친일 논란 최남선·이광수 문학상 제정 '없던 일로'

 1921년에 결혼했던 아내 허영숙과는 1946년 5월 21일에 합의 이혼하였는데,

서울신문은 이 소식을 전하며“장차 이광수가 전범으로 걸려들 때를 걱정하여,

자식과 재산의 보호를 위해서 취하는 잇속 빠른 길이 아닌가 보고 있다.”(1946년 6월 13일자)라며 비판하였다

 

 해프닝으로 끝난 한국문인협회 육당ㆍ춘원문학상

 

육당 최남선과 춘원 이광수는 1943년 11월 24일 일본 도쿄 메이지 대학에서 조선인 전문·대학생들에게 학병에 지원하라는 강연을 했다.
당시 도쿄에서 발행된 잡지 ‘조선화보’(1944년 1월호)에서 아동문학가 마해송의 사회로 진행된 육당과 춘원의 대담 내용이 기록되었다.
이 대담에서 춘원은 강연회에 대해 “일종의 극적 광경이라고나 할까.
황국을 위해 전장에 나가 죽자는 생각이 모두의 얼굴에 드러났더군요”라며
“그때의 압권은 최(남선) 선생님의 강연이 아니었을까요”라고 말했다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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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부사장[편집]

1932년 7월 30일 문인 친목단체인 조선문필가협회 발기인 및 집행위원을 맡았다.

1933년 열차로 시베리아 여행을 다녀왔다.

1933년 8월 동아일보사 편집국장을 그만두고 같은 달 28일 조선일보 부사장에 취임해 1934년 5월까지 활동했다. 9대 사장에 취임한 방응모는 동아일보 편집국장 이광수와 경제부장 서춘 등 유능한 언론인을 스카우트해 조선일보 혁신에 나섰다.[66] 보다 좋은 조건이라 생각한 그는 방응모의 제의에 응한다.

 

1933년 7월 19일 조선일보의 제9대 사장에 취임한 방응모(方應謨)는 한 달 후 동아일보에서 이광수와 서춘(徐椿)을 스카우트해 각각 부사장과 주필(主筆)에 임명하였다.[67] 9월 27일 이광수는 조선일보에 소설 '유정 (有情)'을 연재하였다.[67]

 1933년 조선일보 부사장 겸 취체역(이사), 조선일보의 편집국장, 학예부장, 정리부장 등 5개 직책을 동시에 맡아 '조선 신문계의 무솔리니'라는 별명을 얻었다.[68]

1934년 5월에 조선일보 부사장직에서 물러났으나 조선일보의 이사직은 1950년까지 유지하였다.

 

1934년 이광수는 조선일보에 실은 글에서 "아랫목에 '뜻뜻이' 등을 굽고 있는 생활은 암만 해도 투쟁보다도 은둔을 의미한다.[69]"는 견해를 펼쳤다.

 

 

 

수양동우회 사건 전후[편집]

사회 계몽론[편집]

이광수 가족사진 (1937년)
(왼쪽부터 장남 이진근, 이광수, 차남 이봉근(이광수 앞에 선 이), 부인 허영숙, 삼남 이영근(허영숙이 안은 아기))

1930년대에 이르러 자유 연애 등이 유행하였다. 이광수는 "일반 민중이 도덕적 이상이 퇴폐해서 인생의 의무라든가 사업이라든가 하는 높은 희구를 버리고 오직 성욕과 호기심만 따르게 되니, 에로란 성욕적 흥미를 만족시키는 관념군이요 그로란 호기벽을 만족시킬 만한 관념군"이라고 해석했다('동광' 1931년 1월 1일자).[70] 에로와 그로의 관념론도 좋지만 큰 뜻을 품는 대의지사가 점차 줄어들어감을 애석해하며 한탄하였다.

그러나 그는 고려조선 왕조시대 1천년의 지나친 엄숙주의는 민중들의 진취적인 기상과 자유로운 상상력을 박탈하고 삭막한 사회를 만들었다며 억지로 엄숙한 사회분위기를 조장하는 것은 반대하였다.

1930년대에는 유성기(축음기)와 라디오가 각지로 보급되었고, 유행가가 확산되었다. 이 무렵부터 인기있는 곡은 유행가라 하여 시중의 화제가 되었다. 그러나 유행가는 남녀간의 사랑에 대한 노래들 뿐이었다. '장백산인(이광수)'은 이 범람하는 '유행가'를 '전염병'이라며, "근년에 조선에 유행되는 가요는…'부어라 먹자 두들겨라'식이 아니면 주색의 방종한 향락을, 검열관이 허하는 한에서 고취하는가 십흔 것들…"이라고 비판했다.(1934년 4월 19일자)[71] 그는 유행가라는 노래들이 전부 남녀간의 사랑만을 노래한 곡들이 많지 다른 내용은 없다며 식상한 점 역시 비판하였다. 그럼에도 대중가요 열기는 좀처럼 식지 않았다.[71]

 

1934년 그가 참여하던 어린이잡지인 《어린이》지가 경영난과 조선총독부의 탄압으로 결국 123호를 끝으로 폐간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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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광수 위키백과  (0) 2016.06.04

이광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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