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발굴] 文人, 옛 잡지를 거닐다 ③ 이상·김유정·박태원·김기림

 

“오입쟁이 李箱(이상)도 연정에는 서툰 소년”

 

⊙ ‘고독한 이방인’ 시인 李箱의 遺稿(유고) 속에 당대 문인들의 삶 담겨

⊙ 박태원의 소설 <애욕>의 주인공은 李箱이 실제 모델

⊙ “돌아오지 않는 ‘제비(이상의 다방 상호)’의 임자는 얼마나 야속한 사람이겠소?”(金起林)

 

 

이상·김유정·박태원·김기림(맨 위로부터 시계 반대 방향).

 

 

1930년대에 카프식(式) 경향문학에 맞선 걸출한 문우(文友)들이 여럿 있었다. 시인 이상(李箱·본명 金海卿·1910~1937)과 김기림(金起林), 정지용(鄭芝溶), 소설가 박태원(朴泰遠)과 김유정(金裕貞) 등이다.

순수예술을 지향했던 ‘구인회(九人會)’ 멤버이기도 한 이들 사이에 남은 교우록(交友錄)은, 일찍 타개한 이상의 유고(遺稿)와 문우들의 회고에서 확인할 수 있다.

 

1930년대 한국문단의 ‘고독한 이방인(異邦人)’이라 불린 이상은 당대 카프의 프롤레타리아 문학과 대조되는 관념적이고 난해한 모더니즘 문학으로 센세이션을 일으켰던 인물. 3년 과정의 경성고등공업학교(지금의 서울대 공대) 건축과를 나와 21세 때 조선총독부 내무국 건축기수로 취직한 그는, 조선건축회지 《조선과 건축》의 표지도안 현상모집에 1등과 3등에 당선되는가 하면 <이상(異常)한 반역반응(反逆反應)>이란 낯선 시로 당대 문단을 경악시켰다. 또 ‘선전(鮮展·조선미술전람회)’에 자신의 초상화를 출품, 입선될 정도로 문예(文藝)에 다재다능했다.

 

이상이 1934년 4월 17일 향년 28세를 일기로 동경제대부속병원에서 요절하고 2년 뒤인 1939년 5월호 《청색지(靑色紙)》에 이상의 유고 <소설체로 쓴 김유정론>이 실렸다.

글 도입부에 이상은 ‘앞으로 김기림, 박태원, 정지용에 대한 글도 쓸 계획’임을 밝혔을 정도로 교분이 두터웠다. 그러나 실제로 완성된 글은 한 편밖에 없다. <소설체로 쓴 김유정론>에는 문우들에 대한 흥미로운 묘사가 자주 등장한다.

 

비슷하지만 다른 起林· 泰遠· 芝溶· 裕貞

 

이상은 시인 김기림에 대해 ‘암만해도 성을 안 낼뿐더러 누구를 대하든 늘 좋은 낯으로 대하는 타입의 우수한 견본(見本)’이라고 했다. 소설가 박태원에 대해선 비슷하지만 다르게 묘사한다.

 

<…좋은 낯을 하기는 해도 적(敵)이 비례(非禮)를 했다거나 끔찍이 못난 소리를 했다거나 하면, 잠자코 속으로만 꿀꺽 없이 여기고 그만두는, 그러기 때문에 근시안경을 쓴 위험인물이 박태원이다.…>

(p89, <소설체로 쓴 김유정론>, 《청색지》, 1939년 5월)

 

이상이 보기에 정지용은 김기림, 박태원과 또 다르다.

 

<…없이 여겨야 할 경우에 “이놈! 네까짓 놈이 뭘 아느냐”라든가, 성을 내면서 “여! 어디 덤벼봐라”고 할 줄 아는, 그러나 그저 그럴 줄 알 뿐이지 그만큼 해두고 주저앉고 마는, 코밑에 수염을 저축(貯蓄)한 정지용이었다.…>(p89)

 

반면 김유정은 속으로 부글부글 삼키는 부류가 아닌 진정한 ‘투사’로 묘사된다.

 

<…모자를 홱 벗어 던지고, 두루마기도 마고자도 민첩하게 턱 벗어 던지고, 두 팔 훌떡 부르걷고 주먹으로는 적의 볼때기를, 발길로는 적의 사타구니를 격파하고도 오히려 행유여력(行有餘力)에 엉덩방아를 찧고야 그치는 희유(稀有)의 투사가 있으니 김유정이다.…>(p89)

 

이상은 ‘이들이 무슨 경우에 어떤 얼굴을 했댔자 기실, 그 교만(驕慢)에서 산출된 표정 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참 위험하기 짝이 없는 분들’이라 재미있게 표현한다.

 

<…다행히 이 네 분은 서로들 친하다. 서로 친한 이분들과 친한 나 불초(不肖) 이상이 보니까 여상(如上)의 성격이 순차적 차이가 있는 것은 재미있다. 이것은 혹 불행히 나 혼자의 재미에 그칠는지 우려되지만 그래도 좀 재미있어야 되겠다.…>(p90)

 

 

<소설체로 쓴 김유정론>을 좀 더 들여다보자.

 

어느 날 김유정이 B군, S군과 함께 초저녁부터 곤히 잠든 이상을 찾아왔다.

 

“김형!(김해경) 이 유정이가 오늘, 술 좀 먹었습니다. 김형, 우리 또 한잔 합시다.”

 

이상 왈(曰) “그럽시다 그려.”

 

강원도 출신인 김유정은 술이 들어가면 끈적끈적한 목소리로 강원도아리랑 ‘팔만구암자(八萬九庵子)’를 내뽑곤 했다. 이상이 듣기에 유정의 목소리는 ‘천하일품’. 하지만 취중 문학담은 곧잘 주먹다짐으로 이어졌다.

 

B군이 술에 취해 5합들이 술병을 거꾸로 쥐고 육모방망이 돌리듯 휘두르며 “너, 유정이 덤벼라”고 외쳤다. 유정과 S군이 함께 맞서 B군을 공격했지만 B군은 S군의 불두덩이를 걷어찼다. 노발대발한 S군은 B군을 향하여 맹렬한 일축(一蹴)을 결행한다.

 

<…이러면 B군은 또 선수(船首)를 돌려 유정을 겨누어 거룩한 일축을 발사한다. 김유정은 S군을, S군은 B군을, B군은 유정을, 유정은 S군을, S군은… 대체 누가 누구하고 싸우는 것인지 종잡을 수가 없는 것이다.…>

(p93)

 

 

仇甫의 소설 <애욕>에 등장한 李箱

 

 

이상이 절친한 친구였던 소설가 구보 박태원의 결혼식 방명록에 남긴 친필 축하 메시지.

“結婚(결혼)은 卽(즉) 慢畵(만화)에 틀님업고(틀림없고)”로 시작하는 글이 눈에 띈다.

 

 

1939년 5월 《여성》지에는 소설가 구보(仇甫) 박태원이 쓴 추모글인 <이상(李箱)의 비련(秘戀)>이 실렸다. 그는 이상을 이렇게 묘사했다.

 

<…가난하고 불결하기는 이전과 마찬가지지만, 코르덴 양복에 해진 셔츠, 세수는 사흘에 한번 할까 말까 하고, 잡지 일로 《조선일보》 출판부 같은 곳에 나타나서 불결한 손으로 눈을 비벼 눈곱을 떼고 하품을 하고 그러면서도 곧잘, 그의 독특한 화술을 농(弄)하여 사람을 웃겼던 것이나, 그러한 곳에는 또한 형언키 어려운 일종의 매력이라는 것이 있었다.…>(p76, <이상의 비련>, 《여성》, 1939년 5월호)

 

구보의 집은 서울 광교 천변에 있었는데 이상이 종로1가에서 운영했던 다방과 가까웠다고 한다. 다방 ‘제비’는 이상이 스물네 살 되던 해에 객혈로 건축과 기수직을 포기하고 황해도 백천(白川) 온천으로 휴양을 떠나 그곳에서 기생 금홍(錦紅)이란 여인과 동거를 시작한 뒤 상경(上京), 호구책으로 시작했었다. 영업이 신통치 않아 ‘제비’가 결국 문을 닫았고 뒤이어 카페 ‘쓰루’ ‘씩스 나인’, 다방 ‘무기’를 열었으나 한결같이 실패하고 말았다.

 

구보는 이상을 주인공으로 등장시킨 소설 <애욕(愛慾)>을 1934년 《조선일보》에 연재했다. 그러나 3~4회 연재하다 중단했다고 한다. 소설 내용은 이렇다.

 

 

"주인공은 젊은 화가 하웅(河雄). 하웅은 종로에서 다방을 경영하는데 아내를 다방 마담으로 내세웠다. 아내는 다른 사내와 바람이 나서 떠나버리고 하웅은 우연히 한 소녀와 사랑에 빠져 그녀를 위해 정지용의 시를 암송한다. 그러나 소녀 주위에는 여러 사내가 있어 하웅을 거짓사랑으로 농락할 뿐이다. 그런 하웅을 친구인 구보가 나무라지만 하웅은 ‘자기 힘으로 어쩔 수 없다’고 말한다."

 

 

박태원은 <이상의 비련>이란 글에서 자신의 소설 <애욕>을 소개하며 소설 속 하웅의 모델이 이상이었다고 밝혔다.

 

<…마르고 키 큰 몸에 어지러운 머리터럭과 면수(面手·면도와 세수)를 게을리한 얼굴에 잡초와 같이 무성한 머리카락이며, 심심하면 손을 들어 맹렬한 형세로 코털을 뽑는 버릇에 이르기까지 <애욕> 속의 하웅은 현실의 이상을 그대로 방불케 하는 것이다.…>(p74)

 

소설이 연재되고 친구들이 이상에게 이렇게 물었다고 한다.

 

“그 ‘모던 걸’하고 요새도 자주 만나시오?”

 

그러면 이상은 이렇게 답했다.

 

“무어? <애욕> 말씀이구려. 그건 내 얘기가 아니라, 구보 얘기지요. 하웅이라는 것이 실상은 구보요, 하웅을 나무라는 자가 실상은 나 이상이오.”

 

그러면 문우들이 다시 박태원에게 물었다.

 

“이상이 이처럼 말하는데 진상은 어찌된 것이오?”

 

그때마다 박태원은 이렇게 언명(言明)했다.

 

“그건 괜한 말이오. 하웅은 역시 이상임이 틀림없소.”

 

박태원은 요절한 벗을 그리며 이렇게 고백했다.

 

<…이제 자백(自白)을 하자면 <애욕> 속의 하웅은, 이상이며 동시에 나였고, 그의 친우 구보는 나면서 또한 이상이었던 것이다. (중략) 당시 나와 이상은 서로 각기 다른 조그만 로맨스를 가졌었다.

이상의 정인(情人)이 어느 카페의 여급이라는 것과, 나의 상대가 모(某) 지방 명사(?)의 딸이었다는 고만한 차이가 있었으나 두 사람 모두 작품 속의 소녀나 한 가지로 상당히 방종성(放縱性)을 띠고 있다는 점에 있어서 서로 일치되었다.…>(p74~75)

 

 

“매일같이 gloomy sunday”

 

 

다방 ‘제비’에 모인 이상, 박태원, 김소운(왼쪽부터).

 

 

이상의 실제 연애담은 훗날 여러 문인의 기억을 통해 회자됐다. 다방이 문을 닫고 아내 금홍이 바람이 난 뒤 카페의 일본 여급 ‘마유미’와 어지간히 사귀기도 했다.

어느 날 이상이 치정관계로 건달에게 칼침을 맞고 입원한 ‘마유미’를 보고 이렇게 되뇌었다고 한다

(문학평론가 尹柄魯의 <고독한 이방인> 참조).

 

“나는 떠나야겠어. 서울을, 이렇게 있다가는 썩어버릴 것만 같아, 매일같이 구루미 선데이야. 어두운 일요일이 날마다 계속이야. 아, 나는 죽을 것만 같아.”

 

<이상의 비련>에 박태원과 이상이 나누었던 생전의 대화가 실려 있다.

 

 

<…이상과 나(박태원)는, 당시에 있어 서로 겨 묻은 개였고, 동시에 똥 묻은 개였다. 내가 이상을 향하여 “여보, 그까짓 계집을 무어라고 그토록 소중히 안고 사랑을 하느니 어쩌니 그러오? 당신의 정열(情熱)이 너무 아깝소”라고 충고하면, 이상은 또한 박태원을 향해 이렇게 똑같이 받아쳤다.

 

“여보, 그까짓 계집을 무어라고 그토록 소중히 안고 사랑을 하느니 어쩌니 그러오? 당신의 열정이 너무 아깝소.”

 

두 사람은, 서로 마음속으로 ‘이상이 그리 미쳤단 말인가?’ ‘구보가 아무래도 성치는 않아…’ 그렇게 생각하며 벗을 위해 서로 슬퍼하고 못마땅해했다.…>(p75)

 

 

박태원은 “당당한 오입쟁이였던 이상도 몸과 마음을 그대로 내어놓는 연정(戀情)에는 스스로 소년과 같이 수줍고 애탔다”고 기억했다.

 

 

<…언젠가 다방 ‘금강산’에서 이상이 한 여성을 향해 구애한 일이 있었다. 구석진 탁자에 한잔의 가배차(커피-편집자)를 앞에 두고 여인과 마주앉은 이상은 다시 소년과 같이 가슴을 태우고 마음이 수줍은 나머지, 자신도 깨닫지 못하고 탁자 한가운데 놓은 각설탕 그릇에 담긴 모당을 손으로 만졌다.

사랑을 받아주기 원하는 여인 앞에 이상의 손이 불결한 것은 또한 어찌할 도리가 없는 슬픈 사실이다. 그가 만진 모당은 그대로 꺼멓게 때가 묻었다. 여인은, 이상의 열정보다도 한 개, 두 개, 손때가 까맣게 묻어가는 각설탕에 좀 더 관심을 가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이상은 물론 그런 것에 미처 생각이 들 턱이 없다. (중략) 평소 그처럼 능변(能辯)인 그가 말조차 더듬어 가며 자기의 진정을 애인에게 알리기 위해 열중했다. 그러나 마침내 시중드는 아이가 참다못해 그들 탁자로 다가와 이상의 손에서 그릇을 빼앗아 갔을 때 그는 새삼스럽게 놀라 고개를 들고 그곳에서 자기를 바라보는 여인의 모멸(侮蔑) 가득한 눈초리에 어처구니없이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p77)

 

 

1939년 6월호 《여성》에는 이상이 생전(生前) 시인 김기림에게 보냈던 편지 4편이 <이상서간(李箱書簡)>이란 제목으로 실렸다. 편지에는 사랑에, 정에 굶주렸던 고독한 시인의 마음이 잘 묻어 있다.

 

 

<…연애라도 할까? 싱거워서? 심심해서? 스스러워서? 이 편지를 보았을 때 형(김기림)은 아마 뒤이어 <기상도(氣象圖)>의 교정을 보아야 될 것 같소. 형이 여기 있고 마음맞은 친구끼리 모여 조용한 ‘기상도의 밤’을 가지고 싶은 것이 퍽 유감(遺憾)되게 되었구려. 우리 여름에 할까?

 

여보! 편지나 좀 하구려! 내 고독과 정적을 동정하고 싶지는 않소? 자, 운명에 순종하는 수밖에! 굿바이…>

(p83, <이상서간>, 《여성》, 1939년 6월호)

 

 

이상이 요절한 뒤 김기림은 박태원에게 쓴 편지(《여성》 1939년 5월호에 게재됐다)에 이상을 그리며 “봄이 오니 형(박태원)도 ‘제비(다방 상호)’가 그리우신가 보오. 돌아오지 않는 ‘제비’의 임자는 얼마나 야속한 사람이겠소? 동경(東京)을 지날 때는 머리를 숙이오”라고 썼다.⊙

 

 

 

 

 

 

 

/ 월간조선

 

 

 

 

 

 

 

 

 

출처 : 마음의 정원
글쓴이 : 마음의 정원 원글보기
메모 :

나의 아버지 구보 박태원 (27)반년간 삽화 (1) 0 0 2013.11.18.
나의 아버지 구보 박태원 (26) 편지/추도사  0 0 2013.11.18.
나의 아버지 구보 박태원 (25) 오카빠 머리  0 0 2013.11.18.
나의 아버지 구보 박태원 (24) 4차 구보학회  0 0 2013.11.18.
나의 아버지 구보 박태원(21)  0 0 2013.11.18.
나의 아버지 구보 박태원(20)  0 0 2013.11.18.
나의 아버지 구보 박태원 (19 ) 결혼축하싸인 계속  0 0 2013.11.18.
행복한 한나절-강나루(2)  0 0 2013.11.18.
나의 아버지 구보 박태원 (18)  0 0 2013.11.18.
나의 아버지 구보 박태원(17)나의 아버지 박태원2(정태은)  0 0 2013.11.18.
나의 아버지 구보 박태원(16)나의 아버지 박태원1(정태은)  0 0 2013.11.18.
나의 아버지 구보 박태원 (15)교정본 연보  0 0 2013.11.18.
나의 아버지 구보 박태원 (14)작품목록  0 0 2013.11.18.
나의 아버지 구보 박태원 (13)  0 0 2013.11.18.
나의 아버지 구보 박태원(12)결혼식  0 0 2013.11.18.
나의 아버지 구보 박태원11  0 0 2013.11.18.
나의 아버지 구보 박태원10  0 0 2013.11.18.
나의 아버지 구보 박태원 9  0 0 2013.11.18.
구보의「海西記遊」의 배천온천(白川溫泉)-강나루(1)  0 0 2013.10.15.
나의 아버지 구보 박태원 8  0 0 2012.12.04.
나의 아버지 구보 박태원 7  0 0 2012.12.04.
6.나의 아버지 구보 박태원 6  0 0 2012.12.04.
5.나의 아버지 구보 박태원 5  0 0 2012.12.04.
4.나의 아버지 구보 박태원 4  0 0 2012.12.04.
3.나의 아버지 구보 박태원 3  0 0 2012.12.04.
나의 아버지 구보 박태원 2  0 0 2012.12.04.
1.나의 아버지 구보 박태원 1  0 0 2012.12.04.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http://airzine.egloos.com/1033030

<천변일기>의 구보 박태원에겐 두 명의 절친한 친구가 있었다. 술 친구이기도 하고, 경성을 쏘다니는 길 동무이기도 했고, 술값도 댈 수 있는 스폰서이기도 했다. 김해경이 본명인 시인 '이상'의 사진에는 유독 박태원이 자주 등장한다. 검은 수염을 한 이상과는 달리 박태원은 더벅 머리에 검은 둥근테 안경을 쓴 순진 소년처럼 등장한다. 또 다른 친구는 곱사등을 한 화가 구본웅이다. 어릴 때 사고로 다친 구본웅은 이상과 박태원에 끌려다니다시피 하거나 뒷돈을 대야 했지만 그리 싦은 내색없이 스폰서 역할을 했던 듯 하다. (사진 왼쪽 부터 이상, 박태원, 김소운)

이상 시인이 차린 제비 다방은 지금의 청진동 해장국 골목 입구 오른편 코너에 있었던 듯 하다. 이상은 금홍을 얼굴 마담으로 앉혀두었다. 벌이는 시원치 않았던 모양이다. 박태원은 종로를 들러 일본계 번화가로 들리면서 자주 구본웅의 화실에 들렀는데 그 화실은 지금의 플라자 호텔 뒷편 북창동 쪽이었던 것 같다. 자주 어울리던 이들은 놀라울 정도로 서로서로 이승에서 저승에서 얽혀 있는 모습을 하고 있다.

이상 시인에게는 알려진 로맨스가 몇 번이 있다. 금홍이와의 로맨스는 이미 잘 알려져 있다. 권영희와의 로맨스는 대체로 권영희의 일방적 짝사랑이었다는 말을 많이들 한다. 그러나 로맨스는 로맨스, 빠뜨릴 수는 없다. 또 다른 로맨스는 이상의 주검까지 수습했던 김향안과의 사랑이다. 권영희는 이상 시인과 구보 박태원이 친했던 소설가 정인택과 결혼한다. 정인택이 권영희를 못잊어 죽네 사네하며 음독 자살까지 꾀한 결과다. 둘은 한국 전쟁 통에 월북한다. 일본에서 새로운 꿈을 모색하던 이상 시인이 죽었을 때 이상의 마지막 연인 김향안은 몇날 며칠 동안의 여행을 거쳐 동경으로 가서 이상의 시신을 수습했다고 한다. 여성과 관련해서는 이상이 복이 많은 남자였는지 모르겠다. (사진은 구본웅이 그린 이상)

화가 구본웅은 불구의 처지인지라 여성들과의 로맨스는 그리 눈에 띠지 않았던 듯 하다. 하지만 작가들의 이야기 중간 중간에 그의 모델에 되어 주었던 여인들의 이름들이 들리고, 구본웅이 누구보다도 인간적으로 그녀들을 대해주었다는 이야기들이 있기는 하다. 국립현대미술관에 있는 구본웅의 여인의 그림들에서 구본웅의 격정을 느끼고, 여인들의 얼굴에서 여인들이 느꼈던 그런 만족감을 느낄 수 있는 지 모르겠다.

구보 박태원은 해방전에 결혼을 해서 성북동 싸리집에 살 때는 이미 2남 3녀의 아빠가 되어 있었다. 구보도 늘 병약한 탓에 자신감을 많이 갖지 못했던 것 같고 그래서인지 친구인 이상과는 달리 여성과의 잦은 접촉은 없었던 듯 하다. 모던 보이들이 보여주는 것에 비하면 그렇다는 말이다. 모더니즘 시인인 구보가 한국 전쟁 당시에 북한으로 넘어간 것에 대해서는 모두가 놀랐다. 그는 경향작가도 아니고, 카프의 멤버도 아니었다. 구인회에 속했던 그가 북한으로 가다니. 그것도 아내, 2남 3녀를 두고 말이다.

구보 박태원은 월북한 후 1955년 홀로 사는 아품을 달래려 했는지 결혼을 한다. 상대편은 정인택과 결혼하고, 월북했던, 이상을 짝사랑했던 그녀 권영희(권순옥)다. 그녀는 박태원이 말년에 시력을 상실하고 구술로 작품할 때 같이 공동작업을 하면서 구보씨의 마지막을 지켜본다. 정인택과 사별한 권영희는 정인택과 두 딸을 사이에 두고 있었는데 구보 박태원의 영향인지 북한에서 작가 생활을 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구보 박태원의 큰 딸과 작은 아들이 이산가족 상봉하는 장면)

이상 시인의 마지막 가는 길을 지켜보고 시신을 수습했던 김향안의 본명은 변동림이다. 김향안은 이상의 죽음 이후 그가 대한민국 최고의 화가일 뿐 아니라 세계적인 화가라고 생각했던 홀애비 김환기와 결혼을 한다. 김향안은 김환기를 프랑스 유학으로 이끌고, 김환기의 작품세계에 영향을 미치고, 김환기의 사후에는 환기 미술관을 운영해나간다. 김향안 즉 변동림은 이상, 박태원이 그렇게도 같이 뒹굴며 술값으로 괴롭히던 화가 구본웅의 계모인 변동숙의 이복 동생이다. 여기에 살짝 요즘 이야기를 보태면 구본웅의 딸 구근모가 낳은 딸, 다시 말해 구본웅의 외손녀 중 하나가 이름난 발레리라 강수진이다.

박태원은 북쪽에서도 아이를 낳고, 손주들을 많이 본 모양이다. 그 손주들 이름에는 서울에 남겨 두었던 자식들의 이름을 한자 씩 박아두었다고 한다. 북쪽 아이들을 보면서 남쪽 아이들을 떠올리는 작가의 영리함에는 눈물이 묻어난다. 구보 박태원의 둘째딸 박소영씨의 아들은 요즘 잘나가는 봉준호 감독이다. 봉감독이 구보 박태원의 외손자가 되는 셈이다. 구보 박태원이 북한에서 1987년에 숨을 거두었다고 하니 우리는 비교적 오랫동안 같은 시간을 살은 셈이다. 하지만 그럴 수 없는 조건들 탓에 구보는 여전히 해방전 구보로만 받아들여진다. 적어도 내 맘 속에서는 그렇다. (김환기의 그림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구보 박태원, 이상 김해경, 화가 구본웅이 남겼을 발자욱을 찾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다만 망라되지 못한 것에 대한 불만은 넘치고 넘친다. 그들이 찾았던 낙랑 파라의 모습을 보고 싶고, 그곳을 운영했고 월북후 북한의 인민배우였던 김연실을 보고 싶고, 그들의 든든한 문학 후원자였던 이태준을 만나고 싶고, 그들의 친구 최서해도 보고 싶다. 구보씨의 글 선생이었던 양건식은 어떤 사람이었을까. 이상, 박태원과 함께 사진 속에서 웃고 있는 김소운은 어떤 시인이었을까. 화가 김환기의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는 그의 아내 김향안, 변동림이 이런 우리 맘을 헤아리고 헤아려서 환기 화가에게 넌지시 알려준 결과는 아닐까. 

트랙백

덧글|덧글 쓰기

  • 강나루2007-04-25 22:57
    안녕하세요. 강나루입니다. 일전에 제 초갓집에 들러 주심에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구보의 패션은 대모테와 갑빠인데, 대모테는 거북의 일종인 대모()의 견고한 등판으로 가공한 안경테로 당시 일본에서는 이 재질로 가공한 공예품을 '별갑'이라 했습니다. 갑빠는 일본 민속에 나오는 삿갓처럼 생긴 요상스런 동물인데, 하동()들의 머리처럼 일자로 고른 헤어 스타일로 역시 당시 일본에서 유행했습니다.
    변동림은 구보의 계모 변동숙의 동생으로 나이차가 20여년이나 납니다. 구본웅의 조카 구광모 교수의 증언에 의하면 자매간의 사이가 나빠 변동림이 변씨 성을 버리고 개명을 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상이 운명한 후 김환기와의 재혼을 위해 과거를 정리하는 의미가 더 크다고 하겠습니다.
    정인택은 한국전쟁 중인 1952년에 사망했으며 구보의 차남인 박재영 선생님의 종합적 고증에 의하면 구보에게 아내인 권영희와 두 딸(정태선, 정태은)을 부탁한다는 유언을 남겼다고 합니다.
    정인택의 미망인 권순옥(당시 권영희로 개명)과의 구보의 재혼은 1956년입니다.
    구보의 사망년도는 1985년이 아니고 1986년 7월 10일입니다.

    게재된 사진은 1936년 이상이 구본웅의 도움으로 맡은 인쇄 출판업 창문사이며 사진 뒤에 붙은 포스타는 당시 김소운이 관계했던 아동문학지의 작품모집 광고입니다. 그 속에 바래지 않은 소녀의 함박웃음이 하얗게 살아 숨 쉬는군요.
    액자는 이상이 선전에서 입상했다는 '자화상'인데 제비를 폐업하고 떼온 것이 확실합니다.
    이상은 맬빵에다 넥타이를 짧게 매었고, 김소운은 와이셔츠 위에 라운드 셔츠를 입은 스포티한 차림으로 구보는 역시 대모테 안경에 노타이 차림인데, 셋 다 70년 전의 패션치고 상당히 세련된 모던보이형 차림입니다.
    어느날 '날개'를 적시는 지성의 각혈속으로 불나비가 된 모더니스트들, 때론 만보객의 노스탈지어와 고현학의 지성으로, 함부로 시험했던 운명의 덫에 인생의 반을 걸어버린 젊은 문학의 초상들이었지요.

    건필을 기원하며, 강나루가 실례했습니다.
  • 원용진2007-04-27 13:45
    박선생님 고맙습니다. 수원에 도착하면 초원다방에 한번 들리겠습니다.
  • 강나루2007-04-29 15:10
    원용진 교수님,
    제 블로그는 http://kr.blog.yahoo.com/fish20017 이고, 저는 경북 경주에 살며,
    제 이름은 이대일입니다.

    박재영 선생님의 블로그 http://blog.daum.net/danielpak20 의
    '나의 아버지 구보 박태원'을 제 블로그에다 발췌 게재했었습니다.

    아마 원용진 교수님께서 저를 박재영 선생님으로 알고 계신 듯하여, 알려 드립니다.
    저는 오얏나무()이고, 박재영 선생님은 후박나무()입니다.
    수원의 초원다방과는 전혀 이 없으니...
    이것이 인연일 수도 있겠습니다.

    일본에 계신 듯한데, 건투를 빕니다.
  • 구보아들2007-05-02 07:06
    원용진 선생님, 반갑습니다.
    그리고 감사드립니다.

    아버님에 대한 글이 <강나루> 이대일님을 통해 소개되고 또 이렇게
    원선생님을 통해서 더 알차고 멋있게 많은 분에게 알려지게 되어서
    무척 기쁩니다. 원선생님께서 아버님 구보에 대하여 사랑해 주셔서

    고맙구요, 6월 2일에는 경희대학교에서 오후 1시에서 부터 네번째
    <구보 학회>가 있어서 여러 교수님들이 논문 발표도 있고, 저도 그
    사이 수집한 것도 그 때 보여 드리려고 합니다. 혹시라도 님께서도

    시간이 허락하신다면 오셔서 자리를 빛내 주시기 바랍니다. 감사합
    니다. 구보 박태원의 둘째자 박재영 다니엘 드림. 참고로 제 손전
    화는 017-320-5486 입니다. 전화통화 한번 하고 싶습니다.
  • 박재영 다니엘2007-05-02 15:03
    네 가서 잘 보았습니다. 우선 만나기 전에 전화 통화 한번 하고 싶습니다.
    저는 서울대 농대 63 학번 이지만, 서강대학 하면, 우선 현직에 계신 김영수

    교수님(정치외교학과)과는 이멜도 교환하고 두번이나 학교를 방문하여 뵈
    웠고, 또 현재 김형오 국회의원 보좌관을 하고 있는 서강대 출신 고성학이

    하고는 20 여년전에 여의도 종합무역상사에서 함께 근무하였기 때문에 지
    금도 자주 술자리를 함께 하고, 또 현재 박사 코스를 밟고 계시며 강의도

    하시는 윤직홍님은 형님하고 서울대 문리대 수학과 동기 동창이시고 옛
    무역회사 사장님이시기도 하죠. 아마 아시는 분이 계실 겁니다. 솔대

    성당 맞은 편이면이시라면, <한일아파트>에 살고 계시는 것 같군요.
    한일 아파트라면, 현재 한겨레신문의 문학전문기자 최재봉기자님이

    계셔서 거의 매주 광교산 등산하시면서 제 커피샵에 들르시곤하죠.
    네 가서 잘 보았습니다. 우선 만나기 전에 전화 통화 한번 하고 싶습니다.
    저는 서울대 농대 63 학번 이지만, 서강대학 하면, 우선 현직에 계신 김영수

    교수님(정치외교학과)과는 이멜도 교환하고 두번이나 학교를 방문하여 뵈
    웠고, 또 현재 김형오 국회의원 보좌관을 하고 있는 서강대 출신 고성학이

    하고는 20 여년전에 여의도 종합무역상사에서 함께 근무하였기 때문에 지
    금도 자주 술자리를 함께 하고, 또 현재 박사 코스를 밟고 계시며 강의도

    하시는 윤직홍님은 형님하고 서울대 문리대 수학과 동기 동창이시고 옛
    무역회사 사장님이시기도 하죠. 아마 아시는 분이 계실 겁니다. 솔대

    성당 맞은 편이면이시라면, <한일아파트>에 살고 계시는 것 같군요.
    한일 아파트라면, 현재 한겨레신문의 문학전문기자 최재봉기자님이

    계셔서 거의 매주 광교산 등산하시면서 제 커피샵에 들르시곤하죠.



    비공개
    박선생님 안녕하세요
덧글쓰기

나의 아버지 구보 박태원(46)시인 이상이 <하융>이란 필명으로 그린 삽화

박태원의 갑오농민전쟁과 북한에서의 삶 의붓딸 의 글(51)-1 

川辺風景>의 時代小說的 성격 hwp 파일 cfile8.uf.tistory.com/attach/212BE74B55B71D79079B75

이상李箱 애사哀詞

                                                                                        박 태 원

 

여보, 상箱 -

 

당신이 가난과 병 속에서 끝끝내 죽고 말았다는 그 말이 정말이요 ?

부음을 받은 지 이미 사흘, 이제는 그것이 결코 무를 수 없는 사실인 줄만

알면서도 그래도 좀처럼 믿어지지 않는 이 마음이 섧구려.

 

재질과 교양이 남에게 뛰어나매, 우리는 모두 당신에게 바라고 기다리든 바

컸거늘, 이제 얻어 이른 곳이, 이 갑작한 죽음이었소 ? 사람이 어찌 욕되게

오래 살기를 구하겠다면 이십 팔년은 너무나 짧소.

 

여보, 상箱 -

 

당신이 아직 서울에 있을 때 하롯저녁 술을 나누며 일러주든 그 말 그 생각이

또한 장하고 커서 내 당신의 가는 팔을 잡고 마른 등을 치며 한 가지 감격에

잠겼든 것이 참말 어제 같거든 이제 당신은 이미 없고 내 가슴에 빈 터전은

부질없이 넓어 이 글을 초하면서도 붓을 놓고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기 여러 차례요.

 

여보, 상箱 -

 

이미 지하로 돌아간 당신은 이제 참 마음의 문을 열어, 내게 일러주지 않으려오 ?

당신은 참말 무엇을 위하야, 무엇을 구하야, 내 서울을 버리고 멀리 동경으로 달려

갔던 것이요 ? 모든 어려움을 다 물리치고 모든 벗들의 극진한 만류도 귀 밖에 흘리고

마땅히 하여야 할 많은 일을 이곳에 남겨둔 채 마치 도망꾼이처럼 서울을 떠났든 당신의

참뜻을 나는 이제 있어도 풀어 낼 수가 없구료.

 

여보, 상 -

 

그래도 나는 믿었소. 벗에게 마음을 아직 숨겨 두어도 당신의 뜻은 또 한 커서 이제 수히

서울로 돌아올 때 당신은 응당 집안을 돌보아 아들된 이의 도리를 지키고 또 한편 당신이

그렇게도 사랑하여 마지않든 우리 문학을 위하야 힘을 애끼지 않으리라고.

 

그러나 그것도 부질없이 만리나 떨어진 곳에 가난하고 외로운 몸이 하롯날 병들어 누우매

이곳에 남은 벗들은 오직 궁금하고 답답하여 할 뿐으로 놀란 가슴을 부등켜안고 달려간

안해의 사랑의 손길도 당신의 아픈 몸을 골고루 어루만지는 수는 없어 그래 드디어 할 일

많은 당신을 다시 돌아오게 못하였나, 하면, 우리가 굳이 당신을 붙들어 서울에 그대로

머물러 있게 못한 것이 이제 새삼스러이 뉘우쳐지는구료.

 

여보, 상 -

 

재주가 남보다 뛰어난 사람은 마땅히 또 총명하여야 할 것으로, 우리는 그것도 당신에게

진작부터 허락하여 왔거든, 어찌 당신은 돌아보아 그 귀한 몸을 애낄 줄 몰랐었소?

병을 남에게 자랑할 줄 모르는 당신, 허약한 몸이 감당해낼 턱없는 줄 알면서도 그 절제

없는 생활을 그대로 경영하여 온 당신 - 그러한 당신의 이번 죽음을 애끼고 서러워하기 전에

먼저 욕하고 나무라고 싶은 이 어리석은 벗의 심사를 상의 영혼은 어떻게 풀어주려 하오 ?

 

여보, 상 -

 

그러나 모든 말이 이제는 눈꼽만한 보람도 없는 것이구려. 돌아오면 하리라고 마음 먹었던

많은 사설도, 이제는 영영 찾아갈 곳을 잃은 채 이 결코 충실치 못하였든 벗은 이제 당신의

명복만을 빌려하오.

 

부디 상은 편안히 잠드시오.

                                                                                           <조선일보> 1938년 2월 8일

출처 : 행복한 꿈과 삶을 함께 나누고 싶은 마음
글쓴이 : 다니엘박 20번 원글보기
메모 :

 




 

 

.

 

 

[발굴] 文人, 옛 잡지를 거닐다 ③ 이상·김유정·박태원·김기림

 

“오입쟁이 李箱(이상)도 연정에는 서툰 소년”

 

⊙ ‘고독한 이방인’ 시인 李箱의 遺稿(유고) 속에 당대 문인들의 삶 담겨

⊙ 박태원의 소설 <애욕>의 주인공은 李箱이 실제 모델

⊙ “돌아오지 않는 ‘제비(이상의 다방 상호)’의 임자는 얼마나 야속한 사람이겠소?”(金起林)

 

 

이상·김유정·박태원·김기림(맨 위로부터 시계 반대 방향).

 

 

1930년대에 카프식(式) 경향문학에 맞선 걸출한 문우(文友)들이 여럿 있었다. 시인 이상(李箱·본명 金海卿·1910~1937)과 김기림(金起林), 정지용(鄭芝溶), 소설가 박태원(朴泰遠)과 김유정(金裕貞) 등이다.

순수예술을 지향했던 ‘구인회(九人會)’ 멤버이기도 한 이들 사이에 남은 교우록(交友錄)은, 일찍 타개한 이상의 유고(遺稿)와 문우들의 회고에서 확인할 수 있다.

 

1930년대 한국문단의 ‘고독한 이방인(異邦人)’이라 불린 이상은 당대 카프의 프롤레타리아 문학과 대조되는 관념적이고 난해한 모더니즘 문학으로 센세이션을 일으켰던 인물. 3년 과정의 경성고등공업학교(지금의 서울대 공대) 건축과를 나와 21세 때 조선총독부 내무국 건축기수로 취직한 그는, 조선건축회지 《조선과 건축》의 표지도안 현상모집에 1등과 3등에 당선되는가 하면 <이상(異常)한 반역반응(反逆反應)>이란 낯선 시로 당대 문단을 경악시켰다. 또 ‘선전(鮮展·조선미술전람회)’에 자신의 초상화를 출품, 입선될 정도로 문예(文藝)에 다재다능했다.

 

이상이 1934년 4월 17일 향년 28세를 일기로 동경제대부속병원에서 요절하고 2년 뒤인 1939년 5월호 《청색지(靑色紙)》에 이상의 유고 <소설체로 쓴 김유정론>이 실렸다.

글 도입부에 이상은 ‘앞으로 김기림, 박태원, 정지용에 대한 글도 쓸 계획’임을 밝혔을 정도로 교분이 두터웠다. 그러나 실제로 완성된 글은 한 편밖에 없다. <소설체로 쓴 김유정론>에는 문우들에 대한 흥미로운 묘사가 자주 등장한다.

 

비슷하지만 다른 起林· 泰遠· 芝溶· 裕貞

 

이상은 시인 김기림에 대해 ‘암만해도 성을 안 낼뿐더러 누구를 대하든 늘 좋은 낯으로 대하는 타입의 우수한 견본(見本)’이라고 했다. 소설가 박태원에 대해선 비슷하지만 다르게 묘사한다.

 

<…좋은 낯을 하기는 해도 적(敵)이 비례(非禮)를 했다거나 끔찍이 못난 소리를 했다거나 하면, 잠자코 속으로만 꿀꺽 없이 여기고 그만두는, 그러기 때문에 근시안경을 쓴 위험인물이 박태원이다.…>

(p89, <소설체로 쓴 김유정론>, 《청색지》, 1939년 5월)

 

이상이 보기에 정지용은 김기림, 박태원과 또 다르다.

 

<…없이 여겨야 할 경우에 “이놈! 네까짓 놈이 뭘 아느냐”라든가, 성을 내면서 “여! 어디 덤벼봐라”고 할 줄 아는, 그러나 그저 그럴 줄 알 뿐이지 그만큼 해두고 주저앉고 마는, 코밑에 수염을 저축(貯蓄)한 정지용이었다.…>(p89)

 

반면 김유정은 속으로 부글부글 삼키는 부류가 아닌 진정한 ‘투사’로 묘사된다.

 

<…모자를 홱 벗어 던지고, 두루마기도 마고자도 민첩하게 턱 벗어 던지고, 두 팔 훌떡 부르걷고 주먹으로는 적의 볼때기를, 발길로는 적의 사타구니를 격파하고도 오히려 행유여력(行有餘力)에 엉덩방아를 찧고야 그치는 희유(稀有)의 투사가 있으니 김유정이다.…>(p89)

 

이상은 ‘이들이 무슨 경우에 어떤 얼굴을 했댔자 기실, 그 교만(驕慢)에서 산출된 표정 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참 위험하기 짝이 없는 분들’이라 재미있게 표현한다.

 

<…다행히 이 네 분은 서로들 친하다. 서로 친한 이분들과 친한 나 불초(不肖) 이상이 보니까 여상(如上)의 성격이 순차적 차이가 있는 것은 재미있다. 이것은 혹 불행히 나 혼자의 재미에 그칠는지 우려되지만 그래도 좀 재미있어야 되겠다.…>(p90)

 

 

<소설체로 쓴 김유정론>을 좀 더 들여다보자.

 

어느 날 김유정이 B군, S군과 함께 초저녁부터 곤히 잠든 이상을 찾아왔다.

 

“김형!(김해경) 이 유정이가 오늘, 술 좀 먹었습니다. 김형, 우리 또 한잔 합시다.”

 

이상 왈(曰) “그럽시다 그려.”

 

강원도 출신인 김유정은 술이 들어가면 끈적끈적한 목소리로 강원도아리랑 ‘팔만구암자(八萬九庵子)’를 내뽑곤 했다. 이상이 듣기에 유정의 목소리는 ‘천하일품’. 하지만 취중 문학담은 곧잘 주먹다짐으로 이어졌다.

 

B군이 술에 취해 5합들이 술병을 거꾸로 쥐고 육모방망이 돌리듯 휘두르며 “너, 유정이 덤벼라”고 외쳤다. 유정과 S군이 함께 맞서 B군을 공격했지만 B군은 S군의 불두덩이를 걷어찼다. 노발대발한 S군은 B군을 향하여 맹렬한 일축(一蹴)을 결행한다.

 

<…이러면 B군은 또 선수(船首)를 돌려 유정을 겨누어 거룩한 일축을 발사한다. 김유정은 S군을, S군은 B군을, B군은 유정을, 유정은 S군을, S군은… 대체 누가 누구하고 싸우는 것인지 종잡을 수가 없는 것이다.…>

(p93)

 

 

仇甫의 소설 <애욕>에 등장한 李箱

 

 

이상이 절친한 친구였던 소설가 구보 박태원의 결혼식 방명록에 남긴 친필 축하 메시지.

“結婚(결혼)은 卽(즉) 慢畵(만화)에 틀님업고(틀림없고)”로 시작하는 글이 눈에 띈다.

 

 

1939년 5월 《여성》지에는 소설가 구보(仇甫) 박태원이 쓴 추모글인 <이상(李箱)의 비련(秘戀)>이 실렸다. 그는 이상을 이렇게 묘사했다.

 

<…가난하고 불결하기는 이전과 마찬가지지만, 코르덴 양복에 해진 셔츠, 세수는 사흘에 한번 할까 말까 하고, 잡지 일로 《조선일보》 출판부 같은 곳에 나타나서 불결한 손으로 눈을 비벼 눈곱을 떼고 하품을 하고 그러면서도 곧잘, 그의 독특한 화술을 농(弄)하여 사람을 웃겼던 것이나, 그러한 곳에는 또한 형언키 어려운 일종의 매력이라는 것이 있었다.…>(p76, <이상의 비련>, 《여성》, 1939년 5월호)

 

구보의 집은 서울 광교 천변에 있었는데 이상이 종로1가에서 운영했던 다방과 가까웠다고 한다. 다방 ‘제비’는 이상이 스물네 살 되던 해에 객혈로 건축과 기수직을 포기하고 황해도 백천(白川) 온천으로 휴양을 떠나 그곳에서 기생 금홍(錦紅)이란 여인과 동거를 시작한 뒤 상경(上京), 호구책으로 시작했었다. 영업이 신통치 않아 ‘제비’가 결국 문을 닫았고 뒤이어 카페 ‘쓰루’ ‘씩스 나인’, 다방 ‘무기’를 열었으나 한결같이 실패하고 말았다.

 

구보는 이상을 주인공으로 등장시킨 소설 <애욕(愛慾)>을 1934년 《조선일보》에 연재했다. 그러나 3~4회 연재하다 중단했다고 한다. 소설 내용은 이렇다.

 

 

"주인공은 젊은 화가 하웅(河雄). 하웅은 종로에서 다방을 경영하는데 아내를 다방 마담으로 내세웠다. 아내는 다른 사내와 바람이 나서 떠나버리고 하웅은 우연히 한 소녀와 사랑에 빠져 그녀를 위해 정지용의 시를 암송한다. 그러나 소녀 주위에는 여러 사내가 있어 하웅을 거짓사랑으로 농락할 뿐이다. 그런 하웅을 친구인 구보가 나무라지만 하웅은 ‘자기 힘으로 어쩔 수 없다’고 말한다."

 

 

박태원은 <이상의 비련>이란 글에서 자신의 소설 <애욕>을 소개하며 소설 속 하웅의 모델이 이상이었다고 밝혔다.

 

<…마르고 키 큰 몸에 어지러운 머리터럭과 면수(面手·면도와 세수)를 게을리한 얼굴에 잡초와 같이 무성한 머리카락이며, 심심하면 손을 들어 맹렬한 형세로 코털을 뽑는 버릇에 이르기까지 <애욕> 속의 하웅은 현실의 이상을 그대로 방불케 하는 것이다.…>(p74)

 

소설이 연재되고 친구들이 이상에게 이렇게 물었다고 한다.

 

“그 ‘모던 걸’하고 요새도 자주 만나시오?”

 

그러면 이상은 이렇게 답했다.

 

“무어? <애욕> 말씀이구려. 그건 내 얘기가 아니라, 구보 얘기지요. 하웅이라는 것이 실상은 구보요, 하웅을 나무라는 자가 실상은 나 이상이오.”

 

그러면 문우들이 다시 박태원에게 물었다.

 

“이상이 이처럼 말하는데 진상은 어찌된 것이오?”

 

그때마다 박태원은 이렇게 언명(言明)했다.

 

“그건 괜한 말이오. 하웅은 역시 이상임이 틀림없소.”

 

박태원은 요절한 벗을 그리며 이렇게 고백했다.

 

<…이제 자백(自白)을 하자면 <애욕> 속의 하웅은, 이상이며 동시에 나였고, 그의 친우 구보는 나면서 또한 이상이었던 것이다. (중략) 당시 나와 이상은 서로 각기 다른 조그만 로맨스를 가졌었다.

이상의 정인(情人)이 어느 카페의 여급이라는 것과, 나의 상대가 모(某) 지방 명사(?)의 딸이었다는 고만한 차이가 있었으나 두 사람 모두 작품 속의 소녀나 한 가지로 상당히 방종성(放縱性)을 띠고 있다는 점에 있어서 서로 일치되었다.…>(p74~75)

 

 

“매일같이 gloomy sunday”

 

 

다방 ‘제비’에 모인 이상, 박태원, 김소운(왼쪽부터).

 

 

이상의 실제 연애담은 훗날 여러 문인의 기억을 통해 회자됐다. 다방이 문을 닫고 아내 금홍이 바람이 난 뒤 카페의 일본 여급 ‘마유미’와 어지간히 사귀기도 했다.

어느 날 이상이 치정관계로 건달에게 칼침을 맞고 입원한 ‘마유미’를 보고 이렇게 되뇌었다고 한다

(문학평론가 尹柄魯의 <고독한 이방인> 참조).

 

“나는 떠나야겠어. 서울을, 이렇게 있다가는 썩어버릴 것만 같아, 매일같이 구루미 선데이야. 어두운 일요일이 날마다 계속이야. 아, 나는 죽을 것만 같아.”

 

<이상의 비련>에 박태원과 이상이 나누었던 생전의 대화가 실려 있다.

 

 

<…이상과 나(박태원)는, 당시에 있어 서로 겨 묻은 개였고, 동시에 똥 묻은 개였다. 내가 이상을 향하여 “여보, 그까짓 계집을 무어라고 그토록 소중히 안고 사랑을 하느니 어쩌니 그러오? 당신의 정열(情熱)이 너무 아깝소”라고 충고하면, 이상은 또한 박태원을 향해 이렇게 똑같이 받아쳤다.

 

“여보, 그까짓 계집을 무어라고 그토록 소중히 안고 사랑을 하느니 어쩌니 그러오? 당신의 열정이 너무 아깝소.”

 

두 사람은, 서로 마음속으로 ‘이상이 그리 미쳤단 말인가?’ ‘구보가 아무래도 성치는 않아…’ 그렇게 생각하며 벗을 위해 서로 슬퍼하고 못마땅해했다.…>(p75)

 

 

박태원은 “당당한 오입쟁이였던 이상도 몸과 마음을 그대로 내어놓는 연정(戀情)에는 스스로 소년과 같이 수줍고 애탔다”고 기억했다.

 

 

<…언젠가 다방 ‘금강산’에서 이상이 한 여성을 향해 구애한 일이 있었다. 구석진 탁자에 한잔의 가배차(커피-편집자)를 앞에 두고 여인과 마주앉은 이상은 다시 소년과 같이 가슴을 태우고 마음이 수줍은 나머지, 자신도 깨닫지 못하고 탁자 한가운데 놓은 각설탕 그릇에 담긴 모당을 손으로 만졌다.

사랑을 받아주기 원하는 여인 앞에 이상의 손이 불결한 것은 또한 어찌할 도리가 없는 슬픈 사실이다. 그가 만진 모당은 그대로 꺼멓게 때가 묻었다. 여인은, 이상의 열정보다도 한 개, 두 개, 손때가 까맣게 묻어가는 각설탕에 좀 더 관심을 가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이상은 물론 그런 것에 미처 생각이 들 턱이 없다. (중략) 평소 그처럼 능변(能辯)인 그가 말조차 더듬어 가며 자기의 진정을 애인에게 알리기 위해 열중했다. 그러나 마침내 시중드는 아이가 참다못해 그들 탁자로 다가와 이상의 손에서 그릇을 빼앗아 갔을 때 그는 새삼스럽게 놀라 고개를 들고 그곳에서 자기를 바라보는 여인의 모멸(侮蔑) 가득한 눈초리에 어처구니없이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p77)

 

 

1939년 6월호 《여성》에는 이상이 생전(生前) 시인 김기림에게 보냈던 편지 4편이 <이상서간(李箱書簡)>이란 제목으로 실렸다. 편지에는 사랑에, 정에 굶주렸던 고독한 시인의 마음이 잘 묻어 있다.

 

 

<…연애라도 할까? 싱거워서? 심심해서? 스스러워서? 이 편지를 보았을 때 형(김기림)은 아마 뒤이어 <기상도(氣象圖)>의 교정을 보아야 될 것 같소. 형이 여기 있고 마음맞은 친구끼리 모여 조용한 ‘기상도의 밤’을 가지고 싶은 것이 퍽 유감(遺憾)되게 되었구려. 우리 여름에 할까?

 

여보! 편지나 좀 하구려! 내 고독과 정적을 동정하고 싶지는 않소? 자, 운명에 순종하는 수밖에! 굿바이…>

(p83, <이상서간>, 《여성》, 1939년 6월호)

 

 

이상이 요절한 뒤 김기림은 박태원에게 쓴 편지(《여성》 1939년 5월호에 게재됐다)에 이상을 그리며 “봄이 오니 형(박태원)도 ‘제비(다방 상호)’가 그리우신가 보오. 돌아오지 않는 ‘제비’의 임자는 얼마나 야속한 사람이겠소? 동경(東京)을 지날 때는 머리를 숙이오”라고 썼다.⊙

 

 

 

 

 

 

 

/ 월간조선

 

 

 

 

 

 

 

 

 

출처 : 마음의 정원
글쓴이 : 마음의 정원 원글보기
메모 :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