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파 방정환이 주재한 학생

1929. 3

《학생()》은 1929년 3월 1일자로 방정환이 주재하여 개벽사에서 창간한 중학생잡지로서, 1930년 1월까지 통권 11호를 내고는 종간했다. 판권장을 보면 편집 겸 발행인 방정환(), 인쇄인 전준성(駿), 인쇄소 지까자와()인쇄소, 발행소 개벽사(서울·경운동 88), A5판 115면, 한권 정가는 표시하지 않고 ‘선금()정가 3개월분 75전’으로 매겨져 있다.

방정환은 〈《학생》 창간호를 내면서 남녀학생에게 하고 싶은 말씀〉이란 긴 제목으로 4면에 걸쳐 이야기를 했는데, 그중 몇 대문을 옮긴다.

“방학 때 개학 때, 나는 딴일만 없으면 틈을 얻어가지고 일없이 경성(京城 : 서울)역두(驛頭)에 나아가 섰다가, 그냥 오고 그냥 오고 합니다.

그 수많은 학생들이 몇 만으로 헤일 학생들이 13도(道) 촌촌(村村)을 찾아가기 위하여 정거장으로 몰려 들어가는 것을 멀리 서서 구경하고 있을 때, 나의 귀는 진군(進軍) 나팔소리를 듣습니다.

그 소리 그 나팔소리를 듣고 싶어서 나는 몇 번이고 아침과 저녁으로 정거장 앞을 왕래하였습니다.”

“나는 한동안 계동에 살았습니다. 거기서는 아침마다 세수하고는 반드시 중앙학교 철책(鐵柵) 밖에 가서, 학생 전부가 조회 끝에 웃통을 벗고 함성을 치면서 허공을 향하여 돌격을 하여 내닫는 것을 보고야, 사무소로 가고가고 하였습니다.

지금은 소격동으로 옮겨와서 아침 공부의 한 가지가 없어진 것을 섭섭해 하면서, 간신히 화동 안국동 좁은 길로 중앙·1고·2고·보전(普專)학생들의 진군을 보는 것으로 참고 지냅니다.”

“지금 조선에서 학생잡지를 한다는 것은 너무도 무모한 짓입니다. 일본서도 학생잡지는 작년(1928) 재작년 동안에 전부 몰락하였습니다. 조선에서는 말해볼 것도 없이 안될 일입니다.

첫째, 편집편(便)으로 생각해 보십시다.

학생잡지를 한다 하면 그 내용 설명을 듣지 않고도 누가 하든지 으레 나아갈 길이 뻔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누구든지 미리 생각하는 길, 그 길로는 일자반구(一字半句)를 들지 못하는 것이 조선잡지 아니겠습니까.

여러분이 알고자 하는 것의 대부분, 우리가 중요하게 취급하여야 할 것은 하나도 쓰지 못하게 됩니다.

쓰기는 우리 마음대로 쓰고 싶은 것을 쓰지마는, 책에 싣고 못 싣는 것은 우리의 마음대로 하지 못하는 까닭입니다.

둘째는 경영편으로 생각해 봅시다.

조선사람으로 중학정도와 전문정도의 학생이 남녀, 야학(夜學)강습소까지 합쳐도 5만명을 넘지 못한답니다.

그러니 그야말로 귀신같이 편집하여 학생 한 사람도 빠치지 않고 모두 읽게 한대야 5만부 미만이 아닙니까. ······

아무리 적게 잡더라도 1만부 못나가는 것은 경영할 재주가 없습니다.”

“편집으로나 경영으로나 다 무모한 짓인 줄 알면서 지금의 학생계를 보아 무모한 대로라도 시작을 꼭 해야겠어서 그냥 시작한 것입니다.

창간호마다 10에 7, 8은 원고 압수를 당하기 쉬운 전례(前例)가 있어서, 압수 아니 당하려고 자삭(自削) 또 자삭한 것인즉,

여러분께 특히 바라고 싶은 일은 창간호가 평범한 데에 너무 놀라시지 말고 낙망도 말고,

‘하하 이렇게 부자유로운 출생을 하였구나’고 짐작하면서 천천히 2호·3호·7호·9호 차차차차 나아가는 길을 보아달라 하는 것입니다.

사실 창간호에는 쓰고 싶은 말을 쓴 것보다 못쓴 것이 많습니다.”

“《학생》의 동생 《어린이》는 7년 전 3월에 창간하여 맨처음에는 주소 성명만 통지하면 무료로 보내준다고 신문광고를 하여도 전선(全鮮)에서 18명밖에 청구자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것이 지금은 10수만의 소년소녀를 동무해 나가게 되었으니 그간의 분투는 참으로 대단한 것이었습니다.”

각계 유명인사의 ‘학생시절’을 특집

《학생》 창간호 (1929. 3. 1)

《학생》 창간호 (1929. 3. 1)

목차에서 가장 크게 뽑은 제목은 〈학생시대〉인데 그 내용은, 여러 교장선생과 각계에서 활약하는 유명인사 여러분의 학생시절을 특집으로, 당시의 시대상황을 그대로 담은 것이라 귀중한 자료가 되리라 생각한다.

이에 투고한 교장은 최규동( 중동학교 교장, 후에 서울대 총장), 조동식( 동덕여고 교장, 후에 동덕여대 총장), 임두화( 송도고보 교장), 이윤주( 휘문고보 교장), 정대현( 보성고보 교장), 최두선( 중앙고보 교장, 후에 국무총리) 등인데, 그 이야기의 골자만 추려본다.

1) 〈40대의 상투쟁이가 많았던 교실, 최규동의 이야기〉 ··· “광성()학교나 광성()학교나 모두 야학이었다. 광성()에서는 법률과 상업을 배웠고, 광성()에서는 일어와 수학을 배웠었다. 그중에서 수학을 특별히 좋아하게 된 것은 두어가지 이유가 있었으니, 법률이나 상업 같은 것은 일정한 교과서도 없었을 뿐 아니라 ······, 그러니 자연 가르친다는 것이 아주 막연한 개념뿐이었었다.”

“학생들로 말하면 거의 40여세의 장인()들이어서, 사제()간이 대개 같은 연배였었다. 그러므로 선생이 ‘해라’는 물론 하지 못할뿐 아니라, 어쩌다 ‘하게’가 나오더라도 그것이 큰 말썽거리가 되던 것도 지금 생각하면 한 가지 웃음거리요, 머리 깎은 생도보다 상투쟁이가 더 많은 것도 ······.”

2) 〈창가시간이 제일 싫었다는 조동식의 이야기〉 ··· “내가 다니던 한어()학교만 하더라도 지필()의 공급은 물론이어니와, 점심이면 곰국으로 수십명 학생을 대접해가면서 청하였던 것이다. 3년만 이것을 계속하여 졸업장만 하나 얻으면 그 이튿날 관보()에 대뜸 교관() 아무개라 사령이 내리던 것이다.

한어학교 이후에 기호()학회에 다닐 때 일이니 ······, 내가 다닌 사범과는 모든 과목이 있었고 그것을 2개년 동안에 몰아치기 때문에, 하기방학도 없이 더운 날이면 수염이 한자씩 좋은 사람들이 웃통을 벗고 앉아, 교수받는 것도 우스운 얘기거리다. 그중에도 나이 많은 사람들을 창가를 시키고 체조를 시키니, 체조는 되고 안 되고 따라할지라도 창가는 웃음거리였었다. 나이 3, 40씩된 사람더러 ‘학도야 학도야’를 하라 하니 당음( : 당시()를 모은 책) 읊는 소리만 되었지 창가는 되지 않았다.

나는 일요일이면 슬그머니 삼청동 솔밭 속으로 찾아가서 거치른 성대를 가다듬어가며 창가 연습을 하고 섰다가, 혹시 사람들이나 만나면 그 무안했음이란 ······, 더구나 수염이 시커먼 사람으로 혼자 솔밭 속에서 정신 놓고 ‘학도야 학도야’를 부르고 있는 것이 그때 사람들 눈에는 불가불 미친사람으로 보였을 것이다.”

3) 〈1905년 미국 가서 공부한 임두화의 이야기〉 ··· “내가 처음으로 미주로 떠나던 때는 지금으로부터 25년 전인 1905년이었다. 그때 하와이 이민국에서 노동자들을 실어가는 편에, 나도 17, 8세의 소년으로 쫓아가던 것이니 고생으로 오른 것은 그만두고라도 길이 넘는 사탕수수밭에서 호리호리(적엽())를 하고 있다가 ······, 이러한 노동자생활을 10개월이나 하고 나서야 본주()로 건너갈 수 있었다.

나의 학생생활에서 제일 잊혀지지 않는 때는, 조지아지방 어느 산촌()학교 때의 일일 것이다. 처음에는 그래마스쿨(소학교)에서 8, 9세의 어린이들과 한반에 들어, 의자가 작기 때문에 앉지 못하던 것도 우스웠고, 그 반에서 정이 들 만하면 월반하여 혼자 진급하던 것도 기풍()이라면 기풍이었었다.”

“내가 지방학교에 있을 때에는 양복 다리미질, 또는 장작패기로 학비에 곤란이 없었으나 대학 때부터는 그것만으로는 감당해 나갈 수가 없었다. 그러므로 〈조선사회와 기독교〉라는 연설을 지어가지고 틈틈이 순회강연도 했던 것이다. ······ 들으러 오는 사람들도 연사의 연설이 훌륭해서 오는 것보다, 연사를 동정하려고 연사의 나라 풍속을 들으려오는 것이다.”

4) 〈우습고 기막혔던 일이 많았던 정대현의 이야기〉 ······ “그때 일어()학교라면 그래도 전문학교인 모양인데, 일어교사라는 이가 지금 보통학교 졸업 정도가 될락말락한 일본말솜씨를 가졌었다는 것만 들어도, 그때의 공부한다는 것이 얼마나 우습고 기막혔던지를 알 것입니다.

수학을 4년 동안 배운 것이 분수()밖에 못 배웠는데, 그것은 선생의 지식이 거기까지밖에 안 되니까 우리들도 수학은 다 배웠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역사래야 책 읽는 것이고, 지리래야 경위()선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선생님이고, 물리·화학하고 떠들어대었으나 기껏 어렵다는 시험문제가 ‘물유삼체()하니 기하자()인가 열기()하라!’ 이런 것인데, ······ 지금이면 보통학교 4학년 마친 이는 누구든지 답할 것이 아닙니까.”

“그후 일본 가서 고생도 좀 하였습니다. ······ 교과서의 태반은 베껴서 배웠고, 심지어 자전()까지 베껴 가졌으니, 이런 것은 지금 학생들은 생각도 못할 일이 아니겠습니까. 내가 다니던 학교는 지금의 동경고사()였습니다.”

5) 〈선생이 학생보고 ‘노형’하고 불렀다는 최두선의 이야기〉 ··· “대체로 교사가 결핍한 때라, 상당한 자격이 있거나 없거나 한 교사가 3, 4교() 혹은 4, 5교에 겸무하기는 보통이었으며, 자전거로 인력거로 동분서치(西)하는 모양은 흔히 보는 바이었다.”

“교과서는 어떠하였느냐 하면 이것 또한 각양각색으로, 일본중학교의 교과서를 그대로 쓰기도 하고, 혹은 일본교과서를 직역한 조선문 교과서를 쓰기도 하고, 혹은 임시로 편찬한 것을 등사판에 인쇄하여 사용하기도 하고, 혹은 구술()을 필기하여 ······.”

“연령의 차이가 심하고 그중에는 관직()을 지낸 이도 있어 탕건()에 입자()를 쓴 이도 있고, 연소() 생도 중에는 머리를 땋아서 늘어뜨린 이도 있었다. ······ 교사 중에는 생도보다 연소한 이가 많아서 서로 경어를 사용함은 물론이고, 어떤 선생은 학과를 설명할 때 생도를 보고 ‘노형()이 약시약시(: 이러이러함)하면’이라고 하던 말이 아직도 기억에 남아 있다.”

이밖에도 음악가 김영환(), 소설가 염상섭(), 의학박사 이갑수(), 체육인 서상천(), 변호사 이승우(), 미술가 김주경() 등이 체험한 외국유학시절을 이야기하고 있다.

《학생》의 독자를 중학생이라고는 하나 그것은 요즘과 같은 13, 4세가 아닌 17, 8세, 그보다도 더 많은 20세가 넘은 장가 든 중학생도 많았다. 그래서인지 차상찬()이 쓴 〈대원군 일화록〉에는 이런 이야기도 있다.

“서춘보(徐春輔)와 대원군은 근대조선 화류(花柳)계에 대표적인 오입쟁이다. 서춘보라는 이는 나이 14세 때에 벌써 기생방 출입을 하였는데, 그때만하여도 지금과 달라서 기생방 출입이 어찌나 까다로웠던지, 좀쳇사람으로는 아무리 돈푼이 있고 인물이 똑똑한 사람이라도 소위 선진(先進)오입쟁이(예컨대 대전별감·포도군관 등)에게 두드려맞거나 봉변을 당하는 터였다.

그가 일개 초립동(草笠童)으로 어떤 기생집에 갔더니, 여러 오입쟁이들이 그를 깔보고 누워서 일어나지도 않으니까, 그는 대담스럽게 하는 말이, ‘이놈의 집이 기생집으로 알고 왔더니 모두 누워있는 것을 보니까, 기생집이 아니라 활인서(活人署) 염병(染病)막이로구나’ 하니, 여러 사람이 하도 어이가 없어서 아무 말도 못하고 ······ 그뒤부터는 어느 기생집에 가든지 서춘보라면 으레 오입쟁이로 알고 한 좌석을 주었다.

그런데 대원군은 이 서춘보보다도 더 큰 오입쟁이었다. 외척(外戚) 김씨의 세력에 눌려서 꼼짝달싹을 못하고 무뢰배와 같이 시정을 돌아다닐 때는 물론이고, 그후 일국의 부왕(父王)이 되어 세도할 때에도 화류계의 패권을 항상 잡았었다. 미행(微行)으로 기생방에 다니기는 예사이고 당당하게 운현궁 안으로 몇 십명의 명기(名妓)를 뽑아서 입시(入侍)케 하였다. 이것이 소위 대령(待令)기생이라는 것이다. ······ 항우(項羽)도 낙상을 할 때가 있다고 대원군도 기생집에서 봉변을 당한 일이 있었다. ······ 대원군 당시에 훈련대장으로 위용(威容) 당당하던 이경하(李景夏)는 한때 대원군과 화류계에서 놀던 인물이었다.〈하략〉”

‘중학생잡지’에 당치도 않는 기생방 오입쟁이 이야기를 거리낌 없이 실었으니, 이야기란 하기 나름이고 듣기 나름인가 보다.

                                                                       [네이버 지식백과] 소파 방정환이 주재한 학생 - 1929. 3 (한국잡지백년2, 2004. 5. 15., 현암사)

 

 

 

 

주변인물

 

최영주(崔泳柱, 1906년 ~ 1945년 1월 12일)는 일제 강점기의 아동문학가 겸 언론인으로, 본명은 최신복(崔信福)이며 경기도 수원 출신이다.


배재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니혼 대학으로 유학했다. 조선으로 귀국한 뒤 경기도 수원에서 화성소년회(華城少年會)를 조직하면서부터 소년 운동에 투신했으며 한때 윤석중과 함께 색동회 동인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1927년 1월 개벽사(開闢社)에 입사한 뒤부터 잡지 《학생(學生)》, 《어린이》의 편집 업무를 담당하는 한편 세계 명작동화를 번안하여 연재했다.

1936년 5월 안석주, 윤석중 등과 함께 소파(小波) 방정환 기념비 건립 모금 운동 발기인으로 참여했으며 1940년 방정환이 생전에 집필했던 문학 작품들을 정리한 《소파전집(小波全集)》을 출판했다.

1938년 10월부터 1941년 1월까지 한국 최초의 월간 수필잡지인 《박문(博文)》의 편집 겸 발행인으로 활동했고 《중앙(中央)》, 《신시대(新時代)》, 《여성(女性)》 등의 잡지에서 편집 업무를 담당했다.

1941년 1월부터 1941년 8월까지 월간 잡지 《신시대》 주간으로 활동하는 동안 일제의 내선일체 정책과 황민화 정책, 일본의 침략 전쟁을 찬양하고 지원병 제도를 선전하는 글을 기고했으며 이러한 경력 때문에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자 명단의 언론/출판 부문에 포함되었다. 1945년 1월 12일 폐결핵으로 사망했으며 그의 작품집으로 《호드기》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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奧地人으로서 郵便當局에
                                           三水 石村生

 

 

나의 사는 곳은 조선서 제일 가는 산골입니다.

 

누구나 三水, 甲山이라면 말할 수 업시 험한 산골인 줄로 아는 것은 녯날부터이다.

 

이러케 험한 살골이라서 그런지 또는 이런 곳에서 사니까 사람을 업수이 녁여서 그런지 우리 곳 우편 당국자는 우편물을 매우 무성의하게 취급하고 잇스니 그 심사를 알 수가 업습니다.
내가 전에 서울을 가서 어떤 친구의 집에 묵고 잇슬 때에 그곳 체신부가 편지를 가지고 그 집에 와가지고도 사람을 불너가지고 XXX氏가 잇느냐고 물어서 잇다고 하여야 비로소 전하고 가는 것을 보앗는데 이곳서는 그 집을 차저가기 커녕 실상 편지 바들 사람 잇는 곳에서 한 십리 밧 쯤 되는 곳인 구장(區長) 집에다 두고 가니 아모리 급한 편지라도 급히 바다볼 수가 업게 됩니다.

 

구장 집에서 묵히다 묵히다가 우리 집 근처에 잇는 사람이 혹시 그곳에 들니게 되여야 그것을 그 편에 보내고 또 그것을 가지고 온 사람이 자긔 일이 밧부면 그날로 전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그만 이저버리여 여러 날 되면 제면적어서 전하지 안코 흐지부지 업새버립니다. 이런 일은 혹간 가다가 잇는 레외의 일이라고 하겟지만 대체로 보아 직접 차저 전하는 것이 별로 업습니다.

 

서류(書留)이라야 마지못하야 가지고 옴니다.
편지뿐 아니라 일반 보통우편물은 죄다 그럿습니다. 나는 개벽사(開闢社)의 개벽(開闢) 창간호부터 보는 독자인데 매달 이것 보느라고 여간 힘드리지 안엇습니다.
책이 하도 조흐니까 우편소에 잇는 사람이 뜨더보다가 다 보고 나서 도로 싸서 전하지요.

 

이것을 또 구장 집에 갓다 두면 그곳에서들 펴처보지요. 이러케 한 것을 나종에는 동리 사람이 갓다 줍니다.

 

바다본즉 죄 헌책입니다. 그럼으로 본사에서 헌책 보낸 줄만 알고 그것을 도로 싸서 본사로 보낸즉 본사에서는 다 보고 나서 헌책을 도로 보낸다고 책망을 합니다.

 

그래 노발대발하야 본사로 편지하기를 나에게는 산골 사람이라고 무시하고 그런 헌책을 보내주엇느냐고 나물합니다. 이러케 하느라니 비용인들 얼마나 만히 들엇겟습니까. 이러케 헌책이라도 매달 제때에 꼭꼭 바더보게 되면 조켓지만 그것도 간혹 발행은 되얏다고 신문에 발표되는데 발표되야 십여 일을 기다려도 오지 안습니다. 그래 본사로 편지하지요.

 

그러면 본사에서는 X날 보내엿스니 만일 밧지 못하얏스면 조사하야 보라고 하는 편지가 옴으로 볼일을 못 보고 체부 오는 날을 기댜려 쪼차가서 무러봅니다.

 

무러보면 아니왓다고 합니다. 그래 본사로 다시 편지하면 본사에서도 참말 억울하게 된 것을 생각하시고 재송(再送)이라고 써서 또 보내줍니다. 이러케 해서 그 달이 거의 다 간 다음에야 그 달치를 바다보게 됩니다.

 

책은 보고 십고 돈은 업고할 수 업시 집에 잇는 곡식을 장에 갓다가 팔아서 주문을 합니다.
이즈음에는 개벽사에서 나오는 것 네 가지 그 외의 것도 한두 가지를 보는데 돈(이 끗츤 九頁 第四段에 繼續)<13>으로 말하면 1원이 즘 넘습니다.
이것을 한 달만 떼우게 되면 나의게는 여간 손해가 아닙니다. 나는 여지것 본사에서 보내지 안코 떼여먹군 하는 줄만 알엇더니 이즈음 여러 방면으로 조사해 본 결과 우편당국에서 취급을 무성의하게 하야 이런 일이 생기는 줄을 확실히 알앗습니다.

 

우리 조선 안에 이런 일 당하는 사람이 한둘에 끗치지 안을 것입니다.
그럼으로 나는 이와 가튼 사실을 드러 우편당국자의게 외람히 황의하노니 크게 깨다러 이후에는 이런 사고가 다시 생기지 안토록 주의해주기를 크게 바라고 잇는 바이다. -끗- <9>
<10-13, 9>

 

별건곤 제44호  
발행일 1931년 10월01일  
기사제목 나의 抗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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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얼숭얼숭얼 싯뻘건 『빈대』란 놈이 잡아도 나올 때마다 생각하는 일이 두 가지 잇다.
『사람 중에 낫분 놈은 빈대가튼 놈이라고 욕을 하는 것이 제일 큰 욕이겟다』하는 생각하고
『조선사람 중에는 빈대 잡을 약을 생각해 보는 이가 그러케 한 사람도 업슬가』하는 생각이다.
빈대 잡는 신통한 약을 발명만 하면 단번에 一百萬圓씩은 굴너 도러올 것이 천지신명께 점쳐보지 안트래도 확실한 일이다.
백만원! - ! 3, 4원에도 미인이 끌니고, 1원 50전에 살인사건도 이러나는 세상에 백만원! 백만원이 생긴다면.

 

이런 생각을 할 때 나는 의학이나, 약학을 배호지 못한 것을 한탄한다.
약학자 아닌 사람이 갑갑한 생각으로 따저 본대도 빈대를 잡는데는 두 가지 길이 잇슬 것이다. 사람에게 비상이 독약인 것처럼 빈대에게 제일 독한 독약을 발견하야 빈대 잇슴즉한 곳에 뿌리던지 아니면 빈대가 제일 조와하야 어엽분 게집보고 부자ㅅ집 자식이 땅문서 들고 대여들 듯 참지 못하고 달겨들 만큼 빈대가 조와서 냄새낼 물건을 발견하야 그 냄새로 빈대란 빈대를 모조리 요강 속으로 꼬여드리던지 석유통 속으로<50> 꼬여드리던지 이 두 가지 밧게 더 확실한 방법이 업슬 것이다.
그러나 독약을 생각하는 길은 석유를 뿌려보아 휘발유, 양잿물을 뿌려보아 그래도 안 되니가 더 독한 것은 생각하기 당연하겟고, 빈대가 조와 못견대고 달겨들 냄새를 발견할 도리를 하는 것이 올흘 것 갓다.
빈대가 대체 무슨 냄새를 조와하는가 그것은 약학자가 추근추근하게 급히 굴지 말고 천천히 실지 연구를 해보아야 알 것이다.

 

그러나 우리 따위 무식배의 생각으로도 빈대가 사람의 땀내를 조와하는 것은 분명하다.

 

어두운 속에서 그 좁은 틈바귀에 끼여 잇다가도 땀흘리는 사람의 고기냄새를 맛기만 하면 3년 묵은 *껍질도 긔가 나서 긔여 나오는 것으로 보아 사람의 땀내와 피 냄새를 조와하는 것만은 사실이다.
그러니까 말이지 목욕탕에서 목욕하고 버리는 더러운 물, 그 물을 그저 버릴것이 아니라 그것을 체에 쳐서 건데기(땀과 때)만 남기던지 어떠케 그려서 『엑기스』를 맨들든지 하면 어떨가.

 

그래서 그것을 요강속 바닥에 노코 빈대들을 꼬드리거나 석유통 속에 노코 꼬여드리거나 하면 묘하지 안흔가 말이다.
온돌방 한간치에 30전씩 적게 적게 *잡아 한 집에서 3간치씩만 백만 집에서 한번씩 사도 百萬圓.
그 누가 더러 이런 생각을 안해보는가 하하 ... .
이번 7월 23일은 故 小派 方定煥氏의 일주년 忌日이다. 編者는 그를 추억하는 생각으로 이 遺稿 한 편을 抄載한 것이다.

 

方君을 생각하는 여러분! 다가티 愛讀하야 주십쇼. 특히 빈대 만흔 여름철에-<51>
<50-51>

方定煥

 

 별건곤 제53호   >   小波遺稿, 임자 찻는 百萬圓

잡지명 별건곤 제53호  
발행일 1932년 07월01일  
기사제목 小波遺稿, 임자 찻는 百萬圓  
필자 方定煥  
기사형태 문예기타  
小波遺稿, 임자 찻는 百萬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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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들을 잘 부탁한다”

 “여보게, 밖에 검정말이 끄는 검정 마차가 와서 검정옷을 입은 마부가 기다리니 어서 가방을 내다주게”

 

 

1. 4월 그믐날 밤
2. 귀먹은 집오리
3. 만년 셔츠
4. 까치의 옷
5. 막보의 큰 장사
6. 삼태성
7. 제일 짧은 동화
8. 양초 귀신
9. 어린이 찬미
10. 시골 쥐의 서울 구경
11. 노래주머니
12. 느티나무 신세 이야기
13. 미련이 나라
14. 꼬부랑 할머니
15. 겁쟁이 도둑
16. 삼 부자의 곰 잡기
17. 잘 먹은 값
18. 세숫물
19. 공중의 귀신 신호
20. 난파선
21. 하멜린의 주 난리
22. 두더지의 혼인
23. 이십 년 전 학교 이야기
24. 선물 아닌 선물
25. 방귀 출신 최 덜렁
26. 무서운 두꺼비
27. 과거 시험 문제
28. 셈치르기
29. 설떡, 술떡
30. 옹깃셈
31. 벚꽃 이야기
32. 나비의 꿈
33. 눈어둔 포수

34. 눈물의노래

 

소설[편집]

수필[편집]

희곡[편집]

소파 방정환 선생은 왜 33세에 요절했을까

 

색동회 www.saekdong.or.kr

 

 

 

 

방정환 [方定煥, 1899.11.9~1931.7.23]

  • 1899년 서울 야주개(지금의 당주동) 출생
  • 선린상업학교를 다니다 가난 때문에 학교를 그만둠
  • 잠시 조선총독부 토지조사국에서 서류 베끼는 일을 함
  • 손병희의 딸과 결혼함
  • 총독부 일을 그만두고 보성전문학교를 다니다 일본으로 유학을 떠남
  • 일본 아동문학가인 암곡소파를 만나 큰 영향을 받음
  • 1923년 우리나라 최초의 어린이 잡지 <어린이> 창간
  • 1924년 최초의 아동문화운동단체인 색동회 조직
  • 1927년 어린이 단체를 통합한 ‘조선소년연합회’ 위원장 역임
  • 1931년 33살의 젊은 나이에 병으로 사망
  • 1978년 금관문화훈장 추서
  • 1980년 건국훈장 추서

 

세상 모든 어린이들의 아버지

방정환 선생님은 동화작가로서뿐 아니라 어린이날을 만들어내고 색동회를 조직하여 어린이 인권향상을 위해 평생을 몸바친 어린이 문화운동가, 사회활동가로도 많이 알려져 있다. 방정환 선생님은 <어린이>지를 만들어 세계 어린이 문학을 번역·소개하고, 이원수, 윤석중 같은 소년작가를 길러 내기도 했으며, 이태준이라는 천재작가를 취직시켜 작품활동을 돕기도 했다. 투고된 원고가 없을 때는 스스로 여러 개의 가명을 쓰며 여러 이야기를 직접 쓰기도 했다. 근대적 의미의 '어린이 문학'이라는 게 거의 없던 시절, 우리 어린이 문학의 씨앗을 뿌린 매우 귀한 분이라 할 수 있다.

방정환 선생님이 쓴 <만년샤쓰> <양초귀신> 등은 초등학교 읽기교과서에도 실려있다. <만년샤쓰>는 제목이 참 특이하다. 내용을 읽어보지 않고서는 무슨 말인지 알 수가 없다. 주인공인 창남이와 창남이 어머니는 자신도 입을 옷이 없지만 불이 난 이웃을 위해 자기 옷을 벗어준다. 창남이는 그것도 모자라 추위에 떠는 어머니를 위해 자기 셔츠를 벗어드리고 학교에 온다. 추운 겨울에 저고리만 입고 학교에 온 창남이. 그런데 체육시간에 선생님은 체력을 키우자며 저고리를 모두 벗게 한다. 결국 창남이의 맨살이 드러났고 선생님과 아이들은 뒤늦게 창남이의 사정을 알고 눈물을 흘리고 만다.

이 작품에서 '만년샤쓰'란 맨몸을 의미한다. 우리 몸의 살갗은 평생 동안 우리의 셔츠가 되지 않던가. 오래 전 이야기이지만 현대의 아이들은 창남이의 뜻깊은 행동을 보고 감동하게 된다. 어린이들이 문학작품을 읽고 감동하는 것은 어른들처럼 시대적 배경을 이해하며 감동하는 것이 아니라 한 아름다운 인물에 대해 감동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방정환 선생님의 동화는 시대를 뛰어넘어 어린이들의 심금을 울리고 있다. 현재 출판되어 있는 방정환 선생님의 작품집 중 <사랑의 선물 1>은 주로 선생님의 창작동화나 옛이야기가 실려있고, <사랑의 선물 2>는 창작동화보다는 외국동화를 번안한 것들이 대부분이다.

방정환 선생님은 뛰어난 동화구연가이기도 했다. 텔레비전이나 영화처럼 볼 것이 별로 없던 시절 방정환의 이야기는 큰 구경거리였다고 한다. 이렇듯 재주 많고 할 일 많았던 방정환 선생님은 33살의 짧은 나이에 생을 마감하게 된다. 방정환 선생님의 못다한 일들은 이후 많은 작가들이 이어받아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그리고 그 작가들의 작품에 감동받은 수많은 어린이들이 또다시 그 일을 이어받을 것이다.

소파 방정환은 33세로 생을 마치기까지 어린이를 위해 온갖 정성을 쏟은 애국지사로, 위대한 교육자인 동시에 아동문학의 선구자이다. 짧은 생애였지만 그를 떠나서 한국의 아동문화, 아동문학의 출발을 이야기할 수 없을 정도이다.

그는 어른의 소유뮬로만 취급받아온 어린이를 인격적인 존재로 끌어올리기 위해 다양한 사회운동을 전개하였고, 어린이들의 마음에 사랑, 눈물, 용기, 기쁨을 키워주기 위한 동화, 소설, 시 등 아동문학을 일으키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소파는 1899년 서울 야주개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어머니와 누이를 잃고 새어머니가 들어왔으나 정을 못 붙이고, 대신 그림그리기와 글짓기에 재미를 얻었다.

유복한 환경에서 자라났지만 9세 때 종조부의 사업실패로 그의 집이 파산을 맞게 되어 견디기 힘든 불행한 생활을 하게 되었다. 소학교 학생인 10세 때 소년 입지회라는 소년회를 조직하여 토론, 연설의 수련을 쌓아가기 시작했다. 1914년 선린상업학교에 들어갔지만 2년만에 그만두고 열여섯 나이에 벌써 '청춘' 지에 글을 투고했다.

19세에 천도교 교주이며 독립운동가인 손병희의 사위가 되면서 비로소 인생의 전환점을 맞게 되었다. 그는 일본에 건너가 도요대학 철학과에 다니며 아동문제에 대한 연구를 하였다.

1921년 서울에서 천도교 소년회를 조직하면서부터 어린이에게 존대말을 쓰기로 하는 등 본격적인 소년운동을 전개하였다. 또한 전국을 두루 다니면서 강연을 하는 한편 세계명작 동화집 <사랑의 선물>을 펴내기도 했다.

1923년에는 한국 최초의 아동잡지인 <어린이>를 창간하였다. 그 해 5월 1일 어린이날을 제정하여 어린이날 운동을 범사회적으로 확산시키기 위해 노력하였다.

한편 어린이라는 단어가 언제부터 쓰였는가는 분명치 않지만 현재까지의 기록으로는 방정환 번역시의 장르소개 명칭으로 처음 소개된 것으로 확인되었다.

그는 각종 대회, 강연회, 강습회를 주관하면서도 어린이에게 꿈과 희망을 불어넣기 위해 끊임없이 다양한 형태의 글을 발표하였다.

소년운동이 좌익세력에 의해 자기의 참뜻과 차츰 달라진 1928년부터 일선에서 물러나 오로지 잡지와 동화순례 강연으로 자기 길을 걸었다. 그의 동화는 전국적으로 유명하여 아이들은 물론 어른들까지도 사방에서 몰려들었다. 이와 관련된 여러 일화가 있는데, 그의 이야기가 너무 재미있어서 자리를 뜨지 못하고 고무신을 벗어 오줌을 눈 어린이도 있었다고 한다.

1931년 서른세살의 나이로 그는 고혈압으로 세상을 떠났다. 짧은 생애를 살았지만 초지일관 어린이를 사랑하고 어린이의 미래를 위해 노력한 사람이었다.

 

방정환의 활동

♧ 아동잡지 <어린이>
-- 1923년 창간되어 1934년 7월에 통권 122호로 일단 중지된 아동잡지였다.
-- 옛날이야기식 동화나 창가조의 동요에서 탈피하여 창작동화와 동요를 적극 보급하였다.
-- 방정환은 <어린이>를 통해 짓눌리고 가난하고 웃음을 잃은 어린이에게 슬픔을 달래주고 슬픔을 함께하며, 역경을 극복하는 슬기를 가르쳤다.
-- 이원수, 마해송 같은 아동문학가들을 배출하였다.

♧ 외국동화의 소개

-- 1922년 <안데르센 동화>, <그림 동화>, <아라비안나이트> 중에서 선정한 몇몇 작품들을 초역하여 세계명작 동화집인 <사랑의 선물>을 번안, 출간하였다. 이 동화집이 우리말로 씌어진 첫 동화집이며 창작동화의 실마리가 되었다.

 

방정환의 작품세계

-- 그의 유명한 수필 <어린이 찬미>(1924)에서는 어린이를 "죄많은 세상에서 죄를 모르고 더러운 세상에 나서 더러움을 모르고 부처보다도 예수보다도 하늘뜻 그대로의 산 하느님"이라고 하였다. 소위 '동심천사주의문학'이라고 하는데 이는 당시 식민지하의 냉혹한 현실을 바로 보지 못했다는 신랄한 비판을 받았다.
-- <형제별>은 주권을 잃은 조국의 비운을 별 삼형제로 의인화하여 비극성을 더한 작품으로 `눈물`을 흘리게 만드는 동요이다. 이는 어린이에게 감성해방의 길을 열어 주려한 소파의 의도가 잘 나타나 있다.
-- 대표동요 <귀뚜라미>, <가을밤>, <늙은 잠자리> 등에서는 뛰어난 시세계를 보여주는데, 특히 〈가을밤〉은 현대동요에도 뒤지지 않을 만큼 우수한 작품으로 평가되고 있다.
-- 소설 <만년셔츠>는 가난하면서도 꿋꿋하게 살아가는 주인공의 따뜻한 인간애를 보여준 작품이다.

방정환 문학에 대해 영웅주의와 눈물주의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 작품이라고 비판하였지만 그는 우리 아동문학의 어머니임에는 틀림없다. 그는 누구보다 먼저 아동문학의 밭을 갈고 씨를 뿌려 수많은 작가를 길러냈다. 비록 33세의 짧은 나이에 요절하고 말았지만, 방정환과 깊은 인연을 맺고 방정환의 뒤를 이어 방정환 문학의 한계를 극복해낸 작가들이 많이 나왔다

출처http://kin.naver.com/qna/detail.nhn?d1id=13&dirId=130102&docId=243388976&qb=7J207YOc7KSA67Cp7KCV7ZmY&enc=utf8§ion=kin&rank=1&search_sort=0&spq=0&pid=SxCYMdoRR0ossvsgjICssssssuK-054356&sid=t1I7xjI3GfQvUUoVDlqT/A%3D%3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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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보게, 밖에 검정말이 끄는 검정 마차가 와서 검정옷을 입은 마부가 기다리니 어서 가방을 내다주게”
 
 
 왜정인물 1권
 
方定煥  민족구분    한국인
           이명          牧星, 小波
          생년월일     1899-10-99
          출신지       京城府 堅志洞 118(원적)
          현주소       京城府 敦義洞 83
          학력          渼洞公立普通學校 졸업
                          1921년 東京硏修英語學校에 들어감
                          후에 東洋大學 졸업                  
         경력및활동
                          故 孫秉熙 손녀 濬嬅의 남편으로서 항상 천도교의 중요 임무를 전담함
                          1920년 동경에서 천도교 지부를 설립하여 孫秉熙 사후 이례적으로 그 상속인이 된 자임
         계통 소속단체 : 천도교계
         재산자산     약 3천엔 정도를 가지고 있음
 
        인물평외모    키 5척 2촌
                           둥근 얼굴형에 까만 피부. 비만임
                           배일사상을 가지고 있고 불온한 행동을 할 우려가 있음
참고문헌       왜정시대인물사료
 
 
 
 
동화처럼 떠나간 식민지 아이들의 산타 소파 방정환

 

 

 

 

 

 

한국방정환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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