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파 방정환이 주재한 학생
1929. 3
《학생(學生)》은 1929년 3월 1일자로 방정환이 주재하여 개벽사에서 창간한 중학생잡지로서, 1930년 1월까지 통권 11호를 내고는 종간했다. 판권장을 보면 편집 겸 발행인 방정환(方定煥), 인쇄인 전준성(田駿成), 인쇄소 지까자와(近澤)인쇄소, 발행소 개벽사(서울·경운동 88), A5판 115면, 한권 정가는 표시하지 않고 ‘선금(先金)정가 3개월분 75전’으로 매겨져 있다.
방정환은 〈《학생》 창간호를 내면서 남녀학생에게 하고 싶은 말씀〉이란 긴 제목으로 4면에 걸쳐 이야기를 했는데, 그중 몇 대문을 옮긴다.
“방학 때 개학 때, 나는 딴일만 없으면 틈을 얻어가지고 일없이 경성(京城 : 서울)역두(驛頭)에 나아가 섰다가, 그냥 오고 그냥 오고 합니다.
그 수많은 학생들이 몇 만으로 헤일 학생들이 13도(道) 촌촌(村村)을 찾아가기 위하여 정거장으로 몰려 들어가는 것을 멀리 서서 구경하고 있을 때, 나의 귀는 진군(進軍) 나팔소리를 듣습니다.
그 소리 그 나팔소리를 듣고 싶어서 나는 몇 번이고 아침과 저녁으로 정거장 앞을 왕래하였습니다.”
“나는 한동안 계동에 살았습니다. 거기서는 아침마다 세수하고는 반드시 중앙학교 철책(鐵柵) 밖에 가서, 학생 전부가 조회 끝에 웃통을 벗고 함성을 치면서 허공을 향하여 돌격을 하여 내닫는 것을 보고야, 사무소로 가고가고 하였습니다.
지금은 소격동으로 옮겨와서 아침 공부의 한 가지가 없어진 것을 섭섭해 하면서, 간신히 화동 안국동 좁은 길로 중앙·1고·2고·보전(普專)학생들의 진군을 보는 것으로 참고 지냅니다.”
“지금 조선에서 학생잡지를 한다는 것은 너무도 무모한 짓입니다. 일본서도 학생잡지는 작년(1928) 재작년 동안에 전부 몰락하였습니다. 조선에서는 말해볼 것도 없이 안될 일입니다.
첫째, 편집편(便)으로 생각해 보십시다.
학생잡지를 한다 하면 그 내용 설명을 듣지 않고도 누가 하든지 으레 나아갈 길이 뻔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누구든지 미리 생각하는 길, 그 길로는 일자반구(一字半句)를 들지 못하는 것이 조선잡지 아니겠습니까.
여러분이 알고자 하는 것의 대부분, 우리가 중요하게 취급하여야 할 것은 하나도 쓰지 못하게 됩니다.
쓰기는 우리 마음대로 쓰고 싶은 것을 쓰지마는, 책에 싣고 못 싣는 것은 우리의 마음대로 하지 못하는 까닭입니다.
둘째는 경영편으로 생각해 봅시다.
조선사람으로 중학정도와 전문정도의 학생이 남녀, 야학(夜學)강습소까지 합쳐도 5만명을 넘지 못한답니다.
그러니 그야말로 귀신같이 편집하여 학생 한 사람도 빠치지 않고 모두 읽게 한대야 5만부 미만이 아닙니까. ······
아무리 적게 잡더라도 1만부 못나가는 것은 경영할 재주가 없습니다.”
“편집으로나 경영으로나 다 무모한 짓인 줄 알면서 지금의 학생계를 보아 무모한 대로라도 시작을 꼭 해야겠어서 그냥 시작한 것입니다.
창간호마다 10에 7, 8은 원고 압수를 당하기 쉬운 전례(前例)가 있어서, 압수 아니 당하려고 자삭(自削) 또 자삭한 것인즉,
여러분께 특히 바라고 싶은 일은 창간호가 평범한 데에 너무 놀라시지 말고 낙망도 말고,
‘하하 이렇게 부자유로운 출생을 하였구나’고 짐작하면서 천천히 2호·3호·7호·9호 차차차차 나아가는 길을 보아달라 하는 것입니다.
사실 창간호에는 쓰고 싶은 말을 쓴 것보다 못쓴 것이 많습니다.”
“《학생》의 동생 《어린이》는 7년 전 3월에 창간하여 맨처음에는 주소 성명만 통지하면 무료로 보내준다고 신문광고를 하여도 전선(全鮮)에서 18명밖에 청구자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것이 지금은 10수만의 소년소녀를 동무해 나가게 되었으니 그간의 분투는 참으로 대단한 것이었습니다.”
각계 유명인사의 ‘학생시절’을 특집
목차에서 가장 크게 뽑은 제목은 〈학생시대〉인데 그 내용은, 여러 교장선생과 각계에서 활약하는 유명인사 여러분의 학생시절을 특집으로, 당시의 시대상황을 그대로 담은 것이라 귀중한 자료가 되리라 생각한다.
이에 투고한 교장은 최규동(崔奎東 중동학교 교장, 후에 서울대 총장), 조동식(趙東植 동덕여고 교장, 후에 동덕여대 총장), 임두화(林斗華 송도고보 교장), 이윤주(李潤柱 휘문고보 교장), 정대현(鄭大鉉 보성고보 교장), 최두선(崔斗善 중앙고보 교장, 후에 국무총리) 등인데, 그 이야기의 골자만 추려본다.
1) 〈40대의 상투쟁이가 많았던 교실, 최규동의 이야기〉 ··· “광성(光成)학교나 광성(廣成)학교나 모두 야학이었다. 광성(廣成)에서는 법률과 상업을 배웠고, 광성(光成)에서는 일어와 수학을 배웠었다. 그중에서 수학을 특별히 좋아하게 된 것은 두어가지 이유가 있었으니, 법률이나 상업 같은 것은 일정한 교과서도 없었을 뿐 아니라 ······, 그러니 자연 가르친다는 것이 아주 막연한 개념뿐이었었다.”
“학생들로 말하면 거의 40여세의 장인(長人)들이어서, 사제(師弟)간이 대개 같은 연배였었다. 그러므로 선생이 ‘해라’는 물론 하지 못할뿐 아니라, 어쩌다 ‘하게’가 나오더라도 그것이 큰 말썽거리가 되던 것도 지금 생각하면 한 가지 웃음거리요, 머리 깎은 생도보다 상투쟁이가 더 많은 것도 ······.”
2) 〈창가시간이 제일 싫었다는 조동식의 이야기〉 ··· “내가 다니던 한어(漢語)학교만 하더라도 지필(紙筆)의 공급은 물론이어니와, 점심이면 곰국으로 수십명 학생을 대접해가면서 청하였던 것이다. 3년만 이것을 계속하여 졸업장만 하나 얻으면 그 이튿날 관보(官報)에 대뜸 교관(敎官) 아무개라 사령이 내리던 것이다.
한어학교 이후에 기호(畿湖)학회에 다닐 때 일이니 ······, 내가 다닌 사범과는 모든 과목이 있었고 그것을 2개년 동안에 몰아치기 때문에, 하기방학도 없이 더운 날이면 수염이 한자씩 좋은 사람들이 웃통을 벗고 앉아, 교수받는 것도 우스운 얘기거리다. 그중에도 나이 많은 사람들을 창가를 시키고 체조를 시키니, 체조는 되고 안 되고 따라할지라도 창가는 웃음거리였었다. 나이 3, 40씩된 사람더러 ‘학도야 학도야’를 하라 하니 당음(唐音 : 당시(唐詩)를 모은 책) 읊는 소리만 되었지 창가는 되지 않았다.
나는 일요일이면 슬그머니 삼청동 솔밭 속으로 찾아가서 거치른 성대를 가다듬어가며 창가 연습을 하고 섰다가, 혹시 사람들이나 만나면 그 무안했음이란 ······, 더구나 수염이 시커먼 사람으로 혼자 솔밭 속에서 정신 놓고 ‘학도야 학도야’를 부르고 있는 것이 그때 사람들 눈에는 불가불 미친사람으로 보였을 것이다.”
3) 〈1905년 미국 가서 공부한 임두화의 이야기〉 ··· “내가 처음으로 미주로 떠나던 때는 지금으로부터 25년 전인 1905년이었다. 그때 하와이 이민국에서 노동자들을 실어가는 편에, 나도 17, 8세의 소년으로 쫓아가던 것이니 고생으로 오른 것은 그만두고라도 길이 넘는 사탕수수밭에서 호리호리(적엽(摘葉))를 하고 있다가 ······, 이러한 노동자생활을 10개월이나 하고 나서야 본주(本洲)로 건너갈 수 있었다.
나의 학생생활에서 제일 잊혀지지 않는 때는, 조지아지방 어느 산촌(山村)학교 때의 일일 것이다. 처음에는 그래마스쿨(소학교)에서 8, 9세의 어린이들과 한반에 들어, 의자가 작기 때문에 앉지 못하던 것도 우스웠고, 그 반에서 정이 들 만하면 월반하여 혼자 진급하던 것도 기풍(奇風)이라면 기풍이었었다.”
“내가 지방학교에 있을 때에는 양복 다리미질, 또는 장작패기로 학비에 곤란이 없었으나 대학 때부터는 그것만으로는 감당해 나갈 수가 없었다. 그러므로 〈조선사회와 기독교〉라는 연설을 지어가지고 틈틈이 순회강연도 했던 것이다. ······ 들으러 오는 사람들도 연사의 연설이 훌륭해서 오는 것보다, 연사를 동정하려고 연사의 나라 풍속을 들으려오는 것이다.”
4) 〈우습고 기막혔던 일이 많았던 정대현의 이야기〉 ······ “그때 일어(日語)학교라면 그래도 전문학교인 모양인데, 일어교사라는 이가 지금 보통학교 졸업 정도가 될락말락한 일본말솜씨를 가졌었다는 것만 들어도, 그때의 공부한다는 것이 얼마나 우습고 기막혔던지를 알 것입니다.
수학을 4년 동안 배운 것이 분수(分數)밖에 못 배웠는데, 그것은 선생의 지식이 거기까지밖에 안 되니까 우리들도 수학은 다 배웠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역사래야 책 읽는 것이고, 지리래야 경위(經緯)선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선생님이고, 물리·화학하고 떠들어대었으나 기껏 어렵다는 시험문제가 ‘물유삼체(物有三體)하니 기하자(其何者)인가 열기(列記)하라!’ 이런 것인데, ······ 지금이면 보통학교 4학년 마친 이는 누구든지 답할 것이 아닙니까.”
“그후 일본 가서 고생도 좀 하였습니다. ······ 교과서의 태반은 베껴서 배웠고, 심지어 자전(字典)까지 베껴 가졌으니, 이런 것은 지금 학생들은 생각도 못할 일이 아니겠습니까. 내가 다니던 학교는 지금의 동경고사(高師)였습니다.”
5) 〈선생이 학생보고 ‘노형’하고 불렀다는 최두선의 이야기〉 ··· “대체로 교사가 결핍한 때라, 상당한 자격이 있거나 없거나 한 교사가 3, 4교(校) 혹은 4, 5교에 겸무하기는 보통이었으며, 자전거로 인력거로 동분서치(東奔西馳)하는 모양은 흔히 보는 바이었다.”
“교과서는 어떠하였느냐 하면 이것 또한 각양각색으로, 일본중학교의 교과서를 그대로 쓰기도 하고, 혹은 일본교과서를 직역한 조선문 교과서를 쓰기도 하고, 혹은 임시로 편찬한 것을 등사판에 인쇄하여 사용하기도 하고, 혹은 구술(口述)을 필기하여 ······.”
“연령의 차이가 심하고 그중에는 관직(官職)을 지낸 이도 있어 탕건(宕巾)에 입자(笠子)를 쓴 이도 있고, 연소(年少) 생도 중에는 머리를 땋아서 늘어뜨린 이도 있었다. ······ 교사 중에는 생도보다 연소한 이가 많아서 서로 경어를 사용함은 물론이고, 어떤 선생은 학과를 설명할 때 생도를 보고 ‘노형(老兄)이 약시약시(若是若是: 이러이러함)하면’이라고 하던 말이 아직도 기억에 남아 있다.”
이밖에도 음악가 김영환(金永煥), 소설가 염상섭(廉想涉), 의학박사 이갑수(李甲秀), 체육인 서상천(徐相天), 변호사 이승우(李升雨), 미술가 김주경(金周經) 등이 체험한 외국유학시절을 이야기하고 있다.
《학생》의 독자를 중학생이라고는 하나 그것은 요즘과 같은 13, 4세가 아닌 17, 8세, 그보다도 더 많은 20세가 넘은 장가 든 중학생도 많았다. 그래서인지 차상찬(車相瓚)이 쓴 〈대원군 일화록〉에는 이런 이야기도 있다.
“서춘보(徐春輔)와 대원군은 근대조선 화류(花柳)계에 대표적인 오입쟁이다. 서춘보라는 이는 나이 14세 때에 벌써 기생방 출입을 하였는데, 그때만하여도 지금과 달라서 기생방 출입이 어찌나 까다로웠던지, 좀쳇사람으로는 아무리 돈푼이 있고 인물이 똑똑한 사람이라도 소위 선진(先進)오입쟁이(예컨대 대전별감·포도군관 등)에게 두드려맞거나 봉변을 당하는 터였다.
그가 일개 초립동(草笠童)으로 어떤 기생집에 갔더니, 여러 오입쟁이들이 그를 깔보고 누워서 일어나지도 않으니까, 그는 대담스럽게 하는 말이, ‘이놈의 집이 기생집으로 알고 왔더니 모두 누워있는 것을 보니까, 기생집이 아니라 활인서(活人署) 염병(染病)막이로구나’ 하니, 여러 사람이 하도 어이가 없어서 아무 말도 못하고 ······ 그뒤부터는 어느 기생집에 가든지 서춘보라면 으레 오입쟁이로 알고 한 좌석을 주었다.
그런데 대원군은 이 서춘보보다도 더 큰 오입쟁이었다. 외척(外戚) 김씨의 세력에 눌려서 꼼짝달싹을 못하고 무뢰배와 같이 시정을 돌아다닐 때는 물론이고, 그후 일국의 부왕(父王)이 되어 세도할 때에도 화류계의 패권을 항상 잡았었다. 미행(微行)으로 기생방에 다니기는 예사이고 당당하게 운현궁 안으로 몇 십명의 명기(名妓)를 뽑아서 입시(入侍)케 하였다. 이것이 소위 대령(待令)기생이라는 것이다. ······ 항우(項羽)도 낙상을 할 때가 있다고 대원군도 기생집에서 봉변을 당한 일이 있었다. ······ 대원군 당시에 훈련대장으로 위용(威容) 당당하던 이경하(李景夏)는 한때 대원군과 화류계에서 놀던 인물이었다.〈하략〉”
‘중학생잡지’에 당치도 않는 기생방 오입쟁이 이야기를 거리낌 없이 실었으니, 이야기란 하기 나름이고 듣기 나름인가 보다.
[네이버 지식백과] 소파 방정환이 주재한 학생 - 1929. 3 (한국잡지백년2, 2004. 5. 15., 현암사)
주변인물
최영주(崔泳柱, 1906년 ~ 1945년 1월 12일)는 일제 강점기의 아동문학가 겸 언론인으로, 본명은 최신복(崔信福)이며 경기도 수원 출신이다.
배재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니혼 대학으로 유학했다. 조선으로 귀국한 뒤 경기도 수원에서 화성소년회(華城少年會)를 조직하면서부터 소년 운동에 투신했으며 한때 윤석중과 함께 색동회 동인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1927년 1월 개벽사(開闢社)에 입사한 뒤부터 잡지 《학생(學生)》, 《어린이》의 편집 업무를 담당하는 한편 세계 명작동화를 번안하여 연재했다.
1936년 5월 안석주, 윤석중 등과 함께 소파(小波) 방정환 기념비 건립 모금 운동 발기인으로 참여했으며 1940년 방정환이 생전에 집필했던 문학 작품들을 정리한 《소파전집(小波全集)》을 출판했다.
1938년 10월부터 1941년 1월까지 한국 최초의 월간 수필잡지인 《박문(博文)》의 편집 겸 발행인으로 활동했고 《중앙(中央)》, 《신시대(新時代)》, 《여성(女性)》 등의 잡지에서 편집 업무를 담당했다.
1941년 1월부터 1941년 8월까지 월간 잡지 《신시대》 주간으로 활동하는 동안 일제의 내선일체 정책과 황민화 정책, 일본의 침략 전쟁을 찬양하고 지원병 제도를 선전하는 글을 기고했으며 이러한 경력 때문에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자 명단의 언론/출판 부문에 포함되었다. 1945년 1월 12일 폐결핵으로 사망했으며 그의 작품집으로 《호드기》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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