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 제2번 황의 기
문학사상, 1976. 7
기일(記一)
밤이 이슥하여 황이 짖는 소리에 나는 숙면(熟眠)에서 깨어나 옥외(屋外) 골목까지 황을 마중나갔다.
주먹을 쥔채 잘려 떨어진 한 개의 팔을 물고 온 것이다.
보아하니 황은 일찌기 보지 못했을만큼 몹시 창백(蒼白)해 있다.
그런데 그것은 나의 주치의(主治醫) R의학박사(醫學博士)의 오른팔이었다.
그리고 그 주먹 속에선 한 개의 훈장(勳章)이 나왔다.
ㅡ희생동물공양비(犧牲動物供養碑) 제막식기념(除幕式紀念)ㅡ
그런 메달이었음을 안 나의 기억(記憶)은 새삼스러운 감동(感動)을 받지 않을 수가 없었다.
두 개(個)의 뇌수(腦髓) 사이에 생기는 연결신경(連結神經)을 그는 암(癌)이라고 완고히 주장했었다.
그리고 정기적(定期的)으로 그의 참으로 뛰어난 메스의 기교(技巧)로써 그 신경건(神經腱)을 잘랐다.
그의 그같은 이원론적(二元論的) 생명관(生命觀)에는 실로 철저한 데가 있었다.
지금은 고인(故人)이 된 그가 얼마나 그 기념장(紀念章)을 그의 가슴에 장식하기를 주저하고 있었는가는 그의 장례식(葬禮式) 중에 분실된 그의 오른팔ㅡ현재 황이 입에 물고 온ㅡ을 보면 대충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을 것이다.
그래 그가 공양비(供養碑) 건립기성회(建立期成會)의 회장(會長)이었다는 사실은 무릇 무엇을 의미하는가?
불균형(不均衡)한 건축물(建築物)들로 하여 뒤얽힌 병원구내(病院構內)의 어느 한 귀퉁이에 세워진 그 공양비(供養碑)의 쓸쓸한 모습을 나는 언제던가 공교롭게 지나는 길에 본 것을 기억한다.
거기에 나의 목장(牧場)으로부터 호송(護送)돼 가지곤 해부대(解剖臺)의 이슬로 사라진 숱한 개들의 한(恨)많은 혼백(魂魄)이 뿜게 하는 살기(殺氣)를 나는 느끼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나는 더더구나 그의 수술실(手術室)을 찾아가 예(例)의 건(腱)의 절단(切斷)을 그에게 의뢰(依賴)해야 했던 것인데ㅡ
나는 황을 꾸짖었다. 주인(主人)의 고민상(苦悶相)을 생각하는 한 마리 축생(畜生)의 인정(人情)보다도 차라리 이 경우 나는 사회일반(社會一般)의 예절(禮節)을 중히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ㅡ
그를 잃은 후의 나에게 올 자유(自由)ㅡ바로 현재 나를 염색(染色)하는 한 가닥의 눈물ㅡ나는 흥분을 가까스로 진압(鎭壓)하였다.
나는 때를 놓칠세라 그 팔 그대로를 공양비(供養碑) 근변(近邊)에 묻었다.
죽은 그가 죽은 동물(動物)에게 한 본의(本意) 아닌 계약(契約)을 반환한다는 형식(形式)으로......
기이(記二)
봄은 오월(五月). 화원시장(花園市場)을 나는 황을 동반하여 걷고 있었다.
완상(玩賞) 화초종자(花草種子)를 사기 위하여......
황의 날카로운 후각(嗅覺)은 파종후(播種後)의 성적(成績)을 소상히 예언(豫言)했다.
진열(陳列)된 온갖 종자(種子)는 불발아(不發芽)의 불량품(不良品)이었다.
허나 황의 후각(嗅覺)에 합격된 것이 꼭 하나 있었다.
그것은 대리석(大理石) 모조(模造)인 종자(種子) 모형(模型)이었다.
나는 황의 후각(嗅覺)을 믿고 이를 마당귀에 묻었다.
물론 또 하나의 불량품(不良品)도 함께 시험적(試驗的) 태도로ㅡ
얼마 후 나는 역도병(逆倒病)에 걸렸다.
나는 날마다 인쇄소(印刷所)의 활자(活字) 두는 곳에 나의 병구(病軀)를 이끌었다.
지식(知識)과 함께 나의 병(病)집은 깊어질 뿐이었다.
하루 아침 나는 식사(食事) 정각(定刻)에 그냥 잘못 가수(假睡)에 빠져들어갔다.
틈을 놓치려 들지 않는 황은 그 금속(金屬)의 꽃을 물어선 나의 반개(半開)의 입에 떨어뜨렸다.
시간(時間)의 습관이 식사(食事)처럼 나에게 안약(眼藥)을 무난히 넣게 했다.
병(病)집이 지식(知識)과 중화(中和)했다.
ㅡ세상에 교묘(巧妙)하기 짝이 없는 치료법(治療法)ㅡ
그 후 지식(知識)은 급기야 좌우(左右)를 겸비(兼備)하게끔 되었다.
기삼(記三)
복화술(複話術)이란 결국 언어(言語)의 저장창고(貯藏倉庫)의 경영(經營)일 것이다.
한 마리의 축생(畜生)은 인간(人間)이외의 모든 뇌수(腦髓)일 것이다.
나의 뇌수(腦髓)가 담임(擔任) 지배(支配)하는 사건의 대부분(大部分)을 나는 황의 위치(位置)에 저장(貯藏)했다ㅡ냉각(冷却)되고 가열(加熱)되도록
ㅡ나의 규칙(規則)을ㅡ그러므로ㅡ리트머스지(紙)에 썼다.
배ㅡ그 속ㅡ의 결정(結晶)을 가감(加減)할 수 있도록 소량(小量)의 리트머스액(液)을 나는 나의 식사(食事)에 곁들일 것을 잊지 않았다.
나의 배의 발음(發音)은 마침내 삼각형(三角形)의 어느 정점(頂點)을 정직하게 출발하였다.
기사(記四)
황의 나신(裸身)은 나의 나신(裸身)을 꼬옥 닮았다. 혹은 이 일은 이 일의 반대(反對)일지도 모른다.
나의 목욕(沐浴)시간은 황의 근무(勤務)시간 속에 있다.
나는 천의(穿衣)인채 욕실(浴室)에 들어서 가까스로 욕조(浴槽)로 들어간다.
ㅡ벗은 옷을 한 손에 안은채ㅡ
언제나 나는 나의 조상(祖上)ㅡ육친(肉親)을 위조(僞造)하고픈 못된 충동에 끌렸다.
치욕(恥辱)의 계보(系譜)를 짊어진채 내가 해부대(解剖臺)의 이슬로 사라질 날은 그 어느 날에 올 것인가?
피부(皮膚)는 한 장 밖에 남아 있지 않다.
거기에 나는 파랑잉크로 함부로 근(筋)을 그렸다.
이 초라한 포장(包裝) 속에서 나는 생각한다
ㅡ해골(骸骨)에 대하여......묘지(墓地)에 대하여
영원한 경치(景致)에 대하여.
달덩이 같은 얼굴에 여자는 눈을 가지고 있다.
여자의 얼굴엔 입맞춤할 데가 없다.
여자는 자기 손을 먹을 수도 있었다.
나의 식욕(食慾)은 일차방정식(一次方程式)같이 간단(簡單)하였다.
나는 곧잘 색채(色彩)를 삼키곤 한다.
투명(透明)한 광선(光線) 앞에서 나의 미각(味覺)은 거리낌없이 표정(表情)한다.
나의 공복(空腹)은 음향(音響)에 공명(共鳴)한다ㅡ예컨대 나이프를 떨군다ㅡ
여자는 빈 접시 한 장을 내 앞에 내어 놓는다ㅡ
(접시가 나오기 전에 나의 미각[味覺]은 이미 요리[料理]을 다 먹어치웠기 때문이다)
여자의 구토(嘔吐)는 여자의 술을 뱉어낸다.
그리고 나에게 대한 체면(體面)마저 함께 뱉어내고 만다(오오 나는 웃어야 하는가 울어야 하는가)
요리인(料理人)의 단추는 오리온좌(座)의 약도(略圖)다.
여자의 육감적(肉感的)인 부분은 죄다 빛나고 있다.
달처럼 반지처럼.
그래 나는 나의 신분(身分)에 걸맞게시리 나의 표정(表情)을 절약(節約)하고 겸손(謙遜)하고 하는 것이었다.
모자(帽子)ㅡ나의 모자(帽子). 나의 병상(病床)을 감시(監視)하고 있는 모자(帽子).
나의 사상(思想)의 레텔. 나의 사상(思想)의 흔적. 너는 알 수 있을까?
나는 죽는 것일까. 나는 이냥 죽어가는 것일까.
나의 사상(思想)은 네가 내 머리 위에 있지 아니하듯 내 머리에서 사라지고 없다.
모자(帽子) 나의 사상(思想)을 엄호(掩護)해 주려무나!
나의 데드마스크엔 모자(帽子)는 필요 없게 된단 말이다!
그림달력의 장미(薔薇)가 봄을 준비하고 있다.
붉은 밤. 보라빛 바탕.
별들은 흩날리고 하늘은 나의 쓰러져 객사(客死)할 광장(廣場).
보이지 않는 별들의 조소(嘲笑).
다만 남아 있는 오리온좌(座)의 뒹구는 못(釘)같은 성원(星員).
나는 두려움 때문에.
나의 얼굴을 변장(變裝)하고 싶은 오직 그 생각에 나의 꺼칠한 턱수염을 손바닥으로 감추어본다.
정수리 언저리에서 개가 짖었다. 불성실(不誠實)한 지구(地球)를 두드리는 소리.
나는 되도록 나의 오관(五官)을 취소(取消)하고 싶다고 생각한다.
심리학(心理學)을 포기한 나는 기꺼이
ㅡ나는 종족(種族)의 번식(繁殖)을 위해 이 나머지 세포(細胞)를 써버리고 싶다.
바람 사나운 밤마다 나는 차차로 한 묶음의 턱수염 같이 되어버린다.
한줄기 길이 산(山)을 뚫고 있다.
나는 불 꺼진 탄환(彈丸)처럼 그 길을 탄다.
봄이 나를 뱉어낸다. 나는 차거운 압력(壓力)을 느낀다.
듣자 하니ㅡ아이들은 나무 밑에 모여서 겨울을 말해버린다.
화살처럼 빠른 것을 이 길에 태우고 나도 나의 불행(不幸)을 말해버릴까 한다.
한 줄기 길에 못이 서너개ㅡ땅을 파면 나긋나긋한 풀의 준비(準備)ㅡ봄은 갈갈이 찢기고 만다.
(3월 20일)
출처 hideinx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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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서정시학 제20권 1호 2010년 봄호, 2010.3, 60-91 (32 pages)
이상의 유고 소개 및 번역 경위와 그 문제점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