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식
삼사문학, 1937. 4
정조
이런 경우 즉, ‘남편만 없었던들’ ‘
남편이 용서만 한다면’ 하면서 지켜진 아내의 정조란 이미 간음이다.
정조는 금제(禁制)가 아니요 양심이다.
이 경우의 양심이란 도덕성에서 우러나오는 것을 가리키지 않고
‘절대의 애정’ 그것이다.
만일 내게 아내가 있고 그 아내가 실로 요만 정도의 간음을 범한 때
내가 무슨 어려운 방법으로 곧 그것을 알 때
나는 ‘간음한 아내’ 라는 뚜렷한 죄명 아래 아내를 내쫓으리라.
내가 이 세기에 용납되지 않는 최후의 한꺼풀 막이 있다면
그것은 오직
‘간음한 아내는 내쫓으라’는 철칙에서 영원히 헤어나지 못하는
내 곰팡내 나는 도덕성이다.
비밀 이탈리아 로라 안토넬리
비밀이 없다는 것은 재산 없는 것처럼 가난할 뿐만 아니라 더 불쌍하다.
정치(情痴) 세계의 비밀(내가 남에게 간음한 비밀, 남을 내게 간음시킨 비밀, 즉 불의의 양면),
이것을 나는 만금과 오히려 바꾸리라.
주머니에 푼전이 없을망정 나는 천하를 놀려먹을 수 있는 실력을 가진 큰 부자일 수 있다.
이유
나는 내 아내를 버렸다.
아내는 "저를 용서하실 수는 없었습니까" 한다.
그러나 나는 한 번도 ‘용서’라는 것을 생각해 본 일은 없다.
왜?
‘간음 한 계집은 버리라’는 철칙에 의혹을 가지는 내가 아니다.
간음한 계집이면 나는 언제든지 곧 버린다.
다만 내가 한참 망설여 가며 생각한 것은 아내의 한 짓이 간음인가 아닌가 그것을 판정하는 것이었다.
불행히도 결론은 늘 ‘간음이다’ 였다.
나는 곧 아내를 버렸다.
그러나 내가 아내를 몹시 사랑하는 동안 나는 우습게도 아내를 변호하기까지 하였다.
‘될 수 있으면 그것이 간음은 아니라는 결론이 나도록’
나는 나 자신의 준엄 앞에 애걸하기까지 하였다.
악덕
용서한다는 것은 최대의 악덕이다.
간음한 계집을 용서하여 보아라.
한번 간음에 맛을 들인 계집은 두 번째도 세 번째도 간음하리라.
왜?
불의라는 것은 재물보다도 매력적인 것이기 때문에…….
계집은 두 번째 간음이 발각되었을 때 실로 첫 번째 보지 못하던 귀곡적(鬼哭的) 기법으로 용서를 빌리라.
번번이 이 귀곡적 기법은 그 묘를 극하여 가리라. 그것은 여자라는 동물 천혜의 본질이다.
어리석은 남편은 그때마다 새로운 감상(感傷)으로 간음한 아내를 용서하겠지.
이리하여 실로 남편의 일생이란 ‘이놈의 계집이 또 간음하지나 않을까’ 하고 전전긍긍하다가 그만두는 가엾이 허무한 탕진이리라.
내게서 버림을 받은 계집이 매춘부가 되었을 때 나는 차라리 그 계집에게 은화를 지불하고 다시 매춘할망정
간음한 계집을 용서하지도 버리지도 않는 잔인한 악덕은 범하지 말아야 한다고 나는 나 자신에게 타이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