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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재신채호전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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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재신채호전집






제1권 역사
朝鮮上古史
이만열|숙명여자대학교 명예교수

 『조선상고사(朝鮮上古史)』는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1890~1936)가 쓴 한국사 관련 책 가운데 대표적인 저술이다. 한말 일제강점기에 언론인·구국계몽운동가·독립운동가·역사연구자로서 활동한 그는 『조선상고사』를 비롯하여 『독사신론(讀史新論)』·『조선상고문화사(朝鮮上古文化史)』·『조선사연구초(朝鮮史硏究草)』 등의 저서와 많은 논술들을 남겼다.
  한말 구국언론활동을 펴던 단재(신채호)는 역사의식을 드높이는 글을 많이 썼다. ‘역사와 애국심의 관계’ 등의 논설에는 역사를 통해 애국심을 고양하려는 단재(신채호)의 생각이 잘 드러나고 있다. 그 무렵에 그는 『대한매일신보』에 『독사신론』을 발표하여 당대의 지식인들을 놀라게 했다. 1908년 8월 하순부터 그 해 12월 중순까지 『대한매일신보』에 연재된 『독사신론』은 종래 전통적으로 고수해 오던 한국사 인식에 혁명적인 변화를 가져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새로운 역사인식의 결과물이었다. 『독사신론』과 관련하여 의미 깊게 보아야 할 것은 『독사신론』을 통해 나타나기 시작한 그의 한국사 인식이, 그 뒤 상당한 수정 보완 작업을 거치긴 했지만, 『조선상고사』로 발전했다는 것이다(이만열, 『단재 신채호의 역사학 연구』, 207~218쪽 참고).
  단재(신채호)는 1910년 나라가 망한 후 언론구국활동과 독립운동에 매진하는 한편 독립운동의 한 방편으로서 틈틈이 국사연구도 계속했다. 1910년 4월 국외로 망명한 그는 청도회의를 거쳐 그 해 9월에는 러시아의 블라디보스톡에 도착, 『권업신문(勸業新聞)』을 통해 언론구국활동을 전개했다. 1913년 『권업신문』이 폐간되자 단재(신채호)는 상해에 거주하는 예관(睨觀) 신규식(申圭植)의 초청을 받아 만주를 거쳐 상해에 가서 1년간 체류했다. 1914년 대종교인 윤세복(尹世復)의 초청을 받은 단재(신채호)는 만주 환인현(桓仁縣)으로 가서 1년간 체류하며 동창(東昌)학교 국사교재로서 조선사를 집필하기도 했다. 이 때 그는 집안현 등에 남아있는 고구려 고분군을 답사하고 문헌의 부족을 실지답사를 통해 보완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피력했다.
  1915년 단재(신채호)는 북경으로 거처를 옮겨, 언론활동을 전개하는 한편 북경 근처의 사적답사와 조선사 연구에 힘을 기울였다. 아마도 이때에 그는 상당량의 원고를 남겼던 것으로 보인다. 다시 언급되겠지만, 1921년 이윤재가 북경의 단재(신채호)를 방문했을 때 수년 전부터 써 왔던 것이라면서 보여준 역사관련 원고는 이미 이 무렵에 1차적으로 정리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렇게 북경에 체류하면서 단재(신채호)는, 1917년 조카딸 향란(香蘭)의 혼사 문제로 잠깐 귀국한 적이 있으나, 3·1운동을 맞을 때까지 그는 북경에 체재했다. 3·1운동 직후 단재(신채호)는 상해로 가서 임시정부 운동에 참여했다. 그러나 통합임시정부 조직과정에서 이승만이 대통령으로 선임되는 것을 계기로 단재(신채호)는 임시정부를 떠나게 되었고, 임시정부 반대운동을 펼치게 되었다. 그는 1919년 10월 동지들과 함께 상해에서 창간한 『신대한(新大韓)』을 통해 임시정부를 비판하는 한편 임시정부 기관지인 『독립신문(獨立新聞)』과도 논쟁을 벌였다.
  1년 남짓 상해에 머물렀던 단재(신채호)는 1920년 4월 북경으로 옮겨 박자혜와 결혼, 한 때나마 단란한 가정생활을 맛보았다. 그 이듬해 1월에는 『천고(天鼓)』를 간행, 한국 독립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일본 제국주의의 야만성을 폭로했다. 3·1운동 후 옥고를 치르고 북경으로 ‘탈주’한 심훈(沈熏)은 그 때 마침 『천고』라는 잡지를 주간하는 단재(신채호)를 방문, “희미한 등하(燈下)에서 모필(毛筆)로 붉은 정간을 친 원고지에다가 철야집필”하면서 “한 구절 쓰고는 소리 높여 읊고 몇 줄 또 써 내려가다가는 붓을 멈추고 무릎을 치며 위연(喟然)히 탄식”하는 그를 목도했다고 술회했다(심훈,「단재와 우당」, 『개정판 단재 신채호전집 별집』, 1979, 410~416쪽).
  1922년 12월 김원봉의 요청으로 단재(신채호)는 상해에 내려가 유자명과 함께 그 이듬해 1월에 총 5장 6400여 자로 된, 의열단의 독립운동 이념과 방법을 이론화하기 위한 『조선혁명선언』을 집필했다. 그 무렵 단재(신채호)는 군사통일주비회와 1923년 1월 3일부터 개최된 국민대표회의에도 관여, 창조파의 맹장으로 활약했다. 그 해 8월 창조파가 블라디보스톡으로 옮겨갔으나 일본을 의식한 소련 정부의 방해로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이는 단재(신채호)가 이끈 창조파와, 국민대표회의의 실패를 의미했다. 실의와 좌절에 빠진 그는 1924년 3월부터 한 때 승려생활도 했다. 그러나 1924년 가을부터 그는 다시 국사연구를 재개하면서 북경대학 도서관을 이용하게 되었다. 
  『조선상고사』는 아마도 단재(신채호)가 북경에 체재하면서 집필한 것으로 보인다. 그가 북경에 그래도 안정적으로 체재하면서 집필할 수 있었던 시기는, 1915년부터 3·1운동이 일어나던 1919년까지 약 4년간과 1920년 4월부터 1922년 12월까지였고, 1924년 가을부터 그가 무정부운동에 적극 참여하는 기간까지도 국사연구에 매달릴 수 있는 시간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1921년에 북경에 체류하고 있던 단재(신채호)는 자신이 집필한 상당량의 국사 관련 원고뭉치를 갖고 있었다. 이 해 단재(신채호)가 자신을 방문한 이윤재에게 그 원고뭉치를 보여 주었다. 이윤재는 단재(신채호)와 북경 주변에 산재한 조선사 관련 고적과 자료에 대해 대화를 나누다가 단재(신채호)의 조선역사 저술에 관해서도 언급하게 되었는데 이 때 그 원고뭉치를 볼 수 있었다. 이윤재는 15년 후 단재(신채호)의 서거를 애도하면서 단재(신채호)와 나눈 대화를「북경시대의 단재」라는 글로 남겼다. 그 글에서 그는 당시 그 원고뭉치를 본 사실 외에 단재(신채호)의 입옥 후 그 원고뭉치의 행방을 암시하는 여운도 남겼다. 

  “‘선생은 조선역사(朝鮮歷史)를 하나 저술하시지 아니하시렵니까’
  ‘내가 수년 전부터 조금 써 둔 것이 있는데 아직 좀 덜된 것이 있습니다마는 쉬 끝내려고 합니다.’하며 원고 뭉치를 끄내어 보인다.
  이 원고는 모두 다섯 책으로 되었는데, 첫째 권은 『조선사통론(朝鮮史通論)』, 둘째 권은 『문화편』, 셋째 권은 『사상변천편』, 넷째 권은 『강역고(疆域考)』, 다섯째 권은 『인물고(人物考)』, 이밖에 또 부록이 있을 듯하다고 한다.
  ‘이것을 얼른 출판하도록 하십시다.’
  ‘아직 더 보수할 것이 있으니 다 끝난 다음에 하려고 합니다.’
  ‘이것을 수정하는 때이면 이왕이면 철자법(綴字法)까지 다 고쳐서 했으면 어떨까요.’
  ‘물론 좋지요. 그것을랑 선생이 맡아서 전부 고쳐 주시오.’
  ‘그런데 인쇄는 내지(內地)에 들여다가 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첫째 조선문(朝鮮文) 활자가 있으니 인쇄하기 편리한 것이요, 다음으로 해외의 출판물이 조선으로 들어가는 것은 취체(取締)가 심하니 조선 안에서 발행되어야 널리 보급될 것이 아닙니까.’
  ‘그것은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여기는 석판인쇄(石版印刷)가 연판인쇄(鉛版印刷)보다 값이 싸니 인쇄비가 훨씬 덜 들 것이요, 아무리 그네들의 취체가 심하다기로 선언서(宣言書)나 격문(檄文)이 아니요. 단순히 학술로 된 서적까지 그렇게 할 리가 있겠습니까.’
  나는 이 말에는 더 우기지 못하고 출판비는 힘닿는 데까지 내가 힘써 보겠다 하였다. 그리고 그 뒤에 출판비로써 불다(不多)의 금액을 주선하였던 바 여의(如意)하지 못하였던 것이다. 그 원고가 그 뒤에 어떻게 되었는지 알 수 없으며, 『중외일보(中外日報)』와 『조선일보(朝鮮日報)』 지상에 단재(신채호)의 조선사 논문이 가끔까끔 실리는 것이며, 단행본으로 된 『조선사연구초(朝鮮史硏究草)』가 그 원고의 일부가 아니었던가 의심한다.
  선생의 입옥후(入獄後)에도 그 장서 전부가 천진(天津) 모(某)씨에게 임치(任置)되어 있다 하니 그 원고도 아마 그 속에 있을 것같이 생각된다”(『개정판 단재신채호전집』 하, 480~ 482쪽).

  『개정판 단재신채호전집』 하의 편집자는 위 인용문 중 『중외일보(中外日報)』를 『시대일보(時代日報)』로, 『조선사연구초』를 『조선상고사』와 『조선상고문화사』로 그리고 ‘천진(天津) 모씨(某氏)’를 ‘박용태(朴龍泰)’로 주기(註記)했으나, 이윤재가 적시한 『조선사연구초』를 편집자가 『조선상고사』와 『조선상고문화사』로 바로잡는다고 한 것은 착오인 것 같이 보인다. 이 글을 쓸 당시(1936.4) 이윤재는 단행본 『조선사연구초』가 조선도서주식회사에서 1929년에 이미 출판되었다는 것을 알았고, 『조선사연구초』에 실려진 논문들은 자신이 북경에서 본 단재(신채호)의 원고뭉치 속에 포함된 것으로 이해했던 것이다. 그러나 편집자들은 북경의 그 원고뭉치가 뒷날 『조선상고사』와 『조선상고문화사』로 연재된 적이 있기 때문에 이윤재가 적시한 『조선사연구초』를 『조선상고사』와 『조선상고문화사』일 것이라고 추정하여 주기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윤재가 그 글을 쓸 당시에는 『조선사연구초』는 단행본으로 출판되어 있었으나 『조선상고사』와 『조선상고문화사』는 신문에 연재만 되었을 뿐 아직 단행본으로 출간되지는 않았다.
  단재(신채호)가 『조선상고사』를 쓴 시기는 그가 북경에 다소 안정적으로 체류하고 있었을 1915년~1919년의 약 4년간과 1920년 4월~1922년 12월까지였을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이윤재에게 원고뭉치를 보여주었던 시기가 1921년이니까 『조선상고사』를 쓴 시기는 1921년 이전이라고 봐야 한다. 이와 함께 『조선상고사』 ‘총론’의 집필 연대를 알게 해 주는 자료가 있다. 그것은 『조선상고사』 총론에, “거금(距今) 16년 전에 국치(國恥)에 발분하여 비로소 『동국통감』을 열독(閱讀)하면서, 사평체(史評體)에 가까운 『독사신론』을 지어 『대한매일신보』 지상에 발포”했다고 언급한 구절로서 ‘총론’을 쓰기 16년 전에 『독사신론』을 썼다고 함으로써 『독사신론』이 발표된 지 16년 후에 이 ‘총론’을 썼다는 것을 밝히고 있는 셈이다. 위의 인용문에서 ‘16년 전’이란 단어가 국치(1905년 을사늑약)를 수식하고 있는가, 아니면 ‘『독사신론』을 지어’를 수식하고 있는가 하는 데에 따라 이 책 총론의 집필연대가 달라질 수 있다. 필자도 한 때 ‘거금 16년 전’을 그 뒤에 나오는 ‘국치’라는 단어를 꾸민다고 보고 이 ‘총론’의 집필연대를 1921년으로 본 적이 있다. 그러나 지금에 와서 생각하니 ‘거금 16년 전’은 ‘『독사신론』을 지어’에 닿는 것으로 이해하게 되었다. 따라서 『조선상고사』 ‘총론’의 집필 연대는 1924년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여기까지 앞에서 논의한 것을 정리해 보자. 1921년 단재(신채호)가 이윤재에게 보여준 원고 뭉치 가운데 『조선상고사』가 있었다면, 1924년 이후에 집필했을 『조선상고사』의 ‘총론’은 거기에 들어 있을 수가 없다. ‘총론’ 부분을 제외한 『조선상고사』가 거기에 있었다면, 그것은 『조선상고사』의 ‘본문’에 해당되는 부분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단재(신채호)는 1921년 이전에 『조선상고사』의 본문을 먼저 써 놓고 뒤(1924년 이후)에 『조선상고사』의 ‘총론’을 썼던 것으로 이해할 수밖에 없다. 이 말은 그가 『조선상고사』의 본문에 해당하는 부문을 먼저 써 놓고 몇 년 뒤에 총론을 썼다는 것이다. 이것은 본문을 먼저 써 놓고 서론과 결론을 쓰는 일반 저술방식과도 상통하는 것이다.
  단재(신채호)가 ‘총론’을 쓴 시기와 관련하여 참고할 내용이 있다. 그것은 ‘총론’에 나타난 단재(신채호)의 역사이론과 관련된 것이다. ‘총론’에 나타난 단재(신채호)의 역사이론 중에는 그 내용이 양계초(梁啓超)의 『중국역사연구법』에 영향을 받은 듯한 것으로 보이는 부분이 있다. 그런데 양계초가 『중국역사연구법』을 공간한 것은 1922년이다. 따라서 『조선상고사』 ‘총론’에 나타난 단재(신채호)의 역사관이 양계초의 『중국역사연구법』의 영향을 받은 것이 확실하다면, 그 ‘총론’은 전부 혹은 부분적으로 1922년 『중국역사연구법』이 공간된 이후에 집필된 것으로 보는 것이 순리일 것이다.
  일제 강점기에 단재(신채호)의 한국사 연구업적이 본격적으로 국내에 소개된 것은 1925년 1월 3일부터 10월 16일까지 『동아일보』에「상고사 이두문 명사해석법」 등 뒷날 『조선사연구초』에 합편된 6편의 논문이 연재되면서부터다. 국내 신문에 연재하게 된 것은 당시 국내 지인들의 권유도 있었지만 원고료를 얻어서 어린 아들의 양육비에 보태기 위함이라고 했다. 연재된 후 홍명희(洪命熹) 등이 이 논문들을 단행본으로 출판하려고 했을 때, 단재(신채호)는「평양패수고」에 불만이 많아 수정하겠다고 하면서 출판을 지연시켰던 모양이다. 단재(신채호)는 이 무렵 홍명희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료도 부족되고 평일의 연구도 너무 조율(粗率)하든 것이 작구 자각됩니다. 더욱 전일에 부분적 논문이나마 경솔히 쓴 것이 후회됩니다”고 자신의 학문적인 업적을 불만스러워했다. 그러면서 단행본 간행을 ‘중지시킬 수 있으면 중지하는 것이 좋겠습니다’고 했다. 그러나 홍명희는 단재(신채호)에게 “불만을 참으라, 초하는 것을 중지하지 말라”고 하면서 홍석하(洪石下)를 통해 『조선사연구초』라는 제목으로 간행하였다(『조선사연구초』, 홍명희 서 참조). 『조선사연구초』는 홍명희 서문을 쓴(1926) 지 3년 후인 1929년 6월에 한성도서주식회사에서 정인보의 감수를 받아 출판하였다.
  『조선사연구초』가 간행된 시기는 국내에서 신간회 운동이 한참 진행되던 시기였고 국학운동의 동력도 시동을 걸고 있었다. 이 때 평소에 단재(신채호)를 흠모하고 있던 민세(民世) 안재홍(安在鴻)이 지인을 통해 단재(신채호)와 소통하여 그의 또 다른 원고를 입수, 연재하게 되었다. 그것이 이 책의 원명이라 할 『조선사(朝鮮史)』다. 민세는 자기보다 11세나 앞섰던 단재(신채호)를 중학에 다닐 때부터 지도층의 명사로 흠모하였고 서울의 동숙(同宿)하는 우사(寓舍)에서 만나 본 적이 있고 1913년에는 중국 상해에서도 다시 만나 잠시나마 동제사 활동을 같이 했다. 그런 인연으로 그가 조선일보사를 운영할 때에 『조선사』를 연재했고, 『조선사』 연재를 마감하는 바로 그 이튿날(10월 15일)부터 『조선상고문화사』를 연재를 시작했던 것이다. 『조선사』는 1931년 6월 10일부터 같은 해 10월 14일까지 『조선일보』 학예란에 무려 103회에 걸쳐 연재되었다. 『조선사』라고 한 것은 아마도 단재(신채호)가 조선통사를 계획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윤재가 북경에서 다섯책으로 된 원고뭉치를 보았을 때에도 첫째 권이 『조선사통론』이었다고 했다. 그러나 『조선일보』에 연재된 『조선사』는 백제의 부흥운동에 그치고 있다. 때문에 『조선일보』 연재 『조선사』가 해방 후 단행본으로 간행되었을 때에 『조선상고사』로 개제(改題)되었던 것이다.
  여기서 꼭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조선일보사가 단재(신채호)의 『조선사』를 연재하면서 편집상 가끔 착오를 일으켰다는 것이다. 그 대표적인 것이 연재 제목을 제 때에 바꾸지 않았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연재 제 54회(1931.8.12)부터 제 62회까지의 제목이다. 그 제목이 연재 제 53회(1931.8.11)의 중간에서 제8편「삼국 혈전(血戰)의 시(始)」로 바뀌었음에도 불구하고, 연재 62회까지의 연재 첫 머리의 제목은 계속 제7편「남방제국 대(對)고구려 공수동맹」이라는 제목으로 보이고 있다. 때문에 연재 제목만 보면 제 52회부터 제 62회까지 [제7편]이 계속되는 것처럼 보이다가 제 63회(1931.8.22)에 이르러 갑자기 제9편「고구려 대수전역(對隋戰役)」으로 바뀌고 있다. 그러나 사실은 연재 제 53회 중간부터 제 62회 초까지 제8편「삼국혈전의 시」로 되어 있다.
  또 있다. 연재 내용이 중복된 것도 있다. 가령 연재 82회와 83회의 모두(冒頭)에 게재한 11개 줄이 모두 같은 내용이다. 이것도 편집상의 착오 때문이다. 아마도 그 다음날 연재 첫 머리의 것을 전날의 것으로 잘못 삽입한 것으로 보인다. 편집진도 그것을 발견하고 그 이튿날(83회) 연재 끝에 사고(社告)로 “작일(昨日) 본란(本欄) 모두(冒頭) 11행은 금일(今日) 모두(冒頭)의 것이 오식(誤植)되었삽기 금일 재식(再植)하오며 이를 심사(深謝)함”이라고 ‘정정訂正’사고를 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조선일보』 연재 중에는 저자인 단재(신채호)의 실수라고는 볼 수 없는 오류들이 제법 눈에 많이 뜨인다. 가령 고구려의 살수전역을 다루고 있는 연재 64회에는 수나라의 장군 우문술(宇文述)과 우중문(于仲文)의 좌(우)익위대장군이라는 직책이 같은 연재에서 달리 표기되어 나오기 때문에 독자들에게 혼선을 주고 있다. 이 점은 1948년 판 『조선상고사』(269쪽)에서도 우문술 우중문은 각각 좌익위대장군으로도 나오고 우익위대장군으로도 나오고 있다. 이 또한 편집 책임자나 인쇄공들의 부주의로 인한 오식이라고 밖에는 볼 수 없다. 아마 이런 실수들을 저자인 단재(신채호)가 직접 목격했더라면 당장 연재를 중지시켰을 것이다. 중국에서 자신의 원고에 글자 하나 그것도 어조사 하나를 고쳤다 하여 당시 꽤 인기를 끌던 투고를 중지시켰던 단재(신채호)이기 때문이다.
  『조선일보』에 자기의 저술이 연재되고 있을 때 단재(신채호)는 자신의 연구가 미흡하다는 것을 들어 연재를 중지시켜 달라고 요청했다. 이는 『동아일보』에 연재된 논문을 『조선사연구초』로 합편하여 단행본으로 간행하려 했을 때에도 몇 번이나 홍명희에게 중지시켜 달라고 요청했던 것과 상통한다. 『조선일보』 연재를 중지시켜 달라고 한 것은 여순감옥에 수감중인 단재(신채호)를 면회하러 간 『조선일보』 신영우(申榮雨)에게 요청한 것이며, 안재홍도 뒷날 보고를 받았다. 신영우가 단재(신채호)를 옥중 면회한 것은 『조선일보』에 『조선사』 연재가 끝나고 『조선상고문화사』가 연재되고 있던 1931년 11월 16일이다. 신영우가, “선생이 오랫동안 노력하여 저작한 역사가 『조선일보』 지상에 매일 계속 발표됨을 아십니까”라고 했을 때 단재(신채호)는 “네. 알기는 알았습니다마는 그 발표를 중지시켜 주었으면 좋겠습니다. 그것은 내가 지금까지 비록 큰 노력을 하여서 지은 것이라 하나, 그것이 단정적 연구가 되어서 도저히 자신이 없고, 완벽된 것이라고는 믿지 아니합니다. 돌아가시면 그 발표를 곧 중지시켜 주십시오. 만일 내가 10년의 고역을 무사히 마치고 나가게 된다면 다시 정정하여 발표하고자 합니다”라고 했다. 신영우는 다시 “그와 같이 겸손하여 말씀하지마는 그것이 한 번 발표되자 조선에서는 큰 환영을 받고 있읍니다”고 하자, 단재(신채호)는 “내가 그것을 지을 때에는 결코 그와 같이 속히 발표하려고 한 것이 아니고 좀 더 깊이 연구하여 내가 자신이 생기기 전에는 발표하고자 아니할 것이 중도에 이러한 처지에 당하여 연구가 중단되었으나, 다행히 건강한 몸으로 다시 지상에 나가게 된다면 다시 계속 연구하여 발표하고자 한 것입니다.……”(『개정판 단재신채호전집』 하, 442~443쪽)고 말했다. 단재(신채호)의 이같은 언급은 민세도 들었던 것 같다. 『조선일보』에 연재했던 『조선사』가 해방 후 『조선상고사』로 개제하여 단행본으로 간행될 때 민세는 그 책의 서문에서, 단재(신채호)가 그 원고를 두고 ‘미정고(未定稿)’이며 ‘퇴고(推敲)를 가할 여지가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는 것을 언급했다. 그렇지만 민세는 『조선사』가 ‘조선 사단(史壇)과 학계의 하나의 틀림없는 중보(重寶)’임을 확신하고 연재를 지속시켰던 것이다. 이는 식민지하에서 실의와 좌절을 곱씹고 있던 동족에게 단재(신채호)의 『조선사』를 통해 민족적인 긍지와 용기를 불어넣어 주고자 했기 때문이다.
  여기서 신영우가 단재(신채호)를 면회한 시기는 『조선상고문화사』가 연재되고 있을 때였지만 앞뒤 문맥으로 보아 단재(신채호)가 중지시켜 달라고 한 것이 당시 연재되고 있던 『조선상고문화사』만을 의미했던 것 같지는 않다. 단재(신채호)는 감옥에서 그 연재가 어떻게 진행되고 있었는지 정확하게 알고 있지 못했다. 때문에 중지시켜 달라는 단재(신채호)의 요청이 꼭 『조선상고문화사』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민세도 단재(신채호)의 중지 요청에 『조선사』가 포함되었다고 이해하고 있었다.
  일제 강점기에 『조선일보』에 연재되었던 『조선사』가 다시 소개된 것은 해방 직후다. 1946년 4월 김송규(金松圭)를 발행인으로 한 서울 광한서림(廣韓書林)이 『조선사론(朝鮮史論)』 제 1집-「단재 신채호선생 유고」를 간행했는데, 이는 『조선사』의 제 1편인 총론을 따로 떼어서 단행본(4.6판, 61쪽)으로 묶은 것이다. 필자 미상의 ‘머리말’에는 “선생의 탁월하신 인격, 고매하신 식견, 홍박심원(弘博深遠)하신 학식, 표현할 수 없이 열렬하신 애국정신을 우리는 배우고 본받아 건국의 원동력을 얻읍시다. 이 유고는 우리 조선사를 바로잡는 가장 정확한 역사학론인 만큼 특히 『조선사』를 논술저작하며 일반이나 생도에게 가라치며 또 연구하시는 이들은 꼭 재독삼독(再讀三讀)할 필요가 있다고 믿습니다”라고 써 놓았다. 해방 직후 국사책이 극히 적은 상황에서 단재(신채호)의 저서는 이렇게 소개되고 있었다.
  그 뒤 1948년 10월 다시 『조선사』는 『조선상고사(朝鮮上古史)』라는 단행본(4.6판, 372쪽)으로 종로서원(鐘路書院)에서 간행하였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조선일보』에 연재된 『조선사』가 백제의 부흥운동에서 끝나고 있기 때문에 통사로서의 명칭인 『조선사』보다 『조선상고사』라는 이름이 더 적절하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안재홍은「신 단재의 조선사 권두에 적음」이라는 서문에서, 단재(신채호)를 두고 한말 천재적 사학자요 열렬한 독립운동자라고 하면서, “그 천성준열天(性峻烈)함과 안식(眼識)의 예리함은 시속(時俗)의 배(輩) 따를 수 없는 바이었고 사상의 고매함은 스스로 일두지(一頭地)를 벗어나든 바이니 이에 간행된 조선사는 그 유저(遺著) 중에 가장 이채(異彩)나는 바일 것”이라고 평가했다. 민세는 또 “단재(신채호)의 일념은 첫째 조국의 씩씩한 재건이었고 둘째는 그것이 미처 못될진대 조국의 민족사를 똑바로 써서 시들지 않는 민족정기가 두고두고 그 자유 독립을 꿰뚫는 날을 만들어 기다리게 하자 함이 있었다”고 하여 단재(신채호)의 역사 연구의 목적과 의미를 분명히 이해하고 있었다. 이런 확신과 의미 때문에 안재홍은 조국의 씩씩한 재건을 위해서 단재(신채호)의 역사학이 밑거름이 된다고 보았다. 정부가 수립될 즈음에 『조선상고사』가 간행된 것은 바로 이런 의미를 갖고 있다.
  이승만 정권의 등장과 한국 전쟁은 『조선상고사』의 기반이라 할 민족주의를 압살하고 있었다. 해방 후 그렇게 부르짖던 민족, 민족주의는 설 자리를 잃게 되었다. 그런 속에서 민족주의 사학자가 주목될 수는 없었다. 4·19혁명은 민주주의와 함께 민족주의도 부활시켜 갔다. 민족주의 역사학이 새롭게 주목되면서 단재(신채호)와 백암 박은식의 저작이 소개되었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1972년 단재신채호전집편찬위원회가 『단재신채호전집(丹齋申采浩全集)』(전 3권, 을유문화사)을 간행하면서 제 1권 조선사연구로 『조선상고사』를 간행했다. 이어서 1977년에는 단재신채호선생기념사업회와 단재신채호전집간행위원회가 『개정판 단재신채호전집』(전 4권, 형설출판사)을 간행하여 학계와 일반에게 크게 보급하게 되었다.
  전집의 간행으로 『조선상고사』를 접하기가 쉬워지자 이 책의 번역서와 주석서가 나오기 시작했다. 번역서는 일본에서 처음 나왔다. 경응의숙(慶應義塾) 외국어학교(外國語學校) 조선어과(朝鮮語科)를 졸업한 전직 국민신보사(國民新報社)(현 동경신문) 기자였던 시부돈자(矢部敦子)가 『조선상고사(朝鮮上古史)』(綠蔭書房, 1983)를 펴냈는데, 미촌수수(梶村秀樹)·영목정민(鈴木靖民)이 감수하고 미촌수수(梶村秀樹)가 『신채호(申采浩)와 조선상고사(朝鮮上古史)』라는 제목의 해제를 붙였다.
  『단재신채호전집』이 간행된 후 얼마 안 있어 『조선상고사』에 대한 주석이 시도되었다. 1974년 1월 8일부터 1975년 5월 22일까지 당시 서울신문사에서 간행하던 주간지 『서울평론』에서 제 9호부터 79호까지 총 56회에 걸쳐 이만열이 『주석 조선상고사』를 연재했고 뒤에 이를 두 권으로 간행했다. 단행본 주석서로는 진경환(陳鏡煥)이 인물연구소에서 간행한 『조선상고사』(1982)가 처음 나왔는데, 권두에 유석현(劉錫鉉)의 『전민족 의식지향의 지표』라는 제목의 추천사가 있다. 앞서 언급한 서울평론 연재 이만열의 『주석 조선상고사』는 수정 보완을 거쳐 『주역(註釋) 조선상고사(朝鮮上古史) 상, 하』(형설출판사, 1983)로 단재신채호선생기념사업회에서 간행하게 되었다. 이만열은 그 주석에서 해제(상, pp. 7-14)도 쓰고 본론 주석에 앞서서「상고사 이해를 위한 주석자의 말」(상, pp. 95-102) 및 『단재 신채호의 고대사인식 시고』(하, pp. 539-576)라는 논문도 붙여 조선상고사에 대한 이해를 도우려 했다. 주석자의 이런 해설과 논문을 읽으면 단재(신채호)의 『조선상고사』의 구조와 내용을 이해하는 데에 도움이 될 것이다. 그렇지만 이 주석서는 제 2편 수두시대와 제 3편 삼조선 분립시대 등에 원저자가 인용한 중국 고전의 출처를 제대로 찾지 못해 주석서로의 한계를 드러내었다. 이 점 아쉽게 생각한다. 그러나 『주석 조선상고사』상, 하는 한국측 자료의 전거를 충실히 찾았고, 원저의 원전 인용의 오류를 바로잡은 부분이 많다.
  『조선일보』에 『조선사』라는 이름으로 연재했지만, 『조선사』라는 이름이 주는 대로 ‘조선통사’로서의 내용을 충분히 담아내지 못했다. 원래 통사 원고가 그 이상은 없었는지, 아니면 단재(신채호)의 요청대로 연재를 중단했기 그렇게 되었는지 알 수 없다. 이 책은, 총론에서 우리나라 역사학을 개관하고 자신의 역사이론을 전개하는 것을 제외하면, 단군시대에서 시작하여 삼국시대 말기 백제부흥운동에서 끝나고 있다. 이 책의 맨 끝 제 11편 제 7장은「부여복신(扶餘福信)의 사(死)와 고구려(高句麗)의 내란(內亂)」이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이 제 7장의 3개 절이 1. 자진(自進)의 통관(通款)과 피주(被誅), 2. 부여복신(扶餘福信)의 피살(被殺), 3. 복신(福信) 사후(死後) 풍왕(豊王)의 망(亡)으로 되어 있어서 제 7장의 전반 제목인 ‘부여복신의 사’ 부분은 드러나 있으나, 후반 제목인 ‘고구려의 내란’ 부분은 서술되어 있지 않다. 더 규명해 봐야 할 과제이긴 해도, 제 7장의 제목에 상응하는 후반 부분을 서술하지 못하고 연재를 끝낸 것을 보면 원고가 없었던 것 같지는 않다. 그러나 원래 통사였던 것으로 보이는 『조선사』가 백제부흥운동에서 중단되었기 때문에 해방 후 그 연재물을 단행본으로 묶을 때 『조선상고사』라는 이름으로 간행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 책은 저자의 한국사학사 정리 및 자신의 역사이론을 전개하는 제 1편의 총론과, 삼국시대 말까지의 한국상고사의 흐름을 서술한 나머지 7개편 등 총 8편으로 조직되어 있다. 단재(신채호)가 정리한 역사이론과 한국상고사의 흐름에 대해서는 이만열의 『주석 조선상고사』에 게재된 해제와 논문에서 이미 자세히 밝힌 바 있으므로 여기서 다시 되풀이하지 않겠다.
  먼저 제 1편 총론에서 단재(신채호)는 역사를 “아와 비아의 투쟁……의 기록”이라는 것으로 정리했다. 투쟁을 강조하고 있다는 점에서 역사발전의 원동력을 모순과 상극 관계에서 파악하려 했던 헤겔의 변증법적 발전을 연상케 한다. 그는 ‘아와 비아’의 초점을 민족 문제에서 찾으려 했다. 우리 민족을 아의 위치에 두고 비아인 다른 민족과의 모순과 투쟁을 서술하는 데에 역점을 두려고 했다. 여기서 단재(신채호)가 외민족과의 투쟁인 대외항쟁을 역사서술에서 강조한 이유를 읽을 수 있다. 단재(신채호)가 대외항쟁에 혁혁한 공을 세운 영웅을 내세운 것이나, 대중국 투쟁에 가장 적극적이었던 고구려를 내세우려 한 것도 이 때문이다.
  단재(신채호)는 총론에서 신지(神誌)에서부터 시작하여 고구려 백제 신라와 고려를 거쳐 조선조에 이르기까지의 우리나라 사학사를 일정하게 정리했다. 종래 역사학은 삼국시대의 역사학과 김부식의 『삼국사기』에서 시작되어 조선조로 전승되어 왔다고 보았다. 단재(신채호)는 이와는 달리 단군 때의 신지의 역사가 고기류와 『서곽잡록(西郭雜錄)』·『해동잡록(海東雜錄)』 등으로 면면되어 왔다고 강조했다. 단재(신채호)는 또 그가 유가사학에서 남긴 자료를 통해 단군 이래 면면해 왔다는 낭가(郎家)사상의 자주적인 측면을 가함으로써, 우리나라의 문헌사학으로서의 유가사학을 비유가사학과 결합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 종래 유가사학에서 보였던 비자주적인 한국사가 단재(신채호)에 의해 자주독립적인 역사학으로 발전되어 갔던 것이다.
  단재(신채호)의 한국사학사 정리에서 주목되는 것은 실학시대의 역사학을 비판적으로 수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안정복을 비롯하여 한백겸·유득공·정약용 등의 역사학을 비판하면서 그 장점을 취하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그의 한국상고사 인식에는 조선 후기 이종휘(李鍾徽)의 역사학이 짙게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점이 눈에 띈다. 총론은 이렇게 단재(신채호) 나름대로의 관점을 가지고 우리나라 사학사를 정리했던 것이다.
  총론에서는 또 역사방법론을 나름대로 제시하면서, 사료로서의 고비(古碑)의 참조, 논증에서 중요시해야 할 각 자료간의 호증(互證), 한국사 사료에 보이는 명사의 해석문제, 위서(僞書)의 판별(辦別) 그리고 만몽(滿蒙) 언어와 풍속에 대한 연구 등을 강조했다. 특히 그는 실증적인 역사연구방법론으로서, 인과관계를 찾기 위한 계통(系統)론, 자료의 종합적인 판단을 위한 회통(會通)론, 선입견을 제거하라는 심습(心習)론, 자료를 기록할 당시의 역사적 원형을 찾는 본색(本色)론 등을 제시한 후, 이러한 논증 방법론을 구사하여 사회와 개인, 시대와 공간의 균형성을 가지고 역사연구를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제 2편에서부터 『조선상고사』는 말 그대로 조선의 상고사를 다루고 있다. 단재(신채호)는 단군시대부터 시작되는 한국의 역사를 자신의 독특한 관점으로 정리하고 있다. 우선 우리나라 상고사는 그 인식체계에서부터 일정하게 정리되지 않았다. 『삼국사기』는 삼국 이전의 역사에 대해서 거의 언급하지 않았다. 그러나 『삼국유사』에 와서는 삼국 이전의 역사를 단군 기자 위만 등의 고조선을 내세우고 무체계적으로 나열했다. 그 뒤 조선조 시대에 간행된 『동국통감』 등의 사서에 이르러서 비로소 한국사를 단군→기자→위만(4군2부)으로 체계화하고 삼한은 위만에 부속시켰다. 임진왜란을 겪고 조선 후기 정통론이 등장하면서 상고사의 체계는 단군→기자→마(삼)한으로 정리하고 위만은 참위(僣僞)로 정리되었다. 단재(신채호)는 자기 시대까지 전승되고 있는 정통론을 점차 지양하면서 자신의 견해를 내세우게 되었다.
  단재(신채호)는 그 이전까지 존재했던 상고사의 두 체계(단군→기자→위만(4군2부)과 단군→기자→마(삼)한)에 동의하지 않았다. 사학사적으로 본다면, 단재(신채호)는 단군이 기자로만 계승되지 않고 처음부터 부여·고구려 계통과 기자 계통의 두 계통으로 계승된다는 것과, 부여·고구려 계통은 계속 삼국시대까지 발전하게 되지만, 기자 계통은 삼한과 위만으로 두 계통으로 각각 계승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바로 조선 후기 이종휘의 견해와 거의 비슷한 것이다. 단재(신채호)가 단군의 정통이 부여·고구려로 계승된다고 본 데에는 이유가 있다. 그것은 다음에서 간단히 언급될 것이다.
  단재(신채호)는 『조선상고사』에서 상고사를 신수두시대, 삼조선분립시대, 열국쟁웅시대로 시대구분하고 신수두시대의 대단군의 정통이 부여 고구려로 전승된다고 보았다. 그는 우선 상고사의 각 시대에 대해 설명하고 사료로써 이를 뒷받침하려고 노력했다. 그는 신수두시대를 대단군왕검의 시대라 하고 중국 오제(五帝) 말의 요(堯)·순(舜) 및 하(夏)·은(殷)의 시기에 해당한다고 보았다. 단군이 지나의 수재를 구하기 위하여 그의 아들 부루(夫婁)를 창해(滄海)사자로 삼아 도산회(塗山會)에 파견한 것이 이 시기였다고 보고 있다. 그 뒤 대단군왕검 중심의 단군조는 신조선, 불조선, 말조선의 삼조선으로 분열되었는데 중국의 전국시대에 해당된다는 것이다. 이어서 삼조선은 대한족(對漢族)격전시대에 해당하는 열국쟁웅시대에 이르러 삼한을 성립시키게 된다는 것이다. 단재(신채호)가 구상했던 한국상고사 체계도는 다음 [그림]과 같이 정리될 수 있다.

  丹齋申采浩(단재 신채호)의 韓國上古史 體系圖(한국상고사 체계도) 


  이 시기와 관련하여 단재(신채호)가 주장하는 몇 가지가 우리의 주목을 끈다. 우선 그는 삼한의 성립과 관련하여 삼조선·삼한설을 주장하는데 이것은 곧 전삼한·후삼한이 존재했다는 전후삼한설로 된다. 전후 삼한설을 주장하는 과정에서 그의 역사연구방법론의 하나인 지명이동설이 나오게 되었다. 단재(신채호)는 전삼한에서 후삼한으로 오는 과정은 민족이 이동하게 되는 시기와 일치한다고 보는데, 이 때 이동하는 이들이 자기의 옛 지명을 그대로 옮겨 왔다는 것이다. 또 단재(신채호)는 열국쟁웅시대 즉 대한족(對漢族)격전시대를 B.C. 190년 전후의 수십년으로 보고 그 후기에 와서 한(漢)과 고구려 사이에 9년 전쟁이 있었다는 것이다. 9년 전쟁이란 28만구를 거느린 남여(南閭)가 한에 투항하자 한 무제가 그곳에 창해군을 설치했다가 9년 만에 철폐한 사건과 관련이 있는 것인데, 이렇게 철폐된 것이 바로 고구려의 투쟁에 의한 것으로 보았다. 이 싸움의 고구려측 영웅이 대무신왕이라는 것이다(『조선상고사』 - 『개정판 단재신채호전집』 상, 134쪽).
  여기서 대무신왕이 창해군 철폐(B.C. 128)에 관여한 존재라면 삼국사기에 나타난 대무신왕의 재위연대(A.D. 18~44)와는 150년~170년간 어긋난다. 여기서 단재(신채호)는 고구려연대삭감설을 주장하게 되었다. 이와 관련, 단재(신채호)는 28왕 705년간 계속되었다는 고구려의 연조(年祚)에 삭감이 있었다고 주장하기 위해 몇 개의 다른 증거들을 제시하고 있다. 고구려가 멸망할 때에 당 고종이 가언충(賈言忠)으로부터 들었다는 고구려비기의 고구려 9백년설, 문무왕이 안승(安勝)에게 일렀다는 고구려 8백년설, 그리고 광개토대왕비문을 들어 고구려의 연조가 삭감되었다고 주장했다(『조선상고사』 - 『개정판 단재신채호전집』 상, 111~112쪽).
  단재(신채호)는 종래 중국이 고조선을 치고 그곳에 한사군을 설치했다는 주장에 대해서 그것은 지도상에 그은 계획에 불과하거나 아니면 한반도 밖에 한사군을 설치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한사군을 두고 “토상(土上)에 그은 것이 아니요, 지상(紙上)에 그린 일종의 가정(假定)”이라고 했다. 일본인들이 한사군의 한반도 내 설치를 주장하기 위해 평양 부근에서 낙랑유물을 발굴했다는 것을 두고 단재(신채호)는, “이 따위 기명(器皿)은 혹 남낙랑(南樂浪)이 한(漢)과 교통할 때에 수입한 기명이거나 그렇지 않으면 고구려가 한을 전승할 때에 부획(俘獲)한 기명이 될 것이요, 이로써 금今 대동강 연안이 낙랑군치임을 단언함은 불가하니라”(『조선상고사』 - 『개정판 단재신채호전집』 상, 141쪽)고 했다. 인용문에서 남낙랑(南樂浪)이라 함은 삼국사기에 보이는, 최리(崔理)를 최후의 왕으로 한 낙랑국을 일컫는 것으로 단재(신채호)는 이를 한사군의 낙랑군과 구분하여 남낙랑이라고 불렀다. 단재(신채호)는 한 무제가 고조선을 멸망시키고 설치했다는 그 낙랑이 평양 주변에 있을 수 없었다는 이유의 하나로 그 지역에 최리의 낙랑국이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와 같이 몇 가지 이유를 들어 단재(신채호)는 한사군의 실재를 인정하지 않았거나 실재했다면 한반도 밖에 있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한국 상고사의 주체성을 강하게 주장했던 단재(신채호)사학의 한 측면을 여기서도 엿볼 수 있는 것이다.
  『조선상고사』에서 주장하는 가장 중요한 역사인식체계의 하나는 대단군조선의 역사가 부여·고구려로 계승된다는 것이다. 이는 그가 『독사신론』에서 부여·고구려 주족론을 부르짖은 것과 맥락을 같이하는 것이며, 『조선상고문화사』에서 중국의 양자강과 회하(淮河) 사이에 단군 부여족의 식민지가 형성되었다는 주장과도 상통하는 것이다. 단재(신채호)는 ‘아와 비아의 투쟁’으로서의 역사이론을 내세우면서 우리 민족의 대외경쟁력을 강조함으로써 민족적 주체성을 주장했다. 그것을 가장 두드러지게 드러낸 나라가 바로 고구려라는 것이다. 때문에 그는 신라의 삼국통일을 인정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그것을 김유신의 ‘음모’라고 폄론하였다(『조선상고사』 - 『개정판 단재신채호전집』 상, 329~337쪽).
  단재(신채호)의 고대사 인식에서 또 하나 주목할 것은 고구려의 연조(年祚)가 삭감되었다는 것과 그 대안으로 “고구려 유국(有國) 9백년설”을 주장했다는 것이다. 고구려의 존속기간을 7백여 년(BC 37~AD 668)으로 잡고 있는 『삼국사기』도 800년설 혹은 900년설을 소개하고 있다. ‘고구려 유국 9백년설’은 그 뒤 실학시대의 『해동역사』를 거쳐 단재(신채호)가 본격화했고 『조선상고사』에서는 아예 고구려의 연조가 9백년이라고 썼다. 단재(신채호)는 연개소문의 ‘혁명’을 소개하면서 “그런즉 연개소문을 고구려 9백년간의 장상대신들뿐 아니라 곳 고구려 9백년간에 제왕도 가지지 못한 권력을 가진 1인이었다.”(『조선상고사』 - 『개정판 단채신채호전집』 상, 290쪽)고 했다. 오늘날 고구려의 연조가 9백년이라고 하는 주장이 남북 역사학계에서 나타나고 있는 바, 이를 선구적으로 주장한 근대사학자는 바로 단재(신채호)였다.
  단재(신채호)의 상고사 인식 가운데 또 주목할 만한 것은 그가 한국 상고사의 영역을 확대하고 있다는 것이다. 단재(신채호)는 종래 김부식 이하 한국의 유가적인 역사가들과 일본의 식민주의사가들이 내세운 한반도 중심의 한국사 역사무대에 대해 동의하지 않았다. 이들은 한국사가 본격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한 시기를 삼국시대로 보았기 때문에 그 활동무대를 한반도 중심으로 보려고 했다. 그러나 단재(신채호)는 한민족이 본격적으로 활동한 시기를 삼국시기로 보지 않고 삼국 이전의 상고사의 시기로 보았다. 따라서 한반도는 물론이고 만주와 중국의 동부 지역(산동성·안휘성 등)까지를 단군 부여족의 활동무대로 보았다. 특히 단재(신채호)는 『조선상고사』에서는 중국의 동부지역이 불리지국이라는 단군 부여족의 식민 지역 정도로 서술하고 있지만(『조선상고사』 - 『개정판 단재신채호전집』 상, 87~88쪽), 『조선상고문화사』에서는 중국인 장화(張華)의 박물지(博物志)를 인용하여 동이계통의 서언왕(徐偃王)의 정복활동을 자세히 소개하고 있다.
  이렇게 단군 부여족의 중국 진출을 강조한 단재(신채호)는 백제·신라의 해외경략설을 소개하고 있다. 즉 백제의 요서경략설과 신라의 일을 주장했다. 학계에서는 동빈 김상기 박사가 가장 먼저 백제의 요서경략설을 소개한 것처럼 이해되고 있으나 그 전에 단재(신채호)와 위당 정인보가 소개한 적이 있었다. 단재(신채호)는 『조선상고사』에서 근구수왕의 영웅적 활동을 소개하면서 백제의 해외경략을 소개하고 있다(『조선상고사』 - 『개정판 단재신채호전집』 상, 194~196쪽). 물론 이것은 중국의 사서(『양서』·『송서』·『자치통감』 등)에 보이는 자료를 근거로 소개하고 있지만, 그가 자료를 광범위하게 섭렵하면서도 비범한 내용을 놓치지 않는 기민성이 있었기 때문에 이런 발견이 가능했던 것이다. 또 그는 백제·신라의 일본진출설도 소개하고 있다. 이 점은 『조선상고사』 전편에 흐르는 고구려의 대외경략 뿐 아니라 백제·신라의 대외경략도 일정하게 소개하여 한국 상고사의 주체적인 모습을 드러내려 했다. 이것은 곧 한국사의 주체적인 웅혼한 모습을 독립의지로써 확인해 가려는, 말하자면 자주 의지의 표현이라고도 할 것이다. 독립운동이 일제의 강점을 극복하는 방안이라면, 단재(신채호)의 역사 연구는 일제의 식민주의 사학을 극복하고 역사의 자주독립성을 확립해 가려는 의지의 표현이었으며 그 열매의 하나가 『조선상고사』로 나타났다.
  지금까지 『조선상고사』의 집필 과정과 세상에 알려지게 된 경위 및 그 내용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일제강점기, 안정복의 『동사강목』만을 달랑 들고 망명길에 올랐던 단재(신채호), 그는 자료의 부족과 연구 환경의 열악함 속에서도, 많은 애국지사들이 그랬듯이, 조국의 독립과 재건을 목표로 역사 연구에 임했다.
  단재(신채호)는 독립운동을 하는 심정으로 역사 연구에 임했다. 때문에 그가 스스로 “역사란 역사를 위하여 역사를 지으란 것이요, 역사 이외에 무슨 딴 목적을 위하여 지으란 것이 아니요, 상언하자면 객관적으로 사회의 유동상태와 거기서 발생한 사실을 그대로 적은 것이 역사요, 저작자의 목적을 따라 그 사실을 좌우하거나 첨언 혹 변개하라는 것이 아니”(『조선상고사』 - 『개정판 단재신채호전집』 상, 35쪽)라고 역사 연구의 과학화를 주장하였지만, 그의 주장대로 실천되어졌는가는 의문이다. 역사 연구마저 독립운동의 방편으로 삼지 않을 수 없었던 상황에서는 그 연구가 민족적 편파성 내지는 이념적 교조성을 띄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다만 얼마나 목적 위주의 역사연구를 최소화하고 사료에 입각하여 최대한 객관성과 균형성을 유지하느냐가 문제였을 것이다.
  『조선상고사』는 단재(신채호)가 총론에서 언급한 역사과학화의 의지에도 불구하고 지금의 연구지형에서 본다면 수긍할 수 없는 대목들이 없지 않다. 이런 점은 주로 주체성의 지나친 강조와 민족의식의 과잉투영을 통해 나타난다. 이러한 과잉성이, 그의 또 다른 저서 『조선상고문화사』에서보다는 대종교적인 이념이 훨씬 덜 침윤되었거나 혹은 탈색된 것이긴 하지만, ‘신수두’니 ‘신조선’·‘불조선’·‘말조선’이니 하는 생소한 용어를 사용토록 몰아간 것 같은데, 그런 상황에서 한국 상고사의 체계나 대외관계를 제대로 밝힐 수 있었을까 하는 의구심을 갖게 한다. 또 그가 『조선상고사』에서 가끔 민중 이야기를 내세운 대목도, 어색한 삽입구가 들어 있는 문장마냥, 정제된 이론을 바탕으로 하여 정리된 것도 아니어서 이념적 과잉만 확인할 수 있을 뿐 설득력을 얻기 어렵다.
  문제는 또 있다. 『조선상고사』를 포함한 단재(신채호)의 여러 연구에서 보이는 사료 검증의 문제다. 그는 『천부경(天符經)』이니 『삼일신고(三一神誥)』를 두고 위서(僞書)라고 분명히 언급하였고(『조선상고사』 - 『개정판 단재신채호전집』 상, 55쪽), 『단기고사(檀奇古史)』는 발해 대야발이 쓴 저서라고 인식했지만 연구에서 구체적으로 인용한 적은 없다. 그러나 그가 자주 인용한 『서곽잡록』과 『해상잡록』은 물론이고 『갓쉰동전』·『규염객전(虯髥客傳)』 등 일부 사료들이 엄격한 사료비판을 거쳐 활용했는지는 계속 추적해야 한다. 그가 망명객의 신세로서 제대로 자료를 구할 수 있는 환경이 아니었다 하는 이유만으로 그의 이러한 자료 활용 태도를 묵인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거듭 말하거니와 이런 문제에 대해서도 그 자신이 언급한 엄격한 사료비판의 잣대를 들이대야 한다고 본다. 더구나 해방된 나라에서 그가 주장한 역사의 과학화를 더 강화해야 할 시점에서는 더욱 그렇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렇게 보면 『조선상고사』는 저자 자신이 주장한 역사학 이론을 가지고 보거나 현재의 역사학 연구지형에서 관찰하더라도 분명히 많은 문제점을 갖고 있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후학들은 그런 한계를 인식하고 새로운 시각을 가지고 그가 제기했던 역사학의 과제를 창조적으로 풀어가야 할 책임을 안고 있다고 본다. 다행스런 것은 단재(신채호)의 자주적인 역사학이 해방 후 남북에서 드러내 놓지는 않은 채 일정하게 수용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앞으로 통일 시대에 한국의 남북 사학이 그의 역사학을 통해 다시 만날 수 있는 가능성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런 점에서도 『조선상고사』가 갖는 역사적 의의는 크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조선상고사』는 앞서 언급한 몇 가지 한계에도 불구하고, 저술 당시 한편에서는 전통적인 역사학이 과학적 자주적 역사인식에 걸림돌이 되어 있었고 또 한편에서는 일제강점의 시대적 산물인 식민주의 사학이 횡행하던 시기였음을 감안한다면, 근대 민족주의 사학 이론을 토대로 자주적이고 체계적인 민족사를 개척, 시도한 몇 안 되는 업적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조선상고사』는 한국의 근대 민족주의 사학이 세운 하나의 기념비적 업적이다. 그 책이 한 시대에서 보여주었던 그 독보적 위치는 한국사학사에서 일관되게 유지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단재신채호전집』 제 1권에 수록하는 『조선상고사』는 『조선일보』 연재본과 그 연재를 새로 타자로 쳐서 현대인이 읽기 쉽도록 한 새활자본, 그리고 1948년 종로서원에서 간행한 『조선상고사』를 싣기로 했다. 『조선일보』에 연재된 것을 영인해서 싣고 그것을 현대인이 읽어볼 수 있게 새활자본으로 정리한 것은 단재(신채호)가 이 원고를 썼을 시기로 본다면 이것이 가장 가까운 때에 햇빛을 보게 되었다는 점을 우선 들 수 있다. 단재(신채호)의 『조선상고사』가 여러번 간행되었지만 단재(신채호)의 원고를 저본으로 하여 활자화한 것은 이것이 유일하다고 본다. 때문에 『조선일보』 연재본이 이미 간행된 많은 『조선상고사』 중에서 단재(신채호)의 어투와 문장에 가장 가까운 문장으로 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식자공의 실수 때문인지 혹은 원고 자체의 난해함 때문인지 오류가 많이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활자본은, 편자의 입장에서 명백하게 오류라고 생각되는 부분에 대해서도, 『조선일보』의 연재를 그대로 옮기려고 노력했다. 이유는 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자신의 원고에 글자 한 자 고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던 단재(신채호)의 원고에 가장 가까이 접근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을 뿐만 아니라 형식논리에서 본다면 이 판본이 단재(신채호)의 생각을 진솔하게 잘 타나냈을 것이라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또한 인쇄공의 실수로 나타난 오류는 학자들의 연구의 몫으로 남겨 놓는다는 뜻도 된다.


제2권 역사
朝鮮史硏究草
박걸순 | 충북대 교수

 Ⅰ. 단재(신채호)의 역사연구

  단재 신채호의 생애는 계몽운동가로서 언론활동기(1905~1910), 해외 망명과 민족운동 및 한국고대사연구기(1910~1925), 무정부주의운동기(1925년 이후) 등 3기로 구분할 수 있다. 그리고 그의 생애와 활동에서 나타난 사회사상은 시민적 민족주의기(1898~1922), 혁명적 민족주의기(1923~1924), 무정부주의기(1925~1936)로 3분하여 이해되기도 한다.
  단재(신채호)는 많은 사론과 역사저술을 남겼다. 그의 역사학은 저술을 기준으로 할 때 다음과 같이 3시기로 나누어 볼 수 있다.

1. 제1기(1905~1908) : 한말 『독사신론(讀史新論)』으로 대표되는 단재(신채호)사학의 초창기.
2. 제2기(1909~1920년대 초) : 『조선상고문화사(朝鮮上古文化史)』로 대표되는 단재(신채호)사학의 발전기.
3. 제3기(1920년대) : 『조선상고사(朝鮮上古史)』와 『조선사연구초(朝鮮史硏究草)』로 대표되는 단재(신채호)사학의 성숙기.

  한말 단재(신채호)는 『황성신문(皇城新聞)』과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의 논설기자로 활동하였고, 신민회에 가입하여 활동하며 그의 사회사상과 역사인식을 형성하고 심화시켜 나갔다. 이를 바탕으로 그는 근대국민국가를 추구하는 한편 역사민족주의(歷史民族主義)를 바탕으로 부여족(扶餘族)을 주족(主族)으로 하는 사천년 민족사의 성쇠소장(盛衰消長)을 추구하였다.
  단재(신채호)는 전통시대의 사서에 대해 전면적으로 부정하며 신랄한 비판을 가하였다. 그는 조선에 조선사라 할 조선사가 없었다고 하며, 내란이나 외란의 병화보다 조선사를 저작하던 사가들의 손에 의해 역사가 탕잔(蕩殘)되었다고 하였다. 또한 그는 외국의 기록에 나타난 우리의 역사상도 외국인들이 주체가 된 것으로서 ‘무록(誣錄)’이나 ‘위록(僞錄)’이라고 비판하였다. 즉, 중국 기록의 경우는 중국 민족의 특유한 심적 심리인 자존성으로 인해, 일본 기록의 경우는 근대 일본의 악랄한 학욕(壑慾)으로 인해 모두 ‘참 조선사’가 아니라고 하였다. 곧 단재(신채호)는 “조선인이 읽는 조선사나 외국인이 아는 조선사는 모두 혹 붙은 조선사요 옳은 조선사가 아니다”라고 외국 사료를 전면 비판하였다.
  그는 기왕의 기록이 이같이 틀렸기 때문에 올바른 조선사를 짓기 위한 구급 처방으로서 현존하는 모든 사책의 득실을 평(評)하고 진위를 교(校)하여 조선사의 전도를 개척함이 급선무라고 하였다. 그는 이를 한 말의 모래를 일어 한 톨의 사금을 얻거나 혹 얻지 못하는 상황에 비유하였다.
  단재(신채호)는 고대 이래 조선시대까지의 구사(舊史)의 기록을 간단히 평가한 결과를 네 가지로 피력하였다. 첫째는 대개가 정치사이고 문화사가 별로 없고, 둘째는 고금을 회통(會通)한 저작이 없고 모두 한 왕조의 흥망전말 기술로 끝났으며, 셋째는 공자의 『춘추(春秋)』를 사(史)의 극칙(極則)으로 알아 그 의례(義例)를 따라 존군앙신(尊君抑臣)을 주장하다가 민족의 존재를 잊으며 숭화양이(崇華攘夷)를 주장하다가 끝내는 자국까지 양(攘)하는 벽론(僻論)에까지 이른 경우가 있고, 넷째는 이종휘 일파를 제외하고는 국민의 자감(資鑑)에 공(供)하려기 보다는 외국인에게 아첨하려 한 의사가 더 많아 자가(自家)의 강토를 촌촌척척(寸寸尺尺) 할양하여 급기야는 건국시대의 수도까지 모르게 한 것을 지적한 것이었다. 그는 이처럼 우리 사학계가 ‘맹농파벽(盲聾跛躄)’이 된 것은 빈번한 내란과 외환 등 천연화재(天然禍災)가 아니라 인위의 장초(障礎)라며 구체적인 실례를 제시하였다.
  단재(신채호)의 전통사서에 대한 불신과 비판은 한말의 교과서로까지 연결되었다. 그는 한말에 이른바 신사체(新史體)로 기술된 새로운 사서들도 구사(舊史)의 투(套)를 고치지 않아 ‘한장책(韓裝冊)을 양장책(洋裝冊)으로 고침에 불과한 것’이라고 비판하였다. 또한 학교 교과용으로 편찬된 역사서로서 가치 있는 것이 전혀 없어 없느니만 못하다고 혹평하였다. 이는 ‘동국주족단군후예(東國主族檀君後裔)’의 역사를 올바로 기술하지 않았기 때문에 아무리 서양식의 근대식 체재를 갖추었다고 하더라도 근대사학이라고 볼 수 없다는 단호한 표현이었다. 이 같은 단재(신채호)의 한말 역사교과서에 대한 비판은 학부의 교과서 검정방법에 대한 비판으로 연결되어 곧 「국가를 멸망케 하는 학부」라는 극단적 논설로 발표되었다.
  한말의 사학에 대해 단재(신채호)는 『조선상고사』 총론에서 자신이 ‘사평체(史評體)에 가까운’ 『독사신론』을 연재하였고, 수십 명의 학생들의 청구로 지나식[支那(중국)式]의 연의(演義)를 본받은 ‘비역사(非歷史) 비소설(非小說)’의 『대동사천년사(大東四千年史)』를 지었으나, 두 작업이 모두 사고로 중단되었다고 밝힌 바 있다. 근래에 단재(신채호)의 1910년대 저술로 보이는 『대동제국사서언(大東帝國史叙言)』이 발견되어 관심을 끌고 있으나, 아직 검토의 소지가 많다.
  단재(신채호) 사학의 제1기를 대표하는 『독사신론』은 이 같은 반성에서 비롯된 것이다. 『독사신론』은 1908년 『대한매일신보』에 연재된 이후 다시 1910년 『소년(少年)』에 『국사사론』이라는 이름으로 게재된 미완의 사론이다. 그런데 『소년』은 이 사론을 전재하며 표제에 “많은 희망과 큰 슬픔을 아울러서 너를 이 세상에 보내노라. 원하노니 장수하라 큰소리치라. 유수 같을 지어다.”라고 특기하였다. 이는 단재(신채호)가 직접 쓴 것은 아니나, 이 사론을 저술한 단재(신채호)의 심경을 잘 표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최남선은 「전재(轉載)하면서」라는 글에서 이 사론을 “순정사학의 산물로 보아주기는 너무 경솔하고 그렇다고 순연히 감정의 결정이라고만 하기도 바르지 못하다”고 하며, 조국의 역사에 대하여 가장 걱정하는 마음을 가지고 그 참과 옳음을 구하는데 정성을 다한 것이라고 평가하였다.
  『독사신론』은 인종과 지리를 논급한 서론과, 단군 이래 발해의 존망까지를 10장으로 서술한 상세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즉, 자신의 사관과 단군 이래 발해까지의 민족사에 대한 골격을 제시한 미완의 사론이다. 그는 이 사론이 ‘신역사’를 찬진하기 위한 것이라고 강조하였다. 단재(신채호)는 고대 중국의 저술은 ‘일성(一姓)의 전가보(傳家譜)’이고, 서양의 기적(記籍)은 ‘일편(一編)의 재이기(災異記)’에 불과하다고 평가하고, 우리의 구사(舊史) 또한 허다(許多) 잔결(殘缺)하고 허다(許多) 탄망(誕妄)하기 때문에 이를 모두 없애버리고 신역사를 찬진하려 하는 것이라고 밝혔다. 그는 신역사 찬진을 위해서는 본국 문헌인 조사야승(朝史野乘)을 모두 수집하고 편린잔갑(片鱗殘甲)의 재료라도 모두 모아야 하며, 불길과 같은 안광을 들어 고금 정치풍속의 각 방면을 정세(精細)히 관찰한 다음에 필을 들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그 연후에 나라의 주인되는 일종족(一種族)을 발현하여 주제로 정한 다음, 정치의 장이(張弛)·실업의 창락(漲落)·무공의 진퇴·습속의 변이·외래 각 족의 흡입·타방 이국의 교섭을 서술하여야만 역사라 할 수 있다고 하였다. 그렇지 않으면 이는 무정신의 역사이며, 무정신의 역사는 무정신의 민족을 낳으며, 무정신의 국가를 만들 것이라고 강조하였다.
  그러나 이 사론은 체재가 정비된 통사가 아니고 사평체의 미완의 사론이기 때문에 이 글만으로 단재(신채호)는 완전한 근대적 역사연구 방법론을 제시할 수 없었고, 민족사의 통사적 인식도 전개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사신론』은 근대민족주의 역사학을 성립시킨 저술로서 높이 평가되고 있다. 단재(신채호)는 이 사론을 통해 중세적 왕조사관에서 벗어나 역사서술의 주체를 민족의 소장성쇠로 설정함으로써 민족사관을 정립하였다. 또한 존화사관에 젖어있는 주자학적 구사를 비판하고 극복하고자 하였다. 특히 그는 일제의 허구적인 임나일본부설을 비판함으로써 본격적으로 반식민사학의 기치를 세웠다. 따라서 식민사학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한 한말의 사가를 대표하는 현채나 김택영, 장지연 등도 그에게는 배격의 대상이 되었음은 물론이다. 그러나 그의 사학은 민족주의의 틀 속에만 고착된 것이 아니라, 사회진화론 등 사회과학 이론을 통해 민족사를 조명하고자 하였다.
  그런데 『독사신론』은 단재(신채호) 스스로가 ‘논평의 독단임과 행동의 대담함을 자괴’한다고 한 바 있는데, 전반적으로 고증이 불충분하고 지나치게 정치사와 대외관계사에 치우친 나머지 사회사와 경제사 분야가 결여된 한계가 지적된다.
  단재(신채호) 역사학의 제2기를 1909년으로 분기하는 것은 전년의 『독사신론』과 구별하는 의미도 있으나, 이 해에 『대한매일신보』에 「애국 이자(二字)를 구시(仇視)하는 교육자여」, 「국가를 멸망케 하는 학부」, 「제국주의와 민족주의」, 「이십세기(二十世紀)신동국지영웅(新東國之英雄)」, 「논려사무필(論麗史誣筆)」, 「동국거걸최도통전(東國巨傑崔都統傳)」 등의 중요한 논설을 다수 발표하였기 때문이다. 단재(신채호)는 망명 직전에도 선교와 단군에 관한 글을 발표한 바 있다. 그런데 망명 직후인 1911년경 대종교에 입교하였고 1914년경 서간도에서 윤세복과 교유하며 고구려와 발해 유적지를 답사한 것은 고대사 인식과 연구에 커다란 전기가 된 것으로 이해된다.
  이 시기 단재(신채호)의 역사연구는 1921년경 북경에서 자신을 방문한 이윤재(李允宰)에게 보여 주었다고 하는 「조선사통론(朝鮮史通論)」·「문화편(文化篇)」·「사상변천편(思想變遷篇)」·「강역고(疆域考)」·「인물고(人物考)」·「부록(附錄)」을 통하여 그의 집필 주제와 관심의 범위를 짐작할 수 있다. 이 원고들은 불행히 현전하지 않으나, 1920년대에 발표된 여러 논문의 초고가 되었거나, 『조선상고사』나 『조선상고문화사』 등에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그 원고의 일부를 포함하여 적지 않은 단재(신채호)의 유고가 평양의 인민대학습당에 소장된 것으로 알려지는 바, 북한 측의 조속한 공개를 기대해 본다.
  한편 그가 1916년 소설형식으로 저술한 『꿈하늘(夢天)』에도 그의 고대사인식 체계가 잘 나타나 있다. 『꿈하늘』은 단재(신채호)가 주인공 ‘한놈’을 통하여 자신의 이상을 펼친 사담체(史談體)의 자전적 소설인데, 그 서문에 단재(신채호)의 창작 의지가 잘 나타나 있다. 그는 ‘독자에게 할 말씀 세 가지’에서 이 소설이 ‘꿈꾸고 지은 것’이 아니라 ‘꿈이 지은 것’이라고 하였다. 즉, 실현 불가능한 것이 아니라, 환상적이기는 하지만 강렬한 의지가 반영된 것임을 강조한 것이다. 또한 그는 이 소설이 격식을 갖춘 것이 아니라 붓 가는대로 구사한 수필임을 강조하며 독자들에게 체재를 따지지 말 것을 당부하였다. 특히 그는 이 소설이 환상의 세계를 그린 것이나, 사서를 참고한 것이니 반드시 허구는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였다. 『꿈하늘』이 소설이지만 단재(신채호)의 고대사 인식을 논의할 때 거론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또한 단재(신채호)의 『꿈하늘』은 박은식의 『몽배금태조(夢拜金太祖)』와 함께 초기 민족주의 사학의 몽환적 역사서술과 인식의 경향을 대표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단재(신채호) 역사학의 제2기를 대표하는 저술로 『조선상고문화사』를 들 수 있다. 본서는 1931년과 1932년에 『조선일보』에 연재되었는데, 실제 집필한 시기는 1918년에서 1921년 사이로 추정되고 있다. 그 증거로서 『조선상고사』와는 달리 강한 대종교적 역사인식을 표방하고 있으며, ‘단군(檀君)’이 아니라 ‘단군(壇君)’이라는 표현, ‘단군시대(壇君時代)’라는 편명(編名)의 설정 등을 들 수 있다.
  『조선상고문화사』는 부여족 국가인 단군조선이 통일과 분열을 거듭하여 삼국으로 이어지는 상고사를 5장으로 구성하여 서술하였다. 그런데 제1편은 단군시대라고 편명을 붙였으나, 제1장 조선이라 이름한 뜻, 제2장 조선 역대문헌의 화액(禍厄)이라는 장의 구성에서 알 수 있듯이 단군시대와는 전혀 무관한 내용이다. 그는 제1장에서 조선만이 유일한 국호이며, 역대의 국가명은 모두 단군시대의 부명·관명·지명이라는 주장을 피력하였다. 제2장은 조선이 4천년 역사를 지녔음에도 불구하고 내·외적에 의한 ‘무망(無妄)의 재(災)’와, 폭군과 우부(愚夫)에 의한 ‘불시(不時)의 액(厄)’으로 말미암아 역사 재료가 ‘새벽 별을 셈과 한 가지가 되고 만’ 조선 고적과 기록의 소멸과 변개의 대개를 설명하였다. 그리고 이를 찾아내 바로 잡는 방법으로서 유증(類證)·호증(互證)·추증(追證)·반증(反證)·변증(辨證)의 다섯 가지 방법을 제시하고 조선의 가치 있는 역사를 다물(多勿)하고자 하였다. 이 부분은 전반적으로 『조선상고사』 총론과 유사하다.
  『조선상고문화사』도 미완이나, 단재(신채호)는 본서를 통해 단군 이래 삼국 성립 이전의 상고사의 흐름을 조선족, 즉 부여족의 국가 활동이 주류를 이룬 것으로 설명하였다. 그는 비록 기자조선·위만조선·한사군의 존재를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조선의 전 강역이 아닌 요서나 요동의 일부 지역에 국한된 것이기 때문에 조선족의 국가 활동은 단절되지 않고 지속된 것이라고 강조하였다. 즉 부여족이 주족이 된 조선의 상고사를 체계화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본서에서 주목할 만한 학설로는 한사군의 새로운 위치 비정과 남북 양 낙랑설을 들 수 있다.
  그런데 『조선상고문화사』는 서명에서 알 수 있듯이 정치사와 함께 문화사 부분의 서술에 중점을 두고 있다. 단재(신채호)는 단군조선 전반기 1천년의 정치와 문화는 고대에 있어서 가장 선진적인 것이었다고 하며, 중국을 비롯한 동양 각국 문화의 원류가 된 모범적인 것으로 보았다. 그리고 만일 후손들이 무력으로 그 문화를 보호하고 확장하였다면 조선이 진실로 동양문명사의 수좌를 차지할 뿐 아니라 전 세계를 독점하였을 것이라고 단언하였다.
  단재(신채호)는 여기에서 단군시대의 종교로서 선교를 들고 있으며 화랑은 신라의 과거법이 아니라 단군 때부터 내려오던 종교의 혼이요, 국수의 중심이라고 강조하였다. 또한 중국의 오행과 팔괘는 조선에서 수입해 간 것이라 하여 한중관계를 문화우열의 관계로 해석하고자 하였다. 특히 ‘기자(箕子) 동도(東渡)’를 인정하면서도 기자가 조선에 온 뜻은 ‘신앙의 조국인 조선’으로 온 종교적 사유가 정치적 사유보다 크게 작용한 것으로 해석하였다. 그는 기자를 동교(同敎)의 국인(國人)·인방(隣邦)의 노사(老師)·은조(殷朝)의 충신·망명한 고객(孤客)으로 표현하며 곧 오교(吾敎)의 현사(賢師)이기 때문에 그를 동정하여 평양(平壤) 일우(一隅)의 군읍(郡邑)을 주어 제후로 삼았다고 하였다.
  한편 그는 단군시대의 고유문자를 높이 평가하였는데, 고유문자로 지은 『신지(神誌)』를 사람이름이나 역사책 이름으로 보아도 무방하다고 하였다. 이 또한 『조선상고사』 총론에서 논의한 것과 유사한 내용이다. 곧 『조선상고문화사』는 1910년대의 한국사학계에서 가장 수준 높은 역사연구방법론에 의한 고대사 인식체계를 보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1920년대에 들어 단재(신채호)의 역사학은 더욱 성숙기에 접어들었고, 『조선상고사』와 『조선사연구초』는 그 대표적인 연구서이다. 특히 『조선상고사』는 대종교적 색채를 상당히 벗어나서 더욱 실증적인 ‘역사를 위한 역사’로서의 면모를 보이고 있다.

 Ⅱ. 『조선사연구초』의 저술 배경

  『조선사연구초』는 1920년대인 단재(신채호)사학의 제3기를 대표하는 저술로 평가된다. 이 시기 그는 위임통치를 청원한 이승만과의 노선 대립으로 임시정부를 뛰쳐나와 『신대한(新大韓)』을 간행하는 등 반임정활동을 펼쳤다. 1920년 북경으로 간 단재(신채호)는 박용만·신숙 등과 함께 제2회 보합단과 군사통일촉성회 등 무장투쟁 단체를 조직하고 주도하는 등 무장투쟁론을 실현시키고자 하였다.
  1921년 단재(신채호)는 북경에서 김창숙·박숭병 등과 『천고(天鼓)』를 발행하였다. 여기에 수록된 글들은 당시 독립운동사를 이해하는 데에도 매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하지만, 『조선사연구초』나 『조선상고사』에 앞서 단재(신채호) 사학을 이해하는 데에도 불가결한 자료이다. 한편 당시 단재(신채호)는 군사통일주비회를 개최하고 박은식·원세훈 등과 「아(우리) 동포에게 고함」이라는 성명서를 발표하고 이승만에 대한 「성토문」을 발표하였으며, 통일책진회를 발기하는 등 임시정부와 이승만에 대한 압박을 강화하였다. 북경에 머물 당시 그는 자신의 무장투쟁론을 ‘무장단투(武裝段鬪)’라고 표현한 바 있다. 그는 일본 뿐 아니라 세계 어느 나라라 하더라도 조선에 무례를 가하거든 칼이나 총이나 적수공권(赤手空拳)으로라도 ‘혈전(血戰)’을 벌이는 것이 조선정신이라고 강조하였다.
  1923년은 단재(신채호)에게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해였다. 전년 12월 의열단장 김원봉의 초청으로 상해로 온 단재(신채호)는 류자명의 도움을 받아 이해 1월 「조선혁명선언」의 작성을 완료하였다. 「조선혁명선언」은 민중의 직접혁명론을 제창하였고, 무정부주의적 성향을 보이는데 1920년대 독립운동 논설의 백미라 할 수 있다. 당시 단재(신채호)는 국민대표회의에 창조파의 대표격으로 활동하며 임시정부의 해체를 주장하였다. 그러나 국민대표회의가 결렬되자 민족통일전선을 형성하지 못한데 크게 실망하여 북경으로 돌아갔다. 이후 그는 북경대 교수였던 이석증(李石曾)의 도움으로 북경대학 도서관의 장서를 열람하며 역사연구에 몰두하는 한편, 무정부주의에 더욱 경도되어 갔다.
  1924년 그는 일시 북경 교외에 있는 관음사(觀音寺)에 들어가 승려생활을 하기도 하였다. 그가 승려의 길을 택한 것은 국민대표회의의 결렬 등 독립운동의 부진으로 ‘회심(灰心)’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단재(신채호)는 이미 국내에서부터 불교에 관한 조예가 깊었는데, 정인보는 단재(신채호)의 불교에 대한 깊음이 ‘조선인 거사림(居士林)에 거의 최고’라고 평가하였을 정도이다. 실제로 단재(신채호)는 『유마경(維摩經)』 등 불경에 밝았고 친구들에게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의 열독을 권할 정도로 불교에 심취해 있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사명이 조선사연구에 있음을 깨닫고 1924년 가을 하산하여 역사연구에 몰두하였다. 그는 이 무렵 이석증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신의 무장투쟁론을 ‘전일의 그름’이라고 과오였음을 자인하며 무장투쟁이 유생의 능사가 아니고 국가흥망이 일조(一朝)의 돌발(突發)이 아니라는 것을 비로소 깨달았기 때문에 역사연구에나 전념하겠다는 소회를 밝혔다.

  “…전일에는 또한 나라 운명의 절박함을 통곡하고 분연히 일어나 붓을 내던지고 몇몇 열사와 함께 나라를 위하여 죽음으로써 적과 싸우기를 기도하였더니 벌써 정세는 더욱 틀려지고 기회는 더욱 멀어져 안타깝게도 부질없이 머리만 어루만지는 동안 어느덧 천(賤)한 나이 사십을 지났습니다. 이리하여 무장단투(武裝段鬪)란 유생의 능사가 아니고 국가 흥망이란 일조(一朝)의 돌발(突發)이 아니라는 것을 비로소 알았으니 도연명(陶淵明) 같이 비록 얼른 ‘오늘의 옳음’을 감히 자신할 수는 없다 하더라도 거백옥(遽伯玉)과 같이 또한 ‘전일의 그름’은 자인합니다. 그러면 이 몸이 나갈 곳은 어디일까? ‘유어(鮪)도 아니요 전어(鱣)도 아니니 못 속으로 들어가랴? 솔개도 아니요 새매도 아니니 하늘 위로 올라가랴?’라고 한 시(詩)를 외며 하염없는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립니다. 생각건대 오직 남은 바 역사 연구사업을 계속 진행하고 과거의 견문을 정리 편수하여 후진 학자들로 하여금 나라의 전통을 잊지 말게 하는데 혹 만일의 도움이 될까 합니다.…”

  이는 국민대표회의가 파탄하여 독립운동계의 희망이 좌절된 시기의 단재(신채호) 심경을 잘 드러낸다. 그러나 이는 일시적 체념에 불과한 것일 뿐, 그는 본격적인 역사연구와 집필에 전념하며 여전히 무장투쟁론을 견지하고 실천에 나섰다.
  단재(신채호)는 1924년 6개월여의 승려생활을 하는 동안에 「전후삼한고」와 『조선상고사』 총론 등을 집필하였고, 이 논문들은 국내로 송고되어 『동아일보』 등에 연재되었다. 단재(신채호)의 역사 논문이 국내의 신문에 연재된 것은 그의 국내 거주 가족들의 극심한 생활고를 염려한 지기들의 배려에 의한 것이었다. 즉, 얼마간의 원고료를 통해 그의 처자의 생활비를 지원하고자 한 것이었다. 당시 단재(신채호)는 그 스스로도 수차에 걸쳐 경제적 곤란을 토로한 바 있다. 홍명희에게 보낸 다음의 편지는 그의 절실한 심경을 솔직하게 드러내고 있다.

  “…처 쇄자옥(鎖子獄)이란 말을 이제야 심절(深切)히 각득하였습니다. 아우가 일신으로 돌아다닐 때는 아무 물애(物碍)가 없더니, 지금에는 장문잠(張文潛)의 이른바 칠(漆)로써 목(沐)한 셈입니다. 이십 년 게으른 노동의 소득은 겨우 정리치 못한 뇌중에 있는 조선사고(朝鮮史藁) 뿐이라, 본작의 가치가 원래 얼마 되지 못하겠지만 더욱 시세가 틀리어 매매할 곳이 없지만 그러나 가진 것이 그것뿐이므로 아직 저작하기 전에 산반을 들고 이로써 자가와 처자의 호구를 답(答)합니다. 그러나 외지에서는 할 수 없어 오직 내지만 바라는데 내지에 있는 ○○가 없는 놈이 하물며 내지를 떠난 지 십오 년 후리오. 그런 즉 그 중간(中間)의 거간인(居間人)은 형(兄 홍명희)이나 매당(邁堂)을 믿을 수 밖에 없으나 그러나 매당(邁堂)은 원래 차등(此等) 주시력(周旋力)이 전결(全缺)이라 함도 가(可)하니, 부득불 형(兄 홍명희)을 전시(專恃)할 수밖에 있습니까? 지어 논 수편을 정서하는 대로 보낼 것이니 아보(亞報)에 게재하는 동시에 ‘설항(說項)’의 방편도 많이 생각하심을 바랍니다. 제(弟)의 속현처(續弦妻) 박자혜(朴慈惠)와 4세의 맥아(脉兒)가 경성 관훈동 182 이운경가(李雲卿家)에 우거(寓居)하오니 일차 문가(文暇)에 과방(過訪)하여 그 생활의 정형을 한번 보심을 바랍니다.…”

  이 글은 단재(신채호)가 절친했던 홍명희에게 그의 속내를 숨김없이 드러낸 것이라 하겠다. 뿐만 아니라, 그는 「전후삼한고」의 원고를 보내면서 ‘자서(自敍)’에서 어린 자식의 생활비를 염려하는 아내의 독촉 편지 때문에 써서 보내는 것이라 가치가 없을 것이라고 하였다.

  “…이 「전후삼한고」 삼편 18장은 작년 여름 어느 달이던가 한창 장마 심할 때 북경 모불사(某佛寺)에서 체류하면서 대개 수십 일의 공부(工夫)로써 저작한 것이다. 물론 그 재료의 수집과 연구의 노력은 그 수십 일 동안의 일이 아니다. 한 것은 목하(현재) 소아(小兒) 양활(養活)의 곤란(艱難)을 빙자하여 매주일 편지마다 보채는 가인(家人)의 입을 틀어막는 마개로 쓰게 된 것이다. 그러면 그 가치의 멸여(蔑如)한 것이야 더 말할 것이 있으랴?…”

  홍명희도 단재(신채호)가 국내의 신문에다 역사 논문을 발표한 것은 친구들의 서신 권유도 있었으나 사실은 약간의 원고료로써 4세의 어린 아들 수범(신수범)의 양육비를 보태기 위한 것이었음을 확인한 바 있다.
  단재(신채호)의 어린 아들 수범(신수범)에 대한 사랑은 매우 지극하였다고 한다. 그는 자신을 옥중 면회 온 이관용에게 수범(신수범)을 부탁하였으며, 한 기자에게는 국내에 있는 아들의 교육문제가 걱정되나, 옥중에서 걱정한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므로 아주 단념하였다고 말하기도 하였다. 단재(신채호)의 애틋한 부정과 비감한 옥중 심경을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한편 단재(신채호)는 한기악(韓基岳)을 통하여 『시대일보』에도 「고구려와 신라의 건국연대에 대하여」등의 논문을 발표하였는데, 이 또한 서울 가족의 생계를 위한 것이었다.
  단재(신채호)는 평생 경제적으로 궁핍한 생활을 하였으나, 돈에 대하여 비굴하지는 않았다. 그가 북경에서 『중화보(中華報)』에 사설을 연재하여 생계를 꾸리고 있던 때, 신문사에서 자신의 원고에서 문장의 의미와는 전혀 무관한 ‘의(矣)’ 자(字)를 오자(誤字)하였다 하여 집필을 거절하였다고 한다. 단재(신채호)는 이로 인해 판매부수가 급락하자 수차 사과하러 온 중국인 사장을 질책하고 끝내 집필하지 않았다. 단재(신채호)는 그것이 중국인의 조선인에 대한 우월감에서 나온 행동이라고 생각하고 자신이 돈을 위해 집필했던 사실이 조선인으로서 지조를 잃은 행동으로 후회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또한 그는 한 때 자신이 김립(金立)으로부터 불의의 돈을 받았고, 역사편찬을 빌미로 김립의 돈을 속여 먹었다는 오해에 대해 적극 항변하기도 하였다.
  단재(신채호)는 매우 엄격한 역사편찬의 태도를 견지하였으며, 민족주의 사가로서 당당한 격조를 잃지 않았다. 그는 「전후삼한고」를 송고하며 원고를 받는 사람에게 첫째, 비록 투고된 원고는 반환하지 않는다는 사규가 있더라도 등재하지 않을 시는 즉각 필자에게 반환해 줄 것, 둘째, 본고를 등재할 때는 일자일구도 가감하거나 이동하지 말 것, 셋째, 원고의 반환 시에는 간접적으로 하지 말고 직접 해 줄 것을 요구하였다. 특히 그는 자신의 원고에 잘못된 판단이 있다 하더라도 연구의 기초와 방법이 다르기 때문에 차라리 자신의 원고 전부가 부정당함은 가하나 일자일구의 가감이나 이동은 불가하다는 단호한 의지를 보였다.
  정인보는 『조선사연구초』의 편찬과 관련하여 단재(신채호)의 역사저술 자세를 다음과 같이 평하였다.

  “…최근 『조선사연구초』 같은 것도 방장 간포(刊布)하여 하려 할 즈음에 훼판(毁板)하라는 글발이 단재(신채호)에게로부터 왔었으니 이러한 점에서 더욱 단재(신채호)의 사학적 고격(高格)을 볼 수 있는 바다. 이른바 ‘식법자구(識法者懼)’가 단재(신채호)를 두고 말한 것 같기도 하나 이보다도 단재(신채호)의 사학은 ‘일이월부동(日異月不同)’의 실이 있어서 그 고(故)에 자안(自安)하지 못함이니, 학문의 진경(進境)보다도 그 자기(自欺)하지 못하는 학적(學的) 양심이 또한 경복(敬服)함직하다. 다만 성기(性氣)가 본래 곰살갑지 아니하여 발함이 있으면 찬란할 겨를을 낼 여지가 없어 간혹 일자의 불안을 증오하다가 전책(全冊)을 성냥불에 붙이는 등 어떤 때는 스스로 과사(過思)함을 모르고 홧김에 북북 찢어 쑤세미를 만드는 등 적년(積年)의 공(功)을 들여 심혈(心血)을 다 쏟은 것으로 하여금 편각간(片刻間)에 오유(烏有)를 만든 것이 한두 번이 아니라 하는데, 나온 바로 『조선사연구초』만 하더라도 그가 여기 있기만 하였으면 그 고집에 피차 격면(隔面)하기까지 이르더라도 빼앗아다가 없애고야 말았을 것이니, 누작누훼(累作累毁)하였다는 것이 반드시 사실일 줄 안다. 평심하여 말하면 부족한대로라도 우선 통사의 체계를 세우고 수정을 수가(隨加)할지언정 구(舊)를 전기(全棄)하지 말아 구장(久長)을 기하고 나갔던들 금일에 와서 남은 것이 이같이 무다(無多)하지는 아니할 것이어늘 속을 썩이지 못하기도 너무 심하여 저렇듯이 작훼(作毁)가 빈수(頻數)하였더니 이는 그 성기(性氣)의 단(短)이라고 할 것이로되, 다시 생각하여 보면 그가 자시(自視)하여 부족한 것이 타인으로서 보기에는 미증유의 형견(炯見)인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니, 그의 부족으로 아는 것도 이렇거든 나아가 마지아니하는 그의 사학적 고예(高詣)가 만년에 어느 정도까지 갔었음을 어찌 알랴. 혹 말하기를 그가 사학에 있어 우주에 번쩍거리는 전광(電光) 일성이 승(勝)하고 복류(伏流) 삼과(滲過)하면서도 기어이 그 줄기를 바다까지 끌고 가는 근기는 부치지 아니하느냐 하나, 이는 그런 것이 아니니 단재(신채호)의 꾸준한 점인들 어찌 그 필적이 있으랴. 그 작훼(作毁)도 실상 꾸준 속의 작훼(作毁)임을 알라.”

  홍명희는 『조선사연구초』의 간행 직전 이 계획을 단재(신채호)에게 알렸다. 이 때 단재(신채호)는 「평양패수고」의 내용 중 수정할 것이 있다고 회답하였다. 그러나 홍명희는 어렵게 조선총독부로부터 출판 허가를 받은 뒤라서 원고를 보내 수정할 시간이 없으니 나중에 재판 할 때 수정하라고 하였다. 이에 단재(신채호)는 아예 출판을 중지해 달라고 요청하여 왔다. 그것은 아들의 양육비를 위해 자신이 원고를 너무 경솔히 써 ‘자심(自心)에도 불만'하였기 때문이었다. 홍명희는 단재(신채호)의 역사저술 태도를 다음과 같이 서술하였다.

  “…단재(신채호)는 자기의 고심연구(苦心硏究)한 것을 초(草)하다가 갑자기 없애버리는 버릇이 있으니 이것은 다름이 아니라 초한 것을 다시 살펴보고 불만을 느끼는 까닭일 것이다. 그의 불만하여 하는 모양으로 보면 그의 역사상 연구가 「멘텔리」란 학자의 수학, 언어학 지식과 같이 암중에 매몰되고 말런지도 알지 못할 일이다. 주옥(珠玉)이 매몰됨을 아까워함은 상정(常情)이니 나는 한갓 나의 친구를 위하여 모충(謀忠)함이 아니요, 심상(尋常)한 주옥(珠玉)으로 비(比)치 못할 단재(신채호)의 연구를 일단이라도 매몰치 아니하려고 함이다. 그럼으로 나는 다시 편지로 단재(신채호)에게 권하기를 「불만을 참으라 초하는 것을 중지하지 말라」하였다. 중지하지 말라고 한 것은 어느 기회에 이 사초처럼 간행하게 되기를 깊이 바라는 까닭이다.…”

  단재(신채호)는 옥중으로 자신을 면회 온 『조선일보』 기자에게도 자신의 연구가 너무 단정적이기 때문에 자신이 없고 완벽하지 못한 것이기 때문에 발표를 중지시켜 달라고 요구하며, 만일 자신이 10년의 옥고를 무사히 치르고 출옥한다면 다시 정정하여 발표할 것이라는 의욕을 보이기도 하였다.
  이로써 보면 단재(신채호)의 역사 관련 원고는 가족들의 생계와 아들의 양육을 위한 경제적 고통으로 말미암아 국내 언론에 게재되어 공개될 수 있었던 것임을 알 수 있다. 또한 역설적이지만 『조선사연구초』는 단재(신채호)가 타국에서 영어의 몸이었기에 간행이 가능한 셈이었던 것이다.
  단재(신채호)는 자신의 역사저술이 비재멸학(菲才蔑學)의 의견이라고 겸양하였으나, 또한 자신의 역사저술에 대하여 확신을 지니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의견이 틀릴 수는 있으나, 연구의 기초와 방법은 착오가 없다고 자신하였으며, 삼한 칠십여국에 대한 고증은 이전 사람들보다 ‘오뉴월 하룻볕’ 정도의 차이가 있을 것이라고 하였다. 또한 자신이 “내라야 이것을 발견하지”라는 자신감을 피력하기도 하였으며, 『조선사색당쟁사(朝鮮四色黨爭史)』와 『육가야사(六伽倻史)』는 조선에서 자신이 아니면 능히 정곡한 저작을 못하리라고 확신하였다.
  1924년 10월에는 홍명희의 주선으로 『동아일보』에 「고사상 이두문 명사 해석법」(1924. 10. 20~11. 3) 등의 논문을 게재하였다. 또한 이듬해에는 안질로 고통을 받으면서도 집필을 계속하여 『동아일보』에「삼국사기 중 동서양자 상환고증」(1925. 1. 3), 「삼국지 동이열전 교정」(1925. 1. 15~1. 26), 「평양패수고」(1925. 1. 30~2. 16)를 연재하였고, 별도로 「전후삼한고」와 「조선역사상일천년래제일대사건」논문도 집필하였다. 이 논문들은 대부분 『조선상고사』의 집필과정에서 정리된 것으로 보인다.
  단행본 『조선사연구초』는 그가 여순감옥에서 옥고를 치르던 1929년 6월 서울 견지동에 있는 조선도서주식회사에서 발행되었으며 일원의 정가로 발매되었다. 본서는 해방 직후인 1946년 연학사에서 재간하였다. 여기에서는 전자를 저본으로 영인하고 활자화 한 것이다.

 Ⅲ. 『조선사연구초』의 구성과 서술 내용

 『조선사연구초』는 「고사상 이두문 명사 해석법」·「삼국사기 중 동서양자 상환고증」·「삼국지 동이열전 교정」·「평양패수고」·「전후삼한고」·「조선역사상일천년래제일대사건」 등 6편의 논문으로 구성되었다.
  「고사상 이두문 명사 해석법」은 한자 차용 표기에 대한 단재(신채호)의 사료비판 인식을 잘 보여준다. 단재(신채호)는 이 글의 앞부분에서 이두문으로 된 국명·관명·지명 등에 대해 올바로 해석하는 것은 착오를 교정하고 와오(訛誤)를 귀진(歸眞)하며, 제 시대의 본색(本色)을 탄로(綻露)하고 이미 산실된 조선 역사상의 대사건이 발견되는 것이기 때문에 지중 고적을 발굴함에 비길만한 조선사 연구의 비약(秘鑰)이라고 강조하였다.
  단재(신채호)는 이두문이 한자의 전음(全音)·전의(全義) 혹은 반음(半音)·반의(半義)로 만든 일종의 문자라고 하며, 연구상의 곤란함을 5가지로 지적하였다. 그 곤란함이란 첫째, 구결문(口訣文)으로 화(化)하기 이전에는 자모의 발견이 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일정한 법칙도 없었고, 둘째, 신라 경덕왕대에 지명을 정할 때에 옛 이름의 본의를 버리거나 역용(譯用)하지 않고 한자로 하였으며, 셋째, 사서에 이두문으로 된 당시의 본명을 기록하지 않고 후래에 역용한 한자어로 기록하였기 때문이며, 넷째, 조선의 사책에 와자(訛字)·오자(誤字)·첩자(疊字)·루자(漏字)가 많으며 중국의 사책의 조선열전 부분의 ‘사실의 오(誤)나 문구의 와(訛)’가 대단하여 믿을 수 없으며, 다섯째, 언어는 시대를 따라 생멸하며 변화하는 것이기 때문에 소멸되거나 변개된 말이 많기 때문이라고 설명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재(신채호)는 이두문 표기의 연구를 위해 ‘천려(千慮)의 일득(一得)’으로서 6가지 해석방법을 수립하여 제시하였다. 이 해석방법은 매우 구체적인데, 간략히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본문의 자증(自證) : 고유어가 한자의 석(釋)이나 음(音)을 차용한 이두문일 때 일명(一名)·일작(一作)·본왈(本曰) 등을 병기한 경우로서 별다른 어려움 없이 본문에서 해석할 수 있는 경우.
2. 동류(同類)의 방증 : 홀(忽)·파의(波衣)·홀차(忽次)·미지(彌知)·목멱(木覔)·부사(夫斯) 등과 같이 동일한 접미사나 접두사를 지닌 동류를 수집하여 해석을 추단(推斷)하는 경우.
3. 전명(前名)의 소증(溯證) : 아사달(阿斯達)과 비서(非西)의 예와 같이 부나 조의 성씨를 얻으면 그 자손의 성씨를 자연히 알듯이 지명이 모호할 시 그 옛이름에서 진가(眞假)를 아는 경우.
4. 후명(後名)의 연증(溯證) : 신(臣)·진(辰)의 예를 들고, 결국 김유신·연개소문·성길사한(成吉思汗 칭기즈칸)을 같은 의미로 해독하며, 전명(前名)의 소증(溯證)과 상대되는 경우.
5. 동명이자의 호증(互證) : 가장 대표적 사례로서 ‘라’와 ‘불’을 들고, 복잡한 이명자에서 음·의·연혁으로 동명을 밝혀내는 것으로 조선 고사 연구에 비상한 도움이 있는 경우.
6. 이신동명(異身同名)의 분증(分證) : ‘아리’를 ‘長’의 뜻으로 해석하여 ‘리가람(長江)’을 조선족의 분포 순으로 육처(六處)에 존재한다고 하고 유리왕과 개루왕과 같이 양왕이 존재한 경우.

  이 여섯 개 조항의 언어학적 해석방법은 지나치게 문헌에만 편중되고 항목 구별이 정밀하지 못한 한계가 지적되는 한편, 일정한 방법을 가지고 체계 있는 해석을 시도한 최초의 업적으로 평가된다.
  단재(신채호)는 이런 해석으로 얻을 수 있는 효과로서 ① 전인이 이미 증명한 것을 더욱 견확(堅確)하게 함, ② 유래의 의문을 명답할 수 있음, ③ 전인의 위증을 교정함, ④ 전사의 두찬(杜撰)을 타파할 수 있음을 예시를 통해 설명하였다. 다만, 그는 이두문 명사 해석상의 독단을 피해야만 이 같은 효과가 가능하다고 주의를 환기시켰다.
  결국 「고사상 이두문 명사 해석법」은 단재(신채호)가 우리 상고사를 연구함에 있어서 영성한 자료를 보완하기 위해서 사료에 기록된 인명이나 지명 등의 고유명사와 관직명은 물론 옛 풍속이나 제도에 이르기까지 한자로 표기된 모든 자료를 올바로 읽고 해석해야 한다는 사실을 매우 중요하게 여겼음을 알 수 있는 글이다.
  「삼국사기 중 동서양자 상환고증」은 『동아일보』에 단 1회 게재된 단문이지만, 단재(신채호)의 역사연구 자세가 잘 보이는 글이다. 그는 먼저 자신의 글을 세상에 공포하는 것은 자신의 확신이 있어야 한다고 전제하였으나, 자신의 주장이 옳은지 그른지는 알지 못한다고 하였다. 이는 오히려 자신의 주장이 맞는다는 것을 강조한 문장으로 이해된다.
  단재(신채호)는 『삼국사기』 온조왕 13년 조의 “국가동유낙랑(國家東有樂浪)”이란 문장을 들어서 고사상 ‘동(東)’자와 ‘서(西)’자가 바뀐 원인을 규명하고 실증하였다. 그는 낙랑에 대한 안정복과 정약용의 견해를 소개하고, 양인의 오류를 지적하며 자신의 견해를 피력하였다. 그는 『삼국사기』에서 ‘서’자가 ‘동’자로 기록된 예로서 온조왕 23년 조의 “동북일백리(東北一百里)”와, 동왕 37년 조의 “한수동북(漢水東北)”, 지리지의 “동북대진(東北大鎭)”의 셋을 들며, ‘동북’으로 표기된 이 기록들은 모두 ‘서북’으로 표기되어야 맞는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우리말에 ‘동방’을 ‘시’라 하였고, ‘서방’을 ‘한’이라 하였으므로 삼국시대 학자들이 한자를 취하여 이두문을 만들 때 ‘서’자의 음인 ‘시’를 취해 ‘동(東)’을 ‘서(西)’로 쓰고, 그 대신 ‘서’를 ‘동’으로 쓴 것을 이후 사가들이 사책을 지을 때 바뀐 ‘동’과 ‘서’를 썼기 때문에 고사상 ‘동’과 ‘서’가 바뀐 것이라는 가설을 내세웠다. 그리고 이를 입증하는 실례로서 “가슬라(迦瑟羅) 일명(一名) 하서랑(河西良)”과 “동맹(東盟)”을 들었다. 그런데 그는 ‘동’자와 ‘서’자가 바뀌지 않은 것도 있다고 하며, 관명과 지명이 두 개가 병기된 것은 이두자로 쓴 사책과 한자로 쓴 사책 기록의 차이로 설명하였다.
  본고의 결론은 김부식에 대한 비판으로 맺었다. 그는 김부식이 ‘황조맹랑(荒粗孟浪)한 사가’라고 평가하며, 그가 이두문에 무식하였을 뿐만 아니라 이두문을 철저히 배척하여 『삼국유사』에 수록한 시가를 전혀 수록치 않은 것이라고 하였다. 나아가 그는 김부식이 인명이나 지명에 이두문이 있었음을 알았거나, ‘동’과 ‘서’가 이두문으로 인해 바뀐 것을 알았다면 모두 배척하여 쓰지 않았을 것이라고 하였다. 그는 마지막으로 『삼국사기』에 일부 ‘동’과 ‘서’가 바뀐 것이 존재하는 것은 고려 초의 문사나 승려들이 고기를 한문으로 지을 때 이두문으로 된 사책을 번역하는 과정에서 우연히 빠뜨린 결과라고 하였다.
  「삼국지 동이열전 교정」은 단재(신채호)가 중국사서의 전도(顚倒)·와오(訛誤)·탈락(脫落)·증첩(增疊)된 자구까지 교정할 수 있는 해박한 지식과 탁월한 사료해석 능력을 잘 보여준 논문이다. 그는 먼저 우리의 고대사 관련 문헌이 너무 적기 때문에 중국 고사를 이용할 수밖에 없다고 전제하였다. 그러나 자신이 특히 『삼국지』 동이열전을 취한 까닭은 『사기』나 『한서』의 조선열전은 ‘중국유적(中國流賊)의 침략사’, 『남북사』, 『수서』, 『당서』 등의 동이열전은 ‘한족의 외경사(外競史)’에 불과하고, 위진시대 사관이 지은 『위서』와 『위략』도 문제가 있는 사서이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그리고 『삼국지』를 버리고 『후한서』만 선택한 선유의 오류도 지적하였다.
  단재(신채호)는 자신이 『삼국지』를 취하여 교정하는 이유는 첫째, 서적을 초사(抄寫)하여 전하는 과정에서 전도(顚倒)·와오(訛誤)·탈락(脫落)·증첩(增疊)된 자구가 허다함에도 불구하고 중국의 고증가들이 조선열전이나 동이열전 같은 부분은 고증에 힘쓰지 않았고, 설령 힘써 고증한다 하더라도 인명·지명·풍속·사정 등을 잘 몰라 교정한 것이 더 착오된 곳이 있으며, 둘째, 중국인의 유전적 자존성으로 말미암아 고의로 무록(誣錄)하거나 전문(傳聞)으로 와록(誤錄)한 것이 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이어 그는 전도·와오·탈락·증첩된 자구의 사례로서 다음의 여섯 가지를 제시하였다.

1. 서문의 유오환골도(踰烏丸骨都)는 초사자(抄寫者)가 성명(城名)인 오골(烏骨)과 환도(丸都)를 몰랐기 때문에 유오골환도(踰烏骨丸都)의 오류이다.
2. 『예전(濊傳)』의 유렴치(有廉恥) 불청구려(不請句麗) 언어법속(言語法俗) 대저여구려동(大抵與句麗同)은 유렴치불청흉(有廉恥不請匈)이 일구(一句)”이고, 언어법속여구려동(言語法俗與句麗同)이 일구(一句)이다.
3. 『한전(韓傳)』의 신지(臣智) 혹가우호(或加優呼) 신운견지(臣雲遣支)는 신지(臣智) 혹가 우호(或加優呼) 신견지(臣遣支)의 오류이다.
4. 『변진전(弁辰傳)』의 차읍(借邑)은 읍차(邑借)의 도재(倒載)이다.
5. 『변진전(弁辰傳)』의 미오사마(彌烏邪馬)는 미오마사(彌烏馬邪)의 도사(倒寫)이다.
6. 『한전(韓傳)』의 사로(駟盧) 막로(莫盧)와 『변진전(弁辰傳)』의 마연(馬延)은 첩사(疊寫)한 것이므로 『해동역사(海東繹史)』에서 산거(刪去)한 것이다.

  단재(신채호)는 열전의 기사 중에서 초사자들의 오류를 교정하는데 그치지 않고 본문 기사의 오류도 지적하였다. 그는 고구려를 침략했던 관구검(毌丘儉)이 고구려의 서적을 가져가서 참고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기사의 위오(違誤)가 많은 것은 『원사(元史)』·『명사(明史)』·『일통지(一統志)』가 고려의 사책과 『여지승람(輿地勝覽)』을 등록하면서도 망개(妄改)와 위증(僞證)이 있는 것과 같다고 하며 다음의 네 가지 구체적인 사례를 들었다.

1. 중국 사가들이 자존의 벽견으로 허다한 소화(笑話)를 끼쳤으나, 위증과 불충분한 증거를 토대로 하여 진한을 진인(秦人)의 자손이라 함으로써 조선의 족계를 난(亂)하려 하였다.
2. 읍루(挹婁)가 예(濊)의 별명임을 모르고 읍루전을 입(立)한 이외에 예전(濊傳)을 立한 것이 하나의 잘못이요, 동북 양 부여 가운데 북부여는 부여라 칭하는 동시에 동부여를 예로 인식함이 또 다른 잘못이다. 특히 주(主)인 동부여를 입전(立傳)하지 않고 객(客)인 예를 입전(立傳)한 것은 잘못이다.
3. 낙랑을 뺌으로서 지리의 결점은 고사하고라도, 고구려와 낙랑, 낙랑과 삼한의 언어·풍속 등 동이 관계를 말하지 않았으며, 고구려와 부여 등 북방 제국과 삼한 등 남방 제국의 연락이 단절하여 본지 동이열전의 가장 큰 결점이 되고 있다.
4. 고구려왕을 고구려후라 하고, 고구려사에 보이지 않는 고구려후 ‘騶’란 이름이 보이는 등 착오가 많다.

  단재(신채호)는 본고의 결론도 김부식과 『삼국사기』에 대한 신랄한 비판으로 맺고 있다. 결론의 일부를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김부식은 조선 고사(古史)가 결망(缺亡)된 까닭에 무호동중(無虎洞中)의 삵과 같이 조선사가들의 비조가 되었지만, 피(彼)가 『삼국사기』를 지을 때에 송인(宋人)의 『책부원구(冊府元龜)』 일천권을 사다가 자가(自家)의 참고에 공(供)하고는 내각에 심장(深藏)하여 타인의 열람을 불허하여 자가가 유일한 박학자의 명예를 가지는 동시에 『삼국사기』가 자가의 명예와 같이 국내 유일의 역사됨을 희망하였다. 피(彼)의 악렬한 수단이 참 통악할 만할뿐더러 그 사학적 두뇌가 비상히 결핍하여 즉 근세의 발달된 역사에 비하여 손색(遜色)이 있을 뿐 아니라 동양 고대의 인물중심주의의 역사의 저울로 달아볼지라도 『삼국사기』는 몇 푼어치가 못 되는 역사다.…그러므로 『삼국사기』는 문화사로나 정치사로나 가치가 전무하다.…”

  단재(신채호)의 우리 사학계에 대한 비판은 당대 사학에까지 미쳤다. 그는 한백겸과 안정복이 탄복할만한 정상근밀(精詳謹密)로 김부식의 착오를 많이 찾아냈다고 평가하면서도 중국 사서에 대한 신뢰가 너무 과하여 진위가 착잡한 자료를 마구 인용하고, 후대의 위작도 존신하였다고 비판하였다. 마지막으로 그는 근래의 사학자들이 기록의 시(是)·비(非)·오(誤)·정을 따져보지 않고 각종의 진서(眞書)·위서(僞書)·와언(訛言)·정언(正言)을 모두 재료로 삼고, 양문(洋文)의 형식으로 편장(篇章)을 갈라 신사학자가 지은 조선사라 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라고 질타하였다.
  「평양패수고」는 조선 문명의 발원지로서 고삼경(古三京)의 하나인 평양과 칠대강(七大江)의 하나인 패수(浿水)가 오늘날의 평양과 대동강으로 혼동되는 것을 비판하며, 그 착오된 이유를 지적하고 고평양(古平壤)=해성(海城), 고패수(古浿水)=한간락(蓒芉濼)으로 위치를 비정한 것이다. 먼저 단재(신채호)는 시대별로 위치를 달리한 ① 삼조선시대의 평양, ② 삼국과 동북국 양시대의 평양, ③ 고려 이후의 평양 등 세 개의 평양이 존재하였다고 하였다. 그는 고려 이후의 평양은 오늘날의 평양이나 고평양, 즉 삼조선시대 평양 위치의 변증은 지난한 문제로서 조선의 선유나 최근 일본학자들까지 많은 노력을 기울였으나 아직 확인하지 못하였다고 하였다.
  단재(신채호)는 고평양을 찾지 못한 이유를 찾는 방법이 착오되었다고 하며 다음의 네 가지를 지적하였다. 첫 번째 착오는 평양과 패수의 의의를 해독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그는 평양(平壤)·평양(平穰)·평나(平那)·변나(卞那)·백아(百牙)·낙랑(樂浪) 등은 성(城)을 이르는 것이고, 패수와 패하 등은 강을 이르는 것으로 문자는 다르나 가음(假音)은 ‘펴라’로서 동일한 것이라고 하였다. 즉, 음성학적인 방법을 동원하여 음의 독해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이다. 두 번째 착오는 평양과 패수의 고전에 관한 사책의 본문을 선해(善解)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그는 『위략』과 『사기』의 조선열전과 흉노전에 수록된 동일한 사실의 기사를 대비 분석하여 ‘이천여리’가 상곡(上谷)부터 요양(遼陽)까지이며, 왕검성인 험독(險瀆)은 오늘날의 해성(海城)이 명백하다고 밝혔다. 세 번째 착오는 위조된 문자를 고핵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단재(신채호)는 중국 사책은 거의 독특한 병적 심리인 자존성이 있는 춘추필법 계통자의 저작인 고로, 특히 자신들과 관계된 전쟁이나 영토문제의 경우는 위조가 심하여 믿을 수 없으며 그 대표적인 것으로 사마상여(司馬相如)의 저작이라는 『무릉서(茂陵書)』와 『한서』 지리지에서 낙랑군이 위조된 부분을 들었다. 네 번째 착오는 고사를 읽을 때에 전후의 문례를 모르고 자구의 문의만을 억해하여 위증한 기록을 발견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단재(신채호)는 그 대표적인 사례로서 『한서』 지리지 요동군의 ‘험독(險瀆)’ 주(註)를 잘못 해석한 『동사문답(東史問答)』·『아방강역고(我邦疆域考)』·『해동역사(海東繹史)』를 ‘천하의 소화(笑話)’라고 비판하였다. 그는 이를 ‘풍인(瘋人)의 해석’으로서 ‘세인이 모착(模捉)할 수 없는 비지리(非地理)의 지리(地理), 비역사(非歷史)의 역사(歷史)’라고 신랄히 비판하였다.
  단재(신채호)는 조선 문명사상 중요한 지방인 평양과 패수가 천여 년 동안 천 여리나 떨어진 평안도의 소지방으로 출계(出系)한 것은 ‘위증한 서적의 작얼(作孼)’에도 원인이 있으나, 첫째, 동북 양국이 대치하다가 북국이 거란과 여진에게 멸망하여 종족이 전멸되고 토지도 잃는 등 조선 민족이 대외적으로 실패함으로써 평양과 패수란 이름을 보전치 못하였고, 둘째, 조선 문헌이 결망하고 위증된 중국사서가 일세에 횡행한 결과라고 진단하였다. 특히 그는 중국사서 중 위증의 문자를 조작한 것은 당 태종과 안사고(顔師古)가 조선의 강성과 문명을 시기하여 손 댄 『한서(漢書)』와 『진서(晋書)』가 가장 심하며 『남제서(南齊書)』와 『수서(隋書)』 등에서도 당 태종이 조선 관련 기사를 도말(塗抹) 혹은 개찬(改竄)한 것이라고 의심하였다. 뿐만 아니라 일본인 관야정(關野貞)이 『조선고적도보(朝鮮古蹟圖譜)』에서 열수(列水)를 대동강으로 비정한 것도 『한서』 지리지의 위증을 몰랐기 때문에 착오한 것이라고 하였으며, 본서 중 어떤 말은 학자의 견지에서 나왔다느니보다 정치상 모종의 작용이 적지 않다고 식민사학적 성격을 날카롭게 지적하였다.
  그는 예전의 평양과 패수가 오늘날의 평양과 패수가 된 것은 첫째, 조선 고대에는 동일한 두 개나 두 개 이상의 지명을 짓고 남북 등을 붙여 구별하였다는 설과, 둘째, 선민(先民)이 국도나 인민을 천사(遷徙)시킬 때 지명까지 함께 옮겼으니 해성(海城), 한간락(蓒芉濼)의 ‘펴라’에서 평양, 대동강으로 옮기고 ‘펴라’라 칭하였다는 설이 있다고 소개하였다.
  본고에서 특히 주목되는 것은 남북 양 낙랑설=남북 양 ‘펴라’ 설이다. 그는 한사군의 위치도 천사무상(遷徙無常)하였기 때문에 낙랑군 수부(首府)도 해성(海城)에만 고정되지는 않았으나, 요동(遼東) 이외를 벗어나지 않았기 때문에 『삼국사기』에 기재된 낙랑국을 낙랑군으로 혼동해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그는 낙랑과 평양은 모두 ‘펴라’의 가자(假字)이나, ‘남(南) 펴라’는 평양이라 쓰고, ‘북(北) 펴라’는 낙랑이라 썼는데, 낙랑이 멸망한 뒤로는 평양만을 사용하였으니, 양자는 격절(隔絶)한 관계라는 것이다. 곧 단재(신채호)는 남에 있던 평양과 패수는 낙랑국 또는 평양성이라 불리며 대동강상에 고정되었으며, 북에 있던 평양과 패수는 낙랑군이라 불리며 군치(郡治)가 요동부터 요서, 요서부터 상곡(上谷)까지 이동한 것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전후삼한고」는 사료 비판을 통하여 진번막(眞·番·莫) 삼조선(三朝鮮)을 기준(箕準)이 남천(南遷)하기 이전 북방에 있던 신·불·말의 전삼한(前三韓)·북삼한(北三韓)으로, 마한·변한·변진은 전삼한의 후신으로 유민들이 남하하여 이룩한 후삼한·남삼한으로 규정한 논문이다. 본 논문의 구성을 보면 논지가 명확히 드러나는 바, 목차는 다음과 같다.

一. 인용서(引用書)의 선택(選擇)
  (一) 인용서의 진위 판별
  (二) 조선 고사의 잔결(殘缺)
  (三) 중화사가의 조선에 관한 기록
  (四) 조선인 기록으로 중화사책(中華史冊)에 초록된 삼국지의 조선 사실
  (五) 삼국지 조선에 관한 기록 전부를 신용할 수 없는 조건
  (六) 삼한에 관한 기록
二. 전삼한, 삼조선의 전말
  (一) 삼한의 소출자(所自出)
  (二) 삼한은 곧 삼조선
  (三) 전삼한의 명칭
  (四) 전삼한 창립자 단군
  (五) 전삼한의 강역과 연대
三. 후삼한 - 삼국지에 보인 나가제(羅·加·濟) 삼국
  (一) 후삼한 고증에 대한 선유의 오류
  (二) 중삼한의 약사
  (三) 후삼한 - 나가제(羅·加·濟)의 역사
  (四) 후삼한의 호상관계
  (五) 후삼한과 병립한 열국
  (六) 후삼한과 낙랑대방의 관계
  (七) 후삼한과 북방 제국의 언어

  본고는 단재(신채호)의 역사연구 자세와 방법을 잘 보여주는 것으로 철저한 사료 비판에서 출발하였다. 그는 사료를 인용하기 위해서는 선택과 판별을 통해 가치를 성찰해야 하며, 우리의 고사가 잔결하여 중국 사료에 의존해야 하는 실정이나, 존화양이·상내약외(詳內略外)·위국휘치(爲國諱恥) 경향이 있는 중국사서 중 『삼국지』가 관구검이 탈취해 간 고구려 기록에 기초하여 작성된 것이므로 조선과 관련된 기록 중 믿을 만하나, 이 또한 조선본위의 조선사가 아니라 사이전(四夷傳) 가운데 부록하는 것이었으므로 소략하다고 비판하였다. 또한 그는 『삼국지』의 조선 관련 기록을 전적으로 믿을 수 없는 이유로 첫째, 중국 사가들의 타국에 대한 병적 심리로 인해 망설이 많아 편신(偏信)할 수 없고, 둘째, 당 태종이 고구려를 침략할 때 자기 신민에게 적개심을 고취시키기 위해 조선에 관한 기록을 도개(塗改)하였기 때문에 그대로 존신(尊信)할 수 없으며, 셋째, 도자(倒字)·오자(誤字)·누자(漏字)·첩자(疊字) 등이 많음을 들었다.
  단재(신채호)는 전삼한(前三韓)의 존재를 밝히지 못한 한백겸의 실착을 지적하며 『삼국사기』·『위략』·『삼국지』 중 전삼한의 기록을 예시하였다. 그는 단군·기자·위만을 삼조선이라 한 『고려사』의 기록을 비판하고, 진번막(眞番莫)을 삼조선이라 주장하며, 진·번·막은 신·불·말 삼국의 뜻이요, 진·변·마는 신·불·말 삼왕의 뜻이라고 하였다. 다만 이들이 다르게 쓰인 것은 이두문을 한자로 취용하는 과정에서 비롯된 것이라 하였다.
  또한 그는 전삼한의 개창자는 ‘단군(檀君)’이 아니라 ‘단군(壇君)’이며, 이를 소도(蘇塗)인 ‘수두’의 뜻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님금’은 신단(神壇) 주제자(主祭者)를 일컬음이요, ‘신한’은 정치 원수를 일컬음이니 단군왕검은 신단 주제자가 정치 원수의 직권을 병유(幷有)한 시기를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하였다.
  단재(신채호)의 전삼한설에서 특히 주목되는 것은 그 강역의 비정이다. 단재(신채호)는 ‘번조선’(불한)은 요하 이서와 개원(開原) 이북으로, ‘막조선’(말한)은 마한의 전신으로 압록(鴨綠) 이동, ‘진조선’(신한)은 요동반도와 길림 등지로 비정하되, 삼조선은 별개의 국가가 아니라 ‘신한’의 통치하에 약간의 구별을 가진 국가라 하였다. 이 견해는 우리 역사 발전의 무대를 만주의 요동과 요서 등 동북지방으로 크게 확대시킨 것으로서, 유학자들에 의한 전통사학과 침략적 식민사학에서 설정한 한민족사의 범주와는 확연하게 차이가 나는 것이다.
  전삼한설을 주장한 단재(신채호)는 후삼한 고증에 대한 한백겸·안정복·정약용·한치윤·한진서 등 선유의 ‘3대 오류’로서 ① 후대의 것으로 개찬(改竄)의 광거(狂擧)를 한 『후한서』를 주요 자료로 삼고 더욱 중요한 『삼국지』는 보조 자료로 인용한 점, ② 당 태종의 예에서 알 수 있듯이 중국 사가들은 ‘종족적 편견’으로 자기들에 불리한 기사는 망산(妄刪)하였으나 이를 편신(偏信)한 점, ③ 해석상의 오류로서 이두자의 해석을 모르거나 중국 사료의 오류를 답습한 점 등을 들었다.
  그런데 단재(신채호)는 진번막(眞·番·莫) 전삼한이 멸망하고 나가제(羅加濟) 후삼한이 건설되기 이전에 존재하였던 준(準)의 마한과 진번 양국의 유민이 건설한 진한과 변진의 양 자치부락을 ‘중삼한’으로 개념화하였다. 즉, 그의 삼한설은 전·후삼한설이 아니라 전·중·후삼한설이라 할 것이다.
  한편 단재(신채호)는 『삼국지』 삼한전에 보이는 나가제(羅·加·濟) 삼한(후삼한)에 대한 강역·음의·연혁 등에 대하여 상세하게 논증하였다. 또한 전삼한 때에는 ‘신한’이 수위(首位)가 되고 ‘말한’과 ‘불한’이 보좌였으나, 후삼한 때에는 ‘말한’이 전삼한 때 ‘신한’의 위호(位號)를 지니고 칠십여 국의 공주(共主)가 되었다고 하였다고 상관관계를 파악하였다. 또한 그는 『삼국지』에 후삼한과 병립한 열국으로 기록한 부여·고구려·옥저·읍루·예 등 5국을 설명하며 사실은 그리 핍절(逼切)한 관계가 적었다고 하며 오히려 관계가 밀접했던 낙랑과 대방을 빠뜨렸음을 결점으로 지적하였다.
  단재(신채호)는 ‘낙랑국’과 ‘낙랑군’을 분명히 구별하였다. 즉 ‘낙랑국’은 평안도에 할거하던 최씨 왕조로서 마지막 왕인 최리(崔理)가 고구려에 망하자 그에 소속된 수십 소국이 고구려에 불복하고 한(漢)과 통하여 한(漢)의 세력이 낙랑에 침입하였으나 한의 관리가 파견되거나 조령(詔令)이 미친 것은 아니라고 하였다. 그러나 낙랑군은 요동에 허설(虛設)되었던 군명(郡名)으로서, 그 아래의 제현 또한 허설된 것이라고 해석하였다. 대방군 또한 최씨 멸망 후 일시 존재하던 소왕국이었으나, 한왕들이 이를 따라 요동에 허설한 것이라고 하였다.
  마지막으로 단재(신채호)는 ‘가장 가경(可驚)할 사실’로서 경상도의 신라, 경기·충청도 등의 백제, 강원도의 예, 평안도의 고구려와 낙랑, 함경도의 옥저, 길림·봉천·흑룡 등지의 부여와 고구려가 동일한 언어로 통일되었음을 들었다. 비록 소부분인 읍루만이 언어가 좀 달랐으나, 만청(滿淸)과 조선의 고어가 상통하므로 큰 차이는 아니라고 하였다. 또한 단재(신채호)는 언어의 통일과 함께 사료 상에 나타난 관제와 풍속의 유사함도 강조하였다. 이는 단재(신채호)가 언어·관제·풍속을 통해 한민족 상고사의 범위를 규정하였을 뿐만 아니라, 이들 지역을 회복하여야 할 다물의 대상으로 설정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결국 「전후삼한고」는 부족과 지명 이동설을 차용하여 제시한 것으로서, 당시 정적이고 평면적인 삼한의 이해를 동적이고 입체적으로 발전시킨 것이라 할 수 있다. 그의 견해는 실증적인 측면에서 문제로 지적되는 부분도 있으나, 민족사의 진폭과 외연을 확대시키고 이후 민족주의 사학을 선도하였다는 점에서 의의가 매우 큰 것이다.
  「조선역사상일천년래제일대사건」은 낭가사상의 관점에서 묘청의 ‘서경전역(서경천도운동)’이 지니는 역사적·사상적 성격과 의의를 규명하고, 『삼국사기』의 사대주의 사관을 비판한 논문이다. 그 구성은 다음과 같다.

一. 서론
二. 낭유불 삼가의 원류
三. 낭유불 삼교의 정치상 투쟁
四. 예종과 윤관의 대여진전쟁
五. 묘청과 윤언이의 칭제북벌론의 발생
六. 묘청의 광망한 거동 - 서경의 거병
七. 묘청의 패망과 윤언이의 말로
八. 본 전역후 삼국사기 편찬
九. 삼국사기가 유일한 고사된 원인
十. 결론

  단재(신채호)는 민족의 성쇠는 사상의 추향에 달린 것이고, 사상의 추향은 모종 사건에 영향을 받는 것이라고 전제하고, 조선 근세에 종교·학술·정치·풍속 등 각 방면에 사대주의 노예성을 산출한 것은 묘청의 서경전역(서경천도운동)이 김부식에게 패배한 것이 원인이라고 지적하였다. 그는 이 사건의 성격에 대한 기존의 견해를 근시안적 관찰이라고 비판하며 ‘조선역사상일천년래제일대사건’이라고 규정하였다.

  “…서경전역(묘청의 서경천도운동)을 역대 사가들이 다만 왕사(王師)가 반역(叛逆)을 친 전역(戰役)으로만 알고 있을 뿐이나, 이는 근시안적 관찰이다. 그 실상은 이 전역이 즉 낭불(郎佛)양가 대 유가(儒家)의 전이며 국풍파(國風派)대 한학파(漢學派)의 전이며 독립당대 사대당의 전이며, 진취사상대 보수사상의 전이니, 묘청은 곧 전자의 대표요, 김부식은 곧 후자의 대표였던 것이다. 이 전역에 묘청 등이 패하고 김부식이 승하였으므로 조선사가 사대적 보수적 속박적 사상 - 유교사상에 정복되고 말았거니와, 만일 이와 반대로 김부식이 패하고 묘청 등이 승하였더라면 조선사가 독립적 진취적 방면으로 진전하였을 것이니 이 전역을 어찌 일천년래제일대사건이라 하지 아니하랴.…”

  그는 화랑은 본래 소도(蘇塗) 제단의 무사로서 ‘선비’라 칭하던 자였으나, 고구려에서는 조의(皁衣)를 입어 ‘조의선인(皁衣仙人)’이라 불렸고, 신라에서 미모를 취하여 화랑이라 하고 국선·선랑·풍류도·풍월도라고도 불렀다고 하였다. 그는 최공도·노공도 등은 화랑의 원랑도·영랑도를 모방한 것이며, 학교의 『청금록(靑衿錄)』은 화랑의 풍류 『황권(黃卷)』을 모방한 것이라고 예시하며, 고려 초와 중엽까지 화랑의 유풍이 남아 있었으나, 사가의 필삭을 당해 전해지지 않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단재(신채호)는 고려시대에 화랑사상을 실행하려던 대표적 인물로 여진정벌을 시행한 예종과 윤관을 들었고, 그 이후의 칭제북벌론자로서 윤언이·묘청·정지상을 들었다. 그런데 단재(신채호)는 칭제북벌론자로서 묘청보다 윤언이를 먼저 꼽았으며, 묘청의 광망한 행동은 책망하면서도 윤언이가 평양 천도에 반대한 것은 탁견이며 묘청의 광망한 거동에 동참할 수 없었던 것이라고 윤언이를 옹호하며 긍정적으로 서술한 것은 주목되는 부분이다.
  단재(신채호)는 본고에서도 2장에 걸쳐 김부식을 비판하는 것으로 마무리하고 있다. 그는 『삼국사기』가 소략한 것은 병화로 인해 사료가 소실된 것이 아니라 김부식의 사대주의가 사료를 분멸(焚滅)한 것이라고 지적하였다. 그는 김부식의 ‘이상적 조선사’는 ① 조선의 강토를 줄여 대동강이나 한강으로 국경을 비정하고, ② 조선의 제도·문물·풍속·습관 등을 모두 모두 유교화하여 삼강오륜의 교육이나 받고, ③ 정치란 외국에 사신 다닐만한 비열한 외교의 사령이나 담임할 사람을 양성하여 동방군자국의 칭호나 유지하려는 것으로 개념화 하였다. 이어 그는 김부식이 『삼국사기』를 저술 할 때 그 주의에 합당한 사료만 부연찬탄(敷演讚嘆)이나 개작하며, 합당하지 않는 사료는 논폄도개(論貶塗改)나 산제(刪除)하였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그 근거로서, ① 부여와 발해를 발거(拔去)함, ② 백제의 위례를 직산이라 하고, 고구려의 주군을 태반이나 한강 이남으로 옮기고, 신라의 평양주(平壤州)를 삭제하여 북방 강토를 외국에 할양함, ③ 조선의 고유한 사상으로 발전한 화랑의 성인인 영랑(永郞)과 부예랑(夫禮郞) 등은 성명도 기재하지 않고 도당 유학생으로 거의 당에 동화한 최치원 등을 숭배함, ④ 당과 혈전한 부여복신(扶餘福信)은 열전에 올리지 않고 투항한 흑치상지(黑齒常之)를 특재(特載)함 등을 들었다. 그는 김부식에게 가장 산삭(刪削)을 당한 것은 유교도의 사대주의에 정반대되는 독립사상을 지닌 낭가의 역사라고 하였다. 그러나 김부식이 화랑의 역사를 전삭치 못한 것은 중국사를 존중한 결과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였다.
  단재(신채호)는「삼국지 동이열전 교정」등에서 『삼국사기』가 유일한 고사가 된 원인을 지적한 바 있으나, 본고에서는 그 원인으로 다음과 같은 구체적 사건을 제시하였다. 첫째, 서경전역(묘청의 서경천도운동) 이후에 윤언이·정지상 등이 처형당하였고, 『삼국사기』 편찬 이후에 모든 사료가 궁중에 비장되어 타인의 열람을 금함으로써 국풍파의 사상전파를 금지함, 둘째, 몽고의 압제를 받을 때 태조 이래의 실록이 허다하게 찬삭되는 등 정치 이외의 압박을 당하며 궁중에 비장된 고사가 더욱 심장(深藏)하게 됨, 셋째, 조선 창업 이후에도 『삼국사기』 이외의 역사를 공포할 의지가 없어 ‘송도(松都)의 비장(秘藏)이 한양(漢陽)의 비장(秘藏)’으로 될 뿐이며, 『고려사』가 세종에 의해 일부가 원문대로 회복되었으나, 결국은 『삼국사기』의 서법을 봉승(奉承)한 정도전의 『고려사』가 원본이 되었기 때문에 고려의 가치 있는 사료도 비장됨, 넷째, 조선에서는 전대사까지도 관사(官史)나 준관사(準官史) 이외에는 마음대로 보거나 쓰지 못하는 괴습이 있어 역대 경복궁에 비장되어 온 고사가 임진왜란의 병화로 소실되고 만 것이라고 하였다. 다만, 『삼국유사』가 전해지는 것은 『삼국사기』를 모방하여 사대주의 사관과 충돌하지 않은 결과에 불과한 것으로 해석하였다.
  곧 단재(신채호)는 우리나라의 사상계가 낭가의 독립사상과 유가의 사대주의로 분립되어 오던 중, 묘청의 광망한 거동과 패망으로 사대주의 천하가 되고 말았으며, 몽고의 압제를 경유하며 더욱 유가의 사대주의가 득세하고, 조선도 사대주의로 창업되어 낭가는 아주 멸망해 버린 것이라는 탄식으로 결론을 맺었다.

 Ⅳ. 『조선사연구초』의 사학사적 의의

 1929년 6월, 홍명희 등의 주선으로 단재(신채호)가 국내 신문에 발표한 논문 등 6편을 모은 『조선사연구초』가 조선도서주식회사에서 발행되었다. 『조선사연구초』의 발행 직후 문일평은「독사한평(讀史閑評)」에서 단재(신채호)를 ‘조선혼을 부르짖던 애국자’라 하며 독후감을 다음과 같이 피력하였다.

  “…이 사론이 일찍 조선 내에 있는 신문지를 통하여 실리게 될 때, 사계(斯界) 식자들 사이에 다대한 센세이션을 일으킨 것은 아직도 기억에 새로운 바어니와 그를 아끼는 친구들이 지금 그 사론의 몇 편을 다시 수습하여 단행본으로 출간한 것이 곧 이 『조선사연구초』이다.…단재(신채호)가 조선사를 통하여 조선혼을 부르짖던 것은 사실이다마는 단재(신채호)가 단재(신채호)된 소이(所以)는 그의 열정보다도 독특한 사안(史眼)에 있는 것이다. 그는 항상 보는 바가 빠르고 날카로와 거의 타인의 추급(追及)을 허하지 않는다. 기탄없이 말하면 그의 이론이 반드시 모두 긍계(肯綮)에 맞는지는 모르나, 또는 그의 연구가 반드시 모두 과학적이라고는 할는지 모르나, 그의 견식에 이르러서는 참으로 투철한 바 있으니 시(試)하여 이 『조선사연구초』를 뒤져보면 나의 말이 거짓 아닌 줄을 알 것이다. 그 중에 수습한 육편의 사론은 조선사를 연구하는 이로서는 누구나 한번 참고하지 않을 수 없다. 「이두문 명사 해석」 같은 것은 조선 고사를 개척하는 데 있어서의 한 비약(秘鑰)이 될 것이며, 「삼국지 동이열전 교정」 같은 것은 역사 저술하는 이의 가장 필요한 사료선택에 관하여 비판적 태도를 보여준 것이다.”(『조선일보』, 1929년 10월 15일자).

  한편 홍기문은 단재(신채호)의 순국 직후인 1936년 2월 28일부터 『조선일보』에 「조선 역사학의 선구자인 신단재(신채호)학설의 비판」 이란 제하로 7회에 연속하여 단재(신채호) 역사학에 대한 장문의 평론을 게재하였다. 이 평론은 홍기문이 ‘가친의 가장 가까운 친우요 또 나의 가장 경모하는 선배’인 단재(신채호)의 역사학에 대해 본격적이고 체계적으로 평가를 시도한 점에서 연구사적 의의를 지닌다. 또한 제명처럼 단재(신채호)의 관념론적 사관의 한계를 날카롭게 지적하면서도, 그를 조선역사학의 연구를 진흥시킨 선구자로서 조선 역사학의 개조라고 높게 평가하고 자리매김하였다.
  홍기문은 그의 부친 홍명희와 단재(신채호)의 절친한 관계로 인해 단재(신채호)를 잘 알고 있었다. 특히 단재(신채호)의 원고가 부친의 요청으로 신문에 연재되는 형편을 잘 알고 있었고, 자신이 직접 그 원고를 본 일도 있었다.

  “…신단재(신채호)의 저서는 기간(旣刊)으로 『이순신전』·『을지문덕』·『최도통』·『조선사연구초』 등이 있고 미간으로 『조선사』가 있을 뿐이다. 그 중에도 『이순신전』, 『을지문덕』, 『최도통』은 그의 초기 저작인 만큼 역사가로서 자기의 연구결과를 발표하기 위한 작(作)이 되지 못하니 오직 나의 비판 대상을 이루는 것은 『조선사연구초』와 『조선사』 양종에 지나지 않는다. 『조선사연구초』는 가친이 그의 원고를 청하여 온 것인바 나도 일찍이 그 원고까지 본 일이 있고 『조선사』는 그가 초하다가 던지고 간 원고를 모씨가 정리하여 본보에 연재하던 것이라는데 그조차 끝을 맺지 못하고 말았다. 그러므로 『조선사』는 모씨의 가필이 어느 정도 미쳤을까? 필자의 본의를 과연 손상함이 없었을까 등의 의문이 떠오르는 터로 그의 저작 중 완전히 신빙할 만한 것은 『조선사연구초』 일권에 한한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그러나 선배의 글을 정리하는 분으로서 그에 대한 경의로라도 근본적으로까지 임의로 가감을 행했을 리는 없을 것이다. 직접 그 분으로부터 정리에 대한 경과를 듣지 못한 것은 섭섭한 일로 남겨두고 그만치만 신빙해서는 무방하지 않을까 생각한다.…”(『조선일보』, 1936년 2월 28일자).

  즉, 홍기문은 단재(신채호)의 원고 중 『조선사연구초』는 타인의 가감이 없이 단재(신채호)의 본의를 잘 보여주는 신빙할 수 있는 원고라고 인정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홍기문은 단재(신채호)의 관념론 사학을 신랄히 비판하였다. 그는 단재(신채호)가 사상의 추향 여하가 민족의 성쇠를 결정한다고 하고, 모종의 사건이 그 사상 추향에 영향을 준다고 하며 묘청의 서경전역(서경천도운동)을 강조하고, 또한 역사를 아(我)와 비아(非我)에 대한 투쟁에 의한 심적 상태의 기록이라 서술한 『조선사』를 지적하였다. 특히 그는 아와 비아의 투쟁을 유사 이래 역사의 중요한 근간을 이루는 계급대립이라고 강조하며 이를 막연한 개념으로 심상하게 포섭시킨 단재(신채호)의 학설을 비판하였다. 홍기문은 이 같은 단재(신채호)의 사학은 종래 관념론사가로부터 한 발짝도 더 나아가지 못한 것이라고 혹평하였다. 그는 이 같은 역사관 아래서는 결코 진정한 역사를 찾을 수 없으며, 곧 이는 단재(신채호)를 위해 ‘근본적 불행’을 의미한다고 하였다.

  “…『조선사연구초』를 한번 보라. 만일 그것은 각 부문 단편 단편의 연구 논문을 모은 것으로 또 좀 다르다고 할진대 다시 『조선사』를 보라. 관구검의 내침 수·당의 공전(攻戰)을 말하기에 급급할 뿐 삼국시대의 경제생활 내지는 계급관계 같은 데로는 눈을 돌리지 않았다.…단재(신채호)와 같은 역사관 아래서는 진정한 역사가 찾아질 리 결코 없는 일이다. 이것은 그를 위하여 거의 근본적 불행을 의미한다.”(『조선일보』, 1936년 3월 1일자).

  홍기문의 단재(신채호)사학에 대한 비판은 철저한 유물론사학에 입각한 것이다. 즉, 홍기문은 역사의 원동력은 물질적 생산력에 있고, 유사 이래 역사는 계급대립의 역사라고 해석하는 유물론사학을 신봉하고 있었다. 따라서 그가 단재(신채호)의 관념론적 정신사학을 비판한 것은 당연한 일이라 할 것이다. 그는 단재(신채호)의 ‘자칭 과학의 관념론적 역사관’에 의한 역사를 “선민의 위세를 들먹여 조상의 거룩함을 자랑하고 그들의 자손 됨을 만족케 하는 역사”로 규정하였다. 그리고 단재(신채호)의 관념론적 역사관이 배타자존의 역사를 산출시킨 것이 아니라, 도리어 배타자존의 강렬한 감정이 끝내 관념론적 역사관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게 한 것이라고 평하였다. 또한 그는 단재(신채호)가 인류학·언어학·고고학·토속학(土俗學)·비명학(碑銘學) 등 보조과학에 대한 소양이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조선족의 동래(東來)’ 등에서 영역 비정의 독단을 범하였음을 지적하였다.
  그러나 홍기문은 단재(신채호)의 천품, 천재적 안광, 풍부하고 궁극적인 창견(創見) 등을 높이 평가하며 단재(신채호)를 조선역사학의 선구자로 자리매김하였다. 따라서 단재(신채호)의 학설을 무조건 신뢰해서도 안 되나, 단재(신채호)를 함부로 모멸하거나 비판해서는 안 된다고 주의를 환기시켰다.
  홍기문은 단재(신채호)의 『조선사연구초』에 수록 논문 중 특히 「고사상 이두문 명사 해석법」과 「삼국지 동이열전 교정」을 상세히 설명하며 높이 평가하였다. 그는 「고사상 이두문 명사 해석법」이 비록 문헌에만 치우치고 항목의 구별이 정밀하지 못하며 독단적인 부분이 있다고 지적하였으나, 이는 ‘백옥의 티’에 불과한 결함이라고 하며 단재(신채호)가 제시한 여섯 가지 해석 방법을 상세히 설명하였다. 또한 「삼국지 동이열전 교정」은 ‘역사학계의 막대한 보배’라고 극찬하며, 단재(신채호)가 자구의 교정에서 제시한 여섯 가지 사례를 설명하였다. 또한 그는 단재(신채호)가 중국사서와 『삼국사기』의 오류와 왜곡을 비판한 것도 긍정적으로 평가하였다. 특히 그는 단재(신채호)의 『삼국사기』 비판은 극도의 증오를 금치 못하여 가끔 어조의 격심함이 있다고 하면서도, 교정의 가치를 저하시키는 것은 아니라고 옹호하였다.
  결국 홍기문은 단재(신채호)를 역사학자로서는 불행히 실패하였으나, 거대한 사료고증학자나 문헌학자로서는 성공한 인물로 평가하였다. 즉, 단재(신채호)의 학설은 전적으로 동조하지는 않으나 그가 문헌고증과 해박한 역사적 지식을 통해 결론에 도달하는 역사연구와 해석의 방법론은 높이 평가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단재(신채호)의 『조선사연구초』를 비롯한 역사학에 대하여는 이후에도 많은 학자들의 평가가 있었다. 특히 단재(신채호)가 사거한 직후 많은 신문과 잡지들은 단재(신채호) 특집호를 기획하여 그를 추모하였다. 여기에는 단재(신채호)와 동시대를 살면서 교유했던 많은 인사들의 절절한 추모의 정이 잘 나타나 있다. 그 가운데에서 그를 ‘철혈주의를 부르짖은 주전론자’라 한 이극로의 평가는 그의 독립운동론을 잘 표현하고 있다. 특히 단재(신채호) 사학의 영향을 받은 정인보와 안재홍의 회고는 역사학자로서의 단재(신채호)의 위치를 명확히 설정하였다. 정인보는 단재(신채호)를 재·학·식의 삼장(三長)을 두루 갖춘 청구사가(靑丘史家)의 제일인자요 사학의 거벽이라고 평가하였다. 안재홍은 단재(신채호)를 조선사학의 선구자라고 평가하였다. 또한 변영로는 단재(신채호)를 국수주의의 항성, 조선의 랑케로 비유하였고, 원세훈은 단재(신채호)를 현 조선에서 유일한 사학가로 평가하였다.
  『조선사연구초』의 사학사적 의의는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첫째, 민족사 연구의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고 그 방법론을 제시하였다. 단재(신채호)는 국명·지명·관명 등에 표기된 이두문의 해석 방법을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이를 언어학과 음운학 등의 방법과 연계하여 민족사 연구의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였다. 이는 민족사 연구를 심화시키는 커다란 업적이라 할 수 있다.
  둘째, 민족사의 외연을 확장하고 진폭을 확대하였다. 단재(신채호)는 남북 양 낙랑설=남북 양 ‘펴라’설 및 전후 삼한설 등 독창적인 해석을 제시하였다. 또한 평양과 패수가 오늘날의 평양과 대동강으로 혼동되는 것을 비판하며, 고평양=해성(海城), 고패수=한간락(蓒芉濼)으로 위치를 비정하였다. 이로서 전통 유학사가에 의해 위축되고, 일제 식민사가에 의해 왜곡된 민족사의 강역과 범주를 회복하고 외연을 확대할 수 있었다.
  셋째, 민족사의 정신적 맥락을 낭가사상으로 설정하였다. 단재(신채호)는 묘청을 낭불가·국풍파·독립당·진취사상을 대표하는 인물로 평가하였으나, 그의 광망한 서경전역(묘청의 서경천도운동)의 거동이 오히려 유가·한학파·사대당·보수사상을 대표하는 김부식에게 패배함으로써 결국 낭가사상을 단절시키고 말았다고 개탄하였다.
  넷째, 근대 역사학에서 사료선택과 비판의 중요성을 제고하였다. 단재(신채호)는 중국사서가 중국인들의 존화양이·상내약외(詳內略外)·위국휘치(爲國諱恥) 필법으로 특히 그들과 관계된 전쟁이나 영토관계 기사는 위조와 개작이 심하다고 하며 사례를 제시하였다. 또한 거의 모든 논고에서 김부식이 『삼국사기』를 저술할 때 사대주의사관에 입각해 수많은 사료를 의도적으로 인멸하고, 민족사를 위축시켰다고 구체적 근거를 제시함으로써 역사연구에서 사료의 선택과 비판의 중요성을 일깨웠다.
  마지막으로 『조선사연구초』는 1920년대 단재(신채호) 사학의 성숙기를 대표하는 저술일 뿐만 아니라, 당시까지 민족주의 역사학의 연구 수준과 성과를 대표하는 저술로도 평가할 수 있다. 즉, 『조선사연구초』는 단재(신채호)를 ‘조선사의 열쇠’, 청구사학의 제일인자, 조선 역사학의 개조·선구자·거벽, 거대한 사료고증학자, 조선의 랑케로서 민족주의 역사학을 견인한 선구적 연구업적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제3권 역사
讀史新論
大東帝國史敍言
朝鮮上古文化史
愼鏞廈(신용하)|서울대 명예교수, 이화여대 석좌교수

  1.

  단재 신채호 선생은 이미 구한말에 『독사신론(讀史新論)』을 발표한 후 이어서 『대동제국사서언(大東帝國史敍言)』·『조선상고문화사(朝鮮上古文化史)』·『조선상고사(朝鮮上古史)』·『조선사연구초(朝鮮史硏究艸)』 그 밖에 다수의 역사 연구논문들을 집필하고 발표하여 한국근대사학을 근대민족주의사학으로 성립시킨 위대한 업적을 내었다.
  단재(신채호)는 해외에 망명하여 민족독립운동을 하면서 역사를 연구해서 집필하고, 별도로 간행은 국내에서 동지들이 했기 때문에 집필연도와 간행연도가 전혀 일치하지 않는다.
  집필 순서로 보면 『독사신론』이 1908년, 『대동제국사서언』이 구한말, 『조선상고문화사』가 1910년대(1915년?), 『조선상고사』가 1921~1924년이고, 그 밖에 다수의 논문들과 미간행 저서들이 1910~20년대에 집필되었다.
  그러나 간행발표는 『독사신론』(1908), 『조선사연구초』(1930), 『조선상고사』(1931), 『조선상고문화사』(1931~1932)의 순서로 간행되었고, 『대동제국사서언』은 간행되지 않았다.
  이번 『단재 신채호전집』 제3권에는 집필 순서에 따라『독사신론』(1908) →『대동제국사서언』(구한말) →『조선상고문화사』(1910년대)의 초기 저작 3책을 수록하고 이를 각각 해설하기로 한다.
  종래에는 단재(신채호)가 『독사신론』발표 후에 보다 정밀한『조선상고문화사』와 『조선상고사』의 큰 작품을 발표했기 때문에 그 내용의 분석에 치중하여 『독사신론』의 중요성을 충분히 인식하지 못하는 느낌이 있었다.
 『독사신론』은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에 1908년 8월 27일부터 12월 31일까지 연재된 저작으로서 애국계몽운동기에 사학계뿐만 아니라 전 문화계에 표현하기 어려울 만큼 큰 ‘충격’을 준 저작이었다. 이 저작의 착상과 내용은 그 이전의 역사서와 당시 역사교과서류 등과 대비해 보면 가히 ‘혁명적’인 것이었다.
 『독사신론』의 내용과 관점이 당시 일반적으로 통용되던 관점과는 너무나 다른 것이어서 신채호가 1910년 4월 국외로 망명한 후 최남선(崔南善)이 이를 잡지 『소년(少年)』에 전재하면서『국사사론(國史私論)』이라고 이름 붙여 ‘사론’임을 강조할 만큼 그것은 당시의 통념적 국사관에서 볼 때 ‘이단적’이고 또 ‘혁명적’인 것이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또한 『독사신론』은 종래의 구사(舊史)와는 전혀 다른 최초의 ‘신역사’였다. 단순화시켜서 표현하면 우리나라의 근대민족주의 국사학의 체계화는『독사신론』에서부터 시작된다고 말할 수 있다.
  단재(신채호)가 1908년 시급하게『독사신론』을 집필하여『대한매일신보』를 통해 발표한 동기로서는 다음 세 가지를 들 수 있다.
  첫째, 아직도 중세유학의 영향을 다 벗어버리지 못한 다수의 국사서들은 ‘존화사관(尊華史觀)’·‘소중화사상’·‘사대주의’에 빠져 중국(지나)을 주인으로 하고 자기 나라를 객(客)으로 하여 주객을 거꾸로 한 역사를 서술하고 있다는 점.
  둘째, 일본 역사가들이 우리나라 역사에 대한 사실을 왜곡하여 무설(誣說)을 퍼뜨리고 있는 점. 예컨대 ㉠ 한반도는 항상 북방 제 민족의 세력, 서로 지나(중국)의 세력, 남으로 일본의 세력이 교충(交衝)하는 지점이어서 한국 민족은 북·서·남의 강한 민족에 복속하여왔다는 무설 ㉡ 소위 일본의 ‘신공황후(神功皇后)’가 신라를 침공하고, 가야(伽倻)에 소위 ‘임나일본부(任那日本府)’를 설치했다는 무설…등 초기 식민주의사관을 지어 퍼뜨리고 있는 점.
  셋째, 한국인이 지은 근대 국사서 또는 ‘역사교과서’까지도 자기 민족의 기원과 진화과정을 밝히지 못하고, 어떤 교과서는 아직도 존화사관에 젖어 있거나 또는 일본 사학의 무설을 받아들여 자기 민족의 역사를 주체적으로 정립하지 못하고 있는 점.
  역사를 국권회복을 위한 애국심 배양의 첫째가는 부문이라고 보는 신채호의 역사민족주의와 역사는 민중의 애국심과 민지를 계발하는 학문이 되어야 한다는 신채호의 애국계몽사학의 관점에서 보면, 이러한 중세적 역사서들이나 비주체적 국사서들을 완전히 극복하여 추방시켜 버리고 국권회복을 위하여 애국심이 저절로 우러나와서 배양되고 용솟음치며, 한국 민족의 기원과 진화과정을 당당하게 밝히는 ‘신역사’를 쓰는 것이 국권회복과 민족의 영구한 발전을 위하여 가장 긴급하고 중요하며 절박한 과제로 인식된 것이었다.
  신채호는 스스로 이 과제를 수행하는 것을 자기의 사명으로 삼았다. 그는 자기의 근대 시민적 민족주의·애국계몽사상에 의거하여 ‘신역사’를 쓰려고 하였다. 이렇게 해서 그 화급한 요청에 응하여 쓰여진 것이 『독사신론』인 것이다.
  현재 일부 역사학자들은 아직 신채호의 『독사신론』이 갖는 중요성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거기에는 약간의 이유가 있다고 보여 진다.
  첫째, 단재(신채호)가 『독사신론』이후에 『조선상고사』(『조선일보』, 1931년 6월 10일~10월 14일까지 103회에 걸쳐 연재됨)와『조선상고문화사』(『조선일보』, 1931년 10월 15일~12월 31일까지 그 일부가, 그리고 나머지는 1932년 5월 27일~5월 31일까지 40회에 걸쳐 연재됨)의 보다 정밀하고 고증적인 대작을 썼기 때문에 그 내용의 평면적 비교분석에 치중한 결과 『독사신론』의 중요성이 가려져서 그것이 갖는 역사적 의미를 충분히 인식할 수 없기 때문인 점이 하나의 이유가 될 것이다.
  둘째, 『독사신론』이 통상적 교과서와는 달리 ‘사론적(史論的)’ 신국사서(新國史書)이기 때문에 ‘고증’에 전혀 치우치지 않고 사론적 국사서의 성격을 띠고 있기 때문이다. 이른바 ‘고증사학’의 엄격성과 과학성의 한 면만을 보고 역사의 다른 한 면의 본질을 외면하는 입장에서는 『독사신론』은 경시되기 쉬운 것이 하나의 이유가 될 것이다.
  셋째, 『독사신론』이 ‘미완성’ 작품이기 때문이다. 당시 다른 국사교과서들이 대체적으로 고대부터 조선왕조 말기까지의 역사를 시기적으로 일단 다룬 데 비하여『독사신론』은 발해 문제까지 다루고 미완인 채 연재가 중단되었다. 이 점도『독사신론』의 중요성을 충분히 인식할 수 없게 한 요인으로 작용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우리는 ‘사서’에 대해서까지도 일관되게 역사주의적 고찰을 할 필요가 절실함을 강조하고 싶다. 『독사신론』이 1908년경에 국사학과 국권회복운동에 미친 영향 및 공헌과 『조선상고문화사』와 『조선상고사』가 1931~1932년의 국사학과 독립운동에 미친 영향 및 공헌은 현저하게 다른 것이며, 각각 그 시대의 학문적 발전 조건과 사회적 조건에 관련하여 고찰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단재(신채호)의 『독사신론』이야말로 근대국사학을 창건한 저작이라고 볼 수 있다.
 『독사신론』은 사론적 저술이지만 학술적으로도 종래의 학설을 뒤집는 혁명적 새 학설을 다수 정립하여 제시하였다.
  예컨대 ① 부여-고구려 주족설(主族說), ② 단군-추장시대론, ③ 기자조선설 부정, ④ 기자일읍수위설(箕子一邑守尉說), ⑤ 만주영토설, ⑥ 초기 대일관계신론, ⑦ 임나일본부설 부정, ⑧ 삼국문화의 일본에의 유입설, ⑨ 초기 대북방민족관계 신론, ⑩ 초기 대중국관계 신론, ⑪ 삼국 흥망원인 신론, ⑫ 삼국통일 및 김춘추 비판론, ⑬ 발해·신라 양국시대론, ⑭ 김부식 비판론 등 새 학설들과 그밖에 작은 주제들에 대한 다수의 신해석들이었다.
  단재(신채호)의 『독사신론』은 부여족(고조선족)을 중심으로 하여 안으로는 조선민족이 형성되어 가는 진화과정을 밝히고, 밖으로는 사린의 타민족들과 어떻게 교섭과 투쟁을 전개해 왔는가를 밝히는 데 집중되어 있다. 따라서 그가 1924년의 『조선상고사』「총론」에서 이론적으로 정식화한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의 기록’으로서의 역사관은 이미 『독사신론』에서 실제로는 서술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신채호의 『독사신론』이 한국 근대민족주의 국사학 성립의 저작이 되는 이유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얻기 위하여 그 몇 가지 일반적 특징과 종래의 몇 가지 오해라고 생각되는 관점에 대하여 해설하려고 한다.
  첫째 신채호는 『독사신론』에서 처음부터 ‘민족주의’로 역사를 해석하고 있으며, 따라서 ‘민족주의 사관’이 수립되어 일관되게 발해시대까지의 국사를 ‘재해석’한 국사서임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즉 『독사신론』은 ‘근대민족주의’에 의거하여 국사를 해석하고 이를 통하여 독자들에게 근대민족주의를 보급·계몽하려고 의도한 새로운 국사서인 것이다.
  신채호가 누차 그 절박한 필요성을 강조한 ‘신역사’는 바로 새로운 ‘민족주의 사관’으로 해석된 역사를 의미한 것이었다.
  둘째, 신채호의 『독사신론』에서 다루어진 ‘신역사’의 단위 주체는 ‘민족’이었으며, 가장 역점을 둔 것이 ‘민족적 주체성’이었다.
  단재(신채호)가 다른 국사교과서들처럼 연대나 기술하며 인명·지명이나 기술하는 역사를 반대하고 ‘일정주의(一定主義)’·‘일관정신(一貫精神)’이 살아 있는 역사를 주장한 것도 ‘민족주의 사관’에 의거하여 ‘민족주체성’이 있는 역사서술을 강조한 때문이었다. 김춘추나 김부식이 ‘민적(民賊)’·‘공구(公仇)’로서 가혹한 비판을 받은 것도 신채호의 이러한 관점과 관련이 있는 것이다.
  셋째, 단재(신채호)의 『독사신론』에서의 민족주의 사관은 중세사학을 철저히 비판·극복하고 있다는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신채호는 예컨대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나 반고(班固)의 『한서(漢書)』… 등을 “일성(一姓)의 전가보(傳家譜)”로 밖에 보고 있지 않다. 또한 그는 왕조사를 철저하게 비판하여 소위 왕조의 정통을 따지며 공자의 ‘춘추’의리니 주자의 ‘강목’의리를 논하는 사학을 완루(頑陋)한 ‘구사’라고 비판하였다.
  단재(신채호)는 김부식이 우리나라 역사에서 발해국을 떼어내어 포기해 버린 것도 김부식이 고려왕조를 정통으로 만들고 당시의 자기 군주에게 아첨하기 위한 이유 때문이었다고 분석하고 ‘왕조사’의 폐해를 비판하였다. 신채호는 모든 종류의 중세사, 특히 춘추강목체사학을 ‘구사’라고 보고 있으며, 자기 시대는 ‘신안공(親眼孔)’으로 ‘신역사’를 써야 할 시대임을 극히 명확하게 자각하였고 주장했으며 실천하였다. 일부의 역사학도들이 한말까지는 단재(신채호)가 중세사학을 완전히 극복하지 못하였다고 보는 것은 매우 피상적인 관찰에 불과한 것이다.
  넷째, 단재(신채호)는 자신의 ‘근대민족주의 국사학’의 역사관을 이룬 민족주의의 ‘민족’의 구성요소로서 언어·종족(또는 혈연공동체)·국토(토지)… 등을 가장 중요시하였다. 이 중에서 신채호는 『독사신론』에서 언어의 문제는 자명한 것으로 보아 다루지 않았다. 그가 이 저작에서 심각하게 다룬 것은 종족과 국토의 문제였다.
  단재(신채호)의 『독사신론』은 주로 고대사를 다루다가 중단된 저작이기 때문에 다수의 부족국가들의 인종문제 또는 부족문제에 부딪쳤다. 널리 아는 바와 같이 고대에는 근대에서와 같은 ‘민족’이 형성되지 않았기 때문에 누구든지 고대사를 연구하고 기술하려 할 경우에는 이 문제에 부딪치게 마련인 것이었다. 신채호는 고대사에서의 이 문제를 ‘주족’과 ‘객족’으로 구분하고 한국민족을 형성한 주종족으로서 ‘부여족’을 제시하여 그 계통으로서 ‘부여-고구려 주족론’을 제기함으로써 이를 해결하고자 하였다. 즉 한국민족의 기원을 부여족에서 구하고 그것을 한국민족의 고대의 대명사로 쓰면서 부여족이 ‘토족’을 정복·흡수하여 고대국가를 수립·발전시키는 과정과 ‘객족’인 선비족·지나(중국)족·말갈족·여진족과의 ‘투쟁’과정에서 진화해 나가는 과정을 밝히려고 한 것이다.
  단재(신채호)가 이 경우에 ‘부여족’을 한국민족 고대의 주종족으로 선택하고 부여족을 한국민족의 고대 대명사처럼 사용한 이유는 부여·고구려가 가장 강성했으며 다른 민족(객족)과의 투쟁과정에서 여러 차례 빛나는 승리를 쟁취하고 고대 동아시아에서 가장 강대한 고도의 문명국가를 수립하여 다수의 고대 동아시아 부족들을 지배했으며 강대한 중국민족과 어깨를 나란히 하여 경쟁하고 중국민족의 대규모 침략을 여러 차례 패배시킨 사실과 관련된 이유 때문이라고 해석된다. ‘사회진화론’을 그의 역사학의 이론적 배경으로 한 신채호에 있어서는 고대에서 가장 강성한 종족이 주종족으로 중요시된 것은 당연한 논리였다고 볼 수 있다.
  단재(신채호)의 이러한 견해는 오늘날의 사회과학적 민족형성론이나 역사적 사실의 연구결과와 완전히 부합되는 것은 아니다. 그의 ‘부여-고구려 주족론’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견해는 한편으로는 당시의 지배적인 시민적 사회과학인 사회진화론의 논리, 즉 강대한 종족의 정복에 의한 고대 문명국가 형성론을 그 이론적 배경으로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자기 시대의 자주부강한 민족독립국가 건설을 열망하는 그의 민족주의 이데올로기가 투사된 것으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라고 본다. 그는 이러한 작업을 함에 있어서 사회진화론에 의거한 진화사관을 수립하여 적용했으며, 인류 역사가 국가생활의 발달의 측면에서는 ① 추장시대 ② 귀족시대 ③ 전제시대 ④ 입헌시대의 단계를 거쳐 발전한다고 보았다.
  여기서 지적해두어야 할 것은 일부의 역사학도들이 단재(신채호)의 ‘부여-고구려 주족론’이나 ‘주족(主族)-객족(客族)’ 구분론을 두고 신채호가 중세유가적 정통론을 벗어나지 못했다고 보는 것은 피상적이고 부정확한 관찰이라는 사실이다. 신채호의 ‘부여-고구려 주족론’ 등은 주자학적 정통론에 의거하여 나온 학설이 아니라 시민적 사회과학인 사회진화론과 시민적 근대민족주의 사상에 의거하여 나온 것이었다. 또한 그의 ‘주족-객족’ 구분론은 본질적으로 시민적 근대민족주의에 기초한 강렬한 ‘민족적 주체성’을 역사서술에 투사한 것이었다고 해석되어야 할 것이다.
  다섯째, 단재(신채호)의 『독사신론』에 나타나고 있는 민족주의 사관은 ‘국토’ 문제에 있어서 만주를 시종일관하여 한국민족 형성의 구성요소 안에 포함하는 큰 특징을 갖고 있다. 그에게 있어서 만주는 우리 국토의 일부이며 한국민족 구성요소의 한 부분인 것이었다. 신채호가 이같이 만주를 우리 민족의 국토로 본 사실은 상호보완적으로 그의 고대 사관과 고대사의 구성에 심대한 영향을 끼쳤다고 볼 수 있다. 그의 ‘부여-고구려 주족론’이 만주를 우리 국토로 발견하게 함과 동시에 만주를 국토로 보는 관점이 부여-고구려 주족론에 대한 그의 입론을 더욱 강화시켰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이러한 관점은 한국 고대사의 영역과 주 무대를 지리적으로 반도로부터 만주의 넓은 대륙 벌판으로 옮겨놓는 작용을 했으며, 우리나라 고대사를 더욱 웅장하게 만들게 하였다.
  단재(신채호)의 이러한 관점은 또한 그 후 김춘추의 삼국통일에 대한 비판적 관점을 정립하는 데도 크게 작용했다고 볼 수 있으며, 또한 그 후 한국 역사에서 요동과 만주를 수복하려는 운동과 인물을 매우 높이 평가하고 중요시한 관점을 낳도록 했음에 틀림없다고 볼 수 있다. 최영을 한국 역사상 삼걸의 하나로 보는 신채호의 관점도 물론 이와 관련된 것이다. 신채호의 이러한 관점은 또 발해국을 재발견하여 국사에 편입하고, 통일신라시대와 고려 초기를 ‘양국시대’라고 보는 독특한 그의 사론을 정립케 하는 데 작용했다고 볼 수 있다. 발해를 국사에 편입한 것은 신채호가 처음은 아니고 유득공(柳得恭)의 『발해고(渤海考)』등에서 이미 볼 수 있는 것이지만, 한국 역사에의 발해의 중요성에 대한 신채호의 강조와 그 역사적 의미의 중요성에 대한 독특한 해석은 매우 강도가 높으며 이례적인 것이라고 보지 않을 수 없다.
  여기서 주의해 두지 않으면 안 될 것은 신채호가 만주를 우리 국토 안에 포함시켜 강조한 사실이 비단 고대사의 재구성에만 관련된 것이 아니라, 만주를 국권회복운동 기지로 설정하려는 신채호의 현실적 의도가 강력하게 투사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그는『독사신론』을 쓸 무렵 이미 만주 이주민들에게 만주가 한국 국토의 일부임을 설명하면서 그곳에서 민족문화를 간직하고 국권회복운동을 전개할 것을 계몽하였다. 
  여섯째, 신채호는 『독사신론』을 통하여 민중에게 ‘민족주의’·‘애국심’·‘민족적 자부심’을 교육하고 배양하려 하였다. 그는 역사가의 취미를 위한 역사가 아니라 나약한 자를 일어서게 하고 완매(頑昩)한 자를 깨우치게 하는 역사를 주장하였다. 이것은 바로 계몽사학의 강조였다. 그는 자기 시대의 모든 목표의 초점을 국권회복에 두었기 때문에 이를 위하여 ‘애국심’·‘민족주의’·‘자강’·‘용기’·‘영웅적 투쟁’·‘발분’을 고취하는 애국계몽 사학을 주장하고 강조하였다. 한편으로 ‘신국민’·‘애국심’·‘민중’이 강조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영웅’·‘위인’의 행적이 강조된 것은 이러한 민중계몽을 목적으로 한 신채호의 애국계몽사학의 특징 때문이었다.
  일부의 역사학도 중에는 단재(신채호)가 『독사신론』을 쓸 무렵에 몇 개의 영웅전을 쓴 사실과 그 내용에 주로 큰 인상을 받고 애국계몽운동기에 신채호는 ‘영웅중심 사관’에 빠져 있는 것이라고 보는 분들이 있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는 피상적 관찰이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단재(신채호)는 예컨대 양계초(梁啓超)의 『이태리건국삼걸전(伊太利建國三傑傳)』(1907)을 번역한 데 이어서 우리나라 역사상의 삼걸로 『수군제일위인이순신전(水軍第一偉人李舜臣傳)』(1908), 『을지문덕전(乙支文德傳)』(1909), 『동국거걸최도통전(東國巨傑崔都統傳)』(1909)을 썼다. 그러나 이들은 모두 민중에 대한 계몽과 교육을 목적으로 한 저작이었다. 정작 단재(신채호)의『독사신론』의 내용은 결코 영웅주의 사관에 지배되어 있지 않으며 오히려 시종일관하여 시민적 민족주의 사상에 입각한 민족주의 사관이 본질적으로 관철되어 있다.
  단재(신채호)가 영웅·위인들의 전기를 쓴 것은 당시 국권회복의 목적과 관련하여 한국의 국민들이 낱낱이 ‘신국민’들이 되고 청년들이 과거의 영웅·위인들의 행적을 학습해서 낱낱이 무수한 신영웅들이 되어 국권을 되찾는 데 영웅적 투쟁을 전개할 것을 계몽한 교육상의 목적 때문이었음을 거듭 지적하고 주의를 환기하고 싶다. 단재(신채호)가 정작 『독사신론』에서 때때로 논급하는 영웅에 대한 찬양은 시민적 민족주의 사학이 영웅의 역할을 주목하는 범위를 결코 벗어나지 않고 있다. 뿐만 아니라 단재(신채호)의 『독사신론』은 주로 고대사를 다룬 사서이다.
  단재(신채호)는 고대에는 한 나라의 원동력이 한둘의 영웅호걸의 지휘 여하에 달려 있었으나 자기의 시대에는 한 나라의 흥망은 국민 전체의 실력에 있고 한둘의 호걸에 있지 않으며, 만일 한둘의 영웅이 나와서 나라를 구제해주리라고 기대한다면 그것은 ‘미신’이라고까지 단언하였다.
  단재(신채호)는 여기서 고대에 있어서는 근대와는 달리 영웅호걸의 역할이 매우 큼을 강조했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고대사를 다룬 그의 『독사신론』에서 관점의 중핵을 이루고 있는 것은 영웅이 아니라 민족이며 관철되고 있는 것은 시민적 민족주의 사관인 것이다. 당시 국권회복을 목적으로 한 애국계몽운동기에는 그의 사관으로서의 민족주의 역사관과 교육목적의 영웅전기는 서로 모순되는 것이 아니었음을 주의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단재(신채호)가 『독사신론』을 쓴 애국계몽운동기에는 이미 신국사서가 다수 간행되어 널리 읽혀지고 있었다. 신채호가 이러한 신국사교과서들에 대하여 불만을 가졌던 측면은 영웅숭배라든가 고증이 부족한 점들이 아니라 바로 자신이 강조한 민족주의 역사관과 민족적 주체성이 부족하다고 본 점들이었다.
  일곱째, 단재(신채호)는 『독사신론』을 쓸 무렵에 이미 연대나 기술하며 인명·지명이나 기술하는 역사를 반대하고, ‘민족진화’의 상태를 기술하며 국가치란의 인과를 분석하는 역사를 주장하였다. 이것은 단재(신채호)가 역사의 근대과학화 또는 사회과학화를 주장하고 당시의 최신의 사회과학이론에 기초하여 역사를 과학적으로 해석하고 기술하려 했음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단재(신채호)가 『독사신론』에서 가장 많이 원용한 당시의 진보적 사회과학이론은 허버트 스펜서·벤자민 키드 등의 사회진화론과 서구의 지리환경영향론과 우리나라의 전통적 역사지리론을 종합하여 그 자신이 발전시킨 지리영향설 등이었다. 당시 사회진화론이나 지리영향설 등은 서구에서도 역사연구에 널리 원용되고 있던 대표적인 시민적 사회과학이론이었다.
  단재(신채호)는 사회진화론과 지리영향설의 큰 영향을 받고 역사에 있어서의 진화사관을 갖게 되었다. 그는 우리나라의 고대사 기술에서도 민족이 진화·진보해가는 과정을 서술하려고 노력하였다. 또한 그는 단순한 사실의 서술에 그치지 아니하고 당시의 사회과학이론에 기초하여 집요하게 사실의 인과분석을 추구하였다. 이 점이 신채호의 『독사신론』과 그 이전 및 동시대의 다른 국사서들과의 현저한 차이점이다. 신채호에 있어서는 고증은 역사서술의 준비단계이고, 인과분석을 하는 ‘해석’ 사학에 치중하여 『독사신론』을 씀으로써 한국에서 시민적 근대민족주의 사학을 성립시켰다고 볼 수 있다.
  여기서 필자가 한국에서 근대민족주의 국사학을 성립시킨 업적으로서 1908년의 『독사신론』의 역사적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은 1931~1932년에 간행된 그의 『조선상고사』와 『조선상고문화사』의 중요성을 경시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역사서에서도 우리는 역사주의적 고찰을 전개하여 각각 그 역사적·사회적 역할의 다름에 주목해야 함을 강조하여 지적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조선상고문화사』와 『조선상고사』의 기본 뼈대는 이미 『독사신론』에서 만들어졌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독사신론』은 그 내용과 역사관이 근대국사학을 성립시킨 선구적이고 혁명적인 ‘신역사’였기 때문에, 신민회 및 청년학우회 기관잡지로 역할하던 최남선 관리의 잡지 『소년』제3권 제8호(1910년 8월호, 이탈리아 재건영웅 카블 100주년 기념호)에「국사사론[國史私論(고대)]」이라는 제목으로 전재되었다. 당시 애국계몽운동가들과 선각자들이 『독사신론』을 얼마나 중시했는가를 여기서도 알 수 있다.
  또한 『독사신론』은 단기 4244년(서기 1911년) 10월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재미한인소년서회(在美韓人少年書會)에 의해 순국문(한글전용)으로 발행되었다. 해외동포들과 독립운동가들의 민족역사교육을 위한 목적으로 순국문으로 발행되어 널리 애독되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이번 『단재신채호전집』제3권에서는 『대한매일신보』에 연재한 『독사신론』, 『신한국보(新韓國報)』에 연재된 『독사신론』, 잡지 『소년(少年)』에 전재된 『국사사론』, 그리고 재미한인소년서회의 순국문판 『독사신론』을 원문대로 영인하여 수록하였다.

  2.

 「대동제국사서언(大東帝國史敍言)」은 단재(신채호)가 『국사신론』을 발표한 직후인 1909~1910년 망명 직전에 집필하다가 중단된 『대동사천년사(大東四千年史)』의 첫 부분이라고 판단된다.
  단재(신채호)는 『조선상고사』(1924년경 집필) 총론에서 거금(距今) 16년 전에 국치에 발분하여 비로소 『동국통감』을 열독하면서, 사평체에 가까운 『독사신론』을 지어 『대한매일신보』지상에 발표하며, 이어서 수십 학생의 청구에 의하여 지나식(중국식)의 연의(演義)를 본받은 비역사 비소설인 『대동사천년사』란 것을 짓다가 양역(兩役)이 사고로 인하여 중지되고 말았다고 기록하였다. 단재(신채호)가 여기서 짓다가 중단했다고 하는 『대동사천년사』의 이미 지은 부분이 이번에 새로 전집편찬위원회가 발굴한 『대동제국사서언』이라고 판단되는 것이다.
  성균관대학교 존경각 소장도서인 이 책은 구한말~일제강점기 초기 어떤 이가 단기 4248년(서기 1915년) 을묘 6월에 『신채호저·무애산고(無涯散稿)』라는 표제로 단재(신채호)의 구한말 작품 몇 점을 등사로 필사해서 모아 놓은 필사집 속에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그 내용을 읽어보면 이 작품이 단재(신채호)의 저작임은 단번에 알 수 있다.
 『대동제국사서언』에 수록된 목차와 내용 범위는 다음과 같다.

  一. 국사는 국민의 필수물
  二. 구사가의 류견(謬見)
  三. 금일 저사(著史)의 곤난
  四. 본사(本史) 기(其) 수채(搜採)의 재료
  五. 국명
  六. 기원
  七. 시대구별
  八. 본론

  단재(신채호)는 자신을 ‘신사씨(新史氏)’라고 호칭하면서 4천년 통사를 쓰려니 대표적 국명이 마땅치 않아서 편의상 ‘대동’을 택하여 쓴다고 하였다. 서언의 「기원」까지는 내용의 문제의식이 『독사신론』의 문제의식과 대동소이함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중복을 피하여 여기서는 「시대구별」부터 간단히 해설하기로 한다.
  단재(신채호)는 『대동사천년사』를 다음과 같이 다섯 시기로 구분하였다.
 
  ① 태고사 : 단군 건국부터 삼왕조 분쟁에 지함.
  ② 상세사 : 삼왕조 분쟁부터 발해 멸망에 지함.
  ③ 중세사 : 발해 멸망부터 만주 입구(入寇)에 지함.
  ④ 근세사 : 만주 입구부터 불구(佛寇) 격퇴에 지함.
  ⑤ 최근세사 : 불구 격퇴부터 금일에 지함.

  이어서 단재(신채호)는 태고민족사 부문을 다시 다음과 같이 6기(期)로 구분하였다.
 
  제1기 : 고립시대 - 역 각 개인 경쟁시대
  제2기 : 족장시대 - 역 각 가족 경쟁시대
  제3기 : 추장시대 - 역 각 부락 경쟁시대
  제4기 : 신국시대 - 역 각 신권 경쟁시대
  제5기 : 봉건시대 - 역 각 군웅 분치시대
  제6기 : 귀족시대

  단재(신채호)의 태고사의 이 시기구분은 구한말에 단재(신채호)가 인류사를 사회진화론에 의거하여 ① 추장시대 ② 귀족시대 ③ 전제시대 ④ 입헌시대를 거치면서 진화됐다고 설명한 틀 가운데 ① 추장시대와 ② 귀족시대 이전까지의 역사를 세분해서 설정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단재(신채호)는 본론에 들어가서 「동방고대의 각 인종」을 서술했는데, 편찬위원들 사이에 이 부분이 독립논설이라는 주장도 있어 합의가 되지 않았으므로 「동방고대의 각 인종」은 전집 제6권 「사론·논설」편에 수록하기로 했다.

  3.

  단재(신채호)의 『조선상고문화사』는 1931년 10월 15일부터 12월 3일까지, 그리고 이듬해 5월 27일부터 5월 31일까지 모두 40회에 걸쳐 『조선일보』에 연재됨으로써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조선상고문화사』는 1931~1932년에 활자화되었지만,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그 집필연대는 1910년대의 작품이다. 단재(신채호)의 연보에 보면 1915년에 만주 거류 동포 계몽을 겸해서 동창학교(東昌學校) 교재로 『조선사』를 발간했다고 했는데, 그 일부가 『조선상고문화사』가 아닌가 추정된다. 동창학교는 만주 환인현에 윤세복[尹世復(후에 대종교 3세 교주)]이 세운 대종교(大倧敎) 계통의 동포 교육을 위한 학교였다.
 『조선상고문화사』는 한 마디로 표현하면 단재(신채호)가 1910년대에 서술한 ‘고조선 역사’이다. 이 저서는 단군의 건국 직전에 중단된 『대동제국사서언』에 이어지는 저작이라고 볼 수 있다.
 『조선상고문화사』는 다음과 같이 5편으로 나누어 구성되었다.

  제1편 : 단군시대
  제2편 : 단군조의 업적과 공덕
  제3편 : 아사달왕조 시대와 단군 이후의 분열과 식민지의 성쇠
  제4편 : 진한의 전성과 대외전쟁
  제5편 : 조선열국 분쟁의 초기

  제1편 「단군시대」에서는 서언과 같은 편인데, ‘조선’이라는 이름의 뜻과 조선 역대문헌의 화를 입음에 대한 간단한 설명에서부터 시작하고 있다.
  단재(신채호)는 ‘조선’은 음이 ‘주신(珠申)’과 같고 또 ‘숙신(肅愼)’과 같으니, 조선=주신=숙신이 한 나라였고 동일한 기원의 국명이라고 보았다. 또한 고조선은 3경5부제를 실시했는데, ‘고구려’·‘고려’ 등은 단군조선의 중부의 이름이라고 지적하였다.
  단재(신채호)는 지금의 하북성·요서·요동지방에 진한·변한·마한의 삼한(북삼한·전삼한)이 있었는데 이는 모두 단군조선의 영역 안이었다고 보았다. 그는 이 북삼한이 뒤에 한강 이남의 남으로 이동했다고 설명하였다. 이 관점은 그의「전후삼한고」와『조선상고사』에서 더 자세히 설명되고 있다. 단재(신채호)는 부여·낙랑 등도 단군조선의 3경9부 가운데 성 또는 부의 이름에서 나온 것이라고 보았다. 또한 신라·백제·가락·발해·태봉 등도 단군시대부터 명칭이 있었다고 설명하였다.
  단재(신채호)는「조선 역대문헌의 화액(禍厄)」에서는 조선역사의 문헌들이 진개(秦開)·모돈(冒頓)·위만(衛滿)·유철[劉徹(한무제)]·설인귀(薛仁貴)·소정방(蘇定方)·호종단(胡宗旦) 등 외국의 침략으로 말미암아 소멸된 것을 개탄하였다. 또한 그는 역대 문헌이 국내의 내란에 의해서도 소멸되고, 김부식 등 사대적 본국인들에 의해서도 다수 소실되었음을 각종 사례들을 들면서 지적하였다. 그러나 단재(신채호)는 새벽하늘의 별처럼 드문 부족한 사료를 가지고서도 ‘유증(類證)’·‘호증(互證)’·‘추증(追證)’·‘반증(反證)’·‘변증(辨證)’의 방법으로 실증적으로 조선역사를 재구성할 수 있다고 강조하였다.
  제2편 「단군조의 업적과 공덕」에서는 먼저 단군이 아들 부루(夫婁)와 신하 팽오(彭吳)를 황하 유역에 보내어 우(禹)에게 치수방법을 가르쳐 주어 우의 치수사업을 성공케 했음과 고대 중국과의 교류를 중국 고문헌 등을 인용하여 설명하였다.
  이어서 단재(신채호)는 강화도 마니산에 단군의 세 아들이 쌓았다는 ‘삼랑성(三郞城)’이 있는데, 이를 삼왕자라 하지 않고 구태여 ‘삼랑’이라고 하는 것은 단군을 ‘선인왕검(仙人王儉)’이라고 기록한 곳에서도 보이는 바와 같이 단군조선의 낭가신앙과 관련된 것이며, 신라의 ‘화랑’과 고구려의 조의선인(皂衣仙人)의 연원이 여기에 있다고 지적하였다.
  또한 『신지(神誌)』는 단군의 역사서로서, 그 저자를 책 이름에서 취하여 신지라고 하는 일은 있을 수 있으나, 고조선의 문자를 신지라고 하는 것은 정확하지 않다고 지적하였다.『신지』의 역사가 곧 고조선 문자로 기록되었을 것이므로 고조선 문자는『신지』역사책보다 훨씬 먼저 창제되었을 것이고, 따라서 고조선 문자를 만든 시조를 신지라고 하는 것은 정확치 않은 것이라고 강조하였다.
  이어서 단군조선의 후예인 부여·고구려·신라·마한·가락·고려 등에서 10월 3일은 단군 탄신일이라 하여 기리고, 10월·3월·5월에 대회(대축제)를 여는 공통의 관습이 있게 된 것은 고조선 시기부터 형성된 관습으로 해석하였다. 또한 그 축제의 내용 관습에 ① 한맹(寒盟) ② 수박(手搏) ③ 검술 ④ 궁시(弓矢) ⑤ 격구(擊球) ⑥ 금환(金丸) ⑦ 주마(走馬) ⑧ 회렵(會獵) 등의 경기를 한 것은 시대에 따라 변경과 가감이 있을지라도 그 대부분은 단군왕조가 창시한 것이라고 설명하였다.
  단군의 통치방식은 5부를 두고 중부대가(中部大加)가 정권을 담당하되 3년에 한 번씩 교체하며, 동서남북의 4부의 제가(諸加)가 교대로 갈아들게 하는 방식이었다. 단군조선은 이 방식으로 아무런 쟁투 없이 거의 1천 년을 번영하였다. 이러한 단군의 5부의 통치방식은 상고시대의 중국에 수출되었다. 5부 대가의 별명을 ‘지’라고 했으므로 마가(馬加)를 ‘막리지(莫離支)’라고 했는데, 중국 상고의 ‘제(帝)’도 고조선의 ‘지’의 이름을 가져간 것이라고 설명하였다. 단재(신채호)는 단군 이후 1천여 년 동안의 고조선은 그 치제의 선미(善美)가 고대에 으뜸이었고 문화의 발달도 이웃 각 민족의 모범이 될 만한 것이었다고 강조하였다.
  제3편에서는 단군조선이 아사달로 천도한 아사달 왕조시대와 그 이후 분열, 그리고 중국에 있던 “식민지”의 성쇠를 다룬 편이다. 고조선은 단군 건국 이후 3경5부제를 실시하면서 1천여 년을 크게 번성하더니, B.C. 1334년(단군 1000년)경부터 B.C. 234년~B.C. 134년(단군 2100년~2200년) 사이에는 쇠미하게 되었다. 그 가장 큰 요인은 내부에서 갈등이 격화되어 불통일 상태에 빠졌고, 이를 통일할 큰 인물을 내지 못했기 때문이었다고 단재(신채호)는 지적하였다.
  B.C. 1154년~B.C. 1144년경에 주(周)의 문왕(文王)이 은(殷)의 주(紂)를 쳐서 은이 멸망하고 기자가 고조선으로 망명해오자 조선왕은 이를 받아들여 현재의 만주 광녕현(廣寧縣)에 있는 한 고을의 군수를 맡기었다고 단재(신채호)는 설명하였다. 단재(신채호)는 『독사신론』에서와 마찬가지로 여기서 기자일읍수위설(箕子一邑守尉說)을 더욱 확고히 정립하고, 사마천(司馬遷)의 ‘무왕봉기자(武王封箕子)’ 등 각종 기자조선설을 강력히 비판했으며, 반고(班固)의『한서(漢書)』에서 이를 빼고 다만 “기자가 조선에 피지(避地)하였다”라고 하여 사마천을 비판한 것을 지지하였다. 또한 단재(신채호)는 고죽국(孤竹國)이 단군 5부의 후손으로서 조선의 9족의 하나인데 주 무왕이 고죽을 멸하자 백이(伯夷)·숙제(叔齊)의 형제가 주의 녹(祿)을 거절하고 수양산(首陽山)에서 굶어 죽음은 그가 조선족이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하였다.
  단재(신채호)에 의하면, 당시 조선족이 식민하여 가장 번성한 곳은 ① 산동(山東) ② 산서(山西) ③ 하북(河北) 지방인데 주 무왕이 이를 공격하여 이 지방에서 부여족(조선족)의 교민과 지나족[支那族(중국족)] 사이에 대전쟁이 벌어지게 되었다. 주의 대공격으로 산동지방에 있던 조선족의 식민국인 엄(奄)과 우(嵎)는 싸웠으나 패전하여 망하고 내(萊)는 수백 년간 저항하면서 중국족인 제(齊)와 서로 대치하였다.
  회하(淮河) 부근에서는 조선족의 서국(徐國)에서 서언왕(徐偃王)이 나와 크게 번영해서 그에게 조공하는 제후들이 36국에 달하게 되었다. 주가 비밀리에 초(楚)와 동맹을 맺고 조선족의 대서제국(大徐帝國)을 공격하여 결국 당하지 못해서 서국도 패망하였다.
  단재(신채호)는 산동·회하지방의 고조선족 소국들의 역사를 쓰기 위해 실제로 이 지방을 답사한 것으로 보인다. 그 증거로는「대서제국(大徐帝國)의 흥망」이라는 절에 “팽성(彭城) 등지에 철문관(鐵門關)·주마당(走馬塘) 등의 지명이 있는데, 본토인들의 전설에 의하면 양지(兩地)는 다 서언왕의 말로의 유적이라. 철문관이 명말부터 인민이 교통의 불편으로 말미암아 전체를 파고 뚫으므로 그 유적을 찾을 수 없으나, 고대에는 양석(兩石)이 좌우에 우뚝 서서 철문과 같은 고로 철문관이라 이름하며, 그 안에는 사면이 꽉 막히고 수백가의 살만한 벌이 있는데, 언왕(偃王)이 이 속에서 초병(楚兵)에게 피위(被圍)되었더니, 얼마 아니되어 감사대(敢死隊)로 선봉을 삼아 관문에 나와 주마당에 이르러서는 말타고 달린 고로 ‘주마당’의 이름을 얻음이라 하더라.”라고 서술한 곳에서 이를 알 수 있다.
  제4편 「진한의 전성(全盛)과 대외전쟁」에서는 고조선의 요서지방의 구역에 진한(진조선)이 발흥하여(전삼한설) 중국의 제(齊) 등과 싸운 사실을 서술하였다. 단재(신채호)에 의하면, 고조선은 아사달 왕조부터 통일이 깨어져 열국이 나뉘어 다투었으므로 해외 식민의 여러 소국들이 비록 지나(중국)족의 무력 공격을 만나도 이를 구원할 겨를이 없다가 요서지방에 진한의 진왕이 나서 B.C. 634년에 무력으로 조선열국의 맹주가 되어 고조선의 제왕(후)들을 거느리게 되었다. 한편 지나(중국)족에서는 제의 환공(桓公)이 재상 관중(管仲)을 얻어 부강해지자 맹주가 되어 지나(중국)의 제후들을 거느리고 두 민족의 각각의 연합군이 연경(燕京)지방에서 만나 민족적 대전쟁이 시작되었다.
  진한(진조선)의 진왕이 B.C. 706년에 연의 항복을 받고 남으로 나아가 제를 치니 제가 진왕에게 굽히어 세공을 바치고 현제(玄帝)의 존호를 올리매 이에 진한의 세력이 지나(중국)에 덮이어 주(周)·노(魯)·위(衛)·조(曺)·송(宋)·허(許) 등 지나(중국)족의 열국이 제를 따라 진한을 상국으로 높이니, 이 시기가 진한의 전성시기였다.
  단재(신채호)는 여기서 ‘기조(箕朝)’의 전설이 있었다고 했으나, 뒤에 쓴 『조선상고사』에서는 이 부분이 잘못 기술된 것이라고 모두 취소하였다. 즉 전사(『조선상고문화사』)에는 단군왕검 1220년 후에 “기자의 왕조선”을 기재하였으나, 기자는 기자 자신이 왕됨이 아니요, 기원전 323년경에 이르러 그 자손이 비로소 “불조선왕이 되었나니 이는 제2편 제2장에 기재하려니와, 이제 사실을 따라 기자조선을 삭하노라.”라고 서술하였다.
  진왕이 제를 친지 44년 후인 B.C. 663년, 이미 진왕은 죽고 그 후손의 통치기에, 제 환공이 고조선족의 내(萊)를 급습하여 멸망시키므로 진한의 왕이 크게 노하여 군사를 일으켜 제를 공격하니 양 민족 사이에 큰 전쟁이 일어나게 되었다. 단재(신채호)에 의하면 이 전쟁은 후에 고구려와 수의 전쟁보다도 더 큰 전쟁이었다. 이 전쟁에서 승패는 결정되지 못했으나 제는 진왕에게 현제 칭호를 쓰지 않게 되었다. 그 후 지나(중국)족의 연이 힘을 길러 연의 진개(秦開)가 B.C. 334년에 고조선의 진한을 공격하여 고조선의 고죽(孤竹)과 선비(鮮卑)를 잃게 되었다. 여기서 고조선이 난하 이서지방을 연에 잃게 되었다. 뒤이어 진이 지나(중국)족을 통일하면서 B.C. 254년에 연을 멸하고 만리장성을 만들어 고조선 세력과의 경계선을 만들었다.
  제5편 「조선열국 분쟁의 초기」에서는 고조선의 속국이었던 흉노(匈奴)가 자립하여 지나(중국)족들을 위협하고, 지나(중국)에서는 한(漢)의 유방(劉邦)과 초(楚)의 항우가 대립하다가 한이 통일한 시기의 고조선의 상태를 서술하였다. 일찍이 진시황이 지나(중국)족을 통일하자 고조선의 부왕(否王)이 진시황과 협정하여 중립공지(中立空地)를 설정했었는데, 진이 망했으므로 부(否)의 아들 준왕(準王)은 이 협정을 지킬 필요가 없게 되었다. 위만(衛滿)이 망명해 오므로 준왕은 중립공지에 받아들여 서번(西藩)을 삼았더니, 위만이 망명자를 모으고 밖으로는 흉노와 맺어 반란을 일으켜서 준을 공격하고 만주 요동의 광녕현에 있는 준의 수도(북평양)를 점거하였다. 위만 조선이다. 준왕의 세력은 남으로 이동하여 마한을 세우니 이에 따라 진한·변한도 남천하여 후삼한시대가 시작되었다. B.C. 109년에 한 무제가 위만조선을 공격하여 멸망시키고 위만조선의 영토였던 요동·요서지방에 진번(眞番)·임둔(臨屯)·현토(玄莬)·낙랑(樂浪)의 한의 4군을 설치하였다.
  단재(신채호)는 위만조선의 영토는 압록강 이북 요동·요서지방이었으며 그 수도도 요동의 광녕현이었고, 한사군도 모두 압록강 이북의 요동·요서에 있었다고 논증하였다. 이어서 부여에서 발흥한 고구려가 요동·요서에서 설치된 한사군을 쳐서 멸하고 동부여의 항복을 받으며 남평양에 수도를 두었던 동남의 낙랑국[국왕 최리(崔理)]도 멸하여 매우 강성한 나라로 되었다.
  단재(신채호)의 『조선상고문화사』는 여기까지 쓰고 ‘미완’이라는 글자와 함께 중단되고 있다. 단재(신채호)의 그 후의 집필은 상당 기간이 지난 후에 새로이 『조선상고사』를 쓰면서 이어지는데, 여기서는 그 동안 연구한 결과와 함께 『조선상고문화사』에서 이미 상세히 서술한 부분들은 간략히 요약하고, 새로 연구한 부문은 상세하게 서술 가필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그러므로 『조선상고문화사』가 1910년대에 먼저 저술되고, 그 다음에 1910년대 말~1920년대 초기(1924년경)에 걸쳐 『조선상고사』가 후에 저술된 것을 알 수 있다. 단재(신채호)의 『조선상고문화사』는 많은 새로운 사실을 발견하고 체계화한 고조선사의 고전이라 할 것이다. 
  단재(신채호)의 『독사신론』·『대동제국사서언』·『조선상고문화사』는 (『조선상고사』와 함께) 그가 근대역사학의 방법과 역사관으로 한국민족사의 초기형성과 한국고대사를 새롭게 체계화한 위대한 업적이라고 할 것이다.


제4권 역사
乙支文德
水軍第一偉人李舜臣
수군제일 거록한 인물 이순신전
東國巨傑崔都統
동국에 제일영걸 최도통전
伊太利建國三傑
최홍규|경기사학회장·전 경기대 교수

1. 영웅 전기물의 저술 배경과 의의

  본권에 수록된 국한문판 『을지문덕(乙支文德)』, 한글판 『을지문덕』, 국한문본 『동국거걸최도통(東國巨傑崔都統)』, 국한문본 『수군제일위인이순신(水軍第一偉人李舜臣)』, 한글본 『수군의 제일 거룩한 인물 이순신전』, 국한문본 『이태리건국삼걸전(伊太利建國三傑傳)』 등의 저작은 1900년대 중·후반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 1880~1936)가 역사학자로 발신(發身)하여 활동하던 초기 역사관과 애국계몽사상가로서 활동하던 시기 그의 민족주의 사상의 특징과 편린을 선명히 보여주는 대표적인 역사전기물들이다.
  발표 시기면에서 보면, 1907년 10월 25일 서울 광학서포(廣學書舖)에서 단행본으로 출간된 『이태리건국삼걸전』(양계초의 원저명은 『의태리건국삼걸전(意太利建國三傑傳)』)이 비록 역술본(譯述本)이긴 하나 가장 빠르고, 처녀작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다. 이어서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 지상에 국한문본 『수군제일위인이순신』(1908. 5. 2~8. 18)과 한글본 『수군의 제일 거룩한 인물 이순신전』(1908. 6. 11~10. 24)이 각각 연재되고, 또 그런 와중에서 1908년 5월 30일 국한문판 『을지문덕(乙支文德)』과 같은 해 7월 5일 한글판 『을지문덕』을 잇달아 서울 광학서포에서 각각 단행본으로 간행하였다. 그리고 고려 말의 무장 최영(崔瑩)의 영웅적 활동을 그린 『동국거걸최도통』이 역시 『대한매일신보』 지상에 1909년 12월 5일에서 1910년 5월 27일까지 가장 뒤늦게 연재 발표됨으로써 고구려·고려·조선시대를 각각 대표하는 을지문덕·최영·이순신의 영웅전기 3부작은 비록 일부가 미완이긴 하나 신채호가 구상한 민족사적 3걸의 얼개가 대충 마무리된 셈이다.
  1900년대 중·후반 애국계몽운동기에 신채호는 국사를 민족사로 파악하는 한편 역술본 『이태리건국삼걸전』 이후 삼국시대에서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국난극복과 한국사를 빛낸 을지문덕·최영·이순신 등 애국심으로 무장한 영웅들의 역사전기물을 통해 역사자강·민족자강의 애국계몽사상을 고취하였다. 이와 더불어 「대한의 희망」(1908), 「역사와 애국심의 관계」(1908), 「영웅과 세계」(1908), 「기회는 불가좌대(不可坐待)」(1908), 「20세기 신동국지영웅(新東國之英雄)」(1909), 「20세기 신국민」(1910) 등의 논설을 『대한매일신보』 지상에 발표하고, 앞의 역사전기물과 함께 일제 침략으로 인해 식민지적 전야(前夜)나 다름없는 한말의 위기 상황을 타개할 국민적 영웅의 출현을 열렬히 대망하고 국민 모두가 역사에 대한 자긍심과 애국심으로 무장해 분발할 것을 촉구하였다.
  1905년 일제에 의해 불법적 강권으로 체결된 을사늑약과 1907년 7월 고종이 헤이그 특사사건을 계기로 순종에게 양위(讓位)한 채 한일신협약이 체결되고, 8월 구한국 군대가 강제 해산되는 등 민족적 위기는 고조되고 있었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을 전후해서 일제의 식민지화 기도에 대해 저항하기 위한 전국적인 규모의 항일 비밀결사 신민회(新民會)가 조직되고, 신채호·박은식(朴殷植)·안창호(安昌浩) 등 애국계몽사상가들의 활동이 전개된 것도 이 무렵의 일이었다.
  이처럼 신채호는 일제의 보호국으로 전락된 1905년 전후 시기에 대한제국의 식민지 전야나 다름없는 현실을 우리 민족이 직면한 최악의 역사적 위기로 파악하였다. 그러한 가운데서도 우리 국민이 좌절하지 말고 역으로 민족적 위기를 기회로 활용하는 가운데 희망·애국심, 그리고 역사에 대한 원력(願力)과 신앙을 잃지 않는다면 언젠가는 국권을 회복하고, 자주독립의 근대 국민국가 건설이 가능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였다. 이 시기에 발표된 많은 애국계몽 논설과 역술본 『이태리건국삼걸전』 이후에 집중적으로 발표된 을지문덕·최영·이순신 등 민족사적 3걸(傑)에 대한 역사전기물은 모두 자주독립된 민족국가 건설과 역사의 부활을 열렬히 희구하는 신채호의 역사의식과 시대적 처방전(處方箋)으로써 각별한 의미를 갖는다. 아울러 민족을 역사 주체로 인식하는 역사학자로서 그의 학문적인 사명감과 민족주의 사학의 출발점으로서 단서를 제공해 주고 있다.
  특히 한말은 일본 제국주의의 무력 침략으로 일찍이 우리 민족이 역사상 경험해 보지 못한 미증유의 식민지 전야와 같은 민족적 위기를 노정(露呈)하고 있었다. 따라서 신채호는 대한제국이 당면한 위기적 현실을 해소하기 위한 혁명적 변화를 주도하면서 대세를 역전시킬 구국적 영웅의 출현을 열렬히 대망하면서, 그 모범적인 사례를 고대와 중세의 역사 속에서 찾으려고 하였다. 그의 역사전기물들은 이러한 위기적 상황에 처한 대한제국기의 시대현실을 배경으로 한 것이며, 애국계몽사상가로서 국민들에게 민족주의 사상을 계몽하는 데 1차적 목표를 두고 있다. 아울러 그가 역사학자로서 발신하여 이후 한국 근대민족주의 사학을 창건하는 데 그 출발점이자 밑거름이 되고 있다는 데 그 의의가 크다고 평가할 수 있다.
  이 글에서는 1907~1910년에 발표된 신채호의 역사전기물에 대해 편의상 발표순에 따라 내용과 역사적 의의를 간략히 살펴보고자 한다.

2. 역술본 『이태리건국삼걸전(伊太利建國三傑傳)』

  신채호가 애국계몽사상가·역사학자로서 1900년대 중·후반 대한제국이 처한 역사적 위기를 타개할 국민적 영웅의 출현을 갈망하고, 국민 모두에게 애국심으로 무장하여 분발할 것을 갈망하는 의도에서 역술된 책이 바로 『이태리건국삼걸전』이다. 1907년 10월 25일 서울 광학서포에서 본문 94면으로 발행된 이 책은 신채호의 처녀작과 같은 단행본 저술로써 원저자인 양계초[(梁啓超), 호 임공(任公), 1873~1930]의 『의태리건국삼걸전(意太利建國三傑傳)』을 번안, 장지연(張志淵)의 교열(校閱)로 출간한 것이다.
  이 역술본의 서문은 교열자인 장지연이 썼고, 수편(首篇) 서론(緖論)에서 종편(終篇) 결론에 이르기까지 모두 28절의 목차 아래 그 내용이 국한문 혼용의 논설체로 서술되어 있다. 원저자인 양계초는 일찍이 1898년 4월 강유위(康有爲) 등과 함께 보국회(保國會)를 조직하고 국정개혁을 시도하였다. 그는 민족혁명을 고취하고 공화제의 필요성을 선전하면서, 그해 8월 강유위 등과 함께 무술정변(戊戌政變)에 참가했다가 실패하자 일본에 망명하였다. 양계초는 손문의 혁명적 입장과는 달리 청조의 개조 강화를 주장했으며, 경학(經學)·사학·불교학 등에 박통하였다. 그의 저술 『음빙실문집(飮氷室文集)』은 한말 지식인들에게 민족자강사상을 펼치는 데 큰 영향을 미쳤으며, 『신민설(新民說)』과 『중국역사연구법』 등의 저술은 신채호에게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신채호는 역술본 『이태리건국삼걸전』의 서론과 결론에서 ‘무애생(無涯生)이 왈(曰)’이라는 그 자신의 관점과 평언(評言)을 붙여 한말의 위기적 현실에 빗대어 애국자 대망론을 펼치면서, 19세기 중반 이탈리아 민족국가 통일운동기에 활약한 세 역사적 인물의 혁명적 위업과 애국적 활동을 소개하였다. 즉, 이탈리아 국민적 애국주의의 상징적 존재이자 통일 이탈리아 국민국가 건설운동을 주도했던 마찌니[瑪志尼(Giuseppe Mazzini, 1805~1861)], 가리발디[加里波的(Giuseppe Garibaldi, 1807~1882)], 카부르[加富爾(Camillo Benso di Cavour, 1810~1861)] 등 3걸의 활동을 통해 철저한 조국애와 민족주의 사상으로 근대 국민국가 건설운동에 헌신한 애국적 영웅의 표본으로 삼으려는 관점을 드러냈다.
  19세기 중반 이탈리아의 혁명가 마찌니는 일찍이 카르보나리(Carbonari) 당원으로 입당, 뒤에 망명하여 마르세이유에서 ‘청년 이탈리아당’을 결성하였다. 그는 1848년 귀국하여 밀라노의 혁명에 참가한 뒤 가리발디가 이끄는 군에 가담하여 활동하는 등 통일 이탈리아 건설운동에 진력하였다. 또한 정열적인 애국자 가리발디는 일찍이 청년 이탈리아당에 가입, 공화파의 이탈리아 혁명운동에 헌신하였다. 그는 1860년 ‘붉은 셔어츠대’ 1천여 명의 의용군을 이끌고 시칠리아 섬과 남부 이탈리아를 공략, 사르디니아(橵的尼亞)왕에게 바침으로써 마찌니·카부르와 함께 이탈리아의 근대 국민국가 통일운동의 3대 위인으로 일컬어지게 되었다. 한편 이탈리아 독립운동가 카부르는 뒤에 사르디니아의 수상직에 올라 활약하였다. 그는 조국통일을 위해 나폴레옹 3세와 손잡고 1859년 오스트리아를 격파한 뒤 롬바르디아를 해방시키는 등 활약하다가 이탈리아의 완전 통일을 이루기 직전 애석하게도 별세하였다.
  이 역술본 역사전기물은 19세기 이탈리아의 국민국가 통일과정에서 활약한 세 영웅의 파란만장한 생애와 철저하고도 탁월한 애국심으로 민족과 국가를 위해 어떻게 헌신했는가를 그 역사적 배경과 함께 국한문 혼용의 논설체로 서술한 것이다. 즉, 그들의 출생에서 성장과정, 죽음에 이르기까지 세 영웅의 생애와 활동상을 그 시대적 배경 하에 묘사하였다. 그런데 여기에서 주목해야 할 점은 이 3걸이 단순히 근대 이탈리아 통일운동을 주도한 타국의 영웅으로만 그치지 않고, 1900년대 중반 대한제국이 당면한 위기적 상황을 척결하고 국운을 소생·부활시킬 민족영웅의 상징적 표본으로 형상화하려 했다는 데 번안자의 참다운 의도가 담겨져 있는 것이었다.
  따라서 신채호는 이 역술본에서 ‘무애생의 왈’이라는 자신의 주관적인 관점과 평언을 붙여 구국의 영웅대망론을 펼쳤다. 그에 의하면 19세기 중반 당시 이탈리아가 당면한 역사적 조건이 20세기 초 식민지적 위기에 처한 대한제국의 형편과 비슷하다고 인식하였다. 그 뿐만 아니라 그 시대적 격차 또한 멀지 않고, 비록 타국의 과거사라 할지라도 그 역사조건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국난 극복의 타산지석(他山之石)이 될 수 있다는 관점을 짙게 드러냈다. 비록 이 역술본에서는 19세기 통일 이탈리아의 국민국가 건설과정에서 나타난 빈(wien)체제의 붕괴과정과 대한제국이 당면한 위기적 상황에 대한 인식, 즉 제국주의적 국제정치상황 사이에서 노정되는 커다란 역사조건의 괴리 등에 대한 역사인식이 드러나 있지 않아 구체적인 상황인식과 객관적 서술이 결여되어 있는 등 형평성을 잃고 있다는 지적도 제기될 수 있다.
  그러나 이 책은 신채호가 일제의 악랄한 무력적 침략이 가중되는 식민지 전야나 다름없는 상황 속에서 통일 이탈리아 국민국가 건설에 헌신한 세 영웅의 활동상이 크게 어필하리라고 인식하고 있었던 것 같다. 즉, 이탈리아 3걸의 생애와 활동상을 통해 위기에 처한 대한제국 국민들에게 국권회복을 위한 애국심을 배양하고 자강론적(自强論的) 민족주의 사상을 고취하려 했다는 데 이 책을 번안한 역술자의 진정한 저술 의도와 목표가 반영되어 있었다. 이들 마찌니·가리발디·카부르 등 세 영웅의 생애와 애국적 활동을 이탈리아와 19세기라는 공간적·시간적 조건에 국한시키지 않고, 국민들에게 민족적 위기의 해소와 자주독립사상을 고취시키고 새로운 분발을 촉구하기 위한 1900년대 초 당시로써는 최초의 역사전기물이라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다.
  여기에서 유념해야 할 점은 이 세 영웅의 생애와 활동상을 곧 1900년대 초 대한제국의 사회적·역사적 현실이 요구하는 상징적 구국의 영웅상(英雄像)으로 크게 부각시켰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서 역술자로써는 이 3걸을 통일 이탈리아의 근대 국민국가 수립운동을 주도하며 헌신한 지역적·시대적 특수성이나 그 사례로 한정시킨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제국주의 열강의 이권경쟁과 일제의 침략으로 기울어져 가는 대한제국의 국운을 바로잡고 국권 회복(恢復)과 함께 민족주의 이념에 입각한 민주공화의 정체를 골간으로 하는 근대 국민국가 수립을 지향하는 민족중흥의 영웅으로 열렬히 대망했다는 데 이 저술을 번안하게 된 배경과 동기가 있었다.
  신채호는 그 서론에서

  무애생(無涯生)이 왈(曰), 위재(偉哉)라 애국자(愛國者)며 장재(壯哉)라 애국자여. 애국자가 무(無)한 국(國)은 수강(雖强)이나 필약(必弱)하며, 수성(雖盛)이나 필쇠(必衰)하며 수흥(雖興)이나 필망(必亡)하며 수생(雖生)이나 필사(必死)하고, 애국자가 유(有)한 국은 수약(雖弱)이나 필강(必强)하며 수쇠(雖衰)이나 필성(必盛)하며 수망(雖亡)이나 필흥(必興)하며 수사(雖死)이나 필생(必生)하나니, 지재(至哉)라 애국자며 성재(聖哉)라 애국자여. 기국(其國)의 편토촌양(片土寸壤)이 무비(無非) 애국자의 완(腕)·비(臂)·지(趾)·지(指)로 소개척자야(所開拓者也)며, 기국의 척신신자맹(隻身身子氓)이 무비(無非) 애국자의 심혈누제(心血淚悌)로 소잉조자(所孕造者)며, 산하(山河)의 일초엽(一草葉)과 수저(水底)의 일어별(一語鼈)이 무비 애국자의 정신기백으로 소화육자야(所化育者也)며…

라고 열정적인 애국심과 헌신적인 애국자의 표본을 이 역술본 도처에서 발견하고 강조하려고 하였다.
  신채호는 이 책에서 헌신적이고 참다운 애국적 지도자의 출현은 민족자강과 자주독립의 근대 국민국가 건설에 필수요건이자 원동력임을 전제, 그 필요성을 크게 주장하고 있다. 이 역술본에서 신채호가 대망하는 애국자의 상(像)은 결코 입과 붓으로 그치는 형식적인 애국자가 아니었다. 그것은 뼈·피·살갗·얼굴·모발 등 신체 각 조직조차 철저하리만큼 심신 모두가 애국심으로 절여지고 무장된 애국자였다. 즉 “와시(臥時)의 염(念)도 국야(國也)며 좌시(坐時)의 상(想)도 국야며 기가야(其歌也)도 국야며 기소야(其笑也)도 국야며 기곡야(其哭也)도 국야라”고 할 정도의 심신 모두가 민족애의 열정으로 점철(點綴)된 철저하리만큼 헌신적이면서도 식견이 뛰어난 애국자의 상(像)인 것이다.
  신채호는 『이태리건국삼걸전』의 서론 말미에서 이 책을 역술하게 된 동기를 이렇게 간략히 밝혀 놓았다.

  오호(嗚呼)라. 문명의 등(燈)은 6주(洲)에 찬란하고 자유의 종(鐘)은 사린(四鄰)에 요란한데 아배(我輩)는 하죄(何罪)완대 독(獨) 차(此) 지옥(地獄)고 망산하이참목(望山河以慘目)하고 앙창천이비규(仰蒼天以悲叫)타가 유정(有情)의 일필(一筆)로 이태리 애국자 3걸의 역사를 술(述)하노니, 기(其) 국난(國難)이 여아상류(與我相類)하고 기(其) 연조(年祚)도 거금불원(距今不遠)이라. 기(其) 간고경력(艱苦經歷)이 방불왕래우오흉(彷彿往來于吾胸)하고 기성음소모(其聲音笑貌)가 돌올봉현어오전(突兀捧現於吾前)하는도다. 약(若) 차서(此書)의 인연과 차서의 소개로 대한(大韓) 중흥(中興) 삼걸전(三傑傳) 혹 삼십걸(三十傑) 삼백걸전(三百傑傳)을 경장(更張)하면 차(此)는 무애생 무애(無涯)의 혈원야(血願也)로다.

  다시 말해서 20세기 초 세계의 선진 각국은 문명의 진보와 민주공화를 기반으로 한 자유가 날로 신장되는 시점에서 우리나라만이 캄캄한 어둠 속에 놓인 채 망연자실해 하는 형국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위기적 시대현실 속에서 근대 이탈리아 국민국가 건설운동에 헌신한 마찌니·가리발디·카부르의 그 영웅적 활동과 애국심을 통해 이를 본받을 수 있도록 하자는 것이다. 이에 국민의식 또한 크게 각성됨으로써 국난 극복과 우리나라를 중흥시킬 민족사적 영웅 3걸, 30걸, 아니 3백걸전을 다시 쓸 수 있다면 이것이 곧 번안자(무애생)가 의도한 피끓는 염원이라고 독자들에게 간곡히 상기시키고 있다.
  이처럼 국권극복을 선도할 수 있는 애국심에 투철한 민족영웅의 출현을 갈망하는 신채호의 염원과 찬송은 그의 시대가 당면한 사회적·역사적 현실의 특성과 요구를 반영한 결과이기도 하였다. 더욱이 영웅의 역사적 역할을 강조하는 등 영웅사관(英雄史觀)에 기초한 그의 초기 자강론적 민족주의와 역사 민족주의의 발상과정과 그 사상적 특성·경향의 원형을 잘 보여준다. 이는 1900년대라는 간난과 위기의 시대를 만나 국민 모두에게 국권회복의 용기를 북돋고 자주독립의 근대 국민국가를 건설하는 데 그 기본바탕이 되어야 한다는 바램을 강조한 대목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후 신채호의 관심은 통일 이탈리아 건설운동을 주도한 이들 3걸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을지문덕·최영·이순신 등 투철한 애국심으로 대외투쟁에 승리, 조국 수호에 큰 역할을 한 민족사적 3걸에 대한 관심으로 전위(轉位) 확대되었다.
  여기에서 참고로 서론과 결론을 포함하여 총 28절, 본문 94면으로 구성된 『이태리건국삼걸전』의 차례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수편(首篇) 서론(緖論), 제1절 3걸 이전의 이태리 형세, 제2절 소년 이태리의 창립(刱立), 제3절 카부르(加富爾)의 궁경(躬耕), 제4절 마찌니(瑪志尼)와 가리발디(加里波的)의 망명, 제5절 남미주(南美洲)의 가리발디, 제6절 혁명 이전의 형세, 제7절 1818년의 혁명, 제8절 로마(羅馬)공화국의 건설과 멸망, 제9절 혁명 후의 형세, 제10절 산디니아(橵的尼亞)왕의 현명, 제11절 카부르의 내정개혁, 제12절 카부르의 외교정책 제1단, 제13절 카부르의 외교정책 제2단, 제14절 카부르의 외교정책 제3단, 제15절 이오(伊奧:이탈리아와 오스트리아) 개전(開戰)의 준비, 제16절 이오(伊奧:이탈리아와 오스트리아)의 전쟁, 제17절 가리발디의 사직, 제18절 카부르의 재상(再相), 제19절 당시 남(南)이태리의 형세, 제20절 가리발디의 이태리 감정(戡定), 제21절 남북 이태리의 합병, 제22절 제1국회, 제23절 카부르의 장서(長逝), 제24절 가리발디의 하옥(下獄)과 유영(遊英), 제25절 가리발디의 재체(再逮), 제26절 이태리의 대일통(大一統)이 성(成)함, 종편(終篇) 결론.

3. 국한문판 『을지문덕(乙支文德)』과 한글판 『을지문덕』

  신채호는 자강론적 민족주의에 기초하여 대외전(對外戰)에서 한국사의 영광과 긍지를 선양한 삼국시대의 민족영웅을 부각시키는 작업으로 1908년 5월 30일 국한문판 『을지문덕(乙支文德)』과 같은 해 7월에는 한글판 『을지문덕』을 서울 광학서포에서 매당(邁堂) 변영만(卞榮晩) 교열로 각각 발간하였다.
  무애생(無涯生) 신채호의 필명으로 저술된 국한문판의 원제는 ‘대동사천재 제일위인 을지문덕 대동사천재(大東四千載) 제일위인(第一偉人) 을지문덕(乙支文德)’이며, 권두에는 변영만·이기찬(李基燦)·안창호(安昌浩) 등의 서문이 붙어 있다. 그러나 본문 43면으로 이루어진 한글판에는 책의 맨 앞에 을지문덕의 입상 초상화가 덧붙여 있으며, 이들 인사의 서문이 모두 생략된 채 실려 있지 않다.
  먼저 변영만은 순한문체로 집필된 서문에서 고래로 우리나라는 정주(程朱)의 성리학과 한유(韓愈)·소식(蘇軾)·소철(蘇轍)·이백(李白)·두보(杜甫) 등 중국 당송(唐宋) 8대 가류의 문장만 읊조리며 의존하고 숭상하는 사대주의적 폐풍이 전해져 그 결과 날이 갈수록 민족의 자주독립정신이 쇠퇴하고 노예학(奴隸學)에 길들여지는 결과를 초래했음을 지적하였다. 그리하여 살수(薩水)에서 수군(隋軍)을 격파한 고구려 명장 을지문덕의 전기야말로 대동(大東) 4천년의 자주독립의 민족정신을 선양한 전국민의 필독서로서 우리나라 서적계의 효시를 이루는 역사전기물로 뜻깊은 회심의 쾌작(快作)이라고 상찬하였다.
  신채호의 벗인 이기찬 또한 그 서문에서 을지문덕이야말로 “우리 대동 4천여년 역사상에 제일되는 위인이니 그 독립적 기상(氣像)과 건투적 정신이 실로 우리 대동민족의 대표적 인물이며 모범적 인물이다”라고 전제, 영웅을 숭배하고 연구하는 자는 대영웅 을지문덕의 위업, 곧 그 ‘성공한 역사와 그 인격의’ 자취를 먼저 살펴봐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그리하여 “저자의 웅혼탁영(雄渾卓瑩)한 문장으로써 윤색을 가하여 살수의 굉렬(轟烈)한 전황(戰況)과 을지공(을지문덕)의 심의(沈毅)한 인격을 묘사한” 신채호의 이 역사전기물이야 말로 그 독립적 기상과 건투적 정신을 국민 모두가 본받아야 할 것을 강조하였다.
  한편 안창호는 해외 각국에서 워싱톤(華盛頓)과 나폴레옹(拿破倫)과 같은 영웅의 전기를 통해 수많은 후세의 영웅들이 출현할 수 있다고 하면서, 역대 우리나라는 을지문덕과 같은 민족적 대영웅의 기록과 사적이 미진하여 후세인들에게 자국의 역사와 영웅의 활동을 알지 못하게 되었다고 개탄하였다. 그리고 미진한 가운데 자료를 널리 수집하고 그 논단(論斷) 또한 매우 정밀하게 서술한 저자 신채호의 노고를 치하하였다. 그리하여 이 역사전기물을 통해 “조국의 명예역사를 거(擧)하여 비열자(卑劣者)를 경성(警醒)함이며…선민(先民)의 위대사업을 찬(贊)하여 국민의 영웅 숭배심을 고취함이며…2천년 전의 풍운전쟁을 한가롭게 앉아 노래함이 아니라 열성적·모험적의 옛사람의 지난 자취를 묘화(描畵)하여 2천년 후 제2 을지문덕을 환기함이니…”라고 이 전기물의 시대적·계몽적 역할과 선구성에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아울러 당시 국난을 타개할 민족적 영웅의 출현을 대망하는 1900년대 위기적 시대현실 속에서 애국심 배양을 위한 그 계몽적 역할에 한결같이 주목하였다.
  이 책의 내용은 권두에 저자의 범례가 있고, 서론과 결론을 포함하여 모두 17장에 본문 79면으로 구성되어 있다. 또한 그 내용의 서술 체제는 관련 사료에 입각하여 역사적 사실을 토대로 논문에 가까운 문체로 서술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 책의 차례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서론(緖論), 제1장 을지문덕 이전의 한한(韓漢)관계, 제2장 을지문덕시대의 여수(麗隋)형세, 제3장 을지문덕시대의 열국(列國)상태, 제4장 을지문덕의 의백(毅魄), 제5장 을지문덕의 웅략(雄略), 제6장 을지문덕의 외교, 제7장 을지문덕의 무비(武備), 제8장 을지문덕의 수완(手腕)하에 적국(敵國), 제9장 수구(隋寇)의 성세(聲勢)와 을지문덕, 제10장 용변호화(龍變虎化)의 을지문덕, 제11장 살수(薩水) 대풍운의 을지문덕, 제12장 성공 후의 을지문덕, 제13장 구사가(舊史家) 관공(管孔)의 을지문덕, 제14장 을지문덕의 인격, 제15장 무시무종(無始無終)의 을지문덕, 결론.

  먼저 저자는 범례를 통해 “우리나라 4천년 인물 가운데 그 웅위민활(雄偉敏活)한 수완을 발휘하여 굉대휘혁(宏大輝赫)한 공업을 세운 자를 헤아리건대 부득불 을지문덕에게 첫 손가락을 꼽을 터인데, 그럼에도 『동국통감(東國通鑑)』에 실려 있는 을지문덕의 역사가 수십 귀절에 불과하니 이가 어찌 후인의 책임이 아니리오?”하고 영웅 경시의 풍조를 개탄하였다. 그리고 을지문덕에 관한 일련의 사적을 가능한 정밀하게 수집하고 널리 채록하여 사료에 입각한 충실한 ‘을지문덕전’이 되도록 노력했음을 밝혀 놓고 있다.
  이어서 저자는 본문「서론」에서 역사상 위대한 인물의 공업(功業)과 우리 민족성의 강용(强勇)함이 침략군 수군(隋軍)을 전멸시켜 살수대첩(薩水大捷)을 승리로 이끈 을지문덕의 영웅적 활동에 상징적으로 형상화되어 있다고 보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백년동안 이소사대(以小事大) 사대주의에 찌든 우유(迂儒)의 손에 의해 이루어진 사적(史籍)에는 위대한 영웅의 강의불굴(强毅不屈)의 역사는 거의 축소되거나 매몰 제외되어온 역사적 사실에 대해 개탄하면서 일대 민족적 반성과 분발을 촉구하였다.
  그리하여 신채호는 국한문판 『을지문덕(乙支文德)』 발간 이후 그가 재직하고 있던 『대한매일신보』(1908. 5. 2~8. 18)에 국한문 혼용의 『수군제일위인이순신』을, 역시 『대한매일신보』(1909. 12. 5~1910. 5. 27)에 국한문 혼용의 『동국거걸최도통』을 각각 연재 발표하는 등 을지문덕·최영·이순신을 한국사를 빛낸 민족사적 3걸로 간주하는 역사전기물을 잇달아 저술하였다. 또한 그는 한문에 소양이 없는 일반민중과 부녀층을 상대로 그들을 계몽하고 널리 읽히기 위해 1908년 7월 서울 광학서포에서 한글판 『을지문덕』을 단행본으로 발간하는 한편 한글본 『수군의 제일 거룩한 인물 이순신전』을 『대한매일신보』(1908. 6. 11~10. 24)에 연재 발표하였다.
  고대에서 근세에 이르기까지 민족사를 빛낸 이들 세 영웅은 모두 수(隋)·명(明)·왜국(倭國) 등 침략적의 외세와의 투쟁에서 크게 승리한 민족적 위인들이며, 애국심으로 무장한 대표적인 구국의 영웅들이라는 점에서 공통된 특징을 갖고 있다.

  …단(但) 일국(一國)의 강토는 기국(其國)의 영웅이 신(身)을 헌(獻)하야 장엄케 한 자며 일국의 민족은 기국의 영웅이 혈(血)을 유(流)하야 수호한 자라. 정신은 산립(山立)이며 은택(恩澤)은 해활(海闊)이거늘 기국의 영웅을 기국의 민족이 불지(不知)하면 기국이 국(國)됨을 기득(豈得)하리오. 고로 대가(大家)의 사필(史筆)로 영웅의 진면목을 사전(寫傳)하며 재자(才子)의 사부(詞賦)로 영웅의 대공덕(大功德)을 찬미하고 노(爐)의 행(香)과 단(壇)의 고(鼓)로 영웅의 하강(下降)을 기도하며…내(乃) 아국(我國)은 영웅 숭배하는 근성이 하여시(何如是) 박약(薄弱)한지 금고무쌍(今古無雙) 진정영웅(眞正英雄)은 악착(齷齪) 사필하(史筆下)에 초초매장(草草埋葬)하고 기혹(其或) 영웅으로 신앙하는 자는 지록이마(指鹿爲馬)함과 무이(無異)하여 장혁악습(墻䦧惡習)으로 동족(同族)과 상전한 자도 왈(曰) 시영웅(是英雄)이라 하며, 낙천주의로 외구(外寇)을 미사(媚事)한 자도 왈 시영웅이라 하며, 심지어 적국창귀(敵國倀鬼)로 조국을 반서(反噬)한 자[설인귀(薜仁貴)의 유(類)]도 왈 시영웅이라 하야 인간 구비(口碑)와 한청유적(汗靑遺蹟)이 차유인(此類人)에게 상다(常多)하니 아(我)가 영웅 2자를 위하여 일곡(一哭)함이 가하도다.

  신채호는 이 책의 서론에서 “일국의 민족은 그 나라 영웅이 피를 흘려서 보호한 것이라”고 영웅의 역사적 역할을 전제하면서 민족영웅에 대한 새로운 관심과 신앙을 크게 상기시켰다. 그리고 기왕의 사서가 민족의 자주독립과 국권 수호에 헌신한 각 역사시기에 활약한 영웅의 행적이나 활동상을 소홀히 하거나 왜곡시켰음을 깊이 개탄하였다. 그는 역사전기 『을지문덕』의 서론과 결론에서 한민족의 국력이 강성하고 영토가 크게 확장되었던 고대세계에 깊은 향수를 나타내면서, 민족사를 빛낸 “지나간 영웅을 기록하여 장래의 영웅을 부르노라”고 하여 국권 회복과 민족 중흥의 구국적 영웅상의 도래(到來)를 열렬히 희구해 마지않았다.
  이처럼 신채호가 한말의 위기적 상황 속에서 “과거의 영웅을 사(寫)하여 미래의 영웅을 초(招)하노라”고 하는 데서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처럼 역사적 영웅은 결코 죽지도 사라지지도 않는 존재였다. 따라서 그러한 영웅들의 존재는 역사가 계속되는 한 민족의 사표로써 각 시대마다 위기적 상황을 헤쳐 나가는 데 있어서 국민들에게 국난 극복을 위해 무궁하리만큼 용기의 원천으로 작용할 수 있다고 깊이 인식하였다.
  신채호는 역사전기 『을지문덕(乙支文德)』에서 그 이전과 이후의 한중(韓中)관계, 고구려와 수나라의 형세, 열국상태를 논설체로 개관하고, 을지문덕의 웅략·외교·무비·전술·인격 등과 살수대첩의 경과와 고구려의 승전 사실을 비교적 소상하게 서술하였다. 특히 612년(영양왕 23) 수양제(隋煬帝)의 총지휘하에 1백여 만에 이르는 대규모의 군단으로 고구려를 침공한 역사적 상황에 주목하였다.
  즉, 수나라 육군이 고구려의 군사적 요충지인 요동성(遼東城)에 쇄도하여 포위하고 다른 한편으로 우중문(于仲文)·우문술(宇文述 )등이 이끄는 3만 5천명의 별동부대가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와 고구려의 국도인 평양성을 치려하였다. 그러나 고구려의 명장 을지문덕의 신책(神策)에 가까운 용변호화(龍變虎化)의 유인전술에 말려들어 압록강과 살수(현 청천강)를 건너 평양성 부근까지 깊이 들어왔다가 지치고 굶주리게 되어 헛되이 철수하던 중 마침내 살수에서 고구려군의 공격을 받아 거의 전멸에 가까운 패배를 맛보았다. 이 살수대첩은 수장 신세웅(辛世雄)을 전사케 하고 수군 2,700명의 생존자만이 겨우 돌아갈 정도의 대전과를 거두어 고구려군에게 대승리를 가져다 준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나아가 이 싸움에서 수나라는 막대한 피해를 입었고, 이로 말미암아 내란으로 마침내 멸망하고 말았다.
  이처럼 고대 한민족의 대외투쟁에서 빛나는 업적을 남긴 을지문덕과 같은 영웅의 전기물을 낸 것은 일제의 식민지 전야나 다름없는 한말의 시대적 상황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었다. 그리하여 위기에 처한 시대현실 속에서 국민과 청소년들이 강용(强勇)한 영웅들의 사적을 본받아 외세를 몰아내고 국권회복을 위한 영웅적 투쟁의 필요성을 고취하기 위한 애국계몽적 관점이 드러나 있는 것이었다. 또한 역사 속에서 애국적인 영웅들의 무장투쟁 활동을 통해서 애국계몽운동과 함께 당시 전개되고 있던 항일 의병무장투쟁을 고무 격려하려는 의도도 직·간접적으로 은밀하게 담겨져 있었다. 일례로 한글본 『을지문덕』에 서술된 다음과 같은 내용은 당시 국권회복을 위한 항일 의병무장투쟁의 당위성을 암시적으로 나타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그런고로 나의 권리가 떨어지기 전에는 칼과 피로써 그 권리를 보호할 따름이오, 나의 권리가 이미 떨어지거든 칼과 피로써 그 권리를 찾아올 따름이며, 설혹 형극 속에 비참한 일을 당하여 회계에 부끄러움을 잠시도 참지 못할 경우를 당하면 마땅히 날마다 섶에서 자고 때때로 쓸개를 맛보아 칼과 피로 전국 인민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가하거늘…

  신채호는 한글판 『을지문덕』 결론 부분에서 “…지금은 일폭 금수강산이 파쇄가 되어 단군 이후에 사천년을 전래하던 중심기지까지 남에게 사양하여 우리집 형제들은 발을 디딜 곳이 없으니, 어느 겨를에 압록강 서편을 생각이나 하여 보리오. 슬프다. 이십세기 새 대한에 을지문덕의 탄생이 어찌 그리 더디뇨.” 하고 고대세계의 웅비(雄飛)했던 영웅의 활동과 현재의 암담한 역사적 상황에 대비하면서 구국의 영웅대망론을 피력하였다.
  그리고 이 책 말미에 “슬프다. 만일 다른 나라의 진보되는 것으로 미루어 볼진대 중고시대에 그렇게 강한하던 민족이니 지금 당하여 세력이 마땅히 세계에 으뜸이 될 것이어늘 무슨 연고로 그 타락한 경황이 이 지경에 이르렀나뇨. 내 이제야 알괘라. 그 나라 인민의 용맹하고 나약함과 넉넉하고 용렬함은 전혀 그 나라에 먼저 깨달은 한 두 영웅이 고동하고 권장함을 따라서 진퇴하는 바로다” 라고 식민지 전야나 다름없는 위기의 시대를 구원할 민족영웅의 메시아적 역할을 대망하는 영웅사관의 일단을 극명하게 드러내기도 하였다.

4. 국한문본 『수군제일위인이순신(水軍第一偉人李舜臣)』과  한글본 『수군의 제일 거룩한 인물 이순신전』

  신채호가 국한문판 『을지문덕(乙支文德)』과 한글판 『을지문덕』 발간에 이어 금협산인(錦頰山人)이란 필명을 써 『대한매일신보』(1908. 5. 2~8. 18)에 국한문 혼용의 역사전기물로 연재 발표된 것이 『수군제일위인이순신』이다. 이어서 한문을 모르는 일반민중과 청소년·부녀층을 계몽하려는 의도에서 한글본 『수군의 제일 거룩한 인물 이순신전』을 국문판 『대한매일신보』(1908. 6. 11~10. 24)에 잇달아 연재 발표하였다.
  먼저 국한문 혼용으로 서술된 『수군제일위인이순신』의 차례는 다음과 같이 구성되어 있다.

  제1장 서론(緖論), 제2장 이순신의 유년(幼年)과 급(及) 기(其) 소시(少時), 제3장 이순신의 출신과 기후곤건(其後困騫), 제4장 방호(防湖)의 소역(小役)과 조정의 구재(求材), 제5장 이순신의 전역(戰役) 준비, 제6장 부산해(釜山海) 부원(赴援), 제7장 이순신의 제1전玉浦, 제8장 이순신의 제2전唐浦, 제9장 이순신의 제3전見乃梁, 제10장 이순신의 제4전釜山, 제11장 제5전 후의 이순신, 제12장 이순신의 구나(拘拿), 제13장 이순신의 입옥(入獄)·출옥(出獄)간에 국가의 비운(悲運), 제14장 이순신의 재임(再任) 통제사(統制使)와 명량(鳴梁)의 대전첩(大戰捷), 제15장 왜구의 말로, 제16장 진린(陳璘)의 중변(中變)과 노량(露梁)의 대전(大戰), 제17장 이순신의 상환(喪還)과 급(及) 기(其) 유한(遺恨), 제18장 이순신의 제장(諸將)과 공의 유적(遺跡) 급(及) 기담(奇談), 제19장 결론.

  한편 신채호는 국한문본 『수군제일위인이순신』 서론에서,

  오호(嗚呼)라. 도국수종(島國殊種)이 대대(代代) 한국의 혈적(血敵)이 되어 일위상망(一葦相望)에 시선(視線)이 독주(毒注)하고 구세필보(救世必報)에 골원(骨怨)을 심각(深刻)하여, 한국 사천재(四千載) 역사에 외국 내침자를 역수(曆數)하면 왜구(倭寇) 2자가 기호(幾乎) 십지팔구(十之八九)에 거하여…

라고 하면서, 역대 왜구의 침략을 구체적으로 예거하면서 역사적 사실에 의탁하여 한반도를 무력으로 보호국화한 뒤 식민지화 기도를 획책하는 1900년대 초 일제의 침략적 마수(魔手)를 정면으로 비판하였다.
  신채호는 이어서 역사상 일본과의 대외전에서 승리한 고구려 광개토왕(廣開土王)과 신라 태종, 고려시대의 김방경(金方慶)과 정지(鄭地), 조선시대 이순신의 위업을 열거하면서 특히 이순신을 임진왜란 때 해전에서 대일전을 승리로 이끈 탁월한 민족사적 영웅으로 높이 평가하였다. 그는 다시 이 책의 결론에서 충무공(忠武公)을 영국의 넬슨[乃利孫(Horatio Nelson, 1758~1805)] 제독과 견주어 그 위대성을 평가한 다음, “오호라, 영웅의 명예는 항상 그 나라의 세력을 따라서 높고 낮음이로다”라고 하여, 충무공보다 넬슨이 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까닭을 막강한 군사력과 국력의 신장(伸張) 여하에 따라 평가되고 있기 때문임을 상기시켰다.
  신채호는 계속하여 한글본 『수군의 제일 거룩한 인물 이순신전』「결론」에서 “대저 수군의 제일 유명한 사람이 있고 철갑선을 창조한 나라로 오늘날에 이르러 저 해군의 가장 강한 나라와 비교하기는 고사하고, 필경 나라라는 명색조차 없어질 지경에 빠졌으니…”라고 망국의 징후를 보이는 대한제국기의 심각한 나라 형편을 개탄하였다. 그리고 당시 국가의 존립이 위태로운 한말의 한심한 민족 현실과 고통 속에 헤매는 한국민의 일대 분발을 촉구하면서 “20세기 태평양에 둘째 이순신을 기다리자.”고 하며 제국주의가 발호하는 해양시대를 맞아 외경력(外競力)을 갖춘 새로운 민족영웅의 출현을 대망하였다.
  특히 신채호는 임진왜란이라는 7년전쟁기에 대(對)왜구 해전에서 연전연승(連戰連勝)을 거둔 이순신의 활약상과 전술에 주목하여 동서고금의 역대 인물들과 비교하여 충무공의 탁월함을 높이 평가하였다. 즉, 이 전기물 제19장「결론」부분에서 강감찬(姜邯贊)·정지(鄭地)·제갈량(諸葛亮)·한니발(漢尼拔) 등 동서고금의 인물들과 비교하여 무장 이순신의 뛰어난 애국심과 전술전략을 높이 평가하였다. 다만 1805년 프랑스·스페인 연합 함대를 트라팔가르 앞바다에서 격멸한 영국의 넬슨 제독과 견줄만 하나 오히려 취약한 군비와 병력으로 해전을 승리로 이끈 명장 충무공의 전략전술과 사적이 크게 특기할 만하다고 강조하였다. 그리고 저자는 이 『이순신전』이 널리 읽혀져 고통에 빠진 한국민들이 일대 분발하여 “형천극지(荊天棘地)를 답평(踏平)하며 고해난관(苦海難關)을” 극복할 수 있는 계기로 삼을 것을 간절히 희망하였다.

5. 국한문본 『동국거걸최도통(東國巨傑崔都統)』

  국한문 혼용의 『동국거걸최도통』은 고려 말 원(元)·명(明) 교체기에 마지막까지 고려왕조의 영광을 위해 고군분투(孤軍奮鬪)하다가 비운의 죽음을 맞은 무장 최영(崔瑩)의 사적을 논설체로 서술한 미완의 역사전기물이다. 이 전기물은 금협산인(錦頰山人)이란 필명으로 『대한매일신보』(1909. 12. 5~1910. 5. 27)에 연재 발표된 민족사적 3걸의 영웅전 가운데 가장 마지막을 장식하는 작품이다. 이 영웅 전기는 저자 신채호가 1910년 4월 조국을 탈출하여 해외망명을 단행함에 따라 끝내 미완으로 남고 말았다.
  이 미완의 역사전기물은 모두 8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 차례는 다음과 같다.

  제1장 서론(緖論), 제2장 최도통 이전의 아족(我族)과 외족(外族), 제3장 최도통의 전반생(前半生), 제4장 지나(支那)의 풍운(風雲)과 최도통의 북행(北行), 제5장 최도통 북벌정책의 시착수(始着手)와 왕의 반복(反覆), 제6장 양(兩) 적국(敵國)의 교침(交侵)과 최도통의 재기(再起), 제7장 양차(兩次) 홍건적란(紅巾賊亂)의 최도통, 제8장 최도통의 어몽고책(禦蒙古策).

  신채호는 고려 말 급변하는 동아시아의 국제 환경과 새로운 혁명적 변화를 요구하는 국내 정세의 갈등 속에서 나라의 영광을 위해 북벌(北伐)을 꾀하고, 고려에 침입한 홍건적(紅巾賊)과 왜구를 정벌하는 등의 활약을 한 무장 최영의 생애와 활동상에 주목하였다. 그리고 간단없이 고려왕조를 위협하는 국내외 환경 속에서 70평생을 통해 고려왕조의 존립과 국위 선양을 위해 동정북벌(東征北伐)의 무장활동과 자주독립의 민족의식을 선양한 최영의 강용(强勇)·청렴한 인간상을 바람직한 영웅상으로 인식, 그의 업적과 활동상을 크게 찬양하였다.
  신채호는 이 전기물 제1장 서론에서 고려 말 공민왕·우왕대에 침입이 잦던 왜구·홍건적·반란군 등을 토벌, 동정북벌의 애국적인 무장으로 명성이 드높던 최영을 “국가의 정신을 발휘하여 배외(拜外)의 완몽(頑夢)을 타파하고 아(我) 단군자손의 진면목”을 발휘한 거금 7백년간을 대표하는 역사적 위인으로 손꼽았다. 그는 『고려사』와 정도전(鄭道傳) 등이 최영의 북벌계획을 ‘효패(孝悖)’와 ‘광망(狂妄)’이라 폄하한 것을 노예두뇌의 소치라 크게 분개, 최영이야말로 부여족의 역사와 ‘고대 최명예적(最名譽的)의 역사’를 현양한 역사적 위인으로서 작금에 겪고 있는 ‘부여족의 고통’을 구원할 ‘절대거걸(絶對巨傑) 애국위인 최도통’이라고 최대의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최영은 일생을 통해 애국적인 탁월한 무장으로 외침과 내란을 평정한 후 만년인 1388년 관직이 수문하시중(守門下侍中)에 올랐다. 그러나 신채호는 1374년 양광 전라 경상도 도통사(楊廣全羅慶尙道都統使), 1377년 육도도통사(六道都統使)·삼사좌사(三司左使), 1380년 해도도통사(海道都統使), 1388년 팔도도통사(八道都統使)로 활약한 국가 보위를 위한 대내외 무장활동에 크게 역점을 두어 이 전기물에도 ‘도통(都統)’이란 제호(題號)를 택해 쓴 것 같다.
  특히 신채호는 고려 말 명나라가 철령위(鐵嶺衛)의 설치를 통고하며 북변 일대를 요동(遼東)에 귀속시키려 하자 최영이 요동 정벌을 계획하고 군사를 조발(調發)하여 8도도통사로 취임 활동한 사실에 각별한 관심을 기울인 것 같다. 최영이 우왕과 함께 평양에 가서 군사를 독려했으나 이성계(李成桂) 등의 위화도(威化島) 회군(回軍)으로 요동 정벌이 좌절된 사실에 대해 신채호는 크게 애석해 마지 않았다. 이성계군이 개경에 난입하자 이에 최영은 소수의 군사로 맞서 싸우다가 패전, 체포되어 공료죄(攻遼罪)로 참형(斬刑) 당한 이후 일반 민중들이 최영을 민속신앙의 대상으로 삼아 그 원혼(怨魂)을 기리고 있는 사실도 신채호에게 크게 어필되었던 것 같다.
  아무튼 최영은 고려의 사직을 보위하려는 구파 세력의 마지막 보루로서 신흥사대부들이 후원하는 가운데 신진세력 이성계의 군벌(軍閥)과 대결, 시종일관 고려왕조를 지키려 한 강용·청렴한 장군이었다. ‘금 보기를 돌같이 하라’는 그의 유명한 속설이 후세에까지 유전할 정도로 청렴·강직했던 최영의 죽음과 함께 고려왕조도 종말을 고했으며, 그의 원혼은 후세인들의 민속신앙의 대상으로 민중들의 뇌리 속에 계속 살아남게 되었다.
  신채호는 이 미완의 전기물을 통해 최영이 살았던 고려 말의 사회를 “전국 인심이 부패비열의 극도에 달했던 시대”라 보고 애국적 열정과 신념으로 외침과 내란을 평정하는 데 헌신한 무장 최영의 사적을 역대 고려왕조를 대표하는 탁월한 역사적 위인으로 평가하려 하였다. 『대한매일신보』에 연재된 이 전기물은 1910년 4월 신채호의 해외망명으로 인해 고려 공민왕대 대몽(對蒙)정책과 대(對)홍건적·왜구정책에 골몰하는 최영과 정세운(鄭世雲)·승현린(僧玄麟) 등에 관련된 내용을 담은「제8장 최도통의 여몽 고책」(『대한매일신보』, 1910. 5. 27)을 끝으로 더 이상의 집필이나 신문 연재가 중단, 미완으로 끝나고 말았다.
  이 미완의 역사전기는 앞서 집필 발표된 을지문덕·이순신 등의 전기물이 그러하듯이 역사적 사실에 기초하여 논설체로 서술되었다. 모두 8장으로 구성된 목차는 크게 서론부와 대내외의 역사적 상황에 대처하는 최영의 영웅적 활동과 사적을 평면적으로 서술한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특히 고려 말 내우외환(內憂外患)의 국내외 정세, 곧 원명(元明)교체기라는 동아시아 국제질서 변화에 적극적으로 대응하려는 애국적 무장 최영의 활동을 서술하는 데 주력하였다. 특히 홍건적·왜구의 침입과 내란을 평정하는 가운데 대원(對元)·대명(對明)의 북벌계획을 수립하고, 이를 실천하려는 그의 군사활동과 정치적 지도력, 그리고 구국영웅으로서의 고뇌·갈등 등이 강조되어 있다.

6. 역사전기물과 영웅사관(英雄史觀)

  신채호가 역술서 『이태리건국삼걸전』 간행 이후 을지문덕·이순신·최영 등 역대 영웅들의 사적을 전기화하려 한 것은, 한국사에 대한 긍정적 시각과 자긍심에 기초하여 1900년대 초 민족·국가·역사자강사상을 고양시키려는 데 출발점을 두고 있다. 그리고 이 전기물들이 국민들 사이에 널리 읽혀 국권회복운동에 나설 한국민의 일대 분발과 용기를 촉구하고자 하는 애국계몽적인 의도가 짙게 담겨져 있는 것이다.
  신채호가 역사적 사실을 토대로 을지문덕·이순신·최영 등 국민적 애국심의 표본으로 부각시킨 민족사적 3걸은 모두 국난 극복의 영웅들이다. 이들은 특히 대외투쟁에서 승리한 외경력(外競力)을 갖춘 무장들이라는 공통점 이외에도 한결같이 위기적 민족현실을 타개하고 반사대주의적인 자주독립의 민족의식을 선양·실천하려 한 인물이라는 점에서 그 두드러진 특성이 발견된다. 이는 일본·청국·러시아와 서구 제국주의 열강 등 외세의 침략으로 시달리던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조성된 한말의 시대정세와 깊이 관련되어 있다. 특히 일제의 무력적 침략으로 조성된 위기의 시대에 국권 회복과 국운 개척을 위한 상징적 표본으로 구국의 영웅상을 대망하는 신채호의 애국적 염원과 자강론적 민족주의 사상을 그대로 반영한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에서 검토하고 유념해야 할 점은 1900년 초 애국계몽운동기 이후 신채호의 민족주의 사학에 출발점이 된 역사전기물과 영웅사관의 관련 문제이다.
  일찍이 신채호는 “영웅만이 역사를 창조한다”고 주장한 카알라일(Thomas Carlyle, 1795~1881)의 『영웅숭배론(원제 영웅 및 영웅숭배)』을 영문 원서로 읽을 만큼 역사의 중요성과 함께 영웅의 능력과 역사적 역할에 대하여 각별한 관심을 기울인 것 같다. 그는 민족사적 3걸의 역사전기를 집필 발표할 무렵,

  역사는 애국심의 원천이라. 고로 사필(史筆)이 강하여야 민족이 강하고 사필이 무(武)하여야 민족이 무(武)하는 배이어늘…
하고 상무적(尙武的)인 강건한 역사인식의 필요성을 요청하면서 민족과 역사는 불가분의 관계를 갖고 있음을 강하게 시사하였다. 그러한 신채호의 발상은 을지문덕·이순신·최영 등 민족사적 3걸 모두가 역사상 대외투쟁에서 승리한 애국적 무장이며, 각 전기물마다 그들의 영웅적 활동이 크게 강조되는 데서 잘 드러난다. 역사의 주체로서 영웅에 대한 인식은 앞의 역사전기물들에 집약적으로 형상화되어 있으며, 같은 시기 『대한매일신보』에 발표된 「영웅과 세계」(1908), 「기회는 불가좌대」(1908), 「20세기 신동국지영웅」(1909) 등 논설에 반복해서 강조되어 있다. 이미 국한문판 『을지문덕』에서, “국가의 강약은 영웅의 유무에 있고, 장졸중과(將卒衆寡)에 부재하도다”라고 역사주체로서 영웅의 존재와 역할에 주목한 바 있었다.
  또한 신채호는 한글판 『을지문덕』에서 “일국 강토는 그 나라 영웅이 몸을 바쳐서 위엄이 있게 한 것이며, 일국의 민족은 그 나라 영웅이 피를 흘려서 보호한 것이라” 하여, 민족의 선양(宣揚)과 강토(疆土)의 보존은 모두 영웅의 활약 여하에 있음을 상기시키면서, “지나간 영웅을 기록하여 장래의 영웅을 부르노라”고 국권회복운동에 진력할 구국의 영웅대망론을 펼쳤다. 한국사의 영광을 실현하고 애국심이 투철한 영웅들에 대한 관심은 이 시대의 급박한 위기적 현실을 타개할 영웅의 출현을 대망한 것이기도 하거니와, 초기 신채호의 역사와 사회 주체에 대한 인식이 영웅사관에 기초하고 있음을 알려준다. 그의 영웅대망론은 당시의 일반 민중과 청년 학생들이 역사상 위대했던 영웅의 활동을 본받아 국민 모두가 각 분야에서 투사가 되어 참여하도록 그 분발을 촉구하려는 애국계몽적 발상이 내포된 것이었다.
  같은 시기에 신채호는 애국계몽 논설에서

  영웅이 기회를 조(造)하고 기회가 영웅을 산(産)하나니, 영웅과 기회는 호상대(互相待)하며 호상위용(互相爲用)하는 바로다. 수완(手腕)은 풍운(風雲)을 질타(叱咤)하고 일세를 뇌총(牢寵)하며 거적(巨敵)을 최(摧)하고 망국(亡國)도 흥(興)케 함이 시왈(是曰) 영웅이라.

고 썼다. 신채호가 말하는 영웅은 시대추세에 대한 능동적 대응과 창조적 역량의 발휘를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었다. 따라서 그에 의하면, 기회와 영웅은 불가분의 관계를 맺는다고 보았으며, 또한 망국도 부흥케 할 수 있는 탁월한 능력을 갖춘 존재이자 외경력을 갖춘 민족영웅이었다.
  신채호는 또 다른 논설에서 “영웅자(英雄者)는 세계를 창조(創造)한 성신(聖神)이며, 세계자(世界者)는 영웅의 활동하는 무대라”고 하여 영웅의 존재와 역할을 극대화하면서 “이 시대는 영웅의 분몌흥기(奮袂興起)할 때”라고 보았다. 또, 20세기 초 현재의 국제 상황은 열국경쟁시대이므로 국가는

  반드시 세계와 교섭하며 분투함으로써 세계 속에 독립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니, 그러므로 그 나라에 세계와 교섭할 영웅이 있어야 세계와 교섭할지며, 세계와 분투할 영웅이 있어야 세계와 분투하리니, 영웅이 없고야 그 나라가 나라 됨을 어찌 얻으리오.

라 하고 세계(외국)와 교섭하고 외경력 있는 구국적 영웅의 역할과 그 출현을 갈망하였다. 여기에서 그가 말하는 영웅이란 일차적으로 을지문덕·연개소문(淵蓋蘇文)·케사르·한니발 등 세계사와 한국사를 통해 혁혁한 대외투쟁과 영토 확장전에서 전공을 세운 무장들만의 대명사로서 한정되는 것이 아니었다. 그보다는 종교가·정치가·실업가·문학가·철리가(哲理家)·미술가 등 각 분야의 걸출한 존재들로서 국운 개척에 헌신적인 역할과 위업을 남길 인물들을 지칭하였다.
  신채호의 영웅대망론은 뒤에 「20세기 신동국지영웅(新東國之英雄)」이란 논설 속에서 한층 더 구체화되어 새 시대의 국민적 영웅상을 정립시키기에 이르렀다.

  고금 수천재(數千載)에 인문(人文)이 대벽(大闢)하며 동서 6대주에 철혈(鐵血)이 분비(紛飛)하여 목하(目下) 기절괴절(奇絶怪絶) 장절참절(壯絶慘絶)의 20세기 대무대를 개(開)하고, 세계 풍운아의 연극을 시(試)할새, 강자는 상(賞)을 몽(蒙)하여 점점(點點) 영토를 양반구(兩班球)에 기치(棊置)하며, 약자는 벌을 수(受)하여 애애도조(哀哀刀俎)에 재활(裁割)을 시공(是供)하나니 영웅 영웅 20세기 신동국 영웅이여.

  이처럼 신채호는 자기의 시대를 약육강식(弱肉强食)·우승열패(優勝劣敗)의 사회진화론적 원리에 입각한 제국주의적 침략이 자행되는 시대로 보았다. 따라서 힘의 논리가 지배되는 국제질서 속에 살아남기 위해서는 자강론적 민족주의 사상 아래 외세의 도전에 대해 효과적인 응전을 수행할 영웅, 곧 국권을 회복하고 근대 국민국가를 세울 20세기 초 탁월하고 진취적인 능력을 지닌 한민족의 영웅상을 고대하였다. 그는 워싱턴·카부르·마찌니·크롬웰·비스마르크 등 서구 각국의 근대 영웅들과, 광개토대왕·연개소문·최영·이순신 등 민족사적 영웅들의 역할과 위업을 열거하면서 국가적 위기를 척결한 새 시대의 국민적 영웅상을 열렬히 대망하였다.
  한편 신채호는 1909년 신민회의 이론가로서의 활동과 더불어 근대 민족주의와 자유주의 사상, 입헌·공화의 국민주권사상 등 근대적인 정치의식이 성숙됨에 따라 사회와 역사의 주체로서 ‘신국민(新國民)’상을, 사상적으로는 시민적 민족주의를 지향하게 되었다. 그는 대논설 「20세기 신국민」(1910)에서 중고적(中古的) 영웅의 한계를 지적, 20세기 국가경쟁의 원동력은 한둘의 영웅에 있지 않고, 정치·종교·실업·무력(武力)·학술 등 사회 각 부문에서 활약하는 국민적 역량에 달려 있음을 상기시키면서 국민 각계각층의 대내외적 외경력의 발휘를 촉구하였다.
  신채호는 그의 시대를 사회진화론적 천연(天演)의 공례(公例)에 기초한 국민의 외경력이 요청되는 시대로 보고, 한둘의 영웅이 국운을 좌우하던 중고시대와는 달리 20세기는 국민 모두가 각 분야에서 외경력을 발휘할 때임을 역설하였다. 따라서 애국계몽운동 초기에 부각시킨 영웅사관·영웅대망론이 군권시대(君權時代)의 역사인식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음을 보여 준 것이라면, 이후 그가 내세운 새 시대의 국민적 영웅상(英雄像)인 ‘신국민’은 양계초가 『신민설』에서 제안한 ‘신민(新民)’과 마찬가지로 자강력(自强力)과 입헌·공화의 국가사상을 가진 ‘유신(維新) 국민’이었다. ‘신국민’이야말로 독립자존(獨立自存)의 기풍을 지닌 새로운 ‘국민’을 의미하는 것이었으며, 장차 국권을 회복하고 근대 국민국가를 수립하는 데 역사와 사회의 주체로 인식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제5권 신문·잡지
최광식|고려대학교 한국사학과 교수

1. 『신대한(新大韓)』과 신채호(申采浩)

  (1) 『신대한(新大韓)』의 창간 배경
  『신대한』은 1919년 10월 신채호에 의해 상해에서 창간되었다. 『신대한』은 신채호가 상해 임시정부에 대항하기 위해 창간한 잡지였다. 따라서 『신대한』은 신채호의 독립운동노선과 정치사상을 엿볼 수 있는 매우 중요한 당대 사료라고 할 수 있다.
  단재 신채호는 1880년 12월 8일에 충남 대덕군 산내면 어남리 도림마을에서 태어났다. 단재(신채호)는 조부의 권유로 당시 대한제국 관료였던 신기선의 제자가 되고 1898년 그의 추천으로 성균관에 입학했다. 그 후 단재(신채호)는 장지연의 초청으로 『황성신문』의 논설기자가 되면서 본격적으로 언론활동에 뛰어들게 되었다. 단재(신채호)는 『대한매일신보』의 논설기자로 활약하면서 1905년 대표적인 애국계몽운동가로 이름을 알리게 된다. 신민회에 가입했던 신채호는 1910년 일제에 의해 강제 병합이 결정되자 조선을 떠나 중국으로 망명했으며, 이후 1917년에 잠시 조선에 잠입했던 일을 제외하면 죽음을 맞이하기 전까지 일생을 해외에서 독립운동을 위해 헌신하였다. 또한 단재(신채호)는 독립운동과 함께 많은 저작활동을 병행했는데 『조선상고사』(1931년), 『조선상고문화사』(1931년)가 대표적이다.
  1919년 3·1운동이 발생하고 임시정부 수립 운동이 시작되자 신채호도 여기에 가담하게 되었다. 하지만 당시 독립청원서를 제출했던 이승만과의 불화로 인해서 임시정부를 떠나게 된다. 1920년 북경으로 근거지를 옮긴 신채호는 1921년 북경에서 잡지 『천고』 1권 1호부터 7호까지 발행하며 민족의식을 고취시키고, 일제의 만행을 언론을 통해 알리는 역할을 하였다(최광식,『역주 단재 신채호의 천고』, 아연출판부 2004). 한편 북경에 근거지를 둔 신채호는 다물단을 조직하는 등 무장투쟁론에 입각한 ‘즉시독립운동’을 전개했다. 1923년에는 의열단의 요청으로 그의 독립사상이 가장 잘 표현되어 있다는 「조선혁명선언문」을 작성하였다. 이후 단재(신채호)는 임시정부 창조파로 활동하게 된다. 신채호가 아나키스트로 사상을 전환한 것은 1925년경으로 보인다. 1927년에는 신간회 발기인, 무정부주의동방연맹에 가입하였으며, 1928년 무정부주의동방연맹의 발행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대만 기륭항으로 향하다가 체포되었다. 결국 단재(신채호)는 10년형을 선고받았지만 8년간의 옥고 끝에 1936년에 순국하였다(김강녕, 「단재 신채호의 정치사상」, 『단재신채호의 현대적 조명』, 2004, 256~259쪽 ; 김삼웅, 「연보」, 『단재 신채호 평전』, 2005, 501~516쪽).
  『신대한』의 창간은 3·1운동 직후부터 임시정부 수립 운동에 가담하여 이승만의 독립청원운동에 반대하며 임시정부 반대운동을 벌이다가 북경으로 떠났던 시기를 전후하여 창간되었다. 1919년 3·1운동이 발발하자 신채호는 북경에서 상해로 건너가 신익희·이광수·조소앙·최근우·이시영·신석우·여운형·조완구를 포함하여 29명의 독립운동가들과 함께 임시정부 발기회의에 참석했다. 하지만 이승만을 내각책임제하의 국무총리로 선출하자는 데 신채호는 반대했다. 단재(신채호)는 이승만이 국제연맹의 위임통치를 청원한 사람이기 때문에 국무총리가 될 자격이 없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투표 결과 이승만은 국무총리에 당선되었다. 이에 신채호는 강한 불만을 표현했지만 그래도 임시정부에 계속 몸을 담고 있었다. 이후 제6회 임시의정원회의에서 통합임시정부가 재조직되면서 이승만이 대통령으로 당선되자 신채호는 임시정부와 완전히 결별하고 임시정부 반대활동을 전개하게 되었다.
  이런 와중에 1919년 10월 신채호는 신규식과 남형우의 지원을 받아 동지들과 함께 『신대한』을 창간하고 임시정부의 기관지인 독립신문과 치열한 논쟁을 벌였다. 임시정부 쪽에서는 회유의 표시로 독립신문의 사장으로 신채호를 초청하고자 했으나 신채호는 이를 단호히 거절했다. 단재(신채호)는 동지 30여 명을 규합하여 신대한동맹단을 조직하였으며, 이승만 대통령 탄핵 파면을 요청하는 등 점차 反임시정부 계통의 독립운동가 사이에서 맹위를 떨치게 되었다(정윤재, 「단재 신채호의 국권회복을 향한 사상과 행동-소크라테스형 지식인의 한 예-」, 『단재 신채호의 현대적 조명』, 2003, 240~241쪽).
  신채호가 이승만에게 반대한 것은 독립운동의 방법론 때문이었다. 당시 임시정부의 주된 독립운동 방법론은 이른바 ‘준비론’이었다. 당장의 독립이 어려우므로 민심의 통일과 지덕의 준비, 국민개조에 중심을 두었던 것이다. 더욱이 이승만의 경우에는 위임통치를 주장하는 ‘외교론’의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이러한 노선 때문에 이미 무장투쟁을 통한 독립전쟁론을 주장했던 이동휘·박용만·신채호 등이 임시정부의 노선에 반대하게 된 것이다. 여기에 더하여 임시정부의 혁신을 놓고 무장투쟁론은 전개하며 임시정부의 해체와 새로운 정부수립을 주장했던 ‘창조파’와 실력양성론과 외교론에 입각한 ‘개조파’의 대립이 심화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이승만이 대통령으로 추대되자 창조파에 속해있던 신채호는 임시정부와 마침내 결별하게 된 것이다.
  임시정부와의 결별 후 신채호는 다시 언론투쟁의 길로 뛰어들었고 『신대한』은 그 결과물이었다. 1919년 10월 28일 상해 보강리에서 1주 2회 발행을 원칙으로 하여 『신대한』을 창간하였다. 당시 일제의 보고서와 기록을 보면 임시정부는 『신대한』의 창립을 불편하게 여겨서 이를 폐간시키려고 했다고 한다. 물론 이러한 일제의 기록을 액면 그대로 믿을 수는 없지만, 임시정부의 기관지였던 『독립신문』의 사설에서 『독립신문』이 『신대한』을 불편하게 여겼다는 것은 충분히 감지된다. 『신대한』은 상해와 중국의 한인(韓人)들에게 항일의식을 고취시키고 일제의 폭압을 규탄하고 또한 외교정책과 실력양성론에만 지나치게 의존하려는 임시정부를 거세게 비판하면서 그 대안으로 무장투쟁론을 제시하고 있었다. 결국 『신대한』은 임시정부 쪽의 압력에 의해 1920년 초에 폐간되고 만다. 이미 임시정부 의정원 의원직을 사임하였던 신채호는 『신대한』 폐간 직후 미련 없이 상해를 떠나 활동장소를 북경으로 옮겼다(김상웅, 「연보」, 『단재 신채호 평전』, 2005, 228~241쪽). 북경으로 옮긴 후 1921년 1월부터 7월까지 『천고』1권 1호부터 7호까지 발행하였다.

  (2) 『신대한(新大韓)』의 주요 내용
  현재 『신대한』은 창간호(1919.10.28)·제17호(1920.1.20)·제18호(1920.1.23)가 전해지고 있다. 『신대한』의 기사구성은 크게 3부분으로 볼 수 있다. 해외의 사정을 알리고, 한국과 관련된 국내·외 사정을 알리고, 독립운동을 선전하는 것이다.

  1) 1919. 10. 28일자 창간호
  창간호인 제1호의 1면은 창간사로 시작하고 있다. 창간사에서는 『신대한』이 창간된 목적을 밝히고 있다. 여기서 신채호는 사회주의사상을 어느 정도 이해한 듯이 자본가와 노동자간의 관계와 계급전쟁을 논하고, 독립운동의 방법에서 ‘일본(日本)의 반성(反省)을 요구(要求)하자’나 ‘외교(外交)에 신뢰(信賴)하자’와 같은 방법론 등의 한계와 문제점을 지적한다. 말미에는 ‘칼’과 ‘붓’으로 ‘독립군(獨立軍)’을 지원하자는 말로 결론을 내리고 있다. 이어서 3·1운동에 대한 견문록이 실려 있으며, 남대문정차장에서 총독 재등실(齋藤實)에게 가한 폭탄테러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으며, 그 범인으로 밝혀진 의사(義士)에 대해 소개하고 있다.
  2면에서는 국민의회의 선포를 자세히 다루고 있으며, 이들의 선포문과 포고문 그리고 각 정부 부처들의 명단까지 실어서 세세하게 보도하고 있다. 총독부가 조선의 식량을 일본으로 수탈하고자 하는 의도와 이유도 자세히 설명하며 일본의 식민통치의 수탈성을 폭로하고 있다. 이어서 일본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삼국 동맹설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으며, 중추원에서 제출한 ‘자치론’을 기사로 제시하고 있다.
  3면에서 주목해야 할 기사는 ‘간독원흉(奸毒元凶)한 왜(倭)의 정책(政策)’이다. 이 기사는 3·1운동이후 이른바 문화정치의 단편들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제도의 변화(헌병제의 철폐와 관직명 개칭)가 이전보다 더 가혹한 억압을 위한 것이라는 것을 간파하고 있다. 이외에 3면에서는 주로 해외의 정치상황과 국내외 한인의 동향을 알려주고 있다.
  4면에서는 국내외의 한인들의 소식을 전하는 ‘우리 통신(通信)’이 있다. 여기서 주목할 기사는 ‘국제연맹(國際聯盟)에 대(對)한 감상(感想)’이다. 여기서 신채호는 외교론에 입각한 독립운동이 얼마나 허망한 것인지를 중점적으로 밝히고 있다. “평화회의(平和會議)에서 그 성언(聲言)한대로 각민족(各民族)의 자결(自決)의 요구(要求)에 응(應)한 자(者)가 얼마나 되느뇨”, “민족자결(民族自決)을 허(許)함은 그 표면(表面)뿐이오 내용(內容)의 진의(眞意)는 열강국(列强國)의 이해(利害)를 (前提前提)함이 아닌가 하는 허다(許多)이 의문(疑問)이 있도다”, “그러니 우리 조선(朝鮮)은 강력자(强力者)에 대(對)한 요구(要求)보다 신기리(新氣理)에 향(向)하야 춤추며 평화신(平和神)에 대(對)한 환영(歡迎)보다 적(敵)에 향(向)하야 분국(奮國)함이 더욱 신성지고(神聖至高)한 의무(義務)라 하노라” 등의 내용은 국제연맹을 통한 독립청원이 얼마나 덧없는 행동인지를 지적하고 있다.
  2) 1920. 1. 20일자 제17호
  먼저 1면과 2면에서는 각각 한 편의 장문 사설이 신문 상단을 차지하고 있다. 1면의 첫 글은 ‘여론(輿論)을 제조(製造)할 일’이다. 이어서 1면에는 주로 독립운동이나 일본의 식민정책과 관련된 식민지 조선의 현실에 대한 기사들이 제시된다. 주요 기사로는 1년 전의 경성에서 ‘결의단(結宜團)’이라는 이름으로 조직되어 ‘자산가(資産家)’들에게서 자금을 얻어내려다 실패한 사건[결의단(結宜團)의 조난(遭難)], 신의주의 감옥이 파옥된 사건[신의주파옥상보(新義州破獄詳報)]이 소개되고 조선의 현실과 관련해서는 일제 식민당국이 조선시대의 유습인 역둔토(驛屯土)를 임의로 처분하는 것을 비판하는 기사와 조선에 있는 여학교에서 독립운동과 관련하여 어떠한 움직임이 있는지를 소개하는 기사가 실려 있다.
  2면에는 ‘언(言)과 행(行)을 일치(一致)하여라’는 사설이 실렸다. 사람은 언행을 일치시켜 행동력이 있어야 한다는 내용인데, 독립운동의 방법론에서도 말보다는 행동을 중시하는 단재(신채호)의 입장을 엿볼 수 있다. 그 외에 2면은 1920년 당시 전 세계적인 이슈의 하나였던 러시아 내의 적군(볼셰비키)과 백군 내전에 관한 작은 기사들로 채워져 있다. 연해주까지 와 있었던 체코군인들의 귀환 문제, 미국·일본 등의 시베리아 출병 문제 등에 대한 기사들이다. 러시아의 내전은 동아시아와 관련 있는 연해주와 시베리아 등지에서도 치열하게 행해졌기 때문에 그만큼 단재(신채호)의 관심이 표현된 것으로 보인다.
  3면의 머리에는 국제 소식들이 실려 있다. 국제연맹, 미국에서의 공산당 검거, 필리핀 독립 청원 문제, 애란(愛蘭, 아일랜드)의 독립투쟁, 이탈리아의 피우메 점령 소식 등이다. 3면 중간부터는 국내 소식과 독립운동에 관련된 기사들이 실려 있다. ‘대한적십자(大韓赤十字) 제일회회원(第一回會員) 대모집경쟁회(大募集競爭會) 총성적(總成績) 발표(發表)’, ‘북간도(北墾島)의 실황(實況)’ 등의 큰 기사들에서부터 국내외 등지에서 독립과 관련된 작은 기사까지 나열되어 있다. 그 중에는 조선 국내에서 조선인 경영의 신문들이 탄생하게 되었다는 기사도 보인다[소위(所謂) 한인경영(韓人經營)의 삼신문(三新聞)이 우장출세(又將出世)]. 3면 마지막에는 ‘한일관계사료집(韓日關係史料集)’이라고 하여 조선시대 이전의 한일관계사료를 여러 연대기에서 뽑아서 정리해 놓고 있다.
  4면에서 눈에 띄는 기사는 ‘왜정부(倭政府)의 간책(奸策)과 봉천(奉天)의 흑막(黑幕)’과 ‘한국(韓國)의 진상(眞相)(속續) (육六) 나단열·페퍼 저(著) 제오(第五) 겸구령(箝口令)’이다. 전자는 필자가 직접 자기 목소리로 조선 독립의 필요성을 주장하는 내용이고, 후자는 나단열·페퍼라는 외국인이 쓴 것을 번역하여 실은 것으로 추정되는 내용이다. 특히 후자는 조선의 현실과 관련하여 사회에서의 언론 자유가 탄압받고 있다는 내용을 담고 있어 주목된다.

  3) 1920. 1. 23일자 제18호
  1면에는 ‘신구인물(新舊人物)의 대사(代謝)’라는 사설이 실려 있는데 그 내용은 진화하려면 사회가 변해야하고 사회가 변하려면 구인물(舊人物)에서 신인물(新人物)로 바뀌어야 하는데, 신구(新舊) 인물은 사상으로 나누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또 조선의 역사에서 사상계의 신운동(新運動)이 있던 시기를 정조(正祖)시대, 갑신정변 전후, 갑오을미(甲午乙未) 이후, 갑진을사(甲辰乙巳) 이후, 독립운동(獨立運動) 이후 5시기로 분류하여 조선이 진보했다는 것을 설명하고 있고, 또 각 시기의 인물들의 사상을 비교하고 있다.
  다음으로는 영친왕이 입국한다고 하였으나 오지 못했다는 기사와 길림(吉林)에서의 활동 기사가 보인다. ‘서북간도(西北墾島)·상해(上海)·야소교(耶蘇敎)·천도교(天道敎)·불교(佛敎)·○○○會와 관계(關係)’ 기사들이 있는데 서북간도와 상해지역에서 또 각 종교와 단체가 연계하여 전개한 독립운동을 소개하는 기사를 싣고 있다.
  2면에는 프랑스(法國) 외무성에서 프랑스·영국 등의 나라와 독일(德國) 대표자간의 강화조약 부속의정서를 조인했다는 ‘조약비준교환(條約批准交換)’과 윌슨대통령이 제1회 국제연맹회의를 소집하자고 한 ‘연맹회의소집(聯盟會議召集)’ 등 외국에서 일어난 사건을 외국의 통신을 인용하여 전달하고 있다. 또 세묘노프 장군에 관한 기사나 시베리아 등지에서의 미국·일본과 같은 나라의 군사이동과 변동사항에 관한 기사, 미·일군 주둔지역에서의 반미일 감정 등 군사문제에 관하여 자세히 보도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일본관계사료집(日本關係史料集) [십(十)]’도 보이는데 여기서는 고려시대 왜(倭)가 쳐들어온 사실과 고려가 그에 대항하는 모습을 정리하였다.
  3면에서는 ‘신성(神聖)한 독립군(獨立軍)’ 이라는 글이 있는데 진정한 독립군은 어떠해야 하는지 설명하고 있다. 그 후에는 ‘미국(美國)의 일본(日本)에 대(對)한 회답(回答)’, ‘가주우배일운동(加州又排日運動)’ 등 2면에서와 마찬가지로 외국에서 일어나는 사건과 외국의 상황을 전달하고 있다. 또 ‘영국혁명(英國革命)의 음모(陰謀) [삼(三)]’이라는 글이 있는데 영국혁명에 대해 준비주밀(準備周密)·혁명적(革命的) 출판물(出版物)·문자험악(文字險惡)·혁명론자(革命論者)·음모조직(陰謀組織)·대동소이(大同小異)·중심인물(中心人物)·여력완력(膂力腕力)·유래원대(由來遠大) 등으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다.
  4면에서는 페퍼가 쓴 ‘한국(韓國)의 진상(眞相)’이라는 글이 소개되어 있는데, 여기서는 3·1운동에 관한 국내소식이 소개되고 있다. 특히 3·1운동의 주모자들이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고문은 당하면서도 의연하고 또 전국에서 독립운동이 일어나고 있다고 내용이 담겨있다. 이어서 ‘혁명(革命)의 심리(心理)’라는 글에서는 법란서(法蘭西, 프랑스) 대혁명(大革命)의 사례를 들어서 특권을 일당(一黨)에 주어서 또다시 대중의 분노를 사지 말고 일파(一派)에 이익을 주어 다른 파(派)의 불만을 사지 말 것을 주장하고 있다.

  (3) 신채호의 독립운동에서 『신대한(新大韓)』의 위치
  신채호는 구한말에서부터 1930년대까지 자신의 전 생애에 걸쳐 일제의 강점에 저항하며, 한민족의 독립을 위해 활동했다. 신채호의 독립운동에서는 무엇보다 ‘민족’이 언제나 핵심에 있었지만, 독립을 위해서 취했던 시기별 정치사상에는 몇 단계의 변화가 있다.
  일반적으로 신채호의 독립운동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시기 구분해 볼 수 있다. 제1기 1905년에서 1910년까지 『황성신문』과 『대한매일신보』 등을 통해서 논설과 저술에 매진했던 시기. 제2기 1910년 중국으로 망명하여 독립기지 설치운동과 계몽활동을 했던 1910년대. 제3기 1919년 3·1운동 직후부터 1922년 김원봉의 요청으로 의열단에 가입하고 1923년 「조선혁명선언」을 집필할 때까지의 시기. 제4기 1924년 이후 승려생활, 북경군사통일회, 무정부주의 활동을 마지막으로 1936년 순국할 때까지의 시기(정윤재, 「단재 신채호의 국권회복을 향한 사상과 행동 -소크라테스형 지식인의 한 예-」, 『단재 신채호의 현대적 조명』, 229~230쪽).
  한편 신채호의 독립운동을 언론활동기(1905~1910년), 민족운동 및 한국고대사 연구기(1910~1925년), 무정부주의사상기(1925년 이후)로 나누기도 하며(김강녕, 「단재 신채호의 정치사상」, 『단재 신채호의 현대적 조명』, 259쪽), 또는 크게 보아 1910년을 전후한 사회진화론적 역사관에 입각했던 시기와 1920년 이후의 혁명적 역사관에 입각했던 시기로 구분하기도 한다(김기승, 「신채호의 진화사관과 혁명사관의 대치」, 『단재 신채호의 현대적 조명』, 2003, 143쪽).
  이러한 신채호의 활동시기 구분을 살펴볼 때 『신대한』이 독립운동사상의 일대 변화를 확연히 보여주는 1923년의 「조선혁명선언」의 바로 전 단계에 위치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1920년대 초 신채호가 보여주는 정치사상의 변화상을 살펴봄으로써 『신대한』의 역사적 의미를 더욱 뚜렷하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신채호는 1905~1910년의 언론활동기에 비록 사회진화론과 자강주의에 영향을 받고 있었지만, 다른 한편으로 실력양성론과 준비론을 비판하며 ‘즉시독립론’에 입각하고 있기도 했다. 이는 신채호의 일생을 통해서 변하지 않는 독립관이었다. 단재(신채호)는 독립운동에서 실력이 필요하기는 하지만 오직 실력을 양성한 후에만 독립이 가능하다고 보는 주장에 대해서는 반대했다. 오히려 “부강이 독립의 전제를 작(作)한다 하기보다 오히려 독립이 부강의 전제가 된다함이 가(可)하다”라고 주장했던 것이다(김명구, 「한말·일제강점 초기 신채호의 민족주의 사상」, 『단재 신채호의 현대적 조명』, 2003, 194~195쪽).
  신채호의 1910년대 논설을 살펴보면 아직 사회진화론과 자강론에서 벗어나지 못한 한계를 보여주고 있다. 1910년대의 신채호는 약자가 강자가 되기 위한 방법론을 고민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이미 선진국이 된 문명국을 모방하는 방법이었다. 그러나 1920년대에 들어서면서 신채호는 강자가 되는 방법보다는 오히려 강자에게 저항하는 것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1920년대 이후 신채호는 민중직접혁명론의 단계에 접어들게 된 것이다(김기승, 「신채호의 진화사관과 혁명사관의 대치」, 『단재 신채호의 현대적 조명』, 152쪽).
  『신대한』은 시기적으로 신채호가 사회진화론을 벗어나 혁명론으로 전환하는 1920년대 초의 문턱에서 간행되었다. 우리는 『신대한』을 통해서 신채호의 사상적 변화의 단초를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1910년대 말 신채호는 즉시 독립을 위한 무장투쟁에 더욱 힘을 실었으며, 무엇보다 타협론에 대해서 강하게 비판했다. 1919년 10월 『신대한』 창간의 배경이나 목적 역시도 준비론과 외교론 등의 타협론에 대항하기 위한 것이었다는 점에서 우리는 신채호의 독립운동 노선을 더욱 뚜렷이 확인할 수 있다.
  신채호는 타협론의 유형을 크게 4가지로 나누어 비판하고 있다. 첫째는 외교론이다. 신채호는 사대주의적 외교를 비판하고 이승만의 독립청원론을 일본의 속국에 있던 한국을 미국의 속국으로 바꾸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둘째는 안창호가 주장했던 준비론이다. 신채호는 독립쟁취를 위한 준비에 동의하면서도 일본이 과연 우리가 준비하도록 놓아두겠느냐 하는 점에 의문을 제기했던 것이다. 셋째는 ‘내정독립’, ‘자치’, ‘참정권’을 주장하는 타협론자들에 대한 비판이다. 마지막은 문화운동에 대한 비판이다. 신채호는 문화운동 역시 한국의 문화발전에 기여하기보다는 악영향을 미친다고 이해했다(김강녕, 「단재 신채호의 정치사상」, 『단재신채호의 현대적 조명』, 284쪽).
  기존까지는 이러한 신채호의 비타협적 독립운동사상을 읽을 수 있는 자료로 1923년의 「조선혁명선언」을 주목했지만, 1919년 10월에 창간한 『신대한』을 통해서 이미 비타협적인 독립운동사상의 단면을 확연히 보여주고 있다. 따라서 『신대한』은 신채호의 독립운동사상의 변화상을 살펴보는 데 아주 중요한 사료라고 할 수 있다.
  1920년 『신대한』 폐간 직후 신채호는 상해에서 북경으로 근거지를 옮긴 이후 1921년 한문체 잡지인 『천고(天鼓)』를 발간하게 된다. 『천고』에는 중국인 글도 실었으며, 중국인도 독자층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순한문으로 발행하였던 것이다. 이것은 일본제국주의에 대해 조선과 중국이 공동전선을 구축해야 하는 당시의 상황을 잘 보여주는 것이다(최광식, 『단재 신채호의 천고』, 17~44쪽).
  이처럼 『신대한』이 1921년 북경에서 『천고』가 발간되기 직전에 발행된 신문이라는 점에서도 『천고』에 나타난 신채호의 독립운동사상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단초가 될 것이다.

2. 『천고(天鼓)』에 보이는 신채호의 한국사 인식

  『천고(天鼓)』는 단재 신채호가 1921년 북경에서 발행한 한문체 잡지로 1호에서 7호까지 발간되었다(중국인이 쓴 논문과 중국신문에서 발췌한 기사는 백화문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현재는 북경대도서관에 1호·2호·3호만 수장되어 있다. 필자는 1999년 1학기 북경대 초청으로 역사계(사학과)에서 한국고대사를 강의하게 되어 북경대학교에 갔다가 『천고』 1-3호를 열람하고 그 중 고대사부분을 복사할 수 있었다(입수경위에 대해서는 『역사비평』 48호에 소개한 바가 있다. 최광식, 「단재 신채호가 북경에서 발행한 잡지 『텬고』」, 『역사비평』 48, 역사비평사, 1999).
  『천고』 1호는 도부학(渡部學) 교수가 단재 신채호 선생 기념사업회에 보내주어 그 일부가 『개정판 단재신채호전집』 별집(단재신채호선생 기념사업회, 『단재신채호전집』 별집, 형설출판사, 1977)에 수록되어 있다. 그리고 『천고』 1호 내용 전체는 한국정신문화연구원에서 간행한 『한국독립운동사자료집』-중국편-에 영인되어 있다(윤병석편, 『한국독립운동사자료집』-중국편-,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3). 한편 『천고』 2호는 대한매일신문의 김삼웅 주필이 2000년 6월 연변에서 찾아 복사를 하여 공개하였다(김삼웅, 「‘천고’ 제2호 연변서 첫 발굴」, 『대한매일신문』 2000년 6월 28일자. 필자는 신채호 선생의 며느리 이덕남 여사의 배려로 복사본을 구할 수 있었다). 필자는 이를 근거로 하여 2004년 『천고』 역주본을 간행한 바가 있다. 한편 최근에 신채호 선생의 며느리 이남덕 여사가 『천고』 3호를 필사하여 공개하였다.
  단재(신채호)는 『천고』에 일본 제국주의에 대항하는 논설과 독립운동 기사와 아울러 고대사를 비롯한 한국사에 대한 논문을 발표하였다. 『천고』는 한문과 백화문으로 간행되었는데 이것은 조선인뿐만 아니라 중국인을 독자층으로 겨냥하였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천고』의 내용 중에는 한족(韓族)과 한족(漢族)의 단결을 부르짖는 내용이 많이 나타나고 있다. 또한 중국인들도 기고를 하고 있는 것을 보아서도 그렇다고 할 수 있다.
  『천고』에는 독립운동과 관련된 논설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데 각 호당 고대사 논문이 하나씩 실려 있다. 단재 신채호에 대해서 많은 연구가 있지만(단재신채호선생기념사업회,『단재 신채호와 민족사관』, 단재 신채호선생탄신100주년기념논집, 1980과, 단재신채호선생기념사업회,『신채호의 사상과 민족독립운동』, 단재신채호선생순국50주년추모논총, 1986에는 각각 논문이 20편이 실려 있는데 고대사 관계 논문은 각각 2편씩이 있을 뿐이다) 정작 그의 고대사 인식에 대한 연구는 그리 많지가 않다(이만열, 『단재 신채호의 역사학 연구』, 문학과지성사, 1990). 그리고 종래의 연구는 『독사신론』(1908), 『조선상고사』(1931), 『조선상고문화사』(1931)를 통해서 이루어졌기 때문에 1910년대와 1920년대 초반 신채호의 고대사 인식에 대해서는 연구가 많이 이루어지지 않았다(이 시기에 대한 연구는 2편의 논문이 있다. 한영우, 「1910년대의 신채호의 역사인식」, 『한우근선생정년기념사학논총』 1981;조인성, 「신채호의 낭가사상에 대한 일고찰 '동국고대선교고'를 중심으로」, 『경대사론』 창간호, 1985). 필자는 1921년에 발행된 『천고』 고고편을 통하여 1920년 전후 신채호의 고대사 인식을 살펴본 바가 있다(2000년 12월 단재 신채호 선생 탄신 120주년 기념학술대회에서 「『천고』의 고고편에 보이는 신채호의 고대사인식」을 발표하였으며, 그 글이 2001년 3월 『한국사학사학보』 3집에 수록되었다).
  여기서는 『천고』의 고고편과 아울러 다른 한국사 관련 논문을 통하여 단재 신채호의 한국사 인식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1) 『천고(天鼓)』의 목차와 내용
  『천고』 제1권 제1호의 목차는 다음과 같다.

卷首揷圖; 獨立運動時之犧牲者獨立運動流血之女士
天鼓新年新刊祝                    本社同人               1
天鼓創刊辭                           編輯人                 1
祝大朝鮮軍政署之大破倭兵       大弓                   4
朝鮮獨立及東洋平和                震公                   8
日本帝國主義之末運將至          我觀                  14
論日本之有罪惡而無功德          鐵椎                  18
天鼓與新年                            新人                  22
考古篇                                  志神                  23
波蘭光復之略史                      同淚                  30
華友寄送之兩大著                                           34
爭自由的雷音                         種樹                  34
論中國有設中韓親友會之必要    天涯恨人            36
大韓獨立軍破倭露佈                大弓                  39
悼姜宇奎先生                         肖民                  41
謀殺前皇太子之奇聞                大弓                  43
軍政署布告戰況                      大弓                  46
內國時聞                               肖民                  62
海外雜俎                               世眼                  62
 
  『천고』의 신년 신간축사는 본사동인(本社同人)이, 『천고』의 창간사는 편집인(編輯人)이 쓴 것으로 둘 다 신채호가 쓴 것으로 보인다. ‘대조선 군정서가 왜병을 대파한 축사’는 大弓(대궁)이 쓰고, ‘조선의 독립과 동양평화’는 진공(震公)이 쓴 것으로 이 글들도 신채호가 쓴 것이다. ‘왜가 이른바 친선이라는 것은 이와 같다’는 절굉생(折肱生)이, ‘일본 제국주의의 말운(末運)이 이르렀다’는 아관(我觀)이, ‘일본의 유죄와 무공덕을 논함’은 철추(鐵椎)가, ‘천고와 신년’은 신인(新人)이 쓴 것으로 되어 있는데 이들이 누구인지는 확실히 알 수 없으나 내용을 보면 대부분이 신채호가 쓴 것이다. ‘고고편(考古篇)’은 지신(志神)이 쓴 것으로 신채호가 쓴 것이 확실하다(『천고』 3호에는 고고편의 필자가 신지(神志)로 되어 있다. 신지는 대종교에서 고조선의 역사가로 보고 있는 인물이다. 신채호가 대종교에 입문하고 나서부터 필명으로 사용하였다). ‘폴란드의 광복 약사’는 동루(同淚)가, ‘중국인 친구가 보내준 두 책’은 종수(種樹)와 천애한인(天涯恨人)이 쓴 것으로 이것들은 중국인 친구가 보내준 글이다[『천고』 2호 ‘한족(韓族)과 한족(漢族)은 단결해야 한다’는 글에서 신채호는 천애한인(天涯恨人)이 쓴 ‘중국에 중한(中韓) 친우회를 설치할 필요가 있다’는 글을 읽고 감격하여 눈물이 흘러내리는 것을 몰랐다고 술회하고 있다]. ‘대한독립군이 왜를 파한 것을 알림’과 ‘전황태자(前皇太子)를 모살(謀殺)하는 기문(奇聞)’, ‘군정서의 포고 전황’은 대궁(大弓)이 쓴 것으로 되어 있는데 신채호가 쓴 것이다. ‘강우규선생 추도사’와 ‘내국시문’은 초민(肖民)이 쓴 것으로 필자가 누구인지 확실히 모르겠다. ‘내국시문(內國時聞)은’ 국내소식을, ‘해외잡조(海外雜俎)’는 해외소식을 알려주고 있다.
  『천고』 1권의 2호는 1921년 2월 1일 발행되었는데 그 목차와 내용은 다음과 같다.

卷首揷畵(2)
韓漢兩族之宜加親結              震公             8
古朝鮮之社會主義                上同             12
臚陳日軍殘暴之公文             半面生          16
古魯巴特金之死之感想           南溟            20
萬里長城                             神志            26
見聞雜感                             大弓            26
兩島血戰之鱗爪                 一記者            28
倭奴之勾結馬賊                 一記者            30
最近一朔內獨立運動之進行     鐵椎            31
琿春事件之彙報                 一記者            37
海外消息                             肖民            48

  ‘한족(韓族)과 한족(漢族)은 마땅히 단결해야 한다’와 ‘고조선(古朝鮮)의 사회주의(社會主義)’는 진공(震公)이 쓴 것으로 되어 있는데 신채호의 글이 확실하다. ‘일군의 잔폭함을 보이는 공문’은 반면생(半面生)이, ‘크로포트킨의 죽음에 대한 감상’은 남명(南溟)이 쓴 것으로 누구인지 확실하지 않으나 내용을 보면 신채호가 틀림이 없다.

無政府主義 非吾所講究也 豈曰不可 抑無暇也 此身 爲賊所執 身首手足 皆爲鐵鎖所縛 運動屈伸 無以自由 當是時 所急者 在逐賊 隣家 雖有山珍海錯 充滿羅列 吾奚暇願此也 余非唯無政府主義未究 卽其歷史之顚末 未及詳覽也 非唯古魯巴特金之死於何日之不知 卽其生年之爲何年 …… 중략 …… 其所著之書 吾只得見其日譯漢譯之斷片的文字而已 未嘗誦其書聞其言 而遽論其人 可乎 嗚呼吾之爲此文也 非欲論其人也 將以書吾之所感而已

  『천고(天鼓)』1권 2호, 대어고로파특김지사지감상(對於古魯巴特金之死之感想)(이 글은 단기 4254년 1월 29일 밤 등불 아래에서 썼다고 되어 있어 단재 신채호의 글임이 분명하다. 『천고』는 매달 1일자 발행으로 되어 있으므로 다른 사람에게 원고 청탁을 하여 글을 받을 시간이 없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원고 청탁을 하고, 원고를 받고, 편집을 하는데 많은 시간이 걸렸을 것이기 때문이다. 크로포트킨이 사망한 날이 1월 28일이며, 신채호가 사망기사를 본 것은 1월 29일인 것이다)

  위의 글에 의하면 단재(신채호)가 무정부주의를 깊이 있게 연구한 것은 아니라고 하였다. 그 이유는 나라를 빼앗겨 이러한 사상에 심취할 여유가 없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크로포트킨이 태어난 해나 사망한 날을 알지 못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크로포트킨이 지은 책은 일본어나 중국어로 된 것을 단편적으로 보았을 뿐 보다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기 때문에 크로포트킨 자신보다는 크로포트킨의 책에 대한 소감을 쓰겠다고 하였다. 이 글을 통하여 신채호는 일찍이 크로포트킨의 무정부주의에 대한 서적을 일본어나 한문으로 번역한 것을 접하기는 하였으나 이때까지는 아직 무정부주의에 대한 사상적 수용이 제대로 되어 있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신채호가 아나키즘을 이보다 상당히 이른 시기에 수용하였다는 견해도 있다(이호룡,『한국인의 아나키즘 수용과 전개』, 서울대 박사학위논문, 2000). 단재(신채호)가 행덕추수(幸德秋水)와 유사복(劉師復)의 책을 통하여 아나키즘에 접하기는 했으나 아나키즘을 자기의 사상으로 수용한 것은 『천고』의 ‘크로포트킨의 추도사’를 통해 볼 때 1921년 이후인 것이 확실하다.
  한편 ‘고조선(古朝鮮)의 사회주의(社會主義)’는 신채호가 직접 쓴 것으로 사회주의에 대해서도 접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만리장성(萬里長城)’은 신지(神志)가 쓴 것으로 되어 있는데 신채호가 쓴 것이 확실하며, 만리장성의 역사를 이야기하고 있으나 사실상 한국고대사의 영역을 논하고 있다. ‘견문잡감(見聞雜感)‘은 대궁(大弓)이 쓴 것으로 되어 있는데 신채호가 쓴 것이 확실하며, 간도 학살에 대한 의견을 개진하고 있다. ‘양도혈전(兩島血戰)의 편린(片鱗)’과 ‘왜노(倭奴)가 마적(馬賊)과 결탁함’, ‘혼춘(琿春)사건의 휘보(彙報)’는 일기자(一記者)가 쓴 것으로 되어 있는데 대개 훈춘사건에 대한 내용들이다.
  ‘최근 한달간 독립운동의 진행’은 철추(鐵椎)가 썼는데, 국내와 해외의 독립운동 상황을 전하고 있다. ‘해외소식’은 초민(肖民)이 필자이고, 인도의 독립운동, 아일랜드인의 어려움, 일본정부가 일본화폐를 배척하는 중국에 대해 질문하는 공문, 일본 노동계의 파업, 일본 정부가 사회주의를 경계하는 글, 일본 병사가 미군함 선원을 해한 사건, 영일동맹과 일본운명에 대해 논하고 있다.
  『천고』 3호의 목차와 내용은 다음과 같다.

卷㛮揷畵(3)
韓漢兩族之宜加親結                震公            8
第三回三一節普告同胞             大弓            1
各地第三回三一節紀念             記者            5
獨立運動中一大快報                震生            7
獨立宣言首領之近況               克公            12
馬克齊君之公函                                       14
祈戰死                                 浣生            16
考古篇                                 神志            19
壬辰倭亂人物之一                  耳溪            23
二月以後獨立運動之進行         一民            29
和龍縣居留同胞被禍一覽表     上同             35
琿春事件之彙報                     記者            46
中美俄三國與日本關係            記者            49
日本之時局                           記者            54
世界特聞                              記者            58

  ‘제3회 3·1절을 동포에 알림’은 대궁(大弓)이 필자이므로 신채호가 쓴 것을 알 수 있다. ‘각지의 제3회 3·1절 기념’은 기자가 쓴 것으로 누가 썼는지 확실하게 알 수 없다. ‘독립운동중의 일대 쾌보’는 진생(震生)이 필자로 되어 있어 신채호가 쓴 것이 확실하다. ‘독립선언 수령의 근황’은 극공(克公)이 쓴 것으로 되어 있는데 누구인지 확실하지 않으나 이극로(李克魯)일 것으로 추측한다. ‘마극제군의 편지’는 마극제(馬克齊)가 보내온 편지이며, ‘전사자를 기도함’은 완생(浣生)이 필자로 되어 있는데 누구인지 확실하지 않다. ‘고고편(考古篇)’은 신지(神志)가 쓴 것으로 신채호의 저술이 분명하다. ‘임진왜란 인물의 하나’는 이계(耳溪)가 필자로 되어 있는데 이는 홍양호(洪良浩)의 이계집(耳溪輯)에서 발췌한 내용이다.  ‘2월 이후 독립운동의 진행’과 ‘화룡현 거류 동포의 피해 일람표’는 일민(一民)이 필자로 되어 있는데 누구인지 확실하지 않다. ‘훈춘사건의 휘보’, ‘중국·미국·러시아 3국과 일본관계’, ‘일본의 시국’, ‘세계특문’ 등은 기자가 쓴 것으로 되어 있는데 역시 누가 쓴 것인지 확실하지 않다. 동아시아의 국제정세와 세계정세에 대한 논설을 많이 싣고 있는 것이 주목된다.

  (2) 『천고(天鼓)』의 한국사 관련 내용
  1) 『천고(天鼓)』의 고고편(考古篇)
  신채호는 『천고』 1권 1호에 고고편을 쓰고, 3호에 이어서 고고편을 서술하였다. 한편 2호에는 진공(震公)이라는 필명으로 ‘조선고대(朝鮮古代)의 사회주의(社會主義)’라는 논설을 기고하고 있다(목차에는 ‘古朝鮮之社會主義’라고 되어 있고, 내용에 들어가서는 ‘朝鮮古代之社會主義’로 되어 있다).
  『천고』 제1권 1호 고고편은 ‘승군(僧軍)’과 ‘화랑(花郞)’에 대해 논하고 있으며, 그 앞의 인언(引言, 머리말)에서 고고편을 쓰게 된 동기를 밝히고 있다.

“唾棄國粹而 不欲復道 固人之情也 然吾國果何如 遺忘三寶 自高麗焚棄九扃 自李朝 記歷代 則始箕子而去夫餘 論地志則劃鴨綠而遺渤海 尊祀古賢 定方 先於階伯 論述武功仁貴 偉於蓋金 辰卞列國 固蔚然乎當時稱覇之大邦也 而讀史者 不知其源委 南永諸郞 固儼然乎千年間支配思想界之大聖也”  
[『천고(天鼓)』 1권 1호 고고편(考古篇) 인언(引言)]

  신채호는 먼저 국수론(신채호는 Nationalism을 국수론으로 번역하여 사용하고 있다)의 위험성을 지적하면서도 우리의 경우는 다르다고 하였다. 국수론(國粹論)은 위험성이 있는 것이지만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이를 버리면 삼보(三寶)를 버리는 것과 같다고 인식하였다. 그러면서 고려시대에 구경(九扃)을 태워버린 것과 조선시대에 기자로부터 역사를 서술하여 부여(夫餘)를 빼어 버린 것, 지리를 논하면서 압록강에 국한하여 발해(渤海)를 빠트린 것을 비판하였다. 부여와 발해를 중요시하는 신채호의 고대사 인식이 나타나 있다. 또한 당나라 장수인 소정방과 설인귀를 고구려의 연개소문이나 백제의 계백장군 보다 존숭하는 사대주의적 발상을 비판하였다. 민족주의적 관점에서 인물을 평가해야 한다는 것을 분명히 하고 있다. 또한 변진(弁辰) 열국(列國)은 대국인데도 그 실상을 제대로 파악하고 있지 못한 역사연구자들을 비판하고 있다. 아울러 남랑(南郞)=영랑(永郞) 등 화랑은 천 년 동안 사상계를 지배한 성인인데도 이에 대한 인식을 못하고 있음을 통탄해 하고, 1,000년간 신라의 사상계를 지배해 온 화랑도에 대한 재인식을 촉구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의 것을 제대로 알고 국수를 버려서는 안된다고 강조하고 있다. 특히 화랑도의 사상을 강조하고 있는 점이 주목된다. 그리고 인언(引言)에는 다음과 같은 점도 주장하고 있다.

“雖然尊孔之烈易至於復辟 尙古之弊 必及於退化 守舊不化 又久爲內外所詬病 如中華者 不屑國粹 固不足怪也 若吾人則 不然 知人而不知我 其害爲媚外 知今而不知古 其弊爲誣先”
[『천고(天鼓)』 1권 1호 고고편(考古篇) 인언(引言)]

  단재(신채호)에 따르면 공자(孔子)와 같은 성현을 공경하는 것이 마치 복벽(復辟)을 하는 것 같고 퇴보하는 것 같으나 우리는 중국과 달라서 우리의 것을 알지 못하면 오히려 그 피해가 크다고 하였다. 중국은 국수(國粹)가 필요하지 않지만 우리는 옛 것을 모르면 선조를 모독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의 역사와 문화를 알아야 하며, 이를 위해 고증을 하여 고고편을 썼음을 밝히고 있다.
  『천고』 1권 1호 고고편에는 승군(僧軍)과 화랑(花郞)에 대해 서술하고, 『천고』 1권 2호에는 고고편이 없이 고대사 논문으로 ‘조선고대(朝鮮古代)의 사회주의(社會主義)’라는 글이 있으며, 『천고』 1권 3호 고고편에는 진왕(辰王)과 소도(蘇塗)에 대해 서술하고 있다(최광식, 「『천고』의 ‘고고편’에 보이는 신채호의 고대사 인식」, 『한국사학사학보』 3집, 2001).

  2) 한중관계사 인식
  신채호는 『천고』 2호에 실려 있는 ‘한한양족지의가친결(韓漢兩族之宜加親結)’이라는 논문에서 현실에 있어서 한중관계를 논하기 앞서 한중관계의 역사를 논하였다. 먼저 한국과 중국의 산수(山水)를 논하며 한중관계의 친연성(親緣性)을 강조하였다.

從地圖之書 觀韓中兩國之山水 朝鮮之若鴨綠大同白馬蟾津等大江 及其他細流 皆奔注而西向於中華 中華之水 若江淮河漢等大水 及其他支河 皆奔注而東向於朝鮮 兩國之山脈亦然 有若相卽 而不欲相離者 此非兩國親愛之表徵 而天之所命也乎

  지도를 보면 한국의 강물은 모두 중국을 향해 서쪽으로 흐르고 있으며, 중국의 강물은 모두 조선을 향해 흐르고 있다. 한국과 중국의 산맥들도 그러하여 마치 서로를 향해 나아가려 하는 모양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한국과 중국 양국이 서로 친하고 사랑하는 표징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양국은 서로 교류하는데 있어서 잘못된 것을 바로잡아야 한다는 것을 역설하고 있다.

往者兩國人之相交也 朝鮮人有一失 中國人亦有一失 其失也同 而其所以失不同 前者失於大謙 後者失於自尊 時也

  옛날에 한중 양국이 서로 교류함에 잘못이 있었으니 조선인은 지나치게 겸손하였으며, 중국인은 자존의식이 강하였다는 것이다. 이제는 이것을 고쳐야 진정한 한중교류가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중국인의 한국사 왜곡문제를 논하고 있다.

以劒 割我舊土者 吾未能與抗 以筆誣我舊土者 吾乃偏欲與之言 其尤宜爲人笑也 然我兩國人 不可不親結 旣欲親結 不可不開心相見 我願此後朝鮮人 勿以謙卑 圖皮面之交際 中國人勿以古史之妄筆 據作正史而侮於相愛之地也

  칼로 우리의 옛 영토를 나누는 것은 막을 수 없지만 붓으로 우리의 옛 영토를 농락하면 대항할 것이라는 것이다. 한중 양국은 친하게 지내고 힘을 모아야 하는데 이를 위해서는 역사를 왜곡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나아가 ‘만리장성(萬里長城)’이라는 논문에서는 고조선의 옛 영역을 치밀하게 고증하고 있다.

淮南子 論秦之長城曰 北擊潦水東結朝鮮 然則長城 當時朝鮮與中華之分界也 則長城者 可以與言古朝鮮之一斑矣 作萬里長城考 高句麗蓋蘇文 自夫餘築長城 南之海凡千餘里 此國史上城之崔長者 羅馬該撤以北寇頻逼 築城於菜因河北 其長至數百里 此西洋史上城之崔長者也

  『회남자(淮南子)』를 인용하여 장성이 당시 조선이 중국과 더불어 나눈 경계라 하였다. 즉 장성은 고조선의 한 부분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또한 만리장성을 진시황 이전의 장성, 진시황 이후의 장성, 진시황의 장성 등 셋으로 나누어 상세하고 논하였다.

匈奴傳 秦滅六國 而始皇帝使蒙活將十萬之衆 北擊胡悉收河(羊白河)南地 因河爲塞 四十四縣城 臨河徒適戍以充之 通直道自九原至雲陽 因邊山險塹谿谷可繕者治之 紀臨洮至遼東萬餘里 蒙活傳 起臨洮至遼東 延袤萬餘里 此則秦始皇之長城也 以上所述 中華歷代長城之略史也

  『사기』 흉노전과 몽염전을 고증하여 진시황의 장성이 임조에서 시작하여 요동까지 만여 리였다는 것을 밝히고 있다. 그리고 「위략」을 인용하여 요동의 위치를 고증하고 있다.

魏略所云滿藩汗者 卽漢武帝所分爲汶藩汗二縣 而其名見於漢書遼東郡志者也 卽今蓋平海城等地也 所云拓地二千餘里者 自上谷(今宣化府)至襄平(今奉天城西北) 其程可再折而南 至於蓋平海城 其程可二千里而有餘也 然則燕郡之遼東 秦長城所至遼東 亦可知 而弟三問題結矣

  「위략」의 기록을 통하여 만번한을 지금의 개평과 해성으로 비정하였다. 그리고 숙신·조선·부여·예·동호 등을 한나라로 인식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徒摭一二與中國接觸之事實 以共好寄者之賞玩而已 故或一國之名 訛爲數國(如肅愼朝鮮夫餘濊東胡等 實皆一國 而其名稱 煩訛至此)

  한나라의 이름을 여러 나라로 잘못 인식하였다는 것이다. 즉 숙신, 조선, 부여, 예, 동호 등은 실제로 한나라인데 여러 나라로 잘못 칭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동호를 우리나라로 인식한 것은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3. 맺음말

  이상으로 『천고』에 보이는 한국사 관련 논설을 통하여 이 시기 단재 신채호의 한국사 인식을 살펴보았다. 종래는 『독사신론』(1908)을 통하여 1900년대의 한국사 인식을 살펴보았으며, 『조선상고사』(1931)와 『조선상고문화사』(1931)을 통하여 1920년대의 한국사 인식을 살펴보았다. 따라서 『천고』(1921)를 통하여 1910년대 단재 신채호의 한국사 인식을 살핌으로써 단재의 한국사 인식의 변화과정을 고찰할 수 있게 되었다.
  한국사를 보는 관점이 민족주의인 점은 계속적으로 변화하지 않고 있으며, 한국의 역사와 문화에 대해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1920년대에 들어와 불교에 심취하여 승려가 되기도 하였으며, 그 결과 「조선역사상 일천년래 일대의 사건」이라는 논문을 발표하였다. 아나키즘과 사회주의와 같은 사회사상에 관심을 가졌으나 그에 대한 이해는 매우 초보적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고조선의 사회주의」에서 정전제를 사회주의로 인식한 것을 통해 그것을 알 수 있다. 한편 아나키즘에 대해서도 「크로포트킨의 죽음에 대한 감상」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시기에는 아나키즘에 대한 사상적 수용이 제대로 되지 않았다. 상해임시정부에 환멸을 느낀 그가 조직이나 단체보다 개인적인 차원에서 이러한 사상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였다고 볼 수 있겠다.
  그는 『천고』에서 중국과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상호 협조 하에 일본제국주의에 대항할 것을 천명하고 있으며, 그런 주장을 역사적 맥락에서도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중국과 조선은 종래와 같은 사대적 관계가 아니라 역사적으로 대등한 입장에서 친연성을 강조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고조선의 위치를 요동지역으로 비정함으로써 중국과 고조선이 대등한 입장이라는 것을 실례로 들고 있는 것이다. 민족자존의 역사를 견지하면서 중국과 대등하게 협조하여야 한다는 것을 역사적으로 실증한 것이라 하겠다.
  단재신채호전집편찬위원회에서는 『천고』 1호와 2호 전부와 3호중 신채호 선생의 저술이 확실한 부분을 번역하기로 하였으므로 이 부분에 대해서만 역주 작업을 하였다. 앞으로 『천고』4·5·6·7호도 발견되어 민족독립운동사와 신채호의 한국사 인식을 연구하는데 많이 활용되기를 바란다.


제6권 논설·사론
김삼웅|독립기념관장

1. 기존 전집의 문제점

  단재 신채호는 한말·일제강점기 대표적인 계몽주의 계열의 역사가이며, 언론가였다. 그가 처음부터 계몽주의 계열의 지식인이 된 것은 아니었다. 신채호는 할아버지로부터 성리학자가 되기 위한 기초적인 지식을 터득하였으며, 신승구로부터 한학을 익혀갔다. 한말 학부대신을 역임하였던 신기선의 집에서 머물면서 많은 책을 섭렵하였으며, 그의 추천에 의해 성균관에 들어갈 수 있었다. 이처럼 신채호는 당시 한국 대부분의 지식인들처럼 성리학자가 되기 위한 기초적인 수학과정의 길을 걸어가고 있었다. 신채호가 계몽주의 계열의 지식인으로 자처하기 시작한 것은 독립협회에 몸을 담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 이후 그는 신규식·신백우와 더불어 산동학원 설립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신교육운동을 전개하였다. 1905년에는 장지연의 초청으로 『황성신문(皇城新聞)』 주필로 활동하였다.
  신채호가 본격적으로 계몽활동을 시작한 것은 황성신문사에서 대한매일신보사로 자리를 옮기면서였다. 그는 여기서 주필로 활동하면서 한국사와 관련된 방대한 양의 사론을 집필하였다. 그리고 그는 세 명의 이탈리아 영웅을 서사한 『이태리건국삼걸전』을 번역하였으며, 한국사에 있어 현재의 귀감이 되는 역사적 인물을 저술하려 하였다. 사론과 더불어 그는 당시 한국이 해결해야 할 과제와 한국 민족이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한 나름의 논설도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에 기고하고 있었다. 이처럼 신채호는 각종 논설과 사론을 통해 국민을 계몽하고자 하였으며, 이를 통해 무너져 가는 국권을 회복하고자 하였다.
  일본이 한국을 강제병합(강제병탄, 1910)하자 신채호는 기나긴 망명생활로 접어들게 되었다. 그는 청도를 거쳐 블라디보스토크로 정착하였는데, 그 곳에서도 『대양보』·『권업신문』의 주필을 맡아 신문의 논설과 사론을 담당하였다. 논설과 사론을 통한 식민지 국민의 계몽활동은 임시정부로부터 이탈한 후에도 지속하였다. 그는 『신대한(新大韓)』을 창간하여 임시정부의 노선을 비판함과 동시에 자신만의 특유 화법으로 논설과 사론을 집필하였다. 신문뿐만 아니라 그는 각종 잡지 창간에도 직·간접적으로 참여하였다. 『대동(大同)』의 창간에도 간접적으로 참여하는가 하면, 1921년부터 한문 잡지 『천고(天鼓)』를 발간하여 많은 논설과 사론을 집필하였다. 당시 신문 지상에는 발표하지 않았지만, 그는 많은 논설과 사론을 작성하였다.
  신채호의 이러한 행동 궤적을 감안해 본다면, 신채호의 사상을 파악하고 그의 진면목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논설 및 사론에 대한 검토가 필수적이라 할 수 있다. 이에 후대의 많은 학자들은 신채호의 사상을 파악하기 위하여 그가 집필한 논설과 사론을 수집·정리하는데 많은 열정을 쏟았는데, 대표적인 책으로 1972년 단재신채호선생기념사업회에서 주관하고 형설출판사에서 발행한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 전집(全集)』하(下)와 1975년에 나온 개정판(改訂版)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 전집(全集)』별집(別集)을 들 수 있다. 여기에는 수십 편의 논설 및 사론이 수록되어, 신채호 연구에 있어 기둥과 같은 역할을 해주었다.
  단재신채호선생기념사업회에서 간행한 『단재 신채호 전집』으로 말미암아 그와 관련된 연구가 질과 양적인 측면에서 한 단계 나아간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기존 전집에 수록되어 있는 논설과 사론은 몇 가지 측면에서 중대한 결함을 안고 있었다. 해당 잡지나 신문에 실려 있는 논설과 사론의 원전자료를 수록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기존 전집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이로 인해 생생한 1차 사료로서의 역할보다는 2차 사료로서의 기능밖에 수행할 수 없게 되었다. 기존 전집의 또 다른 문제점으로 무기명 논설 및 사론에 대해 특별한 검증 장치 없이 무분별하게 수록하였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 기존 전집에서 각각의 무기명 논설 및 사론에 대해 그것이 왜 신채호의 작품인가에 대해 설명한 부분은 찾아보기 힘들다. 이는 신채호의 실상을 접근 하는데 오히려 혼란만 초래할 뿐이라는 것이 해제자의 생각이다. 이에 이번 단재 신채호 전집의 논설 및 사론에서는 이러한 문제점을 보완하기 위해 해당 자료의 원전을 수록함과 동시에 무기명 논설에 대한 나름의 입장을 피력하려 한다.

2. 기명 논설·사론의 검토

  이번 『단재 신채호 전집』에 수록될 논설 및 사론은 크게 기명(필명)과 무기명으로 분류하였다. 먼저 기명 및 필명이 기재되어 있는 논설 및 사론 가운데 「새해축사」, 「수원이생원」, 「주락조씨의 부인」, 「한씨부인의 자선」, 「게씨문중의 학교」, 「대한(大韓)의 희망(希望)」, 「역사(歷史)와 애국심(愛國心)의 관계(關係)」, 「성력(誠力)과 공업(功業)」, 「대아(大我)와 소아(小我)」, 「기호흥학회(畿湖興學會)는 하유(何由)로 기(起)하였는가」, 「문법(文法)을 의통일(宜統一)」, 「여우인절교서(與友人絶交書)」, 「친구에게 절교하는 편지」, 「낭객(浪客)의 신년만필(新年漫筆)」, 「부(父)를 수(囚)한 차대왕(次大王)」, 「고구려(高句麗)와 신라(新羅) 건국연대(建國年代)에 대(對)하여」, 「예언가(豫言家)가 본 무진(戊辰)」, 「만리장성(萬里長城)이 뉘것이냐」, 「조선민족(朝鮮民族)의 전성시대(全盛時代)」는 기존 단재 전집에도 수록된 작품들이다. 이번 전집에서는 해당 논설 및 사론의 원문과 새 활자본을 보완하여 수록하였다.
  이번 전집에 새로 수록될 기명(필명) 논설 및 사론으로는 「고금광복기(古今光復記)」, 「동방고대각인종(東方古代各人種)」, 「금일(今日)에 또 피난(避亂)할 십승지(十勝地)를 찾는 사람들」, 「사십이상(四十以上)은 진살(盡殺)?」, 「월왕구천살인(越王句踐殺人)」, 「소아교양론(小兒敎養論)」, 「성질(性質)에 따라 아해(兒孩)들을 가르칠 일」이 있다. 「고금광복기(古今光復記)」는 『향강잡지(香江雜誌)』 창간호에 실려 있는 글이다. 『향강잡지』는 1913년 12월 20일 홍콩에서 창간되었다. 이 잡지는 중국 혁명파들의 경제적 후원을 받아 박은식 주도하에 창간되었다. 창간호에는 총 14편의 논설이 실려 있는데 「고금광복기」는 그 중 하나다. 이 글을 신채호가 작성했다고 보는 이유는 『향강잡지』가 창간될 시점에 신채호는 상해에 있어 박은식이 주관하는 잡지에 글을 기고할 가능성이 높았다는 점, 이 글의 필명이 ‘단생(丹生)’으로 되어 있다는 점이다.
  「동방고대각인종(東方古代各人種)」은 「대동제국사서언(大東帝國史序言)」과 더불어 『무애산고(無涯散稿)』에 수록된 작품이다. 『무애산고』는 성균관대학교 존경각에 소장되어 있는 책으로 우송(又松) 이규호(李奎鎬)라는 사람이 귀중한 여러 도서 중에 하나였다. 필사자·출판사·발행자 등은 현재로서는 알 수 없다. 다만 ‘단군기원지사천이백사십유팔년(檀君紀元之四千二百四十有八年)’이라고 필사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이 책의 간행연대는 1915년으로 추정해 볼 수 있으며, ‘신채호(申采浩)저’라고 밝히고 있다는 점, 『무애산고』의 무애(無涯)는 신채호가 사용했던 여러 호 가운데 하나라는 점을 미루어 보아 이 책의 저자는 신채호라고 보는 것이 타당할 듯하다. 「동방고대각인종」은 예맥족·숙신족·선비족·거란족·지나(중국)족·왜족·몽고족·돌궐족·부여족에 대해 설명을 하고 있다. 이 사론에서는 단순히 각각의 족을 설명해 나가는 것이 아니라 범주화하였다. 즉, 예맥족·숙신족·선비족·거란족은 부여족과 더불어 살거나 전쟁을 하였던 족으로 분류하였다. 지나(중국)족·왜족·몽고족·돌궐족은 부여족의 국경안에 거주하지 않으면서 항상 침입하여 괴롭히는 족으로 판단했다. 이처럼 신채호는 한국사의 주족을 부여족으로 간주하였으며, 이를 중심축에 두고 주변 여타의 족들에 대한 평가를 하고 있었다.
  「금일(今日)에 또 피난(避亂)할 십승지(十勝地)를 찾는 사람들」, 「사십이상(四十以上)은 진살(盡殺)?」, 「월왕구천살인(越王句踐殺人)」은 ‘진공(震公)’이라는 필명으로 상해에서 발행한 『독립신문(獨立新聞)』에 실린 글들이다. 진공을 신채호의 또 다른 필명으로 보는 첫 번째 이유는 『천고(天鼓)』에서 찾아볼 수 있다. 주지하듯이 『천고(天鼓)』는 신채호가 1921년 북경에서 창간한 잡지였는데, 여기에 ‘진공’이라는 필명이 보인다. 예컨대, 『천고』 1권의 「조선독립 및 동양평화(朝鮮獨立及東洋平和)」, 『천고』 2권의 「한한양족지의가친결(韓漢兩族之宜加親結)」, 「고조선지사회주의(古朝鮮之社會主義)」는 필명이 ‘진공’으로 되어 있다. 따라서 『천고』와 『독립신문』에 ‘진공’이라는 필명으로 실려 있는 저자는 동일하다고 보아야 할 것이며, 『천고』의 대부분을 신채호가 집필하였다는 점을 미루어 생각해 보면, 『독립신문』의 그것도 신채호의 필명일 가능성이 높다.
  『독립신문』에 실려 있는 위 3편의 글들은 문체나 사상면에서 신채호의 다른 작품들과 서로 통한다고 볼 수 있다. 예컨대, 「금일(今日)에 또 피난(避亂)할 십승지(十勝地)를 찾는 사람들」에서 당시 문예사조의 하나였던 ‘연애소설’과 ‘신시(新詩)’에 대하여 현실 도피적인 문학일 뿐이라며 그만의 특유 화법으로 비판의 날을 세우는데, 이는 그의 또 다른 작품인 「낭객의 신년만필」과 「문예계 청년에 참고를 구함」이라는 글과 사상면에서 일치한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낭객의 신년만필」에는 ‘십승지(十勝地)를 찾아다니는 치인(癡人)’이라는 표현이 등장하는데, 이는 제목과 유사성을 띠고 있다. 이러한 점을 감안한다면 『독립신문』에 ‘진공’이라는 필명의 글은 신채호의 작품으로 보아도 무방하리라 생각한다.
  「성질(性質)에 따라 아해(兒孩)들을 가르칠 일」과 「소아교양론(小兒敎養論)」은 1935년 『신동방』이라는 잡지에 실려 있는 글이다. 이 두 편의 글이 『신동방』에 실리게 되는 경위에 대해서는 현재 알 수 없다. 이 두 편의 글은 제목에서 말해주듯 ‘소아(小兒)’교육의 중요성에 대한 신채호 나름의 입장을 정리한 것이다. 「성질(性質)에 따라 아해(兒孩)들을 가르칠 일」에서는 부모 특히 아버지의 신분과 직업에 따라 자식을 교육시킬 것이 아니라, 소아가 천성적으로 가지고 있는 자질을 육성하여 국가의 큰 재목이 될 수 있도록 교육 시킬 것을 강조하였다. 「소아교양론」에서는 태아시절부터 소아교육의 중요성에 대해 역설하고 있었다. 신채호가 소아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은 국가의 근본이 소아에게 있다고 판단하였기 때문이다. 즉, 국가의 중심은 국민에 있으며, 국민의 핵심은 청년이라는 것이 그의 평소 지론이었다. 국가가 강해지기 위해서는 청년이 강건해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소아시절 부모가 교육을 잘 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이번 전집에 수록될 기명(필명) 논설 및 사론 가운데 주목되는 것으로 『대한매일신보』 담총(談叢)·잡동산이에 연재된 짤막한 작품들을 들 수 있다. 담총과 잡동산이는 1909년 11월 20일부터 1910년 4월 7일까지 『대한매일신보』 국한문판과 국문판에 각각 연재되었다. 『대한매일신보』 국문판에는 필명이 보이지 않으나, 국한문판에는 ‘검심(劍心)’이라는 필명이 기재되어 있었다. 그러면 담총에 보이는 ‘검심’은 신채호의 필명인가. 『대한매일신보』 1909년 12월 15일자 담총란에는 「국(國)사의 일사(逸事)」라는 제목의 글이 연재되었는데, 여기서 저자 ‘검심’은 “홍이계(洪耳溪)가 연경(燕京)에 사(使)하다가 요양계관산(遼陽鷄冠山)에 일비(一碑)가 유(有)한데 당태종(唐太宗) 이세민(李世民)이 연개소문(淵蓋蘇文)에게 대패(大敗)하여 단기(單騎)로 주(走)하다가 차산(此山)에 유숙(留宿)하였다고 기재(記載)한 것을 친견(親見)하였다.”라고 하여, 홍양호[이계(耳溪)는 홍양호(洪良浩)의 호임]의 기록을 제시하고 있다. 이러한 점은 신채호가 『대한매일신보』에 연재한 「독사신론」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 1909년 12월 29자 담총란에는 「국문(國文)의 기원(起源)」이라는 글이 연재되었는데, 이 글의 필명 또한 ‘검심’으로 되어 있다. 저자는 세종대왕이 한글을 창조한 것은 잘못 알려진 사실이라고 하면서, 한글의 기원을 『진언집(眞言集)』이란 책에 근거하여 승려 요의(了義)에서 찾고 있었다. 한글을 창조한 사람으로 요의를 들고 있는데, 이는 ‘검심’만의 독특한 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신채호의 글로 인정받고 있는 「국한문(國漢文)의 경중(輕重)」, 「국문연구회 제씨(國文硏究會諸氏)에게 권고함」이라는 글에서도 이와 비슷한 주장을 찾아볼 수 있다. 그리고 신채호의 작품으로 간주되고 있는 「천희당시화(天喜堂詩話)」에서 “여(余)가 견(見)하는 바 국시중(國詩中)에 기유전(其流傳) 최구(最舊)한 자(者)를 거(擧)하면 고승(高僧) 요의(了義)가 국문(國文)을 시창(始創)하고 불교(佛敎)를 찬미(讚美)한 진언(眞言)이 시(是)라 할지나”라고 하여 승려 요의를 언급하였다. 이상의 내용을 종합해 볼 때, 담총의 저자인 ‘검심’은 신채호의 또 다른 필명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듯하다.
  담총은 다양한 주제를 짤막하게 적은 글들로 구성되어 있지만, 거기에는 신채호의 현실인식이 고스란히 담겨져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여기서는 담총에 실려 있는 모든 글들을 소개하는 것은 피하고, 신채호의 현실인식을 읽어낼 수 있는 몇 편의 글들만 추려서 소개하고자 한다. 담총 또는 잡동산이에 실려 있는 신채호의 글들을 살펴보면, 기존 체제에 대한 파괴를 강조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군(君)과 국(國)」(『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 1910. 1. 29)이라는 글에서 전통시대 백성들의 마음속에는 군과 국을 동일시하였는데, 오늘날 한국이 문명국이 되기 위해서는 “군(君)은 군(君)이오 국(國)은 국(國)이 되야한다.”고 하였다. 신채호는 군과 국의 분리를 통해 전근대 사회의 표상물이었던 군의 전통적 권위를 부정하려 했다.
  군(君) 뿐만 아니라 성인(聖人)에 대해서도 권위와 전통을 부정하고 있었다. 신채호는 「성인(聖人)」(『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 1909. 12. 18)이라는 글에서 ‘성인’이 가지고 있던 신비성을 벗겨내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는 “성인(聖人)이 개중인이상(蓋衆人以上)에 초출(超出)치 아님은 아니나 피(彼)도 역(亦) 사회업력(社會業力)의 조성(造成)한 바오 자연(自然)히 생지(生知)한 자(者)가 아니라”고 하여 성인을 격하시키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나아가 현시대는 “자유시대(自由時代)니 범아학자(凡我學者)는 고인(古人)의 노(奴)가 되지 말지어다”(『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 1909년 11월 27일자 「지나고설[支那(중국)古說]부에 운(云)하였으되」)라고 하여 기존 전통적 질서와 권위에 대해 부정하였다. 신채호는 전통과 권위에 대한 부정을 파괴의 논리로 이어 나간다. 아래의 자료를 통해 그 단면을 살펴 볼 수 있다.

  오인(吾人)은 공자(孔子)로 선생(先生)을 작(作)할까, 야소[耶蘇(예수)]로 선생(先生)을 작(作)할까, 마합맥[麻哈麥(마호메트)]으로 선생(先生)을 작(作)할까, 왈(曰) 개부부(皆否否)라 오직 진리(眞理)로 선생을 작(作)하리라. 고(故)로 공자(孔子)·야소[耶蘇(예수)]·마합맥[麻哈麥(마호메트)]의 행(行)한 바라도 진리(眞理)에 합(合)하면 공승교(恭承敎)하려니와 만일 진리(眞理)에 부합(不合)한 자(者)면 오인(吾人)은 두(頭)가 쇄(碎)하더라도 결단(決斷)코 반항(反抗)을 작(作)하여 아(我) 진리선생(眞理先生)을 유종(惟從)하리라. (중략) 성인경(聖人經)·현인전(賢人傳)이라도 진리(眞理)에 합(合)하면 이(已)어니와 진리(眞理)에 부합(不合)하면 오인(吾人)은 골(骨)이 분(粉)하더라도 결단(決斷)코 정의(正義)를 장(仗)하여 아(我) 진리성경(眞理聖經)을 유독(惟讀)하리라. 대저(大抵) 파괴(破壞)가 무(無)하면 건설(建設)이 무(無)하나니 구학설(舊學說)이 불파괴(不破壞)하면 신학설(新學說)이 불건설(不建設)될지며 구사상(舊思想)이 불파괴(不破壞)하면 신사상(新思想)이 불건설(不建設)될지며 구습속(舊習俗)·구제도(舊制度)가 불파괴(不破壞)하면 신습속(新習俗)·신제도(新制度)가 불건설(不建設)될지라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 1910년 1월 7일자 「유진리(惟眞理)」)

  공자·예수·마호메트는 성인임과 동시에 ‘구학설(舊學說)’·‘구사상(舊思想)’·‘구습속(舊習俗)’·‘구제도(舊制度)’의 표상물로 등치된다. 이상의 것들은 ‘진리’에 합치되지 않으면 파괴의 대상이 됨을 역설하였다. 이처럼 신채호는 전통과의 단절을 꾀하고 있었다. 그가 이렇게 강한 어조로 전통과의 단절을 선언하고 ‘신학설(新學說)’·‘신사상(新思想)’·‘신습속(新習俗)’·‘신제도(新制度)’의 건설을 강조한 것은 그의 현실인식과 관계가 깊다. 그는 「상복연(喪服鳶)」·「재맹아(再盲兒)」(『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 1909. 11. 23)와 「서인(西人)이 오주[澳洲(오스트레일리아)]를 처음 발현(發現)할 제(際)」(『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 1909. 11. 25)에서 제국주의의 침략성을 직시하면서 동시에 현시대를 제국주의가 힘을 발휘하는 시대라고 규정하고 있었다. 힘의 논리 즉, ‘우승열패’와 ‘생존경쟁’이 엄연히 존재하는 현실 속에서 국가와 민족의 생존을 도모하기 위해서는 더 이상 전통에 얽매일 수 없다는 것이 신채호의 판단이었다.
  신채호가 새롭게 건설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는 새로운 학설·사상·관습·제도는 ‘서구화’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고 그가 무분별하게 서구화를 받아들이자는 것은 아니었다. 신채호는 서구화를 받아들임에 조건을 제시했다. 그것은 「국수(國粹)」(『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 1910. 1. 13)라는 글을 통해 짐작해 볼 수 있다. 그는 여기서 “만일(萬一) 국수(國粹)를 파괴(破壞)하고 법국[法國(프랑스)]의 문명(文明)을 수입(輸入)하면 시(是)는 자국인(自國人)을 구(驅)하여 법국노[法國(프랑스)奴]가 되게 함이오 국수(國粹)를 파괴(破壞)하고 덕국[德國(독일)]의 문명(文明)을 수입(輸入)하면 시(是)는 자국인(自國人)을 구(驅)하여 덕국노[德國(독일)奴]가 되게 함이라. 고(故)로 외국문명(外國文明)을 수입(輸入)하려는 자(者)가 위선(爲先) 국수(國粹) 이자(二字)를 삼복(三復)할지어”라고 하여, 국수를 파괴하지 않는 방향에서 서구의 제도와 사상을 도입하자고 주장하였다.
  이는 담총의 다른 글에서도 찾아진다. 「삼국이후(三國以後)의 한국(韓國)은」(『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 1909. 12. 22)에서 그는 “삼국이후(三國以後)의 한국(韓國)은 기국성(其國性)이 어찌 여사(如斯)히 약(弱)한지 정치상(政治上)·문화상(文化上)에 모두 타(他)의 정복(征服)하는 바 되고 종교상(宗敎上)까지 타(他)의 정복(征服)을 당(當)하여 불교(佛敎)가 입(入)함에 한국적(韓國的) 불교(佛敎)가 되지 못하고 불교적(佛敎的) 한국(韓國)이 되며, 유교(儒敎)가 입(入)함에 한국적(韓國的) 유교(儒敎)가 되지 못하고 유교적(儒敎的) 한(韓)국이 되어 해(害)만 유(有)하고 익(益)은 무(無)하였거늘, 여금(如今) 천주교(天主敎)·기독교(基督敎)가 입(入)함에도 역연(亦然)할 여(慮)가 유(有)하니 비부(悲夫)라”고 하였다. 이를 통해 볼 때, 신채호는 서구의 신문물을 받아들여 새롭게 건설하고자 하였으나, 거기에는 한국적 주체성이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국수가 중심이 되고 그것을 훼손하지 않는 방향에서 서구의 문물과 제도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 그의 판단이었던 것이다.
  지금까지 담총에 실려 있는 몇 편의 글을 가지고 신채호의 현실인식과 극복방안이 무엇이었는가에 대해 살펴보았다. 담총에는 이상의 글 외에도 많은 짤막한 글들이 수록되어 있다. 역사인식의 한 단면을 살펴 볼 수 있는 글로는 「로이십사[路易十四(루이 14세)]는 법국[法國(프랑스)]의 효군(梟君)이라」(『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 1909. 12. 10), 「국(國)사의 일사(逸事)」(『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 1909. 12. 15), 「단(斷)발」(『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 1909. 12. 21), 「삼국이후(三國以後)의 한국(韓國)은」(『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 1909. 12. 22), 「여(余)가 왕년(往年)에 일사학선생(一史學先生)을 과(過)하니」(『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 1910. 1. 5), 「양국사학(兩國史學)의 반비례(反比例)」(『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 1910), 역사인식 외에 영웅관에 대해 언급한 글들로는 「위인(偉人)의 두각(頭角)」(『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 1909. 11. 28), 「철인(哲人)의 면목(面目)」(『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 1909. 11. 30), 「강감찬(姜邯贊)과 가부이[加富爾(카보우르)」(『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 1909. 12. 14), 「동양영웅아(東洋英雄兒)의 결점(缺點)」(『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 1910. 1. 1), 「연개소문(淵蓋蘇文)」·「김준(金俊)」(『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 1910. 1. 21), 「대영웅(大英雄)·소영웅(小英雄)」(『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 1910. 2. 2), 「종교가(宗敎家)의 영웅(英雄)」(『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 1910. 2. 16) 등이 있다. 신채호의 교육관을 살펴 볼 수 있는 글들로 「내가 향곡(鄕谷)에 구경(覯景)하니」(『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 1909. 11. 20), 「옛적에 일소아(一小兒)가 유(有)하니」(『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 1909. 11. 21), 「유(柳)수운(雲) 한석봉(韓石蜂)」(『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 1909. 11. 26), 「촌여(村閭)의 인(人)이 항상(恒常) 소아(小兒)를 조속(操束)하여」(『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 1909. 12. 1), 「노예공부(奴隸工夫)」·「협잡교육(挾雜敎育)」(『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 1909. 12. 3), 「여(余)가 향일(向日)에 일독서실(一讀書室)을 과(過)하다가」(『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 1909. 12. 24) 등을 들 수 있다.

3. 무기명 논설·사론의 검토

  이번 『단재 신채호 전집』을 발간함에 있어 단재신채호전집편찬위원회(이하 편찬위원회)를 구성하여 운영하여 왔다. 편찬위원회는 한국근현대사 전문가와 신채호를 전문적으로 전공하는 학자들로 구성하였다. 편찬위원회를 만든 이유는 이번 전집에 새로운 자료들을 발굴하여 수록하기 위해서였다. 이와 더불어 앞서 지적한 것처럼 기존 전집에는 신채호의 작품이 아닌 경우가 수록되어 있었는데, 이러한 것을 판단하는 데에 있어 신중을 기하기 위함이었다. 특히 논설 및 사론 같은 경우에는 대부분이 무기명으로 되어 있어 각각의 그것이 신채호의 글인지 아닌지를 판단하는 데에 있어 신중을 기하지 않을 수 없다. 이에 편찬위원회를 대위원회와 소위원회로 나누고, 소위원회에서 무기명 논설 및 사론에 대해 검토 작업을 하였다.
  편찬 소위원회에서는 기존 전집에 수록되어 있는 논설 및 사론이 가지고 있는 문제가 심각하다는 것에 대해 인식의 궤를 같이하였다. 소위원회에서는 기존 전집에 수록되어 있는 논설 및 사론 가운데 어떤 것을 제외해야 하는가에 대한 의견과 어떤 것을 제외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기존 전집 가운데 어떤 것을 넣을 것인가가 중요하다는 의견이 나왔다. 기존 전집에는 분명한 문제점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모든 것을 부정하는 상태에서 출발하는 것도 문제가 있다는 지적이 제기되었다. 이에 소위원회에서는 기존 전집 가운데 신채호의 작품이 아닌 것부터 분류하기 시작하였다.
  「역사에 대한 관견 이측」, 「소회일폭으로 보고동포」, 「이십세기 신동국지영웅」은 신채호의 작품이 아닌 것으로 판단했다. 「역사에 대한 관견 이측」은 『대동제국사서언』, 『조선상고문화사』와 비슷한 역사인식을 보이는 것은 사실이지만, 대한매일신보사에서 주필로 근무하던 신채호가 그것을 ‘기서’의 형태로 글을 수록할 이유는 없었다. 이러한 견해에 대해 ‘기서’라는 이유로 신채호의 작품이 아니라고 하는 것은 문제가 있으며, 필명도 유사한 측면이 있다는 견해가 나왔다. 하지만 ‘기서’는 독자 투고이기 때문에 신채호가 투고까지 하면서 신문사에 글을 실을 이유는 없어 보이며, 그와 비슷한 필명은 다른 데에서도 찾아볼 수 있기 때문에 위 세 작품은 신채호의 작품이 아닌 것으로 결정하였다.
  「서호문답」, 「국민·대한 양마두상 객일봉」도 신채호의 작품이 아닌 것으로 편찬 소위원회에서는 결정하였다. 「서호문답」의 서호는 김규식의 호로 생각되며, 거기에서 그려지는 영웅관은 신채호의 그것과 다르다는 것이 소위원회의 견해였다. 그리고 「서호문답」에는 일본을 찬사하는 내용이 나오는데, 그것은 신채호의 일본관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국민·대한 양마두상 객일봉」에는 베델을 옹호하는 내용이 보이고 있기 때문에 양기탁의 글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는 의견이 제시되었다.    이상 5개의 글은 신채호의 그것으로 보기 어렵다는 것이 소위원회의 판단이었다. 소위원회에서는 이들 작품을 이번 새로운 전집에서는 수록하지 말자는 견해도 나왔지만, 그렇게 하기에는 너무 위험하다는 것이 소위원들 전체의 견해였다. 비록 소위원들이 전문가들로 구성되어 있지만, 여기에 참여하지 못한 또 다른 전문가들의 주장과 의견도 있기 때문이다. 다만 「대한신민회취지서」와 「고락유수」는 삭제하기로 하였다. 「대한신민회취지서」는 안창호의 작품이 분명하며, 「고락유수」는 『시천교월보』에 수록되었다고 하는데 『시천교월보』에는 그러한 글이 찾아지지 않는다. 그리고 신채호가 친일단체의 잡지인 『시천교월보』에 글을 기고할 일은 더더욱 없기 때문이다.
  「이십세기 신국민」, 「만주와 일본」, 「만주문제의 취하여 재론함」, 「청년학우회취지서」, 「제국주의와 민족주의」 등은 신채호의 작품으로 보기 어렵다는 견해가 나왔다. 이에 대해 「이십세기 신국민」은 내용상 약간의 차이가 보이지만 양계초의 「신민설」을 번역한 것이며, 「만주와 일본」, 「만주문제의 취하여 재론함」은 동일한 저자로서 신중히 판단해야 한다는 반론이 제기되었다. 「청년학우회취지서」에 대해 국문학을 전공하는 사람들은 최남선의 작품으로 보고 있다는 의견이 제출되었는데, 『경부신백우』에 의하면 신채호가 작성했다는 기록이 보이기 때문에 이 또한 신중히 판단해야 한다는 견해가 나왔다. 이상 4개의 글에 대해서는 판단을 유보하기로 소위원회에서 결정하였다.
  나머지 논설 및 사론에 대해서는 신채호의 글이라고 소위원회에서 판단하였다. 예컨대, 「동양이태리(이탈리아)」에는 「독사신론」에 대한 언급이 나오고 있다는 점, 「구서간행론」, 「서적계의 일평」, 「구서모집의 필요」는 내용상 서로 비슷할 뿐만 아니라 신채호의 문체와 사상이 일치하였다. 「국문연구회 위원제씨에게 권고함」과 「국한문의 경중」은 앞서 언급한 것처럼 담총에서 보이는 내용과 문체가 흡사하였다. 이처럼 단재신채호전집편찬위원회에서는 신채호의 논설 및 사론을 나름대로 검토하여 기명, 무기명-인정, 무기명-추정으로 구분하여 수록하기로 하였다. 아울러 한 가지 더 추가할 것은 「성토문」과 「조선혁명선언」은 독립운동편에 수록하기로 하였다는 점이다. 이 두 작품은 기존 전집에는 논설 및 사론에 수록되어 있었으나, 그 성격상 독립운동편에 수록해야 한다는 것이 편찬위원들의 판단이었다.


제7권 문학
김주현|경북대학교 교수

 1. 단재(신채호)의 글쓰기와 문학

  단재 신채호를 이야기할 때 그의 앞에는 다양한 수식어가 온다. 언론인, 애국계몽가, 독립운동가, 민족주의자, 역사학자, 문인, 무정부주의자 등이 그러한 것이다. 그는 문사철을 겸한 전통적 문인이었을 뿐만 아니라 항일투쟁에 참여한 실천적 지성인이다. 그는 애국계몽기 언론활동을 통해서 계몽운동을 펴는가 하면, 일제 강점기 무력투쟁을 선도하는 등 우리 근대사에서 큰 족적을 남긴 분이다. 이제까지 그에 대해서는 다양하게 조명되어 왔다. 나는 여기에서 그의 다양한 활동 가운데 문인 신채호, 신채호의 문학에 대해 언급하려고 한다.
  단재(신채호)가 문인으로 지칭된 것은 이미 당대에도 그러하였다. 단재(신채호)는 계몽기에 『을지문덕』을 창작하고, 『이순신전』, 『최도통전』을 써서 『대한매일신보』에 발표하기도 했다. 안자산(자산 안확)은 『조선문학사』에서 “무애생의 명이 강호에 선전하야 문예가 혁혁한 자는 신채호”라고 하여 높이 평가하였다[안자산(자산 안확), 『조선문학사』, 한일서점, 1922, 124~125쪽]. 김태준은 단재(신채호)의 『을지문덕』, 『최도통전』 등을 들어 “역사소설을 지어 신생면을 개척한 것도 씨의 독창에서 난 것이며, 융성한 정치관념과 국가관념을 반영한 시대적 산물”이라고 평가하였으며(김태준, 『조선소설사』, 『한국문학사연구총서』 3, 삼문사, 1982, 441쪽), 임화는 그의 작품들을 『정치소설』에 포함시켜 논의하였다(임화, 「신문학의 태생」(6), 『한국문학사연구총서』 1, 삼문사, 1982, 510쪽). 이것들은 신채호의 애국전기물을 대상으로 문채 및 작품의 성격을 논의한 언급들이다. 단재(신채호)에 대한 당대의 문학적 평가는 애국계몽기, 주로 역사전기물을 중심으로 이뤄졌다.
  단재(신채호)는 일제에 의한 강제적인 병합조약(강제병탄, 1910)이 이뤄지기 직전 중국으로 갔다. 그리고 일제강점기 블라디보스토크·상해·북경 등지에 머물면서 독립운동과 역사연구에 몰두한다. 그 시기 그는 적지 않은 문학작품들을 창작하였다. 그러나 그의 문학은 발표 지면을 얻지 못했고, 상당수가 원고 상태로 남아 있었다. 단재(신채호)는 1928년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1936년 여순 감옥에서 옥사하게 된다. 그의 사후 상당수 유고는 떠돌게 된다. 단재(신채호)의 문학이 다시 조명을 받게 된 것은 그의 문학유고가 발견되어 세상에 공표되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는 단재(신채호)의 문학, 특히 그의 유고들이 어떻게 빛을 보게 되었는지, 그리고 단재(신채호)의 전집에 포함되었는지 살펴볼 것이다. 그리고 단재(신채호)의 문학 전모와 전집 문학편의 구성에 대해 언급할 것이다.

2. 단재(신채호)의 창작유고

  단재(신채호)가 여순 감옥에서 옥사한 직후 그의 유고 일부가 공개된다. 1936년 4월 『조광』에서는 단재(신채호)추모특집을 마련한다. 거기에 「고려영(高麗營)」, 「추야술회(秋夜述懷)」, 「금강산(金剛山) 시조(時調)」 등의 유고와 더불어 단재(신채호)가 홍벽초(벽초 홍명희)에게 보낸 서신이 소개된다. 당시 단재(신채호)가 역사연구뿐만 아니라 문학 유고도 남겼음을 다른 사람들의 말을 통해 알 수 있다.
  
  이 외에 「대가야국천국고(大伽倻國遷國考)」, 「정인홍공략전(鄭仁弘公略傳)」 등은 전혀 미발표된 자(者)이요, 그의 심박(深博)한 고징(考徵)과 예리한 변절(辯折)은 동방고사(東邦古史)에 관하여 반드시 만인미발(萬人未發)의 창견(創見)을 이룬 바 더욱 있겠는데, 이제 그것이 고인(故人)과 함께 두터이 지하에 묻히니 애(愛)하다[안재홍, 「오호 단재를 곡함」, 『개정판 단재신채호전집』(별집) 형설출판사, 1977, 378쪽].
 
  안재홍은 단재(신채호)에게 「대가야국천국고(大伽倻國遷國考)」, 「정인홍공략전(鄭仁弘公略傳)」 등의 원고가 있었다고 하였다. 서세충 역시 미간된 책으로 이 두 저술을 들고 있다. 그리고 이윤재에 따르면 『조선사통론』, 『문화편』, 『사상변천편』, 『강역고』, 『인물고』 등 다섯 책의 원고가 있었다고 한다.

  선생의 입옥 후에 그 장서 전부가 천진(天津) 모(某)(박용태(朴龍泰) : 편집자) 씨(氏)에게 임치되어 있다고 하니 그 원고도 아마 그 속에 있을 것 같이 생각된다[이윤재, 「북경시대의 단재」, 『개정판 단재신채호전집』(하) 형설출판사, 1977, 481~482쪽].

  이윤재는 단재(신채호)의 다섯 권 저술이 “천진 모씨”에게 있을 것으로 추정했고, 편집자는 “천진 모씨”를 “박용태”로 설명했다. 이윤재의 추정이나 편집자의 지적은 상당한 일리가 있다. 그것은 단재(신채호)가 일경에 의해 체포된 이후 「만리장성이 뉘 것이냐」(1932.12.9~14)가 박용태의 이름으로 발표된 사실로 보아서도 짐작할 수 있다. 아마도 단재(신채호)의 글은 그가 감옥에 들어간 이후 박용태가 보관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는 단재(신채호)의 사후 얼마 지나지 않은 1938년 12월 2일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 이후 원고의 행방은 자세하지 않다. 한편 단재(신채호)의 옥사(1936년) 이후 그의 유고들에 대한 발간 계획은 꾸준히 있어 왔다.
 
  1942년 이때를 전후하여 한용운·박광·신백우·최범술 제씨가 『단재선생유고집』의 간행을 추진하였으나 일제의 감시로 추진되지 못함[「년보」, 『개정판 단재신채호전집』(하) 형설출판사, 1977, 505쪽].
   1946년 중국에 신채호학사 설립. 중국인으로서는 세계사 대표 이석증, 중국학전관 대표 양가락, 상해 생물학연구소 대표 주설 등과, 한국인으로서는 정화암․유자명 제씨가 상호협력하여 선생의 유고를 한문과 영문으로 출간할 것을 계획함(「년보」, 『개정판 단재신채호전집』(하) 형설출판사, 1977, 506쪽).
 
  유고집의 발간은 1942년 일본 제국주의의 감시 하에서는 성립되기 어려운 일이었다. 왜냐하면 단재(신채호)는 일제에 의해 체포되어 1936년 여순 감옥에서 옥사했고, 또한 그의 글에는 일본 제국주의에 대해 비판하고 항거하는 글이 많았기 때문이다. 한편 1946년 4월 상해에서 중국인 이석증을 비롯하여 한국인 정화암․유자명 등은 신채호학사를 설립하고 유고집 발간을 기획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 발기문에 “한평생을 민족해방과 민족문학 확립발전에 헌신(「申采浩學社 上海에 設立」, 『동아일보』, 1946.4.9.)”이라는 구문이 있는데, 그의 문학유고가 적지 않았음을 엿보게 한다. 그러나 이 역시 중국의 복잡한 상황과 해방 후 남북의 이데올로기 대립 등 여러 가지 현실적인 문제로 실현되지 못했다. 그리고 그의 유고는 잊혀졌다. 그러던 것이 1960년대 북한과 1970년대 남한에서 빛을 보게 되었다.

3. 『룡과 룡의 대격전』의 탄생

  신채호의 유고는 1964년부터 1965년에 『조선문학』과 『문학신문』에 게재되기에 이른다. 먼저 김하명의 해설(『조선문학』 204, 1964.8.)과 더불어 「룡과 룡의 대격전」이 소개되고, 이후 주용걸의 해설(「탁월한 작가 신채호 문학에 대하여—최근에 발굴된 그의 창작 유고를 중심으로」, 『문학신문』, 1964.10.20.)과 함께 「꿈하늘」이 소개된다. 이 글로 보아 당시 신채호의 창작유고가 발견되어 소개되었음을 알 수 있다. 주용걸은 “신채호에게는 적지 않은 시조들과 약간의 자유시, 한시들도 있다. 예컨대 「새벽의 별」, 「고려영』, 「큰 바람」, 「감회」, 「꿈에 금강산에 놀고」, 「청루수」, 「나비를 보고」 등 시편들엔 조국 멀리 떠난 애국지사의 절절한 심정이며, 이국땅에서 겪게 되는 각양한 정신적 체험, 애국의 정서가 소용돌이치고 있다(주용걸, 「탁월한 작가 신채호의 문학에 대하여-최근에 발굴된 그의 창작 유고를 중심으로」, 『문학신문』, 1964.10.20, 3쪽)”라고 진술하였다.
 
「꿈하늘」, 「룡과 룡의 대격전」 외에도 당시 [국립중앙도서관 민족고전부]의 이름으로 「금전․철포․철추」, 「선언」, 「리해」, 「정육과 애국」 등의 수필과 「매암의 노래」, 「너의 것」, 「61일 계단의 회고」, 「나비를 보고」, 「새벽의 별」, 「고려영」, 「임술년 가을에 읊노라」, 「계해년 10월 초2일에」 등의 시․시조가 소개되었다. 그리고 북한은 이러한 작품들과 미발표 유고들을 한데 묶어 1966년 『룡과 룡의 대격전』이라는 유고선집을 발간하였다. 김병민에 따르면, 단재(신채호)의 유고는 1962년부터 북한의 국립중앙도서관에서 정리하였다 한다.
 
  중국에 사는 한 유지 인사는 북경에서 열린 학술논문발표회에서 단재(신채호) 선생의 유고는 광복 후 중국주재 조선대사관을 거쳐 조선민주주의 공화국에 전해졌다고 피력한 바 있다. 그 후 단재(신채호) 선생의 유고는 1962년대 초 평양의 국립중앙도서관에서 처음으로 발견되었는데, 평양의 학자들의 말씀에 의하면 김책공업대학에 있는 한 선생이 국립중앙도서관 서고에 들어갔다가 우연한 기회에 큰 주머니 속에 넣어져 있는 단재(신채호) 선생의 유고를 발견했다고 한다. 하여 즉각 학계의 중시를 일으켰던바 김일성종합대학 어문연구소의 주용걸 선생, 언어문학학부 안함광 교수, 그리고 국립중앙도서관의 관계 일꾼들이 유고정리 사업에 착수했다고 한다.
 
  신채호의 유고가 발견된 이후 1966년 2월 국립중앙도서관 민족고전부에서는 문학유고들만을 선택하여 윤색·삭제·편집을 거쳐 『용과 용의 대격전』이란 책명으로 세상에 내놓았다(김병민 편, 『신채호문학유고선집』, 연변대학출판사, 1994, 2~3쪽).

  『룡과 룡의 대격전』(조선문학예술총동맹출판사, 1966)은 당시 북한에 있는 단재(신채호)의 문학유고들을 정리하여 펴냈다는 점에서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그것으로 인해 단재(신채호)는 역사학자뿐만 아니라 뛰어난 문학인으로 새롭게 조명된다. 그 책에는 소설과 수필, 시를 비롯하여 서간이 실려 있다.

「룡과 룡의 대격전」, 「꿈 하늘」, 「백세 로승의 미인담」, 「일목대왕의 철퇴」, 「일이승」, 「류화전」, 「리괄」, 「박상희」, 「○○○부원군으로 견자」, 「철마 코를 내려치다」, 「구미호와 오제」, 「선언」, 「금전·철포·저주」, 「도덕」, 「정육과 애국」, 「리해」, 「문예계청년에게 참고를 구함」, 「실패자의 신성」, 「인도주의의 가애」, 「사상가의 노력을 요구하는 때」, 「차라리 괴물을 취하리라」, 「명과 리와 진의 삼인」, 「지기를 위하여 죽음」, 「지동설의 효력」, 「수양은 탁계부터」, 「위학문의 폐해」, 「소년의 희생」, 「신선의 두를 참하라」, 「대흑호의 일석담」, 「8월 29일 연초」, 「너의 것」, 「매암의 노래」, 「새벽의 별」, 「1월 28일」, 「61일 계단의 회고」, 「나비를 보고」, 「고려영」, 「현량사 불상을 보고」, 「임술년 가을밤에」, 「고향이 그리워」, 「계해년 10월 초이튿날」, 「우리 형님 가신 날에」, 「김연성을 꿈에 보고」, 「무제」, 「리 수상에게 도서 열람을 요청하는 편지」, 「전훈 노인에게 준 편지」, 「극웅에게」, 「한기악씨에게」(『룡과 룡의 대격전』, 조선예술총동맹출판사, 1966, 4~5쪽).

  『룡과 룡의 대격전』은 말로만 떠돌던 신채호 유고의 실체를 확인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우리 문학계의 빈 공백을 채울 수 있는 자료를 제공해 주었다. 안함광 등이 신채호의 유고를 정리한 것은 김병민의 언급처럼 신채호 연구에 획기적인 의의가 부여된다고 할 수 있다. 유고의 발견은 언론인 또는 역사학자로 알려졌던 신채호가 끊임없이 문학창작을 한 문인 내지 작가였다는 사실을 확인해준 계기가 되었다. 그의 문학 「꿈하늘」과 「룡과 룡의 대격전」 등은 북한에서 높은 평가와 더불어 문학사적으로 새롭게 논의된다.

4. 『단재신채호전집』의 발간

  한편 1970년 남한에서는 이선근을 대표로 단재신채호전집편찬위원회가 결성되어 전집 출간 사업을 추진하게 된다. 전집편찬위원회는 1972년 『단재신채호전집』(형설출판사) 상․하권을 출간하였다. 상권은 주로 「조선상고사」 등의 역사물, 하권은 「조선사연구초」를 비롯하여 전기·논설·역사 관련 글을 비롯하여 소설·시가·서문 등을 싣는다. 특히 하권에는 아래의 작품들이 포함되었다.

시: 「구력세제(舊曆歲除) 봉우술회(逢友述懷)」, 「백두산도중(白頭山途中)」, 「증(贈) 기생(妓生) 연옥(蓮玉)」, 「추야술회(秋夜述懷)」, 「증별(贈別) 기당안태국(期堂安泰國)」, 「독사(讀史)」, 「북경우음(北京偶吟)」, 「영오(詠誤)」, 「서분(書憤)」, 「술회(述懷)1」, 「술회(述懷)2」, 「한나라 생각」, 「금강산(金剛山)」, 「고려영(高麗營)」
소설 : 「고락유수(苦樂有數)」, 「익모초(益母草)」
비평: 「조선(朝鮮) 고래(古來)의 문자(文字)와 시가(詩歌)의 변천(變遷)」
서문: 「세계삼괴물(世界三怪物) 서(序)」, 「몽견제갈량(夢見諸葛亮) 서(序)」, 「단기고사중간 서」.

  먼저 하권에 산입된 시 작품을 보면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알 수 있다. 이 작품들은 크게 작가가 생전에 발표한 것(가)과 단재(신채호)의 옥사 직후 주변 사람들에 의해 발표된 것(나), 그리고 미발표유고로 있다가 단재전집에 포함된 것(다)으로 분류할 수 있다. (가)의 경우는 「서분(書憤)」(『보전친목회보(普專親睦會報)-친목(親睦)』, 1907. 10. 15.), 「구력세제(舊曆歲除) 봉우술회(逢友述懷)」(『대한매일신보』, 1910. 2. 13.)와 「꿈에 금강산을 보고」(『독립신문』, 1923. 11. 10.)를 들 수 있다. 마지막 작품은 『조광』(1936. 4.)에 「금강산」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나오기도 했는데, 심훈의 글에 “그 당시 그는 42, 3세의 장년이었는데, 원체 문명을 높이 들었을 뿐 아니라 [금강산 단풍 구경보다도 몽고 사막풍에 흉금을 펼치고 싶다][심훈, 「단재와 우당」, 『개정판 단재신채호전집』(별집), 형설출판사, 1977, 411쪽]”라고 언급되었다. 단재(신채호)가 43세 되던 때는 1922년이며, 『독립신문』에 발표된 것은 1923년의 일이다. 그리고 (나)의 경우 「영오(詠誤)」(변영만), 「추억의 실루에트」(『중앙』, 1936.6에 소개), 「추야술회(秋夜述懷)」(1922년 창작되어 1936년 4월 『조광』에 소개), 「고려영」(『조광』, 1936.4) 등이 유고로 존재하다가 옥사 직후에 소개되었다. 그러나 나머지  「백두산도중(白頭山途中)」, 「증(贈) 기생(妓生) 연옥(蓮玉)」, 「증별(贈別) 기당안태국(期堂安泰國)」, 「독사(讀史)」, 「북경우음(北京偶吟)」, 「술회(述懷)1」, 「술회(述懷)2」, 「한나라 생각」 등은 유고로 존재하다가 전집에 편입된 것으로 보인다. 전집 하권에 소개된 시들 가운데 『룡과 룡의 대격전』에도 실린 것은 「고려영」과 「추야술회」(북한 선집에는 「임술년 가을밤에」) 2편뿐이다. 그렇다면 북한의 유고와는 다른 유고를 남한에서도 갖고 있었다는 말인가?

  일제의 폭압 아래서 고 신백우 선생 같은 분은… 단재(신채호) 선생의 기간 미간 유고를 모집하여 집대성 발간하고자 온갖 심혈을 기울였었다[이선근, 「우리 민족사관은 누가 확립하였나」, 『개정판 단재신채호전집』(하) 형설출판사, 1977, 14쪽].

  위의 글은 편찬위 대표였던 이선근의 [간행사]의 일부분이다. 그에 따르면, 신백우가 단재(신채호)의 유고를 모집하여 갖고 있다가 그것을 아들인 신범식에게 넘겨주었으며, 신범식의 지원으로 전집을 간행하게 되었다고 한다. 실상 이선근과 신백우는 1950년대 이미 [단재(신채호)유고출판회]에 참여했다. 1954년 10월 [단재(신채호)유고출판회]가 조직되었는데, 당시 김창숙․변영만․이선근 등 고문 6명, 신백우․이정규․장도빈 등 편찬위원 13명, 변영로․신수범․정화암 등 상무위원 9명, 감사 이을규 외 1인 등으로 구성되었다. 이 출판회에 특별히 42년과 46년에 각각 단재(신채호)의 유고출간을 계획했던 신백우와 정화암, 그리고 변영로가 눈에 띈다. 변영로는 「국수주의의 항성인 단재 신채호 선생」이라는 글에서 단재(신채호)가 국시(國詩), 동사고(東史考) 등 저작에 여념이 없었단 말을[개정판 전집(별집), 397면] 들었다고 하였다. 그는 단재(신채호)의 [국시]를 어느 정도 알고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들에 의해 단재(신채호)의 상당수 유고가 확보되어 전집편찬위원회가 구성된 것을 짐작케 한다. 그러나 이들의 유고 출간사업은 1955년 『을지문덕』 번역판이 나온 이후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신백우는 몇 차례 단재(신채호)유고 간행을 위해 힘썼지만 이루지 못하고 1959년에 생을 마감하였다. 그리고 그가 가지고 있던 단재(신채호)의 유고들은 그의 아들인 신범식에게 전해진 것으로 보인다.
  유고 발간 사업은 1970년에 이선근에 의해 다시 추진된다. 이때 신백우가 지녔던 단재(신채호)의 유고가 다시 전집편찬위원회에 전해진 것이다. 그리하여 1972년 비로소 남한에서도 단재(신채호)의 유고가 빛을 보게 된 것이다. 전집편찬위원회가 다른 원고도 확보하고 있었음은 전집하에 실린 「홍벽초(벽초 홍명희)에게」라는 서신에도 드러난다. 전집에서 벽초(홍명희)에게 보낸 서신은 총 3개로 이뤄졌는데, 첫 번째 편지는 년도 미상이지만, 9월 5일에 쓴 것으로 확인이 되며, 두 번째 것은 내용상 1924년에 씌어진 것이다. 이 두 편지는 1936년 4월 『조광』지에 실렸던 것이다. 여기에 1930년 단재(신채호)가 옥중에서 쓴 세 번째 편지 일부가 추가되어 실렸다. 이것은 남한에서도 전집편찬위원회가 단재(신채호)의 유고를 갖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게다가 전집편찬위원회에서는 기존에 발간된 잡지·저서 등에서 단재(신채호)의 글을 발굴하여 전집 하권에 실었다. 그것은 소설과 비평, 서문에 걸쳐 다양하게 진행되었다. 소설 「익모초」의 발굴은 그것이 비록 일부로서 불완전하기는 해도 단재(신채호)의 다양한 창작활동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그리고 「조선 고래의 문자와 시가의 변천」은 단재(신채호)의 문자관과 시에 대한 이해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이 밖에도 「세계삼괴물(世界三怪物) 서(序)」, 「몽견제갈량(夢見諸葛亮) 서(序)」의 발굴은 그 가치가 충분히 인정된다. 다만 뒤에 자세히 언급하겠지만, 「고락유수」와 「단기고사중간서」를 단재(신채호)의 전집에 포함시킨 것은 문제가 있다. 그러나 신문·잡지 등을 뒤지고 유고를 수합하여 전집에 산입한 공은 크다 하겠다.
  1972년 상·하 2권 발간에 이어 단재신채호전집간행위원회(단재신채호전집편찬위원회에서 바뀐 이름)는 또 다른 여러 편의 단재(신채호) 글을 추가로 발굴하여 1975년 『보유』편을 발간했다. 『보유』편은 논설, 사론․평론, 수상, 소설 등으로 구성되었다. 논설이 16편, 사론․평론이 6편, 수상이 8편, 소설이 9편이다. 여기에는 「꿈하늘」이 마침내 소개가 된다. 

  이 보유에 편입된 유고 정 자료들은 전서를 편찬할 때 누락된 몇 편의 글과 그 후에 하나씩 모집해둔 글들이다. 마침 만해(한용운) 스님과 경부 신백우 선생 등이 단재유고집을 편찬하고자 준비해 오던 자료보따리가 나와 거기에서 소설 「꿈하늘」[몽천(夢天)]을 비롯한 몇 개의 유고와…(중략)… 특히 최근에 선생의 장남 신수범 씨가 이도(移徒)를 하면서 낡은 세간을 챙기다가 윤세복 씨가 정리해 둔 미간 유고들을 발견하게 되었다. 「유화전」을 비롯한 몇 개의 소설과 「선언」을 비롯한 몇 개의 논설이 그것이다(『단재신채호전집』(보유), 형설출판사, 1975, 557~558쪽).
  보유편을 편집한 김영호는 자료의 입수경위를 위와 같이 밝혔다. 「꿈하늘」은 신백우로부터, 그리고 「유화전」, 「선언」 및 기타 소설은 윤세복으로부터 구한 것이라는 얘기이다. 그런데 이 작품들은 『룡과 룡의 대격전』에 실렸던 작품들이다. 『룡과 룡의 대격전』에 실린 작품 가운데 전집 보유편에 실린 작품은 「꿈하늘」, 「유화전」, 「구미호와 오제」, 「백세 노승의 미인담」, 「철마 코를 내리치다」, 「일목대왕의 철퇴」, 「박상희」, 「리괄」, 「○○○부원군으로 간 견자」 등의 서사물과 「선언」, 「실패」, 「차라리 괴물을 취하리라」 등 수필 15편이다. 과연 전집간행위원회는 신백우와 윤세복으로부터 자료를 구한 것인가? 왜 『룡과 룡의 대격전』에 실려 있는 작품들을 그들로부터 구했다는 것인가?

  이 별집에 수록하고 있는 문품들로 말하면, 첫째 문예류로서, 소설 시 시조 수상 서한 등과 『천고』지에 게재된 문품들인데, 이것은 특히 일본 동경 무장대(武藏大) 도부(徒部) 학(學) 교수가 보관하고 있던 것을 제공받은 것입니다.
  이것이 비록 작은 것 같지마는 일본인 학자로서 양심 있는 학문인은 이같이 선생의 문품을 소중히 받드는 것임을 생각하면, 새삼 느꺼운 마음을 금치 못함과 아울러, 그분에게 감사의 뜻을 표하는 바입니다[이은상, 「간행사」, 『개정판 단재신채호전집』(별집), 형설출판사, 1977, 3쪽].

  1977년 단재신채호전집간행위원회는 다시 개정판을 내기에 이른다. 그리고 거기에 단재신채호선생기념사업회 회장인 이은상의 「간행사」를 실었다. 개정판의 「간행사」에 자료의 수집 경위가 그대로 드러난다. 그것은 바로 “일본 동경 무장대(武藏大) 도부(徒部) 학(學) 교수가 보관하고 있던 것”이라는 구절이다. 『룡과 룡의 대격전』은 소설과 수상, 시, 시조, 서한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구절은 결국 북한에서 발간된 『룡과 룡의 대격전』을 도부(徒部) 학(學) 교수로부터 건네받았다는 말이 된다. 김영호의 신백우․윤세복의 주장은 북한 자료에 대한 논란을 없애기 위한 도회에 불과하다. 전집간행위원회는 도부(徒部) 학(學)으로부터 『룡과 룡의 대격전』을 입수했고, 이것을 전집에 실은 것이다. 궁극적으로 북한에서 발간된 『룡과 룡의 대격전』의 유입은 비록 때늦은 감이 있지만 남한의 전집 발간에 중요한 역할을 했던 것이다.
  『룡과 룡의 대격전』은 개정판 단재전집에 완전히 그 모습을 드러낸다. 『보유』편에 빠져있던 「용과 용의 대격전」, 「일이승」을 비롯하여 시, 시조, 한시, 그리고 서신 등이 모두 개정판 『별집』에 포함되게 된다. 그리고 새로이 『대한매일신보』 소재 여러 편의 글을 수록하였는데,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임중빈이 발굴 소개한 「천희당시화(天喜堂詩話)」(『대한매일신보』, 1909.11.9~12.4.)이다. 그것은 전대 시화를 계승하면서도 계몽기라는 시대적 상황 속에서 신채호가 견지한 문학관이 여실하게 드러나는 매우 중요하고도 가치 있는 시화이다. 전집간행위원회는 수집할 수 있는 자료들을 최대한 입수하여 실었다. 글 가운데 저자확정이 미처 이뤄지지 못한 채 실린 것들이 있어 문제가 되긴 하지만 그들의 공로는 크다 하겠다.

5. 『신채호문학유고선집』의 출간

  1990년대 들어 새로운 단재(신채호)유고선집이 소개되었다. 그것은 김병민의 『신채호문학유고선집』이다. 이 유고집의 중요성은 크게 두 가지로 압축된다. 그 하나는 단재(신채호)의 유고를 거의 개변 없이 보여준다는 점이다. 이미 북한에서 나온 『룡과 룡의 대격전』에서도 단재(신채호)의 유고들을 소개하였지만, 이데올로기 및 기타 이유에 따라 편집되거나 삭제, 윤색된 것들이 적지 않다. 그러므로 단재(신채호)의 유고와는 거리가 있다. 물론 이것을 토대로 한 전집 역시 개변을 겪었다. 김병민은 필사해온 것을 바탕으로 원전에 가장 가까운 형태를 보여주고 있다(김주현, 「단재 신채호의 문학과 정전의 문제」, 『현대소설연구』, 현대소설학회, 2007.12.).
  다음으로 『룡과 룡의 대격전』에 제시되지 않은 작품들도 선보이고 있다는 점이다. 이미 주용걸의 진술만 보더라도 『룡과 룡의 대격전』이 단재(신채호) 문학 유고의 전체가 아님을 알 수 있다. 그가 소개한 시 작품 가운데 「큰 바람」, 「감회」, 「꿈에 금강산에 놀고」, 「청루수」 등 네 작품은 『룡과 룡의 대격전』에 소개되지 않았다. 여기에서 「꿈에 금강산에 놀고」의 경우 「금강산」으로 『조광』에 소개된 시조가 있어서 그 실상을 확인할 수 있지만, 나머지 3편의 경우 내용을 자세히 알 수 없다. 유고 가운데 적지 않은 분량이 소개되지 않았음을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다. 다행히 김병민은 『룡과 룡의 대격전』에 소개되지 않은 몇 작품을 소개하고 있다. 그것은 아래와 같다.

「단아잡감록(丹兒雜感錄)」, 「조선(朝鮮)의 지사(志士)」, 「아방윤리경(我邦倫理鏡)」, 「고구려삼걸전(高句麗三傑傳) 서문」.

  「단아잡감록」의 경우 총 9필로 되어 있다. 그런데 『룡과 룡의 대격전』에서는 제1필 지기 위하여 죽음, 제2필 피의 인과, 제3필 지동설의 효력, 제4필 수양은 탁계부터, 제6필 위학문의 폐해, 제7필 소년의 희생, 제8필 명과 리와 진의 삼인 등 7개의 글을 개별 글로 소개하고, 「제5필 물심양계의 병진」, 「제9필 나의 말일이 곳 지구의 말일」은 빼고 말았다. 그러나 김병민은 이들 작품들을 모두 소개하여 그의 선집을 통해 작품의 전모를 제대로 파악할 수 있다. 그리고 나머지 세 작품도 단재(신채호)의 현실 및 역사관, 문학관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그의 소개는 의미가 크다.
  또한 그는 책의 후미에 신채호의 유고 작품의 목록을 제시하였다. 그 목록 가운데 『룡과 룡의 대격전』 및 그의 유고집에 소개되지 않은 작품은 아래와 같다.

소설—「건륭황제의 꿈」
시—「도제사언문(悼祭四言文)」
수상—「사상가의 노력을 노력하는 때」, 「태산행기」
사학논저—「역사총론(歷史總論)」, 「강역고(疆域考)」, 「선랑사통론(仙郞史通論)」, 「전설시대사(傳說時代史)」, 「고구려사(高句麗史)」, 「단군강역도만주국(壇君疆域圖滿洲國)」, 「해북열국(海北列國)과 고구려(高句麗)」, 「조선사를 외국인에게 배우지 말지어다」, 중국사관(中國史觀) 방면 논문 3편(김병민 편, 『신채호문학유고선집』, 한국문화사, 1994, 250~252쪽).

  이것들은 신채호의 유고 작품 중 아직도 그 내용이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것들이다. 김병민에 따르면, 이 작품들은 북한에 유고로 남아 있다. 북한에 있는 유고는 어서 빨리 국내로 들여와 전집에 포함시켜야 할 것이다. 

6. 최근 발굴 작품

  박정규는 『용파집(龍坡集)』에 실린 용파(龍坡) 신풍구[申豊求(1837~1932)]의 회갑연을 축하하는 시, 독립기념관에 소장된 광무5년(1901)에 지은 오언배율, 그리고 「단재잠(丹齋箴)」을 발굴하여 소개했다(박정규, 「국내에서의 신채호 연보와 쓴 글에 대한 고찰」, 『단재신채호연구의 재조명』, 단재문화예술추진위원회, 2006, 62~67쪽 및 박정규 외 편, 『단재신채호』, 단재문화예술제전추진위원회, 2006, 116쪽). 전집에서 첫 번째 것은 박정규처럼 그 내용을 따라 「용파수연시(龍坡壽宴詩)」로 이름을 붙였으며, 오언배율은 “광무(光武) 오년(五年)(1901) 신축(辛丑) 이월(二月) 칠일(七日) 신채호(申采浩) 배(拜)”이라는 구절이 있는데 형식에 따라 간단히 「오언배율(五言排律)」이라고 붙였다. 「단재잠」은 [단재 신채호 선생 제23주기 추도식](1959.4.) 자료집에 실린 것으로 4자 14행 56자의 운문 형태를 띠고 있다. 그의 소개는 새로운 자료의 발굴이라는 측면에서 대단히 중요하다. 필자는 이 밖에 신영우의 글속에 포함된 한시와 단재(신채호)가 이화사에게 준 작별시도 중요한 작품으로 생각한다. 전자는 특별히 제목이 없어 임의로 「무제(無題)」로 이름 붙이고, 후자는 “자선이연경시(子鮮離燕京時) 신채호증자선이작별시(申采浩贈子鮮以作別詩)”라는 구절이 있어 편의상 「작별시(作別詩)」로 지칭했다. 전집간행위원회에서는 변영만의 글에 포함된 7언절구를 「영오(詠誤)」라는 이름으로 실었는데, 신영우가 소개한 7언배율은 시에 따로 소개하지 않았다.

고원문물총의전(故園文物總依前) 유아풍류불용선(儒雅風流不用仙)
봉수옹창위특지(峰樹擁蒼爲特地) 현영가백우량천(哯永呵白又凉天)
향수월조방성몽(鄕愁越鳥方成夢) 시의오잠정입면(詩意吳蠶正入眠)
음파독총겸화⊙[吟罷讀叢兼話⊙(扌+覇)] 한인취미신유연(閒人趣味信悠然)

  이 시도 신영우가 [단재작(丹齋作)]으로 분명히 밝히고 있으므로 당연히 단재(신채호) 작품에 포함시켜야 할 것이다. 그리고 또 한 편의 한시가 있다.

부생사십성하사(浮生四十成何事) 
빈병상수불잠리(貧病相隨不暫離) 
각한수궁산진처(却恨水窮山盡處)
임정가곡역난위(任情歌哭亦難爲)

  이 시는 『동아일보』(1936. 2. 27.)에 실린 것으로 알려졌으나 그 신문에서 확인할 수 없었다. 하동호가 발굴하여 『단재신채호와 민족사관』(형설출판사, 1980, 685쪽)에 실었다. 이 시가 있었음은 “[부생사십성하사(浮生四十成何事) 빈병상수불잠리(貧病相隨不暫離)]라는 그의 한시(漢詩) 일구(一句)는 그의 아시(兒時)로부터 잠시도 면치 못한 적빈(赤貧)과 다병(多病)을 자탄(自嘆)한 일구(一句)”라는 원세훈의 추도문에서도 알 수 있다(원세훈, 「단재 신채호」, 『개정판 단재신채호전집』 별집, 형설출판사, 1977, 395쪽). 이 시는 “흥경도중작(興京道中作) 갑인(甲寅)”이라는 설명이 있는데, [1914년 흥경(興京) 가는 길에서 쓴 시]라는 말이다. 단재(신채호)는 1914년 단오 때 환인현(桓仁懸)에 있었음을 「무제」에서 설명하고 있는데, 위 내용은 사실인 것으로 보인다. 다만 3,4행이 「백두산도중」과 거의 같은데, 어떤 연유인지는 불분명하다. 아마도 한 작품을 먼저 짓고 나중에 손을 봐서 다른 작품에 포함시킨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여기서는 해설에서 소개만 하고, 「백두산도중」만 전집에 포함시키기로 하였다. 이 외에도 단재(신채호)의 시는 더 발굴될 가능성이 있다. 왜냐하면 정인보가 “시조(時調)에 대하여 간혹 기탁(寄託)함이 있었다 하나 상해 있을 때는 보지 못한 바요, 한시(漢詩)에 있어서는 자못 영롱(玲瓏)․태탕(駘蕩)한 경계가 있어서 비록 솔이(率爾)한 저작이라도 사치(辭致)가 다른 사람과 달랐다”(개정판 전집(하), 461쪽)라고 하는 대목이나 정인보의 [국시(國詩)] 운운하는 대목은 단재(신채호) 시(시조, 한시 포함)가 많았음을 의미하지만, 실제 전집에 포함된 시는 그리 많지 않기 때문이다. 
  필자는 최근 『가정잡지』 제2년 제3호(1908년 3월호)에 실린 「익모초」의 제1회 게재분을 찾아냈다. 이 잡지는 현재 연세대 중앙도서관 귀중본실에 있는데, 여기에 소설 「익모초(益母草)」(40~47쪽) 제1회가 실려 있다. 이 작품은 제1회에 저자가 구체적으로 명시되어 있지 않지만, 제2년 7호(1908. 7.)에는 [신채호]로 분명히 밝혀져 있다. 단재(신채호)전집에는 현재 1908년 7월호에 실린 「익모초(속)」(5회 연재분 추정)만 실려 있다. 이 작품은 최완길을 주인공으로 하여 애국심을 다룬 것으로, 단재(신채호)의 초기 문체 및 소설을 파악할 수 있는 중요 자료로 평가된다. 작품에는 “기자왈”이라 하여 작가의 주장을 사평형식으로 직접 제시하였다. 다만, 『가정잡지』가 1908년 4월~ 6월호가 비어 있고, 또한 8월호 이후가 없는 상태라 작품의 전모를 파악하기 어려운 아쉬움이 있다. 그리고 「장덕진군(張德震君)의 유서(遺書)와 일지서(日誌敍)」도 이번에 발굴되어 소개되는 글이다. 『장덕진전』에 붙인 단재(신채호)의 서문으로 27세의 나이로 독립운동을 하다가 죽은 장덕진의 전에 부친 글이다.
  그리고 이번에 단재(신채호)의 두 편지도 추가하였다. 하나는 4244(1911)년 9월 8일 안창호에게 보낸 한글편지로, 당시 블라디보스토크에 있던 신채호가 미주로 오라는 안창호의 편지를 받았으나 [『권업신문』 발간] 관계로 미주로 가기 어렵다는 뜻을 전한 것이다. 그 다음 편지는 4245(1912)년 11월 1일에 쓰인 한문편지이다. 이 편지에서도 안창호가 단재(신채호)를 미주로 불러들이려 한 대목을 볼 수 있다. 당시 단재(신채호)는 재정과 건강상의 이유로 도산(안창호)의 제의를 거절하였다. 그리고 내용 가운데에는 이준의연회(李儁義捐會) 발기에 관한 내용도 나온다. 이 두 편지는 신용하에 의해 이미 1986년 3월에 『한국학보』에 소개되었다. 그런데 당시 한글 편지는 모두 소개되었으나 한문 편지의 경우 3면 중 마지막만 소개되었다. 이후 『도산안창호전집』에 전체가 영인되어 실렸다.

7. 전집의 편제와 구성

  여기에 실린 신채호 문학은 『룡과 룡의 대격전』, 『신채호문학유고선집』, 그리고 『단재전집』 수록 문학과 최근 발굴 작품이다. 단재(신채호)는 계몽기에 『이태리건국3걸전』을 역술하고 『을지문덕』, 『이순신전』, 『최도통전』 등의 역사전기물을 썼다. 그러나 그러한 역사전기물은 제4권 역사편에 이미 수록하였다. 그런 관계로 이 권에서는 주로 순문학적인 작품들을 수록하기로 하였다. 먼저 단재유고선집인 『룡과 룡의 대격전』을 실은 것은 비록 윤색이나 누락 등의 문제가 없지 않으나 단재(신채호)의 유고를 직접 정리하였다는 점에서 그 가치가 충분히 인정되기 때문이다. 북한의 유고를 볼 수 없는 현실에서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김병민의 『신채호문학유고선집』을 그대로 실은 것은 단재(신채호)의 원고에서 가장 손상이 적기 때문이다. 여기에다 전집간행위원회가 발굴하여 『단재전집』에 실은 작품들과 최근 새로이 발굴한 작품들을 실었다.
  편제는 시·소설·비평·서신·서로 나누었다. 시 가운데 「무제(無題)」(1896), 「용파수연시(龍坡壽宴詩)」(1897), 「오언배율(五言排律)」(1901), 「서분(書憤)」(1907), 「구력세제(舊曆歲除) 봉우술회(逢友述懷)」(1910), 「백두산도중(白頭山途中)」(1914), 「추야술회(秋夜述懷)」(1922) 등은 작품의 창작 년대를 제대로 알 수 있는 작품이다. 그리고 「증(贈) 기생(妓生) 연옥(蓮玉)」,  「증별(贈別) 기당안태국(期堂安泰國)」, 「독사(讀史)」, 「북경우음(北京偶吟)」, 「술회(述懷)1」, 「술회(述懷)2」, 「영오(詠誤)」, 「작별시(作別詩)」, 「한나라 생각」, 「단재잠(丹齋箴)」 등은 창작 년대가 미상이다. 순서는 창작 연도순으로 하며, 한시·시·시조 순으로 나열하였다. 그래서 한시는 창작 년대를 알 수 있는 「무제」, 「용파수연시」, 「5언배율」, 「서분(書憤)」, 「구력세제(舊曆歲除) 봉우술회(逢友述懷)」, 「백두산도중(白頭山途中)」, 「추야술회(秋夜述懷)」 등을 순서대로 배치하고 이어 년대 미상의 작품인 「증(贈) 기생(妓生) 연옥(蓮玉)」, 「증별(贈別) 기당안태국(期堂安泰國)」, 「독사(讀史)」, 「북경우음(北京偶吟)」, 「술회(述懷)1」, 「술회(述懷)2」, 「영오(詠誤)」, 「작별시(作別詩)」를 실었다. 여기에서 「무제」, 「5언배율」, 「용파수연시」, 「작별시(作別詩)」, 「단재잠(丹齋箴)」 등은 최근 발굴되어 소개된 것들이다. 이해의 편의를 위해 번역을 실었으며, 전집에 실린 작품은 이은상의 번역을 가져왔고, 그밖에 박정규·이충구․김병헌·정우락 제위의 번역을 참조하였다. 이어 일반시 「한나라 생각」과 시조 「금강산」, 마지막으로 운문 형태인 「단재잠」을 실었다. 
  소설에는 유일하게 「익모초(益母草)」를 실었다. 이번에 발굴된 「익모초」 제1회 발표분을 추가해서 실었다. 비평에는 계몽기 가장 중요한 비평문 중 하나인 「천희당시화(天喜堂詩話)」(『대한매일신보』, 1909. 11. 9.~12. 4.)를 실었다. 1920년대의 중요한 글인 「조선 고래의 문자와 시가의 변천」(『동아일보』, 1924. 1. 1.) 역시 비평문이지만, 전집 제6권 신문 등에 수록된 논설류에 실려 여기에서는 배제했다. 그리고 새로이 발굴된 안창호에게 보낸 서신 2통(1911, 1912)과 「차형혜감(車兄惠鑑)」(1928년경)을 실었다. 특히 한문 서신의 경우 정우락 교수의 번역을 참고하여 실었음을 밝혀둔다. 서문으로는 「세계삼괴물서(世界三怪物序)」(1908. 3.)와 「몽견제갈량(夢見諸葛亮) 서(序)」(1908년 여름)를 비롯하여 이번에 새로 발굴된 「장덕진군(張德震君)의 유서(遺書)와 일지서(日誌敍)」(1925)를 실었다.
  그 밖에 기존 전집에 들어 있으면서 제외한 것이 세 작품 있음을 밝힌다. 하나는 「철추가」이며, 또 하나는 「고락유수」, 마지막으로 「단기고사중간서」이다.

박물관(博物館) 도라드러, 창해역사(滄海力士)의 쓰고, 남은 철추(鐵椎), 한번 구경하고나니, 잠겼던 기력(氣力)이 버쩍 나고, 숨었던 사상(思想)이 절로 난다, 더 철추(鐵椎)를 번뜩 들고, 박랑사중(博浪沙中) 드러가서, 진시황(秦始皇)의 타고 앉은 정차(正車)를, 와직근 퉁탕 부시고, 더 폭학(暴虐) 무도(無道)한 자(者)를, 분골쇄신(粉骨碎身)한 후(後)에, 우리 한국(韓國)의 국위국광(國威國光)을, 만고(萬古) 역사상(歷史上)에 빗내며, 자고(自古)로, 회포(懷抱)를 펴지 못하고, 목적(目的)을 달(達)치 못한, 고점리(高漸離) 형가배(荊軻輩)의 천추원혼(千秋怨魂)을, 위로(慰勞)코저(『대한매일신보』, 1910. 3. 25.).

  「철추가」는 『대한매일신보』 국한문본과 국문본에 모두 실려 있다. 국한문본에 실린 작품이 전집간행위원회에 의해 발굴되어 개정판 전집에 실렸다. 국한문본에서는 저자가 [후창해(後滄海)]로 소개되어 있다. 후창해란 창해역사의 뜻을 가진 이후 사람이란 말이다. 아마도 단재(신채호)가 『조선상고사』 등에서 철추, 또는 창해역사 등을 언급하였기에 포함시킨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국문본에서 저자는 [강릉이창해]로 되어 있다. 이로 유추하건대, 이씨 성을 가진 강릉 사람으로 보인다.

  전집 하권의 [소설]에 포함시킨 「고락유수」 같은 것은 단재(신채호)의 작품이 아닌 것이 분명하다. 한 여성의 우여곡절의 일생을 그리려는 시도가 담긴 미완성작 「고락유수」가 내용이나 문체로 보아 단재(신채호)와는 거리가 멀다는 것은 제외하고서라도 1913년 3월 『시천교월보』에 실렸다는 것만으로도 그 이유는 충분하다. 1911년 2월 17일 창간되어 1913년 4월 27일 통권 27호로 종간된 『시천교월보』는 친일파 이완용이 창립한 시천교의 기관지였다. 신문의 이런 성격을 단재(신채호)는 몰랐을 리가 없었고 그렇다면 친일파에 대한 증오가 하늘까지 치솟았던 그가 거기에 글을 실었다는 것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게다가 당시 단재(신채호)는 머나먼 러시아의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병고에 시달리고 있어서 국내와는 거의 연락이 끊긴 상태였다. 그러므로 「고락유수」는 단재(신채호) 작품에서 빼버리는 것이 마땅하다(최옥산, 「문학자 단재신채호론」, 인하대 박사논문, 2003. 8, 66~67쪽). 
 
  최옥산은 여러 가지 정황증거를 통해 「고락(苦樂)이 유수(有數)」(「고락유수(苦樂有數)」의 원제)를 단재(신채호) 작품에서 배제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의 말은 일리가 있다. 비록 저자가 [무애생]이라고 명기되어 있을지라도 신채호로 보기에는 어려움이 있다. 「세계3괴물서」에서 신채호는 [무애생(生)]이라고 썼지만, [무애생]이 신채호만의 호로 보기 어렵다. 이 작품은 1913년 4월(통권 27호)에 1회 게재되고, 이후 잡지의 폐간으로 게재가 중단되고 말았다.

  즉 신채호 명의의 서문은 사실상 이화사의 소작으로 이화사가 광복회 「고시문」의 내용을 변개하여 서문에 넣었던 것으로 헤아려 보는 것이다(조인성, 「한말 단국관계사서의 재검토 - 『신단실기』, 『단기고사』, 『환단고기』를 중심으로」, 『국사관논총』 3, 국사편찬위원회, 1989. 10, 253쪽).

  「단기고사 중간서」에는 “임자(1912)년에 내가 안동현(安東縣)에 이르를 때에 지우 이화사가 일권 고사(古史)를 가지고 와서 장차 출간할 뜻으로 내게 서문(序文)을 청하거늘”이라는 구절이 나온다. 단재(신채호)가 1912년에 안동현에 이르렀을 때 「중간서」를 썼다는 말이다. 그런데 신채호는 1911년 12월말부터 1912년 5월까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신문의 발간 사업으로 인해 대단히 바빴으며, 그런 그가 안동에 갔을 가능성은 없어 보인다. 그리고 페테르스부르크에서 이갑이 보낸 편지 3통[1911(4244). 11. 28, 1912(4245). 1. 29, 1912(4245). 2. 3.]을 보면 그 시기 단재(신채호)가 블라디보스토크에 머물렀음을 확인할 수 있다. 신채호가 1912년 11월 1일 안창호에게 보낸 편지에서 “약소유소수지물(若少有所須之物) 당일관중국(當一觀中國) 차왕내지(次往內地)”이라는 구절이 있는데, 이는 1910년 6월 블라디보스토크에 온 이래 1912년 10월까지 중국을 제대로 둘러보지 못했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러므로 12년 초에 안동에 갔을 가능성은 더욱 없다. 게다가 「중간서」에는 “방술(方術)”, “반만년 역사상”, “중화인”, “중화각지”, “원저 주인공 야발 선생”, “만고불멸” 등 단재(신채호)의 표현이라고 보기 어려운 것들이 많다. 당시 단재(신채호)는 주로 “대동사천재(大東四天載)”, “지나(중국)”, “지나(중국)인” 등의 표현을 썼다. 단재(신채호)는 1916년 「꿈하늘」에서 “단군신조(檀君神祖)께서 교(敎)와 정치(政治)를 세우사 우리의 시조(始祖)가 되시고 강역(疆域)은 남북(南北)이 만리(萬里)가 되며 만대(萬代)에 미쳤사오나 그러나 어찌해 당시(當時)의 기록(記錄)은 신지비사(神志秘詞) 여들짝 밖에 전(傳)치 못하였던가”라고 하여 단군에 관한 기록이 더 이상 없음을 고백하였다. 이후 단재(신채호)의 논저에서 『단기고사』에 대한 언급이 한 번도 없다는 사실도 「단기고사중간서」가 단재(신채호)의 글이 아니라는 증거이다. 그리하여 세 편 모두 이번 전집에서 배제했음을 밝혀둔다.

8. 남은 말

  막상 전집을 구성하기 위해 작품을 찾았지만 기존 전집에서 크게 더한 것이 없다. 사실 이번 전집에서는 새롭게 추가해야 할 작품으로 떠오른 것이 몇 가지 있었다. 먼저 북한에 있다는 단재(신채호)의 문학유고들이다. 이미 소개된 것 외에도 보다 많은 문학유고들이 북한에 있을 것으로 보인다. 주용걸·김병민, 그리고 안함광[안함광은 「신채호와 그의 문학」(『조선문학』 210, 1965. 2, 112쪽)에서 “시가 작품 「새벽의 별」·「너의 것」·「고려영」·「매암의 노래」·「청루수」·「나비를 보고」·「본국 홍수」…등이 있다.”라고 했다.]의 진술을 통해 아래와 같은 작품은 북한에 있지만 아직 소개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소설—「건륭황제의 꿈」
시—「도제사언문(悼祭四言文)」, 「큰 바람」, 「감회」, 「청루수」, 「본국홍수」
수상—「사상가의 노력을 노력하는 때」, 「태산행기」.

  박정규는 오래전부터 단재(신채호)의 작품 발굴에 노력을 기울여 왔다. 그는 그 일환으로 『단재신채호시집』을 간행하는 성과를 이룩했다. 그 시집에는 이전에 미처 알려지지 않았던 작품들이 많이 소개되어 있다. 박정규는 아래 작품을 단재(신채호)의 시로 규정했다.

  「고식(姑息)과 시계(『황성신문』, 1907. 2. 11~12), 「독립가」(獨立歌)(『황성신문』, 1907. 2. 16), 「청포곡(聽布穀)」(『황성신문』, 1907. 4. 27), 「만필감흥(漫筆感興)」(『황성신문』, 1907. 5. 11), 「영입귀문관(寧入鬼門關)이언정 물향묵서가(勿向墨西哥)」(『황성신문』, 1907. 6. 12), 「열심(熱心)」(『황성신문』, 1907. 6. 27), 「가절감회(佳節感懷)」(『황성신문』, 1907. 8. 17), 「초혼가(招魂歌)」(『대한매일신보』, 1907. 12. 17), 「독립자유가(獨立自由歌)」(『대한매일신보』, 1908. 1. 1), 「소망」(『소년』, 1910. 8), 「안 잘 시간에 자는 잠들」(『권업신문』, 1912. 5. 26), 「시일」(『권업신문』, 1912. 8. 29).

  이 가운데에서 「고식과 시계」, 「청포곡」, 「만필감흥」, 「영입귀문관(寧入鬼門關)이언정 물향묵서가(勿向墨西哥)」, 「열심」, 「가절감회」는 『황성신문』에 실린 운문체 논설이요, 「시일」은 『권업신문』에 실린 논설이다. 박정규는 「환기(喚起) 이천만민(二千萬民)하여 축팔만이천리지독립성(築八萬二千里之獨立城)」에 포함된 가사 「독립가」와 「신년송축」에 포함된 가사 「독립자유가」를 시로 소개했다. 그리고 논설 「영입귀문관(寧入鬼門關_이언정 물향묵서가(勿向墨西哥)」는 전반부만을 시로, 논설 「위국민대한양신문초혼(爲國民大韓兩新聞招魂)」의 후반부를 「초혼가」라는 시로 소개했다. 그는 이 시기 무서명 논설이 단재(신채호)에 의해 집필되었기 때문에 운문체 논설을 단재(신채호)의 시로 소개한 것이다. 「안 잘 시간에 자는 잠들」은 『권업신문』에 [단평]란에 실린 무서명의 산문이다. 이것은 행갈이가 되어 있고, 운문 성격을 띠고 있다. 그는 단재(신채호)를 논설에 삽입 시가를 본격적으로 도입한 탁월한 시인으로 평가했는데(『단재 신채호』, 136쪽), 그의 주장은 일부 상당한 일리가 있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수용에 앞서 보다 확실한 작가 검증을 거칠 필요가 있기에 전집에 싣는 것을 보류하였다.
  또한 권오만은 『대한매일신보』 소재 사회등가사를 연구하며 아래와 같이 주장했다.

  신채호 자신이 「사회등」 가사를 제작한 경우이다. 신채호는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의 논설기자로 재직하면서 그의 활동을 논설 집필에만 한정하지는 않았다. …(중략)… 아마도 오늘날 전해지고 있는 610여 편의 「사회등」 가사 중 다수의 작품들이 그에 의하여 쓰여졌으리라고 보아 무방할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신채호는 「사회등」가사의 전개과정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작가라고 할 수 있다(권오만, 『개화기시가연구』, 새문사, 1989, 375쪽).

  그는 신채호가 사회등가사의 작가 중 가장 중요한 작가(382쪽)였으므로 단재(신채호)는 사회등가사를 형성, 전개한 문학인으로도 새롭게 조명되어야 한다고(380쪽) 주장했다. 그의 주장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신채호의 사회등가사 참여 및 제작 여부에 대해서는 이렇다 할 연구 성과가 없는 실정이다. 비록 무서명으로 발표되어 어려움이 있지만, 앞으로 단재(신채호)의 사회등가사 형성 및 제작에 대한 보다 심도 있는 연구가 뒤따라야 한다.
  전집을 묶었지만 여전히 전집은 미완성이다. 현재로선 이것이 최선이라고 위안을 삼아 보지만 오히려 책임회피와 같은 부끄러움이 가시질 않는다. 언젠가 북한의 유고가 입수되고, 또한 단재(신채호)에 대한 연구가 진척되어 보다 완전한 전집이 나오길 기대하며 아쉬움을 달랜다.


제8권 독립운동
윤병석(인하대학교 교수)

 1

  제8권 「독립운동」은 단재 신채호의 독립운동에 관한 국내외 자료를 수집 정리한 것이다. 단재(신채호)는 한국근대사학을 선도한 민족주의 사학자이다. 또한 그는 구국계몽운동과 그를 이은 항일민족운동을 주도한 언론인이며, 저상(沮喪)하던 민족정기를 환기시킨 민족문학을 개창한 문인이다. 그보다도 불요불굴의 민족주의 사상을 견지한 단재(신채호)는 일제 침략으로 유린된 국권의 회복과 조국의 광복을 위하여 강직하고도 철저한 독립운동에 헌신한 순국선열(殉國先烈)이다.
  단재(신채호)는 능문명설(能文名說)로 기술된 수많은 독립운동의 문자를 남겼다. 그러나 단재(신채호)는 이와 같은 문필활동 외에도 조국 독립운동의 일선에서 헌신한 애국적 행적을 남겼다. 그러므로 이 ‘독립운동’ 편은 그가 남긴 유문(遺文) 외에 행적을 밝히는데 필요한 자료를 집대성한 것이다. 분류는 제1부에서 ‘국내 구국계몽운동’, 제2부에서 ‘망명, 독립운동’, 제3부에서 ‘3·1운동(1919) 후 독립운동’ 자료로 대분하여 정리하였다.

 2

  단재(신채호)는 1880년 충청남도 대덕군 산내(山內)에서 태어났다. 조실부형하고 8세 때, 고향 청원군 낭성(琅城)으로 이사하여 사간원 정언(正言)을 지낸 조부 신성우(申星雨) 밑에서 전통 한학을 공부하여 14세 무렵에는 사서삼경(四書三經)을 독파하고, 시문(詩文)이 뛰어나 인근에 문명(文名)을 떨쳤다. 18세 때에는 개화파 재상 신기선(申箕善)의 집에 드나들며 그가 소장한 신·구(新·舊) 서적을 섭렵하고, 그 이듬해 성균관에 입학하여 3년간 관내에서 기숙하며 학문에 정진하였다. 그의 학문은 성리학에만 머문 것이 아니고 제자백가(諸子百家)에 통달하고 불교에도 일가견을 이루었다. 나아가 단재(신채호)는 이무렵 대담하게 신사조(新思潮)를 수용하여 개화혁신과 자주독립을 강조하는 근대 계몽사상가로 급부상하였다.
  단재(신채호)는 26세 때 회시(會試)에 합격하고 이어 성균관박사(成均館博士)에 임명되었으나, 바로 사퇴하고 고향에 돌아가 신규식(申圭植)·신백우(申伯雨) 등과 산동학당(山東學堂)을 개설, 신교육운동에 솔선하였다. 얼마 후 『황성신문(皇城新聞)』의 논설 주필로 초빙되어 강렬한 항일논설로 구국운동을 펴기 시작하였다. 장지연(張志淵)의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논설이 빌미가 되어 그 신문이 폐간되자, 양기탁(梁起鐸)이 주관하던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의 논설 담당 주필로 옮겨 박은식(朴殷植)을 이어 대한제국 최후의 구국언론을 선도하였다.
  단재(신채호)는 이 무렵 『대한매일신보』에 새로운 ‘조선사(朝鮮史)’의 정립을 시도한 『독사신론(讀史新論)』을 연재, 민족주의 사학의 단초(端初)를 열었다. 또한 이와 전후하여 전기물 『을지문덕』과 『수군제일위인 이순신』·『이태리건국삼걸전』을 저술, 구국을 위한 애국심 고취에 기여하였다. 뿐만 아니라 단재(신채호)는 안창호·양기탁·이동녕·박은식·전덕기·이동휘 등과 함께 비밀결사 신민회(新民會)에 참여하여 최후의 구국운동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제1부 ‘국내 구국계몽운동’에는 단재(신채호)의 출신(出身)과 가계를 밝히는 세보(世譜)를 비롯하여 성장, 수학기의 문명(文名)을 실증할 자료와 성균관박사의 서임(敍任)·퇴임(退任), 『황성신문』과 『대한매일신보』·『가정잡지』 등의 주필 편집 논설기자 등을 맡아 항일언론을 폈던 자료들을 제시하였다. 그리고 독립협회와 신민회에 가담하여 구국활동에 솔선한 자료도 망라하였다.
  이들 자료는 단재(신채호)가 망명 전 국내에서의 구국 행적을 직·간접적으로 실증하는 것들이다. 그 중에는 흔히 ‘신박사(申博士)’로 호칭되던 단재(신채호)의 성균관박사 칭호 자료도 포함되었다. 26세 때인 1905년 4월 4일 판임관육등(判任官六等)에 서임된 ‘성균관박사’이나, 그 다음날인 4월 5일 의원 면직된 문서와 신문기사들이다. 또한 장지연의 초빙으로 『황성신문』 주필로 항일언론을 펴던 단재(신채호)가 1907년 11월 5일부터는 박은식을 이어 『대한매일신보』의 논설 주필로 옮겨 대한제국 최후의 문필보국(文筆報國)의 항일언론을 보이게 된 것이다. 이 무렵 『대한매일신보』의 발행부수는 국한문판이 8,043부, 한글판이 4,650부, 영문판인 『코리아 데일리 뉴스(Korea Daily news)』가 463부로 총 13,256부가 발매된 것으로 집계된 자료도 포함되었다. 그리고 단재(신채호)가 1909년 10월 26일 안중근 의사의 하얼빈 의거 소식을 듣고 신민회의 중심인물이기도 한 양기탁 등과 같이 ‘밤늦게까지 주연을 열고 만세를 불렀다’는 일제 통감부의 정보기록도 포함되었다. 그러나 당시 구국계몽운동시기 자료 중에는 『독립협회약력(獨立協會略曆)』과 같이 단재(신채호)의 활동상이 기술되었으나 자료의 성질상 고도의 사료 비판이 필요한 것도 없지 않다.

 3

  단재(신채호)는 31세 때인 1910년 국망을 앞두고 신민회 동지와 망명길에 올라, 그해 6월 ‘청도회담(靑島會談)’을 거쳐 국치일 전후 러시아 연해주에 첫 망명지를 정하였다. 단재(신채호)는 그곳에서 『해조신문(海朝新聞)』과 『대동공보(大東共報)』를 계승한 『대양보(大洋報)』를 어렵게 간행하였다. 이어 권업회(勸業會) 창설에 가담, 언론부장으로 『권업신문(勸業新聞)』의 주필을 맡아 국외에서의 민족언론을 주도하였다. 또한 서북간도와 국내를 연계, 의열투쟁을 결행하는 광복회(光復會) 부회장으로 활동하였다. 3년 남짓 블라디보스토크를 중심으로 연해주에서 활동하던 단재(신채호)는 1913년 여름 신규식(申圭植)의 초청을 받아 북만주를 거쳐 중국 상해(上海)로 활동지를 옮겼다. 그 후 단재(신채호)는 57세를 일기로 일제의 여순 감옥에서 순국할 때까지 망명생활을 상해와 북경을 중심으로, 때로는 고구려와 발해의 고지(故地)인 남만주 서간도(西間島) 지방을 왕래하면서 조국광복투쟁의 최전선에서 헌신하였다.
  제2부 ‘망명, 독립운동’에는 단재(신채호)의 연해주 망명과 그곳에서의 『대양보(大洋報)』와 『권업신문(勸業新聞)』의 간행 및 ‘권업회(勸業會)’ 활동 자료를 수록하였다. 또한 중국 상해(上海)와 북경(北京)에서 활동하던 시기에 관여한 「대동단결선언(大同團結宣言)」에 관한 자료도 포함시켰다.
  단재(신채호)의 망명은 나라의 멸망을 목전에 둔 1910년 2월 국외독립운동기지 선정을 위한 신민회 결정에 따라 안창호·김지간(金志侃)·정영도(鄭英道) 등과 함께 결행되었다. 그러나 망명 경로는 인천에서 해로를 택해 청도(靑島)로 간 안창호 등과 달리 육로로 중국 안동(安東)을 거쳐 청도에서 합류하는 길을 택했다. 그 곳에서 그해 6월 독립운동 방략을 논의한 청도회담(靑島會談)을 개최하고 청도에 모인 망명객 일행들과 러시아 연해주와 인접한 북만주 밀산(密山)에 새로운 독립운동 기지를 세우고자 블라디보스토크로 향발하였다. 이와 같은 망명과 청도회담에 관한 자료는 희귀하다. 그런 중에서도 정영도의 『증언록』과 이정희의 『아버지 추정 이갑(秋汀 李甲)』 속에 이와 관련된 내용이 기술되어 있다. 그해 8월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한 단재(신채호)는 권업청년회(勸業靑年會) 등의 지원을 받아 그곳에서 무엇보다 항일언론을 재건하는 『대양보』와 그를 이은 『권업신문』 간행에 전력하였다. 그동안 『해조신문』과 『대동공보』로 대표되던 연해주지역 한인의 항일언론은 1910년 8월 국치(강제병탄, 한일강제병합)전후 일제의 요구를 받아들인 러시아 당국에 의하여 폐간되었고, 관련 인물들은 피체되었거나, 러시아 영외로 강제 추방되었다. 이로 말미암아 국치전후 연해주지역 한인이 결속하여 전개한 성명회(聲明會) 활동과 십삼도의군(十三道義軍) 편성 등의 중요 민족운동은 대변지 없이 추진될 수밖에 없는 애로를 겪었다.
  연해주 한인사회는 이주 전후에 따른 원호(元戶)와 여호(餘戶)의 차별과 출신지역에 따른 북도(北道)·서도(西道)·경기(京畿)파의 대립, 그리고 이념에 따른 의병계열과 계몽계열로 얽혀 복잡한 정치 성향을 나타내어 단합된 항일민족운동을 추진하는데 적지 않은 장애요인이 되었다. 더욱이 이와 같은 현실적 조건은 여러 갈래 한인사회의 의견통일과 자금 마련, 러시아 당국으로부터의 발행허가 취득, 일제의 방해공작의 제거 등 어려운 문제와 중첩되어 단합된 항일노선을 걷기에는 어려운 실정이었다. 그러나 단재(신채호)의 언론보국(言論報國)을 위한 헌신적 활동은 1911년 6월 18일 『대양보』의 창간으로 결실을 맺었다. 여기에는 연해주 한인들의 단재(신채호)에 대한 『황성신문』과 『대한매일신보』 주필 이래의 항일언론인으로서의 성명(聲名)과 신뢰가 뒷받침되었다고 할 수 있다.
  대양보사의 임원은 사장에 최재형(崔才亨), 총무에 차석보(車錫甫), 러시아어 번역 유진률(兪鎭律), 발행인에 김대규(金大奎), 회계에 김규섭(金奎涉), 서기에 김만식(金晩植), 집금인(集金人)에 이춘식(李春植)으로 짜여 졌고, 단재(신채호)는 신문 내용을 총괄하는 주필을 맡았다. 대외적으로 편집 겸 발행인은 니콜라이 삐토르뷔취 유가이라는 러시아 귀화인 이름을 가진 유진률(兪鎭律)이 맡고 주필에 신채호로 선임되었다. 신문체제는 사설을 비롯하여 국내전보·외국전보·각국통신·최근시사·논설·대한통신·잡보·기서 등의 난을 마련하여 일견 『대동공보』와 유사한 편집체제를 갖추었다. 그보다도 주 2회 발행하는 이 신문은 창간과 더불어 내용이 철저한 항일기사와 민족의 독립언론으로 손색없이 채워져 일제가 가장 질시하는 언론으로 부상한 것이다. 일본영사관 측이 입수하여 일본어로 초역하여 상부에 보고한 자료에 의하면 「강동 재류의 동포에게 고함」이라 제한 창간호 논설의 요지는 다음과 같다.

  강동 재류의 동포여, 머리들어 두만강 저편을 바라보면 동포가 적(일본)의 먹이(餌)가 되었다. 충신은 이미 죽고 애국지사는 투옥되었다. 신문과 학교는 박해를 받으며 토지 수용법이 나왔고 무명의 잡세가 날로 늘어간다. (중략) 『대양보』는 독자에게 금·은·칼·총과 충신·의사·독립·자유를 주어 적(일본)을 살해하게 할 것이다.(국역)

  또한 「대한통신」란에는 국치(강제병탄, 한일강제병합, 1910) 직후 국내에서 일어난 ‘105인 사건’과 ‘테라우치 마사다케[寺內正毅(사내정의)] 총독 암살사건’, ‘신민회사건’으로 알려진 600여명의 애국자 탄압 사실을 필두로 각지 의병항쟁과 탄압, 불법한 토지 수용령 등의 구체적 사례를 들어 일제 무단통치의 내용을 규탄하고 있다. 게다가 이와 같은 『대양보』의 항일논조는 호를 거듭할수록 더해간다고 보고하고 있다.
  1911년 9월 14일자 제13호까지 발행이 확인되는 『대양보』는 실물 그대로 전래된 것이 현재 한 호도 없다. 그러나 이곳에 수록한 일제 측 비밀정보기록 중에는 제2호를 뺀 나머지 호수의 중요 내용을 초역 보고한 것이 남아 있어 그 실상의 일단을 알 수 있게 한다. 현지 일본영사관에서는 이와 같은 『대양보』의 존재를 위태롭게 보고 발행을 불가능하게 하고자 비열한 비밀공작까지 폈다. 그것은 그들이 고용한 고급밀정 엄인섭(嚴仁燮)을 시켜 발행인인 현지 원호 출신의 유진률과 국치(강제병탄, 한일강제병합, 1910) 후 새로 세력이 커진 북도파 실력자 이종호(李鍾浩) 간에 이간 공작을 교묘히 펴면서, 그 해 9월 17일 『대양보』의 인쇄활자를 절취하게 한 것이다. 『대양보』의 상용 인쇄활자 3분의 2에 해당하는 15,000개의 활자를 몰래 절취하여 앞으로 인쇄를 다시 못하게 만들고 그 책임을 교포간의 알력으로 꾸민 비열한 공작을 편 것이다. 사실 대양보사 측이나 교포사회 측에서는 이와 같은 일제 측 공작을 오랫동안 알 수 없었다. 일제가 저지른 그 진상을 이런 자료로 밝힐 수 있게 된 것이다. 현재 우리의 과제 가운데 이와 같은 사실의 규명 못지않게 또한 중요한 것은 어디엔가 전래되고 있을지도 모르는 실물 『대양보』를 조사 수집하여 귀중한 항일언론의 내용을 복원하는 일일 것이다. 더욱이 『대양보』 이전의 『해조신문』과 『대동공보』, 『대양보』 이후의 『권업신문』의 실물들은 결호가 있기는 하지만 러시아 성 페테르부르크 소재 국립도서관에 소장 전래되어 귀중자료로 이용되고 있는 실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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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재(신채호)는 연해주 망명지에서 『대양보』 간행 활동과 함께 권업회(勸業會) 창설과 그 기관지 『권업신문(勸業新聞)』 간행에도 적극 참여하였다. 권업회는 단재(신채호)의 『대양보』 발행과 전후하여 개척리(開拓里)라고 부르던 한인 최초의 집단 거주지가 철거 당하고 새로 건설된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新韓村)에서 1911년 5월 19일 이종호·김익용(金翼鎔)·강택희(姜宅熙)·엄인섭(嚴仁燮)·조창호(趙昌鎬) 등 한인사회 각계파의 인물이 망라된 47인이 발기하였고, 동월 29일 제1회 총회를 개최하여 성립되었다. 이 창립총회에서 회장에는 신망 높던 그곳 한인사회 노야(老爺) 출신의 최재형(崔才亨), 부회장에는 저명한 의병장 출신의 홍범도(洪範圖)가 선임되었고, 단재(신채호)는 김그레고리·엄인섭·조장원·유진률·김유명 등 11인과 함께 평의원에 선임되었다.
  국치(강제병탄, 한일강제병합, 1910) 후 최대의 한인 민족운동기관으로 창립된 권업회는 대외적 활동의 편의를 위하여 ‘권업회’라는 경제주의 단체임을 강조하였고, 러시아 당국의 공인을 신청하여 연흑룡주에서 절대 전제권을 가진 곤닷지 극동총독의 허가까지 얻어 내었다. 그리하여 그해 12월 17일 다시 총회를 개최하여 회칙도 연해주 한인사회가 단합되어 활동할 수 있게 정비하고 그에 따른 임원을 선출, 조국독립의 쟁취를 최고 이념으로 하는 항일민족운동을 각 방면에서 적극적으로 펴갔다. 이 총회에서 권업회를 대표하면서 실질적 운영 책임자가 되는 의사부 의장에는 헤이그 특사로 성명을 떨친 이상설(李相卨), 부의장에는 이종호(李鍾浩)가 선임되고, 단재(신채호)는 신문부에 부장겸 주필에 선임되어 『권업신문』의 창간과 발행을 책임지게 되었다. 그리하여 단재(신채호)는 이상설·이종호·홍범도·이근영(李根英)·조장원(趙璋元)·이민복(李敏馥)·김춘화(金春化) 등과 함께 권업회 발전에 앞장섰다.
  특히 단재(신채호)는 일제 공작으로 부득이 정간된 『대양보』를 잇는 『권업신문』 창간에 주력하여 권업회의 대변지로 부상시키는 한편 강력한 항일민족언론으로 부활시켰다. 『권업신문』은 명의상 발행인을 블라디보스토크 시의원인 이반 삐투르즈코프를 내세우고 있으나 단재(신채호)가 신문부장으로 총무 한형권(韓馨權)과 부원 박동원(朴東轅)·이근용(李瑾鎔) 등과 함께 『대양보』를 잇는 항일민족언론을 펴고 있었다. 인쇄활자를 절취당했으므로 부득이 필사 석판인쇄로 주1회 2,000부를 발행하는 신문으로 키워갔다. 특히 제2부 ‘망명, 독립운동’에 수록된 『대양보』와 『권업신문』, 그리고 권업회의 관련 자료는 한·일(한국·일본) 간의 중요자료를 망라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일제 측은 한인의 국외활동 기지로 가장 주목되는 연해주지역에서 『대양보』와 그를 잇는 『권업신문』이 간행되고 항일 독립운동의 중심기관인 권업회 활동을 중시하여 그를 탄압 와해시키고자 현지 총영사관을 비롯한 각종 군관민의 정보기관을 통하여 철저하게 정보를 수집하고 비열한 탄압공작을 폈다. 수록된 자료는 현재 일본 외무성 사료관에 소장되어 있는 관련 자료 중 단재(신채호)와 관련된 부분을 발췌한 것이다. 한편 한국 측 자료는 국민회 관련 문서 속에 포함된 백원보(白元普)·이강(李剛)·이갑(李甲) 등 현지에서 활동중이던 국민회 계통 인사들이 안창호에게 보낸 서한 속에 담겨 있는 단재(신채호)의 현지 활동상을 생생하게 기술하고 있는 귀중자료들이다. 안창호는 단재(신채호)와 연해주 망명을 이어 미국에 간 후 단재(신채호)를 미국에 초청하여 『신한민보(新韓民報)』 등 국민회의 항일 언론을 맡기고자 여러 차례 시도하였으나, 단재(신채호)는 응하지 않았다. 단재(신채호)는 연해주에서 활동한 후에도 북만주를 돌아 상해와 북경 등 중국에서 독립운동과 국사연구에 골몰하였다. 단재(신채호)로선 신명을 다 바친 독립운동의 현장이며 더욱이 그가 탐구하는 민족주의 사학의 역사 유적이므로 떠날 수 없었던 것이라 해석된다.
  단재(신채호)는 1913년 후반기 이후 상해에서 동제사(同濟社)에 참여, 활동하면서 박달학원(博達學院)에서 청소년 교육에 종사하였다. 이어 1914년에는 윤세복(尹世復)의 초청으로 고구려의 흥기지인 서간도 회인(懷仁)에 가서 대종교에 입교도 하고, 『조선사(朝鮮史)』를 지어 동창학교(東昌學校)에서 역사를 가르쳤다. 1년 남짓 머문 그곳에서 원근의 광개토대왕비와 장군총 등을 비롯한 고구려와 발해의 유적지를 답사, 실측하고 백두산에 올라 고대사의 영광을 성찰하기도 하였다. 그 후 북경에 돌아와 『중화보(中華報)』와 『북경일보(北京日報)』 등에 논설을 기고하여 호구(糊口)하면서, 국사연구에 전심하였다. 그런 중에도 조국광복을 위한 망국민의 애국심을 분발시킨 중편 소설 『꿈하늘(夢天)』과 『용과 용의 대격전』등을 비롯한 망명전 국내에서 발표한 『천희당시화(天喜堂詩話)』의 뜻을 이어가는 애국 작품을 적지 않게 창작하였다.
  한편 단재(신채호)는 1917년 7월 상해에서 발표된 『대동단결선언(大同團結宣言)』에 신규식(申圭植)·조성환(曺成煥)·한진(韓震)·박용만(朴容萬)·김성(金成)·박은식(朴殷植)·조소앙(趙素昻)·박기준(朴基駿)·이일(李逸)·신헌민(申獻民)·홍엽(洪燁)·윤세복(尹世復)·신빈(申斌) 등 17인과 함께 연명하였다. 이와 아울러 일제 측 극비의 정보기록에 의하면 단재(신채호)는 연해주 망명 후 부터 그의 말년까지 언제, 어디에서나 국외한인 중 대표적 ‘불령선인(不逞鮮人)’, ‘요시찰인(要視察人)’으로 지목되어 감시와 체포 숙청의 공작이 뒤따르는 신변 위협 속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단재(신채호)도 망명활동 중에는 유맹원(劉孟源)·유병택(劉炳澤)·박철(朴鐵)·윤인원(尹仁元)·신단(申端)·신채호(申彩浩)·신응우(申應雨)·신병희(申秉凞)·신병호(申秉浩) 혹은 중국식 이름인 왕조숭(王兆崇)·왕국금(王國錦) 등의 가명을 써서 신분을 감추기도 하였다. 또한 독립운동 관련의 선언서·취지서·성토문·논설과 그 밖에 많은 시문을 지어 발표하면서도 아예 기명하지 않거나 별명 혹은 단생(丹生)·단재(丹齋)·무애생(無涯生) 외에도 금협산인(金頰山人)·열혈생(熱血生)·검심(劍心)·한놈·적심(赤心)·연시몽인(燕市夢人)·단아(丹兒)·누사(淚史)·진생(震生)·대궁(大弓) 등 여러 필명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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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0세가 되던 1919년 3·1운동을 맞은 단재(신채호)는 조국독립을 확신하고, 상해에 달려가 임시의정원의 개원 의원으로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미구에 이승만의 ‘위임통치론’과 여운형·장덕수 등의 ‘도일행적(渡日行跡)’ 등에 반대하여 임시정부를 떠나 『신대한(新大韓)』을 창간, 임시정부의 ‘외원중시’와 ‘대일유화’적 독립운동 노선을 비판하였다.
  제3부 ‘3·1운동(1919) 후 독립운동’에는 Ⅰ. 대한민국임시정부, Ⅱ. 북경군사통일회, Ⅲ. 무정부주의운동, Ⅳ. 순국과 그 밖에 시기를 명확히 구별치 못하는 단재(신채호) 행적 관련 자료 등을 수록하였다. 그 중 Ⅰ. 대한민국임시정부 관련 자료에는 서두에 길림(吉林)을 중심으로 하는 만주지역에서 대한의군부(大韓義軍府)가 주동이 되어 발표한 ‘대한독립선언서’와 국내 서울에서 13도의 국민대표가 선포한 ‘한성정부’ 관련 자료를 수록하였다. 단재(신채호)는 대한독립선언서에 연명된 김교헌(金敎獻)·여준(呂準)·이상룡(李相龍)·박용만(朴容萬) 등 민족대표 39인 중 1인으로 기명되었고, 한성정부에서는 조정구(趙鼎九)·박은식(朴殷植)·현상건(玄尙健) 등 18명으로 구성된 평정관(評政官)에 선임되었다.
  단재(신채호)의 상해 임시정부 참여는 1910년대 남북만주와 연해주에서 활동하던 이동녕(李東寧)·이시영(李始榮)·이회영(李會榮)·조완구(趙琓九) 등과 함께 각지에서 모인 29인의 임시의정원 개원의원의 1인으로 대한민국임시정부 건립에 적극 참여 활동을 벌였다.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기사록』은 임시정부 수립경위와 초창기 활동을 밝혀주는 현존하는 귀중 문서이다. ‘대한민국’이란 국호와 연호 그리고 「대한민국임시헌장(大韓民國臨時憲章)」 등을 제정하고 임시정부의 국무원을 구성하는 관제를 마련, 국무총리를 수반으로 하는 임시정부 요인을 선거한 임시의정원의 의사록의 일종이다. 단재(신채호)는 국무총리를 선거할 때 홀로 이승만의 선출을 극력 반대하였다. 이승만은 3·1운동(1919) 직전 미국에서 ‘위임통치안’을 제기한 인물로 독립정신의 흠이 있어 정부수반이 될 수 없다는 논리이다. 결국 단재(신채호)의 이같은 이의제기로 임시의정원 의원 등이 먼저 국무총리 후보를 상호 추천하고 그중에서 3인을 공천후보로 의결하고 최종으로 무기명 단기식 투표에 의하여 선출하는 방식으로 바꾸어 선출하였다. 이때 단재(신채호)가 천거한 박용만(朴容萬)은 3인의 공천후보도 되지 못하고, 이승만은 국무총리에 당선되고 말았다. 단재(신채호)는 크게 불만으로 여겼으나, 그대로 임시의정원 충청도 대표의원으로, 전원위원장도 연임하는 등 임시정부 초창기 활동을 계속하였다. 그러나 그해 9월 들어 임시정부 통합운동의 결과 한성정부의 법통을 계승하며, 연해주의 노령(러시아령)정부와 상해 정부가 통합하는 방식으로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재정비하고, 국무총리를 대통령제로 격상하는 헌법개정을 통하여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격상시켰다.
  단재(신채호)는 이를 용납할 수 없었고 유화적인 임시정부의 지도노선을 바로잡기 위하여 임시정부를 떠나 그해 10월 28일 『신대한(新大韓)』을 창간, 혈전(血戰)을 강조하며 임시정부의 외세의존 노선을 규탄하였다. 또한 이와 전후하여 여운형(呂運亨)·장덕수(張德秀)·최근우(崔謹愚)·신상완(申尙玩) 등의 ‘도일행적(渡日行蹟)’을 원세훈(元世勳)·한위건(韓偉健) 등과 함께 유호국민대회(留滬國民大會)를 개최하여 신랄하게 규탄하였다. 그들의 도일행적은 적인 일본으로부터 참정권이나 자치권을 얻으려 ‘비사후례(卑辭厚禮)’하려는 전통 외교로써 ‘민의위반(民意違反)’ 행위가 되고 또한 임시정부의 활동이 아닌 ‘개인행동’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임시정부의 대변지 『독립신문』과 맞서 간행한 『신대한』의 창간사를 비롯한 각종 논설과 관련 기사는 이를 실증하고 있다.
  한편 단재(신채호)는 이 무렵 남형우(南亨祐)가 단장인 ‘신대한동맹단(新大韓同盟團)’의 부단장으로 각종 일제 측 자료에 부침(浮沈)되고 있다. 단재(신채호)와 뜻이 맞는 정치결사로 여겨지나, 『신대한』과의 관계는 확실히 밝힐 수 없다. 또한 국내에서 안희제(安熙濟)·박광(朴珖)·신백우(申伯雨)·윤병호(尹炳浩)·서세충(徐世忠) 등이 재건한 대한청년단(大韓靑年團) 단장에 추대되기도 하였다.

 6

  단재(신채호)는 1920년에 들어서면서 활동 중심지를 상해에서 다시 북경으로 옮겼다. 그곳에서 박용만(朴容萬)·신숙(申肅) 등 대한민국임시정부 반대세력과 합작하여 군사통일운동(軍事統一運動)을 일으켜 남북만주와 연해주에서 활동하는 군사 단체의 통합과 혈전(血戰)의 독립전쟁을 강조하는 독립운동 방략을 강력히 추진하였다. 제3부 Ⅱ. ‘북경군사통일운동’ 자료에는 혈전을 준비하는 제2 보합단(普合團)으로 불리는 ‘대한민국군정부(大韓民國軍政府)’를 비롯하여 그를 뒷받침할 통일책진회(統一策進會), 군사통일회(軍事統一會) 관련 자료와 『천고(天鼓)』, 『대동(大同)』 및 의열단의 「조선혁명선언(朝鮮革命宣言)」 등의 관련 자료를 합록하였다. 그 중 제2 보합단(普合團)은 1920년 4월 북경에서 단재(신채호)를 포함하여 박용만, 고일청(高一淸)·김창숙(金昌淑) 등 반(反)상해임시정부 인사 50여명이 군사통일운동의 실효를 거두기 위하여 조직한 것이다. 상해의 임시정부와 임시의정원을 타도하고 혈전과 그를 수행할 국민군 편성을 강조하는 ‘독립전쟁론’을 구현하려는 것으로 여겨진다. 외형상으로 ‘각 단이 합동하여 공진(共進)’한다는 뜻으로 ‘제2 보합단(普合團)’이라 불렀으나, 속으로는 상해 임시정부를 반대한 ‘대한민국군정부(大韓民國軍政府)’를 건립하려 한 것이고, 단재(신채호)는 그 정부의 내무장(內務長)의 직임을 맡았다. 단재(신채호)는 이무렵 이승만의 위임통치론을 규탄하고 나아가 임시정부의 부실하고 철저하지 못한 독립노선을 극렬히 반대하는 ‘성토문(聲討文)’을 지어 김원봉·김창숙·남공선·이극로·장건상 등 54인의 연명으로 발표하여 국내외 독립운동사회에 큰 파장을 일으켰다. 또한 무력투쟁의 강화를 위하여 박용만·고일청 등과 함께 ‘군사통일촉성회(軍事統一促成會)’를 개최하고 배달무(裵達武)를 서간도에, 남공선(南公善)을 북만주에 파견하여 각지 무력군단의 통합을 촉진하였다.
  한편 단재(신채호)는 김정묵(金正黙)·박봉래(朴鳳來) 등과 ‘통일책진회’ 결성을 발기하여 ‘첫째 진정한 독립정신 아래 통일적 광복운동을 전개하고, 둘째 정부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여 시국을 수습하고, 셋째 군사 각 단체를 완전히 통일하여 혈전을 꾀한다.’라는 내용의 취지서를 작성 공포하였다. 나아가 단재(신채호)는 ‘군사통일회’를 소집하여 상해 임시정부의 해체와 혈전을 통한 독립전쟁노선의 강화를 천명하였다.
  북경에서 이와 같은 군사통일회의 활동은 상해에서 박은식과 원세훈(元世勳) 등 13인의 국민대표회의(國民代表會議)의 소집 요구와 만주지역에서 경신참변(간도참변, 1920) 후 독립군 재정비를 추진하던 여준(呂準)·김동삼(金東三)·이상룡(李相龍) 등의 동조를 받아 1923년 정초부터 상해에서 역사적인 국민대표회의가 개최되었다. 국민대표회의의 개최는 나라를 잃고 국내외에 유리하면서도 조국 독립운동에 헌신하는 국민의 대표자가 한데 모이는 총회를 개최하여 그곳에서 독립운동의 이념과 정책 그리고 임시정부 문제 등을 총괄 심의하여 온 국민의 총의로 조국 독립운동을 효과적으로 활성화시키려던 염원이 담긴 것이었다. 1921년 초부터 제기된 국민대표회의는 우여곡절 끝에 1923년 1월 3일부터 프랑스 조계내 민국로(民國路) 침례교회당에서 국내외 61개 단체 대표 124명이 참석하여 개최되었다. 이는 한국 독립운동사상 최대 규모였다.
  독립운동계의 각계 명사가 거의 참석한 이 회의는 그해 5월 15일 제63차 회의까지 우여곡절을 겪기는 하였으나,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의제도 다양하게 시국 현안 문제를 비롯하여 독립운동의 이념과 노선, 정책, 혈전의 전술, 그리고 임시정부 문제 등 각 안건을 심도 있게 논의하여 합의 도출한 경우도 많았다. 그러나 임시정부 문제를 놓고 개조파(改造派)와 창조파(創造派)로 갈려 의견 일치를 보지 못하였다. 이때 단재(신채호)는 박용만, 신숙 등과 함께 공산주의 계열이 섞인 창조파의 주동자로 활동하였다. 창조파는 개조파의 퇴장 불참 속에 회의를 속개하여 새로 창조하려는 정부의 헌법까지 제정하고, 기존 임시정부의 해체를 주장하였다. 그러나 단재(신채호)도 적극 가담한 이 창조파의 활동은 끝내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단재(신채호)는 고문에 추대되고 김규식(金奎植)을 수반으로 ‘한정부(韓政府)’ 혹은 ‘조선공화국정부’도 미구에 와해되어 독립운동사상 큰 상처만 남겼다.
  한편 단재(신채호)는 이보다 앞선 1921년 초 북경에서 김창숙 등과 함께 순한문의 독립운동 잡지 『천고(天鼓)』를 창간하여 제7호까지 계속하면서 민족단합과 한·중(한국·중국) 공동의 독립운동 이념을 정립하려 하였으며, 혈전(血戰) 강조의 독립운동 전술 천명에 크게 기여하였다. 또한 이와 전후하여 군사통일과 국민개병의 ‘독립전쟁론’ 구현에 중점을 둔 군사통일회 기관지 『대동주보(大同週報)』를 주간하였다. 표지에 『대동(大同)』이란 표제로 간행된 『대동주보』는 현재 1921년 7월 9일의 제3호를 비롯하여 4·5·6·7호가 전래되어 군사통일운동의 노선을 실증하고 있다.
  또한 단재(신채호)는 국민대표회의 소집보다 약간 앞서 의열단(義烈團)의 요청으로 ‘의열단선언(義烈團宣言)’이라고도 하는 「조선혁명선언(朝鮮革命宣言)」을 집필, 독립운동사상 불후의 문자를 남겼다. 단재(신채호)는 망명 전후에 걸쳐 그의 민족주의 독립사상을 이론으로 기술한 명문탁설(名文卓說)도 많지만 그 중에서도 그의 민족주의사상 내지 민족운동의 전술로 백미를 이룬다고 논찬되는 이 「조선혁명선언」은 민족주의운동이 ‘민중(民衆)’의 기반 위에 서야 한다는 것을 강조할 뿐만 아니라 ‘폭력(暴力)’만이 그 단계에서 가장 유효 적절한 독립운동의 전술이라는 것을 천명하는 것이었다. 그는 여기서 이른바 ‘내정독립론(內政獨立論)’은 물론이요, 이른바 ‘준비론’, ‘외교호국론(外交護國論)’까지도 철저하게 비판하고, 이어 “민중은 우리 혁명의 대본영(大本營)이다. 폭력은 우리 혁명의 유일무이한 무기(武器)이다. 우리는 민중 속에 가서 민중과 악수하며 부절(不絶)하는 폭력·암살·파괴·폭동으로써 일본의 통치를 타도하고 우리 생활에 불합리한 일체 제도를 개조하여 인류로서 인류를 압박하지 못하며 사회로서 사회를 박삭(剝削)치 못하는 ‘이상적 조선(朝鮮)’을 건설할 지니라”라고 하는 ‘민중의 직접 폭력혁명’을 주창하고 있다. 이것이 당시 승승장구하던 일제와의 투쟁에서는 단연코 여러 가지 민족주의운동 가운데서도 돋보이는 혁명이론(革命理論)으로 칭예(稱譽)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한말 이래 단재(신채호)의 ‘신민론(新民論)’을 기반으로 한 ‘독립전쟁론(獨立戰爭論)’을 ‘민중의 직접혁명’ 이론으로 진일보시킨 전술이라고도 할 수 있다.

 7

  단재(신채호)는 1925년 전후로부터 무정부주의 운동에 경도하기 시작하여 1927년 동방 9개국 대표가 모인 ‘무정부주의 동방연맹’에서 주도적 역할을 수행하여 그 대회 선언문까지 작성하였다. 또한 그 대회 결의에 따라 실천운동에도 가담 ‘외국위체변조사건(外國爲替變造事件)’에 연루되어 대만 기륭(基隆)항에서 일제 경찰에게 잡혀 공판정에서 10년형을 받고 안중근 의사가 순국한 여순감옥에서 8년여를 복역하다 옥사 순국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단재(신채호)의 무정부주의운동은 어디까지나 ‘조선의 독립’을 전제로 하고, 그를 성취하기 위하여 무정부주의 이념과 전술을 따른 것이라 할 수 있다. 단재(신채호)는 최후 공판 진술에서 ‘우리 동포가 나라를 찾기 위하여 취하는 수단은 모두 정당한 것’이라고 의연하게 진술하고 있는 것이다.
  Ⅲ. ‘무정부주의운동’에는 단재(신채호)가 조국 독립을 위하여 모험을 간직한 실천운동으로 내외의 이목을 경동하게 하고 자신을 여순감옥에서 옥중 순국으로까지 몰고 가게 한 무정부주의 관련 자료를 수합한 것이다. 특히 한국과 일본 그리고 중국의 신문보도 기사를 조사 수집한 것으로 파괴, 살해 등의 의열활동까지 도모하는 무정부주의 동방연맹의 활동과 ‘외국위체변조사건’의 전말, 투옥 공판의 경위 등을 규명할 자료인 것이다. 그러나 단재(신채호)의 무정부주의 사상의 수용과 내용을 깊이 탐구하기에는 부실한 면이 적지 않다. 앞으로 단재(신채호)의 무정부주의운동 연구의 심화를 위하여 관련 자료의 재보완 발굴이 필요할 것이다. 한편 이와 전후하여 단재(신채호)는 오랜 지기(知己) 홍명희(洪命憙)의 교섭을 받아 국내에서 결성된 신간회에 가담하고 국외활동중임에도 불구하고 중앙위원에 선임되었다. 그리고 일제 측 자료에는 이와 전후하여 단재(신채호)의 공산주의운동 관련 자료가 더러 보이는데 이는 사실성이 거의 희박한 정보 자료인 것 같다. 철저한 검정과 사료비판이 선행된 후의 해석이 필요할 것이다.
  Ⅳ. ‘순국, 기타’에는 10년 형기를 받은 단재(신채호)의 옥중관련 자료와 부인 박자혜(朴慈惠) 여사와 아들 신수범(申秀凡)·신두범(申斗凡) 등 가족관계 자료 및 그밖에 시기와 내용을 정확히 밝힐 수 없는 행적의 단편 자료 등을 함께 수록하였다.
  단재(신채호)는 망명 직후부터 속병 등 신병이 끊이지 않았고 생계의 궁핍이 겹쳐 안정된 가정생활을 영위하기 힘들었다. 게다가 일제로부터는 수급의 ‘불령선인(不逞鮮人)’으로 지목되어 생명을 노리는 감시와 피체 위험이 첫 망명지 연해주에서부터 남북만주, 중국대륙 어느 곳에서나 도사리고 있었다. 그러나 단재(신채호)는 이런 주변 위험을 개의치 않고 어디에서나 한편으로 민족주의사학의 저작과 웅혼한 역사문학을 창작하면서도 철저하고도 강직한 독립운동의 전사로 일관하다 끝내 여순감옥에서 1936년 1월 18일 석방을 1년 8개월 앞두고 뇌일혈로 쓰러져 의식을 잃고 말았다. 급보를 받은 부인 박자혜 여사와 아들 수범(신수범)이 여순 감옥에 도착했을 때에는 그가 그렇게 그리며 걱정하던 처자가 앞에서 오열하는 것도 알아보지 못하고 차가운 시멘트 감방에서 죽은 듯이 누워 운명의 시각만을 남기고 있었다. 민족의 자유와 나라를 찾기 위해 모든 것을 다 바친 단재(신채호)는 며칠 후인 2월 21일 아무도 임종을 지키는 이 없는 감방 속에서 한마디 유언도 남기지 못하고 명운을 다하였다. 일제로선 ‘옥중사망’이나 한국의 역사로선 장엄한 ‘순국선열(殉國先烈)’의 전범(典範)인 것이다.


제9권 단재(신채호)론·연보
최기영|서강대학교 교수

1. 신채호론

  『단재 신채호전집』 제9권은 신채호와 교분이 있던 친구나 후학 등의 기록을 수집하여 ‘신채호론’을 정리한 것이다. 신채호에 관한 인물평을 비롯한 논의는 그의 생존 당대에도 많지는 않았지만, 종종 있었다. 괴벽스러웠던 그의 성품이라든가 그의 학문적 업적 등에 대하여, 주로 교분이 있던 인물들이 신문이나 잡지를 통하여 언급하였던 것이다. 예컨대 신채호가 체포된 뒤 두 차례 면회한 회견기나 부인 회견기 등이 소개되었고, 『동아일보』와 『조선일보』 등에 『조선사연구초』와 『조선사』 등이 연재되자, 신채호의 학설을 비판한 안확이나 홍기문의 글 등이 있었다.
  그러나 신채호에 대한 본격적인 소개와 논의는 그가 1936년 2월 21일 여순감옥에서 순국한 직후에 두드러졌다. 『동아일보』와 『조선일보』는 조사 또는 신채호 관련 기사를 싣고, 두 신문사에서 간행하던 월간잡지였던 『신동아』와 『조광』에서는 그를 기리는 추모특집을 마련하였던 것이다. 『조선일보』는 안재홍이 「오호(嗚呼) 단재(신채호)를 곡함」(2월 27일자)을, 홍명희가 「곡단재(신채호)」(2월 28일자)를 조사로 게재하였다. 이어 홍기문이 「신단재(신채호)학설 비판」이라는 제목의 글을 2월 29일자부터 3월 10일자까지 8차례 연재하였던 것이다. 『동아일보』에서는 정인보의 「단재(신채호)와 사학」(2월 26, 28일자)을 실었고, 심훈이 「단재(신채호)와 우당[友堂(윤희구)]」(3월 12, 13일자)을 실은 바 있다. 그리고 『신동아』 4월호는 「신단재(신채호)를 추억함」이라는 제목으로 정인보가 「잔억(殘憶)의 수편(數片)」, 서세충이 「단재(신채호)의 천재와 응체(凝滯) 없는 성격」, 신석우가 「단재(신채호)와 ‘의(矣)’자」, 해객(海客)이라는 필명의 인물이 「단재(신채호)고우를 추억함」이라는 추모의 글을 실었다. 『조광』 4월호에는 「돌아간 신단재(신채호)의 면영(面影)」이라는 표제로 「희(噫)! 불귀의 신단재(신채호)」(편집자)를 싣고, 안재홍의 「신단재(신채호)학설사관(申丹齋學說私觀)」, 이광수의 「탈출도중의 단재(신채호)인상」, 홍명희의 「상해시대의 단재(신채호)」, 이극로의 「서간도시대의 선생」, 이윤재가 「북경시대의 단재(신채호)」, 미망인 박자혜의 「님의 영전에」라는 위령제문을 수록하였다. 신채호의 시와 편지도 소개하였다. 이 두 잡지의 특집이 신채호에 관련된 많은 정보를 제공하였던 것이다. 그 밖에 『삼천리』에 원세훈이, 『중앙』에 변영만이 회고담을 통하여 신채호의 별세를 안타까워하였다. 또 홍기문은 신채호 역사학 전반에 대한 검토를 시도하였다. 사실 신채호의 생애와 관련해서 작은 사실들이 이러한 회고문을 통하여 확인될 수 있었고, 또 신채호라는 인물의 분위기를 쉽게 접할 수 있었다.
  이 자료집에 수록된 자료는 원칙적으로 신채호와 교분이 있거나, 직접적인 교분이 없더라도 1950년대까지 발표된 기록을 대상으로 삼았다. 신문과 잡지에 발표된 것이 대부분이고, 일부는 회고록 등에서 확인하였다. 대체로 당대 신채호에 대한 논의는 언급한 바와 같이 그의 곧은 성품을 드러내는 일화를 중심으로 해서 이루어졌고, 그의 학문에 대한 관심이 표명되었다. 그리고 추모시 등도 몇 편 있다. 특히 신채호와 막역한 교분을 지닌 변영만·변영로 형제와 홍명희·홍기문 부자, 안재홍 등이 신채호에 관하여 여러 편의 글을 쓴 바 있어, 크게 참조된다. 그리고 신채호와 관련된 신문기사도 일부 수록하였다.
  아래의 표는 『단재 신채호전집』 9권에 수록된 자료의 목록이다.

순번

제         목

 필자

  발표지

 발표시기

비고

 1

大勢의 回運-新大韓主筆 申采浩先生

 

革新公報 50

1919.12.25

 

 2

問題 업는 論文을 읽고

沈鴻武

東亞日報

1924.10.20

 

 3

國粹主義의 恒星인 丹齋申采浩 先生

卞榮魯

開闢

1925.8

 

 4

申采浩氏의 吏讀解釋

安自山

中外日報

1928.3.6-8

3회 

 5

大連監獄에서 申丹齋와 面會

李灌鎔

朝鮮日報

1928.11.8

 

 6

申采浩 夫人 訪問記

 

東亞日報

1928.12.12,13

2회

 7

朝鮮史硏究草를 보고

文一平

朝鮮日報

1929.10.15-16

2회

 8

鐵窓中의 申采浩消息

 

朝鮮日報

1931.6.10

 

 9

申丹齋의 輪廓

薊篁生

朝鮮日報

1931.6.12

 

10

朝鮮의 歷史大家 丹齋 獄中會見記

申榮雨

朝鮮日報

1931.12.19-30

7회 

11

申丹齋의 語源考證을 檢討함

洪起文

朝鮮日報

1935.2.5

 

12

두 번 面會時 全然 意識이 不明-申丹齋, 殞命時 光景 旅順갔든 徐世忠氏 談

徐世忠담 

朝鮮中央日報

1936.2.25

 

13

丹齋와 史學

鄭寅普

東亞日報

1936.2.26,28

2회

14

嗚呼 丹齋를 哭함

安在鴻

朝鮮日報

1936.2.27

 

15

哭丹齋

洪命憙
(碧初)

朝鮮日報

1936.2.28

 

16

朝鮮歷史學의 先驅者인 申丹齋學說의 批判

洪起文

朝鮮日報

1936.2.29-3.8

8회

17

哭丹齋

李楨

東亞日報

1936.3.8

 

18

丹齋와 于堂

沈熏

東亞日報

1936.3.12-13

2회

19

고 단 신채호 선을 조상함

홍언

新韓民報

1936.3.26

 

20

申丹齋와 紅色內衣

點下生

東亞日報

1936.4.12

 

21

申丹齋와 紅燈街

KCS

東亞日報

1936.4.14

 

22

殘憶의 數片

鄭寅普
(爲堂)

新東亞

1936.4

 

23

丹齋의 天才와 礙滯없는 性格

徐世忠

新東亞

1936.4

 

24

丹齋와 ‘矣’字

申錫雨

新東亞

1936.4

 

25

丹齋故友를 追憶함

海客

新東亞

1936.4

 

26

申丹齋 學說私觀-尊貴한 그의 史學上의 業蹟

安在鴻

朝光 2-4

1936.4

 

27

脫出途中의 丹齋印象

李光洙

朝光 2-4

1936.4

 

28

上海時代의 丹齋

洪命憙

朝光 2-4

1936.4

 

29

西間島時代의 先生

李克魯

朝光 2-4

1936.4

 

30

北京時代의 丹齋

李允宰

朝光 2-4

1936.4

 

31

가신 님 丹齋의 靈前에-祭文을 代身하야 哭하는 마음-

朴慈惠

朝光 2-4

1936.4

 

32

丹齋 申采浩

元世勳

三千里 4

1936

 

33

故 丹齋 申采浩 先生을 追悼함

震人

民族革命

1936.4

 

34

野人春秋(二)

金東里

朝鮮中央日報 

1936.5.24

 

35

실루에트 二三

卞榮晩

中央

1936.6

 

36

祭申丹齋文

卞榮晩

山康齋文鈔

1957

 

37

丹齋傳

卞榮晩

山康齋文鈔

1957

 

38

申采浩學社 上海에 設立

 

東亞日報

1946.4.9

 

39

解說에 대신하여-丹齋先生과 나-

李瑄根

花郞道硏究

1949

 

40

잊혀지지 않는 사람들-光輝의 人 史家 申采浩 선생

卞榮魯

新天地

1954.6

 

41

丹齋遺稿 出版會 첫 會合 열고 發足

 

東亞日報

1954.10.30

 

42

丹齋와 나

진록성

靑史 1

1955

 

43

申丹齋와 花郞硏究

林耕一

花郞의 血脈 1

1956

 

44

申采浩論

卞榮魯

思潮 10

1958

 

45

丹齋先生 逸話片片

卞樹州

朝鮮日報

1960.2.20

 

46

哭丹齋先生墓

李殷相

朝鮮日報

1960.2.20


47

獨立運動秘話

金昌淑

京鄕新聞

1962.3.2

 

48

-申采浩- 獨立과 自尊의 奇人風志士

柳光烈

記者半世紀

1968

 

49

아버님 단재

신수범

나라사랑 3

1971

 

50

悼申丹齋

金昌淑

心山遺稿 1

1973

 

51

病枕無寐憶 白凡丹齋二公

金昌淑

心山遺稿 1

1973

 

52

傳記-丹齋 申采浩 略傳

申伯雨

畊夫申伯雨

1973

 

53

丹齋 申采浩 追悼辭

申伯雨

畊夫申伯雨

1973

 

54

雪中 懷 采浩

申伯雨

畊夫申伯雨

1973

 

55

哭 丹齋

申伯雨

畊夫申伯雨

1973

 

56

又 哭 丹齋

申伯雨

畊夫申伯雨

1973

 

57

朝鮮愛國史家申采浩

柳子明

世界史硏究動態

1981.2

 

58

丹齋 申采浩 先生

趙擎韓

光州隨筆 23

1991

 

59

申采浩

柳子明

독립기념관소장본

자료번호
3-011973-000

 


2. 신채호와 관련된 일화

  변영로가 1920년대부터 1960년에 이르기까지 쓴 4편의 신채호 관련 글은 중복되기도 하지만, 신채호의 성격을 잘 보여주는 것이다. 그는 친형인 변영만과 신채호가 가까웠던 탓에 망명 전의 신채호를 기억하고 있었다. 「국수주의의 항성인 단재 신채호선생」(『개벽』 1925년 8월호), 「잊혀지지 않는 사람들」(『신천지』 1954년 8월호), 「신채호론」(『사조』 1958년 10월호), 「단재(신채호)선생 일화편편(逸話片片)」(『조선일보』 1960년 2월 20일자) 등에 나타나는 신채호에 대한 기억은 중복되기도 하지만, 망명 이전의 모습을 보여준다. 변영로는 신채호와 18년 연령의 차이가 있었기 때문에 직접 경험한 기억이 없지 않지만, 변영만을 통하여 전문한 기억이 적지 않다. 그러나 그가 수십 년 신채호에 대한 관심과 기억을 가지고 있어 신채호를 알리는데 계몽적인 역할을 하였음은 틀림없다. 그는 신채호를 “선생이 시는 지으나 시인은 아니시고, 논문은 쓰시나 전문적 논문가도 아니시며, 모든 전고설문(典考說文) 등에도 통하시긴 하다 하나 그렇다고 그 길에 전념하시는 이도 아니다. 선생은 어디까지든지 사가이시다. 조선의 랑케라면 선생께 무례나 아닐는지. 여하간 천재적 기분에 있어서 방불한 가장 경모할 우리의 역사가이시다”라고 1925년에 평가하고 있었다.
  일찍부터 신채호와 교분이 있던 인물은 변영만이었다. 그는 1900년 전후 성균관에서 신채호와 함께 수학하여 수당 이남규 문하의 동학이었다. 연령은 신채호가 9살이나 위였지만, 신채호가 상경하여 활동한 뒤 가장 가까웠다. 따라서 변영만은 신채호가 한말부터 교분을 가진 경우였고, 신채호가 중국에 망명한 뒤에 변영만 역시 변호사 생활을 하다가 중국에 망명하여 1910년대에도 교분이 이어졌다. 1920년 전후 귀국한 변영만이 신채호를 마지막 만난 것은 1921년 북경에서 개최된 변호사 관련 국제회의에 참가하였을 때였다. 따라서 “신단재(신채호)와 나와는 약관 시부터의 구요(舊要)인만큼 양인 상호(相好)의 정도가 비유를 불허하니 만큼 나는 단재(신채호) 숙지자로는 제2인은 아니다”라고 스스로를 평할 만큼 가까워, 1910년대까지 신채호의 일상을 가장 잘 알던 그가 「파심어[신단재(신채호)의 윤곽]」(『조선일보』 1931년 6월 10일자), 「실루에트 二三」(『중앙』 1936년 6월호)와 같은 회고체의 글을 쓰고, 신채호의 사후에 바로 「제단재문」, 「단재전」(『산강재문초』 수록)을 저술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특히 「단재전」은 한문으로 쓴 전의 양식으로도 파격적인 것이었지만, 신채호에 관한 다양한 정보를 제공해 준다. 「실루에트 二三」은 신채호 사후에 일화를 적은 것인데, 그 내용의 대부분이 「단재전」에 상세하게 소개되어 있다. 그에 비하여 「신단재(신채호)의 윤곽」은 신채호의 학문적·문학적 위치를 짧지만 요령 있게 평가한 내용이었다. 「단재전」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신채호 관련사항은 초취부인 조씨(趙氏)와의 관계와 관일(貫日, 신관일)이라는 아들의 존재, 조카 난(蘭, 신난)의 존재와 1917년의 비밀귀국, 제자 김기수(金箕壽)와 우응규(禹應奎)와의 관계 등이다. 그러면서도 신채호의 일화를 전하며, “그의 위력은 상량(爽凉)한 모광(眸光)과 그 청자(淸慈)한 음성에 있었고, 그의 빈핍(貧乏)은 그 세장(細長)한 수지(手指)와 그 윤기 없는 조갑(爪甲)에 있었다. 그리고 무엇이 제일 좋으냐고 물어 본즉 「여자가 제일」이라고 항상 대답하였다. 그러나 나는 그가 여자를 어떻게 처리하였던지 상상할 수도 없다”라는 괴벽스런 그의 성품을 알려주고 있다.
  변영만과 더불어 신채호와 가까웠던 인물은 홍명희와 정인보였다. 그들은 1910년대 전반기 상해에 망명해 있던 그룹이었다. 이광수의 회고에 따르면, 오산학교를 그만두고 중국에 간 이광수는 안동에서 귀국하던 정인보를 만났고, 정인보가 전하는 소식을 듣고 상해로 가서 신규식과 신채호를 비롯하여 홍명희와 문일평, 조소앙 등을 만났다. 1888년생인 홍명희와 1892년생인 정인보는 1880년생인 신채호보다 10년 전후의 연하였지만, 1889년생인 변영만과도 신채호와 교분을 가진 점을 고려한다면 상해에서 이들은 충분히 교분을 가질 수 있었다. 물론 이미 널리 문명을 날린 신채호에게 홍명희와 정인보가 가르침을 받는 수준이었을 것이다. 홍명희와 정인보가 귀국한 뒤에도 신채호는 이들과 인편이나 편지 등을 통하여 지속적인 관계를 맺고 있었다.
  홍명희는 「곡단재」(『조선일보』 1936년 2월 28일자)라는 조사를 썼다. 그는 조사의 첫 부분에,

  단재(신채호)가 죽다니. 죽고 사는 것이 어떠한 큰 일인데 기별도 미리 안하고 슬그머니 죽는 법이 있는가. 죽지 못한다. 죽지 못한다. 나만 사람이라도 단재(신채호)가 지기로 허하고 사랑하는 터이니 죽지 못한다. 말리면 죽을 리 만무하다. 그런데 죽다니, 무슨 소린고. 세상 사람이 다 죽었다고 떠들더라도 나는 죽지 않았거니 믿고 싶다. 만나볼 수 있는 곳에 있었어도 보지 못하고 지냈으니 만나볼 수 없는 곳으로 가서 다시 보지 못하려니 생각하면 그만이다. 신문의 보도와 수범[秀凡(신수범)]의 통기(通寄)가 나에게는 다 부질없는 일이다.

라고 하였다. 신채호의 순국을 슬퍼하는 뜻을 그의 죽음을 믿을 수 없다는 것으로 시작하였던 것이다. 홍명희는 이어 『조광』에 「상해시대의 단재(신채호)」라는 짧은 회고문을 발표하였다. 그는 “내가 단재(신채호)와 사귄 시일은 짧으나 사귄 정의는 깊어서 나의 오십반생에 중심으로 경앙하는 친구가 단재(신채호)이었습니다”라고 신채호와의 교분을 밝히고 있었으며, 그에게서 받은 서신에서 몇 구절을 소개하기도 하였다. 정인보는 『동아일보』 1936년 2월 26일자와 28일자에 「단재(신채호)와 사학」이라는 글로 신채호의 역사학을 평가하며, 『신동아』에 「잔억의 수편」을 실어 한시와 시조를 통하여 신채호를 기억하였다.
  미주(미국)에서는 『신한민보』의 주필인 홍언(洪焉)이 1936년 3월 26일자에 신채호의 순국을 기리며 「고 단재 신채호 선생을 조상함」이라는 조사를 실었다. 홍언은 신채호의 민족정신를 찬양하며 안중근의 뒤를 이은 인물로 평가하였다. 그는 신채호가 김부식의 존화주의를 쓸어버려 오늘날 한국민족의 사상이 있을 수 있었음을 강조하면서, 신채호를 조상함이 민족의 공의이며 가난한 선비에 대한 동정이라 하고 있었다.
  미주(미국)뿐 아니라 중국에서 활동하던 조선민족혁명당에서 발행하던 기관지 『민족혁명』 제2호(1936년 4월간)에는 진인(震人)이라는 필명으로 「고 단재 신채호 선생을 추도함」이라는 글이 실렸다. ‘진인’은 일제의 정보보고에 따르면 윤세주(尹世冑)였다. 윤세주는 신채호의 생애가 한국의 현실적 정치문제의 해결을 위한 노력이었고, 그것은 국망 이전에는 무장투쟁이었으며, 국망 이후에는 비합법적 폭력주의였다고 지적하였다. 즉 윤세주는,

  선생이 청년으로 처음 사회적 생활에 나옴으로부터, 최후의 옥사에 이르기까지의 전 생애는 오직 조선의 현실적 정치문제를 위한 노력에 일관하였다. 선생이 신문기자가 된 것도 이로 인함이었고, 조선역사를 연구함도 이로 인함이었고, 해외에 망명함도 이로 인함이었고, 최후의 옥사도 이로 인함이었다. 그러나 선생의 이같은 조선정치를 위한 노력은 혁명적 정책을 떠나서는 있지 아니하였다. 망국이전에 선생의 구국정책은 전국적 무장궐기로서 외적에 대한 민족적 저항이 그것이었다. 그러므로 선생은 사대사상의 잔물이었던 당시의 의타외교정책과 문화점진정책에는 격렬한 대립으로서 이것을 배격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망국 이후의 선생의 혁명방략은 또한 철저한 비합법 폭력주의로서, 일절 타협적 합법주의자에 대하여는 엄정한 비판으로서 이것의 분쇄(粉碎)에 노력하였었다.

라고 신채호를 평가하였던 것이다.
  신채호가 무정부주의운동에 투신하여 활동하다가 위체사건(爲替事件)으로 1928년 5월 대만 기륭(基隆)에서 일제에 체포되어 대련(大連) 감옥의 미결감에 수감되었다. 그해 10월 신간회의 이관용(李灌鎔)이 대련감옥으로 신채호를 면회한 바 있었는데, 『조선일보』 1928년 11월 8일자에 그 면회한 내용이 소개되었다. 신채호는 이관용에게 H. G. 웰즈의 『세계문화사』 일역본과 『에스페란토 문전(文典)』, 그리고 『윤백호집(尹白湖集)』을 부탁하였던 것이다. 무정부주의자들이 세계문자로 에스페란토어에 관심을 가졌던 것으로 미루어, 신채호 역시 무정부주의에 대한 관심을 엿볼 수 있다. 이어 『동아일보』는 「신채호 부인 방문기」를 게재하여, 부인 박자혜의 간난한 생활상을 보도하였다. 그리고 『동아일보』 1924년 10월 13일자에 실린 신채호의 「문제 없는 논문」이라는 글을 읽은 심홍무라는 이가 감회를 적은 「문제 없는 논문을 읽고」라는 글을 같은 신문 10월 20일자에 기고한 바 있었다.
  『조광』의 신채호 추모특집은 안재홍이 신채호의 학설을 소개하고, 시기적으로 이광수가 중국망명 직전의 신채호의 모습을 회고하였다. 이어 홍명희가 상해시대, 이극로가 서간도시대, 그리고 이윤재가 북경시대의 신채호를 소개하였고, 미망인 박자혜의 글로 마무리하였던 것이다. 이에 비하여 『신동아』의 특집은 신채호의 성품을 주로 다루고 있었다고 하겠다.
  먼저 『조광』의 추모특집을 보자. 이광수는 1910년 신채호가 망명하던 중에 오산학교에 들렀던 시기와 1919년 상해에서 다시 만난 것을 회고하고 있었다. 이광수가 1936년부터 『조선일보』에 「그의 자서전」을 연재할 때에도 신채호를 묘사한 내용은 「탈출도중의 단재인상」과 같은 것이었다. 신채호가 허리를 굽히지 않고 세수를 하였다든지, 발음을 무시하고 영어를 배우고자 하였다든지 하는 일화가 소개되어 있다. 아울러 임시정부(대한민국임시정부)와 이승만에게 적대적이던 신채호의 모습도 그려졌다. 이광수는 그를 임시정부(대한민국임시정부) 기관지 역할을 한 『독립신문』의 주필로 초빙할 요량이었지만, ‘대의’와 ‘절개’를 내세운 신채호는 이승만의 위임통치안을 극력 비난하였다. 임시의정원 (대한민국임시의정원)회의에서 임시정부(대한민국임시정부) 수반으로 이승만을 선출하게 되자 신채호는 “나를 죽이구랴”하며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극로는 1914년 서간도에서 잠시 신채호를 만난 다음, 1919년부터 1921년까지 상해와 북경에서 만난 신채호의 특성을 소개하였다. 이극로에 의하면 신채호는 능문-불능필, 능좌담-불능연설, 속독, 영어능통, 강직한 사필이 뚜렷하였다고 한다. 이윤재는 북경에서 만난 신채호의 저술과 역사연구에 대한 기억을 전해주며, 한문처럼 영문을 읽던 모습을 소개한 바 있다. 신채호가 만주와 북경의 한국유적을 답사한 일이며, 신채호가 집필해 둔 원고가 조선사통론·문화편·사상변천편·강역고·인물고의 다섯 책으로 되어 있었음도 이윤재의 회고에서 알려진 일이었다. 미망인 박자혜는 연경대학에 재학 중이던 24세 때에 39세의 신채호를 만나 결혼한 기억도 언급하였지만, 신채호 별세 전후의 정황을 서술하였다.
  『신동아』에서는 정인보의 회고에 이어, 서세충은 신채호의 약력, 활동과 함께 중국에서 신채호가 논설로 이름이 높았음을 증거 하였다. 서세충은 신채호의 별세 전후 신채호의 가족들과 여순에 가 시신을 수습한 인물이었다. 신석우는 「단재와 ‘의’자」라는 글로, 중국신문에 집필한 논설에 ‘의(矣)’자가 오식된 것을 중국인이 한국인에 대한 우월감에서 나온 행동이라 하여 논설 집필을 단호하게 그만두었던 일화를 전하고 있다. 해객이라는 필명의 필자는 신채호와 30년 지기였는데, 신채호의 성격을 학자로서의 벽성(癖性)과 한만(汗漫)에서 찾으며, 한학과 역사·시학·불경에 뛰어났다고 평가하였다.
  『조광』과 『신동아』 이외에도 『삼천리』와 『중앙』에서도 순국 직후 신채호에 관한 글을 실었다. 『삼천리』는 1936년 4월호에 원세훈이 「단재 신채호」를, 『중앙』에는 변영만이 「실루에트 이삼」을 게재하였던 것이다. 원세훈은 신채호의 고집불통하면서도 합리적인 성품을 일화를 통하여 밝히며, 궁핍하게 지내면서도 돈에 대한 원칙을 지키던 삶을 조명해 주고 있다. 변영만의 회고는 이미 설명한 바 있다. 그리고 『동아일보』는 심훈의 「단재(신채호)와 우당(윤희구)」이라는 글을 실었다. 심훈은 3·1운동으로 옥고를 치루고 북경으로 탈출해 몇 차례 신채호를 만났는데, “기우(氣宇)에 떠도는 정채와 샛별같이 빛나는 안광이며, 추상같이 쌀쌀한 듯하면서도, 춘풍으로써 접인하는 태도가, 평범한 인물이 아닌 것만은 넉넉히 짐작할 수 있었다”고 한다. 마침 신채호는 『천고』를 주재하던 때였다. 아울러 『동아일보』는 1936년 3월부터 ‘아삼속사(雅三俗四)’라는 단평란을 신설하였는데, 4월 12일자에 「신단재(신채호)와 홍색내의」를, 4월 14일자에 「신단재(신채호)와 홍등가」라는 글을 실었다. 신채호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일화를 통하여 그의 단순함과 원칙을 소개한 것이었다. 그에 앞서 이정(李楨)이라는 이가 「곡단재」라는 한시를 보내온 바 있다.
  해방 이후 김창숙도 신채호와 상해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던 시기에 이승만 성토문을 작성하던 내용을 회고하였으며, 유광렬 역시 국민대표회의 시기의 신채호를 기억하고 있었다. 특히 신채호와 일가이기도 한 신백우는 해방 이후 여러 차례 신채호의 기일을 전후하여 추도사를 짓기도 하였다. 신백우는 이미 신채호를 회고하는 한시를 여러 편 지은 바 있었다. 진녹성은 「단재와 나」라는 글을 『청사』라는 잡지 창간호에 실었는데, 신채호와의 교분을 언급하였으나, 내용이나 연대가 제대로 연결되지 않고 있다. 1936년 신채호가 순국한 뒤, 정주에 가 이승훈을 만났다고 하였는데, 이승훈은 이미 1930년 별세하였다. 진녹성이란 인물은 1929년 대경성안내사를 설립하여 사기를 벌였다는 기록(『동아일보』 1929년 11월 16일자)으로 미루어, 신채호와 직접 관련을 맺었는지 알 수 없다.
  조경한 역시 신채호와의 만남으로 ‘경한(擎韓)’이라는 이름을 받은 일과, 영향을 받은 일을 회고한 바 있다. 아들 신수범은 1971년 『나라사랑』의 신채호특집호에 「아버님 단재」라는 글로 부친의 운명과 유물, 장례에 관한 일을 기록하였다. 이은상도 신채호의 묘를 참배하고 추모하는 시조를 남긴 바 있었다. 특기할 것은 해방 직후인 1946년 초 중국 상해에서 신채호학사를 건립하고자 한 움직임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신채호학사는 한국인들만의 발의가 아니라 중국인들도 참여하였는데, 아마도 무정부주의자들이 주를 이루었으리라 짐작된다. 그리고 1954년 10월에 ‘단재(신채호)유고출판회’가 조직되어 유고 출판을 기획하였음도 확인된다.
  순국 직후에 저술한 변영만의 「단재전」은 일제강점기에 알려질 수 있는 글은 아니었다. 신채호와 교분이 있으며 그의 생애를 소개한 글은 변영만의 「단재전」과 신백우의 「단재 신채호 약전」이 있고, 1980년대에 중국에 생존해 있던 유자명의 「신채호」 원고본이 남아 있다.

3. 신채호 학문에 대한 논의

  신채호의 학문에 관련된 논의는 국어학과 역사학 연구자들에 의하여 이루어졌다. 안확이 『동아일보』 1924년 10월부터 11월까지 3회에 걸쳐 게재되었던 「이두문명사해석(吏讀文名詞解釋)」에 대한 비판을 1928년 3월에 『중외일보』 지상에 3회에 걸쳐 연재한 것이 그 처음이 아닌가 한다. 안확은 신채호의 이두 해석을

  고로 씨의 해석방법은 자기경험에 의한바 이집(已集)한 재료를 분류하여 호상 비조(比照)의 편(便)을 언함이오. 객관적 재료를 풍부하여 사고작용의 범위를 언유(言喩)함이 아니라, 갱언(更言)하면 씨의 방법은 자기의 전관적(全觀的)의 해석법을 언한 것이요, 고증의 근지(根地)를 언함이 아니다.

라고 평가하였다. 그는 여섯 가지를 들어 비판하면서, 마지막으로 “어(語)로써 역사의 사실을 논하기는 극히 위험한 일”이라고 지적하였다. 그렇지만 안확은 신채호의 역사연구를 가리켜, “씨의 사론에 있어서도 고려할 여지가 다(多)하나 그 탁견을 출함에는 경탄하는 바이오, 또한 씨의 논제는 다 필요한 제목에 재하매 차역시선(此亦是善)타 하는 바라”고 높게 평가하였다. 그는 신채호의 학설에 경찬하는 중에 이두 해석과 같이 약간의 의문이 있는 점을 문의한다고 밝혔는데, 기본적으로 신채호의 역사학에 대해서는 찬동한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1929년 6월 『조선사연구초』가 간행되자 문일평은 「독사한평(讀史閑評)」이라는 연재에서 

  단재(신채호)가 조선사를 통하여 조선혼을 부르짖던 것은 사실이다마는 단재(신채호)가 단재(신채호)된 소이는 그의 열정보다도 독특한 사안(史眼)에 있는 것이다. 그는 항상 보는 바가 빠르고도 날카로워 거의 타인의 추급(追及)을 허하지 않는다. 기탄없이 말하면 그의 이론이 반드시 모두 긍계(肯綮)에 맞는지는 모르나 또는 그의 연구가 반드시 모두 과학적이라고는 할는지 모르나 그의 견식에 이르러서는 참으로 투철한 바 있으니 시(試)하여 이 『조선사연구초』를 뒤져보면 나의 말이 거짓이 아닌 줄을 알 것이다.

이라고 하였다. 문일평은 이어 신채호의 논지에 독단이 없는 것이 아니지만, 그 독단이야말로 독자의 ‘정찰(精察)’이 필요하다고 적극적으로 지지하였다.
  신채호의 역사학에 대하여 본격적으로 비판적 검토를 한 것은 홍기문이었다. 그는 1935년 2월 전후하여 『조선일보』에 「역사와 언어의 관계」라는 논문을 연재하면서, 한 부분을 「신단재(신채호)의 어원고증을 검토함」이라는 제목으로 신채호의 『조선사연구초』를 언급하였다. 홍기문의 관심은 어원과 관련된 것으로 안확의 관점과 유사한 것이었다. “역사에 대한 그의 공헌이 이로써 전연 말소되는 것은 아니겠지만 많은 논거의 빈위(瀕危)를 면키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만일 그로 하여금 좀 더 어원의 과학적 고증을 주의케 하였다면 역사에 대한 그의 공헌이 현재보다 좀 더 거대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고 비판하였다. 그런데 홍기문은 신채호의 순국 직후 역시 『조선일보』에 「신단재학설의 비판」이라는 논문을 8차례에 걸쳐 연재하였다. 신채호를 ‘조선역사학의 개조’라고 언급한 홍기문은 『조선사연구초』를 중심으로 논의를 전개하였다. 그는 신채호가 역사의 원동력을 정신에서 찾으려 했다는 점에서 관념론적이라며, 계급투쟁의 유물론적인 역사관을 지니지 못한 점을 비판하였다. 아울러 배타자존(排他自尊)의 선입관으로 논증 없이 독단적으로 해석한 사례로 연개소문의 경우나 언어비정 등을 들어 비과학적인 점을 비판하고 있었다.
  그러나 홍기문은 신채호의 역사학을 비판적 관점에서만 보고 있지는 않았다. 즉 신채호를 거대한 ‘사료고증학자’와 ‘문헌학자’로 인정하면서, 일정한 방법으로 체계 있는 해석을 시도하였다고 이두의 해석이나 중국문헌과 삼국사기 교정 등을 논의하였다. 물론 신채호의 독단이나 보조과학 이용의 부족, 방법론 등 한계를 지적하면서도, 신채호를 역사학뿐 아니라 문헌학에 기여한 바를 강조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홍기문은 비판의 마지막에

  여하튼 조선역사학계에 있어 단재(신채호)는 가장 큰 은인이 아닌가. 선구자로서도 그렇고 사료고증학자로서도 그렇지 않은가? 그를 잃어버렸다는 것이 우리의 얼마만한 손실인가? 조선의 학계야말로 거듭거듭 불운한 것이 아닌가. 그러나 단재(신채호)여 편안히 쉬소서. 당신이 끼치어준 그 유산을 정당히 계승해서 진정한 조선사를 완성하여 당신의 업적을 한층 더 빛낼 날이 있을 것이다. 단재(신채호)학설에 대하여 말하고 싶은 바는 오직 이것뿐이 아니나 제한된 지면 아래 여기서 그치지 아니치 못한다. 이 글을 쓰는 중간 간접 혹 직접으로 선배 혹 후배의 많은 충고는 감사히 여기나 서론에 이미 전제한 바와 같이 시비의 분분함을 이미 각오한터로 이 붓을 중단시키지 못한데 대하여는 미안한 마음까지 함께 금치 못한다.

  또 신채호의 역사학을 언급한 것은 정인보와 안재홍이었다. 정인보는 「단재(신채호)와 사학」에서 신채호사학의 특장을, “첫째 고증하는데 있어 다른 사람들 늘 보는 책속에서도 형안(炯眼)이 한번 쏘이기만 하면 이것저것을 비교하는 가운데 뜻하지 않은 발견과 변파(辨破)가 있다”·“둘째 그 분운(紛紜) 복잡한 과거 내외의 기록을 정리하며 나가는데 마치 엉킨 실을 풀 때 어떠한 매듭 한 군데를 고르면 홱 풀리는 것 같이 매양 일처의 요(要)를 제거(提擧)하여 만서(萬緖)의 착(錯)을 해(解)하는 영완(靈腕)이 있다.”·“셋째 여러 천년 동안 구블렁거리며 내려오는 성쇠 변천의 소자(所自)를 그 실제로 좇아 고색(考索)하되 어떤 때는 문헌 미미한 속에서 오래두고 범과(泛過)한 것을 들추어 대관절의 약동하는 것을 보이기에 특장이 있다”고 지적하였다.
  안재홍은 「존귀한 그의 사학상의 업적」에서 신채호가 한말에는 사론과 전기로 국민주의적·민족사상적 선구로 계몽·혁신적 사조의 선양에 기여하였음을 밝히고, 그가 진보된 역사과학 또는 사회경제사관을 지니지 못하였지만, “사학자로서 필요한 많은 고증과 외타(外他)의 비교연구에 의하여 그 전모에서는 다분의 과학자적 영역을 개척”하였다고 평가하였다. 따라서 안채홍은 신채호가 구식 역사가가 아니라 조선사학의 선구자로 그 역사적 위치가 매겨진다고 찬양하였다.
  해방 이후 이선근은 『화랑도연구』라는 저서를 간행하면서, 신채호에게 사숙하고 영향을 받았음을 밝혔다. 임경일은 『화랑의 혈맥』이라는 잡지를 간행하면서, 「신단재(신채호)와 화랑연구」라는 글을 실어, 화랑 연구에 있어 신채호의 선구적 업적을 소개한 바 있다. 해방 이후 신채호에 대한 관심은 화랑 연구에서 비롯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신채호의 학문에 대한 학계의 본격적인 연구는 1970년대 전후에 이루어졌다. 홍이섭·김용섭·김철준·신용하·최홍규·이만열·안병직·한영우·배용일·박찬승 등 많은 역사학자들이 신채호의 역사학과 계몽운동, 독립운동 등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또 신일철 등 철학자와 이경선·이동순 등 국문학자, 그리고 국외에서 가지무라(梶村秀樹)나 김병민 등의 연구도 적지 않다. 특히 단재신채호선생기념사업회 편집으로 『단재 신채호와 민족사관』(형설출판사, 1980)과 『신채호의 사상과 민족독립운동』: 단재 신채호선생 순국 50주년 추모논총(형설출판사, 1986)을 비롯하여, 『단재 신채호연구논집』(충북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1994)와 『단재 신채호의 현대적 조명』(대전대학교 지역협력연구원 엮음, 다운샘, 2003), 『한국사학사학보』3집(한국사학사학회, 2001)의 특집 ‘신채호 사상의 현대적 조명과 과제’와 같은 공동연구서가 간행되었다. 또 신일철·신용하·이만열·최홍규·김병민 등의 전문연구서가 출판되어 있다. 1980년대 이후 신채호 연구는 수량이나 질적인 점에서 크게 증가되었다고 할 수 있다.
  신채호의 저술은 해방 직후부터 『조선사론』(광한서림, 1946)이나 『조선사연구초』(연학사, 1946),『조선상고사』(종로서원, 1948) 등이 출간되었고, 1954년 ‘단재(신채호)유고출판회’가 조직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신채호의 저술이 전체적으로 수집되어 발간된 것은 1970년대에 이르러서였다. 1972년 단재신채호전집편찬위원회에서 2책으로 간행한 『단재 신채호전집』(을유문화사)은 1975년에 보유편이 만들어지고, 1977년에 상·중·하·보유 전 4권으로 형설출판사에서 출간되었다. 아울러 북한에서 발간된 『용과 용의 대격전』(조선문학예술총동맹출판사, 1966)과, 연변대학의 김병민이 편집한 『신채호문학유고선집』(한국문화사, 1995)이 입수되어 신채호 저작의 상당수가 확보되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북한의 인민대학습당에 보관된 것으로 알려진 신채호의 유고가 아직 공개되지 않았지만, 그간 새롭게 발굴된 자료도 적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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