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 조선 영화의 대략
한국에서는 1903년경부터 외국영화가 공개되었으나 필름이 사용된 첫 영화가 제작된 것은 19년 신극좌(新劇座) 김도산(金陶山) 일행의 연쇄극(連鎖劇) 《의리적 구투(義理的仇鬪)》와 그 때 함께 공개된 실사영화(實寫映畵) 《경성(京城) 전시(全市)의 경(景)》이었다. 이것은 모두 한국영화의 효시로 인정되고 있다. 그러나 23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극영화인 윤백남(尹白南)의 《월하(月下)의 맹세》가 발표되었다. 조선총독부의 저축장려 계몽영화였으나 한국인 감독과 배역에 의한 최초의 극영화라는 점에서 한국영화는 이로부터 무성영화시대의 막이 오른 것으로 본다. 초기에는 일본 제작자와 기술진에 의한 영화들이 제작되었지만, 이에 자극받아 민족자본에 의한 《장화홍련전》(24)이 박승필(朴承弼)에 의해 제작되었다.
한국인에 의한 최초의 영화사 윤백남 프로덕션을 비롯하여 여러 영화사들이 출현했으나 단명(短命)했고, 기업적으로 토대를 굳히지 못한 채 한국영화의 무성영화시대는 나운규(羅雲奎)의 등장으로 예술적인 개화(開花)를 보게 된다. 배우로 데뷔한 나운규는 《아리랑》(26)에서 민족적인 저항의식을 통해 한국영화예술의 새경지를 이룩하였다. 이어 《풍운아(風雲兒)》(26) 등의 문제작과 여러 편의 작품을 직접 연출하고 각본을 쓰고 출연하는 등 영화작가(映畵作家)다운 의지로 전력투구하였다.
그러나 그의 후기의 작품들은 《아리랑》과 같은 힘을 잃고 있었고 마지막 작품인 《오몽녀(五夢女)》(37)에서는 인간의 원색적인 본능을 추구하며 새로운 경지를 개척하려 했으나 35세를 일기로 요절하였다(37). 나운규의 영화정신은 이규환(李圭煥)에 의해 계승 발전되어 《임자없는 나룻배》(32) 《나그네》(37) 등에서 서정적이며 향토색 짙은 사실주의를 전개하였다.
한편 1920년대 말에는 좌익사상의 경향파(傾向派) 영화들이 등장했으나 관객의 호응을 얻지 못하고 일제의 탄압으로 자취를 감추었다. 1935년 이필우(李弼雨)의 기술에 의한 최초의 발성영화 《춘향전》이 공개됨으로써 한국영화는 발성영화시대의 막을 열었다. 이경손(李慶孫) 안종화(安鍾和) 윤봉춘(尹逢春) 김유영(金幽影) 방한준(方漢駿) 등이 활약했고 이월화(李月華)를 비롯하여 이금룡(李錦龍)에 이르기까지 많은 배우들이 한국영화를 수놓았다. 그러나 영화사는 여전히 영세자본과 협소한 시장으로 인해 기업적인 토대를 구축하지 못한 가운데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일제의 심한 탄압, 즉 영화사의 강제 통합 및 영화인의 등록강요 등으로 통제의 암흑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이 시기에 조선영화주식회사를 설치, 영화제작자를 묶어놓고 영화인들로 하여금 침략전쟁을 합리화하고 전의(戰意)를 고취하는 어용영화나 내선일체(內鮮一體)를 강요하는 친일영화를 제작케 하여 한국영화는 질식상태에 빠졌다. 이런 상황에서도 최인규(崔寅奎)의 《수업료》(40), 이병일(李炳逸)의 《반도(半島)의 봄》(41)이 마지막으로 주목을 끌었다. 뜻있는 영화인들은 중국 상하이로 망명하거나 지하로 숨어들어 암흑기를 보내야만 되었다. (http://kr.blog.yahoo.com/dw2613/24* 출처 : [발굴 한국현대사 인물33]( 1990.7.20. 한겨레신문 연재, 안정숙 글)
영화인 김유영(1908~1940)
“거리는 아직도 어둠에 잠겨있어 / 산 해골의 그림자가 오며 가며 춤춘다. / 거리는 언제나 밝아지려 하느냐. / 울고만 지낼 수 없는 무리도 있다니...”(영화 <혼가> 주제곡, 김유영 감독, 1928년 작)
“거리는 언제 밝아오려나...”
영화 <혼가>는 조국의 독립을 위해 고향을 떠난 세 사람의 청년, 부상당해 해고당한 노동자와 퇴학당한 고학생, 역마차의 화부를 통해 “일제치하 조선 노동자계급의 비극적 운명과 해방을 위한 투쟁을 담고 있다”고 전해진다. 해방 이전의 영화들이 단 한편도 남아 있지 않은 상황에서 <혼가>도 예외는 아니다. 시나리오조차 전해지지 않는 이 영화를 당시 언론의 눈으로 어림해본다면 “신감각적”영상이 형식적 특징을 이루고 있고,“세 젊은 삶(주인공)이 걸어온 발자취는 조선의 한 귀퉁이를 넉넉히 엿볼 수 있게 한다.”
감독 김유영은 이 영화에 출연한 임화, 추용호 등과 함께 27년 창립된 朝鮮映畵藝術協會(影藝) 연구부에서 영화를 익힌 이였다. 당시 영화계의 중진인 이경로, 안종화, 이우, 조선일보 기자이던 김을한 등이 중심이 되어 만든 영예에는 영화에 새로운 관심을 갖게 된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카프:KAPF)의 성원들이 대거 참여했다. 김유영도 그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영예는...유능한 신인을 양성해보자는 뜻에서 연구부를 신설하고 신인을 모집했는 바, 1백여명의 지원자가 쇄도함에 그 중 20명을 선발해서 연구생(1년과정)으로 삼았다. ...이때 영화계에 나온 사람이 김유영, 임화, 추영호, 서광제, 조경희 등 20여명이었다”고 안종화는 <한국영화측면비사>(1962·춘추각 펴냄)에서 돌아보았다. 그는 또 자신은 미처 알지 못했으나 연구생의 대부분이 카프에 가입하고 있었다고 적었다. 뒷날 카프 영화부장으로 활약한 윤기정이 영예에 창립 때부터 참여하고 있었고, 역시 카프 영화부에서 두각을 나타낸 강호가 영예 연구생으로 영화수업을 받기 시작했으므로 이곳은 프롤레타리아 영화활동의 묘판이었던 셈이다.
연구부에서도 남다른 영화적 재능을 인정받은 이는 김유영이었다. 안종화가 연구생들을 총출연시켜 제작하려던 영화 <이리떼>의 연출보로 김유영을 지목한 것도 그런 연유였다. 기성영화인인 안종화를 축출한 젊은 영화인들이 조선영화예술협회 첫 작품으로 내놓은 영화 <유랑>에서 김유영은 감독을 맡게 된다.
‘유랑’으로 첫 메가폰
첫 작품 <유랑>은 일제 식민정책의 결과, 땅을 빼앗긴 농민들이 고향을 떠나 유랑하게 되는 당시의 상황을 그린 영화였다. 영화연구가 변재란씨는 “<아리랑>에서 다소 소박하던 조선 농촌이 구체적 현실 속에서 더욱 예리하게 묘사되어 있다는 점에서 한층 진전된 모습으로 나타났다”고 영화자료 분석결과를 밝히고 있다. 영예는 이 영화 한편을 내놓고 나서 제작비의 곤란 등으로 해산된다.
김유영은 29년 말 “현단계에 있어서 계급의식을 파악한 예술운동의 일부문인 영화운동”을 표방하며 창립된 신흥영화예술가동맹의 중앙집행위원으로 나타난다.△신흥영화이론의 확립 △엄정한 입장에서 모든 영화의 비평 △영화기술의 연마 △계급적 이데올로기를 파악한 영화인의 결집 △계급적 이해를 대표한 영화제작을 강령으로 내건 신흥영화동맹은“대중의 생활에 부합되는 예술관에 입각한 영화인의 집단”의 최초임을 자부하고 있었다. 실제 제작을 위해 만든 영화사 서울 키노에서 김유영은 두 번째 영화 <혼가>의 메가폰을 든다.
한편으로 그는 신파와 통속영화로 민족의식의 분출을 무마하는 영화계를 향하여 일갈하는 글들을 왕성하게 쏟아냈다. “과연 우리에게 영화계라고 지목할만한 무엇이 있는가? 그럿타! 우리에게는 영화계가 업다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들 씨네아스트(영화인)의 임무는 위선 우리의 이론을 확립하야....눈물 폭풍우의 그 가운데서 돗아난 새싹을 위하야 간단업는 활동을 하여야 할 것이다..”(<조선지광> 1929년 제10권 11호) 그는 영화가 타예술에 비하여 대중의 지지를 얻을 수 있는 특수성을 지닌 예술인 이상 영화제작은 대중을 지도교화하는 내용의 영화, “프롤레타리아 이데올로기에 입각한 신작품”을 제작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최초의 프로영화 ‘화륜’감독
김유영의 세 번째 영화 <화륜>은 도시노동자의 생활과 노동쟁의를 소재로 하고 있다.
<화륜>은 이효석, 안석영, 서광제, 김유영이 모인 조선씨나리오작가협회가 중외일보 지상에 발표한 연작 시나리오를 토대로 한 영화로서 통영의 삼광영화사 제작, 김유영 감독, 이효석·서광제의 편집으로 만들었다. 월북예술인 안막이 <조선프로레타리아 예술운동 약사에서 “최초의 프롤레타리아 영화”로 지칭한 이 영화는 관객동원의 부진과 카프쪽의 혹평이라는 이중의 실패를 겪었다.
카프와 김유영의 불편한 관계는 30년 4월 카프의 조직개편으로 기술부 안에 문학부 외에 영화, 연극, 음악부가 신설되면서 시작됐다. 대표 윤기정, 부원 김남천, 임화, 강호로 구성된 카프 영화부는 '신흥영화예술가동맹'(金幽影, 서광제, 羅雄, 尹기정, 林和, 白河路, 朴完植등이 결성)의 해산을 종용하고, 카프 영화부로의 가입을 권고했으나 신흥영화동맹은 영화인 전문 집단으로서의 위치를 고수할 셈이었다. 서광제는 “조선의 현정세에 있어서 매개단체로서 신흥영화동맹을 생존시킬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서광제와 함께 김유영은 영화운동의 당면 임무를 “당의 사상적 정치적 영향을 확보·확대하여 당의 슬로건을 대중화시키기 위한 광범한 선전선동 사업”으로 보고, 이를 위해 프로영화인들이 카프 영화부에 결집해야 한다는 카프 안의 요구와 비판에 부닥쳐야 했다. 김유영과 서광제는 신흥영화동맹을 보전하는 방안을 택하기로 하고 카프를 탈퇴했다.그러나 곧 카프 안의 비판여론에 밀려 신흥을 해체하게 된다. 대립하였던 찬영회에게 대하여 解體를 勸誘하고 마지막에는 테러 행동까지 일어나게 된 것은 조선영화계의 初有한 事變이었다. <화륜>은 신흥해체 직후 부활시킨 서울키노를 통해 만든 영화였다. <화륜>역시 영화예술의 볼세비키화 임무에 충실치 못했다는 비판에 직면했고, 김유영은 “그러한 내용과 영화적 전개의 필요성은 인정한다”는 전제를 깔고 “그것이 과연 조선 내에서 검열을 거쳐 상영될 수 있는지 의심스럽다”는 반론을 폈다. 조선총독부의 강화되어 가는 검열, 제작비 조달이라는 경제적 부담을 등에 진 영화들이 관객들과 만나기 위하여 어떠한 현실적인 통로를 만들어 낼 수 있을 것인가. <화륜>과 같은 시기에 카프 영화부에서 만든 영화 <지하촌>(강호 감독)이 필름압수, 제작자금 지원자의 이탈 등으로 어려움을 겪었고, 결국 상영공간을 얻지 못했던 데 비해 <화륜>은 상영의 관문을 통과했다. 그러나 몇 겹의 자기검열과 총독부의 가위질로 필름은 원작의 본모습에서 벗어나 있었다. <화륜>이 관객동원에 실패한 까닭으로 김유영은 첫째 이러한 환경적 요인을 꼽고 있었다.
카프와 불화...34년 복귀
그가 제작비를 기금모집으로 충당하고, 소형영화를 제작하여 경비를 절감하며, 기존 영화관 밖에서 독자적인 상영공간을 확보하자는 방안을 제시하고 나온 것도 이즈음이다. 그러나 강화되는 일제의 식민통치는 새로운 실천방안을 실현할 수 있는 길을 봉쇄해가고 있었다. 1932년 서광제와 함께 일본 경도의 일활키네마에 영화연수를 다녀온김융영은 1934년 2월부터 12월까지 계속된 카프 제2차 검거 때 80여명의 피검거인 가운데에 들어 있었다. <유랑>에서 시작된 김유영의 영화 제1기는 그렇게 끝난다.
1939년 서항석 등 동경유학파를 주축으로 한 신극운동단체 극예술연구회가 영화부를 두고 영화제작에 나섰다. 감독은 오랜만에 영화현장에 다시 나타난 김유영. 폐쇄직전인 아버지의 학교를 구하기 위해 사랑하는 사람을 두고 돈많은 사람과 결혼하는‘신식여성’을 주인공으로 한 영화 <애련송>에는 서항석, 유치진, 이해랑, 이진순 등 극연회의 회원들이 대거 출연하여 화제가 되었다. 37년 동아일보사 제1회 시나리오 현상모집 당선작 최금동의 <환무곡>을 이효석이 촬영용 대본으로 각색하여 만든 영화였다.
‘조선영화의 실제 제작태도에 있어서 가장 사회의식적 관심을 가진 젊은 영화인“(박완식·중외일보 30. 3. 12) 김유영이 바이얼린을 연주하는 젊은 음악도와 나른한 카페 그리고 <유랑>의 순이로서는 상상조차 할 수없던 이브닝드레스를 입은 여주인공이 등장하는 멜러영화의 감독으로 변모하기까지의 과정은 거의 기록으로 남아있지 않다.
다만 1937년 8월, 한국청년의 강제집집을 위한 지원병 제도가 선포되는 등 일제의 군국주의 탄압이 막바지로 치닫는 가운데 영화에 대한 탄압 역시 급격하게 강화됐으리라는 점은 어렵지 않게 그려낼 수 있다.
이규환과 당대 쌍벽 이뤄
김유영의 영화계 복귀는 자못 화려한 것이었다. “그는 영화에는 천재적인 소질이 다분히 엿보이는 사람이었다”던 안종화는 “처녀작 <유랑> 이후로 비록 두드러진 작품을 발표하지는 못했다”며 프로영화경력을 폄하하면서도 “임종 직전에 만든 <애련송>과 <수선화>는 확실히 가작으로 손꼽을만 했다”고 술회했었다.
이따금 서울 청진동 하숙으로 김유영을 찾아가 영화 콘티를 짜는 것을 지켜보곤 했다는 <애련송>의 원작자 최금동씨는 “나운규씨가 세상을 뜬 뒤 김유영 선생은 이규환 감독과 함께 당대 영화계의 1인자로 불렸다”고 말했다. ‘김유영’이라는 이름이 이미 선전효과를 지니고 있어서 제작팀은 촬영용 차에 그의 이름을 유독 크게 써 붙이고 종로와 충무로를 누비고 다녔다고 그는 기억을 더듬었다.
그러나 그의 이력이 안락함을 보장해주는 것은 아니었다. 극도의 가난과 폭음으로 이어진 정신적 방황은 그의 육체적 건강을 허물어놓고 있었고, 마지막 영화 <수선화>의 촬영 현장에서는 지병인 신장염이 악화되어 수레에 실려나와 “레디 고”를 외치기도 했다, 기동이 불가능해지고 나서야 입원한 세브란스의전 병원에서 그가 숨을 거두었을 때, <수선화>는 몇 장면의 촬영을 남겨놓고 있었다. 40년 8월 13일, 서울 성보극장에서는 그의 유작 <수선화>의 시사회가 영화를 사랑하는 많은 영화인들이 참석한 가운데 열렸다.
‘수선화’ 촬영중 33살 요절
김유영에 대한 애도는 곧 한국영화 자체에 대한 만가로 이어질 참이었다. 40년 10월, 총독부가 급조한 관제단체 조선영화인협회(회장 안종화)는 기능증명서 없이는 영화활동을 할 수 없도록 하는 영화인등록제를 시작했다. 그것은 일제 군국주의와 침략전쟁을 미화하고, 내선일체를 외치는 영화전선에 영화인들을 직접 동원하기 위한 첫걸음이었다.
분단 이후, 김유영의 초기작업은 20·30년대 프로영화인들의 성과와 함께 남한의 영화사에서 지워지거나 축소되어 왔다. 반면, 후기 영화의 성과들은 여기에 수습되어 남아 있다. 분단 이데올로기를 넘어선 새로운 한국영화사 서술을 준비하고 있는 젊은 영화평론가 이효인씨가 김유영의 발굴에 각별한 관심을 갖는 것도 “김유영은 통일된 민족영화사를 위한 남북영화의 의미있는 접점이 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김유영의 개인사는 선산 소지주의 맏아들로 태어나 서울에서 보성고보를 졸업했다는 정도만이 알려지고 있다. 그는 또 33년 카프에 대항하던 순수·모더니즘 문학모임 구인회의 발기인이라고 문학사에 기록돼 있으나, 그가 얼마 안돼 탈퇴한 그 모임에서 어떤 역할을 했는지도 잘 알려지지 않는다. 문학평론가 김윤식씨는 “20·30년대를 통틀어 각종 활자매체에서 그의 문학작품이 발견되지 않았다”고 말했다. http://blog.naver.com/ltk20/130016679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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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정희(崔貞熙.1906∼1990.12.21)
1906년 함북 성진(城津)군 예도에서 최재연씨와 조덕선씨의 4남매 중 장녀로 출생. 호 담인(淡人). 1920년 함난 단천으로 이사. -보통학교 5학년 1학기를 마치고 친구 千金이를 따라 가출. 1924년 상경, 18세에 동덕여학교에 1학년 2학기로 편입학. 1925년 숙명여고보 2학년 편입학. 1928년 숙명여고보 19회졸업. 중앙보육(中央保育)학교 입학. -학창시절음악과 무용 등 예능 방면에 소질을 보임. -전수린에게 노래 사사받음. -박팔양의 도움으로 라디오에 노래 데뷰. 1929년 중앙보육학교 졸업. 경남 함안유치원 보모 근무. 1930년 도일, 동경 三河 유치원 보모로 근무. -극작가 김진수를 만나 학생 극예술좌 참여. -유치진, 김동원 등과 습작 연극 공연. 1931년 귀국. 연극배우 오디션에서 연출가 김유영을 만나 동거. -김유영의『문화공론 』 잡지사 사무실에서 생활하면서불화를 빚음. -서영은의 「전기소설 최정희-강물의 끝」(문학사상, 1984)과최정희의 「젊은 날의 증언」(육민사, 1962)에서 당시김유영 최정희 부부는 원하지 않는 임신을 했으며 생활고와 남편의 폭력으로 고통의 나날을 보냈다고 함. 잡지 『삼천리(三千里)』)사 여기자로 활동. 단편 <정당한 스파이> 『삼천리』에 발표. 1932년 장남 홍조 출생 1934년 5월, 전주사건에 연루되어 8개월의 옥고를 치름. -1932년 8월에 카프의 프로 극단으로 결성된『신건설』사는 창립공연을 1933년 11월 23~4일에 서울연예관에서 했는데 작품은 독일 소설가 「 서부전선 이상 없다」로 일본인 연출가 무라야마가 각색했다. 공연의 성공으로 전국순회를 하 게됐는데, 전주지방 공연시 일경이 연극 선전 전단의 불온성을 시비삼아 공연 의중단과 관련자를 검거하기 시작했다. 이 사건을 카프2차 검거사태 또는 신건 설사 사건 약칭 '전주사건'이라 일컫기도 한다. -당시 카프 산하 「 신건설사」 단원이었던 김유영이 전주에서 검거되었는데 심 문 중 아내 최정희란 이름이 나오자 함께 검거되었다. 당시 부부는 헤어진 상태 였다(앞의 책). 1935년12월 9일, 전주사건의 1심 판결에서 전주지법 우에노 판사는 박영희 등 19인에게 검사 구형량을 그대로 언도하고 사상전향을 참작하여 집행유예 3년을 언도했으 면 최정희는 무죄로 석방되었다. 조선일보 출판부 입사(조선일보에 재직 중이던 이은상의 도움으로). 1937년 「 흉가」를 조광에 발표. 1939년 김유영 사망 경기도 양주 덕소로 이사 1940년 「 인맥」(문장) 1941년 「 천맥」(삼천리) 1942년 장녀 지원 출생 1947년 「점례 」(문화), 「 풍류 잡히는 마을」(백민) 1948년 단편집 「 천맥」을 수선사에서 간행 1949년 창작집 「 풍류 잡히는 마을」을 아문각에서 간행 1950년 1.4 후퇴 시 대구 피난. 남편 김동환 납북 1951년 종군작가단의 종군기자로 활약 대구에서 문인극 참여 1953년 장편 「녹색의 문 」 서울신문에 연재 1954년 동화집 「 장다리꽃 필 때」를 학원사에서 간행 장편「녹색의 문 」(정음사) 서울시 문화위원 1955년 창작집 「바람 속에서 」(인간사) 1956년 중편 「 데드 마스크의 비극」(평화신문) 「 찬란한 대낮」(문학예술) 1958년 장편 「인생찬가 」로 제8회 서울시 문화상 수상 장편 「끝 없는 낭만 」(동학사) 1960년 장편 「인간사 」를 사상계에 연재하다 중단. 현대문학 추천 심사위원 1962년 장편 「 별을 헤는 소녀들」(학원사) 1964년 장편 「 인간사」를 신사조사에서 간행 장편 「인간사 」로 제1회 여류문학상 수상 장편 「 강물은 또 몇 천리 」제1부 현대문학에 2년 간 연재 1965년 중국 방문 1967년 단편 「 제2여자의 풍경」, 「 제3여자의 풍경」 종군작가단장으로 베트남 방문 1969년 한국여류문학인협회장 피선 1970년 단편 「 바다」(월간문학) 단편 「 205 병실」(현대문학) 예술원회원에 피선 1972년 한국예술원 본상 수상 1976년 「찬란한 대낮 」(문학과 지성), 「 탑돌이」(범우소설문고) 1977년 「최정희 문집 」(명서원) 「천맥 」(성바오로 출판사) 1980년 단편 「화투기 」(현대문학) 1982년 3.1문화상 수상 1990년 정릉 자택에서 노환으로 별세.
***강나루 정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