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본 축구 협회에의 항의 ◆◆◆
한일 공동개최의 월드컵축구 준비가 나아가고 있었을 무렵,
일본 축구 협회의 심볼 마크가 화제가 되어 논의가 일어났습니다.
이 마크는 디자인도 꽤 멋지고 문제는 없을 것 같게 보입니다만
이것에 대해 하물며
일부 보수파의 사람들까지 엄격한 항의를 했습니다.
그 심볼 마크는 일본 신화의 〈八咫烏팔지오〉인데 일본 신화의 설명이 없는 것은 이상하다라고 하는 항의였습니다 .
이 항의는 신문에도 다루어지고 있었습니다.
다만 축구 협회는 어떤 대답도 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
◆◆◆ 저자의 의문과 추리 ◆◆◆
저자는 이 건에 대해서 두 가지 의문을 가졌습니다.
1) 일본 축구 협회에의 의문
왜 일본의 협회인데 일부러 “シナ지나”중국 전설의 까마귀등을 가져왔는지?
2) 항의하는 보수파에의 의문
그 항의는 「〈八咫烏팔지오〉=〈삼족오>를 전제로 하고 있는데 정말로 그런가?
<三足烏> “산조크우”라고 읽습니다.
저자는 「고사기」나 「일본 서기」를 읽어도
八咫烏팔지오 = 삼족오 라고는 써 있지 않기 때문에
보수파의 항의에 의문을 가져 이것저것 조사해 보았습니다.
그 결과로 해서 적어도 고대에 있어서는 八咫烏팔지오 = 삼족오라는 추리를 했습니다.
왜 그러한 추리를 했는가 하면 이하에 설명하는 몇 개의 문헌이 있기 때문입니다.
- 八咫烏팔지오에 대한 일본 최고의 문헌-
1. 古事記고사기(712년) 2.日本書紀일본 서기720년) 先代旧事本紀선대구사본기
매우 유명한 이야기입니다만, 이러한 고전 안에
神武天皇진무덴노”가 ‘大和다이와’에 진출하는 도중의 험한 곳의 “熊野쿠마노”에서 길을 잃었을 때
(天照大神)대신이〈八咫烏팔지오〉를 파견해 길안내를 시킵니다.
그 결과 ‘카미타케’일행은 무사하게 우다(나라현 우다군)에 도착합니다.
그 후의 전쟁에서도〈八咫烏팔지오〉는 천황의 지시에 의해서 활약합니다.
그런 애착으로 동정이 완료했을 때
천황은〈八咫烏〉에 은상을 줍니다만
그 자손이 “카모 아가타누시” 일족(쿄토의 카모사를 둘러싸는 호족)이 되었습니다.
일본 서기가 가장 자세합니다만 다른 두 책에도 모순된 기술은 없습니다.
여기서 짐작가는 것은
일본 최고의 사서에는〈八咫烏>가 3개의 발<三本足>이라는 기술은 전혀 없습니다.
만약 그러한 구전이 710년 나라시대보다 전부터 있었다고 하면
그것은 큰 특징이기 때문에 반드시 기록했다고 생각합니다.
쓰여지지 않은 것은 그러한 구전이 없었다고 하겠지요.
중국전설의 <三足烏>그 자체는 玉虫厨子 다마무시노즈시에도 그려져 있습니다 .
고분벽화에도 있다고 하기 때문에
꽤 옛부터 알려져 있어 태양에서 까마귀라고 하는 전설이
〈八咫烏>신화에 영향을 준 것은 생각할 수 있습니다만
〈八咫烏>의 다리가 실제로 3 개였다고 하는 전승이 옛부터 있었으면
반드시「고사기와 일본서기」에 그렇게 썼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앞의 사서에도〈八咫烏>는 天皇의 명령에 의해서 움직이는 부하로서 쓰여 있습니다.
만약<三足烏>였다면 태양에 관한 것이기 때문에 천황보다 상위로서
神武天皇을 도운 鵄鴙금치나 “ 神剣布都御魂신검포도어혼”과 같이
더 신비적으로 쓰여 질거라고 생각합니다만 그러한 일은 없었습니다.
天照大神이 태양신으로 되어 있는 것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
게다가 전쟁이 끝난 뒤 천황이〈八咫烏>에 은상을 하사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당연 천황의 부하로서의 취급한 것입니다.
八咫烏는 賀茂県主라고하는 호족의 선조라고 기록되고 있습니다만
아무리 고대인도 집필자는 학자이기 때문에 까마귀로부터 사람이 태어난다고 믿고 있던 적은 없습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어디까지나 호족의 선조 집단의 활약을 신화적으로 표현한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덧붙여서 저자가 배웠을 무렵의 초등학교 국사의 교과서에 있는〈八咫烏>의 다리는 그려지고 있지 않습니다.
만약〈八咫烏>의 다리가 3 개라고 하는 인식이 전쟁(2차대전) 전의 역사학자에게 있었으면 그렸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와 같이『일본 서기』등 최고의 사서에는
〈八咫烏>의 다리를 3 개로 하는 기술이 전혀 없는 것을 알았으므로
다음은 오래된 신사의 전승에 대해서 조사해 보겠습니다.
- 八咫烏神社由緒書8지오신사 유서서(705년 창건) -
이 신사는『続日本紀속일본기』에 의하면 몬무 덴노의 교운2년 9월(서기 705년)에 창건 되었습니다.
서기 705년 이라고 하여『古事記고사기』의 성립보다 전으로 아주 오랜 신사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正史의 「속일본기」에 기록되고 있는〈八咫烏>가 활약한 “奈良県宇陀郡나라현우다군” 입니다.
이 신사의 유서서에, 개략 다음과 같이 있습니다.
토지의 호족 “武角身命무각신명”이, 검은 옷을 입어 나무로부터 나무로 뛰어 이동하면서 神武天皇을 안내했다.
천황은 그 모습을 보시고,〈八咫烏>라고 하는 칭호를 내리게 되었다.
八咫烏神社 의 제신은 이 “무각신명”이며 그 자손은 “賀茂県主카모아가타누시”이라고한다.
신사의 도안에는<三足烏>를 사용하고 있다.
“현마츠코의 기억”
즉〈八咫烏>란 검은 옷을 입어 길안내를 한 호족이 마치 큰 까마귀와 같이 보였으므로
천황이 내린 칭호(작명)이다---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물론 인간으로 한편 神武天皇의 부하입니다. 그리고
그 고사와는 관련 없는 <三足烏>를 신사의 마크로 하고 있습니다.
다음 〈八咫烏>나 <三足烏>에 관계 깊은 “카모사”와 “ 熊野三山쿠마노미야마”의 자료를 간단하게 적어 둡니다.
심볼 마크는 모두<三足烏>입니다만
賀茂社카모사는 앞의 「八咫烏神社」의 안내글에 써있었듯이
〈八咫烏>그 사람의 세력권이 “京都쿄토”까지 이어졌던 오래된 신사입니다.
이 신사는 아래와 위의 2사로 나눌 수 있습니다.
제신은 “賀茂別雷大神”으로 “玉依媛命옥의원명”의 자로 되어 있습니다.
즉 “建角身命건각신명” =八咫烏의 손자에 해당합니다.
이 두 개의 賀茂社의 심볼 마크는모두<三足烏>입니다만 그러나
전해지는 由緒譚에는 선조의 다리가 3 개였다고 하는 이야기는 없는 것 같습니다.
마크로서 사용되고 있을 뿐입니다.
다음에는 神武天皇의 東征伝説동정전설로 알려져〈8지오〉가 활약한
“和歌山県와카야마현”의 “熊野쿠마노”에 있는
세 개의 “著名神社저명신사” “”熊野三山쿠마노산야마에 대해서 적습니다.
합계 13 기둥의 제신이 모셔지고 있습니다.
주제신은 “家津御子大神(素戔嗚尊가진자대신(소전오존)”으로 그 밖에 신화로 유명한 신들이 죽 줄지어 있습니다.
축제는 많이 있습니다만 특히 유명한 것이 1월7일의 〈八咫烏>제사입니다.
신사의 심볼 마크 또한 <三足烏>입니다.
그러나 재미있는 것은〈八咫烏>제사의 牛王神符우왕부적에 있는 많은 까마귀는 3 발은 아닌 것처럼 보입니다.
熊野速玉大社 (별칭 熊野新宮/和歌山県新宮市)
합계 14 기둥의 제신이 모셔지고 있습니다.
社格사격은 역시 관 폐타이샤에서, 국보나 중요문화재가 많이 있습니다.
熊野那智大社쿠마노나치타이샤(和歌山県東牟婁郡那智勝浦町)
합계 18 기둥의 제신이 모셔지고 있습니다.
주 제신은 熊野夫須美大神쿠마노남편스미대신(伊弉冉尊이장염존)입니다.
심볼 마크는 같이<三足烏>입니다.
이 熊野三山쿠마노미야마”의 까마귀의 그림(세 발이 아님)이 유명하게 된 것은
“鎌倉時代1200년 가마쿠라시대” 이후 무사가 활발하게 되고 나서부터라는 것입니다.
「고지기와 일본서기」이후에 쓰여진, 남북조 시대까지의 문헌을 조사해 보겠습니다.
新撰姓氏録신선성씨록」(만다황태자등/815년)
이것은 저명한 씨족들의 유래등을 모은 방대한 자료집으로, 서기815년에 생겼습니다.
편자의 일가 “萬多親王만다황태자”는 “桓武天皇간무천황”의 황태자입니다.
현재 남아 있는 것은 대부분이 초본입니다만 그런데도 방대합니다.
예외적으로 발견되고 있는 이 자료집의 본문(逸文전해지지 않는 글)안에
“賀茂県主카모아가타누시”가 있습니다.
거기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고 있습니다.
鴨縣主、賀茂縣主同祖、神日本磐余彦天皇欲向中洲之時、山中嶮絶、跋渉失路、於是神魂命孫鴨武津之身命、化如大鳥翔飛、奉導遂達中洲、時天皇喜其有功、特厚褒賞、天八咫烏之號、從此始也。
이 문장도 八咫烏가 神武天皇를 도운 호족에게 줄 수 있었던 칭호인 것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特厚褒賞특후포상으로 밝혀지도록 천황으로부터 특별한 포상이 주어진 부하이고
물론 다리가 3 개라고 하는 기술은 없습니다.
8지오신사의 유래를 닮아 있습니다.
- 倭名類聚抄왜명유취초」(源順미나모토노시타고/930년대) -
저자가 찾아낸「八咫烏=三足烏〉」설의 최고의 문헌이 이것입니다.
平安中期 900년에 편찬 되어 세계적으로 봐도 매우 오랜 백과사전으로서 유명합니다.
거기에 이하와 같은 기술이 있습니다.
歴天記云、日中有三足烏、赤色、今案文選謂之陽烏、日本紀謂之頭八咫烏、云、夜太加良須、・・・
歴天記력천기」안에 태양에 적색의 三足烏라고 쓰여져 있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이것은 「문선」으로 말하는 양오일 것이다.
또 「일본 서기」에 있는〈8지오〉일 것이다.
여기에 사상 처음〈八咫烏=三足烏〉 라는 설이 쓰여져 있는 것입니다만
그 문장은「倭名類聚抄왜명유취초」보다 전의 책이나 구전을 인용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 안(지금 생각건대)」.....로
편자인 “源順미나모토노시타고”의 생각으로는 三足烏는八咫烏일 것이다」라고 하고 있을 뿐입니다.
즉 源順의 개인적인 의견으로서 기록되고 있을 뿐입니다.
本居宣長는 에도기 최고의 국학자로 여겨지는 인물입니다.
古事記伝고사기전」1798년경 「고사기전」의 18지권에 대해
倭名類聚抄왜명유취초 중에서 源順가 〈八咫烏〉=〈三足烏>로 하고 있는 개소를 그대로 인용하고
그 말은 납득할 수 없다--라고 말합니다.
그 대학자가
〈八咫烏〉=〈三足烏〉라고 하고 있는 것은 간과할 수 없다고 생각됩니다.
- 倭名類聚抄箋注왜명유취초 전주」(狩谷エキ斎/江戸時代後半카리야역금기/ 에도시대 후반) -
“狩谷エキ斎의 <八咫烏〉의 크기에 대한 고증등도 유명합니다.
陽烏(太陽に住む三足烏)』에 대한 긴 해설이 있습니다만
거기서〈三足烏〉와〈八咫烏〉의 관계에 대해서 “狩谷카리야”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즉, 「왜명유취초」에 쓰여진 미나모토노시타고의 「〈8지오〉=〈삼족오〉」설은 잘못이다--라고 명기해 있습니다.
모토오리 노리나가에 필적할 정도의 고증학자가 역시 〈8지오〉는〈삼족오〉가 아니다. 라고
- 보충과 저자의 결론 -
이상과 같이 저명한 학자가 부정되어 있는 것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이〈八咫烏〉의 다리는 3 개라고 믿고 있는 것 같습니다.
古舘씨가 사회를 하는 인기가 높은 텔레비전의 퀴즈 프로그램에서도 그렇게 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저자가 견문한 범위에서는 대부분의 사람은
이상과 같은 문헌 조사를 한 다음 그러한 견해에 이르고 있는 것이 아니라
막연히 믿고 있는 것처럼 생각됩니다.
그럼 그러한 설이 언제쯤부터 어떻게 해 되어있어 왔는가--입니다만
아마 鎌倉時代1200년가마쿠라 시대 이후는 아닐까요.
적어도 일반적으로 그러한 생각이 펼쳐진 것은
鎌倉時代시대 이후일거라고 추측합니다.
대부분의 사람이〈三足烏〉라고 생각하게 된 것은
2차대전 이후로부터라는 생각이 듭니다.
저자로서는〈八咫烏〉=〈三足烏〉가 鎌倉時代시대 이후의 신앙이었다고 해도
그것은 그래서 존중하고 싶습니다만
훨씬 더 단순하게 결정하고 있는 것이 많은 듯 하게 생각하기 때문에
본장과 같은 검토를 해 본 나름입니다.
일본의 축구 협회는
일본 신화의 八咫烏의 이야기를 합나다만
그 것과 三足烏가 동일하다고는 쓰지 않고
그것과는 별도로 八咫烏의 이야기가 신화에 있다--로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여기까지의 저자의 문헌 조사와 모순되지 않도록 썼습니다만 무엇인가 석연치 않습니다.
변명 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저자로서는
일본 축구 협회에의 항의는 일본 신화도 쓸 수 있다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일본의 축구 협회인데 왜 외국의 전설을 채용하는 것인가 ――의 일점에 좁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만약 항의한다면, 말입니다)
일본 축구 협회의 창시자가 熊野出身쿠마노 출신이었으므로 삼족오를 협회의 마크로 했다는 일인 것 같습니다만
일본다운 마크는 그 밖에 얼마든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