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箱의 靈前에 바침

이상의  영전에 바침

 

아무리 째려 보아야

스트라빈스키의 어느 졸작보다도 이쁘지 못한

 도, 레, 미, 파……인생의 일주일.

은단추와 조개껍질과

금화와 아가씨와

불란서 인형 몇 개

부스러진 꿈 조각과……

쥬피타의 노름감은

하나도 재미가 없다.       -- 쥬피타 追放 -중에서 / 김기림 --

 

 

샤넬과 스트라빈스키/ 봄의 제전(Rite of Spring)

1913년 5월 29일 파리의 상젤리제 극장에서 초연된 [봄의 제전]은 당시 청중들이 받아들이기에는 충격적인 요소들이 많았다.

'[불새] 나 [페트루슈카] 에서 보여준 스트라빈스키의 모습보다는

 원시성이 짙은 리듬과  독창적인 시도들이 주를 이뤘고 이를 접한 청중석에서는 수근거림이 시작됐고 

이내 야유와 비난이 터져나왔다.

이를 옹호하는 사람들 사이에서의 다툼이 일어나고 청중석은 한마디로 아수라장이 된다...

이런 청중석을 진정시키기 위해서 디아길레프가  조명스탭에게 장내의 조명을 깜빡거리라고 지시하지만

오히려 혼란만 가중시킬 뿐이었다. 결국 경찰까지 부르게 되는데.. 

1부가 끝나서야 도착한 경찰들도 별 도움이 되지못한다. 

이러한 소란에도 불구하고 몽퇴는 계속해서 연주를 이어나가고 무사히 연주를 마친다.

 

공연 다음 날 스트라빈스키는 여러 매체에서 엄청난 비판을 받지만 스트라빈스키와 주요 스탭들은 개의치 않고 나머지 5일 동안의 공연을 진행한다.

첫날의 충격때문이었을까

그 뒤에 진행된 공연에서는 청중들의 소란없이 잘 끝이난다.   

*이 에피소드를 영화 '샤넬과 스트라빈스키'의 도입부에 잘 재현해놔서 참고하면 좋을 것 같아요    mimi1751님의 글

 

 


 

주피타 추방 원문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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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 다빈치가 인류에 남긴 것들

http://m.post.naver.com/viewer/postView.nhn?volumeNo=4440430&memberNo=15460571&vType=VERTICAL









































시인 이상은 지독히도 기독교를 싫어한 것으로 평가하고 있다.


그러나 시인 이상은  고린도서를 즐겨 읽을 만큼 기독교를 좋아 했다.



그의 멘토이기도 했던 시인 鄭芝溶정지용

자신의 둘째아들에게 가톨릭 사제 수업을 권유할만큼 독실한 신자였다.
이상은 처음으로 鄭芝溶정지용의 추천으로 《가톨릭 청년》잡지에 글을 올리게 된다.



모두가 이상 작품의 난해함에서 오는 해석의 오류 때문이다.

이상은 기독교를 좋아 했다.  

종교의 정치적 이용을 질타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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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시인 이상은  고린도서를 즐겨 읽을 만큼 기독교를 좋아 했다.

그의 멘토이기도 했던 시인 鄭芝溶정지용

자신의 둘째아들에게 가톨릭 사제 수업을 권유할만큼 독실한 신자였다.
이상은 처음으로 鄭芝溶정지용의 추천으로 《가톨릭 청년》에 글을 올리게 된다.



모두가 이상 작품의 난해함에서 오는 해석의 오류 때문이다.

이상은 기독교를 좋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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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드라 콜론타이의 소설三代의 戀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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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의 편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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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정 한 거 생각난 김에 옛날에 했던 포스팅 백업 + 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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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광 통권 20호인가.. 있는 글이다. 정확하진 않다.페이지는 302-307
옛날 잡지라 뭐 저작권은 괘.. 괜찮겠지..
  이상이 죽은 후에 구보 박태원이 쓴 글인데 재밌어서 옮겨본다.
최대한 본문과 가깝게 적으려고 했다.
오늘 쓰는 말이 아닌 것은 괄호치고 대강 해석을 달았다.
글씨가 잘 안 보이는 부분은 O로 처리
띄어쓰기는 그때와 지금이 많이 다른데 적당히 띄어쓰기 해본다.


--

- 이상의 편모

  내가 이상을 안 것은 그가 아즉 다료(다방) '제비'를 경영하고 있었을때다.
나는 누구한테선가 그가 고공건축과 출신이란 말을 들었다.
나는 상식적인 의자나 탁자에 비하야 그 높이가 절반밖에는 안되는 기형적인 의자에 앉어 점안을 둘러보며 그를 괴팍한 사나이라 하였다.
  '제비' 헤멀슥한 벽에는 십호인물형의 초상화가 걸려있었다.
나는 누구에겐가 그것이 그집주인의 자화상임을 배우고 다시 한번 치어다보았다.
황색계통의 색채는 지나치게 남용되어 전화면은 오즉 누-런것이 몹시 음울하였다.
나는 그를 '얼치기 화가로군'하였다.
  다음에 또 누구한테선가 그가 시인이란 말을 들었다.
'그러나 무슨 소린지 한마디 알수없지...'
 나는 그 무슨소린지 알수없는 시가 보고싶었다.
이상은 방으로 들어가 건축잡지를 두어권 들고나와 몇 수의 시를 내게 보여주었다.
나는 '슈을,레아리즘'(쉬르 레알리즘)에 흥미를 갖고 있지는 않었으나 그의 '운동' 1편은 그자리에서 구미가 당겼다.
항금 그 첫두머리 한토막이 기억에 남어있을뿐이나 그것은

  2층우에 2층우에 3층우에 옥상정원에를 올라가서
  남쪽을 보아도 아모것도 없고 북쪽을 보아도 아모것도 없길래 다시 옥상정원 아래 3층 아래 2층아래
  1층으로 나려와......
로 시작되는 시였다.
  나는 그와 몇번을 거듭맞나는 사이 차차 그의 재주와 교양에 경의를 표하게 되고 그의 독특한 화술과 표정과 제스춰는 내게 적지 않은 기쁨을 주었다.
  어느날 나는 이상과 당시 조선중앙일보에 있든 상허(이태준)와 더부러 자리를 함께하여 그의 시를 중앙일보지 상에 발표할것을 의논하였다.
  일반 신문독자가 그 난해한 시를 능히 용납할 것인지 그것은 처음부터 우려할 문제였으나 우리는 이미 그 전에 그러한 예술을 가젔서야만 옳았을 것이다.
  그의 '오감도'는 나의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과 거의 동시에 중앙일보지상에 발표되었다.
나의 소설의 삽화도 '하융'이란 이름아래 이상의 붓으로 그리여졌다.
그러나 예기(豫期)하였든바와 같이 '오감도'의 평판은 좋지 못하였다.
나의 소설도 일반대중에게는 난해하다는 비판을 받었든것이나 그의 시에 대한 세평은 결코 그러한 정도의 것이 아니다.
신문사에는 매일같이 투서가 들어왔다.
그들은 오감도를 정신이상자의 잠꼬대라 하고 그것을 게재하는 신문사를 욕하였다.
그러나 일반독자뿐이 아니다.
비난은 오히려 사내에서도 커서 그것을 물리치고 강연히 나가려는 상허의 태도가 내게는 퍽으나 민망스러웠다.
원래 약 1개월을 두고 연재할 예정이였으나 그러한 까닭으로하야 이상은 나와 상의한 뒤 오즉 10수편을 발표하였을뿐으로 단념하여 버리지 않으면 안되였다.
그러나 당시에 이상이 느낀 OO은 제법 큰것이여서 미발표 대로 남어있는 '오감도 작자의 말'이라는 것은 다음과 같다.

웨 미첬다고들 그리는지 대체 우리는 남보다 수십년식 떠러저도 마음놓고 지낼 작정이냐.
모르는것은 내 재주도 모자랐겠지만 게을러빠지게 놀고만 지내든 일도 좀 뉘우처보아야 아니하느냐.
열아문개쯤 써보고서 시 만들줄 안다고 잔득 믿고 굴러다니는 패들과는 물건이 다르다.
2천점에서 30점을 고르는데 땀을 흘렸다.
31년 32년 일에서 용대가리를 떡 끄내여놓고
하도들 하도들 야단에 배암꼬랑지커녕 쥐꼬랑지도 못달고 그만두니 서운하다.
깜박 신문이라는 답답한 조건을 잊어버린것도 실수지만
이태준, 박태원 두형이 끔찍이도 편을 들어준데는 절한다.
籤첨
이것은 내 새길의 암시요 앞으로 제 아모에게도 굴하지않겠지만 호령하여도 에코-가 없는 무인지경은 딱하다.
다시는 이런-물론 다시는 무슨 다른 방도가 있을것이고 위선 그만 둔다.
한동안 조용하게 공부나 하고 딴은 정신병이나 고치겠다.

그러나 오감도를 발표하였든것은 그로서 아주 실패는 아니었다.
그는 일반대중의 비난을 받은 반면에 그것으로하여 물론 소수이기는 하여도 자기예술의 열렬한 팬을 이 때에 이미 확실히 획득하였다. 할 수 있다.
그 뒤로 그는 또 수 편의 시와 산문을 발표하였으나 평판은 역시 좋지 못하였든 것으로 문단적으로도 그가 일개 작가로 대우를 받게된 것은 작년 9월호 조광에 실렸든 '날개'에서부터가 아닌가 한다.
최재서씨가 그에 대하야 이미 호의있는 세평을 시험하였으므로 이곳에서 다시 말하지 않으나 '날개' 1편은 이렇든 저렇든 우리 문단에 있어 문제의 작품으로 모든 점에 있어 미완성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우리의 문학을 논의할 때 반듯이 들어 말하지 않으면 안될 '소설'이다.
그러나 그는 그 독특한 경지를 개척하여 놓았을 뿐으로 요절하였다.
영원한 미완성품인채 그는 지하로 돌아갔다. 이상이 동경으로 떠나기 전에 정인택에게 하였다는 말을 들어보면 그는 이제는 다시 '오감도'나 '날개'를 쓰는 일 없이 오로지 정통적인 시 정통적인 소설을 제작하리라 하였다지만 만약 그것이 그의 참말 마음에 고백이러면 '오감도'나 '날개' 부류에 속할 작품만을 남겨놓은채 돌아간 그는 지하에있어서도 눈을 감지 못할께다.
그러나 그것은 어떻든 우리가 이상의 작품을 이해하려면 먼저 그의 위인과 생활을 알지 않으면 안된다.
'괴팍한 사람이다'라는 것은 그에 대한 나의 첫 인상이거니와 물론 그렇게 단순한 것은 아니였어도 역시 '괴팍'하다는 형용만은 결코 글르지 않은듯싶다.
일즉 '여성'지에서 나에게 '문단기형이상론'을 청탁하여 왔을 때 그 문자가 물론 아모러한 그에게도 그다시 유쾌한 것은 아닌 듯싶었으나 세상이 자기를 문단의 기형으로 대우하는 것에 스스로 크게 불만은 없었돈 듯 싶다.
그러나 그 이상론은 발표되지 않은 채 편집자가 갈리고 그러는 사이 원고조차 분실되여 나는 그 때 어떠한 말을 하였든 것인지 적역하게 기억하지 못하고 있으나 하여튼 차점(다방) '플라타-느'에 앉어서 당자 이상을 앞에 앉어놓고 그것을 초하여 돈을 벌려면 마땅히 부지런 하여야만 하는 것을 이상은 너무나 게을러서,
'그래 언제든 가난하다'
하는 구절에 이르러 둘이 소리를 높여 서로 웃든것만은 지금도 눈앞에 또렷하다.
  사실 이상의 빈궁은 너무나 유명하였다.
그리고 그것은 대부분은 그의 도저히 구할 길 없는 게으름에 기인하는 것이었다.
  '제비'가 차차 경영곤란에 빠졌을 때
어느날 그의 모교상공에서 전화로 그를 부른일이 있다.
당시 신책중에 있었든 신촌 이화여전공사장에 현장감독으로 가볼 의향의 있고 없음을 물은 것이다.
'하로 1원50전이랍듸다. 어듸 담배값이나 벌러나가볼까 보오'
 그리고 이튼날 벤또를 싸가지고 신촌으로 갔든것이나
그 다음날은 다시 '제비' 뒷방에서 언제나 한가지로 늦잠을 잤다.
'그 참 못하겠읍듸다.
버리도 시원치않지만 나같은 양질은 어디 그런일 견듸여 나겠읍듸까'
그것은 사실이다.
그의 가난은 이렇게 그의 허약한 체질과 수년래(來)의 절제 없는 생활이 가저온 불건강에도 말미암아 오는 것이었으나 집주인이 점방을 내여달라고 지방법원에 소송을 제기하였을 때에 출두하라는 오전 9시에 대여 일어나는 재주가 없어 가장 불리한 결석판결을 받고 그래 좀 더 가난하지 않으면 안되였든 것은 역시 너무나 철저한 그의 게으름을 들어 논하지 않으면 안될 일이다.
 현재 '뽀스톤'의 전신 '69''씩스,나인-'을 으즉 시작하였을뿐으로 남에게 넘겨버리고
'제비'에 또한 실패한 이상은 그래도 단념하지 않고 명치정에다 '무기'라는 다방을 또 만들어 놓았다.
그곳의 실내장식에는 '제비'의 것에보다도 좀 더 이상의 '괴팍한 취미' 내지 '악취미'가 나타나 있었다.
결코 다른 다점에는 통용되지 않는 괴이한 형상의 다탁이며, 사면벽에 그림이나 사진을 걸어놓는 대신 '루나-르'의 '전원수첩'에서 몇 편을 골라 붙여놓는 등 일반 선량한 끽다점(찻집) 순방인의 기호에는 결코 맞지 안는 것이었다.
 '악취미'로 말하자면 '69'와 같은 온건치않은 문구를 공연하게 다점의 옥호로 사용한 이상의 것은 없을 것으로 그 주석을 나는 이자리에서 하지 않거니와 모르는 사람이 고개를 기웃거리며
 '69? 육구? 육구라....... 하하 육구리(천천히) 놀다 가란 말인게로군'이라고라도 하면 그는 경우에 딷라 냉소하기도 하고 홍소(哄笑)도 하였다. 그렇기로 말하면 그에게는 변태적인 곳이 적지 아니있었다. 그
것은 그의 취미에 있어서나 성행에 있어서만이 아니라 그의 인생관, 도덕관, 결혼관, 그러한 것에 있어서도 우리는 보통 상식인과의 사이에 적지 않은 현격을 깨닫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나 그의 사상을 명백하게 안다고 나설 사람은 그의 많은 지우(知友)중에도 혹은 누구 하나라 없을 것이다. 그의 참마음을 그대로 그의 표정이나 언동 우에서 우리는 포착하기가 힘든다.
  이상은 사람과 대와 경우를 따라 마치 카메레온과 같이 변한다.
그것은 천성에보다도 환경에 의한 것이다.
그의 교우권이라 할 것은 제법 넓은 것이여서 물론 그 친소(친함과 친하지 못함)와 심천(깊고 얕음)의 청도는 다르지만
한 번 거리에 나설 때 그는 거의 왼갖 계급의 사람과 알은 체 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래 그는 '하O'이라든 그러한 몽롱한 것 말고 희노애락과 같은 일절의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하지 안는 것에 어느틈엔가 익숙하여졌다.
나는 이 앞에서 변태적이라는 문자를 사용하였거니와 그것은 이상에게 있어서는 그 문자가 흔히 갖는 그러한 단순한 것이 아니고 좀 더 그 성질이 불순한-?- 것이였다.
가령 그는 온건한 상식인 앞에서 기탄없이 그 독특한 화술로써 일반선량한 시민으로서는 규지할 수 없는 세계의 비밀을 폭로한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이야기 하고싶은 행동을 느끼여서가 아니라 실로 그것을 처음 안 순사(純士)들이 다음에 반듯이 얼굴을 붉히고 또 아연하여 할 그 꼴이 보고싶어서인 듯 싶다.
사실 이상은 한 때 상당히 발전하였든 외입장이로 그러한 방면에 있어서도 놀라운 지식을 가저 그것은 그의 유고중에도 한 두 편 산견되나 기생이라든 창부라든 그러한 인물을 취급하여 작품을 쓴다면 가히 외국문단에 있어서도 대적할 사람이 없을 것이다.
 다만 그러한 점으로만도 조선문단이 이상을 잃은 것은 가히 애석하여 마땅한 일이나 그는 그렇게 계집을 사랑하고 술을 사랑하고 벗을 사랑하고 또 문학을 사랑하였으면서도 그것의 절반도 제 몸을 사랑하지는 않았다.

  이상이 아즉 서울에 있을 때
하로저녁 지용이 그와 한강으로 가치 산책을 나가 문득 그의 건강을 염려한 남어지에 
 '여보 상허를 본뜨시요. 상허의 반만큼만 몸을 애끼시요'
 간곡히 충고하였다는 말을 나종에 들었거니와 그와 가까운 벗은 모다 한 두번쯤은 그에게 그러한 종류의 말을 할 것을 잊지는 않었었다.
이상보다 20일 앞서 돌아간 김유정도 자기자신 병고에 허덕이며 몇 번인가 이상의 불규칙하고 또 아울러 비위생적인 생활에 대하야 간절하게 일러준 바가 있었다.
아즉 동경에서 그의 미망인이 돌아 오지 않었고 또 자세한 유언도 별로 없어 그가 돌아가든 당시의 주위와 사정은 물론, 그의 병명조차 적확하게는 모르고 있으나 역시 폐가 나뻤든 모양으로 그 점은 김유정과 같으나 유정이 죽기 바로 수일 전까지도 기어코 병을 정복하고 다시 일어나려 끊임없는 노력을 애끼지 않든 것에 비겨 이상은 전에도 혹간 절망과 같은 의사표시가 있었고 동경에 간 뒤에도 사망하기 수개월 전에 이미 '종생기'와 같은 작품을 써보낸 것을 보면 이상의 이번 죽엄은 이름을 병사에 빌었을 뿐이지 그 본질에 있어서는 역시 일종의 자살이 아니였든가- 그러한 의혹이 농후 하여진다.
  그러나 이제 있어 그러한 것을 새삼스러히 문제삼어 무엇하랴
이상은 이제 영구히 도라오지않고
이상이 없는 서울은
 너무나 쓸쓸하다. -4월26일-



이상이 없는 서울이 쓸쓸하다는  마지막 부분이 왜 이리 쓸쓸하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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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상에 대한 회고를 보면, 그는 참 매력적인 캐릭터였던 것 같다. 좋은 말로 해서 매력적인 캐릭터지 다른 식으로 보자면 눈 앞에 있으면 짜증나고 눈에 안 보이면 걱정되는 인간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지만.. 아 참 저 이상 좋아합니다....(......) 
  깊은샘에서나온 박태원 전집 중 한 권인 '이상의 비애'에 서두인 '이상과 박태원'이라는 제목인 조용만의 회고가 있는데 그 마지막 부분을 보면,

이상은 천재가 그렇듯이 신경질적인 괴벽이 있어서 남의 말을 듣지 않았다. 동경 가는 것도 구보가 건강이 좋지 않으니 가지 말라고 간곡하게 말려도 듣지 않았다.
구보는 지각이 있는 사람이어서 늘 이상에게 충고하고 기괴한 행동을 못하게 하였지만, 이상은 듣지 않았다. 그래도 구보는 끝까지 이상을 아끼고 위해서 친구로서의 깊은 우정을 보여주었다.
  이상이 구보와 밤낮으로 같이 붙어 다니다가 어느 날 별안간 자취를 감추고 나타나지 않았다. 구보는 또 버릇이 생겼구나 하고 속으로 코웃음쳤지만 그래도 그럴 수가 없어서 백방으로 찾아다녔지만 종적이 묘연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별안간 밤중에 구보집 들창 아래 나타나서
'구보 있소?'
하고 소리쳤다. 구보는 놀라서 잠이 깨서
'아니 이게 웬일요!'
하고 나무라니까
'그렇게 되었소. 내일 아침에 오리다.'
하고, 총총히 사라졌다.
이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는데, 구보는 늘 그를 용서하고 감싸주었다.
구보는 이상에게 이런 친구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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