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골편의 유물적 가치는 대단하다.

2004년 상하이 경매회사서 갑골문자 20점이  72억원 낙찰됐다.


3.500년 동안 땅속에 뭍혀있던 시간값일까?

20세기 초에 그 모습을 들어냈다.

                                                 그러나




董作賓 著 [甲骨學 六十年]   동작빈 저 [갑골학 육십년] 중에서


갑골문을 가짜로 새긴 것이 도처에 널려있을 정도로 많았는데 그 수량이 사람을 놀라게 할 정도였다.

그러나 가짜를 새긴 사람은 자연 한 사람만은 아니었으니 그중에서도 가장 뛰어났던 사람은 남보광(藍葆光)이란 자였다.

남보광은 하북성 사람인데 나는 1928년 가을 제1차 은허(중국[河南省][安陽縣][小屯村]하남성 안양현 소둔촌에 있는 고대 상(商) 나라 수도 유적지 )발굴 때 그를 본 적이 있었다.

그때 그는 30살 정도의 약관으로 문약한 서생 같았다.

영리하고 솜씨가 좋은 사람이었으나 안타깝게도 어릴 때부터 아편을 피우는 나쁜 습관에 젖어 바른 일에 힘쓰지 않고 여러 해 동안 창덕부(彰德府)를 떠돌아다니고 있었다.

그의 말에 따르면 그는 처음에 가짜 골동품을 장난삼아 만들었는데 글자가 새겨 있지 않은 동기, 갑골판, 녹각, 전두(箭頭 화살촉)위에 갑골문자를 새길 수 있었다고 한다.

골동품 상인들은 그를 이용하여 가짜 골동품을 많이 만들게 해서 평진경호平津京滬(북경,천진,남경,상해)의 동료를 속이고

그들은 또 그것으로 서양인들을 속였는데 남보광은 자기 손으로 만든 물건을 돈으로 바꾸어 아편을 필 수 있다는 것에 즐거워했다.

그는 어려서부터 자골두(字骨頭)를 모방해서 새겼는데 그 작품을 나에게 보여준 적도 있었다.

원래 골동상인들은 은허에서 나온 글자가 없는 귀갑과 우갑골(점치는데 사용했던 것으로 글자가 없는 갑골이 글자가 있는 것보다 많다.) 녹각, 수골 등을 싼 값에 사서 그에게 새겨달라고 했던 바,

재료는 옛 것이고 문자는 새 것으로, 그는 무늬를 새기거나 갑골문을 조각하여 괴상한 물건들을 많이 만들어 내었고 무늬나 갑골문도 새겼는데 판로가 매우 좋아 골동상인들이 모두 그에게 아첨할 정도였다고 한다.

유철운이 갑골을 수집한 뒤부터 가짜가 섞이더니 1928년에 이르러서는 계속 가짜가 대량으로 쏟아져 나왔다.

남보광은 갑골문자를 많이 베낀 책자 하나를 가지고 있었는데 유철운, 나진옥이 출판한 각 책들도 모두 베껴두었다.

그러나 그는 한 글자도 알지 못했다. 그는 부스러진 조각들에 한 글자를 새길 때 조각들을 거꾸로 방치해 두었으면 곧 뒤집혀진 글자를 쓰게 되었다. 심지어는 전편 모두를 뒤집어서 쓰기도 했다.

새길 때는 책자를 보고 베꼈는데 새기는 것이 익숙해 진 뒤에는 어떤 글자가 생각나면 곧 그 글자를 새길 정도로 새기는 솜씨도 좋아서 문외한들이 볼 때는 매 판 매 글자 하나하나가 모두 갑골문 같았다.

갈수록 더욱 진보하여 완전한 조각만을 베낄 뿐 아니라 새기는 기술도 정밀하기 짝이 없어 완전히 진짜와 혼동할 정도여서 복제판과도 같았다.

그가 일찍이 귀복갑(龜卜甲) 하나를 보내왔는데 뒷면을 뚫고 불로 지진 것은 모두 원래의 것이었다.

그는 이것의 앞면에다 매우 정성스럽게 몇 단의 복사(점을 친 내용)를 새겼는데 확실히 출토된 것과 차이가 없었다.

그러나 그 때 나는 그가 문예(文例)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는데 그것은 글자를 새긴 위치와 좌우행이 모두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에게 알려주진 못했다.


내가 보았던 가짜들에 의하면 민국초년과 광서 말년(1912년)에 만들어진 것은 대부분 구독(句讀)이 안 되며 혼란스럽게 섞여 질서가 없고 중간에는 뒤집힌 글자가 있었는데 이는 그 때의 스타일이었다. 

그 뒤에는 통하는 것 같지만 실제는 통하지 않는 구절을 만들어낸 사람이 있었고 최후에는 전문을 모방하여 새긴 것이었다.
갑골학도 먼저 -가짜를 구별하는- 조예가 필요하게 되었으나, 안양에서 다년간 목사를 지낸 멘지스(1885-1957캐나다 Menzies James Mellon)박사는 1914년부터 갑골문자를 찾아 나섰는데 그의 말에 의하면

최초로 구입했던 대골판(大骨版)은 전부 새 우골(牛骨)에 모방해 새긴 것으로 소장한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도 썩은 냄새가 이루 말할 수 없었다고 한다.

이후 그는 오로지 작은 것들만을 사는데 온 정력을 기울여 탐구하여 마침내 가짜와 진짜를 구별할 줄 아는 능력을 갖추게 되었다.
1904년에서 1908년에 이르기까지 영국인 쿨링, 미국인 칼휀트,가 소장한 갑골문자가 훗날 “고방이씨장갑골복사”[庫方二氏藏甲骨卜辭]라는 책으로 출간되었는데 수록된 갑골은 모두 1687片이다.

그 중 큰 조각은 과반수가 가짜이다. 
1919년에 또 대량의 가짜가 나타났는데 이때  통허 시경훈(通許 時經訓)선생이 구입하였다.


남보광과 기타 갑골을 위조한 사람들은 그저 돈을 벌기위해 옛 것을 좋아하는 중국과 외국의 허다한 선비들을 속였고 동시에 은상시대의 중요한 사료들을 어지럽혔으니 그것에 관련된 후과는 매우 크다고 하겠다. 
     董作賓 著 [甲骨學 六十年]   동작빈 저 [갑골학 육십년]  Page - 100 - 에서


 


진짜와 가짜


 




그림은 원형이 가장 잘 보존된 갑골판甲骨版이라고 한다.
이 것 또한 남보광이 만들어낸 짝퉁의 원조쯤 되는 가짜 작품이 아닐까? 하는 의문을 갖고 그림을 자세히 들여다본다.
문맥이 통하지 않는 글자들이 여기 저기 중복되어 그려져 있다. 더욱 세밀한 분석이 필요할 듯하다.


3.500년 동안 땅속에 뭍혔던 거북의 배딱지에 새겨놓은 조각의 흔적이 저리도 칼끝이 살아있을 수 있을까?

자세히 들여다보면 본래 원본 글자 조각은 그 흔적이 사라지거나  흐릿한 글자의 부분만 남아 있을 뿐이다.

저런 가짜 유물을 바탕으로

상나라의 역사를 규명 했다는 董作賓 동작빈아 !

3,000년전 상나라 점쟁이가  살아나지 않고서야 어찌 그 진실을 밝히리요!



아! 의혹을 품은 사람들은
조금이라도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곽박-





                                              작업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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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 수 년 갑골학에 미쳐 지냈다.

 

하지만 모두가 가짜일 것이라고 결론지었다.

동작빈 나진옥등의 갑골학자들이  

은허의 갑골이 발굴될 당시

상나라의 역사를 조작하기위해 짜가를 만들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라고 결론 지은 것이다.

본래 거북의 등 껍질에 기록된 내용은 은허시대의 천문 기록이다.

그 위에 내용을 조작해 덧 조각을 해서 가짜로 만든 것으로써

상나라 때 점을친 기록이며 역사기록이라하고 얼버무렸다고 보여진다. 

 

세상에

점을 친 내용을 기록해놓을 정도의 기록문화가 성행 했는데

 

올바른 역사기록은 보이지 않는 것이냐 !

 

그동안 연구 과정 내용을 간간이 올릴 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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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racles(甲骨文jia gu wen) - Jongo Knows - Encyclopedia of China -

 

 Tsung Jie ( 倉頡

 

http://www.absoluteastronomy.com/topics/Oracle_bone

 

 

 http://books.google.co.kr/books?id=74NbRyWOXJQC&pg=PA43-IA8&lpg=PA43-IA8&dq=Oracle+Bone++Menzies&source=bl&ots=FpKoJKeHCC&sig=f5gcoMx5JZqIoJRsizFiJVld8A0&hl=ko&ei=XhV0S4SPJ4acsgPq66yWBg&sa=X&oi=book_result&ct=result&resnum=4&ved=0CCIQ6AEwAzgK#v=onepage&q=Oracle%20Bone%20%20Menzies&f=false

 

 

Yin Xu

From New World Encycloped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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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ordinates: 36°07′17″N 114°19′01″E / 36.12139, 114.31694

Yin Xu*
UNESCO World Heritage Site

Yinxu, the ruins of Yin, the capital (1350 - 1046 B.C.E.) of the Shang (Yin) Dynasty.
State Party China
Type Cultural
Criteria ii, iii, iv, vi
Reference 1114
Region** Asia-Pacific
Inscription history
Inscription 2006  (30th Session)
* Name as inscribed on World Heritage List.
** Region as classified by UNESCO.
Yin Xu is located near Anyang in Henan province, People's Republic of China.
Yin Xu is located near Anyang in Henan province, People's Republic of China.

Yin Xu (Chinese: 殷墟; pinyin: Yīnxū; literally "Ruins of Yin") is the ruins of the last capital of China's Shang Dynasty (1600 B.C.E.-1046 B.C.E.), also known as the Yin dynasty. It is located in the central Henan province, near the modern city of Anyang. King Pangeng established Yin on the Huan River during the fourteenth century B.C.E. From the capital, twelve kings in eight generations took the Shang dynasty to its peak before its fall to the Zhōu (周) dynasty in 1046 B.C.E. From that time, Yin had been abandoned and lost until the end of the nineteenth century.

Rediscovered in 1899, Yin Xu numbers among the oldest and largest archaeological sites in China. The site became famous as the original source of oracle bones and oracle bone script, the earliest recorded form of Chinese writing. Wang Yirong, director of the Imperial College, discovered the first oracle bones, leading to the discovery China's earliest ideograms. In the process, he verified the authenticity of the Shang dynasty. In 1929, the first excavations of Yin Xu began, leading to the unearthing of a palace, tombs, and 100,000 oracle bones. The ongoing excavations since 1950 set the standard for archeology throughout China. Eighty sites confirm Yin Xu as the spiritual and cultural center of the Yin Dynasty. The Tomb of Fu Hao and the Exhibition Hall of Chariot Pits stand out among the excavation sites. The People's Republic of China declared Yin Xu one of the Historical capitals of China in 1988, while UNESCO designated it a World Heritage Site in 2006.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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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story

At the beginning of the fourteenth century B.C.E. King Pangeng of the Shang Dynasty established his capital on the banks of the Huan River. The city, known as Yin, also gave it's name to the dynasty of that time, the Yin Dynasty.[1] King Wu Ding continued to use Yin as his capital, from that base launching numerous military campaigns against surrounding tribes securing Shang rule. Fu Hao, his wife, led many of the campaigns. King Wu Ding and Fu Hao took the dynasty to its zenith.

Later rulers, pleasure-seekers, took little interest in state affairs. Internal strife escalated as social differences within the slave-owning society increased. King Zhòu (紂), the last of the Shang Dynasty kings, especially earned a reputation as a ruthless and debauched ruler. His increasingly autocratic laws alienated the nobility until King Wu of the Zhōu Dynasty (周) overthrew the Shang dynasty with popular support from the people. The Zhōu (周) established their capital in Feng and Hao near modern day Xi'an, Yin abandoned to fall into ruin. Sima Qian, in his Records of the Grand Historian,[2] mentioned those ruins, but soon they were lost and their location forgotten. The once-great city of Yin had been relegated to legend along with the dynasty that founded it.

Archaeological discoveries

Oracle Bone Inscriptions on display, Yin Xu site, Anyang, Henan, China
Oracle Bone Inscriptions on display, Yin Xu site, Anyang, Henan, China

Yinxu won renown for the oracle bones, discovered in 1899 by Wang Yirong, director of the Imperial College.[3] Director Wang, suffering from malaria at the time, had been prescribed Longgu (dragon bones) at a traditional Chinese pharmacy. He noticed strange carvings on those bones and concluded that they could have been some of China’s earliest ideograms. Sending his assistant in search of the source of those bones, he traced to the small village of Xiaotun just outside of Anyang.[4] In 1917, Wang Guowei deciphered the oracle bone inscriptions, identifying the names of the Shang kings and constructing a complete Shang genealogy. That decipher perfectly matched those in the Records of the Grand Historian by Sima Qian,[5] confirming the historical authenticity of the legendary Shang Dynasty and the archaeological importance of Yinxu.[6]

Li Chi of the Institute of History and Philosophy from 1928-1937 led the first excavations at Yinxu.[7] They uncovered the remains of a royal palace, several royal tombs, and more than 100,000 oracle bones that showed the Shang had a well-structured script with a complete system of written signs.[4] Since 1950, ongoing excavations by the Archaeological Institute of the Chinese Social Sciences Academy have uncovered evidence of stratification at the Hougang site, remains of palaces and temples, royal cemeteries, oracle bone inscriptions, bronze and bone workshops and the discovery of the Shang city on the north bank of the Huang River.[8] one of the largest and oldest sites of Chinese archaeology, excavations in Yin Xu laid the foundation for work across the country.

Excavation sites

Tomb of Fu Hao), wife King Wu, Shang dynasty ruler. Anyang, Henan, China
Tomb of Fu Hao), wife King Wu, Shang dynasty ruler. Anyang, Henan, China

At 30 square kilometers (12 sq mi), Yin Xu measures as the largest archaeological site in China and excavations have uncovered over eighty rammed-earth foundation sites including palaces, shrines, tombs and workshops. From those remains, archaeologists have confirmed that Yin Xu served as the spiritual and cultural center of the Yin Dynasty.[9]

Chariots of the Shang dynasty excavated in Yin Xu represent the earliest example of animal-drawn carts discovered in China.
Chariots of the Shang dynasty excavated in Yin Xu represent the earliest example of animal-drawn carts discovered in China.

The Tomb of Fu Hao stands out as the best preserved of the Shang Dynasty royal tombs unearthed at Yinxu. The extraordinary Lady Hao had been a military leader and the wife of Shang King Wu Ding. Discovered in 1976, the tomb has been dated to 1250 B.C.E. Completely undisturbed, the tomb escaped the looting that had damaged the other tombs on the site. In addition to the remains of the Queen, six dog skeletons, sixteen human slave skeletons, and numerous grave goods of huge archaeological value had also been discovered in the tomb. Thoroughly excavated and extensively restored, Fu Hao's tomb has been opened for public viewing.

The Exhibition Hall of Chariot Pits, also located on site, displays the earliest animal-driven carts discovered by Chinese archaeologists.[10] The Anyang Working Station of the Archaeological Institute of the Chinese Social Science Academy and the Historical Relics Working Team of Anyang Municipality excavated those artifacts. They unearthed them in the northern and southern lands of Liujiazhuang village and the eastern land of Xiaomintun village, putting on the artifacts display within the hall.[11] The six pits each contain the remains of a carriage and two horses. Five of the pits contained the remains of a human sacrifice (four adult males and one child). The remains of an 8.35 meters (27.4 ft) wide Shang Dynasty road discovered at Anyang Aero Sports School in 2000.[12]

In 1988, Yinxu became the oldest of the seven Historical capitals of China while in 2006 UNESCO designated Yin Xu a World Heritage Site.[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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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racle bo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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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racle bones (Chinese: 甲骨; pinyin: jiǎgǔ) are pieces of bone or turtle plastron (underside) bearing the answers to divination chiefly during the late Shang Dynasty. They were heated and cracked, then typically inscribed using a bronze pin[1] in what is known as oracle bone script. The oracle bones are the earliest known significant[2] corpus of ancient Chinese writing, and contain important historical information such as the complete royal genealogy of the Shāng dynasty[3]. These records confirmed the existence of the Shāng dynasty, which some scholars, until then, had doubted ever existed.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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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dit] Dating

The vast majority of the inscribed oracle bones date to the last 230 or so years of the Shāng dynasty; oracle bones have been reliably dated to the fourth and subsequent reigns of the kings who ruled at Yīn (modern Ānyáng)—from king Wu Ding (武丁) to Di Xin (帝辛).[4] However, the dating of these bones varies from ca. the 14th -11th centuries BCE [5][6] to ca. 1200-1050 BCE[7] because the end date of the Shāng dynasty is not a matter of consensus. The largest number date to the reign of king Wǔ Dīng[8] . Very few oracle bones date to the beginning of the subsequent Zhōu Dynasty.

[edit] Discovery

A Shang Dynasty oracle bone from the Shanghai Museum

The Shāng-dynasty oracle bones are thought to have been unearthed periodically[9] by local farmers, perhaps starting as early as the Hàn dynasty,[10] and certainly by 19th century China, when they were sold as dragon bones (lóng gǔ 龍骨) in the traditional Chinese medicine markets, used either whole or crushed for the healing of various ailments.[11] The turtle shell fragments were prescribed for malaria[12], while the other animal bones were used in powdered form to treat knife wounds[6]. They were first recognized as bearing ancient Chinese writing by a scholar and high-ranking Qing dynasty official[6], Wáng Yìróng (王懿榮; 1845-1900) in 1899. A legendary[6] tale states that Wang was sick with malaria, and his scholar friend Liú È (劉鶚; 1857-1909) was visiting him and helped examine his medicine. They discovered, before it was ground into powder, that it bore strange glyphs, which they, having studied the ancient bronze inscriptions, recognized as ancient writing. As Xǔ Yǎhuì (許雅惠 2002, p. 4) states:

"No one can know how many oracle bones, prior to 1899, were ground up by traditional Chinese pharmacies and disappeared into peoples’ stomachs."

It is not known how Wang and Liu actually came across these “dragon bones”, but Wang is credited with being the first[6] to recognize their significance, and his friend Liu was the first to publish a book on oracle bones[13]. Word spread among collectors of antiquities, and the market for oracle bones exploded. Although scholars tried to find their source, antique dealers falsely claimed that the bones came from Tāngyīn (湯陰) [6] in Hénán. Decades of uncontrolled digs[14] followed to fuel the antiques trade, and many of these pieces eventually entered collections in Europe, the US, Canada and Japan[15]. The first Western collector was the American Rev. Frank H. Chalfant[16], while Presbyterian minister James Mellon Menzies (明義士) (1885-1957) of Canada bought the largest amount[17]. The Chinese still acknowledge the pioneering contribution of Menzies as "the foremost western scholar of Yin-Shang culture and oracle bone inscriptions." His former residence in Anyang was declared in 2004 a "Protected Treasure" and the James Mellon Menzies Memorial Museum for Oracle Bone Studies was established[18][19][20]

[edit] Official excavations

By the time of the establishment of the Institute of History and Philology headed by Fù Sīnián at the Academia Sinica in 1928, the source of the oracle bones had been traced back to modern Xiǎotún (小屯) village at Ānyáng in Hénán Province. Official archaeological excavations in 1928-1937 led by Lĭ Jì (李濟; 1896-1979), the father of Chinese archaeology[21], discovered 20,000 oracle bone pieces, which now form the bulk of the Academia Sinica's collection in Taiwan and constitute about 1/5 of the total discovered[22] . The inscriptions on the oracle bones, once deciphered, turned out to be the records of the divinations performed for or by the royal household. These, together with royal-sized tombs[23], proved beyond a doubt for the first time the existence of the Shāng Dynasty, which had recently been doubted, and the location of its last capital, Yīn. Today, Xiǎotún at Ānyáng is thus also known as the Ruins of Yīn, or Yīnxū (殷墟).

[edit] Materials

In this Shang Dynasty oracle bone (which is incomplete), a diviner asks the Shang king if there would be misfortune over the next ten days; the king replied that he had consulted the ancestor Xiaojia in a worship ceremony.

The oracle bones are mostly tortoise plastrons (ventral or belly shells, probably female[24]) and ox scapulae (shoulder blades), although some are the carapace (dorsal or back shells) of tortoises, and a few are ox rib bones[25], scapulae of sheep, boars, horses and deer, and some other animal bones[26]. The skulls of deer, ox skulls and human skulls[27] have also been found with inscriptions on them, although these are very rare, and appear to have been inscribed for record-keeping or practice rather than for actual divination[28]; in one case inscribed deer antlers are reported, but Keightley (1978) reports that they are fake[29]. Neolithic diviners in China had long been heating the bones of deer, sheep, pigs and cattle for similar purposes; evidence for this in Liáoníng has been found dating to the late fourth millennium BCE[30]. However, over time, the use of ox bones increased, and use of tortoise shells does not appear until early Shāng culture. The earliest tortoise shells found which had been prepared for oracle bone use (i.e., with chiseled pits) date to the earliest Shāng stratum at Èrlĭgāng (Zhèngzhoū, Hénán)[31]. By the end of the Èrlĭgāng the plastrons were numerous[32], and at Ānyáng scapulae and plastrons were used in roughly equal numbers[33]. Due to the use of these shells in addition to bones, early references to the oracle bone script often used the term 'shell and bone script', but since tortoise shells are actually a bony material, the more concise term "oracle bones" is applied to them as well.

The bones or shells were first sourced, and then prepared for use. Their sourcing is significant because some of them (especially many of the shells) are believed to have been presented as tribute to the Shāng, which is valuable information about diplomatic relations of the time. We know this because notations were often made on them recording their provenance (e.g. tribute of how many shells from where and on what date). For example, one notation records that “Què (雀) sent 250 (tortoise shells)”, identifying this as, perhaps, a statelet within the Shāng sphere of influence[34]. These notations were generally made on the back of the shell's bridge (called bridge notations), the lower carapace, or the xiphiplastron (tail edge). Some shells may have been from locally raised tortoises, however.[35] Scapula notations were near the socket or a lower edge. Some of these notations were not carved after being written with a brush, proving (along with other evidence) the use of the writing brush in Shāng times. Scapulae are assumed to have generally come from the Shāng’s own livestock, perhaps those used in ritual sacrifice, although there are records of cattle sent as tribute as well, including some recorded via marginal notations[36].

[edit] Preparation and usage

The bones or shells were cleaned of meat, and then prepared by sawing, scraping, smoothing and even polishing to create convenient, flat surfaces.[37][38] The predominance of scapulae and later of plastrons is also thought to be related to their convenience as large, flat surfaces needing minimal preparation. There is also speculation that only female tortoise shells were used, as these are significantly less concave[39]. Pits or hollows were then drilled or chiseled partway through the bone or shell in orderly series. At least one such drill has been unearthed at Èrlĭgāng, exactly matching the pits in size and shape[40]. The shape of these pits evolved over time, and is an important indicator for dating the oracle bones within various sub-periods in the Shāng dynasty. The shape and depth also helped determine the nature of the crack which would appear. The number of pits per bone or shell varied widely.

[edit] Divination

Replica of an oracle bone -- ox scapula

Since divination (-mancy) was by heat or fire (pyro-) and most often on plastrons or scapulae, the terms pyromancy, plastromancy[41] and scapulimancy are often used for this process. Divinations were typically carried out for the Shāng kings, in the presence of a diviner. A very few oracle bones were used in divination by other members of the royal family or nobles close to the king. By the latest periods, the Shāng kings took over the role of diviner personally.[42]

During a divination session, the shell or bone was anointed with blood [43], and in an inscription section called the 'preface', the date was recorded using the Heavenly Stems and Earthly Branches, and the diviner name was noted. Next, the topic of divination (called the 'charge') was posed[44], such as whether a particular ancestor was causing a king's toothache. The divination charges were often directed at ancestors, whom the ancient Chinese revered and worshiped, as well as natural powers and Dì (帝), the highest god in the Shāng society. A wide variety of topics were asked, essentially anything of concern to the royal house of Shāng, from illness, birth and death, to weather, warfare, agriculture, tribute and so on. one of the most common topics was whether performing rituals in a certain manner would be satisfactory.[45]

An intense heat source[46] was then inserted in a pit until it cracked. Due to the shape of the pit, the front side of the bone cracked in a rough 卜 shape. The character 卜 (pinyin: bǔ or pǔ; Old Chinese: *puk; "to divine") may be a pictogram of such a crack; the reading of the character may also be an onomatopoeia for the cracking. A number of cracks were typically made in one session, sometimes on more than one bone, and these were typically numbered. The diviner in charge of the ceremony read the cracks to learn the answer to the divination. How exactly the cracks were interpreted is not known. The topic of divination was raised multiple times, and often in different ways, such as in the negative, or by changing the date being divined about. one oracle bone might be used for one session, or for many[47], and one session could be recorded on a number of bones. The divined answer was sometimes then marked either "auspicious" or "inauspicious," and the king occasionally[48] added a “prognostication”, his reading on the nature of the omen. on very rare[48] occasions, the actual outcome was later added to the bone in what is known as a “verification”. A complete record of all the above elements is rare; most bones contain just the date, diviner and topic of divination,[48] and many remained uninscribed after the divination[49].

This record is thought to have been brush-written on the oracle bones or accompanying documents, later to be carved in a workshop. As evidence of this, a few of the oracle bones found still bear their brush-written records[50], without carving, while some have been found partially carved. After use, the shells and bones which had seen ritual use[51] were buried in separate pits (some for shells only; others for scapulae only), in groups of up to hundreds or even thousands (one pit unearthed in 1936 contained over 17,000 pieces along with a human skeleton)[52

 

 

 

 

Bone divination

From The Book of THoTH (Leaves of Wisdom)

Oracle bones (甲骨片 jiǎgǔpiàn) are pieces of bone or turtle shell used in royal divination in the mid Shāng to early Zhoū dynasties in ancient China, and often bearing written inscriptions in what is called oracle bone script.

The Shāng oracle bones were unearthed in 19th century China, and were sold as dragon bones in the traditional Chinese medicine markets, used either whole or crushed for the healing of various ailments, including knife wounds. They were not recognized as bearing ancient Chinese writing until 1899, when they fell into the hands of two scholars, Wáng Yìróng (王懿榮 Wang I-jung, 1845-1900), who according to tradition was sick with malaria, and his friend Liú È (劉鶚), who was visiting and helped examine his medicine. They discovered, before it was ground into powder, that it bore strange glyphs, which they recognized as ancient writing. Word spread among collectors of antiquities, and the market for oracle bones exploded. Decades of uncontrolled digs followed, and many of these pieces eventually entered collections in Europe, the US and Japan.

Upon the establishment of the Institute of History and Philology at the Academia Sinica in 1928, the source of the oracle bones was traced back to modern Xiǎotún (小屯 Hsiao-t’un) village near Ānyáng in Hénán Province. Official archaeological excavations in 1928-1937 led by led by Lĭ Jì (李濟 Lee Chi) discovered twenty thousand oracle bone pieces, which now form the bulk of the Academia Sinica's collection in Taiwan. Along with the oracle bones were discovered eleven royal-sized tombs. Traditional history recorded that twelve Shang kings ruled at Yīn (殷), the last of the Shang capitals. Since the last king died in the Zhou conquest and would not have received a normal royal burial, this was strong evidence that Xiaotun was indeed the site of Yīn Xū (殷墟 Yin Hsu), the Ruins of Yīn. The inscriptions on the oracle bones, once deciphered, turned out to be the records of the divinations performed for or by the royal household. These together proved beyond a doubt for the first time the existence of the Shang dynasty and the location of its last capital. The writing on them is also the earliest significant corpus of Chinese writing, and is essential for the study of Chinese etymology, as it is directly ancestral to the modern script.

The oracle bones are mostly ox scapulae (shoulder blades) and turtle shells, although some other animal bones, and even the skulls of deer and humans were sometimes used. Both the dorsal or back shell (carapace) and ventral or belly shell (plastron) of turtles were used, and since these are actually a bony material, the term oracle bones is applied to them as well.

After preparation involving sawing or splitting, and drilling pits partway through the bone, a topic was divined upon during a ceremony, and a heated rod was inserted into one of the pits until the bone cracked at that point. Due to the shape of the pit, the front side of the bone cracked in a rough 卜 shape; the character 卜 bǔ or pǔ (meaning "to divine") is a pictogram of such a crack. A number of cracks were typically made in one session, and the diviner in charge of the ceremony, who was sometimes the Shang king himself, then read the crack to learn the answer to the divination. It is not known exactly how the cracks were interpreted, however. The topic of divination was raised multiple times, and often in different ways, such as in the negative, or by changing the date being divined about. one oracle bone might be used for one session, or for many, and one session could be recorded on a number of bones.

The inscriptions are fairly formulaic, generally "(on) AB date (using the sexagenary cycle), divination was performed by person C regarding (topic)". Additional inscriptions include notations as to provenance of the bones or shells, numbering of the cracks made, annotations as to their auspiciousness, proclamations as to the conclusion of the divination session, and sometimes verifications of whether a future event indeed came to pass. The topics, and sometimes the answers, are then thought to have been brush-written on the oracle bones or accompanying documents, to later be carved in a workshop. A few of the oracle bones found still bear their brush-written records, without carving, while some have been found partially carved.

This kind of divination, involving the application of heat or fire, is called pyromancy; when applied to a scapula or plastron, it is also termed scapulomancy or plastromancy respectively. The divination questions or topics were often directed at ancestors, whom the ancient Chinese revered and worshipped, as well as natural powers and Dì (帝 Ti), the Shang high god. A wide variety of topics were asked, essentially anything of concern to the royal house of Shang, from illness, birth and death, to weather, warfare, agriculture, tribute and so on. one of the most common topics was whether performing rituals in a certain manner would be satisfactory.

Evidence of pyromancy and scapulomancy in ancient China extends back to the 4th millennium BC, with finds from Liáoníng Province (遼寧), but these were not inscribed. Evidence of scapulomancy with inscriptions may date back to the pre-Shang site of Èrlĭgāng (二里崗) in Zhèngzhoū (鄭州), Hénán, where burned scapula of oxen, sheep and pigs were found, and one bone fragment from a pre-Shang layer is inscribed with a graph (ㄓ) corresponding to Shang script. By the mid Zhèngzhoū period, the shells of turtles were in use as well.

However, significant quantities of inscribed oracle bones date only to the middle of the Shāng Dynasty, probably in the reign of Pángēng, around 1350 BC when the Shāng capital was moved to Yīn at modern Ānyáng. The vast majority date to around the 13th to 11th centuries BCE, or late Shāng. The oracle bones are not the earliest writing in China. A few Shāng bronzes with extremely short inscriptions predate them. However, the oracle bones are considered the earliest significant body of writing, due to the length of the inscriptions, the vast amount of vocabulary (very roughly 4000 graphs), and the sheer quantity of pieces found (now well over 100,000). There are also graphs found inscribed or brush-written on Neolithic period pottery shards, but whether or not these constitute writing or are ancestral to the Shāng writing system is currently a matter of great academic controversy.

After the Zhou conquest, the Shang practices of bronze casting, pyromancy and writing continued. Oracle bones found in the 1970s have been dated to the Zhōu dynasty, with some dating to the Spring and Autumn period. However, very few of those were inscribed. It is thought that other methods of divination supplanted pyromancy, such as numerological divination using milfoil (yarrow) in connection with the hexagrams of the Yijing (I Ching).

See also

  • Oracle script

References

  • Keightley, David N. (1978). Sources of Shang History: The Oracle-Bone Inscriptions of Bronze Age China.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Berkeley. Hardcover, ISBN 0-520-02969 (out of print); Paperback 2nd edition (1985) ISBN 0520054555.
  • Keightley, David N. (2000). The Ancestral Landscape: Time, Space, and Community in Late Shang China (ca. 1200 – 1045 B.C.). China Research Monograph 53, Institute of East Asian Studies, University of California – Berkeley. Paperback, ISBN 1-55729-070-9.
  • Qiú Xīguī (裘錫圭, 2000). Chinese Writing. Translation of 文字學概論 by Gilbert L. Mattos (Chairman, Dept. of Asian Studies, Seton Hall University) and Jerry Norman (Professor Emeritus, Asian Languages & Literature Dept., Univ. of Washington). Early China Special Monograph Series No. 4. Berkeley: The Society for the Study of Early China and the Institute of East Asian Studies, University of California, Berkeley. Hardcover, ISBN 1-55729-071-7..
  • Xǔ Yǎhùi (許雅惠 Hsu Ya-huei). Ancient Chinese Writing, Oracle Bone Inscriptions from the Ruins of Yin, 2002. Illustrated guide to the Special Exhibition of Oracle Bone Inscriptions from the Institute of History and Philology, Academia Sinica. English translation by Mark Caltonhill and Jeff Moser. National Palace Museum, Taipei. Govt. Publ. No. 1009100250.
  • http://www.newworldencyclopedia.org/entry/Yin_Xu

 

http://www.amazon.com/gp/community-content-search/results?ie=UTF8&flatten=1&search-alias=community-reviews&query=Oracle%20bo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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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왕조와 서주왕조의 역사 | 중국사
전체공개 2008.05.08 11:50
 

제2장 상(商)․주(周)의 정치와 사회


1. 상왕조의 건립과 통치구조


1) 갑골문의 발견과 신정통치 : 前期 - 河南省 偃師縣 二里頭 偃師商城:(B.C 1700경)

                               中期 - 河南省 鄭州 二里崗 정주상성(B.C 1600경)

                               後期 - 河南省 安陽縣 小屯村(B.C 1300경) : 은허


* ?사기?「은본기」에는 시조: 契(帝嚳의 둘째 부인 簡狄이 玄鳥의 알 먹고 잉태(동북아시아지역 일대의 난생설화? 요순시대에 司徒가 되어 백성교화, 우의 치수에도 공헌, 商에 봉해짐)- 14대 대을(大乙 : 成湯)때 하의 桀을 몰아내고 건국(안휘성 박(亳)현 부근, 하남성 언사현?), 19대 盤庚때 은허(하남성 안양부근)로 천도.


* 잦은 천도의 의미 : 전기(契에서 湯王; 8차), 後期(5차) :유목민의 풍습? 종족간 충돌? 홍    수의 범람? 농경지 개간 필요?


* 갑골문의 발견 : 1899년 劉鶚이 발견 : “龍骨”, 卜辭를 통한 왕위세계 : ?사기?와 비교.

                1920년대 말부터 15차례 발굴, 상의 궁전유지, 왕묘추정 대묘 등 1000개 묘                  가 발굴, 대량의 갑골문자

  유악(劉鶚)의 ?찰운장구(鐵雲藏龜)? - 세상에 알려짐. 10여만 편이 출토.

  갑골문 : 한자의 形聲 원칙이 갖추어짐. 제사, 전쟁, 수렵, 재해 등에 관한 내용

  내용은 시기적으로 22대 武丁이후 30대 帝辛까지

  문자발전: 篆體-隸書-楷書-行書-草書로)(한자:象形․指事․會意․假借․形聲․轉注): 문자는 교역을 위한 목적보다는 씨족을 통치하려는 목적에서 등장. 통치자는 문자체계를 통제함


2) 신정통치와 그 변화 : 上帝 - 최고의 신 : 원시적인 태양숭배와 관련 (태양+선조)


 * 상왕조의 통치는 정치와 종교가 일치된 신정국가의 성격


 * 거대한 왕성과 왕묘, 순장자와 貞人집단의 존재

① 전기: 이리두 궁전유적(동서와 남북이 약 100미터 길이: 정치권력의 발생), 偃師商城(거대한 권력의 중심지 기능, 대형건축군, 성안에 작은 성이 배열됨. 상조 건립시기와 일치된다는 견해도. B.C 1700경은 成湯의 시기와 비슷. 


② 중기: 二里崗 鄭州商城 - 한 쪽 벽 길이 -1,700-1,870미터, 높이 10미터, 폭 30미터 - 매일 1만명 이상의 인력이 약 18년 정도의 노동력을 필요. 순장자(갑골문- 14,000명 이상 확인)


* 정인집단 : 왕의 신정적 성격 보좌, 부족연합적 성격 반영(정인집단→왕 一人으로 대표됨)

강력한 왕권의 형성 - 세속적 왕권의 강화 - 청동기와 문자의 장악

청동기 주조기술의 발달 - 상왕의 권위 상징(행정통치와 의식의 필요)


3) 씨족의 사회조직과 누층적인 邑制國家(혈연중심 씨족공동체) -고고학 성과

사회계층 - 지배층(상왕, 왕실귀족, 지방의 씨족장 : 총칭하여 百姓), 평민(농민 -공물과 요역의 부담), 노예(전쟁, 약탈의 경과 - 순장, 제사의 희생물로 구성


  小邑(屬邑)→族邑→大邑(王都) : 族邑(기본단위)의  연합으로 국가가 성립

* 호북성 황피현 반룡성(1974년 발견) 유적 - 남북 290미터, 동서 260미터. 이리강 규모의 약 9분의 1에 해당. 이후 大邑商, 天邑商의 경우 읍의 규모가 반경 약 20킬로미터.


읍의 외부는 封으로 표시. 읍의 외부에는 別邑이 있는 경우, 野(原野) -夷蠻戎狄의 거주지

그 외 方(商의 통치권 바깥에 존재 : 人方, 土方, 羌方 등


商代에 이미 봉건제의 시작 : 갑골문에 甸, 伯, 侯, 子, 南 등의 명칭. 朝覲과 공납의 의무

출정과 제사의 의무(제후)


4) 상의 사회와 경제


 ① 경제발달

당시의 중원지역: 적당한 기후, 王土사상과 族을 기반으로 한 씨족공동체에 의한 집단 경작방식. 농기구의 개량(청동기보다 석기가 많음)보다는 집단적, 조직적 노동력의 동원, 동물 사역(개․소 등), 관개와 시비법․수수․고량․기장․피․맥․조․벼 등의 생산, 상업의 발달(子安貝․주석 등이 화폐로 사용), 일부 공납과 교역과 약탈의 성격이 모두 보임.

 ② 사회구조

지배층-평민, 노예(피지배 하층민)으로 구성. 商王(‘余一人’이라 자칭: 전제군주), 다음으로 百姓(왕실귀족이나 작위소유층을 총칭, 엄청난 부장품과 순장을 통한 지배력 행사), 小人 혹은 王人 등은 평민을 가리킴. 공물, 병역과 요역의 의무. 부장품이 보이지 않는 묘의 주인. 노예(전쟁포로, 가내노예의 성격, 순장이나 제물로도 사용. 소, 양 등과 함께. 이후 점차 순장자의 숫자가 감소됨. 노동력으로 인식했다는 증거. 

 ③ 종교

자연신, 조상신 가운데 최고의 신은 帝 혹은 上帝 : 商王이 죽으면 帝가 되어 우주와 인간의 질서에 간여. 이후 帝는 周의 天의 개념에 의해 주왕과 천의 관계가 상왕과는 달라짐. 이 시기에 있어서 神․天․帝 등과 관련된 고대 중국인의 종교적 관념의 변화는 제사․의례 등 현실적인 필요와 깊은 관련. 이후 정치적 추이에도 밀접하게 작용.  


2. 서주왕조의 성립과 봉건체제


1) 상․주의 교체와 주공의 동방경영


 * 중국사에 있어서 西周의 위치 : 특히 周公과 봉건제가 美化 - 春秋戰國은 봉건을 파괴함

 * 특히 信古와 疑古派의 대립

  西周의 이상화 : 시호제도, 봉건제도, 종법질서, 가부장제도의 확립, 渭水분지( 西周의 鎬                     京, 秦漢隋唐의 수도 장안부근)

* 西周(B.C 1122-770), 東周(B.C 770-221) : 春秋(B.C 770(노 은공 원년)-403(애공 14년)

                                         戰國(B.C 403-221), 그 이전 B.C453 說

* 周의 건국(?사기?「주본기」) : 시조 后稷(제곡의 왕비 姜原이 들에서 거인 발자국 밟은 후 잉태, 기(棄)를 낳음. 요순시대 農師로 공을 세워 섬서성 무공현에 분봉됨. 후일 농업신으로 추앙; 族姓은 姬)- 12대후 古公亶父때 섬서성 岐山- 季歷거쳐-文王때 豐으로 천도, 발전의 기틀, 은과 갈등 : 武王- 牧野의 싸움에서 승리(B.C1067?, B.C1046?)

* 殷周혁명 : 원시적 종교관에 기초한 신정적 성격의 商을 멸망 -봉건제도, 종법제도 실시 등 새로운 통치원리 부여. 주는 상과 끊임없이 갈등(거역과 복속을 반복함)

  武王의 鎬京으로 천도 : 은의 故土 감시(周初의 봉건제도 : 管叔, 蔡叔 등- 후일 三監의                             반란 : 주공의 진압(3년 만에)

* 周公 旦이 成王 보좌 : 宗周(鎬京)와 成周(洛陽)의 兩京제도 - 영토분할에 의한 동방경영?

* 西周초기의 주변민족 :

  황하하류와 산동지역 - 東夷

  淮水유역: 淮夷(齊, 魯건설)

  남방의 楚,  서북의 犬戎, 玁狁

* 宗周는 B.C771년 융적의 침입 - 낙양(成周)로 천도. 그 이전을 西周라 칭함


2) 天命사상과 봉건제․종법제의 채용

* 周族이 숭배한 최고의 신은 天 - 우주 창조, 천지와 자연의 법칙 주재, 인간사 규제의 절대신. 문왕에게 천명을 내림(?서경?) 상의 토벌이 하극상이 아닌 천명을 받아 天의 의미를 수행한 것. 주 왕조 창업의 정당성 강조


* 周代의 天 : 인간의 노력, 즉 德의 실천으로 천명이 좌우. 인간이 신들의 지배에서 벗어나 자유를 획득하였음을 의미, 제한된 자유는 신의 응보


* 天命사상 : 새로운 정치사상과 세계관을 형성. 天命-天子-천하통치(華夷를 망라한 세계질서의 주재자. 통일제국 등장을 가능하게 하는 이념적 기반, 왕권의 절대성, 전제지배의 근거. 德治가 중심 - 文治우위의 통치이념 (문왕이 무왕보다 존중되는 배경) 관료제도에도 영향

→ 무력적 왕조교체의 합리화, 상왕조 유민의 제어, 주왕의 절대성 확보, 주왕실의 신성한 성격규정, 주 통치의 유일성 확립에 결정적인 역할(도덕의 실천, 예의 중시 등)

* 상의 마지막 주왕(紂王)을 악정의 상징으로 주의 문왕과 대비시킴. 오랜 전쟁에 대한 염증, 지배층의 부패, 인심의 이반 등.


* 周公 단(旦) : 무왕의 상 멸망 후, 紂의 아들 무경으로 하여금 상왕조의 유민통제, 상의 王畿지역에 무왕의 동생 管叔․蔡叔․霍叔 등 소위 ‘三監’의 설치, 무경 감시.

무왕의 아들 成王 즉위- 주공이 섭정, 보좌. 관숙, 채숙과의 갈등, 삼감의 반란, 주공의 동방정벌, 3년여에 걸친 원정의 성공, 왕위분쟁의 문제가 확대된 것이 아닌가?


* 봉건제와 종법제


봉건제 : 전체 제후국이 주초에는 약 130-180개 국, 동성제후 약56개국, 이성제후 약 70여개국. 제후에게는 조근과 공납의 의무가 요구됨. 魯․晉․宋․衛․燕․齊 등 주요 제후국.

주왕의 직할지 王畿를 제외하고 분봉한 땅을 國이라 함. 경제적 자립성을 지님. 都와 다시 봉건관계. 즉 國은 제후의 근거지, 都는 제후에게 분봉 받은 卿, 대부의 근거지. 전체적으로는 王土사상. 주공을 거쳐 康王․昭王․穆王을 거쳐 계속 시행됨.

* 수도: 宗周(종묘의 존재)와 함께 成周(낙읍;낙양)건설. 정치군사적 요충지에 동방지역지배의 거점. 당시 세계의 중앙이라고 인식. 주왕조가 당시의 세계지배를 완성함을 의미. 경제적으로도 중요, 조세인 곡물의 집적지 기능. 주 6군의 상비군 주둔.

* 주 왕실의 군사조직(?周禮?) : 伍(5명)→兩(5伍)→族(4兩)→師(5族)→旅(5師)→軍(5旅)로 구성, 1군의 병력 12,500명, 보병과 전차대로 구성, 주력은 농민중심의 보병.


봉건제를 매개로 광대한 지역에서의 정치적 통합을 가능하게 함. 이를 유지시키는 것이 바로 천명사상과 종법제도. 천명사상의 경우 주왕과 봉건제후의 관계를 보다 보편적인 규범의식으로 강화해 줌. 천명은 혈연적 관계를 초월한 개인적 덕능에 기초한 것으로 정당화될 수 있음.


종법제 : 주왕을 정점으로 한 주왕조 전체가 한 계통의 혈연조직에 포섭되는 것을 이상으로 하는 국가지배이념. 최고권력자와의 혈연적 친소에 따른 누층적 신분질서. 적장자상속.

종족(氏族)은 총본가인 大宗을 중심으로 단결, 그 支派인 小宗은 대종에 예속. 대종의 적장자를 제외한 別子는 모두 각각 다시 小宗을 구성.

* 결국 서주는 혈연조직에 바탕을 두고 종묘와 사직을 중심으로 한 도시국가의 연합체. 이러한 도시국가간의 연결관계를 봉건제․종법제를 통해 유지했으며, 그것을 이념적으로 지탱해준 것이 천명사상이었다.

 

3) 서주의 발전과 관료제도 정비

* 成王․康王에 걸친 장기간의 평화시대-세력범위의 확대, 특히 昭王의 南征과 穆王의 西征주목할 필요. 주와 남방의 楚, 주와 서방의 犬戎의 대립. 주의 문화적 범위는 양자강 중하류 지역인 호남과 江西일대까지 영향. 최근의 발굴 성과로는 남쪽의 광동, 북의 요녕지방까지. 그러나 후일 특히 남방과의 교류가 불분명, 자연조건이나 농경조건이 서주의 진출에 방해요소가 됨.

* 관료제도 : ?주례?의 6官 : 天官(宮中諸官)․地官(地方行政,교육)․春官(제사)․夏官(軍政)․秋官(司法)․冬官(製作)로 구성. 그 이하에 270여 관직의 직제와 관원수, 직무내용 기재. 그러나 이 ?주례?는 전국시대 후반의 기록이라는 것이 통설. 청동기 명문의 자료에 보면, 서주의 중앙관직 기구를 경사료(卿事寮)라고 하며, 장관은 卿士, 그 아래 司土(토지)․司馬(군사)․司空(조세, 노역관리) 중심.


4) 서주시대의 경제


  * 정전제(井田制)의 실시문제: 이후 토지제도(阡陌制-限田制-屯田制-占課田制-均田制-莊園制 등)

* 맹자에 의해 이상화. 공전과 사적, 노동력 형태의 租.


씨족공동체하의 가능한 제도, 勞役地貸(助法), 농업생산기술의 발전, 퇴비상용, 제초를 위한 호미의 사용, 배수, 관개시설의 확충


* 정전제 실시상의 문제 : 휴경농법(당시 기술로는 필수)이 안 보임, 일정 연령을 기준으로 한 토지의 지급과 환수규정 없음, 정기적인 재분배가 안 보임, 경지내의 수로인 구혁(溝洫) 조직이 안 보임, 농사철에 오두막(廬)거주 농한기 읍거주 변화가 안 보임 등

   

* 정전제의 이해 : 맹자의 주장대로 토지국유로 보기보다는 토지사유나 영구점유 이전의 촌락사회 내부의 토지분배 관행과 수취관계로 보는 편이 합리적일 것 (씨족장의 지휘아래 집단경작방식, 공납 노역의무 부담 등 확인.


* 정전제의 의의 : 위정자들이 그 시행을 믿고 이상시대로의 복귀를 희망할 수 있었다는 것. 이후 역대 국가에서는 소농민의 생활보호와 대토지 소유의 억제를 위하여 빈번하게 정전제의 부활을 주장하고 추진.


* 제후의 농민에 대한 지배는 씨족장을 통해 읍 단위로 이루어짐. 이후 제후들은 산림개간 등을 통해 새로운 경지 확보. 농민과 제후의 직접적인 지배관계.

결국 씨족공동체는 서주 일대를 통해 해체되어 갔고, 이는 혈연을 기반으로 한 종법적 봉건제에 균열을 가져옴. 혈연관계 필연적으로 소원해짐. 토착세력과의 협력이 더욱 필요. 자립적 경향이 더욱 강해짐.


4) 서주왕조의 쇠락


* 토지의 규격화 : 경제적 기반의 약화

* 주 왕실과 夷狄 : 정벌과 항쟁. 

* 幽王과 褒姒 : 厲王의 폭정과 國人의 저항 - 共의 伯인 和에 의한 춘자 업무 대행 공화시대(B.C841-828)의 전개. 14년간의 주왕 공백시대. 宣王의 즉위와 일시적 中興, 幽王의 폭정과 후사문제로 인한 내분, 견융의 침입→平王(유왕의 태자 의구(宜臼)의 成周(낙읍)천도 (B.C 771) : 서주의 멸망과 동주시대의 전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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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나라 주나라 역사

상왕조의 건립과 통치구조

2.1.1. 갑골문의 발견과 신정통치

기록에 의하면 상족의 조상은 설(契)인데, 요순시대에 백성을 교화하고 후에 우를 도와 치수에 공을 세워 상땅에 봉건되었기 때문에 상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설에서 14대째에 탕왕(湯王)이 등장해 하왕조의 폭군 걸왕을 물리치고 상왕조를 개국했다. 이후 수차례 도읍을 옮겼다가 19개째인 반경(盤庚) 때에 은(殷)으로 옮겨 마지막 주왕(紂王)까지 273년간 유지되었다. 상이라는 명칭과 더불어 문헌에는 은이라는 칭호도 보이는데, 이것은 상왕조 멸망 후에 주족(周族)이 상의 주민들을 경멸해 사용하던 호칭이라고도 하고, 상왕조의 마지막 수도가 은이었던 데서 연유한다.

전통시대에 하, 상, 주의 삼대(三代)에 대해 아무도 그 실존에 대해 의심을 품지 않았고, 이상적인 시대로 묘사되어 왔다. 그러나 전통적인 상고관에 대한 부정이 의고학파에 의해 시작되면서 상왕조도 그 실재를 의심받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청조 멸망 직전에 1899년에 갑골문(甲骨文)이 발견되고, 이곳이 상왕조에서 만들어진 복점의 기록 즉 복사(卜辭)라는 사실이 밝혀지고, 이후 왕위세계도 전해지던 것과 거의 차이가 없다는 것이 드러남에 따라 그 실재성에 대해 적극적인 재평가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갑골문은 1899년에 유악(劉악, 鐵雲)이 학질의 한방약으로 쓰이던 '용골(龍骨)'이라는 뼈를 발견한 데서 비롯되었다. 뼈에는 옛 문자가 쓰여져 있었는데, 고문자에 대한 이해가 깊었던 그는 이전에 볼 수 없었던 오래된 시기의 문자라는 것을 알아채고 그것의 수집과 연구에 몰두하여 1903년에 『철운장귀(鐵雲藏龜)』라는 책을 출판함으로써 갑골문의 존재가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갑골이란 주로 거북의 복갑(腹甲)이나 소의 어깨뼈(견갑골)를 말하며, 갑골문이란 갑골의 이면에 불에 달군 가는 나무를 눌러 급속히 팽창시키면 국부적으로 표면에 균열이 생기고, 그 균열의 상태로 점을 친 후에 그 주변에 점을 친 날짜와 점을 친 사람의 이름, 점친 내용 및 그 결과 등을 새겨넣은 글을 말한다.

이후 고고학자들은 갑골문이 주로 출토된 하남성 안양시(安陽市) 소둔촌(小屯村)이 은허(殷墟)임을 밝혀내고, 이 지역을 발굴을 통해 다량의 갑골문을 획득하였다. 중일전쟁 시기를 제외하고 꾸준히 발굴조사가 행해진 결과 지금까지 약 10만여 편에 달하는 갑골문이 출토되었으며, 궁전의 유적과 왕묘라고 추정되는 대묘를 포함한 1천여 개의 묘가 발굴되었다. 갑골문은 이미 육서(六書)에 의한 한자의 형성원칙이 갖추어져 있어 현대 중국어의 원형을 보이고 있으며, 그 내용은 주로 조상신이나 자연신에 대한 제사의 가부, 전쟁의 가부, 농사의 풍흉, 바람과 비의 유무, 수렵이나 여행시의 재해 유무, 10일이나 매일의 재해 유무, 질병이나 임신 등 다방면에 걸쳐 있는데, 가장 많은 것은 제사에 관한 것이다. 또한 시기적으로 출토된 갑골문은 대개 22대 무정(武丁) 이후 마지막 30대인 제신(帝辛, 紂王) 때까지의 것이고, 점복의 기록이라는 자료상의 한계는 있지만 이를 통해 상대 특히 후기의 모습에 대한 이해가 가능해졌다.


2.1.2. 신정통치와 그 변화

상대에는 상제(上帝)가 우주의 지배자이며, 그 의지에 따라 모든 미래가 결정된다고 생각하였다. 갑골문은 바로 상대인이 그 의향을 묻기 위해 행한 행위의 기록이었기 때문에 제사와 관련된 기록이 유난히 많으며, 그 중심이 되고 있는 것은 선왕(先王)과 선비(先 )에 대한 제사였다. 상대인은 태양은 지중에 10개가 있어 그것이 매일 하나씩 교체하여 천상에 나타나 10일마다 한 번씩 돈다고 생각하였다. 10개의 태양에는 이름이 붙어져 있는데, 일갑(日甲)부터 일계(日癸)까지 10간(十干)이 이것이다. 결국 상대인의 정신구조의 기저를 이루는 것은 이처럼 원시적인 태양숭배였다. 이러한 왕조제사의 원형은 원시적인 태양관과 씨족 내부의 선조숭배였고, 이 양자가 결합하여 왕조의 제사의 중핵을 이루었고, 따라서 상은 신정국가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 할 것이다.

이러한 측면을 잘 보여주는 것이 바로 거대한 규모의 왕성·왕묘와 다수의 순장자 및 정인(貞人)이라는 존재이다. 상문화는 고고학적 발굴에 따르면 전기(B.C. 1700년경), 중기(B.C. 1600년경), 후기(B.C. 1300년경)으로 나눌 수 있는데, 갑골문을 포함한 은허유적은 후기의 것이다. 전기의 대표적 유적은 이리두에서 발견되었는데 용산문화의 영향을 받으면서 이리두 후기에 동서와 남북이 각각 약 100m에 달하는 대궁전의 유적과 상대의 성터(偃師商城)가 발견된 바 있다. 중기인 이리강(二里崗)시기에는 한쪽 벽의 길이가 1,700-1,870m, 높이 10m, 폭 30m에 달하는 거대한 성벽이 발견되었는데(鄭州商城), 축성에 필요한 인원과 기간을 추산해보면 매일 1만명 이상의 인원이 약 18년 정도 걸렸을 정도이다. 이것은 엄청난 정치력이 전제되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이것은 결국 강력한 왕권의 출현을 의미하며, 초기의 왕과는 달리 후기가 되면 다른 씨족장급들과는 현격하게 구별되는 신적인 권위를 지닌 존재가 출현하게 되었다. 이와 함께 이리강기 후기부터 순장자가 발견되는데, 안양기에는 300명 이상의 순장자가 발견된 곳도 있다. 더욱이 노예를 제사의 제물로 바치는 경우도 많았는데(伐祭), 갑골문에는 무려 2,500명 이상의 희생을 바쳤다는 기록이 있으며, 현재 발견된 갑골문에서 확인된 희생은 모두 14,000명 이상에 달한다.

초기 지배씨족에서 교대로 선출된 상왕이 절대적인 권력을 보유했다고 볼 수는 없다. 왕은 당시 점복에서 길흉을 판단할 수 있는 지상의 유일한 존재였다. 갑골을 가지고 점을 치는 사람은 정인이라는 전문직이지만 그 의미의 판단은 왕 혼자였고, 왕은 신의 세계와 인간 세계의 유일한 매개자였다. 정인은 명칭에 지명이나 씨족 혹은 부족의 이름이 보이는 것으로 보아 왕이 지배하는 소국가나 부족으로부터 대표자 겸 봉사자로 파견된 자로 보인다. 갑골문에서 확인되는 정인은 120명 정도인데이들은 정인기구를 구성해 상왕의 측근으로서 우대를 받았으며, 왕이 바뀌면 정인의 명단 또한 바뀌어 왕의 신정적인 성격을 보좌하는 한편 상의 신정통치가 지닌 부족연합적 성격을 반영한다.

그러나 후기로 갈수록 신정적인 성격은 약화되고 전제적인 세속왕권을 지닌 상왕으로서의 성격이 강화된다. 이는 왕위의 계승에서 확연히 드러나는데, 초기에 형세상속이었던 것이 말기 4대에는 부자상속으로 어느 정도 안정을 보인다. 물론 형제라고는 해도 육친관계보다는 광범하다. 일족이던가 아니면 일족이 아니어도 의제적(擬制的)인 혈연관계를 통해 충분히 계승할 수 있었다. 따라서 당시의 부자, 형제관계는 보다 넓게 생각할 필요가 있다.

정인기구는 상대를 통해 계속 축소·약화되는 경향을 보이며, 상 말기에는 왕권에 예속되어 버린다. 이것은 상대의 신정적인 성격의 왕권이 세속적 왕권이 강화되면서 그 의미가 축소되고 결국 왕권에 흡수되었음을 뜻한다. 강한 왕권과 그것이 지닌 권위를 유지하기 위해서 문자와 청동기의 장악 역시 중요하다. 상대는 정신문화의 신정적인 측면을 유지하면서도 물질문명은 오히려 후대인 주대보다 발달하였다. 그 대표적인 것이 청동기인데, 이리두문화 후기부터 시작되었다고 추정되는 청동기의 주조는 중국의 독자적인 자생적인 발달에서 비롯되었다고 추정되는데, 주조기술이나 정교함에서 현재까지 타의 추종을 불허하며, 이리강기에는 높이 1m에 달하는 대형 방정(方鼎)이 주조되기도 하였다. 이 청동기는 바로 권위의 상징이었고, 상왕의 권위를 대표한다. 문자는 이미 갑골문에서도 잘 드러났듯이 왕권이 강화되면서 행정통치와 의식에서의 필요에 따라 크게 증가하였다. 이리강기에 겨우 몇 개에 지나지 않던 갑골문이 안양기에 대규모로 출토된 것은 바로 이를 뒷바침하는 것이다.


2.1.3. 씨족 사회조직과 누층적 읍제국가

상대의 계층은 대체로 지배층, 평민, 노예로 구성되었다. 지배층은 상왕을 중심으로 왕실귀족이나 지방의 씨족장들을 포함한다. 상왕은 정치적인 지배자이자 종교적인 수장이었다. 상왕과 더불어 성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지배층으로서 이들을 총칭하여 백성(百姓)이라 불렀다. 이들의 묘에서 출토된 부장품과 순장자로 추정컨대 막강한 지배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평민은 대개 농민으로서 국가에 대해 공물과 요역의 의무를 졌다. 노예는 전쟁이나 약탈을 통해 형성되었다. 이들은 주로 순장이나 제사의 희생으로 사용되었다.

상의 지배씨족은 이념적으로 10개로 배열된 내혼조직을 갖고 있어서 각 군도 갑, 을, 병, 정…계의 태양명으로 불려졌다. 각 군이 태양의 손자라는 관념을 갖고 있었을 것이다. 왕이나 왕비는 불규칙하지만 교대로 이 갑군, 을군, 병군… 등에서 선출되었다.

이를 보면 상은 혈족집단을 핵으로 하는 읍(邑)을 기반으로 한 소국가의 연합적 성격으로 출발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 읍을 서아시아나 그리스·로마와의 유사성 때문에 도시국가라 부르기도 하는데, 일반적으로는 읍제국가라 부른다. 대읍-족읍-속읍(소읍)이 누층적으로 맺어진 것이 상의 기본적인 국가조직이었다. 국가의 기본을 이루는 것은 족읍이었고 이것은 신석기시대의 취락에서 발달한 것이라 보인다. 이런 족 사이의 연합·협력 관계가 점차 통합조직을 형성하고 국가가 형성되었고, 지배씨족과 그 거주지로서의 대읍을 만들어냈다. 따라서 상의 초기에는 대읍이 족읍을 지배했다기 보다는 족읍의 연합에 의한 국가였다고 보는 편이 신정국가적인 성격으로 보아도 자연스럽다. 족읍의 크기는 1974년에 발견된 호북성 황피현의 반룡성(盤龍城)에서 추정할 수 있는데, 남북 290m, 동서 260m의 크기이다. 규모로 볼 때 족읍의 전형적인 크기 중의 하나이며 시기적으로는 상 중기 이리강기의 것이라 추정된다. 그렇다면 정주성과 비교할 때 면적으로 약 1/9 크기였다.

읍은 기본적으로 집락(集落)으로 구성되지만, 집락만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읍이란 단순한 거주지만이 아니라 경작지나 산림지역을 포함한 지역적인 영역을 의미하고 있었고, 따라서 읍이란 주민과 주민의 생활기반인 토지 전체를 일컫는 용어였다. 갑골문에서는 상의 수도를 '읍'이라 불렀다. '대읍상(大邑商)', '천읍상(天邑商)'이 그것이다. 이 읍의 규모는 반경이 약 20㎞에 달한다. 또한 이후 서주의 성주(成周)인 낙읍(洛邑)도 대략 한 변이 28㎞ 정도의 크기이기 정방형이기 때문에 상읍(商邑)의 크기와 거의 일치한다. 그리고 성벽이란 읍의 내부를 구획하는 것이고 읍 전체를 둘러싼 것은 아니다. 성벽은 대략 한변 2㎞ 정도가 왕도로서 보통이다.

읍의 바깥은 바로 '봉(封)'으로 표시한다. 봉이란 흙쌓기인데, 토지의 경계를 확정하면서 어떤 경우는 하천에 의해, 어떤 경우는 구릉에 의해, 어떤 경우는 도로에 의해 경계가 지워지면서 요소요소에 흙쌓기가 이루어진다. 따라서 읍의 경계는 봉(封)에 의해 구분되며, '봉건(封建)'이란 바로 이러한 경계를 세우는 작업에서 비롯된 용어이다. 읍의 외측에는 별읍(別邑)이 있는 경우도 있고, 야(野)가 있는 경우도 있다. 야란 원야(原野)를 의미하는데, 이른바 이만융적(夷蠻戎狄)에 속하는 사람들이 거주한 것으로 생각되며 읍인과 야인의 차이는 씨족제에 있었다.

당시에는 도시국가로서의 읍만이 존재했던 것은 아니다. 갑골문에는 방(方)이라는 존재가 자주 등장하는데, 방은 상왕실에 대해 적대적이거나 어느 정도 독립적인 위치를 가지면서 상왕의 통치권밖에 있는 소국가를 가리킨다. 이들은 반드시 단일한 세력만은 아니며 몇 개의 부족을 통칭하는 개념이라고 보아도 좋다. 대표적인 방은 인방(人方), 토방(土方), 강방(羌方) 등이 존재했으며, 주족(周族)도 초기에는 주방(周方)이라 불렸다. 이후 주후(周侯)의 기록으로 보아 후기에 상왕조의 정치질서에 편입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일반적으로 봉건제는 주왕조에서 시작되었다고 하지만 최근의 연구에 의하면 상대에도 이미 봉건제가 시행되어 갑골문에 '전(甸)', '백(伯)', '후(侯)', '자(子)', '남(男)' 등의 명칭이 확인되며, 제후는 상왕에게 조근(朝勤)과 공납(貢納)의 의무를 졌고, 왕의 명에 따라 출정(出征)과 제사에 참여하고 있음이 확인된다. 또한 각종 행정직을 담당한 관직명이 다수 발견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서주의 관료제에 뒤지지 않았다. 따라서 상대의 통치구조 역시 읍제국가에 기반한 봉건제로 보아도 좋을 것이다. 다만 잦은 천도와 초·중기에 우세했던 형제상속제를 본다면 왕권의 안정이 주대에 미치지 못했으며, 상제를 받드는 신정적인 성격이 강하였다는 점에 차이는 보인다.

모든 토지는 왕의 토지로 인식되었고(王土思想), 족(族)을 기반으로 한 씨족공동체에 의한 집단 경작방식이 행해졌다. 경작자는 평민이었는데, 농업생산은 농기구의 개량보다는 집단적이고 조직적인 노동력의 동원, 개나 소 등 동물의 사역, 관개와 시비법 등 농업기술면에서의 진보에 의해 크게 발전되었다. 주된 생산물은 수수, 고량, 기장, 피, 맥, 조, 벼 등이었다. 농업생산력의 발달에 따라 대내외적인 상업이 발달하였는데, 그 예를 동방과 남부지역에서 생산되는 자안패(子安貝)와 주석 등이 화폐로 기능하였던 데서 찾을 수 있다. 이것은 공납이나 약탈의 결과도 있지만 대개의 경우는 교역의 산물이었다.


2.2. 서주의 '봉건'체제

2.2.1.상주의 혁명과 주공의 동방경영

주족은 농업신인 후직(后稷)의 자손이라고 전해지는데, 위수(渭水) 유역에서 흥기하였다. 이곳은 비옥하여 농경에 적합할 뿐만 아니라 감숙 방면에서 서방의 문화가 중국으로 통로에 위치해 있다. 기록에 의하면 12대를 지난 고공단보(古公亶父) 때에 기산(岐山)의 기슭, 이른바 주원(周原)으로 이주하여 융적(戎狄)의 풍속을 버리고 성곽과 궁실을 축조하여 읍락(邑落)을 구성했다고 한다. 이것이 맞다면 상의 무정(武丁) 시기부터 1-2세기 이후의 일이 될 것이다. 그러나 갑골문에 의하면 이미 무정시기부터 주후(周侯)롤 토벌하는 일에 대해 점을 치고 있어 고공단보 이전에 주는 상에 위협적인 존재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고공단보의 막내아들 계력(季歷)이 뒤를 이었는데, 당시의 상왕 문정(文丁)에 의해 살해되었다고 한다. 계력이 살해되자 창(昌)이 뒤를 이었는데 이가 주왕조의 기초를 쌓은 서백(西伯)으로 후일의 문왕(文王)이다. 서백은 50년간 재위했다고 하는데, 죽기 전에 기산의 기슭에서 풍(豊)으로 수도를 옮겼다. 풍은 관중(關中) 평야의 요충지로 이후 상을 무너뜨리는 전진기지가 되었다.

서백이 죽은 후 무왕(武王)이 즉위해 12년만에 서방의 제후를 규합해 상을 정복하였다. 이를 은주혁명(殷周革命)이라고 하는데, 이에 의해 6백년 이상 지속되었던 상왕조가 멸망했다. 시기적으로는 11세기 전반기의 일이다. 은주혁명의 의의는 단순히 왕조가 교대되었다는 것보다, 상왕조가 장기간에 걸친 읍제국가의 틀 속에서 점차 왕권이 강화되고 세습화가 진행되면서 전제화가 이루어졌지만, 그 통치의 기반은 여전히 원시적인 종교관에 기초한 신정적인 성격을 띠고 있었던 데에 있고, 따라서 이후 등장하는 서주는 새로운 통치원리의 내용을 부가하지 않을 수 없었던 데에 은주혁명의 의의가 있다.

무왕은 상을 정복하고 주로 돌아와, 일족과 공신에 대한 봉건에 착수했고 수도를 풍에서 호(鎬)로 옮겼다. 무왕이 천도한 수도를 당시 종주(宗周)라 하였다. 무왕은 상을 정복한 지 2년만에 병사하고 성왕(成王)이 뒤를 이었다. 그러나 나이가 어렸기 때문에 주공(周公) 단(旦)이 섭정(攝政)이 되었다. 일설에는 주공 단이 왕이 되었다고 하는 견해도 있지만 확실치 않다. 그러나 상의 옛 땅에 봉해진 무왕의 동생 관숙(管叔)과 채숙(蔡叔)이 상조의 후예인 녹보(祿父)와 함께 반란을 일으켰다. 이를 삼감(三監)의 난이라 하는데, 주공이 이를 진압하는 데 3년이 걸렸다. 일단 국가통치를 안정시키자 주공은 현재의 낙양(洛陽)에 상의 유민을 동원해 낙읍(洛)邑을 건설하고, 이를 동방통치를 위한 전진기지로 삼음과 동시에 대대적인 봉건을 실시하였다. 이 낙읍을 성주(成周)라 하는데, 성왕은 한때 수도를 종주에서 성주로 옮기려고 했던 것 같다. 그러나 성왕은 종주로 돌아갔고, 주공이 성주에 남아 동방을 다스렸다. 아마 주의 영토는 실제로는 분할통치되었던 듯하다. 종주는 B.C. 771년 융적(戎狄)의 침입을 받아 파괴되고 주는 성주로 수도를 옮겼다. 이 때까지를 서주라 부른다.


2.2.2. 천명사상과 봉건제·종법제의 채용

주족이 숭배한 최고의 신은 천(天)이었다. 천은 우주를 창조하고 천지와 자연의 법칙을 주재함과 동시에 인간사를 규제하난 절대신이었다. 『서경(書經』에 따르면 이 천이 주의 통치자였던 문왕 창에게 포악한 상을 멸망시키고 주를 건국하라는 천명(天命)을 내렸다고 적고 있다. 또한 주초에 상 유민의 반란을 진압한 주공으 원래 천명이 하왕조에 있었지만 걸왕(桀王)이 실정(失政)하여 상의 시조인 탕왕(湯王)에게 전수되었고, 다시 상왕조의 주왕(紂王)이 실정하자 주왕조의 문왕에게 천명이 내렸다고 설명하고, 따라서 주의 상 정벌은 제후가 왕을 무력으로 공격한 하극상이 아니라 천의 의지를 수행한 것이라고 강조하여 주왕조의 정당성을 강조하였다. 상대의 상제는 인간의 운명을 절대적으로 지배하는 존재이고, 점복을 통해 그 의지를 알 수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주대의 천은 인간의 노력 즉 덕(德)의 실천에 의해 천명이 좌우된다고 하는 관념으로 발전하였다. 이것은 인간이 신들의 지배에서 벗어나 자유를 획득한 것을 의미하며, 다만 그 자유에 일정한 제약을 둔 것이 신의 응보라는 논리이다.

천명사상으로 주의 무력정벌을 합리화시킨 주의 통치이념은 주왕실에 새로운 정치사상과 세계관을 형성하였다. 우선 주왕은 천명을 받은 군주이기 때문에 천자(天子)이고, 따라서 천자는 천을 대신해 천하를 지배해야 하는 유일한 존재로 설정된 것이다. 따라서 천자에게는 화이(華夷)를 망라한 세계질서의 주재자가 되어야 했다. 이러한 관념은 주왕조에 위엄과 권위를 주었을 뿐 아니라 이후 중국 역대 왕조의 황제들에게도 공통되어 나타난다. 다만 화이를 불문하고 천자는 하나일 수밖에 없고 모든 정치질서는 천자가 주재해야 하기 때문에 이후 나타나는 분열을 극복하고 통일제국이 등장하게 되는 이념적 기반을 제공하였고, 또한 왕권에 절대적인 권위를 부여해 전제적인 지배가 가능하게 되는 기반도 제공하였다. 또한 천명의 이동은 통치자의 덕치(德治)에 절대적으로 좌우된다는 논리에서 자연적으로 문치(文治) 우위의 통치이념이 자리잡게 되었다. 천명을 주고 받을 때는 비록 불가피하게 무력이 동원된다고 해도 천자로서의 통치는 무력이 아닌 문치여야 한다는 이념이 그것인데, 이 때문에 주왕조의 창업자로 실제 상을 무력으로 멸망시킨 무왕보다 천명을 받았다고 하는 문왕을 거론하게 된 것이다. 주의 천명사상은 또한 문치를 위한 제도적인 장치로서 중국 관료제도 발달에 기여하였다. 상대의 관직이 주로 제사와 군정과 관련된 것이 많은 데 반해 서주의 관직은 매우 다양하고 전문직이었으며 속관을 두어 업무를 처리하였다.

주왕조는 상으로부터 물려받은 광대한 영토와 선진적인 문화를 자랑하던 상왕조 계열의 제후국의 문제도 처리해야 했다. 그래서 상대의 봉건제를 채용하는 한편 여기에 주왕실을 중심으로 한 종법제를 결합시켜 왕실과 제후와의 관계를 정치적인 면 이상으로 발전시켰다. 주초에는 공신과 왕실의 자제와 일족을 각지에 분봉하여 상의 유민과 상왕조에서 이어진 제후국 특히 동방의 제후들을 견제하였다. 물론 일부 지역에서는 상조 일족의 읍을 해체하여 종주로 데려가기도 하였다. 분봉된 제후들은 주왕실의 일족이 약 56개 국, 이성(異姓)제후가 약 70여개 국으로 추측되며, 전체 제후국은 약 130-180개 국이었다고 추산된다. 이들 제후의 통제책으로서 상대의 봉건제에서 사용되던 조근과 공압의 의무가 요구되었다.

당시 주왕의 직할지인 왕기(王畿)를 제외하고 분봉한 땅을 국(國)이라 불렀다. 국은 나름대로 경제적 자립성을 지니고 있으면서 정치적으로 도(都)와 다시 봉건관계를 맺고 있다. 아마도 국은 제후의 근거지였을 것이고 도는 제후에게 분봉을 받은 경(卿)·대부(大夫)의 근거지였을 가능성이 크다. 도의 지배층인 경·대부가 제후에 대해 갖는 부담은 제후가 주왕에 대해 갖는 부감과 비슷했을 것이다. 봉건의 형태는 간단히 말해 주왕실에서 그 일족이나 친족을 파견해 새로운 읍을 건설하는 형태이다. 이것은 주의 지배층이 이제까지 상조와 연합하고 있던 읍제국가 위에 새로운 지배자로 밀고 들어온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그곳에는 이전부터 거주하고 있던 여러 씨족이 거주하고 있었고, 당연 종주의 권위로 봉국에 들어온 지배층과 여러 문제가 야기되었다.

봉건제를 매개로 광대한 지역에서의 정치적 통합은 가능하게 되었지만 이러한 통합을 보다 효과적으로 유지시켜 준 것은 종법제(宗法制)와 천명사상이었다. 종법은 대대로 주왕은 적장자가 부친의 뒤를 이어 대종(大宗)이 되고, 적장자의 동생들은 소종(小宗) 된다. 제후국에서도 마찬가지로 대종이 제후가 되고 그 동생을 소종으로 삼는 것이다. 즉 주왕을 정점으로 한 주왕조 전체가 한 계통의 혈연조직에 포섭되는 것을 이상으로 하는 국가지배이념이었다. 결국 종법제란 최고 권력자와의 혈연적인 친소에 따른 누층적인 신분질서가 그 특징이며 적장자상속이 원칙이었다. 이는 공동의 혈연의식(의제적 관계까지를 포함)을 바탕으로 한 것이지만, 이 관계를 보다 보편적인 규범의식으로 강화해 준 것이 천명사상이었다. 천명이 천하를 지배할 수 있는 능력과 덕을 겸비한 인물에게 부여되고, 천명을 받은 인물이 천명에 따라 새로운 정치질서를 구현하는 과정에 참여한 협력자를 봉건하여 제후로 삼는다는 점에서 천명을 매개로 성립된 정치질서는 혈연적 관계를 초월한 개인적인 덕능(德能)에 기초한 것으로 정당화될 수 있었다. 결국 서주는 혈연조직에 바탕을 두고 종묘와 사직을 중심으로 한 도시국가의 연합체라 할 수 있고, 이러한 도시국가간의 연결관계를 봉건제·종법제를 통해 유지했으며, 그것을 이념적으로 지탱해 준 것이 천명사상이었다.


2.2.3. 정전제(井田制)의 이상화

서주의 토지제도로서 실시되었다고 하는 정전제는 아직도 그 실시 여부에 대한 논란이 그치지 않고 있다. 전국시대의 사상가인 맹자(孟子)가 전하는 정전제는 900무(畝)의 정사각형의 전토를 정(井) 자형으로 만들어진 두둑으로 9등분하고, 사면의 800무를 8가에게 100무씩 사전(私田)으로 경작하게 하여 생활의 근거를 제공한다. 중앙에 있는 나머지 100무는 공전(公田)으로 하여 8가의 공동경작에 의해 그 수확물을 조세로 납부한다는 것이다. 이 경우 모든 토지는 왕의 소유이며(王土), 사전은 다면 대여된 것에 불과하다. 따라서 그 댓가로 농민은 공전을 경작하는 것이기 때문에 노동력의 형태로 조(租)를 거두었다고 여겨진다.

이것이 『맹자』에 나오는 정전제의 내용이다. 그러나 사실 이러한 내용만으로는 실제 시행되었던 토지제도라고 보기 어렵다. 당시의 농업기술상 휴경농법이 필수적이었을 터인데, 이와 관련된 규정이 없다는 점, 일정 연령을 기준으로 한 토지의 수수(授受)와 환수에 관한 규정이 없다는 점, 토지의 정기적인 재분배가 보이지 않는다는 점, 경지내의 수로인 구혁(溝 )조직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 농사철에 여(廬)에 거주하다가 동한기에 읍에 거주하는 계절에 따른 거주지의 변화가 보이지 않는다면 점 등에서 제도적인 미비함을 보이고 있다.

따라서 서주시대에는 정전제가 있었지만 맹자가 주장하는 것과 같은 토지국유의 제도는 아니었을 가능성이 높다. 오히려 토지의 사유나 영구점유가 발생하기 이전에 촌락사회의 토지분급과 수취관계로 이해하는 편이 자연스럽다. 즉 서주 초기의 농민의 씨족공동체적 생활을 하면서 씨족장의 지휘 아래 집단경작의 방식을 취하고 있었고, 씨족장을 통해 전토에 대한 공납과 노역의 의무를 집단적으로 지고 있었던 점을 충분히 인정할 수 있다. 다만 맹자가 전하는 정전제 실제 시행되었는가의 여부도 중요하지만 이후의 위정자들은 실제 그것이 시행되었고, 따라서 정전제를 시행함으로써 이상시대로 복귀할 수 있다는 이상을 가지게 되었다는 점은 더욱 중요하다. 역대 국가에서는 소농민의 생활보호와 대토지소유의 억제를 위해 번번히 정전제의 부활을 주장하고 추진하였다.

제후의 농민에 대한 지배는 개개의 농민이 아니라 씨족장을 통해 읍을 단위로 집단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후기로 갈수록 제후들은 토지를 획득하는 것이 어려워졌기 때문에 산림을 이용하거나 개간하여 새로운 경지를 확보하고 다른 영지의 농민을 동원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종래 읍 단위를 통한 농민지배는 불가능하게 되었고, 농민들은 제후에게 생활을 유지하기 위한 강한 비호를 요구하게 되었다. 서주 중기 이후 제후들 사이에 벌어진 토지의 쟁탈이나 유력제후에 의한 소제후의 병합은 주왕실의 통제력이 약화되었음과 동시에 춘추 이후 제후들의 자립성향을 잘 보여준다.

결국 씨족공동체는 서주 일대를 통해 해체되어 갔고 이것은 혈연은 기반으로 한 종법적 봉건제에 균열을 가져왔다. 이러한 제도는 세대가 내려감에 따라 주왕의 동생들을 제후로 분봉해줄 봉지가 부족하게 되었고, 혈연관계는 더욱 희박하게 되었다. 더욱이 제후는 봉국내에서 토착세력과의 협력관계를 더욱 강화하지 않을 수 없는 입장이었다. 이것이 주왕실의 쇠퇴를 가져왔고 결국 서주 멸망의 한 원인이 되었다. 또한 주왕실과 이적의 항쟁 역시 이러한 경향을 촉진시켰다. 주의 정치지배가 미치는 지역은 기산과 종주·성주를 잇는 지역이었고, 주왕조는 점과 선으로 이어진 국가구조에 불과하였다. 주의 봉국인 읍은 농업을 기반으로 성립하였지만, 농경지는 한정되어 있었고, 그 농경지 주변에는 융족(戎族)이나 이족(夷族)이라 불리는 이적(夷狄)이 아주 가까이 거주하고 있었다. 이들은 주왕실의 정치적 질서에서 벗어난 존재들이었다. 이들의 위협은 곧 봉국의 생존을 위협하는 것이었지만 주왕실의 무력만으로 해결될 문제는 아니었다. 따라서 제후들은 토착세력과의 결합을 더욱 강화하면서 자립적 경향을 보이게 되었다. 또 서주 후기가 되면 씨족제적 규제가 현저히 이완되고, 제후나 경·대부·사 이외의 계층이 토지를 집적하면서 서주의 통치질서 밖에서 신흥 토지소유계층으로 성장한다. 이 역시 종법적 봉건제를 근본부터 흔드는 시대적 추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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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시대 역사

경제적 기반이 점차 약화되어가던 서주말, 여왕(여王)은 왕실의 약체화를 회복하기 위해 새로운 경제정책과 호구조사를 실시하였다. 그러나 이 정책은 강한 저항을 받았는데, 특히 국인(國人)들은 여왕을 내쫓아 여왕은 체(산서성 곽현)로 망명하고, 이후 13년간 왕이 없는 공위(空位)시대가 출현하였다. 여왕이 망명한 해는 B.C. 841년인데, 이를 공화(共和) 원년이라 한다. 이 해는 중국 역사상 연대가 분명한 최초의 해이다. 공화라는 의미는 주공(周公)과 소공(召公) 2인이 상담하여 정치한 데서 비롯되었다고 하지만 실은 공백(共伯) 화(和)가 천자의 업무를 대신한 데서 비롯된 용어이다. 공백은 여왕이 죽은 후 선왕이 즉위하자 봉국으로 돌아갔다. 선왕 때에 일시 주왕실은 권위를 회복하였지만 이것도 잠시뿐이었다.

선왕의 뒤를 이어 유왕(幽王)이 등장하였는데, 그는 애첩인 포사(褒 )를 후로 삼고 그 아들을 태자로 삼았다. 이에 분노한 정후(正后)의 오빠 신후(申侯)가 견융족(犬戎族))과 연합해 주를 공격하였다. 유왕의 태자인 의구(宜臼)가 평왕(平王)이 되었지만 견융의 난을 피해 동도인 낙읍으로 천도하여 서주는 멸망하였다. B.C. 770년 평왕이 천도할 때까지를 서주라 하며, 그 이후 진이 전국을 통일할 때까지를 동주라 하는데, 이를 다시 2분하여 전반기를 춘추시대(春秋時代), 후반기를 전국시대(戰國時代)라 한다. 춘추와 전국은 모두 이 시대를 대상으로 한 역사서에서 그 명칭을 땄다. 춘추는 공자가 편찬했다고 하는 노나라의 연대기이고 전국책(戰國策)은 유세지사(遊說之士)의 담론을 모은 서적이다. 춘추는 B.C. 722년부터 481년까지 밖에 기록하지 않았지만, 일반적으로 춘추시대는 그보다 약 반 세기 정도 소급하여 주의 동천부터 잡는 것이 보통이고, 전국시대의 개시는 한(韓)·위(魏)·조(趙)가 진(晉)을 3분한 B.C. 453년 혹은 주왕실이 이를 공인한 403년부터 잡는 것이 일반적이다

서주 중기 이래 봉건제후에 대한 서주왕실의 통제력은 저하되어 있었다. 춘추시대가 되면서 이들 제후국은 독립하여 서로 공방전을 계속하였다. 결국 춘추시대란 약 200여개에 달했던 제후국이 점차 몇 개의 국가로 통합되어가는 과정임과 동시에 읍제국가에서 영역국가로 이동하는 과정이고도 하였다. 주왕실은 동천하여 일단 명맥을 유지했지만 낙읍을 중심으로 한 소국에 불과하였다. 다만 처음에는 종주로서의 권위를 제후국이 인정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뿐이었다. 춘추시대에 가장 먼저 두각을 나타낸 나라는 정(鄭)이었다. 낙읍 부근의 정은 주왕실과 가장 가까운 관계였지만, 점차 주왕실에 대항하였다. 그러나 주왕실은 이를 제어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 권위는 극도로 실추되었다. 그러자 춘추 중기부터 방대한 영토와 인구 및 강대한 무력을 지닌 강국이 등장해 쇠미해진 주왕실 대신 국제정치의 주도권을 장악하였다. 이들을 패자(覇者)라 하는데, 춘추시대에는 5패가 유명하다. 그러나 이 5패가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의논이 분분하다.

그러나 얼마 되지 않아 양자강 유역에 위치한 남방의 대국 초(楚)가 강국으로 대두했다. 이 남방 초의 위협에 대항해 중원의 제후를 규합해 대항한 것이 동방의 제(齊)였다. B.C. 7세기 경에 시행된 회맹(會盟)은 제를 중심으로 한 경우가 많았고, 이에 참가한 나라도 동방에 치우쳐 있었다. B.C. 658년에 초가 마침내 중원의 강국이었던 정을 침입해 춘추시대의 남북대립의 장을 열었다.

제의 환공(桓公)은 이에 대해 제후를 소집해 초를 물리치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B.C. 651년 규구(揆丘)에서 회맹하여 첫번째 패자가 되었다. 제 환공이 죽은 후 패자의 지위를 물려받은 것은 진(晉) 문공(文公)이었다. 그는 제후를 이끌고 북진해온 초에 승리를 거둔 후(B.C. 634) 돌아오는 길에 천토(踐土)에서 회맹하였다. 그러나 진 문공의 사후에 초가 패자가 되었다. 초는 중원의 제후국과 달리 본래 주왕실의 교화 밖에 있었고, 이민족 중에서 일어났다. 이것은 중원의 문화와는 다른 계통이며 아마 신석기시대 양자강유역의 문화계통을 이었을 것이다. 초는 장왕(莊王) 때에 중원 제후의 연합군과 싸워 승리하였다. 그러나 이전의 패자들과는 달리 제후를 모아 회맹한다거나 주왕실을 받느는 등의 행위를 하지 않았다.

초가 패자가 됨으로써 남북항쟁이라는 춘추시대의 세력판도에서 양자강 유역의 국가들이 강대해졌다. 따라서 중원까지 진출한 초를 위협한 것은 중원의 세력이 아니라 초의 배후에서 세력을 구축한 오(吳)와 월(越)이었다. 오는 수몽(壽夢) 때부터 강력해져 진(晉)과 연합해 초를 공격하였다. 이후 합려(闔閭) 때에는 초의 수도인 영( )을 함락시켰고, 초는 이 때문에 수도를 옮겼다. 그러나 오 역시 오의 남방에서 발흥한 월의 도전을 받았다. 월의 대두에는 오 때문에 곤욕을 치른 초가 적극 후원하였다. 이로써 오와 월의 사투가 벌어졌다. 오왕 부차(夫差)는 월에 승리한 후 중원으로 진출해 맹주의 지위를 다투었지만, 결국 월왕 구천(勾踐)의 공격을 받아 오는 멸망했다. 구천도 중원을 공격해 패자가 되었지만 이후 초가 다시 양자강 유역의 패권을 차지했다. 이후는 양자강 유역의 초와 중원의 중심인 진 사이의 각축을 기본으로 전쟁이 벌어졌고 여기에 산동의 제와 서주의 옛 땅에 자리잡은 진(秦)이 강국으로서 두각을 나타냈다.


3.2. 춘추 중기 이후의 사회변동

대략 B.C. 600년경을 전후해 열국간의 겸병전이 치열해지고 그 결과 약소국이 대거 멸망하였다. 이는 주왕실이 권위와 통제력을 상실하면서 패자를 중심으로 회맹질서가 그를 대신하였고, 적어도 그 안에서 약소국은 굴욕을 받기는 했지만 국가로서의 명맥은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춘추 중기를 전후하여 진(晉)·진(秦)·초(楚) 등의 강대국은 종래의 회맹질서에서 탈피하여 소국을 멸망시킨 후 현(縣)을 설치해 직접 지배하는 새로운 지배방식으로 전환하였다.

또한 춘추 중기 이후 각국에서는 기존의 권력구조가 재편되면서 공실(公室)은 몰락하고 그 대신 유력한 세경가(世卿家)가 국권을 찬탈하게 되었다. 주왕실의 권위가 약화된 것과 마찬가지로 공실의 권위를 상실하였고, 일부 군주권을 강화하려는 시도가 있기는 하였지만 국인의 강력한 반발을 받았다. 새로이 등장한 유력 세경가들은 전쟁의 격화에 따른 국가적 위기에서 난국을 타개하고, 그것을 계기로 군사권을 장악함으로써 공실을 누르고 권력의 전면에 부상할 수 있었다. 이들은 이를 위해 자신들의 채읍을 증대시키는 한편, 전제(田制)와 세제(稅制), 병제(兵制)를 개혁함으로써 세력을 강화시켰다. 이들 제도의 개혁은 대개 군역의 부담이 없던 농민에게 새로이 군역이나 군부(軍賦)를 부담지우거나 또는 수확물을 효율적으로 수취함으로써 군사적·경제적 기반을 확대시키는 방향이었던 듯하다. 농민을 병사로 편성함으로써 이들을 사병화하여 강력한 무력기반을 갖게 되었고, 나아가 이들을 중앙군에 편입시킴으로써 지휘권을 획득하였다.

이러한 농민에 대한 징병의 확대는 상·주의 읍제국가하에서 전사의 역할을 독점했던 국인의 특권을 위태롭게 하였고, 전통적인 상하관계를 허무는 계기를 만들었다. 세경가는 국인층의 불만을 강화된 경제력을 바탕으로 적극적인 시혜(施惠)를 통해 구제하거나 핵심적인 가부장적 무력집단을 구성하였다. 이로써 주로 사 계층인 국인과 세경가 사이에는 혈연관계가 아닌 은혜와 그에 대한 충성이라는 새로운 인격적 관계가 형성되었다. 일반적으로 이러한 관계를 임협적(任俠的) 관계라고 부른다. 이후 세경가의 세력확대 과정에서 유력세족간의 갈등이 심화되어 이들에 의한 권력 충돌이 벌어졌다. 진(秦)과 초와 같이 문화적 혹은 지역적 특수성 때문인지 귀족의 성장이 군주권을 위협할 만한 정도가 아니어서 춘추·전국시대에 걸쳐 단일혈통의 군주권이 유지되는 경우는 드물고, 세경가가 국권을 분할하거나 찬탈하는 경우가 일반적이었다. 진(晉)은 6경이 투쟁하다가 결국 한·위·조의 유력 세족이 분할해 새로운 국가를 성립시켰고, 제는 전씨(田氏)에 의해 왕실의 혈통이 바뀌었다. 극심한 세족의 투쟁으로 인해 춘추시대의 유력세족은 일부 찬탈자를 제외하고 모두 몰락하였다. 가령 전국시대 각국의 상직(相職)을 맡은 인물 중 춘추시대 세족 출신이 없다는 것은 그 단적인 예이다. 세족의 대거 몰악에 따른 사회적 공백을 메운 것은 사(士)였다. 전국시대를 사인(士人)의 시대라 부를 정도로 사인은 정치의 각 부문에서 중요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춘추 중기를 분수령으로 씨족제 질서도 붕괴되었다. 앞서 지적한 대로 춘추 중기를 전후하여 강대국은 소국을 멸망시킨 후 현(縣)을 설치해 직접 지배하는 새로운 지배방식으로 전환하였다. 현은 원래 변경을 방위하는 군사거점으로서의 성격이 강했고 따라서 확고한 지배가 요구되었다. 본래 현(懸)의 의미는 걸려 있다는 뜻으로, 현은 중앙의 직할지를 의미한다. 따라서 현의 출현은 분권적인 봉건체제에서 전국 이후 확립된 군주에 의한 직접 지배방식으로서의 군현제(郡縣制)의 선구라 할 수 있다. 물론 춘추시대의 현의 설치가 권력의 집중도나 지배력의 관철도 면에서 볼 때 전국 이후의 현의 설치와 같을 수는 없다. 다만 현이 설치됨으로 인해 정복지 내부의 조상신을 매개로 한 씨족적 질서는 용이하지는 않았겠지만 철저히 파괴시키려 했을 것이다.

씨족제 질서가 파괴된 또 하나의 원인으로는 철제 농기구의 보급에 따른 생산력의 급격한 상승을 들 수 있다. B.C. 7-6세기경 제철업의 발전에 따른 철기의 출현으로 철제농기구와 우경(牛耕)이 보급되면서 이전에는 엄두를 낼 수 없던 심경(深耕)과 농경과정에서의 효율성으로 인해 단위면적 당 생산량이 급격히 상승했다. 이와 함께 노동생산성이 제고되어 광대한 황무지와 원야가 개간되어 공동체적인 토지소유의 제한을 받지 않는 농경지가 출현하였다. 이와 함께 토지소유의 불균형이 나타나기는 했지만 낮은 생산수준 때문에 불가피하게 유지되던 공동경작이 사라지고 가족을 단위로 한 소농경영이 등장하였다. 다만 이러한 철기는 대개 국가의 수중에 장악되어 있어서 전국 중·후기에 가서야 본격적으로 보급의 단계에 접어 든다.


3.3. 전국 국가의 형성과 각축

3.3.1. 전국 국가의 형성과 그 과제

전국시대의 개막과 함께 나타난 국가형태상의 변화는 읍제국가의 붕괴와 영토국가의 출현이다. 즉 종래 분권적 봉건질서 하에서 읍을 단위로 유지되던 중층적·거점적 지배가 군현제하의 영역에 의한 직접지배로 변화한 것이다. 물론 이러한 군현제적 지배의 관철이 순탄하기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전국시대 들어오면 대다수의 약소국은 이미 겸병을 통해 정리되고 소수의 강대국만 남게 되었다. 이들을 전국칠웅(戰國七雄)이라 하는데, 진, 초, 제, 한, 위, 조, 연(燕)이 그들이었다. 그러나 제후국간의 전쟁은 오히려 더욱 격화되었다. 춘추시대에 비해 전쟁의 발발 건수는 반 정도로 줄었지만 전쟁의 규모는 확대되었고, 전쟁기간도 장기화하였다.

이에 따라 전국시대부터는 전쟁에서의 전술의 중심이 차전(車戰)에서 보병전으로 전환되었다. B.C. 540년 최초로 보병이 사용된 이래 꾸준히 그 중요성이 확대된 결과였다. 차전일 경우는 국인층 이상만이 전쟁이 동원되고, 일단 교전에 들어가 한 편의 차진용이 무너지면 전쟁의 성패는 그것으로 결정되었기 때문에 고작 하루나 이틀이면 끝났다. 또한 요새화된 성곽을 공격하는 데 차전은 효과적이지 못해, 공성전(攻城戰)은 아주 드물었다. 보병부대는 원래 강과 호수가 많았던 오·월에서 비롯되어 중원의 제국으로 전파되었는데, 전국시대에는 대규모의 보병이 주력이 되었다. 그 요인으로는 전쟁의 조건이 변화하여 전차의 중요성이 감소된 데 있었다. 즉 전쟁규모의 확대에 의해 늪지와 산지와 같은 지형에서도 전투가 벌어졌고, 전투의 장기화에 따라 악천후에서도 전투는 벌어졌다. 이런 조건에서는 기동성을 갖춘 보병이 효율적이었다. 보병보다 기동성이 뛰어난 기병은 기습공격이나 측면공격에 동원되었지만, 전면공격이나 포위공격망 돌파, 성의 함락 등은 보병이 담당하였다. 이로써 전국 중기 이후에는 수십만의 병력이 수년간 전쟁에 동원되기도 하였다.

또한 병력의 수가 급격히 늘어났다. 춘추 전기 강대국의 병력은 대략 3만 정도로 추산된다. 그러나 춘추 말 10만 정도의 병력으로 증대되었고, 전국시대 7웅의 군사력은 약소국이었던 한과 위의 병력이 30만, 진과 초는 약 100만에 달했다. 이는 춘추 전기에 비해 10-30배나 증가한 수치이다. 전쟁에 투입되는 병력의 규모도 늘어나, 전국 초 10만 전후이던 것이 40만 정도로 증가했고, 전투도 지구전화하여 3-5년씩 걸리기도 하였다. 전쟁이 빈번해지고 격렬해짐에 따라 방어수단도 지하여 요츙지에 수비시설을 갖추고 병법과 군사학도 발전하였다. 물론 전쟁에 동원되는 민중의 고통은 말할 수도 없었다. 이같은 상황에서 전쟁의 극복과 종식에 이르는 유일한 길은 한 국가에 의한 완전한 승리 즉 통일뿐이었다.

전쟁애서의 패배로 인해 겸병될 지도 모른다는 제후들의 위기의식은 심화되었고 그 결과 총력전의 양상을 띠었다. 이를 위해서는 인적·물적 자원을 극대화하고, 효율적으로 배치해야만 했다. 그 결과 군주권을 중심으로 한 국내체제의 정비와 부국강병의 추진이 요구되었다. 군주권의 강화는 종래 공동체의 규제하에서 이용되던 산림수택(山林藪澤)이 군주 개인의 재산으로 전화되면서 경제적인 토대를 마련하였다. 산립수택은 원래 제사와 군사를 공동으로 하는 씨족제적 읍공동체의 전렵(田獵) 장소였다. 그러나 춘추 중기 이후 전란이 격화되면서 산림수택은 직할상비군의 확대·강화를 위한 군사자재의 공급원으로서 과도기적인 중요성을 갖게 되었다. 이후 전국시대가 되면 교역의 확대와 상업의 발달을 계기로 전제군주권의 경제적 기반이 되었다. 제염과 제철을을 군주가 독점하고 이로 인한 수입을 얻거나 이를 개간하여 획득된 토지도 공전화(公田化)하여 수입을 증대시켰던 것이다.

한편 춘추 중기 이후 재산의 사유화에 따른 읍 내부의 계층분화를 계기로, 다수의 읍민이 몰락하고 이산하였다. 국가로서는 이들의 취약한 재생산을 보장하고 토지에 안착시켜야 했다. 전국 이후 도시거주 인구가 급증했던 것은 생산력의 발전과 사회적 분업화도 중요한 요소로 작용했지만 파산농민의 도시유입 역시 무시할 수 없다. 이와 아울러 상업의 발달로 인해 말업(末業)에 종사하는 인구가 늘어나는 것도 역시 국가로서는 바람직하지 않았다. 이 문제의 해결 역시 전국 국가가 직면했던 과제 중 하나였다.

군주권의 강화에는 군주의 수족 역할을 할 수 있는 관료집단의 충원과 관료제의 정비가 또한 요구되었다. 영토국가가 출현한 이후의 국가경영은 징세 중심의 간단한 행정과는 이미 차원을 달리 하였고, 군주 직할지의 확대는 행정사무의 복잡화와 전문화를 요구하였다. 따라서 전국시대가 되면 실제 행정능력과 정치적 식견을 갖춘 유능한 인재가 대거 필요하였고, 이제 신분의 귀천은 효율적인 관료선발을 저해하는 거추장스런 짐이었다. 더구나 찬탈과 배반의 위기를 느끼는 군주가 자신의 지위를 넘보지 않는 단순 기능인을 이상적 관료로서 측근에 두었던 것은 당연하였다. 이제 유력 세가라는 씨족적 배경은 오리혀 배격의 대상이 되었다. 이와 같은 시대의 요구에 따라 빈궁한 하층의 사인이 자신의 학식을 매개로 출세할 수 있는 기회는 더욱 넓어졌다. 이같은 능력지상주의와 출세주의 풍조는 사회전반의 신분상승 욕구를 더욱 부채질하였다. 이들 관료 지망자들을 효율적으로 선발하고, 선발 이후 효율적인 운용을 하는 것 역시 주요 과제였다.


3.3.2. 변법과 제민지배의 성립

이상의 과제를 해결할 목적으로 전국시대의 군주가 시행한 것이 바로 변법(變法)이다. 가장 먼저 변법을 실시한 것은 위나라의 문후(文侯)였다. 그는 법가의 시조라고 하는 이회(李 )를 등용해 법전의 편찬, 소농민 보호대책 등을 실시해 국내체제를 정비함으로써 적은 영토에도 불구하고 전국 초 최강국의 지위를 누렸다. 이어 B.C. 403년에는 조나라가 정치적 개혁을 추진하였으며, B.C. 390년 경에는 초나라가 오기(吳起)를 등용해 개혁을 주도케 하였다. 오기변법의 핵심은 세습 봉군의 특권을 배제하고 불필요한 관직을 없앰으로써 관리의 기강을 정비하고 군사력을 증대시키는 것이었다. 그러나 도왕의 사후에 오기가 처형되어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다. 한의 경우도 B.C. 354년에 신불해(申不害)를 상으로 기용하여 그의 주도하에 효율적인 관료제 운용방식을 도입해 강력한 군주권을 확립하였다. 그 결과 신불해가 상으로 재임한 15년간 약소국 한이 타국으로부터 침입을 당하지 않았다고 한다. 제에서도 B.C. 357년 추기(鄒忌)가 기용되어 개혁을 추진하였다. 진에서도 상앙(商 )의 주도로 B.C. 356년과 350년에 2차에 걸친 변법을 추진하였고, 연에서도 B.C. 316년에 획기적인 개혁이 이루어졌다.

결국 7웅은 B.C. 400년을 전후하여 약 100년간 경쟁적으로 변법을 단행하여 국내체제를 정비하였다. 변법의 주목적은 군주를 중심으로 한 일원적인 법치의 관철에 있었다. 또한 소농민에게는 균등한 토지의 점유와 안정적인 재생산구조를 보장하면서 이들을 호적에 편입하여 제민(齊民)으로서 일률적으로 파악함으로써, 국내체제를 안정시키고 군주권을 강화함과 동시에 이들을 최대한 확보아형 군사적 경쟁에서 승리하는 것이었다. 결국 변법의 최후 목적은 제민지배체제의 확립에 있었다. 다만 그 구체적인 내용은 각국의 사정에 따라 약간의 차이가 있고, 관철도에서 상당한 차이를 보였지만, 대개의 경우 구래의 특권층의 엄청난 반발에 직면하였다. 이중 가장 대표적이자 성공적이고, 이후까지 계승되었으며, 변법의 구체적인 추진내용을 알려줄 수 있는 것이 상앙의 변법이다.

상앙은 1차 변법에서 십오제(什伍制)와 연좌제를 통해 인민을 빈부에 관계없이 평등하게 십오(什伍)로 편성하고 상호 감시케 함으로써 향리공동체의 내부질서를 파괴하였다. 또한 이를 바탕으로 2차 변법에서는 31현을 설치해 군현제적 지배를 확립하였다. 이렇게 중앙집권적인 군현지배를 관철시킨 후 본격적인 제민의 창출을 위해 수전체제(授田體制)를 시행해 토지의 균등 분배와 국가에 의한 소농민의 보호에 나섰다. 다음으로는 제민은 경전지민(耕戰之民)이었기 때문에 이들을 활용한 군사체제의 강화에 주력하였다. 이것이 군공작(軍功爵)에 의한 20등작제(等爵制)의 실시이다. 신분제의 해체와 전쟁의 격화에 따라 전공에 의한 신분상승의 기회는 더욱 넓어졌고, 이 작위의 서열에 따라 모든 사회적·경제적·정치적 지위가 보장되었다.

결국 전국 변법에서 지향했던 것은 첫째, 폐쇄적인 씨족 질서와 대가족제를 해체하고, 관료제에 의한 군현제적 지배를 실시해 십오제와 연좌제를 수단으로 제민을 철저히 감시·감독함으로써 군주권을 중심으로 한 법치질서를 확립하려 하였다. 둘째, 수전체제의 정비와 소농민의 보호를 통해 제민을 최대한 확보하고, 그들의 최대한의 노동과 봉사를 강요하는 체제를 수립하려 하였다. 셋째, 주요 산업을 관영화하거나 국가독점화하여 민영산업의 성장을 억제하여 빈부의 격차에 따른 소농민의 몰락과 부민(富民)의 출현을 막고자 하였다. 넷째, 군공서열에 의한 작제적(爵制的) 신분질서의 정립을 통해 제민의 전투욕구와 신분상승 욕구를 부추켜 효율적 지배를 기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변법 중 진은 변법에 성공해 부국강병을 이루고 결국 중국을 통일하였다. 진은 원래 씨족제적 전통이 약하고 군권이 강했던 데다 진민의 문화적 후진성에 따른 순박한 기질이 제민지배의 관철도를 높일 수 있었다.

http://kin.naver.com/qna/detail.nhn?d1id=11&dirId=111002&docId=56289032&qb=6ZC16Zuy6JeP76SH&enc=utf8§ion=kin&rank=5&sort=0&spq=0&pid=f3Lmyg331yVsss9cfAZssv--270001&sid=S3Nbhq86c0sAAHn2Gf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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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말약(郭沫若)【Guō Mòruò】1892.11~1978.6.12

 

원명(原名) 곽개정(郭開貞), 자(字) 정당(鼎堂, Dǐng Táng). 1892년 사천성 출생. 근대 중국 최고의 지식인으로 시인, 역사학자, 고문자학가(古文字学家), 고고학자, 극작가(剧作家) 및 사회활동가이며 갑골학4당(甲骨学四堂)의 하나이다. 곽말약은 1914년 일본 구주제국대학(九州帝国大学)에 유학하여 일본여성과 결혼하고 1921년 첫 번째 시집(诗集) ‘여신(女神)’을 발표했으며, 1927년 장개석(蒋介石) 총사령(总司令) 지휘하의 북벌군(北伐军) 총정치부(总政治部) 주임(主任)으로 있었으나 이후 장개석을 성토하는 격문을 쓰고 남창(南昌) 봉기에 참여하며 중국공산당(中国共产党)에 가입하였다가 1928년 2월 일본으로 도피하였다. 일본에서 갑골문(甲骨文), 금문(金文)을 연구하며 1930년 중국고대사회연구(中國古代社会研究)를 편찬하였고 1937년 항일전쟁 발발 후 귀국하였으며 1948년 국공내전(国共内战) 기간 중앙연구원(中央研究院) 원사(院士)를 지냈다. 건국 후 중앙인민정부(中央人民政府) 위원, 정무원(政务院) 부총리(副总理) 겸 문화교육위원회(文化教育委员会) 주임(主任), 중국과학원(中国科学院)의 초대 원장(院长), 전인대(全人大) 상위회(常委会) 부위원장(副委员长), 중국과기대학(中国科技大学) 초대교장 등을 역임하였다. 문화혁명(文化革命) 전과 문화혁명 기간 중 다량의 작품을 발표한 극소수 인물의 하나로 장기간 작품을 통해 중국공산당의 지도자를 찬양해왔으며 문화혁명 기간 자기비판에서 자신의 업적을 부인함으로써 국내외로부터 비난을 받기도 하였다. 1978.6.12 북경에서 사망하였으며 그가 거주하던 곽말약고거(郭沫若故居)는 북경 십찰해(什刹海) 서면에 위치하며 1963년부터 1978년 까지 거주했던 곳으로 1994년 곽말약기념관(郭沫若纪念馆)으로 지정되어 유품과 자료가 전시되어 있다. 곽말약고거(郭沫若故居)는 원래 건륭제의 신하 화신(和珅) 저택의 정원일부로 이후 공왕부(恭王府)에 편입되었다가 건국 후 몽고인민공화국(蒙古人民共和国)의 주중 대사관 및 송경령(宋庆龄)의 거주지였다가 1963년 송경령(宋庆龄)이 이사한 후에 곽말약(郭沫若)이 이곳에서 1978년 사망하기까지 거주하였고 1988년 제 3차 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全国重点文物保护单位)로 지정되어 일반에 공개되고 있다.

 

 

은허에 대해

 

중국의 학술계에서 하()는 중국 고대 최초의 왕조로 인정된다. 그러나 하조에 관한 역사자료가 기본상 후세의 문헌에 의한 기술로써 현재까지 고고학적 발굴의 확실한 인증을 거치지 못하였다. 고고학 자료로 확실하게 실증할수 있는 중국 고대의 가장 이른 왕조는 상조(商朝)이다. 중국에서 역사 기재가 있는 가장 이른 왕조인 상조에 대해 소개드리겠다. 1

상조는 기원전 약 16세기에 창건되여 기원전 11세기경에 멸망하였으며 약 600여년의 역사가 있다. 상조는 초기 여러차례 수도를 이전하였으며 최후로 이전한 수도가 은()[오늘날 하남-河南 안양-安陽 부근]이다. 고고학적인 실증에 따르면 상조 초기 중국의 문명이 벌써 상당한 수준에서 발전하였는데 그 주요 특징이 바로 갑골문과 청동문화이다.

갑골문은 매우 우연한 기회에 발견되였다. 20세기 초 당시 하남성 안양 서북부의 소둔(小屯)촌 농민이 우연한 기회에 얻은 귀갑과 수골(獸骨)을 약재로 팔려고 하던 중 한 학자가 그 위에 새겨진 고대 문자를 발견하게 되였으며 큰 힘을 들여 더 많은 귀갑을 찾기 시작하였다. 얼마후 중국의 고대문자 학자들이 귀갑과 수골에 새겨진 문자가 상조문자라는것을 확정하였고 그뒤 소둔촌이 바로 옛 기재에서 나오는 상조 도성의 유적인 은허(殷墟)라는것을 확정하였다.

은허의 발견과 발굴은 20세기 중국 최대의 고고발견이다. 1928년 최초로 발굴한 이래 수둔촌에서는 갑골문과 청동기를 망라한 대량의 진귀한 문물이 출토되였다. 갑골문은 귀갑과 수골에 새겨진 고대문자이다. 상나라시기 국왕은 모든 일을 하기 전에 우선 점을 치였다. 갑골은 점 칠때 사용되는 도구였다. 갑골은 사용전에 우선 가공을 하는데 먼저 갑골의 피와 고기를 깨끗이 제거한후 평평하게 간다. 그후 갑골의 안쪽 또는 수골의 반대쪽을 칼로 우묵하게 파낸다. 이런 우묵한 자국은 순서에 따라 배열된다. 점치는 사람을 무당이라고도 불렀는데 이름과 점치는 일자, 물으려는 문제를 모두 갑골에 새긴후 불로 갑골의 우묵한 자국을 태운다. 그러면 우묵한 자국이 열을 받아 금이 가는데 이때 나타난 금을 ()” 라 부른다. 무당은은 이런 무늬를 분석하여 점의 결과를 도출해 내고 점이 영험한지 여부도 갑골에 새긴다. 점이 영험하면 갑골문자를 새긴 갑골은 관아의 서류로 보존된다.

현재 은허에서 도합 16만여쪼각의 갑골이 발견되였다. 그중 일부는 완정하고 일부는 문자기재가 없는 쪼각들이다. 통계에 따르면 이런 갑골에는 여러가지 문자 도합 4천여개가 있는데 그중 학자들이 연구를 거쳐 고증한것이 3000개이다. 또 이 3000개중 학자들의 해석이 일치한것이 1000여자이며 나머지는 해석이 불가능하거나 학자들의 의견상이가 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1000여자를 통하여 사람들은 이미 상조의 정치, 경제, 문화 등 각 분야의 상황을 대체적 이해하였다. 갑골문을 연구하는 최초의 전문 저서는 1913년 출판된 유악(劉鄂) 철운장귀(鐵雲藏龜)”이다. 중국의 유명 사학자와 문학가인 곽말약(郭沫若) 1929년 출판한 갑골문자연구(甲骨文字硏究)”는 또 한 부의 중요한 저서이다. 현재 중국의 갑골문 연구분야의 권위인사는 베이징대학 구석규(裘錫圭)교수와 중국역사연구소의 이학근(李學勤) 교수 등이다.

글이 새겨진 갑골문과 마찬가지로 청동기도 상조시기 대표적인 기물이다. 상조의 청동기 제련은 이미 상당한 기술수준을 갖췄으며 은허에서 발굴된 청동기만 수천점에 달한다. 그중 1939년 은허에서 출토된 사모무(司母戊) 대방정(大方鼎)은 무게가 875kg, 높이가 133cm., 길이 110cm, 너비 78cm로 모양이 웅위로운 중국 고대 청동기 문화 전성시기의 대표작품이 하나이다.

고고발굴 및 학술연구는 상조시기 이미 국가가 산생되였고 사유제가 기본적으로 확립되였으며 그 때로부터 중국역사가 문명시대에 들어섰다는 것을 증명한다

데일리차이나] 천재학자 왕국유의 투신

청대 고증학을 집대성한 중국 국학계의 큰 스승 왕국유.
“천재는 일반 사람들보다 더 불행하며 그가 받는 고통은 훨씬 심하다. 왜냐하면 천부적 능력으로 누구보다 세계를 깊게 통찰하고 세계의 본질을 쉽게 파악할 수 있으며 남다른 감수성으로 그것을 훨씬 더 고통스럽게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그 이전 300년 학술 업적을 총결하고 그 이후 80년 학술계의 기초를 마련했다는 평가를 받는 중국 국학계의 큰 스승이자 천재학자였던 왕국유(王國維), 그의 수수께끼 같은 죽음을 떠올리면 이 말은 더욱 실감나게 다가온다.

1927년 6월2일 오전, 칭화(淸華)대학교수였던 왕국유는 학교 근처에 있던 이화원의 곤명호(昆明湖)에 뛰어 들어 그의 생을 마감하였다. 그의 유서에는 “50년의 인생, 이제 남은 것은 죽음뿐이로다. 변해가는 세상, 의는 없고 치욕만 계속되는구나.(五十之年,只欠一死;經此世變,義无再辱) 라고 적혀 있었다.

1877년 저장(浙江)성 하이닝(海寧)에서 태어난 왕국유는 어렸을 때부터 재능이 뛰어나 수재로 불렸다. 23세 되던 1899년 무술정변이 일어나자 그 동안 준비하던 과거공부를 포기하고 상하이로 건너가 시무보(時務報) 서기로 취직하였다. 여기에서 그는 칸트, 니체, 쇼펜하우어 등의 독일관념철학 등을 공부하고 평생 동지인 나진옥을 만나게 된다.

1901년 나진옥과 함께 일본 유학길에 오르지만 병으로 인해  곧 귀국하여 강단활동과 함께 저술활동에 들어간다. 1906년 청나라 정부 산하의 연구소에서 재직하면서 부의(溥儀)에게 문학수업을 하였으며 한족이면서도 청의 유신(遺臣)을 자처하며 평소 장포와 변발 등 청조 복장을 즐겼다. 이 시기 왕국유는 문학비평의 규범으로 뽑히는 <인간사화人間詞話>를 집필하기도 한다. 1911년 신해혁명 이후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갑골문과 고문 등에 대한 연구를 하다가 1916년 귀국한다.

1924년 풍옥상(馮玉祥)이 베이징정변을 일으켜 마지막 황제 부의를 몰아내자 왕국유는 그 치욕을 참지 못하고 나진옥과 청의 신하들과 함께 자금성 앞의 금수하에 투신하려 하였으나 주변사람들의 만류로 성공하지 못했다. 결국 그의 죽음은 끝없는 몰락의 길을 걷는 청조에 대한 비관이었으며 멱라수에 투신한 굴원과 고려 말의 충신 정몽주에 견줄 만한 충신의 우국적 순국으로 평가받을만하다.

또한 왕국유는 중국에서는 처음으로 서양철학과 미학의 관점에서 중국의 고문을 재해석해 내며 고전문학, 미학, 고고학, 음운학, 금석학, 갑골문에 이르기까지 그야말로 광대한 학문적 성과를 남겼으며 고전연구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준 학자로 평가받고 있다.

그러나 무술변법운동을 주도한 강유위(康有爲) 등을 개량주의자라고 비난하고 늘 현실을 외면한 불가지론과 보수적인 사상을 견지하면서 끝까지 청조와 구체제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했던 왕국유의 일생에 대한 평가는 그다지 긍정적이지 못하다. 급격한 시대 변화의 소용돌이 속에서 자신이 믿던 진리를 끝까지 지키며 실천한 한 천재의 고뇌만이 아름다운 글 속에 남아 있을 뿐이다.

‘묻건데 그 어느 곳에 이 몸 의지할 수 있을까.
큰 길을 찾고자 하나 갈림길만 많아지는구나.
인생의 지나가는 곳곳마다 후회만 쌓이고
아는 것이 늘어 갈수록 의심만 더 생겨나는구나.’

베이징=국정넷포터 김대오 dae55555@hanamail.net

<김대오님은> 베이징에 살며 오마이뉴스, 뉴스메이커등에 중국관련 기사를 쓰고 있습니다. [홈페이지 '북경바닷가'] myhome.naver.com/jindawu <데일리차이나>는 그날 그날의 중국 소사(小史)를 전하며 중국 역사 속의 오늘의 의미를 되새겨 보는 난입니다.

이름: 최영택
2002/10/25(금)
갑골문 연구자의 비운(悲運)-나진옥  
나진옥(羅振玉)은 선배인 왕의영, 유철운 두 사람과는 달리 골동품상에서 모아온 갑골에 대하여 연구하였을 뿐만 아니라 갑골이 하남성 안양현에서 나온다는 것을 알고 현지로 찾아가 조사했으며, 갑골이 청동기와 옥기(玉器), 골기(骨器), 석기(石器) 등과 함께 소둔의 언덕에서 발굴된다는 것을 직접 확인하였다. 이것은 당시로서는 대단히 훌륭한 식견이었다.
나진옥은 선배들이 모은 갑골 외에 자기 손으로 많은 갑골을 모아 연구에 착수하였다. 그 당시 청나라는 1911년 신해(辛亥)혁명으로 멸망하였다. 청나라의 관리로서 북경 농과대학 학감(學監)이었던 나진옥은 가족 외에 젊은 제자인 왕국유를 데리고 교또오(京都)대학의 친구를 찾아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나진옥이 가지고 온 많은 짐짝 가운데 가장 소중하게 보관한 것은 전력을 다하여 모은 갑골이었다. 운반과 세관 검사 때문에 파손된 것도 많았으나, 나진옥은 교또에 정착하자 그 탁본(拓本)의 정리를 시작하여 1913년 <은허서계전편(殷墟書契前編)>이라는 책을 출판하였다. 이것은 일본의 크로타이프인쇄를 이용한 것으로서 책도 훌륭했을 뿐만 아니라 그로부터의 연구에도 상당한 도움이 되었다.
계속하여 나진옥은 이 자료집에 낸 갑골문자의 해설서를 써서 이듬해 <은허서계고석(殷墟書契考釋)>으로 출판하였다. 이러한 책들의 출판으로 갑골문자는 처음으로 읽혀지게 되었다.

42. 갑골문을 가장 많이 수장했던 서예가


갑골문을 가장 많이 수장했던 서예가는 청나라 말의 나진옥(羅振玉)이다.

나진옥(羅振玉, 1866-1940)의 자는 숙온(叔蘊)ㆍ숙언(叔言)이고, 호는 설당(雪當)ㆍ정송(貞松)이며, 절강성 상우(上虞)사람이다.  후에 회안(淮安)으로 옮겨 살았으며 청나라 말에 학부참사(學部參事)를 지냈다.  그는 평생 학문에 힘써 자신의 키만큼 많은 책은 썼으며 특히 서화 감상과 금석 고고학에 정통했다.  그의 글씨는 꾸밈이 없고 수수하며 예스럽고 전아하면서 정취가 있다.  그는 『은허서결고석(殷墟書契考釋)』ㆍ『유사추간고석(流沙墜簡考釋)』ㆍ『삼대길금문존(三代吉金文存)』 등의 전문서적을 써서 갑골학에 대해 창조적인 공헌을 하였다. 

나진옥은 1901년 유악(劉鶚)의 처소에서 갑골문을 본 후 즉시 골동상인파견하고 직접 하남성 안양 소둔촌으로 가서 온 힘을 다해 수집하여 1년 안에 만 편 이상을 구했다.  이와 동시에 그는 동생인 나진상(羅振常)과 처남인 범조창(范兆昌)을 원양(洹陽)으로 보내어 이를 파게하여 다시 배를 얻었다.  통계에 따르면 그가 구한 갑골은 약 3만여 편인데 많은 정품이 있어 국내외 학술계에서 칭찬을 받았다.

나진옥은 갑골문을 가장 많이 수장했을 뿐만 아니라 최초로 갑골 출토 지점을 고증해서 갑골학의 형성과 발전에 특출한 공헌을 한 중요한 인물이었다.  『철운장귀(鐵雲藏龜)』의 출판은 그가 유악이 소장하고 있는 갑골 탁본을 발표하도록 권한 것이며 아울러 직접 갑골을 탁본하고 서언을 지어 갑골문이 세상에 널리 퍼지게 하였다.  그는 또 갑골문자 571개를 고증하고 해석하였는데 이 방법은 후에 학자들에게 커다란 깨우침을 주었다.  그와 왕국유(王國維)는 갑골문 전래와 연구에 공헌을 하여 당시 갑골학의 대표가 되었으며 당시 갑골학을 ‘나왕지학(羅王之學)’이라 부를 정도였다.

출처 : 한국서학연구소
글쓴이 : 은초김향선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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