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lene - Effacer le passé '과거는 잊어요'

 

 



                                                불쌍한 정월아 

 

 

 




당시의 금수저요. 아이돌. 14살 때의 작품이 잡지 개벽에 실렸다.3.1 운동과 의열단 사건에도 연루되어 옥고를 치렀다. 1920정동예배당에서 결혼식 소식과 25세 때 모친사망 소식이 신문에 오를 만큼 유명세를 탔다.

 

남편 김우영이 일본영사관 부영사로 만주 안동에 부임하여 6년간의 업적으로 휴가를 받아 총독부의 지원으로 부부동반 해외여행을 한다.6년간의 업적은 무엇이었을까?

 




19210925일 김우영이 일본의 외교관인 만주 안동 부영사

 

당시 일제국주의자들은 만주 침탈을 계획하고 철저한 전략을 수립 중이었다.주변의 정확한 정보 수집과 이주해온 조선인들의 내정을 상세히 지득할 필요가 있었고 독립군들의 동향 파악 등을 위해서는 조선말을 하는 조선인 조력자가 절실했던 만큼 김우영을 안동현 부영사로 임명한다. 이제 서서히 동조세력을 구축하고 곳곳에 정보원을 양성 침투하는 사전 공략을 실행하는 일련의 작전이 단계별로 치밀하고도 비밀리 진행된다.강연회를 주최하여 청년 동포에게 세계정세의 변화에 맞춰 침탈의 정당성에 동조하는 여론을 조성한다.이때 가장 두려운 것은 독립군의 암살위협이다.특히나 일제의 사냥개 노릇을 하는 조선인 관료는 표적 1호였다.김우영이 6년간 무사히 부영사의 임무를 수행할 수 있었던 것은 아내 나혜석 덕분이었다.아내 나혜석이 독립운동을 후원하는 양면 정책이다.  나혜석은 19223월부터 안동현 태성의원에서 야학당을 열어 조선인 교육에 힘썼다.또한 의열단의 김원봉 등에게 거사 자금을 비밀리에 송금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에도 송금 했다. 비밀리에 의열단과 애국부인회를 도와준 사실이 영사관 경찰에 제보되면서 남편인 김우형에게도 불이익이 돌아가게 된 것으로 전해진다.아내 나혜석이 독립자금 전달의 엄청난 사건에도 무사할 수 있었던 것은 독립군 암살단으로 부터 김우영의 목숨을 안전하게 지키는데 일조한 공로 때문이다.그러나 임무를 마치고 조선 땅에 들어서는 순간 아내의 독립운동 후원은 김우영 출세가도의 거침돌이다. 임기를 마치고 서울에 돌아온 우영은 고집 센 아내를 자유분방하고 저돌적인 마누라를 어찌하지 못해 전전 긍긍한다.

 

토사구팽의 때가 다가왔다.

 


특히 그녀는 조선장안의 톱스타였다.아내는 하늘 높은 줄 모르게 잘 나가는 마리앙뚜아네뜨 바이러스가 온몸에 퍼진 중병이 들어 있었다.미술전람회에 수천 명의 관람객이 몰려들었고 신문 잡지는 다투어 나혜석의 글과 주변소식을 다룬다.전람회가 끝난 뒤 김우영은 축하에 앞서 여자는 남자의 부속물이라는 말을 한다. 이 말에 분개하여 남편과 싸운다. 부부간 앙금이 쌓인다.그렇지 않아도 아내는 여성의 권리신장을 주장하는 여성해방론의 거물급 인사다. 줏대 세고 거침없는 아내는 언제어디로 튈지 모르는 럭비공이다.저것이 치솟는 인기를 틈타 독립운동 쪽으로 고개를 돌리는 날에는 모두가 끝장이다.자신의 출세가도에 걸림돌이다.총독부는 완벽한 친일 부역세력을 원한다.아내를 친일화 하지 못하면 제거하는 방법 외에는 별 도리가 없다.총독부와 친일 세력들은 나혜석을 김활란이나 모윤숙처럼 친일파의 거두로 키울 요량으로 비행기를 태웠다.그러나 고집 센 나혜석에게는 이 작전이 통하지 않자 은밀한 지령이 내려진 것일까?

 

까마귀 죽이기작전

나혜석 김우영 부부는 총독부지원으로 세계여행을 떠난다. 명목상은 6년간 만주 외지에서 근무한 공로에 대한 보상휴가라 한다.한편 총독부지원으로 또 달리 세계여행을 떠나는 또 한 남자가 있었으니
최린崔麟

 

천도교 종법사였던 그는 192610월 만성위장병치료차 일본 동경제국대 입원 중에1년 예정으로 구미 각국의 종교 산업 교육 사회정세 시찰 명목으로 세계일주 여행을 떠난다.일제 치하에서 조선 천도교 종법사가 세계사회정세 시찰을 간다웃기는 소리다. 명목상은 벨기에 부랏셀에서 개최된 반제국주의 및 민족독립기성동맹총위원회에 조선대표로 참석했단다. 민족독립기성동맹총위원회라는 단체는 존재했는가?

유령 단체 아닌가?


실상은 일제의 경비지원으로 유럽여행을 떠나는데 이는 일제의 유화책의 일환이었다. 1927-06-11 그야말로 묻지마 관광을 떠난다.

 

유럽김우영은 독일로 유학을 떠난 뒤 프랑스에 홀로 남겨진 나혜석 앞에 고국향수를 바른 노신사가 나타난다. 최린과의 염문설은 프랑스 교민사회에 널리 알려질 만큼 공개되었다.이미 남편이 이해하고 넘어간 최승규와의 사랑 이광수와의 연애 그리고 자신의 자유연애론 사상에 비춰 볼 때 별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던 자유분방 철없는 33세의 뜨거운 마리앙뚜아네뜨였다. 최린과의 불륜이 서서히 장기간 여론화 돼가면서 까마귀 털 뽑기가 시작된다.남편 김우영 전혀 이 사실을 모르고 있는 냥 침묵하는 듯 비춰지고 주변에서는 최린과의 불륜 사진을 공개하는 등 서서히 장안의 화재로 몰고 간다.

 

그런데 이 불륜의 풍문은 최린 측근 사람들의 입을 통해 회자되기 시작한다.사건화 되자귀국 후 부터 김우영은 딴 살림을 준비 중이었고 최린 역시 매몰차게 돌아섰다.숱한 비난에 당황한 나혜석의 예술 혼은 달아났고 전람회 실패와 언론의 비유적 비난 글이 쏟아져 맨붕에 빠진다.

14세 때부터 주목받던 여인, 일거수일투족이 신문의 취재거리가 됐던 스타최린과의 염문은 남편을 속이고 다른 남자를 사랑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남편과 정이 두터워지리라 믿었던 바보였다.브레이크 없는 인생열차는 자기도취 궤도를 벗어나는 순간 철없는 마리 앙투아네트가 되었다.

 

마리 앙투아네트처럼 자녀들도 만나지 못하게 한다. 증오심에 모자의 정을 때려한 것일까? 아니면자녀들에게 반일사상을 주입할까봐 두려웠던 것일까?

 

아내를 방기하고 새살림을 꾸린 후에는 변호사업까지 시들해지고 궁핍했다는 것은 하나의 구실이다.김우영은 아내를 내친 후 또다시 총독부의 사냥개 노릇을 한다.1932.2.19 조선총독부관보 : 김우영이 도리사관에 임명되다.

 

 

 

김우영은 자녀들과의 만남을 경찰을 동원해 저지한다.자식들에게서 반일의 기미만 보여도 모두가 끝장이다. ! 이것이 두려운 것이다.

 

김우영 자신의 출세를 위해 친일하지 않는 아내를 버린 걸까?

김우영과 최린은 친근한 사이였다.우연일까?김우영과 최린은 똑같이 일제의 지원으로 같은 시기 같은 장소로 공짜여행을 떠난다.프랑스/ 나혜석. 김우영. 최린 여기서 김우영은 살짝 빠진다. 독일로.....최린은 나혜석을 대리고 보란 듯이 싸돌아다닌다. 물정모르는 나혜석은 프랑스 교민들의 로망이 된 냥 부풀어 그 양산을 펼친 걸까?귀국 후 최린은 나혜석과의 염문설을 측근을 통해 여론화 했다.이 일련의 사건이 계획적인 것이었다면?

 

아 불쌍한 정월아

 

 

이 모두가 남편 따라 고분고분 친일파가 되지 않은 업보입니까?

 


 

 

 

나혜석羅蕙錫 호: 정월(晶月).

 

 

20세기 한국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로 주요 작품은 <농부>와 <자화상>과 <스페인 해수욕장>.

호는 정월이고 서울 경기에서 태어나 오빠의 권유로 미술을 시작했으며 여권신장을 옹호하는 글을 쓰고,

3.1운동에 참가했다가 투옥되는 등 진보적인 성격을 지녔다.

다양한 국가를 여행하면서 야수파 형식의 그림을 그렸고 귀국 후에는 사회에 저항하는 글을 썼지만 무시당했다.

생활고에 시달려 각지를 돌아다니며 유랑 생활을 하다가

 1946년 서울 자혜병원에서 행려병자로 쓸쓸히 인생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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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업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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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혜석羅蕙錫

최승구 [崔承九]

가야마 린佳山 麟  최린崔麟 

일본식 이름雨英, 金雨英  김우영

사토우 야타佐藤彌太

 

가야마 미쓰로香山光郞 이광수

                              허영숙 [許英肅, 1895~1975]

 

시로야마세이주白山靑樹  金東煥
                                 최정희 [崔貞熙]

                                              金幽影 

 

 

                                                      

 

 

 

 

 

   허허  허씨가  나씨 집안 가족사진에서 보이네요.    ?     자매같다는 느낌이.......

나혜석과 허영숙은 인척관계인가?   위 세 사람은 1931년 미스코리아 심사위원    벙  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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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노라

 

노라
저자: 나혜석

나는 인형이었네
아버지의 착한 딸인 인형으로
남편의 착한 아내인 인형으로
그네들의 노리개였네

노라를 놓아라

순순히 놓아주고
높은 장벽을 열고 깊은 규문을 열고
자유의 대기 중에 노라를 놓아라.

나는 사람이라네.
남편의 아내 되기 전에
자녀의 어미 되기 전에
아버지의 딸이 되기 전에
첫째로 사람이라네.

나는 사람이로세.
구속이 이미 끊쳤도다.
자유의 길이 열렸도다.
천부의 힘은 넘치네.

아아 소녀들이여
깨어서 뒤를 따라 오라. 일어나 힘을 발하여라.
새날의 광명이 비쳤네.

 

 

                            노라 Nora:   입센의 희곡 <인형의 집>에 나오는 여주인공.
            인형의 집
[ Et dukkehjem, 人形─ ]

요약노르웨이의 극작가 입센의 3막 희곡. 

 

1879년 작품. 그해에 코펜하겐 왕립극장에서 초연되어 작가의 이름을 세계적으로 떨치게 한 작품이다.

변호사 헬마의 아내 노라는 세 아이의 어머니이며 남편에게 사랑을 받고 있다. 남편은 새해에 은행장으로 취임하게 되어, 그 기쁨이 겹친 크리스마스를 배경으로 이야기는 전개된다. 노라는 신혼 무렵, 남편이 앓아 전지요양을 했을 때, 이미 세상을 떠난 아버지의 이름을 위서(僞書)하여 고리대금업자로부터 돈을 빌려 남편을 살렸다. 그 악질 고리대금업자 크로그쉬타는 지금 은행에 근무하고 있다.

내용을 모르는 헬마는 행장 취임을 계기로 그를 해임하려 하나 상대방은 그 위서사건을 내세워 남편을 실각시키겠다고 노라를 위협한다. 드디어 그 사실이 남편에게 알려지자 남편은 사랑하는 아내에게 배신당했다며 욕을 퍼붓는다. 지금까지 자기는 단순히 인형으로 취급되어 귀여움을 받은 데 불과하다고 생각한 노라는, 사건이 해결되고 남편이 다시 결합할 것을 원하지만, 아내가 되기 이전에 책임 있는 한 인간으로서 살기 위하여 집을 뛰쳐나간다.

이 작품이 세상에 나오자 노라는 신여성의 대명사가 되었고, 여성해방 운동이 각처에서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입센의 가장 뛰어난 대표작임은 물론 세계 근대극의 대표작이다. 한국에서는 1925년 조선배우학교에서 맨 처음 공연되었다. 입센의 육필원고는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지정되었다.  (두산백과)


1. 나혜석 미술작품 바로가기


2. 이혼 고백서  http://db.history.go.kr/item/level.do?itemId=ma&setId=1192&position=0

 

 

 

삼천리 기고문

1 개벽 제18호 1921-12-01 藝術界의 回顧 一年間 曉鍾 논설 원문제공
2 동광 제29호 1931-12-27 新聞戰線總動員, 「大合同日報」의 幹部公選, 萬一 朝鮮文 3新聞이 다 解消하고 一大理想 新聞이 出現한다면... 설문 원문제공
3 동광 제35호 1932-07-03 混迷低調의 朝鮮美術展覽會를 批判함 美術家諸氏 문예평론 원문제공
4 별건곤 제26호 1930-02-01 金雨英氏 夫人 羅蕙錫氏, 訪問 가서 感心한 婦人 金起田 소식 원문제공
5 별건곤 제30호 1930-07-01 弟九回 朝鮮美展 金周經 문예평론 원문제공
6 삼천리 제4호 1930-01-11 雜談室 잡저 원문제공
7 삼천리 제6호 1930-05-01 諸氏의 聲明 설문 원문제공
8 삼천리 제6호 1930-05-01 喫煙室 잡저 원문제공
9 삼천리 제6호 1930-05-01 新兩性道德의 提唱 尹聖相, 黃信德, 羅惠錫, 鄭錫泰 대담·좌담 원문제공
10 삼천리 제8호 1930-09-01 名流婦人과 産兒制限 설문 원문제공
11 삼천리 제16호 1931-06-01 新女性總觀(2) 百花爛漫의 己未女人群 회고·수기 원문제공
12 삼천리 제3권 제11호 1931-11-01 나를 잇지 안는 幸福, 帝展入選後感想 羅蕙錫 문예기타 원문제공
13 삼천리 제4권 제1호 1932-01-01 아아 自由의 巴里가 그리워, 歐米 漫遊하고 온 후의 나 在東京 羅蕙錫 회고·수기 원문제공
14 삼천리 제4권 제3호 1932-03-01 巴里의 모델과 畵家生活 東京 羅蕙錫 기행문 원문제공
15 삼천리 제4권 제4호 1932-04-01 巴里畵家生活, 巴里의 모델과 畵家生活 在東京 羅蕙錫 논설 원문제공
16 삼천리 제4권 제7호 1932-05-15 佳人春秋 소식 원문제공
17 삼천리 제4권 제7호 1932-07-01 朝鮮美術展覽會 西洋畵總評 羅蕙錫 문예평론 원문제공
18 삼천리 제4권 제12호 1932-12-01 쏘비엣露西亞行, 歐米遊記의 其一 羅蕙錫 기행문 원문제공
19 삼천리 제5권 제1호 1933-01-01 半島에 幾多人材를 내인 英·美·露·日 留學史 회고·수기 원문제공
20 삼천리 제5권 제1호 1933-01-01 CCCP, 歐米遊記의 第二 羅蕙錫 기행문 원문제공

 

 

21

삼천리 제5권 제3호 1933-03-01 伯林과 巴里 羅蕙錫 기행문 원문제공
22 삼천리 제5권 제3호 1933-03-01 畵室의 開放, 巴里에서 도라온 羅蕙錫女史 女子美術學舍 婦人記者 소식 원문제공
23 삼천리 제5권 제4호 1933-04-01 作家日記 문예기타 원문제공
24 삼천리 제5권 제9호 1933-09-01 그랫스면 集 잡저 원문제공
25 삼천리 제5권 제9호 1933-09-01 伯林에서 倫敦까지, 歐美遊記의 續 羅蕙錫 기행문 원문제공
26 삼천리 제5권 제10호 1933-10-01 滿州國行의 廉想涉氏 소식 원문제공
27 삼천리 제5권 제10호 1933-10-01 晩婚打開 座談會, 아아, 靑春이 아가워라! 대담·좌담 원문제공
28 삼천리 제6권 제5호 1934-05-01 朝鮮에 태여 난 것이 幸福한가 不幸한가 羅蕙錫 설문 원문제공
29 삼천리 제6권 제5호 1934-05-01 三千里人生案內 소식 원문제공
30 삼천리 제6권 제5호 1934-05-01 熱情의 西班牙行(世界一周記 續) 羅蕙錫 기행문 원문제공
31 삼천리 제6권 제7호 1934-06-01 人生揭示板 소식 원문제공
32 삼천리 제6권 제7호 1934-06-01 내가 서울 女市長된다면? 羅蕙錫 설문 원문제공
33 삼천리 제6권 제7호 1934-06-01 春園 出家放浪記, 朝鮮日報 副社長 辭任 內面과 山水放浪의 前後 事情記 소식 원문제공
34 삼천리 제6권 제7호 1934-06-01 女人獨居記 羅蕙錫 문예기타 원문제공
35 삼천리 제6권 제8호 1934-08-01 離婚告白狀, 靑邱氏에게 羅蕙錫 문예기타 원문제공
36 삼천리 제7권 제1호 1935-01-01 女流名士의 男便調査狀 잡저 원문제공
37 삼천리 제7권 제1호 1935-01-01 新生活에 들면서 羅蕙錫 문예기타 원문제공
38 삼천리 제7권 제2호 1935-02-01 新生活에 들면서 羅蕙錫 문예기타 원문제공
39 삼천리 제7권 제3호 1935-03-01 三千里機密室(The Korean Black Chamber) 소식 원문제공
40 삼천리 제7권 제3호 1935-03-01 靑春을 앗기는 佳人哀詞

41 삼천리 제7권 제5호 1935-06-01 異性間의 友情論 아름다운 男妹의 記 羅蕙錫 문예기타 원문제공
42 삼천리 제7권 제5호 1935-06-01 조선녀성의게, 歐米女性을 보고 半島女性에게 羅蕙錫 논설 원문제공
43 삼천리 제7권 제5호 1935-06-01 李光洙, 許英肅兩氏間 戀愛書翰集 문예기타 원문제공
44 삼천리 제7권 제6호 1935-07-01 나의 女敎員時代 羅蕙錫 회고·수기 원문제공
45 삼천리 제7권 제9호 1935-10-01 三千里機密室 The Korean Black Chamber 소식 원문제공
46 삼천리 제7권 제9호 1935-10-01 獨身女性의 貞操論 羅蕙錫 문예기타 원문제공
47 삼천리 제7권 제10호 1935-11-01 (戱曲) 巴里의 그 女子 羅蕙錫 희곡·시나리오 원문제공
48 삼천리 제8권 제1호 1936-01-01 英米婦人參政權運動者 會見記 羅蕙錫 대담·좌담 원문제공
49 삼천리 제8권 제1호 1936-01-01 十萬圓의 朝鮮舘經營하는 金珊瑚珠女士(女社長을 차저) 대담·좌담 원문제공
50 삼천리 제8권 제4호 1936-04-01 倫敦救世軍托兒所를 尋訪하고 羅蕙錫 대담·좌담 원문제공
51 삼천리 제8권 제11호 1936-11-01 三千里 機密室 소식 원문제공
52 삼천리 제8권 제12호 1936-12-01 玄淑 羅蕙錫 소설 원문제공
53 삼천리 제10권 제5호 1938-05-01 나의 東京女子美術學校 時代 羅蕙錫 회고·수기 원문제공
54 삼천리 제10권 제5호 1938-05-01 戀愛觀 批判, 毛允淑·羅蕙錫씨의 安德根 논설 원문제공
55 삼천리 제10권 제5호 1938-05-01 女流 文士의 『戀愛 問題』會議 대담·좌담 원문제공
56 만국부인 제1호 1932-10-01 萬國婦人싸론 회고·수기 원문제공
57 동명 제18호 1923-01-01 母된 感想記 羅蕙錫 목차제공
58 동명 제19호 1923-01-07 母된 感想記 羅蕙錫 목차제공
59 동명 제20호 1923-01-14 母된 感想記 羅蕙錫 목차제공
60 동명 제21호 1923-01-21 母된 感想記 羅蕙錫 목차제공

61 동명 제23호 1923-02-04 觀念의 襤褸를 벗은 悲哀-羅蕙錫女史의 ‘母된 感想記’를 보고- 百結生 목차제공
62 동명 제24호 1923-02-11 觀念의 襤褸를 벗은 悲哀-羅蕙錫女史의 ‘母된 感想記’를 읽고- 百結生 목차제공
63 동명 제29호 1923-03-18 百結生에게 答함 羅蕙錫 목차제공
64 서광 제6호 1920-07-05 婦人問題의 一端 羅蕙錫女史 목차제공
65 여자계 목차제공
66 학지광 제3호 1914-12-03 理想的 婦人 羅蕙錫 孃 목차제공

 

저서

  • 나혜석전집(羅蕙錫全集)
  • 나혜석 작품집
  • 나혜석 자서전(유고)
  • 첫사랑의 무덤으로 신혼여행을 떠나다
  • 이혼 고백서
  • 자유 연애
  • 해인사 풍광(기행문)

그림[편집]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557794&cid=46702&categoryId=46753

  • 자화상
  • 파리 풍경
  • 무희
  • 나부 1
  • 나부 2
  • 선죽교
  • 스페인 해수욕장
  • 스페인 국경
  • 해인사 홍류동
  • 이화원 풍경
  • 중국인 촌
  • 수원 서호
  • 수원성
  • 염노장, 여승 초상화
  • 인천풍경

판화

소설[편집]

[편집]

 

 

 

第一篇 三·一運動 關係 新聞報道

2. 國外新聞 論說 記事
뉴욕 타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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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독립운동사 자료 1 임정편Ⅰ一一. 大韓民國臨時政府 政務報告書(大韓民國二十三年~二十七年·一九四一年~一九四五年) 2. 大韓民國二十四年度 政務報告書
2한국독립운동사 자료 2 임정편Ⅱ1. 臨時政府 憲章 6. 臨時政府 成立祝賀文
3한국독립운동사 자료 2 임정편Ⅱ1. 臨時政府宣言書·聲明書·警告文·布告文 2. 臨時政府의 宣言書 및 公約三章
4한국독립운동사 자료 2 임정편Ⅱ2. 國務會議 및 各部署別活動 24. 男女學生에 대한 內務部의 布告文
5한국독립운동사 자료 2 임정편Ⅱ6. 臨時政府主催 各種 記念式·辭類 8. 大統領의 三一節紀念 所感
6한국독립운동사 자료 2 임정편Ⅱ5. 國民代表會議 參席代表의 談話 2. 救國團代表와 北間島地方代表의 談話
7한국독립운동사 자료 2 임정편Ⅱ7. 國民代表會議 開催·經過 5. 國民代表會議參席代表의 宣誓·宣言式 擧行
8한국독립운동사 자료 2 임정편Ⅱ10. 國民代表會議에 對한 國民輿論 및 新聞論評 2. 統一運動과 使命感
9한국독립운동사 자료 2 임정편Ⅱ10. 國民代表會議에 對한 國民輿論 및 新聞論評 10. 會議 反對者의 再考要請
10한국독립운동사 자료 3 임정편Ⅲ27. 韓國國民黨 5. 國恥日 紀念宣言
11한국독립운동사 자료 3 임정편Ⅲ33. 朝鮮民族革命黨 2. 「八·二九」 三十二週年 紀念宣言
12한국독립운동사 자료 4 임정편Ⅳ史料集 第二 3. 韓族의 日本族에게 對한 怨恨
13한국독립운동사 자료 4 임정편Ⅳ四編 獨立運動의 事件 第五章 韓人의 日人의게 對 敵愾心
14한국독립운동사 자료 4 임정편Ⅳ四編 獨立運動의 事件 第七章 獨立運動에 關한 書類
15한국독립운동사 자료 4 임정편Ⅳ대한독립 혈전긔 대한독립 혈전긔 서문
16한국독립운동사 자료 4 임정편Ⅳ내디독립군 활동소식 대한인국민회 쳠존끠
17한국독립운동사 자료 5 3·1운동편Ⅰ1. 國內新聞 論說 記事 朝鮮獨立新聞
18한국독립운동사 자료 5 3·1운동편Ⅰ1. 國內新聞 論說 記事 大韓獨立新聞
19한국독립운동사 자료 5 3·1운동편Ⅰ1. 國內新聞 論說 記事 獨立新報
20한국독립운동사 자료 5 3·1운동편Ⅰ2. 國外新聞 論說 記事 半島新聞
21한국독립운동사 자료 7 안중근편Ⅱ八. 伊藤博文 被擊事件에 대한 國內外의 反響에 關한 件 機密送 第三號
22한국독립운동사 자료 7 안중근편Ⅱ兇行者 及 嫌疑者 調査書 第五. 在外 韓字新聞統의 傾向
23한국독립운동사 자료 7 안중근편Ⅱ一◯. 安重根 및 共諆嫌疑者에 대한 訊問에 關한 件 情報 第三
24한국독립운동사 자료 7 안중근편Ⅱ一◯. 安重根 및 共諆嫌疑者에 대한 訊問에 關한 件 境 警視의 訊問에 대한 安應七의 供述(第十一回)
25한국독립운동사 자료 7 안중근편Ⅱ一一. 安重根 및 關聯被告에 대한 裁判及刑執行關係件 大韓每日申報
26한국독립운동사 자료 9 의병편Ⅱ(三) 三月, 全羅道 通報
27한국독립운동사 자료 10 의병편Ⅲ(二) 四月, 京畿道 通報
28한국독립운동사 자료 12 의병편Ⅴ(四) 十二月, 京畿道 被告人 訊問調書
29한국독립운동사 자료 12 의병편Ⅴ(四) 十二月, 忠淸道 忠州分遣所에서 白南奎의 陳述
30한국독립운동사 자료 13 의병편Ⅵ(三) 三月, 京畿道
31한국독립운동사 자료 13 의병편Ⅵ(三) 三月, 忠淸道 暴徒 首魁 逮捕의 件禮山郡 今坪面 下峴洞
32한국독립운동사 자료 13 의병편Ⅵ(三) 三月, 慶尙道 匪徒 逮捕의 件 本月 十六日付 安東警察署長 報告眞寶郡 北面 汶海洞居 農
33한국독립운동사 자료 13 의병편Ⅵ(三) 三月, 慶尙道 傳令 安東郡守 及 郡主事處(寫)
34한국독립운동사 자료 13 의병편Ⅵ(三) 三月, 黃海道 令 金川馬山城居 鄭春弘處
35한국독립운동사 자료 14 의병편Ⅶ(二)五月, 慶尙道 生擒匪魁 兪宗煥 調査의 件
36한국독립운동사 자료 14 의병편Ⅶ(二)五月, 全羅道 匪徒에 關한 件
37한국독립운동사 자료 14 의병편Ⅶ(三) 六月, 京畿道 暴徒 檄文에 關하여 楊州警察署長 報告要領
38한국독립운동사 자료 16 의병편Ⅸ(二) 十二月, 忠淸道 李敎永 演說 大要
39한국독립운동사 자료 17 의병편Ⅹ(三) 三月, 忠淸道 暴徒에 關한 件
40한국독립운동사 자료 17 의병편Ⅹ(三) 三月, 咸鏡道 內報 暴徒檄文에 關한 件
41한국독립운동사 자료 18 의병편XI (一) 四月, 咸鏡道 賊首魁 姜斗弼 檄文 送附의 件 四月 十五日 元山管區長 報告
42한국독립운동사 자료 18 의병편XI (四) 七月, 黃海道 暴徒에 關한 報告
43한국독립운동사 자료 37 해외언론운동편 제Ⅰ장 러시아지역 「大洋報」第三號譯報ノ件
44한국독립운동사 자료 37 해외언론운동편 제Ⅰ장 러시아지역 「大洋報」第七號譯報
45한국독립운동사 자료 37 해외언론운동편 제Ⅰ장 러시아지역 韓字新聞發刊ニ關スル件
46한국독립운동사 자료 37 해외언론운동편 제Ⅰ장 러시아지역 한국 혈젼에 대한 감상(젼호를 니어)
47한국독립운동사 자료 37 해외언론운동편 제Ⅰ장 러시아지역 3월 1일
48한국독립운동사 자료 37 해외언론운동편 제Ⅱ장 중국관내지역 新大韓創刊辭
49한국독립운동사 자료 37 해외언론운동편 제Ⅱ장 중국관내지역 不穩新聞「革命」ノ記事ニ關スル件
50한국독립운동사 자료 37 해외언론운동편 제Ⅱ장 중국관내지역 不穩新聞「導報」ノ記事ニ關スル件
51한국독립운동사 자료 37 해외언론운동편 제Ⅲ장 중국동북지역 漢字新聞ニ關スル件
52한국독립운동사 자료 37 해외언론운동편 제Ⅲ장 중국동북지역 不逞鮮人等發行雜誌「同友」記事ニ關スル件
53한국독립운동사 자료 37 해외언론운동편 제Ⅲ장 중국동북지역 韓族勞働黨ノ狀況ニ關スル件
54한국독립운동사 자료 37 해외언론운동편 제Ⅲ장 중국동북지역 不穩雜誌「同友」ノ記事其他ニ關スル件
55한국독립운동사 자료 37 해외언론운동편 제Ⅲ장 중국동북지역 「農報」記事ニ關スル件
56한국독립운동사 자료 38 종교운동편國內‧中國東北地域 宗敎運動 耶蘇敎會堂設置ニ關スル件
57한국독립운동사 자료 38 종교운동편國內‧中國東北地域 宗敎運動 不逞鮮人ニ關スル件
58한국독립운동사 자료 38 종교운동편國內‧中國東北地域 宗敎運動 米國議員觀光團ノ來鮮ト不逞鮮人ノ行動
59한국독립운동사 자료 38 종교운동편國內‧中國東北地域 宗敎運動 檀君敎靑年會創立總會ノ件
60한국독립운동사 자료 38 종교운동편國內‧中國東北地域 宗敎運動 報告書 在間島英國宣敎師不法行爲證據書類(大正十年一月十一日軍務局下元少佐ヨリ送付)
61한국독립운동사 자료 39 中國東北地域篇 I 中國東北地域民族運動 局子街ニ於ケル排日鮮人家宅搜索之結果具申
62한국독립운동사 자료 39 中國東北地域篇 I 中國東北地域民族運動 時局ト間島在住排日鮮人ノ言動並並之ニ對スル處置
63한국독립운동사 자료 39 中國東北地域篇 I 中國東北地域民族運動 秘號外 朝鮮人及危險思想抱持者視察ニ要スル費用送付ノ件
64한국독립운동사 자료 40 中國東北地域篇 Ⅱ中國東北地域民族運動 Ⅱ 安鍾奭暴動ノ顚末ニ關スル件
65한국독립운동사 자료 40 中國東北地域篇 Ⅱ中國東北地域民族運動 Ⅱ 排日鮮人ノ秘密會合ニ關スル件
66한국독립운동사 자료 40 中國東北地域篇 Ⅱ中國東北地域民族運動 Ⅱ 韓民仁想會組織ニ關スル件
67한국독립운동사 자료 41 中國東北地域篇 Ⅲ中國東北地域民族運動 Ⅱ 秘密出版物獨立新報ニ關スル件
68한국독립운동사 자료 41 中國東北地域篇 Ⅲ中國東北地域民族運動 Ⅱ 朝鮮獨立ニ關スル秘密出版譯文送付ノ件
69한국독립운동사 자료 41 中國東北地域篇 Ⅲ中國東北地域民族運動 Ⅱ 鮮人ノ配付文書ニ關スル件
70한국독립운동사 자료 41 中國東北地域篇 Ⅲ中國東北地域民族運動 Ⅱ 朝鮮獨立問題ニ關スル秘密印刷物並鮮人其後ノ狀況
71한국독립운동사 자료 41 中國東北地域篇 Ⅲ中國東北地域民族運動 Ⅱ 獨立運動ニ關スル情報送付ノ件
72한국독립운동사 자료 41 中國東北地域篇 Ⅲ中國東北地域民族運動 Ⅱ 新韓共和報ノ社說ニ關スル件
73한국독립운동사 자료 41 中國東北地域篇 Ⅲ中國東北地域民族運動 Ⅱ 排日鮮人等ノ行動急報ノ件
74한국독립운동사 자료 42 中國東北地域篇 Ⅳ中國東北地域民族運動 Ⅳ 國外情報
75한국독립운동사 자료 42 中國東北地域篇 Ⅳ中國東北地域民族運動 Ⅳ 國外情報 (浦潮派遣員報告要旨)
76한국독립운동사 자료 42 中國東北地域篇 Ⅳ中國東北地域民族運動 Ⅳ 國外情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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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 말고 다른 남자와의 성교는

                           가장 진보된 사람에게 마땅히 있어야만 할 감정이라고....

 

충격적 고백수기인 나혜석의 離婚 告白狀-靑邱氏에게

                                     C는 '최린'의 이니셜 (나혜석 33세, 최린 50세


C의 명성은 일찍부터 들어 알고 있었으나 처음 만난 것은 프랑스 파리였습니다.

그를 대접하려고 요리를 하고 있는 나에게 “안녕합쇼“ 하는 처음 인사는 유심이도 힘이 잇는 말이었습니다.

이래 남편은 독일로 가있고 C와 나는 불어를 모르는 관계상 통역을 두고 언제든지 3인이 동반하여 식당, 극장, 뱃놀이 시외구경을 다니며 놀았습니다.

그리하여 과거지사, 현시사, 장래지사를 논하는 중에 공명되는 점이 많았고 서로를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이태리 구경을 하고 나보다 먼저 파리를 떠나 독일로 갔습니다.

그 왜에 콜논에서 다시 만났습니다.

내가 그때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나는 公을 사랑합니다.” 그러나 내 남편과 이혼은 아니 할랍니다.

그는 내 등을 뚝,, 두드리며

“과연 당신의 할 말이오.나는 그 말에 만족하오.” 라고 했습니다.

나는 제네바에서 어느 고국 친구에게 다른 남자나 여자와 좋아 지내면 반면으로 자기 남편이나  아내와 더 잘 지낼 수 있지요. 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공감했습니다.

이 같은 생각이 있는 것은 필경 자기가 자기를 속이고 마는 것인 줄은 모르겠으나

나는 결코 내 남편을 속이고 다른 남자 즉 C를 사랑하라고 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남편에게 정이 두터워지리라고 믿었습니다.

구미 일반 남녀 부부 사이에 이러한 공연한 비밀이 있는 것을 보고 또 이런 것이 당연한 일이오.

중심돼는 본남편이나 본부인을 어찌하지 않는 범위 내에 행동은 죄도 아니오,

실수도 아니라 가장 진보된 사람에게 마땅히 있어야만 할 감정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사실을 판명할 때는 웃어두는 것이 대수요.

 일부러 (폐륜적 불륜관계라고 ?)이름을 지을 필요가 없는 것이외다.  

 

                                                                                               -이혼 고백장- 청구씨에게- 나혜석 三千里 1934년 8월호 ​

 

​                                                                              

불타는 예술혼과 공명심이 세상물정 모르는 바보로 만들었다.


                                                                               50 - 33 = 17  

                                                                      


 원문

 

C의 名聲은 일즉붓허 드럿스나 初對面하기는 巴里이엇사외다. 그를 待接하랴고 料理를 하고 잇는 나에게 「안녕합쇼 」하는 初 인사는 有心이도 힘이 잇는 말이엇사외다. 이래 夫君은 獨逸로 가서 잇고 C와 나는 佛語를 모르난 關係上 通辯을 두고 언제든지 三人이 同伴하야 食堂, 劇場, 船遊 市外 求景을 다니며 놀앗사외다. 그리하야 過去之事, 現時事, 將來之事를 論하는 중에 共鳴되는 點이 만핫고 서로 理解하게 되엿사외다. 그는 伊太利 求景을 하고 나보다 몬저 巴里를 떠나 獨逸노 갓사외다. 其 外 콜논에서 다시 만낫사외다. 내가 그때 이런 말을 하엿나이다. 「나는 公을 사랑합니다. 그러나 내 남편과 離婚은 아니 하랍니다」그는 내 등을 뚝,, 뚜뒤리며 「과연 당신의 할 말이오. 나는 그 말에 만족하오.」하엿사외다. 나는 제네바에서 어느 故國 親舊에게 「다른 男子나 女子와 조와 지내면 반면으로 자기 남편이나 안해와 더 잘 지낼 수 잇지요 」하엿슴니다. 그는 共鳴하엿슴니다. 이와갓흔 生覺이 잇는거슨 必竟 自己가 自己를 속이고 마는 거신 줄은 모르나 나는 決코 내 남편을 속이고 다른 男子 卽 C를 사랑하랴고 하는 거슨 아니엇나이다. 오히려 男便에게 情이 두터워지리라고 밋엇사외다. 歐米 一般 男女 夫婦 사이에 이러한 公然한 秘密이 잇는 거슬 보고 또 잇난 거시 當然한 일이오 中心되는 本夫나 本妻를 엇지 안는 範圍 內에 行動은 罪도 아니오 失守도 아니라 가장 進步된 사람에게 맛당히 잇서야만 할 感情이라고 生覺합니다. 그럼으로 이러한 事實을 判明할 때는 우서두는 거시 수요 일부러 일흠을 지을 必要가 업는 거시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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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p Star 신문자료



일본 여자 유학생: 나혜석 허영숙 김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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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 04월10일동아일보

 변호사김우영, 라혜석양과 정동례배당에서 결혼식(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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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혜석  "천후궁" 특선화보 매일신보

特選畵報 每日申報 1926년 05월 14일

盧壽鉉, 羅惠錫, 金復鎭, 사진

朝鮮魂의 懊惱도 실고 南山에 展開된 美術의 殿堂

新綠에는 美의 旋律 젹막한 속에 새빗을 보는 뎐람회 쳣날의 늣긴 인상

朝鮮美展, 金權洙, 廬壽鉉, 李象範, 李漢福, 李昌鉉, 孫一峰, 羅蕙錫, 姜信鎬, 金復鎭, 金鎭珉, 金振宇




一九三四年의 提議

새해에는 생활부터 개량합시다. 나혜석 (上)  每日申報 1934년 01월 01일




나혜석 모친상  신문게재( 당시 25세)

每日申報  1919년 12월 26일 羅惠錫女史 丁憂

 


좌담 縱論橫議  돈이냐. 지식이냐.

每日申報 1920년 09월 26일



每日申報1925년 03월 21일

物論前과 物論後(6): 시대의 총애를 받던 洋畵家 羅蕙錫 女史

春葉, 李光洙, 金雨英(安東縣 副領事), 동경미술학교 洋畵科, 매일신보 來靑閣, 신여성



나혜석여사의 油畵

每日申報 1921년 03월 17일



양화전 소식

每日申報 1925년 05월 14일




美展 공개의 제2일, 오전 입장자가 일천삼백여명, 매매 예약된 것이 벌써 네 가지, 多數의 朝鮮婦人이 入場

小原武, 佐藤三代治, 羅蕙錫, 제2회 조선미술전람회





美展 공개의 제2일, 오전 입장자가 일천삼백여명, 매매 예약된 것이 벌써 네 가지, 多數의 朝鮮婦人이 入場

小原武, 佐藤三代治, 羅蕙錫, 제2회 조선미술전람회






고국의 겨을을 차져



每日申報 1933년 05월 16. 17일 美展의 印象 (1, 2)



每日申報 1922년 06월 03일

齋藤 총독의 감탄사, 오세창씨 전자에 매우 칭찬, 나혜석 여사의 그림에 감탄

齋藤實(총독), 伊藤(비서관), 加藤(촉탁), 吳世昌, 許百鍊, 沈仁燮, 山本梅溪, 加藤卓爾, 趙鳳珍(진명여학교 학생), 飯原, 三戶, 원전운웅, 羅惠錫, 제1회 조선미술전람회, 경성부



 

새해에는 生活부터 改良합시다 (五)

每日申報 1934년 01월 11일



30 삼천리 제6권 제5호 1934-05-01 熱情의 西班牙行(世界一周記 續) 羅蕙錫 기행문 원문제공
31 삼천리 제6권 제7호 1934-06-01 人生揭示板 소식 원문제공
32 삼천리 제6권 제7호 1934-06-01 내가 서울 女市長된다면? 羅蕙錫 설문 원문제공
33 삼천리 제6권 제7호 1934-06-01 春園 出家放浪記, 朝鮮日報 副社長 辭任 內面과 山水放浪의 前後 事情記 소식 원문제공
34 삼천리 제6권 제7호 1934-06-01 女人獨居記 羅蕙錫 문예기타 원문제공
35 삼천리 제6권 제8호 1934-08-01 離婚告白狀, 靑邱氏에게 羅蕙錫 문예기타 원문제공
36 삼천리 제7권 제1호 1935-01-01 女流名士의 男便調査狀 잡저 원문제공
37 삼천리 제7권 제1호 1935-01-01 新生活에 들면서 羅蕙錫 문예기타 원문제공
38 삼천리 제7권 제2호 1935-02-01 新生活에 들면서 羅蕙錫 문예기타 원문제공
39 삼천리 제7권 제3호 1935-03-01 三千里機密室(The Korean Black Chamber) 소식 원문제공
40 삼천리 제7권 제3호 1935-03-01 靑春을 앗기는 佳人哀詞 문예기타 원문제공

每日申報1924년 06월 21일

今 1일로 폐막될 조선미술전람회, 20일 동안 대성황을 이루고 명일에 폐막

개벽 신간 제1호 1934년 11월01일

 

百人百話

만주국 육군 中佐 李亮씨는 歸京 중 조선호텔에서 체류하얏다. 전날 XXX勞働宿泊所에서 留宿하던 일을 생각하면 씨도 感慨無量할 듯.

金X仁씨는 저번에 母親喪을 당하니 兪鎭午씨는 요새 또 父親喪을 당하엿다. 今秋는 小說家 蒙喪之.

몸이 瘦瘠하기로 유명하야 瘦身大學교수니 말너스키니하는 別名을 듯고 收監 중에도 가느다런 손목이 명꽁이 時計(手錠의 별칭) 속으로 들낙달낙하야 看守들의 이약이거리가 되던 李箕永은 某사건으로 또 檢擧되엿다. 몸은 비록 不自由나마 손목만은 항시 自由일 듯

文藝評論家 白鐵은 이름이 不吉하야 鐵窓구경을 하게 되엿다. 어떤 친구가 戱言하는 것을 드럿다. 그러나 그 대신 姓이 白이닛가 白放될 수도 잇겟지.

金東煥씨는 羅惠錫 天使仙女로 아는지 뼉다구를 게먹드시 再湯三湯으로 三千里誌 號마다 울거먹는다. 그러다가는 羅씨 死後 白骨까지도 東煥씨가 차지하기 쉬울걸.

三千里誌에는 曙海 崔鶴松씨의 追悼會 비용을 상세 발표하얏다.

 

동광 제31호1932년 03월05일

辯護士 評判記(1) 필자東虛子

金雨英君

변호사로 副領事가 되어 가지고 安東縣 가서 수 년을 지내다가 미술가의 안해 羅惠錫女史와 같이 세계일주를 하고 돌아와서는 돌연히 羅氏와 이혼을 하고 다시 시내에서 변호사업을 시작하엿다.

어린 자식 3, 4명이 달린 안혜와 이혼을 한 金君 - 그 중심을 추측하기에 어렵지 아니하거니와 미친 물결같이 뛰노는 감정을 가진 예술가의 안해는 법으로 業을 삼는 이 남편과는 일생을 같이 할 수가 업섯는가.

안해 羅氏가 세계일주시 XX發明士 XXX氏와 巴里에서 달큼한 사랑을 속삭이엇다는 풍문이 사실인지 아닌지 그것은 모르거니와 金君은 자기의 쓰라린 경험으로 이혼소송을 대리할 때에는 타인이 상상도<67> 못할 名論을 토하야 法官의 머리를 끄덕거리게 하는 때도 잇다고 한다.

在野法曹界에 두번재 발을 들어놓는 金君은 무슨 의미로 보던지 甦生의 길을 거러나가는 첫 시련이니 금후의 金君의 辯護士로의 활약은 볼 만한 것인 줄 알앗더니.

 

잡지명 삼천리 제6호

 

발행일 1930년 05월01일

諸氏의 聲明 설문

 

諸氏의 聲明

1. 선생은 민족, 사회주의자임니가?

2. 선생은 실행가, 학자가 되겟슴니가?

3. 선생은 사상상 누구의 영향을 가장 만히 밧엇슴니가?

 

京城 崇三洞 127 李光洙

간단한 말은 오해를 사기 쉬웁니다. 그 중에도 민족주의란 말은 固定 共通한 내용이 적읍니다.

1. 민족주의자입니다.

2. 소설 쓰고 신문기자 되기를 목표로 함니다.

3. 톨스토이, 예수, 佛陀, 島山

 

市內 茶屋町 羅蕙錫

1. 답을 피함니다.

2. 장차 조흔 시기 잇스면 여성운동에 나서려 함니다.

 

삼천리 제6호 1930년 05월01일

喫煙室

羅蕙錫女史 曰=저는 경우만 허락하면 그림공부로 다시 한번 「파리」로 가려고 함니다. 요전 번에 그곳에 갓슬 때는 약 6개월 동안 잇섯는데 파리의 유명한 화가 「빗세이」씨의 화실을 다니며 무엇을 좀 알려고 애를 썻지만은 잘 알려지지 안튼 것이 정작 귀국하여 보니 이것 저것 谿然히 깨닷게 되는 바 잇서 이제야 정말 洋畵에 눈이 떠지는 듯 함니다. 그래서 녯날에는 헛 일을 한 듯 해요. 즉 헛 그림을 그린 듯 후회남니다.

요지음은 친구의 방을 빌어 가지고 전람회에 출품할 풍경화를 그리고 잇는데 아츰 열시부터

저녁 넉점까지 그 화실에 꼭 드러 박이고 잇슴니다. 아마 2주일이나 걸니어야 완성될 듯 한데 녜전 奉天의 풍물을 그린 「天后宮」 이후에 처음 애쓰는 作으로 나는 밋슴니다만은 엇덜는시요.

나의 여학생 시대는 벌서 10여년 전으로 지금은 열살 먹은 아들을 머리로 어린애들 녯을 가진 늙은이람니다. 세월은 참 빠르지요.

 

 

삼천리 제6호 1930년 05월01일

新兩性道德의 提唱

尹聖相, 黃信德, 羅惠錫, 鄭錫泰 대담·좌담

友愛結婚, 試驗結婚

羅蕙錫

日時 4월 2일 오후5시

場所 京城仁寺洞에서 會見

기자=우리들이 결혼하는 목뎍이 사나히면 자긔의 안해를 또 녀자이면 자긔의 지아비를 엇는데 잇슴니까 혹은 자긔의 혈통을 계승하여 줄 아돌 딸을 엇는데 잇슴니까?

羅女史=그야 한 개의 지아비 혹은 안해를 엇는뎨 잇겟지요. 자녀는 부산물에 불과한 것인 줄 압니다.

기자=그러면 「성욕」과 「생식」은 전연히 딴 물건이 되어야 하켓슴니다그러.

羅女史=전연 딴 것이라고 할 수는 업스나 그러케 혼동할 수도 업는 물건이겟지요.

기자 그러면 결혼의 주되는 목적이 이미 저안해를 엇는데 잇다면 만일 그 결혼이 잘못이 되엇든 것이 판명되는 날이면 물론 이혼하여야 할 것이 아니겟슴니까?

羅女史=그래야 하겟지요. 그러나 이혼이란 그러케 쉽사리 되는 것이 아닌 즉 그 결혼이 과연 행복될 것이냐 엇저느냐를 알기 위하야 최근에 구라파에서는 시험결혼이라 것이 제창되는 줄 압니다.

기자=3,4 년동안 살어보다가 실흐면 갈나지고 조흐면 偕老同穴하는?

羅女史=그러치요.

기자= 조선에 그러한 결혼방식이 적합하리까요?

羅女史=일부 처단을 거러가는 새 부부들은 벌서 그를 실행하고 잇지 안어요. 그러케 보이드구만요.

기자=시험결혼의 특색은 무엇임니까?

羅女史=이미 시험이니까 그 결과에 대하야 어느 편이나 절대적의 의무를 지지 안치요. 쉽게 말하면 리혼한다 섬치드래도 慰藉料니 貞操蹂躝이니 하는 문뎨가 붓지 안켓지요. 합의를 전제로 한 결혼은 이혼할 권리를 처음부터 보류하여 조흔 것이니까요.

기자=그러한 새 도덕을 현대의 만흔 여학생들에게 가르치엇스면 조켓슴니다. 성교육이라 하면 교육자들은 생리적 방면만 가르칠 줄 알엇지 사상상 도덕상의 새로운 길은 가르칠 줄 모르는 모양이니까 이것이 현대의 큰 通弊인 줄 압니다.

羅女史=동감임니다. 兩性문제에 잇서서 생리상 방면을 과학적으로 가르치는 것도 조켓스나 오히려 그보다도 더 근본적으로 가령 산아제한이 엇더타든지 시험결혼이란 엇던 것이라든지 하는 도덕상 사상상의 계몽을 식히는 것이 더욱 필요한 일로 교육자의 주력은 그곳에 몰녀와야 올흘 줄 암니다.

기자=그러니 산아제한가튼 방법을 필요로 하는 그 시험결혼은 빈빈한 이혼을 막는 길도 되고 男女性의 離合을 헐신 자유스럽게 하는 효과가 잇슬 것이겟슴니다.

羅女史=그러타 할 것이겟지요.(하략-원문)

 

미스코리아 심사위원

삼천리 제3권 제10호 1931년 10월01일

三千里一色」發表

화려강산 우리 반도가 나은 「삼쳔리일색」은 본사에서 일즉 모집을 개시한 이래 해내해외로부터 삼백이십륙 매의 다수한 응모 사진이 드러왓삽나이다. 그래서 심미계(審美界)의 권위인 李光洙, 廉想涉, 金岸曙, 安碩柱, 李承萬, 李靑田, 許英肅, 羅惠錫, 金一葉, 崔承喜, (本社側 金東煥, 崔貞熙) 등 문사, 화가, 의사, 무용가 여러분께서 여러 날을 두시고 엄숙하고도 공정한 심사를 하시어 이제 아래와 갓치 발표하나이다.

특선 崔貞嫄孃 芳紀 18 현재 충남 대전 여자고등보통학교 수업

 

삼천리 제4권 제1호 1932년 01월01일

아아 自由의 巴里가 그리워, 歐米 漫遊하고 온 후의 나

在東京 羅蕙錫

 

생활정도를 나츠이난 것처럼 고통스러운 것이 업난 것 갓다. 이상을 품고 그것을 실현 못하난 것처럼 비애스러운 것이 업난 것 갓다. 내 意思를 죽여 남의 意思를 쫏난 것처럼 무의미한 것이 업난 것 갓다. 그러면 나는 이러한 환경을 버서나지 못할 그야말로 무슨 운명에 처하엿는가? 그러치 아니면 일부러 당하고 인난가?

 

歐米 漫遊期 1년 8개월 간의 나의 생활은 이러하얏다. 단발을 하고 양복을 입고 빵이나 차를 먹고 침대에서 자고 스켓치빡스를 들고 연구소를 다니고(아가데미) 책상에서 佛蘭西 말 單字를 외우고 때로난 사랑의 꿈도 뀌여보고 장차 그림大家가 될 공상도 해보앗다. 흥 나면 춤도 추어보고 시간 잇스면 연극장에도 갓다. 왕전하와 각국 대신의 연회석상에도 참가해 보고 혁명가도 차자 보고 여자 참정권론자도 맛나 보앗다. 佛蘭西 가정의 가족도 되여보앗다. 그 기분은 여성이오 학생이오 처녀로써이엇다. 실상 조선여성으로서는 누리지 못할 경제상으로나 기분상 아모 장애되난 일이 하나도 업섯다. 태평양을 건느는 뱃속에서조차 매우 유쾌히 지냇다.

 

그러나 橫濱에 도착되난 때 붓터 가옥은 나무간 갓고 길은 시구렁 갓고 사람들의 얼골은 노라코 등은 새우등 갓치 꼬부러저 잇다. 朝鮮 오니 길에 몬지가 뒤집어 씨우난 거시 자못 불쾌하엿고 송이버섯 갓흔 납작한 집속에서 울녀 나오난 다듬이 소리는 처량하엿고 흰옷을 입고 시름 업시 거러가난 사람은 불상하엿다. 이와 갓치 훨적 피엿든 꼿이 바람에 떠러지듯 푸군하고 늘신하든 기분은 전후좌우로 밧삭밧삭 오그러들기를 시작하엇다.

 

歸國 後의 나의 生活

 

朝鮮 와서의 나의 생활은 엇더하엿나. 깍것든 머리를 부리낫케 기르고 강동한 양복을 벗고 긴 치마를 입엇다. 쌀밥을 먹으니 숨이 갓부고 우럭우럭 취하엇다. 잠자리는 백이고 느러슨 거슨 보기<43> 실혓다. 부억에 드러가 반찬을 맨들고 온돌방에 안저 바누질을 하게 되엇다. 시가친척들은 誼理를 말하고 시어머니는 효도를 말하며 시누이는 돈 모라고 야단일다. 아, 내 귀에난 아해들이 어머니라고 부르난 소리가 이상스섭게 들일만치 모든 지난 일은 긔억이 아니나고 지금 당한 일은 귀에 들니지 아니하며 아직 깨지 아니한 꿈속에 사난 것이엇고 그 꿈속에서 깨여보랴고 허덕이난 것은 나 외에 아모도 알 사람이 업섯다.

 

나는 로마시스지나궁전에서 미케란제로의 天井畵 압헤 섯슬 때 西班牙에서 鬼才 고야의 무덤과 밋 그 天井畵 압헤 섯슬 때 나의게 희망 이상이 용출하엿다. 이와 갓치 내가 만흔 그림을 본 후의 감상은 두가지다. 「1은 그림은 좃타」 「2는 그림은 어렵다」 내게 이 감상이 계속되난 동안에는 그림은 늘 수 업스리라고 밋난다. 그 외에 나는 여성인 것을 확실히 깨다랏다. (지금까지는 중성 갓햇든 것이) 그러고 여성은 위대한 것이오 행복된 자인 것을 깨다럿다. 모-든 물정이 이 여성의 지배하에 잇난 것을 보앗고 알앗다. 그리하야 나는 큰 것이 존귀한 동시에 적은 것이 갑잇난 것으로 보고 십고 나 뿐아니라 이것을 모든 조선사람이 알앗스면 십흐다.

 

또 나는 歐米를 漫遊하고 온 후로 곳 1년 동안이나 시집사리를 살게 되고 만흔 친척 가운대로 살게 되엇다. 생각은 따로 두고 행동은 그들에게 좃난 것도 역시 용이한 일이 아니엇다.

 

나는 이 고통, 비애, 무가치를 당하게 된 부득이한 사정이 잇섯나니 조선땅을 밟을 때 임의 腹 중의 8개월 된 임신중이엿다. 이것을 분만하야 왼만치 양육할 동안이 자연 1년이 지나고 만 것이다. 그외에 내 머리속이 뒤범벅이 된 것을 갈피를 차리자면 상당한 휴양과 시일이 걸녀야 햇섯다. 또 나는 사물에 대할 때 마다 이러케 생각한다. 巴里나 조선 지방이 그 인정이나 자연스러운 태도가 일치되난 점이 만타고. 다만 전자는 문명이 극도에 달한 사교술이요, 후자는 미개한 원시적인 差일 뿐이다. 그럼으로 전자보다 후자에게 뜨듯한 맛이 더 잇서 보인다. 識者憂患으로 조곰 아난 것을 잘 소화 못 식힌 나는 점점 偏性으로 다라난다. 이런 결점이 보일 때 마다 늘 반성하난 동시에 후자의게 더욱 친근한 맛을 늣기게 되난 것이다. 또 한가지난 엇지하면 나와 남 사이에 평화하게 살어볼가 하난 것이엇다. 파리인의 사교심이든지 조선농촌의 원시심이 그 요점은 극기다. 사람이 다 각각 개성이 잇난 이상 我만 세울수 업난 것이다. 더욱이 지방부인들의 극기심 즉 부덕이며 만흔 친척 사이에 융화해 가난 포옹성은 수양상 반드시 한번은 보아둘 필요가 잇난 것을 절실히 늣긴다. 이 여러 가지 점으로 보아 환경을 버서나지 못하엇다난 것 보다 환경을 이용할 수 잇섯든 것이다.

 

무서운 것 세 가지

 

그러타고 나는 이상과 갓흔 소극적 행동을 조와하지 아니한다. 경우가 흐리고 기운이 실미지근하며 개성이 똑똑지 못한 것이 실혀하고 미워한다. 과도기 사람들은 남의 변한 행동을 보기 조와하면서 자기의 인습적 행동에서 버서나지 못하난 것이다. 그리하야 누가 압서기를 기다리고 껑충 뛰난 자를 비록 입으로난 비난하더라도 몸으로난 존경을 표하난 것이다. 이러한 적극적 인물이 필요타고 생각한다.그러나 조선사람의 환경에서 껑충 뛸 사람이 용이히 생겨날난지?

 

이것저것 주서 모은 결론의 요점이 이것이다. 세상에난 무서운 것이 세가지가 잇다. 1은 사람이 무섭고 2는 돈이 무섭고 3은 세상이 무섭다. 사람이 사람답게 나든지 또 하고저 하면 못할 것이 업다. 돈만 잇스면 못 갈 곳이 업다. 능치 못할 것이 업다. 그러고 세상을 알고 보면 무섭다. 용기가 주러진다. 사람이면 다 사람이랴, 사람이라야 사람이지. 사람 하나 되기에 얼마나한 시일과 경험과 밋 번민 고통이 싸히난지 돈돈, 돈이 귀한 줄 뉘 몰느며 더구나 조선사람의 돈난리는 처처에서 들니난 바 아인가. 돈 잇난 자는 활기가 들고 돈 업난 자는 억개가 축 처진다. 돈 업스면 伊太利니 佛蘭西니 어대어대를 다 엇더케 다녀왓스랴.<44> 세상은 이런 세상도 잇고 저런 세상도 잇서 세계 중에는 형형색색의 세상이 만타. 이 세상에서는 저 세상을 동경하고 저 세상에서는 이 세상을 동경하니 어느 것이 조흐며 어느 것이 나으며 어느것이 올흔지 조곰 아는 지식으로는 판단하기 어렵다. 도로 제것에 도라가난 수 밧게 업난 것이다. 그럼으로 알고 도로목이나 모르고 도로목이 되기난 일반이다. 이와 갓치 세가지 무서운 것을 알앗다. 또 체험하엿다. 우리가 수양하난 것 활동하난 것이 다 이 세가지 중에 하나를 엇으랴고 하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평면과 입체를 통하야 用機畵에 나타나는 무수한 선이 보이난 것 갓치 눈을 감고 잇스랴면 서양에 잇슬 때는 서양의 입체만 보이고 朝鮮의 평면이 보엿든 것이 朝鮮 오니 조선의 입체가 보이고 서양의 평면이 보인다. 평면과 입체가 합하야 한 물체가된 것 갓치 평면 즉 외면과 입체 즉 내부가 합하야 1사회가 성립된 것이니 어느 것을 따로따로 떼여볼 수가 업다. 잠간잠간 들니난 객에게난 내부를 알 여가가 업고 또 얼는 보이지도 아니하고 한이 업난 것이엇다. 그럼으로 나는 그 외면에 나타난 몃 가지를 취해가지고 왓슬 뿐이다. 그러면 歐米人의 사난 것은 엇더하며 우리 사난 것은 엇더한가. 한말슴 말하면 그들은 꼭꼭 씹어서 단맛, 신맛, 짠맛을 다 알아가지고 생켜서 소화하난 것이오, 우리는 된대로 꿀덕꿀덕 생켜 아모 맛을 모르난 것이다. 결국 大便되기는 일반이나 大便될 동안에 경로가 얼마나 다른가. 그리하야 그들은 생의 맛을 안다. 즉 엇지하면 잘 놀까 하난 것이 걱정거리다. 일할 때는 한껏 일하고 놀때는 흥껏 논다. 감정이 솟을 때는 불이라도 붓흘 듯 하고 理智가 발할 때는 어름과 갓치 차다. 그러나 산뜻하고 다정하고 박애스러운 것이야 아모리 사교술이라 하더라도 유혹 아니될 수 업다. 그러면 우리 사난 것은 엇더한가. 날 가난 줄도 모르게 늘 지지하다. 그러고 감정과 理智를 折衷해서 산다. 또 그들 부녀들은 各自度生으로 의복을 입고 모자를 쓴다. 즉 창작성이 풍부하다. 그리하야 이상한 자태가 보이면 그것을 귀히 역이고 그 사람을 존경하고 그것을 장려한다. 그럼으로 그 사회에난 창작품이 만코 진보가 잇다. 우리난 엇더한가. 좀 이상스러운 것만 보면 욕설과 비방으로 눌느고 비웃난다. 이럼으로 창작물이 잇슬리 만무하다. 개인으로 창작성이 업는 자나 사회로 창작물이 업난 것은 진보가 업다고 볼 수 밧게 업다.

 

무식하나마 세계를 보고 온 머리로 그야말노 원시적이다 십흔 歐米보다 2,3세기 뒤진 조선농촌에서 생활을 하고 잇스랴니 모든 것이 어울니지 아니하고 그 결점이 확실히 눈에 뛰워 다시 외국에 드러슨 감이 생긴다. 그리하야 내 머리로는 딴 생각을 하면서 몸으로난 그들에게 싸이게 하너라고 애를 무한이 쓰게 되고 남보기에난 얼빠진 사람갓치 된다.

 

내가 歐米 갈 때의 目的

 

내가 歐米를 향하야 떠날 때에 나는 무슨 목적으로 가나 하고 생각하엇다. 내게는 안심을 주지 못하는 네가지 문제가 잇섯다. 1은 사람은 엇더케 살아야 조흘가. 2는 남녀간에 엇지하면 평화스럽게 살가. 3은 여자의 지위는 엇더한 것인가. 4는 그림의 요점이 무것인가. 이엇다. 그곳에 가서는 두가지 고려 중에 잇섯다. 즉 한곳에 머물너 巴里살논에 입선이라도 할가, 또 하나는 夫君을 따라 여러나라의 인정풍속을 구경할가 이엇다. 나는 후자를 취하엇다. 그리하야 단시일에 9개국을 주서보고 오니 모다 그것이 그거 갓하야 머리 속이 뒤범벅이 되고 두서를 차릴 수 업게 되엇다. 게다가 곳 해산을 하고 산후의 泄瀉病으로 쇄약해젓다. 마치 무엇을 잡으랴고 허덕허덕 애를 쓰나 잡혀지지 아니하난 것 갓햇다. 이것은 내게 튼튼한 예비지식이 업섯든 까닭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때가 가고 날이 갈사록 한가지 한가지식 정리가 되여 차차 뒤서를 차리게 된다. 그러는 동안에 세월은 速하야 2월 10일. 집에 도착하든 만 1개년이 되고 마렷다. 다만 애처럽고 앗가운 거슨 거대한 금전과 무수한 시간과 무한한 정력을 드려 엇은 歐米에 대한 인상은 점점 희미해지난 것이다. 오즉<45> 꿈속에서 왓다갓다 하다가 새벽잠이 깨여 과거를 回憶하기에 날 새우난 줄 모를 뿐이다. 아, 아 자유, 평등, 박애의 세상 巴里가 그리워...

내게 큰 병이 잇다. 그거슨 무어세든지 化해지지 안는 才操다. 나논 이 才操를 가진 사람을 부러워하나 내게는 잇서지지를 아니한다. 나는 이러한 나를 퍽 미워하고 실혀한다. 그러나 배내병신인데야 엇지하랴. 이는 보난 것, 듯난 것, 배호난 것을 내게 化하려는 고집이 잇는 까닭이다. 즉 내것을 맨든 후에 유쾌함을 늣기난 까닭이다. 다시 말하면 부득이하야 하고 십지 아니하다. 무어세든지 의미를 부처 즐겨서 하난 거시 되어야 속이 시원한 이상한 心思가 잇다. 그럼으로 내가 지금까지 조선대중의 생활을 떠나, 별천지에서 살앗든 거시 다시 조선인의 생활로 드러슬냐면 농촌생활의 정도로붓터 살어볼 필요가 절실히 잇섯다. 내게 농촌생활이 얼마나 필요하엿섯난지.

나는 때때로 이런 생각을 한다. 사람의 머리가 왜 서울 종로에 달닌 鍾만하지 아니한가. 더구나 조선 신여성의 머리가. 그들의 생활은 얼마나 복잡하며 몃 重 몃 중인지?

폭풍우가 지나갓다. 맑은 하날 빗이 들 때 그에 빗취이는 산천초목은 얼마나 명랑한가.

다시 엄동이 닥처왓다. 백설은 싸혀 은세계가 되고 마럿다. 저 수평선에 덥힌 백설은 얼마나 아름답고 결백하고 평화스러운가. 그러나 그것을 헷치고 빗을 보자 얼마나 만흔 凸凹굴곡이 잇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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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살 때에 東萊郡 開揚學校(현 高等普通學校)를 졸업

1906년 東京으로 유학을 가서 正則豫備學校에서 2년간 공부

1914년 岡山第六高等學校 졸업

1915년 京都帝國大學 법학과

1919년 법학사 학위 취득

1919년 京都帝國大學 英法科 졸업

 

 

1915년 1월 24일 日本 京都帝國大學生 金雨英의 주동:  일제침략하 한국36년사 3권

출전朝鮮人槪況 第4章 內地鮮人の情況

日本 京都帝國大學生 金雨英 의 주동으로 京都朝鮮留學生親睦會가 조직되다.


동아일보 1920-04-01  國家存在의 理由(제1회, 全4回)金雨英

                   04월02일 國家存在의 理由(제2회, 全4回)金雨英

 

國家存在의 理由(제3회, 全4回)金雨英

원문이미지

國家存在의 理由(제4회, 全4回)

원문이미지

國家存在의 理由(제4회, 全4回)金雨英

 

 

 

 

 

1920년 04월10일동아일보

변호사김우영, 라혜석양과 정동례배당에서 결혼식(肖) 

 

 

 

 

1921년 09월25일 동아일보

만주지방에 조선인 부령사로 금우영 양재하 이명임명발표, 재만조선인의 내정을 상세히 지득할 필요로

 

 

1925년 12월01일 개벽 제64호 兩西 五十日 中에서

                                         필자春坡 기행문中에서

新舊義州를 보고 回路에 .....

저녁 후는 安東縣에 가서 국경청년연합웅변대회를 보앗다.

演士들의 語材不足과 청중측의 「야지」 不的中은 外格보다 좀 섭섭하얏다.

그것보다 臂頭 金雨英 군의 「番判에 관한 주의」 云云은 (청중의 투표인고로) 죽인지 밥인지 실로 창피막심이엿다.

폐회가 되고보니 11시엿다. 還國을 재촉햇스나 還客이 못처럼 외국왓다가 그져 가느냐고 친구들은 결국 엇던 요리점으로 끌고간다.

盡蕩히 먹고 또 부족하야 엇던 妓房을 차저 기생구경까지하고 오게되얏다.

아구 망측해라.

열이고 백이고 잇는대로 다 드러와 선을 보인다.

누가 마음에 드느냐고 말을 모르면 손고락으로 꼭 집으라고 한다.

십여명 중에서 한아을 손고락질 하니 其餘落第娘들은 창피한듯이 달아나버린다.

5,6명 이국남성이 1개 이국랑과 酬酌이 열리니 엇지 우습지 안으랴.

或笑 或談 일분 후에 1圓金을 주고 나와 버렷다. 此亦經世라고 할가?

 

1930년 10월01일 별건곤 제33호 吸煙室

변호사 금우영 군은 丸山敬次郞君과 명치정에 공동사무소를 내엿다.

이를 터이면 일한소합병이지.

 

 

 

1932년 03월05일 동광 제31호 辯護士 評判記(1) 東虛子

金雨英 君

변호사로 副領事가 되어 가지고 安東縣 가서 수 년을 지내다가 미술가의 안해 羅惠錫女史와 같이 세계일주를 하고 돌아와서는 돌연히 羅氏와 이혼을 하고 다시 시내에서 변호사업을 시작하엿다.

 

어린 자식 3, 4명이 달린 안혜와 이혼을 한 金君 - 그 중심을 추측하기에 어렵지 아니하거니와 미친 물결같이 뛰노는 감정을 가진 예술가의 안해는 법으로 業을 삼는 이 남편과는 일생을 같이 할 수가 업섯는가.

 

안해 羅氏가 세계일주시 XX發明士 XXX氏와 巴里에서 달큼한 사랑을 속삭이엇다는 풍문이 사실인지 아닌지 그것은 모르거니와 金君은 자기의 쓰라린 경험으로 이혼소송을 대리할 때에는 타인이 상상도<67> 못할 名論을 토하야 法官의 머리를 끄덕거리게 하는 때도 잇다고 한다.

 

在野法曹界에 두번재 발을 들어놓는 金君은 무슨 의미로 보던지 甦生의 길을 거러나가는 첫 시련이니 금후의 金君의 辯護士로의 활약은 볼 만한 것인 줄 알앗더니.

 

1932.2.19 朝鮮總督府官報

李聖根이 咸鏡北道參與官에, 姜弼成이 咸鏡南道參與官에, 金雨英 이 道理事官에, 임명되다.

 

1939년 04월01일 동아일보

김우영(총독부도리사관) 승서고등관3등

 

1949년 01월 26일 한성일보

 

反民族行爲特別調査委員會, 부산에서 반민피의자 金雨英과 河判洛을 체포

 

민족을 좀먹는 친일분자에 대한 반민특위의 메스는 드디어 지방에 확대되었다. 즉 중앙반민위원회 김용희 조사관 일행은 지난 23일 부산에 도착, 행동을 개시하여 동일 하오 9시 반경 부내 芙容洞에서 전 중추원參議 金雨英(64)을 체포하는 한편 이어 24일 상오 9시경에는 부수동에서 전 경남도 고등과 형사 河判洛을 체포하여 모처에 구금하였다 하는 바, 전기 김우영은 京都帝大를 졸업한 후 안동 副領事, 전남산업과장, 충남 參與官, 중추원참의 등을 역임한 친일거두라 하며, 河는 고등과 형사로서 수많은 애국자를 고문학대하여 ‘고문왕’이라는 이름까지 받은 악질분자라 한다.

 

 

 

 

 

나혜석은 6년간 만주에서 무엇을 했나?



동아일보 1920-04-10 03 06 辯護士 金雨英, 羅蕙錫孃과 貞洞禮拜堂에서 結婚式(肖)
10 동아일보 1920-05-20 02 07 朝鮮經濟會主催 講演會: 演士 朴泳孝 李商在 崔鎭 安國善 盧翼根 金雨英
11 동아일보 1921-09-25 02 07 滿洲地方에 朝鮮人 副領事로 金雨英 楊在河 二名任命發表, 在滿朝鮮人의 內情을 詳細히 知得할 必要로
12 동아일보 1922-05-19 03 04 報酬金八千圓 請求訴訟, 이전 변호사 金雨英의 송사
13 동아일보 1922-10-04 04 05 安東縣朝鮮人靑年會主催 강연회: 在外靑年 同胞의 責任(金雨英), 家庭에서 育兒하는 方法(黃天佑)
14 동아일보 1930-03-28 02 03 辯護士 金雨英氏 開業
15 동아일보 1939-04-01 조간 01 10 金雨英(總督府道理事官) 陞敍高等官三等
16 동아일보 1949-01-26 석간 02 05 金雨英 河判洛은 釜山에서 逮捕拘禁
17 동아일보 1949-01-27 석간 02 07 盧璣植(保安課長) 逮捕 金雨英等과 서울로 押送//李九範은 日本에 逃避(釜山)
18 동아일보 1949-02-02 석간 02 03 文明琦, 林昌洙逮捕 徐永出 南學鳳도 被檢//特委各道支部設置 朴興植과 李鍾榮은 問招終了//金雨英 金泰錫問招에 着手
19 동아일보 1949-02-15 석간 02 06 金雨英保釋
20 동아일보 1957-09-17 석간 04 06 民族共同生活과 道義(新生公論冊別) ; 新生公論社刊
21 동아일보 1957-09-17 석간 04 06 金雨英著 民族共同生活과 道義(新生公論冊別) ; 新生公論社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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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 앙투아네트 유럽 최대의 몀문 합스브르그 家의 황녀로 태어나

프랑스의 왕비가 된 것은 운명의 우연이었을까?

단두대에서 처형을 당한 것은 역사의 필연이었을까?

프랑스 대혁명의 원인이 과연 그녀였을까?

참 많은 생각과 의문이 든다.

허영과 음모의 대명사 베르사유의 장미! 마리 앙투아네트! 기오틴 단두대에서는 날 아침 마리 앙투아네트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한없는 아이들 걱정에 눈물을 쏟으면서 페르센을 그리워했을까?

비극은 슬프다.

마리 앙투아네트! 한 번만 더 생각하고 인생의 방향을 달리 잡았더라면 이렇게 비참한 결말만은 피할 수 있었을 텐데..

그래서 인생에는 늘 조언이 필요하다.

곁에 있는 좋은 사람들을 통해서, 훌륭한 책들을 통해서 깊은 깨달음을 얻는다.

한 번 사는 인생 욕먹지 말고 사랑받으면서 잘 살아야지! 호호호호홍응! 개그우먼 권진영

 





베르사유의 장미  테판 츠바이크(1881~1942)가 1932년 발표한 평전





마리 앙투아네트Marie Antoinette d'Autriche


출생: 1755년 11월 2일

오스트리아 제국의 공주였다. 프랑스와의 동맹을 위해 루이 16세와 정략 결혼하게 된다.

어린 시절부터 자유분방하게 성장한 그녀는 11세부터 미래의 왕비교육을 받는다.

 

14살 : 1770년 5월 16일, 14살 때 루이 16세와 화려한 결혼식을 치른다.

미래의 왕비로써 갖추어야할 기본 법도를 교육받는다.

왕비는 신분이 낮은 자에게 먼저 말을 걸지 말라고 가르친다.

어려서부터 격이 낮은 자들은 모두 천한 것이니 혐오하도록 가르친 것이니 백성의 삶이 어떠한지 알 길이 없다.

19세 : 1774년 남편이 루이 16세로 즉위하자 마리는 프랑스의 왕비가 되었고,

                 남편으로부터 베르사유의 프티 트리아농 궁전을 선물 받았다.

유행의 선두주자가 되었고 귀족부인들이 이를 따라했다. 스타일 장식 로코코 여왕으로 불렸다.

루이 16세는 성불구(뒤에 회복) 18세의 멋쟁이 악셀 페르센 백작과 만나 로맨스 계속된다.

유행의 선두주자가 되었고 귀족부인들이 이를 따라했다. 스타일 장식 로코코 여왕으로 불렸다.

 

23세 : 1778년 12월 19일 첫 딸 마리 테레즈를 출산했다.

정치놀음에 관심없는 왕비는 무었을 입을까. 머리모양을 어떻게 할까. 액세서리는.., 뭐하고 놀지.....오페라 연극관람 온갖 사치로 빚을 지자 도박에 손을 댄다.

귀족부인들은 돈을 잃어주고 남편의 인사 청탁을 이뤄냈다.

 

가면무도회에서 푸른 눈빛의 폴리니아크 백작부인을 보자마자 반해서 궁정으로 불러들여 어디고 함께 팔짱을 끼고 다닐 만큼 사랑에 빠져있었다.

 

백작부인은 남들이 시샘 할 만큼 총애를 얻자 그의 일족들이 궁내에서 독단적인 전행을 일삼았다.

사치와 파타의 향락에 빠진 왕비는 보석 목걸이 사기 사건에 연루되어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진다.

주범인 라모트는 감옥을 탈출했는데 민심은 왕비가 주범이며 라모트의 탈옥 또한 왕비가 주도 했다고 믿게 되었다.

굶주리던 백성들은 결국 거리로 몰려 나와 혁명의 기쁜 함성을 질렀다.

왕은 단두대에 올랐고 왕비는 루이 까페의 부인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38세: 1793년 10월 16일 그리고 그녀 역시

 앙투아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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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자 룩셈부르크 (Rosa Luxemburg, Rosalia Luxemburg)

1919년 1월 15일 베를린. 150cm가 넘을까 말까 한 신장에 다리가 불편한 한 40대 여인이 군인으로 보이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그들이 휘두른 총의 개머리판에 두개골이 으스러지도록 얻어맞고 쓰러졌다. 그리고 그녀의 시신은 그대로 다리 위에서 운하로 버려졌다. 독일의 11월 혁명 정국 속에서 우파 의용단에게 살해당한 이 왜소한 중년 여인은 로자 룩셈부르크였다. 그녀는 20세기 초, 러시아와 독일의 혁명을 주도하며 새로운 자유와 평등 사회를 꿈꾸던 정열의 혁명가이자 마르크스 이래 가장 뛰어난 두뇌의 소유자로 일컬어지던 탁월한 이론가였다.

타협을 모르는 불굴의 이상주의자

로자 룩셈부르크 이미지 1

로자 룩셈부르크가 살해된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한때 그녀가 몸담았던 사회민주당이 정권을 획득했던 시기였다. 그녀를 살해한 군인들도 11월 혁명을 이끌어 제정을 무너뜨린 세력이었다. 얼핏 그녀와 별반 다를 바 없는 노선을 걷는 것처럼 보이는 세력들이 로자 룩셈부르크를 서둘러 체포하고 재판도 없이 무참히 살해한 것은 로자 룩셈부르크라는 인물이 가진 타협을 모르는 순수 사회주의 사상과 그녀의 폭발적 행동력 때문이었다.

그녀는 고집스러울 만큼 자신이 이론적으로 알고 있고, 믿고 있는 혁명을 제대로 된 방법으로 100% 실현하기 위해 노력한 사람이었다. 이상적 혁명 달성은 공감하지만 과정의 난관을 타파하기 위해서 하는 수 없이 선택한 방법이라던가, 혹은 시대가 변했으니 그에 맞게 이론을 새롭게 수정해야 된다는 주장에 그녀는 단 한 번도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으며 그에 맞서 순정한 혁명정신을 부르짖었다.

그녀는 순수한 국제주의자였으며 평등주의자였고 민주주의자였다. 그러기에 그녀는 러시아로부터 독립을 원하던 그녀의 조국 폴란드의 사회주의자들과는 달리 계급해방의 노선을 택했고, 혁명달성을 위해 직업적 혁명가의 독재를 정당화하던 레닌과 맞섰으며, 변화하는 시대에 맞춰 사회주의 이론을 수정, 자본주의 사회에 적응할 것을 주장한 베른슈타인과 이론 투쟁을 벌였다. 그녀는 노동자 스스로가 만든 평등하고 자유로우며 민주적인 세계를 꿈꾸었으며 그것이 실현 가능하다고 굳게 믿었다. 그러나 대다수 그녀의 동료들은 상황과 자기논리에 맞추어 변해갔고 결국, 그녀에게 등을 돌리고 그녀의 존재를 부담스러워하게 된다.

결국 그녀가 독일 사회민주당과 결별해 독자적인 급진적 혁명당 스파르타쿠스단을 만들고 봉기를 일으키면서, 사회민주당과 로자 룩셈부르크와의 위태로웠던 공존은 불가능해지고 말았다. 그리고 로자 룩셈부르크는 그 꺾이지 않는 불굴의 의지를 증오하고 두려워한 세력에 의해 잔혹하게 살해당했다. 그러나, 정작 그녀의 적들과 동료들이 두려워했던 로자 룩셈부르크, 그녀가 꿈꾼 세상은 인간이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세상이었다. 그녀가 옥중에 있으면서 지인에게 보낸 편지 속에서 로자 룩셈부르크는 자신의 생각을 이렇게 써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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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근현대잡지자료








http://db.history.go.kr/item/level.do?levelId=ma_016


















 http://swmuseum.blog.me/10146366420?Redirect=Log&from=postView

 

 

4男妹 아해들아 에미를 원망치 말고 社會制度와 道德과 法律과 因習을 원망하라.

네 에미는 過度期에 先覺者로 그 運命의 줄에 犧牲된 者이엿더니라.

後日 外交官이 되여 巴里오거든 네 에미에 墓를 차차 꼿 한송이 꼬저 다오.

 

펄펄 날든 저제비
참혹한 사람의손에
두쪽지 두다리
모다 상하엿네
다시 살어날냐고
발버둥치고 허덕이다
끗끗내 못익이고
고만 척느러젓네
그러나 모른다
제비에게는
아직 따듯한긔운잇고
숨쉬는 소리가들닌다
다시 仲天에떠오를
活力과 勇氣와
忍耐와 努力이
다시 잇슬지
뉘 能히 알니가 잇스랴 (舊稿에서)

 

발행일1935년 01월01일   삼천리 제7권 제1호   

http://db.history.go.kr/item/level.do?levelId=ma_016_0440_0680

 

 

 

정조는 취미다.

http://ieave0047.tistory.com/144

 

 

 

진정한 선각자 나혜석

http://blog.naver.com/crazyboy/130177199405

 

나혜석의 시세계

http://jijiu00.blog.me/140014788730

 

인간으로써의 나혜석

http://ieave0047.tistory.com/146

 

이혼고백서

http://blog.naver.com/flowerisla70/120024103518

 

 

 

타박타박 세계사

http://bookcast.tistory.com/category/타박타박%20세계사?page=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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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navercast.naver.com/contents.nhn?rid=75&contents_id=455

http://db.history.go.kr/item/level.do?levelId=ma_016_0270_0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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