每日申報1924년 06월 21일
今 1일로 폐막될 조선미술전람회, 20일 동안 대성황을 이루고 명일에 폐막
개벽 신간 제1호 1934년 11월01일
百人百話
만주국 육군 中佐 李亮씨는 歸京 중 조선호텔에서 체류하얏다. 전날 XXX勞働宿泊所에서 留宿하던 일을 생각하면 씨도 感慨無量할 듯.
金X仁씨는 저번에 母親喪을 당하니 兪鎭午씨는 요새 또 父親喪을 당하엿다. 今秋는 小說家 蒙喪之.
몸이 瘦瘠하기로 유명하야 瘦身大學교수니 말너스키니하는 別名을 듯고 收監 중에도 가느다런 손목이 명꽁이 時計(手錠의 별칭) 속으로 들낙달낙하야 看守들의 이약이거리가 되던 李箕永은 某사건으로 또 檢擧되엿다. 몸은 비록 不自由나마 손목만은 항시 自由일 듯
文藝評論家 白鐵은 이름이 不吉하야 鐵窓구경을 하게 되엿다. 어떤 친구가 戱言하는 것을 드럿다. 그러나 그 대신 姓이 白이닛가 白放될 수도 잇겟지.
金東煥씨는 羅惠錫 天使仙女로 아는지 뼉다구를 게먹드시 再湯三湯으로 三千里誌 號마다 울거먹는다. 그러다가는 羅씨 死後 白骨까지도 東煥씨가 차지하기 쉬울걸.
三千里誌에는 曙海 崔鶴松씨의 追悼會 비용을 상세 발표하얏다.
동광 제31호1932년 03월05일
辯護士 評判記(1) 필자東虛子
金雨英君
변호사로 副領事가 되어 가지고 安東縣 가서 수 년을 지내다가 미술가의 안해 羅惠錫女史와 같이 세계일주를 하고 돌아와서는 돌연히 羅氏와 이혼을 하고 다시 시내에서 변호사업을 시작하엿다.
어린 자식 3, 4명이 달린 안혜와 이혼을 한 金君 - 그 중심을 추측하기에 어렵지 아니하거니와 미친 물결같이 뛰노는 감정을 가진 예술가의 안해는 법으로 業을 삼는 이 남편과는 일생을 같이 할 수가 업섯는가.
안해 羅氏가 세계일주시 XX發明士 XXX氏와 巴里에서 달큼한 사랑을 속삭이엇다는 풍문이 사실인지 아닌지 그것은 모르거니와 金君은 자기의 쓰라린 경험으로 이혼소송을 대리할 때에는 타인이 상상도<67> 못할 名論을 토하야 法官의 머리를 끄덕거리게 하는 때도 잇다고 한다.
在野法曹界에 두번재 발을 들어놓는 金君은 무슨 의미로 보던지 甦生의 길을 거러나가는 첫 시련이니 금후의 金君의 辯護士로의 활약은 볼 만한 것인 줄 알앗더니.
잡지명 삼천리 제6호
발행일 1930년 05월01일
諸氏의 聲明 설문
諸氏의 聲明
1. 선생은 민족, 사회주의자임니가?
2. 선생은 실행가, 학자가 되겟슴니가?
3. 선생은 사상상 누구의 영향을 가장 만히 밧엇슴니가?
京城 崇三洞 127 李光洙
간단한 말은 오해를 사기 쉬웁니다. 그 중에도 민족주의란 말은 固定 共通한 내용이 적읍니다.
1. 민족주의자입니다.
2. 소설 쓰고 신문기자 되기를 목표로 함니다.
3. 톨스토이, 예수, 佛陀, 島山
市內 茶屋町 羅蕙錫
1. 답을 피함니다.
2. 장차 조흔 시기 잇스면 여성운동에 나서려 함니다.
삼천리 제6호 1930년 05월01일
喫煙室
羅蕙錫女史 曰=저는 경우만 허락하면 그림공부로 다시 한번 「파리」로 가려고 함니다. 요전 번에 그곳에 갓슬 때는 약 6개월 동안 잇섯는데 파리의 유명한 화가 「빗세이」씨의 화실을 다니며 무엇을 좀 알려고 애를 썻지만은 잘 알려지지 안튼 것이 정작 귀국하여 보니 이것 저것 谿然히 깨닷게 되는 바 잇서 이제야 정말 洋畵에 눈이 떠지는 듯 함니다. 그래서 녯날에는 헛 일을 한 듯 해요. 즉 헛 그림을 그린 듯 후회남니다.
요지음은 친구의 방을 빌어 가지고 전람회에 출품할 풍경화를 그리고 잇는데 아츰 열시부터
저녁 넉점까지 그 화실에 꼭 드러 박이고 잇슴니다. 아마 2주일이나 걸니어야 완성될 듯 한데 녜전 奉天의 풍물을 그린 「天后宮」 이후에 처음 애쓰는 作으로 나는 밋슴니다만은 엇덜는시요.
나의 여학생 시대는 벌서 10여년 전으로 지금은 열살 먹은 아들을 머리로 어린애들 녯을 가진 늙은이람니다. 세월은 참 빠르지요.
삼천리 제6호 1930년 05월01일
新兩性道德의 提唱
尹聖相, 黃信德, 羅惠錫, 鄭錫泰 대담·좌담
友愛結婚, 試驗結婚
羅蕙錫
日時 4월 2일 오후5시
場所 京城仁寺洞에서 會見
기자=우리들이 결혼하는 목뎍이 사나히면 자긔의 안해를 또 녀자이면 자긔의 지아비를 엇는데 잇슴니까 혹은 자긔의 혈통을 계승하여 줄 아돌 딸을 엇는데 잇슴니까?
羅女史=그야 한 개의 지아비 혹은 안해를 엇는뎨 잇겟지요. 자녀는 부산물에 불과한 것인 줄 압니다.
기자=그러면 「성욕」과 「생식」은 전연히 딴 물건이 되어야 하켓슴니다그러.
羅女史=전연 딴 것이라고 할 수는 업스나 그러케 혼동할 수도 업는 물건이겟지요.
기자 그러면 결혼의 주되는 목적이 이미 저안해를 엇는데 잇다면 만일 그 결혼이 잘못이 되엇든 것이 판명되는 날이면 물론 이혼하여야 할 것이 아니겟슴니까?
羅女史=그래야 하겟지요. 그러나 이혼이란 그러케 쉽사리 되는 것이 아닌 즉 그 결혼이 과연 행복될 것이냐 엇저느냐를 알기 위하야 최근에 구라파에서는 시험결혼이라 것이 제창되는 줄 압니다.
기자=3,4 년동안 살어보다가 실흐면 갈나지고 조흐면 偕老同穴하는?
羅女史=그러치요.
기자= 조선에 그러한 결혼방식이 적합하리까요?
羅女史=일부 처단을 거러가는 새 부부들은 벌서 그를 실행하고 잇지 안어요. 그러케 보이드구만요.
기자=시험결혼의 특색은 무엇임니까?
羅女史=이미 시험이니까 그 결과에 대하야 어느 편이나 절대적의 의무를 지지 안치요. 쉽게 말하면 리혼한다 섬치드래도 慰藉料니 貞操蹂躝이니 하는 문뎨가 붓지 안켓지요. 합의를 전제로 한 결혼은 이혼할 권리를 처음부터 보류하여 조흔 것이니까요.
기자=그러한 새 도덕을 현대의 만흔 여학생들에게 가르치엇스면 조켓슴니다. 성교육이라 하면 교육자들은 생리적 방면만 가르칠 줄 알엇지 사상상 도덕상의 새로운 길은 가르칠 줄 모르는 모양이니까 이것이 현대의 큰 通弊인 줄 압니다.
羅女史=동감임니다. 兩性문제에 잇서서 생리상 방면을 과학적으로 가르치는 것도 조켓스나 오히려 그보다도 더 근본적으로 가령 산아제한이 엇더타든지 시험결혼이란 엇던 것이라든지 하는 도덕상 사상상의 계몽을 식히는 것이 더욱 필요한 일로 교육자의 주력은 그곳에 몰녀와야 올흘 줄 암니다.
기자=그러니 산아제한가튼 방법을 필요로 하는 그 시험결혼은 빈빈한 이혼을 막는 길도 되고 男女性의 離合을 헐신 자유스럽게 하는 효과가 잇슬 것이겟슴니다.
羅女史=그러타 할 것이겟지요.(하략-원문)
미스코리아 심사위원
삼천리 제3권 제10호 1931년 10월01일
三千里一色」發表
화려강산 우리 반도가 나은 「삼쳔리일색」은 본사에서 일즉 모집을 개시한 이래 해내해외로부터 삼백이십륙 매의 다수한 응모 사진이 드러왓삽나이다. 그래서 심미계(審美界)의 권위인 李光洙, 廉想涉, 金岸曙, 安碩柱, 李承萬, 李靑田, 許英肅, 羅惠錫, 金一葉, 崔承喜, (本社側 金東煥, 崔貞熙) 등 문사, 화가, 의사, 무용가 여러분께서 여러 날을 두시고 엄숙하고도 공정한 심사를 하시어 이제 아래와 갓치 발표하나이다.
특선 崔貞嫄孃 芳紀 18 현재 충남 대전 여자고등보통학교 수업
삼천리 제4권 제1호 1932년 01월01일
아아 自由의 巴里가 그리워, 歐米 漫遊하고 온 후의 나
在東京 羅蕙錫
생활정도를 나츠이난 것처럼 고통스러운 것이 업난 것 갓다. 이상을 품고 그것을 실현 못하난 것처럼 비애스러운 것이 업난 것 갓다. 내 意思를 죽여 남의 意思를 쫏난 것처럼 무의미한 것이 업난 것 갓다. 그러면 나는 이러한 환경을 버서나지 못할 그야말로 무슨 운명에 처하엿는가? 그러치 아니면 일부러 당하고 인난가?
歐米 漫遊期 1년 8개월 간의 나의 생활은 이러하얏다. 단발을 하고 양복을 입고 빵이나 차를 먹고 침대에서 자고 스켓치빡스를 들고 연구소를 다니고(아가데미) 책상에서 佛蘭西 말 單字를 외우고 때로난 사랑의 꿈도 뀌여보고 장차 그림大家가 될 공상도 해보앗다. 흥 나면 춤도 추어보고 시간 잇스면 연극장에도 갓다. 왕전하와 각국 대신의 연회석상에도 참가해 보고 혁명가도 차자 보고 여자 참정권론자도 맛나 보앗다. 佛蘭西 가정의 가족도 되여보앗다. 그 기분은 여성이오 학생이오 처녀로써이엇다. 실상 조선여성으로서는 누리지 못할 경제상으로나 기분상 아모 장애되난 일이 하나도 업섯다. 태평양을 건느는 뱃속에서조차 매우 유쾌히 지냇다.
그러나 橫濱에 도착되난 때 붓터 가옥은 나무간 갓고 길은 시구렁 갓고 사람들의 얼골은 노라코 등은 새우등 갓치 꼬부러저 잇다. 朝鮮 오니 길에 몬지가 뒤집어 씨우난 거시 자못 불쾌하엿고 송이버섯 갓흔 납작한 집속에서 울녀 나오난 다듬이 소리는 처량하엿고 흰옷을 입고 시름 업시 거러가난 사람은 불상하엿다. 이와 갓치 훨적 피엿든 꼿이 바람에 떠러지듯 푸군하고 늘신하든 기분은 전후좌우로 밧삭밧삭 오그러들기를 시작하엇다.
歸國 後의 나의 生活
朝鮮 와서의 나의 생활은 엇더하엿나. 깍것든 머리를 부리낫케 기르고 강동한 양복을 벗고 긴 치마를 입엇다. 쌀밥을 먹으니 숨이 갓부고 우럭우럭 취하엇다. 잠자리는 백이고 느러슨 거슨 보기<43> 실혓다. 부억에 드러가 반찬을 맨들고 온돌방에 안저 바누질을 하게 되엇다. 시가친척들은 誼理를 말하고 시어머니는 효도를 말하며 시누이는 돈 모라고 야단일다. 아, 내 귀에난 아해들이 어머니라고 부르난 소리가 이상스섭게 들일만치 모든 지난 일은 긔억이 아니나고 지금 당한 일은 귀에 들니지 아니하며 아직 깨지 아니한 꿈속에 사난 것이엇고 그 꿈속에서 깨여보랴고 허덕이난 것은 나 외에 아모도 알 사람이 업섯다.
나는 로마시스지나궁전에서 미케란제로의 天井畵 압헤 섯슬 때 西班牙에서 鬼才 고야의 무덤과 밋 그 天井畵 압헤 섯슬 때 나의게 희망 이상이 용출하엿다. 이와 갓치 내가 만흔 그림을 본 후의 감상은 두가지다. 「1은 그림은 좃타」 「2는 그림은 어렵다」 내게 이 감상이 계속되난 동안에는 그림은 늘 수 업스리라고 밋난다. 그 외에 나는 여성인 것을 확실히 깨다랏다. (지금까지는 중성 갓햇든 것이) 그러고 여성은 위대한 것이오 행복된 자인 것을 깨다럿다. 모-든 물정이 이 여성의 지배하에 잇난 것을 보앗고 알앗다. 그리하야 나는 큰 것이 존귀한 동시에 적은 것이 갑잇난 것으로 보고 십고 나 뿐아니라 이것을 모든 조선사람이 알앗스면 십흐다.
또 나는 歐米를 漫遊하고 온 후로 곳 1년 동안이나 시집사리를 살게 되고 만흔 친척 가운대로 살게 되엇다. 생각은 따로 두고 행동은 그들에게 좃난 것도 역시 용이한 일이 아니엇다.
나는 이 고통, 비애, 무가치를 당하게 된 부득이한 사정이 잇섯나니 조선땅을 밟을 때 임의 腹 중의 8개월 된 임신중이엿다. 이것을 분만하야 왼만치 양육할 동안이 자연 1년이 지나고 만 것이다. 그외에 내 머리속이 뒤범벅이 된 것을 갈피를 차리자면 상당한 휴양과 시일이 걸녀야 햇섯다. 또 나는 사물에 대할 때 마다 이러케 생각한다. 巴里나 조선 지방이 그 인정이나 자연스러운 태도가 일치되난 점이 만타고. 다만 전자는 문명이 극도에 달한 사교술이요, 후자는 미개한 원시적인 差일 뿐이다. 그럼으로 전자보다 후자에게 뜨듯한 맛이 더 잇서 보인다. 識者憂患으로 조곰 아난 것을 잘 소화 못 식힌 나는 점점 偏性으로 다라난다. 이런 결점이 보일 때 마다 늘 반성하난 동시에 후자의게 더욱 친근한 맛을 늣기게 되난 것이다. 또 한가지난 엇지하면 나와 남 사이에 평화하게 살어볼가 하난 것이엇다. 파리인의 사교심이든지 조선농촌의 원시심이 그 요점은 극기다. 사람이 다 각각 개성이 잇난 이상 我만 세울수 업난 것이다. 더욱이 지방부인들의 극기심 즉 부덕이며 만흔 친척 사이에 융화해 가난 포옹성은 수양상 반드시 한번은 보아둘 필요가 잇난 것을 절실히 늣긴다. 이 여러 가지 점으로 보아 환경을 버서나지 못하엇다난 것 보다 환경을 이용할 수 잇섯든 것이다.
무서운 것 세 가지
그러타고 나는 이상과 갓흔 소극적 행동을 조와하지 아니한다. 경우가 흐리고 기운이 실미지근하며 개성이 똑똑지 못한 것이 실혀하고 미워한다. 과도기 사람들은 남의 변한 행동을 보기 조와하면서 자기의 인습적 행동에서 버서나지 못하난 것이다. 그리하야 누가 압서기를 기다리고 껑충 뛰난 자를 비록 입으로난 비난하더라도 몸으로난 존경을 표하난 것이다. 이러한 적극적 인물이 필요타고 생각한다.그러나 조선사람의 환경에서 껑충 뛸 사람이 용이히 생겨날난지?
이것저것 주서 모은 결론의 요점이 이것이다. 세상에난 무서운 것이 세가지가 잇다. 1은 사람이 무섭고 2는 돈이 무섭고 3은 세상이 무섭다. 사람이 사람답게 나든지 또 하고저 하면 못할 것이 업다. 돈만 잇스면 못 갈 곳이 업다. 능치 못할 것이 업다. 그러고 세상을 알고 보면 무섭다. 용기가 주러진다. 사람이면 다 사람이랴, 사람이라야 사람이지. 사람 하나 되기에 얼마나한 시일과 경험과 밋 번민 고통이 싸히난지 돈돈, 돈이 귀한 줄 뉘 몰느며 더구나 조선사람의 돈난리는 처처에서 들니난 바 아인가. 돈 잇난 자는 활기가 들고 돈 업난 자는 억개가 축 처진다. 돈 업스면 伊太利니 佛蘭西니 어대어대를 다 엇더케 다녀왓스랴.<44> 세상은 이런 세상도 잇고 저런 세상도 잇서 세계 중에는 형형색색의 세상이 만타. 이 세상에서는 저 세상을 동경하고 저 세상에서는 이 세상을 동경하니 어느 것이 조흐며 어느 것이 나으며 어느것이 올흔지 조곰 아는 지식으로는 판단하기 어렵다. 도로 제것에 도라가난 수 밧게 업난 것이다. 그럼으로 알고 도로목이나 모르고 도로목이 되기난 일반이다. 이와 갓치 세가지 무서운 것을 알앗다. 또 체험하엿다. 우리가 수양하난 것 활동하난 것이 다 이 세가지 중에 하나를 엇으랴고 하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평면과 입체를 통하야 用機畵에 나타나는 무수한 선이 보이난 것 갓치 눈을 감고 잇스랴면 서양에 잇슬 때는 서양의 입체만 보이고 朝鮮의 평면이 보엿든 것이 朝鮮 오니 조선의 입체가 보이고 서양의 평면이 보인다. 평면과 입체가 합하야 한 물체가된 것 갓치 평면 즉 외면과 입체 즉 내부가 합하야 1사회가 성립된 것이니 어느 것을 따로따로 떼여볼 수가 업다. 잠간잠간 들니난 객에게난 내부를 알 여가가 업고 또 얼는 보이지도 아니하고 한이 업난 것이엇다. 그럼으로 나는 그 외면에 나타난 몃 가지를 취해가지고 왓슬 뿐이다. 그러면 歐米人의 사난 것은 엇더하며 우리 사난 것은 엇더한가. 한말슴 말하면 그들은 꼭꼭 씹어서 단맛, 신맛, 짠맛을 다 알아가지고 생켜서 소화하난 것이오, 우리는 된대로 꿀덕꿀덕 생켜 아모 맛을 모르난 것이다. 결국 大便되기는 일반이나 大便될 동안에 경로가 얼마나 다른가. 그리하야 그들은 생의 맛을 안다. 즉 엇지하면 잘 놀까 하난 것이 걱정거리다. 일할 때는 한껏 일하고 놀때는 흥껏 논다. 감정이 솟을 때는 불이라도 붓흘 듯 하고 理智가 발할 때는 어름과 갓치 차다. 그러나 산뜻하고 다정하고 박애스러운 것이야 아모리 사교술이라 하더라도 유혹 아니될 수 업다. 그러면 우리 사난 것은 엇더한가. 날 가난 줄도 모르게 늘 지지하다. 그러고 감정과 理智를 折衷해서 산다. 또 그들 부녀들은 各自度生으로 의복을 입고 모자를 쓴다. 즉 창작성이 풍부하다. 그리하야 이상한 자태가 보이면 그것을 귀히 역이고 그 사람을 존경하고 그것을 장려한다. 그럼으로 그 사회에난 창작품이 만코 진보가 잇다. 우리난 엇더한가. 좀 이상스러운 것만 보면 욕설과 비방으로 눌느고 비웃난다. 이럼으로 창작물이 잇슬리 만무하다. 개인으로 창작성이 업는 자나 사회로 창작물이 업난 것은 진보가 업다고 볼 수 밧게 업다.
무식하나마 세계를 보고 온 머리로 그야말노 원시적이다 십흔 歐米보다 2,3세기 뒤진 조선농촌에서 생활을 하고 잇스랴니 모든 것이 어울니지 아니하고 그 결점이 확실히 눈에 뛰워 다시 외국에 드러슨 감이 생긴다. 그리하야 내 머리로는 딴 생각을 하면서 몸으로난 그들에게 싸이게 하너라고 애를 무한이 쓰게 되고 남보기에난 얼빠진 사람갓치 된다.
내가 歐米 갈 때의 目的
내가 歐米를 향하야 떠날 때에 나는 무슨 목적으로 가나 하고 생각하엇다. 내게는 안심을 주지 못하는 네가지 문제가 잇섯다. 1은 사람은 엇더케 살아야 조흘가. 2는 남녀간에 엇지하면 평화스럽게 살가. 3은 여자의 지위는 엇더한 것인가. 4는 그림의 요점이 무것인가. 이엇다. 그곳에 가서는 두가지 고려 중에 잇섯다. 즉 한곳에 머물너 巴里살논에 입선이라도 할가, 또 하나는 夫君을 따라 여러나라의 인정풍속을 구경할가 이엇다. 나는 후자를 취하엇다. 그리하야 단시일에 9개국을 주서보고 오니 모다 그것이 그거 갓하야 머리 속이 뒤범벅이 되고 두서를 차릴 수 업게 되엇다. 게다가 곳 해산을 하고 산후의 泄瀉病으로 쇄약해젓다. 마치 무엇을 잡으랴고 허덕허덕 애를 쓰나 잡혀지지 아니하난 것 갓햇다. 이것은 내게 튼튼한 예비지식이 업섯든 까닭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때가 가고 날이 갈사록 한가지 한가지식 정리가 되여 차차 뒤서를 차리게 된다. 그러는 동안에 세월은 速하야 2월 10일. 집에 도착하든 만 1개년이 되고 마렷다. 다만 애처럽고 앗가운 거슨 거대한 금전과 무수한 시간과 무한한 정력을 드려 엇은 歐米에 대한 인상은 점점 희미해지난 것이다. 오즉<45> 꿈속에서 왓다갓다 하다가 새벽잠이 깨여 과거를 回憶하기에 날 새우난 줄 모를 뿐이다. 아, 아 자유, 평등, 박애의 세상 巴里가 그리워...
내게 큰 병이 잇다. 그거슨 무어세든지 化해지지 안는 才操다. 나논 이 才操를 가진 사람을 부러워하나 내게는 잇서지지를 아니한다. 나는 이러한 나를 퍽 미워하고 실혀한다. 그러나 배내병신인데야 엇지하랴. 이는 보난 것, 듯난 것, 배호난 것을 내게 化하려는 고집이 잇는 까닭이다. 즉 내것을 맨든 후에 유쾌함을 늣기난 까닭이다. 다시 말하면 부득이하야 하고 십지 아니하다. 무어세든지 의미를 부처 즐겨서 하난 거시 되어야 속이 시원한 이상한 心思가 잇다. 그럼으로 내가 지금까지 조선대중의 생활을 떠나, 별천지에서 살앗든 거시 다시 조선인의 생활로 드러슬냐면 농촌생활의 정도로붓터 살어볼 필요가 절실히 잇섯다. 내게 농촌생활이 얼마나 필요하엿섯난지.
나는 때때로 이런 생각을 한다. 사람의 머리가 왜 서울 종로에 달닌 鍾만하지 아니한가. 더구나 조선 신여성의 머리가. 그들의 생활은 얼마나 복잡하며 몃 重 몃 중인지?
폭풍우가 지나갓다. 맑은 하날 빗이 들 때 그에 빗취이는 산천초목은 얼마나 명랑한가.
다시 엄동이 닥처왓다. 백설은 싸혀 은세계가 되고 마럿다. 저 수평선에 덥힌 백설은 얼마나 아름답고 결백하고 평화스러운가. 그러나 그것을 헷치고 빗을 보자 얼마나 만흔 凸凹굴곡이 잇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