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조선말
1936.9.중앙
무관한 친구가 하나 있대서 걸핏하면 성천에를 가구가구 했습니다.
거기서 서도인 말이 얼마나 아름답다는 것을 깨쳤습니다.
들어 있는 여관 아이들이 손을 가리켜 '나가네'라고 그러는 소리를 듣고 '좋은 말이구나' 했습니다.
나같이 표표한 여객이야말로 '나가네'란 말에 딱 필적하는 것같이 회심의 음향이었습니다.
또 '눈깔사탕'을 '댕구알'이라고들 그럽니다.
'눈깔사탕'의 깜찍스럽고 무미한 어감에 비하여 '댕구알'이 풍기는 해학적인 여운이 여간 구수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어서 어서 하고 재촉할 제 '엉야-'하고 콧소리를 내어서 좀 길게 끌어 잡아댕기는 풍속이 있으니
그것이 젊은 여인네인 경우에 눈이 스르르 감길 듯이 매력적입니다.
그러고는 지용의 시 어느 구절엔가 '검정콩 푸렁콩을 주마.' 하는 '푸렁'소리가 언제도 말했지만
잊을 수 없는 아름다운 말솜씨입니다.
불초 이상은 말끝마다 참 참 소리가 많아 늘 듣는 이들의 웃음을 사는데
제 딴은 참 소리야말로 참 아름다운 화술인 줄 믿고 그러는 것이어늘 웃는 것은 참 이상한 일입니다.
------
나는 맞춤법이라는 것이 여간 마음에 들지 않는다.
아니 맞춤법이 받는 대접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어떤 이들은 맞춤법을 금과옥조처럼 여기며 숭배하는데
애초에 법이라는 것은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약속이므로 항상 유동적인 것이다.
맞춤법이란 형식적인 기준으로써 필요에 따라 쓰여지면 그만인 것 아닐까.
방언이 아니더라도 각자가 더 자유롭게 자기만의 말들을 쓰고 뱉었으면 좋겠다.
아는 미용사는 항상 의를 에라고 쓰는 버릇이 있다.
그는 맞춤법을 모를 만큼 무지하지 않다.
나는 그 '에'를 볼 때면, 무구한 생각에 잠겨있는 남자가 떠오른다.
어느 사장님은 '무난'을 항상 '문안'이라 써서 보낸다.
사장님은 종종 문안이 아니라 무난이라며 맞춤법을 지적받곤 하는데,
그럴 때마다 문안도 좋은 뜻이라며 하하 웃고 마는 것이다.
그의 '문안' 예찬은 아마도 지적질의 짜증이 고집으로 굳어진 것이겠지만
역시나 그의 글에서 '문안'을 볼 때면 그저 마음속으로 미소가 지어진다.
언어가 사람들을 더 자유롭게 해 줄 수 있지는 않을까.
죽어가는 말들이, 세상에 없는 말들이 세상 빛을 봤으면 좋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