묘역(墓域)에서 깊어진 세의(世誼)

 

 

 

안계면 소재지의 5거리에서 단밀행 지방도로를 따라서 나가면 곧바로 율리리(栗里里)고개가 도로를 끼고 오른쪽으로 나선다. 동쪽으로는 인가가 밀집하여 들어오고 건너편에는 지호지간에 안계여자 중고등 학교의 위용이 웅장하다.

옛날에는 한적하기 이를 데 없는 묘역이었으나 지금은 차량의 소음이 크고 안계면 소재지가 번창하여 오니 묘소의 관리도 어려우며 번잡한 공해를 벗어나기도 어렵게 되었다. 5정보 가량의 얼마 되지 않는 양지바른 묘역에는 오랜 세월에 세 문중의 세의가 굳어지는 장소가 되어왔으니 그 사연은 이러하다

 

 


고려 말의 충신으로 이름난 백암 김 제(白巖 金 濟)의 후손이요, 기자전 참봉(箕子殿 參奉)을 지낸 김세정(金世貞)이 이 묘역의 서쪽에 맨 먼저 입산하게 되었다.

그 시기는 그의 생졸년을 기록한 문적이 전하지 않으니 확실히 알 길 없으나 연산조(燕山朝)내지 중종조(中宗朝)의 일일 것으로 추리할 수 있다. 그러니 4백년은 훨씬 넘어서 묘역이 이루어지게 되었다고 보아야 하겠다.

김세정은 진주판관(晋州判官)을 지낸 순천인(順天人) 장일신(張日新)의 아들 숙(叔)으로서 사위를 삼게 되었다. 사위를 사랑하는 정은 워낙이나 깊었기에 장인을 존경하고 따르는 마음 또한 남달랐다고 한다. 드디어는 사위를 의성읍의 본가에서 비안(比安)고을로 데려 와서 같이 살기에 이르렀다. 이로써 장숙은 순천 장씨(順天 張氏)의 비안 고을 입향조(入鄕祖)가 되었다. 김 세정은 사위를 가까이 데려와서 출가한 딸도 언제나 쉽사리 만날 수가 있어서 더욱 즐거웠다. 만년에 이르러서는 가족과 측근을 불러 모아두고 더욱 각별한 유언을 하게 되었다.

자기가 죽으면 율현(栗峴)에 묻어 주기를 당부하고 저 세상에 가서도 장 숙과의 정의를 새기고자 하니 뒷날 가서 사위의 일생을 마치거든 자기의 무덤 아래 같이 묻어 달라고 특별히 유언 하였다.

세월이 흘러 1567년(명종 22년 丁印) 7월 15일에 군기시첨정(軍器時僉正)을 역임한다. 장 숙도 78세의 향수로 타계했다. 장인 김 세정의 유언에 따라 그의 묘 아래 바로 붙여 묻어 묘를 이룬 것은 더 말할 나위도 없다. 부인 김씨도 합장이 되었다. 이로써 김 세정의 유언에 따라 그의 묘 아래 바로 붙여 묻어 묘를 이룬 것은 더 말할 나위도 없다. 부인 김씨도 합장이 되었다. 이로써 김세정의 유언은 실행이 되었고 저 세상에서 만난 옹서(翁胥)간에는 더욱 정이 깊어졌을 것이라 여긴다.

장 숙이 묻혀 입산된 후로 그의 아들 문암공(文巖公) 장문서(張文瑞)도 이어서 그 아래쪽에 묻히게 되었다. 국천 효자로 이름난 문암공이 입산한 것은 1577년(선조 10년 丁丑)이었다.

여기에 또 하나의 유언이 남았다. 문암공 역시 그이 사위인 우봉인(牛峰人) 진사(進士) 이 효견(李 孝騫)을 무척이나 사랑하였기에 뒷날에 한 묘역에 묻히기를 당부하였다. 그의 아들 진사 장 해(張 邂)의 묘 옆쪽에 사위인 진사 이 효건도 부인장씨와 더불어 함께 묻혔다. 이렇듯 생시의 정의는 유언으로 남고 유언은 어김없이 실행되어서 선산 김씨, 순천 장씨, 우봉 이씨는 한 묘역을 이루게 된 사연이 밝혀졌다.

그들은 연면 4백년을 내려오면서 선외가(先外家)와의 정의를 새기는 아름다운 전통을 남겼다. 해 마다 서릿발 내리는 가을이 깊으면 묘향을 치르고 자손은 모여들면 고루고루 다같이 어느 묘나 성묘를 하니 모르는 사람들은 무슨 일이기에 한 해에 묘사를 세 번씩이나 지내느냐고 묻기도 하는 모양이다. 묘향의 날짜가 문중 마다 달랐기 때문이다.             //---------------------------------//

먼먼 옛날부터 율현묘역(栗峴墓域)에서 맺어지는 세 문중의 미담가화(美談佳話)는 멀리서 듣기에는 믿기가 어려운 일이다.

여기 우리의 전통을 건전히 세워 나아가는데 모범이 되어지기를 바란다.

 


경상북도 의성군청/ 의성의 인물 중에서 

 

 


명나라 崇禎元年(1628년)

청나라 崇德元年(1636년)

임진왜란   선조 25년 (1592)  정병 20만  소서행장

정유재란   선조 30년 (1597)  정병 14만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

정묘호란   인조  5년 (1627)  정병  3만   아민

병자호란   인조  14년(1636)  정병 20만   청태종


 

 


 龍 潭  日  記


 

                                                        金啓

 


 

 

 


“龍蛇日記”

一善金氏 白岩公派譜 龍潭金啓先生譜錄

일선김씨 백암공파보 용담 김계선생 보록 내용에/ 집안에 “龍蛇日記”가 전해졌다고 한다.

“龍蛇日記”참으로 아까운 사료다.

의문스러운 것은 송암 이로(李魯:1544∼1598)가 쓴 龍蛇日記《용사일기》가 있다.

  경상남도유형문화재 제62호로써  《용사일기》는 1592년(선조 25)부터 1597년의 정유재란까지 전후 5년간의 기록이 실려 있는데, 임진왜란의 상황을 체험 중심으로 기술하였으며 당시 의병들의 활약상, 전쟁의 진행과정, 전란 속의 민심 동향 등을 생생하게 수록되어있다고 한다.

또한 저자미상의 일사기문(逸史記聞)이라는 책이 전해지고 있는데,

선조(宣祖) 때부터 인조(仁祖) 때까지의 사실을 주로 세간에 들리는 이야기에 따라 기록한 책이다.

이 책 내용의 마지막 기록은 대략 정축년(1637)3월 초3일까지의 기록이 적혀 있다.

그런데 책의 서술방식이 金啓선생의 龍潭錄과  흡사하고

내용 또한 인조시대의 다른 학자들의 일기 내용과는 달리

                            세간에 들리는 政勢이야기를 기록한 유사점이 있다.

묘하게도 金啓선생의 龍潭錄 기록은 정축년(1637) 봄의 사건부터 시작된다.

혹 저 작자미상의 逸史記聞은 龍潭 金啓先生의 “龍蛇日記”가 아니었을까?

 

                       .

                                                                 

          

丁丑年 仁祖15年 1637年  明- 崇禎10년  淸- 崇德二年(당63세) (윤4월 듬)

 

역사보기/ 1월 강화도 함락. 인조가 삼전도(三田渡)에서 청태종에 항복함.

3월 홍익한, 윤집, 오달제가 청에 잡혀가 심양에서 살해됨.

4월 소현세자(昭顯世子) 등이 심양에 볼모로 잡혀감.

 


○冊以給 .....

보태어진 책 ....

 


☞ 龍潭錄 以前의 日記에 보태여 쓴다는 말.  즉“龍蛇日記”와 연결된 日記라는 뜻.

一善金氏 白岩公派譜 龍潭金啓先生譜錄

일선김씨 백암공파보 용담 김계선생 보록 내용에/ 집안에 “龍蛇日記”가 전해졌다고 함.

 


○沈方伯(    )未及謫發拿去李敬輿來代(    )

 심방백이(    )하지 못함을 적발하여 잡아가다. 이경여가 뒤이어 부임했다.(    )

 


沈方伯 = 경상감사 심연(沈演)/  李敬輿 = 후임 경상감사/ 

인조실록/   2월 11일 양력/ 1637년 3월 07일 

경상감사 [심연沈演]이 재임 중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쌍령(雙嶺)에서 청군의 기습이 있다는 와전(訛傳)을 듣고 도산해 실전에 임해보지도 못했다. 패하자 전라도에 유배되고. 후임 경상감사 [이경여李敬輿]가 부임했다는 기록인 듯함. 

인조 15년 정축(1637, 숭정 10)  4월 5일(갑술)  이경여(李敬輿)를 경상 감사로 삼았다.

 

 

 

戊寅年 仁祖16年 1638, 明 - 崇禎11년  淸 - 崇德三年(당64세)

           

역사보기/   9월 1일(경신)  함경도에 굶주림과 염병으로 사망한 백성이 4천 3백여 명이다. 

            10월 봉림대군(鳳林大君, 후의 효종)이 청태종의 서정(西征)에 동행함.

 


○自春至夏天久不雨兩麥旣損又未移秧七月間暫雨豆太及黍粟頗有可望其西成而八月飛霜大失稔 自初秋至翌年夏橡實松皮苦苦連命老弱多有餓死者

봄부터 여름에 이르기까지 하늘은 영영 비를 내리지 않았다.

밀과 보리농사는 이미 망쳤고 모내기도 하지 못했다.

7월에 잠시 내린 비로 팥.콩.조를 심었을 뿐이다. 

자못 수확을 기대했지만 거둬들일 무렵인 8월에 서리가 내려 농사를 망쳤다.

초가을부터 내년 여름까지 도토리와 소나무 껍질로 연명해야하는 고통이다. 고통속에 힘들게 연명해가는 노인과 어린이가 늘어나고 굶어 죽는 자가 많다.

 

○牛疫之後不能耕種十家作契耕以人夫或馬耕之或作車推轉而耕之 

高牙大纛鳴鼓吹角大是恠變事也. 

소들이 역질에 걸린 후에는  밭갈이를 할 수가 없다.

열 집이 어울려 “품앗이”로 사람이 직접 밭갈이를 하고,

혹은 말로써  밭갈이하며 혹은 수레바퀴를 끌어서 쟁기를 만들어 밭을 갈았다.

관아에서는 상아로 장식한 깃발 높이 휘날리며 북치고 나발 부니

도대체 이 무슨 괴변이 있냐!

 

○一自兵亂後大小紅疫及染疾大熾死亡過半

정유재란부터 병자호란 이후까지도 크고 작은 홍역에다 장티프스까지 크게 번져 죽은 사람이 절반이 넘는다.

○監司李公在亂時興學設敎勉勵頹風勸課農桑輕徭薄賦而二月辭歸南民不缺然失望 李景曾代來

감사 이경여는 병란 중에도 학문을 세우고 퇴폐한 풍속을 스스로 깨우치도록 가르치고 농사와 누에치기를 권장하며 부역과 세금을 가볍게 하였다.

2월에 (모친의 병환으로)사임하고 떠나가니 남쪽의 백성들이 기대가 무너져 실망하였다.

이경증이 후임으로 왔다.      

☞ 이경여:  인조 15 1637,3월, 경상도 관찰사로 부임 1638 1월, 모친의 병환으로 사직하고 扶餘로 돌아감

 

○都事呂渭老到任數月以無名稱汰尢沈大孚七月到界

도사(종5품) 여위로가 도임한지 여러 달 동안 이름이 알려져 있지 않으니“태왕”이라 불렀다. 七月에 심대부 감사가 부임해왔다.         

 


己卯年 仁祖17年  明- 崇禎12년  淸- 崇德四年 1639년  (당65세)

                             

역사보기/ 4월 20일    감사 이경증(李景曾)의 청을 따라 경상도에 보내 기민을 진휼하게 하다.

          2월 11일    이명웅(李命雄)을 경상 감사로 삼았다.

          4월 18일    최온(崔蘊)을 비안 현감(比安縣監)으로 삼았다.

           5월 1일    청나라에서 정뇌경을 죽이다.

          6월 26일    동양위 신익성이 삼전도 비문을 쓰지 못하겠음을 계하다

          7월 13일    경상 감사 이명웅에게 금오 산성을 쌓게 하다

          9월 28일    선산부사 이각(李恪)에게 금오 산성을 축성한 공로로 通政을 加資하다.

         10월 29일    경상도에 대동법을 시행하다 

          12월 2일    역관 정명수가 병조 좌랑 변호길을 폭행하다

 

○六月胡使自稱中殿冊封而出來到孔詔院宣言中殿親出(    )驕慢使崔鳴吉齊銀千兩往說鄭明時金石伊等得免中殿之親出 鄭明時金石伊乃我國人而投附胡賊作獘一梗者之胡(    )

육월 청나라 사신이 중전책봉을 위하여 나왔다는 구실로 홍제원에서 중전이 친히 나와 받으라며(    )교만스러우니, 최명길이 은 천 냥을 주고 그들을 설득해서 면했다.  정명수. 김돌시는 우리나라 사람으로 오랑캐에 빌붙어 작당질을 하는 한 무리들이다. 오랑캐(    )

 

☞ :     鄭明時는 = 鄭命壽이고    金石伊는 = 金乭屎 =金突  / 김돌시, 김돌이다.

鄭命壽 金乭屎는 1618(광해군 10)년 청나라의 건주위 정벌 때 도원수 강홍립(姜弘立)을 따라 갔다가 포로가 된 정명수(鄭命壽)·김돌(金突) 등이 우리나라 사정을 청나라에 알려줌으로써 청나라 황제의 신임을 얻고 양국간에 통역을 담당하면서 임금을 모독하고 조신을 업신여기는 한편, 관직이나 뇌물을 요구하는 등 갖은 행패를 부렸다.

 

六月五日未時汶孫生˚ 

5일 오후 2시 손자 “문”이 태어났다.

○鄭雷卿拿金宗一等以東殿僚屬在瀋陽□鄭明時□作獘謨共誅殺而事泄觸怒汗令東殿殺鄭雷卿等甚急東殿曲陳其必咨禀於國王之由則汗賊令國王促殺之故不淂己送金吾郞斬鄭雷卿拿金宗一㝎罪 

정뇌경을 잡아갔다. 김종일등과 심양에서 세자를 모시면서□,정명시의□ 못된 짓에.. 주살하려 모의하였는데 사실이 누설되어 청나라의 노여움을 촉발하였다. 세자에게 정뇌경등을 죽이라 명하니 사정이 급하여 세자가 간곡하게 사정하였으나, 살펴 보건데 필히 국왕이 연류된 것이라 하는 즉 청나라에서 명하길 국왕은 빨리 죽이라하니 부득이 의금부도사를 보내 정뇌경을 참수하였다. 김종일은 같은 죄로 잡아갔다.

 

○春大饑饉移粟藍藿賑恤一匹直數斗米四月成倅以京人田稅坊納事罷去六月金壽昌到任

봄에 큰 기근이 들었다. 곡식을 가져와 콩깍지로 연명하는 곤궁한 백성을 구원하였다.

무명 한 필이 쌀 몇 말 값이다.

4월 고을의 成성원님은 서울사람으로 관할구역의 토지세를 거둬들이지 않고 갔다.  

6월 김수창이 부임하다.

 

○監司李命雄等築山城初使僧軍次以編伍軍次以烟軍無論伇品怨苦沖天城号柒谷置府使˚

감사 이명웅등이 산성을 수축할 때 처음에는 승려들로 조직된 승군 을 쓰고 다음에는 지방 정예군 편오군을 쓰다가 품삯을 받는 민가에서 출역한 인부를 쓰면서 노역인의 품삯에 관해서는 아무 말이 없으니 고통과 원성이 하늘을 찌른다.

성의 이름을 柒谷“칠곡”이라하고 府使“부사”를 설치했다.

☞    왕조실록보다 1년 앞선 기록이다.

아마도 당시 주민들을 독려하기위해 지금의 개발계획을  홍보하듯이 미리 공표한 듯하다.

인조 18년 5월 25일 가산산성(山城)의 읍명(邑名)을 칠곡(漆谷)으로 하고 윤양(尹瀁)을 부사로 삼았다.

 

가을에 풍년이 들다. 목화는 흉작이다. 동지 달 튼튼하던 손자 인간 세상에 왔다가 다섯 살도 않되 한 줌의 재가 됐다.

○淸使帶金累祢名者來請曰近無每日以銀百兩禮端給之則無辞受給其回還之日專數□□□□還出給曰此國甚殘獘以待後人云而去歸告其汗□使臣若無□□□□朝鮮矣云雖夷虜□□□□之邦有人矣   청나라 사신 帶金累祢(대금누니)라는 자가 와서 청하길 요즈음 매일 은 백 냥씩 옳게 지급하는 예의가 없다. 여러번 지급받지 못한 것을 돌려 받고자한다.□□□□ 하루도 빠짐없이 지급하라.  말하길 이 나라의 사신접대가 심히 잘못된 폐단이다. 뒷날 귀국하는 사람에게 전해 청태종에 고하여□使臣若無□□□□朝鮮矣云雖夷虜□□□□之邦有人矣

 

 


庚辰年 仁祖18年 1640, 明- 崇禎13년  淸- 崇德5年(당66세) 正1월 윤달

역사보기/

1월 20일  인평 대군에게 권솔을 거느리고 청나라로 가게 하다.

2월 2일   청나라 장수 마부달이 죽다. 그의 형인 만월개(滿月介)에게 위문.

3월 7일   평안 병사 임경업을 심양으로 보내다.

5월 25일  정가 산성(定架山城)의 읍명(邑名)을 칠곡(漆谷)으로 하고 윤양(尹瀁)을 부사로 삼았다.

8월 4일   원손이 심양에서 돌아오다.

10월17일  봉림 대군이 다시 심양으로 가다.

 


○正月无日晩天動○閏正(    )日嫂主別世權庴板項 ○念五六雨土不分遠近○元孫乃橉平大君入送瀋陽東宮受由出還

정월 해가 보이지 않고 늦게는 하늘이 울렸다. 윤달이 든 정월(    )일 형수가 별세하다.  임시로 판항(의성군 봉양면 문흥리)에 모셨다. 25. 6일 흙비가 내려 앞을 분간하기 힘들다. 소현세자의 아들 원손과 인평대군이 심양으로 들어갔다. 소현세자가 청국의 허락을 받아 돌아왔다.


○左右道軍兵咸裂架城大操仍城役民怨沖天

경상 전라도 군병이 두루 나뉘어 가산산성을 크게 쌓으니 거듭되는 성 쌓는 노역에 백성들의 원성이 하늘을 찌른다.   

 

☞  강행군으로 많은 노역자들이 죽었다.

     인조실록: 18년 4월 4일 공사를 서두른 이명웅을 파직하라고 헌부가 아뢰다.

 


○金石伊夲國官奴爵賊作奱淸使之行亦來作禮常與主上較倚而堅淸使久留國傷渴沈說夜趋鄭明時金石伊宿處各給銀子萬兩翌朝勸使發遝到義州金也責房妓色醜牧伯林慶業託以絶無美色則金遽怒曰雖入汝之室入不可廢也林大怒曳下庭使人告淸使曰我亦有淸國之職此漢辱我不可不治使曰笞於四十度杖以不祿木杖之如數卽死曳出之人皆快之

김돌시는 본시 관노비로써 벼슬을 도적질하여 바꾸고 청나라 사신을 따라 나와서 매번 사신을 접대하는 예법을 만드니 주상께서 보시기에도 그 폐단이 지나치다.

청나라 사신이 오래 머물고 있어 나라의 재정이 몹시 고갈 된지 오래되었다는 말씀에 밤으로 정명시와 김돌시의 숙소로 달려가 각각 은자 만 냥을 주고 다음날 아침에 떠나가기를 권하였다. 의주로 돌아간 김돌시가 기생이 못생겼다고 책망하며 의주 목사 임경업에게 절세미인을 부탁하였는데 예쁜 곳이란 없는지라 김돌시가 갑자기 화를 내며 말하길 “너 같아도 그 방엔 못 들어갈 것이다. 당장 바꿔주라”하니 임경업이 열을 받아 김돌시를 뜰아래로 끌어내고 청나라 사신에게 항의하니 청나라 사신이 말하길 “나는 청나라의 사람이요 이놈 또한 청나라 벼슬을 하고 있으니 청나라를 욕되게 한 것이다. 그냥 둘 수 없다. 몽둥이로 40 대를 쳐라!.”사정 봐줄 것 없이 몽둥이를 내려치니 몇 대 맞자 쭉 뻗었다. 시체를 밖으로 끌어내니 모두가 쾌자를 불렀다.

 ☞  왕조실록에도 없는 매국노 김돌쇠의 사망기록이다.

 

 

○二月初八午坤方天動俄而天油然作雲抑沛然雨雹交注雷電霹近古所于有(    )竟夜不能安寢大是異事

2월 8일 정오쯤에 남서쪽에 하늘이 요동하더니 머리위에 뭉게뭉게 구름이 일어나 내려앉자 세차게 비가 쏟아지고 우박으로 바뀌어 내리다 천둥번개가 치더니 가까운 곳에 벼락이 떨어졌다. 예전에 (    ) 밤까지 이르니 편안히 잠을 이룰 수 없다. 커다란 이변이다.

 

○汗請兵我國□□ 以林慶業領兵送之□力入寇中國大敗而還 -557P

청나라에서 우리나라에 군사 조발을 요청하여...  임경업이 통솔하여 출정하였다. ...힘으로  밀어붙여 명나라를 대패시키고 돌아왔다.

 

 

○東宮在瀋陽以皮方席獻詩 

소현세자가 심양에서 가죽방석에 시를 써서 전하께 올리다.

 


身留異域未歸人     몸은 낯선 땅에 있어 못 가는 신세.

家在長安漢水濱     내 집은 서울 장안, 한강 기슭인데.

月白夜心花落泣     달 밟은 밤 내 마음은 꽃잎에 눈물짓네.

靑風池面柳絲新     봄바람 연못 위를 스치니 실버들 새롭고

黃鶴嗅起遼西夢    꾀꼬리 울음소리 고향 꿈을 깨우네.

玄鳥來傳慶會春     제비 찾아와 경회루의 봄을 알리는데.

盡日樓臺歌舞地     온종일 누대에서 노래하고 춤추던 곳을.

不堪回首淚沾巾     차마 그려 볼 수 없어 소매에 눈물 적시네.

 


殿下開逢觀之則有待曰  

전하께서 시를 읽고 答詩를 지었는데

 


내가 그립거니,  넌들 그립지 않겠는가.

千里蠻鄕 천 리 오랑캐 땅에서 얼마나 그리느냐.

紗窓 창 밖에 슬피 우는 저 접동새야!

“돌아갈 것 같지 않다”고 말하지 마라.

내 앉을 자리가 없구나!

 


臣民見此歌詩孰不鳴間流涕..?  

 신하와 백성들이 이 시를 보고  

누군들 흐르는 눈물에  소리 내여 읊을 수 있겠는가....

○斥和金尙憲金迬等如尹集縛送瀋陽孰不憤嘆東宮來觀卽還○方伯具鳳瑞専以愛民爲政南中大悅

청나라와 싸워야한다고 주장한 김상헌 김왕 등과 같이 윤집이 심양에 묶여갔으니 어찌 분통이 터지지 않겠는가! 소현세자가 만나보고 돌아갔다.

도지사 구봉서가 오로지 백성을 사랑하는 일념으로 행정을 펼치니 경기이남 지역에서 인기가 최고다. 

 

☞  金常憲: 1570~1652 본관: 안동. 인조가 자신의 부친을 왕으로 추존하려는 이른바 추숭논의(追崇論議)가 일어나자 그에 강력히 반대하였고, 찬성한 반정공신 이귀(李貴)와 의견 충돌을 빚어 낙향. 1636년 병자호란 때 선전후화론(先戰後和論)주장. 최명길(崔鳴吉)이 작성한 항복문서를 찢고 자결을 기도하다가 실패 뒤 두문불출. 청나라로부터 위험인물로 지목 1641년 청나라에  끌려가 4년여 동안 청인들의 굴복 요구에 불복하여 끝까지 저항. 1649년 효종 즉위 뒤 대현(大賢)으로 추대 받아 좌의정에 임명. 저서: 《야인담록》《독례수초》《남사록》후인들에 의해 문집 《청음집》간행.

 

○元孫往瀋陽之日百官送于盤松容拜辭而歸莫不流涕年六世人君度量己成云 二月朝鴨成群相戰而死者正如丙子矣

원손이 심양으로 가는 날 百官이 전송하는데, 반송정에서 차분하고 침착하게 나아가 절하고 돌아가니 어찌 눈물이 아니 흐르겠는가! 나이 여섯 살에 품성과 아량이 이미 인군의 틀을 갖췄다 한다. 2월 아침에 기러기가 때를 지어 서로 싸우다 죽었다. 지난 병자년과 같다.

 

☞  元孫원손: 소현세자 큰아들. 뒷날 아버지 소현 세자가 죽자. 어머니 강빈은 사약을 받아 죽고 원손은 10살 때 제주도로 귀양 가서 죽는다.


 

○水田不吉旱田亦早霜民不聊生○都事蔡成龜 

논에는 가뭄 들고 밭엔 이른 서리 내려 백성이 편히 살아갈 수가 없다. 도사 채성구가 부임하다.

 

☞  蔡成龜는 = 채성구(蔡聖龜)이다.[1607~1647] 본관 평강. 시조와 필법이 뛰어났다. 

都事도사: 품계는 종5품이었다. 관찰사와 함께 지방을 순력하고 규찰하는 임무를 담당하였다.

 

 

 

辛巳年仁祖19年 1641년 明- 崇禎14년 淸-崇德6年 (당67세)

역사보기/   1월 10일   인평 대군이 심양에서 돌아오다. 

1월 18일    임경업이 돌아오다.

3월 22일    경상도에 가뭄이 들다.

4월 26일    낙동강 물이 마르다 경상도의 가뭄으로 낙동강의 물줄기가 끊겼다.

5월  4일    청나라에 원병간 이사룡이 참형당하고 김득평이 장형에 처해지다.

5월 12일    경상도에 지진이 나고 서리가 내리다.  경상도에 황충이 생기다.

6월 18일    심양가는 군병을 위문하다.

7월 10일    광해군이 죽다.

7월 19일    심양에 있는 재신의 상차에 따라 임경업을 소환하다.

 


○自春徂夏不雨移秧尃廃加以正月抄軍六月再( )軍入錦州民間飢況斗米直本一匹若不方伯移粟賑恤靡南民有子遺○七月( )年凶因往嵗前願留明年事會疏一善一道咸進

봄부터 여름에 이르러 비가오지 않아 모내기를 그만둘 판인데 정월에 군사를 선별해 보내고 6월에 또( )금주전투에 보냈다.

백성들은 가뭄과 기근에 허덕이고  쌀과 콩 한 말 값이 면포 한 필이다. 만약 도지사가 곡식을 가져와 기근을 해결하지 못하면 남도의 백성들은 자식을 내버릴 것이다. 7월( )년의 흉사는 그 전 해에 앞서 머뭇거렸든 원인이다. 내년에 일의 기회가 올 때 정리(正理)에 따라 모두 한 길로 나가자.


○ 汗領兵往圍錦州不利再請兵於我國( ) 以砲手( )名六月損( )抄送八月汗與東宮麟坪親領往錦州中國將祖大受不利先運砲手交代回還

청군이 금주를 포위하러 갔다가 불리하자 또다시 우리나라에( ) 지원병을 요청했다.  우리나라에서는 포수( )명을 6월 달에 결원에 맞춰( ) 뽑아 보냈다. 8월에는 청태종과 소현세자와 인평대군도 함께 금주전투에 참가했다. 명나라 장수 조대수가 불리하다. 앞서 출병한 포수부대와 교대를 하여 돌려보냈다.

 

☞    祖大受는 祖大壽 이다. 명나라 장수 뒷날 청나라에 항복 함

조선군은 정밀한 총을 가지고 있어서 조대수의 군사를 많이 죽였는데, 조대수는 군대에 명하기를 청병의 머리 하나에는 은 50냥을 주고 조선 군사의 머리 하나에는 100냥을 준다고 했다.

 

조선 군사 중에 경상도 성주 사람으로 이사룡이란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차마 명군에게 총을 쏠 수가 없어 공중으로 공포만 쏘아 명군을 상하지 않게 하였다. 이는 본국 조선의 속마음을 밝히려 함이었다.

이를 발견한 청의 군사가 사룡의 목을 베어 진중에 높이 내 걸었다.

명나라 군사들은 이것을 보고 모두 크게 울었고 조대수는 깃발에 큰 글씨로 "대명충신 조선의사"라 써서 시영의 군사를 선동했다.

 

이사룡은 고문을 받으면서도 청나라 장수에게 욕을 퍼부었고 웃으면서 죽었다고 한다.

청태종도 이사룡을 의로운 사람이라 하여 소현세자가 귀국할 때 그의 주검을 운구해 고국으로 돌아가게 하였으며 조선 왕 인조는 지나는 길에 감사에게 예를 표하게 하고 고향에 안장하게 하였다. 그 뒤 숙종 때는 고향 사람들이 사당을 지었고, 정조 때는 성주목사에 증직되었으며 정려를 지어 충렬사란 현판을 내려주었다고 한다.

 

명나라 장수 조대수(祖大壽)가 그의 아우와 함께 금주성(錦州城)에 들어가 수비하였는데 청인(淸人)이 포위하였다. 조대수가 나성(羅城)을 잃자 항복했던 몽고(蒙古) 사람들을 의심하여 한인(漢人)을 시켜 감시하게 하였는데, 몽고인들이 성을 나가 투항하는 자가 매우 많았다. 중국 조정이 10만의 군대를 발동시켜 일곱 명의 총병(摠兵)이 거느리게 하여 금주성을 구원하게 하였다. 우진왕(右眞王)이 대대적으로 원병이 온다는 말을 듣고 우리 나라의 포수(砲手) 4백 명을 선봉으로 삼아 남산(南山)을 굳게 지키게 하였다. 그리고 그들 군대를 두 대(隊)로 나누어 일대는 탑산(塔山)의 귀로를 방비하게 하고 일대는 금주로 들어오는 길을 차단하게 하였으며, 진중(陣中)에 기와집을 지어 오래 머무를 계획임을 보였다. 이때 우리 군대는 이미 여러 달을 노숙(露宿)하여 병들고 부상하지 않은 자가 없었고 죽는 자가 속출하였다. 조정에서 듣고 본도로 하여금 휼전(恤典)을 거행하게 하였다.

 

○自江原山郡由豊基奉化興海至八月初下霜失稔倍往年下道尤甚豆太黍粟稍實木花畓穀専棄市直日蹙所恃者方伯

강원 산골 부락을 비롯하여 풍기, 봉화, 포항에 이르기까지 8월 초부터 서리가 내려 결실을 얻지 못한 것이 지난해의 곱절은 된다. 남쪽지방이 더욱 극심하다. 콩과 팥. 기장. 조(서속)은 끝만 약간 여물었고 목화와 벼는 모두 포기했다. 시장경기는 매일 위축되어  갈수록 급박해지니 기대하는 것은 방백(도지사)뿐이다.  

 

○四月巡相親到洛東左右道文武士咸聚試才入格者四十餘人優數賞賜○責子治第賦長子鈺亦參榜受韻冊一部筆墨壯帋三卷邑卒加賜白帋二卷 -555P

4월 순찰사가 낙동에 왔다. 좌우도의 문무 선비를 모두모아 재주를 시험했다. 경과시에 합격한자가 40여명이었다. 우수한 자들에게 상을 주었다. 責子治第(자식을 타일러 집안을 다스린다.)라는 시제로 큰아들 옥도 합격하여 운책과 필묵을 받았다. 장원한 자에게는 종이 3권을 주고 읍의 수령이 백지 2권을 주었다.

☞   巡相순상: 종2품 임시벼슬 순찰사(巡察使)의 별칭

 

○三月十五日義興孫生女十月十三日山春生男始見曾孫○八月二十五日試年進士試一語嗳回鸚鵡夢賦次子鏡亦參榜于亰一所洪伯昇中東堂壯元 ○鏡造屋始 -554P

3월 15일 의흥에서 외손자 딸을 보았다. 10월 13일 산춘의 아들이 태어났다. 처음으로 증손을 보았다. 8월 25일 과거를 보는 해에 진사시가 있었다. 시험문제는 一語嗳回鸚鵡夢(하던 말 또 하는 멍청한 앵무새)라는 시험문제로 한양의 첫 시험장에서 둘째 아들 경이 합격했다.  동당 시험장에서 홍백승이 장원을 했다. 경이 집을 짓기 시작했다.

☞    鏡:1606 -1664년 용담의 둘째 아들 字明仲 號愚軒 1654년 司馬

 


○九月初七日蔚山東面柳浦村海巷中水源半把䖏黃白色石周回七尺三寸自移陸地岩上○又東萊十月十一日地震自南方間午北方聲如天動窓戶戰搖累年失稔民生未復而非常之変不知攸言云

9월 7일(1641년 10월 11일) 울산 동면 유포촌 바닷가 마을 가운데 물길 오목한 곳에서 7척 가량의 황백색의 돌이 빙빙 돌다가 스스로 땅위의 바위 위에  올라앉았다. 또 동래에서는 10월 11일 지진이 남쪽에서 일어났다가 정오에 북쪽에서 하늘이 요동치는 소리가 창문이 난리가 난 듯 흔들린다. 몇 년째 흉년으로 백성들의 생활이 어려운데 이변이 일어나 알 수없는 이상한 소문이 번진다.

☞  실록의 기록 있음 仁祖19年 蔚山府 有石自海邊, 移于陸地巖上。울산부에서 바위가 움직이다.

 


○安陰士子通文有曰六月二十二日鄭桐溪捐世非侐邦家之不幸抑亦士林之長慟云

안음(함양군 안의면,거창)에 사는 선비의 아들이 서찰을 가져왔다. 6월 22일(양1641년7월29일) 동계선생님이 돌아가셨다고 한다. 한 나라를 평온하게 이끌지 못한 불행에 더하여 사림의 영수이었으니 통탄스러울 뿐이다.

☞ 桐溪: 鄭蘊정온의 호[1569~1641]: 본관 초계. 병자호란 때 이조참판으로서 김상헌과 함께 척화를 주장하다가 화의가 이루어지자 자결시도. 사직하고 덕유산에 들어가 은거하다가 5년 만에 죽었다. 이조참의, 대사간, 경상도 관찰사, 부제학 등을 역임. 저서《동계문집》<동계 약력>《덕변록》《망북두시》《망백운가》를 지어 애군우국의 뜻을 토로하였다.

 


○都事李以存到任○赴瀋軍運粮事冬前所放爲先爭錬運粮雇馬六百匹定奪後西路不能支勢不得己分定各道八結木一匹式一千九十餘同本道除出贊馬三百匹䮠人則各官屬定送馬三匹色吏一名一道定領將一負木品則如歲幣三十七尺  -554P

관찰사 이이존이 부임해 왔다. 심양에 나가있는 군사의 군량조달은 겨울이 오기 전 훈련에 앞서 준비해야 마음이 놓인다고 운송에 필요한 말 600필을 민간으로부터 징발하는 것을 임금의 재결을 받은 후에 함경, 평안도 지방의 징발이 어려운 지경이라  부득이 각 도에 나누어 정했는데 농지세로 받아들인 8결목 당 한 필씩 정하니 1090필이다. 우리 경상도에서 내놓을 량이 300필이다. 마부는 각 감영의 하인을 보낸다. 말 세 마리당 아전 한 명씩 붙이고, 한 도에 대장 한 명이 담당했는데 해마다 중국에 바치던 무명과 똑같은 품질로 37척이나 된다.

☞  李以存: 본관 여흥 인조 20년 부수찬. 승지

 

○爲準十二月內上納事卽今錦圍未觧兵連禍銡我軍調送至於再次陣前運粮遂月飛輓關西民力己到蕩渴  -553P

12달을 기준으로 바치는 것인데. 지금은 금주를 포위하고 풀지 않고 있어 병사들이 연이어 화를 입고 술렁이고 있기에 우리병사를 뽑아 보내준 것인데 여기에 또다시 진군하니 앞서 운송을 마친 달에 이어서 군량을 운송하게 되니 평안도 백성은 기력이 다하여 죽을 지경에 이르렀다.

 


○今此收價雇馬之未誠出於朝廷不得己之計而本道不幸連被灾篰屋懸罄今屆收藏之節方有阻飢許多細木何以辨出言念至此一倍傷心

이번에 민가에서 징발한 말의 수가를 조정에서 성의 없이 지급하니 부득이 상소를 올렸는데 경상도는 불행이도 계속된 재앙에 거적 지붕에는 석가레만 걸려있고 지금은 거두어 들여야 하는 계절에 굶주림에 허덕이는 백성에게 그 많은 무명을 나누워 주면 어떨까하는 말을 생각해보니 이제 와서는 갑절이나 마음이 상한다.

 

○道方以銀子枝三等物代送一邉報備局一邊議關西若得准欲請則自營間主管以此換貿則設有日後各官隨便收價之事目前可除駄價人情木品高重聽不聽在於朝廷不得祿料爲先卜定爲置將此民間知委以待更分付 -558P

도 방백이 은자와 아울러 세 가지 품목을 대신 보내고. 비국에 보고하는 한편  평안도지방과 같은 법을 적용해주길 바라는 논지를 임금에게 올렸는데 그 논지는,

백성들과 관청사이의 상거래에서 사들이는 환무의 규칙을 만들어 놓으면 설령 뒷날 각 관아에서 이 규칙을 따르면 편리하게 사들일 수 있다. 그 시행규칙은

전에는 물품을 실어 나르는 품삯은 주지 않아도 문제가 없었다. 상품의 등급은 인정에 따라 좋든 나쁘든 나라 관리가 정하기 때문이다.

차라리 공무원 봉급은 현지에서 살고 있는 백성들이 바치는 세금으로써 그 산지의 생산물로 먼저 지급하는 것을 장차 법으로 만들어 백성에게 공지하여 그때그때 현지의 생산품으로 대신해서 분납하도록 하는 것이다.

 

○比安田一千二百二十五結八十九負六束出木一百五十三匹內一同貿馬一匹餘木一百十三匹上納次右(具)巡相行關各邑也

비안(경북 의성군 비안면)의 밭은 1.215결 89부 6속이다. 내놓아야할 무명은 153필을 한 번에 바쳐야한다. 실어 나를 말 한필과 나머지 130필을 상납하고 (구)순찰사가 각 읍 관아에 공문을 보냈다

 

○凶年飢嵗賑活赤子者王政之所先散給官穀穋取資潤屋者救荒之急務是白昆上年段失稔最慘是白良置下道稍實仍于轉販募納之際下于有地是白如乎

흉년과 기근 때는 백성을 구휼하는 것이 임금의 임무인바 먼저 관의 창고를 열고 부자 집의 나락을 거둬 나누어주는 것으로 백성을 구황해야한다. 급한 것은 지난해와 마찬가진데 피해등급을 구분지어 가장 참혹하게 농사를 망친 경상도 지방일지라도 흉년 제반조처에서는 초실등급으로 조치한 것이 최상의 조처라 하고 거듭하여 물건을 사고팔 때 군량미를 거둬들인다. 하나같이 땅이 있는 곳은 이와 같다.

 

 

○今年則莫論上下一樣被灾富者罊渴貧者將死公私倉庫赤立板蕩封債貸穀等事俱無辦得之路而明春種食只憑元穀還上是如乎○開倉之後決難盡捧各邑守令連續來報設有些少之捧

올해는 누구를 막론하고 하나같이 재앙을 당했으니 부자들의 단지도 바닥이 나고 가난한 사람은 장차 죽음뿐이다. 모든 창고는 비어있고 국정이 문란해 쌀로 고리대금업을 한다. 곡식을 빌려주는 등 여러 조처와 변통에도 아무 소용이 없다. 거리에선 내년 봄 종자를 먹고 오직 기대할 것은 나라에서 사환곡제(社還穀制)로 양곡을 빌려주고 가을에 받아들이는 일 뿐이라! 창고를 개방한 후로 세금을 거두어들이기 어려움이 있자 각 읍 원님이  여러 차례 와서 독촉하나 서령 거두어들인 것도 하찮을 뿐이다.

 

○今年則司僕各島新捉馬厥數甚多年例分養之數比前倍些少元穀消盡於冬春之內是白在如乎○狗彘食人食之嘆年凶可(  )此外國兵曺一時錯料往來分給馬匹於楚軍爲白有如乎馬疲人怨之後分送三南經年留養馬令肥漨爲白乎矣尙無區處之柔又添別樣國馬爲白有置此則處置不甚重難會該曺急速指揮俾無不緊耗損之患事右巡?上達草 -551P

올해에는 또 말을 관장하는 관리가 여러 섬의 새로 잡아갈 말의 산출 수를 많이 늘렸다. 해를 두고 년 년이 나누워 키우는 수가 전보다 배나 된다. 농가에 빌려준 알량한 양곡도 다 없어진 겨울과 봄 동안에 이러니, 짐승이 사람 먹을 것을 먹어 치우는지라! 탄식하나니 흉년에 어찌(  )하랴!  이는 잘못 헤아려 다른 나라 병조에 한꺼번에 오가며 금군에게 마필을 나누워 주었는데 말은 고달프고 그들은 원망하였다.

뒷날 충청,전라,경상도에서 말을 키워서 해를 두고 번갈아가며 나누워 보내야할 것을 당장 살찌우려하니 변통하여 처리할 방법이 아직은 없는 것이다. (청나라에)복종하기를 더하여 나라의 체면을 馬말로써 세우려하는지라 이는 곧 일을 처리함에 있어 신중하지 못하고 담당하는 관료들의 의사가 분분하여 긴요치 않은 것이 없다하고 급히 처리하니, 긁어 부스럼 내는 걱정스런 일이다. 右巡?이 상소하였다.

 

中國鄭軍門上書曰祖大受出敵己久尙無勝否臣請一戰以決勝敗帝以謂鄭也年少之人爲氣所使妄料輕敵不許鄭再請之帝乃許之因給四萬騎貨賣四萬加之自募四萬幷十二萬而出祖將給○汗曰帝以我無功以他將代之我則將難免拿致之誅願投入以啚生汗信聽簡精兵三千直入組城組將閉門盡擊無有漏汗見欺大憤擧兵而行鄭師不意相遇於伊州尉以短兵殊死力戰鄭且戰且上高峯貨賣二萬未及登山爲胡被殺汗自後不敢輕犯相望結陳而己

명나라 정군문이 상소하길 총병 조대수는 적과 대치한지 오래되었으나 아직도 승패를 가리지 않고 있습니다. 신이 승패를 가르는 일전을 치르고자 청합니다. 하니 명황제가 홍승주를 총독으로 삼았는데 젊은 혈기로써 망령스럽게 적을 가볍게 여기므로 허락하지 않았으나 다시 간청하므로  허락하여 기병 4만 군사와 용병 4만에 지원병 4만을 합하여 12만이 출병하여 총병 조대수를 지원했다. 청나라 칸이 말하길 “다른 장수로 대신하는 것은 내가 공이 없는 임금이니 내가 즉시 잡아다 주살하여 치욕을 면할 것이다. 하였다. 살기를 바란다면 들어와 항복하기 바란다. 하니

칸이 이글을 곧이듣고 정병 삼천으로 곧바로 조대수의 성으로 진격한 것이다. 조대수는 성문을 굳게 닫고 심한 공격에도 빈틈이 보이지 않았다. 칸이 심히 격분하였다.

12만으로 출병한 홍승주는 의주부에서 생각지 않게 마주쳐서 가까운 거리에서 필사적인 전투를 벌였다. 홍승주는 한편으로 싸우고 한편으론 송산으로 올라갔다.

용병 2만 명이 산에 올라가기 전에 청군에게 죽임을 당했다. 칸이 이후로는 감히 가벼이 공격하지 못하고 서로 진을 치고 대치하고 있을 뿐이다.

 

☞: 당시 明史및 靑史의기록상 이때의 군문은 정군문이 아니고 洪承疇홍승주였음. 鄭崇儉군문은 三月에 하옥되고 洪承疇홍승주가 9월 지원군으로 금주에 출병했음

당시 왕조실록 내용: 仁祖19年月 21日

대명의 군사가 청인과 싸워 전세가 불리하자 기병은 도주하여 송산보로 들어가고 보병은 배를 타고 도주하였는데, 영원과 행탑 등지에서 죽은 자가 즐비하였다. 이 당시 조대수가 금주에서 포위된 지 여러 달이 지남에 중국이 크게 군사를 조발하여 보내 구원하였는데, 군문홍승주가 나이가 어리고 오만하여 여러 사람의 말을 듣지 않다가 결국 패배하였다. 대수가 청국의 진영에 사람을 보내, 포위된 지 9개월이 되었으니 빨리 교전하여 승부를 가리자고 말하였으나 청나라 칸이 들어주지 않았다.

 


○宣言先運軍甚精勇使我國得捷爲謝因請軍兵○以我國先運炮手不入戰所優對以送者有意存焉自後例爲交代入送之易胡也其爲謀也巧矣

우리나라에서 임금을 호송하던 포수부대가 싸움에 투입되지 않은 것은 우리가 파병해준 뜻에 부응하여 특별히 대우한 다는 뜻이다. 이후에도 청병과 교대하여 보낼 때에도 선례가 된 것이니 그 계략이 교묘하다. 선언하되 임금을 호송하던 포수부대는 우리나라에서 과거 급제자를 뽑은 최고의 정예부대이니 지원군을 청하면서 사례한 것이다.

 

☞: 조선군은 정밀한 총을 가지고 있어서 명나라 조대수의 군사를 많이 죽였는데, 조대수는 군대에 명하기를 청병의 머리 하나에는 은 50냥을 주고 조선 군사의 머리 하나에는 100냥을 준다고 했다.

 


○運粮胡差十二名出來道過潛商十二人縶縛問之十二人直招曰我義州人以府尹之命往唐陣云則捉囚義州而到京         

군량미를 운송하는 청나라 사신이 나오다가 비밀리 무역하는 장사꾼 12명을 붙잡아 왔다. 물어보니 12명이 사실대로 고하길, 나는 의주사람인데. 의주부윤(황일호)의 명을 받고 중국 진영으로 가려한다고 하여 의주에서 서울로 붙잡혀왔다. 

 


會百官袛迎廟堂辭避上曰不爲袛迎者罷職勢不得已皆袛迎胡差而義州府尹以黃一元交通中國請拿未定刑卽拿致則胡差列百官回示曰百官中有如此犯誅之其中人鄭明時亦甚作

백관들을 회례하고 묘당에서 왕의 행차를 맞이하는 의식을 거절하며 임금이 말하길 파직을 당한 꼴이니 부득이한 상황에서 모든 의식을 거절하는 것이다.

청나라 사신이 의주부윤 황일원이 명나라와 내통하는데도 아직도 잡아들여 벌주지 않는다며  지시하길 즉각 잡아들이라하면서 또한 줄지어서있는 백관을 둘러보며 말하길 백관 중에 이와 같은 죄를 짓는 자는 주살할 것이다. 하니 그 중에서도 정명수의 작태가 극심했다.

 


遂赴出黃顧語百官曰吾無罪捉給至於此極國史如此願僉眞情之因垂淚曰吾母戒余曰吾欲観榮華吾勉力發身畢竟若此吾無兄弟獨身使先靈絶祀不孝莫大觧宝釖賜斬者曰速斬我母僾遇恃朋執手同與病錄藥各曰吾児重速劑送此藥詳傳我之戒勿學業文武蔵踪畎畒遂被戮聞者莫不下淚焉捉囚十二人盡殺之

이윽고 끌려 나온 황일호가 백관을 둘러보며 말하길 나는 죄 없이 붙잡혀와 이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나라 일 또한 이와 같아 여러분에게 (장차 나라 일을)진정 눈물로 호소한다. 나의 어머님이 경계의 말씀하시길 내가 영화를 보고자한다면 애쓰고 힘써서 수신제가하라 하였는데 마침내 이렇게 되니 나는 형제 없이 홀몸으로 선령의 제사가 끊기게 되니 크나큰 불효다. 형리에게 차고있던 보검을 풀어주며 주며 속히 죽여라. 내 어머니께서 그 언젠가 나의 친구를 만나 손을 잡고 부탁하길 같은 병에도 약이 다르다며 말씀하시길 우리아이가 병이 중하고 급하니 속히 약을 지어 보낸 것이라며 꼭 나에게 전해 달라는 약이 있었는데

그 약이란 곧 경계의 말씀이었다. 문무의 학업일랑 밭고랑에 묻어 버리고 시골에 숨어 살라는 말씀이었거늘 마침내 억울하게 죽는다. 소식을 듣고 울지 않는 자가 없다. 잡아온 죄수 12명을 모두 다 죽였다.

 

☞:  黃一元은  黃一皓황일호 이다. 1588∼1641 본관: 창원 사헌부장령 때 병자호란 시 인조를 호종 독전어사(督戰御史)로 화전(火箭)을 이용하여 적군을 물리쳐 전공을 세웠으며, 척화(斥和)를 적극 주장하였다. 난이 끝난 뒤 호종한 공으로 통정대부에 올라 진주목사에 제수되었다. 七義士

七義士(칠의사) : 병자호란 이후 청나라 칸을 죽이고 명과 우리나라 국권을 회복하려다가 사전에 그 사실이 청에 발각되어 청의 명으로 할 수 없이 우리 정부에 의해 사형을 당한 황일호 ·최효일, 차충량· 차예량·안극함, 장후건, 차맹윤

 


○胡差十二名不時欲求景南關庙百官齊迎出去之際色正郞以人馬趂未整齊赤脱北結提畒蹄踏其爲困辱不可勝記

청나라 사신 12명이 갑자기 남문 밖에 있는 (중국 촉한의 장수)관우 사당을 보기를 청하여 백관이 나아가 영접하였다. 인마가 뒤좇아 가는데 혼잡을 정리하는 색리가 미처 대치하지 못하여 남쪽을 빠져나와 북쪽으로 한꺼번에 몰려들어 발굽으로 밭을 밟아 그 곤욕이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다.

 


○義州出身崔孝元當初出際之日見國勢難攴率妻孥懷重寳擧家載舩直抵中原水往之計其慮也深且遠矣卓乎其不可及也

의주출신 최효일이 당초에 (명나라로)나가려고 할 즈음 나라의 어려운 형국을 보고 식솔을 다그치고 가족을 설득하여 가산을 정리해 온 집안이 중원을 거치지 않고 곧바로 뱃길을 이용해 (명나라로) 들어갈 계책을 세우니 그 뜻이 깊고 원대하니 그 탁월함에 도저히 미칠 수가 없다.

☞:   崔孝元은 최효일(崔孝一)이다.  ?  ~1644  七義士 칠의사 병자호란 때 임경업의 휘하에서 전공을 많이 세웠다. 황호일, 임경업 등과 청나라 태종을 암살할 것을 모의하고 등주로 건너가 명나라 사람들과 함께 심양을 공격하려 하였으나 사전에 누설되어 실패하였다. 1644년 명나라가 망하자 의제의 빈소에서 10일 동안 통곡하면서 단식하다가 죽었다. 12월 8일청나라 사신이 의주에 돌아와 최효일(崔孝一)의 족속 12인을 죽이고 갔다.

 


市直木一匹無過米一斗半○十二月十六日鵾變生

시장에서 광목 한필 값이 쌀 한 말 반 밖에 안한다. 12월 16일 곤변이 태어나다.

☞:  鵾變곤변: 큰아들 鈺옥의 셋째 아들 족보에는 鯤變곤변으로 기록돼 있음.

 


○李回寶作詩曰 

(인조임금이 삼전도에서 굴욕적으로 강화하자 이를 보고 은거했던)이회보가 시를 지었다.

憶曾風雨打孤城  비바람 몰아치는 외로운 城의 옛일 생각하니

天柱推顚地軸傾  하늘을 거꾸로 헤아려 땅 지도리 기울어있다.

我忍獨留侄丙子  나는 삼전도 비극을 멍청히 홀로 견디었는데,

君能先逝在崇禎  임금은 명나라를 먼저 버렸네.

人情自古皆衰死 자고로 인정은 모두 메말라,

世事如今孰願生  이런 세상 누가 살길 바라리.

若到雲鄕朝列祖 모여든 구름 속에 열성조 혼이 머문다면,

善爲辭說莫分明 잘했다는 말 분명 않으리.

☞: 崇禎: 중국 명나라의 마지막 황제 의종(毅宗) 때의 연호(1628~1644).

李回寶 1594~ 1669 본관 진성. 병자호란 때 척화(斥和)를 주장하다 항복하게 되자 벼슬을 버리고 낙향했다. 김자점(金自點)의 반역을 예견했고 후에 그를 탄핵하여 유배케 했다. 이로 인해 직간(直諫)하는 위국충절이 뛰어나다 하여 사복시정(司僕寺正)에 특진됐다. 저서: 석병집

 


○淸陰答之(汗)言曰臣各爲其主道其志耳口吾口也志吾志也以吾之口告吾志于吾君而吾君不從豈意細微之事播及於他國乎乃斥和事也

김상헌이 (청나라에 잡혀가서) 대답하길 신하는 각자 의지로써 그 주도하는 바를 행할 뿐이다. 그 뜻한 바를 말한 것은 나의 말이요, 본심은 나의 본심이다. 나의 임금께 내가 고한 말이 나의 본심이니 나의 임금을 따르지 않았는데 뭣 때문에 세세히 대답하겠는가. 이와 같은 일이 번져나가니 다른 나라에서 너희나라에 반기를 드는 것이다.

☞: 淸陰 = 金尙憲김상헌의 호 1570~1652 본관: 안동. 강직한 성격과 기개로써 심양에 잡혀가 6년 동안 청인들의 굴복 요구에 끝내 굽히지 않고 불복하여 저항. 청나라 사람이 심하게 힐문하니 상헌은 누워서 일어나지도 않고 말하니, 청인들이 서로 돌아보며 혀를 차고 말하기를,“정말 못 말리는 늙은이다.”하였다. 청인이 의롭게 여기고 칭찬해 말하기를‘김상헌은 감히 이름을 부를 수 없다.’고 하였다.  1645년 소현세자와 함께 귀국했지만, 여전히 척화신(斥和臣)을 탐탁지 않게 여기는 인조와의 관계가 원만하지 못해 벼슬을 단념하고 석실(石室)로 나아가 은거하였다. 1649년 효종 즉위 뒤 대현으로 추대 받아 좌의정에 임명되었다. 이후 수차례 은퇴의 뜻을 밝히면서 효종에게 인재를 기르고 대업을 완수할 것을 강조하였다.  저서: 야인담록. 남사록. 청음집

 

 

 

 

by 꽃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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壬午年 仁祖20年 1642년  明- 崇禎15년  淸- 崇德7年(당68세)   11월 윤달



역사보기/ 3월 4일    농군을 조발하여 심양에 보내다

3월 14일   경상 감사 구봉서가 조령 아래의 삼색미는 추수 때에 거두기를 청하다 .

3월 18일   조대수가 청국에 항복했다고 심양의 재신이 치계하다.

5월 16일   정태화(鄭太和)를 경상 감사로 삼았다.

6월 2일    경상도에 가뭄이 들다  

7월 27일   경상도에 홍수가 나다

8월 18일   인평 대군 심양에서 돌아오다.

10월 18일  임담(林墰)을 경상 감사로 제수하다



◐正朔辛未十一二終日竟夕雪霏霏幾至尺矣十三動天○金判書之行回自瀋陽初二日到江上還朝而同時被去申朴曺蔡等亦回朝云

정월 초하루 신미날. (양력/ 1642년 1월 30일 辛未)

11일,12일 종일 저녁 내내 눈이 내려 무려 한 자는 쌓였다. 13일 하늘이 울렸다. 김상헌이 심양에서 돌아와 초이튿날 의주에 당도했다. 같이 갔던 신득연. 박황. 조한영. 채이항 등도 돌아왔다 한다.

☞:  江上朝 =“의주”당시 압록강 위쪽에 위치한 청나라 관련 조정업무를 관장한 곳.

1월 6일: 청나라로부터 위험인물로 지목되어 심양에 끌려가 4년여 동안을 청에 묶여 있었다. 의주로 옮겨 구금해두고 사신이 왕래할 때 그들로 하여금 점검하게 한 것이다.



◐元朝日見无妄之患慟慟憤憤○二十一日鏡以覆試事發程與孫生弘祖氏同行○南邊報淘洶譯官洪希男下抵東萊○方伯因嶺南士子願留疎限麥秋仍往南民大悅傳相告賀曰其甦   

정초에 뜻밖의 재앙을 당하니 통분이 인다. 21일 아들 경이 서울에 거행하는 과거시험 길을 떠났다. 생원 손홍조와 동행했다. 남쪽 변방의 흉흉한 소식이 전해지자 역관 홍희남이 동래로 내려갔다. 영남의 선비가 경상감사(구봉서)가 오래 머물기를 바라는 소를 올렸는데 보리를 거두어들이는 철까지 더 머물게 한다는 소식에 남쪽 백성들이 서로 전하며 크게 기뻐하여 말하길 “이제 살았다”라고 한다.

☞:  洪希男은 洪喜男이다. 본관: 남양. 대일 교섭에 난관이 있을 때마다 일본에 파견되었다.

☞: 인조실록: 경상 감사 구봉서가 병으로 사직하였다. 이 당시 봉서의 임기가 임박하자 상이 보리가을 때까지 유임시킬 것을 하교하였었다.



◐二月朔辛丑下跡雪○汗請兵我國交代精兵十五日豊基點考○初九夜大雪沒脛十日終夕不晴  

2월1일(양력 1642년 3월1일) 신축일 눈이 조금 내린다. 청나라에서 정병의 교대를 요청해왔다. 15일 풍기(영주)에서 인구조사를 했다. 9일 밤 크게 천둥이 쳤다. 9일 밤에 큰 눈이 내려 정강이가 빠진다. 10일 저녁까지도 개이질 않는다.



○淸陰疏曰臣等覊繫異域載羅寒暑枯形危喘與死爲期伏蒙天地父母之仁德動於遠邇誠感上下脫之於鼎鑊刀俎之間還於乳哺袵席之內此非臣等所能仰報玉關雖入長安尙隔不得趨詣闕庭少伸微悃瞻天望雲無任感激流涕之至餘昧死以聞

김상헌 등이 상소하기를,

신들은 이역에 구금되어 있으면서 모진 추위와 무더운 더위에 시달려 몸은 메마르고 숨은 거칠어져 죽은 목숨 있었는데, 천지 부모의 사랑으로 덕은 멀고 가까운 곳을 움직이고 정성은 상하를 감동시켜, 솥에 삶아 죽임을 당하고 칼과 도마의 극형에서 빠져나와 편안한 보금자리로 되돌아오게 하시니, 이는 신들의 힘으로는 도저히 갚을 수 없는 은혜입니다.

의주에는 들어왔으나 다만 서울 길이 막혀서 대궐로 달려가 다소나마 충정을 펴지 못하고, 맑은 하늘을 우러러보며 감격의 눈물을 이기지 못하여 죽음을 무릅쓰고 아룁니다.



○二月初三日倭使來曰關伯往八月生子此莫大之慶遣使感賀云  

이월 초삼일 일본 사신이 와서 말하기를 “쇼군이 지난해 8월 아들을 낳으니 크나큰 경사라며 사신을 보내 축하해주어 감사하다고 한다.

☞:  關伯관백(쇼군): 일본 德川家光덕천가광: 家綱의아들 (이에츠나:1641~1680)1641년8월 3일 출생

인조실록: 일본사신 평성행이 홍희남과 서로 의논할 일이 있다고 하였는데 그 뜻은 관백(關白)이 아들을 낳아 온 나라가 축하하고 있으므로 도주(島主)가 우리나라의 축하 사절을 얻어 생색을 내는 소지로 삼자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念二鏡廖泊來所望歸虗○三月晦日華山雪積○四月甚旱秋牟專厥旬後得一耕雨無高底水付種春牟有向茂之勢而連有霜降自春徂夏寒如冬日○着耳掩人不爲惟     

22일 아들 경이 과거에 낙방하고 돌아왔다. 기대는 한낱 꿈이 돼버렸다. 3월 그믐날 화산에 눈이 쌓였다. 4월 가뭄이 심하다. 가을보리는 냉해를 입었다. 10일이 지나서 밭을 갈고 비가 오지 않아 높고 낯은 물길을 대여 봄보리를 갈아 무성히 자랐는데 지난 가을부터 봄까지 이르러 여름날이 겨울날씨 같다. 귀마개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생각 못할 일이다.



○錦州失守祖獎出降云何天之佑乃至於此也○兒輩寃抑不攻自破

(명나라)조대수가 금주의 성을 지키지 못하고 나와서 항복했다한다. 어찌 하늘의 보살핌이 이렇게 될 줄 생각이나 했던가? 멍청이가 원통하고 억울하게 공격하지 못하고 스스로 무너지다니! 

:  인조실록: 20년 3월 18일 조대수가 청나라에 항복했다고 심양의 재신이 치계하다. 청병이 송산을 함몰시켜서, 금주에 원병이 이미 끊어지고 굶주림과 곤궁함이 날로 심해지자, 조대수가 마침내 청국에 항복하였다고 합니다. 



○市價一匹直米一斗粟太無過兩斗處處餓死下道有一兩班甚絶粮行乞求活其妻子矣一日乞還則妻與處子已餓死不勝哀愴之心亦卽縊死聞者莫不倶淚○念風風之餘雨雨 

시중에 무명 한 필 값이 쌀 한말 웬만한 조.콩 두 말 값이다. 곳곳에 굶어죽는 자가 있다. 경상도 한 양반이 너무 굶다가 그 처자를 구하고저 구걸을 나섰다. 어느 날 돌아와 보니 아내와 자식은 이미 굶어 죽어있었다. 애통한 마음을 이기지 못해 곧바로 목을 메에 죽었다. 이 말을 듣는 사람들이 눈물을 금치 못했다. 20일 바람이 불다가, 비가 오다가 한다.



○南賊僧來求請八萬大藏經以不易印出(不)許說印之地帋容入四萬餘卷故如是答之 

일본의 동지승이 와서 청하길 진본의 팔만대장경 인쇄본을 구한다하였다. 허락하지 않고 타이르길, 그곳에서 인쇄하려면 4만 여권의 종이가 필요한 것이니 이렇게 대답한 것이다.

☞:   南賊僧남적승은  일본 사신 등지승(藤智繩)을 이르는 말.

왜구들이 탐낸 팔만대장경: 조선왕조실록에는 83회에 걸쳐 일본이 원본및 인쇄요청을 구한 사실이 기록돼 있다.



○念四五連有大雨水漲南北川非舟楫難通架山還上處來永岩輩用之得見阿女該簡則市直好木一匹太粟無過一斗租則二斗云麥前計活難矣哉○龍宮以上畓官山水暴注活江㳂邊兩麥盡淹云

24.5일 연이어 큰비로 남북의 하천이 물이 불어나서 배 없이는 움직일 수 없어 가산 곡식을 받치는 사창에서 영암의 마차를 타고 왔다. 딸의 서찰을 보니 좋은 포목 한필에 웬만한 콩과 좁쌀 한말 값이고 나락 두 말 값이라 한다. 보리 고개를 넘길 일이 큰 걱정이다. 용궁의 논은 상답인데도 관산에서 쏟아져 내리는 물이 강물 흐르듯 하여 물길 언저리의 밀과 보리는 모두 물에 잠겼다.



◐五月初六戒仲計音來云死日亦難的知乃遆畨砲手者之言厥老母與兄弟相向慟哭不耐見   5월 6일 계중의 부음 소식이 왔다한다. 죽은 날짜 또한 정확치 않다. 포수의 교대기간 중이었다고 하는 말에 노모와 형제들이 서로 마주보고 통곡하는데 차마 참고 볼 수가 없다.

☞:  청나라 정병으로 전투에 참가했던 계중이 귀국을 얼마 앞두고 전사했다는 소식인 듯.



○祖將夫妻降于汗削留陣中降柔每日殺千人者八日云開來慟憎十五日雨作農夫歌舞

조대수 부부가 항복 할 때 청나라 칸이 소탕작전을 펴며 진중의 잔병에게 항복을 권유하며 매일 1.000명을 죽이니 8일 만에 성문을 열었다한다. 참으로 가증스럽고 애통하다.

☞:  조대수와 부하 장수들은 저항 없이 그냥 투항함으로써 명나라의 멸망을 부추겼다.

관리들의 부정부패와 환관들의 권력투쟁. 임진왜란에 무리한 파병. 이자성의 난등의 원인으로 청나라에 패한다.



○六月二十一日新使鄭泰和到界厥第以東萊府使避嫌歸

6월 21일 정태화 감사가 도착했다. 그의 동생 동래부사(정치화)는 혐의(嫌疑)를 피하기 위해 벼슬을 버리고 돌아갔다. 15일 비가 내려 농부가 춤추고 노래하며 농사일을 시작했다.

☞:  정태화와 정치화는 형제가 같은 지역으로 부임되자 상피 관계라 하여 피함

        鄭致和: 인조 20  1월 동래 부사가 되다. 동생 鄭泰和: 인조 20  5월 경상 감사가 되다.

    鄭太和정태화 1602~1673 본관: 동래 병자호란 때 도원수가 도주하자 패잔병을 모아 현관(縣館)에 의지하여 시석(矢石)으로 항전하여 수많은 적을 사살한 공으로 집의가 되었다. 6차례 영의정을 지냈으며, 37번의 청원 끝에 사직하였다. 문집:양파유고 저서:양파연기가 있다.

鄭致和정치화: 정태화의 동생 병자호란 후 세자시강원 보덕으로 봉림대군을 심양에 호종. 서인(西人)이면서도 성품이 원만해 숙종 1년 자의대비의 복상문제로 서인이 몰락 할 때도 화를 면함.



○此月旬後連雨川漲者再三然盈科而已兩麥趂收之○七月旬三四連雨十六大水㳂江左右田畓盡淹沇人多溺死此月無日不雨

이달 10일 이후 연이어 개천 물이 불어나서 두세 차례 웅덩이를 매우고 있으니 밀과 보리는 잽싸게 수확했다. 7월 13.4일 연일 비가 왔다. 16일 큰비로 강이 넘쳐 좌우의 전답이 모두 물에 잠기고 물살에 빠져 죽은 사람이 많다. 이달 내내 비가 온다.



◐八月初七大雨○夜不絶水漲倍前二月之雪八月之雨果若人言○十六七連漲南北川遂爲秧霖哀我民生其何得生旱稻趂未收○統制使柳琳左水營基址擲奸事命齊湖南添坊舡盛陳軍容而來不意天起狂風漂流大洋不知去處云邦家之不幸何之如此  

8월 7일 큰비. 밤에도 쉬지 않고 퍼부으니 불어나는 물길이 지난번의 배는 된다. 2월 눈에 8월 비 라는 속담이 과연 이와 같구나. 16.7일 연이어 남북의 하천이 범람해서 장마 통에 심어놓은 못자리가 모두 떠내려갔다. 애달프다. 우리백성 그 누가 살아남으리. 밭벼도 때맞춰 거두지 못했으니! 통제사 유림이 좌수영 주둔 상황을 꼼꼼히 점검하라 명령하고 전라도를 포함해 모두를 잡도리하는데 배들이 선단을 이뤄 위용을 자랑하며 오다가 갑자기 일어난 소용돌이 바람에 큰 바다로 표류하여 간곳이 어디인지 알 수 없다고 한다. 한나라와 백성의 불행이 어찌 이렇단 말인가?

☞:  柳琳유림1581∼1643년 본관: 진주 오위도총부 부총관·포도대장·경상좌병사 등 역임



○義興鄭梯一姝潛奸婢夫逃在大丘地而見捉兩人竝殺杖下乃蔣允□之妻也實出於蔣之祿衣之變也新都事朴稷十二日拜辭云

의흥(군위군)에 사는 정제일 여동생이 몰래 노비의 남편과 간통을 하다가 대구로 도망갔는데  찾아가 잡아와 두 사람을 곤장을 쳐서 죽였다. 여자는 장윤□의 부인이다. 장윤□이 직접 밝힌 사실이다. 명문집안에서 일어난 변고이다. 신임도사 박직이 12일 임금께 임지로 떠나는 인사를 올렸다한다.



○八月二十五至九日霜降于安東玆山小川地大水之餘加之早霜所變慮本邑則九月十二日水霜自消不至葉黃多幸九旬三千癶自達川持簡來二十三鏡落魄而還云庭試沈譔等五人皆京人武科取十一人○災傷敬差官尹珩二十七日到界

8월 25일부터 29일 서리가 내렸다. 안동 자산의 작은 하천에 큰물이 졌는데 더하여 이른 서리가 내려 변덕스런 날씨가 걱정스러운데 우리 마을에는 9월 12일 물안개가 사라지고 낙엽이 지지 않아서 다행이다. 9월 13일 천발이 달천(군위군 소보면 봉황리)에서 서찰을 가져왔는데, 23일 아들 경이 과거에 낙방하고 돌아왔다 한다. 임시로 시행하던 과거시험에 심선등 5인이 뽑혔고. 모두 서울 사람들이다. 무과에 11인이 뽑혔다. 재해를 조사하고 구휼하는 재상경차관 윤형이 27일 부임해 왔다.

☞:  庭試정시: 임시로 시행하던 별시 중의 한 종류로 지방민들이 응시하기가 불리하였고, 서울의 문벌 출신들이 진출하는 데 중요한 통로로 이용되었다.

☞:  尹珩(윤형): 본관: 파평. 인동부사. 양주목사



○統制使柳琳拿去大旣□□陸舡運饋諸大臣家事政院請啓也

통제사 유림을 잡아 갔다. 이미 여러 차례□□ 육로와 배로 실어다 바치니 여러 대신들이 집안의 일어난 사실을 승정원에 청하여 임금께 아뢴 것이다.

☞:   인조실록 : 9월 21일 간원이 통제사 유림이 소금배로 뇌물을 실어온 죄를 다스렸다.



○木花與太道內同然專廢復種難得九月大旱秧牟難播十月初四晩雨始洒人人相賀

경상도에서 목화와 콩은 하나같이 망쳤다. 다음 종자를 얻기도 힘들다. 9월 큰 한파로 보리갈이도 힘들다. 10월 초4일 늦은 비가 뿌리니 서로 기뻐하였다.



○朝鮮累臣洪翼漢斥和事意歷歷可陳而但語音一不相慣曉敢以文墨控曰夫四海之內皆可爲兄弟而天下無兩父之子矣朝鮮本以禮義相尙諫臣以直截爲風故上年春適授言責之任間金國將偸盟稱帝心以爲恠若果渝盟則是悖兄弟也若果稱帝則是二天子也門庭之內序有悖兄弟也哉覆載之間序有二天子也哉金國之於朝鮮新有交隣之約而先背之大明之朝鮮舊有字小之恩而深結之則忘深結之大恩守先背之失約於理甚不近於義甚不當故首建此議欲守禮義者是臣職豈有他哉但臣分義當盡忠孝而上有君親俱不得扶護而安全之今王世子大君皆爲俘老母存歿亦不知良由一疏之艮陳以致家國之俱禍揆諸忠孝之道掃歸蔑蔑自究乃罪可殺罔赦雖萬被誅戮實爲甘心血一釁鼔魂飛去天歸游故國快哉此外更無所言惟願速死 

잡혀온 조선의 신하 홍익한은 (청나라와 싸워야 한다는)척화의 뜻은 분명하게 밝힐 수 있다. 다만 서로 말이 통하지 못하므로 감히 글로써 밝히는 바 이 땅의 모두는 형제가 될 수는 있지만 천하에는 두 아버지의 아들이 있을 수 없다. 조선은 본디 예의를 서로 숭상하여 왔으며 간하는 신하는 오직 곧은 절개로써 기풍을 삼는다. 

따라서 지난해 봄에 임금에게 올바른 말을 해야 하는 正言정언의 직책을 맡고 있을 때 금나라가 맹세를 저버리고 황제라 칭한다니, 패륜의 행위라 생각했는데 만일 맹세를 저버렸다면 이는 패륜의 형제요, 만일 황제라 참칭했다면 이는 두 개의 천자가 되는 것이다.

어찌 한 집안에 패륜의 형제를 둘 것이며, 거기에 더해서 어떻게 두 아버지를 둘 수 있겠는가, 금나라는 우리 조선과 새로 교린의 약속을 하고서 먼저 그것을 배신했고, 명나라는 조선과 오래도록 선린의 적잖은 은혜로 더욱 깊게 맺고 있는데, 큰 은혜를 지키는 깊은 결속을 저버리고 먼저 배신하란 말인가?

약속을 저버리는 것은 매우 어긋난 의리요 사리에 합당치 못하다. 따라서 먼저 이 척화의 의견을 세워서 예의를 지키고자 한 것이다. 이는 신하된 자의 직분이다. 어찌 다른 뜻이 있겠는가?

다만 신하의 직분은 당연히 충과 효를 다하여 위에 계신 임금과 어버이를 모시는 것이나. 안전하고 편안히 모시지 못하여 지금의 왕세자와 대군은 다 포로가 되었고, 노모의 생사는 알 길이 없다. 참으로 단 한 번의 상소의 진술로 말미암아 가정과 나라의 재앙을 가져왔으니, 따지고 보면 충과 효의 도를 모두 날려버린 셈이다. 스스로 나의 죄를 생각하니, 죽어도 용서받을 수 없다. 만 번 죽임을 당하더라도 달가운 바이다. 한 방울의 피가 북에 튀겨 혼이 고국 하늘로 돌아간다면 이 얼마나 기분 좋은가! 더 이상 할 말 없다. 어서 빨리 죽이라!

☞: 洪翼漢홍익한: 1586~1637 본관:남양. 삼학사의 한사람 1636년 청나라가 속국시하는 모욕적 조건을 내세워 사신을 보내왔을 때 사신을 죽임으로써 설욕하자고 주장하였다.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척화론을 폈으나, 남한산성에서 왕이 화의하니 오달제 ·윤집과 함께 심양에 잡혀가 끝내 굽히지 않고 죽음을 당해 적들이 감탄하여 삼한삼두(三韓三斗)의 비를 세웠다. 저서: 화포집.  북행록. 서정록.



○九月十五日京奇胡差出來平安監司沈演義州府尹定州牧使捉去不知其由或云唐將智謀曰朝鮮事中國如前貢獻不絶云而多散施國物貨汗信聽設之所致云   

9월 15일 서울 소식으로는 청나라 사신이 나와서 평안감사 심연의주부윤, 정주 목사를 잡아갔는데 그 이유를 알지 못한다고 한다. 어떤 이가 전하길 명나라 장수가 묘한 꾀를 내여 말했는데 명나라와 조선과의 관계는 아직 끊어지지 않고 전과 다름없이 명나라에 공물을 바친다고 하므로 이로써 나라의 재정이 많이 소진됐다고 하니 청나라에서 이 말을 곧이듣게 만든 것 때문이라고 한다.

☞:  인조실록:  10월 1일 청국이, 명나라 배가 서해에 출몰하는데도 금지하지 않았다는 것을 이유로 우리나라로 하여금 그 감사·병사와 지방관을 문책할 것을 명하였다. 이에 전 감사 심연과 전 병사 김응해 등을 나국할 것을 명하고 얼마 후에 파직시켰다.



○二十一日夜中白雪沒足道路難通○市價木花好木則一匹三斤麤木則斤半惑二斤正十□太三斗稅太一石麥代石○二十五日寅時遇甲生生於祖母還甲故名之十八日陽春生

21일 밤에 온 눈에 발이 빠져 길을 다니기 힘들다. 시장의 물가로 좋은 목화는 면포 한 필당 3근이다. 거친 것은 한 근 반 또는 두 근이다. 면사 10속에 콩 세말이다. 조세로 내던 콩 한가마니는 보리 한가마로 대신한다. 25일 새벽 4시 경에 甲갑이 태어났다. 태어난 時시가 할머니의 생신 甲子갑자와 같아서 지은 이름이다. 18일 양춘이 태어났다.



○本道方伯乃諸大臣等拿送鳳凰城應問罪龍將處所謂罪目者誈告中國相通事也    

본도 방백과 많은 제신 등을 봉황성으로 잡아 갔다. 청나라 용골대가 힐문하여 취한 조치이다. 소위 그 죄명이란 것이 명나라와 몰래 교역하고 거짓으로 보고했다는 것이다. 

☞:  이계(李烓)가 우리나라에서 명나라와 내통한 사실을 낱낱이 고해바치면서 이들 오신이 청국을 반대하는 주동자라고 하였기 때문에 청국의 관리가 우리나라에 직접 나와 조사한다고 다섯 신하를 심양으로 잡아갔었다. 이계는 11월 12일 나라를 팔아먹은 반역죄로 삼족을 멸하는 벌을 받고 효시된다.

이때의 경상도 방백은 정태화(鄭太和)이다. 정태화가 평안 감사로 있었을 때 이계와 친하게 지냈다. 명나라 배가 서해에 출몰할 때 정태화가 이지룡으로 하여금 선천과 철산 사이를 왕래하면서 명나라 배를 정탐하고 파수한다고 표면적으로 말을 내걸게 하고 이계에게 서찰을 보내 명나라 사람들에게 쌀과 음식을 구해 주도록 하였는데, 이계는 그 서찰을 주머니 속에 숨겨두어 나중에 스스로 발뺌을 하려는 계책을 세웠다가 이때에 와서 그 서찰까지 올려 고발했다.



◐至月初天動連有大霧○新監司安東府使林㻼除朝辭行公柒谷以避嫌遞任

11월 초 하늘이 울리더니 연이어 안개가 자욱하다. 안동부사 임담이 신임 경상감사로 부임하여 곧바로 공무를 집행했다. 칠곡에 부임된 것인데 혐의를 피해 바꾼 것이다.

☞:  林㻼은 = 林墰임담 1596~1652 본관: 나주. 1644년 경상도관찰사로 서원이 사당화(私黨化)하는 폐습을 상소했고 1646년 충청도관찰사로 유탁(柳濯)의 모반사건을 처리했다. 그 후 형조참판·대사간 등을 거쳐 이조판서가 되고 효종 때 1652년 의금부판사에 올라 청나라 사신의 반송사로 의주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죽었다.



○冬日溫和處處反耕○初四龜山孫女歸其家○汗欲殺林慶業發差捉到金郊驛脫身逃走不知去處

겨울 날씨가 따뜻하여 곳곳에서 밭을 갈아 업는다. 4일 구산(안계9km)의 손녀가 본집으로 돌아갔다. 청나라에서 임경업을 죽이려 잡아가는 도중 황해도 금천군 금교역(개성)에서 몰래 달아나서 어디로 갔는지 거처를 알 수 없다.

☞:  11월 6일  팔도로 하여금 대대적으로 수색하게 하고 아울러 현상금을 걸어 체포할 것을 명함.



○前兵使金俊龍病死刑判具宏自決死朝廷大臣連絡捉去或殺或拘留不還

전 병마절도사 김준용이 병사하였다. 형조판서 구굉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조정대신이 줄줄이 잡혀가고 혹은 죽이고 혹은 잡아가두어 돌아오지 못한다.

☞: 具宏구굉이 자결 했다는 것은 의외의 기록이다. 인조 임금의 외삼촌으로써 1577~1642 본관: 능성. 인조반정을 이룩했다. 훈련대장 어영대장 포도대장 총융사 등을 역임하였다. 척화신을 몰아냈음으로 사람들이 다 그를 미워하였으나 상당히 청렴하다는 이름이 있었다.

金俊龍김준용 1586~1642 본관: 원주. 무신으로 영남절도사 사임 후 사망



○大小道路設盗直物色林慶業無行狀者難爲通路其弟亨業見捉受刑一次而慶業浮海向中原云 

크고 작은 도로에 검문소를 설치하고 검문검색을 한다. 임경업이 (외국 여행허가증)행장이 없으니 이동하기가 힘들다. 그 동생 형업이 제일먼저 붙잡혀 죄를 받았는데, 임경업은 바다를 떠돌다가 명나라로 들어가고 있다한다.

☞:  11월 20일 비국이 임경업의 처자와 그 아우 임준업 및 조카 임진무 아우 임흥업과 그의 처자를 잡아 서울로 압송 금부로 하여금 수금하게 했다.



○鄕參新進取十二人柒谷林瑞以新監司四寸避嫌遞來偈往李帚白家有作墅之意  

12명이 새롭게 향교에 참에 들었다. 칠곡의 임서는 신임감사와 4촌으로 협의를 피하려 사직 하고 이추백의 집으로 쉬러갔다. 별장을 짖고자하기 때문이다.

☞: 林瑞는 林㙐 임타이다. 칠곡의 임타는 신임감사 임담과 4촌으로 같은 집안사람끼리 가까운 곳에서 관리를 한다는 세간의 평이 부담스러워 협의를 피하여 사직함.



○冬初夜夜迹雪譊曰臘前三白豊年之兆無乃大有年之瑞節

동지 달 초승에 밤마다 눈이 내리니 서로 다투어 말하길, 동지(冬至)가 지나고 세 번째 술 날이 되는 날에(第三戌日) 행하는 제사 이전에 눈이 세 차례 내린 것은 풍년의 징조이다. 그동안 풍년이 없었는데 상서로운 절기라고 이야기한다.

☞: 臘前三白 : 납제(臘祭:동지후 第三戌日에 행하는 제사) 이해의 동지 날은  음력11월 29일이다.

○閏十一月望日大霧所謂夏霜冬霧非常之變始見碧魚嗚呼晩矣

윤11월 15일 안개가 짓게 낀다. 여름에 서리오고 겨울에 안개가 끼니 예사롭지 않은 이변이다. 애초부터 고등어 맛보기는 이제! 틀렸구나.

☞: 壁魚벽어: 사전 상으로는 10cm에 불과한 물고기이다. 일기 내용을 추론하면 벽어는 고등어인 듯하다. 고등어는 古道魚고도어라고 한다.   일괄 고등어로 칭했다.



○念夜迹雪雪後無風暫霧南賊無時到館奇慮○都事朴椶下來到良才濫刑臺諫所啓杖一百奪告身  

20일 밤새 눈이 쌓였다. 눈이 온 뒤 바람도 없이 잠시 안개가 꼈다. 남쪽에 적들이 때도 없이 부산의 왜관에 들이닥친다 한다. 갑자기 걱정이 된다. 도사 박종이 부임하러 내려왔다가 양재 감형에서 멋대로 형벌을 적용한 죄로 대간이 아뢴바 대로 곤장 백대를 치고 벼슬의 직첩(職牒)을 거둬들였다. 



○兵使喪輿過邑上去時差使貟義興伜護喪承有㫖擧行○念四邑伜成親事乃慶州府尹朴遂弘孫也

병마절도사(김준용)의 상여가 우리 읍을 지나 갈 때 임시관원이 의흥(군위)군졸을 동원해서 상여를 들도록 하자하여 그 뜻을 받들어 거행했다. 24일 고을 수령의 집에 혼사가 이뤄졌는데 는데 경주부윤 박수홍의 손자이다.

☞: 朴遂弘은 朴守弘이다. 1588~1644 정묘호란 때 강화로 인조를 호종하고, 돌아와 금구현령으로 전란 피해복구에 힘썼다. 뒤에 예조참의, 경주부윤으로 부임, 임기를 마치고 상주에서 객사(客死)했다.  경상북도 구미시 봉곡동 백인당(百忍堂)거처



○精兵往瀋陽○十二月初四五六連有夜雪朝霧之變○都事鄭昌冑下批○羅同知萬甲捐世

정예부대가 심양으로 떠났다. 12월 4,5,6일 연이어서 밤에는 눈이 오고 아침에는 안개가 끼는 이변이 있다. 도사에 정창주가 정해졌다. 동지중추부사 나만갑이 세상을 떠났다.

☞; 鄭昌冑 정창주:  1606~? 본관 초계.《만사집》을 남겼다.

☞:  羅萬甲나만갑: (1592~1642) 본관 안정. 청나라와 강화 후 무고로 남해에 유배되었다가 1639년 풀려나 영주에서 죽었다. 병자호란의 참상을 후세에 남기고자 인조14년12월12일부터 다음 해 2월8일까지 57일간 겪은 사실들을 낱낱이 기록한 병자록(丙子錄)의 저자이다.



○初五夜地動雷電發胡差二愽氏之行以林慶業搜覓事各卛家丁十二名出來云○十九日夜大雪霧塞○尙州居尹起雲接訟于赤羅驅迫應訟可昇

5일 밤 지진이 일고 천둥 번개가 친다. 청나라사신 두 愽박씨 일행이 임경업을 수색하려 12명의 가솔을 거느리고 우리나라에 들어왔다 한다. 19일 밤에 큰 눈이 오고 안개가 끼다. 상주의 윤기운이 적나(군위)에서 소송을 당했다. 몰아세워 응송하면 이길 수 있다.



○胡差二愽氏留之京期於窮捕慶業厥家丁日日咨行於大臣家不如意則韇朴之其爲辱不資而索林不己申勑各道機察關津山谷使麌俠不時擲扞民間騷擾○二十八雨雷虹見夜作大風

청나라 사신으로 온 두 愽박씨가 임경업을 잡으려고 서울에 머무르는 동안 그똘마니들이 매일같이 대신들에게 방자하게 굴었다. 똘마니들이 마음대로 되지 않자 화살 통으로 때리며 욕을 보이는데 임경업을 잡는데 계속해서 수색하지 않고 각도의 나루터와 산과 계곡을 샅샅이 검문검색을 단단히 단속하지 않아서 임경업을 잡지 못했다하여 그렇게 욕보인 것이다. 사신들이 때지어 설치다가 갑자기 던지고 때리니 뭇 백성들이 떠들썩하게 들고 일어났다. 28일 비와 천등이 치고 무지개가 보였다가 밤에 큰 바람이 분다.

☞ : 12월 9일 박씨 등이 닭이 세 홰 째 울 때 황주를 떠났는데, 정명수가 길가에 꽂아놓은 횃불이 드물게 있다고 크게 노하여 도사 신응망을 잡아 갓을 벗기고 몰고 오다가 서흥에 이르러서야 풀어주었다.






癸未年 仁祖21年 1643년 明- 崇禎  淸- 崇德8年(당69세)


역사보기/  1월 14일  역관 정명수가 오는 길로 곧장 김상헌이 기거하고 있는 곳으로 가서 가는 노끈으로 김상헌의 두 팔을 묶어 방 안에 안치하고 그의 서책을 모조리 불태웠으며, 의복과 기물은 그의 종에게 돌려주었다. 

4월 2일     경기의 기민 1천 명을 구제하게 하다.

4월 5일     경상·전라의 어영군과 정초군에서 조발하여 심양으로 보내다. 

4월 27일    경상 병사 안몽윤 인견.

9월 1일     청나라의 칸이 죽어 염습에 쓸 물자를 요구하다.

10월 22일   금주의 군졸 가운데 굶주림과 질병으로 죽는 자가 속출하다. 

10월 25일   경상 감사 원두표가 사조하니 가산 산성의 방비에 힘쓰라고 하다. 

12월 3일    소현 세자와 빈궁이 12월 15일에 심양을 출발할 것이라고 치계하다.

세자가 제왕에게 이르기를 ‘빈궁이 수년 동안 타향에서 지내어 임금의 안부를 살피지 못한 지가 오래 되었고 요즘 부친의 상을 당하였는데도 달려가 곡하지 못하고 있으니, 인정이나 사리로 보아 뭐라고 형용할 수 없다.’하니, 제왕도 함께 돌아가라고 허락하였으나 반드시 원손·제손 및 인평 대군의 부인과 12월 20일까지 봉황성에서 서로 교환하자고 하였습니다.

12월 7일   원손과 제손이 심양으로 떠나다. 

◐正月初一日溫和初五日白雪 ○七日乃人日也 終夕陰盛日不出可嘆 

1월 1일 따뜻하다. 5일 눈이 오다. 7일 오늘이 오순절제의 하나인 초이렛날 과거(科擧)보는 날이다. 저녁까지 구름이 꽉 끼고 해가 보이질 않는다. 한숨이 나온다.

☞:  人日: 정월 초이레 인일(人日)이 오순절제의 날  人日製 (인일제) - 조선조 때 임금이 친히 제학들을 불러 과거 시험을 치른다. 인일제(人日製)이다.



○十五月出如乙丑年人言年豊之象云 

15일 달뜨는 모양이 18년 전 1625년(乙丑年)과 같다. 풍년이 들 모양이라고 한다.

☞: 양력 1643년 3월 5일 이날은 여느 때와는 달리 만월의 보름달이 해가 지기도 전에 다른 때 보다 조금 작게 보인다. 18년 전인 1625년(乙丑年)에도 같은 현상이 일어났다고 기록하고 있다. 1625년(乙丑年) 2월 21일 경에 같은 현상이 나타났었다.

이때 현상은 달과 지구의 거리가 가장 멀리 떨어졌을 때 나타난 현상이다. 지구와 달의 거리는 36만 3,300km에서 40만 5,500km 범위에서 변화한다.

달은 지구를 타원형으로 공전한다. 지구와 거리가 멀리 떨어져 있는 만큼 다른 때 보름달 보다 조금 작게 보인다. 

18년 10일을 주기로 나타나는 천문현상이다. 18년 10일의 시간은 사로스주기(saros cycle)를 의미한다.

사로스주기란 달은 황도와 백도의 한 교점에서 삭(朔)또는 망(望)이 된 후 6585일 후에 같은 위치에서 다시 삭 또는 망이 된다. "사로스 주기"는 6585일 = 18년과 10일 또는 11일이  된다.

선생은 18년 전 양력 1625년(乙丑年) 2월 21일 경에 같은 현상을 목격 했다는 사실을 가록에 남겼다. 선생은 아마츄어 천문학자 쯤으로 보인다. 천문에 관심이 없었다면 어찌 18년 전의 현상과 비교가 가능할 수 있었을까! 어째든 대단한 관찰력이다.



○十八大雪○通新使尹順之副使趙絅書狀官申濡二月二十日發京三月望乘舟事定奪云

18일 눈이 많이 왔다. 일본으로 갈 조선통신사를 윤순지로 부사를 조형으로통신사의 기록관을 신유로 하여 三使삼사가 2월20일 서울을 떠나 3월 보름날 뱃길에 오른다는 사안을 임금이 제가하였다한다.

☞:  통신사는 2월20일 출발하여 10월 29일 돌아왔다.

尹順之윤순지: 1591~1666]본관: 해평 병자호란 때 아버지가 평안도관찰사로서 적의 침입을 막지 못한 죄로 사사되자 은거. 1643년 통신사로 일본에 다녀왔다. 1657년 선조수정실록 편찬에 참여. 공조판서. 시와 글씨에 능함 문집: 행명집


○二十三日雪風大作終夜雨風翌明念四嚴寒倍於冬

23일 눈보라가 세차게 불더니 마침내 밤에는 비바람으로 변했다. 다음날 맑게 개였다. 24일 혹한이 예년의 배는 된다.



二月初五種米牟與西疇與南洞田○愽氏之房妓抄出城內市井處子以禮曺治裝錦衣將則各納三家丁則每各一人臨行皆駄去至義州上下皆脫取盛裝甚者至於裠脫去其女等赤身以手掩其夲不耐見云或狄之心甚於斯可見矣京城痛哭大失人心

5일 서쪽 밭과 남쪽 골짜기 밭에 봄보리 씨를 넣었다.

청나라 사신 愽박씨가 성안의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에서 기생을 차출해 가는데 처녀는 고관집의 짝이 되여 비단옷을 두르고 살 것이라 하며 3명의 가솔들이 각각 한 명씩 병차에 실어갔다. 의주에 이르러 비단 치마와 저고리를 모두 벗겨갔다. 횡포가 더욱 극심하여. 속옷까지 벗겨가니 여인들이 벗겨진 속살을 손으로 가리니 차마 그 꼴을 눈뜨고 볼 수가 없었다고 한다. 또 금수의 극심한 본성을 보여 주려함인가. 한양이 통곡하니 크게 민심을 잃었다.



◐三初吉朝見之夜雪滿乾坤此非常之變也○初信使之行自商山到縣三日向軍威上下元役甚衆支供之事一邑振動

3월 1일 초하루 아침 밤사이 눈이 내려 온천지가 하얗다. 전에 없던 기상 이변이다. 1일 통신사 일행이 상산(상주)에서 본 현에 당도하여 3일 군위로 향해 가는데 상하의 군졸들의 군역이 심하다. 일행을 받들어 모시는 일로 읍내 전체가 시끌벅적하다.

☞: 조선통신사: 규모는 수행인원 462명 총책임자인 3사(三使) 외에 제술관, 통역, 화가, 악공, 무용수, 마상곡예사 등을 망라한 300~500 명 규모였다.



○淸陰移囚北關獄云可嘆○旱氣至此處處乾何種○呂泉倅兪撤弃官歸兪也愛民淸白第一吏民咸戴之與上信使尹前有水火之势到郡以埋沒接對言於方伯兪也聞奇卽馳去行裝但衣衾袱而己郡人失望云         

청나라에 잡혀간 김상헌을 사형수를 가두는 심양의 북관 옥으로 옮겼다한다. 한탄스럽다. 가뭄이 심해 곳곳이 마른다. 씨앗은 어떻게 뿌릴까? 여천(예천)고을 수령 유철이 관직을 버리고 돌아갔다. 유철은 백성을 사랑하고 결백하여 제일의 청백리로 백성모두가 받들었다. 위의 통신사 윤순지와 같이 전에 급히 처리할 일이 있어 군현에 왔는데 방백이 접대하는 말이 매몰찬지라 유철이 기이하게 듣고 급히 돌아가는데 그 행장이 단벌옷과 이불 보따리뿐이었다. 군현사람들이 실망했다한다.

☞:    兪㯙: 1606∼1671 본관: 기계. 대사헌·



○十七日夜洒雨浥塵而己○旱旣甚矣兩夜晝蹲蓬頭鬼面飢民四散道路弃其子者不知其數大丘地全氏士子見一女投其子於江中全也㥯極之告于方伯其母逃之伯以遺弃救活立案成給于全也全不受云不忍見故收之耳聞者無異於癸甲矣         

17일 밤에 먼지를 적실만큼의 비가 왔다. 가뭄이 이미 심하게 들었다. 이틀간 밤 낯으로 마구 헝클어진 머리로 귀신얼굴을 한 굶은 사람이 사방을 배회하고 다닌다. 도로에는 자식을 버린 자가 부지기수이다. 대구의 선비 전씨라는 양반이 강물에 자식을 던지는 한 여자를 발견하였다. 전씨가 극구 말리고 방백에게 고하였는데 그 어미가 달아났다. 방백이 내버리고 돌아보지 않는 아이를 구활할 방도를 찾고자 비용을 마련해 전씨에게 부탁하니 전씨가 받지 않았다 한다. 차마 두고 볼 수 없어 방백이 거뒀다한다. 이 말을 들은 사람들은 내년에도 또 다를 바 없다고 한다.



○淸使三行出來上幣則九升木四十尺一匹直常木六匹中幣則六七升分定各官吾責應上四十二匹中七十三十匹民間罔知攸措非但此支待雜物尤多○三月二十六日安定張座首別世同月二十八日金銀守亦逝○二十八日南君汝舟兄避病來於我信宿連枕論惟曰與正郞兄氏同訪南太別于南水岩正郞兄口占一句曰      

청나라 사신이 세 번째 나오는데 올리는 폐물이 9승 목면 40척이다. 1필당 상목 6필이고 중폐는 6.7승으로 각 관아에 나눠서 배분했다. 우리 읍에서 마련해야할 량은 최고품의 목면 42필 중품 30필이다. 백성들은 어찌 할 바를 모른다. 비록 이 물품을 갔다 바친다 해도 또 내야할 잡물은 더욱 많다.

3월 26일 안정(경북 의성 비안)의 장좌수(향청의 우두머리)가 별세했다. 28일 김은수 또한 세상을 버렸다. 28일 친구 남녀주가 전염병을 피해서 우리 집에 왔다. 이틀 밤을 자면서 계속해서 잠자리에 들어서 지난날 이야기를 하는데 정랑 형님과 남수암에 가서 남태별을 방문 했는데 정랑 형님이 즉석에서 한 구절을 시를 읊었다는 것인데

我騎君步十里坪         그대는 걷고 나는 말을 타고 십리길 편히 와서.

來訪南君眼却靑          남군을 찾아보니 눈빛 반가워

曾把小舠橫晩渡거듭잡은 잔 술잔위로 언뜻 황혼이 밀려와

炯凝寒水暮鍾聲          노을빛 엉킨 찬 물결위로 저문 종소리 퍼지네.

之詩傳誦之聞來不勝惻然之至念九散步遊於龍潭邊回飮柭酒大醉還同宿 

이시를 전해 듣는 동안 측은한 생각을 버릴 수가 없다. 29일에 용담 주변을 산책하며 소요하다가 술을 많이 마셔 크게 취하여 돌아와 함께 잦다.

☞:  정랑형님: 용담 선생의 맏형.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순국한 金喜김희:1565 -1592

南太別남태별:1568∼1635 본관: 영양. 임진왜란 때 의병장 곽재우의 의진에서 활동 장사랑을 제수 받음. 경서에 뛰어남  晴川實紀 권1-2 있음. 당시 안동(일직) 거주.

의병활동을 했던 金喜김희와 남태별은 서로 절친한 사이였나 보다.

정랑 형님은 1592에 사망 했고 남태별은 1635년에 사망했음.



○淸國頒赦還送五臣                                       

청나라에서 경사가 있는 날에 다섯 신하를 사면하여 되돌려 보냈다.

☞:   척화오신(斥和五臣): 신익성(申翊聖)·신익전(申翊全)·허계(許啓)·이명한(李明漢)·이경여(李敬輿) 이계(李烓)가 청나라를 반대하는 주동자라고 하였기 때문에  1642년12월에 심양으로 잡혀갔었다.


○四月至旬不雨兩麥枯槙川澤凅渴大命近之○旬朝來家北盤石回口占一句曰

4월 10일에 이르도록 비가오지 않아 보리와 밀이 마르고 전천의 물이 빠져 바닥났다. 하늘의 큰 재앙이 가까이 왔음이다. 10일 아침에 집에 왔다. 북쪽 반석에 둘러앉아 시를 읊다.



先君曾愛石來          어르신이 아끼던 바위에 와서

坐今朝淚滿䄞 무릎 꿇고 이아침 눈물로 제상을 차리려네.



○十三地動振天地屋壁搖振人皆驚惶○今淸使請曰第一凢事除獘所求者扇子百而己道民祝手與帶金累同稱淸儉夷虜之邦亦有人矣                 

13일 지진이 하늘과 땅을 울렸다. 가옥의 벽이 요동하니 사람들이 놀라 두려워서 허둥댄다.

이번에 나온 청나라 사신이 말하기를 우선 일상의 폐단을 제거하고 부탁한 것이 겨우 부채 100개뿐이다. 도민들이 반겨 축하하면서 청나라 사신“대금루”라는 자는 오랑캐 중에서도 청렴결백한 사람이다. 역시 오랑캐 마을에도 사람다운 사람이 있구나 하였다.



○永川李晶李汝海不意拿去大㮣傷時之嘆作詩譏議使其孽族呈于淸使之致終乃以寃枉見得襏刑費之木多至五同云

영천의 이정. 이여해가 갑자기 잡혀가 큰 몽둥이로 맞아 다쳤을 때 한탄하여 지은 시를 비꼬아 평하여 인용해서 천박한 족속이라는 말이 청나라 사신에게 고하여지자 결국에는 억울한 누명을 쓰고 매를 맞느라 헌옷만 만든 꼴을 당하였으니 곤장이 다섯 다발이나 들었다한다.

☞: 推案及鞫案추안급국안 기록에 1643년. :이정해‚ 이여해 이정등의 죄인들을 공초한 기록이 있음

체제에 대항한 자들에 대한 중죄인의 추국을 거쳐 국왕의 판결을 기록 한 책



○其雨之望己極末由生生人皆咨嗟嗷嗷之聲不絶於道路○四月十七洒細細雨如是者連四日得雨僅一犂而如在洪炉之餘人民大悅其甦○四月念一藨麥念二始播井畓稻自念三至念六連雨江漲兩麥盡淹沈七日快晴無高低水溢                     

비를 기다리기조차도 극에 달해 살아갈 길이 없다. 산사람 모두가 애타게 탄식하는 떠들썩한 소리가 길가에 끊이질 않는다.4월 17일 가는 비가 오더니 4일간 계속된 비로 단 한번 밭갈이 했는데도 천지조화의 여유로움이 있는 듯 모두 기뻐하며 이제 살았다고 한다.

4월 21일 쥐눈콩과 보리 22일 볍씨를 담그고 물을 대여 못자리를 시작했다. 23일까지부터 26일까지 연이은 비로 강물이 불어나서 밀과 보리는 모두 물속에 장을 담갔다. 7일 쾌청해졌다. 물이 넘쳐 높고 낮은 곳이 없다.



◐五月初一日爲始雨雨初三往柒谷偶所稱病不出見慟憤憤往李僉知元己家大醉飽而還午後雨始仍

大霖江水大漲

5월 1일 시작한 비가 3일 까지 내렸다. 칠곡에 둘째 아내가 있는 곳에 가니 아프다고 내다보지도 않아 화가 났다. 화김에 첨지 이원기 집에서 술을 많이 마셔 크게 취해 돌아왔다. 오후에 비가 시작되더니 장마 비로 강이 넘친다.



○金淸陰崔鳴吉蒙赦姑留世子館近處又林慶業族屬而林慶業妻及婢二口則不赦仍囚義州留置朴潢申得淵曺漢英蔡恒幷放送龍將以金崔兩臣蒙赦今西向謝恩再拜崔卽行禮金稱痛不爲之龍將强勸而不爲之臥龍將久睌視而去此四月三日成貼狀啓也           

청음 김상현 최명길이 특별히 사면되어 우선 세자관(의주)가까이에 머물렀다. 또 임경업의 식솔 중 경업의 처와 노비 둘은 사면되지 않아 의주의 감옥으로 보냈다. 박황(朴潢)·신득연(申得淵)·조한영(曺漢英)·채이항(蔡以恒) 등을 내보냈다. 용골대가 김상현 최명길 특별히 사면하는 즉 서쪽을 향해 사은의 절을 하라하니 최명길은 즉시 예를 올렸다. 김상현은 아프다는 핑계로 절을 하지 않았다. 용골대가 강력히 지시하는데도 절하지 않고 드러누워 버리니 청나라 용장이 한참을 껄끄럽게 노려보다가 갔다. 이때가 4월 3일이다. 민정을 살핀 결과를 작성하여 임금께 올렸다.

☞: 崔鳴吉최명길: 1586~1647 본관: 전주. 인조반정에 참여한 반정공신이다. 이괄의 난과 정묘호란의 극복 병자호란 때 강화를 주관. 임경업을 통해 승려 독보를 명나라에 보내 비공식적 외교관계를 유지한 일이 발각되어 청나라에 끌려갔다. 문집: 지천집.

朴潢박황:     1597~1648 본관: 반남. 볼모로 가는 소현세자를 수행했고 심기원의 역모사건에 연루되었다 풀려났다. 글씨에 능함.

申得淵신득연: 1585~1647 본관: 고령. 경상좌도양전사를 역임한 뒤 세자시강원빈객으로 청나라에 파견되었다. 1643년 그의 생질 이거가 명나라와 밀무역한 것을 알고서 고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제주도에 유배되었다가 1647년 진도로 이배되었다.

曺漢英조한영  1608~1670 본관: 창녕. 청나라가 왕손을 볼모로 보낼 것을 요구하자 이를 반대하다 청나라에 끌려가다. 저서에 회곡집이 있고 해동가요에 시조 두 수가 전한다.

蔡以恒채이항  1596-1666 본관: 인천.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동지들과 의병을 모아 경상우병사 민영과 감사 심연등을 도왔으나 화의가 성립되자 향리로 돌아가 복수책을 상소하였다.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霖雨之雜兩麥難收或蒔或播種望後連注大雨十七江漲用楫苦旱之餘又苦霖所穫之麥家無擔石農人饑因不能役事可嘆念一川漲難通暴雨峽間田畓沒數水破難辨田形非徔今年失稔永弃耕作吁亦慘矣和氣由人也而近崴人事慘酷者日積何以致陰陽之和也              장마로 어수선하다. 밀과 보리는 수확하기 어렵다. 모내고 씨 뿌린 후 수확을 기다리는데 연이어 큰비에 내린다. 17일 강물이 불어나서 배 젓는 일을 해야 한다. 힘든 가뭄에 여유를 찾는 듯하다가 또다시 장마로 인해 거둬야할 보리는 집집이 빈 항아리뿐이다. 농민은 기근으로 말미암아 노역 일도 할 수 없다. 탄식이 나온다.

21일 하천이 범람해 통행이 두절되고 폭우로 골짜기 사이 논과 밭이 여러 차례 수몰되어 밭의 본래 형태를 구분할 수 없을 만큼 파괴되어 어찌할 수가 없다. 올 농사는 이미 망쳤으니 경작을 포기하고 탄식뿐이니 참혹하다. 조화의 기운은 인간사로 비롯되는 것이나 근래 세상사 참혹함이 날이 갈수록 더해만 가니 어찌 음양의 조화가 이러하단 말인가?



○陜川所根十三地震公私家舍墻壁居半頽落官門外大路十餘把坼裂西北里人多壓死云念四乃吾人知之也坐北栗亭大醉負還薄暮孝述亦盛饌而來達夜痛飮   13일 협천(합천)에서 발원한 지진에 관아와 집의 담벼락이 거반 무너지고 관문이 떨어져 나가고 큰 길 10여 곳이 갈라졌다. 서북리에서는 많은 사람이 깔려죽었다. 24일 오늘이 내 생일이다.북율정에 앉아서 술을 마시다가 대취하여 업혀 왔다. 어둑어둑해질 때 효술이 풍성하게 잘 차린 음식을 가지고와 밤새 흠뻑 마셨다.



○念五與孝述與子孫輩往鵾變家大醉而來近日連患醒病庚炎甚酷閟閟六月初一日耕西疇種亦豆人皆曰節晩  

25일 효술과 그 아이들과 곤섭의 집에 갔다. 술을 많이 마시고 돌아왔다. 요즘 연이은 술병에 무더위까지 혹심하니 답답하다. 6월 1일 서쪽 밭을 갈고 팥 씨를 넣었다. 사람들 모두 절기가 늦다고 한다.



○金奴暴死可惜初二甚熱○田三稅一時囚次知督發待秋備給則本米一石三十三匹收米三十匹太二十八匹卽今備給則本米一石二十匹太一石十七八匹責出民間踈動或賣田宅或賣牛馬罔知攸措余七十年來田稅之艱備未有甚於此時也 

노비 김씨가 참혹하게 죽었다. 애석하다. 2일 무척 덥다. 세 번 내는 농지세를 한 번에 다 내라한다. 집안일을 맡아보는 사람을 가둬놓고 얼리고 독촉하는데 가을에 세를 내면 원래는 쌀 한 가마니 당 3말3되를 징수하고 쌀 3말에 콩은 2말 8되를 친다고 한다. 지금 당장 받치면 쌀 한가마니에 두 말, 콩 한 가마니에 17,8되만 징수한다고 한다. 책임지고 내놓으라 하니 백성들 사이에서는 뜸을 들이다가 아예 집과 밭을 팔거나 소와 말을 팔아치우며 어찌할 바를 모른다. 내 70평생 살며 준비도 없이 농지세를 미리 내라하니 난감하다. 준비도 못했는데 오늘날에  너무 심한 시국이다.



○九日長霾之餘處作炎旱沓無水田龜圻未得立苖民有飢餓色市直日縮一匹皮牟四五斗米牟則三斗稻則四斗直麥則四斗乞糧不絶道路咨嘆

9일 오래 동안 흙비가 내린 나머지 여러 곳의 작물이 찌는 가뭄에 타들어가고 무논에는 물이 마르고 밭은 거북등처럼 갈라지니 씨를 세우지도 못한 농민들은 기아에 부황이 나고 시장은 위축되어 면포 한 필 값이 겉보리 4,5말 쌀보리는 3말 값이다. 벼 4말에 보리 4말 값과 같다. 빌어먹을 곡식조차도 없으니 길가에는 한탄뿐이다.



○自初旬至三日雨水浹水洽農夫大悅錐然稻蹲田穀盡枯木麥種甚貴處處皆陳前頭計活可慮

달초부터 10일에 이르러 3일간의 비로 흡족한 비가 내려 농민들이 기뻐한다. 뾰족하게 벼는 쭈그러들고 밭곡식은 모두 고사하여 메밀은 더욱 심하니 이곳저곳 할 것 없이 모두 진을 치고 머리를 맞대고 살아갈 계책을 논의 해보지만 걱정스럽다.



○十七太守與軍威義興新舊柒谷申注書會集于李連機薹岩樂忌避者再宿于時申使倅間于児輩六月東海壁魚滿發云 

17일 태수와 군위, 의흥의 신구 수령, 칠곡의 신주서가 모여서 이연기의 대암에서 즐기는 것을 피한 것인데 이틀간 모였을 때 신주서가 고을 수령을 시켜 아이들에게 문안을 했다. 6월에 동해에 고등어가 많이 잡힌단다.



◐七月初一日爲始或雨晴根田陳荒牛馬價歇極大牛無過七八匹亦如之非徑牛馬繁息木花最貴之故也村閻間疾病大熾或死熱病或死於痔疾死於飢餓死亡尤多. 

7월1 일을 시작으로 비가 오다 개다한다. 딱딱해진 묵밭은 거칠어지고 소와 말의 값은 형편없이 떨어져서 큰 소는 7,8마리에 불과하니 이 역시 우마를 번식시키는 데는 올바른 일이 아니다. 목화가 가장 귀하니 가뭄 탓이다. 시골 주변마을 사이에 질병이 창궐하여 혹은 죽고 열병에 죽고 치질로 죽는데 굶어 죽는 사람이 가장 많다.



○七月十七日宗漢生生鋔七日運身於房內八月十五日夜淸無霧此日無霧則明夏麥吉之非也與松吝金座首掃墳于黃川同日方伯到縣留一日向義城  

7월 17일 손자 종한이 태어났다. 배안에서 7일간을 돌기만하여 잡아 당겨서 출산했다. 8월 15일 대보름날 밤 안무도 없이 맑다. 보름날에 안무가 없이 맑은 것은 내년 여름보리에 좋지 않다. 송린과 같이 황천의 김좌수 산소를 벌초했다. 이날 방백이 현에 당도하여 하루를 머물다 의성으로 갔다.

☞:  宗漢종한: 둘째형님 吉길에게 양자로 간 鑛광의 막내아들



◐九月初二日耕秋牟西田初五霜降初八雨洒耕牟者病焉初五日未時義娘生○九月初汗計音來七目賦于中國中流失而死秘不發喪今始發喪其爲術也深矣火葬所入帋地求索于我國七萬餘束本道分定敦厚壯帋萬餘卷送田結督責尤可慟憤

9월초 2일 서쪽 밭에 가을보리를 갈았다. 5일 상강이다. 8일 비가 오는데 갈아놓은 보리에는 해롭다. 5일 오후 두시 의랑이 태어났다.

청나라의 汗칸이 죽었다는 소식이 왔다. 청나라에 초상에 쓸 7가지 부의 품을 보냈는데 도중에 잃어버렸다고 하는데 汗칸이 죽었다는 것을 비밀리 하여 상을 치루지 않다가 이제야 상을 치르는 것은 심한 술책이다.

화장하는데 들어가는 종이를 구하는데 우리나라에 7만여 속을 요구한다. 우리 경상도에 나눠 맡은 것이 두꺼운 고려견지(高麗繭紙) 만여 권이나 되니. 논밭의 조세를 독촉하는데 매우 심하다. 통분할 일이다.



○九月修籌左右兵營城左道各邑編伍軍裏二十日粮咸聚役之死傷亦多愁痒喧騰○進士許琇京居人也前於胡亂時避來于此興兒曺相知之分得筆墨欲表情未果而逝厥內室使奴付送曰家風願不可孤負婦女局量有如此豁達也    

9월 진영을 정비하여 좌우 병영과 성, 좌도, 각읍의 편오군의 편제를 점호했다. 20일 식량을 줄여보려고 취역에 나갔다가 죽은 사람이 많고 다친 사람 또한 많다. 시름에 겨운 불만의 소리가 자자하다.

진사 허수경은 서울 사람인데 전에 병자호란 때 이곳으로 피난을 왔었다. 어린아이들이 서로 짝이 되서 예뻐하여 알고 지내는데 먹과 벼루를 나누워 주니 고마운 마음을 전하려 공부가 끝마치기도 전에 안방으로 달려가니 여종을 딸려 보냈는데 아이가 말하길 “가풍이 있는데 기대에 어긋나는 짓은 않을 것이다.”라고 한다. 여자아이의 도량이 저와 같으니 탁 트였구나! 



◐十月初九方伯之行自仁同過門前路到縣留三日跖雪紛紛義興諸山杜鵑花滿發云此何非卽○初七日西崖移葬時瀤孫與張而晩往會葬而來○二十七日圃隱退溪西崖三先生奉安于龍宮三江書院時鏡與瀤進參會員百餘云    

10월 9일 방백이 행차하였다. 안동에서부터 집문 앞길을 지나 현에 도착했다. 3일을 머무는 동안에 밟은 눈이 겹겹이 쌓이고 떠들썩하고 뒤숭숭하다. 의흥의 모든 산에 진달래꽃이 만발 했다고 하니 절기의 출근시간이 한참 잘 못 됐다. 7일 서애 유성룡의 묘(안동시 풍산읍 중동)를 이장할 때 손자 회와 장과 함께 늦게 참석하고 돌아왔다. 27일 포은, 퇴계. 서애. 세 분을 용궁의 삼강서원에 봉안할 때 아들 경과 손자 회와 같이 참석했는데 100여인이 모였다.

☞: 三江書院: 경상북도 예천군 풍양면 삼강리 

서애 유성룡 柳成龍, 1542~1607 본관: 풍산. 경북 의성 출생.  임진왜란 때 도체찰사(로 군무를 일괄, 이순신, 권율 등 명장을 등용. 화기 제조, 성곽 수축 등 군비 확충에 노력. 군대양성을 역설. 저서: 서애집. 징비록.

포은 정몽주鄭夢周, 1337~1392 본관: 연일. 고려 말기 문신 겸 학자. 의창을 세워 빈민을 구제하고 유학을 보급하였으며, 성리학에 밝았다. 1392년 이성계 일파를 제거하려 했으나 실패, 선죽교에서 방원의 부하 조영규 등에게 격살되었다. 문집: 포은집

퇴계 이황 李滉, 1501~1570 본관: 진성. 출생지  경북 예안 영남학파. 이이의 제자들로 이루어진 기호학파와 대립, 동서 당쟁과도 관련 일본 유학계에 큰 영향을 끼쳤다. 도산서원을 설립 후진양성과 학문연구에 힘씀 저서: 퇴계전서. 도산십이곡. 퇴계필적.



◐十一月初二新使元斗杓到界達夜大霧處處染病大膱死亡相繙一家或盡死不得出戶者焉 

11월 2일 심임 도사 원두표가 부임해왔다. 밤에 안개가 자욱하다. 곳곳에서 장티푸스가 크게 번져 많은 사람이 죽는다. 서로 옮겨가서 혹은 한 가족이 모두 죽었다. 할 수없이 밖에는 나가지도 못하고 있다.

☞:  元斗杓원두표:1593~1664 :본관 원주. 1642년 형조참판에 이어 경상도관찰사 등을 역임하였다. 이 기간에 서인(西人)의 공서(功西)에 소속, 청서(淸西)를 탄압하면서 같은 파 김자점과의 권력 다툼으로 분당되자, 원당(原黨)의 영수가 됨 효종의 북벌정책을 지지하여 군비를 증강하는데 앞장섰고 김육이 주장한 대동법에는 반대하였다. 1656년 우의정을 거쳐 1662년 현종 3년 좌의정에 올라 군기시의 도제조를 겸직하였다.



十一月初二信使之行還泊釜山本縣出待長川站初八發向○初七午後白雪大作初八止明雪後風尖行路病焉九日虹見十二日冬至也

11월 2일 일본에 갔던 통신사가 부산에 돌아왔다. 우리 현에서 나아가 맟을 준비를 하고 있는데 장천(경북 상주 낙동)역참에서 8일 날 떠난다고 한다. 7일 오후 눈이 많이 왔다. 8일 날 그치고 맑은데 눈이 온 후의 바람이 매서워 길을 걷기가 힘들 정도다. 9일 무지개가 떴다. 12일이 동지 날이다.(양력 1643년 12월 22일 동지 날)



初十日曾祖考妣神主奉安于吾家庙時日溫如春十一日大霧四塞午後捲㰸日氣溫和不啻三春陰陽

失庳錐非細慮當此綿花絶無之日百結蒼生祝手相賀曰皇天知我亦身俾無凍死

10일 증조와 양친의 신주를 우리집안의 사당에 모셨다. 이때 날씨가 온화해 봄날 갖다. 11일 큰 눈이 오고 사방이 안개가 자욱하다가 오후에 걷혔다. 일기가 따뜻할 뿐만 아니라 춘삼월 봄날 갖다. 음양의 절기가 바늘 끝만큼 잘 못 되도 작은 염려가 아니다. 당연히 이런 해에는 목화 꽃이 피지 못할 것이다. 

이런 날에는 겨우 몇 이랑의 땅을 일궈 살아가는 여린 백성들은 손을 들어 빌며 서로 말하길 하늘이 우리 뜻 헤아려 얼어 죽지 않게 하네! 라고 한다.



○十八日運架山還上三百石一石運價一石適値寒沍雪風薄依生民涕泣於步步此城乃李溟雄設立也人皆欸啖其內寢其皮曰爲穽國中使民芳因至於此極邱皇天皇天尙䆿無吪

18일 가산산성으로 백성에게 꾸어준 곡식을 거둬들이는데 300석이다. 한가마니 실어 올리는 운임이 역시 한 가마에 달하니 때마침 얼어붙는 눈보라에 얇은 옷을 입은 백성들 눈물을 흘리며 울면서 걷고 또 걷는다. 이산성은 이명웅이 수축한 산성이다. 모두가 성난 소리로 “그 살을 씹어 먹고 그 가죽을 깔고 잘 것이다”한다. 구덩이에나 쳐 넣어야 할 나라의 관료들이 백성을 부려먹기 이 지경까지 이르렀으니 여기가 마지막 가는 구덩이 황천이다. 하늘은 아직도 잠을 자는가? 아무런 대답이 없네!     



○新方伯元請除降各邑價布貢物皆以正五升三十五尺雜項木則廘木三十尺定規捧之今一下萬姓祝手相慶曰仁哉吳相不面今日見此周召之政也吏輩則多有不快之色何前則七八升四十四五尺捧之私自換納其規己成矣今則不肆利㱃之心故也

새로 부임한 방백 원두표가 각 읍의 면포 값을 깎아내리기를 청하였다. 나라에 받치는 면포는 모두 닷새베[正五升布]로 35척이다. 여러 종목의 면포를 록목30척으로 규정을 지키도록 한 것인데 이제 한가지로 정해지니. 백성들이 손뼉을 치며 좋아하며 말하길, 어진 분이시다. 한 번도 본 적은 없지만 오늘에서야 주나라의 주공과 소공의 정치를 보는 듯하다. 정치하는 벼슬아치들이 많으면 꼴사납다. 어째서 전에는 七八升의 베를 45척으로 받쳤는가하면 빌려준 면포를 환납 받을 때 사사로이 그렇게 (이자)규정으로 굳어져 버린 것인데. 지금은 검은 욕심을 부리지 못하게 했기 때문이다.

☞: 주공:  주왕조를 세운 문왕의 아들이며 무왕의 동생. 무왕이 죽은 뒤 나이 어린 성왕이 제위에 오르자 섭정(攝政)이 되어 주왕실의 수비를 공고히 하였다. 예악과 법도를 제정하여 주왕실 특유의 제도문물을 창시하였다. 그는 중국 고대의 정치.사상.문화 등 다방면에 공헌하여 유교학자에 의해 성인으로 존숭되고 있다. 저서에 주례(周禮)가 있다.

소공:   문왕의 아들. 무왕(武王)의 아우. 주공을 도와 주나라의 기초를 만들고 산동 반도의 이족을 정벌하여 동방 경로의 사업을 이룩했음



○二十純鄕祖母捐世李別監遭喪○二十一日郞來二十三還歸○念五夜閑分出去○念九黃昏雪積數寸晦日卽消○兵使過縣向呂泉                       

20일 순향의 조모가 별세했다. 이 별감 집에 그 아버지 상을 당했다. 21일 일랑이 왔다가 23일 돌아갔다. 25일 밤에 심심하여 볼일을 보러갔다. 29일 어둑어둑할 무렵 눈이 수촌이 쌓였다. 그믐날 그쳤다. 병마절도사가 우리 현을 지나 여천으로 갔다.



◐十二月三日姜翊周黜鄕云可羙鄕議也○亂䧴餘命唯兄第獨生同一世居同一邑同心同志出入鄕曲念曾回事歷路趋謁顧我淸眼穩叞積襞告別握手含情未洽那知此別乃是永訣執紼今朝五內焚裂來奠薄具庶幾歆格右張座首仲兄氏之喪適有薪憂有志未就尤增痛嘆○初六夜夢蛇龍長數十尺直立騰空自艮方始徐徐向南行於此洞其頭如大鶴而白如雪奇恠難形又交夢之瀤孫登科榮墳倡夫之聲喧騰觀者甚衆此亦寄夢

12월 3일 강익주를 동내에서 쫓아냈다 한다. 마을의 미풍양속을 위해 할만하다.

(장좌수의 둘째 형의 상을 당하여)남은여생 헤아리기란 어렵다. 오직 형제가 외롭게 살아가데 같은 시대에 같은 마을에서 한마음 한 뜻으로 구석진 시골마을을 드나들었다. 생각건대 일찍이 몇 번이던가 지나는 길에 달려가 뵈었고 지난날을 생각하니 나를 반기는 온화한 눈가에는 주름이 쌓이고 이별할 땐 못다 한 정에 손을 꼭 잡았었는데, 어찌 이별을 예견한 걸까?  이것이 영영 인연의 끈을 다한 이별인 것을! 지독히 혼란스런 오늘 아침 오장이 타들어 터질듯 밀려든다. 변변치 못한 예물을 올리오니 부디 강림하여 이를 흠향하소서! 이는 장좌수의 둘째 형이다. 상을 당하고 보니 결국 오랜 병으로 품은 뜻을 펼치지 못하였으니 더더욱 통탄스럽다.

6일 밤 꿈에 수십 척의 길이가 되는 사룡이 곧바로 서서 하늘을 오르다가. 동북쪽에서부터 남쪽으로 서서히 골짜기 있는 쪽으로 가는데 그 머리는 큰 학 같고 흰색이 백설 같다. 기이하고 요상한 모양이다. 꿈이 바뀌어 손자 회가 급제하여 선조의 산소에 고하고 절을 올리는데 창부가 노래를 부르는 소리가 들리고 구경꾼들이 엄청나게 많다. 이 또한 이상한 꿈이다.



○邑中上下而還上不納或刑訊或拘留薄衣蒼生甚可憐也民窮財盡賦役煩重十室九空可嘆也哉○初八終夕陰曀○林將軍以都督梟示鄭明時云實然則人心快哉○汗出還東殿云未知虛實也    

마을에서 잘살고 못 살고 간에 관아에서 빌려온 곡식을 갚지 못해 혹은 죄를 심문 받고 혹은 감옥에 넣었는데 엷은 옷 입은 백성들이 무척이나 가련하다. 백성들 재산은 궁핍한데 모두 여러 번의 과중한 부역으로 열 집중 아홉 집은 비어있으니 실로 탄성이 나오는 것이다. 8일 저녁 때 까지 구름이 끼고 음산하다.

임경업 장군이 도독이 되어 정명시의 목을 쳤다고 한다. 사실이라면 사람들이 진심으로 쾌자를 부를 것이다.세자가 청나라에서 돌아왔다는데 사실인지 알 수 없다.

☞:  사실과 다르다. 정명수는 10년 후인 1653년 심양에서 성주포수 이사용에게 살해당한다.

☞:  12월 3일 소현 세자와 빈궁이 12월 15일에 심양을 출발할 것이라고 치계하다.



○念二胃男得差鄕任見无妄大患慟憤憤此亦點下之所訴也○念三方伯聞計奔喪南民無祿振脘長嘆

20일 위남이 좀 이상한 아이를 보았다. 직접 가서 보니 황당한 재앙에 통분이 인다. 분통이 나는 것은 얼굴 아래에 생긴 점을 탓하는 것이다. 23일 방백이 부친의 부음을 듣고 달려갔는데 남 쪽 사람들이 수의도 없이 염습도 않았다 한다. 긴 탄식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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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에 자주 등장하는  스타

매국노의 표상  정명수

또 한 명의 매국노가 그의 뒤를 따른다. 김돌쇠, 김돌시, 김돌이

 

 

己卯年 仁祖17年  明- 崇禎12년  淸- 崇德四年 1639년(당65세)

○六月胡使自稱中殿冊封而出來到孔詔院宣言中殿親出(    )驕慢使崔鳴吉齊銀千兩往說鄭明時金石伊等得免中殿之親出 鄭明時金石伊乃我國人而投附胡賊作獘一梗者之胡(    )

육월 청나라 사신이 중전책봉을 위하여 나왔다는 구실로 홍제원에서 중전이 친히 나와 받으라며(    )교만스러우니,

 최명길이 은 천 냥을 주고 그들을 설득해서 면했다. 

정명수. 김돌시는 우리나라 사람으로 오랑캐에 빌붙어 작당질을 하는 한 무리들이다. 오랑캐(    )

 ☞ :     鄭明時는 = 鄭命壽이고    金石伊는 = 金乭屎 =金突  / 김돌시, 김돌이다.

 

鄭命壽 金乭屎는 1618(광해군 10)년 청나라의 건주위 정벌 때 도원수 강홍립(姜弘立)을 따라 갔다가 포로가 된 정명수(鄭命壽)·김돌(金突) 등이우리나라 사정을 청나라에 알려줌으로써 청나라 황제의 신임을 얻고 양국간에 통역을 담당하면서 임금을 모독하고 조신을 업신여기는 한편, 관직이나 뇌물을 요구하고 조정 관료의 수염을 횃불로 지지는 등 갖은 행패를 부렸다.

 

庚辰年 仁祖18年 1640, 明- 崇禎13년  淸- 崇德5年(당66세)

○金石伊夲國官奴爵賊作奱淸使之行亦來作禮常與主上較倚而堅淸使久留國傷渴沈說夜趋鄭明時金石伊宿處各給銀子萬兩翌朝勸使發遝到義州金也責房妓色醜牧伯林慶業託以絶無美色則金遽怒曰雖入汝之室入不可廢也林大怒曳下庭使人告淸使曰我亦有淸國之職此漢辱我不可不治使曰笞於四十度杖以不祿木杖之如數卽死曳出之人皆快之

김돌시는 본시 관노비로써 벼슬을 도적질하여 바꾸고 청나라 사신을 따라 나와서 매번 사신을 접대하는 예법을 만드니 주상께서 보시기에도 그 폐단이 지나치다.

청나라 사신이 오래 머물고 있어 나라의 재정이 몹시 고갈 된지 오래되었다는 말씀에 밤으로 정명와 김돌시의 숙소로 달려가 각각 은자 만 냥을 주고 다음날 아침에 떠나가기를 권하였다.

의주로 돌아간 김돌시가 기생이 못생겼다고 책망하며 의주 목사 임경업에게 절세미인을 부탁하였는데 예쁜 곳이란 없는지라

김돌시가 갑자기 화를 내며 말하길 “너 같아도 그 방엔 못 들어갈 것이다.

당장 바꿔주라”하니

임경업이 열을 받아 김돌시를 뜰아래로 끌어내고 청나라 사신에게 항의하니

청나라 사신이 말하길 “나는 청나라의 사람이요 이놈 또한 청나라 벼슬을 하고 있으니 청나라를 욕되게 한 것이다.

그냥 둘 수 없다.

몽둥이로 40 대를 쳐라!.”사정 봐줄 것 없이 몽둥이를 내려치니 몇 대 맞자 쭉 뻗었다.

시체를 밖으로 끌어내니 모두가 쾌자를 불렀다.

 

 ☞  왕조실록에도 없는 매국노 김돌쇠의 사망기록이다.

 

                                     金啓 龍潭錄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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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역(墓域)에서 깊어진 세의(世誼)

 

 

 

안계면 소재지의 5거리에서 단밀행 지방도로를 따라서 나가면 곧바로 율리리(栗里里)고개가 도로를 끼고 오른쪽으로 나선다. 동쪽으로는 인가가 밀집하여 들어오고 건너편에는 지호지간에 안계여자 중고등 학교의 위용이 웅장하다.

옛날에는 한적하기 이를 데 없는 묘역이었으나 지금은 차량의 소음이 크고 안계면 소재지가 번창하여 오니 묘소의 관리도 어려우며 번잡한 공해를 벗어나기도 어렵게 되었다. 5정보 가량의 얼마 되지 않는 양지바른 묘역에는 오랜 세월에 세 문중의 세의가 굳어지는 장소가 되어왔으니 그 사연은 이러하다

 

 


고려 말의 충신으로 이름난 백암 김 제(白巖 金 濟)의 후손이요, 기자전 참봉(箕子殿 參奉)을 지낸 김세정(金世貞)이 이 묘역의 서쪽에 맨 먼저 입산하게 되었다.

그 시기는 그의 생졸년을 기록한 문적이 전하지 않으니 확실히 알 길 없으나 연산조(燕山朝)내지 중종조(中宗朝)의 일일 것으로 추리할 수 있다. 그러니 4백년은 훨씬 넘어서 묘역이 이루어지게 되었다고 보아야 하겠다.

김세정은 진주판관(晋州判官)을 지낸 순천인(順天人) 장일신(張日新)의 아들 숙(叔)으로서 사위를 삼게 되었다. 사위를 사랑하는 정은 워낙이나 깊었기에 장인을 존경하고 따르는 마음 또한 남달랐다고 한다. 드디어는 사위를 의성읍의 본가에서 비안(比安)고을로 데려 와서 같이 살기에 이르렀다. 이로써 장숙은 순천 장씨(順天 張氏)의 비안 고을 입향조(入鄕祖)가 되었다. 김 세정은 사위를 가까이 데려와서 출가한 딸도 언제나 쉽사리 만날 수가 있어서 더욱 즐거웠다. 만년에 이르러서는 가족과 측근을 불러 모아두고 더욱 각별한 유언을 하게 되었다.

자기가 죽으면 율현(栗峴)에 묻어 주기를 당부하고 저 세상에 가서도 장 숙과의 정의를 새기고자 하니 뒷날 가서 사위의 일생을 마치거든 자기의 무덤 아래 같이 묻어 달라고 특별히 유언 하였다.

세월이 흘러 1567년(명종 22년 丁印) 7월 15일에 군기시첨정(軍器時僉正)을 역임한다. 장 숙도 78세의 향수로 타계했다. 장인 김 세정의 유언에 따라 그의 묘 아래 바로 붙여 묻어 묘를 이룬 것은 더 말할 나위도 없다. 부인 김씨도 합장이 되었다. 이로써 김 세정의 유언에 따라 그의 묘 아래 바로 붙여 묻어 묘를 이룬 것은 더 말할 나위도 없다. 부인 김씨도 합장이 되었다. 이로써 김세정의 유언은 실행이 되었고 저 세상에서 만난 옹서(翁胥)간에는 더욱 정이 깊어졌을 것이라 여긴다.

장 숙이 묻혀 입산된 후로 그의 아들 문암공(文巖公) 장문서(張文瑞)도 이어서 그 아래쪽에 묻히게 되었다. 국천 효자로 이름난 문암공이 입산한 것은 1577년(선조 10년 丁丑)이었다.

여기에 또 하나의 유언이 남았다. 문암공 역시 그이 사위인 우봉인(牛峰人) 진사(進士) 이 효견(李 孝騫)을 무척이나 사랑하였기에 뒷날에 한 묘역에 묻히기를 당부하였다. 그의 아들 진사 장 해(張 邂)의 묘 옆쪽에 사위인 진사 이 효건도 부인장씨와 더불어 함께 묻혔다. 이렇듯 생시의 정의는 유언으로 남고 유언은 어김없이 실행되어서 선산 김씨, 순천 장씨, 우봉 이씨는 한 묘역을 이루게 된 사연이 밝혀졌다.

그들은 연면 4백년을 내려오면서 선외가(先外家)와의 정의를 새기는 아름다운 전통을 남겼다. 해 마다 서릿발 내리는 가을이 깊으면 묘향을 치르고 자손은 모여들면 고루고루 다같이 어느 묘나 성묘를 하니 모르는 사람들은 무슨 일이기에 한 해에 묘사를 세 번씩이나 지내느냐고 묻기도 하는 모양이다. 묘향의 날짜가 문중 마다 달랐기 때문이다.             //---------------------------------//

먼먼 옛날부터 율현묘역(栗峴墓域)에서 맺어지는 세 문중의 미담가화(美談佳話)는 멀리서 듣기에는 믿기가 어려운 일이다.

여기 우리의 전통을 건전히 세워 나아가는데 모범이 되어지기를 바란다.

 


경상북도 의성군청/ 의성의 인물 중에서 

 

 


명나라 崇禎元年(1628년)

청나라 崇德元年(1636년)

임진왜란   선조 25년 (1592)  정병 20만  소서행장

정유재란   선조 30년 (1597)  정병 14만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

정묘호란   인조  5년 (1627)  정병  3만   아민

병자호란   인조  14년(1636)  정병 20만   청태종


 

 


 龍 潭  日  記


 

                                                        金啓

 


 

 

 


“龍蛇日記”

一善金氏 白岩公派譜 龍潭金啓先生譜錄

일선김씨 백암공파보 용담 김계선생 보록 내용에/ 집안에 “龍蛇日記”가 전해졌다고 한다.

“龍蛇日記”참으로 아까운 사료다.

의문스러운 것은 송암 이로(李魯:1544∼1598)가 쓴 龍蛇日記《용사일기》가 있다.

  경상남도유형문화재 제62호로써  《용사일기》는 1592년(선조 25)부터 1597년의 정유재란까지 전후 5년간의 기록이 실려 있는데, 임진왜란의 상황을 체험 중심으로 기술하였으며 당시 의병들의 활약상, 전쟁의 진행과정, 전란 속의 민심 동향 등을 생생하게 수록되어있다고 한다.

또한 저자미상의 일사기문(逸史記聞)이라는 책이 전해지고 있는데,

선조(宣祖) 때부터 인조(仁祖) 때까지의 사실을 주로 세간에 들리는 이야기에 따라 기록한 책이다.

이 책 내용의 마지막 기록은 대략 정축년(1637)3월 초3일까지의 기록이 적혀 있다.

그런데 책의 서술방식이 金啓선생의 龍潭錄과  흡사하고

내용 또한 인조시대의 다른 학자들의 일기 내용과는 달리

                            세간에 들리는 政勢이야기를 기록한 유사점이 있다.

묘하게도 金啓선생의 龍潭錄 기록은 정축년(1637) 봄의 사건부터 시작된다.

혹 저 작자미상의 逸史記聞은 龍潭 金啓先生의 “龍蛇日記”가 아니었을까?

 

                       .

                                                                 

          

丁丑年 仁祖15年 1637年  明- 崇禎10년  淸- 崇德二年(당63세) (윤4월 듬)

 

역사보기/ 1월 강화도 함락. 인조가 삼전도(三田渡)에서 청태종에 항복함.

3월 홍익한, 윤집, 오달제가 청에 잡혀가 심양에서 살해됨.

4월 소현세자(昭顯世子) 등이 심양에 볼모로 잡혀감.

 


○冊以給 .....

보태어진 책 ....

 


☞ 龍潭錄 以前의 日記에 보태여 쓴다는 말.  즉“龍蛇日記”와 연결된 日記라는 뜻.

一善金氏 白岩公派譜 龍潭金啓先生譜錄

일선김씨 백암공파보 용담 김계선생 보록 내용에/ 집안에 “龍蛇日記”가 전해졌다고 함.

 


○沈方伯(    )未及謫發拿去李敬輿來代(    )

 심방백이(    )하지 못함을 적발하여 잡아가다. 이경여가 뒤이어 부임했다.(    )

 


沈方伯 = 경상감사 심연(沈演)/  李敬輿 = 후임 경상감사/ 

인조실록/   2월 11일 양력/ 1637년 3월 07일 

경상감사 [심연沈演]이 재임 중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쌍령(雙嶺)에서 청군의 기습이 있다는 와전(訛傳)을 듣고 도산해 실전에 임해보지도 못했다. 패하자 전라도에 유배되고. 후임 경상감사 [이경여李敬輿]가 부임했다는 기록인 듯함. 

인조 15년 정축(1637, 숭정 10)  4월 5일(갑술)  이경여(李敬輿)를 경상 감사로 삼았다.

 

 

 

戊寅年 仁祖16年 1638, 明 - 崇禎11년  淸 - 崇德三年(당64세)

           

역사보기/   9월 1일(경신)  함경도에 굶주림과 염병으로 사망한 백성이 4천 3백여 명이다. 

            10월 봉림대군(鳳林大君, 후의 효종)이 청태종의 서정(西征)에 동행함.

 


○自春至夏天久不雨兩麥旣損又未移秧七月間暫雨豆太及黍粟頗有可望其西成而八月飛霜大失稔 自初秋至翌年夏橡實松皮苦苦連命老弱多有餓死者

봄부터 여름에 이르기까지 하늘은 영영 비를 내리지 않았다.

밀과 보리농사는 이미 망쳤고 모내기도 하지 못했다.

7월에 잠시 내린 비로 팥.콩.조를 심었을 뿐이다. 

자못 수확을 기대했지만 거둬들일 무렵인 8월에 서리가 내려 농사를 망쳤다.

초가을부터 내년 여름까지 도토리와 소나무 껍질로 연명해야하는 고통이다. 고통속에 힘들게 연명해가는 노인과 어린이가 늘어나고 굶어 죽는 자가 많다.

 

○牛疫之後不能耕種十家作契耕以人夫或馬耕之或作車推轉而耕之 

高牙大纛鳴鼓吹角大是恠變事也. 

소들이 역질에 걸린 후에는  밭갈이를 할 수가 없다.

열 집이 어울려 “품앗이”로 사람이 직접 밭갈이를 하고,

혹은 말로써  밭갈이하며 혹은 수레바퀴를 끌어서 쟁기를 만들어 밭을 갈았다.

관아에서는 상아로 장식한 깃발 높이 휘날리며 북치고 나발 부니

도대체 이 무슨 괴변이 있냐!

 

○一自兵亂後大小紅疫及染疾大熾死亡過半

정유재란부터 병자호란 이후까지도 크고 작은 홍역에다 장티프스까지 크게 번져 죽은 사람이 절반이 넘는다.

○監司李公在亂時興學設敎勉勵頹風勸課農桑輕徭薄賦而二月辭歸南民不缺然失望 李景曾代來

감사 이경여는 병란 중에도 학문을 세우고 퇴폐한 풍속을 스스로 깨우치도록 가르치고 농사와 누에치기를 권장하며 부역과 세금을 가볍게 하였다.

2월에 (모친의 병환으로)사임하고 떠나가니 남쪽의 백성들이 기대가 무너져 실망하였다.

이경증이 후임으로 왔다.      

☞ 이경여:  인조 15 1637,3월, 경상도 관찰사로 부임 1638 1월, 모친의 병환으로 사직하고 扶餘로 돌아감

○都事呂渭老到任數月以無名稱汰尢沈大孚七月到界

도사(종5품) 여위로가 도임한지 여러 달 동안 이름이 알려져 있지 않으니“태왕”이라 불렀다. 七月에 심대부 감사가 부임해왔다.         

 


己卯年 仁祖17年  明- 崇禎12년  淸- 崇德四年 1639년  (당65세)

                             

역사보기/ 4월 20일    감사 이경증(李景曾)의 청을 따라 경상도에 보내 기민을 진휼하게 하다.

          2월 11일    이명웅(李命雄)을 경상 감사로 삼았다.

          4월 18일    최온(崔蘊)을 비안 현감(比安縣監)으로 삼았다.

           5월 1일    청나라에서 정뇌경을 죽이다.

          6월 26일    동양위 신익성이 삼전도 비문을 쓰지 못하겠음을 계하다

          7월 13일    경상 감사 이명웅에게 금오 산성을 쌓게 하다

          9월 28일    선산부사 이각(李恪)에게 금오 산성을 축성한 공로로 通政을 加資하다.

         10월 29일    경상도에 대동법을 시행하다 

          12월 2일    역관 정명수가 병조 좌랑 변호길을 폭행하다

 

○六月胡使自稱中殿冊封而出來到孔詔院宣言中殿親出(    )驕慢使崔鳴吉齊銀千兩往說鄭明時金石伊等得免中殿之親出 鄭明時金石伊乃我國人而投附胡賊作獘一梗者之胡(    )

육월 청나라 사신이 중전책봉을 위하여 나왔다는 구실로 홍제원에서 중전이 친히 나와 받으라며(    )교만스러우니, 최명길이 은 천 냥을 주고 그들을 설득해서 면했다.  정명수. 김돌시는 우리나라 사람으로 오랑캐에 빌붙어 작당질을 하는 한 무리들이다. 오랑캐(    )

 ☞ :     鄭明時는 = 鄭命壽이고    金石伊는 = 金乭屎 =金突  / 김돌시, 김돌이다.

鄭命壽 金乭屎는 1618(광해군 10)년 청나라의 건주위 정벌 때 도원수 강홍립(姜弘立)을 따라 갔다가 포로가 된 정명수(鄭命壽)·김돌(金突) 등이 우리나라 사정을 청나라에 알려줌으로써 청나라 황제의 신임을 얻고 양국간에 통역을 담당하면서 임금을 모독하고 조신을 업신여기는 한편, 관직이나 뇌물을 요구하는 등 갖은 행패를 부렸다.

 

六月五日未時汶孫生˚ 

5일 오후 2시 손자 “문”이 태어났다.

○鄭雷卿拿金宗一等以東殿僚屬在瀋陽□鄭明時□作獘謨共誅殺而事泄觸怒汗令東殿殺鄭雷卿等甚急東殿曲陳其必咨禀於國王之由則汗賊令國王促殺之故不淂己送金吾郞斬鄭雷卿拿金宗一㝎罪 

정뇌경을 잡아갔다. 김종일등과 심양에서 세자를 모시면서□,정명시의□ 못된 짓에.. 주살하려 모의하였는데 사실이 누설되어 청나라의 노여움을 촉발하였다. 세자에게 정뇌경등을 죽이라 명하니 사정이 급하여 세자가 간곡하게 사정하였으나, 살펴 보건데 필히 국왕이 연류된 것이라 하는 즉 청나라에서 명하길 국왕은 빨리 죽이라하니 부득이 의금부도사를 보내 정뇌경을 참수하였다. 김종일은 같은 죄로 잡아갔다.

 

 


○春大饑饉移粟藍藿賑恤一匹直數斗米四月成倅以京人田稅坊納事罷去六月金壽昌到任

봄에 큰 기근이 들었다. 곡식을 가져와 콩깍지로 연명하는 곤궁한 백성을 구원하였다.

무명 한 필이 쌀 몇 말 값이다.

4월 고을의 成성원님은 서울사람으로 관할구역의 토지세를 거둬들이지 않고 갔다.  

6월 김수창이 부임하다.

 

○監司李命雄等築山城初使僧軍次以編伍軍次以烟軍無論伇品怨苦沖天城号柒谷置府使˚

감사 이명웅등이 산성을 수축할 때 처음에는 승려들로 조직된 승군 을 쓰고 다음에는 지방 정예군 편오군을 쓰다가 품삯을 받는 민가에서 출역한 인부를 쓰면서 노역인의 품삯에 관해서는 아무 말이 없으니 고통과 원성이 하늘을 찌른다.

성의 이름을 柒谷“칠곡”이라하고 府使“부사”를 설치했다.

☞    왕조실록보다 1년 앞선 기록이다.

아마도 당시 주민들을 독려하기위해 지금의 개발계획을  홍보하듯이 미리 공표한 듯하다.

인조 18년 5월 25일 가산산성(山城)의 읍명(邑名)을 칠곡(漆谷)으로 하고 윤양(尹瀁)을 부사로 삼았다.

 

가을에 풍년이 들다. 목화는 흉작이다. 동지 달 튼튼하던 손자 인간 세상에 왔다가 다섯 살도 않되 한 줌의 재가 됐다.

○淸使帶金累祢名者來請曰近無每日以銀百兩禮端給之則無辞受給其回還之日專數□□□□還出給曰此國甚殘獘以待後人云而去歸告其汗□使臣若無□□□□朝鮮矣云雖夷虜□□□□之邦有人矣   청나라 사신 帶金累祢(대금누니)라는 자가 와서 청하길 요즈음 매일 은 백 냥씩 옳게 지급하는 예의가 없다. 여러번 지급받지 못한 것을 돌려 받고자한다.□□□□ 하루도 빠짐없이 지급하라.  말하길 이 나라의 사신접대가 심히 잘못된 폐단이다. 뒷날 귀국하는 사람에게 전해 청태종에 고하여□使臣若無□□□□朝鮮矣云雖夷虜□□□□之邦有人矣

 

 


庚辰年 仁祖18年 1640, 明- 崇禎13년  淸- 崇德5年(당66세) 正1월 윤달

역사보기/

1월 20일  인평 대군에게 권솔을 거느리고 청나라로 가게 하다.

2월 2일   청나라 장수 마부달이 죽다. 그의 형인 만월개(滿月介)에게 위문.

3월 7일   평안 병사 임경업을 심양으로 보내다.

5월 25일  정가 산성(定架山城)의 읍명(邑名)을 칠곡(漆谷)으로 하고 윤양(尹瀁)을 부사로 삼았다.

8월 4일   원손이 심양에서 돌아오다.

10월17일  봉림 대군이 다시 심양으로 가다.

 


○正月无日晩天動○閏正(    )日嫂主別世權庴板項 ○念五六雨土不分遠近○元孫乃橉平大君入送瀋陽東宮受由出還

정월 해가 보이지 않고 늦게는 하늘이 울렸다. 윤달이 든 정월(    )일 형수가 별세하다.  임시로 판항(의성군 봉양면 문흥리)에 모셨다. 25. 6일 흙비가 내려 앞을 분간하기 힘들다. 소현세자의 아들 원손과 인평대군이 심양으로 들어갔다. 소현세자가 청국의 허락을 받아 돌아왔다.

 

 

 


○左右道軍兵咸裂架城大操仍城役民怨沖天

경상 전라도 군병이 두루 나뉘어 가산산성을 크게 쌓으니 거듭되는 성 쌓는 노역에 백성들의 원성이 하늘을 찌른다.   

☞  강행군으로 많은 노역자들이 죽었다.

     인조실록: 18년 4월 4일 공사를 서두른 이명웅을 파직하라고 헌부가 아뢰다.

 


○金石伊夲國官奴爵賊作奱淸使之行亦來作禮常與主上較倚而堅淸使久留國傷渴沈說夜趋鄭明時金石伊宿處各給銀子萬兩翌朝勸使發遝到義州金也責房妓色醜牧伯林慶業託以絶無美色則金遽怒曰雖入汝之室入不可廢也林大怒曳下庭使人告淸使曰我亦有淸國之職此漢辱我不可不治使曰笞於四十度杖以不祿木杖之如數卽死曳出之人皆快之

김돌시는 본시 관노비로써 벼슬을 도적질하여 바꾸고 청나라 사신을 따라 나와서 매번 사신을 접대하는 예법을 만드니 주상께서 보시기에도 그 폐단이 지나치다.

청나라 사신이 오래 머물고 있어 나라의 재정이 몹시 고갈 된지 오래되었다는 말씀에 밤으로 정명시와 김돌시의 숙소로 달려가 각각 은자 만 냥을 주고 다음날 아침에 떠나가기를 권하였다. 의주로 돌아간 김돌시가 기생이 못생겼다고 책망하며 의주 목사 임경업에게 절세미인을 부탁하였는데 예쁜 곳이란 없는지라 김돌시가 갑자기 화를 내며 말하길 “너 같아도 그 방엔 못 들어갈 것이다. 당장 바꿔주라”하니 임경업이 열을 받아 김돌시를 뜰아래로 끌어내고 청나라 사신에게 항의하니 청나라 사신이 말하길 “나는 청나라의 사람이요 이놈 또한 청나라 벼슬을 하고 있으니 청나라를 욕되게 한 것이다. 그냥 둘 수 없다. 몽둥이로 40 대를 쳐라!.”사정 봐줄 것 없이 몽둥이를 내려치니 몇 대 맞자 쭉 뻗었다. 시체를 밖으로 끌어내니 모두가 쾌자를 불렀다.

 ☞  왕조실록에도 없는 매국노 김돌쇠의 사망기록이다.

 

 

○二月初八午坤方天動俄而天油然作雲抑沛然雨雹交注雷電霹近古所于有(    )竟夜不能安寢大是異事

2월 8일 정오쯤에 남서쪽에 하늘이 요동하더니 머리위에 뭉게뭉게 구름이 일어나 내려앉자 세차게 비가 쏟아지고 우박으로 바뀌어 내리다 천둥번개가 치더니 가까운 곳에 벼락이 떨어졌다. 예전에 (    ) 밤까지 이르니 편안히 잠을 이룰 수 없다. 커다란 이변이다.

 

○汗請兵我國□□ 以林慶業領兵送之□力入寇中國大敗而還 -557P

청나라에서 우리나라에 군사 조발을 요청하여...  임경업이 통솔하여 출정하였다. ...힘으로  밀어붙여 명나라를 대패시키고 돌아왔다.

 

 

○東宮在瀋陽以皮方席獻詩 

소현세자가 심양에서 가죽방석에 시를 써서 전하께 올리다.

 


身留異域未歸人     몸은 낯선 땅에 있어 못 가는 신세.

家在長安漢水濱     내 집은 서울 장안, 한강 기슭인데.

月白夜心花落泣     달 밟은 밤 내 마음은 꽃잎에 눈물짓네.

靑風池面柳絲新     봄바람 연못 위를 스치니 실버들 새롭고

黃鶴嗅起遼西夢    꾀꼬리 울음소리 고향 꿈을 깨우네.

玄鳥來傳慶會春     제비 찾아와 경회루의 봄을 알리는데.

盡日樓臺歌舞地     온종일 누대에서 노래하고 춤추던 곳을.

不堪回首淚沾巾     차마 그려 볼 수 없어 소매에 눈물 적시네.

 


殿下開逢觀之則有待曰  

전하께서 시를 읽고 答詩를 지었는데

 


내가 그립거니,  넌들 그립지 않겠는가.

千里蠻鄕 천 리 오랑캐 땅에서 얼마나 그리느냐.

紗窓 창 밖에 슬피 우는 저 접동새야!

“돌아갈 것 같지 않다”고 말하지 마라.

내 앉을 자리가 없구나!

 


臣民見此歌詩孰不鳴間流涕..?  

 신하와 백성들이 이 시를 보고  

누군들 흐르는 눈물에  소리 내여 읊을 수 있겠는가....

○斥和金尙憲金迬等如尹集縛送瀋陽孰不憤嘆東宮來觀卽還○方伯具鳳瑞専以愛民爲政南中大悅

청나라와 싸워야한다고 주장한 김상헌 김왕 등과 같이 윤집이 심양에 묶여갔으니 어찌 분통이 터지지 않겠는가! 소현세자가 만나보고 돌아갔다.

도지사 구봉서가 오로지 백성을 사랑하는 일념으로 행정을 펼치니 경기이남 지역에서 인기가 최고다. 

☞  金常憲: 1570~1652 본관: 안동. 인조가 자신의 부친을 왕으로 추존하려는 이른바 추숭논의(追崇論議)가 일어나자 그에 강력히 반대하였고, 찬성한 반정공신 이귀(李貴)와 의견 충돌을 빚어 낙향. 1636년 병자호란 때 선전후화론(先戰後和論)주장. 최명길(崔鳴吉)이 작성한 항복문서를 찢고 자결을 기도하다가 실패 뒤 두문불출. 청나라로부터 위험인물로 지목 1641년 청나라에  끌려가 4년여 동안 청인들의 굴복 요구에 불복하여 끝까지 저항. 1649년 효종 즉위 뒤 대현(大賢)으로 추대 받아 좌의정에 임명. 저서: 《야인담록》《독례수초》《남사록》후인들에 의해 문집 《청음집》간행.

○元孫往瀋陽之日百官送于盤松容拜辭而歸莫不流涕年六世人君度量己成云 二月朝鴨成群相戰而死者正如丙子矣

원손이 심양으로 가는 날 百官이 전송하는데, 반송정에서 차분하고 침착하게 나아가 절하고 돌아가니 어찌 눈물이 아니 흐르겠는가! 나이 여섯 살에 품성과 아량이 이미 인군의 틀을 갖췄다 한다. 2월 아침에 기러기가 때를 지어 서로 싸우다 죽었다. 지난 병자년과 같다.

☞  元孫원손: 소현세자 큰아들. 뒷날 아버지 소현 세자가 죽자. 어머니 강빈은 사약을 받아 죽고 원손은 10살 때 제주도로 귀양 가서 죽는다.


 

○水田不吉旱田亦早霜民不聊生○都事蔡成龜 

논에는 가뭄 들고 밭엔 이른 서리 내려 백성이 편히 살아갈 수가 없다. 도사 채성구가 부임하다.

 ☞  蔡成龜는 = 채성구(蔡聖龜)이다.[1607~1647] 본관 평강. 시조와 필법이 뛰어났다. 

都事도사: 품계는 종5품이었다. 관찰사와 함께 지방을 순력하고 규찰하는 임무를 담당하였다.

 

 

 

辛巳年仁祖19年 1641년 明- 崇禎14년 淸-崇德6年 (당67세)

역사보기/   1월 10일   인평 대군이 심양에서 돌아오다. 

1월 18일    임경업이 돌아오다.

3월 22일    경상도에 가뭄이 들다.

4월 26일    낙동강 물이 마르다 경상도의 가뭄으로 낙동강의 물줄기가 끊겼다.

5월  4일    청나라에 원병간 이사룡이 참형당하고 김득평이 장형에 처해지다.

5월 12일    경상도에 지진이 나고 서리가 내리다.  경상도에 황충이 생기다.

6월 18일    심양가는 군병을 위문하다.

7월 10일    광해군이 죽다.

7월 19일    심양에 있는 재신의 상차에 따라 임경업을 소환하다.

 


○自春徂夏不雨移秧尃廃加以正月抄軍六月再( )軍入錦州民間飢況斗米直本一匹若不方伯移粟賑恤靡南民有子遺○七月( )年凶因往嵗前願留明年事會疏一善一道咸進

봄부터 여름에 이르러 비가오지 않아 모내기를 그만둘 판인데 정월에 군사를 선별해 보내고 6월에 또( )금주전투에 보냈다.

백성들은 가뭄과 기근에 허덕이고  쌀과 콩 한 말 값이 면포 한 필이다. 만약 도지사가 곡식을 가져와 기근을 해결하지 못하면 남도의 백성들은 자식을 내버릴 것이다. 7월( )년의 흉사는 그 전 해에 앞서 머뭇거렸든 원인이다. 내년에 일의 기회가 올 때 정리(正理)에 따라 모두 한 길로 나가자.


○ 汗領兵往圍錦州不利再請兵於我國( ) 以砲手( )名六月損( )抄送八月汗與東宮麟坪親領往錦州中國將祖大受不利先運砲手交代回還

청군이 금주를 포위하러 갔다가 불리하자 또다시 우리나라에( ) 지원병을 요청했다.  우리나라에서는 포수( )명을 6월 달에 결원에 맞춰( ) 뽑아 보냈다. 8월에는 청태종과 소현세자와 인평대군도 함께 금주전투에 참가했다. 명나라 장수 조대수가 불리하다. 앞서 출병한 포수부대와 교대를 하여 돌려보냈다.

☞    祖大受는 祖大壽 이다. 명나라 장수 뒷날 청나라에 항복 함

조선군은 정밀한 총을 가지고 있어서 조대수의 군사를 많이 죽였는데, 조대수는 군대에 명하기를 청병의 머리 하나에는 은 50냥을 주고 조선 군사의 머리 하나에는 100냥을 준다고 했다.

조선 군사 중에 경상도 성주 사람으로 이사룡이란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차마 명군에게 총을 쏠 수가 없어 공중으로 공포만 쏘아 명군을 상하지 않게 하였다. 이는 본국 조선의 속마음을 밝히려 함이었다. 이를 발견한 청의 군사가 사룡의 목을 베어 진중에 높이 내 걸었다. 명나라 군사들은 이것을 보고 모두 크게 울었고 조대수는 깃발에 큰 글씨로 "대명충신 조선의사"라 써서 시영의 군사를 선동했다.

 

이사룡은 고문을 받으면서도 청나라 장수에게 욕을 퍼부었고 웃으면서 죽었다고 한다. 청태종도 이사룡을 의로운 사람이라 하여 소현세자가 귀국할 때 그의 주검을 운구해 고국으로 돌아가게 하였으며 조선 왕 인조는 지나는 길에 감사에게 예를 표하게 하고 고향에 안장하게 하였다. 그 뒤 숙종 때는 고향 사람들이 사당을 지었고, 정조 때는 성주목사에 증직되었으며 정려를 지어 충렬사란 현판을 내려주었다고 한다.

명나라 장수 조대수(祖大壽)가 그의 아우와 함께 금주성(錦州城)에 들어가 수비하였는데 청인(淸人)이 포위하였다. 조대수가 나성(羅城)을 잃자 항복했던 몽고(蒙古) 사람들을 의심하여 한인(漢人)을 시켜 감시하게 하였는데, 몽고인들이 성을 나가 투항하는 자가 매우 많았다. 중국 조정이 10만의 군대를 발동시켜 일곱 명의 총병(摠兵)이 거느리게 하여 금주성을 구원하게 하였다. 우진왕(右眞王)이 대대적으로 원병이 온다는 말을 듣고 우리 나라의 포수(砲手) 4백 명을 선봉으로 삼아 남산(南山)을 굳게 지키게 하였다. 그리고 그들 군대를 두 대(隊)로 나누어 일대는 탑산(塔山)의 귀로를 방비하게 하고 일대는 금주로 들어오는 길을 차단하게 하였으며, 진중(陣中)에 기와집을 지어 오래 머무를 계획임을 보였다. 이때 우리 군대는 이미 여러 달을 노숙(露宿)하여 병들고 부상하지 않은 자가 없었고 죽는 자가 속출하였다. 조정에서 듣고 본도로 하여금 휼전(恤典)을 거행하게 하였다.

 

○自江原山郡由豊基奉化興海至八月初下霜失稔倍往年下道尤甚豆太黍粟稍實木花畓穀専棄市直日蹙所恃者方伯

강원 산골 부락을 비롯하여 풍기, 봉화, 포항에 이르기까지 8월 초부터 서리가 내려 결실을 얻지 못한 것이 지난해의 곱절은 된다. 남쪽지방이 더욱 극심하다. 콩과 팥. 기장. 조(서속)은 끝만 약간 여물었고 목화와 벼는 모두 포기했다. 시장경기는 매일 위축되어  갈수록 급박해지니 기대하는 것은 방백(도지사)뿐이다.  

 

○四月巡相親到洛東左右道文武士咸聚試才入格者四十餘人優數賞賜○責子治第賦長子鈺亦參榜受韻冊一部筆墨壯帋三卷邑卒加賜白帋二卷 -555P

4월 순찰사가 낙동에 왔다. 좌우도의 문무 선비를 모두모아 재주를 시험했다. 경과시에 합격한자가 40여명이었다. 우수한 자들에게 상을 주었다. 責子治第(자식을 타일러 집안을 다스린다.)라는 시제로 큰아들 옥도 합격하여 운책과 필묵을 받았다. 장원한 자에게는 종이 3권을 주고 읍의 수령이 백지 2권을 주었다.

☞   巡相순상: 종2품 임시벼슬 순찰사(巡察使)의 별칭

 

○三月十五日義興孫生女十月十三日山春生男始見曾孫○八月二十五日試年進士試一語嗳回鸚鵡夢賦次子鏡亦參榜于亰一所洪伯昇中東堂壯元 ○鏡造屋始 -554P

3월 15일 의흥에서 외손자 딸을 보았다. 10월 13일 산춘의 아들이 태어났다. 처음으로 증손을 보았다. 8월 25일 과거를 보는 해에 진사시가 있었다. 시험문제는 一語嗳回鸚鵡夢(하던 말 또 하는 멍청한 앵무새)라는 시험문제로 한양의 첫 시험장에서 둘째 아들 경이 합격했다.  동당 시험장에서 홍백승이 장원을 했다. 경이 집을 짓기 시작했다.

☞    鏡:1606 -1664년 용담의 둘째 아들 字明仲 號愚軒 1654년 司馬

 


○九月初七日蔚山東面柳浦村海巷中水源半把䖏黃白色石周回七尺三寸自移陸地岩上○又東萊十月十一日地震自南方間午北方聲如天動窓戶戰搖累年失稔民生未復而非常之変不知攸言云

9월 7일(1641년 10월 11일) 울산 동면 유포촌 바닷가 마을 가운데 물길 오목한 곳에서 7척 가량의 황백색의 돌이 빙빙 돌다가 스스로 땅위의 바위 위에  올라앉았다. 또 동래에서는 10월 11일 지진이 남쪽에서 일어났다가 정오에 북쪽에서 하늘이 요동치는 소리가 창문이 난리가 난 듯 흔들린다. 몇 년째 흉년으로 백성들의 생활이 어려운데 이변이 일어나 알 수없는 이상한 소문이 번진다.

☞  실록의 기록 있음 仁祖19年 蔚山府 有石自海邊, 移于陸地巖上。울산부에서 바위가 움직이다.

 


○安陰士子通文有曰六月二十二日鄭桐溪捐世非侐邦家之不幸抑亦士林之長慟云

안음(함양군 안의면,거창)에 사는 선비의 아들이 서찰을 가져왔다. 6월 22일(양1641년7월29일) 동계선생님이 돌아가셨다고 한다. 한 나라를 평온하게 이끌지 못한 불행에 더하여 사림의 영수이었으니 통탄스러울 뿐이다.

☞ 桐溪: 鄭蘊정온의 호[1569~1641]: 본관 초계. 병자호란 때 이조참판으로서 김상헌과 함께 척화를 주장하다가 화의가 이루어지자 자결시도. 사직하고 덕유산에 들어가 은거하다가 5년 만에 죽었다. 이조참의, 대사간, 경상도 관찰사, 부제학 등을 역임. 저서《동계문집》<동계 약력>《덕변록》《망북두시》《망백운가》를 지어 애군우국의 뜻을 토로하였다.

 


○都事李以存到任○赴瀋軍運粮事冬前所放爲先爭錬運粮雇馬六百匹定奪後西路不能支勢不得己分定各道八結木一匹式一千九十餘同本道除出贊馬三百匹䮠人則各官屬定送馬三匹色吏一名一道定領將一負木品則如歲幣三十七尺  -554P

관찰사 이이존이 부임해 왔다. 심양에 나가있는 군사의 군량조달은 겨울이 오기 전 훈련에 앞서 준비해야 마음이 놓인다고 운송에 필요한 말 600필을 민간으로부터 징발하는 것을 임금의 재결을 받은 후에 함경, 평안도 지방의 징발이 어려운 지경이라  부득이 각 도에 나누어 정했는데 농지세로 받아들인 8결목 당 한 필씩 정하니 1090필이다. 우리 경상도에서 내놓을 량이 300필이다. 마부는 각 감영의 하인을 보낸다. 말 세 마리당 아전 한 명씩 붙이고, 한 도에 대장 한 명이 담당했는데 해마다 중국에 바치던 무명과 똑같은 품질로 37척이나 된다.

☞  李以存: 본관 여흥 인조 20년 부수찬. 승지

○爲準十二月內上納事卽今錦圍未觧兵連禍銡我軍調送至於再次陣前運粮遂月飛輓關西民力己到蕩渴  -553P

12달을 기준으로 바치는 것인데. 지금은 금주를 포위하고 풀지 않고 있어 병사들이 연이어 화를 입고 술렁이고 있기에 우리병사를 뽑아 보내준 것인데 여기에 또다시 진군하니 앞서 운송을 마친 달에 이어서 군량을 운송하게 되니 평안도 백성은 기력이 다하여 죽을 지경에 이르렀다.

 


○今此收價雇馬之未誠出於朝廷不得己之計而本道不幸連被灾篰屋懸罄今屆收藏之節方有阻飢許多細木何以辨出言念至此一倍傷心

이번에 민가에서 징발한 말의 수가를 조정에서 성의 없이 지급하니 부득이 상소를 올렸는데 경상도는 불행이도 계속된 재앙에 거적 지붕에는 석가레만 걸려있고 지금은 거두어 들여야 하는 계절에 굶주림에 허덕이는 백성에게 그 많은 무명을 나누워 주면 어떨까하는 말을 생각해보니 이제 와서는 갑절이나 마음이 상한다.

 

○道方以銀子枝三等物代送一邉報備局一邊議關西若得准欲請則自營間主管以此換貿則設有日後各官隨便收價之事目前可除駄價人情木品高重聽不聽在於朝廷不得祿料爲先卜定爲置將此民間知委以待更分付 -558P

도 방백이 은자와 아울러 세 가지 품목을 대신 보내고. 비국에 보고하는 한편  평안도지방과 같은 법을 적용해주길 바라는 논지를 임금에게 올렸는데 그 논지는,

백성들과 관청사이의 상거래에서 사들이는 환무의 규칙을 만들어 놓으면 설령 뒷날 각 관아에서 이 규칙을 따르면 편리하게 사들일 수 있다. 그 시행규칙은

전에는 물품을 실어 나르는 품삯은 주지 않아도 문제가 없었다. 상품의 등급은 인정에 따라 좋든 나쁘든 나라 관리가 정하기 때문이다.

차라리 공무원 봉급은 현지에서 살고 있는 백성들이 바치는 세금으로써 그 산지의 생산물로 먼저 지급하는 것을 장차 법으로 만들어 백성에게 공지하여 그때그때 현지의 생산품으로 대신해서 분납하도록 하는 것이다.

 

○比安田一千二百二十五結八十九負六束出木一百五十三匹內一同貿馬一匹餘木一百十三匹上納次右(具)巡相行關各邑也

비안(경북 의성군 비안면)의 밭은 1.215결 89부 6속이다. 내놓아야할 무명은 153필을 한 번에 바쳐야한다. 실어 나를 말 한필과 나머지 130필을 상납하고 (구)순찰사가 각 읍 관아에 공문을 보냈다

 

○凶年飢嵗賑活赤子者王政之所先散給官穀穋取資潤屋者救荒之急務是白昆上年段失稔最慘是白良置下道稍實仍于轉販募納之際下于有地是白如乎

흉년과 기근 때는 백성을 구휼하는 것이 임금의 임무인바 먼저 관의 창고를 열고 부자 집의 나락을 거둬 나누어주는 것으로 백성을 구황해야한다. 급한 것은 지난해와 마찬가진데 피해등급을 구분지어 가장 참혹하게 농사를 망친 경상도 지방일지라도 흉년 제반조처에서는 초실등급으로 조치한 것이 최상의 조처라 하고 거듭하여 물건을 사고팔 때 군량미를 거둬들인다. 하나같이 땅이 있는 곳은 이와 같다.

 

 

○今年則莫論上下一樣被灾富者罊渴貧者將死公私倉庫赤立板蕩封債貸穀等事俱無辦得之路而明春種食只憑元穀還上是如乎○開倉之後決難盡捧各邑守令連續來報設有些少之捧

올해는 누구를 막론하고 하나같이 재앙을 당했으니 부자들의 단지도 바닥이 나고 가난한 사람은 장차 죽음뿐이다. 모든 창고는 비어있고 국정이 문란해 쌀로 고리대금업을 한다. 곡식을 빌려주는 등 여러 조처와 변통에도 아무 소용이 없다. 거리에선 내년 봄 종자를 먹고 오직 기대할 것은 나라에서 사환곡제(社還穀制)로 양곡을 빌려주고 가을에 받아들이는 일 뿐이라! 창고를 개방한 후로 세금을 거두어들이기 어려움이 있자 각 읍 원님이  여러 차례 와서 독촉하나 서령 거두어들인 것도 하찮을 뿐이다.

 

○今年則司僕各島新捉馬厥數甚多年例分養之數比前倍些少元穀消盡於冬春之內是白在如乎○狗彘食人食之嘆年凶可(  )此外國兵曺一時錯料往來分給馬匹於楚軍爲白有如乎馬疲人怨之後分送三南經年留養馬令肥漨爲白乎矣尙無區處之柔又添別樣國馬爲白有置此則處置不甚重難會該曺急速指揮俾無不緊耗損之患事右巡?上達草 -551P

올해에는 또 말을 관장하는 관리가 여러 섬의 새로 잡아갈 말의 산출 수를 많이 늘렸다. 해를 두고 년 년이 나누워 키우는 수가 전보다 배나 된다. 농가에 빌려준 알량한 양곡도 다 없어진 겨울과 봄 동안에 이러니, 짐승이 사람 먹을 것을 먹어 치우는지라! 탄식하나니 흉년에 어찌(  )하랴!  이는 잘못 헤아려 다른 나라 병조에 한꺼번에 오가며 금군에게 마필을 나누워 주었는데 말은 고달프고 그들은 원망하였다.

뒷날 충청,전라,경상도에서 말을 키워서 해를 두고 번갈아가며 나누워 보내야할 것을 당장 살찌우려하니 변통하여 처리할 방법이 아직은 없는 것이다. (청나라에)복종하기를 더하여 나라의 체면을 馬말로써 세우려하는지라 이는 곧 일을 처리함에 있어 신중하지 못하고 담당하는 관료들의 의사가 분분하여 긴요치 않은 것이 없다하고 급히 처리하니, 긁어 부스럼 내는 걱정스런 일이다. 右巡?이 상소하였다.

 

中國鄭軍門上書曰祖大受出敵己久尙無勝否臣請一戰以決勝敗帝以謂鄭也年少之人爲氣所使妄料輕敵不許鄭再請之帝乃許之因給四萬騎貨賣四萬加之自募四萬幷十二萬而出祖將給○汗曰帝以我無功以他將代之我則將難免拿致之誅願投入以啚生汗信聽簡精兵三千直入組城組將閉門盡擊無有漏汗見欺大憤擧兵而行鄭師不意相遇於伊州尉以短兵殊死力戰鄭且戰且上高峯貨賣二萬未及登山爲胡被殺汗自後不敢輕犯相望結陳而己

명나라 정군문이 상소하길 총병 조대수는 적과 대치한지 오래되었으나 아직도 승패를 가리지 않고 있습니다. 신이 승패를 가르는 일전을 치르고자 청합니다. 하니 명황제가 홍승주를 총독으로 삼았는데 젊은 혈기로써 망령스럽게 적을 가볍게 여기므로 허락하지 않았으나 다시 간청하므로  허락하여 기병 4만 군사와 용병 4만에 지원병 4만을 합하여 12만이 출병하여 총병 조대수를 지원했다. 청나라 칸이 말하길 “다른 장수로 대신하는 것은 내가 공이 없는 임금이니 내가 즉시 잡아다 주살하여 치욕을 면할 것이다. 하였다. 살기를 바란다면 들어와 항복하기 바란다. 하니

칸이 이글을 곧이듣고 정병 삼천으로 곧바로 조대수의 성으로 진격한 것이다. 조대수는 성문을 굳게 닫고 심한 공격에도 빈틈이 보이지 않았다. 칸이 심히 격분하였다.

12만으로 출병한 홍승주는 의주부에서 생각지 않게 마주쳐서 가까운 거리에서 필사적인 전투를 벌였다. 홍승주는 한편으로 싸우고 한편으론 송산으로 올라갔다.

용병 2만 명이 산에 올라가기 전에 청군에게 죽임을 당했다. 칸이 이후로는 감히 가벼이 공격하지 못하고 서로 진을 치고 대치하고 있을 뿐이다.

☞: 당시 明史및 靑史의기록상 이때의 군문은 정군문이 아니고 洪承疇홍승주였음. 鄭崇儉군문은 三月에 하옥되고 洪承疇홍승주가 9월 지원군으로 금주에 출병했음

당시 왕조실록 내용: 仁祖19年月 21日

대명의 군사가 청인과 싸워 전세가 불리하자 기병은 도주하여 송산보로 들어가고 보병은 배를 타고 도주하였는데, 영원과 행탑 등지에서 죽은 자가 즐비하였다. 이 당시 조대수가 금주에서 포위된 지 여러 달이 지남에 중국이 크게 군사를 조발하여 보내 구원하였는데, 군문홍승주가 나이가 어리고 오만하여 여러 사람의 말을 듣지 않다가 결국 패배하였다. 대수가 청국의 진영에 사람을 보내, 포위된 지 9개월이 되었으니 빨리 교전하여 승부를 가리자고 말하였으나 청나라 칸이 들어주지 않았다.

 


○宣言先運軍甚精勇使我國得捷爲謝因請軍兵○以我國先運炮手不入戰所優對以送者有意存焉自後例爲交代入送之易胡也其爲謀也巧矣

우리나라에서 임금을 호송하던 포수부대가 싸움에 투입되지 않은 것은 우리가 파병해준 뜻에 부응하여 특별히 대우한 다는 뜻이다. 이후에도 청병과 교대하여 보낼 때에도 선례가 된 것이니 그 계략이 교묘하다. 선언하되 임금을 호송하던 포수부대는 우리나라에서 과거 급제자를 뽑은 최고의 정예부대이니 지원군을 청하면서 사례한 것이다.

☞: 조선군은 정밀한 총을 가지고 있어서 명나라 조대수의 군사를 많이 죽였는데, 조대수는 군대에 명하기를 청병의 머리 하나에는 은 50냥을 주고 조선 군사의 머리 하나에는 100냥을 준다고 했다.

 


○運粮胡差十二名出來道過潛商十二人縶縛問之十二人直招曰我義州人以府尹之命往唐陣云則捉囚義州而到京         

군량미를 운송하는 청나라 사신이 나오다가 비밀리 무역하는 장사꾼 12명을 붙잡아 왔다. 물어보니 12명이 사실대로 고하길, 나는 의주사람인데. 의주부윤(황일호)의 명을 받고 중국 진영으로 가려한다고 하여 의주에서 서울로 붙잡혀왔다. 

 


會百官袛迎廟堂辭避上曰不爲袛迎者罷職勢不得已皆袛迎胡差而義州府尹以黃一元交通中國請拿未定刑卽拿致則胡差列百官回示曰百官中有如此犯誅之其中人鄭明時亦甚作

백관들을 회례하고 묘당에서 왕의 행차를 맞이하는 의식을 거절하며 임금이 말하길 파직을 당한 꼴이니 부득이한 상황에서 모든 의식을 거절하는 것이다.

청나라 사신이 의주부윤 황일원이 명나라와 내통하는데도 아직도 잡아들여 벌주지 않는다며  지시하길 즉각 잡아들이라하면서 또한 줄지어서있는 백관을 둘러보며 말하길 백관 중에 이와 같은 죄를 짓는 자는 주살할 것이다. 하니 그 중에서도 정명수의 작태가 극심했다.

 


遂赴出黃顧語百官曰吾無罪捉給至於此極國史如此願僉眞情之因垂淚曰吾母戒余曰吾欲観榮華吾勉力發身畢竟若此吾無兄弟獨身使先靈絶祀不孝莫大觧宝釖賜斬者曰速斬我母僾遇恃朋執手同與病錄藥各曰吾児重速劑送此藥詳傳我之戒勿學業文武蔵踪畎畒遂被戮聞者莫不下淚焉捉囚十二人盡殺之

이윽고 끌려 나온 황일호가 백관을 둘러보며 말하길 나는 죄 없이 붙잡혀와 이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나라 일 또한 이와 같아 여러분에게 (장차 나라 일을)진정 눈물로 호소한다. 나의 어머님이 경계의 말씀하시길 내가 영화를 보고자한다면 애쓰고 힘써서 수신제가하라 하였는데 마침내 이렇게 되니 나는 형제 없이 홀몸으로 선령의 제사가 끊기게 되니 크나큰 불효다. 형리에게 차고있던 보검을 풀어주며 주며 속히 죽여라. 내 어머니께서 그 언젠가 나의 친구를 만나 손을 잡고 부탁하길 같은 병에도 약이 다르다며 말씀하시길 우리아이가 병이 중하고 급하니 속히 약을 지어 보낸 것이라며 꼭 나에게 전해 달라는 약이 있었는데

그 약이란 곧 경계의 말씀이었다. 문무의 학업일랑 밭고랑에 묻어 버리고 시골에 숨어 살라는 말씀이었거늘 마침내 억울하게 죽는다. 소식을 듣고 울지 않는 자가 없다. 잡아온 죄수 12명을 모두 다 죽였다.

☞:  黃一元은  黃一皓황일호 이다. 1588∼1641 본관: 창원 사헌부장령 때 병자호란 시 인조를 호종 독전어사(督戰御史)로 화전(火箭)을 이용하여 적군을 물리쳐 전공을 세웠으며, 척화(斥和)를 적극 주장하였다. 난이 끝난 뒤 호종한 공으로 통정대부에 올라 진주목사에 제수되었다. 七義士

七義士(칠의사) : 병자호란 이후 청나라 칸을 죽이고 명과 우리나라 국권을 회복하려다가 사전에 그 사실이 청에 발각되어 청의 명으로 할 수 없이 우리 정부에 의해 사형을 당한 황일호 ·최효일, 차충량· 차예량·안극함, 장후건, 차맹윤

 


○胡差十二名不時欲求景南關庙百官齊迎出去之際色正郞以人馬趂未整齊赤脱北結提畒蹄踏其爲困辱不可勝記

청나라 사신 12명이 갑자기 남문 밖에 있는 (중국 촉한의 장수)관우 사당을 보기를 청하여 백관이 나아가 영접하였다. 인마가 뒤좇아 가는데 혼잡을 정리하는 색리가 미처 대치하지 못하여 남쪽을 빠져나와 북쪽으로 한꺼번에 몰려들어 발굽으로 밭을 밟아 그 곤욕이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다.

 


○義州出身崔孝元當初出際之日見國勢難攴率妻孥懷重寳擧家載舩直抵中原水往之計其慮也深且遠矣卓乎其不可及也

의주출신 최효일이 당초에 (명나라로)나가려고 할 즈음 나라의 어려운 형국을 보고 식솔을 다그치고 가족을 설득하여 가산을 정리해 온 집안이 중원을 거치지 않고 곧바로 뱃길을 이용해 (명나라로) 들어갈 계책을 세우니 그 뜻이 깊고 원대하니 그 탁월함에 도저히 미칠 수가 없다.

☞:   崔孝元은 최효일(崔孝一)이다.  ?  ~1644  七義士 칠의사 병자호란 때 임경업의 휘하에서 전공을 많이 세웠다. 황호일, 임경업 등과 청나라 태종을 암살할 것을 모의하고 등주로 건너가 명나라 사람들과 함께 심양을 공격하려 하였으나 사전에 누설되어 실패하였다. 1644년 명나라가 망하자 의제의 빈소에서 10일 동안 통곡하면서 단식하다가 죽었다. 12월 8일청나라 사신이 의주에 돌아와 최효일(崔孝一)의 족속 12인을 죽이고 갔다.

 


市直木一匹無過米一斗半○十二月十六日鵾變生

시장에서 광목 한필 값이 쌀 한 말 반 밖에 안한다. 12월 16일 곤변이 태어나다.

☞:  鵾變곤변: 큰아들 鈺옥의 셋째 아들 족보에는 鯤變곤변으로 기록돼 있음.

 


○李回寶作詩曰 

(인조임금이 삼전도에서 굴욕적으로 강화하자 이를 보고 은거했던)이회보가 시를 지었다.

憶曾風雨打孤城  비바람 몰아치는 외로운 城의 옛일 생각하니

天柱推顚地軸傾  하늘을 거꾸로 헤아려 땅 지도리 기울어있다.

我忍獨留侄丙子  나는 삼전도 비극을 멍청히 홀로 견디었는데,

君能先逝在崇禎  임금은 명나라를 먼저 버렸네.

人情自古皆衰死 자고로 인정은 모두 메말라,

世事如今孰願生  이런 세상 누가 살길 바라리.

若到雲鄕朝列祖 모여든 구름 속에 열성조 혼이 머문다면,

善爲辭說莫分明 잘했다는 말 분명 않으리.

☞: 崇禎: 중국 명나라의 마지막 황제 의종(毅宗) 때의 연호(1628~1644).

李回寶 1594~ 1669 본관 진성. 병자호란 때 척화(斥和)를 주장하다 항복하게 되자 벼슬을 버리고 낙향했다. 김자점(金自點)의 반역을 예견했고 후에 그를 탄핵하여 유배케 했다. 이로 인해 직간(直諫)하는 위국충절이 뛰어나다 하여 사복시정(司僕寺正)에 특진됐다. 저서: 석병집

 


○淸陰答之(汗)言曰臣各爲其主道其志耳口吾口也志吾志也以吾之口告吾志于吾君而吾君不從豈意細微之事播及於他國乎乃斥和事也

김상헌이 (청나라에 잡혀가서) 대답하길 신하는 각자 의지로써 그 주도하는 바를 행할 뿐이다. 그 뜻한 바를 말한 것은 나의 말이요, 본심은 나의 본심이다. 나의 임금께 내가 고한 말이 나의 본심이니 나의 임금을 따르지 않았는데 뭣 때문에 세세히 대답하겠는가. 이와 같은 일이 번져나가니 다른 나라에서 너희나라에 반기를 드는 것이다.

☞: 淸陰 = 金尙憲김상헌의 호 1570~1652 본관: 안동. 강직한 성격과 기개로써 심양에 잡혀가 6년 동안 청인들의 굴복 요구에 끝내 굽히지 않고 불복하여 저항. 청나라 사람이 심하게 힐문하니 상헌은 누워서 일어나지도 않고 말하니, 청인들이 서로 돌아보며 혀를 차고 말하기를,“정말 못 말리는 늙은이다.”하였다. 청인이 의롭게 여기고 칭찬해 말하기를‘김상헌은 감히 이름을 부를 수 없다.’고 하였다.  1645년 소현세자와 함께 귀국했지만, 여전히 척화신(斥和臣)을 탐탁지 않게 여기는 인조와의 관계가 원만하지 못해 벼슬을 단념하고 석실(石室)로 나아가 은거하였다. 1649년 효종 즉위 뒤 대현으로 추대 받아 좌의정에 임명되었다. 이후 수차례 은퇴의 뜻을 밝히면서 효종에게 인재를 기르고 대업을 완수할 것을 강조하였다.  저서: 야인담록. 남사록. 청음집

 

 

 

 

by 꽃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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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흥참(可興站) 
☞   可興가흥: 충청북도 충주시 엄정면 


나라에 받치는 경상도의 세곡을 낙동강을 따라 상주까지 운반 후에 조령재를 넘어 가흥창으로 모였던 곳이다. 
일찍이 1477년 선산부사를 지낸 점필재 김종직이 이곳을 지나며 '가흥참(可興站)'이라는 시를 남겼는데 경상도 백성들이 세곡을 바치는데 따른 고통과 부패한 가흥참 관리들의 실상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가흥참(可興站) 

嵯峨鷄立嶺            우뚝 솟은 계립령은 

終古限北南            예로부터 남북의 경계가 되었네. 

北人鬪豪華            북쪽사람들은 다투어 사치하는데

南人脂血甘            남쪽사람들의 기름과 피를 빠네 

牛車歷鳥道            우마차로 조령고개 넘는 길엔 

農野無丁男            농사철 들판에 일하는 장정 보이지 않고 

江干夜枕藉            강가에서 밤이면 서로를 베개 삼아 잠을 자네 
 
吏胥何婪婪            아전 서리들은 어찌하여 욕심을 버리지 못하는가.

小市魚欲縷            시장의 생선 가늘게 회치고 

茅店酒如泔            주막에 술은 쌀뜨물처럼 하얀데 

醵錢喚遊女            돈 거두어 계집 불러 즐기니

翠翹凝紅藍            엉덩이를 살랑살랑 연지곤지는 덕지덕지

民苦剜心肉            백성들 심장이 깎이듯 괴로운데 

吏恣喧醉談            아전들 취해서 방자히 떠들며  

斗斛又討嬴            됫박질하면서 또 꾸역꾸역 채워 넣으려하니

漕司宜發慚            출납을 맡은 관리는 의당 부끄러워야 할 것이거늘 

官賦什之一            관가에 받치는 건 십분의 일인데 

胡令輸二三            어찌하여 두 곱 세 곱을 실으라고 호통을 치는가.

江水自滔滔            강물은 절로 도도히 흐르건만

日夜噓雲嵐            밤낮으로 탄식하는 구름 물안개

帆檣蔽峽口            배 돛대 그득한 좁은 강나루에서 
 
北下爭驂驔            북쪽서 내려와 다투어 슬쩍 슬쩍 빼내가니
 
南人蹙頞看            남쪽 사람들 도끼눈 뜨고 살펴보는 것을 

北人誰能諳            북쪽 사람들 누가 신경이나 쓴다던가.





200년이 지난 뒤  비안 박연에 살던 용담 김계선생의 시절에도 그 고통은 더욱 심해져만 간다.

1651년 효종 2年  용담 77세
칠곡 가산산성을 쌓을 때부터 많은 사람들이 죽고 노역의 고통에 시달렸다. 성을 쌓은 이후에도 쌀을 실어 올려야하는 고통과 산성의 보수 일에 노역은 계속되는 상황에 백성들의 원성이 쌓여 오죽하면 가산산성을 쌓은 관리들을 원망하며 그 살을 씹고 그 가죽으로 이불을 덮을 것이라 했을까. 거기에 더해서 농지세를 광목이 아닌 쌀로 정하여 멀리 충주까지 실어 날라야하는 고역을 치르니 원망이 극에 달한 때이다.   
용담 선생이 참다못해 붓을 들었다.  

-용담일기 중에서-

○田稅作木上疏草伏以臣等所居比安爲邑地偏民鮮水土淺滿少有澇旱先自阻飢常賦之役竭力供奉而每患不逮勅物之徵星夜措辦而每必生事民力竭盡儘合變通欲陳於方伯而非其檀裁來訴於該曺而又非自斷故遑遑間迫不得不呼顱於父母之前糞蒙採納伏惟遍下試垂憐察焉
농지세를 면포로 낼 수 있도록 해달라고 임금께 상소문을 올린다.  
엎드린 저희들은 땅과 물길은 적은 장마에도 물에 잠기며 가뭄에 앞서 먼저 굶주림에 허덕이고 항상 세금을 내지 못해 노역으로 진력을 다해 받들고 일하고도 청나라 사신이 올 때마다 받치는 공물을 징수하여 언제나 걱정을 떨쳐내지 못하니 밤늦게 별을 보면서까지 열심히 일을 하는 것은 모두 살아남고자 하는 일입니다. 
백성들이 있는 힘을 다해 모두 뜻을 모아 다른 방법을 찾아보고자 경상감사에게 하소연하였으나 저희들의 뜻을 어찌 헤아려줄 수 없다고 하여 또다시 담당중앙 관청인 해조에 고하였던 바 그 곳에서도 스스로 결정 할 수 없다고 함으로 급한 마음에 어쩔 수 없어 허둥지둥 부모님께 불쑥 볼을 들이 밀었으니 어린아이를 닦아 주듯 저희들의 뜻을 받아주소서. 
삼가 엎드려서 아래 글을 두루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어 살펴 주시기 바리나이다. 

夫朝家賦役於民者一視同仁均有定式而本縣襡以至殘之邑兼他邑所無之役何者嶺南一道分爲上中下三道上都則年年田稅載輸於可興倉五日之程中道則田稅米太今數作木上納於京中而甹自架山城設立之後中道各邑盡屬於山城擬諸緩急保守故兵糧盡討於山城而本縣處於上都之下中道之上故謂之上都而轉輸米太於可興于謂之中道而儲峙糧械於架山以一縣而兼上中道之役則本縣獨不寃若乎
조정에서 부과하는 세금과 노역은 백성이라면 누구나 하나같이 똑같이 정해지는 법인데 저희 고을에서만은 부역이 끝나기기 전에 다른 읍에는 없는 노역일이 또다시 겹치니 어쩐 일입니까. 
영남의 한도에 속하여 상중하로 3도로 나눈 上都상도에서는 년 년이 농지세를 충주에 있는 가흥 창고까지 마차에 실어 나르는데 5일이 걸립니다. 
中道중도에서는 농지세로 내는 쌀과 콩 대신에 최근에는 수차례 광목으로 서울에 받쳤는데 일이 꼬여 칠곡군 가산산성을 쌓은 이후에는 중도의 각 읍이 모두 가산산성에 소속된 것이 의문스럽습니다. 급히 성을 보수하는 일로 산성의 군량미로 모두 쓰였는데 본 현은 상도에 소속되어 있으니 下中道하중도가 상도가 된 꼴이라 하겠습니다. 
상도이니 쌀과 콩을 가흥 창고까지 실어서 나른다는 것이라 하고 중도에 속해 있으니 가산산성의 높은 고개에 군량과 곡식을 쌓아야하니 하나의 현이 이중으로 상중도의 역할을 맡아 하는 것이니 오직 우리 현만의 억울함이 이와 갔습니다.  

臣等請先陳可興遠輸之艱與架山貯糧之斃焉鳴件田稅輸倉惟民所供如不有思宜苦之狀萬萬難堪者
저희 들이 청하고자 하는 것은 우선 계속해서 충주 가흥창고까지 멀리 실어 날라야하는 어려움과 칠곡 가산산성에 곡식을 지어 올려야하는 폐단입니다. 
이번 일은 농지세를 실어 나르는 창고는 백성들이 받치기 알맞은 곳으로 정해야하는데 적절한 고려 없이 정해진 것이니 어려운 상황이 한두 가지가 아니어서 난감합니다. 

臣等問敢百舍重滿凟擾於過災修省之日乎夫遠輸之難有三焉鳥嶺之險惡不必形容其危機石磴而民力之貧富不齊夫馬之有無不同貧而孤寡者典賣其田土富而有馬者索高其輸價督發及期之際南負女載必至顚仆而後己此臣等之所望於至上之軫念者一也 
저희들의 이 문제로 감히 멀리서 거듭하여 시끄럽게 소요하는 것은 지나가는 재앙에서 몸을 구한 날이 되기 때문입니다. 
무릇 멀리 실어 나를 때 세 가지 어려움이 있사오니 조령산맥의 길이 험난함을 형용할 필요도 없겠거니와 위험한 자갈 비탈길에서 백성들의 고생은 부자나 가난한 사람이나 마차가 있거나 없거나 하나같사오며 자식 없는 과부들은 그 토지와 집을 저당 잡히거나 팔아 치우고 부자들은 마차를 구해 봐도 운임이 너무 비쌀뿐더러 관청에서 정한 기간 내에 실어오라고 재촉하여 날짜를 맞추느라 남자는 지고 여자는 이고서 결국은 엎어지고 넘어지고 나서야 그 일을 마치게 됩니다. 
이것이 저희들이 바라는바 전하께 올리는 첫 번째 근심입니다.  

及夫踰嶺輸倉之際一碩所納米則幷計其運價行糧必費二碩有半然後可望准納則田結多而家甚貧者數三碩所納之米虛費其米者又幾多耶以此民困日甚而雇價日增民情所在必欲作木者誠可愍也此臣等之所望於至上之軫念者二也   
또 저 고개를 넘어 창고까지 실어 나르는 일을 마치려면 한가마를 바치는 데에 따른 추가 운임이 필히 두 가마 반이 들어야만 확실한 수납이 가능하니 논밭이 많은 집에서는 부담이 크고 가난한 사람들은 세 가마를 운송하는 비용으로 식량을 삼고 또 그 런 일이 많아지다 보니 이곳 백성의 곤궁함은 날로 더해가서 노임은 날로 치솟아 갑니다. 
백성들의 마음은 꼭 세금은 곡식 대신 광목으로 바칠 수 있기를 바라고 있으니 참으로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이것이 저희들이 바라는바 전하께 올리는 두 번째 근심입니다.  


不徒此也自從牛㿄之後民間富饒者常不能多畜牛馬初其貧無牛馬者乎以此田價賤而抛黃居多民生析而不尊厥居此臣等之所望於至上之軫念者三也 
이뿐만이 아니라. 소들이 마름병에 걸린 후로는 민가에서는 배불리 먹던 부자도 평소와 같이 많은 소와 말을 기르지 못하고 애초 소와 말이 없던 가난한 사람들은 이리하여 농지는 헐값에 집어던지고 병들고 지친 많은 집들이 뿔뿔이 흩어져 그 집에선 제사도 올리지 못합니다. 이것이 저희들이 바라는바 전하께 올리는 세 번째 근심입니다.
鳴呼本縣田三稅所納於可興者況是六百有奇則其數不靜而十室殘邑民力己竭一碩之運重若千斛侗蒙准十許於作木經費所需米布奚捀而民間專輸輕重自別矣 
아 아 우리 현에서 세 가지의 농지세를 내는 곳은 충주 가흥이니 더구나 지금 육백집이 지금의 법대로 한다면 안정하지 못하고 그 가구 수는 열 집이 쇠잔해질 것이고 읍민의 기력은 다해서 한번 나르는 무계는 천섬과 같으니 어리석은 아이라도 비교해보고 열 번이라도 광목으로 받칠 것입니다. 
거두어들이는 쌀과 면포의 경비가 어찌하여 받치는 백성들 간에 오로지 실어 나르는 무계로 구별되는 것입니까.

抑念臣等所謂本縣兼他邑所無之役者切近傍邑如軍威義城等官之距可興道里均於本縣而以其有貯糧械於架山之苦而猶在作木之列則本縣旣屬於架山恒儲七百餘祖及軍器什物而山嵐篜濕易致腐黑間年改色則民力之困亦己極矣更無一分餘力可堪搬輸故冀免遠輸於可興狎得專力於山城其情不其哀乎
문득 저희들은 소위 다른 읍에는 없는 노역을 겸해서 하는 것은 군위와 의성 등의 관청과  같이 가까이 있는 읍이 잘려나가 갔기 때문입니다. (경상도의 중앙인 칠곡에 가산산성을 쌓으면서 지역이 분리됨)  멀리 떨어진 가흥인근 지방과 균일한 방법으로써 본 현에서 그렇게 쌓아야하는 곡식과 군 병기라면 가산산성에 쌓는 고통이 오히려 더하니 면포로 받치는 것이 순리인 즉 본 현은 이미 가산산성에 소속되어있어 항상 7백여 석의 군량이 쌓여있고 사당과 또 군병기와 온갖 기구가 있는데 산속의 아지랑이와 찌는 듯한 습기로 검게 썩어버려서 한해 걸러마다. 다시 바꾸어야하므로 백성들의 곤욕이 역시 극에 달해 있으니 기력을 찾을 만한 일각의 여유도 없이 쌀을 실어내는 일을 감당해야하므로 멀리 가흥창고까지 실어 나르고서는 번갈아 맡아서 가산산성에 전력을 다해야하니 그 사정이 애석하다 하지 않겠습니까.

敢疾呼之望其極濟於偏苦之閟乎伏乞天地父母哀憐臣等之訴如窮人無所於歸本縣田三稅全數作木永作恒規尊安一邑之民不勝幸甚臣等無任膽天懇祈之至謹昧死以呻
감히 급하게 호소하여 바라는 것은 남보다도 더 많은 고통을 받는 답답함에서 구제해 주십사 엎드려 바라오니 천지의 부모님이시여 애처롭고 가엾게 여기소서. 신들의 하소연은 마치 돌아갈 곳이 없는 궁벽한 사람과 같습니다. 
우리 현의 세금을 모두 광목으로 꾸준히 바칠 수 있도록 규정을 정해 주시어 편안히 따를 수 있게 돼오면 한 읍의 백성으로 전하의 깊은 은혜에 신들은 황공하여 어쩔 바를 몰라 하늘같은 은혜에 감사할 것입니다. 삼가 죽기를 무릅쓰고 읊조립니다.  

                                                                    --- 김계---

 

<만장사운무>

 

“비안!”그 이름만으로도 신비스러운 비밀을 간직한 듯 하다.
어쩌면 영어나 불어 인 듯한 어감이기도 하고, 세상을 두루 편안하게 하며 여러 사람들을 서로 아우르게 하는 지명을 가진 그 이름 비안!
이곳이 한때는 의성의 중심지로서 행정을 총괄하고 화려한 문화를 꽃 피웠던 곳이기도 하다.
지명의 어감에 걸맞게 주변 산천의 지세도 만만찮다. 동으로는 막 피어나는 연꽃 봉오리를 형상하는 화장산이 있고, 서쪽에는 천하를 평정할 듯 청화산이 우뚝 자리해 있으며 북으로는 병풍을 두르듯 백학산과 해망산이 팔 벌려 비안을 안고 있다. 멀리 팔공산에서 발원한 위천의 물줄기를 휘감아 받아들이고, 금성산의 정기가 녹아 흐르는 쌍계천과 의성읍의 오토산 기운을 머금은 남대천 강줄기를 이곳 비안에서 한데 모아서 아우르고 버무려 비안 고을의 들판마다 기름진 젖줄이 된다. 이는 오곡을 풍성하게 하고도 남음이 있어 아래로 흐르면서 구천 벌판과 안계평야를 적시며 용이 꿈틀대듯 휘감아 굽이굽이 흐른다.
비안은 현재 의성군의 전신인 비안현 이였던 곳으로 당시 비안현은 1423년(세종5년)에 비옥현과 안정현이 흡수되면서 비안현이라 불리어지게 됐다.
17세기 초에 현 의성군 행정 구역 내에 의성현과 비안현으로 나누어져 있다가 1895년(고종32년) 전국 고을이 조정될 때 의성군과 비안군으로 개편되면서 비안군은 한때 상주와 예천까지 관장했던 큰 군세를 이루는 때가 있기도 했다.
당시 번성했던 비안의 흔적은 대부분 사라졌지만 아직도 남아있는 여러 곳의 흔적을 살펴보면 한때 찬란했던 문화와 역사를 조금은 느낄 수 있다.
먼저 청동기 문화를 읽을 수 있는 고인돌과 선돌, 성혈암이 여러 곳에서 100기가 넘게 볼 수 있어 아주 오래전부터 부족이 터를 잡고 살았음을 알 수 있고, 17세기 초에 건립된 것으로 보이는 비안향교가 비안면과 경계지점인 안계면 교촌리에 오랜 세월을 참아온 듯 아담하게 자리하고 있다.
비안면 동부리에는 굽이치는 위천을 내려다보며 날아갈듯 한, 한 폭의 그림 같은 정자가 절벽위에 있는데 이것이 바로 병산정이다.
고려 문화시중을 역임하고 벽상공신으로서 병산군에 봉해졌던 박우(朴瑀)의 묘제를 지내던 곳으로 공은 비안(병산)박씨의 일세가 되는 중시조이며 고려 때 비안 호족으로 성세를 누려왔다.
공의 후예로서 조선 세종조에 이조참판 대사헌 안동대도호부사를 지내고 청백리에 녹선 된 박 서생(朴瑞生)은 세종을 도와 화폐경제로 전환을 위한 금납세제와 시장경제 형성을 제창하고 농사를 위한 수차를 손수 제작했고 후생과 실학정치를 실천한 대선각자를 배출하기도 했다.
1880년(고종17년)경에 학문과 의로 후학을 가르치고 예의범절을 힘쓰신 지암 김재경 공의 학덕을 기려 후학들이 세운 숭덕사(崇德祠)가 비안면 옥연1리에 위치하고 있으며 이와 함께 1752년(영조28년)에 후학을 길러내기 위해 창건한 백학 서당이 비안면 이두2리에 소재하고 있다.
이렇게 오래전 역사부터 충과 효와 예를 강조한 후학들을 배출한 이유 때문인지 나라가 어려움에 처했을 때마다 나라를 위해 목숨을 초개와 같이 버리신 인물들이 많다.
임진왜란 때 향병을 인솔하고 용감한 전투를 치루고 많은 공을 세운 박사숙(朴嗣叔)과 임란 때 의병장으로 활동했고 싸움에서 장렬이 전사해 머리는 적이 베어가고 시신만 말가죽에 싸여 돌아와 죽은 후에 나라에서 호조좌랑을 증하게 된 백공 김희공(金喜公)과 이름을 나열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의병활동을 하신 분들이 많다.
이후 일제시대에 와서도 독립운동을 선도한 애국투사 현호 박석홍 선생이 있고 경북도내에서 최초로 3.1 만세운동을 일으킨 곳이기도 하다.
당시의 정신을 기리기 위해 현재 비안면 서부리의 목단봉 주변에 3.1독립 만세운동 기념탑과 공원이 조성돼 있다.
비안에는 잘 보존된 문화재를 여러 곳 볼 수 있는데 산제리에 위치한 화장산성은 1592년(선조)에 축조된 것으로 추정되며 임진란 때 의병의 은신처로서 자연지형을 잘 이용한 요새지로서 비안과 안평 신평면의 경계지점에 축조돼 있으며 규모가 크며 아직도 그 흔적이 많이 남아 있다.
화장산성에 인접해 산중턱에 비밀스러운 만장사(卍藏寺)라는 사찰이 구름위에 보일 듯 말 듯 자리하고 있는데 이 사찰은 신라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미륵불상을 10년 전 발굴 복원해 경북도 지정문화재로 지정돼 있으며 갈수록 찾는 사람이 많고 경관이 수려해 명승지로 손색이 없을 것이다.
이곳 만장사에서 산등성이를 하나 넘으면 4㎞ 거리에 자락리 해망산 정상 절벽에 석굴사원인 석불사(石佛寺)가 있다.
자연 석굴을 법당으로 한 보기 드문 곳으로 지방문화재로 지정돼 있으며 산꼭대기에 'ㄱ'자형의 거대한 절벽이 병풍처럼 둘러 싸여 있어 신비스러움을 더하고 있다.
이밖에도 국도에 인접하고 있어 쉽게 접할 수 있는 장춘리의 석조비로자나불좌상(경북도문화재 304호)이 있고 용천사 사찰과 구연석불, 후천석불, 자락리 석조여래좌상, 구천서원, 백천서원, 병호서원, 경덕사 등 수많은 유적이 있을 뿐 아니라 나라를 위해 온몸을 바치신 훌륭한 인물들이 셀 수 없을 정도로 많고 그들을 기리기 위한 유적비가 유별나게 많은 곳이기도 하다.
이렇게 역사의 숨결이 흐르는 비안에 최근에는 굽이쳐 흐르는 위천을 중심으로 사람들이 찾는 고을 만들기 사업이 한창이다.
우선 봉양을 지나 비안의 경계지점에 들어서면 얼마 전 조성한 항아리 탑과 커다란 장승이 오는 사람에게 인사를 건넨다.
그곳에서 조금 지나 백사장이 펼쳐진 위천의 고수부지에는 파릇파릇한 기운이 한창인데 곧 봄이면 만발하게될 유채꽃과 청보리를 수만평 식재해 볼거리와 관광거리를 만들고 있다.
또한 면 소재지 앞 고수부지에도 수만평의 청보리를 식재해 봄을 기다리고 있다.
이곳 강모래는 오염이 적어 강조개가 많이 서식하는데 여름이면 피서와 조개 잡는 사람들로 비안강을 찾는 이가 많아 또 다른 풍경을 만들기도 한다.
아직 그리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강을 추억하고 조용한 산사에서 마음을 다독이고 싶은 사람이면 이곳 비안이 제격이라 여겨지며 한번쯤 걸음을 권하고 싶다.
정휘영기자 <일간대구경북 2009년 1월 22일>

출처 : 日刊 대구경북
글쓴이 : 정휘영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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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곡 가산산성  (0) 2008.06.23

 


 
林慶業임경업 

 

조선 중기의 명장(名將)으로, 본관은 평택(平澤), 자(字)는 영백(英白), 호(號)는 고송(孤松)이다. 판서(判書) 임정(林整)의 7대손으로, 임황(林 )의 아들이다. 그의 출생지에 대해 충주 달천(達川)과 평안도 개천(价川)이 언급되고 있으나, 충북도지(忠北道誌)와 원주시 부론면 손곡리 평촌마을의 전설과 현지 주민, 그리고 임씨 문중에서는 손곡리 태생임을 밝히고 있다. 1618년(광해군 10) 무과(武科)에 합격하여 무인(武人)으로서의 길이 열렸다. 인조반정(仁祖反正)이 성공한 뒤에 이괄(李适)의 난(亂)이 일어나자 관군으로 출전하여 공을 세워 진무원종공신(振武原從功臣) 1등이 되었다. 1627년 정묘호란 때 중군(中軍)으로 강화도까지 군사를 몰아갔으나 조선(朝鮮)과 후금(後金)은 이미 형제의 의(義)를 맺은 뒤였다. 당시 건주위(建州衛)에서 일어난 후금은 명(明)나라를 합병할 야심을 갖고 있었고, 조선은 임진왜란의 원조와 대의명분 때문에 정객(政客)이나 친명파(親明派)들은 후금과 싸울 각오를 하고 있는 형편이었다. 이때 명나라 장군 공유덕(孔有德)과 경중명(耿仲明)이 후금으로 투항하였고, 이들 반장(叛將)을 토벌하기 위해 명나라에서 조선에 원병(援兵)을 청했을 때 임경업이 나아가 토벌하여 명나라 숭정황제(崇禎皇帝)는 총병(摠兵) 관직을 주기까지 하였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丙子胡亂)이 발발하자 의주부윤(義州府尹)으로 있으면서 압록강 맞은 편의 봉황산(鳳凰山)에 봉화대를 설치하고 백마산성(白馬山城)을 굳게 지켜 적의 진로를 둔화시키는데 진력하였다. 1638년 평안감사(平安監司)가 되어 안주(安州)에 병영(兵營)을 설치하고 청나라의 동태를 살폈다. 1640년 청나라가 명나라의 금주(錦州)를 치게 되어 조선에 원병을 청해오자, 조정에서는 임경업을 출전하게 했다. 그러나 친명파(親明派)인 그는 대릉하 앞 석성도(石城島) 근처로 몰래 사람을 보내어 조선의 형세를 알리고 명군(明軍)과 협력하여 청군을 치려고 계획까지 세웠다. 이러한 모의는 청군에게 탄로되어 책망이 대단하여지자 조정은 그를 잡아 올리라는 엄중한 명령을 내렸다. 그는 머리를 깎고 장삼(長衫)을 걸친 후 스님 행세를 하였고, 한양 마포를 출발하여 중국 해풍도(海豊島)에 표착하여서는 명나라에서 평로장군(平虜將軍) 벼슬을 내리고 4만의 병사를 이끌도록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청나라는 마침내 북경(北京)을 함락시켰고, 청 태종은 산해관(山海關)으로 들어가니 임경업은 석성(石城)에 진을 치고 있으면서 재기의 기회를 노렸다. 남경으로 옮긴 명나라는 곧 망하였고, 1645년 정월 명나라의 항장(降將) 마홍주(馬弘周)에게 잡혀 북경으로 압송되어 청나라 황제는 임경업에게 편발(編髮)하고 청에 귀순하라고 했으나 끝까지 버티다 북경옥(北京獄)에 갇히게 되었다. 1646년 6월 죄인의 몸으로 본국에 송환되어 그해 6월 20일 심기원(沈器遠) 옥사(獄事)의 연루와 자기 나라를 배반하고 남의 나라에 들어가서 국법을 어겼다는 죄를 뒤집어쓴 채 형리(刑吏)의 모진 매에 이기지 못하여 마침내 숨졌다. 1697년(숙종 23) 12월 숙종(肅宗)의 특명으로 복관(復官)되었고, 충주 충렬사(忠烈祠) 등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충민(忠愍)이다. 원주시 부론면 손곡리에 그의 추모비가 건립되었는데, 이 비는 임경업 장군의 뜻을 기리기 위하여 1968년 8월 원주문화원에서 고증을 찾아 장군의 출생지인 생가 터에 세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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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직활동〕

1618년(광해군 10) 아우 사업(嗣業)과 함께 무과에 합격, 함경도 갑산으로 추방(秋防 : 새로이 무과에 합격한 자에게 관직을 제수하기 전에 의무적으로 부과했던 일정기간의 赴防)을 위해 나갔다가 1620년 삼수의 소농보권관(小農堡權管)으로 부임해 군량과 군기 구비에 공을 세워 절충장군의 품계에 올랐다.

이듬해 행첨지중추부사 겸 우림위장(行僉知中樞府事兼羽林衛將)을 거쳐 방답첨사(防踏僉使)로 임명되었고, 1626년 전라도 낙안군수로 부임하였다.

1631년 검산산성(劒山山城) 방어사에 임명되어 정묘호란 이후 퇴락한 용골(龍骨)·운암(雲暗)·능한(凌漢) 산성 등을 수축했으며, 정주목사에 승진하였다. 그의 이와 같은 활약에도 불구하고 정묘호란 이후 청천강 북쪽인 서북로의 군사력이 큰 타격을 입었기 때문에 당시 조정에서는 한 때 청북 포기의 의논이 일어났다.

즉, 그 방어선을 청천강 이남으로 후퇴시켜 안주 중심의 방어를 펴는 동시에 강도(江都)와 남한산성(南漢山城)을 수축해 수도권 방어에 전념하려 하였다. 이에 대해 청천강 북쪽의 백성들은 맹렬한 반대를 했는데, 이와 같은 청북인의 반대운동을 임경업이 뒤에서 조종했다 하여 탄핵받고 구금되었으나 곧 석방되었다.

1633년 2월 기복(起復 : 상중에 벼슬에 나감.)해 청북방어사(淸北防禦使)에 임명되고 곧 안변부사를 겸하였다. 이 때 백마산성(白馬山城)에 웅거하면서 이를 수축하고 방비를 튼튼히 하였다.

그 해 4월 명나라의 반장(叛將)인 공유덕(孔有德)·경중명(耿仲明)이 우가장(牛家莊) 앞 바다를 경유해 구련성(九連城)으로 들어가 후금군과 통하려고 하였다. 이에 의주부윤 윤진경(尹進卿)과 함께 이 사실을 명나라 대도독 주문욱(朱文郁)에게 연락해 이를 협격, 섬멸했으나 명나라 장군간의 싸움으로 반장을 사로잡는 데는 실패하였다.

이 공로로 명나라 왕으로부터 금화(金花)와 많은 상을 받았고, 명나라의 총병(摠兵) 벼슬을 받아 이 때부터 임총병으로 명나라에도 크게 알려졌다.

그 뒤 아버지의 탈상을 위해 고향에 왔다가 1634년 부호군에 복직되고, 곧 의주부윤 겸 청북방어사에 임명되었으며 의주진병마첨절제사까지 겸하였다. 그러나 그의 근거지인 백마산성을 방어하기에는 인적·물적 어려움이 많았다.

그리하여 그는 조정으로부터 백금(白金 : 銀을 말함.) 1,000냥과 비단 100필을 받아 중국 상인과 무역을 해 이(利)를 축적하는 동시에 유민(流民)을 모아 12곳에 둔전을 개설해 안집해 살도록 하였다. 이 공로로 1635년 가의대부(嘉義大夫)에 올랐다. 그러나 무역거래가 지나치게 이익을 추구했다는 책임을 물어 파직되었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송골·봉황의 봉화대에서 연락을 받고 산성을 굳게 지켜 적의 진로를 둔화시키는 데 진력하였다.

청군은 임경업이 지키는 백마산성을 포기하고 직접 서울로 진격했으며,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피했으나 역부족이었다. 결국, 이듬해 정월에 주화론자인 최명길(崔鳴吉) 등의 주장으로 굴욕적인 화의를 성립시켰다.

〔반청활동〕

이에 수군장(水軍將)에 발탁된 그는 철저한 친명배금파(親明排金派)로서 선봉에 서는 것을 주저하며 명나라의 도독 심세괴(沈世魁)에게 내통, 그들의 피해를 최소한으로 줄이게 하였다.

한편, 피폐한 의주의 물적^인적 자원을 확보하기 위해 상인들을 다시 심양에 보내 물화 교역으로 이를 해결하려다가 청인에게 발각되어 인조의 노여움을 사, 평안도 철산으로 유배되었다.

이후 청나라에서는 명나라를 치기 위한 병력의 동원을 여러 차례 다시 요청해왔으나 조정에서는 이에 응하지 않았다. 청나라는 이것이 조약에 명시된 사항이라면서 질책하였다.

비변사에서는 임경업의 죄를 용서하고 마침내 조방장(助防將)으로 기용해 그로 하여금 명나라를 치도록 하였다. 그는 군사 300명을 이끌고 구련성으로 나가 진격하는척하면서 군사동원과 군량조달의 어려움을 들어 심양으로 나가 이 사명을 완수하였다.

이 공로로 인조로부터 숙마(熟馬) 한 필이 하사되고 의주부윤으로 복귀했다가 9월 평안병사·수군절제사 겸 안주목사로 승진하였다.

1639년 말부터 청나라는 명나라의 근거지인 금주위(錦州衛 : 지금의 盛京지방)를 공격하기 위해 다시 병력 동원과 군량미의 원조를 강력하게 요구하였다. 조정에서는 청나라의 요청에 의해 임경업을 주사상장(舟師上將), 황해병사 이완(李浣)을 부장(副將)으로 삼았다.

이듬해 4월 그는 전선(戰船) 120척, 격군(格軍 : 조선시대 水夫의 하나로 沙工의 일을 돕던 사람) 1,323명, 사수(射手) 1,000명, 포수(砲手) 4,000명, 화약 1만근, 철환(鐵丸) 4만 2000개, 조총(鳥銃) 4,170정, 군량미 1만 7160석, 그리고 세공청국미(歲貢淸國米) 1만석을 싣고 안주를 출발해 금주위로 향하였다.

한편, 재상 최명길과 밀의해 승려 독보(獨步)를 보내 이 사실을 등주의 명군문 홍승주(洪承疇)에게 통고하고 애써 싸우게 하지 않았다. 그 해 7월 청나라는 범문정(范文程)을 통해 심양에 있는 세자에게 항의하였다.

그들은 임경업의 함대가 전진시키려 하나 전진하지 않고, 세폐미를 요하 입구까지 운반하라고 했으나 거절하고, 또한 명나라 배를 만났으나 싸우지 않았으며, 배가 표류했다고 속여 두 사람을 몰래 명나라로 보내 내통했으므로 우리 조정과 짜고 명나라와 내통한 것이라고 힐책하였다. 소현세자(昭顯世子)는 모르는 사실이라고 극부 부인하였다.

이에 따라 범문정은 그들 황제의 칙서를 가지고 재삼 임경업을 달랬으나 듣지 않았다. 7월 14일 임경업은 부장 이완을 본국으로 돌려보내고 나머지 50척의 배와 1,500명의 선군 및 격군을 이끌고 개주위(蓋州衛)에 이르러 배에 있던 세폐와 군량미를 모두 버리고, 다시 해주위(海州衛)·이주위(伊州衛)·금주위·대승보(大勝堡) 등지로 진주했다.

그러나 다만 청나라 장수의 지휘에 따라 진퇴를 같이 했을 뿐, 그 동안 한번도 명군과 싸우지 않았다.

〔명나라로의 망명〕

1641년 정월 임경업은 배를 버리고 육로로 요양·심양·압록강까지 청나라의 허와 실을 일일이 정탐하면서 서울로 돌아왔다. 청나라에서는 그가 명나라와 내통한 사실을 눈치챘으나 확증을 잡지 못해 고민하였다.

또한 그 해 10월에는 정주의 고충원(高忠元)이 심양 감옥에서 이 사실을 목격했다고 증언해 그가 청나라에 협력하지 않은 죄상이 드러났다.

청나라에서 이러한 확증으로 압력을 가하자 조정에서는 형조판서 원두표(元斗杓)에게 임경업을 체포해 청나라로 압송하도록 하였다. 압송 도중 11월 6일 일행이 황해도 금천군 금교역(金郊驛)에 이르렀을 때 임경업은 밤을 틈타 도망하였다.

그는 붙잡히기 전에 심기원(沈器遠)을 만나 그에게서 은 700냥과 승복(僧服) 및 체도(剃刀)를 얻어 기회를 노리다가 도망치는 데 성공한 것이다.

그는 명나라로 망명할 기회를 잡기 위해 처음 양주 회암사(檜巖寺)에 맡겨두었던 승복을 찾아 포천과 가평의 경계지대에서 중이 되어 양구현의 어느 골짜기에서 초막을 치고 겨울을 지냈다.

이듬해 정월 양양으로 갔으나 복병 때문에 뜻을 이루지 못하고 다시 양구로 돌아왔다가 사잇길로 상원(祥原)으로 갔다가 다시 회암사로 숨어들어 탈출의 기회를 노렸다. 그 동안 조정에서는 청나라의 독촉에 못 이겨 그의 처를 비롯해 형제 등 가족을 체포해 청나라로 압송했으며, 그의 처 이씨는 이듬해 9월 심양옥에서 자살하였다.

한편, 임경업은 1643년 5월 26일 김자점의 종이었던 상인 무금(無金, 일명 孝元)의 주선으로 배 한 척과 사공 10명, 그리고 그의 군관이었던 이형남(李亨男)·박수원(朴守元 : 일명 車自龍)과 일찍이 사귀어온 임성기(林成己)·최수명(崔守明)의 두 승려(일설에는 知明·小明이라고도 함)를 대동하고 상선을 가장해 서울의 마포(麻浦 : 일설에는 泰安이라고도 함)를 출발해 황해로 나갔다.

그 해 가을 중국 제남부(濟南府)의 해풍도(海豊島)에 표착하였다. 그곳에서 명나라의 수비대 군관인 곽이직(郭以直)의 조사를 받고 등주도독(登州都督) 황종예(黃宗裔) 군문의 총병인 마등고(馬騰高)의 휘하에 들어갔다. 명나라에서는 그에게 평로장군(平虜將軍 : 일설에는 부총병)을 내리고 4만의 병사를 이끌도록 했다 한다.

그러나 청나라가 마침내 북경(北京)을 함락하고 청 태종이 산해관(山海關)으로 들어가니 도독 황종예마저 남경으로 도망쳤다. 임경업은 마등고와 함께 석성(石城)으로 들어가 재기의 기회를 노렸다. 명나라 조정은 남경으로 갔으나 그곳도 곧 함락되자 마등고도 청나라에 항복하고 말았다.

한편, 본국에서는 후원자인 심기원의 옥사가 일어나 임경업이 연루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그는 갈 곳을 잃어버렸다. 임경업은 이곳에서 탈출하기 위해 독보에게 배의 주선을 부탁했으나 실패로 돌아갔다.

그리하여 마침내 그의 부하였던 장련포수(長連砲手) 한사립(韓士立)의 밀고로 1645년 정월 명나라의 항장(降將) 마홍주(馬弘周)에게 잡혀 북경으로 압송되었다.

청나라는 당시 섭정자 예친왕(睿親王)이 집권하면서 대사령을 내리고 임경업에 대해서도 재략(才略)을 아껴 과거의 일을 불문에 붙이려 하였다. 그러나 역관 정명수(鄭命壽)·이형장(李馨長), 그리고 조신 김자점 등 반역 부청배(附淸輩)가 결탁해 본국으로 송환되었다.

〔조선으로의 송환과 죽음〕

1646년 6월 임경업은 죄인이 되어 사은사 이경석(李景奭)에 의해 본국으로 송환되었으며, 18일 서울에 도착해 인조의 친국을 받았다. 조정에서는 임경업을 심기원의 옥사에 관련시키려 하였다.

그는 심기원으로부터 은 700냥과 승복 및 체도를 받은 것은 시인했으나 역모 가담은 극력 부인하였다. 그러나 임경업이 달아날 당시 형조판서로 있다가 그 사건으로 파직된 원두표와, 임경업과 지난날 가장 가까웠던 김자점이 그의 처형을 주장하였다.

김자점은 임경업이 평안병사 겸 의주부윤으로 있을 때 도원수로서 서북면의 방어에 전 책임을 졌고 임경업은 막하로서 그를 따랐다. 또한 임경업이 상인 잠송사건을 일으켰을 때에도 적극적으로 그를 옹호해 형벌을 면하게 해준 장본인이었다. 그런데 임경업을 죽여야 된다고 주장한 데는 다음과 같은 이유가 있었다.

결국, 임경업이 문초를 받으면 무금의 처도 문초해야 되고 무금의 처가 김자점에게 알렸다고 하면 김자점도 임경업의 탈출을 도운 결과가 되며, 그러면 심기원의 당으로 몰려 자기도 죽어야 된다는 논리가 성립되기 때문이었다.

그 해 6월 20일 임경업은 심기원사건의 연루 및 자기 나라를 배반하고 남의 나라에 들어가서 국법을 어겼다는 죄를 뒤집어쓴 채 형리(刑吏)의 모진 매를 이기지 못해 마침내 숨지고 말았다. 그의 나이 53세였으며 고향인 충주의 달천에 장사지냈다.

〔평 가〕

임경업은 당시 친명반청의 사회분위기와 함께 우국충정에 뛰어난 충신이요 무장이었다. 그러나 가장 불행한 장수였다. 명성을 떨치면서도 한번도 청나라와 싸움다운 싸움을 해보지 못한 불운의 명장이었다.

뿐만 아니라 당시 사회분위기대로 의리와 명분에 투철하고 고집 센 무장이었지만, 당시 실제적인 국제정세 즉 역사의 흐름에는 어두운 장군이었다.

그러나 이는 그의 무능이 아니라 이를 충족시켜주지 못한 그의 조국이 무능했던 것이다. 그는 이미 망해 가는 명나라와 힘을 합쳐 청나라에 저항해 병자호란의 부끄러움을 씻으려 했지만 조국이 이를 뒷받침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의 생애는 당시의 국민이나 조정의 감정과 함께 충의^지조, 그리고 용기 등으로 점철되어 민족의 마음속에 자리했으니 뒤에 그의 무용담을 소재로 한 고대소설 〈임경업전〉이 널리 읽혀졌던 것으로도 알 수 있다.

1697년(숙종 23) 12월 숙종의 특명으로 복관되었다. 충주의 충렬사(忠烈祠), 선천의 충민사(忠愍祠), 백마산성의 현충사(顯忠祠) 겸천(兼川)의 충렬사 등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충민(忠愍)이다.

≪참고문헌≫ 仁祖實錄
≪참고문헌≫ 瀋陽狀啓
≪참고문헌≫ 瀋陽日記
≪참고문헌≫ 恕菴集
≪참고문헌≫ 宋子大全
≪참고문헌≫ 明陪臣考
≪참고문헌≫ 林忠愍公實記
≪참고문헌≫ 朝鮮名將傳
≪참고문헌≫ 燃藜室記述
≪참고문헌≫ 顯忠祠誌
≪참고문헌≫ 林慶業傳(京枝本)
≪참고문헌≫ 林慶業(張德順, 韓國의 人間像 2, 新丘文化社, 19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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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종 太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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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나라의 제2대 황제

아이신줴뤄 홍타이지(愛新覺羅皇太極[애신각라황태극], 만주어:아이신교로 홍타이지 ,1592년 11월 28일 ~ 1643년 9월 21일)는 청나라의 2대 황제(재위: 1626년 ~ 1643년) 이다. 아바하이(阿巴海)라는 이름을 쓰기도 하며 부황인 천명제가 세운 후금을 이어받아 1636년 나라 이름을 청(清)으로 바꾸었다.

 


  중국 청나라의 제2대 황제(1592~1643). 이름은 황태극(皇太極). 태조(太祖) 누르하치(奴兒哈赤)의 여덟째 아들로, 몽골 등을 복속시키고 나라의 기틀을 세웠다. 재위 기간은 1626~1643년이다.

여러 국가 조직들을 정비하는데 힘써 청나라의 기초를 확립하였고, 내몽골을 평정한 이후 주변의 여러 나라들을 침공, 정복하여 속국으로 삼았다. 1636년 12월에는 병자호란을 일으켜 조선의 항복을 받아냈다. 중원 본토에도 침공을 하였지만, 중원 제패의 꿈은 끝내 달성하지 못한 채 뇌출혈로 죽었다.


 

龍骨大용골대  

 

 

 융알다이(英俄爾岱 : 조선의 각종 기록에는 용골대로 표기

중국 청나라의 장군(?~?). 본명은 영고이대(英固爾垈). 인조 14년(1636)에 사신으로 와서, 청나라 황제의 존호를 쓰고 군신의 의를 맺을 것을 요구하였으나 거절당하자, 그해 12월 10만 대군을 거느리고 쳐들어와 병자호란을 일으켰다.


 

馬夫大마부대

 

  마푸다馬福塔, 瑪福培 : 조선의 각종 기록에는 마부대로 표기

 

 

병자호란 때 조선에 침입한 중국 청나라의 장군. 1636년(인조14)의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조선에 침입한 장수로서 청나라의 전신인 후금(後金) 때부터 사신으로 여러 차례 조선을 왕래했다. 1635년에는 후금의 친서(親書)를 가지고 조선에 오기도 하였다. 병자호란 때는 청태종(淸太宗)의 막료(幕僚)로서 행패가 심하였다. 

 

陽九記事(奎11509), 編者未詳.
          4卷 4冊 筆寫本 35×25.7cm.
          四周單邊 半郭:24×17cm.
          有界 10行 20字.
          版心:上下紋魚尾.

     丙子胡亂과 그후 淸과 강화한 전말을 기록한 책. 병자호란 이전 淸使가 내왕하는  등
   明·朝鮮·淸 3국의 외교관계에서부터 丙子胡亂 후의 여러사실도  기술했다.  序·跋이
   없는 編者 미상의 필사본으로 1662년(顯宗 3)경에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丙子胡亂
   의 과정을 凝川日記·朝野記聞·丙子錄·日月錄 등에서 뽑아, 권  {1}:丙子胡亂,  丁酉
   南漢出城, {권2}:丙子胡亂, 南漢出城, {권3}:丙子胡亂, 江都敗沒,  {권4}:그후의  사실
   등으로 엮었다. 각권의 대강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권1}:1631년(仁祖  9)  淸兵들이
   압록강 일대에 來侵하여 노략질한다는 사실을 적고, 이에 李敏求가 明兵과  합세공격해
   야 한다는 상소와, 禁聖龜가 조정에서 출병해 달라는 상소를 올렸다. 1632년(仁祖  10)
   에는 胡差使新道里등이 黃金·白金 각 萬냥, 五色布 5만, 白苧布 1만, 精兵 3만,  戰馬
   3천필 등을 요구해 온 사실이 기재되었다. 이를 申得淵이 접대하여 끝내  거절하여  돌
   려 보냈다. 1636년 龍骨大가 왔고 또 李浚·林慶業 등이 狀啓로 淸의 來侵을  예고하였
   다. 이에 崔鳴吉은 主和를 다시 들고 나왔다. 동년 12월 9일 淸兵 12만은 압록강을  건
   너, 16일에는 南漢山城을 포위했다. 仁祖와 조정대신은 江華島로 갈 겨를이 없어  南漢
   山城에서 對峙하였다. 南漢山城에서 金尙憲 등의 斥和派와 崔嗚吉 등의 主和派가  예리
   하게 대립, 입씨름만 벌리고 있었다. {권2}:아무 준비없는 南漢山城은  기근이  격심하
   여 王자신도 「無寢具 不解衣而寢 御供只用鷄一脚」 한 참상을 기재하고 있다.  또  적
   은 강간·방화·약탈을 수없이 자행하고 있었다고 했다. 이런 와중에서 主和派의  주장
   이 관찰되어 洪瑞鳳 등이 강화를 청하였고, 이에 淸은 대략 다음과 같은  서신을  보내
   왔다. 여기에서 淸太宗은 자신을 「朕」·「皇帝」, 仁祖를  「爾」·「朝鮮國王」이라
   고 표현하고 있었다. 이에 조정에서는 崔嗚吉·李植·張維 등에  撰書케  하여  答書를
   보냈다. 내용은 치욕을 극한 글을 보냈으나, 淸은 兄弟의 표현 등 미흡한 점이  많아서
   이것을 받지 않아서 다시 撰書하여 보냈다고 기재되어 있다. 이로써 和議를  맺고,  昭
   顯世子·鳳林大君 이하 많은 斥和派의 인사들을 볼모로 보내고 禮物도 함께 보낸  내용
   을 적었다. 이 和議의 전말뒤에는 江華島 및 각지에서 활약한  忠義士에  관한  사실을
   기록하였다. {권3}:江華島의 官軍의 敗戰을 첫머리에 기재하고 각지의 義兵 활동과  招
   募 사실 등을 기록하였다. 그리고 「江都殉節人」항엔金尙容·權順長·金益兼 등의  抗
   戰·殉國 및 간략한 약력을 적고, 忠烈祠에 配享한 전말을  기재하였고,  「殉節婦女」
   항엔 尹宣擧妻 李氏, 李聖求妻 權氏, 李廷龜妻 및 孫一和 등의 자결한  내용을  기재하
   였다. 「諸將士事蹟」항엔 忠淸監司 鄭世規, 知兵使 李義培, 全羅監司 李時昉,  平安監
   司 洪命耉 등 많은 장수들의 활약과 그 공로등을 略記하였다.  그리고  「亂後時事」항
   은 亂後의 제반 사실을 적은 것이다. 여기엔 江華島에서 책임을 다하지 못한  장수들의
   失律의 죄에 관한 관계 사실을 기술하였고, 臺諫에서 主和派 張維, 江華檢察副使  李敏
   求가 왕을 江華島로 移駕하지 못했다고 賜死해야 한다는 등의 내용이 있다. 또  李景奭
   이 撰한 三田渡碑文과 그 내력이 기재되어 있다. 끝에는 柳琳將軍의 記事가  있다.  柳
   琳은 화의가 성립된 후 淸의 요청으로 淸軍과 함께 桭島를 공략,  明軍을  격파했었다.
   이 공로로 瀋陽에 초청받았으나 이를 거절하였고, 그 때문에 白馬城에  圍籬安置되었던
   것이다. {권4}:첫머리에는 승려 獨步에 관한 記事가 나온다. 獨步는  明都督  沈世魁·
   洪承疇의 휘하에 있을 때, 淸이 燕京을 침범하자 瀋陽에 잠입하여 적정을  정탐하였다.
   崔鳴吉은 丙子胡亂 직후 獨步를 明에 보내 胡亂의 전말을 알린 전후  사실이  소재되어
   있다. 다음은 林慶業장군에 관한사 실을 기록했다. 林慶業장군은 胡亂에 공을  세웠고,
   그후 攻明의 전초로 淸이 가島의 明軍을 섬멸코자 할 때 水軍將이 되었으나,  明과  내
   통, 피해를 최소로 줄이게 하였다. 이어 明의 쇠망과, 볼모로 간  朝鮮人士들의  사정,
   그리고 金尙憲과 崔鳴吉의 主和·斥和에 관한 논쟁 등을 수록하였다. 그리고  吳達濟·
   尹集 등 三學士의 사정과 世子·風林大君 및 嬪宮이 燕京을 왕래한 동정  등을  1661년
   까지 기록하였다. 이상의 내용은 丙子胡亂에 관한 전후 사실을 망라한 것이다.  丙子胡
   亂 이후 朝鮮이 韓末까지 淸을 宗主國으로 섬기게 되었고 그로 하여 淸의 來侵을  막았
   었다. 당시의 主和·斥和의 대립을 살피는 데《南漢紀略》·《丙子錄》등과 함께  좋은
   문헌이 되어 준다.
  

 

 


 

 淸 史 稿 卷 二

 

 

    本 紀 二

 

 

      太 宗 本 紀 一

 

 

 

    太 宗 應 天 興 國 弘 德 彰 武 寬 溫 仁 聖 睿 孝 敬 敏 昭 定 隆 道顯 功 文 皇 帝 , 諱 皇 太 極 , 太 祖 第 八 子 , 母 孝 慈 高 皇 后 。上 儀 表 奇 偉 , 聰 睿 絕 倫 , 顏 如 渥 丹 , 嚴 寒 不 栗 。 長 益 神勇 , 善 騎 射 , 性 耽 典 籍 , 諮 覽 弗 倦 , 仁 孝 寬 惠 , 廓 然 有大 度 。

    天 命 元 年)1616) , 太 祖 以 上 為 和 碩 貝 勒 , 與 大 貝 勒 代 善、 二 貝 勒 阿 敏 、 三 貝 勒 莽 古 爾 泰 為 四 大 貝 勒 。 上 居 四 ,稱 四 貝 勒 。

 


    太 祖 崩 , 儲 嗣 未 定 。 代 善 與 其 子 岳 託 、 薩 哈 廉 以上 才 德 冠 世 , 與 諸 貝 勒 議 請 嗣 位 。 上 辭 再 三 , 久 之 乃 許。

 


    天 命 十 一 年 丙 寅 九 月 庚 午 朔 , 即 位 於 瀋 陽 。 詔 以明 年 為 天 聰 元 年 。 初 , 太 祖 命 上 名 , 臆 制 之 , 後 知 漢 稱儲 君 曰 「 皇 太 子 」 , 蒙 古 嗣 位 者 曰 「 黃 台 吉 」 , 音 並 闇合 。 及 即 位 , 咸 以 為 有 天 意 焉 。

 


    辛 未 , 誓 告 天 地 , 以 行 正 道 , 循 禮 義 , 敦 友 愛 ,盡 公 忠 , 勗 諸 大 貝 勒 等 。 甲 戌 , 諭 漢 官 民 有 私 計 遁 逃 及令 奸 細 往 來 者 , 雖 首 告 勿 論 , 後 惟 已 逃 被 獲 者 論 死 。 丙子 , 諭 曰 : 「 工 築 之 興 , 有 妨 農 務 , 前 以 城 郭 邊 牆 , 事關 守 禦 , 有 勞 民 力 , 良 非 得 已 。 茲 後 止 葺 頹 壞 , 不 復 興築 , 俾 民 專 勤 南 畝 。 滿 洲 、 漢 人 , 毋 或 異 視 , 訟 獄 差 徭, 務 使 均 一 。 貝 勒 屬 下 人 , 毋 許 邊 外 行 獵 。 市 稅 為 國 費所 出 , 聽 其 通 商 貿 易 , 私 往 外 國 及 漏 稅 者 罪 之 。 」 丁 丑, 令 漢 人 與 滿 洲 分 屯 別 居 。 先 是 漢 人 十 三 壯 丁 為 一 莊 ,給 滿 官 為 奴 。 至 是 , 每 備 禦 止 留 八 人 , 餘 悉 編 為 民 戶 ,處 以 別 屯 , 擇 漢 官 廉 正 者 理 之 。 設 八 固 山 額 真 , 分 領 八旗 。 以 納 穆 泰 為 正 黃 旗 固 山 額 真 , 額 駙 達 爾 漢 為 鑲 黃 旗固 山 額 真 , 額 駙 和 碩 圖 為 正 紅 旗 固 山 額 真 , 博 爾 晉 為 鑲紅 旗 固 山 額 真 , 額 駙 顧 三 泰 為 鑲 藍 旗 固 山 額 真 , 托 博 輝為 正 藍 旗 固 山 額 真 , 徹 爾 格 為 鑲 白 旗 固 山 額 真 , 喀 克 篤禮 為 正 白 旗 固 山 額 真 。 又 設 十 六 大 臣 , 贊 理 庶 政 , 聽 八旗 訟 獄 。 又 設 十 六 大 臣 , 參 理 訟 獄 , 行 軍 駐 防 則 遣 之 。乙 未 , 蒙 古 科 爾 沁 土 謝 圖 汗 奧 巴 遣 使 來 弔 。

 


    冬 十 月 己 酉 , 以 蒙 古 喀 爾 喀 札 魯 特 部 敗 盟 殺 掠 ,私 通 於 明 , 命 大 貝 勒 代 善 等 率 精 兵 萬 人 討 之 , 先 貽 書 聲其 罪 , 上 送 至 蒲 河 山 而 還 。 癸 丑 , 別 遣 楞 額 禮 、 阿 山 率輕 兵 六 百 入 喀 爾 喀 巴 林 地 , 以 張 軍 勢 。 丙 辰 , 科 爾 沁 土謝 圖 汗 奧 巴 及 代 達 爾 漢 等 十 四 貝 勒 各 遣 使 來 弔 。 達 朱 戶征 卦 爾 察 部 , 獲 其 人 口 牲 畜 以 歸 。 明 寧 遠 巡 撫 袁 崇 煥 遣李 喇 嘛 及 都 司 傅 有 爵 等 來 弔 , 並 賀 即 位 。 甲 子 , 大 貝 勒代 善 等 大 破 札 魯 特 , 斬 其 貝 勒 鄂 爾 齋 圖 , 獲 貝 勒 巴 克 及其 二 子 並 拉 什 希 布 等 十 四 貝 勒 而 還 。

 


    十 一 月 辛 未 , 上 發 瀋 陽 迎 大 貝 勒 代 善 , 師 次 鐵 嶺樊 河 界 。 癸 酉 , 行 飲 至 禮 , 論 功 , 頒 賚 將 士 。 戊 寅 , 上還 瀋 陽 。 察 哈 爾 阿 喇 克 綽 忒 部 貝 勒 圖 爾 濟 率 百 戶 來 歸 。乙 酉 , 遣 方 吉 納 、 溫 塔 石 偕 李 喇 嘛 往 報 袁 崇 煥 , 且 遺 書曰 : 「 頃 停 息 干 戈 , 遣 使 弔 賀 , 來 者 以 禮 , 故 遣 官 陳 謝。 昔 皇 考 往 寧 遠 時 , 曾 致 璽 書 言 和 , 未 獲 回 答 。 如 其 修好 , 答 書 以 實 , 勿 事 文 飾 。 」 崇 煥 不 以 聞 , 而 令 我 使 齎還 。 卓 禮 克 圖 貝 勒 之 子 衛 徵 巴 拜 攜 其 家 屬 來 歸 。 科 爾 沁貝 勒 青 巴 圖 魯 桑 阿 爾 齋 、 台 吉 滿 珠 什 哩 各 齎 鞍 馬 牛 羊 來弔 。

 


    十 二 月 庚 子 , 禁 與 蒙 古 諸 藩 售 賣 兵 仗 。 壬 戌 , 黑龍 江 人 來 朝 貢 。

 


    天 聰 元 年(一六二七) 春 正 月 丙 子 , 命 二 貝 勒 阿 敏 , 貝 勒 濟 爾哈 朗 、 阿 濟 格 、 杜 度 、 岳 託 、 碩 托 率 兵 征 朝 鮮 。 上 曰 :「 朝 鮮 累 世 得 罪 , 今 明 毛 文 龍 近 彼 海 島 , 納 我 叛 民 , 宜兩 圖 之 。 」 復 遣 方 吉 納 、 溫 塔 石 遺 書 明 袁 崇 煥 , 言 興 師由 七 大 恨 , 並 約 其 議 和 , 及 每 歲 餽 報 之 數 。

 


    二 月 己 亥 , 以 書 招 諭 蒙 古 奈 曼 部 袞 出 斯 巴 圖 魯 。

 


    三 月 壬 申 , 阿 敏 等 克 朝 鮮 義 州 , 別 遣 兵 搗 鐵 山 ,明 守 將 毛 文 龍 遁 走 。 又 克 安 州 , 進 至 平 壤 城 , 渡 大 同 江。 朝 鮮 國 王 李 倧 遣 使 迎 師 。 阿 敏 等 數 其 七 罪 , 仍 遣 使 趣和 。 倧 懼 , 率 妻 子 遁 江 華 島 , 其 長 子 李  遁 全 州 。 阿 敏復 遣 副 將 劉 興 祚 入 島 面 諭 倧 。 倧 遣 其 族 弟 原 昌 君 李 覺 獻馬 百 匹 、 虎 豹 皮 百 、 錦 苧 各 四 百 、 布 一 萬 五 千 。 庚 子 ,與 朝 鮮 盟 , 定 議 罷 兵 。 壬 申 , 明 袁 崇 煥 遣 杜 明 忠 偕 方 吉納 等 以 書 來 , 並 李 喇 嘛 書 , 欲 釋 恨 修 好 。 惟 請 減 金 幣 之數 , 而 以 我 稱 兵 朝 鮮 為 疑 。 辛 巳 , 阿 敏 等 遣 使 奏 捷 。 乙酉 , 命 留 滿 洲 兵 一 千 、 蒙 古 兵 二 千 防 義 州 , 滿 洲 兵 三 百、 蒙 古 兵 一 千 防 鎮 江 城 。 並 諭 李 倧 曰 : 「 我 留 兵 義 州 者, 防 毛 文 龍 耳 。 」 阿 敏 等 旋 師 , 以 李 覺 歸 。

 


    夏 四 月 甲 辰 , 遺 袁 崇 煥 書 曰 : 「 釋 恨 修 好 , 固 所願 也 。 朝 鮮 自 尊 輕 我 , 納 我 叛 亡 , 我 遲 之 數 年 , 彼 不 知悔 , 是 以 興 討 。 天 誘 其 衷 , 我 軍 克 捷 。 今 已 和 矣 , 而 爾詭 言 修 好 , 仍 遣 哨 卒 偵 視 , 修 葺 城 堡 。 我 國 將 帥 , 實 以此 致 疑 。 夫 講 信 修 睦 , 必 藉 物 以 成 禮 , 我 豈 貪 而 利 此 ,使 爾 國 力 不 支 ? 可 減 其 半 。 歲 時 餽 答 , 當 如 前 議 , 則 兩國 之 福 也 。 」 書 成 , 聞 崇 煥 方 築 塔 山 、 大 凌 河 、 錦 州 等城 , 遂 罷 遣 使 , 而 以 書 付 杜 明 忠 還 。 更 責 崇 煥 曰 : 「 兩國 修 好 , 當 分 定 疆 域 。 今 又 修 葺 域 垣 , 潛 圖 侵 逼 。 倘 戰爭 不 息 , 天 以 燕 、 雲 畀 我 , 爾 主 不 幸 奔 竄 , 身 敗 名 裂 ,為 何 如 也 。 自 古 文 臣 不 更 事 者 徒 為 大 言 , 每 喪 師 殃 民 ,社 稷 傾 覆 。 前 者 遼 左 任 用 非 人 , 而 河 東 西 土 地 盡 失 , 今尚 謂 不 足 戒 而 謀 動 干 戈 耶 ? 」 癸 丑 , 阿 敏 等 自 朝 鮮 凱 旋, 上 迎 於 武 靖 營 , 賜 阿 敏 御 衣 一 襲 , 餘 各 賜 馬 一 匹 。 乙卯 , 論 征 朝 鮮 將 士 功 , 擢 賞 有 差 。 戊 辰 , 上 還 瀋 陽 。 乙丑 , 以 書 諭 察 哈 爾 台 吉 濟 農 及 奈 曼 袞 出 斯 巴 圖 魯 來 和 。

 


    五 月 戊 辰 , 遣 朝 鮮 國 王 弟 李 覺 歸 國 , 設 宴 餞 之 ,並 賜 鞍 馬 裘 帶 等 物 。 辛 未 , 上 聞 明 人 於 錦 州 、 大 凌 河 、小 凌 河 築 城 屯 田 , 而 崇 煥 無 報 書 , 親 率 師 往 攻 之 。 乙 亥, 至 廣 寧 , 乘 夜 進 兵 。 丙 子 , 明 大 凌 河 、 小 凌 河 兵 棄 城遁 , 遂 圍 錦 州 。 明 臺 堡 兵 二 千 餘 人 來 降 , 悉 縱 之 歸 。 丁丑 , 明 鎮 守 遼 東 太 監 紀 用 、 總 兵 趙 率 教 遣 人 詣 師 請 命 。上 開 誠 諭 之 , 并 許 紀 用 親 來 定 議 。 用 不 答 , 遂 攻 錦 州 。垂 克 , 明 援 兵 至 , 退 五 里 而 營 , 遣 人 調 瀋 陽 兵 益 師 。 庚寅 , 固 山 額 真 博 爾 晉 等 以 兵 至 。 癸 巳 , 攻 寧 遠 城 , 殲 其步 卒 千 餘 人 。 既 , 明 總 兵 滿 桂 出 城 而 陣 , 上 欲 擊 之 , 三大 貝 勒 均 諫 止 。 上 怒 , 趣 諸 將 戴 兜 鍪 , 率 阿 濟 格 疾 馳 而進 , 敗 其 前 隊 , 追 至 寧 遠 城 下 , 盡 殪 之 。 諸 貝 勒 不 及 冑而 從 , 濟 爾 哈 朗 、 薩 哈 廉 、 瓦 克 達 俱 被 創 。 錦 州 守 兵 亦出 城 合 戰 , 我 軍 復 迎 擊 之 。 游 擊 覺 羅 拜 山 、 備 禦 巴 希 陣歿 , 上 臨 其 喪 , 哭 而 酹 之 。 我 軍 還 駐 雙 樹 鋪 。 乙 未 , 復至 錦 州 。

 


    六 月 己 亥 , 攻 錦 州 , 值 天 溽 暑 , 士 卒 死 傷 甚 眾 。庚 子 , 班 師 。 丁 未 , 上 還 瀋 陽 。 是 歲 , 大 饑 , 斗 米 值 銀八 兩 , 銀 賤 物 貴 , 盜 賊 繁 興 。 上 惻 然 曰 : 「 民 饑 為 盜 ,可 盡 殺 乎 ! 」 令 鞭 而 釋 之 , 仍 發 帑 賑 民 。

 


    秋 七 月 己 巳 , 蒙 古 敖 漢 瑣 諾 木 杜 稜 、 塞 臣 卓 禮 克圖 、 奈 曼 袞 出 斯 巴 圖 魯 舉 國 來 附 。 朝 鮮 國 王 李 倧 遣 使 報謝 , 並 獻 方 物 , 命 阿 什 達 爾 漢 等 往 報 之 , 尋 以 義 州 歸 朝鮮 。 是 月 , 明 袁 崇 煥 罷 歸 。

 


    八 月 辛 亥 , 察 哈 爾 阿 喇 克 綽 忒 部 貝 勒 巴 爾 巴 圖 魯、 諾 門 達 賚 、 吹 爾 扎 木 蘇 率 眾 來 歸 。 是 月 , 明 熹 宗 崩 ,其 弟 信 王 嗣 位 , 是 為 莊 烈 帝 。

 


    九 月 甲 子 朔 , 諭 國 家 大 祀 大 宴 用 牛 外 , 其 屠 宰 馬騾 牛 驢 者 悉 禁 之 。

 


    冬 十 一 月 庚 午 , 察 哈 爾 大 貝 勒 昂 坤 杜 稜 來 降 。 辛巳 , 薩 哈 爾 察 部 來 朝 貢 。

 


    十 二 月 甲 午 朔 , 察 哈 爾 阿 喇 克 綽 忒 貝 勒 圖 爾 濟 伊爾 登 來 降 。

 


    二 年一六二八 春 正 月 戊 子 , 格 伊 克 里 部 長 四 人 率 其 屬 來 朝。

 


    二 月 癸 巳 朔 , 以 額 亦 都 子 圖 爾 格 、 費 英 東 子 察 哈尼 俱 為 總 兵 官 。 朝 鮮 國 王 李 倧 遣 其 總 兵 官 李 蘭 等 來 獻 方物 , 並 米 二 千 石 , 更 以 一 千 石 在 中 江 平 糶 。 庚 子 , 以 往喀 喇 沁 使 臣 屢 為 察 哈 爾 多 羅 特 部 所 殺 , 上 率 師 親 征 。 丁未 , 進 擊 多 羅 特 部 , 敗 之 , 多 爾 濟 哈 談 巴 圖 魯 被 創 遁 ,獲 其 妻 子 , 殺 台 吉 古 魯 , 俘 萬 一 千 二 百 人 還 。 丁 巳 , 以戰 勝 , 用 八 牛 祭 天 。

 


    三 月 戊 辰 , 上 還 瀋 陽 , 貝 勒 阿 敏 等 率 群 臣 郊 迎 ,行 抱 見 禮 。 以 弟 多 爾 袞 、 多 鐸 從 征 有 功 , 賜 多 爾 袞 號 墨爾 根 戴 青 , 多 鐸 號 額 爾 克 楚 虎 爾 。 庚 寅 , 以 賜 名 之 禮 宴之 。 戊 子 , 給 國 人 無 妻 者 金 , 使 娶 。 以 貝 勒 多 爾 袞 為 固山 貝 勒 。

 


    夏 四 月 丙 辰 , 巴 林 貝 勒 塞 特 爾 , 台 吉 塞 冷 、 阿 玉石 、 滿 朱 習 禮 率 眾 來 歸 。 明 復 以 袁 崇 煥 督 師 薊 、 遼 。 崇煥 素 弗 善 毛 文 龍 。 時 文 龍 據 皮 島 , 招 集 遼 民 , 有 逃 亡 則殺 以 冒 功 , 遂 得 擢 總 兵 , 便 宜 行 事 。 後 更 致 書 與 我 通 好。 上 遣 科 廓 等 賚 書 往 報 。 既 , 文 龍 執 科 廓 等 送 燕 京 。 崇煥 以 文 龍 私 通 罪 紿 殺 之 。

 


    五 月 辛 未 , 明 人 棄 錦 州 。 貝 勒 阿 巴 泰 等 率 兵 三 千略 其 地 , 隳 錦 州 、 杏 山 、 高 橋 三 城 , 毀 十 三 站 以 東 墩 台二 十 一 。 先 是 顧 特 塔 布 囊 以 其 眾 自 察 哈 爾 逃 匿 蒙 古 地 ,遇 歸 附 者 輒 殺 之 。 辛 巳 , 命 貝 勒 濟 爾 哈 朗 、 豪 格 率 兵 討顧 特 塔 布 囊 。 乙 酉 , 顧 特 伏 誅 , 俘 其 人 口 牲 畜 以 萬 計 。長 白 山 迤 東 濱 海 虎 爾 哈 部 頭 目 里 佛 塔 等 來 朝 。

 


    八 月 辛 卯 , 與 喀 喇 沁 部 議 和 定 盟 。 乙 未 , 賜 奈 曼貝 勒 袞 出 斯 號 達 爾 漢 , 札 魯 特 喀 巴 海 號 衛 徵 。 乙 卯 , 朝鮮 來 貢 。

 


    九 月 庚 申 , 徵 外 藩 兵 共 征 蒙 古 察 哈 爾 。 癸 亥 , 上率 大 軍 西 發 。 丙 寅 , 次 遼 陽 。 敖 漢 、 奈 曼 、 喀 爾 喀 、 札魯 特 、 喀 喇 沁 諸 貝 勒 、 台 吉 各 以 兵 來 會 。 己 巳 , 駐 師 綽洛 郭 爾 。 甲 戌 , 宴 來 會 諸 貝 勒 。 科 爾 沁 諸 貝 勒 不 至 。 土謝 圖 汗 額 駙 奧 巴 、 哈 談 巴 圖 魯 、 滿 朱 習 禮 如 約 , 請 先 侵掠 而 後 合 軍 。 上 怒 , 遣 使 趣 之 。 時 奧 巴 違 命 , 徑 歸 。 滿朱 習 禮 及 台 吉 巴 敦 以 所 俘 來 獻 , 上 賜 滿 朱 習 禮 號 達 爾 漢巴 圖 魯 , 巴 敦 號 達 爾 漢 卓 禮 克 圖 , 厚 賚 之 。 丙 子 , 進 兵擊 席 爾 哈 、 席 伯 圖 、 英 、 湯 圖 諸 處 , 克 之 , 獲 人 畜 無 算。

 


    冬 十 月 辛 卯 , 還 師 。 丙 申 , 諭 敖 漢 、 奈 曼 、 巴 林、 札 魯 特 諸 貝 勒 , 毋 得 要 殺 降 人 , 違 者 科 罰 。 壬 寅 , 上還 瀋 陽 。 以 劉 興 祚 詐 稱 縊 死 , 逃 歸 明 , 繫 其 母 及 妻 子 於獄 。

 


    十 二 月 丁 亥 朔 , 遺 土 謝 圖 汗 額 駙 奧 巴 書 , 數 其 罪。 巴 牙 喇 部 長 伊 爾 彪 等 來 朝 貢 。 蒙 古 郭 畀 爾 圖 、 札 魯 特貝 勒 塞 本 及 其 弟 馬 尼 各 率 部 來 歸 。

 


    三 年 春 正 月 庚 申 , 土 謝 圖 汗 奧 巴 來 請 罪 , 宥 而 遣之 。 辛 未 , 敕 科 爾 沁 、 敖 漢 、 奈 曼 、 喀 爾 喀 、 喀 喇 沁 諸部 悉 遵 國 制 。 丁 丑 , 諭 諸 貝 勒 代 理 三 大 貝 勒 直 月 機 務 。

 


    二 月 戊 子 , 諭 三 大 貝 勒 、 諸 貝 勒 、 大 臣 毋 得 科 斂民 間 財 物 , 犯 者 治 罪 。 己 亥 , 合 葬 太 祖 高 皇 帝 、 孝 慈 高皇 后 於 瀋 陽 之 石 嘴 頭 山 , 妃 富 察 氏 祔 。 喀 爾 喀 札 魯 特 貝勒 戴 青 、 桑 土 、 桑 古 爾 、 桑 噶 爾 寨 等 率 眾 來 附 。 甲 辰 ,上 南 巡 , 閱 邊 境 城 堡 , 圮 薄 者 修 築 之 。 戊 申 , 次 海 州 ,有 老 人 年 一 百 三 歲 , 妻 一 百 五 歲 , 子 七 十 三 歲 , 召 見 賜牛 種 。 辛 亥 , 上 還 瀋 陽 。

 


    三 月 戊 午 , 申 蒙 古 諸 部 軍 令 。

 


    夏 四 月 丙 戌 朔 , 設 文 館 , 命 巴 克 什 達 海 及 剛 林 等繙 譯 漢 字 書 籍 , 庫 爾 纏 及 吳 巴 什 等 記 注 本 朝 政 事 。

 


    五 月 丁 未 , 奈 曼 、 札 魯 特 諸 貝 勒 越 界 駐 牧 , 自 請議 罰 。 上 宥 之 。

 


    六 月 乙 丑 , 議 伐 明 , 令 科 爾 沁 、 喀 爾 喀 、 札 魯 特、 敖 漢 、 奈 曼 諸 部 會 兵 , 並 令 預 採 木 造 船 以 備 轉 餉 。 丁卯 , 喀 喇 沁 布 爾 噶 都 戴 青 、 台 吉 卓 爾 畢 , 土 默 特 台 吉 阿玉 石 等 遣 使 朝 貢 。 辛 巳 , 土 默 特 台 吉 卓 爾 畢 泰 等 來 朝 貢。

 


    秋 七 月 辛 卯 , 喀 爾 喀 台 吉 拜 渾 岱 、 喇 巴 泰 、 滿 朱習 禮 自 科 爾 沁 來 朝 。 甲 午 , 孟 阿 圖 率 兵 征 瓦 爾 喀 。 乙 未, 庫 爾 喀 部 來 朝 貢 。

 


    八 月 庚 午 , 頒 八 旗 臨 陣 賞 罰 令 。 乙 亥 , 諭 曰 : 「自 古 及 今 , 文 武 並 用 , 以 文 治 世 , 以 武 克 敵 。 今 欲 振 興文 教 , 試 錄 生 員 。 諸 貝 勒 府 及 滿 、 漢 、 蒙 古 所 有 生 員 ,俱 令 赴 試 。 中 式 者 以 他 丁 償 之 。 」

 


    九 月 壬 午 朔 , 初 試 生 員 , 拔 二 百 人 , 賞 緞 布 有 差, 免 其 差 徭 。 癸 未 , 貝 勒 濟 爾 哈 朗 等 略 明 錦 州 、 寧 遠 諸路 還 , 俘 獲 以 三 千 計 。 丙 戌 , 阿 魯 部 杜 思 噶 爾 濟 農 始 遣使 來 通 好 。 癸 卯 , 喀 喇 沁 布 爾 噶 都 來 朝 貢 。

 


    冬 十 月 癸 丑 , 上 親 征 明 , 徵 蒙 古 諸 部 兵 以 次 來 會。 庚 申 , 次 納 里 特 河 , 察 哈 爾 五 千 人 來 歸 。 壬 戌 , 次 遼河 。 丙 寅 , 科 爾 沁 奧 巴 以 二 十 三 貝 勒 來 會 。 上 集 諸 貝 勒大 臣 議 征 明 與 征 察 哈 爾 孰 利 , 皆 言 察 哈 爾 遠 , 於 是 征 明。 辛 未 , 次 喀 喇 沁 之 青 城 。 大 貝 勒 代 善 、 三 貝 勒 莽 古 爾泰 止 諸 貝 勒 帳 外 , 入 見 密 議 班 師 。 既 退 , 岳 託 等 入 白 諸將 在 外 候 進 取 。 上 不 懌 , 因 曰 : 「 兩 兄 謂 我 兵 深 入 , 勞師 襲 遠 , 若 糧 匱 馬 疲 , 敵 人 環 攻 , 無 為 歸 計 。 若 等 見 及此 , 而 初 不 言 , 朕 既 遠 涉 , 乃 以 此 為 辭 。 我 謀 且 隳 , 何候 為 ! 」 岳 託 堅 請 進 師 。 八 固 山 額 真 詣 代 善 、 莽 古 爾 泰議 , 夜 半 議 定 。 諭 曰 : 「 朕 承 天 命 , 興 師 伐 明 , 拒 者 戮, 降 者 勿 擾 。 俘 獲 之 人 , 父 母 妻 子 勿 使 離 散 。 勿 淫 人 婦女 , 勿 褫 人 衣 服 , 勿 毀 廬 舍 器 皿 , 勿 伐 果 木 , 勿 酗 酒 。違 者 罪 無 赦 。 固 山 額 真 等 不 禁 , 罪 如 之 。 」 乙 亥 , 次 老河 , 命 濟 爾 哈 朗 、 岳 託 率 右 翼 兵 攻 大 安 口 , 阿 巴 泰 、 阿濟 格 率 左 翼 兵 攻 龍 井 關 。 上 與 大 貝 勒 代 善 、 三 貝 勒 莽 古爾 泰 率 大 兵 繼 之 。 丁 丑 , 左 翼 兵 克 龍 井 關 , 明 副 將 易 愛、 參 將 王 遵 臣 來 援 , 皆 敗 死 。 漢 兒 莊 、 潘 家 口 守 將 俱 降。 戊 寅 , 上 督 兵 克 洪 山 口 。 辛 巳 , 上 至 遵 化 。 莽 古 爾 泰率 左 翼 兵 自 漢 兒 莊 來 會 。 遺 書 明 巡 撫 王 元 雅 勸 降 。

 


    十 一 月 壬 午 朔 , 右 翼 諸 貝 勒 率 師 來 會 。 先 是 濟 爾哈 朗 等 克 大 安 口 , 五 戰 皆 捷 , 降 馬 蘭 營 、 馬 蘭 口 、 大 安營 三 城 , 明 羅 文 峪 守 將 李 思 禮 降 。 山 海 關 總 兵 趙 率 教 以兵 四 千 來 援 , 阿 濟 格 迎 擊 斬 之 。 甲 申 , 諸 貝 勒 攻 遵 化 ,正 白 旗 小 校 薩 木 哈 圖 先 登 , 大 兵 繼 之 , 遂 克 其 城 。 明 巡撫 王 元 雅 自 經 死 。 上 親 酌 金 卮 賜 薩 木 哈 圖 , 擢 備 禦 , 世襲 罔 替 , 賜 號 巴 圖 魯 , 有 過 赦 免 , 家 固 貧 , 恤 之 。 蒙 古兵 擾 害 羅 文 峪 民 。 令 曰 : 「 凡 貝 勒 大 臣 有 掠 歸 降 城 堡 財物 者 斬 , 擅 殺 降 民 者 抵 罪 , 強 取 民 物 , 計 所 取 倍 償 之 。」 己 丑 , 敘 克 城 功 , 將 士 賞 賚 有 差 。 壬 辰 , 參 將 英 俄 爾岱 、 文 館 范 文 程 留 守 遵 化 , 大 軍 進 逼 燕 京 。 有 蒙 古 兵 殺人 而 褫 其 衣 , 上 命 射 殺 之 。 甲 午 , 徇 薊 州 。 乙 未 , 徇 三河 。 丙 申 , 左 翼 貝 勒 赴 通 州 視 渡 口 。 明 大 同 、 宣 府 二 鎮援 兵 至 順 義 , 貝 勒 阿 巴 泰 、 岳 託 擊 敗 之 。 順 義 降 。 上 至通 州 , 諭 明 士 民 曰 : 「 我 國 夙 以 忠 順 守 邊 , 葉 赫 與 我 同一 國 耳 , 明 主 庇 葉 赫 而 陵 我 , 大 恨 有 七 。 我 知 終 不 相 容, 故 告 天 興 師 。 天 直 我 國 , 賜 我 河 東 地 。 我 太 祖 皇 帝 猶願 和 好 , 與 民 休 息 。 爾 國 不 從 , 天 又 賜 我 河 西 地 。 及 朕即 位 , 復 徇 爾 國 之 請 , 遂 欲 去 帝 稱 汗 , 趣 製 國 印 , 而 爾國 不 從 。 今 我 興 師 而 來 , 順 者 撫 , 逆 者 誅 。 是 爾 君 好 逞干 戈 , 猶 爾 之 君 殺 爾 也 。 天 運 循 環 , 無 往 不 復 , 有 天 子而 為 匹 夫 , 亦 有 匹 夫 而 為 天 子 者 。 天 既 佑 我 , 乃 使 我 去帝 號 。 天 其 鑒 之 ! 」 辛 丑 , 大 軍 逼 燕 京 。 上 營 於 城 北 土城 關 之 東 , 兩 翼 營 於 東 北 。 明 大 同 總 兵 滿 桂 、 宣 府 總 兵侯 世 祿 屯 德 勝 門 , 寧 遠 巡 撫 袁 崇 煥 、 錦 州 總 兵 祖 大 壽 屯沙 窩 門 。 上 率 右 翼 大 貝 勒 代 善 , 貝 勒 濟 爾 哈 朗 、 岳 託 、杜 度 、 薩 哈 廉 等 , 領 白 甲 護 軍 、 蒙 古 兵 進 擊 桂 、 世 祿 ,遣 左 翼 大 貝 勒 莽 古 爾 泰 、 阿 巴 泰 、 阿 濟 格 、 多 爾 袞 、 多鐸 、 豪 格 等 , 領 白 甲 護 軍 、 蒙 古 兵 迎 擊 崇 煥 、 大 壽 , 俱敗 之 。 癸 卯 , 遣 明 歸 順 王 太 監 賚 書 與 明 議 和 。 乙 巳 , 屯南 海 子 。 戊 申 , 袁 崇 煥 、 祖 大 壽 營 於 城 東 南 隅 , 樹 柵 為衛 , 我 軍 偪 之 而 營 。 上 率 輕 騎 往 視 。 諸 貝 勒 請 攻 城 , 諭曰 : 「 路 隘 且 險 , 若 傷 我 士 卒 , 雖 得 百 城 不 足 多 也 。 」因 止 弗 攻 。 初 , 獲 明 太 監 二 人 , 令 副 將 高 鴻 中 , 參 將 鮑承 先 、 寧 完 我 等 受 密 計 。 至 是 , 鴻 中 、 承 先 坐 近 二 太 監耳 語 云 : 「 今 日 撤 兵 , 乃 上 計 也 。 頃 上 單 騎 向 敵 , 敵 二人 見 上 語 良 久 乃 去 。 意 袁 都 堂 有 約 , 此 事 就 矣 。 」 時 楊太 監 佯 臥 竊 聽 。 翌 日 縱 之 歸 , 以 所 聞 語 明 帝 , 遂 下 崇 煥於 獄 。 大 壽 懼 , 率 所 部 奔 錦 州 , 毀 山 海 關 而 出 。 諸 貝 勒大 臣 請 攻 城 , 上 曰 : 「 攻 則 可 克 , 但 恐 傷 我 良 將 勁 卒 ,余 不 忍 也 。 」 遂 止 。

 


    十 二 月 辛 亥 朔 , 大 軍 經 海 子 而 南 , 且 獵 且 行 , 趣良 鄉 , 克 其 城 。 壬 子 , 總 兵 吳 訥 格 克 固 安 。 辛 酉 , 遣 貝勒 阿 巴 泰 、 薩 哈 廉 以 太 牢 祀 金 太 祖 、 世 宗 陵 。 丙 寅 , 復趨 燕 京 , 敗 明 兵 於 盧 溝 橋 , 殲 其 眾 。 明 總 兵 滿 桂 、 孫 祖壽 、 黑 雲 龍 、 麻 登 雲 以 兵 四 萬 柵 永 定 門 之 南 。 丁 卯 黎 明, 師 毀 柵 入 , 斬 桂 、 祖 壽 及 副 將 以 下 三 十 餘 人 , 擒 黑 雲龍 、 麻 登 雲 , 獲 馬 六 千 , 分 賜 將 士 。 戊 辰 , 遣 達 海 賚 書與 明 議 和 。 壬 申 , 貝 勒 阿 巴 泰 、 濟 爾 哈 朗 略 通 州 , 焚 其舟 , 攻 張 家 灣 , 克 之 。 達 海 賚 議 和 書 二 分 置 安 定 、 德 勝門 外 。 乙 亥 , 復 遣 人 賚 書 赴 安 定 門 。 俱 不 報 。 丙 子 , 駐師 通 州 。 丁 丑 , 岳 託 、 薩 哈 廉 、 豪 格 率 兵 四 千 圍 永 平 。遂 克 香 河 、 馬 蘭 峪 諸 城 , 復 叛 去 。 己 卯 , 大 軍 趣 永 平 。

 


    四 年 春 正 月 辛 巳 朔 , 大 軍 至 榛 子 鎮 、 沙 河 驛 , 俱降 。 壬 午 , 至 永 平 。 先 是 , 劉 興 祚 自 我 國 逃 歸 , 匿 崇 煥所 。 至 是 , 率 所 攜 滿 洲 兵 十 五 人 、 蒙 古 兵 五 百 欲 往 守 沙河 。 聞 大 兵 至 , 改 趣 永 平 之 太 平 寨 , 襲 殺 喀 喇 沁 兵 於 途。 上 怒 其 負 恩 , 遣 貝 勒 阿 巴 泰 等 禽 斬 之 , 裂 其 屍 以 徇 。癸 丑 , 上 授 諸 將 方 略 , 乘 夜 攻 城 。 城 中 火 藥 自 發 , 敵 軍大 亂 , 黎 明 克 之 。 貝 勒 濟 爾 哈 朗 等 入 城 安 撫 。 丙 戌 , 上率 諸 將 入 城 , 官 民 夾 道 呼 萬 歲 。 貝 勒 濟 爾 哈 朗 、 薩 哈 廉守 永 平 。 以 降 官 白 養 粹 為 永 平 巡 撫 , 孟 喬 芳 、 楊 文 魁 為副 將 , 縱 鄉 民 還 其 家 。 是 日 , 上 率 大 軍 趣 山 海 關 。 敖 漢、 奈 曼 、 巴 林 、 札 魯 特 諸 部 兵 攻 昌 黎 , 不 克 。 臺 頭 營 、鞍 山 堡 、 遷 安 、 灤 州 以 次 降 。 建 昌 參 將 馬 光 遠 來 歸 。 丁酉 , 明 兵 攻 遵 化 , 貝 勒 杜 度 擊 敗 之 。 明 兵 入 三 屯 營 , 先所 下 漢 兒 莊 、 喜 峰 口 、 潘 家 口 、 洪 家 口 復 叛 。 庚 子 , 達海 等 復 漢 兒 莊 , 貝 勒 阿 巴 泰 守 之 。 辛 丑 , 喀 喇 沁 布 爾 噶都 為 明 兵 所 圍 , 遣 軍 往 救 , 未 至 , 布 爾 噶 都 自 擊 敗 之 。其 帥 明 兵 部 尚 書 劉 之 綸 領 兵 至 , 樹 柵 。 我 軍 砲 毀 其 柵 。之 綸 屯 山 中 。 大 貝 勒 代 善 圍 之 , 勸 之 綸 降 , 不 從 。 破 其營 , 之 綸 被 箭 死 。 壬 寅 , 移 師 馬 蘭 峪 , 毀 其 近 城 屯 堡 。丙 午 , 喀 喇 沁 蘇 布 地 上 書 明 帝 , 論 和 好 之 利 , 且 勸 以 愛養 邊 民 、 優 恤 屬 國 之 道 。 不 報 。 樂 亭 復 叛 。

 


    二 月 辛 亥 朔 , 諭 貝 勒 諸 臣 , 凡 將 士 驍 勇 立 功 者 ,勿 與 攻 城 之 役 。 甲 寅 , 宴 明 降 將 麻 登 雲 等 於 御 幄 , 謂 之曰 : 「 明 主 視 爾 等 將 士 之 命 如 草 芥 , 驅 之 死 地 。 朕 屢 遣使 議 和 , 竟 無 一 言 相 報 , 何 也 ? 」 登 雲 對 曰 : 「 明 帝 幼沖 , 大 臣 各 圖 自 保 , 議 和 之 事 , 儻 不 見 聽 , 罪 且 不 測 ,故 懼 不 敢 奏 。 」 上 曰 : 「 若 然 , 是 天 贊 我 也 , 豈 可 棄 之而 歸 。 但 駐 兵 屯 守 , 妨 農 時 為 可 憫 耳 。 且 彼 山 海 關 、 錦州 防 守 尚 堅 , 今 但 取 其 無 備 城 邑 可 也 。 」 己 未 , 遺 書 明帝 , 仍 申 和 好 , 並 致 書 明 諸 臣 , 勸 其 急 定 和 議 , 至 是 凡七 致 書 矣 。 甲 子 , 明 榆 林 副 將 王 世 選 來 降 。 上 班 師 , 貝勒 阿 巴 泰 、 濟 爾 哈 朗 、 薩 哈 廉 及 文 臣 索 尼 、 寧 完 我 等 守永 平 , 鮑 承 先 守 遷 安 , 固 山 額 真 圖 爾 格 、 那 木 泰 等 守 灤州 , 察 喀 喇 、 范 文 程 等 守 遵 化 。 駐 灤 三 日 , 論 功 行 賞 。壬 申 , 諭 曰 : 「 天 以 明 土 地 人 民 予 我 , 其 民 即 吾 民 , 宜飭 軍 士 勿 加 侵 害 , 違 者 治 罪 。 」 上 至 永 平 , 降 官 郎 中 陳此 心 謀 遁 , 事 覺 論 斬 , 上 赦 之 , 聽 其 所 往 。

 


    三 月 壬 午 , 上 還 瀋 陽 。 庚 寅 , 遣 二 貝 勒 阿 敏 、 貝勒 碩 託 率 兵 五 千 往 守 永 平 四 城 , 貝 勒 阿 巴 泰 等 還 。 庚 子, 阿 魯 四 子 部 遣 使 來 盟 。

 


    夏 四 月 壬 子 , 明 兵 攻 灤 州 , 不 克 。 己 卯 , 貝 勒 阿巴 泰 、 濟 爾 哈 朗 等 自 永 平 還 。 上 問 是 役 俘 獲 較 前 孰 多 ,對 曰 : 「 此 行 所 獲 人 口 甚 多 。 」 上 曰 : 「 財 帛 不 足 喜 ,惟 多 得 人 為 可 喜 耳 。 」

 


    五 月 己 丑 , 諭 諸 臣 厚 撫 俘 眾 。 壬 辰 , 阿 敏 、 碩 託等 棄 永 平 四 城 歸 。 時 明 監 軍 道 張 春 、 錦 州 總 兵 祖 大 壽 等合 兵 攻 灤 州 。 那 穆 泰 、 圖 爾 格 、 湯 古 代 等 出 戰 , 屢 敗 明兵 , 然 兵 少 , 阿 敏 、 碩 託 畏 不 往 援 , 明 兵 用 砲 攻 灤 州 ,那 穆 泰 等 不 能 支 , 棄 城 奔 永 平 。 會 天 雨 , 我 軍 潰 圍 出 ,無 馬 被 創 者 死 四 百 餘 人 。 阿 敏 、 碩 託 聞 之 恐 , 遂 殺 降 官白 養 粹 等 , 盡 屠 城 中 士 民 , 收 其 金 幣 , 乘 夜 出 冷 口 。 察哈 喇 等 亦 棄 遵 化 歸 。 上 方 命 貝 勒 杜 度 趨 永 平 協 守 , 且 敕阿 敏 善 撫 官 民 , 無 侵 暴 , 將 整 兵 親 往 。 庚 子 , 聞 阿 敏 棄城 , 且 大 肆 屠 戮 , 乃 止 。

 


    六 月 甲 寅 , 收 繫 棄 城 諸 將 , 數 其 罪 。 乙 卯 , 御 殿宣 阿 敏 十 六 罪 。 眾 議 當 誅 。 上 不 忍 致 法 , 幽 之 。 碩 託 、湯 古 代 、 那 穆 泰 、 巴 布 泰 、 圖 爾 格 等 各 奪 爵 、 革 職 有 差。 諸 將 中 有 力 戰 殺 敵 者 釋 之 。 先 是 阿 敏 既 屠 永 平 官 民 ,以 其 妻 子 分 給 士 卒 。 上 曰 : 「 彼 既 屠 我 歸 順 良 民 , 又 奴其 妻 子 耶 ! 」 命 編 為 民 戶 , 以 房 舍 衣 食 給 之 。

 


    秋 九 月 戊 戌 , 申 諭 諸 大 臣 滿 、 漢 官 各 勤 職 業 。

 


    冬 十 月 辛 酉 , 諭 編 審 各 旗 壯 丁 , 隱 匿 者 罰 之 。

 


    十 一 月 甲 午 , 那 堪 泰 部 虎 爾 噶 率 家 屬 來 歸 , 阿 魯四 子 部 諸 貝 勒 來 歸 。 壬 寅 , 阿 魯 伊 蘇 忒 部 聞 上 善 養 民 ,留 所 部 於 西 拉 木 輪 河 , 而 偕 我 使 臣 察 漢 喇 嘛 來 朝 。

 


    十 二 月 戊 辰 , 科 爾 沁 貝 勒 圖 美 衛 徵 來 朝 。

 


    五 年 春 正 月 庚 辰 , 諭 已 故 功 臣 無 後 者 , 家 產 給 其妻 自 贍 。 壬 午 , 鑄 紅 衣 大 砲 成 , 鐫 曰 「 天 祐 助 威 大 將 軍」 。 軍 中 造 砲 自 此 始 。 乙 未 , 以 額 駙 佟 養 性 總 理 漢 人 軍民 事 , 漢 官 聽 其 節 制 。 己 亥 , 幸 文 館 , 入 庫 爾 纏 直 房 ,問 所 修 何 書 。 對 曰 : 「 記 註 所 行 政 事 。 」 上 曰 : 「 如 此, 朕 不 宜 觀 。 」 又 覽 達 海 所 譯 武 銓 , 見 投 醪 飲 河 事 , 曰: 「 古 良 將 體 恤 士 卒 , 三 軍 之 士 樂 為 致 死 。 若 額 駙 顧 三台 對 敵 時 , 見 戰 士 歿 者 , 以 繩 曳 之 歸 , 安 能 得 人 死 力 乎! 」 庚 子 , 朝 鮮 貢 物 不 及 額 , 卻 之 , 以 書 責 其 罪 。

 


    二 月 庚 申 , 敕 邊 臣 謹 斥 堠 。 甲 戌 , 孟 阿 圖 征 瓦 爾喀 , 奏 捷 。

 


    三 月 乙 亥 朔 , 鑲 藍 旗 固 山 額 真 、 額 駙 顧 三 台 罷 ,以 太 祖 弟 之 子 篇 古 代 之 。 書 諭 大 貝 勒 代 善 、 三 貝 勒 莽 古爾 泰 及 貝 勒 諸 大 臣 , 求 直 言 過 失 。 丁 亥 , 閱 漢 兵 。 甲 午, 誅 劉 興 祚 、 興 治 家 屬 , 赦 其 母 。 丁 酉 , 朝 鮮 復 遣 使 來貢 。 辛 丑 , 遣 滿 達 爾 漢 、 董 訥 密 遺 朝 鮮 王 書 , 索 戰 船 助攻 明 。 不 許 。

 


    六 月 癸 亥 , 定 功 臣 襲 職 例 。 黑 龍 江 伊 札 訥 、 薩 克提 、 伽 期 訥 、 俄 力 喀 、 康 柱 等 五 頭 目 來 朝 。

 


    秋 七 月 甲 戌 , 黑 龍 江 虎 爾 哈 部 四 頭 目 來 朝 貢 。 庚辰 , 始 設 六 部 , 以 墨 勒 根 戴 青 貝 勒 多 爾 袞 , 貝 勒 德 格 類、 薩 哈 廉 、 岳 託 、 濟 爾 哈 朗 、 阿 巴 泰 等 管 六 部 事 。 每 部滿 、 漢 、 蒙 古 分 設 承 政 官 , 其 下 設 參 政 各 八 員 , 啟 心 郎各 一 員 , 改 巴 克 什 為 筆 帖 式 , 其 尚 稱 巴 克 什 者 仍 其 舊 。更 定 訐 告 諸 貝 勒 者 准 其 離 主 例 , 其 以 細 事 訐 訴 者 禁 之 。諭 貝 勒 審 事 冤 抑 不 公 者 坐 罪 。 除 職 官 有 罪 概 行 削 職 律 ,嗣 後 有 罪 者 , 分 別 輕 重 降 罰 有 差 。 並 禁 官 民 同 族 嫁 娶 ,犯 者 男 婦 以 姦 論 。 又 諭 貝 勒 諸 大 臣 省 過 改 行 , 求 極 諫 。甲 申 , 鬧 雷 虎 爾 哈 部 四 頭 目 來 朝 貢 。 癸 巳 , 定 小 事 賞 罰例 , 令 牛 彔 額 真 審 理 , 大 者 送 部 。 明 總 兵 祖 大 壽 等 築 大凌 河 。 檄 諸 蒙 古 各 率 所 部 來 會 征 之 。 己 亥 , 大 軍 西 發 ,命 貝 勒 杜 度 、 薩 哈 廉 、 豪 格 留 守 。 庚 子 , 渡 遼 河 , 申 誡諸 將 恤 士 卒 。

 


    八 月 壬 寅 朔 , 次 舊 遼 河 而 營 , 蒙 古 諸 部 率 兵 來 會。 癸 卯 , 集 蒙 古 諸 貝 勒 , 申 前 令 , 無 擅 殺 掠 。 於 是 分 兵兩 路 , 貝 勒 德 格 類 、 岳 託 、 阿 濟 格 以 兵 二 萬 由 義 州 入 屯錦 州 、 大 凌 河 之 間 , 上 自 白 土 場 入 廣 寧 。 丁 未 , 會 於 大凌 河 , 乘 夜 攻 城 。 令 曰 : 「 攻 城 恐 傷 士 卒 , 當 掘 壕 築 壘困 之 。 彼 若 出 , 與 之 戰 , 外 援 至 , 迎 擊 之 。 」 乃 分 八 旗兵 合 圍 , 令 蒙 古 兵 承 其 隙 。 辛 亥 , 明 馬 步 兵 五 百 人 出 城, 達 爾 哈 擊 敗 之 。 壬 子 , 射 書 城 中 , 招 蒙 古 人 出 降 。 癸丑 , 明 兵 出 城 誘 戰 。 圖 賴 先 入 , 達 爾 哈 繼 之 , 四 面 環 攻, 貝 勒 多 爾 袞 亦 率 兵 入 。 城 內 砲 矢 俱 發 , 圖 賴 被 創 , 副將 孟 坦 、 屯 布 祿 、 備 禦 多 貝 、 侍 衛 戈 里 戰 歿 。 上 以 圖 賴等 輕 進 , 切 責 之 。 以 紅 衣 砲 攻 明 臺 , 兵 降 者 相 繼 。 乙 卯, 遺 祖 大 壽 書 曰 : 「 往 者 我 欲 和 , 爾 國 君 臣 以 宋 為 鑑 ,不 我 應 。 爾 國 非 宋 , 我 亦 非 金 , 何 不 達 若 此 。 朕 今 厭 兵革 , 更 以 書 往 , 惟 將 軍 裁 之 。 」 大 壽 不 答 。 丁 巳 , 明 松山 兵 二 千 來 援 , 阿 山 、 勞 薩 、 土 魯 什 擊 敗 之 。 甲 子 , 貝勒 阿 濟 格 、 碩 托 遮 擊 明 援 兵 。 丁 卯 , 明 錦 州 兵 六 千 來 攻阿 濟 格 營 。 會 大 霧 , 覿 面 不 相 識 。 忽 有 青 氣 衝 敵 營 , 闢若 門 , 我 軍 乘 霧 進 , 大 戰 , 敗 之 , 擒 游 擊 一 , 盡 獲 其 甲仗 馬 匹 。 辛 未 , 上 詣 貝 勒 阿 濟 格 營 , 酌 金 卮 勞 諸 將 。 明兵 突 出 , 師 夾 擊 , 又 大 敗 之 。

 


    九 月 丁 亥 , 上 以 兵 趨 錦 州 , 見 塵 起 , 上 命 諸 軍 勿行 , 自 率 擺 牙 喇 兵 二 百 , 與 貝 勒 多 鐸 緣 山 潛 進 。 明 錦 州兵 七 千 突 出 進 上 前 。 上 甫 擐 甲 , 從 者 不 及 二 百 人 , 渡 河衝 敵 軍 。 敵 不 能 當 , 潰 走 。 諸 軍 繼 至 , 又 大 敗 之 , 斬 一副 將 而 還 。 己 丑 , 復 以 書 招 祖 大 壽 。 庚 寅 , 上 設 伏 山 內, 誘 大 壽 出 , 將 擒 之 , 大 壽 驚 遁 , 自 是 閉 城 不 出 。 時 城中 穀 止 百 石 , 馬 死 盡 , 煮 馬 肉 為 食 , 以 鞍 代 爨 。 乙 未 ,明 太 僕 寺 卿 監 軍 道 張 春 , 總 兵 吳 襄 、 鍾 緯 等 , 以 馬 步 兵四 萬 來 援 , 壁 小 凌 河 。 戊 戌 , 明 援 兵 趨 大 凌 河 , 距 城 十五 里 。 上 率 兩 翼 騎 兵 衝 擊 之 , 不 動 。 右 翼 兵 猝 入 張 春 營, 敵 遂 敗 , 吳 襄 及 副 將 桑 阿 爾 寨 先 奔 。 張 春 等 復 集 潰 兵立 營 , 會 大 風 , 敵 乘 風 縱 火 , 將 及 我 軍 , 天 忽 雨 , 反 風, 復 戰 , 遂 大 破 之 , 生 擒 張 春 及 副 將 三 十 三 人 。 春 不 屈, 乞 死 , 上 赦 不 殺 。 是 役 也 , 祖 大 壽 仍 以 我 為 誘 敵 , 故城 中 無 應 者 。 是 夕 黑 雲 龍 遁 去 。

 


    冬 十 月 丁 未 , 以 書 招 祖 大 壽 、 何 可 剛 、 張 存 仁 。己 酉 , 再 遺 大 壽 書 。 壬 子 , 以 紅 衣 砲 攻 于 子 章 臺 。 臺 最固 , 三 日 臺 毀 , 守 臺 將 王 景 降 , 於 是 遠 近 百 餘 臺 俱 下 。甲 寅 , 遣 降 將 姜 新 招 祖 大 壽 。 大 壽 亦 遣 游 擊 韓 棟 來 會 。癸 亥 , 議 三 貝 勒 莽 古 爾 泰 上 前 持 刃 罪 , 降 貝 勒 , 奪 所 屬五 牛 彔 。 乙 丑 , 祖 大 壽 約 我 副 將 石 廷 柱 議 降 。 丙 寅 , 大壽 遣 其 子 可 法 為 質 。 戊 辰 , 大 凌 河 舉 城 降 , 獨 副 將 何 可剛 不 從 。 大 壽 掖 可 剛 至 軍 前 殺 之 , 夜 至 御 營 , 上 優 遇 之, 大 壽 遂 獻 取 錦 州 策 。 己 巳 , 遣 兵 隨 大 壽 夜 襲 錦 州 , 會大 霧 , 失 伍 , 還 。

 


    十 一 月 庚 午 朔 , 縱 大 壽 還 錦 州 。 戊 寅 , 毀 大 凌 河城 。 己 卯 , 班 師 。 乙 酉 , 上 還 瀋 陽 。 丙 戌 , 察 哈 爾 侵 阿魯 西 拉 木 輪 地 , 貝 勒 薩 哈 廉 、 豪 格 移 師 征 之 , 會 察 哈 爾已 去 , 乃 還 。

 


    閏 十 一 月 庚 子 朔 , 諭 曰 : 「 我 兵 之 棄 永 平 四 城 ,皆 貝 勒 等 不 學 無 術 所 致 。 頃 大 凌 河 之 役 , 城 中 人 相 食 ,明 人 猶 死 守 , 及 援 盡 城 降 , 而 錦 州 、 松 、 杏 猶 不 下 , 豈非 其 人 讀 書 明 理 盡 忠 其 主 乎 ? 自 今 凡 子 弟 年 十 五 歲 以 下、 八 歲 以 上 , 皆 令 讀 書 。 」 遣 庫 爾 纏 等 責 朝 鮮 違 約 罪 。庚 戌 , 禁 國 中 不 得 私 立 廟 寺 , 喇 嘛 僧 違 律 者 還 俗 , 巫 覡星 士 並 禁 止 之 。

 


    十 二 月 壬 辰 , 參 將 寧 完 我 請 設 言 官 , 定 服 制 。 上嘉 納 之 。 丙 申 , 用 禮 部 參 政 李 伯 龍 言 , 更 定 元 旦 朝 賀 行禮 班 次 。

 


    六 年 春 正 月 癸 亥 , 閱 漢 兵 。

 


    二 月 壬 申 , 定 儀 仗 制 。 丁 丑 , 謁 太 祖 陵 , 行 時 享禮 。 戊 子 , 諭 海 州 等 處 城 守 官 三 年 一 赴 瀋 陽 考 察 。 丁 酉, 諭 戶 部 貝 勒 德 格 類 以 大 凌 河 漢 人 分 隸 副 將 以 下 , 給 配撫 養 。 給 還 貝 勒 莽 古 爾 泰 所 罰 人 口 。

 


    三 月 戊 戌 , 賚 大 凌 河 諸 降 將 有 差 。 命 達 海 分 析 國書 音 義 。 庚 戌 , 定 訐 告 諸 貝 勒 者 輕 重 虛 實 坐 罪 例 , 禁 子弟 告 父 兄 、 妻 告 夫 者 , 定 貝 勒 大 臣 賜 祭 葬 例 。 丁 巳 , 征察 哈 爾 , 徵 蒙 古 兵 , 頒 軍 令 。

 


    夏 四 月 戊 辰 朔 , 上 率 大 軍 西 發 , 阿 巴 泰 、 杜 度 、揚 古 利 、 伊 爾 登 、 佟 養 性 留 守 。 己 巳 , 次 遼 河 。 丙 子 ,次 西 拉 木 輪 河 。 己 卯 , 次 札 滾 烏 達 , 諸 蒙 古 部 兵 以 次 來會 。 乙 酉 , 次 哈 納 崖 。 察 哈 爾 汗 林 丹 聞 我 師 至 , 大 懼 ,驅 歸 化 城 富 民 牲 畜 渡 河 西 奔 , 盡 委 輜 重 而 去 。 庚 寅 , 次都 勒 河 , 聞 察 哈 爾 林 丹 遠 遁 , 上 趨 歸 化 城 。 丙 申 , 大 軍自 阿 濟 格 和 爾 戈 還 趨 察 哈 爾 。

 


    五 月 癸 卯 , 諭 諸 部 貝 勒 大 臣 勿 輕 進 , 勿 退 縮 , 勿殺 降 , 勿 分 散 人 妻 子 , 勿 奪 人 衣 服 財 物 。 甲 辰 , 次 布 龍圖 布 喇 克 。 丁 未 , 勞 薩 奏 報 察 哈 爾 遁 去 已 久 , 逐 北 三 日無 所 見 。 上 自 布 龍 圖 旋 師 。 戊 申 , 定 議 征 明 。 丙 辰 , 次朱 兒 格 土 。 時 糧 盡 , 忽 逢 黃 羊 遍 野 , 遂 合 圍 殺 數 萬 , 脯而 食 之 。 無 水 , 以 一 羊 易 杯 水 而 飲 。 上 命 各 牛 彔 持 水 迎給 之 。 庚 申 , 次 木 魯 哈 喇 克 沁 , 貝 勒 阿 濟 格 率 左 翼 略 宣府 、 大 同 , 貝 勒 濟 爾 哈 朗 率 右 翼 略 歸 化 城 , 上 與 大 貝 勒代 善 、 貝 勒 莽 古 爾 泰 統 大 軍 繼 進 。 甲 子 , 上 至 歸 化 城 ,兩 翼 兵 來 會 。 是 日 , 大 軍 馳 七 百 里 , 西 至 黃 河 木 納 漢 山, 東 至 宣 府 , 自 歸 化 城 南 至 明 邊 境 , 所 在 察 哈 爾 部 民 悉俘 之 。

 


    六 月 丁 卯 朔 , 蒙 古 部 民 竄 沙 河 堡 , 上 以 書 諭 明 守臣 索 之 。 明 歸 我 男 婦 三 百 二 十 、 牲 畜 千 四 百 有 奇 。 辛 未, 寧 完 我 、 范 文 程 、 馬 國 柱 合 疏 言 : 「 伐 明 之 策 , 宜 先以 書 議 和 , 俟 彼 不 從 , 執 以 為 辭 , 乘 釁 深 入 , 可 以 得 志。 」 上 嘉 納 之 。 甲 戌 , 大 軍 發 歸 化 城 , 趨 明 邊 。 丁 丑 ,明 沙 河 堡 守 臣 使 賚 牲 幣 來 獻 。 己 卯 , 庫 爾 纏 等 自 得 勝 堡, 愛 巴 禮 等 由 張 家 口 , 分 詣 大 同 、 宣 府 議 和 。 書 曰 : 「我 之 興 兵 , 非 必 欲 取 明 天 下 也 。 遼 東 守 臣 貪 黷 昏 罔 , 勸葉 赫 陵 我 , 遂 嬰 七 恨 。 屢 愬 爾 主 , 而 遼 東 壅 不 上 聞 。 我兵 至 此 , 欲 爾 主 察 之 也 。 及 攻 撫 順 , 又 因 十 三 省 商 賈 各遺 以 書 , 慮 其 不 克 徑 達 , 則 各 以 書 進 其 省 官 吏 , 冀 有 一聞 。 乃 縱 之 使 去 , 寂 焉 不 復 。 語 云 : 『 下 情 上 達 , 天 下罔 不 治 ; 下 情 上 壅 , 天 下 罔 不 亂 。 』 今 所 在 征 討 , 爭 戰不 息 , 民 死 鋒 鏑 , 雖 下 情 不 達 之 故 , 抑 豈 天 意 乎 ? 我 今聞 誠 相 告 , 國 雖 褊 小 , 惟 欲 兩 國 和 好 , 互 為 貿 易 , 各 安耕 獵 , 以 享 太 平 。 若 言 不 由 衷 , 天 其 鑒 我 。 前 者 屢 致 書問 , 憤 疾 之 詞 , 固 所 不 免 。 此 兵 家 之 常 , 不 足 道 也 。 幸速 裁 斷 , 實 國 之 福 。 我 駐 兵 十 日 以 待 。 」 庚 辰 , 駐 大 同邊 外 。 庫 爾 纏 偕 明 得 勝 堡 千 總 賚 牲 幣 來 獻 。 上 不 納 。 復遺 書 明 守 臣 曰 : 「 我 仰 體 天 意 , 願 申 和 好 。 爾 果 愛 民 ,宜 速 定 議 。 若 延 時 不 報 , 縱 欲 相 待 , 如 軍 中 糧 盡 何 。 至書 中 稱 謂 , 姑 勿 論 , 我 遜 爾 國 , 我 居 察 哈 爾 之 上 可 耳 。」 癸 未 , 趨 宣 府 , 守 臣 以 明 主 所 給 察 哈 爾 緞 布 皮 幣 一 萬二 千 五 百 歸 我 。 庚 寅 , 駐 張 家 口 外 , 列 營 四 十 里 。 癸 巳, 明 巡 撫 沈 棨 、 總 兵 董 繼 舒 遣 人 賚 牛 羊 食 物 來 獻 。 上 宴之 , 遂 定 和 議 , 大 市 於 張 家 口 。 科 爾 沁 部 兵 三 人 潛 入 明邊 , 盜 牛 驢 , 斬 其 首 者 , 鞭 二 人 , 貫 耳 以 徇 。 甲 午 , 明巡 撫 沈 棨 遣 使 來 請 盟 。 命 大 臣 阿 什 達 爾 哈 等 蒞 之 , 刑 白馬 烏 牛 , 誓 告 天 地 。 禮 成 , 遣 啟 心 郎 祁 充 格 送 明 使 歸 。明 以 金 幣 來 獻 。 晉 封 皇 子 豪 格 為 和 碩 貝 勒 。 是 月 , 遼 東大 水 。

 


    秋 七 月 丁 酉 朔 , 復 以 書 約 明 張 家 口 守 臣 信 誓 敦 好, 善 保 始 終 , 且 謂 和 議 遼 東 地 方 在 內 , 爾 須 遣 官 往 告 。上 率 大 軍 還 。 庚 子 , 至 上 都 河 , 明 以 和 議 成 , 來 餽 禮 物, 酌 納 之 。 辛 丑 , 蒙 古 諸 貝 勒 辭 歸 。 庚 戌 , 次 擺 斯 哈 兒。 游 擊 巴 克 什 達 海 卒 。 庚 申 , 上 還 瀋 陽 。

 


    八 月 丁 卯 , 召 明 諸 生 王 文 奎 、 孫 應 時 、 江 雲 入 宮, 問 以 和 事 成 否 。 三 人 皆 言 , 明 政 日 紊 , 和 議 難 必 。 且中 原 盜 賊 蜂 起 , 人 民 離 亂 。 勸 上 宣 布 仁 義 , 用 賢 養 民 ,乘 時 弔 伐 , 以 應 天 心 。 癸 酉 , 六 部 署 成 , 頒 銀 印 各 一 。甲 午 , 命 固 山 額 真 察 民 疾 苦 , 清 理 刑 獄 。 察 哈 爾 檮 納 楚虎 爾 來 歸 。

 


    九 月 癸 卯 , 修 復 蓋 州 城 , 移 民 實 之 。 甲 寅 , 命 戶部 貝 勒 德 格 類 、 兵 部 貝 勒 岳 託 展 耀 州 舊 界 至 蓋 州 迤 南 。

 


    冬 十 月 乙 丑 朔 , 幸 開 原 。 甲 戌 , 還 瀋 陽 。 遣 衛 徵囊 蘇 喇 嘛 赴 寧 遠 , 賚 書 致 明 帝 曰 : 「 我 國 稱 兵 , 非 不 知足 而 冀 大 位 , 因 邊 臣 欺 侮 , 致 啟 兵 釁 。 往 征 察 哈 爾 時 ,過 宣 府 定 和 議 , 我 遂 執 越 境 盜 竊 之 人 戮 之 塞 下 , 我 之 誠心 可 謂 至 矣 。 前 邊 臣 未 能 細 述 , 今 欲 備 言 , 又 恐 疑 我 不忘 舊 怨 , 如 遣 信 使 來 , 將 盡 告 之 。 若 謂 已 和 , 不 必 語 及往 事 , 亦 惟 命 。 」 又 與 明 諸 臣 書 曰 : 「 宣 府 守 臣 與 我 盟時 , 約 我 毋 侵 遼 東 , 誓 諸 天 地 。 今 爾 乃 有 異 議 , 天 可 欺乎 ? 執 政 大 臣 宜 通 權 變 , 慎 勿 徒 事 大 言 , 坐 失 事 機 。 若堅 執 不 從 , 惟 尋 師 旅 , 生 靈 荼 毒 , 咎 將 誰 歸 ? 」

 


    十 一 月 壬 寅 , 明 寧 遠 守 臣 以 我 所 遺 書 封 固 , 不 敢以 陳 , 請 露 封 , 許 之 。 辛 亥 , 阿 祿 部 都 思 噶 爾 濟 農 所 屬祁 他 特 吹 虎 爾 台 吉 來 附 。 壬 子 , 遣 使 往 朝 鮮 定 歲 貢 額 。

 


    十 二 月 乙 丑 , 定 朝 服 及 官 民 常 服 制 。 三 貝 勒 莽 古爾 泰 卒 。 乙 亥 , 吳 巴 海 征 兀 札 喇 遣 使 告 捷 。

 


    七 年 春 正 月 庚 子 , 諭 各 牛 彔 額 真 以 恤 貧 訓 農 習 射。 辛 丑 , 朝 鮮 來 貢 , 不 及 額 。 丁 未 , 復 書 責 之 。 戊 申 ,皇 長 女 下 嫁 敖 漢 部 貝 勒 都 喇 爾 巴 圖 魯 子 台 吉 班 第 。 乙 卯, 征 兀 札 喇 師 還 。

 


    二 月 癸 亥 朔 , 阿 魯 科 爾 沁 汗 車 根 率 固 木 巴 圖 魯 、達 爾 馬 代 袞 等 舉 國 來 附 。 己 卯 , 庫 爾 纏 有 罪 , 誅 。 癸 未, 土 魯 什 、 勞 薩 等 略 寧 遠 。

 


    三 月 丁 酉 , 築  場 、 攬 盤 、 通 遠 堡 、 岫 巖 四 城 。辛 丑 , 郭 爾 羅 斯 部 台 吉 固 木 來 朝 。 丙 辰 , 明 故 總 兵 毛 文龍 部 將 孔 有 德 、 耿 仲 明 遣 使 來 約 降 。

 


    夏 四 月 乙 丑 , 察 哈 爾 兩 翼 大 總 管 塔 什 海 虎 魯 克 寨桑 來 附 。 乙 亥 , 使 參 將 英 俄 爾 岱 等 借 糧 朝 鮮 濟 孔 有 德 軍, 不 從 。

 


    五 月 乙 未 , 吳 喇 忒 台 吉 土 門 達 爾 漢 等 來 朝 。 壬 子, 貝 勒 濟 爾 哈 朗 、 阿 濟 格 、 杜 度 率 兵 迎 孔 有 德 、 耿 仲 明於 鎮 江 , 命 率 所 部 駐 東 京 。

 


    六 月 壬 戌 , 諭 將 士 毋 侵 擾 遼 東 新 附 人 民 , 違 者 孥戮 之 。 癸 亥 , 召 孔 有 德 、 耿 仲 明 入 覲 , 厚 賚 之 。 丙 寅 ,遣 英 俄 爾 岱 遺 朝 鮮 王 書 曰 :「

往 之 借 糧 , 貴 國 王 以 孔 有 德 等 昔 隸 毛 氏 , 無 輸 糧 養 敵之 理 。 今 有 德 歸 我 , 糧 已 足 給 。 惟 兵 卒 守 船 , 輓 運 維 艱, 近 距 貴 國 , 以 糧 給 之 甚 便 。 朕 思 王 視 明 為 父 , 視 朕 為兄 , 父 兄 相 爭 數 年 , 而 王 坐 觀 成 敗 , 是 外 有 父 兄 之 名 ,而 內 懷 幸 禍 之 意 。 若 力 為 解 勸 , 息 兵 成 好 , 不 惟 我 兩 國樂 見 太 平 , 即 貴 國 亦 受 其 福 。 若 仍 以 兵 助 明 , 合 而 禦 我, 則 搆 兵 實 自 王 始 。 」 己 巳 , 諭 官 民 冠 服 遵 制 畫 一 。 癸酉 , 以 孔 有 德 為 都 元 帥 , 耿 仲 明 為 總 兵 官 , 並 賜 敕 印 。戊 寅 , 英 俄 爾 岱 奏 報 朝 鮮 用 明 人 計 , 借 兵 倭 國 , 又 於 義州 南 嶺 築 城 備 我 。 集 諸 貝 勒 大 臣 議 之 , 皆 言 宜 置 朝 鮮 而伐 明 。 己 卯 , 貝 勒 岳 託 、 德 格 類 率 右 翼 楞 額 禮 、 葉 臣 ,左 翼 伊 爾 登 、 昂 阿 喇 及 石 廷 柱 、 孔 有 德 、 耿 仲 明 將 兵 取明 旅 順 口 。 甲 申 , 東 海 使 犬 部 額 駙 僧 格 來 朝 貢 。 丁 亥 ,諭 曰 : 「 凡 進 言 者 , 如 朕 所 行 未 協 於 義 , 宜 直 言 勿 諱 。政 事 或 有 愆 忌 , 宜 開 陳 無 隱 。 六 部 諸 臣 , 奸 偽 貪 邪 , 行事 不 公 , 宜 行 糾 劾 。 諸 臣 有 艱 苦 之 情 , 亦 據 實 奏 聞 。 苟不 務 直 言 , 遠 引 曲 喻 , 勦 襲 紛 然 , 何 益 於 事 ? 」

 


    秋 七 月 辛 卯 朔 , 諭 滿 洲 各 戶 有 漢 人 十 丁 者 授 棉 甲一 , 以 舊 漢 軍 額 真 馬 光 遠 統 之 。 壬 辰 , 阿 祿 部 孫 杜 稜 子台 吉 古 木 思 轄 布 , 寨 桑 吳 巴 什 、 阿 什 圖 、 巴 達 爾 和 碩 齊等 , 吳 喇 忒 部 台 吉 阿 巴 噶 爾 代 皆 來 朝 貢 。 甲 辰 , 貝 勒 岳託 等 奏 克 旅 順 口 。

 


    八 月 庚 申 朔 , 英 俄 爾 岱 等 自 朝 鮮 還 , 以 復 書 允 糧濟 我 守 船 軍 士 。 壬 戌 , 貝 勒 阿 巴 泰 、 阿 濟 格 、 薩 哈 廉 、豪 格 等 略 明 山 海 關 外 。 庚 辰 , 貝 勒 德 格 類 、 岳 託 師 還 。丁 亥 , 以 副 將 石 廷 柱 為 總 兵 官 。

 


    九 月 庚 子 , 貝 勒 阿 巴 泰 等 師 還 。 上 以 其 不 深 入 ,責 之 。 癸 卯 , 英 俄 爾 岱 等 往 朝 鮮 互 市 。 庚 戌 , 明 登 州 都司 蔡 賓 等 來 降 。

 


    冬 十 月 壬 戌 , 遣 使 外 藩 蒙 古 各 部 , 宣 布 法 令 。 丙寅 , 大 閱 。 丁 卯 , 發 帑 賚 八 旗 步 兵 。 己 巳 , 諭 曰 : 「 置官 以 來 , 吏 、 戶 、 兵 三 部 辦 事 盡 善 , 刑 部 訊 獄 稽 延 , 罔得 實 情 , 禮 部 、 工 部 皆 有 缺 失 。 夫 啟 心 郎 之 設 , 欲 其 隨事 規 諫 , 啟 乃 心 也 。 乃 有 差 謬 而 不 聞 開 導 , 何 耶 ? 」 又曰 : 「 爾 等 動 以 航 海 取 山 東 攻 山 海 關 為 言 。 航 海 多 險 ,攻 堅 易 傷 , 是 以 空 言 相 賺 , 不 啻 為 敵 計 耳 。 兵 事 無 藉 爾言 , 惟 朕 與 諸 貝 勒 有 過 , 當 極 言 耳 。 」 又 諭 文 館 諸 儒 臣曰 : 「 太 祖 始 命 巴 克 什 額 爾 德 尼 造 國 書 , 後 庫 爾 纏 增 之。 慮 有 未 合 , 爾 等 職 司 紀 載 , 宜 悉 心 訂 正 。 朕 嗣 大 位 ,凡 皇 考 行 政 用 兵 之 大 , 不 一 一 詳 載 , 後 世 子 孫 何 由 而 知, 豈 朕 所 以 盡 孝 道 乎 ? 」 丙 子 , 授 明 降 將 馬 光 遠 為 總 兵官 , 王 世 選 、 麻 登 雲 為 三 等 總 兵 官 , 馬 光 先 、 孟 喬 芳 等各 授 職 有 差 。 癸 未 , 明 廣 鹿 島 副 將 尚 可 喜 遣 使 來 約 降 。

 


    十 一 月 甲 辰 , 英 俄 爾 岱 復 賚 書 往 朝 鮮 , 責 以 違 約十 事 。 戊 申 , 遣 季 思 哈 、 吳 巴 海 往 征 朝 鮮 接 壤 之 虎 爾 哈部 。 辛 亥 , 上 獵 於 葉 赫 。

 


    十 二 月 辛 未 , 上 還 瀋 陽 。

 


    八 年 春 正 月 庚 寅 , 諭 蒙 古 諸 貝 勒 令 遵 我 國 定 制 。黑 龍 江 羌 圖 里 、 嘛 爾 干 率 六 姓 來 朝 貢 。 癸 巳 , 詔 宗 人 自興 祖 直 皇 帝 出 者 為 六 祖 後 , 免 其 徭 役 。 乙 未 , 正 黃 旗 都統 、 一 等 總 兵 官 楞 額 禮 卒 。 癸 卯 , 漢 備 禦 訴 漢 人 徭 役 重於 滿 洲 , 戶 部 貝 勒 德 格 類 以 聞 。 上 命 禮 部 貝 勒 薩 哈 廉 集眾 諭 其 妄 。 漢 總 兵 官 石 廷 柱 等 執 備 禦 八 人 請 罪 , 上 曰 :「 若 加 以 罪 , 則 後 無 復 言 者 。 」 並 釋 之 。 戊 申 , 塔 布 囊等 征 察 哈 爾 潰 眾 於 席 爾 哈 、 席 伯 圖 。 己 酉 , 蒿 齊 忒 部 台吉 額 林 臣 來 歸 。 丁 巳 , 免 功 臣 身 故 無 嗣 者 丁 之 半 , 妻 故始 應 役 , 著 為 令 。

 


    二 月 壬 戌 , 定 喪 祭 例 , 妻 殉 夫 者 聽 , 仍 予 旌 表 ;逼 妾 殉 者 , 妻 坐 死 。 遣 貝 勒 多 爾 袞 、 薩 哈 廉 往 迎 降 將 尚可 喜 , 使 駐 海 州 。 丁 卯 , 都 元 帥 孔 有 德 劾 耿 仲 明 不 法 狀, 諭 解 之 。 戊 辰 , 遣 阿 山 等 略 錦 州 。

 


    三 月 丁 亥 朔 , 日 有 食 之 , 綠 虹 見 。 辛 卯 , 命 譚 泰、 圖 爾 格 略 錦 州 。 壬 辰 , 副 將 尚 可 喜 率 三 島 官 民 降 , 駐海 州 。 己 亥 , 大 閱 。 甲 辰 , 遣 英 俄 爾 岱 往 朝 鮮 互 市 。 令孔 有 德 、 耿 仲 明 、 尚 可 喜 幟 用 白 鑲 皂 , 以 別 八 旗 。 壬 子, 考 試 漢 生 員 。

 


    夏 四 月 辛 酉 , 升 授 太 祖 諸 子 湯 古 代 等 副 將 、 參 將、 備 禦 有 差 。 又 以 哈 達 、 烏 喇 二 部 之 後 無 顯 職 , 授 哈 達克 什 內 為 副 將 , 烏 喇 巴 彥 為 三 等 副 將 。 詔 以 瀋 陽 為 「 天眷 盛 京 」 , 赫 圖 阿 喇 城 為 「 天 眷 興 京 」 。 改 定 總 兵 、 副將 、 參 將 、 游 擊 、 備 禦 滿 字 官 名 。 丁 丑 , 尚 可 喜 來 朝 ,命 為 總 兵 官 。 乙 亥 , 以 太 祖 弟 之 子 拜 尹 圖 為 總 管 。 辛 巳, 初 命 禮 部 考 試 滿 洲 、 漢 人 通 滿 、 漢 、 蒙 古 書 義 者 , 取剛 林 等 十 六 人 為 舉 人 , 賜 衣 一 襲 , 免 四 丁 。 乙 酉 , 金 繼孟 等 自 明 石 城 島 來 降 , 以 隸 尚 可 喜 。

 


    五 月 丙 戌 朔 , 黑 龍 江 巴 爾 達 齊 來 貢 。 庚 寅 , 察 哈爾 台 吉 毛 祁 他 特 來 朝 。 定 滿 、 漢 馬 步 軍 名 。 丙 申 , 議 征明 , 諸 貝 勒 請 從 山 海 關 入 。 上 曰 : 「 不 然 , 察 哈 爾 為 我軍 所 敗 , 其 貝 勒 大 臣 將 歸 我 , 宜 直 趨 宣 、 大 以 逆 之 。 」乃 集 各 都 統 部 署 軍 政 , 遣 國 舅 阿 什 達 爾 哈 徵 科 爾 沁 兵 ,以 書 招 撫 遺 眾 之 在 明 境 者 。 壬 寅 , 定 百 官 功 次 , 賜 敕 書, 其 世 襲 及 官 止 本 身 者 , 分 別 開 載 有 差 。 甲 辰 , 季 思 哈、 吳 巴 海 征 虎 爾 哈 部 奏 捷 。 命 貝 勒 濟 爾 哈 朗 留 守 盛 京 ,貝 勒 杜 度 守 海 州 , 吏 部 承 政 圖 爾 格 等 渡 遼 河 , 沿 張 古 臺河 駐 防 , 並 扼 敵 兵 , 俱 授 方 略 。 畢 , 上 率 大 軍 前 發 。 己酉 , 次 都 爾 鼻 , 諸 蒙 古 外 藩 兵 以 次 來 會 。 甲 寅 , 次 訥 里特 河 。

 


    六 月 辛 酉 , 頒 軍 令 於 蒙 古 諸 貝 勒 及 孔 有 德 、 耿 仲明 、 尚 可 喜 , 曰 : 「 行 軍 時 勿 離 纛 , 勿 諠 譁 , 勿 私 出 劫掠 。 抗 拒 者 誅 之 , 歸 順 者 字 之 。 勿 毀 廟 宇 , 勿 殺 行 人 ,勿 奪 人 衣 服 , 勿 離 人 夫 婦 , 勿 淫 人 婦 女 。 違 者 治 罪 。 」先 是 , 察 哈 爾 林 丹 西 奔 圖 白 特 , 其 部 眾 苦 林 丹 暴 虐 , 逗遛 者 什 七 八 , 食 盡 , 殺 人 相 食 , 屠 劫 不 已 , 潰 散 四 出 。至 是 , 絡 繹 來 附 者 前 後 數 千 戶 。 辛 未 , 次 庫 黑 布 里 都 ,議 覺 羅 布 爾 吉 、 英 俄 爾 岱 擅 殺 察 哈 爾 布 顏 圖 部 眾 罪 , 並奪 其 賜 。 甲 戌 , 次 喀 喇 拖 落 木 , 命 貝 勒 德 格 類 率 兵 入 獨石 口 , 偵 居 庸 關 , 期 會 師 於 朔 州 。 戊 寅 , 諭 蒙 古 諸 貝 勒曰 : 「 科 爾 沁 噶 爾 珠 塞 特 爾 等 叛 往 索 倫 , 為 其 族 兄 弟 等追 獲 被 殺 , 朕 心 惻 然 。 朕 欲 宣 布 德 化 , 使 人 民 共 登 安 樂。 今 諸 貝 勒 雖 以 罪 誅 , 亦 朕 教 化 所 未 洽 也 。 」 又 命 減 阿魯 部 達 喇 海 等 越 界 駐 牧 罪 。 壬 午 , 察 哈 爾 土 巴 濟 農 率 其民 千 戶 來 歸 。 喀 爾 喀 部 巴 噶 達 爾 漢 來 歸 。 甲 申 , 命 大 貝勒 代 善 等 率 兵 入 得 勝 堡 , 略 大 同 , 西 至 黃 河 , 副 都 統 土魯 什 、 吳 拜 等 逕 歸 化 撫 察 哈 爾 逃 民 , 俱 會 師 朔 州 。

 


    秋 七 月 己 丑 , 命 貝 勒 阿 濟 格 、 多 爾 袞 、 多 鐸 等 入龍 門 , 會 宣 府 , 上 親 統 大 軍 自 宣 府 趨 朔 州 , 期 四 路 兵 剋期 並 進 。 辛 卯 , 毀 邊 牆 。 壬 辰 , 入 上 方 堡 , 至 宣 府 右 衛, 以 書 責 明 守 臣 負 盟 之 罪 , 仍 諭 其 遣 使 議 和 。 癸 巳 , 駐城 東 南 。 時 阿 濟 格 攻 龍 門 , 未 下 , 令 略 保 安 。 丁 酉 , 營東 城 , 遺 明 代 王 書 , 復 約 其 遣 使 議 和 。 代 善 攻 得 勝 堡 ,克 之 。 明 參 將 李 全 自 縊 死 。 進 攻 懷 仁 、 井 坪 , 皆 不 克 ,遂 駐 朔 州 。 丙 午 , 上 圍 應 州 , 令 代 善 等 趣 馬 邑 。 土 魯 什至 歸 化 城 , 察 哈 爾 林 丹 之 妻 率 其 八 寨 桑 以 一 千 二 百 戶 來降 。 庚 戌 , 阿 濟 格 等 攻 保 安 州 , 克 之 。 壬 子 , 德 格 類 入獨 石 口 , 取 長 安 嶺 , 攻 赤 城 , 不 克 , 俱 會 師 於 應 州 。

 


    八 月 乙 卯 , 命 諸 將 略 代 州 。 薩 哈 廉 襲 崞 縣 , 拔 之。 丙 辰 , 碩 托 入 圓 平 驛 。 甲 子 , 阿 巴 泰 等 取 靈 丘 縣 之 王家 莊 , 克 之 。 禮 部 承 政 巴 都 禮 戰 歿 。 又 攻 應 州 之 石 家 村堡 , 克 之 。 丙 寅 , 上 發 應 州 , 聞 明 陽 和 總 督 張 宗 衡 、 大同 總 兵 曹 文 詔 駐 懷 仁 , 度 是 夜 必 奔 大 同 , 令 土 魯 什 、 吳拜 伏 兵 邀 之 。 師 行 遲 , 宗 衡 等 逸 去 。 上 怒 責 之 。 戊 辰 ,上 至 大 同 , 遺 書 文 詔 , 令 贊 和 議 。 又 遺 書 眾 官 , 索 察 哈爾 餘 孽 之 在 明 者 。 文 詔 挑 戰 , 擊 敗 之 。 貝 勒 阿 巴 泰 等 拔靈 丘 。 明 代 王 母 楊 氏 與 張 宗 衡 、 曹 文 詔 以 書 來 請 和 。 辛未 , 遣 使 以 書 報 之 。 壬 申 , 代 善 率 師 來 會 。 癸 酉 , 駐 師大 同 , 遣 明 宗 室 朱 乃 廷 及 俘 獲 僧 人 入 城 。 三 索 報 書 , 俱不 答 。 縱 乃 廷 妻 子 及 朱 乃 振 還 。 丁 丑 , 營 四 十 里 鋪 , 得明 間 諜 書 北 樓 口 , 為 書 報 之 曰 : 「 來 書 以 滿 洲 為 屬 國 ,即 予 亦 未 嘗 以 為 非 也 。 惟 遼 東 之 官 欺 凌 我 國 , 皇 帝 惑 於臣 下 之 誑 , 雖 干 戈 十 數 年 來 , 無 一 言 詢 及 , 使 我 國 之 情不 達 , 若 遣 一 信 使 判 白 是 非 , 則 兵 戈 早 息 矣 。 欲 享 太 平, 只 旦 暮 間 事 。 不 然 , 爾 國 臣 僚 壅 蔽 欺 罔 , 虛 報 斬 伐 ,以 吾 小 國 果 受 傷 夷 , 詎 能 數 侵 , 豈 皇 帝 之 聰 明 獨 不 能 一忖 度 耶 ? 願 和 之 誠 , 黑 雲 龍 自 知 之 , 慮 其 恐 結 怨 於 大 臣不 盡 告 耳 。 」 己 卯 , 大 軍 至 陽 和 。 明 總 兵 曹 文 詔 詭 以 書誑 張 宗 衡 , 偽 言 砲 傷 我 兵 , 得 纛 一 桿 等 語 , 為 我 邏 者 所獲 。 上 乃 遺 宗 衡 書 曰 : 「 予 謂 爾 明 當 有 忠 臣 義 士 實 心 謀國 者 , 乃 一 旦 虛 誑 至 此 , 豈 不 愧 於 心 乎 ? 今 與 公 等 約 ,我 兵 以 一 當 十 , 能 約 期 出 戰 , 當 勒 兵 以 俟 。 若 誑 言 欺 君, 貽 害 生 靈 , 禍 櫱 將 無 窮 矣 。 」 壬 午 , 次 懷 遠 。 癸 未 ,駐 左 衛 。

 


    閏 八 月 丙 戌 , 以 書 責 明 宣 府 太 監 欺 君 誤 國 罪 。 丁亥 , 副 都 統 土 魯 什 被 創 卒 。 攻 萬 全 左 衛 , 克 之 。 庚 寅 ,班 師 。 察 哈 爾 噶 爾 馬 濟 農 等 遣 使 乞 降 , 言 其 汗 林 丹 病 殂, 汗 子 及 國 人 皆 欲 來 歸 , 於 是 命 阿 什 達 爾 哈 等 往 偵 之 。丁 酉 , 移 軍 舊 上 都 城 。 庚 戌 , 移 軍 克 蚌 。 辛 亥 , 察 哈 爾寨 桑 噶 爾 馬 濟 農 等 率 其 國 人 六 千 奉 豆 土 門 福 金 來 歸 。

 


    九 月 戊 辰 , 留 守 貝 勒 濟 爾 哈 朗 疏 報 季 思 哈 、 吳 巴海 征 虎 爾 哈 俘 一 千 三 百 餘 人 。 阿 魯 部 毛 明 安 舉 國 來 附 。辛 未 , 渡 遼 河 。 壬 申 , 上 還 盛 京 。

 


    冬 十 月 己 丑 , 建 太 祖 陵 寢 殿 , 樹 松 , 立 石 獸 。 壬辰 , 論 征 宣 、 大 將 士 功 罪 。 己 亥 , 科 爾 沁 台 吉 吳 克 善 來歸 其 妹 , 納 之 。 庚 戌 , 以 八 年 征 討 克 捷 , 為 文 告 太 祖 。壬 子 , 朝 鮮 國 王 李 倧 遣 使 以 書 來 。 上 以 其 言 不 遜 , 復 書切 責 之 。

 


    十 一 月 乙 丑 , 六 部 官 考 績 陞 授 有 差 。

 


    十 二 月 癸 未 朔 , 朝 鮮 國 王 以 書 來 謝 罪 。 壬 辰 , 命副 都 統 霸 奇 蘭 、 參 領 薩 木 什 喀 征 黑 龍 江 未 服 之 地 。 丙 申, 分 定 宗 室 、 額 駙 等 專 管 佐 領 有 差 。 丁 酉 , 墨 勒 根 喇 嘛以 嘛 哈 噶 喇 金 像 來 貢 , 遣 使 迎 至 盛 京 。 癸 卯 , 察 哈 爾 祁他 特 車 爾 貝 、 塞 冷 布 都 馬 爾 等 各 率 所 部 人 民 來 歸 。 遣 吳巴 海 、 荊 古 爾 代 征 瓦 爾 喀 。 甲 辰 , 佐 領 劉 學 誠 疏 請 立 郊壇 , 勤 視 朝 。 上 曰 : 「 疏 中 欲 朕 視 朝 勤 政 是 也 。 至 建 立郊 壇 , 未 知 天 意 所 在 , 何 敢 遽 行 , 果 成 大 業 , 彼 時 議 之未 晚 也 。 」

 


    九 年 春 正 月 丁 卯 , 上 親 送 科 爾 沁 土 謝 圖 濟 農 等 歸國 。 癸 酉 , 免 功 臣 徭 役 。 丁 丑 , 詔 太 祖 庶 子 稱 「 阿 格 」, 六 祖 子 孫 稱 「 覺 羅 」 , 覺 羅 繫 紅 帶 以 別 之 。 有 詈 其 祖父 者 罪 至 死 。

 


    二 月 壬 午 , 令 諸 臣 薦 舉 居 心 公 正 及 通 曉 文 藝 可 任使 者 。 丁 亥 , 編 喀 喇 沁 部 蒙 古 壯 丁 為 十 一 旗 , 每 旗 設 都統 一 員 , 下 以 副 都 統 、 參 領 二 員 統 之 。 戊 子 , 諭 曰 : 「邇 來 進 言 者 皆 請 伐 明 , 朕 豈 不 以 為 念 。 然 亦 須 相 機 而 行。 今 察 哈 爾 新 附 , 人 心 未 輯 , 城 郭 未 修 , 而 輕 於 出 師 ,何 以 成 大 業 。 且 大 兵 一 舉 , 明 主 或 棄 而 走 , 或 懼 而 請 和, 攻 拒 之 策 , 何 者 為 宜 ? 其 令 高 鴻 中 、 鮑 承 先 、 寧 完 我、 范 文 程 等 酌 議 以 聞 。 」 己 丑 , 沈 佩 瑞 請 屯 田 廣 寧 、 閭陽 , 造 舟 輓 粟 , 為 進 取 計 。 上 嘉 納 之 。 乙 未 , 范 文 程 、寧 完 我 請 薦 舉 不 實 宜 行 連 坐 法 。 丁 未 , 命 多 爾 袞 、 岳 託、 豪 格 、 薩 哈 廉 將 精 騎 一 萬 , 收 察 哈 爾 林 丹 之 子 額 爾 克孔 果 爾 額 哲 。

 


    三 月 戊 辰 , 諭 曰 : 「 頃 民 耕 耨 愆 期 , 蓋 由 佐 領 有事 築 城 , 民 苦 煩 役 所 致 。 嗣 有 濫 役 妨 農 者 治 其 罪 。 」 庚午 , 察 哈 爾 寨 桑 巴 賴 都 爾 等 一 千 四 百 餘 人 來 歸 。

 


    五 月 乙 卯 , 霸 奇 蘭 、 薩 木 什 喀 征 黑 龍 江 虎 爾 哈 部, 盡 克 其 地 , 編 所 獲 人 口 以 歸 , 論 功 陞 賞 有 差 。 癸 亥 ,上 以 西 征 諸 貝 勒 經 宣 、 大 境 , 度 明 必 調 寧 、 錦 兵 往 援 ,遣 貝 勒 多 鐸 率 師 入 寧 、 錦 撓 之 。 己 巳 , 命 文 館 譯 宋 、 遼、 金 、 元 四 史 。 壬 申 , 貝 勒 多 鐸 奏 報 殲 明 兵 五 百 人 於 錦州 松 山 城 外 , 殺 其 副 將 劉 應 選 。 丙 子 , 貝 勒 多 爾 袞 、 岳託 、 薩 哈 廉 、 豪 格 等 奏 報 兵 至 西 喇 朱 爾 格 , 遇 察 哈 爾 囊囊 太 妃 暨 台 吉 瑣 諾 木 等 以 一 千 五 百 戶 降 , 遂 抵 額 爾 克 孔果 爾 額 哲 所 居 , 其 母 率 額 哲 迎 降 。

 


    六 月 乙 酉 , 貝 勒 多 鐸 凱 旋 , 賜 良 馬 五 , 賞 從 征 將士 有 差 。 丁 酉 , 吳 巴 海 、 荊 古 爾 代 師 還 , 論 功 亦 如 之 。明 登 州 黃 城 島 千 總 李 進 功 來 降 。 辛 丑 , 諭 曰 : 「 太 祖 以人 民 付 朕 , 當 愛 養 之 。 諸 貝 勒 非 時 修 繕 , 勞 苦 百 姓 , 民不 得 所 , 寖 以 逃 亡 , 是 違 先 志 而 長 敵 寇 也 。 今 朝 鮮 賓 服, 察 哈 爾 舉 國 來 附 , 苟 不 能 撫 輯 其 眾 , 後 雖 拓 地 , 何 以處 之 ? 貝 勒 大 臣 其 各 戢 驕 縱 以 副 朕 意 ! 」 壬 寅 , 察 哈 爾台 吉 瑣 諾 木 率 其 屬 六 千 八 百 人 來 歸 。 癸 卯 , 諭 曰 : 「 太祖 禁 貝 勒 子 弟 郊 外 放 鷹 , 慮 其 踐 田 園 、 擾 牲 畜 也 。 今 違者 日 眾 。 語 曰 : 『 涓 涓 不 塞 , 將 成 江 河 。 』 其 嚴 禁 之 。」

 


    秋 七 月 癸 酉 , 論 漢 人 丁 戶 增 減 , 擢 參 領 李 思 忠 等六 員 官 , 高 鴻 中 等 十 一 員 黜 罰 有 差 。

 


    八 月 庚 辰 , 貝 勒 多 爾 袞 、 岳 託 、 薩 哈 廉 、 豪 格 以獲 傳 國 玉 璽 聞 。 先 是 元 順 帝 北 狩 , 以 璽 從 , 後 失 之 。 越二 百 餘 年 , 為 牧 羊 者 所 獲 。 後 歸 於 察 哈 爾 林 丹 汗 。 林 丹亦 元 裔 也 。 璽 在 蘇 泰 太 妃 所 。 至 是 獻 之 。 時 岳 託 以 疾 留歸 化 城 , 多 爾 袞 等 率 兵 略 明 山 西 , 自 平 虜 衛 入 邊 , 毀 長城 , 略 忻 州 、 代 州 , 至 崞 縣 。 甲 申 , 繪 太 祖 實 錄 圖 成 。乙 巳 , 上 率 大 貝 勒 代 善 及 諸 貝 勒 多 爾 袞 等 師 次 平 虜 堡 。丁 未 , 渡 遼 河 , 閱 巨 流 河 城 堡 。

 


    九 月 癸 丑 , 貝 勒 多 爾 袞 等 師 還 , 獻 玉 璽 , 告 天 受之 。 額 爾 克 孔 果 爾 額 哲 及 其 母 來 朝 。 庚 午 , 上 還 宮 。 壬申 , 召 諸 貝 勒 大 臣 數 代 善 罪 。 眾 議 削 大 貝 勒 號 及 和 碩 貝勒 , 奪 十 佐 領 , 其 子 薩 哈 廉 奪 二 佐 領 , 哈 達 公 主 降 庶 人, 褫 其 夫 瑣 諾 木 濟 農 爵 號 。 上 皆 免 之 。

 


    冬 十 月 己 卯 , 以 明 議 和 不 成 , 將 進 兵 , 遣 使 賚 書諭 明 喜 峰 口 、 董 家 口 諸 邊 將 。 管 戶 部 事 和 碩 貝 勒 德 格 類卒 。 癸 未 , 命 吳 巴 海 、 多 濟 里 、 札 福 尼 、 吳 什 塔 分 將 四路 兵 征 瓦 爾 喀 。

 


    十 一 月 丁 未 朔 , 命 額 爾 克 孔 果 爾 額 哲 奉 母 居 孫 島習 爾 哈 。

 


    十 二 月 辛 巳 , 哈 達 公 主 莽 古 濟 之 僕 冷 僧 機 首 告 貝勒 莽 古 爾 泰 生 時 與 女 弟 莽 古 濟 、 弟 德 格 類 謀 逆 , 公 主 之夫 瑣 諾 木 及 屯 布 祿 、 愛 巴 禮 與 其 事 。 會 瑣 諾 木 亦 自 首 。訊 得 實 , 莽 古 濟 、 莽 古 爾 泰 子 額 必 倫 及 屯 布 祿 、 愛 巴 禮皆 伏 誅 。 莽 古 爾 泰 餘 子 、 德 格 類 子 俱 為 庶 人 。 瑣 諾 木 自首 免 罪 。 授 冷 僧 機 三 等 副 將 。 丁 酉 , 謁 太 祖 陵 。 甲 辰 ,貝 勒 薩 哈 廉 與 諸 貝 勒 及 大 貝 勒 代 善 盟 誓 , 請 上 尊 號 。 上不 許 。 會 蒙 古 貝 勒 復 來 請 。 上 曰 : 「 朝 鮮 兄 弟 國 , 宜 告之 。 」

 


    十 年 春 正 月 壬 戌 , 皇 次 女 下 嫁 額 爾 克 孔 果 爾 額 哲。

 


    二 月 丁 丑 , 八 和 碩 貝 勒 與 外 藩 四 十 九 貝 勒 各 遺 書朝 鮮 , 約 其 國 王 勸 進 尊 號 。 戊 子 , 遣 使 至 明 邊 松 棚 路 、潘 家 口 、 董 家 口 、 喜 峰 口 、 賚 書 致 明 帝 , 索 其 報 書 。 定諸 臣 帽 頂 飾 。 庚 寅 , 寧 完 我 以 罪 免 。

 


    三 月 丙 午 朔 , 清 明 節 , 謁 太 祖 陵 。 辛 亥 , 改 文 館為 內 國 史 、 內 祕 書 、 內 弘 文 三 院 。 乙 卯 , 遣 貝 勒 阿 濟 格、 阿 巴 泰 築 噶 海 城 。 庚 申 , 吳 什 塔 等 征 瓦 爾 喀 , 遣 使 奏捷 。 諭 曰 : 「 蒙 古 深 信 喇 嘛 , 實 乃 妄 人 。 嗣 後 有 懸 轉 輪結 布 旛 者 , 宜 禁 止 之 。 」 乙 丑 , 英 俄 爾 岱 等 自 朝 鮮 還 ,言 國 王 李 倧 不 接 見 , 亦 不 納 書 , 以 其 報 書 及 所 獲 倧 諭 邊臣 書 進 。 諸 貝 勒 怒 , 欲 加 兵 。 上 曰 : 「 姑 遣 人 諭 以 利 害, 質 其 子 弟 , 不 從 , 興 兵 未 晚 也 。 」 丁 卯 , 外 藩 蒙 古 十六 國 四 十 九 貝 勒 及 孔 有 德 、 耿 仲 明 、 尚 可 喜 俱 以 請 上 尊號 至 盛 京 。

 


    夏 四 月 己 卯 , 大 貝 勒 代 善 , 和 碩 貝 勒 濟 爾 哈 朗 、多 爾 袞 、 多 鐸 、 岳 託 、 豪 格 、 阿 巴 泰 、 阿 濟 格 、 杜 度 率滿 、 漢 、 蒙 古 大 臣 及 蒙 古 十 六 國 四 十 九 貝 勒 以 三 體 表 文詣 闕 請 上 尊 號 曰 : 「 恭 維 我 皇 上 承 天 眷 祐 , 應 運 而 興 。當 天 下 昏 亂 , 修 德 體 天 , 逆 者 威 , 順 者 撫 , 寬 溫 之 譽 ,施 及 萬 姓 。 征 服 朝 鮮 , 混 一 蒙 古 。 遂 獲 玉 璽 , 受 命 之 符, 昭 然 可 見 , 上 揆 天 意 , 下 協 輿 情 。 臣 等 謹 上 尊 號 , 儀物 俱 備 , 伏 願 俞 允 。 」 上 曰 : 「 爾 貝 勒 大 臣 勸 上 尊 號 ,歷 二 年 所 。 今 再 三 固 請 , 朕 重 違 爾 諸 臣 意 , 弗 獲 辭 。 朕既 受 命 , 國 政 恐 有 未 逮 , 爾 等 宜 恪 恭 贊 襄 。 」 群 臣 頓 首謝 。 庚 辰 , 禮 部 進 儀 注 。 壬 午 , 齋 戒 , 設 壇 德 盛 門 外 。

 

 

 

 


清 史 稿 卷 三

 


    本 紀 三

 


      太 宗 本 紀 二

    崇 德 元 年(1636년) 夏 四 月 乙 酉 , 祭 告 天 地 , 行 受 尊 號 禮 , 定有 天 下 之 號 曰 大 清 , 改 元 崇 德 , 群 臣 上 尊 號 曰 寬 溫 仁 聖皇 帝 , 受 朝 賀 。 始 定 祀 天 太 牢 用 熟 薦 。 遣 官 以 建 太 廟 追尊 列 祖 祭 告 山 陵 。 丙 戌 , 追 尊 始 祖 為 澤 王 , 高 祖 為 慶 王, 曾 祖 為 昌 王 , 祖 為 福 王 , 考 諡 曰 承 天 廣 運 聖 德 神 功 肇紀 立 極 仁 孝 武 皇 帝 , 廟 號 太 祖 , 陵 曰 福 陵 ; 妣 諡 曰 孝 慈昭 憲 純 德 貞 順 成 天 育 聖 武 皇 后 。 追 贈 族 祖 禮 敦 巴 圖 魯 為武 功 郡 王 , 追 封 功 臣 費 英 東 為 直 義 公 , 額 亦 都 為 弘 毅 公, 配 享 。 丁 亥 , 群 臣 上 表 賀 。 諭 曰 : 「 朕 以 涼 德 , 恐 負眾 望 。 爾 諸 臣 宜 同 心 匡 輔 , 各 共 厥 職 , 正 己 率 屬 , 克 殫忠 誠 , 立 綱 陳 紀 , 撫 民 恤 眾 , 使 君 明 臣 良 , 政 治 咸 熙 ,庶 克 荷 天 之 休 命 。 」 群 臣 頓 首 曰 : 「 聖 諭 及 此 , 國 家 之福 也 。 」 以 受 尊 號 禮 成 , 大 赦 。 己 丑 , 多 濟 里 、 扈 習 征瓦 爾 喀 師 還 , 賞 賚 有 差 。 朝 鮮 使 臣 歸 國 。 初 , 上 受 尊 號, 朝 鮮 使 臣 羅 德 憲 、 李 廓 獨 不 拜 。 上 曰 : 「 彼 國 王 將 搆怨 , 欲 朕 殺 其 使 臣 以 為 詞 耳 , 其 釋 之 。 」 至 是 遣 歸 , 以書 諭 朝 鮮 國 王 責 之 , 命 送 子 弟 為 質 。 丁 酉 , 敘 功 , 封 大貝 勒 代 善 為 和 碩 兄 禮 親 王 , 貝 勒 濟 爾 哈 朗 為 和 碩 鄭 親 王, 多 爾 袞 為 和 碩 睿 親 王 , 多 鐸 為 和 碩 豫 親 王 , 豪 格 為 和碩 肅 親 王 , 岳 託 為 和 碩 成 親 王 , 阿 濟 格 為 多 羅 武 英 郡 王, 杜 度 為 多 羅 安 平 貝 勒 , 阿 巴 泰 為 多 羅 饒 餘 貝 勒 ; 諸 蒙古 貝 勒 巴 達 禮 為 和 碩 土 謝 圖 親 王 , 吳 克 善 為 和 碩 卓 禮 克圖 親 王 , 固 倫 額 駙 額 哲 為 和 碩 親 王 , 布 塔 齊 為 多 羅 札 薩克 圖 郡 王 , 滿 朱 習 禮 為 多 羅 巴 圖 魯 郡 王 , 袞 出 斯 巴 圖 魯為 多 羅 達 爾 漢 郡 王 , 孫 杜 稜 為 多 羅 杜 稜 郡 王 , 固 倫 額 駙班 第 為 多 羅 郡 王 , 孔 果 爾 為 冰 圖 王 , 東 為 多 羅 達 爾 漢 戴青 , 俄 木 布 為 多 羅 達 爾 漢 卓 禮 克 圖 , 古 魯 思 轄 布 為 多 羅杜 稜 , 單 把 為 達 爾 漢 , 耿 格 爾 為 多 羅 貝 勒 , 孔 有 德 為 恭順 王 , 耿 仲 明 為 懷 順 王 , 尚 可 喜 為 智 順 王 。 辛 丑 , 朝 鮮使 臣 置 我 書 於 通 遠 堡 , 不 以 歸 。 札 福 尼 征 瓦 爾 喀 師 還 。

    五 月 丙 午 , 以 希 福 為 內 弘 文 院 大 學 士 , 范 文 程 、鮑 承 先 俱 為 內 秘 書 院 大 學 士 , 剛 林 為 內 國 史 院 大 學 士 。壬 子 , 貝 勒 薩 哈 廉 卒 , 輟 朝 三 日 。 癸 丑 , 始 薦 櫻 桃 於 太廟 。 丁 巳 , 設 都 察 院 , 諭 曰 : 「 朕 或 奢 侈 無 度 , 誤 誅 功臣 ; 或 畋 獵 逸 樂 , 不 理 政 事 ; 或 棄 忠 任 奸 , 黜 陟 未 當 ;爾 其 直 陳 無 隱 。 諸 貝 勒 或 廢 職 業 , 黷 貨 偷 安 , 爾 其 指 參。 六 部 或 斷 事 偏 謬 , 審 讞 淹 遲 , 爾 其 察 奏 。 明 國 陋 習 ,此 衙 門 亦 賄 賂 之 府 也 , 宜 相 防 檢 。 挾 讎 劾 人 , 例 當 加 罪。 餘 所 言 是 , 即 行 ; 所 言 非 , 不 問 。 」 壬 戌 , 追 封 薩 哈廉 為 和 碩 穎 親 王 。 己 巳 , 以 張 存 仁 為 都 察 院 承 政 , 祖 澤洪 為 吏 部 承 政 , 韓 大 勳 為 戶 部 承 政 , 姜 新 為 禮 部 承 政 ,祖 澤 潤 為 兵 部 承 政 , 李 雲 為 刑 部 承 政 , 裴 國 珍 為 工 部 承政 。 都 統 伊 爾 登 罷 。 以 圖 爾 格 為 鑲 白 旗 都 統 。 庚 午 , 武英 郡 王 阿 濟 格 、 饒 餘 貝 勒 阿 巴 泰 、 公 揚 古 利 等 率 師 征 明。 上 御 翔 鳳 閣 面 授 方 略 , 且 誡 諭 之 。 癸 酉 , 師 行 。

 


    六 月 甲 戌 朔 , 授 蒙 古 降 人 布 爾 噶 都 等 世 職 有 差 。己 卯 , 命 豫 親 王 多 鐸 管 禮 部 事 , 肅 親 王 豪 格 管 戶 部 事 。甲 申 , 封 薩 哈 廉 子 阿 達 禮 為 多 羅 郡 王 。 丙 戌 , 以 國 舅 阿什 達 爾 漢 為 都 察 院 承 政 , 尼 堪 為 蒙 古 承 政 。

 


    秋 七 月 己 未 , 檄 外 藩 蒙 古 兵 征 明 。 辛 酉 , 阿 濟 格等 會 師 出 延 慶 州 , 俘 人 畜 一 萬 五 千 有 奇 。

 


    八 月 丁 丑 , 遣 官 祭 孔 子 。 辛 巳 , 成 親 王 岳 託 、 肅親 王 豪 格 以 罪 降 多 羅 貝 勒 。 癸 未 , 睿 親 王 多 爾 袞 , 豫 親王 多 鐸 , 貝 勒 岳 託 、 豪 格 舉 師 征 明 。

 


    九 月 戊 申 , 明 兵 入  場 , 命 吳 善 、 季 思 哈 率 兵 禦之 。 己 酉 , 阿 濟 格 等 奏 我 軍 經 保 定 至 安 州 , 克 十 二 城 ,五 十 六 戰 皆 捷 , 生 擒 總 兵 巢 丕 昌 等 人 畜 十 八 萬 。 庚 申 ,伊 勒 慎 等 追 明 兵 至 娘 娘 宮 渡 口 , 見 敵 船 甚 眾 , 不 敢 進 ,奏 聞 。 命 宜 蓀 往 援 , 復 遣 杜 度 率 師 助 之 。 辛 酉 , 蒙 古 達賴 、 拜 賀 、 拜 音 代 等 自 塔 山 來 降 。 己 巳 , 阿 濟 格 等 師 還。

 


    冬 十 月 癸 酉 , 多 爾 袞 等 師 還 。 丁 亥 , 遣 大 學 士 希福 等 往 察 哈 爾 、 喀 爾 喀 、 科 爾 沁 諸 部 稽 戶 口 , 編 佐 領 ,讞 庶 獄 , 頒 法 律 , 禁 奸 盜 。 戊 戌 , 朝 鮮 國 王 李 倧 以 書 來。 卻 之 。

 


    十 一 月 戊 申 , 復 命 岳 託 管 兵 部 事 , 豪 格 管 戶 部 事。 己 酉 , 衛 寨 桑 等 自 蒙 古 喀 爾 喀 部 還 , 偕 其 使 衛 徵 喇 嘛等 來 貢 。 辛 亥 , 徵 兵 外 藩 。 癸 丑 , 諭 曰 : 「 朕 讀 史 , 知金 世 宗 真 賢 君 也 。 當 熙 宗 及 完 顏 亮 時 , 盡 廢 太 祖 、 太 宗舊 制 , 盤 樂 無 度 。 世 宗 即 位 , 恐 子 孫 效 法 漢 人 , 諭 以 無忘 祖 法 , 練 習 騎 射 。 後 世 一 不 遵 守 , 以 訖 於 亡 。 我 國 嫻騎 射 , 以 戰 則 克 , 以 攻 則 取 。 往 者 巴 克 什 達 海 等 屢 勸 朕易 滿 洲 衣 服 以 從 漢 制 。 朕 惟 寬 衣 博 袖 , 必 廢 騎 射 , 當 朕之 身 , 豈 有 變 更 。 恐 後 世 子 孫 忘 之 , 廢 騎 射 而 效 漢 人 ,滋 足 慮 焉 。 爾 等 謹 識 之 。 」 乙 卯 , 太 祖 實 錄 成 。 乙 丑 冬至 , 大 祀 天 於 圜 丘 。 以 將 征 朝 鮮 告 祭 天 地 、 太 廟 。 己 巳, 頒 軍 令 , 傳 檄 朝 鮮 。

 


    十 二 月 辛 未 朔 , 外 藩 蒙 古 諸 王 貝 勒 率 兵 會 於 盛 京。 鄭 親 王 濟 爾 哈 朗 留 守 , 武 英 郡 王 阿 濟 格 駐 牛 莊 備 邊 ,饒 餘 貝 勒 阿 巴 泰 駐 噶 海 城 收 集 邊 民 防 敵 。 壬 申 , 上 率 禮親 王 代 善 等 征 朝 鮮 , 大 軍 次 沙 河 堡 , 睿 親 王 多 爾 袞 、 貝勒 豪 格 分 兵 自 寬 甸 入 長 山 口 。 癸 酉 , 遣 馬 福 塔 等 率 兵 三百 為 商 賈 裝 , 潛 往 圍 朝 鮮 國 都 , 多 鐸 及 貝 子 碩 託 、 尼 堪以 兵 千 人 繼 之 , 郡 王 滿 朱 習 禮 、 布 塔 齊 引 兵 來 會 。 己 卯, 貝 勒 岳 託 、 公 揚 古 利 以 兵 三 千 助 多 鐸 軍 。 上 率 大 軍 距鎮 江 三 十 里 為 營 , 令 安 平 貝 勒 杜 度 、 恭 順 王 孔 有 德 等 護輜 重 居 後 。 庚 辰 , 渡 鎮 江 至 義 州 。 壬 午 , 上 至 郭 山 城 。其 定 州 遊 擊 來 援 , 度 不 敵 , 自 刎 死 。 郭 山 降 。 癸 未 , 至定 州 。 定 州 亦 降 。 乙 酉 , 至 安 州 , 以 書 諭 朝 鮮 守 臣 勸 降。 己 丑 , 多 鐸 等 進 圍 朝 鮮 國 都 。 朝 鮮 國 王 李 倧 遁 南 漢 山城 。 多 鐸 等 復 圍 之 , 並 敗 其 諸 道 援 兵 。 辛 卯 , 瓦 爾 喀 葉辰 、 麻 福 塔 居 朝 鮮 , 聞 大 軍 至 , 以 其 眾 來 歸 。 丁 酉 , 上至 臨 津 江 , 會 天 暖 冰 泮 , 不 可 渡 , 忽 驟 雨 , 冰 結 , 大 軍畢 渡 。 己 亥 , 命 都 統 譚 泰 等 搜 剿 朝 鮮 國 都 , 留 蒙 古 兵 與俱 。 上 以 大 軍 合 圍 南 漢 城 。

 


    是 歲 , 土 默 特 部 古 祿 格 楚 虎 爾 , 鄂 爾 多 斯 部 額 林臣 濟 農 、 台 吉 土 巴 等 俱 來 朝 。

 


    二 年(1637년) 春 正 月 壬 寅 , 朝 鮮 全 羅 道 總 兵 來 援 , 岳 託 擊走 之 。 遣 英 俄 爾 岱 、 馬 福 塔 齎 敕 諭 朝 鮮 閣 臣 , 數 其 前 後敗 盟 之 罪 。 甲 辰 , 大 軍 渡 漢 江 , 營 於 江 滸 。 丁 未 , 朝 鮮全 羅 、 忠 清 二 道 合 兵 來 援 , 多 鐸 、 揚 古 利 擊 走 之 。 揚 古利 被 創 卒 。 庚 戌 , 多 爾 袞 、 豪 格 軍 克 長 山 , 連 戰 皆 捷 ,以 兵 來 會 , 杜 度 等 運 砲 車 亦 至 。 朝 鮮 勢 益 蹙 , 李 倧 以 書數 乞 和 。 上 許 其 出 降 。 倧 上 書 稱 臣 , 逡 巡 不 敢 出 。 壬 戌, 多 爾 袞 軍 入 江 華 島 , 得 倧 妻 子 , 護 至 軍 前 。 復 諭 倧 曰: 「 來 則 室 家 可 完 , 社 稷 可 保 , 朕 不 食 言 , 否 則 不 能 久待 。 」 倧 聞 江 華 島 陷 , 妻 子 被 俘 , 南 漢 城 旦 夕 且 下 , 乃請 降 。 庚 午 , 朝 鮮 國 王 李 倧 率 其 子  及 群 臣 朝 服 出 降 於漢 江 東 岸 三 田 渡 , 獻 明 所 給 敕 印 。 上 慰 諭 賜 坐 , 還 其 妻子 及 群 臣 家 屬 , 仍 厚 賜 之 。 命 英 俄 爾 岱 、 馬 福 塔 送 倧 返其 國 都 , 留 其 子  、 淏 為 質 。

 


    二 月 壬 申 , 班 師 。 貝 子 碩 託 、 恭 順 王 孔 有 德 等 率朝 鮮 舟 師 取 明 皮 島 。 朝 鮮 國 王 李 倧 表 請 減 貢 額 。 詔 免 丁丑 、 戊 寅 兩 年 貢 物 , 自 己 卯 秋 季 始 , 仍 貢 如 額 。 甲 戌 ,諭 多 爾 袞 等 禁 掠 降 民 , 違 者 該 管 官 同 罪 。 辛 卯 , 上 還 盛京 。 癸 巳 , 諭 戶 部 平 糶 勸 農 。

 


    三 月 甲 辰 , 殺 朝 鮮 臺 諫 官 洪 翼 漢 、 校 理 尹 集 、 修撰 吳 達 濟 , 以 敗 盟 故 。 丁 未 , 武 英 郡 王 阿 濟 格 率 師 助 攻皮 島 。 戊 午 , 罷 蓋 州 城 工 。

 


    夏 四 月 己 卯 , 睿 親 王 多 爾 袞 以 朝 鮮 質 子 李  、 李淏 及 朝 鮮 諸 大 臣 子 至 盛 京 。 辛 巳 , 阿 濟 格 師 克 皮 島 , 斬明 總 兵 沈 世 魁 、 金 日 觀 。 甲 申 , 安 平 貝 勒 杜 度 率 大 軍 後隊 還 。 丁 酉 , 命 固 山 貝 子 尼 堪 、 羅 託 、 博 洛 等 預 議 國 政。 增 置 每 旗 議 政 大 臣 三 人 , 集 群 臣 諭 之 曰 : 「 向 者 議 政大 臣 額 少 , 或 出 師 奉 使 , 而 朕 左 右 無 人 , 卑 微 之 臣 , 又不 可 使 參 國 議 。 今 特 擇 爾 等 置 之 議 政 之 列 , 當 以 民 生 休戚 為 念 , 慎 毋 怠 惰 , 有 負 朝 廷 。 前 蒙 古 察 哈 爾 林 丹 悖 謬不 道 , 其 臣 不 諫 , 以 至 失 國 。 朕 有 過 失 , 爾 諸 臣 即 當 面諍 。 使 面 從 而 退 有 後 言 , 委 過 於 上 , 非 純 臣 也 。 」 又 諭曰 : 「 昔 金 熙 宗 循 漢 俗 , 服 漢 衣 冠 , 盡 忘 本 國 言 語 , 太祖 、 太 宗 之 業 遂 衰 。 夫 弓 矢 我 之 長 技 , 今 不 親 騎 射 , 惟耽 宴 樂 , 則 武 備 寖 弛 。 朕 每 出 獵 , 冀 不 忘 騎 射 , 勤 練 士卒 。 諸 王 貝 勒 務 轉 相 告 誡 , 使 後 世 無 變 祖 宗 之 制 。 」

 


    閏 四 月 癸 卯 , 蒙 古 貢 異 獸 , 名 齊 赫 特 。 壬 子 , 武英 郡 王 阿 濟 格 師 還 。

 


    五 月 庚 午 , 朝 鮮 國 王 李 倧 遣 使 奉 表 謝 恩 贖 俘 獲 。丁 亥 , 遣 朝 鮮 從 征 皮 島 總 兵 林 慶 業 歸 國 , 以 敕 獎 朝 鮮 王。 丁 酉 , 章 京 尼 堪 等 征 瓦 爾 喀 , 降 之 , 師 行 逕 朝 鮮 咸 鏡道 , 凡 兩 月 始 達 , 至 是 還 。

 


    六 月 辛 丑 , 授 喀 喇 沁 歸 附 人 阿 玉 石 等 官 。 明 千 總王 國 亮 、 都 司 胡 應 登 、 百 總 李 忠 國 等 自 海 島 來 降 。 莽 古爾 泰 子 光 袞 獲 罪 , 伏 誅 。 乙 卯 , 諭 曰 : 「 頃 朝 鮮 之 役 ,兵 行 無 紀 , 見 利 即 前 , 竟 忘 國 憲 。 自 今 宜 思 所 以 宣 布 法紀 修 明 典 制 者 。 」 丙 辰 , 以 臣 朝 鮮 , 克 皮 島 , 祭 告 太 廟、 福 陵 。 丁 巳 , 朝 鮮 國 王 李 倧 請 平 值 贖 俘 , 不 許 。 甲 子, 論 諸 將 征 朝 鮮 及 皮 島 違 律 罪 。 禮 親 王 代 善 論 革 爵 , 宥之 。 鄭 親 王 濟 爾 哈 朗 以 下 論 罰 有 差 。

 


    秋 七 月 己 巳 , 遣 喀 凱 等 分 道 征 瓦 爾 喀 。 癸 酉 , 戶部 參 政 恩 克 有 罪 , 伏 誅 。 辛 巳 , 誡 諭 漢 官 以 空 言 欺 飾 者。 智 順 王 尚 可 喜 自 皮 島 師 還 。 壬 午 , 大 赦 。 癸 未 , 優 恤朝 鮮 、 皮 島 陣 亡 將 士 揚 古 利 等 , 贈 官 襲 職 有 差 。 乙 酉 ,明 都 司 高 繼 功 等 自 石 城 島 來 降 。 庚 寅 , 追 封 皇 后 父 科 爾沁 貝 勒 莽 古 思 為 和 碩 福 親 王 。 壬 辰 , 以 朝 鮮 及 皮 島 之 捷宣 諭 祖 大 壽 。 乙 未 , 分 漢 軍 為 兩 旗 , 以 總 兵 官 石 廷 柱 、馬 光 遠 為 都 統 , 分 理 左 右 翼 。

 


    八 月 丙 申 朔 , 再 恤 攻 皮 島 、 朝 鮮 陣 亡 將 士 洪 文 魁等 , 贈 官 襲 職 有 差 。 癸 丑 , 貝 勒 岳 託 以 罪 降 貝 子 , 罰 金, 解 兵 部 任 。 丙 辰 , 命 睿 親 王 多 爾 袞 、 饒 餘 貝 勒 阿 巴 泰築 都 爾 鼻 城 。 己 未 , 遣 阿 什 達 爾 漢 等 往 蒙 古 巴 林 、 札 魯特 、 喀 喇 沁 、 土 默 特 、 阿 魯 諸 部 會 理 刑 獄 。

 


    九 月 辛 未 , 出 獵 撫 安 堡 , 以 書 招 明 石 城 島 守 將 沈志 祥 。 己 丑 , 兵 部 參 政 穆 爾 泰 以 罪 褫 職 。 貝 勒 豪 格 以 逼勒 蒙 古 台 吉 博 洛 罪 , 罰 金 , 罷 管 部 務 。

 


    冬 十 月 乙 未 朔 , 初 頒 滿 洲 、 蒙 古 、 漢 字 曆 。 丙 午, 厄 魯 特 顧 實 車 臣 綽 爾 濟 遣 使 來 貢 , 厄 魯 特 道 遠 , 以 元年 遣 使 , 是 年 冬 始 至 。 庚 申 , 遣 英 俄 爾 岱 、 馬 福 塔 、 達雲 齎 敕 冊 封 李 倧 為 朝 鮮 國 王 。

 


    十 一 月 庚 午 , 祀 天 於 圜 丘 。 朝 鮮 國 王 李 倧 遣 使 來貢 , 復 表 請 歸 其 世 子 , 並 陳 國 中  變 困 窮 狀 。 上 不 許 ,敕 諭 賜 賚 之 。 丁 丑 , 烏 朱 穆 秦 濟 農 聞 上 善 養 民 , 率 貝 勒等 舉 國 來 附 。 癸 未 , 追 封 揚 古 利 為 武 勳 王 。 庚 寅 , 出 獵打 草 灘 。

 


    十 二 月 甲 辰 , 葉 克 書 、 星 訥 率 師 征 卦 爾 察 。 癸 丑, 征 瓦 爾 喀 諸 將 奏 捷 。 戊 午 , 蒿 齊 忒 部 貝 勒 博 羅 特 、 托尼 洛 率 屬 來 歸 。 阿 濟 格 遣 丹 岱 等 敗 明 兵 於 清 河 。

 


    是 歲 , 虎 爾 哈 部 托 科 羅 氏 、 克 益 克 勒 氏 、 耨 野 勒氏 , 黑 龍 江 索 倫 部 博 穆 博 果 爾 , 黑 龍 江 巴 爾 達 齊 , 精 格里 河 扈 育 布 祿 俱 來 朝 。

 


    三 年 (1638년)春 正 月 辛 未 , 命 貝 子 岳 託 仍 為 多 羅 貝 勒 , 管領 旗 務 。 丁 亥 , 以 德 穆 圖 為 戶 部 承 政 。 甲 午 , 皇 第 九 子生 , 是 為 世 祖 章 皇 帝 。

 


    二 月 丁 酉 , 親 征 喀 爾 喀 , 豫 親 王 多 鐸 、 武 英 郡 王阿 濟 格 從 , 禮 親 王 代 善 、 鄭 親 王 濟 爾 哈 朗 、 睿 親 王 多 爾袞 、 安 平 貝 勒 杜 度 居 守 。 丁 未 , 次 喀 爾 占 , 外 藩 諸 王 貝勒 等 以 師 來 會 。 喀 爾 喀 聞 之 , 遁 去 。 上 行 獵 達 爾 那 洛 湖西 , 駐 蹕 。 乙 卯 , 次 奎 屯 布 喇 克 。 庚 申 , 明 東 江 總 兵 沈志 祥 率 石 城 島 將 佐 軍 民 來 降 。 壬 戌 , 遣 勞 薩 以 書 告 明 宣府 守 臣 趣 互 市 , 且 以 歲 幣 歸 我 。

 


    三 月 甲 子 朔 , 次 博 碩 堆 , 命 留 守 諸 王 築 遼 陽 城 。甲 戌 , 次 義 奚 里 。 庚 辰 , 至 登 努 蘇 特 而 還 。 壬 午 , 次 上都 河 源 , 河 西 平 地 湧 泉 高 五 尺 。

 


    夏 四 月 甲 午 朔 , 次 布 克 圖 里 , 葉 克 書 等 征 黑 龍 江告 捷 。 乙 未 , 至 遼 河 。 丁 酉 , 次 杜 稜 城 , 明 山 海 關 太 監高 起 潛 遣 人 詭 議 和 。 戊 戌 , 次 札 哈 納 里 忒 。 己 亥 , 次 察木 哈 。 庚 子 , 次 俄 岳 博 洛 。 都 爾 鼻 城 工 竣 , 改 名 屏 城 。辛 丑 , 杜 爾 伯 特 部 卦 爾 察 札 馬 柰 等 來 朝 貢 。 壬 寅 , 至 遼陽 , 閱 新 城 。 乙 巳 , 上 還 盛 京 。 葉 克 書 、 星 訥 征 黑 龍 江師 還 。 癸 丑 , 命 明 降 將 沈 志 祥 以 其 眾 居 撫 順 。 甲 寅 , 尼噶 里 等 征 虎 爾 哈 師 還 。

 


    五 月 癸 酉 , 修 盛 京 至 遼 河 道 路 , 以 睿 親 王 多 爾 袞、 饒 餘 貝 勒 阿 巴 泰 董 其 役 。 乙 亥 , 禮 親 王 代 善 屬 下 人 覺善 有 罪 , 鄭 親 王 濟 爾 哈 朗 等 請 誅 之 , 議 削 代 善 爵 。 以 細故 不 許 , 並 貸 覺 善 。

 


    六 月 庚 申 , 始 設 理 藩 院 , 專 治 蒙 古 諸 部 事 。

 


    秋 七 月 壬 戌 朔 , 諭 諸 王 大 臣 曰 : 「 自 古 建 國 , 皆立 制 度 , 辨 等 威 。 今 親 王 、 郡 王 、 貝 勒 、 貝 子 、 公 主 、額 駙 名 號 等 級 , 均 有 定 制 , 乃 皆 不 遵 行 , 違 棄 成 憲 , 誠何 心 耶 ? 昔 金 太 祖 、 太 宗 兄 弟 一 心 , 克 成 大 統 。 朕 當 創業 之 時 , 爾 等 顧 不 能 同 心 體 國 恪 守 典 常 乎 ? 」 諸 王 皆 引罪 。 丁 卯 , 喀 爾 喀 使 臣 達 爾 漢 囊 蘇 喇 嘛 歸 , 諭 之 曰 : 「朕 以 兵 討 不 庭 , 以 德 撫 有 眾 。 天 以 蒙 古 諸 部 與 朕 , 爾 喀爾 喀 乃 興 兵 犯 歸 化 , 甚 非 分 也 。 爾 不 獲 已 , 有 逃 竄 偷 生耳 。 爾 所 能 至 , 我 軍 豈 不 能 至 ? 其 速 悔 罪 來 歸 , 否 則 不爾 宥 也 。 」 壬 申 , 達 雅 齊 等 往 明 張 家 口 議 歲 幣 及 互 市 。丁 丑 , 諭 禮 部 曰 : 「 凡 有 不 遵 定 制 變 亂 法 紀 者 , 王 、 貝勒 、 貝 子 議 罰 , 官 繫 三 日 , 民 枷 責 乃 釋 之 。 出 入 坐 起 違式 , 及 官 階 名 號 已 定 而 仍 稱 舊 名 者 , 戒 飭 之 。 有 效 他 國衣 冠 、 束 髮 裹 足 者 , 治 重 罪 。 」 又 諭 大 學 士 希 福 等 曰 :「 朕 不 尚 虛 文 , 惟 務 實 政 。 今 國 家 殷 富 , 政 在 養 民 。 凡新 舊 人 內 窮 困 無 妻 孥 馬 匹 者 , 或 勇 敢 可 充 伍 、 以 貧 不 能披 甲 者 , 許 各 陳 訴 , 驗 實 給 與 。 」 禁 以 陣 獲 良 家 子 女 鬻為 樂 戶 者 。 丙 戌 , 更 定 部 院 官 制 , 專 設 滿 洲 承 政 , 以 阿拜 為 吏 部 承 政 , 英 俄 爾 岱 為 戶 部 承 政 , 滿 達 爾 漢 為 禮 部承 政 , 宜 蓀 為 兵 部 承 政 , 郎 球 為 刑 部 承 政 , 薩 木 什 喀 為工 部 承 政 , 貝 子 博 洛 為 理 藩 院 承 政 , 阿 什 達 爾 漢 為 都 察院 承 政 。 命 布 顏 為 議 政 大 臣 。

 


    八 月 甲 午 , 禮 部 承 政 祝 世 昌 以 罪 褫 職 , 謫 戍 邊 外。 丙 申 , 吳 拜 、 沙 爾 虎 達 連 擊 敗 明 兵 於 紅 山 口 、 羅 文 峪, 又 敗 其 密 雲 兵 , 殲 之 。 丁 酉 , 地 震 。 戊 申 , 授 中 式 舉人 羅 碩 等 十 名 佐 領 品 級 , 免 四 丁 , 一 等 至 三 等 秀 才 授 護軍 校 品 級 , 免 二 丁 , 各 賜 朝 衣 綢 布 有 差 , 未 入 部 者 免 一丁 。 庚 戌 , 阿 魯 阿 霸 垓 部 額 齊 格 諾 顏 等 、 蒿 齊 忒 部 博 洛特 諾 木 齊 等 並 來 朝 貢 。 癸 丑 , 以 睿 親 王 多 爾 袞 為 奉 命 大將 軍 , 統 左 翼 兵 , 貝 勒 豪 格 、 阿 巴 泰 副 之 , 貝 勒 岳 託 為揚 武 大 將 軍 , 統 右 翼 兵 , 貝 勒 杜 度 副 之 , 分 道 伐 明 。 諭之 曰 : 「 主 帥 為 眾 所 瞻 , 自 處 以 禮 , 而 濟 之 以 和 , 則 蒙古 、 朝 鮮 、 漢 人 之 來 附 者 , 自 心 悅 而 誠 服 。 若 計 一 己 之功 , 而 不 恤 國 之 名 譽 , 非 所 望 焉 。 」 丁 巳 , 岳 託 、 杜 度師 行 。 己 未 , 以 巴 圖 魯 準 塔 為 蒙 古 都 統 。

 


    九 月 癸 亥 , 多 爾 袞 、 豪 格 、 阿 巴 泰 師 行 。 壬 申 ,上 親 向 山 海 關 以 撓 明 師 。 徵 孔 有 德 、 耿 仲 明 、 尚 可 喜 兵。 丁 丑 , 定 優 免 人 丁 例 。 丁 亥 , 幸 演 武 場 , 閱 兵 較 射 。

 


    冬 十 月 丁 酉 , 岳 託 師 自 牆 子 嶺 入 , 遇 明 兵 。 明 總兵 官 吳 國 俊 敗 走 。 戊 戌 , 多 爾 袞 軍 入 青 山 關 。 己 亥 , 上統 大 軍 發 盛 京 。 甲 辰 , 次 渾 河 , 科 爾 沁 、 喀 喇 沁 各 率 兵來 會 。 丙 午 , 遣 沙 爾 虎 達 等 率 師 趣 義 州 。 己 酉 , 命 濟 爾哈 朗 、 多 鐸 各 率 師 分 趣 前 屯 衛 、 寧 遠 、 錦 州 , 上 親 向 義州 。 辛 亥 , 索 海 率 師 圍 大 凌 河 兩 岸 十 四 屯 堡 。 壬 子 , 上次 義 州 , 遣 孔 有 德 、 耿 仲 明 、 尚 可 喜 、 石 廷 柱 、 馬 光 遠以 砲 克 其 五 臺 。 乙 卯 , 次 錦 州 。 丙 辰 , 多 鐸 克 桑 噶 爾 寨堡 , 殺 其 守 將 。 孔 有 德 等 攻 石 家 堡 、 戚 家 堡 , 並 克 之 。戊 午 , 孔 有 德 等 攻 錦 州 西 臺 , 臺 中 砲 藥 自 發 , 臺 壞 , 克之 。

 


    十 一 月 己 未 朔 , 多 鐸 將 與 濟 爾 哈 朗 合 師 徑 中 後 所, 會 祖 大 壽 往 援 北 京 , 乘 夜 襲 我 師 。 庚 申 , 多 鐸 、 濟 爾哈 朗 還 至 中 後 所 。 大 壽 懼 , 不 敢 出 。 石 廷 柱 、 馬 光 遠 攻李 雲 屯 、 柏 士 屯 、 郭 家 堡 、 開 州 、 井 家 堡 , 俱 克 之 。 孔有 德 招 降 大 福 堡 , 又 攻 大 臺 , 克 之 。 辛 酉 , 大 軍 入 山 海關 。 壬 戌 , 上 次 連 山 。 癸 亥 , 攻 五 里 河 臺 , 明 守 備 李 計友 等 率 眾 降 。 丁 卯 , 上 至 中 後 所 , 遇 祖 大 壽 收 兵 入 城 。使 告 之 曰 : 「 別 將 軍 數 載 , 甚 思 一 見 。 至 於 去 留 , 終 不相 強 。 將 軍 與 我 角 勝 , 為 將 之 道 應 爾 。 朕 不 以 此 介 意 ,亦 願 將 軍 勿 疑 。 」 戊 辰 , 再 遣 使 諭 大 壽 , 皆 不 答 。 己 巳, 濟 爾 哈 朗 克 摸 龍 關 及 五 里 堡 屯 臺 。 庚 午 , 班 師 。 庚 辰, 次 圖 爾 根 河 , 遣 蒙 古 軍 各 歸 其 部 。 丙 戌 , 上 還 京 。 丁亥 , 地 震 。

 


    十 二 月 戊 戌 , 刑 部 承 政 郎 球 有 罪 解 任 , 以 都 察 院參 政 索 海 代 之 。

 


    是 歲 , 土 默 特 部 古 祿 格 , 杜 爾 伯 特 部 卦 爾 察 札 馬奈 , 席 北 部 阿 拜 、 阿 閔 , 兀 札 喇 部 井 瑙 、 馬 考 、 札 柰 、桑 吉 察 , 鄂 爾 多 斯 部 額 林 臣 濟 農 , 阿 魯 阿 霸 垓 部 額 齊 格諾 顏 , 蒿 齊 忒 部 博 洛 特 諾 木 齊 , 黑 龍 江 博 穆 博 果 爾 、 瓦代 噶 凌 阿 均 來 朝 貢 。

 


    四 年1639년) 春 正 月 乙 丑 , 貝 子 碩 託 以 罪 降 輔 國 公 。 甲 戌, 皇 第 三 女 固 倫 公 主 下 嫁 科 爾 沁 額 駙 祁 他 特 。 己 卯 , 封沈 志 祥 為 續 順 公 。 蒙 古 喇 克 等 自 錦 州 來 歸 。 丁 亥 , 蘇 尼特 部 台 吉 噶 布 褚 等 率 部 人 來 歸 。 是 月 , 明 以 洪 承 疇 總 督薊 、 遼 。

 


    二 月 丁 酉 , 命 武 英 郡 王 阿 濟 格 率 師 征 明 。 壬 寅 ,上 親 統 大 軍 繼 之 。 丙 午 , 次 翁 啟 爾 渾 。 阿 濟 格 遣 使 奏 捷。 蒙 古 奈 曼 等 部 率 十 三 旗 兵 來 會 。 庚 戌 , 營 松 山 。 孔 有德 、 耿 仲 明 、 尚 可 喜 、 石 廷 柱 、 馬 光 遠 以 砲 擊 城 外 諸 臺, 克 之 。 遣 塔 布 囊 布 顏 率 師 防 烏 欣 河 口 。 壬 子 , 上 登 松山 南 岡 , 授 諸 將 方 略 。 癸 丑 , 列 砲 攻 城 , 雉 堞 悉 毀 。 明副 將 金 國 鳳 拒 守 不 下 。 上 命 豎 雲 梯 急 攻 之 。 代 善 請 俟 明日 , 上 從 之 。 明 人 復 完 城 堞 , 我 軍 不 得 入 。 乙 卯 , 命 阿濟 格 、 尼 堪 、 羅 托 等 師 圍 塔 山 、 連 山 。

 


    三 月 戊 午 朔 , 明 軍 援 杏 山 , 我 兵 邀 擊 之 , 斬 五 十人 。 己 未 , 穿 地 道 攻 松 山 城 。 乙 丑 , 命 納 海 等 馳 略 杏 山。 石 廷 柱 、 馬 光 遠 攻 觀 民 山 臺 , 降 之 。 丙 寅 , 多 爾 袞 、杜 度 等 疏 報 自 北 京 至 山 西 界 , 復 至 山 東 , 攻 濟 南 府 破 之, 蹂 躪 數 千 里 , 明 兵 望 風 披 靡 , 克 府 一 州 三 縣 五 十 七 ,總 督 宣 、 大 盧 象 昇 戰 死 , 擒 德 王 朱 由  、 郡 王 朱 慈  、奉 國 將 軍 朱 慈 黨 、 總 督 太 監 馮 允 昇 等 , 俘 獲 人 口 五 十 餘萬 , 他 物 稱 是 。 是 役 也 , 揚 武 大 將 軍 貝 勒 岳 託 、 輔 國 公瑪 瞻 卒 於 軍 。 上 聞 震 悼 , 輟 飲 食 三 日 。 乙 亥 , 多 爾 袞 、杜 度 又 報 自 遷 安 縣 出 青 山 關 , 遇 明 兵 , 二 十 四 戰 皆 勝 。己 卯 , 復 攻 松 山 城 。 明 太 監 高 起 潛 、 總 兵 祖 大 壽 自 寧 遠遣 副 將 祖 克 勇 、 徐 昌 永 等 率 兵 趨 錦 州 。 阿 爾 薩 蘭 等 擊 敗之 。 上 聞 , 馳 赴 錦 州 督 師 , 斬 徐 昌 永 於 陣 , 擒 祖 克 勇 。甲 申 , 解 松 山 圍 。 乙 酉 , 駐 錦 州 。 多 爾 袞 等 師 還 盛 京 。

 


    夏 四 月 戊 子 朔 , 阿 濟 格 略 連 山 。 壬 辰 , 會 於 錦 州。 癸 巳 , 渡 大 凌 河 駐 蹕 。 己 亥 , 杜 度 等 師 還 。 辛 丑 , 上還 盛 京 , 哭 岳 託 而 後 入 , 輟 朝 三 日 。 戊 申 , 以 庫 魯 克 達爾 漢 阿 賴 、 馬 喇 希 為 蒙 古 都 統 。 甲 寅 , 以 索 渾 、 薩 璧 翰為 議 政 大 臣 。 丙 辰 , 追 封 多 羅 貝 勒 岳 託 為 多 羅 克 勤 郡 王。

 


    五 月 戊 午 , 以 貝 子 篇 古 有 罪 , 削 爵 。 己 未 , 鄭 親王 濟 爾 哈 朗 率 兵 略 錦 州 、 松 山 、 杏 山 。 辛 酉 , 蘇 尼 特 台吉 莽 古 斯 、 俄 爾 寨 率 眾 來 歸 。 丁 卯 , 席 特 庫 、 沙 爾 虎 達等 敗 明 兵 於 錦 州 。 辛 未 , 濟 爾 哈 朗 奏 入 明 邊 , 九 戰 皆 捷。 丙 子 , 濟 爾 哈 朗 師 還 。 庚 辰 , 以 鎮 國 公 艾 度 禮 為 都 統。 辛 巳 , 召 豫 親 王 多 鐸 數 其 罪 , 宥 之 , 惟 坐 其 征 明 失 利, 及 不 親 送 睿 親 王 出 師 , 降 多 羅 貝 勒 。

 


    六 月 戊 子 , 蒙 古 阿 蘭 柴 、 桑 噶 爾 寨 等 告 岳 託 生 前與 其 妻 父 瑣 諾 木 謀 不 軌 。 代 善 、 濟 爾 哈 朗 、 多 爾 袞 皆 請窮 治 。 上 以 岳 託 已 死 , 不 問 , 並 貸 瑣 諾 木 勿 治 。 庚 寅 ,遣 馬 福 塔 、 巴 哈 納 冊 封 朝 鮮 國 王 李 倧 妻 趙 氏 為 朝 鮮 王 妃, 其 長 子  為 世 子 。 丙 申 , 分 漢 軍 為 四 旗 , 以 石 廷 柱 、馬 光 遠 、 王 世 選 、 巴 顏 為 都 統 , 改 纛 色 。 辛 亥 , 焚 哈 達、 葉 赫 、 烏 喇 、 輝 發 前 所 受 明 敕 書 於 篤 恭 殿 。 壬 子 , 以伊 爾 登 、 噶 爾 馬 為 議 政 大 臣 , 星 訥 兼 議 政 大 臣 。

 


    秋 七 月 丁 巳 , 遣 官 賚 書 與 明 帝 議 和 , 並 令 朱 由 等 各 具 疏 進 , 許 其 議 成 釋 還 。 辛 未 , 朝 鮮 國 王 李 倧 克 熊島 , 執 加 哈 禪 來 獻 。 乙 亥 , 諭 滿 、 漢 、 蒙 古 有 能 衝 鋒 陷陣 先 登 拔 城 者 , 以 馬 給 之 。

 


    八 月 己 丑 , 授 宗 室 固 山 貝 子 、 鎮 國 公 、 輔 國 公 、鎮 國 將 軍 、 奉 國 將 軍 等 爵 有 差 。 甲 午 , 命 貝 勒 豪 格 管 戶部 事 , 杜 度 管 禮 部 事 , 多 鐸 管 兵 部 事 , 薩 爾 糾 等 率 兵 征庫 爾 喀 部 。 乙 巳 , 歸 化 城 土 默 特 諸 章 京 以 所 得 明 歲 幣 來獻 。

 


    九 月 乙 卯 朔 , 以 孫 達 理 等 八 十 三 人 從 睿 親 王 入 關有 功 , 各 授 官 有 差 , 賜 號 巴 圖 魯 。 乙 丑 , 都 統 杜 雷 有 罪, 褫 職 。 己 巳 , 復 封 貝 勒 豪 格 為 和 碩 肅 親 王 。 癸 酉 , 阿濟 格 、 阿 巴 泰 、 杜 度 率 兵 略 錦 州 、 寧 遠 。 甲 戌 , 封 岳 託子 羅 洛 宏 為 多 羅 貝 勒 。 丙 子 , 以 宗 室 賴 慕 布 、 杜 沙 為 議政 大 臣 , 英 俄 爾 岱 為 都 統 , 馬 福 塔 為 戶 部 承 政 。

 


    冬 十 月 丙 戌 , 豪 格 、 多 鐸 率 兵 復 略 錦 州 、 寧 遠 。庚 寅 , 蘇 尼 特 部 墨 爾 根 台 吉 騰 機 思 等 率 諸 貝 勒 、 阿 霸 垓部 額 齊 格 諾 顏 等 各 率 部 眾 , 自 喀 爾 喀 來 歸 。 辛 卯 , 出 獵哈 達 。 癸 丑 , 以 劉 之 源 為 都 統 , 喀 濟 海 為 議 政 大 臣 。

 


    十 一 月 甲 寅 朔 , 豪 格 疏 報 參 領 阿 藍 泰 率 蒙 古 人 來歸 , 遇 明 兵 於 寧 遠 北 岡 , 擊 敗 之 , 斬 明 總 兵 金 國 鳳 。 辛酉 , 遣 索 海 、 薩 木 什 喀 等 征 索 倫 部 。 丁 卯 , 出 獵 葉 赫 。

 


    十 二 月 甲 午 , 上 還 京 。

 


    是 歲 , 黑 龍 江 額 納 布 、 墨 音 、 額 爾 盆 等 , 喀 爾 喀部 土 謝 圖 、 俄 木 布 額 爾 德 尼 等 , 喀 爾 喀 、 蘇 尼 特 、 烏 朱穆 秦 、 科 爾 沁 、 克 西 克 騰 、 土 默 特 諸 部 , 遣 使 俱 來 朝 貢。

 


    五 年 春 正 月 甲 子 , 命 朝 鮮 質 子 李  歸 省 父 疾 , 仍令 遣 別 子 及  子 來 質 。 遣 翁 阿 岱 、 多 濟 里 等 戍 錦 州 。

 


    閏 正 月 癸 未 朔 , 令 各 旗 都 統 分 巡 所 屬 屯 堡 , 察 窮民 , 理 冤 獄 。

 


    二 月 丙 辰 , 遣 多 濟 里 以 寧 古 塔 兵 三 百 往 征 兀 札 喇部 。 丁 巳 , 戶 部 承 政 馬 福 塔 卒 , 以 車 爾 格 代 之 , 覺 羅 錫翰 為 工 部 承 政 。 丙 寅 , 朝 鮮 國 王 第 三 子  來 質 。

 


    三 月 丙 戌 , 遣 勞 薩 、 吳 拜 等 略 廣 寧 。 己 丑 , 勞 薩、 吳 拜 以 逗 遛 議 罰 有 差 。 薩 木 什 喀 等 征 虎 爾 哈 部 , 克 雅克 薩 城 。 己 亥 , 命 濟 爾 哈 朗 、 多 鐸 築 義 州 城 , 駐 兵 屯 田, 進 逼 山 海 關 。 辛 丑 , 戶 部 參 政 碩 詹 徵 朝 鮮 水 師 糧 米 赴大 凌 、 小 凌 二 河 。 乙 巳 , 索 海 、 薩 木 什 喀 征 索 倫 部 奏 捷。

 


    夏 四 月 壬 子 朔 , 罷 元 旦 、 萬 壽 諸 王 貝 勒 獻 物 。 乙亥 , 索 海 、 薩 木 什 喀 征 索 倫 師 還 , 上 宴 勞 於 實 勝 寺 。 庚辰 , 上 視 師 義 州 。

 


    五 月 癸 未 , 渡 遼 河 。 乙 酉 , 碩 詹 以 朝 鮮 水 師 至 。癸 巳 , 上 至 義 州 。 丁 酉 , 蒙 古 多 羅 特 部 人 蘇 班 代 等 自 杏山 遣 人 約 降 。 上 命 濟 爾 哈 朗 等 率 軍 迎 之 , 戒 曰 : 「 此 行勿 領 多 人 , 敵 見 我 兵 少 , 必 來 拒 戰 。 我 分 兵 為 三 , 以 前隊 拒 戰 , 後 二 隊 為 援 。 」 至 杏 山 , 祖 大 壽 果 遣 劉 周 智 、吳 三 桂 列 陣 逼 我 。 濟 爾 哈 朗 等 偽 卻 , 縱 兵 反 擊 , 大 敗 之。 戊 戌 , 命 勞 薩 、 吳 拜 等 略 海 邊 。 索 倫 部 三 百 三 十 七 戶續 來 降 。 壬 寅 , 上 率 師 攻 克 五 里 臺 。 乙 巳 , 以 紅 衣 砲 攻錦 州 。 丁 未 , 刈 其 禾 而 還 。 庚 戌 , 駕 還 京 。

 


    六 月 乙 丑 , 多 爾 袞 、 豪 格 、 杜 度 、 阿 巴 泰 、 濟 爾哈 朗 等 屯 田 義 州 。 戊 辰 , 朝 鮮 世 子 李  至 。 先 是 , 朝 鮮遣 總 兵 官 林 慶 業 等 載 米 同 我 使 洪 尼 喀 等 自 大 凌 河 運 三 山島 , 遇 風 , 覆 沒 者 半 , 與 明 兵 戰 又 失 利 , 乃 命 陵 輓 至 蓋州 、 耀 州 , 留 其 兵 千 五 百 人 於 海 州 。 癸 酉 , 多 濟 里 、 喀柱 征 兀 札 喇 部 師 還 。 遣 朝 鮮 王 次 子 李 淏 歸 省 。

 


    秋 七 月 庚 辰 朔 , 敘 征 索 倫 功 , 索 海 等 賞 賚 進 秩 有差 。 癸 未 , 定 征 索 倫 違 律 罪 , 薩 木 什 喀 等 黜 罰 有 差 。 乙酉 , 多 爾 袞 等 奏 克 錦 州 十 一 臺 , 請 分 兵 為 兩 翼 屯 駐 。 癸巳 , 明 總 督 洪 承 疇 以 兵 四 萬 壁 杏 山 , 遣 騎 挑 戰 , 多 爾 袞等 擊 敗 之 。 乙 未 , 遣 吳 拜 往 助 多 爾 袞 軍 。 丙 午 , 席 特 庫、 濟 席 哈 等 率 師 征 索 倫 部 。 上 幸 安 山 溫 泉 。 己 酉 , 多 爾袞 奏 敗 明 兵 於 錦 州 , 杜 度 又 敗 之 寧 遠 。

 


    八 月 己 未 , 遣 希 福 等 至 張 家 口 互 市 。 乙 亥 , 多 爾袞 奏 敗 明 兵 於 錦 州 , 又 敗 之 大 凌 河 。

 


    九 月 乙 酉 , 上 還 宮 。 丙 戌 , 命 濟 爾 哈 朗 、 阿 濟 格、 阿 達 禮 、 多 鐸 、 羅 洛 宏 代 圍 錦 州 、 松 山 。 辛 卯 , 多 爾袞 奏 敗 明 兵 於 松 山 。 癸 卯 , 重 修 鳳 凰 城 。

 


    冬 十 月 壬 戌 , 遣 英 俄 爾 岱 等 往 朝 鮮 責 罪 。 壬 申 ,萬 壽 節 , 大 赦 。

 


    十 一 月 戊 寅 朔 , 詔 免 朝 鮮 歲 貢 米 十 之 九 。 乙 酉 ,濟 爾 哈 朗 奏 敗 明 兵 於 塔 山 、 杏 山 及 錦 州 城 下 。 癸 巳 , 阿敏 卒 於 幽 所 。 戊 戌 , 朝 鮮 國 王 次 子 李 淏 來 質 。

 


    十 二 月 庚 戌 , 命 多 爾 袞 、 豪 格 、 杜 度 、 阿 巴 泰 代圍 錦 州 。 己 未 , 遣 朝 鮮 國 王 三 子 李  歸 。 席 特 庫 、 濟 席哈 征 索 倫 部 , 擒 博 穆 博 果 爾 , 俘 九 百 餘 人 。 壬 申 , 英 俄爾 岱 等 至 自 朝 鮮 , 械 繫 其 尚 書 金 聲 黑 尼 等 四 人 以 歸 。

 


    是 歲 , 喀 爾 喀 部 查 薩 克 圖 遣 使 來 朝 貢 。

 


    六 年 春 正 月 庚 辰 , 朝 鮮 國 王 李 倧 上 表 謝 罪 。 壬 辰, 席 特 庫 、 濟 席 哈 等 師 還 。 癸 巳 , 晉 席 特 庫 為 三 等 總 兵官 。 甲 午 , 皇 四 女 固 倫 公 主 雅 圖 下 嫁 科 爾 沁 卓 禮 克 圖 親王 吳 克 善 子 弼 爾 塔 噶 爾 額 駙 。 丁 酉 , 二 等 副 將 勞 薩 有 罪, 革 碩 翁 科 羅 巴 圖 魯 號 , 降 一 等 參 將 。

 


    二 月 己 未 , 以 八 旗 佐 領 下 人 多 貧 乏 , 令 戶 部 察 明奏 聞 。 諭 佐 領 毋 沉 湎 失 職 。 其 有 因 飲 酒 失 業 者 四 十 八 人並 解 任 。 諭 諸 王 大 臣 教 子 弟 習 射 。 丙 寅 , 多 爾 袞 等 奏 敗明 兵 。

 


    三 月 己 卯 , 濟 爾 哈 朗 等 代 圍 錦 州 。 丁 酉 , 降 和 碩睿 親 王 多 爾 袞 、 肅 親 王 豪 格 為 多 羅 郡 王 , 多 羅 貝 勒 阿 巴泰 、 杜 度 以 下 罰 銀 有 差 。 是 時 , 祖 大 壽 為 明 守 錦 州 , 屢招 之 不 應 。 上 令 諸 王 迭 出 困 之 。 而 多 爾 袞 等 駐 營 錦 州 三十 里 外 , 又 時 遣 軍 士 還 家 , 故 有 是 命 。 己 亥 , 遣 朝 鮮 總兵 柳 琳 等 率 兵 助 濟 爾 哈 朗 軍 。 壬 寅 , 濟 爾 哈 朗 奏 克 錦 州外 城 。 初 , 我 軍 環 錦 州 而 營 , 深 溝 高 壘 , 絕 明 兵 出 入 ,城 中 大 懼 。 蒙 古 貝 勒 諾 木 齊 、 台 吉 吳 巴 什 等 請 降 , 且 約獻 東 關 為 內 應 。 祖 大 壽 覺 之 , 謀 執 吳 巴 什 等 。 於 是 諸 蒙古 大 譟 , 與 明 兵 搏 戰 。 我 軍 自 外 應 之 , 遂 克 其 外 城 。 大壽 退 保 內 城 。 甲 辰 , 諾 木 齊 、 吳 巴 什 等 以 蒙 古 六 千 餘 人來 歸 , 至 盛 京 。

 


    夏 四 月 丁 未 , 遣 阿 哈 尼 堪 等 率 兵 詣 錦 州 助 濟 爾 哈朗 軍 。 濟 爾 哈 朗 奏 敗 明 援 兵 於 松 山 。 庚 戌 , 遣 孔 有 德 、尚 可 喜 助 圍 錦 州 。 多 爾 袞 等 聞 錦 州 蒙 古 降 , 請 效 力 贖 罪。 不 許 。

 


    五 月 丁 丑 , 明 總 督 洪 承 疇 以 兵 六 萬 援 錦 州 , 屯 松山 北 崗 。 濟 爾 哈 朗 等 擊 走 之 , 斬 首 二 千 級 。 丁 亥 , 索 倫部 巴 爾 達 齊 降 。 己 丑 , 遣 希 福 等 閱 錦 州 屯 營 濠 塹 。 壬 寅, 諭 駐 防 歸 化 城 都 統 古 祿 格 等 增 築 外 城 , 建 敵 樓 , 浚 深濠 , 以 備 守 禦 。

 


    六 月 丁 未 , 命 多 爾 袞 、 豪 格 代 圍 錦 州 。 辛 酉 , 濟爾 哈 朗 、 多 爾 袞 等 合 軍 敗 明 援 兵 於 松 山 。 丙 寅 , 遣 學 士羅 碩 以 祖 澤 潤 書 招 祖 大 壽 。 庚 午 , 多 爾 袞 等 又 奏 敗 明 援兵 於 松 山 。

 


    秋 七 月 戊 寅 , 賜 中 式 舉 人 滿 洲 鄂 謨 克 圖 、 蒙 古 杜當 、 漢 人 崔 光 前 等 朝 衣 各 一 襲 , 一 二 三 等 生 員 緞 布 有 差。 甲 申 , 遣 孔 有 德 、 耿 仲 明 、 尚 可 喜 下 副 都 統 率 兵 助 圍錦 州 。 乙 酉 , 議 圍 錦 州 功 罪 , 親 王 以 下 賞 罰 有 差 。

 


    八 月 甲 辰 朔 , 敘 克 錦 州 外 城 諸 將 功 , 晉 鼇 拜 、 勞薩 、 伊 爾 登 等 秩 , 復 勞 薩 碩 翁 科 羅 巴 圖 魯 號 。 乙 巳 , 我軍 與 明 合 戰 , 明 陽 和 總 兵 楊 國 柱 敗 死 。 祖 大 壽 自 錦 州 分所 部 為 三 , 突 圍 不 得 出 。 丁 未 , 封 烏 朱 穆 秦 部 多 爾 濟 濟農 為 和 碩 蘇 勒 親 王 , 阿 霸 垓 部 多 爾 濟 額 齊 格 諾 顏 為 卓 禮克 圖 郡 王 。 丁 巳 , 上 以 明 洪 承 疇 、 巡 撫 邱 民 仰 等 援 錦 州兵 號 十 三 萬 , 壁 松 山 , 上 親 率 大 軍 禦 之 。 濟 爾 哈 朗 留 守。 諸 王 、 貝 勒 、 大 臣 以 明 兵 勢 眾 , 勸 上 緩 行 。 上 笑 曰 :「 但 恐 彼 聞 朕 至 , 潛 師 遁 耳 。 若 不 去 , 朕 破 之 如 摧 枯 拉朽 也 。 」 遂 疾 馳 而 進 。 戊 午 , 渡 遼 河 。 洪 承 疇 以 兵 犯 我右 翼 , 豪 格 擊 敗 之 。 壬 戌 , 上 至 戚 家 堡 , 將 赴 高 橋 , 召多 爾 袞 以 兵 來 會 。 多 爾 袞 請 駐 蹕 松 、 杏 間 。 上 從 之 , 幸松 山 。 明 以 一 軍 駐 乳 峰 山 , 由 乳 峰 至 松 山 , 列 步 軍 七 營, 騎 兵 則 環 城 東 西 北 , 壁 壘 甚 堅 。 我 師 自 烏 欣 河 南 山 至海 , 橫 截 大 路 而 軍 。 上 謂 諸 將 曰 : 「 敵 眾 , 食 必 不 足 ,見 我 斷 其 餉 道 , 必 無 固 志 , 設 伏 待 之 , 全 師 可 覆 也 。 」癸 亥 , 明 兵 來 犯 , 擊 卻 之 。 又 敗 之 塔 山 , 獲 其 積 粟 十 二屯 。 甲 子 , 明 兵 再 犯 , 又 卻 之 。 時 承 疇 以 餉 乏 , 欲 就 食寧 遠 。 上 知 其 將 遁 , 分 路 設 伏 , 戒 諸 將 嚴 陣 以 待 , 扼 其歸 寧 遠 及 奔 塔 山 、 錦 州 路 。 是 夜 , 明 吳 三 桂 等 六 總 兵 果潛 師 先 奔 , 昏 黑 中 為 我 伏 兵 所 截 , 大 潰 。 惟 曹 變 蛟 、 王廷 臣 返 松 山 。 乙 丑 , 又 克 其 四 臺 。 王 樸 、 吳 三 桂 奔 杏 山。 曹 變 蛟 棄 乳 峰 山 , 乘 夜 襲 上 營 , 力 戰 , 變 蛟 中 創 走 。己 巳 , 吳 三 桂 、 王 樸 自 杏 山 奔 寧 遠 , 遇 我 伏 兵 , 又 大 敗之 , 三 桂 、 樸 僅 以 身 免 。 是 役 也 , 斬 首 五 萬 , 獲 馬 七 千, 軍 資 器 械 稱 是 。 承 疇 收 敗 兵 萬 餘 人 入 松 山 , 嬰 城 守 ,不 能 戰 。 我 軍 遂 掘 壕 圍 之 。 是 日 , 札 魯 特 部 桑 噶 爾 以 兵至 。

 


    九 月 乙 亥 , 科 爾 沁 卓 禮 克 圖 親 王 吳 克 善 以 兵 至 。命 多 爾 袞 、 豪 格 分 兵 還 守 盛 京 。 戊 寅 , 略 寧 遠 。 乙 酉 ,關 雎 宮 宸 妃 疾 。 上 將 還 京 , 留 杜 度 、 阿 巴 泰 等 圍 錦 州 ,多 鐸 、 阿 達 禮 等 圍 松 山 , 阿 濟 格 等 圍 杏 山 。 丙 戌 , 駕 還。 庚 寅 , 宸 妃 薨 。 辛 卯 , 上 還 京 。

 


    冬 十 月 癸 卯 朔 , 日 有 食 之 。 甲 辰 , 遣 阿 拜 駐 錦 州南 乳 峰 山 。 丁 未 , 遣 孔 有 德 、 耿 仲 明 、 尚 可 喜 等 助 圍 錦州 。 己 巳 , 追 封 宸 妃 為 元 妃 , 諡 敏 惠 恭 和 。 壬 申 , 封 蘇尼 特 墨 爾 根 台 吉 騰 機 思 為 多 羅 墨 爾 根 郡 王 。

 


    十 一 月 乙 亥 , 命 多 爾 袞 、 羅 託 、 屯 齊 駐 錦 州 , 豪格 、 滿 達 海 等 駐 松 山 。

 


    十 二 月 甲 寅 , 濟 爾 哈 朗 、 多 爾 袞 奏 敗 洪 承 疇 於 松山 。

 


    七 年 春 二 月 癸 卯 , 上 出 獵 葉 赫 。 戊 申 , 明 德 王 朱由  卒 , 以 禮 葬 之 。 戊 午 , 阿 濟 格 奏 敗 明 兵 於 寧 遠 。 辛酉 , 豪 格 、 阿 達 禮 、 多 鐸 、 羅 洛 宏 奏 拔 松 山 , 擒 明 總 督洪 承 疇 , 巡 撫 邱 民 仰 , 總 兵 王 廷 臣 、 曹 變 蛟 、 祖 大 樂 ,遊 擊 祖 大 名 、 大 成 等 。 先 是 , 承 疇 援 絕 , 屢 突 圍 不 得 出, 其 副 將 夏 承 德 約 降 , 且 請 為 內 應 , 以 子 夏 舒 為 質 。 戊午 夜 半 , 豪 格 等 梯 城 破 之 。 捷 聞 , 上 以 所 俘 獲 分 賚 官 軍, 收 軍 器 貯 松 山 城 。 壬 戌 , 上 還 宮 。

 


    三 月 癸 酉 , 殺 邱 民 仰 、 王 廷 臣 、 曹 變 蛟 。 諭 洪 承疇 、 祖 大 樂 來 京 , 而 縱 大 名 、 大 成 入 錦 州 。 己 卯 , 克 錦州 , 祖 大 壽 以 所 部 七 千 餘 人 出 降 。 乙 酉 , 阿 濟 格 等 奏 明遣 職 方 郎 中 馬 紹 愉 來 乞 和 , 出 明 帝 敕 兵 部 尚 書 陳 新 甲 書為 驗 。 上 曰 : 「 明 之 筆 札 多 不 實 , 且 詞 意 夸 大 , 非 有 欲和 之 誠 。 然 彼 真 偽 不 可 知 , 而 和 好 固 朕 夙 願 。 朕 為 百 萬生 靈 計 , 若 事 果 成 , 各 君 其 國 , 使 民 安 業 , 則 兩 國 俱 享太 平 之 福 。 爾 等 以 朕 意 傳 示 之 。 」 乙 未 , 諭 多 爾 袞 、 豪格 駐 杏 山 、 塔 山 , 濟 爾 哈 朗 、 阿 濟 格 、 阿 達 禮 等 還 京 。

 


    夏 四 月 丁 未 , 敕 諭 吳 三 桂 等 降 。 庚 戌 , 大 小 二 日並 出 , 大 者 旋 沒 。 辛 亥 , 濟 爾 哈 朗 、 多 爾 袞 、 豪 格 等 奏克 塔 山 。 甲 子 , 奏 克 杏 山 。 毀 松 山 、 杏 山 、 塔 山 三 城 。濟 爾 哈 朗 等 班 師 。 以 阿 巴 泰 守 錦 州 。

 


    五 月 己 巳 朔 , 濟 爾 哈 朗 等 奏 明 遣 馬 紹 愉 來 議 和 ,遣 使 迓 之 。 癸 酉 , 洪 承 疇 、 祖 大 壽 等 至 , 入 見 請 死 。 上赦 之 , 諭 以 盡 忠 報 效 , 承 疇 等 泣 謝 。 上 問 承 疇 曰 : 「 明帝 視 宗 室 被 俘 , 置 若 罔 聞 。 陣 亡 將 帥 及 窮 蹙 降 我 者 , 皆孥 戮 之 。 舊 規 乎 ? 抑 新 例 乎 ? 」 承 疇 對 曰 : 「 昔 無 此 例, 近 因 文 臣 妄 奏 , 故 然 。 」 上 曰 : 「 君 暗 臣 蔽 , 枉 殺 至此 。 夫 將 士 被 擒 乞 降 , 使 其 可 贖 , 猶 當 贖 之 , 奈 何 戮 其妻 子 ! 」 承 疇 曰 : 「 皇 上 真 仁 主 也 。 」 戊 寅 , 禁 善 友 邪教 , 誅 黨 首 李 國 梁 等 十 六 人 。 壬 午 , 明 使 馬 紹 愉 等 始 至。

 


    六 月 辛 丑 , 都 察 院 參 政 祖 可 法 、 張 存 仁 言 : 「 明寇 盜 日 起 , 兵 力 竭 而 倉 廩 虛 , 征 調 不 前 , 勢 如 瓦 解 。 守遼 將 帥 喪 失 八 九 , 今 不 得 已 乞 和 , 計 必 南 遷 。 宜 要 其 納貢 稱 臣 , 以 黃 河 為 界 。 」 上 不 納 。 以 書 報 明 帝 曰 : 「 向屢 致 書 修 好 , 貴 國 不 從 , 事 屬 既 往 , 其 又 何 言 。 予 承 天眷 , 自 東 北 海 濱 以 訖 西 北 , 其 間 使 犬 、 使 鹿 產 狐 產 貂 之地 , 暨 厄 魯 特 部 、 斡 難 河 源 , 皆 我 臣 服 , 蒙 古 、 朝 鮮 盡入 版 圖 , 用 是 昭 告 天 地 , 正 位 改 元 。 邇 者 兵 入 爾 境 , 克城 陷 陣 , 乘 勝 長 驅 , 亦 復 何 畏 。 余 特 惓 惓 為 百 萬 生 靈 計, 若 能 各 審 禍 福 , 誠 心 和 好 , 自 茲 以 往 , 盡 釋 宿 怨 , 尊卑 之 分 , 又 奚 較 焉 。 古 云 : 『 情 通 則 明 , 情 蔽 則 暗 。 』使 者 往 來 , 期 以 面 見 , 情 不 壅 蔽 。 吉 凶 大 事 , 交 相 慶 弔。 歲 各 以 地 所 產 互 為 餽 遺 , 兩 國 逃 亡 亦 互 歸 之 。 以 寧 遠雙 樹 堡 為 貴 國 界 , 塔 山 為 我 國 界 , 而 互 市 於 連 山 適 中 之地 。 其 自 海 中 往 來 者 , 則 以 黃 城 島 之 東 西 為 界 。 越 者 各罪 其 下 。 貴 國 如 用 此 言 , 兩 君 或 親 誓 天 地 , 或 遣 大 臣 蒞盟 , 唯 命 之 從 。 否 則 後 勿 復 使 矣 。 」 遂 厚 賚 明 使 臣 及 從者 , 遣 之 。 後 明 議 中 變 , 和 事 竟 不 成 。 癸 卯 , 諭 諸 王 貝勒 , 凡 行 兵 出 獵 , 踐 田 禾 者 罪 之 。 甲 辰 , 設 漢 軍 八 旗 ,以 祖 澤 潤 等 八 人 為 都 統 。 以 貝 子 羅 託 為 都 察 院 承 政 , 吳達 海 為 刑 部 承 政 , 郎 球 為 禮 部 承 政 。 乙 巳 , 多 羅 安 平 貝勒 杜 度 卒 。

 


    秋 七 月 庚 午 , 諭 諸 王 、 貝 勒 、 大 臣 曰 : 「 爾 等 於所 屬 賢 否 , 當 已 詳 悉 。 知 而 不 舉 , 何 以 示 勸 ? 太 祖 時 ,蘇 完 札 爾 固 齊 費 英 東 等 見 人 有 善 , 先 自 獎 勵 , 然 後 舉 之; 見 人 不 善 , 先 自 斥 責 , 然 後 劾 之 。 故 人 無 矜 色 , 無 怨言 。 今 未 有 若 斯 之 公 直 者 矣 。 」 王 貝 勒 等 皆 謝 罪 。 辛 未, 承 攻 索 海 以 罪 褫 職 。 壬 申 , 以 紐 黑 為 議 政 大 臣 。 丙 子, 敘 功 , 晉 多 羅 睿 郡 王 多 爾 袞 、 肅 郡 王 豪 格 復 為 和 碩 親王 , 多 羅 貝 勒 多 鐸 為 多 羅 郡 王 , 鄭 親 王 濟 爾 哈 朗 以 下 賞賚 有 差 。 戊 寅 , 遣 輔 國 公 博 和 託 代 戍 錦 州 。 乙 酉 , 議 濟爾 哈 朗 以 下 諸 將 征 錦 州 違 律 罪 。 上 念 其 久 勞 , 悉 宥 之 。諭 刑 部 慎 讞 獄 。 己 丑 , 命 多 羅 郡 王 阿 達 禮 管 禮 部 事 。

 


    八 月 己 亥 , 鑄 砲 於 錦 州 。 癸 卯 , 鎮 國 將 軍 巴 布 海有 罪 , 廢 為 庶 人 。 癸 丑 , 論 克 錦 州 、 松 山 、 杏 山 、 塔 山諸 將 功 , 晉 秩 有 差 。

 


    九 月 , 敘 外 藩 諸 王 、 貝 勒 、 大 臣 從 征 錦 州 功 , 賞賚 有 差 。 丁 丑 , 遣 貝 子 羅 託 等 代 戍 錦 州 。 壬 午 , 命 沙 爾虎 達 等 征 虎 爾 哈 部 。

 


    冬 十 月 癸 卯 , 遣 英 俄 爾 岱 等 鞫 朝 鮮 閣 臣 崔 鳴 吉 等罪 。 辛 亥 , 以 阿 巴 泰 為 奉 命 大 將 軍 , 與 圖 爾 格 率 師 伐 明。 壬 子 , 師 行 。 丁 巳 , 上 不 豫 , 赦 殊 死 以 下 。 己 未 , 令多 鐸 、 阿 達 禮 駐 兵 寧 遠 。 以 敕 諭 吳 三 桂 降 。 又 命 祖 大 壽以 書 招 之 。 三 桂 , 大 壽 甥 也 。 甲 子 , 命 鄭 親 王 濟 爾 哈 朗、 睿 親 王 多 爾 袞 、 肅 親 王 豪 格 、 武 英 郡 王 阿 濟 格 裁 決 庶政 , 其 不 能 決 者 奏 聞 。

 


    十 一 月 丁 丑 , 多 鐸 奏 擊 敗 吳 三 桂 兵 。 丙 申 , 阿 巴泰 奏 自 牆 子 嶺 入 克 長 城 , 敗 明 兵 於 薊 州 。

 


    閏 十 一 月 甲 辰 , 上 還 京 。 己 酉 , 沙 爾 虎 達 等 降 虎爾 哈 部 一 千 四 百 餘 人 。 丙 辰 , 遣 巴 布 泰 等 更 戍 錦 州 。 己未 , 以 宗 室 韓 岱 為 兵 部 承 政 。 定 圍 獵 誤 射 人 馬 處 分 例 。

 


    十 二 月 丁 卯 , 上 出 獵 葉 赫 。 乙 亥 , 遣 金 維 城 率 師戍 錦 州 。 丁 丑 , 駐 蹕 開 庫 爾 。 上 不 豫 , 諸 王 貝 子 請 罷 獵, 不 許 。 丙 戌 , 月 暈 生 三 珥 。 丁 亥 , 日 暈 生 三 珥 。 癸 巳, 上 還 京 。

 


    是 歲 , 杜 爾 伯 特 部 札 薩 克 塞 冷 來 朝 。

 


    八 年 春 正 月 丙 申 朔 , 上 不 豫 , 命 和 碩 親 王 以 下 ,副 都 統 以 上 , 詣 堂 子 行 禮 。 辛 亥 , 沙 爾 虎 達 等 師 還 , 論功 賞 賚 有 差 。 甲 寅 , 明 寧 遠 總 兵 吳 三 桂 答 祖 大 壽 書 , 猶豫 未 決 , 於 是 復 降 敕 諭 之 。 乙 卯 , 遣 譚 布 等 更 戍 錦 州 。辛 酉 , 多 羅 貝 勒 羅 洛 宏 以 罪 削 爵 。

 


    二 月 乙 丑 朔 , 日 有 食 之 。 甲 戌 , 葬 敏 惠 恭 和 元 妃。 庚 寅 , 禁 建 寺 廟 。

 


    三 月 丙 申 , 敕 朝 鮮 臣 民 毋 與 明 通 。 丙 午 , 地 震 ,自 西 隅 至 東 南 有 聲 。 庚 戌 , 上 不 豫 , 赦 死 罪 以 下 。 遣 阿爾 津 等 征 黑 龍 江 虎 爾 哈 部 , 葉 臣 等 更 戍 錦 州 。 辛 酉 , 更定 六 部 處 分 例 。

 


    夏 四 月 癸 酉 , 遣 金 維 城 等 更 戍 錦 州 。 甲 戌 , 多 鐸請 暫 息 軍 興 , 輟 工 作 , 務 農 業 , 以 足 民 用 。

 


    五 月 丙 申 , 復 封 羅 洛 宏 為 多 羅 貝 勒 。 先 是 , 圖 白忒 部 達 賴 喇 嘛 遣 使 修 聘 問 禮 , 留 京 八 月 , 至 是 , 遣 還 ,並 賚 其 來 使 。 庚 子 , 努 山 敗 明 兵 界 嶺 口 。 癸 卯 , 阿 巴 泰奏 我 軍 入 明 , 克 河 間 、 順 德 、 兗 州 三 府 、 州 十 八 、 縣 六十 七 , 降 州 一 、 縣 五 , 與 明 大 小 三 十 九 戰 , 殺 魯 王 朱 衣珮 及 樂 陵 、 陽 信 、 東 原 、 安 丘 、 滋 陽 五 郡 王 , 暨 宗 室 文武 凡 千 餘 員 , 俘 獲 人 民 、 牲 畜 、 金 幣 以 數 十 萬 計 , 籍 數以 聞 。 丁 巳 , 阿 爾 津 征 虎 爾 哈 奏 捷 。

 


    六 月 癸 酉 , 多 羅 饒 餘 貝 勒 阿 巴 泰 師 還 , 鄭 親 王 濟爾 哈 朗 、 睿 親 王 多 爾 袞 、 武 英 郡 王 阿 濟 格 郊 迎 之 。 甲 戌, 賜 阿 巴 泰 及 從 征 將 士 銀 緞 有 差 。 己 卯 , 諭 諸 王 貝 勒 曰: 「 治 生 者 務 在 節 用 , 治 國 者 重 在 土 地 人 民 。 爾 等 勿 專事 俘 獲 以 私 其 親 。 其 各 勤 農 桑 以 敦 本 計 。 」 艾 度 禮 代 戍錦 州 。 丁 亥 , 朝 鮮 國 王 李 倧 請 戍 錦 州 兵 歲 一 更 。 庚 寅 ,諭 戶 、 兵 二 部 清 察 蒙 古 人 丁 , 編 入 佐 領 , 俱 令 披 甲 。

 


    秋 七 月 戊 戌 , 阿 爾 津 等 師 還 , 論 功 賞 賚 有 差 。 諭諸 王 勿 以 黃 金 飾 鞍 勒 。 定 諸 王 、 貝 勒 、 貝 子 、 公 第 宅 制。 壬 寅 , 定 諸 王 貝 勒 失 誤 朝 會 處 分 例 。 丙 辰 , 定 外 藩 王、 貝 勒 、 貝 子 、 公 等 與 諸 王 、 貝 勒 、 貝 子 、 公 相 見 禮 。丁 巳 , 以 征 明 大 捷 , 宣 諭 朝 鮮 。 辛 酉 , 命 滿 達 海 掌 都 察院 事 。

 


    八 月 丙 寅 , 貝 子 羅 託 有 罪 論 辟 , 免 死 , 幽 之 。 戊辰 , 以 宗 室 鞏 阿 岱 為 吏 部 承 政 , 郎 球 為 禮 部 承 政 , 星 訥為 工 部 承 政 。 庚 午 , 上 御 崇 政 殿 。 是 夕 , 亥 時 , 無 疾 崩, 年 五 十 有 二 , 在 位 十 七 年 。 九 月 壬 子 , 葬 昭 陵 。 冬 十月 丁 卯 , 上 尊 諡 曰 應 天 興 國 弘 德 彰 武 寬 溫 仁 聖 睿 孝 文 皇帝 , 廟 號 太 宗 , 累 上 尊 諡 曰 應 天 興 國 弘 德 彰 武 寬 溫 仁 聖睿 孝 敬 敏 昭 定 隆 道 顯 功 文 皇 帝 。

 


    論 曰 : 太 宗 允 文 允 武 , 內 修 政 事 , 外 勤 討 伐 , 用兵 如 神 , 所 向 有 功 。 雖 大 勛 未 集 , 而 世 祖 即 位 期 年 , 中外 即 歸 於 統 一 , 蓋 帝 之 詒 謀 遠 矣 。 明 政 不 綱 , 盜 賊 憑 陵, 帝 固 知 明 之 可 取 , 然 不 欲 亟 戰 以 勦 民 命 , 七 致 書 於 明之 將 帥 , 屈 意 請 和 。 明 人 不 量 強 弱 , 自 亡 其 國 , 無 足 論者 。 然 帝 交 鄰 之 道 , 實 與 湯 事 葛 、 文 王 事 昆 夷 無 以 異 。嗚 呼 , 聖 矣 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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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곡 가산산성

 

길지 않은 세월 무성한 함성만 가산을 뒤덮고

 

   인조 17년(1639년), 경상도 관찰사에 제수된 이명웅은 왕에게 부임인사를 하면서 경상도 예순 고을 산성 가운데 믿을 만한 곳은 진주, 금오, 천생의 세군데밖에 없으므로 적당한 곳을 골라 산성을 쌓을 것을 요청하였다. 그해 4월 경상감사로 부임한 이명웅은 가산의 지리가 편리함을 다시 조정에 보고하였고, 9월부터 인근 고을의 많은 남정을 징발하여 험한 지형을 따라 성을 �기 시작하여 이듬해 4월에 내성을 준공하였다. 그러나 이 성을 쌓기 위해 10만여 명 이상의 엄청난 인력과 막대한 자금이 동원되고 감사의 가혹한 독려로 공사 도중 많은 사람이 죽기까지 하여 민심이 동요하였다. 여러 차례 탄핵을 받은 이명웅은 임기를 채우지 못하고 1640년 7월 체직되고 말았다. 그대 쌓은 내성의 규모는 성벽의 둘레가 약 4km에 달하는 4710보, 여장이 1887첩이었으며, 동.서,북문의 세 성문이 설치되고 암문도 여덟개가 있었다. 산성 안에는 네 곳의 포루, 한 군데에 장대, 산성에 필수적인 샘이나 우물이 스물 하나, 기타 많은 부속시설이 들어서고 절도 넷이나 자리잡고 있었다.

   내성이 완공된 지 60년이 지난 숙종 26년(1700년)에 외성을 축조했다.

   중성은 영조 17년(1741년) 관찰사 정익하의 장계를 받아들이면서 이룩되었다. 성벽 길이 602보에 여장 402첩, 중문 하나 문루 하나, 별장(別將)이 머무르는 건물 등이 설치되었다. 4년 뒤에는 중성 안에 빙고를 축조하기도 하였다.

   1640년 성이 완성되면서 종 3품 도호부사가 다스리는 칠곡도호부를 여기에 설치하고 군위, 의흥, 신녕, 하양지방이 칠곡도호부에 예속되었다. 그러나 관아가 산성 안에 있다 보니 여러가지로 불편한 저이 많았기 때문에 백성들은 다른 곳으로 이전을 요구했다. 이에 따라 순조 19년(1819년) 당시 경삼감사로 있던 추사 김정희의 아버지 김노경이 장계를 올리면서 칠곡도호부는 팔거현으로 옮겨졌다. 산성 안에 객사, 인화간을 비롯한 관아와 군관청, 군기고, 보루, 포루, 장대가 설치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행정적이라기보다는 방어를 위한 군사시설이 압도적인 군사용 성이라고 볼 수 있다. 중성에는 네 개의 진의 창고가 있어 비축미를 보관하여 유사시에 사용하도록 하였다.

   영남제일루라고 쓰여진 진남루에 올라 바라본 칠곡 일대는 따가운 여름 햇살이 내려 쬐고 성 안쪽에서 뻗어 올라온 담쟁이 넝쿨은 탐스럽기 그지없다. 어느 쪽으로 올라갈 것인가 생각하다가 산성을 따라 오른다. 1977년부터 1980년까지 3년에 걸쳐 복원한 남문과 문루, 성곽의 일부는 주로 옛 돌을 이용해 복원했으나 솜씨가 거칠고, 조금 지나자 산성은 허물어진 그대로다.

   길가에는 새카만 오디 열매가 검은 낙엽처럼 떨어져 뒹굴고 있다. 그뿐인가. 이미 저버린 지 오래인 아카시아 꽃잎들이 누렇게 변색된 채로 길을 뒤덮고 있다.

   아! 가고 오는 것들이여 가는 계절을 서러워할 사이도 없이 또 다른 꽃들이 연이어 피어나고 그 꽃들이 진 자리에 열매들이 또 다른 탄생을 준비하고 있고, 붉은 딸기 몇 개가 유혹하는 한 켠에 새빨간 나리꽃이 피어 있구나. 싸리꽃 무리지어 피어 있는 길을 돌아가서 성터에 앉는다. 바람은 제법 선선하게 불고 나는 나무기둥에 등을 기댄 채 먼 산을 바라본다. 그래 저 멀리 펼쳐져 있는 칠곡, 대구 일대와 이 가산산성이 한국전쟁 당시 피바람 불어제치던 전쟁터였었지. 한국전쟁 당시 가산산성의 전투를 <한국전쟁사>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우군기의 폭격이 시작되어 뒤를 이어 미군 및 사단 야전포병의 일제사격이 집중되자 가산산성 안은 피비린내 나는 수라장이 되고 말았다. 아름드리 낙엽송이 순식간에 벌거숭이가 되고 성벽 위에 웅크린 적병들이 밤송이 떨어지듯 아래로 곤두박질했다. 가장 치열한 교전을 치른 제4중대는 180명이던 병력 중 몸이 성한 자는 장교 1명과 병사 10명에 지나지 않을 정도로 감소되어 있었다. 가산산성에 침투한 북괴군 제14연대도 1950년 8월27일 전투에서 와해, 약 400여 명만이 탈출했다고 한다" 하지만 가산산성 전투는 빙산의 일각이었다.

   8월12일에는 미군이 제1기병사단과 공군이 입체작전을 벌여 백병전을 무릅쓰고 인민군 이천오백 명쯤을 살상하여 낙동강을 건너 대구로 진입하려는 적의 기세를 꺾었다. 8월13일에는 가산 면학산에 있는 328고지에서  전투가 전개되었고 328고지에서는 하루에도 주인이 두번씩 바뀔 정도의 치열한 전투가 계속되었다. 8월16일 오전 11시58분에 일본 요꼬다와 가네다에서 출발한 B29 비행기 98대는 왜관에 있던 북한군 진지를 향해 대대적인 폭격을 가했다. 26분 동안에 퍼부은 폭탄이 무려 960톤에 이르렀다. 이 폭격으로 강을 건너기 위해 있던 북한군 사만 명 중에 적어도 삼만 명이 죽었다고 한다. 병사들의 시체가 산과 들을 뒤덮었고 낙동강은 붉은 핏빛으로 물들었다. 그러니까 1초에 스무명, 1분에 1150명 꼴로 폭사한 셈이다. 바로 이 폭격으로 국군과 미군이 대구를 방어할 수 있었을 뿐만이 아니라 승리할 수 있는 결정적인 전기가 이루어졌다.

   그러한 사실을 아는 지 모르는 지 바람은 나무들을 흔들리게 하고 길은 계속 오르막길이다. 어디 한 군데 트인 데 없는 작은 소나무와 참나무들이 들어선 길을 한없이 올라서다가 윤영숙, 오현신 선생은 "그늘 속에서 수도나 하겠다"고 뒤쳐진다. 얼마쯤 올랐을까 큰 바위 위에서 산 아래를 내려다보며 진재인씨는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 라는 말을 진실로 깨달았다고 너스레를 떤다.

   내려오는 길은 생각보다 가파르다. 동문으로 해서 가산바위로 오르는 길에는 사람들의 발길이 줄을 잇고 옛 천주사 터에 세워진 해인정사에선 잘 익은 앵두나무가 우리를 반기고 있었다.

   <소창청기>에 "속세를 벗어나 정을 줄만한 대상은 오직 산뿐이다. 산은 반드시 사물의 도리를 깊이 관찰하는 눈과 명승지를 탐방하기에 알맞은 체구와 오래도록 머무는 인연이 있어야만 비로소 허물없는 교우 관게를 허락한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잠시 머물렀다 가는 우리들에게 이 가산과 가산산성은 무슨 질문을 던질 것인가?

   *교통

   서울에서 대구터미널까지 06:00~20:30까지 10분 간격으로 있고, 요금은 우등 17,900원, 일반 12,100원이다. 대구 북부터미널(053-743-4464)에서 동명을 거쳐 송림사 가산산성으로 가는 버스가 06:20, 06:40, 08:30, 10:30, 12:00, 15:00, 17:00 등 많이 있다.

   *잘 데와 먹을 데

   가산산성 아래에 숙식할 곳들이 많이 있다.

 

참고: 월간<사람과산> 2002년 7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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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mapiaa.com.ne.kr/가산산성.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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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해록'의 주인공, 홍어장사 '문순득'

 

'표해록(漂海錄)' 이라는 제목의 책은 현재까지 3종이 전해 내려오고 있다. 하나는 탐진출신의 최부가 남긴 것과 제주출신의 장한철이 남긴 표해록, 그리고 정약전 선생이 저술한 표해록이다. 최부의 표해록이나 장한철의 표해록은 잘 알려져 있으나 정약전 선생이 우이도에서 유배생활을 하면서 저술한 표해록은 비교적 늦게 그 존재가 알려져 모르는 경우가 많다.

 

이 표해록의 주인공이 '문순득(文淳得)'이란 사람으로 홍어장사였다. 정약전 선생이 홍어장사인 문순득의 표류생활을 생생하게 엮은 책으로 표해시말(漂海始末)이라는 제목으로 되어있다. 대대로 우이도에 살고있는 문순득의 5대손인 문채옥씨 집에 소장되어 내려온 여러 문건 중에 단지 저술되었다는 사실 외에 원본의 실체가 없었던 표해록이 뒤 늦게 발견되어 세상에 빛을 보게 된 것이다.

 
▲표해시말(漂海始末)이란 제목의 문순득 표해록
 
'문순득', 이 사람은 1777년에서 1847년까지 조선후기를 살았던 실존인물로 본관은 나주 문씨이다. 당시에도 홍어는 서남해를 대표하는 어종(魚種)이었고 이런 홍어를 전문적으로 뭍과 유통하며 장사하던 이가 바로 문순득이다. 향토음식으로 7백 여 년이 넘는 홍어의 역사이지만 기록상으로나 구전으로 알려진 바로 최초로 홍어와 연관되어 나오는 이름 석자가 이 문순득이란 인물이다. 문순득과 표해록에 관한 기록은 조선왕조실록에도 나온다.
 
(·····) 나주(羅州) 흑산도(黑山島) 사람 문순득(文順得)이 여송국(呂宋國,필리핀)에 표류한 일이 있는 바, 그 곳 사람의 형모(形貌)와 의관(衣冠)을 보고하고 그 나라의 방언(方言)을 기록하여 가지고 왔었다.(·····) - 순조9년(1809) 6월 26일
  
지금의 신안군 도초면인 우이도는 조선시대에 소흑산도로 불리우고 있었다. 이 섬에서 배를 두척을 부리던 문순득은 큰 배는 홍어를 잡고 작은 배는 잡은 홍어를 싣고 그때나 지금이나 홍어로 유명한 나주 영산포에 내다 팔았다. 돌아오는 길에는 빈배로 가지않고 쌀과 곡식을 사 양식이 귀한 섬에 되 파는 장사를 하며 살던 문순득이 인생의 큰 전기(轉機)를 맞는다.
 
 
▲우이도의 옛 부두, 여기서 문순득은 출항과 귀항을 하였을 것이다.
 
문순득의 나이가 25살 때인 지금으로부터 2백년전인 1801년 12월의 어느 겨울날, 대흑산도 남쪽의 태사도에서 홍어를 사서 싣고 돌아오다 사나운 풍랑에 동네 선원들과 함께 타고 있던 배가 표류를 하게 된다.
 
이 때 문순득은 오키나와를 거쳐 필리핀에 다다르게 된다. 1805년 1월 8일에 중국을 통해 집에 무사히 돌아오기까지 무려 3년2개월의 시간이 걸린 본의 아닌 여정(旅程)이었다.
 
이미 일본에서도 그 가치를 인정받아 단행본으로 발간된 표해록은 문순득이 해류에 밀려 제일 먼저 기착 한 곳이 오키나와(유구국,琉球國)이다. 이 곳에서 문순득은 8개월이 넘는 기간을 보내다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중국으로 향했으나 무슨 기구한 운명이었는지 또 풍랑을 만나 필리핀(여송국,呂宋國)에 표착하게 된다. 여기서도 근 9개월이 넘는 기간을 지내다 중국에서 약 14개월을 보내고 의주를 거쳐 처자식이 있는 그리운 고향 땅을 밝게 된다.
 
여기서 주목되는 점은 홍어 어상(魚商)을 하던 평범한 섬사람인 문순득이 마침 우이도에서 유배 중인 정약전 선생에게 그가 표류해 다녀온 중국, 안남, 유구, 여송 나라들의 풍속과 의복, 가옥, 토산품, 언어, 선박 등등을 세세하게 구술하여 이를 체계적으로 기록이 가능하게끔 자료를 제공했다는 점이다. 놀라운 것은 표해록 권말에 112개의 단어를 유구어, 여송어와 우리말로 비교, 나열해 실었을 정도이다.
 
문순득은 그저 단순히 일개 홍어장사가 아니라 대단한 두뇌와 관찰력의 소유자였고 해외 문물을 적극 수용하는 지금으로 치면 세계인이요, 개명한 선각자였던 것이다. 
 
▲문순득이 내려 받은 교지
 
후일 필리핀인들이 우리 나라 제주도에 표류해 온 적이 있는데 의사소통에 어려움이 많자 조정에서 문순득을 불러 통역을 할 정도였다고 하니 어학에 천부적인 재능이 있었고. 유통을 알던 문순득이 표류생활 중 중국에서 직접 가져온 부채, 장신구와 상례가 적힌 서책들이 지금까지 집안대대로 유품(遺品)으로 내려오고 있다. 
 
또한 우이도의 문씨가문은 외딴 섬에 유배되어 절망의 나락 속에서 고통의 세월을 보내고 있던 인물들에 대해 대대로 물심양면으로 도움을 주었다는 사실이다. 문순득도 집안 내력대로 유배객 들에게 각별했던 모양으로 이때 정약전 선생과 서로 나눈 교류와 대화들은 막막하고 고달픈 귀양살이에서도 선생이 붓을 놓지 않게 하는데 큰 힘이 되었으리라 여겨지고 그저 한낱 이야기 거리로 치부되어 잊혀질 표류객의 체험담은 정약전 선생의 붓끝을 통해 소중한 기록유산으로 남게 되었다는 것이다.

 
▲1816년 우이도에서 유배 생활 중 숨을 거둔 형 정약전의 장례를 문씨(문순득 추정)들이 치러 준 고마움에 강진에서 유배 중이던 동생 다산 정약용은 감사의 편지를 보낸다.

 
문순득! 그의 파란 많은 생(生)도 흥미롭지만 서남해 바다 한 쪽 우이도 출신의 홍어장사인 그가 우리에게 남긴 행동과 자세에서 본 받아야 할 점은 크다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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沈演심연 

 


 

 

【생몰년】 1587(선조 20)∼1646(인조 24)

【본 관】 청송(靑松) 심(沈)

【자·호】 윤보(潤甫), 규봉(圭峰)

【시 대】 조선 중기

 

 

【성 격】 문신

1587(선조 20)∼1646(인조 24). 본관은 청송(靑松), 자는 윤보(潤甫), 호는 규봉(圭峰)으로 진사 심대형(沈大亨)의 아들이다.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광해군 4년(1612)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인조 2년(1624)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나자 인조를 공주에 호송하여 내시교관(內侍敎官)이 되고 1626년 헌릉 참봉(獻陵參奉)을 지냈다. 1627년 정묘호란 때는 강화도로 왕을 호종하여 조지서 별제(造紙署別提) · 의금부 도사를 역임, 그해 식년문과에 갑과로 급제, 사섬시 직장(司贍寺直長)에 임명되었다. 지평 · 정언 · 교리를 거쳐 1633년에는 호란으로 파괴된 창덕궁의 보수공사를 벌일 때 도청(都廳)이 되어 총괄하였다. 같은 해 광산 현감(光山縣監)으로 부임, 선정을 베풀어 현을 주로 승격시키고, 그 목사가 되었다. 1635년 경상도 관찰사로 재임 중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쌍령(雙嶺)에서 싸우다 패하여 재기를 꾀하던 중 화의가 성립되자, 패전의 책임을 지고 전라도 임피(臨陂)에 유배되었다. 1638년 제주 목사로 덕정을 인정받아 비변사 당상이 되었다. 이어 한성부 판윤 · 승지 · 대사간, 황해도 · 평안도의 순찰사, 평안도 · 경기도의 관찰사를 역임한 뒤 함경도 관찰사로 재직시 죽었다.

 


【참고문헌】 仁祖實錄, 國朝人物考, 燃藜室記述, 國朝榜目, 淸選考

【관련항목】 심택(沈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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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崔鳴吉최명길; 1586~1647)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서 본관은 전주이며 자는 자겸(子謙)이고 호는 지천(遲川)이다. 그리고 시호는 문충(文忠)이며 영흥부사 기남(起南)의 아들이다. 이항복(李恒福)과 신흠(申欽)에게 배웠고 조익(趙翼) ·장유(張維) ·이시백(李時白)과 교유하였다. 20세 때인 1605년(선조 38) 한 해에 사마시의 생원, 진사시와 문과를 모두 통과하고 승문원을 거쳐 예문관에 들어가는 가장 화려한 경로로 정부에 진출하였다. 광해군대에 북인의 권력독점이 심화되던 중 1614년(광해군 6) 병조좌랑에서 삭직되었으며, 북인의 독주가 선조비인 인목대비(仁穆大妃) 유폐에 이르게 되자 이귀(李貴)가 중심이 된 반정계획에 참여하였다. 그 후 김류(金) 계열과의 연합을 통한 반정이 성공하자 이조좌랑이 되고 그 해에 이조참판과 비변사 제조까지 승진하였으며, 정사공신(靖社功臣) 1등 완성부원군(完城府院君)에 녹훈되었다.
  여러 관직을 거치며 이괄의 난과 정묘호란의 극복에 공헌하였는데 특히 정묘호란 때는 강화를 주장하여 후금과 형제의 맹약을 맺도록 했다. 1632년(인조 10) 이후 예조 ·이조 ·호조의 판서와 예문관 ·홍문관 대제학을 역임하였다. 1636년에는 병조판서가 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고, 이조판서에 다시 올라 병자호란에서 강화를 주관하였다. 난중의 일처리로 인조의 깊은 신임을 받음으로써 1637년 우의정과 좌의정을 거쳐 이듬해에는 영의정에 올라, 대청 ·대명 외교의 복잡한 문제에 대처하고 개혁을 추진하면서 국정을 주도하였다. 일찍 사이가 벌어진 김류 ·김자점(金自點) 세력과의 경쟁으로 1640년에 일단 물러났다가 2년 후 다시 영의정이 되었지만, 임경업(林慶業)을 통해 승려 독보(獨步)를 명나라에 보내 비공식적 외교관계를 유지한 일이 발각되어 1643년에 청나라에 끌려가 수감되었다가, 1645년 소현세자 일행과 함께 풀려났다.

  사상은 당시의 대세인 신유학을 바탕으로 하였지만 성리학 원론이나 번다한 예설 자체에 대해 관심을 크게 보이지 않았고 명분론 일변도로 흐르지도 않았다. 또한 양명학(陽明學)에 호감을 보이고 그 소양을 몸에 익혀 장유 등과 더불어 그 사상을 후대에 이어준 매우 중요한 인물로 평가된다. 인조반정 때 길흉을 점쳐 거사 시기를 정했을 만큼 점술을 인정받았으며 풍수지리나 병법에도 뛰어났다. 다양하고 현실적인 사상은 실제 생활과 정치에 반영되었다. 사족들에 대해 청군에 끌려갔던 부녀들과 혼인관계를 계속 유지할 것을 외롭게 주장하였고, 늦게 생자를 얻었으나 그 전에 조카를 양자로 삼은 것을 취소하지 않고 그대로 후사로 삼도록 특별히 청해 조정의 허락을 받았다. 또한 동료 공신들의 경제적 비리행위를 규탄하고 개혁을 촉구하는 데 거리낌이 없을 정도로 강직하였다.

  1624년 이괄의 난에는 무신이 아닌데도 위험 속에서 홀로 임진강을 건너 원수 장만(張晩)을 찾아갔고, 계책을 세워 안현(鞍峴) 전투를 승리로 이끎으로써 반란 진압에 결정적인 계기를 마련하였다. 병자호란 초기에 청나라의 기동대가 들이닥쳤을 때는 자원하여 목숨을 걸고 적장에게 침략을 항의함으로써 인조와 백관이 남한산성으로 피신할 시간을 벌었다. 병자호란 후에도 스스로 청나라를 왕래하면서 대청 외교에서 패전국으로서 겪는 온갖 어려움을 당당한 자세로 해결하여 나갔다. 그의 이러한 성격은 주로 정적들이 편찬한 《인조실록》에서도 곳곳에서 높이 평가되었다. 구체적인 정책은 외부의 압력에 굴하지 않고 개혁을 추구하되 시세의 변화에 따라 변통하는 방향으로 추진하였다. 후금 및 그 뒤의 청나라에 대해서는 유연한 외교관계를 유지하여 충돌을 피하고 우리의 입장을 지키자는 주장으로 일관하였다.

  병자호란 때는 “싸우자니 힘이 부치고 감히 화의하자고 못하다가 하루 아침에 성이 무너지고 위아래가 어육(魚肉)이 되면 종사를 어디에 보존하겠느냐”는 입장에서 강화를 주장하였지만, 자신이 쓴 항서를 찢는 척화파 김상헌(金尙憲)의 행동에도 의미가 있다고 인정함으로써 독단에 빠지지 않았다. 또한 인조가 대원군 신분인 생부 정원군(定遠君)을 왕으로 추존하는 정책을 펼 때 대부분의 사림들이 공과 사의 분별을 내세워 반대하였으나 임금의 입장을 존중하는 소수 의견에 가담하여 탄핵을 받았다. 그러나 항상 임금만을 따른 것은 아니어서 1646년 인조가 소현세자빈을 처형할 때는 공포 분위기 속에서도 일반 사류들과 함께 그녀를 용서할 것을 주장하였다.

  1625년(인조 3)에 관직체계 ·토지제도 ·군사제도 전반에 대한 개혁안을 제출한 데 나타난 개혁 의지는 병자호란 후 국정을 주도할 때 실행에 옮겨졌다. 정치운영에 대해서는 관인들 사이의 분란 가능성을 줄이고 재상의 권한을 확대함으로써 정치의 효율성을 증대시키고, 민생에 대해서는 호패법(號牌法)을 실시하여 민간의 부담을 균등히 하려는 것이었다. 그리고 당시 붕당정치의 폐단이 이조낭관(吏曹郎官)의 자천권(自薦權)과 삼사(三司)의 서사법(署事法) 및 피혐(避嫌)에서 온다고 인식하여 의정부의 기능을 강화하고 낭관의 권한을 제한하며 양사에서의 쟁단을 막아 왕권을 강화하고 정치의 효율성을 높이고자 했다.

  주화론으로 대표되는 그의 사상과 정책은 성리학적 명분을 중시하던 시대 분위기에 밀려 인조 말년 이후 거의 모두 부정되고 자신도 소인배나 불길한 인물로 폄하되었다. 그러나 국가와 민생을 위해 개인의 위험을 돌아보지 않는 헌신과 복잡한 문제들을 풀어간 공로에 대한 찬사도 계속되었다. 그의 정치적 입장은 손자이자 숙종대에 영의정을 지낸 소론의 지도자인 최석정(崔錫鼎) 등을 통해 후대로 이어졌다. 문집으로 《지천집》과 《지천주차(遲川奏箚)》가 있다.

<두산대백과사전>참고

- 차석찬의 역사창고 홈으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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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沈大孚심대부
 

생몰년 1586-1657(선조19-효종8) 

본관 청송(靑松) 

자 신숙(信叔) 

호 가은(嘉隱)/범재(泛齋) 


심대부(沈大孚)

1586(선조 19)∼1657(효종 8).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청송(靑松). 자는 신숙(信叔), 호는 가은(嘉隱)·범재(泛齋). 영천군수 의검(義儉)의 손자이고, 경기도 관찰사 대(岱)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전라감사 최홍한(崔弘僩)의 딸이다. 정구(鄭逑)의 문인이다.

1613년(광해군 5) 사마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고, 1623년(인조 1) 선행으로 사포서별제(司圃署別提)에 기용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그뒤 중림찰방(重林察訪)을 거쳐, 1630년 봉림대군(鳳林大君:뒤의 효종)의 사부(師傅)가 되었다.

1632년 형조좌랑이 되고, 이듬해 관직에 있으면서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이어 예조좌랑을 거쳐 정언이 되었는데, 이때 이미 사사(賜死)된 인성군(仁城君)의 세 아들이 절도에 위리안치된 것을 왕이 관용을 베풀어 방면하자 이에 찬성을 한 것이 화근이 되어 반대파의 탄핵으로 보령현감으로 좌천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그뒤 1634년 송화현감(松禾縣監)이 되었는데, 가도(椵島)에 진을 친 명나라 장수 모문룡(毛文龍)의 군사가 여러 고을을 횡행하며 민폐를 끼치자, 이들 대표와 횡포를 금하는 조약을 엄중히 체결하여 민폐방지에 공헌하였다.

뒤에 서로(西路)의 행정이 부패한 데 혐오를 느껴 한때 사직하였다가 다시 복직하였다. 이어 수찬·교리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양하고 취임하지 않았으며, 1638년 또다시 지평에 임명되었으나 사퇴하고 돌아왔다.

그러나 그해 삼남지방에 큰 흉년이 들자 삼남도사 겸 진정사를 택정할 때 경상도사로 뽑혔으며, 이어서 수찬·헌납·종부시정을 지냈다.

1643년 성산현감으로 나갔다가 다시 들어와 응교·시강관·필선 등을 역임하였다.1649년 인조가 죽자 유계(兪棨) 등과 조(祖)자의 묘호를 반대하다가 왕의 노여움을 사 회양으로 귀양갔다가 1657년에 풀려났다. 이해에 죽었는데, 사후 신원되었으며, 문경의 소양사(瀟陽祠)에 제향되었다.

 http://koreandb.empas.com/koreandb/history/kpeople/person_view.html?id=0006603

 

 

기언 별집(記言別集) 제13권   
 
 
 애사(哀詞)
 
 
사간(司諫) 심대부(沈大孚)에게 드리는 애사 병서(幷序)
 

 

슬프다, 우리 신숙공(信叔公 심대부(沈大孚))이 평생 고서(古書)를 읽어 옛사람의 도를 즐기더니, 벼슬하여 요직에 올라서는, 옛사람의 도대로 그 임금을 섬겼습니다. 그런데 하루아침에 언사(言事) 때문에 배척을 당하여, 객지에서 시름하고 빈궁하게 곤욕을 당하면서 성내지도 않고 욕하지도 않고 이 세상을 마치니, 사람들이 모두 ‘공은 바른 도 때문에 드러났고, 바른 도 때문에 빈궁하게 되었다.’ 하며, 그 도를 슬퍼하고 그 운명을 애처롭게 여기지 않는 이가 없었습니다.
나는 ‘운수가 트이고 막히는 것은 천명이다. 대장부의 심사(心事)는 마땅히 이와 같이 뜻하는 바가 크고 뛰어나야 한다. 다만 슬퍼하는 것은 세도(世道)가 처량하여 착한 사람이 날로 다 없어져서 갈팡질팡 갈 곳 몰라 하는 나를 깜깜한 속에서 원망하며 한없이 울게 할 뿐인 것이다.’라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애사를 지어 슬퍼합니다.
그 애사는 다음과 같습니다.

못가를 거닐고 읊조리며 / 行吟澤畔
상루를 슬퍼하노니 / 哀湘纍些
여추가 추악하고 / 謂閭娵醜
모모가 곱다 하네 / 嫫母媚些
지란은 꺾어져도 / 芝蘭萎折
꽃다움 없어지지 않으니 / 芳不滅些
이름은 백대토록 영원히 빛나는데 / 百代之名永輝光些
혼백은 서글퍼 고향을 슬퍼하노라 / 魂魄悽愴悲故鄕些

 


[주D-001]상루(湘纍) : 상은 소상강을 말하고 루는 자신이 지은 죄가 아닌 것으로 인하여 죽는다는 뜻으로 이 사실은 굴원의 어부사(漁父辭)에 보인다. 여기서는 심대부(沈大孚)가 쫓겨난 것이, 굴원(屈原)이 쫓겨나 못가에서 읊조리다가 소상강(瀟湘江)에 빠져 죽은 일과 같다는 뜻으로 말하였다.
[주D-002]여추(閭娵)가 …… 곱다 하네 : 간신을 가까이하고 어진 이를 멀리 한다는 뜻이다. 여추는 옛날 미인으로 《초사(楚辭)》 동방삭(東方朔) 칠간원세(七諫怨世)에 “아첨하는 무리를 가까이하고 어진 이를 멀리하며, 여추를 헐뜯어 추악하다 하네.” 하였다. 모모(嫫母)는 추한 여인으로 《열녀전(列女傳)》에 “황제(黃帝)의 제4비가 모모인데, 외모는 제일 추하지만 가장 어질었다.” 하였는데, 여기서는 추하다는 뜻만 취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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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敬輿 이경여


 

     감사 이경여는 병란 중에도 학문을 세우고 퇴폐한 풍속을 스스로 깨우치도록 가르치고 농사와 누에치기를 권장하며 부역과 세금을 가볍게 하였다.

         2월에 사임하고 떠나가니 남쪽의 백성들이 기대가 무너져 실망하였다. ---용담록--

 

 

 


 1585(선조 18)∼1657(효종 8).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직부(直夫), 호는 백강(白江)·봉암(鳳巖). 목사 수록(綬祿)의 아들이다.

1601년(선조 34) 사마시를 거쳐, 1609년(광해군 1)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1611년 검열이 되었으나, 광해군의 실정이 심해지자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취임하였고, 이듬해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나자 왕을 공주에 호종하고, 이어 체찰사 이원익(李元翼)의 종사관이 되었으며, 1630년(인조 8) 부제학·청주목사·좌승지·전라도관찰사를 역임하였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왕을 모시고 남한산성에 피란하였다.

이듬해 경상도관찰사가 되고, 그뒤 이조참판으로 대사성을 겸임하여 선비양성의 방책을 상주하였고, 이어 형조판서에 승진하였다.

1642년 배청친명파로서 청나라 연호를 사용하지 않은 것을 이계(李烓)가 청나라에 밀고함으로써 심양(瀋陽)에 억류되었다가 이듬해 세자와 함께 귀국하여 우의정이 되었다.

1644년 사은사로 청나라에 갔다가 다시 억류되었으나, 그동안 본국에서는 영중추부사라는 벼슬을 내렸다.

이듬해 귀국, 1646년 민회빈강씨(愍懷嬪姜氏:昭顯世子嬪)의 사사(賜死)를 반대하다가 진도에 유배되고, 다시 1648년 삼수에 위리안치되었으나, 이듬해 효종이 즉위하자 풀려나와 1650년(효종 1)에 다시 영중추부사가 되었다. 이어 영의정으로 다시 사은사가 되어 청나라에 다녀온 뒤 청나라의 압력으로 영중추부사로 전임하였다.

시문에 능하고 글씨에도 뛰어났다. 부여의 부산서원(浮山書院), 진도의 봉암사(鳳巖祠)와 흥덕(興德)의 동산서원(東山書院)에 제향되었으며, 저서로는 《백강집》이 있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행력

왕력 서기 간지 연호 연령 기사

선조 18 1585 을유 萬曆 13 1 1월 9일, 서울에서 태어나다.

선조 32 1599 기해 萬曆 27 15 尹承勳의 딸 海平尹氏와 혼인하다.

선조 34 1601 신축 萬曆 29 17 司馬試에 합격하다.

광해군 1 1609 기유 萬曆 37 25 10월, 增廣試에 乙科로 합격, 승문원에 分館되다.

광해군 2 1610 경술 萬曆 38 26 12월, 검열이 되다. 이후 설서, 대교를 지내다.

광해군 4 1612 임자 萬曆 40 28 4월, 봉교가 되다. ○ 11월, 공조 좌랑이 되다. ○ 12월, 정언이 되었으나 사직하고 나아가지 않다.

광해군 6 1614 임인 萬曆 42 30 1월, 直講이 되다. ○ 9월, 司書가 되었으나 사직하다.

광해군 7 1615 을묘 萬曆 43 31 4월, 京畿 都事가 되다.

광해군 8 1616 병진 萬曆 44 32 4월, 金剛山을 비롯한 關東 지방을 유람하다.

광해군 9 1617 정사 萬曆 45 33 3월, 부인상을 당하다. ○ 4월, 忠原 縣監이 되다.

광해군 10 1618 무오 萬曆 46 34 8월, 豐川任氏와 혼인하다.

광해군 11 1619 기미 萬曆 47 35 벼슬을 버리고 興元江 가에 우거하다.

광해군 12 1620 경신 泰昌 1 36 8월, 부친상을 당하다. 驪江에서 居喪하다.

인조 1 1623 계해 天啓 3 39 3월, 反正 뒤 부수찬이 되다. 이후 교리, 헌납, 이조 좌랑 등을 역임하다.

인조 2 1624 갑자 天啓 4 40 1월, 李适의 난에 扈駕하여 公州로 가다. 體察府 從事官을 겸하다. 평정 후 隨駕하여 還都하다. ○ 3월, 교서관 교리를 겸하다. ○ 10월, 이조 정랑이 되다.

인조 3 1625 을축 天啓 5 41 2월, 暗行御史로서 嶺南을 다녀오다. ○ 6월, 體察府 從事官으로서 南漢山城을 순찰하고 오다. ○ 8월, 명을 받들고 西沿의 邊備를 시찰하다. ○ 10월, 사간이 되다. 성균관 사예, 응교를 역임하다.

인조 4 1626 병인 天啓 6 42 7월, 號牌御史로서 嶺南을 다녀오다. ○ 12월, 賜暇讀書하다. 곧 號牌御史로서 湖南을 다녀오다. 호

인조 5 1627 정묘 天啓 7 43 1월, 胡亂이 일어나자 扈駕하여 江都로 들어갔다가 4월에 돌아오다. ○ 5월, 동부승지가 되다. ○ 9월, 충청도 관찰사가 되다.

인조 6 1628 무진 崇禎 1 44 10월, 대사성이 되다.

인조 7 1629 기사 崇禎 2 45 윤4월, 이조 참의가 되다. ○ 가을, 扶餘 白馬江 가에 定居하다.

인조 8 1630 경오 崇禎 3 46 2월, 淸州 牧使가 되다.

인조 9 1631 신미 崇禎 4 47 7월, 부제학이 되다. ○ 10월, 모친의 병환을 이유로 휴가를 받아 扶餘로 돌아와 상소, 사직하다.

인조 10 1632 임신 崇禎 5 48 8월, 우승지로 소명을 받들고 올라와 곧 부제학이 되다. ○ 11월, 휴가를 얻어 扶餘로 돌아와 상소하여 사직하다.

인조 11 1633 계유 崇禎 6 49 1월, 전라도 관찰사가 되다.

인조 12 1634 갑술 崇禎 7 50 봄, 부제학이 되다. 곧 上箚하고 扶餘로 돌아오다.

인조 14 1636 병자 崇禎 9 52 봄, 우승지로서 入對하여 時事를 진달하다. ○ 12월, 호란이 일어나자 南漢山城으로 扈駕하다.

인조 15 1637 정축 崇禎 10 53 3월, 경상도 관찰사가 되다.

인조 16 1638 무인 崇禎 11 54 1월, 모친의 병환으로 사직하고 扶餘로 돌아오다. ○ 3월, 동지중추부사로서 상소하여 御留山城의 수축을 청하다. 곧 부제학으로 올라오다. ○ 5월, 대사헌이 되다. 얼마 후 휴가를 얻어 扶餘로 돌아와 상소, 사직하다. ○ 12월, 우승지가 되다.

인조 17 1639 기묘 崇禎 12 55 2월, 부제학 겸 대사성이 되다. ○ 3월, 이조 참판이 되다. ○ 11월, 형조 판서가 되다. ○ 12월, 모친의 병환으로 扶餘로 돌아오다.

인조 18 1640 경진 崇禎 13 56 2월, 모친상을 당하다.

인조 20 1642 임오 崇禎 15 58 6월, 대사헌이 되다. ○ 12월, 申翊聖, 李明漢 등과 함께 淸 나라로 잡혀가 瀋陽에 구류되다.

인조 21 1643 계미 崇禎 16 59 3월, 還國하여 扶餘로 돌아가다. ○ 11월, 대사헌이 되다. ○ 12월, 右議政이 되다.

인조 22 1644 갑신 崇禎 17 60 2월, 瀋陽으로 사신 갔다가 다시 구류되다. 金尙憲, 崔鳴吉과 만나다.

인조 23 1645 을유 順治 2 61 3월, 세자를 모시고 돌아오다. 영중추부사가 되다.

인조 24 1646 병술 順治 3 62 2월, 姜嬪의 賜死를 반대하다가 削奪官職, 門外黜送당하고, 珍島로 遠竄, 圍籬安置되다.

인조 26 1648 무자 順治 5 64 3월, 三水로 移配되다. ○ 5월, 인조가 승하한 뒤 7월에 牙山으로 量移되다.

효종 1 1650 경인 順治 7 66 1월, 석방되어 돌아오다. ○ 3월, 領議政이 되다. ○ 겨울, 嶺南 儒生의 疏斥으로 解職을 청하다.

효종 2 1651 신묘 順治 8 67 봄, 청 나라 사신의 압력으로 영의정 직을 떠나다.

효종 4 1653 계사 順治 10 69 3월, 영중추부사로서 인재를 천거해 올리다. ○ 7월, 재이로 인하여 召命을 받들어 入對한 뒤 萬言箚를 올리다.

효종 5 1654 갑오 順治 11 70 겨울, 청 나라 사신이 다시 와서 문제 삼자 물러나 忠州 田家로 피하다.

효종 6 1655 을미 順治 12 71 5월, 耆社會에 나아가다.

효종 8 1657 정유 順治 14 73 8월 8일, 明禮洞 집에서 졸하다. 遺疏를 자손이 올리다. ○ 10월, 交河 月籠山 아래에 장사 지내다.

숙종 4 1678 무오 康熙 17 -  4월, 抱川 鑄金山 아래 安陽洞으로 移葬하다.

숙종 7 1681 신유 康熙 20 -  家狀(李敏敍 撰) 및 諡狀(金錫胄 撰)을 완성하다.

숙종 9 1683 계해 康熙 22 -  6월, ‘文貞’으로 시호를 내리다. ○ 9월, 珍島 鳳巖祠宇가 낙성되어 배향하다.

숙종 10 1684 갑자 康熙 23 -  아들 李敏敍와 손자 李師命이 문집을 간행하다. (宋時烈의 序) 이민서

숙종 34 1708 무자 康熙 47 -  神道碑銘(宋時烈 撰), 墓表(李頤命 撰)를 짓다.

 


기사전거 : 年譜, 家狀(李敏敍 撰, 西河集 卷15), 朝鮮王朝實錄 등에 의함

 


 편찬 및 간행

저자의 시문은 아들 李敏敍에 의하여 정리, 편차되었다. 1684년(숙종 10)에 宋時烈이 지은 序文에 의하면, 李敏敍가 大提學으로 있을 때 奏御文字를 모으고 정리하여 편차하였는데 여기에 여러 작품을 합쳐 간행하려 한다고 하였다. 여기서 말한 여러 작품이란 곧 家藏 草稿를 바탕으로 정리한 시문을 뜻하는 것으로, 1681년에 李敏敍가 지은 家狀에서 ‘詩文 약간 권이 家藏되어 있다.’ 한 그 시문을 말한다. 李敏敍는 이렇게 奏御文字와 家藏 草稿를 모아 편차해서 15권의 定稿本을 만들었던 것인데, 「肅宗實錄」에 의하면 李敏敍의 大提學 재임은 1680년(숙종 6) 5월~1683년(숙종 9) 4월 사이였다. 따라서 李敏敍는 대제학 재임 중 1681년에 諡號를 청하기 위하여 家狀을 지은 시기를 전후하여 유고의 간행을 도모하여 위와 같은 과정을 거쳤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간행은 宋時烈의 序文이 쓰여진 1684년에 이루어졌는데, 「白江年譜」에 의하면 이해에 저자의 손자 李師命이 全羅道 觀察使로 나가게 되면서 간행하였다고 하였다. 李師命은 「肅宗實錄」에 의하면, 1682년 8월에 제수되고 1684년 7월에 仍任되어 임기를 채웠다. 따라서 李敏敍가 대제학으로 있고 李師命이 전라도 관찰사로 나간 1682년경에 문집 간행을 위한 본격적인 준비에 들어가 1684년에 15권 7책의 목판본으로 완성된 것이다.《초간본》 현재 규장각(奎6275)과 성균관대학교 중앙도서관(D3B-409)에 소장되어 있고, 장서각(4-6036), 고려대학교 중앙도서관(Dl-A2383), 연세대학교 중앙도서관에는 같은 판본으로 15권 8책본이 소장되어 있다.

한편 본집에는 실리지 않았지만 목판본으로 된 「白江年譜」 1책이 전해지고 있다. 그 凡例를 통해 보면, 家狀과 諡狀을 기본으로 하여 만들었고, 補遺를 붙여 狀碑나 여타 文字 가운데 年譜에 다 실을 수 없는 것이나 遺聞, 瑣錄에 나오는 기록들, 家藏 手筆帖 가운데 子侄을 訓戒한 書와 箴 등을 아울러 기록하였다. 이 연보가 만들어진 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는데, ‘英宗大王 32년’까지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正祖 연간 이후에 만들어진 것으로 짐작된다. 현재 장서각(2-744) 등에 소장되어 있다.

이후 문집의 重刊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본서의 저본은 1684년 목판으로 간행된 초간본으로, 규장각장본이다. 권10의 제17판과 제27판이 잘못 結冊되어 있어 바로잡았다.

 


 

 

 


 

丁丑年 仁祖15年   1637년 --윤4월 듬

역사보기/  

1월 강화도 함락. 인조가 삼전도(三田渡)에서 청태종에 항복함.

2월 후금군 철수.

3월 홍익한, 윤집, 오달제가 청에 잡혀가 심양에서 살해됨.

4월 소현세자(昭顯世子) 등이 심양에 볼모로 잡혀감.

4월 이경여를 경상 감사로 관직을 제수하다.    

戊寅年 仁祖16年

            正月朔日(甲寅月 乙丑日) 대월 평달 양력/ 1638 년2월 14일 房

역사보기/  

1월 5일(기사)경상 감사 이경여가 사직하니 윤허하다  

8월 8일(무술)평안도 철산부에 우박이 내리다

8월 26일(병진) 흉년의 백성 구제에 대해 의논하다

8월 29일(기미) 전라도에 서리가 일찍 내려 곡식이 손상되다

9월 1일(경신)  함경도에 굶주림과 염병으로 사망한 백성이 4천 3백여 명이다 

10월 봉림대군(鳳林大君, 후의 효종)이 청태종의 서정(西征)에 동행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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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종 14권 8년 6월 21 일 (갑오) 1667년

 

임인관 등 명나라 상인 95명이제주도에 표류해 왔다.

 

飄風(표풍)속에서 구사일생 살아난 그들은

또 다른 죽음의 공포가 기다리고 있었다.

 


무사히 고국으로 귀환될 것인지?

아니면 청나라로 압송되어 불귀의 객이 될 것인지?

 


[현종]임금의 결정이 내려지기 까지 100일 간의 처절한 몸부림이 기록으로 남아있다.

 


제주도에서 서울까지 압송되는 동안

당도한 고을의 현관들에게 애걸복걸하였고, 

고국으로  돌려보내주길 바라는 간절한 글을 지나가는 행인에게 건네주기도 하였다.

 

한편 그들을 구하기위해

동몽 교관(童蒙敎官) 이상익(李商翼)이 상소하기를,
 
“오늘날의 국사는 말하자니 통곡스럽습니다. 지금 의논하는 자들은 한갓 이해 관계의 소재만을 알고 구제하는 방도에 대해서는 모르니, 역시 나라를 위해 충성하는 것이 아니며 일을 처리해 나가는 도리도 아닙니다. 지금 만약 신에게 직함 하나를 주어 제주도로 달려가서 압송해 올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해 준다면 어찌 별도로 잘 처리할 방도가 없겠습니까. 신이 그들을 놓쳐버렸다고 청나라에 보고하면 신에게만 죄가 내릴 것이고, 나라에까지 화가 미칠 리는 반드시 없을 것입니다. 전하께서는 어찌하여 미천한 신 하나를 아껴 의리상 차마 하지 못 할 짓을 차마 하여 스스로 천하 후세에 기롱을 받으시려 하십니까. 더구나 신의 아비 이흘(李忔)이 지난 숭정(崇禎) 기사년793) 에 중국에 갔다가 불행히 옥하관(玉河館)에서 병사하였는데, 상구(喪柩)가 돌아올 때 특별히 황조(皇朝)에서 불쌍히 여겨 돌보아 주는 은전을 입었으므로, 그에 보답하고자 하는 마음이 하늘처럼 가이없습니다. 그리고 또한 신종 황제(神宗皇帝)께서 우리 나라를 다시 세워주신 그 은혜는 실로 우리 동방이 영원토록 잊을 수 없는 것입니다.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신의 청을 허락하시어 속히 결단을 내리소서.
 


 

 

 

고을의 현관들은 한 잔 술로 그들을 위로하고 희망적인 말을 전했으나 !

 

길고긴 100일

 

 

 

현종 14권 8년 10월 03 일 (갑술) 002 / 표류해 온 중국인 95명을 북경으로 압송하다. 


조정에서 ‘이미 청나라에 통보하여 다시는 변통할 뜻이 없다.’고 하자, 인관 등이 모두 울부짖으며 죽어도 가지 않으려고 하였다. 이에 그들을 내몰아 압송해 가니, 연도에서 보는 자들이 모두 비분강개하였으며, 시를 지어 자신의 뜻을 말하는 자도 있었는데, 그 시에,

 

 


남쪽 나라 귀한 손 바다 건너 왔는데


붉은 구름 한 떨기 해 곁에 떠있네


천추의 큰 의리 아는 이 없어


석실산 앞에서 통곡하고 돌아왔네


라고 하였다.

 


일행 중 한사람이 분통하여 강물에 뛰어들었다.

 

 

 

 

 

 

고귀한 생명은 명분의 희생양이되었다.

 


뒷날 역사는

 


정조 49권 22년 7월 23 일 (을유) 003

유민(遺民) 임인관(林寅觀) 등을 봄과 가을에 똑같이 현충사(顯忠祠)에서 제사지내라고명하였다.


○若林寅觀等九十五人之事, 固出於迫不得已之意, 而故副學李端相之詩, 故洗馬尹以健之疏, 可以無愧於千秋。 彼九十五人之一時竝戮, 慘傷錯愕, 何嗟及之。 其來泊雖在耽羅, 其回程必由灣上。 而于今一百三十有二年之間, 尙未有宣鬱疏冤之擧, 其爲闕典欠事, 莫有過此。 適當二十一義士竝享之時, 九十五人, 亦一體造牌同祭, 題曰: ‘皇朝遺民林寅觀等九十五人。’ 若是, 則禮似有據, 義亦有辭。 竝以此意, 分付。


임인관 등 95인의 일은 그야말로 그만둘 수 없는 절박한 심정[迫不得已]에서 나온 것으로서 고(故) 부제학 이단상(李端相)의 시나 고 세마(洗馬) 윤이건(尹以健)의 소를 보아도 알 수 있듯이 가히 천추(千秋)에 부끄러움이 없는 일이었다고 하겠다. 그런데 95인이나 되는 그들이 한꺼번에 모두 죽임을 당하다니 처참하고 경악스러워 탄식을 금할 수가 없다. 그들이 와서 정박한 곳은 탐라(眈羅)라 할지라도 돌아갈 때에는 필시 의주(義州)를 거쳤을 것이다. 그럼에도 지금까지 1백 32년이 지나도록 그들의 답답하고 원통한 마음을 풀어주는 일을 행하지 않았으니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은 것으로서 이보다 더 심한 것이 없다. 마침 21의사를 함께 제향(祭享)하는 때를 만났으니 95인에 대해서도 똑같이 위패를 만들어 같이 제사를 올리되 위패에는 ‘황조 유민 임인관 등 95인’이라고 써넣게 하라. 이와 같이 하면 예(禮)에도 의거하는 바가 있게 될 듯하고 의리상으로도 할 말이 있게 될 것이다. 모두 이런 뜻으로 분부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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