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광수와 허영숙(許英肅) 자료실
2010.04.30. 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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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광수와 허영숙(許英肅)
춘원(春園) 이광수(李光洙)가 한국 최초의 여의사(女醫師)가 될 허영숙(許英肅)을 만난 것은 1917년 가을. <무정(無情)>을 끝낸 귀에도 잇단 과로(過勞)로 가슴을 앓게 된 그는 우시고매여의전(午込女醫專) 부속병원을 찾아갔다. 진찰비가 1원(圓) 20전(錢.) 그러나 그의 수중에는 60전뿐이었다. 막연히 머뭇거리는 그에게 한 여학생이 나타났다.
“좋으시다면 제가 빌려드리죠.”
이때 허영숙(許英肅)의 나리 21세, 26세로 당대의 한국문단을 주름잡는 청년대가(靑年大家)인 이광수(李光洙)의 존재에 대해서는 아직 잘 모르고 있었다. 춘원은 영숙(英肅)의 도움과 간호로 몸을 회복하면서 이지적(理智的)이고 냉철한 그녀와 곧 사랑에 빠져들었다.
이듬해 7월 영숙(英肅)이 여의전(女醫專)을 졸업, 귀국한 뒤에도 그들의 뜨거운 연애편지(戀愛便紙)가 현해탄을 넘나들면서 20대의 선각적(先覺的)인 남녀들은 결혼 문제로 고민하기 시작했다,l 허영숙의 부모는 의사에게 시집갈 것을 딸에게 요구했고, 더군다나 춘원은 이미 결혼한 몸으로 아내가 따로 있었던 것이다.
1892년 2월 평안북도(平安北道) 정주군(定州郡) 갈산면(葛山面) 익성동(益城洞) 전주이씨(全州李氏) 집안에 태어난 이광수의 성장기는 누구보다 불우했다. 아버지 이종원(李鍾元)은 행세하던 가문이 완전 몰락하여 가난해진 소작농(小作農)이었고, 어머니는 삼취(三娶)였다. 8, 9세 때부터 산에서 나무를 하고 들에서 김을 맨 그는 노승(老僧)이 거울을 주는 태몽(胎夢)을 꾸었다 해서 아명(兒名)을 보경(寶鏡)이라 했다.
“그것은 내가 열한 살 때 일이다. 불과 열흘 내에 아버지와 어머니가 다 괴질(怪疾)로 돌아가시고 어린 누이동생과 나와 단 둘만 남았을 때다. 부모는 다 돌아가셨지만, 그래도 먹고 살겠다고 내가 물을 길어 오고 반찬을 만들고 밥을 지었다.”
1902년 전국을 휩쓴 호열자로 부모를 한꺼번에 잃은 이광수는 고향을 떠나기로 결심, 여동생을 친척에게 맡기고 동네 사람이 거둬준 3원(圓)을 밑천으로 담배장사를 시작, 1년을 버티다가 동학(東學)에 입도(入道), 박찬병 대령의 서기로 들어가 활동했다. 그러나 관헌(官憲)의 동학(東學) 탄압이 심해지자 상경(上京)을 결심, 진남포(鎭南浦)에서 화륜선(火輪船)을 타고 제물포(濟物浦)를 거쳐 서울로 들어왔다.
‘네 살 때 천자문(千字文) 반을 외고 외조모에게 이야기책을 읽어준’ 조숙한 보경(寶鏡)은 일어(日語) 교사로 채용되었다가 곧 [일진회(一進會)] 유학생으로 뽑혀 도일(渡日)했다. 명치학원(明治學院) 중학부에 다닐 때 홍명희(洪命憙)ㆍ문일평(文一平), 후에 최남선과 사귄 그는 안도산(安島山)의 강연에 감명을 받은 한편, 톨스토이에 경도(傾倒)하고 구니기다(國木田獨步)ㆍ나쓰메(夏日漱石) 등 당대 일본 문인들의 작품을 탐독, 이들의 영향으로 첫 소설 <사랑인가>(1909)를 발표했다.
1910년 3월 조부(祖父)의 별세로 귀국한 이광수는 남강(南岡) 이승훈(李昇薰)이 경영하는 오산학교(五山學校) 선생이 되었고, 경술국치(庚戌國恥)를 당할 무렵에 백혜순(白惠順)과 결혼했다. 청소년다운 개인적 변민과 나라를 잃은 식민지 지식인의 좌절에 짓눌려, [소년(少年)]· <청춘(靑春)] 등에 글을 발표하면서서 상해(上海)와 시베리아로 전전하던 그가 재차 도일(渡日), 학업에 뜻을 둔 것은 1915년 인촌(仁村) 김성수(金性洙)의 후원 때문이었다.
이럴 때 <무정(無情)>으로 필운(筆運)을 높이는 한편, 신여성 허영숙(許英肅)과 사랑을 하게 된 것은 그의 생애에 처음 보는 밝은 행운이었다. 자유연애론자(自由戀愛論者)인 그는 한동안의 번민 끝에 마침내 백혜순과 합의이혼하고 1918년 10월 허영숙(許英肅)과 북경(北京)으로 유명한 ‘사랑의 도피행(逃避行)’을 떠났다.
셋방을 얻어 영숙이 병원 내과의사로 취직하며 보금자리를 편 춘원은, 그러나 한 달도 못 돼 1치대전의 종전(終戰)과 파리강화회담 소식에 접하고 아내를 북경에 남겨둔 채 급거 귀국, 현상윤(玄相允)ㆍ최린(崔麟)을 설득, 독립운동을 가서(擧事)토록 한 후 일본으로 건너가 최팔용(崔八鏞)ㆍ백관수(白寬洙)ㆍ김도연(金度演) 등과 [조선독립단(朝鮮獨立團)]을 조직, 이듬해 2월 <조선독립선언서(朝鮮獨立宣言書)>를 기초(起草), 선언대회를 열었으니, 이것이 육당이 기초한 ‘삼일선언문(三一宣言文)’보다 20일 빨리 동경유학생들에 의해 발표된 유명한 <2ㆍ8독립선언>이었다.
동료들의 권고로 동경에서 상해로 탈출한 춘원은 상해임정(上海臨政)에 투신, 기관지 [독립신문(獨立新聞)]의 사장 겸 편집국장, 임정사료편찬위(臨政史料編纂委)의 주임으로 활약하며 [흥사단(興士團)]에도 가입했다. 2년 동안의 정치활동에 피로를 느낄 즈음 허영숙이 그를 찾아왔고, 그녀가 귀국한 뒤를 따라 1921년 4월에 입국, 선천에서 일경(日警)에 체포, 성우로 압송되었으나, 곧 불기소처분으로 풀려나왔다.
이 석방 과정에 의혹이 있다 해서 변절자(變節者)란 비난을 피할 수 없게 된 춘원은, 5월 허영숙과 정식 결혼, 당주동 자택에서 두문불출(杜門不出)했다. 그에게 더 괴로웠던 것은 자신이 유일한 작가로 자부하던 문단(文壇)에 어느 사이 새로운 작가들이 수없이 나타나 그의 계몽주의문학(啓蒙主義文學)에 도전하고 나선 것이었다.
- 김병익(金炳翼) : <한국문단사(韓國文壇史)>(1974) -
[출처] 이광수와 허영숙(許英肅) |작성자 재봉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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