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행한 계승



                                                                                                  문학사상, 1976. 7

  

한여름 대낮 거리에 나를 배반하여 사람 하나 없다.

   패배(敗北)에 이은 패배(敗北)의 이행(履行), 그 고통(苦痛)은 절대(絶大)한 것일 수밖에 없다.

   나는 그것을 잘 알고 있다ㅡ자살(自殺)마저 허용되지 않고 있다는 것을.

   그래 그렇기에ㅡ

   나는 곧 다시 즐거운 산(山) 즐거운 바다를 생각하지 아니하면 아니 된다. ㅡ달뜬 친절한 말씨와 눈길ㅡ그리고 나는 슬퍼하기보다는 우선 괴로와하기부터 실천하지 아니하면 아니된다.

 

   한 여름 대낮 거리 사람들 모두 날 배반하여 허허(虛虛)롭고야

 

1

 

   상(箱)은 참으로 후회(後悔)하지 아니할까? 그렇진 않겠지. 그건 참을 수 없는 냉정(冷情)함보다도 더욱 냉정(冷情)하여 참을 수 없는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기다리고 있다. 후회(後悔)를ㅡ상(箱)에게서 후회(後悔)하지 아니하는 시간(時間)은 더욱 위태하다는 그런 말일까. 그는 절실히 후회(後悔)를 고대(苦待)하고 있다.

   그런 꼴이었다.

   혼자서 못된 짓 하고 싶다. 난 이제 끝내 살아나지 못할 것 같다. 필경 살아나지 못할 테지.

   허나 언제나 상(箱)과 꼬옥 같은 모양을 한, 바로 상(箱) 자신이 아니면 아니된다. 그림자보다도 불투명(不透明)한 한 사나이가 그의 앞에 막아서면서 어정버정하는 것이었다.

   그는 그 빛바랜 세피어색 그림자 앞에선 고개를 들지 못한다.

   어차피 살아날 수 없는 것이라면, 혼자서 한껏 잔인(殘忍)한 짓을 해보고 싶구나.

   그래 상대방을 죽도록 기쁘게 해주고 싶다. 그런 상대는 여자ㅡ역시 여자라야 한다. 그래 여자라야만 할지도 모르지.

   그래 그는 후회(後悔)하지 아니했는가. 거듭될수록 오히려 후회(後悔)는 심각(深刻)해지지 아니했던가. 그럴 때 그의 지쳐버린 머리로 어떤 것을 생각했던가. 이 경우의 여자ㅡ그의 이른바 여자란 무엇인가.

   상(箱)은 사실은 이토록 후회(後悔)하고 있단 말이다. 그의 머리는ㅡ이성(理性)은, 참으로 그가 고대(苦待)하고 있는 것은 물론 후회(後悔) 같은 씁쓰레한 서툰 요리(料理)는 아니다. 후회(後悔)하지 아니하고 되는 일.

   그래 이번만은 후회(後悔)하지 않고 되는 첩경을 찾아내리라.

   아니 이거 무슨 물건이 바로 이 내 몸에 달라붙어서 떨어지지 않기 때문이겠지. 요놈을 떼쳐버려야지ㅡ

   그러나 그건 대체 무슨 놈일까.

   그는 이성(理性)은 멀쩡했었다. 그것이 보였을 만큼ㅡ그러나 그가 피로(疲勞)를 회복하기가 무섭게 이내 그의 그러한 이성(理性)은 다시 무디어지고 마는 것이었다.

 

   그래 표본(標本)처럼 혼자 의자(倚子)에 단좌(端坐)하여 창백(蒼白)한 얼굴이 후회(後悔)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이제 금시 도어가 열리면 사건(事件)이ㅡ사건(事件)이라고 하기엔 너무나도 초라한 장난이, 혹은 친구의 호주머니에 혹은 미지(未知)의 남의 고십(gossip)에 숨겨져 들어오지나 아니할까.

   상(箱)은 보기에도 딱하게 벌벌 떨고 있었다.

   아아, 후회(後悔)하긴 싫다, 아무것도 갖다주지 않는 게 좋겠다.

   그렇지 그래, 오전중(午前中)에 잘라 파는 꽃을 어린아이가 사러 온다. 그 뒤로는 반드시 그 꽃보다도 어린아이보다도 신선(新鮮)한 유혹(誘惑)이 전연 유혹(誘惑)이라는 그 면모(面貌)를 바꿔가지고 제법 신나게 들어오는 것이었다.

 

2

 

   목부용(木芙蓉)은 인사하듯 나가버렸다. 이젠 그 이상 그는 참을 수가 없다. 그도 그 뒤를 쫓아서 나간다.

   읽다 만 교과서(敎科書)를 접기보다도 더욱 쉽게 육친(肉親) 위에 덮쳐오는 온갖 치욕(恥辱)마저 그의 앞서의 후회(後悔)와 함께 치워버리곤, 그는 행복한 곤충(昆蟲)처럼 뛰어가는 것이다.

   범죄(犯罪) 냄새가 나는 그러한 신식(新式) 좌석(


座席)은 없을 것인가. 허나 그는 다시 공기총(空氣銃) 가진 사람보다도 쉽게 그 비슷한 것을 발견해낸다. 그는 그만 미소(微笑)하면서 인사를 하고 마는 것이다.

   오늘 밤은 둘이 함께 해야 하나 보다. 그 언짢은 그림자의 사나이와 상(箱)은 한 의자(倚子) 위에 걸터앉고 이젠 요리(料理)도 아주 한 사람 몫이다.

   누이처럼 생각한 적도 있답니다.





   케티 폰 나기같이 아름다운 오뎅집 딸한테 그는 인제 그야말로 전혀 의미없는 말을 한마디 해 보았다. 누굴 말입니까?(정말 별란 소리 다한다. 누이처럼 생각했던 사람이란 대체 누구를 말하는 건가)

   난 야단친 적도 있답니다, 좀 더 견문(見聞)을 넓히라고요. 허어,

   한데 그 여자와 악마(惡魔)가 걸으니까 거 참 지독한 절름발이였지요. 하지만 어느 쪽이 길고 어느 쪽이 짧은지는 전혀 알 수 없었지요.

   나기양(孃)은 웃었다. 그건 상(箱)의 수다에 언제나 번쩍이는, 더럽게 기독교(基督敎) 냄새만 나는 사고방식(思考方式)을 슬쩍 조소(嘲笑)한 것일까. 어떻든 그는 벼란간 아연(啞然)해지고 말았다.

   주기(酒氣)로 뻘개진 얼굴의 내면(內面)에 발그레 홍조(紅潮)가 도는 걸 느꼈다. 평소 그가 업신여기고 있던 것들이 실은 그로서 업신여겨선 안될 것들이라는 사실이 내심(內心) 몹시 창피했기 때문이다.

   뭐 이런 건 이 언짢은 그림자의 사나이가 집게손가락으로 장난스런 주름살을 만들면서 나를 쿡쿡 찔러대기 때문이다.

   (대단할 건 없다. 따돌려버려라) 해서ㅡ난 이후로도 그를 누인 줄 알고 위로해 주곤 할 작정입니다.

   나기양(孃)은 비로소 알아차린 것 같다. 허나 나기양(孃)을 깨우치게 한 그 한마디는 또 얼마나 세상에 어리석기 그지없는 수작이었겠는가.

   이상 야릇한 밤이었다. 허나 또 결정적(決定的)인 밤이었다. 집 밖에서 저회(低徊)하며 가지 않는 나그네가 그제서야 겨우 집안에다 짐을 부리운 것 같은‥‥‥

   농후(濃厚)한 지방색(脂肪色) 사색(思索)에 결코 접근(接近)시켜선 안된다. 하나의 백금선(白金線)의 정체(正體)를 마침내 백일하(白日下)에 폭로하고 만 조롱(嘲弄)받아야 할 밤이 아니면 아니된다.

   단 한 줄기의 백금선(白金線)ㅡ(나기양[孃], 당신만 해도 모노그램과 같은 백금선[白金線]의 바둑무늬란 말이오)

   고단한 인생(人生)에 이건 또 부질없는 농담이다. 주기(酒氣)가 그의 혈액(血液) 속에 도도(滔滔)히 밀려 흐르고 있는 불행(不幸)한 조상(祖上)의 체취(體臭)를 더욱 더 부채질하고 있다. 허나 이 경우만은 그는 제멋대로 여전히 불길(不吉)한 호흡(呼吸)을 시작할 수는 없는 것 같았다.

   피해자(被害者)를 낼만한 농담(弄談)은 금해야 할 것이다. 그의 뇌리(腦裡)에 첫째로 떠오는 금제(禁制)의 소리는 몽롱하나마 그것은 피해자(被害者)에의 경계(警戒)인 것 같았다. 그렇다, 상(箱)의 앞에 피해자(殺害者)는 육안(肉眼)이라는 조건(條件)을 가지고 상(箱)을 위협(威脅)하는 포우즈를 계속할 것이다. 그것은 괴롭다.

   차라리 이렇게 하자. 저 언짢은 그림자의 사나이가 나중에 무엇이라고 나무라든 아랑곳할 것이 뭐냐.

   옳지, 하고 그는 후회(後悔)보다도 더욱 냉정(冷情)한 푼돈을 집어던지고는 오뎅집 콘크리이트 바닥을 차고 일어섰다.

   그리곤 가을바람처럼 비틀거리면서 일로(一路)ㅡ

   차압(差押)이다. 특히 네놈이 이번엔 지명(指名) 당하고 있단 말이다. 그런 기세로 상(箱)의 속도(速度)에는 시뻘거니 발홍(發紅)한 노(怒)여움이 충만해 있었다.

 

3

 

   불길(不吉)한 예감(豫感)에는 그는 무섭도록 민감(敏感)했다. 불길(不吉)한 사건(事件) 앞에선 반드시 무슨 일에나 불길(不吉)한 조짐이 그를 괴롭히는 것이었다.

   그는 이런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 항상 전전긍긍(戰戰兢兢)하여 겁을 먹고 있지 아니하면 아니되었다.

   머리 정수리를 분쇄(粉碎) 당한 부동명왕(不動明王) 같이 그의 예감(敏感)은 이미 전기의자(電氣倚子) 위에 단좌(端坐)하고 있었다. 푸른 눈은 허망한 전방(前方)에 무형(無形)의 일점(一點)을 택하여 불꽃 튀듯 응시(凝視)하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ㅡ그렇다, 딱잘라 말하겠다. 그렇다, 하지만 그러면 나쁠까, 죄악(罪惡)이 될까, 부도덕(不道德)이 될까.

   그러는 소운(素雲)의 한 마디에ㅡ상(箱)은 가슴팍 전면(前面)에 한 잎발[염(廉)]의 미끄러져 내리는 소리를 들었다. 이것이 불길(不吉)이었던가ㅡ허나 이젠 이것을 똑바로 볼 수는 없다. 발너머로 보이는 이 불길(不吉)의 정체(正體)라는 건 그다지 대단한 것도 아닌 듯했다.

   그렇다면 무엇일까ㅡ한 걸음 앞에 있는 그는 아직껏 겁을 먹고 있다. 아까보다 더욱 한층 파랗게 질려 있다. 난 우정(友情)인지 뭔지를 통 믿지 않는다는 것쯤 알아채고 있을 게다. 이런 내 말의 근거(根據)일랑 그래 가령 우정(友情)에서라도 해두기로 하자. 그러고 보면 너는 살았고나?ㅡ이봐ㅡ

   가볍게 주먹으로 소운(素雲)의 허리께를 쿡 찌르면서, 상(箱)은 울며 웃는 상판이었다. 이런 때 그는 가장 많이 가면(假面)을 사용하는 것인데, 그 가면(假面)이야말로 상(箱) 자신의 본 얼굴에 제일 가까운 것인 줄을, 그 자신의 본얼굴을 한번도 보지 못한 사람으로선 결코 알아챌 수는 없다. 모르면 몰라도 상(箱) 자신조차ㅡ가 그 정교(精巧)함에는 미처 주의(注意)하지 못한다.

   이젠 더 내 평생(平生)엔 사랑을 한다든가 하는 기회(機會)는 없을 것이라고 단정하고 있었단다. 설령 어느 경우 이쪽에서 연연한 연정(戀情)을 느낀다손 치더라도, 결국은 바닷가 조개비의 짝사랑이 되고 말 것이라고 굳게 체념하고 있었단다. 불긋불긋 녹슨 들판만 아득한 천리(千里)란다.

   사귀면 손해(損害) 본다. 허나 되려 반갑다. 두셋 친구 이외에 내 자살(自殺)을 만류해줄 이유(理由)의 근원이 있을 턱이 없다.

   자넨 혹은, 하필이면 네가 그러느냐 그럴지도 모른다. 허나 난 정당방위(正當防衛) 그것마저 준비하고 있었단다ㅡ아니지, 어느 경우이건 놀림받기는 싫단 말이야. 그래서 그 손쉬운, 즉 조그마한 희생(犧牲)을 택했던 게야. 이러한 점에서 내가 하수인(下手人)이라는 책임(責任)을 지게 될지도 모르지만, 그 점에서만 말하자면 난 굳이 그 책임(責任)을 회피하려곤 하지 않을 작정이다.

아니, 자넨 아주 무관심(無關心)한 것 같군. 하나의 조소(嘲笑) 거리를 얻을 것 같을지도 모르지. 허나,

 


   이런 날에도 어찧다 떠오르는 추억의 조각 한강(漢江)물 반짝이는 여름햇살 보누나

 

   여름햇살이라고 한 것은 안 좋다. 더더구나 안 좋다.

   (한여름 햇살이 퍼붓는 거리에 사람들은 나를 배반한 것이다. 한 사람도 없다. 허나 나 또한 즐거운 산[山] 희롱거리는 해변[海邊]을 생각할 것을 잊지는 아니한다. 지껄대는 친절한 말과 말. 정겨운 눈매ㅡ나는 거리를 쏘다니지 아니하면 아니된다. 한여름 살갗을 어여 흐르는 땀에 헐떡이면서 사람 하나 없는 거리를 쏘다니지 아니하면 아니된다.)

 

4

 

   상(箱)은 그러나 조종을 받고 있었다. 그는 저 십년(十年)이 하루 같은 몸짓을 그만두지는 못한다. 산다는 것은 어쩌면 이다지도 재미 없는 몸짓의 연속(連續)인 것일까. 허나 그만두든 그만두지 않든 인형(人形) 자신의 의사(意思)에 의하는 것은 아니다.

   칠월(七月) 보름 밤 한강(漢江)에 사람 많이 나온 것을 말하면서 주가(酒家)의 일부분(一部分)(그는 쓰러지면 점원[店員]아이의 물세례[洗禮]를 받을 것만 같았다‥‥‥)

   가랑비가 내리다가 이윽고 제법 쏟아져 내렸다. 사람들은 그래도 흩어지려곤 하지 않았다. 그래 속세(俗世)는 더욱 더 공기(空氣)를 탁(濁)하게 해갔다.

   타자꾸나

   타자꾸나

   꼭둑각씨 인형(人形)을 태운 보우트는 그 인형(人形)을 다시 조종하면서, 또 한 사람에 의해 조종받고 있었다. 상(箱)은 어떻게 하면 좋단 말인가. 이 무슨 궁지(窮地). 그는 양말을 벗어 던지고 여차할 때 헤엄칠 준비를 했다. 허나 그는 헤엄쳤던가. 알고보면 그는 헤엄칠 줄 모르는 것이다.

   무슨 생각에서일까. 배는 반드시 뒤집히는 거라고만 단정하고 있는 근거는 어디에 있단 말인가.

   그는 전날밤의 그의 실언(失言)?을 상기(想起)해 보았다. 혹은 전복(轉覆)을 불러올 것 같은ㅡ심장(心臟)의 어떤 어두운 공기(空氣)를 자아낼 것 같은ㅡ

   무관심(無關心)하다니, 무슨 소리냐?

   이 한 마디가 과연 어떻게 받아졌을 것인가. 이제와서 생각해 보면, 그것은 분명 의외(意外)의 폭언(暴言)이지. 그렇지, 폭언(暴言)이지.

   상(箱)은 그 한 마디만을 뉘우쳤다. 묘한 데까지 손을 내밀고 싶어하는 놈이라는 소리를 듣고 싶지 않기 때문에ㅡ

   손을 내밀어? 어느 쪽이 손을 내밀었단 말이지? 아니면 손은 양쪽에서 함께 내밀었던 것일까. 우습기 짝이 없다. 사람을 우습게 보는군.

   상(箱)은 소리를 내어(그때 그의 앞에 비굴[卑屈]한 몸짓으로 막아 서는 자가 있었기에)

   (비켯ㅡ비키라니깐)

   언짢은 그림자의 사나이는 경악(驚愕)했다. 처음으로, 정녕 처음으로 그의 성난 꼴이 무서웠던 것이다. 위험햇, 뭘하고 있나?

   바보 같군ㅡ물이야, 한강(漢江)이란 말야ㅡ보우트는 크고 그리고 강(江)물은 작다. 가랑비는 친절하지 뭐냐. 예서 난 혼자 낮잠을 자고 싶다.

   난 젊어질 작정이야ㅡ(그리고 상[箱]은 한꺼번에 10년[年]이나 늙을 작정이야)

   그러면서 소운(素雲)은 무엇인지 상(箱)에게 몰래 명령(命令)했다. 알고 있어. 난 그렇게 할게. 산다, 살지 못한다 그런 문제가 아니야. 자존심(自尊心), 이건 또 어쩌면 이렇게도 낡은 장난감 훈장(勳章)일까. 결코 그런 건 아니다. 그런 식으론 진짜 어쩌지는 못할걸.

   그럼 왜? 왜 잠자코 보우트를 둘이서 탔느냐 말이다. 반대(反對)ㅡ소운(素雲)이 물에 빠지면 그는 배 안에 점잖이 있어야 하는 것쯤은 알고 있었을 게다. 알고 있었지. 허나 이건 「하는 후회(後悔)」가 아닌 「있는 후회(後悔)」가 시킨 일일 게다.

   기슭 위에 있는 것은 모두가 따스하다. 그리고 배 안에 있는 그는 차겁다. 그리고 그가 기슭에 있을 땐, 후회(後悔) 때문에 모두가 반대(反對)가 아니면 아니되었다.

   피(避)하지 아니하면 아니되는 것, 피(避)해서 안전(安全)한 것을 어째서 피(避)하지 아니하였느냐 말이다. 한 줄기이 백금선(白金線)을 백일(白日)에 드러냈던 때의 후회(後悔)ㅡ아니다ㅡ

   그래 그것은 나중이냐, 아니면 정녕 먼저냐? 예감(豫感)이라니 정말이냐.

   허나 분명 얻은 것은 아니다. 무엇인가 송두리째 잃은 것만은 사실이다. 속일 순 없다. 이건 또 치명적(致命的)인 결석(缺席)이었다.

   무엇일까. 누이인 줄 알고 있던 두 가지의 성격(性格)을 두 가지의 방법(方法)으로 생각했던 그것일까. 아니면, 한꺼번에 십년후(十年後)로 후퇴(後退)해버린 자신(自身)의 위치(位置)일까. 아니면, 십년(十年)이란 먼 곳에 미소(微笑)짓는 해변(海邊)의 소운(素雲)ㅡ그 친구일까.

   아니면, 그것들과는 전혀 다른 그 무엇일까.

 

   훗훗한 풀냄새가 코를 쿠욱 찔러 왔다. 피로(疲勞)한 두 사람은 어렴풋한 어둠 속에서 께느른하게 잠자고 있다. 모든 직업(職業), 모든 실망(失望), 모든 무료(無聊)를 분담(分擔)하면서 시방 두 사람이 내려다보고 있는 주택군(住宅群)ㅡ그 속에서 사람들은 역시 서로 사랑하고 있는 것일까. 역시 걱정을 하고들 있을테지. 보게, 이렇게. 이 레일은 경의선(京義線)이었나. 예전의 그, 지금은 근교일주(近郊一周), 동경(東京)의 성선(省線) 같은 거지. 한번 타보지 않겠나, 천하태평(天下泰平)한 기차(汽車)라구. 동녘이 밝아왔구먼.

   자아, 가자구. 그러지 말고 가자구. 고집부리지 말고. 멋꼬라지 없게, 새삼스레, 자아, 자아.

   그렇지. 상(箱)은 결국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가만히 있는다는 것은ㅡ전연 손을 내밀지 않는다는 것. 그래, 그렇게 하려고 한다면, 대체 그는 어떻게 하고 있으면 좋단 말인가. 결국 가만히 있는 것. 그런 일은 있을 수 없거든.

   가만히 있기는커녕, 정녕 가만히 있진 못하겠다. 이건 또 불가사의(不可思議)한 처지(處地)인 것 같았다. 왜 가만히 있지 못한단 말인가?

   소운(素雲)은 집에 가겠노라 했던 것이다. 집에 가서 혼자 조용한 시간을 가지고 싶다는 것이었다. 슬픈 심정(心情)을 주체스러워 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괴로워해 하겠노라고ㅡ

   괴로워해?

   그 괴로움이야말로 사람들이 원해도 쉬이 얻을 수 없는, 말하자면 괴로움 같은 그런 것은 절대로 아닌, 어떤 그 무엇이지 않을까.

   조용한 시간(時間)만큼 적어도 두 사람에게 있어서 싫은 것은 없을 터이다. 실상 상(箱)은 그것이 무엇보다도 무서운 것이었다.

   그러나 완전히 외톨로 남게 되어ㅡ상(箱)은 소운(素雲)의 팔을 잡아 끌면서, 절일 만큼의 서러움을 몸에 느끼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었다.

   무슨 수를 쓰든 이 자리를 면하지 아니하면 아니된다. 아니다, 소운(素雲)으로 하여금 이 「눈물의 장(場)」에서 달아나게 해선 안된단 말이다.

   억지로, 오기(傲氣)로도ㅡ(혹은 있고 싶지는 않단 말이다. 혼자 있는 건 무서워)

   혼자서? 혼자서 있는 것일까 그것이? 그리고 그런 내용(內容)을 가지고서의 혼자서 있는 것, 그것이 허용될 수 있는 일일까.

   숫자(數字)는 3이다. 이(二)와 일(一)이라는 짝맞춤 밖에는 전혀 방법(方法)은 없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미 결정(決定)된 것이나 다름 없지 않은가. 그런데도 무엇을 그렇게 우물쭈물하고 있는 것이냐? 얌전하게 단념(斷念)해야지ㅡ

   그러고 싶어. 사실은 그래도 좋다곤 생각해. 허나 그저 가만히 있지는 못하겠다 그런 소리일 따름이야. 이걸 달래주는 법은 없을까.

 

   상(箱)은 체념(諦念)한 듯 또다시 레일 위에 걸터앉았다. 풀냄새가 한층 드세게 코로 왔다. 자연(自然)은 결코 게으르진 않은 것이다.

   동녘은 더욱 밝아 왔다. 그것은 체념(諦念)하는 표정(表情)과도 같은 갸날픈 탄식(嘆息)이었다. 벌써 아침이 오지 않는가.

   절망(絶望)의 새끼줄을 붙잡고ㅡ이 무슨 멋꼬라지 없는 하룻밤이었던가. 이미 분리(分離)된 것을 끌어당긴다는 것은 적어도 비굴(卑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밤이 밝아온다. 절망(絶望)은 절망(絶望)인채, 밤이 사라져 없어지듯 놓아주지 아니하면 아니될 성질(性質)의 것이다. 날뛰는 망념(妄念) 위에, 광기(狂氣) 어린 야유(揶揄) 위에, 그야말로 희디흰 새벽빛 베일이 덮쳐오는 것이었다.

   레일은 더욱 더 차겁다. 매질하듯 상(箱)의 저주(咀呪) 받은 육체(肉體)를 가로질렀다. 그리고 뺨엔 두 줄기 차거운 것이 있었다.

   레일 앞에는 무엇이 있었는가. 거기엔 오로지 그의 재능(才能)을 짓밟는 후회(後悔)가 있을 따름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기 아니면 그는 살아날 수 없다고ㅡ아니다, 그릇된 생각이다ㅡ내뿜는 분류(奔流)를 막아낼 수는 없다고 생각했던 것일까.

   바보 같은ㅡ상(箱)은 돌아다보듯 하면서, 저만치 선착(先着)해 있는 자신의 무모(無謀)하고 치둔(癡鈍)함을 비웃으려 했던 것이다. 허나 돌연(突然)ㅡ

   가자, 상(箱)! 가자꾸나ㅡ좋은 앨[창녀(娼女)] 사자꾸나. 아니야, 난 이제 단념(斷念)했어. 벌써 날도 샜어. 저것봐, 제법 붉어왔는걸.

   일언(一言) 중천금(重千金)! 뿔뿔이 갈라진 역류(逆流)가 예기(豫期)치 않은 방향(方向)으로ㅡ그리하여 그들은 숙소(宿所)로부터 더욱 더 멀어져 갈 따름이었다.

 

6

 

   밤이 사라졌다. 벗어던져진 전등(電燈)에는 아련한 애수(哀愁)와 외잡한 수다가 이국인(異國人)처럼 오도카니 버림받고 있었다.

   은화(銀貨)에 의한 정조(貞操)의 새 색칠ㅡ상(箱)의 생명(生命)은 이런 섬에 당도하여 비로소 찬란한 광망(光芒)을 발(發)하는 것 같았다.

   모든 것은 현관(玄關) 신발장 께에 구두와 함께 벗어던져져 있다. 이제 이 지폐(紙幣) 냄새 물씬거리는 실내(室內)엔 고독(孤獨)이란 찾아볼 수가 없다.

   상(箱)은 녹음(錄音)된 완구(玩具)처럼 토오키 브로마이드ㅡ신나게 지껄였다. 그의 얼굴은 웃음으로 넘쳐 있었다.

   ㅡ은산(銀仙)아! 전등(電燈)이 꺼졌어, 졸립질 않니? (등불이 꺼지면 잠이 깬다는 걸 아는 사람들은 여기 없다.)

   ㅡ아아뇨.

   ㅡ난 말야, 애인(愛人)을 친구한테 뺐겼단 말야. 분명하진 않지만, 아무래도 그런 것 같아. 아냐, 난 그 애가 내 애인(愛人)인지 아닌지 그런 거 쇠통 알지 못했어. 허지만 내 친구가ㅡ어느 틈에 내 친구가 그 앨 좋아하게 됐단 말야. 그랬더니 그때 그 애는 내 애인(愛人)이란 사실을 깨닫게 됐단 말야. 그러고 보면 뺏기고 만 셈이지 뭐냐. 그래서 난 지각(遲刻)했다고나 할까 그렇게 되고 만 꼴인데, 이제 새삼 그 앤 내 애인(愛人)이란 주장은 못하게 됐지. 그렇지, 주장(主張)할 수가 없지. 그래서 난 친구한테 그런 말을 들었을 때, 아 그런가, 그건 안되지. 아니, 괜찮어. 아니, 역시 안되겠어. 그렇게 어린애를, 그건 죄악이야. 허지만 잘 됐어. 그렇다면 그 애도 살게 되는 셈이니, 자네 같은 거시기 다소 나이 많은 신뢰(信賴)할 만한 사람에게 자기 일생(一生)을 맡길 수 있다는 건, 그건 그 애로선 행복(幸福)된 일임에 틀림없어. 그런 소릴 하고 얼버무려버렸던 것인데‥‥‥

   ㅡ예쁜 여잔가?

   ㅡ글쎄 그렇군. 예쁘달 수도 있겠지만, 아뭏든 아주 두드러지게 특색(特色)이 있는 여자(女子)인데, 얼굴은 창백(蒼白)하고 작달막한 몸집에 근시(近視)이고 머리털이 빨갛고 절대로 웃지 않는다구. 그래 웃지 않기는커녕 입을 열지 않는다구. 그런 아주 색다른, 어쩌면 내일 당장 자살(自殺)해버리지나 않을까 싶은 염세형(壓世型)인데,

   그러면서도 개성(個性)이 강(强)해서 남의 말은 쉬이 들어먹지 않거든.

   그렇지, 입술이 퍼렇지. 난 또 그 애 눈알의 검은 자위를 본 적이 없어.

   즉 사람을 똑바로는 절대로 보지 않는다 그 말야.

   ㅡ근사한 여학생(女學生)?

   ㅡ여자대학생(女子大學生) 그런 종류 같은데‥‥‥

   은산(銀仙)은 곧잘 면도(面刀)칼을 갖다대고 밋밋한 상(箱)의 뺨을 두 손으로 만지곤 했다. 털밑 피부(皮膚) 언저리에 찌르듯 한 아픔을 느꼈다.

   ㅡ그런 이상 야릇한 여자(女子) 좋아할 것 뭐예요. 내가 사랑해 드릴께요.

   그러고보니 은산(銀仙)은 미인(美人)이었다. 정사(情死)하려다 남자(男子)만 죽였는지, 목 언저리에 끔찍스런 칼날 자국이 있던 것으로 기억(記憶)한다.

   ㅡ그래서 난 홧김에 여기로 끌고 들어 왔단 말이야. 내일 아침, 그러니까 오늘 아침이지, 랑데부 한다는 거야. 그렇지. 저 꼴 좀 보라구. 분한 김에 그런긴 했지만, 좀 안됐군. (말 말라구. 저 사람이 내 애인[愛人]을 뺏은 사람이거든.)

   ㅡ촌뜨기 같은 소리ㅡ깔보지 말라구요.

   (어째서 너 보곤 내 심정[心情]을 이렇게 똑똑이 말할 수 있을까. 그리고 넌 또 영리[伶悧]해. 이 심정[心情]을 참 잘도 알어.)

   ㅡ나이는 열 아홉, 처녀(處女)란 말씀이야. 이래도 마음이 동하지 않는 작자는, 그렇지 거세(去勢)당한 놈이랄 수밖에.

   ㅡ하지만 뺏길 때꺼정 자기 애인인지 아닌지조차 알지 못했다니, 댁도 어지간히 칠칠치가 못했나 보군요.

   ㅡ그게 글쎄 알고 보니 짝사랑이더라 이거야.

   ㅡ아이고, 사람 작작 웃겨요. (요점[要點]은 그곳에 있는 모든 것은 아무일도 없었던 양 지극히 무사태평[無事泰平]하다 그 말씀이야.)

   ㅡ그래 난 실은 아무 말도 안했어. 물론 둘이 다 그런 걸 알아챌 까닭은 애당초 없었지.

   계산(計算)과 같은 햇살이 유리장지 문을 가로질렀다. 그리하여 일회분(一回分) 표(票)를 가진 사나이가 하나 정조(貞操)의 건널목을 바람을 헤치듯 가로질러 간다. 땀이 납덩이처럼 냉랭한 도면(圖面) 위에 침전(沈澱)했다.

 

                                                                       (柳呈 譯 : 유정 번역)


                   출처:  http://cafe.naver.com/leesangkhk/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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