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mme vous êtes loin, paradis parfumé, 당신과 함께 멀어진, 향기로운 낙원 Où sous un clair azur tout n’est qu’amour et joie, 거기엔 밝은 하늘빛 아래 어디든 모두가 사랑과 기쁨 Où tout ce que l’on aime est digne d’être aimé, 모든 사랑 중에 그 하나 마땅히 동쪽을 사랑하는 이유이다. Où dans la volupté pure le cœur se noie ! 왠지 순수한 즐거움에 심장이 가라앉는다! Comme vous êtes loin, paradis parfumé, 향기로운 낙원, 당신과 함께 멀어진
멀어진 향기로운 낙원은 동쪽 끝 너머 거기가 어디일까?
Mais le vert paradis des amours enfantines, 하지만 설익은 천진난만한 어린 요정들의 낙원
Les courses, les chansons, les baisers, les bouquets, 달리기, 노래, 입맞춤, 꽃다발
Les violons vibrant derrière les collines, 바이올린 울려 퍼지는 언덕 뒤로
Avec les brocs de vin, le soir, dans les bosquets. 주둥이 긴 포도주 병을 가지고. 밤, 작은 숲으로
Mais le vert paradis des amours enfantines, 하지만 설익은 천진난만한 어린 요정들의 낙원
낙원의 꿈마저 잊고 살아야하는 언덕 너머의 가난한 주정뱅이 마을
그들의 하루 하루 낙원은 술과 하룻밤 작은 숲의 relax뿐
L’innocent paradis, plein de plaisirs furtifs, 얼간이 낙원, 비밀 가득 찬 낙원
Est-il déjà plus loin que l’Inde et que la Chine ? 동쪽은 자꾸 멀어져 인도와 중국은 얼마나 멀어지는가?
Peut-on le rappeler avec des cris plaintifs, 탄식하는 외침이 되풀이 될 수 있다.
Et l’animer encor d’une voix argentine, 그리고 아르헨티나의 목소리로 또다시 되살아나게 된다.
L’innocent paradis, plein de plaisirs furtifs, 비밀 가득 찬 낙원
얼간이 낙원,
- 1861년 -
영국해협을 빠져나와 인도양을 거쳐 태평양을 방랑하는 얼간이들......
1860년 영국과 연합한 프랑스 얼간이 해군은 중국의 수도를 점령하고 베이징 조약을 체결했다. 그리고 자신들의 낙원으로 삼았다.
그 이전 스페인은 16세기 말부터 식민지 건설을 본격화하여 그야말로 낙원이었던 남미 대륙을 침공하여 자신들의 얼간이 낙원을 만들었다.
정쟁(政爭)과 내란, 살육. 수탈로 혁명을 되풀이되었다.
아르헨티나는 1816년 독립하였으나 혼란의 여파로 1864 파라과이와의 전쟁 때문에 경제적으로 궁지에 몰려 아비규환의 지옥을 만들고 말았다.
저주받은 시인 보들레르
프랑스 함대가 인도와 중국을 수탈하는 얼간이 짖을 지켜보았다.
얼간이들이 낙원의 꿈을 버리지 않는 한
인도와 중국 또한 아르헨티나 꼴이 될 것이라고 질타하고 있는 것이다.
동쪽은 자꾸 멀어져가고 있다.
이제 지구상 남은 낙원은 동쪽 끝 de Corée.
조선이 남아 있을 뿐이다.
마지막 聖女성녀 아가사의 심장이 가라앉을 수 있는 마지막 땅 KOREA
보들레르는 마지막 낙원을 지켜달라고 聖女성녀 아가사에게 기도 했을까?
1860년 10월 18일 중국: 제2차 아편 전쟁의 결과로 베이징 조약이 체결 조선: 최제우 동학 창시
고령에도 안경은 필요 없다. 유학 생활 중 독학을 하실 때 다져진 기초 체력 덕분이라고 .... 부모님이 보내주시는 학비는 한번도 쓰지 않고. 어려운 이웃 유학생들을 도왔고, 기숙사내의 잡일 아르바이트로 타이피스트의 부업까지 해가며 대학을 마쳤다. 이때부터 이미 지독한 고집이 오늘을 있게 하셨나 보다. 10여 년 간 사비를 털어 300여권의 외규장각 문서를 해석 했고, 아직도 연구와 집필로 잠시 쉴 틈이 없으시다. 넉넉하진 않지만 어려울 때마다 항상 도와주시는 분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였단다. “열심히 준비하면 언제나 쓰임을 받는다.”고.......
동양학 전공. 영어독해가 가능하고. 범어와 중국 일어 몽고어를 공부한 준비된 인재였기에 프랑스 박물관에서 특채한 것이다.
청주 예술의 전당에서 바라본 우암산 다리 건너편 고인쇄박물관
1926년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대 사범대를 나와 1955년 사립학교를 운영하겠다는 꿈을 안고 프랑스로 유학을 떠났다. 1965년 프랑스 소르본 대학에서 역사학 박사학위 취득, 1972년 프랑스 국립도서관 소장의 직지심경이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본임을 밝혀냄, 1978년 베르사이유 국립도서관에서 외규장각 문서 발견, 1979년 10월 외규장각 문서의 존재 밝힘, 1980년 국립도서관 사서직 사직, 1993년 프랑스에서 발견된 300여권의 외규장각 문서를 해석한 요약본 발행. 1999년 은관문화훈장 2003년 한국인쇄사에 관한 개설서를 한국어.영어 , 프랑스어로 출간.
2011년 11월 22일(프랑스시각), 프랑스 파리에서 향년 83세로 사망했고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되었다. 자신이 소장해 오던 보물급 유물 15종 46점을 청주 고인쇄 박물관에 기증 자신의 연구물 일체 선문대 도서관에 기증
박병선 박사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칭찬도 박수도 아닌, 혹독한 시련과 수난이었다. 박병선 박사의 우리 것에 대한 애정이 아니었다면, 그것을 되찾고야 말겠다는 집념이 없었다면
우리의 소중한 고문서들은 멀고 먼 프랑스의 도서관 한켠에 묻혀 영원히 잊혀지고 마는 운명에 처했을지도 모른다. 그것을 찾는 일은 우리 문화를 찾는 일이었고 나아가 우리의 자존심을 일깨우는 것이었다. 여생 또한 한국의 발자취를 찾아내서 연구하고 프랑스에 한국을 알리는 데 바치겠다는 박병선 박사야말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