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와 신바드의 배   세헤라자데- op.35   /

림스키코르사코프 Nikolai Andreevich ~ (1844-1908) ((러시아의 작곡가))

 

 

 

 

 

 

 

 

바다와 나비     

                                  김기림

 

 

 

 

아무도 그에게 수심(水深)을 일러준 일이 없기에

흰나비는 도무지 바다가 무섭지 않다.

 

청(靑)무우 밭인가 해서 내려갔다가는

 

어린 날개가 물결에 절어서 공주처럼 지쳐서 돌아온다.

 

삼월달 바다가 꽃이 피지 않아서 서글픈 나비 허리에

 

새파란 초승달이 시리다.

                                                              

                                          1939년 4월 <여성>

 

하얀 피부에 나비수염 백구두를 신고

주피터가 된 이상,

까마귀가 된 이상,

산 오뚝이가 된 이상,

나비가 된 이상

이상은 흰나비가 되여 쫒기 듯 바다 건너 일본으로 갔다.

이상의 작품 속에는 여러 번 나비 이야기가 나온다.

 

나비가 의미하는 바는

烏瞰圖 詩第十號 오감도시제10호 "나비"에서 보면

“나비”의 상징은 “조국의 독립 의지를 펼치는 임시정부 레지스탕스”를 이르는 말로 그려지고 있다.

“나비”의 상징은 이상과 김기림, 이태준, 박태원 등이 공유한 Allegory알레고리이다.

 

김기림은 이상과 가장 절친한 사이였으며 이상의 멘토Mentor이기도 했다.

이상의 재능을 보고 프랑스로 같이 유학을 가자고 권유하기도 했고 이상 사후 가장 애석해했다.

 

아무도 그에게 수심(水深)을 일러준 일이 없기에

흰나비는 도무지 바다가 무섭지 않다.

독립투쟁, 레지스탕스 활동이 얼마나 무서운 일인지 아무도 말해주지 않았다.

이상이 일본에 건너간 이유는 행동파 독립군이 되어 윤봉길처럼 의거를 하려 했던 것이다.

그 활동 내용은 그의 작품 “종생기” “파첩” “봉별기” “날개” “실화” “황소와 도깨비”등등의 작품 속에 우거지 쓰레기처럼 기록해놓았다.

소설 "날개"속에는 그 계획을 알리는 통지문이 들어 있다.

그러나  이상이 일본으로 건너 간 후 독립군 본진에서 작전취소를 통보한다.

 

청(靑)무우 밭인가 해서 내려갔다가는

어린 날개가 물결에 절어서

공주처럼 지쳐서 돌아온다.

독자적인 작전을 수행하려 했으나 그의 계획은 누설되어 실패하고 만다.

배신자가 있었다.

 

삼월달 바다가 꽃이 피지 않아서

서글픈 나비 허리에

새파란 초승달이 시리다.

                                                   -1939년 4월 <여성>-

 

그의 작전 개시일은 1937년 3월 3일 이었다.

하지만 안타깝게 1937년 2월 12일 사상불온자로 경찰에 구속된다.

일경이 어떤 제보도 없이 무작위 불심검문을 한 것은 아니었다.

누가 이 비밀을 제보한 것일까?

꿈도 펼치지 못 한 체 3월 16일 죽음 일보직전에 새파란 초생달이 되어 풀려나왔다.

3월 새파란 초생달

병상의 이상을 마지막 방문한 친구도 김기림이었다.

혹? 이상의 허리에 새파란 고문의 흔적이라도 남아 있었던 것일까?

이상의 애처로운 사연을 김기림은 모두 알고 있었다.

그리고 글로 남겼다.

 

 

 

이상  1939년 4월 17일  새벽, 동경제대 부속병원에서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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氣象圖  2. 시민행렬(市民行列)

                                                          

 

 

넥타이를 한 흰 식인종

니그로의 요리가 칠면조보다도 좋답니다

살갈을 희게 하는 검은 고기의 위력

의사 콜베르 의 처방입니다

헬매트를 쓴 피서객들은

난잡한 전쟁경기에 열중했습니다

슲은 독창가인 심판의 호각소리

너무 흥분하였으므로

내복만 입은 파씨스트

그러나 이태리에서는

설사제는 일체 금물이랍니다

필경 양복 입는 법을 배워낸 송미령여사(宋美齡女史)

아메리카에서는

               여자들은 모두 해수욕을 갔으므로

빈 집에서는 망향가를 불으는 니그로와

생쥐가 둘도 없는 동무가 되었읍니다

파리의 남편들은 차라리 오늘도 자살의 위생에 대하여 생각하여야 하고

옆집의 수만이는 석달만에야

아침부터 지배인 영감의 자동차를 불으는

지리한 직업에 취직하였고

독재자는 책상을 따리며 오직

단연히 단연(斷然)한개의 부사(副詞)만 발음하면 그만입니다

동양의 안해들은 사철을 불만이니까

배추장사가 그드르이 군소리를 담어 갖어오기를

어떻게 기다리는지 모릅니다

공원은 수상막도날드가 세계에 자랑하는

여전히 실업자를 위한 국가적 시설이 되었습니다

교도(敎徒)들은 언제든지 치일 수 있도록

가장 간편한 곳에 성경을 언저 두었습니다

기도는 죄를 지을 수 있는 구실이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마님 한푼만 적선하세요

내 얼골이 요로케 이즈러진 것도

내 팔이 이렇게 부러진 것도

마님과니 말이지 내 어머니의 죄는 아니랍니다

! 무명전사의 기념제행렬(記念祭行列)이다

뚜걱 뚜걱 뚜걱……

                             --- 1936년 김기림의 기상도(氣象圖중에서---


 

 

 

 

Private Worlds(1935)

 

Claudette Colbert

콜베-르: Claudette Colbert 클로데트 콜베르

프라이빗 월드는 1934 년 필리스 보텀의 소설. 돌보는 여성 정신과 의사와 동료가 보수적 인 신임 상사로부터 차별을받는 정신 병원의 직원과 환자의 이야기 -1935 년의 드라마 영화

 

 

 

장제스의 초상화를 앞세우고 행진하는 삼민주의청년단원들.

삼민주의역행사(남의사)의 후신인 삼청단을 이끈 것도 역행사 출신들이었다.

 

 

 

 

 

 

宋美齡송미령: Sung Meiling 1897. 3. 5,출생     타이완 대총통 장개석의 둘째 부인.

1927년 장제스와 결혼한 뒤 그가 서구의 문화·사상을 받아들이도록 도왔고, 한편으로는 그의 대의를 서방에 널리 알리는 데 힘을 기울였다.

https://www.youtube.com/watch?v=MM1b4lzf6yg 

 

 

 

맥도날드 형제는 대대적으로 시스템을 손을 봤다.

중요시한 변화는 바로 속도전이었다. 30분 기다려야 할 것을 30초만에 나오도록 고안한 것이었다.

맥도날드 형제는 인근 공원의 테니스코트에 분필로 그림을 그려가며 가장 효율적인 주방 동선과 기구의 배치를 고안했다. 그리고 실제 크기로 그린 전개도 위로 직원들을 보내 직접 동선을 몸에 익히도록 지시했다.

접시나 식기류를 제공하지 않고 종이 포장으로만 충분한 핑거 푸드를 냄으로써 비품 가격과 품을 줄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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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천리 제16호  
발행일 1931년 06월01일  
기사제목 解消可決前後의 新幹會, 5月15日 於京城全體大會光景  
필자 金起林  
기사형태

논설  

 

 

 
解消可決前後의 新幹會, 5月15日 於京城全體大會光景

金起林
 
한個의 指導理論과 가튼 것을 이 論文에서 樹立하려는 企圖는 勿論 내게는 업다.
다만 1927년 創立以來 解消를 可決한 오늘날까지 또는 나아가 解消가 完結됨으로써 舊形態가 完全히 止揚되는 瞬間까지 一聯의 歷史的 事件으로서의 新幹會가 오늘까지 거러온 途程과 밋 未來의 그 運命을 決定하는 現在의 諸 『모멘트』를 그 具體性에 잇서서 指示함으로써 朦朧하나마 新幹會에 대한 一聯의 知識을 系統세우기 위한 努力以上에 이 論文은 엇더한 頉越도 犯하지 아니하려고 삼긴다.
近來에 우리는 너무나 高踏的인 理論을 新幹會에 관하야 만히 듯는다. 그러나 그것이 新幹會의 圈外에서 더욱히 아모 大衆的 背景이나 實踐을 通하지 아니한 文字그대로 高踏的인 紳士的 貴族的 安全地帶的 提論일 때처름 우리들 보는 者의 耳目에 걸리는 일은 업다.
新幹會의 指導的 理論은 新幹會內部의 大衆만이 그 實踐에서 攝取하리라 또는 그 大衆에 의하야 把握되며 다시말하면 新幹會內部의 大衆을 通하야 實現될 可能性이 잇는 提論이 아니면 그것은 妄想이나 頉越이다. 그럼으로 나로 하여곰 다만 自由롭게 觀察하게 하고 본 그대로 充實히 報告하게 하기를 讀者에게 바랄 뿐이다.
新幹會는 벌서부터도 비록 그것이 最後의 것일지라도 한번은 그 全體大會를 가저야 할 切實한 要求에 直面하엿다. 이말은 한個의 『파라독쓰』다. 卽 그것은 그것이 包容하고 잇는 構成分子의 總意思를 反映식힐수 잇는 充實한 全體大會에서 그 過去를 嚴正하게 批判 檢討 反省하고 무슨 意味로던지 轉換이 잇서야 하도록 重大한 矛盾을 包含하고 잇섯든 것이다.
矛盾이라고 하는 것은 對立의 狀態다. 『테-제』에 對 『안틔테-제』의 成長存立을 意味한다.
따라서 早晩間 그 矛盾은 새로운 『씬테-제』로 止揚하여야 할 危機에 處하여 잇는 것이다.
이것을 否定하려고 하는 것은 現狀維持를 企圖하는 反動的 意思임에 틀림업다. 그것은 그 矛盾에 대하야 特殊한 利害關係에선 主觀的 生存意慾의 生理的 發見以外의 아모것도 아니며 따라서 事態의 發展우헤 全然無力한 것이다.
그 矛盾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新幹會 組織當初에 『로동자, 농민, 소시민(小市民)은 신간회로』라는 『슬로간』을 걸면서 그 組織形態는 黨으로서 規定할 때에 벌서 懷姙된 것이라고 보힌다.
다시말하면 恒久한 本質的인 利害를 紐帶로 아니한 黨은 그것 自身이 한個의 危機엿든 것이다.<13>
따라서 이것은 同時에 思想的으로 亦是 矛盾을 意味한다.
新幹會의 머리속에는 明白히 두 개의 精神이 살고 잇섯다. 이일은 新幹會 自身을 混亂식힌 同時에 民衆을 混亂식혓다. 混亂은 도리여 懷疑로 懷疑는 信任의 喪失로 變換하엿다. 今日組織의 膨大를 가르켜 成長이라고 解釋하는 便도 잇스나 이러한 矛盾이 날로 客觀的 主觀的 情勢와 動因으로 因하야 成長하야 갈때에 그 組織上의 膨大는 오히려 矛盾의 助成이다. 더욱히 아모 動員된 大衆을 그 組織속에 吸收하지 못하엿스며 그 組織圈內에 잇는 大衆까지를 動員할 수 업섯던 新幹會는 그 自身이 아모리 生存慾에 불타고 잇술지라도 움직이는 社會는 그러한 힘업는 惰性的 存在는 早晩 차버리고 말 것이다.
그리하야 그 矛盾은 그것을 에워싸고 잇는 客觀的 諸條件의 急迫한 包圍에 의한 組織自體의 觀念的 委縮으로 인하야 그 專賣特許性의 無力와 無學와 無用이 餘地업시 暴露되엿슬 때 極度로 成熟한 것이다.
5월15일 午後두時 第3代前 中央執行委員長 金炳魯氏가 開會를 宣言하야 여긔에 幕을 연 新幹會第2回全體大會는 前述한 矛盾의 가장 露骨한 縮圖엿스며 展覽場이엿다.
그리하야 한便의 『안티테-제』를 意味하는 解消派와 그 反對派는 尖銳하게 對立하엿다.
資格問題에 잇서서 解消派는 規約을 完全히 超越하야 自派에게 絶對로 有利하게 誘導하야 平壤과 京城 두 支會의 解消委員會의 代表가 議席을 차지못하엿다.
前 中央執行委員長 金炳魯氏의 開會辭가 畢하고 臨時執行部를 選擧하고나니 議長 李晃 副議長 韓鴻霆 書記長 尹基鼎 書記 朴泰根 尹氷均 査察 崔浩讚 金釆龍 朴哲恒 金斗煥 金益謙 等 京鄕各支會의 解消論의 斥候隊들이 大會의 最高執行機關을 占領하엿다.
大會의 形勢는 벌서 決定的으로 그 方向이 定하여저서 前會錄朗讀 經過報告 重要事項 承認 等 諸順序는 一瀉千里의 勢로 一過하여 버리고 中央幹部의 改選을 行한 結果.
中央執行委員長 康基德
同 委 員 丁7星 洪起文 趙悅 金爀 閔洪植 安喆洙 金在水 黃泰成 洪宰植 金正鎭 黃德允 朴勝極 權忠一 朴勝慶 孔錫政 兪仁穆 鄭基桓 金基煥 方致規 權東奎 丁奎燦 朴泰根 安德根 方奎星 崔大 任守吉 玄益謙 金貞玉 金東起 鄭允時
同 候 補 金湖 金精鍊 鄭鶴源
同 檢査員 殷在基 郭尙勳 李晃 李雨 李東壽
등 모다 今後의 解消運動의 有利한 展開를 위한 十分準備잇는 配定이다.
이윽고 問題의 解消案이 幾多의 劃時期的 理論展開와 充分한 討議를 기다리면서 上程되엿다. 實로 今般大會의 『클라이맑쓰』도 <14> 여긔잇스며 萬人注視의 焦點도 이것이다.
無慮 300名을 세이는 2層의 傍聽席과 70餘名의 代表會員과 그 數에 比等한 警官과 新聞記者로 가득찬 아래 層을 合하야 會場은 極度로 緊張한 가운데 京東支會를 爲始한 仁川 統營 各支會의 解消建議案이 朗讀되엿다.
그中에서 比較的 要約的으로 解消論의 眞意를 捕捉한 듯한 統營支會의 建議案을 아래 引用하야 參考에 供하려 한다.
 
建議案
 
左의 理由로 解消를 建議함.
가. 客觀的 情勢의 成熟한 것.
나. 主體的 條件이 이에 照應한 것.
다. 組織形態가 黨的 形態로 된 것.
라. 鬪爭을 통한 組織이 아니고 外交에 의한 組織인 것.
마. 新幹會는 雜同散異的 組織形態로 運動의 主要要素인 勞農大衆의 獨自性을 抹殺식히는 것.
바. 그럼으로 反動의 必然性을 內包한 것.
 
解消運動의 大體的 輪廓
 
1. 解消의 意義를 一般大衆에게 徹底化식히기 위한 運動.
A. 勞農大衆의 日常利益을 充實代表하며 그 獲得을 위하야의 精力的 X爭.ㅡ 이에 의하야 그 組織形態의 이에 대한 無力과 少數機會主義者들의 本質의 暴露.
B. 適宜한 方法에 의한 宣傳.
2. 勞農組再建擴大强化와 新幹會組織內에 構成되여잇는 勞農大衆을 勞農組에 再編成하며 未組織勞農大衆을 이에 組織化식힐 것.
3. 民衆의 日常利益의 獲得伸張을 위하야 時間的 協同鬪爭機關의 創成.
 
解消派는 解消論의 理論的 根據를 大會에 十分指示할 수 잇는 自由와 便宜가 업섯다. 그런 것은 오히려 全然中止하는 것이 解消派 自身을 위하야 나흔 일일지도 모른다.
이윽고 解消의 動議는 否便1票에 대한 絶對多數로써 드듸여 可決되엿다. 勿論 豫期하엿던 것에 틀림업섯다.
警察은 그 後의 모든 動議와 諸議案은 『新幹會는 벌서, 解消되엿다』는 理由로 一體禁止하엿다.
이것도 勿論一部의 第3者까지도 先見하고 잇던 일임에 틀림업다.
用語의 嚴密한 定義에 빗춰서 新幹會의 解消는 解消可決한 卽席에서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解消에 反對하는 便이나 贊成하는 便이나 한가지로 用語의 解釋에 잇서서는 公平하지 아니하면 아니되리라고 나가튼 局外者도 생각한다.
卽 解消와 解體라는 두個의 槪念은 그 內包와 外延에 잇서서 서로 交涉은 가지고 잇스나 決코 『씨노니멈』은 아니다.
이러한 社會運動上의 術語를 常識的으로만 理解하는 것은 危險하다. 늘 社會運動上의 術語로써 理解해야 한다. 誤解를 사기 쉬운 單語 그것을 위해서보다도 自身의 正當한 知識을 위하야.
그럼으로 『新幹會는 解消하엿다지』하는 用例는 妥當하지 아니하다. 無識의 發露다.
設使 大會에서 解消를 可決하엿다고 하여도 그것은 한個의 可決이며 그것이 참으로 解消되는 것은 新幹會라는 組織形態가 새로운<15> 다른 形態로 完全히 止揚하는 그 瞬間일 것이다. 이는 勿論 아직 먼 未來의 일이다. 그래서 그 瞬間까지는 新幹會는 依然히 存在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모다 觀念上 理論上의 見解다. 實質에 잇서서 解消可決以後 殘務處理를 하기 위하는 以外 아모 決議나 討議조차 할 수 업시 集會를 封鎖當한 新幹會는 過去의 表現團體로서의 生命은 벌서 地上에서 消滅되고 만 것에 틀림업지 아니한가? 地下室的 新幹會의 存續如何는 勿論 論外다.
그리하야 그것은 解消可決과 同時에 解體된 것과 同樣의 狀態에 잇다.
要컨대 新幹會의 今後의 모-든 問題와 興味는 오로지 解消派와 그들의 運動우헤 실려잇다.
이 派에 屬한 人物들은 大會에 나타난 限度에서는 大部分은 젊은 피에 끌는 靑年이엿스며 또 한 過去에는 別로히 피비린내나는 X場을 馳奔하는 것을 본 일이 업는 오직 未來에만 그들의 理論을 實踐으로써 確證할 餘地를 가진 분들이다.
한個의 決議나 理論이 『엣펠』의 塔과 가치 崇高하고 華著할지라도 究竟에 그것의 價値를 決定하는 것은 實踐以外에는 아모것도 업다. 그려치 못한 限 그것들은 詩的 價値以上에 一枚의 空文에 不過하리라.
그러면 解消論의 價値는 엇더한가?
解消派는 果然 正當한가?
그것은 오로지 今日의 如何한 整然한 理論에도 不拘하고 今後에 그 派의 實踐만이 對答하여 줄 것이다.
일직이 우리들은 至極히 尨大하고도 深奧한 理論的 展開속에서 新幹會가 當時에는 唯一한 指導理論의 結果로써 出現하엇스나 今日에 와서는 다시 過誤로써 認識하고 取扱되지 아니하면 아니되게 된 것을 안다. 누가 그러게 식혓는가? 頭腦의 問題가 아니다. 實踐이 그것을 가르친 것이다.
그러고 今般解消에 反對하는 左翼民族主義者한가지로 이에 反對하는 支會나 或은 會員들을 糾合하야 新幹會의 舊壘를 死守할 것이나 아닐가? 或은 別個의 形態로 結成할 것이 아닐가 하는 말들이 흔히 귀에 들니나 嚴密한 意味에서 朝鮮의 客觀的 情勢는 左翼民族主義의 結成體의 出現을 可能하게 아니한다.
萬若에 그들이 結成한다고 해도 더 右傾한 形式으로 出現할 것이나 아닌가 한다.
左냐! 右냐!
길은 이것뿐이다. 中間은 업다. 다만 尖銳한 對立이 잇다. 自己의 階級的 利害를 위한 協同과 讓步는 따라서 더욱 明瞭한 形式으로 大膽하게 行하야지리라고 보힌다.
5월20일<16>
<13-16>
출처 : 이강기
글쓴이 : 이강기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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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림 


3달 바다가 꽃이 피지 않서  흰나비가 된 이상은 그렇게 갔다.



                                                                                                                    이상

 

故 李箱의 追憶

고 이상의 추억

 

이상은 필시 죽음에 진 것은 아니라,

이상은 제 육체의 마지막 조각까지라도 손수 퍼내여 없애고 사라진 것이리라.

이상은 오늘의 일제 치하의 환경과 조선사회의 무지 속에 두기에는 너무나 아까운 천재였다.

이상은 한 번도 잉크로 시를 쓴 일은 없다.

이상의 시에는 언제나 그의 피가 흠뻑 젖어있다.

그는 스스로 제 혈관을 짜서 '시대의 혈서'를 쓴 것이다.

그는 현대라는 커다란 부서진 배에서 떨어져 표랑하던 너무나 처참한 선체조각이었다.

 

다방N, 등의자에 기대 앉아 흐릿한 담배연기 저편에 절반쯤 취해서 몽롱한 상의 얼굴에서 나는 언제고 '현대의 비극'을 느끼고 소름이 돋았다.

약간의 해학과 야유와 독설이 섞여서 더듬더듬 떨어져 나오는 그의 잡담 속에는 오늘의 문명의 깨어진 메커니즘이 엉켜 있었다.

파리에서 문화수호국제작가대회가 있었을 때 내가 만난 작가나 시인 가운데 가장 흥분한 것도 이상이었다.

이상이 우는 것은 나는 본 일이 없다.

그는 세속에 반항하는 한 악한(?) 정령이었다.

악마더러 울 줄을 모른다고 비웃지 마라.

그는 울다 울다 못해서 이제는 눈물샘이 말라버려서 더 울지 못하는 것이다.

이상이 소속한 20세기의 악마의 종족들(순수문학파)은 그러므로 번영하는 위선의 문명에 향해서 메마른 찬웃음을 토할 뿐이다.

흐리고 어지럽고 게으른 詩壇시단의 낡은 풍류에 극도의 증오를 품고 파괴와 부정에서 시작한 그의 시는 드디어 시대의 깊은 상처에 부딪쳐서 참담한 신음소리를 토했다.

그도 또한 세기의 어둠 속에서 불타다가 꺼지고 만 한줄기 첨예한 양심이었다.

그는 그러한 불안 동요 속에서 '動동하는 정신'을 재건하려고해서 새 출발을 계획한 것이다. 이 방대한 설계의 어구에서 그는 그만 불행히 자빠졌다.

상의 죽음은 한 개인의 생리의 비극이 아니다.

축소판으로 인쇄된 한 시대의 비극이다.

詩壇시단과 또 내 우정의 여럿 중에 채워질 수 없는 영구한 빈자리 하나 만들어 놓고 이상은 사라졌다.

이상을 잃고 나는 오늘 시단이 갑자기 반 세게 뒤로 물러선 것을 느낀다.

내 공허를 표현하기에는 슬픔을 그린 자전 속의 모든 형용사가 모두 다 오히려 사치하다. '고 이상'-내 희망과 기대 위에 부정의 도장을 사정없이 찍어놓은 故李箱 세 억울한 상형문자야.

 

반년 만에 이상을 만난 지난 3월 스무날 밤, 동경 거리는 봄비에 젖어 있었다.

그리로 왔다는 이상의 편지를 받고 나는 지난겨울부터 몇 번인가 만나기를 기약했으나 종내 仙臺센다이(동경에서 약350km)를 떠나지 못하다가 이날이야 동경으로 왔던 것이다.

이상의 숙소는 九段구단 아래 꼬부라진 뒷골목 2층 골방이었다.

이 '날개' 돋친 시인과 더불어 동경 거리를 거닐면 얼마나 유쾌하랴 하고 그리던 온갖 꿈과는 딴판으로 상은 '날개'가 아주 부러져서 몸도 바로 못하고 이불을 뒤집어쓰고 앉아 있었다.

전등불에 가로 비친 그의 얼굴은 상아보다도 더 창백하고 검은 수염이 코 밑과 턱에 참혹하게 무성하다.

그를 바라보는 내 얼굴의 어두운 표정이 가뜩이나 병들어 약해진 벗의 마음을 상하게 할까봐서 나는 애써 명랑을 꾸미면서

"여보, 당신 얼굴이 아주 '피디아스'의 '제우스' 신상 같구려." 하고 웃었더니 이상도 예의 정열 빠진 웃음을 껄껄 웃었다.

사실은 나는 '듀비에'의 '골고다의 예수'의 얼굴을 연상했던 것이다.

 

오늘 와서 생각하면 이상은 실로 현대라는 커다란 모함에 빠져서 십자가를 걸머지고 간 골고다의 시인이었다.

 

암만 누우라고 해도 듣지 않고 이상은 장장 두 시간이나 앉은 채 거의 혼자서 그 동안 쌓인 이야기를 풀어 놓는다.

"오스카와일드"위 전기를 쓴 "리차드 엘만(Richard Ellmann)"(1918~1987)을 찬탄하고

침체 속에 빠진 몇몇 벗의 문인으로서의 앞날의 운명을 걱정하다가 말이 그의 작품에 대한 이번 달의 비평에 미치자 그는 몹시 흥분해서 통속적인 비평을 꾸짖는다.

문학평론가 최재서의 모더니티를 찬양하고 또 씨의 '날개' 평은 대체로 승인하나 작자로서 다소 다른 주의가 있다고도 말했다.

나는 벗이 세평에 대해서 너무 신경 과민한 것이 벗의 건강을 더욱 해칠까보아서 시인이면서 왜 독자적인 작품을 쓰는 것을 그렇게 두려워하느냐, 세상이야 알아주든 말든 값있는 일만 정성껏 하다가 가면 그만이 아니냐 하고 어색하게나마 위로해 보았다.

 

이상의 말을 들으면 공교롭게도 책상 위에 몇 권의 상스러운 책자가 있었고 본명 金海卿김해경 외에 李箱이상이라는 별난 이름이 있고 그리고 일기 속에 몇 줄 온전하다고 할 수 없는 글귀를 적었다는 일로 해서 그는 한 달 동안이나ㅇㅇㅇ(유치장?)에 들어가 있다가 아주 건강을 상해 가지고 한주일 전에야 겨우 자동차에 실려서 숙소로 돌아왔다는 것이다.

이상은 그 안에서 다른 ㅇㅇ(공산?, 지하운동?)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수기를 썼는데 예의 명문에 계원도 찬탄하더라고 하면서 웃는다.

니시간다(西神田) 경찰서 속에조차 애독자를 가졌다고 하는 것은 시인으로서 얼마나 통쾌한 일이냐 하고 나도 같이 웃었다.

 

음식은 그 부근에 계신 허남용씨 내외가 죽을 쑤어다 준다고 하고 마침 素雲(김소운>이 동경에 와 있어서 날마다 찾아주고 극작가 주영섭, 삼사문학 동인인 한천, 여러 친구가 가끔 들러주어서 과히 적막하지는 않다고 한다.

이튿날 낮에 다시 찾아가서야 나는 그 방이 완전히 햇빛이 들지 않는 방인 것을 알았다.

 

지난해 1936년 7월 그믐께다.

아침에 황금정 뒷골목 이상의 신혼 보금자리를 찾았을 때도 방은 역시 햇빛 한줄기 들지 않는 캄캄한 방이었다.

그날 오후 조선일보사 3층 뒷방에서 벗이 애를 써 장정을 해준 졸저 '氣象圖기상도'의 발송을 마치고 둘이서 창에 기대서서 갑자기 거리에 몰려오는 소낙비를 바라보는데 창문 앞에 뱉는 이상의 침에 빨간 피가 섞였었다.

평소부터도 상은 건강이라는 속된 관념은 완전히 초월한 듯이 보였다.

이상의 앞에 설적마다 나는 아침이면 맨손 체조를 잊어버리지 못하는 내 자신이 늘 부끄러웠다.

무릇 현대적인 퇴폐에 대한 진실한 체험이 없는 나는 이 점에 대해서는 늘 이상에게 경의를 표했다.

그러면서도 그를 아끼는 까닭에 건강이라는 것을 너무 천대하는 벗이 한없이 원망스러웠다.

이상은 스스로 형용해서 천재일우의 기회라고 하면서 모처럼 동경서 만나가지고도 병으로 해서 뜻대로 함께 놀러 다니지 못하는 것을 한탄한다.

미진한 계획은 4월 20일께 동경서 다시 만나는 데로 미루고 그때까지는 꼭 맥주를 마실 정도로라도 건강을 회복하겠노라고, 그리고 햇볕이 드는 옆방으로 이사하겠노라고 하는 이상의 뼈뿐인 손을 놓고 나는 동경을 떠나면서 말할 수 없이 마음이 캄캄했다.

 

이상의 부탁을 부인 변동림에게 알리려 했더니 내가 서울 오기 전날 밤에 벌써 부인께서 동경으로 떠나셨다는 말을 서울 온 이튿날 전차 안에서 영문학자 조용만씨를 만나서 들었다.

그래 일시 안심하고 집에 돌아와서 잡무에 분주하느라고 다시 벗의 병상을 보지도 못하는 사이에 원망스러운 비보가 달려들었다.

"그럼 다녀오오. 내 죽지는 않소." 하고 이상이 마지막 들려준 말이 기억 속에 너무 선명하게 솟아올라서 아프다.

 

이제 우리들 몇몇 남은 벗들이 이상에게 바칠 의무는 이상의 피 엉킨 유고를 모아서 이상이 그처럼 애써 친하려고 하던 새 시대에 선물하는 일이다.

허무 속에서 감을 줄 모르고 뜨고 있을 두 눈동자와 영구히 잠들지 못할 이상의 괴로운 정신을 위해서 한 암담하나마 그윽한 침실로서 그 유고집을 만들어 올리는 일이다.

 

나는 믿는다.

이상은 갔지만 그가 남긴 예술은 오늘도 내일도 새 시대와 함께 동행하리라고.

 

-조광 3권 6호, 1937. 6-

                                               

원문http://blog.naver.com/fish20017/101520461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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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시단의 등뼈, 동인 4

 

1930년대의 문제성

한국 근대문학은 계몽적·집단적·운동적 성격을 특징으로 한다. 특히 문학의 집단적·운동적 성격은 한국 근대문학이 작가 개인의 노력과 역량만이 아니라 동인지 운동의 성격을 강하게 띠었고, 창작집이 아니라 주로 문예지라는 형식을 통해 표현되었다는 사실과 밀접한 관련을 지닌다. 이러한 문예 동인과 문예지는 제도에 안착한 기성의 안정성에 도전하는 차이화 전략의 일환이므로, 한국 근대문학의 매 시기에는 항상 해당 시기를 대표하는 동인 또는 문예지가 있었다. 이 글이 논의의 대상으로 삼고 있는 ‘구인회’ 《문장》 《인문평론》 또한 예외가 아니어서, 이것들은 사실상 1930년대 한국문학의 수준을 보여주는 바로미터의 성격을 갖고 있다. 따라서 이들의 성격과 성취를 살피는 일은 곧 1930년대 문학의 그것을 되묻는 일이기도 하다.

 

 

한국 근대문학사에서 1930년대의 위상은 각별하다. 1930년대의 한국은 대륙침략의 야욕을 포기하지 않은 일본 때문에 온전히 전쟁의 시간을 겪어야 했다. 만주사변(1931)―중일전쟁(1937)―태평양전쟁(1941)으로 이어지는 이 전쟁의 시대에 한국문학은 한편으로는 열악한 정치적 현실로 인해 인위적인 단절을 경험해야 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이전 시기에 비해 한층 다양하고 성숙한 단계로 발돋움했다. 특히 이 ‘성숙’의 의미는 다층적이고 복합적이었다. 왜냐하면 1930년대에 이르러 한국의 문학인들 가운데 일부가 본격적인 모더니즘 운동을 실험하기 시작했고, 동시에 ‘근대’ 자체를 비판적 시선으로 바라보려는 움직임도 생겨났기 때문이다. 물론 이 시선의 상당 부분은 제국 일본의 시선을 차용한 결과였기에 국내의 현실과 연동되지 못한 한계가 있었지만, 이러한 한계는 또한 모더니즘에도 있었다. 한국문학의 전통성을 애써 부정하거나 폄하할 이유는 없지만 근대 이후의 한국문학은 일본을 통해 수입된 외래적인 것의 영향에 반복적으로 노출되었고, 그때마다 외래적인 것과 한국의 문학 현실 사이에는 미묘한 긴장이 있었다.

 

1930년대는 ‘카프’가 주도한 1920년대와는 분위기가 확연히 달랐다. 이 시기 일본은 3·1 운동 이후에 취해 오던 문화통치를 무단통치로 전환했고, 그에 따라 1920년대 문학의 핵심이었던 카프(KAPF)와 공산주의 운동의 영향력은 현저히 축소되었다. 카프의 리얼리즘이 퇴조기에 접어들 무렵 문단에는 ‘구인회’로 대표되는 모더니즘적 경향이 본격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내적 동력이 약했던 ‘구인회’는 불과 2~3년 만에 사실상의 해체 상태에 직면하게 되었고, 이 모임의 회원 중 일부가 1930년대 후반에 《문장》을 창간했다. 1930년대 후반의 문학을 사실상 양분했던 《문장》의 전통주의 담론과 《인문평론》의 근대(비판) 담론으로 인해 이 시기 한국문학은 ‘담론’을 통해 급박한 변화의 시기를 맞이했다. 아래에서는 이들 동인 집단과 문예동인지의 탄생 배경과 그들이 내세운 문학적 이념을 중심으로 그 문학사적 가능성과 한계를 타진해보려 한다.

 

‘구인회’와 모더니즘의 등장

 

‘구인회’는 1933년 김기림, 이효석, 이종명, 김유영, 유치진, 조용만, 이태준, 정지용, 이무영 등이 창립한 예술 모임이다. 결성 당시 이 모임은 “회원 간의 친목 도모”와 “문학에 대한 순수한 연구”를 창립 목적으로 내세웠다. 하지만 구인회는 결성된 얼마 후 이종명, 김유영, 이효석이 탈퇴하고 박태원, 이상, 박팔양이 새로 가입했으며, 그 이후에도 유치진, 조용만이 탈퇴하고 김유정, 김환태가 가입하는 등 회원에서 변화를 보였다. 흔히 ‘구인회’는 회원 수가 늘 9명을 유지했다고 오해되고 있지만, 1935년 6월 30일 《조선문단》 좌담회에서 정지용은 회원 수를 묻는 이석훈의 질문에 “13인입니다.”라고 대답했다. 지금까지 확인된 이들의 집단적 활동은 몇 번의 합평회, 집단적인 칼럼 연재, 두 차례의 문학 강연회, 그리고 1936년 3월 기관지 《시와 소설》을 발행한 것 등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구인회’는 1933년 8월에 결성되어 1936년 10월 무렵에 사실상 해체되었다고 보아야 할 듯하다. 지금까지의 많은 연구는 ‘구인회’와 카프의 관계, ‘구인회’의 결성 과정과 구체적 성격, 특히 문학과 예술에 대한 회원들의 공통적인 지향 등을 ‘모더니즘’이라는 개념으로 포괄해왔다. 하지만 집단적으로 활동한 기간이 무척 짧았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이들이 의식적인 예술적 지향을 함께하기 위해 ‘구인회’라는 모임을 결성한 것인지는 여전히 불투명하다. 특히 현재까지 ‘구인회’에 관한 대부분의 정보가 회고, 조용만의 회고에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도 문제로 지적할 수 있는데, 실제로 여러 지면을 통해 확인되는 ‘구인회’에 관한 정보들은 상충되는 것들이 상당히 많다.

 

‘구인회’의 결성 계기는 무엇이었고, 결성 과정은 어떠했으며, 어떤 이유로 활동을 멈추었을까? 많은 연구자가 이 문제에 천착했으나 여전히 해명되지 않고 있다. 실제로 ‘구인회’는 창립 일자부터가 논란의 대상이다. 비교적 최근까지 ‘구인회’의 창립 일자는 1933년 8월 15일로 알려져 있었다. 이는 〈조선중앙일보〉 1934년 6월 25일 자에 실린 ‘시와 소설의 밤’ 광고 기사 때문이다. 이 기사에는 1934년 6월 30일에 개최될 ‘시와 소설의 밤’ 행사가 구인회가 주최하고 〈조선중앙일보〉 학예부가 후원한다는 내용과, “구인회는 작년 8월 15일에 창립된 김기림, 박태원, 정지용, 이무영, 유치진, 조용만, 이효석, 조벽암, 이종명, 이태준 11씨(氏)의 작가 단체”라는 단체 소개의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하지만 지금까지 ‘구인회’에 대한 정보의 대부분을 제공했고 그 자신 ‘구인회’의 일원이기도 했던 조용만은 1957년 회고(〈구인회의 기억〉 《현대문학》 1957년 1월호)에서 창립일을 “7월 그믐께이던가 팔월 초생”이라고 밝혔고, 소설집 《구인회 만들 무렵》(정음사, 1984)에서는 “칠월 스무날 께, 이효석도 서울로 올라오고 아홉 사람 전 회원이 모여서 저녁 여섯 시에 광교 큰길에 있는 조그만 양식집에서 발회식을 가졌다.”라고 기록했다. 하지만 최근의 연구에 따르면 ‘구인회’의 창립일은 1933년 8월 26일일 가능성이 높다.

 

첫째, 〈조선중앙일보〉 1933년 8월 31일 자 ‘문단인 소식―구인회 조직’이라는 제목의 기사에 “좌기(左記)의 문인 구씨(九氏)는 이십육일 오후 팔시(八時)에 시내 황금정 아서원에서 회합하야 순문학 연구단체 구인회를 조직하얏다는데 00한 조선문학에 신기축을 짓고자 함이 그 목적이라 하며 한 달에 한 번씩 회합을 한다고……”라는 내용이 등장한다. 둘째, 〈동아일보〉 1933년 9월 1일 자 3면 ‘문단 풍문’에 “구인회 창립. 순연한 연구적 입장에서 상호의 작품을 비판하며 다독다작을 목적으로 한 사교적 클럽”이라는 기사가 실렸다. 셋째, 〈조선일보〉 1933년 8월 30일 학예면에 ‘소식―구인회 창립’이라는 기사가 실렸다. 넷째, 잡지 《삼천리》 1933년 9월호 ‘문인의 신단체’에 “소필(蕭苾)한 추풍(秋風)이 불자, 최근에 문단에 희소식이 들린다. 이종명, 김유영, 이태준, 이효석, 김기림, 이무영, 조용만 외 제씨의 발기로, 신흥문예단체가 결성되야 크게 활약하리라는데, 결사의 주지는, 문인상호 간의 친목과 자유스러운 입장에 서서 예술운동을 이르킴에 잇다 하는데, 아무튼 금후의 활약이 기대된다.”라는 내용이 실렸다. 조용만의 회고를 제외한 대부분의 증거들이 ‘구인회’의 창립일이 8월 26일이라는 〈조선중앙일보〉의 기사를 뒷받침하고 있고, 구체적인 모임 장소 또한 조용만의 기억과 달리 “광교 큰길에 있는 조그만 양식집”이 아니라 황금정에 있던 중화요리점인 아서원(雅廻園)이었다. 아서원은 1907년 산동성 복산현(福山縣) 출신의 서광빈(徐光賓)이라는 사람이 설립하여 1970년 폐점할 때까지 약 60년 동안 서울의 대표적인 중화요릿집이었다.

 

사정이 이렇다면 ‘구인회’가 카프의 프롤레타리아 문학에 반대하는 순수예술을 위해 결성되었다는 기존의 평가도 사후적으로 구성된 시선이 아닌지 의심해 보아야 한다. 1920년대와 1930년대, 카프의 프롤레타리아 문학과 구인회의 범(凡)모더니즘 문학은 확실히 대립·경쟁적 관계로 포착되기 쉽다. 실제로 기관지 《시와 소설》의 편집후기에 등장하는 이상의 진술(“구인회처럼 탈 많을 수 참 없다. 그러나 한 번도 대꾸를 한 일이 없는 것은 말하자면 그런 대꾸 일일이 하느니 할 일이 따로 많으니까다. 일후라도 묵묵부답 채 지날 게다.”)을 살펴보면 ‘구인회’를 겨냥한 카프의 비판이 있었던 듯하다. 아울러 ‘구인회’에 소속된 인물들의 문학적 경향을 살펴보면 이들의 모임 결성에 프롤레타리아 문학에 대한 반감, 즉 1920년대 문학의 주류적 경향과는 다른 성격의 문학을 추구하려던 의지가 짙게 투영되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의지가 곧 대타적인 의식의 발로를 설명하는 원인이 될 수는 없으니, ‘구인회’는 넓은 의미에서 비슷한 문학적 경향을 보이던 일군의 시인·소설가들이 순수한 문학적 목적으로 결성―정지용은 ‘구인회’를 글 좋아하는 친구들의 모임이며 계획이나 강령은 없다고 밝혔다―한 모임이라고 이해하는 것이 타당할 듯하며, 바로 이 점이 또한 그들의 결속을 느슨하게 만드는 한 원인으로 작용하기도 한 듯하다.

 

우리는 회원의 사상을 강제하지 안는다. 어느 단체에 끼여 어떤 사상행동을 하거나 어떤 경향을 작품에 강조하거나 절대 자유다. 다만 구인회 그것을 자기가 이용하려 들어서도 안 된다. 그런 야심이 생기면 벌써 우의에 불순이 생기기 때문에 불가불 남이 될 수박에 없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우리들에게 이미 남 되어 주기를 요구바든 회원도 잇섯다. 그럼으로 구인회 그 자체에게 어떤 정치적인 행동을 기대하는 것은 구인회의 성격을 모르기 때문이다. 구인회원인 작가가 개인으로나, 혹은 다른 단체에 끼어선 어떤 행동이든 할 수 있되 구인회로서는 〈글공부〉 그 이상에 나서지 못한다. 그러타고 그것이 구인회를 위해서 슬퍼하거나 못맛당해 할 이유는 아무 것도 업다. 애초에 붓으로 맨 것은 글을 쓰는 것으로 맛당하고 비로 맨 것은 마당을 쓰는 것만으로 맛당한 것이다.

 

이태준이 〈조선중앙일보〉 1835년 8월 11일 자에 “구인회에 대한 난해 기타”라는 제목으로 쓴 글 일부이다. 이 글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은 ‘구인회’가 회원들 개인의 정치적 성향에 대해서는 일체의 자유를 보장한다는 것, 구인회 자체를 특정한 정치적 성향으로 이끌어가려는 움직임에 대해서는 단호하게 반대한다는 것, 구인회의 활동과 성격은 오직 ‘문학’에 국한된다는 것이다. 이 단호한 반대의 구체적인 내용은 이무영을 탈회시킨 것이다. 1935년 6월 30일 《조선문단》 좌담회에서 김남천과 김광섭이 이무영과 조벽암의 탈회, 특히 그 자리에 참석한 이무영에게 구인회 탈퇴의 이유를 묻지만 이무영은 “글로는 발표할 수 있는 성격이지만 여기선 말할 수 없읍니다.”라고 침묵을 유지한다.

그렇다면 ‘구인회’는 실제 어떤 활동을 했을까? 이 질문에 대한 첫 번째 대답은 1934년 6월 17일부터 〈조선중앙일보〉에 11회에 걸쳐 연속 게재된 〈격(檄)!! 흉금을 열어 선배에게 일탄을 날림〉에서 찾을 수 있다. 이 기획에는 총 6명의 필자가 참여했는데, 처음 두 번의 칼럼을 집필한 임린을 제외한 5명(이무영, 이종명, 박태원, 조용만, 김기림)이 모두 구인회 멤버였다. 이들은 각각 이광수, 현진건, 김동인, 염상섭, 주요한을 비판의 대상으로 삼았는데, 공교롭게도 이 비판 대상자 명단에는 프롤레타리아 문학자가 한 사람도 포함되어 있지 않다. 이것은 카프와 구인회의 관계에 대한 기존 연구를 재검토할 필요가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다음으로 구인회는 〈조선중앙일보〉 학예부 후원으로 1934년 6월 30일에는 ‘시와 소설의 밤’을, 1935년 2월 18~22일에는 ‘조선신문예강좌’를 열었다. 마지막으로 1935년 4월에 창간호가 출판된 기관지 《시와 소설》 발행이 있다. 이에 대해서는 “이상은 다방을 집어치우고 구본웅 화백이 경영하는 창문사라는 인쇄소에 들어가서 교정을 보아주고 있었다. 그래서 구 화백의 호의로 그 이듬 이듬해 1935년 4월에 《시와 소설》이라는 제목으로 구인회 기관지가 나왔다. 오륙십 장의 얇다란 잡지로서 구보와 김유정이 단편을 썼고, 편집은 이상이가 맡아 하였다. 정가는 십전(拾錢)으로 기억되는데 잘 팔리지 않았는지 한 번밖에 못 내고 말았다.”(〈구인회의 기억〉 《현대문학》 1957년 1월호)라는 조용만의 회고와 다음과 같은 이상의 편집후기를 참고할 수 있다.

 

 

전부터 몇 번 궁리가 있었으나 여의치 못해 그럭저럭 해 오든 일이 이번에 이렇게 탁방이 나서 회원들은 모두 기뻐한다. 위선 화우(畵友) 구본웅 씨에게 마음으로 치사해야 한다. 쓰고 싶은 것을 써라 책을랑 내 만들어 주마 해서 세상에 흔이 있는 별별 글탄 하나 격지 않고 깨끗이 탄생했다. 일후도 딴 걱정 없을 것은 물론이다. 깨끗하다니 말이지 겉표지에서 뒷표지까지 예서 더 할 수 있으랴 보면 알 게다.

— 《시와 소설》(1935. 4) 창간호 편집후기

지금까지 밝혀진 사실을 바탕으로 《시와 소설》의 발간 과정을 정리하면 대략 다음과 같다. 시인 이상이 다방 ‘제비’를 폐업한 후 구본웅이 경영하던 인쇄소인 창문사에 들어갔고, ‘구인회’의 기관지인 《시와 소설》은 구본웅의 지원을 받아 이상이 편집을 맡아 출간되었다. 창간호 편집후기에서 이상은 기관지를 출간한 사실에 대해 무척이나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다. 이때까지만 해도 그는 “차차 페이지도 늘일 작정이다. 회원밖의 분도 물론 실닌다. 지면 벨으는 것은 의논껏하고 편집만 인쇄소 관계상 이상이 맡아보기로 한다.”처럼 이 기관지가 번창하리라고 믿었다.

 

하지만 약 1년 후 일본에 간 김기림에게 보낸 몇 통의 편지에서 이상은 “구인회는 그 후로 모이지 않았소이다.” “《시와 소설》은 회원들이 모두 게을러서 글렀소이다. 그래 폐간하고 그만둘 심산이오. 2호는 회사 쪽에 내 면목이 없으니까 내 독력으로 내 취미 잡지를 하나 만들 작정입니다.” “구인회는 인간 최대의 태만에서 부침중이오. 팔양이 탈회했소―. 잡지 2호는 흐지부지요. 게을러서 다 틀려먹은 것 같소.”처럼 ‘구인회’ 회원들의 게으름 때문에 두 번째 호를 발간하지 못하는 상황에 분개하고 있다. 하지만 이 시기에 구인회 회원들의 문학 활동이 미약했다고는 말할 수 없으며, 다만 기관지 《시와 소설》을 포함한 집단적 활동에 상대적으로 무심했던 듯하다. 이상에게 쓰라린 실패를 맛보게 한 회원들의 이 게으름은 실제로 구인회의 응집력이 그만큼 미약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www.yousim.co.kr › 기획연재 › 한국시단의 등뼈 同人http://www.yousim.co.kr/news/articleList.html?sc_section_code=S1N16

 

Rimsky-Korsakov: Scheherazade - op.35  The Sea and Sinbad's Ship

바다와 신바드의 배   세헤라자데- op.35   / 림스키코르사코프 Nikolai Andreevich ~ (1844-1908) ((러시아의 작곡가))

 

 





바다와 나비      김기림

 

아무도 그에게 수심(水深)을 일러준 일이 없기에

흰나비는 도무지 바다가 무섭지 않다.

 

청(靑)무우 밭인가 해서 내려갔다가는

                        어린 날개가 물결에 절어서 공주처럼 지쳐서 돌아온다.

 

                        삼월달 바다가 꽃이 피지 않아서 서글픈

                        나비 허리에 새파란 초승달이 시리다.

                                                                                1939년 4월 <여성>

 

 

 

 

 

 

이 시 또한 李箱이상을 기리며 쓴 시로 이해된다.

하얀 피부에 나비수염 백구두를 신고

주피터가 된 이상,

까마귀가 된 이상,

산 오뚝이가 된 이상,

나비가 된 이상

이상은 흰나비가 되여 쫒기 듯 바다 건너 일본으로 갔다.

이상의 작품 속에는 여러 번 나비 이야기가 나온다.

 

나비가 의미하는 바는

烏瞰圖 詩第十號 오감도시제10호 "나비"에서 보면

“나비”의 상징은 “조국의 독립 의지를 펼치는 임시정부 레지스탕스”를 이르는 말로 그려지고 있다.

“나비”의 상징은 이상과 김기림, 이태준, 박태원 등이 공유한 Allegory알레고리이다.

 

김기림은 이상과 가장 절친한 사이였으며 이상의 멘토Mentor이기도 했다.

이상의 재능을 보고 프랑스로 같이 유학을 가자고 권유하기도 했고 이상 사후 가장 애석해했다.

 

아무도 그에게 수심(水深)을 일러준 일이 없기에

흰나비는 도무지 바다가 무섭지 않다.

독립투쟁, 레지스탕스 활동이 얼마나 무서운 일인지 아무도 말해주지 않았다.

이상이 일본에 건너간 이유는 행동파 독립군이 되어 윤봉길처럼 의거를 하려 했던 것이다.

그 활동 내용은 그의 작품 “종생기” “파첩” “봉별기” “날개” “실화” “황소와 도깨비”등등의 작품 속에 우거지 쓰레기처럼 기록해놓았다.

소설 "날개"속에는 그 계획을 알리는 통지문이 들어 있다.

그러나  이상이 일본으로 건너 간 후 독립군 본진에서 작전취소를 통보한다.

 

청(靑)무우 밭인가 해서 내려갔다가는

어린 날개가 물결에 절어서

공주처럼 지쳐서 돌아온다.

독자적인 작전을 수행하려 했으나 그의 계획은 누설되어 실패하고 만다.

배신자가 있었다.

 

삼월달 바다가 꽃이 피지 않아서 서글픈

나비 허리에 새파란 초승달이 시리다.

                                                   -1939년 4월 <여성>-

 

그의 작전 개시일은 1937년 3월 3일 이었다.

하지만 안타깝게 1937년 2월 12일 사상불온자로 경찰에 구속된다.

일경이 어떤 제보도 없이 무작위 불심검문을 한 것은 아니었다.

누가 이 비밀을 제보한 것일까?

꿈도 펼치지 못 한 체 3월 16일 죽음 일보직전에 새파란 초생달이 되어 풀려나왔다.

3월 새파란 초생달

병상의 이상을 마지막 방문한 친구도 김기림이었다.

혹? 이상의 허리에 새파란 고문의 흔적이라도 남아 있었던 것일까?

이상의 애처로운 사연을 김기림은 모두 알고 있었다.

그리고 글로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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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림/문헌 원문  (0) 2015.09.20

 

 

 

<쥬피타 追放>

 

(李箱의 靈前에 바침) / 이상의 영전에 바침    

 

 

 

 

파초 잎파리처럼 축 느러진 중절모 아래서                                         芭蕉, 中折帽

빼여 문 파이프가 자조 거룩지 못한 원광을 그려 올린다.                       圓光,.

거리를 달려가는 밤의 폭행을 엿듣는                                                 暴行,

치껴올린 어께가 이 걸상 저 걸상에서 으쓱거린다.                   

주민들은 벌서 바다의 유혹도 말 다툴 흥미도 잃어버렸다.                     住民

 

깐다라 벽를 숭내 낸 아롱진 잔에서                                                 壁畫,  盞

쥬피타는 중화민국의 여린 피를 드리켜고 꼴을 찡그린다.                       中華民國

‘쥬피타 술은 무엇을 드릴가요?’                                              

‘응 그 다락에 언저 둔 등록한 사상을랑 그만둬.                                   登錄, 思想

빚은 지 하도 오라서 김이 다 빠젔을걸.                                     

오늘 밤 신선한 내 식탁에는 제발                                            

구린 냄새는 피지 말어’.                                                         

 

쥬피타의 얼굴에 절망한 우숨이 장미처럼 히다.                                   絶望

쥬피타는 지금 씰크햇트를 쓴 영란은행 노오만 가                            英蘭銀行, 氏

글세대영제국 아츰거리가 없어서                                                     大英帝國

장에 게란을 팔러 나온 것을 만났다나.

그래도 게란 속에서는

빅토리아 여왕직속의 악대가 군악만 치드라나.                                    女王 直屬, 樂隊, 軍樂,

 

쥬피타는 록펠라 씨정원에 만발한                                                  氏   庭園,

곰팽이 낀 절조들을 도모지 칭찬하지 않는다.                                       節操

 

별처럼 무성한 온갓 사상의 화초들.                                                    思想, 花草,

기름진 장미를 빨아먹고 오만하게 머리 추어든 치욕들.                          恥辱

 

쥬피타는 구름을 믿지 않는다. 장미도 별도……

쥬피타의 품 안에 자빠진 비둘기 같은 천사들의 시체.                             天使,  屍體

거문 피 엉크린 날개가 경기구처럼 쓰러젔다.                                        輕氣球처럼

딱한 애인은 오늘도 쥬피타다려 정열을 말하라고 졸르나                         愛人

쥬피타의 얼굴에 장미 같은 우숨이 눈보다 차다.

땅을 밟고 하는 사랑은 언제고 흙이 묻었다.

 

아모리 따려 보아야 스트라빈스키의 어느  졸작보다도                            拙作

이뿌지 못한 도, 레, 미, 파……인생의 일주일.                                        一週日

은단추와 조개껍질과 금화와 아가씨와                                                 金貨

불란서 인형몇 개 부스러진 꿈 쪼각과……                                            佛蘭西, 人形,

쥬피타의 노름감은 하나도 자미가 없다.

 

몰려오는 안개가 겹겹이 둘러싼 네거리에서는

교통순사 로오랑 씨 로오즈벨트 씨 기타 제씨가                                     交通巡査, 氏

저마다 그리스도 몸짓을 숭내 내나

함부로 돌아가는 붉은 불 푸른 불이 곳곳에서 事故만 이르킨다.                事故,

그중에서도 푸랑코 씨의 직립부동의 자세에 더군다나 현기ㅅ증이 났다.     直立 不動,

 

쥬피타 너는 세기의 아푼 상처였다.                                                     世紀,

악한 기류가 스칠 적마다 오슬거렸다.                                                  惡, 氣流,

쥬피타는 병상을 차면서 소리첬다

‘누덕이불로라도 신문지로라도 좋으니

저 태양을 가려 다고.

눈먼 팔레스타인의 살육을 키질하는 이 건장한                                      殺戮,

대영제국의 태양을 보지 말게 해 다고’                                                 大英帝國

 

쥬피타는 어느 날 아침 초라한 걸레 쪼각처럼 때 묻고 해여진

수놓은 비단 형이상학과 체면과 거짓을 쓰레기통에 벗어 팽개첬다.           形而上學

실수 많은 인생을 탐내는 썩은 체중을 풀어 버리고                                 體重

파르테논으로 파르테논으로 날어갔다.

 

그러나 쥬피타는 아마도 오늘 세라시에 페하처럼                                   陛下

해여진 망또를 둘르고

문허진 신화가 파무낀 폼페이 해안을                                                   神話,海岸,

바람을 데불고 혼자서 소요하리라.

 

쥬피타 승천하는 날 예의 없는 사막에는                                               昇天, 禮儀,

마리아의 찬양대도 분향도 없었다.

길 잃은 별들이 유목민처럼                                                                 遊牧民

허망한 바람을 숨 쉬며 떠 댕겼다.

허나 노아의 홍수보다 더 진한 밤도

어둠을 뚫고 타는 두 눈동자를 끝내 감기지 못했다.

 

≪초판본 김기림 시선≫, 김기림 지음, 김유중 엮음, 100~104쪽.

 

 

김기림

 

바다와 나비

 

아무도 그에게 수심(水深)을 일러준 일이 없기에
흰나비는 도무지 바다가 무섭지 않다.

청(靑)무우 밭인가 해서 내려갔다가는
어린 날개가 물결에 절어서
공주처럼 지쳐서 돌아온다.

삼월달 바다가 꽃이 피지 않아서 서거픈
나비 허리에 새파란 초승달이 시리다.

                                             <출전 : 바다와 나비 1946 >

이 시 또한 이상을 기리며 쓴시로 이해된다.  1939년 4월 <여성>지에 발표된 작품으로 알려진다.

 

하얀 피부에 백구두를 신은 이상  주피터

쥬피타 追放추방

누가 이상을 일본으로 추방시킨 것일까?

 

 흰나비가 되여  쫒기듯 바다 건너 일본으로 갔다. 

꿈도 펼치지 못한체

3월달 동경 경찰서에서 새파란 초생달이 되어  풀려나왔다.

새파란 초생달

혹? 이상의 허리에 고문의 흔적이라도 남아 있었던 것일까?

 

이상의 작품 속에는 여러차레 나비 이야기가 나온다.

나비가 의미하는 바는?

이상과 김기림이 공유한 Allegory알레고리.......

 

관련글  바다와나비

 

나비를 그리는 쥬피터, 메르크리우스 신과 덕의 신  - Dosso Dossi도소 도시作-

 

주피타 추방 해설 바로가기 -작업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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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붕어는 일본제국침략자들

 

                     금붕어

                                                         김기림

 

금붕어는 어항 밖 대기(大氣)를 오를래야 오를 수 없는 하늘이라 생각한다.

금붕어는 어느새 금빛 비늘을 입었다 빨간 꽃이파리 같은

꼬랑지를 폈다. 눈이 가락지처럼 삐어져 나왔다.

인젠 금붕어의 엄마도 화장한 따님을 몰라 볼 게다.

 

금붕어는 아침마다 말숙한 찬물을 뒤집어쓴다  떡가루를

흰손을 천사의 날개라 생각한다. 금붕어의 행복은

어항 속에 있으리라는 전설(傳說)과 같은 소문도 있다.

 

금붕어는 유리벽에 부딪혀 머리를 부수는 일이 없다.

얌전한 수염은 어느새 국경(國境)임을 느끼고는 아담하게

꼬리를 젓고 돌아선다. 지느러미는 칼날의 흉내를 내서도

항아리를 끊는 일이 없다.

 

아침에 책상 위에 옮겨 놓으면 창문으로 비스듬히 햇볕을 녹이는

붉은 바다를 흘겨본다. 꿈이라 가르쳐진

그 바다는 넓기도 하다고 생각한다.

 

금붕어는 아롱진 거리를 지나 어항 밖 대기(大氣)를 건너서 지나해(支那海)의

한류(寒流)를 끊고 헤엄쳐 가고 싶다. 쓴 매개를 와락와락

삼키고 싶다. 옥도(沃度)빛 해초의 산림 속을 검푸른 비늘을 입고

상어에게 쫓겨다녀 보고도 싶다.

 

금붕어는 그러나 작은 입으로 하늘보다도 더 큰 꿈을 오므려

죽여버려야 한다. 배설물의 침전처럼 어항 밑에는

금붕어의 연령만 쌓여 간다.

금붕어는 오를래야 오를 수 없는 하늘보다도 더 먼 바다를

자꾸만 돌아가야만 할 고향이라 생각한다.

 

그들은 오늘부터  쓴 매개를 와락와락 삼키기 시작했다.

 

*  매개: 맛 없는 먹이, 거친 먹이*

 

 

 

 

 

 

 

 

 

 

 

쥬피타 追放   (李箱의 靈前에 바침)

 

 

가거라 새로운 생활로 /김기림 가을의 과수원 /김기림 가을의 태양(太陽)은 플라티나의 연미복(燕尾服)을 입고
감상풍경(感傷風景) /김기림 겨울의 노래 /김기림 곡(哭) 백범 선생(白凡先生) /김기림
공동묘지 /김기림 구절(句節)도 아닌 두서너 마디 /김기림 금붕어
기상도(氣象圖)- 세계의 아침 기차 /김기림 길 - 김기림
깃발 /김기림 꿈꾸는 진주(眞珠)여 바다로 가자 /김기림 데모크라시에 부치는 노래 /김기림
동해 동해(東海) /김기림 두견새 /김기림
만세(萬歲)소리 /김기림 모두들 돌아와 있고나 /김기림
바다 바다와 나비 바다의 향수(鄕愁) /김기림
방(房) /김기림 병(病)든 풍경(風景) /김기림 봄 /김기림
봄은 전보도 안 치고 비 /김기림 산양(山羊) /김기림
새 나라 송(頌) 새해의 노래 /김기림 쇠바퀴의 노래 /김기림
순교자(殉敎者) /김기림 슈―르레알리스트 /김기림 시(詩)와 문화(文化)에 부치는 노래 /김기림
시론(詩論) /김기림 시민행렬(市民行列) /김기림 아롱진 기억(記憶)의 옛 바다를 건너
아프리카 광상곡(狂想曲) /김기림 어린 공화국이여 연가(戀歌) /김기림
연륜(年輪) /김기림 연애의 단면(斷面) /김기림  

 

 시 사랑 시의 백과

 
45 첫사랑 /김기림  김기림 1250 2004-04-15 유용선
44 연애의 단면(斷面) /김기림  김기림 938 2004-04-15 유용선
43 연륜(年輪) (1)  김기림 1599 2004-04-15 유용선
42 아프리카 광상곡(狂想曲) /김기림  김기림 913 2004-04-14 유용선
41 아롱진 기억(記憶)의 옛 바다를 건너  김기림 928 2004-04-14 유용선
40 시민행렬(市民行列) /김기림  김기림 1206 2004-04-14 유용선
39 시론(詩論) /김기림  김기림 851 2004-04-14 유용선
38 시(詩)와 문화(文化)에 부치는 노래 /김기림  김기림 830 2004-04-14 유용선
37 슈―르레알리스트 /김기림  김기림 866 2004-04-14 유용선
36 순교자(殉敎者) /김기림  김기림 860 2004-04-14 유용선
35 쇠바퀴의 노래 /김기림  김기림 988 2004-04-14 유용선
34 새해의 노래 /김기림  김기림 1135 2004-04-14 유용선
33 산양(山羊) /김기림  김기림 866 2004-04-14 유용선
32 비 /김기림  김기림 1027 2004-04-10 유용선
31 병(病)든 풍경(風景)  김기림 848 2004-04-10 유용선
30 방(房) /김기림  김기림 823 2004-04-10 유용선
29 바다의 향수(鄕愁) /김기림  김기림 1101 2004-04-10 유용선
28 모두들 돌아와 있고나 /김기림  김기림 868 2004-04-10 유용선
27 만세(萬歲)소리 /김기림  김기림 738 2004-04-10 유용선
26 두견새 /김기림  김기림 844 2004-04-10 유용선
25 동해(東海) /김기림  김기림 764 2004-04-10 유용선
24 데모크라시에 부치는 노래 /김기림  김기림 783 2004-04-10 유용선
23 꿈꾸는 진주(眞珠)여 바다로 가자 /김기림  김기림 892 2004-04-10 유용선
22 기상도(氣象圖)- 세계의 아침  김기림 1625 2004-04-10 유용선
21 구절(句節)도 아닌 두서너 마디 /김기림 (1)  김기림 833 2004-04-10 유용선
20 공동묘지 /김기림  김기림 953 2004-04-10 유용선
19 곡(哭) 백범 선생(白凡先生) /김기림  김기림 802 2004-04-10 유용선
18 겨울의 노래 /김기림  김기림 1024 2004-04-10 유용선
17 감상풍경(感傷風景) /김기림  김기림 806 2004-04-10 유용선
16 가을의 태양(太陽)은 플라티나의 연미복(燕尾服)을 입고  김기림 1028 2004-04-10 유용선
15 가을의 과수원 /김기림  김기림 902 2004-04-10 유용선
14 가거라 새로운 생활로 /김기림  김기림 970 2004-04-10 유용선
13 연가(戀歌) /김기림  김기림 877 2004-04-10 유용선
12 기차 /김기림  김기림 1049 2004-04-10 유용선
11 깃발 /김기림  김기림 891 2004-04-10 유용선
10 동해  김기림 773 2004-04-10 유용선
9  김기림 803 2004-04-10 유용선
8 어린 공화국이여  김기림 756 2004-04-10 유용선
7 인민공장(人民工場)에 부치는 노래  김기림 737 2004-04-10 유용선
6 일요일 행진곡  김기림 1128 2004-04-10 유용선

 
5 해도(海圖)에 대하여  김기림 708 2004-04-10 유용선
4 우리들의 팔월(八月)로 돌아가자  김기림 746 2004-04-10 유용선
3 새 나라 송(頌)  김기림 790 2004-04-10 유용선
2 봄은 전보도 안 치고  김기림 721 2004-04-10 유용선
1 금붕어  김기림 2267 2004-04-10 유용선

위키 저작[편집]

[편집]

수필[편집]

시론[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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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 김기림 '천재 이상' 멘토 되다 -20100119,조선일보- 현대문학-작가 / 문학의 세계

2010/01/19 08:39

복사 http://blog.naver.com/bebright75/98063339

1930년대 경성은 강렬한 음향과 색채로 충만하고, 상쾌한 만보(漫步)와 새로운 미적 규준, 그리고 동경(憧憬)의 '울트라 모던'이 꽃피는 장소였다. 그 자신 대표적인 '모던 뽀이'였던 시인 김기림은 당시 경성인들이 선망하는 것이 '다이야 반지-양식(洋食)-오후의 산책로-백화점-극장의 특등석-예금통장'이었다고 했다.

'모던 뽀이'들은 상징적 아버지(조선·전통·과거)를 살해하고 스스로 부왕(父王)의 권좌에 앉은 자들이었다. 그들이 아버지에게서 본 것은 미개한 '원주민', 전근대의 '낙후'와 '봉건'의 잔재들이었다. 그것은 '모던'으로 나가는 데 큰 장애물이었다. 따라서 그들이 장애물을 넘어서는 데 아버지의 상징적 살해가 필요했다. 이상은 '나는나의아버지가되고또나는나의아버지의아버지가되고그런데도나의아버지는나의아버지대로나의아버지인데어쩌자고나는자꾸나의아버지의아버지의아버지의…아버지'(시 〈오감도〉 제2호)가 되는 것이냐고 탄식했다. 아버지를 살해하고 그 대신에 '모던'을 손에 쥔 '13인의 아해들'은 '역사의 슬픈 울음소리'를 내는 까마귀들이며, '종합된 역사의 망령'(이상)들이었다.

조선일보 기자 시절의 김기림 시인. 동료 문인이자 문학기자로서 이상의 작품 활동을 도왔다.

시인 김기림은 함경북도 성진에서 가까운 학성군 출신이었다. 1908년생이니 이상보다 두 살 연상이다. 주로 종로서를 외근 구역으로 맡은 조선일보 사회부 기자였던 김기림은 '북구(北歐)적인 선이 굵고 축구감독 같은 풍모'를 지녔고, '근심·우울·센티멘털리즘 등을 전혀 찾아볼 수 없는 명랑성이 농후한 사람'이었다. 신문사 안에서의 별명은 '김모범 청년'이었다.

1930년대 조선일보에는 염상섭·현진건·김동인·채만식·홍기문·함대훈·이원조 등 문인들이 기자로 있었고, 동아일보에는 이익상·주요섭·윤백남·이무영·홍효민·주요한·이은상·변영로·심훈 등이 있었다. 당시 문단의 헤게모니는 지면을 확보하고 있는 이들 문인기자들이 쥐고 있었고, 그 중심에 김기림이 있었다.

김기림과 이상의 우정은 호혜평등 관계이기보다는 이상이 자신의 지지자이자 멘토였던 김기림에게 일방으로 기대는 형국이었다. 일찍이 이상의 천재성을 알아봤던 김기림은 이상에게 "파리 가서 3년간 공부하고 오자. 파리에 있는 슈르 리얼리스트들하고 싸워서 누가 이기나 내기하자"고 제의했다. 이상은 김기림에게 편지를 보내 "형, 도동(渡東)하는 길에 서울 들러 부디 좀 만납시다. 할 이야기도 많고 이일 저일 의논하고 싶소"라고 말했다. 그리고 새 작품을 쓰면 김기림에게 보냈다. "졸작 〈날개〉에 대한 형의 다정한 말씀 골수에 숨이오. 방금은 문학청년이 회로(灰爐)에 돌아갈 지상최종의 걸작 〈종생기〉를 쓰는 중이오. 형이나 부디 억울한 이 내출혈을 알아주기 바라오!"

그 무렵 이상은 거듭되는 카페 경영의 실패, 금홍과의 이별, 나태와 방종, 질병 등으로 몸과 의식이 퇴락하고 있었다. 구인회 멤버인 정인택과 윤태영이 황금정 뒷골목의 어두컴컴한 셋방에 숨어 지내던 이상을 찾아 "지금까지 걸어오던 불건강한 악취미는 청산하고 건강한 생활을 찾으라"고 호소했다. 이상은 얼마 뒤 화가 구본웅의 부친이 경영하던 인쇄소 겸 출판사 창문사에 교정부 직원으로 나가기 시작했다. 김유정이 가끔 나타나 이상의 책상 맞은편에 우두커니 앉았다가 갔다. 김유정이 "해경, 그건 뭐하라는 표시요?"라고 물으면 이상은 "이건 거꾸로 박힌 활자를 바로 세우라는 표시요"라고 답했다.

1936년 7월 김기림의 첫 시집 《기상도(氣象圖)》가 나왔을 때 동북제대에 유학 중인 김기림의 부탁으로 이상이 본문 편집과 표지 장정을 떠맡았다. 책에 쪽수 표기를 하지 말자는 이상의 파격적인 아이디어에 김기림은 "책인데 어떻게 쪽수 표시를 안 하느냐"고 난색을 표했다. 구본웅은 "한 1000부 박아서 팔자"고 했고, 이상은 100부만 찍자고 했다. 결국 200부를 찍고자 했던 김기림의 뜻대로 되었다.

이상은 그해 10월경 동경행을 감행하면서 김기림에게 편지를 썼다. "골맹에 든 이 문학병을―이 익애(溺愛)의 이 도취의… 이 굴레를 제발 좀 벗고 제법 근량 나가는 인간이 되고 싶소. 여기서 같은 환경에서는 자기 부패 작용을 일으켜서 그대로 연화(煙火)할 것 같소. 동경이라는 곳에 오직 나를 매질한 빈고가 있을 뿐인 것을 잘 알고 있지만 컨디션이 필요하단 말이오."

출처 : 시와 비평
글쓴이 : 심은섭 원글보기
메모 :

 

 

 

 

기림 兄 , 편지 좀 주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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