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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 이상이 문학 속에 그린 그림 - 위작 논란과 관련하여
천경자 유족 "'미인도' 저작권 돌려달라" 입력시간 : 2017. 05.16. 00:00
서울시와 갈등…법적대응·저작권 반환 촉구
국립현대미술관이 고 천경자 화백의 작품인지 논란이 계속되는 '미인도'를 전시한 데 대해 천 화백 유족이 저작재산권을 가진 서울시에 법적 대응에 나서거나 저작권을 유족에게 반환하라고 요구했다.
15일 천 화백 유족(차녀)에 따르면 천 화백 작품의 저작재산권을 가진 서울시는 미인도 전시에 법적 대응 하라는 유족측 요구에 대해 "저작재산권자인 서울시보다는 저작인격권의 일종인 성명표시권과 동일성유지권을 유족이 행사할 수 있으므로 저작인격권자인 유족이 권리행사를 할 수 있다"고 답했다.
http://www.honam.co.kr/read.php3?aid=1494860400524724007
烏瞰圖 詩第十號 / 오감도시제10호
李箱이상 1934년 8월 3일 조선중앙일보
나비
찌저진壁紙에죽어가는나비를본다. 찢겨진 벽지에 죽어가는 나비를 본다.
그것은幽界에絡繹되는 그 것은 알 수 없는 세계에 끈기지 않고 연결되는
秘密한通話口다. 비밀스런 통화구다.
어느날거울가운데의鬚髥에 어느 날 거울 가운데의 수염에
죽어가는나비를본다. 죽어가는 나비를 본다.
날개축처어진나비는 날개 축 쳐진 나비는
입김에어리는가난한이슬을먹는다. 입김에 어리는 가난한 이슬을 먹는다.
通話口를손바닥으로꼭막으면서 통화구를 손바닥으로 꼭 막으면서
내가죽으면안젓다일어서듯키 내가 죽으면 앉았다 일어나듯이
나비도날아가리라. 나비도 날아가리라.
이런말이決코밖으로새여나가지는안케한다. 이런 말이 결코 밖으로 새여 나가지 않게 한다.
이하 작업중 입니다.
1940년 작이나 1927~1928년 작 나혜석의 그림으로 추정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실장을 지낸 미술평론가를 포함해 4명의 감정위원이 진품으로 단정하기 어렵다는 의견을 냈다.
국립현대미술관은 1980년 개인으로부터 이 작품을 구입해 현재 소장하고 있다.
그러나 최근 수원박물관 주최의 나혜석 특별전을 계기로 미술전문가 5명이 시중에서 나혜석 작품으로 주장되는 50점을 감정한 결과 ‘무희’의 위작 가능성을 제기했다.
미술평론가 윤범모 가천대학교 교수는 “무대 위의 여성 2명을 소재로 삼은 이 그림은 인체 데생의 기본도 모르는 사람이 그린 3류의 태작”이라고 평했다.
윤 교수는 인체의 비례감과 해부학적 표현이 전혀 반영되지 않았다는 점을 지적했다. 또 아동수준의 얼굴 표현, 질감과 무관한 옷주름의 표현 등은 데생 실력이 없는 아마추어의 솜씨로 보인다고 밝혔다.
더욱이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실장을 지낸 미술평론가를 포함해 4명의 감정위원이 진품으로 단정하기 어렵다는 의견을 냈고, 국립현대미술관이 당시 큐레이터가 부재한 상황에서 작품을 구입한 것으로 알려졌다.
국립현대미술관측은 “구입 당시 큐레이터는 없었으나 전문위원들의 감정을 받아 작품을 구입했다”며 “나혜석의 작품 자체가 희소해 현재로서는 위작 여부를 정확히 판가름하기 힘들다”고 밝혔다.
출처: http://ews21.tistory.com/3584
나는 14살 때 수채화를 그렸다.
수채화와 첫 경험
보아라 나무젓가락같이 야윈 팔목에서는 삼동(三冬)에도 김이 무럭무럭 난다.
김나는 팔목과 잔털 나스르르한 매춘하면서 자라나는 회충같이 매혹적인 살결.
사팔뜨기와 내 흰자위 없는 짝짝이 눈.
옥잠화 속에서 나오는 기술 같은 어제의 화장과 화장 지우는 기술
이에 대항하는 내 자전차 탈 줄 모르는 아슬아슬한 천품
다홍댕기에 불의와 불의를 방임하는 속수무책의 나태
심판이여
----이상 종생기 중에서
「치사한 소녀는」
「해동기의 시냇가에 서서」
「입술이 꽃이 지듯 좀 파래지면서」
「살얼음 밑으로는 무엇이 저리도 움직이는가 하고」
「고개를 갸웃거리는 듯이 숙이고 있는데」
「봄 운기를 품은 훈풍이 불어와서」
「스커어트」아니 아니,
「너무나」아니, 아니,
「좀」
「슬퍼 보이는 붉은 털을 건드리면」그만. 더 이상 진한 말은 안 된다.
나는 한 마디 가련한 어휘를 첨가할 성의를 보이자.
「나붓 나붓」
이만하면 완비된 장치에 틀림없으리라. 나는 내 종생기의 첫 장을 꾸밀 그 소문 높은 珊瑚鞭산호편을 더 확실히 하기 위하여 위와 같은 실체적인 것으로 나로서는 너무나 과감히 치사스럽고 어마어마한 세간살이를 장만한 것이다.
그런데ㅡ 혹 지나치지나 않았나?
천하에 똑 소리 나는 관찰력이 없지 않으니까.!
너무 금색 칠을 아니 했다가는 섣불리 들킬 염려가 있다. 그러나ㅡ 그냥, 어디! 이대로 사용해보기로 하자.
----이상 종생기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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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학생운동의 전개
(1) 광주학생운동의 발단
1031 鄭世鉉, 앞 책, p.1164.닫이는 6월 26일이 맹휴 1주년이 되는 날이기 때문에 학생들은 이 날을 상기하고 행동의 돌파구를 찾으려고 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6월 25일 5학년 학생들은 자치회(自治會)를 한다는 명목으로 수업을 거부하였고, 26일에는 전체 학생들이 동요를 일으켜 그 중 일부가 수업을 받지 않고 학교당국과 신경전을 벌이다가 하교하고 말았다.032 梁東柱, 앞 책, p.96.닫기
1929년 10월 30일 오후 5시 30분 경 광주에서 통학생을 실은 하행통학열차가 나주역(羅州驛)에 도착, 통학생들이 삼삼오오 짝을 지어 개찰구로 나갈 때 광주중학교 4년생 복전수삼(福田修三:후꾸다 슈우죠)·말길극기(末吉克己:스에요시 가쯔미)·전중(田中:다나까) 등이 광주여자고등보통학교 3년생인 박기옥(朴己玉)·이광춘(李光春)·이금자(李錦子:혹은 李岩城) 등을 ‘센징〔鮮人〕’이라 조롱하며 특히 복전이 박기옥의 댕기머리를 잡아 다니며 희롱하니 여학생들은 항거도 못하고 어쩔 줄 모르고 있었다. 이 당시의 사정을 박기옥의 4촌동생이며 광주고등보통학교 1년생이었던 박준채(朴準埰)는 다음과 같이 술회하였다.
이 때 차장이 달려와 싸움을 말리고 박준채외 수명의 광주고등보통학교 학생과 복전수삼의 통학승차권을 압수했고 이 싸움을 보고있던 광주일보(光州日報)의 일본인 기자가 복전의 말만 듣고 한국인 학생이 무조건 나쁘다고 욕설을 퍼부었으며, 일본인 승객들도 박준채를 향해서 “선인(鮮人)주제에 건방지다”느니 “선인학생이 잘못했다”느니 하면서 욕설과 폭언을 퍼부었다. 이를 들은 한국학생들은 대항도 하지 못하고 울분을 삼킨 채 국가없는 민족의 설움을 다시 한 번 되새기게 되었다.037 朴準埰, 앞 글, 참조.닫기
그러나 통근열차의 발차시간이 거의 다 되었을 때 광주중학교 5년생 4·5명이 광주고등보통학교생 정세면(鄭世勉)에게 시비를 걸자 정세면은 기차에 타고 있던 광주고등보통학교 통학생들에게 이 사실을 알렸고, 한국인 학생들은 모두 기차에서 하차하여 개찰구를 경계선으로 서로 대치하게 되었다.039 朝鮮總督府警務局,『光州抗日學生事件資料』(風媒社, 1979), p.131.닫기
학교에 돌아온 한국학생들은 5학년 을급(乙級) 급장(級長) 노병주(盧秉柱)와 통학생 단장(團長) 채규호(蔡奎鎬) 등이 이 날 사태를 보고하고 의견을 교환하려 했으나 분노에 복받친 학생들은 선후대책이 불가능한 것을 느끼고 일단 해산하기로 하고 장곡천(長谷川)의 인솔로 송정리통학생은 귀가하고 안본(岸本:기시모도)의 인솔로 나주통학생도 모두 귀가하였다.041 鄭世鉉, 앞 책, p.169.닫기
그러나 이날은 양교 학생들 간에 별다른 충돌없이 넘어가고 드디어 11월 3일을 맞이하였다.
(2) 광주학생운동의 시위화
043 金成植, 앞 책, p.203.닫기
044 朴準埰, 앞 글, 참조.닫기
이들 일본인 학생들은 신사참배 후 귀로에 광주천(光州川)부근에서 광주고등보통학교생 최쌍현(崔雙鉉)을 단도로 코와 안면을 찔러 부상을 입히고 도주해 온 자들이었다. 우체국 앞에서의 싸움은 광주고등보통학생들이 수적인 열세에도 불구하고 일본인 학생들을 구타하니 이들은 형세 불리함을 느끼고 광주역 쪽으로 도주하였다. 이에 광주고등보통학교생들은 이들을 쫓아 광주역으로 달려가 순찰 중이던 광주서(光州署) 순사 5명과 광주중학교 복정(福正:후꾸마사) 교유를 제치고 플랫트홈으로 도망친 일본인 학생들을 닥치는 대로 때려 눕히니 이들은 두려워서 자기학교로 도주하기 시작하였다.047 梁東柱, 앞 책, p.108.닫기
이리하여 광주역 광장은 한일학생 간의 결투장으로 변하였다. 현장에 몰려있던 군중들도 한국학생들이 싸우는 모습을 보고 ‘왜놈 죽여라’고 함성을 지르면서 학생들의 사기를 북돋아 주었다.
이 때 양측의 학생 수는 각각 200여 명 내외로 수에 있어서는 비등하였으나 싸움은 한국학생들이 유리하여 일본인 학생들은 차츰 도망가기 시작하였다.
이에 경찰의 강력한 제지와 양교 교사들의 교섭으로 동시 퇴각이 결정되어 일단 험악한 상태는 가라앉았다.
강당에 집합한 학생들은 노병주의 사회로 사건경위의 보고와 사후대책을 논의, 일인중학교를 완전히 타도하여야 한다는 강경론이 지배적이어서 가두시위투쟁을 벌이기로 하였다.
전남견산(全南繭産) 600만석 돌파경축대회에 참석했던 수 많은 도민들도 이에 호응하여 시위군중은 3만 명이라고 당시 언론기관이 보도하고 있다.
시위대열은 두번에 걸쳐 광주중학교를 목표로 돌진하였으나 일경의 강력한 제지에 부딛쳐 성공은 거두지 못했으나 광주시내는 완전히 한국학생들로 메워져 일본인들은 겁에 질려 폐문철시하였고, 광주서(光州署)도 자체 경찰력으로는 부족하여 인근지방의 경찰을 동원하여 초비상사태에 돌입하였다.
이와 같은 검거는 일경의 편파적인 행위였다. 한국학생 70명에 비해 일본학생은 7명을 검거했으나 그것도 얼마 지나지 않아 모두 석방했던 것이다.
그 중 신간회는 허헌(許憲)·김병로(金炳魯)·황상규(黃尙奎) 등이 11월 9일 광주에 도착, 백정 광주고등보통학교장과 좌등(佐藤:이도) 광주중학교장을 방문하여 사건진상을 조사하고 관계기관을 방문하여 사건의 불공평한 처리를 엄중 항의하였다.
제1차 시위운동 직후인 11월 4·5일 경 광주고등보통학교출신 장재성(張載性)은 재광주사회단체(在光州社會團體)의 간부인 장석천(張錫天)·강석원(姜錫元)·박오봉(朴五鳳)·국채진(鞠採鎭) 등과 회합하여 학생투쟁지도본부를 결성하고 각 학교의 책임자를 정하고 다음과 같은 격문의 초안을 작성, 학생들에게 보냈다.
058 大邱覆審法院刑事部,『1930年 刑控 第176, 177號』참조.닫기
059 주 58)과 같음.닫기
그러나 광주농업학교에서는 수업종을 신호로 조길룡(曹吉龍)의 제창과 김남철(金南哲)·최정기(崔貞基) 등 10여 명의 선도로 전교생이 일제히 교문을 박차고 격문을 뿌리고 구호를 외치면서 광주형무소로 진격하였으나 광주고등보통학교 부근에서 급히 출동한 일경에 의하여 저지당하고 말았다.061 光州學生獨立運動同志會編, 앞 책, p.58.닫기
062 『東亞日報』, 1929년 12월 28일자「號外」.닫기 이와같은 제2차 광주학생 시위운동이 있은 후 일제는 광주시내 중등교육기관에 휴교조치를 내리고 시위운동에 관한 일체의 보도금지령을 내렸다. 이러한 조치는 동년 12월 28일까지 취해져 그 사이 한국인들은 광주학생운동의 진상을 파악하지도 못하였고 이에 따라 전국의 민심은 동요되고 일제의 악랄한 정책에 대한 분노는 높아만 갔던 것이다.
동월 16일에는 제3차 시위운동을 준비하다가 발각되어 48명이 무더기로 퇴학당하였으며 광주여자고등보통학교 학생들도 백지동맹·비밀결사 등 시위에 관련되어 40여명이 퇴학당하는 등 한 번 피어났던 불꽃은 꺼질 줄 모르고 피어오르기만 하였다.
박준채(朴準埰)옹이 7일 오전 11시55분 광주보훈병원에서 숙환으로 타계했다
동아일보 기사입력 2001-03-07 18:51 최종수정 2001-03-07 18:51
나주역 사건으로 광주고보에서 퇴학당한 뒤 3개월간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이후 양정고보를 졸업한 후 일본으로 건너가 와세다대에서 경제학을 전공한 그는 광주로 돌아와 60년대 초부터 조선대 교수로 재직, 이 대학 법정대학장과 대학원장 등을 역임했다.
그는 대학강단에서 물러난 뒤 광복회와 광주학생독립운동 동지회에서 활동하다 88년 국민훈장석류장과 90년 건국훈장애족장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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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부처 팔아먹고 살고, 이승훈이는 이상 팔아먹고 (0) | 2016.04.03 |
시인 이상은 화가다.
1910년 한일합방이 되던 해에 서울 사직동에서 태어나 줄곧 서울에서 자란 서울 토박이였다.
그는, 보통학교(신명학교) 시절 이상은 살색이 희고, 국어보다는 그림을 좋아했고,
체육을 싫어하는 아이, 그리고 담배 '칼표' 껍질에 나오는 도안을 거의 그대로 모방해 그림을 그리고,
길가에 버려진 화투 목단 10끗자리를 그대로 그려 동네에서 자랑이 되기도 한 아이로 알려져 있다.
보성고보 당시 동창들의 회고에 따르면 이상은 그림을 매우 잘 그렸고,자주 '난 화가가 될 거야'라고 말했다고 한다.
또한 보성고보 재학 시절에 이상은 교내 미전에서 1등상을 수상했고,
한국 최초의 서양화가였던 당시 미술 교사 고희동은 이상의 재주를 알고 극진한 사랑을 베풀었다고 한다.
경성고등공업학교을 1929년에 졸업한 이상은 조선총독부 내무국 건축과 기수로 근무하게 된다.
그는 서대문구 의주통에 있는 전매청 공사를 비롯하여 몇 군데의 설계를 입안, 현장 감독을 맡으며 일하게 된다.
직장 생활을 하면서도 이상은 1929년 12월에는 조선건축학회 기관지인 <조선과 건축>의 표지 도안 현상 모집에 1등과 3등으로 당선되었고,
1931년에는 <조선과 건축>에 몇 편의 일문시들을 발표했으며, 제9회 조선미전에 서양화 <자화상>으로 입선한다.
-해피캠퍼스 (88shfwk) 시인 이상의 일대기 중에서-
이상 문학 특강 / 박남철
나는 부처 팔아먹고 살고, 이승훈이는 이상 팔아먹고 살고,
송 머시기 는 이승훈이 팔아먹고 산다! 라는, 당대의 한 말씀을 남겨주셨다는,
그 어떤 큰스님의 또 다른 한 말씀이,
서기 2011년 11월 8일 저녁 6시 30분
무렵, 신사동의 엠지타워 3층 ‘유심 세미나실’에서 시작된 문학 강연회에서 또다시 터져나오시고야;
말았던, ‘거디었던’, 것이다.
90년 뒤 육목단 화투 그림으로 이상을 판다.
화려한 지상최대 장례식으로.....
그래서일까 ?
이상은 자신의 終生記종생기가 아직도 않 끝났다고 외친다.
구본웅이 그린 화가 이상
제발 그만 좀 팔아 먹어라!
치사한 짓거리 그만 뭠춰라!
落 張 不 入
나는 지금 " 딜라일라" 노래가 듣기 싫어지는 아픔을 격고 있다.
화가 이상이 문학 속에 그린 그림 - 위작 논란과 관련하여 (0) | 2017.05.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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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 강좌_한국 모더니즘 문학의 탄생_이상(李箱)의 시와 소설 (0) | 2016.04.02 |
이상과 나혜석의 만남
1927년 봄에 구본웅은 이상을 충무로에 있는 ‘메이지’ 제과점에서 만났다.
지금까지 ‘메이지’ 또는 ‘모리나가’ 같은 최고급 제과점에 갈 때에는 항상 그의 아버지나 숙부를 따라 갔었다.
그러나 대학생이 된 뒤 이제는 어른으로 행세하고 싶은 마음에 두 사람은 그 곳에 마주앉았다.
그들이 커피와 곰보빵을 들며 한참을 떠들고 있을 때 뜻밖에도 정월 나혜석이 들어왔다.
구본웅은 놀라서 얼떨결에 인사를 했다. 옆에 있는 이상은 홍당무 얼굴을 하고 있었다.
정월은 남편(金雨英)이 만주지방 안동현 부영사의 임기를 마치고 이번 봄에 귀국해서 동래에 있는 시가에 있는데 곧 세계일주 여행을 떠난다고 했다.
그녀는 ‘제6회 조선미전’에 출품하기 위하여 며칠 전에 상경했다며 우연히 구본웅을 만난 것을 무척 반가워했다.
작년 말에 둘째 아들을 낳아 2남1녀의 어머니가 되었지만 만 31세인 그녀의 얼굴과 몸매에서는 아직도 사람들을 휘어잡는 매력과 교태가 넘쳐흘렀다.
구본웅은 한때 미술을 가르쳐준 나혜석에게 이상을 소개하며 그가 미술과 문학에 특출한 재능이 있다고 말했다.
그녀는 과자와 빵을 사러 왔는데 자기도 커피 한잔 마시고 가도 되겠느냐고 물었다.
뜻밖에 그들은 동석하게 되었다. 그녀는 구본웅에게 동경이나 파리로 유학을 가보라고 격려했다. 이상에게는 너무 미남이라 그를 따라다니는 여자가 많겠지만 일부일처에서 벗어나서는 안된다고 덕담을 하면서 그의 등을 자상하게 두드려 주었다.
그때 이상의 얼굴에는 번갯불이 내려친 듯 전율이 스쳤다.
이상은 그녀에게 화답하듯 작년에 정월이 신문과 잡지에 발표한 ‘내가 어린애 기른 경험’ ‘생활개량에 대한 여자의 부르짖음’ ‘그림을 그리게 된 동기와 경력과 구심’ ‘미전 출품 제작 중에’ ‘내 남편은 이러하외다’ 그리고 소설 ‘원한’을 읽었다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정월은 어떻게 그런 것을 그렇게 잘 기억하고 있느냐며 이상의 기억력과 독서량과 정보력에 놀라는 표정이었다.
“이상 김해경이라고 했지요? 아호가 무척 멋있는데….”
“몇 년 전에 ‘신여성’에 발표하신 ‘강명화의 자살에 대하여’라는 글에 쓰신 정월(晶月)이란 아호를 보고 글과 아호가 무척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던 일이 있습니다.”
이상이 그답지 않게 가느다란 목소리로 응답했다.
“아! 그 글도 읽었어요? 이상!”
이상은 서산에게처럼 자기에게도 말을 낮추어 줄 것을 간청했다.
“그럼 그렇게 하자. 김해경 군. 서산도 강명화에 관한 글을 읽었니?”
“저는 읽지 못했어요. 어떤 내용인지 간단히 말씀해 주세요. 정월 선생님.”
기생 강명화의 죽음
강명화는 기생이었다. 그녀는 사랑하는 애인에게 “나는 결코 당신을 떠나서는 살아 있을 수가 없고 당신은 나하고 살면 사회와 가정의 배척을 면할 수가 없으니 차라리 사랑을 위하고 당신을 위하여 한 목숨을 끊는 것이 옳소”라는 유서를 남겼다.
1923년 6월15일 ‘동아일보’는 ‘康明花(강명화)의 자살’이란 제목 하에 10일 하오 11시경에 약을 먹고 11일 하오 6시 반에 고개를 땅에 박고 별세하였다는 간단한 기사를 내보냈다.
나혜석은 ‘동아일보’에 기고한 글에서 20시간 가까이 죽음을 향하여 고통하고 신음했을 것을 생각하니, 전신이 벌벌 떨리고 소름이 쭉 끼치고 눈앞이 아물아물했다고 묘사했다.
나혜석은 기생의 처지와 사랑을 연민의 정으로 이해하려고 애쓰면서 강씨의 자살 동기에 동정할 점이 많다고 지적했다.
기생 강씨는 비운을 견디다 못해 정조(貞操)의 순수함을 보이기 위해, 자기 정신의 결백을 드러내기 위해, 세태에 분노하기 위해 자살을 감행했다고 정월은 이해했다. 그러나 정월은 자살 행위에 대해서는 맹렬히 비판했다.
정월은 동기가 어떻든 자살은 생명의 존귀와 그 생명 역량의 풍부를 자각한 현대인이 취할 방법이 아니며, 어떻게 해서든지 살려고 할 때 연애의 철저함과 정조의 순수함과 정신의 결백함이 실현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결론적으로 정월은 우리 여자들이 건설적이고 긍정적이며 적극적으로 삶을 펼쳐 나가자고 외쳤다.
“서산! 그리고 이상! 기생이나 선비나 부자나 백정이나 모두 인간으로 대접받아야 하고 인간답게 사는 세상을 우리가 빨리 만들어야 해. 물론 여자나 장애인이나 노약자도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드세.”
그때 이상이 엉뚱한 말을 했다.
“서산은 기생 채경이를 좋아해요.”
“춘곡 고희동이 그렸던 모델 채경이 말이야?”
정월이 물었다.
“아니에요. 선생님. 이상이 괜히 그래요. 저는 저의 몸에 콤플렉스가 있기 때문에 예쁘고 건강한 여자면 누구든지 좋아해요. 이상은 재능이 탁월한 여자가 첫째 조건이고 다음으로 아름다움이 중요하대요.”
“내 목숨은 헐값이 아니다”
그 말에 이상의 얼굴에는 홍조가 번지기 시작했다.
“아름답고 재능이 있는 여자라면 바로 난데…”
정월의 농담에 이상은 자신의 생각을 들킨 듯 눈알까지 빨개지고 말았다.
“선생님은 혹시 자살하고 싶은 충동이 드신 경우는 없으세요?”
이상이 물었다. 이상은 얼마 전에 자살 충동을 느꼈다며 구본웅에게도 똑같은 질문을 했던 적이 있다.
“좌절하거나 심한 상처를 입었을 때 절망한 사람은 자살 충동을 느끼게 되지. 특히 예술가들치고 자살 충동을 느껴보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예술가란 현실적이지 않은 저 높은 이상에 목표를 설정하고, 그 이상에 도달할 수 없는 현실에 좌절할 뿐만 아니라
그 이상을 달성할 능력이 자신에게 없음에 절망하며 사는 인간이지. 그래서 자살 충동이 많을 수밖에 없어. 그러나 우리 목숨은 결코 그렇게 헐값이 아니야. 내 목숨이되 내가 끊을 아무 권리가 없는 것이지.
내 몸은 결코 내 소유가 아니야. 우리 어머니 것이고 우리 조상의 것이며 내 사회의 물건이지.
내 생명이 계속되는 최후까지 내 힘을 다하여 최선을 다해야지.
남과 같이 행복하고 만족한 생활을 못하기로 크게 자포자기할 것이 무엇이야.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한다면 또한 이것이 행복이 아닐지….”
나혜석은 그들의 화제가 자살 충동 이야기로 바뀐 것을 의식했는지 화제를 바꾸려고 했다. 그녀는 말을 이었다.
“기생이나 천민 중에도 나보다 더 재능이 있고 똑똑한 여자가 많을 것이야. 그들에게 더 아름답고 순결한 사랑도 있을 수 있고….
기생이나 작부가 되면, 남자들과의 성 관계는 밥 먹는 일이나 다름없는 비감정적이고 일상적인 것에 불과할 거야. 그들에게는 직업상의 특성을 인정해 주어야 하지 않을까.
아니 식사와 성교는 동물의 본능적 행동이야. 물론 사회와 제도를 위하여 인간은 절제되고 규제되어야 하겠지만 지금처럼 정조와 신분에 대해 그렇게 호들갑을 떨어야 할까.
언젠가 군들이 그런 여자들을 만나면 기생 강명화처럼 좌절과 상처를 입지 않도록 유념하게. 제도와 관행도 자네들이 나서서 개혁해야 하네. 우선 우리부터 실천하는 용기와 헌신이 있어야 해.
기생도 천민도 떳떳하게 선비의 본부인이 될 수 있고 사람다운 사랑과 순결을 인정받을 수 있는 세상이 빨리 와야 하네. 어느 누구도 차별받지 않고 차별당하지 않는 그런 사회 말이야.”
일본어로도 작품을 써라 나혜석은 조혼과 축첩 등에 관하여도 쉴 새 없이 자기 의견을 털어놓으며 그들을 교육하려 했다. 그녀는 교사와 예술가 그리고 모범생과 모험가 사이를 숨돌릴 틈 없이 오락가락했다. 숙녀로 보이다가 어느새 투사로 바뀌고, 교태를 부리다가 갑자기 근엄한 표정으로 분위기를 반전시키기도 했다. “정월 선생님. 선생님 속에는 여러 모습이 함께 나타나는 것 같네요. 자아가 여럿이라고나 할까요?” 이상이 조심스럽게 정월의 눈치를 살피며 말을 이었다. “그래! 이상. 바로 보았다. 사람에게는 자아가 하나뿐이 아니지. 누구에게도 일관된 하나의 자아는 없어. 사람들이 하나라고 오해할 뿐이지. 사람의 생각과 느낌과 행동양식은 시시각각 변하게 마련이지. 한 몸뚱이 속에 악하고 착한 온갖 면이 함께 있는 거야. 어느 면이 얼마만큼 언제 어떻게 나타나느냐에 따라 범죄인도 되고 영웅도 되고 호인도 되고 악인도 되고 샌님도 되고 탕아도 될 수 있는 것이야.” 이상은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나혜석은 이제 일어나야 할 시간이라면서도 일어날 움직임은 보이지 않았다. 이상이 화제를 바꿨다. “정월 선생님은 그림으로 나타내는 자아와 글로 나타내는 자아가 서로 다르신 것 같아요. 그림으로 보면 매우 서정적인 분 같으신데, 글로 보면 매우 투사적이세요. 그렇죠?” 정월은 대답 대신에 그렇다고 수긍하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이상의 비범한 눈빛에 오히려 끌려들어가는 듯했다. 이상은 말을 이어갔다. “저는 요즘 시를 열심히 쓰고 있어요. 물론 습작이지요. 그런데 선생님. 조선어로만 글을 써야 될까요?” “일본어나 영어나 불어로도 쓸 수 있으면 더 좋지.” 정월의 이러한 답변에 구본웅은 이의를 달았다. 조선에서 일어로 시와 소설을 쓰면 현재는 물론 후세에까지 친일파 문인으로 몰릴 가능성이 있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정월의 생각은 달랐다. “그것은 가설일 수 있겠지만 편협한 생각이야. 편협한 여론에 밀려 창작력을 소실하면 안되지. 우리가 조선 사람만을 위해, 또는 조선 사람에게만 보이려고 예술을 하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예술은 영원한 것이고 국가나 사회라는 벽을 뚫고 갈 보편성이 있어야 하는 것이야. 이상에게 어학 능력만 있으면 일어고 영어고 중국어고 러시아말이고 간에 모든 언어와 예술수단을 다 동원하여 표현하게.” 이상의 얼굴은 점점 더 밝아져 갔다. 이상은 이미 일어로 시를 많이 습작해 놓았다고 밝혔다. 앞으로 적어도 5개 외국어를 유창하게 말할 수 있도록 어학 공부를 열심히 하겠다고 어깨를 으쓱거렸다. “정월 선생님. 조선어는 영어나 중국어나 일본어에 비해서 세련도가 많이 떨어져요. 개념화할 수 있는 어휘도 너무 적고 쓰임도 잘되지 않아요.” 오늘에야 진짜 문학도를 만났다 구본웅은 이상의 발언에 놀랐다. 세종대왕이 만드신 우리 글이 얼마나 좋은 언어인데 하면서,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이상은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을 창제한 역사는 수백 년이 넘었어도 그것을 문학적으로 다듬어 본격적으로 쓰기 시작한 것은 20세기에 들어서 이인직(李人稙)의 ‘血(혈)의 淚(누)’ 이후이기 때문에, 문학적 언어로서의 한글은 아직 어린이 수준이라고 주장했다. 정월도 이에 맞장구를 치며 오늘에야 진짜 문학도를 만났다고 기뻐했다. 정월과 이상은 조선어를 조선에서의 단순한 통용어 수준에서 학문어와 예술어로 개발하고 발전시키자고 의기투합했다. 그리고 정월은 이상과 서산에게 조선어로만 글을 쓰지 말고 일본어는 물론 다른 나라 언어로도 글을 발표하라고 재차 격려했다. 정월 자신은 우선 조선에서의 남녀평등과 여권을 주장하는 일이 급해서 조선어로 자신의 주장을 펼치고 있지만, 이상과 서산은 조선만의 문학에서 탈피해 아시아권 전체, 아니 세계적인 작가로 인정받기 위하여 우선 일본어로라도 글을 많이 쓰라고 주문했다. 정월의 힘있는 조언에 이상은 크게 고무되었다. 그러나 구본웅은 이상과 정월의 정서가 이해되지 않았다. 언젠가는 해방될 것이다. 그럴 때 그들이 남긴 일본어 작품에 어떤 평가가 내려질 것인가? 친일 문학인으로 낙인찍힐 것을 염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들은 그러한 편견과 몰이해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이미 이상의 시공간은 식민지 시대에 태어난 일부 반일 민족주의 지식인들이 그들의 생명이 마감될 때까지 완고하게 지켜간 시간적인 편견과 조선반도라는 지역적인 편협성을 뛰어넘고 있었기 때문이다. 드디어 정월 나혜석은 시계를 보더니 많이 늦었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상은 정월 앞에서 한동안 넋 나간 장승처럼 그대로 서 있었다. 구본웅이 이상의 그런 모습을 다시 본 것은 몇 년 후 그가 금홍(錦紅)을 처음 만났을 때라고 기억했다. ‘제6회 조선미전’이 1927년 5월25일부터 3주일간 남대문통 조선총독부 도서관에서 열린다고 4월에 발표되었다. 작품 접수 마감일은 5월17일 오후 5시까지였다. 작업실을 같이 쓰는 서양화가 이창현은 구본웅에게 조선미전에 함께 출품하자고 졸랐다. 구본웅은 단호히 거절했다. 장애인이라고 관립학교 입학도 거절당했는데 또다시 관청에서 주관하는 조선미전에 출품하라고? 그는 관청 근처에는 얼씬도 하지 않겠다고 자신과 굳게 약속했으니 절대 출품하지 않겠다고 분명히 말했다. 이창현은, 구본웅의 작품 실력이 조선미전의 특선급이라고 김복진도 장담했고 또 이렇게 밤잠을 안자고 수개월간 열심히 만들었는데 사장시킬 수 있느냐며 언성을 높였다. 그러나 구본웅은 관청의 인정을 받기 위하여 조각을 하는 것이 아니라며 콧방귀도 뀌지 않았다. 이창현은 할 수 없이 마감 날인 5월17일 오전에 자기 작품만 출품했다. 그리고 작업실에 돌아와 완전히 탈진해 쓰러진 구본웅을 발견했다. 그는 인력거를 불러 급히 병자를 데리고 병원으로 갔다. 그리고 다시 작업실로 달려왔다. 그리고는 구본웅이 근래 만든 몇 개의 조각 작품 중에서 하나를 골랐다. 그는 시간에 쫓겨 헐떡이며 조선미전 접수창구로 달려가 작품을 내밀었다. 그때 비로소 신청서의 작품명 난에 무엇이라고 써야할지를 두고 고민에 빠졌다. 그는 구본웅이 그 해에 계속하여 얼굴 습작을 했다는 것을 상기하고 ‘얼굴 習作(습작)’이라고 적어 넣었다. 이렇게 하여 조선 최고 권위의 미술전람회에 정말로 습작이 출품되는 파격이 벌어졌다. 또한 구본웅의 생애 전체에 걸쳐 관청에서 주관한 전람회에 단 한번 출품하게 된 마땅치 않은 경력이 만들어지게 된 것이다. 불쾌한 수상소식 5월21일 오전 10시에 심사 결과가 발표된다고 하여 이창현이 총독부 도서관에 다녀왔다. 이창현은 총 1416점이 응모하여 310점이 입선했는데, 서양화는 810점 중 177점이 입선되고 조소 분야는 25점이 응모하여 9점이 입선되었다고 떠벌렸다. 특선은 서양화, 동양화, 조소, 서예, 사군자 분야를 모두 합쳐 29점뿐이고 조선인 12명이 특선에 올랐는데, 놀랍게도 무감사로 입선했던 나혜석이 이번에는 특선에서 탈락하는 이변이 생겼다고 흥분했다. 자기는 이번에도 입선에 머물렀다고 어깻죽지를 늘어뜨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구본웅은 그날 저녁에야 비로소 김복진에게서 조소 분야에서 조선인 한 명이 특선상을 받게 됐는데 수상자가 바로 구본웅 자신임을 통보받고는 경악하고 말았다. 그는 조선미전 기간 내내 불쾌감을 감출 수가 없었다. 앞으로 다시는 조선이건 일본이건 관청 전람회에 얼씬거리지 않고 진취적이고 전위적인 영원한 야인(野人)이 되겠다고 다짐했다. 그렇지만 구본웅의 수상은 조선미전이 개최된 이래 조소 분야에서 김복진 다음으로 조선인의 작품이 특선에 입상한 것으로 조선미술사 등에 기록으로 남아 있다. 1928년 여름 김복진이 일제 경찰에 잡혀갔다는 소식이 날아왔다. 공산당 간부라는 혐의를 받았다고 했다. 구본웅은 당혹감을 느꼈다. 그가 보기에 김복진은 성실하고 착한 휴머니스트이고 유능한 이상주의자였으며 열기에 넘치는 민족주의자였다. 무엇보다 그는 구본웅에게 자상하고 사려 깊은 스승이었다. 그러나 구본웅의 집안 어른들은 김복진 주변에 있는 사회주의 성향의 예술인들이 구본웅에게 접근하는 것을 차단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구본웅도 스스로 새로운 전환과 변신이 필요하다는 것을 절감하고 있었다. 김복진에 대한 실망감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는 조소작품 활동에 넘기 힘든 한계를 절감했다. |
무작정 떠난 동경유학 지난 2년 간 구본웅은 조소(彫塑)의 매력에 푹 빠져 있었지만 건강이 나쁘고 힘이 약한 장애인이 도전하기에는 너무나 힘든 분야였다. 그래서 조소를 포기하고 미술을 본격적으로 공부하기로 결정했다. 무엇보다도 김복진 쇼크에서 빨리 벗어나기 위하여 1928년 가을에 무조건 일본으로 떠나기로 했다. 1928년 9월 구본웅은 부산으로 가서 일본행 여객선을 탔다. 동경에 도착하여 누구나 쉽게 들어갈 수 있는 가와바타(川端) 미술학교 양화부에 등록했다. 교육은 주로 석고 데생이었다. 그러나 무조건 선생을 따라서 실습하는 도제식(徒弟式) 교육에 싫증이 났다. 그 당시 일본에 유학하는 미술학도들은 대부분이 가와바타 미술학교를 거쳐 관립학교인 동경미술학교에 입학해서 아카데믹한 고전파와 인상파의 아류를 뒤쫓았다. 그러나 구본웅은 스스로 정한 원칙에 따라 처음부터 관립학교는 안중에도 없었다. 그는 전통적인 굴레에서 벗어나 새롭고도 실험적인 조형예술에 몸을 던지고 싶었다. 그래서 자신에게 맞는 미술기법을 찾아내기 위하여 이론 공부부터 하기로 작정했다. 1929년 봄 그는 일본대학 예술전문학부 미학과에 입학해 정식으로 예술이론 공부에 매달렸다. 그 동안 공부하던 미술실기와 달리 학구적인 분위기가 마음에 들었다. 이후 1년간 예술이론을 본격적으로 공부한 경험이 평생 동안 예술이론의 발전과 그 동향에 깊은 관심을 갖게 했으며 미술비평가로서 미술평론과 미술론을 집필하는 바탕이 되었다. 1929년 여름방학이 다가왔다. 구본웅의 아버지는 구본웅의 혼처가 정해졌으니 방학 다음날 서울로 돌아와 일주일 후에 결혼식을 올리라고 편지로 통보했다. 규수는 종1품 벼슬을 지낸 강희맹(姜希孟)의 후손으로, 경기도 연천군으로 낙향하여 현재는 가세가 기울었지만 명문가의 후예라고 힘주어 쓰셨다. 그런 여자가 왜 꼽추에게 시집을 오느냐고 물을 것 같았는지, 혼인은 다 하늘의 인연으로 맺어지는 것이지 사람의 힘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했다. 결혼하는 날에야 비로소 신부 이름이 강임(姜妊)이라는 걸 알았을 정도로 구본웅은 그녀에 관해 아는 바가 없었다. 혹시 자신처럼 장애인이 아닌가 눈여겨보았지만 그녀의 얼굴과 체형은 정상이었다. 결혼 첫날밤 그는 착하게 생긴 새하얀 피부의 건강한 여자를 안았다. 그녀는 한없이 떨고 있었다. 그는 신부에게 어떻게 꼽추에게 시집왔느냐고 물었다. 그녀는 부모가 정해준 대로 따랐다며 고개를 떨구었다. 그는 아버지가 그녀의 친정에 논밭을 주었음을 그날 처음 아내로부터 들었다. 한없는 미안함과 측은함, 열등감과 당혹감 그리고 분노와 처절함이 뒤섞여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그는 신부를 부둥켜안고 울먹이면서 신혼 첫날밤을 지샜다. 신부는 오히려 꼿꼿이 앉아 그를 격려하고 감싸는 의연함을 보였다. 조선 최초의 야수파 화가 신랑 구본웅은 외아들로서 가계를 잇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점과 결혼의 의미를 이해했다. 아들을 많이 낳아 대를 이어 잘 기르는 것이었다. 숙부 말씀이 서양에서도 결혼이란 성교와 육아의 제도화라 하지 않았던가! 물론 사랑이 결혼에 중요한 전제가 된다고 했다. 그러나 지금 그의 신부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아들을 낳는 일이었다. 이를 위한 도구 내지 기계 노릇을 열심히 해야 한다. 그런데 그는 도구나 기계나 원료가 되기 싫었다. 서로 첫눈에 반한 격정적인 사랑에 빠지고 싶었다. 아름다움에 관한 그의 집착과 사랑은 남달랐다. 그는 아름다움에 대해서는 첫눈에 반했던 기생 채경이 이하로 눈높이를 내려본 적이 없었다. 그의 눈은 이상형에 고정되었다. 1930년 봄 구본웅은 혼자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태평양미술학교에 입학하여 유화(油畵)를 전공했다. 그동안 그는 일본대학 미학과에서 익힌 미술이론을 바탕으로 자신의 내부에 잠재한 자학적인 저항정신을 표출하는 작품들을 만들기 시작했다. 당시 일본 화단의 주류는 인상파에서 야수파를 포함한 넓은 개념의 표현주의로 옮겨 가고 있었다. 야수파(포비즘)는 극한적으로 단순화한 형태와 선명한 원색적 색조 그리고 대담하고 격정적 필촉으로 화면을 형성하는 특색을 지녔다. 그는 유럽에서 발아해 일본 화단에 이입된 이 대담하고 거칠면서도 선명한 야수파의 기법에 매료되었다. 바로 이러한 미술기법이 자신과 사회에 대한 콤플렉스를 배설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아차렸다. 그는 새로운 화법으로 1930년 동경 태평양미술전 콩쿠르에서 1929년에 이어 2년 연속 수상하는 영광을 안았다. 더욱이 1930년 가을 구본웅은 ‘이과회미술전람회(이과미전 또는 이과전 또는 이과회전)’에 입선했다. 이과(二科)란 전통적인 서양화의 화풍을 일과(一科)라 하는 데 반해 진취적 경향을 가리키는 용어였다. 제국미전이 1과 중심으로 운영되는 관전(官展)인 반면 이과미전은 제국미전과 쌍벽을 이루는 2과 중심의 민전(民展)이었다. 조선의 언론들은 조선의 청년 수재 구본웅이 조선사람으로는 처음으로 이과미전 양화부에 입선했다고 보도했다. 3년 후인 1933년에는 김종태와 신흥휴가, 1934년에는 김종태, 1935년에는 김환기가 이과미전 입선 기록을 이어갔다. 이과미전에 입선하고 작품이 특출하다는 소문이 나자 구본웅에게는 일본 각지에서 연애편지가 날아들었다. 같은 하숙집에서 매일 만나는 여학생들도 데이트하자고 열광했다. 그 녀들에게는 그가 불구거나 기혼인 것이 문제가 되지 않는 것 같았다. 오직 특별한 재능과 유명인사라는 점에 호기심을 보이며 애정과 성적인 관심을 나타냈다. 그러나 전람회 소식을 듣고 여러 장의 편지를 보내고 일본까지 찾아왔던 한국 신여성은 등이 굽은 그를 보고는 말 한마디 없이 도망가버렸다. 1930년 가을에 이과회 소속 화가들 중 야수파와 표현주의파에 속하는 화가들이 결속하여 독립미술가협회를 창설했다. 1931년 1월에는 ‘제1회 독립미술가협회전람회(독립미전 또는 독립전)’를 개최했다. 야수파에 심취해 있던 구본웅은 독립미전에도 출품해 조선인으로는 유일하게 입선했다. 5년이 지난 1936년에는 유영국, 1937년에는 김만형이 조선인으로서 독립미전 입선 기록을 이어갔다. |
전위예술 경향의 새로운 화풍 동아일보는 구본웅에게 1931년 6월에 동아일보 사옥에서 개인전을 열어주겠다고 제의했다. 서울에 있는 신문사가 개인전을 주최하고 주관하는 것은 극히 이례적이었다. 그는 이 개인전에 49점을 출품했다. 작품 대부분이 일상의 주변에 있는 정물화와 풍경화였다. 그러나 전위예술의 여러 경향을 섭렵한 새로운 화풍이라는 소문이 퍼져서 예상 밖으로 관람객이 넘쳐났다. 개막식 날은 이화여전과 숙명여전에 재학중인 신여성도 많이 찾아왔다. 그들은 작가가 키 작은 선생님이라고 알았다. 월간 종합지 ‘東光(동광)’이 1931년 5월호에 구본웅을 “일본의 이과전과 독립전에서 새로운 기치를 휘두른 키 작은 선생님”으로 소개했기 때문이다. 그 표현이 꼽추란 의미로 전달되지 않고 아담한 체구를 지닌 동경 어느 학교의 미술교사로 조선인들에게 알려졌다. 신여성들은 작가를 앞에 내세워 소개하라고 요청했다. 꼽추가 앞에 나서자 그들 중 몇 명은 두 말 않고 자리를 떴다. 구본웅은 그녀들이 당황하는 걸 보며 오히려 긍지와 재미를 느꼈다. 자신감이 노력과 성취로 만들어지고 그 자신감은 여유와 긍지와 새로운 각오로 축적되는 것을 체험하는 순간이었다. ‘제8회 조선미전’에서 특선했던 김주경(金周經)은 ‘구본웅 개인전’에 관한 평을 ‘조선일보’에 다음과 같이 발표했다. “이제까지 조선에 소개되지 않았던 쉬르리얼리즘(초현실주의)을 처음으로 소개한 것이다. 연(然)이나 씨가 발표한 작품 전부가 쉬르라는 것은 아니다. 그중에는 큐비즘(입체파)과의 중간층과 포비즘(야수파)과의 중간층 내지 익스프레셔니즘(표현주의), 또는 임플레이셔니즘(인상파)의 중간층에 속하는 작품들도 병진되었음을 부기하여 둔다.” 그밖에 많은 사람들이 구본웅이야말로 우리나라 최초의 아방가르드(전위) 화풍의 선구자라며 대단한 관심을 나타냈다. 동아일보 개인전이 끝난 후 그를 ‘운명의 화가’ 또는 ‘숙명의 화가’ 또는 ‘서울의 로트렉’라고 부르는 사람이 늘어났다. 그들은 꼽추가 된 그의 운명을 안타까워하면서도 바로 그 운명이 그를 뛰어난 화가로 만들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는 ‘노력하는 예술가’일 뿐이었다. 열심히 정진하는 것이야말로 어떠한 역경에서도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삶을 살려는 의지를 지탱해주는 원동력임을 일찌감치 깨달았던 것이다. ‘동아일보’ 개인전이 끝나고 일본으로 돌아간 구본웅은 1933년 3월 초 태평양미술학교 본과를 졸업하고 서울로 돌아왔다. 한편 폐병이 심해진 이상은 2월 말에 총독부를 그만둔 후 습기로 눅눅하고 퀴퀴한 냄새로 가득 찬 골방에 이불을 뒤집어쓰고 누워있었다. 구본웅은 요양을 위해 그를 황해도 백천온천으로 데려갔다. 이상은 그곳에서 금홍(錦紅)을 만나게 되는데 그녀를 6월초에 개업한 제비다방의 마담 겸 내연의 처로 맞아들였다. 백천온천에서 먼저 서울로 돌아온 구본웅은 1933년 4월28일부터 휘문고보 강당에서 열린 ‘제12회 서화협회전람회(서화협회전 또는 協展)’에 ‘실제(失題)’란 작품을 출품했다. 서화협회전은 조선미전에 맞먹는 민전이었다. 전시된 작품은 대부분 서양화였다. 시인 겸 비평가 김기림(金起林)은 편석촌(片石村)이란 필명으로 ‘조선중앙일보’에 비평문을 기고했다. 그는 구본웅에게 깊은 관심을 나타냈다. 그는 “지극히 불리한 환경에도 그만한 경지까지 개척해 나간 구본웅의 예술에 대한 정열에 탄복한다”며, “구본웅의 작품 ‘실제’야말로 조선미전의 관료주의에 대한 반대로서 서화협회전의 빛나는 존재가치를 또렷하게 인식토록 해주는 작품”이라고 평가했다. 그는 마지막으로 “조선화단의 ‘아카데미즘’이 그에게 아무리 돌을 던질지라도 구본웅씨는 엄연히 우리 화단의 최좌익이다. 적막한 고립에 영광이 있어라”라고 끝을 맺었다. 김기림은 조선의 전통적 관학(官學)파와 관전(官展)파 화가들이 아무리 무어라 하더라도 우리나라 최초의 야수파 화가이고 최초·최첨단의 전위화가로서 구본웅에게 계속 정진하라는 격려를 보낸 것이었다. 구본웅은 매일 ‘낙랑팔라’와 제비다방에 들러 예술인들과 담소를 나누는 등 활발하게 활동했다. 그는 1933년 4월에 오늘날 유네스코회관 근처에 있는 건물 2층을 빌려 경성정판사(京城精版社)를 개업했고 9월에는 가까운 거리에 있는 소공동에 골동품 갤러리 우고당(友古堂)을 열었다. 경성정판사에서는 주로 극장 포스터를 디자인하고 인쇄해주는 일을 했으며 우고당에서는 미술품을 감정하고 좋은 골동품을 발견했을 때 일본인이 아니라 조선인 수집가를 연결해 주는 역할을 했다. 이는 장애를 극복하고 적극적이고 긍정적이며 개방적으로 살려는 노력의 일환이었다. 또한 아버지로부터 경제적으로 독립하려는 몸부림이었다. 우고당 3층에 아틀리에를 마련했는데 교통이 좋아서 낮에는 친구들의 집합소가 되었다. 그는 특별한 재주꾼들과 교류를 즐겼다. 늘 자진해서 각종 모임에 참석하고 주변 사람들과 융합하려고 애썼다. 어떤 모임에 가도 장애인이 왔다는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 항상 쾌활하고 명랑한 얼굴로 사람들을 대했으며 재담과 농담을 잘했다. ‘꼽추 멋쟁이’라는 별명 시인 고은(高銀)은 ‘이상 평전’에서 구본웅의 본가(本家)와 그의 일면을 이렇게 표현했다. “‘낙랑팔라’에서 만나는 일을 제외하면 그들이 매일 만나는 곳은 다동에 있는 구본웅가의 광활한 대가(大家) 사랑의 화실이었다. 그 화실 겸 거실은 당시의 시인, 작가, 비평가, 화가, 심지어 영화감독까지도 모여들어서 문예살롱의 기분이 짙었으며 그 본웅가(家)를 다옥정(多玉亭)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본웅은 화가답게 그의 꼽추에도 불구하고 서구적인 멋 가락을 잘 나타내어서 다옥정(多屋町) 기생들도 ‘꼽추 멋쟁이’ ‘꼽추 도련님’이라는 별명으로 수군거릴 정도였다.” 구본웅은 외출할 때면 양복 정장을 차려 입었다. 그런데 양복 어깨에 각을 만들고 구부러진 짧은 등을 돋보이게 하여 꼽추인 외모가 더욱 두드러져 꼴불견이었다. 그래도 그의 아버지는 격에 맞는 의관과 모자를 고집했다. 그래서 그는 최고급 양복을 격식에 맞게 제대로 갖추어 입었지만, 양복 정장이 귀하던 시절에 서양 상류층의 복장에 익숙지 않은 일반인들에게 이 예술가의 모습은 우스꽝스럽게만 보였다. 1934년 5월에는 동경미술학교 출신 7명과 구본웅이 모여 목일회(牧日會)를 창립했다. 이들 8명은 조선미전의 개혁을 주장하는 인물들이었다. 이런 뜻을 나타내기 위하여 이들은 조선미전 출품을 거부하고 ‘제13회 조선미전’을 며칠 앞둔 5월16일부터 일주일간 화신백화점 5층에 있는 화신화랑에서 ‘제1회 목일회전’을 개최했다. 회원 8명이 46점을 출품했는데 구본웅의 작품이 14점이나 됐다. 그러나 그는 처음으로 비평가로부터 혹평을 듣는 뼈아픈 경험을 하게 되었다. A생(生)이란 가명으로 ‘조선일보’에 기고된 ‘목일회 제1회 양화전(洋畵展)을 보고’란 비평문은 “구본웅의 활달한 작품이 14점이나 나와 구본웅 개인특별전을 하는 듯한 느낌이 들 정도”라고 표현했다. 그는 “구본웅의 작품들이 마치 사군자 휘호회에서 보이는 단숨의 붓놀림 같은 화풍 탓으로 보는 사람의 눈을 현란하게 하지만 현실에 발붙이지 않은 채 구름 위에 그 어느 세계를 건설하려는 데카당한 일면이 있다”고 신랄하게 비판했다. A생은 ‘얼굴’에 대해 “시각의 예리함을 보여주어 작가의 관점을 잘 드러낸 작품”이라고 칭찬하면서도 “몹시도 대담한 구상과 색채에 비해 선이 무기력해 보인다”는 아쉬움을 나타냈다. 그리고 그의 초현실주의 작품에 대해서는 “(구본웅의) 괴로운 인생을 그 어느 숭고하고 신비스러운 환상의 세계에까지 유도”하려는 것이라고 평가하면서도 “현실이 없는 초현실”이라고 꼬집었다. |
구본웅 비평시대가 열리다 1934년 5월이 가까워오면서 정월 나혜석은 ‘제13회 조선미전’에 대한 비평 요청이 오기를 고대하고 있었다. 그녀는 제1회부터 제11회까지 11년간 아홉 차례 출품하여 아홉 차례 입선했고 다섯 차례나 입상했다. 또한 그중 세 차례는 조선인으로는 최고상을 받았다. 출품하지 못한 경우는 구미를 여행한 2년과, 그리고 작품 접수 기일 변경을 제대로 전달받지 못한 제12회 등 세 차례 뿐이었다. 그녀는 누구보다도 조선미전에 많이 출품했고 그때까지 입상과 최고상을 가장 많이 받은 화가였다. 1933년에는 출품하지 못한 대신에 ‘매일신보’의 요청으로 ‘美展(미전)의 인상’을 발표했다. 그녀는 앞으로도 계속해서 미술비평을 하고 싶었다. 어느 모로 보나 누구보다도 자신이 미술비평 자격과 능력을 갖추었다고 믿었다. 그런데 개막일이 며칠 지나도록 어느 언론에서도 비평 요청이 없었다. 구본웅은 전년도 10월에 ‘靑邱會展(청구회전)을 보고’란 비평문을 ‘동아일보’에 투고했었다. 이 비평문이 남다르다는 소문이 났다. 그래서 여러 신문사에서 ‘제13회 조선미전’에 대한 비평문을 써달라고 요청했다. 구본웅은 첫번째로 요청을 받은 ‘조선중앙일보’에 ‘제13회 조선미전을 봄’을 5월30일부터 6월6일까지 연재했다. 그리고 ‘월간매신’ 6월호에도 비평문을 게재했다. 각 신문사의 비평문 중에서 구본웅의 글이 제일 뛰어났고 또한 관심의 대상으로 떠올랐다. 9월에는 ‘조선일보’가 그에게 미술계에 대한 한 해의 소감을 써달라고 요청했다. 그 해에 10명 남짓한 비평가들이 ‘일본화풍의 맹목적 본뜨기’와 ‘겉핥기식 향토색’에 대하여 꾸짖고 나섰지만 이들은 언론에 각각 한 번 정도의 비평을 썼다. 그러나 구본웅과 프로예맹(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 출신의 정하보(鄭河普)는 각기 비평을 세 편이나 쓰는 적극성을 보였다. 물론 정하보와 구본웅의 생각은 달랐다. 구본웅이 주장하는 향토성은 소재 따위로 민족성을 해석하는 수준을 뛰어넘는 것이었다. 조선 풍속이나 조선의 자연을 그리는 것만이 향토성이 아니며 조선인 생활의 모던화를 표현하고자 하는 것도 향토성이라고 주장했다. 그래서 조선 전래의 생활풍습, 언어행동, 풍토와 역사 따위에 바탕을 두는 직관이 나타나면 그것이 향토성 아니냐고 물었다. 당시에 일본제국주의 정부는 조선에서 민족성이란 용어를 쓰지 못하게 했으며 조선총독부는 문화정책에서 지방색이란 용어를 강조했다. 이에 반발한 조선인들은 향토성 또는 향토색이란 표현을 선호했다. 구본웅의 비평에 대하여 소설가 이태준(李泰俊)이 지원사격을 하고 나섰다. 그는 “백화점에 태극선 화문석 같은 것을 늘어놓으면 조선 맛이 난다. 그러나 한 예술품이 가진 정신이나 맛은 그러한 조선 물정이나 묘출하였다고 해선 조선적 작품은 될지언정 조선미술이 되는 것은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이어서 그는 “요즈음 조선심(朝鮮心)이니 조선정조(朝鮮情調)니 하고 그것을 고조하는 예술가들”이 있지만, “내면적인 것을 잊어버리고 외면적인 것에만 관심을 기울이는” 예술가들이 많음을 안타까워했다. 파란 몰고온 이혼고백장 나혜석은 이제 미술비평에 구본웅 시대가 왔음을 직감했다. 나혜석은 미술작품에서만이 아니라 미술비평에서도 이미 설자리가 없다는 것을 절감해야 했다. 그래도 자신이 제일 아끼는 제자인 구본웅이 그 자리를 차지한 것에 긍지와 보람을 느끼고 위안을 삼으며 눈물을 머금었다. 나혜석은 다시 남녀평등과 사회정의를 위한 공격에 나섰다. 그녀는 ‘삼천리’ 1934년 8월호와 9월호에 장문의 ‘이혼고백장’을 연재했다. 자신의 10년간 결혼생활과 4년 전 이혼 과정의 적나라한 갈등과 비극적인 심경을 솔직하게 밝히고, 조선에서 여성들에게만 일방적으로 강요하는 정조 관념을 비판하면서 앞으로도 계속적인 자아발견 그리고 정진과 재기를 다짐하는 글을 발표했다. 당시로서는 사회적으로 엄청난 파문을 일으키는 사건이었다. 더욱이 그녀는 이혼의 도화선이었던 친일적인 사회지도자 최린(崔麟)을 상대로 파리에서의 정조 유린에 대한 거액의 위자료를 청구하는 소송을 9월19일에 제기했다. 이 사실이 1934년 9월20일자 언론에 보도되어 남성중심의 조선 사회는 또다시 엄청난 충격에 휩싸였다. 다방 운영의 적자와 금홍의 가출 등으로 어깻죽지가 처진 이상은 오후 늦게 구본웅의 우고당 작업실에 들르거나 밤에 만취해 다옥정 구본웅의 집으로 찾아오는 일이 잦아졌다. 그럴 때면 이불에 오줌을 싸고 방에 토하기 일쑤여서 구본웅의 부모는 이상을 싫어했다. 그래도 구본웅은 이상이 좋았다. 꼽추와 결핵환자인 두 사람만의 동병상련 의식은 서로 어렵고 힘들 때 아픔을 승화시켜 황량한 마음을 훈훈하게 녹여주는 화롯불 같았다. 구본웅은 이상의 얼굴을 초상화로 남겨야겠다고 생각했다. 그의 얼굴은 바로 억압과 암울의 시대를 사는 예술인의 모습이었다. 구본웅은 이상의 얼굴을 통해서 식민지 시대를 사는 지성인들의 모습을 상징화하기로 했다. 1935년 3월3일 13시, 구본웅은 우고당 작업실로 이상을 불렀다. 원래 이상은 오래 전부터 초상화를 그려달라고 수없이 졸랐다. 그러나 구본웅은 남의 초상화 그리는 일은 철저히 거절했다. 이번에도 그의 초상화를 그리는 것이 아니라 권태와 조소와 자학과 반항과 분노와 초탈을 폭포줄기처럼 쏟아내는 젊은이를 나타내려 한다고 작품의도를 설명했다. 구본웅은 그에게 다음날부터 매일 모델로 나와줄 것을 부탁했다. 이상은 그 작품을 자기에게 주는 것을 조건으로 응했다. 구본웅은 우울하고도 비탄에 잠긴 표정을 강조하기 위하여 바탕 화면을 푸른 색조로 짙게 처리하겠다고 이상에게 양해를 구했다. 이상은 이번에는 황달이 아니라 ‘청달’에 걸렸다는 조소를 받게 될 것 같다며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제비다방에 걸려있는, 이상 자신이 그려 1931년도 ‘제10회 조선미전’에 입선했던 ‘自畵像(자화상)’에는 누런 색이 강조되었다. 그래서 친구들로부터 황달에 걸렸다는 놀림을 자주 받았던 것이다. 구본웅은 그에게 파이프를 비스듬히 물고 골똘히 생각에 잠겨있는 표정을 지으라고 주문했다. 이상은 평소에 파이프 담배를 피우지 않았다. 실제로는 구본웅이 파이프 담배를 물고 다녔는데, 구본웅은 그런 모습에서 일상성에 조소를 퍼부으면서 반항 의식을 분출하는 한 지성인의 내면세계를 표출해 내려고 안간힘을 썼다. ‘우인상’은 구본웅의 자화상 구본웅은 친구 얼굴에서 그의 내면을 읽고, 나아가 불우한 한 시대의 내면까지 묘출하려고 매일 이상을 불러 각기 다른 포즈를 취하게 했다. 이상은 왜 그림은 빨리 안 그리고 요리조리 포즈만 취하게 하면서 사진 모델 취급을 하느냐고 성화가 대단했다. 그 과정에서 구본웅은 단순한 친구의 모습이 아닌, 한 시대의 상징과 자신의 내면을 나타내려 했다. 그리고 그러한 시대적, 신체적 조건에 적응하면서도 이를 권태롭게 수용하고 조소하며 도전하는 자신의 내면 풍경을 나타내려고 열중했다. 마침내 구본웅은 이상의 눈매를 더욱 날카롭게 하고 파이프를 비스듬히 물고 있는 얼굴을 더욱 창백하게 그림으로써 젊은 지성인의 반항적이고 괴팍한 이미지를 포착했다. 모든 것이 가소롭다는 표정으로 담배를 피우고 있는 이상의 얼굴은 그 개인의 권태를 자각하려는 내면의 구현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한 시대의 어둠을 향한 지성인의 시니컬한 대응이기도 했다. 권태롭고 조소적인, 그러면서 세상을 초탈한 듯한 젊은 지성인이 격한 터치와 어두운 색조의 응결로 그려졌다. 이 시대 의식 있는 예술가들이 지녔던 자학과 조소와 도전, 이러한 내면 풍경을 극명하게 묘출할 수 있는 작품을 만들어 갔다. 구본웅은 격렬한 터치와 어두운 톤이 작품을 지배하게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구성적 의지를 표출하려고 노력했다. 사실상 이러한 점이 다른 야수파, 표현파 계열 화가와 구분되는 구본웅만의 예술 세계였다. 그래서 이 ‘友人像(우인상)’은 바로 구본웅 내면의 자화상(自畵像)이기도 했다. 이렇게 하여 구본웅의 대표작 중 하나이자 우리나라에서 널리 알려지게 된 유화 초상화가 이 세상에 태어나게 되었다. 작품을 완성했을 때 구본웅은 인력거에 이 작품을 싣고 제비다방으로 갔다. 제비 다방이 개업했을 때는 이상의 ‘자화상’과 구본웅이 그려 기증한 ‘裸婦(나부)와 靜物(정물)’ 두 작품이 벽에 걸려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이상은 회칠한 사면 벽에 주르 뢰나르의 그림틀을 몇 개나 더 걸어 놓았다. 이상은 주르 뢰나르의 복사그림 하나를 떼어내고 ‘우인상’을 걸었다. 그 자리에서 구본웅은 이상에게 창문사 인쇄공장에서 하루에 몇 시간씩 교정과 편집 일을 도와줄 수 있느냐고 조심스레 물었다. 그의 자존심을 건드리지 않으려는 배려였다. 그러나 사실은 그를 경제적으로 돕고 싶은 생각이 앞섰다. 이상은 다방 일도 있고 해서 하루에 3시간 정도면 아르바이트를 할 수 있다며 대단한 관심을 보였다. 그래서 하루 3시간 근무에 일급은 1원40전으로 정했다. |
백단화와 보헤미안 넥타이 ‘주식회사 창문사(彰文社)’는 구본웅의 아버지가 1934년 9월에 ‘주식회사 조선기독교창문사(朝鮮基督敎彰文社)’를 인수해 설립한 회사였다. 이 회사는 기독교 관련 서적과 YMCA 등 기독교 기관의 간행물을 인쇄했는데 당시로는 최신 인쇄시설을 완비했다. 이 회사는 월남(月南) 이상재(李商在)가 황성신문을 그만둔 후 전국서점 주인들의 주식 참여(이상재 명의로 주식을 발행했음)와 하와이 동포들로부터 모은 기부금, 그리고 고종 황제의 하사금 등을 합쳐 설립한 민족자본 기업이었다.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성경을 인쇄하여 출판한 공로도 남겼다. 그러나 해가 갈수록 적자가 누적되었다. 이를 고심하던 초대 사장 이상재는 2대 사장 양주삼의 동의를 받아 구본웅의 아버지인 구자혁(具滋爀)에게 인수하도록 설득했다. 젊은 시절에 황성신문 기자와 종합잡지 ‘開闢(개벽)’ 편집장을 역임했던 구본웅의 아버지는 적자가 아무리 크더라도 조선의 문화계를 위해서라면 감수할 가치가 있다고 판단했다. 그는 이 회사를 인수한 후 ‘조선기독교’란 이름은 빼고 그간 약자로 불리던 ‘주식회사 창문사’란 간판을 쓰기로 결정했다. 창문사 인수로 문화예술계에서 구본웅에 대한 기대는 더욱 커졌다. 주변에서는 그를 ‘창문사 사주(社主)의 아들’로 부르기 시작했다. 이상도 구본웅의 아버지가 창문사를 인수한 것을 그렇게 좋아할 수가 없었다. 그는 이상이 원하는 원고는 무조건 무료로 출판해 주기로 다시 약속했다. 이상은 이때의 생활을 단편소설 幻視記(환시기)에 이렇게 적어놓았다. “나는 내 고독을 일급 일원사십전과 바꾸었다. 인쇄공장 우중충한 속에서 활자처럼 오늘도 내일도 모레도 똑같은 생활을 찍어내었다.” 총독부에 근무할 때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그렇게 깔끔하고 단정하게 차려입던 미남 키다리 이상은 이때부터 더욱 봉두난발, 작소(雀巢)머리와 고슴도치 수염, 그리고 일주일에 한 번쯤 세수한 듯한 어릿광대로 변해갔다. 거기에 백단화(白短靴)와 보헤미안 넥타이를 매고 단장을 휘두르면서 외출할 때에는 퇴폐와 문란의 상징으로 주위의 눈총을 받았다. 이상이 순차적으로 개업했던 다방 제비’ ‘鶴(학)’ ‘69’ ‘麥(맥)’은 구본웅의 계속적인 재정후원에도 완전히 망해버렸다. 이를 딱하게 여긴 구본웅은 이상에게 하루 8시간씩 창문사에서 일하도록 배려한 후 아예 출판부장으로 대우해 주었다. 1935년 12월 초순, 또다시 장기 가출중인 금홍 때문에 속을 썩이던 이상이 구본웅과 저녁 외출을 나왔다. 우연히 길에서 희곡 ‘화가와 모델’을 발표한 양백화(梁白華)와 마주쳤다. 이상은 쓸쓸해 보이는 그를 위해서 술 한잔 사지 않겠냐고 구본웅을 충동질했다. 그래서 그들은 양백화가 단골로 가는 다방골에 있는 ‘민순자집’으로 향했다. 그런데 세 사람 뒤를 아이들이 졸졸 따라오면서, “곡마단이 왔다”고 떠들어댔다. 양백화가 소리를 질러서 아이들을 쫓았다. 그러나 아이들은 계속 따라왔다. 아이들이 세 사람을 곡마단패로 본 데는 까닭이 있었다. 이상은 차린 복장과 활동사진 변사 같은 말투 때문에 곡마단 요술쟁이로 보였고, 구본웅은 땅에 잘잘 끌리는 망토 같은 인버네스 외투에 높은 중산모를 썼으니 원숭이 조련사쯤으로 보였을 터였다. 그런데 설상가상 구본웅보다 두 배나 크고 팔다리 네 개가 각각 따로 흐느적거리며 걷는 꼴이 흡사 로봇 같은 양백화가 한몫 끼었으니, 이 해괴한 세 사람을 보면 아이들이 아닐지라도 곡마단 단원들로 보았을 것이다. 그들 세 사람이 밤늦게 술집을 나서서 몇 걸음을 옮겼을 때, 또 다른 술집을 나서는 김복진 일행을 만났다. 이들을 공손하게 배웅하는 기생의 자태가 구본웅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바로 채경이었다. 춘곡 고희동 작품에 모델을 섰던 그 아름다운 채경이가 미소를 머금은 채 통영칠기의 대가(大家) 강창원(姜蒼園)과 서양화가 박상진에게 눈웃음을 치고 있었다. 구본웅은 심장이 일순간 멎어버린 듯 그곳에 한동안 장승처럼 서 있었다. 여인상의 주인공 장성옥과의 만남 이상은 금홍이 없는 골방으로 돌아오자 연말의 고적감에 휩싸였다. 그래서 시 ‘紙碑(지비)’ 속편을 쓰기 시작했다. 그는 시의 첫 줄에 “ 어디갔는지모르는안해”라고 띄어쓰기까지 생략할 만큼 숨가쁜 탄식을 내뿜었다. 다음날 그는 그 원고를 월간지 ‘中央(중앙)’에 급하게 우송했다. 1936년 새해 새아침을 장식하는 1월호에 게재해 주기 바란다는 편지를 첨부했다. 돌에 쓴 비문이 아니라 종이에 쓴 비문 시 ‘紙碑’가 ‘천재시인 이상은 세상 사람들이 비웃는 술집작부 출신 금홍을 일시적인 동거녀가 아니라 사랑하는 정식 아내로 삼았다’는 사실을 영원히 이 세상에 남겨주기를 기원하면서…. 이상의 귀에는 정월 나혜석이 들려주던 기생 강명화의 자살에 관한 이야기가 자장가처럼 밀려들기 시작했다. 1936년 새해 벽두부터 구본웅은 강창원에게 연말에 보았던 그 미녀를 모델로 소개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때 그 자리에 함께 있었던 박상진은 그녀가 강창원의 애인이라고 넌지시 알려주었다. 이틀 후 강창원은 장성옥(張成玉)이란 이름의 그 미녀를 데리고 구본웅의 작업실로 찾아왔다. 동양인으로는 보기 드물게 큰 눈과 작은 얼굴, 맑은 눈빛과 안면의 입체감, 처녀만이 가질 수 있는 육색과 가냘픈 체구 그리고 넘치는 건강미에 구본웅은 완전히 뇌쇄당하고 말았다. 그는 강창원과 장성옥에게 여인 상반신 그림 두 장을 그리겠다고 제안했다. 하나는 한복을 입고, 또 하나는 상반신 나체로 얼굴과 가슴 부위를 그리는 계획을 설명하고 동의를 받았다. 술집에서 ‘예쁜 옥(玉)’이라고 불린다는 만 19세의 이 미녀는 그의 작업실 분위기에 깊은 관심을 나타냈다. 강창원이 돌아간 다음, 옥이는 웃옷을 모두 벗고 의자에 앉았다. 구본웅은 양손을 머리 위로 올려 잡으라고 주문했다. 오래 견디기 어려운 포즈였다. 그녀는 발레리나와 같은 동작으로 움직였다. 실제로 그녀는 조선춤을 아주 잘 춘다고 했다. 구본웅은 그녀의 아름다움에 넋을 잃었다. 이 곱고 깨끗한 균제의 아름다움과 기름진 육체를 19년 동안 곱게 감추어 두었다가 이 작은 화인(畵人)에게 풀어 헤쳐 내맡긴다는 것은 너무나 아까운 일이라고 생각했다. 머리카락은 옻칠같이 검고 그 눈은 벨벳마냥 보드랍고 그 살결은 진주처럼 빛났다. 기계로 쭉 뽑아낸 듯 미끈한 어깨 곡선이 서기를 뿜고 있었다. 황홀한 젖가슴 구석구석에서 파동치는 신비의 율동을 보았다. 구본웅의 귀는 분명히 청옥을 덮어놓은 듯한 젖가슴에서 심장의 고동도 들었다. 놀랐다. 이처럼 어려운 포즈를 태연하게 연출하는 대담성과 인내심에. 모델을 보고 마음이 이렇게 들떠본 경험이 없었다. 그러나 구본웅의 그림은 이런 아름다움을 곱게 그려내지 못했다. 그 여인을, 그의 마음과 정신을 미치도록 흔들고 혼란스럽게 하는 주체로 화폭에 담기 때문이었다. 그의 눈앞에는 모델 장성옥뿐만 아니라 기생 채경과 이상의 금홍, 그리고 정월 나혜석도 어른거렸다. 그래서 벌거벗은 여인의 상반신을 화면 가득히 펼쳐 놓은 이 ‘女人像(여인상)’은 ‘우인상’에 비하여 더욱 격렬한 터치와 왜곡된 상형으로 그려갔다. 여인의 얼굴보다는 가슴을 강조하고 볼과 입술을 붉은 색으로 칠하여 여인의 성적인 특성이 노골적이면서도 난폭하게 드러났다. 내적으로 불안한 에너지가 막을 길 없어 폭발하듯 분출되고 있었다. 자신으로부터 파동치는 격정의 소용돌이가 그림 속으로 용암처럼 흘러들어갔다. “처음으로 사람대접, 여왕대접 받았다” 추하게 일그러진 여인상을 통해 감히 접근할 수 없는 장애인의 절망과 분노 그리고 시대적 아픔과 도전을 표현했다. 그러한 아픔과 절망, 분노와 도전이 그림 속에서 위기의식에 편승되어 나타났다. 그래서 이 ‘여인상’은 어느 특정한 여인을 대상으로 해서 그린 것이 아니라 작가의 주관에 의한 극단적인 표현태도를 보였다. 이제까지 조선의 예술과 미학에서 성전처럼 취급되던 전통적 가치와 예술관을 죄 부정하고 현대성이라는 조형의 실험이 작품에서 잘 드러나도록 노력했다. 특히 두 팔을 머리 뒤로 돌리고 있는 나부(裸婦)의 대담한 변형과 강렬한 색채 그리고 거친 선과 필촉은 색채 면에서 이전의 야수파 작가들이 보이던 밝고 경쾌한 색채 대신 무겁고 어두운 색채 위에 부분적으로 밝고 강렬한, 짧은 터치의 색채를 대치시켜 표현했다. 그래서 긴장감을 더 두드러지게 했다. 뿐만 아니라 굵고 거친 선으로 여인의 상체 윤곽을 표현하여 화면에 강렬한 느낌을 주는 것은, 작가 자신의 내면적인 리얼리티를 강하게 표출하려는 의도에서 비롯됐다. 특히 인체 표현의 기본형에서 벗어나 검은 색조의 배경에 부분적으로 강조되어 있는 붉은 색의 강렬한 대비는 이 ‘여인상’ 속에 숨어있는 구본웅 자신의 자화상(自畵像)이리라. 옥이는 이 흉측해 보이는 그림이 그려지는 것을 보고도 전혀 불평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는 아파하고 절망하며 분노하면서 그림 그리기에 도전하는 불구자에게 흥미를 느끼는 듯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녀는 작업실 청소도 하고 비서 노릇도 하면서 스스럼없이 구본웅을 대하기 시작했다. 그보다 10년 연하인 그녀가 하는 행동이 그보다 훨씬 어른스러웠다. 이상이 백천온천에서 스물한 살 된 금홍을 보고 서른한 살 먹은 사람보다도 낫다고 감탄하던 것이 구본웅에게도 이제야 실감 있게 다가왔다. 그는 그동안 짝사랑으로 가슴에 담아왔던 기생 채경을 닮은 미녀와 작업실에 함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더할 수 없는 행복감에 도취했다. 그림이 거의 완성되어 갈 즈음 그녀는, 그간 경험했던 모든 남자가 자신을 돈만 주면 데리고 놀 수 있는 술집여자로 대했는데, 지난 한 달간 처음으로 이곳에서 사람대접은 물론 여왕대접을 받았노라고 말했다. 특히 항상 반말만 듣고 살던 그녀는 처음으로 존대어로 예우받는 것을 신기해하면서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그들은 손을 잡고 같이 울었다. 그들은 서로의 아픔을 달래주고 감싸주었다. 영과 영이 마주치는 섬광은 찬란하고 황홀했다. 그들은 서로 상대방의 모자람을 보태주고 절망을 덮어주자고 약속했다. 이렇게 하여 구본웅의 인물화 중에서 ‘우인상’과 함께 대표작으로 알려진 ‘여인상’이 태어나게 되었다. 이 두 작품은 국립현대미술관에 소장되어, 서산 구본웅이 ‘근대미술의 큰 봉우리’일 뿐만 아니라 ‘현대미술의 첫 봉우리’라는 평가를 오늘날의 많은 관람객들과 미술애호가들에게 전해 주고 있다.
http://egloos.zum.com/hooroo/v/8865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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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부처 팔아먹고 살고, 이승훈이는 이상 팔아먹고 그 어떤 큰스님의 또 다른 한 말씀이, 서기 2011년 11월 8일 저녁 6시 3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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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상(李箱)의 조선총독부 기사시절 URL
이상(李箱)과 그의 시대_2부 - 이상(李箱) 필명의 유래
- 且8氏의 出發 URL
2. 이상의 시와 보는 시 의 의미_1부 - 이상 시의 의미
- 오감도의 탄생
이상의 시와 보는 시의 의미_2부 - 오감도 시제2호
- 오감도 시 제4호
- 素榮爲題(소영위제) URL
3. 이상의 소설과 메타픽션의 성격_1부 - 이상 소설의 성격
- 메타픽션으로서의 이상의 소설 URL
이상의 소설과 메타픽션의 성격_2부 - 동해(童骸)」와 ‘메타적 글쓰기
- 「종생기(終生記)」와 ‘자기 반영’의 기법 URL
4. 대담 및 질의응답_1부 URL
대담 및 질의응답_2부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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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 <此生輪廻: 이상(李箱) 연구노트> 3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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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 <此生輪廻: 이상(李箱) 연구노트> 2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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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21세기, 다시 읽는 이상]<3>탈주,근대의 우울에 맞서다-20100414,동아일보 (0) | 2014.12.02 |
[스크랩] [21세기,다시읽는 이상]<4>분열,자아의 불안을 응시하다-20100421,동아일보 (0) | 2014.12.02 |
조선건축회는 매년 연말 『조선과 건축』 표지도안의 설계공모를 실시하여 당선된 작품을 일 년간 잡지의 표지도안으로 사용하였다.
이 잡지에는 문학인 이상(李霜)의 표지디자인·일문 시(詩)·건축비평 등이 실려 자료로서의 가치가 높다
.(왼쪽, 가운데) 조선건축회가 주최한 조선주택의 개량을 논한 좌담회(「朝鮮住宅の改良を語る」)에 대한 기사,
『조선과 건축』 제22집 8호(1943년 8월). 1940년대는 비상전시체제에 돌입하고 일제의 황국신민화 정책과 맞물리면서 주택개량의 이념을 ‘황민화(皇民化)’에 중점을 두었다.(오른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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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 및 대외관계 | 일본·세계 동향 | |||||||||||||||||||||||||||||
1885 乙酉 高宗22 光緖11 明治1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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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력 연호 (韓中日) |
독립운동 및 대외관계 | 일본·세계 동향 | |||||||||||||||||||||||||||||
1889 己丑 高宗26 光緖15 明治2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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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력 연호 (韓中日) |
독립운동 및 대외관계 | 일본·세계 동향 | |||||||||||||||||||||||||||
1891 辛卯 高宗28 光緖17 明治2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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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2 壬辰 高宗29 光緖18 明治2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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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3 / 1894 明治/大正/昭和/平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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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력 연호 (韓中日) |
독립운동 및 대외관계 | 일본·세계 동향 | |||||||||||||||||||||||||
1893 癸巳 高宗30 光緖19 明治2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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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4 甲午 高宗31 光緖20 明治2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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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력 연호 (韓中日) |
독립운동 및 대외관계 | 일본·세계 동향 | |||||||||||||||||||||||||||||||||||||||
1895 乙未 高宗32 光緖21 明治2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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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6 (0) | 2016.03.2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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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8 (0) | 2016.03.2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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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력 연호 (韓中日) |
독립운동 및 대외관계 | 일본·세계 동향 | ||||||||||||||||||||||||||||||||||||||||||||||||||||||
1896 丙申 建陽1 光緖22 明治2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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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문 대조선독립협회회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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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3 / 1894 (0) | 2016.03.2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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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5 (0) | 2016.03.24 |
1897 (0) | 2016.03.24 |
1898 (0) | 2016.03.24 |
1899 (0) | 2016.03.2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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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0.09. 0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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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력 연호 (韓中日) |
독립운동 및 대외관계 | 일본·세계 동향 | |||||||||||||||||||||||||||||||||||||||||||||||
1898 戊戌 光武2 光緖24 明治3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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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기선의 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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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search.i815.or.kr/Degae/DegaeView.jsp?nid=2175
2010.10.09. 02:23
http://blog.naver.com/okinawapark/114575603
서력 연호 (韓中日) |
독립운동 및 대외관계 | 일본·세계 동향 | |||||||||||||||||||||||||||||||||||
1899 己亥 光武3 光緖25 明治3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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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search.i815.or.kr/Degae/DegaeView.jsp?nid=2176
2010.10.09. 02:27
http://blog.naver.com/okinawapark/114575676
서력 연호 (韓中日) |
독립운동 및 대외관계 | 일본·세계 동향 | |||||||||||||||||||||||||||||||||||||||||
1900 庚子 光武4 光緖26 明治3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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