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 사이트 모음 2012/07/07 13:17   http://blog.hani.co.kr/bonbon/44699
 
# 건축과 도시에 대한 다양한 사이트들을 수시 업데이트할 예정입니다. 좋은 사이트 추천해주시면 올리겠습니다.

국가건축정책위원회 http://www.pcap.go.kr/
 
단체
 
한국건축가협회 http://www.kia.or.kr/
대한건축사협회 http://www.kira.or.kr/
새건축사협의회 http://www.kai2002.org/
한국실내건축가협회 http://www.kosid.or.kr/
한국여성건축가협회 http://kifaonline.com/ 

연구
 
건축도시공간연구소 http://www.auri.re.kr/
건축도시연구정보센터 http://www.auric.or.kr/default.aspx
대한건축학회 http://www.aik.or.kr/
서울학연구소 http://iss.uos.ac.kr/
한국건축역사학회 http://www.kaah.or.kr/
한국도시설계학회 http://www.udik.or.kr/
한국도시연구소 http://www.kocer.re.kr/
프리즘 https://www.prism.go.kr/homepage/main/index.do  문체부, 국토부 등의 건축관련 용역의 결과자료 볼 수 있는 곳
 
미디어
 
VM SPACE http://www.vmspace.com/
월간 건축문화 + 월간 bob http://ancbook.cafe24.com/
C3 http://www.c3p.kr/
한국건설신문 http://www.conslove.co.kr/
월간 디자인 http://mdesign.design.co.kr/

포럼
 
젊은건축가포럼코리아 www.youngarchitectsforum.or.kr
영추포럼 http://www.doojinhwang.pe.kr/
땅집사향 http://cafe.naver.com/aqlab

문화 & 교육

정림건축문화재단 http://junglimfoundation.org/
어린이건축학교 http://cafe.naver.com/arkoartcenterarchite/
목천김정식문화재단 http://www.mokchon-kimjungsik.org/

사이트

건축안내원의 편파적인 건축이야기 http://buddyjhs.blog.me/
김광현 교수 블로그 http://blog.naver.com/kkhfile/
김재경 건축사진 http://blog.naver.com/kjk_1293
도심산책-지정우 교수  http://blog.yahoo.com/jungwoo
레오퐁 http://www.leopon.co.kr/
박영채 건축사진스튜디오 http://blog.naver.com/pychea
아키인포-건축여행정보 공유 사이트 http://archinfo.net/
오사 http://5osa.com/
우드플래닛 http://blog.naver.com/woodplanet
이관용박사의 오픈스케일 건축디자인블로그 http://blog.naver.com/leekwanyong/
이용재 블로그 http://blog.naver.com/leecorb
임진영 기자 블로그 http://archiroot.wordpress.com/
조한 교수 블로그 http://blog.naver.com/jluke313
진짜공간 www.jinzaspace.com
천경환 블로그 http://blog.yahoo.com/_HQO6UFOHTTERTIMNJP64UIOP7E/articles/page/1
행복한 오기사 http://blog.naver.com/nifilwag/
archur가 해석하는 도시, 건축 http://archur.blog.me/ 

외국 건축사이트
 
미모아  www.mimoa.eu
월드오브아키 http://www.worldofarchi.com/

사진
 
건축사진연구회 http://archipl.tumblr.com/


 

 

 

 

 

 

 

 

 

 

 

 

 

 

 

 

 

 

화가 이상이 문학 속에 그린 그림 - 위작 논란과 관련하여

 

 

 

 

 

천경자 유족 "'미인도' 저작권 돌려달라" 입력시간 : 2017. 05.16. 00:00

 

 

서울시와 갈등법적대응·저작권 반환 촉구

 

국립현대미술관이 고 천경자 화백의 작품인지 논란이 계속되는 '미인도'를 전시한 데 대해 천 화백 유족이 저작재산권을 가진 서울시에 법적 대응에 나서거나 저작권을 유족에게 반환하라고 요구했다.

 

15일 천 화백 유족(차녀)에 따르면 천 화백 작품의 저작재산권을 가진 서울시는 미인도 전시에 법적 대응 하라는 유족측 요구에 대해 "저작재산권자인 서울시보다는 저작인격권의 일종인 성명표시권과 동일성유지권을 유족이 행사할 수 있으므로 저작인격권자인 유족이 권리행사를 할 수 있다"고 답했다.

http://www.honam.co.kr/read.php3?aid=1494860400524724007

 

 

 

 烏瞰圖 詩第十號 / 오감도시제10

                                                                           李箱이상 193483일 조선중앙일보

 

                                   나비

 

 

 

찌저진壁紙에죽어가는나비를본다.           찢겨진 벽지에 죽어가는 나비를 본다.

그것은幽界絡繹되는               그 것은 알 수 없는 세계에 끈기지 않고 연결되는

秘密通話口.                                   비밀스런 통화구다.

어느날거울가운데의鬚髥에                     어느 날 거울 가운데의 수염에

죽어가는나비를본다.                             죽어가는 나비를 본다.

날개축처어진나비는                               날개 축 쳐진 나비는

입김에어리는가난한이슬을먹는다.            입김에 어리는 가난한 이슬을 먹는다.

通話口를손바닥으로꼭막으면서                통화구를 손바닥으로 꼭 막으면서

내가죽으면안젓다일어서듯키                   내가 죽으면 앉았다 일어나듯이

나비도날아가리라.                                 나비도 날아가리라.

이런말이코밖으로새여나가지는안케한다.                 이런 말이 결코 밖으로 새여 나가지 않게 한다.

 

 

 

 

 

 

 

 

 

 

 

 

 

 

 

 

 

 

 

 

 

 

 

이하   작업중 입니다.

 

 

 

 

 

 

 

 

 

                                        1940년 작이나 1927~1928년 작 나혜석의 그림으로 추정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실장을 지낸 미술평론가를 포함해 4명의 감정위원이 진품으로 단정하기 어렵다는 의견을 냈다.

 

국립현대미술관은 1980년 개인으로부터 이 작품을 구입해 현재 소장하고 있다.

그러나 최근 수원박물관 주최의 나혜석 특별전을 계기로 미술전문가 5명이 시중에서 나혜석 작품으로 주장되는 50점을 감정한 결과 무희의 위작 가능성을 제기했다.

 

미술평론가 윤범모 가천대학교 교수는 무대 위의 여성 2명을 소재로 삼은 이 그림은 인체 데생의 기본도 모르는 사람이 그린 3류의 태작이라고 평했다.

윤 교수는 인체의 비례감과 해부학적 표현이 전혀 반영되지 않았다는 점을 지적했다. 또 아동수준의 얼굴 표현, 질감과 무관한 옷주름의 표현 등은 데생 실력이 없는 아마추어의 솜씨로 보인다고 밝혔다.

더욱이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실장을 지낸 미술평론가를 포함해 4명의 감정위원이 진품으로 단정하기 어렵다는 의견을 냈고, 국립현대미술관이 당시 큐레이터가 부재한 상황에서 작품을 구입한 것으로 알려졌다.

국립현대미술관측은 구입 당시 큐레이터는 없었으나 전문위원들의 감정을 받아 작품을 구입했다나혜석의 작품 자체가 희소해 현재로서는 위작 여부를 정확히 판가름하기 힘들다고 밝혔다.

                                                                                                    출처: http://ews21.tistory.com/3584

 

 

 

나는 14살 때 수채화를 그렸다.

수채화와 첫 경험

 

보아라 나무젓가락같이 야윈 팔목에서는 삼동(三冬)에도 김이 무럭무럭 난다.

 

김나는 팔목과 잔털 나스르르한 매춘하면서 자라나는 회충같이 매혹적인 살결.

 

사팔뜨기와 내 흰자위 없는 짝짝이 눈.

 

옥잠화 속에서 나오는 기술 같은 어제의 화장과 화장 지우는 기술

 

이에 대항하는 내 자전차 탈 줄 모르는 아슬아슬한 천품

 

다홍댕기에 불의와 불의를 방임하는 속수무책의 나태

심판이여

                                                            ----이상 종생기 중에서

 

 

 

 

 

 

 

 

 

 

  

치사한 소녀는

해동기의 시냇가에 서서

입술이 꽃이 지듯 좀 파래지면서

살얼음 밑으로는 무엇이 저리도 움직이는가 하고

고개를 갸웃거리는 듯이 숙이고 있는데

봄 운기를 품은 훈풍이 불어와서

스커어트아니 아니,

너무나아니, 아니,

슬퍼 보이는 붉은 털을 건드리면그만. 더 이상 진한 말은 안 된다.

나는 한 마디 가련한 어휘를 첨가할 성의를 보이자.

나붓 나붓

이만하면 완비된 장치에 틀림없으리라. 나는 내 종생기의 첫 장을 꾸밀 그 소문 높은 珊瑚鞭산호편을 더 확실히 하기 위하여 위와 같은 실체적인 것으로 나로서는 너무나 과감히 치사스럽고 어마어마한 세간살이를 장만한 것이다.

 

그런데혹 지나치지나 않았나?

천하에 똑 소리 나는 관찰력이 없지 않으니까.!

너무 금색 칠을 아니 했다가는 섣불리 들킬 염려가 있다. 그러나그냥, 어디! 이대로 사용해보기로 하자.

                                                            ----이상 종생기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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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panish rose “스페인의 장미”  by KOREAN POPS ORCHESTRA

 

 

 

광주학생운동의 전개

 

(1) 광주학생운동의 발단

1929년의 광주고등보통학교와 광주농업학교의 동맹휴교는 학교당국·도학무과(道學務課)·경찰의 강경한 조치 때문에 표면상으로는 종식되었지만 학생들의 반일감정은 더욱 심화되어갔고 행동의 돌파구만 있으면 분출할 정세에 놓여 있었다.
이러한 상황 아래 1928년을 보내고 1929년을 맞이했다. 방학이 끝나고 개학이 되면서 학생들이 등교하자 학교당국에서는 예의주도하게 학생들의 동태를 주시하고 있었다. 그러나 광주고등보통학교에서는 5월부터 학생들의 움직임이 보이기 시작하여 벽이나 화장실등에 ‘조선독립만세’ ‘조선혼(朝鮮魂)을 고취(鼓吹)하자’ ‘6월이 되면 전선적(全鮮的)으로 맹휴하자’라는 낙서가 나붙기 시작하였다

 

1이는 6월 26일이 맹휴 1주년이 되는 날이기 때문에 학생들은 이 날을 상기하고 행동의 돌파구를 찾으려고 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6월 25일 5학년 학생들은 자치회(自治會)를 한다는 명목으로 수업을 거부하였고, 26일에는 전체 학생들이 동요를 일으켜 그 중 일부가 수업을 받지 않고 학교당국과 신경전을 벌이다가 하교하고 말았다.
더구나 이날은 광주고등보통학교와 광주중학교 학생 간의 첫 충돌을 일으킨 날이기도 하다. 즉 이날 송정리의 한·일 통학생(通學生)들이 열차가 광주와 송정리 중간역인 운암역(雲岩驛)을 지날 때 한국인 농부들이 개를 잡아 불에 끄슬리고 있는 광경을 본 광주중학생인 근둥(近藤:곤도오)이 “야만(野蠻)이다”라고 말했다. 옆에서 이를 들은 광주고등보통학교생들이 “무엇이 야만이냐”고 하면서 그의 모자를 벗겨 버렸다. 근둥이 모자를 벗긴 학생을 구타하자 광주고등보통학교생들도 이에 근둥을 때려 패싸움으로 변했다.
통학생들의 감정적인 대립은 여기서 끝나지 않고 민족적인 반목으로 발전하여 한국인 학생들은 식민지 피지배민족이라는 현실을 타개하기 위한 항일운동을 생각하였고, 일본인 학생들은 지배자의 입장에서 정치적·문화적 우월감을 가지고 한국학생들을 대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양민족 학생들의 사고방식은 사사건건 구실만 있으면 서로 대립하고 반목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라고 보여진다. 그리하여 1929년 6월의 운암역사건이 일어난 지 4개월 후인 10월 30일 또 다시 한·일기차 통학생간의 시비가 발단되어 11월 3일 광주학생운동으로 확대·발전되게 되었다.

 

1929년 10월 30일 오후 5시 30분 경 광주에서 통학생을 실은 하행통학열차가 나주역(羅州驛)에 도착, 통학생들이 삼삼오오 짝을 지어 개찰구로 나갈 때 광주중학교 4년생 복전수삼(福田修三:후꾸다 슈우죠)·말길극기(末吉克己:스에요시 가쯔미)·전중(田中:다나까) 등이 광주여자고등보통학교 3년생인 박기옥(朴己玉)·이광춘(李光春)·이금자(李錦子:혹은 李岩城) 등을 ‘센징〔鮮人〕’이라 조롱하며 특히 복전이 박기옥의 댕기머리를 잡아 다니며 희롱하니 여학생들은 항거도 못하고 어쩔 줄 모르고 있었다. 이 당시의 사정을 박기옥의 4촌동생이며 광주고등보통학교 1년생이었던 박준채(
朴準埰)는 다음과 같이 술회하였다.

……나는 피가 역류하는 분노를 느꼈다. 가뜩이나 그놈들과는 한 차에 통학을 하면서도 민족감정으로 서로 멸시하고 혐오하며 지내온 터인데 그자들이 우리 여학생을 희롱하였으니 나로서는 당연한 감정적인 충격이었다. 더구나 박기옥은 나의 누님(4촌)이었으니 나의 분노는 더 하였다.
나는 박기옥의 맹기를 잡고 장난을 친 복전을 개찰구 밖 역전광장에서 불러 세우고 점잖게 따졌다.
“후꾸다 너는 명색이 중학생인 녀석이 야비하게 여학생을 희롱해” 그러자 복전은 “뭐라고? 센징놈이 뭐라고 까불어” 이 센징이란 말이 후꾸다의 입에서 떨어지기가 무섭게 나의 주먹은 그 자의 면상에 날아가 작렬하였다. 더구나 센징이란 얼마나 우리민족을 모욕한 말인가? 일인교사들이나 지각없는 일인들 입에서 불시에 튀어 나오던 이 비칭에 대하여 평소 나는 어린(16세) 마음에도 앙심을 먹고 있었다.……

 

박준채의 위와 같은 대일관(對日觀)은 당시 한국학생들이 가지고 있었던 태도였다. 박준채와 복전의 싸움은 양교 통학생 간의 패싸움으로 변하여 역전광장이 어수선하자 나주 역전파출소에 근무하던 삼전송삼랑(森田松三郞:모리다) 순사가 일방적으로 광주고등보통학교학생이 나쁘다고 힐난하면서 박준채의 따귀를 때리고, 부당함을 항의하는 박준채를 또 때리니 할 수 없이 한국학생들은 민족차별에서 오는 분노를 참고 귀가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다음 날인 10월 31일 광주로 가는 상행통학열차에서 일본인 학생들은 전날의 앙갚음으로 떼를 지어 박준채의 자리로 몰려와 시비를 걸자 한국인 학생들도 가만있지 않고 박준채를 호위하면서 서로 옥신각신하였으나 별다른 충돌없이 보냈다. 그러나 이 날 오후 5시 하행열차에서 한·일학생 간에 패싸움이 벌어졌다.

 

이 때 차장이 달려와 싸움을 말리고 박준채외 수명의 광주고등보통학교 학생과 복전수삼의 통학승차권을 압수했고 이 싸움을 보고있던 광주일보(光州日報)의 일본인 기자가 복전의 말만 듣고 한국인 학생이 무조건 나쁘다고 욕설을 퍼부었으며, 일본인 승객들도 박준채를 향해서 “선인(鮮人)주제에 건방지다”느니 “선인학생이 잘못했다”느니 하면서 욕설과 폭언을 퍼부었다. 이를 들은 한국학생들은 대항도 하지 못하고 울분을 삼킨 채 국가없는 민족의 설움을 다시 한 번 되새기게 되었다.
11월 1일 박준채와 복전 등은 전날 압수당한 통학승차권을 찾아 각기 학교에 등교하였다. 복전은 등교하자 길전(吉田:요시다) 교유(敎諭;선생)에게 2일 간의 사태를 보고하였고 이에 길전은 광주고등보통학교의 도변(渡邊:와다나베)·강본(岡本:오가모도) 교유에게 연락하니 이 날 방과 후 박준채는 이들 교사에게 불려가 단단히 야단을 맞았다.
광주고등보통학교와 광주중학교 통학생 간의 사이가 이처럼 험악하다는 것을 파악한 광주고등보통학교의 장곡천(長谷川:하세가와)이 통학생 감독을 위하여 이 날 오후 광주역(光州驛)에 파견되어 학생들을 감시하게 되었다.

 

그러나 통근열차의 발차시간이 거의 다 되었을 때 광주중학교 5년생 4·5명이 광주고등보통학교생 정세면(鄭世勉)에게 시비를 걸자 정세면은 기차에 타고 있던 광주고등보통학교 통학생들에게 이 사실을 알렸고, 한국인 학생들은 모두 기차에서 하차하여 개찰구를 경계선으로 서로 대치하게 되었다.
광주역에서 벌어진 한·일학생 간의 새로운 사태에 접한 광주고등보통학교에서는 지전(池田:이게다)·복중(福重:후꾸시게)·강본(岡本) 교유가 달려왔고 광주중학교에서는 이전(伊田:이다)·증전(增田:마스다)·뇌구(瀨口:세구찌) 교유가 달려와 현장수습에 나섰다. 이 때 광주고등보통학교생은 약 20명이었고 광주중학생은 약 30명으로 일본인 학생 중에는 통학생이 아닌 학생도 섞여 있었으며 상급반 학생 중에는 단도까지 뽑아들고 있어 사태는 매우 험악하였다.
현장에 달러온 중학교의 일본인 교사들은 일본학생 편을 들면서 한국학생들을 나무라고 전 날 주먹을 휘두른 학생이 누구냐면서 오히려 더욱 사태를 악화시키려하자, 고등보통학교의 일본인 교사들이 “지금은 싸움을 말릴 때가 아니냐” 하면서 동시철수를 제의하자 중학교의 일본인 학생이 먼저 철수하고 뒤이어 한국인 학생들도 일단 학교로 철수하였다.

 

학교에 돌아온 한국학생들은 5학년 을급(乙級) 급장(級長) 노병주(盧秉柱)와 통학생 단장(團長) 채규호(蔡奎鎬) 등이 이 날 사태를 보고하고 의견을 교환하려 했으나 분노에 복받친 학생들은 선후대책이 불가능한 것을 느끼고 일단 해산하기로 하고 장곡천(長谷川)의 인솔로 송정리통학생은 귀가하고 안본(岸本:기시모도)의 인솔로 나주통학생도 모두 귀가하였다.
이튿날 즉 11월 2일 학교에 등교한 광주고등보통학교생 등은 어제의 광주역사건에 대하여 흥분을 감추지 못하며 화살을 일본인 교사들에게 돌렸다. 즉 일본인 선생들에 대하여 “중학교 선생처럼 선생들도 우리 편을 들어 달라”, “우리 선생은 말리기만 한다”, “중학교 학생을 응원한 이전이나 길전같은 자는 선생이 아니다” 라고 항의하였고 학교 안 여기저기에는 항일적 낙서가 붙여지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날은 양교 학생들 간에 별다른 충돌없이 넘어가고 드디어 11월 3일을 맞이하였다.

 

(2) 광주학생운동의 시위화

1929년 11월 3일은 지금까지 쌓이고 쌓였던 광주시내 한국인 학생들의 울분이 일시에 폭발하여 광주학생운동을 일으킨 날이며, 이를 계기로 전국학생들이 일본제국주의에 항거하여 민족운동을 전개한 뜻깊은 날이기도 하다. 한편 이 날은 일본 4대국경일의 하나인 명치절(明治節)이었고 공교롭게 음력으로는 10월 3일이 되어 우리민족에게는 개천절(開天節)이어서 한국학생들에게는 희비가 교차되는 날이었고 마침 일요일인데다 전남견산(全南繭産) 600만석 돌파축하회가 광주신사(光州神社) 앞에서 열리는 날이어서 온 광주시가가 인파로 들끓었고 일본학생들은 축제분위기에 들떠있었으나 한국학생들은 비분 속에 이 날을 맞이하였다.
일본제국주의는 명치절을 기념하기 위하여 전국 각급학교 학생들을 등교시켜 기념식을 갖도록 지시하여 이에 따라 광주에서도 명치절 기념식이 각 학교 별로 개최되었다. 광주중학교에서는 기념식이 끝난 뒤에 모두 광주신사로 가서 참배했으며, 광주고등보통학교는 기념식은 가졌으나 학생들은 일본국가를 부를 때 제대로 부르지 않았고 신사참배는 자유의사에 맡겼으나 한 학생도 신사에 간 학생은 없었다.

 

특히 이 날은 광주시내 한국인 학생들에 의하여 조직된 비밀결사 성진회 창립 3주년 기념일이어서 독서회중앙본부(讀書會中央本部)에서는 이 날을 기하여 일제히 궐기하자는 암암리의 상호연락과 지시가 있어서 광주고등보통학교를 비롯하여 광주농업학교·광주사범학교·광주여자고등보통학교생들의 분위기는 자못 험악하였다.

 

이런 눈치를 알아차린 각 학교의 선생들은 시내 요소요소에 배치되어 불상사를 방지하려고 하였다. 오전에 학교에서 식을 마친 광주고등보통학교생들은 삼삼오오 떼를 지어서 시내로 쏟아져 나왔다. 거리에 나온 광주고등보통학교생 일단은 통학열차 내에서 일어난 한일학생 간의 충돌사건을 편파적으로 보도한 광주일보사에 몰려가 기사의 왜곡성을 항의하고 윤전기에 모래를 뿌려 신문제작을 방해했다.
한편 임한길(任漢吉)·고광신(高光信)·구용우(具龍祐)·황남옥(黃南玉)·최상을(崔祥鳦) 등 7·8명이 수기옥정(須寄屋町:스끼야 쵸) 우체국 앞에서 광주중학교의 재등준부(齋藤俊夫:사이또오 도시요) 등 16명과 맞부닥쳐 패싸움을 벌였다.

 

이들 일본인 학생들은 신사참배 후 귀로에 광주천(光州川)부근에서 광주고등보통학교생 최쌍현(崔雙鉉)을 단도로 코와 안면을 찔러 부상을 입히고 도주해 온 자들이었다. 우체국 앞에서의 싸움은 광주고등보통학생들이 수적인 열세에도 불구하고 일본인 학생들을 구타하니 이들은 형세 불리함을 느끼고 광주역 쪽으로 도주하였다. 이에 광주고등보통학교생들은 이들을 쫓아 광주역으로 달려가 순찰 중이던 광주서(光州署) 순사 5명과 광주중학교 복정(福正:후꾸마사) 교유를 제치고 플랫트홈으로 도망친 일본인 학생들을 닥치는 대로 때려 눕히니 이들은 두려워서 자기학교로 도주하기 시작하였다.
이럴 즈음 광주중학교생들이 구타당하고 있다는 급보를 받은 광주중학교에서는 기숙사생 백 수십명이 목도(木刀)·단도(短刀) 등을 휴대하고 유도교사의 인솔로 ‘광주고보생타도’를 외치면서 달려왔고, 광주고등보통학교 기숙사생들도 야구방망이나 운동기구 등으로 무장하고 광주역으로 달려왔으며, 시내를 배회하던 광주고등보통학교생과 광주농업학교생들도 역전으로 모여 들었다.

 

이리하여 광주역 광장은 한일학생 간의 결투장으로 변하였다. 현장에 몰려있던 군중들도 한국학생들이 싸우는 모습을 보고 ‘왜놈 죽여라’고 함성을 지르면서 학생들의 사기를 북돋아 주었다.

 

이 때 양측의 학생 수는 각각 200여 명 내외로 수에 있어서는 비등하였으나 싸움은 한국학생들이 유리하여 일본인 학생들은 차츰 도망가기 시작하였다.
이와같은 한일학생 간의 충돌을 연락받고 광주서에서는 비상경계를 내리고 경찰대·기마대·소방대까지 동원, 현장에 출동하여 도주하는 일본인 학생들의 뒤를 쫓는 한국학생들의 진로를 차단하였다. 그리하여 양측 학생들은 담양가도(潭陽街道) 성저리(城底里) 십자로(十字路)부근의 작은 토교(土橋)를 사이에 두고 서로 대치하게 되었다.

 

이에 경찰의 강력한 제지와 양교 교사들의 교섭으로 동시 퇴각이 결정되어 일단 험악한 상태는 가라앉았다.
광주고등보통학교생들은 노병주의 인솔로 학교강당으로 집결하였다. 이때 많은 학생들의 손에는 장작개비 한 개 씩을 들고 있었으니 이것은 양측이 서로 대치해 있을 때 광주중학교를 습격하기 위하여 인근에 있던 관동여관의 장작더미에서 한 개씩 집어 들고 있었던 것이다.

 

강당에 집합한 학생들은 노병주의 사회로 사건경위의 보고와 사후대책을 논의, 일인중학교를 완전히 타도하여야 한다는 강경론이 지배적이어서 가두시위투쟁을 벌이기로 하였다.
김병기(金炳基)·강윤석(康潤錫)·김용대(金容大)·김상환(金相免)등이 농구실을 부수고 삽·괭이·목봉(木棒) 등과 검도실에서 검도도구를 꺼내어 장작을 들지 않은 학생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이 때 광주농업학교의 최태주(崔泰周)가 광주농업학교생들도 가두시위에 참가한다고 통고해와 사기는 더욱 충천하였다. 오후 1시 어린 학생들을 가운데 넣고 상급생들이 앞과 뒤에서 보호하면서 교문을 박차고 시가로 쏟아져 나왔다. 이 때에 광주농업학교생들이 뒤를 따랐고 광주사범학교의 한국인 학생들도 학교의 완강한 제지를 뿌리치고 학교담을 뛰어넘어 시위대열에 합세했다.
시내에 나온 시위대열의 학생들은 ‘조선독립만세’ ‘식민지 노예교육을 철폐하라’ 등의 구호를 외치고 애국가·응원가를 부르며 행진했다. 한국학생들의 사기는 충천했다.

 

전남견산(全南繭産) 600만석 돌파경축대회에 참석했던 수 많은 도민들도 이에 호응하여 시위군중은 3만 명이라고 당시 언론기관이 보도하고 있다.

 

시위대열은 두번에 걸쳐 광주중학교를 목표로 돌진하였으나 일경의 강력한 제지에 부딛쳐 성공은 거두지 못했으나 광주시내는 완전히 한국학생들로 메워져 일본인들은 겁에 질려 폐문철시하였고, 광주서(光州署)도 자체 경찰력으로는 부족하여 인근지방의 경찰을 동원하여 초비상사태에 돌입하였다.
광주중학교 습격이 좌절되자 시위대열은 대오를 정비하여 광주고등보통학교로 돌아왔다. 교문 앞에서 광주농업학교와 사범학교생들은 해산하고, 광주고등보통학교생들은 강당에 집결 ① 부상자문제 ② 금후의 연락방법 등을 결의하고 대오를 지어 모두 귀가하였다.
이 시위로 광주고등보통학교를 비롯하여 광주농업학교·광주사범학교는 물론 광주중학교까지 이 날부터 3일 간 휴교령이 내려졌고 다시 사태가 악화되자 11월 9일까지 휴교령이 연기되었다. 그 뿐만 아니라 이 날부터 한국학생들에 대한 검거선풍이 불어 다음날까지 70여 명이 구속되고 그 중 62명이 검사국으로 송치되었다.

 

이와 같은 검거는 일경의 편파적인 행위였다. 한국학생 70명에 비해 일본학생은 7명을 검거했으나 그것도 얼마 지나지 않아 모두 석방했던 것이다.
(3) 광주학생운동의 여론화
광주학생운동에 대한 일제당국의 불공평한 처사에 대하여 민중들은 불만을 품었고 언론기관·신간회(新幹會)를 비롯한 각 사회단체에서도 이를 규탄하고 비밀리에 조사단을 파견, 진상조사에 나섰다.

 

그 중 신간회는 허헌(許憲)·김병로(金炳魯)·황상규(黃尙奎) 등이 11월 9일 광주에 도착, 백정 광주고등보통학교장과 좌등(佐藤:이도) 광주중학교장을 방문하여 사건진상을 조사하고 관계기관을 방문하여 사건의 불공평한 처리를 엄중 항의하였다.
한편 광주고등보통학교·광주농업학교·광주사범학교·광주여자고등보통학교·광주 수피아여학교(須皮亞女學校)·광주숭일학교(光州崇一學校) 등의 한국학생들은 편파적인 행정기관처사에 격분하고 끝까지 항쟁할 것을 결심, 제2차 시위운동을 전개하게 되었다.

 

제1차 시위운동 직후인 11월 4·5일 경 광주고등보통학교출신 장재성(張載性)은 재광주사회단체(在光州社會團體)의 간부인 장석천(張錫天)·강석원(姜錫元)·박오봉(朴五鳳)·국채진(鞠採鎭) 등과 회합하여 학생투쟁지도본부를 결성하고 각 학교의 책임자를 정하고 다음과 같은 격문의 초안을 작성, 학생들에게 보냈다.

학생이여 대중이여 궐기하라. 검거된 학생은 우리의 손으로 탈환하자. 언론·결사·집회·출판의 자유를 획득하라. 식민지 교육제도를 철폐하라. 조선인 본위의 교육제도를 확립하라.

 

 

이리하여 동월 10일 광주고등보통학교생 오쾌일(吳快一)·이영범(李 榮範), 광주사범학교생 이신형(李信珩)·황상남(黃相南), 광주농업학교생 김남철(金南哲)·정욱(鄭昱) 등이 회합하여 동월 11일 각 학교 별로 수업시작종을 신호로 전기(前記) 격문을 살포하고 만세시위운동을 전개하기로 합의를 보았다. 그러나 11일 보다 12일이 마침 광주장날이라 이 날 많은 군중들이 모일 것을 예상하고 시위일을 12일로 수정하고 오쾌일이 다음과 같은 4종의 격문인쇄를 책임지기로 하였다.

1. 학생·대중이여 궐기하라! 우리의 슬로건 아래로! 피검자를 우리의 힘으로 탈환하자. 검속자를 즉시 석방하라. 교내의 경찰권 침입에 반대하라. 언론·집회·결사·출판의 자유를 획득하라. 조선인 본위의 교육제도를 확립하라. 식민지 노예교육제도를 철폐하라. 사회과학연구의 자유를 획득하라.
2. 조선민중이여 궐기하라! 피검자를 탈환하라. 재향군인의 비상소집에 반대하라. 경계망을 즉시 철회하라. 소방대·청년단을 즉시 해산하라. 광주중학을 폐쇄하라. 언론·집회·결사·출판의 자유를 획득하라.
3. 용감히 싸워라. 학생·대중이여! 우리의 슬로건 아래 궐기하라. 승리는 오직 우리들의 단결과 희생적 투쟁에 달려 있다(이하 제목은 2항과 같음).
4. 용감한 학생 대중이여 최후까지 우리의 슬로건을 지지하라. 그리고 궐기하라. 전사여 힘차게 싸워라(이하 제목은 1항과 같음).

 

 

이와같은 격문을 약 1천매 인쇄하여 12일 오전 8시 김안진(金安鎭)에게 약 5백매, 강민섭(姜旻燮)에게 약 2백매, 조길룡(曹吉龍)에게 약 3백매를 교부하였다.
11월 12일 수업종이 울리자 광주고등보통학교에서 김향남(金向南)이 “철창에서 신음하는 교우들을 구하자”는 외침과 함께 김안진·최상을(崔祥鳦)·김상석(金三錫)·김동섭(金東燮)·송만수(宋萬洙)·김홍남(金鴻南) 등을 선두로 학생일동이 교문을 박차고 시내로 쏟아져 나왔다. 학생시위대열은 전기(前記) 격문을 뿌리고 구호를 외치면서 광주형무소를 목표로 정하고 진격하였다. 도중에 광주여자고등보통학교와 광주사범학교 앞에서 시위에 합세하라고 외쳤으나 양교의 교사들이 교문을 굳게 잠가놓고 극력 제지하였으므로 시위대열에 참가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광주농업학교에서는 수업종을 신호로 조길룡(曹吉龍)의 제창과 김남철(金南哲)·최정기(崔貞基) 등 10여 명의 선도로 전교생이 일제히 교문을 박차고 격문을 뿌리고 구호를 외치면서 광주형무소로 진격하였으나 광주고등보통학교 부근에서 급히 출동한 일경에 의하여 저지당하고 말았다.
이상과 같은 제2차 항일학생 시위운동으로 일경에 검거된 학생 수는 양교를 합하여 280여명 이었으니 시위참가학생 약 550여명의 과반수가 되며 일경은 이 많은 학생을 유치장으로는 모두 수용할 수 없어서 도청 앞 무덕전(武德殿)에도 집단으로 학생을 수용하였다. 특히 제2차 시위운동에 연루되었다는 혐의로 광주시내 일반사회단체에 대하여도 검거선풍이 불어 사회단체간부 100여명이 차례로 구속되었다.

 

이와같은 제2차 광주학생 시위운동이 있은 후 일제는 광주시내 중등교육기관에 휴교조치를 내리고 시위운동에 관한 일체의 보도금지령을 내렸다. 이러한 조치는 동년 12월 28일까지 취해져 그 사이 한국인들은 광주학생운동의 진상을 파악하지도 못하였고 이에 따라 전국의 민심은 동요되고 일제의 악랄한 정책에 대한 분노는 높아만 갔던 것이다.
2차에 걸친 광주학생들의 항일시위운동으로 구속된 학생이 255명에 이르러 많은 희생자를 냈다. 그러나 광주학생들은 이러한 희생에도 불구하고 1930년 1월 9일 광주고등보통학교에서 다시 백지동맹(白紙同盟)을 일으켜 17명의 학생이 퇴학당했고

 

동월 16일에는 제3차 시위운동을 준비하다가 발각되어 48명이 무더기로 퇴학당하였으며 광주여자고등보통학교 학생들도 백지동맹·비밀결사 등 시위에 관련되어 40여명이 퇴학당하는 등 한 번 피어났던 불꽃은 꺼질 줄 모르고 피어오르기만 하였다.

 

  • 8권 3·1 운동이후의 민족운동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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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4. 광주학생 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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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준채(朴準埰)옹이 7일 오전 11시55분 광주보훈병원에서 숙환으로 타계했다

                                                                동아일보 기사입력 2001-03-07 18:51 | 최종수정 2001-03-07 18:51

     

    나주역 사건으로 광주고보에서 퇴학당한 뒤 3개월간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이후 양정고보를 졸업한 후 일본으로 건너가 와세다대에서 경제학을 전공한 그는 광주로 돌아와 60년대 초부터 조선대 교수로 재직, 이 대학 법정대학장과 대학원장 등을 역임했다.

    그는 대학강단에서 물러난 뒤 광복회와 광주학생독립운동 동지회에서 활동하다 88년 국민훈장석류장과 90년 건국훈장애족장을 받았다

     

     

     

     

     

     

     

     

     

     

     

     

     

     

    시인 이상은 화가다.

     

     


    1910년 한일합방이 되던 해에 서울 사직동에서 태어나 줄곧 서울에서 자란 서울 토박이였다.
    그는, 보통학교(신명학교) 시절 이상은 살색이 희고, 국어보다는 그림을 좋아했고,

    체육을 싫어하는 아이, 그리고 담배 '칼표' 껍질에 나오는 도안을 거의 그대로 모방해 그림을 그리고,

    길가에 버려진 화투 목단 10끗자리를 그대로 그려 동네에서 자랑이 되기도 한 아이로 알려져 있다.


     

    보성고보 당시 동창들의 회고에 따르면 이상은 그림을 매우 잘 그렸고,자주 '난 화가가 될 거야'라고 말했다고 한다.

    또한 보성고보 재학 시절에 이상은 교내 미전에서 1등상을 수상했고,

    한국 최초의 서양화가였던 당시 미술 교사 고희동은 이상의 재주를 알고 극진한 사랑을 베풀었다고 한다.

    경성고등공업학교을 1929년에 졸업한 이상은 조선총독부 내무국 건축과 기수로 근무하게 된다.
    그는 서대문구 의주통에 있는 전매청 공사를 비롯하여 몇 군데의 설계를 입안, 현장 감독을 맡으며 일하게 된다.

    직장 생활을 하면서도 이상은 1929년 12월에는 조선건축학회 기관지인 <조선과 건축>의 표지 도안 현상 모집에 1등과 3등으로 당선되었고,

    1931년에는 <조선과 건축>에 몇 편의 일문시들을 발표했으며, 제9회 조선미전에 서양화 <자화상>으로 입선한다.

                                                                                                        -해피캠퍼스 (88shfwk) 시인 이상의 일대기 중에서-

     

     

    이상 문학 특강 / 박남철


    나는 부처 팔아먹고 살고, 이승훈이는 이상 팔아먹고 살고,

    송 머시기 는 이승훈이  팔아먹고 산다! 라는, 당대의 한 말씀을 남겨주셨다는,

    그 어떤 큰스님의 또 다른 한 말씀이,

    서기 2011년 11월 8일 저녁 6시 30분
    무렵, 신사동의 엠지타워 3층 ‘유심 세미나실’에서 시작된 문학 강연회에서 또다시 터져나오시고야;
    말았던, ‘거디었던’, 것이다.

     

     

    90년 뒤 육목단 화투 그림으로 이상을 판다.

    화려한 지상최대 장례식으로.....

     

     

    그래서일까 ?

    이상은 자신의 終生記종생기가 아직도 않 끝났다고 외친다.

     

     

        구본웅이 그린         화가   이상

     

     

     

     

    제발 그만 좀 팔아 먹어라!

    치사한 짓거리 그만 뭠춰라!

     

     

    落         張         不        入

     

     

    나는 지금 " 딜라일라" 노래가 듣기 싫어지는 아픔을 격고  있다.

     

     

     

     

     

     

     



    이상과 나혜석의 만남

    1927년 봄에 구본웅은 이상을 충무로에 있는 ‘메이지’ 제과점에서 만났다.

    지금까지 ‘메이지’ 또는 ‘모리나가’ 같은 최고급 제과점에 갈 때에는 항상 그의 아버지나 숙부를 따라 갔었다.

    그러나 대학생이 된 뒤 이제는 어른으로 행세하고 싶은 마음에 두 사람은 그 곳에 마주앉았다.

    그들이 커피와 곰보빵을 들며 한참을 떠들고 있을 때 뜻밖에도 정월 나혜석이 들어왔다.

    구본웅은 놀라서 얼떨결에 인사를 했다. 옆에 있는 이상은 홍당무 얼굴을 하고 있었다.

    정월은 남편(金雨英)이 만주지방 안동현 부영사의 임기를 마치고 이번 봄에 귀국해서 동래에 있는 시가에 있는데 곧 세계일주 여행을 떠난다고 했다.

    그녀는 ‘제6회 조선미전’에 출품하기 위하여 며칠 전에 상경했다며 우연히 구본웅을 만난 것을 무척 반가워했다.

    작년 말에 둘째 아들을 낳아 2남1녀의 어머니가 되었지만 만 31세인 그녀의 얼굴과 몸매에서는 아직도 사람들을 휘어잡는 매력과 교태가 넘쳐흘렀다.

    구본웅은 한때 미술을 가르쳐준 나혜석에게 이상을 소개하며 그가 미술과 문학에 특출한 재능이 있다고 말했다.

    그녀는 과자와 빵을 사러 왔는데 자기도 커피 한잔 마시고 가도 되겠느냐고 물었다.

    뜻밖에 그들은 동석하게 되었다. 그녀는 구본웅에게 동경이나 파리로 유학을 가보라고 격려했다. 이상에게는 너무 미남이라 그를 따라다니는 여자가 많겠지만 일부일처에서 벗어나서는 안된다고 덕담을 하면서 그의 등을 자상하게 두드려 주었다.

    그때 이상의 얼굴에는 번갯불이 내려친 듯 전율이 스쳤다.

    이상은 그녀에게 화답하듯 작년에 정월이 신문과 잡지에 발표한 ‘내가 어린애 기른 경험’ ‘생활개량에 대한 여자의 부르짖음’ ‘그림을 그리게 된 동기와 경력과 구심’ ‘미전 출품 제작 중에’ ‘내 남편은 이러하외다’ 그리고 소설 ‘원한’을 읽었다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정월은 어떻게 그런 것을 그렇게 잘 기억하고 있느냐며 이상의 기억력과 독서량과 정보력에 놀라는 표정이었다.

    “이상 김해경이라고 했지요? 아호가 무척 멋있는데….”

    “몇 년 전에 ‘신여성’에 발표하신 ‘강명화의 자살에 대하여’라는 글에 쓰신 정월(晶月)이란 아호를 보고 글과 아호가 무척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던 일이 있습니다.”

    이상이 그답지 않게 가느다란 목소리로 응답했다.

    “아! 그 글도 읽었어요? 이상!”

    이상은 서산에게처럼 자기에게도 말을 낮추어 줄 것을 간청했다.

    “그럼 그렇게 하자. 김해경 군. 서산도 강명화에 관한 글을 읽었니?”

    “저는 읽지 못했어요. 어떤 내용인지 간단히 말씀해 주세요. 정월 선생님.”


    기생 강명화의 죽음

    강명화는 기생이었다. 그녀는 사랑하는 애인에게 “나는 결코 당신을 떠나서는 살아 있을 수가 없고 당신은 나하고 살면 사회와 가정의 배척을 면할 수가 없으니 차라리 사랑을 위하고 당신을 위하여 한 목숨을 끊는 것이 옳소”라는 유서를 남겼다.

    1923년 6월15일 ‘동아일보’는 ‘康明花(강명화)의 자살’이란 제목 하에 10일 하오 11시경에 약을 먹고 11일 하오 6시 반에 고개를 땅에 박고 별세하였다는 간단한 기사를 내보냈다.

    나혜석은 ‘동아일보’에 기고한 글에서 20시간 가까이 죽음을 향하여 고통하고 신음했을 것을 생각하니, 전신이 벌벌 떨리고 소름이 쭉 끼치고 눈앞이 아물아물했다고 묘사했다.

    나혜석은 기생의 처지와 사랑을 연민의 정으로 이해하려고 애쓰면서 강씨의 자살 동기에 동정할 점이 많다고 지적했다.

    기생 강씨는 비운을 견디다 못해 정조(貞操)의 순수함을 보이기 위해, 자기 정신의 결백을 드러내기 위해, 세태에 분노하기 위해 자살을 감행했다고 정월은 이해했다. 그러나 정월은 자살 행위에 대해서는 맹렬히 비판했다.

    정월은 동기가 어떻든 자살은 생명의 존귀와 그 생명 역량의 풍부를 자각한 현대인이 취할 방법이 아니며, 어떻게 해서든지 살려고 할 때 연애의 철저함과 정조의 순수함과 정신의 결백함이 실현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결론적으로 정월은 우리 여자들이 건설적이고 긍정적이며 적극적으로 삶을 펼쳐 나가자고 외쳤다.

    “서산! 그리고 이상! 기생이나 선비나 부자나 백정이나 모두 인간으로 대접받아야 하고 인간답게 사는 세상을 우리가 빨리 만들어야 해. 물론 여자나 장애인이나 노약자도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드세.”

    그때 이상이 엉뚱한 말을 했다.

    “서산은 기생 채경이를 좋아해요.”

    “춘곡 고희동이 그렸던 모델 채경이 말이야?”

    정월이 물었다.

    “아니에요. 선생님. 이상이 괜히 그래요. 저는 저의 몸에 콤플렉스가 있기 때문에 예쁘고 건강한 여자면 누구든지 좋아해요. 이상은 재능이 탁월한 여자가 첫째 조건이고 다음으로 아름다움이 중요하대요.”


    “내 목숨은 헐값이 아니다”

    그 말에 이상의 얼굴에는 홍조가 번지기 시작했다.

    “아름답고 재능이 있는 여자라면 바로 난데…”

    정월의 농담에 이상은 자신의 생각을 들킨 듯 눈알까지 빨개지고 말았다.

    “선생님은 혹시 자살하고 싶은 충동이 드신 경우는 없으세요?”

    이상이 물었다. 이상은 얼마 전에 자살 충동을 느꼈다며 구본웅에게도 똑같은 질문을 했던 적이 있다.

    “좌절하거나 심한 상처를 입었을 때 절망한 사람은 자살 충동을 느끼게 되지. 특히 예술가들치고 자살 충동을 느껴보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예술가란 현실적이지 않은 저 높은 이상에 목표를 설정하고, 그 이상에 도달할 수 없는 현실에 좌절할 뿐만 아니라

    그 이상을 달성할 능력이 자신에게 없음에 절망하며 사는 인간이지. 그래서 자살 충동이 많을 수밖에 없어. 그러나 우리 목숨은 결코 그렇게 헐값이 아니야. 내 목숨이되 내가 끊을 아무 권리가 없는 것이지.

    내 몸은 결코 내 소유가 아니야. 우리 어머니 것이고 우리 조상의 것이며 내 사회의 물건이지.

    내 생명이 계속되는 최후까지 내 힘을 다하여 최선을 다해야지.

    남과 같이 행복하고 만족한 생활을 못하기로 크게 자포자기할 것이 무엇이야.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한다면 또한 이것이 행복이 아닐지….”

    나혜석은 그들의 화제가 자살 충동 이야기로 바뀐 것을 의식했는지 화제를 바꾸려고 했다. 그녀는 말을 이었다.

    “기생이나 천민 중에도 나보다 더 재능이 있고 똑똑한 여자가 많을 것이야. 그들에게 더 아름답고 순결한 사랑도 있을 수 있고….

    기생이나 작부가 되면, 남자들과의 성 관계는 밥 먹는 일이나 다름없는 비감정적이고 일상적인 것에 불과할 거야. 그들에게는 직업상의 특성을 인정해 주어야 하지 않을까.

    아니 식사와 성교는 동물의 본능적 행동이야. 물론 사회와 제도를 위하여 인간은 절제되고 규제되어야 하겠지만 지금처럼 정조와 신분에 대해 그렇게 호들갑을 떨어야 할까.

    언젠가 군들이 그런 여자들을 만나면 기생 강명화처럼 좌절과 상처를 입지 않도록 유념하게. 제도와 관행도 자네들이 나서서 개혁해야 하네. 우선 우리부터 실천하는 용기와 헌신이 있어야 해.

    기생도 천민도 떳떳하게 선비의 본부인이 될 수 있고 사람다운 사랑과 순결을 인정받을 수 있는 세상이 빨리 와야 하네. 어느 누구도 차별받지 않고 차별당하지 않는 그런 사회 말이야.”  


    일본어로도 작품을 써라

    나혜석은 조혼과 축첩 등에 관하여도 쉴 새 없이 자기 의견을 털어놓으며 그들을 교육하려 했다.

    그녀는 교사와 예술가 그리고 모범생과 모험가 사이를 숨돌릴 틈 없이 오락가락했다. 숙녀로 보이다가 어느새 투사로 바뀌고, 교태를 부리다가 갑자기 근엄한 표정으로 분위기를 반전시키기도 했다.

    “정월 선생님. 선생님 속에는 여러 모습이 함께 나타나는 것 같네요. 자아가 여럿이라고나 할까요?”

    이상이 조심스럽게 정월의 눈치를 살피며 말을 이었다.

    “그래! 이상. 바로 보았다. 사람에게는 자아가 하나뿐이 아니지.

    누구에게도 일관된 하나의 자아는 없어. 사람들이 하나라고 오해할 뿐이지.

    사람의 생각과 느낌과 행동양식은 시시각각 변하게 마련이지.

    한 몸뚱이 속에 악하고 착한 온갖 면이 함께 있는 거야. 어느 면이 얼마만큼 언제 어떻게 나타나느냐에 따라 범죄인도 되고 영웅도 되고 호인도 되고 악인도 되고 샌님도 되고 탕아도 될 수 있는 것이야.”

    이상은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나혜석은 이제 일어나야 할 시간이라면서도 일어날 움직임은 보이지 않았다. 이상이 화제를 바꿨다.

    “정월 선생님은 그림으로 나타내는 자아와 글로 나타내는 자아가 서로 다르신 것 같아요. 그림으로 보면 매우 서정적인 분 같으신데, 글로 보면 매우 투사적이세요. 그렇죠?”

    정월은 대답 대신에 그렇다고 수긍하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이상의 비범한 눈빛에 오히려 끌려들어가는 듯했다. 이상은 말을 이어갔다.

    “저는 요즘 시를 열심히 쓰고 있어요. 물론 습작이지요. 그런데 선생님. 조선어로만 글을 써야 될까요?”

    “일본어나 영어나 불어로도 쓸 수 있으면 더 좋지.”

    정월의 이러한 답변에 구본웅은 이의를 달았다. 조선에서 일어로 시와 소설을 쓰면 현재는 물론 후세에까지 친일파 문인으로 몰릴 가능성이 있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정월의 생각은 달랐다.

    “그것은 가설일 수 있겠지만 편협한 생각이야. 편협한 여론에 밀려 창작력을 소실하면 안되지. 우리가 조선 사람만을 위해, 또는 조선 사람에게만 보이려고 예술을 하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예술은 영원한 것이고 국가나 사회라는 벽을 뚫고 갈 보편성이 있어야 하는 것이야. 이상에게 어학 능력만 있으면 일어고 영어고 중국어고 러시아말이고 간에 모든 언어와 예술수단을 다 동원하여 표현하게.”

    이상의 얼굴은 점점 더 밝아져 갔다. 이상은 이미 일어로 시를 많이 습작해 놓았다고 밝혔다. 앞으로 적어도 5개 외국어를 유창하게 말할 수 있도록 어학 공부를 열심히 하겠다고 어깨를 으쓱거렸다.

    “정월 선생님. 조선어는 영어나 중국어나 일본어에 비해서 세련도가 많이 떨어져요. 개념화할 수 있는 어휘도 너무 적고 쓰임도 잘되지 않아요.”


    오늘에야 진짜 문학도를 만났다

    구본웅은 이상의 발언에 놀랐다. 세종대왕이 만드신 우리 글이 얼마나 좋은 언어인데 하면서,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이상은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을 창제한 역사는 수백 년이 넘었어도 그것을 문학적으로 다듬어 본격적으로 쓰기 시작한 것은 20세기에 들어서 이인직(李人稙)의 ‘血(혈)의 淚(누)’ 이후이기 때문에, 문학적 언어로서의 한글은 아직 어린이 수준이라고 주장했다.

    정월도 이에 맞장구를 치며 오늘에야 진짜 문학도를 만났다고 기뻐했다. 정월과 이상은 조선어를 조선에서의 단순한 통용어 수준에서 학문어와 예술어로 개발하고 발전시키자고 의기투합했다.

    그리고 정월은 이상과 서산에게 조선어로만 글을 쓰지 말고 일본어는 물론 다른 나라 언어로도 글을 발표하라고 재차 격려했다. 정월 자신은 우선 조선에서의 남녀평등과 여권을 주장하는 일이 급해서 조선어로 자신의 주장을 펼치고 있지만, 이상과 서산은 조선만의 문학에서 탈피해 아시아권 전체, 아니 세계적인 작가로 인정받기 위하여 우선 일본어로라도 글을 많이 쓰라고 주문했다.

    정월의 힘있는 조언에 이상은 크게 고무되었다.

    그러나 구본웅은 이상과 정월의 정서가 이해되지 않았다. 언젠가는 해방될 것이다.

    그럴 때 그들이 남긴 일본어 작품에 어떤 평가가 내려질 것인가? 친일 문학인으로 낙인찍힐 것을 염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들은 그러한 편견과 몰이해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이미 이상의 시공간은 식민지 시대에 태어난 일부 반일 민족주의 지식인들이 그들의 생명이 마감될 때까지 완고하게 지켜간 시간적인 편견과 조선반도라는 지역적인 편협성을 뛰어넘고 있었기 때문이다.

    드디어 정월 나혜석은 시계를 보더니 많이 늦었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상은 정월 앞에서 한동안 넋 나간 장승처럼 그대로 서 있었다. 구본웅이 이상의 그런 모습을 다시 본 것은 몇 년 후 그가 금홍(錦紅)을 처음 만났을 때라고 기억했다.

    ‘제6회 조선미전’이 1927년 5월25일부터 3주일간 남대문통 조선총독부 도서관에서 열린다고 4월에 발표되었다. 작품 접수 마감일은 5월17일 오후 5시까지였다. 작업실을 같이 쓰는 서양화가 이창현은 구본웅에게 조선미전에 함께 출품하자고 졸랐다.

    구본웅은 단호히 거절했다. 장애인이라고 관립학교 입학도 거절당했는데 또다시 관청에서 주관하는 조선미전에 출품하라고? 그는 관청 근처에는 얼씬도 하지 않겠다고 자신과 굳게 약속했으니 절대 출품하지 않겠다고 분명히 말했다.

    이창현은, 구본웅의 작품 실력이 조선미전의 특선급이라고 김복진도 장담했고 또 이렇게 밤잠을 안자고 수개월간 열심히 만들었는데 사장시킬 수 있느냐며 언성을 높였다.

    그러나 구본웅은 관청의 인정을 받기 위하여 조각을 하는 것이 아니라며 콧방귀도 뀌지 않았다.

    이창현은 할 수 없이 마감 날인 5월17일 오전에 자기 작품만 출품했다.

    그리고 작업실에 돌아와 완전히 탈진해 쓰러진 구본웅을 발견했다. 그는 인력거를 불러 급히 병자를 데리고 병원으로 갔다. 그리고 다시 작업실로 달려왔다.

    그리고는 구본웅이 근래 만든 몇 개의 조각 작품 중에서 하나를 골랐다. 그는 시간에 쫓겨 헐떡이며 조선미전 접수창구로 달려가 작품을 내밀었다. 그때 비로소 신청서의 작품명 난에 무엇이라고 써야할지를 두고 고민에 빠졌다. 그는 구본웅이 그 해에 계속하여 얼굴 습작을 했다는 것을 상기하고 ‘얼굴 習作(습작)’이라고 적어 넣었다. 이렇게 하여 조선 최고 권위의 미술전람회에 정말로 습작이 출품되는 파격이 벌어졌다.

    또한 구본웅의 생애 전체에 걸쳐 관청에서 주관한 전람회에 단 한번 출품하게 된 마땅치 않은 경력이 만들어지게 된 것이다.


    불쾌한 수상소식

    5월21일 오전 10시에 심사 결과가 발표된다고 하여 이창현이 총독부 도서관에 다녀왔다. 이창현은 총 1416점이 응모하여 310점이 입선했는데, 서양화는 810점 중 177점이 입선되고 조소 분야는 25점이 응모하여 9점이 입선되었다고 떠벌렸다.

    특선은 서양화, 동양화, 조소, 서예, 사군자 분야를 모두 합쳐 29점뿐이고 조선인 12명이 특선에 올랐는데, 놀랍게도 무감사로 입선했던 나혜석이 이번에는 특선에서 탈락하는 이변이 생겼다고 흥분했다.

    자기는 이번에도 입선에 머물렀다고 어깻죽지를 늘어뜨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구본웅은 그날 저녁에야 비로소 김복진에게서 조소 분야에서 조선인 한 명이 특선상을 받게 됐는데 수상자가 바로 구본웅 자신임을 통보받고는 경악하고 말았다.

    그는 조선미전 기간 내내 불쾌감을 감출 수가 없었다. 앞으로 다시는 조선이건 일본이건 관청 전람회에 얼씬거리지 않고 진취적이고 전위적인 영원한 야인(野人)이 되겠다고 다짐했다.

    그렇지만 구본웅의 수상은 조선미전이 개최된 이래 조소 분야에서 김복진 다음으로 조선인의 작품이 특선에 입상한 것으로 조선미술사 등에 기록으로 남아 있다.

    1928년 여름 김복진이 일제 경찰에 잡혀갔다는 소식이 날아왔다. 공산당 간부라는 혐의를 받았다고 했다.

    구본웅은 당혹감을 느꼈다. 그가 보기에 김복진은 성실하고 착한 휴머니스트이고 유능한 이상주의자였으며 열기에 넘치는 민족주의자였다. 무엇보다 그는 구본웅에게 자상하고 사려 깊은 스승이었다.

    그러나 구본웅의 집안 어른들은 김복진 주변에 있는 사회주의 성향의 예술인들이 구본웅에게 접근하는 것을 차단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구본웅도 스스로 새로운 전환과 변신이 필요하다는 것을 절감하고 있었다. 김복진에 대한 실망감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는 조소작품 활동에 넘기 힘든 한계를 절감했다.   


    무작정 떠난 동경유학

    지난 2년 간 구본웅은 조소(彫塑)의 매력에 푹 빠져 있었지만 건강이 나쁘고 힘이 약한 장애인이 도전하기에는 너무나 힘든 분야였다. 그래서 조소를 포기하고 미술을 본격적으로 공부하기로 결정했다. 무엇보다도 김복진 쇼크에서 빨리 벗어나기 위하여 1928년 가을에 무조건 일본으로 떠나기로 했다.

    1928년 9월 구본웅은 부산으로 가서 일본행 여객선을 탔다. 동경에 도착하여 누구나 쉽게 들어갈 수 있는 가와바타(川端) 미술학교 양화부에 등록했다. 교육은 주로 석고 데생이었다.

    그러나 무조건 선생을 따라서 실습하는 도제식(徒弟式) 교육에 싫증이 났다. 그 당시 일본에 유학하는 미술학도들은 대부분이 가와바타 미술학교를 거쳐 관립학교인 동경미술학교에 입학해서 아카데믹한 고전파와 인상파의 아류를 뒤쫓았다.

    그러나 구본웅은 스스로 정한 원칙에 따라 처음부터 관립학교는 안중에도 없었다.

    그는 전통적인 굴레에서 벗어나 새롭고도 실험적인 조형예술에 몸을 던지고 싶었다. 그래서 자신에게 맞는 미술기법을 찾아내기 위하여 이론 공부부터 하기로 작정했다.

    1929년 봄 그는 일본대학 예술전문학부 미학과에 입학해 정식으로 예술이론 공부에 매달렸다. 그 동안 공부하던 미술실기와 달리 학구적인 분위기가 마음에 들었다.

    이후 1년간 예술이론을 본격적으로 공부한 경험이 평생 동안 예술이론의 발전과 그 동향에 깊은 관심을 갖게 했으며 미술비평가로서 미술평론과 미술론을 집필하는 바탕이 되었다.

    1929년 여름방학이 다가왔다. 구본웅의 아버지는 구본웅의 혼처가 정해졌으니 방학 다음날 서울로 돌아와 일주일 후에 결혼식을 올리라고 편지로 통보했다.

    규수는 종1품 벼슬을 지낸 강희맹(姜希孟)의 후손으로, 경기도 연천군으로 낙향하여 현재는 가세가 기울었지만 명문가의 후예라고 힘주어 쓰셨다. 그런 여자가 왜 꼽추에게 시집을 오느냐고 물을 것 같았는지,

    혼인은 다 하늘의 인연으로 맺어지는 것이지

    사람의 힘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했다. 결혼하는 날에야 비로소 신부 이름이 강임(姜妊)이라는 걸 알았을 정도로 구본웅은 그녀에 관해 아는 바가 없었다.

    혹시 자신처럼 장애인이 아닌가 눈여겨보았지만 그녀의 얼굴과 체형은 정상이었다. 결혼 첫날밤 그는 착하게 생긴 새하얀 피부의 건강한 여자를 안았다. 그녀는 한없이 떨고 있었다.

    그는 신부에게 어떻게 꼽추에게 시집왔느냐고 물었다. 그녀는 부모가 정해준 대로 따랐다며 고개를 떨구었다.

    그는 아버지가 그녀의 친정에 논밭을 주었음을 그날 처음 아내로부터 들었다.

    한없는 미안함과 측은함, 열등감과 당혹감 그리고 분노와 처절함이 뒤섞여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그는 신부를 부둥켜안고 울먹이면서 신혼 첫날밤을 지샜다. 신부는 오히려 꼿꼿이 앉아 그를 격려하고 감싸는 의연함을 보였다.


    조선 최초의 야수파 화가

    신랑 구본웅은 외아들로서 가계를 잇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점과 결혼의 의미를 이해했다.

     아들을 많이 낳아 대를 이어 잘 기르는 것이었다.

     숙부 말씀이 서양에서도 결혼이란 성교와 육아의 제도화라 하지 않았던가! 물론 사랑이 결혼에 중요한 전제가 된다고 했다. 그러나 지금 그의 신부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아들을 낳는 일이었다. 이를 위한 도구 내지 기계 노릇을 열심히 해야 한다. 그런데 그는 도구나 기계나 원료가 되기 싫었다.

    서로 첫눈에 반한 격정적인 사랑에 빠지고 싶었다. 아름다움에 관한 그의 집착과 사랑은 남달랐다. 그는 아름다움에 대해서는 첫눈에 반했던 기생 채경이 이하로 눈높이를 내려본 적이 없었다.

    그의 눈은 이상형에 고정되었다.

    1930년 봄 구본웅은 혼자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태평양미술학교에 입학하여 유화(油畵)를 전공했다.

    그동안 그는 일본대학 미학과에서 익힌 미술이론을 바탕으로 자신의 내부에 잠재한 자학적인 저항정신을 표출하는 작품들을 만들기 시작했다.

    당시 일본 화단의 주류는 인상파에서 야수파를 포함한 넓은 개념의 표현주의로 옮겨 가고 있었다.

    야수파(포비즘)는 극한적으로 단순화한 형태와 선명한 원색적 색조 그리고 대담하고 격정적 필촉으로 화면을 형성하는 특색을 지녔다.

    그는 유럽에서 발아해 일본 화단에 이입된 이 대담하고 거칠면서도 선명한 야수파의 기법에 매료되었다. 바로 이러한 미술기법이 자신과 사회에 대한 콤플렉스를 배설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아차렸다.

    그는 새로운 화법으로 1930년 동경 태평양미술전 콩쿠르에서 1929년에 이어 2년 연속 수상하는 영광을 안았다.

    더욱이 1930년 가을 구본웅은 ‘이과회미술전람회(이과미전 또는 이과전 또는 이과회전)’에 입선했다.

     이과(二科)란 전통적인 서양화의 화풍을 일과(一科)라 하는 데 반해 진취적 경향을 가리키는 용어였다.

    제국미전이 1과 중심으로 운영되는 관전(官展)인 반면 이과미전은 제국미전과 쌍벽을 이루는 2과 중심의 민전(民展)이었다. 조선의 언론들은 조선의 청년 수재 구본웅이 조선사람으로는 처음으로 이과미전 양화부에 입선했다고 보도했다.

    3년 후인 1933년에는 김종태와 신흥휴가, 1934년에는 김종태, 1935년에는 김환기가 이과미전 입선 기록을 이어갔다.

    이과미전에 입선하고 작품이 특출하다는 소문이 나자 구본웅에게는 일본 각지에서 연애편지가 날아들었다.

    같은 하숙집에서 매일 만나는 여학생들도 데이트하자고 열광했다. 그

    녀들에게는 그가 불구거나 기혼인 것이 문제가 되지 않는 것 같았다.

    오직 특별한 재능과 유명인사라는 점에 호기심을 보이며 애정과 성적인 관심을 나타냈다.

    그러나 전람회 소식을 듣고 여러 장의 편지를 보내고 일본까지 찾아왔던 한국 신여성은 등이 굽은 그를 보고는 말 한마디 없이 도망가버렸다.

    1930년 가을에 이과회 소속 화가들 중 야수파와 표현주의파에 속하는 화가들이 결속하여 독립미술가협회를 창설했다.

    1931년 1월에는 ‘제1회 독립미술가협회전람회(독립미전 또는 독립전)’를 개최했다.

    야수파에 심취해 있던 구본웅은 독립미전에도 출품해 조선인으로는 유일하게 입선했다.

    5년이 지난 1936년에는 유영국, 1937년에는 김만형이 조선인으로서 독립미전 입선 기록을 이어갔다.   


    전위예술 경향의 새로운 화풍

    동아일보는 구본웅에게 1931년 6월에 동아일보 사옥에서 개인전을 열어주겠다고 제의했다.

    서울에 있는 신문사가 개인전을 주최하고 주관하는 것은 극히 이례적이었다.

    그는 이 개인전에 49점을 출품했다. 작품 대부분이 일상의 주변에 있는 정물화와 풍경화였다. 그러나 전위예술의 여러 경향을 섭렵한 새로운 화풍이라는 소문이 퍼져서 예상 밖으로 관람객이 넘쳐났다.

    개막식 날은 이화여전과 숙명여전에 재학중인 신여성도 많이 찾아왔다. 그들은 작가가 키 작은 선생님이라고 알았다. 월간 종합지 ‘東光(동광)’이 1931년 5월호에 구본웅을 “일본의 이과전과 독립전에서 새로운 기치를 휘두른 키 작은 선생님”으로 소개했기 때문이다.

    그 표현이 꼽추란 의미로 전달되지 않고 아담한 체구를 지닌 동경 어느 학교의 미술교사로 조선인들에게 알려졌다. 신여성들은 작가를 앞에 내세워 소개하라고 요청했다. 꼽추가 앞에 나서자 그들 중 몇 명은 두 말 않고 자리를 떴다. 구본웅은 그녀들이 당황하는 걸 보며 오히려 긍지와 재미를 느꼈다.

    자신감이 노력과 성취로 만들어지고 그 자신감은 여유와 긍지와 새로운 각오로 축적되는 것을 체험하는 순간이었다.

    ‘제8회 조선미전’에서 특선했던 김주경(金周經)은 ‘구본웅 개인전’에 관한 평을 ‘조선일보’에 다음과 같이 발표했다.

    “이제까지 조선에 소개되지 않았던 쉬르리얼리즘(초현실주의)을 처음으로 소개한 것이다. 연(然)이나 씨가 발표한 작품 전부가 쉬르라는 것은 아니다.

    그중에는 큐비즘(입체파)과의 중간층과 포비즘(야수파)과의 중간층 내지 익스프레셔니즘(표현주의), 또는 임플레이셔니즘(인상파)의 중간층에 속하는 작품들도 병진되었음을 부기하여 둔다.”

    그밖에 많은 사람들이 구본웅이야말로 우리나라 최초의 아방가르드(전위) 화풍의 선구자라며 대단한 관심을 나타냈다. 동아일보 개인전이 끝난 후 그를 ‘운명의 화가’ 또는 ‘숙명의 화가’ 또는 ‘서울의 로트렉’라고 부르는 사람이 늘어났다. 그들은 꼽추가 된 그의 운명을 안타까워하면서도 바로 그 운명이 그를 뛰어난 화가로 만들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는 ‘노력하는 예술가’일 뿐이었다. 열심히 정진하는 것이야말로 어떠한 역경에서도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삶을 살려는 의지를 지탱해주는 원동력임을 일찌감치 깨달았던 것이다.

    ‘동아일보’ 개인전이 끝나고 일본으로 돌아간 구본웅은 1933년 3월 초 태평양미술학교 본과를 졸업하고 서울로 돌아왔다.

    한편 폐병이 심해진 이상은 2월 말에 총독부를 그만둔 후 습기로 눅눅하고 퀴퀴한 냄새로 가득 찬 골방에 이불을 뒤집어쓰고 누워있었다.

    구본웅은 요양을 위해 그를 황해도 백천온천으로 데려갔다. 이상은 그곳에서 금홍(錦紅)을 만나게 되는데 그녀를 6월초에 개업한 제비다방의 마담 겸 내연의 처로 맞아들였다.


    백천온천에서 먼저 서울로 돌아온 구본웅은 1933년 4월28일부터 휘문고보 강당에서 열린 ‘제12회 서화협회전람회(서화협회전 또는 協展)’에 ‘실제(失題)’란 작품을 출품했다.

    서화협회전은 조선미전에 맞먹는 민전이었다. 전시된 작품은 대부분 서양화였다.

    시인 겸 비평가 김기림(金起林)은 편석촌(片石村)이란 필명으로 ‘조선중앙일보’에 비평문을 기고했다. 그는 구본웅에게 깊은 관심을 나타냈다.

    그는 “지극히 불리한 환경에도 그만한 경지까지 개척해 나간 구본웅의 예술에 대한 정열에 탄복한다”며,

    “구본웅의 작품 ‘실제’야말로 조선미전의 관료주의에 대한 반대로서 서화협회전의 빛나는 존재가치를 또렷하게 인식토록 해주는 작품”이라고 평가했다.

    그는 마지막으로 “조선화단의 ‘아카데미즘’이 그에게 아무리 돌을 던질지라도 구본웅씨는 엄연히 우리 화단의 최좌익이다. 적막한 고립에 영광이 있어라”라고 끝을 맺었다.

     김기림은 조선의 전통적 관학(官學)파와 관전(官展)파 화가들이 아무리 무어라 하더라도 우리나라 최초의 야수파 화가이고 최초·최첨단의 전위화가로서 구본웅에게 계속 정진하라는 격려를 보낸 것이었다.


    구본웅은 매일 ‘낙랑팔라’와 제비다방에 들러 예술인들과 담소를 나누는 등 활발하게 활동했다.

    그는 1933년 4월에 오늘날 유네스코회관 근처에 있는 건물 2층을 빌려 경성정판사(京城精版社)를 개업했고 9월에는 가까운 거리에 있는 소공동에 골동품 갤러리 우고당(友古堂)을 열었다.

    경성정판사에서는 주로 극장 포스터를 디자인하고 인쇄해주는 일을 했으며 우고당에서는 미술품을 감정하고 좋은 골동품을 발견했을 때 일본인이 아니라 조선인 수집가를 연결해 주는 역할을 했다. 이는 장애를 극복하고 적극적이고 긍정적이며 개방적으로 살려는 노력의 일환이었다. 또한 아버지로부터 경제적으로 독립하려는 몸부림이었다.

    우고당 3층에 아틀리에를 마련했는데 교통이 좋아서 낮에는 친구들의 집합소가 되었다.

    그는 특별한 재주꾼들과 교류를 즐겼다. 늘 자진해서 각종 모임에 참석하고 주변 사람들과 융합하려고 애썼다.

     어떤 모임에 가도 장애인이 왔다는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 항상 쾌활하고 명랑한 얼굴로 사람들을 대했으며 재담과 농담을 잘했다.


    ‘꼽추 멋쟁이’라는 별명

    시인 고은(高銀)은 ‘이상 평전’에서 구본웅의 본가(本家)와 그의 일면을 이렇게 표현했다.

    “‘낙랑팔라’에서 만나는 일을 제외하면 그들이 매일 만나는 곳은 다동에 있는 구본웅가의 광활한 대가(大家) 사랑의 화실이었다.

    그 화실 겸 거실은 당시의 시인, 작가, 비평가, 화가, 심지어 영화감독까지도 모여들어서 문예살롱의 기분이 짙었으며 그 본웅가(家)를 다옥정(多玉亭)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본웅은 화가답게 그의 꼽추에도 불구하고 서구적인 멋 가락을 잘 나타내어서 다옥정(多屋町) 기생들도 ‘꼽추 멋쟁이’ ‘꼽추 도련님’이라는 별명으로 수군거릴 정도였다.”

    구본웅은 외출할 때면 양복 정장을 차려 입었다. 그런데 양복 어깨에 각을 만들고 구부러진 짧은 등을 돋보이게 하여 꼽추인 외모가 더욱 두드러져 꼴불견이었다.

     그래도 그의 아버지는 격에 맞는 의관과 모자를 고집했다. 그래서 그는 최고급 양복을 격식에 맞게 제대로 갖추어 입었지만, 양복 정장이 귀하던 시절에 서양 상류층의 복장에 익숙지 않은 일반인들에게 이 예술가의 모습은 우스꽝스럽게만 보였다.

    1934년 5월에는 동경미술학교 출신 7명과 구본웅이 모여 목일회(牧日會)를 창립했다. 이들 8명은 조선미전의 개혁을 주장하는 인물들이었다.

    이런 뜻을 나타내기 위하여 이들은 조선미전 출품을 거부하고 ‘제13회 조선미전’을 며칠 앞둔 5월16일부터 일주일간 화신백화점 5층에 있는 화신화랑에서 ‘제1회 목일회전’을 개최했다.

    회원 8명이 46점을 출품했는데 구본웅의 작품이 14점이나 됐다. 그러나 그는 처음으로 비평가로부터 혹평을 듣는 뼈아픈 경험을 하게 되었다.

    A생(生)이란 가명으로 ‘조선일보’에 기고된 ‘목일회 제1회 양화전(洋畵展)을 보고’란 비평문은 “구본웅의 활달한 작품이 14점이나 나와 구본웅 개인특별전을 하는 듯한 느낌이 들 정도”라고 표현했다.

    그는 “구본웅의 작품들이 마치 사군자 휘호회에서 보이는 단숨의 붓놀림 같은 화풍 탓으로 보는 사람의 눈을 현란하게 하지만 현실에 발붙이지 않은 채 구름 위에 그 어느 세계를 건설하려는 데카당한 일면이 있다”고 신랄하게 비판했다.

    A생은 ‘얼굴’에 대해 “시각의 예리함을 보여주어 작가의 관점을 잘 드러낸 작품”이라고 칭찬하면서도 “몹시도 대담한 구상과 색채에 비해 선이 무기력해 보인다”는 아쉬움을 나타냈다.

    그리고 그의 초현실주의 작품에 대해서는 “(구본웅의) 괴로운 인생을 그 어느 숭고하고 신비스러운 환상의 세계에까지 유도”하려는 것이라고 평가하면서도 “현실이 없는 초현실”이라고 꼬집었다.   


    구본웅 비평시대가 열리다

    1934년 5월이 가까워오면서 정월 나혜석은 ‘제13회 조선미전’에 대한 비평 요청이 오기를 고대하고 있었다. 그녀는 제1회부터 제11회까지 11년간 아홉 차례 출품하여 아홉 차례 입선했고 다섯 차례나 입상했다.

    또한 그중 세 차례는 조선인으로는 최고상을 받았다. 출품하지 못한 경우는 구미를 여행한 2년과, 그리고 작품 접수 기일 변경을 제대로 전달받지 못한 제12회 등 세 차례 뿐이었다.

    그녀는 누구보다도 조선미전에 많이 출품했고 그때까지 입상과 최고상을 가장 많이 받은 화가였다. 1933년에는 출품하지 못한 대신에 ‘매일신보’의 요청으로 ‘美展(미전)의 인상’을 발표했다.

    그녀는 앞으로도 계속해서 미술비평을 하고 싶었다.

    어느 모로 보나 누구보다도 자신이 미술비평 자격과 능력을 갖추었다고 믿었다. 그런데 개막일이 며칠 지나도록 어느 언론에서도 비평 요청이 없었다.


    구본웅은 전년도 10월에 ‘靑邱會展(청구회전)을 보고’란 비평문을 ‘동아일보’에 투고했었다. 이 비평문이 남다르다는 소문이 났다. 그래서 여러 신문사에서 ‘제13회 조선미전’에 대한 비평문을 써달라고 요청했다.

    구본웅은 첫번째로 요청을 받은 ‘조선중앙일보’에 ‘제13회 조선미전을 봄’을 5월30일부터 6월6일까지 연재했다. 그리고 ‘월간매신’ 6월호에도 비평문을 게재했다.

    각 신문사의 비평문 중에서 구본웅의 글이 제일 뛰어났고 또한 관심의 대상으로 떠올랐다. 9월에는 ‘조선일보’가 그에게 미술계에 대한 한 해의 소감을 써달라고 요청했다.

    그 해에 10명 남짓한 비평가들이 ‘일본화풍의 맹목적 본뜨기’와 ‘겉핥기식 향토색’에 대하여 꾸짖고 나섰지만 이들은 언론에 각각 한 번 정도의 비평을 썼다.

    그러나 구본웅과 프로예맹(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 출신의 정하보(鄭河普)는 각기 비평을 세 편이나 쓰는 적극성을 보였다. 물론 정하보와 구본웅의 생각은 달랐다.

    구본웅이 주장하는 향토성은 소재 따위로 민족성을 해석하는 수준을 뛰어넘는 것이었다.

    조선 풍속이나 조선의 자연을 그리는 것만이 향토성이 아니며 조선인 생활의 모던화를 표현하고자 하는 것도 향토성이라고 주장했다. 그래서 조선 전래의 생활풍습, 언어행동, 풍토와 역사 따위에 바탕을 두는 직관이 나타나면 그것이 향토성 아니냐고 물었다.

    당시에 일본제국주의 정부는 조선에서 민족성이란 용어를 쓰지 못하게 했으며 조선총독부는 문화정책에서 지방색이란 용어를 강조했다. 이에 반발한 조선인들은 향토성 또는 향토색이란 표현을 선호했다.

    구본웅의 비평에 대하여 소설가 이태준(李泰俊)이 지원사격을 하고 나섰다.

    그는 “백화점에 태극선 화문석 같은 것을 늘어놓으면 조선 맛이 난다.

    그러나 한 예술품이 가진 정신이나 맛은 그러한 조선 물정이나 묘출하였다고 해선 조선적 작품은 될지언정 조선미술이 되는 것은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이어서 그는 “요즈음 조선심(朝鮮心)이니 조선정조(朝鮮情調)니 하고 그것을 고조하는 예술가들”이 있지만, “내면적인 것을 잊어버리고 외면적인 것에만 관심을 기울이는” 예술가들이 많음을 안타까워했다.


    파란 몰고온 이혼고백장

    나혜석은 이제 미술비평에 구본웅 시대가 왔음을 직감했다. 나혜석은 미술작품에서만이 아니라 미술비평에서도 이미 설자리가 없다는 것을 절감해야 했다.

    그래도 자신이 제일 아끼는 제자인 구본웅이 그 자리를 차지한 것에 긍지와 보람을 느끼고 위안을 삼으며 눈물을 머금었다.

    나혜석은 다시 남녀평등과 사회정의를 위한 공격에 나섰다.

    그녀는 ‘삼천리’ 1934년 8월호와 9월호에 장문의 ‘이혼고백장’을 연재했다. 자신의 10년간 결혼생활과 4년 전 이혼 과정의 적나라한 갈등과 비극적인 심경을 솔직하게 밝히고, 조선에서 여성들에게만 일방적으로 강요하는 정조 관념을 비판하면서 앞으로도 계속적인 자아발견 그리고 정진과 재기를 다짐하는 글을 발표했다.

    당시로서는 사회적으로 엄청난 파문을 일으키는 사건이었다. 더욱이 그녀는 이혼의 도화선이었던 친일적인 사회지도자 최린(崔麟)을 상대로 파리에서의 정조 유린에 대한 거액의 위자료를 청구하는 소송을 9월19일에 제기했다. 이 사실이 1934년 9월20일자 언론에 보도되어 남성중심의 조선 사회는 또다시 엄청난 충격에 휩싸였다.


    다방 운영의 적자와 금홍의 가출 등으로 어깻죽지가 처진 이상은 오후 늦게 구본웅의 우고당 작업실에 들르거나 밤에 만취해 다옥정 구본웅의 집으로 찾아오는 일이 잦아졌다.

    그럴 때면 이불에 오줌을 싸고 방에 토하기 일쑤여서 구본웅의 부모는 이상을 싫어했다.

    그래도 구본웅은 이상이 좋았다. 꼽추와 결핵환자인 두 사람만의 동병상련 의식은 서로 어렵고 힘들 때 아픔을 승화시켜 황량한 마음을 훈훈하게 녹여주는 화롯불 같았다.

    구본웅은 이상의 얼굴을 초상화로 남겨야겠다고 생각했다.

    그의 얼굴은 바로 억압과 암울의 시대를 사는 예술인의 모습이었다. 구본웅은 이상의 얼굴을 통해서 식민지 시대를 사는 지성인들의 모습을 상징화하기로 했다.

    1935년 3월3일 13시, 구본웅은 우고당 작업실로 이상을 불렀다.

    원래 이상은 오래 전부터 초상화를 그려달라고 수없이 졸랐다. 그러나 구본웅은 남의 초상화 그리는 일은 철저히 거절했다. 이번에도 그의 초상화를 그리는 것이 아니라 권태와 조소와 자학과 반항과 분노와 초탈을 폭포줄기처럼 쏟아내는 젊은이를 나타내려 한다고 작품의도를 설명했다.

    구본웅은 그에게 다음날부터 매일 모델로 나와줄 것을 부탁했다. 이상은 그 작품을 자기에게 주는 것을 조건으로 응했다.

    구본웅은 우울하고도 비탄에 잠긴 표정을 강조하기 위하여 바탕 화면을 푸른 색조로 짙게 처리하겠다고 이상에게 양해를 구했다. 이상은 이번에는 황달이 아니라 ‘청달’에 걸렸다는 조소를 받게 될 것 같다며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제비다방에 걸려있는, 이상 자신이 그려 1931년도 ‘제10회 조선미전’에 입선했던 ‘自畵像(자화상)’에는 누런 색이 강조되었다. 그래서 친구들로부터 황달에 걸렸다는 놀림을 자주 받았던 것이다.

    구본웅은 그에게 파이프를 비스듬히 물고 골똘히 생각에 잠겨있는 표정을 지으라고 주문했다. 이상은 평소에 파이프 담배를 피우지 않았다.

    실제로는 구본웅이 파이프 담배를 물고 다녔는데, 구본웅은 그런 모습에서 일상성에 조소를 퍼부으면서 반항 의식을 분출하는 한 지성인의 내면세계를 표출해 내려고 안간힘을 썼다.


    ‘우인상’은 구본웅의 자화상

    구본웅은 친구 얼굴에서 그의 내면을 읽고, 나아가 불우한 한 시대의 내면까지 묘출하려고 매일 이상을 불러 각기 다른 포즈를 취하게 했다.

    이상은 왜 그림은 빨리 안 그리고 요리조리 포즈만 취하게 하면서 사진 모델 취급을 하느냐고 성화가 대단했다. 그 과정에서 구본웅은 단순한 친구의 모습이 아닌, 한 시대의 상징과 자신의 내면을 나타내려 했다.

    그리고 그러한 시대적, 신체적 조건에 적응하면서도 이를 권태롭게 수용하고 조소하며 도전하는 자신의 내면 풍경을 나타내려고 열중했다.

    마침내 구본웅은 이상의 눈매를 더욱 날카롭게 하고 파이프를 비스듬히 물고 있는 얼굴을 더욱 창백하게 그림으로써 젊은 지성인의 반항적이고 괴팍한 이미지를 포착했다.

    모든 것이 가소롭다는 표정으로 담배를 피우고 있는 이상의 얼굴은 그 개인의 권태를 자각하려는 내면의 구현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한 시대의 어둠을 향한 지성인의 시니컬한 대응이기도 했다.

    권태롭고 조소적인, 그러면서 세상을 초탈한 듯한 젊은 지성인이 격한 터치와 어두운 색조의 응결로 그려졌다. 이 시대 의식 있는 예술가들이 지녔던 자학과 조소와 도전, 이러한 내면 풍경을 극명하게 묘출할 수 있는 작품을 만들어 갔다.

    구본웅은 격렬한 터치와 어두운 톤이 작품을 지배하게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구성적 의지를 표출하려고 노력했다. 사실상 이러한 점이 다른 야수파, 표현파 계열 화가와 구분되는 구본웅만의 예술 세계였다.

    그래서 이 ‘友人像(우인상)’은 바로 구본웅 내면의 자화상(自畵像)이기도 했다. 이렇게 하여 구본웅의 대표작 중 하나이자 우리나라에서 널리 알려지게 된 유화 초상화가 이 세상에 태어나게 되었다.

    작품을 완성했을 때 구본웅은 인력거에 이 작품을 싣고 제비다방으로 갔다. 제비 다방이 개업했을 때는 이상의 ‘자화상’과 구본웅이 그려 기증한 ‘裸婦(나부)와 靜物(정물)’ 두 작품이 벽에 걸려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이상은 회칠한 사면 벽에 주르 뢰나르의 그림틀을 몇 개나 더 걸어 놓았다. 이상은 주르 뢰나르의 복사그림 하나를 떼어내고 ‘우인상’을 걸었다.

    그 자리에서 구본웅은 이상에게 창문사 인쇄공장에서 하루에 몇 시간씩 교정과 편집 일을 도와줄 수 있느냐고 조심스레 물었다. 그의 자존심을 건드리지 않으려는 배려였다.

    그러나 사실은 그를 경제적으로 돕고 싶은 생각이 앞섰다. 이상은 다방 일도 있고 해서 하루에 3시간 정도면 아르바이트를 할 수 있다며 대단한 관심을 보였다. 그래서 하루 3시간 근무에 일급은 1원40전으로 정했다.   


    백단화와 보헤미안 넥타이

    ‘주식회사 창문사(彰文社)’는 구본웅의 아버지가 1934년 9월에 ‘주식회사 조선기독교창문사(朝鮮基督敎彰文社)’를 인수해 설립한 회사였다.

    이 회사는 기독교 관련 서적과 YMCA 등 기독교 기관의 간행물을 인쇄했는데 당시로는 최신 인쇄시설을 완비했다. 이 회사는 월남(月南) 이상재(李商在)가 황성신문을 그만둔 후 전국서점 주인들의 주식 참여(이상재 명의로 주식을 발행했음)와 하와이 동포들로부터 모은 기부금, 그리고 고종 황제의 하사금 등을 합쳐 설립한 민족자본 기업이었다.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성경을 인쇄하여 출판한 공로도 남겼다.

    그러나 해가 갈수록 적자가 누적되었다. 이를 고심하던 초대 사장 이상재는 2대 사장 양주삼의 동의를 받아 구본웅의 아버지인 구자혁(具滋爀)에게 인수하도록 설득했다.

    젊은 시절에 황성신문 기자와 종합잡지 ‘開闢(개벽)’ 편집장을 역임했던 구본웅의 아버지는 적자가 아무리 크더라도 조선의 문화계를 위해서라면 감수할 가치가 있다고 판단했다.

    그는 이 회사를 인수한 후 ‘조선기독교’란 이름은 빼고 그간 약자로 불리던 ‘주식회사 창문사’란 간판을 쓰기로 결정했다.

    창문사 인수로 문화예술계에서 구본웅에 대한 기대는 더욱 커졌다.

    주변에서는 그를 ‘창문사 사주(社主)의 아들’로 부르기 시작했다. 이상도 구본웅의 아버지가 창문사를 인수한 것을 그렇게 좋아할 수가 없었다. 그는 이상이 원하는 원고는 무조건 무료로 출판해 주기로 다시 약속했다.

    이상은 이때의 생활을 단편소설 幻視記(환시기)에 이렇게 적어놓았다.

    “나는 내 고독을 일급 일원사십전과 바꾸었다. 인쇄공장 우중충한 속에서 활자처럼 오늘도 내일도 모레도 똑같은 생활을 찍어내었다.”

    총독부에 근무할 때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그렇게 깔끔하고 단정하게 차려입던 미남 키다리 이상은 이때부터 더욱 봉두난발, 작소(雀巢)머리와 고슴도치 수염, 그리고 일주일에 한 번쯤 세수한 듯한 어릿광대로 변해갔다.

    거기에 백단화(白短靴)와 보헤미안 넥타이를 매고 단장을 휘두르면서 외출할 때에는 퇴폐와 문란의 상징으로 주위의 눈총을 받았다.

    이상이 순차적으로 개업했던 다방 제비’ ‘鶴(학)’ ‘69’ ‘麥(맥)’은 구본웅의 계속적인 재정후원에도 완전히 망해버렸다. 이를 딱하게 여긴 구본웅은 이상에게 하루 8시간씩 창문사에서 일하도록 배려한 후 아예 출판부장으로 대우해 주었다.

    1935년 12월 초순, 또다시 장기 가출중인 금홍 때문에 속을 썩이던 이상이 구본웅과 저녁 외출을 나왔다. 우연히 길에서 희곡 ‘화가와 모델’을 발표한 양백화(梁白華)와 마주쳤다. 이상은 쓸쓸해 보이는 그를 위해서 술 한잔 사지 않겠냐고 구본웅을 충동질했다.

    그래서 그들은 양백화가 단골로 가는 다방골에 있는 ‘민순자집’으로 향했다. 그런데 세 사람 뒤를 아이들이 졸졸 따라오면서, “곡마단이 왔다”고 떠들어댔다. 양백화가 소리를 질러서 아이들을 쫓았다. 그러나 아이들은 계속 따라왔다. 아이들이 세 사람을 곡마단패로 본 데는 까닭이 있었다.

     이상은 차린 복장과 활동사진 변사 같은 말투 때문에 곡마단 요술쟁이로 보였고, 구본웅은 땅에 잘잘 끌리는 망토 같은 인버네스 외투에 높은 중산모를 썼으니 원숭이 조련사쯤으로 보였을 터였다. 그런데 설상가상 구본웅보다 두 배나 크고 팔다리 네 개가 각각 따로 흐느적거리며 걷는 꼴이 흡사 로봇 같은 양백화가 한몫 끼었으니, 이 해괴한 세 사람을 보면 아이들이 아닐지라도 곡마단 단원들로 보았을 것이다.

    그들 세 사람이 밤늦게 술집을 나서서 몇 걸음을 옮겼을 때, 또 다른 술집을 나서는 김복진 일행을 만났다.

     이들을 공손하게 배웅하는 기생의 자태가 구본웅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바로 채경이었다.

    춘곡 고희동 작품에 모델을 섰던 그 아름다운 채경이가 미소를 머금은 채 통영칠기의 대가(大家) 강창원(姜蒼園)과 서양화가 박상진에게 눈웃음을 치고 있었다. 구본웅은 심장이 일순간 멎어버린 듯 그곳에 한동안 장승처럼 서 있었다.


    여인상의 주인공 장성옥과의 만남

    이상은 금홍이 없는 골방으로 돌아오자 연말의 고적감에 휩싸였다.

    그래서 시 ‘紙碑(지비)’ 속편을 쓰기 시작했다. 그는 시의 첫 줄에 “ 어디갔는지모르는안해”라고 띄어쓰기까지 생략할 만큼 숨가쁜 탄식을 내뿜었다. 다음날 그는 그 원고를 월간지 ‘中央(중앙)’에 급하게 우송했다. 1936년 새해 새아침을 장식하는 1월호에 게재해 주기 바란다는 편지를 첨부했다.

    돌에 쓴 비문이 아니라 종이에 쓴 비문 시 ‘紙碑’가 ‘천재시인 이상은 세상 사람들이 비웃는 술집작부 출신 금홍을 일시적인 동거녀가 아니라 사랑하는 정식 아내로 삼았다’는 사실을 영원히 이 세상에 남겨주기를 기원하면서…. 이상의 귀에는 정월 나혜석이 들려주던 기생 강명화의 자살에 관한 이야기가 자장가처럼 밀려들기 시작했다.

    1936년 새해 벽두부터 구본웅은 강창원에게 연말에 보았던 그 미녀를 모델로 소개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때 그 자리에 함께 있었던 박상진은 그녀가 강창원의 애인이라고 넌지시 알려주었다.

    이틀 후 강창원은 장성옥(張成玉)이란 이름의 그 미녀를 데리고 구본웅의 작업실로 찾아왔다.

    동양인으로는 보기 드물게 큰 눈과 작은 얼굴, 맑은 눈빛과 안면의 입체감, 처녀만이 가질 수 있는 육색과 가냘픈 체구 그리고 넘치는 건강미에 구본웅은 완전히 뇌쇄당하고 말았다.

    그는 강창원과 장성옥에게 여인 상반신 그림 두 장을 그리겠다고 제안했다. 하나는 한복을 입고, 또 하나는 상반신 나체로 얼굴과 가슴 부위를 그리는 계획을 설명하고 동의를 받았다.

    술집에서 ‘예쁜 옥(玉)’이라고 불린다는 만 19세의 이 미녀는 그의 작업실 분위기에 깊은 관심을 나타냈다.

    강창원이 돌아간 다음, 옥이는 웃옷을 모두 벗고 의자에 앉았다.

    구본웅은 양손을 머리 위로 올려 잡으라고 주문했다. 오래 견디기 어려운 포즈였다.

    그녀는 발레리나와 같은 동작으로 움직였다. 실제로 그녀는 조선춤을 아주 잘 춘다고 했다. 구본웅은 그녀의 아름다움에 넋을 잃었다.

    이 곱고 깨끗한 균제의 아름다움과 기름진 육체를 19년 동안 곱게 감추어 두었다가 이 작은 화인(畵人)에게 풀어 헤쳐 내맡긴다는 것은 너무나 아까운 일이라고 생각했다. 머리카락은 옻칠같이 검고 그 눈은 벨벳마냥 보드랍고 그 살결은 진주처럼 빛났다. 기계로 쭉 뽑아낸 듯 미끈한 어깨 곡선이 서기를 뿜고 있었다.

    황홀한 젖가슴 구석구석에서 파동치는 신비의 율동을 보았다. 구본웅의 귀는 분명히 청옥을 덮어놓은 듯한 젖가슴에서 심장의 고동도 들었다. 놀랐다.

    이처럼 어려운 포즈를 태연하게 연출하는 대담성과 인내심에. 모델을 보고 마음이 이렇게 들떠본 경험이 없었다.

    그러나 구본웅의 그림은 이런 아름다움을 곱게 그려내지 못했다.

    그 여인을, 그의 마음과 정신을 미치도록 흔들고 혼란스럽게 하는 주체로 화폭에 담기 때문이었다. 그의 눈앞에는 모델 장성옥뿐만 아니라 기생 채경과 이상의 금홍, 그리고 정월 나혜석도 어른거렸다.

    그래서 벌거벗은 여인의 상반신을 화면 가득히 펼쳐 놓은 이 ‘女人像(여인상)’은 ‘우인상’에 비하여 더욱 격렬한 터치와 왜곡된 상형으로 그려갔다.

    여인의 얼굴보다는 가슴을 강조하고 볼과 입술을 붉은 색으로 칠하여 여인의 성적인 특성이 노골적이면서도 난폭하게 드러났다. 내적으로 불안한 에너지가 막을 길 없어 폭발하듯 분출되고 있었다.

    자신으로부터 파동치는 격정의 소용돌이가 그림 속으로 용암처럼 흘러들어갔다.


    “처음으로 사람대접, 여왕대접 받았다”

    추하게 일그러진 여인상을 통해 감히 접근할 수 없는 장애인의 절망과 분노 그리고 시대적 아픔과 도전을 표현했다.

    그러한 아픔과 절망, 분노와 도전이 그림 속에서 위기의식에 편승되어 나타났다. 그래서 이 ‘여인상’은 어느 특정한 여인을 대상으로 해서 그린 것이 아니라 작가의 주관에 의한 극단적인 표현태도를 보였다.

    이제까지 조선의 예술과 미학에서 성전처럼 취급되던 전통적 가치와 예술관을 죄 부정하고 현대성이라는 조형의 실험이 작품에서 잘 드러나도록 노력했다.

    특히 두 팔을 머리 뒤로 돌리고 있는 나부(裸婦)의 대담한 변형과 강렬한 색채 그리고 거친 선과 필촉은 색채 면에서 이전의 야수파 작가들이 보이던 밝고 경쾌한 색채 대신 무겁고 어두운 색채 위에 부분적으로 밝고 강렬한, 짧은 터치의 색채를 대치시켜 표현했다.

    그래서 긴장감을 더 두드러지게 했다. 뿐만 아니라 굵고 거친 선으로 여인의 상체 윤곽을 표현하여 화면에 강렬한 느낌을 주는 것은, 작가 자신의 내면적인 리얼리티를 강하게 표출하려는 의도에서 비롯됐다.

    특히 인체 표현의 기본형에서 벗어나 검은 색조의 배경에 부분적으로 강조되어 있는 붉은 색의 강렬한 대비는 이 ‘여인상’ 속에 숨어있는 구본웅 자신의 자화상(自畵像)이리라.

    옥이는 이 흉측해 보이는 그림이 그려지는 것을 보고도 전혀 불평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는 아파하고 절망하며 분노하면서 그림 그리기에 도전하는 불구자에게 흥미를 느끼는 듯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녀는 작업실 청소도 하고 비서 노릇도 하면서 스스럼없이 구본웅을 대하기 시작했다.

    그보다 10년 연하인 그녀가 하는 행동이 그보다 훨씬 어른스러웠다.

    이상이 백천온천에서 스물한 살 된 금홍을 보고 서른한 살 먹은 사람보다도 낫다고 감탄하던 것이 구본웅에게도 이제야 실감 있게 다가왔다.

    그는 그동안 짝사랑으로 가슴에 담아왔던 기생 채경을 닮은 미녀와 작업실에 함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더할 수 없는 행복감에 도취했다.

    그림이 거의 완성되어 갈 즈음 그녀는, 그간 경험했던 모든 남자가 자신을 돈만 주면 데리고 놀 수 있는 술집여자로 대했는데, 지난 한 달간 처음으로 이곳에서 사람대접은 물론 여왕대접을 받았노라고 말했다. 특히 항상 반말만 듣고 살던 그녀는 처음으로 존대어로 예우받는 것을 신기해하면서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그들은 손을 잡고 같이 울었다. 그들은 서로의 아픔을 달래주고 감싸주었다. 영과 영이 마주치는 섬광은 찬란하고 황홀했다. 그들은 서로 상대방의 모자람을 보태주고 절망을 덮어주자고 약속했다.

    이렇게 하여 구본웅의 인물화 중에서 ‘우인상’과 함께 대표작으로 알려진 ‘여인상’이 태어나게 되었다.

    이 두 작품은 국립현대미술관에 소장되어, 서산 구본웅이 ‘근대미술의 큰 봉우리’일 뿐만 아니라 ‘현대미술의 첫 봉우리’라는 평가를 오늘날의 많은 관람객들과 미술애호가들에게 전해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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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상 문학 특강 / 박남철

     

     

    나는 부처 팔아먹고 살고, 이승훈이는 이상 팔아먹고
    살고, 송 머시기 이승훈이  팔아먹고 산다! 라는, 당대의 한 말씀을 남겨주셨다는,

    그 어떤 큰스님의 또 다른 한 말씀이,

    서기 2011년 11월 8일 저녁 6시 30분
    무렵, 신사동의 엠지타워 3층 ‘유심 세미나실’에서 시작된 문학 강연회에서 또다시 터져나오시고야;
    말았던, ‘거디었던’, 것이다!
    권영민 교수님의 ‘이상 문학 특강’의 말머리에서, 부터!

    권 선생, 하려면 하고 말려면 말고 말이지,
    그냥 대충 어중간히 하려면, 그냥 집어치워버리든지,
    권 선생, 한번 일을 시작했으면 끝장을 보아내고야 말아야지!

    나는, 일단은, 권영민 교수님의 그 강연의 말머리가
    그냥 며칠 전에 만나보셨다는 한 노스님의 영역에 오신
    분의 예우 차원의 말머리이시겠거니 했었다, 일단은, 그냥.

    격월간 《유심》 측에서 11월 1일 자로 보내온 전자편지상의
    주제는 ‘이상 문학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였었고, 청중들에게
    나누어진 유인물의 제목은 ‘이상 문학과 새로운 시각의 발견’,
    이었었지만, 별도로 나누어진 한 장의 유인물에는 〈오감도〉
    연작 중 〈시 제5호〉가…… 상단에는, 국한문혼용체본으로,
    하단에는, ‘일본어 원문’이라고, 일본어본으로 인쇄되어 있어,

    翼殷不逝 目大不覩--→

    하여, 나는 바로 직감해버릴 수가 있었던 것이다!
    아하, 이놈이 바로 오늘의 문제인 놈인 것이로구나!

    하여,
    그리하여,
    이제 내가,
    더 이상 뭘 더 쓴다면서,
    이 시를 더 쓴다면서,
    중언부언을 더 해볼 수가 있을 것인가?

    권영민 교수님은 처음에는 서서 말씀을 해주시다가, 어째
    말씀이 좀 되기 시작한다는 판단이 드셨을 무렵에는, 앉아서
    얘기를 하시겠다고 양해를 구해오신, 다음에는

    엠지타워 3층의 ‘유심 세미나실’의 층수를, 단박에, 6층으로
    높여버려 주시더니, 다시 조금 있다가는 9층으로, 다시 조금 더
    있다가는 13층으로, 다시 조금 더 있다가는, 에라, 33층으로, 하는
    식으로, 자꾸만 그 무슨 ‘타워’랄 것도 없는, 조그만 전체 5층 빌딩
    중의 3층의 층수를, 자꾸만자꾸만 더 높여주시던 것이었다!

    내가 지금, 시방, 그 무슨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도 절대 아니다!

    그때 그날 그 자리에는 분명히 신달자 선생님도 계셨고,
    홍사성 주간님도 계셨고, 나무 무무무 (혹은 공공공) 시인님도 계
    셨었고, 우리 정숙자 시인님까지도 다들 그 자리에 계셨으니까. 다들
    꼭 그 무슨 마술사에게라도 홀린 사람들처럼 숨소리 하나도 제대로
    내시지도 못하신 채, 그저 고공으로, 고공으로, 부상되고
    고양들 되시느라 혼쭐들이 다 나가버리신 상태였으니까!

    세상에, 다들 한번 생각들을 해보시라! 많게는 꼭 306층 높이로
    까지 들려져 올라갔다가 도로 살아서 내려온 고소공포증의 청자도;
    여기 이렇게 한 명 있다면, 진실로, 진실이라고 믿어주시겠는가?

    신달자 선생님의 말씀에 의하면 ‘유심 세미나실’이 생긴 이래로
    그렇게 많은 청중들이 모이기도 또한 처음 있는 일이기도 하셨다니깐!

    나중에, 신달자 선생님께서 ‘이건 그냥 차비이니깐!’ 하시며
    넣어주시던 ‘차비’로 택시를 타고 중계본동으로 돌아오면서야,
    나는, 간신히, 왜 권영민 교수님…… 내가 이제야 간신히 내 시에서
    ‘교수님’이라는 말을 한번 제대로 써보는 것이다! ……께서 말머리에서

    부터, 그런 말씀을 다 해주셨는지, 그 무슨 예우의 차원이라거나 아부,
    또는 그따위 흔해빠진 ‘조비어천가(曺飛御天歌)’의 차원에는 도저히 미치치도 못할;
    그 어떤 영역의 말씀이셨던지를!

    翼殷不逝 目大不覩--→
    날개야 다시 돋아라.
    날자 날자 날자 한 번만 더 날자꾸나.
    한 번만 더 날아보자꾸나.

    권 선생, 날려면 날고 말려면 말고 말이지……
    그냥 대충대충 어중간히 날려면, 그냥 집어치워버리든지……
    권 선생, 한번 날기 시작했으면 끝장을 한번 보아내고야 말아야지……

     

    박남철 | 1953년 경북 포항(영일) 출생. 1979년 《문학과지성》으로 등단. 시집으로 《지상의 인간》 《자본에 살어리랏다》 《바다 속의 흰머리뫼》 《제1분》 등이 있다. 불교문예작품상 등 수상.

    인문학 강좌_한국 모더니즘 문학의 탄생

     

     

     

     
    1.  이상(李箱)과 그의 시대_1부           - 이상(李箱)의 성장 과정
                                                         - 이상(李箱)의 조선총독부 기사시절 URL 
                                                          이상(李箱)과 그의 시대_2부 - 이상(李箱) 필명의 유래
                                                          - 且8氏의 出發 URL 
    2.  이상의 시와 보는 시 의 의미_1부     - 이상 시의 의미
                                                          - 오감도의 탄생 

      이상의 시와 보는 시의 의미_2부          - 오감도 시제2호
                                                           - 오감도 시 제4호
                                                           - 素榮爲題(소영위제) URL 
    3.  이상의 소설과 메타픽션의 성격_1부  - 이상 소설의 성격
                                                          - 메타픽션으로서의 이상의 소설 URL 
                                                          이상의 소설과 메타픽션의 성격_2부 - 동해(童骸)」와 ‘메타적 글쓰기
                                                          - 「종생기(終生記)」와 ‘자기 반영’의 기법 URL 
    4.  대담 및 질의응답_1부  URL 
                                                          대담 및 질의응답_2부  URL 

     

     

     

     



    7 <此生輪廻: 이상(李箱) 연구노트>의 비평: <…
    2014.04.12. 663
    6 <此生輪廻: 이상(李箱) 연구노트>의 비평: <…
    2014.04.12. 567
    5 <此生輪廻: 이상(李箱) 연구노트> 4회 & 연재를…
    2014.04.12. 597
    4 <此生輪廻: 이상(李箱) 연구노트> 3회
    2014.04.12. 606
    3 <此生輪廻: 이상(李箱) 연구노트> 2회
    2014.04.12. 1219
    2 <此生輪廻: 이상(李箱) 연구노트> 1회
    2014.04.12. 709
    1 <此生輪廻: 이상(李箱) 연구노트> 여는 글
    2014.04.12. 481


      
     
         

     

     

     

    문헌에 나타난 일제강점기 조선 고적조사와 주택개량

     

     

     

     
     
     
     
    김미금(金美今) 열화당책박물관 학예연구사
     
     
     
    한국의 근대 건축사는 한국 근대사의 제반 영역에서와 마찬가지로 전통의 단절과 새로운 양식의 굴절된 수용이라는 모순을 지니고 있다. 그 시작은 일제의 고적조사연구(古跡照査硏究)에 의한 문화유적 발굴 및 조사 작업에서 출발하여 역사의 왜곡과 문화재 도굴 및 수탈이라는 결과를 낳았으며, 전통민가(傳統民家)의 조사 작업을 통해 전통 생활방식은 비합리적이라 폄하되고 일본식·서구식 절충형 가옥구조로의 개량화를 양산하게 되었다. 따라서 이 시기에 우리의 건축물들이 어떻게 조사·연구되었고 또 어떻게 변모되었는가를 살피는 것은 식민지 공간에서 건축이 정책에 어떻게 이용되었는지를 알 수 있는 좋은 예가 될 것이다. 이에 대한 흐름을 소략하게나마, 이번 전시에 소개되는 문헌을 중심으로 서술하고자 한다.
     
    일제강점기의 고적조사사업은 1893년 도쿄제국대학(東京帝國大學)의 이과대학에 인류학교실을 개설하고, 이미 조선에 일본인 연구자 야기 쇼사부로(八木獎三郞, 1866-1942)를 파견하여 고분을 조사하고 토기를 수집하면서 시작되었다. 러일전쟁을 전후로 한국에서의 지위를 더욱 확고히 다지게 된 일본은 고적조사사업을 본격적으로 진행했는데, 이 사업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맡았던 사람이 세키노 다다시(關野貞, 1868-1935)였다. 그를 중심으로 다니이 세이이치(谷井濟一), 쿠리야마 슌이치(栗山俊一) 등이 도쿄제국대학의 지시로 1902년 대한제국 정부의 지원까지 받아 가면서 자유롭게 한국의 고적조사를 진행하였으며, 이때 조사한 내용이 1904년에 『한국건축조사보고(韓國建築調査報告)』(이에 대한 전시도서는 1990년 후대 복각본인 『한국의 건축과 예술』이다)로 간행되었다. 이 책에서 그는, 조선 건축사에서 중국의 영향을 강조하면서 조선시대의 건축은 일본보다 뒤떨어져 볼만한 것이 없다고 결론짓고 있어, 당시 일본인의 한국에 대한 인식을 읽을 수 있다.
    이후 세키노의 두번째 조사는 1909년에 대한제국 탁지부(度支部)의 의뢰로 이루어졌고 1912년까지 모두 다섯 차례에 걸쳐 한반도 전역으로 확대되었으며, 조사 대상도 건축물 외에 고분, 성곽 및 미술품으로 확장되었다. 그의 조사방법은 유물의 전체 형태나 세부의 면밀한 관찰, 유사한 것과의 비교를 통해서 유물의 조성 연대를 판정하고 특징을 도출해내는 실증적인 것이었다. 이러한 조사를 통해서 부석사(浮石寺) 무량수전(無量壽殿)을 비롯한 많은 건축물의 건립연대를 판정하고 시대적인 특징을 그려냈다. 이러한 내용은 세키노 사후 그의 조사보고서, 논문, 강연내용 등이 그를 추모하는 기념사업회가 발행한 논문집인 『조선의 건축과 예술(朝鮮の建築と藝術)』(岩波書店, 1941)에 모두 수록되어 있다. 주로 세키노에 의해 실시된 1909년부터 1915년까지의 한반도 고적조사사업은 이후 1916년부터 조선총독부가 조직과 법령을 마련하면서 본격적으로 진행되었다. 이 사업은 한국의 고대사회부터 고려시대까지의 유적을 발굴조사 대상으로 삼고 있었으며, 지역적으로는 한반도 전체를 아우르고 있었다. 특히 그 가운데서도 한사군(漢四郡) 치지(治地)인 낙랑군(樂浪郡) 및 가야(伽倻) 지역에 관심이 집중되었는데, 여기에는 한반도가 역사 이래로 중국의 영향력 아래에 있었음을 강조하고, 이를 통해 한민족의 독자성을 부인하여 일제의 한국 침략과 지배를 역사적으로 정당화·합리화하려는 타율성론의 의도가 반영되어 있었다. 본격적인 조사가 이루어진 첫 해의 결과물로 『조선고적조사보고(朝鮮古蹟調査報告)』(1917)가 나왔고, 이번 기획전에 1974년 일본 국서간행회(国書刊行会)에서 발행한 영인본이 전시되어있다. 1916년에서 1937년까지 진행된 이 사업은 모두 17권의 『조선고적조사보고』로 결과물이 남았으며 조사사업에서 수집된 사진을 토대로 하여 도판을 중심으로 조선의 고대문화를 소개한 것이 조선총독부에서 펴낸 『조선고적도보(朝鮮古蹟圖譜)』(전15권, 1915-1935)이다. 이 도보는 낙랑(樂浪)·대방(帶方) 시대에서 시작하여 조선시대에 이르고 있다.
     
    고적조사사업에서 수집된 유물들은 공식적으로는 조선총독부의 인가를 받아 박물관으로 들어가게 되었으나, 일본으로 유출되는 경우가 많아 철저한 보존 작업 관리가 이루어지지 못했다. 박물관에 진열된 유물은 일찍부터 한국의 문화가 중국과 일본의 영향을 받아 형성되고 진행되어 왔다는 식민사관의 타율성론을 실질적으로 입증하는 증거품으로 활용되었다.
    이 외에 왕권을 상징하던 조선의 궁궐은 헐리거나 일반에 매각되고, 박람회장, 동물원, 식물원 등으로 변모하여 일반에게 공개됨으로써 그 위상이 격하되었다. 사직단(社稷壇), 원구단(圜丘壇)과 같은 제단은 철거되고 그 자리에 호텔이 지어지거나 일본식 신사(神社)가 조영되었다. 또한 새로운 도시정비와 도로건설의 명목으로 한양도성(漢陽都城)의 성벽이 철거되고 서대문은 사라지게 되었다. 이렇듯 조선의 상징적 건물은 물론 도심의 구조가 변화되면서, 경성을 중심으로 민가의 개량은 생활의 개선과 함께 필수적인 문제로 떠오르게 되었다.
     

     

    『조선의 건축과 예술』(關野貞, 岩波書店, 1941) 중 부석사 무량수전의 도면이 실린 부분.
    세키노 다다시는 고려시대에 건립된 부석사 무량수전을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건축물임을 처음으로 밝혔다.
     
     
     
     
     
     
     
     
     
     
     
     
     
     
     
    조선민가(朝鮮民家)에 대한 조사연구는 강점(强占) 직후 시작된 조선의 구관(舊慣) 조사에서 시작되었다. 이 사업은 조선의 문화와 역사에 대한 사전조사로 토지, 가족제도, 양반제도, 종교 및 풍습, 농가경제, 지방제도, 조선어 편찬 등 각종 식민지 행정자료를 제공하기 위함이었다. 1920년 이후에는 부락의 연혁 및 변천, 주민의 경제 및 사회 상태를 실제로 조사하는 방향으로 전환하게 되었다. 한국 근대 최초의 민가 조사라 할 수 있는 『조선부락조사특별보고(朝鮮部落調査特別報告) 제1책 민가(民家)』(조선총독부, 1924)는 일본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 건축학과 교수 곤 와지로(今和次郞, 1888-1973)가 조선총독부의 의뢰를 받아 1922년 9월부터 10월까지 한 달 동안 개성, 평양, 함흥, 김천, 전주, 대구, 경주 등의 살림집을 조사한 보고서이다. 그러나 이 보고서는 조선민가 조사를 통해 일본민가나 사찰의 기원을 찾는 데 방향을 두어, 조선민가의 유형을 일반형과 북부형으로 분류한 다음, 일본민가의 유형이 조선민가의 북부형과 유사하다고 지적하고 있다. 특히 그는 조선의 온돌문화를 이동민족들에 의해 조선에 전파된 세계사적으로 발달된 문화양식으로 높이 평가하여 조선총독부의 ‘온돌폐지론’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다. 1920년대 당시 온돌에 대한 일본인들의 생각은 에너지효율이나 위생 등 기능적인 면에서 부정적인 평가를 가지고 있었다. 또한 온돌은 너무 많은 열이 전달되어 조선인들의 행동을 둔화시키고 게으르게 만든다고 평하여 일본인들은 ‘온돌망국론’을 주장하기도 했다.
     
      
    『조선부락조사특별보고(민가)』(今和次郞, 조선총독부, 1924). 일반형[中鮮型] 민가의 스케치(좌), 북부형 민가의 내부 스케치와 평면도(우). 곤 와지로(今和次郞)는 조선민가의 유형을 일반형과 북부형으로 분류하고 일본민가의 유형이 조선민가의 북부형과 유사하다고 보았다. 
     
     
     
    이후 조선 살림집에 대해서는 적지 않은 논문이 여러 발간물을 통해 발표되었다. 그 중 『조선과 건축(朝鮮と建築)』이 중요한 발간물의 하나로, 건축 단체인 조선건축회(朝鮮建築會)가 1922년부터 1945년까지 간행한 기관지이자, 한국에서는 최초로 발행된 건축 전문지이다. 발간 초기에는 주생활(住生活)과 밀접하게 연관된 주택의 본질적인 문제, 생활과 주택 등 일반적인 논의를 하였으며, 1930년대에는 지역별·시대별·구조별 등으로 나누어 글이 게재되었는데, 지역별 연구에서는 조선민가를 북부지방형, 중부지방형, 남부지방형, 경성지방형, 서양형으로 나누고 있다. 가장 빈번한 주제는 주생활 방식의 개선에 따른 주택구조 및 설비의 개선이었으며, 이러한 논의가 구체적인 시안으로 제시되기도 했다.
    주생활의 개선은 단순히 주택의 구조적 물리적 개량뿐만 아니라 주택이 담고 있는 생활양식의 변화를 전제로 하는 중요한 논제였으며, 당시 건축가들은 합리적인 개량주택으로서의 새로운 주택양식을 찾고자 했다. 행랑채의 폐지, 사랑채와 안채의 통합 관계, 안방과 부엌의 위치 변화, 부엌과 온돌의 개량 등이 논의되었으며, 특히 사랑채와 안채의 통합 문제와 온돌 문제는 조선식 주택개량의 주된 과제였다. 1940년대에 들어와서는 ‘문화생활’ ‘문화주택’ 등과 같은 합리주의적 이념을 담은 소주택(小住宅)이 보급되었다. 또한 황국신민화정책(皇國臣民化政策)과 맞물리면서 주택을 철저하게 일본정신을 기를 수 있는 장소로 삼았다. 『조선과 건축』 제22집 8호(1943년 8월)를 보면, 조선건축회가 개최한 좌담회에서 주택개량을 위한 사항이 제시되었다. 즉 일본풍을 유도하도록 일본식 ‘도코노마(床の間)’(바닥을 한층 높게 만든 곳에 족자를 걸고, 꽃이나 장식물을 꾸며 놓은 곳)와 ‘카미다나(神棚)’(집안에 신을 모셔 놓은 감실)를 설치하고 온돌을 한 칸 외에는 다 없애고 나머지를 내지식(內地式, 일본식)으로 하여 표준주택을 만들 것 등이 명시되었다.
     
    이상을 정리하면, 해방 이전 일본인 학자들로부터 시작된 한국민가에 대한 연구는 특정한 학문체계나 이론을 배경으로 했다기보다는 조선총독부의 식민통치를 위한 시정자료(施政資料)로서의 필요성이나 다른 민족의 주거에 대한 호기심에서 비롯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민가의 유형을 분류하고 이들의 분포권을 설정한 것은 해방 이후 지리학적 접근방법의 근거를 마련해 주었다는 의의를 지닌다. 일제의 조선고적조사 역시 ‘본격적인 근대적 시각방식에 의한 연구’라는 의미를 둘 수 있다. 그러나 그 목적이 어디까지나 식민정책을 위한 조사연구였으며, 해방 이후 한국건축사에 기형적 토대를 마련하였음은 분명히 인지해야 할 것이다. 이번에 특별 대여 전시된 『조선과 건축』, 『조선부락조사특별보고』 그리고 열화당책박물관이 소장한 일제강점기 건축 관련 조사보고서 등을 통해, 광복 칠십 주년을 맞이하여 우리 건축의 아픈 역사를 돌아보는 기회가 되었으면 한다.■
     

     

     

     
     
     
     
     
     
     
     
     
     
     
     
     
    『조선과 건축』 제8집 1호(1929년 1월)와 제11집 1호(1932년 1월) 표지.

     

    조선건축회는 매년 연말 『조선과 건축』 표지도안의 설계공모를 실시하여 당선된 작품을 일 년간 잡지의 표지도안으로 사용하였다.

     

    이 잡지에는 문학인 이상(李霜)의 표지디자인·일문 시(詩)·건축비평 등이 실려 자료로서의 가치가 높다

     

    .(왼쪽, 가운데) 조선건축회가 주최한 조선주택의 개량을 논한 좌담회(「朝鮮住宅の改良を語る」)에 대한 기사,

     

    『조선과 건축』 제22집 8호(1943년 8월). 1940년대는 비상전시체제에 돌입하고 일제의 황국신민화 정책과 맞물리면서 주택개량의 이념을 ‘황민화(皇民化)’에 중점을 두었다.(오른쪽)

     

     

    1883 / 1884

     

     

     

    서력 연호
    (韓中日)
    독립운동 및 대외관계 일본·세계 동향
    1883 癸未
    高宗20
    光緖9
    明治16
    1 인천항 개항
    1.24 부산-나가사키간 한일해저전선부설조약 체결
    1.27 태극기를 국기로 제정하여 전국에 반포
    1.18. 영국, 이집트를 속령으로 함
    2.17 인천항 개항, 일본 조계를 확정
    2 금위영에 당오전 주전소를 설치 / 김옥균이 일본시찰을 마치고 귀국 / 개화파가 경기도 광주에 1,000여 명의 신식군대를 조직하고 훈련
    신식군인들
       
    3.10 日, 청국·조선국재류일본인 취체규칙 제정:영사에게 퇴거명령권과 재류금지권 부여
    3.14 독일 마르크스, 런던에서 죽음
    3.15 대판입헌당 해산
    3.27 프랑스, 베트남 남단 점령
    4.7 초대주한미국공사 푸트(L.Foote) 착임, 조미수호조약 비준서 교환
    4 청국의 변방관헌, 간도 개간을 위해 조선인 철수를 요구. 신식무기제작을 위해 서울 삼청동북창에 기기창을 설치하고 군기제조법을 교습케 함
    4.12 日, 육군대학교 개교
    5.11 동래부에 민란 발생
    5.23 기기국을 설치 : 박정양·김윤식 등을 총판에 임명
    5 정부, 재정난을 타개하기 위해 당오전을 주조하여 강제 통용
    5.8 淸, 유영복의 흑기군이 프랑스에 선전포고
    6.22 조일통상장정·해관세목·일본인어채범죄조규·일본인간행리여정조약 등 체결 : 민영목-竹添進一郞
    6 전권대신 민영익 등을 보빙사로 미국에 파견 / 김옥균이 국채위임장을 가지고 세번째 일본 방문, 묄렌도르프가 竹添進一郞에게 김옥균의 국채위임장이 위조라고 허위통보
    6.1 프랑스·마다가스카르, 전쟁 개시
    6.8 프랑스·튀니지, 협약 체결:프랑스의 튀니지 지배 강화
    7.25 경상·전라·강원·함경 4도 연안의 通漁權을 일본에 허가
    7 전환국 설치 / 서북경략사 어윤중이 청국에 정계비를 근거로 간도 국경문제의 재조사 및 획정을 요구
       
    8.8 경상도 성주에서 결가등귀를 반대하는 민란 발생
    8.19 통상 3항구(인천·부산·원산)에 해관사무를 위한 감리 설치
    8.30 인천일본조계지거류조약 체결 : 민영목-竹添進一郞
    8 인천·부산·원산에 행정 외교 사무를 위해 감리 설치 / 혜상공국 및 박문국 설치
    8.4 日, 伊藤博文 귀국
    8.24 日, 立憲帝政黨 해산
    8.25 프랑스·베트남, 위에조약 체결 : 안남과 통킹이 프랑스의 보호령이 됨
    9.8 일본공사 다케조에 신이치로와 외무협판 묄렌도르프 비밀교섭, 인천·원산·부산 등 항구의 해관세 수세업무를 일본 제일은행 각 지점에 위탁하는 계약 체결
    9.16 부산-나가사키간 해저전선 착공
    9.30 일본, 거류지역 규정한 인천조계조약을 정부에 강압, 인천국조계지거류조약 10개조 조인
    9.3 淸, 유영복의 흑기군이 하노이 남쪽 탄호아에서 프랑스군과 격전하여 패퇴시킴
    10.1 개화파가 박문국을 통하여 근대적 신문인 『漢城旬報』 창간
    10.27 조영수호통상조약(1884.4.3. 비준) 및 조독수호통상조약(1884.10.1 비준) 조인
    10.30 루마니아, 러시아에 대항하기 위해 독일·오스트리아와 비밀동맹 체결
    11 개화파, 국왕에게 경기도 광주의 신식군대의 열병을 보임
    11.16 청, 베트남에 대한 종주권 주장. 프랑스군의 통킹 철퇴 요구
    11.29 베트남, 쿠데타 발생(국왕을 죽이고 반불파 승리)
    12 평안도 의주에 중국 무역을 위해 감리서 설치
       
    이해 일본 제일은행, 인천에 출장소 개설함 / 지석영이 충청도 공주에 우두국을 설치, 우두종법을 가르침

    서력 연호
    (韓中日)
    독립운동 및 대외관계 일본·세계 동향
    1884 甲申
    高宗21
    光緖10
    明治17
    1 일본참모본분부의 밀정 酒勾景信, 광개토왕릉비의 雙鉤加墨榻本을 일본에 전해 「동부여영락대왕비명의 해석」 발표
    1.6 이집트, 영국의 압력으로 수단에서 철퇴를 결정
    2.12 정부, 인천조계 확장을 승인
    2.24 일본 제일은행과 개항장 해관세 취급약정을 조인
    2.28 부산-나가사키간 해저전선 개통
    2.27 아프리카 공화국 성립
    3.7 인천구 華商지계장정 의정 조인 : 민영목-진수당
    3.상 전라도 강진현 완도 가리포민이 첨사 이상돈의 탐학을 이유로 민란 일으킴
    3.18 조중상민수륙무역장정 제4조 개정, 청나라 상인의 내지통상 허락
    3 김윤식을 독판교섭통상사무로 임명 / 우정총국 설치(우정국총판, 홍영식)
    3.17 日, 헌법제도취조국 설치
    3.19 日, 조선에 해저전선부설
    4.4 조영수호통상조약 비준교환, 주조영국총영사로 애스턴 부임
    4.4 칠레·볼리비아, 발파라이소 강화조약 체결
    윤5.4 조이수호통상조약 조인
    윤5.15 조러수호통상조약 조인
    5.11 청·프랑스, 천진조약 체결
    5.13 日 群馬縣하의 자유당원 봉기(群馬 사건)
    6.22 미북감리교회 선교사 매클레이가 포교 및 육영사업 허가 받음
    6.19 淸·프랑스, 북월남에서 충돌:청·프랑스전쟁 발발
    7.18 일본, 제주·울릉도에 침입. 도민의 어업권을 침해(정부, 조일통상장정의 수정을 요구)
    7.7 日, 華族令 제정(공후백자남의 5등)
    7.11 카메룬, 독일의 보호령이 됨
    7.28 淸·프랑스, 상해회의 개최
    8.2 선교사이며 의사인 알렌(H.N.Allen), 미국공사관 官醫자격으로 내한
    8.18 일본의 요청으로 용산을 각국 開市場으로 함
    8 부산에 청국영사관 설치
    8.5 프랑스 함대, 대만의 基隆砲臺를 포격 파괴(8.6. 청군, 기륭에 상륙한 프랑스군 격퇴)
    8.26 淸, 프랑스에 선전포고
    9 김홍집을 독판교섭통상사무로 임명
    9.23 日, 자유당원 도마쓰 마사야스(富松正安) 등의 반정부폭동(加波山사건)
    9 淸, 조주·복주의 민중이 프랑스 교회 파괴
    10.1 우정총국에서 우정사무 시작. 인천의 우정분국도 개국
    10.3 일본, 미·영과 공모하여 불평등적 치외법권을 규정한 인천제물포조계장정을 체결
    10.12 일본인재조선국간행리정약조부록 議定 : 김홍집-다케조에 신이치로
    10.17(양 12.4) 甲申政變 : 우정국 낙성식에서 정변 일으킴→개화당, 경운궁에 새 내각 조직하고 14개조 혁신정책 반포(10.18)→청·일 양국 병사가 창덕궁에서 충돌(10.19)→군민(軍民)이 청병과 일본공사관 병영 습격. 일본공사 일행은 인천으로 도주(10.20)→새 내각 조직. 정변 중의 모든 개혁 환원하고 개화파에 대한 체포령 내림(10.21)→고종, 청국군영에서 창덕궁으로 환궁(10.23)→김옥균·박영효·서광범·서재필 등 일본공사와 함께 일본 망명(10.24)→일본특파전권대신 이노우에 가오루가 고종 알현하여 일본 국서 전달(11.21)→5개조 한성조약 체결(11.24, 양 1885.1.9)→갑신정변 가담자 처벌 위한 국청 설치(12.8)→개화당 관련자(이희정·김봉균·신중모·이창규)와 그 가족 등 12명 처형(12.13)
    10.1 프랑스, 함대로 대만 기륭 점령→대만 봉쇄(10.23)
    10.29 日, 자유당 해산
       
    갑신정변의 주역들
       
    11.15 독일·프랑스 주창으로 아프리카 분할에 관한 베를린회의 개최
    갑신정변 현장
    12.4 日, 조선에서 일본공사관 燒失, 日 군사충돌(甲申政變)
    12.6 日, 자유당원의 名古屋 鎭台 습격 거병계획 발각(飯田事件) / 영국 의회, 제3차선거법 개정안 통과(실질적인 남자보통선거제 실현됨)
    12.17 日 大隈重信, 개진당 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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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력 연호
    (韓中日)
    독립운동 및 대외관계 일본·세계 동향
    1885 乙酉
    高宗22
    光緖11
    明治18
    1.17 고종 경복궁으로 환궁
    1.30 독일총영사 부틀러, 김윤식을 통해 조선의 永世中立宣言을 권고. 정부 묵살(3.17)
    1 황해도 초산에서 민란 발생
    1.9 日, 朝日善後條約(漢城條約) 조인
    2 서상우·묄렌도르프, 일본 외무성과 일본인의 울릉도벌채금지 조약 의정 미 공사관 알렌이 광혜원 설치→3.12일부터 제중원이라 개칭 / 미국선교사 아펜젤러·언더우드 입국(양 4.5) / 여주에서 농민이 봉기하여 관청을 습격
    2.6 이탈리아, 에티오피아 맛사와항에 식민지 획득
    2.23 프랑스, 진남관 점령
    3.1 거문도사건 : 영국함대가 거문도 불법점령(~1887.2.7)→엄세영·묄렌도르프·정여창이 함께 거문도에 도착하여 영국함대에 항의(4.3)→청·독·미·일 등 각국공사에게 영국의 거문도점령 사실을 통고하고 조정을 요청(4.7)→영국 총영사 에스턴이 연간 5,000파운드에 거문도 임차를 제의(9.16)
    3 박문사를 광인사로 옮기고 『한성순보』 계속 발간 / 강원도 원주에서 농민 봉기
    3.16 福澤論吉, 『脫亞論』 발표
    4.3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 일본으로부터 수입되는 사진기계·종이류·양재 등의 물품을 면세케 함
    4.18 주일러시아공사관서기관 쉬페이에르 입경, 묄렌도르프와 러시아군사교관의 초빙을 시도하였으나 실패(제1차 한·러밀약설) / 천진조약 체결
    4.20 청 예부에 토문강 舊界의 공동조사 요청
    4.6 청·프랑스, 동시휴전과 철병선언
    4.18 日, 텐진조약(天津條約) 체결
    4.25 日, 조약개정을 위한 新條約案을 각국 공사에 제시
    5.6. 서울-의주간에 전선가설을 위한 韓淸電線條約을 체결
    5.8. 日本臨時代理公使 高平小五郞, 공사관 護衛兵 철수는 제물포조약, 第5款에 의한 것인 바, 유사시에는 再派兵의 권리를 갖는다고 설명
    5.28 조이수호통상조약 체결
    5.2 콩고, 자유국 성립
    6.2 일본파견 유학생들의 귀국 명함
    6.6 조청전선조약 조인
    6 청·일양국군 철수. 외무협판 묄렌도르프 파면
    6.5 영국, 니제르강지대를 보호령으로 함
    6.9 淸·프랑스, 텐진강화조약 체결
    8.3 아펜젤러, 培材學堂 설립
    8.27 대원군 귀국
    8 혜상공국을 상리국으로 개칭. 베베르가 러시아 총영사로 서울에 부임
       
    9.7 조로수호통상조약 비준교환
    9.17 조중상민수륙무역장정에 따라 통상분국 설치
    9.30 토문감계사 이중하, 청의 덕왕과 토문감계에 대하여 회담
    9.2 美, 와이오밍주에서 중국인 노동자 박해폭동 발생
    10.11 청의 원세계, 주차조선총리교섭통상사의로 부임
    10.27 토문감계문제 해결을 위해 조·청 대표를 3반으로 편성하여 동북국경을 공동답사(10.15)→ 국경회담 결렬
    10.28 영국, 만달레이를 점령
    11.16 부산구설해저전선조관속약 체결(한성-부산) : 김윤식-일본 공사 다카히라 고고로(高平小五郞)
    11.10 부산에 일본재판소 설치(영사재판)
    11.28 독일상사 세창양행으로부터 은 10만냥 차관 : 연리1할, 12년 상환
    11.14 영국, 제3차 미얀마전쟁 시작
    11.23 日 오이 겐타로(大井憲太郞) 등의 조선독립당원조계획 발각, 日 체포
    11.30 독일, 마셜 제도 점령
    12.27 金允植·高平小五郞, 부산에 일본해군 貯炭場 설치를 규정한 租借絶影島其他條約을 조인
    12.22 일본, 내각제도 확립. 제1차 伊藤博文 내각 성립
    12.28 인도, 국민회의파의 창립대회
    서력 연호
    (韓中日)
    독립운동 및 대외관계 일본·세계 동향
    1886 丙戌
    高宗23
    光緖12
    明治19
    1.25 『漢城週報』 발간
       
       
    1.1 영국, 제3차 미얀마전쟁에서 승리→버마가 영국식민지가 됨
    1.26 日, 北海道廳 설치
    1.28 日, 6개 사단 설치
    2.17 일본대리공사 高平小五郞, 공문에 한문을 쓰지 않고 일본어만 사용할 것을 통보
    2.19 한성-부산간 전선을 청국전보국에서 가설키로 함
    2.5 日, 宮內省 관제 공포
       
       
       
    4.25 淸·프랑스, 안남통상조약 체결
    5.3 조불수호통상조약·부속통상장정·선후속조 등을 조인
    5.11 일본정부, 수교 방해 이유를 들어 김옥균 추방 명령
    5 스크랜튼 대부인 이화학당 창설
    5.1 日 각국공사와 조약개정회의 제1회 개최
    5 日 政府, 김옥균에게 15일 안으로 일본을 떠날 것을 강요
    6.17 육영공원 설립→개원(8.26)
    6.23 朝伊修好條規 비준교환
    6.5 日, 만국적십자조약에 가맹
    7.10 총리내무부사 심순택이 러시아공사 베베르에게 親露抗淸策에 관한 국서 전달 → 조존두·김가진 등 친로항청책을 도모한 죄로 유배(7.17) → 원세개가 朝露密約事件을 계기로 이준용을 추대하려는 계획을 꾸며 천진의 이홍장에게 파병 요청(7.21) → 정부가 원세개에게 조로밀약설 해명(7.22) → 러시아공사 베베르가 조로밀약 관련인의 석방 요구(7.23) → 청국제독 정여창·오안렴이 군함 4척을 인솔하고 인천 도착(7.25) → 서상우를 텐진에 파견해서 이홍장에게 러시아와의 비밀교섭설을 해명케 함(8.13)
    7.26 日, 망명객 金玉均 구류
    7.24 淸·영국, 버마조약 조인
       
    8.6 日, 조약개정 준비로 法律取調所 설치하고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外相을 위원장에 취임
       
    9.24 주청러시아공사 라디젠스키가 이홍장에게 조선영토를 침략하지 말라고 언명
    10.1 남로전선(한성-부산) 가설착공
    10.22 김윤식, 원세개에게 토문정계를 논하고 본국 유민의 안치를 요청
       
    11 경상도관찰사 이호춘이 방곡령을 실시, 부산거류 일본상인의 곡물반출을 금지시킴
       
    1.31 守山 수령, 일본 상인 곡물에 과세. 일본상인 항의하다 지방민과 충돌
       
    12.27 영국, 타국이 거문도를 점령하지 않는다는 청국의 보장 하에 거문도 철퇴를 결정

    https://search.i815.or.kr/Degae/DegaeView.jsp?nid=21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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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력 연호
    (韓中日)
    독립운동 및 대외관계 일본·세계 동향
    1887 丁亥
    高宗24
    光緖13
    明治20
    1 일본임시공사 衫村, 경상도지방의 방곡령 철폐를 요구
    1.20 美, 하와이로부터 진주만 사용권 획득
    2.7 영국 군함, 거문도 철수
    2.14 경복궁 전등설비 기사 미국인 매케이가 한국인에게 저격당함
    2.8 美, 인디언에 관한 도스법안 의회 통과(인디언보유지 지정)
    3.25 청국이 한성-부산간 육로전선 가설권을 조선정부에 이양
    3.25 일본임시공사 衫村, 경상도지방의 방곡령 철폐요구→방곡령 해제
       
    4.5 토문감계사 이중하와 청나라 대표 진영이 정계비와 부근의 수원을 조사
    윤4.9 조불수호통상조규 비준교환 : 김윤식-플랑시
    4월 광무국 설치:私採, 세금 체납, 외국인 채광 업무 정리 단행 / 제주도에 침입한 일본어민 300여 명을 추방하고 일본대리공사에 엄중 항의
    4.4 영국, 제1회식민지회의를 런던에서 개최
    4.30 日 憲法草案 탈고
    5.17 조일통어장정안을 일본공사에 전달하고 조인 촉구
    5 정부, 해관세장정 개정
       
    6월 朝鮮電報總局 설립, 정부 주관의 전신사업 시작되어 자주적 전신 발전의 계기를 가짐
    6.29 박정양-주미공사, 심상학-주영·독·러·이·불 겸임 공사로 임명→심상학을 조신희로 대치(7.29)
    6.18 독일·러시아, 비밀 재보장조약 체결
       
    7 경학원 설치
       
    8.17 일본어선 6척이 제주목에 상륙하여 약탈하고 인명을 상해함
       
    9.27 최초의 조직교회인 서울의 새문안교회 설립
    9 청, 조선의 외교사절차견 방해. 속방인정을 조건부로 전권공사파견 승인(「另約三端」)
    9 日, 조약개정 연기에 대한 여론으로 井上馨 외상 사임, 伊藤博文, 외상 겸임
    10.2 주미공사 박정양과 참찬관 알렌 일행 인천 출발
       
    박정양
    10.7 日, 육군대학교조례 공포
    10.10 日, 고치현(高知縣) 대표, 三大事件 建白書를 원로원에 제출
    10.17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연방 성립
    10 淸, 포르투갈과 수호통상조약 체결 : 마카오 할양
    12.29 일본공사 近藤, 수산자원 약탈 강화하기 위해 조일양국통어장정, 어세기한 수정보충 및 인천에서의 소가죽세 철폐를 정부에 강요(1888.4. 철폐)
    12.12 영국·프랑스·오스트리아, 제2차 지중해협상(발칸 3국동맹) 성립
    서력 연호
    (韓中日)
    독립운동 및 대외관계 일본·세계 동향
    1888 戊子
    高宗25
    光緖14
    明治21
    2 서울-부산간 전기가설공사 착공 / 미국인 다이 등이 군사고문으로 내한
    2.1 日 大隈重信 외상 취임
    3 土門勘界의 재실시를 그만두고 현재까지의 경과를 청에 통고함
    3.12 조병식, 미·러·이 3국 공사에게 정부 승인 외의 기독교 선교 및 학당 설립 금지 요청
    3.18 일본공사 곤도 신스케가 인천연해의 어업특허장정안을 정부에 보내옴
    3 화재로 『승정원일기』 300여 권 소실
    3.17 영국, 사라와크를 보호령으로 삼음
    4.6 조병식이 곤도 신스케에게 영미어채장정의 예에 따라 일본어선의 어세 年納을 요구
    4.19 군제개편, 3영(통위영·장위영·총어영)을 둠
    4.19 일본공사 近藤, 평남 방곡령 실시 항의
    4.30 日, 추밀원관제 공포. 伊藤博文 초대의장 취임, 구로다기요타카(黑田淸隆) 내각 성립
    5 ‘영아소동’으로 서울에서 반외국인 정서가 팽배함
    5.12 日, 육군참모본부조례 등 공포
    5.12 영국, 北보르네오를 보호령으로 삼음
    5.13 브라질, 노예해방법안 의회 통과
    5.25 日 추밀원, 헌법제정 회의
    6 함경도 정평부 초원광점에서 봉기, 관리 9명이 피살. 함경도 영흥에서도 농민봉기(7월)
    6.15 독일, 빌헬름 2세 즉위
    7.10 조병식, 일본대리공사에게 조일통상장정이 발효 후 5년이 경과하였으므로 개정 요구
    7.13 조로육로통상장정의정 조인
    7.14 부산일본우편국 소용물품의 면세요구 승인
       
    8.18 일본정부와 변리통연만국전보약정서 체결
       
    9.22 서울에서의 일본상인의 무명 백목 판매행위 금지를 일본공사에게 요청
       
    10 울릉도 연안의 일본잠수회사 어선들의 어로작업 단속
    10.24 日, 청국·조선국주재영사재판규칙 공포
    10.29 수에즈운하조약 조인
    11 정부, 조일통상장정의 개정을 거듭 요구
       
    이해 함경도 북청·영흥·길주에서 농민 봉기
    11.30 淸, 캉유웨이(康有爲)의 변법자강운동
    11.30 日, 멕시코와 통상조약 조인 :일본 최초의 대등조약
    12.17 淸, 北洋海軍 창립. 丁汝昌이 北洋海軍提督
    https://search.i815.or.kr/Degae/DegaeView.jsp?nid=21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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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력 연호
    (韓中日)
    독립운동 및 대외관계 일본·세계 동향
    1889 己丑
    高宗26
    光緖15
    明治22
    1.중 강원도 정선군에서 민란 발생 : 군수 축출, 사령 불태워 죽임
    1 서울의 육주비전을 비롯한 상인들이 외국상인의 철수를 요구하며 철시.마포장정을 실시하여 일본상인의 마포기항을 제한 / 전라도 전주와 강원도 정선에서 농민봉기
    1.10 프랑스, 아프리카의 상아해안을 보호령으로 함
    2 露國에 절영도 및 원산에 러시아 貯炭所설치를 허가(부산 절영도는 거절)
    2.5 淸, 진강에서 배외폭동 발생
    2.11 日, 제일본제국헌법 발포
       
    3.4 淸, 光緖帝의 친정 시작
    4 정부, 기선회사 설치 승인 / 황해도관찰사 조병철이 방곡령을 실시
       
    5 일본, 황해도 방곡령 철폐 요청, 해제 / 일본, 대동강연안 측량 협조요청, 거부(6월 승인)
    5.6 국제사회당(제2인터내셔널) 성립(~1914)
    日, 흉작에 따른 물가등귀로 최초의 경제공황
    6.13 러시아, 남해의 녹도를 러시아 동양함대의 기류지 및 저탄장으로 삼고자 정부에 요청(거절)
    6.26 일본공사, 황해도 방곡령 철폐와 일상에게 몰수한 곡물 반환 요구
       
    7.11 일본공사, 일본상인들의 내지행상을 요청
    7 일본거류민을 위한 인천우체국 한성출장소 설립
       
    8 『승정원일기』의 편집을 위하여 일기청 설치
       
    9.24 함경도관찰사 조병식이 방곡령 공포
       
    10.15 일본대리공사 곤도 신스케, 방곡령의 철폐 및 손해배상을 요구
    10.20 조일통어장정 의정(10.20)→제주도 어민의 반대투쟁. 일본과 통상장정속약 체결
    10 경기도 수원에서 농민봉기, 경상도 창원 금광채굴권을 일본에 넘김
    10.25 日, 黑田淸隆 내각 총사직. 산조 사네토미(三條實美) 내각 성립
    10.30 日, 伊藤博文 추밀원의장 사임
    10 日, 大隈重信 피습으로 부상 미일수호통상조약 개정 중시
    11 일본, 조선정부에 방곡령 실시에 의한 손해배상을 요구
    11.15 브라질 공화국 수립(11.17. 황제 일족, 포르투칼에 망명)
       
    12.24 日, 내각관제 공포. 山縣有朋 내각 성립
    서력 연호
    (韓中日)
    독립운동 및 대외관계 일본·세계 동향
    1890 庚寅
    高宗27
    光緖16
    明治23
    1.7 함경도의 방곡령 철회, 조병식 감봉 처분
    1.11 도성 내의 청일양국상민을 용산으로 철거시키도록 양국에 요청
    1 서울 상인, 외국상점의 용산 이전을 주장하여 철시
    1.21 日, 자유당 결성
    2 황해도 관찰사 오준영이 방곡령 실시, 정부는 일본의 요구에 방곡령 해제 / 미국인 리젠드르가 데니를 대신하여 협판내무부사로 취임
       
    3 제주도 어민, 조일양국통어장정에 반대하여 봉기
    3.15 베를린에서 국제노동자회의
    3.17 淸·영국, 시킴·티베트조약 체결
    3.18 독일 비스마르크, 빌헬름 2세의 요구로 宰相 사임
    4 일본공사 近藤, 대동강 입구 철도의 개항을 요구
       
    5.9 미국공사 겸 총영사 A.허어드 부임
    5.19 일본공사, 일본군함의 대동강 연안측량에 대한 협조를 요청
    5.1 제2인터내셔널 창립대회에서의 결의에 따라 최초의 메이데이행진 실시
    5.5 日 板垣退助, 愛國公黨결성
    6.4 대왕대비 趙氏(翼宗妃) 사망
    6 부산·인천의 25客主制를 일본의 반대로 철폐
    6.14 영국, 잔지바르를 보호령으로 삼음
    6.13 양화진에 외국인공동묘지 설치 인가
    6.16 일본, 대동강 하구 철도의 개항을 강요
    조대비
    7.6 일본공사가 용산 일본상인 조차지 설치를 요청
       
    7.1 영국·독일, 헬리골랜드조약 체결
    7.1 日, 제1회 중의원 의원 선거
    7.25 日, 집회 및 政社法 공포
    9 淸, 영국인 기사를 채용하여 남만주철도건설을 위한 현지조사 실시
    10.20 일본어선의 제주도 연해 출어 허가 만기일 연장(~1891.4.24)
    10.21 함경도의 흉년으로 곡물수출이 내년 가을까지 금지될 것을 일본공사에 통고
    10.24 일본공사가 방곡령 실시 기간을 내년 봄으로 단축해 줄 것을 요청
    10.20 日, 元老院 폐지
    10.24 日 伊藤博文, 초대귀족원 의장에 취임
    10.30 日, 敎育勅語 발포
    11 미국인 그레이트 하우스, 내무협판으로 취임
    11.29 日, 제1회 제국의회 개회
    12.12 일본과 월미도기지조차조약 체결 : 4,900평에 연세 80원
       
    이해 일본 제18은행 서울설치
    12.4 淸 張之洞, 漢陽鐵廠 및 병기창 설립
    https://search.i815.or.kr/Degae/DegaeView.jsp?nid=21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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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력 연호
    (韓中日)
    독립운동 및 대외관계 일본·세계 동향
    1891 辛卯
    高宗28
    光緖17
    明治24
    1.1 일본 대리공사 곤도 신스케의 후임으로 육군소좌 가와키타 도시스케(河北俊弼) 부임(28일 사망)
    1 남전국(한성-동칠릉)의 전선가설 완공
       
    2.9 청, 鐵島(쇠섬)의 개항요구→거절
    2.10 일본, 제주도 禁漁 대신 철도의 개항 요구→거절
    2.15 청과 북로전선합동 체결
    2.28 일본공사가 일본상인도 청상인과 같이 평안·황해도 연안에서 무역을 허락해 줄 것을 요청
       
    3.21 제주어민 폭동: 일본과의 통어 철폐 요구→일본과 합의하여 통어장정 시행일시를 11월 말로 연기(4.2)
    3.24 신임 일본공사 육국중좌 가지야마 가나에스케(梶山鼎介) 부임, 일본주재 영사 파견을 요청
    3.24 영국·이탈리아, 아프리카국경조약 체결
    4 정부, 각국 조계사무를 인천세무사에 위임
    4.9 독일, 팽창주의적 단체인 범독일연맹 성립
    4 淸, 가로회 외국 선교사 살해 장강 일대 폭동 확대
    5.15 일본어선 수십 척, 제주도 건입포로 들어와서 주민 살해(5.15)→일본어선 수십척이 조천리 등지에 상륙하여 살인·약탈 감행
    5 일본상인, 진고개에 물고기상점 설치
    5.6 日 山縣有朋 사직, 松方正義 내각 성립
    5.11 日 巡査 쓰다산조(津田三造), 러시아 황태자 니콜라스를 傷害(大津事件)
    5.13 淸, 무호의 민중들이 교회를 불태우고 영영사관을 포위
    6.24 북로전선(한성-원산) 준공
    6.24 외무독판 민종묵이 일본공사에게 朝日通商通漁章程의 개정을 요구
    6 서울에 일어학당 설립
    6.1 日 伊藤博文, 추밀원 의장에 취임
    7.1. 일본공사, 朝日通漁章程 개정 요구에 대하여 불가를 통고
    7.1 日, 府縣制 실시
    8.29 내무협판 리젠드르를 파견하여 일본어선의 제주어채금지와 조일통상·통어장정의 개정 교섭
    8 강원도 고성에서 농어민 봉기
    8.27 러시아·프랑스, 8월조약 체결
    10 衫村, 조선주재일본공사관 서기관 겸 영사로 부임
    10.14 독일, 사회민주당의 에르푸르트대회 개최:에르푸르트 강령(카우츠키 기초) 채택, 정치 권력의 탈취와 계급·계급투쟁의 절멸 선언(~10.20)
    11.8 일본공사 梶山鼎介, 원산항의 방곡령에 따른 손해배상으로 14만 7천여원을 요구
    11.17 평양 일대의 탄광을 담보로 연안경비용 군함을 영국에서 구입하기로 결정
    11.11 淸, 열하에서 금단도교의 이국진 등이 봉기하여 기독교도와 충돌
    11.22 러시아, 기근의 타개를 위해 식량수출 금지(1892.6.21. 해제)
    11.26 日, 제2회 제국의회 개회
       
    12.26 日, 중의원해산
    서력 연호
    (韓中日)
    독립운동 및 대외관계 일본·세계 동향
    1892 壬辰
    高宗29
    光緖18
    明治25
    2 정부, 일본의 평양개방 요구를 거절. 정부, 일본인의 제주도 성산포 침입에 항의
    2.15 日, 중의원임시총선거에 관권의 선거개입
    2.22 미국, 인민당(포퓰리스트당) 결성
    3 함경도 함흥·덕원의 농민들이 봉기
    3 이탈리아, 노동당 결성
    4 정부, 일본제1은행에서 은 5천원을 차관. 일본인이 제주도 화북포에 침입 약탈
       
    5.29 동경에서 조오수호통상조약·부속통상장정 및 세칙장정 체결 조인
    5.5 美, 게리의 중국인 배척법 성립
    5.6 日, 제3회 제국의회 개회
    5.14 日 중의원, 정부인책결의안 가결
    5.21 淸, 排外文書의 발행을 금지
    6 일본어민의 제주도민 살상에 대한 배상을 일본에 요구
       
       
    8.17 러시아·프랑스, 군사협약 성립
    9.28 일본공사가, 황해도 방곡령 실시로 입은 손해액 6만 9,469원(日貨)의 보상을 요구
       
    10.6 청으로부터 庫平銀 10만냥을 차관 : 상환기간 100개월, 월이자 6리
    10 동학지도층, 통문을 돌려 교조신원운동을 벌임(공주)
       
    11.2 일본에서 은화 25만원 차관
    11 인천에 전환국을 설치하고 서양식으로 조선화폐를 주조
    11.8 日 제2차 伊藤博文 내각 성립, 외상에 무츠 무네미츠(陸奧宗光)
    11.29 日 제4회 제국의회 개회
    11 프랑스 쿠베르탱, 올림픽 부활 제창
    12.1 동학교도, 전라도 삼례역에 모여 교조신원 및 관리들의 교도탄압 금지를 진정
       
    이해 일본의 제58은행 서울지점 설치
       

    https://search.i815.or.kr/Degae/DegaeView.jsp?nid=21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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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력 연호
    (韓中日)
    독립운동 및 대외관계 일본·세계 동향
    1893 癸巳
    高宗30
    光緖19
    明治26
    1 日公使, 일본 상인에게도 미·영·청 등 諸國人과 같이 상점·가옥 등 소유 인정 요청
    1.22 상해영국회풍은행에서 은 5만원 차관
    1.17 하와이, 쿠데타 성공→왕정 폐지, 임시정부 수립
    *교조신원운동은 민심을 현혹시킨다는 죄로 억울하게 죽은 동학교조 최제우의 죄를 사면시키기 위해 동학교도들이 전개한 운동이다. 동학교조 최제우는 1864년 ‘좌도혹민’의 죄명으로 처형하였다. 2세 교주 최시형의 지도로 1892년(고종 29) 1월에 열린 ‘삼례집회’에서 억울하게 죽은 최제우의 죄를 벗기기 위한 제1차 교조신원운동이 전개하였다. 이어 1893년 3월 동학교도 40여 명이 서울에서 복합상소(伏閤上疏)를 하였다. 이어 3월 10일 충북 보은 장내리 집회에서는 교조신원의 구호를 넘어 ‘척왜양창의(斥倭洋倡義)’의 정치적 구호까지 제기되었다. 이 시기 전라도 금구에서도 동학교인들이 집회를 갖고 ‘부패정권 타도, 외세 배격’의 구호가 전면에 내세워졌다. 처음에는 순수한 동학의 운동으로서 종교의 자유라는 측면에서 출발하였으나, 점점 체제개혁을 지향하는 운동으로 발전해갔다
    2.12 동학교도 40여 명이 교조신원을 위해 광화문에서 3일간 복합상소
    2 척왜척양을 주장하는 동학교도들의 벽보가 외국공관과 서울시내에 붙자 각국 외교관들이 본국 정부에 군함 증파를 요청. 정부, 방곡령에 따른 일본의 거듭되는 배상 요구를 거절. 평안도 함증(증산) 농민들이 봉기
    3.10 동학교도 2만여 명이 충청도 보은군 속리면 장내에서 척왜양의 기치로 농성시위(보은취회)→선무사 어윤중의 설득으로 해산(4.3)
    3 동학교도 전라도 금구에서 척왜양 농성→어윤중의 설득으로 해산(4.22)
    4.11 일본공사, 동학교도 진압 위해 군함 1척 파견을 일본정부에 제기
    4.16 일본공사 오오이시 마사미(大石正己) 이임
    4 일본과의 방곡령 배상문제 11만원에 해결
       
    5.5 영국, 공황 발생
    5.21 日, 방곡령에 대한 朝日담판 종료. 일본에 배상금 지불
    5.22 日, 戰時大本營條例 공포
    6.18 방곡령사건 배상금 1차분 상환 위해 청으로부터 은 3만 5천원을 차관
    6 인천에서 백성들과 병사들이 관청을 습격
       
    8 영국인 브라운을 해관총세무사에 임명 / 한오통상조약 비준 교환 / 황해도 재령과 충청도 청풍·황간지방에서 농민 봉기
    8.12 日 문부성, 기미가요를 국가로 제정
    9.9 외무독판 남정철, 각국 주재 공사에게 흉년으로 인한 방곡령 실시 통고→일본공사 항의
    9.28 일본 특명전권공사 大鳥圭介 착임(1894.10.17까지 재임)
       
    10.24 부산·원산 두 항구에서 방곡령 실시(~1894.2.1)
    10.1 日, 대일본협회 설립. 대외강경론
    10.3 프랑스·타이 조약 조인:타이 메콩강 동쪽의 영유권 포기와 300만 프랑의 배상 지불에 합의
    10.20 日 조선정부, 방곡령 재발령
    11 황주·중화·강계·철도·회령·종성·통영·운산·금부·양주 등 전국 각지에서 민란 계속
    11.30 趙秉稷, 일본공사의 황해도 방곡령으로 인한 손해배상 요구를 반박
    11.6 日, 재발령 해제에 관한 朝日담판 종료
    11.28 日, 제5회 제국의회 개회
       
    12.17 프랑스, 라오스를 보호령화함
    12 이탈리아, 시칠리아에서 농민폭동 발발 / 淸, 북경-산해관 간의 철도 완성
    서력 연호
    (韓中日)
    독립운동 및 대외관계 일본·세계 동향
    1894 甲午
    高宗31
    光緖20
    明治27
    1.10 전라도 고부 군민, 군수 조병갑의 탐학에 항거하여 전봉준 영도하에 고부관아 점령→이용태를 안핵사로 임명하여 민란 수습 지시(2.15)
       
    2.22 金玉均이 상해 공동조계 내의 일본여관 동화양행에서 홍종우에게 암살됨
       
    3.21 전봉준, 동학교도와 농민군을 끌고 고부 백산 봉기 : 4대 강령 발표 → 홍계훈이 양호초토사에 임명. 북접동학교도들도 최시형의 통문으로 청산에 집결(4.2) → 동학군, 부안·금구 점령(4.4) → 동학 포고문 발표(4.11) → 동학군의 전주 점령(4.27) → 충청도 동학군 봉기. 동학군 진압을 위해 청국에 원병 요청(4.28) → 청군 제독 섭지초가 1,500명을 이끌고 인천 도착(5.2) → 일본 해군중장 이토 스케유키(伊東祐亨)이 군함 2척을 인솔하고 인천 상륙(5.6) → 전주화약 성립(5.7) → 동학군, 전라도관찰사에게 13조의 시정책을 건의 → 전국에 집강소 조직(6.) → 동학군 재차 봉기(9.3) → 최시형도 무력 봉기 선언(9.18) → 목천 세성산전투에서 동학군 패배(10.21) → 우금치전투에서 일군에 대패(10.22~11.12) → 전봉준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12.2, 양 12.28) → 북접주력부대는 충주에서 해산(12.24) → 동학군 진압 완료(12.27)
    3.1 日, 임시중의원총선거
    3.6 日 神宮, 승려들의 정치활동을 금지
       
    4.1 日 제3회 임시 총선거
    5.7(양 6.9) 일본군 혼성여단 선발대대 800명이 인천에 상륙, 오오도리 공사가 특전대를 끌고 서울 침입→5.23 일본공사 왕에게 내정개혁을 건의
    5.5 영국·이탈리아, 동아프리카에 관한 영이협정 조인
    5.15 日, 제6회 제국의회 개회
    5.22 인도, 간디가 남아프리카에서 나탈인 인도국민회의 결성
    5.31 日 중의원, 내각탄핵상주안 결의, 중의원 해산(6.2)
    6 일본공사 내정개혁안 5개조 제시(6.1) → 내정개혁에 대한 국왕의 윤음 공포(6) → 일본 독단으로 경인 경부간 군용전선공사 착공(8) → 내정개혁을 담당할 교정청 설치(11) → 갑오변란(일본군의 경복궁 침입, 왕궁의 보물 약탈, 대원군 집권, 민씨일파 축출 21) → 청일전쟁 도발(23) → 군국기무처 창설(25, 양 7.27~12.17) → 군국기무처에서 의정부 관제안과 12개조의 사회정치적 개혁안 심의채택(28, ‘갑오경장’ 시작) → 일본공사 이노우에 가오루가 2차 내정개혁신안 20조 제의(10.23) → 제2차 김홍집 내각 성립(중추원 신설)(11.21)
    6.23 일본군함이 풍도 앞바다에서 청국군함을 격침 → 청일양국선전포고(7.1) : 청일전쟁의 시작 → 청군이 평양에서 일군에 대패(8.17)
    6.4 日, 한국에 출병
    6.7 淸·日 한국에 출병
    6.8 日 상비함대사령관 해군중장 이토 유코(伊東祐亨), 군함 松島·千代田 2척 인솔하고 인천에 도착
    6.15 日 내각회의, 청나라와 협상이 파괴되는 경우에도 군대 철회할 수 없다는 방침을 결정. 조선에 내정개혁을 추진시킬 대책 강구
    6.24 프랑스 대통령 카르노, 이탈리아인 아나키스트에게 암살됨
    7.16 일본공사 大鳥 강요로 정부가 공문으로 내정개혁에 대한 회답, 공문에서 일본군 철수를 요구하고 개혁은 스스로 진행할 것임을 통보
    7.20 조일잠정합동조관 체결
    7.25 지방군제 개혁 : 각도의 병영·수영 폐지
    7 군국기무처가 신식화폐발행장정을 채택, 은본위체 실시하고 전환국에서 새 화폐를 발행하고 금납제 결정 / 4건의 전선 절단투쟁이 『東京朝日新聞』에 나타남(~8) : 경성-마포(7.8), 용산 부근(7.15), 용산-양화진(7.18), 대구근방(8.18~19) / 안동에서 서상철의 의병이 거의(갑오의병, 25) → 태봉에서 일본군과 전투(음력 9.1) → 정부-일본 연합군과 교전(10.15) → 청풍 곤지암에서 교전(10.18) → 계속된 패배로 곤지암 부근에 피신 / 安承禹, 지평에서 의병모집(여름) / 영해에서 농민 봉기
    7.4 하와이 임시정부, 하와이 공화국 성립 선언(8.7. 영국 승인)
    7.16 英·日개정통상항해조약 조인
    7.23 淸日兵, 서울부근에서 충돌
    7.29 일본군 혼성여단장 오오시마 요시마사(大島義昌), 청국 聶士城 부대와 成歡에서 접전, 청국군대를 격파하고 아산에 진격
    8 경북 영해와 영천에서 농민 봉기. 경북 용궁과 석문에서 농민군이 일본군과 격전. 일본군이 평양전투에서 청군을 격파
    8.1 日, 淸에 선전포고(청일전쟁)
    8.7 영국, 청일전쟁에 중립 선언
    8.9 러시아, 중립선언
    8 아르메니아, 반 투르크 봉기
    9.7 외무아문, 일본공사의 요청에 의해 경기·충청·경상 3도에 공문을 보내 일본 군용전선의 절단행위를 엄금
    9.19 張元石, 전신선 절단죄로 황해 감영에서 사형 집행됨
    9.1 日, 임시중의원 총선거
    9.15 일본군, 평양전투에서 승리
    9.17 日, 黃海大海戰
    10.11 일본 서원사의 내한 답례로 의화군 堈을 일본보빙사로 파견
    10 군국기무처, 새도량형법 실시 결정
       
    유성의병장 문석봉
    10.6 영국, 독·불·러·미에 극동에 대한 공동간섭 제안. 미·독의 반대로 실패
    10.15 프랑스 유대계 불군참모장교 알프레드 드레퓌스, 스파이 혐의로 체포됨
    10.18 日 제7회 제국의회 廣島에서 소집
    10.19 日 중의원, 임시군사비예산안전원일치로 가결
    11.20 보호청상규칙 반포 시행
    11.21(양 12.17) 일제의 강요로 군국기무처 해산되고 제2차 金弘集내각 성립
    11 文錫鳳, 양호소모사에 임명됨
       
    사발통문
       
    전봉준
    11.1 러시아 황제 알렉산드르 3세 죽음. 니콜라이 2세 즉위
    11.4 淸, 恭親王이 영·미·독·불·러의 공사에게 청일전쟁의 휴전조정을 요청
    11.8 연합함대, 대련 점령
    11.12 주일미공사가 청국의 요청으로 강화조건을 이론에 제의
    11.21 日本軍, 청의 旅順 점령
    11.22 日, 美日개정통상항해조약 조인
       
       
       
       
       
    12.2(양12.28) 동학농민군 지도자 전봉준, 변절자의 밀고로 전라도 순창 피로리에서 체포됨
    12.3 일본공사, 일본군대 철회 통고
    12.12 고종이 홍범14조와 독립서고문을 종묘에 고함
    12.27 김홍집-박영효 연립내각 출범, 2차 김홍집 내각-2차 갑오개혁(12.27)
    12 지평의 안승우가 모병활동 펼침 / 홍범도, 철원에서 의병 계획
       
    이해 開國紀元을 사용 / 李濟馬가 四象醫學을 체계화하여 『東醫壽世保 元』을 씀
    12 淸, 쑨원(孫文)이 하와이에서 홍중회(興中會) 조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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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력 연호
    (韓中日)
    독립운동 및 대외관계 일본·세계 동향
    1895 乙未
    高宗32
    光緖21
    明治28
    2.2 학교설립과 인재양성에 관한 詔勅 발표.
    2.26 교육입국조서 반포(2.26)
    *‘교육입국조서’라고도 하는데 이는 1947년에 펴낸 이만규(李萬珪)의 「조선교육사」에서 비롯되었다. 1894년 갑오농민전쟁 뒤 조선정부는 교육을 근대화하려는 목적에서 그해 7월 예부를 폐지하고 근대적인 교육행정기관인 학무아문을 설치하였으며 다음해 2월 이 조서를 발표했다. 이 조서는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전통적인 도덕교육에 지식교육과 체육교육을 새롭게 첨가하여 교육의 근대화를 이루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전통적인 가치관을 개혁하는 내용이 아니라 1890년 일본의 메이지[明治] 천황이 발표한 ‘교육에 관한 칙어’와 마찬가지로 봉건적인 주장이 담겨 있다. 중요한 내용으로는 첫째, 세계의 형세를 보건대 부강한 나라는 모두 백성의 지식 수준이 발달하였으니, 지식을 깨우치는 것은 교육의 선미(善美)이고 교육은 실로 국가를 보존하는 근본이다. 둘째, 교육은 그 길이 있는 것이니 헛이름과 실용을 분별해서 실용에 힘쓰고, 독서나 습자로 옛사람의 찌꺼기나 줍고 시세에 어두워서는 안된다. 셋째, ① 오륜의 행실을 닦는 덕양(德養), ② 체력을 기르는 체양(體養), ③ 격물치지(格物致知)의 지양(智養)을 교육의 3대 강령으로 삼는다. 넷째, 널리 학교를 세우고 인재를 기르겠다 등이 있다
    2.2 日, 威海衛 점령
    2.12 淸, 北洋艦隊 사령관 丁汝昌 日艦隊에 항복
    2.21 淸 孫文, 興中會를 개편, 輔仁文社를 병합. 合衆政府의 수립을 표방(일설 2.18)
    3.9 전선절단투쟁(4건, 『東京朝日新聞』) : 고양(3.9), 서울 모화현(3.18), 모화현(3.31), 개성-장단간 전봇대 불태움(4.)
    3.25 을미개혁 단행(재판소구성법 포함, 행정과 사법이 처음으로 분리됨)
    3.29 동학군 지도자 全琫準(1854~1895)과 接主 孫化中(1861~1895)·金德明·崔慶先(1859~1895)·成斗漢 등 처형
    3 경기도 抱川에서 농민 봉기(官長을 축출). 일본과 연리 6%의 300만원 차관조약 체결. 내각관제·중추원관제·재판소구성법 등 34건의 근대법 공포
    3.16 淸 손문 등의 흥중회, 홍콩에서 廣州 공격을 계획
    3.20 淸, 李鴻章과 일본의 伊藤博文, 시노모세키에서 강화회담
    4 安昌植, 廣川에서 의거 기도. 홍주에서 안창식이 모병활동 전개→김복한·이설 등과 결합하여 의병투쟁 전개 / 한성사범학교 및 외국어학교 관제를 발표 / 박정양 내각 조직
    4.17 청일강화조약(下關條約) 조인
    4.23 露·獨·佛 삼국, 일본에 遼東반도 還付를 권고
    5.16 柳麟錫, 제천에서 향음례 실시
    윤5.1 신설대 설치
    윤5.25 시위대 설치
    유인석
    5.1 淸, 康有爲 등 18개 省의 擧人 1800명, 拒和·還都·變法을 상서
    5.4 日 閣議, 遼東半島 포기를 결정
    5.25 淸, 대만인들 봉기로 臺灣巡撫 唐景松을 總統으로 臺灣民主國 선언. 일본군에 의해 좌절(6.6)
    6.7 日, 臺北 점령
    6.8 日, 露·日통상항해조약 조인
    6.17 日, 대만인의 봉기를 진압하고 臺北에 臺灣總督府 설치
    음7.22 金元喬, 祥原에서 의병 일으킴: 長壽山城 점거(7.30)→장수산성 전투 敗散(8.12)
    7.24 미우라 고로(三浦梧樓) 주차조선특명공사로 임명, 부임(양 9.1 부임)
    7 제3차 김홍집내각 조직 / 소학교령 공포
       
    8.20(양10.8) 을미사변 : 일본낭인과 군인, 玉壺褸에서 명성황후를 시해
    8.6 日 육군성, 대만총독부조례 제정
    9 훈련대를 해산하고 친위대와 진위대를 설치
       
    10.12 春生門事件 발생(친러·친미파의 이범진 등이 국왕을 移御하고, 김홍집 내각을 타도하려다 실패함)
    10.중 文錫鳳, 國讐報復의 기치를 들고 懷德 등지에서 의병 일으킴
    10.10 3차 김홍집 내각 출범
       
    명성황후
       
    10.13 日, 무단조선도항금지령 공포
    10.17 日, 민비시해의 주범 미우라 고로(三浦梧樓)의 소환귀국을 명함. 고무라 주타로(小村壽太郞)를 주한판리공사에 임명
    10.21 일본군, 臺南 점령
    10.24 日, 을미사변 주모자 구스노세 사치이코(楠瀨中佐)를 구속하여 일본 히로시마(廣島) 헌병대에 송치. 26일에는 전일본공사 三浦梧樓 등 4명, 일본국에 의해 음모죄로 구속(1896.1.21. 증거불충분으로 무죄석방)
    10 淸 흥중회, 광주에서 봉기
    10.27 孫文의 擧兵計劃 실패(광저우사건)
    11.16 金河洛·趙性學 등 利川義兵陣 구성
    11.15 단발령 공포. 고종 단발
    11 공주의 匪徒 文錫鳳黨 소멸 / 1896년부터 태양력을 사용키로 공포
    11.8 日, 요동반도 還付條約·付屬議定書에 조인. 보상금 3,000만엔
       
    12.29 日, 제9회 제국의회 개회
    12 러시아 레닌, 상트페테부르크에서 노동자계급해방동맹 결성(12.9. 검거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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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력 연호
    (韓中日)
    독립운동 및 대외관계 일본·세계 동향
    1896 丙申
    建陽1
    光緖22
    明治29
    1.1 建陽이라는 연호 사용. 陽曆 사용
    1.3 외부대신 김윤식, 일본판리공사 小村壽太郞에게 친위대 진위대 양성을 위한 일본인 교관 24명 초청 의뢰
    1.7 盧應奎, 경남 安義에서 기병
    1.8 神武門 밖에서 관병식 거행
    1.11 국왕, 단발령의 이행을 강조하는 조칙 발표
    1.13 李春永, 원주에서 의병 봉기
    1.17 김복한 홍주에서 각각 기병(1.18. 체포됨) / 金道和 등, 안동에서 기병
    1.19 노응규 의병, 진주성 점령
    1.20 李昭應, 춘천에서 기병
    1.25 조선에 일본헌병대 창설(1903.12 한국주차헌병대로 개칭)
    1.30 閔龍鎬, 강릉에서 창의소 결성 / 이소응 의병, 춘천관찰사 曺寅承 처단
    1 柳麟錫, 제천에서 의병 봉기
    1.9 日, 중의원에서 遼東還付에 관한 내각탄핵안 부결
    1.15 영국·프랑스, 타이의 독립존중·영토보전에 합의
    1.16 프랑스, 마다가스카르 영유를 선언
       
       
       
    김복한
    2.1 러시아 수병 120명, 인천 군함에서 내려 입경 / 김가진, 주일공사 부임
    2.3 유인석, 제천창의대장에 취임
    2.11 李範晉·李完用 등 친러파, 고종 및 왕자를 俄館播遷 : 세자를 정동 러시아공사관으로 移御케 함. 친러내각 성립(총리 金炳始). 총리대신 김홍집, 농상공부대신 鄭秉夏, 경무청에 의해 체포, 처형됨. 유길준·趙羲淵·張博 등, 일본으로 망명 / 김윤식, 피신 중 체포되어 제주도에 유배됨
    2.15 일본 동경에서 조선유학생 최초의 잡지 『親睦會會報』 창간
    2.17 어윤중, 용인에서 군중에게 피살
    2.18 내부대신 박정양, 단발이 강제가 아님을 알리고 의병해산을 권유 / 고종, 각지 의병에게 해산을 권유하는 조칙 반포
    2.23 국왕, 을미사변·춘생문사건 관계자 재판의 불공정시정 지시
    2.25 일본외무상대리 西園寺, 짜르러시아공사와 조선주재공사에게 조선문제에 관한 러일협상 기본방침을 지시(고종을 왕궁에 돌려보낼 것, 러일 양국이 새정부 조직할 경우 민비살해사건 가담자 극형에 처하지 말 것 등)
    2.28 이천의병, 남한산성 점령
    2.29 安承禹 의진의 도영장으로 제천·충주·가흥 전투에서 활약한 羅時雲(평창) 피살 순국
    2 奇宇萬, 광주에서 기병, 光山會盟所 설치
       
       
       
       
       
    러시아 공사관
       
    3.2 정부, 일본공사에 의병진압을 위해 각처에 파견된 일병의 철수를 요청
    3.4 친위대 2개 대대 증설을 공포
    3.9 金昌洙(金九), 치하포에서 일본인의 왕후살해보복으로 일본상인 쓰치다(土田讓亮)를 살해
    3.상 제천의병진, 예천군수 柳仁馨과 영덕군수 鄭在寬 처단
    3.27 제천의병진의 선봉장 金伯善(百先, 양평) 처형당함
    3.29 미국인 모스, 경인철도 부설권을 얻음
    3.30 정부, 일본공사에게 개성-서울간 노선 및 북로전선(京元間)의 조속반환 요구
    3.1 日, 진보당 결성
    3.14 日, 육군 4개사단증설안 공포.
    3.31 日, 拓植務省 설치. 대만총독부 조례 공포
    4.1 러시아특명전권공사 閔泳煥, 尹致昊 등과 러시아로 출발
    4.2 일본군, 안동부에 방화(민가 2천여호 소각)
    4.7 서재필, 온건개화파와 함께 『독립신문』 창간
    4.17 관립 러시아학교 개교 / 미국인 모스, 운산금광 채굴권 얻음
    4.20 藥峴 천주교당에서 처음으로 한국인 신부 임명
    4.22 러시아인 니시겐스키, 함경도 경원 종성의 금광채굴권 얻음
    4.6 제1회 근대올림픽, 아테네에서 개최(~4.15. 13개국의 285명의 선수 참가)
    5.1 김병시, 국왕이 俄館으로부터 환어토록 상소함
    5.12 日人, 경부철도주식회사 창립발기인대회 구성하고 정부에 경부철도부설권 청구
    5.20 민영환, 러시아 외상 로바노프와 회담(경제·군사원조 등 5개조항 협약)
    5.25 제천의병진, 제천 남성 전투에서 中軍將 安承禹(1865~1896), 종사 洪思九(영주, 1896~1896) 전사
    5 한국문제에 관한 일·러협정(小村·베베르각서 : 아관파천 인정)
    5.14 일본·러시아, 서울에서 베베르·고무라 각서 조인(러일협상)
    5.18 대만, 臺東에서 劉德杓의 항일거병
    6.1 경의철도 부설권과 1개처의 광산채굴권 허가를 프랑스측에 통보
    6.15 의병장 李忠應(가평, 1856~1896) 순국
    6.16 조선은행창립발기회 개최
    6.3 淸·러시아, 李鴻章과 로마노프·비테 조약 조인(露淸密約), 일본의 공격에 대한 공동방위를 밀약
    6.5 淸, 프랑스가 베트남철도를 廣西·龍州까지 연장함을 인정
    6.9 山縣有朋·로바노프협정 성립(한국에 관한 露日協定書)
    6.14 臺灣 雲林義·하철, 항일거병
       
    서재필
    7.2 서재필·윤치호·안경수 등 30여 명, 독립협회 결성
    7.3 프랑스인 그리유에게 경의철도 부설권 허가
    7.4 『독립신문』 논설을 통해 독립협회의 창립목적을 널리 선전, 국민의 동참을 호소
    7.7 신임 주조선일본공사 하라 다카시(原敬) 부임
    7.21 日, 淸日통상항해조약 조인
    제2인터내셔널 런던대회 열림(~7.27.)
    7.13 이천의병장 金河洛(의성, 1856~1896), 영덕에서 자결순국
    7.31 학부, 銅峴 安洞에 각각 관립소학교 설립
    8.4 1895년 반포한 지방제도 관련 제반 칙령 폐지하고, 23부제를 13도제로 변경
    8.17 淸露은행원 포코틸로프 등 재정실태 조사차 내한
    8.18 러시아공사, 정부에 인천 월미도 남단 조차 결약서 제출
    8.23 유인석의병부대, 楚山 도착
    8.26 忠州·洪州·尙州·原州에 地方隊 설치령 공포
       
    9.1 제천에서 기병, 여주와 강원도 일대에서 활약하던 李範稷 순국
    9.9 러시아에 茂山, 압록강 유역 및 울릉도에 대한 삼림 채벌과 養木權 허가
    9.18 민용호(閔龍鎬)부대, 함흥 점령
    9.24 공주·춘천·강계·충주·홍주·상주·원주 지방대 폐지 내각을 폐지하고 의정부제도 환원
    9 안동의병장 김도화, 의병 해산
    9.8 日蘭通商航海條約 성립
    9.18 日 제2차 松方正義(松隈)내각 성립
    독립문 대조선독립협회회보
    10.4 일본공사 하라(原敬) 귀국하고 가토 마쓰오(加藤增雄)가 대리공사(대리공사)가 됨
    10.15 김도현 의병부대, 영양에서 해산
    10.19 독립협회 임원들 기관지로서 회보를 발간키로 결의
    10.21 러시아특명전권공사 민영환, 귀국하여 국왕께 러시아 사정을 보고
    11.1 朝露密約案 작성
    11.19 유성에서 기병, 회덕·진잠·공주·원주 등지에서 활약한 의병장 文錫鳳(달성, 1851~1896) 병사
    11.21 독립협회, 迎恩門 자리에 독립문 정초식 거행(1897.11.20 준공)
    11.30 독립협회, 『大朝鮮獨立協會會報』 창간호 발행
    11.30 서재필, 배제학당 학생들을 독려하여 協成會 조직, 첫 모임 가짐, 1898년 3월 중순까지 총 42회를 열었음
    11.30 독립협회 「獨立協會輪告」를 채택, 독립문 등의 건립사업에 적극적 참여 호소
    12.6 고종, 의병진압에 공로가 많은 유공자에게 포상토록 조칙을 내림
    12.18 日, 고등교육회의규칙 공포
    12.25 日, 제10회 제국의회 개회

    https://search.i815.or.kr/Degae/DegaeView.jsp?nid=21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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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력 연호
    (韓中日)
    독립운동 및 대외관계 일본·세계 동향
    1897 丁酉
    光武1
    光緖23
    明治30
    1.5 일본불교 정토종 전래
    1.7 민비 시호를 文成, 능호를 홍능으로 함 / 『대조선독립협회회보』 제2호 간행
    1.11 국왕즉위기념일 1월 15일을 慶興節로 함 / 민영환 유럽파견 특명전권공사에 임명
    1.31 韓善會·李根鎔 등, 정부전복기도 발각, 제주도 유배 15년
    1 『독립신문』, 영문판 『The Independent』 분리하여 2종으로 간행
       
    2.2 아펜젤러, 감리교회 주간신문인 『조선그리스도인회보』 창간
    2.19 김종한 등 한성은행(조흥은행 전신) 발기→1903.12 영업개시
    2.20 고종, 러시아공사관으로부터 경운궁(덕수궁)으로 옮김
    2.28 프랑스 마다가스카르총독, 메리나왕조를 폐함
    3.2 민비 시호를 明成으로 바꾸어 올림
    3.9 정부, 베베르·小村각서와 로마노프·山縣의정서를 자주권 침해라고 일본공사에 항의
    3.23 중추원에 校典所 설치
    3 러시아 교관 포티아타에 의해 훈련된 군인으로 시위대 조직
    3.2 열강, 투르크·그리스에 크레타의 자치와 철병을 요구
    4.1 언더우드, 장로교회 주간신문인 『그리스도신문』 창간
    4.6 러시아공사, 端川·三水 광산 채굴허가를 외부에 요청, 三水광산만 허가
    4.7 러시아공사, 청국의 朝淸전선조약 초안의 수정을 재차 정부에 요구
    4.14 일본은행 借款 300만원 중 100만원 상환을 통고
    4.9 日, 하와이일본이민 상륙거절
    4.17 그리스, 터키에 선전포고
    4.30 러시아·오스트리아, 발칸에 있어서의 현상유지에 동의하는 협정 조인
    5.1 관립 漢語학교 설립
    5.4 日人, 京仁鐵道引受組合 발족
    5.8 미국 모스회사와 京仁鐵道讓受結約 조인
    5.15 일본공사, 함경도 鍾城의 방곡령 철회를 요청
    5.23 황태자, 독립문 현판식 거행. 독립협회, 모화관을 개수하여 협회사무실 (독립관)로 사용
    5.19 그리스·투르크, 휴전 성립
    5.29 日, 北海道에 區制, 1·2級町村制 공포
    6.1 일본공사, 전라도지방 방곡령 철회를 요청
    6.3 史禮所 설치
    6.15 日, 萬國郵便條約에 조인
    6.22 日, 제국대학을 동경제국대학으로 개칭. 경도제국대학 신설
    7.3 정부, 목포와 진남포를 개항키로 결정(→10.1 개항)
    7.16 정부전복과 요인암살을 꾀하던 宋鎭用·洪顯哲 처형됨
    7.28 군대교련교사로 초빙한 러시아 군인 13명이 입국함
    7.17 주한미국공사대리 알렌, 공사로 승진
    7 우간다 내분. 반영파 므왕가, 도망하여 독일군에 항복
    8.12 단발령 취소
    8.13 독립협회 주최 개국505주년 기원절 기념식을 독립관에서 거행
    8.14 연호를 光武라고 고침(8.16 시행) / 전 미국공사 서광범, 미국에서 사망
    8 스위스, 바젤에서 제1회 시오니스트회의 열림. 팔레스타인에 합법적인 유대인 거주지를 건설하기로 결의
    9.29 金在顯 등 관료 716명 왕께 帝位에 오를 것을 상소
    9.1 日, 拓植務省 폐지
    9.2 주한러시아공사 스페이에르 부임
    10.1 舊南別宮에 圜丘壇 축조를 명함
    10.3 국왕, 皇帝에 즉위하라는 신하들의 의견에 따를 것을 선포
    10.11 국호를 大韓帝國으로 결정
    10.12 圜丘壇에서 황제즉위식 거행, 왕후를 황후, 왕태자를 황태자로 칭함
    10.14 정부, 황제즉위와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개정했음을 각국 대표에게 통보
    10.16 미국·일본·독일·러시아·프랑스 등 각국 대표와 목포·진남포거류지규칙 조인
    10.25 정부, 러시아인 알렉시예프를 재정고문 겸 해관총세무사에 임명하고 브라운을 해고
    10 빌라에서 러시아·폴란드·리투아니아의 全유대인사회민주주의동맹 결성
    환구단
    11.7 탁지부대신 박정양, 알렉시예프를 재정고문에 초빙한 것에 반발하여 사임
    11.21 명성왕후의 국장 거행
    11 독립문, 시공 1년만에 완공
    12.2 황제즉위일인 10월 12일을 繼天紀元節로 정함
    12.4 일본공사, 충청도 각지의 방곡령 철회를 요구. 정부, 철회를 통고
    12.13 서재필, 중추원 고문직 해임
    12.20 김윤식·李承五, 을미사변 관련혐의로 제주로 종신 유배
    12.31 미국의 스탠다드 석유회사, 인천 월미도에 석유탱크 건립
    12.17 독일, 華北을 러시아의 세력권으로 인정하여, 일본진출의 저지에 협력하기로 러시아에 약속
    12.24 日, 제11회 제국의회 개회
    12.25 日, 내각불신임안 상정, 松方正義 내각 총사직(28)
    이탈리아, 이슬람교도의 저항으로 수단의 카살라를 이집트에 할양
    12 淸, 康有爲가 독일의 膠州灣 점령에 항의, 變法自疆을 황제에게 요청

    https://search.i815.or.kr/Degae/DegaeView.jsp?nid=21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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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력 연호
    (韓中日)
    독립운동 및 대외관계 일본·세계 동향
    1898 戊戌
    光武2
    光緖24
    明治31
    1.1 협성회, 『협성회회보』 주간지로 창간함
    1.12 앞으로 채광권·철도부설권을 외국인에게 허가하지 않겠다는 칙령 반포
    1.18 외국인 콜브란·보스트위크, 한성전기회사 설립. 전기철도·전등·수도·전화부설권 계약체결
    1.28 궐내에 전화 설치하여 각 아문 및 인천 감리와 통화
    1.21 日, 제3차 伊藤博文 내각 성립
       
    2.9 독립협회, 종로 네거리에서 萬民共同會 개최하여 러시아의 한로은행, 재정·군사고문 비판
    2.21 독립협회, 러시아 침략정책에 반대하는 상소
    2.22 독립협회, 러시아의 간섭에 의해 군사·재정·인사 등 국권이 침해된 데 대한 外人배척운동 전개 / 興宣大院君 李昰應 사망
    2.25 외부, 부산 絶影島를 러시아에 租借하는 것을 허가
    2.27 독립협회, 정부에 러시아의 졀영도 조차 항의, 해명 요구 / 독립협회 임원개편(회장 이완용)
    2.1 淸, 배상금 지불의 연기를 요구하였으나 일본정부, 이를 거절함
    3.1 서울 새문안에 韓露銀行 개설
    3.2 제주도에서 봉기 발생(場火稅사건) / 외부대신 이도재, 절영도 러시아 조차에 항의, 사직 / 『京城新聞』 창간→『대한황성신문』으로 제호 변경(4월 6일)→『황성신문』으로 제호 변경(9월 5일)
    3.10 독립협회, 종로에서 만민공동회를 열고 러시아 세력의 배척을 결의
    3.11 고종, 여론에 따라 정부로 하여금 러시아 공사관에 군사교관 및 재정고문 철수를 요청토록 함. 러시아 재정고문 및 군사교관을 정식으로 해고, 3월 1일 개설된 한러은행도 문을 닫음
    3.21 독립협회원 135명, 러시아의 절영도조차 반대를 상소
    3.3 러시아, 청에 大連·旅順의 조차를 요구
    3.6 淸·독일, 교주만 조차조약 조인. 독일, 교주만조차권(99년간)·膠濟철도부설권·광산물채굴권 획득(3.6)
    3.15 日, 제5회 중의원임시총선거
    3.19 日 외상, 러시아 공사관에게 滿韓交涉을 통고
    3.27 러시아, 청의 大連· 旅順항 조차권과 南蠻철도부설권 획득, 중국의 반식민지화
    4.9 협성회, 『협성회회보』를 일간신문으로 발전시켜 간행에 성공, 제호를 『매일신문』이라 함
    4.24 미국공사 알렌, 외부대신에 美西戰爭 통보
    4.25 일본 외상 西德二郞과 러시아 공사 로젠, 한국에 관한 의정서에 조인(니시-로젠 협정)
    4.28 정부, 美·西전쟁에 중립을 선언
    4.12 淸, 康有爲 등, 북경에서 保國會 결성
    4.21 미국·스페인 전쟁 개시
    4.25 니시-로젠협정
    4.25 日 한국의 독립승인과 내정불간섭에 관한 露日議定書 조인
    5.16 『매일신문』 제32호에 러시아와 프랑스가 이권을 요구한 외교문서 폭로→러시아 공사 마튜닌(Nikolai Matyunin)과 프랑스 공사 플랑시(V. Collin de Plancy)의 항의, 관련자 처벌 요구(5월 16일), 6월 20일까지 항의 지속
    5.7 청국, 청일전쟁의 배상금 지불을 완료
    5.23 청, 義和團의 義民會, 河北· 山東省에서 배외운동 개시
    5.26 성진·마산·군산의 개항과 평양을 개시장으로 할 것을 정하고 절영도의 각국조계도 정함
    6.3 외부, 허가한 절영도의 외국거류지 취급을 보류한다고 발표
    6.10 친위기병대 창설
    최시형
    6.9 영국, 청나라로부터 九龍을 조차(99년간)
    6.11 청, 光緖帝, 변법자강을 선포, 百日維新 시작
    6.12 필리핀 아귀날도, 필리핀의 독립을 선언, 임시정부 수립하여 대통령에 취임
    6.16 미국·하와이, 합병조약 조인
    6.22 日 자유당, 진보당 합동하여 헌정당으로 결합
    6.30 日 大隈重信(隈板) 내각 성립
    7.1 『독립신문』 일간으로 발행횟수 증가
    7.7 보부상들, 황국협회 창립
    7.9 대한청년애국회의 투서로 廢王陰謀 혐의 발각됨. 박정양과 閔泳駿 등 체포, 안경수는 일본망명
    7.12 인천주재 일본영사관, 日本圓銀의 통용을 공포
    7.18 동학교주 최시형 교수형 선고(7.21 사형집행), 교도에게는 중형을 내림
    7.27 화폐제도를 금본위제로 개정함
       
    8.8 『제국신문』 창간(‘경술국치’ 때까지 간행)
    8.30 일본공사 加藤增雄 귀국 / 伊藤博文, 京釜鐵道敷設許可 지원을 위해 내한
    8.10 日 제6회 중의원 총선거
    8.29 日 大隈重信(隈板) 내각 와해, 山縣有朋 내각 성립(11.8)
    8.31 대만총독부, 항일투쟁을 탄압하기 위한 연좌제로 保甲條例 제정
    9.5 『황성신문』 창간. 국한문 혼용, 유교층 계몽에 주 목적을 둠
    9.8 경부철도부설권, 일본인 佐佐木淸에게 허가
    9.11 金鴻陸 일당이 황제와 황태자에게 독차를 바친 毒茶事件 발생
    9.15 외부고문 그레이트 하우스, 황실보호를 위해 외인부대 30명을 이끌고 들어옴
    9.18 ~19 독립협회, 外部 문 앞에서 황실 호위 특수부대인 외인 용병부대 창설 반대 시위
    9.21 淸, 戊戌政變 일어남. 西太后, 실권을 장악. 康有爲·梁啓超 渡日
    10.3 독립협회, 독차사건 처리에 있어 구법 적용함에 항의. 법부대신 申箕善 파면
    10.7 황국중앙총상회, 독립협회의 정부탄핵운동에 동조, 인화문 앞에서 집결, 연좌
    10.8 독립협회, 南宮檍·韓致愈를 제소위원으로 선정, 수구파정부 7대신의 퇴진을 요구하는 제2차 상소 작성하여 올림
    10.9 독립협회의 성토로 개각. 외부대신 朴齊純, 학부대신 李道宰, 농상공부대신 閔丙奭을 임명
    10.10 독립협회, 7대신의 즉각 파면과 신정부의 수립을 요구하는 제3차 상소를 올림
    10.11 구관습의 폐지와 자유를 절규하는 시민시위운동 발생(서울시내 상점 폐점, 부녀자 가담) / 배재·漢城義塾 등 각학교, 독립협회의 정부탄핵에 합세하여 시위
    10.12 독립협회의 청원에 따라 내각을 개편, 議政署理에 박정양 / 관립소학교 궐기
    10.17 황국협회 회원, 독립협회 본부를 습격 / 서대문-홍릉간 단선전차 궤도 부설공사 기공
    10.25 독립협회, 정부의 정치활동 규제에 항의하여 4개조의 상소문을 올림. 정부는 언론자유를 허락. 황제, 무명잡세의 금지 등 각종 내정 쇄신에 관한 官民 합작의 12개조 조칙을 내림
    10.29 독립협회, 관민공동회를 종로에서 개최, 윤치호를 회장에 선출하고 獻議六條 상주
    10.30 황제, 만민공동회의 헌의6조를 윤허. 中樞院章程의 제정, 언론 및 상공업 진흥 등에 관한 5개조의 조칙을 추가 반포케 함
    신기선의 필적
       
       
       
       
    만민공동회 상상도
    11.2 중추원관제 개정의 건 공포 시행
    11.3 정부, 만국우편협약 비준
    11.4 독립협회의 해산과 주도인물의 검거를 명함. 만민공동회에 참석했던 각 대신 파면
    11.5 만민공동회, 독립협회 해산과 지도자 17명 체포 항의 시위. 종로 시전상인들 철시
    11.9 독립협회원과 민중, 고등재판소 문전에서 독립협회 회원검거에 대한 해명을 요구, 이에 동조한 각 상가 철시(이후 10여 일간 계속)
    11.16 만민공동회의 규탄을 받은 조병식·민종묵·김정근·유기환·이기동 등 검거
    11.21 황국협회, 보부상 수천 명을 불러들여 만민공동회를 습격
    11.22 독립협회 복설 허가. 독립협회원의 구속자 전원 특사
    11.24 민영환 등 興化學校 개교 인가
    11.30 충청도 각 군수 방곡령 발포
    11.3 日, 憲政本黨 결성
    11.8 日, 제2차 山縣有朋 내각 성립
    11.28 淸, 호북의 江湖會, 滅洋의 깃발을 내걸고 봉기. 기독교회를 불태우고, 교도를 죽임
    12.1 신내각 구성
    12.1 만민공동회, 황국협회와 투쟁 중 사망한 신기료장수 김덕구의 장례를 萬民葬으로 거행하기로 결정, 숭례문 밖에서 만민장 거행
    12.6 만민공동회 재개
    12.23 만민공동회를 군대를 동원하여 탄압하고 민회 해산을 명함(25일)
    12.3 日, 제13회 제국의회 개회
    12.10 파리강화조약 조인
    미국·스페인 전쟁 끝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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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력 연호
    (韓中日)
    독립운동 및 대외관계 일본·세계 동향
    1899 己亥
    光武3
    光緖25
    明治32
    1.1 宋秉稷·全秉薰·鄭煥直 등 독립협회 폐지를 상소
    1.20 황국협회, 격일간지 『時事叢報』 창간 → 100호를 낸 후 폐간됨(8.17)
    1.30 대한천일은행(상업은행 전신) 창립 / 韓淸通商條約 의정차 청국전권대사 徐壽朋 내한
    1.31 일본경인철도인수조합, 미국인 모스로부터 경인철도부설권 인수(100만 달러)
    1 독립신문사를 아펜젤러가 운영
    1 신임주한러시아공사 파블로프 부임
    2.1 전북 흥덕에서 농민봉기→전주·임피군 등지에서 均田문제로 농민봉기(24일)
    2.12 독일·스페인, 협정 조인 / 독일, 캐롤라인·마리아나·팔라우 제도획득
    3.7 제생의원, 산부인과·소아과·내과·안과 등 진료시작
    3.15 주미공사에 민영환, 주러·불 공사에 이범진 임명
    3.24 의학교관제 반포, 관립의학교 설립(28일, 교장 池錫永)
    3.29 러시아 케이제를링에게 울산 등지의 포경권 허가
    3.21 프랑스, 나일강유역의 전영토권을 포기하겠다고 언명
    3 청, 산동에서 의화단 봉기
    4.4 『매일신문』 폐간. 중학교관제 반포
    4.12 관공립학교 교원 서임시 시험규칙 반포
    4.27 유교진흥에 관한 조서 및 학교교육진흥에 관한 조서 반포
    4.15 淸 廣東·九龍의 주민, 영국의 구룡조차에 대한 반대운동 일으킴. 영국, 무력탄압
    5.4 한성전기회사, 서대문-청량리간 전차궤도 완공으로 시운전(17일 개통식)
    5.9 주일공사에 李夏榮 임명
    5.15 경인철도회사 설립
    5.16 시민에 의하여 서대문-청량리간 전차소각사건 발생
    5.19 鄭翼西 등, 大義所라는 명의로 英學黨 조직, 斥洋排日을 주장하고 봉기
    5.24 인천·원산·목포·진남포 등 각 해관에 기상관측소를 설치하고 일본과 기상통보를 교환키로 함
    5.30 재판소구성법 개정 공포-재판소를 지방 한성 및 각 개항장, 순회, 평리원(고등재판소), 특별법원의 5종으로 구분함
       
       
    개화기 전차
    6.1 영국인 엠벌린 『독립신문』 사장에 취임
    6.8 申箕善·趙秉式 등의 요인저택에 폭발물투척사건 발생. 재일한국유학생 친목회, 제국청년회로 개칭
    6.11 국내철도용달회사(朴琪宗)에 경성-원산-경흥간 철도부설권 허가
    6.22 元帥府 관제 발표
    6.24 상공학교 관제 발표
    6.28 직산금광, 일본인에 대해 저항
    6.1 주한일본공사 가토 마쓰오(加藤增雄), 러시아정책 실패로 해임되고 前인천영사 林權助가 공사에 임명됨
    6.13 청, 강유위 등 保皇會 결성
    7.3 프랑스인 그리유에게 허가한 경의철도부설권, 계약기간 내에 착공치 않아 취소→경의철도부설권, 대한철도회사 박기종에게 허가(7.8)→일본의 방해로 박기종에게 허가한 부설권 취소(8.16)
    7.4 表勳院 관제 발표
    7.27 법부, 독립협회 회원 崔廷植을 絞刑에, 李承晩을 종신징역에 처한 판결 선고를 승인
    7.5 日, 제국당 결성
    7.29 日,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조약 조인
    8.16 ~9.6 전염병(콜레라·장티푸스·발진티푸스·천연두) 예방규칙 공포
    8.17 大韓國國制 의정 반포
    8 日, 普通選擧期成同盟會 결성
    9.11 韓淸통상조약(청국과 대등하게 맺은 최초의 조약) 체결, 비준(12.14)
    9.18 인천-노량진간 철도 33.2km 완성(한국 최초의 철도)
    9.27 영국상회에 은산금광 채굴권 허가
    9 일본인 거류민 50여 명, 康寧浦 등지의 蔘圃에 침입하여 약탈 / 원산주민 400여 명, 반일봉기
    9.6 美 국무장관 헤이, 영국·독일·러시아에 청국의 문화개방 각서를 통고
    9.17 淸 산동의화단의 朱紅燈, 기독교도를 습격
    10.10 주한각국공사와 마산·군산·청진의 거류지규칙 조인
    10.2 日 코노 히로나카(河野廣中)·고토쿠 슈스이(幸德秋水) 등 보통선거기성동맹회 결성
    10.3 淸, 貴州省 遵義의 哥老會, 교회와 기독교도의 집을 불태움
    10.12 보어전쟁(Boer戰爭) 시작
    11.6 의병 權仁圭(강원 고성, 1843~1899) 순국
    11.12 思悼世子 추존 의절을 행하고 廟號를 莊祖로 추존(12.7)
    11.30 충청도 각 군수, 방곡령 발표
    11.1 영국·독일, 사모아제도 분할협정 조인
    11.16 淸·프랑스, 廣州灣 조차 조약 조인
    11 청 鄭士良 등, 가로회 지도자와 홍콩에서 회합, 쑨원을 지도자로 하는 비밀결사 결성
    12.14 정부, 서재필로부터 4,000원 지급하여 『독립신문』 판권 및 인쇄시설 매수, 이후 발행 중단
    12.29 인천에 英美연초공장 준공, 생산개시 / 일본제일은행 인천지점 준공
    12.21 日 선거법개정기성전국각시연합회 결성

    https://search.i815.or.kr/Degae/DegaeView.jsp?nid=21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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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력 연호
    (韓中日)
    독립운동 및 대외관계 일본·세계 동향
    1900 庚子
    光武4
    光緖26
    明治33
    1.1 만국우편연맹에 가입
    1.15 前미국공사관 서기관 샌즈, 궁내부 贊議官에 임명 / 민영환, 법규교정소 부총재에 임명됨
    1.24 대만총독부, 신문지조례 공포
    1.27 북경의 列國公使團, 청나라에 의화단 진압을 요구
    1 日, 보통선거기성회동맹회 회의
    2.12 경부철도주식회사 발기인 총회
    2.14 일본원양어업회사에 경상·강원·함경도 해역의 浦鯨權을 허가
    2.20 은산금광, 한국인 광부들 영국인들의 불법침탈에 저항(~24)
    2.24 궁내부 찬의관 미국인 샌즈에게 외부사무를 署理케 함
    2.29 日, 중의원선거법개정 공포
    3.2 충남 홍주·연산 등지에 활빈당 1,000여 명 출몰
    3.3 을미사변 단발령 기병하여 단양·원주 등지에서 활약하다 만주로 망명한 李弼熙(서울, 1857~1900) 사망
    3.30 러시아에 馬山浦 租借를 허용(거제도협약) / 영국인 멀덕과 헤이의 은산광산 채굴허가
    3 목포부두노동자, 일제의 경제수탈에 파업
    3.10 日, 치안경찰법 반포
    3.14 美, 금본위제 채택
    4.9 활빈당 1,000여 명, 충북 延豐·槐山, 경북의 聞慶 등지에 출몰 / 한성부윤과 일본인 사이에 남대문정거장용지 대여협약체결
    4.10 한성전기주식회사, 종로에 가로등 3개 시설 / 마산포를 러시아 특별거류지로 분할
    4.11 마산포의 부산일본영사관 분관을 영사관으로 승격 신설
    4.14 사립학교 규칙 반포
    4.28 프랑스인 크레마지, 법부고문에 임명됨
    4.1 신임독일주한서리공사 바이파트 부임
    4.10 日 황태자 요시히토 친왕(嘉仁親王), 구조 사다코(九條節子)와 결혼
    4.24 日, 동경주식시장 대폭락
    5.17 평리원, 황제양위운동을 한 안경수·권형진에 사형선고, 당일 집행
    5 각국, 군대를 파견하여 북경으로 진군, 청의 의화단, 蘆保·京津철도 절단 / 프랑스, 타하트·티디켈트를 정복, 사하라사막 북부의 지배권 장악
    6.12 警部 관제 반포
    6.16 영국 왕립아세아협회지부, 서울에 설치 / 진고개 일인상가에 민간전등 설치
    6.28 직산금광, 일본인에 대해 저항
    6.30 의화단 습격에 대비하여 평안북도·함경남북도에 진위대대 설치
    6 활빈당, 충남 부여·홍산 지역에서 부호 처단
    *활빈당 : 1900~1904년에 남한 각지에서 활동한 무장농민집단. 조선후기 이래 농민들은 봉건적 수탈이 심화되어 생활터전을 빼앗기고, 무리를 지어다니면서 산간벽지에서 화전을 일구거나 양반부호가·장시·행상인 등을 습격·약탈하는 화적집단으로 변하기도 했다. 개항 이후 제국주의 침탈로 인해 농민층 분화가 가속화되자 화적집단은 더욱 확대되었다. 이들은 주로 빈농층이 주류를 이루었다. 확대된 화적집단은 점차 조직을 정비하여 단순한 화적질에서 의적(義賊)으로 새로운 활동방향을 모색했다. 특히 개항 이후 제국주의 열강의 경제적 침탈과 1894년의 갑오농민전쟁을 경험한 민족적·계급적 자각이 있었다. 이에 가난한 사람을 잘 살게 하는 집단이라는 뜻의 활빈당이 전국적인 조직으로 통일·정비되었다. 활빈당 조직은 경기도·충청도지방, 경상좌도, 경상도 서부, 전라도 동부 등지에서 각각 결성되어 연합체를 구성함으로써 상호 횡적인 연대를 유지하면서 독자적으로 활동했다. 각 파의 내부 조직은 비밀결사의 종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조직관리를 위해 철저한 보안유지, 가명 사용, 조직 발설시 보복 등 강력한 내규를 적용했다. 이들은 평소 10~30명 또는 40~50명 단위로 말을 타고 총·칼로 무장하여 떼지어다니며 양반부호가의 재물을 약탈하거나, 일반 농민들 사이에 거주하거나 행상상인을 가장하여 활동했다. 활빈당은 구체적 요구사항으로 반봉건·반침략 투쟁을 주요내용으로 하는 「'대한사민논설(大韓士民論說)」 13조목을 내외에 천명하고, 양반부호가의 습격·약탈, 관청습격, 외국인에 대한 보복·약탈을 했고, 때로는 수적(水賊)이 되어 바다에서 상선을 습격·약탈하기도 했다. 그밖에도 관청을 습격하여 무기와 재물을 탈취하거나 통도사·범어사 등의 대사찰이나 장시를 습격하기도 했다. 활빈당은 빼앗은 재물을 빈민이나 영세소상인에게 나누어주기도 했는데, 활빈당의 반봉건투쟁과 각지에서의 활빈행위는 민중들로부터 큰 호응을 받았다. 그러나 1905년 을사조약 이후 일본군과 경찰의 무력탄압으로 지도부가 붕괴되었다. 그리하여 일부는 농민무장대의 형태로 활동을 계속했고, 일부는 독자적인 의병부대를 만들거나 다른 의병부대에 흡수되어 항일 의병전쟁의 대열에 합류했다
    6.10 영국 함대사령관 시모어 중장이 지휘하는 열국연합군, 天津에서 북경으로 향함
    6.13 북경의 각국공사관, 의화단에 포위당함. 각국연합군, 북경에 입성하여 공사관 및 거류민을 구출(8.15)
    6.20 北京駐在獨公使 케텔러, 저격당하여 죽음
    6.21 淸, 북경에 출병한 8국에 선전포고. 의화단, 북경의 각국 공사관 포위
    6 淸, 의화단이 북경에서 교회 방화 및 파괴 개피. 日, 의화단사건으로 청에 출병
    7.5 한강철교 준공
    7.8 경인철도 완전 개통
    7.25 지방대, 진위대로 통일 / 우체사 관제 및 전보사 관제 반포
       
    경인철도를 달리던 기차
    7.4 淸 의화단, 奉天 부근의 東凊 철도 파괴
    7.6 日 閣議, 의화단을 진압하기 위해 1개 사단을 증파키로 결정. 일군 총수 2만 2천여 명
    7.14 일본군, 天津 점령
    7.15 러시아군, 블라고베이첸스크부근 江東 64둔민을 학살
    7.29 이탈리아국왕 움베르토 1세, 아나키스트에게 암살됨
    7.30 淸 天津, 외국지배하에 놓임
    7 8개국 연합군, 天津 점령
    8.1 중추원의사규칙 공포 시행
    8.2 민영환, 헌병대사령관 겸임
    8.3 貴人 嚴씨를 淳嬪으로 봉함
    8.7 조병식, 주일본특명전권공사에 임명됨
    8.10 길주군민 수백 명, 성진 감리서를 습격 방화, 진압됨
    8.16 일본인 澁澤榮一·淺野總一郞 등, 稷山금광의 채굴권을 얻어냄
    8.17 둘째 황태자 堈을 義王, 셋째 황태자 垠을 英王에 봉함 / 京釜電線의 복선공사 완료
    8.29 전북 전주 등지에 활빈당 창궐
    8.9 淸, 唐才常 등의 自立軍, 安徽省 大通에서 봉기했으나 실패
    8.14 연합군, 북경 입성
    8.19 8개국 연합군, 북경 점령
    8.22 淸 唐才常, 張之洞에게 살해됨
    9.3 중학교 규칙 반포 / 내장원 하에 서북철도국 설치
    9.4 육군법률 및 육군학교 관제 공포시행 / 광무학교 관제 반포 / 육군법원관제 공포 시행(9.17)
    9.19 서울군인수 친위대 3,000명, 시위대 2,000명, 平壤兵 1,000명, 砲兵 1,000명, 馬兵 1,000명 / 경무청, 동학교단의 南接간부 徐章玉·孫思文 등을 체포하여 평리원으로 이관함
    9.27 육군참위 金圭福·盧伯麟·魚潭 등 19명, 일본유학을 명함
    9.30 경인철도주식회사에서 주문한 皇帝用 승용차 도착
    9 경상도 울산·영천·경주, 전라도의 龍潭 등지에 활빈당 출몰
    9.15 입헌정우회 결당(총재:伊藤博文)
    9.23 제2인터내셔널의 파리대회 열림(~9.27. 부르주아정당과의 제휴와 식민지문제 토의)
    9.24 日, 국민동맹회 결성
    9 日 伊藤博文, 立憲政友會 조직. 러시아군, 청의 동북지구 점령
    10.3 관립중학교, 화동에서 개교
    10.5 일인 어업구역을 전라·경상·강원·함경도에서 경기도를 20년간 추가 허가
    10.10 간도거류민, 정부에 관리 파견을 요청
    10.16 러시아 키릴 블라디미로비치 親王, 전 러시아공사 베베르를 대동하고 입국
    10.25 정부, 울릉도를 울도군, 島監을 郡守로 개칭
    10.27 전 南山營 터에 獎忠壇 설치, 洪啓薰 등 을미사변 이후 전사한 장병들을 제사
    10.3 淸 孫文 등의 흥중회, 惠州에서 거병
    10.19 日, 伊藤博文 내각 성립
    10.29 日, 청의 영토보전 및 문호개방에 관한 英獨協定에 가맹
       
    11.3 侍衛騎兵隊 설치 / 황족교육기관으로 宗人學校를 설치키로 함
    11.5 함흥-북청간 전선가설, 통신업무 개시
    11.12 경인철도 개통식, 서대문역에서 거행
    11.20 12월 6일을 기하여 외국인 배격운동을 전개하려던 비밀문서건 탄로
    11.27 日本三井物産에 官蔘委託販賣 허가
    11.9 벨기에 전권대사 뱅카르, 통상조약 체결차 來韓
       
    12.7 황제, 영국 빅토리아 女王으로부터 훈장을 받음
    12.8 警部에서 태극기 규격을 통일하라는 훈령 반포
    12.19 군악대 설치령 반포
    12.27 일인 회사에 부산해안 일부 매립공사 허가
    12 일본과의 사이에 洪州 長古島사건, 月尾島점령사건이 발생
    12.24 북경의 열국 공사단, 청의 전권위원에게 12개조의 강화 조건을 전달
    12.30 淸, 전권위원이 12개조의 강화조건 수락함으로써 의화단사건 종결

    https://search.i815.or.kr/Degae/DegaeView.jsp?nid=21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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