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반한 이 여자 동림이

2009.05.23. 14:36

복사 http://blog.naver.com/fish20017/10047873929

번역하기 전용뷰어 보기

 

                             

   내가 반한 이 여인, 그녀는 암울했던 시대를 두 남편과 살다 갔다.
   2004년 그녀는 뉴욕에서 타계했다. 그리고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의 두번째 남편 곁에 묻혔다. 미아리에 있던 첫 남편의 묘소는 유실되었기 때문이다. 만약에 무덤이 있었다면 그녀는 반반씩 누웠을까. 그러기엔 1937년 4월 17일이란 날짜가 너무 멀다. 인연의 인력이 역사를 거슬러 오르긴 버겁다.  

    지금은 세 시간 정도면 동경까지 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1937년은 서울역에서 부산까지는 12시간이 걸렸고, 거주지에서 도항증명서를 받아 관부연락선 '덕수환'으로 시모노세끼(下關)까지 또 그만치 걸렸다. 다시 거기에서 동경까지 가서 동경제대 부속병원으로 갔다고 생각하니 상상이 잘 안된다. 그러나 이 여인은 갔다. 그해 4월 17일, 남편이 거기에서 죽었기 때문이다. 사상이 의심스럽고 행적이 수상하다는 이유로 감방에 구금되었다가, 지병이 겹쳐 3월에 석방되었지만 다음달에 지인들이 그를 동경제대 부속병원에 입원시켰다. 그러나 그는 멜론의 향기가 그립다는 말을 남기고 아내와 친구 김소운(金巢雲)과 몇몇의 '삼사문학'과 '동경학생예술좌' 후배 동인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스물일곱 살로 요절했다.
   마치 반딧불이처럼 반짝하는 짧은 인생을 살았지만 그는 세기를 넘어 만인 앞에서 문학이라는 이름을 수식하며 오늘날까지 회자된다.
   그녀의 첫 남편, 일탈의 사나이, 그 이름만으로도 희대의 스캔들인 바로 이상(李箱)이다.
   그럼 그 당찬 여인은 누구인가! 남편의 유해를 수습하여 다시 관부연락선을 타고 현해탄을 건너와 미아리에 안장시킨 그녀, 바로 변동림(卞東琳)이다.
   경기여고, 이화여전 영문과 출신의 변동림은 스무 살 나던 1936년 6월, 이복오빠인 화가 구본웅과 절친했던 6년 연상의 李箱과 결혼한다. 그러나 천재시인과 문학소녀와의 결혼생활은 불과 넉 달 만에에 막을 내린다. 그해 10월 17일, 그녀는 동경으로 떠나는 李箱과 살아서는 다시 못 볼 이별을 한다. 가을은 늘 이별을 동반하는 것인가.
    1936년 7월 말일 경에 이상은 조선일보사 3층 뒷방에서, 장정한 김기림의 '氣象圖'를 발송하면서 편지에다 자신도 일본으로 가겠다는 열망과 의지를 피력한다. 이상은 변동림을 남기고 다시는 살아 돌아오지 못할 서울을 떠난다. 

   동경에 도착한 이상은 간다(西神田)의 햇볕 안 드는 이층방에다 하숙을 정한다. 며칠 후 동경유학생들로 구성된 '삼사문학'의 후배 동인들과 '동경학생예술좌'의 이진순(李眞淳)을 불러내어, 늘 그렇듯 문학과 예술과 술로 밤을 지새우는 그만의 임상적 풍경으로 다가간다. 이상은 생명을 도려내어 죽음의 혼과 자의식을 바꾸는 무모한 거래를 했다. 김기림의 표현처럼, "箱은 필시 죽음에 진 것은 아니라, 箱은 제 육체의 마지막 조각까지라도 손수 길러서 없애고 사라진 것이리라. 箱은 오늘의 환경과 種族과 無知 속에 두기에는 너무나 아까운 천재였다. 箱은 한번도 잉크로 시를 쓴 일은 없다. 箱의 시에는 언제나 상의 피가 淋리(임리:흠뻑 젖어 흘러 떨어지거나 흥건함:역자 주)하다. 그는 스스로 제 혈관을 짜서 '시대의 혈서'를 쓴 것이다."

   그 무렵 스물두 살의 과부 변동림은 겪기 힘든 시기를 보낸다. 기막힌 역정이 어찌 없었으랴. 그러나 변동림, 그녀는 강했다. 이역만리 동경으로 가 남편의 유해를 안고 고국으로 돌아온 당찬 여인이 아니었던가. 1940년대로 접어들어 차츰 신변의 안정을 찾은 변동림은 스물아홉 살이 되던 1944년, 서양화가 수화(樹話) 김환기(金煥基)를 만나 김향안(金鄕岸)으로 개명하고 제2의 인생을 시작하게 된다. 김환기에겐 이미 아이 셋이 달려 있었지만 그녀는 개의치 않았다. 그해 봄 목련이 한창일 때, 청첩인을 정지용으로 하고 화가 고희동을 주례로, 길진섭의 사회로 서울 기독교청년회관에서 결혼식을 올린다. 그리고 성북동의 '늙은 감나무'가 있는 그 산방에서 신혼 살림을 차린다.
   훗날 그녀는 수필 <사람은 가고 예술은 남다>에서 오래된 감나무가 있는 그 신혼시절의 노시산방(김용준의 노시산방이 이후에 수향산방으로 바뀜-필자 주)을 이렇게 추억한다. 
   성북동 32-3, 근원(近園) 선생이 선생의 취미를 살려서 손수 운치있게 꾸미신 한옥. 안방, 대청, 건넌방, 안방으로 붙은 부엌, 아랫방, 광으로 된 단순한 기역자 집. 다만 건넌방에 누마루를 달아서 사랑채의 구실을 했고 방마다 옛날 창문짝들을 구해서 맞춘 정도로 집은 빈약했으나, 이백 평 남짓되는 양지바른 산마루에 집에 붙은 개울이 있고, 여러 그루의 감나무와 대추나무가 있는 후원과 앞마당엔 괴석을 배치해서 풍란을 꽃피게 하며, 여름엔 파초가 잎을 펴게 온실도 만들어졌고 운치있게 쌓아올린 돌담장에는 앵두와 개나리를 피웠다. 앞마당 층계를 내려가면 우물가엔 목련이 피었었다.(<사람은 가고 예술은 남다-김환기 전기 중의 일부>, 김향안, '월하의 마음', 환기미술관)
   김향안은 1954년에 프랑스로 그림 유학을 떠나고 다음해 김환기 역시 파리로 가 미술평론을 공부한다. 부부는 1959년 귀국 후 5년여 국내에 머무는데 김환기는 홍익대 미술대학장으로 재임하고 김향안은 수필가로 활동한다. 1964년 부부는 도미하여 줄곧 뉴욕에서 살게 된다.
   그녀는 1974년 김환기가 세상을 떠난 뒤에는 남편의 유작과 유품을 돌보는 한편, 1978년에는 환기재단을 설립해 김환기의 예술을 알리는 데에 힘썼다. 1992년에는 서울 종로구 부암동(付岩洞)에 자비로 환기미술관을 설립하였는데, 사설 개인 기념미술관으로는 국내 최초이다.
   이상과 김환기의 두 남편, 내가 정작 이 여인에게 반한 것은 다음의 이유 때문이다.

   김향안은 1986년 월간 '문학사상' 지에서, 그녀가 변동림이었을 때 불과 4개월을 같이 산 첫 남편 李箱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다.
   "그는 가장 천재적인 황홀한 일생을 마쳤다. 그가 살다간 27년은 천재가 완성되어 소멸되어 가는 충분한 시간이다.(...) 천재는 또 미완성이다."
   또 그녀가 김향안으로서 30년을 함께 한 김환기의 아내였을 때에는, "지치지 않는 창작열을 가진 예술가의 동반자로 살 수 있었음은 행운이었다."라고 회고했다.

   이상과 변동림, 그들이 정식 부부로 살았던 기간이 불과 수 개월이었지만 그들에게 있어서 아주 특별한 기간이 된다. 그것은 이상이 타계할 때 아내로서 남편의 최후를 임종하는 빌미가 되어, 그녀는 서울에서 동경까지 무리하다싶은 이역만리의 여정을 마다하지 않았다.  
   웬만하면 전 남편을 입에 올리지 않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생전에 그녀는 당당하게 말했고 기록으로도 인터뷰를 남겼고 실천으로도 옮겼다.  
   두 천재 예술가를 가까이에서 지켰던 그녀는 88세로 2004년 세상을 뜰 때까지 일찌감치 눈을 감은 두 배우자의 예술혼을 기리고 작품세계를 정리하고 보존하는 일을 신념처럼 펼쳤다.
   첫 남편이었던 李箱의 기념사업으로는, 모교 보성고 교정에 1990년 5월 이상의 기념비와 문학비가 세워지기까지, 교우회가 발벗고 나서기도 했지만, 그녀의 의지와 지원이 큰 힘이 됐다. 또 두번째 남편 김환기 화백과 관련해 그녀는 김환기의 미술세계를 이끌고 완결시킨 인물로 평가된다. 화가 생전에는 작품활동에 감흥을 불러일으키는 예술의 반려였으며, 사후엔 유작과 유품을 정리해 환기미술관을 탄생시켰던 것이다.

   내가 반한 이 여자, 그녀는 2004년 88세로 운명한 변동림과 김향안으로 불리는 여자였다.


   ***강나루(Essay-by Deili. 2009. 2. 25 '내가 반한 이 여자'를 쓰다)

종로구 부암동에 가면 환기 미술관이 있습니다

미술관 좋아라 하지만 오늘은 미술관 이야기 할려고 하는것이 아니라

김환기 님 부인 돼시는 분 이야기 입니다

김환기님 우리나라 추상화에 선구 자적인 분입니다

그럼 그 부인 돼시는 분이야기를 할려고 하는이유는


이상에 날개 라는 소설이 있죠

각자 다른 방을 쓰면서 아내와 함께 살고 있는 나는 매일 방에서만 빈둥거리며 살아간다.

가끔 아내가 없을 때는 아내의 방에 들어가 불장난을 하거나, 화장품 냄새를 맡기도 하며 논다.

그러나 아내의 방에 손님이 있으면 나는 그 방으로 들어갈 수 없다. 손님이 돌아가고 나면 아내는 내 방으로 들어와 은화를 놓고 간다.

그 돈을 가지고 나는 어느 날 밤에 아내가 외출한 틈을 타서 거리로 나온다. 그러나 돈을 쓸 줄 모르는 나는 그 돈을 가지고 돌아와 아내에게 준다.

그날 밤 아내는 처음으로 아내의 방에다 나를 재워 준다. 나는 매일 밤 외출을 나가고, 어느 날은 늦게까지 비를 맞고 돌아다니다 병이 나고 만다.

그 후로 한 달 가량 앓아누운 나는 아내가 준 아스피린이란 흰 알약을 매일 먹는다.

나는 계속 머리가 어지러웠고, 그 알약이 최면약 아달린이란 사실을 알고는 아내가 자신을 죽이려고 그런 것이 아닌가 의심하면서 집을 나간다.

그러다가 아내를 의심한 것을 미안하게 생각한 나는 다시 집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방에 아내와 한 남자가 같이 있는, 보지 말아야 할 장면을 보고 만다. 절망한 채 다시 집에서 나온 나는 거리를 배회하다가 미쓰꼬시 백화점 옥상에 이르자 문득 날고 싶은 욕망을 느낀다.

그리고 "날개야, 돋아라. 날자 날자. 한 번만 더 날아 보자꾸나." 라고 외치고 싶어진다. 

                                                                                                          -이상,<날개>

소설이긴 하지만 이상에 날개에 아내는 

변동림씨입니다


1916년 경성에서 태어나고, 경성여고보를 거쳐 이화여전 영문과를 졸업한 지식인 신여성 변동림(卞東琳) 역시 자유연애론자 중의 하나였다. 변동림은 이상이 단골이었던 커피 다방 낙랑파라에서 자주 마주쳐 알던 당대의 지식인 변동욱(卞東昱)의 동생이자, 이상의 절친한 친구 화가 구본웅의 서모(庶母)와는 이복지간이었다.

이상이 변동림을 '낙랑'에서 처음 만났을 때, 평소의 그답지 않게 얼굴이 벌게지면서 각설탕만 만지작거려 다방 아가씨들로부터 핀잔을 들었다. 이상은 좌중을 압도할 만큼 위트와 패러독스가 넘치는 사람이었지만 변동림을 만난 자리에서는 변변히 말도 제대로 못했다.

이상은 변동림 주변의 애인들에 대한 소문을 들었다. 그럼에도 변동림이 "당당한 시민이 못 되는 선생님을 저는 따르기로 하겠습니다"라고 고백하자, 이상은 그것을 받아들였다. "나는 술이 거나하게 취해서 어떤 여자 앞에서 몸을 비비 꼬면서, 나는 당신 없이 못 사는 몸이오, 하고 얼러 보았더니 얼른 그 여자가 내 아내가 되어버린 데는 실없이 깜짝 놀랐습니다"라는 이상의 훗날 고백으로 미루어보건대 금홍과 헤어진 뒤 의식이 황폐해진 이상이 일종의 도피로써 변동림을 선택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소설속에 보면 금홍이에 남자 관계는 그렇게 관대 했던 이상이

변동림을 만났을때는 극도로  민감했던것 같습니다

아이러니 하죠 자유 로운 이상님이 아무튼

그들은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은 1936년 6월 서둘러 신흥사에서 결혼식을 올리고 황금정(黃金町)의 허름한 셋집에서 신혼살림을 차렸다. 햇빛도 제대로 들어오지 않는 어두컴컴한 셋방에서 이상은 종일 누워 지냈다. 햇빛을 보지 못한 이상의 얼굴은 더욱 하얘졌고, 폐결핵은 깊어졌다. 변동림은 이상의 약값과 생활비를 벌기 위해 일본인이 운영하는 바에 나갔다. 두 사람의 신혼살림은 이상이 10월에 일본으로 건너가면서 파경(破鏡)을 맞았다. 불과 넉 달이 채 못 되는 짧은 결혼생활이었다. 그 해 6월을 전후하여 변동림(卞東琳)과 혼인한 뒤 곧 일본 동경으로 건너갔으나 1937년 사상불온혐의로 구속되었습니다. 이로 인하여 건강이 더욱 악화되어 그 해 4월 동경대학 부속병원에서 사망하였습니다.
. 아내 변동림이 몇날 며칠 동경으로 가서 시신을 수습하여 미아리 공동묘지에 안장하나 그 후 유실되고 만다.


결국 결혼 생활 얼마 안돼서 변동림 씨는 혼자가 돼었습니다 


==========================================================

p.s 단짝 술친구 이상과 박태원의 술값 스폰서(?)인 화가 구본웅의 계모인 변동숙의 배다른 여동생이 변동림이고, 구본웅의 딸 구근모가 낳은 딸, 그러니까 구본웅의 외손녀 중 하나가 세계적 발레리나 강수진이다. 그러니까 발레리나 강수진은 외할아버지 구본웅을 중심으로 구본웅의 이모인 김향안과 이모부 김환기, 그리고 외할아버지의 친구인 이상과 연(緣)이 닿는 셈이다. 인연이란 얽히고설켜 짜여지는 법..
==============================================================================================

 

변동림은 1944년 김환기와 재혼하고 수필가로 데뷔하며 김향안(金鄕岸)이란 이름을 썼다. 김향안은 1955년 김환기와 함께 불란서 유학길에 올라 파리에서 미술평론을 공부하였고, 1964년 미국 뉴욕으로 건너간 이후 줄곧 뉴욕에서 살았다. 1974년 김환기가 세상을 떠난 뒤에는 남편의 유작과 유품을 돌보는 한편, 1978년에는 환기재단을 설립해 김환기의 예술을 알리는 데 힘썼다. 1992년에는 서울 종로구 부암동에 자비로 환기미술관을 설립하였는데, 사설 개인 기념미술관으로는 국내 최초이다.

 

2004년 미국 뉴욕에서 작고한 김향안은 1986년 월간 <문학사상>에서, 그녀가 변동림이었을 때 불과 4개월을 같이 산 첫 남편 이상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다.


"그는 가장 천재적인 황홀한 일생을 마쳤다. 그가 살다간 27년은 천재가 완성되어 소멸되어 가는 충분한 시간이다. (…) 천재는 또 미완성이다."

 이 부부는 금술이 좋았다고 랍니다



 


김환기 화가님이 부인에게 보낸 옆서












왼쪽부터 이상, 박태원, 수필가 김소운



오늘에 주인공이신 그분 ^.* 변동림은 1944년 김환기와 재혼하고 수필가로 데뷔하며 김향안(金鄕岸)이란 이름을 썼다. 김향안은 1955년 김환기와 함께 불란서 유학길에 올라 파리에서 미술평론을 공부하였고, 1964년 미국 뉴욕으로 건너간 이후 줄곧 뉴욕에서 살았다. 1974년 김환기가 세상을 떠난 뒤에는 남편의 유작과 유품을 돌보는 한편, 1978년에는 환기재단을 설립해 김환기의 예술을 알리는 데 힘썼다. 1992년에는 서울 종로구 부암동에 자비로 환기미술관을 설립하였는데, 사설 개인 기념미술관으로는 국내 최초이다.


키차이 많이 나시네요
김향안은 1974년 김환기가 죽은 뒤 그의 그림과 유품들을 정리해서 1992년에 서울 종로구 부암동에 환기미술관을 설립했고, 2004년 2월 29일 뉴욕에서 세상을 떴다.





P.S-구본웅의 계모인 변동숙의 배다른 여동생이 변동림이고, 구본웅의 딸 구근모가 낳은 딸, 그러니까 구본웅의 외손녀 중 하나가 세계적 발레리나 강수진이다. 그러니까 발레리나 강수진은 외할아버지 구본웅을 중심으로 구본웅의 이모인 김향안과 이모부 김환기, 그리고 외할아버지의 친구인 이상과 연(緣)이 닿는 셈이다. 인연이란 얽히고설켜 짜여지는 법...

 

 

 

                                                                  발레리나 강수진


원문  http://poison777.tistory.com/128

'관련인물 > 변동림'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내가 반한 이 여자   (0) 2016.06.05
변동림 그리고  (0) 2014.12.11
[스크랩] 변동림과의 짧은 결혼생활 -20100209,조선일보  (0) 2014.12.02

 

이상이 그린 시화 그림 속의 실제 주인공은 누구인가?



これはこれ札つきの要視察猿                     이거야말로 딱지 붙은 요시찰 원숭이

トキドキ人生ノ檻ヲ脫出スルノデ               가끔 인생의 우리를 탈출하기 때문에

園長さんが心配スルノテアル                     원장님이 걱정을 하는 것이다.            -이상-

 

 

누구는 구보 박태원 선생의 초상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림 원본의 얼굴 아래쪽 시루엣은 두 남녀가 대화를 나누고 있다.

                                                             원숭이 처럼 창문 밖에서 몰래 엳듣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요시찰  원숭이는 과연 누구일까?   간담이 서늘하다.

                                                                          

 

 

이 시화는 시인 강 민 선생이 원본을 보관하고 있을 때 가까운 이들에게

이 귀한 시화 몇 점을 나누어주기 위해 복사를 한 뒤 비닐로 코팅해 놓았던 것이다. 

이 시화 원본은 안타깝게도 강 민 선생이 이사를 할 때 잃어버렸다 한다.

                      전체사진 http://www.pressbyple.com/news/articleView.html?idxno=25293                                                  

 

 

 

 

 

 

 

나는 전연 실망 가운데 있다. 지금에 나의 이 무서운 생활이 노위에 선 도승사의 모양과 같이 나를 지지하고 있다.

모든 것이 다 하나도 무섭지 아니한 것이 없다. 그 가운데에도 이 <죽을 수도 없는 실망>은 가장 큰 좌표에 있을 것이다.


중편소설 十二月 十二日 서문 중에서......

                                                                                              

 

                                               

                                                                                          10. 동물에 대한 고결한 지식    바로가기













변동림과의 짧은 결혼생활 -20100209,조선일보- 현대문학-작가 / 문학의 세계

2010/02/09 09:03

복사 http://blog.naver.com/bebright75/99737505

이상의 아내 변동림은 수화 김환기 화백과 재혼하고 이름도 김향안으로 바꾼 뒤 수화를 정성스럽게 뒷바라지했다. 사진은 1960년대 초의 김향안 여사.

 

모더니티(modernity)의 본질은 새로운 것, 영원한 것, 덧없음에 대한 추구이다. 그 새로움은 낡은 것과의 단절에서 당위를 얻고, 그 영원함은 찰나의 소멸 속에서 빛을 얻고, 그 덧없음은 사라짐으로써 존재의 견고성을 이끌어낸다. 모더니티가 자주 자신을 드러내는 가시적 표층(表層)은 패션(fashion·유행)이다.

1930년대 '모던' 경성이 보여준 최고 패션은 '자유연애'였다. 자유연애의 대유행을 빼놓고는 이 시기 경성에 대해 말할 수 없다. 이때 자유연애의 이념은 신분과 계급의 차이를 넘어서는 사랑, 죽음마저도 불사하는 진실한 사랑이었다.

1916년 경성에서 태어나고, 경성여고보를 거쳐 이화여전 영문과를 졸업한 지식인 신여성 변동림(卞東琳) 역시 자유연애론자 중의 하나였다. 변동림은 이상이 단골이었던 커피 다방 낙랑파라에서 자주 마주쳐 알던 당대의 지식인 변동욱(卞東昱)의 동생이자, 이상의 절친한 친구 화가 구본웅의 서모(庶母)와는 이복지간이었다.

이상이 변동림을 '낙랑'에서 처음 만났을 때, 평소의 그답지 않게 얼굴이 벌게지면서 각설탕만 만지작거려 다방 아가씨들로부터 핀잔을 들었다. 이상은 좌중을 압도할 만큼 위트와 패러독스가 넘치는 사람이었지만 변동림을 만난 자리에서는 변변히 말도 제대로 못했다.

이상은 변동림 주변의 애인들에 대한 소문을 들었다. 그럼에도 변동림이 "당당한 시민이 못 되는 선생님을 저는 따르기로 하겠습니다"라고 고백하자, 이상은 그것을 받아들였다. "나는 술이 거나하게 취해서 어떤 여자 앞에서 몸을 비비 꼬면서, 나는 당신 없이 못 사는 몸이오, 하고 얼러 보았더니 얼른 그 여자가 내 아내가 되어버린 데는 실없이 깜짝 놀랐습니다"라는 이상의 훗날 고백으로 미루어보건대 금홍과 헤어진 뒤 의식이 황폐해진 이상이 일종의 도피로써 변동림을 선택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몇 번?" "한번" "정말?" "꼭" 이래도 안 되겠다고 간발을 놓지 말고 다른 방법으로 고문을 하는 수밖에 없다. "그럼 윤 이외에?" "하나" "예이!" "정말 하나예요" "말 마라" "둘" "잘 헌다" "셋" "잘 헌다, 잘 헌다, 잘 헌다" "넷" "잘 헌다, 잘 헌다, 잘 헌다" "다섯" 속았다. 속아 넘어갔다.〉(소설 〈실화(失花)〉의 한 대목)

이상이 변동림의 남자관계를 캐는 장면이다. 이상은 〈단발〉 〈실화〉 〈동해(童骸)〉 〈종생기(終生記)〉 등에서 변동림의 이야기를 다뤘다. 이상은 아내가 간음한 경우라면, 특히 자신이 그 사실을 알았다면 이를 용납할 수 없음을 분명히 했다. 앞선 동거녀 금홍의 방종한 남자관계에는 그토록 관대했던 이상이 변동림의 정조(貞操) 관념에 엄격한 도덕의 잣대를 들이대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 이상은 "20세기를 생활하는데 19세기의 도덕성밖에는 없으니 나는 영원한 절름발이"라고 스스로를 자책하고 있다.

어쨌든 그들은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은 1936년 6월 서둘러 신흥사에서 결혼식을 올리고 황금정(黃金町)의 허름한 셋집에서 신혼살림을 차렸다. 햇빛도 제대로 들어오지 않는 어두컴컴한 셋방에서 이상은 종일 누워 지냈다. 햇빛을 보지 못한 이상의 얼굴은 더욱 하얘졌고, 폐결핵은 깊어졌다. 변동림은 이상의 약값과 생활비를 벌기 위해 일본인이 운영하는 바에 나갔다. 두 사람의 신혼살림은 이상이 10월에 일본으로 건너가면서 파경(破鏡)을 맞았다. 불과 넉 달이 채 못 되는 짧은 결혼생활이었다. 변동림은 이상이 돌아오기를 간절히 바랐으나, 몇 달 뒤 날아온 것은 이상이 동경제국 부속병원에 입원했는데 위독하다는 소식이었다.

신여성 변동림은 1930년대에 돌출한 아방가르드 예술가 이상을 배우자로 선택함으로써 남과 다르게 살고 싶다는 욕망을 추구했지만 그 꿈은 실패했다. 그는 1944년 5월 화가 김환기(1913~1974)와 재혼하고, 프랑스 유학을 거쳐 1964년 이후 뉴욕에 정착해 뉴요커로서의 삶을 살았다. '변동림'에서 '김향안(金鄕岸)'으로 개명함으로써 낡은 봉건 도덕과 낙후된 식민지 조선을 지배하는 구태의연한 것에서 벗어나 첨단의 삶을 향한 주체적 의지를 드러냈다. 

출처 : 시와 비평
글쓴이 : 심은섭 원글보기
메모 :

'관련인물 > 변동림'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내가 반한 이 여자   (0) 2016.06.05
천재 이상과 김환기가 사랑 했던 여인 변동림(김향안)  (0) 2016.06.05
변동림 그리고  (0) 2014.12.11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