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05.23. 14: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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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반한 이 여인, 그녀는 암울했던 시대를 두 남편과 살다 갔다.
2004년 그녀는 뉴욕에서 타계했다. 그리고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의 두번째 남편 곁에 묻혔다. 미아리에 있던 첫 남편의 묘소는 유실되었기 때문이다. 만약에 무덤이 있었다면 그녀는 반반씩 누웠을까. 그러기엔 1937년 4월 17일이란 날짜가 너무 멀다. 인연의 인력이 역사를 거슬러 오르긴 버겁다.
지금은 세 시간 정도면 동경까지 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1937년은 서울역에서 부산까지는 12시간이 걸렸고, 거주지에서 도항증명서를 받아 관부연락선 '덕수환'으로 시모노세끼(下關)까지 또 그만치 걸렸다. 다시 거기에서 동경까지 가서 동경제대 부속병원으로 갔다고 생각하니 상상이 잘 안된다. 그러나 이 여인은 갔다. 그해 4월 17일, 남편이 거기에서 죽었기 때문이다. 사상이 의심스럽고 행적이 수상하다는 이유로 감방에 구금되었다가, 지병이 겹쳐 3월에 석방되었지만 다음달에 지인들이 그를 동경제대 부속병원에 입원시켰다. 그러나 그는 멜론의 향기가 그립다는 말을 남기고 아내와 친구 김소운(金巢雲)과 몇몇의 '삼사문학'과 '동경학생예술좌' 후배 동인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스물일곱 살로 요절했다.
마치 반딧불이처럼 반짝하는 짧은 인생을 살았지만 그는 세기를 넘어 만인 앞에서 문학이라는 이름을 수식하며 오늘날까지 회자된다.
그녀의 첫 남편, 일탈의 사나이, 그 이름만으로도 희대의 스캔들인 바로 이상(李箱)이다.
그럼 그 당찬 여인은 누구인가! 남편의 유해를 수습하여 다시 관부연락선을 타고 현해탄을 건너와 미아리에 안장시킨 그녀, 바로 변동림(卞東琳)이다.
경기여고, 이화여전 영문과 출신의 변동림은 스무 살 나던 1936년 6월, 이복오빠인 화가 구본웅과 절친했던 6년 연상의 李箱과 결혼한다. 그러나 천재시인과 문학소녀와의 결혼생활은 불과 넉 달 만에에 막을 내린다. 그해 10월 17일, 그녀는 동경으로 떠나는 李箱과 살아서는 다시 못 볼 이별을 한다. 가을은 늘 이별을 동반하는 것인가.
1936년 7월 말일 경에 이상은 조선일보사 3층 뒷방에서, 장정한 김기림의 '氣象圖'를 발송하면서 편지에다 자신도 일본으로 가겠다는 열망과 의지를 피력한다. 이상은 변동림을 남기고 다시는 살아 돌아오지 못할 서울을 떠난다.
동경에 도착한 이상은 간다(西神田)의 햇볕 안 드는 이층방에다 하숙을 정한다. 며칠 후 동경유학생들로 구성된 '삼사문학'의 후배 동인들과 '동경학생예술좌'의 이진순(李眞淳)을 불러내어, 늘 그렇듯 문학과 예술과 술로 밤을 지새우는 그만의 임상적 풍경으로 다가간다. 이상은 생명을 도려내어 죽음의 혼과 자의식을 바꾸는 무모한 거래를 했다. 김기림의 표현처럼, "箱은 필시 죽음에 진 것은 아니라, 箱은 제 육체의 마지막 조각까지라도 손수 길러서 없애고 사라진 것이리라. 箱은 오늘의 환경과 種族과 無知 속에 두기에는 너무나 아까운 천재였다. 箱은 한번도 잉크로 시를 쓴 일은 없다. 箱의 시에는 언제나 상의 피가 淋리(임리:흠뻑 젖어 흘러 떨어지거나 흥건함:역자 주)하다. 그는 스스로 제 혈관을 짜서 '시대의 혈서'를 쓴 것이다."
그 무렵 스물두 살의 과부 변동림은 겪기 힘든 시기를 보낸다. 기막힌 역정이 어찌 없었으랴. 그러나 변동림, 그녀는 강했다. 이역만리 동경으로 가 남편의 유해를 안고 고국으로 돌아온 당찬 여인이 아니었던가. 1940년대로 접어들어 차츰 신변의 안정을 찾은 변동림은 스물아홉 살이 되던 1944년, 서양화가 수화(樹話) 김환기(金煥基)를 만나 김향안(金鄕岸)으로 개명하고 제2의 인생을 시작하게 된다. 김환기에겐 이미 아이 셋이 달려 있었지만 그녀는 개의치 않았다. 그해 봄 목련이 한창일 때, 청첩인을 정지용으로 하고 화가 고희동을 주례로, 길진섭의 사회로 서울 기독교청년회관에서 결혼식을 올린다. 그리고 성북동의 '늙은 감나무'가 있는 그 산방에서 신혼 살림을 차린다.
훗날 그녀는 수필 <사람은 가고 예술은 남다>에서 오래된 감나무가 있는 그 신혼시절의 노시산방(김용준의 노시산방이 이후에 수향산방으로 바뀜-필자 주)을 이렇게 추억한다.
성북동 32-3, 근원(近園) 선생이 선생의 취미를 살려서 손수 운치있게 꾸미신 한옥. 안방, 대청, 건넌방, 안방으로 붙은 부엌, 아랫방, 광으로 된 단순한 기역자 집. 다만 건넌방에 누마루를 달아서 사랑채의 구실을 했고 방마다 옛날 창문짝들을 구해서 맞춘 정도로 집은 빈약했으나, 이백 평 남짓되는 양지바른 산마루에 집에 붙은 개울이 있고, 여러 그루의 감나무와 대추나무가 있는 후원과 앞마당엔 괴석을 배치해서 풍란을 꽃피게 하며, 여름엔 파초가 잎을 펴게 온실도 만들어졌고 운치있게 쌓아올린 돌담장에는 앵두와 개나리를 피웠다. 앞마당 층계를 내려가면 우물가엔 목련이 피었었다.(<사람은 가고 예술은 남다-김환기 전기 중의 일부>, 김향안, '월하의 마음', 환기미술관)
김향안은 1954년에 프랑스로 그림 유학을 떠나고 다음해 김환기 역시 파리로 가 미술평론을 공부한다. 부부는 1959년 귀국 후 5년여 국내에 머무는데 김환기는 홍익대 미술대학장으로 재임하고 김향안은 수필가로 활동한다. 1964년 부부는 도미하여 줄곧 뉴욕에서 살게 된다.
그녀는 1974년 김환기가 세상을 떠난 뒤에는 남편의 유작과 유품을 돌보는 한편, 1978년에는 환기재단을 설립해 김환기의 예술을 알리는 데에 힘썼다. 1992년에는 서울 종로구 부암동(付岩洞)에 자비로 환기미술관을 설립하였는데, 사설 개인 기념미술관으로는 국내 최초이다.
이상과 김환기의 두 남편, 내가 정작 이 여인에게 반한 것은 다음의 이유 때문이다.
김향안은 1986년 월간 '문학사상' 지에서, 그녀가 변동림이었을 때 불과 4개월을 같이 산 첫 남편 李箱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다.
"그는 가장 천재적인 황홀한 일생을 마쳤다. 그가 살다간 27년은 천재가 완성되어 소멸되어 가는 충분한 시간이다.(...) 천재는 또 미완성이다."
또 그녀가 김향안으로서 30년을 함께 한 김환기의 아내였을 때에는, "지치지 않는 창작열을 가진 예술가의 동반자로 살 수 있었음은 행운이었다."라고 회고했다.
이상과 변동림, 그들이 정식 부부로 살았던 기간이 불과 수 개월이었지만 그들에게 있어서 아주 특별한 기간이 된다. 그것은 이상이 타계할 때 아내로서 남편의 최후를 임종하는 빌미가 되어, 그녀는 서울에서 동경까지 무리하다싶은 이역만리의 여정을 마다하지 않았다.
웬만하면 전 남편을 입에 올리지 않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생전에 그녀는 당당하게 말했고 기록으로도 인터뷰를 남겼고 실천으로도 옮겼다.
두 천재 예술가를 가까이에서 지켰던 그녀는 88세로 2004년 세상을 뜰 때까지 일찌감치 눈을 감은 두 배우자의 예술혼을 기리고 작품세계를 정리하고 보존하는 일을 신념처럼 펼쳤다.
첫 남편이었던 李箱의 기념사업으로는, 모교 보성고 교정에 1990년 5월 이상의 기념비와 문학비가 세워지기까지, 교우회가 발벗고 나서기도 했지만, 그녀의 의지와 지원이 큰 힘이 됐다. 또 두번째 남편 김환기 화백과 관련해 그녀는 김환기의 미술세계를 이끌고 완결시킨 인물로 평가된다. 화가 생전에는 작품활동에 감흥을 불러일으키는 예술의 반려였으며, 사후엔 유작과 유품을 정리해 환기미술관을 탄생시켰던 것이다.
내가 반한 이 여자, 그녀는 2004년 88세로 운명한 변동림과 김향안으로 불리는 여자였다.
***강나루(Essay-by Deili. 2009. 2. 25 '내가 반한 이 여자'를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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