鄭命壽정명수
정명수(鄭命壽, ?~1653) 1619년(광해군 11) 강홍립(姜弘立)의 군대를 따라 청나라에 갔다가 포로가 되었는데, 청나라 말을 배우고 조선의 사정을 밀고하여 청나라 황제의 신임을 얻었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 때는 용골대(龍骨大)·마부대(馬夫大) 등 청나라 장수의 역관으로 들어와
동포를 괴롭히고
매국행위를 일삼았다.
그뒤 청나라의 세력을 믿고 조정에 압력을 가하여 영중추부사에까지 올랐다.
이에 조정에서는 그를 두려워하여 뇌물을 주고, 그의 친척들에게도 벼슬을 주어 비위를 맞추었다. 그러나 그는 또 1639년 그의 처족인 정주의 관노 봉영운(奉永雲)을 정주군수로 임명하도록 강청하고, 이어 병조의 관리들을 구타하는 등 갖은 행패를 부리며 조정을 좌우하다가 청나라로 건너가 살았다. 그곳에서도 왕을 모독하고 갖은 행패를 부렸으며 청나라로 보내는 세폐를 노략질하였다. 1653년(효종 4) 심양에서 시강원서리 강효원(姜孝元), 성주포수 이사용(李士用), 시강원필선 정뇌경(鄭雷卿) 등에게 모살되었다.
인조 15년 정축(1637, 숭정 10) 11월 8일(임신)
청의 사신과 정명수가 기생 바치길 요구하니 기녀들이 죽음으로 항거하다
이때 청나라 사신과 정명수(鄭命壽)가 연로(沿路)의 각 고을에서 방기(房妓)
바치기를 요구하였는데 기녀들이 죽음으로 항거하였다. 묘당이 아뢰기를,
“그 뜻을 맞추지 않을 수 없겠습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인조 17년 기묘(1639, 숭정 12) 12월 2일(갑신)
역관 정명수가 병조 좌랑 변호길을 폭행하다
청역(淸譯) 정명수(鄭命壽)·변란(卞蘭) 등이 병조 좌랑 변호길(邊虎吉)을 끌고 들어
와 큰 몽둥이로 때렸다. 이때 변호길은 관소(館所)를 파수하는 낭청(郞廳)으로 관소
문 밖에 있었는데, 정명수의 방기(房妓)가 문을 나와 폐단을 일으키므로 변호길이 통
렬히 금지하자 방기가 정명수에게 호소하여 욕보인 것이었다.
인조 23년 을유(1645, 순치 2) 8월 23일(임인)
청나라에서 준 은자를 가로챈 혐의로 최득남을 사형에 처하게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