鄭雷卿정뇌경
1608(선조 41)∼1639(인조 17). 조선 후기의 문신·지사. 본관은 온양(溫陽). 자는 진백(震伯), 호는 운계(雲溪). 을사삼간(乙巳三奸) 순붕(順朋)의 현손으로, 생원 환(晥)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증병조참판 서주(徐澍)의 딸이다.
1630년(인조 8) 별시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성균관전적이 되고, 그뒤 공조·예조·병조의 좌랑을 거쳐 부수찬·수찬 및 지평·정언 등의 언관을 역임하였다. 그는 대간에 임명되자 간신 순붕의 현손임을 들어 자핵하기도 하였다.
1636년 병자호란으로 왕이 남한산성에 피난갈 때 교리로 호종(扈從)하였다. 그 이듬해 봄에 인조가 청나라 태종에게 항복한 뒤 소현세자(昭顯世子)가 볼모로 청나라 심양(瀋陽)에 잡혀가게 되자 자청하여 수행하였으며, 1639년에 필선으로 승진하여 심양에서 세자를 보위하였다.
당시 청나라에는 1618년(광해군 10) 건주위(建州衛)정벌 때 도원수 강홍립(姜弘立)을 따라갔다가 포로가 된 정명수(鄭命壽)·김돌(金突) 등이 우리나라 사정을 청나라에 알려줌으로써 청나라 황제의 신임을 얻고 양국간의 통역을 담당하면서 임금을 모독하고 조신(朝臣)을 업신여기는 한편, 관직이나 뇌물을 요구하는 등 갖은 행패를 부리고 있었다.
그는 이들을 제거하고자 기회를 엿보던 중 마침 이들이 우리나라에서 청나라에 보내는 세폐(歲幣)를 도둑질하자, 이들과 사이가 좋지 않은 청나라 사람을 시켜 그 죄상을 고발하게 하고 그들의 처벌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미 증거를 없앤 뒤여서 도리어 청나라 관헌에 잡혀 처형당하였는데, 그때 나이 32세였다. 소현세자와 봉림대군(鳳林大君:효종)이 자기 옷을 벗어 염(斂)을 하였다 한다.
처음에 도승지에 추증되었다가 다시 이조참판에 추증되었으며, 뒤에 찬성이 가증(加贈)되었다. 시호는 충정(忠貞)이다. 
 
 
 
http://koreandb.empas.com/koreandb/history/kpeople/person_view.html?n=3610
 
 
雲溪先生文集 :조선 후기의 문신 정뇌경의 시문집이다.

정뇌경은 을사삼간(乙巳三奸) 순붕(順朋)의 현손으로 생원 환(晥)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증병조참판 서주(徐澍)의 딸이다. 1630(인조 8)년 별시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성균관 전적이 되고 그 뒤 공조·예조·병조의 좌랑을 거쳐 부수찬·수찬 및 지평·정언 등의 언관을 역임하였다. 그는 대간(大諫)에 임명되자 간신 순붕의 현손임을 들어 자핵하기도 하였다. 1636년 병자호란으로 왕이 남한산성에 피난 갈 때 교리로 호종하였다. 그 이듬해 봄에 인조가 청나라 태종에게 항복한 뒤 소현세자(昭顯世子)가 볼모로 청나라 심양에 잡혀가게 되자 자청하여 수행하였으며, 1639년에 필선(弼善)으로 승진하여 심양에서 세자를 보위하였다. 당시 청나라에는 1618(광해군 10)년 건주위 정벌 때 도원수 강홍립(姜弘立)을 따라 갔다가 포로가 된 정명수(鄭命壽)·김돌(金突) 등이 우리나라 사정을 청나라에 알려줌으로써 청나라 황제의 신임을 얻고 양국간에 통역을 담당하면서 임금을 모독하고 조신을 업신여기는 한편, 관직이나 뇌물을 요구하는 등 갖은 행패를 부리고 있었다. 그는 이들을 제거하고자 기호를 엿보던 중 세폐(歲幣)를 도둑질하자, 이들과 사이가 좋지 않는 청나라 사람을 시켜 그 죄상을 고발하게 하고 그들의 처벌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미 증거를 없앤 뒤여서 도리어 청나라 관헌에 잡혀 처형당하였는데, 그때 나이 32세였다. 소현세자와 봉림대군(鳳林大君)이 자기 옷을 벗어 염(斂)을 하였다 한다. 처음에 도승지에 추증되었다가 나중에 이조참판에 추증되었으며, 뒤에 찬성이 가증(加贈)되었다. 시호는 충정(忠貞)이다.

 

 

 


이 문집은 1969년 9세손 건영(乾永)이 편집, 간행하였다. 시(詩)는 10수 중 3수를 제외하고 모두 심양(瀋陽)에서 지은 것이다. 저자는 1637(인조 15)년 소현세자(昭顯世子)가 볼모로 심양에 잡혀가게 되자 그를 배행(陪行)하였는데, 이 작품들은 그때의 심경을 잘 보여 주고 있다. 위국단충(爲國丹衷)과 이국 땅에서의 고독, 원분(怨憤) 등으로 표현되는 저자의 정신세계가 잘 그려져 있다. 소(疏)에는 「이윤방사진열소(以尹昉事陳列疏)」가 있는데, 윤방(尹昉)의 사건 전말을 진술한 것이다. 윤방이 강화로부터 묘사(廟社)의 신주를 모시고 이르렀을 때, 자신이 세자에게 배알 중지를 건의한 일을 해명한 내용이다. 「문학시대죄소(文學時待罪疏)」에서는 문학으로 심양에 있으면서 본국 사신을 만나 반가운 나머지 술을 마시고 왕세자에게 실수를 범한 뒤 대죄(待罪)한 내용이다. 차(箚)에는 1636년 봄에 교리로서 척화를 주장한 글이다. 이 세 편의 글은 조선 중기 대청(對淸)관계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사료로 평가된다. 이밖에 1630년 별시문과에 장원으로 합격한 「복수책(復?策)」과 「몽양책(蒙養策)」이 있다.

 

 

 

인조 17년 기묘(1639, 숭정 12)      

 

 

 5월 1일(정사)  

청나라에서 정뇌경을 죽이고, 재신 박노와 신득연이 치계하다

 

 

청나라에서 시강원 필선 정뇌경(鄭雷卿)을 죽였다. 재신 박노(朴)·신득연(申得淵) 등이 치계하기를,

“4월 18일에 용골대(龍骨大)·마부달(馬夫達) 두 장군이 신들을 불러 말하기를 ‘정뇌경 등의 죄는 진실로 죽어 마땅하며, 조선에서도 이미 자문을 보내왔으니, 지금 처치해야 할 것이다.’ 하므로, 신들이 놀라움을 견디지 못하여 속바치기를 청하는 뜻으로 언급하였습니다. 그러자 두 장군이 말하기를 ‘국왕이 재신으로 하여금 속바치는 것을 도모하게 하였는가, 재신이 스스로 속바치기를 도모하였는가? 재신이 당초 모의에 참여하였으므로 이처럼 그를 구하려는 것인가?’ 하므로 신들이 말하기를 ‘국왕의 본뜻은 자문 안에 다 들어 있다. 어찌 다른 뜻이 있겠는가. 세자와 대군도 모르는 바이다. 다만 우리들이 같이 있은 지 오래되어 그가 죽는 것을 차마 볼 수 없으므로 감히 이 계책을 내었을 뿐이다.’ 하고, 반복하여 간절히 말하였더니, 두 장군이 말하기를 ‘우리를 해치고자 도모한 자를 구원하는 것은, 그 마음을 알 수 있다. 반드시 우리 두 사람과 두 역관의 살고기를 먹은 뒤에야 마음에 쾌하겠는가?’ 하므로, 신들이 부득이 세자에게 가서 고하겠다고 말하고 물러났습니다.

세자가 구원하고자 하여 재삼 물었으나 다른 계책이 없으므로 친히 아문에 나아가려 하였습니다. 그런데 정명수·김돌시 두 역관이 여러 통사(通事)와 함께 말 앞에 늘어서서 큰 소리로 말하기를 ‘내 머리가 부서져야 앞으로 갈 수 있다.’ 하므로, 세자가 말을 멈추고 주저하는데 아문의 재촉이 성화보다 급하므로 세자가 부득이 도로 관소로 들어왔습니다. 정역(鄭譯)의 무리가 정뇌경을 나오라고 독촉하자, 정뇌경이 새옷으로 갈아 입고 관문 밖에서 하직하니, 세자가 인견하고 술을 하사하였습니다. 정뇌경이 하직하고 나가 대문 안에서 동쪽으로 본국을 향하여 네 번 절하고 또 그 어미를 향하여 두 번 절하고 나가니, 청인이 목졸라 죽였습니다. 서리 강효원도 일시에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신들이 용골대·마부달에게 말하여 겨우 시체를 거두어 염습(斂襲)하였는데, 옷과 이불은 모두 대내에서 내었으며, 강효원에게도 염할 옷을 주었습니다. 그리고 내관 박지영(朴之榮)으로 하여금 관을 호위하여 나가게 하였습니다.”

하였는데, 상이 하교하기를,

“정뇌경의 죽음은 몹시 놀랍고 참혹하다. 해조로 하여금 장례 물품을 제급하게 하라. 그리고 그의 어미와 아내에게 달마다 양식과 찬거리를 주어 나의 애처로워 하는 뜻을 표하게 하라. 강효원에게도 일체로 시행하라.”

하고, 또 정뇌경에게 증직(贈職)하도록 명하였다.
 
 
 
 
참고문헌 
 
仁祖實錄, 國朝榜目, 國朝人物考, 燃藜室記述, 順菴集, 瀋陽日記. 〈申解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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