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殷商시대의 甲骨文

 

1. 甲骨文의 槪況

 

  甲骨文字가 새겨진 재료는 龜甲과 獸骨이 가장 많기 때문에 甲骨文이라 불리고 있으며 서기전 14세기에서 서기전 11세기 중엽인 殷商시대에 주로 사용된 한자를 가리킨다. 甲骨文이 발견되어 문자학계와 서예계에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오래되지 않은 일이다. 淸나라 시대 光緖 25년(1899년)에 甲骨文은 비로소 수 천년의 잠 속에서 깨어나 학계에 그 신비스러운 모습을 내 보이기 시작하였다.

  甲骨文이 학계에 주목을 받기까지는 매우 의미 있는 이야기로부터 시작된다. 1899년 겨울 北京의 國子監인 王懿榮이 병을 고치기 위하여 한약방에서 그 당시 ‘龍骨’이라고 불리는 오래된 짐승의 뼈를 사 오게 하였다. 그 때 마침 그의 친구인 劉鶚이 병 문안 와 있었는데 龍骨을 살펴보다가 우연히 그곳에 무엇인지 새겨져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들은 龍骨에 새겨진 것이 그때까지 발견된 적이 없는 고대의 한자임을 깨닫고서 龍骨이 출토된 지점을 역 추적하여 집중적으로 수집하고 정리하게 되었다. 이후 1903년 劉鶚은 자신의 雅號를 넣은『鐵雲藏龜』라는 甲骨文을 수록한 최초의 서적을 편찬하기에 이르렀다.

  甲骨文이 출토된 지점은 河南省의 安陽市의 小屯村이다.『史記』의 기록에 의하면 小屯村은 서기전 14세기 商나라 열 아홉 번째 왕인 盤康이 도읍으로 정하고 새로운 출발을 한 땅으로 그 이후부터는 나라이름을 殷이라 불렀다고 전한다. 그 후로부터 이곳은 殷나라 마지막 紂王이 周나라에 멸망하기까지 273년 8代 12王이 통치한 殷나라의 수도가 되었으며 지금은 殷墟라 부르고 있다. 殷墟의 甲骨文이 발견된 후 河南省 鄭州의 二里岡, 山東省 洪越坊堆村, 陝西省 長安의 張家坡, 北京의 昌平 白浮村 등에서도 西周시대의 甲骨片이 다량 발견되었는데 총수가 1만 7천 편을 넘고 있다. 殷墟이외의 지역에서 발견된 甲骨편에서는 한자가 새겨져 있는 것이 적어 약 3백 편이 조금 넘고 있으나 周나라 시대의 甲骨文을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 殷墟 이외의 지역에서도 甲骨文이 발견되므로 하여 殷商을 이어받은 周나라 시대에서도 甲骨文이 광범위하게 쓰여졌다는 사실을 새롭게 알 수 있었으며 文字學, 考古學, 考證學은 물론 서예사적으로 볼 때도 중요한 연구 가치가 있다.

  지금까지 殷墟에서 출토된 甲骨편 총수는 15만 편이 넘으며 글자 수는 총 일 백만 자에 달하고 있는 것으로 집계되고 있다. 총 단어 수는 4500자 정도이며 그 가운데 현재까지 읽어서 판독되는 글자는 1500자를 조금 넘고 있다. 현대 중국어도 3천자 이상의 한자만 알고 있으면 의사 소통에 기본적으로 문제가 없는 것으로 보아 甲骨文이 널리 사용된 殷商시대에 이미 한자의 사용이 매우 광범위했으며 인간의 사상과 감정을 기록하고 전달하는데 아무런 불편함이 없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甲骨文이 매우 성숙되고 발전된 문자와 문장 구조를 갖추고 있는 것으로 보아 甲骨文이 사용된 殷商시대 이전에도 좀 덜 진화된 문자가 있었을 것이라는 추측을 충분히 가질 수 있게 한다.

 

2. 甲骨文의 내용 및 형식

 

  甲骨文은 거북의 배나 등 껍질 그리고 소의 어깨뼈뿐만 아니라 사슴의 머리뼈, 사람의 해골 등 많은 재료에 새겨진 문자로 일종의 점술 문장인 卜辭이다. 따라서 甲骨文을 甲骨刻寫, 貞人文字, 殷墟書契, 殷墟卜辭 등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불리어지고 있다. 甲骨文의 內容은 매우 다양하여 역대 殷商 왕조의 각종 활동 및 그들의 미래에 대한 희망과 농사의 생산 및 왕실과 가까운 가족 등의 상황을 비교적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그 내용을 형태별로 나누어 귀납해 보면 대체로 다음 몇 종류의 것으로 이루어져 있다.

 

① 祭祀: 조상신과 자연신에 대한 제사에 관한 내용.

② 天時: 風, 雨, 水, 天 등 날씨와 하늘의 움직임에 대한 내용.

③ 農事: 농사와 사냥 등의 수확에 관한 내용.

④ 征伐: 이웃 나라와의 전쟁과 외교 등에 관한 내용.

⑤ 王事: 출생, 질병, 사망 등 왕실의 사건에 관한 내용.

⑥ 豫言: 하늘에 대한 바램과 미래의 예언에 관한 내용.

 

  이상과 같은 甲骨 문의 문장을 살펴보면 殷商의 왕이 내용의 중심이 되어 왕실의 편안함과 농사와 사냥의 풍년 등 국가의 태평성대를 기원하는 것이 주목적이며 조상신과 자연신에 대한 숭배로 그 목적을 달성하려는 것을 알 수 있다.

  甲骨文은 점을 쳐서 내용을 기록한 것 이외에 왕실에서 일어난 일들의 단순한 기록이나 干支를 새긴 것 그리고 글씨를 쓰고 새기는 연습을 한 것 등 비교적 다양한 형식이 있다. 殷商시대에 이미 干支가 보편적으로 사용되었던 흔적을 쉽게 찾을 수 있다. 또 어떤 甲骨편에는 干支의 60甲子를 순서대로 새겨 놓아 점을 칠 때에 필요에 따라서 참고로 삼은 흔적도 보이고 있다.

  殷商시대에 신을 섬기고 점을 쳐서 큰일을 결정하였다는 것은 문헌의 기록에도 나타난다.『禮記·表記』편에 “殷人尊神, 率民以事神, 先鬼而後禮”(殷나라 사람들은 神을 존중하여 백성들과 함께 神을 섬겼다. 먼저 영혼을 불러온 후 예를 행하였다.)라 하여 殷商시대에는 신을 매우 존중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와 같은 내용이 말해 주듯 殷나라 시대의 사람들은 신을 섬기는 구체적 표현으로 점을 쳤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어떤 사건을 처리하거나 재앙이 닥치거나 기쁜 일이 생겨도 먼저 점을 쳐 신에게 물어 본 다음 처리할 방향을 결정하는 풍습과 전통이 있었다. 그 뿐만 아니라 중대한 사건이나 큰 재앙을 당하면 몇 명의 점술사가 반복하여 점을 쳤고 그 중에서 가장 확률이 많은 점괘 쪽으로 일의 방향을 결정한 것을 알 수 있다.

  甲骨文의 상태로 殷나라 시대의 점치는 과정을 살펴보면 일반적으로 다음과 같은 순서로 되어 있다. 먼저 글씨를 새기는 甲骨의 반대쪽에 송곳으로 구멍을 낸 후 불에 구우면 구멍을 따라서 균열이 생기게 되는데 이때 점술사인 貞人이나 왕이 이 균열을 근거로 하여 길흉을 판단하게 된다. 그 후 신에게 점쳐 물었던 內容과 점괘를 균열이 생긴 甲骨의 주위 공간에 새겨 넣었다. 문장의 내용은 비교적 상세하였으며 점을 친 사람과 점의 내용뿐만 아니라 일이 발생하고 난 후 점괘가 맞았는지 아니면 틀렸는지 까지도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이렇게 하여 한편의 완전한 甲骨文이 완성되었으며 이후 이 甲骨片들을 버리지 않고 한곳에 모아 보관하였다. 淸나라 후기에 甲骨文이 한 자리에서 대량으로 발견될 수 있었던 것도 당시에 한곳에 모아서 보관하였기 때문이다.

오랜 세월에 걸쳐 甲骨文을 새기는 전통 속에서 문장의 고정된 격식과 규칙이 만들어지게 된다. 한편의 완전한 甲骨文의 형식은 대체로 前辭, 問辭, 占辭, 驗辭 등 네 부분으로 조성되어져 있다. 前辭는 敍辭라고 불리는데 점을 친 날짜와 장소 그리고 貞人의 이름 등이 기록되어 있다. 問辭는 命辭라고 불리며 신에게 점을 쳐 물은 內容들이 적혀 있다. 占辭는 점을 친 결과인 점괘가 적혀 있으며 길흉의 예언과 목적의 成敗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驗辭는 일이 발생한 후 그 결과와 점괘가 맞았는지 틀렸는지 등의 내용이 비교적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아래에서 완전한 한편을 甲骨文 문장을 예로 들어 보편적 형식과 내용을 간단히 소개한다.

 

* 釋文

 

① 戊子卜, 嗀貞; 帝及四夕令雨? (前辭)

② 貞; 帝弗其及今四夕令雨? (問辭)

③ 王占曰: 丁雨, 不?? 혜辛. (占辭)

④ 旬丁酉允雨. (驗辭)

 

* 飜譯

 

①. 戊子날에 占을 치다, 嗀(貞人의 이름)이 묻습니다. 上帝이시어 4일째 되는 저녁에 비를 내려 주시겠습니까?

②. 다시 묻습니다, 상제이시어 4일째 되는 저녁에 비를 내려 주시지 않습니까?

③. 王(武丁)이 점괘를 보고 말한다: 丁酉날에 비가 오며 辛卯날에는 비가 오지 않는다.

④. 10일이 지난 후 丁酉날에 과연 비가 내렸다.

위 甲骨文은 董作賓의『小屯·殷墟文字·乙編』에 실려 있으며『甲骨文合集』에도 실려 있는 것으로 殷商의 제 4대 왕인 武丁시대의 卜辭로서 상제에게 비를 내려 주시기를 간절히 원하며 점치고 기도한 기록이다. 시간, 인물, 사건, 경과, 결과 등 완전한 격식을 갖춘 전형적인 甲骨文이다.

 

3. 甲骨文의 시대 구분과 특징

 

1) 甲骨文의 시대 구분

 

淸나라 시대의 光緖 연간인 1899년 殷墟의 甲骨文이 처음 발견된 후 학자들이 가장 큰 관심을 가지고 연구한 것은 甲骨文이 어느 시대의 문자이며 어떤 뜻이 있는지에 관한 것이었다. 考古學, 歷史學, 文字學 등에 종사하는 학자들이 중심이 되어 연구한 결과 甲骨文이 殷商시대에 사용된 문자였음을 판명하였고 그 내용도 알 수 있었다.

  이 시대에 甲骨學에 종사하여 큰 성과를 거둔 학자는 羅振玉, 董作賓, 王國維, 郭沫若 등으로 甲骨學 四大家라 불린다. 이들과 같은 학자들의 노력으로 고대 商나라와 周나라의 역사적 실체가 밝혀질 수 있었으며 한자의 탄생과 서체의 변천에 관한 의문도 어느 정도 풀리게 되었다. 書藝學界에서도 새로운 한자에 대한 비상한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甲骨文의 筆劃과 結字法을 근거로 하는 창작 행위가 성행하게 되었다.

  甲骨文이 殷商시대에 사용되었던 한자라는 사실은 비교적 쉽게 알아낼 수 있었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어느 甲骨片이 어느 시대의 것이며 시대별로 어떠한 특징이 있는지에 관한 내용은 문자학자의 더 많은 연구를 거친 후에 이루어졌다. 15만 편에 일 백만 자가 넘는 甲骨文에서 같은 글자끼리 분류하고 글자의 뜻을 알아내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甲骨文에 사용된 한자가 약 4500자 정도로 집계되고 있으나 현재까지 연구하여 판독되는 글자는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는 1500자 정도 밖에 되지 않는다. 현대의 문자학계에서는 甲骨文의 한 글자만 밝혀 내도 박사 학위를 받을 수 있을 정도이니 그 작업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짐작이 간다.

  甲骨文을 판독하고 시대별로 분류하는 연구에 羅振玉, 王國維, 董作賓, 郭沫若 등이 매우 훌륭한 업적을 남겼으며 그 가운데 董作賓은 甲骨文의 특징을 시대별로 나누어 분류하는 업적을 남겼다. 董作賓은『甲骨文斷代硏究例』에서 甲骨文의 시대를 다섯 부분으로 나누어 설명하였다. 이 때부터 甲骨文의 시대 구분은『甲骨文斷代硏究例』를 근본으로 연구하게 되었으며 이 저술은 甲骨文의 시대 구분에 가장 권위 있는 저서가 되었다.

 

항목

殷墟 문화의 분기

甲骨文의 분기

대표자

왕명

鄒衡

考古所

胡厚宣

董作賓

盤庚

제 1 기

제 1 기

제 1 기

제 1 기

小辛

小乙

武丁

제 2 기

祖庚

제 2 기

제 2 기

제 2 기

祖甲

廩辛

제 3 기

제 3 기

제 3 기

康丁

제 3 기

武乙

제 4 기

文丁

帝乙

제 4 기

제 4 기

제 4 기

제 5 기

帝辛

 

  董作賓은『甲骨文斷代硏究例』에서 殷商시대의 盤庚이 都邑을 옮기고 난 후 紂王이 周나라에 망하기까지 273년 8代 12왕 시대의 甲骨文을 다음과 같이 분류하였다.

 

제1기; 盤庚, 小辛, 小乙, 武丁 (4世 4王)

제2기; 祖庚, 祖甲 (1世2王)

제3기; 廩辛, 康丁 (1世2王)

제4기; 武乙, 文丁 (2世2王)

제 5기; 帝乙, 帝辛 (2世2王)

 

  이상의 甲骨文의 시대 구분은 ① 世系 ② 稱謂 ③ 貞人 ④ 坑位 ⑤ 方國 ⑥ 人物 ⑦ 事類 ⑧ 文法 ⑨ 字形 ⑩ 書體 등의 10가지 표준과 방법에 의하여 연구 조사로 귀납해 낸 것이다.

  世系는 殷商 왕조의 왕실과 그 친척들의 계보를 위주로 연구한 것이다.

  稱謂는 殷王과 관계되는 사람들을 호칭한 것을 중심으로 연구 한 것으로 왕은 主, 형은 兄某, 아버지는 父某 등으로 불렀던 것을 알 수 있다.

  貞人은 점을 치는 행위를 주관한 점술사를 연구한 것으로 爭, 充, 古, 賓, 永 등 많은 貞人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坑位는 甲骨文이 출토된 장소의 연관성과 특징을 중심으로 연구하고 분류하였다.

  方國은 시대에 따라서 殷나라와 외교 관계가 있거나 정벌한 나라를 중심으로 연구하여 분류한 것으로 武丁 시대에 苦方과 土方을 정벌한 사실 등을 알 수 있다.

  인물은 殷商 왕조의 관료와 諸侯등을 연구하여 분류한 것으로 시대를 추정하는 좋은 자료가 된다.

  事類는 甲骨文에 기록된 사건과 중심으로 연구하여 분류한 것으로 武乙 시대에 사냥에 관한 기록이 60번 정도가 있다는 사실 등을 알 수 있다.

  文法은 甲骨文의 문법이 시대에 따라 차이가 있는 것을 밝혀 내고 분류한 것이다.

  字形과 書體는 시대에 따라 甲骨 문자가 조금씩 다르게 쓰였으며 그 서풍도 다르다는 것을 밝혀 내 분류한 것으로 甲骨文 서예를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

 

  아래에서 각 분기별 甲骨文 서체의 특징을 상세하게 살펴보기로 한다.

 

제1기; 盤庚, 小辛, 小乙, 武丁 (약100년)

 

商나라 제19대 왕인 盤庚이 도읍을 殷墟로 옮긴 후 武丁시대까지를 제1기로 분류하였다. 이 시대는 殷나라가 경제와 군사 그리고 문화의 여러 방향에서 가장 발전한 것으로 평가되는 시대로 왕실의 활동이 가장 많았다. 현재까지 발견된 甲骨文도 이 시기의 것이 가장 많으며 그 가운데서도 武丁시대의 것이 가장 많다.

  이 때의 甲骨文字는 비교적 字形이 큰 편이며 筆劃이 굵은 편이다. 글자가 비교적 큰 甲骨文은 강건하면서도 질박한 심미적 특징이 있다. 筆劃과 결구가 마치 종횡으로 거침없이 달리는 준마의 역동성을 느끼게 한다. 結字와 결구가 비교적 크고 넓으며 글자와 글자 사이의 뚝 떨어져 있으며 布置와 章法이 매우 자연스러워 보는 이로 하여금 가슴이 탁 트이는 통쾌함을 느끼게 한다. 제1기 甲骨文의 심미적 특징을 종합적으로 표현하면 웅장하고 강건하며 씩씩한 아름다움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때의 유명한 貞人으로는 嗀, 賓, 爭, 丙, 亙, 吏, 邑, 등이 있다.

 

제2기 祖庚, 祖甲 (약40년)

 

  이 시기는 殷나라가 제1기의 치적으로 인하여 국가가 부강해지고 사회가 비교적 안정되었다. 인근 부족 국가와의 전쟁도 감소됨에 따라 농업과 사냥 등의 생산성도 매우 높아지게 되었다. 따라서 왕실 내부의 행사가 많아졌으며 甲骨文字의 자형과 서체의 심미적 특징이 많은 변화를 맞게 되었다.

  武丁시대의 웅장하고 강건한 書風은 방정하고 유창하며 미려한 형태로 변화하였다. 結字와 결구는 가지런하며 글자의 중심을 향하여 모여들게 하였고 布置와 章法도 매우 규칙적이고 규범화되었다. 행간과 자간이 균일하면서도 공간의 안배가 자연스러워 안정감과 편안함을 느끼기 한다. 이 시기의 甲骨文 서체와 내용은 당시의 사회가 비교적 안정되어 있었고 사람들이 물질과 정신적으로 풍요로웠음을 잘 나타내고 있다. 이 때에 많이 등장하는 貞人으로는 旅, 出, 行, 喜, 洋, 尹, 逐 등이 있다.

 

제3기; 廩辛, 康丁期 (약14년)

 

이 시기의 殷나라는 사회 각 부분의 안정이 깨어지기 시작하여 점점 쇠락의 길로 들어서는 초기 단계로 평가한다. 殷商의 문화적 분기 중에서 가장 짧은 시기로 발견된 甲骨文의 수량도 가장 적다. 甲骨文의 내용도 제 1기와 2기에 비해 생활상의 사사로운 일을 기록한 정도의 일반적이며 서체의 크기도 들쭉날쭉 불규칙하고 변화가 심하다. 행간과 자간의 배치가 산만하고 字形이 균형을 잃은 작품이 많이 보인다. 그러나 그 가운데에서도 전대의 전통을 이은 방정하고 수려한 작품도 함께 섞여 있다. 이와 같은 서체의 특징을 미루어 甲骨文 시대에도 정치와 경제 등 사회의 변화가 서체와 서풍의 변화에 많은 영향을 끼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사회가 안정되어 있을 때는 서체도 안정되고 사회가 혼란하고 국력이 한 약해진 시대에는 서체도 안정감을 잃고 있는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다. 이 시기의 貞人으로는 何, 寧, 彘, 彭, 狄, 敎, 弔등이 있다.

 

제4기; 武乙, 文丁시기 (약17년)

 

  이 시기는 甲骨文 서예의 百花齊放의 시대라고 불릴 정도로 서풍이 다양하다. 武乙시대에는 큰 글자의 甲骨文이 비교적 많이 나타나며 서풍이 매우 씩씩하고 엄숙하며 호방한 느낌을 표현하고 있다. 이러한 서풍의 甲骨文의 미감은 ‘銅筋鐵骨’ 즉 뼈는 쇠와 같고 근육은 구리와 같이 강인하고 건강하다고 표현된다. 文丁시대의 甲骨文에서는 자형이 작은 것에서 큰 것까지 다양하다. 대체로 武乙시대의 심미적 특징을 계승하였으나 작은 글자에서 정교하고 수려한 맛을 많이 표현하였다. 結字와 결구 그리고 布置와 章法이 조화를 잘 이루고 있을 뿐 아니라 甲骨에 글자를 새기는 기술이 발전하여 筆劃에 기교가 풍부한 것이 이 시대의 甲骨文 서예의 特徵이다. 따라서 이 시대의 甲骨文은 殷商과 周나라 시대 甲骨文 서풍의 공통된 특징을 잘 간직하고 있는 까닭에 전체 甲骨文 서풍을 대표한다고 인정되며 예술적 수준이 가장 높은 시기로 평가된다. 제 4기는 貞人의 이름도 가장 많이 등장하며 史, 車, 歷, 萬, 中 등의 이름이 자주 나타난다.

 

제5기; 帝乙, 帝辛시기 (약 89년)

 

  殷商의 가장 후기에 속하는 이 시기의 甲骨文은 문장이 매우 성숙하여 한편의 완성된 서사문의 형식을 갖추고 있으며 서체는 완성의 단계에 접어들었다. 글자의 크기가 가지런하고 규칙적이며 행간과 자간의 배열이 일정한 규율 속에서 정제되어져 있다. 筆劃이 세밀하고 기교가 무르익어 있으며 結字와 결구가 엄격하고 좌우와 상하의 대칭을 완벽하게 안배하여 통일되고 안정된 조화의 미를 창출해 내었다. 布置와 章法은 규율과 법칙 속에서도 활동적인 움직임을 간직하고 있어 생동감이 넘치는 것이 특징이다. 이 시대의 貞人으로는 黃, 泳, 立 등이 있다.

  하나의 서체가 정리되고 통일되어 완성되는 것은 또 다른 서체의 탄생을 예견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비록 甲骨文을 서체의 범주에 넣을 수는 없지만 甲骨文이 완성되는 시기에 甲骨이외에 새로운 서사 재료가 많이 사용되고 서체와 서풍도 많은 변화를 맞이하게 된다. 殷商이 멸망하고 뒤를 이은 周나라 시대에는 청동기를 서사 재료로 사용하였으며 甲骨文과는 다른 서풍과 심미적 특징을 간직하고 있다. 한 서체가 완성되고 난 후에는 그 주도적 위치를 다른 새로운 서체에게 내어 주는 것이 서체 변화의 가장 큰 특징이다. 甲骨文이 완성된 후 金文에게 그 자리를 내어 준 것은 小篆이 隸書, 隸書가 또 楷書에게 자리를 양보한 것과 같은 서체 변천의 매우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2) 甲骨文의 심미적 특징

 

  甲骨文은 칼을 사용하여 이루어진 서예의 한 영역으로 그 심미적 범주와 특징이 붓을 사용한 서예 작품과는 많이 다르다. 딱딱한 甲骨에 칼로서 새기는 행위가 甲骨文字의 형상과 서풍 그리고 筆劃의 심미적 범주를 결정하였다. 가로와 세로가 기본적으로 직선을 취하여 날카로우면서도 강건한 甲骨文 筆劃의 기본 미감을 형성하였으나 무겁고 가벼움, 빠르고 느림, 굵고 가는 筆劃을 자유롭게 사용하여 심미적 범주를 확대하였다. 청동기나 옥으로 만든 칼을 사용한 도법은 매우 숙련되어 方筆과 圓筆의 자유롭게 표현하였다. 起筆과 收筆은 가볍고 빠르게 運筆하였으며 行筆은 굵기와 속도에 많은 변화를 구사하여 한 筆劃 안에서도 깊은 운율과 움직임이 내재되어 있다. 筆劃이 꺾이고 굽은 轉折의 筆法에서는 方筆과 圓筆을 골고루 취하였으며 方筆은 날카롭고 강건하며 圓筆은 부드러우면서 윤택한 아름다움을 주로 표현하였다.

  甲骨文은 長方形의 結字와 위에서 아래로의 순서를 기본으로 하여 한자의 형태와 서사 순서의 특징을 결정하였다. 甲骨文에서 사용한 사각형의 結字와 세로로의 필순과 布置는 한자 서사 행위의 법칙이 되었으며 수 천년 동안 변하지 않는 기본 규칙이 되었다. 이와 같은 甲骨文의 사각형 구도는 평형과 대칭을 기본으로 하는 篆書의 심미적 범주를 창조해 내었고 이것은 한자 결구의 가장 기본적이고 중요한 구성 요소가 되었다. 筆劃과 結字, 布置와 章法은 서예 작품의 심미적 특징을 탐구하는 가장 기본적 요소이다. 甲骨文의 심미적 특징도 이와 같은 범주를 중심으로 고찰 할 수 있다.

  甲骨文 筆劃의 대표적 미감은 웅장하고 중후한 미감, 튼튼하고 방정한 미감, 부드럽고 수려한 미감, 자유롭고 개성적인 미감 등으로 나누어 설명할 수 있다. 웅장하고 중후한 미감을 특징으로 하는 甲骨文은 筆劃이 대체로 굵으나 起筆과 收筆이 상대적으로 가늘어 풍만하고 안정된 형태를 갖추었다. 行筆의 중심이 굵기 때문에 원만하고 편안하여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당시 사람들의 너그러운 인정미를 느끼게 한다. 이러한 종류의 筆劃은 甲骨文 분기의 제 1기에 많이 나타나는 특징으로 金文에서 아주 쉽게 볼 수 있다.

  튼튼하고 방정함을 심미적 특징으로 하는 甲骨文은 날카로우면서도 강건하여 당시의 사회가 안정되어 있었음을 상징한다. 筆劃의 起筆과 收筆 그리고 行筆이 거의 비슷한 굵기로 運筆하였고 筆劃과 筆劃 사이를 가지런하게 안배하였다. 또 筆劃이 서로 만나는 부분은 상대적으로 약간 굵게 처리하여 균일하고 안정된 가운데 긴장감을 느끼게 한다. 이와 같은 筆劃은 제 2기의 심미적 특징을 대표하며 가장 성숙한 甲骨文의 筆劃이라 할 수 있다.

  부드럽고 수려한 미감을 대표로 하는 筆劃은 甲骨文이 매우 성숙한 시기인 제 3기 이후에 주로 나타나는 것으로 도법의 뛰어난 기교를 요구하였다. 이런 종류의 筆劃은 대체로 가늘기는 하지만 結字와 결구의 조화를 잘 이루어 결코 약하지 않으며 완곡하고 고상한 아름다움을 표현하였다. 行筆에서도 굵기의 조화를 이루었고 곡선의 轉折을 많이 선택하였을 뿐 아니라 筆劃이 비교적 길어서 현대적인 미감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甲骨文의 초기와 후기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특징이 바로 자유스럽고 개성적인 筆劃과 결구이다. 아직 완성되기 이전의 甲骨文 筆劃은 질박하고 천진한 미감이 대표적이고 후기의 자유스러운 筆劃은 각 작품마다의 개성이 특징이다. 다듬어지지 않은 筆劃은 점차 통일되고 완성되는 길로 접어들고 완성된 이후에는 또 다른 변화를 모색하는 것이 서체 변천의 일반적 규율일 뿐 아니라 한 작가의 창작 행위에서도 이와 같은 규율이 상존 하고 있다. 甲骨文의 후기에 나타나는 자유와 개성은 당시의 서사 행위에서도 이미 작자 자신만의 심미적 요구를 표현하였으며 甲骨文이 예술 행위의 대상이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甲骨文에는 사물이나 동작의 행위 그리고 형태나 위치를 형용하는 象形文字가 매우 많이 쓰이고 있다. 이것은 甲骨文이 초기의 완전한 문자로서 象形의 造字규칙을 기본으로 하였으며 간단한 筆劃으로서 사물의 형상이나 사건을 표현해 내었음을 알 수 있다. 甲骨文의 象形字를 구체적으로 분석하면 象物, 象事, 象意 등으로 나눌 수 있으며 이것은 六書法에서 말하는 象形과 指事를 모두 포함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許愼이『說文解字· 敍』에서 象形字를 “畵成其物, 隨體詰詘.”(사물의 각각 다른 형태에 따라서 물상을 그렸다.)이라 하였는데 ‘隨體詰詘’(물체 형태를 따르다.)이라 한 것은 畵論의 ‘應物象形’(만물의 형상을 본받다.)과 같은 뜻으로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사물을 형태를 따른 것은 그림과 그 성질이 같음을 알 수 있다. 指事字도 추상을 형상화 한 것으로 넓은 의미에서는 象形字의 범주에 포함하여 설명할 수 있다.

  甲骨文은 象物, 象事, 象意의 象形性을 기본으로 하는 結字法을 취하여 자형에 회화적 요소가 많은 것이 특징이다. 象物의 象形字는 형체가 있는 객관적 사물을 묘사하였기 때문에 사실적 미감과 筆劃의 미를 함께 느낄 수 있다. 象事의 象形字는 사물이 움직이는 형상을 묘사한 것으로 사람과 사람, 사람과 사물, 사물과 사물의 사이에서 발생하는 많은 상황을 筆劃으로 표현하였기 때문에 생동감 있는 움직임을 느끼게 한다. 尙意의 象形字는 추상적 생각이나 형상을 묘사한 것으로 사물의 본성, 시간과 공간 개념, 위치와 방위의 개념을 표현하여 의미를 상상하며 감상할 수 있는 특징이 있다. 形聲에 의한 甲骨文의 結字도 모두 상형을 기본으로 하여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에 甲骨文 結字의 심미적 범주는 사실적 미감, 운동성의 미감, 추상성의 미감 등으로 표현할 수 있다.

  상형을 기본 結字로 한 甲骨文의 결구는 대칭을 가장 중요한 형식과 심미적 범주로 선택하였다. 대칭의 심미적 특징은 평형과 조화이다. 평형과 조화는 사람들에게 평화롭고 안정된 심리 상태를 유지시켜 주는 역할을 한다. 甲骨文에서 선택한 대칭의 결구는 인류의 대자연에 대한 인식에서 유래하였다고 할 수 있다. 자연계에 존재하는 만물이 모두 음과 양을 바탕으로 암과 수, 위와 아래, 왼쪽과 오른쪽, 앞과 뒤 등의 대칭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러한 구조는 사람들의 감성을 자극하여 그것을 심미적 범주로 인지하게 하였으며 고도의 이성 인식으로서 승화시켜 조화의 아름다움을 표현할 수 있게 한다.

  甲骨文의 대칭에 의한 결구도 대자연의 만물에서 그 심미적 특징을 찾아내어 표현하였다고 할 수 있다. 객관적 사물을 묘사하는 과정에서 사물 자체에 존재하고 있는 대칭의 결구를 자연스럽게 배울 수 있었고 또 표현할 수 있었다. 甲骨文에서 표현한 대칭은 한 글자 안에서만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布置와 章法 그리고 문장 속에서도 가장 중요하게 인식한 형식의 심미적 범주이다. 이러한 대칭의 형식은 甲骨文의 서사 재료인 거북의 배 껍질과 소의 어깨뼈 자체의 대칭과도 관련이 깊으며 심지어 甲骨의 균열된 무늬까지도 대칭의 형식을 유도해 내었다. 이와 같이 甲骨文은 글자와 章法, 문장 등 여러 방면에서 대칭의 형식과 심미적 범주를 추구한 것을 알 수 있다. 대칭에 의한 결구는 甲骨文 서예의 가장 특출한 심미적 범주 가운데 하나로서 위와 아래, 왼쪽과 오른쪽 등 모든 방향에서 대칭의 형식을 갖추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甲骨文의 대칭은 結字와 결구뿐 아니라 布置와 章法의 구성 영역에서도 가장 중요하게 채택한 심미적 범주이다. 대칭의 형식 이외에 甲骨文 布置와 章法의 가장 뚜렷한 특징은 세로 줄은 맞추고 가로줄은 맞추지 않는 ‘縱有行, 橫無列’의 기본 구조이다. 초기와 후기의 몇 작품은 가로와 세로에 아무런 격식이 없이 자유 자재로 布置하였거나 혹은 가로 세로를 매우 질서 정연하며 단정하게 布置하였으나 완전한 형태의 대부분의 甲骨文은 ‘縱有行, 橫無列’의 章法을 취하고 있다. 甲骨文에서부터 출발한 서예사에서 서체를 분류 할 때 가장 큰 분류법으로 正體와 草體의 두 산맥으로 나누어 설명한다. 篆書, 隸書, 楷書는 正體이고 行書와 草書는 草體라 한다. 正體는 일반적으로 가로와 세로의 행간과 자간을 정확하게 맞추는 章法을 취하고 草體는 세로는 행간은 맞추나 가로의 자간은 맞추지 않는 章法을 취하는 것이 보편적이다. 草體와 正體의 이러한 章法은 최초의 문자이며 서예 작품인 甲骨文에서부터 탄생하였으며 몇 천년을 흘러온 현재도 계속하여 지켜지고 있다.

  甲骨文은 기본적으로 평형과 대칭의 布置와 章法으로 전체적으로 안정감을 추구하였으나 형식상의 단조로움을 피하기 위하여 여러 가지 변화를 모색하였다. 결구와 章法에 있어서 좌우 편방을 일반적으로 위치를 교환하거나 위치에 따른 크기를 자유롭게 변화시켜 직선의 筆劃과 형태의 통일에서 나타나는 단순함을 최소화하였다. 甲骨文의 筆劃은 전체적으로 직선의 조합으로 이루어져 있으므로 가장 중요하게 고려해야 할 문제가 바로 변화와 생동감을 불어넣는 일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殷商시대의 사람들이 얼마나 창조적이며 예술적 감각이 뛰어났는가를 충분히 알 수 있으며 심미적 탐구에 찬사를 보내게 된다.

甲骨文은 꾸밈이 적은 질박하고 자연스러운 원시 문화의 정취를 물씬 풍겨 주는 서예 작품으로 가장 선명한 색깔과 미감으로 우리에게 다가왔다. 甲骨文이 오랜 역사의 숨결을 간직한 가장 원시적 서체이지만 20세기의 서예가들에게는 새롭고 신선한 서체로 느껴질 뿐 아니라 가장 신비로운 미감을 간직하고 있는 서체로 평가된다.

 출전:중국서법예술사 /저자 배규하
출처 : 서예사랑 호학당
글쓴이 : 예전 이영란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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