Ⅲ. 簡牘 서예와 帛書 및 盟書
1. 盟書
盟書는 玉冊의 한 형식으로 簡帛 서체와 함께 先秦시대의 墨跡 서체의 변천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예로부터 중국에서 玉은 주술적 의미를 지닌 귀중하고 상서로운 보석으로 인식되어져 왔다. 현재까지 발견된 유물을 근거로 할 때 玉이 사용된 시기는 신석기 시대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고대 사회에서 옥은 재산과 권위의 상징인 동시에 심미적 표현의 수단으로 사용되었다. 문자가 사용된 후부터는 부족이나 개인의 휘장이나 신앙의 대상을 새겨 종교 활동이나 증표로서 사용되기도 하였다. 지금까지 발견된 玉石 문자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은 商나라 시대의 것으로 묵서와 각서가 모두 나타나고 있다. 玉書의 내용은 玉器와 주인의 이름이나 일을 기록한 것으로 초기의 甲骨文이나 刻石 그리고 陶器의 내용과 비슷하다.
殷商시대 이후 簡冊은 문서를 기록하는 중요한 재료로 사용되었다. 甲骨文에 나타난 ‘示冊’, ‘冊至’, ‘乙典’ 등의 문자와 西周시대의 金文에 나타난 冊命을 근거로 할 때 殷商시대에 簡冊이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簡冊의 재료로는 骨片, 玉片, 石片, 竹片, 木片 등 다양하며 지금까지 발견된 완전한 형태의 簡冊가운데 연대가 가장 빠른 것은 春秋시대의『侯馬盟書』이다. 盟書는 문헌에서『載書』라 기록하고 있는 것으로 고대 사회에서 개인이나 국가간에 공약을 정하고 하늘에 맹세한 내용을 기록한 문장이다.『周禮‧司盟』에 “司盟, 掌盟載之法.”(司盟은 盟約의 법을 주관한다.)이라 하였는데 鄭玄은 注에서 “載, 盟辭也. 盟者書其辭於策(冊), 殺牲取血, 坎其牲, 加書於上而埋之, 謂之載書.” (載는 盟約의 글귀이다. 盟約하는 사람은 그 내용을 策(冊)에 기록하는데 짐승을 죽여 그 피를 사용하여 盟約하고 盟約한 내용을 적어 땅에 묻는다. 이것을 이름하여 載書라 한다.)라 하여 載書가 盟約하는 글귀를 적은 盟書라고 설명하였다.『周禮‧司盟』,『左傳‧定公十三年, 僖公五年』 등의 기록에 의하면 당시에 盟書는 모두 같은 형식을 두 개로 나누어 하나는 司盟의 관청인 盟府에 보관하고 하나는 땅에 묻거나 강속에 넣었다고 한다. 春秋시대에는 중요한 일을 도모하고 처리하는데 盟書가 매우 유행하였다.『左傳』의 魯隱公원년부터 襄公27년까지(서기전 722-서기전 468) 250여 년의 기록에 제후국 사이의 盟約이 약 200차에 달하고 있으며 그 중에 晋나라에 관한 盟約이 가장 많은 50여 차례이다.
『侯馬盟書』는 1965년 山西省 侯馬市 春秋시대의 晉나라 유적지에서 출토되었으며 山西省 文物管理委員會에 보관되어 있다. 학자들은 기록된 내용으로 春秋 시내 후기의 秦나라 定公15년에서 23년까지(서기전 497-서기전 489)의 盟書로 고증하였다. 侯馬에서 출토된 玉冊은 모두 5천 점이 넘고 있으며 그 중에서 판독할 수 있는 문자가 쓰여져 있는 것도 600점이 넘는 매우 많은 수량이다. 글씨는 붓으로 쓴 墨書와 朱書의 두 가지이며 墨書는 詛呪文과 卜筮文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朱書는 宗盟文, 委質文, 納室文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玉片의 크기는 길이 18-32㎝, 넓이 2-3.8㎝, 두께가 약 1㎝ 정도이며 위가 뾰족한 형태를 갖추고 있다. 내용은 晋나라 宰相인 趙鞅과 卿大夫사이에 신의를 盟約한 것으로 春秋시대의 盟約에 관한 제도를 알 수 있는 좋은 자료이다.
『侯馬盟書』의 서체는 蝌蚪書로 불리며 西周시대의 金文과 簡帛 서체의 중간 형태를 취하고 있어서 古體에서 今體로 변화하는 隸變을 연구하는데 매우 중요한 자료가 된다. 대부분의 글자가 당시의 金文 서체와 같은 형태로 이루어져 있으나 筆劃을 간략하게 것이 많으며 같은 글자가 여러 형태로 쓰여진 異體字가 많이 나타나는 것이 특징이다. 起筆을 무겁게 運筆하였으나 형태는 蝌蚪형, 丁字형, 삼각형 등 다양하며 行筆과 收筆을 빠른 속도로 運筆한 흔적이 역력하다. 結字와 결구에 있어서 가로획과 세로획이 수평과 수직의 직선을 이루지 않고 곡선이 많으며 비교적 자유스러운 형세이다. 章法에 있어서도 행간만 유지하고 자간은 筆劃의 많고 적음과 글자의 크기에 따라 자유롭게 布置 하였으나 산만하지 않은 자연스러움이 있다. 玉片에 먹이나 朱砂로 글자를 써넣은 재료의 특성으로 심미적 특징이 簡帛 서체와는 많은 차이가 있다. 簡牘과 비단은 먹물이 조금씩 번지고 깊숙이 스며드는 성질 때문에 세월의 부드럽고 온화한 맛이 있으나 玉片은 먹이 잘 스며들지 않을 뿐 아니라 미끄럽기 때문에 運筆이 빨라지게 되어 날카롭고 강인한 맛이 나타난다.
『溫縣盟書』는 1980년에서 1982년 사이에 河南省 溫縣에서 출토되었으며 대부분 河南省 文物硏究所에 소장되어 있다. 이 盟書는 春秋시대의 후기 秦나라 定公15년(서기전 497)의 것으로 고증되고 있다. 溫縣은 비록 적은 양이지만 1930년, 1935년, 1942년 등 여러 차례에 걸쳐서 盟書가 출토된 지역이다.『溫縣盟書』 이전에 출토된 盟書는『沁陽玉簡』 혹은『沁陽盟書』로 불리며 현재 中國社會科學院에 소장되어 있다.『溫縣盟書』는 약 5천 점에 달하는 매우 많은 수량으로 대체로 길이 25㎝, 넓이 3㎝, 두께 1㎜정도의 玉片에『侯馬盟書』와 비슷한 蝌蚪書로 이루어져 있다. 내용은 晋나라 六卿 가운데 한 사람이 중심이 된 盟約書로서『侯馬盟書』와 함께 당시의 제도를 알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溫縣盟書』는『侯馬盟書』와 같이 楚나라 簡牘 서체와 유사한 점이 많이 있다. 盟書나 簡牘 서체가 모두 실용의 과정에서 탄생한 서체이기 때문에 꾸밈이 적고 자연스러운 미감이 많은 것이 특징이다. 실용의 서사 행위에서는 당시에 사용되고 있는 가장 일반적인 筆劃과 자형이 쓰이는 것이 보통이다. 따라서 盟書와 簡牘 서체를 연구하면 春秋 戰國시대에 보편적으로 사용된 서체와 그 변화 과정을 알 수 있다.『溫縣盟書』는 붓으로 쓴 墨書이며 전체적으로 篆書의 자형을 갖추고 있으나 부분적으로 간략하게 한 筆劃이 많이 나타나고 있으며 여러 사람이 쓴 까닭에 서풍이 매우 다양하다. 筆劃은 가는 것과 굵은 것, 布置는 정제된 것과 자유스러운 것 등 다양하게 나타나지만 자형과 筆法은『侯馬盟書』의 특징과 비슷하여 起筆은 무겁고 굵으며 收筆은 가볍고 뾰족하다. 이와 같은 서체를 蝌蚪書라 부르기도 하는데 戰國시대의 簡牘 서체에까지 조금씩 보이다가 秦나라가 六國을 통일한 이후에는 나타나지 않고 있다.
2. 竹簡과 木牘
先秦시대의 서체를 기록하는 방법으로 분류하면 새겨진 서체, 鑄造되어진 서체, 쓰여진 서체의 세 가지이다. 새겨지거나 鑄造되어 이루어진 서체는 甲骨文, 金文, 刻石, 陶文, 印章 등이 있으며 쓰여진 서체는 簡牘, 帛書, 盟書 등이 있다. 그리고 일부의 甲骨文이나 陶文에도 쓰여진 문자가 있으나 숫자가 매우 적다. 先秦시대의 鑄刻되어 있는 서체는 대부분이 大篆 계통의 古體字인 반면에 簡牘이나 帛書 그리고 盟書는 고체와 今體가 모두 나타나고 있는 것이 매우 큰 특징이다. 先秦시대에는 아직 종이가 보편적으로 사용되지 않았기 때문에 禮樂의 행사와 목적으로 사용되던 金文이나 刻石 서체 이외에 일상의 기록은 簡牘이나 비단을 주로 사용하였다.
현재까지 발견된 簡牘 작품으로 가장 오래된 것은 戰國시대의『曾侯乙墓竹簡』으로 밝혀지고 있으나 簡牘이 사용된 시대는 이보다 훨씬 이전일 것이라 추정되고 있다. 다만 簡牘이 목재로 이루어진 까닭에 청동이나 석재보다 쉽게 썩기 때문에 春秋시대 이전의 작품이 발견되지 않고 있을 뿐이다. 이와 같이 추정하는 근거는 甲骨文과 金文에 이미 ‘冊’자가 사용되고 있었으며 고문헌에도 簡牘에 관하여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尙書·多士篇』에 “惟殷先人有冊有典”(殷나라 先王은 사실을 기록한 典冊이 있었다.)이라는 기록이 있으며『墨子‧明鬼篇』에는 “故書之竹帛, 傳遺後世子孫”(竹帛에 써서 후세의 자손에게 전한다.)이라 하였으며 또한『韓非子‧安危篇』에도 “先王寄理於竹帛”(先王은 竹帛의 기록에 의거하여 다스렸다.)이라 기록하여 春秋시대 이전부터 竹帛이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게 한다.
戰國시대 簡牘의 출토에 관하여 기록한 옛 문헌이 몇 가지 전해지는데 그 중에서 중요한 문헌은『漢書』,『晉書』,『南齊書』 등이다.『漢書‧藝文志』에는 漢나라 武帝때 魯恭王이 孔子의 옛집을 허물 때 簡牘에 기록된『尙書』,『禮記』,『論語』,『孝經』 등을 얻었다고 기록하였고『晉書‧束晳傳』에는 晉나라 武帝 太康 2년(281)에 戰國시대의 魏나라 襄王의 무덤에서 竹簡 수 십 점을 얻었다고 기록하고 있으며『南齊書‧齊惠太子傳등』에는 建元 원년(499)에 戰國시대의 楚나라 昭王의 무덤에서 簡牘의『周禮‧考工記』를 얻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상에서 소개한 簡牘 서체는 모두 蝌蚪書라 전해지고 있으나 실물은 모두 소실되어 그 모습을 알 수 없다. 簡牘 서체가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20세기에 접어들면서부터이며 1970년대 이후에 매우 많은 양의 簡牘이 출토되어 서예사의 연구에 중요한 자료를 제공하고 있을 뿐 아니라 서예 작품의 창작에 훌륭한 소재가 되고 있다.
漢나라 시대의 許愼은『說文解字』에서 “簡, 從竹, 間聲”이라 하였고 “牘, 書版也, 從片”이라 하여 簡은 대나무를 재료로 하고 牘은 나무를 재료로 하고 있음을 설명하였다. 竹簡書에 관하여『儀禮·聘禮‧疏』에는 “連編爲策, 不編爲簡.”(연결된 編을 策이라 하고 단 編을 簡이라 한다.)이라 하였고 孔潁達은『左傳‧序』에서 “單執一札謂之簡, 連編諸簡乃名爲策.”(한 쪽의 竹片을 簡이라 하고 簡이 연결된 것을 策이라 한다.)이라 하여 하나의 竹片을 簡이라 하였으며 竹片이 연결되어 한 권으로 이루어진 것을 策이라 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策’자는 ‘冊’으로 쓰기도 하며 그 형상은 竹簡을 끈으로 묶은 형태의 象形字이다. 古文에서는 ‘冊’의 머리에 ‘竹’자를 더하여 冊의 재료는 대나무이었으며 여러 편의 竹簡을 끈으로 묶어 이루어진 것을 策(冊)이라 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牘은 秦나라가 六國을 통일한 이후의 명칭으로서 그 이전에는 板(版)이라 불렀으며 보통 하나의 판에 여러 줄의 글씨를 쓰는 용도로 사용하였으며 竹簡書과 같이 冊으로 묵어 사용한 것은 매우 적다. 木牘에 관하여 王充은『論衡·量知篇』에서 “斷木爲槧, 析之爲板, 力加刮削乃成奏牘”(나무를 자른 것을 槧이라 하고 쪼갠 것을 板이라 하며 깎고 다듬은 과정을 거친 것을 牘이라 한다.)이라 하였고『論衡‧慂力傳』에서 “書五行之牘.”(다섯 행의 글씨를 쓴 牘.)이라 하였으며『漢書‧循吏傳』에는 “一札十行, 細書成文.”(하나의 목판에 10행의 작은 글씨로서 문장을 이루었다.)이라 하여 牘은 나무를 깎아서 만든 서사 재료이었으며 하나의 목판에 여러 줄의 글씨를 쓰는 용도로 사용하였음을 기록하였다. 이상의 기록을 근거로 하고 또 현재까지 발견된 簡牘을 살펴보면 대부분의 簡은 대나무로 만들었고 牘은 나무판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竹簡과 木牘이라는 이름이 가장 많이 사용되고 있다. 그러나 폭이 좁고 한 줄로 글씨를 써 내려간 木片이 있으며 여러 줄의 글씨가 있는 竹片도 있기 때문에 竹牘이나 木簡 등의 이름도 사용되며 비단에 쓰여진 서체인 帛書와 함께 簡帛 문자나 서체로 불리기도 한다.
先秦시대의 竹簡書는 1930년 湖南省 長沙의 戰國시대 楚나라 墓誌에서 처음으로 발견되었으나 문자가 지워져 판독할 수 없었다. 1951년 長沙의 五里牌에서 戰國시대 후기의 竹簡書 38점이 발견되면서부터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하였다. 현재까지 발견된 先秦시대의 簡牘은 약 20여 곳에서 5000점이 넘고 있으며 그 내용과 형식은 經書, 遣策, 法律, 占卜등의 기록뿐만 아니라 일상의 사건과 역사 등 매우 다양하게 기록되어 있다. 또한 글씨가 분명하고 서체의 筆劃과 결구 그리고 章法이 다양하여 書藝學은 물론 문자학의 분야에서도 史料로서 매우 중요한 가치가 인정된다. 先秦시대의 簡牘 가운데 연대가 가장 빠른 것은 戰國시대 초기의『曾侯乙墓竹簡』으로 알려져 있으며 이밖에도 楚나라의 것으로『仰天湖楚簡』,『信陽楚簡』,『望山楚簡』,『包山楚簡』, 『郭店楚簡』 등이 있으며 秦나라의 것으로『靑川木牘』,『睡虎地秦簡』 등이 있다.
『曾侯乙墓竹簡』은 1978년 湖北省 隨縣의 戰國시대 曾나라 제후의 묘지에서 수많은 靑銅器, 漆器, 玉器 등과 함께 출토되었으며 현재 湖北省博物館에 소장되어 있다. 여기서 발견된 竹簡書은 모두 240점이고 글자 수는 약 6700자 이르며 현재까지 발견된 竹簡書 가운데 가장 오래된 戰國시대 초기 曾나라 시대의 작품으로 고증되고 있다. 曾나라는 문헌에서 隨나라로 기록되기도 하며 戰國시대 초기에 西陽(지금의 河南省 光山縣부근)에 도읍을 정하고 발전하였다.『曾侯乙墓竹簡』의 시대는 함께 발견된 청동기의 형태와 명문 그리고 방사성 탄소 실험을 근거로 서기전 433년에서 서기전 400년으로 고증하고 있다. 중국 社會科學院의 李學勤 교수는『東周與秦代問名』에서 청동기 명문을 근거로 楚나라 惠王 56년(서기전 433)의 것이라 하였다.
『曾侯乙墓竹簡』은 길이가 72-75cm 정도이고 넓이는 1cm 정도이며 하나의 대나무 편에 쓰여진 글자 수는 적게는 4자부터 많은 것은 60자를 넘는다. 문장의 내용은 曾나라 군주를 장례 지낼 때 순장한 말과 수레, 병기, 청동기 등을 기록하고 있다. 이 竹簡書의 내용과 순장된 청동기의 명문을 근거로 하면 曾侯 乙의 장례에 楚나라 王公 귀족들이 많은 예물을 보낸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竹簡書에 기록된 관직의 이름이 楚나라 관직과 같거나 비슷한 것이 많이 있어서 曾나라는 楚나라의 제도를 채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楚나라와 曾나라 문화를 근거로 하여 학자들은 曾나라는 楚나라의 附庸國이었다고 고증하고 있다. 曾나라 시대의 金文 서체는 거의 楚나라 서체와 비슷하여 당시에 두 나라가 문화적으로 많은 교류가 있었음을 증명하고 있다.『曾侯乙墓竹簡』의 서체도 楚나라 竹簡書 서체와 비슷하여 起筆은 무겁고 굵으며 收筆은 가볍고 뾰족하다. 서체의 형태는 大篆과 비슷하나 筆劃은 篆書보다는 隸書의 느낌이 훨씬 많이 나는 것이 특징이다.
『信陽楚簡』은 1957년 河南省 信陽市 부근 長臺關의 戰國시대 楚나라 묘지에서 출토되었으며 현재 河南省文物硏究所에 소장되어 있다. 내용은 크게 두 가지로 하나는 고대의 문장을 기록한 竹書이며 또 하나는 죽은 사람에게 보내는 물건을 기록한 遣策이다. 竹書는 190점, 470여자로 비교적 많은 편이지만 모두 殘簡으로 남아 있어서 그 내용에 관하여는 周公의『刑書』라는 학설과『墨子』라는 학설 등 여러 가지로 통일되지 않고 있다. 그러나『信陽楚簡』의 죽서는 현재까지 발견된 서적의 기록 가운데 최초의 것으로 그 역사적 가치가 인정된다. 竹書의 竹簡書은 넓이 0.7-0.8㎝, 두께 0.1-0.15㎝, 길이30㎝ 정도이며 竹簡書의 중간과 양쪽 끝의 세 군데에 끈으로 묶어 책을 만든 흔적이 남아 있다. 遣策은 29점, 957자로 길이가 비교적 길어 70㎝에 가깝고 넓이도 거의 1㎝에 가까워 竹書의 竹簡書에 비해 길이가 훨씬 길다.
『信陽楚簡』의 연대에 관하여 郭沫若은 春秋시대 후기의 竹簡이라 하였고 河南省文物硏究所는『信陽楚墓』에서 戰國시대 초기의 竹簡이라 하였으며 中山大學의 古文字硏究室은『戰國楚竹簡槪述』에서 戰國시대의 중 후기의 竹簡이라 하는 등 많은 학설이 존재하였다. 1984년 출판된『楚文化考古大事記』에서 戰國시대 曾侯乙墓에서 출토된 유물과 楚墓의 유물을 비교하고 분석한 학자들의 연구를 근거로 戰國시대 중기의 목간으로 결론지었다.『信陽楚簡』은 古體에서 今體로 변천하는 과정에 있는 서체로 大篆과 隸書의 筆劃과 結字가 동시에 나타나고 있다. 起筆에서 藏鋒과 露鋒을 동시에 구사하고 있으며 결구는 비교적 빽빽하나 글자와 글자 사이를 넓게 布置하였다. 이와 같은 筆法과 章法은 秦漢시대의 簡帛과 刻石 隸書의 결구와 章法에 많은 영향을 끼치게 된다.
『仰天湖楚簡』은 1953년 湖南省 長沙의 仰天湖에서 출토되어 현재 湖南省 文管會에 소장되어 있다. 戰國시대 竹簡이 발견되었다. 이 竹簡은 모두 43점으로 길이가 약 22cm 넓이가 1cm정도이며 내용은 각종 기물의 이름과 수량을 기록한 것이다. 그 가운데 많은 양이 의복과 견직물의 명칭이며 청동기, 철기, 옥, 나무 등으로 만든 기물의 이름도 나타나고 있다. 따라서 이 竹簡은 戰國시대의 문자를 연구하는 중요한 재료가 될 뿐 아니라 당시의 방직 기술과 의복 제도 등 문화 전반을 연구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가 된다.
『仰天湖楚簡』의 서체는『信陽楚簡』과는 달리 露鋒의 筆法을 주로 사용하였으며 結字와 결구는 楚나라 金文 서체와 일맥상통한다. 筆劃의 시작과 끝은 가늘고 중간은 굵으며 곡선의 부드러움을 많이 응용하였으며 偏方形의 橫勢를 취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와 같은 서체를 후세 사람들은 蝌蚪書에서 변화한 서체로 이해하였다.『晉書』에 “蝌蚪文者, 周時古文也, 其頭粗尾細似蝌蚪之蟲, 故俗名之焉.”(蝌蚪文은 周나라 시대의 古文으로 그 시작은 굵고 끝은 가늘어 마치 올챙이와 닮았기 때문에 민간에서 그렇게 이름 붙여 불렀다.)이라 하여 蝌蚪書에 관해 설명하였다. 현재 완전한 모양의 蝌蚪書는 전하는 것이 없으며 보통 春秋 戰國시대의 盟書류 서체에서 蝌蚪書의 흔적을 찾을 수 있다.
『包山楚簡』은 1986년과 1987년 사이에 湖北省 荊門市 부근 包山의 戰國시대 楚나라 묘지에서 출토되었으며 현재 湖北省博物館에 소장되어 있다. 문자가 있는 竹片은 278점이며 전체의 글자는 일만 자를 넘고 있다. 竹簡書의 크기는『信陽楚簡』과 비슷하여 길이는 약 55㎝-73㎝이며 폭은 약 0.7㎝-0.9㎝정도로 하나의 竹簡書에 보통 50-60자의 글씨가 쓰여져 있으며 많은 것은 90여자에 이른다. 내용은『老子』,『周禮』 등 經書를 기록한 竹書와 점을 치거나 제사 지낸 기록 그리고 遣策 등의 세 종류이다.『包山楚簡』은 내용이 다양하면서도 수량이 많을 뿐만 아니라 대부분이 연대를 기록하고 있어서 楚나라의 역사와 법률과 관직 제도 등을 연구하는 중요한 자료가 된다. 특히『包山楚簡』 가운데에는 한 편의 대나무에 두 줄 이상의 글씨가 쓰여져 있는 竹牘이 발견되고 있어서 簡牘의 연구에 새로운 轉機를 마련하게 되었다.『包山楚簡』이 발견되기 이전까지 한 쪽의 대나무에는 한 줄의 글씨만 적혀 있는 竹簡書만 출토되는 것이 보편적 현상이었으나 한 쪽의 대나무에 여러 줄의 글씨를 써넣은 竹牘의 발견은 竹簡書과 木牘의 고정된 개념을 깨트리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信陽楚簡』과『包山楚簡』은 戰國시대 楚나라 竹簡書 서체를 대표하는 작품으로 古體에서 今體로 변화하는 과정에 있는 서체로 그 예술성이 매우 뛰어나다고 평가된다. 筆劃, 결구, 章法 등이 다양하여 한 사람의 글씨가 아니라 여러 사람에 의해 쓰여진 작품임을 알 수 있다. 楚나라 竹簡書 서체의 고유의 형태를 취하고 있으나 다른 楚簡에 비해 간략하게 한 筆劃이 많이 나타나며 隸書의 형태로 더욱 진행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상에서 예로 든 簡牘 작품은 모두 戰國시대의 楚나라 竹簡으로 출토된 양이 많을 뿐 아니라 그 범위도 매우 넓다. 先秦시대의 簡牘은 楚나라와 秦나라의 작품만 발견되고 있을 뿐 다른 나라의 簡牘은 아직 발견되지 않고 있다. 그러나 木牘은 戰國시대 秦나라의 것만 발견되었을 뿐 다른 六國의 것은 발견되지 않고 있다. 秦나라의 簡帛 작품으로는『靑川木牘』,『睡虎地秦簡』,『放馬灘秦簡』,『楊家山秦簡』 등이 있다.
『靑川木牘』은 1979년 四川省 靑川縣의 戰國시대 秦나라의 묘에서 출토되었으며 四川省博物館에 보관되어 있다. 靑川에서 발견된 木牘은 두 점이지만 한 점은 글씨가 거의 모두 지워져 서체와 내용을 알 수 없고 다른 한 점은 비교적 완전한 형태이다. 길이 46cm, 넓이 2,5cm, 두께가 4mm 정도의 녹나무 판의 앞면과 뒷면에 모두 글씨가 있으며 앞면은 3행으로 모두 121자이고 뒷면은 4행으로 모두 33자이다. 내용은 秦나라 武王2년에서 4년(서기전309-서기전 307)의 丞相인 甘茂 등에게 명하여 農田法을 수정하게 하는 법률문이다. 따라서 이 木牘의 田律을 연구하면 戰國시대 秦나라의 田畝 제도와 토지를 관리한 자세한 상황을 알 수 있다.
『靑川木牘』은 지금까지 발견된 최초의 木牘으로 大篆에서 隸書로의 변천이 거의 모두 진행된 형태의 서체이다. 象形性의 篆書 형태는 몇 글자밖에 없으며 대부분이 隸書의 筆劃과 結字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미 波磔의 筆劃이 탄생하고 있다. 隸書의 특징인 偏方形의 字勢를 취하고 있으며 필순이 현재의 방법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아직 漢隸와 같이 筆劃에서 波磔이나 撇捺이 발달하지 않았으며 자형에도 象形性이 남아 있어서 완전한 隸書라고 보기는 어렵다. 이와 같이 波磔이 발달하지 않았으며 非篆非隸의 형태인 서체를 일반적으로 古隸라 부른다.『靑川木牘』과 같은 古隸 서체의 출현은 隸變의 시기를 戰國시대 중기 이전으로 주장하는 학설에 큰 힘이 실리는 증거가 되었다.
『睡虎地秦簡』은 1975년 湖北省 雲夢縣 睡虎地의 秦나라 시대의 墓에서 출토되어 현재 湖北省博物館에 보관되어 있다. 이 秦簡은 1155점, 수 만 자에 달하는 많은 양으로 戰國시대 후기의 昭襄王 원년에서 始皇 5년(서기전306-서기전217)에 이르기까지의 작품으로 고증되었다. 문장의 내용과 형식은 매우 다양하여 昭襄王시대부터 秦始皇시대까지의『編年紀』,『語書』,『秦律』,『效律』,『秦律雜抄』,『日書』 등이 기록되어져 있다. 특히 睡虎地에서는 竹簡書 이외에 두 점의 木牘이 함께 출토되어『靑川木牘』 이후의 木牘 서체의 연구에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이 木牘의 내용은 戰線의 병사가 집으로 보낸 書信으로 현재까지 발견된 것으로는 최초의 편지글이다.
『睡虎地秦簡』의 書體는 정방형, 장방형, 偏方形 등 매우 다양하고 筆劃도 가는 것, 굵은 것, 강한 것, 부드러운 것 등 형태가 다채롭고 변화가 풍부하다. 筆劃에서 이미 起伏과 굵기의 변화가 생겨나고 있으며 특히 波磔이 거의 완성의 단계로 접어들고 있다. 또한 훗날 漢隸에서 완성된 隸書의 結體와 字勢가 많이 있을 뿐만 아니라 金文과 같은 大篆의 결구와 자형이 함께 나타나고 있다. 이와 같은 현상은 隸書가 小篆에서 변천한 서체가 아니라 小篆과 함께 大篆에서 변천하였으며 동시에 사용된 서체임을 증명하는 것이며 漢隸는 秦나라의 隸書를 계승하여 완성한 서체임을 알 수 있게 한다.
『天水放馬灘秦簡』은 1986년 甘肅省 天水市 放馬灘의 戰國시대 후기의 秦나라 묘에서 출토된 竹簡으로 현재 天水市 文化館에 보존되어 있다. 모두 73점의 竹簡書 가운데 연대가 기록되어 있는 것이 8점이 있어서 그것을 근거로 秦나라 嬴政8년(서기전239) 이전의 작품으로 고증한다. 竹簡書의 내용은 墓地 주인의 일을 기록한 墓主記, 하루의 일을 점친 내용을 기록한 日書 등이다. 서체는 세로로 긴 結字와 字勢를 갖추고 있으며 글자의 크기와 자형이 들쭉날쭉 변화가 많고 筆劃과 筆劃 사이가 넓게 결구하고 있다. 간혹 大篆의 형태를 갖춘 글자가 있으나 대부분 筆劃을 간략화 하였으며 비록 波磔이 성숙되지는 않았으나 隸書의 자형으로 이루어져 있다. 가로의 筆劃은 무겁게 逆入하여 가늘게 뽑아 낸 釘頭鼠尾의 형태이고 꺾이는 부분을 둥글게 運筆하여 전체적으로 圓筆의 느낌이 많은 것이 특징이다.
3. 帛書
帛書는 일반적으로 비단에 글씨가 쓰여진 서체를 일컬으며 繒書, 絹書, 縑書 등으로 불리기도 한다. 중국에서 언제부터 비단이 사용되었는지 자세히 알 수 없고 다만 서기전 3000년경에 嫘祖라는 사람이 織造法를 발명했다는 전설이 전하여 지고 있을 뿐이다. 비단이 사용되었던 증거는 殷商시대의 甲骨文에서 찾을 수 있다. 甲骨文에 ‘絲’, ‘蠶’, ‘帛’, ‘桑’, 등의 글자가 사용되어진 것으로 보아 商나라 때 이미 양잠과 직조 기술이 상당히 발전한 것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殷商시대 이전의 견직물은 아직 발견되지 않고 있으며 현재까지 발견된 최초의 견직물은 長沙의 楚나라 묘에서 출토된 비단으로 戰國시대 이전의 것으로 고증되고 있다.
비단이 書寫의 재료로 사용되었던 것을 알 수 있게 하는 최초의 증거는 고대 문헌의 기록이다.『墨子』에 “書之竹帛, 傳遺後世子孫.”(竹簡書과 비단에 적어서 후세의 자손에게 전하였다.)이라 하였고『晏子春秋』에 “著之於帛.”(비단에 기록하다.)이라 하였으며『越絶書』에 “越王以丹書帛.”(越王은 丹砂로 비단에 썼다.)이라 기록하고 있는 것을 볼 때 帛書가 春秋시대에 이미 상당히 광범위하게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아직까지 春秋시대 이전의 帛書는 발견되지 않고 있으며 시대가 가장 빠른 帛書는『子彈庫楚帛書』로 戰國시대 중기의 楚나라 작품이다.
竹簡書 木牘은 재료를 구하기가 쉬운 반면에 부피가 많아 휴대하거나 보관하기가 곤란한 단점이 있다. 진시황이 六國을 통일한 후 매일 처리한 공문서가 한 섬이 넘었으며 西漢시대에 東方朔이 武帝에게 올린 상소문이 3천 점의 木牘으로 두 명의 장정이 皇宮으로 옮겼다는 이야기는 簡牘의 불편함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좋은 예이다. 비단은 簡牘과 달리 보관하거나 휴대하기가 편리하다는 장점이 있으나 가격이 비싸다는 것이 단점이다.
漢나라 시대에 한 필의 비단은 여섯 섬의 쌀값과 비슷하였다는 기록을 볼 때 일반인의 서사 재료로는 簡牘이 많이 사용되었으며 비단은 특별한 계층에서만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현재까지 출토된 帛書의 내용을 살펴볼 때 비단을 서사 재료로 사용한 계층은 당시의 王公 귀족이나 국가의 중요한 기록을 담당하는 사람들에 국한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것을 살펴볼 때 先秦시대의 서사 재료로는 비단보다 簡牘이 많이 사용되었을 것은 당연하며 또 방직물이 쉽게 훼손되고 썩어 버리는 성질이 있기 때문에 남겨진 자료도 簡牘보다는 훨씬 적은 편이다. 20세기 이전에는 帛書가 거의 발견되지 않았으나 1908년 甘肅省 敦煌부근에서 최초로 東漢시대의 帛書가 발견되어 학계의 관심을 받았으며 1940년대에 이르러 湖南省의 長沙에서 戰國시대 중기 楚나라의 帛書가 2점 발견되면서 考古學界와 書藝學界에 帛書에 관한 관심이 집중되기 시작하였다. 지금까지 발견된 先秦시대의 帛書는『子彈庫楚帛書』,『子彈庫楚帛書殘片』,『馬山楚墓絹書』 등으로 그 수량이 매우 적은 편이다.
『子彈庫楚帛書』는『楚繒書』로 불리기도 하는 戰國시대 중기의 楚나라 帛書로 1942년 湖南省 長沙의 子彈庫에서 출토되어 현재 미국 뉴욕의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이 帛書는 길이가 47cm 넓이가 38.7cm의 비단에 900여자의 글씨가 두 단락으로 나누어져 서로 반대로 배열되어져 있으며 사면의 가장자리에는 12개월의 神象이 그려져 있고 네 귀퉁이에는 채색된 식물 그림이 布置되어 있다. 원본은 이미 낡아서 겨우 270여자의 문자만 읽어 낼 수 있고 자외선으로 촬영한 사진에 의해 그 내용을 판독 할 수가 있다.『子彈庫楚帛書』는 지금까지 발견된 최초의 帛書이며 先秦시대의 것으로 유일하게 완전한 형태를 갖추고 있는 帛書로서 내용은『四時』,『天象』,『帝名』,『神名』 등을 기록하고 있다. 이 帛書는 陰陽五行에 관련된 문헌 자료이며 동시에 비교적 원시 형태이나 고대의 천문 저작이라 할 수 있기 때문에 이것은 고대 사람들의 하늘관, 제사의 禁忌, 역법 등을 알 수 있을 뿐만 아니라 楚나라 민족의 형성 및 중국 고대의 신화를 알 수 있는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子彈庫楚帛書』는 楚나라의 簡牘 서체와 매우 닮은 형태로 篆書에서 隸書로 변화하는 과정에 있는 글씨이다. 筆劃의 起筆은 굵고 收筆은 가늘게 運筆 하였으며 특히 가로획을 시작할 때는 큰 점을 먼저 찍은 다음 運筆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가로획에서 직선의 사용을 피하고 있으며 마치는 부분을 아래고 향하게 하여 筆意를 연결되게 하였다. 行筆에서 누르거나 들고 멈추는 흔적이 없이 運筆하였으며 곡선을 많이 사용한 圓筆이 주종을 이루고 있다. 結字에서는 ‘天’, ‘下’, ‘可’, ‘丙’, ‘辰’자 등의 머리에 가로로 한 획씩을 추가하는 등 羨劃(글자에 추가로 획을 더한 것)을 사용하여 문자에 예술적 꾸밈을 더하였다. 結體와 결구에서는 가로로 긴 偏方形을 취하여 隸書의 字勢가 느껴지며 행간을 가지런하게 布置하였고 자간에서도 균일한 간격을 유지하고 있다. 郭沫若은 논문『古代文字之辨證的發展』에서 이 帛書를 “···글씨를 쓰고 그림을 그린 사람은 당시의 민간 巫俗人이 틀림없다. 字體는 비록 篆書이나 金文과는 성격을 달리하고 있다. 筆劃이 간략하게 변화하고 偏方形의 자형은 후대의 隸書에 접근하고 있다. 당시의 簡牘과 陶文의 서체와 비슷하여 민간의 俗書라고 할 수 있다.”라 하여『子彈庫楚帛書』가 篆書에서 隸書로 변천하는 과정의 서체라 평가하였다.
『子彈庫楚帛書』와 함께 출토된『子彈庫楚帛書殘片』은 모두 14편으로 글자가 가장 많은 것이 14자이며 篆書와 隸書사이의 서체이다. 殘片으로 남아 있으나 글자가 완전한 형태를 유지하고 있어서 당시의 서체를 연구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가 된다.『馬山楚墓絹書』는 1982년 湖北省 江陵縣에서 출토된 楚나라 시대의 帛書로서 모두 3자이다. 1985년 출판된『江陵馬山一號楚墓』에서 이 帛書를 서기전 278년 이전의 戰國시대 중 후기의 글씨로 고증하고 있다.『子彈庫楚帛書』와 같이 起筆을 굵게 하고 收筆을 가늘게 運筆하였으며 轉折에서 곡선을 사용하는 등 서체는 다른 帛書와 비슷하나 공간의 안배가 매우 돋보이는 것이 특징이다. 이 帛書가 비록 3자 밖에 안되지만 다른 帛書와 비교하여 서체의 발전 과정을 알 수 있는 자료로서의 가치가 인정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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