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근대 건축사는 한국 근대사의 제반 영역에서와 마찬가지로 전통의 단절과 새로운 양식의 굴절된 수용이라는 모순을 지니고 있다. 그 시작은 일제의 고적조사연구(古跡照査硏究)에 의한 문화유적 발굴 및 조사 작업에서 출발하여 역사의 왜곡과 문화재 도굴 및 수탈이라는 결과를 낳았으며, 전통민가(傳統民家)의 조사 작업을 통해 전통 생활방식은 비합리적이라 폄하되고 일본식·서구식 절충형 가옥구조로의 개량화를 양산하게 되었다. 따라서 이 시기에 우리의 건축물들이 어떻게 조사·연구되었고 또 어떻게 변모되었는가를 살피는 것은 식민지 공간에서 건축이 정책에 어떻게 이용되었는지를 알 수 있는 좋은 예가 될 것이다. 이에 대한 흐름을 소략하게나마, 이번 전시에 소개되는 문헌을 중심으로 서술하고자 한다.
일제강점기의 고적조사사업은 1893년 도쿄제국대학(東京帝國大學)의 이과대학에 인류학교실을 개설하고, 이미 조선에 일본인 연구자 야기 쇼사부로(八木獎三郞, 1866-1942)를 파견하여 고분을 조사하고 토기를 수집하면서 시작되었다. 러일전쟁을 전후로 한국에서의 지위를 더욱 확고히 다지게 된 일본은 고적조사사업을 본격적으로 진행했는데, 이 사업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맡았던 사람이 세키노 다다시(關野貞, 1868-1935)였다. 그를 중심으로 다니이 세이이치(谷井濟一), 쿠리야마 슌이치(栗山俊一) 등이 도쿄제국대학의 지시로 1902년 대한제국 정부의 지원까지 받아 가면서 자유롭게 한국의 고적조사를 진행하였으며, 이때 조사한 내용이 1904년에 『한국건축조사보고(韓國建築調査報告)』(이에 대한 전시도서는 1990년 후대 복각본인 『한국의 건축과 예술』이다)로 간행되었다. 이 책에서 그는, 조선 건축사에서 중국의 영향을 강조하면서 조선시대의 건축은 일본보다 뒤떨어져 볼만한 것이 없다고 결론짓고 있어, 당시 일본인의 한국에 대한 인식을 읽을 수 있다.
이후 세키노의 두번째 조사는 1909년에 대한제국 탁지부(度支部)의 의뢰로 이루어졌고 1912년까지 모두 다섯 차례에 걸쳐 한반도 전역으로 확대되었으며, 조사 대상도 건축물 외에 고분, 성곽 및 미술품으로 확장되었다. 그의 조사방법은 유물의 전체 형태나 세부의 면밀한 관찰, 유사한 것과의 비교를 통해서 유물의 조성 연대를 판정하고 특징을 도출해내는 실증적인 것이었다. 이러한 조사를 통해서 부석사(浮石寺) 무량수전(無量壽殿)을 비롯한 많은 건축물의 건립연대를 판정하고 시대적인 특징을 그려냈다. 이러한 내용은 세키노 사후 그의 조사보고서, 논문, 강연내용 등이 그를 추모하는 기념사업회가 발행한 논문집인 『조선의 건축과 예술(朝鮮の建築と藝術)』(岩波書店, 1941)에 모두 수록되어 있다. 주로 세키노에 의해 실시된 1909년부터 1915년까지의 한반도 고적조사사업은 이후 1916년부터 조선총독부가 조직과 법령을 마련하면서 본격적으로 진행되었다. 이 사업은 한국의 고대사회부터 고려시대까지의 유적을 발굴조사 대상으로 삼고 있었으며, 지역적으로는 한반도 전체를 아우르고 있었다. 특히 그 가운데서도 한사군(漢四郡) 치지(治地)인 낙랑군(樂浪郡) 및 가야(伽倻) 지역에 관심이 집중되었는데, 여기에는 한반도가 역사 이래로 중국의 영향력 아래에 있었음을 강조하고, 이를 통해 한민족의 독자성을 부인하여 일제의 한국 침략과 지배를 역사적으로 정당화·합리화하려는 타율성론의 의도가 반영되어 있었다. 본격적인 조사가 이루어진 첫 해의 결과물로 『조선고적조사보고(朝鮮古蹟調査報告)』(1917)가 나왔고, 이번 기획전에 1974년 일본 국서간행회(国書刊行会)에서 발행한 영인본이 전시되어있다. 1916년에서 1937년까지 진행된 이 사업은 모두 17권의 『조선고적조사보고』로 결과물이 남았으며 조사사업에서 수집된 사진을 토대로 하여 도판을 중심으로 조선의 고대문화를 소개한 것이 조선총독부에서 펴낸 『조선고적도보(朝鮮古蹟圖譜)』(전15권, 1915-1935)이다. 이 도보는 낙랑(樂浪)·대방(帶方) 시대에서 시작하여 조선시대에 이르고 있다.
고적조사사업에서 수집된 유물들은 공식적으로는 조선총독부의 인가를 받아 박물관으로 들어가게 되었으나, 일본으로 유출되는 경우가 많아 철저한 보존 작업 관리가 이루어지지 못했다. 박물관에 진열된 유물은 일찍부터 한국의 문화가 중국과 일본의 영향을 받아 형성되고 진행되어 왔다는 식민사관의 타율성론을 실질적으로 입증하는 증거품으로 활용되었다.
이 외에 왕권을 상징하던 조선의 궁궐은 헐리거나 일반에 매각되고, 박람회장, 동물원, 식물원 등으로 변모하여 일반에게 공개됨으로써 그 위상이 격하되었다. 사직단(社稷壇), 원구단(圜丘壇)과 같은 제단은 철거되고 그 자리에 호텔이 지어지거나 일본식 신사(神社)가 조영되었다. 또한 새로운 도시정비와 도로건설의 명목으로 한양도성(漢陽都城)의 성벽이 철거되고 서대문은 사라지게 되었다. 이렇듯 조선의 상징적 건물은 물론 도심의 구조가 변화되면서, 경성을 중심으로 민가의 개량은 생활의 개선과 함께 필수적인 문제로 떠오르게 되었다.
『조선의 건축과 예술』(關野貞, 岩波書店, 1941) 중 부석사 무량수전의 도면이 실린 부분.
세키노 다다시는 고려시대에 건립된 부석사 무량수전을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건축물임을 처음으로 밝혔다.
조선민가(朝鮮民家)에 대한 조사연구는 강점(强占) 직후 시작된 조선의 구관(舊慣) 조사에서 시작되었다. 이 사업은 조선의 문화와 역사에 대한 사전조사로 토지, 가족제도, 양반제도, 종교 및 풍습, 농가경제, 지방제도, 조선어 편찬 등 각종 식민지 행정자료를 제공하기 위함이었다. 1920년 이후에는 부락의 연혁 및 변천, 주민의 경제 및 사회 상태를 실제로 조사하는 방향으로 전환하게 되었다. 한국 근대 최초의 민가 조사라 할 수 있는 『조선부락조사특별보고(朝鮮部落調査特別報告) 제1책 민가(民家)』(조선총독부, 1924)는 일본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 건축학과 교수 곤 와지로(今和次郞, 1888-1973)가 조선총독부의 의뢰를 받아 1922년 9월부터 10월까지 한 달 동안 개성, 평양, 함흥, 김천, 전주, 대구, 경주 등의 살림집을 조사한 보고서이다. 그러나 이 보고서는 조선민가 조사를 통해 일본민가나 사찰의 기원을 찾는 데 방향을 두어, 조선민가의 유형을 일반형과 북부형으로 분류한 다음, 일본민가의 유형이 조선민가의 북부형과 유사하다고 지적하고 있다. 특히 그는 조선의 온돌문화를 이동민족들에 의해 조선에 전파된 세계사적으로 발달된 문화양식으로 높이 평가하여 조선총독부의 ‘온돌폐지론’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다. 1920년대 당시 온돌에 대한 일본인들의 생각은 에너지효율이나 위생 등 기능적인 면에서 부정적인 평가를 가지고 있었다. 또한 온돌은 너무 많은 열이 전달되어 조선인들의 행동을 둔화시키고 게으르게 만든다고 평하여 일본인들은 ‘온돌망국론’을 주장하기도 했다.
이후 조선 살림집에 대해서는 적지 않은 논문이 여러 발간물을 통해 발표되었다. 그 중 『조선과 건축(朝鮮と建築)』이 중요한 발간물의 하나로, 건축 단체인 조선건축회(朝鮮建築會)가 1922년부터 1945년까지 간행한 기관지이자, 한국에서는 최초로 발행된 건축 전문지이다. 발간 초기에는 주생활(住生活)과 밀접하게 연관된 주택의 본질적인 문제, 생활과 주택 등 일반적인 논의를 하였으며, 1930년대에는 지역별·시대별·구조별 등으로 나누어 글이 게재되었는데, 지역별 연구에서는 조선민가를 북부지방형, 중부지방형, 남부지방형, 경성지방형, 서양형으로 나누고 있다. 가장 빈번한 주제는 주생활 방식의 개선에 따른 주택구조 및 설비의 개선이었으며, 이러한 논의가 구체적인 시안으로 제시되기도 했다.
주생활의 개선은 단순히 주택의 구조적 물리적 개량뿐만 아니라 주택이 담고 있는 생활양식의 변화를 전제로 하는 중요한 논제였으며, 당시 건축가들은 합리적인 개량주택으로서의 새로운 주택양식을 찾고자 했다. 행랑채의 폐지, 사랑채와 안채의 통합 관계, 안방과 부엌의 위치 변화, 부엌과 온돌의 개량 등이 논의되었으며, 특히 사랑채와 안채의 통합 문제와 온돌 문제는 조선식 주택개량의 주된 과제였다. 1940년대에 들어와서는 ‘문화생활’ ‘문화주택’ 등과 같은 합리주의적 이념을 담은 소주택(小住宅)이 보급되었다. 또한 황국신민화정책(皇國臣民化政策)과 맞물리면서 주택을 철저하게 일본정신을 기를 수 있는 장소로 삼았다. 『조선과 건축』 제22집 8호(1943년 8월)를 보면, 조선건축회가 개최한 좌담회에서 주택개량을 위한 사항이 제시되었다. 즉 일본풍을 유도하도록 일본식 ‘도코노마(床の間)’(바닥을 한층 높게 만든 곳에 족자를 걸고, 꽃이나 장식물을 꾸며 놓은 곳)와 ‘카미다나(神棚)’(집안에 신을 모셔 놓은 감실)를 설치하고 온돌을 한 칸 외에는 다 없애고 나머지를 내지식(內地式, 일본식)으로 하여 표준주택을 만들 것 등이 명시되었다.
이상을 정리하면, 해방 이전 일본인 학자들로부터 시작된 한국민가에 대한 연구는 특정한 학문체계나 이론을 배경으로 했다기보다는 조선총독부의 식민통치를 위한 시정자료(施政資料)로서의 필요성이나 다른 민족의 주거에 대한 호기심에서 비롯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민가의 유형을 분류하고 이들의 분포권을 설정한 것은 해방 이후 지리학적 접근방법의 근거를 마련해 주었다는 의의를 지닌다. 일제의 조선고적조사 역시 ‘본격적인 근대적 시각방식에 의한 연구’라는 의미를 둘 수 있다. 그러나 그 목적이 어디까지나 식민정책을 위한 조사연구였으며, 해방 이후 한국건축사에 기형적 토대를 마련하였음은 분명히 인지해야 할 것이다. 이번에 특별 대여 전시된 『조선과 건축』, 『조선부락조사특별보고』 그리고 열화당책박물관이 소장한 일제강점기 건축 관련 조사보고서 등을 통해, 광복 칠십 주년을 맞이하여 우리 건축의 아픈 역사를 돌아보는 기회가 되었으면 한다.■
『조선과 건축』 제8집 1호(1929년 1월)와 제11집 1호(1932년 1월) 표지.
조선건축회는 매년 연말 『조선과 건축』 표지도안의 설계공모를 실시하여 당선된 작품을 일 년간 잡지의 표지도안으로 사용하였다.
이 잡지에는 문학인 이상(李霜)의 표지디자인·일문 시(詩)·건축비평 등이 실려 자료로서의 가치가 높다
.(왼쪽, 가운데) 조선건축회가 주최한 조선주택의 개량을 논한 좌담회(「朝鮮住宅の改良を語る」)에 대한 기사,
『조선과 건축』 제22집 8호(1943년 8월). 1940년대는 비상전시체제에 돌입하고 일제의 황국신민화 정책과 맞물리면서 주택개량의 이념을 ‘황민화(皇民化)’에 중점을 두었다.(오른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