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프 연극부의 조직 변천에 관한 연구
―극단 이동식소형극장과의 관계를 중심으로
박영정 / 건국대 강사
목 차
1. 머리말
2. 카프 영화부와 신흥영화예술가동맹
3. 카프 연극부의 조직 변천 과정
1) 카프 연극부와 극단 청복극장
2) 극단 이동식소형극장과 극단 메가폰
3) 극단 신건설과 카프 연극부
4. 맺음말
1. 머리말
한국 프롤레타리아 연극운동은 1930년대 전반기가 그 전성기에 해당한다.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카프)에 ‘연극부’가 설치된 1930년 4월에서부터 극단 신건설(新建設)이 이른바 ‘신건설사건’으로 인해 활동을 중지한 1934년 6월 이전까지의 시기가 그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이 시기에 전국적으로 프로연극운동을 표방하고 나타난 극단들은 평양의 마치극장, 명일극단(明日劇團), 신세기극단(新世紀劇團), 대구의 가두극장(街頭劇場), 개성의 대중극장(大衆劇場), 해주의 연극공장(演劇工場), 원산의 조선연극공장(朝鮮演劇工場), 서울의 이동식소형극장(移動式小型劇場), 청복극장(靑服劇場), 메가폰, 신건설(新建設) 등 대략 10여 단체에 이른다.
그러나 이처럼 많은 극단들이 조직되었음에도 서울의 몇몇 극단을 제외하고는 이렇다 할 활동을 보이지 못한 채 창립과 해산을 거듭하였을 뿐이다. 물론 일제 당국의 프로연극에 대한 검열이나 프롤레타리아 극단에 대한 탄압을 고려하면 거듭되는 창립과 해산이 어느 정도는 불가피했던 것으로 보이며, 어떤 의미에서는 그러한 ‘계속적인 재조직’이야말로 프로연극의 강인한 생명력을 보여 주는 것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한효는 이러한 극단의 재조직 과정을, 카프 연극이 객관적 상황을 뚫고 나가기 위해 취했던 하나의 ‘전술’로서 받아들이고, 나아가 당시 프로연극인들의 ‘백절불굴의 투지’를 말해 주는 것이라며 긍정적 평가를 내리고 있다.
한효, ?조선 연극사 개요?, 국립출판사, 1956, 297~298면.
그렇지만 프로극단의 부침을 단지 객관적 상황의 작용으로만 설명할 수는 없지 않을까. 거기에는 주체적 역량의 문제를 비롯하여, 프로연극계 내부의 각 극단 또는 세력 사이의 노선 대립이나 조직론적 갈등의 작용도 작지 않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10여 개의 프로극단 가운데 실제로 공연 활동을 전개한 극단을 꼽아 보면 조선연극공장과 이동식소형극장, 극단 메가폰, 극단 신건설 등 모두 네 단체에 불과하다. 외부로부터 주어진 객관적 상황을 어느 정도 동일한 조건으로 보았을 때, 소수 극단만이 공연을 했다는 것은 일제의 탄압이라고 하는 객관적 상황 못지 않게 개별 극단의 주관적 역량의 문제가 프로극단들의 공연 활동에 크게 작용하였음을 말해 주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1930년 4월에 발족한 카프 연극부는 프로연극운동의 지도기관으로서 설치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실제에 있어서는 각지의 프로극단과 조직적 연계를 구축하거나 나아가 그들의 활동에 대한 지도를 제대로 수행하지는 못한 것으로 보이며, 결국 프로연극운동의 전국적 통일이 이루어지지 못한 채 각 극단의 개별적 역량 여하에 의존하여 그 활동이 전개되었던 것이다. 즉, 1930년대에 등장한 각각의 프로극단들이 단일한 조직적 대오를 갖추고 활동을 전개한 것은 아니었던 것이다. 1934년에 이르기까지 각지의 프로극단들과의 연계를 통해 ‘전국적 통일 조직’을 구축하는 것이 카프 연극부의 최우선의 조직 과제로 제기되어 있었다는 사실은 역으로 당시의 프로연극운동이 분산적으로 전개되었음을 반증해 주는 것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당시의 프로극단들이 분산적인 활동만을 전개했던 것은 아니다. 카프 연극부를 통한 전국적인 지도․통일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한 것은 사실이지만, 각 극단들 사이의 관계를 보다 면밀하게 추적하여 보면 그 내부에 조직적 친소관계 혹은 계보 관계가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게 된다. 카프 연극부와 각 개별 극단들의 관계, 특히 극단 이동식소형극장과의 관계를 규명하여 보면, 1930년대 프로극단이 몇 가지 계열체를 형성하고 있음을 알 수 있게 된다.
이에 본고에서는 1930년대 전반기의 프로연극운동 진영을 형성하였던 각 극단들의 조직적 관계를 고찰하는 것을 주 목적으로 삼고자 한다. 그 큰 줄기를 말하면 ‘카프 연극부’와 여러 프로극단들 사이의 조직적 관계를 검토하는 일이 될 것이다. 특히 카프 연극부와 극단 ‘이동식소형극장’의 관계를 따져 보는 가운데, 1930년대 전반기 한국 프로연극운동에 조직적으로 두 개의 계열이 존재하였음을 밝히고, 이를 통해 각 프로극단들의 부침 과정을 일정한 조직론적 맥락 위에서 역동적으로 이해해 보고자 한다. 특별히 카프 연극부와 이동식소형극장의 관계를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하는 것은 이동식소형극장이 당시의 여러 프로극단 가운데서도 카프 연극부와 ‘의도적 거리’를 유지한 극단이었기 때문이다. 이 극단은 1930년 4월 프로영화 부문에서 ‘카프 영화부’와 대립한 바 있는 ‘신흥영화예술가동맹’(1929.12)에 조직적 뿌리가 닿아 있다. 즉, 이동식소형극장은 출발부터 카프 연극부와의 조직적 대립의 가능성을 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본고에서는 이 점에 주목하여 카프 연극부와 이동식소형극장의 조직적 관계를 밝히는 것을 주 목표로 하되, 그를 위해 먼저 카프 영화부와 신흥영화예술가동맹과의 관계를 밝히는 순서를 취했다.
카프 연극부 및 그 주변의 프로연극운동에 대해서 상당한 연구의 진전이 있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한효, 앞의 책.
유민영, ?한국근대연극사?, 단국대학교출판부, 1996.
역사문제연구소 문학사연구모임, ?카프문학운동연구?, 역사비평사, 1989.
정호순, 「한국 초창기 프롤레타리아 연극 연구」, 단국대 석사논문, 1991.
양승국, ?한국근대연극비평사 연구?, 태학사, 1996.
본고는 이러한 기존 연구에서 밝혀지지 않은 아주 새로운 내용을 담고 있지는 않다. 그보다는 기존 연구의 성과들을 수렴하여 재정리해 놓은 것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구체적으로는 카프 연극부와 이동식소형극장을 중심으로 조직 문제에 초점을 맞추어 다시 살펴본 것에 다름 아니다. 그렇지만 기존의 연구가 소홀히 지나친 조직 문제에 천착하여 재정리함으로써 프로연극운동 진영을 무조건 뭉뚱그려 취급하던 프로극단 사이의 조직적 관계를 보다 뚜렷이 밝혀 줄 것이다.
2. 카프 영화부와 신흥영화예술가동맹 카프 영화부와 신흥영화예술가동맹의 대립과 갈등의 전반적 흐름에 대해서는 이효인, ?한국영화역사강의1?, 이론과실천, 1992, 93~131면 참조.
1927년 이른바 ‘제1차 방향전환’을 통해 조직을 정비한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은 지역 지부의 설치와 ‘문호개방’을 통해 ‘정치적 대중조직’으로서의 성격을 구축하게 된다. 그리하여 지역 지부의 경우 비예술가들이 다수 가입하여 한때 160명 가까운 대조직으로 번창하기도 한다. 김기진, 「조선에 있어서 프롤레타리아 예술운동의 과거와 현재」, ?사상월보?, 1932.10. ; 임규찬 한기형 편, ?카프시대에 대한 회고와 문학사?, 태학사, 1989, 100면.
그러다가 1930년 4월 20일 중앙위원회를 개최하여 안막(安漠)․권환(權煥) 등을 새로운 중앙위원으로 선임하고, 부서 개편을 단행하여 기술부 산하에 전문부서로 문학부․영화부․연극부․미술부의 4부를 설치한다. ?조선일보?, 1930.4.29.
四. 技術部 委員 設置의 件
▲技術部 權煥(常任)
▲文學部 權煥(常任) 李箕永 韓雪野 朴英熙 宋影
▲映畵部 尹基鼎(常任) 林和 金孝植 李應鍾 朴完植
▲演劇部 金基鎭(常任) 崔承一 安漠 韓澤鎬 申英
▲美術部 李相大(常任) 安夕影 鄭河善 姜湖
▲書記 洪宰植(增選)
이처럼 기술부(장르별 예술 활동을 전개하는 부서)가 신설되었다는 것은 카프의 성격이 정치적 대중조직에서 예술운동 조직으로 변화되어 간다는 것을 의미함과 동시에, 문학부문에 한정되어 있던 기존의 활동이 전 예술 분야로 확대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역사문제연구소 문학사연구모임, 앞의 책, 242면.
그런데 신설된 기술부에는 영화부의 임화와 김남천을 비롯하여 연극부의 안막과 한택호, 문학부 및 기술부 상임 위원의 권환 등 동경의 ‘무산자사(無産者社)’ 출신이 상당수에 이른다. 조선프로예맹 동경지부(1927.10)의 조직 형태가 창립 당시부터 전문부 아래 ‘문학부․연극부․미술부․음악부’를 두었던 것을 고려하면 부서별 재편이 이들 동경 출신 활동가들과 관련되어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조선일보?, 1927.10.10.
특히 동경에서는 문학 이외에 연극 분야의 활동이 상대적으로 활발한 편이었다.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 동경지부의 ‘프롤레타리아극장’, 무산자사의 ‘무산자극장’의 활동이 그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박영정, 「일제강점기 재일본 조선인 연극운동 연구」, ?한국극예술연구? 3, 태동, 1993 참조.
그러한 경험을 바탕으로 1930년 4월 기술부 설치의 조직 개편이 동경의 무산자사 출신의 주도 아래 전개되었으며, 이후 이들이 카프의 주도권을 쥐고서 ‘문예운동의 볼세비키화’를 적극 추진하게 되는 것이다.
이로써 공식적으로 ‘카프 영화부’가 설치되며, 종래 자생적으로 발전해 오던 프롤레타리아 영화운동은 이제 카프의 지도 아래 재편되는 과정을 거치게 된다. 그리하여 카프 영화부에서는 당시의 프로영화운동에 참여하고 있던 단체 및 영화인들을 모두 카프 영화부의 조직적 지도 아래 편입시키고자 하는 노력을 기울이게 된다. 카프 영화부 설치 무렵의 프롤레타리아 영화운동은 ‘신흥영화예술가동맹(新興映畵藝術家同盟)’이라는 단체를 중심으로 전개되고 있었는데, 카프 영화부는 창설 직후 프로영화운동의 주도권을 쥐고자 ‘신흥영화예술가동맹’(이하 신흥영맹)의 해산을 권고하게 된다. 그러나 이미 조직적으로 활동을 전개해 오던 신흥영맹 측에서 카프 영화부의 권고를 거부함으로써 프로영화운동 진영 내부의 대립이 일어나게 된다. 이는 중앙에 기술부를 설치하여 각 장르별 예술운동의 주도권을 쥐고자 한 카프 중앙과 기존의 자생적 예술운동 단체 사이에 생긴 갈등으로서, 단지 영화 부문의 내분에 그치지 않고 이후 연극․미술 분야에까지 그 파장이 미치게 된다는 점에서 카프 조직 연구에서 주목을 요하는 대목이다.
여기에서 잠깐 1930년 이전의 프로영화운동에 대해 개관해 보기로 하자.
1925년 조선프로예맹 출범 이후 1930년에 이르기까지는 문학부문을 제외한 프로예술운동은 매우 빈약한 것이었다. 연극부문에 있어서는 김복진(金復鎭)․김기진․안석영(安夕影)․박영희(朴英熙) 등 카프 맹원들이 참여하여 조직한 ‘불개미극단’(1927.1) ?조선일보?, 1927.1.25, ?동아일보?, 1927.1.28.
이 그 흔적을 보일 뿐이고, 미술이나 음악 부문의 활동은 거의 이루어지지 못했다. 다만 영화부문에서는 김영팔(金永八), 최승일, 윤기정, 임화, 김유영(金幽影), 김기진, 안석영 등이 참여한 ‘조선영화예술협회(朝鮮映畵藝術協會)’(1927.7) ?조선일보?, 1927.7.6.
이후 타 장르에 비해 상대적으로 활발한 활동을 보였다. 물론 조선영화예술협회 자체는 결코 경향적인 성향을 가진 단체는 아니었다. 그럼에도 여기에 참여한 젊은 영화인들의 대부분이 뒤에 프로영화운동을 주도해 나가게 되며, 임화와 윤기정의 경우처럼 카프 전체를 리드하기도 한다는 점에서 주목을 요하는 단체이다. 불개미극단이 단체 결성에 그치고 무대에서 사라진 반면, 이 조선영화예술협회 출신의 경향적 영화인들은 <유랑>의 제작 이후 독자적으로 ‘서울키노’(京城映畵工場, 1928.5) ?동아일보?, 1928.5.27.
를 조직하여 임화와 추적양(秋赤陽) 등이 출연하고 김유영이 감독한 <혼가(昏街)> 제작에 들어가는 등 프로영화운동을 계속 전개한다.
한편 함흥에서 ‘신흥영화공장(新興映畵工場)’(1929.2) ?조선일보?, 1929.2.12.
을 설립한 김태진(金兌鎭)과 ‘동북영화제작소(東北映畵製作所)’(1929.11) ?조선일보?, 1929.11.19
에서 활동하던 김형용(金形容) 등이 가세하여 1929년 12월 김태진․김형용․윤기정․임화․김유영 등의 발기로 ‘신흥영화예술가동맹(新興映畵藝術家同盟)’ ?조선일보?, 1929.12.12, 1929.12.17, ?동아일보?, 1929.12.12.
을 결성하기에 이른다. ‘계급의식을 파악한 예술운동의 일 부문으로서의 영화운동’을 표방한 신흥영맹의 간부를 보면 다음과 같다.
中央執行委員 金幽影 羅雄 林華 尹曉峰
常務執行委員 金幽影 白河路
部署 庶務部 白河路
撮影部 金幽影
硏究部 羅雄 石一良
出版部 尹曉峰 崔星兒 ?조선일보?, 1929.12.17.
이들은 대부분 조선프로예맹의 회원들로서, 이후 1930년대 프로영화와 프로연극 분야에서 중심 멤버로 활약하게 된다. 이들은 회원 김태진을 파견하여 평양에 그 지부(1930.2) ?조선일보?, 1930.2.7, 1930.2.14.
를 설치하는 등 조직 확대에 들어간다.
그런데 바로 이러한 과정에서 1930년 4월의 카프 조직 개편을 만나게 되며, 신설된 ‘카프 영화부’로부터 갑자기 해산 권고를 받게 된 것이다. 4월 20일에 열린 카프 중앙위원회에서 ‘신흥영화예술동맹’ 해체 권고의 건을 공식 논의하였다.(?조선일보?, 1930.4.22.)
이에 신흥영맹에서는 4월 21일 위원회를 열어 카프 영화부의 상임 위원인 윤기정을 자퇴 형식을 빌어 신흥영맹에서 탈퇴시키고, 신흥영맹의 주도자인 김유영과 서광제(徐光霽)도 자퇴 형식을 밟아 카프에서 탈퇴함으로써 카프측의 해산 권고를 거부한다. 이 날의 위원회에서 결정된 부서 위원들을 보면 서무부 석일량, 출판부 서광제, 촬영부 김유영, 연구부 나웅으로 되어 있다. ?조선일보?, 1930.4.23.
신흥영맹의 간부 가운데 카프 영화부의 위원이 된 자는 임화와 윤기정의 2인이지만, 이 무렵 임화는 동경에 있었기 때문에, 실제적으로는 윤기정 1인만 신흥영맹에서 빠져 나와 카프 영화부로 옮긴 셈이 되었던 것이다. 윤기정에 김남천과 박완식이 결합하여 카프 영화부를 구성했던 것이며, 서울키노에서 활동을 같이하던 강호도 카프 미술부에 소속되어 있긴 했지만 카프 영화부의 활동을 함께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카프 영화부 설치와 함께 프로영화운동을 카프 지도 아래 전개하고자 했던 계획은 실현되지 못하고, 거꾸로 프로 영화 진영의 분열로 치닫게 된다. 결과적으로 카프 영화부에서 윤기정․김남천 등이 중심이 되어 신흥영맹에 집중적 공격을 가함으로써, 김유영 등이 리드하던 신흥영맹이 자진 해산하게 되지만, 신흥영맹이 해산되었다고 해서 프로영화 진영의 내분이 해소된 것은 아니었다. 신흥영맹 해체 이후에도 김유영 일파의 활동은 카프 영화부와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계속되었던 것이다.
신흥영맹의 해체 직후 김유영과 서광제의 주도로 ‘서울키노’(1930.4)가 부활 ?조선일보?, 1930.4.28.
되고, 평양에서도 ‘평양키노’(1930.7) ?조선일보?, 1930.7.17.
를 다시 세우게 된다. 부활된 서울키노에서는 김유영 감독, 이효석(李孝石)․서광제 편집, 김연실(金蓮實)․석금성(石金星)․석일량(石一良)․이엽(李葉)․추적양 등의 출연으로 <화륜(火輪)>을 제작하는 등 독자적인 영화 제작 활동을 전개한다.
이리하여 서울키노계(구 신흥영맹계)와 카프 영화부의 조직적 결합은 더이상 불가능한 상황이 되었고, 결국 카프 영화부의 지도 강호, 「조선영화운동의 신방침-우리들의 금후 활동을 위하야」(3), ?조선중앙일보?, 1933.4.9.
하에 서울키노와는 별개로 ‘청복(靑服)키노’(1930.11) ?조선일보?, 1930.11.29.
가 창립됨으로써 프로영화운동 진영은 정식으로 양분을 겪게 된다. 이 청복키노의 주요 멤버는 신응식(申應植-문학부), 강호(姜湖-미술부), 박완식(朴完植-영화부), 신영(申英-연극부), 정하보(鄭河普-미술부) 등 주로 카프 기술부 위원들이었다. 이들은 창립 직후 신응식 원작 <느러가는 무리>(후에 <지하촌>으로 개제)를 강호의 감독으로 제작하였다. 그리하여 다음해 3월 서울키노의 <화륜>이 상영 ?조선일보?, 1931.3.11.
에 들어간 시점에 청복키노에서는 <지하촌>의 촬영 완료 ?조선일보?, 1931.3.11.
를 하게 된다.
바로 이 무렵 임화는 서울키노가 만든 영화 <화륜>에 대한 비판을 내세워, 구 신흥영맹 계열의 서울키노와 그 주도 멤버인 김유영․서광제에 대해 “계급적 영화운동의 유일의 조직〔카프 영화부를 가리킴-인용자〕을 배반한 탈주자” 임화, 「서울키노 영화 <화륜>에 대한 비판」, ?조선일보?, 1931.3.25.
라며 공격을 가한다. 반면 서광제는 이에 대한 반박을 하면서도 분규가 있던 1930년 4월에는 임화가 동경에 있었기 때문에 사정을 잘 몰랐을 것이라며 당시의 상황을 설명하는 가운데, 자신은 “조직적 영화운동의 유일의 조직을 위반한 탈주자도 아니며 임군의 말과 같이 카프에서 방출당한 사실도 없으며 어디까지 무산계급 예술운동의 일원으로서 당당히 투쟁할 역원이며 우리의 조직체는 카프인 것을 말하여 둔다.” 서광제, 「영화화된 화륜과 <화륜>의 원작자로서」(상), ?조선일보?, 1931.4.11.
며 입장을 얼버무리고 있다. 이리하여 더이상 조직 문제에 대한 논의로 비화되지는 않았지만, 신흥영맹계(서울키노)와 카프 영화부(청복키노) 사이의 갈등은 여전히 계속되어 각기 양분된 채 활동을 전개하게 된다. 신흥계의 서울키노에서는 1931년 6월 조직을 혁신하여 ‘농촌영화부’․‘가두영화부’․‘기록영화부’의 3개 제작부를 두고, ‘이동영사대(移動映寫隊)’를 조직하여 도시 농촌을 순회 상영하기로 하고, 농촌영화부에서는 <낙동강>(조명희 원작, 추적양, 김해웅 공동감독)을, 가두영화부에서는 <어머니>(고리키 원작, 석일량, 황렬 공동감독)을 제작하기로 하는 등 ?동아일보?, 1931.6.12.
, 독자적 활동을 활발히 전개해 나간다. 그에 비해 카프계인 청복키노의 활동은 1931년 여름의 ‘제1차 카프 사건’으로 인해 사실상 막을 내리게 된다.
이렇게 갈라져 있던 영화운동의 두 흐름이 단일 조직으로 재편되는 것은 1932년 12월에 창립된 ‘동방(東方)키노’에 이르러서 비로소 실현된다.
脚本部 金兌鎭 秋赤陽
監督部 姜湖
撮影部 閔又洋 金容泰
出演部 李圭卨 南宮雲 羅雄 趙希勅 金海棠 李銀淑(이하 략)
美術部 河北卿 黃一鉉 金海岩
宣傳部 李圭卨 李葉
庶務部 金兌鎭 秋赤陽 姜湖 ?조선일보?, 1932.12.9.
그 구성원으로 보면 김유영과 서광제가 배제되어 있을 뿐, 프로영화 진영의 총집결체라 할 수 있겠다. 이 ‘동방키노’의 사무소가 ‘장사동(長沙洞) 198번지’로 당시 극단 ‘신건설(新建設)’의 사무소와 동일한 것으로 보아, 극단 신건설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동방키노는 기관지 ?영화부대(映畵部隊)?를 발간 ?조선일보?, 1932.12.27, 1933.3.1.
하면서 프로영화운동에 대한 주도권을 더욱 강화하여 나간다. 이로써 1930년 4월 카프 영화부가 출범하면서 시작된 프로 영화진영의 갈등이 이 시기에 와서야 비로소 해소되었다고 할 수 있다.
강호의 「조선영화운동의 신방침-우리들의 금후 활동을 위하야」 ?조선중앙일보?, 1933.4.7~17.
는 이러한 조직적 안정성을 기반으로 하여 제시된 것으로 ‘조선프롤레타리아영화동맹’ 결성의 촉진을 통해 카프 재조직, 즉 ‘조선프롤레타리아문화연맹’의 결성으로 나가기 위해 카프 영화부가 기술적 전문단체로서 독립적 조직체를 가질 수 있도록 하자는 것과, 부원의 다수 획득을 위해 부원 자격에 있어서 의식 수준을 너무 과중하게 요구하지 말 것을 강조하고 있다. 여기에서 제시된 카프의 조직 방향은 1934년 2월의 중앙집행위원회 결의를 거쳐 공식적 방침으로 제시된다. 카프 서기국, 「카프중앙집행위원회 결의문」, ?우리들?, 1934.3.
그렇지만 이 때는 이미 프로영화 진영이 일제 당국의 탄압으로 인해 상당히 약화되어 있는 시점이었다. 따라서 그 구체적 실현을 보지 못하고 1934년의 ‘신건설사 사건’으로 인해 종지부를 찍게 된 것이다.
3. 카프 연극부의 조직 변천 과정
1) 카프 연극부와 극단 청복극장
앞에서도 보았듯이 ‘카프 연극부’는 1930년 4월 카프에 기술부를 신설하면서 그 산하 부서의 하나로 설치되었다. 상임 위원 김기진을 비롯 최승일, 안막, 한택호, 신영의 5인이 그 위원에 선임되었다. 이 가운데 안막과 한택호가 동경 ‘무산자극장’ 출신이다. 이들의 존재는 카프에 연극부가 설치되는 과정에 동경의 무산자극장의 영향이 있었음을 추정케 한다.
무산자극장이 국내 프로연극에 직접 영향을 끼친 것은 그 전신인 조선프로예맹 동경지부 연극부 ‘프롤레타리아극장’이 1929년 여름 국내 순회 공연을 시도하던 때부터이다. 이들은 경성․평양․개성․수원․원산․함흥․대구 등을 순회하면서 루 메르덴의 <탄갱부>, 뮐러의 <하차>, 촌산지의(村山知義)의 <전선(폭력단기 개제)>, 고전보(高田保)의 <어머니를 구하라> 등의 레퍼터리로 공연을 할 예정이었지만, 각본 검열 때문에 실제 공연은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동아일보?, 1929.7.24, 1929.7.26, ?조선일보?, 1929.7.16, 1929.7.24, 1929.7.25, 1929.7.26, 1929.7.30, 1929.8.15, 1929.8.23.
그러나 그 순회 공연이 각 지방의 프로연극운동을 촉발하는 계기가 되었음은 쉽게 추정해 볼 수 있다. 이 점에 대해서는 일찍이 역사문제연구소 문학사연구모임, 앞의 책, 212면에서 지적한 바 있다.
그 구체적 예가 되는 것이 평양의 경우이다. 조선프로예맹 평양지부에서는 동경지부 ‘프롤레타리아극장’의 국내 순회 공연을 계기로 자체의 극단을 만들고자 하는 시도를 한다. 즉, 평양지부에서는 1929년 9월 8, 9일 백선행기념관에서 공연하기로 하고, 맹원 가운데서 연극에 출연하고자 하는 사람을 모집하였다. 단순한 공연 기획이 아니라 공연단을 조직하려는 시도는 곧 국내 프로극단의 조직으로 연결된다는 점에서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이 과정에 동경지부의 한택호(평양 출신)가 중심 역할을 하게 되었음은 물론이다. 記事, 「平壤에서 푸로劇 開演-藝盟支部 主催」, ?朝鮮日報?, 1929.7.30.
푸로藝術同盟 平壤支部에서는 去二十七日 午後 十時부터 平壤 靑年同盟會舘內에서 푸로레타리아劇 上演에 關한 件을 討議키 爲하야 第三回 執行委員會를 開催하고 左記와 如히 委員을 定한 後 九月 八日 夜부터 同九日 夜지 平壤 白善行紀念舘內에서 開催하기로 하고 同十一時半에 閉會하엿다는데 支部 盟員中 出演코저 하는 사람은 來八月 十五日內로 來議하여 주기를 바란다더라(平壤)
◇任員
脚本選擇委員 푸로레타리아東京支部員 韓在德
俳優選定委員 黃萬鳳
經費負擔委員 李寬燁
社交委員 朴英華
設備委員 張景涉
이 공연에 관한 기사가 없는 것으로 보아 이 공연은 이루어지지 못한 것 같다. 그렇지만 동경지부의 국내 순회공연이 국내 프로연극에 미친 한 단초를 보여 주는 것임에는 틀림없다.
사실 카프 연극부가 설치되기 한 달 전인 1930년 3월 23일 평양에서 ‘마치극장’이 창립되는 것도 위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앞서 1929년 여름 평양에서 극단을 조직하려다 실패한 한택호(당시 무산자극장 멤버)가 일본으로 돌아갔다가 다시 방학을 이용하여 귀국하여 재조직한 극단이 바로 마치극장이다. ?조선일보?, 1930.3.28.
한재덕, ?김일성을 고발한다?, 공산권문제연구소, 1965, 38면.
이 극단은 ‘노동자의 행진’을 연상시키는 극단 명칭이나 “마치극장은 푸로레타리아극장이다. 이것이 우리의 성질을 그리고 방향을 말하는 일체이다.” ?조선일보?, 앞의 기사.
라는 극단의 창립선언에서 드러나듯 국내에서는 최초로 프롤레타리아 연극을 표방하고 창립한 연극 단체인 셈이다. 유민영, 앞의 책, 758면.
이처럼 국내 최초의 프로극단이 무산자극장의 영향 아래 조직되었다는 것은 다른 지역 프로극단의 창립의 계기가 어디에 있었는지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추정을 가능케 한다고 할 수 있다. 이와 연관해서 한 가지 간과해서는 안 될 점은 동경의 무산자극장이 지방의 프로극단의 출범에 영향을 끼친 것도 분명하지만, 그보다 더 직접적으로 ‘카프 연극부’의 조직과 활동에도 영향을 끼쳤다는 사실이다. 즉, 무산자극장의 영향을 받은 지방의 프로극단이라면 카프 연극부와도 일정한 연계가 있는 극단이라고 보아야 하는 것이다. 마치극장을 제외한 지방 프로극단이 모두 카프 연극부가 설치된 지 6개월이 지난 이후에 창립되었다는 점도 함께 고려되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그 창립대회 장소가 다름 아닌 신흥영맹 평양지회관이었다. 이는 그 때만 해도 카프측과 신흥영맹측의 갈등이 일어나기 전이기 때문에 매우 자연스러운 현상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마치극장 창립에 관여했던 한택호가 ‘카프 연극부’ 신설과 함께 그 위원이 되고, 그와 동시에 한편에서는 카프 영화부와 신흥영맹 사이의 갈등이 시작된다. 한택호 자신이 카프 연극부의 위원이었을 뿐만 아니라 카프 영화부의 김남천과는 고교시절부터 가까운 사이였고, 동경에서도 무산자사의 활동을 함께했던 점 한재덕, 앞의 책, 36면.
을 고려해 보면, 카프 영화부와 신흥영맹의 갈등에서 한택호가 어떠한 입장을 취했을 것인가 하는 것은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카프 중앙위원회에서 신흥영화예술가동맹 해산 권고안을 결의한 이후, 5월 16일 동경의 무산자극장에서도 임시총회를 열어 “카프의 연극부와 영화부를 절대 지지하며, 조선신흥영화예술동맹을 박멸할 것”을 결의한 것으로 미루어 보면, 무산자극장 출신 한택호가 신흥영맹에 대해 취한 태도는 보다 분명해진다.(?조선일보?, 1930.5.24)
애초에 <고개>(<荷車>의 다른 제목), <탄갱부(炭坑夫)> 등의 레퍼터리로 제1회 공연(4월 하순 예정)을 준비 ?조선일보?, 1930.4.5.
하였던 ‘마치극장’이 아무런 이유 없이 공연도 하지 못하고, 또 극단마저 소리 없이 사라진 것도 이러한 조직 갈등과 무관하지 않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렇지만 신흥영맹이 영화인 조직이었던 만큼 카프 연극부와 직접적인 갈등이 있었던 것은 아니며, 또한 신흥영맹에 비견할 만한 연극계 조직이 따로 있었던 것도 아니기 때문에 프로연극 진영에서는 프로영화 진영과 같은 조직적 갈등은 일어나지 않았다.
다만 카프 영화부 및 청복키노의 활동이 미약했듯이, 카프 연극부도 1930년에는 이렇다 할 활동을 보여 주지는 못하였다. 부서만 설치되었을 뿐 실제적 활동 역량은 아직 미약하였던 것이다. 1930년 9월 카프 연극부 위원 최승일의 연출로 ‘미나도좌’에서 루 메르덴의 <탄갱부>를 <산>이라 개제하여 상연하는 등 ?조선일보?, 1930.9.18.
, <하차> ?중외일보?, 1930.9.11.
․<이층의 사나이>(업톤 씽클레어 원작, 李白水 번역) 등 일련의 경향극 각본을 상연한 것이 그 활동의 전부였다. 이 공연이 프로연극의 한 발전 과정인지 아닌지를 놓고 뒤에 평자들간에 논전이 벌어지지만, 공연 활동이 아닌 조직 활동의 차원에 본다면 이 해의 카프 연극부의 활동은 전무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프로연극운동의 새로운 기치를 들고 나선 것이 대구의 ‘가두극장(街頭劇場, 1930.11)’ ?조선일보?, 1930.12.3.
이다. 가두극장은 연극을 무기로 하여 무산계급 해방을 위해 투쟁하며, 일체의 부르주아 연극을 실천적으로 극복하여 프롤레타리아 연극의 조직적 생산을 계획한다는 강령 아래, 대공연․이동공연 등 다양한 공연 형태를 통해 노동자 농민 대중 속에 연극을 가지고 들어갈 뿐 아니라 ‘이동극장(移動劇場)’을 확충 강화하며, 카프의 재조직을 촉진하여 연극운동을 전국적으로 통일하고자 하는 등의 활동 방침을 가지고 출발하였다. 이는 이 단체가 카프를 각 부문 동맹들간의 협의체로 만들고자 했던 1930년 4월 이래의 ‘카프 재조직’ 논의와 ‘예술의 볼세비키화’의 연장선에서 출발한 극단임을 보여 주는 것이며, 이때문에 카프 연극부와의 조직적 연계 하에서 창립된 극단이 아닌가 하는 추정도 가능하게 한다. 실제로 이상춘(李相春)이나 신고송(申鼓頌) 등이 이후 카프 연극부에서 활동하는 것으로 보아 적어도 가두극장과 카프 연극부는 동일한 계열에 속하는 단체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어 개성에서는 카프에서 발행하던 노동자 농민용 대중 잡지 ?군기(群旗)?사의 극부(劇部)로 ‘대중극장(大衆劇場, 1930.12)’ ?조선일보?, 1931.1.3.
이라는 극단이 창립되었는데, 이 극단은 ‘노동자 농민을 위한 기관’이 될 것을 목표로 하였다. 이러한 창립 경과로 보면 이 극단의 창립 과정에 카프 연극부가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즉, 대중극장은 비록 지방인 개성에서 창립되었지만 카프 연극부의 직계에 속하는 극단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대중극장은 1931년 3월 송영(宋影)의 <일체면회 거절>, 씽클레어의 <이층의 사나이> 등으로 제1회 공연을 준비중이었지만, 세칭 ‘?군기? 사건’으로 카프 중앙과 대중극장(또는 카프 개성지부)의 주도 멤버인 민병휘(閔丙徽)․양창준(梁昌俊) 등의 사이에 갈등이 일어나 중지되고 만다.
‘?군기? 사건’은 1930년 9월의 미나도좌 공연을 놓고 벌어진 박영희와 민병휘간의 논전에서 발단된다. 박영희, 「1930년 조선프로예술운동-극히 간단한 보고로서」, ?조선지광?, 1931.1. 6면.
민병휘, 「박씨의 프로극관과 포빙씨의 <어진 거울>」, ?조선일보?, 1931.2.11~12.
이 논쟁의 전개 과정 및 그 연극사적 의미에 대해서는 양승국, 앞의 책, 87~93면 참조.
박영희가 미나도좌 공연을 ‘프롤레타리아 연극의 첫행진’이라 고평하자, 민병휘는 이러한 박영희의 관점이 지닌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카프 중앙에 대한 공격으로 논의를 확대하게 된다. 이동극장 형식의 연극 활동을 강조한 민병휘의 입론은 카프 중앙과는 별개로 카프 재조직을 추진하고자 했던 개성지부 양창준(?군기?의 발행인)의 주장으로 연결되면서 ‘반카프 음모’의 ‘?군기? 사건’이 일어난다. 그 사건 개요는 카프 개성지부 멤버들이 카프에서 발행하는 ?군기?라는 잡지를 이용하여 카프 중앙에 대한 ‘기만적 역선전’을 통해 ‘전조선무산자예술단체협의회’를 결성하려고 하다가 카프 서기국에 의해 적발된 사건을 말한다. ?조선일보?, 1931.4.28.
사실 민병휘가 박영희의 견해를 비판한 것은 애초 대중극장의 창립 취지에 그대로 연결되는 것이고, 그것은 곧 카프 중앙의 소장파들(임화, 안막, 권환 등)의 입장과도 내용상 동일한 것이다. 또한 이른바 재조직 논의라는 것도 그 내용만 가지고 본다면 1930년 4월 이후 카프 중앙의 소장파들이 추구하던 조직론의 핵심(재조직론)과 대동소이하다. 그러나 이 양자 사이에는 카프 중앙이 재조직을 추진하면서도 카프 조직의 현실적 사정을 고려하면서 추진한 데 비해, 개성지부의 양창준 등은 일본 나프(전일본무산자예술단체협의회)의 조직 형태를 본따서 이현인, 「카프 분규에 대한 대중적 견해」, ?시대공론?, 1932.1, 52면.
하나의 이상적 형태로서의 조직을 추구하는 데서 오는 간극이 놓여 있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조직 문제의 최우선 원칙으로 전국적 예술운동에 대한 카프의 헤게모니 관철을 염두에 두고 있던 카프 중앙의 입장에서는 카프 중앙의 사정을 고려하지 않는 어떠한 조직 논의도 ‘반카프적인 것’으로 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를 뒤집어 보면, 이 ‘?군기? 사건’은 이 시기 카프 중앙의 태도가 얼마나 종파적이고 섹트적이었는가를 단적으로 보여 준다고 할 것이다. 카프 영화부와 신흥영맹 사이의 갈등도 사실은 활동 방향의 차이에서 기인한 것이라기보다는 카프 중앙의 헤게모니 관철을 전면에 내세운 종파적 조직관에서 비롯한 것이라 보아야 할 것이다.
이후 대중극장은 ‘군기파’에 들지 않은 카프 개성지부원 김종인(金鍾仁) 등을 내세워 재기를 시도 ?동아일보?, 1932.7.18.
하지만 자체 역량의 미비 김소엽, 「연극운동의 회고와 비판-대중극장을 예로 들어」, ?조선중앙일보?, 1933.8.30~31.
로 공연 한 번 하지 못하고 해산하게 된다.
이른바 ‘?군기? 사건’이 진행되는 중에 카프 연극부의 지도 아래 서울에서 ‘청복극장(靑服劇場, 1931.4)’ ?조선일보?, 1931.4.19., ?동아일보?, 1931.4.21.
이 창립된다. ‘카프 소속 및 그 동반자’에 해당하는 임화, 안막, 김남천, 이규설(李圭卨), 이찬(李燦), 정용산, 신영, 김태진, 김형용, 이귀례(李貴禮), 송계숙 등으로 이루어진 구성원으로 보아 카프 연극부에 의해 창립된 극단이 분명하다. 또한 그 명칭으로 보아도 앞에서 살펴본 카프 영화부 직속의 ‘청복키노’와 동일 계열의 것임이 분명하다. 카프 연극부의 입장에서 보면 ‘청복극장’에 이르러 비로소 서울에 직계 극단을 갖게 된 셈이다. 카프 연극부 설립으로부터 보면 만 1년이 걸린 셈이다.
청복극장은 <지나(支那)!>(7장), <다리업는 말틴>(11장), <아세아>(1막), <파업조정안>(1막), <탄갱부>(1막), <하차>(1막), <3등수병 말틴>(13장), <전선>(5막), <반향>(5막)의 레퍼터리로 1931년 5월 제1회 공연을 가질 예정이었지만, 뜻을 이루지 못하고 그 해 여름부터 ‘카프 사건’이 발생함에 따라 저절로 해산되고 만다. 같은 무렵 이동규(李東珪), 홍구(洪九) 등에 의해 ‘우리들극장’(1931.6)이 서울에서 조직 한효, 앞의 책, 292면.
되는데, 홍범(洪凡)에 의하면 구성원의 대부분이 노동자로 이루어진 소인극단(素人劇團)이었다고 한다. 홍범, 「최근 극단의 회고와 전망」, ?조선중앙일보?, 1932.3.14.
1932년에 쓴 이 글에서 홍범은 ‘군소 프로극단’이 가진 결점을 ‘청복극장’은 전혀 가지지 않았으며, 연극부의 직속이라 해도 좋을 만큼의 구성원으로 되어 있다고 평가하고 있다. 그는 또한 청복극장과 함께 ‘우리들극장’을 새로운 프로극단으로 제시하면서, 정작 ‘이동식 소형극장’에 대해서는 일체의 언급이 없다. 대신 “모든 불순분자들을 자기진영에서 가혹 축출식히는 동시에 접근되지 못하게 할 것”이라는 방책을 제시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이동식소형극장과 카프 연극부의 갈등의 한 단면을 보여 주는 것으로 추정된다.
이 두 극단은 카프 연극부의 지도 아래 조직되었지만, 이어 8월부터 시작된 ‘제1차카프사건’의 영향으로 아무런 활동도 보여 주지 못한 채 해산되었다.
이처럼 카프 연극부 설립 전후의 프로극단의 동향을 보면 1930년 4월 카프 연극부 설립 이래 1931년 4월에 청복극장이라고 하는 직계 극단이 만들어지고, 또 그를 전후하여 직계 극단은 아니지만 일정한 조직적 연관 아래 마치극장, 가두극장, 대중극장이 창립되어 활동을 시도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들 극단은 한결같이 검열 및 주체 역량의 미비로 단 1회의 공연도 하지 못한 채 해산되었다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2) 극단 이동식소형극장과 극단 메가폰
대중극장과 청복극장이 개성과 서울에서 창립될 무렵 해주의 ‘해주연극공장(海州演劇工場, 1931.4)’ ?동아일보?, 1931.4.7, 1931.4.8.
과 원산의 ‘조선연극공장(朝鮮演劇工場, 1931.4)’ ?동아일보?, 1931.4.30.
이 창립된다. 이 두 극단은 ‘연극공장’이라는 명명법으로 보아 어떠한 유사성, 특히 신흥영맹계의 ‘영화공장’ 들과의 연계성이 추정되지만, 구체적 근거나 정황은 확인되지 않는다. 다만 가두극장이나 대중극장, 청복극장과 달리 처음부터 카프 연극부와 무관하게 자생적으로 등장한 프로극단인 것으로 추정된다. “現朝鮮의 情勢로서는 캅푸演劇部의 生新한 活動을 期待하지 아니할 수 업게 된다. 卽 地方劇團의 創立 밋 그의 組織的 技術的 指導者의 派遣 뉴스의 發的 等等에 잇서서 좀더 活動의 機軸을 開拓하여 주엇스면 한다.”(안함광, 「무산연극운동의 촉진-문제의 간단한 제기로서」(하), ?조선일보?, 1931.5.10)의 안함광의 주장도 결국 카프 연극부가 해주연극공장과 아무런 조직적 연관을 갖고 있지 못함을 나타낸다고 하겠다.
특히 원산의 ‘조선연극공장’은 흥행극단이 프로극단으로 발전해 나간 독특한 경로를 가지고 있는 극단이라 할 수 있다.
그 경로를 살펴보면, 조선연극공장은 원래 1930년 5월경 흥행극단인 원산관(元山館) 직속의 ‘WS연예부’(WS는 원산의 영문 이니셜)로 출발했다. 원산관 주인 김창준(金昌俊)과 극작가 박영호(朴英鎬) 등이 주도한 ‘원산관연예부’는 1930년 11월 상연중이던 <과도기> <하차> 등의 각본이 문제가 되어 당국으로부터 해산 명령을 받아 ?조선일보?, 1930.11.19
일시 해산하였다가, 곧바로 ‘동방예술좌(東方藝術座)’라는 이름으로 재출발 ?조선일보?, 1930.12.8
하여 원산과 함흥을 중심으로 공연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 동방예술좌가 1931년 4월경 극단 명칭을 ‘조선연극공장’으로 바꾸게 된 것이다. ?동아일보?, 1931.4.30
이 명칭의 변경과 함께 종래의 ‘에로’ 경향을 청산하고 새로운 진용과 무대형식을 가진 극단으로 혁신하여 활동하던 중, 10월의 함흥 공연시 <아리랑 승인편>과 <아리랑 반대편>이 문제되어 극단원이 검속되고 함흥에서의 공연 활동이 일체 금지를 당하면서 ?조선일보?, 1931.10.13
그 활동이 중단되었다. 조선연극공장은 몇 차례의 검속과 해산 명령에도 불구하고 원산관연예부 시절부터 계산하면 약 1년 반 동안 원산과 함흥을 중심으로 매우 활발한 공연 활동을 전개한 셈이다. 이처럼 활발한 공연 활동이 가능했던 것은 프로극단을 표방하지는 않으면서 실제 공연에서는 경향적 각본을 상연하는 방식을 취했기 때문일 것이다. 따라서 이 극단의 성격은 엄밀한 의미에서 프로극단이라기보다는 ‘동반자’적 성향을 가진 극단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1931년 7월경부터 ‘이동식소형극장(移動式小型劇場)’을 만들려는 움직임이 시작되어 8월 경성부 와룡동 시대공론사에서 창립을 하게 된다. 이동식소형극장의 창립시기는 자료에 따라 약간의 편차가 있다.
1931년 11월의 ?조선일보?(1931.11.11)와 ?동아일보?(1931.11.14) 기사에는 창립 시기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고 공연 계획에 대해서만 상세하게 보도하고 있다. 선풍아는 1931년 11월 13일에 쓴 「조선프로레타리연극의 전조」(?시대공론?, 1932.12)에서 ‘금추(今秋)’에 창립되었다고 기록하고 있지만, 그 시기를 구체적으로 언급하지는 않았다. ‘신건설사 사건’ 예심 결정문(1935.6.28)에서는 ‘1931년 8월경 와룡동 시대공론사’에서 창립하여 11월부터 순회 공연을 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로써 보면 1931년 여름에 창립하여 11월부터 공식 활동에 들어간 것으로 볼 수 있겠다. 그렇다면 1931년 7월의 ?조선일보?(1931.7.9) 기사에 나오는 ‘소형 이동극장’의 창립 소식이 곧 ‘이동식소형극장’의 창립을 말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겠다. 참고로 그 기사 전문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기사, 「小型 移動劇場 創立―工場 農村 巡廻公演 方今 公演을 準備中」, ?조선일보?, 1931.7.9.
“금번 새로히 소형이동극장(小型移動劇場)이 창립되엿다는데 일반 무산대중(一般無産大衆)의 리익을 위한 극운동을 개시하리라는바 방금 공연준비(公演準備)에 분망중이라 하야 공장(工場) 농촌(農村)으로 순회(巡廻)하여 이동공연(移動公演)을 할 터이라 한다.”
이동식소형극장은 극단의 명칭에서도 알 수 있듯이 공장이나 농촌에 있는 노동자 농민을 상대로 하는 ‘이동연극(移動演劇)’을 주로 하는 극단이다. 이동연극이라 함은 농촌․산촌 등 상설적인 극장 설비가 없는 곳, 학교․공장․회사 등 관객들의 삶의 현장으로 연극을 직접 가지고 들어가서 공연하는 방식을 말한다. 또한 극장 설비가 없는 곳이기에 소수의 인원과 간단한 도구로 무대를 연출하는 ‘소형극장’이 될 수밖에 없기도 하다. 일찍부터 프로연극에서는 이동연극을 주요한 공연 형태로 추구해 왔으며, 이는 일본의 프로연극이나 조선프로예맹 동경지부의 활동에서도 직접 실천된 바 있다. 앞서 살펴본 대구의 가두극장에서도 주요 공연 형태의 하나로 제시한 바 있다. 극단 명칭이 그렇다고 하여 ‘이동식소형극장’이 중앙공연을 완전히 배제한 것은 물론 아니다. 실제로 이동식소형극장은 1931년 11월 상연 예정으로 <전선>(村山知義), <순아! 네 죄가 아니다>(小掘甚二), <이층의 사나이>(씽클레어)의 번역극 외에 <호신술>(송영), <작년>(석일량), <지하층 소동>(김유영), <부음>(김영팔), <박첨지>(兪鎭午), <다난기의 기록>(이효석) 등의 레퍼터리로 제1회 중앙공연을 준비한 바 있다. ?동아일보?, 1931.11.15, ?조선일보?, 1931.11.11.
그러나 중앙 공연은 각본 불허가 등으로 공연이 이루어지지 못하였고 ?조선일보?, 1932.2.19.
, 결국 이동공연의 형태로만 공연 활동이 이루어지게 된다. 추적양, 「이동식소형극장운동-지방순회공연을 마치고」, ?조선일보?, 1932.5.6.
이동식소형극장의 활동 경과에 대해서는 정호순 앞의 논문, 48~51면 참조.
당시의 상황에서는 중앙공연보다는 이동공연이 상연 가능성이 높았던 것이다. 이 극단이 이동공연을 위주로 하는 극단으로 출발한 것도 그 때문이며, 바로 이동공연의 형태를 취한 결과 서울에서 만들어진 프로극단으로서는 최초로 공연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창립 당시의 이동식소형극장의 진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顧 問 姜天熙
脚本部 兪鎭午 李孝石
演出部 金幽影 河北鄕
裝置部 秋赤陽 金美男
道具部 張鐵兵 朴昌赫
效果部 金容泰
宣傳部 金赫
出版部 崔貞熙
音樂部 金永燦
演技部 石一良 李葉 尹想黙 黃河石 韓愚(?) 朴哲熙 張越廠 林永植 張福萬 許世忠 白如川 鄭完赫 金蓮實 金仙草 金鮮英 崔露砂 金惠淑 金馬利亞 姜海蓮 ?조선일보?, 1931.11.11.
김유영, 추적양, 석일량, 이효석, 이엽 등 중심 멤버의 대부분이 신흥영맹계인 서울키노와 관련된 인물로 되어 있다는 점이 눈에 띈다. 연기부 소속의 연기자들도 주로 영화에 출연한 경험이 있는 영화배우들이 대부분을 이루고 있다. 이러한 구성원으로 보아 이 극단이 카프 연극부와는 무관하게, 그리고 일정한 거리를 두고 탄생한 극단임을 알 수 있다. 이 시기 카프 연극부를 비롯한 카프 중앙 및 청복극장의 주요 구성원은 경찰 조사를 받은 이후여서, 상대적으로 활동력이 크게 둔화된 상태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카프 이러한 사정에도 불구하고 상당한 규모의 이동식소형극장이 만들어졌다는 것은 이 극단이 카프와 무관한 영역에서 출발한 극단임을 말해 주는 것이기도 하다.
보다 구체적으로는 이동식소형극장은 카프 연극부가 아닌 신흥영맹계 영화인들에 의해 주도적으로 만들어진 극단이라 할 수 있다. 창립 장소인 시대공론사가 김유영 등이 신흥영맹의 재기를 꿈꾸었던 곳이었다는 점도 이를 뒷받침해 준다.
이동식소형극장의 창립을 주도한 김유영은 이미 1931년 4월 경부터 이동식소형극장을 조직할 것을 제안하고 있다.
至今부터―푸로레타리아的 演劇運動의 基本方針은 어케 할 것인가―는 原問題와 버스러지는 듯함으로 캅프 演劇部에 存在한 同志들이나 다른 鬪爭的 分子에게 맛기고. 다만 映畵 公開時에 잇서서 小規模的으로(大槪 一幕으로 된 寸劇) 公開할 수 잇는 移動式小型劇場을 組織하엿스면 어 한다. … 日本에서는 左翼劇場 內部에 包含한 移動劇場部에 獨立한 存在 ‘푸로레타리아演藝團’이 잇서서 移動式 活動을 專門的으로 하고 잇다. … 그리고 ‘푸로레타리아演藝團’이 납프의 푸로키노 映畵工場과 握手하야 地方으로 移動公演을 할 에는 이러한 劇團이 반드시 決死的 後援을 한다고도 한다.
朝鮮의 프로레타리아 演劇人도 日本과 가튼 手段 方法을 引用하야 朝鮮의 客觀的 情勢를 잘 살펴서 (略) 슬로간으로 移動式小型劇場을 組織하야 우리들 映畵人과 가티 握手하지 안흐면 안될 것이다.(강조 인용자) 김유영, 「금후 푸로 영화운동의 기본방침은 이러케 하자」(10), ?조선일보?, 1931.4.12
김유영은 일본 프로연극의 예를 들어가며 ‘이동식소형극장’을 만들었으면 한다는 바램을 피력하고 있다. 인용문에서도 언급하고 있듯이 일본에서는 동경 좌익극장(左翼劇場) 산하에 이동극장부 ‘프롤레타리아연예단’을 조직하여 이동공연을 전담하게 하였다. 김유영의 이러한 언급으로 보면 이동식소형극장이라는 극단 명칭도 이동공연의 전담을 의도하고 붙여진 것임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김유영의 계획이 1931년 8월경 현실화한 것이 곧 이동식소형극장이다. 극단 창립 직후에도 김유영은 「이동식소형극장의 공연을 압두고」 ?시대공론?, 1932.1
란 글에서 극단원이 조합 공장 농촌 등지에 들어가서 써클을 조직할 것, 공연시 노동자권을 발행할 것, 기술이나 경제 관계로 1막극만을 공연할 것 등 극단 활동 방침을 밝히고 있다. 이처럼 창립 전후의 과정으로 보아 이동식소형극장은 김유영의 주도로 만들어진 극단이라 할 수 있으며, 그가 이미 카프에서 탈퇴한 상태에 있었던 만큼 카프 연극부와 이동식소형극장의 거리도 짐작해 볼 수 있다.
그런데 주목되는 것은 앞의 김유영의 글이 발표된 ?시대공론?(1932년 1월호)에 나란히 발표된 전미력(全美屴)의 「푸로레타리아 미술의 개척―신흥미술가동맹 결성을 촉함」에 나오는 이동식소형극장에 대한 언급이다.
예술동맹의 ×××〔미술부-인용자〕와 적극적 행동에 불가능으로 푸로레타리아미술을 위한 집단이 아직 업다. 조선의 ××제도 전후……대중은 양해하여 주워야 된다. 여기서 단연 ‘신흥미술가동맹(新興美術家同盟)’을 작성하려고 제기한다. 신흥미술가동맹의 계통은 분 시일의 역사적 도정에서 정신적 물질적 고통을 돌파하여 대중 압헤 출현한 이동식소형극장의 성립이다. 동지(상세는 금일초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에 보도한 바와 갓치) 金幽影 李孝石 兪鎭午 石一良 秋赤陽 李葉 崔貞熙(순서 不同) 외 수인으로 결합되여 소형극장의 창립과 연(連)해 ?시대공론(時代公論)?의 속간행(續刊行)과 (다음 호부터는 ?제삼선(第三線)?으로 개제)에 라……신흥미술가동맹 등……다갓치 밀접한 결합에……발양(發揚)되여 간다.(강조-인용자) ?시대공론?, 1932.1, 75면.
전미력은 이동식소형극장 장치부 부원인 김미남(金美男)의 다른 이름이다. 그의 주장은 카프 ×××(미술부)의 활동 불가능으로 프롤레타리아 미술을 위한 집단이 없기 때문에 이동식소형극장에 뿌리를 둔 ‘신흥미술가동맹’을 조직하여 활동을 전개하겠다는 것이다. 전미력의 ‘신흥미술가동맹’ 조직론에 대해서는 최열, ?한국현대미술운동사?, 돌베개, 1991, 64면 참조.
전미력이 과거 ‘신흥영화예술가동맹’의 명명법을 그대로 이어 받은 ‘신흥미술가동맹’ 결성을 촉진하고 있고, 또 그 신흥미술가동맹이 이동식소형극장의 계통 조직이라고 하는 사실로 보아 이동식소형극장이 구 신흥영맹계의 맥을 잇고 있는 극단임이 분명해진다.
또한 뒤에 소위 ‘신건설사 사건’으로 프로 연극인들이 다수 검거되었을 때 이 이동식소형극장의 주도 멤버들도 함께 구속되어 재판을 받았는데, 주목되는 것은 당시의 재판부가 김유영․추적양․석일량․이엽․최정희 등의 ‘이동식소형극장’ 조직건을 ‘카프사건’과는 별도의 사건으로 취급하고 있다는 점이다. 전주지방법원 예심 판사 고야미일랑(高野彌一郞), 「카프사건 예심 결정문(1935.6.28)」, ?고등경찰보? 제1호, 64면.
동일한 내용이 ?매일신보?(1935.10.28) 기사에도 보도되어 있다.
이동식소형극장을 마치 ‘좌익 결사’인 것처럼 취급하는 재판부 태도의 옳고 그름을 떠나서, 카프 연극부 및 극단 신건설과 별도로 이동식소형극장(극단 메가폰 포함)을 취급하였다는 것은 그만큼 이동식소형극장의 계통이 카프 연극부와는 전연 별개의 것임을 분명히 해 주는 증거라 하겠다.
이동식소형극장은 1932년 2월경에 함흥의 이동극단인 ‘동북극장(東北劇場, 1932.2)’ ?동아일보?, 1932.2.18, ?조선일보?, 1932.2.19.
의 김승일(金承一)․김형용(金形容)이 새로 가입하고, 기존의 멤버 가운데서는 김유영․최정희․김미남 등이 탈퇴하는 것을 계기로 내부 개혁을 시도하게 된다. 특히 김유영이 탈퇴함으로써 카프 연극부와의 대립 의식이 약화되고, 어느 정도 친화성을 회복하게 된다. 그리하여 순회 공연을 마친 후 이동식소형극장은 자진 해소 ?조선일보?, 1932.5.25.
하고 극단 ‘메가폰’으로 재출발하게 된다. ?조선일보?, 1932.5.25, ?동아일보?, 1932.5.28.
사무소를 경성부외 아현리 명화관에 둔 극단 메가폰의 진용은 다음과 같다.
書記局 金形容, 秋赤陽
脚本部 宋影, 兪鎭午, 金形容
演出部 申讚, 秋赤陽
裝置部 秋赤陽, 李相春
演技部 羅鐵
舞臺監督 金承一 ?동아일보?, 1932.5.28.
기존의 멤버 가운데 과거 신흥영맹계의 영향권 아래 들어 있던 기성 영화계의 배우들이 대거 탈락하고, 대신 김승일과 김형용이 새로이 간부에 선임되었으며, 거기에 송영․이상춘․신고송 위의 신찬이 곧 신고송이다. 그는 1931년 일본 동지사 및 코프 조선협의회에서 활동한 후 1932년 3월경 귀국하였으며, 귀국해서는 ?연극운동?의 발간에 주력하였고, 1932년 5월에는 카프 중앙위원에 선임되었다.
동지사에서의 활동에 대해서는 박영정, 앞의 글, 참조.
․나웅․신영 등 카프 연극부 관계자들도 대거 진출하고 있다. 극단 메가폰은 비록 그 전신이 이동식소형극장이라 할지라도 구성원들의 면면으로만 본다면 카프 연극부의 직계 극단에 가까운 단체라고 할 수 있겠다.
이처럼 메가폰의 창립에 카프 연극부원들이 결합할 수 있었던 것은 신고송의 귀국과 함께 오랜 숙원이던 기관지 ?연극운동?의 발간 ?조선일보?, 1932.3.2, 1932.4.28, 1932.7.9.
이 이루어지고, 그를 계기로 카프 연극부가 연극운동의 전국적 통일을 위한 구체적 활동을 개시한 것과 관련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는 1930년 4월 이래 과제로 제기되어 있던 카프 연극부를 중심으로 하는 ‘연극동맹’ 결성을 향한 구체적 발걸음이 시작된 것으로 볼 수 있다. 특히 2년 전의 신흥영맹에 대한 카프 영화부의 배격 방침과는 달리, 이동식소형극장에 대한 카프 연극부의 대응에서는 ‘동반자의 획득’ 문제와 관련되는 방침상의 변화를 엿볼 수 있다. 박태양이 극단 메가폰 출발 전후의 카프 연극부의 입장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는 것도 이와 연관된다고 하겠다.
이 극단〔메가폰-인용자〕의 전신은 ‘이동식소형극장’이다. 이 이동식소형극장은 북선 지방공연에서 상당한 성과를 엇고 귀경하자 그 극단의 지도격에 잇든 악평 놉흔 좌익 탈락자 김×〔유〕영은 드듸여 숨길 수 업는 반동의 마각을 들어내게 되엿다. 그리하야 동 극단의 멘버는 이에 반대하야 그를 내여 고 다시 진영을 정돈하고 나온 것이 ‘극단 메가폰’인 것이다. 이 극단은 당초부터 현재 조선에 잇서서 프로레타리아연극의 실천을 짐지고 잇는 캅프 연극부와는 하등의 연락이 업시 결성되엿든 것이다. 캅프 연극부의 동지 신고송이 거기에 손을 대기 시작하게 된 것은 동 극단의 제1회 공연시엿든 것이다. (나는 이와 관련하야 연극운동 영역에 잇서서 동반자 문제를 가장 빗나게 해결하엿다는 것을 말할나고 하엿스나 그만 둔다.) 상기한 곳에서 본 바와 여히 ‘극단 메가폰’을 조직된 연극운동자들은 놉흐게 평가하여서 말하자면 좌익극 운동의 동반자적 지위에 잇섯든 것이다.(강조-인용자) 박태양, 「김광섭 군의 극단 제언을 박함」(상, 중), ?조선일보?, 1933.1.29, 2.14.
이렇듯 카프 연극부와 조직적으로 무관한 상태에서 이동식소형극장이 창립되고, 그것이 다시 극단 메가폰으로 재출발하였지만, 좌익연극의 ‘동반자’적 위치에 있는 극단으로 높이 평가해서 카프 연극부에서는 신고송을 중심으로 그와 결합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카프 연극부의 입장에서 보면 ‘동반자적 극단’의 위치를 가지고 있던 이동식소형극장에 대해, 배제가 아닌 포용의 방식을 취함으로써 프로연극 진영을 통일하고자 하는 노력을 구체화시킨 셈이다. 물론 그것은 1932년 5월에 재구성된 카프 중앙,80) 1932년 5월의 중앙위원회에서 신고송, 이찬, 강호 등이 신임 위원으로 선임된 것과 관련된다(?조선일보?, 1932.5.19).
특히 신고송의 역할에 의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극단 메가폰은 1932년 6월 8, 9 양일간 신고송 작 <메가폰>(슈프레히콜), 유진오 작 <박첨지>, 송영 작 <호신술>, 김형용 작 <지옥> 등의 레퍼터리로 조선극장에서 제1회 공연을 가졌다. ?동아일보?, 1932.6.8.
원래 10일까지 공연하기로 예정되어 있었으나 10일 밤 공연은 중지하고 지방 순회 공연으로 방향을 돌리게 된다. ?동아일보?, 1932.6.11.
비록 이틀간의 공연이었지만, 프롤레타리아 극단으로서는 처음으로 극단 메가폰이 서울에서 ‘중앙공연’을 했다는 점에서 그 의의를 찾을 수 있다. 메가폰은 이후 인천 공연 ?동아일보?, 1932.6.27, 1932.7.2.
후 내부의 경제적 사정으로 인해 해산의 운명을 맞는다. 이로써 이동식소형극장으로 대표되는 신흥영맹계의 연극 활동도 막을 내리는 셈이다.
메가폰의 활동이 시들해진 데에는 또다른 원인이 있다. 그것은 1932년 8월 카프 연극부의 직계로 극단 ‘신건설(新建設, 1932.8)’ ?동아일보?, 1932.8.7.
이 창립되었기 때문이다. 연출부 신고송, 문예부 송영․권환, 미술부 이상춘․강호, 연기부 이귀례․박태양․신영․한호 등으로 조직된 극단 신건설의 멤버 가운데는 극단 메가폰에서 활동하던 멤버가 다수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메가폰의 활동은 자연스럽게 위축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는 메가폰의 활동이 위축되었다기보다는 극단 신건설로 재출발되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재출발이 가능했던 것은 극단 메가폰이 명목상으로는 이동식소형극장의 후신이었지만, 그 실질 내용에 있어서는 카프 연극부의 직계 극단에 가까운 것이었으므로 큰 무리가 없었던 것이다. 이렇게 보면 극단 메가폰은 이동식소형극장과 카프 연극부가 결합하여 당시의 프로연극운동을 조직적으로 통일해 나가는 과도기적 극단으로서의 위치를 갖는다 하겠다.
3) 극단 신건설과 카프 연극부
앞서 보았듯이 1932년 봄 동경에서 귀국하자마자 ?연극운동?의 발간을 통해 프로 연극 진영을 통일하고자 했던 신고송의 활동은 극단 이동식소형극장 및 메가폰과의 결합을 통해 그 징검다리를 마련하고, 마침내 1932년 8월 극단 신건설의 창립을 통해 서울에서의 프로연극 진영의 통합을 성취하게 된다. 극단 신건설이야말로 카프 연극부를 중심으로 하는 프로연극운동의 비약적 발전을 가능하게 하는 발판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극단 신건설이 채 활동을 시작하기도 전에 그 주도 멤버이던 신고송이 ‘?우리동무? 사건’85) 이 사건은 세칭 ‘?별나라? 사건’이라고도 불렸는데, 이는 신고송이 잡지 ?별나라?의 주간으로 잘못 알려져 붙여진 이름이며, 그가 사실은 ?연극운동?지의 주간이라는 것이 나중에 밝혀지지만, 수사 결과 사건 내용은 ?연극운동?과도 무관한 것이었다. ‘?우리동무? 사건’이라 함은 신고송 등이 일본의 코프 조선협의회 기관지 ?우리 동무?를 국내에 배포하다 출판법 위반으로 처벌을 받았기 때문이다. 신고송은 이 사건으로 시인 이찬(李燦)과 함께 구속되어 출판법 위반으로 재판을 받고 금고 10월의 형을 받는다.
으로 구속되는 사태가 발생한다. 이로 인해 극단 신건설의 활동도 일시 좌절을 겪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신고송의 구속 사유는 출판 관계로 인한 것이었지만, 조사가 진행되는 동안에는 극단 신건설의 활동도 자유로울 수가 없었던 것이다. 신고송의 구속 이후 김태진․김승일․이상춘․강호 등이 중심이 되어 조직을 정비하고 창립공연 준비에 들어간 것은 창립 이후 6개월째인 1933년 1월의 일이었다. 이 때의 극단 신건설의 진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文藝部 朴太陽 金永俊 李鐸鎬
演出部 金兌鎭 邊孝植 李翰 羅雄 金承一
經濟部 朴太陽 李圭卨
裝置部 李相春 姜湖 秋赤陽 李斗星
宣傳部 李葉 鄭靑山 李圭卨
效果部 尹駿燮
照明部 姜湖 秋赤陽
出演部 南宮雲 邊碩 金承一 李葉 李圭卨 羅雄 具連壽 姜湖 崔泰峰 安鐵 李斗星 林正華 李相協 尹南影 秋赤陽 鄭靑山 朴琪燮 白世鐵 李貴禮 金順子 柳英玉 金海? ?조선일보?, 1933.1.7.
여기에는 당시의 프로연극계가 총망라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과거 카프 연극부 멤버는 물론이고, 이동식소형극장(메가폰) 및 청복극장 계열의 전 구성원이 모두 극단 신건설로 결집했던 것이다. 이로써 비로소 카프 연극부의 주도권 아래 프로연극운동이 통일적 활동을 전개할 수 있는 조직 기반이 마련된 것이다. 이는 앞절에서 살펴본 바 프로영화운동이 ‘동방키노’(1932.12)에 이르러 통일적 조직을 형성한 것과 동일한 맥락에 놓여 있다고 할 수 있다. 실제로 동방키노와 극단 신건설은 구성원이 겹치기도 하고, 또 사무소까지 동일한 장소(장사동 198번지)를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서로 긴밀한 연계 아래 활동을 전개한 것으로 보인다. 악화되어 가는 객관적 정세를 무시하고 주관적 요인만 가지고 본다면, 카프의 영화부와 연극부는 이 시기에 이르러 비로소 도약의 기본틀을 구축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앞절에서 본 강호의 「조선영화운동의 신방침」(1933.4)에서 제시된 카프 영화부의 조직 및 활동 방향을 그대로 이 시기 카프 연극부의 활동에 적용하여 보아도 크게 다르지는 않을 것이다. 즉, 카프 연극부의 독자적 활동의 강화를 통해 ‘연극동맹’ 및 ‘문화연맹’으로 나아가는 카프 재조직 작업이 이 시기에 이르러 극단 신건설의 존재로써 구체적 진전을 보이기 시작했다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극단 신건설은 1933년 2월 세칭 ‘?연극운동? 사건’ 이는 중앙고보 격문 사건의 배후를 수사하다 우연히 발각된 것으로 처음에 ?연극운동?사에서 그 관계자가 검거된 데서 유래한 이름이다. 최종 재판 결과에 의하면 ‘?영화의 벗? 사건’이라 하는 것이 옳겠다.
이 사건의 경과에 대해서는 박영정, 「연극운동 사건에 대한 재검토」, ?민족극과 예술운동? 10, 1994.여름, 110~127면 참조.
이 발생해 이상춘․강호․김태진 등 주요 멤버가 구속됨으로써 또다시 일시 정체를 겪게 된다. 즉, 이 사건으로 1933년 2월 이상춘․강호․김태진․나웅․추적양 등 카프 연극부와 영화부의 주요 멤버가 구속되었다가, 3월의 기소 과정에서 나웅과 추적양은 불기소로 풀려나고, 이상춘․강호․김태진의 3인만 기소되었으며, 다시 8월의 예심 재판에서 신고송․이찬의 ‘?우리동무? 사건’과 병합심리되어 함께 재판을 받았는데, 이상춘 1인만 면소되고 나머지 4인은 8월(이찬, 강호, 김태진)에서 10월(신고송)의 금고형을 받게 된다. 그리하여 신고송․강호․김태진이 감옥에 들어가 있는 동안, 1933년 후반에서 1934년 전반에 이르는 극단 신건설의 활동에서는 이상춘과 나웅 등이 중심축을 형성하게 되며, 극단 신건설은 1933년 11월 창립 1년 3개월 만에 비로소 창립 공연 ?조선일보?, 1933.11.8.
이 공연에서 나웅은 연출을, 이상춘은 무대장치를 맡았다.
을 성취하게 된다.
이후 1934년 2월 카프 중앙집행위원회 결의에 의해 카프의 문화연맹으로의 재조직 작업이 구쳬화됨에 따라 카프 연극부는 사실상 연극동맹으로서의 지위를 갖게 된다. 이에 카프 연극부는 나웅․이상춘․김욱(金旭)․고영(高英)․홍구(洪九)의 5인으로 집행위원회를 구성하고, 상설적 사무기관으로 서기국을 두어 그 책임자로 이상춘을 선임하게 된다. 이와 같은 카프 재조직의 구체화에 따라 개인만이 아니라 극단 등 연극 단체가 직접 카프 연극부에 가맹할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되며, 그 가입 여부를 카프 중앙이 아닌 연극부 자체에서 결정할 수 있도록 하여 독립성도 ‘연극동맹’ 수준만큼 강화된다. 카프 서기국, 앞의 글, 6면.
각 장르 부서별 독립성 강화를 통한 동맹 조직으로의 전환과 각 장르별 동맹 조직을 토대로 한 카프의 연맹으로의 전환이라고 하는 재조직 작업이, 1930년 4월 처음 제기된 이래 4년 만에 그 실질적인 진전이 이루어진 셈이다.
앞서의 청복극장은 물론이려니와 극단 신건설도 카프 연극부의 ‘직계 극단’이기는 했지만, 조직론적으로 ‘직속극단’은 아니었다. 그것은 카프 연극부의 조직 성격이 극단을 하부 구성원으로 하는 ‘연극동맹’의 형태를 갖추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한 조직론적 미비점이 1934년 2월에 이르러서 비로소 해결된 것이며, 그러한 맥락에서 카프 연극부 집행위원 나웅의 「연극운동의 신단계-캅푸 연극부의 새로운 발전을 위하야」(1934.3) ?조선중앙일보?, 1934.3.21~3.30.
가 발표될 수 있었던 것이다. 나웅은 이 글에서 과거의 카프 중앙이 지닌 종파적이고 섹트적인 편향에 대한 엄정한 자기비판을 전제로, 프롤레타리아 전문극단 및 자립극단에 대한 연극부의 통일적 방침의 수립, 소부르주아 출신의 동반자 문제 해결을 통한 다수자 획득의 방침 등을 자신 있게 제시하고 있다.
이러한 경과를 거쳐 ‘신건설사 사건’ 직전의 카프 연극부는 ‘연극부’라는 명칭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지만, 그 실질에 있어서는 ‘연극동맹’의 형태를 취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카프 연극부(이상춘)의 산하에 중앙극단 ‘신건설사’(김형갑), 평양극단 ‘신세기(新世紀)’ 평양의 프롤레타리아극단인 마치극장의 개명 ‘명일극장(明日劇場)’이 해산된 후 그 후신으로 조직된 극단으로, 20여 명의 동인이 창립대회를 마치고 ?연극선(演劇線)?이라는 잡지까지 발간할 예정이었으나 경찰의 탄압으로 해산되었다(?조선중앙일보?, 1933.9.5).
, 함흥극단 ‘북방무대(北方舞臺)’ 1933년 12월 함흥에서 김승일, 김형용, 이규설 등이 중심이 되어 20여 명의 단언으로 조직된 극단이다(?조선일보?, 1933.12.20).
, 해주극단 ‘공장’ 해주연극공장을 말한다.
, 대구극단 ‘가두’ 대구의 ‘가두극장’을 말한다.
등의 다섯 극단을 정식으로 가맹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김윤식, ?한국근대문예비평사연구?, 일지사, 1976, 192면.
다만 이러한 체제 정비를 갖춘 시점에서 곧바로 ‘신건설사 사건’이 발생함으로써, 극단 신건설은 물론이고, 카프 조직 전체가 완전히 와해되고 만다. ‘연극동맹’으로서의 카프 연극부가 미처 가동도 되기 전에 활동 중단을 맞게 되었음은 말할 것도 없다. 그리고 1935년 5월 카프가, 6월 극단 신건설이 경찰에 해산계를 제출함으로써 카프와 카프 연극부는 조직과 활동에 있어서 말그대로 종지부를 찍게 된다. 카프는 1935년 5월 28일, 극단 신건설은 1935년 6월 5일 동대문서에 해산계를 제출하였다(?조선중앙일보?, 1935.6.5, 1935.6.6).
4. 맺음말
이상에서 보았듯이 1930년대의 프로연극은 1930년 4월 카프 연극부가 설립되는 것을 전후하여 서울과 지방에서 여러 프로극단이 창립되면서 그 활동이 전개되었다. 대부분의 프로극단이 동경의 무산자극장과 카프 연극부의 영향 또는 지도 아래 조직되었지만 이동식소형극장의 경우는 그와 다른 조직적 맥락에서 출발하였다. 카프 연극부의 직계에 속하는 극단으로 청복극장과 우리들극장이 있고, 그 방계 극단으로 가두극장과 대중극장, 마치극장 등이 있음을 보았다. 한편 카프 연극부보다는 ‘신흥영화예술가동맹’에 조직적 뿌리를 두고 있는 이동식소형극장이 창립하여 활동을 하였는데, 이것이 다시 극단 메가폰을 경과하면서 양대 세력의 통합극단인 극단 신건설에 이르게 되었음도 살펴보았다.
카프 연극부의 입장에서 프로연극의 전개과정을 정리해 보면, 애초 프로연극의 통일적 지도를 염두에 두고 출범하였지만, 카프 중앙(1930년 4월)의 헤게모니를 앞세운 종파적 조직론 때문에 프로연극의 전국적 통일 노력이 전혀 이루어지지 못하였고, 그러한 상황에서 카프 중앙과 대립하는 이동식소형극장이라는 극단이 나오게 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카프 중앙의 이러한 태도는 1932년 5월 재편을 계기로 변화하게 되며, 특히 신고송을 중심으로 하는 카프 연극부의 실천 방식의 변화에 힘입어 카프 연극부가 프로연극의 전국적 통일을 위한 구심점으로 기능하기 시작한다. 극단 메가폰에 카프 연극부원이 다수 참여한 것은 그 단적인 예가 된다. 이러한 경과를 거쳐 프로연극계의 통합극단으로서의 극단 신건설이 탄생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서울에서의 극단 신건설이 출범함으로써 1934년의 ‘연극동맹(안)’이 현실화될 수 있었던 것이다. 즉, 프로연극의 조직적 통일을 기하고자 했던 카프 연극부의 목표가 1932년 극단 메가폰을 분기점으로 하여 ‘연극동맹’의 형태로 발전해 갈 수 있었다고 할 수 있겠다.
이상에서와 같이 카프 연극부를 중심으로 1930년대 프롤레타리아 극단들의 조직 관계를 개관해 봄으로써, 당시의 프롤레타리아 연극운동이 ‘연극동맹’을 목표로 하는 전국적 통일 과정이라는 일정한 흐름을 지니고 전개되었음을 확인하였다. 또한 카프 연극부와 여타의 프로극단들의 관계에 대한 계열화의 시도를 통해, 그동안 모든 프로극단을 동일한 성격을 가진 집단으로 뭉뚱그려 인식하던 데서 한걸음 나아가 그들 내부의 갈등이나 성격의 차이를 파악할 수 있었다. 이러한 고찰을 바탕으로 각각의 프로극단 및 그들의 공연 활동이 프롤레타리아 연극운동에서 차지하는 위치에 대한 보다 구체적인 평가도 가능하게 될 것이다.
참고문헌
김윤식, ?한국근대문예비평사연구?, 일지사, 19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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