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심 고리키
- 러시아의 사회주의 혁명가이자 문학 작가로,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제창하고 제정 러시아 하층민의 생활을 묘사하는 등 프롤레타리아 문학의 선구적인 문학가였다. 1901년에는 짜르 타도를 외치며 지하인쇄소 사건에 연루되어 체포되었으며, 1905년에 러시아혁명의 기폭제가 된 '피의 일요일' 사건을 주도했던 '가퐁신부사건'에 연루되어 체포되었다. 대표작은 희곡 《밤 주막》(1902), 자전적 3부작 《유년시대》(1914), 《사람들 속에서》(1916), 《나의 대학》(1923) 등이 있다.
원어명 | Maksim Gor'kii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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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사망 | 1868.3.28 ~ 1936.6.14 |
본명 | 페슈코프(Aleksei Maksimovich Peshkov) |
국적 | 러시아 |
활동분야 | 문학 |
출생지 | 러시아 니주니노브고로트 |
주요저서 | 《유년시대》(1914), 《사람들 속에서》(1916), 《나의 대학》(1923) |
1868년 3월 16일 러시아 볼가강 연안의 도시인 니즈니 노브고로드(Nizhni Novgorod)에서 출생하였다. 본명은 알렉세이 막시모비치 페쉬코프(Aleksei Maksimovich Peshkov)이다. 아버지(막심 사바치예비치 페쉬코프)는 목수였고 어머니(바르바라 바실리예브)는 작은 염색공장을 운영하는 집안의 딸이었다. 고리키가 3세때 아버지가 사망하자 어머니와 함께 외가에서 자랐지만 어머니가 재혼하여 모스크바로 떠나자 외할머니에게 의탁하여 성장하였다. 초급학교를 3년 다니다가 가난으로 중퇴하였으며 돈벌이를 위해 구두수선공, 제도사, 짐꾼 등 다양한 직업을 전전하였으며 그의 어머니는 고리키가 11세 때 사망하였다.
1880년 그가 12세가 되었을 때 집을 나와 살면서 각지를 방랑하며 떠돌이로 지냈다. 우연히 볼가강을 운항하는 화물선의 식당에 취업하여 주방일을 하게되었다. 그곳에서 같이 식당에서 일하는 퇴직한 사관출신의 요리사를 만나는데 그에게 많은 영향을 받았으며 후일 고리끼는 그 퇴직사관이 자신의 첫번째 스승이라고 고백했다. 그와 생활하면서 학문과 문학에 눈뜨게 되고 독서에 깊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이후 타타르스탄의 수도인 카잔(Kazan)으로 가서 지하조직에서 활동하였다. 대학에 진학하고자 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는 이곳에서 활동하며 진보적인 혁명가들과 교류하였으며 지식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더욱더 독서에 매진하였다. 특히 그는 빵을 만드는 공장에서 일하며 열학한 노동조건에 항의하는 집회에 가담하였다. 고리키는 독학으로 공부하면서 문학에 뜻을 두었으나 진보적인 지식을 가진 청년들과 만남에서 자신의 부족함에 절망하여 자살을 기도하기도 하였다(1887). 20세가 되어 친구이자 혁명가인 로마스를 따라 볼가강 연안을 끌라스노비도보로 이주하여 농촌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때문에 고리키는 짜르 경찰과 보수파의 수배대상이 되어 쫗기다가 고향이 니즈니 노브고로드에서 체포되어 수감되기도 하였다.
이때 그는 그동안 간간히 집필하였던 것을 그만두고 이후 5년 동안 러시아제국 전역을 도보로 여행하였다. 러시아제국이 처한 현실을 직접 목격하며 고통받는 민중의 삶을 표현하기 위해 다시 글을 쓰기 시작했으며 이때 자신의 처녀작 단편소설인 《마까르 추드라 Makar Chudra (Макар Чудра)》를 집필하였다. 늙은 두명의 집시를 주제로 한 소설이며 인간의 자유를 갈망하는 내용으로 상당한 주목을 받은 작품이다. 고리키는 이것으로 문단에 등단하게 되며 이때부터 필명인 막심 고리키라는 이름을 사용하게 된다. 1895년 단편소설 《첼카슈 Chelkash (Челкаш)》를 발표하면서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그는 이소설에서 떠돌이 부랑자인 첼카슈가 물건을 훔치면서도 작은 물건에도 소유욕이 많은 가브릴라에 대비하여 금전적으로 타락하지 않은 인간상을 보여준다. 문학가인 코롤렌코(Vladimir Galaktionovich Korolenko), 안톤 체호프(Anton Pavlovich Chekhov)와 친분을 가지게 되었으며, 제정 러시아의 밑바닥에서 허덕이는 사람들의 생활을 묘사하여 프롤레타리아 문학의 선구적인 문학가로 알려지게 되었다. 1899년 자본주의가 인간을 변모시키는 과정을 묘사한 장편소설 《포마 고르제예프》를 발표하며 그의 문학적인 입지는 더욱 견고해진다. 1901년에는 짜르 타도를 외치며 지하인쇄소 사건에 연루되어 체포되었으며 1905년에 러시아혁명의 기폭제가 된 '피의 일요일' 사건을 주도했던 '가퐁신부사건'에 연루되어 체포되었다. 이후 이탈리아와 미국을 여행하며 짜르 정부의 타도와 러시아 민중혁명지원을 호소했다.
그의 생활은 자전적(自傳的) 3부작 《유년시대 Detstvo》(1914), 《사람들 속에서 V lyudyakh》(1916), 《나의 대학 Moi universitety》(1923)에 나타나 있다. 1892년 처녀작 《마카르 추드라 Makar Chudra》로 인정을 받았고 이어 《첼카슈》(1895)로 주목을 끌어 희곡 《밤 주막 Na dne》(1902)이 특히 유명하며, 한때 볼셰비키당에 들어가 소설 《어머니 Mat’》(1907)에서 혁명가의 전형을 창조하기도 하였다.
1905년 혁명으로 투옥된 뒤 외국으로 망명, 그곳에서 《레토피시》지(誌)를 발간하여 좌익작가를 모았다. 1913년, 대사령(大赦令)을 이용하여 귀국, 《신생활》지(紙)를 발행하여 레닌파(派)와 대립하였으나 11월혁명(구력으로는 10월혁명) 후에는 신정권을 지지하였다.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제창하여 소비에트 문학의 기수(旗手)가 되었고, 미완성의 서사시인 《클림 사므긴의 생애 Zhizn’ Klima Samgina》(1936) 등 많은 작품을 남겼다. 1936년 6월 8일 폐렴으로 죽었다. 일설에는 1930년대 후반의 대숙청 때 정적에게 독살되었다고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