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곡 가산산성
길지 않은 세월 무성한 함성만 가산을 뒤덮고
인조 17년(1639년), 경상도 관찰사에 제수된 이명웅은 왕에게 부임인사를 하면서 경상도 예순 고을 산성 가운데 믿을 만한 곳은 진주, 금오, 천생의 세군데밖에 없으므로 적당한 곳을 골라 산성을 쌓을 것을 요청하였다. 그해 4월 경상감사로 부임한 이명웅은 가산의 지리가 편리함을 다시 조정에 보고하였고, 9월부터 인근 고을의 많은 남정을 징발하여 험한 지형을 따라 성을 �기 시작하여 이듬해 4월에 내성을 준공하였다. 그러나 이 성을 쌓기 위해 10만여 명 이상의 엄청난 인력과 막대한 자금이 동원되고 감사의 가혹한 독려로 공사 도중 많은 사람이 죽기까지 하여 민심이 동요하였다. 여러 차례 탄핵을 받은 이명웅은 임기를 채우지 못하고 1640년 7월 체직되고 말았다. 그대 쌓은 내성의 규모는 성벽의 둘레가 약 4km에 달하는 4710보, 여장이 1887첩이었으며, 동.서,북문의 세 성문이 설치되고 암문도 여덟개가 있었다. 산성 안에는 네 곳의 포루, 한 군데에 장대, 산성에 필수적인 샘이나 우물이 스물 하나, 기타 많은 부속시설이 들어서고 절도 넷이나 자리잡고 있었다.
내성이 완공된 지 60년이 지난 숙종 26년(1700년)에 외성을 축조했다.
중성은 영조 17년(1741년) 관찰사 정익하의 장계를 받아들이면서 이룩되었다. 성벽 길이 602보에 여장 402첩, 중문 하나 문루 하나, 별장(別將)이 머무르는 건물 등이 설치되었다. 4년 뒤에는 중성 안에 빙고를 축조하기도 하였다.
1640년 성이 완성되면서 종 3품 도호부사가 다스리는 칠곡도호부를 여기에 설치하고 군위, 의흥, 신녕, 하양지방이 칠곡도호부에 예속되었다. 그러나 관아가 산성 안에 있다 보니 여러가지로 불편한 저이 많았기 때문에 백성들은 다른 곳으로 이전을 요구했다. 이에 따라 순조 19년(1819년) 당시 경삼감사로 있던 추사 김정희의 아버지 김노경이 장계를 올리면서 칠곡도호부는 팔거현으로 옮겨졌다. 산성 안에 객사, 인화간을 비롯한 관아와 군관청, 군기고, 보루, 포루, 장대가 설치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행정적이라기보다는 방어를 위한 군사시설이 압도적인 군사용 성이라고 볼 수 있다. 중성에는 네 개의 진의 창고가 있어 비축미를 보관하여 유사시에 사용하도록 하였다.
영남제일루라고 쓰여진 진남루에 올라 바라본 칠곡 일대는 따가운 여름 햇살이 내려 쬐고 성 안쪽에서 뻗어 올라온 담쟁이 넝쿨은 탐스럽기 그지없다. 어느 쪽으로 올라갈 것인가 생각하다가 산성을 따라 오른다. 1977년부터 1980년까지 3년에 걸쳐 복원한 남문과 문루, 성곽의 일부는 주로 옛 돌을 이용해 복원했으나 솜씨가 거칠고, 조금 지나자 산성은 허물어진 그대로다.
길가에는 새카만 오디 열매가 검은 낙엽처럼 떨어져 뒹굴고 있다. 그뿐인가. 이미 저버린 지 오래인 아카시아 꽃잎들이 누렇게 변색된 채로 길을 뒤덮고 있다.
아! 가고 오는 것들이여 가는 계절을 서러워할 사이도 없이 또 다른 꽃들이 연이어 피어나고 그 꽃들이 진 자리에 열매들이 또 다른 탄생을 준비하고 있고, 붉은 딸기 몇 개가 유혹하는 한 켠에 새빨간 나리꽃이 피어 있구나. 싸리꽃 무리지어 피어 있는 길을 돌아가서 성터에 앉는다. 바람은 제법 선선하게 불고 나는 나무기둥에 등을 기댄 채 먼 산을 바라본다. 그래 저 멀리 펼쳐져 있는 칠곡, 대구 일대와 이 가산산성이 한국전쟁 당시 피바람 불어제치던 전쟁터였었지. 한국전쟁 당시 가산산성의 전투를 <한국전쟁사>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우군기의 폭격이 시작되어 뒤를 이어 미군 및 사단 야전포병의 일제사격이 집중되자 가산산성 안은 피비린내 나는 수라장이 되고 말았다. 아름드리 낙엽송이 순식간에 벌거숭이가 되고 성벽 위에 웅크린 적병들이 밤송이 떨어지듯 아래로 곤두박질했다. 가장 치열한 교전을 치른 제4중대는 180명이던 병력 중 몸이 성한 자는 장교 1명과 병사 10명에 지나지 않을 정도로 감소되어 있었다. 가산산성에 침투한 북괴군 제14연대도 1950년 8월27일 전투에서 와해, 약 400여 명만이 탈출했다고 한다" 하지만 가산산성 전투는 빙산의 일각이었다.
8월12일에는 미군이 제1기병사단과 공군이 입체작전을 벌여 백병전을 무릅쓰고 인민군 이천오백 명쯤을 살상하여 낙동강을 건너 대구로 진입하려는 적의 기세를 꺾었다. 8월13일에는 가산 면학산에 있는 328고지에서 전투가 전개되었고 328고지에서는 하루에도 주인이 두번씩 바뀔 정도의 치열한 전투가 계속되었다. 8월16일 오전 11시58분에 일본 요꼬다와 가네다에서 출발한 B29 비행기 98대는 왜관에 있던 북한군 진지를 향해 대대적인 폭격을 가했다. 26분 동안에 퍼부은 폭탄이 무려 960톤에 이르렀다. 이 폭격으로 강을 건너기 위해 있던 북한군 사만 명 중에 적어도 삼만 명이 죽었다고 한다. 병사들의 시체가 산과 들을 뒤덮었고 낙동강은 붉은 핏빛으로 물들었다. 그러니까 1초에 스무명, 1분에 1150명 꼴로 폭사한 셈이다. 바로 이 폭격으로 국군과 미군이 대구를 방어할 수 있었을 뿐만이 아니라 승리할 수 있는 결정적인 전기가 이루어졌다.
그러한 사실을 아는 지 모르는 지 바람은 나무들을 흔들리게 하고 길은 계속 오르막길이다. 어디 한 군데 트인 데 없는 작은 소나무와 참나무들이 들어선 길을 한없이 올라서다가 윤영숙, 오현신 선생은 "그늘 속에서 수도나 하겠다"고 뒤쳐진다. 얼마쯤 올랐을까 큰 바위 위에서 산 아래를 내려다보며 진재인씨는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 라는 말을 진실로 깨달았다고 너스레를 떤다.
내려오는 길은 생각보다 가파르다. 동문으로 해서 가산바위로 오르는 길에는 사람들의 발길이 줄을 잇고 옛 천주사 터에 세워진 해인정사에선 잘 익은 앵두나무가 우리를 반기고 있었다.
<소창청기>에 "속세를 벗어나 정을 줄만한 대상은 오직 산뿐이다. 산은 반드시 사물의 도리를 깊이 관찰하는 눈과 명승지를 탐방하기에 알맞은 체구와 오래도록 머무는 인연이 있어야만 비로소 허물없는 교우 관게를 허락한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잠시 머물렀다 가는 우리들에게 이 가산과 가산산성은 무슨 질문을 던질 것인가?
*교통
서울에서 대구터미널까지 06:00~20:30까지 10분 간격으로 있고, 요금은 우등 17,900원, 일반 12,100원이다. 대구 북부터미널(053-743-4464)에서 동명을 거쳐 송림사 가산산성으로 가는 버스가 06:20, 06:40, 08:30, 10:30, 12:00, 15:00, 17:00 등 많이 있다.
*잘 데와 먹을 데
가산산성 아래에 숙식할 곳들이 많이 있다.
참고: 월간<사람과산> 2002년 7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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