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해록'의 주인공, 홍어장사 '문순득'
'표해록(漂海錄)' 이라는 제목의 책은 현재까지 3종이 전해 내려오고 있다. 하나는 탐진출신의 최부가 남긴 것과 제주출신의 장한철이 남긴 표해록, 그리고 정약전 선생이 저술한 표해록이다. 최부의 표해록이나 장한철의 표해록은 잘 알려져 있으나 정약전 선생이 우이도에서 유배생활을 하면서 저술한 표해록은 비교적 늦게 그 존재가 알려져 모르는 경우가 많다.
이 표해록의 주인공이 '문순득(文淳得)'이란 사람으로 홍어장사였다. 정약전 선생이 홍어장사인 문순득의 표류생활을 생생하게 엮은 책으로 표해시말(漂海始末)이라는 제목으로 되어있다. 대대로 우이도에 살고있는 문순득의 5대손인 문채옥씨 집에 소장되어 내려온 여러 문건 중에 단지 저술되었다는 사실 외에 원본의 실체가 없었던 표해록이 뒤 늦게 발견되어 세상에 빛을 보게 된 것이다.

▲표해시말(漂海始末)이란 제목의 문순득 표해록
'문순득', 이 사람은 1777년에서 1847년까지 조선후기를 살았던 실존인물로 본관은 나주 문씨이다. 당시에도 홍어는 서남해를 대표하는 어종(魚種)이었고 이런 홍어를 전문적으로 뭍과 유통하며 장사하던 이가 바로 문순득이다. 향토음식으로 7백 여 년이 넘는 홍어의 역사이지만 기록상으로나 구전으로 알려진 바로 최초로 홍어와 연관되어 나오는 이름 석자가 이 문순득이란 인물이다. 문순득과 표해록에 관한 기록은 조선왕조실록에도 나온다.
(·····) 나주(羅州) 흑산도(黑山島) 사람 문순득(文順得)이 여송국(呂宋國,필리핀)에 표류한 일이 있는 바, 그 곳 사람의 형모(形貌)와 의관(衣冠)을 보고하고 그 나라의 방언(方言)을 기록하여 가지고 왔었다.(·····) - 순조9년(1809) 6월 26일
지금의 신안군 도초면인 우이도는 조선시대에 소흑산도로 불리우고 있었다. 이 섬에서 배를 두척을 부리던 문순득은 큰 배는 홍어를 잡고 작은 배는 잡은 홍어를 싣고 그때나 지금이나 홍어로 유명한 나주 영산포에 내다 팔았다. 돌아오는 길에는 빈배로 가지않고 쌀과 곡식을 사 양식이 귀한 섬에 되 파는 장사를 하며 살던 문순득이 인생의 큰 전기(轉機)를 맞는다.

▲우이도의 옛 부두, 여기서 문순득은 출항과 귀항을 하였을 것이다.
문순득의 나이가 25살 때인 지금으로부터 2백년전인 1801년 12월의 어느 겨울날, 대흑산도 남쪽의 태사도에서 홍어를 사서 싣고 돌아오다 사나운 풍랑에 동네 선원들과 함께 타고 있던 배가 표류를 하게 된다.
이 때 문순득은 오키나와를 거쳐 필리핀에 다다르게 된다. 1805년 1월 8일에 중국을 통해 집에 무사히 돌아오기까지 무려 3년2개월의 시간이 걸린 본의 아닌 여정(旅程)이었다.
이미 일본에서도 그 가치를 인정받아 단행본으로 발간된 표해록은 문순득이 해류에 밀려 제일 먼저 기착 한 곳이 오키나와(유구국,琉球國)이다. 이 곳에서 문순득은 8개월이 넘는 기간을 보내다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중국으로 향했으나 무슨 기구한 운명이었는지 또 풍랑을 만나 필리핀(여송국,呂宋國)에 표착하게 된다. 여기서도 근 9개월이 넘는 기간을 지내다 중국에서 약 14개월을 보내고 의주를 거쳐 처자식이 있는 그리운 고향 땅을 밝게 된다.
여기서 주목되는 점은 홍어 어상(魚商)을 하던 평범한 섬사람인 문순득이 마침 우이도에서 유배 중인 정약전 선생에게 그가 표류해 다녀온 중국, 안남, 유구, 여송 나라들의 풍속과 의복, 가옥, 토산품, 언어, 선박 등등을 세세하게 구술하여 이를 체계적으로 기록이 가능하게끔 자료를 제공했다는 점이다. 놀라운 것은 표해록 권말에 112개의 단어를 유구어, 여송어와 우리말로 비교, 나열해 실었을 정도이다.
문순득은 그저 단순히 일개 홍어장사가 아니라 대단한 두뇌와 관찰력의 소유자였고 해외 문물을 적극 수용하는 지금으로 치면 세계인이요, 개명한 선각자였던 것이다. 

▲문순득이 내려 받은 교지
후일 필리핀인들이 우리 나라 제주도에 표류해 온 적이 있는데 의사소통에 어려움이 많자 조정에서 문순득을 불러 통역을 할 정도였다고 하니 어학에 천부적인 재능이 있었고. 유통을 알던 문순득이 표류생활 중 중국에서 직접 가져온 부채, 장신구와 상례가 적힌 서책들이 지금까지 집안대대로 유품(遺品)으로 내려오고 있다.
또한 우이도의 문씨가문은 외딴 섬에 유배되어 절망의 나락 속에서 고통의 세월을 보내고 있던 인물들에 대해 대대로 물심양면으로 도움을 주었다는 사실이다. 문순득도 집안 내력대로 유배객 들에게 각별했던 모양으로 이때 정약전 선생과 서로 나눈 교류와 대화들은 막막하고 고달픈 귀양살이에서도 선생이 붓을 놓지 않게 하는데 큰 힘이 되었으리라 여겨지고 그저 한낱 이야기 거리로 치부되어 잊혀질 표류객의 체험담은 정약전 선생의 붓끝을 통해 소중한 기록유산으로 남게 되었다는 것이다.

▲1816년 우이도에서 유배 생활 중 숨을 거둔 형 정약전의 장례를 문씨(문순득 추정)들이 치러 준 고마움에 강진에서 유배 중이던 동생 다산 정약용은 감사의 편지를 보낸다.
문순득! 그의 파란 많은 생(生)도 흥미롭지만 서남해 바다 한 쪽 우이도 출신의 홍어장사인 그가 우리에게 남긴 행동과 자세에서 본 받아야 할 점은 크다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