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살 때에 東萊郡 開揚學校(현 高等普通學校)를 졸업
1906년 東京으로 유학을 가서 正則豫備學校에서 2년간 공부
1914년 岡山第六高等學校 졸업
1915년 京都帝國大學 법학과
1919년 법학사 학위 취득
1919년 京都帝國大學 英法科 졸업
1915년 1월 24일 日本 京都帝國大學生 金雨英의 주동: 일제침략하 한국36년사 3권
출전朝鮮人槪況 第4章 內地鮮人の情況
日本 京都帝國大學生 金雨英 의 주동으로 京都朝鮮留學生親睦會가 조직되다.
동아일보 1920-04-01 國家存在의 理由(제1회, 全4回)金雨英
04월02일 國家存在의 理由(제2회, 全4回)金雨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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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 04월10일동아일보
변호사김우영, 라혜석양과 정동례배당에서 결혼식(肖)
1921년 09월25일 동아일보
1925년 12월01일 개벽 제64호 兩西 五十日 中에서
필자春坡 기행문中에서
新舊義州를 보고 回路에 .....
저녁 후는 安東縣에 가서 국경청년연합웅변대회를 보앗다.
演士들의 語材不足과 청중측의 「야지」 不的中은 外格보다 좀 섭섭하얏다.
그것보다 臂頭 金雨英 군의 「番判에 관한 주의」 云云은 (청중의 투표인고로) 죽인지 밥인지 실로 창피막심이엿다.
폐회가 되고보니 11시엿다. 還國을 재촉햇스나 還客이 못처럼 외국왓다가 그져 가느냐고 친구들은 결국 엇던 요리점으로 끌고간다.
盡蕩히 먹고 또 부족하야 엇던 妓房을 차저 기생구경까지하고 오게되얏다.
아구 망측해라.
열이고 백이고 잇는대로 다 드러와 선을 보인다.
누가 마음에 드느냐고 말을 모르면 손고락으로 꼭 집으라고 한다.
십여명 중에서 한아을 손고락질 하니 其餘落第娘들은 창피한듯이 달아나버린다.
5,6명 이국남성이 1개 이국랑과 酬酌이 열리니 엇지 우습지 안으랴.
或笑 或談 일분 후에 1圓金을 주고 나와 버렷다. 此亦經世라고 할가?
1930년 10월01일 별건곤 제33호 吸煙室
변호사 금우영 군은 丸山敬次郞君과 명치정에 공동사무소를 내엿다.
이를 터이면 일한소합병이지.
1932년 03월05일 동광 제31호 辯護士 評判記(1) 東虛子
金雨英 君
변호사로 副領事가 되어 가지고 安東縣 가서 수 년을 지내다가 미술가의 안해 羅惠錫女史와 같이 세계일주를 하고 돌아와서는 돌연히 羅氏와 이혼을 하고 다시 시내에서 변호사업을 시작하엿다.
어린 자식 3, 4명이 달린 안혜와 이혼을 한 金君 - 그 중심을 추측하기에 어렵지 아니하거니와 미친 물결같이 뛰노는 감정을 가진 예술가의 안해는 법으로 業을 삼는 이 남편과는 일생을 같이 할 수가 업섯는가.
안해 羅氏가 세계일주시 XX發明士 XXX氏와 巴里에서 달큼한 사랑을 속삭이엇다는 풍문이 사실인지 아닌지 그것은 모르거니와 金君은 자기의 쓰라린 경험으로 이혼소송을 대리할 때에는 타인이 상상도<67> 못할 名論을 토하야 法官의 머리를 끄덕거리게 하는 때도 잇다고 한다.
在野法曹界에 두번재 발을 들어놓는 金君은 무슨 의미로 보던지 甦生의 길을 거러나가는 첫 시련이니 금후의 金君의 辯護士로의 활약은 볼 만한 것인 줄 알앗더니.
1932.2.19 朝鮮總督府官報
李聖根이 咸鏡北道參與官에, 姜弼成이 咸鏡南道參與官에, 金雨英 이 道理事官에, 임명되다.
1939년 04월01일 동아일보
김우영(총독부도리사관) 승서고등관3등
1949년 01월 26일 한성일보
反民族行爲特別調査委員會, 부산에서 반민피의자 金雨英과 河判洛을 체포
민족을 좀먹는 친일분자에 대한 반민특위의 메스는 드디어 지방에 확대되었다. 즉 중앙반민위원회 김용희 조사관 일행은 지난 23일 부산에 도착, 행동을 개시하여 동일 하오 9시 반경 부내 芙容洞에서 전 중추원參議 金雨英(64)을 체포하는 한편 이어 24일 상오 9시경에는 부수동에서 전 경남도 고등과 형사 河判洛을 체포하여 모처에 구금하였다 하는 바, 전기 김우영은 京都帝大를 졸업한 후 안동 副領事, 전남산업과장, 충남 參與官, 중추원참의 등을 역임한 친일거두라 하며, 河는 고등과 형사로서 수많은 애국자를 고문학대하여 ‘고문왕’이라는 이름까지 받은 악질분자라 한다.
동아일보 | 1920-04-10 | 무 | 03 | 06 | 辯護士 金雨英, 羅蕙錫孃과 貞洞禮拜堂에서 結婚式(肖) | ||
10 | 동아일보 | 1920-05-20 | 무 | 02 | 07 | 朝鮮經濟會主催 講演會: 演士 朴泳孝 李商在 崔鎭 安國善 盧翼根 金雨英 | |
11 | 동아일보 | 1921-09-25 | 무 | 02 | 07 | 滿洲地方에 朝鮮人 副領事로 金雨英 楊在河 二名任命發表, 在滿朝鮮人의 內情을 詳細히 知得할 必要로 | |
12 | 동아일보 | 1922-05-19 | 무 | 03 | 04 | 報酬金八千圓 請求訴訟, 이전 변호사 金雨英의 송사 | |
13 | 동아일보 | 1922-10-04 | 무 | 04 | 05 | 安東縣朝鮮人靑年會主催 강연회: 在外靑年 同胞의 責任(金雨英), 家庭에서 育兒하는 方法(黃天佑) | |
14 | 동아일보 | 1930-03-28 | 무 | 02 | 03 | 辯護士 金雨英氏 開業 | |
15 | 동아일보 | 1939-04-01 | 조간 | 01 | 10 | 金雨英(總督府道理事官) 陞敍高等官三等 | |
16 | 동아일보 | 1949-01-26 | 석간 | 02 | 05 | 金雨英 河判洛은 釜山에서 逮捕拘禁 | |
17 | 동아일보 | 1949-01-27 | 석간 | 02 | 07 | 盧璣植(保安課長) 逮捕 金雨英等과 서울로 押送//李九範은 日本에 逃避(釜山) | |
18 | 동아일보 | 1949-02-02 | 석간 | 02 | 03 | 文明琦, 林昌洙逮捕 徐永出 南學鳳도 被檢//特委各道支部設置 朴興植과 李鍾榮은 問招終了//金雨英 金泰錫問招에 着手 | |
19 | 동아일보 | 1949-02-15 | 석간 | 02 | 06 | 金雨英保釋 | |
20 | 동아일보 | 1957-09-17 | 석간 | 04 | 06 | 民族共同生活과 道義(新生公論冊別) ; 新生公論社刊 | |
21 | 동아일보 | 1957-09-17 | 석간 | 04 | 06 | 金雨英著 民族共同生活과 道義(新生公論冊別) ; 新生公論社刊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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