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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굴] 文人, 옛 잡지를 거닐다 ③ 이상·김유정·박태원·김기림
“오입쟁이 李箱(이상)도 연정에는 서툰 소년”
⊙ ‘고독한 이방인’ 시인 李箱의 遺稿(유고) 속에 당대 문인들의 삶 담겨
⊙ 박태원의 소설 <애욕>의 주인공은 李箱이 실제 모델
⊙ “돌아오지 않는 ‘제비(이상의 다방 상호)’의 임자는 얼마나 야속한 사람이겠소?”(金起林)
이상·김유정·박태원·김기림(맨 위로부터 시계 반대 방향).
1930년대에 카프식(式) 경향문학에 맞선 걸출한 문우(文友)들이 여럿 있었다. 시인 이상(李箱·본명 金海卿·1910~1937)과 김기림(金起林), 정지용(鄭芝溶), 소설가 박태원(朴泰遠)과 김유정(金裕貞) 등이다.
순수예술을 지향했던 ‘구인회(九人會)’ 멤버이기도 한 이들 사이에 남은 교우록(交友錄)은, 일찍 타개한 이상의 유고(遺稿)와 문우들의 회고에서 확인할 수 있다.
1930년대 한국문단의 ‘고독한 이방인(異邦人)’이라 불린 이상은 당대 카프의 프롤레타리아 문학과 대조되는 관념적이고 난해한 모더니즘 문학으로 센세이션을 일으켰던 인물. 3년 과정의 경성고등공업학교(지금의 서울대 공대) 건축과를 나와 21세 때 조선총독부 내무국 건축기수로 취직한 그는, 조선건축회지 《조선과 건축》의 표지도안 현상모집에 1등과 3등에 당선되는가 하면 <이상(異常)한 반역반응(反逆反應)>이란 낯선 시로 당대 문단을 경악시켰다. 또 ‘선전(鮮展·조선미술전람회)’에 자신의 초상화를 출품, 입선될 정도로 문예(文藝)에 다재다능했다.
이상이 1934년 4월 17일 향년 28세를 일기로 동경제대부속병원에서 요절하고 2년 뒤인 1939년 5월호 《청색지(靑色紙)》에 이상의 유고 <소설체로 쓴 김유정론>이 실렸다.
글 도입부에 이상은 ‘앞으로 김기림, 박태원, 정지용에 대한 글도 쓸 계획’임을 밝혔을 정도로 교분이 두터웠다. 그러나 실제로 완성된 글은 한 편밖에 없다. <소설체로 쓴 김유정론>에는 문우들에 대한 흥미로운 묘사가 자주 등장한다.
비슷하지만 다른 起林· 泰遠· 芝溶· 裕貞
이상은 시인 김기림에 대해 ‘암만해도 성을 안 낼뿐더러 누구를 대하든 늘 좋은 낯으로 대하는 타입의 우수한 견본(見本)’이라고 했다. 소설가 박태원에 대해선 비슷하지만 다르게 묘사한다.
<…좋은 낯을 하기는 해도 적(敵)이 비례(非禮)를 했다거나 끔찍이 못난 소리를 했다거나 하면, 잠자코 속으로만 꿀꺽 없이 여기고 그만두는, 그러기 때문에 근시안경을 쓴 위험인물이 박태원이다.…>
(p89, <소설체로 쓴 김유정론>, 《청색지》, 1939년 5월)
이상이 보기에 정지용은 김기림, 박태원과 또 다르다.
<…없이 여겨야 할 경우에 “이놈! 네까짓 놈이 뭘 아느냐”라든가, 성을 내면서 “여! 어디 덤벼봐라”고 할 줄 아는, 그러나 그저 그럴 줄 알 뿐이지 그만큼 해두고 주저앉고 마는, 코밑에 수염을 저축(貯蓄)한 정지용이었다.…>(p89)
반면 김유정은 속으로 부글부글 삼키는 부류가 아닌 진정한 ‘투사’로 묘사된다.
<…모자를 홱 벗어 던지고, 두루마기도 마고자도 민첩하게 턱 벗어 던지고, 두 팔 훌떡 부르걷고 주먹으로는 적의 볼때기를, 발길로는 적의 사타구니를 격파하고도 오히려 행유여력(行有餘力)에 엉덩방아를 찧고야 그치는 희유(稀有)의 투사가 있으니 김유정이다.…>(p89)
이상은 ‘이들이 무슨 경우에 어떤 얼굴을 했댔자 기실, 그 교만(驕慢)에서 산출된 표정 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참 위험하기 짝이 없는 분들’이라 재미있게 표현한다.
<…다행히 이 네 분은 서로들 친하다. 서로 친한 이분들과 친한 나 불초(不肖) 이상이 보니까 여상(如上)의 성격이 순차적 차이가 있는 것은 재미있다. 이것은 혹 불행히 나 혼자의 재미에 그칠는지 우려되지만 그래도 좀 재미있어야 되겠다.…>(p90)
<소설체로 쓴 김유정론>을 좀 더 들여다보자.
어느 날 김유정이 B군, S군과 함께 초저녁부터 곤히 잠든 이상을 찾아왔다.
“김형!(김해경) 이 유정이가 오늘, 술 좀 먹었습니다. 김형, 우리 또 한잔 합시다.”
이상 왈(曰) “그럽시다 그려.”
강원도 출신인 김유정은 술이 들어가면 끈적끈적한 목소리로 강원도아리랑 ‘팔만구암자(八萬九庵子)’를 내뽑곤 했다. 이상이 듣기에 유정의 목소리는 ‘천하일품’. 하지만 취중 문학담은 곧잘 주먹다짐으로 이어졌다.
B군이 술에 취해 5합들이 술병을 거꾸로 쥐고 육모방망이 돌리듯 휘두르며 “너, 유정이 덤벼라”고 외쳤다. 유정과 S군이 함께 맞서 B군을 공격했지만 B군은 S군의 불두덩이를 걷어찼다. 노발대발한 S군은 B군을 향하여 맹렬한 일축(一蹴)을 결행한다.
<…이러면 B군은 또 선수(船首)를 돌려 유정을 겨누어 거룩한 일축을 발사한다. 김유정은 S군을, S군은 B군을, B군은 유정을, 유정은 S군을, S군은… 대체 누가 누구하고 싸우는 것인지 종잡을 수가 없는 것이다.…>
(p93)
仇甫의 소설 <애욕>에 등장한 李箱
이상이 절친한 친구였던 소설가 구보 박태원의 결혼식 방명록에 남긴 친필 축하 메시지.
“結婚(결혼)은 卽(즉) 慢畵(만화)에 틀님업고(틀림없고)”로 시작하는 글이 눈에 띈다.
1939년 5월 《여성》지에는 소설가 구보(仇甫) 박태원이 쓴 추모글인 <이상(李箱)의 비련(秘戀)>이 실렸다. 그는 이상을 이렇게 묘사했다.
<…가난하고 불결하기는 이전과 마찬가지지만, 코르덴 양복에 해진 셔츠, 세수는 사흘에 한번 할까 말까 하고, 잡지 일로 《조선일보》 출판부 같은 곳에 나타나서 불결한 손으로 눈을 비벼 눈곱을 떼고 하품을 하고 그러면서도 곧잘, 그의 독특한 화술을 농(弄)하여 사람을 웃겼던 것이나, 그러한 곳에는 또한 형언키 어려운 일종의 매력이라는 것이 있었다.…>(p76, <이상의 비련>, 《여성》, 1939년 5월호)
구보의 집은 서울 광교 천변에 있었는데 이상이 종로1가에서 운영했던 다방과 가까웠다고 한다. 다방 ‘제비’는 이상이 스물네 살 되던 해에 객혈로 건축과 기수직을 포기하고 황해도 백천(白川) 온천으로 휴양을 떠나 그곳에서 기생 금홍(錦紅)이란 여인과 동거를 시작한 뒤 상경(上京), 호구책으로 시작했었다. 영업이 신통치 않아 ‘제비’가 결국 문을 닫았고 뒤이어 카페 ‘쓰루’ ‘씩스 나인’, 다방 ‘무기’를 열었으나 한결같이 실패하고 말았다.
구보는 이상을 주인공으로 등장시킨 소설 <애욕(愛慾)>을 1934년 《조선일보》에 연재했다. 그러나 3~4회 연재하다 중단했다고 한다. 소설 내용은 이렇다.
"주인공은 젊은 화가 하웅(河雄). 하웅은 종로에서 다방을 경영하는데 아내를 다방 마담으로 내세웠다. 아내는 다른 사내와 바람이 나서 떠나버리고 하웅은 우연히 한 소녀와 사랑에 빠져 그녀를 위해 정지용의 시를 암송한다. 그러나 소녀 주위에는 여러 사내가 있어 하웅을 거짓사랑으로 농락할 뿐이다. 그런 하웅을 친구인 구보가 나무라지만 하웅은 ‘자기 힘으로 어쩔 수 없다’고 말한다."
박태원은 <이상의 비련>이란 글에서 자신의 소설 <애욕>을 소개하며 소설 속 하웅의 모델이 이상이었다고 밝혔다.
<…마르고 키 큰 몸에 어지러운 머리터럭과 면수(面手·면도와 세수)를 게을리한 얼굴에 잡초와 같이 무성한 머리카락이며, 심심하면 손을 들어 맹렬한 형세로 코털을 뽑는 버릇에 이르기까지 <애욕> 속의 하웅은 현실의 이상을 그대로 방불케 하는 것이다.…>(p74)
소설이 연재되고 친구들이 이상에게 이렇게 물었다고 한다.
“그 ‘모던 걸’하고 요새도 자주 만나시오?”
그러면 이상은 이렇게 답했다.
“무어? <애욕> 말씀이구려. 그건 내 얘기가 아니라, 구보 얘기지요. 하웅이라는 것이 실상은 구보요, 하웅을 나무라는 자가 실상은 나 이상이오.”
그러면 문우들이 다시 박태원에게 물었다.
“이상이 이처럼 말하는데 진상은 어찌된 것이오?”
그때마다 박태원은 이렇게 언명(言明)했다.
“그건 괜한 말이오. 하웅은 역시 이상임이 틀림없소.”
박태원은 요절한 벗을 그리며 이렇게 고백했다.
<…이제 자백(自白)을 하자면 <애욕> 속의 하웅은, 이상이며 동시에 나였고, 그의 친우 구보는 나면서 또한 이상이었던 것이다. (중략) 당시 나와 이상은 서로 각기 다른 조그만 로맨스를 가졌었다.
이상의 정인(情人)이 어느 카페의 여급이라는 것과, 나의 상대가 모(某) 지방 명사(?)의 딸이었다는 고만한 차이가 있었으나 두 사람 모두 작품 속의 소녀나 한 가지로 상당히 방종성(放縱性)을 띠고 있다는 점에 있어서 서로 일치되었다.…>(p74~75)
“매일같이 gloomy sunday”
다방 ‘제비’에 모인 이상, 박태원, 김소운(왼쪽부터).
이상의 실제 연애담은 훗날 여러 문인의 기억을 통해 회자됐다. 다방이 문을 닫고 아내 금홍이 바람이 난 뒤 카페의 일본 여급 ‘마유미’와 어지간히 사귀기도 했다.
어느 날 이상이 치정관계로 건달에게 칼침을 맞고 입원한 ‘마유미’를 보고 이렇게 되뇌었다고 한다
(문학평론가 尹柄魯의 <고독한 이방인> 참조).
“나는 떠나야겠어. 서울을, 이렇게 있다가는 썩어버릴 것만 같아, 매일같이 구루미 선데이야. 어두운 일요일이 날마다 계속이야. 아, 나는 죽을 것만 같아.”
<이상의 비련>에 박태원과 이상이 나누었던 생전의 대화가 실려 있다.
<…이상과 나(박태원)는, 당시에 있어 서로 겨 묻은 개였고, 동시에 똥 묻은 개였다. 내가 이상을 향하여 “여보, 그까짓 계집을 무어라고 그토록 소중히 안고 사랑을 하느니 어쩌니 그러오? 당신의 정열(情熱)이 너무 아깝소”라고 충고하면, 이상은 또한 박태원을 향해 이렇게 똑같이 받아쳤다.
“여보, 그까짓 계집을 무어라고 그토록 소중히 안고 사랑을 하느니 어쩌니 그러오? 당신의 열정이 너무 아깝소.”
두 사람은, 서로 마음속으로 ‘이상이 그리 미쳤단 말인가?’ ‘구보가 아무래도 성치는 않아…’ 그렇게 생각하며 벗을 위해 서로 슬퍼하고 못마땅해했다.…>(p75)
박태원은 “당당한 오입쟁이였던 이상도 몸과 마음을 그대로 내어놓는 연정(戀情)에는 스스로 소년과 같이 수줍고 애탔다”고 기억했다.
<…언젠가 다방 ‘금강산’에서 이상이 한 여성을 향해 구애한 일이 있었다. 구석진 탁자에 한잔의 가배차(커피-편집자)를 앞에 두고 여인과 마주앉은 이상은 다시 소년과 같이 가슴을 태우고 마음이 수줍은 나머지, 자신도 깨닫지 못하고 탁자 한가운데 놓은 각설탕 그릇에 담긴 모당을 손으로 만졌다.
사랑을 받아주기 원하는 여인 앞에 이상의 손이 불결한 것은 또한 어찌할 도리가 없는 슬픈 사실이다. 그가 만진 모당은 그대로 꺼멓게 때가 묻었다. 여인은, 이상의 열정보다도 한 개, 두 개, 손때가 까맣게 묻어가는 각설탕에 좀 더 관심을 가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이상은 물론 그런 것에 미처 생각이 들 턱이 없다. (중략) 평소 그처럼 능변(能辯)인 그가 말조차 더듬어 가며 자기의 진정을 애인에게 알리기 위해 열중했다. 그러나 마침내 시중드는 아이가 참다못해 그들 탁자로 다가와 이상의 손에서 그릇을 빼앗아 갔을 때 그는 새삼스럽게 놀라 고개를 들고 그곳에서 자기를 바라보는 여인의 모멸(侮蔑) 가득한 눈초리에 어처구니없이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p77)
1939년 6월호 《여성》에는 이상이 생전(生前) 시인 김기림에게 보냈던 편지 4편이 <이상서간(李箱書簡)>이란 제목으로 실렸다. 편지에는 사랑에, 정에 굶주렸던 고독한 시인의 마음이 잘 묻어 있다.
<…연애라도 할까? 싱거워서? 심심해서? 스스러워서? 이 편지를 보았을 때 형(김기림)은 아마 뒤이어 <기상도(氣象圖)>의 교정을 보아야 될 것 같소. 형이 여기 있고 마음맞은 친구끼리 모여 조용한 ‘기상도의 밤’을 가지고 싶은 것이 퍽 유감(遺憾)되게 되었구려. 우리 여름에 할까?
여보! 편지나 좀 하구려! 내 고독과 정적을 동정하고 싶지는 않소? 자, 운명에 순종하는 수밖에! 굿바이…>
(p83, <이상서간>, 《여성》, 1939년 6월호)
이상이 요절한 뒤 김기림은 박태원에게 쓴 편지(《여성》 1939년 5월호에 게재됐다)에 이상을 그리며 “봄이 오니 형(박태원)도 ‘제비(다방 상호)’가 그리우신가 보오. 돌아오지 않는 ‘제비’의 임자는 얼마나 야속한 사람이겠소? 동경(東京)을 지날 때는 머리를 숙이오”라고 썼다.⊙
/ 월간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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