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lene - Effacer le passé '과거는 잊어요'

 

 



                                                불쌍한 정월아 

 

 

 




당시의 금수저요. 아이돌. 14살 때의 작품이 잡지 개벽에 실렸다.3.1 운동과 의열단 사건에도 연루되어 옥고를 치렀다. 1920정동예배당에서 결혼식 소식과 25세 때 모친사망 소식이 신문에 오를 만큼 유명세를 탔다.

 

남편 김우영이 일본영사관 부영사로 만주 안동에 부임하여 6년간의 업적으로 휴가를 받아 총독부의 지원으로 부부동반 해외여행을 한다.6년간의 업적은 무엇이었을까?

 




19210925일 김우영이 일본의 외교관인 만주 안동 부영사

 

당시 일제국주의자들은 만주 침탈을 계획하고 철저한 전략을 수립 중이었다.주변의 정확한 정보 수집과 이주해온 조선인들의 내정을 상세히 지득할 필요가 있었고 독립군들의 동향 파악 등을 위해서는 조선말을 하는 조선인 조력자가 절실했던 만큼 김우영을 안동현 부영사로 임명한다. 이제 서서히 동조세력을 구축하고 곳곳에 정보원을 양성 침투하는 사전 공략을 실행하는 일련의 작전이 단계별로 치밀하고도 비밀리 진행된다.강연회를 주최하여 청년 동포에게 세계정세의 변화에 맞춰 침탈의 정당성에 동조하는 여론을 조성한다.이때 가장 두려운 것은 독립군의 암살위협이다.특히나 일제의 사냥개 노릇을 하는 조선인 관료는 표적 1호였다.김우영이 6년간 무사히 부영사의 임무를 수행할 수 있었던 것은 아내 나혜석 덕분이었다.아내 나혜석이 독립운동을 후원하는 양면 정책이다.  나혜석은 19223월부터 안동현 태성의원에서 야학당을 열어 조선인 교육에 힘썼다.또한 의열단의 김원봉 등에게 거사 자금을 비밀리에 송금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에도 송금 했다. 비밀리에 의열단과 애국부인회를 도와준 사실이 영사관 경찰에 제보되면서 남편인 김우형에게도 불이익이 돌아가게 된 것으로 전해진다.아내 나혜석이 독립자금 전달의 엄청난 사건에도 무사할 수 있었던 것은 독립군 암살단으로 부터 김우영의 목숨을 안전하게 지키는데 일조한 공로 때문이다.그러나 임무를 마치고 조선 땅에 들어서는 순간 아내의 독립운동 후원은 김우영 출세가도의 거침돌이다. 임기를 마치고 서울에 돌아온 우영은 고집 센 아내를 자유분방하고 저돌적인 마누라를 어찌하지 못해 전전 긍긍한다.

 

토사구팽의 때가 다가왔다.

 


특히 그녀는 조선장안의 톱스타였다.아내는 하늘 높은 줄 모르게 잘 나가는 마리앙뚜아네뜨 바이러스가 온몸에 퍼진 중병이 들어 있었다.미술전람회에 수천 명의 관람객이 몰려들었고 신문 잡지는 다투어 나혜석의 글과 주변소식을 다룬다.전람회가 끝난 뒤 김우영은 축하에 앞서 여자는 남자의 부속물이라는 말을 한다. 이 말에 분개하여 남편과 싸운다. 부부간 앙금이 쌓인다.그렇지 않아도 아내는 여성의 권리신장을 주장하는 여성해방론의 거물급 인사다. 줏대 세고 거침없는 아내는 언제어디로 튈지 모르는 럭비공이다.저것이 치솟는 인기를 틈타 독립운동 쪽으로 고개를 돌리는 날에는 모두가 끝장이다.자신의 출세가도에 걸림돌이다.총독부는 완벽한 친일 부역세력을 원한다.아내를 친일화 하지 못하면 제거하는 방법 외에는 별 도리가 없다.총독부와 친일 세력들은 나혜석을 김활란이나 모윤숙처럼 친일파의 거두로 키울 요량으로 비행기를 태웠다.그러나 고집 센 나혜석에게는 이 작전이 통하지 않자 은밀한 지령이 내려진 것일까?

 

까마귀 죽이기작전

나혜석 김우영 부부는 총독부지원으로 세계여행을 떠난다. 명목상은 6년간 만주 외지에서 근무한 공로에 대한 보상휴가라 한다.한편 총독부지원으로 또 달리 세계여행을 떠나는 또 한 남자가 있었으니
최린崔麟

 

천도교 종법사였던 그는 192610월 만성위장병치료차 일본 동경제국대 입원 중에1년 예정으로 구미 각국의 종교 산업 교육 사회정세 시찰 명목으로 세계일주 여행을 떠난다.일제 치하에서 조선 천도교 종법사가 세계사회정세 시찰을 간다웃기는 소리다. 명목상은 벨기에 부랏셀에서 개최된 반제국주의 및 민족독립기성동맹총위원회에 조선대표로 참석했단다. 민족독립기성동맹총위원회라는 단체는 존재했는가?

유령 단체 아닌가?


실상은 일제의 경비지원으로 유럽여행을 떠나는데 이는 일제의 유화책의 일환이었다. 1927-06-11 그야말로 묻지마 관광을 떠난다.

 

유럽김우영은 독일로 유학을 떠난 뒤 프랑스에 홀로 남겨진 나혜석 앞에 고국향수를 바른 노신사가 나타난다. 최린과의 염문설은 프랑스 교민사회에 널리 알려질 만큼 공개되었다.이미 남편이 이해하고 넘어간 최승규와의 사랑 이광수와의 연애 그리고 자신의 자유연애론 사상에 비춰 볼 때 별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던 자유분방 철없는 33세의 뜨거운 마리앙뚜아네뜨였다. 최린과의 불륜이 서서히 장기간 여론화 돼가면서 까마귀 털 뽑기가 시작된다.남편 김우영 전혀 이 사실을 모르고 있는 냥 침묵하는 듯 비춰지고 주변에서는 최린과의 불륜 사진을 공개하는 등 서서히 장안의 화재로 몰고 간다.

 

그런데 이 불륜의 풍문은 최린 측근 사람들의 입을 통해 회자되기 시작한다.사건화 되자귀국 후 부터 김우영은 딴 살림을 준비 중이었고 최린 역시 매몰차게 돌아섰다.숱한 비난에 당황한 나혜석의 예술 혼은 달아났고 전람회 실패와 언론의 비유적 비난 글이 쏟아져 맨붕에 빠진다.

14세 때부터 주목받던 여인, 일거수일투족이 신문의 취재거리가 됐던 스타최린과의 염문은 남편을 속이고 다른 남자를 사랑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남편과 정이 두터워지리라 믿었던 바보였다.브레이크 없는 인생열차는 자기도취 궤도를 벗어나는 순간 철없는 마리 앙투아네트가 되었다.

 

마리 앙투아네트처럼 자녀들도 만나지 못하게 한다. 증오심에 모자의 정을 때려한 것일까? 아니면자녀들에게 반일사상을 주입할까봐 두려웠던 것일까?

 

아내를 방기하고 새살림을 꾸린 후에는 변호사업까지 시들해지고 궁핍했다는 것은 하나의 구실이다.김우영은 아내를 내친 후 또다시 총독부의 사냥개 노릇을 한다.1932.2.19 조선총독부관보 : 김우영이 도리사관에 임명되다.

 

 

 

김우영은 자녀들과의 만남을 경찰을 동원해 저지한다.자식들에게서 반일의 기미만 보여도 모두가 끝장이다. ! 이것이 두려운 것이다.

 

김우영 자신의 출세를 위해 친일하지 않는 아내를 버린 걸까?

김우영과 최린은 친근한 사이였다.우연일까?김우영과 최린은 똑같이 일제의 지원으로 같은 시기 같은 장소로 공짜여행을 떠난다.프랑스/ 나혜석. 김우영. 최린 여기서 김우영은 살짝 빠진다. 독일로.....최린은 나혜석을 대리고 보란 듯이 싸돌아다닌다. 물정모르는 나혜석은 프랑스 교민들의 로망이 된 냥 부풀어 그 양산을 펼친 걸까?귀국 후 최린은 나혜석과의 염문설을 측근을 통해 여론화 했다.이 일련의 사건이 계획적인 것이었다면?

 

아 불쌍한 정월아

 

 

이 모두가 남편 따라 고분고분 친일파가 되지 않은 업보입니까?

 


 

 

 

나혜석羅蕙錫 호: 정월(晶月).

 

 

20세기 한국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로 주요 작품은 <농부>와 <자화상>과 <스페인 해수욕장>.

호는 정월이고 서울 경기에서 태어나 오빠의 권유로 미술을 시작했으며 여권신장을 옹호하는 글을 쓰고,

3.1운동에 참가했다가 투옥되는 등 진보적인 성격을 지녔다.

다양한 국가를 여행하면서 야수파 형식의 그림을 그렸고 귀국 후에는 사회에 저항하는 글을 썼지만 무시당했다.

생활고에 시달려 각지를 돌아다니며 유랑 생활을 하다가

 1946년 서울 자혜병원에서 행려병자로 쓸쓸히 인생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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