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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지 삼천리 속  최린

 

 

 

삼천리 제4호 1930-01-11 人材巡禮(第一編), 新聞社側 소식 원문제공
82 삼천리 제5호 1930-04-01 全盛時代 회고·수기 원문제공
83 삼천리 제6호 1930-05-01 諸氏의 聲明 설문 원문제공
84 삼천리 제6호 1930-05-01 나는 웨 僧이 되엇나? 韓龍雲 회고·수기 원문제공
85 삼천리 제7호 1930-07-01 海外諸氏 在內時代 회고·수기 원문제공
86 삼천리 제9호 1930-10-01 現有勢力 總調査, 新幹, 農總, 勞總, 靑總, 槿友, 天道敎, 基督敎, 佛敎 소식 원문제공
87 삼천리 제9호 1930-10-01 러부렛타-의 告白 회고·수기 원문제공
88 삼천리 제10호 1930-11-01 友邦 巨頭 會見記 소식 원문제공
89 삼천리 제11호 1931-01-01 朝鮮 民族的 代表의 選出問題 설문 원문제공
90 삼천리 제12호 1931-02-01 朝鮮運動은 協同乎 對立乎, 新幹會「解消運動」批判 설문 원문제공
91 삼천리 제12호 1931-02-01 大會 以後의 天道敎經倫 心耕學人 논설 원문제공
92 삼천리 제14호 1931-04-01 最近 十年間 筆禍, 舌禍史 회고·수기 원문제공
93 삼천리 제15호 1931-05-01 光武隆熙時代의 新女性總觀 회고·수기 원문제공
94 삼천리 제17호 1931-07-01 喫煙室 잡저 원문제공
95 삼천리 제17호 1931-07-01 交叉點 소식 원문제공
96 삼천리 제3권 제9호 1931-09-01 三千里 「壁新聞」 第4號 소식 원문제공

 

 

 

 

 

동아일보

 

 

1 동아일보 1920-07-12 03 10 금일 공판 시작되는 朝鮮民族代表 사십팔인의 肖像: 孫秉熙, 崔麟, 權東鎭, 吳世昌, 林禮煥, 權秉悳, 李鍾一, 羅仁協, 洪基兆, 金完圭, 羅龍煥, 李鍾勳, 洪秉箕, 朴準承, 李寅煥, 朴熙道, 崔聖模, 申洪植, 梁甸伯, 李明龍, 吉善宙, 李甲成, 金昌俊, 李弼柱, 吳華英, 朴東完, 鄭春洙, 申錫九, 韓龍雲, 白相奎, 安世桓, 林圭, 金智煥, 崔南善, 咸台永, 宋鎭禹, 鄭魯湜, 玄相允, 李景燮, 韓秉益, 金弘奎, 金道泰, 朴寅浩, 盧憲容, 金世煥, 康基德, 金元璧, 劉如大
2 동아일보 1920-07-14 03 01 展開된 獨立運動의 第一幕; 朝鮮民族代表 四十七人의 公判, 第二日에는 崔麟外 八名만 審問, 公安妨害의 理由로 傍聽은 一時禁止, 極秘密裏에 四人을 審問한 內容은 何?//崔麟부터 審問開始…//傍聽을 禁하고 大審問…//崔麟兩次의 四人會議…//崔南善宣言方法을 討議…崔南善參加始末…//宋鎭禹 李寅煥이 上京하야…//玄相允…//鄭魯湜 金道泰…(寫: 법정으로 들어가는 피고들)
3 동아일보 1920-07-15 03 01 兩敎同志者의 相呼相應; 朝鮮民族代表 四十七人의 公判, 第三日은 李寅煥外 五名을 審問, 獨立宣言의 計劃과 同志糾合에 奔走, 三月一日以前의 暗中飛躍的大活動…//李寅煥; 耶蘇敎의 同志糾合…兩敎合同의 運動…握手後의 大活動…//崔麟; 金五千圓의 出處…//咸台永; 「舊韓國을 回復할뿐」…//梁甸伯 李明龍 劉如大 三人 參加의 經過…
4 동아일보 1920-07-16 02 09 宣言動機의 眞實한 告白, 朝鮮民族代表四十七人의 公判; 申洪植 吉善宙; 悶悶難抑의 不平//朴熙道 吳華英 鄭春洙; 宜當許可할 獨立//李甲成 安世桓 金世煥; 熱烈한 獨立論//朴寅浩 盧憲容; 五千圓支出問題//崔南善; 最後의 一人 最後의 一刻//崔麟 權東鎭 吳世昌; 裁判長과 殆히 論戰
5 동아일보 1920-09-21 03 01 獨立宣言事件의 控訴公判 急轉直下로 事實審問에, 問題의 核心인 「公訴不受理」은 自歸水泡, 공소 불슈리 문뎨는 판결 내일때까지 더퍼둔다고, 생각도 아니하얏던 사실심문부터 드리모라친다, 第一日은 崔麟外 四十名을 訊問//控訴의 理由, 고등법원의 결정은 사건송치를 의미함//又復不受理申立, 제령제칠호는 아무 효력도 없다는 주장; 被告는 上告權을 가젓슨즉 먼저 법문제를 해결할지라; 被告側의 質問, 본안심리는 무엇? 일심판결은 파괴?//崔麟; 「獨立은 世界大勢」//各派의 合同運動//宣言書作成顚末, 최남선의 학식과 인격을 믿고 대세에 순응하여 짓도록 당부//午後엔 十四人 審問, 권동진외 십삼명심문
6 동아일보 1921-03-01 03 04 滿二個年의 春을 迎하는 獨立宣言事件 囚人의 生活, 권동진 한사람만 위병이 나고 그 밧게는 모다 별탈은 업다고(寫: 독림션언사건 관계쟈의 구금된 경성감옥; 최린 박희도 오세창 최남선 권동진 오화영의 사진, 그 옆에 쓰인 글씨는 각기 그사람들이 감옥으로부터 최근에 가족에게 부친 편지의 필적)
7 동아일보 1921-12-23 03 01 獨立宣言한 崔麟 咸台永 吳世昌 權東鎭 李鍾一 金昌俊 韓龍雲등 假出獄, 작 이십이일하오 두시삼십분 돌연히, 同志中 在監者는 李寅煥 吳華英 李甲成등 三人
8 동아일보 1922-03-07 03 05 桑港慘事에 鑑하야; 무엇보다도 사랑이 급무, 가장 의미가 심졀한 계획(天道敎庶務課長 崔麟氏談)
9 동아일보 1922-04-01 05 01 新生을 追求하는 朝鮮人, 現下急務는 果然 何인가//人格이 主, 비판정신의 필요, 中央高普校長崔斗善씨談//團結 敎育 피 공업발달의 필요, 漢城圖書會社 張道斌氏談//自作自給, 방금 가장 큰 문뎨, 韓一銀行頭取 閔大植氏談//經濟 活字 기타는 여개방차, 天道敎庶務課長崔麟氏談//不知是惡, 먼저 알어야 한다, 普成高普校長 鄭大鉉氏談//物質重視, 돈이 잇서야산다, 中央靑年會長 尹致昊氏談//農民救濟, 부자의 생각할일, 佛敎會 理事 朴漢永氏談//道德建設 시긔질투는 금물, 中央靑年會總務 李商在氏談//靈的革新 새로운 종교가 필요, 兪星濬氏談//經濟獨立 뎨일문뎨는 정권, 辯護士 朴勝彬氏談//相互扶扶助 힘을 모아 분투할일, 新生活社長 朴熙道氏談//不眠不休 모든일에 끈기잇게, 京城圖書舘 李範昇氏談
10 동아일보 1922-04-02 05 01 新生을 追求하는 朝鮮人, 現下急務는 果然 何인가//人格이 主, 비판정신의 필요, 中央高普校長崔斗善씨談//團結 敎育 피 공업발달의 필요, 漢城圖書會社 張道斌氏談//自作自給, 방금 가장 큰 문뎨, 韓一銀行頭取 閔大植氏談//經濟 活字 기타는 여개방차, 天道敎庶務課長崔麟氏談//不知是惡, 먼저 알어야 한다, 普成高普校長 鄭大鉉氏談//物質重視, 돈이 잇서야산다, 中央靑年會長 尹致昊氏談//農民救濟, 부자의 생각할일, 佛敎會 理事 朴漢永氏談//道德建設 시긔질투는 금물, 中央靑年會總務 李商在氏談//靈的革新 새로운 종교가 필요, 兪星濬氏談//經濟獨立 뎨일문뎨는 정권, 辯護士 朴勝彬氏談//相互扶扶助 힘을 모아 분투할일, 新生活社長 朴熙道氏談//不眠不休 모든일에 끈기잇게, 京城圖書舘 李範昇氏談
11 동아일보 1922-11-23 04 04 海州天道敎講演: 事業의 精神(崔麟), 朝鮮人의 將來(李敦化)
12 동아일보 1922-11-26 04 03 安岳邑天道敎會主催 演會: 朝鮮人의 運命(崔麟), 우리의 主義(李敦化)
13 동아일보 1922-11-29 04 04 鎭南浦碑石里 天道敎會大講演: 自活의 道(崔麟), 朝鮮의 將來(李敦化)
14 동아일보 1922-12-21 08 04 博川天道敎區에서 崔麟 李敦化兩氏의 大講演: 力(李敦化), 職業神聖(崔麟)
15 동아일보 1922-12-21 08 05 宣川天道敎區에서 天道敎中央總部 崔麟 李敦化兩氏 巡講
16 동아일보 1922-12-22 04 03 龍岩浦敎區에서 崔麟 李敦化兩氏講演
17 동아일보 1923-01-01 신년 제1호 03 01 朝鮮及朝鮮人의 煩悶(一) 정치적 경제적의 자유가업는 것이 제일번민, 편당싸홈하는 것도 큰걱정, 최린氏談
18 동아일보 1923-03-31 03 09 天道敎靑年會主催 강연: 現下의 日本(崔元淳)現下의 極東(金燦)現下의 朝鮮(崔麟)
19 동아일보 1923-04-05 03 09 朝鮮女子靑年會主催로 강연회: 朝鮮女子(崔麟)最大急務(李載甲), 旣婚男子의 離婚이 可乎아 否乎아(李弼秀)(모임란)
20 동아일보 1923-04-20 03 08 평양의 교육강연회, 大成敎育會主催로: 演士 宋鎭禹 崔麟 玄相允(모임란)

21 동아일보 1923-05-09 04 09 永同靑年會大講演會: 社會進化와 協同運動(金喆壽), 反省(崔麟), 너와나(安信行)
22 동아일보 1923-06-07 04 04 民大宣傳大講演: 反省(崔麟)(黃州)
23 동아일보 1923-08-07 04 04 文化大講演會計劃, 沙里院天道敎會主催 沙里院學友會及本社沙里院支局後援으로(演士 李熟化 崔麟)
24 동아일보 1923-12-09 02 01 必勝을 期하는 選手의 勇姿, 신임톄육회장 崔麟씨의 간곡한 식사가 잇고 먼저 텬진이 류로하는 소학단부터 개젼햇다(寫)//小學優勝은 光成에, 결국 한졈으로 輔仁에 패배(寫)//中學優勝은 培材에, 량군의 대젼과 관중의 응원격렬
25 동아일보 1924-01-01 02 01 生活改善의 第一步로 새해부터 우리朝鮮人이 實行할 새決心; (앙케트)//猜忌, 黨派, 조션민족의고질(李商在談)//悲觀, 不實, 비관하는 것은 멸망으로 드러가는길(崔麟氏談)//無公德心, 사소한일이 우리전톄를 욕되게한다(申興雨)//無勇無氣, 먼저용긔잇자(趙喆鎬氏談)//不潔한 우리의집안, 새해부터는 비와 걸레를 쓰름하기로 하여봅시다(金美理斯女史談)//自尊虛慾은 자긔를 망한다(金昌俊)//身體를 정결히하라(朱永善)//表裡不同 거듭나지안으면, 표리부동을 곳칠수업다(李敦化)//會規不守, 집회시간을 직히지 안는자는 남까지 락심식힘(盧俊鐸)//虛禮濫費, 쓸데업는 절차(兪星濬)//無職業녀자들은 놀고먹는 말을듯도록 하지말라(姜道成女史談)//白色, 不潔, 의복의결점, 염색옷을 검소히 입고 때때로 빨아 입읍시다(申앨버 女史談)//飮食一定, 시간불일과 생식으로 먹는것은 국민위생에 큰방해(申弼浩)//無用한 수고를 덜자(金弼禮)//浪費, 無蓄, 터무니업시 랑비, 돈업는 조선사람들이 쓰기를 예산업시 쓴다(金潤冕)//時間節約에 힘을쓰자(李灌鎔博士)//順序不整, 유시무종은 모다순서와 성산이 튼튼하지 못한까닭(李範昇)//酒와 煙草를 폐지하라, 술과 담배를 먹는것은 사회의 생명을 먹는것(金一善)//料店出入을 삼가하라, 소위 명사네들은 고등부랑자갓다(李鍾駿)//無味乾燥, 우리생활은 너무도 취미업다, 새해부터 잘살자(安錫桂)
26 동아일보 1924-01-07 02 04 離婚問題의 可否 (七) 自己犧牲에 同情, 살겟다 안살겟다하는 생각, 자긔를 희생함에 더욱 동졍, 崔麟氏談
27 동아일보 1924-02-11 03 07 天道敎講道會에 崔麟氏參席(安州)
28 동아일보 1924-10-25 02 03 天道敎祖 大神師 出生百年紀念式, 이십 팔일 기념관에서 거행(寫: 일반공용에 뎨공할 준공되는 천도교 긔념관)//紀念館無料提供, 엇던단톄 무슨일에든지 무료로 빌릴터, 天道敎崔麟氏談
29 동아일보 1924-12-06 03 03 婦人講座開催, 조선녀자청년회관에서: 自立의 二大條件(崔麟)
30 동아일보 1925-01-01 03 03 崔麟(古友)氏 試筆
31 동아일보 1925-01-23 02 01 百鬼遍滿한 昏衢의 明燈//混沌한 思想界의 善後策(二千萬民衆當面한 重大問題其一)//社會改善 爲先生活保障, 崔麟氏談//現實에 立脚 理論보다 實地, 韓龍雲氏談//各自尊重 主義나 思想을, 金得洙氏談//生活安定 此亦根本問題, 萎錫奉氏談//文藝, 宗敎, 健全한 眞正한, 鏡城耶蘇敎牧師 金麟瑞氏談//敎育, 生業, 그리고 宗敎로, 全州靑年會 尹相産氏談//言論廓淸, 敎育과 宗敎로, 咸興基督靑年會 李舜基氏談//惡黨撲滅 무엇보다 上策, 京城 金鍾範氏談//急進捷徑, 自然의 順理로, 京城金若水氏談//國民敎育, 第一物資豊足, 京城女子敎育協會金美理女史談
32 동아일보 1925-10-01 02 04 己未年運動과 朝鮮의 四十八人, 最近消息의 片片 (二) 崔麟, 白相奎, 韓龍雲, 金昌俊, 林禮煥, 羅仁協(讀者와 記者欄)
33 동아일보 1925-12-05 04 07 敎理講道와 社會問題講演, 來十日부터 高原天道敎에서: 演士 李敦化 崔麟
34 동아일보 1926-06-10 05 01 新事實 每日 續出, 學生中心의 某運動發覺, 市內 關係의 可驚할 情報, 鍾路署 兩段活動//學生續續檢擧, 일변으로는 경찰부에//主要人物 薛某//鷄龍山을 搜索//各道에서 檢擧護送, 경긔경찰부로//崔麟氏도 同行, 본사댱 金性洙氏도 동행
35 동아일보 1926-06-11 01 11 驛頭에서 또 逮捕, 상해에서 들어온 청년한명 작일 오후 일곱시경에 톄포, 민족적인 사건으로//종로서에 동행되엇든 崔麟氏와 金性洙氏 歸宅
36 동아일보 1927-04-21 04 06 五百戶稅代納, 崔麟容氏가(群山)
37 동아일보 1927-06-11 02 07 一年 豫定으로 崔麟氏 洋行, 구미 각국의 졍세시찰 목뎍, 十一日 橫濱出發
38 동아일보 1927-10-08 04 09 兩期戶稅代納, 崔麟容氏(群山)
39 동아일보 1928-04-01 02 09 崔麟氏 歸國, 금일 오후 팔시에, 歐米視察마치고
40 동아일보 1928-04-03 02 04 多數人士 歡迎裡 崔麟氏 再昨 歸國, 약 일개년간 세계를 시찰하고 재작일 밤에 무사히 귀국하여, 世界 卄一個國을 周遊

 

41 동아일보 1928-04-14 02 08 崔麟氏 歡迎 수요구락부 주최로
42 동아일보 1929-01-30 05 05 巨金探索者 崔麟政出發,「지러露皇室」遺産인 金塊가
43 동아일보 1929-04-09 04 08 金百圓을 寄附, 崔麟模氏가 新明學校에(碧潼)
44 동아일보 1930-01-01 01 01 創作生活, 天道敎正道領 崔麟氏談
45 동아일보 1930-04-04 03 01 十週年記念號를 通하야 朝鮮에 부치는 付託, 內外各國名士; 近代新聞紙의 偉力은 强大正當한 支配가 必要,「해일삼」卿//文化的 舊邦 배울 것이 만하「쫀넬슨」氏//朝鮮을 代表 極東文化 啓發,「치챠엡」氏//讀者의 信任 十年間의 功績 魚丕信//固有의 文化護持 又는 啓發 崔麟
46 동아일보 1930-04-09 02 06 天道敎靑盟이 自治反對決議 결의운운에 대하야 崔麟氏는 絶對로 否認
47 동아일보 1930-10-23 02 01 派爭에서 合同으로, 天道敎의 新舊兩派, 世稱沙里院派도 合同될듯, 交涉委員의 往來頻頻//兩派幹部의 感想 實現은 時間問題 合同을 確信 崔麟氏談//「오히려晩時의 嘆」誠實한 態度로, 李鍾麟氏談
48 동아일보 1930-12-19 02 06 天道敎幹部更迭 大領은 鄭廣朝氏, 合同問題압두고 大變革 權東鎭 崔麟兩氏는 顧問으로
49 동아일보 1930-12-21 02 09 ≪取消申請記事≫天道敎幹部更迭 大領은 鄭廣朝氏, 合同問題압두고 大變革 權東鎭 崔麟兩氏는 顧問으로
50 동아일보 1930-12-25 03 09 貧民同胞救濟, 安東縣 崔麟柱氏가
51 동아일보 1931-01-16 03 08 百七十戶에 白米一斗式, 安東 崔麟柱氏 厚意
52 동아일보 1931-09-20 03 12 金浦支局; 崔麟植 韓萬憶 任記者 記者 金鳳基 文善澤 依願解職
53 동아일보 1933-01-01 부록 01 08 新春을 맞는 우리의 抱負와 希望 ; 崔麟 : 協助精神과 實際的運動[肖]//梁柱三 : 犧牲精神과 實踐的氣魄[肖]//韓龍雲 : 正明한 認識[肖]
54 동아일보 1934-01-01 부록 01 08 新年에 보내는 우리의 새 信號 其一. 中道로 躍進, 中央基靑會長 尹致昊//過去를 淸算, 天道敎大領 崔麟//自主와 自學, 天道敎大宗司長 權東鎭//緊張과 忠實, 延禧專門學監 兪億兼//圓智方品行, 佛敎專門校長 朴漢永
55 동아일보 1934-04-09 석간 02 09 天道敎記念講談會 講師氏名 : 崔麟 鄭廣朝 李敦化 李根培
56 동아일보 1934-04-16 석간 02 05 天道敎 大道正 崔麟氏 參議說, 중추원 참의 후보로 내정
57 동아일보 1934-04-18 석간 01 08 崔麟(勅任官待遇) 朝鮮總督府中樞院參議被仰付
58 동아일보 1934-07-27 조간 02 06 桂洞崔麟宅 後園地下에서 彈丸五百發 發見 拳銃長銃彈藥과 革帶等, 鍾路署 血眼活動
59 동아일보 1934-08-03 조간 02 09 崔麟政護送도 中止 連累檢擧再着手 蓮建洞서 老人一名 檢擧取調 舊露皇室 寶物詐欺事件擴大
60 동아일보 1934-08-03 석간 02 01 孤島의 七億圓祕寶 싸고도는 世界的獵奇 警視廳刑事隊出張 主役崔麟政 逮捕 蓋平에서 京城護送 東署에 留置 國際的詐欺 朝鮮에 飛火//산사람 喪廳 黃金劇의 클라이막 중국어 능통한 것을 기화로 縣長의 丈人의 行勢//卅萬圓 먹은 崔麟政 被殺假裝코 潛跡, 舊韓國時代露公使通譯 미끼로 寶物採取運動金橫領

61 동아일보 1934-08-05 석간 02 12 現金等六萬圓 崔麟政押送, 로서아 「로마놉흐」皇室 「寶物」事件 舞臺移動
62 동아일보 1934-08-11 조간 02 11 國際詐欺의 關聯者 皮熙承 崔麟政等昨夜押送 「露皇室寶物事件」 後聞
63 동아일보 1934-09-20 조간 02 01 女流畫家 羅蕙錫氏 崔麟氏相對提訴 妻權 侵害에 依한 慰藉料萬二千圓 請求, 十九日午後正式手續[肖]//訴狀에 나타난 請求理由의 全文//貞操蹂躝關係는 內容證明으로, 不應하기에 畢竟訴訟提起 辯護士蘇完奎氏談
64 동아일보 1937-10-02 석간 04 07 特志家의 寄附로 新明學院에 曙光, 定州 兩崔氏巨金 喜捨, 崔麟瑞, 崔弘瑞씨가(雲田)
65 동아일보 1938-05-03 석간 01 11 崔麟(朝鮮總督府 中樞院參議) 依願總督府中樞院參議被免
66 동아일보 1946-10-10 석간 01 03 親日·反逆者들이 擡頭 崔麟, 李光洙, 金大羽, 朱耀翰, 朱耀燮, 桂光淳等이 謀議
67 동아일보 1947-08-19 석간 02 04 前中樞院參議 崔麟 留置場에서 斷食 天道敎 靑友黨事件?
68 동아일보 1949-03-24 석간 02 07 反民者 一回公判 三十日 崔麟等에 實施//楊秉一等自首(全州)//金大亨等 서울로 押送
69 동아일보 1949-03-30 석간 02 02 反民裁判 ; 經濟上의 親日이오 朴興植 政治活動을 否認[寫]//崔麟等은 今日//前高等刑事 李俊聖被逮//愛國志士들에 弑虐 拷問王金泰錫罪相을 陰蔽//눈병을 핑게로 金泰勳保釋申請(仁川)//親日牧師 金仁善逮捕
70 동아일보 1949-04-01 석간 02 05 反民裁判 民族運動에 큰 汚點 崔麟變節의 動機를 說明//金泰勳 서울 送致(仁川)//朴正純等四名 서울 本部에 送致(大邱)//鄭僑源을 收監 楊載弘刑事는 起訴//李豐漢은 保釋//金秊洙에 拘束取消處分//朴鍾杓, 孫永穆等 反民特檢에 送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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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생애[편집]

생애 초기[편집]

1878년 1월 25일에 태어났다. 어린 시절 한학을 배우다가 한성부로 상경하여 개화파 청년들과 교유하게 된다. 1902년 길주감리서 주사를 거쳤는데, 당시 일본 육사 출신 청년 장교들이 중심이 된 일심회 조직 사건으로 일본으로 잠시 피신했다.[1] 그때 개화파 역관인 오경석의 아들 오세창이 당시 일심회 사건에 함께 연루되었다.

1904년 10월에는 대한제국 황실유학생으로 선발되어 유학생 신분으로 도쿄 부립 제1중학에 입학하였다. 그해 중학교 교장이 조선인에게는 교육이 불필요하다고 말한 데 대해 항의하면서 파업을 일으켜 퇴교당한다. 1905년 일본 유학생회를 조직하여 부회장을 거쳐 회장에 선임된다. 1906년 메이지 대학을 입학한 최린은 대한제국 황실을 모독한 공연장을 습격하고 영업방해로 검거된다. 1906년 9월부터 1907년 2월까지 대한유학생회 부회장과 회장을 지냈다. 1907년에는 광무학회 총대와 태극학회 회장을 역임하였고 1909년에는 대한흥학회 평의원과 부회장을 역임했다. 1909년메이지대학교를 졸업하고 귀국한다. 일본 유학 중에 같은 황실유학생이었던 최남선, 이상헌(李祥憲)이라는 가명을 쓰던 천도교 교주 손병희를 만나 교류했고, 이들의 영향을 받아 귀국 후 1910년 10월 천도교에 입교했다.

천도교에서 운영하던 보성고등보통학교 교장을 지내면서 비밀결사 독립운동 단체 신민회에 가입해 활동하였고, 교육 분야에 종사했다.

3.1 운동 활동[편집]

1918년부터 손병희오세창, 권동진 등 천도교 인사들과 함께 독립 운동의 방안을 논의하다가 1919년 3·1 운동고종의 인산일을 구상했다. 최린은 불교계의 한용운, 기독교계의 이승훈을 통해 두 종교 대표를 참가시키고 기미독립선언서 기초자로 최남선을 추천하는 등 기획 과정을 주도했으며, 또한 3·1 운동의 3원칙으로 대중화와 단일화, 비폭력을 제시하였다. 독립선언서 낭독 모임 이후 곧바로 체포되어 징역 3년형을 선고받았으나, 1921년 12월 22일 가출옥하였다.

사회활동과 변절[편집]

출옥한 후 1922년 1월부터 3월까지 천도교 중앙교단에서 서무과, 교육과 주임에 선출되어 활동하면서 교단활동을 시작했다. 그러나 그 해 5월 동지였던 손병희가 사망했고, 그 해 9월부터 1924년까지 종리사를 거쳐 1925년부터 1928년까지 종법사를 지냈다. 그외에 1923년에는 민립대학기성회 중앙부 집행위원으로 홀동하며 점차 활동영역을 사회문화 전반으로 넓혀갔다. 같은 해 9월 동경지방이재조선인구제회 발기인, 상무위원에 선임되었고, 1924년 조선기근구제회 위원, 1925년 조선체육회 위원, 1926년 조선문헌협회 발기인으로 활동했다. 1927년 6월부터 1928년 4월까지 유럽과 미국등 21개 국가를 시찰하고 돌아온 후 1929년에 교단 최고직인 도령에 올랐다. 1929년 10월 조선어사전편찬회에 발기인으로 참여했고, 1930년 7월 전조선수재구제회 위원에 임명되었다.

이러한 폭 넓은 사회활동을 한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이중적인 모습을 보였다. 1920년대손병희가 죽고 난 이후 천도교는 심각한 내분을 겪게 된다. 이때부터 최린은 '민족개량주의' 경향으로 흘러가게 되어 일본의 승인을 통한 '자치론'을 내세우며 신파를 주도했다. 이 자치론은 "독립의 전단계로서의 자치와 실력 양성"을 뜻하였고, 이는 곧 독립을 위한다는 명분과 실력 양성이라는 실리를 만족하므로 최린을 비롯한 민족주의 계열의 유산계층의 관심을 끌었다. 이러한 자치론은 친일 세력으로 전향시키려는 일제의 정치모략이었다. 이후 조선총독부의 비호 아래 자치운동 조직 연정회의 부활을 기도하는 등의 활동을 하면서 신간회의 구파와는 대립했다. 총독부와 밀착한 이러한 행보는 변절의 단초가 된다.

나혜석과의 불륜[편집]

1928년 우연히 파리 시에서 나혜석을 만나게 된다. 그런데 파리 한인 사회에 화제거리가 된, 당시 파리에 외교관으로 주재하고 있던 중 나혜석과의 불륜이 발단이 되어 1930년 나혜석은 이혼하게 된다.[2] 프랑스어를 몰랐던 두 사람은 통역을 고용해 식당, 극장, 뱃놀이, 시외 구경을 다녔다. 1928년 11월 20일 저녁, 두 사람은 오페라를 관람하고 함께 나혜석의 숙소인 셀렉트호텔로 돌아왔다. 그날 밤 최린은 자기 숙소로 돌아가지 않았다. 그런 관계가 수십 회 이어졌고, 파리 유학생 사회에 나혜석은 최린의 작은댁이란 소문이 나돌았다.[3] 한국 유학생들이 주최한 환영회에서 최린을 처음 본 순간 첫눈에 빠져버린 나혜석은 그와 사랑에 빠진다.[4] 그러나 나혜석이 여러 남성과 연애한다는 소문을 들은 김우영은 비밀리에 파리로 돌아와 나혜석의 뒤를 따라갔고 최린과의 불륜 장면을 목격한다. 이 사실을 확인한 김우영이 베를린에서 파리로 돌아와 짐을 싸는 것으로 그들의 사랑은 막을 내릴 수 있었지만 나혜석김우영의 결혼생활을 청산하는 이혼의 빌미가 되었다.

그러나 나혜석이 이혼한 뒤, 그녀의 자유 연애관과 여성주의 사상을 피곤하게 여긴 그는 나혜석에게 이별을 통보한다. 최린과의 불륜이 이혼의 원인이 된 이상 나혜석은 가만히 있지 않고 그를 정조 유린죄라는 명목으로 법원에 고소하게 된다.

나중에 나혜석은 그를 상대로 12000원의 위자료 소송을 청구한다. 그리고 이 사실을 보도한 동아일보의 기사를 매수하고, 그는 2천원의 돈을 나혜석에게 전달하고 입막음을 한다. 그러나 타인의 아내를 유혹하고 가정을 파탄냈다는 사회의 조롱과 함께 조선총독부로부터도 신뢰가 깎이게 된다.

친일 행적[편집]

1940년 2월 11일자 매일신보에 기고한 최린의 글. 내용은 황국신민으로서 봉공의 성의를 다하고 동시에 내지 동포의 상애의 정의를 촉진한다.'라는 내용으로 내선일체를 주장하는 사설이다.

1934년 4월에 중추원 참의에 임명되고, 그 해 8월 내선일체와 대동방주의(大東方主義)를 내세우는 한일 연합 친일 조직인 시중회를 조직하면서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너게 된다. 1937년에는 총독부 기관지인《매일신보》사장에 취임하여 내선일체를 설파했다.

1937년 7월 중추원에서 주편하는 시국강연회의 강사로 선발되어 전주, 군산, 남원, 광주, 목포, 순천, 이리 등 전라도 일대를 순회하며 '국민의 자각을 촉구하는'강연활동등을 수행했다. 중일 전쟁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자 1940년 국민총력조선연맹 이사, 1941년 조선임전보국단 단장, 1945년 조선언론보국회 회장 등등 각종 친일단체에 주요간부를 맡으며 강연 활동과 학병권유 유세, 내선일체 적극지지, 전쟁을 지원하는 등등 수없이 많은 친일행적을 남겨 극렬 친일 인사가 되었다.

1939년 12월 18일 정동의 이화여전 강당에서 80여 명의 관계자들이 모인 가운데 후원회 창립총회가 개최되었다. 여기에서 12개조의 후원회 장정을 통과시키고 25명의 위원을 선출했다.[5] 최린도 이화여전 후원회 위원의 한사람으로 선출되었다.[5]

광복 이후[편집]

광복 이후 1945년 11월 3일에 미군정청이 발표한 '이동사령 제29호'에 따라 같은 날짜로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에서 파면되었다. 천도교측은 그의 죄를 물어 은퇴를 권고하였으나 그는 거부하다가 결국은 교단에서 쫓겨나는 수모를 당하였다고 한다.

1949년 1월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가 활동을 시작했을 때 체포되어 세 차례 공판을 받았다. 재판과정에서 최린은 자신의 친일행각을 시인하고 재판장과 방청객들 앞에서 솔직한 참회를 보였다. 그는 기자회견에서 자신이 사면될 것을 바라지는 않는다고 덤덤하게 반응하였다. 그는 재판정에서 최후 변론으로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민족 대표에 한사람으로 잠시 민족 독립에 몸담았던 내가 이곳에 와서 반민족 행위를 재판을 받는 그 자체가 부끄러운 일이다. 광화문 네거리에 사지를 소에 묶고 형을 집행해 달라. 그래서 민족에 본보기로 보여야 한다.

납북과 최후[편집]

그는 여러 번 병보석을 신청하였으나 거절당했다. 반민특위 재판 공판을 3차례 받은 끝에 1949년 4월 20일 병보석으로 풀려났다.

1950년 한국 전쟁 기간 중에 납북되어 끌려갔다. 이후 조소앙, 김원봉, 엄항섭, 안재홍 등의 인사들과 함께 북한의 대남한 통일 선전기관에 참여를 요구받았으나 그는 거절하였다. 그 이후 행방은 1958년 12월에 81세로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을뿐 그외에는 알려지 않았다.

독립운동가였으나 후에 변절하여 조선총독부의 고위 관료를 역임하였으므로 1962년 3월의 독립유공자 서훈 대상에 올랐으나 곧 제외되었다.

사후[편집]

2002년 발표된 친일파 708인 명단에 포함되었고,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친일인명사전에 수록하기 위해 정리하여 발표한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중 중추원, 천도교의 두 부문에 들어 있다.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도 포함되었다.

최린은 공개적으로 친일을 한 인물인데다 천도교 신자로서 김일성과 직접 교류한 박인진, 최동오, 김달현 등과는 대립하는 관계였기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낮게 평가한다. 예를 들어 김일성의 회고록《세기와 더불어》에도 대표적인 민족 배반자로 언급되었다.[6]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는 역시 친일파로 널리 알려진 이광수의 묘도 조성되어 있을 정도지만,[7] 최린의 최후나 묘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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