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敬輿 이경여


 

     감사 이경여는 병란 중에도 학문을 세우고 퇴폐한 풍속을 스스로 깨우치도록 가르치고 농사와 누에치기를 권장하며 부역과 세금을 가볍게 하였다.

         2월에 사임하고 떠나가니 남쪽의 백성들이 기대가 무너져 실망하였다. ---용담록--

 

 

 


 1585(선조 18)∼1657(효종 8).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직부(直夫), 호는 백강(白江)·봉암(鳳巖). 목사 수록(綬祿)의 아들이다.

1601년(선조 34) 사마시를 거쳐, 1609년(광해군 1)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1611년 검열이 되었으나, 광해군의 실정이 심해지자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취임하였고, 이듬해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나자 왕을 공주에 호종하고, 이어 체찰사 이원익(李元翼)의 종사관이 되었으며, 1630년(인조 8) 부제학·청주목사·좌승지·전라도관찰사를 역임하였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왕을 모시고 남한산성에 피란하였다.

이듬해 경상도관찰사가 되고, 그뒤 이조참판으로 대사성을 겸임하여 선비양성의 방책을 상주하였고, 이어 형조판서에 승진하였다.

1642년 배청친명파로서 청나라 연호를 사용하지 않은 것을 이계(李烓)가 청나라에 밀고함으로써 심양(瀋陽)에 억류되었다가 이듬해 세자와 함께 귀국하여 우의정이 되었다.

1644년 사은사로 청나라에 갔다가 다시 억류되었으나, 그동안 본국에서는 영중추부사라는 벼슬을 내렸다.

이듬해 귀국, 1646년 민회빈강씨(愍懷嬪姜氏:昭顯世子嬪)의 사사(賜死)를 반대하다가 진도에 유배되고, 다시 1648년 삼수에 위리안치되었으나, 이듬해 효종이 즉위하자 풀려나와 1650년(효종 1)에 다시 영중추부사가 되었다. 이어 영의정으로 다시 사은사가 되어 청나라에 다녀온 뒤 청나라의 압력으로 영중추부사로 전임하였다.

시문에 능하고 글씨에도 뛰어났다. 부여의 부산서원(浮山書院), 진도의 봉암사(鳳巖祠)와 흥덕(興德)의 동산서원(東山書院)에 제향되었으며, 저서로는 《백강집》이 있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행력

왕력 서기 간지 연호 연령 기사

선조 18 1585 을유 萬曆 13 1 1월 9일, 서울에서 태어나다.

선조 32 1599 기해 萬曆 27 15 尹承勳의 딸 海平尹氏와 혼인하다.

선조 34 1601 신축 萬曆 29 17 司馬試에 합격하다.

광해군 1 1609 기유 萬曆 37 25 10월, 增廣試에 乙科로 합격, 승문원에 分館되다.

광해군 2 1610 경술 萬曆 38 26 12월, 검열이 되다. 이후 설서, 대교를 지내다.

광해군 4 1612 임자 萬曆 40 28 4월, 봉교가 되다. ○ 11월, 공조 좌랑이 되다. ○ 12월, 정언이 되었으나 사직하고 나아가지 않다.

광해군 6 1614 임인 萬曆 42 30 1월, 直講이 되다. ○ 9월, 司書가 되었으나 사직하다.

광해군 7 1615 을묘 萬曆 43 31 4월, 京畿 都事가 되다.

광해군 8 1616 병진 萬曆 44 32 4월, 金剛山을 비롯한 關東 지방을 유람하다.

광해군 9 1617 정사 萬曆 45 33 3월, 부인상을 당하다. ○ 4월, 忠原 縣監이 되다.

광해군 10 1618 무오 萬曆 46 34 8월, 豐川任氏와 혼인하다.

광해군 11 1619 기미 萬曆 47 35 벼슬을 버리고 興元江 가에 우거하다.

광해군 12 1620 경신 泰昌 1 36 8월, 부친상을 당하다. 驪江에서 居喪하다.

인조 1 1623 계해 天啓 3 39 3월, 反正 뒤 부수찬이 되다. 이후 교리, 헌납, 이조 좌랑 등을 역임하다.

인조 2 1624 갑자 天啓 4 40 1월, 李适의 난에 扈駕하여 公州로 가다. 體察府 從事官을 겸하다. 평정 후 隨駕하여 還都하다. ○ 3월, 교서관 교리를 겸하다. ○ 10월, 이조 정랑이 되다.

인조 3 1625 을축 天啓 5 41 2월, 暗行御史로서 嶺南을 다녀오다. ○ 6월, 體察府 從事官으로서 南漢山城을 순찰하고 오다. ○ 8월, 명을 받들고 西沿의 邊備를 시찰하다. ○ 10월, 사간이 되다. 성균관 사예, 응교를 역임하다.

인조 4 1626 병인 天啓 6 42 7월, 號牌御史로서 嶺南을 다녀오다. ○ 12월, 賜暇讀書하다. 곧 號牌御史로서 湖南을 다녀오다. 호

인조 5 1627 정묘 天啓 7 43 1월, 胡亂이 일어나자 扈駕하여 江都로 들어갔다가 4월에 돌아오다. ○ 5월, 동부승지가 되다. ○ 9월, 충청도 관찰사가 되다.

인조 6 1628 무진 崇禎 1 44 10월, 대사성이 되다.

인조 7 1629 기사 崇禎 2 45 윤4월, 이조 참의가 되다. ○ 가을, 扶餘 白馬江 가에 定居하다.

인조 8 1630 경오 崇禎 3 46 2월, 淸州 牧使가 되다.

인조 9 1631 신미 崇禎 4 47 7월, 부제학이 되다. ○ 10월, 모친의 병환을 이유로 휴가를 받아 扶餘로 돌아와 상소, 사직하다.

인조 10 1632 임신 崇禎 5 48 8월, 우승지로 소명을 받들고 올라와 곧 부제학이 되다. ○ 11월, 휴가를 얻어 扶餘로 돌아와 상소하여 사직하다.

인조 11 1633 계유 崇禎 6 49 1월, 전라도 관찰사가 되다.

인조 12 1634 갑술 崇禎 7 50 봄, 부제학이 되다. 곧 上箚하고 扶餘로 돌아오다.

인조 14 1636 병자 崇禎 9 52 봄, 우승지로서 入對하여 時事를 진달하다. ○ 12월, 호란이 일어나자 南漢山城으로 扈駕하다.

인조 15 1637 정축 崇禎 10 53 3월, 경상도 관찰사가 되다.

인조 16 1638 무인 崇禎 11 54 1월, 모친의 병환으로 사직하고 扶餘로 돌아오다. ○ 3월, 동지중추부사로서 상소하여 御留山城의 수축을 청하다. 곧 부제학으로 올라오다. ○ 5월, 대사헌이 되다. 얼마 후 휴가를 얻어 扶餘로 돌아와 상소, 사직하다. ○ 12월, 우승지가 되다.

인조 17 1639 기묘 崇禎 12 55 2월, 부제학 겸 대사성이 되다. ○ 3월, 이조 참판이 되다. ○ 11월, 형조 판서가 되다. ○ 12월, 모친의 병환으로 扶餘로 돌아오다.

인조 18 1640 경진 崇禎 13 56 2월, 모친상을 당하다.

인조 20 1642 임오 崇禎 15 58 6월, 대사헌이 되다. ○ 12월, 申翊聖, 李明漢 등과 함께 淸 나라로 잡혀가 瀋陽에 구류되다.

인조 21 1643 계미 崇禎 16 59 3월, 還國하여 扶餘로 돌아가다. ○ 11월, 대사헌이 되다. ○ 12월, 右議政이 되다.

인조 22 1644 갑신 崇禎 17 60 2월, 瀋陽으로 사신 갔다가 다시 구류되다. 金尙憲, 崔鳴吉과 만나다.

인조 23 1645 을유 順治 2 61 3월, 세자를 모시고 돌아오다. 영중추부사가 되다.

인조 24 1646 병술 順治 3 62 2월, 姜嬪의 賜死를 반대하다가 削奪官職, 門外黜送당하고, 珍島로 遠竄, 圍籬安置되다.

인조 26 1648 무자 順治 5 64 3월, 三水로 移配되다. ○ 5월, 인조가 승하한 뒤 7월에 牙山으로 量移되다.

효종 1 1650 경인 順治 7 66 1월, 석방되어 돌아오다. ○ 3월, 領議政이 되다. ○ 겨울, 嶺南 儒生의 疏斥으로 解職을 청하다.

효종 2 1651 신묘 順治 8 67 봄, 청 나라 사신의 압력으로 영의정 직을 떠나다.

효종 4 1653 계사 順治 10 69 3월, 영중추부사로서 인재를 천거해 올리다. ○ 7월, 재이로 인하여 召命을 받들어 入對한 뒤 萬言箚를 올리다.

효종 5 1654 갑오 順治 11 70 겨울, 청 나라 사신이 다시 와서 문제 삼자 물러나 忠州 田家로 피하다.

효종 6 1655 을미 順治 12 71 5월, 耆社會에 나아가다.

효종 8 1657 정유 順治 14 73 8월 8일, 明禮洞 집에서 졸하다. 遺疏를 자손이 올리다. ○ 10월, 交河 月籠山 아래에 장사 지내다.

숙종 4 1678 무오 康熙 17 -  4월, 抱川 鑄金山 아래 安陽洞으로 移葬하다.

숙종 7 1681 신유 康熙 20 -  家狀(李敏敍 撰) 및 諡狀(金錫胄 撰)을 완성하다.

숙종 9 1683 계해 康熙 22 -  6월, ‘文貞’으로 시호를 내리다. ○ 9월, 珍島 鳳巖祠宇가 낙성되어 배향하다.

숙종 10 1684 갑자 康熙 23 -  아들 李敏敍와 손자 李師命이 문집을 간행하다. (宋時烈의 序) 이민서

숙종 34 1708 무자 康熙 47 -  神道碑銘(宋時烈 撰), 墓表(李頤命 撰)를 짓다.

 


기사전거 : 年譜, 家狀(李敏敍 撰, 西河集 卷15), 朝鮮王朝實錄 등에 의함

 


 편찬 및 간행

저자의 시문은 아들 李敏敍에 의하여 정리, 편차되었다. 1684년(숙종 10)에 宋時烈이 지은 序文에 의하면, 李敏敍가 大提學으로 있을 때 奏御文字를 모으고 정리하여 편차하였는데 여기에 여러 작품을 합쳐 간행하려 한다고 하였다. 여기서 말한 여러 작품이란 곧 家藏 草稿를 바탕으로 정리한 시문을 뜻하는 것으로, 1681년에 李敏敍가 지은 家狀에서 ‘詩文 약간 권이 家藏되어 있다.’ 한 그 시문을 말한다. 李敏敍는 이렇게 奏御文字와 家藏 草稿를 모아 편차해서 15권의 定稿本을 만들었던 것인데, 「肅宗實錄」에 의하면 李敏敍의 大提學 재임은 1680년(숙종 6) 5월~1683년(숙종 9) 4월 사이였다. 따라서 李敏敍는 대제학 재임 중 1681년에 諡號를 청하기 위하여 家狀을 지은 시기를 전후하여 유고의 간행을 도모하여 위와 같은 과정을 거쳤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간행은 宋時烈의 序文이 쓰여진 1684년에 이루어졌는데, 「白江年譜」에 의하면 이해에 저자의 손자 李師命이 全羅道 觀察使로 나가게 되면서 간행하였다고 하였다. 李師命은 「肅宗實錄」에 의하면, 1682년 8월에 제수되고 1684년 7월에 仍任되어 임기를 채웠다. 따라서 李敏敍가 대제학으로 있고 李師命이 전라도 관찰사로 나간 1682년경에 문집 간행을 위한 본격적인 준비에 들어가 1684년에 15권 7책의 목판본으로 완성된 것이다.《초간본》 현재 규장각(奎6275)과 성균관대학교 중앙도서관(D3B-409)에 소장되어 있고, 장서각(4-6036), 고려대학교 중앙도서관(Dl-A2383), 연세대학교 중앙도서관에는 같은 판본으로 15권 8책본이 소장되어 있다.

한편 본집에는 실리지 않았지만 목판본으로 된 「白江年譜」 1책이 전해지고 있다. 그 凡例를 통해 보면, 家狀과 諡狀을 기본으로 하여 만들었고, 補遺를 붙여 狀碑나 여타 文字 가운데 年譜에 다 실을 수 없는 것이나 遺聞, 瑣錄에 나오는 기록들, 家藏 手筆帖 가운데 子侄을 訓戒한 書와 箴 등을 아울러 기록하였다. 이 연보가 만들어진 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는데, ‘英宗大王 32년’까지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正祖 연간 이후에 만들어진 것으로 짐작된다. 현재 장서각(2-744) 등에 소장되어 있다.

이후 문집의 重刊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본서의 저본은 1684년 목판으로 간행된 초간본으로, 규장각장본이다. 권10의 제17판과 제27판이 잘못 結冊되어 있어 바로잡았다.

 


 

 

 


 

丁丑年 仁祖15年   1637년 --윤4월 듬

역사보기/  

1월 강화도 함락. 인조가 삼전도(三田渡)에서 청태종에 항복함.

2월 후금군 철수.

3월 홍익한, 윤집, 오달제가 청에 잡혀가 심양에서 살해됨.

4월 소현세자(昭顯世子) 등이 심양에 볼모로 잡혀감.

4월 이경여를 경상 감사로 관직을 제수하다.    

戊寅年 仁祖16年

            正月朔日(甲寅月 乙丑日) 대월 평달 양력/ 1638 년2월 14일 房

역사보기/  

1월 5일(기사)경상 감사 이경여가 사직하니 윤허하다  

8월 8일(무술)평안도 철산부에 우박이 내리다

8월 26일(병진) 흉년의 백성 구제에 대해 의논하다

8월 29일(기미) 전라도에 서리가 일찍 내려 곡식이 손상되다

9월 1일(경신)  함경도에 굶주림과 염병으로 사망한 백성이 4천 3백여 명이다 

10월 봉림대군(鳳林大君, 후의 효종)이 청태종의 서정(西征)에 동행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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