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흥참(可興站) 
☞   可興가흥: 충청북도 충주시 엄정면 


나라에 받치는 경상도의 세곡을 낙동강을 따라 상주까지 운반 후에 조령재를 넘어 가흥창으로 모였던 곳이다. 
일찍이 1477년 선산부사를 지낸 점필재 김종직이 이곳을 지나며 '가흥참(可興站)'이라는 시를 남겼는데 경상도 백성들이 세곡을 바치는데 따른 고통과 부패한 가흥참 관리들의 실상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가흥참(可興站) 

嵯峨鷄立嶺            우뚝 솟은 계립령은 

終古限北南            예로부터 남북의 경계가 되었네. 

北人鬪豪華            북쪽사람들은 다투어 사치하는데

南人脂血甘            남쪽사람들의 기름과 피를 빠네 

牛車歷鳥道            우마차로 조령고개 넘는 길엔 

農野無丁男            농사철 들판에 일하는 장정 보이지 않고 

江干夜枕藉            강가에서 밤이면 서로를 베개 삼아 잠을 자네 
 
吏胥何婪婪            아전 서리들은 어찌하여 욕심을 버리지 못하는가.

小市魚欲縷            시장의 생선 가늘게 회치고 

茅店酒如泔            주막에 술은 쌀뜨물처럼 하얀데 

醵錢喚遊女            돈 거두어 계집 불러 즐기니

翠翹凝紅藍            엉덩이를 살랑살랑 연지곤지는 덕지덕지

民苦剜心肉            백성들 심장이 깎이듯 괴로운데 

吏恣喧醉談            아전들 취해서 방자히 떠들며  

斗斛又討嬴            됫박질하면서 또 꾸역꾸역 채워 넣으려하니

漕司宜發慚            출납을 맡은 관리는 의당 부끄러워야 할 것이거늘 

官賦什之一            관가에 받치는 건 십분의 일인데 

胡令輸二三            어찌하여 두 곱 세 곱을 실으라고 호통을 치는가.

江水自滔滔            강물은 절로 도도히 흐르건만

日夜噓雲嵐            밤낮으로 탄식하는 구름 물안개

帆檣蔽峽口            배 돛대 그득한 좁은 강나루에서 
 
北下爭驂驔            북쪽서 내려와 다투어 슬쩍 슬쩍 빼내가니
 
南人蹙頞看            남쪽 사람들 도끼눈 뜨고 살펴보는 것을 

北人誰能諳            북쪽 사람들 누가 신경이나 쓴다던가.





200년이 지난 뒤  비안 박연에 살던 용담 김계선생의 시절에도 그 고통은 더욱 심해져만 간다.

1651년 효종 2年  용담 77세
칠곡 가산산성을 쌓을 때부터 많은 사람들이 죽고 노역의 고통에 시달렸다. 성을 쌓은 이후에도 쌀을 실어 올려야하는 고통과 산성의 보수 일에 노역은 계속되는 상황에 백성들의 원성이 쌓여 오죽하면 가산산성을 쌓은 관리들을 원망하며 그 살을 씹고 그 가죽으로 이불을 덮을 것이라 했을까. 거기에 더해서 농지세를 광목이 아닌 쌀로 정하여 멀리 충주까지 실어 날라야하는 고역을 치르니 원망이 극에 달한 때이다.   
용담 선생이 참다못해 붓을 들었다.  

-용담일기 중에서-

○田稅作木上疏草伏以臣等所居比安爲邑地偏民鮮水土淺滿少有澇旱先自阻飢常賦之役竭力供奉而每患不逮勅物之徵星夜措辦而每必生事民力竭盡儘合變通欲陳於方伯而非其檀裁來訴於該曺而又非自斷故遑遑間迫不得不呼顱於父母之前糞蒙採納伏惟遍下試垂憐察焉
농지세를 면포로 낼 수 있도록 해달라고 임금께 상소문을 올린다.  
엎드린 저희들은 땅과 물길은 적은 장마에도 물에 잠기며 가뭄에 앞서 먼저 굶주림에 허덕이고 항상 세금을 내지 못해 노역으로 진력을 다해 받들고 일하고도 청나라 사신이 올 때마다 받치는 공물을 징수하여 언제나 걱정을 떨쳐내지 못하니 밤늦게 별을 보면서까지 열심히 일을 하는 것은 모두 살아남고자 하는 일입니다. 
백성들이 있는 힘을 다해 모두 뜻을 모아 다른 방법을 찾아보고자 경상감사에게 하소연하였으나 저희들의 뜻을 어찌 헤아려줄 수 없다고 하여 또다시 담당중앙 관청인 해조에 고하였던 바 그 곳에서도 스스로 결정 할 수 없다고 함으로 급한 마음에 어쩔 수 없어 허둥지둥 부모님께 불쑥 볼을 들이 밀었으니 어린아이를 닦아 주듯 저희들의 뜻을 받아주소서. 
삼가 엎드려서 아래 글을 두루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어 살펴 주시기 바리나이다. 

夫朝家賦役於民者一視同仁均有定式而本縣襡以至殘之邑兼他邑所無之役何者嶺南一道分爲上中下三道上都則年年田稅載輸於可興倉五日之程中道則田稅米太今數作木上納於京中而甹自架山城設立之後中道各邑盡屬於山城擬諸緩急保守故兵糧盡討於山城而本縣處於上都之下中道之上故謂之上都而轉輸米太於可興于謂之中道而儲峙糧械於架山以一縣而兼上中道之役則本縣獨不寃若乎
조정에서 부과하는 세금과 노역은 백성이라면 누구나 하나같이 똑같이 정해지는 법인데 저희 고을에서만은 부역이 끝나기기 전에 다른 읍에는 없는 노역일이 또다시 겹치니 어쩐 일입니까. 
영남의 한도에 속하여 상중하로 3도로 나눈 上都상도에서는 년 년이 농지세를 충주에 있는 가흥 창고까지 마차에 실어 나르는데 5일이 걸립니다. 
中道중도에서는 농지세로 내는 쌀과 콩 대신에 최근에는 수차례 광목으로 서울에 받쳤는데 일이 꼬여 칠곡군 가산산성을 쌓은 이후에는 중도의 각 읍이 모두 가산산성에 소속된 것이 의문스럽습니다. 급히 성을 보수하는 일로 산성의 군량미로 모두 쓰였는데 본 현은 상도에 소속되어 있으니 下中道하중도가 상도가 된 꼴이라 하겠습니다. 
상도이니 쌀과 콩을 가흥 창고까지 실어서 나른다는 것이라 하고 중도에 속해 있으니 가산산성의 높은 고개에 군량과 곡식을 쌓아야하니 하나의 현이 이중으로 상중도의 역할을 맡아 하는 것이니 오직 우리 현만의 억울함이 이와 갔습니다.  

臣等請先陳可興遠輸之艱與架山貯糧之斃焉鳴件田稅輸倉惟民所供如不有思宜苦之狀萬萬難堪者
저희 들이 청하고자 하는 것은 우선 계속해서 충주 가흥창고까지 멀리 실어 날라야하는 어려움과 칠곡 가산산성에 곡식을 지어 올려야하는 폐단입니다. 
이번 일은 농지세를 실어 나르는 창고는 백성들이 받치기 알맞은 곳으로 정해야하는데 적절한 고려 없이 정해진 것이니 어려운 상황이 한두 가지가 아니어서 난감합니다. 

臣等問敢百舍重滿凟擾於過災修省之日乎夫遠輸之難有三焉鳥嶺之險惡不必形容其危機石磴而民力之貧富不齊夫馬之有無不同貧而孤寡者典賣其田土富而有馬者索高其輸價督發及期之際南負女載必至顚仆而後己此臣等之所望於至上之軫念者一也 
저희들의 이 문제로 감히 멀리서 거듭하여 시끄럽게 소요하는 것은 지나가는 재앙에서 몸을 구한 날이 되기 때문입니다. 
무릇 멀리 실어 나를 때 세 가지 어려움이 있사오니 조령산맥의 길이 험난함을 형용할 필요도 없겠거니와 위험한 자갈 비탈길에서 백성들의 고생은 부자나 가난한 사람이나 마차가 있거나 없거나 하나같사오며 자식 없는 과부들은 그 토지와 집을 저당 잡히거나 팔아 치우고 부자들은 마차를 구해 봐도 운임이 너무 비쌀뿐더러 관청에서 정한 기간 내에 실어오라고 재촉하여 날짜를 맞추느라 남자는 지고 여자는 이고서 결국은 엎어지고 넘어지고 나서야 그 일을 마치게 됩니다. 
이것이 저희들이 바라는바 전하께 올리는 첫 번째 근심입니다.  

及夫踰嶺輸倉之際一碩所納米則幷計其運價行糧必費二碩有半然後可望准納則田結多而家甚貧者數三碩所納之米虛費其米者又幾多耶以此民困日甚而雇價日增民情所在必欲作木者誠可愍也此臣等之所望於至上之軫念者二也   
또 저 고개를 넘어 창고까지 실어 나르는 일을 마치려면 한가마를 바치는 데에 따른 추가 운임이 필히 두 가마 반이 들어야만 확실한 수납이 가능하니 논밭이 많은 집에서는 부담이 크고 가난한 사람들은 세 가마를 운송하는 비용으로 식량을 삼고 또 그 런 일이 많아지다 보니 이곳 백성의 곤궁함은 날로 더해가서 노임은 날로 치솟아 갑니다. 
백성들의 마음은 꼭 세금은 곡식 대신 광목으로 바칠 수 있기를 바라고 있으니 참으로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이것이 저희들이 바라는바 전하께 올리는 두 번째 근심입니다.  


不徒此也自從牛㿄之後民間富饒者常不能多畜牛馬初其貧無牛馬者乎以此田價賤而抛黃居多民生析而不尊厥居此臣等之所望於至上之軫念者三也 
이뿐만이 아니라. 소들이 마름병에 걸린 후로는 민가에서는 배불리 먹던 부자도 평소와 같이 많은 소와 말을 기르지 못하고 애초 소와 말이 없던 가난한 사람들은 이리하여 농지는 헐값에 집어던지고 병들고 지친 많은 집들이 뿔뿔이 흩어져 그 집에선 제사도 올리지 못합니다. 이것이 저희들이 바라는바 전하께 올리는 세 번째 근심입니다.
鳴呼本縣田三稅所納於可興者況是六百有奇則其數不靜而十室殘邑民力己竭一碩之運重若千斛侗蒙准十許於作木經費所需米布奚捀而民間專輸輕重自別矣 
아 아 우리 현에서 세 가지의 농지세를 내는 곳은 충주 가흥이니 더구나 지금 육백집이 지금의 법대로 한다면 안정하지 못하고 그 가구 수는 열 집이 쇠잔해질 것이고 읍민의 기력은 다해서 한번 나르는 무계는 천섬과 같으니 어리석은 아이라도 비교해보고 열 번이라도 광목으로 받칠 것입니다. 
거두어들이는 쌀과 면포의 경비가 어찌하여 받치는 백성들 간에 오로지 실어 나르는 무계로 구별되는 것입니까.

抑念臣等所謂本縣兼他邑所無之役者切近傍邑如軍威義城等官之距可興道里均於本縣而以其有貯糧械於架山之苦而猶在作木之列則本縣旣屬於架山恒儲七百餘祖及軍器什物而山嵐篜濕易致腐黑間年改色則民力之困亦己極矣更無一分餘力可堪搬輸故冀免遠輸於可興狎得專力於山城其情不其哀乎
문득 저희들은 소위 다른 읍에는 없는 노역을 겸해서 하는 것은 군위와 의성 등의 관청과  같이 가까이 있는 읍이 잘려나가 갔기 때문입니다. (경상도의 중앙인 칠곡에 가산산성을 쌓으면서 지역이 분리됨)  멀리 떨어진 가흥인근 지방과 균일한 방법으로써 본 현에서 그렇게 쌓아야하는 곡식과 군 병기라면 가산산성에 쌓는 고통이 오히려 더하니 면포로 받치는 것이 순리인 즉 본 현은 이미 가산산성에 소속되어있어 항상 7백여 석의 군량이 쌓여있고 사당과 또 군병기와 온갖 기구가 있는데 산속의 아지랑이와 찌는 듯한 습기로 검게 썩어버려서 한해 걸러마다. 다시 바꾸어야하므로 백성들의 곤욕이 역시 극에 달해 있으니 기력을 찾을 만한 일각의 여유도 없이 쌀을 실어내는 일을 감당해야하므로 멀리 가흥창고까지 실어 나르고서는 번갈아 맡아서 가산산성에 전력을 다해야하니 그 사정이 애석하다 하지 않겠습니까.

敢疾呼之望其極濟於偏苦之閟乎伏乞天地父母哀憐臣等之訴如窮人無所於歸本縣田三稅全數作木永作恒規尊安一邑之民不勝幸甚臣等無任膽天懇祈之至謹昧死以呻
감히 급하게 호소하여 바라는 것은 남보다도 더 많은 고통을 받는 답답함에서 구제해 주십사 엎드려 바라오니 천지의 부모님이시여 애처롭고 가엾게 여기소서. 신들의 하소연은 마치 돌아갈 곳이 없는 궁벽한 사람과 같습니다. 
우리 현의 세금을 모두 광목으로 꾸준히 바칠 수 있도록 규정을 정해 주시어 편안히 따를 수 있게 돼오면 한 읍의 백성으로 전하의 깊은 은혜에 신들은 황공하여 어쩔 바를 몰라 하늘같은 은혜에 감사할 것입니다. 삼가 죽기를 무릅쓰고 읊조립니다.  

                                                                    --- 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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