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왕조와 서주왕조의 역사 | | | 중국사 |
2008.05.08 11:50 |
제2장 상(商)․주(周)의 정치와 사회
1. 상왕조의 건립과 통치구조
1) 갑골문의 발견과 신정통치 : 前期 - 河南省 偃師縣 二里頭 偃師商城:(B.C 1700경)
中期 - 河南省 鄭州 二里崗 정주상성(B.C 1600경)
後期 - 河南省 安陽縣 小屯村(B.C 1300경) : 은허
* ?사기?「은본기」에는 시조: 契(帝嚳의 둘째 부인 簡狄이 玄鳥의 알 먹고 잉태(동북아시아지역 일대의 난생설화? 요순시대에 司徒가 되어 백성교화, 우의 치수에도 공헌, 商에 봉해짐)- 14대 대을(大乙 : 成湯)때 하의 桀을 몰아내고 건국(안휘성 박(亳)현 부근, 하남성 언사현?), 19대 盤庚때 은허(하남성 안양부근)로 천도.
* 잦은 천도의 의미 : 전기(契에서 湯王; 8차), 後期(5차) :유목민의 풍습? 종족간 충돌? 홍 수의 범람? 농경지 개간 필요?
* 갑골문의 발견 : 1899년 劉鶚이 발견 : “龍骨”, 卜辭를 통한 왕위세계 : ?사기?와 비교.
1920년대 말부터 15차례 발굴, 상의 궁전유지, 왕묘추정 대묘 등 1000개 묘 가 발굴, 대량의 갑골문자
유악(劉鶚)의 ?찰운장구(鐵雲藏龜)? - 세상에 알려짐. 10여만 편이 출토.
갑골문 : 한자의 形聲 원칙이 갖추어짐. 제사, 전쟁, 수렵, 재해 등에 관한 내용
내용은 시기적으로 22대 武丁이후 30대 帝辛까지
문자발전: 篆體-隸書-楷書-行書-草書로)(한자:象形․指事․會意․假借․形聲․轉注): 문자는 교역을 위한 목적보다는 씨족을 통치하려는 목적에서 등장. 통치자는 문자체계를 통제함
2) 신정통치와 그 변화 : 上帝 - 최고의 신 : 원시적인 태양숭배와 관련 (태양+선조)
* 상왕조의 통치는 정치와 종교가 일치된 신정국가의 성격
* 거대한 왕성과 왕묘, 순장자와 貞人집단의 존재
① 전기: 이리두 궁전유적(동서와 남북이 약 100미터 길이: 정치권력의 발생), 偃師商城(거대한 권력의 중심지 기능, 대형건축군, 성안에 작은 성이 배열됨. 상조 건립시기와 일치된다는 견해도. B.C 1700경은 成湯의 시기와 비슷.
② 중기: 二里崗 鄭州商城 - 한 쪽 벽 길이 -1,700-1,870미터, 높이 10미터, 폭 30미터 - 매일 1만명 이상의 인력이 약 18년 정도의 노동력을 필요. 순장자(갑골문- 14,000명 이상 확인)
* 정인집단 : 왕의 신정적 성격 보좌, 부족연합적 성격 반영(정인집단→왕 一人으로 대표됨)
강력한 왕권의 형성 - 세속적 왕권의 강화 - 청동기와 문자의 장악
청동기 주조기술의 발달 - 상왕의 권위 상징(행정통치와 의식의 필요)
3) 씨족의 사회조직과 누층적인 邑制國家(혈연중심 씨족공동체) -고고학 성과
사회계층 - 지배층(상왕, 왕실귀족, 지방의 씨족장 : 총칭하여 百姓), 평민(농민 -공물과 요역의 부담), 노예(전쟁, 약탈의 경과 - 순장, 제사의 희생물로 구성
小邑(屬邑)→族邑→大邑(王都) : 族邑(기본단위)의 연합으로 국가가 성립
* 호북성 황피현 반룡성(1974년 발견) 유적 - 남북 290미터, 동서 260미터. 이리강 규모의 약 9분의 1에 해당. 이후 大邑商, 天邑商의 경우 읍의 규모가 반경 약 20킬로미터.
읍의 외부는 封으로 표시. 읍의 외부에는 別邑이 있는 경우, 野(原野) -夷蠻戎狄의 거주지
그 외 方(商의 통치권 바깥에 존재 : 人方, 土方, 羌方 등
商代에 이미 봉건제의 시작 : 갑골문에 甸, 伯, 侯, 子, 南 등의 명칭. 朝覲과 공납의 의무
출정과 제사의 의무(제후)
4) 상의 사회와 경제
① 경제발달
당시의 중원지역: 적당한 기후, 王土사상과 族을 기반으로 한 씨족공동체에 의한 집단 경작방식. 농기구의 개량(청동기보다 석기가 많음)보다는 집단적, 조직적 노동력의 동원, 동물 사역(개․소 등), 관개와 시비법․수수․고량․기장․피․맥․조․벼 등의 생산, 상업의 발달(子安貝․주석 등이 화폐로 사용), 일부 공납과 교역과 약탈의 성격이 모두 보임.
② 사회구조
지배층-평민, 노예(피지배 하층민)으로 구성. 商王(‘余一人’이라 자칭: 전제군주), 다음으로 百姓(왕실귀족이나 작위소유층을 총칭, 엄청난 부장품과 순장을 통한 지배력 행사), 小人 혹은 王人 등은 평민을 가리킴. 공물, 병역과 요역의 의무. 부장품이 보이지 않는 묘의 주인. 노예(전쟁포로, 가내노예의 성격, 순장이나 제물로도 사용. 소, 양 등과 함께. 이후 점차 순장자의 숫자가 감소됨. 노동력으로 인식했다는 증거.
③ 종교
자연신, 조상신 가운데 최고의 신은 帝 혹은 上帝 : 商王이 죽으면 帝가 되어 우주와 인간의 질서에 간여. 이후 帝는 周의 天의 개념에 의해 주왕과 천의 관계가 상왕과는 달라짐. 이 시기에 있어서 神․天․帝 등과 관련된 고대 중국인의 종교적 관념의 변화는 제사․의례 등 현실적인 필요와 깊은 관련. 이후 정치적 추이에도 밀접하게 작용.
2. 서주왕조의 성립과 봉건체제
1) 상․주의 교체와 주공의 동방경영
* 중국사에 있어서 西周의 위치 : 특히 周公과 봉건제가 美化 - 春秋戰國은 봉건을 파괴함
* 특히 信古와 疑古派의 대립
西周의 이상화 : 시호제도, 봉건제도, 종법질서, 가부장제도의 확립, 渭水분지( 西周의 鎬 京, 秦漢隋唐의 수도 장안부근)
* 西周(B.C 1122-770), 東周(B.C 770-221) : 春秋(B.C 770(노 은공 원년)-403(애공 14년)
戰國(B.C 403-221), 그 이전 B.C453 說
* 周의 건국(?사기?「주본기」) : 시조 后稷(제곡의 왕비 姜原이 들에서 거인 발자국 밟은 후 잉태, 기(棄)를 낳음. 요순시대 農師로 공을 세워 섬서성 무공현에 분봉됨. 후일 농업신으로 추앙; 族姓은 姬)- 12대후 古公亶父때 섬서성 岐山- 季歷거쳐-文王때 豐으로 천도, 발전의 기틀, 은과 갈등 : 武王- 牧野의 싸움에서 승리(B.C1067?, B.C1046?)
* 殷周혁명 : 원시적 종교관에 기초한 신정적 성격의 商을 멸망 -봉건제도, 종법제도 실시 등 새로운 통치원리 부여. 주는 상과 끊임없이 갈등(거역과 복속을 반복함)
武王의 鎬京으로 천도 : 은의 故土 감시(周初의 봉건제도 : 管叔, 蔡叔 등- 후일 三監의 반란 : 주공의 진압(3년 만에)
* 周公 旦이 成王 보좌 : 宗周(鎬京)와 成周(洛陽)의 兩京제도 - 영토분할에 의한 동방경영?
* 西周초기의 주변민족 :
황하하류와 산동지역 - 東夷
淮水유역: 淮夷(齊, 魯건설)
남방의 楚, 서북의 犬戎, 玁狁
* 宗周는 B.C771년 융적의 침입 - 낙양(成周)로 천도. 그 이전을 西周라 칭함
2) 天命사상과 봉건제․종법제의 채용
* 周族이 숭배한 최고의 신은 天 - 우주 창조, 천지와 자연의 법칙 주재, 인간사 규제의 절대신. 문왕에게 천명을 내림(?서경?) 상의 토벌이 하극상이 아닌 천명을 받아 天의 의미를 수행한 것. 주 왕조 창업의 정당성 강조
* 周代의 天 : 인간의 노력, 즉 德의 실천으로 천명이 좌우. 인간이 신들의 지배에서 벗어나 자유를 획득하였음을 의미, 제한된 자유는 신의 응보
* 天命사상 : 새로운 정치사상과 세계관을 형성. 天命-天子-천하통치(華夷를 망라한 세계질서의 주재자. 통일제국 등장을 가능하게 하는 이념적 기반, 왕권의 절대성, 전제지배의 근거. 德治가 중심 - 文治우위의 통치이념 (문왕이 무왕보다 존중되는 배경) 관료제도에도 영향
→ 무력적 왕조교체의 합리화, 상왕조 유민의 제어, 주왕의 절대성 확보, 주왕실의 신성한 성격규정, 주 통치의 유일성 확립에 결정적인 역할(도덕의 실천, 예의 중시 등)
* 상의 마지막 주왕(紂王)을 악정의 상징으로 주의 문왕과 대비시킴. 오랜 전쟁에 대한 염증, 지배층의 부패, 인심의 이반 등.
* 周公 단(旦) : 무왕의 상 멸망 후, 紂의 아들 무경으로 하여금 상왕조의 유민통제, 상의 王畿지역에 무왕의 동생 管叔․蔡叔․霍叔 등 소위 ‘三監’의 설치, 무경 감시.
무왕의 아들 成王 즉위- 주공이 섭정, 보좌. 관숙, 채숙과의 갈등, 삼감의 반란, 주공의 동방정벌, 3년여에 걸친 원정의 성공, 왕위분쟁의 문제가 확대된 것이 아닌가?
* 봉건제와 종법제
① 봉건제 : 전체 제후국이 주초에는 약 130-180개 국, 동성제후 약56개국, 이성제후 약 70여개국. 제후에게는 조근과 공납의 의무가 요구됨. 魯․晉․宋․衛․燕․齊 등 주요 제후국.
주왕의 직할지 王畿를 제외하고 분봉한 땅을 國이라 함. 경제적 자립성을 지님. 都와 다시 봉건관계. 즉 國은 제후의 근거지, 都는 제후에게 분봉 받은 卿, 대부의 근거지. 전체적으로는 王土사상. 주공을 거쳐 康王․昭王․穆王을 거쳐 계속 시행됨.
* 수도: 宗周(종묘의 존재)와 함께 成周(낙읍;낙양)건설. 정치군사적 요충지에 동방지역지배의 거점. 당시 세계의 중앙이라고 인식. 주왕조가 당시의 세계지배를 완성함을 의미. 경제적으로도 중요, 조세인 곡물의 집적지 기능. 주 6군의 상비군 주둔.
* 주 왕실의 군사조직(?周禮?) : 伍(5명)→兩(5伍)→族(4兩)→師(5族)→旅(5師)→軍(5旅)로 구성, 1군의 병력 12,500명, 보병과 전차대로 구성, 주력은 농민중심의 보병.
봉건제를 매개로 광대한 지역에서의 정치적 통합을 가능하게 함. 이를 유지시키는 것이 바로 천명사상과 종법제도. 천명사상의 경우 주왕과 봉건제후의 관계를 보다 보편적인 규범의식으로 강화해 줌. 천명은 혈연적 관계를 초월한 개인적 덕능에 기초한 것으로 정당화될 수 있음.
② 종법제 : 주왕을 정점으로 한 주왕조 전체가 한 계통의 혈연조직에 포섭되는 것을 이상으로 하는 국가지배이념. 최고권력자와의 혈연적 친소에 따른 누층적 신분질서. 적장자상속.
종족(氏族)은 총본가인 大宗을 중심으로 단결, 그 支派인 小宗은 대종에 예속. 대종의 적장자를 제외한 別子는 모두 각각 다시 小宗을 구성.
* 결국 서주는 혈연조직에 바탕을 두고 종묘와 사직을 중심으로 한 도시국가의 연합체. 이러한 도시국가간의 연결관계를 봉건제․종법제를 통해 유지했으며, 그것을 이념적으로 지탱해준 것이 천명사상이었다.
3) 서주의 발전과 관료제도 정비
* 成王․康王에 걸친 장기간의 평화시대-세력범위의 확대, 특히 昭王의 南征과 穆王의 西征주목할 필요. 주와 남방의 楚, 주와 서방의 犬戎의 대립. 주의 문화적 범위는 양자강 중하류 지역인 호남과 江西일대까지 영향. 최근의 발굴 성과로는 남쪽의 광동, 북의 요녕지방까지. 그러나 후일 특히 남방과의 교류가 불분명, 자연조건이나 농경조건이 서주의 진출에 방해요소가 됨.
* 관료제도 : ?주례?의 6官 : 天官(宮中諸官)․地官(地方行政,교육)․春官(제사)․夏官(軍政)․秋官(司法)․冬官(製作)로 구성. 그 이하에 270여 관직의 직제와 관원수, 직무내용 기재. 그러나 이 ?주례?는 전국시대 후반의 기록이라는 것이 통설. 청동기 명문의 자료에 보면, 서주의 중앙관직 기구를 경사료(卿事寮)라고 하며, 장관은 卿士, 그 아래 司土(토지)․司馬(군사)․司空(조세, 노역관리) 중심.
4) 서주시대의 경제
* 정전제(井田制)의 실시문제: 이후 토지제도(阡陌制-限田制-屯田制-占課田制-均田制-莊園制 등)
* 맹자에 의해 이상화. 공전과 사적, 노동력 형태의 租.
씨족공동체하의 가능한 제도, 勞役地貸(助法), 농업생산기술의 발전, 퇴비상용, 제초를 위한 호미의 사용, 배수, 관개시설의 확충
* 정전제 실시상의 문제 : 휴경농법(당시 기술로는 필수)이 안 보임, 일정 연령을 기준으로 한 토지의 지급과 환수규정 없음, 정기적인 재분배가 안 보임, 경지내의 수로인 구혁(溝洫) 조직이 안 보임, 농사철에 오두막(廬)거주 농한기 읍거주 변화가 안 보임 등
* 정전제의 이해 : 맹자의 주장대로 토지국유로 보기보다는 토지사유나 영구점유 이전의 촌락사회 내부의 토지분배 관행과 수취관계로 보는 편이 합리적일 것 (씨족장의 지휘아래 집단경작방식, 공납 노역의무 부담 등 확인.
* 정전제의 의의 : 위정자들이 그 시행을 믿고 이상시대로의 복귀를 희망할 수 있었다는 것. 이후 역대 국가에서는 소농민의 생활보호와 대토지 소유의 억제를 위하여 빈번하게 정전제의 부활을 주장하고 추진.
* 제후의 농민에 대한 지배는 씨족장을 통해 읍 단위로 이루어짐. 이후 제후들은 산림개간 등을 통해 새로운 경지 확보. 농민과 제후의 직접적인 지배관계.
결국 씨족공동체는 서주 일대를 통해 해체되어 갔고, 이는 혈연을 기반으로 한 종법적 봉건제에 균열을 가져옴. 혈연관계 필연적으로 소원해짐. 토착세력과의 협력이 더욱 필요. 자립적 경향이 더욱 강해짐.
4) 서주왕조의 쇠락
* 토지의 규격화 : 경제적 기반의 약화
* 주 왕실과 夷狄 : 정벌과 항쟁.
* 幽王과 褒姒 : 厲王의 폭정과 國人의 저항 - 共의 伯인 和에 의한 춘자 업무 대행 공화시대(B.C841-828)의 전개. 14년간의 주왕 공백시대. 宣王의 즉위와 일시적 中興, 幽王의 폭정과 후사문제로 인한 내분, 견융의 침입→平王(유왕의 태자 의구(宜臼)의 成周(낙읍)천도 (B.C 771) : 서주의 멸망과 동주시대의 전개
[출처] 상왕조와 서주왕조의 역사 (도덕사랑카페) |작성자 knue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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