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말약(郭沫若)【Guō Mòruò】1892.11~1978.6.12
원명(原名) 곽개정(郭開貞), 자(字) 정당(鼎堂, Dǐng Táng). 1892년 사천성 출생. 근대 중국 최고의 지식인으로 시인, 역사학자, 고문자학가(古文字学家), 고고학자, 극작가(剧作家) 및 사회활동가이며 갑골학4당(甲骨学四堂)의 하나이다. 곽말약은 1914년 일본 구주제국대학(九州帝国大学)에 유학하여 일본여성과 결혼하고 1921년 첫 번째 시집(诗集) ‘여신(女神)’을 발표했으며, 1927년 장개석(蒋介石) 총사령(总司令) 지휘하의 북벌군(北伐军) 총정치부(总政治部) 주임(主任)으로 있었으나 이후 장개석을 성토하는 격문을 쓰고 남창(南昌) 봉기에 참여하며 중국공산당(中国共产党)에 가입하였다가 1928년 2월 일본으로 도피하였다. 일본에서 갑골문(甲骨文), 금문(金文)을 연구하며 1930년 중국고대사회연구(中國古代社会研究)를 편찬하였고 1937년 항일전쟁 발발 후 귀국하였으며 1948년 국공내전(国共内战) 기간 중앙연구원(中央研究院) 원사(院士)를 지냈다. 건국 후 중앙인민정부(中央人民政府) 위원, 정무원(政务院) 부총리(副总理) 겸 문화교육위원회(文化教育委员会) 주임(主任), 중국과학원(中国科学院)의 초대 원장(院长), 전인대(全人大) 상위회(常委会) 부위원장(副委员长), 중국과기대학(中国科技大学) 초대교장 등을 역임하였다. 문화혁명(文化革命) 전과 문화혁명 기간 중 다량의 작품을 발표한 극소수 인물의 하나로 장기간 작품을 통해 중국공산당의 지도자를 찬양해왔으며 문화혁명 기간 자기비판에서 자신의 업적을 부인함으로써 국내외로부터 비난을 받기도 하였다. 1978.6.12 북경에서 사망하였으며 그가 거주하던 곽말약고거(郭沫若故居)는 북경 십찰해(什刹海) 서면에 위치하며 1963년부터 1978년 까지 거주했던 곳으로 1994년 곽말약기념관(郭沫若纪念馆)으로 지정되어 유품과 자료가 전시되어 있다. 곽말약고거(郭沫若故居)는 원래 건륭제의 신하 화신(和珅) 저택의 정원일부로 이후 공왕부(恭王府)에 편입되었다가 건국 후 몽고인민공화국(蒙古人民共和国)의 주중 대사관 및 송경령(宋庆龄)의 거주지였다가 1963년 송경령(宋庆龄)이 이사한 후에 곽말약(郭沫若)이 이곳에서 1978년 사망하기까지 거주하였고 1988년 제 3차 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全国重点文物保护单位)로 지정되어 일반에 공개되고 있다.
은허에 대해
중국의 학술계에서 하(夏)는 중국 고대 최초의 왕조로 인정된다. 그러나 하조에 관한 역사자료가 기본상 후세의 문헌에 의한 기술로써 현재까지 고고학적 발굴의 확실한 인증을 거치지 못하였다. 고고학 자료로 확실하게 실증할수 있는 중국 고대의 가장 이른 왕조는 상조(商朝)이다. 중국에서 역사 기재가 있는 가장 이른 왕조인 상조에 대해 소개드리겠다. 1
상조는 기원전 약 16세기에 창건되여 기원전 11세기경에 멸망하였으며 약 600여년의 역사가 있다. 상조는 초기 여러차례 수도를 이전하였으며 최후로 이전한 수도가 은(殷)[오늘날 하남-河南 안양-安陽 부근]이다. 고고학적인 실증에 따르면 상조 초기 중국의 문명이 벌써 상당한 수준에서 발전하였는데 그 주요 특징이 바로 갑골문과 청동문화이다.
갑골문은 매우 우연한 기회에 발견되였다. 20세기 초 당시 하남성 안양 서북부의 소둔(小屯)촌 농민이 우연한 기회에 얻은 귀갑과 수골(獸骨)을 약재로 팔려고 하던 중 한 학자가 그 위에 새겨진 고대 문자를 발견하게 되였으며 큰 힘을 들여 더 많은 귀갑을 찾기 시작하였다. 얼마후 중국의 고대문자 학자들이 귀갑과 수골에 새겨진 문자가 상조문자라는것을 확정하였고 그뒤 소둔촌이 바로 옛 기재에서 나오는 상조 도성의 유적인 은허(殷墟)라는것을 확정하였다.
은허의 발견과 발굴은 20세기 중국 최대의 고고발견이다. 1928년 최초로 발굴한 이래 수둔촌에서는 갑골문과 청동기를 망라한 대량의 진귀한 문물이 출토되였다. 갑골문은 귀갑과 수골에 새겨진 고대문자이다. 상나라시기 국왕은 모든 일을 하기 전에 우선 점을 치였다. 갑골은 점 칠때 사용되는 도구였다. 갑골은 사용전에 우선 가공을 하는데 먼저 갑골의 피와 고기를 깨끗이 제거한후 평평하게 간다. 그후 갑골의 안쪽 또는 수골의 반대쪽을 칼로 우묵하게 파낸다. 이런 우묵한 자국은 순서에 따라 배열된다. 점치는 사람을 무당이라고도 불렀는데 이름과 점치는 일자, 물으려는 문제를 모두 갑골에 새긴후 불로 갑골의 우묵한 자국을 태운다. 그러면 우묵한 자국이 열을 받아 금이 가는데 이때 나타난 금을 “조(兆)” 라 부른다. 무당은은 이런 무늬를 분석하여 점의 결과를 도출해 내고 점이 영험한지 여부도 갑골에 새긴다. 점이 영험하면 갑골문자를 새긴 갑골은 관아의 서류로 보존된다.
현재 은허에서 도합 16만여쪼각의 갑골이 발견되였다. 그중 일부는 완정하고 일부는 문자기재가 없는 쪼각들이다. 통계에 따르면 이런 갑골에는 여러가지 문자 도합 4천여개가 있는데 그중 학자들이 연구를 거쳐 고증한것이 3000개이다. 또 이 3000개중 학자들의 해석이 일치한것이 1000여자이며 나머지는 해석이 불가능하거나 학자들의 의견상이가 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1000여자를 통하여 사람들은 이미 상조의 정치, 경제, 문화 등 각 분야의 상황을 대체적 이해하였다. 갑골문을 연구하는 최초의 전문 저서는 1913년 출판된 유악(劉鄂)의 “철운장귀(鐵雲藏龜)”이다. 중국의 유명 사학자와 문학가인 곽말약(郭沫若)이 1929년 출판한 “갑골문자연구(甲骨文字硏究)”는 또 한 부의 중요한 저서이다. 현재 중국의 갑골문 연구분야의 권위인사는 베이징대학 구석규(裘錫圭)교수와 중국역사연구소의 이학근(李學勤) 교수 등이다.
글이 새겨진 갑골문과 마찬가지로 청동기도 상조시기 대표적인 기물이다. 상조의 청동기 제련은 이미 상당한 기술수준을 갖췄으며 은허에서 발굴된 청동기만 수천점에 달한다. 그중 1939년 은허에서 출토된 사모무(司母戊) 대방정(大方鼎)은 무게가 875kg, 높이가 133cm., 길이 110cm, 너비 78cm로 모양이 웅위로운 중국 고대 청동기 문화 전성시기의 대표작품이 하나이다.
고고발굴 및 학술연구는 상조시기 이미 국가가 산생되였고 사유제가 기본적으로 확립되였으며 그 때로부터 중국역사가 문명시대에 들어섰다는 것을 증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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