묘역(墓域)에서 깊어진 세의(世誼)

 

 

 

안계면 소재지의 5거리에서 단밀행 지방도로를 따라서 나가면 곧바로 율리리(栗里里)고개가 도로를 끼고 오른쪽으로 나선다. 동쪽으로는 인가가 밀집하여 들어오고 건너편에는 지호지간에 안계여자 중고등 학교의 위용이 웅장하다.

옛날에는 한적하기 이를 데 없는 묘역이었으나 지금은 차량의 소음이 크고 안계면 소재지가 번창하여 오니 묘소의 관리도 어려우며 번잡한 공해를 벗어나기도 어렵게 되었다. 5정보 가량의 얼마 되지 않는 양지바른 묘역에는 오랜 세월에 세 문중의 세의가 굳어지는 장소가 되어왔으니 그 사연은 이러하다

 

 


고려 말의 충신으로 이름난 백암 김 제(白巖 金 濟)의 후손이요, 기자전 참봉(箕子殿 參奉)을 지낸 김세정(金世貞)이 이 묘역의 서쪽에 맨 먼저 입산하게 되었다.

그 시기는 그의 생졸년을 기록한 문적이 전하지 않으니 확실히 알 길 없으나 연산조(燕山朝)내지 중종조(中宗朝)의 일일 것으로 추리할 수 있다. 그러니 4백년은 훨씬 넘어서 묘역이 이루어지게 되었다고 보아야 하겠다.

김세정은 진주판관(晋州判官)을 지낸 순천인(順天人) 장일신(張日新)의 아들 숙(叔)으로서 사위를 삼게 되었다. 사위를 사랑하는 정은 워낙이나 깊었기에 장인을 존경하고 따르는 마음 또한 남달랐다고 한다. 드디어는 사위를 의성읍의 본가에서 비안(比安)고을로 데려 와서 같이 살기에 이르렀다. 이로써 장숙은 순천 장씨(順天 張氏)의 비안 고을 입향조(入鄕祖)가 되었다. 김 세정은 사위를 가까이 데려와서 출가한 딸도 언제나 쉽사리 만날 수가 있어서 더욱 즐거웠다. 만년에 이르러서는 가족과 측근을 불러 모아두고 더욱 각별한 유언을 하게 되었다.

자기가 죽으면 율현(栗峴)에 묻어 주기를 당부하고 저 세상에 가서도 장 숙과의 정의를 새기고자 하니 뒷날 가서 사위의 일생을 마치거든 자기의 무덤 아래 같이 묻어 달라고 특별히 유언 하였다.

세월이 흘러 1567년(명종 22년 丁印) 7월 15일에 군기시첨정(軍器時僉正)을 역임한다. 장 숙도 78세의 향수로 타계했다. 장인 김 세정의 유언에 따라 그의 묘 아래 바로 붙여 묻어 묘를 이룬 것은 더 말할 나위도 없다. 부인 김씨도 합장이 되었다. 이로써 김 세정의 유언에 따라 그의 묘 아래 바로 붙여 묻어 묘를 이룬 것은 더 말할 나위도 없다. 부인 김씨도 합장이 되었다. 이로써 김세정의 유언은 실행이 되었고 저 세상에서 만난 옹서(翁胥)간에는 더욱 정이 깊어졌을 것이라 여긴다.

장 숙이 묻혀 입산된 후로 그의 아들 문암공(文巖公) 장문서(張文瑞)도 이어서 그 아래쪽에 묻히게 되었다. 국천 효자로 이름난 문암공이 입산한 것은 1577년(선조 10년 丁丑)이었다.

여기에 또 하나의 유언이 남았다. 문암공 역시 그이 사위인 우봉인(牛峰人) 진사(進士) 이 효견(李 孝騫)을 무척이나 사랑하였기에 뒷날에 한 묘역에 묻히기를 당부하였다. 그의 아들 진사 장 해(張 邂)의 묘 옆쪽에 사위인 진사 이 효건도 부인장씨와 더불어 함께 묻혔다. 이렇듯 생시의 정의는 유언으로 남고 유언은 어김없이 실행되어서 선산 김씨, 순천 장씨, 우봉 이씨는 한 묘역을 이루게 된 사연이 밝혀졌다.

그들은 연면 4백년을 내려오면서 선외가(先外家)와의 정의를 새기는 아름다운 전통을 남겼다. 해 마다 서릿발 내리는 가을이 깊으면 묘향을 치르고 자손은 모여들면 고루고루 다같이 어느 묘나 성묘를 하니 모르는 사람들은 무슨 일이기에 한 해에 묘사를 세 번씩이나 지내느냐고 묻기도 하는 모양이다. 묘향의 날짜가 문중 마다 달랐기 때문이다.             //---------------------------------//

먼먼 옛날부터 율현묘역(栗峴墓域)에서 맺어지는 세 문중의 미담가화(美談佳話)는 멀리서 듣기에는 믿기가 어려운 일이다.

여기 우리의 전통을 건전히 세워 나아가는데 모범이 되어지기를 바란다.

 


경상북도 의성군청/ 의성의 인물 중에서 

 

 


명나라 崇禎元年(1628년)

청나라 崇德元年(1636년)

임진왜란   선조 25년 (1592)  정병 20만  소서행장

정유재란   선조 30년 (1597)  정병 14만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

정묘호란   인조  5년 (1627)  정병  3만   아민

병자호란   인조  14년(1636)  정병 20만   청태종


 

 


 龍 潭  日  記


 

                                                        金啓

 


 

 

 


“龍蛇日記”

一善金氏 白岩公派譜 龍潭金啓先生譜錄

일선김씨 백암공파보 용담 김계선생 보록 내용에/ 집안에 “龍蛇日記”가 전해졌다고 한다.

“龍蛇日記”참으로 아까운 사료다.

의문스러운 것은 송암 이로(李魯:1544∼1598)가 쓴 龍蛇日記《용사일기》가 있다.

  경상남도유형문화재 제62호로써  《용사일기》는 1592년(선조 25)부터 1597년의 정유재란까지 전후 5년간의 기록이 실려 있는데, 임진왜란의 상황을 체험 중심으로 기술하였으며 당시 의병들의 활약상, 전쟁의 진행과정, 전란 속의 민심 동향 등을 생생하게 수록되어있다고 한다.

또한 저자미상의 일사기문(逸史記聞)이라는 책이 전해지고 있는데,

선조(宣祖) 때부터 인조(仁祖) 때까지의 사실을 주로 세간에 들리는 이야기에 따라 기록한 책이다.

이 책 내용의 마지막 기록은 대략 정축년(1637)3월 초3일까지의 기록이 적혀 있다.

그런데 책의 서술방식이 金啓선생의 龍潭錄과  흡사하고

내용 또한 인조시대의 다른 학자들의 일기 내용과는 달리

                            세간에 들리는 政勢이야기를 기록한 유사점이 있다.

묘하게도 金啓선생의 龍潭錄 기록은 정축년(1637) 봄의 사건부터 시작된다.

혹 저 작자미상의 逸史記聞은 龍潭 金啓先生의 “龍蛇日記”가 아니었을까?

 

                       .

                                                                 

          

丁丑年 仁祖15年 1637年  明- 崇禎10년  淸- 崇德二年(당63세) (윤4월 듬)

 

역사보기/ 1월 강화도 함락. 인조가 삼전도(三田渡)에서 청태종에 항복함.

3월 홍익한, 윤집, 오달제가 청에 잡혀가 심양에서 살해됨.

4월 소현세자(昭顯世子) 등이 심양에 볼모로 잡혀감.

 


○冊以給 .....

보태어진 책 ....

 


☞ 龍潭錄 以前의 日記에 보태여 쓴다는 말.  즉“龍蛇日記”와 연결된 日記라는 뜻.

一善金氏 白岩公派譜 龍潭金啓先生譜錄

일선김씨 백암공파보 용담 김계선생 보록 내용에/ 집안에 “龍蛇日記”가 전해졌다고 함.

 


○沈方伯(    )未及謫發拿去李敬輿來代(    )

 심방백이(    )하지 못함을 적발하여 잡아가다. 이경여가 뒤이어 부임했다.(    )

 


沈方伯 = 경상감사 심연(沈演)/  李敬輿 = 후임 경상감사/ 

인조실록/   2월 11일 양력/ 1637년 3월 07일 

경상감사 [심연沈演]이 재임 중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쌍령(雙嶺)에서 청군의 기습이 있다는 와전(訛傳)을 듣고 도산해 실전에 임해보지도 못했다. 패하자 전라도에 유배되고. 후임 경상감사 [이경여李敬輿]가 부임했다는 기록인 듯함. 

인조 15년 정축(1637, 숭정 10)  4월 5일(갑술)  이경여(李敬輿)를 경상 감사로 삼았다.

 

 

 

戊寅年 仁祖16年 1638, 明 - 崇禎11년  淸 - 崇德三年(당64세)

           

역사보기/   9월 1일(경신)  함경도에 굶주림과 염병으로 사망한 백성이 4천 3백여 명이다. 

            10월 봉림대군(鳳林大君, 후의 효종)이 청태종의 서정(西征)에 동행함.

 


○自春至夏天久不雨兩麥旣損又未移秧七月間暫雨豆太及黍粟頗有可望其西成而八月飛霜大失稔 自初秋至翌年夏橡實松皮苦苦連命老弱多有餓死者

봄부터 여름에 이르기까지 하늘은 영영 비를 내리지 않았다.

밀과 보리농사는 이미 망쳤고 모내기도 하지 못했다.

7월에 잠시 내린 비로 팥.콩.조를 심었을 뿐이다. 

자못 수확을 기대했지만 거둬들일 무렵인 8월에 서리가 내려 농사를 망쳤다.

초가을부터 내년 여름까지 도토리와 소나무 껍질로 연명해야하는 고통이다. 고통속에 힘들게 연명해가는 노인과 어린이가 늘어나고 굶어 죽는 자가 많다.

 

○牛疫之後不能耕種十家作契耕以人夫或馬耕之或作車推轉而耕之 

高牙大纛鳴鼓吹角大是恠變事也. 

소들이 역질에 걸린 후에는  밭갈이를 할 수가 없다.

열 집이 어울려 “품앗이”로 사람이 직접 밭갈이를 하고,

혹은 말로써  밭갈이하며 혹은 수레바퀴를 끌어서 쟁기를 만들어 밭을 갈았다.

관아에서는 상아로 장식한 깃발 높이 휘날리며 북치고 나발 부니

도대체 이 무슨 괴변이 있냐!

 

○一自兵亂後大小紅疫及染疾大熾死亡過半

정유재란부터 병자호란 이후까지도 크고 작은 홍역에다 장티프스까지 크게 번져 죽은 사람이 절반이 넘는다.

○監司李公在亂時興學設敎勉勵頹風勸課農桑輕徭薄賦而二月辭歸南民不缺然失望 李景曾代來

감사 이경여는 병란 중에도 학문을 세우고 퇴폐한 풍속을 스스로 깨우치도록 가르치고 농사와 누에치기를 권장하며 부역과 세금을 가볍게 하였다.

2월에 (모친의 병환으로)사임하고 떠나가니 남쪽의 백성들이 기대가 무너져 실망하였다.

이경증이 후임으로 왔다.      

☞ 이경여:  인조 15 1637,3월, 경상도 관찰사로 부임 1638 1월, 모친의 병환으로 사직하고 扶餘로 돌아감

○都事呂渭老到任數月以無名稱汰尢沈大孚七月到界

도사(종5품) 여위로가 도임한지 여러 달 동안 이름이 알려져 있지 않으니“태왕”이라 불렀다. 七月에 심대부 감사가 부임해왔다.         

 


己卯年 仁祖17年  明- 崇禎12년  淸- 崇德四年 1639년  (당65세)

                             

역사보기/ 4월 20일    감사 이경증(李景曾)의 청을 따라 경상도에 보내 기민을 진휼하게 하다.

          2월 11일    이명웅(李命雄)을 경상 감사로 삼았다.

          4월 18일    최온(崔蘊)을 비안 현감(比安縣監)으로 삼았다.

           5월 1일    청나라에서 정뇌경을 죽이다.

          6월 26일    동양위 신익성이 삼전도 비문을 쓰지 못하겠음을 계하다

          7월 13일    경상 감사 이명웅에게 금오 산성을 쌓게 하다

          9월 28일    선산부사 이각(李恪)에게 금오 산성을 축성한 공로로 通政을 加資하다.

         10월 29일    경상도에 대동법을 시행하다 

          12월 2일    역관 정명수가 병조 좌랑 변호길을 폭행하다

 

○六月胡使自稱中殿冊封而出來到孔詔院宣言中殿親出(    )驕慢使崔鳴吉齊銀千兩往說鄭明時金石伊等得免中殿之親出 鄭明時金石伊乃我國人而投附胡賊作獘一梗者之胡(    )

육월 청나라 사신이 중전책봉을 위하여 나왔다는 구실로 홍제원에서 중전이 친히 나와 받으라며(    )교만스러우니, 최명길이 은 천 냥을 주고 그들을 설득해서 면했다.  정명수. 김돌시는 우리나라 사람으로 오랑캐에 빌붙어 작당질을 하는 한 무리들이다. 오랑캐(    )

 ☞ :     鄭明時는 = 鄭命壽이고    金石伊는 = 金乭屎 =金突  / 김돌시, 김돌이다.

鄭命壽 金乭屎는 1618(광해군 10)년 청나라의 건주위 정벌 때 도원수 강홍립(姜弘立)을 따라 갔다가 포로가 된 정명수(鄭命壽)·김돌(金突) 등이 우리나라 사정을 청나라에 알려줌으로써 청나라 황제의 신임을 얻고 양국간에 통역을 담당하면서 임금을 모독하고 조신을 업신여기는 한편, 관직이나 뇌물을 요구하는 등 갖은 행패를 부렸다.

 

六月五日未時汶孫生˚ 

5일 오후 2시 손자 “문”이 태어났다.

○鄭雷卿拿金宗一等以東殿僚屬在瀋陽□鄭明時□作獘謨共誅殺而事泄觸怒汗令東殿殺鄭雷卿等甚急東殿曲陳其必咨禀於國王之由則汗賊令國王促殺之故不淂己送金吾郞斬鄭雷卿拿金宗一㝎罪 

정뇌경을 잡아갔다. 김종일등과 심양에서 세자를 모시면서□,정명시의□ 못된 짓에.. 주살하려 모의하였는데 사실이 누설되어 청나라의 노여움을 촉발하였다. 세자에게 정뇌경등을 죽이라 명하니 사정이 급하여 세자가 간곡하게 사정하였으나, 살펴 보건데 필히 국왕이 연류된 것이라 하는 즉 청나라에서 명하길 국왕은 빨리 죽이라하니 부득이 의금부도사를 보내 정뇌경을 참수하였다. 김종일은 같은 죄로 잡아갔다.

 

 


○春大饑饉移粟藍藿賑恤一匹直數斗米四月成倅以京人田稅坊納事罷去六月金壽昌到任

봄에 큰 기근이 들었다. 곡식을 가져와 콩깍지로 연명하는 곤궁한 백성을 구원하였다.

무명 한 필이 쌀 몇 말 값이다.

4월 고을의 成성원님은 서울사람으로 관할구역의 토지세를 거둬들이지 않고 갔다.  

6월 김수창이 부임하다.

 

○監司李命雄等築山城初使僧軍次以編伍軍次以烟軍無論伇品怨苦沖天城号柒谷置府使˚

감사 이명웅등이 산성을 수축할 때 처음에는 승려들로 조직된 승군 을 쓰고 다음에는 지방 정예군 편오군을 쓰다가 품삯을 받는 민가에서 출역한 인부를 쓰면서 노역인의 품삯에 관해서는 아무 말이 없으니 고통과 원성이 하늘을 찌른다.

성의 이름을 柒谷“칠곡”이라하고 府使“부사”를 설치했다.

☞    왕조실록보다 1년 앞선 기록이다.

아마도 당시 주민들을 독려하기위해 지금의 개발계획을  홍보하듯이 미리 공표한 듯하다.

인조 18년 5월 25일 가산산성(山城)의 읍명(邑名)을 칠곡(漆谷)으로 하고 윤양(尹瀁)을 부사로 삼았다.

 

가을에 풍년이 들다. 목화는 흉작이다. 동지 달 튼튼하던 손자 인간 세상에 왔다가 다섯 살도 않되 한 줌의 재가 됐다.

○淸使帶金累祢名者來請曰近無每日以銀百兩禮端給之則無辞受給其回還之日專數□□□□還出給曰此國甚殘獘以待後人云而去歸告其汗□使臣若無□□□□朝鮮矣云雖夷虜□□□□之邦有人矣   청나라 사신 帶金累祢(대금누니)라는 자가 와서 청하길 요즈음 매일 은 백 냥씩 옳게 지급하는 예의가 없다. 여러번 지급받지 못한 것을 돌려 받고자한다.□□□□ 하루도 빠짐없이 지급하라.  말하길 이 나라의 사신접대가 심히 잘못된 폐단이다. 뒷날 귀국하는 사람에게 전해 청태종에 고하여□使臣若無□□□□朝鮮矣云雖夷虜□□□□之邦有人矣

 

 


庚辰年 仁祖18年 1640, 明- 崇禎13년  淸- 崇德5年(당66세) 正1월 윤달

역사보기/

1월 20일  인평 대군에게 권솔을 거느리고 청나라로 가게 하다.

2월 2일   청나라 장수 마부달이 죽다. 그의 형인 만월개(滿月介)에게 위문.

3월 7일   평안 병사 임경업을 심양으로 보내다.

5월 25일  정가 산성(定架山城)의 읍명(邑名)을 칠곡(漆谷)으로 하고 윤양(尹瀁)을 부사로 삼았다.

8월 4일   원손이 심양에서 돌아오다.

10월17일  봉림 대군이 다시 심양으로 가다.

 


○正月无日晩天動○閏正(    )日嫂主別世權庴板項 ○念五六雨土不分遠近○元孫乃橉平大君入送瀋陽東宮受由出還

정월 해가 보이지 않고 늦게는 하늘이 울렸다. 윤달이 든 정월(    )일 형수가 별세하다.  임시로 판항(의성군 봉양면 문흥리)에 모셨다. 25. 6일 흙비가 내려 앞을 분간하기 힘들다. 소현세자의 아들 원손과 인평대군이 심양으로 들어갔다. 소현세자가 청국의 허락을 받아 돌아왔다.

 

 

 


○左右道軍兵咸裂架城大操仍城役民怨沖天

경상 전라도 군병이 두루 나뉘어 가산산성을 크게 쌓으니 거듭되는 성 쌓는 노역에 백성들의 원성이 하늘을 찌른다.   

☞  강행군으로 많은 노역자들이 죽었다.

     인조실록: 18년 4월 4일 공사를 서두른 이명웅을 파직하라고 헌부가 아뢰다.

 


○金石伊夲國官奴爵賊作奱淸使之行亦來作禮常與主上較倚而堅淸使久留國傷渴沈說夜趋鄭明時金石伊宿處各給銀子萬兩翌朝勸使發遝到義州金也責房妓色醜牧伯林慶業託以絶無美色則金遽怒曰雖入汝之室入不可廢也林大怒曳下庭使人告淸使曰我亦有淸國之職此漢辱我不可不治使曰笞於四十度杖以不祿木杖之如數卽死曳出之人皆快之

김돌시는 본시 관노비로써 벼슬을 도적질하여 바꾸고 청나라 사신을 따라 나와서 매번 사신을 접대하는 예법을 만드니 주상께서 보시기에도 그 폐단이 지나치다.

청나라 사신이 오래 머물고 있어 나라의 재정이 몹시 고갈 된지 오래되었다는 말씀에 밤으로 정명시와 김돌시의 숙소로 달려가 각각 은자 만 냥을 주고 다음날 아침에 떠나가기를 권하였다. 의주로 돌아간 김돌시가 기생이 못생겼다고 책망하며 의주 목사 임경업에게 절세미인을 부탁하였는데 예쁜 곳이란 없는지라 김돌시가 갑자기 화를 내며 말하길 “너 같아도 그 방엔 못 들어갈 것이다. 당장 바꿔주라”하니 임경업이 열을 받아 김돌시를 뜰아래로 끌어내고 청나라 사신에게 항의하니 청나라 사신이 말하길 “나는 청나라의 사람이요 이놈 또한 청나라 벼슬을 하고 있으니 청나라를 욕되게 한 것이다. 그냥 둘 수 없다. 몽둥이로 40 대를 쳐라!.”사정 봐줄 것 없이 몽둥이를 내려치니 몇 대 맞자 쭉 뻗었다. 시체를 밖으로 끌어내니 모두가 쾌자를 불렀다.

 ☞  왕조실록에도 없는 매국노 김돌쇠의 사망기록이다.

 

 

○二月初八午坤方天動俄而天油然作雲抑沛然雨雹交注雷電霹近古所于有(    )竟夜不能安寢大是異事

2월 8일 정오쯤에 남서쪽에 하늘이 요동하더니 머리위에 뭉게뭉게 구름이 일어나 내려앉자 세차게 비가 쏟아지고 우박으로 바뀌어 내리다 천둥번개가 치더니 가까운 곳에 벼락이 떨어졌다. 예전에 (    ) 밤까지 이르니 편안히 잠을 이룰 수 없다. 커다란 이변이다.

 

○汗請兵我國□□ 以林慶業領兵送之□力入寇中國大敗而還 -557P

청나라에서 우리나라에 군사 조발을 요청하여...  임경업이 통솔하여 출정하였다. ...힘으로  밀어붙여 명나라를 대패시키고 돌아왔다.

 

 

○東宮在瀋陽以皮方席獻詩 

소현세자가 심양에서 가죽방석에 시를 써서 전하께 올리다.

 


身留異域未歸人     몸은 낯선 땅에 있어 못 가는 신세.

家在長安漢水濱     내 집은 서울 장안, 한강 기슭인데.

月白夜心花落泣     달 밟은 밤 내 마음은 꽃잎에 눈물짓네.

靑風池面柳絲新     봄바람 연못 위를 스치니 실버들 새롭고

黃鶴嗅起遼西夢    꾀꼬리 울음소리 고향 꿈을 깨우네.

玄鳥來傳慶會春     제비 찾아와 경회루의 봄을 알리는데.

盡日樓臺歌舞地     온종일 누대에서 노래하고 춤추던 곳을.

不堪回首淚沾巾     차마 그려 볼 수 없어 소매에 눈물 적시네.

 


殿下開逢觀之則有待曰  

전하께서 시를 읽고 答詩를 지었는데

 


내가 그립거니,  넌들 그립지 않겠는가.

千里蠻鄕 천 리 오랑캐 땅에서 얼마나 그리느냐.

紗窓 창 밖에 슬피 우는 저 접동새야!

“돌아갈 것 같지 않다”고 말하지 마라.

내 앉을 자리가 없구나!

 


臣民見此歌詩孰不鳴間流涕..?  

 신하와 백성들이 이 시를 보고  

누군들 흐르는 눈물에  소리 내여 읊을 수 있겠는가....

○斥和金尙憲金迬等如尹集縛送瀋陽孰不憤嘆東宮來觀卽還○方伯具鳳瑞専以愛民爲政南中大悅

청나라와 싸워야한다고 주장한 김상헌 김왕 등과 같이 윤집이 심양에 묶여갔으니 어찌 분통이 터지지 않겠는가! 소현세자가 만나보고 돌아갔다.

도지사 구봉서가 오로지 백성을 사랑하는 일념으로 행정을 펼치니 경기이남 지역에서 인기가 최고다. 

☞  金常憲: 1570~1652 본관: 안동. 인조가 자신의 부친을 왕으로 추존하려는 이른바 추숭논의(追崇論議)가 일어나자 그에 강력히 반대하였고, 찬성한 반정공신 이귀(李貴)와 의견 충돌을 빚어 낙향. 1636년 병자호란 때 선전후화론(先戰後和論)주장. 최명길(崔鳴吉)이 작성한 항복문서를 찢고 자결을 기도하다가 실패 뒤 두문불출. 청나라로부터 위험인물로 지목 1641년 청나라에  끌려가 4년여 동안 청인들의 굴복 요구에 불복하여 끝까지 저항. 1649년 효종 즉위 뒤 대현(大賢)으로 추대 받아 좌의정에 임명. 저서: 《야인담록》《독례수초》《남사록》후인들에 의해 문집 《청음집》간행.

○元孫往瀋陽之日百官送于盤松容拜辭而歸莫不流涕年六世人君度量己成云 二月朝鴨成群相戰而死者正如丙子矣

원손이 심양으로 가는 날 百官이 전송하는데, 반송정에서 차분하고 침착하게 나아가 절하고 돌아가니 어찌 눈물이 아니 흐르겠는가! 나이 여섯 살에 품성과 아량이 이미 인군의 틀을 갖췄다 한다. 2월 아침에 기러기가 때를 지어 서로 싸우다 죽었다. 지난 병자년과 같다.

☞  元孫원손: 소현세자 큰아들. 뒷날 아버지 소현 세자가 죽자. 어머니 강빈은 사약을 받아 죽고 원손은 10살 때 제주도로 귀양 가서 죽는다.


 

○水田不吉旱田亦早霜民不聊生○都事蔡成龜 

논에는 가뭄 들고 밭엔 이른 서리 내려 백성이 편히 살아갈 수가 없다. 도사 채성구가 부임하다.

 ☞  蔡成龜는 = 채성구(蔡聖龜)이다.[1607~1647] 본관 평강. 시조와 필법이 뛰어났다. 

都事도사: 품계는 종5품이었다. 관찰사와 함께 지방을 순력하고 규찰하는 임무를 담당하였다.

 

 

 

辛巳年仁祖19年 1641년 明- 崇禎14년 淸-崇德6年 (당67세)

역사보기/   1월 10일   인평 대군이 심양에서 돌아오다. 

1월 18일    임경업이 돌아오다.

3월 22일    경상도에 가뭄이 들다.

4월 26일    낙동강 물이 마르다 경상도의 가뭄으로 낙동강의 물줄기가 끊겼다.

5월  4일    청나라에 원병간 이사룡이 참형당하고 김득평이 장형에 처해지다.

5월 12일    경상도에 지진이 나고 서리가 내리다.  경상도에 황충이 생기다.

6월 18일    심양가는 군병을 위문하다.

7월 10일    광해군이 죽다.

7월 19일    심양에 있는 재신의 상차에 따라 임경업을 소환하다.

 


○自春徂夏不雨移秧尃廃加以正月抄軍六月再( )軍入錦州民間飢況斗米直本一匹若不方伯移粟賑恤靡南民有子遺○七月( )年凶因往嵗前願留明年事會疏一善一道咸進

봄부터 여름에 이르러 비가오지 않아 모내기를 그만둘 판인데 정월에 군사를 선별해 보내고 6월에 또( )금주전투에 보냈다.

백성들은 가뭄과 기근에 허덕이고  쌀과 콩 한 말 값이 면포 한 필이다. 만약 도지사가 곡식을 가져와 기근을 해결하지 못하면 남도의 백성들은 자식을 내버릴 것이다. 7월( )년의 흉사는 그 전 해에 앞서 머뭇거렸든 원인이다. 내년에 일의 기회가 올 때 정리(正理)에 따라 모두 한 길로 나가자.


○ 汗領兵往圍錦州不利再請兵於我國( ) 以砲手( )名六月損( )抄送八月汗與東宮麟坪親領往錦州中國將祖大受不利先運砲手交代回還

청군이 금주를 포위하러 갔다가 불리하자 또다시 우리나라에( ) 지원병을 요청했다.  우리나라에서는 포수( )명을 6월 달에 결원에 맞춰( ) 뽑아 보냈다. 8월에는 청태종과 소현세자와 인평대군도 함께 금주전투에 참가했다. 명나라 장수 조대수가 불리하다. 앞서 출병한 포수부대와 교대를 하여 돌려보냈다.

☞    祖大受는 祖大壽 이다. 명나라 장수 뒷날 청나라에 항복 함

조선군은 정밀한 총을 가지고 있어서 조대수의 군사를 많이 죽였는데, 조대수는 군대에 명하기를 청병의 머리 하나에는 은 50냥을 주고 조선 군사의 머리 하나에는 100냥을 준다고 했다.

조선 군사 중에 경상도 성주 사람으로 이사룡이란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차마 명군에게 총을 쏠 수가 없어 공중으로 공포만 쏘아 명군을 상하지 않게 하였다. 이는 본국 조선의 속마음을 밝히려 함이었다. 이를 발견한 청의 군사가 사룡의 목을 베어 진중에 높이 내 걸었다. 명나라 군사들은 이것을 보고 모두 크게 울었고 조대수는 깃발에 큰 글씨로 "대명충신 조선의사"라 써서 시영의 군사를 선동했다.

 

이사룡은 고문을 받으면서도 청나라 장수에게 욕을 퍼부었고 웃으면서 죽었다고 한다. 청태종도 이사룡을 의로운 사람이라 하여 소현세자가 귀국할 때 그의 주검을 운구해 고국으로 돌아가게 하였으며 조선 왕 인조는 지나는 길에 감사에게 예를 표하게 하고 고향에 안장하게 하였다. 그 뒤 숙종 때는 고향 사람들이 사당을 지었고, 정조 때는 성주목사에 증직되었으며 정려를 지어 충렬사란 현판을 내려주었다고 한다.

명나라 장수 조대수(祖大壽)가 그의 아우와 함께 금주성(錦州城)에 들어가 수비하였는데 청인(淸人)이 포위하였다. 조대수가 나성(羅城)을 잃자 항복했던 몽고(蒙古) 사람들을 의심하여 한인(漢人)을 시켜 감시하게 하였는데, 몽고인들이 성을 나가 투항하는 자가 매우 많았다. 중국 조정이 10만의 군대를 발동시켜 일곱 명의 총병(摠兵)이 거느리게 하여 금주성을 구원하게 하였다. 우진왕(右眞王)이 대대적으로 원병이 온다는 말을 듣고 우리 나라의 포수(砲手) 4백 명을 선봉으로 삼아 남산(南山)을 굳게 지키게 하였다. 그리고 그들 군대를 두 대(隊)로 나누어 일대는 탑산(塔山)의 귀로를 방비하게 하고 일대는 금주로 들어오는 길을 차단하게 하였으며, 진중(陣中)에 기와집을 지어 오래 머무를 계획임을 보였다. 이때 우리 군대는 이미 여러 달을 노숙(露宿)하여 병들고 부상하지 않은 자가 없었고 죽는 자가 속출하였다. 조정에서 듣고 본도로 하여금 휼전(恤典)을 거행하게 하였다.

 

○自江原山郡由豊基奉化興海至八月初下霜失稔倍往年下道尤甚豆太黍粟稍實木花畓穀専棄市直日蹙所恃者方伯

강원 산골 부락을 비롯하여 풍기, 봉화, 포항에 이르기까지 8월 초부터 서리가 내려 결실을 얻지 못한 것이 지난해의 곱절은 된다. 남쪽지방이 더욱 극심하다. 콩과 팥. 기장. 조(서속)은 끝만 약간 여물었고 목화와 벼는 모두 포기했다. 시장경기는 매일 위축되어  갈수록 급박해지니 기대하는 것은 방백(도지사)뿐이다.  

 

○四月巡相親到洛東左右道文武士咸聚試才入格者四十餘人優數賞賜○責子治第賦長子鈺亦參榜受韻冊一部筆墨壯帋三卷邑卒加賜白帋二卷 -555P

4월 순찰사가 낙동에 왔다. 좌우도의 문무 선비를 모두모아 재주를 시험했다. 경과시에 합격한자가 40여명이었다. 우수한 자들에게 상을 주었다. 責子治第(자식을 타일러 집안을 다스린다.)라는 시제로 큰아들 옥도 합격하여 운책과 필묵을 받았다. 장원한 자에게는 종이 3권을 주고 읍의 수령이 백지 2권을 주었다.

☞   巡相순상: 종2품 임시벼슬 순찰사(巡察使)의 별칭

 

○三月十五日義興孫生女十月十三日山春生男始見曾孫○八月二十五日試年進士試一語嗳回鸚鵡夢賦次子鏡亦參榜于亰一所洪伯昇中東堂壯元 ○鏡造屋始 -554P

3월 15일 의흥에서 외손자 딸을 보았다. 10월 13일 산춘의 아들이 태어났다. 처음으로 증손을 보았다. 8월 25일 과거를 보는 해에 진사시가 있었다. 시험문제는 一語嗳回鸚鵡夢(하던 말 또 하는 멍청한 앵무새)라는 시험문제로 한양의 첫 시험장에서 둘째 아들 경이 합격했다.  동당 시험장에서 홍백승이 장원을 했다. 경이 집을 짓기 시작했다.

☞    鏡:1606 -1664년 용담의 둘째 아들 字明仲 號愚軒 1654년 司馬

 


○九月初七日蔚山東面柳浦村海巷中水源半把䖏黃白色石周回七尺三寸自移陸地岩上○又東萊十月十一日地震自南方間午北方聲如天動窓戶戰搖累年失稔民生未復而非常之変不知攸言云

9월 7일(1641년 10월 11일) 울산 동면 유포촌 바닷가 마을 가운데 물길 오목한 곳에서 7척 가량의 황백색의 돌이 빙빙 돌다가 스스로 땅위의 바위 위에  올라앉았다. 또 동래에서는 10월 11일 지진이 남쪽에서 일어났다가 정오에 북쪽에서 하늘이 요동치는 소리가 창문이 난리가 난 듯 흔들린다. 몇 년째 흉년으로 백성들의 생활이 어려운데 이변이 일어나 알 수없는 이상한 소문이 번진다.

☞  실록의 기록 있음 仁祖19年 蔚山府 有石自海邊, 移于陸地巖上。울산부에서 바위가 움직이다.

 


○安陰士子通文有曰六月二十二日鄭桐溪捐世非侐邦家之不幸抑亦士林之長慟云

안음(함양군 안의면,거창)에 사는 선비의 아들이 서찰을 가져왔다. 6월 22일(양1641년7월29일) 동계선생님이 돌아가셨다고 한다. 한 나라를 평온하게 이끌지 못한 불행에 더하여 사림의 영수이었으니 통탄스러울 뿐이다.

☞ 桐溪: 鄭蘊정온의 호[1569~1641]: 본관 초계. 병자호란 때 이조참판으로서 김상헌과 함께 척화를 주장하다가 화의가 이루어지자 자결시도. 사직하고 덕유산에 들어가 은거하다가 5년 만에 죽었다. 이조참의, 대사간, 경상도 관찰사, 부제학 등을 역임. 저서《동계문집》<동계 약력>《덕변록》《망북두시》《망백운가》를 지어 애군우국의 뜻을 토로하였다.

 


○都事李以存到任○赴瀋軍運粮事冬前所放爲先爭錬運粮雇馬六百匹定奪後西路不能支勢不得己分定各道八結木一匹式一千九十餘同本道除出贊馬三百匹䮠人則各官屬定送馬三匹色吏一名一道定領將一負木品則如歲幣三十七尺  -554P

관찰사 이이존이 부임해 왔다. 심양에 나가있는 군사의 군량조달은 겨울이 오기 전 훈련에 앞서 준비해야 마음이 놓인다고 운송에 필요한 말 600필을 민간으로부터 징발하는 것을 임금의 재결을 받은 후에 함경, 평안도 지방의 징발이 어려운 지경이라  부득이 각 도에 나누어 정했는데 농지세로 받아들인 8결목 당 한 필씩 정하니 1090필이다. 우리 경상도에서 내놓을 량이 300필이다. 마부는 각 감영의 하인을 보낸다. 말 세 마리당 아전 한 명씩 붙이고, 한 도에 대장 한 명이 담당했는데 해마다 중국에 바치던 무명과 똑같은 품질로 37척이나 된다.

☞  李以存: 본관 여흥 인조 20년 부수찬. 승지

○爲準十二月內上納事卽今錦圍未觧兵連禍銡我軍調送至於再次陣前運粮遂月飛輓關西民力己到蕩渴  -553P

12달을 기준으로 바치는 것인데. 지금은 금주를 포위하고 풀지 않고 있어 병사들이 연이어 화를 입고 술렁이고 있기에 우리병사를 뽑아 보내준 것인데 여기에 또다시 진군하니 앞서 운송을 마친 달에 이어서 군량을 운송하게 되니 평안도 백성은 기력이 다하여 죽을 지경에 이르렀다.

 


○今此收價雇馬之未誠出於朝廷不得己之計而本道不幸連被灾篰屋懸罄今屆收藏之節方有阻飢許多細木何以辨出言念至此一倍傷心

이번에 민가에서 징발한 말의 수가를 조정에서 성의 없이 지급하니 부득이 상소를 올렸는데 경상도는 불행이도 계속된 재앙에 거적 지붕에는 석가레만 걸려있고 지금은 거두어 들여야 하는 계절에 굶주림에 허덕이는 백성에게 그 많은 무명을 나누워 주면 어떨까하는 말을 생각해보니 이제 와서는 갑절이나 마음이 상한다.

 

○道方以銀子枝三等物代送一邉報備局一邊議關西若得准欲請則自營間主管以此換貿則設有日後各官隨便收價之事目前可除駄價人情木品高重聽不聽在於朝廷不得祿料爲先卜定爲置將此民間知委以待更分付 -558P

도 방백이 은자와 아울러 세 가지 품목을 대신 보내고. 비국에 보고하는 한편  평안도지방과 같은 법을 적용해주길 바라는 논지를 임금에게 올렸는데 그 논지는,

백성들과 관청사이의 상거래에서 사들이는 환무의 규칙을 만들어 놓으면 설령 뒷날 각 관아에서 이 규칙을 따르면 편리하게 사들일 수 있다. 그 시행규칙은

전에는 물품을 실어 나르는 품삯은 주지 않아도 문제가 없었다. 상품의 등급은 인정에 따라 좋든 나쁘든 나라 관리가 정하기 때문이다.

차라리 공무원 봉급은 현지에서 살고 있는 백성들이 바치는 세금으로써 그 산지의 생산물로 먼저 지급하는 것을 장차 법으로 만들어 백성에게 공지하여 그때그때 현지의 생산품으로 대신해서 분납하도록 하는 것이다.

 

○比安田一千二百二十五結八十九負六束出木一百五十三匹內一同貿馬一匹餘木一百十三匹上納次右(具)巡相行關各邑也

비안(경북 의성군 비안면)의 밭은 1.215결 89부 6속이다. 내놓아야할 무명은 153필을 한 번에 바쳐야한다. 실어 나를 말 한필과 나머지 130필을 상납하고 (구)순찰사가 각 읍 관아에 공문을 보냈다

 

○凶年飢嵗賑活赤子者王政之所先散給官穀穋取資潤屋者救荒之急務是白昆上年段失稔最慘是白良置下道稍實仍于轉販募納之際下于有地是白如乎

흉년과 기근 때는 백성을 구휼하는 것이 임금의 임무인바 먼저 관의 창고를 열고 부자 집의 나락을 거둬 나누어주는 것으로 백성을 구황해야한다. 급한 것은 지난해와 마찬가진데 피해등급을 구분지어 가장 참혹하게 농사를 망친 경상도 지방일지라도 흉년 제반조처에서는 초실등급으로 조치한 것이 최상의 조처라 하고 거듭하여 물건을 사고팔 때 군량미를 거둬들인다. 하나같이 땅이 있는 곳은 이와 같다.

 

 

○今年則莫論上下一樣被灾富者罊渴貧者將死公私倉庫赤立板蕩封債貸穀等事俱無辦得之路而明春種食只憑元穀還上是如乎○開倉之後決難盡捧各邑守令連續來報設有些少之捧

올해는 누구를 막론하고 하나같이 재앙을 당했으니 부자들의 단지도 바닥이 나고 가난한 사람은 장차 죽음뿐이다. 모든 창고는 비어있고 국정이 문란해 쌀로 고리대금업을 한다. 곡식을 빌려주는 등 여러 조처와 변통에도 아무 소용이 없다. 거리에선 내년 봄 종자를 먹고 오직 기대할 것은 나라에서 사환곡제(社還穀制)로 양곡을 빌려주고 가을에 받아들이는 일 뿐이라! 창고를 개방한 후로 세금을 거두어들이기 어려움이 있자 각 읍 원님이  여러 차례 와서 독촉하나 서령 거두어들인 것도 하찮을 뿐이다.

 

○今年則司僕各島新捉馬厥數甚多年例分養之數比前倍些少元穀消盡於冬春之內是白在如乎○狗彘食人食之嘆年凶可(  )此外國兵曺一時錯料往來分給馬匹於楚軍爲白有如乎馬疲人怨之後分送三南經年留養馬令肥漨爲白乎矣尙無區處之柔又添別樣國馬爲白有置此則處置不甚重難會該曺急速指揮俾無不緊耗損之患事右巡?上達草 -551P

올해에는 또 말을 관장하는 관리가 여러 섬의 새로 잡아갈 말의 산출 수를 많이 늘렸다. 해를 두고 년 년이 나누워 키우는 수가 전보다 배나 된다. 농가에 빌려준 알량한 양곡도 다 없어진 겨울과 봄 동안에 이러니, 짐승이 사람 먹을 것을 먹어 치우는지라! 탄식하나니 흉년에 어찌(  )하랴!  이는 잘못 헤아려 다른 나라 병조에 한꺼번에 오가며 금군에게 마필을 나누워 주었는데 말은 고달프고 그들은 원망하였다.

뒷날 충청,전라,경상도에서 말을 키워서 해를 두고 번갈아가며 나누워 보내야할 것을 당장 살찌우려하니 변통하여 처리할 방법이 아직은 없는 것이다. (청나라에)복종하기를 더하여 나라의 체면을 馬말로써 세우려하는지라 이는 곧 일을 처리함에 있어 신중하지 못하고 담당하는 관료들의 의사가 분분하여 긴요치 않은 것이 없다하고 급히 처리하니, 긁어 부스럼 내는 걱정스런 일이다. 右巡?이 상소하였다.

 

中國鄭軍門上書曰祖大受出敵己久尙無勝否臣請一戰以決勝敗帝以謂鄭也年少之人爲氣所使妄料輕敵不許鄭再請之帝乃許之因給四萬騎貨賣四萬加之自募四萬幷十二萬而出祖將給○汗曰帝以我無功以他將代之我則將難免拿致之誅願投入以啚生汗信聽簡精兵三千直入組城組將閉門盡擊無有漏汗見欺大憤擧兵而行鄭師不意相遇於伊州尉以短兵殊死力戰鄭且戰且上高峯貨賣二萬未及登山爲胡被殺汗自後不敢輕犯相望結陳而己

명나라 정군문이 상소하길 총병 조대수는 적과 대치한지 오래되었으나 아직도 승패를 가리지 않고 있습니다. 신이 승패를 가르는 일전을 치르고자 청합니다. 하니 명황제가 홍승주를 총독으로 삼았는데 젊은 혈기로써 망령스럽게 적을 가볍게 여기므로 허락하지 않았으나 다시 간청하므로  허락하여 기병 4만 군사와 용병 4만에 지원병 4만을 합하여 12만이 출병하여 총병 조대수를 지원했다. 청나라 칸이 말하길 “다른 장수로 대신하는 것은 내가 공이 없는 임금이니 내가 즉시 잡아다 주살하여 치욕을 면할 것이다. 하였다. 살기를 바란다면 들어와 항복하기 바란다. 하니

칸이 이글을 곧이듣고 정병 삼천으로 곧바로 조대수의 성으로 진격한 것이다. 조대수는 성문을 굳게 닫고 심한 공격에도 빈틈이 보이지 않았다. 칸이 심히 격분하였다.

12만으로 출병한 홍승주는 의주부에서 생각지 않게 마주쳐서 가까운 거리에서 필사적인 전투를 벌였다. 홍승주는 한편으로 싸우고 한편으론 송산으로 올라갔다.

용병 2만 명이 산에 올라가기 전에 청군에게 죽임을 당했다. 칸이 이후로는 감히 가벼이 공격하지 못하고 서로 진을 치고 대치하고 있을 뿐이다.

☞: 당시 明史및 靑史의기록상 이때의 군문은 정군문이 아니고 洪承疇홍승주였음. 鄭崇儉군문은 三月에 하옥되고 洪承疇홍승주가 9월 지원군으로 금주에 출병했음

당시 왕조실록 내용: 仁祖19年月 21日

대명의 군사가 청인과 싸워 전세가 불리하자 기병은 도주하여 송산보로 들어가고 보병은 배를 타고 도주하였는데, 영원과 행탑 등지에서 죽은 자가 즐비하였다. 이 당시 조대수가 금주에서 포위된 지 여러 달이 지남에 중국이 크게 군사를 조발하여 보내 구원하였는데, 군문홍승주가 나이가 어리고 오만하여 여러 사람의 말을 듣지 않다가 결국 패배하였다. 대수가 청국의 진영에 사람을 보내, 포위된 지 9개월이 되었으니 빨리 교전하여 승부를 가리자고 말하였으나 청나라 칸이 들어주지 않았다.

 


○宣言先運軍甚精勇使我國得捷爲謝因請軍兵○以我國先運炮手不入戰所優對以送者有意存焉自後例爲交代入送之易胡也其爲謀也巧矣

우리나라에서 임금을 호송하던 포수부대가 싸움에 투입되지 않은 것은 우리가 파병해준 뜻에 부응하여 특별히 대우한 다는 뜻이다. 이후에도 청병과 교대하여 보낼 때에도 선례가 된 것이니 그 계략이 교묘하다. 선언하되 임금을 호송하던 포수부대는 우리나라에서 과거 급제자를 뽑은 최고의 정예부대이니 지원군을 청하면서 사례한 것이다.

☞: 조선군은 정밀한 총을 가지고 있어서 명나라 조대수의 군사를 많이 죽였는데, 조대수는 군대에 명하기를 청병의 머리 하나에는 은 50냥을 주고 조선 군사의 머리 하나에는 100냥을 준다고 했다.

 


○運粮胡差十二名出來道過潛商十二人縶縛問之十二人直招曰我義州人以府尹之命往唐陣云則捉囚義州而到京         

군량미를 운송하는 청나라 사신이 나오다가 비밀리 무역하는 장사꾼 12명을 붙잡아 왔다. 물어보니 12명이 사실대로 고하길, 나는 의주사람인데. 의주부윤(황일호)의 명을 받고 중국 진영으로 가려한다고 하여 의주에서 서울로 붙잡혀왔다. 

 


會百官袛迎廟堂辭避上曰不爲袛迎者罷職勢不得已皆袛迎胡差而義州府尹以黃一元交通中國請拿未定刑卽拿致則胡差列百官回示曰百官中有如此犯誅之其中人鄭明時亦甚作

백관들을 회례하고 묘당에서 왕의 행차를 맞이하는 의식을 거절하며 임금이 말하길 파직을 당한 꼴이니 부득이한 상황에서 모든 의식을 거절하는 것이다.

청나라 사신이 의주부윤 황일원이 명나라와 내통하는데도 아직도 잡아들여 벌주지 않는다며  지시하길 즉각 잡아들이라하면서 또한 줄지어서있는 백관을 둘러보며 말하길 백관 중에 이와 같은 죄를 짓는 자는 주살할 것이다. 하니 그 중에서도 정명수의 작태가 극심했다.

 


遂赴出黃顧語百官曰吾無罪捉給至於此極國史如此願僉眞情之因垂淚曰吾母戒余曰吾欲観榮華吾勉力發身畢竟若此吾無兄弟獨身使先靈絶祀不孝莫大觧宝釖賜斬者曰速斬我母僾遇恃朋執手同與病錄藥各曰吾児重速劑送此藥詳傳我之戒勿學業文武蔵踪畎畒遂被戮聞者莫不下淚焉捉囚十二人盡殺之

이윽고 끌려 나온 황일호가 백관을 둘러보며 말하길 나는 죄 없이 붙잡혀와 이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나라 일 또한 이와 같아 여러분에게 (장차 나라 일을)진정 눈물로 호소한다. 나의 어머님이 경계의 말씀하시길 내가 영화를 보고자한다면 애쓰고 힘써서 수신제가하라 하였는데 마침내 이렇게 되니 나는 형제 없이 홀몸으로 선령의 제사가 끊기게 되니 크나큰 불효다. 형리에게 차고있던 보검을 풀어주며 주며 속히 죽여라. 내 어머니께서 그 언젠가 나의 친구를 만나 손을 잡고 부탁하길 같은 병에도 약이 다르다며 말씀하시길 우리아이가 병이 중하고 급하니 속히 약을 지어 보낸 것이라며 꼭 나에게 전해 달라는 약이 있었는데

그 약이란 곧 경계의 말씀이었다. 문무의 학업일랑 밭고랑에 묻어 버리고 시골에 숨어 살라는 말씀이었거늘 마침내 억울하게 죽는다. 소식을 듣고 울지 않는 자가 없다. 잡아온 죄수 12명을 모두 다 죽였다.

☞:  黃一元은  黃一皓황일호 이다. 1588∼1641 본관: 창원 사헌부장령 때 병자호란 시 인조를 호종 독전어사(督戰御史)로 화전(火箭)을 이용하여 적군을 물리쳐 전공을 세웠으며, 척화(斥和)를 적극 주장하였다. 난이 끝난 뒤 호종한 공으로 통정대부에 올라 진주목사에 제수되었다. 七義士

七義士(칠의사) : 병자호란 이후 청나라 칸을 죽이고 명과 우리나라 국권을 회복하려다가 사전에 그 사실이 청에 발각되어 청의 명으로 할 수 없이 우리 정부에 의해 사형을 당한 황일호 ·최효일, 차충량· 차예량·안극함, 장후건, 차맹윤

 


○胡差十二名不時欲求景南關庙百官齊迎出去之際色正郞以人馬趂未整齊赤脱北結提畒蹄踏其爲困辱不可勝記

청나라 사신 12명이 갑자기 남문 밖에 있는 (중국 촉한의 장수)관우 사당을 보기를 청하여 백관이 나아가 영접하였다. 인마가 뒤좇아 가는데 혼잡을 정리하는 색리가 미처 대치하지 못하여 남쪽을 빠져나와 북쪽으로 한꺼번에 몰려들어 발굽으로 밭을 밟아 그 곤욕이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다.

 


○義州出身崔孝元當初出際之日見國勢難攴率妻孥懷重寳擧家載舩直抵中原水往之計其慮也深且遠矣卓乎其不可及也

의주출신 최효일이 당초에 (명나라로)나가려고 할 즈음 나라의 어려운 형국을 보고 식솔을 다그치고 가족을 설득하여 가산을 정리해 온 집안이 중원을 거치지 않고 곧바로 뱃길을 이용해 (명나라로) 들어갈 계책을 세우니 그 뜻이 깊고 원대하니 그 탁월함에 도저히 미칠 수가 없다.

☞:   崔孝元은 최효일(崔孝一)이다.  ?  ~1644  七義士 칠의사 병자호란 때 임경업의 휘하에서 전공을 많이 세웠다. 황호일, 임경업 등과 청나라 태종을 암살할 것을 모의하고 등주로 건너가 명나라 사람들과 함께 심양을 공격하려 하였으나 사전에 누설되어 실패하였다. 1644년 명나라가 망하자 의제의 빈소에서 10일 동안 통곡하면서 단식하다가 죽었다. 12월 8일청나라 사신이 의주에 돌아와 최효일(崔孝一)의 족속 12인을 죽이고 갔다.

 


市直木一匹無過米一斗半○十二月十六日鵾變生

시장에서 광목 한필 값이 쌀 한 말 반 밖에 안한다. 12월 16일 곤변이 태어나다.

☞:  鵾變곤변: 큰아들 鈺옥의 셋째 아들 족보에는 鯤變곤변으로 기록돼 있음.

 


○李回寶作詩曰 

(인조임금이 삼전도에서 굴욕적으로 강화하자 이를 보고 은거했던)이회보가 시를 지었다.

憶曾風雨打孤城  비바람 몰아치는 외로운 城의 옛일 생각하니

天柱推顚地軸傾  하늘을 거꾸로 헤아려 땅 지도리 기울어있다.

我忍獨留侄丙子  나는 삼전도 비극을 멍청히 홀로 견디었는데,

君能先逝在崇禎  임금은 명나라를 먼저 버렸네.

人情自古皆衰死 자고로 인정은 모두 메말라,

世事如今孰願生  이런 세상 누가 살길 바라리.

若到雲鄕朝列祖 모여든 구름 속에 열성조 혼이 머문다면,

善爲辭說莫分明 잘했다는 말 분명 않으리.

☞: 崇禎: 중국 명나라의 마지막 황제 의종(毅宗) 때의 연호(1628~1644).

李回寶 1594~ 1669 본관 진성. 병자호란 때 척화(斥和)를 주장하다 항복하게 되자 벼슬을 버리고 낙향했다. 김자점(金自點)의 반역을 예견했고 후에 그를 탄핵하여 유배케 했다. 이로 인해 직간(直諫)하는 위국충절이 뛰어나다 하여 사복시정(司僕寺正)에 특진됐다. 저서: 석병집

 


○淸陰答之(汗)言曰臣各爲其主道其志耳口吾口也志吾志也以吾之口告吾志于吾君而吾君不從豈意細微之事播及於他國乎乃斥和事也

김상헌이 (청나라에 잡혀가서) 대답하길 신하는 각자 의지로써 그 주도하는 바를 행할 뿐이다. 그 뜻한 바를 말한 것은 나의 말이요, 본심은 나의 본심이다. 나의 임금께 내가 고한 말이 나의 본심이니 나의 임금을 따르지 않았는데 뭣 때문에 세세히 대답하겠는가. 이와 같은 일이 번져나가니 다른 나라에서 너희나라에 반기를 드는 것이다.

☞: 淸陰 = 金尙憲김상헌의 호 1570~1652 본관: 안동. 강직한 성격과 기개로써 심양에 잡혀가 6년 동안 청인들의 굴복 요구에 끝내 굽히지 않고 불복하여 저항. 청나라 사람이 심하게 힐문하니 상헌은 누워서 일어나지도 않고 말하니, 청인들이 서로 돌아보며 혀를 차고 말하기를,“정말 못 말리는 늙은이다.”하였다. 청인이 의롭게 여기고 칭찬해 말하기를‘김상헌은 감히 이름을 부를 수 없다.’고 하였다.  1645년 소현세자와 함께 귀국했지만, 여전히 척화신(斥和臣)을 탐탁지 않게 여기는 인조와의 관계가 원만하지 못해 벼슬을 단념하고 석실(石室)로 나아가 은거하였다. 1649년 효종 즉위 뒤 대현으로 추대 받아 좌의정에 임명되었다. 이후 수차례 은퇴의 뜻을 밝히면서 효종에게 인재를 기르고 대업을 완수할 것을 강조하였다.  저서: 야인담록. 남사록. 청음집

 

 

 

 

by 꽃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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