壬午年 仁祖20年 1642년  明- 崇禎15년  淸- 崇德7年(당68세)   11월 윤달



역사보기/ 3월 4일    농군을 조발하여 심양에 보내다

3월 14일   경상 감사 구봉서가 조령 아래의 삼색미는 추수 때에 거두기를 청하다 .

3월 18일   조대수가 청국에 항복했다고 심양의 재신이 치계하다.

5월 16일   정태화(鄭太和)를 경상 감사로 삼았다.

6월 2일    경상도에 가뭄이 들다  

7월 27일   경상도에 홍수가 나다

8월 18일   인평 대군 심양에서 돌아오다.

10월 18일  임담(林墰)을 경상 감사로 제수하다



◐正朔辛未十一二終日竟夕雪霏霏幾至尺矣十三動天○金判書之行回自瀋陽初二日到江上還朝而同時被去申朴曺蔡等亦回朝云

정월 초하루 신미날. (양력/ 1642년 1월 30일 辛未)

11일,12일 종일 저녁 내내 눈이 내려 무려 한 자는 쌓였다. 13일 하늘이 울렸다. 김상헌이 심양에서 돌아와 초이튿날 의주에 당도했다. 같이 갔던 신득연. 박황. 조한영. 채이항 등도 돌아왔다 한다.

☞:  江上朝 =“의주”당시 압록강 위쪽에 위치한 청나라 관련 조정업무를 관장한 곳.

1월 6일: 청나라로부터 위험인물로 지목되어 심양에 끌려가 4년여 동안을 청에 묶여 있었다. 의주로 옮겨 구금해두고 사신이 왕래할 때 그들로 하여금 점검하게 한 것이다.



◐元朝日見无妄之患慟慟憤憤○二十一日鏡以覆試事發程與孫生弘祖氏同行○南邊報淘洶譯官洪希男下抵東萊○方伯因嶺南士子願留疎限麥秋仍往南民大悅傳相告賀曰其甦   

정초에 뜻밖의 재앙을 당하니 통분이 인다. 21일 아들 경이 서울에 거행하는 과거시험 길을 떠났다. 생원 손홍조와 동행했다. 남쪽 변방의 흉흉한 소식이 전해지자 역관 홍희남이 동래로 내려갔다. 영남의 선비가 경상감사(구봉서)가 오래 머물기를 바라는 소를 올렸는데 보리를 거두어들이는 철까지 더 머물게 한다는 소식에 남쪽 백성들이 서로 전하며 크게 기뻐하여 말하길 “이제 살았다”라고 한다.

☞:  洪希男은 洪喜男이다. 본관: 남양. 대일 교섭에 난관이 있을 때마다 일본에 파견되었다.

☞: 인조실록: 경상 감사 구봉서가 병으로 사직하였다. 이 당시 봉서의 임기가 임박하자 상이 보리가을 때까지 유임시킬 것을 하교하였었다.



◐二月朔辛丑下跡雪○汗請兵我國交代精兵十五日豊基點考○初九夜大雪沒脛十日終夕不晴  

2월1일(양력 1642년 3월1일) 신축일 눈이 조금 내린다. 청나라에서 정병의 교대를 요청해왔다. 15일 풍기(영주)에서 인구조사를 했다. 9일 밤 크게 천둥이 쳤다. 9일 밤에 큰 눈이 내려 정강이가 빠진다. 10일 저녁까지도 개이질 않는다.



○淸陰疏曰臣等覊繫異域載羅寒暑枯形危喘與死爲期伏蒙天地父母之仁德動於遠邇誠感上下脫之於鼎鑊刀俎之間還於乳哺袵席之內此非臣等所能仰報玉關雖入長安尙隔不得趨詣闕庭少伸微悃瞻天望雲無任感激流涕之至餘昧死以聞

김상헌 등이 상소하기를,

신들은 이역에 구금되어 있으면서 모진 추위와 무더운 더위에 시달려 몸은 메마르고 숨은 거칠어져 죽은 목숨 있었는데, 천지 부모의 사랑으로 덕은 멀고 가까운 곳을 움직이고 정성은 상하를 감동시켜, 솥에 삶아 죽임을 당하고 칼과 도마의 극형에서 빠져나와 편안한 보금자리로 되돌아오게 하시니, 이는 신들의 힘으로는 도저히 갚을 수 없는 은혜입니다.

의주에는 들어왔으나 다만 서울 길이 막혀서 대궐로 달려가 다소나마 충정을 펴지 못하고, 맑은 하늘을 우러러보며 감격의 눈물을 이기지 못하여 죽음을 무릅쓰고 아룁니다.



○二月初三日倭使來曰關伯往八月生子此莫大之慶遣使感賀云  

이월 초삼일 일본 사신이 와서 말하기를 “쇼군이 지난해 8월 아들을 낳으니 크나큰 경사라며 사신을 보내 축하해주어 감사하다고 한다.

☞:  關伯관백(쇼군): 일본 德川家光덕천가광: 家綱의아들 (이에츠나:1641~1680)1641년8월 3일 출생

인조실록: 일본사신 평성행이 홍희남과 서로 의논할 일이 있다고 하였는데 그 뜻은 관백(關白)이 아들을 낳아 온 나라가 축하하고 있으므로 도주(島主)가 우리나라의 축하 사절을 얻어 생색을 내는 소지로 삼자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念二鏡廖泊來所望歸虗○三月晦日華山雪積○四月甚旱秋牟專厥旬後得一耕雨無高底水付種春牟有向茂之勢而連有霜降自春徂夏寒如冬日○着耳掩人不爲惟     

22일 아들 경이 과거에 낙방하고 돌아왔다. 기대는 한낱 꿈이 돼버렸다. 3월 그믐날 화산에 눈이 쌓였다. 4월 가뭄이 심하다. 가을보리는 냉해를 입었다. 10일이 지나서 밭을 갈고 비가 오지 않아 높고 낯은 물길을 대여 봄보리를 갈아 무성히 자랐는데 지난 가을부터 봄까지 이르러 여름날이 겨울날씨 같다. 귀마개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생각 못할 일이다.



○錦州失守祖獎出降云何天之佑乃至於此也○兒輩寃抑不攻自破

(명나라)조대수가 금주의 성을 지키지 못하고 나와서 항복했다한다. 어찌 하늘의 보살핌이 이렇게 될 줄 생각이나 했던가? 멍청이가 원통하고 억울하게 공격하지 못하고 스스로 무너지다니! 

:  인조실록: 20년 3월 18일 조대수가 청나라에 항복했다고 심양의 재신이 치계하다. 청병이 송산을 함몰시켜서, 금주에 원병이 이미 끊어지고 굶주림과 곤궁함이 날로 심해지자, 조대수가 마침내 청국에 항복하였다고 합니다. 



○市價一匹直米一斗粟太無過兩斗處處餓死下道有一兩班甚絶粮行乞求活其妻子矣一日乞還則妻與處子已餓死不勝哀愴之心亦卽縊死聞者莫不倶淚○念風風之餘雨雨 

시중에 무명 한 필 값이 쌀 한말 웬만한 조.콩 두 말 값이다. 곳곳에 굶어죽는 자가 있다. 경상도 한 양반이 너무 굶다가 그 처자를 구하고저 구걸을 나섰다. 어느 날 돌아와 보니 아내와 자식은 이미 굶어 죽어있었다. 애통한 마음을 이기지 못해 곧바로 목을 메에 죽었다. 이 말을 듣는 사람들이 눈물을 금치 못했다. 20일 바람이 불다가, 비가 오다가 한다.



○南賊僧來求請八萬大藏經以不易印出(不)許說印之地帋容入四萬餘卷故如是答之 

일본의 동지승이 와서 청하길 진본의 팔만대장경 인쇄본을 구한다하였다. 허락하지 않고 타이르길, 그곳에서 인쇄하려면 4만 여권의 종이가 필요한 것이니 이렇게 대답한 것이다.

☞:   南賊僧남적승은  일본 사신 등지승(藤智繩)을 이르는 말.

왜구들이 탐낸 팔만대장경: 조선왕조실록에는 83회에 걸쳐 일본이 원본및 인쇄요청을 구한 사실이 기록돼 있다.



○念四五連有大雨水漲南北川非舟楫難通架山還上處來永岩輩用之得見阿女該簡則市直好木一匹太粟無過一斗租則二斗云麥前計活難矣哉○龍宮以上畓官山水暴注活江㳂邊兩麥盡淹云

24.5일 연이어 큰비로 남북의 하천이 물이 불어나서 배 없이는 움직일 수 없어 가산 곡식을 받치는 사창에서 영암의 마차를 타고 왔다. 딸의 서찰을 보니 좋은 포목 한필에 웬만한 콩과 좁쌀 한말 값이고 나락 두 말 값이라 한다. 보리 고개를 넘길 일이 큰 걱정이다. 용궁의 논은 상답인데도 관산에서 쏟아져 내리는 물이 강물 흐르듯 하여 물길 언저리의 밀과 보리는 모두 물에 잠겼다.



◐五月初六戒仲計音來云死日亦難的知乃遆畨砲手者之言厥老母與兄弟相向慟哭不耐見   5월 6일 계중의 부음 소식이 왔다한다. 죽은 날짜 또한 정확치 않다. 포수의 교대기간 중이었다고 하는 말에 노모와 형제들이 서로 마주보고 통곡하는데 차마 참고 볼 수가 없다.

☞:  청나라 정병으로 전투에 참가했던 계중이 귀국을 얼마 앞두고 전사했다는 소식인 듯.



○祖將夫妻降于汗削留陣中降柔每日殺千人者八日云開來慟憎十五日雨作農夫歌舞

조대수 부부가 항복 할 때 청나라 칸이 소탕작전을 펴며 진중의 잔병에게 항복을 권유하며 매일 1.000명을 죽이니 8일 만에 성문을 열었다한다. 참으로 가증스럽고 애통하다.

☞:  조대수와 부하 장수들은 저항 없이 그냥 투항함으로써 명나라의 멸망을 부추겼다.

관리들의 부정부패와 환관들의 권력투쟁. 임진왜란에 무리한 파병. 이자성의 난등의 원인으로 청나라에 패한다.



○六月二十一日新使鄭泰和到界厥第以東萊府使避嫌歸

6월 21일 정태화 감사가 도착했다. 그의 동생 동래부사(정치화)는 혐의(嫌疑)를 피하기 위해 벼슬을 버리고 돌아갔다. 15일 비가 내려 농부가 춤추고 노래하며 농사일을 시작했다.

☞:  정태화와 정치화는 형제가 같은 지역으로 부임되자 상피 관계라 하여 피함

        鄭致和: 인조 20  1월 동래 부사가 되다. 동생 鄭泰和: 인조 20  5월 경상 감사가 되다.

    鄭太和정태화 1602~1673 본관: 동래 병자호란 때 도원수가 도주하자 패잔병을 모아 현관(縣館)에 의지하여 시석(矢石)으로 항전하여 수많은 적을 사살한 공으로 집의가 되었다. 6차례 영의정을 지냈으며, 37번의 청원 끝에 사직하였다. 문집:양파유고 저서:양파연기가 있다.

鄭致和정치화: 정태화의 동생 병자호란 후 세자시강원 보덕으로 봉림대군을 심양에 호종. 서인(西人)이면서도 성품이 원만해 숙종 1년 자의대비의 복상문제로 서인이 몰락 할 때도 화를 면함.



○此月旬後連雨川漲者再三然盈科而已兩麥趂收之○七月旬三四連雨十六大水㳂江左右田畓盡淹沇人多溺死此月無日不雨

이달 10일 이후 연이어 개천 물이 불어나서 두세 차례 웅덩이를 매우고 있으니 밀과 보리는 잽싸게 수확했다. 7월 13.4일 연일 비가 왔다. 16일 큰비로 강이 넘쳐 좌우의 전답이 모두 물에 잠기고 물살에 빠져 죽은 사람이 많다. 이달 내내 비가 온다.



◐八月初七大雨○夜不絶水漲倍前二月之雪八月之雨果若人言○十六七連漲南北川遂爲秧霖哀我民生其何得生旱稻趂未收○統制使柳琳左水營基址擲奸事命齊湖南添坊舡盛陳軍容而來不意天起狂風漂流大洋不知去處云邦家之不幸何之如此  

8월 7일 큰비. 밤에도 쉬지 않고 퍼부으니 불어나는 물길이 지난번의 배는 된다. 2월 눈에 8월 비 라는 속담이 과연 이와 같구나. 16.7일 연이어 남북의 하천이 범람해서 장마 통에 심어놓은 못자리가 모두 떠내려갔다. 애달프다. 우리백성 그 누가 살아남으리. 밭벼도 때맞춰 거두지 못했으니! 통제사 유림이 좌수영 주둔 상황을 꼼꼼히 점검하라 명령하고 전라도를 포함해 모두를 잡도리하는데 배들이 선단을 이뤄 위용을 자랑하며 오다가 갑자기 일어난 소용돌이 바람에 큰 바다로 표류하여 간곳이 어디인지 알 수 없다고 한다. 한나라와 백성의 불행이 어찌 이렇단 말인가?

☞:  柳琳유림1581∼1643년 본관: 진주 오위도총부 부총관·포도대장·경상좌병사 등 역임



○義興鄭梯一姝潛奸婢夫逃在大丘地而見捉兩人竝殺杖下乃蔣允□之妻也實出於蔣之祿衣之變也新都事朴稷十二日拜辭云

의흥(군위군)에 사는 정제일 여동생이 몰래 노비의 남편과 간통을 하다가 대구로 도망갔는데  찾아가 잡아와 두 사람을 곤장을 쳐서 죽였다. 여자는 장윤□의 부인이다. 장윤□이 직접 밝힌 사실이다. 명문집안에서 일어난 변고이다. 신임도사 박직이 12일 임금께 임지로 떠나는 인사를 올렸다한다.



○八月二十五至九日霜降于安東玆山小川地大水之餘加之早霜所變慮本邑則九月十二日水霜自消不至葉黃多幸九旬三千癶自達川持簡來二十三鏡落魄而還云庭試沈譔等五人皆京人武科取十一人○災傷敬差官尹珩二十七日到界

8월 25일부터 29일 서리가 내렸다. 안동 자산의 작은 하천에 큰물이 졌는데 더하여 이른 서리가 내려 변덕스런 날씨가 걱정스러운데 우리 마을에는 9월 12일 물안개가 사라지고 낙엽이 지지 않아서 다행이다. 9월 13일 천발이 달천(군위군 소보면 봉황리)에서 서찰을 가져왔는데, 23일 아들 경이 과거에 낙방하고 돌아왔다 한다. 임시로 시행하던 과거시험에 심선등 5인이 뽑혔고. 모두 서울 사람들이다. 무과에 11인이 뽑혔다. 재해를 조사하고 구휼하는 재상경차관 윤형이 27일 부임해 왔다.

☞:  庭試정시: 임시로 시행하던 별시 중의 한 종류로 지방민들이 응시하기가 불리하였고, 서울의 문벌 출신들이 진출하는 데 중요한 통로로 이용되었다.

☞:  尹珩(윤형): 본관: 파평. 인동부사. 양주목사



○統制使柳琳拿去大旣□□陸舡運饋諸大臣家事政院請啓也

통제사 유림을 잡아 갔다. 이미 여러 차례□□ 육로와 배로 실어다 바치니 여러 대신들이 집안의 일어난 사실을 승정원에 청하여 임금께 아뢴 것이다.

☞:   인조실록 : 9월 21일 간원이 통제사 유림이 소금배로 뇌물을 실어온 죄를 다스렸다.



○木花與太道內同然專廢復種難得九月大旱秧牟難播十月初四晩雨始洒人人相賀

경상도에서 목화와 콩은 하나같이 망쳤다. 다음 종자를 얻기도 힘들다. 9월 큰 한파로 보리갈이도 힘들다. 10월 초4일 늦은 비가 뿌리니 서로 기뻐하였다.



○朝鮮累臣洪翼漢斥和事意歷歷可陳而但語音一不相慣曉敢以文墨控曰夫四海之內皆可爲兄弟而天下無兩父之子矣朝鮮本以禮義相尙諫臣以直截爲風故上年春適授言責之任間金國將偸盟稱帝心以爲恠若果渝盟則是悖兄弟也若果稱帝則是二天子也門庭之內序有悖兄弟也哉覆載之間序有二天子也哉金國之於朝鮮新有交隣之約而先背之大明之朝鮮舊有字小之恩而深結之則忘深結之大恩守先背之失約於理甚不近於義甚不當故首建此議欲守禮義者是臣職豈有他哉但臣分義當盡忠孝而上有君親俱不得扶護而安全之今王世子大君皆爲俘老母存歿亦不知良由一疏之艮陳以致家國之俱禍揆諸忠孝之道掃歸蔑蔑自究乃罪可殺罔赦雖萬被誅戮實爲甘心血一釁鼔魂飛去天歸游故國快哉此外更無所言惟願速死 

잡혀온 조선의 신하 홍익한은 (청나라와 싸워야 한다는)척화의 뜻은 분명하게 밝힐 수 있다. 다만 서로 말이 통하지 못하므로 감히 글로써 밝히는 바 이 땅의 모두는 형제가 될 수는 있지만 천하에는 두 아버지의 아들이 있을 수 없다. 조선은 본디 예의를 서로 숭상하여 왔으며 간하는 신하는 오직 곧은 절개로써 기풍을 삼는다. 

따라서 지난해 봄에 임금에게 올바른 말을 해야 하는 正言정언의 직책을 맡고 있을 때 금나라가 맹세를 저버리고 황제라 칭한다니, 패륜의 행위라 생각했는데 만일 맹세를 저버렸다면 이는 패륜의 형제요, 만일 황제라 참칭했다면 이는 두 개의 천자가 되는 것이다.

어찌 한 집안에 패륜의 형제를 둘 것이며, 거기에 더해서 어떻게 두 아버지를 둘 수 있겠는가, 금나라는 우리 조선과 새로 교린의 약속을 하고서 먼저 그것을 배신했고, 명나라는 조선과 오래도록 선린의 적잖은 은혜로 더욱 깊게 맺고 있는데, 큰 은혜를 지키는 깊은 결속을 저버리고 먼저 배신하란 말인가?

약속을 저버리는 것은 매우 어긋난 의리요 사리에 합당치 못하다. 따라서 먼저 이 척화의 의견을 세워서 예의를 지키고자 한 것이다. 이는 신하된 자의 직분이다. 어찌 다른 뜻이 있겠는가?

다만 신하의 직분은 당연히 충과 효를 다하여 위에 계신 임금과 어버이를 모시는 것이나. 안전하고 편안히 모시지 못하여 지금의 왕세자와 대군은 다 포로가 되었고, 노모의 생사는 알 길이 없다. 참으로 단 한 번의 상소의 진술로 말미암아 가정과 나라의 재앙을 가져왔으니, 따지고 보면 충과 효의 도를 모두 날려버린 셈이다. 스스로 나의 죄를 생각하니, 죽어도 용서받을 수 없다. 만 번 죽임을 당하더라도 달가운 바이다. 한 방울의 피가 북에 튀겨 혼이 고국 하늘로 돌아간다면 이 얼마나 기분 좋은가! 더 이상 할 말 없다. 어서 빨리 죽이라!

☞: 洪翼漢홍익한: 1586~1637 본관:남양. 삼학사의 한사람 1636년 청나라가 속국시하는 모욕적 조건을 내세워 사신을 보내왔을 때 사신을 죽임으로써 설욕하자고 주장하였다.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척화론을 폈으나, 남한산성에서 왕이 화의하니 오달제 ·윤집과 함께 심양에 잡혀가 끝내 굽히지 않고 죽음을 당해 적들이 감탄하여 삼한삼두(三韓三斗)의 비를 세웠다. 저서: 화포집.  북행록. 서정록.



○九月十五日京奇胡差出來平安監司沈演義州府尹定州牧使捉去不知其由或云唐將智謀曰朝鮮事中國如前貢獻不絶云而多散施國物貨汗信聽設之所致云   

9월 15일 서울 소식으로는 청나라 사신이 나와서 평안감사 심연의주부윤, 정주 목사를 잡아갔는데 그 이유를 알지 못한다고 한다. 어떤 이가 전하길 명나라 장수가 묘한 꾀를 내여 말했는데 명나라와 조선과의 관계는 아직 끊어지지 않고 전과 다름없이 명나라에 공물을 바친다고 하므로 이로써 나라의 재정이 많이 소진됐다고 하니 청나라에서 이 말을 곧이듣게 만든 것 때문이라고 한다.

☞:  인조실록:  10월 1일 청국이, 명나라 배가 서해에 출몰하는데도 금지하지 않았다는 것을 이유로 우리나라로 하여금 그 감사·병사와 지방관을 문책할 것을 명하였다. 이에 전 감사 심연과 전 병사 김응해 등을 나국할 것을 명하고 얼마 후에 파직시켰다.



○二十一日夜中白雪沒足道路難通○市價木花好木則一匹三斤麤木則斤半惑二斤正十□太三斗稅太一石麥代石○二十五日寅時遇甲生生於祖母還甲故名之十八日陽春生

21일 밤에 온 눈에 발이 빠져 길을 다니기 힘들다. 시장의 물가로 좋은 목화는 면포 한 필당 3근이다. 거친 것은 한 근 반 또는 두 근이다. 면사 10속에 콩 세말이다. 조세로 내던 콩 한가마니는 보리 한가마로 대신한다. 25일 새벽 4시 경에 甲갑이 태어났다. 태어난 時시가 할머니의 생신 甲子갑자와 같아서 지은 이름이다. 18일 양춘이 태어났다.



○本道方伯乃諸大臣等拿送鳳凰城應問罪龍將處所謂罪目者誈告中國相通事也    

본도 방백과 많은 제신 등을 봉황성으로 잡아 갔다. 청나라 용골대가 힐문하여 취한 조치이다. 소위 그 죄명이란 것이 명나라와 몰래 교역하고 거짓으로 보고했다는 것이다. 

☞:  이계(李烓)가 우리나라에서 명나라와 내통한 사실을 낱낱이 고해바치면서 이들 오신이 청국을 반대하는 주동자라고 하였기 때문에 청국의 관리가 우리나라에 직접 나와 조사한다고 다섯 신하를 심양으로 잡아갔었다. 이계는 11월 12일 나라를 팔아먹은 반역죄로 삼족을 멸하는 벌을 받고 효시된다.

이때의 경상도 방백은 정태화(鄭太和)이다. 정태화가 평안 감사로 있었을 때 이계와 친하게 지냈다. 명나라 배가 서해에 출몰할 때 정태화가 이지룡으로 하여금 선천과 철산 사이를 왕래하면서 명나라 배를 정탐하고 파수한다고 표면적으로 말을 내걸게 하고 이계에게 서찰을 보내 명나라 사람들에게 쌀과 음식을 구해 주도록 하였는데, 이계는 그 서찰을 주머니 속에 숨겨두어 나중에 스스로 발뺌을 하려는 계책을 세웠다가 이때에 와서 그 서찰까지 올려 고발했다.



◐至月初天動連有大霧○新監司安東府使林㻼除朝辭行公柒谷以避嫌遞任

11월 초 하늘이 울리더니 연이어 안개가 자욱하다. 안동부사 임담이 신임 경상감사로 부임하여 곧바로 공무를 집행했다. 칠곡에 부임된 것인데 혐의를 피해 바꾼 것이다.

☞:  林㻼은 = 林墰임담 1596~1652 본관: 나주. 1644년 경상도관찰사로 서원이 사당화(私黨化)하는 폐습을 상소했고 1646년 충청도관찰사로 유탁(柳濯)의 모반사건을 처리했다. 그 후 형조참판·대사간 등을 거쳐 이조판서가 되고 효종 때 1652년 의금부판사에 올라 청나라 사신의 반송사로 의주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죽었다.



○冬日溫和處處反耕○初四龜山孫女歸其家○汗欲殺林慶業發差捉到金郊驛脫身逃走不知去處

겨울 날씨가 따뜻하여 곳곳에서 밭을 갈아 업는다. 4일 구산(안계9km)의 손녀가 본집으로 돌아갔다. 청나라에서 임경업을 죽이려 잡아가는 도중 황해도 금천군 금교역(개성)에서 몰래 달아나서 어디로 갔는지 거처를 알 수 없다.

☞:  11월 6일  팔도로 하여금 대대적으로 수색하게 하고 아울러 현상금을 걸어 체포할 것을 명함.



○前兵使金俊龍病死刑判具宏自決死朝廷大臣連絡捉去或殺或拘留不還

전 병마절도사 김준용이 병사하였다. 형조판서 구굉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조정대신이 줄줄이 잡혀가고 혹은 죽이고 혹은 잡아가두어 돌아오지 못한다.

☞: 具宏구굉이 자결 했다는 것은 의외의 기록이다. 인조 임금의 외삼촌으로써 1577~1642 본관: 능성. 인조반정을 이룩했다. 훈련대장 어영대장 포도대장 총융사 등을 역임하였다. 척화신을 몰아냈음으로 사람들이 다 그를 미워하였으나 상당히 청렴하다는 이름이 있었다.

金俊龍김준용 1586~1642 본관: 원주. 무신으로 영남절도사 사임 후 사망



○大小道路設盗直物色林慶業無行狀者難爲通路其弟亨業見捉受刑一次而慶業浮海向中原云 

크고 작은 도로에 검문소를 설치하고 검문검색을 한다. 임경업이 (외국 여행허가증)행장이 없으니 이동하기가 힘들다. 그 동생 형업이 제일먼저 붙잡혀 죄를 받았는데, 임경업은 바다를 떠돌다가 명나라로 들어가고 있다한다.

☞:  11월 20일 비국이 임경업의 처자와 그 아우 임준업 및 조카 임진무 아우 임흥업과 그의 처자를 잡아 서울로 압송 금부로 하여금 수금하게 했다.



○鄕參新進取十二人柒谷林瑞以新監司四寸避嫌遞來偈往李帚白家有作墅之意  

12명이 새롭게 향교에 참에 들었다. 칠곡의 임서는 신임감사와 4촌으로 협의를 피하려 사직 하고 이추백의 집으로 쉬러갔다. 별장을 짖고자하기 때문이다.

☞: 林瑞는 林㙐 임타이다. 칠곡의 임타는 신임감사 임담과 4촌으로 같은 집안사람끼리 가까운 곳에서 관리를 한다는 세간의 평이 부담스러워 협의를 피하여 사직함.



○冬初夜夜迹雪譊曰臘前三白豊年之兆無乃大有年之瑞節

동지 달 초승에 밤마다 눈이 내리니 서로 다투어 말하길, 동지(冬至)가 지나고 세 번째 술 날이 되는 날에(第三戌日) 행하는 제사 이전에 눈이 세 차례 내린 것은 풍년의 징조이다. 그동안 풍년이 없었는데 상서로운 절기라고 이야기한다.

☞: 臘前三白 : 납제(臘祭:동지후 第三戌日에 행하는 제사) 이해의 동지 날은  음력11월 29일이다.

○閏十一月望日大霧所謂夏霜冬霧非常之變始見碧魚嗚呼晩矣

윤11월 15일 안개가 짓게 낀다. 여름에 서리오고 겨울에 안개가 끼니 예사롭지 않은 이변이다. 애초부터 고등어 맛보기는 이제! 틀렸구나.

☞: 壁魚벽어: 사전 상으로는 10cm에 불과한 물고기이다. 일기 내용을 추론하면 벽어는 고등어인 듯하다. 고등어는 古道魚고도어라고 한다.   일괄 고등어로 칭했다.



○念夜迹雪雪後無風暫霧南賊無時到館奇慮○都事朴椶下來到良才濫刑臺諫所啓杖一百奪告身  

20일 밤새 눈이 쌓였다. 눈이 온 뒤 바람도 없이 잠시 안개가 꼈다. 남쪽에 적들이 때도 없이 부산의 왜관에 들이닥친다 한다. 갑자기 걱정이 된다. 도사 박종이 부임하러 내려왔다가 양재 감형에서 멋대로 형벌을 적용한 죄로 대간이 아뢴바 대로 곤장 백대를 치고 벼슬의 직첩(職牒)을 거둬들였다. 



○兵使喪輿過邑上去時差使貟義興伜護喪承有㫖擧行○念四邑伜成親事乃慶州府尹朴遂弘孫也

병마절도사(김준용)의 상여가 우리 읍을 지나 갈 때 임시관원이 의흥(군위)군졸을 동원해서 상여를 들도록 하자하여 그 뜻을 받들어 거행했다. 24일 고을 수령의 집에 혼사가 이뤄졌는데 는데 경주부윤 박수홍의 손자이다.

☞: 朴遂弘은 朴守弘이다. 1588~1644 정묘호란 때 강화로 인조를 호종하고, 돌아와 금구현령으로 전란 피해복구에 힘썼다. 뒤에 예조참의, 경주부윤으로 부임, 임기를 마치고 상주에서 객사(客死)했다.  경상북도 구미시 봉곡동 백인당(百忍堂)거처



○精兵往瀋陽○十二月初四五六連有夜雪朝霧之變○都事鄭昌冑下批○羅同知萬甲捐世

정예부대가 심양으로 떠났다. 12월 4,5,6일 연이어서 밤에는 눈이 오고 아침에는 안개가 끼는 이변이 있다. 도사에 정창주가 정해졌다. 동지중추부사 나만갑이 세상을 떠났다.

☞; 鄭昌冑 정창주:  1606~? 본관 초계.《만사집》을 남겼다.

☞:  羅萬甲나만갑: (1592~1642) 본관 안정. 청나라와 강화 후 무고로 남해에 유배되었다가 1639년 풀려나 영주에서 죽었다. 병자호란의 참상을 후세에 남기고자 인조14년12월12일부터 다음 해 2월8일까지 57일간 겪은 사실들을 낱낱이 기록한 병자록(丙子錄)의 저자이다.



○初五夜地動雷電發胡差二愽氏之行以林慶業搜覓事各卛家丁十二名出來云○十九日夜大雪霧塞○尙州居尹起雲接訟于赤羅驅迫應訟可昇

5일 밤 지진이 일고 천둥 번개가 친다. 청나라사신 두 愽박씨 일행이 임경업을 수색하려 12명의 가솔을 거느리고 우리나라에 들어왔다 한다. 19일 밤에 큰 눈이 오고 안개가 끼다. 상주의 윤기운이 적나(군위)에서 소송을 당했다. 몰아세워 응송하면 이길 수 있다.



○胡差二愽氏留之京期於窮捕慶業厥家丁日日咨行於大臣家不如意則韇朴之其爲辱不資而索林不己申勑各道機察關津山谷使麌俠不時擲扞民間騷擾○二十八雨雷虹見夜作大風

청나라 사신으로 온 두 愽박씨가 임경업을 잡으려고 서울에 머무르는 동안 그똘마니들이 매일같이 대신들에게 방자하게 굴었다. 똘마니들이 마음대로 되지 않자 화살 통으로 때리며 욕을 보이는데 임경업을 잡는데 계속해서 수색하지 않고 각도의 나루터와 산과 계곡을 샅샅이 검문검색을 단단히 단속하지 않아서 임경업을 잡지 못했다하여 그렇게 욕보인 것이다. 사신들이 때지어 설치다가 갑자기 던지고 때리니 뭇 백성들이 떠들썩하게 들고 일어났다. 28일 비와 천등이 치고 무지개가 보였다가 밤에 큰 바람이 분다.

☞ : 12월 9일 박씨 등이 닭이 세 홰 째 울 때 황주를 떠났는데, 정명수가 길가에 꽂아놓은 횃불이 드물게 있다고 크게 노하여 도사 신응망을 잡아 갓을 벗기고 몰고 오다가 서흥에 이르러서야 풀어주었다.






癸未年 仁祖21年 1643년 明- 崇禎  淸- 崇德8年(당69세)


역사보기/  1월 14일  역관 정명수가 오는 길로 곧장 김상헌이 기거하고 있는 곳으로 가서 가는 노끈으로 김상헌의 두 팔을 묶어 방 안에 안치하고 그의 서책을 모조리 불태웠으며, 의복과 기물은 그의 종에게 돌려주었다. 

4월 2일     경기의 기민 1천 명을 구제하게 하다.

4월 5일     경상·전라의 어영군과 정초군에서 조발하여 심양으로 보내다. 

4월 27일    경상 병사 안몽윤 인견.

9월 1일     청나라의 칸이 죽어 염습에 쓸 물자를 요구하다.

10월 22일   금주의 군졸 가운데 굶주림과 질병으로 죽는 자가 속출하다. 

10월 25일   경상 감사 원두표가 사조하니 가산 산성의 방비에 힘쓰라고 하다. 

12월 3일    소현 세자와 빈궁이 12월 15일에 심양을 출발할 것이라고 치계하다.

세자가 제왕에게 이르기를 ‘빈궁이 수년 동안 타향에서 지내어 임금의 안부를 살피지 못한 지가 오래 되었고 요즘 부친의 상을 당하였는데도 달려가 곡하지 못하고 있으니, 인정이나 사리로 보아 뭐라고 형용할 수 없다.’하니, 제왕도 함께 돌아가라고 허락하였으나 반드시 원손·제손 및 인평 대군의 부인과 12월 20일까지 봉황성에서 서로 교환하자고 하였습니다.

12월 7일   원손과 제손이 심양으로 떠나다. 

◐正月初一日溫和初五日白雪 ○七日乃人日也 終夕陰盛日不出可嘆 

1월 1일 따뜻하다. 5일 눈이 오다. 7일 오늘이 오순절제의 하나인 초이렛날 과거(科擧)보는 날이다. 저녁까지 구름이 꽉 끼고 해가 보이질 않는다. 한숨이 나온다.

☞:  人日: 정월 초이레 인일(人日)이 오순절제의 날  人日製 (인일제) - 조선조 때 임금이 친히 제학들을 불러 과거 시험을 치른다. 인일제(人日製)이다.



○十五月出如乙丑年人言年豊之象云 

15일 달뜨는 모양이 18년 전 1625년(乙丑年)과 같다. 풍년이 들 모양이라고 한다.

☞: 양력 1643년 3월 5일 이날은 여느 때와는 달리 만월의 보름달이 해가 지기도 전에 다른 때 보다 조금 작게 보인다. 18년 전인 1625년(乙丑年)에도 같은 현상이 일어났다고 기록하고 있다. 1625년(乙丑年) 2월 21일 경에 같은 현상이 나타났었다.

이때 현상은 달과 지구의 거리가 가장 멀리 떨어졌을 때 나타난 현상이다. 지구와 달의 거리는 36만 3,300km에서 40만 5,500km 범위에서 변화한다.

달은 지구를 타원형으로 공전한다. 지구와 거리가 멀리 떨어져 있는 만큼 다른 때 보름달 보다 조금 작게 보인다. 

18년 10일을 주기로 나타나는 천문현상이다. 18년 10일의 시간은 사로스주기(saros cycle)를 의미한다.

사로스주기란 달은 황도와 백도의 한 교점에서 삭(朔)또는 망(望)이 된 후 6585일 후에 같은 위치에서 다시 삭 또는 망이 된다. "사로스 주기"는 6585일 = 18년과 10일 또는 11일이  된다.

선생은 18년 전 양력 1625년(乙丑年) 2월 21일 경에 같은 현상을 목격 했다는 사실을 가록에 남겼다. 선생은 아마츄어 천문학자 쯤으로 보인다. 천문에 관심이 없었다면 어찌 18년 전의 현상과 비교가 가능할 수 있었을까! 어째든 대단한 관찰력이다.



○十八大雪○通新使尹順之副使趙絅書狀官申濡二月二十日發京三月望乘舟事定奪云

18일 눈이 많이 왔다. 일본으로 갈 조선통신사를 윤순지로 부사를 조형으로통신사의 기록관을 신유로 하여 三使삼사가 2월20일 서울을 떠나 3월 보름날 뱃길에 오른다는 사안을 임금이 제가하였다한다.

☞:  통신사는 2월20일 출발하여 10월 29일 돌아왔다.

尹順之윤순지: 1591~1666]본관: 해평 병자호란 때 아버지가 평안도관찰사로서 적의 침입을 막지 못한 죄로 사사되자 은거. 1643년 통신사로 일본에 다녀왔다. 1657년 선조수정실록 편찬에 참여. 공조판서. 시와 글씨에 능함 문집: 행명집


○二十三日雪風大作終夜雨風翌明念四嚴寒倍於冬

23일 눈보라가 세차게 불더니 마침내 밤에는 비바람으로 변했다. 다음날 맑게 개였다. 24일 혹한이 예년의 배는 된다.



二月初五種米牟與西疇與南洞田○愽氏之房妓抄出城內市井處子以禮曺治裝錦衣將則各納三家丁則每各一人臨行皆駄去至義州上下皆脫取盛裝甚者至於裠脫去其女等赤身以手掩其夲不耐見云或狄之心甚於斯可見矣京城痛哭大失人心

5일 서쪽 밭과 남쪽 골짜기 밭에 봄보리 씨를 넣었다.

청나라 사신 愽박씨가 성안의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에서 기생을 차출해 가는데 처녀는 고관집의 짝이 되여 비단옷을 두르고 살 것이라 하며 3명의 가솔들이 각각 한 명씩 병차에 실어갔다. 의주에 이르러 비단 치마와 저고리를 모두 벗겨갔다. 횡포가 더욱 극심하여. 속옷까지 벗겨가니 여인들이 벗겨진 속살을 손으로 가리니 차마 그 꼴을 눈뜨고 볼 수가 없었다고 한다. 또 금수의 극심한 본성을 보여 주려함인가. 한양이 통곡하니 크게 민심을 잃었다.



◐三初吉朝見之夜雪滿乾坤此非常之變也○初信使之行自商山到縣三日向軍威上下元役甚衆支供之事一邑振動

3월 1일 초하루 아침 밤사이 눈이 내려 온천지가 하얗다. 전에 없던 기상 이변이다. 1일 통신사 일행이 상산(상주)에서 본 현에 당도하여 3일 군위로 향해 가는데 상하의 군졸들의 군역이 심하다. 일행을 받들어 모시는 일로 읍내 전체가 시끌벅적하다.

☞: 조선통신사: 규모는 수행인원 462명 총책임자인 3사(三使) 외에 제술관, 통역, 화가, 악공, 무용수, 마상곡예사 등을 망라한 300~500 명 규모였다.



○淸陰移囚北關獄云可嘆○旱氣至此處處乾何種○呂泉倅兪撤弃官歸兪也愛民淸白第一吏民咸戴之與上信使尹前有水火之势到郡以埋沒接對言於方伯兪也聞奇卽馳去行裝但衣衾袱而己郡人失望云         

청나라에 잡혀간 김상헌을 사형수를 가두는 심양의 북관 옥으로 옮겼다한다. 한탄스럽다. 가뭄이 심해 곳곳이 마른다. 씨앗은 어떻게 뿌릴까? 여천(예천)고을 수령 유철이 관직을 버리고 돌아갔다. 유철은 백성을 사랑하고 결백하여 제일의 청백리로 백성모두가 받들었다. 위의 통신사 윤순지와 같이 전에 급히 처리할 일이 있어 군현에 왔는데 방백이 접대하는 말이 매몰찬지라 유철이 기이하게 듣고 급히 돌아가는데 그 행장이 단벌옷과 이불 보따리뿐이었다. 군현사람들이 실망했다한다.

☞:    兪㯙: 1606∼1671 본관: 기계. 대사헌·



○十七日夜洒雨浥塵而己○旱旣甚矣兩夜晝蹲蓬頭鬼面飢民四散道路弃其子者不知其數大丘地全氏士子見一女投其子於江中全也㥯極之告于方伯其母逃之伯以遺弃救活立案成給于全也全不受云不忍見故收之耳聞者無異於癸甲矣         

17일 밤에 먼지를 적실만큼의 비가 왔다. 가뭄이 이미 심하게 들었다. 이틀간 밤 낯으로 마구 헝클어진 머리로 귀신얼굴을 한 굶은 사람이 사방을 배회하고 다닌다. 도로에는 자식을 버린 자가 부지기수이다. 대구의 선비 전씨라는 양반이 강물에 자식을 던지는 한 여자를 발견하였다. 전씨가 극구 말리고 방백에게 고하였는데 그 어미가 달아났다. 방백이 내버리고 돌아보지 않는 아이를 구활할 방도를 찾고자 비용을 마련해 전씨에게 부탁하니 전씨가 받지 않았다 한다. 차마 두고 볼 수 없어 방백이 거뒀다한다. 이 말을 들은 사람들은 내년에도 또 다를 바 없다고 한다.



○淸使三行出來上幣則九升木四十尺一匹直常木六匹中幣則六七升分定各官吾責應上四十二匹中七十三十匹民間罔知攸措非但此支待雜物尤多○三月二十六日安定張座首別世同月二十八日金銀守亦逝○二十八日南君汝舟兄避病來於我信宿連枕論惟曰與正郞兄氏同訪南太別于南水岩正郞兄口占一句曰      

청나라 사신이 세 번째 나오는데 올리는 폐물이 9승 목면 40척이다. 1필당 상목 6필이고 중폐는 6.7승으로 각 관아에 나눠서 배분했다. 우리 읍에서 마련해야할 량은 최고품의 목면 42필 중품 30필이다. 백성들은 어찌 할 바를 모른다. 비록 이 물품을 갔다 바친다 해도 또 내야할 잡물은 더욱 많다.

3월 26일 안정(경북 의성 비안)의 장좌수(향청의 우두머리)가 별세했다. 28일 김은수 또한 세상을 버렸다. 28일 친구 남녀주가 전염병을 피해서 우리 집에 왔다. 이틀 밤을 자면서 계속해서 잠자리에 들어서 지난날 이야기를 하는데 정랑 형님과 남수암에 가서 남태별을 방문 했는데 정랑 형님이 즉석에서 한 구절을 시를 읊었다는 것인데

我騎君步十里坪         그대는 걷고 나는 말을 타고 십리길 편히 와서.

來訪南君眼却靑          남군을 찾아보니 눈빛 반가워

曾把小舠橫晩渡거듭잡은 잔 술잔위로 언뜻 황혼이 밀려와

炯凝寒水暮鍾聲          노을빛 엉킨 찬 물결위로 저문 종소리 퍼지네.

之詩傳誦之聞來不勝惻然之至念九散步遊於龍潭邊回飮柭酒大醉還同宿 

이시를 전해 듣는 동안 측은한 생각을 버릴 수가 없다. 29일에 용담 주변을 산책하며 소요하다가 술을 많이 마셔 크게 취하여 돌아와 함께 잦다.

☞:  정랑형님: 용담 선생의 맏형.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순국한 金喜김희:1565 -1592

南太別남태별:1568∼1635 본관: 영양. 임진왜란 때 의병장 곽재우의 의진에서 활동 장사랑을 제수 받음. 경서에 뛰어남  晴川實紀 권1-2 있음. 당시 안동(일직) 거주.

의병활동을 했던 金喜김희와 남태별은 서로 절친한 사이였나 보다.

정랑 형님은 1592에 사망 했고 남태별은 1635년에 사망했음.



○淸國頒赦還送五臣                                       

청나라에서 경사가 있는 날에 다섯 신하를 사면하여 되돌려 보냈다.

☞:   척화오신(斥和五臣): 신익성(申翊聖)·신익전(申翊全)·허계(許啓)·이명한(李明漢)·이경여(李敬輿) 이계(李烓)가 청나라를 반대하는 주동자라고 하였기 때문에  1642년12월에 심양으로 잡혀갔었다.


○四月至旬不雨兩麥枯槙川澤凅渴大命近之○旬朝來家北盤石回口占一句曰

4월 10일에 이르도록 비가오지 않아 보리와 밀이 마르고 전천의 물이 빠져 바닥났다. 하늘의 큰 재앙이 가까이 왔음이다. 10일 아침에 집에 왔다. 북쪽 반석에 둘러앉아 시를 읊다.



先君曾愛石來          어르신이 아끼던 바위에 와서

坐今朝淚滿䄞 무릎 꿇고 이아침 눈물로 제상을 차리려네.



○十三地動振天地屋壁搖振人皆驚惶○今淸使請曰第一凢事除獘所求者扇子百而己道民祝手與帶金累同稱淸儉夷虜之邦亦有人矣                 

13일 지진이 하늘과 땅을 울렸다. 가옥의 벽이 요동하니 사람들이 놀라 두려워서 허둥댄다.

이번에 나온 청나라 사신이 말하기를 우선 일상의 폐단을 제거하고 부탁한 것이 겨우 부채 100개뿐이다. 도민들이 반겨 축하하면서 청나라 사신“대금루”라는 자는 오랑캐 중에서도 청렴결백한 사람이다. 역시 오랑캐 마을에도 사람다운 사람이 있구나 하였다.



○永川李晶李汝海不意拿去大㮣傷時之嘆作詩譏議使其孽族呈于淸使之致終乃以寃枉見得襏刑費之木多至五同云

영천의 이정. 이여해가 갑자기 잡혀가 큰 몽둥이로 맞아 다쳤을 때 한탄하여 지은 시를 비꼬아 평하여 인용해서 천박한 족속이라는 말이 청나라 사신에게 고하여지자 결국에는 억울한 누명을 쓰고 매를 맞느라 헌옷만 만든 꼴을 당하였으니 곤장이 다섯 다발이나 들었다한다.

☞: 推案及鞫案추안급국안 기록에 1643년. :이정해‚ 이여해 이정등의 죄인들을 공초한 기록이 있음

체제에 대항한 자들에 대한 중죄인의 추국을 거쳐 국왕의 판결을 기록 한 책



○其雨之望己極末由生生人皆咨嗟嗷嗷之聲不絶於道路○四月十七洒細細雨如是者連四日得雨僅一犂而如在洪炉之餘人民大悅其甦○四月念一藨麥念二始播井畓稻自念三至念六連雨江漲兩麥盡淹沈七日快晴無高低水溢                     

비를 기다리기조차도 극에 달해 살아갈 길이 없다. 산사람 모두가 애타게 탄식하는 떠들썩한 소리가 길가에 끊이질 않는다.4월 17일 가는 비가 오더니 4일간 계속된 비로 단 한번 밭갈이 했는데도 천지조화의 여유로움이 있는 듯 모두 기뻐하며 이제 살았다고 한다.

4월 21일 쥐눈콩과 보리 22일 볍씨를 담그고 물을 대여 못자리를 시작했다. 23일까지부터 26일까지 연이은 비로 강물이 불어나서 밀과 보리는 모두 물속에 장을 담갔다. 7일 쾌청해졌다. 물이 넘쳐 높고 낮은 곳이 없다.



◐五月初一日爲始雨雨初三往柒谷偶所稱病不出見慟憤憤往李僉知元己家大醉飽而還午後雨始仍

大霖江水大漲

5월 1일 시작한 비가 3일 까지 내렸다. 칠곡에 둘째 아내가 있는 곳에 가니 아프다고 내다보지도 않아 화가 났다. 화김에 첨지 이원기 집에서 술을 많이 마셔 크게 취해 돌아왔다. 오후에 비가 시작되더니 장마 비로 강이 넘친다.



○金淸陰崔鳴吉蒙赦姑留世子館近處又林慶業族屬而林慶業妻及婢二口則不赦仍囚義州留置朴潢申得淵曺漢英蔡恒幷放送龍將以金崔兩臣蒙赦今西向謝恩再拜崔卽行禮金稱痛不爲之龍將强勸而不爲之臥龍將久睌視而去此四月三日成貼狀啓也           

청음 김상현 최명길이 특별히 사면되어 우선 세자관(의주)가까이에 머물렀다. 또 임경업의 식솔 중 경업의 처와 노비 둘은 사면되지 않아 의주의 감옥으로 보냈다. 박황(朴潢)·신득연(申得淵)·조한영(曺漢英)·채이항(蔡以恒) 등을 내보냈다. 용골대가 김상현 최명길 특별히 사면하는 즉 서쪽을 향해 사은의 절을 하라하니 최명길은 즉시 예를 올렸다. 김상현은 아프다는 핑계로 절을 하지 않았다. 용골대가 강력히 지시하는데도 절하지 않고 드러누워 버리니 청나라 용장이 한참을 껄끄럽게 노려보다가 갔다. 이때가 4월 3일이다. 민정을 살핀 결과를 작성하여 임금께 올렸다.

☞: 崔鳴吉최명길: 1586~1647 본관: 전주. 인조반정에 참여한 반정공신이다. 이괄의 난과 정묘호란의 극복 병자호란 때 강화를 주관. 임경업을 통해 승려 독보를 명나라에 보내 비공식적 외교관계를 유지한 일이 발각되어 청나라에 끌려갔다. 문집: 지천집.

朴潢박황:     1597~1648 본관: 반남. 볼모로 가는 소현세자를 수행했고 심기원의 역모사건에 연루되었다 풀려났다. 글씨에 능함.

申得淵신득연: 1585~1647 본관: 고령. 경상좌도양전사를 역임한 뒤 세자시강원빈객으로 청나라에 파견되었다. 1643년 그의 생질 이거가 명나라와 밀무역한 것을 알고서 고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제주도에 유배되었다가 1647년 진도로 이배되었다.

曺漢英조한영  1608~1670 본관: 창녕. 청나라가 왕손을 볼모로 보낼 것을 요구하자 이를 반대하다 청나라에 끌려가다. 저서에 회곡집이 있고 해동가요에 시조 두 수가 전한다.

蔡以恒채이항  1596-1666 본관: 인천.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동지들과 의병을 모아 경상우병사 민영과 감사 심연등을 도왔으나 화의가 성립되자 향리로 돌아가 복수책을 상소하였다.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霖雨之雜兩麥難收或蒔或播種望後連注大雨十七江漲用楫苦旱之餘又苦霖所穫之麥家無擔石農人饑因不能役事可嘆念一川漲難通暴雨峽間田畓沒數水破難辨田形非徔今年失稔永弃耕作吁亦慘矣和氣由人也而近崴人事慘酷者日積何以致陰陽之和也              장마로 어수선하다. 밀과 보리는 수확하기 어렵다. 모내고 씨 뿌린 후 수확을 기다리는데 연이어 큰비에 내린다. 17일 강물이 불어나서 배 젓는 일을 해야 한다. 힘든 가뭄에 여유를 찾는 듯하다가 또다시 장마로 인해 거둬야할 보리는 집집이 빈 항아리뿐이다. 농민은 기근으로 말미암아 노역 일도 할 수 없다. 탄식이 나온다.

21일 하천이 범람해 통행이 두절되고 폭우로 골짜기 사이 논과 밭이 여러 차례 수몰되어 밭의 본래 형태를 구분할 수 없을 만큼 파괴되어 어찌할 수가 없다. 올 농사는 이미 망쳤으니 경작을 포기하고 탄식뿐이니 참혹하다. 조화의 기운은 인간사로 비롯되는 것이나 근래 세상사 참혹함이 날이 갈수록 더해만 가니 어찌 음양의 조화가 이러하단 말인가?



○陜川所根十三地震公私家舍墻壁居半頽落官門外大路十餘把坼裂西北里人多壓死云念四乃吾人知之也坐北栗亭大醉負還薄暮孝述亦盛饌而來達夜痛飮   13일 협천(합천)에서 발원한 지진에 관아와 집의 담벼락이 거반 무너지고 관문이 떨어져 나가고 큰 길 10여 곳이 갈라졌다. 서북리에서는 많은 사람이 깔려죽었다. 24일 오늘이 내 생일이다.북율정에 앉아서 술을 마시다가 대취하여 업혀 왔다. 어둑어둑해질 때 효술이 풍성하게 잘 차린 음식을 가지고와 밤새 흠뻑 마셨다.



○念五與孝述與子孫輩往鵾變家大醉而來近日連患醒病庚炎甚酷閟閟六月初一日耕西疇種亦豆人皆曰節晩  

25일 효술과 그 아이들과 곤섭의 집에 갔다. 술을 많이 마시고 돌아왔다. 요즘 연이은 술병에 무더위까지 혹심하니 답답하다. 6월 1일 서쪽 밭을 갈고 팥 씨를 넣었다. 사람들 모두 절기가 늦다고 한다.



○金奴暴死可惜初二甚熱○田三稅一時囚次知督發待秋備給則本米一石三十三匹收米三十匹太二十八匹卽今備給則本米一石二十匹太一石十七八匹責出民間踈動或賣田宅或賣牛馬罔知攸措余七十年來田稅之艱備未有甚於此時也 

노비 김씨가 참혹하게 죽었다. 애석하다. 2일 무척 덥다. 세 번 내는 농지세를 한 번에 다 내라한다. 집안일을 맡아보는 사람을 가둬놓고 얼리고 독촉하는데 가을에 세를 내면 원래는 쌀 한 가마니 당 3말3되를 징수하고 쌀 3말에 콩은 2말 8되를 친다고 한다. 지금 당장 받치면 쌀 한가마니에 두 말, 콩 한 가마니에 17,8되만 징수한다고 한다. 책임지고 내놓으라 하니 백성들 사이에서는 뜸을 들이다가 아예 집과 밭을 팔거나 소와 말을 팔아치우며 어찌할 바를 모른다. 내 70평생 살며 준비도 없이 농지세를 미리 내라하니 난감하다. 준비도 못했는데 오늘날에  너무 심한 시국이다.



○九日長霾之餘處作炎旱沓無水田龜圻未得立苖民有飢餓色市直日縮一匹皮牟四五斗米牟則三斗稻則四斗直麥則四斗乞糧不絶道路咨嘆

9일 오래 동안 흙비가 내린 나머지 여러 곳의 작물이 찌는 가뭄에 타들어가고 무논에는 물이 마르고 밭은 거북등처럼 갈라지니 씨를 세우지도 못한 농민들은 기아에 부황이 나고 시장은 위축되어 면포 한 필 값이 겉보리 4,5말 쌀보리는 3말 값이다. 벼 4말에 보리 4말 값과 같다. 빌어먹을 곡식조차도 없으니 길가에는 한탄뿐이다.



○自初旬至三日雨水浹水洽農夫大悅錐然稻蹲田穀盡枯木麥種甚貴處處皆陳前頭計活可慮

달초부터 10일에 이르러 3일간의 비로 흡족한 비가 내려 농민들이 기뻐한다. 뾰족하게 벼는 쭈그러들고 밭곡식은 모두 고사하여 메밀은 더욱 심하니 이곳저곳 할 것 없이 모두 진을 치고 머리를 맞대고 살아갈 계책을 논의 해보지만 걱정스럽다.



○十七太守與軍威義興新舊柒谷申注書會集于李連機薹岩樂忌避者再宿于時申使倅間于児輩六月東海壁魚滿發云 

17일 태수와 군위, 의흥의 신구 수령, 칠곡의 신주서가 모여서 이연기의 대암에서 즐기는 것을 피한 것인데 이틀간 모였을 때 신주서가 고을 수령을 시켜 아이들에게 문안을 했다. 6월에 동해에 고등어가 많이 잡힌단다.



◐七月初一日爲始或雨晴根田陳荒牛馬價歇極大牛無過七八匹亦如之非徑牛馬繁息木花最貴之故也村閻間疾病大熾或死熱病或死於痔疾死於飢餓死亡尤多. 

7월1 일을 시작으로 비가 오다 개다한다. 딱딱해진 묵밭은 거칠어지고 소와 말의 값은 형편없이 떨어져서 큰 소는 7,8마리에 불과하니 이 역시 우마를 번식시키는 데는 올바른 일이 아니다. 목화가 가장 귀하니 가뭄 탓이다. 시골 주변마을 사이에 질병이 창궐하여 혹은 죽고 열병에 죽고 치질로 죽는데 굶어 죽는 사람이 가장 많다.



○七月十七日宗漢生生鋔七日運身於房內八月十五日夜淸無霧此日無霧則明夏麥吉之非也與松吝金座首掃墳于黃川同日方伯到縣留一日向義城  

7월 17일 손자 종한이 태어났다. 배안에서 7일간을 돌기만하여 잡아 당겨서 출산했다. 8월 15일 대보름날 밤 안무도 없이 맑다. 보름날에 안무가 없이 맑은 것은 내년 여름보리에 좋지 않다. 송린과 같이 황천의 김좌수 산소를 벌초했다. 이날 방백이 현에 당도하여 하루를 머물다 의성으로 갔다.

☞:  宗漢종한: 둘째형님 吉길에게 양자로 간 鑛광의 막내아들



◐九月初二日耕秋牟西田初五霜降初八雨洒耕牟者病焉初五日未時義娘生○九月初汗計音來七目賦于中國中流失而死秘不發喪今始發喪其爲術也深矣火葬所入帋地求索于我國七萬餘束本道分定敦厚壯帋萬餘卷送田結督責尤可慟憤

9월초 2일 서쪽 밭에 가을보리를 갈았다. 5일 상강이다. 8일 비가 오는데 갈아놓은 보리에는 해롭다. 5일 오후 두시 의랑이 태어났다.

청나라의 汗칸이 죽었다는 소식이 왔다. 청나라에 초상에 쓸 7가지 부의 품을 보냈는데 도중에 잃어버렸다고 하는데 汗칸이 죽었다는 것을 비밀리 하여 상을 치루지 않다가 이제야 상을 치르는 것은 심한 술책이다.

화장하는데 들어가는 종이를 구하는데 우리나라에 7만여 속을 요구한다. 우리 경상도에 나눠 맡은 것이 두꺼운 고려견지(高麗繭紙) 만여 권이나 되니. 논밭의 조세를 독촉하는데 매우 심하다. 통분할 일이다.



○九月修籌左右兵營城左道各邑編伍軍裏二十日粮咸聚役之死傷亦多愁痒喧騰○進士許琇京居人也前於胡亂時避來于此興兒曺相知之分得筆墨欲表情未果而逝厥內室使奴付送曰家風願不可孤負婦女局量有如此豁達也    

9월 진영을 정비하여 좌우 병영과 성, 좌도, 각읍의 편오군의 편제를 점호했다. 20일 식량을 줄여보려고 취역에 나갔다가 죽은 사람이 많고 다친 사람 또한 많다. 시름에 겨운 불만의 소리가 자자하다.

진사 허수경은 서울 사람인데 전에 병자호란 때 이곳으로 피난을 왔었다. 어린아이들이 서로 짝이 되서 예뻐하여 알고 지내는데 먹과 벼루를 나누워 주니 고마운 마음을 전하려 공부가 끝마치기도 전에 안방으로 달려가니 여종을 딸려 보냈는데 아이가 말하길 “가풍이 있는데 기대에 어긋나는 짓은 않을 것이다.”라고 한다. 여자아이의 도량이 저와 같으니 탁 트였구나! 



◐十月初九方伯之行自仁同過門前路到縣留三日跖雪紛紛義興諸山杜鵑花滿發云此何非卽○初七日西崖移葬時瀤孫與張而晩往會葬而來○二十七日圃隱退溪西崖三先生奉安于龍宮三江書院時鏡與瀤進參會員百餘云    

10월 9일 방백이 행차하였다. 안동에서부터 집문 앞길을 지나 현에 도착했다. 3일을 머무는 동안에 밟은 눈이 겹겹이 쌓이고 떠들썩하고 뒤숭숭하다. 의흥의 모든 산에 진달래꽃이 만발 했다고 하니 절기의 출근시간이 한참 잘 못 됐다. 7일 서애 유성룡의 묘(안동시 풍산읍 중동)를 이장할 때 손자 회와 장과 함께 늦게 참석하고 돌아왔다. 27일 포은, 퇴계. 서애. 세 분을 용궁의 삼강서원에 봉안할 때 아들 경과 손자 회와 같이 참석했는데 100여인이 모였다.

☞: 三江書院: 경상북도 예천군 풍양면 삼강리 

서애 유성룡 柳成龍, 1542~1607 본관: 풍산. 경북 의성 출생.  임진왜란 때 도체찰사(로 군무를 일괄, 이순신, 권율 등 명장을 등용. 화기 제조, 성곽 수축 등 군비 확충에 노력. 군대양성을 역설. 저서: 서애집. 징비록.

포은 정몽주鄭夢周, 1337~1392 본관: 연일. 고려 말기 문신 겸 학자. 의창을 세워 빈민을 구제하고 유학을 보급하였으며, 성리학에 밝았다. 1392년 이성계 일파를 제거하려 했으나 실패, 선죽교에서 방원의 부하 조영규 등에게 격살되었다. 문집: 포은집

퇴계 이황 李滉, 1501~1570 본관: 진성. 출생지  경북 예안 영남학파. 이이의 제자들로 이루어진 기호학파와 대립, 동서 당쟁과도 관련 일본 유학계에 큰 영향을 끼쳤다. 도산서원을 설립 후진양성과 학문연구에 힘씀 저서: 퇴계전서. 도산십이곡. 퇴계필적.



◐十一月初二新使元斗杓到界達夜大霧處處染病大膱死亡相繙一家或盡死不得出戶者焉 

11월 2일 심임 도사 원두표가 부임해왔다. 밤에 안개가 자욱하다. 곳곳에서 장티푸스가 크게 번져 많은 사람이 죽는다. 서로 옮겨가서 혹은 한 가족이 모두 죽었다. 할 수없이 밖에는 나가지도 못하고 있다.

☞:  元斗杓원두표:1593~1664 :본관 원주. 1642년 형조참판에 이어 경상도관찰사 등을 역임하였다. 이 기간에 서인(西人)의 공서(功西)에 소속, 청서(淸西)를 탄압하면서 같은 파 김자점과의 권력 다툼으로 분당되자, 원당(原黨)의 영수가 됨 효종의 북벌정책을 지지하여 군비를 증강하는데 앞장섰고 김육이 주장한 대동법에는 반대하였다. 1656년 우의정을 거쳐 1662년 현종 3년 좌의정에 올라 군기시의 도제조를 겸직하였다.



十一月初二信使之行還泊釜山本縣出待長川站初八發向○初七午後白雪大作初八止明雪後風尖行路病焉九日虹見十二日冬至也

11월 2일 일본에 갔던 통신사가 부산에 돌아왔다. 우리 현에서 나아가 맟을 준비를 하고 있는데 장천(경북 상주 낙동)역참에서 8일 날 떠난다고 한다. 7일 오후 눈이 많이 왔다. 8일 날 그치고 맑은데 눈이 온 후의 바람이 매서워 길을 걷기가 힘들 정도다. 9일 무지개가 떴다. 12일이 동지 날이다.(양력 1643년 12월 22일 동지 날)



初十日曾祖考妣神主奉安于吾家庙時日溫如春十一日大霧四塞午後捲㰸日氣溫和不啻三春陰陽

失庳錐非細慮當此綿花絶無之日百結蒼生祝手相賀曰皇天知我亦身俾無凍死

10일 증조와 양친의 신주를 우리집안의 사당에 모셨다. 이때 날씨가 온화해 봄날 갖다. 11일 큰 눈이 오고 사방이 안개가 자욱하다가 오후에 걷혔다. 일기가 따뜻할 뿐만 아니라 춘삼월 봄날 갖다. 음양의 절기가 바늘 끝만큼 잘 못 되도 작은 염려가 아니다. 당연히 이런 해에는 목화 꽃이 피지 못할 것이다. 

이런 날에는 겨우 몇 이랑의 땅을 일궈 살아가는 여린 백성들은 손을 들어 빌며 서로 말하길 하늘이 우리 뜻 헤아려 얼어 죽지 않게 하네! 라고 한다.



○十八日運架山還上三百石一石運價一石適値寒沍雪風薄依生民涕泣於步步此城乃李溟雄設立也人皆欸啖其內寢其皮曰爲穽國中使民芳因至於此極邱皇天皇天尙䆿無吪

18일 가산산성으로 백성에게 꾸어준 곡식을 거둬들이는데 300석이다. 한가마니 실어 올리는 운임이 역시 한 가마에 달하니 때마침 얼어붙는 눈보라에 얇은 옷을 입은 백성들 눈물을 흘리며 울면서 걷고 또 걷는다. 이산성은 이명웅이 수축한 산성이다. 모두가 성난 소리로 “그 살을 씹어 먹고 그 가죽을 깔고 잘 것이다”한다. 구덩이에나 쳐 넣어야 할 나라의 관료들이 백성을 부려먹기 이 지경까지 이르렀으니 여기가 마지막 가는 구덩이 황천이다. 하늘은 아직도 잠을 자는가? 아무런 대답이 없네!     



○新方伯元請除降各邑價布貢物皆以正五升三十五尺雜項木則廘木三十尺定規捧之今一下萬姓祝手相慶曰仁哉吳相不面今日見此周召之政也吏輩則多有不快之色何前則七八升四十四五尺捧之私自換納其規己成矣今則不肆利㱃之心故也

새로 부임한 방백 원두표가 각 읍의 면포 값을 깎아내리기를 청하였다. 나라에 받치는 면포는 모두 닷새베[正五升布]로 35척이다. 여러 종목의 면포를 록목30척으로 규정을 지키도록 한 것인데 이제 한가지로 정해지니. 백성들이 손뼉을 치며 좋아하며 말하길, 어진 분이시다. 한 번도 본 적은 없지만 오늘에서야 주나라의 주공과 소공의 정치를 보는 듯하다. 정치하는 벼슬아치들이 많으면 꼴사납다. 어째서 전에는 七八升의 베를 45척으로 받쳤는가하면 빌려준 면포를 환납 받을 때 사사로이 그렇게 (이자)규정으로 굳어져 버린 것인데. 지금은 검은 욕심을 부리지 못하게 했기 때문이다.

☞: 주공:  주왕조를 세운 문왕의 아들이며 무왕의 동생. 무왕이 죽은 뒤 나이 어린 성왕이 제위에 오르자 섭정(攝政)이 되어 주왕실의 수비를 공고히 하였다. 예악과 법도를 제정하여 주왕실 특유의 제도문물을 창시하였다. 그는 중국 고대의 정치.사상.문화 등 다방면에 공헌하여 유교학자에 의해 성인으로 존숭되고 있다. 저서에 주례(周禮)가 있다.

소공:   문왕의 아들. 무왕(武王)의 아우. 주공을 도와 주나라의 기초를 만들고 산동 반도의 이족을 정벌하여 동방 경로의 사업을 이룩했음



○二十純鄕祖母捐世李別監遭喪○二十一日郞來二十三還歸○念五夜閑分出去○念九黃昏雪積數寸晦日卽消○兵使過縣向呂泉                       

20일 순향의 조모가 별세했다. 이 별감 집에 그 아버지 상을 당했다. 21일 일랑이 왔다가 23일 돌아갔다. 25일 밤에 심심하여 볼일을 보러갔다. 29일 어둑어둑할 무렵 눈이 수촌이 쌓였다. 그믐날 그쳤다. 병마절도사가 우리 현을 지나 여천으로 갔다.



◐十二月三日姜翊周黜鄕云可羙鄕議也○亂䧴餘命唯兄第獨生同一世居同一邑同心同志出入鄕曲念曾回事歷路趋謁顧我淸眼穩叞積襞告別握手含情未洽那知此別乃是永訣執紼今朝五內焚裂來奠薄具庶幾歆格右張座首仲兄氏之喪適有薪憂有志未就尤增痛嘆○初六夜夢蛇龍長數十尺直立騰空自艮方始徐徐向南行於此洞其頭如大鶴而白如雪奇恠難形又交夢之瀤孫登科榮墳倡夫之聲喧騰觀者甚衆此亦寄夢

12월 3일 강익주를 동내에서 쫓아냈다 한다. 마을의 미풍양속을 위해 할만하다.

(장좌수의 둘째 형의 상을 당하여)남은여생 헤아리기란 어렵다. 오직 형제가 외롭게 살아가데 같은 시대에 같은 마을에서 한마음 한 뜻으로 구석진 시골마을을 드나들었다. 생각건대 일찍이 몇 번이던가 지나는 길에 달려가 뵈었고 지난날을 생각하니 나를 반기는 온화한 눈가에는 주름이 쌓이고 이별할 땐 못다 한 정에 손을 꼭 잡았었는데, 어찌 이별을 예견한 걸까?  이것이 영영 인연의 끈을 다한 이별인 것을! 지독히 혼란스런 오늘 아침 오장이 타들어 터질듯 밀려든다. 변변치 못한 예물을 올리오니 부디 강림하여 이를 흠향하소서! 이는 장좌수의 둘째 형이다. 상을 당하고 보니 결국 오랜 병으로 품은 뜻을 펼치지 못하였으니 더더욱 통탄스럽다.

6일 밤 꿈에 수십 척의 길이가 되는 사룡이 곧바로 서서 하늘을 오르다가. 동북쪽에서부터 남쪽으로 서서히 골짜기 있는 쪽으로 가는데 그 머리는 큰 학 같고 흰색이 백설 같다. 기이하고 요상한 모양이다. 꿈이 바뀌어 손자 회가 급제하여 선조의 산소에 고하고 절을 올리는데 창부가 노래를 부르는 소리가 들리고 구경꾼들이 엄청나게 많다. 이 또한 이상한 꿈이다.



○邑中上下而還上不納或刑訊或拘留薄衣蒼生甚可憐也民窮財盡賦役煩重十室九空可嘆也哉○初八終夕陰曀○林將軍以都督梟示鄭明時云實然則人心快哉○汗出還東殿云未知虛實也    

마을에서 잘살고 못 살고 간에 관아에서 빌려온 곡식을 갚지 못해 혹은 죄를 심문 받고 혹은 감옥에 넣었는데 엷은 옷 입은 백성들이 무척이나 가련하다. 백성들 재산은 궁핍한데 모두 여러 번의 과중한 부역으로 열 집중 아홉 집은 비어있으니 실로 탄성이 나오는 것이다. 8일 저녁 때 까지 구름이 끼고 음산하다.

임경업 장군이 도독이 되어 정명시의 목을 쳤다고 한다. 사실이라면 사람들이 진심으로 쾌자를 부를 것이다.세자가 청나라에서 돌아왔다는데 사실인지 알 수 없다.

☞:  사실과 다르다. 정명수는 10년 후인 1653년 심양에서 성주포수 이사용에게 살해당한다.

☞:  12월 3일 소현 세자와 빈궁이 12월 15일에 심양을 출발할 것이라고 치계하다.



○念二胃男得差鄕任見无妄大患慟憤憤此亦點下之所訴也○念三方伯聞計奔喪南民無祿振脘長嘆

20일 위남이 좀 이상한 아이를 보았다. 직접 가서 보니 황당한 재앙에 통분이 인다. 분통이 나는 것은 얼굴 아래에 생긴 점을 탓하는 것이다. 23일 방백이 부친의 부음을 듣고 달려갔는데 남 쪽 사람들이 수의도 없이 염습도 않았다 한다. 긴 탄식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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