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천리 제8권 제1호  
발행일1936년 01월01일  
기사제목藝術家로서 世界에 나가면 무엇을 보고 도라올가  
기사형태설문  

 

 

 

藝術家로서 世界에 나가면 무엇을 보고 도라올가

음악 「波蘭樂聖 쇼팡을 맛나고저」
-延禧專門學校敎授 玄濟明
三千里誌에서 필자에게 向日 만약 필자가 세계일주를 한다면 어디 어디를 가보겠느냐? 대답인 즉 매우 어려운 대답이다. 地理式 대답이라면 그래도 낙제나 면할지 모르나 그래도 필자가 理想한 바가 있다면 그것을 내놓아야 할 것이니 그러한 空想이라도 하여보지 못한 나로서는 난처한 일이다. 그러나 이러한 기회에 꿈같은 이야기라도 해보는 것이 그리 손해될 것은 없으리라고 본다. 그러하다고 멍텅구리 세계일주 만화처럼 얼토당토 안는 虛榮說을 버려놓을 것도 아니다. 만약 내가 세계를 도라다닌다고 假說하면 내 전문이 음악이니만치 유명한 樂團音樂都市 音樂舘 音樂家들을 만나도 보고 또는 일즉이 세상을 떠난 유명한 樂聖들의 묘지를 찾어도 보겠고 또 그네들이 생존 時<172> 머물러 있던 집이라던지 로맨스가 얽힌 그곳을 내밟아보고 싶으며 따라 내가 연구하는 방면에 견문을 넓히고 깊은 경험과 배움을 더하려고 노력할 것은 물론이다. 그와 동시에 내가 보고싶고 만나고 싶은 處所와 인물을 여기 좀 記하여보려 한다. 그 광채나던 음악의 나라 露西亞는 그저 지내가고 말 것이다. 볼카호수가에서 배끄을던 그 노래는 아마도 지금은 그곳에서는 못드를 것이며 배끄으는 그네들을 보지도 못할 것이니 西伯利亞로 가던 그네들이 눈 우에서 잠을 잘 때 주린 창자를 쥐고서도 오히려 그 사슬을 흔드러 악기삼아 리즘을 맨들고 노래하던 그네들은 다 가버리고 그 音樂狂들은 가버리고 그 子孫들은 오늘날 무엇들을 하고 있는지! 내 무식하야 알 길이 없지마는 오늘에 露西亞는 음악의 露西亞는 아니다. 그리하야 過客으로서 지나갈 뿐이다.
내가 좋아하는 波蘭! 쇼팡이 난 波蘭! 파드럽스키가 난 波蘭을 가보고 싶다. 그리고 파드럽스키 前大統領을 만나고 싶다. 대통령보다도 波蘭에 救主인 피아니스트 파드럽스키를 여기서 만나보고 싶다는 것이다. 筆者在米時 數次 演奏會末席에서 본 일은 있으나 波蘭 땅에서 그를 보고 그 人格을 배우고 싶고 그 예술을 배우고 싶다는 것이다. 波蘭이 아니면 파드럽스키가 없었을 것이오, 파드럽스키가 없었든들 波蘭이 어찌되엿을고, 위대한 음악가 파드럽스키.
과거에 많은 樂聖들을 낳아준 獨逸, 匈牙利와 山水가 美麗하고 노래의 나라인 利太利를 나는 또한 사랑하며 가볼 만한 곳이니 序論에 말한 그 조건 만으로이다. 그 外로는 오히려 나치스 파시슴의 권력들의 폭행이 내 눈에는 보기 싫은 것이다. 다음으로는 자유의 나라 그보다도 세계음악가들의 活舞臺인 米國을 들어선다면, 뉴욕, 시카코, 兩大都市는 세계를 縮圖한 것으로서 他方面도 물론, 음악으로는 총 집합처, 過하게 말한다면 세계음단에 총 本營일 것이다. 세계적 樂家들이 이 米國에서 성공을 하고 못하는 데 따라서 세계적 地盤을 세우고 못세우는 대 있다고 생각이 된다. 여기서는 어떠한 유명한 대가들을 다 볼 수 있읍니다. 근본문제로 도라가 만약 내가 다시 간다면 내가 존경하고 숭배하는 두 선생을 만나보고 싶으니, 즉 그라부氏와 크라이슬러氏다. 發聲學者로 3옥타부 이상의 聲域을 가지고 뻬이스나 테너-를 무난히 노래를 하며 과학적 발성에 최고봉인 氏의 독특한 연구를 알아보고 싶은 것이다. 벌서 8,9년 전이다. 氏를 잠간 만난 일은 있으나 오랜 기회가 없었슴이 늘 遺憾이었던 것이다. 유감을 언제나 풀고저 누구나 다 아는 提琴大家 크라이슬러氏 나는 氏의 연기를<173> 숭배함보다 그 인격을 숭배하는 바이므로이다. 여기서 새삼스럽게 그의 사생활을 들어 인격을 증명할 것은 없지만은 예술가로서 가지기 어려운 順厚히고 겸손하고 검소하야 愛他主義 그 모든 도덕적 인격, 또는 예술가로서 있어야 할 예술에 대한 인격을 내 찬양하오며, 철학자인 그로서 예술가로서의 훌륭한 그 분을 내 다시 仰慕하는 바이므로서이다. 여기서 발길을 옴겨, 과거에 내가 정 깊든 시카코를 가서 모교와 은사들과 나를 援助해 주던 親友들을 만나고 내가 뛰놀던 곳들을 다시 가보고, 그네들에게 은혜에 한끝이라도 갚고 싶은 것이다. 이로서 다시 이 땅의 강산을 찾어든다면 새로운 내가 될까? 그리하야 北岳山 밑에서 울리우는 우리 고유에 음악을 내 다시 가지고 세계공*인 그 음악을 이 땅에 퍼치우려.
영화 「찝푸링」과 그 예술을 보고저
-羅雲奎
너무 막연한 이야기를 쓰라 하시니 대답하기도 아뜩합니다. 가고싶나, 보고싶다는 데가 한 두곳이겠읍니까, 그러나 그 마음도 時時로 변해 갑니다. 南政文學에 醉하였을 때는 地中海邊을 낱낱이 뒤지고 싶었고, 톨스토이를 좋아하던 때는 로시아도 퍽 그리워 했읍니다. 그러나 요새는 실현되지 못할 空想으로 밤을 새일 나히는 지났으므로 별로 그런 생각은 아니합니다만 지금 갈 수 있다면, 에디오피아에 가서 발 벗은 兵丁들이 싸움하는 구경이나 하고 싶습니다. 그 다음에 旅費나 넉넉하면 아메리카로 건너가 영화 村으로 드러가서 한 5, 6개월만 마음대로 구경이나 했으면 좋겠읍니다. 전에는 獨逸로 퍽 가고 싶었는데 히틀러氏의 「나치스」狂風이 떠도는 판에 재주있는 사람이면 거반 외국으로 가버렸다는 말을 드른 다음에는 독일영화계도 쓸쓸할 것 같습니다. 한 시절 제일 좋아하던 콘란트화이드도 지금은 英國에 가 있다니 독일 갈 마음이 더욱 없어졌읍니다. 그래도 하리우트는 그리운 사람이 꽤 많어요. 챠푸링같은 사람은 꼭 한번 만나보겠읍니다. 제일 먼저 묻고 싶은 이야기가 수십년 功을 드려 專賣특허권을 얻은 수염을 히틀러에게 빼끼고, 웨 가만있느냐고 그 일이 제일 궁금합니다. 다음은 그가 出演할 때에 차리는 모양이 (中山帽, 스데끼, 해진 예복, 뚜러진 구두 假紳士, 다시 말하면 속은 비고 형식만 차리는 어부류에 인간들을 비웃는 차림차리라는데 아무렇게 보아도 그것은 19세기말에나 볼 수 있는 紳士지요. 새 거리에서 볼 수 있는 紳士는 아니다. 처음 그가 출연할<174> 때에 신사들은 그랬을른지도 모르나, 요새 거리에 나타나 가진 害毒을 다 끼치는 假紳士들은 그런 모양으로 나타나지 안는다. 모자도 다르고, 양복도 다르다. 그러니 시대를 따 서 의상도 고쳐야 될 것을 아직까지도 그 옷으로 뼛틔려는 그 고집을 버리라고 손목을 꼭 붓잡고 타일르고 싶다. 그래서도 듣지 아니하거던 朝鮮사람이 모여준 돈 100만원을 도루내라고 해서 찾어오면 其中에 내가 찾을 돈도 2,30원은 있을 것이다. 다음에 만나야 될 사람은 죤 바리모어. 그곳서 백이는 寫眞은 많다는데 이리로 오는 寫眞은 하나도 없으니, 웬 일이냐고 무러야겠다. 물론 이렇게 대답하히라. 「내 사진은 권리금이 비싼데 그 돈을 주고 사가서는 收支가 안만는다고 안사가는 것이니 난들 어떻게 하우」하리다. 그러나 그것은 모르고 하는 말이다. 죤 바리모어를 朝鮮사람이 좋아하기는 씨-비스트(海의 野獸」 다. 線이 굵고 熱있는 演技가 朝鮮사람의 심장을 울렸다. 그후에 그는 작품마다 거이 다 低級興行價値를 구하려는 美男子役으로 출연했다. (마논레스코 론판, 내가 만일 왕자이었더면) 50된 남자가 힌 분을 바르고 나와서 20세 청년의 흉내를 낸다고 되는 법이 아니다. 그래서 여러 번 속은 朝鮮觀客들은 그를 버렸다. 아직도 무대에 나서 하물넷을 하면 1年滿員은 틀림없다는 인기니 權利金은 비싸리라만, 朝鮮에다가 사진을 또 팔아 먹으려거던 「海의 野獸」같은 것을 백여 보내면 틀림없이 나도 50전하나는 人場料로 쓰겠다고 단단히 일러야 겠읍니다. 돌아오는 길에 「하와이」에 들러서 朝鮮寫眞 중에 제일 잘못된 것을 그곳 있는 형제들에게 구경시키고, 조선서는 男俳優나 女俳優가 다 생활난으로 얼굴빛이 이렇게 나뿌니 그곳에 있는 대표적 미남미녀로 열사람씩만 同情해서 조선에 보내주면 외국으로 보낼 영화를 만들겠노라고. 事情하면 드를 듯도 한 일입니다. 東京 京都는 지나던 길에 들러서 그곳서 變名해 가지고 「中村」니 「田村」니 하고 조선사람이라는 것이 알려지면 10원짜리 撮影所 심부름군 자리가 떨어질가바 벌벌떨* 硏究(?)하시는 분들에게 「朝鮮映畵界가 貧弱하다」는 타령만 말고 와서 일 좀 가치 해보자고 부탁이나 해놓고 돌아올까 합니다. 정말 자미있는 이야기는 정말 여행을 하고온 때에 쓰겠읍니다. 언제 떠나는냐구요? 세계일주할 여비를 모으려고 「벙어리」한 개를 오늘 사 올 작정입다.
무용 「미라노」의 스카라座를 보고저
趙澤元
무용행각으로 세계일주를 떠나자면 먼저 조선 정서가 농크한<175> 조선의 고전무용을 현대 우리들의 감정에 맞게 고쳐 가지고 그것을 서양음악의 반주로 가장 자미있다고 생각하는(僧舞劍舞) 몇몇가지 무용을 질머지고 세계를 유람하는데 서양무용으로는 감히 그들과 억개를 겨눌 수가 없겠기에 돈 없는 우리들의 거름이니만큼 버러가면서 길을 떠나고져 한다.
먼저 압록강을 건너 넓고 넓은 만주들판에 좋은 공기를 담북 드러 마시고 머리로부터 발끝까지 깨끗하고 순진한 기세로서 먼저 신흥로서아에 발을 듸려놓아 그 옛날의 로시안바레(Rusian Balett)로 유명하던 제왕시대의 모스바를 찾어 한 조각 남은 그림자라도 찾어 옛 테크닉크로만 되여 있던 무용을 보기라도 하고 내가 가장 좋아하며 목적으로 삼는 독일로 발을 옴겨 그곳에서 적어도 2년간은 우리의 선구자인 메리웨크멘 무용연구소에서 신흥중앙파무용을 여사에게 지도받으며 연구하고 싶다. 화려하며 기술을 본위로 한 무용도 좋겠지만. 옛날처럼 자기 일생을 기술로만 보내던 시대와는 다르니 내용을 충실이하며 과학적이며 심장에 밑까지 찌를 수 있는 심각한 무용을 이곳에서 연구해가지고 불란서로 건너가서 힘주었던 독일생활을 위로하기 위하야 찬란무진한 「파리」에서 머리를 쉬여가는 일편 조그마한 극장에나마 출연하야 우리의 무용을 소개하는 동시에 도라올 노자와 이태리와 스페인에 가서 구경할 미천을 한주머니 만드러 가지고 이태리 미라노에 드러가 세계에 자랑꺼리인 쓰카라座한 귀퉁이에서 그들의 힘찬 노래에 귀를 씨처가지 스페인에 건너가 투우(鬪牛)와 캬스타녯도의 「칵텔」에서 스페인의 정령을 맛보아 가지고 (영국은 신사 외에는 볼 것 없다기에 슬적 빼고) 취한 김에 쟈쯔와 돈으로 세계를 정복하는 미국에 건너가 마음껏 보고 듣고 뛰고 한 연후에 태평양을 한숨에 건너 다시금 내 고향인 조선에 도라와 세계의 참된 무용을 가지고 남에게 뒤떨어진 조선의 대중과 무용아들을 위하여 새로운 힘이 되여나 보련다.
극장 寶塚劇場이나 볼가
東洋劇場主 洪淳彦
물으신 말슴에 대답하기 전에 먼저 말슴드릴 것은 나에게는 아직 세계일주할 만한 시간의 여유도 없읍니다. 따라서 米國의 누구 獨逸의 누구를 만나겠다는 계획도 없읍니다. 그래서 나 자신이 실행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푸랑을 말한다면 내년 봄쯤 東京을 가서 松竹의 白井會長을 만나서 日本興行界의 선구자, 또는 개척자로서의 辛苦談을 듣고, 그 다음으로는 寶塚의 小林社長을 만나서, 일본흥행계에 대한 明日의 포부를 듣고 싶은 것이 나의 솔직한 생각입니다.<176>
<172-1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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