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시단의 등뼈, 동인 4
1930년대의 문제성
한국 근대문학은 계몽적·집단적·운동적 성격을 특징으로 한다. 특히 문학의 집단적·운동적 성격은 한국 근대문학이 작가 개인의 노력과 역량만이 아니라 동인지 운동의 성격을 강하게 띠었고, 창작집이 아니라 주로 문예지라는 형식을 통해 표현되었다는 사실과 밀접한 관련을 지닌다. 이러한 문예 동인과 문예지는 제도에 안착한 기성의 안정성에 도전하는 차이화 전략의 일환이므로, 한국 근대문학의 매 시기에는 항상 해당 시기를 대표하는 동인 또는 문예지가 있었다. 이 글이 논의의 대상으로 삼고 있는 ‘구인회’ 《문장》 《인문평론》 또한 예외가 아니어서, 이것들은 사실상 1930년대 한국문학의 수준을 보여주는 바로미터의 성격을 갖고 있다. 따라서 이들의 성격과 성취를 살피는 일은 곧 1930년대 문학의 그것을 되묻는 일이기도 하다.
한국 근대문학사에서 1930년대의 위상은 각별하다. 1930년대의 한국은 대륙침략의 야욕을 포기하지 않은 일본 때문에 온전히 전쟁의 시간을 겪어야 했다. 만주사변(1931)―중일전쟁(1937)―태평양전쟁(1941)으로 이어지는 이 전쟁의 시대에 한국문학은 한편으로는 열악한 정치적 현실로 인해 인위적인 단절을 경험해야 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이전 시기에 비해 한층 다양하고 성숙한 단계로 발돋움했다. 특히 이 ‘성숙’의 의미는 다층적이고 복합적이었다. 왜냐하면 1930년대에 이르러 한국의 문학인들 가운데 일부가 본격적인 모더니즘 운동을 실험하기 시작했고, 동시에 ‘근대’ 자체를 비판적 시선으로 바라보려는 움직임도 생겨났기 때문이다. 물론 이 시선의 상당 부분은 제국 일본의 시선을 차용한 결과였기에 국내의 현실과 연동되지 못한 한계가 있었지만, 이러한 한계는 또한 모더니즘에도 있었다. 한국문학의 전통성을 애써 부정하거나 폄하할 이유는 없지만 근대 이후의 한국문학은 일본을 통해 수입된 외래적인 것의 영향에 반복적으로 노출되었고, 그때마다 외래적인 것과 한국의 문학 현실 사이에는 미묘한 긴장이 있었다.
1930년대는 ‘카프’가 주도한 1920년대와는 분위기가 확연히 달랐다. 이 시기 일본은 3·1 운동 이후에 취해 오던 문화통치를 무단통치로 전환했고, 그에 따라 1920년대 문학의 핵심이었던 카프(KAPF)와 공산주의 운동의 영향력은 현저히 축소되었다. 카프의 리얼리즘이 퇴조기에 접어들 무렵 문단에는 ‘구인회’로 대표되는 모더니즘적 경향이 본격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내적 동력이 약했던 ‘구인회’는 불과 2~3년 만에 사실상의 해체 상태에 직면하게 되었고, 이 모임의 회원 중 일부가 1930년대 후반에 《문장》을 창간했다. 1930년대 후반의 문학을 사실상 양분했던 《문장》의 전통주의 담론과 《인문평론》의 근대(비판) 담론으로 인해 이 시기 한국문학은 ‘담론’을 통해 급박한 변화의 시기를 맞이했다. 아래에서는 이들 동인 집단과 문예동인지의 탄생 배경과 그들이 내세운 문학적 이념을 중심으로 그 문학사적 가능성과 한계를 타진해보려 한다.
‘구인회’와 모더니즘의 등장
‘구인회’는 1933년 김기림, 이효석, 이종명, 김유영, 유치진, 조용만, 이태준, 정지용, 이무영 등이 창립한 예술 모임이다. 결성 당시 이 모임은 “회원 간의 친목 도모”와 “문학에 대한 순수한 연구”를 창립 목적으로 내세웠다. 하지만 구인회는 결성된 얼마 후 이종명, 김유영, 이효석이 탈퇴하고 박태원, 이상, 박팔양이 새로 가입했으며, 그 이후에도 유치진, 조용만이 탈퇴하고 김유정, 김환태가 가입하는 등 회원에서 변화를 보였다. 흔히 ‘구인회’는 회원 수가 늘 9명을 유지했다고 오해되고 있지만, 1935년 6월 30일 《조선문단》 좌담회에서 정지용은 회원 수를 묻는 이석훈의 질문에 “13인입니다.”라고 대답했다. 지금까지 확인된 이들의 집단적 활동은 몇 번의 합평회, 집단적인 칼럼 연재, 두 차례의 문학 강연회, 그리고 1936년 3월 기관지 《시와 소설》을 발행한 것 등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구인회’는 1933년 8월에 결성되어 1936년 10월 무렵에 사실상 해체되었다고 보아야 할 듯하다. 지금까지의 많은 연구는 ‘구인회’와 카프의 관계, ‘구인회’의 결성 과정과 구체적 성격, 특히 문학과 예술에 대한 회원들의 공통적인 지향 등을 ‘모더니즘’이라는 개념으로 포괄해왔다. 하지만 집단적으로 활동한 기간이 무척 짧았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이들이 의식적인 예술적 지향을 함께하기 위해 ‘구인회’라는 모임을 결성한 것인지는 여전히 불투명하다. 특히 현재까지 ‘구인회’에 관한 대부분의 정보가 회고, 조용만의 회고에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도 문제로 지적할 수 있는데, 실제로 여러 지면을 통해 확인되는 ‘구인회’에 관한 정보들은 상충되는 것들이 상당히 많다.
‘구인회’의 결성 계기는 무엇이었고, 결성 과정은 어떠했으며, 어떤 이유로 활동을 멈추었을까? 많은 연구자가 이 문제에 천착했으나 여전히 해명되지 않고 있다. 실제로 ‘구인회’는 창립 일자부터가 논란의 대상이다. 비교적 최근까지 ‘구인회’의 창립 일자는 1933년 8월 15일로 알려져 있었다. 이는 〈조선중앙일보〉 1934년 6월 25일 자에 실린 ‘시와 소설의 밤’ 광고 기사 때문이다. 이 기사에는 1934년 6월 30일에 개최될 ‘시와 소설의 밤’ 행사가 구인회가 주최하고 〈조선중앙일보〉 학예부가 후원한다는 내용과, “구인회는 작년 8월 15일에 창립된 김기림, 박태원, 정지용, 이무영, 유치진, 조용만, 이효석, 조벽암, 이종명, 이태준 11씨(氏)의 작가 단체”라는 단체 소개의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하지만 지금까지 ‘구인회’에 대한 정보의 대부분을 제공했고 그 자신 ‘구인회’의 일원이기도 했던 조용만은 1957년 회고(〈구인회의 기억〉 《현대문학》 1957년 1월호)에서 창립일을 “7월 그믐께이던가 팔월 초생”이라고 밝혔고, 소설집 《구인회 만들 무렵》(정음사, 1984)에서는 “칠월 스무날 께, 이효석도 서울로 올라오고 아홉 사람 전 회원이 모여서 저녁 여섯 시에 광교 큰길에 있는 조그만 양식집에서 발회식을 가졌다.”라고 기록했다. 하지만 최근의 연구에 따르면 ‘구인회’의 창립일은 1933년 8월 26일일 가능성이 높다.
첫째, 〈조선중앙일보〉 1933년 8월 31일 자 ‘문단인 소식―구인회 조직’이라는 제목의 기사에 “좌기(左記)의 문인 구씨(九氏)는 이십육일 오후 팔시(八時)에 시내 황금정 아서원에서 회합하야 순문학 연구단체 구인회를 조직하얏다는데 00한 조선문학에 신기축을 짓고자 함이 그 목적이라 하며 한 달에 한 번씩 회합을 한다고……”라는 내용이 등장한다. 둘째, 〈동아일보〉 1933년 9월 1일 자 3면 ‘문단 풍문’에 “구인회 창립. 순연한 연구적 입장에서 상호의 작품을 비판하며 다독다작을 목적으로 한 사교적 클럽”이라는 기사가 실렸다. 셋째, 〈조선일보〉 1933년 8월 30일 학예면에 ‘소식―구인회 창립’이라는 기사가 실렸다. 넷째, 잡지 《삼천리》 1933년 9월호 ‘문인의 신단체’에 “소필(蕭苾)한 추풍(秋風)이 불자, 최근에 문단에 희소식이 들린다. 이종명, 김유영, 이태준, 이효석, 김기림, 이무영, 조용만 외 제씨의 발기로, 신흥문예단체가 결성되야 크게 활약하리라는데, 결사의 주지는, 문인상호 간의 친목과 자유스러운 입장에 서서 예술운동을 이르킴에 잇다 하는데, 아무튼 금후의 활약이 기대된다.”라는 내용이 실렸다. 조용만의 회고를 제외한 대부분의 증거들이 ‘구인회’의 창립일이 8월 26일이라는 〈조선중앙일보〉의 기사를 뒷받침하고 있고, 구체적인 모임 장소 또한 조용만의 기억과 달리 “광교 큰길에 있는 조그만 양식집”이 아니라 황금정에 있던 중화요리점인 아서원(雅廻園)이었다. 아서원은 1907년 산동성 복산현(福山縣) 출신의 서광빈(徐光賓)이라는 사람이 설립하여 1970년 폐점할 때까지 약 60년 동안 서울의 대표적인 중화요릿집이었다.
사정이 이렇다면 ‘구인회’가 카프의 프롤레타리아 문학에 반대하는 순수예술을 위해 결성되었다는 기존의 평가도 사후적으로 구성된 시선이 아닌지 의심해 보아야 한다. 1920년대와 1930년대, 카프의 프롤레타리아 문학과 구인회의 범(凡)모더니즘 문학은 확실히 대립·경쟁적 관계로 포착되기 쉽다. 실제로 기관지 《시와 소설》의 편집후기에 등장하는 이상의 진술(“구인회처럼 탈 많을 수 참 없다. 그러나 한 번도 대꾸를 한 일이 없는 것은 말하자면 그런 대꾸 일일이 하느니 할 일이 따로 많으니까다. 일후라도 묵묵부답 채 지날 게다.”)을 살펴보면 ‘구인회’를 겨냥한 카프의 비판이 있었던 듯하다. 아울러 ‘구인회’에 소속된 인물들의 문학적 경향을 살펴보면 이들의 모임 결성에 프롤레타리아 문학에 대한 반감, 즉 1920년대 문학의 주류적 경향과는 다른 성격의 문학을 추구하려던 의지가 짙게 투영되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의지가 곧 대타적인 의식의 발로를 설명하는 원인이 될 수는 없으니, ‘구인회’는 넓은 의미에서 비슷한 문학적 경향을 보이던 일군의 시인·소설가들이 순수한 문학적 목적으로 결성―정지용은 ‘구인회’를 글 좋아하는 친구들의 모임이며 계획이나 강령은 없다고 밝혔다―한 모임이라고 이해하는 것이 타당할 듯하며, 바로 이 점이 또한 그들의 결속을 느슨하게 만드는 한 원인으로 작용하기도 한 듯하다.
우리는 회원의 사상을 강제하지 안는다. 어느 단체에 끼여 어떤 사상행동을 하거나 어떤 경향을 작품에 강조하거나 절대 자유다. 다만 구인회 그것을 자기가 이용하려 들어서도 안 된다. 그런 야심이 생기면 벌써 우의에 불순이 생기기 때문에 불가불 남이 될 수박에 없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우리들에게 이미 남 되어 주기를 요구바든 회원도 잇섯다. 그럼으로 구인회 그 자체에게 어떤 정치적인 행동을 기대하는 것은 구인회의 성격을 모르기 때문이다. 구인회원인 작가가 개인으로나, 혹은 다른 단체에 끼어선 어떤 행동이든 할 수 있되 구인회로서는 〈글공부〉 그 이상에 나서지 못한다. 그러타고 그것이 구인회를 위해서 슬퍼하거나 못맛당해 할 이유는 아무 것도 업다. 애초에 붓으로 맨 것은 글을 쓰는 것으로 맛당하고 비로 맨 것은 마당을 쓰는 것만으로 맛당한 것이다.
이태준이 〈조선중앙일보〉 1835년 8월 11일 자에 “구인회에 대한 난해 기타”라는 제목으로 쓴 글 일부이다. 이 글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은 ‘구인회’가 회원들 개인의 정치적 성향에 대해서는 일체의 자유를 보장한다는 것, 구인회 자체를 특정한 정치적 성향으로 이끌어가려는 움직임에 대해서는 단호하게 반대한다는 것, 구인회의 활동과 성격은 오직 ‘문학’에 국한된다는 것이다. 이 단호한 반대의 구체적인 내용은 이무영을 탈회시킨 것이다. 1935년 6월 30일 《조선문단》 좌담회에서 김남천과 김광섭이 이무영과 조벽암의 탈회, 특히 그 자리에 참석한 이무영에게 구인회 탈퇴의 이유를 묻지만 이무영은 “글로는 발표할 수 있는 성격이지만 여기선 말할 수 없읍니다.”라고 침묵을 유지한다.
그렇다면 ‘구인회’는 실제 어떤 활동을 했을까? 이 질문에 대한 첫 번째 대답은 1934년 6월 17일부터 〈조선중앙일보〉에 11회에 걸쳐 연속 게재된 〈격(檄)!! 흉금을 열어 선배에게 일탄을 날림〉에서 찾을 수 있다. 이 기획에는 총 6명의 필자가 참여했는데, 처음 두 번의 칼럼을 집필한 임린을 제외한 5명(이무영, 이종명, 박태원, 조용만, 김기림)이 모두 구인회 멤버였다. 이들은 각각 이광수, 현진건, 김동인, 염상섭, 주요한을 비판의 대상으로 삼았는데, 공교롭게도 이 비판 대상자 명단에는 프롤레타리아 문학자가 한 사람도 포함되어 있지 않다. 이것은 카프와 구인회의 관계에 대한 기존 연구를 재검토할 필요가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다음으로 구인회는 〈조선중앙일보〉 학예부 후원으로 1934년 6월 30일에는 ‘시와 소설의 밤’을, 1935년 2월 18~22일에는 ‘조선신문예강좌’를 열었다. 마지막으로 1935년 4월에 창간호가 출판된 기관지 《시와 소설》 발행이 있다. 이에 대해서는 “이상은 다방을 집어치우고 구본웅 화백이 경영하는 창문사라는 인쇄소에 들어가서 교정을 보아주고 있었다. 그래서 구 화백의 호의로 그 이듬 이듬해 1935년 4월에 《시와 소설》이라는 제목으로 구인회 기관지가 나왔다. 오륙십 장의 얇다란 잡지로서 구보와 김유정이 단편을 썼고, 편집은 이상이가 맡아 하였다. 정가는 십전(拾錢)으로 기억되는데 잘 팔리지 않았는지 한 번밖에 못 내고 말았다.”(〈구인회의 기억〉 《현대문학》 1957년 1월호)라는 조용만의 회고와 다음과 같은 이상의 편집후기를 참고할 수 있다.
전부터 몇 번 궁리가 있었으나 여의치 못해 그럭저럭 해 오든 일이 이번에 이렇게 탁방이 나서 회원들은 모두 기뻐한다. 위선 화우(畵友) 구본웅 씨에게 마음으로 치사해야 한다. 쓰고 싶은 것을 써라 책을랑 내 만들어 주마 해서 세상에 흔이 있는 별별 글탄 하나 격지 않고 깨끗이 탄생했다. 일후도 딴 걱정 없을 것은 물론이다. 깨끗하다니 말이지 겉표지에서 뒷표지까지 예서 더 할 수 있으랴 보면 알 게다.
— 《시와 소설》(1935. 4) 창간호 편집후기
지금까지 밝혀진 사실을 바탕으로 《시와 소설》의 발간 과정을 정리하면 대략 다음과 같다. 시인 이상이 다방 ‘제비’를 폐업한 후 구본웅이 경영하던 인쇄소인 창문사에 들어갔고, ‘구인회’의 기관지인 《시와 소설》은 구본웅의 지원을 받아 이상이 편집을 맡아 출간되었다. 창간호 편집후기에서 이상은 기관지를 출간한 사실에 대해 무척이나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다. 이때까지만 해도 그는 “차차 페이지도 늘일 작정이다. 회원밖의 분도 물론 실닌다. 지면 벨으는 것은 의논껏하고 편집만 인쇄소 관계상 이상이 맡아보기로 한다.”처럼 이 기관지가 번창하리라고 믿었다.
하지만 약 1년 후 일본에 간 김기림에게 보낸 몇 통의 편지에서 이상은 “구인회는 그 후로 모이지 않았소이다.” “《시와 소설》은 회원들이 모두 게을러서 글렀소이다. 그래 폐간하고 그만둘 심산이오. 2호는 회사 쪽에 내 면목이 없으니까 내 독력으로 내 취미 잡지를 하나 만들 작정입니다.” “구인회는 인간 최대의 태만에서 부침중이오. 팔양이 탈회했소―. 잡지 2호는 흐지부지요. 게을러서 다 틀려먹은 것 같소.”처럼 ‘구인회’ 회원들의 게으름 때문에 두 번째 호를 발간하지 못하는 상황에 분개하고 있다. 하지만 이 시기에 구인회 회원들의 문학 활동이 미약했다고는 말할 수 없으며, 다만 기관지 《시와 소설》을 포함한 집단적 활동에 상대적으로 무심했던 듯하다. 이상에게 쓰라린 실패를 맛보게 한 회원들의 이 게으름은 실제로 구인회의 응집력이 그만큼 미약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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