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림 


3달 바다가 꽃이 피지 않서  흰나비가 된 이상은 그렇게 갔다.



                                                                                                                    이상

 

故 李箱의 追憶

고 이상의 추억

 

이상은 필시 죽음에 진 것은 아니라,

이상은 제 육체의 마지막 조각까지라도 손수 퍼내여 없애고 사라진 것이리라.

이상은 오늘의 일제 치하의 환경과 조선사회의 무지 속에 두기에는 너무나 아까운 천재였다.

이상은 한 번도 잉크로 시를 쓴 일은 없다.

이상의 시에는 언제나 그의 피가 흠뻑 젖어있다.

그는 스스로 제 혈관을 짜서 '시대의 혈서'를 쓴 것이다.

그는 현대라는 커다란 부서진 배에서 떨어져 표랑하던 너무나 처참한 선체조각이었다.

 

다방N, 등의자에 기대 앉아 흐릿한 담배연기 저편에 절반쯤 취해서 몽롱한 상의 얼굴에서 나는 언제고 '현대의 비극'을 느끼고 소름이 돋았다.

약간의 해학과 야유와 독설이 섞여서 더듬더듬 떨어져 나오는 그의 잡담 속에는 오늘의 문명의 깨어진 메커니즘이 엉켜 있었다.

파리에서 문화수호국제작가대회가 있었을 때 내가 만난 작가나 시인 가운데 가장 흥분한 것도 이상이었다.

이상이 우는 것은 나는 본 일이 없다.

그는 세속에 반항하는 한 악한(?) 정령이었다.

악마더러 울 줄을 모른다고 비웃지 마라.

그는 울다 울다 못해서 이제는 눈물샘이 말라버려서 더 울지 못하는 것이다.

이상이 소속한 20세기의 악마의 종족들(순수문학파)은 그러므로 번영하는 위선의 문명에 향해서 메마른 찬웃음을 토할 뿐이다.

흐리고 어지럽고 게으른 詩壇시단의 낡은 풍류에 극도의 증오를 품고 파괴와 부정에서 시작한 그의 시는 드디어 시대의 깊은 상처에 부딪쳐서 참담한 신음소리를 토했다.

그도 또한 세기의 어둠 속에서 불타다가 꺼지고 만 한줄기 첨예한 양심이었다.

그는 그러한 불안 동요 속에서 '動동하는 정신'을 재건하려고해서 새 출발을 계획한 것이다. 이 방대한 설계의 어구에서 그는 그만 불행히 자빠졌다.

상의 죽음은 한 개인의 생리의 비극이 아니다.

축소판으로 인쇄된 한 시대의 비극이다.

詩壇시단과 또 내 우정의 여럿 중에 채워질 수 없는 영구한 빈자리 하나 만들어 놓고 이상은 사라졌다.

이상을 잃고 나는 오늘 시단이 갑자기 반 세게 뒤로 물러선 것을 느낀다.

내 공허를 표현하기에는 슬픔을 그린 자전 속의 모든 형용사가 모두 다 오히려 사치하다. '고 이상'-내 희망과 기대 위에 부정의 도장을 사정없이 찍어놓은 故李箱 세 억울한 상형문자야.

 

반년 만에 이상을 만난 지난 3월 스무날 밤, 동경 거리는 봄비에 젖어 있었다.

그리로 왔다는 이상의 편지를 받고 나는 지난겨울부터 몇 번인가 만나기를 기약했으나 종내 仙臺센다이(동경에서 약350km)를 떠나지 못하다가 이날이야 동경으로 왔던 것이다.

이상의 숙소는 九段구단 아래 꼬부라진 뒷골목 2층 골방이었다.

이 '날개' 돋친 시인과 더불어 동경 거리를 거닐면 얼마나 유쾌하랴 하고 그리던 온갖 꿈과는 딴판으로 상은 '날개'가 아주 부러져서 몸도 바로 못하고 이불을 뒤집어쓰고 앉아 있었다.

전등불에 가로 비친 그의 얼굴은 상아보다도 더 창백하고 검은 수염이 코 밑과 턱에 참혹하게 무성하다.

그를 바라보는 내 얼굴의 어두운 표정이 가뜩이나 병들어 약해진 벗의 마음을 상하게 할까봐서 나는 애써 명랑을 꾸미면서

"여보, 당신 얼굴이 아주 '피디아스'의 '제우스' 신상 같구려." 하고 웃었더니 이상도 예의 정열 빠진 웃음을 껄껄 웃었다.

사실은 나는 '듀비에'의 '골고다의 예수'의 얼굴을 연상했던 것이다.

 

오늘 와서 생각하면 이상은 실로 현대라는 커다란 모함에 빠져서 십자가를 걸머지고 간 골고다의 시인이었다.

 

암만 누우라고 해도 듣지 않고 이상은 장장 두 시간이나 앉은 채 거의 혼자서 그 동안 쌓인 이야기를 풀어 놓는다.

"오스카와일드"위 전기를 쓴 "리차드 엘만(Richard Ellmann)"(1918~1987)을 찬탄하고

침체 속에 빠진 몇몇 벗의 문인으로서의 앞날의 운명을 걱정하다가 말이 그의 작품에 대한 이번 달의 비평에 미치자 그는 몹시 흥분해서 통속적인 비평을 꾸짖는다.

문학평론가 최재서의 모더니티를 찬양하고 또 씨의 '날개' 평은 대체로 승인하나 작자로서 다소 다른 주의가 있다고도 말했다.

나는 벗이 세평에 대해서 너무 신경 과민한 것이 벗의 건강을 더욱 해칠까보아서 시인이면서 왜 독자적인 작품을 쓰는 것을 그렇게 두려워하느냐, 세상이야 알아주든 말든 값있는 일만 정성껏 하다가 가면 그만이 아니냐 하고 어색하게나마 위로해 보았다.

 

이상의 말을 들으면 공교롭게도 책상 위에 몇 권의 상스러운 책자가 있었고 본명 金海卿김해경 외에 李箱이상이라는 별난 이름이 있고 그리고 일기 속에 몇 줄 온전하다고 할 수 없는 글귀를 적었다는 일로 해서 그는 한 달 동안이나ㅇㅇㅇ(유치장?)에 들어가 있다가 아주 건강을 상해 가지고 한주일 전에야 겨우 자동차에 실려서 숙소로 돌아왔다는 것이다.

이상은 그 안에서 다른 ㅇㅇ(공산?, 지하운동?)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수기를 썼는데 예의 명문에 계원도 찬탄하더라고 하면서 웃는다.

니시간다(西神田) 경찰서 속에조차 애독자를 가졌다고 하는 것은 시인으로서 얼마나 통쾌한 일이냐 하고 나도 같이 웃었다.

 

음식은 그 부근에 계신 허남용씨 내외가 죽을 쑤어다 준다고 하고 마침 素雲(김소운>이 동경에 와 있어서 날마다 찾아주고 극작가 주영섭, 삼사문학 동인인 한천, 여러 친구가 가끔 들러주어서 과히 적막하지는 않다고 한다.

이튿날 낮에 다시 찾아가서야 나는 그 방이 완전히 햇빛이 들지 않는 방인 것을 알았다.

 

지난해 1936년 7월 그믐께다.

아침에 황금정 뒷골목 이상의 신혼 보금자리를 찾았을 때도 방은 역시 햇빛 한줄기 들지 않는 캄캄한 방이었다.

그날 오후 조선일보사 3층 뒷방에서 벗이 애를 써 장정을 해준 졸저 '氣象圖기상도'의 발송을 마치고 둘이서 창에 기대서서 갑자기 거리에 몰려오는 소낙비를 바라보는데 창문 앞에 뱉는 이상의 침에 빨간 피가 섞였었다.

평소부터도 상은 건강이라는 속된 관념은 완전히 초월한 듯이 보였다.

이상의 앞에 설적마다 나는 아침이면 맨손 체조를 잊어버리지 못하는 내 자신이 늘 부끄러웠다.

무릇 현대적인 퇴폐에 대한 진실한 체험이 없는 나는 이 점에 대해서는 늘 이상에게 경의를 표했다.

그러면서도 그를 아끼는 까닭에 건강이라는 것을 너무 천대하는 벗이 한없이 원망스러웠다.

이상은 스스로 형용해서 천재일우의 기회라고 하면서 모처럼 동경서 만나가지고도 병으로 해서 뜻대로 함께 놀러 다니지 못하는 것을 한탄한다.

미진한 계획은 4월 20일께 동경서 다시 만나는 데로 미루고 그때까지는 꼭 맥주를 마실 정도로라도 건강을 회복하겠노라고, 그리고 햇볕이 드는 옆방으로 이사하겠노라고 하는 이상의 뼈뿐인 손을 놓고 나는 동경을 떠나면서 말할 수 없이 마음이 캄캄했다.

 

이상의 부탁을 부인 변동림에게 알리려 했더니 내가 서울 오기 전날 밤에 벌써 부인께서 동경으로 떠나셨다는 말을 서울 온 이튿날 전차 안에서 영문학자 조용만씨를 만나서 들었다.

그래 일시 안심하고 집에 돌아와서 잡무에 분주하느라고 다시 벗의 병상을 보지도 못하는 사이에 원망스러운 비보가 달려들었다.

"그럼 다녀오오. 내 죽지는 않소." 하고 이상이 마지막 들려준 말이 기억 속에 너무 선명하게 솟아올라서 아프다.

 

이제 우리들 몇몇 남은 벗들이 이상에게 바칠 의무는 이상의 피 엉킨 유고를 모아서 이상이 그처럼 애써 친하려고 하던 새 시대에 선물하는 일이다.

허무 속에서 감을 줄 모르고 뜨고 있을 두 눈동자와 영구히 잠들지 못할 이상의 괴로운 정신을 위해서 한 암담하나마 그윽한 침실로서 그 유고집을 만들어 올리는 일이다.

 

나는 믿는다.

이상은 갔지만 그가 남긴 예술은 오늘도 내일도 새 시대와 함께 동행하리라고.

 

-조광 3권 6호, 1937. 6-

                                               

원문http://blog.naver.com/fish20017/101520461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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