奧地人으로서 郵便當局에
三水 石村生
나의 사는 곳은 조선서 제일 가는 산골입니다.
누구나 三水, 甲山이라면 말할 수 업시 험한 산골인 줄로 아는 것은 녯날부터이다.
이러케 험한 살골이라서 그런지 또는 이런 곳에서 사니까 사람을 업수이 녁여서 그런지 우리 곳 우편 당국자는 우편물을 매우 무성의하게 취급하고 잇스니 그 심사를 알 수가 업습니다.
내가 전에 서울을 가서 어떤 친구의 집에 묵고 잇슬 때에 그곳 체신부가 편지를 가지고 그 집에 와가지고도 사람을 불너가지고 XXX氏가 잇느냐고 물어서 잇다고 하여야 비로소 전하고 가는 것을 보앗는데 이곳서는 그 집을 차저가기 커녕 실상 편지 바들 사람 잇는 곳에서 한 십리 밧 쯤 되는 곳인 구장(區長) 집에다 두고 가니 아모리 급한 편지라도 급히 바다볼 수가 업게 됩니다.
구장 집에서 묵히다 묵히다가 우리 집 근처에 잇는 사람이 혹시 그곳에 들니게 되여야 그것을 그 편에 보내고 또 그것을 가지고 온 사람이 자긔 일이 밧부면 그날로 전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그만 이저버리여 여러 날 되면 제면적어서 전하지 안코 흐지부지 업새버립니다. 이런 일은 혹간 가다가 잇는 레외의 일이라고 하겟지만 대체로 보아 직접 차저 전하는 것이 별로 업습니다.
서류(書留)이라야 마지못하야 가지고 옴니다.
편지뿐 아니라 일반 보통우편물은 죄다 그럿습니다. 나는 개벽사(開闢社)의 개벽(開闢) 창간호부터 보는 독자인데 매달 이것 보느라고 여간 힘드리지 안엇습니다.
책이 하도 조흐니까 우편소에 잇는 사람이 뜨더보다가 다 보고 나서 도로 싸서 전하지요.
이것을 또 구장 집에 갓다 두면 그곳에서들 펴처보지요. 이러케 한 것을 나종에는 동리 사람이 갓다 줍니다.
바다본즉 죄 헌책입니다. 그럼으로 본사에서 헌책 보낸 줄만 알고 그것을 도로 싸서 본사로 보낸즉 본사에서는 다 보고 나서 헌책을 도로 보낸다고 책망을 합니다.
그래 노발대발하야 본사로 편지하기를 나에게는 산골 사람이라고 무시하고 그런 헌책을 보내주엇느냐고 나물합니다. 이러케 하느라니 비용인들 얼마나 만히 들엇겟습니까. 이러케 헌책이라도 매달 제때에 꼭꼭 바더보게 되면 조켓지만 그것도 간혹 발행은 되얏다고 신문에 발표되는데 발표되야 십여 일을 기다려도 오지 안습니다. 그래 본사로 편지하지요.
그러면 본사에서는 X날 보내엿스니 만일 밧지 못하얏스면 조사하야 보라고 하는 편지가 옴으로 볼일을 못 보고 체부 오는 날을 기댜려 쪼차가서 무러봅니다.
무러보면 아니왓다고 합니다. 그래 본사로 다시 편지하면 본사에서도 참말 억울하게 된 것을 생각하시고 재송(再送)이라고 써서 또 보내줍니다. 이러케 해서 그 달이 거의 다 간 다음에야 그 달치를 바다보게 됩니다.
책은 보고 십고 돈은 업고할 수 업시 집에 잇는 곡식을 장에 갓다가 팔아서 주문을 합니다.
이즈음에는 개벽사에서 나오는 것 네 가지 그 외의 것도 한두 가지를 보는데 돈(이 끗츤 九頁 第四段에 繼續)<13>으로 말하면 1원이 즘 넘습니다.
이것을 한 달만 떼우게 되면 나의게는 여간 손해가 아닙니다. 나는 여지것 본사에서 보내지 안코 떼여먹군 하는 줄만 알엇더니 이즈음 여러 방면으로 조사해 본 결과 우편당국에서 취급을 무성의하게 하야 이런 일이 생기는 줄을 확실히 알앗습니다.
우리 조선 안에 이런 일 당하는 사람이 한둘에 끗치지 안을 것입니다.
그럼으로 나는 이와 가튼 사실을 드러 우편당국자의게 외람히 황의하노니 크게 깨다러 이후에는 이런 사고가 다시 생기지 안토록 주의해주기를 크게 바라고 잇는 바이다. -끗- <9>
<10-13, 9>
별건곤 제44호 | |
발행일 | 1931년 10월01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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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제목 | 나의 抗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