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수 -정지용 (손준호와 김소현 이중창) Nostalgia -유샤인 영어번역판
정지용 시인의 시평
정지용 시인에 대한 소고
정지용 시에 대한 소고
목 차
Ⅰ. 서론·· ····························2
Ⅱ. 鄭芝溶의 生涯와 文學的 背景···················3
Ⅲ. 모더니즘 志向性······ ·················8
1. 이미지즘의 수용····· ··················8
2. 이미지 分析·························11
Ⅳ. 카톨리시즘의 志向性········· ·············15
Ⅴ. 동양정신의 志向性······ ·················20
Ⅵ. 결론······························25
※ 참고문헌····························28
Ⅰ. 서론
한국 現代詩의 정신적 틀을 살펴보면, 전통성과 모더니티 지향이라는 두 가지 경향이 서로 대립하면서도 상호보안적인 관계를 유지하는 가운데 심화 발전되어 왔다. 1920년대 중반부터 활동하기 시작한 정지용은 한국 現代詩의 이러한 두 가지 흐름을 잘 조화시켜, 새로운 시세계를 전개함으로써 한국 현대시의 형성 과정에 중요한 발반을 제공하였다.
그러나 鄭芝溶은 이처럼 우리 문화사에서 대단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으면서도 그의 전기적인 발자취 때문에 1987년에 해금되는 불운을 겪어야 했다. 한때 금서 목록에 올라 있었던 관계로 그에 대한 연구가 미흡했던 것도 사실이었다. 그는 趙芝薰, 朴木月, 朴斗鎭 등 靑鹿派 시인들을 비롯한 이 땅의 많은 문인들을 배출한 공로자이며, 한국시단에 현대적인 詩魂과 언어 예술의 조탁의 기교를 보여준 시인이기도 하다.
이러한 의미에서 鄭芝溶 시 작품에 대한 연구는 대체로 전기적 고찰이나 유파 위주의 일방적 평가에 의존해 온 셈이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그의 작품은 그가 영·미 문학을 전공했다는 선입관 때문에 항상 서구적 모더니즘의 시각으로 논의되어 온 사실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文學作品은 작품 그 자체의 분석이 가장 우선되어야 한다고 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文學作品의 본질적 연구보다 작품 外的 여러 가지 요인과 환경을 탐색하
는 非本質的 연구가 많은 경향이 있다.
사실 鄭芝溶의 시는 모더니즘적 요소 외에 다양한 특성과 실험의식을 보여준다. 그는 작품 성향은 한 군데 안주했다기보다는 다양한 기법과 주제의식과 선구적 실험정신을 가지고 경작한 흔적을 볼 수 있다. 그의 시를 모더니즘이라는 특정한 유파로 묶어 분류한다는 것은 결국 1930년대 金起林, 崔載瑞 등의 몇몇 비평가들의 의견에 너무 동조한다고 밖에 보여진다. 이와 같은 편협한 시각은 학문적 영역의 극대화란 시대적 상황에 비추어 볼 때, 결코 바람직한 현상은 아니라고 본다. 한 시인의 정신적 토양은 시대나 환경에 따라 얼마든지 변화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본 논문은 그 성격상 형식적 구조의 연구보다 주제적 특질에 중점을 두어 鄭芝溶이 서구 문학을 단순한 모방대상으로 택하지 않고 주체적으로 수용하고 있는가를 살펴보고자 한다. 아울러 그의 시가 거느리고 있는 카톨리시즘과 동양 전통정신 지향의 시들이 그의 내면에 흐르고 있는 시정신과 어떻게 접맥되고 있는가를 실펴보고자 한다.
Ⅱ. 鄭芝溶의 生涯와 文學的 背景
鄭芝鎔은 1902년 충북 옥천읍에서 좀 떨어진 舊邑의 청석교 바로 옆에 위치한 촌가에서 한약상을 경영하던 延日 鄭氏 泰國을 아버지로 하고, 河東 鄭씨 美河를 어머니로 하여 그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머니의 태몽에서 유래되어 그의 아명을 '池龍'이라 했는데, 같은 발음에 뜻이 다른 한자를 맞춰 후에 '芝龍'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의 필명은 '芝龍'으로 초기의 작품을 발표할 때 많이 사용했고, 후기의 수필이나 논문류에서는 본명을 쓰고 있는 경우를 많이 볼 수 있다. 그의 세례명은 프란시스코, 창씨명은 '大弓修(오오유미 오사무)'이다.
부친 정태국은 젊었을 때, 중국과 만주 등지를 전전하면서 익힌 한의학을 바탕으로 고향에 돌아와 한약상을 경영하여 어느 만큼의 부를 축적했었으나, 불의에 밀어 닥친 홍수의 피해로 가세가 갑자기 기울어져 가난해 졌다고 한다. 그 후 정태국은 중국과 만주 등지를 돌아 다닐 때부터 믿었던 천주교를 버리고, 文化柳氏를 둘째 부인으로 맞이하여 화용, 계용 두 남매를 낳았으나, 그 중 아들 화용은 죽어서 결국 鄭芝龍은 4대 독자가 되었다.이와 같이 鄭芝龍은 형제들이 없었으므로 어린 시절 무척 외로이 자랐으리라 짐작된다.
'산문'에 기록된 그의 유년 시절에 대한 회상은 무척 고독하고 가난하고 슬펐던 것으로 나타난다.
어린이에 대한 글을 쓰라고 하시니 갑자기 나는 소년쩍 고독하고 슬프고 원통한 기억이 진저리가 나도록 싫어진다.
다른 글에서도 "나의 몸서리가 떨리도록 고독하고 가난하던 소년" 시절이라고 회상하고 있다.
이와 같이 고독하고 슬픈 소년에게 위로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어른들로부터 전해들은 옛이야기와 전설이었다. 그의 동시의 많은 부분은 이런 전설이나 민요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별동을 먹으면 오래 오래 산다는 것이었다. 별똥을 주워왔다는 사람이 있었다. 그날 밤에도 별똥이 찌익 화살처럼 떨어졌었다. 아저씨가 한번 모초라기를 산채로 훔쳐 잡어 온, 뒷산 솔푸데기 속으로 분명 바로 떨어졌었다.
당시만 해도 사회적으로는 대가족을 선호하던 시대였다. 그렇지만 그는 4대 독자로 자라난 체험과 가난한 환경, 유년의 자연 환경 등은 鄭芝溶의 문학적 숲을 형성하는 복합적 근원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鄭芝溶은 1910년 옥천 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하여 13살 때인 1914년 3월 25일 졸업했다. 이 사이에 1913년(12살)에 충북 영동군에 사는 동갑내기인 송재숙과 결혼했다. 鄭芝溶과 송재숙 사이에는 10명이 넘는 자녀가 태어났는데, 모두 태어나면서, 혹은 어려서 죽고 4남매만 자라게 된다.
이 시절 그는 한문공부를 하였다는 사실이 휘문보통고등학교의 졸업 학적부에 '沃川公普 졸업 후(大正 3년 3월) 한문수학'이라는 기록에서 입증된다.
그 후 鄭芝溶은 1918년에 휘문고보를 입학된다. 휘문고보 시절 鄭芝溶은 '搖藍' 동인을 만들어 활발한 문예활동을 하였으며, 소설「三人」을《曙光》지에 발표하기도 한다. 또한 1922년 '문우회' 활동에도 참가하여 학예부장으로《휘문》지 제1호를 발간하였다. 휘文高普 시절의 교우로는 洪思容, 朴鍾和, 金永郞, 李泰俊 등이 있다.
1923년에는 교비장학생으로 東志社大學 예과에 입학하여 1929년에 同大學 문학부 영문과를 졸업하였다.
鄭芝溶의 東志社大學 유학시절은 그의 詩歷과 자아성찰에 있어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 시기이다. 이때 그는 고향을 그리워하는 詩心과 향토적인 순수성을 형상화하는 상상력을 키워 나갔다. 이러한 자연적 분위기는 그가 이국(異國) 생활의 고독 속에서 그리워하던 마음의 고향이 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1926년에는《學潮》창간호에〈카페 프란스〉,〈슬픈 인상화〉,〈파충류 동물〉과 기타 동요, 시조를 발표하고,《新民》,《朝鮮之光》에〈이른봄 아침〉,〈바다〉,〈향수〉등을 계속 발표하여 시인으로서 기반을 다졌다.
또한 그는 유학 기간 동안에 카톨릭 신앙을 가지게 되는데, 이 카톨릭 신앙은 그가 사회생활을 할 때와 내면적 갈등을 치유하는데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이를 계기로《카톨릭 청년》(1933. 6 창간)지의 편집을 맡기도 하고, 해방 이후에는《경향신문》등 카톨릭 재단에서 주관하는 사업에 적극 참여하여 돕기도 하였다.
鄭芝溶 시인은 이런 독실한 신앙 생활을 바탕으로 한 시편들은〈不死鳥〉,〈나무〉,〈思惠〉,〈臨終〉,〈다른 한울〉,〈또하나 다른 태양〉,〈갈릴레아 바다〉등이 있다.
鄭芝溶은 1929년(28살) 東志社大學 영문과를 졸업하고, 그 해 9월에 文高等普通學校 영어과 교사로 취임하였다. 그가 본격적이고 그의 시의 방향에 대한 뚜렷한 의식을 가지고 문학 활동을 시작한 것이 이때부터였다.
1930년에는 朴容喆, 金永郞, 이하윤 등과《詩文學》동인으로 참가하여 활발한 詩作 활동을 한다. 鄭芝溶은 시문학 동인으로서 朴容喆과 친교 때문에《詩文學》,《文藝月刊》,《文學》등 朴容喆이 주간하는 잡지에 계속 작품을 발표하였다. 이 발표된 작품들을 주축으로 朴容喆의 기획에 의하여 鄭芝溶의 첫 시집인『鄭芝溶詩集』(1935. 10)을 詩文學社에서 출판하게 되었다. 이 책은 1935년 중반까지 발표된 작품을 모아 엮은 것으로 총 89편이 실려 있다. 이들 작품은 朴容喆의 발문에도 밝혀 있듯이 향토성을 바탕으로 하는 동요나 민요풍의 시들과 회화성을 강조한 이미지즘 계열의 시, 신앙시, 산문 2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의 첫 시집이 간행되자, 많은 사람들이 찬사를 보냈는데 金起林의 경우가 대표적이다. 그 이전의 감상적 시들이나 카프류의 사상 위주의 시에 대해 염증을 느끼고 있던 사람들에게『鄭芝溶詩集』의 발간은 경이로운 자체였던 것이다.
한편, 鄭芝溶은 1938년 '九人會'에도 참여하게 된다. '九人會'는 프로동맹 과는 달리 순수문학의 옹호를 취지로 하여 발족된 순수 문학인들의 모임이였다. 李鍾嗚와 김유영이 발기하여 李泰俊, 李無影, 柳致眞, 金起林, 趙容萬 등이 참석하였으며, 동인지로《시와 소설》창간호가 간행되었는데, 鄭芝溶은 여기에〈流線哀傷〉이란 시를 발표한다.
또한 1939년《文章》지 창간 당시 鄭芝溶은 詩 부문의 選考委員이 되어 재능 있는 후진들을 많이 배출하였다.《文章》지는 우리나라 최초의 문학 종합지로 일어 사용을 거부해서 폐간될 때까지 통권 27권을 낸다.《文章》지를 통해 鄭芝溶에게 추천 받은 시인은 靑鹿派 3인을 비롯하여 金鍾漢, 李漢俊, 朴南秀 등이 있다.
1941년 9월에는 제2시집인『白鹿潭』을 문장사를 통해 출간한다. 이것은《文章》지가 폐간된 1941년 4 후의 일이다. 鄭芝溶은 1936년 이후부터 동아일보와 조선일보사 등에서 지원을 받아 국토순례를 하고 기행문을 쓴 일이 있었는데, 시집『白鹿潭』에 실린 詩들은 그러한 여행 체험에서 얻어진 것을 형상화한 작품들이다. 초기의〈바다〉,〈고향〉의 詩들에 비교하면 깊이 있고 세계를 바라보는 눈이 넓고 높은을 볼 수 있다.
『白鹿潭』은 모두 5부로 편성되어 있으며, 총 33편잉 수록되어 있다. 1939년 2월에 창간된《文章》지 에 실린〈장수산〉과 〈白鹿潭〉그리고『新作 鄭芝溶 詩集』의〈조찬〉,〈비〉,〈忍冬茶〉등을 주축으로 엮었다. 鄭芝溶이『白鹿潭』을 출간한 시기는 정신적, 육체적으로 고난의 때였다. 그래도 그의 시적 특성은 창작기법 면에서 現代的 自覺과 방법을 탐색했다는 점이다.
그러나 鄭芝溶은 1941년『白鹿潭』을 발간한 이후 문학활동이 거의 멈추면서 납북으로 생을 마감한 1950년까지 鄭芝溶이 발표한 작품은 6편에 불과하다.
鄭芝溶은 8·15해방과 함께 이화여전 교수로 취임하여 한국어와 英詩와 羅典語를 가르쳤다.
1946년 9월에는 카톨릭계 신문《경향신문》의 창간과 함께 이 신문의 주간으로 취임하여 '餘滴'과 '社說'을 담당하였다. 이 무렵에 그는 문학과 거리가 먼 時論類를 많이 썼었다. 이들 시론류 대부분은 일관성이 없고, 애매한 논조를 펼치고 있다. 좌경 문학집단인 '文學家同盟'에 잠시 그의 이름이 오르내린 것도 그 무렵이다.
"한민당은 더러워서 싫고 빨갱이는 무시무시해서 싫다."라고 강의시간에 이화여전 학생들에게 한 말이나, "유물사관을 공부한 적이 없어서 이 問題는 내게 과분한 숙제입니다."라고 한 그의 말을 통해서, 좌익하고는 관계했던 인물이 아님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6.25때 월북한 것으로 오해받고 있는 것은 '文學家同盟'(1949)에 가입했었다는 사실과 그의 납북 과정에 대한 근거없는 글들 때문일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좀더 충분한 자료가 제시되는 대로 명확한 사실이 밝혀지리라 믿는다.
Ⅲ. 모더니즘 志向性
1. 이미지즘의 수용
1920년대의 시는 기법이나 시에 대한 태도에서 어느 정도 차이는 있지만 그 바탕을 이루는 포괄적인 정신은 감상적 浪漫主義라고 할 수 있다.《白潮》동인들의 시는 이 시대에 정신적 편향인 주관적 浪漫性과 데카당스 쪽으로 빠져 있었다. 1925년에 KAPF가 결성되면서 새로운 기풍이 이는 듯하나 오히려 백조파의 일부 시인들과 합세하여 이데올로기적 문학을 내세운다. 이러한 偏內容主義에 빠져 있는 것에 대한 반동으로 나타난 것이 현대적 성격의 모더니즘 시운동으로 나타난 것이다.
이마지스트(이미지스트)라는 말을 처음 명명한 E. 파운드는 "이미지란 知的 情的 複合體를 한 순간에 제시한 것이다. …… 그것은 최대의 걸작 앞에서 우리가 경험하는 突然한 해방감, 시공의 제한으로부터의 자유감각, 돌연한 增大감感의 표현이다."라고 말한다. 파운드가 정의한 복합체로서의 이미지는 T. E. Hulme의 이른바 乾燥하고 견고한 이미지의 개념에 바탕을 둔 것이라 하겠다.
이러한 이미지즘의 강령 골자를 요약해 보면, 명확한 이미지, 정확한 事物의 言語, 좋은 傳統, 主知的 態度, 새로운 리듬과 自由詩 등이 된다고 하겠다.
이는 객관적 태도, 감정의 절제와 지성 존중, 감각적 심상의 시, 비교적 시행이 짧은 시형식을 보여주고 있는 鄭芝溶의 시적 특성과 상통된다. 鄭芝溶 의 모더니즘 수용은 1926년《學潮》창간지에〈카페-프란스〉,〈슬픈 印象畵〉등을 발표한 시기로 파악되어 지는데 이는 한국 現代詩의 기점 문제와도 관련되고 있다.
옴겨다 심은 棕櫚나무 밑에
빗두루 슨 장명등
카페 프란스에 가쟈.
이놈은 루바쉬카
또 한 놈은 보헤미안 넥타이
삣적 마른 놈이 압장을 섰다.
밤비는 뱀눈처럼 가는데
페이브멘트에 흐늙이는 불빛
카페 프란스에 가쟈.
이 놈이 머리는 빗두른 능금
또 한놈의 心臟은 벌레 먹은 薔薇
제비처럼 젖은 놈이 뛰여 간다.
〈카페 프란스〉전반부
이처럼 鄭芝溶은 감정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고 시각적인 영상만으로 작품을 구성하는 것이 현대적이고 知的인 詩라고 생각했다. 작품의 내용과 표현 사이에 엄격한 거리를 인식하고 각별한 언어의 선택을 통해 하나하나의 영상을 정확히 표현하려고 했다.
또한 詩〈아츰〉에는 모든 사물이 선명하게 제 모습을 드러내는 객관적 셰계가 표현되고 있다 하겠다.
프로펠러 소리 ……
鮮姸한 커브를 돌아나갔다.
快晴! 짙푸른 六月 都市는 한 層階 더 자랐다.
나는 어께를 골르다
하품 …… 목을 뽑다.
붉은 수탉모양하고
피여 오르는 분수를 물었다 …… 뿜었다 ……
해ㅅ 살이 함빡 自孔雀의 꼬리를 폈다.
睡蓮이 花辯을 폈다
움츠라첫던 잎새. 잎새. 잎새
방울 방울 水銀을 바쳤다.
아아 乳房처럼 솟아오르는 水面
바람이 굴고 게우가 미끄러지고 하늘이 돈다.
좋은 아츰
나는 탐하듯이 呼吸하다.
때는 구김살 없는 흰돛을 달다.
〈아츰〉전문
일상적이고 역동적인 생활의 세계, 정지하고 있는 것 대신에 살아 숨쉬고 있는 세계를 표현 대상으로 할 때 시의 언어의 영역은 확대된다.
모더니스트 鄭芝溶은 천재적 민감으로 말의 (主로) 음의 가치와 이메지, 참신하고 원시적인 시각적 이메지를 발견하고 문명의 새아들의 명랑한 감성을 처음으로 우리 시에 이끌어 들었다. 鄭芝溶은 언어에 대한 혼의 정신을 불어넣어 생동감 넘치는 언어의 기교를 부렸다.
2. 이미지 分析
이미지즘의 영향을 받은 鄭芝溶의 詩는 현대적 감성으로 대상을 감각화하여 이미지로 제시하고 있다.
鄭芝溶의 詩〈바다 1〉에서 바다는 母性的 이미지는 어떤 작용을 하고 있으며 물과 연관된 바다를 중심으로 나타난 열린 想像力은 어떤 이미지적 양태로 발전되고 있는가를 살펴보자.
오·오·오·오·오· 소리치며 달려가니
오·오·오·오·오· 연달어서 몰아온다
간 밤에 잠 살포시
머언 뇌성이 울더니.
오늘 아침 바다는
포도빛으로 풀어졌다.
철석, 철얼석, 철석. 처얼석, 철석,
제비 날어들 듯 물결 새이새이로 춤을 추어.
〈바다 1〉全文
1연은 바다의 살아있는 움직임을 파도에 비유한 것이고. 2연은 닫힌 공간을 젖히고 무엇인가 꿈의 실현하려고 발버둥치는 의지를 나타낸 것으로 '간 밤'의 이미지는 그의 잠재 의식적 표현이다.
3연에서는 '뇌성'이라는 청각적 이미지를 '포도빛'이라는 시각적 이미지로 변화하는 작용을 시도하여 새로운 세계에 대한 동경을 무의식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鄭芝溶의 시에 나타난 바다의 이미지는 모든 생명의 어머니인 동시에 영원을 상징하는 이미지일 뿐만 아니라, 탄생과 죽음의 兩義적 이미지 가운데, 탄생의 역확을 담당하고 있다. 이러한 바다의 이미지는 한 단계 上昇한 세계 곧 땅의 세계로 이동한다.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회돌아 나가고,
얼룩백이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 그 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질화로에 재가 식어지면
뷔인 밭에 밤바람 소리 말을 달리고,
엷은 조름에 겨운 늙으신 아버지가
짚 벼개를 돋아 고이시는 곳,
--- 그 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흙에서 자란 내 마음
파아란 하늘 빛이 그립어
함부로 쏜 활살을 찾으려
풀섶 이슬에 함추름 휘적시든 곳,
--- 그 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傳說바다에 춤추는 밤물결 같은
검은 귀밑머리 날리는 어린 누이와
아무러치도 않고 여쁠 것도 없는
사철 발 벗은 안해가
따가운 해ㅅ살을 등에지고 이삭 줏던 곳,
--- 그 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하늘에는 석근 별
알수도 없는 모래성으로 발을 옮기고,
서리 까마귀 우지짖고 지나가는 초라한 지붕,
흐릿한 불빛에 돌아 앉어 도란 도란거리는 곳.
--- 그 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鄕愁〉전문
이〈鄕愁〉는 1927년《조선지광》65호에 발표되었으며 鄭芝溶의 대표작 중의 한 편으로 가장 많이 평가받고 있으며 공간과 시각의 특성을 잘 나타낸 작품이다.
위 詩는 상실감을 바탕으로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회고하면서 나타내고 있다. 각 연에서 고향의 구체적 영상을 선명한 이미지로 나타내며, 반복구에서는 고향에 대한 애절한 그리움을 노래한다. 이 고향의 이미지에서 한층 상승적 이미지를 추구한 작품으로 그의 대부분의 宗敎詩와 제2시집『白鹿潭』에 실린 산을 주제로 한 詩가 있다.
그 중에서도〈나무〉는 上昇的 뚜렷하여 프라이가 주장한 묵시적 心象인 '생명의 나무'에 대한 이미지와 연결시켜 볼 수도 있다. 바슐라르도 樹木은 지상의 生命을 푸른 하늘로 운반해 가는 현혹되지 않는 힘으로 보고 있어서 N. 프라이의 의견과 접근하고 있다.
나무의 直立性을 인간의 直立性과 동일화 한다. 直立性의 위쪽은 하늘을 향하고 아래쪽은 흙을 향한다. 이러한 上下의 관계는 나무나 사람이나 마찬가지다.
이 원형적 이미지는 地上을 떠나 山으로 이동한다. 산은 하늘과 땅의 중간에 위치에서 오르내리는 길목의 역할을 한다. 山은 항상 위를 향해 열려져 있는 문이며 神이 하강하고 人間이 상징적으로 승천할 수 있는 聖域이다. 또한 시적인 이미지가 山, 山頂, 골짜기 등의 공간을 가질 때는 地上의 모든 現實과 인연을 끊고 自然과 밀착하게 된다.
따라서 山을 제재로 한 克己, 淸潔, 無慾의 세계를 지향하면서 天國과 접근을 갈망하는 상승적 이미지로 나타나게 된다.
絶頂에 가까울수록 뻑국채 꽃키가 점점 消耗된다. 한마루 오르면 허리가 슬어지고 다시 한마루 우에서 모가지가 없고 나종에는 얼굴만 갸옷 내다본다. 花粉처럼 版박힌다. 바람이 차기가 咸鏡道끝과 맞서는 데서 뻑국채 키는 아조 없어지고도 八月한철엔 흩어진 星辰처럼 爛漫하다. 山그림자 어둑어둑하면 그러지 않어도 뻑국채 꽃밭에서 별들이 켜든다. 제자리에서 별이 옮긴다. 나는 여긔서 기진했다.
〈白鹿潭〉중 일부
白鹿潭도 인간의 삶에 대한 社會的, 역사적 現實을 털어버리고, 결국 상승적 이미지, 곧 묵시적 이미지의 궁극의 목표인 천국에 도달하고져 하는 詩人의 욕구이다.
지금까지 鄭芝溶의 詩에 나타난 이미지가 어떤 성격으로 전개되는가를 살펴보았다.
바다라는 개방적 이미지에서 고향이라는 폐쇄적 이미지로 하늘과 山이라는 상승적 이미지로 변이 되어 가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Ⅳ. 카톨리시즘의 志向性
鄭芝溶에게 있어서 信仰詩는 宗敎的 체험에서 우러나온 神과 영적인 교류이며 대화다. 따라서 神에 대한 영혼의 갈망이다.
『鄭芝溶詩集』제4부에 있는〈不死鳥〉〈나무〉〈恩惠〉〈별〉〈臨終〉〈갈릴레아바다〉〈그의 반〉〈다른 한울〉〈또 하나 다른 太陽〉등을 중심으로 생각할 때, 그의 宗敎詩의 세계에는 신앙·소망·구원의 사상이 담겨져 있다.
鄭芝溶이 선택한 신앙적 자아는 도피적인 자아이며, 현실도피로서 구원을 얻고자 하는 셈이 된다. 鄭芝溶에게서는 신앙시는 事物詩의경우처럼 감각적 心象을 사용했음에도 불구하고 종교적 테의 관념적 진술에 치우친 나머지 詩的인 肉化를 이루어 내지 못한다. 그의 신앙시가 신앙과 생활이 분리도었듯이 감수성도 분리된 인상을 던져준바. 엘리어트가 말한 것처럼 宗敎詩도 일반시처럼 '全人的 인격체'로서의 우리에게 영향을 주어야 한다. 이것이 카톨릭시즘의 기본정신이기도 하다.
먼저 신앙의 문제를 다른 시를 살펴보면〈갈릴레아바다〉〈그의 반〉을 들 수 있을 것이다.
나의 가슴은
조그만 '갈릴레아 바다'.
때없이 설레는 波濤는
美한 風景을 이룰 수 없도다.
예전에 門弟들은
잠자시는 主를 깨웠도다.
主를 다만 깨움으로
그들의 信德은 福되도다.
돗폭을 다시 펴고
키는 方向을 찾았도다.
오늘도 나의 조그만 '갈릴레아'에서
主는 짐짓 잠자신 줄을-
바람과 바다가 잠잠한 후에야
나의 嘆息은 깨달었도다.
이 작품은 新約聖書의 마가복음 4장에 나오는 이야기를 문제로 한 詩다. 예수께서 제자들을 데리고 갈릴레아 바다를 건널 때, 예수께서 믿음의 힘으로 보이신 기적의 고사가 우리에게 보이는 교훈을 주제로 한 詩이다. 시적 話者도 예수의 제자들과 같이 의심을 갖기도 했지만, 어려운 일이 무사히 지나갈 때마다 자신의 부족한 信仰心을 알고 탄식하고 신앙심을 더 깊게 했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다. 이 작품과는 좀 다른 방향으로 신앙심을 나타내는 작품으로〈그의 반〉이 있다. 하느님에 대한 찬양을 통해 신앙심을 나타내는 작품이다. '그의 반'이란 하느님의 반이란 뜻이다. '반'은 인간을 정신과 육체로 나누었을 때 정신은 하느님의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시적 話者는 하느님을 인간이 존경할 수 있는 가장 훌륭하고 아름다운 대상으로 보고 찬양하고 신앙심을 나타내는 것이다.
성모마리아에 대한 강한 신앙심을 나타내는 것으로는〈또 하나 다른 太陽〉이 있다. 이 작품에서 詩的 話者의 信仰心에 대한 강한 의지가 보인다. 죽음이 다가와도 깊은 산 속에 '외로운 사슴처럼' 벙어리가 된다 하여도 자신의 행복은 聖母마리아를 믿고 의지하면 찾을 수 있으리라는 믿는다. 한 편의 신앙 고백을 하는 기도처럼 읽힌다고 말 할 수 있다.
기독교에서 소망이란 하느님을 충실히 믿고, 성경의 말씀에 따라 살고 구원받기를 바라는 것이다. 이러한 소망은〈나무〉, 〈별〉등에 잘 나타나 있다. 기독교 신자가 되는 것은 구원받기 위해서다. 구원은 영원히 죽지 않는 길이며, 죽음을 미소지으며 맞이할 수 있는 자의 축복이기도 한 것이다. 죽음으로부터 자유스러울 수 있는 경지에 이르렀다면, 불안의식을 초극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죽음의 초극을 노래한 작품으로〈臨終〉이 있다.
나의 림종하는 밤은
귀또리 하나도 울지 말라
나종 죄를 들의신 神父는
거룩한 産婆처럼 나의 靈魂을 갈르시라.
聖母就潔禮 미사때 쓰고남은 黃觸불!
---중략
달고 달으신 聖母의 일홈 불으기에
나의 입술을 타게 하라.
〈臨終〉
시적 話者는 임종의 순간을 상상하면서 그 순간을 엄숙한 고요 속에서 맞고 싶다는 소망을 지닌다. 마지막 연에서는 입술이 타도록 聖母마리아를 부르고 싶다는 것이다. 鄭芝溶은 하나님이나 예수보다도 聖母마리아를 찾는 경우가 많다. 순수하고 깨끗한 聖女인 마리아에게 鄭芝溶은 더 구원의 손길을 내민 것이다.
이 작품은 鄭芝溶의 종교시 중에서 가장 다양하고 화려한 이미지로 구성된 작품이다.
비애의 고통으로부터 벗어나 구원받은 경지를 노래한 작품으로〈不死鳥〉가 있다. 鄭芝溶은 悲哀를 죽지 않은 不死鳥라고 일컫고 있다. 영원히 사라질 수 없는 悲哀를 靑春이 다한 어느날 사라지게 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悲哀를 초극하여 마음의 평안을 얻었다는 것이다.
이처럼〈不死鳥〉는 원형적 한 인간으로서 비극적 人間像을 그리고 있다. 詩的 自我는 슬픔과 동체가 되어 "박힌 화살, 날지 않는 새"이며, 죽지도 않는 '不死鳥'이기 때문에 그가 피할 수도 초극할 수도 없는 것이다. 이런 숙명적인 조건과 의식은 人間은 타고나면서 '원죄적 존재'라는 기도교적 의식의 등가물과 연계된다. 詩的自我는 여기서 더욱 逆說的으로 슬픔을 "나의 神父"라고 까지 하여 일종의 운명애마저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宗敎詩를 믿음이나 소망 혹은 구원만을 나타내는 詩라고 본다면 문제가 있다고 본다. 믿음과 소망·구원은 별개의 것이 아니라 서로 연결되어 있는 정신구조이다. 그런 의미에서〈나무〉라는 작품은 鄭芝溶의 종교시의 특성을 종합적으로 포함하고 있다고 하겠다.
얼골이 바로 푸른 한울을 울어렀기에
발이 항시 검은 흙을 향하기 욕되지 않도다.
곡식알이 거꾸로 떨어져도 싹은 반듯이 우로!
어느 모양으로 심기여젔더뇨? 이상스런 나무 나의 몸이여!
오오 알맞은 位置! 좋은 우아래!
아담의 슬픈 유산도 그대로 받았노라.
나의 적은 年論으로 이스라엘의 二千年을 헤였노라.
나의 存在는 宇宙의 한낱 集燥한 汚點이었도다.
목마른 사슴이 샘을 찾어 입을 잠그듯이
이제 그리스도의 못박히신 발의 聖血에 이마를 적시며 -
오오! 新約의 太陽을 한아름 안다.
〈나무〉
첫 부분에서는 하나님께로 향하여 가까이 가려는 소망을 나타내고, 셋째 연과 넷째 연에서는 원죄사상과 신앙심을 다섯째 연에서는 구원의 사상을 나타내고 있다.
결국 鄭芝溶이 선택한 신앙적 자아는 도피적 자아이며 현실 도피로써 구원을 얻은 셈이 된다. 종교로의 귀의가 반드시 현실도피를 하는 것은 아니다. 진정한 종교시는 시인의 실존적 상황으로부터 도피하지 않으면서 영적 체험이나 불확실성의 실재를 추구할 때 탄생한다. 이런 점에서 그의 신앙적 자아는 아직 미성숙한 단계에 놓여 있다고 본다.
Ⅴ. 동양정신의 志向性
鄭芝溶의 시는 대체로 이미지즘적 技法을 수용한 감각적인 詩가 주종을 이루고 있다. 그러나 主題의 성격은 카톨릭 신앙을 바탕으로 한 宗敎詩와 동야적인 思惟에 근거를 둔 전통적인 詩로 크게 나누어 볼 수 있다. 鄭芝溶의 시에서는 이미지즘 내지 모더니즘적 색채를 띤 경우라 하더라도 동양적 체질과 미학만은 가볍게 넘길 수 없다. 鄭芝溶의 동양정신에의 경도는 그의 詩論에서도 많이 발견할 수 있다. 그의 말대로 詩는 言語로 肉化되어야 한다. 이 육화의 방법은 지금까지 연구하여온 것들과는 달리, 서구의 것에서 획득하기 보다는 동양에서도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
실제로 鄭芝溶은 지금까지 여러 문학연구가들의 주장처럼 모더니즘에 함몰되어 있는 詩人은 아니라고 본다. 왜냐하면 그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鄕愁〉등은 우리 고유의 가사와 민요의 숨결을 담아 원용하고 있거나 詩的 발상이나 기법의 처리에서도 동양의 고전을 원용한 작품이 상당히 많다.
鄭芝溶은 한 때 당시의 苦痛을 카톨릭신앙에 의한 견인적 정신으로 나타내고자 하였으나, 곧바로 그 항해의 방향을 수정하게 된다. 그것은 그의 피 속에 흐르는 동야적 정신주의가 근본적인 이유일 것이다. 그렇다면 그의 동양적정신의 실체는 과연 어떤 작품에 남아 있는가를 살펴보면서 이야기를 전개해 보고자 한다.
그의 시는 당시 누구보다도 東洋的 傳統性을 바탕으로 삼아 다양한 실험정신을 전개했기 때문이다. 朴容喆도『鄭芝溶詩集』발문에서 "芝溶은 한군데 自安하는 시인이라기보다는 새로운 詩境을 개척하고자 하는 시인"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鄭芝溶은 한국 최초로 본격적인 散文詩를 개척했으며, 李箱과 더불어 연작시를 시도했다. 童謠詩 25편, 시조 9편, 소설 1편을 창작한 장본인이다. 鄭芝溶이 이미즘의 영향을 받았다지만 그의 詩的 特色은 분명히 동양의 전통과 방법이다. 이런 토양을 바탕으로 하여 그의 詩的 完成을 이룩해 나간 것이다.
그러나 鄭芝溶의 시어에서 많이 나오는 센티멘탈한 로맨시티즘에 대하여 살펴보자.
朴容喆의 詩가 관념적인데 대해 鄭芝溶의 詩는 감각적인 것이 특색이다. 그의 맵짠 言語의 節制와 선명하고 的確한 이미지는 一見 英美의 이미지스트들의 詩를 연상케 하지만, 그가 이미지스트의 영향을 받은 확증은 없다.
鄭芝溶의 시들 가운데 모더니즘의 표본으로 내세우고 있는 작품에서도 그 발상이나 詩想의 전개방식은 동양의 미학을 바타으로 한 漢詩的인 수법에 속한다. 이런 성향의 작품은〈비〉에서도 볼 수 있다.
돌에
그늘이 지고.
따로 몰리는
소소리 바람.
앞섰거니 하야
꼬리 치날리여 세우고.
죵죵다리 깟칠한
山새 걸음걸이.
여울지여
수척한 흰 물살.
갈갈이
슨가락 펴고.
멎은 듯
새삼 돋는 비ㅅ낯.
붉은 닢 닢
소란히 밟고 간다.
〈비〉全文
문학 연구가들이 이미지즘의 영향으로 받은 詩의 표본으로 내세우고 있는 이 작품은 시인의 감정이 극도로 배제되어 있다. 시의 분위기도 한 폭의 山水畵를 느끼게 한다. 이 작품에서 시인의 숨결, 곧 인간적 삶의 속성을 배제시킨 창작기법은 한국이나 중국의 敍事詩에서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다. 또한 이 詩가 보여주고 있는 정교한 언어의 正確한 표출과 절제력도 이미지즘의 詩의 技法이라고만 볼 수 없다. 漢詩의 기법에서도 적확한 시어를 사용하여 압축적인 절제미를 창작의 기본으로 삼아온 것은 사실이기 때문이다. 鄭芝溶은 "감정의 절제를 가능한 한도까지 감행해 본 한국 최초의 시인"이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면 崔東鎬의〈비〉에 대한 평을 살펴보자.
鄭芝溶의〈비〉는 그 표출방법이 동양의 山水畵的 수법과 맥락을 함께 하며, 그 안에는 산수화가 담고 있는 은일의 정신이 담겨 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아니될 것이다. 따라서 위에서 언급한 일련의 芝溶詩를 山水詩로 명명하는 이유는 동양적 기법과 정신 양면에서 그의 시를 정의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그의 산수시와 은일의 정신은〈비〉외에도 여러 작품에서 발견되지만, 특히 1941년 1월《文章》지에 발표된〈朝餐〉,〈忍冬茶〉등의 詩와〈玉流洞〉〈九城洞〉〈長壽山〉〈白鹿潭〉등의 시에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여기에서 〈九城洞〉에 대하여 더 자세히 들여다 보자.
골작에는 흔히
流星이 묻힌다.
黃昏에
누뤄가 소란히 싸히기도 하고
꽃도
귀향 사는 곳,
절터 드랬는데
바람도 모히지 않고
산그림자 설핏화면
사슴이 일어나 등을 넘어간다.
〈九城洞〉전문
이 작품은 인간세계와 완전히 단절된 구성동은 탈속한 작자의 정신세계를 상징하고 있다. 즉 시대적 중압과 정신적 위기감을 山이 주는 정신적 침잠으로 극복하고자 했던 그의 시의식을 역볼 수 있다.
鄭芝溶의 대표적인 후기시인〈白鹿潭〉에서도 동양 고전과 더불어 두보의 詩가 자연스러운 모습으로 나타난다.
가재도 긔지 않는 白鹿潭 푸른 물에 하눌이 돈다.
〈白鹿潭〉9연의 일부
江闊浮高棟
雲長出斷山
杜甫의〈遠游〉1, 2 句
두보의 詩는 '江이 넓으니 높은 용마루의 그림자가 떠 비친다'는 뜻으로서, '浮動'의 의미가 된다. 강물에 높다란 용마루의 그림자가 떠 비친다는 뜻의 '遠游'의 시적 환경은 '백록담 푸른 물에 하늘이 돈다'는 환경과 비슷하기 때문에 이미지상의 작시법이 유사하게 느겨진다.
지금까지 우리는 鄭芝溶의 작품에 나타난 동양 정신의 美學이 오떤 양상으로 전개되었는지를 살펴보았다.
鄭芝溶의 시에서 詩語의 的確한 사용, 압축적인 언어의 節制力, 短詩構造의 실험, 회화적이면서도 山水畵的인 정신세계, 표현기법의 漢詩 기법의 영향, 죽음에 대한 이질적 가치관 등은 그가 東洋的 詩정신을 바탕으로 실험정신과 技巧를 접목시키고자 한 노력을 흔히 발견할 수 있었다.
이 논문에서 鄭芝溶 문학의 총체성을 조명해 보면서 그의 문학성의 본질이 어디에 있는가를 살펴보았다.
Ⅵ. 결론
본 논문에서는 鄭芝溶의 문학세계를 살펴보기 위하여 이를 모더니즘 志向性, 카톨리시즘 志向性, 동양정신의 志向性으로 구분한 다음, 그 작품의 주제와 시의 특색을 살펴 보았다. 이와 같은 점을 토대로 하여 이 시인의 문학사적 위상을 종합적으로 밝혀봄으로써 본 논문의 결론을 삼고자 한다.
鄭芝溶의 시를 살펴보고 그 특색을 이해하기 위한 첫걸음은 그의 生涯와 文學觀에 대해서도 들여다보았다.
鄭芝溶은 개화기에 태어나 전원적 분위기에서 자랐고, 어린 시절 한문 수학을 하였으며, 서울과 일본 유학을 통해 都市的 체험을 하게 된다.
이런 경험은 이 시인의 문학관과 작품 세계를 형성하는 바탕으로 작용하였으므로, 鄭芝溶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해 준 것이었다.
鄭芝溶의 초기시는 그의 문학의 출발점이자 그 기본 토대이기도 하다. 이 시기의 작품을 검토해 본 결과, 그이 詩는 전통과 모더니티라는 두 가지 문학적 특성을 동시에 공유하고 있었다. 예를들면 데뷔작에 해당하는〈카페 프란스〉경향의 詩가 모더니티 지향이라면,〈鄕愁〉〈유리창1〉등은 이러한 시인의 편협성을 극복하고, 조화와 질서의 세계를 추구하고 있다. 이것은 초기시에 나타난 이미지즘의 수용 양상을 살펴보면 더욱 분명하게 파악할 수 있었다. 정지용이 영미의 이미즘의 영향을 받은 것은 분명하지만, 그것을 그대로 받아들이는데 만족한 것이 아니라 동양적 전통성과 결합하고자 노력하였다.
지용은 동양 시세계의 고담과 명징성, 절제의 미학을 현대적으로 수용하여 발전시킴으로써 동 시대의 문단에 감수성을 개선시키는 역할을 하였다.
정지용의 초기시는 엄격히 말해서 즉물시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다. 이런 초기시의 반성에서 신앙시가 탄생된 것으로 보인다. 초기시의 한계 극복의 원리로 선택한 것이 카톨릭시즘이라고 본다. 그의 신앙시가 그러한 시대 인식을 어느 만큼 적절하게 구현하고 있는가 하는 점에서 많은 의문을 던질 수 밖에 없다.
엘리어트 등은 카톨릭시즘을 서구 문학의 원점으로 파악하고, 이런 사상적 기초 위에서 현대인의 위기를 그복하려는 문명 비판적 안목을 가졌는데 비하여 정지용에게는 그와 같은 역사의식이 결핍되어 있었다.
정지용은 이러한 한계점에 빠지자 다시 山水詩의 양식을 선택했다. 시집 《白鹿潭》은 이러한 점에서 중요한 의의를 지닌다. 이 시집속에 실린 일련의 작품들은 한국 現代詩의 새로운 도달점에 다다른 것이다. 그의 山水詩는 도시와 문명에 대한 자연의 인식에서 출발하고 있다. 여기서 자연이란 시인의 내부에 놓인 에덴의 축도와 같은 것이다. 지용은 이와 같은 내부세계의 꿈을, 동양 사상의 핵심을 이루는 선비 정신과 전원 취향으로 결합시키고 있다.
한 시대의 전통이 아무리 타락할지라도 정통 정신만 확고하다면 그 사회는 구제받을 수 있다는 T.S. 엘리어트의 견해를 빌린다면, 정지용은 선비 정신에 입각하여 식민지 시대의 정신적 황폐상을 극복시켜려 했던 것 같다. 그의 山水詩는 이러한 선비 정신의 문학적 구현이다.
그런데 정지용의 山水詩는 이와 같은 現代詩의 복잡성을 적극적으로 제시하고 있느냐는 점에서 문제점을 안고 있다. 이 시인의 경우, 전원적 삶의 표상들은 현실의 때문은 징후들을 모두 버린 뒤의 공허한 메아리와 같이 존재하고 있다.
다시 종합해 말하면, 정지용은 전통(지속)과 변화(모더니티)라는 문학사의 두 축을 잘 결합함으로서 톡특한 시세계를 구축하였다. 정지용의 시적 매력은 이런 점에서 찾을 수 있다. 이러한 큰 업적을 쌓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여러 가지 한계에 부딪쳤다. 그 중 가장 큰 실패의 요인은 역사인식의 치열성 부족이라고 본다. 더욱 안타가운 점은 동시대의 함께 살아가는 서민들의 애환을 당나라 시인 두보처럼 절창으로 노래한 詩가 찾기 힘들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동서 문화의 만남의 겪변기 사회의 시인으로서 자기 시대의 실체를 잘 인식하고, 그에 맞는 시적 양식을 전개함으로서 한국 現代詩의 발전적 토대를 구축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정지용 시에 대한 소고
목 차
Ⅰ. 서론·· ····························2
Ⅱ. 鄭芝溶의 生涯와 文學的 背景···················3
Ⅲ. 모더니즘 志向性······ ·················8
1. 이미지즘의 수용····· ··················8
2. 이미지 分析·························11
Ⅳ. 카톨리시즘의 志向性········· ·············15
Ⅴ. 동양정신의 志向性······ ·················20
Ⅵ. 결론······························25
※ 참고문헌····························28
Ⅰ. 서론
한국 現代詩의 정신적 틀을 살펴보면, 전통성과 모더니티 지향이라는 두 가지 경향이 서로 대립하면서도 상호보안적인 관계를 유지하는 가운데 심화 발전되어 왔다. 1920년대 중반부터 활동하기 시작한 정지용은 한국 現代詩의 이러한 두 가지 흐름을 잘 조화시켜, 새로운 시세계를 전개함으로써 한국 현대시의 형성 과정에 중요한 발반을 제공하였다.
그러나 鄭芝溶은 이처럼 우리 문화사에서 대단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으면서도 그의 전기적인 발자취 때문에 1987년에 해금되는 불운을 겪어야 했다. 한때 금서 목록에 올라 있었던 관계로 그에 대한 연구가 미흡했던 것도 사실이었다. 그는 趙芝薰, 朴木月, 朴斗鎭 등 靑鹿派 시인들을 비롯한 이 땅의 많은 문인들을 배출한 공로자이며, 한국시단에 현대적인 詩魂과 언어 예술의 조탁의 기교를 보여준 시인이기도 하다.
이러한 의미에서 鄭芝溶 시 작품에 대한 연구는 대체로 전기적 고찰이나 유파 위주의 일방적 평가에 의존해 온 셈이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그의 작품은 그가 영·미 문학을 전공했다는 선입관 때문에 항상 서구적 모더니즘의 시각으로 논의되어 온 사실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文學作品은 작품 그 자체의 분석이 가장 우선되어야 한다고 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文學作品의 본질적 연구보다 작품 外的 여러 가지 요인과 환경을 탐색하
는 非本質的 연구가 많은 경향이 있다.
사실 鄭芝溶의 시는 모더니즘적 요소 외에 다양한 특성과 실험의식을 보여준다. 그는 작품 성향은 한 군데 안주했다기보다는 다양한 기법과 주제의식과 선구적 실험정신을 가지고 경작한 흔적을 볼 수 있다. 그의 시를 모더니즘이라는 특정한 유파로 묶어 분류한다는 것은 결국 1930년대 金起林, 崔載瑞 등의 몇몇 비평가들의 의견에 너무 동조한다고 밖에 보여진다. 이와 같은 편협한 시각은 학문적 영역의 극대화란 시대적 상황에 비추어 볼 때, 결코 바람직한 현상은 아니라고 본다. 한 시인의 정신적 토양은 시대나 환경에 따라 얼마든지 변화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본 논문은 그 성격상 형식적 구조의 연구보다 주제적 특질에 중점을 두어 鄭芝溶이 서구 문학을 단순한 모방대상으로 택하지 않고 주체적으로 수용하고 있는가를 살펴보고자 한다. 아울러 그의 시가 거느리고 있는 카톨리시즘과 동양 전통정신 지향의 시들이 그의 내면에 흐르고 있는 시정신과 어떻게 접맥되고 있는가를 실펴보고자 한다.
Ⅱ. 鄭芝溶의 生涯와 文學的 背景
鄭芝鎔은 1902년 충북 옥천읍에서 좀 떨어진 舊邑의 청석교 바로 옆에 위치한 촌가에서 한약상을 경영하던 延日 鄭氏 泰國을 아버지로 하고, 河東 鄭씨 美河를 어머니로 하여 그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머니의 태몽에서 유래되어 그의 아명을 '池龍'이라 했는데, 같은 발음에 뜻이 다른 한자를 맞춰 후에 '芝龍'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의 필명은 '芝龍'으로 초기의 작품을 발표할 때 많이 사용했고, 후기의 수필이나 논문류에서는 본명을 쓰고 있는 경우를 많이 볼 수 있다. 그의 세례명은 프란시스코, 창씨명은 '大弓修(오오유미 오사무)'이다.
부친 정태국은 젊었을 때, 중국과 만주 등지를 전전하면서 익힌 한의학을 바탕으로 고향에 돌아와 한약상을 경영하여 어느 만큼의 부를 축적했었으나, 불의에 밀어 닥친 홍수의 피해로 가세가 갑자기 기울어져 가난해 졌다고 한다. 그 후 정태국은 중국과 만주 등지를 돌아 다닐 때부터 믿었던 천주교를 버리고, 文化柳氏를 둘째 부인으로 맞이하여 화용, 계용 두 남매를 낳았으나, 그 중 아들 화용은 죽어서 결국 鄭芝龍은 4대 독자가 되었다.이와 같이 鄭芝龍은 형제들이 없었으므로 어린 시절 무척 외로이 자랐으리라 짐작된다.
'산문'에 기록된 그의 유년 시절에 대한 회상은 무척 고독하고 가난하고 슬펐던 것으로 나타난다.
어린이에 대한 글을 쓰라고 하시니 갑자기 나는 소년쩍 고독하고 슬프고 원통한 기억이 진저리가 나도록 싫어진다.
다른 글에서도 "나의 몸서리가 떨리도록 고독하고 가난하던 소년" 시절이라고 회상하고 있다.
이와 같이 고독하고 슬픈 소년에게 위로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어른들로부터 전해들은 옛이야기와 전설이었다. 그의 동시의 많은 부분은 이런 전설이나 민요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별동을 먹으면 오래 오래 산다는 것이었다. 별똥을 주워왔다는 사람이 있었다. 그날 밤에도 별똥이 찌익 화살처럼 떨어졌었다. 아저씨가 한번 모초라기를 산채로 훔쳐 잡어 온, 뒷산 솔푸데기 속으로 분명 바로 떨어졌었다.
당시만 해도 사회적으로는 대가족을 선호하던 시대였다. 그렇지만 그는 4대 독자로 자라난 체험과 가난한 환경, 유년의 자연 환경 등은 鄭芝溶의 문학적 숲을 형성하는 복합적 근원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鄭芝溶은 1910년 옥천 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하여 13살 때인 1914년 3월 25일 졸업했다. 이 사이에 1913년(12살)에 충북 영동군에 사는 동갑내기인 송재숙과 결혼했다. 鄭芝溶과 송재숙 사이에는 10명이 넘는 자녀가 태어났는데, 모두 태어나면서, 혹은 어려서 죽고 4남매만 자라게 된다.
이 시절 그는 한문공부를 하였다는 사실이 휘문보통고등학교의 졸업 학적부에 '沃川公普 졸업 후(大正 3년 3월) 한문수학'이라는 기록에서 입증된다.
그 후 鄭芝溶은 1918년에 휘문고보를 입학된다. 휘문고보 시절 鄭芝溶은 '搖藍' 동인을 만들어 활발한 문예활동을 하였으며, 소설「三人」을《曙光》지에 발표하기도 한다. 또한 1922년 '문우회' 활동에도 참가하여 학예부장으로《휘문》지 제1호를 발간하였다. 휘文高普 시절의 교우로는 洪思容, 朴鍾和, 金永郞, 李泰俊 등이 있다.
1923년에는 교비장학생으로 東志社大學 예과에 입학하여 1929년에 同大學 문학부 영문과를 졸업하였다.
鄭芝溶의 東志社大學 유학시절은 그의 詩歷과 자아성찰에 있어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 시기이다. 이때 그는 고향을 그리워하는 詩心과 향토적인 순수성을 형상화하는 상상력을 키워 나갔다. 이러한 자연적 분위기는 그가 이국(異國) 생활의 고독 속에서 그리워하던 마음의 고향이 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1926년에는《學潮》창간호에〈카페 프란스〉,〈슬픈 인상화〉,〈파충류 동물〉과 기타 동요, 시조를 발표하고,《新民》,《朝鮮之光》에〈이른봄 아침〉,〈바다〉,〈향수〉등을 계속 발표하여 시인으로서 기반을 다졌다.
또한 그는 유학 기간 동안에 카톨릭 신앙을 가지게 되는데, 이 카톨릭 신앙은 그가 사회생활을 할 때와 내면적 갈등을 치유하는데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이를 계기로《카톨릭 청년》(1933. 6 창간)지의 편집을 맡기도 하고, 해방 이후에는《경향신문》등 카톨릭 재단에서 주관하는 사업에 적극 참여하여 돕기도 하였다.
鄭芝溶 시인은 이런 독실한 신앙 생활을 바탕으로 한 시편들은〈不死鳥〉,〈나무〉,〈思惠〉,〈臨終〉,〈다른 한울〉,〈또하나 다른 태양〉,〈갈릴레아 바다〉등이 있다.
鄭芝溶은 1929년(28살) 東志社大學 영문과를 졸업하고, 그 해 9월에 文高等普通學校 영어과 교사로 취임하였다. 그가 본격적이고 그의 시의 방향에 대한 뚜렷한 의식을 가지고 문학 활동을 시작한 것이 이때부터였다.
1930년에는 朴容喆, 金永郞, 이하윤 등과《詩文學》동인으로 참가하여 활발한 詩作 활동을 한다. 鄭芝溶은 시문학 동인으로서 朴容喆과 친교 때문에《詩文學》,《文藝月刊》,《文學》등 朴容喆이 주간하는 잡지에 계속 작품을 발표하였다. 이 발표된 작품들을 주축으로 朴容喆의 기획에 의하여 鄭芝溶의 첫 시집인『鄭芝溶詩集』(1935. 10)을 詩文學社에서 출판하게 되었다. 이 책은 1935년 중반까지 발표된 작품을 모아 엮은 것으로 총 89편이 실려 있다. 이들 작품은 朴容喆의 발문에도 밝혀 있듯이 향토성을 바탕으로 하는 동요나 민요풍의 시들과 회화성을 강조한 이미지즘 계열의 시, 신앙시, 산문 2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의 첫 시집이 간행되자, 많은 사람들이 찬사를 보냈는데 金起林의 경우가 대표적이다. 그 이전의 감상적 시들이나 카프류의 사상 위주의 시에 대해 염증을 느끼고 있던 사람들에게『鄭芝溶詩集』의 발간은 경이로운 자체였던 것이다.
한편, 鄭芝溶은 1938년 '九人會'에도 참여하게 된다. '九人會'는 프로동맹 과는 달리 순수문학의 옹호를 취지로 하여 발족된 순수 문학인들의 모임이였다. 李鍾嗚와 김유영이 발기하여 李泰俊, 李無影, 柳致眞, 金起林, 趙容萬 등이 참석하였으며, 동인지로《시와 소설》창간호가 간행되었는데, 鄭芝溶은 여기에〈流線哀傷〉이란 시를 발표한다.
또한 1939년《文章》지 창간 당시 鄭芝溶은 詩 부문의 選考委員이 되어 재능 있는 후진들을 많이 배출하였다.《文章》지는 우리나라 최초의 문학 종합지로 일어 사용을 거부해서 폐간될 때까지 통권 27권을 낸다.《文章》지를 통해 鄭芝溶에게 추천 받은 시인은 靑鹿派 3인을 비롯하여 金鍾漢, 李漢俊, 朴南秀 등이 있다.
1941년 9월에는 제2시집인『白鹿潭』을 문장사를 통해 출간한다. 이것은《文章》지가 폐간된 1941년 4 후의 일이다. 鄭芝溶은 1936년 이후부터 동아일보와 조선일보사 등에서 지원을 받아 국토순례를 하고 기행문을 쓴 일이 있었는데, 시집『白鹿潭』에 실린 詩들은 그러한 여행 체험에서 얻어진 것을 형상화한 작품들이다. 초기의〈바다〉,〈고향〉의 詩들에 비교하면 깊이 있고 세계를 바라보는 눈이 넓고 높은을 볼 수 있다.
『白鹿潭』은 모두 5부로 편성되어 있으며, 총 33편잉 수록되어 있다. 1939년 2월에 창간된《文章》지 에 실린〈장수산〉과 〈白鹿潭〉그리고『新作 鄭芝溶 詩集』의〈조찬〉,〈비〉,〈忍冬茶〉등을 주축으로 엮었다. 鄭芝溶이『白鹿潭』을 출간한 시기는 정신적, 육체적으로 고난의 때였다. 그래도 그의 시적 특성은 창작기법 면에서 現代的 自覺과 방법을 탐색했다는 점이다.
그러나 鄭芝溶은 1941년『白鹿潭』을 발간한 이후 문학활동이 거의 멈추면서 납북으로 생을 마감한 1950년까지 鄭芝溶이 발표한 작품은 6편에 불과하다.
鄭芝溶은 8·15해방과 함께 이화여전 교수로 취임하여 한국어와 英詩와 羅典語를 가르쳤다.
1946년 9월에는 카톨릭계 신문《경향신문》의 창간과 함께 이 신문의 주간으로 취임하여 '餘滴'과 '社說'을 담당하였다. 이 무렵에 그는 문학과 거리가 먼 時論類를 많이 썼었다. 이들 시론류 대부분은 일관성이 없고, 애매한 논조를 펼치고 있다. 좌경 문학집단인 '文學家同盟'에 잠시 그의 이름이 오르내린 것도 그 무렵이다.
"한민당은 더러워서 싫고 빨갱이는 무시무시해서 싫다."라고 강의시간에 이화여전 학생들에게 한 말이나, "유물사관을 공부한 적이 없어서 이 問題는 내게 과분한 숙제입니다."라고 한 그의 말을 통해서, 좌익하고는 관계했던 인물이 아님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6.25때 월북한 것으로 오해받고 있는 것은 '文學家同盟'(1949)에 가입했었다는 사실과 그의 납북 과정에 대한 근거없는 글들 때문일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좀더 충분한 자료가 제시되는 대로 명확한 사실이 밝혀지리라 믿는다.
Ⅲ. 모더니즘 志向性
1. 이미지즘의 수용
1920년대의 시는 기법이나 시에 대한 태도에서 어느 정도 차이는 있지만 그 바탕을 이루는 포괄적인 정신은 감상적 浪漫主義라고 할 수 있다.《白潮》동인들의 시는 이 시대에 정신적 편향인 주관적 浪漫性과 데카당스 쪽으로 빠져 있었다. 1925년에 KAPF가 결성되면서 새로운 기풍이 이는 듯하나 오히려 백조파의 일부 시인들과 합세하여 이데올로기적 문학을 내세운다. 이러한 偏內容主義에 빠져 있는 것에 대한 반동으로 나타난 것이 현대적 성격의 모더니즘 시운동으로 나타난 것이다.
이마지스트(이미지스트)라는 말을 처음 명명한 E. 파운드는 "이미지란 知的 情的 複合體를 한 순간에 제시한 것이다. …… 그것은 최대의 걸작 앞에서 우리가 경험하는 突然한 해방감, 시공의 제한으로부터의 자유감각, 돌연한 增大감感의 표현이다."라고 말한다. 파운드가 정의한 복합체로서의 이미지는 T. E. Hulme의 이른바 乾燥하고 견고한 이미지의 개념에 바탕을 둔 것이라 하겠다.
이러한 이미지즘의 강령 골자를 요약해 보면, 명확한 이미지, 정확한 事物의 言語, 좋은 傳統, 主知的 態度, 새로운 리듬과 自由詩 등이 된다고 하겠다.
이는 객관적 태도, 감정의 절제와 지성 존중, 감각적 심상의 시, 비교적 시행이 짧은 시형식을 보여주고 있는 鄭芝溶의 시적 특성과 상통된다. 鄭芝溶 의 모더니즘 수용은 1926년《學潮》창간지에〈카페-프란스〉,〈슬픈 印象畵〉등을 발표한 시기로 파악되어 지는데 이는 한국 現代詩의 기점 문제와도 관련되고 있다.
옴겨다 심은 棕櫚나무 밑에
빗두루 슨 장명등
카페 프란스에 가쟈.
이놈은 루바쉬카
또 한 놈은 보헤미안 넥타이
삣적 마른 놈이 압장을 섰다.
밤비는 뱀눈처럼 가는데
페이브멘트에 흐늙이는 불빛
카페 프란스에 가쟈.
이 놈이 머리는 빗두른 능금
또 한놈의 心臟은 벌레 먹은 薔薇
제비처럼 젖은 놈이 뛰여 간다.
〈카페 프란스〉전반부
이처럼 鄭芝溶은 감정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고 시각적인 영상만으로 작품을 구성하는 것이 현대적이고 知的인 詩라고 생각했다. 작품의 내용과 표현 사이에 엄격한 거리를 인식하고 각별한 언어의 선택을 통해 하나하나의 영상을 정확히 표현하려고 했다.
또한 詩〈아츰〉에는 모든 사물이 선명하게 제 모습을 드러내는 객관적 셰계가 표현되고 있다 하겠다.
프로펠러 소리 ……
鮮姸한 커브를 돌아나갔다.
快晴! 짙푸른 六月 都市는 한 層階 더 자랐다.
나는 어께를 골르다
하품 …… 목을 뽑다.
붉은 수탉모양하고
피여 오르는 분수를 물었다 …… 뿜었다 ……
해ㅅ 살이 함빡 自孔雀의 꼬리를 폈다.
睡蓮이 花辯을 폈다
움츠라첫던 잎새. 잎새. 잎새
방울 방울 水銀을 바쳤다.
아아 乳房처럼 솟아오르는 水面
바람이 굴고 게우가 미끄러지고 하늘이 돈다.
좋은 아츰
나는 탐하듯이 呼吸하다.
때는 구김살 없는 흰돛을 달다.
〈아츰〉전문
일상적이고 역동적인 생활의 세계, 정지하고 있는 것 대신에 살아 숨쉬고 있는 세계를 표현 대상으로 할 때 시의 언어의 영역은 확대된다.
모더니스트 鄭芝溶은 천재적 민감으로 말의 (主로) 음의 가치와 이메지, 참신하고 원시적인 시각적 이메지를 발견하고 문명의 새아들의 명랑한 감성을 처음으로 우리 시에 이끌어 들었다. 鄭芝溶은 언어에 대한 혼의 정신을 불어넣어 생동감 넘치는 언어의 기교를 부렸다.
2. 이미지 分析
이미지즘의 영향을 받은 鄭芝溶의 詩는 현대적 감성으로 대상을 감각화하여 이미지로 제시하고 있다.
鄭芝溶의 詩〈바다 1〉에서 바다는 母性的 이미지는 어떤 작용을 하고 있으며 물과 연관된 바다를 중심으로 나타난 열린 想像力은 어떤 이미지적 양태로 발전되고 있는가를 살펴보자.
오·오·오·오·오· 소리치며 달려가니
오·오·오·오·오· 연달어서 몰아온다
간 밤에 잠 살포시
머언 뇌성이 울더니.
오늘 아침 바다는
포도빛으로 풀어졌다.
철석, 철얼석, 철석. 처얼석, 철석,
제비 날어들 듯 물결 새이새이로 춤을 추어.
〈바다 1〉全文
1연은 바다의 살아있는 움직임을 파도에 비유한 것이고. 2연은 닫힌 공간을 젖히고 무엇인가 꿈의 실현하려고 발버둥치는 의지를 나타낸 것으로 '간 밤'의 이미지는 그의 잠재 의식적 표현이다.
3연에서는 '뇌성'이라는 청각적 이미지를 '포도빛'이라는 시각적 이미지로 변화하는 작용을 시도하여 새로운 세계에 대한 동경을 무의식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鄭芝溶의 시에 나타난 바다의 이미지는 모든 생명의 어머니인 동시에 영원을 상징하는 이미지일 뿐만 아니라, 탄생과 죽음의 兩義적 이미지 가운데, 탄생의 역확을 담당하고 있다. 이러한 바다의 이미지는 한 단계 上昇한 세계 곧 땅의 세계로 이동한다.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회돌아 나가고,
얼룩백이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 그 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질화로에 재가 식어지면
뷔인 밭에 밤바람 소리 말을 달리고,
엷은 조름에 겨운 늙으신 아버지가
짚 벼개를 돋아 고이시는 곳,
--- 그 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흙에서 자란 내 마음
파아란 하늘 빛이 그립어
함부로 쏜 활살을 찾으려
풀섶 이슬에 함추름 휘적시든 곳,
--- 그 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傳說바다에 춤추는 밤물결 같은
검은 귀밑머리 날리는 어린 누이와
아무러치도 않고 여쁠 것도 없는
사철 발 벗은 안해가
따가운 해ㅅ살을 등에지고 이삭 줏던 곳,
--- 그 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하늘에는 석근 별
알수도 없는 모래성으로 발을 옮기고,
서리 까마귀 우지짖고 지나가는 초라한 지붕,
흐릿한 불빛에 돌아 앉어 도란 도란거리는 곳.
--- 그 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鄕愁〉전문
이〈鄕愁〉는 1927년《조선지광》65호에 발표되었으며 鄭芝溶의 대표작 중의 한 편으로 가장 많이 평가받고 있으며 공간과 시각의 특성을 잘 나타낸 작품이다.
위 詩는 상실감을 바탕으로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회고하면서 나타내고 있다. 각 연에서 고향의 구체적 영상을 선명한 이미지로 나타내며, 반복구에서는 고향에 대한 애절한 그리움을 노래한다. 이 고향의 이미지에서 한층 상승적 이미지를 추구한 작품으로 그의 대부분의 宗敎詩와 제2시집『白鹿潭』에 실린 산을 주제로 한 詩가 있다.
그 중에서도〈나무〉는 上昇的 뚜렷하여 프라이가 주장한 묵시적 心象인 '생명의 나무'에 대한 이미지와 연결시켜 볼 수도 있다. 바슐라르도 樹木은 지상의 生命을 푸른 하늘로 운반해 가는 현혹되지 않는 힘으로 보고 있어서 N. 프라이의 의견과 접근하고 있다.
나무의 直立性을 인간의 直立性과 동일화 한다. 直立性의 위쪽은 하늘을 향하고 아래쪽은 흙을 향한다. 이러한 上下의 관계는 나무나 사람이나 마찬가지다.
이 원형적 이미지는 地上을 떠나 山으로 이동한다. 산은 하늘과 땅의 중간에 위치에서 오르내리는 길목의 역할을 한다. 山은 항상 위를 향해 열려져 있는 문이며 神이 하강하고 人間이 상징적으로 승천할 수 있는 聖域이다. 또한 시적인 이미지가 山, 山頂, 골짜기 등의 공간을 가질 때는 地上의 모든 現實과 인연을 끊고 自然과 밀착하게 된다.
따라서 山을 제재로 한 克己, 淸潔, 無慾의 세계를 지향하면서 天國과 접근을 갈망하는 상승적 이미지로 나타나게 된다.
絶頂에 가까울수록 뻑국채 꽃키가 점점 消耗된다. 한마루 오르면 허리가 슬어지고 다시 한마루 우에서 모가지가 없고 나종에는 얼굴만 갸옷 내다본다. 花粉처럼 版박힌다. 바람이 차기가 咸鏡道끝과 맞서는 데서 뻑국채 키는 아조 없어지고도 八月한철엔 흩어진 星辰처럼 爛漫하다. 山그림자 어둑어둑하면 그러지 않어도 뻑국채 꽃밭에서 별들이 켜든다. 제자리에서 별이 옮긴다. 나는 여긔서 기진했다.
〈白鹿潭〉중 일부
白鹿潭도 인간의 삶에 대한 社會的, 역사적 現實을 털어버리고, 결국 상승적 이미지, 곧 묵시적 이미지의 궁극의 목표인 천국에 도달하고져 하는 詩人의 욕구이다.
지금까지 鄭芝溶의 詩에 나타난 이미지가 어떤 성격으로 전개되는가를 살펴보았다.
바다라는 개방적 이미지에서 고향이라는 폐쇄적 이미지로 하늘과 山이라는 상승적 이미지로 변이 되어 가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Ⅳ. 카톨리시즘의 志向性
鄭芝溶에게 있어서 信仰詩는 宗敎的 체험에서 우러나온 神과 영적인 교류이며 대화다. 따라서 神에 대한 영혼의 갈망이다.
『鄭芝溶詩集』제4부에 있는〈不死鳥〉〈나무〉〈恩惠〉〈별〉〈臨終〉〈갈릴레아바다〉〈그의 반〉〈다른 한울〉〈또 하나 다른 太陽〉등을 중심으로 생각할 때, 그의 宗敎詩의 세계에는 신앙·소망·구원의 사상이 담겨져 있다.
鄭芝溶이 선택한 신앙적 자아는 도피적인 자아이며, 현실도피로서 구원을 얻고자 하는 셈이 된다. 鄭芝溶에게서는 신앙시는 事物詩의경우처럼 감각적 心象을 사용했음에도 불구하고 종교적 테의 관념적 진술에 치우친 나머지 詩的인 肉化를 이루어 내지 못한다. 그의 신앙시가 신앙과 생활이 분리도었듯이 감수성도 분리된 인상을 던져준바. 엘리어트가 말한 것처럼 宗敎詩도 일반시처럼 '全人的 인격체'로서의 우리에게 영향을 주어야 한다. 이것이 카톨릭시즘의 기본정신이기도 하다.
먼저 신앙의 문제를 다른 시를 살펴보면〈갈릴레아바다〉〈그의 반〉을 들 수 있을 것이다.
나의 가슴은
조그만 '갈릴레아 바다'.
때없이 설레는 波濤는
美한 風景을 이룰 수 없도다.
예전에 門弟들은
잠자시는 主를 깨웠도다.
主를 다만 깨움으로
그들의 信德은 福되도다.
돗폭을 다시 펴고
키는 方向을 찾았도다.
오늘도 나의 조그만 '갈릴레아'에서
主는 짐짓 잠자신 줄을-
바람과 바다가 잠잠한 후에야
나의 嘆息은 깨달었도다.
이 작품은 新約聖書의 마가복음 4장에 나오는 이야기를 문제로 한 詩다. 예수께서 제자들을 데리고 갈릴레아 바다를 건널 때, 예수께서 믿음의 힘으로 보이신 기적의 고사가 우리에게 보이는 교훈을 주제로 한 詩이다. 시적 話者도 예수의 제자들과 같이 의심을 갖기도 했지만, 어려운 일이 무사히 지나갈 때마다 자신의 부족한 信仰心을 알고 탄식하고 신앙심을 더 깊게 했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다. 이 작품과는 좀 다른 방향으로 신앙심을 나타내는 작품으로〈그의 반〉이 있다. 하느님에 대한 찬양을 통해 신앙심을 나타내는 작품이다. '그의 반'이란 하느님의 반이란 뜻이다. '반'은 인간을 정신과 육체로 나누었을 때 정신은 하느님의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시적 話者는 하느님을 인간이 존경할 수 있는 가장 훌륭하고 아름다운 대상으로 보고 찬양하고 신앙심을 나타내는 것이다.
성모마리아에 대한 강한 신앙심을 나타내는 것으로는〈또 하나 다른 太陽〉이 있다. 이 작품에서 詩的 話者의 信仰心에 대한 강한 의지가 보인다. 죽음이 다가와도 깊은 산 속에 '외로운 사슴처럼' 벙어리가 된다 하여도 자신의 행복은 聖母마리아를 믿고 의지하면 찾을 수 있으리라는 믿는다. 한 편의 신앙 고백을 하는 기도처럼 읽힌다고 말 할 수 있다.
기독교에서 소망이란 하느님을 충실히 믿고, 성경의 말씀에 따라 살고 구원받기를 바라는 것이다. 이러한 소망은〈나무〉, 〈별〉등에 잘 나타나 있다. 기독교 신자가 되는 것은 구원받기 위해서다. 구원은 영원히 죽지 않는 길이며, 죽음을 미소지으며 맞이할 수 있는 자의 축복이기도 한 것이다. 죽음으로부터 자유스러울 수 있는 경지에 이르렀다면, 불안의식을 초극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죽음의 초극을 노래한 작품으로〈臨終〉이 있다.
나의 림종하는 밤은
귀또리 하나도 울지 말라
나종 죄를 들의신 神父는
거룩한 産婆처럼 나의 靈魂을 갈르시라.
聖母就潔禮 미사때 쓰고남은 黃觸불!
---중략
달고 달으신 聖母의 일홈 불으기에
나의 입술을 타게 하라.
〈臨終〉
시적 話者는 임종의 순간을 상상하면서 그 순간을 엄숙한 고요 속에서 맞고 싶다는 소망을 지닌다. 마지막 연에서는 입술이 타도록 聖母마리아를 부르고 싶다는 것이다. 鄭芝溶은 하나님이나 예수보다도 聖母마리아를 찾는 경우가 많다. 순수하고 깨끗한 聖女인 마리아에게 鄭芝溶은 더 구원의 손길을 내민 것이다.
이 작품은 鄭芝溶의 종교시 중에서 가장 다양하고 화려한 이미지로 구성된 작품이다.
비애의 고통으로부터 벗어나 구원받은 경지를 노래한 작품으로〈不死鳥〉가 있다. 鄭芝溶은 悲哀를 죽지 않은 不死鳥라고 일컫고 있다. 영원히 사라질 수 없는 悲哀를 靑春이 다한 어느날 사라지게 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悲哀를 초극하여 마음의 평안을 얻었다는 것이다.
이처럼〈不死鳥〉는 원형적 한 인간으로서 비극적 人間像을 그리고 있다. 詩的 自我는 슬픔과 동체가 되어 "박힌 화살, 날지 않는 새"이며, 죽지도 않는 '不死鳥'이기 때문에 그가 피할 수도 초극할 수도 없는 것이다. 이런 숙명적인 조건과 의식은 人間은 타고나면서 '원죄적 존재'라는 기도교적 의식의 등가물과 연계된다. 詩的自我는 여기서 더욱 逆說的으로 슬픔을 "나의 神父"라고 까지 하여 일종의 운명애마저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宗敎詩를 믿음이나 소망 혹은 구원만을 나타내는 詩라고 본다면 문제가 있다고 본다. 믿음과 소망·구원은 별개의 것이 아니라 서로 연결되어 있는 정신구조이다. 그런 의미에서〈나무〉라는 작품은 鄭芝溶의 종교시의 특성을 종합적으로 포함하고 있다고 하겠다.
얼골이 바로 푸른 한울을 울어렀기에
발이 항시 검은 흙을 향하기 욕되지 않도다.
곡식알이 거꾸로 떨어져도 싹은 반듯이 우로!
어느 모양으로 심기여젔더뇨? 이상스런 나무 나의 몸이여!
오오 알맞은 位置! 좋은 우아래!
아담의 슬픈 유산도 그대로 받았노라.
나의 적은 年論으로 이스라엘의 二千年을 헤였노라.
나의 存在는 宇宙의 한낱 集燥한 汚點이었도다.
목마른 사슴이 샘을 찾어 입을 잠그듯이
이제 그리스도의 못박히신 발의 聖血에 이마를 적시며 -
오오! 新約의 太陽을 한아름 안다.
〈나무〉
첫 부분에서는 하나님께로 향하여 가까이 가려는 소망을 나타내고, 셋째 연과 넷째 연에서는 원죄사상과 신앙심을 다섯째 연에서는 구원의 사상을 나타내고 있다.
결국 鄭芝溶이 선택한 신앙적 자아는 도피적 자아이며 현실 도피로써 구원을 얻은 셈이 된다. 종교로의 귀의가 반드시 현실도피를 하는 것은 아니다. 진정한 종교시는 시인의 실존적 상황으로부터 도피하지 않으면서 영적 체험이나 불확실성의 실재를 추구할 때 탄생한다. 이런 점에서 그의 신앙적 자아는 아직 미성숙한 단계에 놓여 있다고 본다.
Ⅴ. 동양정신의 志向性
鄭芝溶의 시는 대체로 이미지즘적 技法을 수용한 감각적인 詩가 주종을 이루고 있다. 그러나 主題의 성격은 카톨릭 신앙을 바탕으로 한 宗敎詩와 동야적인 思惟에 근거를 둔 전통적인 詩로 크게 나누어 볼 수 있다. 鄭芝溶의 시에서는 이미지즘 내지 모더니즘적 색채를 띤 경우라 하더라도 동양적 체질과 미학만은 가볍게 넘길 수 없다. 鄭芝溶의 동양정신에의 경도는 그의 詩論에서도 많이 발견할 수 있다. 그의 말대로 詩는 言語로 肉化되어야 한다. 이 육화의 방법은 지금까지 연구하여온 것들과는 달리, 서구의 것에서 획득하기 보다는 동양에서도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
실제로 鄭芝溶은 지금까지 여러 문학연구가들의 주장처럼 모더니즘에 함몰되어 있는 詩人은 아니라고 본다. 왜냐하면 그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鄕愁〉등은 우리 고유의 가사와 민요의 숨결을 담아 원용하고 있거나 詩的 발상이나 기법의 처리에서도 동양의 고전을 원용한 작품이 상당히 많다.
鄭芝溶은 한 때 당시의 苦痛을 카톨릭신앙에 의한 견인적 정신으로 나타내고자 하였으나, 곧바로 그 항해의 방향을 수정하게 된다. 그것은 그의 피 속에 흐르는 동야적 정신주의가 근본적인 이유일 것이다. 그렇다면 그의 동양적정신의 실체는 과연 어떤 작품에 남아 있는가를 살펴보면서 이야기를 전개해 보고자 한다.
그의 시는 당시 누구보다도 東洋的 傳統性을 바탕으로 삼아 다양한 실험정신을 전개했기 때문이다. 朴容喆도『鄭芝溶詩集』발문에서 "芝溶은 한군데 自安하는 시인이라기보다는 새로운 詩境을 개척하고자 하는 시인"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鄭芝溶은 한국 최초로 본격적인 散文詩를 개척했으며, 李箱과 더불어 연작시를 시도했다. 童謠詩 25편, 시조 9편, 소설 1편을 창작한 장본인이다. 鄭芝溶이 이미즘의 영향을 받았다지만 그의 詩的 特色은 분명히 동양의 전통과 방법이다. 이런 토양을 바탕으로 하여 그의 詩的 完成을 이룩해 나간 것이다.
그러나 鄭芝溶의 시어에서 많이 나오는 센티멘탈한 로맨시티즘에 대하여 살펴보자.
朴容喆의 詩가 관념적인데 대해 鄭芝溶의 詩는 감각적인 것이 특색이다. 그의 맵짠 言語의 節制와 선명하고 的確한 이미지는 一見 英美의 이미지스트들의 詩를 연상케 하지만, 그가 이미지스트의 영향을 받은 확증은 없다.
鄭芝溶의 시들 가운데 모더니즘의 표본으로 내세우고 있는 작품에서도 그 발상이나 詩想의 전개방식은 동양의 미학을 바타으로 한 漢詩的인 수법에 속한다. 이런 성향의 작품은〈비〉에서도 볼 수 있다.
돌에
그늘이 지고.
따로 몰리는
소소리 바람.
앞섰거니 하야
꼬리 치날리여 세우고.
죵죵다리 깟칠한
山새 걸음걸이.
여울지여
수척한 흰 물살.
갈갈이
슨가락 펴고.
멎은 듯
새삼 돋는 비ㅅ낯.
붉은 닢 닢
소란히 밟고 간다.
〈비〉全文
문학 연구가들이 이미지즘의 영향으로 받은 詩의 표본으로 내세우고 있는 이 작품은 시인의 감정이 극도로 배제되어 있다. 시의 분위기도 한 폭의 山水畵를 느끼게 한다. 이 작품에서 시인의 숨결, 곧 인간적 삶의 속성을 배제시킨 창작기법은 한국이나 중국의 敍事詩에서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다. 또한 이 詩가 보여주고 있는 정교한 언어의 正確한 표출과 절제력도 이미지즘의 詩의 技法이라고만 볼 수 없다. 漢詩의 기법에서도 적확한 시어를 사용하여 압축적인 절제미를 창작의 기본으로 삼아온 것은 사실이기 때문이다. 鄭芝溶은 "감정의 절제를 가능한 한도까지 감행해 본 한국 최초의 시인"이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면 崔東鎬의〈비〉에 대한 평을 살펴보자.
鄭芝溶의〈비〉는 그 표출방법이 동양의 山水畵的 수법과 맥락을 함께 하며, 그 안에는 산수화가 담고 있는 은일의 정신이 담겨 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아니될 것이다. 따라서 위에서 언급한 일련의 芝溶詩를 山水詩로 명명하는 이유는 동양적 기법과 정신 양면에서 그의 시를 정의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그의 산수시와 은일의 정신은〈비〉외에도 여러 작품에서 발견되지만, 특히 1941년 1월《文章》지에 발표된〈朝餐〉,〈忍冬茶〉등의 詩와〈玉流洞〉〈九城洞〉〈長壽山〉〈白鹿潭〉등의 시에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여기에서 〈九城洞〉에 대하여 더 자세히 들여다 보자.
골작에는 흔히
流星이 묻힌다.
黃昏에
누뤄가 소란히 싸히기도 하고
꽃도
귀향 사는 곳,
절터 드랬는데
바람도 모히지 않고
산그림자 설핏화면
사슴이 일어나 등을 넘어간다.
〈九城洞〉전문
이 작품은 인간세계와 완전히 단절된 구성동은 탈속한 작자의 정신세계를 상징하고 있다. 즉 시대적 중압과 정신적 위기감을 山이 주는 정신적 침잠으로 극복하고자 했던 그의 시의식을 역볼 수 있다.
鄭芝溶의 대표적인 후기시인〈白鹿潭〉에서도 동양 고전과 더불어 두보의 詩가 자연스러운 모습으로 나타난다.
가재도 긔지 않는 白鹿潭 푸른 물에 하눌이 돈다.
〈白鹿潭〉9연의 일부
江闊浮高棟
雲長出斷山
杜甫의〈遠游〉1, 2 句
두보의 詩는 '江이 넓으니 높은 용마루의 그림자가 떠 비친다'는 뜻으로서, '浮動'의 의미가 된다. 강물에 높다란 용마루의 그림자가 떠 비친다는 뜻의 '遠游'의 시적 환경은 '백록담 푸른 물에 하늘이 돈다'는 환경과 비슷하기 때문에 이미지상의 작시법이 유사하게 느겨진다.
지금까지 우리는 鄭芝溶의 작품에 나타난 동양 정신의 美學이 오떤 양상으로 전개되었는지를 살펴보았다.
鄭芝溶의 시에서 詩語의 的確한 사용, 압축적인 언어의 節制力, 短詩構造의 실험, 회화적이면서도 山水畵的인 정신세계, 표현기법의 漢詩 기법의 영향, 죽음에 대한 이질적 가치관 등은 그가 東洋的 詩정신을 바탕으로 실험정신과 技巧를 접목시키고자 한 노력을 흔히 발견할 수 있었다.
이 논문에서 鄭芝溶 문학의 총체성을 조명해 보면서 그의 문학성의 본질이 어디에 있는가를 살펴보았다.
Ⅵ. 결론
본 논문에서는 鄭芝溶의 문학세계를 살펴보기 위하여 이를 모더니즘 志向性, 카톨리시즘 志向性, 동양정신의 志向性으로 구분한 다음, 그 작품의 주제와 시의 특색을 살펴 보았다. 이와 같은 점을 토대로 하여 이 시인의 문학사적 위상을 종합적으로 밝혀봄으로써 본 논문의 결론을 삼고자 한다.
鄭芝溶의 시를 살펴보고 그 특색을 이해하기 위한 첫걸음은 그의 生涯와 文學觀에 대해서도 들여다보았다.
鄭芝溶은 개화기에 태어나 전원적 분위기에서 자랐고, 어린 시절 한문 수학을 하였으며, 서울과 일본 유학을 통해 都市的 체험을 하게 된다.
이런 경험은 이 시인의 문학관과 작품 세계를 형성하는 바탕으로 작용하였으므로, 鄭芝溶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해 준 것이었다.
鄭芝溶의 초기시는 그의 문학의 출발점이자 그 기본 토대이기도 하다. 이 시기의 작품을 검토해 본 결과, 그이 詩는 전통과 모더니티라는 두 가지 문학적 특성을 동시에 공유하고 있었다. 예를들면 데뷔작에 해당하는〈카페 프란스〉경향의 詩가 모더니티 지향이라면,〈鄕愁〉〈유리창1〉등은 이러한 시인의 편협성을 극복하고, 조화와 질서의 세계를 추구하고 있다. 이것은 초기시에 나타난 이미지즘의 수용 양상을 살펴보면 더욱 분명하게 파악할 수 있었다. 정지용이 영미의 이미즘의 영향을 받은 것은 분명하지만, 그것을 그대로 받아들이는데 만족한 것이 아니라 동양적 전통성과 결합하고자 노력하였다.
지용은 동양 시세계의 고담과 명징성, 절제의 미학을 현대적으로 수용하여 발전시킴으로써 동 시대의 문단에 감수성을 개선시키는 역할을 하였다.
정지용의 초기시는 엄격히 말해서 즉물시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다. 이런 초기시의 반성에서 신앙시가 탄생된 것으로 보인다. 초기시의 한계 극복의 원리로 선택한 것이 카톨릭시즘이라고 본다. 그의 신앙시가 그러한 시대 인식을 어느 만큼 적절하게 구현하고 있는가 하는 점에서 많은 의문을 던질 수 밖에 없다.
엘리어트 등은 카톨릭시즘을 서구 문학의 원점으로 파악하고, 이런 사상적 기초 위에서 현대인의 위기를 그복하려는 문명 비판적 안목을 가졌는데 비하여 정지용에게는 그와 같은 역사의식이 결핍되어 있었다.
정지용은 이러한 한계점에 빠지자 다시 山水詩의 양식을 선택했다. 시집 《白鹿潭》은 이러한 점에서 중요한 의의를 지닌다. 이 시집속에 실린 일련의 작품들은 한국 現代詩의 새로운 도달점에 다다른 것이다. 그의 山水詩는 도시와 문명에 대한 자연의 인식에서 출발하고 있다. 여기서 자연이란 시인의 내부에 놓인 에덴의 축도와 같은 것이다. 지용은 이와 같은 내부세계의 꿈을, 동양 사상의 핵심을 이루는 선비 정신과 전원 취향으로 결합시키고 있다.
한 시대의 전통이 아무리 타락할지라도 정통 정신만 확고하다면 그 사회는 구제받을 수 있다는 T.S. 엘리어트의 견해를 빌린다면, 정지용은 선비 정신에 입각하여 식민지 시대의 정신적 황폐상을 극복시켜려 했던 것 같다. 그의 山水詩는 이러한 선비 정신의 문학적 구현이다.
그런데 정지용의 山水詩는 이와 같은 現代詩의 복잡성을 적극적으로 제시하고 있느냐는 점에서 문제점을 안고 있다. 이 시인의 경우, 전원적 삶의 표상들은 현실의 때문은 징후들을 모두 버린 뒤의 공허한 메아리와 같이 존재하고 있다.
다시 종합해 말하면, 정지용은 전통(지속)과 변화(모더니티)라는 문학사의 두 축을 잘 결합함으로서 톡특한 시세계를 구축하였다. 정지용의 시적 매력은 이런 점에서 찾을 수 있다. 이러한 큰 업적을 쌓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여러 가지 한계에 부딪쳤다. 그 중 가장 큰 실패의 요인은 역사인식의 치열성 부족이라고 본다. 더욱 안타가운 점은 동시대의 함께 살아가는 서민들의 애환을 당나라 시인 두보처럼 절창으로 노래한 詩가 찾기 힘들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동서 문화의 만남의 겪변기 사회의 시인으로서 자기 시대의 실체를 잘 인식하고, 그에 맞는 시적 양식을 전개함으로서 한국 現代詩의 발전적 토대를 구축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 [직접서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