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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광수와 허영숙(許英肅) 자료실

2010.04.30. 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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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광수와 허영숙(許英肅)

   춘원(春園) 이광수(李光洙)가 한국 최초의 여의사(女醫師)가 될 허영숙(許英肅)을 만난 것은 1917년 가을. <무정(無情)>을 끝낸 귀에도 잇단 과로(過勞)로 가슴을 앓게 된 그는 우시고매여의전(午込女醫專) 부속병원을 찾아갔다. 진찰비가 1원(圓) 20전(錢.) 그러나 그의 수중에는 60전뿐이었다. 막연히 머뭇거리는 그에게 한 여학생이 나타났다.

   “좋으시다면 제가 빌려드리죠.”

   이때 허영숙(許英肅)의 나리 21세, 26세로 당대의 한국문단을 주름잡는 청년대가(靑年大家)인 이광수(李光洙)의 존재에 대해서는 아직 잘 모르고 있었다. 춘원은 영숙(英肅)의 도움과 간호로 몸을 회복하면서 이지적(理智的)이고 냉철한 그녀와 곧 사랑에 빠져들었다.

   이듬해 7월 영숙(英肅)이 여의전(女醫專)을 졸업, 귀국한 뒤에도 그들의 뜨거운 연애편지(戀愛便紙)가 현해탄을 넘나들면서 20대의 선각적(先覺的)인 남녀들은 결혼 문제로 고민하기 시작했다,l 허영숙의 부모는 의사에게 시집갈 것을 딸에게 요구했고, 더군다나 춘원은 이미 결혼한 몸으로 아내가 따로 있었던 것이다.

   1892년 2월 평안북도(平安北道) 정주군(定州郡) 갈산면(葛山面) 익성동(益城洞) 전주이씨(全州李氏) 집안에 태어난 이광수의 성장기는 누구보다 불우했다. 아버지 이종원(李鍾元)은 행세하던 가문이 완전 몰락하여 가난해진 소작농(小作農)이었고, 어머니는 삼취(三娶)였다. 8, 9세 때부터 산에서 나무를 하고 들에서 김을 맨 그는 노승(老僧)이 거울을 주는 태몽(胎夢)을 꾸었다 해서 아명(兒名)을 보경(寶鏡)이라 했다.

   “그것은 내가 열한 살 때 일이다. 불과 열흘 내에 아버지와 어머니가 다 괴질(怪疾)로 돌아가시고 어린 누이동생과 나와 단 둘만 남았을 때다. 부모는 다 돌아가셨지만, 그래도 먹고 살겠다고 내가 물을 길어 오고 반찬을 만들고 밥을 지었다.”

   1902년 전국을 휩쓴 호열자로 부모를 한꺼번에 잃은 이광수는 고향을 떠나기로 결심, 여동생을 친척에게 맡기고 동네 사람이 거둬준 3원(圓)을 밑천으로 담배장사를 시작, 1년을 버티다가 동학(東學)에 입도(入道), 박찬병 대령의 서기로 들어가 활동했다. 그러나 관헌(官憲)의 동학(東學) 탄압이 심해지자 상경(上京)을 결심, 진남포(鎭南浦)에서 화륜선(火輪船)을 타고 제물포(濟物浦)를 거쳐 서울로 들어왔다.

   ‘네 살 때 천자문(千字文) 반을 외고 외조모에게 이야기책을 읽어준’ 조숙한 보경(寶鏡)은 일어(日語) 교사로 채용되었다가 곧 [일진회(一進會)] 유학생으로 뽑혀 도일(渡日)했다. 명치학원(明治學院) 중학부에 다닐 때 홍명희(洪命憙)ㆍ문일평(文一平), 후에 최남선과 사귄 그는 안도산(安島山)의 강연에 감명을 받은 한편, 톨스토이에 경도(傾倒)하고 구니기다(國木田獨步)ㆍ나쓰메(夏日漱石) 등 당대 일본 문인들의 작품을 탐독, 이들의 영향으로 첫 소설 <사랑인가>(1909)를 발표했다.

   1910년 3월 조부(祖父)의 별세로 귀국한 이광수는 남강(南岡) 이승훈(李昇薰)이 경영하는 오산학교(五山學校) 선생이 되었고, 경술국치(庚戌國恥)를 당할 무렵에 백혜순(白惠順)과 결혼했다. 청소년다운 개인적 변민과 나라를 잃은 식민지 지식인의 좌절에 짓눌려, [소년(少年)]· <청춘(靑春)] 등에 글을 발표하면서서 상해(上海)와 시베리아로 전전하던 그가 재차 도일(渡日), 학업에 뜻을 둔 것은 1915년 인촌(仁村) 김성수(金性洙)의 후원 때문이었다.

   이럴 때 <무정(無情)>으로 필운(筆運)을 높이는 한편, 신여성 허영숙(許英肅)과 사랑을 하게 된 것은 그의 생애에 처음 보는 밝은 행운이었다. 자유연애론자(自由戀愛論者)인 그는 한동안의 번민 끝에 마침내 백혜순과 합의이혼하고 1918년 10월 허영숙(許英肅)과 북경(北京)으로 유명한 ‘사랑의 도피행(逃避行)’을 떠났다.

   셋방을 얻어 영숙이 병원 내과의사로 취직하며 보금자리를 편 춘원은, 그러나 한 달도 못 돼 1치대전의 종전(終戰)과 파리강화회담 소식에 접하고 아내를 북경에 남겨둔 채 급거 귀국, 현상윤(玄相允)ㆍ최린(崔麟)을 설득, 독립운동을 가서(擧事)토록 한 후 일본으로 건너가 최팔용(崔八鏞)ㆍ백관수(白寬洙)ㆍ김도연(金度演) 등과 [조선독립단(朝鮮獨立團)]을 조직, 이듬해 2월 <조선독립선언서(朝鮮獨立宣言書)>를 기초(起草), 선언대회를 열었으니, 이것이 육당이 기초한 ‘삼일선언문(三一宣言文)’보다 20일 빨리 동경유학생들에 의해 발표된 유명한 <2ㆍ8독립선언>이었다.

   동료들의 권고로 동경에서 상해로 탈출한 춘원은 상해임정(上海臨政)에 투신, 기관지 [독립신문(獨立新聞)]의 사장 겸 편집국장, 임정사료편찬위(臨政史料編纂委)의 주임으로 활약하며 [흥사단(興士團)]에도 가입했다. 2년 동안의 정치활동에 피로를 느낄 즈음 허영숙이 그를 찾아왔고, 그녀가 귀국한 뒤를 따라 1921년 4월에 입국, 선천에서 일경(日警)에 체포, 성우로 압송되었으나, 곧 불기소처분으로 풀려나왔다.

   이 석방 과정에 의혹이 있다 해서 변절자(變節者)란 비난을 피할 수 없게 된 춘원은, 5월 허영숙과 정식 결혼, 당주동 자택에서 두문불출(杜門不出)했다. 그에게 더 괴로웠던 것은 자신이 유일한 작가로 자부하던 문단(文壇)에 어느 사이 새로운 작가들이 수없이 나타나 그의 계몽주의문학(啓蒙主義文學)에 도전하고 나선 것이었다.

                                                     - 김병익(金炳翼) : <한국문단사(韓國文壇史)>(197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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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완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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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완용
李完用
Lee Wan-yong Portrait.jpg
후작
후임자이병길
배우자양주 조씨
자녀장남 이승구
차남 이항구
3남 이찬우
출생1858년 7월 17일(음력 6월 7일)
조선 경기도 광주부 낙생면
(현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사망1926년 2월 12일 (67세)
일제강점기 조선 경성부 옥인동
폐렴과 해소 등의 합병증
국적조선(1858년~1897년)
대한제국(1897년~1910년)
일본 제국(1910년~1926년)

이완용(李完用, 1858년 7월 17일(음력 6월 7일) ~ 1926년 양력 2월 12일)은 대한제국의 외교관, 정치가이자 관료이다. 일제에 적극 협력한 대가로 조선귀족 백작 작위를 받았고, 1919년에는 후작에 올랐다. 을사오적, 정미칠적, 경술국적 가운데 한 사람이다. 조선총독부 중추원 부의장, 조선사 편수회 고문 등을 지냈다. 본관은 우봉(牛峰)이며 자는 경덕(敬德), 호는 일당(一堂)이다.

문과 급제 후 수구파로서 청나라 양무 운동 모델의 근대화를 추구했고, 신교육을 받고 미국으로 건너가 주미공사를 역임하는 등, 대한제국 내의 미국 전문가이자 내각의 실세로서 대미협상을 전담했지만, 정작 미국이 제 잇속만 챙기고 대한제국의 뜻대로 안되자 일시적으로 실각당하기도 했다. 왕정을 고수하고 국제 사회에서 독립을 인정받기 위해 여러 방면으로 힘을 기울였다.

1905년 러일 전쟁에서 일본의 승리가 결정적이 되자 친일파로 변신, 어전회의에서 고종을 협박해 을사조약을 맺은 후 대한제국 외교권이 박탈됐고, 1907년 헤이그 만국평화회의 사건을 빌미로 고종에게 퇴위를 강요했다. 곧 정미 7조약에 서명해 행정권도 일본 제국에 넘겼다. 1909년에는 독단으로 기유각서를 교환, 사법권마저 일본 제국에 넘겨 1910년 한일 병합 조약을 체결하기까지 철저히 일본 제국의 주구가 되었다.

일제 강점기에는 소위 '일선(日鮮)의 융화(融化)'를 내세운 일제의 각종 정책에 발맞춰 한국 황족과 일본 황족 간의 혼인을 성사시켰다. 또한 3·1 운동 당시에는 독립 투쟁을 비난하는 내용이 담긴 경고문을 3차례에 걸쳐 발표하면서 만세 운동이 "불순 세력의 선동에 의한 무지한 백성들의 허망한 경거망동일 뿐이다"라고 비난했다.

 

출생과 가계 배경[원본 편집]

1858년 6월 7일 경기도 광주군 낙생면 백현리(현재의 성남시 분당구 백현동, 현재의 판교)[1][2][3] 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친은 이석준(본명은 이호석(李鎬奭))이고 생모는 신씨(辛氏)였다. 그리고 친형제로는 15살 터울의 큰형 이면용(李冕用) 등이 있었다[2][4].

그의 먼 직계 조상들은 고관을 역임했는데[5][6], 16대조 이교는 판서, 15대조 이방년은 밀직부사, 14대조 이순은 감사를 역임했으며 성종 때의 청백리였다. 11대조 이세명은 을묘사화에 연루된 선비였으며, 10대조 이한(李僴)은 무과에 급제해 수군절도사를 지냈다. 9대조 이의원과 8대조 이우는 명예직인 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종2품)에 제수[7] 됐는데, 그후 이완용의 직계에선 더이상 문무 양과 급제자를 배출하지 못해 몰락한 양반 상태였고 가난했다.

양자 입양[원본 편집]

이완용은 10살 때인 1867년에 일가 아저씨뻘인 중추부 판사 이호준에게 입양됐다. 그의 양아버지가 될 이호준에게는 서자(庶子)와 딸만 있었을 뿐, 정실 부인의 아들은 없었다. 이호준은 당대 정계의 거물로 이조참의(吏曹參議),승정원(承政院) 동부승지(同副承旨),한성부 판윤(漢城府 判尹)등 최고위 관료이자 흥선대원군의 친구였으며, 그의 사위 조성하(趙成夏)는 대원군의 측근이었다. 게다가 서자인 이윤용(李允用)[8] 을 대원군의 서녀(庶女)와 결혼시켜 왕실과 이중삼중의 연을 맺은 명가를 만들었다.

더욱이 이호준의 직계는 대대로 노론으로 인조반정 이후 조선 조정과 유학계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해 왔다. 이조판서를 지낸 6대조 이만성은 우의정 이숙(李䎘,1626년 ~ 1688년)의 차남으로 노론의 거성 우암 송시열의 제자였다. 이만성은 어린 시절 숙부 이영(李翎,1615 ~ 1637)[9] 에게 입양됐는데, 숙부 역시 예학의 집대성자인 김집(金集)[10] 의 문하생이고 친조카가 당대 노론의 영수(領首) 도암(陶庵) 이재(李縡)(1680~1746)였다.[11]

특이하게도 이호준의 가계는 약 350년 전인 대사성(大司成) 이승녕(李承寧)의 손자 때부터 후사 문제로 입양을 시작한 이후 8번이나 양자를 들였으며, 정작 어린 이완용의 입양을 원했던 이호준 자신도 어렸을 때 입양 온 양자였다. 유소년기의 이완용은 머리가 비상하고 문리를 일찍 깨쳐 집안의 주목을 받았었고 가난한 집 늦둥이 막내라 부모로서도 입양 결정이 어려운 일만은 아니었다. 이호준은 이완용의 친아버지 이석준과 족보상 32촌으로 매우 멀었는데, 입양을 허락해 준 보답으로 미관말직이나마 선공감(繕工監)[12] 감역관(監役官-정9품) 자리를 알선해 줬다. 이석준은 이미 나이가 많았고 몇 년 안 가 별세해 벼슬은 거기에 그쳤다.

이완용이 입양되던 1867년은 병인양요를 치른지 얼마 되지 않았고 조선이 국제적 위협에 노출돼 민심이 한참 흉흉하던 때였다. 삼정의 문란이 계속됐고, 단지 수면 아래로 숨었을 뿐인 막강한 안동 김씨 세도가들과 흥선대원군의 암투가 이어지며 명성황후와 외척 민씨들까지 조정 전면에 나서기 시작했다. 이런 상황에 당시 왕실의 비서실장 격이었던 이호준[13] 은 대원군의 최측근으로서 서울 조정을 비울 수가 없었고, 더이상 적통 승계를 미룰 수 없는 40대 중반이었다.

성장기와 학업[원본 편집]

청소년기의 이완용은 당대 정치계의 거물인 이호준의 후계자로서 늘 다른 대감집 자제들과 비교당했고, 양어머니 여흥 민씨와 의붓 형제들 눈치를 보느라 반드시 여러 번 생각후 조심히 말했다 한다. 늘 숫기없이 작은 목소리라 이호준은 어린 이완용에게 종종 "너는 어떤 일에 대해 마음속으로 분명히 알고 있다 하더라도 말이 너무 적어 마땅히 설명해야 할 것도 이를 표현하지 못하고 있다. 이는 남자로서 처세에 대단히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칠 지도 모르는 습관이니 고쳐야 할 것이다. 앞으로는 동료간에 모인 자리에서도 농담이나 객설에 구애받지 말고 하도록 노력해 보아라"고 타일렀다 한다[14].

이완용은 친아버지 이석준에게 소학(少學)까지 뗐고 입양 직후에는 서울의 노론계 서당에서 글을 배웠다는데, 누구 서당의 문하생이었는가까지는 알려진 바 없다. 이후 본격적으로 과거 준비에 들어간 이완용은 이호준의 주선으로 충청북도 전의군의 선비 정익호에게 대학(大學)과 논어(論語)등 4서를 사사(師事)받았다. 13세가 되던 1870년 3월에는 한 살 연상으로 홍문관 부수찬(종6품) 조병익(趙秉翼)의 딸인 양주 조씨와 혼인했으며[15] 16세 무렵에는 명필 이용희를 초빙, 친구와 함께 서예를 익혔는데[14] 이때 이호준이 전라도 관찰사로 전주에 부임해 이완용은 멀리 전주감영까지 문안갔다고 한다. 그의 전주행에는 글선생 정익호와 이용희가 동반할 때도 있었다[15].

21세 때는 평안북도 태천군의 선비 박세익에게 수년간에 걸쳐 시경(詩經), 서경(書經), 주역(周易) 등 3경을 반복 강습받았다[15]. 말수가 여전히 적었고 나서는 것도 별로 좋아하지 않았지만, 해야할 때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달성하려 했고 꼼꼼해서 학업 성취도가 매우 빠른 편이었다 한다. 이 사이 그의 친아버지 이석준과 양어머니 여흥 민씨가 차례로 사망해 몇 년간 시묘(侍墓)를 하기도 했다[15].

청년기[원본 편집]

과거 급제[원본 편집]

1882년, 25세 나이로 증광문과(增廣文科) 별시에 병과(丙科) 18위(전체 28위 해당)로 급제한 후, 주서(注書-정7품)[16] 가 됐다. 증광시(增廣試)는 왕실에 축하할 일이 있을 때만 치러지는 과거시험이었는데 이완용 등이 시험을 쳤던 당시의 축하할 일이라는 것이, 임오군란을 청나라의 개입으로 진압 후, 충주까지 피난갔던 명성황후를 청군의 경호속에 무사 환궁시키고, 반대로 대원군이 중국 톈진에 끌려가면서 고종(高宗) 부부(夫婦)가 다시 조정 실권을 쥐게된 일을 말하는 것이었다.

갑과(甲科)나 을과(乙科) 급제도 아니고 그보다 급이 낮은 병과(丙科)에서조차 1등이 아닌데도 8,9품이 아닌 정7품으로 임명됐는데[17], 이는 이완용의 후견인이었던 아비 이호준이 발빠르게 대원군과 손을 끊고 이미 민씨 정권과 손을 잡은 상태였기 때문이었다[18]. 이후 이호준과 함께 수구파로서, 1894년 청일전쟁에서 청나라일본에 패배하기까지 양무 운동을 근대화의 모델로 삼게 된다.

이완용은 당시 젊은 엘리트라면 출세 가도에서 반드시 거쳐가야 했던 규장각 대교(待敎-정7품, 겸직가능)를 겸직했고 그후 홍문관(弘文館) 수찬(修撰-정6품), 의정부(議政府) 검상(檢詳-정5품) 등 핵심 요직을 거쳐 외직(外職)인 해방영군사마(海防營軍司馬)[19] 로 나갔다. 해방영에 들어간다는 것은 이호준과 이완용 부자가 원래 주군인 대원군과 완전히 손을 끊고 민씨 정권과 결탁한 상태임을 다시금 확인시켜준다. 해방영 설치를 주도한 것은 민영환으로, 그의 부친 민겸호 대감이 문제의 별기군 때문에 2년전 대원군에 의해 주살을 당했었다. 또한 민영환을 위시한 수구 내각은 개화파들이 주장해 설치됐던 병조 산하 조련국을 취소시키면서 대신 해방영을 설치했다.

갑신정변의 위기 그리고 출세[원본 편집]

1884년 음력 10월 갑신정변이 일어났다. 이때 이완용은 해방영 주둔지에서 개화파의 집권, 그리고 그들의 3일 천하, 민씨 정권의 재집권이라는 정치적 격변을 불안하게 지켜보고 있었다. 민씨 정권과 이미 손을 잡고 수구파가 됐으려니와 이완용은 김옥균, 박영효, 서재필 등의 급진개화파와의 접점이 전혀 없었다. 오로지 후계 수업에 바빠 개화파가 주장하는 것이 뭔지, 세계 정세나 시대적 당위성은 무엇인지 전혀 인식돼있지 않았다[20].

1886년에는 중앙정계로 복귀, 조선 최초의 근대적 관료재교육기관이었던 육영공원(育英公院)에 입학해 초보적인 영어, 과학, 경제학 등으로 재교육을 받으면서 비로소 신문물을 접했고, 이 때 뛰어난 성적으로 사헌부(司憲府) 장령(掌令-정4품), 홍문관(弘文館) 응교(應敎-정4품) 등으로 승차했다. 이듬해엔 세자시강원(世子施講院) 보덕(輔德-정3품)[21] 에 보임돼 왕세자 순종(純宗)을 가르쳤다. 이완용은 갑신정변 실패후 떨려나간 급진개화파들과 달리 민씨 정권과 등을 지지 않으면서도 신문물을 이해하고 근대화를 추진할 수 있는 신세대 인재로서 고종의 눈에 들었다. 정3품 당상관에 오르기까지 과거 급제부터 5년도 채 걸리지 않았는데 이는 조선 역사를 통틀어 실로 유례없이 빠른 승진이었다.

미국 외교관 생활[원본 편집]

1887년에는 주차미국참찬관(駐箚美國參贊官)으로 발령됐다. 초대 주미공사 박정양을 따라 요코하마, 하와이를 거쳐 미국 워싱턴에 가 대한제국주미공사관을 설치 후, 이듬해인 1888년초 병으로 박정양과 함께 소환됐다. 박정양은 청나라에 약속한 영약삼단(另約三端)[22] 을 지키지 않아 문책성 인사를 당했는데, 그들은 귀국 후, 미국이 일본, 러시아, 중국과 달리 한반도 지배에 관심이 없기 때문에 독립을 위해 미국을 적극 이용해야 한다는 조정 여론을 재확인시켜 줬다.

그렇지만 정작 미국 문명의 가장 빛나는 업적이라 할 노예제 등 신분제의 철폐나 자유인권적 헌법, 참정권 등의 입헌의회정치를 도입할 그 어떤 의견 표명, 노력도 하지 않았다. 불과 3~4년 전 갑신정변 실패후 신분제 철폐, 양반 조세, 입헌군주정 도입, 의회 정치 논의를 했던 급진개화파들이 일본, 중국, 미국 등지에서 망명객이 돼 어떤 꼴로 고생하고 있는지 뻔히 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다시 말해 이완용은 집권 세력이 자주 바뀌는 불안한 정국에서 이호준과 함께 보신에 급급한 정치적 입장에 섰고, 근대 국가 건설과 국제 사회에서 독립을 인정받는 길이 무엇인가에 대한 절실한 인식이 결여된 상태였다.

1888년 음력 5월에 동부승지(同副承旨) 임명을 시작으로 이조참의(吏曹參議)·외무참의 등을 지냈다. 1888년 음력 12월에 주차미국참찬관에 재임명돼 이하영 부부, 부인 양주 조씨와 함께 부부동반으로 다시 워싱턴에 갔다가 이듬해 12월에 주미대리공사로 승진 후 총 2년간 근무했다[23]. 주미공사관의 이전을 지휘했고 재임시 미국 대통령 클리블랜드와 회담하기도 했는데, 당시 미국 워싱턴에 체제중이었던 윤치호가 <워싱턴 이브닝 스타紙>등 현지 신문에 실리는 이완용 및 대한 제국 공관 소식을 자신의 일기에 기록한 것이 남아있다. 역적으로 몰려 미국으로 망명간 과거 동기 서재필이 거지꼴에 갖은 인종차별을 견디고 미국에서 다시 고등학교를 졸업할 즈음이었다.

1890년대 활동[원본 편집]

귀국 및 교육 개혁[원본 편집]

1890년 음력 10월에 귀국해 성균관(成均館) 대사성(大司成)·교환서총판(交換署總辦)·형조참판(刑曹參判)·공조참판(工曹參判)·동지의금부사(義禁府使)·동지성균관사(成均館使)·동지춘추관사(春秋館使)·전환국총판(典圜局總辦)·우부승지(右副承旨)·내무참의(內務參議)등 각종 화요직(華要職)을 역임했고 대한제국 내각의 대미협상을 도맡았다.

특히 성균관 대사성(大司成-정3품) 재임당시 미국에서 겪은 것을 바탕으로 근대교육개혁을 주도했는데, 초등교육의 의무화를 제도화하고, 근대적 교사 양성사업 계획을 지휘했으며 조선의 국립대 격인 성균관의 커리큘럼을 개편해 지리, 산술, 과학등 서양 학문 이수 과목을 신설하고 정기적인 시험 제도의 개정을 주도했다. 이는 정부 주도로 이뤄진 최초의 교육 근대화 시도였다 할 수 있었다[24].

동학농민운동과 청일전쟁[원본 편집]

1893년엔 친어머니 신씨(辛氏)의 상을 당하여 사직하고 모친상을 지키길 1년여, 이듬해인 1894년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났다. 청나라의 태평천국운동을 떠올린 고종과 조정 대신들의 긴장감은 극에 달했고, 곡창 지대인 삼남 지방[25] 일대가 큰 혼란에 빠졌다. 동학운동의 근대사적 의미는 후일 역사가들의 평가이고 당시 고종과 조정 대신들의 인식으로는 역성 혁명으로 변질될 가능성이 있는 대규모 농민 봉기에 불과했다. 곧 그들은 동학 시위를 흥선대원군과 결탁된 반역 작당 쯤으로 몰아붙였다[26]. 용인에서 친어머니 산소를 지키고 있는 이완용으로서도 위기가 감지됐으나 양아버지 이호준의 처분과 결단을 잠자코 기다리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1894년 6월 고부민란이 전국적으로 확산되면서 수구파 일색의 조선 조정은 동학난[27] 을 진압하기 위해 청국에 파병을 요청했고, 이에 호응하여 청군이 조선에 진주하자 청일 양국 군대의 조선 반도로부터 동시 철수를 주내용으로 하는 톈진 조약 (1885년)이 자동 파기되면서 일본이 참전했다[28]. 조정 대신들은 외세를 끌어들여 조선의 국제적 위신을 크게 실추시켰고 이제 사태는 그들의 손을 떠났다. 경쟁하듯 동학 농민군을 죽이던 청일 양국은 곧 직접 충돌했고, 육해전에 걸친 몇번의 공방전 끝에 전쟁은 일본의 승리로 끝났다. 청의 패전으로 양무 운동식 근대화의 한계가 드러났고, 12년전 명성 황후 환궁때부터 청나라와 결탁 중이었던 수구파 정권은 붕괴했다. 이완용 부자 역시 수구 정권의 핵심 인물들로서 일련의 사태에 책임을 져야 했으며, 과거 대원군을 버렸듯 다시금 말을 갈아타느냐 아니면 같이 몰락하느냐의 기로에 놓였다.

갑오경장과 개화파 내각에 참여[원본 편집]

1894년 8월 청일전쟁에서 청국군대를 한반도에서 축출하고 승기를 잡은 일본의 비호 아래, 박영효갑신정변 실패 후 도쿄서 망명 중이던 개화파들이 조선에 돌아왔다. 그들은 청에 의존했던 민씨 정권을 쫓아내고 2차 개혁을 추진했다. 이를 갑오경장 혹은 갑오개혁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개화파들은 이호준과 이완용을 같이 숙청하지 않고 손을 내밀었다. 그러나 이완용 부자는 아직 개화파 내각이 불안정하고 또 그들이 단 3일만에 몰락했었던 10년 전 갑신정변의 예도 있으므로, 이완용이 아직 친모 산소를 지키고 있다는 이유를 들어 거절하고 일단 정국의 혼란이 가라앉길 기다렸다. 이후 시모노세키 조약으로 승리를 확정한 일본의 보호 속에 개화파의 개혁이 자리를 잡아가는 듯 하자, 이완용은 1895년 음력 5월 학부대신(學部大臣) 겸 중추원의관(中樞院議官)으로 내각에 참여한다[29].

1895년 음력 7월, 갑오개혁이 실패로 끝났다. 고종과 민씨 외척 등 친위 세력들은 박영효와 개화파에게 명성황후 시해 책모 등 역적 누명을 씌워 조정에서 쫓아냈다. 갑오개혁 당시 박영효의 13만 8천 자(字)에 달하는 개혁 상소문은 고종과 조정 대신 및 지방 민심을 전혀 잡지 못했고, 외형상 개혁이 진행되는 듯 보였던 것은 일본의 눈치를 본 수구파들이 잠자코 입을 다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일본이 삼국 간섭으로 요동 반도를 러시아에 뺏겼다. 조선 조정에 일본의 위신이 크게 떨어졌고 자연히 개화파의 위세도 땅에 떨어졌다. 졸지에 다시 역적들이 된 개화파들은 기약없는 일본 망명길에 올랐고, 조정의 관심은 이제 외교적 위압만으로 일제를 누른 러시아미국으로 쏠렸다. 새로운 근대화 모델도 찾아야 했다.

정동소재 구한말 주한러시아공사관 유적. 당시 국내 최대 연면적 6,600평에 달하는 건물은 헐어없어졌고 현재 남은 건 망루의 일부다.

을미사변과 아관파천[원본 편집]

1895년 8월, 고종의 어심(御心)을 읽은 이호준은 국제 경험이 있는 이완용을 보내 러시아에 접근시켰다. 이에 이완용은 정동파(貞洞派)[30] 에 가담해 러시아 세력과 접촉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별안간 을미사변이 일어났다. 개화파가 조직했던 훈련대 소속 사병들이 민씨 정권의 탄압에 반발, 일본과 공모해 일을 벌였다. 스스로 낭인으로 자처하는 일본 극우들의 칼에 경복궁 건청궁 마당에서 명성황후가 목숨을 잃었고 나라의 존엄인 궁궐은 처참하게 유린됐다. 수구파 이완용 부자도 목숨이 위험했는데, 사변 당시 그는 주한미국서기관 호레이스 앨런[31] 의 도움으로 미국공사관으로 급히 피신했다.

일본은 을미사변을 일으켜 친일 개화파 내각을 복귀시키면서 을미개혁을 추진했지만, 직후 러시아가 사태에 적극 개입하면서 다시 물러났다. 고종과 수구 내각은 일본과 개화파를 조선에서 축출하기 위해 1896년(건양 1년), 미온적인 미국 대신 주한러시아공사 베베르(러시아어: Карл Иванович Вебер)와 함께 아관파천을 기획했다.

1896년 음력 2월 11일 이완용 등 친위대가 지방 소요를 진압하러 떠난 사이, 고종은 의도대로 아관파천을 단행시켜 러시아 공관에서 왕세자와 1년여를 보냈고 자연히 친일 개화파들은 조정에서 모습을 감췄다. 이제 이완용은 외부대신(外部大臣)에 임명되어 대한 제국의 러시아 협상까지 전담하게 됐다. 이 때문에 훗날 그를 친러파로 분류하는 의견도 있고 당시 손가락질도 받았었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일본 견제에 적극적이었던 러시아를 이용하기 위한 것 뿐이었고 러시아와의 밀월은 오래가지 못했다. 장남도 미국에서 유학했을 뿐만 아니라 이후 러일전쟁 전까지 행적을 보더라도 그는 친미파(親美派)였고, 후일 친일파로 변신한 후에도 러시아어는 고사하고 아는 일본어는 천황폐하만세 뿐이었다. 일본인들과는 영어를 쓰거나 일본어 통역을 항상 대동했다.

이완용은 아울러 농상공부대신(農商工部大臣) 등을 겸직, 제국 근대화에 핵심적인 역할을 맡는데 이는 러시아를 이용, 일본을 견제하고 근대화를 이뤄 국제사회에서 독립을 인정받으려던 고종과 신내각의 위기감 때문이었다.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 참여[원본 편집]

서재필. 이완용과 과거 급제 동기이나, 개화파이며 갑신정변 주동자로 미국으로 망명했었다.
윤치호서재필의 정치적 동지이다. 수구파 출신에 친일파인 이완용을 경멸했다.

이완용은 과거 육영공원에서 영어를 배우면서 1차로 개화된 문물을 접하고, 이후 직접 미국으로 건너가 의회 제도나 공교육 체계, 그리고 불과 5일만에 샌프란시스코에서 워싱턴까지 갈 수 있게 해준 대륙횡단철도 등 미국식 문물을 경험하면서 친미파가 됐지만, 수구파답게 서구 열강의 무력에 의한 강제 개항 방식에는 그 역시 부정적인 시각을 갖고 있었다. 기독교도 당연히 멀리했으며 왕정을 지지했고 공화정 모의를 경계했다.

한편, 일본이 조선 반도에서 영향력을 잃고 러시아의 개입이 본격화되기 직전까지 조선 반도에는 잠시나마 힘의 공백이 생겼다. 고종은 러시아공사관에서 경운궁으로 환궁하면서 광무 연호와 제위를 허락했다. 이에 수구 내각은 대한제국을 급히 수립하고 러시아와 프랑스 등 각국의 승인을 얻었으며[32] 대내적으로는 독립협회를 조직했다.

그리고는 국모를 죽인 일제에 대항하고 유교 질서를 수호하며 조선인다운 근대화에 대한 여론을 일으키고 계몽하자는 취지로 만민공동회를 열었다. 수구 내각은 갑신정변 때 쫓겨났던 개화파들 중에서도 윤치호, 서재필, 서광범 등 친미국파에 한해서만 독립협회에 가담시켜 이완용 등과 계몽강연 활동에 나서게 한다. 이완용은 특히 독립협회 내 정부측 인사로서 독립협회 제2대 위원장으로까지 활동했는데, 다음은 그의 연설 중 일부분이다.

독립을 하면 미국처럼 부강한 나라가 될 것이며 만일 조선 인민이 단결하지 못하고 서로 싸우거나 해치려고 하면 구라파폴란드라는 나라처럼 남의 종이 될 것이다. 세계사에서 두 본보기가 있는데, 미국처럼 세계 제일의 부강한 나라가 되는 것이나 폴란드 같이 망하는 것 모두가 사람 하기에 달려 있다. 조선 사람들은 미국같이 되기를 바란다.

여기서 서로 싸우거나 해치지 말자는 의미는 협회내 대다수인 수구파 출신과 소수 친미 개화파 출신의 단합을 요구하는 의미가 크다. 그는 조선 시대 중국 사신을 영접했던 모화관(慕華館)의 정문으로, 조선 사대주의 구태[33] 의 상징으로 지목됐던 영은문(迎恩門)을 허물고 독립문을 설립하도록 뜻을 모았다. 독립협회 위원장을 맡았던 시절에는 독립신문의 가장 큰 후원자였으며 그야말로 독립협회 내 핵심요인 중 한 명이었다.

그런데 점차 친미 개화파 계열의 윤치호(尹致昊), 서재필(Philip Jaisohn) 등이 국민 투표를 통한 미국식 참정권을 주장하며 황실과 유생(儒生)들의 경계와 이목을 끌자 독립협회 내에는 균열이 생기고 계속 파열음이 들렸다. 원래 왕정 지지자였던 데다가 자칫 역모의 죄까지 뒤집어쓸까 저어한 이완용은 협회 명단에 이름만 남긴채 모든 간부직을 자진 사퇴했다[34]. 독립협회의 모토이자 하부 청년조직인 협성회(協成會)에는 장남 이승구(李升九)[35] 도 창립회원으로 활동중이었는데 이완용이 캘리포니아의 무관학교로 도피 유학까지 보내 버렸다.

러시아와의 갈등과 좌절 그리고 이호준의 죽음[원본 편집]

얼마안가 아관파천 등으로 자신감을 얻은 러시아 제국의 본격적인 개입이 시작됐다. 그들은 대한제국 승인 대가로 각종 이권을 요구하고 사사건건 내정간섭했다. 당시 한국의 독립을 인정받기 위해서는 더이상 국제 사회에서 위신이 떨어져서는 안됐다. 이완용과 대한제국 내각은 자칫 러시아의 침공 위험을 무릅쓰고 영흥·길주·삼수·단천의 금광 및 석탄채굴권 양도 요구를 거부했으며, 군사교관을 보내겠다 일방적으로 통보해왔을 때에도 강력히 거부했다[36].

황실과 내각은 미국통이었던 외부대신(外部大臣) 이완용의 주장대로 미국 쪽으로 줄을 댔다. 아관파천 때 이완용을 도왔던 주한미국공사 알렌을 통해 각종 이권을 헐값에 넘겨 어떻게든 미국의 영향력을 이용해보려 했고, 아울러 러시아 세력 일소 목적의 2차 파천 계획, 소위 미관파천(美館播遷)을 제안했다. 그러나 남북 전쟁 이후 미국의 외교기조는 고립주의였고 러시아 제국과의 충돌을 우려, 거부 의사를 표시했다. 각종 이권을 매우 헐값에 마구 넘겼음에도 미국이 제 잇속만 차리고 대한 제국 황실의 마음대로 움직여주지 않자 이완용의 능력은 결정적으로 의심받게 됐다.

한편, 러시아는 조선의 대미 접촉에 분노와 위기감을 느꼈고, 이에 주한 러시아 공사 베베르고종에게 압력을 가해 1897년 7월 20일 이완용을 학부대신(學部大臣)으로, 재차 9월 1일자로 외직인 평양 관찰사로 좌천시켜 중앙 정계에서 축출시켰다. 좌천 이튿날인 9월 2일 러시아 공사관 베베르의 후임으로 주한 러시아 공사로 부임한 스페에르(Speyer, A. de.)는 고종(高宗)에게 '(이권을 넘기지 않으면)궁궐 경비병을 철수한다','제2의 아관파천을 하겠다'는 등 협박했다. 미국인 헤링턴이 남긴 기록에 따르면 스페에르는 이완용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그는 내가 아는 한 가장 질나쁜 인간이다. 나는 그의 이름에 주목하고 있다. 그는 내 재임기간 내엔 내각에 복귀할 수 없다. 그는 독립을 떠들지만 친미(親美) 하수인 중 하나일 뿐이다. 나는 그들을 조선 정치에서 배제시키려 한다.

1898년 3월 11일 러시아의 압력에다 대미 협상 실패의 책임을 지고 내각에서도 차츰 밀려난 그는 급기야 전북 관찰사로 좌천됐다. 부임 5일만에 직무태만 혐의로 감봉 처분을 받았고, 공금횡령죄까지 뒤집어써 그나마도 파직될 뻔했으며 그해 7월 11일에는 아예 독립협회로부터 제명당하기까지 이른다.

1901년 2월 의정부(議政府) 참정(參政-정1품)이던 아비 이호준이 노환으로 갑자기 쓰러졌다. 고종 황제는 총신 이호준의 후계를 잇게 하려고 급히 이완용을 사면복권시켜 궁내부(宮內部) 특진관(特進官)으로 불러 올렸다. 이호준은 얼마안가 81세를 일기로 사망했고, 이완용은 3년 부친상을 위해 의원면본관(意願免本官)[37][38] 해 정계를 다시금 떠났다. 이호준은 양아들 이완용에게 자신의 모든 정치적 지위와 집안 제사를 잇게 했고,친아들인 이윤용에게는 자신의 장남으로서 막대한 재산을 모두 물려줬다[39].

이완용은 빈손으로 가솔들을 이끌고 양아버지의 고래등같은 저택을 떠나, 남대문 밖 잠배골(현재 중구 중림동), 즉 당시 한양의 어물전이 몰려있던 칠패시장 근처에 그리 크지 않은 집을 구했다. 잠배골은 현재 아현역서울역 사이에 자리한 지역으로 당시에는 번잡하고 못사는 동네였으나 구한말 최초로 설렁탕 전문 식당들이 자리잡은 곳이기도 했다[40].

을사늑약 전후[원본 편집]

친일파로 전향[원본 편집]

1904년 2월 이완용은 3년상을 치르고 상복을 벗었다. 그는 곧 자신의 정치적 스승이자 보호자였던 아버지를 대신해 수구파의 좌장자리에 올랐다. 인생 최대의 기로였다. 이때까지 이완용의 정치적 행보가 전적으로 이호준의 판단에 의한 것이었다면 이제부터의 정치적 결단은 이완용이 독자적으로 내려야 하는 것이었다. 게다가 당시는 러일전쟁에서 일본의 승리가 굳어져가는 시점으로, 당시 세계 어느 누구도 감히 예상치 못했던 일본의 승리에 국권을 침탈당할 위험이 과거 어느 때보다도 커졌다. 시간이 없었다.

일제에 대한 마지막 보루로 대한제국은 다시 한 번 미국을 택했고, 이완용을 재기용해 미국공사관으로 재차 파천할 목적으로 미국과 비밀교섭에 들어갔다. 그러나 미국은 미서전쟁(美西戰爭)의 전리품이었던 필리핀과 북태평양의 지배를 굳히고 러시아태평양 진출을 견제하기 위해 일본과 동맹할 필요가 있어서, 이미 몰래 카츠라-태프트 밀약(일본어: 桂・タフト密約 (かつら・タフトみつやく))까지 체결한 상태였다. 이권을 마구 넘겨줬던 보람도 없이 미국은 한반도에서 완전히 발을 뺐다. 대한제국은 더이상 빌릴 외세의 힘조차도 없었다. 이완용이 스스로 내린 결론과 정치적 결단은 이랬다.

일본은 한국 문제 때문에 두 번이나 큰 전쟁을 치러 이제는 러시아까지 격파했으니 한국에 대해 무엇인들 못하겠는가. 그런데도 일본 천황과 정부가 타협적으로 일을 처리하려고 하니 우리 정부도 일본의 요구에 응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1905년 을사조약(乙巳條約) 체결 즈음 이완용이 남긴 말이다. 이완용과 내각 대신들은 이제 일본의 철저한 대리자로 변신해 제대로 싸워보지도 않고 나라의 주권을 멋대로 포기하는 대가로, 미국에 이권을 넘기는 과정에서 착복했던 부와는 비교도 안 될만큼 엄청난 특권과 부를 거머쥐게 되었다. 원래 친일이었던 개화파, 일본을 경계하던 수구파 가릴 것 없이 조정에 남은 자들과 그의 후손들은 모두 친일파가 되었고 일제에 협조, 반민족행위를 저지르게 된다.

을사늑약[원본 편집]

1905년 11월 17일 이완용은 학부대신으로서 일본특파대사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로부터 지시를 받고, 일본군의 무력시위를 배경으로 어전회의를 열어 고종을 협박, 을사조약에 서명하게 했다. 많은 유생들이 을사오적 이완용을 처벌하라며 여러 차례 상소를 올렸는데, 그는 '시국에 따라 종묘사직을 지키기 위해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으며 조선의 외교권은 힘을 키워 다시 도로 찾으면 된다'고 항변했다고 한다.

그러나 얄궂게도 을사늑약으로 이완용이 과거 1888년 1월 19일 손수 마련했고 1889년 2월 13일에 이전할 때도 직접 참여했었던 대한제국주미공사관이 단돈 5달러라는 푼돈에 일본에 강제 매각됐다[41]. 워싱턴 뿐만이 아니었다. 영국 일본 등 10여 개의 모든 재외 공관이 일본에 즉시 양도 폐쇄되는 국가적 치욕이 기다리고 있었다.[42] 이제 대한제국과 일제의 강제 병합은 시간 문제였다.

총리대신 임명[원본 편집]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1905년 12월에는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의 후원으로 의정대신(議政大臣)을 겸직하고, 1907년 초 대한제국 내각 최고직이었던 의정부(議政府) 참정대신(정1품)에 올랐으며, 조선 근대화 작업을 위해 겸하고 있었던 농상공부 대신서리·광산사무국총재에 유임됐다.

1907년 6월에는 일본과 본격적인 강제병합 준비를 위해 내각 체제가 개편됐다. 이완용은 개각 후에도 총리대신 직에 추천됐다. 처음엔 거부했지만 조선통감부[43] 통감 이토의 거듭된 권유에 결국 수락한다.

1차 가택 화재(火災)[원본 편집]

1907년 6월 내각총리대신으로 궁내부대신서리를 겸하면서 이완용은 매국노의 대명사가 됐다. 하루는 이완용이 어전회의에서 항일 의병장 허위의 처형을 순종황제에게 주청했다. 허위는 황실 어용단체인 황국협회의 간부 출신으로, 1898년 6월 30일부터 같은 해 11월 황국협회와 독립협회가 동시 해체될 때까지 보부상 등을 시켜 서구식 참정권을 주장했던 독립협회를 해체하기 위해 각종 사보타주[44] 를 가하는 등[45] 황실의 더러운 심부름을 했던 전력도 있었다. 어찌보면 황실로서는 공이 있는 인물이었으나 정상은 참작되지 않았다. 이완용의 사형 주청 사실이 알려지자 옛 황국협회 지지자들과 화가난 민중들이 몰려와 그의 집에 불을 놨다. 그래도 이때는 조기에 진압하여 조상들의 위패와 재산의 대부분을 지켰다.

사태 무마 목적의 남인, 북인등의 복권[원본 편집]

1907년(융희 1년) 총리대신 취임 초 자신들에게 향하던 양반들의 불만을 무마하기 위해 역대 당쟁 희생자들로 역적의 오명을 쓰고 축출됐던 남인, 북인등의 복권을 시도한다. 비록 노론벽파 시파로 갈린 것도 백여년 전, 그나마도 외척 세도 정치를 지나 아예 조선의 문을 닫을 때가 다가오고 있었지만 아직 문벌들의 뿌리가 되는 노론계의 집단 반발이 잠시 있었다. 그러나 숙종의 환국 정치를 모방한 사면 이벤트에 국권 침탈을 놓고 고조되던 양반들의 분노를 흩어놓는데는 어느 정도 효과가 있었다.[46] 단, 정여립대동계서학(천주교) 관련자 등은 배제됐다.

1908년(융희 2년) 4월에는 예정대로 77명의 명예를 회복시킨다[47]. 이완용 등의 건의로 사면복권된 명단은 아래와 같다.

  • 한효순(韓孝純), 정인홍(鄭仁弘), 목내선(睦來善), 이현일(李玄逸), 이광좌(李光佐), 조태구(趙泰耉), 조태억(趙泰億), 최석항(崔錫恒), 유봉휘(柳鳳輝), 김일경(金一鏡)
  • 김중기(金重器), 김도응(金道應), 정후겸(鄭厚謙), 김하재(金夏材), 안기영(安驥泳), 권정호(權鼎鎬), 조중호(趙中鎬), 김익순(金益淳), 이희화(李喜和), 민암(閔黯)
  • 이의징(李義徵), 한세량(韓世良), 신치운(申致雲), 이징옥(李澄玉), 원용성(元用星), 허욱(許煜), 이주회(李周會), 이진유(李眞儒), 정해(鄭楷), 서종하(徐宗廈), 윤성시(尹聖時),
  • 박필몽(朴弼夢), 이명의(李明誼), 이사상(李師尙), 윤연(尹㝚), 윤취상(尹就商), 이명언(李明彦), 김중희(金重熙), 권익관(權益寬), 윤상백(尹尙白), 윤지(尹志),
  • 이하징(李夏徵), 유수원(柳壽垣), 심악(沈䥃), 박찬신(朴讚新), 조동정(趙東鼎), 이거원(李巨源), 이명조(李明祚), 권형진(權瀅鎭), 윤휴(尹鑴), 윤원형(尹元衡)
  • 이동양(李東讓), 이범제(李範濟), 이공윤(李公胤), 이중술(李重述), 이하택(李夏宅), 이보욱(李普昱), 김호(金浩), 박필현(朴弼顯), 박태신(朴泰新), 정권(鄭權)
  • 조현빈(趙顯彬), 심유현(沈維賢), 권첨(權詹), 이사로(李師魯), 밀풍군(密豊君) 이원(李垣), 이재화(李在華), 이우화(李宇和), 권숭(權崇), 김정관(金正觀), 김정리(金正履)
  • 정사효(鄭思孝), 권집(權䌖), 김주태(金柱泰), 김윤(金潤), 채동술(蔡東述), 박홍구(朴弘耉), 박홍도(朴弘道)[47]
헤이그 특사 이준,이상설,이위종

헤이그밀사사건 및 고종 양위 강요[원본 편집]

퇴위 즈음의 고종(高宗)
일본 육군 대장 하세가와 요시미치(長谷川好道)

1904년 러일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영일 동맹카츠라-태프트 밀약(일본어: 桂・タフト密約 (かつら・タフトみつやく)) 등을 통해 열강들로부터 암묵적으로 조선 식민지화를 인정받았다. 이에 일본은 제1차, 제2차 한일 협약과 1905년 을사조약을 체결하여 대한제국의 외교권 박탈과 내정 간섭을 본격화했다.

가만 있을 수 없었던 고종은 1907년(광무 11년) 헤이그(Hague) 만국평화회의이준, 이상설, 이위종으로 해당하는 세 명의 밀사를 파견하여 일본 침략의 부당성과 을사조약 무효를 세계에 호소해보려 했으나 결국 좌절해야 했다.

일본이야말로 자기들 뜻대로 순풍에 돛단 듯 가는 줄 알다가 불시에 크게 놀라, 일본 내에서도 당시 온건파로 분류되던 이토 히로부미 등을 질책하는 여론이 일어났고, 원래 계획보다 훨씬 앞당겨 한국 병합을 서둘렀다.

일본은 이완용과 친일 단체들을 앞세웠다. 이완용과 일진회(一進會) 송병준 등은 고종에게 책임을 추궁, 양위를 강요하여 순종이 일본의 각본대로 즉위했다. 고종 퇴위를 계기로 전국적으로 일어난 항일 의거들을 탄압하고 대한 제국 군대를 해산시키기 위해 이완용은 주한주차일본군사령관(駐韓日本軍司令官)이자 통감대리였던 하세가와 요시미치(長谷川好道,1850 ~ 1924)와 긴밀히 협의했다. 이완용은 수구파 출신이라 아직 일본 정부의 요주의 인물이었던 데다 송병준일진회와 경쟁 관계에 있던 터라 헌병보조원(憲兵補助員) 제도, 즉 조선인 앞잡이로 일본 헌병과 함께 항일의병들을 토벌하게 제안까지 했다. 이는 곧 채용돼 곳곳에서 의병들이 학살당했다.

2차 가택 화재(火災) 및 순종 즉위식[원본 편집]

1907년 7월 19일 이완용은 양위에 관한 고종의 조칙이 내려진 당일 곧바로 황제 대리 의식을 거행하려 했다. 그런데 의식을 주관할 궁내부 대신 박영효가 병을 핑계로 입궐하지 않아 차질이 생겼다[48]. 그는 갑신정변 실패이래 1차로 일본에서 10년을 보냈고, 갑오개혁의 실패로 다시 12년 간을 일본에서 망명하면서 불과 1개월전까지 도쿄에 있었다. 그런 그를 친일파 박제순이 주선해 사면시켰고, 귀국 즉시 금릉위[49] 에 복직되고 궁내부 대신에 막 임명된 참이었다. 이 모든 것은 개화파의 거물이자 왕실 친척인 박영효가 한일병합 과정에서 일정한 역할을 해주길 기대해서 였지만, 그는 일본과 친일파들의 기대와 달리 양위만은 막고자 조선통감 이토와 이완용 사이에서 무던히 애를 썼었다. 양위가 확정되자 그는 다시 궁에 나타나지 않았다. 이튿날 이완용은 박영효의 공석을 맡아 궁내부대신 서리로서 양위식을 강행한다[48].

1907년 7월 20일 순종 즉위식으로 공표된 그 시각, 반일 단체인 동우회(同友會) 회원들이 덕수궁에서 2㎞ 거리도 안되는 이완용의 자택으로 몰려가 불을 질렀다[50]. 1차 화재 때와 달리 서울 시내의 경비력과 치안력이 양위식 때문에 모두 덕수궁 쪽으로 집중됐던 탓으로 시위 및 화재에 미처 대처할 수 없었다. 당시 가재도구는 말할 것도 없고 고서적 등과 집안 패물까지 모두 타버려, 이완용은 거의 전재산이 불타는 상당한 피해를 입었다[50]. 특히 그가 집안의 적장자로서 제사를 모셔야될 조상들의 신주까지 몽땅 불 속에 사라지는 바람에 정신적인 충격도 상당했다고 한다[50].

성난 군중들의 방화로 집은 불타고, 이완용의 가족들은 '매국노의 일족들을 잡아 죽여라'는 그들에게 쫓겨 남산 왜성대(倭城臺)에 있던 왜성구락부(倭城九樂部)로 몸만 피했다. 난리가 난 줄도 모르고 이완용과 친일 관료들은 덕수궁에서 순종 즉위식을 주관 중이었다[50]. 즉위식 당일, 일본에 대한 분노가 이완용에게로 옮아 붙으면서 반이완용 데모와 화형식은 서울 말고도 전국 각지 백성들이 모이는 곳마다 격렬하게 진행되었다.

순종 즉위식 도중 덕수궁으로 몰려온 군중들이 일본 헌병대에 가로막힌채 '이완용을 죽여라'라고 외치는 함성 소리를 듣고 나서야 그는 사태를 깨닫고 당황했다. 그와 내각 관료들은 궁 밖으로 나갈 생각도 못하고 쩔쩔매는데, 헌병대가 통과시킨 각 신문 기자들과 관료들이 전국 각지에서 소요 사태가 일어나고 있음을 속속 알려왔다. 이토(伊藤)는 헌병대의 호위를 붙여 이완용을 자신의 마차에 태우고 통감 관저로 갔다[39]. 왜성대의 통감부는 1926년 광화문에 조선 총독부 신청사가 들어서기 전까지 초기 조선총독부 역할을 했는데 이곳에 먼저 피신 와있던 이완용의 부인 조씨는 후일, 피신 첫 1주일간 모든 비용을 이토가 댔다고 회고했다[39].

1907년 9월 이완용과 그 가족들은 왜성대에서 두 달 가량 머물다가 이제 의붓형 이윤용의 집이 된 옛 대저택으로 돌아갔다[39][51]. 앞에서 기술한 대로 이호준의 모든 재산은 친아들인 서자 이윤용에게 상속이 됐지만 이완용은 이호준 사망 당시 상속권을 주장하지 않고 집안 제사를 직접 모시는 적자로서 의무만을 다해왔기 때문에, 비록 이윤용이 의붓형이나마 동생 가족의 편의를 성심성의껏 봐줘 더부살이에 별 어려움은 없었다 한다.

1908년 1월 의붓형집에서 서너 달을 지내던 이완용은 겨우 궁리끝에 태황제로 물러난 고종(高宗)이 직접 저동(현재 명동성당 인근)에 있는 남녕위궁전[52] 을 자신에게 하사한다는 식의 정치적 연출로 사태무마를 시도하기까지 이른다[39].

박영효 탄핵[원본 편집]

친일파들은 원활한 합병 절차 진행을 위해 철종의 사위이자 개화파의 거물 박영효에게 정치 참여 의사를 계속 타진했으나 그는 고종 양위 이후 일체 정사에 관여하지 않았다. 그를 압박하기 위해 이완용과 법부대신 조중응(趙重應, 1860 ~ 1919)은 순종 즉위식에 나타나지 않은 박영효를 처벌하라는 상소를 새 황제 순종에게 올렸다[39]. 조중응은 이완용의 처가쪽 친척이기도 했으며 이완용과 함께 올린 상소문에서 '이번에 황제의 위를 물려준 것은 태황제의 순수한 심정에서 나온 것이며 종묘사직이 억만년토록 공고하게 될 기초가 여기에 있으므로 경사롭게 여기고 기뻐하지 않은 신하와 백성이 없다 그런데 박영효가 그 직책을 회피했으니 그 죄를 물어야 한다'라며 사태를 완전 왜곡했다[39].

순종은 박영효 체포 상소를 일단 윤허했다[53]. 이에 박영효는 역시 황제 대리 의식 집행을 거부한 시종원경 이도재, 전 홍문관 학사 남정철과 함께 법부에 구속되었다. 이때 구속 수감된 박영효가 갑자기 배탈이 나 고생했는데, 이 소식을 들은 이토 통감이 그를 달래보려고 직접 약을 보냈으나 그는 한국에 약이 없냐며 물리쳤다. 그는 경무청에서 심문을 받으며 "총리대신 이완용을 역적이라 했을 뿐 나는 무죄다"고 강변했지만 유배형에 처해져 제주도로 귀양갔다[54]. 그렇긴 했어도 순종 황제는 제주도 밖으로 이동해도 죄를 묻지는 않겠다고 밀지(密旨)를 따로 줬다고 한다.

오래지나지 않아 박영효는 유배형에서 도성 출입금지령으로 감형, 1910년 마산에서 한일 병합의 비보를 듣는다. 그때부터 박영효 역시 조선에 대해 체념하고 후작 작위와 은채공사금 28만원을 받고 조선귀족에 편입된다.[55] 친일파로서 첫손가락에 꼽히는 이완용이 15만원, 박제순이 10만원이었다.

이완용이 일본에게 받은 훈장

정미7조약[원본 편집]

순종이 즉위한 뒤, 정미칠조약에 서명하여 내정권을 스스로 일본에 넘겼다. 정미조약 체결의 원흉인 정미칠적 명단에는 이완용의 맏며느리 임건구의 친삼촌인 사돈 임선준(任善準)의 이름 역시 확인되고 있다.

8월에는 매국친일(賣國親日)의 대가로 일본으로부터 대훈위국화대수장(일본어: 大勲位菊花大綬章 (だいくんいきっか だいじゅしょう),영어: Grand Cordon of the Supreme Order of the Chrysanthemum)을 받았다[56].

국화대수장은 일본 황실이 현재도 수여하고 있다. 역대 수훈자 목록에서 한국인의 이름은 현재까지 4명이 확인되는데 조선 왕족들인 순종의 황태자이자 마지막 황손 영친왕 이은(李垠), 의친왕의 장남 이건(李鍵), 그리고 히로시마에서 원폭에 폭사당했으며, 요근래 국내 네티즌 사이에서 미남 왕족으로 인기를 끌었던 의친왕의 차남 이우(李鍝) 등 3명이 명단에 올라있고, 왕족을 제외하고는 이완용이 유일하다.

영친왕 이은 황태자책봉 주도[원본 편집]

순종(純宗)이 정식으로 황제가 되자 이완용은 왕실의 왕위 계승 문제에도 개입하기 시작했다. 그는 자식이 없었던 순종황제의 세자로 반일적 성향의 다섯째 동생 의친왕 이강(義親王 李堈,1877 ~ 1955)이 아닌, 아직 10살 꼬마였던 막내 영친왕 이은(英親王 李垠,1897 ~ 1970)을 점찍었다.

1907년 8월 17일 태황제 고종(高宗)은 이완용의 추천대로, 후사가 없었던 순종의 황태자로 순종황제의 막내 동생 영친왕을 결정했다[57][58]. 당시 차기 대권의 유력 주자였던 흥선대원군의 적장손(嫡長孫)이자 자신의 장조카 영선군(永宣君)[59] 장성한 아들 의친왕을 견제해, 막후에서 실질적 권력을 쥐려했던 고종(高宗)의 노욕과 이완용의 정략(政略)이 맞아떨어진 결과였다[60]. 이로써 끊임없이 잠재적 왕위계승자로서의 대우와 주목을 받아왔던 영선군의친왕은 졸지에 황태자의 신하로 격하(格下)됐다.[60]

한편 왕위계승문제에까지 개입한 그에 대한 조정 대신들의 시각은 악화됐고, 그가 권세를 부리며 온갖 참견을 시작하자 양위를 같이 주도하던 사람들조차 등을 돌리게 됐다. 황실은 일제와 친일 내각의 거수기로 전락하게 됐으며 친일 내각이나마 조선인들이 다스리던 나라는 한일병합 후에는 총독부가 설치돼 완전히 일본인들에 의해 통치되는 망신과 굴욕을 겪어야 했다.

기유각서[원본 편집]

1909년 7월에는 이완용의 독단으로 기유각서를 일본과 교환, 대한제국의 사법권마저 일본에 넘겨주었다.

민중들의 분노와 암살 위협[원본 편집]

1909년 12월 24일자 황성신문. 12월 22일 낮에 명동성당에서 이재명 의사에게 칼에 찔려 병원으로 이송되었다고 보도한 내용이다.

고종이 퇴위하고 순종이 즉위하자 이완용은 망국노, 역적이라는 질타를 받았고 반(反)이완용 시위, 이완용 화형식이 곳곳에서 거행되었다. 특히 블랙리스트에 오른 일본 정부 요인들과 매국 인사들을 처단하기 위해 암살단이 곳곳에서 꾸려졌고 이완용은 언제나 그들의 1번 타겟이 되었다.

1909년 10월 26일에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가 암살됐다. 이완용은 11월 4일 서울 남산 장충단에서 열렸던 이토 통감 추도회에 침통한 표정으로 참석했다. 추도회는 일본 현지의 이토 히로부미의 장례식과 동시에 거행됐는데, 시종원경(侍從元卿) 윤덕영, 한성부민회(漢城府民會) 대표 윤효정 등이 대표로 함께 얼굴을 내밀었다. 그는 추도문을 읽는 자리에서 이토 공은 자신의 스승과 같은 존재였으며 그가 제창한 극동평화론(極東平和論)[61] 의 뜻을 지지하고 존경한다고 말하는 동시에 그를 암살한 안중근 의사(1879년 9월 2일(황해도 해주) - 1910년 3월 26일)를 조선인의 이름으로 맹렬히 비난했다[62].

1909년 12월 22일에는 앞서 17일에 사망한 벨기에 황제이자 콩고 인종 학살의 주범, 레오폴 2세의 명동성당 추도미사에 참석하기 위해 인력거에 올랐다. 성당 정문 근처에서 군밤장수로 변장하고 기다리던 이재명 의사(義士)[63] 가 이완용을 덮쳐 그의 옆구리와 어깨등을 순식간에 3차례 찔렀다. 그는 자신과 실랑이를 벌이는 인력거꾼 마저 찔러 밀쳐내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다 일본 순사의 군도에 넓적다리를 맞고 체포됐다. 인력거꾼 박원문은 그 자리에서 절명, 이완용은 곧바로 대한의원(서울대학교병원의 전신)으로 후송됐다. 이재명 의사는 이듬해 9월 이완용에 대한 살인미수 혐의 및 박원문을 살해한 죄로 교수형에 처해졌다.

이때 이완용은 칼에 왼쪽 폐가 관통됐는데, 마침 일본인 치료목적으로 파견와있던 일본인 외과의사들과 당시의 최신의료기술을 총동원, 구사일생으로 살아났다. 다만 이때부터 얻은 폐쪽의 지병이 천식과 폐렴으로 발전, 평생 동절기마다 크게 고생했고 결국 그로 인해 사망하게 된다. 어쨌든 이완용은 약 2개월간의 입원 치료 끝에 자리를 털고 일어날 수 있었다.

1910년대~1920년대 활동[원본 편집]

한일 병합 조약[원본 편집]

1910년 8월에는 내각총리대신 이완용은 일본의 각본대로 내각회의를 소집해 한일병합에 관한 건을 상정하고 어전회의에 올려 뻔뻔하게도 황제의 면전에서 합병안을 통과시켰다. 이에 따라 한일양국병합전권위원회가 설치되자 22일에는 스스로 전권위원에 올라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의 관사에서 한일 병합 조약에 직접 서명했다. 다음은 이완용이 긴 협상 끝에 서명한 조약 전문이다.

한국 황제 폐하와 일본국 황제 폐하는 두 나라 사이의 특별히 친밀한 관계를 고려하여 상호 행복을 증진시키며 동양의 평화를 영구히 확보하자고 하며 이 목적을 달성하고자 하면 한국을 일본국에 병합하는 것이 낫다는 것을 확신하고 이에 두 나라 사이에 합병 조약을 체결하기로 결정하였다.

이를 위하여 한국 황제 폐하는 내각 총리 대신(內閣總理大臣) 이완용(李完用)을, 일본 황제 폐하는 통감(統監)인 자작(子爵) 사내정의(寺內正毅, 데라우치 마사타케)를 각각 그 전권 위원(全權委員)으로 임명하는 동시에 위의 전권 위원들이 공동으로 협의하여 아래에 적은 모든 조항들을 협정하게 한다.

  1. 한국 황제 폐하는 한국 전체에 관한 일체 통치권을 완전히 또 영구히 일본 황제 폐하에게 양여함.
  2. 일본국 황제 폐하는 앞조항에 기재된 양여를 수락하고, 완전히 한국을 일본 제국에 병합하는 것을 승락함.
  3. 일본국 황제 폐하는 한국 황제 폐하, 태황제 폐하, 황태자 전하와 그들의 황후, 황비 및 후손들로 하여금 각기 지위를 응하여 적당한 존칭, 위신과 명예를 누리게 하는 동시에 이것을 유지하는데 충분한 세비를 공급함을 약속함.
  4. 일본국 황제 폐하는 앞 조항 이외에 한국황족 및 후손에 대해 상당한 명예와 대우를 누리게 하고, 또 이를 유지하기에 필요한 자금을 공여함을 약속함.
  5. 일본국 황제 폐하는 공로가 있는 한국인으로서 특별히 표창하는 것이 적당하다고 인정되는 경우에 대하여 영예 작위를 주는 동시에 은금(恩金)을 줌.
  6. 일본국 정부는 앞에 기록된 병합의 결과로 완전히 한국의 시정을 위임하여 해당 지역에 시행할 법규를 준수하는 한국인의 신체 및 재산에 대하여 전적인 보호를 제공하고 또 그 복리의 증진을 도모함.
  7. 일본국 정부는 성의충실히 새 제도를 존중하는 한국인으로 적당한 자금이 있는 자를 사정이 허락하는 범위에서 한국에 있는 제국 관리에 등용함.

본 조약은 한국 황제 폐하와 일본 황제 폐하의 재가를 받은 것이므로 공포일로부터 이를 시행함.

위 증거로 삼아 양 전권위원은 본조약에 기명 조인함.

융희4년 8월22일 내각총리대신 이완용 명치43년 8월22일 통감자작 데라우치 마사타케


조약체결후 곧 관직을 사퇴한 이완용은 조약문 5번 조항의 혜택으로, 일본 정부로부터 훈1등 백작(伯爵)의 작위와 잔무처리수당 60여 원(당시 일본돈 2원은 조선엽전 1천닢과 같은 가치였다고 한다[64]), 퇴직금 1,458원 33전, 총독부의 은사공채금 15만 원을 지급받았다.

경술국치(한일병합) 이후[원본 편집]

1916년 8월 4일매일신보. 이완용이 기고한 글로 이왕가의 왕세자 이은의 결혼 결정을 '내선융화'로 미화했다.

한일병합이후, 백작이 된 그는 1912년조선총독부 중추원 부의장에 올라 '일선융화'(日鮮融化)를 진행시켰다. 그는 정기적으로 일본천황에게 조선귀족 대표로 직접 문안인사를 갔으며, 신사 참배는 물론이거니와 조선인 귀족들을 모아 두고 '천황폐하 만세'를 불렀다. 그해 7월 11일 농사장려회 회장으로 추대됐다.

1915년 10월 13일 조선농회 회두(會頭)로, 16년 7월 30일에는 이무회의 회두로 선출됐고, 1918년 5월 25일에는 조선귀족회 부회장에 선출됐다.

1919년 1월 15일고종 황제가 붕어했다. 시중에 독살설이 떠돌았는데, 고종 양위를 강요했던 친일파들, 특히 이완용이 그 배후로 지목됐다.

3.1운동 비난 및 망언[원본 편집]

1919년 4월 5일매일신보 1면에 이완용이 3.1 운동의 실패를 주장하는 경고문 3번째 발표한 글.

1919년 3월 1일, 조선에서는 고종의 승하(昇遐)와 국제 연맹우드로 윌슨(Thomas Woodrow Wilson, 1856년 12월 28일 ~ 1924년 2월 3일) 미국 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 제창에 호응해 3·1 운동이 일어났다. 그 역시 민족 지도자들로부터 동참을 요청받았으나 오히려 당시 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에게 탄압 필요성과 그 방안에 관한 편지를 수차례 보내기도 했다. 이완용은 공식적으로 경고문을 연달아 3회 발표하고, 3·1 운동이 불순세력에 의한 불순한 난동에 불과하며, 약육강식의 시대에 조선의 독립 기도는 허망할 뿐이라며 망언했다.

친일관료 및 사회단체 활동[원본 편집]

1920년에 일제는 3·1 운동 진압에 대한 공로로 그를 백작에서 후작으로 올려줬다. 일제 치하에서 그의 입지는 일본 황실로부터 훈장과 작위를 받으면서 더욱더 확고해졌다.

앞줄 왼쪽-손자 이병주, 가운데-이완용 본인, 안긴 아이는 손자 이병철, 뒷줄 왼쪽-손자 이병길, 뒷줄 가운데-차남 이항구, 뒷줄 오른쪽-손자 이병희

1921년에는 조선인 귀족 명부 관리 기관인 중추원(中樞院) 고문 겸 부의장을 지냈다. 내선일체(內鮮一體)와 일본어 보급을 독려했으며, 조선귀족원 회원, 농사장려회 회장, 조선물산공진협찬회 명예회원, 일본제국군인후원회 조선지부 평의원, 조선귀족회 부회장, 농림주식회사고문, 총독부 교육조사 및 산업조사위원, 조선농업교육연구회 고문, 선만노몽연구협회 고문 등등 친일단체들마다 깊숙히 간여해 일본의 식민지 정책과 한반도 수탈을 음으로 양으로 돕는다.

未離海底千山暗, 及到天中萬國明
[65] 가 아직 바다 속을 떠나지 않았을 땐 온 산이 어둡더니, 하늘로 떠오르니 온 세상이 밝아지는구나.

이완용이 송태조 조광윤(趙匡胤)의 영일시(詠日時-해를 찬양함)[66] 를 인용, 일본을 찬양했던 구절

1922년 3월 14일에는 조선미술전람회 서예부문 심사위원으로 위촉됐다.

1923년 1월 6일에는 조선사편찬위원회 고문으로 한국 역사를 일본의 시각에 껴맞춰 해석, 왜곡하는 이른바 친일사관을 정립하는 데 힘을 보탰다.

1924년에는 그의 아들 이항구도 남작(男爵)이 되어, 조선인으로는 거의 드문 부자귀족(父子貴族)이 되기도 했다[67].

이완용과 핵심 친일파들 몇몇은 일제시대 내내 승승장구했던 반면 다수의 귀족들과 나머지 양반들의 형편도 국민들과 마찬가지로 점점 비참해졌다. 1910년 경술국치 이후 상당수의 귀족들이 일본으로부터 작위를 받고 상금을 받았지만, 일본의 수탈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면서 일어난 인플레이션으로 가만히 있어도 금방 돈의 가치가 떨어졌고, 그나마도 무위도식하거나 타락해서 방탕한 생활로 몰락해 가는 판이었다[68].

대부분 세습 대토지로 사치를 누려온 그들이었지만, 일본에서 쏟아져 들어오는 공산품에 비해 농업의 가치는 나날이 떨어져가기만 해서, 계속 토지에 의존했던 그들 가운데는 이미 파산 지경에 이르러 품위 유지는 물론 생활조차 꾸려나가기 힘들 정도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68]. 왕실과 연이 닿았던 이들중에는 창덕궁으로 몰려가 전 황제 고종, 순종 부자에게 가세의 어려움을 하소연하며 용돈을 타서 생활하는 자들도 있었다고 한다.

최후[원본 편집]

말년의 이완용

앞에서 기술한대로 이완용은 매년 겨울철만 되면 해소(咳嗽)와 천식, 폐렴과 흉통 등으로 고통을 겪었다. 일본에서 의사들을 불러 그 후로도 계속 정기적인 진료를 받았으나 차도는 보이지 않았다. 시들어가는 몸과는 반대로 그의 재산은 늘어나기만 했는데, 특히 땅 재산은 1억 3천만 평까지 불어났다. 당시 조선인 가운데 왕을 제외하고 가장 부자라는 소문까지 있었지만 폐렴과 해소 증상은 어쩔 수 없었고 죽을 때까지 흉통에 시달렸다. 이런 증상은 나이가 들면서 점점 더 심해졌다.

1925년에도 가을까지는 전라남도 화순군 동복면의 명승지 물염적벽(勿染赤壁)을 유람하고 11월 하순에는 순종에게 문안인사를 하는 등 활발하게 활동했다. 그러나 찬바람이 불면서부터 다시 해소가 심해져 12월 5일 황해도 장단군 소남면 유덕리의 우봉 이씨 시조 이공정의 묘에서 열린 제사에 참석하지 못했다[69]. 오래전 유실됐던 시조 이공정의 묘를 이완용이 손수 이것저것 챙겨 드디어 개축공사를 끝내고 원래 직접 제사를 지내려하려 했으나, 지병인 기침이 목숨을 위협할 정도로 심해졌다[69].

그후 얼마간 집에 들어앉아 요양을 해 어느 정도 호전됐다. 그래서 1926년 1월 12일 오전 10시 총독부에서 열린 중추원 신년 제1회 회의에 다소 무리를 해 참석하게 된다[70]. 조선 총독부는 그해 1월 1일 경복궁 안에 신축한 청사로 이전해 있었으며, 조선 귀족 등록관청인 중추원도 새 청사 한 귀퉁이에 자리잡고 있었다. 조선 총독부는 새 청사를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 正毅) 초대 총독이 입안했고, 하세가와 요시미치(長谷川 好道) 전 총독(2대)이 착공한 이래 9년만에 완공을 본 당시 동양 최대의 건물이라며 대대적으로 선전했다.

이완용은 새 청사에서 열린 새해 첫 회의인데다 사이토 마코토(齋藤 實) 총독(3대)도 참석한다고 해서 무리할 수 밖에 없었는데 이것이 그의 병을 결정적으로 악화시키고 말았다[70]. 부축을 받고 귀가 후 밤이 되자 기침이 손쓸 수 없을 정도가 됐고, 이내 졸도해 며칠간 고열에 시달리다 혼수상태에 빠졌다. 2월 11일 오전 오늘이 고비라는 소식을 들은 순종(純宗)은 적포도주 한 상자를 이완용의 집으로 보냈다[70]. 1926년 2월 11일 오후 1시 20분 이완용은 옛 주인이 보낸 포도주를 입에 대보지도 못한 채 일본인 의학 박사 두 명과 조선인 주치의, 그리고 그의 의붓형 이윤용과 차남 이항구가 지켜보는 가운데 옥인동 집에서 눈을 감았다. 향년(享年) 69세. 장손 이병길은 일본 유학 중으로 임종을 지키지 못했다.

사후[원본 편집]

1926년 2월 13일 매일신보의 이완용 부고 기사

1926년 2월 12일, 장례식은 일본인, 조선인 합쳐 50명의 장례위원들이 엄수했고, 일황(日皇)이 하사한 조선총독부 중추원 부의장 정2위대훈위후작 우봉이공지구(朝鮮總督府 中樞阮 副議長 正二位大勳位候爵 牛峯李公之柩)라고 적힌 장례깃발을 앞세워 호화로운 장례 행렬이 이어졌다. 일본 순사들의 호위속에 종로 옥인동부터 광화문까지 이어진 장례 행렬의 규모는 고종 황제 장례행렬을 넘는 게 아닌가 할 정도였다고 한다.

1926년 2월 13일자 동아일보 사설란

1926년 2월 13일동아일보 사설란에 '무슨 낯으로 이 길을 떠나가나'라는 제목의 기사다.

그도 갔다. 그도 필경 붙들려갔다. 보호순사의 겹겹 파수와 견고한 엄호도 저승차사의 달려듦 하나는 어찌하지 못하였다. 너를 위하여 준비하였던 것이 이때였다. 아무리 몸부림하고 앙탈하여도 꿀꺽 들이마시지 아니치 못할 것이 이날의 이 독배이다. (중략) 어허, 부둥켰던 그 재물은 그만하면 내놓았지. 앙탈하던 이 책벌을 이제부터는 영원히 받아야지!

이완용은 전라북도 익산군 낭산면 낭산리의 산에 묻혔다. 어떤 연고가 있어 택한 것은 아니고, 유명한 풍수가를 통해 점찍어둔 명당 장소였던 것으로 보인다. 일설에는 매국 행동에 대한 앙갚음으로 인한 묘소 훼손이 두려웠던 나머지 1926년 당시에는 굉장히 궁벽한 벽지였던 낭산리 임야를 일부러 택했던 것으로 추정하는 의견도 있다[71]. 해방 이전에도 훼묘 사건이 종종 있어 일본 순사가 묘를 지켰고 해방 이후로도 지속적으로 훼묘 사건이 끊이지 않아 급기야 1979년, 직계 후손들이 아예 파묘(破墓)하여 그 유골은 화장했다. 현재 그의 묘터는 이후 채석장으로 바뀌어 그나마 옛 흔적조차 사라져 버렸다.

1935년 당시 총독부가 편찬한 《조선공로자명감》에 조선인 공로자 353명 중 한 명으로 수록됐다[72][73].

1945년 해방후 이완용의 가족과 후손들은 가는 곳마다 사람들에게 손가락질 당하거나 돌팔매를 맞고 다녔다. 장손주 이병길은 앞서 말한대로 6.25 전쟁때 행방불명되었으며 둘째 손주 이병주는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이기지 못하고 1962년 일본으로 밀항해 아예 일본인으로 귀화했다고 한다. 또한 큰증손자 이윤형은 남은 재산을 정리해 캐나다로 이민을 가는 등 이완용의 직계후손은 거의 뿔뿔이 사방으로 흩어졌다[74].

2002년 민족정기를 세우는 국회의원모임이 발표한 친일파 708인 명단2008년 공개된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에는 아들 이항구와 함께 이름이 올랐다. 민족문제연구소의 명단에는 6.25때 행방불명된 장손자 이병길의 이름도 올라있다.

2006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조사,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106인 명단에 포함되었다. 2007년 대한민국 친일반민족행위자재산조사위원회는 이완용과 이병길의 재산을 국가로 환수하기로 결정했다.[75]

이완용과 관련된 요즘 사건들[원본 편집]

1992년부터 이완용의 후손들은 캐나다로 이민간 장손주 이윤형을 대표로 조상땅찾기 소송을 시작했다. 그들은 1992년 서울대학교를 상대로 경기도 고양시 임야 2만 5천평에 대한 반환청구 소송을 냈다가 패소했고, 다시 1998년 7월에는 서울 서대문구 북아현동 일대 토지 2372㎡(약 712평)에 대한 반환청구 소송을 내 승소했다. 반환받은 토지는 즉시 제3자에게 매각, 약 30억원의 매매 이익을 얻었다고 한다. 아직도 이완용과 송병준 등 친일파의 후손들은 친일 환수 재산 반환 소송을 여러 개 준비중이다[76][77].

2008년 12월, 서울대학교병원의 전신인 옛 대한의원 때 일본인 의사가 작성한 흉부외과 수술 차트[78] 가 발견됐다. 해당 기록은 1909년 12월 22일 피습 당일 이완용의 것이라고 서울대학교병원 흉부외과 김원곤 교수가 18일 언론에 밝혔다.[78] 이는 한국 의료 역사상 최초의 흉부외과 기록으로[79], 단순의료기록이라기보다 검사 측 요구로 재판에 채택된 감정서 성격이 큰 것으로 보인다고 한다.[78]

평가[원본 편집]

긍정적 평가[원본 편집]

일단, 그는 조선의 문을 닫은 장본인이고 일본을 끌어들인 것은 맞으나, 그가 있었기 때문에 왕통(王統)의 단절만은 면했다. 그가 일본과 교섭한 결과, 일제시대에도 이왕직(李王職), 왕세자부(王世子附) 등을 통해서 왕실의 명맥만은 유지가 되었으며, 왕족 대부분이 조선인 귀족으로서 일제시대에도 생활을 이어나갈 수 있었다는 데는 평가가 일치한다. 과거 대한 제국의 지배층들 역시 일본에 귀순한다는 조건으로 귀족 작위를 받게 했고, 멸문을 당하게 하지는 않았다. 즉, 조선은 망했어도 왕실만은 남긴 것이다. 이는 그의 일본에 대한 기민한 외교적 대응이 효과가 있었고 이토 히로부미 등 일본 내 온건파들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최소한의 것들은 얻어냈다. 그래서 왕이 보는 앞에서 태연히 나라를 넘기는 조약 문구에 서명을 했음에도 실제로 고종과 순종 모두 그를 특별히 경원하거나 내치지 않았고 특히 순종은 이완용이 와병하는 동안 갖가지 위문품을 보내기도 했다.

같은 친일파 박중양(朴重陽)은 1945년 해방이후 이완용을 '역사의 희생자'라며 변호하였다. 그를 매국노라 매도하긴 쉽지만 국가가 위급존망한 때를, 지도자가 되어 이완용 같이 깔끔하게 일처리를 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라고 하였다[80]. 이어 '폭풍노도와 같은 대세를 항거하는 것은 어차피 불가능한 일이었고 국난을 당하여 분사(憤死)하는 자가 있을지라도 그것이 사상계의 자극은 될 지언정, 부국제민(扶國濟民)의 방도는 아니다. 하물며 관직을 사퇴하고 도피하는 것은 무책임한 자의 행동[80] 일 뿐이다.'라며 이완용이 모든 악역을 자처했다고 변호했다. 그는 '누구라도 이완용과 동일한 경우의 처지가 된다면 이완용 이상의 선처할 도리가 없을 것이다.'라며 이완용 등은 단순히 매국노가 아니라고 주장했다. 이는 을사조약 때나 경술국치 이후 관직을 내놓았던 일부 양심 인사들, 또한 그들을 존경하던 사람들과 엄청난 논쟁꺼리가 되었다.

한편, 신중히 생각해서 결정을 내리며 한 번 결심한 일은 반드시 성취하는 의지가 굳은 인물이라는 하마평이 있었다. 육영공원(育英公院)에서 처음 접해보는 영어와 서양 학문들이었을 텐데도 매우 우수한 학습 능력을 보여줬다. 당대 최고 평판의 서예가이기도 했으며 실제로 독립문 현판을 직접 쓰기까지 했다. 그가 독립협회 위원장직을 지낸 시절, 각종 국민 계몽 활동에 열심을 냈고 독립신문을 대대적으로 지원하기도 했다. 그리고 독립문 설립에 앞장서 독립의지를 국내외에 알렸던 과거가 있었고, 당시에 한해서는 그의 독립 의지가 진심이었다는데는 이견이 없다.

특히 아관파천 이후 러시아의 각종 이권 요구를 막아낸 이완용을 서재필독립신문 1897년 11월 11일 자 논설을 통해 "이완용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나라를 위해 외국에 이권을 넘겨주는 것에 반대했다"면서 "대한의 몇 째 아니 가는 재상"으로 극찬하고 있다[36]. 이완용과 동시에 과거에 급제했던 서재필은 갑신정변의 주동자로 부인과 젖먹이 아들까지 죽임을 당하고 미국으로 도망가 갖은 고생을 다했었고[81], 당연히 수구파의 좌장격인 이완용에게 감정이 좋지 않았을 터였음에도 칭찬한 것이다. 물론 이완용이 이후, 서구식 참정권을 주장하는 개화파 계열 독립협회원들을 공격하고 이내 협회내 모든 간부직에서 자진 사퇴하자 둘 사이의 틈은 돌이킬 수 없는 것이 되었으며, 수구파들을 대동하여 친일 개화파들과 짬짜미해 임금과 백성을 속이고 일본에 나라를 팔자 서재필은 더 큰 증오와 멸시를 보내게 된다.

부정적 평가[원본 편집]

첫째, 위의 긍정적 평가의 이면엔 과연 무엇을 위한 타협이었나라는 근본적 의문이 존재한다. 나라가 없이 왕실이 무슨 소용이며 대다수 양반들 역시 일반 국민과 마찬가지로 구차하고 고생스러운 삶은 마찬가지였고, 더욱이 일제에 착취당하며 곧 강제징용 및 일본군위안부 등으로 학대당하게 될 백성들의 삶은 애당초 왕실과 친일파들의 고려대상이 아니었다.

둘째, 일본과 러시아의 틈바구니 속에서 조선의 독립을 놓고 이리저리 애썼던 것만은 사실이나, 그에게 있어 독립이란 '근대적 국민 국가'로서의 독립보다는 왕실 보존 및 안위 문제로서의 '독립'이란 의미였다. 그 예로 미국을 끌어들이려 온갖 수를 다썼지만, 정작 미국을 본받아야 했던 보통교육, 참정권, 공화정, 노비 철폐 등은 전혀 도외시했고, 근대적 의회 정치에 대한 합의를 이끌어 내거나 국가로서 세계에서 인정받을 수 있는 가장 기본적 조건인 근대 헌법 제정등에 전혀 한 일이 없다. 특히 이완용 등 수구파들이 대한제국을 선포하며 내놓은 헌법(大韓國 國制)이라는 것은 왕권의 전통적 절대성만을 강조한 내용으로, 국민 모두를 아우를 지지와 합의를 이끌어낸다는 것은 애당초 불가능했다.

셋째, 근대 개혁을 정부 주도로 하려했음에도 그 동력이 될 국가 예산이나 국가 재산 및 세수 확보에도 한 일이 없다. 수백년간 면세를 누려온 양반들, 특히 온갖 혜택을 독점한 문벌 세도가들이라던지, 왕실 종친들에게 사사로이 주었던 국가 전매 사업등, 근대화에 방해가 되는 사회 구조를 놔두고 이완용 등 수구파들이 한 짓은 각종 이권을 열강들에게 헐값에 넘기는 일 뿐이었다. 여기서 받은 얼마간의 돈은 왕실 재정과 일부 정부 요인들에게 도움은 됐을지언정, 이권을 넘겨 열강들이 마구 국부를 유출해 가는 통에 정부 재정과 국민의 삶은 더욱더 피폐해져 갔다. 게다가 일본에 나라를 판 후 대가로 불어난 그의 재산은 현재 추산 수조원에 달했고 가진 땅만 1억 3천만 평이 넘었어도, 을사조약 체결 직전 변명처럼 떠들었던 '나라가 다시 부강해지면 그 때가서 국권을 되찾으면 된다'는 말을 실현하기 위해 한 일이 전혀 없었고, 후배들과 역사에 전혀 본보기가 되지 못했다.

넷째, 그의 리더십으로는 대한제국 정부 내각 내에서조차 합의를 이끌지 못하고 정적(政敵)들만 자꾸 생겼다. 이완용이 젊은 시절 주미공사관에 있을 때부터 수십년간 그를 지켜봐왔던 윤치호는 다음과 같은 인물평을 남겼다.

나는 이완용을 대단히 싫어한다. 그의 특권의식, 야비한 교활성과 음흉함, 그와 같거나 열등한 사람들에 대해서는 고집스럽고 권세 있는 사람들에게는 굴욕적일 만큼 복종하는 태도, 이 모든 것이 나로 하여금 그에게 편견을 갖게 한다. 이완용은 철저한 기회주의자요 변절주의자 아부주의자였다고 할 수 있다. 주지하다시피 이완용은 초창기 독립협회의 의장이었다. 독립협회의 구성원이 대부분 우습지만 일본과 가까운 사람들이 많았지만 말이다.
- 윤치호 일기 내용 중에서-

이완용의 조카 김명수가 이완용 사후 1주년을 기리기 위해 1927년에 저술한 책 《일당기사》(一堂紀事, 일당(一堂)은 이완용의 호)

또한, 이완용의 조카이자 이완용의 비서직으로 있던 김명수가 이완용을 기리기 위해 1927년 《일당기사(一堂紀事)》를 펴냈는데, 《일당기사》 내용 중에서 이완용의 가치관이 어땠는지를 엿볼 수 있다.

나는 20세 때에 한학(漢學)을 숭상하고 산림학(山林學)에 종사했으나 존도숭유(尊道崇儒)의 풍이 퇴색하고 외국과의 교통이 확장되어 서양과의 교제가 절실하여 하루아침에 머리를 깎고 구미(歐美)로 갔다. 최초에는 조선인이 목적으로 하는 문과에 합격했다. 당시 미국과의 교제가 점차 긴요한 까닭에 신설된 육영공원에 입학했고 미국으로 건너갔다.

갑오경장 후 을미년에는 아관파천 사건으로 노당(露黨·친러파)의 호칭을 얻었고, 그 후 러일전쟁이 끝날 때 전환하여 현재의 일파(日派·친일파) 칭호를 얻었다. 이는 때에 따라 적당함을 따르는 것일 뿐 다른 길이 없다. 무릇 천도(天道)에 춘하추동이 있으니 이를 변역(變易)이라 한다. 인사(人事)에 동서남북이 있으니 이것 역시 변역이라 한다. 천도, 인사가 때에 따라 변역하지 않으면 실리를 잃고 끝내 성취하는 바가 없게 될 것이다.

게다가 매천야록(梅泉野錄)에는 그가 이재명(李在明) 의사(義士)의 칼을 맞고 입원중, 자신을 간호하던 맏며느리 임건구와 간통을 하여 장남 이승구가 자살하였고, 며느리는 이완용이 첩처럼 데리고 살았다는 패륜적 성추문[82] 마저 기록돼 있다.

저서[원본 편집]

  • 《일당기사(一堂紀事)》[83]

대중문화에서 이완용[원본 편집]

가족 관계[원본 편집]

흥선대원군
(興宣大院君)
(
운현궁 가계도)
이호준
(李鎬俊)
조병익
(趙秉翼)
이씨(李氏)이윤용
(李允用)
이완용
(李完用)
이호준 아들로 입적
조씨(趙氏)조민희
(趙民熙)
이명구
(李明九)
이승구
(李升九)
임걸귀이항구
(李恒九)
김진구
(金鎭九)
조중수
(趙重壽)
이병태
(李丙台)
이병길
(李丙吉)
이승구 아들로 입적
이병희
(李丙喜)
이병주
(李丙周)
이병철
(李丙喆)
이병오
(李丙吾)


  • 양 조부 : 이식(李埴)
  • 아버지: 이석준(李奭俊, 다른 이름은 이호석(李鎬奭), 선공감 감역관(正九品) 역임)
  • 어머니: 신씨(辛氏, ? - 1893년 8월 6일)
  • 친형: 이면용(李冕用, 字는 공류(公旒), 1843년(철종9년) - ?, 고종(高宗) 22년(1885) 을유(乙酉) 식년시(式年試) 진사(進士) 3등(三等) 67위(97/238))
  • 양 아버지: 이호준(李鎬俊, 1821년 - 1901년 4월 14일)
  • 양 어머니: 송씨
  • 양 어머니: 여흥 민씨, 이조판서 민용현의 딸,
  • 아내: 양주 조씨(陽州趙氏, ? - ?)- 조병익(趙秉翼)의 딸.
  • 장인 : 조병익(趙秉翼, 본관은 양주)
  • 장모 : 송씨(宋氏)
  • 사돈: 임대준(任大準), 맏며느리 임건구의 친정아버지
  • 사부인 : 윤씨(尹氏, 맏며느리 임건구의 친정어머니)
  • 사돈: 임선준(任善準), 임건구의 숙부
  • 사돈: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

각주[원본 편집]

  1. 조선일보 : 판교 이완용 생가터 처리 고심 --2005년 8월 4일 사회면 기사 "한국토지공사 토지박물관이 2001년 성남시 의뢰를 받아 작성한 '성남시의 역사와 문화유적' 보고서 가운데 '이완용 생가'편에는 1쪽 분량의 이완용 소개글 속에 '현재의 생가는 백현동 아랫말 뒷가게인 이모씨의 집으로, 옛 집은 헐리고 새로 지은 것'이라고 적혀있다. 성남시는 원주민 구증을 토대로 “이완용 생가는 백현동 226의 1(자연녹지)로, 한국전쟁 때 소실된 뒤 다른 사람이 신축했으며 최근까지 기와지붕의 허름한 주택에 이모씨가 살다가 보상을 받고 이사했다”고 밝혔다.
  2. 한국역대인물 종합정보시스템 이면용 편 이완용의 친형 이면용(李冕用)은 1885년 을유년 식년시 진사과에 합격했는데, 그의 출신지가 경기도 광주군(廣州)으로 기재돼있음이 확인되므로 이완용의 고향은 현재 판교가 맞으며 두계 이병도의 익산설은 분명한 거짓임을 밝혀둔다.
  3. 윤덕한, 《이완용 평전》 (중심, 2005) 22페이지
  4. 『숭정기원후5을유식년사마방목(崇禎紀元後五乙酉式年司馬榜目)』(장서각[B13LB 5])
  5. 우봉 이씨는 고려시대 잠성부원군(岑城府院君) 이공정의 후손들로, 이공정의 아들 이자성(李子晟)이 고려-몽골 전쟁몽골의 장군 살리타이의 침입을 막고 경주농민봉기를 진압, 문하시중을 지냈고 조선조에 들어와서도 이길배(李吉培)가 태종(太宗)때 황해도관찰사를 지낸 것을 비롯해 문과 급제자 40명, 우의정 1명, 대제학 1명을 배출한 대표적 양반 씨족 가운데 하나이다.
  6. 윤덕한, 《이완용 평전》 (중심, 2005) 23페이지
  7. 제수(除授): 과거를 보지 않고 왕명(王命)으로 관직에 임명되는 일
  8. 흥선대원군의 서녀(庶女)와 혼인했을지라도 사위이기도 했고, 친아버지와 의붓동생이었던 이완용의 천거(薦擧)로 서자(庶子)로서는 생각할 수 없는 고급관리직을 두루 역임한다. 후일 의붓동생 이완용과 함께 친일파 조선귀족이 되어 친일파인명사전에도 이름이 오른다.
  9.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의병(義兵)으로 활약했다.
  10. 김집(金集,1574~1656): 호는 신독재(愼獨齋). 노론의 뿌리가 되는 서인 기호학파의 영수. 우암 송시열의 스승이다. 예학 발전에 지대한 공을 끼쳤고 아버지 사계 김장생과 함께 부자(父子)가 함께 문묘에 배향되는 조선 유교계 최고의 영예를 누렸다. 반면 공물 현납의 폐단을 보고도 못 본 척하고 대동법(大同法) 시행을 반대했던 산당(山黨)의 우두머리로 조선 후기 개혁을 방해한 잘못을 비판받고 있다.
  11. 친형 이만창(李晩昌,1654~1684)의 아들로, 이만성은 삼촌 이영의 양자로 갔으니 본가 친형의 아들인 도암 이재는 3촌이 아닌 5촌 조카뻘이 된다.
  12. 선공감(繕工監):『경국대전』에는 토목과 선공을 맡는다고 되어 있고, 제조(提調) 2인을 두는데, 판관(判官) 이상 1인은 장기 복무인 구임(久任)으로 한다고 하였다. 관원으로 정(정3품) 1인, 부정(종3품) 1인, 첨정(종4품) 1인, 판관(종5품) 1인, 주부(종6품) 1인, 직장(종7품) 1인, 봉사(종8품) 1인, 부봉사(정9품) 1인, 참봉(종9품) 1인이 있었다.
  13. 당시 그는 예방승지(우승지,右承旨)였음.
  14. 윤덕한, 《이완용 평전》 (중심, 2005) 36페이지
  15. 윤덕한, 《이완용 평전》 (중심, 2005) 37페이지
  16. 주서(注書): 조선시대 문하부(門下府)·승정원(承政院)에 두었던 정칠품(正七品) 관직으로 정원은 2원이다. 1인은 약방(藥房)을 관장(管掌)하고, 1인은 일기(日記)를 관장(管掌)하였다.
  17. 갑과나 을과 급제자는 보통 6, 7품, 병과급제자는 8품이나 9품으로 임명되는 것이 상례였다. 갑과 급제자는 승진이 빠르고 각종 청요직(淸要職)을 거치며 고관대작(高官大爵)이 될 수 있었다.
  18. 실례로 이완용과 과거 급제 동기인 서재필은 이완용보다 과거 성적도 더 높았고 최연소 합격자였음에도 집안이 받쳐주질 못해 약 3개월여를 임관도 못한채 대기 상태에 있어야 했다.
  19. 해방영(海防營): 해방아문(海防衙門)이라고도 한다. 1884년(고종 21)에 설치하여 경기·황해·충청 3도의 수군(水軍)을 통할하였다. 1888년 친군영(親軍營)에 딸린 우영(右營)·후영(後營)과 합하여 통위영(統衛營)으로 개편되었다.
  20. 임오군란 이후 전통적 유교 체계만을 고집하던 대원군파(혹은 척화파)들이 쫓겨나고, 조정에는 급진적이든 점진적이든 서양 문물을 받아들이는 쪽으로 방향이 정해졌었다. 현재 우리가 수구파라 부르는 이들, 즉 명성황후를 위시한 민씨 정권이 청나라식 개혁을 주장했으며, 김옥균, 박영효등은 일본식 개혁을 주장하여 갑신정변을 일으켰다. 고종은 청나라식 개혁에 손을 들어줬고, 이에 이호준과 그의 후계자 이완용 및 조정 대신들은 이후 수구파로서 왕정 수호 및 유교적 질서를 담보한 서양 문물의 도입이라는 목표를 두고 행동하게 된다.
  21. 보덕(輔德): 세자의 스승으로서 보통 세자가 보위에 오를 경우 새로운 왕의 곁에서 다음 정권을 함께 책임지는 자리였다. 원래 종3품 이었는데 정조 8년에 정3품 당상관으로 격상되었다.
  22. <<영약삼단(另約三端)>> ① 조선 공사는 주재국에 도착하면 먼저 청국공사를 찾아와 그의 안내로 주재국 외무성에 간다. ② 회의나 연회석상에서 조선 공사는 청국공사의 밑에 자리한다. ③ 조선 공사는 중대 사건이 있을 때 반드시 청국 공사와 미리 협의한다.
  23. 남편을 따라 미국에 간 최초의 여성들(부제:미국 신문에 실린 이완용의 부인) -1981년 12월 23일 경향신문 9면 기사
  24. <이완용 평전>
  25. 삼남: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를 이르는 말
  26. 1893년 동학교도와 大院君의 擧兵 企圖 The Coup Attempt of Taewongun and the Tonghak Followers - 한국사학보 제12호 (2002. 3) pp.97-133 1229-6252 KCI
  27. 새 시대에 대한 열망과 외세 배척을 기치로 일어난 동학농민운동을 당시 조선 조정은 동학난으로 규정해 폄하했다. 유교 사회에서 동학은 사도(邪道)였고 왕조와 신분질서가 뒤집힐 수 있는 위기였다. 고부 군수 조병갑 등 탐관오리들에 대한 반감에서 터진 이 사건은 필연적으로 고종과 문벌 세도가들에 대한 반감으로 흐르게 되어 있었다.
  28. 10년전 갑신정변 당시 조선에는 위안스카이를 비롯 청군 수천 명이 주둔했었다. 갑신정변이 실패하면서 일본군과 개화파들은 고종을 납치해 데려가려 했는데 위안스카이의 청군이 전투에 승리하면서 이후 조선의 패권은 청나라가 쥐게 됐었다. 이듬해 톈진 조약으로 청일 양국은 조선 반도에서 군을 철수시켰고 그사이 은 신식군대인 북양군북양 함대를 조직하는 한편 위안스카이를 조선에 파견하고 군대를 국경 근처에 계속 주둔시켜 왔다.
  29. 반민족문제연구소,《친일파99인》1권 (돌베게, 1993년) 49~50쪽(강만길 집필 부분)
  30. 주한러시아공관이 정동(貞洞)에 있었다.
  31. 호레이스 앨런(Horace Newton Allen, 1884~1905 재한), 혹은 호러스 앨런으로도 불림. 한국이름은 안련(安連)
  32. 《한국의 황제》, 이민원 엮음, 대원사, 2002년 초판 간행, p24 ISBN 9788936902438
  33. 구태(舊態): 예전 그대로의 뒤떨어진 모습이란 뜻
  34. 서구식 참정권을 주장하는 등 급진성을 띄기 시작한 독립협회를 견제하기 위해 설립된 황실 어용단체인 황국협회가 설립된 것은 그가 지방직으로 좌천당한 뒤로 이완용이 황국협회와 관련된 기록이나 정황은 없다.
  35. 일제 강점기에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를 역임했던 이승구(李承九)와는 다른 인물이다. 이완용의 장남 이승구는 자살로 요절(妖絶)했다. 일설에는 부인을 친아버지에게 뺏기고 분사(憤死)했다고 하기도 한다. 이완용 불륜 때문에 아들이 자살? 미디어오늘 2006년 9월 1일자
  36. 99년 전 매국노 이완용의 영욕 -2009년 8월 29일 조선일보 기사
  37. 의원면본관(意願免本官): 스스로 원하여 관직을 그만두는 일
  38. 황성신문 1901년 2월 25일자 궁정녹사(宮廷錄事) 지면 기사 발췌: 宮內府特進官 李完用自引疏 批旨省疏具悉往事何必爲引卿其勿辭行公 부분
  39. 윤덕한, 《이완용 평전》 (중심, 2005) 261페이지
  40. 서울 설렁탕 열전 "뜨끈한 국물이 생각날 때" 주간동아 2013년 12월 4째 주 기사, 글:푸드칼럼니스트 박정배
  41. '워싱턴 주미 대한제국공사관 잃어버린 2년 10개월 찾았다!' -미디어붓다 2013년 4월 25일 기사 이학종 기자
  42. 日, 을사조약 전부터 대한제국 해외공관 폐쇄계획 -2012년 8월 28일 세계일보 신동주 기자
  43. 후일의 조선 총독부
  44. 사보타주: 상대방의 사유재산등을 고의적으로 파손해 본인의 항의 의사를 주장하는 행위. 노동쟁의의 경우 태업등의 의미를 포함하기도 한다.
  45. 강준만 (2007년 11월 19일). 〈제5장 만민공동회의 도전〉. 《한국 근대사 산책 3 (개화기편, 아관파천에서 하와이 이민까지)》. 서울: 인물과사상. ISBN 9788959060733. 
  46. 네이버 캐스트 인물 한국사 <숙종 환국 정치의 명과 암> 2012년 2월 20일 게재
  47. 순종실록 2권, 순종 1년(1908 무신 / 대한 융희(隆熙) 2년) 4월 30일(양력) 3번째기사 "죽은 좌의정 한효순 외 77명의 관작을 회복시켜 줄 것에 관하여 보고하다"
  48. 윤덕한, 《이완용 평전》 (중심, 2005) 259페이지
  49. 금릉위(錦綾尉): 박영효는 같은 반남 박씨 일족이자 스승이었던 박규수의 천거로 철종의 딸 영혜옹주의 남편이 되었다. 이때 사위로서 받은 이름이 금릉위다. 정1품으로 품계는 상보국숭록대부(上輔國崇祿大夫)여서 고종의 친형 이재면의 종2품 보다 높았다. 영의정 품계인 대광보국숭록대부와 같다.
  50. 윤덕한, 《이완용 평전》 (중심, 2005) 260페이지
  51. 현재 장교동은 삼일대로가 지나가며 한화 사옥과 장교빌딩, 서울지방고용노동청, 청계천 베를린 광장 등이 몰려있는 번화가로 당시는 고관 대작들의 대저택들이 몰려있던 곳이었다
  52. 남녕위궁(南寧衛宮): 조선 대대로 임금이 사위인 부마와 공주 내지 옹주를 살게했던 궁의 이름.
  53. 기본적으로 이완용은 순종의 스승이자 가장 가까운 조언자였고, 그 자신이 무력한 이유도 있어서 이완용의 주청(奏請)은 거절하는 일 없이 모두 받아들였다.
  54. 윤덕한, 《이완용 평전》 (중심, 2005) 262페이지
  55. 반민족문제연구소 (1993년 2월 1일). 〈박영효 :친일 거두가 된 개화파 영수 (윤해동)〉. 《친일파 99인 1》. 서울: 돌베개. ISBN 978-89-7199-011-7. 
  56. 나카노문고(中野文庫) '大勲位菊花大綬章' 일반수상자 명단, 대정시대(大正時代) 26번째 줄, 이완용 수상목록 확인
  57. 국사편찬위원회, 《고종시대사 6》 (국사편찬위원회, 1969) 635 페이지
  58. 국사편찬위원회, 《고종시대사 6》 (국사편찬위원회, 1969) 641 페이지
  59. 오영섭 《한국 근현대사를 수놓은 인물들(1)》(오영섭 저, 한영희 발행, 2007.4, 경인문화사) 333쪽
  60. 오영섭 《한국 근현대사를 수놓은 인물들(1)》(오영섭 저, 한영희 발행, 2007.4, 경인문화사) 334쪽
  61. 이등박문의 동양평화론이라고도 불린다. 주 내용은 '조선은 더이상 근대화를 이룰 수 없는 상황에서 항상 러시아로부터 위기에 직면하고 있다. 이에 위기에 항상 노출되어 근대화를 이룰 수 없는 조선은 일본이 조선을 보호국화해서 러시아를 비롯한 서양열강을 몰아내야 한다.'는 것이다.
  62. 임종국 (1991년 2월 1일). 《실록 친일파》. 반민족문제연구소 엮음. 서울: 돌베개. 83쪽쪽. ISBN 89-7199-036-8. 
  63. 이재명(李在明) 의사(義士)는 1904년 17살 때 하와이 사탕수수밭 노동자로 이민갔다가 3년 후 귀국, 일본 요인 및 매국노들을 처단하기 위해 동지들과 함께 암살단을 꾸렸다. 의거 당시 나이는 22세에 불과했다.
  64. 스토리가 있는 대구 도심 (22)북성로 ③돈과 쌀이 모이는 곳 부제:일본의 쌀 수탈·수입품 물류기지 역할을 했던 미곡 창고들 -2009년 12월 10일 대구매일신문 기사
  65. 여기서 '떠오르는 해'는 일본을 뜻한다.
  66. 未離海底千山黑, 及到天中萬國明 구절에서 원래 송나라 태조 조광윤(趙匡胤)이 읆었던 싯구의 첫구끝은 이처럼 어두울 '暗'이 아닌, 검을 '黑'자였다. 떠오르는 해를 보며 느낀 감상을 적은 시였는데, 이완용은 이를 일본에 아부하는 구절로 바꿔썼다.
  67. 김삼웅 (1995년 7월 1일). 《친일정치 100년사》. 서울: 동풍. 55쪽. ISBN 978-89-86072-03-7. 
  68. 윤덕한, 《이완용 평전》 (중심, 2005) 348페이지
  69. 윤덕한, 《이완용 평전》 (중심, 2005) 349페이지
  70. 윤덕한, 《이완용 평전》 (중심, 2005) 350페이지
  71. <이완용, 첩첩산중 땅 왜 약탈했나>연합뉴스 2004년 8월 13일자 기사
  72. 성강현 (2004년 3월 18일). “‘조선공로자명감’친일 조선인 3백53명 기록 - 현역 국회의원 2002년 발표한 친일명단 일치 상당수”. 일요시사. 2008년 4월 16일에 확인함. 
  73. 성강현 (2004년 3월 18일). “3백53명 중 2백56명 명단”. 일요시사. 2008년 4월 16일에 확인함. 
  74. 허성호, 99년 전 매국노 이완용의 영욕 조선일보
  75. 이민정 (2007년 5월 2일). “재산 환수되는 친일파 9인은 누구? - 권중현·이완용 등 을사오적 중 일부 포함”. 오마이뉴스. 2008년 4월 13일에 확인함. 
  76. {끝나지 않은 친일 논란} 친일파'더러운 땅' 되찾는다 -2005년 1월 27일 주간한국 기사
  77. 이완용 송병준 소유토지 중 해방후 국가귀속 0.3%에 그쳐 -2010년 7월 1일 세계일보 기사
  78. "서울대병원, 매국노 이완용 수술기록 발견" --2008년 12월 18일 조선일보 기사
  79. "한국 첫 흉부외과기록 발견…환자는 이완용" -2008년 12월 18일 조선닷컴 기사
  80. 민족문제연구소, 《민족문제연구 9권》(민족문제연구소, 1996) 15페이지
  81. 서재필은 과거급제동기 이완용이 주미공사로서 미국에서 엘리트 외교관으로 잘나가던 당시, 같은 미국땅에서 갖은 죽을 고비를 넘기며 비위생적인 환경에서 굶주림과 피부병에 시달렸고, 그의 거지꼴을 불쌍하게 생각한 미국인 독지가들의 도움으로 겨우 미국 고등학교를 다니고 있었다. 말도 제대로 통하지 않았고 인종차별을 당하면서도, 역적으로 몰려 음독자살한 처와 굶어죽은 젖먹이 자식, 그리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부모, 동생들을 떠올리며 처절하게 하루하루를 버티고 있었다.
  82. "이완용 불륜 때문에 아들이 자살?" --미디어오늘 2006년 9월 1일자 기사
  83. 일당기사: 이완용의 평생 작품이나 글씨, 생각들을 모아 사후(死後) 간행한 것으로, 당시 명필로도 평가받았던 이완용의 필적을 확인할 수 있음.
  84. 이완용의 둘째 아들 이항구의 아들로 큰아버지 이승구의 양자로 출계하였다.

조선중앙일보*

 

 

 

 

 

 

 

 

별건곤 제63호1933-05-01號外의 號外세태비평 원문제공
6별건곤 제69호1934-01-01秘中秘話, 百人百話集多言生소식 원문제공
7별건곤 제69호1934-01-01號外의 號外세태비평 원문제공
8삼천리 제5권 제4호1933-04-01鬪志滿腹의 歷代巨頭소식 원문제공
9삼천리 제5권 제9호1933-09-01新聞夜話소식 원문제공
10삼천리 제5권 제9호1933-09-01李光洙氏와 交談錄대담·좌담 원문제공
11삼천리 제5권 제9호1933-09-01三大金鑛王 出世記, 崔昌學, 方應模, 金台原氏 等北岳山人회고·수기 원문제공
12삼천리 제5권 제9호1933-09-01鍾閣雜吟, 續水標橋畔吟파인문예기타 원문제공
13삼천리 제5권 제10호1933-10-01大亂戰中의 東亞日報對朝鮮日報 新聞戰草兵丁논설 원문제공
14삼천리 제5권 제10호1933-10-01地下三千里에 무친 金鑛脈과 有望金鑛調査局소식 원문제공
15삼천리 제5권 제10호1933-10-01三大金鑛王 成功(崔昌學·方應謨·金台原 氏等)北北山人소식 원문제공
16삼천리 제6권 제5호1934-05-01三千里機密室(The Korean Black-chember)소식 원문제공
17삼천리 제6권 제5호1934-05-01新聞社長의 하로-方應模氏, 朝鮮日報社長소식 원문제공
18삼천리 제6권 제5호1934-05-01三千里人生案內소식 원문제공
19삼천리 제6권 제5호1934-05-01崔昌學氏 朔州金鑛採鑛觀, 全朝鮮의 大金鑛巡禮(其一)木兵丁 記소식 원문제공
20삼천리 제6권 제7호1934-06-01春園 出家放浪記, 朝鮮日報 副社長 辭任 內面과 山水放浪의 前後 事情記소식 원문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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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운형

몽양 여운형선생 기념사업회

http://www.mongyang.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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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운형
呂運亨
Yuh Woon-Hyung.jpg
Mongyang signature.gif
출생1886년 5월 25일(1886-05-25)
조선 경기도 양근군
사망1947년 7월 19일 (61세)
미 군정 조선 서울특별자유시 종로구 혜화동
(現대한민국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종로구 혜화동)
필명는 몽양
직업독립운동가, 저술가
국적미국 미 군정 조선
학력중화민국 난징 개신교 금릉 대학 영문학 졸업(수료)
장르저술
부모여정현(부)
경주 이씨 부인(모)
친지여운홍(아우)
여윤숙(누이동생)
여운일(사촌 남동생)
여운혁(6촌 남동생)
여운각(6촌 남동생)
박찬기(생질)
배우자강릉 유씨 부인(초취 부인)
진상하(재취 부인)
천출 일본 여인(첩실)
진옥출(첩실)
자녀슬하 4남 3녀
종교유교(성리학) → 개신교
웹사이트
여운형 기념사업회

여운형(呂運亨, 1886년 5월 25일 ~ 1947년 7월 19일)은 일제 강점기독립운동가저술가이다. 1945년 8월건국준비위원회 위원장을, 9월부터 1946년 2월까지 조선인민공화국부주석을 지내기도 했다. 구한 말 기독교의 평등 사상을 수용하여 노비들을 해방시키고, 교육·계몽 활동을 하다가 1907년 대한협회에서 주최하는 강연회에서 안창호(安昌浩) 연설에 감화되어 독립 운동에 투신했다.

외교관으로는 중국에 건너가 신한청년당 당수로 활동하여 1919년 3.1 만세 운동을 기획하는 일을 주도하였고[1][2] 김규식 등을 파리 강화 회의에 파견했으며, 직접 일본을 찾아 담판을 짓기도 했다. 상하이 대한민국임시정부 임시의정원 의원, 임시 정부 외무부 차장 등을 지냈으며 한국노병회, 시사책진회, 중한호조사 결성에도 참여했고, 1923년 국민대표회의안창호, 김동삼과 함께 개조파로 활동했으나 임정을 떠났다.

이후 중화민국러시아를 오가면서 쑨원의 권유로 중국 국민당에 가담해 국공합작을 통한 중국 혁명 운동과 반제국주의 운동에 활동하였다. 1929년 7월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국내로 송환된 이후에는 언론인으로 활동했다. 1920년대 초중반 중국 상하이에서 동아일보의 상해 주재 촉탁 통신원과 타스 통신사 직원으로 지냈으며, 국내에서는 1933년~1936년까지 조선중앙일보사의 사장을 지냈다. 체육인으로는 조선체육회(대한체육회의 전신) 회장과 미군정기 군정청 체육부장을 지내기도 했다. 1944년부터는 비밀 지하 독립 운동 단체인 건국동맹농민동맹을 결성, 해방 뒤 1945년 8월 안재홍, 박헌영 등과 함께 건국준비위원회, 9월 조선인민공화국을 결성하여 혼란 수습과 치안 유지 등의 활동을 했다. 1946년부터는 김규식, 안재홍과 함께 통일 임시 정부 수립을 위해 좌우 합작 운동을 전개하였으나 이를 반대하는 좌·우익 양측으로부터 테러를 십여 차례 당했으며, 좌파 단체의 주도권을 놓고 박헌영 등과 경합했다. 1947년 7월 19일 서울 혜화동 로터리에서 차량으로 이동 도중, 백의사의 집행부장 김영철이 선정한 한지근(본명 이필형)외 다섯 명의 저격을 받고 암살되었다.

사후 2005년 대한민국 정부는 건국훈장 대통령장, 2008년 다시 건국훈장 대한민국장(훈 1등)을 추서했다. 독립운동가 겸 정치인 여운홍의 친형이고, 철학자 박찬기의 외삼촌이다. 경기도 양근군(현재의 양평군) 출신이며, 호는 몽양(夢陽)이다.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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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편집]

생애 초기[편집]

출생과 가계[편집]

몽양 여운형은 1886년 5월 25일 경기도 양근군 양서면 신원리 묘곡(妙谷)에서 여정현(呂正鉉)과 경주 이씨(慶州李氏)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으며.[3], 세 형이 일찍 사망하여 [3] 가문의 9대 종손이 되었다.[4] 그를 수태했을 당시 조부 여규신이 꿈에 '태양이 떠오르는 꿈을 꾸고 낳았다.' 하여 여운형은 뒤에 아호를 몽양(夢陽)이라 했다고 한다.[5] 그가 태어나고 남동생 여운홍과 여동생 여씨, 여윤숙이 연이어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양반 가문 출신이었으나, 소론계열이었으므로 권력의 주류에서는 밀려나 있었다고 한다. 조부 여규신(呂圭信)은 조선이 항상 중국으로부터 수모를 당했다고 여겨 중국을 정벌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이를 조정에 건의도 하고 동지들을 규합해 결사도 만들고 하였으나 발각되어 주모자는 사형을, 여규신은 유배를 당한다. 돌아와서도 조부는 병법과 축성법을 연구하는 등 미련을 가졌지만 점차 고립되어갔다. 그럼에도 조부는 손자 여운형에게 역사 이야기를 해주며 왜 중국을 정벌해야 하는지 나름의 주장을 펼치곤 했다. 여운형은 조부의 영향을 강력하게 받아서 어린시절의 사상적 배경을 형성해준 분으로 존경했고, 강개지사라 평했다. 이후 동생 여운홍이 미국으로 가서 후일을 도모할때 여운형은 중국행을 택하게되는데 이 역시 조부의 영향이다.[6]그 뒤 그의 조부는 동학에 입교하여 동학의 2대 교주 최시형을 직접 만날 정도로 독실한 동학(천도교) 신도가 되었다 한다.[7]

유년기[편집]

어려서 부모가 격렬하게 다투는 것을 본 그는 화를 자제하는 법을 스스로 터득했다 하는데, 분노가 치밀어 오를때 입술을 스스로 깨물어 참았다 한다.[8] 한편, 그가 남의 과수원에서 과일을 따먹다가 들켜서 도망쳐 나오다가 나뭇가지에 얼굴이 긁히게 되었는데, 이 사실을 안 여운형의 부친은 아들을 꾸짖는 대신 과수원에 달려가 나무들을 도끼로 찍어버렸다고 한다.[3] 분명히 자신이 잘못해서 생긴 일인데도, 양반의식이 깊은 부친이 자신보다 신분이 낮은 상민의 과일나무를 잘라버려서 생존권을 즉, 인간으로서의 기본적인 삶을 누릴 수 있는 권리를 짓밞아버린 횡포에 분노한 여운형은 신분에 따른 차별제도에 저항하는 태도를 갖게 하였고, 양반들에게 무시와 억압을 받는 평민과 천민들에 대한 동정심을 가지게 하였다.[8]

그래서 을 타고 서울로 왕래할 때 길가에서 농부들이 잠시 일을 쉬고 을 먹는 모습을 보면, 항상 먼지를 날려서 그들의 소중한 식사시간을 방해하거나, 무례한 일이 될까 하여 항상 말에서 내려서 조심스럽게 지나다녔고[9], 동리에 상사가 났을때, 특히 노비와 상민의 장례일수록 더 보살펴서 양반과 동등하게 밤을 세우며 돌아가신 분의 마지막 길을 배웅하기도 하고, 돌아가신 분이 말끔한 모습으로 저승에 갈 수 있도록 치장해드리는 염습도 하였으며, 한번은 상민 소년의 관을 직접 들고 장례에 참여하기도 하였다.[9] 어린 시절의 여운형은 삼국지를 즐겨 읽었으며 그 중에서도 관우를 좋아했다고 한다.[8]

소년기, 기독교 입교[편집]

1900년 미국영국 유학에서 돌아온 7촌 종숙 여병현(呂炳鉉)의 영향으로 감리교 학교인 배재학당에 입학하였다.[10] 미국과 영국을 유학한 여병현은 영어교사로 활동하였고 그에게 새로운 정신적 지주가 되었다. 이만규에 의하면 이 무렵 여운형은 감리교회선교사들이 세운 개신교 교회인 상동교회의 인사들을 만나 교제하면서 교회에 출석, 그리스도인이 되었다고 한다.[11] 배재학당에 입학한 뒤 그는 1년 만에 학교를 그만두었다. 학당에서는 날마다 학생들을 예배당에 출석시키고, 이것을 어기는 학생들은 교실에 남아서 한 시간 동안 자습을 시켰으며, 몽양 자신도 반 아이들과 남산에 놀러가느라 주일 예배를 빠졌다가 예배에 불참하였다 하여 담임선생에게 체벌을 받았다. 당시 몽양은 담임교사가 정직한 학생은 벌주고, 오히려 속인 자들을 봐 주었다고 보아, 부당한 체벌에 자퇴로 반발하였다.[12][13] 배재학당을 그만둔 여운형은 민영환이 설립한 흥화학교로 전학했다가 다시 그만두게 되었다.[14] 그러나, '자신의 힘으로 살려면 직업을 가져야 한다.'는 아버지의 충고에 따라, 나라에서 운영하던[12] 통신원 부설의 관립 우무학당(郵務學堂)에 입학하였다.[14] 우무학당 재학 중, 우무학당이 일본인의 손에 넘어가자, 그는 우무학당 학생 20여 명을 모아 학교인수 반대운동을 일으켰다.[14] 졸업 후, 우무학당은 '여운형을 우무국 기술관으로 채용하겠다.'는 채용통지서를 보냈으나, 그는 '일본인들이 통신원을 가로챈 것.'이라며 반대하고 취임하지 않았다.[14] 당시 첫 월급은 27원으로 당시로서는 상당한 액수였다고 한다.[14] 아버지 여정현과 아버지의 친구 이 진사가 여운형을 찾아와 우무국 기술관에 취임할 것을 권고하였으나, 여운형은 '이 진사를 가리켜 역적이다.'이라고 통박하여 소동이 발생하기까지 하였다.[14] 아버지는 사과하라며 꾸짖었지만 여운형은 끝까지 고집을 굽히지 않았다.

청년기[편집]

교회 활동과 계몽운동[편집]

안창호, 그의 강연에 감화되어 독립운동에 투신하게 된다.
기독교 입문[편집]

여운형은 1906년 양평군 양평읍 묘골에 개신교 교회를 세웠는데, 그 후 그의 문중 일족들에게 전도하여 잇달아 기독교인이 되게 하였다. 친구이자 사돈이던 이만규 등의 증언에 따르면 그의 노력으로 이후 양평군 묘곡에 예배당학교가 서고, 힘써 전도활동을 하였다고 한다.[15] 1928년장로교회에서 발행한 《조선예수교장로회사기》에는 묘골에 살던 탁인한(卓仁漢)이 여운형 일가가 기독교인이 되는 것을 도왔다고 한다.[15] [[|조선예수교장로회신학교|평양신학교]]에서 공부하다가, 미국 장로교 선교사 언더우드를 만난다. 뒷날, 미국 장로교 선교사 언더우드의 추천으로 1914년 중국 난징금릉대학교에 입학하여 영문학을 공부한다. 일찍부터 신학문과 기독교에 접하면서 사회개혁 사상을 품은 그는 집안의 노비들을 스스로 풀어 주기도 하였다.[16]

신앙, 교육 활동과 노비 해방[편집]

1907년부터 1910년까지 초기 민중교회였던 승동교회[주 1](서울특별시 종로구 인사동 위치)에서 조사(전도사)로 일한 적이 있다.[15][17] 1910년에는 강원도 강릉에 있는 초당의숙의 교사가 되었다. 하지만 1911년에 일본식 연호 사용을 반대한다는 이유로 학교가 폐교되었다. 그리고 1911년부터 평양 장로교 신학교에 입학하여 2년간 공부하였다.[18] 1911년부터 1913년까지 다시 승동교회전도사로 활동하였다.[15],[17] 그 뒤 공산주의를 접하고 운동에 참여하기도 하였으나, 그는 유물론을 거부한데다 기독교 신자였기에 공산주의 사상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주 2] 즉, 여운형은 공산주의자라기보다는 진보적인 사고를 가진 기독교인으로 보는 것이 정확한 이해일 것으로 생각된다.

1908년 부친의 3년상을 마친후 조상의 신주를 땅에 묻고, 노비문서들을 불살라 집안의 모든 노비를 해방시켰다.[4] 노비들이 해방되고 나서 나중에 여운형한테 반말을 하였는데, 그는 도리어 웃으며 "예수는 내가 믿고 복은 네들이 받았구나."하고 대답했다고 한다. 동생 여운홍은 '이는 링컨의 노예해방에서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하였다.[19] 집안에 모시고 있던 신주를 모두 땅에 매장하고, 집안에 있는 터주, 성주, 군웅 등의 단어가 적힌 서적들을 꺼내 모두 불살랐다. 이 일로 동네 양반,선비들로부터 백안시 즉, 무시를 당하기도 하였다.[15]

독립운동 투신[편집]

1907년 여운형은 동생 여운홍대한협회에서 주최하는 강연회에서 안창호의 연설을 듣게 됐다. 여운형과 여운홍안창호의 연설을 듣고 감격하였다 한다.[12] 안창호의 연설에 감화된 형제는 독립운동에 투신을 결심한다.

1914년 여운형은 집안 재산을 모두 정리하여 중국 유학길에 올랐다.[20] 동시에 노비문서를 불사르고 집안에 남아있던 노비들을 모두 해방시켰다. 그리고, 중국 난징 금릉대학교 영문학에 입학하여 학업에 열중한다. 하지만 3년이 지난 뒤 소정의 모든 학과 수업을 대부분 마쳤으나 졸업 증서를 받지 못하였다. 하지만 졸업이 목적이 아니었기 때문에 영문학 과정을 수료하고 학교를 마쳤다. 그리고 상하이에 정착하여 미국사람이 경영하는 협화서국(協和書局)에서 출국수속 관련 업무를 교섭해주는 일을 했다.[21] 1917년 중국 국민당의 원수 쑨원을 만나 교제하였다.[22] 그 해 여름에 은밀히 귀국하여 한강에서 이범석을 만나 그와 함께 상하이로 떠났다.[23]

독립운동과 정치 활동[편집]

상하이 활동[편집]

신한청년당 당수와 3.1운동 활동[편집]

1918년에는 상하이에서 서병호·조동호 등과 함께 신한청년당을 조직하여 당수를 맡았다.[24] 이어 김규식을 상하이로 초청하기도 하였다.

1918년 제1차 세계대전 종전 후 전후처리 문제로 파리강화회의가 열릴 무렵, 미국 대통령 윌슨의 특사 찰스 크레인이 1918년 11월 중국 상하이의 '칼튼 카페'에 와서 '파리평화회의에서는 민족자결의 원칙에 따라 많은 문제들이 해결된다.'는 요지의 강연을 한다. 마침 그 자리에 있던 여운형이 초청받아 그것을 듣고는 윌슨의 특사 찰스 크레인과 개인면담을 가진 뒤 '파리강화회의가 한민족 독립운동의 절호의 기회가 될 것.'이라 판단했다.[25]

여운형의 주도로 만들어진 신한청년당중국 톈진에 있던 김규식을 초청하여 파리강화회의에 파견하였다.[26] 또한 장덕수이광수에게 해외 소식을 비밀리에 전달하는 임무를 주어 장덕수는 국내로 파견해서 독립운동 자금을 모집하게 하고, 이광수를 일본 동경에 파견하여 2·8 독립 선언에 직간접적인 영향을 주었다.[26]

그리고 여운형 자신은 중국 길림 성으로 가서 활동하여 무오독립선언의 촉매역할을 했다. 간도에 있는 독립운동가 김약연,정재면등과 만나서 파리강화회의와 민족자결주의 원칙등 상황을 설명하였고, 블라디보스토크에 가서는 당시 그곳에 체류하고 있던 박은식,이동녕,조완구등을 만나서 여러가지 상의를 하는등 그러한 활동이 뒷날 연해주 지역에 대한국민의회를 탄생시키는 계기에 영향을 주었다. 이러한 여운형의 주도로 결성된 신한청년당 활동은 직간접적으로 3.1 운동의 불씨를 제공하였다.[2]

대한민국 임시정부 활동[편집]
1919년 4월 임시의정원에서 맨뒷쪽 2번째가 여운형

1919년 3·1 운동 후, 독립운동을 계속 확대해 나가기 위해 국내외에서 정부수립계획이 진행되었다. 여운형은 '정부를 조직하기에는 시기가 이르다.'고 보았고, '당 조직을 제대로 갖추고 난 뒤에 정부를 조직해야 한다.'는 주장을 폈다. 하지만, 이것은 '먼저 정부를 조직해야 한다.'는 주장에 묻혀 버리고 말았다.[27] 1919년 3월, 중국 상하이에서 임시정부 구성을 위해 임시의정원이 창설되자, 동생 여운홍과 함께 임시의정원 의원에 선출되었다. 그해 4월 10일 의정원 회의가 열렸을 때 신석우가 국호명칭을 '대한민국'을 발안하자 여운형은 “대한이란 말은 조선왕조 말엽에 잠깐 쓰다가 망한 이름이니 부활시킬 필요가 없다”고 반대했다. 이에 신석우는 “대한으로 망했으니 대한으로 흥하자”고 주장하였고 의정회에서 국호를 대한민국으로 정하고 상하이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여운형은 외무부 차장에 선출되었다.[5]

한편 대한제국의 황실을 우대하는가의 여부를 놓고 임정에서 논의가 나오자 그는 이승만 등과 함께 황족 우대론을 극력 반대하였다. 임시정부 내에서 구 황실 예우문제가 불거지자 조완구(趙琬九) 등 비교적 연로한 그래서 황실을 존경하는 것이 익숙한 사람들은 구 황실 우대를 주장하였다.[28] 그러나 안창호, 여운형을 비롯한 청장년측은 반대하였다.[28] 표결 결과 황실 우대론이 다수였다. 그리하여 4월 11일에 발표된 대한민국 임시천장 제8조에 "대한민국은 대한제국 구황실을 우대함"이라는 구절이 들어갔다.[29] 그 뒤 이 부분은 1919년 9월 11일에 발표된 통합 임시정부로서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헌법 제7조가 되었다. 여운형은 '황실우대론'이 임시정부 헌법으로 통과되자,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어떤 자리에도 앉지 않겠다."고 선언했으나, 임시의정원 외무부차장직으로 잠깐 활동하게 된다.[29][주 3]

일제의 회유공작과 제국호텔에서 한 연설[편집]
1919년 일본 도쿄 기자회견 당시

1919년 여름부터 여운형은 한국과 만주, 연해주, 미주에서 몰려드는 지사를 맞이하기에 바빴다.[24] 그 해 11월, 임시정부 공직에서 사퇴하고 개인자격 신분으로 일본의 초청을 받아 장덕수를 데리고 일본으로 건너간다.[주 4] 일본의 초청을 받은 여운형은 장덕수의 석방 없이는 일본에 가지 않겠다고 거절하여 장덕수를 석방시킨 뒤 일본행에 동행하였다. 장덕수는 여운형의 일본 방문기간 중 호텔에 유숙하며 그의 시중을 들었다.

일본 제국은 그를 국빈으로 대접해 '대한민국 임시정부'탈퇴가 조건인 회유책을 보냈다. 일본 정부가 여운형을 국빈으로 일본에 초청한 의도는 임정 중심 세력인 여운형을 일본 편으로 만들어 임정을 분열시키기위한 술책이었다. 한편, 이무렵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는 여운형의 도쿄행에 대해서 찬반이 크게 엇갈렸다. 임시정부 국무총리 이동휘는 '국무총리 포고 1호'를 발표해 '여운형의 도쿄행은 개인행동'을 천명하면서 반대했다. 이와 반대로 임시정부 내무총리 겸 노동국 총판 안창호는 '몽양의 국가를 위하는 열렬한 충성에 대해서 나는 절대로 신임합니다.'하며 여비까지 지원해주는 등 찬성했다.[25]

도쿄에 도착한 여운형 일행은 제국호텔에 머물렀다. 거기서 일본의 국방대신, 내무대신, 체신성 대신, 척식국장관 등을 차례로 면담하고 설전하여 조선의 독립의 당위성을 주장하였다.[30]

여운형은 일본 장관들이 주장하는 회유와 협박과 설득에 넘어가지 않았다. 도리어 "일본이 만용을 부리고 3.1운동을 진압한 것은 흡사 타이타닉이 작은 빙산을 무시하고 지나가다가 가라앉는 것과 같은 것"이라며 조선독립의 당위성을 역설하면서 일본 장관들을 설득한다. 그 중에 고가 렌조(古賀廉造)척식국 장관은 대화를 하면서 여운형의 기개와 인품에 감탄하여 여운형이 떠날 때 "여운형 만세!"를 외쳐 여운형을 놀라게 했다고 한다.[31]

제국호텔을 방문한 내외신의 주요 인사들과의 면담에서 그는 '조선 독립의 타당성과 필요성'을 주장하여 일본의 회유공작에 결코 넘어가지 않았다.[32] 1919년 도쿄 제국호텔에서 기자회견을 했는데,그가 주장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주린 자는 먹을 것을 찾고 목마른 자는 마실 것을 찾는 것은 자기의 생존권을 위한 인간 자연의 원리이다. 이것을 막을 자가 있겠는가! 일본인이 생존권이 있는데 우리 한민족만이 홀로 생존권이 없을 수 있는가? 일본인이 생존권이 있다는 것을 한국인이 긍정하는 바이요, 한국인이 민족적 자각으로 자유와 평등을 요구하는 것은 신이 허락하는 바이다. 일본 정부는 이것을 방해할 무슨 권리가 있는가! 세계는 약소민족해방, 부인해방, 노동자해방 등 세계 개조를 부르짖고 있다. 이것은 일본을 포함한 세계적 운동이다. 한국의 독립운동은 세계의 대세요, 신의 뜻이요, 한민족의 각성이다.

 
1919년11월 28일 일본 마이니치 신문에 실린 여운형의 연설
일본 제국호텔. 이곳에서 여운형은 1919년 일본 장관들하고 담판을 짓고, 조선독립의 당위성을 역설하였다.

이 연설로 만좌에서 박수갈채가 이어졌다. 기자회견이 끝난 후 '태평양'잡지사 사장은 "조선독립에 대한 이론이 명쾌해졌다."고 말했다. 요시노 도쿄제국대학교 법학 교수는 '중국, 조선, 대만 등의 많은 사람들과 회담 하였지만, 교양있고 존경할 만한 인격으로서 여운형씨 같은 사람은 드물게 보는 뛰어난 사람이다.'라고 극찬하기도 하였다.[25]

이 때문에 여운형을 초대한 일본 의원들로 구성된 하라 내각은 "'불령선인 1호 인물'을 일본땅에 불러들이고 독립을 외치게 만들었다."는 책임을 지라는 압력에 밀려 붕괴하고 일본정국이 들끓게 되었다. 일본에서는 이 내각을 일컬어 '여운형 국회', 혹은 '여운형 내각'이라고 부르게 되었다.[31]

1920년1월 17일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발행하는 독립신문 논설에서 여운형의 이러한 활약을 '독립운동사에 있어, 유래없는 성과'라고 대서특필하면서 여운형은 독립운동의 주요인물로 자리잡는다.[33]

한편, 여운형의 일본행을 결연히 반대하던 임시정부 국무총리 이동휘는 '국무총리 포고 2호'를 발표해 여운형의 항일 활동을 공식적으로 인정하였고, 이동휘소련에서 상해로 오자 여운형은 그와 함께 1920년 고려공산당을 창립하였다.[34]

임시정부 가입과 탈퇴[편집]

임시정부 개조파 활동과 고려공산당 활동[편집]

1922년 5월는 국민대표대회를 소집하기 위한 국민대표대회준비위원회 준비위원의 1인에 피선되었다.[35] 1921년 말 모스크바를 방문하였다.[32] 1922년 1월, '극동근로자대회'에 참석하여 레닌트로츠키를 만나, 레닌의 조선민족주의 운동 지지 노선에 대한 견해를 직접 들었다.[32] 1918년 7월에 발표된 소련 러시아국 외무위원장 치체린의 중국지원 성명, 1919년 7월 발표된 러시아 외무위 부위원장 카라한의 성명을 접한 후, 이에 감동한 여운형은 볼세비키 당에 참여하고, 임시정부와 볼세비키 당과 제휴의 필요성을 주장하기도 하였다.[32] 치체린과 카라한이 발표한 성명서는 러시아가 중국에게 빼앗은 각종 이권을 중국에 되돌려준다는 내용이 있었는데, 이 중에는 러시아가 강제로 빼앗은 동청철도(東淸鐵道)에 대한 각종 이권 포기 내용도 있었다.[32] 이를 본 여운형은 볼세비키들이 평등과 균형을 추구한다고 신뢰하게 되었다.

1922년 김구, 이유필 등과 한국노병회의 창립에 참여하였고, 1922년 7월 김구, 신익희, 안창호, 조소앙, 이시영(李始榮) 등 50여 명과 함께 시사책진회(時事策進會)를 조직하는데 참여하였다. 1923년 국민대표회의에서 임시정부가 창조파와 개조파로 나뉘었을 때 여운형은 안창호의 개조파 세력을 따랐으나 임시정부의 파벌다툼에 실망하여 임시정부를 떠났다.

이 무렵, 국제공산당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200만루블을 원조하기로 했는데[36], 이동휘, 김립 등은 그중의 60만루블만 받아가지고 와서 자의로 쓰는 바람에 140만루블은 구경도 못하게 되었다.[36] 그러나 국제공산당이 일본 제국주의에 항거하는 조선민족을 도우려고 한 것이 확실해지자 여운형은 고려공산당에 가입을 결심하게 된다.[36] 그가 고려공산당에 가입한 목적은 '독립운동을 위한 수단으로서 코뮌테른(국제 공산당)의 원조를 기대한것'이어서다.[36] 그런데, 1921년 김립(金立)의 '노농정부 자금횡령사건'으로 그는 이동휘(李東輝)와 결별하고, 김만겸(金萬謙)이 주도한 이르쿠츠크파와 고려공산당 상해지부에 참가했다.

외교 활동과 소련 방문[편집]

1921년에는 '중한호조사'(中韓互助社) 결성에 참가하여 한·중 양민족의 공동 투쟁과 이해증진을 모색하였다. 한·중연대를 통한 독립운동의 방도를 강조했던 그는 국제정세의 흐름에서 한국독립운동이 나아갈 방향을 찾고자 했다.[37]

1921년 모스크바 극동피압박인민대회에서.

1921년 말 김규식등과 함께 러시아 이르쿠츠크에 도착했다. 12월 이르쿠츠크에 체류 중, 러시아군에게 체포된 독립군들의 재판정에 김규식과 배심원으로 참석했다. 이때 여운형은 '이 재판은 말할 수 없이 안타까운 애석한 정과 암담한 우울로 나의 마음을 몹시 누른 사건이었다.'고 회고했다. 이르쿠츠크에서 열리기로 한 극동피압박민족대회가 모스크바에서 열리니 모스크바로 가라는 소식이 통지되었다.

그 후 그는 1922년 1월, 고비사막에서 야영을 하면서 모스크바에서 극동피압박민족대회가 열릴 때 조선민족 대표의 일원으로 참석하여 조선독립을 역설하였는데, 소비에트 연방모스크바에 도착했을 때 가타야마 센취추바이등과 함께 서기장 블라디미르 레닌을 만난다.[36] 면담에서 레닌은 "한국에서는 공산주의혁명을 추진할 것이 아니라 민족주의운동에 주력해야 한다"고 하였고, 이 의견에 공감한 여운형은 볼셰비키와 연대하여 활동하게 되었다.[36] 그 후에 중국에서 스탈린의 대리인격인 보로딘중국 반제국주의운동에도 참가하게 된다.[36]

1922년 10월부터 이듬해 1923년 5월까지 동아일보상하이주재 촉탁 통신원으로 임명되어 활동했다.[38] 1924년 쑨원의 권유로 중국 국민당에 가입하는 한편, 제1차 국공합작에도 참여해 중국 공산당을 돕기도 했다. 1924년 9월 15일 김규식, 최창식이 설립한 상해고등보수학원의 전임교사로 초빙되었다.[39]

중국혁명 활동[편집]

1925년 3월, 쑨원이 사망하자 그의 추도식에 참석하였다.[40] 그 해 5월 말경에 조봉암이 여운형의 집에 찾아와서 조선공산당제 3 인터내셔널의 승인을 받아야 하니 모스크바로 가는 여권을 받게 도와달라고 부탁했고, 여운형은 이를 도와주었다. 이는 후에 신의주 사건(제1차 조선공산당검거사건)과 맞물려서 물의를 빚게 되었다.[41]

5월 30일 영국 경찰이 불평등 조약에 반대하는 중국인 젊은이 20여 명을 살해한 '5.30 사건' 이후 중국 혁명에도 참가하게 되었다.[32] 반영 시위는 1926년 10월까지 지속되었다.[32] 이 기간 중 그는 중국국민당 대표 사오리쯔와 공산당 대표 취추바이 등과 함께 운동의 방향에 대해 일주일에 두세 번 이상 만나 토의하기도 하였다.[40] 1925년부터 1927년까지는 상하이에서 소련이 새로 시작한 타스 통신사에 취직,근무한다.[36]

1926년 1월에 의열단 단장으로 무장 항일투쟁한 김원봉황포 군관학교로 입학시키는데 도왔다.[42] 이와 동시에 1926년 1월, 국민당 2차 대표대회에 국민당 정부 주석 왕징웨이의 초대로 참석하여 연설을 하였으며[40] 보로딘과 함께 왕징웨이의 자문활동도 하였다.[40] 1927년 장제스가 대대적인 공산당 숙청을 하면서 그의 중국 혁명 활동도 중단되었다.[40]

중국 혁명 활동과 조선독립운동의 활동이 여의치 않게 되자, 중국 복단 대학교 체육교사로 취직하였고, 수학여행차 학생들을 데리고 동남아시아로 건너가 싱가포르, 필리핀 일대에서 '제국주의에 대항하는 투쟁, 민족해방을 촉구'하는 내용의 연설을 하였다. 이 때문에 필리핀 지역에서 경찰에 의해 강제로 억류되기도 했고,[43] 싱가포르 지역의 영국 경찰들과 마찰이 생겨 여권을 빼앗기거나 쫓겨나기도 했다.[5]

국내 활동[편집]

체포와 감옥 생활[편집]
1929년 체포되어 용산역에 내리는 여운형.

동남아시아 지역 순회를 마친 뒤 1929년 7월에 여운형은 중국 상하이 대마로(大碼路) 야구장에서 야구경기 관람중 영국경찰의 협력을 받은 일제 경찰에게 체포되어 조선으로 압송된다. [44][45] [46] [47][48] 여운형은 일본경찰이 공동조계에서 자신을 체포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고 야구 경기를 관람한 것인데, 일본 경찰들은 그를 발견하자마자 첩첩이 포위했다. 그 과정에서 심한 몸싸움이 벌어져서 여운형의 한쪽 귀 고막이 상해 한쪽 귀가 안 들리게 되었다.[5]

그가 체포되었다는 소식이 조선에 전해지자 사람들은 이 소식의 진위를 의심했다. 이는 이 전에도 여운형 체포설이 심심할 때 마다 신문에 나왔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체포가 사실로 확인되자 그의 체포되었다는 소식이 대대적으로 보도되었고 여운형의 이름이 조선에 더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그가 조선에 도착할 무렵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서울역으로 몰려들었는데, 사실 서울역에서 내릴 예정이었으나 사람들이 너무 많이 몰리자 경찰이 만일의 사태를 우려하여 용산역에서 미리 내리게 했다. 당시 신문사들은 이를 "여운형 사건"이라 하여 관련 보도들을 지속적으로 보도하였고, 공판 과정을 관람하기 위해 새벽부터 수백명의 사람들이 모여들었다.[5]

한편 여운형은 본국에 송환되던 날 오랜 여정의 피로로 신경이 약해졌고 유난히 더워서 찬물을 많이 마셔서 소화불량에 시달리고 있었는데, 그의 형량은 1930년 4월 26일 일제 법정에 의해 3년 징역으로 최종 확정되었고[49] 1930년 6월 9일 상고심에서도 3년형을 받아[50] 옥고를 치러야 했다.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하여 독방생활을 하게 되자 평소 세계구급으로 활발하게 돌아다녔던 몸이 적응을 못하여 신경통에 시달리더니 그 결과 털이 허옇게 드문드문 쉬어버렸고 이전에 몸무게가 80kg대에서 60kg대로 줄었다.[5] 특히 수감생활 중 치질 때문에 엄청 고생했다고 한다.[5]

조선중앙일보 사장[편집]
1934년 조선중앙일보 사장시절. 백두산 탐방했을때.

1932년 7월 26일, 만기 4개월을 앞두고 대전형무소에서 가석방되었다[51]. 그리고 동생 여운홍등 지인들의 도움으로 1933년에 〈조선중앙일보〉사장에 취임하였다.[주 5]

윤치호 일기에 1933년 10월 4일자 내용에 따르면, "안창호윤치호에게 ‘일본인들은 최근의 적이지만 기호파는 500년간의 적이기에 먼저 기호파를 박멸하고 독립해야 한다’고 했다.[52] [53] 그러자 여운형,신흥우 등도 독립지사들과 함께 윤치호를 찾아가 서북파의 음모를 분쇄하기 위한 기호파 비밀결사를 제안하였다고 한다.[53] 윤치호는 이를 자신의 일기에 기록으로 남겼고, 윤치호는 '안창호신흥우,여운형등을 비롯한 독립운동가들의 지역감정을 놓고, '지역감정 하나로만 봐도 한국일본으로부터 독립할 자격이 없다'고 비난했다.[52][53] 그러나, 안창호1932년 5월에 중국 상하이에서 일제 경찰에 체포되어 국내로 압송되었고 징역 4년형 선고받아 대전형무소에서 복역상태였기 때문에 안창호나 여운형등이 이 시기에 윤치호에게 찾아가 그런 제안을 했다는 것에 대해서는 앞뒤 정황이 맞지않다.

사회사업가 최송설당 자택을 방문한 여운형과 송진우 (1935년)

1935년조선체육회 회장을 역임하였다. 한편, 조선중앙일보 사장으로 지내면서 망하기 직전이던 조선중앙일보는 조선일보, 동아일보와 겨루는 3대 일간지가 되었다. 당시 언론사에서 나돈 유행어로 "3증 경쟁"의 대열에 합류한 조선중앙일보는 사옥을 더 넓은 곳으로 옮기고 지면을 계속 늘려갔으며, 월간 잡지 《중앙》을 창간하는 등 무섭게 성장하였다. 여운형은 주식회사를 설립하여 자본을 늘리고[54] 사옥을 증축, 윤전기를 늘렸다. 1935년 9월 말에는 회사 전용 경비행기를 사서 백두산을 탐방하기도 했다.[55] [56]

한때, 김구의 가족들을 피신시켜 김구와 상봉하게 해주는 데에 지대한 공헌을 해서 총독부로부터 감시를 받기도 하였다. 조선중앙일보는 '일제의 조선인 탄압 정책'을 비판하는 논조를 지닌 민주사회주의성향의 중도적인 정치노선 신문이었다.

특히, 그는 '식민지 조선을 구해낼 수 있는 것은 청년들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1905년 광동(光東)학교를 설립하기도 했던 그는 '청년들을 일으켜 세우기 위해서 스포츠가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라고 보았다. 그는 조선체육회 회장을 맡았으며, 체육을 좋아하던 그는 각종 구기종목 대회에 신문사가 주관하도록 적극 장려하였다. 또한 여운형은 조선인 최초 올림픽 금메달리스트가 된 손기정과 가까이 지냈다. 1934년 11월에는 충청남도 아산에 있는 충무공 이순신의 묘소를 처음 찾아가고는 황폐해진 묘소를 보고서 이후 그것을 정돈하는 사업을 추진했다.[57]

이러한 신문사 사장의 행적으로 조선중앙일보는 다른 유력 신문사들(동아일보,조선일보)에 비해 수익구조가 그렇게 좋지는 않았다 한다. 그래서 사장인데도 걸어서 출근해 세간에는 이런 말장난이 나돌았다.[5]

조선일보 광산왕은 자가용으로 납시고

동아일보 송진우는 인력거로 꺼떡꺼떡
조선중앙일보 여운형은 걸어서 뚜벅뚜벅

조선중앙일보 사장직을 지냈을 때, 조선중앙일보는 대범한 기사를 냈을 뿐만 아니라 파격적인 문학작품의 게재를 허락하여 온갖 비난 여론과 협박이 들어와도 신경쓰지 않고 그냥 싣게 해주기도 했다고 한다. 대표적인 예로, 이상의 '오감도'를 게재하자 당시 독자들의 빗발치는 항의를 받기도 했다.[주 6]

1932년 11월 중국에 있던 김단야정태희를 시켜 여운형에게 연락하여 신의주 감옥에 있는 박헌영에게 원조금을 전하고 조동호를 상해로 내보내라는 말을 전하였다.[58] 여운형은 조동호에게 부탁하여 정태희영도사 승방(僧房)에 숨겨주었다. 여운형은 조동호와 양하석을 일선에서 활동하게 하면서 조동호와 양하석을 국외로 내보낼 생각이었다.[58]

그러나 정태희가 국외로 출국하려다가 조선총독부 이동경찰에 검거되어 신의주감옥에 갇힌다. 여운형은 사원 박돈서(朴敦緖)와 함께 순회하다 전북 남원군 연회석상에서 이 소식을 접하였다. 박헌영도 체포, 압송되었으며 조동호·홍증식 등은 함께 연행되었다.[58] 여운형의 체포장도 날아왔지만 총독부 경무국은 신의주 경찰서에 자진출두하라 하였다.[58] 경찰관은 취조로 조동호 등과 상의한 내용을 진술하라고 압력을 가하였다.

여운형은 '조동호는 나의 친우다. 매일 상종하는데 그 많은 이야기들을 어찌 다 일일이 기억할 수 있느냐. 조동호의 진술이 옳다고 하고 나도 감방으로 가면 그만이 아니냐?'[59] 취조하던 형사는 밤 8시에 다시 오라며 여운형을 풀어주었고,여운형은 평안북도 도지사에게서 일이 없으니 다시 상경하라는 전갈을 받고 되돌아가게 되었다.[5]

1930년대 후반[편집]
도산 안창호 선생의 말년에 함께 찍은 사진.[주 7]

1936년, 베를린에서 올림픽 개최가 정해지고 손기정이 일본측 대표 후보가 되자 손기정은 '굳이 이 대회를 나가야 되느냐.'고 여운형에게 물었다. 여운형은 "일장기를 달고가지만, 등에 한반도를 짊어지고 달린다는 것을 잊지 말라."며 출전을 권하였고, 손기정은 마라톤 대회에서 1등을 하여 금메달을 딴다. 이 일은 각계 언론사들에 의해 보도되었는데, 그 중 조선중앙일보는 누구보다 먼저 손기정 선수의 활약을 극찬하였고, 1936년 8월 13일조선중앙일보손기정의 일장기를 쓱싹 지운 사진을 실었다. 중앙일보는 인쇄기 품질이 좋은 편이 아니었기 때문에 일장기가 지워진건지 안 지워진건지 총독부가 알아차리지 못해서 검열을 통과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인쇄기의 품질이 좋았던 동아일보는 이걸 따라하여 8월 25일자 신문에 실었다가 총독부의 검열에 걸리게 되었고, 중앙일보가 이를 먼저 시도했음이 밝혀져 두 신문 모두 정간되었다.[60] 이 일로 조선중앙일보는 자진휴간된 뒤 한동안 복간되지 않았다.

사장직에서 물러난 여운형은 인기 많은 공인으로 각종 행사의 연사를 맡으면서 학교 졸업식에서부터 결혼식 주례까지 없는 곳이 없어 '감초사장'이라고 불렸다 한다. 한동안 그는 결혼 주례와 스포츠행사 참석 등으로 세월을 보내게 되었다.[61] 이어 안창호가 일제에 의해 국내에 압송된 뒤 수감되자, 조만식·이광수 등과 함께 수시로 면회를 다녀오기도 했다. 1935년 2월 10일, 대전형무소에서 안창호가 가석방되자 마중을 나가기도 했다.[62] 또한, 도산 안창호의 말년에는 끝까지 조만식과 함께 곁에 있었다.[5] 1937년에는 권투구락부 회장에 취임하였다.[63]

조선중앙일보 폐간 직후[편집]

조선중앙일보가 폐간되고 이렇다 할 직업이 없어진 여운형은 결혼식 주례사로, 각종 행사의 초빙 연사로 소일하다가 1937년 4월 초순에 갑자기 일본으로 떠났으며 수시로 도쿄를 오갔다.[64][65] 이에 대해 자신의 아들이 일본 호세이 대학에 입학하는 관계로 일본행을 결정했다고 하였으나 [66] 사실은 만주사변중일전쟁이 터진 뒤 일본이 조선에서 독립운동 활동에 탄압을 강화하여 활동이 여의치 않아서였고, 중일전쟁과 관련해 일본 고위급 관료들의 동태를 살피기 위해서였다.[주 8] 일본으로 건너간 여운형은 일본유학 중인 조선인 유학생들을 만나 '조국독립의 필연성'을 역설하여 그들에게 희망을 불어넣으면서 그들의 유학생활 자금을 대주기도 했다. 당시 조선인 유학생들 사이에서 여운형은 매우 인기있는 지도자로, 조선인 유학생이 많이 모여드는 때는 여운형씨가 올 때와 긴자 무대에서 한국인 가수가 공연할 때였다고 한다.[67] 한편, 일본 고위급 관료들과도 만나 중국에서 일본군은 서둘러 철수할 것을 요구하였고, 일본의 우파 지식인이자 정치인인 오카와 슈메이와 시국을 논하기도 하였다.[주 9] 하지만, 군부 인사들은 '이미 시작한 일이니 물러설 수 없다.'면서 듣지 않아 성과를 볼 수 없었다.[5] 1939년 12월 18일 경성부 정동이화여전 강당에서 80여 명의 관계자들이 모인 가운데 후원회 창립총회가 개최되었다. 여기에서 12개조의 후원회 장정을 통과시키고 25명의 위원을 선출했다.[68] 여운형도 이화여전 후원회 위원의 한사람으로 선출되었다.[68]

일제 강점기 후반[편집]

태평양 전쟁 직후[편집]
태평양 전쟁

1941년, 일본 정부는 다시 여운형을 초청했다. 당시 일제는 중일전쟁이 한창이었는데, 이번에는 그를 이용해 '왕징웨이와 함께 활동해서 중화민국과 화해를 위해 힘써 달라.'고 하려던 것이 본래 목적이었다. 일본 군부쪽 고위 관료들의 요청으로 회담을 하기도 하였는데, 특히 전직 수상을 지낸 고노에 후미마로중일전쟁 초기에 여운형의 제안을 거절한 바가 있었다. 그러나 국공합작이 전개되고 일본 전황이 패망으로 치닫게 되자, 여운형에게 '중국측 인사들을 설득하여 휴전협상을 도와달라.'고 요청하지만 여운형은 '이미 늦었다.'며 거절하였다.

일본정부는 1940년부터 1942년까지 다섯 차례에 걸쳐 여운형을 동경으로 불러들였다. 여운형은 화평공작에 임할듯 말듯한 위장전술을 취하면서 오히려 이들과의 만남을 통해 일본의 패망을 확신하게 되었다. 그래서 1942년에는 이화여자전문학교 교수 이정구에게 '장차 조선이 해방될 때를 대비하여 국민이 먹어야 할 식량조사와 그 대책을 세우라.'고 지시하고, 장권에게는 '해방시의 혼란을 막기 위해 치안대를 조직할 상세한 계획을 세우라'고 지시했다고 한다.[69]

1942년에는 송진우,김성수 등과 '미국의 소리 단파방송'을 청취하기도 했다. 이후 여운형은 공공연히 송진우, 안재홍, 장택상과 함께 일본의 패망을 주장하였다. 1942년 4월 18일, 일본제국의 수도 도쿄에 미군 폭격기의 공습(둘리틀 공습)을 목격한 그는 일본에 다녀온뒤 귀국하면서 여름무렵 경성부 계동 자택에 머물러 있을때 평양신학교 동창생으로 왕십리 교회에 시무하던 오랜친구격인 오건영,이재형이라는 목사를 만나 이야기 하던 중 '일본제국의 패배'를 공개적으로 발언했다가 주변인들에게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일본 헌병대에까지 들리게 되었다. 여운형이 일본에 체류 중이던 1942년 12월 21일, 고이소 쿠니아키 총독과의 회견을 마치고 일본 도쿄에서 귀국하던 중 시모노세키에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경성헌병대로 연행되고 수감되었다.[61] 이 때의 죄목은 치안유지법 위반, 육해군형법 위반, 조선임시보안법 위반, 소련의 밀정혐의, 안녕질서에 대한 죄목 등이었다.[61] 그는 옥중에서 수차례 고문에 시달렸고, 사상전향서를 쓸 것과 신사참배 등 학도병 강연회에 앞장서라는 일제의 위협에 굴하지 않았다고 한다.[5] 당시 여운형의 회상에 의하면 '일본 헌병들이 자신을 때리고 매달지 못하는 대신, 여러 일본경찰들이 번갈아가며 달라붙어서 자신을 90여 시간 동안 의자에 묶어놓은 채 흔들고 잡아당기며 잠을 못자게 하는 건고문을 했다고 하였다.[61][70] 이 뒤로 감옥에 이감된 뒤에도 신경쇠약에 걸려 잠을 못 이루었다고 한다.[61][주 10] 1943년 7월 2일 석방되었다. 여운형이 출옥한 다음 날 자택으로 그를 방문했던 안재홍은 그날의 여운형의 모습을 너무나 처참하고 쓰라렸다고 묘사했다.[61] 석방 직후에 그는 극히 신경쇠약에 시달려 경성요양원에 입원했는데, 7월 5일 일본인 검사 두명이 전향서 쓸것을 협박, 여운형은 재차 거절했지만 경성지방법원 판사 백윤화가 '전향하지 않으면 집행유예를 취소하고 다시 형을 집행한다.'고 협박한다. 그러자 극도로 몸이 쇠약해진 여운형은 자신의 건강을 염려하던 가족들이 자기 대신 전향문에 도장 찍는 것을 그대로 묵인하고 말았고, 결국 협박 분위기 속에서 가족들에 의해 전향문이 날인 당하게 된다. 이 강제 전향문으로 인해 여운형은 훗날 해방 후 수 많은 정적들로부터 비판의 명분을 받게되어 명예적으로 치명적인 손상을 입게 된다.[71] 전향문 날인 이후에도 일제 경찰들로부터 가택연금을 당하고 총독부로부터 지속적인 감시를 받았다. 게다가 일본 고위급 정치인들은 자기들과 협력하라는 공갈협박을 수차례 하였다. 그러자 여운형은 요양을 핑계로 경기도 양주군 봉안마을로 내려가 거처를 옮긴다. 석방된 이후에도 여전히 일제의 보호, 관찰대상 1호로 지목되어 일제의 감시를 받았지만, 수많은 청년들이 그를 찾아가 도와주곤 했다.[1][주 11]

건국동맹과 농민동맹[편집]
서울 종로구 낙원상가에 위치해 있는 건물. 이 건물은 1944년 8월 10일, 여운형을 중심으로 조직된 지하 비밀 결사 독립운동 단체인 건국동맹이 결성되었던 곳이었다.

1943년 7월 2일 석방 된 이후 여운형은 한동안 경성요양원에 입원해 있었고, 거기 있으면서 독립운동의 길을 모색했다.[72] 그래서 퇴원후 요양을 핑계로 향리경기도 봉안촌으로 거주하면서 만주군에 소속된 박승환 대위를 만나 군사조직 문제를 논의했다.[5] 이와 함께 염윤구,이혁기등 학병,징병 거부자들을 집결시켜 군사훈련과 무장투쟁을 준비시켰다.

1944년 8월, 경성부 종로구 운니동에서는 여운형이 주도하여 '건국동맹'을 비밀리에 결성하였다. 건국동맹은 민족주의자에서 공산주의자들까지 좌우익세력들을 망라한 애국세력들이 뭉친 조직으로 여운형은 이 건국동맹으로 해외 각지에 흩어진 독립운동단체들과 연대를 추진했다. 대표적인 사례가 중국 옌안에 있는 '연안독립동맹'과 연대를 추진한 것이다. '연안독립동맹'의 수장이던 김무정의 기록에는, '조선의 한성에서 연락을 취하던 대규모 독립단체가 있다.'고 되어 있다. 여기서 '조선의 한성'은 '건국동맹'을 의미한다. 건국동맹은 뒷날 해방직후 건국준비위원회로 발전한다.[30]

1944년 10월, 인근 용문산에서 13명의 청년들이 여운형을 찾아 만난다. 경기북부지역을 대표하는 청년들이 모여 비밀결사단체인 '농민동맹'을 결성한다. 당시 농민동맹은 용문산을 거점으로 일제의 강제징병을 피해 도피한 청년들을 보호하였고, 일제(日帝)의 공출로 인한 농민들의 피해를 막으려 노력했다.[30][61] 이후에는 보광당, 조선민족해방협동단, 산악대 등 여러조직과 직간접 접촉을통해 건국동맹의 기반을 다져나아가게 된다.

1945년 3월에는 건국동맹의 산하에 군사위원회를 조직하고 일본군의 후방교란과 노농군 편성을 계획하면서 경기도 주안 조병창의 채병덕 중좌와 접촉하고자 당시 은행원으로 지내던 손기정을 보내 채병덕 중좌에게 전갈을 보냈고[73], 채병덕 중좌와 두차례 접촉해 유사시에 무기공급에 대한 약속을 받았다. 1945년 4월에는 미국의 샌프란시스코 회담과 관련해 연안 독립동맹과 구체적인 연계를 위해 이영선을 파견하고, 5월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접촉하기 위해 최근우베이징에 파견하여 연락을 시도했다. 그리고 8월초에는 총독부 경찰에 그 존재가 드러나게 되어 건국동맹의 간부 이걸소,황운,이석구,조동호등이 검거되었고, 이에 따라 최근우,김세용,이여성,이상백,김기용,이만규등을 중앙위원으로 선출했다.[5]

건국동맹은 1만여명의 맹원을 확보해서 외곽 단체 농민동맹도 조직하고 해외 연락 사업을 벌였으며 심지어 국외에서 편성한 병력을 1945년 8월 29일 국치 35주년의 날에 국내로 진공시킬 계획까지 추진했다고 한다. 건국동맹의 인력과 자원이 건준 활동의 발판이 되었다고 한다. [74]

해방후 정치활동[편집]

해방 직전[편집]

해방 직전, 소비에트 연방청진 상륙 작전을 개시하자 조선총독부경성까지 소비에트 연방이 점령하겠다는 우려에 좌파민중 세력을 대변할 수 있는 여운형과 접촉하였다.[주 12][주 13] 1945년 8월 14일, 여운형은 당시 총독부 경무국장이었던 니시히로에게서 일본의 패전소식과 함께 15일 아침 조선총독부 정무총감 엔도 류사쿠의 관저(서울 필동)로 와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이어서 총독부 정무총감은 여운형과 교섭하여 '자신들을 포함해 조선에 거류중인 일본인들이 안전하게 빠져나오도록 해달라'고 하자, 여운형은 5개항 보장 조건을 전제로 수락하였다. 여운형이 제시한 5개항 조건 전제내용은 다음과 같다.[75]

  • 모든 정치범을 즉시 석방할 것.
  • 당장에 경성 시민이 먹고 살 수 있을 만큼의 식량을 확보해줄 것.
  • 우리 조선이 주체적으로 치안을 맡는다.
  • 치안 유지와 건설 공사에 총독부는 방해 하지 않는다.
  • 학생들과 청년들 활동을 총독부가 방해하지 않는다.
서울 필동에 위치한 한국의 집. 이곳은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 정무총감 관저로 1945년 8월 15일, 아침에 여운형이 이곳에서 총독부로부터 치안권과 행정권을 이양받았다.

행정권,치안유지권을 인수하게 된 여운형은 8월 15일에 사람을 보내 송진우의 참여를 요청하였고, 직접 찾아가기도 했지만 송진우로부터 "경거망동을 삼가라. 중경 정부를 지지하여야 한다."는 말만 들었다.[76] 송진우가 집요하게 내세운 임정봉대론에 대해 여운형은 "일제의 탄압 아래서 직접 싸워온 거대한 세력은 국외에 있는 것이 아니고 국내에 있는 3천만 민중"이라고 반박하였다. 여운형은 "임정이 해외에 30년간 머물러 있었기 때문에 이렇다 할 업적이 없고, 국내에 인민적 토대를 갖지 못했기 때문에 정부로 군림할 수 없으며, 임정은 많은 해외독립단체가 만든 정부 가운데 하나일 뿐."이라고 주장하였다.[77]

그가 조선총독부와 교섭을 한 부분에 대해서는 상당한 논란의 여지가 있다. 일단 긍정적으로 보는 측은 패망한 일본군이 철수하기 전에 무고한 조선인들을 마구 학살하고 떠난다거나 해방 직후에 사상계 내에서 친일파를 처단한다는 이름으로 사적인 감정에 기인한 마구잡이식 보복성 살인으로 사회 분열과 혼란이 일어나 힘없는 사람들이 억울한 피해를 입을 것을 걱정해서라고 주장한다.[주 14]

반면, 비판하는 이들은 일본군 및 행정관료들이 동남아, 중국 등지에서 항복하여 포로 대우를 받았던 점을 지적하며, 부적절한 처신이었다고 지적한다.

훗날 한민당과 그들의 대표지 동아일보, 친일파 방응모조선일보는 여운형이 총독부와 교섭했다는 것을 구실로 '여운형은 일본으로부터 돈 받아 먹은 친일파'라고 맹렬히 비난했지만, 정작 여운형 본인은 일제에 의해 인생 전반에 걸쳐 생사를 넘나든 최대 피해자였다. 해방직전 총독부로부터 돈을 한 푼도 받지 않았으며, 해방이후에도 역시 가난하게 살았다. 총독부 측에서도 여운형이 반일인사라는 것을 알아 교섭을 주저하기도 했다.

반면, 총독부는 소비에트 연방의 남진에 쏠려있는 상태라서 아무런 대응을 하지 못했다. 당시 8월 16일경성소비에트 연방이 올 거라는 소문이 퍼졌기 때문이다.

건국준비위원회 조직과 치안 유지 활동[편집]

1945년 8월 16일, 휘문고보의 군중 속 여운형. 여운형은 이곳에서 연설을 하였다.
몽양 여운형과 훗날 국민방위군 사령관으로 총살형이 된 김윤근.

1945년 8월 15일, 여운형은 서대문 형무소에서 정치범으로 수감중이던 독립운동가 조봉암의 출소 소식을 듣고, 직접 마중나가기도 했다.[78] 8월 15일, 밤 자신이 이미 1년 전인 1944년 8월에 결성한 건국동맹을 모체로 건국준비위원회를 발족하고 위원장을 맡았다.[79] 1945년 8월 16일, 시민들은 전날 8월 15일 라디오 방송이 일본제국 천황의 항복 방송인 줄 알게 되자 환호하였다.

그대로 시민들은 서울 계동에 있는 여운형의 집에 몰려가 연설을 해달라 하였고, 여운형은 집 바로 뒤에 있는 서울 휘문중학 운동장에서 연설을 하였다.[80] 연설 주요내용은 다음과 같다.

조선민족의 해방의 날이 왔습니다. (..중략..) 나는 다섯 가지 조건을 요구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총독부로부터 치안권과 행정권을 이양받았습니다. 이제 우리민족은 새역사의 일보를 내딛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지난날의 아프고 쓰라린 것을 다 잊어버리고, 이땅에 합리적이고, 이상적인 낙원을 건설하여야 합니다. 개인의 영웅주의는 단연 없애고, 끝까지 일사분란한 단결로 나아갑시다. (..중략..)
이제 곧 여러 곳으로부터 훌륭한 지도자가 들어오게 될 터이니 그들이 올 때까지 우리들의 힘은 적으나마 서로 협력하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5][30][주 15]

YMCA 건물에서 건국준비위원회 발족식때 강연하는 여운형.

이어 곧 여운형은 일제말기에 자신이 운영했던 기존 비밀결사 조직인 건국동맹을 모체로 건국준비위원회를 조직하였고 YMCA 건물에서 건준 강령을 발표하였다. 건준은 치안권과 행정권을 담당했다. 그 당시만 해도 건준은 민중들로부터 많은 지지를 받아 각 지역마다 100여개의 지부가 확대,개편되었다. 이어 건준은 전환하여 각 지역 지부인 '인민위원회'를 만드는 데 앞장섰다. 해방의 기쁨은 잠시, 곧 이어 한반도의 분단이 공식적으로 알려진 때는 8월 하순이었다. 북위38도선 이북을 소련군이, 이남은 미국군이 각각 점령한다는 연합국의 방침이 경성에도 알려지게 되었다.[16] 1945년 8·15광복을 맞아 안재홍등과 건국준비위원회를 조직, 그는 곧 건준을 공식적인 정부로 선포해 하나의 기정사실화하고 곧 경성에 진주할 미군으로부터 추인받는 길을 밟으려 했다.

한편, 건준에 가담한 박헌영이 '건국준비위원회 내에 민족주의자들이 많다.'며 개조를 요구하였다. 여운형은 부위원장 안재홍을 찾아가 협의하였는데, 안재홍은 박헌영을 멀리하라며 그에게 충고하였다고 한다.[81] 그러나, 건준은 곧 박헌영의 공산주의계 인사들의 좌경화로 본질적인 목적과 정치성향이 변질되었고, 우익계열 인사인 안재홍은 이에 반발하여 건준에서 탈퇴했다.

여운형은 송진우를 찾아 건국준비위원회에 동참해 줄 것을 요청하였으나, 송진우임정 봉대론을 주장하며 제안을 거절했다. 일부 청년측에서는 여운형이 송진우를 너무 과대 평가한다고 불만을 표출하였다.[82][주 16]

그런데, 소비에트 연방이 더 이상 남진하지 않자 조선총독부의 반격으로 인해 다시 경성일보, 경성방송국, 동아일보 등이 모두 조선총독부 손아귀로 다시 넘어갔다.

조선인민공화국 활동[편집]

그리하여 9월 6일에 '전국인민대표자회의'를 열고 박헌영이 건준을 「조선인민공화국」(약칭 인공)으로 변모시켰다.[16][주 17]

1945년 8월 하순, 여운형 등은 밀사 손치웅평양에 파견하여 조만식에게 남으로 내려올 것을 권고하였다. 그러나 조만식은 '여운형 등의 호의는 감사하나 북에 남겠다.'고 하였다. 조만식은 '여운형에게 뜻은 함께 하겠으나 몸은 여기 남겠다.'며 사양하였다.[83] 1945년 9월 7일 여운형은 미군정이 시작되기 전까지 지속되었던 조선인민공화국의 주석에 선출된 이승만과 함께 부주석에 선출되었다.[84] 9월 8일 미 24군단이 한반도 입성하고 군정을 선포하였을때, 미군정장관 아널드는 오긍선을 만나는데, 오긍선은 한민당송진우를 소개해주었다. 그리고 다음날 9월 11일 한민당을 대표한 조병옥, 윤보선 등은 미 군정장관 등을 만나 인공은 "일본과 협력한 한인집단"에 의해 조직되었으며, 여운형은 "한인들에게 잘 알려진 부일협력 정치인"이라고 왜곡하여 주장하였다. 이묘묵도 명월관에서 미군정 관리들에게 '여운형이 잘 알려진 친일파이며 인공은 공산주의적 경향이 있다.'고 왜곡하여 주장하였다.[30][85][주 18]

상하이 임시정부군무부장이었던 김원봉, 그는 여운형의 수려한 외모와 달변에 매료되어 좌파 진영에 본격 가담한다.
미군정청 사령장관 존 하지

1945년 10월초, 여운형은 미 군정 사령관 존 하지와 첫 대면이 이루어졌는데, 첫 대화내용은 다음과 같다.

After shaking hands, the first question General Hodge put to me was, 'What connections have you with the Jap?'
Answer : 'None.'
Then he asked : 'How much money did you receive from the Jap?'
Answer: 'None.'
I was completely taken aback by his question and his unfriendly attitude.

악수를 마친 후, 그(존 하지)가 던진 첫 질문은 "왜놈과 무슨 관련이 있지?"였고, 내 대답은 "없소!"였소. 그러자, 그는 "왜놈으로부터 얼마나 돈을 받았지?"라고 묻더이다. 나는 그의 질문과 비우호적인 태도에 당황했소.

김용중에게 보낸 여운형의 유고편지 中

이러한, 존 하지의 왜곡된 선입견과 그 배경은 미군정 고문으로 위촉된 9명의 한국민주당들의 모함으로 밝혀지게 된다.[30]

1945년 12월 3일임시정부 요인 환국기념 사진

1945년 10월 20일, 미군정의 주관하에 대대적인 환영행사속에 이승만이 귀국하게 된다. 여운형은 이승만에게 찾아가 인공이 설립된 경로를 설명하고 인공 주석에 취임할 것을 요청하러 만났으나, 이승만은 침묵으로 답하고 이후 한국민주당과 함께 손을 잡고 독자적인 행보를 걷게 된다. 이어 1945년 11월 3일,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환국때 그는 중경 임시정부 요인들을 맞아주었으나, 충칭 임시정부만을 추대하자는 내용인 '임정 정통론'추대에는 반대하였다.[86]

귀국한 임정 요인 중 김원봉장건상, 김성숙 등이 그를 찾아온다. 이들과의 면담에서 여운형은 호쾌한 성격과 달변으로 이들을 매료시켜, 김원봉 등을 좌파 진영으로 영입하게 된다.

조선인민당 창당[편집]

인공의 좌경화와 미군의 건준 불인정등으로 민족통일전선운동의 진전을 기대하기 어렵게 되자, 그 매개체 역할을 자임하는 정당을 결성하게 된다. 그는 11월 12일 건국동맹이 모체가 되고 몇 개의 군소단체가 합류하여 조선인민당을 서울 종로구 경운동의 천도교 중앙 대교당에서 창당했다. 인민위원회조선인민공화국으로 전환한 이후 건국준비위원회가 또다른 분열의 축이 되었음을 인정하고 새로운 출발을 선언한 것이다. 조선인민당은 평화적 방법으로 광범위한 대중과 정치세력속에 독립을 완성하자는 것이 목표였다.[30] 여운형은 창당대회에서 다음과 같이 연설했다.

해방된 오늘,지주와 자본가만으로 나라를 세우겠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어디 손을 들어보시오. 지식인, 사무원, 소시민만으로 나라를 세우고자 하는 사람이 있다면 역시 손을 들어 보시오. 농민, 노동자들 만으로 나라를 세우겠다고 우기는 사람 있으면 어디 한번 손을 들어보시오. 손을 드는 사람이 없군요. 그렇습니다. 일제 통치기간 우리 민족에게 씻을 수 없는 반역적 죄악을 저지른 극소수 친일파들을 제외하고 우리는 다같이 손을 잡고 건국사업에 매진해야 됩니다.
(..중략..)

독립을 완성하려면 땅의 남북과 사상의 좌우를 가릴 필요가 어디 있는가? 과거 지하운동시대 어두컴컴한 감방을 걷다 만나 껴안고 감격하던 혁명투사 간에 민족주의자도 공산주의자도 없었던 것 아닌가?

 
— 조선인민당 창당 연설, 1945년 11월

조선인민당 창당엔 미군정이 어느 정도 작용을 하였고, 조선인민당은 지주,보수층에 호감을 보이기 위해 당기에 태극을 넣었다. 그러나 인민당에는 공산주의자,사회주의자들이 많이 참여하였고, 박헌영계의 프락치들이 많아 훗날 분란을 일으키게 되었다.[87] 이어 1945년 11월, 조선인민당의 당수가 되었다.

1945년 11월 23일 조선일보의 복간을 축하하는 축사를 발표했다.[88] 인민당 당수 자격으로 보낸 축사에서 그는 '과거의 빛나던 그 민족문화 사상(史上)에 남긴 공적과 역할을 다시 살려서 바야흐로 닥쳐오는 신국가 건설 도정(途程)의 훌륭한 반석이 되어주기를 바라 마지 않는다'라 하였다.[88]

1945년 12월 23일 그는 오후 2시 김구가 주관하는 순국선열추념대회에 참여하였다.[4] 순국선열추념대회 위원으로 선출되었다.[4]

1945년 12월 27일, 모스크바 3상 회의에서 '조선의 신탁통치가 결정되었다.'라는 기사가 동아일보에 게재되었다. 신탁통치 결정되었다는 기사가 실리자, 반탁 시위가 격렬히 벌어졌다.[주 19] 시간이 흐를수록 국내 상황은 혼란을 더욱 크게 흘러갔다. 우익 정치인 김구이승만은 신탁통치 결정 보도를 접하고 격노하여 신탁통치 결사 반대를 외치며 반탁운동을 하기 시작했고, 소련에서 돌아온 극좌 정치인 박헌영은 '모스크바3상 회의의 결정을 지지한다.'는 선언을 하여 각자 독선적인 노선을 주장하기 시작했다.[주 20] 이 때부터 미군정기 조선은 '우익반탁 좌익찬탁'으로 나뉘어 극심하게 대립하게 되었으며, 이는 남한의 좌우갈등의 근본이 되었다. 시위는 '반소-반공'성향으로 변질되어가게 된다.[30][89]

이러한 상황 속에 여운형은 즉시 입장을 밝히지 않았다. 어느 때보다 정확한 상황파악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30]

그 뒤 1946년 1월 8일, 여운형은 조선인민당을 중심으로 4당(한국민주당,국민당,조선공산당,조선인민당)지도자와 임정세력들을 만난다. 여기서 '모스크바 3상회의'의 결정이 조선의 자주독립을 보장하는데 전적으로 지지하며, 신탁은 장래 수립 될 우리 정부로 하여금 해결하게 하자는 합의가 이루어지게 된다. 이는 해방 정국 각 정치세력이 이루어낸 단 한 번의 합의안이었다. 그러나, 약속은 하루를 넘기지 못하고 사태는 원점으로 되돌아가고 말았다.[주 21]

그 모습을 지켜보면서 여운형은 다음과 같이 통탄하였다.

참담한 심정이다. 나를 비롯해 지도층을 자칭하는 이들이 총퇴각을 할 때라 생각한다. 우리같은 지도층이 없었던들 통일은 벌써 성공하였을 것이다. 조선 지도자들은 제1차 시험에서 전부 낙제다.
 
1946년 4당 코뮤니케 무산 뒤, 1월 14일 기자회견

임시정부와 김구와의 관계[편집]

1919년 여운형은 신한청년당 당수로 활약하여 동생 여운홍과 함께 임시정부 창설에 참여하였고, 임시정부 의정원 의원, 외무부차장 등으로 활동하며 일본에 왕래하기도 했다. 그러나 1923년 국민대표회의로 인해 임시정부가 창조파, 개조파세력으로 나뉠 때 여운형은 개조파 세력(안창호 중심)으로 따랐으나 임시정부의 파벌다툼에 실망하여 임시정부를 떠났다.

상하이에서 신한청년당으로 지냈을때와 임시정부 의정원으로 지내던 시절에 여운형은 김구와 처음에 인연이 있었다. 여운형이 일제에 체포되어 국내로 압송된 뒤 1935년, 여운형이 황해도에 살던 김구의 가족들을 상하이로 피신시켜 김구와 상봉하게 해주는데에 지대한 공헌을 해서 한때 일본경찰의 요주의 인물로 낙인찍혀 심문을 받은 적 있었을만큼 인연이 두터웠다. 또한, 1945년 8월 일제가 패망하기 직전, 김구의 충칭 임시정부는 국내 진공작전을 위해 국내에 있던 지하 비밀 독립단체였던 건국동맹과 비밀연락망을 두고 연락을 시도했었다.[90]

임시정부 설립 초기에는 참여하였으나, 후에 탈퇴하여 임시정부와도 인연이 있었다. 그러나, 여운형은 임시정부의 법통성 주장에 동의하지 않았다.

해방직후에 김구는 여운형을 매우 싫어했고, 이와 마찬가지로 충칭 임시정부 역시 여운형과 협력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충칭 임시정부만이 정통성'이라는 '임정법통론'노선에 여운형이 반대했기 때문이었다. 즉, 여운형의 노선 생각은 '임시정부라는 조직이 중국 충칭에 있는 것뿐만이 아닌 해외 여러곳(여운형은 미주, 연해주, 시베리아, 만주 등지에 독립운동 단체가 있었다고 주장한다.)에 독립운동세력들이 있었고, 그러한 해외 독립운동가 세력들이 국내에 들어와서 함께 새로운 임시정부를 건설해야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는 김구를 비롯한 충칭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눈으로는 '여운형은 임시정부의 권위를 부정하고 중대한 월권,도전 행위다.'라 여겨 여운형과 협력하지 않게 되었다.

1945년 11월, 대한민국임시정부 1진이 망명길에서 돌아오자 여운형은 김구를 상대로 '임정뿐만이 아니라 국내외 다른 독립운동 세력, 사회주의세력과 함께 협력하여 통일된 조국을 건설하자.'고 설득하러 서대문 경교장을 방문했다. 여운형은 경교장에 들어가 옛 동지들과 인사를 나누던 중에 김구는 그와의 대화를 거절했고, 수위에게 몸수색을 지시하여 여운형은 끌려나가 몸수색을 당하기도 했다. 그는 그 이후로 다시는 김구를 찾아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91][주 22]

임시정부 법통성 논란[편집]

1945년 12월 환국 직후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법통성을 주장하였다. 여운형은 허헌과 함께 임시정부의 법통성 주장은 옳지 않다는 시각을 피력하였다. 임시정부의 공헌은 어느 정도 인정하는 조선공산당과 달리 여운형은 좀 다른 각도에서 중경 임정 추대에 반대하였다. 장덕수와의 대화에서 그는 임정에 대해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다.

  • 임시정부는 30년간 해외에서 지리멸렬하게 유야무야 중에 있던 조직이니 국내에 기초가 없어 군림이 불가하다는 점
  • 연합국한테 승인되지도 될 수도 없다는 점
  • 미주(美洲), 연안, 시베리아, 만주 등지의 혁명단체 중에는 임시정부보다 몇 배가 크고 실력 있고 맹활동한 혁명단체가 있으며 그네들 안중에는 임시정부가 없다는 점
  • 국내에서 투옥되었던 혁명지사가 다수인데 , 안전지대에 있었고 객지고생만 한 해외 혁명가 정권만을 환영하는 것은 잘못된 점이라는 점
  • 중경 임정을 환영하는 자들은 아무런 혁명 공적이 없는 자들로 호가호위(狐假虎威)하려는 것이고 건준의 정권수립권(權)을 방해하는 수단이 된다는 점
  • 중경 임정만을 환영하는 것은 해내해외의 혁명단체의 합동을 방해하고 혁명세력을 분열시키는 과오라는 점 [92][93]

그는 임시정부가 해외에서 존재한 하나의 독립운동 단체에 불과하다는 점을 들어 임시정부의 법통 주장을 반박하였다. 임정 법통을 부정한 점 역시 극우단체로부터 공격대상으로 찍히는 하나의 원인이 되었다.

민주의원 참가 거부, 민전 참여[편집]

1946년 2월 13일 비상국민회의(독립촉성중앙협의회와 비상정치회의 주비회 통합체)에서 최고정무위원직(총 28명)에 선출되었다.[94] 이후 비상국민회의는 민주의원으로 바뀌었는데, 2월 14일 민주의원결성대회가 열렸으나 여운형은 김창숙, 함태영, 정인보, 조소앙 등과 함께 민주의원 의원직을 거부하였다.[95]

1946년 2월 15일, 서울 종로 YMCA에서 열린 민족주의민족전선(민전) 결성식에 참여하였다. 15일, 임시정부의 성주식, 김성숙, 장건상, 김원봉 등이 민전에 참가하였는데, 여운형은 허헌, 박헌영, 백남운, 김원봉과 함께 민족주의민족전선의 5인 공동의장에 추대되었다.[96][97]

이를 두고 미군정청 사령관 존 하지 중장은 여운형과 조선인민당민전에 참여한 것을 "인민당소련 지령하의 조선공산당에 완전히 팔려간 증거로 해석하며, 이것은 여운형이 완전한 공산주의자라는 최초의 확증을 제공했다."고 주장했다.[98][99] 그러나 존 하지의 주장과는 달리, 여운형은 '극소수의 반동을 제외하곤 손을 잡아야 한다'는 좌우합작 입장을 견지했으며, 조선공산당을 극소수 반동으로 보지 않은 것일 뿐이었다. 군정청은 처음에 여운형의 정치노선 행보에 많은 의심을 품었지만, 점차 한반도의 정치 상황등 알게 되면서 여운형을 비롯한 김규식등 중도파 노선에 호감을 가지게 된다.[5][주 23] 한편, 민전은 여운형의 '좌우합작'노선 뜻대로 돌아가지 못했다.[98]

3월 7일 소련 군정청 사령관 스티코프가 짠 초안에서 그는 향후 수립될 정부의 수상 후보감으로 지목되기도 했다.[100]

좌우합작운동 전개[편집]

덕수궁 석조전. 이곳에서 미소공위가 개최되어 좌우합작위원회 회담이 열리곤 했었다.

1945년 9월, 박헌영계열의 공산주의자 세력들이 건준내를 득세함으로써 건준의 본질적인 중도적 성향은 변질되어 박헌영을 주축으로 조선인민공화국을 선포하게 되었다. 송진우, 김성수 등은 '충칭 임시정부를 지지한다.'고 주장하여 국내의 우익세력들은 불참하였고, 9월 16일 박헌영 축출을 요구했으나 들어지지 않자 반발한 안재홍계 세력의 중도우파들의 비판과 탈당[101], 11월 인공의 지도자로 지명되었던 이승만, 김구의 취임 거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론'을 주장하는 한민당우익 진영의 반대, 미군정의 불인정으로 인공은 실패하였다.

그러던 중 1945년 12월 말에 모스크바 3상 회의에서 신탁통치안 문제로, '찬탁 반탁'시위로 좌우 대립 갈등이 더욱 심화된다. 1946년 1월 초, 4당 코뮤니케를 열어 합의안을 만들었으나, 이내 곧바로 결렬되어 사태는 원점으로 돌아간다.

1946년 2월 9일에 여운형은 비밀리에 농부로 변장하고 3.8선을 넘어 이북으로 건너갔다. 1946년 2월 9일부터 2월 11일까지 북한의 인사들은 북한을 방문한 여운형은 '조만식의 석방 안건'에 관해 협의했다.[16] 북한의 저명 인사들도 조만식에게 월남할 것을 권하였지만 조만식은 '이북 동포들이 고통 받고 있는데 나 혼자만 월남할 수 없다'며 듣지않았다.[102]

1946년 2월 13일 비상국민회의가 28명의 최고정무위원직을 선출할 때 이승만, 김구, 김규식, 조소앙, 안재홍 등과 함께 비상국민회의 최고정무위원의 한사람으로 선출되었다.[103] 2월 14일 비상국민회의 최고정무위원 전원이 민주의원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비상국민회의에 최고정무위원직에는 거의 대부분이 한민당을 비롯한 우익인사들이 대부분이었고, 이승만의 독단적 행보에 여운형은 반대하여 민주의원에 불참을 선언하였다.[104][105]

1946년 5월, 제1차 미소공위때. 미국대표들과 함께.
1946년 5월, 제1차 미소공위때. 소련대표들과 함께.

그러던 중 1946년3월 20일, 제1차 미국-소련 공동위원회가 개최되었다. 소련은 '모스크바 3상회의 협정지지세력만 통일 임시정부에 참여할 자격을 주자.'고 주장하였고, 미국은 '모든 정치세력을 통일 임시정부에 참여할 자격을 주자' 고 하였다. 결국 양측의 입장이 크게 엇갈려 주장을 좁히지 못하고 제1차 미소공위는 실패로 결렬되었다.

여운형은 제1차 미소공위 당시 다음과 같이 입장을 밝혔다.

지정학상으로도 남방세력이자, 해양세력인 민주주의의 맹주인 미국, 북방세력이자, 대륙세력인 사령탑 소련이 접합하고 있다. 때문에 자주국가건설과 유지 발전은 조선의 역사가 증명하는 바와 같이 좌우협력에서만 가능하다.
여운형, 엄항섭, 장면
1947년 미소공동위원회 회의장에서
(앞줄 왼쪽 선글라스를 낀 남자가 엄항섭, 바로 옆은 여운형, 엄항섭의 뒷쪽 왼편에 흰 양복에 흰 중절모를 쓴 이는 장면

제1차 미소공위가 실패로 결렬된 직후 1946년 6월 3일, 이승만이 삼남지방 유세하러 가던 중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주장하는 정읍발언이 나온다.[주 24] 이때, 여운형과 김규식은 단독정부 수립운동에 결연히 반대했다. 여운형은 단독정부에 대해 다음과 같이 반발했다.

결코 반대다. 그 결과는 민족분열로 오고, 10년이 지나도 고칠 수 없는 분열의 원인이 된다. 현재, 통일의 암은 신탁이 아니라 결국, 각 진영의 이해관계다.[106]

이에 여운형을 비롯한 김규식, 안재홍 등 중도파 인사들이 7월, 좌우합작운동을 전개하였다. 여운형은 좌우합작운동 좌측 대표에 선출되었다.[61]

좌우합작운동은 미국 국무성의 요구로 실시되어 군정청에서 추진하도록 지원했지만, 본질적인 목표는 사상, 이념을 뛰어넘어 좌,우익이 단결하고 남북연합으로 이어져서 미국, 소련등 열강세력을 설득하여 무기한 휴회된 미소공위를 다시 재개, 중도적 사상의 '통일임시정부'를 수립하려는 것이었 취지였다.

여운형은 당시 한반도에 조성된 국제정세 속에서 미소공위 협상과 좌우합작의 길만이 평화적으로 통일임시정부를 수립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생각했다. 미 국무부 또한 분단정부 수립으로 소련이나 중국을 자극하는 극단적인 상황을 원하지 않아 여운형과 김규식으로 하여금 좌우대립 해소를 위한 좌우합작운동을 추진하도록 도와주었다.[61]

박헌영과의 갈등[편집]
1946년 2월, 박헌영과 여운형. 일생의 동지였다가 좌우합작 문제와 3당합당 문제등으로 서로 앙숙관계가 되어버렸다.

1946년 4월 12일 국내 좌파세력들이 주도한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 1주기 추모식에 참가하였다. 여기서 조선공산당 당수 박헌영도 참가하였다. 이는 공산당이 남한에서 엄연한 현실 권력인 미군정을 인정하고 협조하겠다는 자세이자, 여운형이 노력한 결과물이기도 했다. 본격적으로 추진될 좌우합작과정에서 한 사람이라도 더 많은 이들이 참여해야 한다는 것이 여운형의 생각이었다. 박헌영은 여운형 환갑잔치에도 참석해 '당신은 조선민족해방운동의 과정에서 위대한 지도자였습니다. 당신은 일본제국주의의 압력에도 불구하고 조선독립을 위해 싸워왔고 조선 노동계급을 위해 용감히 투쟁해 왔습니다.'라고 극찬하기도 했다.[107] 그러나 한달 뒤 5월 정판사 위조지폐 사건이 터져 미군정조선공산당을 탄압하자, 조선공산당은 급진화되었다.

문제는 미군정의 태도였다. 좌우합작세력을 밀어 대중들의 지지를 확보하되, 공산당이 대열에 이탈하면 곧바로 파괴한다는 것이 미군정의 목표였고, 그 열쇠를 쥔 것이 여운형이었다. 미군정 비밀보고서에는 노골적으로 여운형을 회유와 압박을 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미군정이 원하던 것은 여운형과 공산당의 단절이었다. 조선공산당 또한 여운형의 좌우합작노선을 어렵게 만들었다. 박헌영이 1946년 6월 23일에 합작 5원칙을 발표했는데, 토지의 무상몰수, 무상분배와 정부기능을 미군정에서 인민위원회로 즉각 이양할 것 등을 주장했다. 사실상 좌우합작원칙을 전면 거부한 내용들이었다.[89]

이는 여운형도 받아들일 수 없는 원칙이었다. 여운형은 명백한 반대의사를 밝히고, 박헌영을 설득하였다. 그러나, 그가 공산당과 손을 놓는 순간이 공산당과 미군정의 전면전을 의미했다. 여운형과 미군정은 서로 다른 속셈이었다. 여운형에게 미군정은 좌우합작을 위해 피할 수 없는 현실이었고, 미군정에 여운형은 상황에 따라 이용할 수 있는 수단이었다.[30]

1946년 7월 17일 버취 중위 집에서 좌우합작 요인들과 회담을 하였는데, 그 날 밤에 김두한대한민청에 야산으로 납치되어 협박을 당하던 중 벼랑에서 낙하 했다.[108][109]

1946년 8월 27일, 여운형은 조선인민당 당수직에서 사임하기에 이른다. 인민당 내부에는 조선공산당 프락치들로 박헌영의 지시로 공산당으로의 흡수통합을 결의해 버린 것이다. 이에 여운형은 미군정청에 '박헌영을 제거해 달라.'는 요청을 하기도 하였다.[110].[111] 한편, 박헌영김일성에게 서신을 보내 여운형을 비판하였는데 '김일성 동지는 여운형을 잘 모른다. 여운형은 대중선동을 좋아하는 야심가이고 철저한 친미주의자며 부르주아 민주주의자다. 여운형이 좌우합작운동을 끄집어내면서 3대 원칙을 제시했는데 첫 번째로 부르주아 민주주의 공화국을 세운다고 하지 않았느냐. 또 그는 출신 자체가 양반지주 출신이다.'라며 비판하였다.[110] 한편, 여운형은 '북의 김일성·김두봉이 민족주의자로서 박헌영의 반미적 노선에는 반대할 것.'이라고 판단하고 있었다.[111] 그러나, 1946년 5월에 김일성이 남한을 '미제국주의와 총독정치'라고 평가하며, 8월에는 '남한을 완전히 해방시켜야 한다.'는 연설을 했던 것을 여운형은 모르고 있었다.[111]

1946년 8월초, 조선인민당 당수 여운형은 조선공산당조선신민당 앞으로 3당합당을 제안하는 서한을 보내왔다.[16] 발송하기 이틀 전에 평양김일성김두봉에게 편지 형식의 보고서를 먼저 올렸다.[112] 박헌영조선공산당 책임비서로서 3당합당 요청을 수락하였다.[16] 9월 4일 3당합당 결과 남조선노동당창당중앙위원회가 결성되었다. 이 시기 미군정은 조선공산당 간부들에 대한 체포령을 내리고 조선공산당은 더욱 과격 성향을 보이며 9월 총파업으로 맞서며 미군정과 전면충돌하게 되었다.[30]

조선공산당, 남조선신민당, 조선인민당 3당이 통합하여 남조선노동당이 결성되자, 초대 위원장에 선출되었다. 그러나 부위원장으로 선출된 박헌영과 당내 주도권을 놓고 갈등하다가 암투를 벌이게 되었다. 여운형은 좌익정당 합당보다는 우익세력과 연대해서 통일정부를 수립하는 좌우합작운동을 추진했고, 박헌영은 이를 반대했다.

좌우합작 7원칙 제정[편집]

46년 10월 7일에는 좌우합작위원회에서 좌익세력이 제시한 5원칙과 우익세력이 제시한 8원칙을 절충하여 '좌우합작 7원칙'이 합의되고 10일 양측대표가 참석하여 결정짓기로 하였다. 그러나, 10일 아침 여운형은 김규식의 자택인 삼청장을 갈려는 찰나, 극좌세력에 의해 정치테러 당해 납치되어 이날 회의에 참석 못했다.

그러나, 이 날 양측대표가 합의하고 결정하여 '좌우합작 7원칙'이 발표되었다.

  1. 조선의 민주독립을 보장한 모스크바 3국 외상회의 결정에 의하여 남북을 통한 좌,우합작으로 민주주의 임시정부를 수립할 것.
  2. 미국-소련 공동위원회 속개를 요청하는 공동성명을 발표할 것.
  3. 토지개혁에 있어 몰수 유조건 몰수 체감 매상 등으로 토지를 농민에게 무상으로 분여하여 시가지의 기지와 대건물을 적정처리하며 주요산업을 국유화 하여 사회 노동법령과 정치적 자유를 기본으로 지방자치제의 확립을 속히 실시하며, 통화및 민생문제등을 급속히 처리하여 민주주의 건국 과업완수에 매진할 것.
  4. 친일파 및 민족반역자를 처리할 조례를 본 합작위원회의 입법기구에 제안하여 입법기구로 하여금 심리 결정하여 실시케 할 것.
  5. 남북을 통하여 현 정권하에서 검거된 정치 운동자의 석방에 노력하고, 아울러 남북 좌,우익 테러적 행동을 일체 즉시로 제지토록 노력할 것.
  6. 입법기구에 있어서는 일체 그 권능과 구성방법, 운영등에 관한 대안을 본 합작위원회에서 작성하여 적극적으로 실행을 기도할 것.
  7. 전국적으로 언론,집회,출판, 교통,투표등의 자유가 보장되도록 노력할 것.

남로당과의 갈등과 근로인민당 창당[편집]

1946년 10월 16일 3당 합당 교섭위원들의 토의를 거쳐 합동의정서와 강령 초안을 발표함으로써 여운형은 사회노동당을 결성했으나 사회노동당은 3당 합당문제를 둘러싸고 여전히 내부갈등을 노출한 채 별다른 활동을 하지 못하였다. 1946년 12월에 여운형은 남조선과도입법의원불참 선언과 정계은퇴를 선언하면서 남로당을 곧바로 탈당했다. 1946년 12월 28일부터 1947년 1월 8일 사이에 북한을 방문해 김일성을 만났다. 여기서 좌익진영의 단결과 자신의 정계복귀문제, 좌우합작운동미소공위 재개운동등에 관해 논의하면서 김일성에게 '북조선 방식 토지개혁'을 만류했다고 한다. 38선 이북만의 토지개혁이 분단의 길임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89][113] 북한을 방문하고 돌아온 뒤 1947년 1월 27일에는 반탁운동과 민주주의민족전선의 편협성을 비판하는 담화를 발표하였다. 1947년 5월 미소공위가 재개될 조짐을 보이자, 좌우합작운동을 보다 원활히 추진하기 위해 1947년 5월에 근로인민당을 조직하였다.

1947년 4월 26일 근로인민당 준비위원회를 열었고 5월 24일5월 25일에 열린 근로인민당 창당대회에서 위원장에 여운형, 부위원장에 백남운, 장건상을 각각 선출하였다.[114] 그런데 한 증언에 의하면 여운형은 근로인민당남로당과의 차이점을 주장하는 연설을 하였는데, 이것이 소련측에 들어가 소련군정의 5월 4일자 보고서에 올라가게 됐다. 문제의 발언은 "남로당은 미군정청과 투쟁하는 정당이다. 나는 미군정청과 협력하는 당을 만들었다"라고 했다는 것이다.[114][주 25]

다른 연설에서 여운형은 "남로당은 극단적으로 좌익이며, 오직 우리 당만이 올바른 노선을 견지하고 있습니다."고 발표했다고 하는데, 이 발언을 보고한 남로당의 한 간부는 "그러한 식으로 여운형은 반동과 싸우는 것이 아니라 남로당과 투쟁하고 있다. 그는 남로당에 가입해 있는 구 인민당 구성원들과 사회노동당 구성원들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려 노력하고 있다. 그는 문화학생 조직들 속으로도 침투하려고 시도한다"고 보고하였다.[115]

1947년 7월, 서재필 박사 모시는 김규식과 여운형.

1947년 3월 17일 새벽 1시에 여운형의 계동 집이 폭파하면서 가옥이 파괴되었다.[116] 군정경찰은 조사대신 여운형에게 '서울을 떠나라'라고 충고하였다.[117] 계동 집이 반파된 직후 여운형은 여원구여연구를 북으로 보낸다. 이로 인해 극우, 극좌세력으로부터 계속 정치테러 표적이 되고 말지만, 여운형 자신은 끝내 서울을 떠나지 않았다.[30]

여운형의 동생 여운홍은 "폭탄테러가 좌파에 의해 일어났다"고 증언하여 남로당의 개입을 시사하였으며, 이정구, 이상백 등은 이 음모가 남로당의 지시에 따라 일어났다고 지적하였다. 여운형과 남로당의 관계가 폭력을 사용할 정도로 관계가 악화되자, 여운형의 측근들은 1947년 당시까지도 삼가하던 '공산당에 대한 비판'을 표현하기 시작하였다.[118] 그러나 폭파를 한 인물은 백민태로 백민태는 김두한과 친분관계로[119] 훗날 1949년 노덕술 등의 친일파들이 계획한 반민특위 및 정부 요인 암살 사건을 폭로하면서 자수했던 인물이었다.

1947년 4월 3일 혜화동로터리에서 괴한 청년들로부터 권총 저격을 받았다.[120] 그러나 위기는 모면하였다.

1947년 7월 1일, 서재필이 귀국하자 그는 김규식과 함께 친히 공항에 나가 서재필을 환영했다.

좌우합작운동의 결속[편집]

1947년 초의 여운형
1947년 5월, 제2차 미소공위당시 사진. 오른쪽부터 여운형,김규식,이묘묵,말리크, 테렌티 스티코프(소련군정 사령관), 허헌

1947년 이 무렵에는 미국 정가에서는 소련과의 협력무드가 깨졌고, 뒤이어 매카시즘 열풍이 불면서 미 국무성 안에 있던 진보적 관리들이 '빨갱이'로 몰려 투옥되는 사태를 빚으면서 미국의 대한정책도 반공노선으로 급선회하게 되고, 여기서 미군정기 조선의 상황도 영향을 미치게 되면서 중도파 정치세력은 수차례 테러를 당하게된다.[1]

이러한 상황 속에서 1947년 5월 21일에 제2차 미소공위가 재개되었다. 미소공위 개최 이전 신탁통치를 반대하였던 우익진영 정당,단체들은 미소공위에 협력할것을 거부하였다. 그러나, 우익진영 내부에서 한민당 일부세력은 미소공위에 무조건 참가할 것을 주장하여 다수의 당 중진들이 탈당하는 사태를 빚게 되었다.[5]

한편, 중간 진영인 좌우합작위원회5월 23일 김규식 명의로 '합작 7원칙'에 명시된 바와 같이 우리의 최대목표인 공위가 재개 되었으므로 "최속기간 내에 통일된 민주주의 임시정부 수립을 성취하자"는 성명서를 발표한다.

이렇게 됨으로써 좌익과 중간진영은 물론 대부분의 우익진영도 통일 임시정부 수립을 위해서 미소공위 참가는 불가피하게 되었으며, '신탁통치안 문제는 새로운 임시정부 수립 후에 민족총의로 반대해야 한다.'는 조건부 입장하에 미소공위참가를 결정하게 된다.[5] 좌우합작위원회미소공위의 성공적 추진에 의하여 통일임시정부 수립을 위해 중간파 세력의 보다 광범위하게 결집하게 된다.[5]

테러 일지[편집]

여운형은 1945년 광복 이후부터 정치 테러를 수 차례 겪었다. 1929년 중국에 있을때 정치테러 2차례, 1945년 8월 광복 이후부터 1947년 7월 암살되기까지 2년간 총 10차례 테러를 당했는데 이는 정치테러사에서 전무후무할 정도로 최다 기록 수준이다. 직접적인 테러뿐만 아니라 협박전화와 편지, 비방 벽보, 심지어 살인을 교사하는 신문 기사(대표적인 예가 이종형대동신문)까지 존재했다.

'신탁통치는 식민통치의 한 방식이며, 이를 찬성하는 자는 반역자이기 때문에 제거해야 한다.'고 믿은 광신자들은 찬탁으로 전환한 박헌영을 비롯해 김규식, 안재홍, 여운형[주 26] 을 암살 표적으로 삼았다.[121]

여운형의 비서로 지낸 여운각은 '일상적으로 위협을 느끼는 것이었다. 게다가 집(계동)도 폭파되고, 여운형이 여러 번 테러를 당했었고.. 그리고, 자녀들도 미행이 붙는 등 수상한 것도 여러 번 있었고, 하루도 정말 안심할 그런 게 아니었다.'고 회상했다.[30]

여운형은 5번째 테러를 당했을 적에 "나는 죽어도 이 길을 가겠다."라고 말하였고, 아버지를 걱정하는 자식들에게 "혁명가는 침상에서 죽는 법이 없다. 나는 거리에서 죽을 것이다."라고 앞날을 예견하는 듯한 말을 했다고 한다.

1947년 5월무렵, 극우파는 미군정하의 한국인 경찰세력과 연계하여 여운형을 암살하기로 계획했는데, 이러한 극우파의 움직임을 파악한 존 하지는 그해 6월 28일자이 무렵 미 군정에서는 잦은 테러를 당해온 여운형을 보호하기 위해 미군 헌병을 경호원으로 붙여주겠다고 했으나, 여운형은 “대중과 함께 살아온 내가 어찌 대중으로부터 스스로 격리되겠는가?”하고 이 제안을 일언지하에 거절했다고 한다.[122]

여운형이 1945년 8월 광복 이후부터 정치테러 당한 일지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 1945년 8월 18일 오전 1시경, 서울 계동 자택 앞에서 괴한들에 의해 곤봉으로 피습.[주 27]
  • 1945년 9월 7일 저녁 무렵, 서울 원서동에서 계동으로 넘어오다가 괴한들에게 밧줄로 묶임. 행인이 구제.
  • 1945년 12월 초순, 백천온천 여관에서 괴한에게 피습. 피습당하기 이전에 여관을 옮겨 무사.
  • 1946년 1월, 서울 창신동 친구 집을 괴한 5명이 습격, 다른곳에 있었으므로 중으로 위기 모면.
  • 1946년 4월 18일 오후 9시, 서울 관수교에서 괴한들에 포위. 행인이 구출
  • 1946년 5월 하순, 서울 종로에서 괴한들에 포위. 격투 끝에 행인이 구출.
  • 1946년 7월 17일 서울 신당동 산에서 협박, 벼랑에서 낙하.[108]
  • 1946년 10월 7일 저녁무렵, 자택 문전에서 납치. 나무에서 결박을 풀고 도피.
  • 1947년 3월 17일 밤, 서울 계동 자택에 침실 폭파. 외출상태였으므로 무사.
  • 1947년 4월 3일, 서울 혜화동 로터리에서 승용차 피습.[5]

암살[편집]

미군정은 정치적인 필요성 때문에 여운형을 중시하고 가까이 하였지만, 그를 신뢰하지는 않았다.[123] 1947년 7월 19일 아침, 여운형은 김용중[주 28] 에게 영문편지를 보냈는데, 거기엔 죽음을 예견하는 내용이 있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북조선에서 소련이 극좌파분자만을 선호한다고 하면 여기 남조선에서 미국은 반대로 가려하고 있소.


(..중략..)
극우파가 아닌 모든 사람들은 '공산주의자'로 낙인찍히고, 그 활동을 방해받고 있소.

(..중략..)

친애하는 김선생.
나는 공포로부터의 자유가 없소. 나는 아직도 미군정 하에서 국립경찰로 채용된 친일파의 손아귀에 고통 받고 있소이다.[30][124]

1947년 7월 19일, 서울 혜화동 로터리에서 피격절명한 곳.

곧 이어 IOC가입 축하기념[주 29] 으로 서울 운동장에서 한국과 영국의 친선축구경기가 열린 날, 당시 체육부장관이던 여운형은 경기 참관 다음 남조선과도입법의원 민정장관 수락을 논의하는 약속예정을 잡았다. 그 전에 여운형은 '옷을 갈아입겠다.'고 차를 타고 집으로 갔다. 오후 1시, 서울 혜화동 로터리 근방에서 트럭 1대가 갑자기 들이닥쳐 여운형이 탄 자동차를 가로막았다. 이어 한지근(韓智根)[주 30] 이 나타나 여운형이 탄 자동차로 달려가 2발의 총탄을 쏘았다. 2발은 여운형의 복부와 심장을 정확히 관통했고, 병원으로 호송 중에 그는 절명하였다. 당시 여운형의 옆에 있던 고경흠은 '그가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내뱉은 말은 "조국..." 그리고 "조선..."이었으며, 미소를 띤 얼굴로 죽었다.'고 한다.[5][주 31]

한편 여운형이 죽은 후 미군정은 그의 소지품 중에서 북한으로 보내는 편지들을 수거하였다고 한다.[125] 이 편지들에 대한 해설은 'G-2 보고서 4, 1947. 08. 05'의 450페이지에 수록되었다.[125] 그밖에 여운형은 언론사로 중외일보를 운영하고 있었다. 1947년 당시의 한 편지에서 그는 '내가 하고 있는 중외일보'[125] 라고 언급하였다. 당시 그의 나이 향년 62세였다.

사후[편집]

1947년 8월 3일, 여운형 장례식. 추모인파는 60여만명이 몰려와서 애도의 물결을 이루었다.

그의 죽음으로 좌우합작위원회는 구심점을 잃게 된다. 제2차 미소공위는 추진하던 중 이후 중재자가 없어지자 극좌,극우 양극단 세력의 갈등이 표출하였고, 끝내 미국-소련의 입장만 확인한 채 1947년 10월에 제2차 미소공위는 완전히 결렬되어 미국한반도 문제를 UN으로 이관함으로써 좌우합작위원회는 1947년 12월에 공식 해체된다. 결국, '통일임시정부' 수립을 위한 좌우합작운동은 좌절되어 실패로 끝났고 한반도는 '남한 내 단독정부 수립'안이 확정되기에 이르렀다.

1947년 7월 19일 여운형이 피습,절명하여 암살되었을 당시 갑작스런 그의 죽음은 많은 사람들에게 커다란 충격을 주었다. 1947년 8월 3일 광화문 인민당사 앞에서 발인식이 거행되었다. 그의 영결식은 인민장으로 치러졌다.[주 32]

영결식에 약 60여만명의 수많은 추모인파가 몰렸다고 한다. 이는 광복 이후 최다 인파가 모인 것인데, 민중들이 슬픔에 동참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흰 옷을 입어서 서울시내가 하얗게 뒤덮였다고 한다.[126] 영구는 결식장인 서울운동장(동대문운동장)으로 향해 서서히 갔고, 장례 행렬은 11시 40분에 서울운동장에 도착하여 영결식이 치러졌다. 서울 운동장에서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금메달리스트 손기정과 역도선수 김성집등 체육인들이 그의 관을 운구하였다.[127]

그의 시신은 포르말린으로 방부처리되어 쇠로 만들어진 관에 안치되었다. 통일이 되는 날에 다시 장사를 지내기 위함이었다. 그가 죽자 미 군정장관 하지가 육각수은관을 미국에서 특별 주문해 가져왔다고 한다.[128]

여운형 묘소. 서울 우이동에 위치해 있다.

여운형의 묘소는 서울시 강북구 우이동에 안치되었으며 강북구 수유동에서 멀지 않은 솔밭공원 근처에 있다. 한 때 1961년 5.16 군사정변 직후 우이동 묘소 땅이 채윤혁 개인에게 불하받게 되어 여운형 시신이 오갈 데 없는 딱한 처지에 놓인 적이 있었다.[129][130] 당시 국회의원이던 여운형의 동생 여운홍이 법적으로 어떻게 해볼 길이 없으니 대통령 박정희한테 직접 문제를 해결해달라고 부탁했다. 이에 대해 박정희는 "그 분 사상이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독립운동을 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높이 평가할 만 하다."면서 좋게 해결해주었다고 한다.[131] 그리고, 1965년 7월 19일에 공식적인 추모식이 열렸다.[5] 1990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부터 조국통일상이 추서되었다.

2007년 항일독립운동가단체 협의회로부터 신간회창립80주년을 기념하는 민족공동체 상이 추서되었다.[132] 양평군에서는 생가 복원사업을 진행하고 있다.[133][134]

암살 배후 논란[편집]

여운형 암살 저격조 조직표.

암살 사건 당시 경찰은 범행 발생 나흘 후인 1947년 7월 23일 평북 출신의 19세 소년 한지근(이필형)이 범인이라고 발표했고, 체포 후 한지근은 재판 과정에서 자신이 '애국투사'임을 강조했다. 하지만, 배후는 밝히지 않았다. 1974년 2월 공소시효가 지나자 유순필, 김흥성, 김훈, 김영성 이라는 사람들이 서울지검에 출두해 "자신들이 몽양 암살에 가담했다."고 자백한다. 이들은 "민족분열의 책임자는 여운형"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극우 테러단체인 혁신탐정사와 비밀결사 백의사로부터 입수한 권총 2정으로 범행을 저질렀다고 주장했다.[135] 한지근은 송진우 암살범인 한현우와 친분이 있는 사이이고, 사건 발생후 권총과 실탄 10발을 한현우 집에 숨겨두었다고 한다.[136]

그러나 이들 역시 배후는 끝내 밝히지 않았다. 여운형의 암살 배경과 그 배후는 지금도 정확하게 알 수 없다.[주 33][주 34]

우익계열에 의한 암살설[편집]

《여운형 평전》을 저술한 이기형 시인과 재일 한국인출신 강덕상 명예교수는 '이승만의 하수인 장택상노덕술등 친일경찰세력들이 배후가 있다.'고 주장한다.[5][12] 이기형은 "여운형 위시한 지도자를 훼방하고 때리고 가두는 작업에 친일잔재세력들과 보수 수구세력들이 결정적 역할을 했다"면서 "이들은 해방 이후 우익이라는 우산을 쓰고 애국자로 둔갑했고 건준을 망가뜨렸다"고 주장했다.[137]

여운형 암살공범들과 김영철(앉아 있는 인물이 김영철). 김영철은 임시정부 행동대원 겸 백의사 집행부장이라고 한다.

이 사건에는 군정경찰[138]백의사[139] 가 깊숙하게 개입[140] 되어 있는데 1947년 7월 19일, 암살 그날 경찰은 암살범을 쫓아가던 경호원을 '범인'이라고 지목하고 경호원을 체포하는 황당한 상황 연출을 보인 점과 수사 결과를 보도할 적에 '한지근 개인의 우발적인 범죄'라는 발표를 내었을 뿐 암살 배후 조사도 제대로 하지 않은 채로 수사를 종결지었다. 평소 여운형이 수차례 테러를 당했을 때도 경찰은 이를 방조하여 사실상 테러 행위를 조장하였던 것들을 미루어 볼때, 이는 경찰의 후원없이는 결코 이루어질 수 없는 암살이었다.

여운형 암살공범 중 김흥성과 신동운에 의하면 권총을 건내준 인물은 김영철이라고 한다.[139][141] 김영철은 '임시정부 행동대원'으로 서북청년회 또는 그와 유사한 단체의 행동대장으로 있었던 사람으로 당시 반공을 모토로 한 테러리스트 단체 주요 간부들과 서로 통하는 처지였다. 그래서 김영철은 백의사와 서로 연이 닿는 사이로 여러 사건에 직간접으로 연관이 되었던 인물이었다.[142] 여운형 암살 공범들은 '임시정부 행동대원' 김영철하고 거래가 많이 있었다고 하며 김영철이 백의사 계통하고 얼마나 가까운지 그것까지는 잘 모른다고 말했다. 1985년 8월 31일 백의사 부사령관 박경구의 녹취록을 보면 백의사와 김영철의 관계를 알 수 있다.

김영철 씨는 원래 만주에 있을 때 우리 중대장이야. 그런데 여기 나와서는 내가 (백의사) 부사령관이고 그 양반(김영철)이 집행부장 했단 말이야. 본래 김영철 씨 권총 잘 쏩니다. 그래서 그 집행부장(김영철)이 하수자를 선정했을 것 아닙니까.(하략)

백의사가 여운형 암살 계획한 이유에 대해서 부사령관 박경구는 여운형이 암살되기 전 여운형의 노선에 대해 탐문하기 위해 여운형을 찾아갔다고 한다.

(여운형에게) 물었더니 이 양반 말이 뭐라고 하느냐하면 과거 임시정부 시절은 이미 쓰레기이다. 지나갔다. 이제부터 우리나라는 사회주의 정부를 세워야 한다." 이런 말을 했어. "큰일 났구나" 그런데 청년들은 전부 이 사람을(따르고) 내 그래 그 이야기하던 것을 그냥 그대로 염 선생(염동진)에게 보고했어. 그러니까 염 선생이 탁 치면서 "그렇다니까 그 틀림없다" "그렇다면 저 놈 없애 되지 않겠느냐" "그럽시다, 없앱시다."

당시에 여운형은 제2차 미소공위 성사를 위해 좌우합작운동을 진행하고 있었는데, 국사편찬위원회 정병준 박사는 '여운형이란 사람은 당시로서 기회주의자이고 정치적 회색분자로도 볼 수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 이야기한다면 좌우가 협력해서 나라를 건설하자는 이념을 가진 인물로 여운형 암살 이후 남한에서 더이상 중도는 불가능한 문명적으로 볼 수 있다.'고 말했다.[143] 당시 여운형 암살모의를 계획한 극우파의 행동대원들은 이승만-김구-한민당을 왔다갔다 했었으며, 백의사뿐만 아닌 극우테러 단체들은 여운형 암살의 거세를 원하고 있었고 실제로 사건이 벌어졌을 때 자신의 일처럼 범인들을 감싸고 돌았다.[71]

그리고, 암살 시점이 그가 소련과 결별하고 미군정과 협력한 시점이었으며, 여운형에게 새로운 통일 임시정부 총리직을 제의하기 위해 '여운형과 교섭해야겠다.'는 미군정 문서까지 발견된 것[주 35] 등 감안한다면 암살배후가 수도경찰청장 장택상,노덕술등 군정경찰세력들이 극우 정치테러 단체들과 타협해서 사건을 축소, 무마하는데 일조한 암살배후로 보고있다.[주 36][5] 재일 한국인 원로 사학과 명예교수인 강덕상 역시 '이승만 일파에 의해 암살당했다.'고 주장한다.[12]

그밖에 여운형의 외조카인 철학자 박찬기김구를 지목했다.[144]

박헌영 계열에 의한 암살설[편집]

암살당시 입었던 옷. 혈흔이 뚜렷히 남아있다.
여운형의 데드마스크.

이와 반대로 최근 2007년이정식교수는 '당의 주도권을 놓고 여운형과 다투던 남로당박헌영계열이 암살했다.'는 주장을 제기했다.[145][146]

여운형이 암살당한뒤 2개월 뒤, 존 하지 사령관은 서울을 방문한 미국 육군차관 드레이퍼에게 보호하기를 6월 말까지 북한 공산당은 여운형을 '미군정과 연탁한 배반자'라고 맹공격하였는데, 그가 죽은 후에는 그를 추도하겠다는 등 야단을 부렸다고 한다.[147]

여운형의 동생 여운홍은 좌파에 의한 테러를 지적하기도 했고[148], 여운형의 둘째딸 여연구는 부친을 암살한 것이 종파분자들이라고 증언하였다. 여기서 종파분자는 박헌영 계열을 가리킨다.[114] 이정식 교수는 이를 근거로 남로당 계열 등 박헌영계열이 암살했을 것이라는 추정을 하고 있다.[148]

김일성 계열에 의한 암살설[편집]

반면에 김일성에 의해 암살당했다는 주장도 있다. 남로당의 '마지막 지하총책'이었다고 주장하는 박갑동의 증언에 의하면 여운형과 김일성은 공산당의 주도권 확보를 위해 공동의 적인 박헌영을 타도할 목적으로 손을 잡았는데, 기대와는 달리 여운형의 역량이 박헌영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자 이에 실망한 김일성이 여운형에게 자금지원을 중단했다 한다. 이에 여운형이 김일성을 비난하자 모의내용이 탄로날 것을 우려한 김일성이 여운형을 제거했다 한다.[149]

박갑동에 의하면 신문 보도와는 달리, 미국의 자료에 의하면 여운형의 암살자는 김일성이라는 것을 암시하는 대목[150] 이 있다고 한다. 또한 여운형이 좌익에서 몰락해 가자 김일성에게는 이용 가치가 없어졌다.[150] 여운형은 이에 대해 불만을 품고 '김일성이 싫다'는 발언을 했는데[150], 박갑동에 의하면 '이 말이 김일성의 귀에 들어[150] 간 것'이 원인이라는 것이다.

박갑동에 의하면, '이러한 근거자료들은 미국측의 자료에 있으며, 미국측 자료에 여운형의 진짜 암살자는 김일성이라는 것을 암시하는 부분이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151] 그러나 그는 자신이 말한 "미국 자료"를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았으며, 어떤 연구자도 이 자료를 찾아내지 못했다. 국사편찬위원회로 활동하고 있는 정병준 교수는 "어떤 자료에도 미군정이 여운형 암살에 조직적으로 개입했었다는 정후는 보이지 않는다."라고 반박했다. 동아일보 사장인 김학준 역시 '여운형과 김일성의 관계에 미뤄, 김일성이 여운형을 암살했다는 박갑동의 주장은 설득력이 떨어지고 받아들이기 어렵다."고 반박했다.[152]

박갑동에 의하면 김일성은 월남한 반공청년으로 위장한 한지근을 남파시켜 자연스럽게 우익청년조직인 백의사에 접근토록 하여 여운형을 암살하였다는 것이다. 체포된 한지근은 개성형무소에서 복역하던 중 한국전쟁때 남하한 인민군에 의해 사살되었다고 한다.[149]

실제로, 한지근(이필형)은 개성형무소에서 복역 중 행방불명되었다. 소문으로 '한지근이 일본에 살아있다.'는 증언이 있어 예전에 한겨레신문 기자가 취재한 적이 있는데, 알고보니 고하 송진우를 암살한 한현우였다고 한다.

암살 배후[편집]

이러한 암살 배후가 불분명한 가운데, 좌익세력에 암살되었다는 설이 우익진영에서 꾸준히 제기되었지만, 암살 사건 현장에서 경찰이 암살범의 도피를 방조한 점이나 범행 직후 우파 소행으로 보이는 암살 성공을 알리는 벽보가 서울 곳곳에 나붙은 정황 증거 등을 감안하면 우익진영에 암살되었다는 설이 더 유력하다.[주 37] 암살 당시 여연구는 모스크바 유학 중이라 국내 사정을 잘 알지 못했으며, 당시 수사당국은 '좌파 한지근의 개인적인 범인'이라고 밝혔으나 당시 이를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고 한다. 광복 이후 미군정기 시기 여운형은 대중의 인기가 가장 높은 인물로 우익세력의 최대 정적이었다.[153][154]

평가와 비판[편집]

1947년 6월 미군정 사령관 존 하지이승만에게 이승만김구가 계획 중이라는 테러행위를 즉각 중지하도록 요구하는 서한을 은밀히 보내지 않고 공개적으로 보냈다. 이후 미군정의 태도를 보면 여운형의 암살을 짐작하고 있었으면서도 공개적으로 경고만 하고는 방관하였다는 인상을 준다는 견해가 있다.[155][156]

우사 김규식은 여운형의 암살 소식을 듣고 충격이 컸다고 한다. 김규식은 여운형을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우리는 한 위대한 혁명투사를 잃었을 뿐만 아니라, 유일목표인 신국가 건설을 위하여 전 민족이 합작으로부터 완전 통일에 나아감으로 최후 목적을 달하기를 제창하여 이에 최종까지 노력하던 지도자를 상실하였다.

그러므로, 나는 몽양 동지의 영별에 대하여 정실상의 감촉보다도 우리 민족의 자유를 획득하려는 공동진영의 한 용장을 상실하였다고 본다. 곧 민족 전체의 손실이다.

 
— 여운형 서거 담화, 1947년 7월 22일, 우사 김규식[157]

군정청은 처음에 한민당세력들로부터 '여운형은 친일파이며, 공산주의자.'라는 소리를 듣고 여운형을 의심했으나[158], 나중에 가면서 그러한 오해가 풀리게 되어 여운형의 중도파 정치노선에 호감가게 되었다고 한다.[159]

미 국무성은 여운형을 당시 해방이후 조선에서 인기있고 유능한 지도자로 봤다. 그는 권력을 추구하지 않고, 국민을 최우선으로 생각했다. (중략) 그가 공산주의자라는 생각은 틀린 생각이다. 그는 최대한 공산주의를 이용했을 뿐이며, 그는 민중정치기구 결성을 도왔지만, 그는 결코 공산주의자가 아니라고 나는 확신한다. 그는 공산주의 이론을 신봉하지 않았고, 소련편이 아니었다. 그는 언제나 한국편이었다.[30]
 
— 리처드 로빈슨[주 38]
몽양은 개인적으로 소련보다 미국에 더 가까웠지만, 이들 양국에 대해 절대 중립이었으며, 그가 갖고 있던 유일한 목적은 미국, 소련 양국으로 하여금 가급적 빨리 한국으로부터 물러나게 하는 일이었다.[30]
 
— 윌리엄 랭던[160]

남동생 여운홍에 의하면 남들에게 후한 사람이라 하였고, 윤보선은 그가 세련된 인물이고 활기찬 사람이며 웅변에 능하고 겸손하며 사교적이었다고 평가하였다.[161] 김종필은 그가 명연설가이고, 잘생기고 똑똑한 사람이었다고 하였다.[162] 유병묵은 그가 천재적이었다고 보았고 강원용은 마음이 열렸으며 폭넓은 사고를 하였다고 평가하였다.[161] 언론인 송건호는 '그가 사망했을때 기회주의자라서 그의 죽음이 조롱당했다. 처음에는 그들의 의견에 따랐으나, 지금와서 나중에 다시 생각하니 여운형의 정치노선이 옳았다. 그를 재평가 해야한다.'고 평가하였다.[163] 김두한은 여운형은 중도이고 청년들에게 인기가 많았다고 하며 그도 존경했다고 말했다.[108] 강원룡 목사는 '여운형을 첫째로 자유주의자, 둘째로 민족주의자, 셋째로 민주사회주의자'로 평가한 적이 있는데, 강원룡 목사 스스로 '이것이 가장 정확한 평가.'라고 한 적이 있다.[164]

당대의 여론[편집]

1945년 10월 10일부터 11월 9일까지 선구회(先毆會)라는 단체에서 가장 뛰어난 지도자를 지목하는 설문조사 결과에 33%가 여운형을 지목하였다.[165] 그 뒤 11월 선구회에서 다시 대통령에 적합한 인물을 설문조사했을 때는 1957명 중 78명이 여운형을 지목하였다.[165] 한편 최고의 혁명가를 꼽는 설문에서는 978명 중 195표를 얻어 1위였다.[165] 1946년 7월 조선 여론협회가 서울에서 누가 초대 대통령에 적합한가를 조사한 설문결과에는 689표로 전체의 10.3%를 확보했다 한다.[165] 1947년 1월, 이승만 지지단체인 '한국애국부인회'가 서울 주요 시내거리에서 이승만과 여운형 두 사람에 대한 지지 모의투표를 실시했는데, 결과는 1000표(이승만) 대 900표(여운형)로 근소한 차이를 나타냈다.[166]

1990년대 이후의 평가[편집]

2008년 건국훈장 수여증.

사회주의 운동 이력으로 독립운동의 업적을 인정받지 못하다가, 2002년 7월 몽양 여운형 선생 추모 사업회가 조직되어, 여운형에 대한 재평가와 독립유공자 서훈을 추서하기 위한 운동을 하였다. 2005년 3월 1일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받았다. 하지만 그가 받은 건국훈장은 2급훈장이어서, 조선의 독립과 청년들을 위해서 헌신한 여운형의 업적에 비해 너무 인색하다는 비평도 있다. 그동안 여운형에 대한 건국헌장 추서는 '오랜시간 동안 제대로 사상문제로 대접받지 못하던 사회주의계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재조명의 시작'이라는 평가도 있다. 또한, 오늘날 남북한 모두 존경받는 지도자로 평가받기도 한다.[167] 재일교포 출신으로 와세다 대학교 사학과 명예교수로 지내는 강덕상 교수는 '독립운동의 중심은 김구도 아니고 이승만도 아니다. 해방 후 외세의 간여가 없었다면 여운형이 민족의 지도자가 됐을 것이다.'라고 평가하였다.[168]

미국의 대학교수 이정식은 "힘든 과정을 통해서 몽양은 많은 사람에게 감명을 주었고, 그들을 격려했고, 이끌었습니다. 몽양 자신은 때를 잘못 만났기에 꽃을 피우지 못했으나 그는 겨레의 스승의 한 사람으로 길이 남을 것"이라고 평가했으며,[114] 이어서 이정식 교수는 "여운형은 마르크스주의자같은 공산주의자가 될 수도 없는 사람이었어요. 국내에서 5년간 기독교 전도사를 했고, 중국 상하이 한인교회에서도 3년간 전도사를 했던 것을 보면 유물론을 받아들이지 않았어요. 그저 제국주의에 반대했던 겁니다. 필리핀 마닐라에서 연설한 것을 보면 미국의 제국주의에도 반대했고, 소련도 '스탈린 집권 후 제국주의로 변질했다.'는 점을 간파했죠."라고 평가하였다.[167]

외조카이며 여동생 여윤숙의 차남 고려대학교 명예교수 박찬기에 의하면 "해방정국에서 영국과 소련은 한국의 대통령으로 여운형을 꼽았고 미국이승만을 꼽았지요. 김구는 없었어요. 김구는 여운형을 제거했고, 이승만은 김구를 쳤지요. 이것이 우리의 비극입니다. 단합과 화해보다 분열과 대립의 추한 모습을 보여준 것이고, 이것이 우리 정치에 그대로 오염돼버렸다[144]"며 아쉬워했다.

국가 보훈처에서는 2005년 2급인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받았으나, 2008년 2월 21일 퇴임 직전 노무현 대통령 정부로부터 최고 등급(1급)인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다시 추서받았다.[169]

그 외에 '여운형은 박헌영과 같은 과격한 공산주의(마르크스-레닌주의)계열이라기보다는 민주사회주의쪽에 가까운 인물로 사회주의의 오래된 미래'라는 재평가가 있다.[170][171] [172] 또한, 제국주의에 대항하는 개념으로 인민 본위의 정치를 옹호하였으나 권력을 잡지 못하였고, 좌우 양쪽에서 존경을 받는 정치인이자 지도자 였다는 점에서 쑨원과 비슷하다는 평가도 있다. 실제로, 중국어 논문 중에 여운형과 손중산을 비교연구한 논문도 발표되었다.[1]

비판[편집]

박헌영이나 한국민주당 세력 등으로부터는 회색주의자, 기회주의 정치가의 전형이라는 혹평을 받았다.[173][주 39] 여운홍건국준비위원회조선인민공화국으로의 개편 과정을 '이것은 순전히 소아병적인 극렬 공산당원들이 꾸며낸 하나의 연극이었으며, 형님(여운형)에게는 박헌영등 극렬 공산주의자와 손을 끊지 못하고 연계하였던것이 정치생활 중 가장 큰 실책이었다.'고 평하였다.[174] 한편 나용균은 그가 자기의 선전을 너무 많이 한다고 보았고[161], 남로당원 출신 박갑동은 '우유부단하고 생각이 모호하다, 남의 영향을 쉽게 받았다.'면서 '좌우합작운동 추진과정에 김일성과 손잡은 것은 실수'라고 비판적으로 평가했다.

독립운동가 출신 정치인 박진목은 그를 '이름 팔기를 좋아한 매명주의자'라고 평하였다.[161][175][176]

그밖에 실패한 정치인이라는 평가와 이편 저편도 아닌 우왕좌왕하다 좌익과 우익 양측에 의해 정략적으로 이용당해 희생양이 되었다는 비판도 있다.[177]

의혹과 반론[편집]

친일 의혹설[편집]

1944년에 발행한 반도학보출진보 단행본 p95. 여운형이 '반도 2천 5백만 동포에게 호소한다'는 제목으로 단행본에 게재했다는 의혹이 제기되었다.

2005년 건국훈장 추서 당시 친일 의혹이 처음으로 제기되었는데, 태평양 전쟁 이후로 부일협력의 길을 걸었다는 견해였다.[178] 근거로 든 것은 다음과 같다. 1941년 일제태평양전쟁을 도발했을 무렵, 여운형은 '일본이 머지않아 패망할 것'이라고 말했다. 일제는 이를 '소련의 밀정','치안유지법 위반',유언비어 등 혐의로 그를 체포했다. 여운형은 옥중에 심한 고문으로 1943년 7월에 집행유예를 받고 석방, 경성요양원에 입원 중 전향서를 썼다고 한다.[1][178] 그 후 그의 이름으로 된 총독부기관지 경성일보1943년 11월 9일부터 11일까지 '학도병권유문'이 3차례 실리고, 1944년에 경성일보사가 발행한 '반도학도출진보(半島學徒出陣譜)'에 같은 내용의 글을 수기로 썼다고 발표한 내용이 발견되었다.[178] 1930년대 조선중앙일보 사장시절 친일 단체인 조선대아세아협회 상담 역임, 조선교화단체연합회 찬조연사에 그의 이름이 실렸고, 1945년에 결성된 조선언론보국회 명예회원에 그의 이름이 올랐다. 조선총독부 기관지 경성일보에 그의 이름으로 된 학도병 출정 권유문이 세 차례 실리기도 했다는 것이 그의 '친일 행위' 의혹설들이다.[179][180]

광복 후 친일 문학 소설가 김동인과 만주에서 일제 밀정으로 지낸 친일파 이종형, 변호사이자 한민당 간부로 지낸 이인은 여운형의 친일의혹을 제기하였다. 김동인은 '그가 일제 말 방공훈련 때 경찰 지휘를 받으며 완장을 두르고 고함지르며 싸대고 있었다. 저럴 때면 좀 피해서 숨어버리는 편이 좋지 않겠느냐. 난 지나가면서 그를 한심하게 쳐다보고 갔다.'며 1949년 잡지 '신천지'에 발표하였다.[178][179] 이종형1946년 자신의 신문사 대동신문에다가 '여운형은 일본 검사에게 제출한 진술서에서 일본을 위해 대중국 공작을 할 수 있으니 기회를 달라며 한시까지 지어 충성을 맹세했다.'고 기사를 실어 놓았다.[71] 이인1945년 8.15 해방이 되자 여운형이 서울지검에 나타나 자신의 '전향서'와 '시문' 및 이에 관한 형사기록을 찾아달라 했으나 서기가 주지않고 있다가 이인이 검찰총장에 발령되자 이 서류를 건네 받았다는 것이며, 자료를 훑어본 뒤 금고에 보관해두라고 지시했다고 한다.[181] 한국정토학회 고문이자 서울 정토사 주지였던 박설산(법명- 설산)은 자신의 저서 <뚜껑없는 조선 역사 책>에서 1943년 학도병에 끌려가게 돼 여운형을 찾아가자 자신에게 "학도병으로 나가라. 그리고 총 쏘고 칼 쓰는 법을 배우라."라고 말해 박설산은 '왜제를 위해서 총 쏘고 칼 쓰는 법을 배우라는 말씀인가? 선생의 깊은 뜻을 모르는 우리는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며 아연실색했다고 기록하고 있다.[182]

2009년 12월, 정진석 한국외국어대학교 언론학부 명예교수는 신동아 2010년 1월호에 '여운형의 친일과 조선중앙일보 폐간 속사정-좌우 가리지 말고 똑같은 잣대 들이대야'라는 글에서 친일파 이종형이 세운 신문사 대동신문1946년 2월 17일, 18일자 신문에 나온 '여운형이 1943년 2월, 옥중에서 한시(漢詩)까지 써서 친일을 맹세했다.'는 자료를 들어 친일의혹을 제기하였다.[71][118] '한국인들 사이에 친일파로 널리 알려진 정치가'라는 내용으로 1945년 9월 12일에 기록된 광복 직후 미국사령부 정보 보고서와 1950년 11월, 한국전쟁 중, 유엔군이 노획한 조선공산당 문서에 '여운형을 변명할 이유가 없는 친일분자'라 기록된 것을 근거로 제기하고 있다.[118]

2009년 11월 8일민족문제연구소에서 친일인명사전 발간대회를 열었을 때, '뉴데일리'와 '조선일보'를 비롯한 보수세력들은 '여운형과 안재홍,허헌,이극로는 친일경력이 구체적으로 드러난 인물인데, 왜 이들은 친일인명사전에 수록하지 않느냐?'고 비판한 바 있다.[183]

친일의혹설에 대한 반론[편집]

학병 권유문이 실린 배경과 이에 대한 반론[편집]

1946년 2월 13일자 민주중보에 실린 전직 경성일보 기자 출신 조반상의 증언. '여운형의 학병권유문 게재의혹설은 조작되었다.'고 증언한 내용이다.

1943년, 일제 강점기 총독부 기관지 경성일보에 실렸던 '일제학도병 권유문'을 근거로 여운형의 친일의혹에 제기되었으나, 이는 처음부터 기사 자체가 조작되었다.[주 40]

먼저, 여운형이 옥중 전향서를 쓰고 집행유예를 선고받고 석방 이후 각종 친일 단체에 협력했다는 것에 여러가지 반론이 있다.[1] 그는 일제의 패망을 주장하다가 1942년 12월 21일 '유언비어 죄'로 치안유지법에 적용되었다. 그리고 옥중에서 가혹한 고문을 받아 1943년 7월 2일에 출옥하게 된다. 출옥 후 여운형은 극도로 쇠약해진 데다 신병을 앓아 경성요양원에 입원한다. 7월 5일 일제 담당검사 도자와가 여운형을 찾아가 전향문과 신사참배를 요구했다.[1] 도자와 담당검사로에게 세 차례나 사상전향서를 쓸 것을 강제 협박당했지만, 여운형은 이러한 사상전향서뿐만 아닌 신사참배도 끝까지 거부했다. 그 다음으로 사상검사 스기모토가 자신이 직접 전향문을 기초하고 여운형에게 '도장을 찍으라'고 요구하였으나, 2차례 모두 거절당한다.[1] 그러자, 경성지방법원 백윤화 판사가 직접 찾아와 '이것은 여 선생 신념과는 아무 관계없는 단순한 형식에 불과하니 날인해달라.'면서 '만일 응하지 않으면, 다시 구속하여 형을 집행할 방침'이라며 여운형을 협박한다.[1] 사태가 이렇게 되면서 숱한 고문으로 몸과 마음이 지친 여운형의 건강을 이루 말할 수 없이 근심하는 가족과 친척들은 그를 간절히 권유하기도 했지만, 그는 묵묵히 병상에만 누워 있었다고 한다.[5] 결국, 근심하는 가족과 친척들의 손에 의해 전향문 서명이 날인되었다.[1]

이어서 1943년 10월 경, 경성일보 기자가 와서 5분간 여운형과 면담하였다. 당시 경성일보 사회부 기자로 근무한 부산출신 조반상은 여운형과 일본인 기자가 만나는 자리에 자신도 있었으며, 여운형의 뜻과 상관없이 기사가 조작됐다고 1946년 2월 13일민주중보(부산 지역신문) 신문에 직접 증언을 하였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184]

총독부는 여운형에게 학병 권장 유세를 할 것을 권했다. 그러나 여운형은 건강문제를 핑계로 거절한 뒤, 총독과 면담 6∼7분만에 밖으로 나왔다. 경성일보 사회부 차장이던 일본인 기자가 이 모습을 보고 여운형 집에 쫓아가 여운형의 총독회견 기사를 냈다. 그 다음날 다시 여운형을 찾아가 학병에 대한 견해를 물었다. 이때 나는 통역으로 동석했다.

여운형은 '학도병은 지원제도이므로 나가고 안 나가고는 본인들의 의사에 달려있고, 나로서는 의견을 말할 바가 못 된다.'며 회의적인 태도를 취했다. 일본인 차장이 '여운형의 서명을 받고 싶다'고 하자, 여운형이 서명해 주었다. 그리고 그 다음날 사실무근의 기사가 나갔다.[184]

이 명의가 날인 된 이후, '여운형은 성전완수에 적극 협력하고 나섰다. 특히, 청년학생들은 전쟁터로 나아가 목숨을 바쳐 황은에 보답하라고 소리높이 권고한다.'는 주 내용의 장문 기사를 연 3일간에 걸쳐서 경성일보 신문에 연재되었고, 그 내용이 이듬해 1944년 경성일보 발행 단행본 '반도학보출진보'에 '여운형 수기'로 써있게 된 것이다.[5][184][주 41]

1943년 7월 요양원에서 퇴원한 이후, 여운형은 일제 경찰에 의해 요주의 인물로 가택연금되고 감시당했다. 이를 피하려 1943년 11월 말, 경기도 양주군의 봉안 이상촌으로 내려가 훗날 건국준비위원회 모태가 되는 건국동맹(1944년 8월)과 농민동맹(1944년 10월)을 조직해 독립을 준비했다. 당시 비밀결사던 건국동맹과 농민동맹은 일제 말기 국내에서 거의 유일하게 활동한 지하 독립운동 조직이자 군사조직이다. '건국동맹' 등 비밀결사 독립운동 단체를 조직하면서 일제 학병유세를 권했다는 것은 논리상 앞뒤가 맞지가 않다.[주 42] 이런 행보는 친일활동으로 돌아섰거나 '침묵'으로 일관한 다른 유력 인사와 명백히 구분된다.[주 43] 이를 생각하면 일찍이 일제의 패전을 예측하고 구체적으로 독립 준비를 펼치던 여운형이 뜬금없이 '학도병 지원을 권유하는 글'을 신문에 게재했다는 것은 앞뒤가 맞지않다.[185]

여운형을 가까운 곳에서 지켜본 이기형 시인이 저술한 <여운형 평전>에 따르면 '여운형 본인도 경성일보 기사가 사실이 아니라고 밝힌 것'으로 자세히 나와 있다. 1943년 겨울, 여운형이 머물던 경기 양평군 봉안에 "여운형을 평상시 숭배했다."는 낯선 중년신사가 경성일보를 들고 찾아와 "대체 어떻게 된 일이냐"고 따졌다. 이에 여운형은 "내 사람됨에 대한 것을 참으로 알고자 한다면 나를 평하는 그 사람의 사람 됨됨이를 먼저 살펴보도록 하라는 말이 있다"고 말한 뒤 "나 자신의 정당성 여부가 문제이지 참새들의 입방아는 그리 신경 쓸 필요가 없다는 뜻"이라고 답했다는 것. 이기형은 "경성일보를 만드는 사람들은 사람이 아니니 그들의 여운형에 대한 기사를 믿어서는 안 된다는 답변이었다"고 전했다.[5][185] 측근인 이기형 시인, 독립운동가 이란에 따르면 학도병 징집 거부를 위해 여운형에게 찾아가 상의하러 갔더니, 여운형은 '학도병에는 나아가지 않는 것이 원칙인데, (강요받을 경우에는) 부득이해서 나아갈 경우라면, 나아가서 전쟁 연습을 잘배워서 우리 독립운동에 잘 써먹어라.'고 말했다 한다.[주 44]

여운형은 일제말기 일제로부터 철저한 감시를 받아가면서 생활이 어려워지자, 그의 측근인 이임수와 배석환이 그의 생활비를 지원했다고 한다.[주 45][1]

1943년 12월 2일자 일본 극우 지식인 오가와 슈메이의 일기에 따르면 '여운형이 경성일보에서 자신의 이름을 도용한 학병권유문을 제멋대로 실은 데 대해 몹시 분개했다'고 적혀 있다.[1]

친일단체 관여설에 대한 반론[편집]

여운형이 조선중앙일보 사장직으로 재임했을때인 1934년 3월에 발회한 '조선대아세아협회'에 상담역으로 관계한 점과 1935년 조선교화단체연합회의 발회식에 내빈으로 참여한것등에 대한 의혹이 제기되었다. 이러한 제기에 대해서는 역사문제연구소에서 활동하고 있는 성균관대학교 교수인 윤해동1991년 논문에 해명한 바가 있었다. 윤해동에 따르면 '조선대아세아협회는 "아세아의 대세와 시국의 진상을 규명하여 황국대일본과 아세아제국과의 친선을 도모하고 전아세아제국의 평화를 확보하고 공존공영의 실을 거(擧)하여 그 복지를 증진"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 단체로 12명의 친일파 거두(한상룡등 필두)와 방응모, 송진우, 여운형 등 15명의 조선인이 상담역으로 추천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후의 활동이 없고 3인의 신문사 사장이 관여된 것으로 보아 자의가 아닌, 피할 수 없었던 일로 추측해도 좋을 것이다.'라고 해명했다. 이어 윤해동 교수는 1935년 '조선교화단체연합회'의 발회식에 내빈으로 참여한 부일협력 제기에 대해 "여운형의 이 시기 부일혐의에 대한 이러한 비판은 친일파연구가 전문인 임종국에 의해 1985년에 제기되었으나 너무나 과도한 지적이 아닌가 한다.'라면서 '1936년에 여운형은 조선의 농촌문제에 대하여 월간잡지 '중앙'지에 논문을 기고하였다. 거기에서 그는 반봉건적인 유제가 잔존하고 있는 비참한 농촌현실을 지적하고 일제의 농촌진흥운동친일파의 개량화 노선을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다. 또한 이시기의 '조선중앙일보'의 논조도 이러한 기조를 유지하고 있었다. 이와 같은 사실만으로도 이 시기 여운형의 활동 배면을 파악할 수 있으며 위와 같은 과도한 추리는 무리한 것임을 짐작하기에 어렵지 않다."라고 해명했다.[186]

일제강점기 말기의 여운형은 대중국 화평공작, 학도병 지원을 권장하는 유세, 신사참배 요구등에 참여하라는 총독부 요구를 수 차례 거절하였으며, 일제 강점기 말기 어용단체인 조선언론보국회,대화숙등을 비롯한 친일 전향단체 관여설은 이름이 도용된 데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로 알려진 바 있다.[185][주 46] 그리고, 이 시기 여운형은 일제의 패망에 대비하여 조동호등과 함께 지하독립운동 단체인 1944년 8월에 조선건국동맹을 결성하고 활동했기 때문에 이러한 의혹설은 무의미하다.

미군정 G-2 정보참모부 보고서와 & 금전수수설 의혹에 대한 반론[편집]

광복 이후, 미24군단은 1945년 9월 8일에 인천항에 들어와, 9월 9일 서울에 입성한 뒤 군정을 선포한다. 미군정은 친일파 오긍선의 소개로 9월 11일 한민당 세력과 접촉하게 된다. 그리고 한민당 세력은 미군정에게 '여운형은 친일파이며, 건준은 총독부와 연탁한 단체'라고 주장하여 미군정은 9월 12일자로 다음과 같은 보고서를 작성했다.[187]

일제 패망 후 서울에 진주한 미군사령부 정보참모부는 1945년 9월 12일자로 작성한 비밀문서 〈G-2 Periodic Report〉(미군 제24군단의 보고서)에서 여운형은 "한국인들 사이에 친일파로 널리 알려진 정치가"이며 "조선총독으로부터 거금 (아마 2000만엔)을 받았다"고 지적했다.

G-2란, 미 24군단 정보참모부를 말한다. 미군정이 한반도 입성한 지 3일만에 보고서에 '여운형이 친일파'였다는 결론을 낼 수 있던 것은 미군정이 고문으로 위촉한 9명의 한국민주당원들이 '여운형은 친일파이며, 건준조선총독부에게 2천만엔을 받았다'는 소리만 듣고 미군정의 독자적인 조사없이 결정지은 것이었다.[188] 또한, 당시 2천만엔은 조선총독부 정무총감이라도 내놓기 쉽지 않을 만큼 매우 큰 돈이었다. 1945년, 해방 이후 당시 조선은행의 통화량은 48억 7천만엔에 지나지 않았다. 미군정에 보고한 한국민주당 측이 주장하는 당시 2천만엔의 가치를 지금의 화폐발행고 30조원에 투영·환산해보면 대략 1천 2백억원에 달하는 거금이다. 이런 엄청난 자금이 여운형에게 진짜로 있었다면 어째서 건국준비위원회는 본부 사무실이 없어 서울 계동 입구의 임용상 집을 빌려 쓰다가 다시 안국동의 풍문고녀 교사로 옮기는 등 구차한 행동을 계속했는지, 어째서 여운형이 전용 자가용 차도 마련하지 못하였는지 의문이 든다. 실제 여운형이 1947년 7월 암살되어 죽을 때까지 재산이라곤 그의 집인 서울 계동의 38평짜리 한옥 한 채 밖에 없었을 뿐더러 해방무렵까지 돈이 없어 자기 차도 없었다. [주 47] 그가 총독부와 연탁해서 '2천만엔을 먹었다.'는 주장은 위에 언급한 바 있듯이 '사실이 아님'이 드러났다.[184]

뒤에 미군정은 여운형의 활동에 의심을 품고 그의 친일활동을 조사하였다. 1946년 8월, 미 국무부가 파견한 미군장교 레나드 버치 중위가 사령관 존 하지에게 '여운형의 일본인 접촉과 관련한 조사를 하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이에 존 하지 사령관은 '일리있는 말이군. 나는 그(여운형)의 약점을 잡고싶다.' 면서 군정청 외무부 소속의 찰스 오리오단이라는 소령을 일본으로 보내 조선총독부에서 일한 사람들을 찾아가 조사하곤 했다.[1] 미 군정은 일본에까지 사람을 보내 역대 조선 총독부와 일본 패전 당시 총독부 정무총감을 역임한 엔도 류사쿠를 비롯해, 우가키 조선총독부 총독등 과거 조선총독부에서 일한 고위 관계자들의 증언들을 들었다.

그러나 미군정은 여운형이 친일 인물임을 입증할 증거를 찾아내지 못했으며, 그와 반대로 '여운형은 반일 인사였다.'는 증언들을 수차례 들었다. 그 근거로 1947년 3월 7일자 미군정에서 작성된 '여운형의 친일 관여설'에 대한 조사 보고서가 발표되었는데, 미군정 문서 기록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여운형의 일본 관련설(친일의혹설)에 대해 찰스 오라이오단이 일본에서 조사한 결과는 부정적이었다. 뒷받침할 만한 증거가 하나도 없었다. 오라이오단이 인터뷰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떻게 그런 의문이 생겨났느냐.'면서 놀란 모습들이었다. 그들은 '여운형을 조선의 훌륭한 애국자의 한 사람'으로 간주했다.



(The result of the investigation of Lyuh's Japanese connections in Japan by Charles 0'Riordan was negative. Not a scrap of supporting evidence. Most of the people 0'Riordan interviewed seemed amazed that any question had come up. They considered him one of the outstanding Korean patriots. Robinson.)[1]

존 N. 로빈슨. 1947년 미 제24군단 G-2(정보참모부) 책임자)

미군정 기록에 의하면 "여운형은 '강한 민족주의자', '순수한 민족주의자'이며 일본 관리 중에서 송진우김성수를 좋아하던 이들은 여운형에 대해 깊은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고 증언했다.[185][189]

미군정이 여운형을 의심하게 된 것은 1940년1941년 두 차례에 걸친 일본행과 관련돼 있다. 여운형은 당시 일본에서 우익정객인 오카와 슈메이, 고노에 후미마로, 이 두 사람과 다나카 육군성 소장, 우가키 전 조선총독 등을 만났다. "여운형은 전쟁기간을 통해 일본의 최고급 관헌들과 극비 관계를 맺고 있었다"는 미 군정의 인식은 여기에 뿌리를 두고 있다. 이와 관련 송재헌씨는 1985년 연세대학교 석사논문('몽양 여운형에 대한 사회사상적 연구')에서 "여운형이 친일에의 유혹이나 압력 및 협박을 피하는 방법은 독특한 데가 있었다"며 "그것은 일본의 고관들을 사귀어둠으로써 일제의 경찰이 감히 손을 못대도록 만드는 방법이었다"고 분석했다.[184]

실제로 해방 이후, 송진우,김성수를 비롯한 한민당 극우계열과 친일파 세력들은 오히려 '여운형을 친일파'라고 비판하였는데, 그 중 여운형에게 친일파라고 올가미를 씌운 것은 친일파 이종형이었다. 이종형은 일제 강점기 당시, 만주에서 관동군으로 활동한 바 있으며 일제 앞잡이로 부역행위와 밀정행위를 해온 자였다. 해방 이후에 이종형은 극우 반공주의자로 변신해 자신의 신문사 대동신문에다가 '여운형은 친일파'라고 맹렬히 몰아붙인다.[184] 게다가 1946년 5월, 여운형 암살 음모 기도를 그 누구보다도 가장 찬양할 정도로 극우적인 활동을 한 인물이기도 하다.[주 48]

진술서와 친일 한시(漢詩)에 대한 반론[편집]

1946년 2월 17일자 대동신문에 보도된 기사. '반성한 여운형의 고백, 결국은 대지공작의 전쟁범?'이라는 제목하에 붙여진 기사인데, 이 기사는 대동신문 사주 이종형이 전향서와 친일한시를 직접 지어서 여운형이 썼다고 소개한 기사글로 2틀 연달아서 기사를 실었다.[71][184]

1946년 2월 17일,18일자 게재된 대동신문의 기록에 따르면 다음과 같다.

〈대동신문〉의 여운형 진술서는 1943년 2월 6일 일본인 검사 스기모토(杉本寬一)에게 제출된 것으로 "나는 조선민족의 관념을 완전히 청산하고 적신(赤身)으로 되여서 총독의 명령에 복종하야 당국에 협력하야서 국가를 위하야 활동하랴고 생각함으로써 좌(左)에 맹세합니다"라고 썼다.



진술서 말미에 적힌 한시:대지(對支)공작(대중국 공작)은 소지이며, 준비도 자신도 유하야 실행기회를 득코저 소회를 술하오니 용서하십시오. (이하중략.)

대동신문은 친일파 이종형의 사주로 1945년 11월 창간되어 여운형을 '친일파'라고 맹렬히 몰아 붙였으며, 여운형 암살 음모를 찬양할 정도로 반인권적인 보도를 하다가 미군정에 의해 정간 처분을 받은 신문이다. 거기다 대동신문1946년 2월 17일, 2월 18일자에 기사에 게재한 것은 실제와는 달리 왜곡해서 게재한 것으로 밝혀졌다. 이종형은 해방후 자신이 운영하던 '대동신문'에 여운형의 전향문을 그대로 실었을 뿐 아니라 이종형 자신이 친일시 한편을 짓고, 그것이 여운형이 직접 지은 것이라고 소개까지 했다. 그 한시의 내용이 '砲煙彈雨又經筆'(포연탄우 속에 문필도 보답하고..)라고 시작되는 내용이다.[71][190][주 49] 실제 여운형은 한문은 배웠지만 한시를 많이 썼다는 기록은 없으며 그가 남긴 것으로 알려진 한시는 평생에 서너 편밖에 전해지지 않는다. 더구나 1943년 감옥에서 '건국동맹'등 지하단체를 결성하려고 마음먹은 그가 친일행각의 흔적이 남는 한시를 지었다는 것은 논리 자체가 맞지 않는다. 즉, <대동신문>의 사주인 이종형이 여운형을 폄훼하기 위해 그런 시를 지어 발표해버린 것이다.[71] 이종형은 그런 식의 공작을 눈도 깜짝하지 않고 해치울 수 있는 일제의 밀정 출신이었기 때문이다.[184][주 50]

변호사 이인의 회고록에 대한 반론[편집]

1967년신동아 8월호에 이인의 '해방전후 회고록'에는 검사국 서기로부터 8.15 해방이 되자 여운형이 서울지검에 나타나 자신의 '전향서'와 '시문'과 이에 관한 형사기록을 찾아달라고 했으나 서기가 주지 않고 있다가, 이인이 검찰총장에 발령되자 이 서류를 건네 받고 자료를 훑어본 뒤 금고에 보관해두라고 지시했다고 한다.[181]

그러나 해방 당일 엔도 류사쿠 정무총감에게 치안권을 넘겨받은 여운형은 몹시 바빴다. 그 날 그는 계동 자택에서 찾아온 수 많은 사람들에 의해 간접적으로 감시당했으며, 많은 사람들 만나는 와중에도 여운형은 감옥에 갇혀 있던 정치범들을 석방하기 위해 측근들과 함께 오전에 서울 필동에 있는 조선헌병사령부, 오후에 서대문 형무소를 각각 방문했다. 그런 여운형이 언제 서울지검에 혼자 찾아갔는지 알 수 없다.[188] 혼자 갔다 하더라도 당시에 사실상 대권을 잡은 것 같은 위치에 선 여운형이 일개 서기에게 자신의 서류를 몰래 꺼내달라고 할 처지가 아니었다. 다만 이인이 서기에게 '그렇게 들었다.'는 얘기를 적은 것일 뿐이며 해방 당일 이인이 직접 목격했다는 일도 아니다.

변호사 이인이 이런 글을 쓴것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해방 당시 여운형이 건국준비위원회를 결성하면서 송진우김성수 그룹의 참여를 유도하기 위해 여러 사람보내고 본인이 직접 송진우를 찾아가 만나기도 했으나 송진우의 반대로 협상은 무산되었다. 이에 이인송진우의 건준 참여 비토를 비난하면서 백관수,김병로등과 함께 건준 부위원장이던 안재홍과 협상을 적극적으로 벌이면서 중재역할을 하였다. 이들은 당시 여운형이 8월 18일 테러를 당해 몸져누운 사이에 건준 중앙위원회를 우파 중심으로 바꾸려 했다. 그러나 좌우형평을 중시했던 여운형이 안재홍과 이인의 협상결과를 허락하지 않았다.[1] 여기서 이인은 여운형에 대한 불만을 갖게 된 것이다.[188]

이인의 회고록 글에는 <전향서> 등을 금고에 넣어두었다고 하지만, 정작 이 <전향서>는 단 한번도 세간에 공개되지 않았다. 만일 존재했었다면, 여운형의 최대 정적이던 한민당이 공개하지 않았을리가 없다는 반론이 있다. 그러나 매번 제기되는 자료는 이종형이 창간한 대동신문의 자료일 뿐이다.[188]

친일 소설가 김동인의 수필에 대한 반론[편집]

1949년 <신천지> 1949년 7월호 자에 소설가 김동인은 문단회고록을 썼다. 그 회고록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어떤 날 거리에 나가보니 거리는 방공 연습을 하노라고 야단이고, 소위 민간유지들이 경찰의 지휘로 팔에 누런 완장을 두르고 고함지르며 싸매고 있었다. 몽양 려운형은 그런 일에 나서서 삥삥 돌기를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그날도 누런 완장을 두르고 거리를 활보하고 있었다. 대체 몽양이란 사람에 대해서는 쓰고 싶은 말도 많지만 다 싹여버리고 말고 방공훈련 같은 때는 좀 피해서 숨어버리는 편이 좋지 않을까, 나는 한심스러이 그의 활보하는 뒷모양을 바라보았다.[191]

여기서 '방공연습을 하던 어떤 날'이라는 표현은 이 시기 일본미국과 전쟁을 일으킨 뒤인 1941년 12월 이후의 일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그런데, 1942년 여름부터 여운형은 경성헌병대의 추적을 받고 있을 때였고 1942년 12월에 구속되었다가 1943년 7월 2일에 석방되었다. 석방 이후 여운형은 한동안 경성요양원에 입원했고 거기서 독립운동의 길을 모색했다. 퇴원 후에는 향리인 경기도 봉안에 거주하면서 만주군 장교 박승환을 비롯해 염윤구,이혁기등 학병,징병 거부자들을 모아 군사훈련과 무장투쟁을 준비하였고, 1944년 8월에는 국내에서 유일의 독립운동 단체였던 건국동맹을 결성했다. 이런 여운형이 언제 완장을 차고 총독부 경찰에 협력했다는 것인지 알 수 없다. 소설가 김동인의 말대로 그랬다 하더라도 여운형의 친일행각은 그저 방공훈련을 하는 곳에서 완장 차고 왔다 갔다 했다는 것이 전부다.[188] 이 글을 쓴 김동인중일전쟁 이후 친일파로 변절하여 조선문인보국회등 각종 어용단체에 들어가 중국 전선에 일본군 위문을 다녀오는 등 각종 친일행각을 일삼았고 수많은 친일 작품을 남겼다.[192] 이런 그가 여운형의 친일을 매도했다. 여기에 광복 이후 김동인은 1948년 3월부터 1949년 8월까지 '신천지'에 산문 '문단 30년의 자취'등을 발표하면서 김동인 자신의 일제강점기 수많은 친일활동을 변명하는 논조를 썼는데, 그 주요 내용은 "일제말기의 친일행위는 민족 해방을 위한 결단이자 고육책, '조선어와 조선소설'을 지키기 위한 체제내적 저항 행위"라고 미화했다. 1949년은 좌파와 중도파가 모두 세를 잃고 극우세력이 득세한 시기다. 당시 '좌익'으로 몰린 여운형을 매도한다고 해서 누구 하나 문제 삼을 수 없던 때였다. 즉,앞의 인용문은 김동인의 주관적인 글이다.[188]

조선공산당 노획문서에 대한 반론[편집]

1950년 한국전쟁때 11월에 유엔군이 북진했을때 평양근교에서 노획한 조선공산당 문서 자료이다. 이 문서는 언제 작성되었는지 불명이며[193], 원문은 다음과 같다.

여운형이 1937년 7월(중일전쟁) 이후로 일제와의 투쟁의식이 연약했고, 그의 태도가 명확하지 못했다고 평하고, 여섯 조목의 예를 들었다. 그 가운데는 “소·독 전쟁이 개시되고 태평양전쟁이 개시된 후, 여씨는 공개적으로 일본 동경 대화숙(大和塾·1938년 7월에 결성된 조선사상범 보호관찰소의 외곽단체)에 가 있었고, 학도병 지원 권고문을 발표했다”.[주 51]

이 '노획문서'기사를 통해서 보수성향의 학자인 정진석 한국외대 언론학부 명예교수는 "공산당이 여운형을 친일로 보았으니 틀림없는 친일파"라고 주장하지만, 위에 인용문은 '노획문서'다. '노획문서'란, 한국전쟁때 북진하면서 유엔군(미군)이 압수한 문서를 말한다. 미국 제8군이 1950년 10월 16일, 한국전쟁때 북진하면서 북한지역 문서수집 임무를 수행하게 될 '인디언헤드(Indian Head) 특별임무부대(부대장 포스터 중령)'를 편성했다. 동 부대의 임무는 평양의 정보기관과 평양주재 외국기관을 점령해 군사,정치적으로 중요한 자료를 수집하는 것이었다. 이윽고 평양에 들어간 '인디언헤드부대'는 평양의 공공건물을 샅샅이 뒤져 각종 문서를 노획해서 일본의 극동군사령부로 후송했고, 이 문서가 다시 워싱턴으로 공수되었는데, 당시 인디언헤드부대가 평양에서 노획한 문서는 총 160만 쪽에 달한다.[194]

1977년에 정보공개법에 따라 일반에게 공개된 이 '노획문서'는 일반적인 책 약 5천 4백권 정도에 해당하는 방대한 분량이다. 이렇게 도서관 같이 방대한 문서에 언제 작성되었는지 시기도 불분명한 조선공산당의 비판문을 건져내어 마치 '조선공산당 문서가 여운형을 친일파'라고 보았다는 식으로 호도하는 기사로 게재했다.[188]

박헌영은 초기 여운형을 지지하고 따랐었으나, 1946년 여름부터 좌우합작문제와 3당합당 문제를 둘러싸고 여운형과 조선공산당박헌영 사이는 적대관계로 바뀌었기 때문에 조선공산당의 문서 가운데는 여운형을 비판하는 문서가 얼마든지 있을 것이라는 반론이 있다.[188]

진상규명에서 해명[편집]

2009년 11월,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뉴라이트 등 보수 언론 세력에서 대한민국 친일진상규명위에 여운형이 친일파 명단에 실리지 않았음을 '정치 사상의 형평성' 문제를 근거로 이의제기하였다.

보수 언론들은 "민간단체(민족문제연구소)에서 발행한 친일인명사전은 그렇다 치더라도 국가 기관(친일진상규명위)의 '친일파' 평가에 대해서 후손들은 불명예를 안고 살아야 한다. 또 공정하게 평가했다고 하더라도 여운형 등 좌익 사회주의계열은 어디에도 없다. 형평성에 문제가 있다는 지적도 있다"고 친일진상규명위에 항의했다. 이에 친일진상규명위에서 여운형의 친일행위를 조사하였다. 원로 사학자인 성대경 친일진상규명위위원장은 "여운형의 친일 자료는 단 1건 있었지만, 1943년부터 1945년까지 독립동맹[주 52] 을 만들어 활동을 했고, 이를 11명의 위원들이 논의해 (보고서에 명단을 넣지 않는다는) 결론을 내렸다."고 밝혀 '여운형은 친일행위자가 아니다'라고 해명하였다.[195]

신념[편집]

  • 혈농어수(血濃於水): 피는 물보다 진하다.[196]
  • 분즉도합필립(分卽倒合必立): 나뉘면 곧 쓰러지고 합하면 반드시 일어난다.[197]

상훈[편집]

가족 관계[편집]

서울 계동에 위치한 여운형의 자택 터. 오늘날은 음식점으로 변했다.

여운형 슬하에 둘째딸 여연구, 셋째딸 여원구, 막내 아들 여붕구(1991년 11월 사망)가 월북했다. 둘째딸 여연구와 셋째딸 여원구 또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영향력 있는 정치가로 활동하였다. 이중 둘째 딸인 여원구는2002년 8월 14일 대한민국을 8·15공동행사 민족통일대회에 북한측 대표단 단원으로 참여, 방문한 바 있다. 북한에는 약 30여명의 유족들이 있다고 한다. 여운형의 자녀 이름은 모두 구(九)자 돌림에 새 조(鳥)가 들어간다는 특색이 있다. 사촌동생 여운일은 3.1운동이나 배일사상에 관련되어 1919년 총독부에 의해 인천 덕적도에 1년간 감금되었다.[198] 동생 여운홍은 독립운동가이자 대한민국의 국회의원을 지냈다.

외조카 류기원은 한의사이고, 외조카 박찬웅은 법철학자, 박찬기는 철학자이다.

여운형이 등장하는 대중문화 작품[편집]

드라마[편집]

영화[편집]

기타[편집]

윤보선상하이에서 돌아온 여운형을 만난 걸 계기로 여운형을 따라 따라 상하이로 가서 독립운동에 투신하였다.[203] 한편 이범석(李範奭)도 그의 주선으로 상하이로 건너가기도 했다.

외간여자와의 바람난 적이 있는데, 일단 공식적으로 여운형이 데려온 자녀들만 따져서 두 번이라고 말한다. 첫 번째는 해방될 때 까지 주변 사람들끼리 공공연한 비밀이었지만 유부남의 몸으로 일본여자[주 53] 를 만나 1936년에 막내아들(붕구)을 낳은 것이다. 그 때문에 해방 이후 좌우 갈등으로 여운형이 좌우익 양쪽에서 비난받았을때 '저명한 독립운동가가 처자식을 놔두고 일본여자 사이에서 자식을 낳았다.'는 얘기가 커다란 화제가 되어 반대편 언론에 두고두고 비난받게 되었다. 두 번째는 1940년대 초 일본 도쿄를 들락날락 했을 적에 일본에서 조선미인이라고 소문난 재일여대생 진옥출과 연애를 한 사건인데, 너무 열애를 한 나머지 임신시켜버려서 옥출이 딸(효기)을 낳자 자신이 책임지고 맡아 키우겠다며 조선에 데리고 가서 애를 아내한테 맡겨버렸다. 진옥출은 아이를 여운형에게 맡기고 뒤에 무정의 연안 독립동맹으로 갔으며 거기서 결혼했는데, 그 남편 허갑이 일본 밀정이라 총으로 남편을 살해했다고 한다.[204]

박헌영 등 공산주의 사상을 가진 것이 아닌 온건한 민주사회주의 사상을 지닌 융화주의자라는 재평가를 받고 있다.[주 54][205] 조선인민공화국 내각의 출범을 놓고도 이견이 존재한다. 인공의 출범은 여운형이 완전히 소외된 가운데 박헌영허헌이 저지른 일이라는 주장이 그것이다. 여운형은 인공 내각 명단에 자신이 부주석으로 오른 것에 대해서도 기뻐하기는커녕 박헌영허헌의 돌이킬 수 없는 경거망동을 한탄했다는 것이다.[174] 밖으로는 인공이 여운형 주도하에 만들어진 것으로 알려진 것 만큼 여운형은 한민당세력들을 비롯한 우익진영의 타도 대상이 되었다.[206]

여운형과 여운홍은 국어학자 박승빈을 사표로 받들었는데[144], 후일 박승빈의 아들 박정서(朴定緖)는 그의 여동생 여윤숙(呂允淑)과 결혼했다.

일화[편집]

여운형은 20대부터 수염을 길렀고, 금릉대학 재학 중에 카이젤 수염을 기른 것이 독특해보였는지 교수와 학생이 그를 머스타쉬(moustache:콧수염)라고 불렀다고 한다. 운동선수 활동으로 다른 대학에서 그에게 시합 관련해서 통지서를 보냈는데, 이름을 몰라 "미스터 머시타쉬"라고 학교로 편지가 오기도 했다고 한다.[207] 옷을 잘 차려입는 멋쟁이었다고 한다.[208][209]

여운형은 강원룡에게 이승만, 김구 등 지도자들과 관련된 얘기를 해주었다. 해방 직후 조선체육회를 이끌던 여운형은 이승만이 귀국한 후 서울운동장에서 전국체육대회를 개최했다. 그때 몽양은 비록 노선은 다르지만 이승만이 해외에서 독립을 위해 수십년을 일하다 돌아왔으므로 일장기[210] 가 아닌 태극기를 가슴에 단 우리 청년들이 대회장에 위풍당당하게 걸어들어오는 것을 보면 얼마나 감격할까 하는 생각에서 이승만을 개회식에 초대했다고 한다.[211]

여운형에 의하면 이승만윤치영과 함께 와서 내빈석에 자리를 잡았는데 식이 시작되어도 각도 청년들이 줄을 지어 씩씩하게 입장하자 몽양이박사가 얼마나 흐뭇해할까 하고 감격을 나누기 위해 그의 손을 잡으려고 했다. 그런데 이승만은 청년들을 보지도 않고 수행한 윤치영과 귓속말로 정치 이야기만 하더니 "일이 있어 그만 가봐야겠다"며 곧 퇴장해버리고 말더라는 것이다.[211] 정치적 노선은 다르지만 인간적인 입장에서 그를 초청했는데, 그 모습을 보고 여운형은 인간적으로 섭섭했다면서 자기가 이박사에게 가장 실망을 느낀 때가 바로 그때였다고 했다.[211] 윤치영은 해방 이전까지는 사적인 일로 여운형과 자주 만나는 사이였으나 해방 이후에 그는 여운형을 적대적으로 대하였다. 이 밖에도 송진우, 장덕수, 김성수 등과도 개인적인 친분관계가 있었으나 이들은 모두 해방직후 건준 참여를 거절하고 한민당에 가담하면서 그와 적대적 관계로 변하였다.

건강과 운동[편집]

1925년 체육교사 시절, 코치로 활약했던 야구팀과 (상하이 공설운동장)
1934년 서울 방문한 영국축구팀과 친선경기.(조선중앙일보 사장 시절.)

일찍부터 술과 담배를 배워서 주량이 근동에 소문이 날 정도였으나 국채보상운동에 참가하면서 조선이 독립하기 전에는 술, 담배를 않겠다며 끊었다고 한다. 독립이후 친지들이 이젠 마시라며 권했지만 나라가 통일된 다음에 마시고 피우겠다며 사양하였다고 한다.[212] 연설하면서 자신은 술 담배는 냄새만 맡아도 골치아프다고 한 적 있다.[213]
그는 반찬을 가리지 않았으며 밥을 많이 먹었다.[214][215] 며칠간 이만규의 집에서 묵은 일이 있었는데, 이만규 집에서는 그에게 '밥 많이 먹는 손님'이라는 별명을 붙였다.[216]

당시에 개방적이었고 청년들과 어울리기를 좋아했다. 이러한 면을 보여주는 것이 그의 체육활동이다. YMCA 야구단 활동에서부터 시작하여 복단대학교에서 체육교사로 취직하는 등 나이를 먹어서도 스포츠를 매우 좋아했고, 다방면의 운동경기에 능하였다.

본국에 압송되어 옥중생활을 하면서 소화불량과 치질에 시달리게 되었지만,[217][218] 출옥 후에도 각종 체육 활동에 참여하여 건강을 유지했다. 이때 체육활동으로 다져진 체력과 민첩함으로 해방후 수차례 테러로 인한 위기에서 비껴갈 수 있었다고 한다.[219] 서상천을 비롯한 체육계 인사들과 가깝게 지냈고, 서상천이규현1934년에 출간한 《현대철봉운동법》이라는 책에서 상반신을 벗고 모델로 등장하기도 했다.[220][221]

스포츠를 적극 장려하는 연설을 하였고 기고문을 내기도 했다.[222][223] 각종 체육 협회 회장을 역임하기도 하여 조선 체육의 아버지라고 불릴 정도였다고 한다. 덴마크식 체조를 국내에 처음으로 보급했고, 청년들과 투포환 던지는 경기를 했는데 1등을 했는가 하면, 수영을 잘해서 물놀이하다 물에 빠진 세 사람을 모두 구출한 적도 있었다. 1936년 베를린 올림픽 경기를 나갈까 망설인 손기정 선수의 출전을 적극 장려하였고, 각종 스포츠 경기의 심판을 맡기도 했다.[5]

같이 보기[편집]

참고 자료[편집]

  • 강만길, 《항일독립투쟁과 좌우합작》 (한울, 2000)
  • 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1940년대편 1권〉(인물과사상사, 2004)
  • 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1940년대편 2권〉(인물과사상사, 2004) 47쪽.
  • 강준식, 《적과 동지》(한길사, 1993)
  • 강준식, 《혈농어수 : 몽양 여운형 일대기》(아름다운 책, 2006년)
  • 강준식, 《조선독립의 당위성 (외) : 여운형 편》(종합출판 범우, 2008)
  • 몽양 여운형 선생 추모사업회·몽양 연구소 편,《여운형 노트》(학민사, 1994)
  • 박태균, 《한국전쟁》(책과함께, 2005년) 47쪽.
  • 여연구 지음/신준영 편집, 《나의 아버지 여운형》(김영사, 2001)
  • 여운홍,《몽양 여운형》(청하각, 1967)
  • 이기형,《몽양 여운형》 (실천문학사, 1984)
  • 이기형,《여운형 평전》(실천문학, 2000)
  • 이만규, 《여운형투쟁사》 (민주문화사, 1946)
  • 이정식,《여운형: 시대와 사상을 초월한 융화주의자》(서울대학교출판부, 2008)
  • 이정식,최상용 등저 《여운형을 말한다》(아름다운책, 2007)
  • 이철승·박갑동,《건국50년 대한민국 이렇게 세웠다》(계명사, 1998)
  • 정병준, 《몽양 여운형 평전》(한울, 1995)
  • 정희준, 《스포츠 코리아 판타지: 스포츠로 읽는 한국 사회문화사》- 조선 스포츠의 아버지, 여운형 (개마고원, 2009)
  • 《여성동아》(2002.9.18.) "여원구 북한 최고인민회의 부의장"
  • 《정계야화》 (전2권) (홍우출판사, 1966)
  • 정용욱, 《존 하지와 미군 점령통치 3년》 (중심, 2003)
  • 한윤형, 《뉴라이트 사용후기: 상식인을 위한 역사전쟁 관전기》 (개마고원, 2009)
  • 대한민국 50년사 1권 (임영태 지음, 들녘, 1998)
  • 해방전후사의 인식 1 (송건호 등저, 한길사, 2004년 개정판)
  • 미국의 배반 (리처드 로빈슨 지음, 1988년)

주해[편집]

  1. 이동 승동교회 보도자료에 따르면 승동교회는 1893년 미국인 선교사 새뮤얼 무어 목사가 설립했으며, 설립당시 백정 등 천민들이 주요 신자였다고 한다. 또한 사회에서 차별받던 백정이 장로가 될 만큼 당시로서는 매우 진보적인 교회였다.
  2. 이동 미국 펜실베니아 대학교 교수 이정식은 '여운형이 공산주의자가 아님에도 공산주의자라는 부당한 평가를 받았다.'고 하였다. 《기독신문》2004년 5월 4일자 기사
  3. 이동 여운형은 조선왕실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이었다. 나라가 망한 이유도 조선왕실의 무능함으로 인해 일어났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황실우대론'을 반대했던 것이다.
  4. 이동 당시 일본은 3.1운동을 혹독하게 진압한 것이 드러나면서 일본에 대한 국제사회의 여론이 극히 안 좋아지던 시기였다. 이에 일본 척식국(拓殖局)고가 렌조 장관은 여운형을 도쿄에 초대한 것이다.
  5. 이동 조선일보측에 따르면, 1932년 2월에 조선일보 사장 안재홍이 일제 경찰에 의해 구속당했고 조선일보는 당시 재정악화로 고리대금업자 임경래가 조선일보 발행권을 인수했다 한다. 그리고 임경래는 6월부터 부사장을 맡아 발행인과 편집인을 겸했는데, 여기서 조선일보 사원들의 반발이 극심해졌고 조선일보 사원들은 협의를 통해 당시 막 출소한 여운형을 조선일보 사장직으로 임명할려 했었다고 한다. 그런데, 중외일보(당시 중앙일보) 기자로 활동했던 홍증식이 먼저 여운형을 찾아가 중앙일보 사장으로 추대했다고 한다. <조선일보 사람들 일제시대 편> 참고.
  6. 이동 이상의 문학작품은 당시 특이하기로 유명했다.
  7. 이동 왼쪽에는 여운형, 오른쪽에는 고당 조만식. 여운형은 조만식과 함께 안창호 말년생활 끝까지 곁에 있었다.
  8. 이동 여운형은 중일전쟁이 터질 때부터 '장기전으로 끌고가면 갈수록 일제는 패망할 것.'이라고 지인들에게 말했다고 한다.
  9. 이동 이 시기 오가와 슈메이는 일본 정부가 중일전쟁을 계속하는 것에 대해 매우 비판적이었다. 여운형은 오가와 슈메이와 '일본이 중국과의 전쟁 반대, 중국과의 친선'을 주장하면서도 정치적 입장에서는 서로 거리를 두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인간적으로 매우 친했는데, 대표적인 예로 오가와 슈메이가 당시 보호관찰하에 있던 무직의 여운형을 '사회적으로 자리잡도록 하겠다.'며 추천으로 만철(滿鐵)의 다른 단체인 '동아회' 고문에 취임시킨것을 들을 수 있다. '동아회'라는 단체는 만철의 '동아경제조사국'이 1928년 조직한 단체로, "중국의 정치,경제,사회의 실태에 대해 분석하고 논책하고 제언하는 잡지 <동아>를 발행하고 있었다. 이 단체 집필자는 외부의 사람들로 구성되어, 애당초 그 목적이 '중국 관련'에 대한 학술적 색채가 짙은 논고가 많았었다. 여기서 여운형은 오가와 슈메이와 '중일전쟁 문제'를 놓고 시국을 논했다. - 《몽양여운형전집3》, 강덕상 저 - 대중국화평공작 '아시아연맹'구상과 여운형, p302 ~ p304 인용.
  10. 이동 당시 일제는 여운형을 다치게 하면 파장이 클 걸 염려하여 90시간동안 잠을 못자게 깨우는 고문을 했다. 그 때문에 한동안 신경쇠약에 걸려 잠을 제대로 잘 수 없었다고 한다. 또한 옥살이 중 기력이 많이 떨어지고 머리가 하얗게 셌으며 일제의 징병 부분에서 협력을 하지 않은 대가로 늘상 죽음의 위협에 시달려야했다. 이정식 저 <여운형:시대와 사상을 초월한 융화주의자> 인용.
  11. 이동 그의 신변을 보호하고자 가장 적극적으로 나선 인물은 김용기 장로 (가나안 농군학교 설립자)였다. 이는 김용기의 회고록에 자세히 나와 있다. 김용기의 회고록에 따르면, '추럭을 대절해 가서 그 식솔들을 데려와 같이 생활을 했다.'고 나와 있다.
  12. 이동 총독부 입장에서는 '일본과 총독부의 입장을 존중해 줄 만한 사람이되, 친일파로 몰리지 않을 사람'을 대상으로 접촉했다고 한다. 사실 이는 일본인들이 조선인들의 힘으로 치안협력과 일본인들의 안전을 확보하겠다는 뜻이었기 때문이다. 엔도 정무총감은 여운형을 만난 것이 '치안 유지의 협조 부탁을 위한 것이지, 총독부의 권한을 넘겨준 것이 아니다.'라고 후에 강조해서 밝힌다.
  13. 이동 그 이전에 총독부는 우파를 대변하는 고하 송진우를 접촉하고 제안했으나 송진우가 이를 거부하는 바람에 치안권 위촉이 여운형에게 돌아갔다고 후에 한민당 세력에서 사실인것 마냥 주장했으나, 1957년 前조선총독부 정무총감으로 지낸 엔도 류사쿠는 '한민당의 그 같은 주장이 사실무근'이라고 분명히 밝혔다.
  14. 이동 실제로 중국 및 동남아 등지에서 그런 사건들이 수차례 있었다. 그리고 한반도에서는 후에 4.3사건이라거나 한국전쟁같이 사회가 혼란할 때의 피해자들은 결국 '힘 없는 민간인들'이었다는 점을 생각해보아야 한다. 정작 여운형은 이 결정에 대해서 자기 변호를 한적이 한번도 없다.
  15. 이동 그런데, 연설도중에 '소련군이 서울역에 온다'는 소문이 나돌아 수많은 시민들이 연설 도중 청중들 사이에서 고함소리가 들렸다. 청중의 일각이 웅성거리는 가운데 여운형은 연설을 이어나갔으나 소련군의 경성 입성 소문은 순식간에 운동장을 한 바퀴 돌았다. 이에 흥분한 군중의 일부가 아우성치면서 교문 밖으로 달려 나가기 시작했다. 이렇게 하여 여운형의 이날 연설은 중단되고 말았다. 그래서 기록으로 전하는 연설문도 반토막뿐이다. 연설이 중단된 원인은 흔히 소련군의 경성 입성 소문 때문이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실상은 조선사람들의 습격을 두려워한 조선총독부 관료들이 전향자들을 동원해서 벌였던 공작이었다. -이정식 교수 저<신동아, 8.5 미스터리, 1991년 8월호 p430~437.&1945 08 15 그날 무슨 일이 …③
  16. 이동 송진우가 이런 태도를 보인 원인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말이 있지만, 이는 당시 송진우가 보기에 건국준비위원회 활동이 국제적인 승인을 받았는지 불분명하므로 그럴바엔 중경 임시정부를 지지하는 편이 낫다고 보았기 때문도 있고, 여운형이 과거 공산당 활동에 몸 담았던 전적이 있어 공산주의자라고 판단했기 때문도 있었다. 또한, 여운형이 동아일보의 경쟁 신문 중 하나였던 조선중앙일보 사장이었으므로 자존심상 서로 경쟁관계 사이에 운영하는 조직인 건준 아래로 들어가기 싫었기 때문이라는 얘기도 있다.
  17. 이동 사실 여운형 측에서는 건준의 좌경화로 '인공'으로 선포된것에 대해 원하지 않았고, 인공 개편도 여운형이 소외된 상태에서 이루어졌다. 심지어 여운형은 인공의 탄생에 대해 '자궁 외 임신'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면서 반발했으며, 인공 내각 명단에 자신이 부주석으로 오른 것에 대해 기뻐하기보다 박헌영과 허헌의 경거망동을 한탄했다고 한다.
  18. 이동 미군정은 영어를 잘하는 이들을 신뢰하는 경향이 있었는데, 미국 유학 등을 다녀와 연전이나 이전 교수 등을 역임하고 있던 구미 유학파의 상당수는 역시 한민당의 우파 인사들과 깊은 연대관계를 맺고 있었다.
  19. 이동 그러나, 이는 동아일보의 명백한 오보였다. 실제, 모스크바 3상 회의 주요 원문은 '신탁통치'문제안이 쟁점이 아닌 '어떻게 해서 한국에 임시정부를 수립하느냐'가 결정사항이었다. '어떻게 해서 임시정부를 수립하느냐? 그럼, 임시정부가 수립한 후에는 어떻게 해서 연합국이 임시정부를 도와주느냐?' 이런식 식으로 나가는 것인데, 동아일보 신문에 나온 '모스크바 3상 회의' 보도는 이를 보지 않고, "소련은 신탁통치 주장, 미국은 즉시 독립 주장, 소련의 구실은 38선 분할 점령"이라고 왜곡보도한 것이었다.
  20. 이동 박헌영은 초기에 모스크바 3상 회의 반대를 선언했으나, 소련에 다녀온뒤에 지지로 선회하였다.
  21. 이동
    그것만 제대로 합의안이 되었다면, 제1차 미소공위는 결렬 되었을 일이 없었을 것이고, 남북으로 분단 되지 않았을것이고 통일정부가 수립되었을것이다.
     
    — 독립운동가이자 김규식의 비서인 송남헌의 회고
  22. 이동 강원룡 목사는 여운형을 직접 찾아가 얘기를 들었다고 하는데, 그 얘기에 따르면 여운형은 김구를 상대로 "임정 뿐만이 아니라 다른 독립운동 세력, 사회주의세력과 함께 협력하여 통일된 조국을 건설하자."고 설득하러 갔더니 김구는 그와의 대화를 거절했고 몸수색을 지시하였으며, 임정에서 정해진 사안이라면서 문 밖에 글을 붙여놓는데 다름아닌 '여운형 사형'이었다."고 회고했다. <강원룡 저. 역사의 언덕에- 1권,p264 참고>
  23. 이동 그 근거로 1946년 좌우합작운동이 전개되었을때에 미군정은 이승만,김구등 우익세력에 단독정부 수립운동 노선에 등을 돌려 여운형,김규식등 중도파세력에 간접적으로 지원한것을 들을 수 있다.
  24. 이동 당시, 미군정은 이승만의 '단독정부 수립'발언에 크게 당황한다. 무엇보다 우익세력만의 정치개편은 이미 한계로 드러난 상황이기 때문이었다. 미군정 관리로 지냈던 로빈슨은 '1945년말까지 미군정의 지지는 이승만과 임시정부만 있었지만, 미군정에 대한 대중들의 지지는 최악이었다.'고 회고한다.
  25. 이동 여운형은 '좌익은 자기를 믿지않는 반면, 미국인들은 자신을 신임한다고 한탄하곤 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는 커다란 오해였다. 미국인들 역시 그를 신뢰한 적이 없었다. 그 근거로 여운형에 대한 미군정 비밀보고서들 내용에 따르면, 불신과 조소로 가득차있었다. (박헌영 평전, 안재성 지음. p400 참조.)
  26. 이동 여운형,김규식,안재홍은 '선임정수립, 후반탁을 주장하면서 극렬한 반탁운동을 삼갈 것.'을 주장했었다.
  27. 이동 총독부가 사주한 정치테러라는 설이 유력하다. <혈농어수>,강준식 지음.&이정식,《여운형: 시대와 사상을 초월한 융화주의자》참조.
  28. 이동 영문잡지 《Voice of Korea》의 발행인
  29. 이동 1947년 6월 21일에 IOC 가입.
  30. 이동 본명은 이필형
  31. 이동 암살된 당시 입었던 옷이 오늘날 현재에도 보관되고 있다. 핏자국이 선명하고 총알이 그야말로 정확히 관통한 흔적이 남아있다. 좌우를 넘어 민족을 하나로- 제 1편 여운형
  32. 이동 정부 수립 이전이었고, 미군정이 국장을 치러줄 의지가 없었기 때문에 '인민장'으로 불리는 것이며, 정부 수립 이후로는 이 용어를 쓸 일이 없다. 본래는 '국민장'이며 김구 사후에는 국민장이란 명칭으로 장례가 치러진것이다.
  33. 이동 암살범은 백의사 소속이었으나, 김일성이나 박헌영 계열에서 보낸 사람일 가능성도 제기되는 등 그 정점에 지시한 배후가 불분명하다는 얘기임.
  34. 이동 암살의 배후로는 박헌영, 김일성, 김구, 이승만 등의 측근 하수인들이 배후로 의심되고 있다.
  35. 이동 당시 남조선 과도입법의원 민정장관이었던 안재홍한민당의 방해공작등으로 인해 업무처리가 미약했었다. 그래서 미군정은 안재홍을 해임시키고, 여운형을 민정장관으로 추대할려 했었다. 이는 남한만 단독정부를 구상하는 이승만계열 시각에서는 입지가 좁아져갈 가능성이 컸다. 당시 이승만은 미군정 헌병에 의해 가택연금 처지에 놓여있던 상태였다.
  36. 이동 노덕술은 당시 수도경찰청 수사과장에 있던 인물로 이미 누가 암살범이며 배후에 누가 있었는지를 훤히 알고 있었던 인물이었다.
  37. 이동 실제로는 극좌익 세력과 극우익 세력 양자간의 정치테러가 난무했지만, 좌익과는 달리 임정계열은 오랫동안 해온 전문가 집단이었다.
  38. 이동 1945년 해방 이후 조선에서 미군정관리로 근무했다.
  39. 이동 '기회주의 정치가'라고 혹평받은건 미군정으로부터 지적받았던 것이다. 미군 정보 당국은 모든 세력과 줄을 대고 그들의 편에 서는 것처럼 처신하는 여운형의 행위를 '정치적 기회주의자'라고 단정지은바 있다. <박헌영 평전>, 안재성 지음. 인용.
  40. 이동

    이 반민특위 문서기록에 따르면 '新聞記者(주로 京日) 會見 等에서 是非를 드러내지 않고 큰 支障이 없을 程度의 技術的 談話 發表를 한 것이 紙上에는 自己 意思와 다르게 發表되었으나 訂正을 要求할 수 없어서 그대로 放任한 者. 例 呂運亨, 安在鴻 等.'이라고 적혀 있다.

  41. 이동 일단 전향문에 날인을 한 이상 총독부가 여운형의 이름으로 학병 권유격문을 발표하거나 기타의 성명서를 발표했다고 해서 반기를 들 수가 없었다는 것이다. 이 당시, 즉 일본의 패배가 눈앞에 다가왔을 시절 총독부는 모든 분야에서 발악을 하고 있었다. 펜실베니아 대학교 교수이자, 보수성향의 역사학자인 이정식 교수는 '이름을 도용 당한 사람에게 친일의 죄명을 씌울 수 없다.'고 주장했다.
  42. 이동 여운형이 정말로 '친일파'였다면, 1940년~1945년 일제 말기에 중국 왕징웨이 정권에 가서 친일파 왕징웨이,천공보,저우포하이등 고위급 인사들 만나서 협력했다는 기록이나 문서가 있어야 한다. 일제는 1920년대 여운형이 중국 국민당과 공산당에서 활동한 경력을 바탕으로 대중국공작에 활동하기를 원했다. 그러나, 여운형이 난징 괴뢰정부에 갔거나 왕징웨이를 만났다는 어떠한 기록도 없다. 또한, 여운형을 '친일파'라고 증언하는 자들이 대부분 '친일파'들이나 '한민당'세력들이 대부분이다.|<이정식>|《여운형: 시대와 사상을 초월한 융화주의자》(서울대학교출판부, 2008)
  43. 이동 전향서를 써서 일제에 협력한 친일파들은 대부분이 일제로부터 감시 받지도 않았다. 또한, 친일파라면 당연히 일제로부터 돈과 직위를 받아 챙기거나 미곡조합,은행,탄광 같은 곳의 사무직 자리를 보장받거나 불하받아야 했다. 그런데, 여운형은 돈이나 작위를 받기는커녕 오히려 일제로부터 철저히 감시를 받고 다녔다.
  44. 이동 2010년, 7월 19일. 이기형 시인의 구술과 1989년 펜실베니아 대학교 교수 이정식 교수와 이란씨와 인터뷰.
  45. 이동 2010년, 7월 19일. 이기형 시인의 구술.
  46. 이동 일제강점기 말기에 일제는 거의 모든 분야에 발악하고 있었고, 일제는 당시 사회적으로 명망있는 사람들은 자신의 뜻과 관계없이 무단으로 명의도용하여 각종 어용단체 명단에 넣기까지 했다. 따라서 무슨 단체에 이름이 들어가 있었다 할지라도 의미가 없다.(대표적인예가 홍명희,안재홍,이인,허헌,조만식,이극로등이다.) <조선일보 사람들 일제시대 편> 서적 참조.
  47. 이동 해방 후부터 암살될 때 까지 그가 타고 다닌 자동차는 자동차서비스공장을 경영하던 사업가인 정무묵이 그에게 기증한 것이었다.1974년 3월 1일 경향신문 기사, 《숨겨진 패트론 정무묵씨》
  48. 이동 대동신문은 한때, 비판의 수위와 반인권적인 보도가 지나쳐 미군정으로부터 정간당하기까지 하였다. 참조
  49. 이동 반민특위 문서에 따르면 '그(이종형)는 ≪大東新聞≫ 사장으로 앉아 큰소리를 쳤고 故 呂運亨 先生이 學兵 勸誘를 했다는 거짓말을 大書特筆하여 덤벼들었고...'라는 문장이 있다. 여기서 '故 呂運亨 先生이 學兵 勸誘를 했다는 거짓말을 大書特筆하여 덤벼들었고..'라는 말은 1946년 2월 10일, 17일, 18일자 대동신문에 실린 기사를 의미한다.
  50. 이동 이종형이 1945년에 창간한 <대동신문>에는 여운형이 친일활동을 했다는 기사가 유독 많이 실렸다. 앞서 소개한 조반상(前 경성일보 사회부 기자출신)의 증언이 민주중보에 게재된 것도 1946년 2월, 수 차례 관련 기사를 실은 대동신문의 '공작'이 근거 없음을 알리기 위해서였다. 실제, 이종형은 여운형에게 그런 짓을 할 만한 충분한 동기가 있었다. 이종형은 광복 직후에 건국준비위원회에 가담하려고 건준 위원장 여운형에게 상의하려 했는데, 여운형에게 단박에 거절당한 적이 있었다. <정병준 저. (여운형 평전)>&<이란씨의 회고(이정식 교수와 면담.)>
  51. 이동 이 '노획문서'에 의하면 경성콤그룹에서 활동했던 김태준이 수감 중 여운형의 주선으로 전향서를 쓰고 가출옥했다고 기록되어있다. 그러나, 실제 김태준은 병보석으로 출감했기 때문에 이는 왜곡된 것이다. 참조.
  52. 이동 농민동맹건국동맹을 말한다.
  53. 이동 옹호하는 측에서는 기생이라는 설을 들고, 우파측이나 일본측 자료에서는 미인계 차원에서 일본에서 보낸 밀정이라는 설도 나오곤 한다.
  54. 이동 미국 펜실베니아대학교 교수 이정식은 여운형 선생이 공산주의자가 아님에도 공산주의자라는 부당한 평가를 받았다고 주장한다. 《기독신문》2004년 5월 4일자 기사

각주[편집]

  1. 이동: 《몽양 여운형 - 시대와 사상을 초월한 융화주의자》(이정식 지음, 서울대출판부 출간)
  2. 이동: <<도올이 본 한국독립운동사 제10부 황포의 눈물>>-EBS
  3. 이동: 이정식, 《대한민국의 기원》(일조각, 2006) 241쪽.
  4. 이동: 최호열 기자 (2002년 9월 13일). donga.com “화제의 인물-57년 만에 아버지 몽양 여운형 묘소 찾은 여원구 북한 최고인민회의 부의장” |url= 값 확인 필요 (도움말). 여성동아.  인용 오류: 잘못된 <ref> 태그; "autogenerated1"이 다른 콘텐츠로 여러 번 정의되었습니다
  5. 이동: 《여운형 평전》, 이기형 지음
  6. 이동 여운형, 자서전 1-나의 청년시대, (삼천리, 1932.9)
  7. 이동 이정식, 《대한민국의 기원》(일조각, 2006) 240쪽.
  8. 이동: 이정식, 《대한민국의 기원》(일조각, 2006) 243~244쪽.
  9. 이동: 이정식, 《대한민국의 기원》(일조각, 2006) 258~259쪽 참조
  10. 이동 이정식, 《대한민국의 기원》(일조각, 2006) 257쪽 참조
  11. 이동 이정식, 《대한민국의 기원》(일조각, 2006) 259쪽 참조
  12. 이동: ::: 몽양여운형선생기념사업회 인용 오류: 잘못된 <ref> 태그; "autogenerated3"이 다른 콘텐츠로 여러 번 정의되었습니다
  13. 이동 이정식, 《대한민국의 기원》(일조각, 2006) 257~259쪽 참조
  14. 이동: 이정식, 《대한민국의 기원》(일조각, 2006) 257~259쪽 참조.
  15. 이동: 이정식, 《대한민국의 기원》(일조각, 2006) 259~260쪽 참조
  16. 이동: 김학준 기자 (1995년 8월 5일). donga.com “몽양 여운형/김학준(해방공간의 주역:1)” |url= 값 확인 필요 (도움말). 동아일보.  인용 오류: 잘못된 <ref> 태그; "autogenerated2"이 다른 콘텐츠로 여러 번 정의되었습니다 인용 오류: 잘못된 <ref> 태그; "autogenerated2"이 다른 콘텐츠로 여러 번 정의되었습니다
  17. 이동: 김은홍 (2002년 8월 19일). '목회'신세원 목사의 교회사 이야기”. 기독신문. 
  18. 이동 몽양 연보
  19. 이동 이정식, 《대한민국의 기원》(일조각, 2006) 244쪽 참조.
  20. 이동 이정식, 《대한민국의 기원》(일조각, 2006) 261쪽 참조
  21. 이동 삼천리 제4권 제10호, 나의 上海時代, 自叙傳 第二
  22. 이동 이정식, 《대한민국의 기원》(일조각, 2006) 271쪽 참조
  23. 이동 이범석 - Daum 백과사전
  24. 이동: 이이화, 《한국사이야기21. 해방 그 날이 오면》(한길사, 2004) 23쪽.
  25. 이동: 잊혀진 지도자 몽양 여운형
  26. 이동: 이정식, 《대한민국의 기원》(일조각, 2006) 267쪽 참조
  27. 이동 이이화, 《한국사이야기21. 해방 그 날이 오면》(한길사, 2004) 23~24쪽
  28. 이동: 신흥무관학교와 망명자들(서중석 지음 | 역사비평사 | 2006) 326페이지
  29. 이동: 신흥무관학교와 망명자들(서중석 지음 | 역사비평사 | 2006) 327페이지
  30. 이동: KBS 인물 현대사, 여운형 편
  31. 이동: 《여운형 평전1 - 중국, 일본에서 펼친 독립운동》(강덕상 지음/김광열 옮김, 역사비평사 출간)
  32. 이동: 이정식, 《대한민국의 기원》(일조각, 2006) 269~271쪽 참조
  33. 이동 呂運亨氏一行 渡日記
  34. 이동 김성룡, 권립, 제30회 상해의 조선공산주의자들 중앙인민방송
  35. 이동 '국민대표대회주비위원회' - 네이트 백과사전
  36. 이동: 이정식 교수 (2007년 9월 1일). “이정식 교수, ‘여운형은 박헌영파에 암살’ 주장”. 신동아. 
  37. 이동 [1]
  38. 이동 한국사데이터베이스
  39. 이동 '상해고등보수학원' - 네이트 백과사전
  40. 이동: 이정식, 《대한민국의 기원》(일조각, 2006) 272~273쪽
  41. 이동 강준식, 《조선독립의 당위성 (외) : 여운형 편》(종합출판 범우, 2008)
  42. 이동 《약산 김원봉》,이원규 지음.
  43. 이동 여운형 강제 억류지
  44. 이동 反帝國主義聯盟, 영국관헌이 呂運亨을 체포하여 일본관헌에 인도한 것은 국제법상 위반이라 하여 세계 각지의 同연맹지부에 격문 산포하고 시위운동 전개키로 결의
  45. 이동 1930년 05월 01일 삼천리 제6호, 金乙漢-列車中의 呂運亨(한국사 데이터베이스)
  46. 이동 1931년 10월 01일 삼천리 제3권 제10호, 名探偵과 新聞記者 競爭記, 여운형 사건과 검사와 나
  47. 이동 여운형 사건 관련 동아일보 기사 목록(한국사 데이터베이스)
  48. 이동 여운형 사건 관련 중외일보 기사 목록(한국사 데이터베이스)
  49. 이동 한국사 데이터베이스
  50. 이동 한국사 데이터베이스
  51. 이동 1932년 7월 28일 동아일보 2면 2단 기사
  52. 이동: 황병주 강사 (2004년 4월 12일). ““비열한 서북, 신사적 기호” 지역을 선악구도로 본 윤치호”. 한겨레. 
  53. 이동: <윤치호 일기>, 1933년10월 4일
  54. 이동 주식회사 관련정보(한국사 데이터베이스)
  55. 이동 조선중앙일보 9월 기사목록(한국사 데이터베이스)
  56. 이동 조선중앙일보 10월 기사목록(한국사 데이터베이스)
  57. 이동 여상화 (2005년 5월 10일). “몽양의 이순신 사랑”. 한겨레. 
  58. 이동: 이기형, 《여운형 평전》 (역사인물찾기 5) (이기형 지음, 실천문학사, 2009) p.250
  59. 이동 이기형, 《여운형 평전》 (역사인물찾기 5) (이기형 지음, 실천문학사, 2009) p.251
  60. 이동 "'일장기 말소' 원조는 몽양의 <조선중앙>"
  61. 이동: 이정식, 《대한민국의 기원》(일조각, 2006) 274~275쪽 참조
  62. 이동 대전형무소에서 가출옥한 안창호를 맞이하는 여운형 사진
  63. 이동 客談室(객담실)- 呂運亨氏(한국사 데이터베이스)
  64. 이동 1940년05월01일 삼천리 잡지 소식, 呂運亨氏 歸京 宋鎭禹씨는 아직 東京에(한국사 데이터베이스)
  65. 이동 1940년10월01일 삼천리 잡지 소식, 呂運亨씨-前中央日報社長인 氏는 최근에 東京에 가셨다가 歸城(한국사데이터베이스)
  66. 이동 呂運亨씨 東京 왕복-무슨 일로인지 여행함(한국사데이터베이스)
  67. 이동 공훈전자사료관 일본방면(성장환씨의 증언)
  68. 이동: 양현혜, 《빛과 소망의 숨결을 찾아》 (이화여자대학교출판부, 2007) 104페이지
  69. 이동 한국사 시민강좌: 47집(2010년) - 특집,대표적 독립운동가 12인일조각 출판사. p157, 정병준 저.
  70. 이동 안재홍의 증언.
  71. 이동: <몽양 여운형 평전>, 정병준 지음. p73
  72. 이동 <여운형 평전>, 정병준 지음.
  73. 이동 《여운형 평전1》. 강덕상 저. p531
  74. 이동 역사학자 김기협 (2010년 8월 12일). “일본 총독부 2인자가 여운형을 찾은 이유는?”. 프레시안. 
  75. 이동 지명관, 〈8·15의 날〉,《한국을 움직인 현대사 61장면》(다섯수레,1996), 36쪽
  76. 이동 서중석, 《한국현대민족운동연구: 해방후 민족국가 건설운동과 통일전선》(역사비평사, 1991), 202쪽; 강만길, 《고쳐쓴 한국현대사》(창작과 비평사,1997년 초판 11쇄), 205쪽
  77. 이동 《지배자의 국가, 민중의 나라》,서중석 저.
  78. 이동 한국현대민족운동연구(역비한국학연구총서 1) (서중석 지음, 역사비평사 펴냄, 2006) 496
  79. 이동 김재명, 〈안재홍: 민족애 실천했던 온건파 지식인〉,《한국현대사의 비극-중간파의 이상과 좌절》 (선인, 2003),244쪽 ; 여연구, 신준영 편집 《나의 아버지 여운형》(김영사, 2001),143쪽
  80. 이동 김송달, 〈마침내 기다리던 해방을 맞이하다,《한국 근현대사 100년사》(거름, 1998), 50~51쪽
  81. 이동 강준만(2004). 《한국현대사산책: 1940년대편 1권》. 인물과사상사. 59쪽. ISBN 89-88410-89-0. 에 인용된 여연구, 신준영 편집 (2001). 《나의 아버지 여운형》. 김영사. 175~176쪽. 그는 아버지에게 건준의 간부들 속에 민족주의자가 너무 많기 때문에 우경화될 위험이 있으니 개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아버지는 그 문제는 나 혼자 결심할 일이 못 되니 토론해 보아야 한다고 말했다. 건준 부위원장이던 안재홍은 아버지의 말을 듣자 ‘나는 해방 전에 공산당을 하는 사람들이 파벌싸움을 하는 것을 신물이 나도록 목격한 사람이오. 몽양도 박헌영을 가까이 하지 마시오’라고 했다. 
  82. 이동 한국현대민족운동연구(역비한국학연구총서 1) (서중석, 역사비평사, 2006) 203페이지
  83. 이동 (대한민국 건국 영웅들(3)) 조만식 -그는 누구인가?- 위클리조선
  84. 이동 허은, 〈8·15직후 민족국가 건설운동〉,강만길 외, 《통일지향 우리 민족해방운동사》(역사비평사,2000)307~308쪽.
  85. 이동 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 1940년대편 1권 80~82쪽
  86. 이동 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1940년대편 1권〉 (인물과사상사, 2004) 119~120쪽.
  87. 이동 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 1940년대편 1권 118쪽
  88. 이동: 이한수 기자 (2010년 2월 8일). “[격동의 역사와 함께한 조선일보 90년 ] 해방공간 지도자들, 이념 떠나 '복간 축하' 메시지”. 조선일보. |제목=에 지움 문자가 있음(위치 1) (도움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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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0. 이동 《애국지사 조동호 평전》,이현희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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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8. 이동: 강준만의 한국현대사산책:1940년대편 1권(인물과사상사, 2006) 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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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1. 이동 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1940년대편 1권〉 (인물과사상사, 2004) 59쪽
  102. 이동 이재호 칼럼
  103. 이동 강준만의 한국현대사산책:1940년대편 1권(인물과사상사, 2006) 221
  104. 이동 강준만의 한국현대사산책:1940년대편 1권(인물과사상사, 2006) 222
  105. 이동 한국현대사의 비극:중간파의 이상과 좌절(김재명, 선인, 2003) 36
  106. 이동 1946년6월 11일AP통신 기자회견 내용中
  107. 이동 임경석, <이정 박헌영 일대기>,역사비평사 31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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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5. 이동 동아일보 매거진::신동아
  116. 이동 한국사 데이터베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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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8. 이동 민족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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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0. 이동 1964년 7월 18일 경향신문 기사,《몽양의 묘소 걱정》
  131. 이동 1964년 2월 22일 동아일보 기사, 故몽양묘지 불하부당하다 - 박대통령 조사지시
  132. 이동 615유럽공동위 / 615europe.de
  133. 이동 ::: 경기신문 :::
  134. 이동 양평군, 여운형 생가 내년까지 복원 :: 파란 ∽ 뉴스
  135. 이동 이정식 교수, ‘여운형은 박헌영파에 암살’ 주장
  136. 이동 1965년 9월 17일 경향신문 기사, 《테러....그 뿌리》
  137. 이동 2005년 1월 25일 국회도서관 지하 대강당에서 열린 '계승연대 의문사건 특위'에서 증언.
  138. 이동 《한국현대민족운동연구》,서중석 저. p587
  139. 이동: 《몽양 여운형 평전》, 정병준 저. p467~469
  140. 이동 강준만『한국 현대사 산책:1940년대편 2권』인물과사상사
  141. 이동 1974년 02월 14일자 경향신문
  142. 이동 《혈농어수 下》, 강준식 저. 아름다운 책.
  143. 이동 이제는 말할 수 있다비밀결사- 백의사”. MBC. 2002년 1월 20일 46회. 
  144. 이동: 고려대 명예교수 박찬기 신동아 2001년 10월호(통권 505호)
  145. 이동 이정식 교수, ‘여운형은 박헌영파에 암살’ 주장 :: 네이버 뉴스
  146. 이동 맛있는 정보! 신선한 뉴스! - 서울신문
  147. 이동 이정식, 《대한민국의 기원》(일조각, 2006) 288~289쪽 참조.
  148. 이동: 이정식 교수, ‘여운형은 박헌영파에 암살’ 주장 신동아 2007년 9월호(통권 576호)
  149. 이동: 코나스넷
  150. 이동: 이철승·박갑동, 《건국50년 대한민국 이렇게 세웠다》 (계명사, 1998) 268페이지
  151. 이동 이철승·박갑동, 《건국50년 대한민국 이렇게 세웠다》 (계명사, 1998) 335~336페이지
  152. 이동 《북한의 역사2권》,p755. 김학준 저.
  153. 이동 잡지《말》 1992년5월호 '몽양 암살범 추적기사'내용 中.
  154. 이동 “몽양 여운형, 남로당에 암살 가능성”
  155. 이동 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1940년대편 2권〉(인물과사상사, 2004) 51쪽
  156. 이동 우사연구회 엮음, 서중석 지음, 《남,북협상:김규식의 길, 김구의 길》(한울, 2000) 20쪽
  157. 이동 좌우를 넘어 민족을 하나로 - 제3편 김규식
  158. 이동 《G-2 미 육군 정보참모부 일일보고서》
  159. 이동 여운형이 미군정의 민정장관이 됐다면
  160. 이동 주한 미국 총영사를 지냈다.
  161. 이동: 이정식, 《대한민국의 기원》(일조각, 2006) 235~236쪽 참조.
  162. 이동 JP골프이야기 - `신익희, 여운형, 조병옥은 명 연설가`
  163. 이동 송건호 《송건호전집 20:역사에서 배운다》(한길사, 2006) 295
  164. 이동 <역사의 언덕에서 1 : 엑소더스> 강원용 저
  165. 이동: 이정식, 《대한민국의 기원》(일조각, 2006) 226~228쪽 참조.
  166. 이동 《미·소 공위 문서철》Roll 4


의열단

[ ]

의열단 관련 기사

의열단 관련 기사1919년 만주 길림성에서 조직된 항일독립운동단체. 김대지, 황상규가 지도했고, 김원봉, 윤세주 등 13명의 단원이 있었다. 1920년대에 활발한 활동을 하였고, 1930년대에 급진적 민족주의 색채를 띄었다.

유형단체
시대근대
성격독립운동단체
설립일시1919년 11월 10일
설립자김대지(), 황상규() 등

정의

1919년 11월 만주에서 조직되었던 독립운동단체.

개설

1920년대에 활발한 활동을 보였으며, 1920년대 말부터 1930년대에 걸쳐 민족주의 급진파를 표방하는 단체로 변모되어 갔다. 1919년의 거족적인 3·1독립운동을 겪은 뒤, 해외로 독립운동기지를 옮긴 애국지사들은 강력한 일제의 무력에 대항하여 독립을 쟁취하기 위하여는 보다 조직적이고 강력한 독립운동단체의 조직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였다.

이러한 요망에 부응하여 1919년 11월 9일 밤, 만주 길림성 파호문() 밖 중국인 반모()의 집에 모인 독립지사들은 밤을 새워가면서 숙의한 끝에 그 이튿날인 10일 새벽에 급진적 민족주의 노선을 지향하는 항일비밀결사인 의열단을 조직하였다. “정의의 사()를 맹렬히 실행한다.”고 한 데서 유래된 단체명만 보아도 이 단체의 성격을 알 수 있다.

설립목적

의열단은 당시 만주와 중국 본토지역에 조직된 많은 독립운동단체가 미온적이고 온건한 독립운동을 전개하고 있다고 보고, 이에 대한 반성으로서 과격하고 급진적인 폭력투쟁을 목적으로 하였다.

연원 및 변천

의열단 창단 당시의 단원은 대체로 신흥무관학교 출신이 중심이 되었고, 그 명단은 자료에 따라 한결같지 않으나, 김대지()·황상규()가 고문으로서 지도하였고, 단원은 김원봉()·윤세주()·이성우()·곽경()·강세우()·이종암()·한봉근()·한봉인()·김상윤()·신철휴()·배동선()·서상락()·권준() 등 13명이며, 단장에는 김원봉이 선출되었다.

일설에는 김원봉의 고모부인 황상규가 단장이라고 전해지고 있으나 대부분의 다른 자료에서 김원봉이 단장으로 기록되어 있는 점으로 보아 이는 오류인 것 같다.

의열단의 지도이념 및 사상을 정립하는 데는 창단의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던 김원봉의 동향 선배이며 고문인 김대지와 황상규의 영향이 컸으며, 뒤에는 신채호()가 독립운동의 경륜과 강령을 체계화한 것으로 보인다. 신채호가 1922년 12월에 작성에 착수하여 1923년 1월에 완성, 발표한 <조선혁명선언>(일명 의열단선언)에는 의열단의 독립투쟁노선과 행동강령이 잘 나타나 있다.

즉, 민중직접혁명과 평등주의에 입각하여 당시 일부 민족주의자들의 독립운동노선이었던 문화주의·외교론·준비론 등 일체의 타협주의를 배격하고, 오직 폭력적 민중혁명에 의한 일제의 타도라는 전술을 통하여 독립의 쟁취를 목표로 한 것이다. 의열단의 민중직접혁명노선과 전술은 시대의 흐름에 따라 당시의 시대사조를 반영하여 수정이 가해져, 창단 초에 비하면 강령상의 변질을 보게 되었다.

1926년부터 점차 당대를 풍미하던 사상계의 영향을 받아 사회주의 이론을 수용하기 시작한 의열단의 강령 및 사상은 1928년 10월 ‘조선의열단중앙집행위원회’ 이름으로 발표된 <창단9주년기념성명>을 계기로 종래의 조국광복을 목표로 한 순수한 민족주의노선에서 계급적 이데올로기에 기반을 둔 급진적 민족주의 내지 사회주의노선으로 전환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이 무렵만 하더라도 의열단은 항일독립운동에 있어서 전민족적 통일전선의 구축을 위한 항일민족공동전선을 세계약소민족의 반식민제국주의전선으로 연결시키려는 시대적·민족적 요망을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의열단이 본격적으로 급진좌파의 노선으로 가게 되는 것은, 1929년 12월 북경에서 ML파와 합동하여 조선공산당재건동맹을 조직하였을 때부터라고 하겠다. 의열단의 창단 초기에는 성문화된 강령은 없었으나, 특히 구축왜노()·광복조국()·타파계급()·평균지권()을 단원들의 이상이며, 강령과 같이 여기고 있었다.

이 중 구축왜노와 광복조국은 모든 독립운동단체가 추구한 목표였고, 타파계급과 평균지권은 민중을 직접혁명의 중핵으로 하는 3·1운동 이후 독립운동의 새로운 흐름을 나타낸 것이다. 특히, 의열단의 초기 사상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은 다음의 주장에서 살펴 볼 수 있다.

즉, “우리 동포가 광복운동을 시작한 이래 임시정부를 조직하고, 혹은 군대를 조직하고, 혹은 공산당과 제휴하고, 혹은 국민대표회의를 개최하는 등 여러 가지 실책()을 강구하여 보았으나 무슨 얻은 바가 있었는가? 우리 단원이 노리는 곳은 동경()·경성()의 2개 소로서 우선 조선총독을 죽이기를 대대로 5, 6명에 미치게 되면 반드시 그 후계자가 되려는 자가 없게 될 것이고, 동경시민을 놀라게 함이 매년 2회에 달하면 한국독립문제는 반드시 그들 사이에서 제창되어 결국은 일본국민 스스로가 한국통치를 포기하게 될 것임은 명약관화한 일이다.”고 한 것만 보아도 민족적 지상과제인 독립의 쟁취를 위하여는 오직 직접적 투쟁방법인 암살과 파괴라는 과격한 방법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는 점에서 순수한 민족독립운동을 지향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강령은 1928년 이후에는 21개 조의 강령으로 확대되고 창단 초기와는 변질된 사상경향을 보이게 되었다.

기능과 역할

의열단은 창단 직후 ‘공약10조’와 뒤에 ‘5파괴’, ‘7가살()’이라는 행동목표를 기본규약으로 삼아 독립운동의 지침으로 채택하였다. ① 천하의 정의의 사()를 맹렬히 실행하기로 함. ② 조선의 독립과 세계의 평등을 위하여 신명을 희생하기로 함. ③ 충의의 기백과 희생의 정신이 확고한 자라야 단원이 됨. ④ 단의()에 선()히 하고 단원의 의()에 급히 함.

⑤ 의백() 1인을 선출하여 단체를 대표함. ⑥ 하시(), 하지()에서나 매월 1차씩 사정을 보고함. ⑦ 하시, 하지에서나 초회()에 필응()함. ⑧ 피사()치 아니하여 단의에 진()함. ⑨ 1이 9를 위하여 9가 1을 위하여 헌신함. ⑩ 단의에 배반한 자는 처살()함.

이와 같이 의열단은 조국독립을 위하여 과감하고 과격한 적극투쟁과 희생정신을 강조하고 있으며, 암살대상으로서 ① 조선총독 이하 고관, ② 군부 수뇌, ③ 대만총독, ④ 매국노, ⑤ 친일파 거두, ⑥ 적탐(밀정), ⑦ 반민족적 토호열신() 등을 지목하였다. 이 의열단의 이른바 ‘가살()’은 이미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선언한 ‘7가살’과 대동소이하였다.

한편, 파괴대상으로는 ① 조선총독부, ② 동양척식회사, ③ 매일신보사, ④ 각 경찰서, ⑤ 기타 왜적 중요기관 등 일제의 식민지 통치기관 및 그 관련기관의 시설에 대한 폭파를 목적으로 하였다. 의열단은 위의 계획을 실천에 옮기기 위하여 우선 폭탄제조법을 배울 필요가 있었다.

김원봉 등은 이미 신흥무관학교 학생 때 중국인 교관 주황()에게서 폭탄제조법을 배운 바 있었는데, 이 무렵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별동대인 구국모험단()의 김성근()이 폭탄제조를 연구하고 있었으므로, 그를 길림으로 초빙하여 상해에서 익힌 폭탄제조법의 기술을 단원들에게 가르치기도 하였다.

의열단은 단원 중 모험가로 일컬어지는 김대지·김천·한봉근·김상윤 등이 중심이 되어, 창단된 지 얼마 뒤에 근거지를 길림에서 북경()으로 옮기고, 다시 상해지방에서 열렬단원을 포섭하고 세력확대에 힘씀으로써, 1924년경에는 중국인을 포함하여 약 70여 명의 결사적 단원을 가지게 되었다.

후일에는 한국민족운동사에 있어서 지도적 위치에 있던 김구()·김규식()·김창숙()·신채호 등을 실질상의 고문으로 삼고, 장개석() 중화민국총통의 후원을 받게 되었다고 한다. 초기 의열단의 의거활동을 중심으로 그 중요한 것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① 밀양·진영 폭탄반입사건:일본 고관에 대한 암살과 중요관공서의 폭파를 목적으로 하는 의열단의 제1차 암살파괴계획은 1920년 3월에 시작되었다. 우선 폭탄을 국내로 반입하기 위하여 3월 중순경 의열단원 곽재기()가 만주 안동현()에서 밀양의 김병완()에게 보낸 폭탄이 경기도 경찰부에 탐지되어 수색한 결과 폭탄 3개도 압수되고, 폭파계획의 행동책임을 맡은 관련자 18명 중 곽재기 등 12명이 일본경찰에게 붙잡혔다.

5월 중순경에는 의열단원 이성우()가 다시 폭탄 13개 및 권총 2점을 입수하여 안동현 이륭양행()을 통하여 경상남도 진영()의 강원석()에게 보냈는데, 이것이 일본경찰에 발견됨으로써 압수되고 이 사건의 관련자 윤치형() 등 6명이 붙잡혔다. 한편, 이 폭탄의 반입과 함께 의열단의 행동대원들은 파괴대상을 선정, 검토하면서 거사 준비에 착수하던 중 붙잡힘으로써 거사는 좌절되었다.

1920년 6월에는 곽재기·이성우 등 전원이 검거되어 취조를 끝내고 10월에는 경성지방법원검사국에 송치되었는데 이 사건의 관련자는 모두 26명이었고, 붙잡힌 단원은 18명이었다. 이 사건은 경성지법에서 8개월간의 예심을 거쳐 붙잡힌 지 1년이 지난 1921년 6월 언도공판에 회부되어 16명 중 강원석 1명만 면소() 방면되고 나머지 15명은 모두 유죄로 결정되었다. 특히, 선고공판에서 이성우와 곽재기는 주범으로 지목되어 8년형이 선고되었다.

② 부산경찰서 폭탄투척의거:제1차 암살파괴계획이 좌절된 지 얼마 안된 1920년 9월 14일, 이번에는 경상남도 부산경찰서가 의열단원 박재혁()에 의하여 폭파되고 서장 등 3명이 즉사한 사건이 일어났다. 이 의거는 의열단에 의하여 계획된 암살폭파사건의 하나로 부산 출신의 박재혁에게 명하여 그 대상을 부산경찰서로 정한 것이다.

1920년 9월 초 그는 선편(便)으로 상해를 떠나 나가사키()를 거쳐 9월 13일 부산에 상륙하였다. 싱가포르에서 사업을 경영하고 있던 그는 의열단의 ‘공약 10조’ 제7항의 “하시, 하지에서나 초회에 필응한다.”는 단명에 의하여 상해로 와서 부산경찰서 폭파의 임무를 띠고 입국하였던 것이다.

입국한 다음날 아침 그는 중국인 고서적상()으로 변장하고 평소 지면이 있던 부산경찰서장 하시모토()를 방문, 고서적을 구경하는 그에게 먼저 의열단의 전단을 보인 다음 폭탄 2개를 투척하였다. 폭음과 함께 둘이 함께 쓰러졌는데, 중상을 입은 서장은 병원으로 가는 도중에 사망하고 옆에 있던 일본경찰 2명도 즉사하였다. 박재혁도 중상을 입은 채, 투옥된 날부터 단식을 시작하여 9일 만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③ 밀양경찰서 폭탄투척의거:부산경찰서 폭탄투척의거가 일어난 지 불과 3개월 만에 이번에는 경상남도 밀양경찰서가 폭탄세례를 입은 사건이 일어났다. 1920년 12월 27일 오전 7시 30분경 밀양경찰서 서장실에서 전경찰서원이 모여 서장 와다나베()의 훈시를 듣고 있을 때, 밀양 출신의 의열단원 최수봉()이 경찰서 창밖에서 이 기회를 노려 폭탄 2개를 연달아 투척하였다.

제1탄은 남쪽 유리창으로 던진 것으로 정렬하고 있던 순사부장의 오른손에 맞아 불발되고, 다시 정면 현관에서 던진 제2탄은 복도에서 폭발하였으나 인명피해는 없었다. 이 사건은 일본경찰에게 피해를 주지 못하였지만 민심에 충격을 불러일으키는 등 그 끼친 바 영향은 컸다.

의거에 사용된 폭탄은 이종암·김상윤 등이 제공한 것인데, 이 거사는 결국 실패로 돌아갔으며, 최수봉은 현장에서 단도로 자결을 기도하였지만 뜻을 이루지 못하고, 곧 붙잡혀 병원으로 옮겨져 치료받은 뒤 검찰로 송치되었다. 그는 대구지방법원에서 무기징역을 언도받고 검사의 공소로 대구복심법원에서 사형이 선고되었다. 최수봉은 굽힘없이 태연하게 교수대에 올라 21세의 짧은 생애를 장렬하게 마쳤다.

④ 조선총독부 투탄의거:1921년 9월 12일 오전 10시경 서울 남산 밑에 있는 왜성대(:지금의 숭의여고 부근) 총독부청사 2층에 있는 회계과와 비서과에 각각 1개씩의 폭탄이 투척되었다. 비서과의 것은 불발이었으나, 회계과의 것은 큰 폭음과 함께 폭발하여 건물의 일부가 파괴되었다. 이 의거가 일어나자 일본경찰은 비상령을 내리고 범인체포에 혈안이 되었으나 색출에 실패하였다.

결국, 이 사건의 진상은 이듬해 3월 상해에서 일본 육군대장 다나카()에 대한 암살저격사건으로 김익상이 붙잡혀 그가 실토할 때까지 밝혀지지 않았다. 의열단원 김익상(본명 )은 서울 출신으로 1921년 9월 10일 폭탄 3개를 지니고 북경을 떠나 이튿날 서울에 도착, 12일 전기수리공으로 변장하여 총독부 정문을 무사히 통과하고 2층으로 향하여 거사하였던 것이다.

그는 의거 후 일본인 목수로 변장하고 그날 저녁 용산역에서 기차를 타고 중도에 평양에서 하차하여 하루를 소일한 뒤 신의주를 거쳐 무사히 북경으로 돌아갔다. 이 사건은 일제에게는 큰 충격을 주었으며 당시의 서울 시민을 크게 놀라게 하였다.

⑤ 상해황포탄의거(, 저격의거):1922년 3월 28일 일본 육군대장 다나카()가 기선편으로 상해에 도착한다는 정보를 접하자, 의열단이는 그의 암살저격계획을 세웠다. 이 계획은 치밀하게 추진되어 부두에서 제1선은 오성륜(), 제2선은 김익상, 제3선은 이종암이 맡기로 하였다.

제1선을 맡은 오성륜은 배에서 내려 걸어오는 다나카를 저격하였으나, 때마침 앞으로 나선 영국인 여성이 맞아 즉사하였고, 제2선을 맡은 김익상이 곧이어 자동차에 오르는 것을 저격하였으나 그의 모자를 관통시키는 데 그쳤다. 제3선의 이종암은 앞으로 나아가 폭탄을 던졌으나 자동차 뒤에 떨어진 폭탄이 불발되고 말았다.

결국 의열단의 이 의거는 실패로 돌아가고 3명 중 김익상·오성륜이 일본경찰에게 붙잡혔는데, 같은 해 4월 오성륜은 탈옥에 성공하고 김익상만 일본 나가사키로 압송되어 사형언도와 무기징역을 거쳐 20년 징역형으로 감형되어 복역하고, 출옥한 지 얼마 안 되어 일본형사에게 연행된 채 암살당하였다.

⑥ 종로경찰서 폭탄투척 및 삼판통()·효제동 의거:1923년 1월 12일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투척한 사건이 일어났다. 이 의거를 일으킨 사람이 의열단원 김상옥()이었음은 그가 순국할 때까지 당시의 일본경찰당국도 몰랐다.

그러나 종로경찰서가 폭탄세례를 받은 지 5일이 지난 1월 17일 눈 내리는 새벽 3시, 그의 은신처인 삼판통(지금의 후암동) 고봉근()의 집이 종로경찰서 형사진에게 탐지되어 우메다() 경부 등의 지휘 아래 20여 일본경찰에게 포위되었다. 김상옥은 단신으로 일본경찰과 총격전을 벌여 다무라() 형사부장 등을 사살하고, 그 밖의 수 명에게 중상을 입힌 뒤 포위망을 뚫고 남산 쪽으로 자취를 감추었다.

그는 눈 덮인 남산을 넘어 지금의 금호동에 있는 안장사()를 찾아 승복을 빌려 입고 효제동 이혜수() 집에 은신하였다. 1월 22일 새벽 일본경찰은 우마노() 경기도 경찰부장의 총지휘로 수백 명의 무장경관이 효제동의 은신처를 완전 포위하였다. 김상옥은 단신으로 두 손에 권총을 들고 일본경찰과 접전 3시간 반 끝에 서대문경찰서 경부 구리다() 외 수 명을 사살하고 총탄이 다하여 최후의 일발로 자결하였다. ⑦ 제2차 암살파괴계획(· 등의 폭탄반입사건):1923년 초 의열단은 조선총독부 등 일제 관공서와 총독 사이토() 등 일제 고관을 대상으로 하는 제2차 파괴암살계획을 추진하였다. 이를 위하여 곧 상해에 비밀폭탄제조공장을 두고 폭탄기술자로서 독일인·헝가리인 등 각국인을 초빙하여 고성능의 폭탄을 제조하였다.

이를 국내로 반입하기 위하여 상해에서 톈진()으로 운반하였는데 여기에는 <조선혁명선언> 및 <조선총독부관공리에게>라는 유인물도 함께 포함되어 있었다. 이 폭탄반입계획은 그 실행을 김시현이 담당, 톈진에 가서 홍종우() 등을 지휘하여 수송하기로 하였다. 그는 당시 경기도 경찰부의 한국인 경부 황옥과도 동지적 결합을 하고, 1923년 3월 7일 안동현의 조선일보사 안동지국장댁에 들렀다.

12일 오전 6시 차로 김시현·황옥·김재진()·권동산() 등 4명이 폭탄 18개와 권총 5정을 가지고 톈진을 출발하여 서울로 향하고, 나머지 폭탄 18개와 유인물은 안동현 홍종우집과 신의주 조동근()집에 숨겨두었다.

그러나 위의 4명 중 김재진이 평안북도 경찰부 고등과 김덕기()에게 매수되어 이 계획을 일본경찰에게 밀고함으로써 홍종우·백영무()·조동근·조영천() 등 4명이 체포되고 폭탄 10개, 선언서·전단 691매를 압수당하였으며, 그 뒤 신의주에서 발견된 폭탄 8개와 합쳐 폭탄 18개를 압수당하였다. 또한, 경기도 경찰부에서는 서울에 도착한 김시현·황옥 등 10여 명을 체포하고 폭탄 18개를 압수하였다.

의열단의 암살파괴계획은 의거에 착수하기 위한 준비과정에서 좌절되고 이에 관련된 의열단원들은 모두 체포되고 말았다.

⑧ 동경 니주바시 폭탄투척의거:1924년 1월 5일동경 니주바시 사쿠라다몬()에 폭탄을 투척한 사건이 일어났다. 이 의거는 의열단원 김지섭()에 의하여 감행된 것으로 일본 천황이 사는 궁성을 파괴하고자 한 것이다.

김지섭은 신년 벽두 동경에서 열리는 의회에 조선총독을 비롯한 일제의 고관들이 참석한다는 소문을 듣고, 이곳에 폭탄세례를 주기 위한 목적으로 1923년 12월 20일 3개의 폭탄을 지니고 상해를 떠나 일본으로 향하였다. 더욱이 1923년 9월에 일어났던 관동대진재()에 희생된 동포들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해서도 이번의 의거계획은 그의 마음을 설레게 하였다.

그러나 막상 동경에 도착하여 제국의회가 휴회중임을 알게 되자 계획을 바꾸어 궁성에 폭탄을 투척하기로 하였다. 1924년 1월 5일 저녁 그는 궁성 니주바시 앞에 접근하여 우선 제1탄을 보초 경찰에게 던졌으나 불발되었으며, 다시 2탄을 던졌으나 역시 불발이 되어 정문 석책() 밖에 떨어지고, 마지막으로 던진 3탄도 불발이 되고 말았다.

이 거사는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실패에 돌아가고 그는 일본경찰에게 붙잡히게 되었다. 그는 사형 구형에 무기징역을 선고받아 복역중, 20년으로 감형되었으나 1928년 2월 몸이 극도로 쇠약하여 옥사하였다.

⑨ 동양척식회사 및 식산은행폭탄투척의거:1926년 12월 28일 하오 2시경 동양척식회사 및 조선식산은행에 폭탄을 투척한 사건이 일어났다. 이는 의열단원 나석주()에 의하여 이루어진 의거로, 의열단이 그동안 계획한 여러 차례의 암살 및 파괴공작이 실패한 뒤 모처럼 성공을 거둔 것이었다. 나석주는 1926년 7월 하순 톈진에서 김창숙이 준 자금으로 권총과 폭탄을 구입하여 같은해 12월 26일 인천에 도착하였다.

12월 28일 거사를 단행하기로 하고 하오 2시경 먼저 식산은행에 들어가 폭탄 1개를 던지고, 다시 동양척식회사로 들어가 폭탄을 투척하고 권총을 난사하면서 1층과 2층에서 수 명의 사원을 사살하였다. 동양척식회사를 수라장으로 만들고 그 곳을 나와 전차길로 뛰어나왔을 무렵 총소리를 듣고 경기도 경찰부경부보가 달려오자 그를 사살한 다음, 일본경찰 4, 5명의 추격을 받게 되자 권총으로 자결하였다.

의의와 평가

위에서 살펴본 의열단의 의거 외에도 제3차 폭탄계획·대구부호암살계획·북경밀정암살사건·이종암사건 등 의열단이 계획하고 실행한 의거는 계속되었는데, 의열단의 항일투쟁이 민족운동사상에 끼친 공헌은 매우 컸다.

참고문헌

  • 『기려수필(騎驢隨筆)』
  • 『약산(若山)과 의열단(義烈團)』(박태원, 백양당, 1949)
  • 『조선독립운동』 6(김정명, 원서방, 1967)
  • 『의렬단부장이종암전(義烈團副將李鍾岩傳)』(이종범, 광부회, 1970)
  • 『독립운동사』 5·7(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3·1975)
  • 『자료한국독립운동』(추헌수, 연세대학교 출판부, 1975)
  • 『독립운동사자료집』 11(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6)
  • 『한국민족운동사료 2-중국편-』(대한민국국회도서관, 1976)
  • 「한국민족운동사」(조지훈, 『한국문화사대계』 1,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1964)
  • 「민족운동으로서의 의열단(義烈團)의 활동」(김창수, 『3·1운동50주년기념논문집』, 동아일보사, 1969)
  • 「1920년대에 있어서 민족운동의 양상-의열단(義烈團)의 활동보유(活動補遺)-」(김창수, 『아세아학보』 12, 1976)
  • 「조선의열단(朝鮮義烈團)의 창립과 투쟁」(김승곤, 『군사』 5, 1982)
  • 「의열단(義烈團)의 성립과 투쟁」(김창수, 『한민족독립운동사』 4, 국사편찬위원회, 1988)
  • 「義烈團と金元鳳」(村秀樹, 『朝鮮史の枠組と思想』, 硏文出版, 19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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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원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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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원봉

출생1898년 9월 28일(음력 8월 13일)
대한제국 경상남도 밀양군 밀양읍 내이리(내이동) 901번지
사망미상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사인미상
국적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별칭호 약산(若山)
별칭 최림(崔林), 김약산, 진국빈(陳國斌), 이충(李冲), 김세량(金世樑), 왕세덕(王世德), 암일(岩一), 왕석(王石), 운봉(雲峰), 김국빈(金國斌), 진충(陳沖), 천세덕(千世德), 김약삼(金若三)
학력경성 중앙중학교 졸업,신흥무관학교 자퇴,황푸군관학교 졸업
직업정치인
배우자최씨, 박차정, 최동선
자녀2남
상훈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로동훈장(1958년)

김원봉(金元鳳, 1898년 9월 28일 ~ 미상)은 한국독립운동가이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정치인이다. 호는 약산(若山), 본관은 김해(金海)이다.

1919년 아나키즘 단체인 의열단(義烈團)을 조직하였고, 황푸군관학교를 거쳐 조선의용대를 조직하였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합류하여 임시의정원(경상도 지역구)의원, 광복군 부사령관 겸 제1지대장으로 활동하고 1944년 임시정부 군무부장에 선출됐다.

1946년 2월 민족주의민주전선, 인민공화당, 조선 공산당의 적색테러 단체인 조선민주청년동맹(약칭 조선민청)의 명예회장을 역임했다.[1][2] 1946년 8월 북조선의 합당[3]을 지지하였으며, 1948년 김규식·김구 등과 함께 남북협상에 참여한 뒤에 1948년 4월 월북하였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정부수립 후 국가검열성상, 노동상,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중앙위원,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 등을 역임했다.

1950년 한국 전쟁 당시 남파활동을 벌이기도 했다. 1954년 1월 25일 대한민국의 경제 혼란 및 선거 방해 목적으로 남파된 간첩단 4명이 체포되었다.[4] 1958년 이후 김일성과의 정치암투에 패배하여 숙청되었다.

 

생애[편집]

김원봉
김원봉
독립운동가 박차정과의 결혼 사진(1931년)
조선의용대 대장 재직 중
조선의용대 성립기념 사진 (1938년 10월 10일)
1921년 3월 5일자 동아일보 기사. 1920년 12월에 의열단최수봉이 밀양 경찰서에 폭탄 투척 기사.</ref>
1945년 12월 3일. 임시정부요인 귀국기념 사진.
해방 후 독립운동가이자 부인 박차정의 유해를 밀양에 안장하는 김원봉.
1946년 2월 민족주의 민주전선 회의장에서 연설하는 약산 김원봉
제1차 미소공위 환영 시민대회 집회에서. 왼쪽부터 김원봉,허헌,박헌영
1948년 9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초대 내각, 김원봉(뒷줄 오른쪽에서 두 번째 선글라스를 낀 사람)

1898년 9월 28일(음력 8월 13일) 경상남도 밀양군 밀양읍 내이리 901번지에서 아버지 김주익과 어머니 경주 이씨 이경념이며, 이경념은 그가 4살 되던 해 동생 경봉을 출산하다 사망했다. 아버지 김주익은 영양 천씨와 재혼하여 8남 2녀를 두었고, 또 다른 첩 박순남 슬하에서 3명의 이복 동생이 태어났다. 이 중 익봉은 요절했고, 계모 천연이가 낳은 이복 동생들 중 봉철, 봉기, 덕봉, 구봉은 뒤에 보도연맹원으로 몰려 한국전쟁 중 처형되었다.

중앙학교 재학 중 김원봉은 김약수(본명 김두전)·이여성(본명 이명건) 등과 교류하였다. 중앙중학교를 먼저 졸업한 김두봉, 윤치영과 나중에 졸업하게 된 무정 등을 만나 친분관계를 쌓는다. 1916년경성 중앙중학교를 졸업한 뒤 중국으로 망명하였다.

평안도 출신의 최석진이라는 사람의 딸과 결혼하였지만, 본처가 사망하자 동료였던 박차정과 결혼하였다. 1919년 2월 신흥무관학교에 입학해 6개월간 교육을 받았다. 하지만 졸업은 하지못하고 중퇴하였다.

1919년 11월 9일 길림성에서 양건호, 한봉근, 곽재기, 김옥 등과 회합하여 일본의 침략본거를 파괴할 것을 결의하고 의열단을 조직하여 의백에 취임, 국내의 기관 파괴, 요인암살 등 여러 차례 무정부주의적 항일 투쟁 활동을 벌인다. 단원은 김원봉, 양건호, 곽재, 김옥, 윤세위, 윤치형, 이성우, 강세우, 한봉인, 신철휴, 배동선, 서상락, 권준 등 13명이었다.(의열단 참고.) 이어 그는 공약 10조를 발표하였다.

  1. 천하에 정의로운 일을 맹렬히 실행하기로 한다.
  2. 조선의 독립과 세계 만인의 평등을 위하여 신명을 바쳐 희생하기로 한다.
  3. 충의의 기백과 희생정신이 화고한 자라야 단원이 될수 있다.
  4. 단의를 우선하고 단원의 의를 급히 한다.
  5. 의백 1인을 선출하여 단체를 대표하게 한다.
  6. 어떤 시간, 어떤 곳에서든 매일 1차씩 사정을 보고케 한다.
  7. 어떤 시간, 어떤 곳에서든 초회에는 필히 응한다.
  8. 죽음을 피하지 아니하여 단의에 뜻을 다한다.
  9. 일이 구를 위하여 구가 일을 위하여 헌신한다.
  10. 단의를 배반한 자는 학살한다.

제거해야 할 대상

  1. 조선총독부 총독 이하 고관
  2. 주조선 일본군 주둔군 수뇌
  3. 대만총독부 총독과 대만총독부 고관
  4. 매국적
  5. 친일파 거두
  6. 적의 밀정
  7. 반민족적 귀족 및 대지주

1924년 사회주의운동과 노동대중운동이 급격히 성장하는 추세에 편성하여 의열단 고위 간부 출신으로 국내 서울청년회의 유력한 성원이였다가 상해에 들어와 ¨청년동맹회를 결성한 윤자영(尹滋英)에게 많은 젊은이들이 찾아갔고, 윤자영 등은 그의 노선을 비판하였으며 단원의 이탈과 자금의 부족으로 생활마저 궁핍한 지경에 다달아 의열단의 활동은 점차 쇠퇴하게 되었다. 1925년 2월에는 김원봉이 2월 20일과 21일 동아일보를 통해 사회주의자들을 비판하는 내용의 글을 실었다가 일부 문제가 되었다.

이후 의열단의 소수의 의열투쟁에 한계에 도달되자 1926년 황포군관학교에 4기로 입학하였다. '최림'(崔林)이라는 가명을 쓰고, 조선공산당재건동맹, 조선민족혁명당을 조직하여 활동했다.

1926년 10월 졸업과 동시에 국민혁명군 소위로 임관되어 황포군관학교 군관단에 배속되었다. 조선민족혁명당을 조직되어 활동을 벌였지만 분열로 해체되었고 조선청년전위동맹을 창건하고, 최창익이 위원장이 되었다.[5]

1937년 조선총독부의 정보기관 보고에 의하면 김원봉은 자신의 자동차를 보유하고 있었으며, 임시정부보다는 장쉐량 일파에게 더 많은 자금을 받고 있었다고 보고하였다.[6] [7] 1937년 7월 10일, 중화민국 정부의 초청으로 피서지이자 중국 고관들의 회의 장소인 난징 서쪽의 루산(蘆山)에 초대되었다. 루산에는 김구 등이 와 있었다. 초대에서 중국 정부측 대표자는 일본을 상대로 통일전선을 결성해야 한다고 설득하였다. 귀환하기 전 중국 정부 대표자로부터 자금을 지원받았다.[8]

1942년 김원봉은 광복군 부사령관이 되었다. 1942년 7월 중국 화북에서 '조선독립동맹'이 창설되자, 민족혁명당과 의용대의 대원들 일부는 김원봉의 곁에서 이탈하여 독립동맹으로 건너갔다.[9] 1943년 박차정은 총상 후유증으로 사망하였다.

1944년 장준하을 영입하려 했으나, 거부당했다. 장준하는 '그가 미인계를 써서 현혹시키려 했다.'고 비판하였다.[10][11] [12] 장준하는 일본군 출신 한인들에게 임시정부광복군에 대한 불신을 조장하고 이소민 등을 파견하여 인척인 일본군 소위 출신 [[황용주]을 끌어들이려 한다고 보았다.[13] 장준하는 그가 계략을 써서 일본군 출신 한인에게 대한민국임시정부광복군에 대한 불신임을 조장한다 하여 이소민 등에 대한 자료를 지청천에게 보고하였다.[13]

1945년 1월 민혁당 중앙감찰위원장이었던 우강 최석순의 맏딸 동선(東仙, 일명 최동옥(崔東玉))과 결혼하였다. 아들 중근(重根)을 낳았다.

1945년 12월 3일 임시정부 요인들과 함께 귀국 제2진으로 귀국하였다. 1945년 9월 8일 정치적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해 조직된 조선인민민공화국에서 군사부장으로 선임되었다. 그러나 이 단체는 활동은 없다가 곧 해산되었다.[14] 1946년]] 2월 조선공산당이 좌익단결을 위해 '민주주의민족전선'을 결성하였는데 그는 2월 14일 민족주의 민주전선 중앙위원에 선출되고 5인의 공동의장에 선출되어 추대되어 활동하였다.

1946년 7월 22일 박헌영이 민전 협의회 석상에서 좌우합작에 반대하며 5개항을 제시했다. 민전 회의에서 좌우합작에 참여 여부는 표결로 결정되었다. 박헌영은 다수결에서 패배하자 5개항을 지지할 경우 합작을 지지하겠다고 제의했다.[15] 그러나 김원봉은 여운형과 함께, 박헌영의 5개항에 반대하고 나섰다. 이들은 5개항 가운데 토지몰수 조항이나 행정권을 인민위원회에 이양하는 조항, 입법기구 수립 반대 조항은 곧 합작반대로 비춰질 수 있으며 우익 측에서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라며 수정을 요구했다.[15] [16] 그러나 박헌영은 이를 듣지 않고 단독으로 5개항을 발표한다.

1947년 7월 좌우합작운동을 주도했던 여운형이 암살되자, '광명일보', '노력인민' 등 좌익지 7월 25일자에 게재하여 '여운형의 유지를 받들어 미소공위를 성공시키자.'고 호소했다.[17]

1948년 4월남북 제정당사회단체 대표자연석회의김구, 김규식, 박헌영, 리극로 등과 함께 남한측 정치단체 대표의 한 사람으로 협상에 참여, 4월 19일 참석자 8명의 수행원과 함께 북한으로 넘어가 협상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약산의 중경시절 비서를 지내고 상해에 살고 있던 사마로(司馬路)에게 보낸 편지를 살펴보면 “북한은 그리 가고 싶지 않은 곳이지만 남한의 정세가 너무 나쁘고 심지어 나를 위협하여 살 수가 없다”는 뜻을 피력하기도 했다.

1948년 6월 29일부터 7월 5일까지 제2차 전조선 제정당사회단체 대표자 연석회의를 다시 개최하자 참여, 8월 25일에 북쪽에서도 총선거를 실시할 것을 결의하였다. 그해 8월 북한 최고인민회의 제1기 대의원이 되었고, 9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 수립에 참여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수립 후 내각 국가검열상이 되었다.

1948년 8월 북한 최고인민회의 제1기 대의원에 선출되었다. 정부수립 이후 국가검열상에 임명되었다(9월 9일).[18]

한국 전쟁의 과정에서 그의 형제 4명과 사촌동생 5명이 보도연맹으로 몰리거나, 월북자의 가족이라는 이유로 대한민국 국군에 의해 총살당하거나 살해되기도 했다. 그 학살의 과정에서 동생 김봉철, 김학봉만이 살아남았다. 그의 아버지 김주인은 외딴 곳에 유폐되었다가 굶어 죽었다.[19]

1952년 5월 내각 노동상, 1956년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중앙위원 등을 역임하였다. 1957년 8월 최고인민회의 제2기 대의원에 선출되어 상임위원회 부위원장에 선출되었다.

1954년 1월 25일 남파 간첩단 4명이 체포되었는데, 조사결과 이들은 김원봉의 직접 지휘아래 남한의 경제 혼란 및 선거방해 목적으로 남파된 것으로 밝혀졌다. 이들은 한국전쟁 이후부터 남파 활동을 벌였다. [4] 1958년 그의 탄생 60주년을 기념하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로부터 노동훈장을 수여받았다.[20]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의 중앙위원 및 중앙위원회 상무위원직을 맡았다. 그러나 1956년 종파사건을 계기로 연안파가 숙청되면서 1954년에 실각했다. 1958년 10월 최고인민회의 상무위원 부위원장직에서 해임되었다.

이후의 생애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 없다. 1964년 대한민국으로 탈북한 조선로동당 자강도당선전부장을 지낸 김남식은 김일성 김영주 형제의 반 김일성 숙청에서 김원봉도 이 시기에 학살당했다고 말했다.[21]

그의 월북에 대해서 김삼웅 전 독립기념장을 비롯해 진보성향의 인물들은 친일파들 탄압에 못이겨 월북하였다고 주장했지만, 이에 대한 근거는 없다. 한편, 상해에서 김원봉과 대면한 황용주 전 MBC 사장은 김원봉의 월북에 대해 "민전이 흐지부지되고 좌우합작이 실패한 데 대한 실망에다 자기를 따르던 단원들이 거의 북쪽으로 돌아서 버린 점에 따른 동요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던 것으로 보이며 또 약산은 북행하기 전 박헌영을 자주 만나는 눈치였다며 아마 그의 북행에는 박헌영의 끈질긴 권유도 크게 작용했을 것"이라고 추측했다.[22]

인물평[편집]

운암 김성숙은 그를 가리켜 '약산은 좋은 사람이요, 능력은 별로 없는 사람이지만 사람은 굉장히 좋아요. 혁명 지조가 있는 사람이고, 그러나 학식은 없다. 또 그를 가리켜 '굉장한 정열의 소유자였습니다. 동지들에 대해서도 굉장히 뜨거운 사람이었지요. 그는 자기가 만난 사람을 설복시키고 설득시켜 자기의 동지로 만들겠다고 결심하면 며칠을 두고 싸워서라도 모든 정열을 쏟아서 뜻을 이뤘지요. 그렇기 때문에 동지들이 죽는 곳에 뛰어들기를 겁내지 않았던 것이 아닙니까? 그만큼 남으로 하여금 의욕을 내게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것이 김원봉의 가장 큰 능력이었습니다.[23]'라고 평하였다.

상훈[편집]

가계[편집]

남에서 가족들 중 남동생들은 모두 보도연맹 사건으로 살해당한 것으로 알려져 있었으나 김봉철(1918 - 1986)은 당시 생존하였다. 이복동생 김봉철은 4,18생들의 죽음에 대한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밀양피학살자조사대책위원회에 참여하였다. 옥살이를 하기도했다. 이후 1986년 사망하였고 대법원에서 재심결정 및 무죄를 판결받았다.[24] 현재 김원봉의 여동생 김학봉은 대한민국에서 생존해 있다.

대중문화의 작품[편집]

뮤지컬[편집]

드라마[편집]

영화[편집]

각주[편집]

  1. 조선민주청년동맹 결성대회 서울신문 중앙일보 1946년 04월 26일
  2. 허헌김원봉양씨 러—취장관방문 1947년 5월 22일 경향신문
  3. 조선민족혁명당 김원봉, 3당합당 지지 서울신문 1946년 8월 4일
  4. 어마어마한간첩단체포 김원봉이직접지휘 1954년 1월 26일 경향신문
  5. 시대의창 편집부, 《중국항일전쟁과 한국독립운동》 (김승일 역, 시대의창, 2005) 149페이지
  6. 이정식, 《대한민국의 기원》(일조각, 2006) 71페이지
  7. 사상휘보 제14호(1938.3)(조선총독부고등법원사상부, 1938) 219~222페이지
  8. 이정식, 《대한민국의 기원》(일조각, 2006) 70페이지
  9. 이종석 《조선로동당연구(역비한국학연구총서 7)》 (역사비평사, 2006) 234페이지
  10. 민족주의자의 길(장준하 저, 세계사, 2002.05.02) 140페이지
  11. 장준하(민족주의자의 길)(박경수 지음, 돌베개 출판사, 2006.11.30) 165 페이지
  12. (26) 파쟁 속의 망명정부
  13. 장준하전집 1 : 돌베개(장준하, 세계사, 2001) 94~95페이지
  14. 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 1940년대편 1권 60쪽
  15. 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1940년대편 2권〉(인물과사상사, 2004) 285쪽.
  16. 브루스커밍스, 한국전쟁의 기원 (김자동 역, 일월서각) 331페이지
  17. 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1940년대편 2권〉(인물과사상사, 2004) 51~52쪽
  18. “김일성내각 組閣을 완료”. 경향신문. 1948년 9월 11일. 1면. 
  19. 김삼웅, 약산 김원봉 평전 584쪽, 시대의창 2008년
  20. 이우탁《김구, 장보고, 앙드레김》(이우탁, 출판사 동아시아, 2006) 144페이지
  21. 김원봉)등수천명)을학살 1964.01.29 동아일보 7면
  22. 의열단 창설한 항일무장투쟁의 "상징" 1990년 6월 22일 한겨레
  23. 김학준, 《혁명가들의 항일 회상》 (도서출판 민음사, 2005) 101
  24. 반세기만에 ‘친북 누명’ 벗은 독립투사 동생 2010-07-14 한겨레

박광()[1882~?]은 지금의 고령군 대가야읍에서 박지환()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활동사항

박광은 1909년 안희제(), 윤세복(), 김동삼(), 신팔균() 등 80여 명의 동지와 함께 비밀 결사 조직인 대동청년당()을 꾸려 항일 활동을 펼쳤다. 그 후 중국으로 건너가 문상직()·이남기() 등과 함께 만주 안동현()에서 표면상 신동상회()라는 곡물 무역상을 경영하면서 독립운동의 거점으로 삼아 백산상회()와 연계하여 독립운동가를 은닉해 주거나 여비를 제공해 주었다. 또한 신규식(), 조성환(), 박은식() 등을 통해 미국 샌프란시스코와 하와이 호놀룰루 동포들의 기관지인 『신한민보()』·『국민보()』 등을 들여와 국내에 배포하며 항일 독립 의식의 고취에 힘썼다.

1919년에는 영남과 호서 지방 유림 137명이 서명한 독립청원서를 파리강화회의에 제출하기 위해 만주에 건너온 김창숙()과 박돈서()에게 여행 편의를 제공하고 국내외의 연락을 맡아 활동하였다. 1919년 7월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통신원 황대벽()에게서 고유문()·『독립신문』·대한민국 임시정부 각원개조서() 등의 문서를 교부받아 송재기()를 통해 국내에 배포하였다.

그 후 김원봉()이 주도하여 조직한 의열단()에 가입하여 신동상회를 독립운동 거점으로 제공하며 활동하였다. 1923년 11월에는 김원봉에게서 무기와 신임장을 인수받아 강홍열()·이상쾌()에게 전해 줘 이들로 하여금 국내로 잠입하여 김정현()·구여순()·오세덕()·문시환() 등과 함께 군자금 모집 활동을 펴도록 하였다.

상훈과 추모

1977년과 1990년에 각각 대통령 표창과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 『고등경찰요사』(경상북도 경찰부, 1934)
  • 김정명, 『명치백년사총서』1(원서방, 1967)
  • 김승학, 『한국독립사』하(통일문제연구회, 1972)
  • 문일민, 『한국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1973)
  • 『한국민족운동사료』중국편(국회도서관, 1976)
  • 『독립운동사』1~10(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0~1978)
  • 『독립운동사자료집』1~14(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0~1978)
  • 『독립유공자공훈록』(국가보훈처, 1986)
  • 『고령군지』(고령군지편찬위원회, 1996)
  • 『한민족독립운동사자료집』28(국사편찬위원회, 1996)

    [네이버 지식백과] 박광 [朴洸]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한국학중앙연구원)

조동호

 

1.    독립운동가 유정 조동호 http://blog.daum.net/yoojung0815

 

 

2.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조동호

출생1892년 8월 4일
조선 충청북도 옥천군 청산면 백운리
사망1954년 9월 11일 오후 1시
대한민국 충청북도 옥천군 청산면 백운리
사인병사(고문 후유증)
거주지대한민국 서울특별시
국적조선, 대한제국 대한제국, 대한민국 대한민국
별칭호는 유정(榴亭), 다른 이름 조동우(趙東祐)
학력중국 금릉대학 중문학과
직업독립운동가·교육인·정치인·언론인
종교기독교
배우자박소동득(朴小東得)
자녀아들 조윤구(趙潤九), 아들 조준구(趙準九)
부모부 조명하(趙明夏), 모 박빈(朴彬)
친척장인 박 광(朴 洸)독립운동가, 건국훈장 애족장
서명
조동호 서명.jpg
웹사이트유정 조동호 기념사업회

조동호(趙東祜, 1892년 8월 4일 ~ 1954년 9월 11일)는 한국의 독립운동가이자, 언론인, 정치인이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위원, 임시의정원을 지냈으며, 1921년 중국 각지에서 한국의 독립운동가들과 중국의 민간인들간에서 한중친선과 한국독립 지원, 반제국주의 활동등을 목적으로 결성한 민간단체 한중호조사에 깊이관여했다. 1925년에는 조선공산당 창당 참여에 관여하였다. 일제강점기 말기에는 비밀결사 독립운동 단체인 건국동맹에 주요인물로 활동했고, 해방 정국에는 건국준비위원회 선전부장, 근로인민당좌우합작운동에 참여하여 활동했다. 언론인으로는 중국 상해에서 '구국일보' 신문기자와 대한민국 임시정부 기관지 독립신문 발간인으로 논설주필을 맡았으며, 국내에서는 동아일보조선중앙일보 편집고문,논설주필위원으로 지냈다.

조선 영조 때의 노론 문신인 조문명, 조현명은 그의 8대 방조(傍祖)였다. 본관은 풍양으로 호(號)는 유정(榴亭)이다. 충청북도 출신. 이름의 혼동으로 일부에서는 조동우(趙東祐)[1] 로도 불린다.

 

생애[편집]

생애 초기[편집]

출생과 가계[편집]

조동호는 본관은 풍양(豊壤)이고, 조명하(趙明夏,1862~1900)와 고령 박씨 박빈(朴彬)(1864~1945)의 3남 2녀 중 3남으로 충청북도 옥천군 청산면 백운리 299번지에서 출생하였다.

그의 가계는 조선시대서인 노론으로 영조의 장남 효장세자의 처가였다. 효장세자의 장인인 노론 탕평파 풍릉부원군 조문명영의정 풍원부원군을 지낸 조현명, 좌의정을 지낸 조재호(趙載浩)가 그의 방계 조상으로, 그는 조문명·조현명 형제의 사촌이자 한성부서윤을 지낸 조철명(趙哲命)의 8대손이었다.

성장과 학창시절[편집]

어려서 한학을 공부하다가 1905년 청산에 신명사립학교(현 청산초등학교)가 개교 하면서 신학문에 뜻을 두고 3년을 다니다가 큰형 조동석의 권유로 한성부로 상경하였다.

1908년 한성 경성측량학교(京城測量學校)에 입학, 1910년에 수료한 뒤, 측량기사가 되었다. 1907년경 무렵에 국립측량학교에 다닐 때 같은 건물에 있던 국립우편학교 출신인 여운형을 우연히 만나 이때부터 그는 여운형과 일생의 동지가 된다.[2] 이후 여운형의 소개로 이만규를 알게 되었고 이들은 서로 친해지면서 교우를 쌓게 된다.

독립운동에 투신[편집]

1912년 조동호의 누이동생이 결혼하여 그의 후행으로 서강갈때였다. 이 당시 조동호는 측량기사였는데, 신촌으로 가던 중 일본인과 한국인이 싸움을 하는 광경을 목격했다고 한다. 이때 일본 순사는 일본인 편만 들고 한국인에게는 야단을 쳤다고 한다. 이에 조동호는 그의 부당성을 지적하여 일본순사 5명과 실랑이를 벌였다고 한다. 이 사건으로 경찰에 잡혀 서대문경찰서에서 구타를 당하고 불법으로 약 1개월간 잡혀있다가 풀려났다. 이를 계기로 조동호는 항일의식과 독립운동에 투신을 결심하게 된다.[2]

1914년 12월 하순 여운형과 함께[3] 중국으로 망명하여 남경 금릉대학(南京金陵大學: 현 난징 대학교) 사범과 중문학부에 입학, 1917년 졸업했다.

독립운동[편집]

독립운동 입문[편집]

1917년 금릉대학 졸업후 상하이에서 중국인 황자오(黃覺)가 경영하는 구국일보(救國日報)에 입사하여 기자가 되면서 언론계에 입문했고 박은식, 신규식, 등이 조직한 독립운동단체인 동제사(同濟社 :1912년)에 이사로 참여하면서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1918년 8월 상하이(上海)에서 여운형(呂運亨), 장덕수(張德秀), 김철(金澈). 선우혁(鮮于爀), 한진교(韓鎭敎)등 6인과 함께 신한청년당(新韓靑年黨)을 조직하고, 1919년 프랑스 파리에서 열리는 파리강화회의미국 윌슨대통령에게 제출하기 위한 조선독립청원서여운형 등과 함께 영문으로 작성하였다.[4]

신한청년당은 처음에는 작은 모임이었으나 이 당의 활약으로 일본에서는 유학생들이 모여 2.8 독립선언이 국내에서는 3.1 만세운동이 발생하게 된다. 그 후 큰 혁명을 일으킨 한국 최초의 큰 정당으로 발전하여 당원이 150명으로까지 늘어났다.[4]

상해 임시정부 참여[편집]

1921년 1월 1일 신년하례회. 제4열 맨 윗줄 우측 두 번째가 조동호.

1919년 4월 10일 상해 프랑스 조계지 김신부로(上海 法界金神父路) 22호에서 신한청년당원들이 주축이 되어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 동참하였다. 조동호는 임시의정원 충청도 대표의원과 임시정부 국무위원에 피선되었다. 임시정부에서는 임시정부 기관지로 안창호, 이광수, 차이석(車利錫) ,백성욱(白性郁) 등과 같이 독립신문을 창간하여 조동호의 노력으로 성경에서 그 글자체를 따서 한글 활자를 제조, 사용 하였다. 1921년 이동휘(李東輝)가 주도한 상해파 고려공산당에 입당, 고려공산당 출판부위원이 되었다.[3]

1921년중국인들과 임정요인들인 노백린, 김규식, 여운형, 이유필 등과 함께 중국어에 능통하고 중국인과 친분이 두터운 유정 조동호(榴亭 趙東祜)가 핵심적 역할을 수행하여 한중호조사(韓中互助社)가 조직되었다.

이르쿠츠크파와 상해파의 사회주의 운동의 주도권을 둘러싼 경쟁을 하다가 이동휘와 결별하고, 이르쿠츠크파와 연대하여 1921년 7월 김만겸(金萬謙)·여운형 등과 함께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 상하이 지부를 조직했다.[3] 1922년 10월 10년내에 1만명의 병력과 10만원의 자금을 모아 독립전쟁을 개시한다는 목적으로 상해 샤페이로(霞飛路) 바오캉리(寶康里) 24호 조상섭의 집에서 여운형, 김구, 이유필 등과 한국노병회(韓國勞兵會)를 창립하는데 참여하였다. 1923년 4월 2일 한국노병회 1차 정기총회에 참석하고 노병회 교육부 부원에 임명되었다. 조동호는 곧 최석순 등과 함께 한국노병회 회계검사원에 임명되었다. 1923년 12월경 귀국하였다.

언론 활동과 정당 활동[편집]

귀국 후 조동호는 〈동아일보〉에 입사하였다. 이후 동아일보 논설위원과 동아일보 특파원 등 언론인으로 활동하였고[3],[5] 1924년 11월 19일 사회주의운동단체인 화요회(火曜會)가 출범하자, 그는 화요회에도 가입, 참여하였다.[3]

1925년 4월 17일 김재봉(金在鳳)·김찬(金燦) 등과 함께 조선공산당을 창당, 조직하는데 참여하였고[3], 조선공산당 중앙집행위원 겸 조직부 책임자로 선출되었다.[3] 25년 6월 소련에 파견되는 조선공산당 대표로 소련모스크바에 건너가 코민테른 위원들과 만나고 코민테른의 정식 승인을 받아왔다.[3]

1928년 2월 상해 일본 영사관 경찰에 체포, 본국으로 강제 송환되었다. 이후 경성 종로경찰서로 압송되어 서울 경성지법에서 치안유지법 위반과 증거인멸죄로 4년형을 받아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했다.

1930년대 후반[편집]

1931년 12월 만기 출옥 후 조동호는 사촌동생 조동순의 매제인 충남 논산의 갑부 윤희중 및 그의 지인들과 상의하여 신문창설의 자금을 원조하여 줄 것을 약속 받고 중앙일보를 인수했다. 이어 중앙일보는 조선중앙일보로 개칭하고 평생 동지인 여운형을 사장으로 영입하고 조동호는 편집고문, 논설위원 주필로 활동하였다. 1933년엔 한국인 젊은청년들을 독립운동가로 양성하기 위하여 중국으로 유학 보내다 일제에 발각되었다.

1932년 11월 중국에 있던 김단야정태희를 시켜 여운형에게 연락하여 조동호를 상해로 내보내라는 말을 전하였다.[6] 조동호는 여운형의 부탁을 받고 정태희영도사 승방(僧房)에 숨겨주었다. 여운형조동하양하석을 일선에서 활동하게 하면서 조동하양하석을 국외로 내보낼 생각이었다.[6]

그러나 정태희가 국외로 출국하려다가 조선총독부 이동경찰에 검거당하여 신의주감옥에 수감되고 조동호도 홍증식과 함께 끌려가게 되었다.[6] 다시 신의주형무소에서 2년 반 동안 옥고를 치렀다. 1936년 3월에는 의열단원 출신의 독립운동가 박광(朴洸)의 차녀 박소동득(小東得)과 결혼하였다.

조선건국동맹 창건[편집]

서울 종로구 낙원상가에 위치해 있는 건물. 이 건물은 1944년 8월 10일, 여운형을 중심으로 조직된 지하 비밀 결사 독립운동 단체인 건국동맹이 결성되었던 곳이었다.

1938년 6년반의 옥중생활과 일제의 예비검속자로 지명되어 활동을 하지 못하다가, 경북 봉화군 명호면 도천리의 사금광(砂金鑛)현장으로 피신하였으며, 대륙광업사에서 근무하였다.

1941년 일본진주만 폭격 소식을 접하고 일본의 패망을 예견하였다. 이미 국제정세가 일제의 패망을 예고하면서 독립이 가능하다는 희망 하에 1944년 8월 10일 서울 경운동「삼광한의원」현우현의 집에 조동호, 여운형, 김진우, 현우현, 이수목 등이 모여 비밀 결사단체인 조선건국동맹을 창건하여 조국 해방의 준비를 하게 된다. 건국동맹에서는 군사위원회와 농민동맹을 조직했으며 위원장에는 여운형, 조동호는 내무부 담당과 군사위원회를 담당, 비밀히 활동하다가 1945년 7월 24일 부민관 사건으로 8월 4일 이걸소(李傑笑)·이석구 등과 함께 관철동집회소에서 총독부 경찰에 체포되어 경기도 경찰부에 투옥되었다.

정치 활동[편집]

8.15 해방과 건국준비위원회[편집]

1945년 일제가 패망한 다음날인 8월 16일 오후 1시 경기도 경찰부에서 석방, 출옥했다. 해방과 동시에 여운형을 중심으로 한 건국동맹 동지들이 건국준비위원회(建國準備委員會)(위원장 여운형)를 조직했고, 조동호는 선전부장(宣傳部長)을 맡았다. 그러나 조동호는 일제 강점기 잔혹한 고문등에 시달리면서 지냈기 때문에 오랜 지병을 앓아왔었던데다 병세가 악화되어 사실상 활동이 불가능한 상태였다. 때문에 8월 22일에 선전부장직을 사임하고 수원에 있는 누님댁으로 가서 요양생활을 하게 된다. 9월 14일 건준을 중심으로 조선인민공화국이 조직되자, 조동호는 조선인민공화국의 중앙위원 겸 내무부장 대리로 선출되었다.[3]

정당·사회단체 활동[편집]

1946년 2월 민주주의민족전선의 중앙위원이 되었고[3], 정치학교의 개교에도 참여하였으며[3], 그 해의 제1차 미·소 공동위원회에 참가하였다. 그러나 미·소공위는 우익세력의 반발로 무산되고 만다. 1946년 4월 실업자동맹(失業者同盟) 을 조직, 위원장에 취임하고 유정정치학교(榴亭政治學校)를 설립하여 정치인과 공무원 양성에 심혈을 기울였다. 1947년 4월 여운형 등에 의해 근로인민당(勤勞人民黨)이 조직되자 조동호는 근민당 정치협의회 위원으로 추대되었고, 1947년 5월,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가 개최되었을때, 미소공위 대책위원회 위원에 선출되었다. 그러나 평생동지인 여운형7월 19일 서울 혜화동 로터리에서 암살 당하자 정계에서 은퇴하고 낙향하였다.

말년[편집]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김일성(金日成)이 소련과 중공의 등에 업고 남침(南侵)을 했을 때 조동호는 다음과 같이 예견하면서 한탄을 했다고 한다.

김일성은 나이가 어려 철이 안 난 아해(아이 :생각이 없다는 뜻)이다. 백성을 다 죽이고 어쩌자는 건가. 남북(南北)이 이제 원수가 됐으니 우리(남과 북)가 합(合)치려면(남북통일) 앞으로 100년은 족히 걸릴 것이다.

[7]

그 후로 경기도 수원 교동 35번지에 살던 누님의 집과 고향을 오가면서 일제 강점기 투옥 생활 중 고문으로 얻은 지병으로 투병생활을 하다가 한국 전쟁을 겪고 1954년 9월 11일 오후 1시 추석날, 고향인 옥천군 청산면 백운리에서 한 많은 생을 마감하였다.

사후[편집]

사후 바로 경기도 이천군(현 이천시) 마장면 해월리 산24번지 언덕에 안장되었다.

조동호는 여운형과 함께 활동한 사회주의계 독립운동가로, 대한민국에서 좌익계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공적 평가가 시작되면서 공적을 인정받았다. 2005년 3월 1일에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이 결정에 따라, 경기도 이천군에 모셔져 있던 묘소를 그해 8월 30일 대전 현충원 애국지사 제3묘역으로 천장하였다.

평가[편집]

연보[편집]

가계[편집]

  • 장인 : 박광(朴洸[8], 다른 이름은 박황(朴況), 근호(根浩), 본관은 고령, 1882년 6월 16일 - 1970년 3월 5일)독립운동가. 건국훈장 애족장 서훈(1977년)

기타[편집]

  • 중국의 구국일보(求國日報),중화신보(中華新報)의 기자로 활동했고, 1919년부터 23년까지는 임시정부의 기관지 독립신문의 필진이었다. 석방 이후에는 동아일보조선중앙일보에서 기자, 언론인으로도 활동하였다.
  • 유정정치학교(榴亭政治學校)를 운영할 때 여러 번 결혼 주례를 맡았으며, 주례의 감사로 양복이나 구두 와이셔츠 등 선물해 오는데 대체로 몸에 맞지 않는다는 핑계로 후배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 체구는 장신으로 180cm의 거구였다.
  • 여운형과는 1907년 만난 이후 평생 친구로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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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체스카 도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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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체스카 도너

출생1900년 6월 15일(1900-06-15)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
사망1992년 3월 19일 (91세)
대한민국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사인병사(노환)
매장지대한민국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동작구 사당2동 국립서울현충원
거주지오스트리아 오스트리아 (1900~1933)->미국 미국 워싱턴 D.C(1933~1945)->대한민국 대한민국 서울특별시(1945~1960)->미국 미국 하와이(1960~1965)->오스트리아 오스트리아 (1965~1969)->대한민국 대한민국 서울특별시(1970~1992)
별칭이금순 또는 이부란
학력-
직업대통령 영부인
종교개신교
배우자헬무트 뵈룅(1920 - 1923, 이혼), 이승만(1875 - 1965)
자녀양자 이강석(사망), 양자 이인수
부모부:루돌프 도너
친척며느리:조혜자, 손자:이병구, 손자:이병조

프란체스카 도너(독일어: Franziska Donner 프란치스카 도너[*], 영어: Francesca Donner Rhee, 1900년 6월 15일 ~ 1992년 3월 19일)는 대한민국의 제1, 2, 3대 대통령 이승만의 두 번째 아내로, 한번 결혼했으나 이혼했고, 1931년 빈 회의에 참석차 오스트리아를 방문한 이승만과 만났다가 그와 재혼하였다.

1960년 이승만의 하야 이후 함께 하와이에 망명하였고, 이승만 사후에는 오스트리아로 가 있다가 1970년 대한민국 정부의 허가로 귀국하였다. 오스트리아 출신 귀화인으로 대한민국의 1번째 영부인이었다. 한국어 이름은 이금순 또는 이부란(李富蘭)이다. 별칭은 호주댁[1] 이다.

 

생애[편집]

생애 초반[편집]

프란체스카 도너는 1900년 오스트리아 에서 가톨릭 가문[2]오스트리아 사업가 루돌프 도너의 3명의 딸 중 막내로 태어났다. 1920년 독일의 자동차경주 선수 헬무트 뵈룅과 결혼하였으나 3년만에 이혼하였다.

이승만과의 결혼[편집]

1934년 제네바에서 국제 연맹 회의에 참석차 방문한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표 이승만(李承晩)을 처음 만났고, 모친의 반대에도 재혼을 강행하여 같은 해 10월 8일 미국 뉴욕 클레어몬트 호텔에서 결혼했다.

미국에서 결혼식을 올린 이승만과 프란체스카 도너

그는 한때 ‘호주댁(濠洲宅)’으로도 불렸는데, 이는 이승만과 프란체스카 도너의 존재를 받아들일 수 없었던 한인 교포들과 독립운동가들이 그를 여사라 부르지 않고 ‘호주댁’이라 부른 데에서 비롯한다.[출처 필요] 참고로 ‘호주댁’은 그의 출신 국가인 오스트리아가 이름이 비슷한 나라인 오스트레일리아로 와전돼서 붙은 이름이다. 한때는 미국 출신이라는 설도 돌기도 했다.[출처 필요] 이승만은 그에게 직접 이금순, 이부란이라는 한국어 이름을 지어주기도 했다.

한국 입국[편집]

한국 방문 중 경교장을 찾아온 피치 박사 부부와 함께 (1946년)
앞줄 오른쪽에서 두 번째가 프란체스카 도너, 가운데는 김구, 앞줄 왼쪽은 피치 박사 부부, 앞줄 오른쪽은 조완구, 뒷줄 왼쪽 첫 번째는 엄항섭, 세 번째는 이기붕, 네 번째는 안우생, 가운데는 안미생, 오른쪽 첫 번째는 선우진, 네 번째는 서영해

1945년 10월 이승만과 함께 귀국하였다. 이후 돈암장이화장에서 거주하다가 이승만은 1948년 5월 30일에는 국회의장에, 8월에는 대통령에 선출되었고 프란체스카는 이승만을 따라 경무대로 이주하여 살았다. 1948년 1월 12일 UN한국위원회가 서울에 도착하자 이승만을 따라 회의에 참관하였다.

이후 남편 이승만이 제헌 국회의원과 국회의장에 당선되고, 초대 대통령에 선출되자 영부인 자격으로 이화장에서 경무대에 입주하였다. 그러나 경무대 입주 직후 남편 이승만을 만나는 방문객 문제에 일일이 개입하여 보좌관들과 마찰을 빚기도 했다.

제1공화국 시절[편집]

남편 이승만임영신과 불륜관계라는 소문이 돌자 마자 이유 없이 임영신을 해고하였고, 그 뒤 윤치호의 딸 윤노라가 그녀의 시중을 들다가 이승만의 비서인 이기붕의 부인 박마리아윤치영의 부인 이은혜가 프란체스카의 시중을 들게 되었다. 그러나 양반 출신의 고고한 이미지의 이은혜를 부담스러워한 반면 가난한 집안 출신이며 평소에 싹싹한 박마리아를 편애하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박마리아와 그녀의 남편 이기붕이승만의 최측근으로 발탁되는 계기를 마련한다. 박마리아는 그녀의 총애를 자신의 남편 이기붕의 권력을 강화하는 데 이용한다.

1960년 5월 29일자 경향신문.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성명 발표 후 하와이 망명가는 모습

청와대의 방문객과 접대 문제에 일일이 개입하면서 이승만의 보좌관이었던 박용만과 외무장관 장택상 등과 마찰을 빚기도 했다. 장택상은 프란체스카에게 밉보였던 박용만을 특별히 배려하여 그녀의 시선과 멀어지도록 자신의 주변으로 발령시켰다.

1955년 11월 중앙대학교 대학원에서 명예법학박사 학위를 수여받았다.[3]

생애 후반[편집]

두 번째 남편 이승만 한국 대통령

1960년 쇠약해진 이승만을 대신해 여러 정책 문제를 자신이 스스로 처결했다. 얼마 뒤 4·19 혁명으로 이승만 대통령이 자진 사퇴한 후 하와이로 휴양차 출국하자 함께 하와이로 떠났다. 거주지를 정하지 못해 수시로 거처를 옮겨다니던 이승만과 프란체스카 도너는 하와이 한국인 교포단체의 유지인 최백렬(崔伯烈), 오중정(吳重政), 윌버트 최 등의 도움으로 한 빌라에 머무르다가 이승만의 병세가 악화되면서 하와이의 요양원으로 옮겨졌다.

1965년 7월 19일 이승만이 사망하고 그 뒤로도 하와이에서 거주하다가 외무부 장관이 발급한 특별 여권을 소지하고 오스트리아로 갔다. 이후 친정 동생, 친정 언니의 집을 전전하였다.

1970년 5월 16일대한민국 정부의 배려로 귀국하였다.[4] 이후 청와대가 주관하는 각종 행사에 귀빈으로 초대되었다. 이후 양자 이인수 내외와 함께 살았다. 만년에는 동작동 국립묘지의 중단에 묻힌 남편 이승만의 묘소를 찾아 참배하는 것을 낙으로 삼았다.

1987년 이승만의 전직 비서였던 윤치영의 구순 기념 논문 봉정식에 참석하였다. 1990년 소피텔 엠배서더 호텔에서 90회 생일 축하연을 했다. 이 때 오스트리아에 남아 있던 소수 친지들의 방문을 받았다. 1992년 3월 19일 0시경 서울특별시 이화장에서 향년 92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사후[편집]

3월 23일 서울 정동제일교회에서 영결식을 마친 뒤 동작동 국립묘지의 남편 이승만의 묘소 옆에 안장됐다.

가족 관계[편집]

신혼기간(1932년 미국에서)

저서[편집]

  • 《이승만 대통령의 건강(이승만 연구총서 1)》(출판사 촛불, 2006)

학위[편집]

평가[편집]

이 문단은 토막글입니다. 서로 지식을 모아 알차게 문단을 완성해 갑시다. 내용에 대한 의견이 있으시다면 토론 문서에서 나누어 주세요.

이승만의 비서실장을 지냈던 정치인 윤치영의 공보비서로 돈암장을 출입했던 최기일은 그를 상당히 인색하고 냉정하다고 평가했다.

최기일에 의하면 그는 '매우 인색한 사람이었다. 예를 들면, 이 박사의 생신날이 되었을 때 사람들은 집오리고기, 닭고기, 쇠고기 등 온갖 종류의 귀한 식품들을 가져왔다.[6]' 그러나 '그녀는 남은 음식을 돈암장 직원들과 나눌 수도 있었을 텐데 그러지 않았다. 일부 음식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어버릴 수도 있었을 텐데 그러지 않았다. 결국 1주일 후에 음식들이 상했기 때문에 그 전부를 내버려야 했다.[6]'는 것이다.

그는 남북협상, 좌우합작론을 주장하다가 전향하여 이승만을 찾아온 안재홍을 무시하고 냉소적으로 대했다. 이를 본 최기일은 '안재홍 씨가 프란체스카 여사에게 푸대접을 받고 가시는 것을 보고 나는 조선 사람으로서 분한 마음이 들었다.[6]'고 증언한 바 있다.

이승만의 비서인 박용만은 그녀와 수시로 충돌하던 사람 중 한사람이었는데, 그는 이승만 박사가 괄괄한 성품의 첫 부인과 이혼한 이후 그녀와 결혼한 것을 안타까워하며 이승만이 평생 후덕한 성품의 여성과 결혼하지 못했던 것을 한탄했다.

프란체스카를 연기한 배우[편집]

같이 보기[편집]

각주[편집]

  1. 이동 당시 오스트리아와 오스트레일리아를 착각한 사람들 때문에 이런 별명이 붙었다. 프란체스카 도너는 분명히 오스트리아 출신이나, 오스트리아오스트레일리아의 국명이 비슷한 관계로 이런 오해가 생겼다.
  2. 이동 Donner는 동유럽 유대인(Ashkenazic Jew)의 성. Millett논문에 따르면 여러 대 위의 집안 배경이 유대인. 이승만 부부와 친하였던 Oliver는 "from the Central European background"라 표현
  3. 이동 "중대서 학위 수여 대통령부인등 육명", 경향신문 1955년 11월 07일자 3면, 정치면
  4. 이동 월간조선 2001년 3월호
  5. 이동 이봉수는 이승만의 본처 박씨 소생 장남이다. 이봉수에게 프란체스카는 계모가 된다.
  6. 이동: 최기일, 《자존심을 지킨 한 조선인의 회상》 (생각의나무, 2002) 92페이지

참고 서적[편집]

바깥 고리[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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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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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李承晩[1], 1875년 4월 18일 ~ 1965년 7월 19일)은 독립운동가이자, 조선과 대한제국 및 대한민국의 언론인이자 정치인이며, 대한민국의 제1·2·3대 대통령이다. 본관은 전주.

대한제국 시절 협성회 회보독립신문 주필, 교육계몽운동 등으로는 독립협회 활동 등을 하면서, 왕정 폐지와 공화국 수립을 도모하였다는 반역의 죄목으로 옥살이를 하였으며, 수감 시절 기독교로 개종하고(어린시절 불교 집안에서 태어났고 개종 전까지 불교였다), 독립정신을 저술하였다. 대한제국 말기 사면된 후 밀사로 도미하였다가 실패했다고 알려져 왔으나, 최근 당시 이승만은 대한제국 정부나 황제의 대리인이 아니라 일진회의 대리인이라고 자칭했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2] 프린스턴 대학교에서 국제정치학 박사학위를 받고 이후 하와이에서 한인학원과 한인학교 등을 운영하였다. 일제 강점기에는 독립운동 방법을 놓고 의견이 갈라섰을 때 그는 국내의 사정을 외국에 알리고 양해를 구하는 외교독립론을 주장하였다. 특히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초대 대통령이었으나 국제 연맹에 위임통치를 건의 한 것을 계기로, 임시의정원에 의해 탄핵되었다.[3]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국무총리, 한성 임시정부와 각지에서 수립된 임시정부의 수반을 거쳐 1919년 9월부터 1925년 3월까지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통령직을 역임했고 대한민국 임시정부 구미외교위원부 위원장, 국무위원회 외교위원 등을 역임했다. 주로 미국에서 외교 중심의 독립운동을 벌였다. 1933년 3월 6일의 제25회 임시 의정원 회의에서 무임소 국무위원에 보궐 당선되었다.[4] 이후 1933년 11월에 다시 임시정부 국무위원에 선임되고 1934년 4월 2일에는 임정 외교위원에 선임되었다. 일제 강점기 중반에는 미국스위스 등을 무대로 조선의 독립을 호소하는 한편 일본내막기를 저술하는 등 일본의 미국 침략을 경고하였으며 태평양 전쟁 이후 미군 OSS와 임시정부 간의 연결을 주선하였다. 일제 강점기 말기에는 미국 체신청에서 발행한 태극기 모양 우표 발행에 크게 기여했으며, 항일 단파 라디오 방송 연설 등에도 참여하였다. 1945년 해방 후 조선인민공화국주석에 추대되었으나, 귀국 후 거절하였다.

1945년 12월부터 김구·조소앙·김성수 등과 함께 신탁통치 반대운동을 주관하였으며, 반공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 체제의 남한단독정부 수립을 지지, 추진하였다. 대한민국 초대 국회의장을 역임하였다. 대통령 임기중 의무교육으로 문맹율을 획기적으로 낮추었고, 농지개혁을 통해 소작농을 자작농으로 전환시켜 국가의 기틀을 다졌다. 6.25전쟁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침공으로부터 대한민국적화통일을 막아냈고,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하여 이후 대한민국 번영의 발판을 마련했다. 1952년 부산정치파동에 따른 대통령직선제 발췌개헌과 1954년사사오입 개헌으로 민주적 절차를 무시한 채 헌법을 두 차례 개정하여 대통령을 3회 역임하였다. 1960년에 4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으나, 3.15 부정선거로 촉발된 4·19 혁명에 의해 부정선거의 책임을 지고 대통령직에서 물러났고, 미국 하와이로 망명하여 그곳에서 사망하였다. 장례는 대한민국에서 가족장으로 집행되었으며,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되었다. 1949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받았다.

 

목차

대통령이 되기 이전[편집]

유년기·청소년기[편집]

이승만은 1875년 4월 18일(음력 3월 26일) 황해도 평산군 마산면 대경리 능내동(陵內洞)의 몰락한 양반 가문에서 태어났다.[5] 초명은 승룡(承龍), 는 우남(雩南)이다.

아버지 이경선(李敬善, 1839년 ~ 1912년), 어머니 김해 김씨(金海金氏, 1833년 ~ 1896년) 사이에 3남 2녀 중 막내로 출생하였으나, 손위의 두 형이 그의 출생 전에 사망했기 때문에 장남 역할을 대신하였고 사실상의 6대 독자가 되었다. 아버지 이경선은 이승만에 의하면 "그는 부자였으나 재산을 젊은 시절에 모두 탕진해 버렸다."고 한다.[6] 이경선은 일찍이 벼슬길을 포기했고 이승만 위로 두 아들을 두었다가 천연두로 잃자 세상을 크게 비관했다.[7] 둘째 아들이 죽자 아버지 경선(敬善)은 격분한 나머지 역귀한테 올리는 터줏대감 상을 몽둥이로 부수고, 역귀가 머문다는 사당 앞에서 큰 칼을 휘둘렀다 한다. 그가 석달 동안 몸져 눕자 사람들은 그것이 그런 지각 없는 행동 때문이라 했다.

내가 자손이 없이 죽으면 우리 집안의 긴 핏줄은 끊어지게 된다. 내가 나기 전 우리 집안에는 딸이 둘 있고 아들이 있었는데 아들은 얼마 후에 죽었다고 한다. 그래서 집안에 후손이 없는 데다가 어머니는 자꾸 나이를 먹으시니 모두들 퍽 근심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어느날 밤 어머니는 큰 용이 하늘에서 날아와 자신의 가슴에 뛰어드는꿈을 꾸고 깨어나서 가족에게 그 얘기를 하였는데, 그것이 나를 갖게 될 태몽이었다. 나는 그 얘기를 어머니한테서 여러번 되풀이하여 들었던 기억이 난다.[6]
 
— 이승만의 회고

아버지 이경선은 양녕대군(조선 태종의 장남)의 다섯째 서자 장평도정(長平都正) 이흔(李訢)의 15대손으로, 왕족이었지만 계승권에서 밀려나 가난하게 자랐기 때문에 이승만은 조선왕조 자체에 대해 극히 비판적이었다 한다.[8] 그는 장평도정의 장남 부림령(富林令) 이순(李順)의 후손이다. 이승만은 양녕대군 16대손이다.

왕족으로서의 대우는 장평도정의 손자이자 이승만의 13대조인 수주정(樹州正) 이윤인(李允仁)에서 끝이 났고, 이윤인의 손자이자 이승만의 11대조 이원약(李元約)이 병자호란 때에 무공을 세워 전풍군(全豊君)에 추증되었고, 그 후광을 입은 몇몇 자손들이 무관직에 등용되기도 했으나, 이승만의 6대조 할아버지 이징하(李徵夏)가 음직(陰職)으로 현령(縣令)을 지낸 것을 끝으로 벼슬길이 끊기고 어렵게 살아갔다. 그럼에도 그가 조선의 왕실과 같은 성씨라는 이유로 그가 왕정복고를 꿈꿨다는 비난에 시달려야 했다.[9]

이승만은 후일 자신의 간단한 일대기를 써서 로버트 T. 올리버에게 부쳤다. 그러면서 내 조상들에 대한 이야기는 하지 말아달라고 부탁하였다.

나의 선조에 관한 이야기는 하지 말아 주십시오.[6] 나의 정적들은 내가 민주제도를 세우려고 하지 않고 왕권을 회복시키려 한다는 자기들의 주장을 '입증'하기 위해서 나의 족보를 캐내려고 애를 많이 썼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적은 것은 윤곽에 불과합니다.[10]
 
로버트 T. 올리버에게 보낸 편지의 일부

그는 '아버지는 나에게 너는 6대 독자인 줄을 알라고 되풀이하곤 하였다. 그런 탓으로 주위에 가까운 친척이 없다. 그런데 만약 16대 전의 나의 선조가 그렇게 관대하게 상속권을 그의 동생에게 넘겨주지 않았더라면 나는 고종의 위치에 놓여졌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우리 나라는 고종 치하에서 독립을 빼앗긴 것이다. 그러므로 나와 이씨 왕족과의 먼 친척 관계는 나에게는 영예가 아니라 치욕이다. 그러한 관계로 나는 성을 바꿀 수 있는 것이라면 당장 바꾸어 버리기라도 하겠다.[11]'고 하였다.

로버트 T. 올리버는 이승만의 전기를 쓸 때 '이승만의 가계는 다년간 그를 울분하게 만드는 원인이었고 또 그의 핸디캡이기도 하였다'고 한다.[10] 이승만은 자신이 왕족의 후손이라는 사실을 껄끄럽게 여겼다. 아버지 이경선은 계보학자이자 당대의 양반 사대부들처럼 여러번 자신의 족보를 아들에게 설명하였다. 그러나 이승만은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고, 나중에 양녕대군이 태조의 아들인지 태종의 아들인지도 구별 못하였다. 그래서 이승만은 자신의 간략한 일대기를 적어 보낼 때 양녕대군을 태조의 아들[12] 이고 정종에게 양보한 것 이라고 하기도 했다.

이승만의 증조부 이황(李璜)의 대에 한성부에서 황해도로 이주했다가 다시 아버지 이경선의 대에 다시 한성으로 이주하여 그 역시 부모를 따라 이동했다. 1877년 그의 가족은 황해도에서 한성으로 이사하여 숭례문 밖 염동, 낙동을 거쳐 도동의 우수현(雩守峴)으로 이사 다녔고, 우수현에서 성장하였다.[8] 그의 회고에 의하면 '아버지는 한때 부자였지만 젊은 시절에 모두 탕진해 버렸다. 어머니 말로는 내가 태어날 무렵에는 집에 재산이 없었다.'고 회고하였다. 어려운 환경에서도 부모는 어렵게 얻은 아들에 대한 공부열이 대단하였다.

1879년 퇴직 대신 이건하가 운영하는 낙동서당에 입학하였고, 1885년부터 1894년 이전까지 사간원 대사간을 지냈으며 양녕대군의 봉사손 이근수가 운영하는 도동서당에 다니면서 수학하였다.[8] 도동서당은 한성부 용산에 있었다. 1887년 13세 때에 아명인 승룡에서 승만(承晩)으로 이름을 고쳤다.

아버지 이경선은 풍수지리에 몰두하여 조상의 묘자리를 새로 찾아 이장함으로써 가문의 재흥을 꾀한다는 생각에 남은 재산을 거의 탕진하고 방랑으로 집에서 일없이 지냈다.[7] 어려서 음죽 박씨 박춘겸(朴春兼)의 딸과 결혼하였다. 그러나 아들 이봉수가 요절하면서 관계는 소원해졌고 결국 해방 후 최종 이혼한다.

유년시절의 이승만은 집중력이 뛰어났다. 그는 혼자서 몇 시간이고 연을 날리기도 하고, 나비 그림 그리기에 몰두하여 '이나비'라는 별명을 얻기도 하였으며[13]:244 서당 정원에 꽃 심기에 몰두하여 '꽃귀신이 씌였다'는 반갑지 않은 말을 듣기도 하였다고 한다.[13]:244 한편 이승만은 유년 시절 주변에서 본 일상풍경이 미개하고 미신이 많았다고 회고하였다. 이승만에 의하면 자신이 태어날 당시 사람들은 상당히 미개하고 문을 꽉 닫고 살았다고 했다. '나는 당시 어른들이 중국사람들과 일본사람들을 무슨 뿔달린 괴상한 짐승들인 것처럼 얘기하는 것을 기억한다.[11]'고 했다.

청년기[편집]

배재학당 재학 (1895 ~ 1897)[편집]

1895년 4월 2일에는 아펜젤러배재학당에 입학하였다.[8] 배재학당에 들어간 이승만은 초기에는 '기독교라는 사교집단의 선교사가 운영하는 학교'에 대해 거부감과 두려움을 가졌다.[13]:295 그러다 배재학당에서 공부하던 중, 곧 일본의 지배에 반대하는 한국의 독립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기 시작하였다. 1895년 11월 29일 명성황후가 살해당하자 이에 대한 원수를 갚는다는 계획(춘생문 사건)을 세웠다가 계획이 사전에 탄로나 황해도 평산의 누이 집에 3개월간 피신하였다.[8] 그 뒤 배재학당에 다시 복귀하였다.

서재필
(이승만에게 사상적 영향을 주었고, 미국 유학을 적극 권고했다.)
이상재
(이상재는 이승만의 정치적, 재정적 후견인이 되었다.)

1896년 귀국한 서재필의 강의를 듣고 서양사람들에게 호기심을 갖게 되었다.[13]:295 그 후 이승만은 독립협회의 민중운동시기 즉 1898년 만민공동회 당시 가장 치열하게 앞장선 운동가들 중의 으뜸가는 청년이었으며 활발한 연설가로 활동하였다. 이때 그는 서재필, 이상재, 윤치호 등을 만나 자주 교류했는데, 그 중 서재필은 그에게 미국 유학을 적극 권고하였다.

1896년 11월 30일 배재학당에서 양홍묵 등과 함께 청년단체인 협성회를 조직하고 미국식 토론회를 통해 개화-구국운동의 방향을 찾기도 하였다. 협성회에서 이후 이승만은 서기, 회장 등에 선출되어 활동하였다.[8] 협성회는 나날이 발전했다. 동시에 이승만이 왕정을 타도하려 한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 협성회의 창립회원이자 동지의 한사람인 이승구이완용의 아들이었다. 이승구의 아버지 이완용은, '자식이 이승만 패거리와 뭉쳐 다니는 것을 걱정'하여 미국 캘리포니아의 무관학교로 유학을 보내[14] 버렸다. 협성회는 계속 발전하였고, 학업과 협성회 활동을 병행하면서도 이승만은 1897년 7월 배재학당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였다.

1897년 7월 8일 정동에 새로 지은 감리교회 예배당에서 배재학당 졸업식이 있었고 600명의 청중이 모였다. 1부는 문학 시강으로 한문영어의 공개 강독이 시행되었다.[15] 영어 강독에서 신흥우영어 문장을 읽고 한글로 유창하게 번역하자 청중들이 크게 호응했다. 이어 이승만이 영어 연설이 시작되었는데, 발음도 유창하거니와 조선독립을 역설하는 패기로 청중들을 사로잡았다.[15] :91

계몽운동 (1897 ~ 1904)[편집]

언론 활동[편집]

1898년 1월 양홍묵과 함께 한글판 주간신문이자 협성회의 기관지인 《협성회회보》를 간하고 주필을 맡았다. 이때 이승만은 한국 최초의 현대시 '고목가(枯木歌)'를 신문에 싣기도 했다. 3월 10일 러시아의 이권 침탈을 규탄하기 위해 독립협회(獨立協會)가 종로에서 제1차 만민공동회 집회를 개최하자 이승만은 연사로 참가, 가두연설을 통해 인기를 얻고, 대한제국 정부 외부대신에게 항의의사를 전달하는 총대(總代)위원으로 선발되었다.[8] 4월 한국 최초의 일간지인《매일신문》을 창간하고 사장 겸 저술인의 직책을 맡았다. 8월 10일에는 이종일과 함께 한글 신문인 《제국신문》을 창간, 편집담당과 논설담당을 겸하였다.[8] 11월 5일 익명의 투서 사건이 발생, 군주제를 폐지하고 공화정을 도입하려했다는 혐의를 받고 독립협회이상재, 남궁억 등 간부급 17인이 체포되자, 이승만은 배재학당의 학생과 대중을 동원, 이들을 이끌고 경무청평리원(고등법원) 앞에서 철야 농성을 벌여 독립협회 간부들을 석방시키는 데 성공하였다.[8] 11월 26일 고종 황제는 독립협회를 달래기 위해 헌의 6조의 실시를 약속하고, 남궁억 등 50여명을 중추원 의관(議官, 종9품)으로 임명할 때 함께 중추원 의관에 임명되었다.[8] 이후 영의정에 임명되기도 했다.[출처 필요]

그러나 12월 23일 고종만민공동회 해체로 방향을 바꾸자, 그는 미국인 의사 해리 셔먼의 집으로 피신하였다.[8] 이후 그는 협회의 전단지를 배포하다가 전단지 내용 중 '광무황제는 연령이 높으시니 황태자에게 자리를 내 주셔야 한다.'라고 쓰인 문구가 문제가 되어 요시찰 대상이 되던 중, 1899년 1월 9일 발생한 박영효 일파의 대한제국 고종 폐위 음모에 가담하였다는 혐의로 체포되어, 1904년 8월 9일 석방될 때까지 한성감옥에 투옥되었다.

투옥과 탈옥 미수[편집]

1899년 1월 17일미국공사로 근무했던 알렌은 외부대신 박제순에게 이승만의 석방을 요구하였으나 거부당하였다. 1월 30일 독립협회의 동지였던 한글학자 주시경을 만나 그로부터 몰래 건네받은 육혈포를 쏘며 동지 2인과 함께 감옥을 탈출했으나, 서상대만 중국으로 탈출하는데 성공하였고, 이승만은 중간에 붙잡혀 들어왔다.[8] 7월 11일 평리원 재판소에 회부, 당시 재판장으로 지냈던 홍종우에게 곤장 100대와 종신형을 선고받았고, 한성감옥서에 재수감되었다. 이때 탈옥 동지였던 최정식은 처형당하였다.[8] 본래 성격이 성급하기로 유명했던 이승만은 오랜 감옥생활로 성격이 더 굳어지는 계기가 되었다.[13]:247 그는 옥중 생활에서 성경책을 통해 영어공부를 틈틈이 했으며, 이때부터 이승만은 영어공부에 재미를 느끼면서 심심풀이로 혼자서 한영사전 등 정리하기도 했었다. 그는 한성감옥 생활하면서 동료 죄수들은 물론, 간수들한테도 기독교로 개종시키고 한글과 영어를 가르치면서 많은 개화인사들을 길러내기도 하였다. 그리고, 옥중 생활 중 그는 민중계몽의식 가치관을 나타내는 저서 '독립정신'을 1904년 6월에 저술했다.[16] 한편 이승만은 옥중에서 어른 죄수와 어린이 죄수를 나뉘어서 글을 가르치고, 기독교 포교 활동을 했다.

독립정신은 총 52편으로 이뤄졌고, 크게 근대 역사관과 정치관으로 이뤄진 앞부분과 당시 시대상황을 해석한 뒷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당시 독립정신은 대중과 지식인들에게 큰 인기가 있었지만 공식적으로 출간이 되지는 않아 필사본으로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을 돌려봤다고 한다. 이후 이승만이 도미한 1910년이 되어서야 LA에서 첫 출판본이 나올 수 있었다.

이승만은 이 책에서 입헌군주제의 도입을 주장했지만 실제로 해외 사례를 언급하는 부분 상당수가 미국의 독립선언문과 대통령제에 대한 설명으로 가득차 있다. 그런 점에서 이승만이 실제로 원한 제도는 대통령제였지만, 집필 당시 사형수였다는 신분상의 이유로 입헌군주제를 옹호하는 척 하는 게 아닌가 하는 해석이 있다.[17]

고문과 후유증[편집]

이승만은 독립협회, 만민공동회 사건으로 투옥되어 고문을 당하였다. 한때 강원룡은 이승만의 고문이 거짓이라고 주장했다. ' 대통령은 일경에게 잡힌 적이 없으면서도 자기의 손을 보여주며 '왜놈에게 붙잡혀 고문당한 손'이라고 거짓말을 했다[18]'는 것이다.

그러나 이승만의 측근이었던 허정은 그가 독립협회, 만민공동회 사건으로 투옥당한 뒤 고문당한 것을 진술하였다. 허정은 자신이 황성기독교회관 청년부[19] 시절에 이승만이 안면 경련을 일으켰던 것을 진술했다. 허정은 '이 무렵의 이 박사의 인상은 지금도 생생하다. 그 때에도 이박사는 얼굴을 실룩거렸다. 그를 상징하다시피하는 이 안면 경련독립협회(獨立協會) 사건으로 체포되어 고문을 당해서 그리 되었다 한다.[20]'고 한다.

옥중 계몽운동과 석방[편집]
민영환
(그는 이승만을 석방하여 미국에 밀사로 보냈다.)
한성감옥에서의 이승만.(맨 왼쪽)[주해 1]

옥중에서 영한사전을 집필했고, 1900년 8월, 한성감옥에서 청·일전쟁의 교훈을 다룬 중국 서적 《중동전기본말》을 한글로 번역하였다. 이는 뒤에 다시 1917년미국 하와이에서 《청일전기》라는 이름으로 재출간되기도 했다.[8]

1904년 7월 8일 이승만은 특별 사면령을 받고 석방되었다. 민영환, 한규설 등이 그의 사면을 위해 노력한 결과, 러일 전쟁이 발생하면서 그는 8월 9일 특사로 감옥을 나올 수 있었다.[8] 민영환한규설을 만난 뒤 1904년 10월 15일 남대문의 상동교회 상동청년학원 교장직에 취임했으나 미국으로 가기 위해 곧 사임하였다. 이때 그는 고종 황제를 만나보라는 민영환의 요청을 거절했고, 고종이 보낸 궁녀 역시 만나주지 않았다.

외교 활동 (1904 ~ 1905)[편집]

1905년 8월. 미국 대통령 시어도어 루스벨트를 만나기 위해 예복을 갖춘 이승만 박사.

1904년 8월 민영환, 한규설 등의 건의로, 예정이 없던 특사조치로 출옥한 이승만은 민영환(閔泳煥)을 만나 그의 밀서를 소지하고 미국 대통령을 만나기 위해 11월 도미한다.[21] 미국으로 떠나기 전에 고종이 그를 만나기를 원하여 밀지(密紙)를 써서 궁녀를 비밀리에 그에게 보냈다.[13]:247 그러나 왜 고종이 그를 만나기를 원하는가를 생각조차 하지 않고 밀지를 들고 온 궁녀를 돌려보냈다. 이승만은 '역대 군주들 가운데 가장 허약하고 겁쟁이 임금 중의 한 사람'이라며 나라를 망쳐버린 고종과는 아예 상종도 하지 않겠다며 거절하였다.[13]:247 1904년 11월 4일 일본 고베를 거쳐 미국으로 건너 갔다. 그 해 12월 31일 샌프란시스코, 로스앤젤레스, 시카고를 거쳐 워싱턴D.C.에 도착하였다.

1905년 1월 15일 미국 신문 "워싱턴포스트" 지와 기자회견을 열고 일본한국 침략을 폭로하는 인터뷰를 하였다.[8] 2월 워싱턴 D.C의 조지워싱턴 대학교에 2학년 장학생으로 입학하였다.[8] 2월 20일 이승만은 한국에 선교사로 왔던 적이 있던 미국 상원의원 휴 딘스모어를 찾아가, 그의 주선으로 존 헤이 미국 국무장관과 30분간 면담하였다. 헤이 장관을 설득, 1882년의 '한미수호조약'의 거중조정 조항(제8조)에 따라 한국의 독립에 협조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냈으나, 헤이 장관의 죽음으로 허사가 되었다.[8] 4월 23일 워싱턴 D.C의 커베넌트 장로교회류이스 햄린 목사로부터 세례를 받았다.[8]

1905년 8월 윌리엄 태프트시어도어 루스벨트의 딸 앨리스와 미 의원 워즈워스를 대동하고 아시아 수행길에 하와이호놀룰루를 경유하였다. 이때 이승만은 호놀룰루의 한인 선교부를 책임지던 와드먼 박사를 통해 태프트와 접촉, 그의 추천장을 받아 시어도어 루스벨트를 만났다.[13]:2971905년 8월 4일 뉴욕시 동부 로즈벨트 대통령 별장에서 이승만과 만난 루즈벨트 대통령은 밀서에 호의적인 반응을 보였으며 "귀국을 위한 일이라면 무슨 일이건 할 용의가 있다"라고 답변했다. 다만 외교적인 일이므로 밀서가 아닌 위싱턴의 한국공사관을 통해 제출하라고 권유했다. 이승만은 당시 공사인 김윤정에게 도움을 요청하였으나 그는 이미 일본에게 포섭되어 있어 이승만의 요청을 외면하였다. 이승만은 김윤정의 어린 아들을 설득하여 공사의 마음을 되돌리려 하였으나 끝내 거절당했다.[22] 9월 10일 대한제국 황실 시종무관장 민영환으로부터 격려 편지와 함께 300 달러의 경비를 지원받았다. 그러나 두 달 후에 민영환을사조약에 대한 울분을 못 이겨 자결함으로써 순국한다.[8]

1905년 루스벨트의 딸 앨리스는 대한제국을 방문, 고종 황제를 예방하게 되는데, 고종은 미국이 한국의 독립에 우호적인 입장으로 판단하고 잔뜩 기대하고 있었으나 앨리스 루스벨트는 융숭한 대접만 받고 되돌아갔다.[23] 시어도어 루즈벨트는 끝내 이승만을 만나주지 않았다. 이미 태프트를 보내 일본 총리 가쓰라와 식민지 분할에 합의한 뒤였다. 가쓰라-태프트 밀약의 진실을 알게 된 이승만은 미국이 한국을 일본에게 팔아넘겼다고 확신하였고 그 후 미국의 한반도 정책에 대해 의구심을 품게 되었다.[13]:297 밀사활동 실패에 실망한 이승만은 미국에 남아 공부를 하기로 결심한다.

미국 유학 (1906 ~ 1910)[편집]

1909년의 이승만
고딕 양식으로 지어진 대학원생 기숙사의 탑을 그린 유화. 이승만 전 대통령도 이 기숙사에서 묵었다고 전해진다.

이후 이승만은 조지워싱턴 대학교에서 철학(哲學)을 공부하였다. 1907년조지워싱턴 대학교에서 학사 학위(Bachelor of Arts)를 받고, 하버드 대학교에서 석사(M.A) 학위를, 그리고 1910년프린스턴 대학교에서 《미국의 영향을 받은 영세중립론》[24] 라는 논문으로 박사 학위(Doctor of Philosophy)를 받았다. 학비나 후원자가 없던 이승만은 노동과 아르바이트로 학비를 조달하였다. 그의 처지를 알게 된 지도교수가 학교에 요청하여 장학금박사학위 출간 비용을 지원받기도 하였다.(박사 논문 제본 비용 80달러가 없어서 논문은 2년 후인 1912년에 출간된다.)

1908년 덴버의 감리교회에서 열린 애국동지회에 참석하였다. 그 뒤 장인환·전명운 의사가 1908년 대한제국의 외교 고문으로 활동하던 친일파 미국인 더럼 스티븐슨오클랜드기차역에서 저격, 암살하여 미국 법정에 서게 되었다. 미주의 한인들은 전명운, 장인환 두 의사를 변호하기 위해 십시일반하여 이들의 재판을 도왔는데, 그 와중의 법정 통역을 이승만에게 요청하였다. 그러자 이승만은 미주의 한인들에게 전명운의 변호비용으로 3000달러의 거액(당시 장인환 의사의 미국 변호사 선임비는 4000달러였다.)을 요구했다. 전명운과 장인환 두 의사의 재판을 위한 의연금이 미주 본토, 하와이, 멕시코, 국내, 연해주, 만주, 중국 등지를 포함한 한국인이 거주하는 세계 각지에서 답지하여 7,390달러가 모아졌다. 그리고 미주 한인들은 3000달러를 모아서 이승만에게 가져갔다. 그러나 이승만은 샌프란시스코에 와서 형편을 살피고 통역하기를 거절하였는데, 그 이유는 "시간 관계로 오래 있을 수 없으며 예수교인의 신분으로 살인 재판 통역을 원하지 않는다" 하고 같은날 8월 25일 동방으로 갔다.[25][26] 당시 이승만은 이 사건에 대해 미국인들의 여론반응을 살피고 있었기 때문에 법정 통역을 거부했던 것이다. 그는 법정 변호를 거부한 후 보스턴에서 비행기를 타고 왔다가 다시 비행기를 타고 돌아가버렸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장인환과 전명의 의거는 국내외 한국 기독교인들에게도 큰 파문과 각성의 계기를 주어 민족운동에 깊이 참여하도록 이끌었다. 물론 일부에서는 이승만이 “예수교인의 신분으로 살인 재판 통역을 원하지 않는다”고 했던 것처럼 이 사건을 외면하려고 하기도 했지만, 그 대신 통역을 맡은 신흥우를 비롯하여 대다수 한인 기독교인들은 장인환, 전명운의 의거에 적극 관심을 갖고 의연금을 보내는 등 힘을 모았다. [27] 또한 후에 그는 임시정부의 주요 수반이 되었던 까닭에, 그가 전명운에 대한 변호를 거부한 것은 오늘날 비판받기도 한다.

이승만은 서구적인 교육을 받은 영향으로 그의 이름을 성보다 앞서 사용하는 서양식 이름을 썼다 (Syng-Man Rhee, 또는 승만 리). 당시 박사(博士)가 거의 없었던 한국에서 이승만은 '박사'의 대명사가 되었고, 1948년 8월 대통령이 된 뒤에도 사람들은 그를 이승만 대통령보다는 '이승만 박사'라고 불렀다. 1908년 8월 미국 콜로라도 주 덴버시에서 개최된 '애국동지대표자회의'(愛國同志代表者會議)에 이상설과 함께 연해주(沿海州) 대표로 참석하였다.[28]

독립운동기[편집]

귀국[편집]

1910년의 이승만

1910년 3월 국민회에 가입했다. 1910년 한국으로 돌아가 YMCA에서 교사로서, 그리고 이어 YMCA 청년부 간사로 취임하여 기독교를 선교하였는데[13]:248 감리교파 선교사로서 생활을 하였다. 또한 당시 들어온 신문화에 대해 긍정적이라서 "나라가 없어진 것은 슬프지만 왕, 양반, 상투가 없어진 것은 시원하다"고 언급하기도 했다.

도미[편집]

1915년 대한인국민회 하와이 지방총회
(오른쪽 열한번째는 이승만, 가운데 단상에 선 이는 안창호)

1912년 미국으로 되돌아갔다.[출처 필요]

1912년 4월 미국 미네소타주 미니애폴리스에서 열린 국제감리교 회의에 참석하였다.[29] 1913년 그는 귀국을 시도했으나 아버지 이경선으로부터 귀국하지 말고 미국에 체류하라는 편지 서신을 받고 귀국을 단념한다.

하와이 정착[편집]

1913년 이승만은 국민회와 박용만의 초청으로 미국 네브래스카에서 하와이로 건너갔다. 1913년 2월 3일 이승만은 박용만과 함께 하와이에 정착했다. 이승만과 박용만은 한성감옥에서 만나 호형호제하는 사이로 둘 다 독립운동에 뜻을 두고 있었다.[30] 이승만은 105인 사건을 폭로하는 《한국교회 핍박》을 출간하였고 그해 8월 미국 하와이 감리교회가 운영하는 한인학교인 '한인기숙학교'의 교장직에 추천되어 취임하였다. 이어 한인기독학원(KIC)의 원장도 겸하였다. 이때 그는 한국어한문을 새로 가르치고, 뒤에 학교 이름도 '한인기독학원'에서 '한인중앙학원'(韓人中央學院)으로 재단 이름을 바꾸기도 하였다.[8]

이승만은 하와이에서 감리교 부속의 한인중앙학원장으로 재직하면서 교육 활동과 실력운동 양성에 사업을 전개했다. 그는 감리교에서 설립한 한인기숙학교를 '한인중앙학원'이라 고치고 민족교육을 실시했다. 그러나 미국인 감리교 감리사가 이승만의 민족교육을 반대하고 나섰다. 이에 이승만은 반발하고 학원장직을 사임, 새로운 학원을 세웠다. 그는 태극기를 걸어놓고 민족교육에 열중했다. 이승만은 한인기독교회를 창설하고 교회 안에서 어린이들에게 한국어를 교육하기도 했다.[31]

그리고 '태평양 잡지'를 창간해 '청일전기' 등의 홍보물을 간행하는 등 언론 출판활동을 전개했다. 이들 학생과 후원자들은 뒷날 이승만 계열 또는 후원자가 되어 하나의 파벌을 이루었고, 뒷날 대한인 동지회로 발전하게 된다.[31] 독립운동을 위한 자금을 마련하기 위하여 이승만은 하와이섬의 마운틴 뷰에서 숯 사업을 시작하기도 있다.[32]

국민회와 대립[편집]

한편, 이 무렵 1914년 박용만국민군단을 창설했고 군사력을 양성코자 했으나 이승만은 무장투쟁에 반기를 들었고 교육을 통한 인재 양성을 중시했으므로 두 사람은 대립하게 되었다. 이승만은 1915년 6월 17일 스타불레틴 신문에 기고하여 자신은 어떠한 반일적인 내용도 가르치지 않으며 보편적인 인류애를 가르치고자 한다고 했다. 그는 지역 일본인 신문들이 자신이 반일감정을 조장한다는 오해를 하지 말았으면 한다고 말했다.[33]

1913년 4월. 하와이 호놀룰루 기차역에서 나란히 포즈를 취한 이승만(왼쪽)과 박용만. 한때 결의형제를 할 만큼 일생의 동지였던 두 사람은 독립운동 방법론과 국민회기금을 둘러싸고 대립하여 결국 정적이 되고 말았다.[주해 2]

1915년국민회에 커다란 혼란이 있었던 시기로 당시 회장이었던 김종학과 박용만 등 주요 간부들은 자금 횡령 의혹으로 남학생들의 습격을 받아 부상을 입었다. 그 뒤 홍한식 목사가 새 회장직을 맡는 등 이승만 지지자들이 국민회 주요 간부직을 접수했다.[34] 하와이 한인들은 국민회에 의무금을 납부하였고 국민회는 당시 최대 인력과 자금력을 가진 독립운동 단체였다. 이승만은 국민회 회장 선출과 자금 사용 내역에 관해 문제를 제기했고 국민회측과 대립하게 되었다. 이러한 분열과 대립은 오래 지속되었고 테러, 폭동이 일어났다. 하와이 법원에는 이승만과 관련된 소송이 10여 건 벌어졌다. 당시 로베르타 장이 수집한 재미한인 교포들의 인터뷰는 당시 상황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 과반수 이상은 이승만이 한인사회에서 위험한 인물이라고 기억했으며 이승만의 조직원에 의한 암살 시도 증언도 있다.[30]

감리교 교단과 수시로 마찰을 빚어오던 중 1915년 6월에는 자신이 운영하던 '한인중앙학원'을 미국 감리교 선교부로부터 독립시켰다.

한인 사회 장악[편집]

1917년 이승만은 하와이 주 호놀룰루에서 과거 옥중에서 쓴 저서 '독립졍신'(제2판)과 '청일전기'를 출판하였다. 그해 10월 29일 뉴욕에서 개최된 25개 약소 민족대표자 회의에 한국대표로 참석하였다.[8]

1918년 7월 29일 하와이 호놀룰루에 수립된 '신립교회' 예배당 헌당에 참여하였고, 9월 '한인여자성경학원' 을 남녀공학의 한인기독학원(The Korean Christian Institute)으로 바꾸었다. 12월 1일 정한경, 민찬호 등과 함께 대한인국민회의 파리 평화회의 한인대표로 선출되었다.[8] 12월 23일 '신립교회'의 이름을 한인기독교회(The Korean Christian Church)로 바꾸었다. 이승만은 교회를 분열시켰으며 헤이즐 정의 증언에 따르면 당시 한인들은 이승만의 교회 아니면 감리교,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상황에 놓였다.[30]

1918년 박용만은 일본군 선박 출운호를 폭파하려 한다는 혐의를 받고 하와이 법정에 서게 되었는데 신한민보에 따르면 당시 이승만이 증인으로 출석하여 국민군단을 비난하였다고 한다. 이 사건 이후 국민군단은 해체되고 박용만은 하와이를 떠났다. 이승만이 국민회를 장악하자 대립은 일단락되었다. 이승만은 반대자가 많았지만 지지자들에게서는 숭배에 가까운 존경을 받았다고 한다.[30]

1918년 11월 독일이 일단 항복함으로써 세계 제1차 대전이 끝나고 다음해 1월 18일 파리에서 만국평화회의가 열렸다.[35] 서재필 역시 이 회의에 참석하였다. 미주의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에서는 평화회의에 이승만 박사, 민찬호 목사, 정한경을 파견하기로 했다. 그러나 그들은 미국 시민이 아니므로 여권을 얻을 수 없었다. 이들은 일본 국민인 까닭에 마땅히 일본 대사관에서 여권을 받아야 한다는 게 국무부의 해명이었다.[35]

1919년 4월 16일 필라델피아에서 열렸던 '한인자유대회'. 앞줄 왼쪽에서 네 번째가 정한경, 여섯 번째가 서재필, 일곱 번째가 이승만

1918년 제1차 세계 대전의 종전을 위한 파리 강화회의가 예정되고, 미국 대통령인 우드로우 윌슨민족자결주의를 발표한다.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에 고무된 그는 일제 강점기의 조선에 밀지를 보낸다.

1918년 12월의 어느 날 미국으로부터 이승만이 보낸 밀사가 송진우김성수를 찾아갔다.[36] 이승만이 보냈다는 그는 "윌슨 대통령의 민족자결론의 원칙이 정식으로 제출될 이번 강화회의를 이용하여 한민족의 노예 생활을 호소하고 자주권을 회복시켜야 한다. 미국에 있는 동지들도 이 구국운동을 추진시키고 있으니 국내에서도 이에 호응해주기 바란다."는 내용의 밀서를 전해주었다.[36] 이승만은 밀서를 통해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선언을 계기로 해외에 알릴만한 거사를 하라는 뜻을 피력했다. 그러나 나름대로 뜻이 있었던 송진우는 일단 밀서를 반송, 되돌려보냈다.

1919년 2월 1일 발표된 무오 독립선언 선언문에 민족지도자의 한 사람으로 서명하였다.

2월 중순 일본인이 보낸 밀정의 저격을 받았으나 미수에 그쳤다. 국내에는 그가 일본인에게 저격당한 사실이 바로 알려졌다.[37]

3월 1일 미국 현지에서 3·1 만세 운동의 소식을 접하였다. 그는 3.1 운동으로 조선인의 독립의지가 세계에 홍보될 것으로 예상했다. 3·1만세 운동 이후, 3월 21일 러시아프리모르스키 지방(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대한국민의회(노령 임시정부)에서 국무총리 겸 외무총장에 선출되었고 이승만은 그 사실을 4월 5일미국 워싱턴에서 통보받았다. 1919년 4월 1일 기호 지방에서 설립되려다가 해산된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도 국무총리에 추대되었다. 4월 7일 이승만은 노령 임시정부 국무총리 겸 외무총장 자격으로 UP통신과 기자회견을 하였다.[8] 1919년 4월에는 상하이 대한민국임시정부국무총리(혹은 집정관 총재)로 뽑혔다.

4월 14일 3·1 만세 운동의 열기가 미국에 번져 한인자유대회가 미국 독립기념관이 있는 필라델피아에서 열렸다. 이승만은 이 대회에서 한국이 독립하면 기독교 국가 건설과 미국식 민주제를 시행하겠다고 말했다. 이승만은 미국 최초의 의회 장소로 발길을 옮겨 미국 초대 대통령 워싱턴이 앉았던 의자에 앉았고 사진이 남아 있다.[33] 3·1 운동 소식을 접한 서재필은 만세운동에 호응하기 위해 4월 초에 공지하여 4월 13일 필라델피아에서 제1차 한인연합회의(The First Korean Congress)를 소집하였다. 이승만은 4월 13일부터 4월 15일까지 3일간 필라델피아에서 개최된 제1차 한인연합회의에 참석하였다. 3일 간의 제1차 한인연합회의가 끝난 뒤, 바로 한국의 자유와 독립을 세계에 선언하고자 4월 16일에는 필라델피아에서 서재필의 주도로 열린 '한인자유대회'에 참석하였다. 이 대회에서 그는 연사로 참여하였다.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지도자 (1919 ~1925)[편집]

1921년 상하이에 도착한 이승만대통령 환영식
(가운데가 대통령 이승만, 오른쪽은 안창호, 왼쪽은 이동휘)

1919년 4월 15일 길림성에서 선포된 고려임시정부에서 국무총리로 추대되었고, 4월 17일 평안북도에서 설립된 신한민국임시정부에서는 국방총리로 추대되었다. 4월 19일 인천에서 수립된 조선민국임시정부 로부터는 집정관총재 겸 국무총리에 선임되었다. 1919년 4월 23일에는 경성에서 한성임시정부가 이승만을 집정관 총재로 추대했다. 그러자, 이 즈음 미국에 있던 이승만은 워싱턴 D.C.에 한성임시정부 집정관 총재 사무실을 열어 재빠르게 대외적으로 대통령 행세를 했다는 의견이 있다.[38] 각지의 임시정부의 총리, 수반으로 추대되자 1919년 4월 이승만의 목에 일본 제국 정부의 명의로 30만 달러의 현상금이 걸렸다.

6월 14일부터 6월 27일 그는 '대한공화국' 대통령 이름으로 미국,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일본의 국가원수들과 파리 평화회의 의장 조르쥬 클레망소에게 한국의 독립선포를 알리는 공문을 발송했다. 7월 4일 국ㆍ내외 동포에게 독립을 위한 헌신을 촉구하는 '대통령 선언서'를 발표했다. 7월 17일 워싱턴 디시에 '대한공화국' 임시공사관을 설치했다.

1921년 1월 1일 신년하례회. 두 번째 줄 오른쪽에서 일곱 번째가 이승만

8월 이승만은 한성임시정부 집정관 총재 사무소를 한국 위원회로 개칭했다. 8월 15일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대한독립혈전기(大韓獨立血戰記)를 발간했고, 8월 16일 대한인국민회가 연 이승만의 집정관 총재 추대 축하식에 참석하였다. 그러나 그의 '프레지던트'(President) 칭호 사용이 상하이에 알려지면서 상하이 임시정부에서는 논란이 발생하였고, 논쟁이 격화되자 8월 25일 임시정부내무부 총장 안창호(安昌浩)는 그에게 전보를 발송한다.

임시정부국무총리 제도이고 한성정부집정관 총재 제도이며 어느 정부에나 대통령 직명이 없으므로 각하가 대통령이 아닙니다...(이하 생략)... 헌법을 개정하지 않고 대통령 행세를 하시면 이는 헌법 위반이며, 정부를 통일하던 신조를 배반하는 것이니 대통령 행사를 하지 마시오.

- 1919년 8월 25일 안창호의 서신 -

이승만은 안창호에게 다음과 같은 답장을 보낸다.

만일 우리끼리 떠들어서 행동이 일치하지 못한 소문이 세상에 전파되면 독립 운동에 큰 방해가 있을 것이며 그 책임이 당신들에게 돌아갈 것이니 언급하지 마시오.

- 1919년 8월 26일 이승만의 답신-

1920년 3월 1일 미국 워싱턴에서 3·1절 1주년 기념식을 마치고 기념촬영을 한 임정 구미위원부 간부들
(앞줄 가운데가 이승만 박사, 그 오른쪽이 김규식 박사)

1919년 9월 1일에는 김규식과 함께 '독립공채표' 혹은 '대한민국 공채표'를 발행하기도 하였다. 공채표로 거둔 의연금은 상하이에 소재한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송금되었다. 원래 이 애국공채는 한국의 건국시에 공채 형식으로 상환하기로 되어 있었는데, 이승만은 임시정부는 국제적으로 인정받지 못한 단체라고 하면서 상환을 거부했다고 한다. 1919년 9월 11일에는 상하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연해주의 대한인 국민회, 서울의 한성정부 등이 합쳐져 대통령 이승만, 국무총리 이동휘로 하는 통합 대한민국 임시정부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그가 대통령에 선출된 이후 상하이임시정부는 이승만에게 상하이로 와줄 것을 청원하는 청원서를 임시정부, 임시의정원의 명의로 워싱턴에 발송하였다.

8월 이승만은 한국위원회필라델피아에서 서재필이 임시정부 공식대표로 운영하고 있던 한국통신부와 주 파리 위원부를 흡수하여 구미위원부로 개편했다. 파리 강화회의에서 실망을 느끼고 미국으로 건너온 김규식을 맞이하여 구미위원부 위원장으로 삼았다. 이승만은 김규식에게 하와이멕시코 등지의 한국인 교포들로부터 공채금과 의연금을 징수하는 역할을 부여하였다.[39] 이후 김규식은 1920년 10월 미국을 떠나 상하이로 향했다.[40] 또한, 이승만은 1919년 10월부터 1920년 6월 이승만은 미국 각지를 순회하며 '대한공화국'을 지지해줄 것을 호소하는 강연, 홍보활동을 하고 다녔다. 한편 이승만은 일본 천황 히로히토조선총독부 앞으로 조선의 독립을 청원하는 편지를 보냈으나, 이는 묵살당하였고 다른 독립운동가들로부터도 조롱당하였다.

1922년 임시정부 제3기 정부 구성에서 이승만은 대통령에 유임되었다.[41] 1924년 11월 23일 대한인동지회에서 종신총재로 추대하였다.[42]

임시 정부 각료들과의 갈등[편집]

대통령에 뽑혔지만 이승만은 여전히 미국 하와이워싱턴 등지에서만 거주하고 있어, 상하이에 있는 임정에서는 이승만의 정부 내도를 촉구하는 서한을 여러 차례 보냈다. 1920년 12월에 처음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요구로 배를 타고 임병직, 이원순 등을 대동하고 미국에서 상하이로 건너왔다. 배삯이 부족하여 중국인 시신 운반선에 밀항하여 고국으로 운반되는 중국인의 시신들 틈에 숨었다가 상하이로 건너오게 되었다.[출처 필요] 상하이로 건너온 그는 자신의 목에 걸린 현상금 30만 달러라는 수배전단지를 발견, 한자를 잘 구사하는 점을 이용, 중국인 복장을 구한 뒤 중국인으로 행세하며 임시정부에 나타났다. 1921년 5월 미국하와이로 건너갔다.

그가 임시정부대통령이 되었던 데는 당시 미국윌슨 대통령이 이승만이 프린스턴 대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받을 때 총장이었다는 점이 작용하였다. 당시 임시정부는 외교 활동을 통해 한국의 독립을 이루고자 했고, 외교활동의 주된 목표는 민족자결주의를 선포한 미국이었다. 그런데 이승만은 임시정부의 대통령에 임명되기 전에 당시 임시정부 직제에 없었던 대통령 명함을 사용함으로써 안창호와 대립하였으나, 9월 임시정부 체제를 대통령제로 개정하면서 겨우 봉합되었다. 그러나 대통령이 된 뒤에도 민주주의를 주장하여 사회주의를 주장하던 이동휘·여운형·한형권 등과 대립하였다. 1921년 이후에는 임시정부가 있는 상하이에 체류하지 않았다.

임시 정부 대통령 탄핵 (1925)[편집]

1921년 이승만은 국제연맹에 위임통치를 청원한 사건을 계기로, 임정 내 일부 독립운동가들과 내부 대립,갈등하게 되었다. 신채호는 "없는 나라를 팔아먹으려는 것은 있는 나라를 팔아먹은 이완용보다 더한 역적이다"고 말했고 임시 국무총리 이동휘는 "대통령이 위임통치를 건의하는 바람에 정부 대표로 가 있는 김규식 특사가 어려움을 겪고 있어요. 위임통치를 요청하려면 뭐 하러 파리까지 왔느냐는 것이지요. 그러니 불필요한 오해를 낳는 위임통치 청원을 철회한다는 성명서를 내시는 게 어떻겠습니까?"라고 건의하였다. 그러나 이승만은 '대통령을 비난하는 것은 도리에 어긋난다. 위임통치 건은 지나간 일이니 철회할 의사가 없다.'고 답했다.[43]

1925년 3월 대한민국 임시의정원의 탄핵 의결로 대통령직에서 면직되었다.[42] 다음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통령 이승만 탄핵서 전문이다.

주문

  • 임시대통령 이승만을 면직시킴. 이승만 탄핵안에 의해 그 위법사실을 조사한 증거를 열거하면 민국 6년 12월 22일부로 전 재무총장 이시영에게 보낸 공문, 동 6년 12월 22일부로 국무원 각위 회람으로서 송부된 임시대통령 공문, 동 6년 7월 3일에 발한 구미위원부 통신부 특별통신, 동 7년 1월 28일에 낸 구미위원부 통신 특별호, 동 7년 2월 13일부로 박은식에게 송부한 서신 등과 같다.
  • 이승만은 외교를 빙자하고 직무지를 떠나 5년 동안 원양일우에 편재해서 난국수습과 대업진행에 하등 성의를 다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허무한 사실을 제조 간포해서 정부의 위신을 손상시키고 민심을 분산시킨 것은 물론, 정부의 행정을 저해하고 국고수입을 방해하고 의정원의 신성을 모독하고 공결을 부인하고, 심함에 이르러서는 정부의 행정과 재부를 방해하고, 임시헌법에 의해 의정원의 선거에 의해 취임한 임시대통령으로서 자기의 지위에 불리한 결의라고 해서 의정원의 결의를 부인하고, '한성조직 계통 운운'과 같은 것은 대한민국의 임시헌법을 근본적으로 부인하는 행위다.
  • 이와 같이 국정을 방해하고 국헌을 부인하는 자를 하루라도 국가원수의 직에 두는 것은 대업진행을 기하기 어렵다. 국법의 신성을 보지하기 어려울 뿐 아니라 순국 제현이 명복할 수 없는 바이고, 또 살아있는 충용들이 소망하는 바 아니므로 주문과 같이 심판한다.


대한민국 7년 3월 11일 임시대통령 이승만 심판위원회


위원장 나창헌
위원 곽헌, 채원개, 김현구, 최석순

[44]

한편, 임시정부의 외교부장직을 맡았던 조소앙1925년 3월 임시의정원의 이승만 대통령 탄핵,면직 조치에 극력 반대 입장을 표명했고, 이듬해 1926년 말까지 하와이에 거주했던 이승만에게 임정 내부의 사정을 내보(內報)하며 이승만의 복권을 시도했었다.[45]

구미외교위원부 활동 (1925~1930)[편집]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통령직에서 탄핵당한 이후, 이승만은 구미외교위원부에 활동하며 미국, 유럽, 국제연맹 등에 한국의 독립을 청원하는 성명서를 보내는 등 각종 외교적 활동을 하였다. 1919년 8월 김규식, 여운홍, 장택상 등의 도래와 임정 파리위원부를 구미위원부로 흡수하여 구미위원부 산하 주불대표부로 활용하였고, 미국과 유럽을 상대로 임정 홍보와 국제사회에 한국의 독립에 지지를 보내줄 것을 호소하였다. 주불대표부를 통해서 이승만은 유럽의 정치정세 변동과 정보를 수시로 입수하였다.

구미외교위원부1919년 5월 이승만이 한성임시정부 집정관 총재 자격으로 설치한 집정관 총재 사무소와 서재필이 운영하고 있던 한국통신부와 주 파리 위원부를 흡수하여 개편하여 만든 것이다. 구미 위원부는 한국의 입장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는데 기여를 했으나 태평양 회의(1921-22)에 한국 문제를 상정하지 못했고 임시정부에 대한 미국의 승인도 이루지 못하는 등 구체적인 외교상의 성과는 없었다. 게다가 출범 초부터 이승만의 개인기관으로 활용되어 대한인국민회가 임시정부에 보내는 애국금을 전용하는 문제를 일으켰다. 마침내 임시정부는 1925년 구미위원부 폐지령을 발표했다. 그러나 이승만은 임정의 구미위원부 폐지령을 묵살하였으며 계속 구미위원부를 가동하였다. 일설에는 1928년 재정난으로 해체될 때까지 유지되었다[46] 는 설이 있었으나 1926년 김현구라는 최측근을 기용하여 구미위원부의 살림살이를 맡기기도 했다.[47]

김현구는 1926년 이후 1929년까지 임정 구미위원부의 대소사를 총괄했는데, '1926년부터 1929년까지 3년간 워싱턴 구미위원부 위원으로서 위원부의 살림을 꾸려갔던 김현구는 1927년 1월부터 1928년 7월까지 1년 반 기간에 걸쳐 무려 131통의 간찰(편지)을 이승만에게 발송했고, 이승만으로부터 4통의 답변을 접수받았다.[47] 임정의 구미위원부 폐지령에 반발한 이승만은 임정으로 보내는 송금줄을 차단하고, 미국 교포들에게도 임정으로 송금하지 말 것을 주문했다.

임정과의 갈등[편집]

1928년 11월 20일 김구가 이승만에게 보낸 편지 (추운 겨울에 털옷 조차 입지 못하는 임시정부의 어려운 자금 사정을 호소하였다.)

1929년 이후 이승만은 임정과는 별개로, 독자적으로 임정 구미위원부를 가동하며 외교, 구국활동을 하였다. 그의 구미외교위원부에는 한국인 유학생인 조병옥·허정·장택상 등이 나타나 업무를 보좌하였다. 1928년 4월 10일 이승만은 구미위원부에서 《재만동포옹호》팜플렛을 작성하여 발표하였다.[42] 1929년부터 1930년 1월 8일 시사이 이승만은 미국 본토 전역을 방문하고 호놀룰루로 돌아 온 후 "태평양잡지"를 "태평양주보"로 이름을 바꾸어 다시 발간하기 시작했다.[42] 이승만은 미국에서 활동하면서 임시정부의 구미위원회 대표직을 역임하였다. 그러나 안창호, 박용만 등과 갈등이 계속되었다. 미국 내의 재미 교포 조직들은 안창호 지지 세력과 이승만 지지 세력으로 나뉘어 있었는데, 이들의 분열은 미국이 임시정부를 승인하지 않는 중요한 원인 중 하나였다.

1920년대 후반 임시정부는 자금난에 시달렸고, 자금을 마련할 수 없었던 김구는 고민하게 되었다. 임시정부는 일본 경찰의 감시와 침투를 피해 프랑스조계(프랑스 대사관 관할구역)와 영국조계, 중국 국민당의 영향력이 미치는 곳의 건물에 월세를 주고 입주했다. 그러나 청사 임대료 30원을 내지 못해 건물주, 토지주로부터 고발당하였고, 청사의 각부 직원과 잡일을 하는 급사, 경무국 직원들의 월급도 제때 주지 못하였다. 일부 급사들은 임정을 떠나거나 임정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기도 했고, 경무국에서 일하던 청년들은 모두 뿔뿔이 흩어졌다. 김구는 그에게 자금 지원을 호소하는 편지 서신을 여러번 보냈다.

1928년 박용만텐진에서 의열단 단원 박인식, 이해명 등에게 암살당하자 이승만은 서재필과 함께 미국내의 언론과 방송 담화를 통해 의열단을 비난하였다. 의열단의 경쟁세력인 임시정부의 김구가 나서서 이승만에게 박용만은 총독부에 매수된 밀정이라는 답신을 보냈으나 이승만은 그럴리 없다면서 비난 철회를 거부하였다.

외교 홍보 활동 (1930 ~ 1933)[편집]

1931년때 이승만.

1920년대 후반 임시정부는 자금난에 시달렸고, 자금을 마련할 수 없었던 김구는 고민하게 되었다. 김구는 재중 한인 동포들과 교민단체의 후원금과 성금 모금에 의존하는 한편 1928년 이후 미국에 있는 이승만에게도 자금을 요청하는 편지를 보냈다. 이승만은 자신도 처지가 어렵다고 거절하면서도 자금의 일부를 임시정부에 꾸준히 송금하였다.

1932년 4월 29일, 상하이 홍커우 공원에서 윤봉길이 폭탄을 투척해 의거를 일으켰을 때, 미국에 있던 이승만은 다음과 같이 윤봉길의 의거를 비판하였다.

이런(의거) 행동은 어리석은 짓이며, 일본의 선전선동만 강화시켜줄 뿐 한국의 독립을 가져다 주지 못할 것이다.


-이승만 자서전 내용中[48]

뒷날, 1943년 카이로 회담이 열리자 이승만은 카이로 회담에서 '장개석으로(장제스로) 하여끔 한국의 독립을 제안하고 그 선언문에 명문화시킨 것의 원인은 윤봉길 의거에 있다.'고 평가하기도 했다.[49]

이봉창과 윤봉길의 의거는 임정의 존재를 국제사회에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국민대표자대회 이후 임정의 반이승만 세력이 사라지면서 이승만은 임시정부에 후원금을 지속적으로 보냈다. 또한 한국인 교민들로부터 성금을 모금하여 상하이임정으로 송금해주었다.

1934년 미국에서 결혼식을 올린 이승만과 프란체스카 도너

1932년 11월 10일, 이승만은 임시정부 국무회의에 의해 국제연맹에 한국의 독립을 탄원할 전권대사로 임명되었다.[50] 1932년 12월 미국을 출발하여 리버풀, 런던, 파리 등을 경유한 후 1933년 1월 26일 국제연맹 본부가 있는 제네바에 도착하였다.

1933년 국제연맹에 참가하기 위해 스위스 제네바에 가서 대한독립청원서(大韓獨立請願書)를 제출하였다.[13]:63 1933년 1월 26일 프랑스어 일간신문 《주르날 드 제네바》지와 인터뷰하였고, 인터뷰 기사가 실렸다.[50] 2월 8일 이승만은 한국의 독립을 요구하는 공한(公翰)을 국제연맹 회원국 대표들과 기자들에게 배포하였고, 2월 16일 국제연맹의 방송시설을 통해 극동분쟁과 한국에 관한 연설을 하였다.[50] 1933년 2월 21일 제네바의 호텔 드뤼시 식당에서 오스트리아프란체스카 도너(Francesca Donner)를 만났다.[50]

김규식과 함께 찍은 사진

2월 22일 제네바의 프랑스어 신문《라 트리뷴 도리앙》지에 그의 독립운동 관련 기사가 보도되었고, 2월 23일 베른의 독일어 신문 《데어 분트》도 활동 상황이 실렸다.[50] 7월 9일 스위스 제네바를 출발하여 7월 20일 소비에트 연방으로 건너가 소련한국의 독립에 대한 도움을 호소하고자 모스크바 기차역에 도착하였으나(비엔나 경유) 즉시 쫓겨났다.[50] 8월 10일부터 8월 16일 프랑스 니스를 출발하여 미국 뉴욕 주에 도착했고, 그해 10월하와이 호놀룰루로 되돌아왔다.[50] 1934년 1월 12일 워싱턴의 《데일리뉴스》지가 이승만의 활동을 기사로 보도하였다.[50]

1933년 3월 6일의 제25회 임시 의정원 회의에서 무임소 국무위원에 보궐 당선되었다.[4] 이로서 임정에서 탄핵당한지 8년만에 다시 임시정부 각료로 복귀하였다.

임정 외교위원, 국무위원 선임 (1934 ~1939)[편집]

1933년 11월 이승만은 이동녕 내각에 의해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위원으로 보선되었다. 임정 일각의 반대에도 외교 활동을 위한 그의 역할이 크다는 이동녕, 김구 등의 주장에 의해서였다. 1934년 1월 12일 워싱턴의 《데일리뉴스》지가 이승만의 활동을 기사로 보도하였다.[50]

1934년 4월 2일 대한민국임시정부 외무부 행서규정을 공포하여 외무위원회를 설치하고 외교위원을 선임할 때, 조소앙·최동오·이승만·신익희외교위원으로 선임하였다.[51] 1934년 7월 22일 미국 국무부의 정치고문 스탠리 혼벡 박사와 면담하고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였으며 9월 16일 장기영과 함께 몬태나 주의 뷰트를 방문하였다. 이는 《몬태나 스탠다드》지가 기사로 게재하였다.[50] 1934년 9월 20일부터 10월 8일 사이 뉴욕 주 랙싱턴 가(街)의 호텔 몽클래어에서 프란체스카 도너와 결혼하였다. 1935 1월 24일 프란체스카 도너와 함께 하와이 호놀룰루에 도착하였으며,「스타불리틴」지에 만주 한국인도 독일의 자르 지방인들처럼 민족자결의 원리에 따라 지위가 결정되어야 한다는 내용의 칼럼을 실었다.[50] 9월 20일 뉴욕 랙싱턴 가(街)의 호텔 몽클래어에서 프란체스카 도너와 결혼하였고, 10월 8일까지 신혼기간을 보냈다. 백인 여성과의 결혼을 반대하는 분위기가 강했다. 신혼 초기부터 프란체스카 도너는 한인 지도자의 외국인 신부를 탐탁치 않게 여긴 한인 교포들에 의해 '호주댁'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고, 호주댁[주해 3] 이 뭐냐는 질문에 이승만은 좋은 이름이라고 대답했다.

1935년 1월 24일 배우자와 함께 하와이 호놀룰루 시에 도착, 《스타불리틴》지에 만주 한국인도 독일의 자르 지방인들처럼 민족자결의 원리에 따라 지위가 결정되어야 한다는 호소문을 발표하였다. 1937년 임시정부 외교위원에 선출되었다.

1938년 4월 24일 하와이 주 호놀룰루 시 릴리하 가(街)에 '한인기독교회' 건물을 낙성하였고[50], 1939년 3월 30일 제2차 세계 대전의 가능성이 보이자 워싱턴D.C에서 구미위원회 활동을 다시 시작하기 위해 호놀룰루로 돌아왔다. 8월 30일 한국인과 중국인이 국제정세에 대해 몽매한 것을 한탄하며 한국의 독립에는 미국의 지원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을 강조하는 편지를 대한민국임시정부김구에게 발송하였다. 이어 12월 10일 《워싱턴포스트》지와 인터뷰에서 이청천 장군의 독립운동을 알렸고[50], 이는 《워싱턴포스트》의 기사로 보도되었다. 1939년 조선에 입국하여 경성부 YMCA 강당에서 강연을 하였다. 조선총독부 경무국은 경찰을 파견하여 이승만을 체포하려 하였으나 그는 한국의 기독교 선교사들의 비호를 받았고, 선교사들에 의해 빼돌려져 체포를 면하고 부산항을 거쳐 다시 하와이로 되돌아왔다.

주미외교위원부 위원장 선임[편집]

김구, 주석 취임 직후 그를 구미위원장으로 복직시킨다.
1941년 6월에 이승만이 출판한 《일본을 벗기다》(원제 - Japan Inside Out: The Challenge of Today). 이 책은 일본 제국주의에 대한 실상을 낱낱히 비난하는 내용으로 향후 미국은 일본과 장차 전쟁을 하게 될 것임을 예견했다. 이 책 발간 6개월 후인 1941년 12월, 실제로 진주만 공격을 받은 미국에서는 커다란 관심을 받아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1940년 3월 김구가 주석으로 취임한 후, 6월 4일 대한민국임시정부로부터 다시 주미외교위원부 위원장으로 승인받았다. 6월 일본 제국주의의 팽창과 태평양 제 국가를 식민지로 삼아 유럽, 미국 침략을 경고한 《일본을 벗기다》(원제 - Japan Inside Out: The Challenge of Today, '일본 내막기'라고도 함)를 출간하였다. 진주만 기습으로 태평양전쟁을 겪은 미국인에게 일본의 침략을 사전 경고한 이승만의 '일본을 벗기다'는 이후 진주만 공격 이후 큰 설득을 얻어 베스트셀러가 되기도 했다. 당시 이 책은 《대지》의 저자 펄벅에게 "무서운 진실을 담고 있다"는 평가를 들었다.[52]

그해 9월 광복군 창설 소식을 통보받고 축전을 보낸다. 그러나 김원봉 등의 입각을 추진한다는 소식에 그는 김원봉 등을 절대 참여시켜서는 안 된다며 김구, 조소앙 등에게 항의 전보와 전화를 한다.

1941년 12월의 진주만 공격을 계기로 미국일본이 전쟁상태로 들어간 직후 이승만은 일본의 패배가 당연하다고 생각한 이승만은 한국이 독립국이 되어야 하므로 미국은 중경 임시정부를 승인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13]:299 12월 9일 미국일본이 전쟁을 시작하자 이승만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연락을 받고,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선전포고문을 전달받은 뒤, 동 12월 9일 미국 국무부 정치고문 스탠리 혼벡 박사, 대통령 프랭클린 D. 루즈벨트, 미국 국무부 장관 코델 헐 등에게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선전포고문과 임시정부 승인 요구 공한(公翰)을 전달하였다.

소련의 한국 점령을 우려하던 이승만은 대한민국임시정부 대표로 미국 국무부와 빈번히 접촉하였다. 1942년 1월 이승만은 미국 국무부소련이 장차 한반도를 점령할 것이라고 경고하였다.[13]:99 1942년 1월 2일 미국 국무부의 실세인 알저 히스와 면담하였다. 1942년 1월 2일 이승만은 국무부를 방문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대한 승인과 일본을 상대로 한 대일전쟁에 참가하기 위한 무기원조를 요청하였다. 그러나 미국 국무부의 혼벡히스는 현 시점에서 한국의 독립정부를 승인한다면 소련의 반감을 사게 될 것이고, 소련이 대일본 전쟁에 참가하지 않은 상황에서 이 문제에 대한 토론을 할 수도 없지만 소련의 관심 또는 이권을 무시할 수 없다고 하면서 이승만의 임시정부 승인요청을 거절하였다.[13]:299 1월 16일 한국에 우호적인 미국인들과 함께 한미협회(The Korean-American Council)를 창설, 조직하였다. 이 단체는 미국의회 상원 원목인 프레데릭 해리스(이사장), 전 캐나다 대사 제임스 크롬웰(회장), 언론인 제이 제롬 윌리엄스, 변호사 존 스태거즈 등을 중심인물로 선출했고,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승인과 무기지원을 목표로 활동하게 되었다.

임시정부 승인 운동 (1942 ~ 1944)[편집]

태평양 전쟁

1942년 2월 27일 이승만은 미국 국무장관 코델 헐에게 자신의 신임장과 임시정부의 공한을 제출하였다. 2월 27일부터 3월 1일까지 워싱턴 D.C의 라파옛 호텔에서 한인자유대회(The Korean Liberty Conference) 개최. 이승만이 이끄는 한미협의회와 재미한족연합위원회가 공동 주최하였다. 행사 참석 후, 3월 23일 미국 국무장관 코델 헐을 찾아가 임정을 승인해줄 것을 요청하였다.

이승만은 그 뒤에도 계속 미국임시정부를 승인해줄 것을 요청하였다.[13]:299 이승만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측에서는 1882년 체결된 한미수호조약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정통성, 한국사람들의 대일본 전쟁에서의 공헌 가능성 등을 설득하며 임시정부를 승인해줄 것을 요청하였지만 미국은 미국대로 임시정부 승인이 불가능한 이유를 여러가지를 들면서 반대하여 양자의 대립은 심화되었다.[13]:299

3월 30일 미국 육군장관에게 하와이 한인동포들을 일본인과 같은 적성국민으로 대하지 말 것을 요구하는 서한을 보냄. 육군장관으로부터 다르게 취급하겠다는 회신을 받았다. 5월 15일 미국 대통령 루즈벨트에게 극동에 대한 소련의 야욕을 상기시키고 임정 즉각 승인과 무기 지원을 요청하는 서신 발송하였으며, 8월 23일 캐나다에서 열린 제1차 퀘벡 회담에 참석한 루즈벨트 대통령과 처칠 영국 수상에게 전보로 임정 승인과 군사지원을 요청하였다. 그해 8월 이승만은 한미협회와는 별도로 종교적 후원단체인 기독교인친한회(The Christian Friends of Korea)를 조직했다. 이 단체는 한국 의료선교사 애비슨, 아메리칸대학 총장 폴 더글러스 등을 중심인물로 내세웠으며, 이후 임시정부 승인과 무기지원을 목표로 활동하였다.

1943년초 이승만은 미국루스벨트 대통령에게 한국정부의 승인을 요청하는 서한을 보내면서 반소전선을 구성할 것을 요청한 것을 요구하였다.[53] 1943년 카이로 선언에서 미국은 한국의 독립을 지지하였다. 그해 12월 이승만을 지지하는 대한인동지회재미한족연합위원회에서 탈퇴하게 되었다. 12월 19일부터 12월 22일 가이 질레트 미국 상원의원으로부터 임정 승인이 불가능하다는 서한을 받자, 몇몇 동지들과 함께 항의 방문하였다.

1944년 7월, 이승만의 노력으로 미국 체신청이 태극마크가 들어있는 우표를 공식 발행을 성사시키기도 했다. 1944년 10월 18일 미국 체류 중인 이승만은 중국 충칭에 있는 임시정부 주석 김구에게 영문으로 편지를 발송, 1944년 11월에 미국정부한국인의 대일항전을 기념하기 위해 5센트짜리 태극우표를 발행한다는 내용을 통지했다. 11월 미국 체신청에서 태극우표를 발행하자 이승만은 한국독립미국이 지지한다는 증명으로 태극마크를 도안하여 우표를 발행하였다는 사실을 알렸고, 발행된 태극우표 3점을 동봉하여 충칭 임시정부로 발송해주었다.

항일단파방송 선전활동[편집]

미국의 소리는 미국 정부가 전 세계의 청취자를 향해 방송운영하는 국제방송을 말하는데, 이승만은 6월-7월부터 매일 미국의 소리(VOA) 초단파 방송망을 통해 고국 동포들의 투쟁을 격려하였다. 한국어 방송은 1942년 8월 29일 처음 방송되었는데, 8월 29일 이승만의 제안으로 첫 방송을 시작했었다. 당시 미국의 소리방송은 1941년 태평양 전쟁이 발발함에 따라 전쟁상황을 알려주는 역할을 했었다.

일제 강점기, 1942년경성방송국에서 근무하는 한국인 직원들이 위험을 무릅쓰고,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송출되는 미국의 소리 한국어 방송을 듣곤했는데, 여기서 이승만이 1942년 6월 13일, 미국의 소리 라디오로 통해 미국 워싱턴 D.C로부터 '일제는 전쟁에 패하고 있다. 우리 임시정부는 미국의 승인을 얻어 연합군의 일원으로 참가할 날이 가까워 오고 있다. 나의 사랑하는 2300만 동포여, 우리가 독립을 위해 건국을 준비하여야 하며 피를 흘려야 자손만대에 영원할 것이다.'는 주 내용으로 한반도에 소식을 전하였던 사건이었다.[54] 당시 이 라디오 단파방송을 들었던 이들은 극히 소수였는데, 이는 밀청했던 사람들로부터 입으로 전래되고 알려지게 되어 훗날 국내에서 이승만에 대해 널리 알려지는 계기가 된다.

전서울 중앙 방송국 기자로 지냈던 문제안의 증언에 의하면 '항일 단파 라디오 방송은 힘은 많지 않지만, 아주 막연하게 저 하늘에 있는 구름 같이 먼 데 아주 알 수 없는 곳인데 우리나라를 다시 만들려고 하는 우리를 지켜려는 누군가가 있다. 이런것을 아주 가냘픈 희망이 있지만 그런 마음이 있었다.'라고 증언하였다.[55][주해 4]

이때 워싱턴에서 항일단파방송을 하였던 이승만의 공식직함은 '충칭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미외교위원부 위원장'이었다.

이 항일단파방송을 몰래 밀청하다가 일제 총독부에 의해 잡혀간 사람들이 적지않게 있었는데, 이들 증언에 따르면, '임시정부가 중국이 아닌 미국에 있고, 이승만이 대통령이라는 소문까지 퍼지기도 했다.'라고 한다.

이승만의 항일단파방송 육성원본은 오늘날 천안에 위치한 독립기념관에 보존되어 있다.

전략사무국(OSS) 지원 요청[편집]

임정한국광복군의 특수훈련을 계획하고 미국국무성의 협조를 기대한다. 임정의 연락을 받은 이승만은 미국국무성국방성과 교류하며 임정광복군미국 OSS의 합동훈련을 중개하게 된다.

1942년 5월 5일 이승만의 미국 내 후원조직인 '한미협의회' 회장 제임스 크롬웰이 국무장관 코델 헐에게 임정 승인을 촉구하였고, 42년 9월 30일 이승만은 미국 육군전략사무처(OSS)의 로센봄 중위, 국무부 차관보실의 로스토우 등을 만나 중국내 한국인 게릴라 부대 조직의 후원 문제를 협의하였다. 10월 10일 다시 미국 육군전략사무처(OSS)를 찾아 프레스톤 굳펠로우 대령에게 항일 게릴라 조직 제의. 10월 미국육군전략사무처의 협조를 얻어낸 뒤, 임정에 이를 통보하고 임정으로부터 한국인 선발요원 50명의 명단을 OSS에 통보하였다. 1942년 12월 4일 12명의 한인이 선발되어 군사훈련을 받기 시작하였다.

12월 7일 이승만은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한국인 군사훈련에 대한 지원을 요청하는 서한을 보냈다. 12월 31일부터 1943년 2월 16일까지 이승만은 계속 미국 국무장관 코델 헐에게 면담을 요청하였으나 미 국무장관 코델 헐이 만나 주지 않자, 편지로 만약 미국정부가 임정을 승인하지 않으면, 전후 한반도에 친소련 공산정권이 수립될 것임을 경고하였다.

1943년 2월 17일 미국 육군장관 헨리 스팀슨에게 편지를 보내, 항일 게릴라 조직계획서를 제시하였다.

귀국[편집]

1945년 5월 미국 샌프란시스코 국제회의에 파견된 대한민국임시정부 구미위원(앞줄 가운데가 대표단장 이승만, 뒷줄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윤병구·정한경·유경상·임병직, 앞줄 왼쪽부터 이살음·대표단장 이승만·송헌주 순)

1944년 8월 21일 루즈벨트 미국 대통령에게 편지를 보내 임정을 승인해줄 것을 거듭 촉구하였다. 9월 11일 이승만은 제2차 퀘벡 회담에 참석한 루즈벨트영국 총리 처칠 경 에게 다시 카이로 선언문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일본 패망 후 한국의 분리 독립을 요구하는 전보를 보냈다. 이승만의 독립승인 요청에도 불구하고 미국무부 내의 반대파와 공산주의자들은 임시정부의 승인을 강력히 반대하였고 미국 대통령 루스벨트1943년에 카이로 선언에서 약속한 한국의 독립을 번복하고 1945년 2월 얄타 회담에서 소련스탈린과 한국의 신탁통치를 합의하였다.

1945년 2월 5일 이승만은 미국 국무 차관 조셉 그루에게 전보를 발송, '한반도에 공산정권을 수립하려는 소련의 야욕을 막는 방법으로 임정을 즉시 승인해줄 것'을 요구하였다. 3월 8일 미국 국무장관 에드워드 스테티니어스에게 4월에 열릴 샌프란시스코 유엔 창립총회에 임정 대표를 초청해줄 것을 요청하였다. 3월 9일 부인 프란체스카 도너를 대동하고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의 영부인 엘리노어 루즈벨트 여사를 면담하였다.

1945년 5월 유엔 창립총회에 참석하려는 한국인들에게 중국의 외교부장 송자문(쑹쯔원)이 좌우합작을 주장한 데 대해 맹렬히 반대성명을 발표했다. 5월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린 유엔창립총회에서 이승만은 프랭클린 루스벨트가 얄타에서 한반도를 소련에 양도해 주었다는 정보를 접한 뒤 소련을 맹공격하는 선전을 하였다.[13]:99 이때 이승만이 돌린 반소 전단지가 소련측 대표들의 수중에도 들어가게 되어 소련 외상이자 소련 수석대표인 몰로토프(Vyacheslav M. Molotov)는 이승만과 임시정부를 극도로 적대시하게 되었다.[13]:99 김성숙(金星淑)은 중국공산당의 유일한 유엔대표였던 둥비우로부터 소식을 전달받고 임정 국무위원회 석상에서 이승만을 주미외교위원장직에서 해임하고 임정소련에 해명과 사과를 해야 된다고 주장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13]:99 5월 14일 얄타 회담에서 미국과 영국이 한국을 소련의 지배로 넘겨주기로 비밀협약이 이루어졌다는 주장을 발표하여(얄타밀약설) 미국 국무부와도 충돌하게 되었다.

1945년 8월 소련은 한반도에 점령군으로 진주하면서 이승만을 반소적인 인물로 지목, 그 뒤에 벌어지는 일련의 정치과정에서 이승만의 참여를 사실상 배제하기로 계획하였다.[53] 1945년 8월 23일 소련군은 스탈린과 외무부의 비신스키차관에게 보낸 보고에서 이승만을 "한국의 망명정치인들 가운데 가장 반동적이고 반소적인 인물"이라 보고하기도 했다.[53] 소련군은 이승만을 반소적인 인물로 평가하는 이유로, "이승만이 43년 미국의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한국정부의 승인을 요청하는 서한을 보내면서 반소전선을 구성할 것을 요청한 것"을 근거로 했다.[53]

1945년 10월 16일 중앙청에서 귀국인사를 하는 이승만과 그를 수행중인 윤치영

일본 천황이 방송을 통해 항복을 발표한 1945년 8월 15일 정오는 워싱턴 시간으로 14일 밤 11시였다. 이 뉴스를 들은 이승만은 그 날 밤을 거의 뜬눈으로 새웠다. 그는 부인 프란체스카에게 되도록 빨리 자신이 먼저 귀국하겠다는 결심을 밝혔다. 프란체스카는 이미 각오하고 있는 터였다. 이승만은 15일 아침 워싱턴에 사는 한국 교포 30여명을 구미위원부로 불러 축하파티를 열었다.[56] 8·15 광복 직후 이승만은 즉시 귀국하려 하였으나 이승만을 기피인물로 여기는 미국 국무부가 쉽게 여권을 내주기 어려워 2개월간 발이 묶여 있었다. 이승만은 1945년 9월 5일 국무성 여권과장 루드 쉬플레어 여사를 통해 여권발급허가를 받았고 국방성 스위니 대령의 주선으로 미군작전 지역인 한국에 들어갈 수 있는 허가도 일단 얻었다. 그러나 국무성은 곧 주미한국외교대표라는 이승만의 호칭을 인정할 수 없다는 이유로 여권발급허가를 취소해버렸다. 이승만은 즉각 호칭을 포기하겠다는 태도를 밝혔지만 국무성은 뚜렷한 이유를 대지 않은 채 계속 여권발급을 거부하다가 나중에는 더 이상 그의 일에 간여하지 않겠다는 태도로 나왔다.[57]

1945년 8월 하순 이승만은 미군 인사들과 연락, 굿펠로 대령의 도움으로 미 여권국으로부터 여행증서를 받고 군사지역으로 지정되어 있던 한국에 입국하려고 맥아더의 극동사령부(GHQ)로부터 입경 허가서를 받아 출발을 서두르게 되었다. 미국 국무부는 이승만의 허가서에 '고급 집정관(High Commissioner)'이라는 표현이 있음을 문제삼아 정정을 요구했다. 이 문제가 생긴 것은 9월 23일이었다. 이 표현을 삭제한 뒤에야 여행문서를 재발급받았다.[13]:312~314 1945년 9월 7일 조선인민공화국의 주석에 선임되었다.[58] (조선인민공화국 참조) 그러나 취임을 거절하였다.

광복 직후[편집]

1945년 10월, 귀국 환영회에서의 이승만.

1945년 10월 4일 뉴욕, 그 간 미국을 주된 활동 무대로 삼아 외교 중심의 독립운동을 해온 이승만이 귀국길에 올랐다. 이승만은 하와이와 괌을 거쳐 12일 도쿄에 도착한 뒤 그곳에서 맥아더를 만나 며칠 머문 다음, 미국 군용기를 이용하여 10월16일 오후 5시 김포공항에 도착했다. 이승만의 귀국 경위는 매우 복잡해 아직까지도 학자들 사이에 의견 통일이 돼 있지 않지만, 널리 통용되고 있는 견해는, 미 국무성은 이승만의 귀국을 반대했지만, 미 군정청장 존 하지 중장이 그의 귀국을 원했다는 것이다.[59] 그의 귀국은 다른 독립운동지도자보다 이른 것이었다. 이승만이 비교적 연합국 측에 잘 알려진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귀국 다음날인 1945년 10월 17일 오전 10시 존 하지의 안내로 군정청 제1회의실에서 기자회견을 가졌는데, 존 하지의 대접은 극진했다. 저녁 8시 30분에는 서울 중앙 방송국의 전파를 통해 첫 방송을 했는데, 당시 그의 연설 요지는 "나를 따르시오.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습니다."였다.

미군정청 사령장관 존 하지, 이승만은 이후 그와 수시로 마찰을 빚는다.

이승만이 귀국후에 벌인 첫 번째 대미교섭은 임시정부요인들의 환국문제였다. 이승만은 존 하지에게 임정을 정부 자격으로 귀국하게 해 줄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사령관 하지는 답변을 회피한다.

이승만은 측근들에게 "존 하지가 임정을 불한당 집단이라고 생각하고 있다"는 말을 여러번했다.[60] 그러나 이승만 역시 속으로는 임시정부를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다. 그는 우선 임시정부가 "정부" 자격으로 들어오는 것을 원치 않았다.[출처 필요] 자신을 중심으로 새로운 정부를 세우겠다는 뜻을 품은 이승만으로서는 임시정부가 대내외적으로 법통을 인정받는 형식으로 귀국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던 것이다.[61]

귀국 당시 이승만은 남한의 좌우정당·사회단체 대표들이 모두 그의 지도를 받기 위해 모여든 것에 크게 고무되었다. 미군정 또한 그의 지도력을 원했다. 이에 이승만은 10월 21일 ‘공산당에 대한 나의 감상’이라는 방송 연설을 통해 “나는 공산당에 대하여 호감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그 주의에 대하여도 찬성하므로 우리나라의 경제대책을 세울 때 공산주의를 채용할 점이 많이 있다…”라고 하여 공산주의를 포용하겠다고 선언했다.[62]

그가 귀국하자 국내의 후견인이자 독립협회 때부터의 동지였던 윤치호가 만나줄 것을 요청했지만 이승만은 윤치호를 만나지 않고 차일피일 미루었다.

귀국 환영회[편집]

1945년 10월 16일 이승만의 환영회를 할 때 조병옥은 이승만을 맨 앞의 좌석에 앉게 하도록 건의하였다. 10월 16일 이승만은 사실상 평민의 자격으로 환영회에 참석하기로 되었는데 어떻게 앞자리에 앉게 할 수 있겠느냐 하고 하지 장군이 항의를 하자 조병옥은 대답하기를 "이승만 박사는 비록 평민의 자격으로 환영회에 참석하게 될 것이지만 그는 독립운동의 원훈이므로 당연히 앞자리에 앉아 여러분을 환영해야 한다."고 이틀 동안이나 주장하여 관철시켰다.[63]

하지 장군은 결국 조병옥의 말에 수긍하고 자기 스스로가 이승만 박사를 소개하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하지 장군이 답사를 마치고하단하자 이승만 박사는 만면에 웃음을 띄우고 하지 장군과 정답게 악수하는 광경을 볼 수 있었다.[63] 이어 조병옥은 직접 이승만 환영사를 낭독했다.

이제 우리 한민족의 해방을 위하여 태평양 전쟁에서 영웅적으로 용전분투한 역전용사 미군을 환영하는 이 마당에 우리는 40년간 우리 한민족을 착취하고 압박하던 이 백아전당(白亞殿堂) 앞에 우리의 자유독립의 상징인 백발이 성성한 이승만 박사가 바로 이 자리에 나와 계십니다."하고 이승만을 소개하였더니 덜어선 회장의 수만은 청중들에게서 우레같은 박수소리와 함께 감격의 울음소리가 이곳 저곳에서 퍼져나왔다.

박수소리가 끝나는 것을 기다려 조병옥은 연설을 계속하였다. "이 백아전당은 희고 깨끗이 단장되어 있지만 그 속에서 일보던 총독부의 일본인 관리들은 우리 한민족을 어떻게 해야만 많이 착취하고 일본에 예속되도록 할 것인가 하는 것을 계획하고 집행한 저주받은 아성입니다. 그러나 이 백아전당의 흰 것과는 달리 우리민족의 자유독립의 상징인 이승만 박사의 백발은 40여년 간의 해외의 모진 풍상을 다 겪어가면서 검은 머리가 흰 머리가 되도록 오직 조국의 광복만을 위하여 투쟁한 인생의 산 역사를 말하는 백발의 기록이며 상징일 것입니다.[64]

조병옥이 말을 맺었을 때 다시 우레같은 박수 소리가 쏟아져 나왔다. 하지 장군은 직접 답사와 함께 이승만의 약력을 직접 소개하였다. 조병옥에 의하면 '하지 장군도 이 우레같은 박수 소리에 압도되어 자기가 답사를 하지 않을 수 없어 결국 이승만의 소개를 하였다고 생각한다.'고 평하기도 했다.[64]

한민당 영수직 거절[편집]

이승만은 미국 국무성의 편의 제공으로 귀국한 만큼, 미 군정에 대해서나 미국 행정부에 대해서나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65] 10월 16일 오후 허정은 미 군정 당국의 연락을 받고 이승만이 여장을 푼 조선호텔로 찾아갔다.[66] 허정은 이승만과 대좌, 국내 정세를 설명했다. 허정은 '무엇보다도 이 박사가 겨레의 구심점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좌익의 움직임을 경계해야 한다는 점'도 덧붙였다.[65]

그 자리에서 허정한민당의 창당을 알리고 그에게 영수 추대를 수락하도록 권고했다. 그러나 이승만은 수락을 거절했다.

한국민주당이 조직되었다는 것은 참으로축하할 일이지만, 나로서는 영수직을 맡을 수가 없소. 한민당이 싫어서는 아니오. 나도 미국에 있으면서 민주주의 정치에서 정당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알고 있지만, 지금 내가 할 일은 한 정당의 지도자가 되는 일을 아닐 것이오. 나는 일당 일파의 영수가 아니라 온 국민의 벗이 되고 싶소. 지금 내가 할 일은 온 민족을 단합시켜 한뜻을 갖고 일하게 하는 것이오. 지금 내가 한 정당에 소속한다면 반드시 이루어야 할 전민족의 단합이라는 더 큰 일을 버리는 것이 될 것이오.[67]

허정은 여러번 설득했지만 이승만은 한 정당 정파의 리더가 되기는 싫다고 답했다. 이승만의 성품을 알고 있던 허정은 더 이상 권하지 않았다.[67]

독립촉성회 결성[편집]

비서실장 윤치영, 이후 56년 이기붕 세력에게 밀리기 전까지 그를 최측근에서 보좌한다.

1945년 10월 중순 윤치영 등의 독지가들의 주선으로 돈암장에 입주한다. 그가 미국에 체류했을 때 이미 그의 열렬한 추종자가 된 허정, 장덕수가 돈암장에 출입했고, 윤치영, 이기붕 등은 그의 비서역을 자처했다.

1945년 10월 23일 각 정당·단체 대표 200여 명이 모여 이승만을 정점으로 소집한 회합에서 독립촉성중앙협의회의 회장으로 추대되었는데 여기에는 박헌영조선공산당 등 공산 정당도 모두 포함돼 있었다.[68](독립촉성중앙협의회 참조)

1945년 12월 3일. 임시정부요인 귀국기념 사진.

이후 김구, 김규식 등과 함께 신탁통치 반대운동을 전개해 나갔다. 10월 31일 이승만은 조선공산당 책임비서 박헌영을 돈암장에 불러들였고, 두 사람의 이날 회담은 원만하게 타결된 듯 보였다.[69] 그러나 회담에서 논의된 선친일파 숙청을 주장하는 박헌영과 건국후 처벌을 주장하는 이승만 사이에는 합의점을 찾지 못하였다. 11월 3일 이승만의 통일안에 대해 조선공산당이 반대성명을 발표했고, 11월 21일 이승만도 <공산당에 관한 나의 관념>이란 방송 연설을 통해 공산당의 본질에 관해 설파했다. 이후, 돈암장에 머물렀다가 거처를 이화장으로 이동했다.

상해 비행장에 내린 임정요인들이 공항에서 환영나온 교민들과 기념사진

11월 3일 대한민국 임시정부 환국 제1진이 귀국하였다. 이승만은 친히 김포비행장으로 나가 김구, 김규식 등 환국 요인들을 영접하였다.

1945년 11월 23일 이승만은 조선일보의 복간을 축하하는 축하 성명을 발표하였다.[70] "조선일보가 왜적(倭敵)의 압박 밑에서도 민족의 개명(開明)과 국권(國權)의 회복(恢復)을 위하야 분투항전(奮鬪抗戰)한지 다년(多年)이었는데 왜적의 시기와 탄압으로 말미암아 폐간하게 이름을 우리가 피가 끓게 통념(痛念)히 여겨온 바"라며 "금일 우리의 위급한 이 시기에 조선일보가 다시 부활하여 출세(出世)됨을 우리는 한없이 기뻐하며 환영한다"고 축하했다.[70] 11월 26일 이승만은 '전체 국민은 총단결하여 임시정부를 적극 지지하자'며 국민에게 호소하였다.[71] 11월 30일 노기남 대주교의 초대로 주교관 만찬에 참석하였다.

임정요인 환영식에 이승만과 김구 (1945.12.01)

1945년 11월말과 12월돈암장으로 재력가 20여 명을 불러모아 “새로운 정부가 수립되려는 모든 국가지도자들은 경제적으로 부유한 시민들의 지원을 받는다. 조선에서는 이렇나 지원이 매우 부족하다”면서 경제보국회 결성을 독려하였다.[72]:223 [73] 1945년 12월 서울운동장에서 열린 임시정부 환영회 참석하였다. 하오 2시 20분경 조선생명회사 2층에서 김구를 중심으로 좌우에 이승만, 이시영, 김규식, 류동렬 등이 창을 열고 환영행렬을 맞이하였다.[74] :145 1945년 12월 1일 이승만은 김구김규식을 초대하였다. 김구김규식은 이승만의 초대를 받고 12월 2일 돈암장을 방문, 2시간 동안 회담하였다.[74]:146

1945년 12월 16일 방송을 통해 공산주의자들의 파괴행동에 경계가 필요하다는 공격을 하였다.[75] 1945년 12월 24일 한국 소년군 총본부 고문에 추대되었다.[74] :221

신탁통치 반대 운동[편집]

김구를 군정청 사령장관 하지에게 소개하는 이승만 (1945년 11월)
이승만의 소개로 하지와 면담 (1945년 11월)

45년 12월 28일 모스크바 삼상회의 결과 신탁통치가 결정되자 이승만은 김구와 함께 신탁통치 반대(탁치반대)를 결의하였다. 1945년 12월 29일 김구, 김규식과 함께 신탁통치 반대운동을 지도하였다. 그러나 김규식은 곧 반탁 대열에서 이탈하였다. 1946년 1월 14일 이승만은 공산당을 매국노라고 단정하고 공산당과의 일체 타협을 거부하였다. 허정은 이를 두고 소련의 찬탁하라는 지시를 받고 바로 찬탁으로 돌아선 '좌익의 사대주의 때문'이라 하였다.[76] 그해 1월 이승만은 미국으로 건너가 국무성 담당자들과 접촉을 시도했고, 이승만의 미국 도미를 불허하는 미군정의 반대로 이승만의 도미는 난관에 부딪혔으나, 출국을 감행했다. 이때 국내외 우파 단체의 자발적인 모금으로 이승만의 도미 여비가 마련되었다.

1946년 1월 미소공동위원회가 결정되었다. 이승만과 김구는 미소공위 반대와 공위 불참을 선언했다. 그러나 김규식은 공위 찬성의 입장에 서게 됐다. 한국민주당장덕수가 이승만을 방문하여 이승만에게 미소공위 참가를 설득했으나, 이승만도 이를 거절하였다. 1월 16일부터 2월 6일까지 미소공위 예비회담이 열렸다.

1946년 2월 1일 대한민국 비상국민회의가 개최되었는데 이승만은, 김구, 김규식, 조만식, 권동진, 김창숙, 오세창, 홍명희 등과 함께 비상국민회의 대의원에 선출되었다.[77] 2월 8일 조선독립촉성중앙협의회신탁통치반대국민총동원위원회를 통합한 대한독립촉성국민회(大韓獨立促成國民會)가 설립되자 이승만은 총재로 추대되었다.

귀국 직후 촬영한 영정사진 (1945년 10월)
1946년 5월의 미소공위 회의장에서 열린 신탁통치 반대 운동

1946년 2월 13일 비상국민회의의 최고정무위원직으로 선출되었다. 이 자리에서 비상국민회의 최고정무위원회 설치를 결의하고 비상국민회의는 이승만, 김구에게 최고정무위원 선임권을 주었다. 이승만과 김구는 28인의 최고정무위원을 선발했다.[77] 2월 14일 남조선대한국민대표민주의원(민주의원) 의장에 선출되었다.[72]:2062월 14일 아침 미군정청 1회의실에서 민주의원이 개소된다는 보도를 접한 김창숙은 이승만·김구가 민족을 파는 반역자가 되었다'고 비판하였다.[77] 민주의원 지도부 구성은 이승만과 김구에 의해 이루어졌기 때문에 좌익은 배제되었다.[72]:225

46년 2월 이승만은 김구를 위원장으로, 김성수를 부위원장으로 하는 반탁독립투쟁위원회 고문으로 선출되었다.[78]

1946년 3월 1일 김구와 함께 3.1절 기미독립선언기념전국대회를 주관하였다. 1946년 3월 19일 민주의원 의장직을 사퇴했다.[79]:235 표면상 이유는 건강 문제였지만, 사실은 미 군정이 다음날 개최될 1차 미소공동위원회를 앞두고 철저한 반소(反蘇)주의자이며 신탁통치안을 격렬히 비판해 온 이승만을 정치 일선에서 배제할 필요를 느꼈기 때문이었다.[79]:235 미군정은 의장 대리에 김규식을 앉혔다.[79]:235[80][81] 미군정은 이승만을 이화장에 반(半) 연금상태로 묶어두었다. 정문에는 미군 헌병을 세워두고 출입자들을 하나하나씩 체크했으며, 미군정청과 직통으로 연결되는 미군용 전화도 이화장에서 떼어갔다.[79]:235 [81][82] 당시 한국 민간인 중 미군 군용 전화가 가설된 집은 이승만과 김규식의 집뿐이었으며, 3월 20일 이승만 집의 전화를 끊었다.[79]:235

46년 3월 22일 우파정당 통합에 나선 한독당은 국민당과 통합을 선언하였으며, 이때 김구는 이승만에게 한독당의 중앙집행위원장을 맡아 줄 것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이승만은 '초당적인 국민운동'을 내세워 이를 거부하였다.[79]:235 [83]

미·소 공동위원회 반대[편집]

1946년 제1차 미소공위. 왼쪽부터 이승만, 김구, 스티코프, 안재홍.

1946년 3월 20일에 열린 미·소 공동위원회에서 소련측은 미국측이 예상했던 대로 모스크바결정을 지지하지 않는 반탁세력은 임시정부 구성에서 제외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난항을 거듭하던 미소공위는 소련측이 양보하여 반탁투쟁을 했더라도 이후에 그러한 활동을 하지 않겠다고 서약하면[84] 임시정부에 참가할 수 있다는 방안을 제시했고 이것에 토대를 두어 공동성명 5호가 발표되었다.[85] 이승만은 서명에 동의하지 않다가 미군정의 압력으로 서명에 동의하게 되었다.

1946년 4월 이승만과 김구는 밀사 김욱을 조만식에게 파견하였다. 밀사로 파견된 김욱을 접견한 조만식은 자신의 이름을 사용하는 것은 방임하면서도 직접 문서에 서명하지 않았다. 대신 밀사는 조만식의 유고시 그를 대행하는 이윤영의 서명을 받아서 이승만과 김구에게 제출했고, 소련 측에 대한 반박자료로 미·소공위에 제출되었다.[86]

덕수궁 석조전. 이곳에서 미소공위가 개최되어 좌우합작위원회 회담이 열리곤 했었다.

그는 미·소공동위원회가 신탁통치를 추진시킨다고 이를 극력 반대하였다. 장덕수는 미소공동위원회가 신탁통치를 추진시킨다고 이를 반대하는 이승만이나 김구와는 달리 미소공위에 참석하여 한국인의 견해를 당당히 표명하기 위해서는 미소공동위원회와 협의해야 하다고 주장했다.[87]

1946년 5월 19일 이승만은 미소공위에 불참할 것을 공식 성명으로 발표했고, 김규식은 반박성명을 내고 전체 애국자는 적극 미소공위에 참가하라고 공식성명을 발표했다.[88] 그러자 이승만의 측근이던 박용만은 “김규식 박사의 주장에 따른다면 미소공동위에 끝까지 불참을 표명했던 이승만 박사나 김구 선생은 애국자가 아니고 자기만이 애국자라는 어처구니 없는 결론”이라며 비난하였다.[88]

북한이 공산주의화 되어가자, 1946년 6월 3일 전라북도 정읍에서 가진 유세에서 선거가 가능한 지역에 한해서 정부 수립을 할 것을 주장했다. 1946년 5월 경제보국회로부터 1천만원의 정치자금을 제공받았다. 경제보국회는 이승만, 김구, 김규식 등 우익 정치인들에게 정치자금을 제공하였는데, 이들 중 가장 큰 혜택을 받은 것은 이승만이었다.[72]:2236월 29일 민족통일총본부가 설치되자 이승만은 민족통일총본부 총재에 선출됐다.[79]:257 1946년 8월 3일 여운홍사회민주당 결성식에 참석하여 축사를 하기도 했다.[89]

미·소 공동위원회에 대한 저항 운동[편집]

1946년 7월 이승만은 상하이 임시정부를 계승한 형태로든지, 선출된 실행위원회에서 임명된 형태로든지 대한민국 정부의 수립을 촉구하면서 미소공위에 도전했다.[90] 그러한 정부의 지위는 선거가 실시될 때까지 단순한 과도정부가 되어야 한다고 이승만은 밝혔다. 그리고 여러 정치써글에서 논의된 정부구성에 관한 의견들을 언급하면서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 의존하지 말고 우리 손으로 신정부를 수립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미소공위의 결과가 우리의 기대와 일치한다면 그때는 정부를 구성하려는 계획을 포기할 수도 있습니다. 다만 그것이 만족스럽지 못하면 우리는 우리의 길을 가는 것이 올바르다고 생각합니다."라고 했다.[90]

이승만은 신탁통치를 완강하게 거부함과 동시에 미소공위 역시 깨져야 된다고 주장했다. 허정에 의하면 당시 '한민당 안에서는 신탁통치를 전제로 하는 미소 공위 참석 여부를 놓고 논란이 벌어졌다. 그러나 한민당이 참석하지 않은 채로 그 협정에서 정해진 임시정부 수립이 결정된다면 그 후 한민당은 물론이고 우익 진영도 발언권을 상실하므로 일단 참석하여 반대 의사를 관철하기로 결정하였다.' 한다.[76] 이승만이 강력 반대를 하므로 한민당은 어쩌지도 못하고 안절부절했다. 그러나 이승만의 태도는 완강하여, 한민당에 대해서도 미소 공위 참석을 거부하라고 종용했다.[76] 하지 중장은 이승만을 설득하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으나 이승만은 끝까지 반대 의사를 굽히지 않았다.

이승만의 미소공위 반대에 하지 사령관은 골칫거리를 만났다며 골치아파했다. 이승만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미소공위는 어느 정도 진척을 이루었다.[90] 허정돈암장으로 이승만을 찾아가 한민당이 미소 공위에 참석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를 설명했다.[76]

선생님이 반대하시는 뜻은 이해가 갑니다. 또한 저 자신도 (미소공위나 신탁통치를) 반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정치를 하려면 현실을 무시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미소 공위의 개최는 미국의 정책입니다. 미국의 군정하에 있는 지금, 그들의 정책을 극단적으로 반대한다면, 결국 그들은 우리를 제외하고 그들의 정책을 밀고 나갈 것입니다. 우리가 전혀 관여하지 못하게 되면 그 결과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미국은 더 좋아할 것이고 그 결과는 엉뚱한 것이 될 지도 모릅니다. 그런 만큼 선생님은 반대하시더라도 가만히 계십시오. 반대 의사를 적극적으로 밝히시되 반대 운동에 적극 나서지는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91]

허정의 장기간 설득은 통하여 이승만은 미소공위를 반대하되, 적극적으로 나서서 미소공위 반대 시위를 주도하지는 않았다. 허정은 이를 두고 '이 박사는 고집이 센 반면에 옳은 말은 깨끗이 받아들이는 담백한 일면이 있었다.[91]'고 했다. 허정은 또 만일 이박사가 끝까지 반대 의사를 적극적으로 고집했다면 한민당 등 이 박사 지지 세력은 딜레마에 빠졌을 것이다. 일단 이 박사의 묵인 끝에 한민당은 미소 공위에 참여하게 되었다. 라고 하였다.[91] 제1차 미소 공위가 결렬되면서 반탁운동은 더욱 고조되었으며, 이승만과 김구는 반탁 운동에서 공동 보조를 취하였다.[91]

그러나 이승만의 미소공위 반대에 미군정은 골치아파했다. 미군정은 비밀리에 이승만을 정치적으로 거세할 계획을 세우기도 했다. 이승만은 1945년 11월 3일 이래 좌익 우익 합작의 독립촉성중앙협의회의 실패로 말미암아 그 역량이 박헌영을 따를 수 없다는 평을 받았으며 또 이승만은 완강한 정치인이라고 해서 한국 정치계에서 제가되리라고 하였던 것이다.[92] 김구 주석은 극렬한 반탁운동을 하였기 때문에 미국의 신망을 얻지 못하였다.[92] 이승만과 김구는 정국의 반전을 꾀한다.

한편 이승만, 김구 등은 서북청년단에 종종 경제적 지원을 해주곤 했는데 대부분 일회성이었다.[93]

단독 정부 수립론[편집]

1946년 6월 3일 '남한 단독정부의 수립'을 주장한 이승만의 ‘정읍 발언’을 보도한 서울신문 1면 기사.

1946년 5월 20일, 전남 목포에서 이승만은 반공주의적인 발언을 하게 되는데 이는 향후 자신의 정치노선을 분명히 드러낸다.

"공산주의자는 소련으로 보내야 한다. 가족의 일원이라도 거부하라.

공산주의자는 파괴주의자이므로 전부 체포할 것이다.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되면 남조선에 단독정부를 세워 3.8선을 깨트리고 소련군을 내어 쫓고 북조선을 차지할 것이다."[94][95]

이러한 그의 과감한 발언으로 그는 공산주의자·사회주의자들로부터 '늙은 보수꼴통'이라고 비난받기도 하였다.

1946년 6월 11일 서울 정동교회에서 열린 독촉국민회 전국대표자대회에 참석하였다.[79]:257 이승만은 이날 연설에서 "소련 사람을 내보내고 공산당을 이땅에 발못붙이게 하자,"고 역설하면서, "최고사령부라고나 할까, 최고의 명령을 내리는 기구를 조직할 터이니 이 명령에 복종함을 맹세"할 것을 요구하였다.[79]:257[96][97] 그러자 김구는 "우리는 죽음으로써 이승만 박사께 복종하기를 맹세합시다."라고 화답하였다.[79]:257[98][99]

46년 8월 15일 미 군정청에서 열린 8·15 해방 1주년 기념식에 참석하여 하지 중장에 이어 인사말을 했다.[100] 1946년 9월 10일 독립정부 수립 문제를 미소공동위원회로부터 유엔에 넘길 것을 요구하기 위해 임영신을 미국에 파견하였다.[75] 9월 12일 돈화문 앞에서 공산주의자의 권총저격 미수를 당하였다.[75]

1946년 11월 우익단체들이 통합하여 서북청년단이 결성되자 이승만은 김구·한민당과 함께 서북청년단에 자금을 지원해 주었다.[101]

1946년 11월 북한에서는 인민위원회 위원 선거가 있었다. 이때 월남했던 반공세력이 일부다시 월북하여 선거방해를 도모하였다.[102] 김일성은 이를 이승만과 김구가 배후에서 조종한 짓이라고 선언했다. 심지어 이들의 방해로 선전대원 몇 명이 사망한 경우도 있었다. 이들은 “선거가 비민주적이다”, “승려들과 목사들은 선거하지 말라”, “공동후보가 아니라 자유경쟁” 등으로 선거에 비판적이었고, 유권자들에게 선거에서 찬성하면 흑함에 넣으라는 흑함운동을 하기도 하였다.[102] 이들에 대하여 김일성은 인민의 원수이며 반동파들에게 매수되어 그들의 간첩배가 된 세력으로 몰았다. 김일성은 선거기간에 생산기관의 방화, 운수부분에서 충돌사건, 주요 인사의 암살미수사건 등이 반동세력의 반대운동의 일환으로 파악하였고, 나아가서 북한에서 일어난 방화를 이승만과 김구가 파견한 방화단으로 규정하였다.[102]

도미 외교[편집]

1946년 12월 이승만은 미국을 방문하였다. 1946년 12월 이승만은 미국을 떠나기 전에 우익세력과 함께 반탁운동을 추진하되 김구가 체포되어 투옥될 정도로 격렬하게 하도록 사전에 말을 맞추었다.[79]:13그러나 계획은 미군정 첩보망에 걸렸고 이승만은 1월 16일 미국 워싱턴에서 국내에 전문을 보내 김구에게 과격 시위를 중단할 것을 요청하게 되었다.[79]:13

그가 미국에 있을 때 김구대한민국임시정부 계열은 3.1절을 전후하여 독자적으로 정부수립을 기도하였다. 이승만과 한국민주당은 김구와 임정의 행위를 국제정세를 모르는 자살행위라며 비판하였다.[79]:15 1월~2월 이승만 주도의 독립촉성중앙회김규식 중심의 좌우합작위원회를 '독립운동'의 반역집단이라고 규정하고 이들의 회색행동을 철저히 소탕할 것을 결의하였다.[103]

1947년 3월 3일 임시정부 국무위원을 보선할 때 이승만을 임시정부 주석, 김구를 부주석으로 추대하였다.[104][105] 김규식, 장건상, 김붕준(金朋濬) 등 중도우파 국무위원은 보선에서 배제되었다.[105] 그리고 1947년 9월 5일의 국무위원 보선에서 재선되었다.[106] 3월 12일 미국해리 S. 트루먼 대통령이 트루먼 독트린을 발표하자, 이를 쌍수로 환영하면서 이것이 모든 나라에 서광을 비추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해리 S. 트루먼에게 감사의 편지를 보내 한국에 이 정책을 수용케 함으로써 민족주의자와 공산주의자 사이에 협조를 이끌어내려는 미군정의 정책을 포기토록 권하였다. 또한 '미국 지역 내에서 즉각적인 과도 독립정부를 수립함으로써 공산주의의 진출에 대한 방파제를 구축'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79]:24~25

1947년 4월 5일 미국 방문을 마치고, 귀국길에 올랐다. 귀국 도중, 일본에서 맥아더를 만났고, 중국에 들러 장제스와 국민당 정부의 환대를 받았다.

1947년 4월 21일 비행기편으로 경기도 김포공항을 통해 귀국하였다. 김구는 김포공항에 나와 그를 친히 마중하였다. 이승만이 귀국하던 날, 김구김포에 마중을 나가 단정론 연설만은 그만두도록 충고하였다.[107]

4월 23일 귀국성명을 발표하였다. 4월 27일 열렬한 환영 속에 열린 귀국 환영대회에서 이승만은 입법위원이 총선거 법안을 만들어 남한 과도정부, 즉 단독정부를 수립해야 하며 이제 김구와 김규식은 임정법통론과 좌우합작론을 모두 포기하고 나와 같이 보조를 취해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79]:28 1947년 5월 미소공동위원회가 열리자 이승만과 김구는 반탁투쟁을 전개했다.[85] 5월 21일 예정된 제2차 미소공위 개최를 앞두고 단독정부 수립론을 공격적으로 외치는 이승만은 위험인물로 간주되어 하지의 지시에 의해 연금상태에 들어갔다.[79]:29

1947년 6월 19일 미소공위 참석 문제를 놓고 제단체 간 이론이 있자, 한민당은 '참여하여 반대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공위 협의에 참가할 것을 주장하면서 6월 19일 74개 정당 사회단체로 구성된 '임시정부수립대책협의회'를 구성했다. 이에 대해 이승만은 '회의에 참가해서 신탁을 반대할 수 있다는 말은 우리로서는 해석키 곤란하다. 속이고 들어가서 반대하겠다는 것은 자기의 신의를 무시하는 자'라고 불만을 토로하였다.[79]:31~32[108] 한국독립당에서도 미소 공위의 참석에 찬성하는 혁신파와 민주파는 한독당을 이탈하여 신한민족당과 민주한독당을 결성하였다. 이로 인해 이승만과 김구만 고립되었고, 한민당의 변화에 분노한 이승만과 김구는 공위 협의 청원서 제출 마감일인 1947년 6월 23일 김구와 함께 여러 곳에서 반탁 시위가 벌어지게끔 주도하였다. 6월 23일 이철승과 전국학련 주도로 반탁궐기대회가 열렸다. 이승만은 전보를 보내 반탁 시위대를 격려하였다.[79]:32~33[109] 6.23 반탁데모로 전국학련의 반탁시위대가 소련측 공위 대표단에게 돌을 던지는 등의 맹활약을 하였으며 학생시위대 시위가 끝난후 시위대는 이승만을 찾아 경과를 상세히 보고하였다. 이승만은 그들을 격려하며 이철승에게 '자네는 건국공신이야 큰일을 해냈어'라 하며 칭찬하였다.[79]:32~33 그러나 이승만과 김구의 격려에도 6.23 반탁시위는 10만명을 동원했다는 우익신문들의 보도와 달리 3, 4천명에 불과해 대규모 군중동원에 실패하고 말았다.[79]:35 미소공위가 결렬되자 1947년 7월 10일~7월 12일 전국에서 올라온 대의원 200여 명을 모아 제1회 한국민족대표자 회의를 개최하여 자신의 단정 노선을 역설하였다.[79]:36

1947년 8월, 미 군정 관계자에게 테러리스트들의 좌익 공격을 금지할 수도 없고, 금지하는 것을 원하지도 않는다고 말했다. 1947년 9월 17일 미군정이 조선문제를 유엔으로 이관하겠다고 발표했다. 소련은 강력 반발하였지만 이승만은 김구, 한민당과 함께 이를 크게 환영하였다.[79]:60~619월 21일 이청천(李靑天)이 단장으로 있는 대동청년단의 총재로 취임하였다. 10월 18일 윤치영 등 측근들과 독지가들의 모금으로 마련된 이화동의 이화장(梨花莊) 사저에 입주하였다.

김구와의 결별[편집]

장덕수. 한민당내 이승만의 지지자였던 그의 암살을 계기로, 김구와의 감정이 악화, 결별하게 된다.

1947년 11월 14일 유엔총회에서 유엔감시하의 한반도 자유선거 실시를 가결했다는 소식을 접하였다. 11월 24일 김구는 남한 단독선거는 국토양분의 비극을 가져올 것이라고 발표했다가 11월 30일 이승만을 방문한 뒤 번복하여 전혀 다른 태도를 취하였다. 김구의 방문을 받고 한시간여 요담을 한 후, 김구는 자신과 이승만은 조금도 근본 의사의 차이를 보지 못했다고 말하고 사실상 단독정부 참여 의사를 밝히는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김구의 성명 발표 후 이승만은 김구와 함께 서북청년단 1주년 기념식에 참석회 훈화를 하였다.[110] 그러나 협력관계가 강화되어 가던 12월 2일 발생한 장덕수 암살사건으로 둘의 관계는 파국으로 가게 되었다.

1947년 12월 2일 김구장덕수 암살 배후로 지목되어 미군정에 소환당했다. 김구는 이승만에게 사람을 보내 자신이 법정에 서지 않게 해달라고 이승만의 도움을 요청했지만 이승만은 그럴 마음이 없었다.[111] 이승만이 장덕수 암살사건으로 위기에 처한 국민회의를 방관하면서 한민당과 연대하며 독자적으로 '한국민족대표단'을 구성하자 김구는 배신감에 크게 분노하였다.[111] 1947년 12월 22일 김구는 이승만에 대한 지지를 거두고 단독정부 절대반대와 '한국민족대표단'의 해산을 주장하였다.[112] 이승만과 김구의 연대에 비판적이던 한민당은 이 사건을 정치적인 호재로 이용하고자 하였다 김구의 항의로 이승만의 민족대표단은 한국민족대표자회와의 합동작업이 재개되었지만 한민당의 강한 반대에 부딪혀 무산되었다. 장덕수가 암살되었을 때 이승만은 김구를 배후로 지목했고 그 후 김구는 검찰에 연행되어 수모를 당한 후로 이승만과 결별하게 되었다.[112]

1948년 3월 8일 이승만은 언론에 장덕수의 사건에 김구가 연루되었다는 것은 믿을 수 없다. 부하 몇사람 행동이 김구에게 누가 끼친 것은 유감이라는 담화문을 발표하였다. 이승만은 "김 주석이 고의로 이런 일에 관련되었으리라고는 믿을수 없다."며 사실상 김구 관련설을 강하게 암시하였다.[113]

"고 장덕수씨 사건에 김구가 관련되었다는 말은 얼마 전에 들었으나 근일 항간에 허무한 풍설이 많이 유포되고 있는 때이므로 나는 별로 신뢰치 않았던 것인데 지금에 와서는 신문에까지 보도되고 있는 때이므로 나로는 사실을 모르고 좌우간 단언할 수 없으나 김 주석이 고의로 이런 일에 관련되었으리라고는 믿을 수 없다. 김주석 부하 몇 사람의 무지망동한 죄범으로 김 주석에게 누가 미치게 한 것은 참으로 통탄할 일이다. 앞으로 법정의 공정한 판결이 있을 줄 믿는다."[74] :331

이승만은 장덕수의 암살범을 김구라고 확신했고, 경교장 측에서 지원, 구명 요청이 왔으나 모두 거절한다.

단독 총선거 직전[편집]

1948년 1월 8일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이 한국에 도착하자, 이승만은 유엔한위를 마중나가 환영군중대회에서 연설하였다. 1948년 1월 12일 UN한국위원회가 서울에 도착하자 회의에 참관하였다. 그러나 UN위원단 단장인 인도인 메논이 북한과의 좌우합작을 요구하는 발언을 시작하자, 연설중 즉각 대회장을 박차고 퇴장하였다. 1월 23일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의 북한 입국을 유엔소련대표 그로미코가 거부했다는 소식을 접하였다.

1948년 3월 1일 남로당 중앙위원회로부터 "제국주의자의 앞잡이가 되어 조국의 분할 침략계획을 지지하고 나라를 팔아먹는 이승만, 김구, 김규식, 김성수 등의 정체를 폭로하고 인민으로부터 고립·매장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는 비판을 받았다.[114] 1948년 3월 17일 이승만을 암살하기 위한 암살단이 이승만의 사저로 침투했으나 암살에는 실패했다.[115] 한편 사건 직후 이승만 측에서는 김구도 암살단의 공모자로 지목했다.[115]

3월에는 총선거 연기설이 확산되었는데, 선거 연기설이 나돌자 이승만은 3월 30일 성명을 발표, 선거 연기설을 비난하였다. 4월 1일에는 김구김규식남북협상소련의 목적에 동조하는 것이라고 비판 성명을 발표하였다.

제헌 국회의원 시기[편집]

5·10 단독 총선거 직후[편집]

김구와의 우정에 금이 간 후 이화장을 찾아온 비서 박용만과 대화하던 중

김구 주석이 나하고 같이 한 길을 못가게 된 것은 정말 슬픈 일이며, 내 가슴이 쓰라리다. 원통한 일이다. 김주석은 내 아우야! 이 세상에 하나 밖에 없던 내 아우야! 정말 원통한 일이야.내 가슴이 쓰라리고 아파![116]

라며 말끝을 흐리고 눈물을 흘렸다.[116] 박용만에 의하면 흐르는 눈물을 닦으면서 이박사는 무슨 말을 더 하려고 머뭇거렸으나 슬픔이 북받쳐 오르는 바람에 아무 말도 더 못했다고 했다. 이날 흘린 이승만의 눈물은 김구선생과 갈라선 이승만 한 사람의 눈물이 아니라 한국의 앞날을 걱정한 온국민의 눈물이기도 하다고 평가하였다.[116] 그러나 이승만과 김구의 감정의 골은 깊어졌다. 한독당의 당원이던 김선(1910~)의 회고에 의하면 김구가 남북협상에 다녀온 뒤 '날 보고 하는 얘기가 이승만 박사 욕을 하더라[117]'는 것이었다.

우리가 중국서 뻣뻣한 빵 한 조각으로 며칠씩 끼니 할 때 이승만이 반역자 자금 걷으러 미국 간다 하고선 돈커녕 미국 여자 하나 얻어서 침대서 잠자고 이제 와서 지가 애국자라고 나와?[117]

그러면서 말도 꺼내기 싫다는 것이다. 이승만은 이승만 대로 김선에게 '거 뭣하러 가서 만나느냐[117]'고 대응했다. 이승만은 '김구는 혁명가는 될수 있어도 정치가는 못 되고, 그저 곡괭이 들고 나가서 부수라면 하겠지만 정치 다독거리는 건 못해[117]'라며 조롱하였다.

이승만은 이승만 대로 또 하지 미군정청 사령관을 비난했다. 김선에 의하면 '이박사는 밤낮으로 하지 중장을 욕한다.[117]'고 회고했다. 그에 의하면 '자기(하지 중장을 지칭) 집에 가면 행랑살이 밖에 못할 것이 총선 하는거 자꾸 연기하자 그런다고[117]' 하는 것이다.

1948년 5월 10일 국회의원 선거에서 동대문구 갑에 단독으로 입후보하여 무투표 당선되었다.[118]

제헌 국회의장과 헌법 선포[편집]

1948년 5월 31일 임시 의장으로 개회사를 낭독하는 이승만

1948년 5월 31일 구성된 제헌국회는 최고령자였던 이승만을 제1대 제헌국회(制憲國會) 의장으로 선출되었다. 국회의장이 된 이승만은 윤보선을 자신의 국회의장 비서로 채용했다. 그러나 한민당에 의해 내각 책임제가 언급되자, 이승만은 대통령중심제를 고집하며 6월 16일 헌법기초위원회에 참석하여 대통령책임제 의사를 강력히 전달하였다.

7월 12일 이날 기념사를 통해 “이날에 동양의 한 고대국인 대한민국 정부가 회복돼서 40여 년을 두고 바라며 꿈꾸며 투쟁해온 결실이 실현되는 것”이라고 밝히고 “이 정부가 대한민국의 처음으로 서서 끝까지 변함없이 민주주의의 모범적 정부임이 세계에 표명되도록 매진할 것”을 선언했다. 또한 건국의 대장전이 되는 제헌헌법은 다음과 같이 그 전문을 선포했다.[119]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국민은 기미 삼일운동으로 대한민국을 건립해 세계에 선포한 위대한 독립정신을 계승해 이제 민주독립 국가를 재건함에 있어서 정의 인도와 동포애로써 민족의 단결을 공고히 하며 모든 사회적 폐습을 타파하고 민주주의 제 제도를 수립해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각인의 기회를 균등히 하고 능력을 최고도로 발휘케 하며 각인의 책임과 의무를 완수케 해 안으로는 국민생활의 균등한 향상을 기하고 밖으로는 항구적인 국제평화의 유지에 노력해 우리들과 우리들의 자손의 안전과 자유와 행복을 영원히 확보할 것을 결의하고 우리들의 정당 또 자유로이 선거된 대표로서 구성된 국회에서 단기 4281년[120] 7월 12일 이 헌법을 제정한다.[119]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선포식

이후 헌법 제정과 함께 대통령 선거가 준비된다. 1948년 7월 20일 1948년 대한민국 대통령 선거에서 김구, 안재홍, 서재필 등을 누르고 제헌 국회의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초대 대통령 취임 선서

7월 24일 초대 대통령에 취임했고, 8월 15일 독립기념일을 맞아 중앙청에서 정부수립을 선포하였다.

...(이상 생략)...이날에 동양의 한 고대국인 대한민국 정부가 회복돼서 40여 년을 두고 바라며 꿈꾸며 투쟁해온 결실이 실현되는 것이며...(이하 중략)...이 정부가 대한민국의 처음으로 서서 끝까지 변함없이 민주주의의 모범적 정부임이 세계에 표명되도록 매진할 것입니다.

대한민국 정부수립 선포 직전인 8월 11일 파리 유엔총회에서 대한민국의 국제적 승인을 얻기 위해 장면 등을 대표로 지목, 한국대표단을 파견하였다. 이때 장면을 선택한 이유는 영어에 능한 몇 안되는 인사임과 동시에 로마 교황청의 지지를 얻으려는 목적에서였다. 5·10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패배한 윤보선(尹潽善)을 특별히 채용하여 국회의장의 비서실장으로 삼기도 했다.

대통령직 수행시[편집]

이승만은 1948년 8월 13일부터 1960년 4·19 혁명으로 하야하기 전까지의 시기(제1공화국)의 대통령이었다. 초기에 집권 여당은 없었으나, 1949년 친이승만계 정당 대한국민당 창당 이후 독립촉성중앙회를 중심으로 이승만의 직계 정당인 자유당이 1952년 창당되었다. 그는 반공·반일적 정치성향으로 일본과의 외교관계를 수립하자는 의견을 묵살하고, 철저히 반일외교 노선을 지향하였다. 북한의 도발을 우려한 이승만은 대한군원(對韓軍援)과 미군의 계속주둔을 요구했으나 미 국무성은 이에 대해 소극적이었다.[121]

취임 1기 (1948 ~ 1952)[편집]

1951년의 이승만 대통령
취임 선서 장면

이승만은 1948년 7월 20일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선거에서 대한독립촉성국민회 후보로 나서 2위 김구, 3위 안재홍을 누르고 초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1948년 7월 24일 당시 국회의사당으로 사용되던 중앙청 광장 앞에서 취임식을 거행하였다. 이날 부통령도 함께 취임식을 치렀다. 1948년 8월 15일에 정부수립을 선언하였다. 그 직후, 이승만은 연호를 '대한민국 30년'으로 정하고, 공식 문서에서 쓰는 달력은 단군기원(4281년)을 사용하도록 했다. 1948년 8월 15일은 단기로 4281년 8월 15일이었다. 8월 26일 이승만은 한미상호방위원조 협정을 체결하였다. 이승만은 우방과 어떤 형태든 외교관계를 맺어 새로 수립된 정부가 국제적 고립을 면해야 한다는 집념에 사로잡히게 되었고, 이러한 정부승인 외교를 위해 조병옥 · 장면 두 특사를 세계 각국에 파견(1948년 8월)하였다.[122] 9월 30일 대통령 시정방침을 발표하였고, 10월 8일 미국 국무성에 미군철수 연기를 요청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949년의 이승만과 장개석.

10월 9일 서울 운동장에서 열린 민족청년단 창단 2주년 기념식에 참석하여 축사를 낭독하였다. 10월 19일부터 20일까지 주일연합군 최고사령관 맥아더의 초청으로 일본을 방문하였다. 영부인 및 4명의 수행원(정한경 · 김양천 비서 · 김동성 공보처장 · 이정순 공보국장)이 수행하였다. 1박2일의 비공식적 사교 방문이었으나, 대한민국이 주권을 회복하고 나서, 초대 대통령이 일본 땅을 처음 밟는 것이었다. 주일 미국대사관저에서 더글러스 맥아더와 1차 회담을 가진 이승만은 이날 밤 더글러스 맥아더의 저택으로 초대되어 함께 축배를 들었다. 이 방문은 맥아더의 방한에 대한 답방형식이었으나, 맥아더 장군으로부터 한국 방위에 대한 확실한 지원을 얻어내자는 것이 주목적이었다.[123][124] 11월 6일 여수·순천 사건에 따른 국가위기를 맞아 수습책을 국회에서 발표하였다.

제3차 국제 연합 총회(파리, 1948년 12월) 마지막 날 마지막 시간에 한국대표단의 노력으로 간신히 대한민국 승인안이 통과되었다는 소식을 접하였다.(12월 12일) 이승만은 재외공관 설치작업을 서둘렀다. 우선, 대미외교에 있어서 이승만은 국제 연합 총회를 마치고 미국을 방문하였다가 귀국을 준비 중이던 장면을 대한민국 정부의 특별대표(Special Representative, 특사)로 임명(12월 27일)하였다.[125]

대통령 취임 초기 (1949년 무렵)
장면, 초대 주미대사로 활동하며 대한민국 정부 승인과 6.25 전쟁 당시 주한미군, UN군의 파병을 이끌어냈다. 이승만은 장면의 실적을 높이 평가해 제2대 총리로 발탁했지만, 그는 원내 자유당 인사들에 의해 내각제 총리와 대통령의 물망에 오르기도 했다.

1949년 1월 2일 이승만은 장면을 주미대사로 인정해달라는 붓글씨를 친필로 작성해서 미국 대통령 해리 트루먼에게 보냈다.[126]

1949년 1월 6일 민족청년단의 영향력이 커지는 것을 두려워하던 그는 족청을 해산하여 대한청년단에 통합하도록 지시하였다. 그러나 이범석은 족청을 완전히 해산하지 않고 일부 보존하였다. 1월 7일 일본에 대한 배상금을 요구할 것이라고 언급하였으며, 1월 8일 일본대마도의 반환 요구하는 기자회견을 하였다. 1월 9일 반민특위의 친일파 처벌에 신중해야 한다고 담화문을 발표했고, 2월 18일 유엔이 북한과 협상할 것이라는 소식을 듣고 유엔기구가 북한과 협상하는 데 대해 반대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1949년 3월 23일 필리핀 퀴리노 대통령이 제안한 반공적인 태평양동맹안을 지지하였고, 5월 20일 일본에 대한 대일배상요구 관철을 주장하였다. 6월 9일 일본의 어업구역 확대에 반대 성명을 발표하였고, 7월 1일 한국에 대한 미국의 추가 원조를 요청했다. 7월 20일 반공적인 태평양동맹의 체결 협의를 위해 퀴리노 필리핀 대통령, 장개석 중화민국 총통을 초청하였다. 8월 8일 장제스와 진해에서 회담하고 돌아왔다. 10월 18일 대통령관저 담벼락 근처에 폭발물 장치를 매설한 것을 터지기 전에 경관이 발견하였고, 이승만도 이를 확인하였다. 10월 28일 일본과의 강화조약 체결까지 임시통상협정을 체결할 용의가 있다고 언명하였다. 11월 26일 남북통일방안으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 해체후의 총선거를 주장하였다. 11월 29일 귀속재산인 일본인 주택을 매매할 것을 발표하였다. 12월 16일에는 군사원조에 비행기 등의 포함을 미국에 요청하였으나 묵살당하였다.

1949년, 미국측에서는 한국도 미국과 마찬가지로 모병제를 권고하고 이에 대한 기반을 다지는 데 전력을 다해 도와주겠다고 권유했으나, 물자원조를 하나라도 더 받아내려는 이승만은 미국으로부터 C레이션 박스 한상자라도 더 원조받기 위해 징병제를 고집하였다.[출처 필요] 이후 한국군은 60년이 넘게 징병제를 고수하게 되었다.

1949년 미군이 철수하자 이승만은 1949년 12월 중순 주미한국대사 장면에게 편지를 보냈다. 편지에서 이승만은 미국의 편향적인 친일정책의 부당성을 지적하면서, 미국가쓰라-태프트 밀약일본의 한국 합병에서 보았듯이 일본을 위해 한국을 포기할 수 있음을 주장하며 심각하게 우려를 표했다.[127] 자신의 전기인 우남이승만전에 아버지 이경선에게 공(公)이라는 존칭을 사용하지 않았다고 하여 판매금지조치 시켰다. 그해 6월 부활된 대한적십자사 개소식에 아내 프란체스카 도너를 대동하고 참석하였다.

1949년 이승만은 기자회견을 통해 무력을 통한 북진통일을 피력하였다.

한국은 한 몸뚱이가 양단된 셈이다. 한국은 앞으로 장기간 남북 분열을 용인하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가 전쟁으로서 이 사태를 해결하여야 할 때는 필요한 모든 전투는 우리가 행할 것이다.……이 대사상 냉정 전쟁(大思想冷靜戰爭)에서 우리는 공산주의를 저지하기 위한 가능한 모든 일을 할 것이다.


-1949년 10월 기자 회견

[128]

한편 1949년 서울지방법원의 '처의 관계부존재확인 판결'을 제기하여 양자 이은수를 파양하였다. 한편 그때까지도 일정부분 생활비를 지급하던 전 부인 박씨와는 6.25 전쟁 이후 연락이 끊어지게 된다.

친일파 청산 반대 의혹[편집]

이승만은 오랜 망명생활로 국내 정치기반이 취약하였고, 해방 직후 가졌던 좌익과의 협상이 결렬되자 우익, 친일파를 기반으로 권력을 유지하였다. 귀국 초기 대동단결론을 주장하며 "선통일, 후친일파 청산"을 주장하였으며 권력 유지를 위해 대한민국 수립 후 친일관리를 대거 등용하였다.[129]

반민족행위처벌법은 1948년 9월 22일 법률 제3호로 제정된 법률로 반민족행위자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가 구성되었다.

그러나 이승만은 반민특위에 기회가 있을 때마다 특별담화를 발표하거나 특위 위원들에게 직접 압력을 가하는 등 활동을 노골적으로 방해하였다.[130]

정부와 국회의 위신을 보존하여 반민 법안을 단속한 시일 내에 끝마치도록 할 것이다. (중략)....지금 반란 분자와 파괴 분자와 각처에서 살인, 방화를 하며 인명이 위태하고 지하공작이 긴밀한 이때 경관의 기술과 성격이 아니면 사태가 어려울 것인데 기왕에 범죄가 있는 것을 들춰내서 함부로 잡아들이는 것은 치안 확보상 온당치 못한 일이다.


-1949년 2월 2일 특별 담화문 「반민법 실시에 대하여」

반민족행위 처벌법안이 발의되자 친일파들은 국회와 서울 시내에 협박장을 뿌렸다. 내용은 "민족 처벌을 주장하는 놈은 공산당의 주구다."라는 것이었다. 이승만도 이에 동조하여 "친일파에 대해서 말을 많이 한 것은 공산당이다."라고 말했다.[131]

결국 반민특위는 국회 프락치 사건과 6.6 특경대 습격사건 등이 결정타가 되어 해산하고 만다. 각 사건은 당시 내무차관 장경근의 지시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특경대 해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람은 이승만이었다.[132]

내가 특별경찰대를 해산시키라고 경찰에게 명령한 것이다... (중략)... 특별 경찰대는 국립 경찰의 노련한 경찰관이자 반공투사 최운하 등을 체포하였는데....(중략)..현재, 특위에 의한 체포의 위협은 국립 경찰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1949년 6월 8일 AP통신사와의 회견中.

이때문에 반민특위 특경대는 '친일파들과 결탁한 이승만 정권의 탄압'[133] 에 의해 해산되었다.

이러한 이승만의 친일파 포용은 민족문화의 정상적 발전을 저해하고,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약화시키는 요인으로 남게 되었다.[129]

내각 인선 작업[편집]

초대 내각의 대부분은 독립운동가 출신자로 기용되었다.[134] 제1공화국 연인원 96명의 각료 가운데 30자리 이상을 구연수 등 친일파 또는 친일파 후손에게 주었다는 견해가 있다.[135] 남한 단독정부 수립에 협조하는 대신 그는 한민당에게 총리직과 내각 각료직의 일부를 약속했다. 그러나 한민당의 세력이 강해지자 경계한 이승만은 총리직을 한민당에 안배하지 않기로 생각을 바꾼다. 당시 총리 후보자로 지명되는 인사로는 김성수, 조소앙, 이윤영, 이범석 등이 있었다.

1948년 7월 22일 초대 총리를 한민당이 아닌 조선민주당의 당수 이윤영(李允榮)을 천거하자 한민당은 집단으로 반대하여 총리서리 인준을 부결시켰다. 7월 29일 이범석을 서리로 천거하자 반대할 명분이 없었던 한민당은 이범석을 인준하였다.[136] 이윤영의 총리인준이 실패하자 그는 이윤영을 지청천과 함께 초대 내각의 무임소 장관으로 임명하여 입각시킨다.

내각 인선시 그는 조봉암을 농림부장관으로 발탁하기도 했다. 조선공산당 출신 전향자였던 조봉암의 발탁은 파격인사였으며, 이후 이승만은 조봉암 등을 통해 농지개혁을 추진하기도 한다. 토지개혁을 통해 그는 한민당과 토착 지주세력의 기반인 농지를 실제 농민에게 분배하여 한민당과 지주세력을 약화시키려는 목적이었다. 상공부 장관에는 그의 측근이었던 임영신이 발탁되었는데, 대한민국 최초의 여성 장관이다.

정부수립 직전, 한민당에게는 내각 장관직의 절반 또는 총리직을 주겠다는 약속과는 달리 재무부 장관 1석만을 부여하였다. 단독정부 수립에 협조하였음에도 이승만이 약속을 이행하지 않자 한민당은 이번 내각은 실패한 내각이라며 즉각 반발하고 야당화의 길을 걷게 된다. 그러나 국회 내의 한민당의 영향력, 4.3 사건, 여순 반란 사건 등의 후유증이 나타나자 이승만도 한발 물러서, 2대 내각에는 한민당이 당명을 바꿔 만든 민국당계 인사들을 대거 입각시킨다.

대일외교 문제와 이승만 라인[편집]

이승만의 독도 라인대마도 영유권 주장에 항의하는 일본인들의 집회

1951년 미국의 권고로 한·일관계 정상화 교섭은 남북 휴전 회담이 개시된 직후인 1951년 10월미국의 주선 으로 예비 회담 이 있었다 . 그러나, 옛날 일본으로부터 고문 받은 경험이 있는 이승만은 식민지 지배에 대한 명확한 사죄로 70억 달러의 배상을 요구했다.[137] 일본측은 제의를 거절했고, 협상은 결렬되었다.

취임 이후 그는 독도 문제로 일본과 마찰을 빚기도 했다. 1945년 9월 27일 미국이 일본어업의 조업구역으로 설정한 '맥아더 라인'이 1952년 무효화되면서 이승만은 이를 대체할 법안으로 당시 한국과 일본과의 어업분쟁에서 대한민국의 주장에 의한 방위 수역을 설정했다. 이어 1952년 10월 14일 대통령 긴급명령 제12호로 '포획심판령'을 제정 공포하고 포획심판소및 고등포획심판소를 개설 하였으며 1953년 해양경찰대 설치계획을 수립하고 이해말에 180톤급 경비정 6척으로 부산에서 한국해양경찰대를 창설하여 평화선을 침범하는 외국선박과 밀무역을 단속하도록 하였다.

1952년 1월 18일 이승만은 동해에 평화선을 선포하였고[138], 세계를 놀라게 했다. 2월 12일 미국은 이승만의 평화선을 인정할 수 없다고 이승만에게 통보해왔으나[138] 그는 이를 묵살하였다.

1952년 2월 4일에는 일본 어선이 제주도 남쪽 바다를 침범, 이를 나포하는 과정에서 한국 경찰이 총을 쏘아 일본선박의 선장이 사망했다. 이후 한국 영해를 넘나드는 일본 선박에 대해서는 체포, 억류 등의 강경대응을 하여 1965년 한일국교 정상화로 평화선이 새로운 한일어업협정으로 대체되기 전까지 한국 해경은 328척의 일본 배와 3929명의 선원들을 나포, 억류하였으며[139] 나포한 일본 배를 해양경비대의 경비정으로 쓰게 하기도 했다.[139]

중국측의 영해침략에 대해서도 강경대응을 하였다. 1955년 12월 25일엔 해양경찰대 866정이 흑산도 서남방 근해의 평화선을 침범한 중국 어선 15척을 나포하려다가 총격전이 벌어졌다.[139] 한국 경찰관 네 명이 중국 배에 납치되어 가서 12년 5개월간 옥살이를 해야 했으며 1960년 1월10일엔 해양경찰대 701정이 서해 서청도 부근에서 중국 어선단을 검문 중 총격을 받고 두 사람이 사망하고 세 명이 부상당하기도 했다.[139]

한국 전쟁 시기(1950 ~ 1953)[편집]

1951년의 이승만 대통령
한국 전쟁 중 이승만 대통령과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

그러나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에 한국 전쟁이 일어나자 이승만은 대전에서 사흘을 머무른 뒤, 7월 1일 새벽에 열차편으로 대전을 떠나 익산(이리)에 도착하였다. 7월 2일에는 다시 목포에 도착하였고, 배편으로 부산으로 옮긴 뒤 7월 9일 대구로 옮겨갔다. 그러나 전황을 전혀 모르던 국민들은 북한군이 서울 미아리 고개까지 쳐들어 오자 그 때서야 피난을 시작했다. 그러자 정부는 북한군이 한강을 넘어서 진격할 것을 우려해 한강철교를 예고없이 폭파해 무고한 인명피해가 발생하였다. 철교 폭파는 신성모 국방장관이 지시했지만, 총리 이범석이 건의하였다는 주장도 있다.[140] 북한군을 곧 격퇴할테니 피난가지 말고 안심하라는 이승만의 라디오 방송을 믿었던 상당수의 서울시민들은 한강 철교의 폭파로 발이 묶였고 조선인민군은 곧 서울을 넘어 대구, 부산, 포항 일대를 제외한 모든 지역을 점령하게 되었다. 안심하라는 라디오 방송 당시 이승만은 대전에 피신해 있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피난가지 못한 수많은 서울시민들은 북한군에 의해 강제동원되었는데, 전쟁 후에는 북한군에 부역했다는 사실에 의해 유무형의 피해를 입게되었다. [모호한 표현][출처 필요]

이 무렵에 '대국민 사상통제 목적'으로 조직된 반공단체 국민보도연맹에 가입된 사람들이 조선인민군이 점령한 지역에서 부역행위 등 협조할 것이라는 보고를 받았다. 그래서 이승만은 김창룡의 CIC 특무 헌병대에 지시하여 '인민군 점령 수중에 들어가지 않은 지역'의 보도연맹원들을 잡아 처형하도록 명령하고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처형당했다. 이를 보도연맹사건이라 한다. 당시 보도연맹에 가입자들 가운데 실제 공산주의자 외에도 공무원들의 실적을 위해 문서에 기록되거나 배급 수령을 위해 가입한 양민들도 있었다. 전국 각지에서 진행된 보도연맹원 처형자들의 유해나 유적 발굴조사는 계속 진행 중이다.

한국전쟁 휴전 후 국회의장 신익희, 국회부의장 장택상, 조봉암은 이승만을 찾아가 '수도 서울을 지키겠다고 약속해놓고 약속을 위반하고 도주한 것에 대한 대국민사과를 발표'하라고 요구했다. 그러자 이승만은 내가 당 덕종이냐면서 거절했다. 조봉암이 끝까지 이승만의 사과를 요구하자, 이승만은 제스처를 하며 '다 과인이 부덕한 탓이오 이럴까?'하며 불쾌감을 드러냈다 한다.

1·4 후퇴와 휴전[편집]
한국 전쟁 참전군인 위문 순찰 중 정일권과 함께

중화인민공화국이 궁지에 몰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도와 참전하자 국군과 유엔군은 200만 중공군의 인해전술에 38선 이북의 수복지역에서 부득이 후퇴하였다. 1951년 1월 4일 중공군이 다시 서울을 점령하고, 유엔군은 원산 등의 지역에 폭격을 가하였다. 1월 12일 일본군의 참전설이 나오자 이승만은 이에 대해 강력히 반대하였다. 2월 38선은 공산군 남침으로 이미 없어졌으므로 북진 정지는 부당하다고 선언하였으며 2월 15일 북진통일을 전쟁 목표로 분명히 밝히고 미국에도 통보하였다. 3월 24일 한만국경 진격 전에 정전은 안 된다는 담화문을 발표하였다.

6월 9일 38선 정전의 결사반대를 선언하였고 6월 27일 소련의 정전안을 거부하였다. 9월 20일 이승만은 휴전수락의 전제조건으로 중공군 철수, 북한 무장해제, 유엔감시 하 총선거를 요청하였다.

1950년 12월 미국에 체류중인 장면국무총리로 내정하였다. 당초 이승만은 장면에게 인사권을 위임하겠다고 하였으나, "5석 중 3석을 총리가 정하였으니 내무에는 이순용, 국방에는 이기붕을 써 주시오"하고 종용하자 장면은 받아들이고 말았다.[141] 한국 전쟁 중 2년 동만 이렇다 한 성과를 올리지 못하고 중국의 개입으로 전선이 고착화하자 미국은 현상유지 차원에서 휴전을 서둘렀다. 미국소련중공 측과 휴전을 논의한다. 1952년 3월 이승만은 분단 상태에서의 휴전은 한국에 대한 “사형선고”나 다름없다고 주장하며, “민족국가로 생존하기 위해 단독으로라도 계속해 싸워 나갈 것”이라고 강조했다.[142] 1953년 7월 27일판문점에서 휴전 협정이 조인됨으로써 3년 1개월 만에 한국 전쟁은 휴전으로 매듭 지어졌다. 이승만은 북진통일을 고집하였으나 전시 작전권을 UN군에 이양하여 휴전을 막을 수는 없었다. 휴전 협정 이후 이승만은 다시 서울에 올라왔다.

한국전쟁 휴전 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의 재충돌을 우려한 이승만은 미국에 남한의 안전보장을 담보할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을 미국에 요구하였다. 중공의 개입으로 부담스러워한 미국은 휴전협정을 추진하였다. 이에 반대한 이승만은 휴전 협정을 방해할 목적으로 수감된 포로들 중 반공포로들을 대규모로 석방했다. 전격적인 반공포로 석방에 격분한 미국은 이승만을 제거할 작전을 계획한다.

6.25 전쟁의 후유증[편집]

국민 방위군 사건[편집]

중공군의 한국전쟁 개입으로 인해 예비병력 확충에 어려움을 겪자, 중공군 및 조선인민군에 대항하고자 제2국민병을 편성하게 되었는데 이것이 국민방위군이다. 그러나, 국민방위군에게 군수보급, 물자를 지급해야 할 것을 고급 장교들이나 간부들이 이를 부정 착복, 횡령하여 수많은 국민방위군으로 징집된 이들이 아사하거나 동사하는 사태가 속출하였다. 이를 국민방위군 사건이라 한다.[143]

거창 양민 학살 사건[편집]

공비 소탕 명목으로 500여명을 박산(朴山)에서 총살하였다. 그 후 국회조사단이 파견되었으나 경남지구 계엄민사부장 김종원(金宗元) 대령은 국군 1개 소대로 하여금 공비를 가장, 위협 총격을 가함으로써 사건을 은폐하려 하였다. 국회 조사 결과 사건의 전모가 밝혀져 내무·법무·국방의 3부 장관이 사임하였으며, 김종원·오익경·한동석·이종배 등 사건 주모자들이 군법회의에 회부되어 실형을 선고받았으나 얼마되지 않아 모두 특사로 석방되었다. 국민방위군 사건과 함께 이승만 정권의 평판을 크게 실추시켰다.

취임 2기 (1952 ~ 1956)[편집]

부산 정치 파동[편집]

전시 중에도 부분적 지방 자치를 실시하는 등[144] 의 정책을 폈다. 그러나 1950년 제2대 국회의원 총선에서 김구, 김규식 계열의 남북협상파와 무소속 계열의 후보가 대거 당선되고, 거창양민 학살 사건국민 방위군 아사 사건 등으로 정권의 지지 기반이 약화되어갔다. 이승만과 신성모는 용공분자의 음해라는 국민 방위군 사령관 김윤근의 주장을 그대로 믿었으나, 국민 방위군 아사자를 목격한 윤보선 등의 진언을 거절함으로써 윤보선 등은 그로부터 등을 돌리게 되었다. 이승만은 결국 국민 방위군 총책임자 김윤근을 사형시킨다. 민주국민당 의원이던 서민호가 기생집에서 현역 육군 대위를 사살하자 이승만은 사형을 선고한 뒤 자비를 베풀어 사형을 면제시키는 것처럼 하려 하였으나 육군중장 최경록을 비롯한 군관과 법관들의 거부로 무산되었다. 이승만은 이들에 대한 인사보복으로 대응하였다.

1951년 11월 19일 독립촉성중앙회를 기초로 자유당이 창당하고 자유당 총재직을 수락하였다. 이승만은 수도경찰청 인사참모 겸 경기도경찰청 보안과장 최연(崔燕)에게 자유당의 청년조직을 만들 것을 지시하였다.[145] 최연이원국에게 청도관 관원 5천명을 자유당에 입당시키게 하였으나[145] 실패하고 말았다.

1952년의 남북협상파와 무소속 의원들이 국회를 주도하게 되고, 한민당과 갈등을 겪게 되면서 대통령 재선이 어렵게 되자, 이승만은 대통령직선제 개헌을 추진한다. 이승만은 백골단, 땃벌떼 등을 동원하여 관제 데모를 획책하고, 부산정치파동에서 발췌 개헌을 시도하여, 대통령 직선제를 이끌어내, 제2대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될 수 있었다. 한편, 부통령 김성수는 부산정치파동 사건을 지켜보면서 '민주주의를 유린한 행동'이라며 장문의 항의서한을 남기고 부통령직에서 사임했다.

1951년 9월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의 체결로 일본의 주권이 회복됨으로써 일본의 오래된 야심이 다시 재발하고 있다고 지적하고, "일본인들은 한국이 또다시 일본의 지배를 받게 될 것이라고 믿고 있으며, 미국과 그 밖의 지역에 있는 한인 친일분자들은 일본인들의 생각에 맞장구를 칠 뿐만이 아니라 그것을 전파하고 있다."며 비판했다.[127] 실제로 이승만은 대통령 재임기간 내내 일본의 한반도 재침략 가능성을 심각하게 우려하고 있었다.[127]

북한의 남침 직후 폭파됐다가 1952년 7월 22일, 2년여만에 복구된 한강철교를 이승만 대통령이 각료 등과 함께 기차를 타고 지나며 손을 흔들고 있다.

1952년 10월 초 이승만은 주미대사 양유찬에게 편지를 보내, 미국이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필리핀, 일본 등과는 안보조약을 맺으면서 왜 유독 대한민국과는 그러한 조약의 체결을 거부하는 것인가 하고 반문하며, 미국 행정부 내 친일인사들은[127] 일본이 군사적으로 충분히 재무장되면 "한국은 일본에게 또다시 넘겨지게 될 것"이라는 생각을 아직도 노골적으로 갖고 있다고 비판했다.[146]

1952년 이승만은 "여성은 이르니 가당치 않다"라며, 김병로 대법원장이 요청한 판사 임용 후보 중 이태영을 제외시켰다.[147]

1954년 3월한미상호방위조약이 공식적으로 체결된 직후 양유찬 대사에게 다시 보낸 편지에서도 여전히 미국이 언젠가는 일본을 위해 한국을 희생시킬 가능성이 많다는 점을 항상 유념해야 한다고 강조했다.[146] 4월11월 한표욱에게도 편지를 보내 "덜레스는 일본을 증강시키기로 작심한 인물", "덜레스는 일본 때문에 한국군대를 증강시키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146] 4월 7일 미군 제315공수사단을 방문하여 직접 표창장을 수여하였다.

일본의 전통적 팽창주의 야욕에 대한 경계와 미국의 일방적인 친일정책에 대한 이승만의 심각한 우려는 미국 대통령 아이젠하워닉슨 부통령에게도 여러 차례 전달되었다.[146] 1953년 11월 중순 닉슨이 방한하자 이승만은 아시아인들은 소련과 일본의 결탁을 우려하고 있다고 지적하면서 미국은 일본을 너무 강하게 증강시키지 말 것을 주문했다.[146] 1954년 2월 아이젠하워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승만은 일본을 군사적, 경제적으로 재건시켜야 되겠다는 미국의 정책은 한국민의 마음을 엄청나게 불안하게 만들고 있다고 지적하고, 미국정부는 일본을 너무 신뢰하지 말라는 한국의 우정어린 경고를 무시하면서, 한국의 입장은 옹호하지 않고 일본의 편만 들어왔다고 주장했다.[146] 같은해 12월 말 아이젠하워에게 보낸 편지에서도 이승만은 미국의 친일정책을 강하게 비판하였다.[148]

불출마 선언과 번복[편집]

1954년 3월 5일 그는 국제사회에 국제반공십자군 창설을 제의하였고, 3월 27일에는 일본제 상품의 몰수를 지시했다. 3월 28일 대한민국 국군의 증강을 미국이 보장하면 제네바 정치회의에 대표를 파견하겠다고 미국에 통고하는 한편 4월 28일 일본의 반공연맹 가입을 반대하였다. 5월 6일 제네바 정치회의에 참석한 6.25전쟁 참전 16개국 대표들은 한반도 문제에 대한 소련과 중국의 동의를 얻기 위해 대한민국 정부를 해체하고 국제연합 감시하의 선거를 통해 한반도에 통일정부를 수립하기로 합의했다. 미국로버트 올리버 박사를 통해 이승만을 설득시키려 하였으나 5월 12일 이승만이 맹렬히 반대하자 대한민국 재선거안을 철회했다.

그 후 1954년 사사오입 개헌을 통해, 초대 대통령의 3선 제한을 철폐하여 1956년의 3대 정부통령 선거에 대통령으로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그러나 부통령 선거에서는 야당인 장면이 당선되었고, 대선에서 진보당의 대통령 후보 조봉암이 선전하였다. 이 저항에 이승만 정부는 1958년 진보당 사건을 터트려 정적을 제거하기 위한 대한민국 최초의 사법살인을 자행했다.[149] 1954년 7월 미국 로스앤젤레스 등을 방문했고 모교 조지워싱턴 대학교에서 명예법학박사 학위를 받고, 콜롬비아대학교에서도 명예법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55년 3월에는 자유수호에 힘쓴 공로로 미국 금영자유훈장을 받았다.

한편 미국일본을 통해 한국문제를 해결하려 하자 1954년 8월 3일 이승만은 유엔총회에서 한국 통일에 대한 지원을 역설하고 8월 9일에는 한일회담 재개용의를 표명하는 한편, 일본의 반성을 촉구했다. 8월 30일 일본에 대한 미국의 편파적 정책을 경고하고, 11월 4일 일본의 한국 재침략 망상을 비난했다. 11월 14일 미 국무부가 제안한 일본의 반공동맹 참가 반대 성명을 발표했고, 12월 15일 적성 중립국감시위원단 축출을 언명하다.

구황실재산법과 대한제국 황실 재산의 몰수[편집]

1954년에 제정 되었으며, 영친왕 등 구 황실의 재산을 강제로 몰수하여 국유화한 사건이다.

이승만은 당시 자신을 황실의 후손이라고 주장하며 영친왕등의 실제 황실의 후손에게는 '황족' 칭호를 쓰지 말 것이라는 경고까지 날릴 정도로 냉대했었다. 1950년에 이승만은 맥아더와 면담 때, 최초로 영친왕 부부를 만났고, 이때부터 이승만은 이들을 자신의 정치적인 눈엣가시로 여기게 되었다.

법 제정 후 황실 후예들은 해방 후 이승만 정권 때 만든 "구황실재산법"으로 모든 재산과 권력을 빼앗기고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다. 순종황제의 계비인 윤황후는 6·25 때 피란을 다녀온 뒤 원래 살던 창덕궁 낙선재로 돌아가지 못하고 정릉의 한 집에서 귀양살이처럼 살기도 했다.

사사 오입 개헌[편집]

1948년 대한민국 제헌헌법상 대통령을 국회에서 간접선거로 선출하도록 되어있던 조항을 1952년 직선제로 개정하여(발췌개헌) 이승만이 중임되었다. 이승만과 자유당은 3선을 하고자 하였으나 당시의 헌법은 대통령의 임기는 4년제이며 1차에 한하여 중임할 수 있다고 제한하고 있었다. 이에 이승만과 자유당은 초대 대통령에 대한 중임제한 철폐를 골자로 한 개헌(改憲)을 준비했다. 1954년 5월 20일 실시되는 민의원 선거에서, 3선 개헌에 찬성하는 사람을 후보로 추천하여 다수 당선시켰고, 무소속 의원들도 다수 유인하여 개헌 정지작업을 진행하였다.

이러한 시점에서 UN에서 한국 통일을 위한 선거안이 제기되었다. 정부는 이에 대하여 국가 안위에 관한 사안은 국민의 의견을 들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국민투표제를 제기하였다. 이를 위해 정부는 국민투표제를 대표 안건으로 내세우고, 이와 더불어 3선금지조항 폐지·국무원의 연대 책임제 폐지·개별 국무원 불신임 인정·부통령의 대통령 승계권 부여 등을 골자로 헌법 개정안을 제출하려 하였다. 그리고 여당인 자유당에서는 김두한(金斗漢)을 제외한 전 의원과 다수의 무소속 의원이 서명에 참여하여 국회에 개헌안을 제출하였다. 국회에서 비밀투표를 한 결과(1954. 11. 27), 재적의원 203명, 참석의원 202명 중, 찬성이 135표, 반대가 60표, 기권이 7표로 나타났다. 당시의 개헌 가능 의결정족수는 재적의원의 2/3 이상이었으므로 이 개헌안이 가결되기 위한 충분한 선은 136명이어야 했다(재적의원 2/3는 135.33…명이므로, 자연인은 136명이어야 함). 따라서 당시 사회자였던 부의장 최순주(崔淳周)는 부결을 선포하였다.

그러나 자유당은 수학의 4사5입론을 적용하여 135.33명은 논리적으로 성립되지 않으며 0.33이란 자연인으로 존재할 수 없으므로, 반(半)도 안되는 소수점 이하는 삭제하는 것이 이론상 옳다고 주장하였다. 그리하여 자유당은 의원총회에서 이 안을 채택하여 국회에서 재론하기로 하였고 이에 반발한 야당 의원들은 모두 의사당에서 퇴장하였다. 자유당 의원들만 남은 자리에서, 자유당 의원 125명 중 123명이 찬성하여(김두한, 민관식 의원만 반대), 개헌안을 통과된 것으로 결정하고(11월 29일) 이를 정부로 이송하여 결국 개헌안을 공표·발효하였다.

이미 부결선언된 개헌안을 번복하여 가결시킨 행위(위헌), 야당이나 국회의장, 사회자의 의견을 무시한 행위(국회법 위반), 이론적으로도 필요충분한 가결선은 136명이어야 함에도 이치에도 맞지 않은 이론을 적용한 행위(비법리, 비논리 강제 적용) 등은 의회 사상 초유의 사건으로 국민들을 크게 자극하였다. 이러한 행위가 가능했던 것은 자유당 정부의 독재적 행태가 작용했기 때문이었다. 이를 토대로 이승만은 1956년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되어 3선 대통령의 뜻을 이루었고, 이는 자유당의 장기 집권과 독재가 연장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이 사건 이후 자유당 내 양심적 의원들이 탈당하면서 점차 당의 정당성과 위력이 붕괴되어 갔다. 상대적으로 야당세력은 호헌동지회를 설립하면서 한데 뭉쳐 강력한 야당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인도차이나 파병 검토[편집]

1954년 2월부터 이승만은 인도차이나 파병을 계획하고 프랑스와 접촉하였다. 베트남에서 베트콩의 활동이 맹렬하게 진행되는 것을 접한 이승만은 프랑스와 교섭, 한국군의 파병을 제의하였다.

그는 1954년 2월초 국군 1개사단을 공산군과 싸우고 있는 프랑스군을 지원하기 위하여 인도차이나 지역에 파병하겠다고 제안하였다.[150] 미국정부는 물론 프랑스 정부도 이러한 제안에 대해 애초부터 실현성이 없다고 보고 거절하였다. 이승만 정부는 다시 1954년 5월21일 외신과의 회견에서 한국군의 인도차이나 파병을 제안하였다.(「I.N.S. 통신사에 제공한 성명서」,1954년 5월21일,『담화집』2, 33-36쪽) 그러나 이승만 정권의 이러한 제안은 곧 제네바 정치회담에서 베트남의 휴전이 합의됨에 따라 백지화되었다.

한편 1955년 3월 15일 이승만을 암살하려 한 대통령 암살음모자 이성재 외 6명을 검거했고, 10월 7일 대통령 암살기도사건 관계자 김동훈 등 8명을 체포했다.

우의마의 사태와 3대 대선 재출마[편집]

1956년 2월 김창룡 특무대장이 암살되자, 2월 5일 직접 헌병 총사령부내에 김창용 중장 피살사건 전담 수사본부 설치를 지시하였다. 2월 13일 일본의 공산국가들에 대한 타협정책에 경고를 보냈고, 2월 21일 국회 연설에서 판사의 월권행위에 유감을 표명했다. 3월 5일 자유당 전당대회에서 대통령 후보로 지명되자 이승만은 불출마 서한을 전달했다. 56년 3월 5일 자유당이 대통령 후보에 이승만, 부통령 후보에 이기붕을 추대하자 이승만은 "출마 않기로 작정했다."는 유시를 내렸다.[151]

그러나 3월 6일 국민회·노총·부인회 등이 궐기대회를 갖고 민의를 전하기 위한다는 목적으로 서울로 상경했다.[151] 이승만은 3선 출마를 강권하는 집회가 열리자 서울 시내 집회현장을 다니면서 이들을 위로하기도 했다. 3월 9일 전국 각지에서 측근들과 자유당, 국민회, 애련, 노동조합 등 친위단체들 주최로 '이 대통령 3선 출마 호소 궐기대회'가 열리고 3월 13일 이승만 재출마를 요구하는 관제 노총이던 대한노총의 정치파업이 있자 이승만은 3선 출마를 결심하게 된다. 3월 10일 이승만은 외신 기자들에게 "(국민이) 자살을 원한다면 자살이라도 하겠다"고 말해 민의 수용의사를 표명했다.

그러자 3월 11일부터 어용 민의가 전국 각지에서 발동되었다. 영화인, 무대예술인, 댄서도 가만 있지 않았다. 우마차 조합에서 우마차 8백대를 동원하여 소와 말까지 출마를 원하는 우의마의를 이승만한테 알렸다.[151] 우의마의 소동으로 서울 거리는 똥바다가 되었다. 3월 12일 이승만은 민의는 글로 써서 해도 된다고 타일렀다. 3월 17일 덜레스 미국 국무장관이 한국을 방문, 그를 만나 통일방안 협의하였고 일주일쯤 지난 3월 25일 공보실 통해 재출마 결의 담화를 발표했다.

3월 20일 이승만은 공보실을 통해 민의는 글로 써서 해도 된다는 말을 다시 전달했다. 3월 23일 이승만은 3백만 명 이상이 날인한 탄원서와 혈서가 들어와 할 수 없이 민의에 양보하기로 했다는 담화를 발표했다. 그는 이 담화에서 '대통령 후보 한 사람의 선거 비용으로 백만 환 이상 쓰지 못하도록 법률을 만들어야 한다'고 피력했다.[152] 3월 28일 이승만은 이기붕부통령 후보로 적격이라고 말했다. 3월 29일 서울운동장에서 이승만의 81회 탄생 경축식이 정부 및 서울시 주최로 열렸다.(이승만의 생일은 3월 26일이었다.)[151]

자유당은 3월 6일 임시대의원대회에서 자유당 총재 이승만을 대통령 후보로 지명하였다. 그런데 선거운동기간 중인 5월 5일 민주당의 대통령 후보 신익희가 사망하는 사고가 발생하여 선거운동의 양상은 급변하였다. 그에 따라 대통령은 당선은 ‘이승만’이 당연시되었으나, 선거결과는 이승만에게 부정적이었다. 무효표가 무려 20.5%에 이르렀고, 특히 서울은 투표자수 608,741명 중에 284,359명이 무효표를 던져 유효투표율은 53.8%밖에 되지 않았다. 거기다 서울의 유권자들은 부통령선거에서는 96.4%의 유효투표율에 야당의 장면 후보에게 76.9%의 압도적인 지지를 보냈던 것이다. 또 조봉암이 30% 가까이 확보하였다. 이것은 이승만에게는 부담스런 장애물이었다.

취임 3기(1956 ~ 1960)[편집]

대통령 당선과 행적[편집]

1956년의 이승만

이승만은 후보로서 단 한번도 공식적인 정견 발표를 하지 않았다.[153] 이에 대해 서중석은 이를 유권자를 바보 취급하고 스스로를 위대하다고 생각한 망자존대 의식의 소치였다고 보았다.[153] 이승만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신익희조봉암을 비판했다.[153] 5월 3일 신익희는 한강 백사장에서 장시간의 선거 유세를 했다. 신익희는 "만약 내가 대통령에 당선된다면 일본 지도자들과 회담할 용의가 있다. 한일 양국 정부는 무엇보다 먼저 부당한 감정을 청산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기염을 토하자, 이승만은 그날로 바로 역전 유세 보다 훨씬 강도를 높여 두 후보를 공격했다.[154] 5월 3일 이승만은 유세를 하지 않겠다고 밝히고는 논산훈련소와 논산, 대선 등 7개 역 플랫폼에서 유세를 벌였다. 그는 역 구내에 가득 모인 군중 앞에서 "일본과 회동하여 국가의 독립과 자유를 발전케 하겠다든가 또는 공산당과 싸우지 않고 평화적으로 통일을 하겠다든가 하는 것은 다시 국권을 일본에게 빼앗겨도 좋다는 것이고, 또 소련을 조국이라고 하는 류의 언동이다."라고 역설했다.[153][154]

"이들이 정권을 잡게 되면 이것은 반역분자들이 나라를 팔아먹는 것뿐만 아니라 민중이 나라를 팔아먹는 것"이라고 말했다.[155]

그러나 5월 5일 신익희는 호남 유세를 다녀오던 중 열차 호남선 열차 안에서 사망하고, 이승만은 무난히 3선에 성공한다.

5월 22일 선거 결과 대통령에는 자유당의 이승만, 부통령민주당의 장면이 당선되었다는 당선공고를 접하였다. 이후 이승만은 6월 25일 6.25동란은 미국의 오판에서 일어났고 중공군 철수가 통일의 선행조건임을 강조하였고, 7월 8일에는 환율 고수 및 공무원 인력 감원을 단행하였으며, 7월 26일 휴전협정은 이미 사문화되었음을 강조했다.

8월 15일 제3대 대통령에 취임하였는데, 취임식에서는 부통령 자리를 내주지도 않는 등 부통령인 장면은 홀대하였다 한다. 8월 16일 취임 3기 첫 국무회의에서 군비 증강과 경제 부흥을 강조하였고, 9월 1일 미국의 극동정책은 패배주의와 유화주의로 전락했다고 비판하였으며 9월 13일 유엔가입을 적극 추진하도록 임병직 대사에게 훈령을 내렸으나 한국의 UN가입은 무산되었다. 9월 17일 기자회견에서 야당의 지나친 반정부적 태도를 비난했고, 9월 22일 대통령령으로 10월 1일을 국군의 날로 공포하였다. 대선 전부터 일본에서 한일관계 개선을 요구해왔으므로 9월 30일 한일관계 개선 조건으로 한국에 대한 재산권 청구 철회를 일본에게 요구하는 한편 11월 4일 동해안을 시찰하였다. 동해안 시찰 도중 이북동포 구출 태세를 갖추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11월 7일에는 소련에 항거한 헝가리 국민들을 예찬하며, 헝가리 국민을 돕겠다는 의사를 표명했다.

1957년 1월 휴전협정 폐기와 군비강화를 강조하였고, 3월 21일 82회 생일을 맞아 우남장학회를 발족하였다. 8월 31일 방한한 UP통신의 극동 총국장인 호브라이트씨 부자를 면담하였으며 미국 오클라호마 주지사가 증정한 명예 시민증을 전달받았다.

1957년 11월 경제 4부 장관들이 경무대를 찾아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필요성을 설명하였으나, 이승만은 스탈린식의 사고방식이며 불구대천의 원수인 공산주의자 방식을 따르자는 것이냐며 한마디로 거절했다.[156][157] 1959년에 가서야 경제개발 3개년 계획의 초안을 짰다. 그러나 4.19로 3개년 계획은 전면 중단되고, 제2공화국에서 경제개발 5개년 계획으로 재수립된다.

측근들에 의한 고립[편집]

1958년 1월 1일 이북동포에게 메시지를 보냈으며, 1월 21일 일본에 대한 경계심을 강조하였다. 2월 23일 유엔군의 철수가 불가하다는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3월 8일에는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비난하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납북된 KNA 민간여객기 기체 송환을 요구했다.

앞선 대통령 선거에서 자유당의 장기집권과 독재체제에 커다란 위협이 되었던 자신의 정적 조봉암을 제거하기 위해 1958년 1월 13일 진보당 사건을 조작하였다. 조봉암은 간첩혐의로 사형 당했다.[158] 그런데 이때 이승만의 최측근인 장택상윤치영이 조봉암의 구명운동을 벌이는 이변이 발생한다.

한편 그의 3선, 4선을 출마하기를 원한다며 자유당에서 사람을 고용하여 3선, 4선 출마를 원하는 관제 시위를 주도했다. 이승만은 이것이 진심이라고 받아들였다. 그는 자신이 국민의 절대적 지지를 받고 있다는 측근들의 말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고 국민은 그의 지도를 절대적으로 신뢰하고 있다고 믿었다. 국민과 우남을 격리시킨 일부 측근들에 의해 그는 현실로부터 고립되어 있었다.[159] 그는 자신이 국민의 절대적지지 위에서 민의를 대표하고 있다고 망상하고 있었다.[159] 소와 말까지 동원한 3선, 4선 출마 권고를 그는 진심으로 이해하였다.

허정은 '그는 주권재민을 앞세우면서도 카리스마적으로 군림하려는 태도가 있었다.[159]'며 그에게는 모순되고 상반되는 두 면이 있었다. 그를 보필하는 사람들이 어느 면에 중점을 두고 그를 돕느냐에 따라 우남의 행동은 달라질 수 있었다. 만일 그가 이념적으로 앞세우고 있던 민주주의의 신념을 구현하는 방향으로 그를 성심껏 그를 돕는 사람들이 그의 주변에서 주류를 이루고 있었더라면 우남은 한국의 조지 워싱턴도 될 수 있었을 것[159] 이라며 아쉬움을 나타내기도 했다.

자유당 일파의 속임수를 얄밉게 생각한 이승만의 최측근 윤치영은 일부러 4대 부통령 선거와 1960년의 정부통령 선거에 출마하여 이기붕의 표를 갉아먹는다. 윤치영에 의하면 '내가 자유당 사람들의 미움을 산 것은 3대 정부통령 선거에 부통령으로 출마하여 이기붕과 맞서서 결국 장면으로 하여금 당선이 되도록 한 사실이며[160]'라고 밝히기도 했다. 윤치영은 부통령 후보로 나서되 대통령 후보로는 이승만을 지지한다 하고, 이기붕을 떨어뜨리기 위해서 출마한다고 호언하였다.

이기붕 일파의 행동을 미워한 이승만의 또다른 측근인 이윤영 역시 부통령에 출마한다. '이기붕을 떨구기 위해서[161]'였다. 1959년 이윤영은 나라의 운이 다 되었다고 생각하고 이승만에게 진언을 하러 경무대로 찾아갔다.[161] 그러나 4대 부통령에 출마했던 이윤영을 밉게 본 이기붕 일파가 못만나게 해 놓아서 결국 이윤영은 뜻을 이루지 못하고 돌아섰다. 이승만과의 면회를 거절당하자 이윤영은 부통령 후보에 다시 입후보하였다. 주위에서 부통령 입후보는 해서 무엇하느냐고 말리기도 하였다.[161] 그러나 이윤영은 이기붕을 낙선시키기 위해서 출마한다고 하였다.

씨름판에 나가는 사람이 꼭 이기려고 나가느냐? 씨름에 져도 잠뱅이나 찢으려 나가는 거지! 이기붕이를 떨구기 위해서다.[161]

이기붕은 사람을 보내 이윤영에게 돈 1억원을 보내드릴 터이니 사퇴하고 자기를 밀어 줄 것을 제안하였으나 이윤영은 크게 나무라고 해서 되돌려보냈다.[161] 제4대 부통령 선거에서 그는 낙선하였다. 이후 이기붕 세력의 견제를 받아 한동안 경무대에 출입하지 못하였다. 결국 이승만이 윤치영이윤영을 다시 만나게 된 것은 3.15 부정 선거가 터진 직후였다.

라오스 파병 계획[편집]

미국이 한국군의 감군을 직접적으로 추진하고 있었던 1958년에 가서 이승만은 다시 한번 인도네시아 파병을 제안하고, 비밀리에 우익 반군 지도자들과의 접촉을 시도하였다.[162]

한편 미국은 CIA를 본뜬 정보기관을 설치하도록 이승만에게 요청했지만 CIA를 불신하던 이승만 대통령은 그 제의를 받아 주는 척 하면서 국방부 산하에 설치함으로써 기능을 격하시켰었다. 1958년 국방부 장관 김정렬로부터 미국 CIA의 요구에 따라 정보기관을 설치할 것을 건의받자 그는 당초 거절했다. 결국 정보기관은 국방부 산하에 두는 것으로 낙착된다.

1959년 이승만은 라오스우익 노사반 장군이 이끄는 반군이 공산군에게 밀리자, 라오스 파병을 계획한다. 이승만은 1959라오스 내전에 개입할 의사를 피력하고, 비밀리에 국방부 내의 정보기관인 ‘79호실’ 책임자 이후락을 라오스에 보내어 상황을 파악하도록 하였다.[162][163][163] 이후락은 당시 베트남 대사 최덕신의 도움을 받아 노사반을 만난 결과를 이승만 대통령에게 직접 보고했다. 보고에 따라 한국군라오스 파병이 깊이 있게 검토되다가 미국의 반대로 무산되었다.[163]

집권 후반[편집]

1958년 8월 11일 이승만은 갑자기 국가보안법 개정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야당은 야당 탄압의 수단으로 사용될 법이라고 주장하며 강력히 반대했으나, 12월 24일 무술 경관을 국회에 투입하여 야당을 감금하고 국회의사당의 정문을 폐쇄시킨 채 여당인 자유당만이 출석한 국회에서 국가보안법과 지방자치법 개정안을 비롯해 1959년 예산안 등 10개 법안 27개 의안이 통과시켰다.

베트남에서 기자회견을 하고 있는 이승만(1958년 11월)

한편 계속 미국의 한일회담 압력이 들어오자 이승만은 3월 28일 일본 총리 기시(岸信介)의 한일회담 재개 요망 친서에 동의를 표한다. 3월 31일 미국 기자와의 회견에서 인도차이나에 한국군 파견용의를 표명했고, 4월 26일 멘델레스 터키 총리에게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대한민국장(훈1등)을 수여했다. 58년 5월 19일에는 일본 총리가 보낸 특사를 면담하였으나 협의점은 찾지 못하였다. 58년 6월 29일 AP기자의 서면질문에서 유엔 감시 하의 북한 선거를 주장했고, 8월 5일 외신 기자와의 서면회견에서 국군 감축에 반대하고 장비 현대화를 강조, 8월 29일 아시아집단안전보장체제를 강조하고 중화민국유재흥 국군 연합참모총장을 특사로 파견했다. 9월 13일 중화민국중화인민공화국의 군사적 충돌 사태에 미국이 적극 개입하자, 이에 대한 미국의 태도를 지지하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10월 28일 원자력 연구를 지시하여, 원자력 연구를 실시하게 하였으며 11월 월남대통령의 초청으로 월남을 순방하고 돌아왔다. 12월 12일 CBS 방송국과의 기자회견에서 기자에게 UN군 철수 불가, 국가보안법의 필요성을 언명하였다. 1959년 1월 국가재산의 효율적인 운영을 지시하였고, 1월 26일 일본에게 약탈문화재에 대한 반환을 외신기자들과의 인터뷰에서 요구하였다. 2월 일본이 재일동포를 북송하자 추방이라며 강하게 비난하였다.

1959년 2월 4일자 경향신문 조간에는 무기명 컬럼 여적을 통해 이승만 정권에 비판적인 내용에 대한 단평이 게재되었다. 이를 계기로 장면을 지지하였던 경향신문이 이에 따라 폐간되었다.[158] 그해 4월 손병희선생기념사업회 명예 회장에 추대되었다. 1959년 3월 1일에는 3.1절 기념식에 참석하여 일본을 규탄, 일본에 대항한 국내 안전보장이 필요하다 주장했으며 3월 25일에는 미국에 서한을 보내 남북통일을 위한 미국의 결단 요구했다. 59년 3월 29일에는 미국 언론에 자유진영의 단결을 위해 미국의 강경정책이 필요하다고 미국 국민들에게 호소했다. 1959년 4월 초부터 미국소련이 정상회담을 계획하자 4월 15일 이승만은 미국소련의 정상회담이 쓸모없음을 강조했고, 6월 8일에는 대한민국 국내에서 열리는 제5차 아시아민족반공대회 대표들을 환영하는 시민대회에 환영과 반공 메시지를 전달했다. 6월 24일 UPI 기자를 면담하고, 기자의 서면질문에 북진통일을 강조했으며 59년 6월 25일 미국 적십자사일본의 재일동포 북송을 저지해줄 것을 요청했다. 1959년 9월 2일 국무회의에서 학원(학교)에 잡다한 부과금 등을 근절할 것을 지시하였다. 9월 10일 국제 적십자 부위원장에게 북송은 적십자정신에 위배된다고 강조했다. 1959년 12월 북한 송환 저지 공작원을 비밀리에 일본에 파견했다.

3·15 부정선거와 4·19 혁명[편집]

1960년 3월 17일동아일보. 3.15 부정선거 개표결과 이승만 대통령 4선 당선, 이기붕 부통령 당선을 보도한 기사.

1960년 3월 15일 정부통령 선거가 있었고, 개표 과정에서 이기붕부통령 당선을 위한 개표조작이 벌어졌다. 이에 대한 항의가 전국적으로 진행된 가운데 경남 마산에서는 조직적 저항으로 발전한 마산 3·15 의거가 발생했다. 그러나 관계자 처벌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사태는 확대되었다.

3월 15일 부정선거 반대시위에 참가했다 실종되었던 마산상고 1학년 김주열은 1960년 4월 11일 한 낚시꾼에 의해 마산 앞바다에서 숨진채로 발견되었다. 시체의 왼쪽 눈에서 박힌 최루탄이 확인되었고, 이는 부정선거 비판여론을 전국적으로 확대시켰다. 당시 이승만 정권은 언론을 통해 마산 3·15 의거를 남한에 잠복한 공산주의자 간첩이 배후가 된 폭동이라고 간주하면서 마산에 계엄령을 선포하였다.

전국적으로 확대되던 시위는 4월 19일, 서울 지역 대학생들이 총궐기하고 수많은 중고생들과 시민들이 동참한 시위와 이에 대한 경찰의 유혈 진압으로 절정에 이르렀다. 사태는 동료들의 희생에 분노한 학생들이 집회를 여는 지경에 이르렀고, 계엄령은 서울과 전국적으로 확대되었으나 군부는 무력진압을 사실상 거부하고 중립적 입장을 견지하였다. 이에 이승만은 자유당 당직을 사퇴하고 대통령직에만 전념하겠다 하였다. 주한 미국대사였던 매카나기의 방문을 받은 이승만은 이 모든 사태가 장면과 교회세력의 지시라고 설명했지만 메카나기 대사는 3.15부정 선거와 이를 저지르고도 숨긴 각료들 특히 경찰의 탓이라고 이야기하였고, 즉각적인 개혁을 강력히 촉구했다.

In my younger days I certainly knew my people well and even now felt myself certainly one of them.
내가 젊었을때에는 우리국민들을 잘 알고 이해해 왔었습니다.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 이승만의 대답

한편 학생들을 탄압하자는 측근자들의 제의를 받자 그는 서슴지 않고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불의를 보고 일어나지 못하는 민족은 죽은 민족이다. 민중이 내가 그만둘 것을 원한다면 물러서면 된다.'[164] 며 강경 대응론에는 반대하였다.

대통령직 사퇴[편집]

1960년 4월 26일 이승만은 하야의 뜻을 밝혔다. 그는 불의를 보고 국민이 좌시한다면 이 나라는 희망이 없다고 하였다.[165] 그는 학생들의 궐기를 높이 평가하며 우리 선열들의 독립투쟁과 3.1운동을 이어받은 것이라고 하였다.[166]

4월 26일 새벽 6시경 허정은 이승만에게 하야를 권고할 결심으로 경무대를 방문했다. 이때 이승만은 구 비서에게 국민이 원한다면 대통령직을 하야하겠다는 성명서를 구술하고 있었다. 이승만은 25일 저녁에도 학생들이 많이 죽고 다쳤다는 보고를 듣고 어떻게 국민들을 죽일 수가 있느냐. 내가 물러 나야지 하며 하야를 결심했다[167] 이승만의 하야 권고를 하러 간 허정은 하야 성명을 구술하는 이승만을 문전에서 보고 목이 메어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168] 고 한다.

이어 이승만 대통령은 하야할것을 결정하게 되었으며, 4월 23일 시위진압경찰의 발포로 시민들의 사망소식이 전달되자 애도의 뜻을 발표한다. 4월 24일에는 유혈사태에 대한 책임을 지고, 자유당 총재직을 사임하였다.[169]

한편 이승만은 4·19 의거 부상자들이 수용된 병원을 찾아 부상자들을 위문하였다. 1960년 4월 26일 이승만은 대국민 담화문을 통해 대통령직 자진 사퇴의 뜻을 표하였다.

이어서 이승만은 국회에 사임서를 제출하고 물러났다. 한편, 부통령 당선자 이기붕4월 28일 경무대에서 이기붕의 장자이자 이승만의 양자인 이강석에 의해서 가족들과 함께 타살되었다. 자유당 정권이 저지른 부정선거에 항의하는 학생을 중심으로 시작한 4·19 혁명일본의 민중운동인 안보투쟁에도 영향을 주게 되었다. 대통령에서 하야하고 이화장에 있을 때 중화민국장제스 총통으로부터 위로 편지가 왔다. 우남은 답신에서 '정의를 사랑하는 우리 청년학도들이 있는 한 대한민국의 미래는 밝다.[170]'라고 대답하였다.

사퇴에 대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반응[편집]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지도부는 4월 19일 '피의 화요일'에 분명히 이승만의 사퇴를 예견하였다.[171] 김일성4월 21일 이승만의 후계자를 언급하며 반공연맹 의장 장택상을 그 후계자로 지목하였다.[171] 그러나 장택상에 대한 미국의 신뢰를 의심했다.[171] 이어 김일성은 이승만의 후계자들에 대해 전망하면서 미국이 난처한 입장에 처해 있다고 말했다. 이승만은 연령상 도저히 안되는 상태인 바, 특히 최근들어 권위를 엄청나게 훼손당하였다고 말했다.[171]

4월 26일 이승만 사퇴성명 이후 조선로동당 중앙위 국제부장 박용국은 평양주재 대사들에게 브리핑했다. 브리핑에서 박용국은 "시위대가 탱크병과 좋은 관계를 맺는 데 성공했으며, 부통령인 이기붕의 집을 박살냈고, 전 내무장관인 최인규타이완으로 도망갔고, 남조선 경찰들도 동요하고 있다."고 설명했다.[171] 이어 미국이 이승만을 남기고 그 정부만 교체하길 원했지만 이승만의 사퇴는 불가피하다[171] 고 발표했다.

대통령직 하야 이후[편집]

미국 망명[편집]

1960년 5월 29일. 하와이로 출국하는 이승만 박사. 왼편 두 번째는 대통령권한대행 겸 내각수반 허정
1960년 5월 29일자 경향신문.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성명 발표 후 하와이 망명가는 모습을 보도했다.

이승만은 1960년 5월 29일 하와이로 망명하였다. 그는 처음에 한국을 떠날 때 영구 망명을 생각하진 않았다. 다만 한 달 정도 잠시 피하는 걸로만 생각했었다. 그러나 허정 과도내각과 제2공화국 장면 정권은 이승만의 귀국을 허락하지 않았다. 하와이에서 망명생활중이던 이승만은 향수병에 걸렸다. 한국에 돌아오고 싶어 1962년 3월 17일자 비행기표까지 끊어놓고, 3월 16일 '사과 성명'을 발표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3월 17일 박정희는 특별지시를 통해 입국을 거부, 이승만의 귀국을 막았다. 3월 18일자 신문들도 사설을 통해 이승만의 귀국을 반대했다.[172] 이승만은 실어증에 걸려서 고생했다. 영어에 유창했던 이승만은 실어증 이후 프란체스카 도너의 간호를 받으며 약간의 한글과 한문으로 대화할 수 있었다.

거주지를 정하지 못해 수시로 거처를 옮겨다니던 이승만과 프란체스카 도너는 하와이 한국인 교포단체의 유지인 최백렬(崔伯烈), 오중정(吳重政), 윌버트 최 등의 도움으로 한 빌라에 머무르다가 이승만의 병세가 악화되면서 하와이의 요양원으로 옮겨졌다.

죽음[편집]

1960년부터 심장병이 있던 그는 트리폴리 육군 병원에 자주 진료하였다. 이승만은 망명생활중 병세가 악화되면서 망명지 하와이에서 살다가, 1965년 7월 19일 한국 시간 19시 35분에 하와이 호놀룰루 요양원에서 병으로 별세하였다. 이때 이승만의 나이는 91세였다.

바로 미국에서 데스마스크를 만든 뒤 유해는 비행기편으로 하와이 호놀룰루를 출발, 1965년 7월 22일 경기도 김포비행장을 통해 입국하였으며, 7월 27일 서울특별시 정동 교회에서 영결식을 마치고, 가족장으로 서울 시가행진 후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

7월 23일 오후 3시 미 공군 수송기가 '고향생각'이 연주되는 가운데 이승만의 유해를 운구하여 김포공항에 도착하였다. 대통령 박정희, 국회의장 이효상, 대법원장 조진만, 국무총리 정일권 등 3부 요인들을 대동하고 공항으로 나가 시신을 영접하였다.[173] 그밖에 내외 귀빈으로 윤보선, 허정, 장면, 윤치영, 이범석, 장택상 등이 김포공항에 나와 이승만의 시신을 영접했다.

시신은 운구차량과 경찰의 호송을 받고 서울 이화장에 안치되었다가 호상기간을 마친 뒤 동작동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

2008년 8월 학술지 ‘한국사 시민강좌’ 하반기호(43호)에서 ‘대한민국을 세운 사람들’ 을 선발, 건국의 기초를 다진 32명을 선정할 때 정치 부문의 한사람으로 선정되었다.[174]

추도사[편집]

대통령 박정희 추도사[편집]

추도사는 국무총리 정일권이 대독하였다.

(중략)

전 대통령권한대행 겸 국무총리 허정 추도사[편집]

(중략)

장례 문제[편집]

배재중,고등학교에 세워진 이승만 동상

시신 귀국 이후 장례 문제를 놓고 논란이 일었다. 1965년 7월 20일 박정희는 이승만의 장례를 국민장으로 결정하였으나 이승만의 문중 사람들과 이승만 측근들은 정부의 국민장 결정은 이승만에 대한 홀대라고 생각했고, 4월 혁명동지회 등 4·19 혁명 관련 단체들은 이승만의 국민장은 과분한 조치라며 3일간 항의 농성을 하였다.[173] 이승만의 시신이 운구되자 민중당 대변인 김영삼은 '적잖은 정치적 과오가 있으나 평생을 조국의 독립투쟁에 몸바쳐왔으며, 초대 대통령을 지냈다는 것을 감안하여 전 국민과 더불어 깊은 애도의 뜻을 표한다는 애도성명서를 발표하였다.[173]

1965년 7월 19일 이승만의 부음 소식을 듣고, 허정, 윤치영, 이범석, 장택상 등은 7월 22일 비행기를 통해 이승만 시신이 귀국하자, 오전 8시경 김포공항에 도착하여 이승만의 시신을 영접하였다. 허정, 윤치영, 이범석, 장택상 등은 국장을 요구하였다.

4월 혁명동지회 등 일부 단체에선 국장, 국민장, 사회장도 안 된다며 반발하였다.[173] 동아일보1965년 7월 23일자 사설에서 국장도, 국민장도 불가하다며 정부는 즉시 이승만의 장례에서 손을 떼라[175] 고 항의하였다. 대통령 박정희는 이승만의 국민장을 추진하였으나, 허정, 윤치영, 이범석, 장택상 등은 국장을 고수하였다. 4.19 관련 단체에서는 국장도 국민장도 안 된다며 대규모 시위, 집회를 열었다.

양자의 의견 조율이 안되자 박정희는 이승만의 유족에게 국민장을 권유하였으나 이승만의 양자 이인수국민장을 거부하고 가족장을 하겠다고 응답하였고, 구 자유당측 인사들은 국민장을 거부하고 국장을 요구하였다.[173] 화가 난 박정희는 '가족장으로 하려면 마음대로 하라'며 내버려두었다. 장례는 가족장으로 결정되었고, 박정희국무총리 정일권을 보내 추도사를 대독하였으며, 기타 허정, 이범석, 윤치영, 장택상, 윤보선, 장면 등 이승만의 측근들 및 정관계 인사들이 다수 참석하였고 대통령 권한대행 허정 등이 친히 추도사를 지어 낭독하였다.

평가[편집]

해방정국에서의 이승만의 주장이 한국의 분단을 고착화시켰다는 주장과 공산주의에 맞서서 반공국가를 건설하였다는 주장이 있다.[176]

일반적 평가[편집]

긍정적 평가[편집]

허정은 '흔히 선생님을 독재자라고도 하지만 미국에서 수학하신 선생은 독재자는커녕 분명한 자유민주주의의 신봉자였다. 오히려 우유부단한 면까지 없잖아 있었다'[177] 라고 말했다. 또한 허정은 그가 3.15 부정선거에 대한 책임을 지고 물러나는 점을 두고 그가 민의를 존중하는 정치인이었다[178] 고 평하였다.

애국자라는 시각[편집]

장면은 '그 분의 애국심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고 하였다. 일평생 독립운동에 바친 공적이 이를 말하고도 남는다. 특히 대외적으로 철석 같은 반공 태세, 의연한 대일본 태도, 과감한 반공 포로 석방 등은 이승만 박사의 용단이 아니고는 아무도 따를 사람이 없었다. 독립 주권 의식의 철저한 시범도 경복할 만큼 위대했다[179]'는 것이다.

허정은 '부정선거에 항거하는 4.19의 노도가 장안을 휩쓸었을 때 비로소 민의의 소재를 정확히 파악한 그는 '부정을 보고서 일어서지 않는 백성은 죽은 것이라며 깨끗이 권부에서 물러났다'[180] 며 '젊은 학생들의 애국 기상을 가상히 여기고 국민이 원한다면 사퇴하겠다면서 자진해서 대통령직을 내던지고 하야함은 이승만이 아니고서는 하지 못할 결단이었다'[180] 고 평하였다. 허정은 또 '우리는 그의 마지막 모습만을 보고 그의 전부를 평가해서는 안될 것이다. 남한 단독정부 수립으로 한반도 전체의 적화를 막은 그의 슬기와 용단 만으로도 우남은 한국 현대 정치사에 커다란 공적을 남긴 것이다'[181] 라고 평가하였다.

극작가 신봉승은 '오직 조국의 자주 독립만을 위해 헌신하였다.[182]'는 평을 내렸다.

이승만은 전형적인 조선의 선비사상과 미국의 감리교사상이 혼합된 인물로서 평생을 매우 금욕적이고 도덕적인 삶을 살았다는 평가가 있다.[183] 이와 관련된 후문으로 인권운동가 박소영은 그가 하와이 망명생활 도중 임영신에게 청혼하였으나 거절당했다는 후문이 있는 것뿐, 그의 뒷얘기는 깔끔했다는 예를 제시했다.[183]

재평가 시도[편집]

1970년대부터 윤치영, 박용만 등에 의해 이승만 재평가론이 제기되기도 했다. 특히 윤치영제1공화국 기간 중의 부패와 선거 관련 문제는 이승만과는 무관하다고 확신했다. '얼마간의 무리도 따른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50년대 들어 저질러진 그러한 행태들은 자유당 정권의 부패한 세력들에 의해 주도된 것이다. 가령 이기붕, 박마리아 같은 사람들이 자신들의 권력을 더욱 유지시키고 심지어는 대권을 생각해서 저지른 짓들입니다.[184]'라고 주장했다. 그는 1970년대부터 이승만이 독재자라는 주장은 낭설이며 우의마의라는 단어의 어원을 설명, 이승만이 3선으로 퇴진하려 했으나, 이승만을 등에 업고 권력을 행사하려는 자유당 측근들의 간계로 관제 3선 출마 시위가 있었고, 이승만은 속은 것에 불과하다는 주장을 역설했다. 1979년 이후부터는 공공연히 이승만의 3선 퇴진설과 우의마의라는 단어의 어원을 역설하며 학생 운동권의 이승만 독재자설에 반론을 제기했다.

1991년한국논단과의 인터뷰에서 윤치영은 '우리는 거시적인 차원에서 이박사를 평가해야 할 것이다. 그분은 평생을 독립투쟁에 몸바쳐 온 분이고, 민주주의를 가장 신봉하는 인물이었다.[184]'라고 평하였다.

2001년 이후 결성된 뉴라이트 계열은 이승만을 대한민국을 건국하는 '건국대통령', '국부'로 재평가, 상정하자는 의견도 있다. 이와 관련하여 이명박 정부에서는 국가적 차원으로 이승만 정부의 건국을 기념하는 행사를 개최한바 있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이후 이승만 박사는 국민학교 의무교육 실시했다는 점에 있어서 한국 근현대 교육사에 획을 긋는 자취를 남겼다는 주장이 있다.

박용만은 이승만과 김구는 민족의 쌍벽이었고 민족진영 인사들은 두 영도자를 모시고 반석위에 놓인 것과 같은 안도감과 신뢰감을 가지고 무조건 두 분이 영도하는 대로 마음놓고 따랐던 것이다.[185] 라고 평가하였다.

2대 국무총리와 4대 부통령을 지낸 장면은 '이 박사 밑에 국무 총리로서 1년 가까이 지낸 내가 본 [186] 그분은 장점도 많고 단점도 많았다. 그분의 애국심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일평생 독립 운동에 바친 공적이 이를 말하고도 남는다. 특히 대외적으로 철석 같은 반공 태세, 의연한 대일(對日) 태도, 과감한 반공 포로 석방 등은 이 박사의 용단이 아니고는 아무도 따를 사람이 없었다. 독립 주권 의식의 철저한 시범도 경복할 만큼 위대했다.[187]' 고 평가하였다.

13대 대통령을 지낸 김영삼은 그를 당시 가장 현실적인 지도자로 평가했다.[188][189] 대한민국의 건국의 주역이되 4사 5입 개헌 시기부터 잘못되기 시작했다고 평가하였다.[188][189] 한편 김영삼은 또 '이 박사가 너무 노인이었고 기억력이 약했던 것 같다.' '밑에 사람들이 보좌를 잘 못했고 이기붕이 건강이 안 좋은 사람이었는데도 대통령 욕심이 있었다' 고 평가하였다.[189]

토지개혁[편집]
1950년 3월에 개정되어 공포된 농지개혁법안.

농지개혁법을 시행했다.[190] 이승만의 승인 하에 농지개혁을 주도한 사람은 당시 농림부 장관이었고 진보당 사건으로 사형당한 조봉암이다. 1948년 8월 이승만은 농림부 장관 조봉암의 건의와 설득을 받아들여 농지개혁을 승인한다. 농지개혁으로 왕조시대 이후 대지주에게 집중된 농토를 실제 농민에게 나누어주는 것이었다.

인천의 지역 유지이며 인천시 의회 제1대 의장인 이명호는 조봉암의 농지개혁에 반발하였으면서도 이승만에 대한 존경심 때문에 참았다고 한다. 이명호의 다섯째 딸 이양숙의 증언에 의하면 이명호는 토지개혁으로 그 많은 땅을 빼앗겼으면서도 크게 내색하지 않았다고.[191] 워낙 이승만 대통령을 존경했는데, 그 이승만 대통령이 장관으로 임명한 조봉암이 나서서 한 일이니 이해하지 않을 수 없었다.[191] 는 것이다.

농지개혁으로 인한 효과는 남다른 것이었다. 비록 일부에서는 '실패한 토지개혁'으로 폄하하는 의견도 있으나, 정설로는 '토지개혁을 통해 주인의식이 생긴 농민들이 많아져 당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김일성, 박헌영 등이 주장하던 100만 봉기설이 무용지물이 됐다는 것이다.

시대적 제약[편집]

전북대 신방학과 교수 강준만은 '이승만의 시계는 구한말에 멈춰져 있었다. (많은 부정적평가와 긍정적평가를 이루면서도) 이승만은 평생을 복고적 투쟁을 위해 바친 인물이었다.[192]'고 했다. 강준만은 또 '이 점을 무시한 채, 오늘날의 잣대로 이승만을 평가하는 것은 이승만에 대한 불필요한 악의적 해석만을 낳을 뿐이다' 라고 평가하였다.[192]

부정적 평가[편집]

대한민국정부 수립 이후, 1949년 반민특위 습격사건에 최종적 결정 승인과 지시를 내린것으로 알려져있으며, 친일 경찰, 군인, 관료 출신들을 '반공투사'라 칭송하면서 대거 등용했다는 점과[133], 한국 전쟁 시기에 대통령으로서의 평판을 실추시킨 행동들과 책임들, 토지개혁과 귀속재산처리 문제에 소극적인 태도로 나아갔다는점, 이후 자유당과 사사오입 개헌, 3·15 부정선거, 인의 장막에 가려져 있었던 점, 집권욕, 고집 등에 대한 비판들이 있다.

허정은 '다만 처음 환국했을 때처럼 한 정당의 지도자가 아니라, 국민의 입장에 선 초당적 지도자로서 아직도 미숙한 한국의 정당들을 공평한 입장에서 육성하여 정권의 평화로운 교체를 위한 기반을 확립하지 못한 점[181] 과 정권을 인계함으로써 훌륭한 민주적 전통을 확립하지 못한 점만은 그의 잘못[193]'이라고 지적했다.

위임통치 청원 사건에 대한 비판[편집]

1919년에는 미국윌슨 대통령에게 국제연맹의 감시하에 한국의 독립을 청원하는 청원서를 올리고 후에 다시 국제연맹의 위임통치를 요구하는 청원서를 제출하였다. 이 때문에 이승만은 신채호, 신성모임시정부의 무장투장파와 갈등하였고, 박은식 일파의 공격을 받았다.[출처 필요] 결국 임시정부 임시의정원에 의해 탄핵까지 가게 되었다. 이때 임정에서 이승만의 편을 들던 인물은 내무부총장 김구, 의정원 의장 최창식(崔昌植) 등 소수였다.[출처 필요]

이때, 단재 신채호는 '이완용은 있는 나라를 팔아먹었지만 이승만은 없는 나라를 팔아먹었다.' 라고 성토를 했었다.[194][195] 거기다 이승만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통령직을 임하면서도 임시정부 청사가 있는 상하이에서는 활동이 거의없어 1925년에 탄핵을 당하게 된다.[196]

조소앙은 이승만에게 쿠테타를 종용하는 편지까지 보내기도 했다.[197] 임시정부에서 이승만을 탄핵하자 이승만은 미국내 재미 한인 교포들에게 임시정부로의 송금을 중단하게 하였다.

이승만의 반대파들이 국민대표자 회의 소집을 요구하며 임시정부를 부정하고 임정의 해산과 재창조 등을 주장하는 창조파, 개조파 등으로 활동하면서 임시정부 내에서의 이승만의 위치가 자연스럽게 다시 복권될 수 있었다는 주장도 있다. 1932년 11월에는 33년에 열리는 스위스 제네바 국제연맹회의의 전권대사로 파견되었고, 1934년 국무위원회 회의에서는 신익희·조소앙 등과 함께 임시정부 외교위원의 한 사람으로 신임되었다.

자만심이 강하고 독선적인 인물이었다는 주장[편집]

측근이었던 허정에 의하면 자신을 대단히 높게 평가하였으며, 한국인 중에 자신과 맞설 수 있는 사람이 없다고 봤다고 한다. 누구든지 그에게 복종하고 그를 따르기만 하면 그는 그 사람을 동지로 간주하였으며, 그 외의 사람은 모두 그의 적이었다고 평가하였다. 또한 허정은 '그가 대단히 성격이 급하고 남들과 쉽게 싸웠으며 주요 정치문제에 대하여 대단히 완고했다'고 평하였다.[13]:229

초기에 그의 신임을 받기도 했던 장면에 의하면 '그분의 성격 소치인지 자존심이 너무 지나쳐 ‘나’ 이외에는 이 나라를 다스릴 사람이 안중에 보이지 않는 양 정치 면에 나타난 그분의 개성은 독재의 전형적인 감을 주었다. 정적을 용서 않고 때로는 고도의 술책과 잔인성을 주저 않고 드러냈다.[187] 국회에서 통과된 법률도 비위에 안 맞으면 공포 안하기가 일쑤이며, 그의 유시나 담화가 법률 이상의 위력을 휘둘렀다. 구속된 국회 의원에 대한 석방 결의도 아랑곳없고, 헌법 기관인 참의원, 헌법 위원회, 탄핵 재판소 등도 필요 없다고 구성해 주지 않았다. 장기 집권을 위하여 때로는 비민주적인 방법의 정치 파동도 일으킨 사실은 우리가 다 잘 알고 있는 바다.[187]'라고 비판하였다.

해방 직후 조선체육회를 이끌던 여운형은 이승만이 귀국한 후 서울운동장에서 전국체육대회를 개최했다. 그때 몽양은 비록 노선은 다르지만 이승만이 해외에서 독립을 위해 수십년을 일하다 돌아왔으므로 일장기[198] 가 아닌 태극기를 가슴에 단 우리 청년들이 대회장에 위풍당당하게 걸어들어오는 것을 보면 얼마나 감격할까 하는 생각에서 이승만을 개회식에 초대했다고 한다.[199] 여운형에 의하면 이승만은 윤치영과 함께 와서 내빈석에 자리를 잡았는데 식이 시작되어도 각도 청년들이 줄을 지어 씩씩하게 입장하자 몽양은 이박사가 얼마나 흐뭇해할까 하고 감격을 나누기 위해 그의 손을 잡으려고 했다. 그런데 이승만은 청년들을 보지도 않고 수행한 윤치영과 귓속말로 정치 이야기만 하더니 "일이 있어 그만 가봐야겠다"며 곧 퇴장해버리고 말더라는 것이다.[199] 정치적 노선은 다르지만 인간적인 입장에서 그를 초청했는데, 그 모습을 보고 여운형은 인간적으로 섭섭했다면서 자기가 이박사에게 가장 실망을 느낀 때가 바로 그때였다고 했다.[199]

친일 경찰의 활용[편집]

제주4.3사건, 여순사건, 반민특위 습격사건, 장면 부통령 암살사건등의 배후에는 친일 경찰이 있었다고 한다. 노덕술, 이구범, 최운하 등은 일제 강점기부터 고문을 잘해서 출세한 사람들이다. 이들은 '반공'을 이용해 국민들에게 공포를 심었다. 당시에는 친일행위 청산을 주장하면 빨갱이로 몰리기 쉬웠다고 한다. 이승만도 친일파청산 주장은 공산당의 연관성이 긴밀하다는 취지의 발언을 했다.[200]

학살 범죄[편집]

제주4.3사건, 여순사건 진압 과정에서 벌어진 대규모 양민학살과 한국전쟁 중 벌어진 보도연맹 학살사건대한민국 국군에 의해 벌어진 민간인 집단학살에 대통령 이승만의 책임이 제기된다.

동상 건립[편집]

4.19혁명 이후 대한민국에는 이승만의 동상이 없었다. 한국자유총연맹은 이승만의 동상 건립을 지속적으로 추진해왔다. 2011년 8월 25일 이승만 동상이 서울특별시 장충동에 건립되었다. 그러나 자유총연맹 정문 앞 인도에서 사월혁명회·한국전쟁유족회 등 단체들은 동상 제막식 반대 집회를 열었다.[201]

임기 연장과 독재정권 수립에 대한 비판[편집]

대통령 장기집권과 독재정권 수립을 위해, 1952년부산 정치 파동과 발췌개헌, 1954년사사오입 개헌, 1960년3.15 부정선거 등, 일련의 사건을 일으킨 것에 대한 비판을 받고 있다. 앞서 두 차례의 개헌은 기립투표와 궤변으로 민주적 개헌 절차를 무시한 채 이루어졌으며 이를 통해 이승만은 대통령에 세 번 피선되며 장기집권을 실현했고, 이후에도 4선을 위한 3.15 부정선거를 저질러 또 한 번의 임기연장을 시도하였다. 이러한 사건들로 인해 다수의 학자들로부터 독재자라는 비판을 받고 있으며, 보수 정치인 김무성 의원도 '이승만 전 대통령의 독재와 부정부패는 비판받아야 마땅하다'고 주장하였다.[202]

사법살인에 대한 비판[편집]

진보당 사건으로 정적 조봉암을 숙청하기 위해 사법살인을 자행한 것에 대한 비판을 받고 있다. 사건 당시 이승만 본인이 직접 국무회의에서 "조봉암은 아직도 공산당원이 틀림없다. 이러한 위험분자는 제거되어야 할 것이다."라고 발언하는 등 본 사건에 깊숙히 관여한 정황이 있다.[203] 이후 조봉암은 '평화통일'을 주장했다는 이유로 국가보안법에 의거, 간첩혐의로 사형되었다. 2007년 9월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는 조봉암에 대한 사과와 피해구제, 명예회복을 위한 적절한 조처를 국가에 권고했고, 2008년 8월 조봉암의 유족들이 재심을 청구, 2011년 1월 20일 대법원에서 무죄판결을 하였다. 이로써 진보당 사건조봉암에 대한 사형 집행은 이승만 정권에서 이루어진 대표적인 사법살인으로 남게 되었다.[204]

언론탄압에 대한 비판[편집]

1955년 '동아일보 괴뢰 오식 사건'과 '대구매일신문 피습 사건', 1958년 '경무대 똥통 사건'과 '함석헌 필화사건',[205] 1959년 '경향신문 폐간 사건' 등, 일련의 사건을 일으켜 언론을 탄압한 것에 대한 비판을 받고 있다. 역사학자 박한용, 언론인 김삼웅 등 다수의 인사가 이승만 정권의 언론탄압에 대해 비판하였다.[206][207]

외교력 평가[편집]

대미국 관계[편집]

이승만은 미국을 불신하면서도 강력한 동맹상대로 미국을 지목하였다. 이승만은 대한제국 시절에 밀사로 파견되었을 때 미국일본가쓰라 태프트 밀약을 체결한, 1905년부터 이승만은 미국의 대한국 정책에 대한 강력한 불신을 품어왔다. 미국은 비밀리에 대통령 루스벨트가 파견한 윌리엄 태프트 국무장관과 일본 총리 가쓰라가 비밀 회담으로 일본이 한국 점령을 용인하는 대신 미국은 필리핀을 점령하는 것을 일본이 침해하지 않는다는 내용이었다. 1940년대에도 임시정부 승인을 미루거나 회피하는 미국에 대한 이승만의 불신은 계속되었고, 한국 전쟁의 원인도 1949년 주한미군이 철수하는 것이 원인을 제공한 것이라고 확신하였다.

대일본 관계[편집]

일본에 대한 외교정책은 시종일관 반일노선과 경계를 지향하였다.[208] 그러나 일본에 대표부를 파견하여 연락을 유지하였고, 이는 이승만 퇴진 후 주일한국대사관으로 승격되었다. 6.25 전쟁 당시 미국에서 일본군의 개입을 천명하자, 이승만은 주한미국 대사에게 일본군이 개입하면 일본군부터 먼저 축출할 것이라고 하여 일본군 참전을 취소시켰다. 한편 서울이 점령되었을 무렵, 이승만은 일본에 임시 망명정부를 수립할 계획도 고려하고 있었다. 54년 3월 27일에는 국내에 유통중인 일제상품 몰수를 지시했고, 55년 6월 20일에는 일본제품 특혜수입 금지령을 내렸다. 한편 일본인을 만났다는 이유로 국무총리 장택상을 해임시키기도 했다.

대아시아 관계[편집]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후원한 중화민국과는 우호관계를 유지하였다. 장제스를 방문하여 면담하기도 하였고, 내한한 장제스에게 건국훈장을 수여하기도 했다. 베트남 공화국(남베트남)의 고 딘 디엠과도 우호관계를 수립하였고, 고 딘 디엠 방한 시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친히 수여하기도 했다. 그러나 인도네루와는 사이가 안좋았는데, 네루는 이승만에게 부정적이었다. 네루1949년 대한민국 정부의 승인을 반대하는 입장에 서기도 했다. 그러나 정부의 대표단인 조병옥의 설득으로 반대에서 기권으로 돌려놓게 되었다.

동시대 인물 간 비교평가[편집]

이승만과 김구의 비교[편집]

이승만과 김구 모두 구한말에 과거에 응시해 낙방한 경험을 갖고 있었다. 낙방 후 이승만은 개신교, 김구동학과 인연을 맺었다. 이승만은 친미국 노선으로 갔고, 김구는 친중국(중화민국) 노선으로 갔다.[192] 훗날 중국 국민당 장제스중화민국국공내전에서 패퇴하여 거의 몰락한 반면, 미국의 세계적 패권은 더욱 강화되어 갔다. 미국은 비교적 다원체제 였던 만큼 이승만과 미국의 갈등은 미국의 어느 한 부분과의 갈등이었을 뿐, 큰 흐름은 친미노선을 선택한 이승만에게 유리하였다. 그래서 이승만은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이 되었으며 향후 12년간 통치하게 된다.[192]

이승만은 부인 프란체스카와 함께 수시로 경마장에 들렀다. 경마가 있는 날이면 3층 귀빈실은 항상 북적거렸다. 마사회에서는 이들을 극진히 예우했으며, 예정에 없던 상장이나 상배를 마련하여 레이스를 하기도 했다.[209] 한편 김구도 경마장을 즐겨 찾았는데, 1946년 모친 곽낙원여사의 시신을 중국에서 운구하여 정릉뒷편으로 이장할 때 기마단이 운구를 호송했기 때문이다. 운구 호송을 고마워한 김구는 계속 경마장을 찾았다고 하며, 이승만과 김구가 자주 찾는 것에서 '이승만상', '김구상'이 유래했다고 한다.[209]

김구는 이승만과 서로 매우 친분이 두터웠다. 공석에서도 김구는 이승만한테 '형님'이라는 소리했을 정도로 사이가 매우 좋았다. 그러나 김구장덕수 암살사건의 배후로 지목되었을 때 이승만이 도움을 거절한 일로 이승만과 김구의 관계는 악화되었다. 장덕수 암살의 배후로 지목되어 법정에 증인 자격으로 서게 된 김구는 자신이 법정에 서지 않게 해달라고 이승만에게 도움을 요청했지만 이승만은 그럴 마음이 없었다.[210] 이승만은 철저한 외교론주의자였기 때문에 정치인 암살,테러등 매우 부정적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이승만이 장덕수 암살사건으로 위기에 처한 국민회의는 방관하면서 한민당과 연대하며 독자적으로 '한국민족대표단'을 구성하자 김구는 크게 분노하였다. 1947년 12월 22일 김구는 단독정부 절대반대와 '한국민족대표단'의 해산을 주장하였다. 이승만과 김구의 연대에 비판적이던 한민당은 이 사건을 정치적인 호재로 이용하고자 하였다.[211] 김구의 항의로 한국민족대표자회와의 합동작업이 재개되었지만 한민당의 강한 반대에 부딪혀 무산되었다. 장덕수가 암살되었을 때 이승만은 김구를 배후로 지목했고 그 후 김구는 검찰에 연행되어 수모를 당한 후로 이승만과의 결별을 결심했다.[211]

윤경빈에 의하면 훗날 '단독 정부 수립 운동'이냐 '남북 통일 정부 운동'이냐 노선을 두면서 거리가 멀어지게 되었다고 주장하였다.[212]

이승만과 서재필과의 비교[편집]

서재필은 대를 잇는다는 개념 자체를 무책임한 발상이라고 극도로 혐오하였다. 서재필은 문중에서 서재필이 아들이 없음을 염려하여 양자를 세우려고 계획하였을 때 이 소식을 듣고, "쓸데없는 일들이오. 나에게는 사랑하는 딸이 둘이나 살아 있소. 이제 새삼스럽게 양자를 세운다니 생각해보고 싶지도 않소이다."하고 거절해버렸다. 이어서 "이런 생각은 모두 고루한 동양적 사고방식에서 나온 것이오. 이러한 구습을 타파하고 새로운 민주사상을 길러가는 것이 우리나라가 빨리 독립할 수 있는 길이오.[213]"라며 "부지런히 일이나 하고 착실하게 살기 위한 새로운 힘을 연구하시오."라고 덧붙였다. 서재필은 후사가 끊어진다는 동양적인 사고방식을 중요하게 생각지 않는 서구적 사고방식의 소유자였다. 문중에서는 서재필이 아들이 없어 후사가 끊어짐을 안타까이 생각하고 그의 마음을 돌리려고 노력하였으나 그것은 허사로 돌아가고 말았다.[214] 서재필의 이와 같은 사상은 그가 형식에 구애받지 않는 지극히 단순한 사람임을 말해 주었다. 그는 이미 가족관념을 청산한 인물이었다.[215]

서재필은 서울의 친척집에도 다니지 않고 공무가 끝나면 조선호텔에서 혼자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 그가 귀국하자 서씨문중에서는 들끓기 시작하였다. 서재필은 이러한 소란을 몹시 싫어하였다.[213]

서재필은 한국인가족관념을 타파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였다. 그러한 가족주의가 바로 끼리끼리 해먹는 패거리주의를 만드는 원인이며 이방인을 배척하는 근간이라 생각하고 끔찍히 여겼다. 서재필은 지나친 형식 위주의 완고한 족벌의식은 조국의 민주화에 적지 않은 방해가 될 뿐이라고 했다.[213] 서재필의 이러한 풍모를 두고 그의 둘째딸인 뮤리엘이 후에 지적하여 말하기를 '파파는 심플맨이에요.'라고 하였다. 훗날 송건호는 서재필이 형식과 금전과 동양적인 가족 관념을 청산한 크나큰 인물이었다[213] 라고 칭송했다. 이를 두고 사람들은 서재필은 탈조선화 된 인간이라 하였다.

이승만은 자신에게 아들이 없는 것을 평생의 한으로 여겼다. 성재 이시영의 장례식 때 신익희가 장례위원장이었다. 이시영의 장례식에 참석한 이승만은 빈소를 찾아 분향하고 상제에게 조의를 표한 후 돌아서다가 두 손자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신익희에게 "그래도 성재장은 이런 고몰고몰한 손자들이 있었구려"라고 하였다.[216]

신익희나 그의 비서 신창현에 의하면 이승만은 이시영의 손자들을 보더니 '눈귀에 다시 눈물이 지적지적하였다' 했다. 나중에 신익희는 비서이자 종손인 신창현에게 "그 어른 오랜 미국 생활로 아예 우리나라의 대를 잇는다던가 하는 종법 관념에는 아예 관심조차 없을 줄 알았는데, 자기가 아들도 없고 손자조차 없음을 마음속 깊이 한으로 품고 계신 것이 역력히 보이더라."라고 했다.[217] 신익희는 이승만이 후사가 없음을 한으로 여겼다고 술회하였다.

이승만에 대한 타인의 평가[편집]

1920년대부터 1960년 망명 전까지 가까이에 있었던 허정에 의하면 대단히 두뇌가 명석한 인물이라 평가하였다.[13]:229

전북대학교 신방학과 교수 강준만에 의하면 '이승만은 비난과 독설에 매우 능숙했다' 한다. 이승만의 미국인 고문 로버트 올리버가 언젠가 이승만에게 그런 문제점을 제시했더니 이승만은 "나도 알고 있소. 나는 평생을 선동가로 살아 왔으니까 그렇게 할 도리밖에 없었던 것이오"라고 답했다.[192]}}

장택상은 이승만의 결점으로 "이승만에게 결점이 있다면 그것은 먼저 행동하고 나중에 생각한다는 것이다."라고 하였다.[218]

이승만에 대한 허정의 평가[편집]

허정은 이승만이 사리에 옳은 말이라면, 누구의 말이라도 수용하는 담박한 면이 있었다고 하였다. '내가 아는 우남은 유순한 호호야(好好爺)였다. 그는 기분이 좋을 때면 봄바람같이 부드러운 마음씨였고, 자신보다 20~30세 어린 연하자들에게도 반드시 공대를 하며, 사람의 방문을 받을 때엔 꼭 자리에서 일어나 맞이하였다.[219]

또한 이승만은 평소 자신보다 나이가 어리다 하여 인사를 받거나, 함부로 반말을 하지 않고 공대, 존재를 하고 맞인사를 했다 한다. 허정은 부정이나 거짓을 보면 육친이라도 용서함이 없는 반면 옳은 일, 곧은 말이면 삼척동자의 말이라도 곧이 듣는 성미였다. 또한 부드럽고 자애롭고 유머 센스가 풍부한 사람이면서도 한번 화를 내면 호랑이처럼 무섭기도 했다.[219] 고 했다. 조크를 잘 하기로도 으뜸이었다.[219] 장관을 해임할 때는 그만 두라는 말은 절대 하지 않았다 한다. 허정은 직접 담화를 쓰지 않고 장관을 해임할 때도 '그 동안 수고했으니 잠시 좀 나가서 쉬게' 하는 식으로 얘기하는 바람에 여러 사람이 어리둥절할 때가 있었다.[219] 진언을 받으면 즉시 메모하고 유익한 일이면 미루지 않고 결단으로 실천하였다.[219] 반면 누가 나쁜 짓을 했다는 보고나 참소를 들으면 사실여부 불문곡직하고 목부터 베어놓고 연후에 진부를 가려내는 수가 적지 않았다.[177] 고도 했다.

유머 연발과 농담[편집]

이승만의 측근이자 중학교 재학때 기독교청년회 영어학원에서 배웠던 허정은 이승만이 농담도 잘 하고, 장난도 잘 쳤으며 성격이 유머러스했다고 한다.

허정에 의하면 '그는 근엄하지만은 않았다. 그는 매우 유머러스한 성품이어서 학관에서는 재치 넘치는 농담으로 학생들을 잘 웃겼다. 그러나 이것은 그가 기분이 좋을 때의 일이고 화가 나면 아무도 당해내지 못했다.[220]'며 '기분이 좋을 때는 봄바람처럼 부드러운 성격이 되어 유머를 연발했다.[220]'고 한다.

고집스러운 성격과 가부장적 태도[편집]

허정은 이승만이 독립운동하기 전부터 고집스러운 태도와 가부장적인 면모를 보였다고 하였다. 일단 비위에 거슬리는 일이 있어서 고집을 부리고 화를 내면 자기 뜻을 조금이라도 굽히거나 남의 사정을 이해하려고 하지 않았다. 이때부터 그는 가부장적 카리스마의 일면이 엿보였던 것이다.[220] 허정은 이승만의 고집스러운 성격이 장점과 단점, 업적과 불행을 동시에 안겨주었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그의 유명한 고집, 이때는 확신이요 신념이었지만, 그의 고집은 우리 역사에 적지 않은 기여를 했다. 해방 후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고집한 것이며, 반공포로 석방, 일본에 대한 완강한 반대 등은 그의 고집이 아니고는 불가능한 일이었다.[220] 그의 고집의 나쁜 일면은 그에게 말년의 불운을 안겨주었다. 그가 자유당에 카리스마적 인물로 군림하지 않고, 진정한 민주 정당으로 육성하려는 배려를 아끼지 않고, 또한 합헌적인 정권 교체를 통해 평화로운 정권 교체의 선례를 남겨놓았더라면, 그는 아직도 국부(國父)로서 추앙을 받았을 것이다.[221] 그러나 통일은 내손으로 라는 결코 나무랄 수 없는 그의 고집이 결국 슬픈 결말을 초래한 것이다.[221] 허정에 의하면 평소의 이승만은 농담도 잘하고, 장난도 잘 치고, 유머도 잘 했지만 한편으로는 고집스러운 성격과 가부장적인 태도를 보였다고 한다.

장면과 조병옥에 대한 이승만의 평가[편집]

이승만은 자신이 대통령직을 내놓을 경우, 자신 대신 대통령이 될 인물로 장면조병옥을 꼽았다.[222] 그러나 이승만은 이 두 사람의 도덕성과 능력, 그리고 애국심(특히 미국에 대한 독립적인 자세)을 의심하였다. 따라서 그들에게 위태로운 상태에 놓여 있는 나라를 맡기느니 차라리 야유를 더 받더라도 스스로가 좀 더 오래 집권하면서 나라를 보위하고 그 기반을 다지는 것이 대한민국을 위해 낫다고 판단했다 한다.[222]

기타[편집]

어학 능력[편집]

그는 역대 정치인 중 영어를 가장 능통하게 구사한 인물이었다.[223] 그는 영어를 제1언어처럼 사용하였다.[224]

그는 약간의 독일어도 구사할 수 있었다. 부부 간에 서로 대화를 나누면서 오스트리아의 언어인 독일어도 어느 정도 익혔다고 한다.[224]

권위주의적인 태도[편집]

1947년 가을 당시 돈암장 신문이라고 불렸을 정도로 친이승만 신문이었던 민중일보의 사장이자 이승만박사 기념사업회 회장인 윤보선의 요청으로 서정주가 이승만의 집을 방문했을 때의 이야기이다.

무슨 자료를 찾아오라고 프란체스카에게 시켰다는데 조그마하고 가냘프고 유순한 부인은 묵묵히 명령대로 나가 꽤 오랜 뒤에 돌아와서 그게 어디에 있는지 아무리 찾아봐도 잘 나타나지 않는다고 했다. 그런 일은 어느 집에서나 가끔 있는 일로 자세히 오래 찾아야 하는 일이기 때문에 나는 다음에 와서 가져가겠다 하고, 여기를 뜨려 했다. 그러자 이 박사는 침대에서 허리를 반만 일으키고는 들어와 서 있는 프란체스카 부인을 화난 눈으로 바라보며 영어로 "겟 아웃!"하고 크게 소리치고는 나보고 거기 앉으라고 했다. 나는 그의 부인이 마치 꾸지람 들은 어린애처럼 풀이 죽어 주춤주춤 물러나가는 것을 보았다.

서정주[79]:269~270

소설가 미당 서정주는 우여곡절 끝에 이승만의 전기를 완성했다. 그래서 1949년 10월 삼팔사에서 이승만 박사전이라는 제목의 책이 나왔다. 그러나 이 책은 나오자마자 발매 금지 처분을 당했고, 내무부 치안국이 압수 명령을 내려 서점에 깔린 책들은 다 몰수되었다. 이승만은 대변인 김광섭에게 자신의 아버지 이름 밑에 경칭을 안 붙인 것을 문제삼았다. "서정주는 그래 얼마만큼이나 되는 시인인가?"하는 질문에 김광섭이 좋은 시인이라고 대답하자, 이승만은 이렇게 비판하며 말했다. "그렇지만 그 사람은 저의 집 어른도 못 모시어 봤나?"[79]:270 강준만에 의하면 서정주가 어른을 모셔 보지 못해 경칭을 생략하지는 않았다고 보았다. 그에 의하면 조지 워싱턴대 학사, 하버드대 석사, 프린스턴대 박사로서 서양 물을 40년 넘게 먹은 이승만이 서양의 전기에선 경칭을 쓰지 않는다는 것쯤은 이해할 것이라고 믿은 것뿐이었다. 서정주는 이승만이 오히려 정반대로 40년 넘게 외국을 떠돌아야 했기에 조선, 그것도 구한말 조선의 전통에 대한 집착이 더욱 강렬했다는 것을 이해하긴 어려웠을 것이라는 평을 내렸다.[79]:270

개신교 보급[편집]

대학교수이자 역사학자인 이주영은 그를 윤치호와 함께 지난 1세기 동안 한국의 역사에서 개신교와 문명 개화의 연결 고리가 가장 확실하게 드러난 대표적 인물로 평가하기도 했다.[225] 이주영은 이승만에 대해서 “이승만 전 대통령은 통치 기간에 모두 135명의 장관과 장관급 부서장을 임명했는데, 그 가운데 기독교인은 절반에 가까운 47.7%였다. 그리고 군대와 감옥에 기독교를 보급하기 위해 군목제도와 형목제도를 도입했다”고 말했다. 또 사회 전반의 미성숙으로 실패로 끝나기는 했지만, 개인의 평등을 전제로 하는 자유선거제도의 확립에도 많은 노력을 쏟았다고 덧붙였다.[225]

핵력 공학과 개발 추진[편집]

1958년 이승만은 에너지를 발전을 위해 핵력이 필요하다는 전문가의 조언을 듣고 핵력 공학과 개발을 추진한다. 그러나 핵력 공학과 개발 시도는 2년 만에 1960년 4.19 혁명으로 권좌에서 축출당하고 만다. 절반도 시공되지 못했던 핵력 공학과 개발 계획은 그대로 백지화되었다.

그러나 이승만은 북진통일을 주장했다. 하지만 휴전 이후 미국은 북방한계선을 그어 이승만의 북진을 막았다. 이승만은 미국의 개입없이 북진하려면 핵폭탄이 필요하다고 생각했고 많은 학생들을 유럽으로 유학보냈다. 하지만 일부 학생들은 이승만의 의도를 알고 독일 등에 망명하는 경우가 있었다.[출처 필요]

미국의 이승만 제거 시도[편집]

한국 전쟁 이후 이승만이 반휴전 태도를 고수하자 미국 정부는 이승만을 제거하고 유엔군사령부 주도로 새로운 정부를 수립하는 '에버레디 작전'(Operation Everready)을 수립했다.[226]

1952년 미국은 이승만을 제거하고 새로운 지도자를 수립할 계획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미국이 이승만 정부의 전복을 후원할 경우 전쟁 수행에 대한 정당성이 훼손될 것이라는 우려 때문에 미국은 이 계획을 실행할 수는 없었다.[226] 마땅한 대안자를 찾지 못하던 미국은 이승만을 유지하되 그의 주변 측근들 중 강경파를 숙청하는 방안을 추진하였다.

미국 정부는 이승만의 제거가 더 큰 혼란을 부를 수 있으며, 한국민의 민족 감정을 자극할 수 있다는 점도 무시할 수 없었다. 그렇지만 미국은 그 계획을 완전히 폐기하지는 않았다. 그 후에도 이승만이 계속 미국의 정책에 비협조적인 태도를 보일 때마다, 미국은 이승만의 제거를 고려했다.[226] 4·19 혁명 당시 이승만의 퇴진에 대해 윤치영은 '미국 사람들이 앞장서서 한 짓이나 다름이 없다.[184]'라고 증언하였다.

1950년대 말에 있어서는 한때 장면을 대안으로 세웠으나 실패의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자유당 내 온건파인 이기붕 등을 통한 자연스러운 세대교체를 추진하려 하기도 했다.

정파, 정당정치에 대한 불신[편집]

이승만은 정당 정치 자체를 파벌싸움이나 일으키는 갈등의 요인으로 해석하였다. 이승만은 정당정치를 조선시대 당파 싸움 개념의 연장선으로 이해하였다. 이승만은 한민당의 영수가 되어달라는 허정의 주장에 대해 '나는 일당 일파의 영수가 아니라 온 국민의 벗이 되고 싶다.' '지금 내가 할 일은 민족을 단합시켜 한 뜻을 갖고 일하게 하는 것이오. 지금 내가 한 정당에 소속한다면, 반드시 이루어야 할 전민족의 단합이라는 더 큰 일을 버리는 것이오.[67]'라고 답했다. 허정은 이러한 정책을 높이 평했다. 반면 이승만의 정당정치 혐오를 두고 신익희윤보선 등은 비판을 가하게 된다.

1949년 2월 민주국민당 창당 사실을 이승만에게 알리기 위해 신익희김성수경무대를 방문했다.[227] 그런데 신익희는 이승만이 창당에 대한 비판을 늘어놓자 이를 불쾌히 여긴다. 면담은 오래 걸렸고 그 날 오후에 나왔다. 나온 후 김성수는 차에 오르자 마자 벌레 씹은 우거지상을 하고 말이 없었다. 신익희는 "정당은 무엇 때문에 조직하는 건데 이 어른 정당을 조직했다고 인사온 사람보고 정권에는 도전하지 말라니..... 모든 것을 혼자서 도맡아서 두고두고 하시겠다는 말씀이야. 우리들을 아간지(兒看之), 어린아이 보듯 하시는 말씀이지.[228] 노골적으로 불쾌감을 드러내지 않았지만 신익희에 의하면 김성수 역시 정당 정치를 비판하는 그의 태도에 불쾌감을 드러냈다 한다.

윤보선은 이승만의 정당정치를 두고 민주주의 정당 정치를 부인하는 행위라며 비판한다. 윤보선은 '그이는 흉중에 무슨 생각을 품었던지 정당정치의 부당성을 주장해 오다가 6.25 사변 후 갑작스레 자유당을 만들어 정당정치를 표방하였다는 것은 우리나라 의회 정치사상 본궤도를 찾은 셈이 되었다[229] 고 주장하였다. 한편 2대 대통령 때부터 이승만은 민심이 이반되어 권위가 날로 퇴색되어가고 있었다. 그러자 이승만은 "국민 대다수를 점유하는 농민, 노동자, 근로 대중의 이익을 도모하기 위하여 신당을 조직하겠으며 직선제 개헌을 하겠다."라고 하였다.[230]

이승만이 자유당을 창당한 것을 두고도 반응은 엇갈렸다. 나중에 이승만이 친위 정당인 자유당을 결성한 것을 두고 윤보선은 당연한 정치태도라는 입장을 보인 반면 신익희는 국회의원들이 간접선거로 하면 당선이 어려우니까 재선을 위해 수를 쓴 것으로 해석하였다. 허정은 귀국 초기의 입장처럼 중립적인 시각을 보이라며 촉구하기까지 했다.

만사에 직접 개입, 결재[편집]

이원순은 이승만이 사소한 것까지 관여, 간섭하면서도 일면 사소한 것은 대강 넘겼다고 했다. 그는 정사의 세부에까지만 관여하고 있으면서도 실제로 행정부의 자세한 사무에는 초연하였고, 원칙상 기본적이고, 전체적인 정책에 주의를 집중하도록 하였다.[164]

신익희 역시 이승만이 사소한 것까지 일일이 간섭해야만 직성이 풀린다고 증언하였다. 신익희는 취임 초 그를 찾아가 그가 시시콜콜 간섭, 개입하는 것을 염려하여 "국무총리 이하 각 부 장관만 학식과 능력, 그리고 덕망 있는 사람으로 골라서 맡기시고, 그 아래는 그 사람들로 하여금 골라서 임용하도록 권리와 책임을 주십시오. 우남장께서는 이열 한 부의 장관과 네 처장만 딱 거머쥐셔서 번적 들며 줄줄이 따라 올라오고, 내려 놓으면 모두가 내려 앉습니다.[231] 라며 각 해당부서 소관 업무나 인사권한은 장관, 차관선에서 해결하라고 충고하였다. 그러나 이승만은 내가 직접 보지 않으면 다른 짓을 할지도 모른다며 응수하였다. 이승만은 "믿을 사람이 누구란 말이오"하고는 국회의장실 한 구석에 앉아 있던 여자 사무원을 가리키며 "저기 앉아 있는 사환들 까지도 내가 일일이 간섭해야 해요. 그래야 모든 일이 제대로 됩니다."라고 하였다.[231]

허정은 이승만이 소인배들의 농간 외에도 그의 판단을 흐리게 하는 또하나의 요인이 있었다. 그것은 좋게 말하면 사명감이라고도 할 수 있는 집념 또는 아집이었다.[232] 허정에 의하면 '우남은 자기 손으로, 그리고 자기만이 한국을 훌륭한 민주국가로 키울 수 있고 분단된 조국을 통일할 수 있다고 확신했다. 이것은 스스로 설정한 정치적 목표였고 스스로 내세운 사명이었다. 그는 대통령직에서 물러나게 될 때까지 이 사명을 수행하는 길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않았다고 믿었을 것이다. 그에 대한 국민의 절대적 신뢰를 의심하지 않게 되었을 때, 그는 국민의 이러한 신뢰는 그의 정치적 사명에 대한 국민의 정치적 동의라고 생각했을 것이다.[232]'라고 보기도 했다. 만사에 일일이 개입하는 업무 스타일을 그의 최측근 이외의 부하직원들은 피곤하게 여겼고, 이기붕 일파와 자유당은 이승만에게 소와 말까지 동원해가며 국민이 재출마를 희망한다(우의마의)며 그를 속이기도 했다.

군 견제 정책[편집]

한국 전쟁 이후 급격하게 성장한 국군 세력을 이승만은 경계했다.

1954년 5월 정일권 참모총장이 그와 친밀한 사이에 있던 공국진을 육군 헌병사령관으로 임명하여 군내 부패의 척결과 수사기관 사이의 갈등 해결 등을 주요 과제로 지시[233] 했다. 공국진은 이 과제들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직무한계를 자의로 무시하는 김창룡 특무대장과 잦은 갈등을 빚게 되었고, 김창룡은 이 과정에서 공국진이 탄피를 일본에 밀수출하려 하였다는 혐의를 씌워 해임을 기도했다. 소위 경무대 유시를 근거로 하는 김창룡의 공세 앞에 정일권 참모총장도 역부족으로 그가 임명한 헌병사령관의 해임을 명할 수 밖에 없게 되었다.[233]

이후 공국진이 강문봉이 군단장으로 있는 2군의 참모장으로 발령되는 것도 김창룡의 방해로 무산되었고, 이 과정에서 김창룡은 참모총장 정일권의 명령을 정면으로 무시하고 공국진의 보좌관을 체포, 연행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은 김창룡의 월권행위에 분노한 정일권과 강문봉은 1955년 10월 진해에 머물고 있던 이승만에게 직접 찾아가 김창룡의 전근 내지는 유학을 건의하기도 했다.[234]

그러나 이승만은 이들의 건의를 수용하지 않음으로써 김창룡에 대한 신뢰를 재확인하였다. 김창룡은 정일권과 강문봉의 비리에 대한 집중 수사로 이에 대응하였고, 이는 정일권과 강문봉의 김창룡 암살음모와 교사 라는 극단적인 대응으로 이어졌다.[234] 이 과정에서 주목할 것은 이승만은 김창룡에게 정일권의 비리를 수사하게 했고, 정일권에게는 역으로 김창룡의 비리를 수사하라는 밀지를 내렸다는 것이다.[234]

군인들의 쿠데타 기도를 두려워하던 이승만은 국군 내 일본군 파벌, 만주군 파벌, 광복군 파벌 간의 헤게모니 쟁탈 갈등을 알고도 묵인했다.

1940년대의 설문조사[편집]

1957년도 1,000환에서의 이승만

1945년 10월 10일부터 11월 9일까지 선구회(先驅會)라는 단체에서 가장 뛰어난 지도자를 지목하는 설문조사 결과에 9%가 이승만을 지목하였다.[13]:226~228 그 뒤 11월 선구회에서 다시 대통령에 적합한 인물을 설문조사했을 때는 1957명 중 431명이 이승만을 선택하여 1위로 집계되었다.[13]:226~228 한편 최고의 혁명가를 꼽는 설문에서는 978명 중 176표를 얻어 2위였다.[13]:226~228 1946년 7월 조선 여론협회가 서울에서 누가 초대대통령에 적합한가를 조사한 설문결과에는 1961표로 전체의 29%를 확보했다 한다.[13]:226~228 1947년 1월, 이승만 지지단체인 '한국애국부인회'가 이승만과 여운형 두 사람에 대한 모의투표를 실시했는데, 여기서 결과는 1000표(이승만) 대 900표(여운형)로 근소한 차이를 나타냈다.[235][236] 1948년 6월 23일 조선여론협회에서 다시 조사한 결과(누가 초대대통령이 되기를 바라는가?)에서는 1024표로 1위를 하였다.[13]:226~228

각종 의혹[편집]

독재자가 아니라는 견해[편집]

그가 독재자라는 견해에 대해 독재자는 아니라는 설이 있다. 그에 의하면 이승만은 권위주의적이고 독선적이기는 했지만 독재자는 아니라는 주장이다. 그 근거로 4.19에 대한 책임을 지고 스스로 물러났다는 점을 근거로 든다. 허정은 이승만의 성격을 알기에 그가 독재자가 되려고 마음먹었다면 얼마나 잔인하고 혹독하게 탄압했을 지 모른다고 했다. 허정은 '우남의 성격을 잘 알고 있는 나로서는, 만일 그가 스스로 독재자의 길을 택했다면 얼마나 철저했을 것인가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기 때문에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232]

허정에 의하면 '우리가 독재라고 부르는 그의 행동이 얼마나 엉성하고, 어설프고, 불철저했던가. 만일 그가 스스로 독재자가 되려고 결심했다면 그는 이렇게 불철저한 행동을 하지 않았으리라고 믿는다. 독재자는 우남과는 다른 유형임을 이제 국민들은 이해해야 할 것이다. 심신이 쇠약한 노령에 이르러 행정수반으로서의 과오와 실정을 저지른 바 없지 않았지만 그가 평소에 쌓은 공적과 대비하면 문제가 되지 않는다[232]'고 주장하였다.

윤치영은 이승만이 평소 '부정과 부패를 싫어하고 자유민주주의적 공명선거를 믿고 있었다며[237] 이승만 몰래 자유당 측근들이 부정을 저지른 사실이 사후에 다른 사람에 의해 보고되자 깜짝 놀라, 그렇다면 학생과 국민이 일어선다는 것은 당연하다고 하며 자진해서 하야한 이박사[237] 였다고 주장했다. 윤치영은 진상이 드러나자 '드디어 이승만은 4월 27일 행동으로 당신의 뜻을 보여주었다.[166]'라며 이승만이 독재자가 아니라고 하였다.

이원순은 '학생들의 의거가 한창일 때 그는 대통령 직위를 미련 없이 버렸다. 이런 것을 보면 그는 별로 명예욕이 강한 인물은 아닌 것 같이도 생각된다.[164] 라고 평하였다.

독립운동 할 때의 마인드[편집]

이승만이 독립운동 할 때의 사고방식을 버리지 못했다는 시각도 있다. 신익희는 이승만이 독립운동 할 당시의 주먹구구식 계산으로 정치를 한다고 했다. 1948년 7월 20일 초대 대통령 선거에 당선되었다. 이승만의 대통령 당선 직후 처음 방문한 신익희는 "우남께서는 을미사변, 을사늑약, 경술합방을 겪으시면서 해내, 해외에서 영토토 국민도 없이 유한한 몇몇 독립운동 동지들과 함께 독립운동하시느라 어렵고 위험한 형극의 길을 50여 기나긴 성상을 걷다가 반쪽일 망정 영토, 국민, 주권의 세 요소를 갖춘완전한 독립국가의 대통령이 되셨으니 그 감개무량함이 남달리 여타유별한 바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천만 가지 모두가 청황이 부접하고요, 얼얼이 미정한 때에 깊은 근심과 짙은 걱정이 전보다 몇 배 더하실 것입니다. 하와이에서, 상해에서, 미 본토에서 독립운동하시던 그 때와는 판이하게 아주 다릅니다.[238]"라며 "국무총리 이하 각 부 장관만 학식과 능력, 그리고 덕망 있는 사람으로 골라서 맡기시고, 그 아래는 그 사람들로 하여금 골라서 임용하도록 권리와 책임을 주십시오. 우남장께서는 이열 한 부의 장관과 네 처장만 딱 거머쥐셔서 번적 들며 줄줄이 따라 올라오고, 내려 놓으면 모두가 내려 앉습니다. 이렇게 하셔야지 만일 그렇지 않고 만기(萬機)를 일일이 친자(親自) 총괄하시려고 하면 어렵습니다. 아무리 기억력 좋고 영리한 사람이라도 사람의 능력은 한계가 있습니다. 더구나 우남장께서는 지금 나이가 연만하신 터수에 어려우시니 그렇게 하도록 하십시오.[231] 라고 진언하였다.

그러나 끝까지 조용하게 듣고 있던 이승만은 신익희의 건의가 끝나자 벌떡 일어서 방안을 빙빙 돌면서 손을 입에 갖다 대고는 훅훅 불면서 "안 돼요, 믿을 사람이 누구란 말이오"하고는 국회의장실 한 구석에 앉아 있던 여자 사무원을 가리키며 "저기 앉아 있는 사환들 까지도 내가 일일이 간섭해야 해요. 그래야 모든 일이 제대로 됩니다. 해공은 모르시는 말씀이야."라고 하였다.[231] 신익희는 "우남 대통령 저 어른 큰일났다. 아직도 하와이의 사탕수수 밭에서 노무자로 이민간 무식한 교포들과 비서 몇 사람 데리고 일하시던 그 테두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계시니, 앞으로 정형(情形)은 어려워 질 것 같구나"라고 하였다.[231] 신익희는 그가 독립운동 할 당시의 마인드를 버리지 못했다고 하였다.

측근들의 부패와 오도[편집]

측근들이 그의 눈과 귀를 가렸다는 설도 있다. 이승만이 돈암장, 이화장에 있을 때부터 비서관이며 그의 비서실장을 지낸 윤치영이기붕의 수하들이 눈과 귀를 가리고 이박사를 속였다고 진술했다. 윤치영은 '가슴아픈 것은 면종복배판 측근들에 대한 이박사의 심정이었다.[166]'는 것이다.

윤치영은 내무장관 최인규와 자유당 간부들이 부정선거를 획책했다고 하였다. 윤치영에 의하면 '선거전이 종반으로 접어들면서 내무장관 최인규가 진두지휘하는 행정부의 부정선거 음모는 자유당 수뇌들과 미리 짜여진 각본에 따라 실상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행정관서와 경찰이 청중을 강제동원하는 전국 유세가 2월 27일 대구에 이르러 수성천변에는 역사상 초유의 군중이 자유당 집계로도 30만에 달하였다.[239]'며 1960년 2월 28일 대구 시내에는 경북고등학교 학생들을 일요일임에도 불구하고 민주당 장면 후보의 집회를 방해할 목적으로 등교케 했다. '최인규가 각급 행정관서와 경찰, 그리고 지방선거관리위원회에 내린 비밀지령은 이기붕 후보를 필사적으로 당선시키려고 무리를 담고 있었다'며 윤치영은 '이러한 부정선거운동의 양상을 보며 더군다나 장막에 둘러싸여 아무것도 모른 채 당신의 평소의 소신과 철학대로 민주주의적인 절차가 잘 진행되고 있으려니 하고 믿고 있을 이승만 박사의 처지가 가엾고 통분할 노릇이었다.[239]'고 했다. 윤치영은 노쇠한 이승만 대통령의 여생을 점치던 정상배와 협잡꾼들과 같은 기회주의자마저 끼어들어 벌써부터 논공행상에 여념이 없는 작태들을 노정시키고 있었다[240] 허정 역시 이승만이 소인배들의 농간에 희생되었다[232] 고 하였다.

장면은 이승만 측근들이 장기집권을 위해 부정부패를 저질렀다고 비판하기도 했다. 장기집권은 이승만의 뜻이 아니라 그 부하들의 농간이었다는 것이다. '그 분을 장기집권 시키기 위한 자유당 정권이 저지른 중석불 사건, 원면 사건, 연계 자금 사건, 산업 금융 채권 사건 등 추잡한 사건이 연달아 일어나 국민의 불신을 사게 되었다[241] 는 것이다.

한편 이승만은 인의 장막에 가려져 있음을 은연중에 인식했다고 한다. 윤치영에 의하면 1958년 이승만을 찾아갔을 때 '당신의 불편한 심정을 토로하는 가운데 뭔가를 암시하는 듯 '철창에 갇힌 호랑이'에 비유해서 혼잣말처럼 독백하시던 일로 미루어 나로서는 여러 가지 짐작되는 바가 있었다.[239]'며 이승만이 뒤늦게 자신이 부하들의 농간에 놀아남을 인식하고 있었던 것 같다고 증언하기도 했다.

이승만 우상화 논란[편집]

49년 3월 26일 중앙청 광장에서 이승만의 생일을 기념하기 위해 9시에 기념식이 열렸고 집집마다 태극기를 걸었다. 54년 9월 18일 교통부 광장에서 '철도창설 55주년 기념 이승만 대통령 흉상 제막식'이 열렸다. 56년 3월 31일 서울 탑골 공원에 이승만 동상이 설치되었다. 이승만의 80회 생일을 기념하기 위해 24m 높이의 동상이 제작되었다. 56년 8월 15일 이 동상의 제막식에서 이승만에 대한 만세 삼창이 이루어지고 서울 하늘에서는 축하 불꽃 놀이가 벌어졌다. 하지만 이 동상은 4.19혁명 이후 국무회의 의결을 거쳐 철거되었다. 59년 10월 이승만의 얼굴을 넣은 100환 동전등 이승만을 소재로한 화폐 8종이 발행되었다. 서울 뚝섬의 '우남송덕관', '우민회관', '우남정'등 이승만의 호 '우남'이 들어가는 건물이 건축되었다. 부산 용두산 공원은 '우남공원'으로 명칭이 변경되고 중앙대 도서관도 '우남도서관'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이승만 하야 이후 이러한 기념물,건물등은 철거되거나 명칭이 변경되었다.[242]

2010년 한기총 나라사랑운동본부은 서울 연지동 한국기독교연합회관에서 ‘이승만 건국대통령 동상 건립 소위원회’ 출범 기자회견을 갖고 “자유민주주의공화국의 정체성을 세우고 미국과 손잡고 태평양 기독교문화권을 형성한 우남에 대해 올바로 평가하고 그의 업적을 기념하는 사업을 펼치는 게 당연하다”고 밝혔다. 운동본부는 성명을 통해 대한민국 건국 정신과 정통성 회복을 위해 이 대통령 기념사업과 동상 건립, 건국기념일 제정에 정부가 앞장서 줄 것을 촉구했다. 아울러 한국교회에는 동상 건립 모금운동과 서명운동에 적극 동참해 줄 것을 호소했다.[243]

미국의 이승만 제거 음모설[편집]

3.15 부정선거 자체를 이승만을 제거하기 위한 미국의 계략이라는 주장도 있다. 윤치영은 이박사의 빛나는 독립투쟁의 업적을 이 기회에 일거에 실추시키고 어부지리를 얻으려 하고 있다는 모측의 계획된 공작[244] 이라고 의혹을 제기하기도 했다.

윤치영미국 국무성의 음모가 개입되어 있었다는 의혹을 제기하기도 했다. 3.15 부정선거 규탄 데모로부터 변질되어 이승만 박사를 기꺼이 하야하도록 만든 일관된 계략이 있었다[237] 고 의혹을 제기하였다. 윤치영은 '미 국무성의 이승만 제거작전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나 안다고 해도 지금에 와서 그 진상을 자세히 밝힌다는 것은 쉽고도 어려운 일이 아닌가 싶다.[237]'며 의혹을 제기했다. 윤치영은 1950년대부터 미국이 이승만을 제거하려고 공작을 하고 있었다고 주장했다.

국민회 자금 유용 의혹[편집]

박용만과의 갈등 중 하와이 대한인 국민회 활동에서 자금을 유용했다는 의혹을 끊임없이 받기도 했다.

이승만은 하와이에 온 초기부터 하와이 실력자이면서 군사양성에 열중하는 박용만을 맹렬하게 비난했고, 박용만 반대세력을 규합했다. 이승만은 대한인 국민회의 운영권 곧 회비관리권을 움켜쥐려고 온갖 공작을 벌였으나 쉽게 실현되지 않았다. 박용만은 다른 농장으로 군영을 옮겨가면서 군사훈련을 거듭했으나 두 사람의 대립은 그칠 줄 몰랐다.[245]

1910년대 중반 무렵 일제는 밀정을 통해 박용만의 군사훈련 사실을 캐냈다. 주미 일본 대사관에서는 미 국무장관에게 이를 항의했고 국무장관은 하와이 총독에게 그 실정을 알아보게 했다. 1918년 박용만이 살인미수 혐의로 재판을 받자, 이승만은 다음과 같이 증언을 했다.[245]

그는 미국 영토에 조선국민군단을 설립하고 배일활동을 하면서 일본군함 출운호가 호놀룰루에 도착하면 파괴하려고 음모를 꾸미고 있다. 이는 미국과 일본 사이에 중대사건을 일으켜 평화를 방해하려는 짓이다.[245]

박용만은 온갖 음모에 시달리면서 주도권을 잃어갔다. 이승만은 자금횡령 혐의로 대한인 국민회 간부들을 고소했고, 국민회 간부들은 법정에서 고통을 받아야 했다. 서로 벌인 소송사건이 열 차례나 있었다. 국민회와 이승만파(동지회)가 서로 테러를 가하기도 하고 국민회 대포회의때 총격이 가해지는 일도 벌어졌다. 이런 분쟁 속에서 마침내 국민회 주도권이 이승만의 손아귀에 들어갔다. 분쟁이 야기되는 속에서도 독립기부금은 잘 걷혀 1915년 1,523달러에서 해마다 늘어나 1918년도에는 3,775달러를 기록했다.[245]

대한인 국민회 계열 재미 한국인들은 이승만을 두고 '협잡배'라 매도했고 돈을 너무 밝힌다고 비난을 가하기도 했다고 한다.[245]

이후에도 이승만과 국민회가 독립자금 문제로 분란을 겪어 끊임없이 의혹을 받고 있다.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발족되자 국내외에 걸쳐 많은 독립자금이 들어왔는데, 1919년 미주의 국민회에서 임시정부에 송금한 내역을 보면 공식적으로 36,000달러였다고 한다. 다음 해 이승만도 많은 돈을 가지고 상하이로 왔는데, 1920년도에는 미주에서 200만 달러를 모금했는데, 이는 오늘날 가치로 보면 2억 달러가 된다.[246]

이승만이 구미위원부를 발족한 뒤, 미주 동포들이 낸 독립자금은 구미위원부에서만 사용하고 임시정부로 보내주지 않았다. 그리고 독립자금 모금을 두고 다시 주도권 분쟁이 야기되기도 하였다.[246]

박용만, 안창호 계열의 비판[편집]

박용만 계열 인사들은 이승만이 교포사회에서 잔악한 위험인물" 이라는걸 서슴없이 증언하고 있다.[주해 5][247]

'재미한인 50년사'를 저술한 김원용에 의하면 '이승만은 미주 한인사회에서 파쟁과 모함과 비난과 재판으로 세월을 보내다가 마침내 대한인 국민회와 별도로 자기를 지지하는 '동지회'라는 단체를 따로 조직해서 국민회와 적대관계를 지속하여 한인사회를 분열시켰다.'고 비판하였다.[248]

1983년부터 하와이 이민 1세대 중 장금환의 딸 로베르타 장은 지금 살고 있는 하와이 이민 1세대를 상대로 인터뷰를 하였는데, 하와이 이민 1세대들의 증언에 따르면, 이승만을 부정적 시각으로 증오하는 사람들과 긍정적으로 보는사람들 등등 각각 서로 반반씩 존재했었다. 이승만에 부정적 시각가진 이들은 대한인 국민회 철폐한것과, 자신의 부모를 죽이려고 든 기억이 있었다고 증언한다.[249]

가정 생활[편집]

독립협회 활동과 수감, 미국 활동 등으로 아내와 친밀감을 가질 사이가 없었던 그는, 첫 아들인 이태산(이봉수)이 사망하면서 아내 박씨와 이혼하게 된다. 박씨부인과 이혼 후 오랫동안 혼자 살았으며 여자를 가까이 하지 않았다. 1930년 미국 워싱턴에서 이승만은 독립운동가 겸 교육자인 임영신에게 청혼을 하였으나 거절당하였다. 1931년 이승만은 자신의 측근이며 임영신의 기전학교 은사인 이순길을 통해 임영신에게 청혼할 뜻을 밝혔으나 거절당하였다. 아내가 될 것인가 동지로 남을 것인가를 고민하던 임영신은 단독으로 이승만을 만나 거절하였다.[250]

"아마 이 밤이 박사님을 뵈옵는 마지막이 될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우리나라가 독립이 되는 그날까지 누구와도 결혼하지 않고 혼자 살 생각입니다...(이하 생략)...저는 이미 독립운동과 결혼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앞으로 선생님 곁을 떠나서나, 선생님 곁에 있을 때나 언제든지 동지가 되어 드리겠습니다.[250]"

이승만은 실망하였으나 임영신을 측근으로서 신뢰하였고, 임영신은 그의 가깝고 충실한 측근이 되었으며 자신의 호를 이승만의 이름에서 따 승당(承堂)이라 짓기도 했다.

1945년 10월 16일 이승만은 홀로 귀국했다. 33년 만에 고국에 돌아온 이 박사는 돈암장에 거주했다. 이때 윤치영의 부인 이은혜대한여자국민당의 당수였던 임영신 등이 돈암장을 자주 드나들며 그를 도왔다.[251] 당시 이 박사는 71세, 임씨는 47세였는데, 두 사람이 불륜관계라는 소문이 사람들 입에 오르내렸고, 이 소문은 이 박사가 미국에서 독립운동을 하면서 미국 캘리포니아대에 유학 중이던 임씨에게 청혼했다가 거절당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확대 재생산됐다.[251] 남편에게서 한국에 들어오라는 전갈이 있기를 손꼽아 기다리던 프란체스카 도너에게 먼저 날아든 소식은 이 박사와 임씨의 관계에 대한 낯 뜨거운 소문이었다. 소식을 접한 그는 대로(大怒)했고 한국행을 서둘렀다. 귀국 후 그가 가장 먼저 한 일은 남편과 임씨를 떼놓은 것이었다.[251] 이승만이 돈암장에서 이주한 후 마포장에 머무를 무렵, 김구 외에 임영신윤치영만이 마포장을 통제받지 않고 출입하였다. 이때 이승만이 임영신과 동침한다는 루머가 나돌기도 했다. 프란체스카 도너임영신마포장에 출입금지 시켰다.

김구의 이승만 암살 미수 의혹[편집]

장덕수 사건 이후 사이가 틀어진 김구가 이승만의 암살을 시도하려 했다는 의혹도 제기되고 있다. 안두희 공판기에 의하면 김학규는 홍종만을 통해 안두희를 알게 되었다고 하며 김학규와 만나기 전부터 홍종만을 통하여 한독당에 입당할 것을 이야기하여 3, 4월경에 입당 절차를 밟았으며, 비서를 통하여 당원증을 내주게 했다고 하며 안두희가 한국독립당에서 활동한 일은 없다고 한다. 김학규는 안두희와 만났을 적마다 대한민국에 대한 불평을 말하였으며, 때때로는 듣기에도 위험한 이야기까지 하고, 또 김구 자신의 증명서까지 얻어달라고 말하여 왔다며 김학규는 그 후로 홍종만을 통해 찾아주지 말기를 요구하며 김구의 암살 약 1달 전부터 한 번도 만난 일이 없다고 말했다. 또한 김학규한국독립당에서 비밀당원증이란 것이 없다고 했다.[252]

그런데 진술과는 달리 김구가 경교장에서 암살되던 날 김학규경교장에 모인 한 측근에게 혈서를 하나 보여주었다.

사건 직후 경교장에서 보좌진을 부른 김학규는 자신이 소지하던 손수건 두 장 크기의 하얀 천을 한장 보였다. 천에는 "나는 미국제국주의의 주구 이승만을 타도한다"는 혈서가 쓰여 있었다.[253] 보좌진들이 누가 쓴 것이냐 라고 붇자 김학규는 "안두희가 백범 선생 앞에서 쓴 것"이라며 믿었던 안두희에게 배신을 당했다는 사실을 분해하며 부르르 떨었다.[253]

이 사건 직후 김학규안두희의 혈서를 그대로 불에 태웠다.[253] 그러나 김학규안두희김구에게 소개해서 이승만 암살을 도우려 했다는 정보는 이미 유출된 뒤였다.

친일 논란[편집]

1918년 징집서류에 이승만 본인의 국적을 'Japan'으로 자필서명한 사실이 미국 국가기록원과 고문서보관 사이트 엔시스트리닷컴 이 공개한 자료에 의해 드러났다.[254] 더욱이 동시대 미주한인 대부분의 징집카드 국적란에 'Korea'로 표기되어 있던 것으로 드러나 그의 기회주의적 면모에 대한 비판이 일었다.[255]

수상 경력[편집]

학력[편집]

명예 박사 학위[편집]

가계[편집]

첫 배우자 박씨에게서 얻은 아들 이봉수를 잃은 뒤, 이기붕의 장남 이강석을 양자로 삼았다. 그러나 이강석이 사망한 뒤 대원군의 5대손인 이청이 양자 후보로 낙전되었다. 그러나 이승만은 "왕정복고를 연상시킨다"며 양자 입적을 중지시킨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박씨는 이승만이 미국으로 떠난 뒤 고아원에서 아들 하나를 양자로 들여 은수(恩秀)라고 하였다. 그러나 1949년까지도 은수가 호적상 그의 양자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 뒤 이승만의 양자는 같은 항렬의 친족인 이승용의 아들 이인수를 양자로 들이게 됐다.

  • 고조부 : 이최권(李最權, 1756년 ~ 1808년, 진사[256])
  • 증조부 : 이황(李璜, 1784년 ~ 1845년)
  • 증조모 : 남양홍씨, 현감 홍치복(洪致復)의 딸
  • 할아버지 : 이창록(李昌祿, 1811년 ~ 1862년)
  • 할머니 : 밀양박씨(1817년 ~ 1849년) - 박동욱(朴東郁)의 딸
    • 고모 : 전주이씨
    • 고모부 : 김재석(金載錫, 본관은 김해)
    • 고모 : 전주이씨
    • 고모부 : 한필수(韓必洙, 본관은 청주)
    • 고모 : 전주이씨
    • 고모부 : 오인모(吳仁模, 본관은 해주)
  • 할머니 : 고령신씨(高靈申氏), 신흥우에 의하면 고령신씨가 이승만의 아버지 이경선의 생모라 한다.
  • 할머니(계모) : 제주고씨(1833년 ~ ?) - 통정대부 고인관(高仁寬)의 딸
  • 아버지 : 이경선(李敬善) (1839년 6월 12일 ~ 1913년 12월 5일)
  • 어머니 : 김해김씨(1840년 2월 20일 ~ 1916년 7월 15일), 김창은(金昌殷)의 딸
    • 형 : 2명 요절
    • 누이 : 이태명, 황해도 해주의 우씨에게 출가
    • 매부 : 우태명(禹泰命, 본관은 단양)
    • 누이 : 전주이씨, 황해도 연백의 심씨에게 출가
    • 매부 : 심원붕(沈遠鵬, 본관은 청송)
  • 배우자 : 박승선(朴承善, 1875년 6월 9일 ~ ?), 1891년 결혼, 그 뒤 이혼)
  • 배우자 : 프란체스카 도너 (1900년 ~ 1992년 3월 19일, 한국명 이부란)
  • 외조부 : 김창은(金昌殷, 본관은 김해)
  • 진외증조부 : 박동욱(朴東郁, 본관은 밀양)
  • 장인 : 박춘겸(朴春兼, 본관은 음죽), 박승선의 아버지
  • 장인 : 루돌프 도너 - 프란체스카 도너의 아버지
  • 장모 : 프란체스카 게르바르트 - 프란체스카 도너의 어머니

저서[편집]

신체시 효시는 이승만의 '고목가'라는 주장이 있는데 이승만이 1896년 《협성회보(協成會報)》에 <고목가(枯木歌)>라는 신체시를 발표하였다는 설이다.[257]

또한 이승만은 옥중에서 쓴 독립정신(옥중기)와 일본의 침략 야욕을 폭로한 일본 내막기 등을 썼다. 그밖에 시집도 냈는데 옥중에서 쓴 시들의 모음집인 체역집 등이 있다. 체역집이라는 시집은 그가 고종 황제의 수구정책을 비판한 혐의 등으로 1899년 대한제국 정부에 의해 체포, 구금돼 5년 7개월간 한성감옥에서 옥살이를 할 때 지은 한시(漢詩)들을 모은 것이다.[258]

시집[편집]

  • 《이승만 한시선》
  • 《체역집》

작품[편집]

기타[편집]

양녕대군의 다섯째 서자인 장평도정 가문에서도 이승만은 한참 방계에 속하였다. 14대조 부림령 이순(1489 - 1540) 역시 장평도정의 적자가 아니라 서자였고, 12대조 이충의는 셋째 아들, 11대조 전풍군 이원약이 둘째 아들이었으며, 6대조 이징하는 둘째 아들, 5대조 이환은 셋째 아들이었다.

서재필배재학당독립협회, 협성회를 통해 이승만을 지도하였으나 해방정국에서 그는 이승만의 정적으로 변신했다. 이상재는 독립협회와 YMCA에서 그의 활동을 도왔고, 옥중에 있을 때는 이승만이 준 성경을 보고 기독교로 개종했다. 이상재는 이승만이 미국으로 건너간 뒤에는 이승만의 미국 유학비와 생활비를 지원, 후원하였다.

가난한 한인 고학생들이 찾아오면 찾아가서 끼니와 차비와 숙박비도 지불해주었고, 학생들의 학비까지 직접 건네주기도 했다.[260]

1957년 3월 21일 82회 생일을 맞아 우남장학회를 발족하였다. 또한 열녀상(賞)을 부활시켜서 매년 열녀상을 수여하기도 했다.

1958년 11월 5일에는 베트남을 방문, 베트남전 참전 의사를 발표했다.[261] 파병은 1964년에 가서야 첫 파병군이 지원된다.

취향[편집]

그는 술도 담배도 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금욕주의자는 아니었다. 그는 굉장히 대단한 미식가였고, 독서가였고, 재담을 즐기고 낚시, 테니스, 정원 손질, 개를 데리고 산책하기, 서도 등을 즐겼다.[164] 그는 많은 책을 독서하기를 좋아했다.

시 짓기도 좋아해서 애국충정에 넘치는 한시를 많이 지었다. 또 한시들 중에는 소, 벼룩, 모기, 빈대, 쥐, 파리, 누에 등을 주제로 하여 읊은 것들도 있다.[164]

문화에 나타난 이승만[편집]

화폐 속의 이승만[편집]

1959년에 만들어진 백 동전에 이승만이 그려져 있다.

옛날에 사용하던 환화에 그려진 이승만 대통령의 초상도[262] 처음 발행된 1953년에는 한복을 입은 모습으로 그려졌으나, 1957년에 발행된 새 환화의 이승만 대통령의 초상에 있던 한복양복으로 바뀌었다가 1962년에 들어서 돈에서 이승만의 초상을 볼 수 없게 되었다.[263][264]

작품 속의 이승만[편집]

  • 영화 《독립협회와 청년 이승만》 (1959년, 신상옥 감독)
  • 《TBC백서:이승만 특집방송》 (1967년) - TBC 방송
  • 《건국비화:특집방송》- 1968년, TBC 방송
  • 잘돼갑니다. - 동아방송

이승만을 연기한 배우들[편집]

텔레비전 드라마[편집]

라디오 드라마[편집]

영화[편집]

연극[편집]


관련 서적[편집]

  • 공보처, 《대통령 이승만박사 담화집 1, 2》(공보처, 1953)
  • 이원순, 《인간 이승만》 (신태양사, 1995)
  • 서정주, 《우남이승만전》 (화산문화기획, 1995)
  • 이승만, 《일본 그 가면의 실체》(대한언론인회, 2007)
  • 이종구, 《이승만(건국 대통령)》 (글벗사, 2005)
  • 로버트 올리버, 황정일 옮김, 《이승만 - 신화에 가린 인물》 (건국대학교출판부, 2002. 3)
  • 로버트 올리버, 《이승만 없었다면 대한민국 없다 (역사의 진실은 오늘을 가르치는 철학이다 나라세우기 X파일)》(박일영 역, 동서문화, 2008)
  • 유영익, 《이승만과 대한민국 임시정부:현대한국학연구소 학술총서 13》 (연세대학교출판부, 2009)
  • 김제방, 《이승만과 김구의 대좌》 (한솜, 2005년)
  • 고정휴, 《이승만과 한국독립운동》(연세대학교출판부, 2004)
  • 황정일 역, <이승만 : 신화에 가려진 인물> (건국대학교출판부, 2002).
  • 이현희,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 석오 이동녕과 백범 김구》 (동방도서, 2002)
  • 이승만, 《이승만의 전시중립론(미국의 영향을 받은 중립)》(정인섭 역, 나남출판, 2000)
  • 이승만, 《이승만 한시선- 이승만 연구 총서》(이수웅 역, 배재대학교출판부, 2007)
  • 이한우, 《우남 이승만, 대한민국을 세우다》 (출판사 해냄, 2008)
  • 정병준, 《우남 이승만 연구- 역비한국학연구총서》(역사비평사, 2005)
  • 이정식, 《이승만의 구한말 개혁운동》 (배재대학교, 2005)
  • 유영익, 《이승만과 대한민국임시정부(현대한국학연구소 학술총서 13)》(연세대학교출판부, 2009)
  • 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1940년대편 1권〉(인물과사상사, 2006)
  • 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1940년대편 2권〉(인물과사상사, 2006)
  • 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1950년대편 1권〉(인물과사상사, 2006)
  • 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1950년대편 2권〉(인물과사상사, 2006)
  • 정치 외교 사학회 편, 한국현대정치사 (집문당, 1997)
  • 김학준, 《해방공간의 주역들》(동아일보사, 1996)
  • 김영명, 《한국 현대 정치사: 정치 변동의 역학》 (을유문화사, 1992)
  • 김태일, 한배호 편, 《한국 현대 정치론 I》, (나남, 1990)
  • 한용원, 한배호 편, 《한국 현대 정치론 II》, (오름, 1996)
  • 최종만, 《한국의 정당 정치와 민주주의》 (웅비출판사, 1991)
  • 올리버, 《대한민국 건국의 비화-이승만과 한미 관계》(올리버 저, 박일영 역, 계명사, 1990)
  • 양동안, 《대한민국 건국사》 (이승만박사기념사업회, 1998)
  • 이현희, 《한민족광복투쟁사》 (정음문화사, 1989)
  • 정규상, 《우남이승만박사한시선집》(정규상 편역, 동성미술출판사, 1982)
  • 박태균, 《한국전쟁》 (책과함께, 2005년) 40, 42쪽.
  • 로버트 올리버, 《이승만 없었다면 대한민국 없다- 나라세우기 X파일》(박일영 옮김, 동서문화사, 2008)
  • 서중석, 《이승만의 정치 이데올로기》 (역사비평사, 2005)
  • 유영익, 《이승만 대통령 재평가(연세대학교 현대한국학연구소 학술총서 10)》(연세대학교 출판부, 2006)
  • 유영익, 《이승만 연구(연세대학교 현대한국학연구소 학술총서 2)》(유영익 편, 연세대학교 출판부, 2000)
  • 이달순, 《이승만 정치 연구》 (수원대학교출판부, 2000)
  • 이주영, 《우남 이승만 그는 누구인가》(출판사 김&정 펴냄, 2008)
  • 월간조선, 《이승만, 박정희를 추억한다》(월간조선편집부, 월간조선사, 2004)
  • 이승만, 《풀어쓴독립정신》(이승만, 김충선 외 역, 청미디어, 2008)
  • 이현희, 《3·1독립운동과 임시정부의 법통성》 (동방도서, 1987)
  • 이현희, 《대한민국임시정부사》 (집문당, 1982)
  • 양우종, 《이대통령투쟁사》(연합신문사, 1949)
  • 이승만, 《일민주의 개설》(일민주의보급회, 1949)
  • 김인서, 《망명노인 이승만박사를 변호함 (亡命老人 李承晩博士를 辯護함)》(독학협회출판사, 1963)
  • 허정, 《위대한 한국인 제11권 이승만 편》(휘문출판사, 1976년)
  • 이현희, 《이야기 인물한국사(2005)》 (이현희, 청아출판사, 2007)
  • 정용욱, 《존 하지와 미군 점령통치 3년》 (중심, 2003)
  • 리처드 알렌, 《한국과 이승만》 (알렌, 윤대균 역, 합동통신사, 1961)
  • 최태응, 《사실소설 슬픔과 고난은 가는 곳마다-청년 이승만》 (성봉각, 1960)
  • 홍우출판사, 정계야화 (전2권) (홍우출판사, 1966)
  • 한국사학회, 한국현대인물론 1,2(을유문화사, 1987)
  • 채근식, 《무장독립운동사》(대한민국공보처, 1949)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독립운동사 1∼5》 (국사편찬위원회, 1965∼1970)
  • 국가보훈처, 《대한민국독립유공자인물록》 (국가보훈처, 1992)
  • 이승만, 《뭉치면 살고》 (조선일보사, 1995)
  • 리승만박사투쟁사간행회, 《민족의 거성》 (문성당, 1957)
  • 재상해일본총영사관 경찰부 제2과 편, 《조선민족운동연감》 (東文社書店, 1946)
  • 한영우, 《다시찾는 우리역사》(경세원, 2005)

같이 보기[편집]

역대 선거 결과[편집]

선거명직책명대수정당득표율득표수결과당락
제1대 총선국회의원(동대문구)1대무소속-무투표-동대문구 국회의원 당선
제1대 대통령 선거대통령1대대한독립
촉성국민회
91.8%180표1위대한민국 제 1대 대통령 당선
제2대 대통령 선거대통령2대자유당 74.6%5,238,769표1위대한민국 제 2대 대통령 당선
제3대 대통령 선거대통령3대자유당 70.0%5,046,437표1위대한민국 제 3대 대통령 당선
제4대 대통령 선거대통령4대자유당 100%9,633,376표1위대한민국 제 4대 대통령 당선

각주[편집]

내용주[편집]

  1. 이 사진은 우남관에 전시되어 있다.
  2. 이승만은 외교독립론을 주창한 반면, 박용만은 무장독립론을 주창했었다.
  3. 오스트리아의 착오로, 오스트리아를 하와이에서 가까운 오스트레일리아로 착각한 것에서 호주댁이라는 별명이 유래되었다.
  4. 당시 이 '항일단파방송' 활동은 매우 의의가 컸다. 일제강점기 말기 일제는 모든분야에 발악했었고, 전시상황이 패망에 치닫았을 무렵에도 국내에서는 매일신보,경성일보 등 어용 신문 등을 이용해 '전시상황에서 나날이 승전하고 있다.'는 주 내용들을 기사로 대서특필했던 시기였다. 때문에 국내에서 일제의 패망을 예측했던 사람들은 극히 드물었던 시기였다.
  5. 실제로, 이승만은 하와이에 있는 독립운동가 박용만과 대립하였고, 하와이 교민사회에서 교회를 이용해 분열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참조주[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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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0. ▒ 경인일보 창간 50주년 '도약! 20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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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6. 이승만의 정치 이데올로기(서중석, 역사비평사, 2006) pp 360~3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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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8. 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1940년대편 2권〉(인물과사상사, 2004) 128쪽. 친일 경찰 문제로 조병옥을 비판했다가 사직한 최능진도 동대문구 갑에 출마해 이승만과 대결을 벌이고자 하였으나 이승만의 방해공작으로 등록 무효선고를 받아 결국 이승만이 단독으로 입후보하게 되었다.
  119. ‘대한민국號’ 첫 선장 이승만과 미국의 동상이몽
  120. 이후 그는 대통령 직에서 퇴임하고 이후에도 서신에 단기를 사용했다. 대한민국에서는 1962년 3월까지 공식 문서에 단기를 사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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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6. [대한민국 제1호] 張勉 초대 주미대사 붓글씨로 신임장 작성-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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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3.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47&aid=0001961597 조중동, 친일인명사전이 그렇게도 두려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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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6. 강준만에 의하면 이범석은 한민당에 장관직 8석을 약속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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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8. http://news.chosun.com/svc/content_view/content_view.html?contid=1998051570380
  139. 李承晩, 피로써 獨島를 지켜냈다! - 조갑제 칼럼
  140. 백사 이윤영 회고록 제I편 171~172쪽
  141. 장면, 《한알의 밀이 죽지 않고는》 (가톨릭출판사, 1999 증보판) 436페이지
  142. 북진통일 위협과 미국의 이승만 제거작전- 신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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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4. 지방자치의 전면실시, 즉 지방자치단체장과 지방자치의회를 완전히 국민이 선출한 때는 김영삼 정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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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7. 여성 차별의 벽, 이태영 첫 여성판사 임명, 이승만이 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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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9. YS 단독인터뷰-"DJ가 1년6개월 동안 내 뒷조사해, 그러나 용서…" 시사온 2009년 10월 24일자 기사
  190. 농지개혁법 제정이 한국전쟁 이전에 개정되어 실시되었는데, 이 법이 개정되지 않고 실시가 안되었으면 한국전쟁때 수 많은 농민들이 인민군 세력으로 가담했을 가능성이 높았을 것이라는 학계의 주장이 있다. 이 점에 있어서 이승만의 치적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191. [인천인물 100人·86] 인천시의회 초대의장 이명호 - 구한국·왜정·미군정·대한민국… '파란만장인천의 산 역사' 드높은 香이여! 경인일보 2007년 08월 08일자
  192. 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1940년대편 2권》(강준만, 인물과사상사, 2004) 271쪽
  193. 허정, 《내일을 위한 증언》 (샘터사, 1979) 237페이지
  194. 좌파와 대립 일관한 ‘숭미 대통령병’ 이승만 한겨레신문 (한겨레 칼럼 | 2004.02.16 (월))
  195. 친일청산 없인 참된광복 없어” 대전일보 사회 | 2006.02.28 (화)
  196. KBS 한국사傳 -이승만 제2부 참조-
  197. [Why-단독] 임정 대통령에서 탄핵된 이승만에게 조소앙이 '쿠데타' 건의 - 1등 인터넷뉴스 조선닷컴
  198. 강원룡, 《역사의 언덕에서 1:엑소더스》 (한길사, 2003) 263페이지
  199. 강원룡, 《역사의 언덕에서 1:엑소더스》 (한길사, 2003) 264페이지
  200. 시사INLive 2010.08.23 '친일'은 지금도 계속된다.
  201. 남산에 다시 선 이승만 동상 중앙일보 2011년 8월
  202. “김무성 "이승만, 건국 치적에도 독재 비판받아야 마땅". 중앙일보. 2013년 11월 6일. 2015년 3월 28일에 확인함. 
  203. “박정희도 비판했다 "이승만 노인의 눈 어두운 독재". 프레시안. 2013년 3월 6일. 2015년 3월 28일에 확인함. 
  204. 김남일 기자 (2013년 1월 21일). “‘사법살인에 희생’ 조봉암 무죄”. 한겨레. 2015년 3월 28일에 확인함. 
  205. 김동문 논설위원 (2007년 4월 20일). “함석헌 필화사건-1”. 《뉴스타운》. 2015년 3월 29일에 확인함. 
  206. 안은필 기자 (2014년 5월 13일). “독재의 3박자-국가보안법, 언론탄압, 관권부정선거”. 《국민TV뉴스》. 2015년 3월 29일에 확인함. 
  207. 김삼웅 (2010년 5월 12일). “[23회] 이승만 정권의 부패, 횡포를 지켜보며”. 《김삼웅의 인물열전 블로그》. 오마이뉴스. 2015년 3월 29일에 확인함. 
  208. 대표적인 사례로 평화선과 보상 요구 문제등을 들을 수 있다.
  209. [경마 이야기] 김구-이승만 이후 정치인 발길 끊겨 조선일보 1999.06.02
  210. 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1940년대편 2권》(강준만, 인물과사상사, 2004) 67쪽
  211. 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1940년대편 2권》(강준만, 인물과사상사, 2004) 68쪽
  212. KBS 1TV <<한국사 傳>> -이승만(2부)편-, 김구의 비서를 지냈던 윤경빈의 증언
  213. 송건호, 《송건호 전집 13:서재필과 이승만》 (한길사, 2002) 279페이지
  214. 송건호, 《송건호 전집 13:서재필과 이승만》 (한길사, 2002) 280페이지
  215. 송건호, 《송건호 전집 13:서재필과 이승만》 (한길사, 2002) 406페이지
  216. 신창현, 《내가모신 해공신익희 선생》 (해공신익희기념사업회, 1986) 396페이지
  217. 신창현, 《내가모신 해공신익희 선생》 (해공신익희기념사업회, 1986) 397페이지
  218. 리처드 로빈슨, 《미국의 배반:미군정과 남조선》 (정미옥 역, 과학과 사상, 1986) 199페이지
  219. 허정, 《내일을 위한 증언》 (샘터사, 1979) 241페이지
  220. 허정, 《내일을 위한 증언》 (샘터사, 1979) 31페이지
  221. 허정, 《내일을 위한 증언》 (샘터사, 1979) 32페이지
  222. 강규형 외 《청소년을 위한 우리 역사 바로 보기》 (성신여자대학교출판부, 2007) 185페이지
  223. 송국건, 《도대체 청와대에선 무슨 일이》 (네모북스, 2007) 127페이지
  224. 송국건, 《도대체 청와대에선 무슨 일이》 (네모북스, 2007) 355페이지
  225. 개신교, 근대화의 장애물이었나 촉진제였나 크리스천투데이 2008년 3월 27일자
  226. 북진통일 위협과 미국의 이승만 제거작전 신동아 2006년 08월호
  227. 신창현, 《내가모신 해공신익희 선생》 (해공신익희기념사업회, 1986) 394페이지
  228. 신창현, 《내가모신 해공신익희 선생》(해공신익희기념사업회, 1986) 394페이지
  229. 윤보선, 《구국의 가시밭길》 (한국정경사, 1967) 80페이지
  230. 신창현, 《내가모신 해공신익희 선생》 (해공신익희기념사업회, 1986) 502페이지
  231. 신창현, 내가모신 해공신익희 선생 (해공신익희기념사업회, 1986) 381페이지
  232. 허정, 《내일을 위한 증언》 (샘터사, 1979) 235페이지
  233. 유영익, 이승만 대통령 재평가 (연세대학교출판부, 2006) 271페이지
  234. 유영익, 이승만 대통령 재평가 (연세대학교출판부, 2006) 272페이지
  235. 《여운형의 생애사와 주요쟁점들》여현덕 저.(논문)
  236. 《미·소 공위 문서철》Roll 4
  237. 윤치영, 《윤치영의 20세기:동산회고록》 (삼성출판사, 1991) 329페이지
  238. 신창현, 내가모신 해공신익희 선생 (해공신익희기념사업회, 1986) 380페이지
  239. 윤치영, 《윤치영의 20세기:동산회고록》 (삼성출판사, 1991) 322
  240. 윤치영, 《윤치영의 20세기:동산회고록》 (삼성출판사, 1991) 330페이지
  241. 장면, 《한알의 밀알이 죽지 않고는》 (가톨릭 출판사, 1998) 42페이지
  242. 국민일보 2010.03.16,동상의 정치학... 50년대"이승만 우상화"건립 열풍,4.19이후 대부분 철거돼
  243. 이승만 대통령 동상 세운다… 건국기념일 제정 운동도 전개 국민일보 2010년 11월 15일자
  244. 윤치영, 《윤치영의 20세기:동산회고록》 (삼성출판사, 1991) 323페이지
  245. 《끝나지 않은 역사 앞에서》,이이화 저. 김영사. p33~p34
  246. 《끝나지 않은 역사 앞에서》,이이화 저. 김영사. p40
  247. KBS 한국사전, 이승만 제1부 내용中
  248. 송건호 전집 13,서재필과 이승만. 송건호 저. p333
  249. 한국사傳 제54회 :: <이승만-2부작>1부 이승만, 9월1일 읽어봄.
  250. 1968년 월간조선의 임영신 인터뷰 참조
  251. ‘대통령 상전’, 영부인 열전 :: 네이버 뉴스
  252. 안두희 공판기 백범 김구선생 기념사업회
  253. 동아일보 1992.04.15, 6면 정치면
  254. “내 국적은 일본” 이승만 美체류시절 자필 국적표기 충격
  255. ‘일본국적’ 이승만, 동시대 미주한인 90% ‘한국국적’
  256. 정병준, 《우남 이승만 연구》 (역사비평사, 2005) 55페이지
  257. 신체시 효시는 이승만'고목가' 한겨레 7면(1989.12.12) 기사(뉴스) 참조
  258. 송국건, 《도대체 청와대에선 무슨 일이》 (네모북스, 2007) 238페이지
  259. 옥중기 라는 이름으로도 불린다.
  260. 서재필이나 김규식은 한국인 고학생을 거절했는데, 자기 좋아서 유학을 왔으면 그만한 고생도 감내해야 되는 것이 아니냐며 거절하였다. 미국, 프랑스, 영국 유학생들에게 용돈과 학비를 부쳐주던 인물은 안창호와 이승만이 유일했다.
  261. 시사저널
  262. 고종석, "이승만은 고종, 김일성에 이은 넘버 쓰리", 시사IN, 2011년 8월 2일
  263. 고영득, ‘최초·최단명’ 女 화폐 모델, 그는 지금..., 경향신문, 2009년 3월 6일
  264. 류정일, “국부(國父)얼굴을 욕되게 하지 마라”, 헤럴드경제, 2007년 1월 27일
  265. 이승만을 닮은 외모로 이승만 집권기간 중 오해를 받았다 한다. 이승만과 기념사진을 촬영하기도 했다.

참고 자료[편집]

바깥 고리[편집]

Flag of South Korea.svg제1·2·3대 대한민국 대통령Seal of the President of the Republic of Korea.svg
전 임
안재홍(미군정)
1948년 7월 24일 ~ 1960년 4월 26일후 임
허정
(권한 대행)
이승만 · 윤보선 · 박정희 · 최규하 · 전두환 · 노태우 · 김영삼 · 김대중 · 노무현 · 이명박 · 박근혜
제1대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총리
1919년 4월 11일 ~ 1919년 4월 23일
후 임
이동녕
대한민국 임시정부 정부 수반
1919년 4월 10일 ~ 1919년 9월 10일
후 임
이승만
전 임
이승만
제1대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통령
1919년 9월 11일 ~ 1925년 3월 21일
후 임
박은식
(의정원 보궐선출)
전 임
아베 노부유키
(사실상)
제1대 조선인민공화국 주석
1945년 9월 ~ 1945년 10월
후 임
(취임거부로 인한 해임)
전 임
김구
제21대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위원회 주석
1947년 3월 3일 ~ 1947년 9월 5일
후 임
이승만
전 임
이승만
제22대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위원회 주석
1947년 9월 5일 ~ 1948년 8월 15일
후 임
이승만
(대한민국 정부 수립)
Emblem of the National Assembly of Korea (1948-2014).svg전 임
(초대)
제헌 국회의원(동대문구 갑)
1948년 5월 31일 ~ 1948년 7월 24일
1948년 7월 20일. 제헌 국회에서 대통령으로 선출됨에 따라 제헌 헌법 제53조에 따라 국회의원직을 상실
독촉국민회
(동대문구 을)이영준
후 임
(재보궐)홍성하
Emblem of the National Assembly of Korea (1948-2014).svg
전 임
김구
제1대 대한민국 국회의장
1948년 5월 31일 ~ 1948년 7월 24일
후 임
(보궐선거)신익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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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eorge Winston: December - Full Album 조지윈스턴 앨범12월

 

 

湯谷탕곡

 

그옛날 태양은 하루 한 번 탕곡이라는 못에서 목욕을 한다는데.....
 

어디쯤에 있을까.

 

 

 

 

 

 

 

 

목욕을 하고나면 이런 모습일까?

 

 

 

 

 

 

 

http://blog.daum.net/gapgol1/16154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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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수의 탄식

 

 

카페 - 의자에 걸터 앉아서

희고 흰 팔을 뽐내어 가며

<·나로-!>*라고 떠들고 있는    (브나로드. “민중 속으로라는 뜻)

60년 전의 노서아 청년이 눈 앞에 있다……

Cafe Chair Revolutionist (혁명가)

너희들의 손이 너무도 희고나!

 

 

희고 흰 팔을 뽐내어 가며

입으로 말하기는<·나로드>,

60년 전의 노서아 청년의

헛되인 탄식이 우리에게 있다!

Cafe Chair Revolutionist,

너희들의 손이 너무도 희고나!

 

너희들은 <백수>--

가고자 하는 농민들에게는

되지도 못한 <미각>이라고는

조금도, 조금도 없다는 말이다 

Cafe Chair Revolutionist,

너희들의 손이 너무도 희고나!

 

아아 60년 전의 옛날,

노서아 청년의 <백수의 탄식>

미각을 죽이고 내려가고자 하든

전력을 다하든, 전력을 다하든, 탄식이었다.

Ah! Cafe Chair Revolutionist, 

너희들의 손이 너무도 희어!

 

                             <개벽 48호> (1924. 6)

 

 

 

 

 

 

 

 

 

 

 

 

 

 

 

 

 

 

 

 

 

 

 

 

 

 

 

 

 

 

 

 

 

 

 

 

 

 

 

 

 

 


Lara Fabian - Adagio

 






 

                   카페 프란스

 

                                     -정 지 용-

 

                                                            同志社大学予科学生会誌          1925.11

                                                             카페ー・프란스, 学潮』            1926.6

                                                             かつふえ・ふらんす, 近代風景1926.12


 

 

                      이국종異國種 종려綜櫚나무 밑에       

비뚜로 서있는 가로등,                

카페 프란스에 가자.                 Cafe  Prance가자

                                                                           

이놈은 루바쉬카                      루바슈카 러시아 남자 의상

또 한 놈은 보헤미안 넥타이        Bohemian tie

비쩍 마른 놈이 앞장을 섰다.     

 

 

밤비는 뱀 눈처럼 가늘은데         

포장도로 에 흐느끼는 불빛     Pavement

카페 프린스에 가자.      


  

이놈의 머리는  찌그러 사과

또 한 놈의 심장에 벌레먹은 장미

들개처럼 비에 젖은 놈이 뛰여간다.

 

 

          ※                                                                   

 

 

 

[오오 패릍 서방님 ! 굳 이브닝!]                     Parrot(앵무)

[굳 이브닝!](이 친구 어떠하시오?)                 Good evening!

鬱金香  아가씨는                                         울금향 (튤립 tulip)

오늘 밤에도  경사更紗 텐 아래서 조시는구료!


손이 너무 희어서 슬프구나!

나는 나라도 집도 없단다!

대리석 테이블에 닿는 내 뺨이 슬프구나!          

 

오오, 이국종  강아지야                                  

내 발을 빨어다오.                                          

내 발을 빨어다오                                               

                                                 同志社大学予科学生会誌   1925.11 

 

 


 




이 시는 여러 가지 버전이 있다.

최초  1925년 11월 同志社大学予科学生会誌에 발표한 듯하다.


정지용은 1923년부터 시를 썼다고 알려져 있으나

실제 지면에 발표되기로는 이 시가 그의 첫 작품이다.


 [PDF]『同志社大學豫科學生會誌』『自由詩人』のころの ... - 福岡大学機関リポジトリ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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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translate.google.co.kr/translate?hl=ko&sl=en&u=https://en.wikipedia.org/wiki/Arnold_Bennett&prev=search

 

 

1902년에 발표된 전 4막의 장편 희곡입니다. 

원제가 <На дне (Na dne)>...... 영어로 번역된 제목이 <The Lower Depth>라니까 우리말로 <밑바닥> 정도로 번역하면 적당할 듯합니다. 일찍부터 고리키의 대표작으로 손꼽혀 왔지만 한국어로는 1954년에야 함대훈에 의해 처음 출판되었습니다.

[출처] 고리키를 번역하고 순직한 경찰 관료 함대훈|작성자 부끄럼

 

 

 

 

 

 

 

 

 

 

 

 

 

최대로 고통받는 인간

 

막심 고리키

요약
러시아의 사회주의 혁명가이자 문학 작가로,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제창하고 제정 러시아 하층민의 생활을 묘사하는 등 프롤레타리아 문학의 선구적인 문학가였다. 1901년에는 짜르 타도를 외치며 지하인쇄소 사건에 연루되어 체포되었으며, 1905년에 러시아혁명의 기폭제가 된 '피의 일요일' 사건을 주도했던 '가퐁신부사건'에 연루되어 체포되었다. 대표작은 희곡 《밤 주막》(1902), 자전적 3부작 《유년시대》(1914), 《사람들 속에서》(1916), 《나의 대학》(1923) 등이 있다.
원어명 Maksim Gor'kii
출생-사망 1868.3.28 ~ 1936.6.14
본명 페슈코프(Aleksei Maksimovich Peshkov)
국적 러시아
활동분야 문학
출생지 러시아 니주니노브고로트
주요저서 《유년시대》(1914), 《사람들 속에서》(1916), 《나의 대학》(1923)

1868년 3월 16일 러시아 볼가강 연안의 도시인 니즈니 노브고로드(Nizhni Novgorod)에서 출생하였다. 본명은 알렉세이 막시모비치 페쉬코프(Aleksei Maksimovich Peshkov)이다. 아버지(막심 사바치예비치 페쉬코프)는 목수였고 어머니(바르바라 바실리예브)는 작은 염색공장을 운영하는 집안의 딸이었다. 고리키가 3세때 아버지가 사망하자 어머니와 함께 외가에서 자랐지만 어머니가 재혼하여 모스크바로 떠나자 외할머니에게 의탁하여 성장하였다. 초급학교를 3년 다니다가 가난으로 중퇴하였으며 돈벌이를 위해 구두수선공, 제도사, 짐꾼 등 다양한 직업을 전전하였으며 그의 어머니는 고리키가 11세 때 사망하였다. 

1880년 그가 12세가 되었을 때 집을 나와 살면서 각지를 방랑하며 떠돌이로 지냈다. 우연히 볼가강을 운항하는 화물선의 식당에 취업하여 주방일을 하게되었다. 그곳에서 같이 식당에서 일하는 퇴직한 사관출신의 요리사를 만나는데 그에게 많은 영향을 받았으며 후일 고리끼는 그 퇴직사관이 자신의 첫번째 스승이라고 고백했다. 그와 생활하면서 학문과 문학에 눈뜨게 되고 독서에 깊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이후 타타르스탄의 수도인 카잔(Kazan)으로 가서 지하조직에서 활동하였다. 대학에 진학하고자 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는 이곳에서 활동하며 진보적인 혁명가들과 교류하였으며 지식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더욱더 독서에 매진하였다. 특히 그는 빵을 만드는 공장에서 일하며 열학한 노동조건에 항의하는 집회에 가담하였다. 고리키는 독학으로 공부하면서 문학에 뜻을 두었으나 진보적인 지식을 가진 청년들과 만남에서 자신의 부족함에 절망하여 자살을 기도하기도 하였다(1887). 20세가 되어 친구이자 혁명가인 로마스를 따라 볼가강 연안을 끌라스노비도보로 이주하여 농촌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때문에 고리키는 짜르 경찰과 보수파의 수배대상이 되어 쫗기다가 고향이 니즈니 노브고로드에서 체포되어 수감되기도 하였다.

이때 그는 그동안 간간히 집필하였던 것을 그만두고 이후 5년 동안 러시아제국 전역을 도보로 여행하였다. 러시아제국이 처한 현실을 직접 목격하며 고통받는 민중의 삶을 표현하기 위해 다시 글을 쓰기 시작했으며 이때 자신의 처녀작 단편소설인 《마까르 추드라 Makar Chudra (Макар Чудра)》를 집필하였다. 늙은 두명의 집시를 주제로 한 소설이며 인간의 자유를 갈망하는 내용으로 상당한 주목을 받은 작품이다. 고리키는 이것으로 문단에 등단하게 되며 이때부터 필명인 막심 고리키라는 이름을 사용하게 된다. 1895년 단편소설 《첼카슈 Chelkash (Челкаш)》를 발표하면서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그는 이소설에서 떠돌이 부랑자인 첼카슈가 물건을 훔치면서도 작은 물건에도 소유욕이 많은 가브릴라에 대비하여 금전적으로 타락하지 않은 인간상을 보여준다. 문학가인 코롤렌코(Vladimir Galaktionovich Korolenko), 안톤 체호프(Anton Pavlovich Chekhov)와 친분을 가지게 되었으며, 제정 러시아의 밑바닥에서 허덕이는 사람들의 생활을 묘사하여 프롤레타리아 문학의 선구적인 문학가로 알려지게 되었다. 1899년 자본주의가 인간을 변모시키는 과정을 묘사한 장편소설 《포마 고르제예프》를 발표하며 그의 문학적인 입지는 더욱 견고해진다. 1901년에는 짜르 타도를 외치며 지하인쇄소 사건에 연루되어 체포되었으며 1905년에 러시아혁명의 기폭제가 된 '피의 일요일' 사건을 주도했던 '가퐁신부사건'에 연루되어 체포되었다. 이후 이탈리아와 미국을 여행하며 짜르 정부의 타도와 러시아 민중혁명지원을 호소했다.   

그의 생활은 자전적() 3부작 《유년시대 Detstvo》(1914), 《사람들 속에서 V lyudyakh》(1916), 《나의 대학 Moi universitety》(1923)에 나타나 있다. 1892년 처녀작 《마카르 추드라 Makar Chudra》로 인정을 받았고 이어 《첼카슈》(1895)로 주목을 끌어 희곡 《밤 주막 Na dne》(1902)이 특히 유명하며, 한때 볼셰비키당에 들어가 소설 《어머니 Mat’》(1907)에서 혁명가의 전형을 창조하기도 하였다.

1905년 혁명으로 투옥된 뒤 외국으로 망명, 그곳에서 《레토피시》지()를 발간하여 좌익작가를 모았다. 1913년, 대사령()을 이용하여 귀국, 《신생활》지()를 발행하여 레닌파()와 대립하였으나 11월혁명(구력으로는 10월혁명) 후에는 신정권을 지지하였다.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제창하여 소비에트 문학의 기수()가 되었고, 미완성의 서사시인 《클림 사므긴의 생애 ZhiznKlima Samgina》(1936) 등 많은 작품을 남겼다. 1936년 6월 8일 폐렴으로 죽었다. 일설에는 1930년대 후반의 대숙청 때 정적에게 독살되었다고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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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역(墓域)에서 깊어진 세의(世誼)

 

 

 

안계면 소재지의 5거리에서 단밀행 지방도로를 따라서 나가면 곧바로 율리리(栗里里)고개가 도로를 끼고 오른쪽으로 나선다. 동쪽으로는 인가가 밀집하여 들어오고 건너편에는 지호지간에 안계여자 중고등 학교의 위용이 웅장하다.

옛날에는 한적하기 이를 데 없는 묘역이었으나 지금은 차량의 소음이 크고 안계면 소재지가 번창하여 오니 묘소의 관리도 어려우며 번잡한 공해를 벗어나기도 어렵게 되었다. 5정보 가량의 얼마 되지 않는 양지바른 묘역에는 오랜 세월에 세 문중의 세의가 굳어지는 장소가 되어왔으니 그 사연은 이러하다

 

 


고려 말의 충신으로 이름난 백암 김 제(白巖 金 濟)의 후손이요, 기자전 참봉(箕子殿 參奉)을 지낸 김세정(金世貞)이 이 묘역의 서쪽에 맨 먼저 입산하게 되었다.

그 시기는 그의 생졸년을 기록한 문적이 전하지 않으니 확실히 알 길 없으나 연산조(燕山朝)내지 중종조(中宗朝)의 일일 것으로 추리할 수 있다. 그러니 4백년은 훨씬 넘어서 묘역이 이루어지게 되었다고 보아야 하겠다.

김세정은 진주판관(晋州判官)을 지낸 순천인(順天人) 장일신(張日新)의 아들 숙(叔)으로서 사위를 삼게 되었다. 사위를 사랑하는 정은 워낙이나 깊었기에 장인을 존경하고 따르는 마음 또한 남달랐다고 한다. 드디어는 사위를 의성읍의 본가에서 비안(比安)고을로 데려 와서 같이 살기에 이르렀다. 이로써 장숙은 순천 장씨(順天 張氏)의 비안 고을 입향조(入鄕祖)가 되었다. 김 세정은 사위를 가까이 데려와서 출가한 딸도 언제나 쉽사리 만날 수가 있어서 더욱 즐거웠다. 만년에 이르러서는 가족과 측근을 불러 모아두고 더욱 각별한 유언을 하게 되었다.

자기가 죽으면 율현(栗峴)에 묻어 주기를 당부하고 저 세상에 가서도 장 숙과의 정의를 새기고자 하니 뒷날 가서 사위의 일생을 마치거든 자기의 무덤 아래 같이 묻어 달라고 특별히 유언 하였다.

세월이 흘러 1567년(명종 22년 丁印) 7월 15일에 군기시첨정(軍器時僉正)을 역임한다. 장 숙도 78세의 향수로 타계했다. 장인 김 세정의 유언에 따라 그의 묘 아래 바로 붙여 묻어 묘를 이룬 것은 더 말할 나위도 없다. 부인 김씨도 합장이 되었다. 이로써 김 세정의 유언에 따라 그의 묘 아래 바로 붙여 묻어 묘를 이룬 것은 더 말할 나위도 없다. 부인 김씨도 합장이 되었다. 이로써 김세정의 유언은 실행이 되었고 저 세상에서 만난 옹서(翁胥)간에는 더욱 정이 깊어졌을 것이라 여긴다.

장 숙이 묻혀 입산된 후로 그의 아들 문암공(文巖公) 장문서(張文瑞)도 이어서 그 아래쪽에 묻히게 되었다. 국천 효자로 이름난 문암공이 입산한 것은 1577년(선조 10년 丁丑)이었다.

여기에 또 하나의 유언이 남았다. 문암공 역시 그이 사위인 우봉인(牛峰人) 진사(進士) 이 효견(李 孝騫)을 무척이나 사랑하였기에 뒷날에 한 묘역에 묻히기를 당부하였다. 그의 아들 진사 장 해(張 邂)의 묘 옆쪽에 사위인 진사 이 효건도 부인장씨와 더불어 함께 묻혔다. 이렇듯 생시의 정의는 유언으로 남고 유언은 어김없이 실행되어서 선산 김씨, 순천 장씨, 우봉 이씨는 한 묘역을 이루게 된 사연이 밝혀졌다.

그들은 연면 4백년을 내려오면서 선외가(先外家)와의 정의를 새기는 아름다운 전통을 남겼다. 해 마다 서릿발 내리는 가을이 깊으면 묘향을 치르고 자손은 모여들면 고루고루 다같이 어느 묘나 성묘를 하니 모르는 사람들은 무슨 일이기에 한 해에 묘사를 세 번씩이나 지내느냐고 묻기도 하는 모양이다. 묘향의 날짜가 문중 마다 달랐기 때문이다.             //---------------------------------//

먼먼 옛날부터 율현묘역(栗峴墓域)에서 맺어지는 세 문중의 미담가화(美談佳話)는 멀리서 듣기에는 믿기가 어려운 일이다.

여기 우리의 전통을 건전히 세워 나아가는데 모범이 되어지기를 바란다.

 


경상북도 의성군청/ 의성의 인물 중에서 

 

 


명나라 崇禎元年(1628년)

청나라 崇德元年(1636년)

임진왜란   선조 25년 (1592)  정병 20만  소서행장

정유재란   선조 30년 (1597)  정병 14만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

정묘호란   인조  5년 (1627)  정병  3만   아민

병자호란   인조  14년(1636)  정병 20만   청태종


 

 


 龍 潭  日  記


 

                                                        金啓

 


 

 

 


“龍蛇日記”

一善金氏 白岩公派譜 龍潭金啓先生譜錄

일선김씨 백암공파보 용담 김계선생 보록 내용에/ 집안에 “龍蛇日記”가 전해졌다고 한다.

“龍蛇日記”참으로 아까운 사료다.

의문스러운 것은 송암 이로(李魯:1544∼1598)가 쓴 龍蛇日記《용사일기》가 있다.

  경상남도유형문화재 제62호로써  《용사일기》는 1592년(선조 25)부터 1597년의 정유재란까지 전후 5년간의 기록이 실려 있는데, 임진왜란의 상황을 체험 중심으로 기술하였으며 당시 의병들의 활약상, 전쟁의 진행과정, 전란 속의 민심 동향 등을 생생하게 수록되어있다고 한다.

또한 저자미상의 일사기문(逸史記聞)이라는 책이 전해지고 있는데,

선조(宣祖) 때부터 인조(仁祖) 때까지의 사실을 주로 세간에 들리는 이야기에 따라 기록한 책이다.

이 책 내용의 마지막 기록은 대략 정축년(1637)3월 초3일까지의 기록이 적혀 있다.

그런데 책의 서술방식이 金啓선생의 龍潭錄과  흡사하고

내용 또한 인조시대의 다른 학자들의 일기 내용과는 달리

                            세간에 들리는 政勢이야기를 기록한 유사점이 있다.

묘하게도 金啓선생의 龍潭錄 기록은 정축년(1637) 봄의 사건부터 시작된다.

혹 저 작자미상의 逸史記聞은 龍潭 金啓先生의 “龍蛇日記”가 아니었을까?

 

                       .

                                                                 

          

丁丑年 仁祖15年 1637年  明- 崇禎10년  淸- 崇德二年(당63세) (윤4월 듬)

 

역사보기/ 1월 강화도 함락. 인조가 삼전도(三田渡)에서 청태종에 항복함.

3월 홍익한, 윤집, 오달제가 청에 잡혀가 심양에서 살해됨.

4월 소현세자(昭顯世子) 등이 심양에 볼모로 잡혀감.

 


○冊以給 .....

보태어진 책 ....

 


☞ 龍潭錄 以前의 日記에 보태여 쓴다는 말.  즉“龍蛇日記”와 연결된 日記라는 뜻.

一善金氏 白岩公派譜 龍潭金啓先生譜錄

일선김씨 백암공파보 용담 김계선생 보록 내용에/ 집안에 “龍蛇日記”가 전해졌다고 함.

 


○沈方伯(    )未及謫發拿去李敬輿來代(    )

 심방백이(    )하지 못함을 적발하여 잡아가다. 이경여가 뒤이어 부임했다.(    )

 


沈方伯 = 경상감사 심연(沈演)/  李敬輿 = 후임 경상감사/ 

인조실록/   2월 11일 양력/ 1637년 3월 07일 

경상감사 [심연沈演]이 재임 중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쌍령(雙嶺)에서 청군의 기습이 있다는 와전(訛傳)을 듣고 도산해 실전에 임해보지도 못했다. 패하자 전라도에 유배되고. 후임 경상감사 [이경여李敬輿]가 부임했다는 기록인 듯함. 

인조 15년 정축(1637, 숭정 10)  4월 5일(갑술)  이경여(李敬輿)를 경상 감사로 삼았다.

 

 

 

戊寅年 仁祖16年 1638, 明 - 崇禎11년  淸 - 崇德三年(당64세)

           

역사보기/   9월 1일(경신)  함경도에 굶주림과 염병으로 사망한 백성이 4천 3백여 명이다. 

            10월 봉림대군(鳳林大君, 후의 효종)이 청태종의 서정(西征)에 동행함.

 


○自春至夏天久不雨兩麥旣損又未移秧七月間暫雨豆太及黍粟頗有可望其西成而八月飛霜大失稔 自初秋至翌年夏橡實松皮苦苦連命老弱多有餓死者

봄부터 여름에 이르기까지 하늘은 영영 비를 내리지 않았다.

밀과 보리농사는 이미 망쳤고 모내기도 하지 못했다.

7월에 잠시 내린 비로 팥.콩.조를 심었을 뿐이다. 

자못 수확을 기대했지만 거둬들일 무렵인 8월에 서리가 내려 농사를 망쳤다.

초가을부터 내년 여름까지 도토리와 소나무 껍질로 연명해야하는 고통이다. 고통속에 힘들게 연명해가는 노인과 어린이가 늘어나고 굶어 죽는 자가 많다.

 

○牛疫之後不能耕種十家作契耕以人夫或馬耕之或作車推轉而耕之 

高牙大纛鳴鼓吹角大是恠變事也. 

소들이 역질에 걸린 후에는  밭갈이를 할 수가 없다.

열 집이 어울려 “품앗이”로 사람이 직접 밭갈이를 하고,

혹은 말로써  밭갈이하며 혹은 수레바퀴를 끌어서 쟁기를 만들어 밭을 갈았다.

관아에서는 상아로 장식한 깃발 높이 휘날리며 북치고 나발 부니

도대체 이 무슨 괴변이 있냐!

 

○一自兵亂後大小紅疫及染疾大熾死亡過半

정유재란부터 병자호란 이후까지도 크고 작은 홍역에다 장티프스까지 크게 번져 죽은 사람이 절반이 넘는다.

○監司李公在亂時興學設敎勉勵頹風勸課農桑輕徭薄賦而二月辭歸南民不缺然失望 李景曾代來

감사 이경여는 병란 중에도 학문을 세우고 퇴폐한 풍속을 스스로 깨우치도록 가르치고 농사와 누에치기를 권장하며 부역과 세금을 가볍게 하였다.

2월에 (모친의 병환으로)사임하고 떠나가니 남쪽의 백성들이 기대가 무너져 실망하였다.

이경증이 후임으로 왔다.      

☞ 이경여:  인조 15 1637,3월, 경상도 관찰사로 부임 1638 1월, 모친의 병환으로 사직하고 扶餘로 돌아감

 

○都事呂渭老到任數月以無名稱汰尢沈大孚七月到界

도사(종5품) 여위로가 도임한지 여러 달 동안 이름이 알려져 있지 않으니“태왕”이라 불렀다. 七月에 심대부 감사가 부임해왔다.         

 


己卯年 仁祖17年  明- 崇禎12년  淸- 崇德四年 1639년  (당65세)

                             

역사보기/ 4월 20일    감사 이경증(李景曾)의 청을 따라 경상도에 보내 기민을 진휼하게 하다.

          2월 11일    이명웅(李命雄)을 경상 감사로 삼았다.

          4월 18일    최온(崔蘊)을 비안 현감(比安縣監)으로 삼았다.

           5월 1일    청나라에서 정뇌경을 죽이다.

          6월 26일    동양위 신익성이 삼전도 비문을 쓰지 못하겠음을 계하다

          7월 13일    경상 감사 이명웅에게 금오 산성을 쌓게 하다

          9월 28일    선산부사 이각(李恪)에게 금오 산성을 축성한 공로로 通政을 加資하다.

         10월 29일    경상도에 대동법을 시행하다 

          12월 2일    역관 정명수가 병조 좌랑 변호길을 폭행하다

 

○六月胡使自稱中殿冊封而出來到孔詔院宣言中殿親出(    )驕慢使崔鳴吉齊銀千兩往說鄭明時金石伊等得免中殿之親出 鄭明時金石伊乃我國人而投附胡賊作獘一梗者之胡(    )

육월 청나라 사신이 중전책봉을 위하여 나왔다는 구실로 홍제원에서 중전이 친히 나와 받으라며(    )교만스러우니, 최명길이 은 천 냥을 주고 그들을 설득해서 면했다.  정명수. 김돌시는 우리나라 사람으로 오랑캐에 빌붙어 작당질을 하는 한 무리들이다. 오랑캐(    )

 

☞ :     鄭明時는 = 鄭命壽이고    金石伊는 = 金乭屎 =金突  / 김돌시, 김돌이다.

鄭命壽 金乭屎는 1618(광해군 10)년 청나라의 건주위 정벌 때 도원수 강홍립(姜弘立)을 따라 갔다가 포로가 된 정명수(鄭命壽)·김돌(金突) 등이 우리나라 사정을 청나라에 알려줌으로써 청나라 황제의 신임을 얻고 양국간에 통역을 담당하면서 임금을 모독하고 조신을 업신여기는 한편, 관직이나 뇌물을 요구하는 등 갖은 행패를 부렸다.

 

六月五日未時汶孫生˚ 

5일 오후 2시 손자 “문”이 태어났다.

○鄭雷卿拿金宗一等以東殿僚屬在瀋陽□鄭明時□作獘謨共誅殺而事泄觸怒汗令東殿殺鄭雷卿等甚急東殿曲陳其必咨禀於國王之由則汗賊令國王促殺之故不淂己送金吾郞斬鄭雷卿拿金宗一㝎罪 

정뇌경을 잡아갔다. 김종일등과 심양에서 세자를 모시면서□,정명시의□ 못된 짓에.. 주살하려 모의하였는데 사실이 누설되어 청나라의 노여움을 촉발하였다. 세자에게 정뇌경등을 죽이라 명하니 사정이 급하여 세자가 간곡하게 사정하였으나, 살펴 보건데 필히 국왕이 연류된 것이라 하는 즉 청나라에서 명하길 국왕은 빨리 죽이라하니 부득이 의금부도사를 보내 정뇌경을 참수하였다. 김종일은 같은 죄로 잡아갔다.

 

○春大饑饉移粟藍藿賑恤一匹直數斗米四月成倅以京人田稅坊納事罷去六月金壽昌到任

봄에 큰 기근이 들었다. 곡식을 가져와 콩깍지로 연명하는 곤궁한 백성을 구원하였다.

무명 한 필이 쌀 몇 말 값이다.

4월 고을의 成성원님은 서울사람으로 관할구역의 토지세를 거둬들이지 않고 갔다.  

6월 김수창이 부임하다.

 

○監司李命雄等築山城初使僧軍次以編伍軍次以烟軍無論伇品怨苦沖天城号柒谷置府使˚

감사 이명웅등이 산성을 수축할 때 처음에는 승려들로 조직된 승군 을 쓰고 다음에는 지방 정예군 편오군을 쓰다가 품삯을 받는 민가에서 출역한 인부를 쓰면서 노역인의 품삯에 관해서는 아무 말이 없으니 고통과 원성이 하늘을 찌른다.

성의 이름을 柒谷“칠곡”이라하고 府使“부사”를 설치했다.

☞    왕조실록보다 1년 앞선 기록이다.

아마도 당시 주민들을 독려하기위해 지금의 개발계획을  홍보하듯이 미리 공표한 듯하다.

인조 18년 5월 25일 가산산성(山城)의 읍명(邑名)을 칠곡(漆谷)으로 하고 윤양(尹瀁)을 부사로 삼았다.

 

가을에 풍년이 들다. 목화는 흉작이다. 동지 달 튼튼하던 손자 인간 세상에 왔다가 다섯 살도 않되 한 줌의 재가 됐다.

○淸使帶金累祢名者來請曰近無每日以銀百兩禮端給之則無辞受給其回還之日專數□□□□還出給曰此國甚殘獘以待後人云而去歸告其汗□使臣若無□□□□朝鮮矣云雖夷虜□□□□之邦有人矣   청나라 사신 帶金累祢(대금누니)라는 자가 와서 청하길 요즈음 매일 은 백 냥씩 옳게 지급하는 예의가 없다. 여러번 지급받지 못한 것을 돌려 받고자한다.□□□□ 하루도 빠짐없이 지급하라.  말하길 이 나라의 사신접대가 심히 잘못된 폐단이다. 뒷날 귀국하는 사람에게 전해 청태종에 고하여□使臣若無□□□□朝鮮矣云雖夷虜□□□□之邦有人矣

 

 


庚辰年 仁祖18年 1640, 明- 崇禎13년  淸- 崇德5年(당66세) 正1월 윤달

역사보기/

1월 20일  인평 대군에게 권솔을 거느리고 청나라로 가게 하다.

2월 2일   청나라 장수 마부달이 죽다. 그의 형인 만월개(滿月介)에게 위문.

3월 7일   평안 병사 임경업을 심양으로 보내다.

5월 25일  정가 산성(定架山城)의 읍명(邑名)을 칠곡(漆谷)으로 하고 윤양(尹瀁)을 부사로 삼았다.

8월 4일   원손이 심양에서 돌아오다.

10월17일  봉림 대군이 다시 심양으로 가다.

 


○正月无日晩天動○閏正(    )日嫂主別世權庴板項 ○念五六雨土不分遠近○元孫乃橉平大君入送瀋陽東宮受由出還

정월 해가 보이지 않고 늦게는 하늘이 울렸다. 윤달이 든 정월(    )일 형수가 별세하다.  임시로 판항(의성군 봉양면 문흥리)에 모셨다. 25. 6일 흙비가 내려 앞을 분간하기 힘들다. 소현세자의 아들 원손과 인평대군이 심양으로 들어갔다. 소현세자가 청국의 허락을 받아 돌아왔다.


○左右道軍兵咸裂架城大操仍城役民怨沖天

경상 전라도 군병이 두루 나뉘어 가산산성을 크게 쌓으니 거듭되는 성 쌓는 노역에 백성들의 원성이 하늘을 찌른다.   

 

☞  강행군으로 많은 노역자들이 죽었다.

     인조실록: 18년 4월 4일 공사를 서두른 이명웅을 파직하라고 헌부가 아뢰다.

 


○金石伊夲國官奴爵賊作奱淸使之行亦來作禮常與主上較倚而堅淸使久留國傷渴沈說夜趋鄭明時金石伊宿處各給銀子萬兩翌朝勸使發遝到義州金也責房妓色醜牧伯林慶業託以絶無美色則金遽怒曰雖入汝之室入不可廢也林大怒曳下庭使人告淸使曰我亦有淸國之職此漢辱我不可不治使曰笞於四十度杖以不祿木杖之如數卽死曳出之人皆快之

김돌시는 본시 관노비로써 벼슬을 도적질하여 바꾸고 청나라 사신을 따라 나와서 매번 사신을 접대하는 예법을 만드니 주상께서 보시기에도 그 폐단이 지나치다.

청나라 사신이 오래 머물고 있어 나라의 재정이 몹시 고갈 된지 오래되었다는 말씀에 밤으로 정명시와 김돌시의 숙소로 달려가 각각 은자 만 냥을 주고 다음날 아침에 떠나가기를 권하였다. 의주로 돌아간 김돌시가 기생이 못생겼다고 책망하며 의주 목사 임경업에게 절세미인을 부탁하였는데 예쁜 곳이란 없는지라 김돌시가 갑자기 화를 내며 말하길 “너 같아도 그 방엔 못 들어갈 것이다. 당장 바꿔주라”하니 임경업이 열을 받아 김돌시를 뜰아래로 끌어내고 청나라 사신에게 항의하니 청나라 사신이 말하길 “나는 청나라의 사람이요 이놈 또한 청나라 벼슬을 하고 있으니 청나라를 욕되게 한 것이다. 그냥 둘 수 없다. 몽둥이로 40 대를 쳐라!.”사정 봐줄 것 없이 몽둥이를 내려치니 몇 대 맞자 쭉 뻗었다. 시체를 밖으로 끌어내니 모두가 쾌자를 불렀다.

 ☞  왕조실록에도 없는 매국노 김돌쇠의 사망기록이다.

 

 

○二月初八午坤方天動俄而天油然作雲抑沛然雨雹交注雷電霹近古所于有(    )竟夜不能安寢大是異事

2월 8일 정오쯤에 남서쪽에 하늘이 요동하더니 머리위에 뭉게뭉게 구름이 일어나 내려앉자 세차게 비가 쏟아지고 우박으로 바뀌어 내리다 천둥번개가 치더니 가까운 곳에 벼락이 떨어졌다. 예전에 (    ) 밤까지 이르니 편안히 잠을 이룰 수 없다. 커다란 이변이다.

 

○汗請兵我國□□ 以林慶業領兵送之□力入寇中國大敗而還 -557P

청나라에서 우리나라에 군사 조발을 요청하여...  임경업이 통솔하여 출정하였다. ...힘으로  밀어붙여 명나라를 대패시키고 돌아왔다.

 

 

○東宮在瀋陽以皮方席獻詩 

소현세자가 심양에서 가죽방석에 시를 써서 전하께 올리다.

 


身留異域未歸人     몸은 낯선 땅에 있어 못 가는 신세.

家在長安漢水濱     내 집은 서울 장안, 한강 기슭인데.

月白夜心花落泣     달 밟은 밤 내 마음은 꽃잎에 눈물짓네.

靑風池面柳絲新     봄바람 연못 위를 스치니 실버들 새롭고

黃鶴嗅起遼西夢    꾀꼬리 울음소리 고향 꿈을 깨우네.

玄鳥來傳慶會春     제비 찾아와 경회루의 봄을 알리는데.

盡日樓臺歌舞地     온종일 누대에서 노래하고 춤추던 곳을.

不堪回首淚沾巾     차마 그려 볼 수 없어 소매에 눈물 적시네.

 


殿下開逢觀之則有待曰  

전하께서 시를 읽고 答詩를 지었는데

 


내가 그립거니,  넌들 그립지 않겠는가.

千里蠻鄕 천 리 오랑캐 땅에서 얼마나 그리느냐.

紗窓 창 밖에 슬피 우는 저 접동새야!

“돌아갈 것 같지 않다”고 말하지 마라.

내 앉을 자리가 없구나!

 


臣民見此歌詩孰不鳴間流涕..?  

 신하와 백성들이 이 시를 보고  

누군들 흐르는 눈물에  소리 내여 읊을 수 있겠는가....

○斥和金尙憲金迬等如尹集縛送瀋陽孰不憤嘆東宮來觀卽還○方伯具鳳瑞専以愛民爲政南中大悅

청나라와 싸워야한다고 주장한 김상헌 김왕 등과 같이 윤집이 심양에 묶여갔으니 어찌 분통이 터지지 않겠는가! 소현세자가 만나보고 돌아갔다.

도지사 구봉서가 오로지 백성을 사랑하는 일념으로 행정을 펼치니 경기이남 지역에서 인기가 최고다. 

 

☞  金常憲: 1570~1652 본관: 안동. 인조가 자신의 부친을 왕으로 추존하려는 이른바 추숭논의(追崇論議)가 일어나자 그에 강력히 반대하였고, 찬성한 반정공신 이귀(李貴)와 의견 충돌을 빚어 낙향. 1636년 병자호란 때 선전후화론(先戰後和論)주장. 최명길(崔鳴吉)이 작성한 항복문서를 찢고 자결을 기도하다가 실패 뒤 두문불출. 청나라로부터 위험인물로 지목 1641년 청나라에  끌려가 4년여 동안 청인들의 굴복 요구에 불복하여 끝까지 저항. 1649년 효종 즉위 뒤 대현(大賢)으로 추대 받아 좌의정에 임명. 저서: 《야인담록》《독례수초》《남사록》후인들에 의해 문집 《청음집》간행.

 

○元孫往瀋陽之日百官送于盤松容拜辭而歸莫不流涕年六世人君度量己成云 二月朝鴨成群相戰而死者正如丙子矣

원손이 심양으로 가는 날 百官이 전송하는데, 반송정에서 차분하고 침착하게 나아가 절하고 돌아가니 어찌 눈물이 아니 흐르겠는가! 나이 여섯 살에 품성과 아량이 이미 인군의 틀을 갖췄다 한다. 2월 아침에 기러기가 때를 지어 서로 싸우다 죽었다. 지난 병자년과 같다.

 

☞  元孫원손: 소현세자 큰아들. 뒷날 아버지 소현 세자가 죽자. 어머니 강빈은 사약을 받아 죽고 원손은 10살 때 제주도로 귀양 가서 죽는다.


 

○水田不吉旱田亦早霜民不聊生○都事蔡成龜 

논에는 가뭄 들고 밭엔 이른 서리 내려 백성이 편히 살아갈 수가 없다. 도사 채성구가 부임하다.

 

☞  蔡成龜는 = 채성구(蔡聖龜)이다.[1607~1647] 본관 평강. 시조와 필법이 뛰어났다. 

都事도사: 품계는 종5품이었다. 관찰사와 함께 지방을 순력하고 규찰하는 임무를 담당하였다.

 

 

 

辛巳年仁祖19年 1641년 明- 崇禎14년 淸-崇德6年 (당67세)

역사보기/   1월 10일   인평 대군이 심양에서 돌아오다. 

1월 18일    임경업이 돌아오다.

3월 22일    경상도에 가뭄이 들다.

4월 26일    낙동강 물이 마르다 경상도의 가뭄으로 낙동강의 물줄기가 끊겼다.

5월  4일    청나라에 원병간 이사룡이 참형당하고 김득평이 장형에 처해지다.

5월 12일    경상도에 지진이 나고 서리가 내리다.  경상도에 황충이 생기다.

6월 18일    심양가는 군병을 위문하다.

7월 10일    광해군이 죽다.

7월 19일    심양에 있는 재신의 상차에 따라 임경업을 소환하다.

 


○自春徂夏不雨移秧尃廃加以正月抄軍六月再( )軍入錦州民間飢況斗米直本一匹若不方伯移粟賑恤靡南民有子遺○七月( )年凶因往嵗前願留明年事會疏一善一道咸進

봄부터 여름에 이르러 비가오지 않아 모내기를 그만둘 판인데 정월에 군사를 선별해 보내고 6월에 또( )금주전투에 보냈다.

백성들은 가뭄과 기근에 허덕이고  쌀과 콩 한 말 값이 면포 한 필이다. 만약 도지사가 곡식을 가져와 기근을 해결하지 못하면 남도의 백성들은 자식을 내버릴 것이다. 7월( )년의 흉사는 그 전 해에 앞서 머뭇거렸든 원인이다. 내년에 일의 기회가 올 때 정리(正理)에 따라 모두 한 길로 나가자.


○ 汗領兵往圍錦州不利再請兵於我國( ) 以砲手( )名六月損( )抄送八月汗與東宮麟坪親領往錦州中國將祖大受不利先運砲手交代回還

청군이 금주를 포위하러 갔다가 불리하자 또다시 우리나라에( ) 지원병을 요청했다.  우리나라에서는 포수( )명을 6월 달에 결원에 맞춰( ) 뽑아 보냈다. 8월에는 청태종과 소현세자와 인평대군도 함께 금주전투에 참가했다. 명나라 장수 조대수가 불리하다. 앞서 출병한 포수부대와 교대를 하여 돌려보냈다.

 

☞    祖大受는 祖大壽 이다. 명나라 장수 뒷날 청나라에 항복 함

조선군은 정밀한 총을 가지고 있어서 조대수의 군사를 많이 죽였는데, 조대수는 군대에 명하기를 청병의 머리 하나에는 은 50냥을 주고 조선 군사의 머리 하나에는 100냥을 준다고 했다.

 

조선 군사 중에 경상도 성주 사람으로 이사룡이란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차마 명군에게 총을 쏠 수가 없어 공중으로 공포만 쏘아 명군을 상하지 않게 하였다. 이는 본국 조선의 속마음을 밝히려 함이었다.

이를 발견한 청의 군사가 사룡의 목을 베어 진중에 높이 내 걸었다.

명나라 군사들은 이것을 보고 모두 크게 울었고 조대수는 깃발에 큰 글씨로 "대명충신 조선의사"라 써서 시영의 군사를 선동했다.

 

이사룡은 고문을 받으면서도 청나라 장수에게 욕을 퍼부었고 웃으면서 죽었다고 한다.

청태종도 이사룡을 의로운 사람이라 하여 소현세자가 귀국할 때 그의 주검을 운구해 고국으로 돌아가게 하였으며 조선 왕 인조는 지나는 길에 감사에게 예를 표하게 하고 고향에 안장하게 하였다. 그 뒤 숙종 때는 고향 사람들이 사당을 지었고, 정조 때는 성주목사에 증직되었으며 정려를 지어 충렬사란 현판을 내려주었다고 한다.

 

명나라 장수 조대수(祖大壽)가 그의 아우와 함께 금주성(錦州城)에 들어가 수비하였는데 청인(淸人)이 포위하였다. 조대수가 나성(羅城)을 잃자 항복했던 몽고(蒙古) 사람들을 의심하여 한인(漢人)을 시켜 감시하게 하였는데, 몽고인들이 성을 나가 투항하는 자가 매우 많았다. 중국 조정이 10만의 군대를 발동시켜 일곱 명의 총병(摠兵)이 거느리게 하여 금주성을 구원하게 하였다. 우진왕(右眞王)이 대대적으로 원병이 온다는 말을 듣고 우리 나라의 포수(砲手) 4백 명을 선봉으로 삼아 남산(南山)을 굳게 지키게 하였다. 그리고 그들 군대를 두 대(隊)로 나누어 일대는 탑산(塔山)의 귀로를 방비하게 하고 일대는 금주로 들어오는 길을 차단하게 하였으며, 진중(陣中)에 기와집을 지어 오래 머무를 계획임을 보였다. 이때 우리 군대는 이미 여러 달을 노숙(露宿)하여 병들고 부상하지 않은 자가 없었고 죽는 자가 속출하였다. 조정에서 듣고 본도로 하여금 휼전(恤典)을 거행하게 하였다.

 

○自江原山郡由豊基奉化興海至八月初下霜失稔倍往年下道尤甚豆太黍粟稍實木花畓穀専棄市直日蹙所恃者方伯

강원 산골 부락을 비롯하여 풍기, 봉화, 포항에 이르기까지 8월 초부터 서리가 내려 결실을 얻지 못한 것이 지난해의 곱절은 된다. 남쪽지방이 더욱 극심하다. 콩과 팥. 기장. 조(서속)은 끝만 약간 여물었고 목화와 벼는 모두 포기했다. 시장경기는 매일 위축되어  갈수록 급박해지니 기대하는 것은 방백(도지사)뿐이다.  

 

○四月巡相親到洛東左右道文武士咸聚試才入格者四十餘人優數賞賜○責子治第賦長子鈺亦參榜受韻冊一部筆墨壯帋三卷邑卒加賜白帋二卷 -555P

4월 순찰사가 낙동에 왔다. 좌우도의 문무 선비를 모두모아 재주를 시험했다. 경과시에 합격한자가 40여명이었다. 우수한 자들에게 상을 주었다. 責子治第(자식을 타일러 집안을 다스린다.)라는 시제로 큰아들 옥도 합격하여 운책과 필묵을 받았다. 장원한 자에게는 종이 3권을 주고 읍의 수령이 백지 2권을 주었다.

☞   巡相순상: 종2품 임시벼슬 순찰사(巡察使)의 별칭

 

○三月十五日義興孫生女十月十三日山春生男始見曾孫○八月二十五日試年進士試一語嗳回鸚鵡夢賦次子鏡亦參榜于亰一所洪伯昇中東堂壯元 ○鏡造屋始 -554P

3월 15일 의흥에서 외손자 딸을 보았다. 10월 13일 산춘의 아들이 태어났다. 처음으로 증손을 보았다. 8월 25일 과거를 보는 해에 진사시가 있었다. 시험문제는 一語嗳回鸚鵡夢(하던 말 또 하는 멍청한 앵무새)라는 시험문제로 한양의 첫 시험장에서 둘째 아들 경이 합격했다.  동당 시험장에서 홍백승이 장원을 했다. 경이 집을 짓기 시작했다.

☞    鏡:1606 -1664년 용담의 둘째 아들 字明仲 號愚軒 1654년 司馬

 


○九月初七日蔚山東面柳浦村海巷中水源半把䖏黃白色石周回七尺三寸自移陸地岩上○又東萊十月十一日地震自南方間午北方聲如天動窓戶戰搖累年失稔民生未復而非常之変不知攸言云

9월 7일(1641년 10월 11일) 울산 동면 유포촌 바닷가 마을 가운데 물길 오목한 곳에서 7척 가량의 황백색의 돌이 빙빙 돌다가 스스로 땅위의 바위 위에  올라앉았다. 또 동래에서는 10월 11일 지진이 남쪽에서 일어났다가 정오에 북쪽에서 하늘이 요동치는 소리가 창문이 난리가 난 듯 흔들린다. 몇 년째 흉년으로 백성들의 생활이 어려운데 이변이 일어나 알 수없는 이상한 소문이 번진다.

☞  실록의 기록 있음 仁祖19年 蔚山府 有石自海邊, 移于陸地巖上。울산부에서 바위가 움직이다.

 


○安陰士子通文有曰六月二十二日鄭桐溪捐世非侐邦家之不幸抑亦士林之長慟云

안음(함양군 안의면,거창)에 사는 선비의 아들이 서찰을 가져왔다. 6월 22일(양1641년7월29일) 동계선생님이 돌아가셨다고 한다. 한 나라를 평온하게 이끌지 못한 불행에 더하여 사림의 영수이었으니 통탄스러울 뿐이다.

☞ 桐溪: 鄭蘊정온의 호[1569~1641]: 본관 초계. 병자호란 때 이조참판으로서 김상헌과 함께 척화를 주장하다가 화의가 이루어지자 자결시도. 사직하고 덕유산에 들어가 은거하다가 5년 만에 죽었다. 이조참의, 대사간, 경상도 관찰사, 부제학 등을 역임. 저서《동계문집》<동계 약력>《덕변록》《망북두시》《망백운가》를 지어 애군우국의 뜻을 토로하였다.

 


○都事李以存到任○赴瀋軍運粮事冬前所放爲先爭錬運粮雇馬六百匹定奪後西路不能支勢不得己分定各道八結木一匹式一千九十餘同本道除出贊馬三百匹䮠人則各官屬定送馬三匹色吏一名一道定領將一負木品則如歲幣三十七尺  -554P

관찰사 이이존이 부임해 왔다. 심양에 나가있는 군사의 군량조달은 겨울이 오기 전 훈련에 앞서 준비해야 마음이 놓인다고 운송에 필요한 말 600필을 민간으로부터 징발하는 것을 임금의 재결을 받은 후에 함경, 평안도 지방의 징발이 어려운 지경이라  부득이 각 도에 나누어 정했는데 농지세로 받아들인 8결목 당 한 필씩 정하니 1090필이다. 우리 경상도에서 내놓을 량이 300필이다. 마부는 각 감영의 하인을 보낸다. 말 세 마리당 아전 한 명씩 붙이고, 한 도에 대장 한 명이 담당했는데 해마다 중국에 바치던 무명과 똑같은 품질로 37척이나 된다.

☞  李以存: 본관 여흥 인조 20년 부수찬. 승지

 

○爲準十二月內上納事卽今錦圍未觧兵連禍銡我軍調送至於再次陣前運粮遂月飛輓關西民力己到蕩渴  -553P

12달을 기준으로 바치는 것인데. 지금은 금주를 포위하고 풀지 않고 있어 병사들이 연이어 화를 입고 술렁이고 있기에 우리병사를 뽑아 보내준 것인데 여기에 또다시 진군하니 앞서 운송을 마친 달에 이어서 군량을 운송하게 되니 평안도 백성은 기력이 다하여 죽을 지경에 이르렀다.

 


○今此收價雇馬之未誠出於朝廷不得己之計而本道不幸連被灾篰屋懸罄今屆收藏之節方有阻飢許多細木何以辨出言念至此一倍傷心

이번에 민가에서 징발한 말의 수가를 조정에서 성의 없이 지급하니 부득이 상소를 올렸는데 경상도는 불행이도 계속된 재앙에 거적 지붕에는 석가레만 걸려있고 지금은 거두어 들여야 하는 계절에 굶주림에 허덕이는 백성에게 그 많은 무명을 나누워 주면 어떨까하는 말을 생각해보니 이제 와서는 갑절이나 마음이 상한다.

 

○道方以銀子枝三等物代送一邉報備局一邊議關西若得准欲請則自營間主管以此換貿則設有日後各官隨便收價之事目前可除駄價人情木品高重聽不聽在於朝廷不得祿料爲先卜定爲置將此民間知委以待更分付 -558P

도 방백이 은자와 아울러 세 가지 품목을 대신 보내고. 비국에 보고하는 한편  평안도지방과 같은 법을 적용해주길 바라는 논지를 임금에게 올렸는데 그 논지는,

백성들과 관청사이의 상거래에서 사들이는 환무의 규칙을 만들어 놓으면 설령 뒷날 각 관아에서 이 규칙을 따르면 편리하게 사들일 수 있다. 그 시행규칙은

전에는 물품을 실어 나르는 품삯은 주지 않아도 문제가 없었다. 상품의 등급은 인정에 따라 좋든 나쁘든 나라 관리가 정하기 때문이다.

차라리 공무원 봉급은 현지에서 살고 있는 백성들이 바치는 세금으로써 그 산지의 생산물로 먼저 지급하는 것을 장차 법으로 만들어 백성에게 공지하여 그때그때 현지의 생산품으로 대신해서 분납하도록 하는 것이다.

 

○比安田一千二百二十五結八十九負六束出木一百五十三匹內一同貿馬一匹餘木一百十三匹上納次右(具)巡相行關各邑也

비안(경북 의성군 비안면)의 밭은 1.215결 89부 6속이다. 내놓아야할 무명은 153필을 한 번에 바쳐야한다. 실어 나를 말 한필과 나머지 130필을 상납하고 (구)순찰사가 각 읍 관아에 공문을 보냈다

 

○凶年飢嵗賑活赤子者王政之所先散給官穀穋取資潤屋者救荒之急務是白昆上年段失稔最慘是白良置下道稍實仍于轉販募納之際下于有地是白如乎

흉년과 기근 때는 백성을 구휼하는 것이 임금의 임무인바 먼저 관의 창고를 열고 부자 집의 나락을 거둬 나누어주는 것으로 백성을 구황해야한다. 급한 것은 지난해와 마찬가진데 피해등급을 구분지어 가장 참혹하게 농사를 망친 경상도 지방일지라도 흉년 제반조처에서는 초실등급으로 조치한 것이 최상의 조처라 하고 거듭하여 물건을 사고팔 때 군량미를 거둬들인다. 하나같이 땅이 있는 곳은 이와 같다.

 

 

○今年則莫論上下一樣被灾富者罊渴貧者將死公私倉庫赤立板蕩封債貸穀等事俱無辦得之路而明春種食只憑元穀還上是如乎○開倉之後決難盡捧各邑守令連續來報設有些少之捧

올해는 누구를 막론하고 하나같이 재앙을 당했으니 부자들의 단지도 바닥이 나고 가난한 사람은 장차 죽음뿐이다. 모든 창고는 비어있고 국정이 문란해 쌀로 고리대금업을 한다. 곡식을 빌려주는 등 여러 조처와 변통에도 아무 소용이 없다. 거리에선 내년 봄 종자를 먹고 오직 기대할 것은 나라에서 사환곡제(社還穀制)로 양곡을 빌려주고 가을에 받아들이는 일 뿐이라! 창고를 개방한 후로 세금을 거두어들이기 어려움이 있자 각 읍 원님이  여러 차례 와서 독촉하나 서령 거두어들인 것도 하찮을 뿐이다.

 

○今年則司僕各島新捉馬厥數甚多年例分養之數比前倍些少元穀消盡於冬春之內是白在如乎○狗彘食人食之嘆年凶可(  )此外國兵曺一時錯料往來分給馬匹於楚軍爲白有如乎馬疲人怨之後分送三南經年留養馬令肥漨爲白乎矣尙無區處之柔又添別樣國馬爲白有置此則處置不甚重難會該曺急速指揮俾無不緊耗損之患事右巡?上達草 -551P

올해에는 또 말을 관장하는 관리가 여러 섬의 새로 잡아갈 말의 산출 수를 많이 늘렸다. 해를 두고 년 년이 나누워 키우는 수가 전보다 배나 된다. 농가에 빌려준 알량한 양곡도 다 없어진 겨울과 봄 동안에 이러니, 짐승이 사람 먹을 것을 먹어 치우는지라! 탄식하나니 흉년에 어찌(  )하랴!  이는 잘못 헤아려 다른 나라 병조에 한꺼번에 오가며 금군에게 마필을 나누워 주었는데 말은 고달프고 그들은 원망하였다.

뒷날 충청,전라,경상도에서 말을 키워서 해를 두고 번갈아가며 나누워 보내야할 것을 당장 살찌우려하니 변통하여 처리할 방법이 아직은 없는 것이다. (청나라에)복종하기를 더하여 나라의 체면을 馬말로써 세우려하는지라 이는 곧 일을 처리함에 있어 신중하지 못하고 담당하는 관료들의 의사가 분분하여 긴요치 않은 것이 없다하고 급히 처리하니, 긁어 부스럼 내는 걱정스런 일이다. 右巡?이 상소하였다.

 

中國鄭軍門上書曰祖大受出敵己久尙無勝否臣請一戰以決勝敗帝以謂鄭也年少之人爲氣所使妄料輕敵不許鄭再請之帝乃許之因給四萬騎貨賣四萬加之自募四萬幷十二萬而出祖將給○汗曰帝以我無功以他將代之我則將難免拿致之誅願投入以啚生汗信聽簡精兵三千直入組城組將閉門盡擊無有漏汗見欺大憤擧兵而行鄭師不意相遇於伊州尉以短兵殊死力戰鄭且戰且上高峯貨賣二萬未及登山爲胡被殺汗自後不敢輕犯相望結陳而己

명나라 정군문이 상소하길 총병 조대수는 적과 대치한지 오래되었으나 아직도 승패를 가리지 않고 있습니다. 신이 승패를 가르는 일전을 치르고자 청합니다. 하니 명황제가 홍승주를 총독으로 삼았는데 젊은 혈기로써 망령스럽게 적을 가볍게 여기므로 허락하지 않았으나 다시 간청하므로  허락하여 기병 4만 군사와 용병 4만에 지원병 4만을 합하여 12만이 출병하여 총병 조대수를 지원했다. 청나라 칸이 말하길 “다른 장수로 대신하는 것은 내가 공이 없는 임금이니 내가 즉시 잡아다 주살하여 치욕을 면할 것이다. 하였다. 살기를 바란다면 들어와 항복하기 바란다. 하니

칸이 이글을 곧이듣고 정병 삼천으로 곧바로 조대수의 성으로 진격한 것이다. 조대수는 성문을 굳게 닫고 심한 공격에도 빈틈이 보이지 않았다. 칸이 심히 격분하였다.

12만으로 출병한 홍승주는 의주부에서 생각지 않게 마주쳐서 가까운 거리에서 필사적인 전투를 벌였다. 홍승주는 한편으로 싸우고 한편으론 송산으로 올라갔다.

용병 2만 명이 산에 올라가기 전에 청군에게 죽임을 당했다. 칸이 이후로는 감히 가벼이 공격하지 못하고 서로 진을 치고 대치하고 있을 뿐이다.

 

☞: 당시 明史및 靑史의기록상 이때의 군문은 정군문이 아니고 洪承疇홍승주였음. 鄭崇儉군문은 三月에 하옥되고 洪承疇홍승주가 9월 지원군으로 금주에 출병했음

당시 왕조실록 내용: 仁祖19年月 21日

대명의 군사가 청인과 싸워 전세가 불리하자 기병은 도주하여 송산보로 들어가고 보병은 배를 타고 도주하였는데, 영원과 행탑 등지에서 죽은 자가 즐비하였다. 이 당시 조대수가 금주에서 포위된 지 여러 달이 지남에 중국이 크게 군사를 조발하여 보내 구원하였는데, 군문홍승주가 나이가 어리고 오만하여 여러 사람의 말을 듣지 않다가 결국 패배하였다. 대수가 청국의 진영에 사람을 보내, 포위된 지 9개월이 되었으니 빨리 교전하여 승부를 가리자고 말하였으나 청나라 칸이 들어주지 않았다.

 


○宣言先運軍甚精勇使我國得捷爲謝因請軍兵○以我國先運炮手不入戰所優對以送者有意存焉自後例爲交代入送之易胡也其爲謀也巧矣

우리나라에서 임금을 호송하던 포수부대가 싸움에 투입되지 않은 것은 우리가 파병해준 뜻에 부응하여 특별히 대우한 다는 뜻이다. 이후에도 청병과 교대하여 보낼 때에도 선례가 된 것이니 그 계략이 교묘하다. 선언하되 임금을 호송하던 포수부대는 우리나라에서 과거 급제자를 뽑은 최고의 정예부대이니 지원군을 청하면서 사례한 것이다.

 

☞: 조선군은 정밀한 총을 가지고 있어서 명나라 조대수의 군사를 많이 죽였는데, 조대수는 군대에 명하기를 청병의 머리 하나에는 은 50냥을 주고 조선 군사의 머리 하나에는 100냥을 준다고 했다.

 


○運粮胡差十二名出來道過潛商十二人縶縛問之十二人直招曰我義州人以府尹之命往唐陣云則捉囚義州而到京         

군량미를 운송하는 청나라 사신이 나오다가 비밀리 무역하는 장사꾼 12명을 붙잡아 왔다. 물어보니 12명이 사실대로 고하길, 나는 의주사람인데. 의주부윤(황일호)의 명을 받고 중국 진영으로 가려한다고 하여 의주에서 서울로 붙잡혀왔다. 

 


會百官袛迎廟堂辭避上曰不爲袛迎者罷職勢不得已皆袛迎胡差而義州府尹以黃一元交通中國請拿未定刑卽拿致則胡差列百官回示曰百官中有如此犯誅之其中人鄭明時亦甚作

백관들을 회례하고 묘당에서 왕의 행차를 맞이하는 의식을 거절하며 임금이 말하길 파직을 당한 꼴이니 부득이한 상황에서 모든 의식을 거절하는 것이다.

청나라 사신이 의주부윤 황일원이 명나라와 내통하는데도 아직도 잡아들여 벌주지 않는다며  지시하길 즉각 잡아들이라하면서 또한 줄지어서있는 백관을 둘러보며 말하길 백관 중에 이와 같은 죄를 짓는 자는 주살할 것이다. 하니 그 중에서도 정명수의 작태가 극심했다.

 


遂赴出黃顧語百官曰吾無罪捉給至於此極國史如此願僉眞情之因垂淚曰吾母戒余曰吾欲観榮華吾勉力發身畢竟若此吾無兄弟獨身使先靈絶祀不孝莫大觧宝釖賜斬者曰速斬我母僾遇恃朋執手同與病錄藥各曰吾児重速劑送此藥詳傳我之戒勿學業文武蔵踪畎畒遂被戮聞者莫不下淚焉捉囚十二人盡殺之

이윽고 끌려 나온 황일호가 백관을 둘러보며 말하길 나는 죄 없이 붙잡혀와 이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나라 일 또한 이와 같아 여러분에게 (장차 나라 일을)진정 눈물로 호소한다. 나의 어머님이 경계의 말씀하시길 내가 영화를 보고자한다면 애쓰고 힘써서 수신제가하라 하였는데 마침내 이렇게 되니 나는 형제 없이 홀몸으로 선령의 제사가 끊기게 되니 크나큰 불효다. 형리에게 차고있던 보검을 풀어주며 주며 속히 죽여라. 내 어머니께서 그 언젠가 나의 친구를 만나 손을 잡고 부탁하길 같은 병에도 약이 다르다며 말씀하시길 우리아이가 병이 중하고 급하니 속히 약을 지어 보낸 것이라며 꼭 나에게 전해 달라는 약이 있었는데

그 약이란 곧 경계의 말씀이었다. 문무의 학업일랑 밭고랑에 묻어 버리고 시골에 숨어 살라는 말씀이었거늘 마침내 억울하게 죽는다. 소식을 듣고 울지 않는 자가 없다. 잡아온 죄수 12명을 모두 다 죽였다.

 

☞:  黃一元은  黃一皓황일호 이다. 1588∼1641 본관: 창원 사헌부장령 때 병자호란 시 인조를 호종 독전어사(督戰御史)로 화전(火箭)을 이용하여 적군을 물리쳐 전공을 세웠으며, 척화(斥和)를 적극 주장하였다. 난이 끝난 뒤 호종한 공으로 통정대부에 올라 진주목사에 제수되었다. 七義士

七義士(칠의사) : 병자호란 이후 청나라 칸을 죽이고 명과 우리나라 국권을 회복하려다가 사전에 그 사실이 청에 발각되어 청의 명으로 할 수 없이 우리 정부에 의해 사형을 당한 황일호 ·최효일, 차충량· 차예량·안극함, 장후건, 차맹윤

 


○胡差十二名不時欲求景南關庙百官齊迎出去之際色正郞以人馬趂未整齊赤脱北結提畒蹄踏其爲困辱不可勝記

청나라 사신 12명이 갑자기 남문 밖에 있는 (중국 촉한의 장수)관우 사당을 보기를 청하여 백관이 나아가 영접하였다. 인마가 뒤좇아 가는데 혼잡을 정리하는 색리가 미처 대치하지 못하여 남쪽을 빠져나와 북쪽으로 한꺼번에 몰려들어 발굽으로 밭을 밟아 그 곤욕이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다.

 


○義州出身崔孝元當初出際之日見國勢難攴率妻孥懷重寳擧家載舩直抵中原水往之計其慮也深且遠矣卓乎其不可及也

의주출신 최효일이 당초에 (명나라로)나가려고 할 즈음 나라의 어려운 형국을 보고 식솔을 다그치고 가족을 설득하여 가산을 정리해 온 집안이 중원을 거치지 않고 곧바로 뱃길을 이용해 (명나라로) 들어갈 계책을 세우니 그 뜻이 깊고 원대하니 그 탁월함에 도저히 미칠 수가 없다.

☞:   崔孝元은 최효일(崔孝一)이다.  ?  ~1644  七義士 칠의사 병자호란 때 임경업의 휘하에서 전공을 많이 세웠다. 황호일, 임경업 등과 청나라 태종을 암살할 것을 모의하고 등주로 건너가 명나라 사람들과 함께 심양을 공격하려 하였으나 사전에 누설되어 실패하였다. 1644년 명나라가 망하자 의제의 빈소에서 10일 동안 통곡하면서 단식하다가 죽었다. 12월 8일청나라 사신이 의주에 돌아와 최효일(崔孝一)의 족속 12인을 죽이고 갔다.

 


市直木一匹無過米一斗半○十二月十六日鵾變生

시장에서 광목 한필 값이 쌀 한 말 반 밖에 안한다. 12월 16일 곤변이 태어나다.

☞:  鵾變곤변: 큰아들 鈺옥의 셋째 아들 족보에는 鯤變곤변으로 기록돼 있음.

 


○李回寶作詩曰 

(인조임금이 삼전도에서 굴욕적으로 강화하자 이를 보고 은거했던)이회보가 시를 지었다.

憶曾風雨打孤城  비바람 몰아치는 외로운 城의 옛일 생각하니

天柱推顚地軸傾  하늘을 거꾸로 헤아려 땅 지도리 기울어있다.

我忍獨留侄丙子  나는 삼전도 비극을 멍청히 홀로 견디었는데,

君能先逝在崇禎  임금은 명나라를 먼저 버렸네.

人情自古皆衰死 자고로 인정은 모두 메말라,

世事如今孰願生  이런 세상 누가 살길 바라리.

若到雲鄕朝列祖 모여든 구름 속에 열성조 혼이 머문다면,

善爲辭說莫分明 잘했다는 말 분명 않으리.

☞: 崇禎: 중국 명나라의 마지막 황제 의종(毅宗) 때의 연호(1628~1644).

李回寶 1594~ 1669 본관 진성. 병자호란 때 척화(斥和)를 주장하다 항복하게 되자 벼슬을 버리고 낙향했다. 김자점(金自點)의 반역을 예견했고 후에 그를 탄핵하여 유배케 했다. 이로 인해 직간(直諫)하는 위국충절이 뛰어나다 하여 사복시정(司僕寺正)에 특진됐다. 저서: 석병집

 


○淸陰答之(汗)言曰臣各爲其主道其志耳口吾口也志吾志也以吾之口告吾志于吾君而吾君不從豈意細微之事播及於他國乎乃斥和事也

김상헌이 (청나라에 잡혀가서) 대답하길 신하는 각자 의지로써 그 주도하는 바를 행할 뿐이다. 그 뜻한 바를 말한 것은 나의 말이요, 본심은 나의 본심이다. 나의 임금께 내가 고한 말이 나의 본심이니 나의 임금을 따르지 않았는데 뭣 때문에 세세히 대답하겠는가. 이와 같은 일이 번져나가니 다른 나라에서 너희나라에 반기를 드는 것이다.

☞: 淸陰 = 金尙憲김상헌의 호 1570~1652 본관: 안동. 강직한 성격과 기개로써 심양에 잡혀가 6년 동안 청인들의 굴복 요구에 끝내 굽히지 않고 불복하여 저항. 청나라 사람이 심하게 힐문하니 상헌은 누워서 일어나지도 않고 말하니, 청인들이 서로 돌아보며 혀를 차고 말하기를,“정말 못 말리는 늙은이다.”하였다. 청인이 의롭게 여기고 칭찬해 말하기를‘김상헌은 감히 이름을 부를 수 없다.’고 하였다.  1645년 소현세자와 함께 귀국했지만, 여전히 척화신(斥和臣)을 탐탁지 않게 여기는 인조와의 관계가 원만하지 못해 벼슬을 단념하고 석실(石室)로 나아가 은거하였다. 1649년 효종 즉위 뒤 대현으로 추대 받아 좌의정에 임명되었다. 이후 수차례 은퇴의 뜻을 밝히면서 효종에게 인재를 기르고 대업을 완수할 것을 강조하였다.  저서: 야인담록. 남사록. 청음집

 

 

 

 

by 꽃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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壬午年 仁祖20年 1642년  明- 崇禎15년  淸- 崇德7年(당68세)   11월 윤달



역사보기/ 3월 4일    농군을 조발하여 심양에 보내다

3월 14일   경상 감사 구봉서가 조령 아래의 삼색미는 추수 때에 거두기를 청하다 .

3월 18일   조대수가 청국에 항복했다고 심양의 재신이 치계하다.

5월 16일   정태화(鄭太和)를 경상 감사로 삼았다.

6월 2일    경상도에 가뭄이 들다  

7월 27일   경상도에 홍수가 나다

8월 18일   인평 대군 심양에서 돌아오다.

10월 18일  임담(林墰)을 경상 감사로 제수하다



◐正朔辛未十一二終日竟夕雪霏霏幾至尺矣十三動天○金判書之行回自瀋陽初二日到江上還朝而同時被去申朴曺蔡等亦回朝云

정월 초하루 신미날. (양력/ 1642년 1월 30일 辛未)

11일,12일 종일 저녁 내내 눈이 내려 무려 한 자는 쌓였다. 13일 하늘이 울렸다. 김상헌이 심양에서 돌아와 초이튿날 의주에 당도했다. 같이 갔던 신득연. 박황. 조한영. 채이항 등도 돌아왔다 한다.

☞:  江上朝 =“의주”당시 압록강 위쪽에 위치한 청나라 관련 조정업무를 관장한 곳.

1월 6일: 청나라로부터 위험인물로 지목되어 심양에 끌려가 4년여 동안을 청에 묶여 있었다. 의주로 옮겨 구금해두고 사신이 왕래할 때 그들로 하여금 점검하게 한 것이다.



◐元朝日見无妄之患慟慟憤憤○二十一日鏡以覆試事發程與孫生弘祖氏同行○南邊報淘洶譯官洪希男下抵東萊○方伯因嶺南士子願留疎限麥秋仍往南民大悅傳相告賀曰其甦   

정초에 뜻밖의 재앙을 당하니 통분이 인다. 21일 아들 경이 서울에 거행하는 과거시험 길을 떠났다. 생원 손홍조와 동행했다. 남쪽 변방의 흉흉한 소식이 전해지자 역관 홍희남이 동래로 내려갔다. 영남의 선비가 경상감사(구봉서)가 오래 머물기를 바라는 소를 올렸는데 보리를 거두어들이는 철까지 더 머물게 한다는 소식에 남쪽 백성들이 서로 전하며 크게 기뻐하여 말하길 “이제 살았다”라고 한다.

☞:  洪希男은 洪喜男이다. 본관: 남양. 대일 교섭에 난관이 있을 때마다 일본에 파견되었다.

☞: 인조실록: 경상 감사 구봉서가 병으로 사직하였다. 이 당시 봉서의 임기가 임박하자 상이 보리가을 때까지 유임시킬 것을 하교하였었다.



◐二月朔辛丑下跡雪○汗請兵我國交代精兵十五日豊基點考○初九夜大雪沒脛十日終夕不晴  

2월1일(양력 1642년 3월1일) 신축일 눈이 조금 내린다. 청나라에서 정병의 교대를 요청해왔다. 15일 풍기(영주)에서 인구조사를 했다. 9일 밤 크게 천둥이 쳤다. 9일 밤에 큰 눈이 내려 정강이가 빠진다. 10일 저녁까지도 개이질 않는다.



○淸陰疏曰臣等覊繫異域載羅寒暑枯形危喘與死爲期伏蒙天地父母之仁德動於遠邇誠感上下脫之於鼎鑊刀俎之間還於乳哺袵席之內此非臣等所能仰報玉關雖入長安尙隔不得趨詣闕庭少伸微悃瞻天望雲無任感激流涕之至餘昧死以聞

김상헌 등이 상소하기를,

신들은 이역에 구금되어 있으면서 모진 추위와 무더운 더위에 시달려 몸은 메마르고 숨은 거칠어져 죽은 목숨 있었는데, 천지 부모의 사랑으로 덕은 멀고 가까운 곳을 움직이고 정성은 상하를 감동시켜, 솥에 삶아 죽임을 당하고 칼과 도마의 극형에서 빠져나와 편안한 보금자리로 되돌아오게 하시니, 이는 신들의 힘으로는 도저히 갚을 수 없는 은혜입니다.

의주에는 들어왔으나 다만 서울 길이 막혀서 대궐로 달려가 다소나마 충정을 펴지 못하고, 맑은 하늘을 우러러보며 감격의 눈물을 이기지 못하여 죽음을 무릅쓰고 아룁니다.



○二月初三日倭使來曰關伯往八月生子此莫大之慶遣使感賀云  

이월 초삼일 일본 사신이 와서 말하기를 “쇼군이 지난해 8월 아들을 낳으니 크나큰 경사라며 사신을 보내 축하해주어 감사하다고 한다.

☞:  關伯관백(쇼군): 일본 德川家光덕천가광: 家綱의아들 (이에츠나:1641~1680)1641년8월 3일 출생

인조실록: 일본사신 평성행이 홍희남과 서로 의논할 일이 있다고 하였는데 그 뜻은 관백(關白)이 아들을 낳아 온 나라가 축하하고 있으므로 도주(島主)가 우리나라의 축하 사절을 얻어 생색을 내는 소지로 삼자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念二鏡廖泊來所望歸虗○三月晦日華山雪積○四月甚旱秋牟專厥旬後得一耕雨無高底水付種春牟有向茂之勢而連有霜降自春徂夏寒如冬日○着耳掩人不爲惟     

22일 아들 경이 과거에 낙방하고 돌아왔다. 기대는 한낱 꿈이 돼버렸다. 3월 그믐날 화산에 눈이 쌓였다. 4월 가뭄이 심하다. 가을보리는 냉해를 입었다. 10일이 지나서 밭을 갈고 비가 오지 않아 높고 낯은 물길을 대여 봄보리를 갈아 무성히 자랐는데 지난 가을부터 봄까지 이르러 여름날이 겨울날씨 같다. 귀마개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생각 못할 일이다.



○錦州失守祖獎出降云何天之佑乃至於此也○兒輩寃抑不攻自破

(명나라)조대수가 금주의 성을 지키지 못하고 나와서 항복했다한다. 어찌 하늘의 보살핌이 이렇게 될 줄 생각이나 했던가? 멍청이가 원통하고 억울하게 공격하지 못하고 스스로 무너지다니! 

:  인조실록: 20년 3월 18일 조대수가 청나라에 항복했다고 심양의 재신이 치계하다. 청병이 송산을 함몰시켜서, 금주에 원병이 이미 끊어지고 굶주림과 곤궁함이 날로 심해지자, 조대수가 마침내 청국에 항복하였다고 합니다. 



○市價一匹直米一斗粟太無過兩斗處處餓死下道有一兩班甚絶粮行乞求活其妻子矣一日乞還則妻與處子已餓死不勝哀愴之心亦卽縊死聞者莫不倶淚○念風風之餘雨雨 

시중에 무명 한 필 값이 쌀 한말 웬만한 조.콩 두 말 값이다. 곳곳에 굶어죽는 자가 있다. 경상도 한 양반이 너무 굶다가 그 처자를 구하고저 구걸을 나섰다. 어느 날 돌아와 보니 아내와 자식은 이미 굶어 죽어있었다. 애통한 마음을 이기지 못해 곧바로 목을 메에 죽었다. 이 말을 듣는 사람들이 눈물을 금치 못했다. 20일 바람이 불다가, 비가 오다가 한다.



○南賊僧來求請八萬大藏經以不易印出(不)許說印之地帋容入四萬餘卷故如是答之 

일본의 동지승이 와서 청하길 진본의 팔만대장경 인쇄본을 구한다하였다. 허락하지 않고 타이르길, 그곳에서 인쇄하려면 4만 여권의 종이가 필요한 것이니 이렇게 대답한 것이다.

☞:   南賊僧남적승은  일본 사신 등지승(藤智繩)을 이르는 말.

왜구들이 탐낸 팔만대장경: 조선왕조실록에는 83회에 걸쳐 일본이 원본및 인쇄요청을 구한 사실이 기록돼 있다.



○念四五連有大雨水漲南北川非舟楫難通架山還上處來永岩輩用之得見阿女該簡則市直好木一匹太粟無過一斗租則二斗云麥前計活難矣哉○龍宮以上畓官山水暴注活江㳂邊兩麥盡淹云

24.5일 연이어 큰비로 남북의 하천이 물이 불어나서 배 없이는 움직일 수 없어 가산 곡식을 받치는 사창에서 영암의 마차를 타고 왔다. 딸의 서찰을 보니 좋은 포목 한필에 웬만한 콩과 좁쌀 한말 값이고 나락 두 말 값이라 한다. 보리 고개를 넘길 일이 큰 걱정이다. 용궁의 논은 상답인데도 관산에서 쏟아져 내리는 물이 강물 흐르듯 하여 물길 언저리의 밀과 보리는 모두 물에 잠겼다.



◐五月初六戒仲計音來云死日亦難的知乃遆畨砲手者之言厥老母與兄弟相向慟哭不耐見   5월 6일 계중의 부음 소식이 왔다한다. 죽은 날짜 또한 정확치 않다. 포수의 교대기간 중이었다고 하는 말에 노모와 형제들이 서로 마주보고 통곡하는데 차마 참고 볼 수가 없다.

☞:  청나라 정병으로 전투에 참가했던 계중이 귀국을 얼마 앞두고 전사했다는 소식인 듯.



○祖將夫妻降于汗削留陣中降柔每日殺千人者八日云開來慟憎十五日雨作農夫歌舞

조대수 부부가 항복 할 때 청나라 칸이 소탕작전을 펴며 진중의 잔병에게 항복을 권유하며 매일 1.000명을 죽이니 8일 만에 성문을 열었다한다. 참으로 가증스럽고 애통하다.

☞:  조대수와 부하 장수들은 저항 없이 그냥 투항함으로써 명나라의 멸망을 부추겼다.

관리들의 부정부패와 환관들의 권력투쟁. 임진왜란에 무리한 파병. 이자성의 난등의 원인으로 청나라에 패한다.



○六月二十一日新使鄭泰和到界厥第以東萊府使避嫌歸

6월 21일 정태화 감사가 도착했다. 그의 동생 동래부사(정치화)는 혐의(嫌疑)를 피하기 위해 벼슬을 버리고 돌아갔다. 15일 비가 내려 농부가 춤추고 노래하며 농사일을 시작했다.

☞:  정태화와 정치화는 형제가 같은 지역으로 부임되자 상피 관계라 하여 피함

        鄭致和: 인조 20  1월 동래 부사가 되다. 동생 鄭泰和: 인조 20  5월 경상 감사가 되다.

    鄭太和정태화 1602~1673 본관: 동래 병자호란 때 도원수가 도주하자 패잔병을 모아 현관(縣館)에 의지하여 시석(矢石)으로 항전하여 수많은 적을 사살한 공으로 집의가 되었다. 6차례 영의정을 지냈으며, 37번의 청원 끝에 사직하였다. 문집:양파유고 저서:양파연기가 있다.

鄭致和정치화: 정태화의 동생 병자호란 후 세자시강원 보덕으로 봉림대군을 심양에 호종. 서인(西人)이면서도 성품이 원만해 숙종 1년 자의대비의 복상문제로 서인이 몰락 할 때도 화를 면함.



○此月旬後連雨川漲者再三然盈科而已兩麥趂收之○七月旬三四連雨十六大水㳂江左右田畓盡淹沇人多溺死此月無日不雨

이달 10일 이후 연이어 개천 물이 불어나서 두세 차례 웅덩이를 매우고 있으니 밀과 보리는 잽싸게 수확했다. 7월 13.4일 연일 비가 왔다. 16일 큰비로 강이 넘쳐 좌우의 전답이 모두 물에 잠기고 물살에 빠져 죽은 사람이 많다. 이달 내내 비가 온다.



◐八月初七大雨○夜不絶水漲倍前二月之雪八月之雨果若人言○十六七連漲南北川遂爲秧霖哀我民生其何得生旱稻趂未收○統制使柳琳左水營基址擲奸事命齊湖南添坊舡盛陳軍容而來不意天起狂風漂流大洋不知去處云邦家之不幸何之如此  

8월 7일 큰비. 밤에도 쉬지 않고 퍼부으니 불어나는 물길이 지난번의 배는 된다. 2월 눈에 8월 비 라는 속담이 과연 이와 같구나. 16.7일 연이어 남북의 하천이 범람해서 장마 통에 심어놓은 못자리가 모두 떠내려갔다. 애달프다. 우리백성 그 누가 살아남으리. 밭벼도 때맞춰 거두지 못했으니! 통제사 유림이 좌수영 주둔 상황을 꼼꼼히 점검하라 명령하고 전라도를 포함해 모두를 잡도리하는데 배들이 선단을 이뤄 위용을 자랑하며 오다가 갑자기 일어난 소용돌이 바람에 큰 바다로 표류하여 간곳이 어디인지 알 수 없다고 한다. 한나라와 백성의 불행이 어찌 이렇단 말인가?

☞:  柳琳유림1581∼1643년 본관: 진주 오위도총부 부총관·포도대장·경상좌병사 등 역임



○義興鄭梯一姝潛奸婢夫逃在大丘地而見捉兩人竝殺杖下乃蔣允□之妻也實出於蔣之祿衣之變也新都事朴稷十二日拜辭云

의흥(군위군)에 사는 정제일 여동생이 몰래 노비의 남편과 간통을 하다가 대구로 도망갔는데  찾아가 잡아와 두 사람을 곤장을 쳐서 죽였다. 여자는 장윤□의 부인이다. 장윤□이 직접 밝힌 사실이다. 명문집안에서 일어난 변고이다. 신임도사 박직이 12일 임금께 임지로 떠나는 인사를 올렸다한다.



○八月二十五至九日霜降于安東玆山小川地大水之餘加之早霜所變慮本邑則九月十二日水霜自消不至葉黃多幸九旬三千癶自達川持簡來二十三鏡落魄而還云庭試沈譔等五人皆京人武科取十一人○災傷敬差官尹珩二十七日到界

8월 25일부터 29일 서리가 내렸다. 안동 자산의 작은 하천에 큰물이 졌는데 더하여 이른 서리가 내려 변덕스런 날씨가 걱정스러운데 우리 마을에는 9월 12일 물안개가 사라지고 낙엽이 지지 않아서 다행이다. 9월 13일 천발이 달천(군위군 소보면 봉황리)에서 서찰을 가져왔는데, 23일 아들 경이 과거에 낙방하고 돌아왔다 한다. 임시로 시행하던 과거시험에 심선등 5인이 뽑혔고. 모두 서울 사람들이다. 무과에 11인이 뽑혔다. 재해를 조사하고 구휼하는 재상경차관 윤형이 27일 부임해 왔다.

☞:  庭試정시: 임시로 시행하던 별시 중의 한 종류로 지방민들이 응시하기가 불리하였고, 서울의 문벌 출신들이 진출하는 데 중요한 통로로 이용되었다.

☞:  尹珩(윤형): 본관: 파평. 인동부사. 양주목사



○統制使柳琳拿去大旣□□陸舡運饋諸大臣家事政院請啓也

통제사 유림을 잡아 갔다. 이미 여러 차례□□ 육로와 배로 실어다 바치니 여러 대신들이 집안의 일어난 사실을 승정원에 청하여 임금께 아뢴 것이다.

☞:   인조실록 : 9월 21일 간원이 통제사 유림이 소금배로 뇌물을 실어온 죄를 다스렸다.



○木花與太道內同然專廢復種難得九月大旱秧牟難播十月初四晩雨始洒人人相賀

경상도에서 목화와 콩은 하나같이 망쳤다. 다음 종자를 얻기도 힘들다. 9월 큰 한파로 보리갈이도 힘들다. 10월 초4일 늦은 비가 뿌리니 서로 기뻐하였다.



○朝鮮累臣洪翼漢斥和事意歷歷可陳而但語音一不相慣曉敢以文墨控曰夫四海之內皆可爲兄弟而天下無兩父之子矣朝鮮本以禮義相尙諫臣以直截爲風故上年春適授言責之任間金國將偸盟稱帝心以爲恠若果渝盟則是悖兄弟也若果稱帝則是二天子也門庭之內序有悖兄弟也哉覆載之間序有二天子也哉金國之於朝鮮新有交隣之約而先背之大明之朝鮮舊有字小之恩而深結之則忘深結之大恩守先背之失約於理甚不近於義甚不當故首建此議欲守禮義者是臣職豈有他哉但臣分義當盡忠孝而上有君親俱不得扶護而安全之今王世子大君皆爲俘老母存歿亦不知良由一疏之艮陳以致家國之俱禍揆諸忠孝之道掃歸蔑蔑自究乃罪可殺罔赦雖萬被誅戮實爲甘心血一釁鼔魂飛去天歸游故國快哉此外更無所言惟願速死 

잡혀온 조선의 신하 홍익한은 (청나라와 싸워야 한다는)척화의 뜻은 분명하게 밝힐 수 있다. 다만 서로 말이 통하지 못하므로 감히 글로써 밝히는 바 이 땅의 모두는 형제가 될 수는 있지만 천하에는 두 아버지의 아들이 있을 수 없다. 조선은 본디 예의를 서로 숭상하여 왔으며 간하는 신하는 오직 곧은 절개로써 기풍을 삼는다. 

따라서 지난해 봄에 임금에게 올바른 말을 해야 하는 正言정언의 직책을 맡고 있을 때 금나라가 맹세를 저버리고 황제라 칭한다니, 패륜의 행위라 생각했는데 만일 맹세를 저버렸다면 이는 패륜의 형제요, 만일 황제라 참칭했다면 이는 두 개의 천자가 되는 것이다.

어찌 한 집안에 패륜의 형제를 둘 것이며, 거기에 더해서 어떻게 두 아버지를 둘 수 있겠는가, 금나라는 우리 조선과 새로 교린의 약속을 하고서 먼저 그것을 배신했고, 명나라는 조선과 오래도록 선린의 적잖은 은혜로 더욱 깊게 맺고 있는데, 큰 은혜를 지키는 깊은 결속을 저버리고 먼저 배신하란 말인가?

약속을 저버리는 것은 매우 어긋난 의리요 사리에 합당치 못하다. 따라서 먼저 이 척화의 의견을 세워서 예의를 지키고자 한 것이다. 이는 신하된 자의 직분이다. 어찌 다른 뜻이 있겠는가?

다만 신하의 직분은 당연히 충과 효를 다하여 위에 계신 임금과 어버이를 모시는 것이나. 안전하고 편안히 모시지 못하여 지금의 왕세자와 대군은 다 포로가 되었고, 노모의 생사는 알 길이 없다. 참으로 단 한 번의 상소의 진술로 말미암아 가정과 나라의 재앙을 가져왔으니, 따지고 보면 충과 효의 도를 모두 날려버린 셈이다. 스스로 나의 죄를 생각하니, 죽어도 용서받을 수 없다. 만 번 죽임을 당하더라도 달가운 바이다. 한 방울의 피가 북에 튀겨 혼이 고국 하늘로 돌아간다면 이 얼마나 기분 좋은가! 더 이상 할 말 없다. 어서 빨리 죽이라!

☞: 洪翼漢홍익한: 1586~1637 본관:남양. 삼학사의 한사람 1636년 청나라가 속국시하는 모욕적 조건을 내세워 사신을 보내왔을 때 사신을 죽임으로써 설욕하자고 주장하였다.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척화론을 폈으나, 남한산성에서 왕이 화의하니 오달제 ·윤집과 함께 심양에 잡혀가 끝내 굽히지 않고 죽음을 당해 적들이 감탄하여 삼한삼두(三韓三斗)의 비를 세웠다. 저서: 화포집.  북행록. 서정록.



○九月十五日京奇胡差出來平安監司沈演義州府尹定州牧使捉去不知其由或云唐將智謀曰朝鮮事中國如前貢獻不絶云而多散施國物貨汗信聽設之所致云   

9월 15일 서울 소식으로는 청나라 사신이 나와서 평안감사 심연의주부윤, 정주 목사를 잡아갔는데 그 이유를 알지 못한다고 한다. 어떤 이가 전하길 명나라 장수가 묘한 꾀를 내여 말했는데 명나라와 조선과의 관계는 아직 끊어지지 않고 전과 다름없이 명나라에 공물을 바친다고 하므로 이로써 나라의 재정이 많이 소진됐다고 하니 청나라에서 이 말을 곧이듣게 만든 것 때문이라고 한다.

☞:  인조실록:  10월 1일 청국이, 명나라 배가 서해에 출몰하는데도 금지하지 않았다는 것을 이유로 우리나라로 하여금 그 감사·병사와 지방관을 문책할 것을 명하였다. 이에 전 감사 심연과 전 병사 김응해 등을 나국할 것을 명하고 얼마 후에 파직시켰다.



○二十一日夜中白雪沒足道路難通○市價木花好木則一匹三斤麤木則斤半惑二斤正十□太三斗稅太一石麥代石○二十五日寅時遇甲生生於祖母還甲故名之十八日陽春生

21일 밤에 온 눈에 발이 빠져 길을 다니기 힘들다. 시장의 물가로 좋은 목화는 면포 한 필당 3근이다. 거친 것은 한 근 반 또는 두 근이다. 면사 10속에 콩 세말이다. 조세로 내던 콩 한가마니는 보리 한가마로 대신한다. 25일 새벽 4시 경에 甲갑이 태어났다. 태어난 時시가 할머니의 생신 甲子갑자와 같아서 지은 이름이다. 18일 양춘이 태어났다.



○本道方伯乃諸大臣等拿送鳳凰城應問罪龍將處所謂罪目者誈告中國相通事也    

본도 방백과 많은 제신 등을 봉황성으로 잡아 갔다. 청나라 용골대가 힐문하여 취한 조치이다. 소위 그 죄명이란 것이 명나라와 몰래 교역하고 거짓으로 보고했다는 것이다. 

☞:  이계(李烓)가 우리나라에서 명나라와 내통한 사실을 낱낱이 고해바치면서 이들 오신이 청국을 반대하는 주동자라고 하였기 때문에 청국의 관리가 우리나라에 직접 나와 조사한다고 다섯 신하를 심양으로 잡아갔었다. 이계는 11월 12일 나라를 팔아먹은 반역죄로 삼족을 멸하는 벌을 받고 효시된다.

이때의 경상도 방백은 정태화(鄭太和)이다. 정태화가 평안 감사로 있었을 때 이계와 친하게 지냈다. 명나라 배가 서해에 출몰할 때 정태화가 이지룡으로 하여금 선천과 철산 사이를 왕래하면서 명나라 배를 정탐하고 파수한다고 표면적으로 말을 내걸게 하고 이계에게 서찰을 보내 명나라 사람들에게 쌀과 음식을 구해 주도록 하였는데, 이계는 그 서찰을 주머니 속에 숨겨두어 나중에 스스로 발뺌을 하려는 계책을 세웠다가 이때에 와서 그 서찰까지 올려 고발했다.



◐至月初天動連有大霧○新監司安東府使林㻼除朝辭行公柒谷以避嫌遞任

11월 초 하늘이 울리더니 연이어 안개가 자욱하다. 안동부사 임담이 신임 경상감사로 부임하여 곧바로 공무를 집행했다. 칠곡에 부임된 것인데 혐의를 피해 바꾼 것이다.

☞:  林㻼은 = 林墰임담 1596~1652 본관: 나주. 1644년 경상도관찰사로 서원이 사당화(私黨化)하는 폐습을 상소했고 1646년 충청도관찰사로 유탁(柳濯)의 모반사건을 처리했다. 그 후 형조참판·대사간 등을 거쳐 이조판서가 되고 효종 때 1652년 의금부판사에 올라 청나라 사신의 반송사로 의주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죽었다.



○冬日溫和處處反耕○初四龜山孫女歸其家○汗欲殺林慶業發差捉到金郊驛脫身逃走不知去處

겨울 날씨가 따뜻하여 곳곳에서 밭을 갈아 업는다. 4일 구산(안계9km)의 손녀가 본집으로 돌아갔다. 청나라에서 임경업을 죽이려 잡아가는 도중 황해도 금천군 금교역(개성)에서 몰래 달아나서 어디로 갔는지 거처를 알 수 없다.

☞:  11월 6일  팔도로 하여금 대대적으로 수색하게 하고 아울러 현상금을 걸어 체포할 것을 명함.



○前兵使金俊龍病死刑判具宏自決死朝廷大臣連絡捉去或殺或拘留不還

전 병마절도사 김준용이 병사하였다. 형조판서 구굉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조정대신이 줄줄이 잡혀가고 혹은 죽이고 혹은 잡아가두어 돌아오지 못한다.

☞: 具宏구굉이 자결 했다는 것은 의외의 기록이다. 인조 임금의 외삼촌으로써 1577~1642 본관: 능성. 인조반정을 이룩했다. 훈련대장 어영대장 포도대장 총융사 등을 역임하였다. 척화신을 몰아냈음으로 사람들이 다 그를 미워하였으나 상당히 청렴하다는 이름이 있었다.

金俊龍김준용 1586~1642 본관: 원주. 무신으로 영남절도사 사임 후 사망



○大小道路設盗直物色林慶業無行狀者難爲通路其弟亨業見捉受刑一次而慶業浮海向中原云 

크고 작은 도로에 검문소를 설치하고 검문검색을 한다. 임경업이 (외국 여행허가증)행장이 없으니 이동하기가 힘들다. 그 동생 형업이 제일먼저 붙잡혀 죄를 받았는데, 임경업은 바다를 떠돌다가 명나라로 들어가고 있다한다.

☞:  11월 20일 비국이 임경업의 처자와 그 아우 임준업 및 조카 임진무 아우 임흥업과 그의 처자를 잡아 서울로 압송 금부로 하여금 수금하게 했다.



○鄕參新進取十二人柒谷林瑞以新監司四寸避嫌遞來偈往李帚白家有作墅之意  

12명이 새롭게 향교에 참에 들었다. 칠곡의 임서는 신임감사와 4촌으로 협의를 피하려 사직 하고 이추백의 집으로 쉬러갔다. 별장을 짖고자하기 때문이다.

☞: 林瑞는 林㙐 임타이다. 칠곡의 임타는 신임감사 임담과 4촌으로 같은 집안사람끼리 가까운 곳에서 관리를 한다는 세간의 평이 부담스러워 협의를 피하여 사직함.



○冬初夜夜迹雪譊曰臘前三白豊年之兆無乃大有年之瑞節

동지 달 초승에 밤마다 눈이 내리니 서로 다투어 말하길, 동지(冬至)가 지나고 세 번째 술 날이 되는 날에(第三戌日) 행하는 제사 이전에 눈이 세 차례 내린 것은 풍년의 징조이다. 그동안 풍년이 없었는데 상서로운 절기라고 이야기한다.

☞: 臘前三白 : 납제(臘祭:동지후 第三戌日에 행하는 제사) 이해의 동지 날은  음력11월 29일이다.

○閏十一月望日大霧所謂夏霜冬霧非常之變始見碧魚嗚呼晩矣

윤11월 15일 안개가 짓게 낀다. 여름에 서리오고 겨울에 안개가 끼니 예사롭지 않은 이변이다. 애초부터 고등어 맛보기는 이제! 틀렸구나.

☞: 壁魚벽어: 사전 상으로는 10cm에 불과한 물고기이다. 일기 내용을 추론하면 벽어는 고등어인 듯하다. 고등어는 古道魚고도어라고 한다.   일괄 고등어로 칭했다.



○念夜迹雪雪後無風暫霧南賊無時到館奇慮○都事朴椶下來到良才濫刑臺諫所啓杖一百奪告身  

20일 밤새 눈이 쌓였다. 눈이 온 뒤 바람도 없이 잠시 안개가 꼈다. 남쪽에 적들이 때도 없이 부산의 왜관에 들이닥친다 한다. 갑자기 걱정이 된다. 도사 박종이 부임하러 내려왔다가 양재 감형에서 멋대로 형벌을 적용한 죄로 대간이 아뢴바 대로 곤장 백대를 치고 벼슬의 직첩(職牒)을 거둬들였다. 



○兵使喪輿過邑上去時差使貟義興伜護喪承有㫖擧行○念四邑伜成親事乃慶州府尹朴遂弘孫也

병마절도사(김준용)의 상여가 우리 읍을 지나 갈 때 임시관원이 의흥(군위)군졸을 동원해서 상여를 들도록 하자하여 그 뜻을 받들어 거행했다. 24일 고을 수령의 집에 혼사가 이뤄졌는데 는데 경주부윤 박수홍의 손자이다.

☞: 朴遂弘은 朴守弘이다. 1588~1644 정묘호란 때 강화로 인조를 호종하고, 돌아와 금구현령으로 전란 피해복구에 힘썼다. 뒤에 예조참의, 경주부윤으로 부임, 임기를 마치고 상주에서 객사(客死)했다.  경상북도 구미시 봉곡동 백인당(百忍堂)거처



○精兵往瀋陽○十二月初四五六連有夜雪朝霧之變○都事鄭昌冑下批○羅同知萬甲捐世

정예부대가 심양으로 떠났다. 12월 4,5,6일 연이어서 밤에는 눈이 오고 아침에는 안개가 끼는 이변이 있다. 도사에 정창주가 정해졌다. 동지중추부사 나만갑이 세상을 떠났다.

☞; 鄭昌冑 정창주:  1606~? 본관 초계.《만사집》을 남겼다.

☞:  羅萬甲나만갑: (1592~1642) 본관 안정. 청나라와 강화 후 무고로 남해에 유배되었다가 1639년 풀려나 영주에서 죽었다. 병자호란의 참상을 후세에 남기고자 인조14년12월12일부터 다음 해 2월8일까지 57일간 겪은 사실들을 낱낱이 기록한 병자록(丙子錄)의 저자이다.



○初五夜地動雷電發胡差二愽氏之行以林慶業搜覓事各卛家丁十二名出來云○十九日夜大雪霧塞○尙州居尹起雲接訟于赤羅驅迫應訟可昇

5일 밤 지진이 일고 천둥 번개가 친다. 청나라사신 두 愽박씨 일행이 임경업을 수색하려 12명의 가솔을 거느리고 우리나라에 들어왔다 한다. 19일 밤에 큰 눈이 오고 안개가 끼다. 상주의 윤기운이 적나(군위)에서 소송을 당했다. 몰아세워 응송하면 이길 수 있다.



○胡差二愽氏留之京期於窮捕慶業厥家丁日日咨行於大臣家不如意則韇朴之其爲辱不資而索林不己申勑各道機察關津山谷使麌俠不時擲扞民間騷擾○二十八雨雷虹見夜作大風

청나라 사신으로 온 두 愽박씨가 임경업을 잡으려고 서울에 머무르는 동안 그똘마니들이 매일같이 대신들에게 방자하게 굴었다. 똘마니들이 마음대로 되지 않자 화살 통으로 때리며 욕을 보이는데 임경업을 잡는데 계속해서 수색하지 않고 각도의 나루터와 산과 계곡을 샅샅이 검문검색을 단단히 단속하지 않아서 임경업을 잡지 못했다하여 그렇게 욕보인 것이다. 사신들이 때지어 설치다가 갑자기 던지고 때리니 뭇 백성들이 떠들썩하게 들고 일어났다. 28일 비와 천등이 치고 무지개가 보였다가 밤에 큰 바람이 분다.

☞ : 12월 9일 박씨 등이 닭이 세 홰 째 울 때 황주를 떠났는데, 정명수가 길가에 꽂아놓은 횃불이 드물게 있다고 크게 노하여 도사 신응망을 잡아 갓을 벗기고 몰고 오다가 서흥에 이르러서야 풀어주었다.






癸未年 仁祖21年 1643년 明- 崇禎  淸- 崇德8年(당69세)


역사보기/  1월 14일  역관 정명수가 오는 길로 곧장 김상헌이 기거하고 있는 곳으로 가서 가는 노끈으로 김상헌의 두 팔을 묶어 방 안에 안치하고 그의 서책을 모조리 불태웠으며, 의복과 기물은 그의 종에게 돌려주었다. 

4월 2일     경기의 기민 1천 명을 구제하게 하다.

4월 5일     경상·전라의 어영군과 정초군에서 조발하여 심양으로 보내다. 

4월 27일    경상 병사 안몽윤 인견.

9월 1일     청나라의 칸이 죽어 염습에 쓸 물자를 요구하다.

10월 22일   금주의 군졸 가운데 굶주림과 질병으로 죽는 자가 속출하다. 

10월 25일   경상 감사 원두표가 사조하니 가산 산성의 방비에 힘쓰라고 하다. 

12월 3일    소현 세자와 빈궁이 12월 15일에 심양을 출발할 것이라고 치계하다.

세자가 제왕에게 이르기를 ‘빈궁이 수년 동안 타향에서 지내어 임금의 안부를 살피지 못한 지가 오래 되었고 요즘 부친의 상을 당하였는데도 달려가 곡하지 못하고 있으니, 인정이나 사리로 보아 뭐라고 형용할 수 없다.’하니, 제왕도 함께 돌아가라고 허락하였으나 반드시 원손·제손 및 인평 대군의 부인과 12월 20일까지 봉황성에서 서로 교환하자고 하였습니다.

12월 7일   원손과 제손이 심양으로 떠나다. 

◐正月初一日溫和初五日白雪 ○七日乃人日也 終夕陰盛日不出可嘆 

1월 1일 따뜻하다. 5일 눈이 오다. 7일 오늘이 오순절제의 하나인 초이렛날 과거(科擧)보는 날이다. 저녁까지 구름이 꽉 끼고 해가 보이질 않는다. 한숨이 나온다.

☞:  人日: 정월 초이레 인일(人日)이 오순절제의 날  人日製 (인일제) - 조선조 때 임금이 친히 제학들을 불러 과거 시험을 치른다. 인일제(人日製)이다.



○十五月出如乙丑年人言年豊之象云 

15일 달뜨는 모양이 18년 전 1625년(乙丑年)과 같다. 풍년이 들 모양이라고 한다.

☞: 양력 1643년 3월 5일 이날은 여느 때와는 달리 만월의 보름달이 해가 지기도 전에 다른 때 보다 조금 작게 보인다. 18년 전인 1625년(乙丑年)에도 같은 현상이 일어났다고 기록하고 있다. 1625년(乙丑年) 2월 21일 경에 같은 현상이 나타났었다.

이때 현상은 달과 지구의 거리가 가장 멀리 떨어졌을 때 나타난 현상이다. 지구와 달의 거리는 36만 3,300km에서 40만 5,500km 범위에서 변화한다.

달은 지구를 타원형으로 공전한다. 지구와 거리가 멀리 떨어져 있는 만큼 다른 때 보름달 보다 조금 작게 보인다. 

18년 10일을 주기로 나타나는 천문현상이다. 18년 10일의 시간은 사로스주기(saros cycle)를 의미한다.

사로스주기란 달은 황도와 백도의 한 교점에서 삭(朔)또는 망(望)이 된 후 6585일 후에 같은 위치에서 다시 삭 또는 망이 된다. "사로스 주기"는 6585일 = 18년과 10일 또는 11일이  된다.

선생은 18년 전 양력 1625년(乙丑年) 2월 21일 경에 같은 현상을 목격 했다는 사실을 가록에 남겼다. 선생은 아마츄어 천문학자 쯤으로 보인다. 천문에 관심이 없었다면 어찌 18년 전의 현상과 비교가 가능할 수 있었을까! 어째든 대단한 관찰력이다.



○十八大雪○通新使尹順之副使趙絅書狀官申濡二月二十日發京三月望乘舟事定奪云

18일 눈이 많이 왔다. 일본으로 갈 조선통신사를 윤순지로 부사를 조형으로통신사의 기록관을 신유로 하여 三使삼사가 2월20일 서울을 떠나 3월 보름날 뱃길에 오른다는 사안을 임금이 제가하였다한다.

☞:  통신사는 2월20일 출발하여 10월 29일 돌아왔다.

尹順之윤순지: 1591~1666]본관: 해평 병자호란 때 아버지가 평안도관찰사로서 적의 침입을 막지 못한 죄로 사사되자 은거. 1643년 통신사로 일본에 다녀왔다. 1657년 선조수정실록 편찬에 참여. 공조판서. 시와 글씨에 능함 문집: 행명집


○二十三日雪風大作終夜雨風翌明念四嚴寒倍於冬

23일 눈보라가 세차게 불더니 마침내 밤에는 비바람으로 변했다. 다음날 맑게 개였다. 24일 혹한이 예년의 배는 된다.



二月初五種米牟與西疇與南洞田○愽氏之房妓抄出城內市井處子以禮曺治裝錦衣將則各納三家丁則每各一人臨行皆駄去至義州上下皆脫取盛裝甚者至於裠脫去其女等赤身以手掩其夲不耐見云或狄之心甚於斯可見矣京城痛哭大失人心

5일 서쪽 밭과 남쪽 골짜기 밭에 봄보리 씨를 넣었다.

청나라 사신 愽박씨가 성안의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에서 기생을 차출해 가는데 처녀는 고관집의 짝이 되여 비단옷을 두르고 살 것이라 하며 3명의 가솔들이 각각 한 명씩 병차에 실어갔다. 의주에 이르러 비단 치마와 저고리를 모두 벗겨갔다. 횡포가 더욱 극심하여. 속옷까지 벗겨가니 여인들이 벗겨진 속살을 손으로 가리니 차마 그 꼴을 눈뜨고 볼 수가 없었다고 한다. 또 금수의 극심한 본성을 보여 주려함인가. 한양이 통곡하니 크게 민심을 잃었다.



◐三初吉朝見之夜雪滿乾坤此非常之變也○初信使之行自商山到縣三日向軍威上下元役甚衆支供之事一邑振動

3월 1일 초하루 아침 밤사이 눈이 내려 온천지가 하얗다. 전에 없던 기상 이변이다. 1일 통신사 일행이 상산(상주)에서 본 현에 당도하여 3일 군위로 향해 가는데 상하의 군졸들의 군역이 심하다. 일행을 받들어 모시는 일로 읍내 전체가 시끌벅적하다.

☞: 조선통신사: 규모는 수행인원 462명 총책임자인 3사(三使) 외에 제술관, 통역, 화가, 악공, 무용수, 마상곡예사 등을 망라한 300~500 명 규모였다.



○淸陰移囚北關獄云可嘆○旱氣至此處處乾何種○呂泉倅兪撤弃官歸兪也愛民淸白第一吏民咸戴之與上信使尹前有水火之势到郡以埋沒接對言於方伯兪也聞奇卽馳去行裝但衣衾袱而己郡人失望云         

청나라에 잡혀간 김상헌을 사형수를 가두는 심양의 북관 옥으로 옮겼다한다. 한탄스럽다. 가뭄이 심해 곳곳이 마른다. 씨앗은 어떻게 뿌릴까? 여천(예천)고을 수령 유철이 관직을 버리고 돌아갔다. 유철은 백성을 사랑하고 결백하여 제일의 청백리로 백성모두가 받들었다. 위의 통신사 윤순지와 같이 전에 급히 처리할 일이 있어 군현에 왔는데 방백이 접대하는 말이 매몰찬지라 유철이 기이하게 듣고 급히 돌아가는데 그 행장이 단벌옷과 이불 보따리뿐이었다. 군현사람들이 실망했다한다.

☞:    兪㯙: 1606∼1671 본관: 기계. 대사헌·



○十七日夜洒雨浥塵而己○旱旣甚矣兩夜晝蹲蓬頭鬼面飢民四散道路弃其子者不知其數大丘地全氏士子見一女投其子於江中全也㥯極之告于方伯其母逃之伯以遺弃救活立案成給于全也全不受云不忍見故收之耳聞者無異於癸甲矣         

17일 밤에 먼지를 적실만큼의 비가 왔다. 가뭄이 이미 심하게 들었다. 이틀간 밤 낯으로 마구 헝클어진 머리로 귀신얼굴을 한 굶은 사람이 사방을 배회하고 다닌다. 도로에는 자식을 버린 자가 부지기수이다. 대구의 선비 전씨라는 양반이 강물에 자식을 던지는 한 여자를 발견하였다. 전씨가 극구 말리고 방백에게 고하였는데 그 어미가 달아났다. 방백이 내버리고 돌아보지 않는 아이를 구활할 방도를 찾고자 비용을 마련해 전씨에게 부탁하니 전씨가 받지 않았다 한다. 차마 두고 볼 수 없어 방백이 거뒀다한다. 이 말을 들은 사람들은 내년에도 또 다를 바 없다고 한다.



○淸使三行出來上幣則九升木四十尺一匹直常木六匹中幣則六七升分定各官吾責應上四十二匹中七十三十匹民間罔知攸措非但此支待雜物尤多○三月二十六日安定張座首別世同月二十八日金銀守亦逝○二十八日南君汝舟兄避病來於我信宿連枕論惟曰與正郞兄氏同訪南太別于南水岩正郞兄口占一句曰      

청나라 사신이 세 번째 나오는데 올리는 폐물이 9승 목면 40척이다. 1필당 상목 6필이고 중폐는 6.7승으로 각 관아에 나눠서 배분했다. 우리 읍에서 마련해야할 량은 최고품의 목면 42필 중품 30필이다. 백성들은 어찌 할 바를 모른다. 비록 이 물품을 갔다 바친다 해도 또 내야할 잡물은 더욱 많다.

3월 26일 안정(경북 의성 비안)의 장좌수(향청의 우두머리)가 별세했다. 28일 김은수 또한 세상을 버렸다. 28일 친구 남녀주가 전염병을 피해서 우리 집에 왔다. 이틀 밤을 자면서 계속해서 잠자리에 들어서 지난날 이야기를 하는데 정랑 형님과 남수암에 가서 남태별을 방문 했는데 정랑 형님이 즉석에서 한 구절을 시를 읊었다는 것인데

我騎君步十里坪         그대는 걷고 나는 말을 타고 십리길 편히 와서.

來訪南君眼却靑          남군을 찾아보니 눈빛 반가워

曾把小舠橫晩渡거듭잡은 잔 술잔위로 언뜻 황혼이 밀려와

炯凝寒水暮鍾聲          노을빛 엉킨 찬 물결위로 저문 종소리 퍼지네.

之詩傳誦之聞來不勝惻然之至念九散步遊於龍潭邊回飮柭酒大醉還同宿 

이시를 전해 듣는 동안 측은한 생각을 버릴 수가 없다. 29일에 용담 주변을 산책하며 소요하다가 술을 많이 마셔 크게 취하여 돌아와 함께 잦다.

☞:  정랑형님: 용담 선생의 맏형.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순국한 金喜김희:1565 -1592

南太別남태별:1568∼1635 본관: 영양. 임진왜란 때 의병장 곽재우의 의진에서 활동 장사랑을 제수 받음. 경서에 뛰어남  晴川實紀 권1-2 있음. 당시 안동(일직) 거주.

의병활동을 했던 金喜김희와 남태별은 서로 절친한 사이였나 보다.

정랑 형님은 1592에 사망 했고 남태별은 1635년에 사망했음.



○淸國頒赦還送五臣                                       

청나라에서 경사가 있는 날에 다섯 신하를 사면하여 되돌려 보냈다.

☞:   척화오신(斥和五臣): 신익성(申翊聖)·신익전(申翊全)·허계(許啓)·이명한(李明漢)·이경여(李敬輿) 이계(李烓)가 청나라를 반대하는 주동자라고 하였기 때문에  1642년12월에 심양으로 잡혀갔었다.


○四月至旬不雨兩麥枯槙川澤凅渴大命近之○旬朝來家北盤石回口占一句曰

4월 10일에 이르도록 비가오지 않아 보리와 밀이 마르고 전천의 물이 빠져 바닥났다. 하늘의 큰 재앙이 가까이 왔음이다. 10일 아침에 집에 왔다. 북쪽 반석에 둘러앉아 시를 읊다.



先君曾愛石來          어르신이 아끼던 바위에 와서

坐今朝淚滿䄞 무릎 꿇고 이아침 눈물로 제상을 차리려네.



○十三地動振天地屋壁搖振人皆驚惶○今淸使請曰第一凢事除獘所求者扇子百而己道民祝手與帶金累同稱淸儉夷虜之邦亦有人矣                 

13일 지진이 하늘과 땅을 울렸다. 가옥의 벽이 요동하니 사람들이 놀라 두려워서 허둥댄다.

이번에 나온 청나라 사신이 말하기를 우선 일상의 폐단을 제거하고 부탁한 것이 겨우 부채 100개뿐이다. 도민들이 반겨 축하하면서 청나라 사신“대금루”라는 자는 오랑캐 중에서도 청렴결백한 사람이다. 역시 오랑캐 마을에도 사람다운 사람이 있구나 하였다.



○永川李晶李汝海不意拿去大㮣傷時之嘆作詩譏議使其孽族呈于淸使之致終乃以寃枉見得襏刑費之木多至五同云

영천의 이정. 이여해가 갑자기 잡혀가 큰 몽둥이로 맞아 다쳤을 때 한탄하여 지은 시를 비꼬아 평하여 인용해서 천박한 족속이라는 말이 청나라 사신에게 고하여지자 결국에는 억울한 누명을 쓰고 매를 맞느라 헌옷만 만든 꼴을 당하였으니 곤장이 다섯 다발이나 들었다한다.

☞: 推案及鞫案추안급국안 기록에 1643년. :이정해‚ 이여해 이정등의 죄인들을 공초한 기록이 있음

체제에 대항한 자들에 대한 중죄인의 추국을 거쳐 국왕의 판결을 기록 한 책



○其雨之望己極末由生生人皆咨嗟嗷嗷之聲不絶於道路○四月十七洒細細雨如是者連四日得雨僅一犂而如在洪炉之餘人民大悅其甦○四月念一藨麥念二始播井畓稻自念三至念六連雨江漲兩麥盡淹沈七日快晴無高低水溢                     

비를 기다리기조차도 극에 달해 살아갈 길이 없다. 산사람 모두가 애타게 탄식하는 떠들썩한 소리가 길가에 끊이질 않는다.4월 17일 가는 비가 오더니 4일간 계속된 비로 단 한번 밭갈이 했는데도 천지조화의 여유로움이 있는 듯 모두 기뻐하며 이제 살았다고 한다.

4월 21일 쥐눈콩과 보리 22일 볍씨를 담그고 물을 대여 못자리를 시작했다. 23일까지부터 26일까지 연이은 비로 강물이 불어나서 밀과 보리는 모두 물속에 장을 담갔다. 7일 쾌청해졌다. 물이 넘쳐 높고 낮은 곳이 없다.



◐五月初一日爲始雨雨初三往柒谷偶所稱病不出見慟憤憤往李僉知元己家大醉飽而還午後雨始仍

大霖江水大漲

5월 1일 시작한 비가 3일 까지 내렸다. 칠곡에 둘째 아내가 있는 곳에 가니 아프다고 내다보지도 않아 화가 났다. 화김에 첨지 이원기 집에서 술을 많이 마셔 크게 취해 돌아왔다. 오후에 비가 시작되더니 장마 비로 강이 넘친다.



○金淸陰崔鳴吉蒙赦姑留世子館近處又林慶業族屬而林慶業妻及婢二口則不赦仍囚義州留置朴潢申得淵曺漢英蔡恒幷放送龍將以金崔兩臣蒙赦今西向謝恩再拜崔卽行禮金稱痛不爲之龍將强勸而不爲之臥龍將久睌視而去此四月三日成貼狀啓也           

청음 김상현 최명길이 특별히 사면되어 우선 세자관(의주)가까이에 머물렀다. 또 임경업의 식솔 중 경업의 처와 노비 둘은 사면되지 않아 의주의 감옥으로 보냈다. 박황(朴潢)·신득연(申得淵)·조한영(曺漢英)·채이항(蔡以恒) 등을 내보냈다. 용골대가 김상현 최명길 특별히 사면하는 즉 서쪽을 향해 사은의 절을 하라하니 최명길은 즉시 예를 올렸다. 김상현은 아프다는 핑계로 절을 하지 않았다. 용골대가 강력히 지시하는데도 절하지 않고 드러누워 버리니 청나라 용장이 한참을 껄끄럽게 노려보다가 갔다. 이때가 4월 3일이다. 민정을 살핀 결과를 작성하여 임금께 올렸다.

☞: 崔鳴吉최명길: 1586~1647 본관: 전주. 인조반정에 참여한 반정공신이다. 이괄의 난과 정묘호란의 극복 병자호란 때 강화를 주관. 임경업을 통해 승려 독보를 명나라에 보내 비공식적 외교관계를 유지한 일이 발각되어 청나라에 끌려갔다. 문집: 지천집.

朴潢박황:     1597~1648 본관: 반남. 볼모로 가는 소현세자를 수행했고 심기원의 역모사건에 연루되었다 풀려났다. 글씨에 능함.

申得淵신득연: 1585~1647 본관: 고령. 경상좌도양전사를 역임한 뒤 세자시강원빈객으로 청나라에 파견되었다. 1643년 그의 생질 이거가 명나라와 밀무역한 것을 알고서 고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제주도에 유배되었다가 1647년 진도로 이배되었다.

曺漢英조한영  1608~1670 본관: 창녕. 청나라가 왕손을 볼모로 보낼 것을 요구하자 이를 반대하다 청나라에 끌려가다. 저서에 회곡집이 있고 해동가요에 시조 두 수가 전한다.

蔡以恒채이항  1596-1666 본관: 인천.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동지들과 의병을 모아 경상우병사 민영과 감사 심연등을 도왔으나 화의가 성립되자 향리로 돌아가 복수책을 상소하였다.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霖雨之雜兩麥難收或蒔或播種望後連注大雨十七江漲用楫苦旱之餘又苦霖所穫之麥家無擔石農人饑因不能役事可嘆念一川漲難通暴雨峽間田畓沒數水破難辨田形非徔今年失稔永弃耕作吁亦慘矣和氣由人也而近崴人事慘酷者日積何以致陰陽之和也              장마로 어수선하다. 밀과 보리는 수확하기 어렵다. 모내고 씨 뿌린 후 수확을 기다리는데 연이어 큰비에 내린다. 17일 강물이 불어나서 배 젓는 일을 해야 한다. 힘든 가뭄에 여유를 찾는 듯하다가 또다시 장마로 인해 거둬야할 보리는 집집이 빈 항아리뿐이다. 농민은 기근으로 말미암아 노역 일도 할 수 없다. 탄식이 나온다.

21일 하천이 범람해 통행이 두절되고 폭우로 골짜기 사이 논과 밭이 여러 차례 수몰되어 밭의 본래 형태를 구분할 수 없을 만큼 파괴되어 어찌할 수가 없다. 올 농사는 이미 망쳤으니 경작을 포기하고 탄식뿐이니 참혹하다. 조화의 기운은 인간사로 비롯되는 것이나 근래 세상사 참혹함이 날이 갈수록 더해만 가니 어찌 음양의 조화가 이러하단 말인가?



○陜川所根十三地震公私家舍墻壁居半頽落官門外大路十餘把坼裂西北里人多壓死云念四乃吾人知之也坐北栗亭大醉負還薄暮孝述亦盛饌而來達夜痛飮   13일 협천(합천)에서 발원한 지진에 관아와 집의 담벼락이 거반 무너지고 관문이 떨어져 나가고 큰 길 10여 곳이 갈라졌다. 서북리에서는 많은 사람이 깔려죽었다. 24일 오늘이 내 생일이다.북율정에 앉아서 술을 마시다가 대취하여 업혀 왔다. 어둑어둑해질 때 효술이 풍성하게 잘 차린 음식을 가지고와 밤새 흠뻑 마셨다.



○念五與孝述與子孫輩往鵾變家大醉而來近日連患醒病庚炎甚酷閟閟六月初一日耕西疇種亦豆人皆曰節晩  

25일 효술과 그 아이들과 곤섭의 집에 갔다. 술을 많이 마시고 돌아왔다. 요즘 연이은 술병에 무더위까지 혹심하니 답답하다. 6월 1일 서쪽 밭을 갈고 팥 씨를 넣었다. 사람들 모두 절기가 늦다고 한다.



○金奴暴死可惜初二甚熱○田三稅一時囚次知督發待秋備給則本米一石三十三匹收米三十匹太二十八匹卽今備給則本米一石二十匹太一石十七八匹責出民間踈動或賣田宅或賣牛馬罔知攸措余七十年來田稅之艱備未有甚於此時也 

노비 김씨가 참혹하게 죽었다. 애석하다. 2일 무척 덥다. 세 번 내는 농지세를 한 번에 다 내라한다. 집안일을 맡아보는 사람을 가둬놓고 얼리고 독촉하는데 가을에 세를 내면 원래는 쌀 한 가마니 당 3말3되를 징수하고 쌀 3말에 콩은 2말 8되를 친다고 한다. 지금 당장 받치면 쌀 한가마니에 두 말, 콩 한 가마니에 17,8되만 징수한다고 한다. 책임지고 내놓으라 하니 백성들 사이에서는 뜸을 들이다가 아예 집과 밭을 팔거나 소와 말을 팔아치우며 어찌할 바를 모른다. 내 70평생 살며 준비도 없이 농지세를 미리 내라하니 난감하다. 준비도 못했는데 오늘날에  너무 심한 시국이다.



○九日長霾之餘處作炎旱沓無水田龜圻未得立苖民有飢餓色市直日縮一匹皮牟四五斗米牟則三斗稻則四斗直麥則四斗乞糧不絶道路咨嘆

9일 오래 동안 흙비가 내린 나머지 여러 곳의 작물이 찌는 가뭄에 타들어가고 무논에는 물이 마르고 밭은 거북등처럼 갈라지니 씨를 세우지도 못한 농민들은 기아에 부황이 나고 시장은 위축되어 면포 한 필 값이 겉보리 4,5말 쌀보리는 3말 값이다. 벼 4말에 보리 4말 값과 같다. 빌어먹을 곡식조차도 없으니 길가에는 한탄뿐이다.



○自初旬至三日雨水浹水洽農夫大悅錐然稻蹲田穀盡枯木麥種甚貴處處皆陳前頭計活可慮

달초부터 10일에 이르러 3일간의 비로 흡족한 비가 내려 농민들이 기뻐한다. 뾰족하게 벼는 쭈그러들고 밭곡식은 모두 고사하여 메밀은 더욱 심하니 이곳저곳 할 것 없이 모두 진을 치고 머리를 맞대고 살아갈 계책을 논의 해보지만 걱정스럽다.



○十七太守與軍威義興新舊柒谷申注書會集于李連機薹岩樂忌避者再宿于時申使倅間于児輩六月東海壁魚滿發云 

17일 태수와 군위, 의흥의 신구 수령, 칠곡의 신주서가 모여서 이연기의 대암에서 즐기는 것을 피한 것인데 이틀간 모였을 때 신주서가 고을 수령을 시켜 아이들에게 문안을 했다. 6월에 동해에 고등어가 많이 잡힌단다.



◐七月初一日爲始或雨晴根田陳荒牛馬價歇極大牛無過七八匹亦如之非徑牛馬繁息木花最貴之故也村閻間疾病大熾或死熱病或死於痔疾死於飢餓死亡尤多. 

7월1 일을 시작으로 비가 오다 개다한다. 딱딱해진 묵밭은 거칠어지고 소와 말의 값은 형편없이 떨어져서 큰 소는 7,8마리에 불과하니 이 역시 우마를 번식시키는 데는 올바른 일이 아니다. 목화가 가장 귀하니 가뭄 탓이다. 시골 주변마을 사이에 질병이 창궐하여 혹은 죽고 열병에 죽고 치질로 죽는데 굶어 죽는 사람이 가장 많다.



○七月十七日宗漢生生鋔七日運身於房內八月十五日夜淸無霧此日無霧則明夏麥吉之非也與松吝金座首掃墳于黃川同日方伯到縣留一日向義城  

7월 17일 손자 종한이 태어났다. 배안에서 7일간을 돌기만하여 잡아 당겨서 출산했다. 8월 15일 대보름날 밤 안무도 없이 맑다. 보름날에 안무가 없이 맑은 것은 내년 여름보리에 좋지 않다. 송린과 같이 황천의 김좌수 산소를 벌초했다. 이날 방백이 현에 당도하여 하루를 머물다 의성으로 갔다.

☞:  宗漢종한: 둘째형님 吉길에게 양자로 간 鑛광의 막내아들



◐九月初二日耕秋牟西田初五霜降初八雨洒耕牟者病焉初五日未時義娘生○九月初汗計音來七目賦于中國中流失而死秘不發喪今始發喪其爲術也深矣火葬所入帋地求索于我國七萬餘束本道分定敦厚壯帋萬餘卷送田結督責尤可慟憤

9월초 2일 서쪽 밭에 가을보리를 갈았다. 5일 상강이다. 8일 비가 오는데 갈아놓은 보리에는 해롭다. 5일 오후 두시 의랑이 태어났다.

청나라의 汗칸이 죽었다는 소식이 왔다. 청나라에 초상에 쓸 7가지 부의 품을 보냈는데 도중에 잃어버렸다고 하는데 汗칸이 죽었다는 것을 비밀리 하여 상을 치루지 않다가 이제야 상을 치르는 것은 심한 술책이다.

화장하는데 들어가는 종이를 구하는데 우리나라에 7만여 속을 요구한다. 우리 경상도에 나눠 맡은 것이 두꺼운 고려견지(高麗繭紙) 만여 권이나 되니. 논밭의 조세를 독촉하는데 매우 심하다. 통분할 일이다.



○九月修籌左右兵營城左道各邑編伍軍裏二十日粮咸聚役之死傷亦多愁痒喧騰○進士許琇京居人也前於胡亂時避來于此興兒曺相知之分得筆墨欲表情未果而逝厥內室使奴付送曰家風願不可孤負婦女局量有如此豁達也    

9월 진영을 정비하여 좌우 병영과 성, 좌도, 각읍의 편오군의 편제를 점호했다. 20일 식량을 줄여보려고 취역에 나갔다가 죽은 사람이 많고 다친 사람 또한 많다. 시름에 겨운 불만의 소리가 자자하다.

진사 허수경은 서울 사람인데 전에 병자호란 때 이곳으로 피난을 왔었다. 어린아이들이 서로 짝이 되서 예뻐하여 알고 지내는데 먹과 벼루를 나누워 주니 고마운 마음을 전하려 공부가 끝마치기도 전에 안방으로 달려가니 여종을 딸려 보냈는데 아이가 말하길 “가풍이 있는데 기대에 어긋나는 짓은 않을 것이다.”라고 한다. 여자아이의 도량이 저와 같으니 탁 트였구나! 



◐十月初九方伯之行自仁同過門前路到縣留三日跖雪紛紛義興諸山杜鵑花滿發云此何非卽○初七日西崖移葬時瀤孫與張而晩往會葬而來○二十七日圃隱退溪西崖三先生奉安于龍宮三江書院時鏡與瀤進參會員百餘云    

10월 9일 방백이 행차하였다. 안동에서부터 집문 앞길을 지나 현에 도착했다. 3일을 머무는 동안에 밟은 눈이 겹겹이 쌓이고 떠들썩하고 뒤숭숭하다. 의흥의 모든 산에 진달래꽃이 만발 했다고 하니 절기의 출근시간이 한참 잘 못 됐다. 7일 서애 유성룡의 묘(안동시 풍산읍 중동)를 이장할 때 손자 회와 장과 함께 늦게 참석하고 돌아왔다. 27일 포은, 퇴계. 서애. 세 분을 용궁의 삼강서원에 봉안할 때 아들 경과 손자 회와 같이 참석했는데 100여인이 모였다.

☞: 三江書院: 경상북도 예천군 풍양면 삼강리 

서애 유성룡 柳成龍, 1542~1607 본관: 풍산. 경북 의성 출생.  임진왜란 때 도체찰사(로 군무를 일괄, 이순신, 권율 등 명장을 등용. 화기 제조, 성곽 수축 등 군비 확충에 노력. 군대양성을 역설. 저서: 서애집. 징비록.

포은 정몽주鄭夢周, 1337~1392 본관: 연일. 고려 말기 문신 겸 학자. 의창을 세워 빈민을 구제하고 유학을 보급하였으며, 성리학에 밝았다. 1392년 이성계 일파를 제거하려 했으나 실패, 선죽교에서 방원의 부하 조영규 등에게 격살되었다. 문집: 포은집

퇴계 이황 李滉, 1501~1570 본관: 진성. 출생지  경북 예안 영남학파. 이이의 제자들로 이루어진 기호학파와 대립, 동서 당쟁과도 관련 일본 유학계에 큰 영향을 끼쳤다. 도산서원을 설립 후진양성과 학문연구에 힘씀 저서: 퇴계전서. 도산십이곡. 퇴계필적.



◐十一月初二新使元斗杓到界達夜大霧處處染病大膱死亡相繙一家或盡死不得出戶者焉 

11월 2일 심임 도사 원두표가 부임해왔다. 밤에 안개가 자욱하다. 곳곳에서 장티푸스가 크게 번져 많은 사람이 죽는다. 서로 옮겨가서 혹은 한 가족이 모두 죽었다. 할 수없이 밖에는 나가지도 못하고 있다.

☞:  元斗杓원두표:1593~1664 :본관 원주. 1642년 형조참판에 이어 경상도관찰사 등을 역임하였다. 이 기간에 서인(西人)의 공서(功西)에 소속, 청서(淸西)를 탄압하면서 같은 파 김자점과의 권력 다툼으로 분당되자, 원당(原黨)의 영수가 됨 효종의 북벌정책을 지지하여 군비를 증강하는데 앞장섰고 김육이 주장한 대동법에는 반대하였다. 1656년 우의정을 거쳐 1662년 현종 3년 좌의정에 올라 군기시의 도제조를 겸직하였다.



十一月初二信使之行還泊釜山本縣出待長川站初八發向○初七午後白雪大作初八止明雪後風尖行路病焉九日虹見十二日冬至也

11월 2일 일본에 갔던 통신사가 부산에 돌아왔다. 우리 현에서 나아가 맟을 준비를 하고 있는데 장천(경북 상주 낙동)역참에서 8일 날 떠난다고 한다. 7일 오후 눈이 많이 왔다. 8일 날 그치고 맑은데 눈이 온 후의 바람이 매서워 길을 걷기가 힘들 정도다. 9일 무지개가 떴다. 12일이 동지 날이다.(양력 1643년 12월 22일 동지 날)



初十日曾祖考妣神主奉安于吾家庙時日溫如春十一日大霧四塞午後捲㰸日氣溫和不啻三春陰陽

失庳錐非細慮當此綿花絶無之日百結蒼生祝手相賀曰皇天知我亦身俾無凍死

10일 증조와 양친의 신주를 우리집안의 사당에 모셨다. 이때 날씨가 온화해 봄날 갖다. 11일 큰 눈이 오고 사방이 안개가 자욱하다가 오후에 걷혔다. 일기가 따뜻할 뿐만 아니라 춘삼월 봄날 갖다. 음양의 절기가 바늘 끝만큼 잘 못 되도 작은 염려가 아니다. 당연히 이런 해에는 목화 꽃이 피지 못할 것이다. 

이런 날에는 겨우 몇 이랑의 땅을 일궈 살아가는 여린 백성들은 손을 들어 빌며 서로 말하길 하늘이 우리 뜻 헤아려 얼어 죽지 않게 하네! 라고 한다.



○十八日運架山還上三百石一石運價一石適値寒沍雪風薄依生民涕泣於步步此城乃李溟雄設立也人皆欸啖其內寢其皮曰爲穽國中使民芳因至於此極邱皇天皇天尙䆿無吪

18일 가산산성으로 백성에게 꾸어준 곡식을 거둬들이는데 300석이다. 한가마니 실어 올리는 운임이 역시 한 가마에 달하니 때마침 얼어붙는 눈보라에 얇은 옷을 입은 백성들 눈물을 흘리며 울면서 걷고 또 걷는다. 이산성은 이명웅이 수축한 산성이다. 모두가 성난 소리로 “그 살을 씹어 먹고 그 가죽을 깔고 잘 것이다”한다. 구덩이에나 쳐 넣어야 할 나라의 관료들이 백성을 부려먹기 이 지경까지 이르렀으니 여기가 마지막 가는 구덩이 황천이다. 하늘은 아직도 잠을 자는가? 아무런 대답이 없네!     



○新方伯元請除降各邑價布貢物皆以正五升三十五尺雜項木則廘木三十尺定規捧之今一下萬姓祝手相慶曰仁哉吳相不面今日見此周召之政也吏輩則多有不快之色何前則七八升四十四五尺捧之私自換納其規己成矣今則不肆利㱃之心故也

새로 부임한 방백 원두표가 각 읍의 면포 값을 깎아내리기를 청하였다. 나라에 받치는 면포는 모두 닷새베[正五升布]로 35척이다. 여러 종목의 면포를 록목30척으로 규정을 지키도록 한 것인데 이제 한가지로 정해지니. 백성들이 손뼉을 치며 좋아하며 말하길, 어진 분이시다. 한 번도 본 적은 없지만 오늘에서야 주나라의 주공과 소공의 정치를 보는 듯하다. 정치하는 벼슬아치들이 많으면 꼴사납다. 어째서 전에는 七八升의 베를 45척으로 받쳤는가하면 빌려준 면포를 환납 받을 때 사사로이 그렇게 (이자)규정으로 굳어져 버린 것인데. 지금은 검은 욕심을 부리지 못하게 했기 때문이다.

☞: 주공:  주왕조를 세운 문왕의 아들이며 무왕의 동생. 무왕이 죽은 뒤 나이 어린 성왕이 제위에 오르자 섭정(攝政)이 되어 주왕실의 수비를 공고히 하였다. 예악과 법도를 제정하여 주왕실 특유의 제도문물을 창시하였다. 그는 중국 고대의 정치.사상.문화 등 다방면에 공헌하여 유교학자에 의해 성인으로 존숭되고 있다. 저서에 주례(周禮)가 있다.

소공:   문왕의 아들. 무왕(武王)의 아우. 주공을 도와 주나라의 기초를 만들고 산동 반도의 이족을 정벌하여 동방 경로의 사업을 이룩했음



○二十純鄕祖母捐世李別監遭喪○二十一日郞來二十三還歸○念五夜閑分出去○念九黃昏雪積數寸晦日卽消○兵使過縣向呂泉                       

20일 순향의 조모가 별세했다. 이 별감 집에 그 아버지 상을 당했다. 21일 일랑이 왔다가 23일 돌아갔다. 25일 밤에 심심하여 볼일을 보러갔다. 29일 어둑어둑할 무렵 눈이 수촌이 쌓였다. 그믐날 그쳤다. 병마절도사가 우리 현을 지나 여천으로 갔다.



◐十二月三日姜翊周黜鄕云可羙鄕議也○亂䧴餘命唯兄第獨生同一世居同一邑同心同志出入鄕曲念曾回事歷路趋謁顧我淸眼穩叞積襞告別握手含情未洽那知此別乃是永訣執紼今朝五內焚裂來奠薄具庶幾歆格右張座首仲兄氏之喪適有薪憂有志未就尤增痛嘆○初六夜夢蛇龍長數十尺直立騰空自艮方始徐徐向南行於此洞其頭如大鶴而白如雪奇恠難形又交夢之瀤孫登科榮墳倡夫之聲喧騰觀者甚衆此亦寄夢

12월 3일 강익주를 동내에서 쫓아냈다 한다. 마을의 미풍양속을 위해 할만하다.

(장좌수의 둘째 형의 상을 당하여)남은여생 헤아리기란 어렵다. 오직 형제가 외롭게 살아가데 같은 시대에 같은 마을에서 한마음 한 뜻으로 구석진 시골마을을 드나들었다. 생각건대 일찍이 몇 번이던가 지나는 길에 달려가 뵈었고 지난날을 생각하니 나를 반기는 온화한 눈가에는 주름이 쌓이고 이별할 땐 못다 한 정에 손을 꼭 잡았었는데, 어찌 이별을 예견한 걸까?  이것이 영영 인연의 끈을 다한 이별인 것을! 지독히 혼란스런 오늘 아침 오장이 타들어 터질듯 밀려든다. 변변치 못한 예물을 올리오니 부디 강림하여 이를 흠향하소서! 이는 장좌수의 둘째 형이다. 상을 당하고 보니 결국 오랜 병으로 품은 뜻을 펼치지 못하였으니 더더욱 통탄스럽다.

6일 밤 꿈에 수십 척의 길이가 되는 사룡이 곧바로 서서 하늘을 오르다가. 동북쪽에서부터 남쪽으로 서서히 골짜기 있는 쪽으로 가는데 그 머리는 큰 학 같고 흰색이 백설 같다. 기이하고 요상한 모양이다. 꿈이 바뀌어 손자 회가 급제하여 선조의 산소에 고하고 절을 올리는데 창부가 노래를 부르는 소리가 들리고 구경꾼들이 엄청나게 많다. 이 또한 이상한 꿈이다.



○邑中上下而還上不納或刑訊或拘留薄衣蒼生甚可憐也民窮財盡賦役煩重十室九空可嘆也哉○初八終夕陰曀○林將軍以都督梟示鄭明時云實然則人心快哉○汗出還東殿云未知虛實也    

마을에서 잘살고 못 살고 간에 관아에서 빌려온 곡식을 갚지 못해 혹은 죄를 심문 받고 혹은 감옥에 넣었는데 엷은 옷 입은 백성들이 무척이나 가련하다. 백성들 재산은 궁핍한데 모두 여러 번의 과중한 부역으로 열 집중 아홉 집은 비어있으니 실로 탄성이 나오는 것이다. 8일 저녁 때 까지 구름이 끼고 음산하다.

임경업 장군이 도독이 되어 정명시의 목을 쳤다고 한다. 사실이라면 사람들이 진심으로 쾌자를 부를 것이다.세자가 청나라에서 돌아왔다는데 사실인지 알 수 없다.

☞:  사실과 다르다. 정명수는 10년 후인 1653년 심양에서 성주포수 이사용에게 살해당한다.

☞:  12월 3일 소현 세자와 빈궁이 12월 15일에 심양을 출발할 것이라고 치계하다.



○念二胃男得差鄕任見无妄大患慟憤憤此亦點下之所訴也○念三方伯聞計奔喪南民無祿振脘長嘆

20일 위남이 좀 이상한 아이를 보았다. 직접 가서 보니 황당한 재앙에 통분이 인다. 분통이 나는 것은 얼굴 아래에 생긴 점을 탓하는 것이다. 23일 방백이 부친의 부음을 듣고 달려갔는데 남 쪽 사람들이 수의도 없이 염습도 않았다 한다. 긴 탄식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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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 논란 최남선·이광수 문학상 제정 '없던 일로'

 1921년에 결혼했던 아내 허영숙과는 1946년 5월 21일에 합의 이혼하였는데,

서울신문은 이 소식을 전하며“장차 이광수가 전범으로 걸려들 때를 걱정하여,

자식과 재산의 보호를 위해서 취하는 잇속 빠른 길이 아닌가 보고 있다.”(1946년 6월 13일자)라며 비판하였다

 

 해프닝으로 끝난 한국문인협회 육당ㆍ춘원문학상

 

육당 최남선과 춘원 이광수는 1943년 11월 24일 일본 도쿄 메이지 대학에서 조선인 전문·대학생들에게 학병에 지원하라는 강연을 했다.
당시 도쿄에서 발행된 잡지 ‘조선화보’(1944년 1월호)에서 아동문학가 마해송의 사회로 진행된 육당과 춘원의 대담 내용이 기록되었다.
이 대담에서 춘원은 강연회에 대해 “일종의 극적 광경이라고나 할까.
황국을 위해 전장에 나가 죽자는 생각이 모두의 얼굴에 드러났더군요”라며
“그때의 압권은 최(남선) 선생님의 강연이 아니었을까요”라고 말했다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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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부사장[편집]

1932년 7월 30일 문인 친목단체인 조선문필가협회 발기인 및 집행위원을 맡았다.

1933년 열차로 시베리아 여행을 다녀왔다.

1933년 8월 동아일보사 편집국장을 그만두고 같은 달 28일 조선일보 부사장에 취임해 1934년 5월까지 활동했다. 9대 사장에 취임한 방응모는 동아일보 편집국장 이광수와 경제부장 서춘 등 유능한 언론인을 스카우트해 조선일보 혁신에 나섰다.[66] 보다 좋은 조건이라 생각한 그는 방응모의 제의에 응한다.

 

1933년 7월 19일 조선일보의 제9대 사장에 취임한 방응모(方應謨)는 한 달 후 동아일보에서 이광수와 서춘(徐椿)을 스카우트해 각각 부사장과 주필(主筆)에 임명하였다.[67] 9월 27일 이광수는 조선일보에 소설 '유정 (有情)'을 연재하였다.[67]

 1933년 조선일보 부사장 겸 취체역(이사), 조선일보의 편집국장, 학예부장, 정리부장 등 5개 직책을 동시에 맡아 '조선 신문계의 무솔리니'라는 별명을 얻었다.[68]

1934년 5월에 조선일보 부사장직에서 물러났으나 조선일보의 이사직은 1950년까지 유지하였다.

 

1934년 이광수는 조선일보에 실은 글에서 "아랫목에 '뜻뜻이' 등을 굽고 있는 생활은 암만 해도 투쟁보다도 은둔을 의미한다.[69]"는 견해를 펼쳤다.

 

 

 

수양동우회 사건 전후[편집]

사회 계몽론[편집]

이광수 가족사진 (1937년)
(왼쪽부터 장남 이진근, 이광수, 차남 이봉근(이광수 앞에 선 이), 부인 허영숙, 삼남 이영근(허영숙이 안은 아기))

1930년대에 이르러 자유 연애 등이 유행하였다. 이광수는 "일반 민중이 도덕적 이상이 퇴폐해서 인생의 의무라든가 사업이라든가 하는 높은 희구를 버리고 오직 성욕과 호기심만 따르게 되니, 에로란 성욕적 흥미를 만족시키는 관념군이요 그로란 호기벽을 만족시킬 만한 관념군"이라고 해석했다('동광' 1931년 1월 1일자).[70] 에로와 그로의 관념론도 좋지만 큰 뜻을 품는 대의지사가 점차 줄어들어감을 애석해하며 한탄하였다.

그러나 그는 고려조선 왕조시대 1천년의 지나친 엄숙주의는 민중들의 진취적인 기상과 자유로운 상상력을 박탈하고 삭막한 사회를 만들었다며 억지로 엄숙한 사회분위기를 조장하는 것은 반대하였다.

1930년대에는 유성기(축음기)와 라디오가 각지로 보급되었고, 유행가가 확산되었다. 이 무렵부터 인기있는 곡은 유행가라 하여 시중의 화제가 되었다. 그러나 유행가는 남녀간의 사랑에 대한 노래들 뿐이었다. '장백산인(이광수)'은 이 범람하는 '유행가'를 '전염병'이라며, "근년에 조선에 유행되는 가요는…'부어라 먹자 두들겨라'식이 아니면 주색의 방종한 향락을, 검열관이 허하는 한에서 고취하는가 십흔 것들…"이라고 비판했다.(1934년 4월 19일자)[71] 그는 유행가라는 노래들이 전부 남녀간의 사랑만을 노래한 곡들이 많지 다른 내용은 없다며 식상한 점 역시 비판하였다. 그럼에도 대중가요 열기는 좀처럼 식지 않았다.[71]

 

1934년 그가 참여하던 어린이잡지인 《어린이》지가 경영난과 조선총독부의 탄압으로 결국 123호를 끝으로 폐간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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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광수 위키백과  (0) 2016.0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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