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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世宗大王子 胎室세종대왕자 태실 조성 계기 고찰
 

 

1.  天祭와 封禪 천제와 봉선

 

천문은 제왕학
고대 제왕들의 투쟁사는 천문학의 논쟁으로부터 발단했다.
새로운 역법과 연호 제정
천하를 통일하면 반드시 태산에 올라 봉선제(封禪祭)를 지냄
관중은 제환공의 봉선을 만류했다. 진시황도 제대로 봉선제(封禪祭)를 올리지 못했다.
중국역사상 최초로 격식을 갖춘 봉선제(封禪祭)를 올린 것은 기원전 110년 한무제다.
무제가 봉선의식을 위해 태산을 방문했을 때,
천문역법을 관장하고 황실 전적을 관리하는 태사령(太史令) 벼슬에 있던 아버지 사마담은 낙양 땅에 머물다가 봉선 의식에 참가하지 못했다.
이를 깊이 한스럽게 여긴 사마담은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봉선(封禪) : 천하를 통일한 사람이 천하통일의 위업을 하늘의 상제에게 보고하는 특별한 제사로서 이 제사를 지낸 사람은 불사등선(不死登仙)을 보장 받는다는 신앙이 있었다.

 

 

2.  인물

 

世宗大王세종대왕
    이름은 이도(李燾), 자는 원정(元正). 충녕대군
    1418년 8월 10일 태종의 선위를 이어받아 왕위에 오름

 

李純之이순지
    자는 성보(誠甫)  본관양성(陽城) 천문학자.
    세종의 명으로 조선의 자주적 역법을 자주적 역법을 이룩하여
    1.450년대 조선 천문학을 세계 수준으로 올려놓은 천문학자
    交食推步法교식추보법2권 1책을 완성  七政算內外篇 칠정산내외편 저술

 

懶翁나옹
    指空지공 無學무학과 함께  三大和尙삼대화상이라 일컬어졌다.
    중국의 指空和尙지공화상을 따라 心法심법의 正脈정맥을 이어받고 돌아왔다.
    공민왕 때 王師왕사를 지냈으며, 우왕의 명을 받고 密陽밀양 瑩原寺영원사로 가다가
    驪州여주 神勒寺신륵사에서 죽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나옹 [懶翁] (한국사전연구사)

 

禪石寺선석사
    692년(효소왕 1)에 義湘이 화엄십찰(華嚴十刹) 중 하나로 창건하여 신광사(神光寺)라 하였으나,

    현재보다 서쪽    에 위치하고 있었다.
    1361년(공민왕 10)에는 懶翁이 신광사 주지로 부임한 뒤, 절을 현재의 위치로 이건하였다.

    그런데 당시 새 절터를 닦다가 큰 바위가 나왔다 하여 터 닦을禪자를 넣어 절 이름을 선석사라 하였다고 한다. 

 

 

                                                               세종대왕왕자태실                               선석사 경상북도 성주군 월항면 인촌리 217

 

 


3. 조성과 관련한 시대적 배경

 

1368년 명원의 교체시기
1392년 太祖즉위  
1418년 세종즉위 
1938년 - 1442년간 조성

고려 말에 이르러 신진 개혁파들의 술렁인다.  
대외 정세 판단을 통해 원나라가 망해가는 징조가 보이자. 원나라의 내정 간섭을 배척하고  빼앗겼던 국권을 되찾아 명실상부한 독자적 자주 국가를 건설하려한다.
이 때 懶翁나옹이 귀국하여 王師왕사가 된다.
1361년(공민왕 10)에는 나옹이 새 절터를 닦으며 禪石寺선석사라 이름 짖는다.

 

 

禪선이란
禪봉선의 의미이다.
원나라만이 천자의 나라가 아니라 고려 또한 천자의 나라가되어 독자적 禪봉선을 시행하겠다는 숨은 의지를 보인 절 이름이다.
1392년 太祖 이성계의 즉위  조선 개국 후 46년 후
1938년 세종은  禪石寺선석사 가까이에 왕자 태실을 조성한다.
이때  분명히  禪石寺선석사에서 제를 올렸을 것이다.
청나라 모르게 암암리에 天祭封禪祭 천제와 봉선제를 올렸음직 하다.
禪선 字는 임금의 이름자를 避諱 피휘 하듯 함부로 쓰는 글자가 아니다.
禪石寺선석사라 이름을 지으며 터를 닦다가 큰 바위가 나왔다 하여 “터 닦을禪자”를 넣어 절 이름을 지였다고 한다. 
혹여 청나라 에서 너희들 禪石寺선석사에서 봉선제를 지낸 것 아니냐라고 시비 거리를 만들면  터를 닦다가 나온 바위를 변명거리로 삼을 냥 지금도 마당가운데 버티고 있다.

封禪祭봉선제에는 역법을 관장하는 관리 太史令태사령이 참한다.
이는 천문관측을 통해 정확한 달력을 만들어 제후들에게 달력과 봉지를 하사하는 일이다.

이때
李純之이순지라는 천문학자가 있었다.
이슬람 역법을 도입해서 만든 달력은 지금사용해도 별 차이가 없을 만큼  정확한 역법을 수행했다.

천문도상 하늘을 九野 9야로 나누워 여기는 제나라 여기는 초나라 여기는 충청도 저기는 전라도 등등의 구역을 나누었다.
세종대왕자 태실은
천문학상 하늘의 중심이요 땅의 중심이 되는 곳을 선택한 것이다.
곧 풍수상의 명당자리 이상으로 천문적 명당의 자리에 조성한 것이다.

 

그 내력을 알아보자.

 

 

 

 

 

 

              

 

靑山兮要我以無語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 하고,
蒼空兮要我以無垢       창공은 나를 보고 티 없이 살라 하네.
聊無愛以無惜兮          탐욕도 벗어 놓고 성냄도 벗어 놓고,
如水如風終我             물같이 바람 같이 살다가 가라 하네.
                                                                      - 懶翁나옹 -

 

 

                                                                     다음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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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대왕 왕자태실의 천문적 의미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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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關聯古事 관련고사 1  金烏 扶桑 若木 금오 부상 약목

 

 

金烏 扶桑 若木 금오 부상 약목

 

 

金烏금오


金烏금오는 金鷄금계. 三足烏삼족오의 異名이명이다.
烏오는 까마귀. 어둡다. 검다. 라는 뜻이 있다.

金烏 扶桑 若木 금오 부상 약목
고서의 내용을 보면
若木약목이라는 나무가 있다. 扶桑부상나무라고도 한다.
태양은 하루 한 번 탕곡에서 목욕을 하고 부상나무에 오른다.
부상나무위에는 삼족오가 있다.
어느 날 10개의 태양이 떠올라 초목이 메말라 죽자 명사수 仁羿인예가 활을 쏘아 9개의 태양을  떨어트렸다.

 

 

천문상의 扶桑부상나무란

 해 그림자를 만드는 규표를 이르는 말이며
三足烏삼족오는 규표의 꼭대기에 설치해둔 세발의 靈針영침을 이르는 말이다.

 

 

 

 

동쪽에서 태양이 떠오를 때  세발 까마귀를 규표 꼭대기에 세워놓으면
태양이 떠오르면서 땅 바닥에는 해 그림자가 나타난다.
태양이 높이 떠오른 정오가 되면 까마귀의 세발 그림자는 하나의 직선 모양으로 일직선의 그림자를 만든다.

이 때가 남중한 때임을 알 수 있게 되고  해그림자의 길이를 계산해서 절기를 측정하게 되는 것이다.

 

 

 

 

 

이렇듯 扶桑부상나무란 해시계 역할을 하는 규표를 의미한다.
日中三足烏 태양 속에 삼족오가 있다는 말은 
남중 때 해 그림자 속에 늘 상 삼족오의 발이 하나가 됐음을 이르는 말이다.

 

 

 

 

若木약목

 


若약: 같을 약 자이다.  扶桑부상나무와 같다는 의미인데
扶桑부상나무가 낮에 해그림자를 측정하는 규표역할을 하는 반면
若木약목은 밤에 별자리의 좌표를 측정하는 簡儀간의 역할을 의미하는 말이다.


부상과 탕곡 이라는 단어는
그 옛날 어줍잖은 文士는 감히 필설하지도 못한 단어였다.
간혹 천하를 통달한 당대 학자님의 詩귀에서나 찾아볼 수 있었든 이상향의 단어였다.
부상과 탕곡과 관련된 고서의 내용을 간추리면...
                                                                   (산해경. 회남자. 도연명/시. /왕충/논형 굴원九歌東君/ 離騷經 등)

 

 


在海外東方有湯谷             바다 밖의 동쪽에는 탕곡이 있고
上有扶桑                         위로는 부상나무가 있다고 한다.
十日浴沐水中                   열 개의 해가 물속에서 목욕을 하고
有大木九日居下枝             아홉 개의 해가 아래가지에 머무는 큰 나무가 있으니,
一日居上枝                      하나는 윗가지에 머문다고 한다.
扶桑在上一日方至             부상나무위에 해가 들어오고

一日方出皆載于烏             하나는 나가는데 모두 그 위에 새가 올려져있다.
日中三足烏                      해 가운데 삼족오가 있다

 

 

 

天問   屈原      천문 굴원  BC 343 ? ~ BC 277)

 

天何所沓十二焉                  하늘은 열두겹이 어디에서 겹치는가
分日月安屬                       나눠진 해와 달은 어디에 속하였고,
列星安陳                          펼쳐진 별자리는 어디에 줄지어 서나?
出自湯谷 次于蒙汜             태양은 탕곡에서 나와서 몽수로 간다.
自明及晦 所行幾里             아침부터 저녁까지 몇 리나 가나?

 


九歌/ 東君  구가/동군

 

暾將出兮東方照                 해가 떠오르나 동쪽 하늘 밝아오네
吾檻今扶桑                       부상에 시간을 맞추고
撫餘馬兮                          여유롭게 말을 돌보네.
安驅夜蛟蛟兮既明              밤은 달각달각 어디로 달렸기에 아침이 밝아오나

 

 

 

讀山海經독산해경  <도연명> 중에

泛覽周王傳(범람주왕전)      穆天子傳(목천자전)을 두루 보고,
流觀山海圖(유관산해도)      하늘의 별자리 그림(산해도)을 따라가며 본다.
俯仰終宇宙(부앙종우주)      아래, 위로 맞춰보니 마침내 宇宙(우주)로다.
不樂復何如(불락복하여) >   다시 보아도 즐겁지 아니한가.

 

 

 

                                                                      -다음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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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대왕 왕자태실의 천문적 의미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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關聯古事 관련고사 2  -   仁羿와 姮娥 인예와 항아

 

羿예의 이름을 仁羿인예 또는 后羿후예라고 부른다.

 

 

 

仁羿인예는 하나라의 제 5대 군주라 전한다.

그는 원래 하나라의 제후로 궁술의 명인이었다. 열개의 태양이 떠올라 초목이 메마르자 아홉 개의 태양을 쏘아 떨어뜨리고 백성들을 재난에서 구제했다.

그 후 후예는 姮娥항아라는 아름답고 선량한 미인을 아내로 얻었다.

후예는 서왕모에게서 "불사약"천도 복숭아를 구해 온다.

그 불사약을 아내 항아가 몰래 훔쳐 먹고 남편을 버리고 저 멀리 달세계 월궁으로 올라간다.

 

 

 

주역에 보면 달에는 이미 歸妹귀매라는 항아의 언니가 帝乙제을 남편으로 모시고 살고 있었다.

궁술의 명인 남편을 버리고 겨우 달로 도망가서

언니 집에 빌붙어 형부와 함께 살았는가?

 

그런데 후대 사람들은 항아를 욕하지 않는다.

 

저 신화 속에는 어떤 천문적 의미가 숨어있을까?

 

천문적 의미로 보면 인예는 천문학자였다.

열 개의 태양이 떠올랐다는 것은 실재로 열개의 태양이 하늘에 떠있던 것이 아니라

동지 날 태양이 떠오르는 천구의 위치가 정확하지 않아 10명의 천문학자들 간에 의견이 분분

했다는 말이다.

정밀한 천문학이 정립되지 않은 시대였다.

이때 인예라는 훌륭한 천문학자가 정확한 천문이론을 발표한 것이다.

지구가 자전을 할 때 지구의 축이 팽이가 돌 때 회전 속도가 줄면서 팽이의 축 자체가 뒤뚱거리는 현상에 의해 천구의 위치가 26.000년을 주기로 변한다는 이론을 밝혀서 정확한 동지점의 좌표를 찾아낸 것이다.

이렇듯 잘 못 된 9개의 천문이론을 일소해버린 것이다.

이것이 신화속에 숨은 천문이야기이다.

 

 

 

불사약을 먹은 항아는 죽지 않는다. 만 만 세 달이 사라지지 않는 천문이야기이다.

인예는 지구의 수호신으로

항아는 달의 수호신으로

달과 지구는 부부사이로

인예와 항아는 지금도 부부사이로 영원한 삶의 관계로 설정된다.

 

그래서 후대 사람들이 항아를 욕하지 않는다.

 

달에 토끼가 사는 전설의 이유는

漢張衡《靈憲》:月者陰精之宗積而成獸象兔蛤焉

영헌에 의하면 달은 음기의 마름이고 짐승의 모양으로 쌓이면 토끼와 대합조개가 된다 라고 했다.

                                                                                     蛤 대합조개 합: 조개라는 뜻이다.

 

바로 달의 모양을 취합하면 토끼와 조개모양이 된다.

 

 

 

 

 

우리에게 전해지는 “토끼타령”에 보면

제석님이 신통력으로 달집에 불을 지르니 토끼가 즉시 불속에서 뛰어나와서는 하는 말이

“내 털 속에 다른 버러지가 있다면 공연히 타죽을 것 아닌가” 하면서

몸을 세 번 툴 툴 털고는 다시 활활타는 불속으로 들어갔다는 자애로운 이야기가 전해진다.

항아는 얼마나 자애로웠던가.

달은 언제나 어머니를 떠올리게 한다.

 

항아는 영원한 엄마

 

인간은 항아의 털 속에 기생하던 빈대 벼룩 진드기였던 것일까?

 

                                                                        -  다음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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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대왕 왕자태실의 천문적 의미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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關聯地名古事 관련지명고사 1 龜尾 達句火 斯同火 八公山

구미 달구화 사동화 팔공산

 

龜尾구미의 옛지명은 九尾였다. 아홉 번 째 끝이라는 뜻이다.

達句火달구화大邱의 옛지명이다.

斯同火사동화는 경상북도 칠곡지역의 옛 지명으로 일명 이동혜(爾同兮)라고도 한다.

지금의 가산면 석정면 지역으로 추정하고 있다.

구미에서 낙동강 건너 동쪽 석적읍에서 부터 가산면 아래쪽으로 칠곡을 거쳐 대구까지는 불의 지명을 가진다.

達句火 斯同火 지명 이름에 불자가 들어간다.

왜 불자가 들어간 것일까?

 

達句火 달구불: 불덩어리의 마디가 다다른 곳이라는 뜻이다.

달구불우리말 그대로 달구불이다.

쇠를 불에 벌겋게 달군다는 뜻 아닌가?

불에 쇠를 달구는 제련기술 최초 철기시대의 표상이다.

 

 

그러면 사동화의 뜻은

斯同火 사동불 = 똑같은 불이 떨어진 곳이라는 뜻이다.

이 사,천할 사: , 이것.잠깐 .모두.쪼개다, 떨어지다. 사전적 의미이다.

 

八公山팔공산 여덟 개가 공평한 산이라는 말이다.

우리는 저 옛 지명이 의미하는 바를 고대의 기록에서 찾아 볼 수 있을까?

 

앞서 보았던 신화 이야기 중

仁羿인예가 아홉 개의 태양을 쏘아 떨어뜨렸다.

아홉 개의 태양이 처음 떨어진 곳이 달구벌 대구이고

가산면 석적읍이 되는 斯同火사동화 지역에 순서대로 떨어졌다.

마지막 불덩어리가 떨어진 곳이 아홉 번 째 마지막 九尾 구미이다.

八公山팔공산에서 보면 낙동강 동쪽으로 떨어진 불덩어리의 간격이

達 句 火(대구) - 斯 同 火(가산 - 석정지역 )순으로 공평하다는 말이다.

 

 

 

 

이 지역에 실재로 아홉 개의 태양 불덩어리가 떨어졌을까?.

태양 불덩어리가 떨어질리 만무하니 천문의 이야기로 귀결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 다음계속-

  

 

 

 

 

 

 

 

 

 

 

 

 

 

 

 

 

 

 

 

 

 

세종대왕 왕자태실의 천문적 의미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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關聯地名古事 관련지명고사 2

 

 

扶桑里 金烏山 若木面 崑山書院 仁村里 月恒面 星州郡 七谷郡

부상리 금오산 약목면 곤산서원 인촌리 월항면 성주군 칠곡군

 

 

扶桑里부상리 경상북도 김천시 남면 부상리

앞서 글에서 보았듯이

扶桑里부상리는 금오산에 떠오르는 태양의 위치로 천문을 하는 규표를 세워둔 지명의 이름이다.

부상 나무 꼭대기에서 보이는 삼족오는 금오산에 떠오른 태양을 말한다.

부상리에서 보면 하지 때 아침 날 금오산 정상에서 떠오르는 천문좌표 역할을 한다.

따라서 扶桑里 를 규표로 金烏山을 삼족오로 삼아 천문을 한 지역 이름이다.

 

 

若木面 약목면은 금오산 아래쪽에 있다.

古書고서에 보면

若木:若木扶桑也上三足烏下昆侖丘天空曾有十個太陽仁羿射九日

若木약목은 부상나무이다.

위쪽에 삼족오가 있고 아래쪽에 곤륜구가 있다.

하늘에 열개의 태양이 떠올라 인예가 아홉 개의 태양을 활로 쏘았다.

若木面약목면은 신라 때 옛 지명은 昆山縣곤산현으로 불렸다.

옛 지명의 명맥을 이은 山書院곤산서원이 若木약목 아래 자리하고 있다.

 

  

仁村里

崑崙之墟天空曾有十個太陽仁羿射九日

仁羿인예는 약목 아래 곤산에서 9개의 태양을 쏘아 떨어트렸다.

약목아래 仁村里인촌리가 있다.

바로 仁羿인예의 활터 자리가 仁村里인촌리이다.

 

 

月恒面월항면 仁羿請不死之藥於西王母姮娥竊之以奔月

인예가 서왕모에게 불사약을 얻었는데 항아가 몰래 훔쳐 먹고 달로 달아났다.

달로 간 姮娥항아의 奔月地분월지가 月恒面월항면이다. (= )

모두가 古事를 인용한 지명이다.

 

 

星州郡 성주군

별 성가 들어간 지명은 그리 흔하지 않다.

고을 주이다.

그래서 星州성주를 별 고을. 光州광주를 빛 고을 이라 부른다.

그런데 의 의미에는 모래톱. 백사장이라는 뜻이 있다.

자를 파자하면   + . . . 

...모래알이다.

星州성주 = 별의 모래밭이라는 뜻이 된다.

별의 모래밭은 곧 한여름 칠석날 밤 솟구쳐 오르는 은하수를 이르는 말이다.

 

즉   星州성주는 은하수 라는 뜻이다. 


<위지동이전>'미리미동국(彌離彌凍國)''미리'는 우리말 '미리내'에서 보는 것처럼 ''의 고어로 보아 성산국(星山國)의 별칭으로 보는 견해가 있는 것은 의미 있게 보인다. 라고 한다. 미리내는 은하수라는 우리말

그러므로 星州성주를   " 별고을" 이 아닌  은하수고을이라고 불러도 탈나지 않는다.

 

 

漆谷 칠곡 칠곡의 옛 이름은 七谷이었고 그 전에는 八居里縣팔거리현이었다.

일곱 개의 골짜기 는 천문에서 곧 북두칠성을 이르는 말이다.

북두칠성은 원래 여덟 개의 별로 이뤄져있다.

북두칠성 별자리 국자 손잡이의 두 번째 별은 이중성이다.

고대에는 맑은 하늘이었음으로 여덟 개의 별을 확인하기에 더욱 용이했을 것이다.

그래서 고대 칠곡의 이름은 八居里縣팔거리현 이었다.

 

 

이제 천문적의미로 위 지역을 정리해보자.

부상리: 대낮에 태양의 그림자로 시간과 절기를 측정

약목리: 밤에 관측기구 간의를 통해 별자리 좌표를 측정

금오산: 태양의 좌표를 확인하는 규표의 영침 역할을 하는 삼족오 --- (태양의 의치)

인촌리: 태양의 좌표를 정확하게 측정한 인예가 서있는 지구의 자리-- (지구의 의치)

월항면: 달의 좌표를 상징하는 위치  ------------------------ (달의 의치)

성주군: 은하수 별자리를 나타내는 위치   --------------------- (별의 의치)

 


그런대 방위상 태양이 남쪽에 있지 않고 북쪽에 위치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 이유는 밤하늘 천문관측을 주제로 설정된 지명이기 때문이다.

밤하늘을 보자면 태양은 지구 아래로 사라진 밤이 되어야한다.

태양이 북쪽에 위치한 이유는 지구 밑에 내려가 있다는 말이다.

태양이 북망산천으로 내려앉은 설정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북두칠성은 왜 북쪽에 위치하지 못하고 동쪽으로 치우친 것일까?

이를 확인 하기위해서는 고대 천문으로 눈을 돌려야 한다.

 

 

 

 

                                                                    - 다음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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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대왕 왕자태실의 천문적 의미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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關聯地名古事 관련지명고사 3                碧珍 伽倻 高靈 陜川

                                                         벽진 가야 고령 합천

 

碧珍伽倻벽진가야

낙동강 중류 지방을 洛中낙중이라한다.

학문의 고장 최상의 면포를 생산하든 삼베의 고장이었다.

그래서일까 이 지역에는 칠월칠석을 위하는 풍습이 남다르다.

칠석 전날 저녁 장독대에 정화수와 백설기 떡을 차려놓고 북쪽 하늘을 바라보며 가족의 장수나 집안의 평안과 풍농을 기원하였다.

그런데 이때

북두칠성에 빌었을까.

직녀성에 빌었을까?

대게 북두칠성이 인간의 생명이나 수명을 점지한다고 믿는 신앙을 바탕으로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북두칠성은 죽음을 관장한다. 칠성판이 그 의미를 증명하고 있다.

인간의 생명이나 수명을 점지하는 것은 남두육성이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칠석날 祈願處기원처는 北斗七星북두칠성이 아니라 織女星직녀성이다.

고래로 칠월 칠석에는 처녀들은 직녀성에게 바느질 솜씨가 늘기를 빌거나 별이 뜨는 쪽을 향해 칠성제를 지냈다.

칠월칠석의 주인공은 織女직녀이다.

 

 

織女星직녀성

베가 Vega αLyrae अभिजित् abhijit 七星娘娘칠성낭랑

베가는 거문고자리의 알파별이다. 밤하늘 전체에서 다섯 번째로 밝은 별이다.

알파별인 베가는 푸른색 하늘에서 네 번째로 밝은 별

직녀성 베가는 BC12.000년에는 천구의 북극이었다.

별자리의 야야기는 14.000년 전으로 거스른다.

 

 

碧珍伽倻 벽진가야

벽진가야는 서기 562년 신라 병합 마지막까지 버틴 깊은 역사의 땅이다.

 

碧珍伽倻 벽진가야의 천문적 의미를 보자.

 

碧珍벽진: 푸른 구슬이라는 뜻이다.

伽倻가야: गव- gava - cow 소 라는 의미이다.

하늘에 푸른 구슬과 소가 있는 곳은 직녀성과 견우성이다.

거문고자리의 알파별인 베가는 하늘에서 유일한 푸른색 밝은 별이다.

碧珍벽진: 푸른 구슬은 곧 직녀성 베가 Vega별을 이르는 말이며

伽倻가야: 소 라는 의미는 牽牛별을 말한다.

牽牛견우: 소를 끈다는 의미의 별자리 이름이다.

그러니까

신라 이전의 碧珍伽倻벽진가야는 천문도상의 九野分圖구야분도 중 牽牛織女星의 별을 담당하는 땅의 위치라는 말이다.

碧珍伽倻 벽진가야라는 나라이름은 직녀견우국이 되는 셈이다.

거문고자리 베가 Vega별을 왜 織女星직녀성: 베를 짜는 여인이라고 칭 했을까.

 

14.000년 전의 밤하늘로 가보자

 

 

織女星직녀성 베가 Vega별이 북극 가까이서 북극성 역할을 한다.

북극성 역할은 천문도를 그릴 때 원의 중심에 있으면서 적경과 적위선분의 벼리가 되는 곳이다.

즉 씨줄의 코를 잡고 있는 적경선분이다. 날줄의 위치로 적위값이 정해진다.

베를 짤 때 씨줄과 날줄의 모양을 취하고 있다.

 

서양의 천문에서도 저 별자리를 거문고 자리라고 명명 했다.

거문고에도 씨줄과 날줄이 있다.

현을 적경으로 삼고 음의 높낮이를 적위 값으로 삼은 것이다.

동서양이 공히 織女星직녀성 베가 Vega별이 북극성 역할을 한 시기인 BC12.000년에 지어진 이름으로 이해 할만하다.

 

그림에서 보는 바와 같이 북두칠성은 북극에서 멀리 내려앉은 모양이다.

七谷칠곡 지명이 북두칠성의 의미를 가지는 시기와 같다. 14.000

 

앞에서 본 바와 같이 천구의 위치가 26.000년을 주기로 변하는 세차운동으로 인하여 북극성이 바뀜과 아울러 춘분점과 같은 절기의 위치도 바뀐다.

따라서 지금의 칠월칠석은 한여름이었으나 14.000년경에는 한겨울 이었다.

즉 동지 때 정월 초하루 날이다.

지금의 칠월칠석제를 올리는 것을 그대로 과거로 되돌리면 14.000년경 새해 새모제를 올리는 것과 같다.

칠석제의 기원을 14.000년 전이었다고 주장하는 것이 황당하지만은 않을 듯하다.

 

지명으로 보면 織女星직녀성은 碧珍面벽진면이고

牽牛견우성은 伽倻山가야산이 된다.

 

織女星직녀성과 牽牛견우성은 우리은하수의 양단에 위치해 있다.

은하수를 따라 아래쪽으로 내려가면 우리은하의 중삼방향이 되는 곳에는 찬란한 별 모래밭이 펼쳐진다.

그곳이 陜川천지역이다.

:[좁을 합,땅 이름 합,좁을 협]좁다. 땅의 이름, 합천(陜川). 좁다. 산골짜기

陜川천이 은하수의 중심부부이라는 문자적 의미는

陜川: 좁은 골짜기의 물길 이라는 뜻이다.

여기서 : 물길의 의미를 보자.

고대에 은하수를 밤하늘의 물길로 보았다.

銀河水은하수의 뜻은 미리 내은모래 빛 강물이다.

우리은하의 중심방향 쪽에는 엄청나게 많은 별들의 군집을 이루어 빽빽한 골짜기의 물길이 모여든 것처럼 보인다.

이 모양을 陜川천이라한 것이다.

그 중앙 부분이 우리은하의 중심방향 극이 된다. 그곳이 곧 高靈고령이다.

高靈고령의 의미는 가장 높은 極點극점이라는 뜻이다.

고대 만 사천 년 전 천문학자는 우리은하의 중심방향을 알고 있었다는 말이기도 하다.

 

 

 

 

 

지금까지의 이야기를 망라한 그림을 보자.

 

 

 

 

    

 >

금오산에는 태양이 있고

달의 항아가 있는 월항리

벽진의 직녀성 가야산의 견우성

칠곡의 북두칠성 합천의 은하수

성주의 무수한 별 모래밭

인예가 활을 들고 태양을 지키고서있는 인촌리는 지구이고

천문학상의 천정자리이니 이곳이 곳 천문학상의 명당이다.

 

이 천문적 명당자리에 세종대왕 왕자태실이 조성된 것이다.

이 때  천문학자 李純之이순지가 세종대왕 옆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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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월칠석 직녀의 의미를 이해하려면

14.000년 전 선조들의 천문학 수준을 이해해야 힌다 . 

BC 2345  황제 軒轅星헌원성 별자리는 당시의  夏至點 하지점

BC 12.000  織女星직녀성은  당시의 北極星북극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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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C 2345 황제 軒轅星헌원성 별자리는 당시의 夏至點 하지점

 

  BC 12.000 織女星직녀성은 당시의 北極星북극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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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7년경의 일본 나가사키 항구를 내려다보이는 언덕집을 무대로

미국의 해군장교 핑커톤과 나비부인의 결혼부터 그녀의 비극적인 자살까지를 엮은 오페라 <나비부인>

 푸치니의 중기 대표작이다.

 <라보엠>과 <토스카>와 더불어 푸치니의 3대 오페라로서 전세계 각국 오페라 극장의 레파토리를 장식하고 있다.

 

 

 

 

 

 

어느 개인 날, 바닷물 저편에
연기 뿜으며 흰 기선 나타나고
늠름한 내 사랑 돌아오리라.
하지만 마중은 안나갈테요.

 

나 홀로 그님 오기 기다릴테요.
사랑은 이 언덕에서 맞을테요.
그대는 부르겠지, 버터 플라이

그러나 나는 대답않고 숨겠어요.

너무 기뻐서 죽을지도 몰라요.
내 사랑이여, 내 임이여!
그대는 반드시 돌아오리,

 

 

 

 

 

 

,

 

 

 

 

 

 

 

 

 

 

밤의 여왕 아리아   Der Hölle Rache kocht in meinem

 

밤의 여왕은 딸 파미나에게 칼을 주며 자라스트로를 죽이라고 명령해요..

그러나 파미나는 벌벌 떨며 거절합니다.

그에 분노한 밤의 여왕이 부르는 노래가 바로...

 

 

 

 

 

 

 

그래도 박기영 목소리는 착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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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업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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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디오북 소라소리

 

 

 

 

 

 

 

 

 

 

 

 

 

 

 

 

 

 

 

 

                                                                                                                                        마네의그림

                           보들레르의 정부    관능적인 흑인혼열아 창녀    잔느뒤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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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朝鮮 天文明堂 조선 천문과 명당

 

 

天祭封禪 천제와 봉선

 

천문은 제왕학

고대 제왕들의 투쟁사는 천문학의 논쟁으로부터 발단했다.

새로운 역법과 연호 제정

천하를 통일하면 반드시 태산에 올라 봉선제(封禪祭)를 지냄

관중은 제환공의 봉선을 만류했다. 진시황도 제대로 봉선제(封禪祭)를 올리지 못했다.

중국역사상 최초로 격식을 갖춘 봉선제(封禪祭)를 올린 것은 기원전 110년 한무제다.

무제가 봉선의식을 위해 태산을 방문했을 때,

 

천문역법을 관장하고 황실 전적을 관리하는 태사령(太史令) 벼슬에 있던 사마천의 아버지 사마담은 봉선 의식에 참가하지 못했다.

이를 깊이 한스럽게 여기다 사마담은 세상을 떠났다.

 

봉선(封禪) : 천하를 통일한 사람이 천하통일의 위업을 하늘의 상제에게 보고하는 특별한 제사로서 이 제사를 지낸 사람은 불사등선(不死登仙)을 보장 받는다는 신앙이 있었다.

 

 

 

世宗大王子 胎室세종대왕자 태실 조성 계기 고찰

 

 

世宗大王子胎室세종대왕자태실 - 慶尙北道 星州郡 月恒面 仁村里 국가사적444

18왕자와 세손 단종의 태실 등 19기가 군집을 이루고 있다.

 

조성과 관련한 주변상황

 

조성시기: 1368년 명원의 교체시기

1392太祖즉위

1418년 세종즉위

1938- 1442년간 조성

 

1. 풍수설: 당초 명당이라 하여 성주이씨의 중시조 李長庚의 묘를 옮기고 태실 조성

 

2. 천문설

 

禪石寺선석사

692(효소왕 1)義湘이 화엄십찰(華嚴十刹) 중 하나로 창건하여 신광사(神光寺)라 하였으나, 현재보다 서쪽에 위치하고 있었다.

1361(공민왕 10)에는 懶翁이 신광사 주지로 부임한 뒤, 절을 현재의 위치로 이건하였다. 그런데 당시 새 절터를 닦다가 큰 바위가 나왔다 하여 터 닦을자를 넣어 절 이름을 선석사라 하였다고 한다.

 

 

 

 

 

 

 

李純之이순지

자는 성보(誠甫) 본관양성(陽城)

세종의 명으로 조선의 자주적 역법을 자주적 역법을 이룩하여

1.450년대 조선 천문학을 세계 수준으로 올려놓은 천문학자

交食推步法교식추보법21책을 완성

七政算內外篇 칠정산내외편 저술

지명과 별자리 이름

 

   

 

 

 

 

벼리 기 :그물코를 꿴 굵은 줄일이나 글의 뼈대가 되는 줄거리

 

 

 

 

 

關聯古史

 

 

 

 

扶桑: 日中 三足烏

金烏:  三足烏

若木: 若扶桑也 上三足烏下昆侖丘 昆山

仁羿: 崑崙之墟方八百里天空曾有十個太陽仁羿射九日 仁村

姮娥: 仁羿請不死之藥於西王母姮娥竊之以奔月 月恒

碧珍: Vega अभिजित् abhijit αLyrae

伽倻: गव- gava -  cow

星州: = + * * *

七谷: 八居里縣.

架山: 斯同火: 구미일부 칠곡 왜관 가산 다부 등 일부 지역의 옛 지명

大邱: 達句火:

龜尾: 九尾

 

八公山: 26.000/ 360 = 72* 100°= 7.200120 *72 = 8,640

西王母: 神仙女靑鳥九尾弧

高靈:

陜川:

  

 

   

張衡靈憲》:月者陰精之宗積而成獸象兔蛤焉

달의 질량은 지구의 1 / 81 = 0.01234567901234570123456790123457

 

 

4. 天符經小考

   

一始無始一析三極無盡本 天一一地一二人一三一積十鉅無櫃化三天二三地二三人二三大三合六生

七八九運三四成環五()一妙衍萬往萬來用變不動本本心本太陽昻明人中天地一一終無終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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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山海經 allegory

    

 

                                                                                              김기림. 이태준. 정지용. 샤를 보들레르. 이상

   

 

    

奢比尸 山海經大荒: 东经有神人面犬耳兽身珥两青蛇名曰奢比尸

海外东经: 奢比尸国在其北兽身人面大耳珥两青蛇一曰肝榆之尸在大人北

   

 

危 貳負 窫窳 : 山海經海內西經: :貳負之臣曰危危與貳負殺窫窳帝乃梏之疏屬之山桎其右足反縛兩手與髮繫之山上木在開題西北 山海經劉秀校上表 참조前漢말기劉秀

                       

   

 

刑天: 山海經·海外西經: 形天與帝爭神載刑天與帝至此爭神帝斷其首葬之常羊之山以以乳為目以臍為口操干戚以舞

共工: 淮南子:昔人共工與顓頊爭為帝怒而觸不周之山天柱折地維絕天傾西北故日月星辰移焉;

地不滿東南故水塵埃歸焉

   

    

治水 銀河水: 淸水 積水 落水 黑水 青水 溴水 勺水 ......

   

 

    

 

 

    

 

 

 

 

 

地不滿東南故水塵埃歸焉

 

 

 

 

 

 

爾雅: 齸屬牛曰羊曰麋鹿曰

[새김질할 익] 1. 새김질하다 2. 사슴이 반추(反芻)하다 3. 목구멍

[새김질할 ] 1. 새김질하다 2. (사슴 등이)풀을 먹다

[새김질할 ] 1. 새김질하다 2. 양이 반추(反芻)하다

[새김질할 ] 1. 새김질하다 2. 사슴이 반추(反芻)하다 3. 목구멍

 

爾雅: 중국에서 가장 오랜 字書. 13중 하나

고대 중국어의 어휘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쓰인다.

 

釋名: 기원전 202~220나라 말 유희(劉熙, ?~?)이아를 모방하여

1,502개의 사물의 명칭을 27개 부문으로 분류하여 뜻풀이

 

 

 

 

 

 

 

 

 

 

 

 

 

 

 

 

    

夫蘙薈之翔叵以論垂天之凌夫之翔 

                                                  무릇 풀숲의 새가 봉황이 밤하늘을 나는 경지를 논할 수 없고,

蹏涔之遊無以知絳虯之騰

                                                 발자국 고인 물에 노는 것이 붉은 용이 하늘에 오르는 경지를 알 수 없다.

鈞天之庭豈伶人之所躡

                                                 장엄한 음률이 울려 퍼지는 천상의 뜨락에 속된 악공이 발을 디디랴.

無航之津豈蒼兕之所涉

                                                 배 없는 나루터에서 어찌 蒼梧之山까지 건너 갈 수 있겠는가.

非天下之至通難與言山海之義矣

                                                 天下를 통달하지 않고는 더불어 山海經의 의미를 말하기 어렵다.

嗚呼 達觀博物之客 其鑒之哉

                                                天下를 통달한 박식한 후대사람은 이것을 거울로 삼을 것이다.

                                                                                                                                        - 郭璞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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天 文 解 字

Astronomical understanding of ancient letters

 

 

1. 天文文字의 기원 

 

2. 山海經 Allegory

 

3. 朝鮮 天文明堂 

 

4. 天符經小考

 

 

道可道 非常道 터득한 도가 진정한 도라 하겠지만 절대적인 도는 아니다.

名可名 非常名 사물에 이름을 붙어 부르지만 절대적인 이름이 아니다.

無名 天地之始 이름 없이 천지가 시작되었다.

有名 萬物之母 이름을 지음으로 하여 만물이 태어나는 모체가 된 것이다.

故常無欲以觀其妙 그러므로 욕심 없이 보면 만물의 오묘함을 보게 되고

常有欲以觀其 욕심을 가지고 보면 수박 겉껍질을 본다.

此兩者同出而異名 이 둘의 본질은 같은 것인데 이름만 다를 뿐이다.

同謂之玄 玄之又玄 캄캄한 건 매한가진데도 어두운 것이 또 어둡다고 한다.

衆妙之門 (마음은) 온갖 오묘한 것들이(七情浮沈) 들고 나는 문이다.

 

無爲自然의 마음으로 절대적 관념을 버리라고 노래 함 - 老子 道德經 中에서 --

 

 

 

돌 요: 돌다. 순찰하다. 순행하다. 돌아다니며 살피다. 구하다. 차단하다. 훔치다,

                                                    

 

 

 

 

 

 

 

 

 

百 㪣 不 如 一 付

   

 

 

  

 

 

    

1. 天文文字

 

文字起源자료

 

1. 허신의 설문해자서: 說文解字敍

及神農氏 結繩爲治而統其事.倉頡見鳥獸蹄迒之跡知分理之可相別異也 察蓋取諸夬 夬揚於王庭

 

   

   

    

 

   

 

tan 4/7 =0.57 = 29.7°   

 

 

史記 卷 百二十八 / 六十八龜策列傳 /楮少孫

 

新雨已天淸靜無風以夜捎免絲去

비가 막 그친 뒤 하늘이 맑고 고요하며 바람 없는 밤에 토사를 베어내고

卽以燭此地燭之 즉시 불을 밝히는데 이는 땅을 밝히는 것이다.

火滅卽記其處以 불이 꺼지면 곧바로 그곳을 표시해 두는데

新布四丈環置之 새 천을 4장 길이로 돌아가며 펼쳐 세운다.

明卽掘取之 그것이 확실하면 그곳에 구멍을 뚫는다.

入四尺至七尺得矣 들어온 것이 4장에 이르면 7장을 얻은 것이다.

過七尺不可得 7장이 넘는 것은 얻을 수 없다.

伏靈者千歲松根也 복령이라는 말은 천년 묵은 소나무의 뿌리요,

食之不死 사람이 먹으면 죽지 않는다.

 

龜藏則不靈: 천문 관측기구용 거북판이 오래되면 극점이 어디인지 알 수 없다는 뜻

蓍久則不神: 가새풀이 오래되면(赤緯 赤經 線分의 정확한 점을 측정하지 못한다는 말이다.

    

 

 

龍 如意珠 逆鱗

   

    머무를 계; 머무르다, 머무르게 하다, 쌓다, 저축하다

    

 

書斷列傳 張懷瓘 서단열전 장회관

 

按古文者黄帝史倉頡所造也頡首有四目通於神明仰觀奎星圜曲之勢俯察龜文鳥迹之象博采衆美合而爲字是曰古文

張懷瓘장회환: 출생 - 사망미상 당나라 해릉(우솔부병조참군(右率府兵曹參軍)을 지냈다. 眞書.行書등을 잘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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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순사에게 끌려가기 전   

                                  이상은 이 음악을 감상하며  

                                                                 종생기를 예감 했을까?

 

1937.2. 12   사상불온자로 경찰에 구속

        3. 16   석방(34일간)

        4. 17   새벽, 동경제대 부속병원에서 사망. (27세)

 

 



 

1937121일부터 27일까지 히비야공원 공회당에서 바이올리니스트 미샤 엘만(1891~1967)

방일(訪日)연주회를 가졌을 때

이상은 끽다점 낙랑파라에서 레코드로 들었던 이 유대계 러시아인의 연주회를 들으러 갔다.

 

 

 

 

 

러시아에서 태어나 주로 미국에서 활약한 왕년의 유태계 명바이올리니스트다.

베를린에서 데뷔한 후 1905년의 런던, 08년의 뉴욕 공연 모두 선풍적인 성공을 거두어 이름을 세계에 떨쳤다.

11년에 미국으로 이주하여 23년에 시민권을 얻었다.

한때(26년)는 「엘만 관악 4중주단」을 조직하여 실내악 활동도 했지만 주력했던 것은 물론 솔로이며,

세계를 무대로 화려한 활약을 펼쳐 나갔다.

36년부터 이듬해에 걸쳐서는 카네기 홀에서 연속 5회의 콘서트를 가져 합계 15곡 이상의 협주곡을 연주하기도 했다.

그의 장점은 뭐니뭐니 해도 카를 플레시가 ‘동양풍의 색조를 띤 벨 칸토의 아름다운 음’이라고 격찬한 독특한 감미로운 음색으로

‘엘만 톤’으로 불리며 일세를 풍미했다.

그 시대에 레코드가 200만 장 이상이나 팔릴 정도로 대단한 인기를 누렸다    (최신 클래식 연주가 사전, 1994. 10. 20., 삼호뮤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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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에  유치환을 찾아가서 문우에게 일부러 뺨 맞은 이상


신태범의 부산문화 野史 2001   국제신문

 

왜 맞았을까 ?

                원인은 한 가지.

 

 

 

 

 

 

부산 와서 뺨맞은 李箱

 

 

부산문단의 전설처럼 전해오는 실화다.

1936년 어느 봄날이었다.

오감도」 「날개등의 시와 소설로 화제와 문명을 드날리던 천재작가 이상(1910~1937)이 부산엘 왔다.

역시 당시 주목받는 시인이었던 청마 유치환(靑馬 柳致環 1908~1967)도 만날 겸 부산의 바닷바람도 쐴 겸해서 였다.

청마 유치진은 그 무렵, 부산 초량에 살면서 부청(지금의 시청) 임시고용원, 사진관기사, 백화점 점원 등을 전전하며 문학운동에 전념하고 있었다.

청마는 이상을 만나자 바로 단골 술집을 찾았다.

부산의 문인들이 자주 드나들었던 동래의 박돈영 주점이었다. 청마가 주도하여 1935년 부산최초로 발간한 문학동인지 생리(生理)동인들도 불러내었다.

박영포 염주용 장하보 등이 그들. 곧 술잔이 오가고 문학적 화제가 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이상은 얼큰하게 취기가 오르자 자기를 우러러보는 부산시인들을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나 얼마 전에 생리를 받아 보았는데

어째 시들이 모두 그래요오……?

청마 형의 시나 그런 대로 모양을 갖추었을까…』 이상의 말에 청마는 물론 다른 시인들도 갑자기 긴장했다.

생리동인의 시를 도매금으로 매도하려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이상의 태도에는 부산 시인들을 낮추어보는 듯한 우월감이 잔뜩 묻어 있었다.

다른 시들은 여엉 종이 값이 아까울 정도더란 말이지…』

그때였다.

이상의 맞은편에 앉아 묵묵히 아래만 내려다 보던 박영포(朴永浦)가 벌떡 일어나며 댓바람에 이상의 멱살을 잡아 일으켰다.

거의 동시에 그의 손이 이상의 뺨을 사정없이 후려치고 있었다.

이 자슥이 여가 어딘데 거드름을 피우고 지랄이고! 일마야, 니만 시인이가 나도 문예춘추 당선시인이다.

알아 묵지도 못할 관념이나 농하는 주제에 좀 잘 나간다 시푼께 오줌똥을 못 가리고 자빠졌네!

박영포는 이상의 멱살을 뒤로 홱 밀치며 술집을 박차고 나가 버렸다. 정말 순식간의 일이었다.

얼얼한 뺨을 감싸며 박영포의 뒷모습을 지켜보는 이상은 술이 확 깨는 모양이었다.

그때야 청마는 얼른 이상을 자리에 앉히고 술을 권하며 대신 사과했다.

박영포는 이미 사라지고만 다음이었다. 기고만장하던 이상은 이미풀이 죽어 있었다.

남은 생리동인들은 미안한 표정 속에서도 쾌재를 불렀다. 박영포가 아니었다면 누가 감히 이상의 따귀를 갈기고 자기들의 자존심을 지켜줬을 것인가.

박영포. 그는 1913년 좌천동에서 태어난 부산 토박이었다.

그는 부산상업학교 2학년이었던 1927년에 광주학생사건 주모자의 일원으로 일경에 검거되어 투옥되었다.

그는 이듬해 폐결핵이 악화되어 가석방되었다.

그는 부산진육영학원 강사로 일하면서 문학적 열정을 불태우기 시작했다.

그는 1935년일본 문예지 문예춘추에 시 푸른조끼가 당선된 후, 초기 부산시단에 활력을 불어 넣은 시인의 한 사람이었다.

 그는 애주가로 매우 과묵한 편이었으나 경우에 어긋나거나 불의를 보면참지 못하는 전형적인 열혈의 부산남자였다.

그러나 그는 지병인 결핵으로 1939년 스물 여섯의 푸른 나이에 삶을 접고 말았다.

그런데 그에게 뺨을 얻어맞은 이상 또한 서울로 돌아간 이듬해인 1937년 결핵에 발목을 잡혀 그보다 먼저 이 세상을 떠났으니 묘한 인연이었다.

지금쯤 결핵 없는 하늘에서 다정하게 대포라도 나누고 있을지…       국제신문 신태범의 부산문화 野史: 2001

 

 http://blog.naver.com/joba34/140019413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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깃발  (0) 2017.05.23

 

 

 

 

李箱의 靈前에 바침

이상의  영전에 바침

 

아무리 째려 보아야

스트라빈스키의 어느 졸작보다도 이쁘지 못한

 도, 레, 미, 파……인생의 일주일.

은단추와 조개껍질과

금화와 아가씨와

불란서 인형 몇 개

부스러진 꿈 조각과……

쥬피타의 노름감은

하나도 재미가 없다.       -- 쥬피타 追放 -중에서 / 김기림 --

 

 

샤넬과 스트라빈스키/ 봄의 제전(Rite of Spring)

1913년 5월 29일 파리의 상젤리제 극장에서 초연된 [봄의 제전]은 당시 청중들이 받아들이기에는 충격적인 요소들이 많았다.

'[불새] 나 [페트루슈카] 에서 보여준 스트라빈스키의 모습보다는

 원시성이 짙은 리듬과  독창적인 시도들이 주를 이뤘고 이를 접한 청중석에서는 수근거림이 시작됐고 

이내 야유와 비난이 터져나왔다.

이를 옹호하는 사람들 사이에서의 다툼이 일어나고 청중석은 한마디로 아수라장이 된다...

이런 청중석을 진정시키기 위해서 디아길레프가  조명스탭에게 장내의 조명을 깜빡거리라고 지시하지만

오히려 혼란만 가중시킬 뿐이었다. 결국 경찰까지 부르게 되는데.. 

1부가 끝나서야 도착한 경찰들도 별 도움이 되지못한다. 

이러한 소란에도 불구하고 몽퇴는 계속해서 연주를 이어나가고 무사히 연주를 마친다.

 

공연 다음 날 스트라빈스키는 여러 매체에서 엄청난 비판을 받지만 스트라빈스키와 주요 스탭들은 개의치 않고 나머지 5일 동안의 공연을 진행한다.

첫날의 충격때문이었을까

그 뒤에 진행된 공연에서는 청중들의 소란없이 잘 끝이난다.   

*이 에피소드를 영화 '샤넬과 스트라빈스키'의 도입부에 잘 재현해놔서 참고하면 좋을 것 같아요    mimi1751님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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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와 나비 해설   (0) 2016.07.08

 

 

 

미국 화가. 47년간 ‘새터데이 이브닝 포스트’ 잡지에 321개의 표지 그림을 그렸다. 일상적인 미국의 생활을 대중적으로 표현하였다. 1925년부터 1976년까지 매년 보이스카우트 달력을 그렸고, 존 F. 케네디 대통령을 포함한 유명 인사들의 초상화도 그렸다.

    

노먼 록웰은 열네 살 때부터 뉴욕에 있는 여러 미술 대학들에서 공부를 했다. 열여섯 살에 여전히 학생이었던 그는 넉 장의 크리스마스 카드를 만들어달라는 생애 최초의 주문을 받았다. 열여덟 살에는 전업 화가가 되었다. 4년 후, 록웰은 미국 최대 판매부수를 자랑하는 주간지인 『새터데이 이브닝 포스트』의 표지를 그리기 시작했다. 그는 이후 47년간 이 잡지를 위해 총 321개의 표지 그림을 그렸다. 이로써 그는 역사상 당대에 가장 많은 팬을 가진 미술가가 되었다.

록웰은 다른 많은 간행물에도 작품들을 실었다. 그는 일상적인 미국의 생활상에서 주제를 얻었다. 그의 작품은 대중적이고 일화적이며 세부적이었다. 그러나 일부 비평가들은 그의 작품이 너무 감정에 치우친다고 폄하했다. 록웰은 40권 이상의 책 표지를 그렸으며, 1925년부터 1976년까지 미국 보이스카우트 달력을 해마다 그렸다. 또한 그는 많은 유명 인사들의 초상화도 그렸는데, 그중에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존 F. 케네디, 린던 존슨 대통령도 포함된다. 프랭클린 D. 루즈벨트 대통령의 의회 연설에 감명을 받은 록웰은 <네 개의 자유>(1943)를 그렸는데, 이 그림은 『새터데이 이브닝 포스트』지에 게재되기도 했다. 『새터데이 이브닝 포스트』지와 재무성의 후원을 받아, 그의 작품들은 전국을 순회하며 전시되었다. 이 때 전쟁 자금으로 1억 3천만 달러의 후원금이 모금되었다.

1953년에 록웰은 가족들을 데리고 버몬트에서 매사추세츠로 이사를 했다. 그곳에서 그는 1963년부터 1973년까지 『룩』이라는 잡지에 삽화들을 기고했는데, 시민의 권리, 빈곤과의 전쟁을 선포한 미국의 정책, 그리고 우주 탐험 등과 같이 당시 그가 관심을 가졌던 문제들을 주제로 다루었다. 1977년 록웰은 대통령 자유 메달(Presidential Medal of Freedom)을 받았고, 2001년에는 뉴욕의 구겐하임 미술관에서 그의 작품들을 전시했다.

"도시에서는 언제나 불쾌한 일들을 마주하기 마련이다. 나는 그것이 마을을 동요시키는 일임을 안다."

 노먼 록웰 [NORMAN ROCKWELL] (501 위대한 화가, 2009. 8. 20., 마로니에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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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네 뤼시앙 쇼메트(René Lucien Chomette)   (0) 2017.02.04

 

 

 

 

 

살바도르 도밍고 펠리페 하신토 달리 이 도네메크(Salvador Domingo Felipe Jacinto Dalí i Domènech,

1904년 5월 11일~1989년 1월 23일

 

스페인의 초현실주의 화가이자 판화가, 영화 제작가이다.

무의식을 탐구한 초현실주의 화가.

20세기 미술에 큰 족적을 남겼다.

녹은 시계들이 사막에 널려 있는 풍경을 그린 <기억의 고집>처럼, 익숙한 것들을 이해할 수 없는 문맥 속에 놓았다.

그런 작품에서 보여준 충돌과 부조화는 평단의 큰 주목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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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s le ciel de Paris  빠리의 하늘 아래

 

 

 

 

1930년대 프랑스영화의 황금기 시절 르네 클레르는 장 르누아르나 마르셀 카르네 같은 감독보다도 더 대접받는 작가였다.

앙드레 바쟁의 말대로 당시 르네 클레르는 채플린 이래 세상에서 가장 존경받는 감독의 하나였고 그의 매력적인 코미디들은 지적 풍요로움과 샴페인 같은 영화보기의 유쾌함을 주는 것이었다.

그러나 50년대를 고비로 그의 평가는 점점 추락일변도의 하강곡선을 그리며 동시대 작가 감독들의 반열에서 멀어져 갔는데,

그것은 복잡한 삶의 현실에서 도망가려는 영화의 과도한 단순함과 순진함 때문이었다.

1898년 파리의 센 강변에서 태어난 르네 클레르는 영화평론가이자 배우로 활약하던 중 영화제작에 매력을 느끼고 자크 드 바로셀로니 감독 밑의 조수로 영화계에 입문한다.

1924년 그는 <간주곡 Ent’r, ract><파리는 잠들고 있다 Paris qui dort>를 내놓으면서 일약 영화계의 주목을 끄는 재능있는 감독으로 데뷔했는데, 영화는 사회풍자적인 요소와 초현실주의적 환상을 결합한 코믹판타지 물로 이러한 초현실주의적 백일몽의 이미지는 그의 후기작품까지 계속 영향을 미쳤다.

 

르네 클레르  (René Clair)

 

 

 

 

 

 

 

 

이탈리아의 맥고 모자 (An Italian Straw Hat, 1927)

무성영화 시대의 대표작이다. 19세기 프랑스 극단의 재사() 외젠 라비슈가 마르크 미셸과 공동제작하여 보드빌(프랑스의 독특한 경연극)에서 크게 성공했던 동명 희극을 영화화하였다.

신랑을 태우고 결혼식장으로 달리던 마차의 말이 군인과 밀회중인 유부녀의 맥고모자를 물어뜯어,

밀회의 탄로를 겁내어 배상을 요구하는 군인과 그 때문에 결혼식을 팽개치고 동분서주하는 신랑을 둘러싸고

재치 넘치는 웃음이 전개된다.  

프랑스 영화 사상 가장 프랑스적 감각이 넘쳐 흐른다고 하는 클레르 감독의 특징이 잘 나타난 작품이다.

 

Le Chapeau de paille d'Italie(두산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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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학생운동의 전개

 

(1) 광주학생운동의 발단

1929년의 광주고등보통학교와 광주농업학교의 동맹휴교는 학교당국·도학무과(道學務課)·경찰의 강경한 조치 때문에 표면상으로는 종식되었지만 학생들의 반일감정은 더욱 심화되어갔고 행동의 돌파구만 있으면 분출할 정세에 놓여 있었다.
이러한 상황 아래 1928년을 보내고 1929년을 맞이했다. 방학이 끝나고 개학이 되면서 학생들이 등교하자 학교당국에서는 예의주도하게 학생들의 동태를 주시하고 있었다. 그러나 광주고등보통학교에서는 5월부터 학생들의 움직임이 보이기 시작하여 벽이나 화장실등에 ‘조선독립만세’ ‘조선혼(朝鮮魂)을 고취(鼓吹)하자’ ‘6월이 되면 전선적(全鮮的)으로 맹휴하자’라는 낙서가 나붙기 시작하였다

 

1이는 6월 26일이 맹휴 1주년이 되는 날이기 때문에 학생들은 이 날을 상기하고 행동의 돌파구를 찾으려고 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6월 25일 5학년 학생들은 자치회(自治會)를 한다는 명목으로 수업을 거부하였고, 26일에는 전체 학생들이 동요를 일으켜 그 중 일부가 수업을 받지 않고 학교당국과 신경전을 벌이다가 하교하고 말았다.
더구나 이날은 광주고등보통학교와 광주중학교 학생 간의 첫 충돌을 일으킨 날이기도 하다. 즉 이날 송정리의 한·일 통학생(通學生)들이 열차가 광주와 송정리 중간역인 운암역(雲岩驛)을 지날 때 한국인 농부들이 개를 잡아 불에 끄슬리고 있는 광경을 본 광주중학생인 근둥(近藤:곤도오)이 “야만(野蠻)이다”라고 말했다. 옆에서 이를 들은 광주고등보통학교생들이 “무엇이 야만이냐”고 하면서 그의 모자를 벗겨 버렸다. 근둥이 모자를 벗긴 학생을 구타하자 광주고등보통학교생들도 이에 근둥을 때려 패싸움으로 변했다.
통학생들의 감정적인 대립은 여기서 끝나지 않고 민족적인 반목으로 발전하여 한국인 학생들은 식민지 피지배민족이라는 현실을 타개하기 위한 항일운동을 생각하였고, 일본인 학생들은 지배자의 입장에서 정치적·문화적 우월감을 가지고 한국학생들을 대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양민족 학생들의 사고방식은 사사건건 구실만 있으면 서로 대립하고 반목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라고 보여진다. 그리하여 1929년 6월의 운암역사건이 일어난 지 4개월 후인 10월 30일 또 다시 한·일기차 통학생간의 시비가 발단되어 11월 3일 광주학생운동으로 확대·발전되게 되었다.

 

1929년 10월 30일 오후 5시 30분 경 광주에서 통학생을 실은 하행통학열차가 나주역(羅州驛)에 도착, 통학생들이 삼삼오오 짝을 지어 개찰구로 나갈 때 광주중학교 4년생 복전수삼(福田修三:후꾸다 슈우죠)·말길극기(末吉克己:스에요시 가쯔미)·전중(田中:다나까) 등이 광주여자고등보통학교 3년생인 박기옥(朴己玉)·이광춘(李光春)·이금자(李錦子:혹은 李岩城) 등을 ‘센징〔鮮人〕’이라 조롱하며 특히 복전이 박기옥의 댕기머리를 잡아 다니며 희롱하니 여학생들은 항거도 못하고 어쩔 줄 모르고 있었다. 이 당시의 사정을 박기옥의 4촌동생이며 광주고등보통학교 1년생이었던 박준채(
朴準埰)는 다음과 같이 술회하였다.

……나는 피가 역류하는 분노를 느꼈다. 가뜩이나 그놈들과는 한 차에 통학을 하면서도 민족감정으로 서로 멸시하고 혐오하며 지내온 터인데 그자들이 우리 여학생을 희롱하였으니 나로서는 당연한 감정적인 충격이었다. 더구나 박기옥은 나의 누님(4촌)이었으니 나의 분노는 더 하였다.
나는 박기옥의 맹기를 잡고 장난을 친 복전을 개찰구 밖 역전광장에서 불러 세우고 점잖게 따졌다.
“후꾸다 너는 명색이 중학생인 녀석이 야비하게 여학생을 희롱해” 그러자 복전은 “뭐라고? 센징놈이 뭐라고 까불어” 이 센징이란 말이 후꾸다의 입에서 떨어지기가 무섭게 나의 주먹은 그 자의 면상에 날아가 작렬하였다. 더구나 센징이란 얼마나 우리민족을 모욕한 말인가? 일인교사들이나 지각없는 일인들 입에서 불시에 튀어 나오던 이 비칭에 대하여 평소 나는 어린(16세) 마음에도 앙심을 먹고 있었다.……

 

박준채의 위와 같은 대일관(對日觀)은 당시 한국학생들이 가지고 있었던 태도였다. 박준채와 복전의 싸움은 양교 통학생 간의 패싸움으로 변하여 역전광장이 어수선하자 나주 역전파출소에 근무하던 삼전송삼랑(森田松三郞:모리다) 순사가 일방적으로 광주고등보통학교학생이 나쁘다고 힐난하면서 박준채의 따귀를 때리고, 부당함을 항의하는 박준채를 또 때리니 할 수 없이 한국학생들은 민족차별에서 오는 분노를 참고 귀가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다음 날인 10월 31일 광주로 가는 상행통학열차에서 일본인 학생들은 전날의 앙갚음으로 떼를 지어 박준채의 자리로 몰려와 시비를 걸자 한국인 학생들도 가만있지 않고 박준채를 호위하면서 서로 옥신각신하였으나 별다른 충돌없이 보냈다. 그러나 이 날 오후 5시 하행열차에서 한·일학생 간에 패싸움이 벌어졌다.

 

이 때 차장이 달려와 싸움을 말리고 박준채외 수명의 광주고등보통학교 학생과 복전수삼의 통학승차권을 압수했고 이 싸움을 보고있던 광주일보(光州日報)의 일본인 기자가 복전의 말만 듣고 한국인 학생이 무조건 나쁘다고 욕설을 퍼부었으며, 일본인 승객들도 박준채를 향해서 “선인(鮮人)주제에 건방지다”느니 “선인학생이 잘못했다”느니 하면서 욕설과 폭언을 퍼부었다. 이를 들은 한국학생들은 대항도 하지 못하고 울분을 삼킨 채 국가없는 민족의 설움을 다시 한 번 되새기게 되었다.
11월 1일 박준채와 복전 등은 전날 압수당한 통학승차권을 찾아 각기 학교에 등교하였다. 복전은 등교하자 길전(吉田:요시다) 교유(敎諭;선생)에게 2일 간의 사태를 보고하였고 이에 길전은 광주고등보통학교의 도변(渡邊:와다나베)·강본(岡本:오가모도) 교유에게 연락하니 이 날 방과 후 박준채는 이들 교사에게 불려가 단단히 야단을 맞았다.
광주고등보통학교와 광주중학교 통학생 간의 사이가 이처럼 험악하다는 것을 파악한 광주고등보통학교의 장곡천(長谷川:하세가와)이 통학생 감독을 위하여 이 날 오후 광주역(光州驛)에 파견되어 학생들을 감시하게 되었다.

 

그러나 통근열차의 발차시간이 거의 다 되었을 때 광주중학교 5년생 4·5명이 광주고등보통학교생 정세면(鄭世勉)에게 시비를 걸자 정세면은 기차에 타고 있던 광주고등보통학교 통학생들에게 이 사실을 알렸고, 한국인 학생들은 모두 기차에서 하차하여 개찰구를 경계선으로 서로 대치하게 되었다.
광주역에서 벌어진 한·일학생 간의 새로운 사태에 접한 광주고등보통학교에서는 지전(池田:이게다)·복중(福重:후꾸시게)·강본(岡本) 교유가 달려왔고 광주중학교에서는 이전(伊田:이다)·증전(增田:마스다)·뇌구(瀨口:세구찌) 교유가 달려와 현장수습에 나섰다. 이 때 광주고등보통학교생은 약 20명이었고 광주중학생은 약 30명으로 일본인 학생 중에는 통학생이 아닌 학생도 섞여 있었으며 상급반 학생 중에는 단도까지 뽑아들고 있어 사태는 매우 험악하였다.
현장에 달러온 중학교의 일본인 교사들은 일본학생 편을 들면서 한국학생들을 나무라고 전 날 주먹을 휘두른 학생이 누구냐면서 오히려 더욱 사태를 악화시키려하자, 고등보통학교의 일본인 교사들이 “지금은 싸움을 말릴 때가 아니냐” 하면서 동시철수를 제의하자 중학교의 일본인 학생이 먼저 철수하고 뒤이어 한국인 학생들도 일단 학교로 철수하였다.

 

학교에 돌아온 한국학생들은 5학년 을급(乙級) 급장(級長) 노병주(盧秉柱)와 통학생 단장(團長) 채규호(蔡奎鎬) 등이 이 날 사태를 보고하고 의견을 교환하려 했으나 분노에 복받친 학생들은 선후대책이 불가능한 것을 느끼고 일단 해산하기로 하고 장곡천(長谷川)의 인솔로 송정리통학생은 귀가하고 안본(岸本:기시모도)의 인솔로 나주통학생도 모두 귀가하였다.
이튿날 즉 11월 2일 학교에 등교한 광주고등보통학교생 등은 어제의 광주역사건에 대하여 흥분을 감추지 못하며 화살을 일본인 교사들에게 돌렸다. 즉 일본인 선생들에 대하여 “중학교 선생처럼 선생들도 우리 편을 들어 달라”, “우리 선생은 말리기만 한다”, “중학교 학생을 응원한 이전이나 길전같은 자는 선생이 아니다” 라고 항의하였고 학교 안 여기저기에는 항일적 낙서가 붙여지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날은 양교 학생들 간에 별다른 충돌없이 넘어가고 드디어 11월 3일을 맞이하였다.

 

(2) 광주학생운동의 시위화

1929년 11월 3일은 지금까지 쌓이고 쌓였던 광주시내 한국인 학생들의 울분이 일시에 폭발하여 광주학생운동을 일으킨 날이며, 이를 계기로 전국학생들이 일본제국주의에 항거하여 민족운동을 전개한 뜻깊은 날이기도 하다. 한편 이 날은 일본 4대국경일의 하나인 명치절(明治節)이었고 공교롭게 음력으로는 10월 3일이 되어 우리민족에게는 개천절(開天節)이어서 한국학생들에게는 희비가 교차되는 날이었고 마침 일요일인데다 전남견산(全南繭産) 600만석 돌파축하회가 광주신사(光州神社) 앞에서 열리는 날이어서 온 광주시가가 인파로 들끓었고 일본학생들은 축제분위기에 들떠있었으나 한국학생들은 비분 속에 이 날을 맞이하였다.
일본제국주의는 명치절을 기념하기 위하여 전국 각급학교 학생들을 등교시켜 기념식을 갖도록 지시하여 이에 따라 광주에서도 명치절 기념식이 각 학교 별로 개최되었다. 광주중학교에서는 기념식이 끝난 뒤에 모두 광주신사로 가서 참배했으며, 광주고등보통학교는 기념식은 가졌으나 학생들은 일본국가를 부를 때 제대로 부르지 않았고 신사참배는 자유의사에 맡겼으나 한 학생도 신사에 간 학생은 없었다.

 

특히 이 날은 광주시내 한국인 학생들에 의하여 조직된 비밀결사 성진회 창립 3주년 기념일이어서 독서회중앙본부(讀書會中央本部)에서는 이 날을 기하여 일제히 궐기하자는 암암리의 상호연락과 지시가 있어서 광주고등보통학교를 비롯하여 광주농업학교·광주사범학교·광주여자고등보통학교생들의 분위기는 자못 험악하였다.

 

이런 눈치를 알아차린 각 학교의 선생들은 시내 요소요소에 배치되어 불상사를 방지하려고 하였다. 오전에 학교에서 식을 마친 광주고등보통학교생들은 삼삼오오 떼를 지어서 시내로 쏟아져 나왔다. 거리에 나온 광주고등보통학교생 일단은 통학열차 내에서 일어난 한일학생 간의 충돌사건을 편파적으로 보도한 광주일보사에 몰려가 기사의 왜곡성을 항의하고 윤전기에 모래를 뿌려 신문제작을 방해했다.
한편 임한길(任漢吉)·고광신(高光信)·구용우(具龍祐)·황남옥(黃南玉)·최상을(崔祥鳦) 등 7·8명이 수기옥정(須寄屋町:스끼야 쵸) 우체국 앞에서 광주중학교의 재등준부(齋藤俊夫:사이또오 도시요) 등 16명과 맞부닥쳐 패싸움을 벌였다.

 

이들 일본인 학생들은 신사참배 후 귀로에 광주천(光州川)부근에서 광주고등보통학교생 최쌍현(崔雙鉉)을 단도로 코와 안면을 찔러 부상을 입히고 도주해 온 자들이었다. 우체국 앞에서의 싸움은 광주고등보통학생들이 수적인 열세에도 불구하고 일본인 학생들을 구타하니 이들은 형세 불리함을 느끼고 광주역 쪽으로 도주하였다. 이에 광주고등보통학교생들은 이들을 쫓아 광주역으로 달려가 순찰 중이던 광주서(光州署) 순사 5명과 광주중학교 복정(福正:후꾸마사) 교유를 제치고 플랫트홈으로 도망친 일본인 학생들을 닥치는 대로 때려 눕히니 이들은 두려워서 자기학교로 도주하기 시작하였다.
이럴 즈음 광주중학교생들이 구타당하고 있다는 급보를 받은 광주중학교에서는 기숙사생 백 수십명이 목도(木刀)·단도(短刀) 등을 휴대하고 유도교사의 인솔로 ‘광주고보생타도’를 외치면서 달려왔고, 광주고등보통학교 기숙사생들도 야구방망이나 운동기구 등으로 무장하고 광주역으로 달려왔으며, 시내를 배회하던 광주고등보통학교생과 광주농업학교생들도 역전으로 모여 들었다.

 

이리하여 광주역 광장은 한일학생 간의 결투장으로 변하였다. 현장에 몰려있던 군중들도 한국학생들이 싸우는 모습을 보고 ‘왜놈 죽여라’고 함성을 지르면서 학생들의 사기를 북돋아 주었다.

 

이 때 양측의 학생 수는 각각 200여 명 내외로 수에 있어서는 비등하였으나 싸움은 한국학생들이 유리하여 일본인 학생들은 차츰 도망가기 시작하였다.
이와같은 한일학생 간의 충돌을 연락받고 광주서에서는 비상경계를 내리고 경찰대·기마대·소방대까지 동원, 현장에 출동하여 도주하는 일본인 학생들의 뒤를 쫓는 한국학생들의 진로를 차단하였다. 그리하여 양측 학생들은 담양가도(潭陽街道) 성저리(城底里) 십자로(十字路)부근의 작은 토교(土橋)를 사이에 두고 서로 대치하게 되었다.

 

이에 경찰의 강력한 제지와 양교 교사들의 교섭으로 동시 퇴각이 결정되어 일단 험악한 상태는 가라앉았다.
광주고등보통학교생들은 노병주의 인솔로 학교강당으로 집결하였다. 이때 많은 학생들의 손에는 장작개비 한 개 씩을 들고 있었으니 이것은 양측이 서로 대치해 있을 때 광주중학교를 습격하기 위하여 인근에 있던 관동여관의 장작더미에서 한 개씩 집어 들고 있었던 것이다.

 

강당에 집합한 학생들은 노병주의 사회로 사건경위의 보고와 사후대책을 논의, 일인중학교를 완전히 타도하여야 한다는 강경론이 지배적이어서 가두시위투쟁을 벌이기로 하였다.
김병기(金炳基)·강윤석(康潤錫)·김용대(金容大)·김상환(金相免)등이 농구실을 부수고 삽·괭이·목봉(木棒) 등과 검도실에서 검도도구를 꺼내어 장작을 들지 않은 학생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이 때 광주농업학교의 최태주(崔泰周)가 광주농업학교생들도 가두시위에 참가한다고 통고해와 사기는 더욱 충천하였다. 오후 1시 어린 학생들을 가운데 넣고 상급생들이 앞과 뒤에서 보호하면서 교문을 박차고 시가로 쏟아져 나왔다. 이 때에 광주농업학교생들이 뒤를 따랐고 광주사범학교의 한국인 학생들도 학교의 완강한 제지를 뿌리치고 학교담을 뛰어넘어 시위대열에 합세했다.
시내에 나온 시위대열의 학생들은 ‘조선독립만세’ ‘식민지 노예교육을 철폐하라’ 등의 구호를 외치고 애국가·응원가를 부르며 행진했다. 한국학생들의 사기는 충천했다.

 

전남견산(全南繭産) 600만석 돌파경축대회에 참석했던 수 많은 도민들도 이에 호응하여 시위군중은 3만 명이라고 당시 언론기관이 보도하고 있다.

 

시위대열은 두번에 걸쳐 광주중학교를 목표로 돌진하였으나 일경의 강력한 제지에 부딛쳐 성공은 거두지 못했으나 광주시내는 완전히 한국학생들로 메워져 일본인들은 겁에 질려 폐문철시하였고, 광주서(光州署)도 자체 경찰력으로는 부족하여 인근지방의 경찰을 동원하여 초비상사태에 돌입하였다.
광주중학교 습격이 좌절되자 시위대열은 대오를 정비하여 광주고등보통학교로 돌아왔다. 교문 앞에서 광주농업학교와 사범학교생들은 해산하고, 광주고등보통학교생들은 강당에 집결 ① 부상자문제 ② 금후의 연락방법 등을 결의하고 대오를 지어 모두 귀가하였다.
이 시위로 광주고등보통학교를 비롯하여 광주농업학교·광주사범학교는 물론 광주중학교까지 이 날부터 3일 간 휴교령이 내려졌고 다시 사태가 악화되자 11월 9일까지 휴교령이 연기되었다. 그 뿐만 아니라 이 날부터 한국학생들에 대한 검거선풍이 불어 다음날까지 70여 명이 구속되고 그 중 62명이 검사국으로 송치되었다.

 

이와 같은 검거는 일경의 편파적인 행위였다. 한국학생 70명에 비해 일본학생은 7명을 검거했으나 그것도 얼마 지나지 않아 모두 석방했던 것이다.
(3) 광주학생운동의 여론화
광주학생운동에 대한 일제당국의 불공평한 처사에 대하여 민중들은 불만을 품었고 언론기관·신간회(新幹會)를 비롯한 각 사회단체에서도 이를 규탄하고 비밀리에 조사단을 파견, 진상조사에 나섰다.

 

그 중 신간회는 허헌(許憲)·김병로(金炳魯)·황상규(黃尙奎) 등이 11월 9일 광주에 도착, 백정 광주고등보통학교장과 좌등(佐藤:이도) 광주중학교장을 방문하여 사건진상을 조사하고 관계기관을 방문하여 사건의 불공평한 처리를 엄중 항의하였다.
한편 광주고등보통학교·광주농업학교·광주사범학교·광주여자고등보통학교·광주 수피아여학교(須皮亞女學校)·광주숭일학교(光州崇一學校) 등의 한국학생들은 편파적인 행정기관처사에 격분하고 끝까지 항쟁할 것을 결심, 제2차 시위운동을 전개하게 되었다.

 

제1차 시위운동 직후인 11월 4·5일 경 광주고등보통학교출신 장재성(張載性)은 재광주사회단체(在光州社會團體)의 간부인 장석천(張錫天)·강석원(姜錫元)·박오봉(朴五鳳)·국채진(鞠採鎭) 등과 회합하여 학생투쟁지도본부를 결성하고 각 학교의 책임자를 정하고 다음과 같은 격문의 초안을 작성, 학생들에게 보냈다.

학생이여 대중이여 궐기하라. 검거된 학생은 우리의 손으로 탈환하자. 언론·결사·집회·출판의 자유를 획득하라. 식민지 교육제도를 철폐하라. 조선인 본위의 교육제도를 확립하라.

 

 

이리하여 동월 10일 광주고등보통학교생 오쾌일(吳快一)·이영범(李 榮範), 광주사범학교생 이신형(李信珩)·황상남(黃相南), 광주농업학교생 김남철(金南哲)·정욱(鄭昱) 등이 회합하여 동월 11일 각 학교 별로 수업시작종을 신호로 전기(前記) 격문을 살포하고 만세시위운동을 전개하기로 합의를 보았다. 그러나 11일 보다 12일이 마침 광주장날이라 이 날 많은 군중들이 모일 것을 예상하고 시위일을 12일로 수정하고 오쾌일이 다음과 같은 4종의 격문인쇄를 책임지기로 하였다.

1. 학생·대중이여 궐기하라! 우리의 슬로건 아래로! 피검자를 우리의 힘으로 탈환하자. 검속자를 즉시 석방하라. 교내의 경찰권 침입에 반대하라. 언론·집회·결사·출판의 자유를 획득하라. 조선인 본위의 교육제도를 확립하라. 식민지 노예교육제도를 철폐하라. 사회과학연구의 자유를 획득하라.
2. 조선민중이여 궐기하라! 피검자를 탈환하라. 재향군인의 비상소집에 반대하라. 경계망을 즉시 철회하라. 소방대·청년단을 즉시 해산하라. 광주중학을 폐쇄하라. 언론·집회·결사·출판의 자유를 획득하라.
3. 용감히 싸워라. 학생·대중이여! 우리의 슬로건 아래 궐기하라. 승리는 오직 우리들의 단결과 희생적 투쟁에 달려 있다(이하 제목은 2항과 같음).
4. 용감한 학생 대중이여 최후까지 우리의 슬로건을 지지하라. 그리고 궐기하라. 전사여 힘차게 싸워라(이하 제목은 1항과 같음).

 

 

이와같은 격문을 약 1천매 인쇄하여 12일 오전 8시 김안진(金安鎭)에게 약 5백매, 강민섭(姜旻燮)에게 약 2백매, 조길룡(曹吉龍)에게 약 3백매를 교부하였다.
11월 12일 수업종이 울리자 광주고등보통학교에서 김향남(金向南)이 “철창에서 신음하는 교우들을 구하자”는 외침과 함께 김안진·최상을(崔祥鳦)·김상석(金三錫)·김동섭(金東燮)·송만수(宋萬洙)·김홍남(金鴻南) 등을 선두로 학생일동이 교문을 박차고 시내로 쏟아져 나왔다. 학생시위대열은 전기(前記) 격문을 뿌리고 구호를 외치면서 광주형무소를 목표로 정하고 진격하였다. 도중에 광주여자고등보통학교와 광주사범학교 앞에서 시위에 합세하라고 외쳤으나 양교의 교사들이 교문을 굳게 잠가놓고 극력 제지하였으므로 시위대열에 참가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광주농업학교에서는 수업종을 신호로 조길룡(曹吉龍)의 제창과 김남철(金南哲)·최정기(崔貞基) 등 10여 명의 선도로 전교생이 일제히 교문을 박차고 격문을 뿌리고 구호를 외치면서 광주형무소로 진격하였으나 광주고등보통학교 부근에서 급히 출동한 일경에 의하여 저지당하고 말았다.
이상과 같은 제2차 항일학생 시위운동으로 일경에 검거된 학생 수는 양교를 합하여 280여명 이었으니 시위참가학생 약 550여명의 과반수가 되며 일경은 이 많은 학생을 유치장으로는 모두 수용할 수 없어서 도청 앞 무덕전(武德殿)에도 집단으로 학생을 수용하였다. 특히 제2차 시위운동에 연루되었다는 혐의로 광주시내 일반사회단체에 대하여도 검거선풍이 불어 사회단체간부 100여명이 차례로 구속되었다.

 

이와같은 제2차 광주학생 시위운동이 있은 후 일제는 광주시내 중등교육기관에 휴교조치를 내리고 시위운동에 관한 일체의 보도금지령을 내렸다. 이러한 조치는 동년 12월 28일까지 취해져 그 사이 한국인들은 광주학생운동의 진상을 파악하지도 못하였고 이에 따라 전국의 민심은 동요되고 일제의 악랄한 정책에 대한 분노는 높아만 갔던 것이다.
2차에 걸친 광주학생들의 항일시위운동으로 구속된 학생이 255명에 이르러 많은 희생자를 냈다. 그러나 광주학생들은 이러한 희생에도 불구하고 1930년 1월 9일 광주고등보통학교에서 다시 백지동맹(白紙同盟)을 일으켜 17명의 학생이 퇴학당했고

 

동월 16일에는 제3차 시위운동을 준비하다가 발각되어 48명이 무더기로 퇴학당하였으며 광주여자고등보통학교 학생들도 백지동맹·비밀결사 등 시위에 관련되어 40여명이 퇴학당하는 등 한 번 피어났던 불꽃은 꺼질 줄 모르고 피어오르기만 하였다.

 

  • 8권 3·1 운동이후의 민족운동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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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4. 광주학생 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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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준채(朴準埰)옹이 7일 오전 11시55분 광주보훈병원에서 숙환으로 타계했다

                                                                동아일보 기사입력 2001-03-07 18:51 | 최종수정 2001-03-07 18:51

     

    나주역 사건으로 광주고보에서 퇴학당한 뒤 3개월간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이후 양정고보를 졸업한 후 일본으로 건너가 와세다대에서 경제학을 전공한 그는 광주로 돌아와 60년대 초부터 조선대 교수로 재직, 이 대학 법정대학장과 대학원장 등을 역임했다.

    그는 대학강단에서 물러난 뒤 광복회와 광주학생독립운동 동지회에서 활동하다 88년 국민훈장석류장과 90년 건국훈장애족장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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