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서 고국 그리던 화가 김환기 서울의 시인 김광섭에게 편지 고독·곤궁의 기록 … 12통 첫 공개
[1967년 5월 8일 소인이 찍힌 이 편지는 네 장의 그림엽서다. 김환기는 산봉우리에 유유히 떠다니는 구름을 그려 넣고는 “쇠고기야 엄두가 나야지. 새우젓에 참기름으로 살자. 산을 바라보며 견우와 직녀로 살자”라고 적었다. 수화가 뉴욕서 이산 김광섭에게 보낸 편지 12통을 입수했다. 미술사가 황정수씨가 본지에 공개했다.]
[김환기(左), 김광섭(右)]
“요새 제 그림은 靑綠色(청록색), 점밖에 없어요. 왼편에서 한줄기 점의 파동이 가고, 또 그 아래, 또 그 아래, 그래서 온통 점만이 존재하는 그림이야요. 붓을 들면 언제나 서러운 생각이 쏟아져 오는데 왜 나는 이런 그림을 그리고 있는 것일까. 참 모르겠어요. 창밖에 빗소리가 커집니다.”
1966년 2월 뉴욕의 수화(樹話) 김환기(1913~74)는 서울의 이산(怡山) 김광섭(1905∼77)에게 이렇게 적어 보냈다. 세계 무대에서 스스로를 시험하고자 홍익대 교수도 그만두고 1963년 미국으로 건너간 수화는 고국을 몹시 그리워했다. 그 창구는 이산이었다. 성북동서 가까이 살며 교분을 나눴던 이산으로부터 받는 소식, 이산의 시를 통해 수화는 위로받았고 이를 작품으로 승화했다. 대표적인 게 이산의 시 ‘저녁에’를 모티브로 그린 대형 점화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1970)다.
뉴욕 시절의 수화가 이산에게 보낸 편지 12통이 처음 공개됐다. 편지는 1965년 11월말부터 시작한다. 일곱 달 전 수화는 이산이 뇌출혈로 쓰러졌다는 소식을 부음으로 오인해 충격을 받았었다. “부디 서러워 마시고 빨리 健康(건강)해지셔서 환희에 찬 싱싱한 詩(시)를 써 주십시오. 빨리 돌아가고 싶지만 왜 돌아가지 못하는지 나도 모르겠어요.”
이렇게도 털어놓았다. “빨리 이 봄에 詩集(시집)을 내야 해요. 그리고 한 권 보내주셔요. 석판화를 넣어 호화판 畵集(화집)을 제가 다시 꾸며 보겠어요. 이것은 장기계획-제가 서울에 가지는 날, 그것도 딸라를 좀 쥐고 가지는 날 자비출판 하겠어요. 한 권에 3만원짜리 화집을 내야겠어요. 되도록이면 비싸서 안 찾는 책을 내고 싶어요. 이런 것이 미운 세상에 복수가 될까.”(1966년 2월 24일)
화가는 타국에서 외로웠고, 곤궁했다. 편지마다 시인에게 “시를 써 주세요” 독려했던 것은 곧 스스로에게 ‘그림을 그리라’고 채찍질하는 거였을 터다.
편지는 미술사가 황정수씨가 갖고 있던 것이다. 전기작가 이충렬씨가 본지에 알려왔다. 간송(澗松) 전형필(1906∼62), 혜곡(兮谷) 최순우(1916∼84) 등 우리 고유의 아름다움을 찾았던 이들의 전기를 써온 그가 이번에 매달린 인물은 탄생 100주년을 맞는 김환기다. 『김환기-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유리창)를 출간했다. 저자는 한국 추상미술의 선구자 수화뿐 아니라 파리·뉴욕 등지에서 평생 그를 내조한 부인 김향안(1916∼2004)씨에 대해서도 입체적으로 서술했다.
김향안씨는 남편과 사별 후 서울 부암동에 환기미술관을 설립하는 등 수화를 미술사의 한 부분으로 만드는 데 기여했다. 본명은 변동림, 시인 이상(1910∼37)의 부인이자 화가 구본웅의 서이모(庶姨母)이기도 했다. 김환기와 결혼한 뒤 남편이 쓰던 호 향안(鄕岸)을 이름으로 삼았다. 전기는 김환기 관련 저작권을 갖고 있는 환기재단의 동의를 얻지 못한 채 출간됐다. 해서 이산과의 편지 부분도 책에는 싣지 못했다.
권근영 기자<young joongang.co.kr="JOONGANG.CO.KR">
◆김환기 탄생 100주년=한국 추상미술의 선구자 김환기의 탄생 100주년을 맞아 환기미술관에선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전(6월 9일까지)을 열고 있다. 인터넷 포털 네이버에선 온라인 특별전을 연다. 근대문화재로 지정된 ‘론도’ 등 대표작 50여 점을 모았다. </young>
내가 반한 이 여인, 그녀는 암울했던 시대를 두 남편과 살다 갔다. 2004년 그녀는 뉴욕에서 타계했다. 그리고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의 두번째 남편 곁에 묻혔다. 미아리에 있던 첫 남편의 묘소는 유실되었기 때문이다. 만약에 무덤이 있었다면 그녀는 반반씩 누웠을까. 그러기엔 1937년 4월 17일이란 날짜가 너무 멀다. 인연의 인력이 역사를 거슬러 오르긴 버겁다. 지금은 세 시간 정도면 동경까지 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1937년은 서울역에서 부산까지는 12시간이 걸렸고, 거주지에서 도항증명서를 받아 관부연락선 '덕수환'으로 시모노세끼(下關)까지 또 그만치 걸렸다. 다시 거기에서 동경까지 가서 동경제대 부속병원으로 갔다고 생각하니 상상이 잘 안된다. 그러나 이 여인은 갔다. 그해 4월 17일, 남편이 거기에서 죽었기 때문이다. 사상이 의심스럽고 행적이 수상하다는 이유로 감방에 구금되었다가, 지병이 겹쳐 3월에 석방되었지만 다음달에 지인들이 그를 동경제대 부속병원에 입원시켰다. 그러나 그는 멜론의 향기가 그립다는 말을 남기고 아내와 친구 김소운(金巢雲)과 몇몇의 '삼사문학'과 '동경학생예술좌' 후배 동인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스물일곱 살로 요절했다. 마치 반딧불이처럼 반짝하는 짧은 인생을 살았지만 그는 세기를 넘어 만인 앞에서 문학이라는 이름을 수식하며 오늘날까지 회자된다. 그녀의 첫 남편, 일탈의 사나이, 그 이름만으로도 희대의 스캔들인 바로 이상(李箱)이다. 그럼 그 당찬 여인은 누구인가! 남편의 유해를 수습하여 다시 관부연락선을 타고 현해탄을 건너와 미아리에 안장시킨 그녀, 바로 변동림(卞東琳)이다. 경기여고, 이화여전 영문과 출신의 변동림은 스무 살 나던 1936년 6월, 이복오빠인 화가 구본웅과 절친했던 6년 연상의 李箱과 결혼한다. 그러나 천재시인과 문학소녀와의 결혼생활은 불과 넉 달 만에에 막을 내린다. 그해 10월 17일, 그녀는 동경으로 떠나는 李箱과 살아서는 다시 못 볼 이별을 한다. 가을은 늘 이별을 동반하는 것인가. 1936년 7월 말일 경에 이상은 조선일보사 3층 뒷방에서, 장정한 김기림의 '氣象圖'를 발송하면서 편지에다 자신도 일본으로 가겠다는 열망과 의지를 피력한다. 이상은 변동림을 남기고 다시는 살아 돌아오지 못할 서울을 떠난다.
동경에 도착한 이상은 간다(西神田)의 햇볕 안 드는 이층방에다 하숙을 정한다. 며칠 후 동경유학생들로 구성된 '삼사문학'의 후배 동인들과 '동경학생예술좌'의 이진순(李眞淳)을 불러내어, 늘 그렇듯 문학과 예술과 술로 밤을 지새우는 그만의 임상적 풍경으로 다가간다. 이상은 생명을 도려내어 죽음의 혼과 자의식을 바꾸는 무모한 거래를 했다. 김기림의 표현처럼, "箱은 필시 죽음에 진 것은 아니라, 箱은 제 육체의 마지막 조각까지라도 손수 길러서 없애고 사라진 것이리라. 箱은 오늘의 환경과 種族과 無知 속에 두기에는 너무나 아까운 천재였다. 箱은 한번도 잉크로 시를 쓴 일은 없다. 箱의 시에는 언제나 상의 피가 淋리(임리:흠뻑 젖어 흘러 떨어지거나 흥건함:역자 주)하다. 그는 스스로 제 혈관을 짜서 '시대의 혈서'를 쓴 것이다."
그 무렵 스물두 살의 과부 변동림은 겪기 힘든 시기를 보낸다. 기막힌 역정이 어찌 없었으랴. 그러나 변동림, 그녀는 강했다. 이역만리 동경으로 가 남편의 유해를 안고 고국으로 돌아온 당찬 여인이 아니었던가. 1940년대로 접어들어 차츰 신변의 안정을 찾은 변동림은 스물아홉 살이 되던 1944년, 서양화가 수화(樹話) 김환기(金煥基)를 만나 김향안(金鄕岸)으로 개명하고 제2의 인생을 시작하게 된다. 김환기에겐 이미 아이 셋이 달려 있었지만 그녀는 개의치 않았다. 그해 봄 목련이 한창일 때, 청첩인을 정지용으로 하고 화가 고희동을 주례로, 길진섭의 사회로 서울 기독교청년회관에서 결혼식을 올린다. 그리고 성북동의 '늙은 감나무'가 있는 그 산방에서 신혼 살림을 차린다. 훗날 그녀는 수필 <사람은 가고 예술은 남다>에서 오래된 감나무가 있는 그 신혼시절의 노시산방(김용준의 노시산방이 이후에 수향산방으로 바뀜-필자 주)을 이렇게 추억한다. 성북동 32-3, 근원(近園) 선생이 선생의 취미를 살려서 손수 운치있게 꾸미신 한옥. 안방, 대청, 건넌방, 안방으로 붙은 부엌, 아랫방, 광으로 된 단순한 기역자 집. 다만 건넌방에 누마루를 달아서 사랑채의 구실을 했고 방마다 옛날 창문짝들을 구해서 맞춘 정도로 집은 빈약했으나, 이백 평 남짓되는 양지바른 산마루에 집에 붙은 개울이 있고, 여러 그루의 감나무와 대추나무가 있는 후원과 앞마당엔 괴석을 배치해서 풍란을 꽃피게 하며, 여름엔 파초가 잎을 펴게 온실도 만들어졌고 운치있게 쌓아올린 돌담장에는 앵두와 개나리를 피웠다. 앞마당 층계를 내려가면 우물가엔 목련이 피었었다.(<사람은 가고 예술은 남다-김환기 전기 중의 일부>, 김향안, '월하의 마음', 환기미술관) 김향안은 1954년에 프랑스로 그림 유학을 떠나고 다음해 김환기 역시 파리로 가 미술평론을 공부한다. 부부는 1959년 귀국 후 5년여 국내에 머무는데 김환기는 홍익대 미술대학장으로 재임하고 김향안은 수필가로 활동한다. 1964년 부부는 도미하여 줄곧 뉴욕에서 살게 된다. 그녀는 1974년 김환기가 세상을 떠난 뒤에는 남편의 유작과 유품을 돌보는 한편, 1978년에는 환기재단을 설립해 김환기의 예술을 알리는 데에 힘썼다. 1992년에는 서울 종로구 부암동(付岩洞)에 자비로 환기미술관을 설립하였는데, 사설 개인 기념미술관으로는 국내 최초이다. 이상과 김환기의 두 남편, 내가 정작 이 여인에게 반한 것은 다음의 이유 때문이다. 김향안은 1986년 월간 '문학사상' 지에서, 그녀가 변동림이었을 때 불과 4개월을 같이 산 첫 남편 李箱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다. "그는 가장 천재적인 황홀한 일생을 마쳤다. 그가 살다간 27년은 천재가 완성되어 소멸되어 가는 충분한 시간이다.(...) 천재는 또 미완성이다." 또 그녀가 김향안으로서 30년을 함께 한 김환기의 아내였을 때에는, "지치지 않는 창작열을 가진 예술가의 동반자로 살 수 있었음은 행운이었다."라고 회고했다. 이상과 변동림, 그들이 정식 부부로 살았던 기간이 불과 수 개월이었지만 그들에게 있어서 아주 특별한 기간이 된다. 그것은 이상이 타계할 때 아내로서 남편의 최후를 임종하는 빌미가 되어, 그녀는 서울에서 동경까지 무리하다싶은 이역만리의 여정을 마다하지 않았다. 웬만하면 전 남편을 입에 올리지 않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생전에 그녀는 당당하게 말했고 기록으로도 인터뷰를 남겼고 실천으로도 옮겼다. 두 천재 예술가를 가까이에서 지켰던 그녀는 88세로 2004년 세상을 뜰 때까지 일찌감치 눈을 감은 두 배우자의 예술혼을 기리고 작품세계를 정리하고 보존하는 일을 신념처럼 펼쳤다. 첫 남편이었던 李箱의 기념사업으로는, 모교 보성고 교정에 1990년 5월 이상의 기념비와 문학비가 세워지기까지, 교우회가 발벗고 나서기도 했지만, 그녀의 의지와 지원이 큰 힘이 됐다. 또 두번째 남편 김환기 화백과 관련해 그녀는 김환기의 미술세계를 이끌고 완결시킨 인물로 평가된다. 화가 생전에는 작품활동에 감흥을 불러일으키는 예술의 반려였으며, 사후엔 유작과 유품을 정리해 환기미술관을 탄생시켰던 것이다. 내가 반한 이 여자, 그녀는 2004년 88세로 운명한 변동림과 김향안으로 불리는 여자였다.
***강나루(Essay-by Deili. 2009. 2. 25 '내가 반한 이 여자'를 쓰다)
가끔 아내가 없을 때는 아내의 방에 들어가 불장난을 하거나, 화장품 냄새를 맡기도 하며 논다.
그러나 아내의 방에 손님이 있으면 나는 그 방으로 들어갈 수 없다. 손님이 돌아가고 나면 아내는 내 방으로 들어와 은화를 놓고 간다.
그 돈을 가지고 나는 어느 날 밤에 아내가 외출한 틈을 타서 거리로 나온다. 그러나 돈을 쓸 줄 모르는 나는 그 돈을 가지고 돌아와 아내에게 준다.
그날 밤 아내는 처음으로 아내의 방에다 나를 재워 준다. 나는 매일 밤 외출을 나가고, 어느 날은 늦게까지 비를 맞고 돌아다니다 병이 나고 만다.
그 후로 한 달 가량 앓아누운 나는 아내가 준 아스피린이란 흰 알약을 매일 먹는다.
나는 계속 머리가 어지러웠고, 그 알약이 최면약 아달린이란 사실을 알고는 아내가 자신을 죽이려고 그런 것이 아닌가 의심하면서 집을 나간다.
그러다가 아내를 의심한 것을 미안하게 생각한 나는 다시 집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방에 아내와 한 남자가 같이 있는, 보지 말아야 할 장면을 보고 만다. 절망한 채 다시 집에서 나온 나는 거리를 배회하다가 미쓰꼬시 백화점 옥상에 이르자 문득 날고 싶은 욕망을 느낀다.
그리고 "날개야, 돋아라. 날자 날자. 한 번만 더 날아 보자꾸나." 라고 외치고 싶어진다.
-이상,<날개>
소설이긴 하지만 이상에 날개에 아내는
변동림씨입니다
1916년 경성에서 태어나고, 경성여고보를 거쳐 이화여전 영문과를 졸업한 지식인 신여성 변동림(卞東琳) 역시 자유연애론자 중의 하나였다. 변동림은 이상이 단골이었던 커피 다방 낙랑파라에서 자주 마주쳐 알던 당대의 지식인 변동욱(卞東昱)의 동생이자, 이상의 절친한 친구 화가 구본웅의 서모(庶母)와는 이복지간이었다.
이상이 변동림을 '낙랑'에서 처음 만났을 때, 평소의 그답지 않게 얼굴이 벌게지면서 각설탕만 만지작거려 다방 아가씨들로부터 핀잔을 들었다. 이상은 좌중을 압도할 만큼 위트와 패러독스가 넘치는 사람이었지만 변동림을 만난 자리에서는 변변히 말도 제대로 못했다.
이상은 변동림 주변의 애인들에 대한 소문을 들었다. 그럼에도 변동림이 "당당한 시민이 못 되는 선생님을 저는 따르기로 하겠습니다"라고 고백하자, 이상은 그것을 받아들였다. "나는 술이 거나하게 취해서 어떤 여자 앞에서 몸을 비비 꼬면서, 나는 당신 없이 못 사는 몸이오, 하고 얼러 보았더니 얼른 그 여자가 내 아내가 되어버린 데는 실없이 깜짝 놀랐습니다"라는 이상의 훗날 고백으로 미루어보건대 금홍과 헤어진 뒤 의식이 황폐해진 이상이 일종의 도피로써 변동림을 선택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소설속에 보면 금홍이에 남자 관계는 그렇게 관대 했던 이상이
변동림을 만났을때는 극도로 민감했던것 같습니다
아이러니 하죠 자유 로운 이상님이 아무튼
그들은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은 1936년 6월 서둘러 신흥사에서 결혼식을 올리고 황금정(黃金町)의 허름한 셋집에서 신혼살림을 차렸다. 햇빛도 제대로 들어오지 않는 어두컴컴한 셋방에서 이상은 종일 누워 지냈다. 햇빛을 보지 못한 이상의 얼굴은 더욱 하얘졌고, 폐결핵은 깊어졌다. 변동림은 이상의 약값과 생활비를 벌기 위해 일본인이 운영하는 바에 나갔다. 두 사람의 신혼살림은 이상이 10월에 일본으로 건너가면서 파경(破鏡)을 맞았다. 불과 넉 달이 채 못 되는 짧은 결혼생활이었다. 그 해 6월을 전후하여 변동림(卞東琳)과 혼인한 뒤 곧 일본 동경으로 건너갔으나 1937년 사상불온혐의로 구속되었습니다. 이로 인하여 건강이 더욱 악화되어 그 해 4월 동경대학 부속병원에서 사망하였습니다. . 아내 변동림이 몇날 며칠 동경으로 가서 시신을 수습하여 미아리 공동묘지에 안장하나 그 후 유실되고 만다.
p.s 단짝 술친구 이상과 박태원의 술값 스폰서(?)인 화가 구본웅의 계모인 변동숙의 배다른 여동생이 변동림이고, 구본웅의 딸 구근모가 낳은 딸, 그러니까 구본웅의 외손녀 중 하나가 세계적 발레리나 강수진이다. 그러니까 발레리나 강수진은 외할아버지 구본웅을 중심으로 구본웅의 이모인 김향안과 이모부 김환기, 그리고 외할아버지의 친구인 이상과 연(緣)이 닿는 셈이다. 인연이란 얽히고설켜 짜여지는 법.. ==============================================================================================
변동림은 1944년 김환기와 재혼하고 수필가로 데뷔하며 김향안(金鄕岸)이란 이름을 썼다. 김향안은 1955년 김환기와 함께 불란서 유학길에 올라 파리에서 미술평론을 공부하였고, 1964년 미국 뉴욕으로 건너간 이후 줄곧 뉴욕에서 살았다. 1974년 김환기가 세상을 떠난 뒤에는 남편의 유작과 유품을 돌보는 한편, 1978년에는 환기재단을 설립해 김환기의 예술을 알리는 데 힘썼다. 1992년에는 서울 종로구 부암동에 자비로 환기미술관을 설립하였는데, 사설 개인 기념미술관으로는 국내 최초이다.
2004년 미국 뉴욕에서 작고한 김향안은 1986년 월간 <문학사상>에서, 그녀가 변동림이었을 때 불과 4개월을 같이 산 첫 남편 이상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다.
"그는 가장 천재적인 황홀한 일생을 마쳤다. 그가 살다간 27년은 천재가 완성되어 소멸되어 가는 충분한 시간이다. (…) 천재는 또 미완성이다."
이 부부는 금술이 좋았다고 랍니다
김환기 화가님이 부인에게 보낸 옆서
왼쪽부터 이상, 박태원, 수필가 김소운
오늘에 주인공이신 그분 ^.* 변동림은 1944년 김환기와 재혼하고 수필가로 데뷔하며 김향안(金鄕岸)이란 이름을 썼다. 김향안은 1955년 김환기와 함께 불란서 유학길에 올라 파리에서 미술평론을 공부하였고, 1964년 미국 뉴욕으로 건너간 이후 줄곧 뉴욕에서 살았다. 1974년 김환기가 세상을 떠난 뒤에는 남편의 유작과 유품을 돌보는 한편, 1978년에는 환기재단을 설립해 김환기의 예술을 알리는 데 힘썼다. 1992년에는 서울 종로구 부암동에 자비로 환기미술관을 설립하였는데, 사설 개인 기념미술관으로는 국내 최초이다.
키차이 많이 나시네요 김향안은 1974년 김환기가 죽은 뒤 그의 그림과 유품들을 정리해서 1992년에 서울 종로구 부암동에 환기미술관을 설립했고, 2004년 2월 29일 뉴욕에서 세상을 떴다.
P.S-구본웅의 계모인 변동숙의 배다른 여동생이 변동림이고, 구본웅의 딸 구근모가 낳은 딸, 그러니까 구본웅의 외손녀 중 하나가 세계적 발레리나 강수진이다. 그러니까 발레리나 강수진은 외할아버지 구본웅을 중심으로 구본웅의 이모인 김향안과 이모부 김환기, 그리고 외할아버지의 친구인 이상과 연(緣)이 닿는 셈이다. 인연이란 얽히고설켜 짜여지는 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