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과 나혜석의 만남

1927년 봄에 구본웅은 이상을 충무로에 있는 ‘메이지’ 제과점에서 만났다.

지금까지 ‘메이지’ 또는 ‘모리나가’ 같은 최고급 제과점에 갈 때에는 항상 그의 아버지나 숙부를 따라 갔었다.

그러나 대학생이 된 뒤 이제는 어른으로 행세하고 싶은 마음에 두 사람은 그 곳에 마주앉았다.

그들이 커피와 곰보빵을 들며 한참을 떠들고 있을 때 뜻밖에도 정월 나혜석이 들어왔다.

구본웅은 놀라서 얼떨결에 인사를 했다. 옆에 있는 이상은 홍당무 얼굴을 하고 있었다.

정월은 남편(金雨英)이 만주지방 안동현 부영사의 임기를 마치고 이번 봄에 귀국해서 동래에 있는 시가에 있는데 곧 세계일주 여행을 떠난다고 했다.

그녀는 ‘제6회 조선미전’에 출품하기 위하여 며칠 전에 상경했다며 우연히 구본웅을 만난 것을 무척 반가워했다.

작년 말에 둘째 아들을 낳아 2남1녀의 어머니가 되었지만 만 31세인 그녀의 얼굴과 몸매에서는 아직도 사람들을 휘어잡는 매력과 교태가 넘쳐흘렀다.

구본웅은 한때 미술을 가르쳐준 나혜석에게 이상을 소개하며 그가 미술과 문학에 특출한 재능이 있다고 말했다.

그녀는 과자와 빵을 사러 왔는데 자기도 커피 한잔 마시고 가도 되겠느냐고 물었다.

뜻밖에 그들은 동석하게 되었다. 그녀는 구본웅에게 동경이나 파리로 유학을 가보라고 격려했다. 이상에게는 너무 미남이라 그를 따라다니는 여자가 많겠지만 일부일처에서 벗어나서는 안된다고 덕담을 하면서 그의 등을 자상하게 두드려 주었다.

그때 이상의 얼굴에는 번갯불이 내려친 듯 전율이 스쳤다.

이상은 그녀에게 화답하듯 작년에 정월이 신문과 잡지에 발표한 ‘내가 어린애 기른 경험’ ‘생활개량에 대한 여자의 부르짖음’ ‘그림을 그리게 된 동기와 경력과 구심’ ‘미전 출품 제작 중에’ ‘내 남편은 이러하외다’ 그리고 소설 ‘원한’을 읽었다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정월은 어떻게 그런 것을 그렇게 잘 기억하고 있느냐며 이상의 기억력과 독서량과 정보력에 놀라는 표정이었다.

“이상 김해경이라고 했지요? 아호가 무척 멋있는데….”

“몇 년 전에 ‘신여성’에 발표하신 ‘강명화의 자살에 대하여’라는 글에 쓰신 정월(晶月)이란 아호를 보고 글과 아호가 무척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던 일이 있습니다.”

이상이 그답지 않게 가느다란 목소리로 응답했다.

“아! 그 글도 읽었어요? 이상!”

이상은 서산에게처럼 자기에게도 말을 낮추어 줄 것을 간청했다.

“그럼 그렇게 하자. 김해경 군. 서산도 강명화에 관한 글을 읽었니?”

“저는 읽지 못했어요. 어떤 내용인지 간단히 말씀해 주세요. 정월 선생님.”


기생 강명화의 죽음

강명화는 기생이었다. 그녀는 사랑하는 애인에게 “나는 결코 당신을 떠나서는 살아 있을 수가 없고 당신은 나하고 살면 사회와 가정의 배척을 면할 수가 없으니 차라리 사랑을 위하고 당신을 위하여 한 목숨을 끊는 것이 옳소”라는 유서를 남겼다.

1923년 6월15일 ‘동아일보’는 ‘康明花(강명화)의 자살’이란 제목 하에 10일 하오 11시경에 약을 먹고 11일 하오 6시 반에 고개를 땅에 박고 별세하였다는 간단한 기사를 내보냈다.

나혜석은 ‘동아일보’에 기고한 글에서 20시간 가까이 죽음을 향하여 고통하고 신음했을 것을 생각하니, 전신이 벌벌 떨리고 소름이 쭉 끼치고 눈앞이 아물아물했다고 묘사했다.

나혜석은 기생의 처지와 사랑을 연민의 정으로 이해하려고 애쓰면서 강씨의 자살 동기에 동정할 점이 많다고 지적했다.

기생 강씨는 비운을 견디다 못해 정조(貞操)의 순수함을 보이기 위해, 자기 정신의 결백을 드러내기 위해, 세태에 분노하기 위해 자살을 감행했다고 정월은 이해했다. 그러나 정월은 자살 행위에 대해서는 맹렬히 비판했다.

정월은 동기가 어떻든 자살은 생명의 존귀와 그 생명 역량의 풍부를 자각한 현대인이 취할 방법이 아니며, 어떻게 해서든지 살려고 할 때 연애의 철저함과 정조의 순수함과 정신의 결백함이 실현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결론적으로 정월은 우리 여자들이 건설적이고 긍정적이며 적극적으로 삶을 펼쳐 나가자고 외쳤다.

“서산! 그리고 이상! 기생이나 선비나 부자나 백정이나 모두 인간으로 대접받아야 하고 인간답게 사는 세상을 우리가 빨리 만들어야 해. 물론 여자나 장애인이나 노약자도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드세.”

그때 이상이 엉뚱한 말을 했다.

“서산은 기생 채경이를 좋아해요.”

“춘곡 고희동이 그렸던 모델 채경이 말이야?”

정월이 물었다.

“아니에요. 선생님. 이상이 괜히 그래요. 저는 저의 몸에 콤플렉스가 있기 때문에 예쁘고 건강한 여자면 누구든지 좋아해요. 이상은 재능이 탁월한 여자가 첫째 조건이고 다음으로 아름다움이 중요하대요.”


“내 목숨은 헐값이 아니다”

그 말에 이상의 얼굴에는 홍조가 번지기 시작했다.

“아름답고 재능이 있는 여자라면 바로 난데…”

정월의 농담에 이상은 자신의 생각을 들킨 듯 눈알까지 빨개지고 말았다.

“선생님은 혹시 자살하고 싶은 충동이 드신 경우는 없으세요?”

이상이 물었다. 이상은 얼마 전에 자살 충동을 느꼈다며 구본웅에게도 똑같은 질문을 했던 적이 있다.

“좌절하거나 심한 상처를 입었을 때 절망한 사람은 자살 충동을 느끼게 되지. 특히 예술가들치고 자살 충동을 느껴보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예술가란 현실적이지 않은 저 높은 이상에 목표를 설정하고, 그 이상에 도달할 수 없는 현실에 좌절할 뿐만 아니라

그 이상을 달성할 능력이 자신에게 없음에 절망하며 사는 인간이지. 그래서 자살 충동이 많을 수밖에 없어. 그러나 우리 목숨은 결코 그렇게 헐값이 아니야. 내 목숨이되 내가 끊을 아무 권리가 없는 것이지.

내 몸은 결코 내 소유가 아니야. 우리 어머니 것이고 우리 조상의 것이며 내 사회의 물건이지.

내 생명이 계속되는 최후까지 내 힘을 다하여 최선을 다해야지.

남과 같이 행복하고 만족한 생활을 못하기로 크게 자포자기할 것이 무엇이야.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한다면 또한 이것이 행복이 아닐지….”

나혜석은 그들의 화제가 자살 충동 이야기로 바뀐 것을 의식했는지 화제를 바꾸려고 했다. 그녀는 말을 이었다.

“기생이나 천민 중에도 나보다 더 재능이 있고 똑똑한 여자가 많을 것이야. 그들에게 더 아름답고 순결한 사랑도 있을 수 있고….

기생이나 작부가 되면, 남자들과의 성 관계는 밥 먹는 일이나 다름없는 비감정적이고 일상적인 것에 불과할 거야. 그들에게는 직업상의 특성을 인정해 주어야 하지 않을까.

아니 식사와 성교는 동물의 본능적 행동이야. 물론 사회와 제도를 위하여 인간은 절제되고 규제되어야 하겠지만 지금처럼 정조와 신분에 대해 그렇게 호들갑을 떨어야 할까.

언젠가 군들이 그런 여자들을 만나면 기생 강명화처럼 좌절과 상처를 입지 않도록 유념하게. 제도와 관행도 자네들이 나서서 개혁해야 하네. 우선 우리부터 실천하는 용기와 헌신이 있어야 해.

기생도 천민도 떳떳하게 선비의 본부인이 될 수 있고 사람다운 사랑과 순결을 인정받을 수 있는 세상이 빨리 와야 하네. 어느 누구도 차별받지 않고 차별당하지 않는 그런 사회 말이야.”  


일본어로도 작품을 써라

나혜석은 조혼과 축첩 등에 관하여도 쉴 새 없이 자기 의견을 털어놓으며 그들을 교육하려 했다.

그녀는 교사와 예술가 그리고 모범생과 모험가 사이를 숨돌릴 틈 없이 오락가락했다. 숙녀로 보이다가 어느새 투사로 바뀌고, 교태를 부리다가 갑자기 근엄한 표정으로 분위기를 반전시키기도 했다.

“정월 선생님. 선생님 속에는 여러 모습이 함께 나타나는 것 같네요. 자아가 여럿이라고나 할까요?”

이상이 조심스럽게 정월의 눈치를 살피며 말을 이었다.

“그래! 이상. 바로 보았다. 사람에게는 자아가 하나뿐이 아니지.

누구에게도 일관된 하나의 자아는 없어. 사람들이 하나라고 오해할 뿐이지.

사람의 생각과 느낌과 행동양식은 시시각각 변하게 마련이지.

한 몸뚱이 속에 악하고 착한 온갖 면이 함께 있는 거야. 어느 면이 얼마만큼 언제 어떻게 나타나느냐에 따라 범죄인도 되고 영웅도 되고 호인도 되고 악인도 되고 샌님도 되고 탕아도 될 수 있는 것이야.”

이상은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나혜석은 이제 일어나야 할 시간이라면서도 일어날 움직임은 보이지 않았다. 이상이 화제를 바꿨다.

“정월 선생님은 그림으로 나타내는 자아와 글로 나타내는 자아가 서로 다르신 것 같아요. 그림으로 보면 매우 서정적인 분 같으신데, 글로 보면 매우 투사적이세요. 그렇죠?”

정월은 대답 대신에 그렇다고 수긍하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이상의 비범한 눈빛에 오히려 끌려들어가는 듯했다. 이상은 말을 이어갔다.

“저는 요즘 시를 열심히 쓰고 있어요. 물론 습작이지요. 그런데 선생님. 조선어로만 글을 써야 될까요?”

“일본어나 영어나 불어로도 쓸 수 있으면 더 좋지.”

정월의 이러한 답변에 구본웅은 이의를 달았다. 조선에서 일어로 시와 소설을 쓰면 현재는 물론 후세에까지 친일파 문인으로 몰릴 가능성이 있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정월의 생각은 달랐다.

“그것은 가설일 수 있겠지만 편협한 생각이야. 편협한 여론에 밀려 창작력을 소실하면 안되지. 우리가 조선 사람만을 위해, 또는 조선 사람에게만 보이려고 예술을 하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예술은 영원한 것이고 국가나 사회라는 벽을 뚫고 갈 보편성이 있어야 하는 것이야. 이상에게 어학 능력만 있으면 일어고 영어고 중국어고 러시아말이고 간에 모든 언어와 예술수단을 다 동원하여 표현하게.”

이상의 얼굴은 점점 더 밝아져 갔다. 이상은 이미 일어로 시를 많이 습작해 놓았다고 밝혔다. 앞으로 적어도 5개 외국어를 유창하게 말할 수 있도록 어학 공부를 열심히 하겠다고 어깨를 으쓱거렸다.

“정월 선생님. 조선어는 영어나 중국어나 일본어에 비해서 세련도가 많이 떨어져요. 개념화할 수 있는 어휘도 너무 적고 쓰임도 잘되지 않아요.”


오늘에야 진짜 문학도를 만났다

구본웅은 이상의 발언에 놀랐다. 세종대왕이 만드신 우리 글이 얼마나 좋은 언어인데 하면서,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이상은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을 창제한 역사는 수백 년이 넘었어도 그것을 문학적으로 다듬어 본격적으로 쓰기 시작한 것은 20세기에 들어서 이인직(李人稙)의 ‘血(혈)의 淚(누)’ 이후이기 때문에, 문학적 언어로서의 한글은 아직 어린이 수준이라고 주장했다.

정월도 이에 맞장구를 치며 오늘에야 진짜 문학도를 만났다고 기뻐했다. 정월과 이상은 조선어를 조선에서의 단순한 통용어 수준에서 학문어와 예술어로 개발하고 발전시키자고 의기투합했다.

그리고 정월은 이상과 서산에게 조선어로만 글을 쓰지 말고 일본어는 물론 다른 나라 언어로도 글을 발표하라고 재차 격려했다. 정월 자신은 우선 조선에서의 남녀평등과 여권을 주장하는 일이 급해서 조선어로 자신의 주장을 펼치고 있지만, 이상과 서산은 조선만의 문학에서 탈피해 아시아권 전체, 아니 세계적인 작가로 인정받기 위하여 우선 일본어로라도 글을 많이 쓰라고 주문했다.

정월의 힘있는 조언에 이상은 크게 고무되었다.

그러나 구본웅은 이상과 정월의 정서가 이해되지 않았다. 언젠가는 해방될 것이다.

그럴 때 그들이 남긴 일본어 작품에 어떤 평가가 내려질 것인가? 친일 문학인으로 낙인찍힐 것을 염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들은 그러한 편견과 몰이해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이미 이상의 시공간은 식민지 시대에 태어난 일부 반일 민족주의 지식인들이 그들의 생명이 마감될 때까지 완고하게 지켜간 시간적인 편견과 조선반도라는 지역적인 편협성을 뛰어넘고 있었기 때문이다.

드디어 정월 나혜석은 시계를 보더니 많이 늦었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상은 정월 앞에서 한동안 넋 나간 장승처럼 그대로 서 있었다. 구본웅이 이상의 그런 모습을 다시 본 것은 몇 년 후 그가 금홍(錦紅)을 처음 만났을 때라고 기억했다.

‘제6회 조선미전’이 1927년 5월25일부터 3주일간 남대문통 조선총독부 도서관에서 열린다고 4월에 발표되었다. 작품 접수 마감일은 5월17일 오후 5시까지였다. 작업실을 같이 쓰는 서양화가 이창현은 구본웅에게 조선미전에 함께 출품하자고 졸랐다.

구본웅은 단호히 거절했다. 장애인이라고 관립학교 입학도 거절당했는데 또다시 관청에서 주관하는 조선미전에 출품하라고? 그는 관청 근처에는 얼씬도 하지 않겠다고 자신과 굳게 약속했으니 절대 출품하지 않겠다고 분명히 말했다.

이창현은, 구본웅의 작품 실력이 조선미전의 특선급이라고 김복진도 장담했고 또 이렇게 밤잠을 안자고 수개월간 열심히 만들었는데 사장시킬 수 있느냐며 언성을 높였다.

그러나 구본웅은 관청의 인정을 받기 위하여 조각을 하는 것이 아니라며 콧방귀도 뀌지 않았다.

이창현은 할 수 없이 마감 날인 5월17일 오전에 자기 작품만 출품했다.

그리고 작업실에 돌아와 완전히 탈진해 쓰러진 구본웅을 발견했다. 그는 인력거를 불러 급히 병자를 데리고 병원으로 갔다. 그리고 다시 작업실로 달려왔다.

그리고는 구본웅이 근래 만든 몇 개의 조각 작품 중에서 하나를 골랐다. 그는 시간에 쫓겨 헐떡이며 조선미전 접수창구로 달려가 작품을 내밀었다. 그때 비로소 신청서의 작품명 난에 무엇이라고 써야할지를 두고 고민에 빠졌다. 그는 구본웅이 그 해에 계속하여 얼굴 습작을 했다는 것을 상기하고 ‘얼굴 習作(습작)’이라고 적어 넣었다. 이렇게 하여 조선 최고 권위의 미술전람회에 정말로 습작이 출품되는 파격이 벌어졌다.

또한 구본웅의 생애 전체에 걸쳐 관청에서 주관한 전람회에 단 한번 출품하게 된 마땅치 않은 경력이 만들어지게 된 것이다.


불쾌한 수상소식

5월21일 오전 10시에 심사 결과가 발표된다고 하여 이창현이 총독부 도서관에 다녀왔다. 이창현은 총 1416점이 응모하여 310점이 입선했는데, 서양화는 810점 중 177점이 입선되고 조소 분야는 25점이 응모하여 9점이 입선되었다고 떠벌렸다.

특선은 서양화, 동양화, 조소, 서예, 사군자 분야를 모두 합쳐 29점뿐이고 조선인 12명이 특선에 올랐는데, 놀랍게도 무감사로 입선했던 나혜석이 이번에는 특선에서 탈락하는 이변이 생겼다고 흥분했다.

자기는 이번에도 입선에 머물렀다고 어깻죽지를 늘어뜨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구본웅은 그날 저녁에야 비로소 김복진에게서 조소 분야에서 조선인 한 명이 특선상을 받게 됐는데 수상자가 바로 구본웅 자신임을 통보받고는 경악하고 말았다.

그는 조선미전 기간 내내 불쾌감을 감출 수가 없었다. 앞으로 다시는 조선이건 일본이건 관청 전람회에 얼씬거리지 않고 진취적이고 전위적인 영원한 야인(野人)이 되겠다고 다짐했다.

그렇지만 구본웅의 수상은 조선미전이 개최된 이래 조소 분야에서 김복진 다음으로 조선인의 작품이 특선에 입상한 것으로 조선미술사 등에 기록으로 남아 있다.

1928년 여름 김복진이 일제 경찰에 잡혀갔다는 소식이 날아왔다. 공산당 간부라는 혐의를 받았다고 했다.

구본웅은 당혹감을 느꼈다. 그가 보기에 김복진은 성실하고 착한 휴머니스트이고 유능한 이상주의자였으며 열기에 넘치는 민족주의자였다. 무엇보다 그는 구본웅에게 자상하고 사려 깊은 스승이었다.

그러나 구본웅의 집안 어른들은 김복진 주변에 있는 사회주의 성향의 예술인들이 구본웅에게 접근하는 것을 차단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구본웅도 스스로 새로운 전환과 변신이 필요하다는 것을 절감하고 있었다. 김복진에 대한 실망감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는 조소작품 활동에 넘기 힘든 한계를 절감했다.   


무작정 떠난 동경유학

지난 2년 간 구본웅은 조소(彫塑)의 매력에 푹 빠져 있었지만 건강이 나쁘고 힘이 약한 장애인이 도전하기에는 너무나 힘든 분야였다. 그래서 조소를 포기하고 미술을 본격적으로 공부하기로 결정했다. 무엇보다도 김복진 쇼크에서 빨리 벗어나기 위하여 1928년 가을에 무조건 일본으로 떠나기로 했다.

1928년 9월 구본웅은 부산으로 가서 일본행 여객선을 탔다. 동경에 도착하여 누구나 쉽게 들어갈 수 있는 가와바타(川端) 미술학교 양화부에 등록했다. 교육은 주로 석고 데생이었다.

그러나 무조건 선생을 따라서 실습하는 도제식(徒弟式) 교육에 싫증이 났다. 그 당시 일본에 유학하는 미술학도들은 대부분이 가와바타 미술학교를 거쳐 관립학교인 동경미술학교에 입학해서 아카데믹한 고전파와 인상파의 아류를 뒤쫓았다.

그러나 구본웅은 스스로 정한 원칙에 따라 처음부터 관립학교는 안중에도 없었다.

그는 전통적인 굴레에서 벗어나 새롭고도 실험적인 조형예술에 몸을 던지고 싶었다. 그래서 자신에게 맞는 미술기법을 찾아내기 위하여 이론 공부부터 하기로 작정했다.

1929년 봄 그는 일본대학 예술전문학부 미학과에 입학해 정식으로 예술이론 공부에 매달렸다. 그 동안 공부하던 미술실기와 달리 학구적인 분위기가 마음에 들었다.

이후 1년간 예술이론을 본격적으로 공부한 경험이 평생 동안 예술이론의 발전과 그 동향에 깊은 관심을 갖게 했으며 미술비평가로서 미술평론과 미술론을 집필하는 바탕이 되었다.

1929년 여름방학이 다가왔다. 구본웅의 아버지는 구본웅의 혼처가 정해졌으니 방학 다음날 서울로 돌아와 일주일 후에 결혼식을 올리라고 편지로 통보했다.

규수는 종1품 벼슬을 지낸 강희맹(姜希孟)의 후손으로, 경기도 연천군으로 낙향하여 현재는 가세가 기울었지만 명문가의 후예라고 힘주어 쓰셨다. 그런 여자가 왜 꼽추에게 시집을 오느냐고 물을 것 같았는지,

혼인은 다 하늘의 인연으로 맺어지는 것이지

사람의 힘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했다. 결혼하는 날에야 비로소 신부 이름이 강임(姜妊)이라는 걸 알았을 정도로 구본웅은 그녀에 관해 아는 바가 없었다.

혹시 자신처럼 장애인이 아닌가 눈여겨보았지만 그녀의 얼굴과 체형은 정상이었다. 결혼 첫날밤 그는 착하게 생긴 새하얀 피부의 건강한 여자를 안았다. 그녀는 한없이 떨고 있었다.

그는 신부에게 어떻게 꼽추에게 시집왔느냐고 물었다. 그녀는 부모가 정해준 대로 따랐다며 고개를 떨구었다.

그는 아버지가 그녀의 친정에 논밭을 주었음을 그날 처음 아내로부터 들었다.

한없는 미안함과 측은함, 열등감과 당혹감 그리고 분노와 처절함이 뒤섞여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그는 신부를 부둥켜안고 울먹이면서 신혼 첫날밤을 지샜다. 신부는 오히려 꼿꼿이 앉아 그를 격려하고 감싸는 의연함을 보였다.


조선 최초의 야수파 화가

신랑 구본웅은 외아들로서 가계를 잇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점과 결혼의 의미를 이해했다.

 아들을 많이 낳아 대를 이어 잘 기르는 것이었다.

 숙부 말씀이 서양에서도 결혼이란 성교와 육아의 제도화라 하지 않았던가! 물론 사랑이 결혼에 중요한 전제가 된다고 했다. 그러나 지금 그의 신부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아들을 낳는 일이었다. 이를 위한 도구 내지 기계 노릇을 열심히 해야 한다. 그런데 그는 도구나 기계나 원료가 되기 싫었다.

서로 첫눈에 반한 격정적인 사랑에 빠지고 싶었다. 아름다움에 관한 그의 집착과 사랑은 남달랐다. 그는 아름다움에 대해서는 첫눈에 반했던 기생 채경이 이하로 눈높이를 내려본 적이 없었다.

그의 눈은 이상형에 고정되었다.

1930년 봄 구본웅은 혼자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태평양미술학교에 입학하여 유화(油畵)를 전공했다.

그동안 그는 일본대학 미학과에서 익힌 미술이론을 바탕으로 자신의 내부에 잠재한 자학적인 저항정신을 표출하는 작품들을 만들기 시작했다.

당시 일본 화단의 주류는 인상파에서 야수파를 포함한 넓은 개념의 표현주의로 옮겨 가고 있었다.

야수파(포비즘)는 극한적으로 단순화한 형태와 선명한 원색적 색조 그리고 대담하고 격정적 필촉으로 화면을 형성하는 특색을 지녔다.

그는 유럽에서 발아해 일본 화단에 이입된 이 대담하고 거칠면서도 선명한 야수파의 기법에 매료되었다. 바로 이러한 미술기법이 자신과 사회에 대한 콤플렉스를 배설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아차렸다.

그는 새로운 화법으로 1930년 동경 태평양미술전 콩쿠르에서 1929년에 이어 2년 연속 수상하는 영광을 안았다.

더욱이 1930년 가을 구본웅은 ‘이과회미술전람회(이과미전 또는 이과전 또는 이과회전)’에 입선했다.

 이과(二科)란 전통적인 서양화의 화풍을 일과(一科)라 하는 데 반해 진취적 경향을 가리키는 용어였다.

제국미전이 1과 중심으로 운영되는 관전(官展)인 반면 이과미전은 제국미전과 쌍벽을 이루는 2과 중심의 민전(民展)이었다. 조선의 언론들은 조선의 청년 수재 구본웅이 조선사람으로는 처음으로 이과미전 양화부에 입선했다고 보도했다.

3년 후인 1933년에는 김종태와 신흥휴가, 1934년에는 김종태, 1935년에는 김환기가 이과미전 입선 기록을 이어갔다.

이과미전에 입선하고 작품이 특출하다는 소문이 나자 구본웅에게는 일본 각지에서 연애편지가 날아들었다.

같은 하숙집에서 매일 만나는 여학생들도 데이트하자고 열광했다. 그

녀들에게는 그가 불구거나 기혼인 것이 문제가 되지 않는 것 같았다.

오직 특별한 재능과 유명인사라는 점에 호기심을 보이며 애정과 성적인 관심을 나타냈다.

그러나 전람회 소식을 듣고 여러 장의 편지를 보내고 일본까지 찾아왔던 한국 신여성은 등이 굽은 그를 보고는 말 한마디 없이 도망가버렸다.

1930년 가을에 이과회 소속 화가들 중 야수파와 표현주의파에 속하는 화가들이 결속하여 독립미술가협회를 창설했다.

1931년 1월에는 ‘제1회 독립미술가협회전람회(독립미전 또는 독립전)’를 개최했다.

야수파에 심취해 있던 구본웅은 독립미전에도 출품해 조선인으로는 유일하게 입선했다.

5년이 지난 1936년에는 유영국, 1937년에는 김만형이 조선인으로서 독립미전 입선 기록을 이어갔다.   


전위예술 경향의 새로운 화풍

동아일보는 구본웅에게 1931년 6월에 동아일보 사옥에서 개인전을 열어주겠다고 제의했다.

서울에 있는 신문사가 개인전을 주최하고 주관하는 것은 극히 이례적이었다.

그는 이 개인전에 49점을 출품했다. 작품 대부분이 일상의 주변에 있는 정물화와 풍경화였다. 그러나 전위예술의 여러 경향을 섭렵한 새로운 화풍이라는 소문이 퍼져서 예상 밖으로 관람객이 넘쳐났다.

개막식 날은 이화여전과 숙명여전에 재학중인 신여성도 많이 찾아왔다. 그들은 작가가 키 작은 선생님이라고 알았다. 월간 종합지 ‘東光(동광)’이 1931년 5월호에 구본웅을 “일본의 이과전과 독립전에서 새로운 기치를 휘두른 키 작은 선생님”으로 소개했기 때문이다.

그 표현이 꼽추란 의미로 전달되지 않고 아담한 체구를 지닌 동경 어느 학교의 미술교사로 조선인들에게 알려졌다. 신여성들은 작가를 앞에 내세워 소개하라고 요청했다. 꼽추가 앞에 나서자 그들 중 몇 명은 두 말 않고 자리를 떴다. 구본웅은 그녀들이 당황하는 걸 보며 오히려 긍지와 재미를 느꼈다.

자신감이 노력과 성취로 만들어지고 그 자신감은 여유와 긍지와 새로운 각오로 축적되는 것을 체험하는 순간이었다.

‘제8회 조선미전’에서 특선했던 김주경(金周經)은 ‘구본웅 개인전’에 관한 평을 ‘조선일보’에 다음과 같이 발표했다.

“이제까지 조선에 소개되지 않았던 쉬르리얼리즘(초현실주의)을 처음으로 소개한 것이다. 연(然)이나 씨가 발표한 작품 전부가 쉬르라는 것은 아니다.

그중에는 큐비즘(입체파)과의 중간층과 포비즘(야수파)과의 중간층 내지 익스프레셔니즘(표현주의), 또는 임플레이셔니즘(인상파)의 중간층에 속하는 작품들도 병진되었음을 부기하여 둔다.”

그밖에 많은 사람들이 구본웅이야말로 우리나라 최초의 아방가르드(전위) 화풍의 선구자라며 대단한 관심을 나타냈다. 동아일보 개인전이 끝난 후 그를 ‘운명의 화가’ 또는 ‘숙명의 화가’ 또는 ‘서울의 로트렉’라고 부르는 사람이 늘어났다. 그들은 꼽추가 된 그의 운명을 안타까워하면서도 바로 그 운명이 그를 뛰어난 화가로 만들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는 ‘노력하는 예술가’일 뿐이었다. 열심히 정진하는 것이야말로 어떠한 역경에서도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삶을 살려는 의지를 지탱해주는 원동력임을 일찌감치 깨달았던 것이다.

‘동아일보’ 개인전이 끝나고 일본으로 돌아간 구본웅은 1933년 3월 초 태평양미술학교 본과를 졸업하고 서울로 돌아왔다.

한편 폐병이 심해진 이상은 2월 말에 총독부를 그만둔 후 습기로 눅눅하고 퀴퀴한 냄새로 가득 찬 골방에 이불을 뒤집어쓰고 누워있었다.

구본웅은 요양을 위해 그를 황해도 백천온천으로 데려갔다. 이상은 그곳에서 금홍(錦紅)을 만나게 되는데 그녀를 6월초에 개업한 제비다방의 마담 겸 내연의 처로 맞아들였다.


백천온천에서 먼저 서울로 돌아온 구본웅은 1933년 4월28일부터 휘문고보 강당에서 열린 ‘제12회 서화협회전람회(서화협회전 또는 協展)’에 ‘실제(失題)’란 작품을 출품했다.

서화협회전은 조선미전에 맞먹는 민전이었다. 전시된 작품은 대부분 서양화였다.

시인 겸 비평가 김기림(金起林)은 편석촌(片石村)이란 필명으로 ‘조선중앙일보’에 비평문을 기고했다. 그는 구본웅에게 깊은 관심을 나타냈다.

그는 “지극히 불리한 환경에도 그만한 경지까지 개척해 나간 구본웅의 예술에 대한 정열에 탄복한다”며,

“구본웅의 작품 ‘실제’야말로 조선미전의 관료주의에 대한 반대로서 서화협회전의 빛나는 존재가치를 또렷하게 인식토록 해주는 작품”이라고 평가했다.

그는 마지막으로 “조선화단의 ‘아카데미즘’이 그에게 아무리 돌을 던질지라도 구본웅씨는 엄연히 우리 화단의 최좌익이다. 적막한 고립에 영광이 있어라”라고 끝을 맺었다.

 김기림은 조선의 전통적 관학(官學)파와 관전(官展)파 화가들이 아무리 무어라 하더라도 우리나라 최초의 야수파 화가이고 최초·최첨단의 전위화가로서 구본웅에게 계속 정진하라는 격려를 보낸 것이었다.


구본웅은 매일 ‘낙랑팔라’와 제비다방에 들러 예술인들과 담소를 나누는 등 활발하게 활동했다.

그는 1933년 4월에 오늘날 유네스코회관 근처에 있는 건물 2층을 빌려 경성정판사(京城精版社)를 개업했고 9월에는 가까운 거리에 있는 소공동에 골동품 갤러리 우고당(友古堂)을 열었다.

경성정판사에서는 주로 극장 포스터를 디자인하고 인쇄해주는 일을 했으며 우고당에서는 미술품을 감정하고 좋은 골동품을 발견했을 때 일본인이 아니라 조선인 수집가를 연결해 주는 역할을 했다. 이는 장애를 극복하고 적극적이고 긍정적이며 개방적으로 살려는 노력의 일환이었다. 또한 아버지로부터 경제적으로 독립하려는 몸부림이었다.

우고당 3층에 아틀리에를 마련했는데 교통이 좋아서 낮에는 친구들의 집합소가 되었다.

그는 특별한 재주꾼들과 교류를 즐겼다. 늘 자진해서 각종 모임에 참석하고 주변 사람들과 융합하려고 애썼다.

 어떤 모임에 가도 장애인이 왔다는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 항상 쾌활하고 명랑한 얼굴로 사람들을 대했으며 재담과 농담을 잘했다.


‘꼽추 멋쟁이’라는 별명

시인 고은(高銀)은 ‘이상 평전’에서 구본웅의 본가(本家)와 그의 일면을 이렇게 표현했다.

“‘낙랑팔라’에서 만나는 일을 제외하면 그들이 매일 만나는 곳은 다동에 있는 구본웅가의 광활한 대가(大家) 사랑의 화실이었다.

그 화실 겸 거실은 당시의 시인, 작가, 비평가, 화가, 심지어 영화감독까지도 모여들어서 문예살롱의 기분이 짙었으며 그 본웅가(家)를 다옥정(多玉亭)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본웅은 화가답게 그의 꼽추에도 불구하고 서구적인 멋 가락을 잘 나타내어서 다옥정(多屋町) 기생들도 ‘꼽추 멋쟁이’ ‘꼽추 도련님’이라는 별명으로 수군거릴 정도였다.”

구본웅은 외출할 때면 양복 정장을 차려 입었다. 그런데 양복 어깨에 각을 만들고 구부러진 짧은 등을 돋보이게 하여 꼽추인 외모가 더욱 두드러져 꼴불견이었다.

 그래도 그의 아버지는 격에 맞는 의관과 모자를 고집했다. 그래서 그는 최고급 양복을 격식에 맞게 제대로 갖추어 입었지만, 양복 정장이 귀하던 시절에 서양 상류층의 복장에 익숙지 않은 일반인들에게 이 예술가의 모습은 우스꽝스럽게만 보였다.

1934년 5월에는 동경미술학교 출신 7명과 구본웅이 모여 목일회(牧日會)를 창립했다. 이들 8명은 조선미전의 개혁을 주장하는 인물들이었다.

이런 뜻을 나타내기 위하여 이들은 조선미전 출품을 거부하고 ‘제13회 조선미전’을 며칠 앞둔 5월16일부터 일주일간 화신백화점 5층에 있는 화신화랑에서 ‘제1회 목일회전’을 개최했다.

회원 8명이 46점을 출품했는데 구본웅의 작품이 14점이나 됐다. 그러나 그는 처음으로 비평가로부터 혹평을 듣는 뼈아픈 경험을 하게 되었다.

A생(生)이란 가명으로 ‘조선일보’에 기고된 ‘목일회 제1회 양화전(洋畵展)을 보고’란 비평문은 “구본웅의 활달한 작품이 14점이나 나와 구본웅 개인특별전을 하는 듯한 느낌이 들 정도”라고 표현했다.

그는 “구본웅의 작품들이 마치 사군자 휘호회에서 보이는 단숨의 붓놀림 같은 화풍 탓으로 보는 사람의 눈을 현란하게 하지만 현실에 발붙이지 않은 채 구름 위에 그 어느 세계를 건설하려는 데카당한 일면이 있다”고 신랄하게 비판했다.

A생은 ‘얼굴’에 대해 “시각의 예리함을 보여주어 작가의 관점을 잘 드러낸 작품”이라고 칭찬하면서도 “몹시도 대담한 구상과 색채에 비해 선이 무기력해 보인다”는 아쉬움을 나타냈다.

그리고 그의 초현실주의 작품에 대해서는 “(구본웅의) 괴로운 인생을 그 어느 숭고하고 신비스러운 환상의 세계에까지 유도”하려는 것이라고 평가하면서도 “현실이 없는 초현실”이라고 꼬집었다.   


구본웅 비평시대가 열리다

1934년 5월이 가까워오면서 정월 나혜석은 ‘제13회 조선미전’에 대한 비평 요청이 오기를 고대하고 있었다. 그녀는 제1회부터 제11회까지 11년간 아홉 차례 출품하여 아홉 차례 입선했고 다섯 차례나 입상했다.

또한 그중 세 차례는 조선인으로는 최고상을 받았다. 출품하지 못한 경우는 구미를 여행한 2년과, 그리고 작품 접수 기일 변경을 제대로 전달받지 못한 제12회 등 세 차례 뿐이었다.

그녀는 누구보다도 조선미전에 많이 출품했고 그때까지 입상과 최고상을 가장 많이 받은 화가였다. 1933년에는 출품하지 못한 대신에 ‘매일신보’의 요청으로 ‘美展(미전)의 인상’을 발표했다.

그녀는 앞으로도 계속해서 미술비평을 하고 싶었다.

어느 모로 보나 누구보다도 자신이 미술비평 자격과 능력을 갖추었다고 믿었다. 그런데 개막일이 며칠 지나도록 어느 언론에서도 비평 요청이 없었다.


구본웅은 전년도 10월에 ‘靑邱會展(청구회전)을 보고’란 비평문을 ‘동아일보’에 투고했었다. 이 비평문이 남다르다는 소문이 났다. 그래서 여러 신문사에서 ‘제13회 조선미전’에 대한 비평문을 써달라고 요청했다.

구본웅은 첫번째로 요청을 받은 ‘조선중앙일보’에 ‘제13회 조선미전을 봄’을 5월30일부터 6월6일까지 연재했다. 그리고 ‘월간매신’ 6월호에도 비평문을 게재했다.

각 신문사의 비평문 중에서 구본웅의 글이 제일 뛰어났고 또한 관심의 대상으로 떠올랐다. 9월에는 ‘조선일보’가 그에게 미술계에 대한 한 해의 소감을 써달라고 요청했다.

그 해에 10명 남짓한 비평가들이 ‘일본화풍의 맹목적 본뜨기’와 ‘겉핥기식 향토색’에 대하여 꾸짖고 나섰지만 이들은 언론에 각각 한 번 정도의 비평을 썼다.

그러나 구본웅과 프로예맹(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 출신의 정하보(鄭河普)는 각기 비평을 세 편이나 쓰는 적극성을 보였다. 물론 정하보와 구본웅의 생각은 달랐다.

구본웅이 주장하는 향토성은 소재 따위로 민족성을 해석하는 수준을 뛰어넘는 것이었다.

조선 풍속이나 조선의 자연을 그리는 것만이 향토성이 아니며 조선인 생활의 모던화를 표현하고자 하는 것도 향토성이라고 주장했다. 그래서 조선 전래의 생활풍습, 언어행동, 풍토와 역사 따위에 바탕을 두는 직관이 나타나면 그것이 향토성 아니냐고 물었다.

당시에 일본제국주의 정부는 조선에서 민족성이란 용어를 쓰지 못하게 했으며 조선총독부는 문화정책에서 지방색이란 용어를 강조했다. 이에 반발한 조선인들은 향토성 또는 향토색이란 표현을 선호했다.

구본웅의 비평에 대하여 소설가 이태준(李泰俊)이 지원사격을 하고 나섰다.

그는 “백화점에 태극선 화문석 같은 것을 늘어놓으면 조선 맛이 난다.

그러나 한 예술품이 가진 정신이나 맛은 그러한 조선 물정이나 묘출하였다고 해선 조선적 작품은 될지언정 조선미술이 되는 것은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이어서 그는 “요즈음 조선심(朝鮮心)이니 조선정조(朝鮮情調)니 하고 그것을 고조하는 예술가들”이 있지만, “내면적인 것을 잊어버리고 외면적인 것에만 관심을 기울이는” 예술가들이 많음을 안타까워했다.


파란 몰고온 이혼고백장

나혜석은 이제 미술비평에 구본웅 시대가 왔음을 직감했다. 나혜석은 미술작품에서만이 아니라 미술비평에서도 이미 설자리가 없다는 것을 절감해야 했다.

그래도 자신이 제일 아끼는 제자인 구본웅이 그 자리를 차지한 것에 긍지와 보람을 느끼고 위안을 삼으며 눈물을 머금었다.

나혜석은 다시 남녀평등과 사회정의를 위한 공격에 나섰다.

그녀는 ‘삼천리’ 1934년 8월호와 9월호에 장문의 ‘이혼고백장’을 연재했다. 자신의 10년간 결혼생활과 4년 전 이혼 과정의 적나라한 갈등과 비극적인 심경을 솔직하게 밝히고, 조선에서 여성들에게만 일방적으로 강요하는 정조 관념을 비판하면서 앞으로도 계속적인 자아발견 그리고 정진과 재기를 다짐하는 글을 발표했다.

당시로서는 사회적으로 엄청난 파문을 일으키는 사건이었다. 더욱이 그녀는 이혼의 도화선이었던 친일적인 사회지도자 최린(崔麟)을 상대로 파리에서의 정조 유린에 대한 거액의 위자료를 청구하는 소송을 9월19일에 제기했다. 이 사실이 1934년 9월20일자 언론에 보도되어 남성중심의 조선 사회는 또다시 엄청난 충격에 휩싸였다.


다방 운영의 적자와 금홍의 가출 등으로 어깻죽지가 처진 이상은 오후 늦게 구본웅의 우고당 작업실에 들르거나 밤에 만취해 다옥정 구본웅의 집으로 찾아오는 일이 잦아졌다.

그럴 때면 이불에 오줌을 싸고 방에 토하기 일쑤여서 구본웅의 부모는 이상을 싫어했다.

그래도 구본웅은 이상이 좋았다. 꼽추와 결핵환자인 두 사람만의 동병상련 의식은 서로 어렵고 힘들 때 아픔을 승화시켜 황량한 마음을 훈훈하게 녹여주는 화롯불 같았다.

구본웅은 이상의 얼굴을 초상화로 남겨야겠다고 생각했다.

그의 얼굴은 바로 억압과 암울의 시대를 사는 예술인의 모습이었다. 구본웅은 이상의 얼굴을 통해서 식민지 시대를 사는 지성인들의 모습을 상징화하기로 했다.

1935년 3월3일 13시, 구본웅은 우고당 작업실로 이상을 불렀다.

원래 이상은 오래 전부터 초상화를 그려달라고 수없이 졸랐다. 그러나 구본웅은 남의 초상화 그리는 일은 철저히 거절했다. 이번에도 그의 초상화를 그리는 것이 아니라 권태와 조소와 자학과 반항과 분노와 초탈을 폭포줄기처럼 쏟아내는 젊은이를 나타내려 한다고 작품의도를 설명했다.

구본웅은 그에게 다음날부터 매일 모델로 나와줄 것을 부탁했다. 이상은 그 작품을 자기에게 주는 것을 조건으로 응했다.

구본웅은 우울하고도 비탄에 잠긴 표정을 강조하기 위하여 바탕 화면을 푸른 색조로 짙게 처리하겠다고 이상에게 양해를 구했다. 이상은 이번에는 황달이 아니라 ‘청달’에 걸렸다는 조소를 받게 될 것 같다며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제비다방에 걸려있는, 이상 자신이 그려 1931년도 ‘제10회 조선미전’에 입선했던 ‘自畵像(자화상)’에는 누런 색이 강조되었다. 그래서 친구들로부터 황달에 걸렸다는 놀림을 자주 받았던 것이다.

구본웅은 그에게 파이프를 비스듬히 물고 골똘히 생각에 잠겨있는 표정을 지으라고 주문했다. 이상은 평소에 파이프 담배를 피우지 않았다.

실제로는 구본웅이 파이프 담배를 물고 다녔는데, 구본웅은 그런 모습에서 일상성에 조소를 퍼부으면서 반항 의식을 분출하는 한 지성인의 내면세계를 표출해 내려고 안간힘을 썼다.


‘우인상’은 구본웅의 자화상

구본웅은 친구 얼굴에서 그의 내면을 읽고, 나아가 불우한 한 시대의 내면까지 묘출하려고 매일 이상을 불러 각기 다른 포즈를 취하게 했다.

이상은 왜 그림은 빨리 안 그리고 요리조리 포즈만 취하게 하면서 사진 모델 취급을 하느냐고 성화가 대단했다. 그 과정에서 구본웅은 단순한 친구의 모습이 아닌, 한 시대의 상징과 자신의 내면을 나타내려 했다.

그리고 그러한 시대적, 신체적 조건에 적응하면서도 이를 권태롭게 수용하고 조소하며 도전하는 자신의 내면 풍경을 나타내려고 열중했다.

마침내 구본웅은 이상의 눈매를 더욱 날카롭게 하고 파이프를 비스듬히 물고 있는 얼굴을 더욱 창백하게 그림으로써 젊은 지성인의 반항적이고 괴팍한 이미지를 포착했다.

모든 것이 가소롭다는 표정으로 담배를 피우고 있는 이상의 얼굴은 그 개인의 권태를 자각하려는 내면의 구현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한 시대의 어둠을 향한 지성인의 시니컬한 대응이기도 했다.

권태롭고 조소적인, 그러면서 세상을 초탈한 듯한 젊은 지성인이 격한 터치와 어두운 색조의 응결로 그려졌다. 이 시대 의식 있는 예술가들이 지녔던 자학과 조소와 도전, 이러한 내면 풍경을 극명하게 묘출할 수 있는 작품을 만들어 갔다.

구본웅은 격렬한 터치와 어두운 톤이 작품을 지배하게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구성적 의지를 표출하려고 노력했다. 사실상 이러한 점이 다른 야수파, 표현파 계열 화가와 구분되는 구본웅만의 예술 세계였다.

그래서 이 ‘友人像(우인상)’은 바로 구본웅 내면의 자화상(自畵像)이기도 했다. 이렇게 하여 구본웅의 대표작 중 하나이자 우리나라에서 널리 알려지게 된 유화 초상화가 이 세상에 태어나게 되었다.

작품을 완성했을 때 구본웅은 인력거에 이 작품을 싣고 제비다방으로 갔다. 제비 다방이 개업했을 때는 이상의 ‘자화상’과 구본웅이 그려 기증한 ‘裸婦(나부)와 靜物(정물)’ 두 작품이 벽에 걸려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이상은 회칠한 사면 벽에 주르 뢰나르의 그림틀을 몇 개나 더 걸어 놓았다. 이상은 주르 뢰나르의 복사그림 하나를 떼어내고 ‘우인상’을 걸었다.

그 자리에서 구본웅은 이상에게 창문사 인쇄공장에서 하루에 몇 시간씩 교정과 편집 일을 도와줄 수 있느냐고 조심스레 물었다. 그의 자존심을 건드리지 않으려는 배려였다.

그러나 사실은 그를 경제적으로 돕고 싶은 생각이 앞섰다. 이상은 다방 일도 있고 해서 하루에 3시간 정도면 아르바이트를 할 수 있다며 대단한 관심을 보였다. 그래서 하루 3시간 근무에 일급은 1원40전으로 정했다.   


백단화와 보헤미안 넥타이

‘주식회사 창문사(彰文社)’는 구본웅의 아버지가 1934년 9월에 ‘주식회사 조선기독교창문사(朝鮮基督敎彰文社)’를 인수해 설립한 회사였다.

이 회사는 기독교 관련 서적과 YMCA 등 기독교 기관의 간행물을 인쇄했는데 당시로는 최신 인쇄시설을 완비했다. 이 회사는 월남(月南) 이상재(李商在)가 황성신문을 그만둔 후 전국서점 주인들의 주식 참여(이상재 명의로 주식을 발행했음)와 하와이 동포들로부터 모은 기부금, 그리고 고종 황제의 하사금 등을 합쳐 설립한 민족자본 기업이었다.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성경을 인쇄하여 출판한 공로도 남겼다.

그러나 해가 갈수록 적자가 누적되었다. 이를 고심하던 초대 사장 이상재는 2대 사장 양주삼의 동의를 받아 구본웅의 아버지인 구자혁(具滋爀)에게 인수하도록 설득했다.

젊은 시절에 황성신문 기자와 종합잡지 ‘開闢(개벽)’ 편집장을 역임했던 구본웅의 아버지는 적자가 아무리 크더라도 조선의 문화계를 위해서라면 감수할 가치가 있다고 판단했다.

그는 이 회사를 인수한 후 ‘조선기독교’란 이름은 빼고 그간 약자로 불리던 ‘주식회사 창문사’란 간판을 쓰기로 결정했다.

창문사 인수로 문화예술계에서 구본웅에 대한 기대는 더욱 커졌다.

주변에서는 그를 ‘창문사 사주(社主)의 아들’로 부르기 시작했다. 이상도 구본웅의 아버지가 창문사를 인수한 것을 그렇게 좋아할 수가 없었다. 그는 이상이 원하는 원고는 무조건 무료로 출판해 주기로 다시 약속했다.

이상은 이때의 생활을 단편소설 幻視記(환시기)에 이렇게 적어놓았다.

“나는 내 고독을 일급 일원사십전과 바꾸었다. 인쇄공장 우중충한 속에서 활자처럼 오늘도 내일도 모레도 똑같은 생활을 찍어내었다.”

총독부에 근무할 때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그렇게 깔끔하고 단정하게 차려입던 미남 키다리 이상은 이때부터 더욱 봉두난발, 작소(雀巢)머리와 고슴도치 수염, 그리고 일주일에 한 번쯤 세수한 듯한 어릿광대로 변해갔다.

거기에 백단화(白短靴)와 보헤미안 넥타이를 매고 단장을 휘두르면서 외출할 때에는 퇴폐와 문란의 상징으로 주위의 눈총을 받았다.

이상이 순차적으로 개업했던 다방 제비’ ‘鶴(학)’ ‘69’ ‘麥(맥)’은 구본웅의 계속적인 재정후원에도 완전히 망해버렸다. 이를 딱하게 여긴 구본웅은 이상에게 하루 8시간씩 창문사에서 일하도록 배려한 후 아예 출판부장으로 대우해 주었다.

1935년 12월 초순, 또다시 장기 가출중인 금홍 때문에 속을 썩이던 이상이 구본웅과 저녁 외출을 나왔다. 우연히 길에서 희곡 ‘화가와 모델’을 발표한 양백화(梁白華)와 마주쳤다. 이상은 쓸쓸해 보이는 그를 위해서 술 한잔 사지 않겠냐고 구본웅을 충동질했다.

그래서 그들은 양백화가 단골로 가는 다방골에 있는 ‘민순자집’으로 향했다. 그런데 세 사람 뒤를 아이들이 졸졸 따라오면서, “곡마단이 왔다”고 떠들어댔다. 양백화가 소리를 질러서 아이들을 쫓았다. 그러나 아이들은 계속 따라왔다. 아이들이 세 사람을 곡마단패로 본 데는 까닭이 있었다.

 이상은 차린 복장과 활동사진 변사 같은 말투 때문에 곡마단 요술쟁이로 보였고, 구본웅은 땅에 잘잘 끌리는 망토 같은 인버네스 외투에 높은 중산모를 썼으니 원숭이 조련사쯤으로 보였을 터였다. 그런데 설상가상 구본웅보다 두 배나 크고 팔다리 네 개가 각각 따로 흐느적거리며 걷는 꼴이 흡사 로봇 같은 양백화가 한몫 끼었으니, 이 해괴한 세 사람을 보면 아이들이 아닐지라도 곡마단 단원들로 보았을 것이다.

그들 세 사람이 밤늦게 술집을 나서서 몇 걸음을 옮겼을 때, 또 다른 술집을 나서는 김복진 일행을 만났다.

 이들을 공손하게 배웅하는 기생의 자태가 구본웅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바로 채경이었다.

춘곡 고희동 작품에 모델을 섰던 그 아름다운 채경이가 미소를 머금은 채 통영칠기의 대가(大家) 강창원(姜蒼園)과 서양화가 박상진에게 눈웃음을 치고 있었다. 구본웅은 심장이 일순간 멎어버린 듯 그곳에 한동안 장승처럼 서 있었다.


여인상의 주인공 장성옥과의 만남

이상은 금홍이 없는 골방으로 돌아오자 연말의 고적감에 휩싸였다.

그래서 시 ‘紙碑(지비)’ 속편을 쓰기 시작했다. 그는 시의 첫 줄에 “ 어디갔는지모르는안해”라고 띄어쓰기까지 생략할 만큼 숨가쁜 탄식을 내뿜었다. 다음날 그는 그 원고를 월간지 ‘中央(중앙)’에 급하게 우송했다. 1936년 새해 새아침을 장식하는 1월호에 게재해 주기 바란다는 편지를 첨부했다.

돌에 쓴 비문이 아니라 종이에 쓴 비문 시 ‘紙碑’가 ‘천재시인 이상은 세상 사람들이 비웃는 술집작부 출신 금홍을 일시적인 동거녀가 아니라 사랑하는 정식 아내로 삼았다’는 사실을 영원히 이 세상에 남겨주기를 기원하면서…. 이상의 귀에는 정월 나혜석이 들려주던 기생 강명화의 자살에 관한 이야기가 자장가처럼 밀려들기 시작했다.

1936년 새해 벽두부터 구본웅은 강창원에게 연말에 보았던 그 미녀를 모델로 소개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때 그 자리에 함께 있었던 박상진은 그녀가 강창원의 애인이라고 넌지시 알려주었다.

이틀 후 강창원은 장성옥(張成玉)이란 이름의 그 미녀를 데리고 구본웅의 작업실로 찾아왔다.

동양인으로는 보기 드물게 큰 눈과 작은 얼굴, 맑은 눈빛과 안면의 입체감, 처녀만이 가질 수 있는 육색과 가냘픈 체구 그리고 넘치는 건강미에 구본웅은 완전히 뇌쇄당하고 말았다.

그는 강창원과 장성옥에게 여인 상반신 그림 두 장을 그리겠다고 제안했다. 하나는 한복을 입고, 또 하나는 상반신 나체로 얼굴과 가슴 부위를 그리는 계획을 설명하고 동의를 받았다.

술집에서 ‘예쁜 옥(玉)’이라고 불린다는 만 19세의 이 미녀는 그의 작업실 분위기에 깊은 관심을 나타냈다.

강창원이 돌아간 다음, 옥이는 웃옷을 모두 벗고 의자에 앉았다.

구본웅은 양손을 머리 위로 올려 잡으라고 주문했다. 오래 견디기 어려운 포즈였다.

그녀는 발레리나와 같은 동작으로 움직였다. 실제로 그녀는 조선춤을 아주 잘 춘다고 했다. 구본웅은 그녀의 아름다움에 넋을 잃었다.

이 곱고 깨끗한 균제의 아름다움과 기름진 육체를 19년 동안 곱게 감추어 두었다가 이 작은 화인(畵人)에게 풀어 헤쳐 내맡긴다는 것은 너무나 아까운 일이라고 생각했다. 머리카락은 옻칠같이 검고 그 눈은 벨벳마냥 보드랍고 그 살결은 진주처럼 빛났다. 기계로 쭉 뽑아낸 듯 미끈한 어깨 곡선이 서기를 뿜고 있었다.

황홀한 젖가슴 구석구석에서 파동치는 신비의 율동을 보았다. 구본웅의 귀는 분명히 청옥을 덮어놓은 듯한 젖가슴에서 심장의 고동도 들었다. 놀랐다.

이처럼 어려운 포즈를 태연하게 연출하는 대담성과 인내심에. 모델을 보고 마음이 이렇게 들떠본 경험이 없었다.

그러나 구본웅의 그림은 이런 아름다움을 곱게 그려내지 못했다.

그 여인을, 그의 마음과 정신을 미치도록 흔들고 혼란스럽게 하는 주체로 화폭에 담기 때문이었다. 그의 눈앞에는 모델 장성옥뿐만 아니라 기생 채경과 이상의 금홍, 그리고 정월 나혜석도 어른거렸다.

그래서 벌거벗은 여인의 상반신을 화면 가득히 펼쳐 놓은 이 ‘女人像(여인상)’은 ‘우인상’에 비하여 더욱 격렬한 터치와 왜곡된 상형으로 그려갔다.

여인의 얼굴보다는 가슴을 강조하고 볼과 입술을 붉은 색으로 칠하여 여인의 성적인 특성이 노골적이면서도 난폭하게 드러났다. 내적으로 불안한 에너지가 막을 길 없어 폭발하듯 분출되고 있었다.

자신으로부터 파동치는 격정의 소용돌이가 그림 속으로 용암처럼 흘러들어갔다.


“처음으로 사람대접, 여왕대접 받았다”

추하게 일그러진 여인상을 통해 감히 접근할 수 없는 장애인의 절망과 분노 그리고 시대적 아픔과 도전을 표현했다.

그러한 아픔과 절망, 분노와 도전이 그림 속에서 위기의식에 편승되어 나타났다. 그래서 이 ‘여인상’은 어느 특정한 여인을 대상으로 해서 그린 것이 아니라 작가의 주관에 의한 극단적인 표현태도를 보였다.

이제까지 조선의 예술과 미학에서 성전처럼 취급되던 전통적 가치와 예술관을 죄 부정하고 현대성이라는 조형의 실험이 작품에서 잘 드러나도록 노력했다.

특히 두 팔을 머리 뒤로 돌리고 있는 나부(裸婦)의 대담한 변형과 강렬한 색채 그리고 거친 선과 필촉은 색채 면에서 이전의 야수파 작가들이 보이던 밝고 경쾌한 색채 대신 무겁고 어두운 색채 위에 부분적으로 밝고 강렬한, 짧은 터치의 색채를 대치시켜 표현했다.

그래서 긴장감을 더 두드러지게 했다. 뿐만 아니라 굵고 거친 선으로 여인의 상체 윤곽을 표현하여 화면에 강렬한 느낌을 주는 것은, 작가 자신의 내면적인 리얼리티를 강하게 표출하려는 의도에서 비롯됐다.

특히 인체 표현의 기본형에서 벗어나 검은 색조의 배경에 부분적으로 강조되어 있는 붉은 색의 강렬한 대비는 이 ‘여인상’ 속에 숨어있는 구본웅 자신의 자화상(自畵像)이리라.

옥이는 이 흉측해 보이는 그림이 그려지는 것을 보고도 전혀 불평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는 아파하고 절망하며 분노하면서 그림 그리기에 도전하는 불구자에게 흥미를 느끼는 듯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녀는 작업실 청소도 하고 비서 노릇도 하면서 스스럼없이 구본웅을 대하기 시작했다.

그보다 10년 연하인 그녀가 하는 행동이 그보다 훨씬 어른스러웠다.

이상이 백천온천에서 스물한 살 된 금홍을 보고 서른한 살 먹은 사람보다도 낫다고 감탄하던 것이 구본웅에게도 이제야 실감 있게 다가왔다.

그는 그동안 짝사랑으로 가슴에 담아왔던 기생 채경을 닮은 미녀와 작업실에 함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더할 수 없는 행복감에 도취했다.

그림이 거의 완성되어 갈 즈음 그녀는, 그간 경험했던 모든 남자가 자신을 돈만 주면 데리고 놀 수 있는 술집여자로 대했는데, 지난 한 달간 처음으로 이곳에서 사람대접은 물론 여왕대접을 받았노라고 말했다. 특히 항상 반말만 듣고 살던 그녀는 처음으로 존대어로 예우받는 것을 신기해하면서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그들은 손을 잡고 같이 울었다. 그들은 서로의 아픔을 달래주고 감싸주었다. 영과 영이 마주치는 섬광은 찬란하고 황홀했다. 그들은 서로 상대방의 모자람을 보태주고 절망을 덮어주자고 약속했다.

이렇게 하여 구본웅의 인물화 중에서 ‘우인상’과 함께 대표작으로 알려진 ‘여인상’이 태어나게 되었다.

이 두 작품은 국립현대미술관에 소장되어, 서산 구본웅이 ‘근대미술의 큰 봉우리’일 뿐만 아니라 ‘현대미술의 첫 봉우리’라는 평가를 오늘날의 많은 관람객들과 미술애호가들에게 전해 주고 있다.   

 

http://egloos.zum.com/hooroo/v/886566

 

 

 




狂女の告白
                                 李箱


[#ここから5字下げ]
ヲンナであある[#「あある」に「ママ」の注記]S子様には本当に気の毒です。そしてB君、君に感謝しなければならない
だろう。われわれはS子様の前途に再びと光明のあらんことを祈らう。
[#ここで字下げ終わり]

 蒼白いヲンナ
 顔はヲンナ履歴書である。ヲンナの口は小さいからヲンナは溺死しなければならぬがヲンナは水の様に時々荒れ狂ふことがある。あらゆる明るさの太陽等の下にヲンナはげにも澄んだ水の様に流れを漂はせていたがげにも静かであり滑らかな表面は礫を食べたか食べなかつたか常に渦を持つてゐる※[#「碌のつくり+りっとう」、第3水準1-15-94]げた純白色である。
 
 カツパラハウトスルカラアタシノハウカラヤツチマツタワ。

 猿の様に笑ふヲンナの顔には一夜の中にげにも美しくつやつやした岱赭色のチヨコレエトが無数に実つてしまつたからヲンナは遮二無二チヨコレエトを放射した。チヨコレエトは黒檀のサアベルを引き摺りながら照明の合間合間に撃剣を試みても笑ふ。笑ふ。何物も皆笑ふ。笑ひが遂に飴の様にとろとろと粘つてチヨコレエトを食べてしまつて弾力剛気に富んだあらゆる標的は皆無用となり笑ひは粉々に砕かれても笑ふ。笑ふ。青く笑ふ、針の鉄橋の様に笑ふ。ヲンナは羅漢を孕んだのだと皆は知りヲンナも知る。羅漢は肥大してヲンナの子宮は雲母の様に膨れヲンナは石の様に固いチヨコレエトが食べたかつたのである。ヲンナの登る階段は一段一段が更に新しい焦熱氷地獄であつたからヲンナは楽しいチヨコレエトが食べたいと思はないことは困難であるけれども慈善家としてのヲンナは一と肌脱いだ積りでしかもヲンナは堪らない程息苦しいのを覚へたがこんなに迄新鮮でない慈善事業が又とあるでしようかとヲンナは一と晩中悶へ続けたけれどもヲンナは全身の持つ若干個の湿気を帯びた穿孔(例へば目其他)の附近の芥は払へないのであつた。
 ヲンナは勿論あらゆるものを棄てた。ヲンナの名前も、ヲンナの皮膚に附いてゐる長い年月の間やつと出来た垢の薄膜も甚だしくはヲンナの唾線を迄も、ヲンナの頭は塩で浄められた様なものである。そして温度を持たないゆるやかな風がげにも康衢煙月の様に吹いてゐる。ヲンナは独り望遠鏡でSOSをきく、そしてデツキを走る。ヲンナは青い火花の玉が真裸のまゝ走つてゐるのを見る。ヲンナはヲロウラを見る。デツキの勾欄は北極星の甘味しさを見る。巨大な膃肭臍の背なかを無事に駆けることがヲンナとして果して可能であり得るか、ヲンナは発光する波濤を見る。発光する波濤はヲンナに白紙の花ビラをくれる。ヲンナの皮膚は※[#「碌のつくり+りっとう」、第3水準1-15-94]がれ※[#「碌のつくり+りっとう」、第3水準1-15-94]がれた皮膚は羽衣の様に風に舞ふているげにも涼しい景色であることに気附いて皆はゴムの様な両手を挙げて口を拍手させるのである。

 アタシタビガヘリ、ネルニトコナシヨ。

 ヲンナは遂に堕胎したのである。トランクの中には千裂れ千裂れに砕かれたPOUDRE VERTUE-USEが複製されたのとも一緒に一杯つめてある。死胎もある。ヲンナは古風な地図の上を毒毛をばら撒きながら蛾の様に翔ぶ。をんなは今は最早五百羅漢の可哀相な男寡達には欠ぐ[#「欠ぐ」に「ママ」の注記]に欠ぐ[#「欠ぐ」に「ママ」の注記]べからざる一人妻なのである。ヲンナは鼻歌の様なADIEUを地図のエレベエシヨンに告げNO.1-500の何れかの寺刹へと歩みを急ぐのである。


一九三一、六、一八




광녀의 고백               - 이상  

여자인S옥양玉孃한테는참으로미안未安하오.

그리고B군君자네한테감사感謝하지아니하면아니될것이오.

우리들은S옥양玉 孃의앞길에다시광명光明이있기를빌어야하오.

창백蒼白한여자
얼굴은여자의이력서履歷書이다.

여자의입(口)은작기때문에여자는익사溺死하지아니하면아니되지만여자는물과같이

때때로미쳐서소란騷亂해지는수가있다.

온갖밝음의태양太陽들아래여자는참으로맑은물과같이떠돌고있었는데

참으로고요하고매끄러운표면表面은조약돌을삼켰는지아니삼켰는지

항상소용돌이를갖는퇴색褪色한순백색純白色이다.

등쳐먹으려고하길래내가먼첨한대먹여놓았죠.

잔내비와같이웃는여자의얼굴에는하룻밤사이에참아름답고빤드르르한적갈색赤褐色쵸콜레이트가

무수無數히열매맺혀버렸기때문에여자는마구대고쵸콜레이트를방사放射하였다.

쵸콜레이트는흑단黑檀의사아벨을질질끌면서조명照明사이사이에격검擊劍을하기만하여도웃는다.

웃는다.

어느것이나모두웃는다.

웃음이마침내엿과같이걸쭉하게찐덕거려서쵸콜레이트를다삼켜버리고


탄력강기彈力剛氣에찬온갖표적標的은모두무용無用이되고웃음은산산散散이부서지고도웃는다.

웃는다.

 파랗게웃는다.

바늘의철교鐵橋와같이웃는다.

여자는나한羅漢을밴(孕)것인줄다들알고여자도안다.

나한羅漢은비대肥大하고여자의자궁子宮은운모雲母와같이부풀고

여자는돌과같이딱딱한쵸콜레이트가먹고싶었던것이다.

여자가올라가는층계層階는한층한층이더욱새로운초열빙결지옥焦熱氷結地獄이었기때문에

여자는즐거운쵸콜레이트가먹고싶지않다고생각하지아니하는것은 곤란困難하기는하지만

자선가慈善家로서의여자는한몫보아준심산心算이지만그러면서도여자는못견딜이만큼답답함을느꼈는데

이다지도신선新鮮하지아니한자선사업慈善事業이또있을까요하고

여자는밤새도록고민고민苦悶苦悶하였지만

여자는전신全身이갖는약간개若干個의습기濕氣를띤천공穿孔(예例컨대눈기지其他)근처近處의먼지는떨어버릴수없는것이었다.
여자는물론勿論모든것을포기抛棄하였다.

여자의성명姓名도,여자의피부皮膚에붙어있는오랜세월歲月중에간신히생겨진때(구垢)의박막薄膜도심지어甚至於는여자의수선睡腺까지도, 여자의머리로는소금으로닦은것이나다름없는것이다.

그리하여온도溫度를갖지아니하는엷은바람이참강구연월康衢煙月과같이불고있다.

 여자는혼자망원경望遠鏡으로SOS를듣는다.

그리곤

덱크를달린다.

 여자는푸른불꽃탄환彈丸이벌거숭이인채달리고있는것을본다.

여자는오오로라를본다. 덱크의구란勾欄은북극성北極星의감미甘味로움을본다.

거대巨大한바닷개(해구海狗)잔등을무사無事히달린다는것이여자로서과연果然가능可能할수있을까,

여자는발광發光하는파도波濤를본다.

발광發光하는파도波濤는여자에게백지白紙의화판花瓣을준다.

여자의피부皮膚는벗기고벗기인피부皮膚는선녀仙女의옷자락과같이바람에나부끼고있는참서늘한풍경風景이라는점點깨닫고사람들은고무와같은두손을들어입을박수拍手하게하는것이다.

이내몸은돌아온길손,잘래야잘곳이없어요.

여자는마침내낙태落胎한것이다. 트렁크속에는천千갈래만萬갈래로찢어진POUDRE VERTUEUSE가복제複製된것과함께가득채워져있다.

사태死胎도있다.

여자는고풍古風스러운지도地圖위를독모毒毛를살포撒布하면서불나비와같이날은다.

여자는이제는이미오백나한五百羅漢의불쌍한홀아비들에게는없을래야없을수없는유일唯一한아내인것이다.

여자는콧노래와같은ADIEU를지도地圖의에레베에순에다고告하고

No.1∼500의어느사찰寺刹인지향向하여걸음을재촉하는것이다.


                                                                                                                      1931.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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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녀狂女의 고백告白 원문  (0) 2015.11.22


開元占經 完解 개원점경 완해 1 - 1 - 1

 

 

開元占經  

 

                            唐瞿曇悉達撰唐書·藝文志載一百十卷

 

 

玉海唐志亦同又注雲:《國史志四卷崇文目三卷此本一百二十卷與諸書所載不符當屬後人分卷之異自一卷天占至一百十卷星圖均占天象自一百十一卷八穀占至一百二十卷龍魚蟲蛇占均占物異或一百十卷以前爲悉達原書

 

중국 당나라에서 활동하던 인도의 천문학자인 구담실달瞿曇悉達Gautama Siddhanta이 썼다.

구당서예문지舊唐書藝文志구당서 예문지에 110권이 실려 있다.

 

송나라 왕응린王應麟(1223-1206)이 쓴 천문.율력.음악등 27240류의 책玉海옥해역시

당서唐書를 인용한 것은 똑같다.

또 주석에 이르기를 송국사지宋國史志 4권 숭문목崇文目3권에 이 책은 120권이라 하니 여러 책마다 다르다.

후대인들이 그때마다 분류한 책의 권수가 다르다.

1天占천점에서 110星圖성도에 이르기까지 균점천상均占天象(천문학 좌표)

111팔곡점八穀占(자미원紫微垣별자리)에서

120용어충사점龍魚蟲蛇占(별자리 모양)”까지

균점물이均占物異(각기 다른 별자리 모양)이다.

 

? 110권 이전이 책을 구담실달의 원본이 아닐까?

그렇게 보아야당지唐志옥해玉海의 권수가 서로 맞아 떨어진다.

 

其後十卷後人以雜占增附之歟卷首標銜悉達曾官太史監事玉海開元六年詔瞿曇悉達譯九執曆則悉達之爲太史監當在開元初卷首又標奉敕撰而奉敕與成書年月皆無可考惟其中載曆代曆法止於唐麟德曆且雲李淳風見行麟德曆》。

그 후 10권은 후대인이 잡다한 것들을 끼워 넣은 것은 아닐까?

책의 서명에개원開元이라 표한 구담실달瞿曇悉達의 직함은 일찍이 태사감사太史監事였음을 고려할 때

옥해玉海에 보면 개원6(719)현종玄宗의 칙령을 받고 인도의 역법서구집력九執曆

(Navagraha)”을 번역해 올렸다.

즉 실달이 태사감이였든 당시 현종玄宗의 연호인개원開元初 712이 시작되는 때였다.

책의 서명에개원開元이라는 연호를 표한개원점경開元占經이라는 글을 올린 것이다.

이에 현종의 뜻을 받들어 글을 지어 올린 719년 때의 시점을 고려치 않고

오직 그중에 실려 있는 역대역법인 당고종高宗의 인덕麟德2(665)에 이순풍李淳風이 만든 태음력 인덕력麟德曆에 집착하고 있다.

또 이순풍李淳風의 인덕력麟德曆을시행했다고 말한다.

 

  考唐一行以開元九年奉詔創大衍曆》,以開元十六年頒之其時麟德曆遂不行此書仍雲見行麟德曆知其成於開元十六年以前矣所言占驗之法大抵術家之異學本不足存惟其中卷一百四一百五全載麟德九執二曆。《九執曆不載於唐志》,他書亦不過標撮大旨此書所載全法具著爲近世推步家所不及窺

玉海九執曆以開元二年二月朔爲曆首

今考此書明雲今起明慶二年丁巳歲二月一日以爲曆首亦足以訂玉海所傳之誤麟德曆雖載唐志》,而以此書較之多有異同若推入蝕限術月食所在辰術日月蝕分術諸類,《唐志俱未之載

보건데

당나라 승려 일행一行이 현종玄宗의 명에 따라 새로 편찬한개원대연력開元大衍曆729년에 사용되었다.

그 시기에는 인덕력麟德曆은 역법이 잘 맞지 않았는데 이 책에서는 후대에까지 인덕력麟德曆을 시행한 것으로 보고 있다.

그것이 이뤄진 것이 729년 전이었음을 알 수 있다.

(개원대연력開元大衍曆720년에 만들어 729년에 사용되었다.)

이 말은 점험지법占驗之法(역법의 좌표를 검증하는 방법)은 대체로 점술가의 또 다른 학문이다.

본문 내용에 부족한 부분이 있어 유일하게 그중 104.105권에 인덕력麟德曆과 구집력九執曆두역법을 모두를 올려놓았다.

구집력九執曆이 기록되지 않은 당지唐志와 다른 책 역시 두드러진 특징이 있는 주요 내용만을 취합해놓은 것에 불과하다.

이 책에 쓰여 있는바 모든 역법을 적어 놓은 것은 근세에 와서 천체의 운행을 관측한 사람들이 눈여겨 볼만한 내용은 없다.

옥해玉海에 기록된 구집력九執曆에는 開元二年二月(7352 ) 초하루 삭(양력 73522804:55)의 시점을 曆元역원으로 했다.

역시 바르게 할 만하므로 옥해玉海에 그 잘못을 알린 것이다.

 

인덕력麟德曆에는 비록 그 이름이 실려 있으나 당지唐志와 비교하면 일치하지 않은 곳이 많다.

대략 추가한 내용에 식을 계산하는 방법.

월식이 일어나는 별자리 좌표의 계산 방법.

일식 또는 월식 때 달이나 해의 이지러진 비율 계산 방법 등 당지唐志가 갖추지 못한 것들을 수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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開元占經개원점경은  (0) 2016.05.22

開元占經은단순히 점성술에 관한 책이 아니다.

고대 중국 천문학의 전체적인 모습을 종합적으로 보여주는 문헌이다.

당나라 현종713년 이전 잊혀진 수많은 천문서적들의 흔적이나마 찾아 기록해놓은 책이다.

당시 인도 사람 구담실달(瞿曇悉達)이 지었는데, 모두 120권이다.

 

開元占經개원점경

에 관한 책이라는 문자적 해석이 오해의 소지이다.

점치다의 뜻으로 해석하니 천문학자가 무당이 되고 과학이 巫術무술이 됐다.

 

= +

복 모두 점을 치다라는 뜻으로 해석한다.

그러나

천문 해자에서는

복은 날짜” “Day”라는 뜻이다.

丙寅月 乙丑卜= 병인월 을축일

 

따라서 = +

: 날짜를 말한다는 말아다.

이 말은 시간을 이야기 한다는 말이다.

즉 시간....날짜.... 역법을 다룬다는 말이다.

 

점자의 사전적 의미에

 

: 爾雅·釋言隱占也。《占者視兆以知吉凶也必先隱度故曰隱占也

著位也

隱占也: 은밀히 역법을 다룬다,

占者視兆以知吉凶也: 占者 점이란 예측해 보아서 나타나고 사라짐을 보는 것이다.

必先隱度: 틀림없이 앞에 은밀한 (적경과 적위의 천문度數) 度數도수가 있다.

故曰隱占也: 따라서 은밀히 역법을 다룬다,는 말이다.

: 별자리가 하늘에 떠오르다.

: 별자리가 땅 밑으로 숨다. 고문자 상형에서의 引伸인신이다.

 

 

 

開元占經은 고대 천문학의 바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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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ksss.or.kr/html/sub5_05.html

 

 

 

 

가상과학박물관  http://vsm.kisti.re.kr/

 

고천문              http://vsm.kisti.re.kr/astro/ancient/ancient_index.htm

간의                 http://vsm.kisti.re.kr/astro/ancient/obs_instrument/obs_position/ganui/1_2_ani1.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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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자줏빛인가.

紫北方閒色

北方閒色북방한색 북쪽 자방의 색을 자줏빛으로 정했다는 말이다.

무지개 일곱 색 중에 가장 어두워 보이는 색이 자줏빛이다.

 

 

 

  <!--[if !vml]--><!--[endif]--> 

 

 

고대인의 과학적 사고에서 기인한 색의 분류이다.

그들은 이미 가시광선의 굴절도를 파악했다.

빨주노초파남보 순서대로 굴절도가 높아진다.

사물을 볼 수 있는 것은 태양빛에 의해서다.

북쪽의 별을 볼 수 있는 것은 태양이 지구의 반대편에 있을 때 가장 밝게 빛난다.

이때는 지구를 중심으로 태양과 북극의 각이 180°가 된다.

23.5° 지축 기울기의 굴절각을 갖게 된다.

紫北方閒色북방한색을 이끌어낸 고대인의 사고이다.

 

자 자의 의미에 北方의 의미가 내재해 있다.

 

고문자 상형을 보자.

= +

차자의 고문자 상형은 등을 돌리고 있는 사람의 발을 그리고 있다.

발은 머무를 지 자이다.

발은 머무는 곳 위치를 나타내는 뜻을 가진다.

하늘 높이 등을 지고 있는 위치. 북극의 좌표를 말한다.

 

사자의 고문자 상형은 실타래를 의미한다.라고 이해하고 있다.

천문해자에서는 두 사물이 나란히 직선 선상에 있음을 표현한 상형으로 본다.

실을 양쪽에서 당기면 최상의 일직선 선분이 만들어진다.

즉 두 사물의 정중앙을 관통하는 직선상의 충의 현상이 고문자 상형에 그려있다.

행성과 행성이 일직선상에 머무름을 의미한다.

따라서 천문해자에서는 자의 의미를 직선상의 의미로 해석되는 것이다.

 

북극에 그어놓은 직선 선분 赤經적경을 그린다는 의미이다.

북극점의 방향

다시 말해 천문도상의 북극점에서내리는 수선의 의미이다.

= 천문도상의 北極點에서 내린 赤經적경 선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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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三垣삼원중에 紫微垣자미원이 가장 중심이 되는 공간으로 인식될 수 있으나 사실상 삼원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太微垣태미원이라고 할 수 있다.

조선시대 편찬된 天文類抄천문류초에서도 태미원을 먼저 설명하고 후에 자미원과 천시원을 설명하고 있다.

 

太微垣태미원 입구에 端門단문이라는 좌표가 있다.

실제 별자리가 아니고 상징적 좌표이다.

端門단문은 처녀별자리Virgo의 목 부분에 위치한다.

端門단문이라는 좌표는 조선 세종 때에 이순지가 저술한 천문류초(天文類秒)에 나타나는 별자리 좌표이다.

 

天文類抄 /上元太微垣 步天歌/

上元太微宮 昭昭列象布蒼空 端門只是門之中 左右執法

천문유초 상원태미원 보천가

상원 태미궁은 밝고 밝게 열을 지어 하늘에 펼쳐있다.

端門은 단지 문의 중심 자리이다. 좌우에 집법의 별자리가 있다.

 

중국 천문도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사마천의 天官書 천관서에도 端門에 대해서는 하나의 별자리처럼 기술되어 있고 어떤 설명도 없으나

天象列次分野圖천상열차분야도에는 분명 큰 별자리 점으로 표시해두고 단지 문의 중심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천문도상 上元太微垣상원태미원의 중심선상에 있다.

 

 

 

 

 

 

 

 

 

 

 

 

 

 

 

 

端門단문이라는 좌표를 표시해 두었을까?

끝 단: . , 한계限界. 처음, 시초始初. 실마리, 일의 단서端緖. 까닭,

댓님의 매듭과 같이 묶인 점을 단이라 한다.

시작과 끝의 정점

端門단문

천문에서의 端門단문은 천문을 시작하는 상징적 좌표임을 의미한다.

클 태자의 처음, 최초. 첫째,라는 사전적 의미와도 일치한다.

 

太微垣태미원

희미한 문자의 의미에서 최초 천문도를 그리고 별자리의 이름을 기록에 남긴 때를 거슬러 가보자.

端門단문이 시작과 끝의 정점으로 이용 되었을 만한 시기와 장소

BC 2333년 경 단군기원의 시점 when. who /

갑골문자판 출토지 은허의 하남성 안양현 소둔촌 / where

이때의 천문 현상과 문자내용을 통해

三垣삼원의 의미를 고찰한다.

 

BC 2333127일 오후 5:55:44 (음력 11일 설날 초저녁)

Position n 36° 06 e 114° 24  河南省安陽縣小屯하남성 안양현 소둔촌

태양 Rise: 7h 17m 49s ----------------- Set: 17h 18m 40s

 

설날 초저녁 태양이 산을 넘어 간지 약35분 후 天文薄明천문박명이 끝나고 별빛이 초롱초롱 빛난다.

이때 천문이 시작인 端門단문이 동북쪽 지평선에서 떠오른다.

시간이 흘러 자정이 지나서 처녀별자리가 남중했을 때

우리은하수의 북극점인 머리털별자리가 그 위에 떠있다.

 

 

 

 

 

 

 

 

 

 

 

 

 

 

 

 

 

 

 

 

 

 

 

정남쪽에 북극 -- 우리은하수의 북극점 -- 端門단문이 일직선으로 정열 한다.

 이 때가 太微태미의 의미를 상징하는 것이다.

太微태초: 태초의 은밀한 곳. 태초의 은밀한 좌표라는 문자적 의미이다.

태초의 은밀한 곳. 태초의 은밀한 좌표

우리은하수의 북극점을 이르는 말이다.

다시 말하면

고대 천문은 우리은하수의 북극점을 기점으로 한 고도의 천문을 구가했다는 말이기도 하다.

우리은하수의 북극점 = 머리털자리

서양의 머리털자리는 山海經산해경에서 보이는 刑天의 잘린 머리와 같다.

사천성에서 발굴된 진한시대(BC221~AD220)전각화는 그 천문의 의미가 함축된 그림이다.

 

우리은하수의 구조를 이해한 것은 불과 100년 전의 일이다.

 

그러나 우리의 선조들은 우리은하수의 구조가 두 판으로 이루어 졌다는 사실까지 이미 알고 있었으며 은하 축의 기울기 때문에 남쪽 아래쪽은 볼 수 없다는 것까지가 알고 있었다.

 

우리은하수 궤도를 최초 큰 원으로 그리는 太微태미와

북극을 중심으로 그리는 紫薇자미와

태양의 축 皇極황극을 큰 원으로 그리는 天市천시

 

太微. 紫薇. 天市.태미.자미.천시의 三垣삼원을 좌표의 기본으로 고도의 천문을 한 것이다.

이것이 산해경의 기록이다.

 

 

                                    -계속 적업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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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보 1926∼1956
1926 강원도 인제 출생
1944 황해도 재령 명신중학교 졸업. 관립 평양의학전문학교 3년제 입학
1945 광복 후 학교를 중단하고 상경. 종로 3가 2번지 낙원동 입구에 서점 마리서사를 개업
1946 12월, <국제신보>에 [거리]라는 작품을 발표하여 시인으로 데뷔
1948 입춘을 전후하여 마리서사를 폐업. 김 경린, 양 병식, 김 수영, 임 호권, 김 병욱 등과동인지 <신시론> 제1집을 발간. 자유신문사에 입사
1949 김 경린, 김 수영, 임 호권, 양 병식 등과 5인 합동시집 {새로운 都市와 市民들의 合唱} 발간. 경향신문사에 입사. 동인 그룹 <후반기> 발족
1951 경향신문사 본사가 있는 부산과 대구를 왕래 종군 기자로 활동
1952 경향신문사를 그만두고 대한해운공사에 취직
1953 환도 직전. 부산에서 <후반기>의 해산이 결정됨
1955 화물선 남해호의 사무장으로 미국을 여행. 귀국 후 <조선일보>에 [19일간의 아메리카]를 기고. 대한해운공사 퇴사. {박인환 선시집} 간행
1956 심장마비로 자택에서 사망
1986 시집 {木馬와 淑女} 간행

  강원도 인제 출생. 경성제일고보를 거쳐 평양의전 중퇴(1945). 1946년 『국제신보』에 「거리」를 발표하면서 등단. 1959년 5인 합동시집 『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을 발간하여 본격적인 모더니즘의 기수로 각광을 받았다. 1940년대의 모더니스트로 알려진 이들의 모더니즘 운동은 김기림이 제창한 반자연(反自然), 반서정(反抒情)의 기치에 1940년대 후반의 시대고(苦)가 덧붙여진 것으로 확대되었다. 『후반기』 동인으로 모더니즘 운동을 계속하면서도 도시적인 동시에 인생파적인 비애를 그려내고 있다는 점이 기타 동인의 시와는 다르다고 할 수 있다.
시집으로는 『박인환선시집』(산호장, 1955), 『목마와 숙녀』(근역서재, 1982)

             박인환의 시세계에 대하여

                                     - 이동하 (문학평론가/서울시립대 교수 )

  한국의 근대 시사 가운데서 1945년의 해방으로부터 1960년의 4.19에까지 이르는 시기의 시는 가장 덜 알려지고, 가장 덜 논의된 부분에 속한다. 그 이전의 시, 즉 20년대에 나온 시나 30년대에 나온 시들은 학계와 비평계 양쪽에서 거듭거듭 다루어졌고, 그 시대를 대표하는 시인들의 작품을 모은 앤솔러지도 심심찮게 발간되었기 때문에, 그 시대의 시인들은 전문적인 연구자들에게나 일반 독자들에게나 똑같이 친숙한 존재가 되어 있다. 그리고 4.19 이후의 시들 역시, 전문적인 연구자들에게나 일반 독자들에게나 똑같이 친숙한 존재가 되어 있다는 점에서는, 20년대 혹은 30년대의 시와 다를 바 없다. 이 시기의 시들은 아직 학술적인 연구의 대상으로는 좀처럼 등장하지 않고 있지만, 비평계의 조명을 집중적으로 받아왔다는 점, 그리고 신작시집이나 시선집의 형태로 일반 독자들에게 거듭거듭 소개되어왔다는 점으로 해서, 별다른 어려움 없이 <친숙한 존재>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이에 비하면. 해방에서 4.19에까지 이르는 시기의 시는 사정이 크게 다르다. 해방 이전에 이미 등단했던 시인들과 김수영, 김 춘수, 신 동엽 등 몇몇 <스타 시인>의 경우를 제외하고 보면, 이 시기의 시들은 전문적인 연구자들에 의해서나 일반 대중에 의해서나 거의 외면되어 오다시피 했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 그 결과 이 시기의 많은 시와 시인들에 대해서는 별다른 객관적 근거를 갖추지 못한 풍문들만이 막연하게 흘러 다니는 사태가 빚어지게 되었다.

  왜 이 모양이 되고 말았을까. 이 물음에 대한 답은 대략 세 가지로 나누어서 정리해볼 수 있을 듯하다.

  첫째, 해방에서 4.19에 이르는 시기 자체가 현재의 시점에서 보면 다소 모호한 위치에 놓인다는 사실을 들 수 있다. 보수적인 학계의 시각에서 보면, 이 시기는 현재의 시점으로부터 너무 가깝기 때문에 학술적인 연구의 대상으로 삼기에는 부적당하다는 결론이 내려진다. 그런가 하면, 비평계나 일반 독자층의 시각으로 볼 때는, 이 시기는 현재의 시점으로부터 너무 멀기 때문에 동시대적인 관심의 대상으로 삼기에는 부적당하다는 결론이 내려지는 것이다. 너무 가깝다는 이유로 외면당하고, 또 너무 멀다는 이유로 외면당하는 역설적인 상황 속에 이 시대의 시는 놓여 있는 셈이다.

  둘째, 해방 이전에 이미 등단했던 시인들이나 해방 이후에 등단했다 하더라도 예외적인 위치에 도달하는 데 성공했던 몇몇 시인들(여기에는 앞서 이름을 들었던 김 수영, 김 춘수, 신 동엽뿐 아니라 그 밖에도 몇 명이 더 추가되어야 마땅하다)의 경우를 제외하고 보면, 이 시기에 나온 시작품들은 오늘날의 전문적 연구자나 일반 독자를 끌어당길 만한 매력을 결여하고 있는 게 일반적이라는 점을 부정할 수 없다. 이렇게 된 이유는 물론 하필 그 시대에 재주 없는 사람들이 시단으로 많이 몰렸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다. 그 시대에 활동한 시인들 가운데 상당수가 일본어로 교육을 받고 자라난 까닭에 우리말을 다루는 데는 지극히 서투를 수밖에 없었다는 점, 그리고 대체로 성년의 문턱으로 접어들거나 청년기를 끝내갈 무렵에 4.19의 대지진을 만나 심각한 혼란을 경험하게 되었다는 점, 이 두 가지가 바로 진정한 이유인 것이다.

  셋째, 아무리 위에서 말한 시기상의 모호성과 이 시대 시 자체의 매력 없음을 강조한다 하더라도 역시 완전히 빼놓을 수는 없는 또 한 가지 원인으로서, 우리 시대 비평가들의 지나친 편식증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사실 엄밀히 따져보면 지금까지 언급한 두 가지 이유란 학계와 일반 독자층을 위한 변명으로는 성립이 가능한 것이지만 비평계를 위한 변명으로는 성립이 불가능한 것이다. 얼핏 보기에 동시대적인 관심을 촉발하지 않더라도, 또 별다른 매력이 없는 것처럼 여겨지더라도 일단은 성실하게, 폭넓게 읽고서 올바른 자리매김을 시도하는 것이 비평가의 직분이 아닌가.

  그렇다면 이 시기에 활동한 시인들 중 해방 전에 등단한 사람들과 김 수영, 김 춘수, 신 동엽 등 소수만을 주목하고 나머지는 내몰라라 방치해온 대다수 비평가들의 자세는 결코 정당한 것이었다고 할 수 없다. 지금까지 나는 해방에서부터 4.19까지에 이르는 시기의 우리 시가 다른 시기의 우리 시에 비할 때 상대적으로 적은 관심밖에 모아오지 못했으며, 그 결과 별다른 객관적 근거를 갖추지 못한 풍문들만이 막연하게 부유하는 사태가 현출되었음을 말하고 그렇게 된 이유를 내 나름대로 분석해본 셈이거니와, 박 인환(1926-56)은 지금까지 내가 해온 이야기를 전형적으로 예증해주는 인물 가운데 하나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점에서 그와 같은 판단이 가능하다.

  첫째, 박 인환이 시작 활동을 전개한 시기는 [거리]라는 작품을 {국제신보}에 발표하여 데뷔한 1946년 12월부터 [죽은 아포롱]을 발표한 1956년 3월까지에 걸쳐 있으며, [죽은 아포롱]이 발표된 지 3일 후에는 그 자신이 세상을 떠난 것으로 기록되어 있거니와, 이로써 볼 때 그의 시적 생애 전체가 해방에서 4.19까지에 이르는 시기 안에 포함됨을 알 수 있다.즉, 그는 이 시기를 떠나서는 전혀 논의될 수 없는 존재인 것이다.

  둘째, 그의 시세계에 대한 본격적 접근이 지금껏 전혀 행해지지 않았던 것은 아니지만, 그 수는 매우 적다. 특히 일관된 프로그램에 근거하여 다수의 시인론을 기획, 청탁, 수록한 논문집 혹은 평론집이 만들어지는 바람에 덩달아 언급되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던 경우를 제외하고 순전히 그에 대한 연구자 자신의 자발적 관심에 기초하여 논문이나 평론이 씌어진 경우는 극히 희소하다.

  셋째, 그의 시세계에 대한 본격적 접근이 이처럼 희소한 것과는 대조적으로 그에 대한 가십 차원의 풍문은 대단히 풍부하고 또 화려한 편이다. 박 인환은 아마 이 점에 있어서는 1950년대의 많은 시인들 가운데서도 1.2위를 다투는 존재일 것이다. 마리서사 시절의 낭만과 관련된 풍문들, 후반기 동인회를 둘러싼 얘기들, 환도 후 감상적 실존주의와 폐허의식의 물결에 휩싸인 명동을 누비고 다닌 이른바 명동백작 시절의 에피소드들, 박 인환이 시를 쓰고 이진섭이 곡을 붙인 작품 [세월이 가면]에 얽힌 얘기들, 영화광으로서의 면모를 보여주는 얘기들, 그리고 그의 불행한 요절에 관련된 얘기들, 이런 풍문 차원의 얘기들이 그를 빽빽하게 둘러싸고 있어 정작 그의 시작품 자체는 거의 보이지 않을 지경인 것이다.

  넷째, 그가 남긴 시작품들 가운데 대부분에는 오늘날의 전문적 연구자나 일반 독자를 끌어당길 만한 매력이 갖추어져 있지 않다. 여기서 내가 <전부>라 하지 않고 <대부분>이라한 것은, 예컨대 [木馬와 淑女] 같은 예외적 존재가 있음을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木馬와 淑女]는 전문적 연구자들의 경우에는 평가가 엇갈리고 있는 작품이지만, 일반 독자들로부터는 의심할 바 없이 대단한 인기를 누리고 있는 작품이다. 그러나 이런 작품은 위에서도 말한 것처럼 어디까지나 예외적인 존재이다. [木馬와 淑女]나 이진섭에 의해 작곡되어 널리 불리고 있는 [세월이 가면] 정도를 제외하면, 박 인환의 시 가운데서 대중의 폭넓은 사랑을 받고 있는 작품은 거의 없다.

  다섯째, 박 인환이 이처럼 상당히 한정된 수준의 성과밖에 남기지 못한 데에는 여러 가지 요인이 있겠지만, 그 중 일부로서 우리는 그가 일본어로 교육을 받고 자라난 세대에 속하며 또한 청년기에 4.19를 겪고 깊은 정신적 상처를 입은 세대에 속한다는 사실을 들지 않을 수 없다. 우선 그가 일본어로 교육받은 세대에 속한다는 사실은 그가 살아 있는 우리말을 다루는 데 서툴렀다는 사실과 직결되는데, 이것은 사실 시인으로서는 커다란 불행이었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또한 그가 청년기에 4.19를 겪고 깊은 정신적 상처를 입은 세대에 속한다는 사실은 그가 세계를 침착하게, 깊이 있게 이해하고자 애쓰는 태도를 갖추지 못하고 추상적인 울분과 센티멘털리즘으로 시종했다는 사실과 직결되는데, 이것 역시 시인으로서는 커다란 불행이었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이상에서 정리한 다섯 가지 항목을 잘 음미해보면, 박 인환이야말로 해방에서 4.19까지의 시기에 이루어진 우리 시의 전개과정에서 나름대로 하나의 전형성에 도달한 인물이라는 사실을 새삼 확인할 수 있으리라. 물론 앞으로 이 시기의 우리 시에 대한 본격적 연구가 꾸준히 이루어질 경우, 어쩌면 이 시기의 우리 시에 대한 지금까지의 일반적 인식을 근본적으로 바꿔야 할 날이 올지도 모르며, 그때에는 지금 내가 박인환에게 붙인 전형성의 패찰을 도로 떼어야 하게 될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현재의 시점에 있어서는 위와 같은 결론이 가능한 것이다.
                                          출처: 남상학의 시솔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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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인택                

 
성격 친일반민족행위자
출신지 서울
성별
저서(작품) 나그네 두 사람, 촉루, 준동, 검은 흙과 흰 얼굴, 구역지
대표관직(경력) 매일신보 기자

정의

1909~1953. 언론인·기자·친일반민족행위자.

생애 및 활동사항

1909년 서울에서 출생했다. 『매일신보』 주필을 지낸 정운복의 아들이다. 1922년 3월 수하동공립보통학교를 졸업, 4월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에 입학, 1927년 졸업했다. 1928년 4월 경성제국대학 예과 문과에 입학했으나 중퇴했다. 박태원()·윤태영()·이상() 등과 가깝게 지냈다. 이상의 단편소설 「환시기()」에서 ‘송군’이 실제 정인택이라는 주장도 있다. 이상이 경영하던 카페 ‘쓰루()’의 여급 권순옥()을 사랑한 나머지 자살을 기도하기도 했다. 『매일신보』와 『문장사』 등에서 기자를 역임했다. 1930년 『매일신보』에 「나그네 두 사람」을 발표하면서 문단에 데뷔했으나, 1935년『중앙()』에 단편소설 「촉루」를 발표한 이후부터 왕성하게 창작 활동을 펼쳤다. 「촉루」 이후의 소설로 그의 대표적인 소설은 「준동()」· 「연연기()」· 「우울증()」· 「착한 사람들」· 「부상관(?)의 봄」· 「검은 흙과 흰 얼굴」· 「구역지()」 등이다.

1930년대 소설은 다양한 서술 양상을 보여준다. 정인택은 주로 인간의 내면세계를 다루는 소설을 썼다. 그래서 그의 작품은 심리소설로 분류된다. 과잉된 의식세계와 생의 무기력성이 그려지고 있거나 신변적인 일상과 애정이 내부 촛점화로 기술되고 있다. 그리고 「검은 흙과 흰 얼굴」 등은 일본 제국주의자들의 식민정책의 이념을 허구에 반영하고 있는, 이른바 친일 문학으로 비판되기도 한다. 또한 「색상자()」·「해변」 등도 친일적 색채가 매우 농후한 소설이라 지적되고 있다. 그의 소설 내용과 그의 문단 활동 및 교우 관계로 볼 때 사회주의적인 의식이 뚜렷한 작가는 아니었다. 그럼에도 한국전쟁 때 월북한 탓으로 ‘월북작가’라는 낙인이 찍혀 우리 문학 연구의 담론에서 외면되어 왔다. 그의 전 작품이 해금된 이상 그의 소설의 기법상의 가치를 중심으로 새롭게 평가되어야 한다. 작가의 소설집으로 1948년 금룡도서()에서 출판한 『연연기()』가 있으며, 그 외에 평론으로 「불쌍한 이상()-요절()한 그들의 면영()」·「작중인물()의 진실성()」 등이 있다.

정인택의 이상과 같은 활동은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 제2조 제11·13·17호에 해당하는 친일반민족행위로 규정되어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 보고서』 Ⅳ-16: 친일반민족행위자 결정이유서(pp.358∼405)에 관련 행적이 상세하게 채록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정인택 [鄭人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주변부로 밀려난 인물이 점차 사물화되는 과정 속에서도 생존욕과 오기로 견뎌내려는 내면풍경을 밀도 높은 심리 추적을 통해 그려내는 것이 정인택의 특징이다.
출생 - 사망 1909. 9. 12. ~ 미상
출생지 국내 서울특별시
데뷔 1936. 중앙에 「촉루」로 등단

1909년 9월 12일 서울 태생. 『매일신보』와 『문장』 기자를 역임했다.

일제 말기에는 조선문인보국회에 관여하기도 했으며, 이 때문에 광복 후에는 별다른 활동을 하지 못하다가 한국전쟁 중에 월북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1936년 『중앙』에 「촉루」를 발표하며 등단하였다. 초기작품인 「촉루」(1936), 「미로」(1939), 「여수」(1941) 연작이 그의 대표작이다.

이 연작의 주인공은 일본의 어느 전문대학을 중퇴한 조선의 한 지식 청년이다. 그는 무기력하고, 어느 곳에서도 용납되지 않는 주변인이다. 이처럼 주변부로 밀려난 인물이 점차 사물화되는 과정 속에서도 생존욕과 오기로 견뎌내려는 내면풍경을 밀도 높은 심리 추적을 통해 그려내는 것이 정인택의 특징이다. 창작집 『청량리계외』(1945)와 『연련기』(1948)를 발간했다.

경력사항

  • 매일신보 기자
  • 문장 기자
  • 조선문인보국회 활동

작품목록

  • 나그네 두 사람
  • 불효자식
  • 시계
  • 눈보라
  • 촉루
  • 감정의 정리
  • 준동
  • 못다 핀 꽃
  • 상극
  • 동요
  • 미로
  • 계절
  • 범가족
  • 연연기
  • 천사하강
  • 혼선
  • 업고
  • 헛되인 우상
  • 우울증
  • 착한 사람들
  • 여수
  • 단장
  • 말상관의 봄
  • 구역지
  • 봉선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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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네이버 지식백과] 정인택 [鄭人澤] (한국현대문학대사전, 2004. 2.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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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인택鄭人澤  (0) 2017.06.08


그림을 크릭해서 글 옆에 놓고 음미하세요!



하늘의 三垣

 

太微垣  紫微垣  天市垣

三垣의 이해에 앞서   

垣원자의 천문적 의미부터 음미하자.


垣담 원: 담, 담장(-牆) . 울타리 . 관아(官衙) . 별자리, 별 이름. (담을)두르다, 에워싸다.
垣원자 의 상형과 고문자를 보면
垣원 = 土 + 二 + 日
二의 상형은 하늘과 땅의 의미이다.
土토 지구 땅에서 二 하늘과 땅 사이에 日해를 가두어 놓았다.
땅에서 하늘과 땅 사이의 태양을 인간이 가두어 놓을 수 있을까?

가능하다.
 
 
 
 
 
 
 


천문도가 그것이다.

그림1의 우측의 작업 내용을 상형화 한 것이다.
사마천의 사기 [귀책열전]에 자세히 표현해놓았다.

천문의 가장 기초가 되는 것은  북극점을 찾는 작업이다.

정확한 북극점을 찿은 연후 모든 별자리를 그린 것이 천문도다.

넓다란 광목천 위에 둥근 원을 그리고 하늘의 뭍 별들의 위치를 표시한다.

하늘의 별들은 둥근 원 안에 가둬두는 작업이다.

 


垣원 의 천문적 의미는  천문도에 등근 원으로 적위 값을 표시하고 해가 가는 길  黃道황도를 그려놓은 모양이다.
이 적위를 기반으로 뭍 별들의 좌표를 그려 넣은 것이 천문도다.
垣원 = 울타리. 두르다, 에워싸다.의 의미는
별자리를 에워싼 별자리의 울타리이라는 말이다.


桓檀환단이라는 자형에서도 같은 모양이 보인다.
桓환은 규표의 해그림자 높낮이로 천문도를 그린 인류최초의 기초천문학의 의미인 반면
檀단은 혼천의를 개발해 더욱 발전된 천문을 시행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상형이다.
이 고대 천문은 天子만이 할 수 있는 학문이요. 天符천부란 곧 桓檀환단이다.
단군은 桓檀환단으로 나라를 세운 것이다.


모든사건의 정확한 사실을 알기위해서는 何原則 하원칙 

 

when   where   who      what   how

언제      어디서    누가   무었을   어떻게 했는지

why
왜 그랬는지 알아야 정확한 사실 논증이 된다.

三垣의 의미를 何原則하원칙으로 접근해 보자.




                                                 -작업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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鳥瞰圖조감도 / LE URINE3 중에서  -李箱이상 1931-


1934년 이상은 조선중앙일보 신문에 15편의 시를 썻다.

그런데 당시 독자들은 이시를 이해하지 못하고
"미친놈의 잠꼬대냐?", "그게 무슨 시란 말인가", "당장 집어치워라",

                          "그 이상이란 자를 죽여야 해!"  등 독자들의 비난 투서가 빗발쳐서

                         30편중 15편에서 연재를 중단하기에 이르렀다.



                         그만큼 난해하면서 기존의 시에 대한 고정관념을 무너뜨린 작품이다. 라고 전해 온다.

                          그러나 
                          시인 이상의 작품은 고정관념을 깨뜨린 적도 없고 난해하지도 않았다.


                           그들의 문약을 감추려는 말장난일 뿐이다













전도유망한  젊은 문학도가  왜 하필이면 자위행위를 하는 시를 써야만 했을까?


여기서 자위행위란 

일제 침략자들이 조선 8도를 딸딸이를 타고 오르락 내리락 거리면서 수탈의 쾌감을 느끼는 것을 풍자한 것이다.

이상은 건축학도로써  지도에 관한 글을 많이썼다.

대륙의 지도를 놓고 보면  한반도는 남성의 음경으로 본 것이며


만주와 몽고를 음낭으로 비유한다.


일제는 딸딸이를 타고 한반도를 흔들어대면 뭔가 나온다는 것에 재미 부쳤다.


만주를 집어삼키는데  조선사람을 이용하는 것이다.

조선사람을 아용하고 유린하는 것을 비유한  것이 곧 자위행위이다.


지도상 한반도를 고추로 본  시인 이상!









                                      LE URINE 오줌  해설 3    李箱 조선과 건축, 1931.8월




갈색은 한글번역 /      청색 일문원문/       흑색은 해설                  



오오 춤 추려무나 일요일의 비너스여,                              オオれよ、日曜日のビイナスよ

목쉰 소리 나마 노래 부르려무나                                     しはがれたのまゝえよ

일요일의비너스여.                                                       日曜日のビイナスよ



   오줌을 누며 마지막 마무리를 하는 중이다.

   남아 있는 오줌이 졸졸 요도 끝으로  몰려들어 결국은 


   찔끔 찔금.. 제차 삼차 발사 마무리 중이다


오오 고추여 씰룩씰룩 힘을주어  까딱 까딱 춤을 추려무나.

아내가 맨스 중인 외로운 고추 비너스여

찔금 찔금  "쪼로록, 쪼록" 마지막 마무리 소리나마. 뱉어 내거라.

아내가 맨스 중인 외로운 비너스여

(아내가 월경중이니 아름다운 고추는 일요일을 맞이했다.)


그 평화로운 식당 문가에는                                             その平和食堂ドアアには

백색 투명한 월경 이라는 문패가 붙어서                            白色透明なるMenstruation表札がくついて

한정 없는 전화를 피로하여 침대위에 놓고                         ない電話疲労してLIT

다시 적백색 여송연을 그냥 물고 있는데.                           亦白色巻煙草をそのまゝくはへているが


(참았던 소변을 마치고나면 얼마나 시원하고 상쾌한지 어깨까지 투루룩 털린다아 이런 평화로움이!)

평화로운 식당 문 같은 요도의 끝 귀두에는

백색 투명한 한 방울의 오줌이 매달려 MEMSTRUATION月經월경이라는 문패처럼 붙어있다. (멘스 때는 출입금지)

시도 때도 없는 전화와 같은 성행위는 피곤하니

그냥 침상위에 전화기를 내려놓은 것처럼

색스에 관한 생각은 하지 않으려고
그냥  뽀하얀 고추를  손가락 사이에 끼고 담배 재 털 듯 탈탈 털고 있는데.

(생각을 않으려 할수록 자꾸 커져만 간다.) 










                                                                                                    만주고구마



마리아여, 마리아여,                                                  マリアよマリアよ

피부는 새까만 마리아여,                                            皮膚真黒いマリアよ

어디로 갔느냐,                                                         どこへつたのか


포경수술하지 않은 아름다운 꼬추 덮개 마리아여!

돌돌 말리고, 말린 새까만 귀두 덮게

말려있는 음경 거풀 마리아여!

어디로갔느냐?   



                                                                                            (홀라당 까졌구나.)


욕실 수도 코크에선                                                  浴室水道コツクからは

열탕이 서서히 흘러나오고 있는데                               熱湯徐々ているが

가서 얼른 어젯밤을 틀어막으렴,                                 つて昨夜


수도꼭지가 뜨거워지고 서서히 물이 흘러나오듯 고추에 열이 오르고 끈적끈적한 무엇이 살짝 배어 나온다







얼른 어제 밤 색스 장면의 기억을 지워버리렴......





나는 밥을 먹고 싶지 않으니                                           はゴハンがべたくないから

미끄러지는 힘은 축음기위에 얹어놓아 주렴                      スリツパアを蓄音器いてくれよ


나는 자위를 하고 싶지 않으니

slip power 미끄러지는 힘은 축음기 위에나 올려놓으려무나.

(축음기의 head해드가 점점 돌아 들어가 좁혀지듯이 고추도 저절로 줄어들어 마리아의 검은 피부가 덮이도록 해다오!)



무수한 비가 무수한 추녀 끝을                                         数知れぬ数知れぬヒサシを

두드리고 두드리는 것이다.                                             つのである


투닥 투닥 추녀 끝의 빗소리에 마음의 동요가 인다.

무수한 생각의 변화가 싱숭생숭 일어난다.  (커진 고추 때문에)


분명 팔목과 팔꿈치가 똑같이 힘든 건 틀림없는데               キツト上膊下膊との共同疲労ひない

식어빠진 점심을 먹어볼까                                               つた中食をとつてるか

먹어본다.                                                                    


분명 팔뚝과  팔목이 똑같이 힘든 일이기에

틀림없이 영양가 없이 식어 빠진 점심과 같은 것인데...

식어 빠진 점심과 같은 대낮 자위를 해볼까?







 으  흐 므          ............


.............................................................









**   평화로운 식당  ***  ?


평화로운 식당이라 했다.


 평화로운 식당에서 파는 전문 메뉴는 무었일가?

색근녀가 좋아하는 "정자".

저 식당 문을  열고 들어가면 고환 이라는 두 방에는 수 십억 개의 정자가 준비되 있다.      


투명한 소스처럼 밤꽃향과 해파리 냄새를 풍긴다.

어떤 쌕근녀는  생콩나물 냄새같다고도 하더라.                        


일본 순사는 이 글을 읽자마자 일찍 퇴근 했다.    Come and lay down by my side




1931년





lit:                                           침대잠자리

スリツパア 스립퍼어 slip power:  미끄러지는 힘 (신고 다니는 슬리퍼가 아니다)

menstruation:                           월경주기, 월경




                   -  다음  광녀의 고백 바로가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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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 URINE - 오줌 / 일본어 번역본   (0) 2017.10.21


干支了解      간지요해 수정본을 올리며

본인은 구약성서 창세기 1장 1절 -14절 까지의 내용 속에서 고대인의 우주관을 보았다.
물론 종교적 접근이 아닌
문자 언어적 진실 탐구의 접근이다.
구약성서 창세기에는 두 개의 빛이 존재한다.
두 개의 태양이 존재 했다는 내용으로 성서 불신 비판론자들의 다툼은 2000년간 계속돼왔다.
많은 사람들이 첫째 날에 빛을 창조하신 것과 넷째 날에 태양을 창조하신 것에 대하여

의문을 제기하거나 창조론을 비판하는데 사용한다.

아직까지도 성경을 제대로 해석하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이다.
하느님의 빛과 인간의 빛은 그 개념이 다르다.

성경 창세기 속에서 말하는 최초의 빛은 인간이 볼 수 있는 빛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하느님만이 볼 수 있는 빛이다.

창조주의 시야에 마저도 어둠만이 있다면 창조주 또한 아무것도 볼 수 없는 것은 당연하다.

최초 창조주만이 볼 수 있는 빛은 空間공간개념을 이르는 말이다.

빛은 공간이 존재하지 않고는 발현되지 않는다.

그 공간 개념이 신의 빛인 것이다.

성경 창세기를 해석함에 있어 인간의 시야와 창조주의 시야를 동등한 차원에서 이해하려는 오해에서 빗어진 실수이다.

하느님에 있어서 공간을 낮이라 하고

하느님에 있어서 시간을 밤이라 한 것이다.

하느님의 낮과 밤, 시간과 공간을 바탕으로 만물창조를 시작한 것이다.

이것이 첫 째 날의 이야기다.
    

인간이 이해하지 못하는 하느님만의 빛

하느님의 빛과 어둠은 하느님의 의지가 삼라만상 속에 내재해 있음을 客體表象객체표상하기 위한 주관적 필수요소이다. 

이 하느님의 빛이 인간에 있어서는 空間공간으로 인식되는 것이며

하느님의 어두움은 인간에 있어서는 時間시간개념이 되는 것이다.

시간과 공간은 마치 풍선 속의 공기처럼  한몸이며 서로 靜力學statics을 유지한다.  

아직 인간존재 자체가 출현하기 이전의 빛과 어둠이기 때문이다.

그 이유를 설명하자면

태초에 빛이 생긴 첫째 날의 주체는 오직 하느님뿐이었음을 상기하시기 바란다.

이 공간과 시간의 개념을 도입해 놓으신 후 뭍 생명들을 위해

드디어

넷째 날에 태양을 만드셨다. 창세기 1:19

인간이 빛으로 인식할 수 있는 것은 이 태양 빛 뿐이다.

인간이 등장한 것은

 여섯째 날이다.  창세기 1:27


하느님의 언어로 빛과 어둠이 인간에게는 空間과 時間槪念으로 인지되는바

하느님의 빛과 어둠은 언제 어디서나 내 안에 거하시는 전능하심이다.

 

이 논쟁의 해답이 하나님이 주체가 된 빛과 어둠은 인간에 있어서는 공간과 시간의 개념으로 발현된다는 사실이니 비판자들이여

이글을 읽고

더 이상 창세기를 욕되게 하지 말지어다.

또한

하느님의 보기 좋은 빛은 공간이다.

그러므로 하느님은 모든 공간을 투시한다는 말이다.

계란 속의  노른자까지 일목에 들여다 보는 전지전능............

인간의 마음 속도 다 들여다 본다.

나 자신을 속이는 양심까지도 다 들여다 보고 계시다.



0000000000000         -             000000000000



이 내용의 해석은

干支了解 간지요해 = 10干12地支의 문자적 해석중 발견한 사실이다.

왜?

하늘이 땅보다 큰데

12干110地支가 아니고  10干12地支이 되었을까.

이 의문 부터 풀어보자.  

                                          -  작업중  -



 

창세기 1:1 ;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창세기 1:2 ;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 행하시니라

창세기 1:3 ;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창세기 1:4 ; 빛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빛과 어둠을 나누사

창세기 1:5 : 하나님이 빛을 낮이라 부르시고 어둠을 밤이라 부르시니라 저녁이 되고 아침 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

창세기 1:6: 하나님이 이르시되 물 가운데에 궁창이 있어 물과 물로 나뉘라 하시고

창세기 1:7 : 하나님이 궁창을 만드사 궁창 아래의 물과 궁창 위의 물로 나뉘게 하시니 그 대로 되니라.

창세기 1:8 : 하나님이 궁창을 하늘이라 부르시니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둘째 날 이니라.

창세기 1:9 : 하나님이 이르시되 천하의 물이 한 곳으로 모이고 뭍이 드러나라 하시니 그대 로 되니라.

창세기 1:10 : 하나님이 뭍을 땅이라 부르시고 모인 물을 바다라 부르시니 하나님이 보시기 에 좋았더라.

창세기 1:11 : 하나님이 가라사대 땅은 풀과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과목을 내라하시매 그대로 되어

창세기 1:12 : 땅이 풀과 각기 종류대로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를 내니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

창세기 1:13 :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세째 날이니라.

창세기 1:14 : 하나님이 가라사대 하늘의 궁창에 광명이 있어 주야를 나뉘게 하라 또 그 광 명으로 하여 징조와 사시와 일자와 연한이 이루라

창세기 1:15 : 또 광명체들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을 비추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창세기 1:19 :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넷째 날이니라.

창세기 1:27 :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창세기 1:31 :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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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천문 지리 역사 연구의 나아갈 바
       

 


 http://www.bbc.com/news/blogs-trending-36259047
 

 
 
우리가 궁구하는 것이 바로 이것 아닌가?
 
동양의 고대 천문과 역사 지리도 하나다.
 
山海經산해경이
천문과 지리 역사 天地人의 이야기를 하나로 묶에낸 기록물이다라는 것이 꽃신의 주장이다.
 
우리도 함께 찾아나서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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桓檀환단



桓환


무환자나무 잘라서 커다란 푯대 세운다.
역ᄎᆞᆷ의 표시로 세워둔 푯말
오리마다 세웠다는 솟대
부처님 위엄을 표시한 당간지주
쌍쌍이 나란히 세운 부상나무

새벽까지 머뭇거리던 태양이 꼭대기까지 솟아올라
그림자 드리우고 빙빙 돌아 나간다.
용맹스런 顓頊전욱이 桓자 속의 날日자를 뚫어져라 쳐다본다.
해그림자 높낮이로 달력을 만드누나.







檀단



박달나무 가지 휘어서 굴렁쇠를 만들고
단항목 잘게 갈라 씨줄날줄 엮어놓고
밤하늘별에 맞춰 뱅글뱅글 돌려본다.
북극 향해 기울인 축軸은 共工공공의 功공 이려니!
봄여름가을겨울 節氣절기 바로 잡아
만민에 베푼 은혜
天符印천부인에 들었으니
Dana Dana檀那단아檀那단아 모여들어
檀郞 檀郞 檀郞 檀君 단랑 단랑 단랑 단군
檀君 檀君 단군 단군 檀郞 단랑 檀君 단군
우리 주인.  우리 주인 합장하고 칭송한다.   

단랑단군 우리 단군
나라를 세우다!



                           





                                                       -끝-


2. 天符印천부인의 천문적 의미

3. 천부天符 의 천문적 의미


알아보기

西王母

黃帝

蚩尤                 -작업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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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次角 삼차각

 

電氣전기의 運動운동 electromotive force 起電力을 설명하는데 필요한 세 방향각,

 

플레밍의 왼손법칙

 

이것이 三次角삼차각이다.

 

 

 

시인 이상

청소년기에는 소파 방정환과 단재 신채호 선생의 영향을 받아 지독한 國粹主義者국수주의자를 넘어서서

나 홀로 土着主義토착주의에 빠져있었다.

 

그는 21세의 나이에 총독부에 근무하면서 고급 정보를 입수하였고

필사적 多讀다독으로 세계정세를 꿰뚫어 보고 있었다.

 

조국의 독립과 민족의 번영에는 새롭고 막강한 힘이 필요했다.

그는 한마디로 외친다.

조국의 독립은 원자탄만이 해답이며

민족의 번영은 과학의 실천뿐이라고...

 

그러기에 독립운동이니 민족계몽 운동이니 여성해방이니하며 어물쩡거리는 패거리들이 하는 짓거리가 시답잖게 보여서

그들에게 이상 특유의 독설을 퍼붓는다.

 

모두가 쓰레기들 뿐이라고 일갈한다.

 

어정쩡한 지식인의 행동을 보면 그의 마당에 먹물 침을 뱄고

비뚤어진 주장을 하면 당장 고추를 흔들어 잡지 갈피 속에 유백색 물총을 갈기는가하면 유

명세를 타고 겁 없이 날뛰며 세상을 어지럽게 하는 신여성의 광기에는 “포주확인서” 한 편을 獻詩헌시한다.

 

그리하여 그는 외톨이가 되었다.

민족, 사회계열 양측으로부터 미운 오리새끼로 살아야만 했다.

 

그러나 오직 하나

 

조국의 독립과 민족의 번영의 꿈은 버릴 수 없었다.

번영의 꿈

과학 조선

三次角삼차각

전기의 힘

 

수력 발전소의 터빈이 돌면 三次角삼차각의 위용이 발휘된다.

기전력, 자속, 전류 = 힘

힘 = 전기는 線路선로를 따라 도시로 온다.

발전소에서 생산된 전기의 힘은 선반과 밀링을 돌리며 산업육성의 기반을 조성한다.

국가의 발전의 원동력이 되는 전기의 이용이 생산적인가 소비적인가에 따라 결정된다.

그런데 저 어정쩡한 지식인들은 이 힘을 이용할 생각은 않고

샹들리에chandelier 불빛 아래서 향수 감별사 노릇을 즐길 뿐이다.

이에 분노한 이상은 민족의 나아갈 바를 밝혀

三次角設計圖삼차각설계도를 작성 한 것이다.

 

 

 

 

 

전선줄을 따라 흐르는 힘 전류

電線전선

전기의 발생부터 전기의 소멸까지 電線전선은 힘을 주관한다.

흐르는 힘 電流전류가 國力국력이라면 電線전선은 國家국가다.

電線이 國家이고

電流가 國力이라면

三次角의 起電力기전력, 磁束자속, 光電子광전자. 驅動力구동력. 등등은 각계의 국민들이 가지고 있는 능력에 비유된다.

다름 아닌 전기의 메카니즘을 국가 정치체제의 메카니즘과 대비하여 분석했다.

 

전기의 힘으로 가장 기본 요소인 플레밍의 왼손법칙 속의 三次角삼차각부터 기초하여 설계를 시작했다.

三次角 = 國民의 底力저력

電流 = 國力

電線 = 國家

電線 = 朝鮮조선

線선 = 鮮선

線선은 조선의 音價음가요 조선을 의미한다.

따라서

線에 關한 覺書

선에 관한 각서의 의미는

조선에 관한 “깨달음의 글”覺書각서 라는 의미이다.

 

三次角設計圖 /  線에 關한 覺書  =  조선에 관한 깨달음의 글

 

7편의 글이 실려 있다.

여기에는 1931년 조선인이 깨달아야 할 절실한 내용이 기록돼있다.

또한 독자로 하여금 간담이 서늘할 만한 내용이 포함돼있다.

이상의 담대함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한 글이다.

감히 총독부 기관지인 “조선과 건축”에 발표 할만한 배짱을 가진 者 또 있을까?

그의 무기는 펜

21세의 의혈투사 이상의 7편의 글을 기대하시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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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파 방정환이 주재한 학생

1929. 3

《학생()》은 1929년 3월 1일자로 방정환이 주재하여 개벽사에서 창간한 중학생잡지로서, 1930년 1월까지 통권 11호를 내고는 종간했다. 판권장을 보면 편집 겸 발행인 방정환(), 인쇄인 전준성(駿), 인쇄소 지까자와()인쇄소, 발행소 개벽사(서울·경운동 88), A5판 115면, 한권 정가는 표시하지 않고 ‘선금()정가 3개월분 75전’으로 매겨져 있다.

방정환은 〈《학생》 창간호를 내면서 남녀학생에게 하고 싶은 말씀〉이란 긴 제목으로 4면에 걸쳐 이야기를 했는데, 그중 몇 대문을 옮긴다.

“방학 때 개학 때, 나는 딴일만 없으면 틈을 얻어가지고 일없이 경성(京城 : 서울)역두(驛頭)에 나아가 섰다가, 그냥 오고 그냥 오고 합니다.

그 수많은 학생들이 몇 만으로 헤일 학생들이 13도(道) 촌촌(村村)을 찾아가기 위하여 정거장으로 몰려 들어가는 것을 멀리 서서 구경하고 있을 때, 나의 귀는 진군(進軍) 나팔소리를 듣습니다.

그 소리 그 나팔소리를 듣고 싶어서 나는 몇 번이고 아침과 저녁으로 정거장 앞을 왕래하였습니다.”

“나는 한동안 계동에 살았습니다. 거기서는 아침마다 세수하고는 반드시 중앙학교 철책(鐵柵) 밖에 가서, 학생 전부가 조회 끝에 웃통을 벗고 함성을 치면서 허공을 향하여 돌격을 하여 내닫는 것을 보고야, 사무소로 가고가고 하였습니다.

지금은 소격동으로 옮겨와서 아침 공부의 한 가지가 없어진 것을 섭섭해 하면서, 간신히 화동 안국동 좁은 길로 중앙·1고·2고·보전(普專)학생들의 진군을 보는 것으로 참고 지냅니다.”

“지금 조선에서 학생잡지를 한다는 것은 너무도 무모한 짓입니다. 일본서도 학생잡지는 작년(1928) 재작년 동안에 전부 몰락하였습니다. 조선에서는 말해볼 것도 없이 안될 일입니다.

첫째, 편집편(便)으로 생각해 보십시다.

학생잡지를 한다 하면 그 내용 설명을 듣지 않고도 누가 하든지 으레 나아갈 길이 뻔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누구든지 미리 생각하는 길, 그 길로는 일자반구(一字半句)를 들지 못하는 것이 조선잡지 아니겠습니까.

여러분이 알고자 하는 것의 대부분, 우리가 중요하게 취급하여야 할 것은 하나도 쓰지 못하게 됩니다.

쓰기는 우리 마음대로 쓰고 싶은 것을 쓰지마는, 책에 싣고 못 싣는 것은 우리의 마음대로 하지 못하는 까닭입니다.

둘째는 경영편으로 생각해 봅시다.

조선사람으로 중학정도와 전문정도의 학생이 남녀, 야학(夜學)강습소까지 합쳐도 5만명을 넘지 못한답니다.

그러니 그야말로 귀신같이 편집하여 학생 한 사람도 빠치지 않고 모두 읽게 한대야 5만부 미만이 아닙니까. ······

아무리 적게 잡더라도 1만부 못나가는 것은 경영할 재주가 없습니다.”

“편집으로나 경영으로나 다 무모한 짓인 줄 알면서 지금의 학생계를 보아 무모한 대로라도 시작을 꼭 해야겠어서 그냥 시작한 것입니다.

창간호마다 10에 7, 8은 원고 압수를 당하기 쉬운 전례(前例)가 있어서, 압수 아니 당하려고 자삭(自削) 또 자삭한 것인즉,

여러분께 특히 바라고 싶은 일은 창간호가 평범한 데에 너무 놀라시지 말고 낙망도 말고,

‘하하 이렇게 부자유로운 출생을 하였구나’고 짐작하면서 천천히 2호·3호·7호·9호 차차차차 나아가는 길을 보아달라 하는 것입니다.

사실 창간호에는 쓰고 싶은 말을 쓴 것보다 못쓴 것이 많습니다.”

“《학생》의 동생 《어린이》는 7년 전 3월에 창간하여 맨처음에는 주소 성명만 통지하면 무료로 보내준다고 신문광고를 하여도 전선(全鮮)에서 18명밖에 청구자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것이 지금은 10수만의 소년소녀를 동무해 나가게 되었으니 그간의 분투는 참으로 대단한 것이었습니다.”

각계 유명인사의 ‘학생시절’을 특집

《학생》 창간호 (1929. 3. 1)

《학생》 창간호 (1929. 3. 1)

목차에서 가장 크게 뽑은 제목은 〈학생시대〉인데 그 내용은, 여러 교장선생과 각계에서 활약하는 유명인사 여러분의 학생시절을 특집으로, 당시의 시대상황을 그대로 담은 것이라 귀중한 자료가 되리라 생각한다.

이에 투고한 교장은 최규동( 중동학교 교장, 후에 서울대 총장), 조동식( 동덕여고 교장, 후에 동덕여대 총장), 임두화( 송도고보 교장), 이윤주( 휘문고보 교장), 정대현( 보성고보 교장), 최두선( 중앙고보 교장, 후에 국무총리) 등인데, 그 이야기의 골자만 추려본다.

1) 〈40대의 상투쟁이가 많았던 교실, 최규동의 이야기〉 ··· “광성()학교나 광성()학교나 모두 야학이었다. 광성()에서는 법률과 상업을 배웠고, 광성()에서는 일어와 수학을 배웠었다. 그중에서 수학을 특별히 좋아하게 된 것은 두어가지 이유가 있었으니, 법률이나 상업 같은 것은 일정한 교과서도 없었을 뿐 아니라 ······, 그러니 자연 가르친다는 것이 아주 막연한 개념뿐이었었다.”

“학생들로 말하면 거의 40여세의 장인()들이어서, 사제()간이 대개 같은 연배였었다. 그러므로 선생이 ‘해라’는 물론 하지 못할뿐 아니라, 어쩌다 ‘하게’가 나오더라도 그것이 큰 말썽거리가 되던 것도 지금 생각하면 한 가지 웃음거리요, 머리 깎은 생도보다 상투쟁이가 더 많은 것도 ······.”

2) 〈창가시간이 제일 싫었다는 조동식의 이야기〉 ··· “내가 다니던 한어()학교만 하더라도 지필()의 공급은 물론이어니와, 점심이면 곰국으로 수십명 학생을 대접해가면서 청하였던 것이다. 3년만 이것을 계속하여 졸업장만 하나 얻으면 그 이튿날 관보()에 대뜸 교관() 아무개라 사령이 내리던 것이다.

한어학교 이후에 기호()학회에 다닐 때 일이니 ······, 내가 다닌 사범과는 모든 과목이 있었고 그것을 2개년 동안에 몰아치기 때문에, 하기방학도 없이 더운 날이면 수염이 한자씩 좋은 사람들이 웃통을 벗고 앉아, 교수받는 것도 우스운 얘기거리다. 그중에도 나이 많은 사람들을 창가를 시키고 체조를 시키니, 체조는 되고 안 되고 따라할지라도 창가는 웃음거리였었다. 나이 3, 40씩된 사람더러 ‘학도야 학도야’를 하라 하니 당음( : 당시()를 모은 책) 읊는 소리만 되었지 창가는 되지 않았다.

나는 일요일이면 슬그머니 삼청동 솔밭 속으로 찾아가서 거치른 성대를 가다듬어가며 창가 연습을 하고 섰다가, 혹시 사람들이나 만나면 그 무안했음이란 ······, 더구나 수염이 시커먼 사람으로 혼자 솔밭 속에서 정신 놓고 ‘학도야 학도야’를 부르고 있는 것이 그때 사람들 눈에는 불가불 미친사람으로 보였을 것이다.”

3) 〈1905년 미국 가서 공부한 임두화의 이야기〉 ··· “내가 처음으로 미주로 떠나던 때는 지금으로부터 25년 전인 1905년이었다. 그때 하와이 이민국에서 노동자들을 실어가는 편에, 나도 17, 8세의 소년으로 쫓아가던 것이니 고생으로 오른 것은 그만두고라도 길이 넘는 사탕수수밭에서 호리호리(적엽())를 하고 있다가 ······, 이러한 노동자생활을 10개월이나 하고 나서야 본주()로 건너갈 수 있었다.

나의 학생생활에서 제일 잊혀지지 않는 때는, 조지아지방 어느 산촌()학교 때의 일일 것이다. 처음에는 그래마스쿨(소학교)에서 8, 9세의 어린이들과 한반에 들어, 의자가 작기 때문에 앉지 못하던 것도 우스웠고, 그 반에서 정이 들 만하면 월반하여 혼자 진급하던 것도 기풍()이라면 기풍이었었다.”

“내가 지방학교에 있을 때에는 양복 다리미질, 또는 장작패기로 학비에 곤란이 없었으나 대학 때부터는 그것만으로는 감당해 나갈 수가 없었다. 그러므로 〈조선사회와 기독교〉라는 연설을 지어가지고 틈틈이 순회강연도 했던 것이다. ······ 들으러 오는 사람들도 연사의 연설이 훌륭해서 오는 것보다, 연사를 동정하려고 연사의 나라 풍속을 들으려오는 것이다.”

4) 〈우습고 기막혔던 일이 많았던 정대현의 이야기〉 ······ “그때 일어()학교라면 그래도 전문학교인 모양인데, 일어교사라는 이가 지금 보통학교 졸업 정도가 될락말락한 일본말솜씨를 가졌었다는 것만 들어도, 그때의 공부한다는 것이 얼마나 우습고 기막혔던지를 알 것입니다.

수학을 4년 동안 배운 것이 분수()밖에 못 배웠는데, 그것은 선생의 지식이 거기까지밖에 안 되니까 우리들도 수학은 다 배웠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역사래야 책 읽는 것이고, 지리래야 경위()선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선생님이고, 물리·화학하고 떠들어대었으나 기껏 어렵다는 시험문제가 ‘물유삼체()하니 기하자()인가 열기()하라!’ 이런 것인데, ······ 지금이면 보통학교 4학년 마친 이는 누구든지 답할 것이 아닙니까.”

“그후 일본 가서 고생도 좀 하였습니다. ······ 교과서의 태반은 베껴서 배웠고, 심지어 자전()까지 베껴 가졌으니, 이런 것은 지금 학생들은 생각도 못할 일이 아니겠습니까. 내가 다니던 학교는 지금의 동경고사()였습니다.”

5) 〈선생이 학생보고 ‘노형’하고 불렀다는 최두선의 이야기〉 ··· “대체로 교사가 결핍한 때라, 상당한 자격이 있거나 없거나 한 교사가 3, 4교() 혹은 4, 5교에 겸무하기는 보통이었으며, 자전거로 인력거로 동분서치(西)하는 모양은 흔히 보는 바이었다.”

“교과서는 어떠하였느냐 하면 이것 또한 각양각색으로, 일본중학교의 교과서를 그대로 쓰기도 하고, 혹은 일본교과서를 직역한 조선문 교과서를 쓰기도 하고, 혹은 임시로 편찬한 것을 등사판에 인쇄하여 사용하기도 하고, 혹은 구술()을 필기하여 ······.”

“연령의 차이가 심하고 그중에는 관직()을 지낸 이도 있어 탕건()에 입자()를 쓴 이도 있고, 연소() 생도 중에는 머리를 땋아서 늘어뜨린 이도 있었다. ······ 교사 중에는 생도보다 연소한 이가 많아서 서로 경어를 사용함은 물론이고, 어떤 선생은 학과를 설명할 때 생도를 보고 ‘노형()이 약시약시(: 이러이러함)하면’이라고 하던 말이 아직도 기억에 남아 있다.”

이밖에도 음악가 김영환(), 소설가 염상섭(), 의학박사 이갑수(), 체육인 서상천(), 변호사 이승우(), 미술가 김주경() 등이 체험한 외국유학시절을 이야기하고 있다.

《학생》의 독자를 중학생이라고는 하나 그것은 요즘과 같은 13, 4세가 아닌 17, 8세, 그보다도 더 많은 20세가 넘은 장가 든 중학생도 많았다. 그래서인지 차상찬()이 쓴 〈대원군 일화록〉에는 이런 이야기도 있다.

“서춘보(徐春輔)와 대원군은 근대조선 화류(花柳)계에 대표적인 오입쟁이다. 서춘보라는 이는 나이 14세 때에 벌써 기생방 출입을 하였는데, 그때만하여도 지금과 달라서 기생방 출입이 어찌나 까다로웠던지, 좀쳇사람으로는 아무리 돈푼이 있고 인물이 똑똑한 사람이라도 소위 선진(先進)오입쟁이(예컨대 대전별감·포도군관 등)에게 두드려맞거나 봉변을 당하는 터였다.

그가 일개 초립동(草笠童)으로 어떤 기생집에 갔더니, 여러 오입쟁이들이 그를 깔보고 누워서 일어나지도 않으니까, 그는 대담스럽게 하는 말이, ‘이놈의 집이 기생집으로 알고 왔더니 모두 누워있는 것을 보니까, 기생집이 아니라 활인서(活人署) 염병(染病)막이로구나’ 하니, 여러 사람이 하도 어이가 없어서 아무 말도 못하고 ······ 그뒤부터는 어느 기생집에 가든지 서춘보라면 으레 오입쟁이로 알고 한 좌석을 주었다.

그런데 대원군은 이 서춘보보다도 더 큰 오입쟁이었다. 외척(外戚) 김씨의 세력에 눌려서 꼼짝달싹을 못하고 무뢰배와 같이 시정을 돌아다닐 때는 물론이고, 그후 일국의 부왕(父王)이 되어 세도할 때에도 화류계의 패권을 항상 잡았었다. 미행(微行)으로 기생방에 다니기는 예사이고 당당하게 운현궁 안으로 몇 십명의 명기(名妓)를 뽑아서 입시(入侍)케 하였다. 이것이 소위 대령(待令)기생이라는 것이다. ······ 항우(項羽)도 낙상을 할 때가 있다고 대원군도 기생집에서 봉변을 당한 일이 있었다. ······ 대원군 당시에 훈련대장으로 위용(威容) 당당하던 이경하(李景夏)는 한때 대원군과 화류계에서 놀던 인물이었다.〈하략〉”

‘중학생잡지’에 당치도 않는 기생방 오입쟁이 이야기를 거리낌 없이 실었으니, 이야기란 하기 나름이고 듣기 나름인가 보다.

                                                                       [네이버 지식백과] 소파 방정환이 주재한 학생 - 1929. 3 (한국잡지백년2, 2004. 5. 15., 현암사)

 

 

 

 

주변인물

 

최영주(崔泳柱, 1906년 ~ 1945년 1월 12일)는 일제 강점기의 아동문학가 겸 언론인으로, 본명은 최신복(崔信福)이며 경기도 수원 출신이다.


배재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니혼 대학으로 유학했다. 조선으로 귀국한 뒤 경기도 수원에서 화성소년회(華城少年會)를 조직하면서부터 소년 운동에 투신했으며 한때 윤석중과 함께 색동회 동인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1927년 1월 개벽사(開闢社)에 입사한 뒤부터 잡지 《학생(學生)》, 《어린이》의 편집 업무를 담당하는 한편 세계 명작동화를 번안하여 연재했다.

1936년 5월 안석주, 윤석중 등과 함께 소파(小波) 방정환 기념비 건립 모금 운동 발기인으로 참여했으며 1940년 방정환이 생전에 집필했던 문학 작품들을 정리한 《소파전집(小波全集)》을 출판했다.

1938년 10월부터 1941년 1월까지 한국 최초의 월간 수필잡지인 《박문(博文)》의 편집 겸 발행인으로 활동했고 《중앙(中央)》, 《신시대(新時代)》, 《여성(女性)》 등의 잡지에서 편집 업무를 담당했다.

1941년 1월부터 1941년 8월까지 월간 잡지 《신시대》 주간으로 활동하는 동안 일제의 내선일체 정책과 황민화 정책, 일본의 침략 전쟁을 찬양하고 지원병 제도를 선전하는 글을 기고했으며 이러한 경력 때문에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자 명단의 언론/출판 부문에 포함되었다. 1945년 1월 12일 폐결핵으로 사망했으며 그의 작품집으로 《호드기》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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奧地人으로서 郵便當局에
                                           三水 石村生

 

 

나의 사는 곳은 조선서 제일 가는 산골입니다.

 

누구나 三水, 甲山이라면 말할 수 업시 험한 산골인 줄로 아는 것은 녯날부터이다.

 

이러케 험한 살골이라서 그런지 또는 이런 곳에서 사니까 사람을 업수이 녁여서 그런지 우리 곳 우편 당국자는 우편물을 매우 무성의하게 취급하고 잇스니 그 심사를 알 수가 업습니다.
내가 전에 서울을 가서 어떤 친구의 집에 묵고 잇슬 때에 그곳 체신부가 편지를 가지고 그 집에 와가지고도 사람을 불너가지고 XXX氏가 잇느냐고 물어서 잇다고 하여야 비로소 전하고 가는 것을 보앗는데 이곳서는 그 집을 차저가기 커녕 실상 편지 바들 사람 잇는 곳에서 한 십리 밧 쯤 되는 곳인 구장(區長) 집에다 두고 가니 아모리 급한 편지라도 급히 바다볼 수가 업게 됩니다.

 

구장 집에서 묵히다 묵히다가 우리 집 근처에 잇는 사람이 혹시 그곳에 들니게 되여야 그것을 그 편에 보내고 또 그것을 가지고 온 사람이 자긔 일이 밧부면 그날로 전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그만 이저버리여 여러 날 되면 제면적어서 전하지 안코 흐지부지 업새버립니다. 이런 일은 혹간 가다가 잇는 레외의 일이라고 하겟지만 대체로 보아 직접 차저 전하는 것이 별로 업습니다.

 

서류(書留)이라야 마지못하야 가지고 옴니다.
편지뿐 아니라 일반 보통우편물은 죄다 그럿습니다. 나는 개벽사(開闢社)의 개벽(開闢) 창간호부터 보는 독자인데 매달 이것 보느라고 여간 힘드리지 안엇습니다.
책이 하도 조흐니까 우편소에 잇는 사람이 뜨더보다가 다 보고 나서 도로 싸서 전하지요.

 

이것을 또 구장 집에 갓다 두면 그곳에서들 펴처보지요. 이러케 한 것을 나종에는 동리 사람이 갓다 줍니다.

 

바다본즉 죄 헌책입니다. 그럼으로 본사에서 헌책 보낸 줄만 알고 그것을 도로 싸서 본사로 보낸즉 본사에서는 다 보고 나서 헌책을 도로 보낸다고 책망을 합니다.

 

그래 노발대발하야 본사로 편지하기를 나에게는 산골 사람이라고 무시하고 그런 헌책을 보내주엇느냐고 나물합니다. 이러케 하느라니 비용인들 얼마나 만히 들엇겟습니까. 이러케 헌책이라도 매달 제때에 꼭꼭 바더보게 되면 조켓지만 그것도 간혹 발행은 되얏다고 신문에 발표되는데 발표되야 십여 일을 기다려도 오지 안습니다. 그래 본사로 편지하지요.

 

그러면 본사에서는 X날 보내엿스니 만일 밧지 못하얏스면 조사하야 보라고 하는 편지가 옴으로 볼일을 못 보고 체부 오는 날을 기댜려 쪼차가서 무러봅니다.

 

무러보면 아니왓다고 합니다. 그래 본사로 다시 편지하면 본사에서도 참말 억울하게 된 것을 생각하시고 재송(再送)이라고 써서 또 보내줍니다. 이러케 해서 그 달이 거의 다 간 다음에야 그 달치를 바다보게 됩니다.

 

책은 보고 십고 돈은 업고할 수 업시 집에 잇는 곡식을 장에 갓다가 팔아서 주문을 합니다.
이즈음에는 개벽사에서 나오는 것 네 가지 그 외의 것도 한두 가지를 보는데 돈(이 끗츤 九頁 第四段에 繼續)<13>으로 말하면 1원이 즘 넘습니다.
이것을 한 달만 떼우게 되면 나의게는 여간 손해가 아닙니다. 나는 여지것 본사에서 보내지 안코 떼여먹군 하는 줄만 알엇더니 이즈음 여러 방면으로 조사해 본 결과 우편당국에서 취급을 무성의하게 하야 이런 일이 생기는 줄을 확실히 알앗습니다.

 

우리 조선 안에 이런 일 당하는 사람이 한둘에 끗치지 안을 것입니다.
그럼으로 나는 이와 가튼 사실을 드러 우편당국자의게 외람히 황의하노니 크게 깨다러 이후에는 이런 사고가 다시 생기지 안토록 주의해주기를 크게 바라고 잇는 바이다. -끗- <9>
<10-13, 9>

 

별건곤 제44호  
발행일 1931년 10월01일  
기사제목 나의 抗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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