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동림과의 짧은 결혼생활 -20100209,조선일보- 현대문학-작가 / 문학의 세계

2010/02/09 0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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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의 아내 변동림은 수화 김환기 화백과 재혼하고 이름도 김향안으로 바꾼 뒤 수화를 정성스럽게 뒷바라지했다. 사진은 1960년대 초의 김향안 여사.

 

모더니티(modernity)의 본질은 새로운 것, 영원한 것, 덧없음에 대한 추구이다. 그 새로움은 낡은 것과의 단절에서 당위를 얻고, 그 영원함은 찰나의 소멸 속에서 빛을 얻고, 그 덧없음은 사라짐으로써 존재의 견고성을 이끌어낸다. 모더니티가 자주 자신을 드러내는 가시적 표층(表層)은 패션(fashion·유행)이다.

1930년대 '모던' 경성이 보여준 최고 패션은 '자유연애'였다. 자유연애의 대유행을 빼놓고는 이 시기 경성에 대해 말할 수 없다. 이때 자유연애의 이념은 신분과 계급의 차이를 넘어서는 사랑, 죽음마저도 불사하는 진실한 사랑이었다.

1916년 경성에서 태어나고, 경성여고보를 거쳐 이화여전 영문과를 졸업한 지식인 신여성 변동림(卞東琳) 역시 자유연애론자 중의 하나였다. 변동림은 이상이 단골이었던 커피 다방 낙랑파라에서 자주 마주쳐 알던 당대의 지식인 변동욱(卞東昱)의 동생이자, 이상의 절친한 친구 화가 구본웅의 서모(庶母)와는 이복지간이었다.

이상이 변동림을 '낙랑'에서 처음 만났을 때, 평소의 그답지 않게 얼굴이 벌게지면서 각설탕만 만지작거려 다방 아가씨들로부터 핀잔을 들었다. 이상은 좌중을 압도할 만큼 위트와 패러독스가 넘치는 사람이었지만 변동림을 만난 자리에서는 변변히 말도 제대로 못했다.

이상은 변동림 주변의 애인들에 대한 소문을 들었다. 그럼에도 변동림이 "당당한 시민이 못 되는 선생님을 저는 따르기로 하겠습니다"라고 고백하자, 이상은 그것을 받아들였다. "나는 술이 거나하게 취해서 어떤 여자 앞에서 몸을 비비 꼬면서, 나는 당신 없이 못 사는 몸이오, 하고 얼러 보았더니 얼른 그 여자가 내 아내가 되어버린 데는 실없이 깜짝 놀랐습니다"라는 이상의 훗날 고백으로 미루어보건대 금홍과 헤어진 뒤 의식이 황폐해진 이상이 일종의 도피로써 변동림을 선택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몇 번?" "한번" "정말?" "꼭" 이래도 안 되겠다고 간발을 놓지 말고 다른 방법으로 고문을 하는 수밖에 없다. "그럼 윤 이외에?" "하나" "예이!" "정말 하나예요" "말 마라" "둘" "잘 헌다" "셋" "잘 헌다, 잘 헌다, 잘 헌다" "넷" "잘 헌다, 잘 헌다, 잘 헌다" "다섯" 속았다. 속아 넘어갔다.〉(소설 〈실화(失花)〉의 한 대목)

이상이 변동림의 남자관계를 캐는 장면이다. 이상은 〈단발〉 〈실화〉 〈동해(童骸)〉 〈종생기(終生記)〉 등에서 변동림의 이야기를 다뤘다. 이상은 아내가 간음한 경우라면, 특히 자신이 그 사실을 알았다면 이를 용납할 수 없음을 분명히 했다. 앞선 동거녀 금홍의 방종한 남자관계에는 그토록 관대했던 이상이 변동림의 정조(貞操) 관념에 엄격한 도덕의 잣대를 들이대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 이상은 "20세기를 생활하는데 19세기의 도덕성밖에는 없으니 나는 영원한 절름발이"라고 스스로를 자책하고 있다.

어쨌든 그들은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은 1936년 6월 서둘러 신흥사에서 결혼식을 올리고 황금정(黃金町)의 허름한 셋집에서 신혼살림을 차렸다. 햇빛도 제대로 들어오지 않는 어두컴컴한 셋방에서 이상은 종일 누워 지냈다. 햇빛을 보지 못한 이상의 얼굴은 더욱 하얘졌고, 폐결핵은 깊어졌다. 변동림은 이상의 약값과 생활비를 벌기 위해 일본인이 운영하는 바에 나갔다. 두 사람의 신혼살림은 이상이 10월에 일본으로 건너가면서 파경(破鏡)을 맞았다. 불과 넉 달이 채 못 되는 짧은 결혼생활이었다. 변동림은 이상이 돌아오기를 간절히 바랐으나, 몇 달 뒤 날아온 것은 이상이 동경제국 부속병원에 입원했는데 위독하다는 소식이었다.

신여성 변동림은 1930년대에 돌출한 아방가르드 예술가 이상을 배우자로 선택함으로써 남과 다르게 살고 싶다는 욕망을 추구했지만 그 꿈은 실패했다. 그는 1944년 5월 화가 김환기(1913~1974)와 재혼하고, 프랑스 유학을 거쳐 1964년 이후 뉴욕에 정착해 뉴요커로서의 삶을 살았다. '변동림'에서 '김향안(金鄕岸)'으로 개명함으로써 낡은 봉건 도덕과 낙후된 식민지 조선을 지배하는 구태의연한 것에서 벗어나 첨단의 삶을 향한 주체적 의지를 드러냈다. 

출처 : 시와 비평
글쓴이 : 심은섭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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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 김기림 '천재 이상' 멘토 되다 -20100119,조선일보- 현대문학-작가 / 문학의 세계

2010/01/19 08: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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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대 경성은 강렬한 음향과 색채로 충만하고, 상쾌한 만보(漫步)와 새로운 미적 규준, 그리고 동경(憧憬)의 '울트라 모던'이 꽃피는 장소였다. 그 자신 대표적인 '모던 뽀이'였던 시인 김기림은 당시 경성인들이 선망하는 것이 '다이야 반지-양식(洋食)-오후의 산책로-백화점-극장의 특등석-예금통장'이었다고 했다.

'모던 뽀이'들은 상징적 아버지(조선·전통·과거)를 살해하고 스스로 부왕(父王)의 권좌에 앉은 자들이었다. 그들이 아버지에게서 본 것은 미개한 '원주민', 전근대의 '낙후'와 '봉건'의 잔재들이었다. 그것은 '모던'으로 나가는 데 큰 장애물이었다. 따라서 그들이 장애물을 넘어서는 데 아버지의 상징적 살해가 필요했다. 이상은 '나는나의아버지가되고또나는나의아버지의아버지가되고그런데도나의아버지는나의아버지대로나의아버지인데어쩌자고나는자꾸나의아버지의아버지의아버지의…아버지'(시 〈오감도〉 제2호)가 되는 것이냐고 탄식했다. 아버지를 살해하고 그 대신에 '모던'을 손에 쥔 '13인의 아해들'은 '역사의 슬픈 울음소리'를 내는 까마귀들이며, '종합된 역사의 망령'(이상)들이었다.

조선일보 기자 시절의 김기림 시인. 동료 문인이자 문학기자로서 이상의 작품 활동을 도왔다.

시인 김기림은 함경북도 성진에서 가까운 학성군 출신이었다. 1908년생이니 이상보다 두 살 연상이다. 주로 종로서를 외근 구역으로 맡은 조선일보 사회부 기자였던 김기림은 '북구(北歐)적인 선이 굵고 축구감독 같은 풍모'를 지녔고, '근심·우울·센티멘털리즘 등을 전혀 찾아볼 수 없는 명랑성이 농후한 사람'이었다. 신문사 안에서의 별명은 '김모범 청년'이었다.

1930년대 조선일보에는 염상섭·현진건·김동인·채만식·홍기문·함대훈·이원조 등 문인들이 기자로 있었고, 동아일보에는 이익상·주요섭·윤백남·이무영·홍효민·주요한·이은상·변영로·심훈 등이 있었다. 당시 문단의 헤게모니는 지면을 확보하고 있는 이들 문인기자들이 쥐고 있었고, 그 중심에 김기림이 있었다.

김기림과 이상의 우정은 호혜평등 관계이기보다는 이상이 자신의 지지자이자 멘토였던 김기림에게 일방으로 기대는 형국이었다. 일찍이 이상의 천재성을 알아봤던 김기림은 이상에게 "파리 가서 3년간 공부하고 오자. 파리에 있는 슈르 리얼리스트들하고 싸워서 누가 이기나 내기하자"고 제의했다. 이상은 김기림에게 편지를 보내 "형, 도동(渡東)하는 길에 서울 들러 부디 좀 만납시다. 할 이야기도 많고 이일 저일 의논하고 싶소"라고 말했다. 그리고 새 작품을 쓰면 김기림에게 보냈다. "졸작 〈날개〉에 대한 형의 다정한 말씀 골수에 숨이오. 방금은 문학청년이 회로(灰爐)에 돌아갈 지상최종의 걸작 〈종생기〉를 쓰는 중이오. 형이나 부디 억울한 이 내출혈을 알아주기 바라오!"

그 무렵 이상은 거듭되는 카페 경영의 실패, 금홍과의 이별, 나태와 방종, 질병 등으로 몸과 의식이 퇴락하고 있었다. 구인회 멤버인 정인택과 윤태영이 황금정 뒷골목의 어두컴컴한 셋방에 숨어 지내던 이상을 찾아 "지금까지 걸어오던 불건강한 악취미는 청산하고 건강한 생활을 찾으라"고 호소했다. 이상은 얼마 뒤 화가 구본웅의 부친이 경영하던 인쇄소 겸 출판사 창문사에 교정부 직원으로 나가기 시작했다. 김유정이 가끔 나타나 이상의 책상 맞은편에 우두커니 앉았다가 갔다. 김유정이 "해경, 그건 뭐하라는 표시요?"라고 물으면 이상은 "이건 거꾸로 박힌 활자를 바로 세우라는 표시요"라고 답했다.

1936년 7월 김기림의 첫 시집 《기상도(氣象圖)》가 나왔을 때 동북제대에 유학 중인 김기림의 부탁으로 이상이 본문 편집과 표지 장정을 떠맡았다. 책에 쪽수 표기를 하지 말자는 이상의 파격적인 아이디어에 김기림은 "책인데 어떻게 쪽수 표시를 안 하느냐"고 난색을 표했다. 구본웅은 "한 1000부 박아서 팔자"고 했고, 이상은 100부만 찍자고 했다. 결국 200부를 찍고자 했던 김기림의 뜻대로 되었다.

이상은 그해 10월경 동경행을 감행하면서 김기림에게 편지를 썼다. "골맹에 든 이 문학병을―이 익애(溺愛)의 이 도취의… 이 굴레를 제발 좀 벗고 제법 근량 나가는 인간이 되고 싶소. 여기서 같은 환경에서는 자기 부패 작용을 일으켜서 그대로 연화(煙火)할 것 같소. 동경이라는 곳에 오직 나를 매질한 빈고가 있을 뿐인 것을 잘 알고 있지만 컨디션이 필요하단 말이오."

출처 : 시와 비평
글쓴이 : 심은섭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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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림 兄 , 편지 좀 주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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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인환 詩 / 박인희 낭송 - 

    한 잔의 술을 마시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生涯)와
    목마(木馬)를 타고 떠난 숙녀(淑女)의 옷자락을 이야기한다
    목마(木馬)는 주인을 버리고 거저 방울소리만 울리며
    가을 속으로 떠났다 술병에서 별이 떨어진다
    상심傷心)한 별은 내 가슴에 가벼웁게 부숴진다

     

    그러한 잠시 내가 알던 소녀(少女)는
    정원(庭園)의 초목(草木) 옆에서 자라고
    문학(文學)이 죽고 인생(人生)이 죽고
    사랑의 진리마저 애증(愛憎)의 그림자를 버릴 때
    목마(木馬)를 탄 사랑의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세월은 가고 오는 것
    한때는 고립(孤立)을 피하여 시들어가고
    이제 우리는 작별(作別)하여야 한다
    술병이 바람에 쓰러지는 소리를 들으며
    늙은 여류작가의 눈을 바라다보아야 한다


    등대(燈臺)에
    불이 보이지 않아도
    거저 간직한 페시미즘의 미래(未來)를 위하여
    우리는 처량한 목마(木馬) 소리를 기억(記憶)하여야 한다
    모든 것이 떠나든 죽든
    거저 가슴에 남은 희미한 의식을 붙잡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서러운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
    두 개의 바위 틈을 지나 청춘(靑春)을 찾은 뱀과 같이
    눈을 뜨고 한 잔의 술을 마셔야 한다


    인생은 외롭지도 않고
    거저 낡은 잡지雜誌)의 표지(表紙)처럼 통속(通俗)하거늘
    한탄할 그 무엇이 무서워서 우리는 떠나는 것일까
    목마(木馬)는 하늘에 있고
    방울 소리는 귓전에 철렁거리는데
    가을 바람소리는
    내 쓰러진 술병 속에서 목메어 우는데

     

     

출처 : 그대가 머문자리
글쓴이 : 사랑빵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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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본웅 作

 

 

 

 

 

 

 

 

구본웅이 그린 친구이상의 초상화로 알려진다.

그림을 양분해 놓고 보면 왼 쪽은 자신의 모습을 그렸다.

코 부분을 보면 자신의 굽은 등처럼 코가 휘여있다.

이상의 코 볼에는 각혈한 피의 흔적을 덧 발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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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서율력지

삼탄 이승소는 조선조 초기 집현전 출신 학자로 대표적 관각문인이다. 公의 묘는 본래 서울 상도동에 있었으나 1968년 도시계획 확장으로 천장하게 되어 직계후손들이 많이 살고 있는 충주시 이류면 완오동으로 옮기고 이류면 매현리 서당동에 제실인 청간사(淸簡祠)를 지었다.

한편 이승소는 충청도관찰사 시절 충청 일대를 돌며 많은 시를 남겼다.  

공의 유고문집인 삼탄집에는 500여편의 시와 문장이 실려 있는데 현재 국역된 것은 50여편 정도다.

 

 

三灘集序(삼탄집서)
三灘先生은 文章으로 世上을 울린 분이다(以文章鳴干世). 같은 시대의 文章大家에는 金守溫(字는 文良, 號는 乖崖), 徐居正(字는 剛中, 號는 四佳亭), 姜希孟 (字는 景醇, 號는 私淑齊) 같은 이가 있는데 모두 문단(文壇)을 주도한 인물들이다.
문장의 특징을 들면 괴애(김수온)는 雄渾(웅장하고 막힘이 없음)하고 사가정(서거정)은 圓滑(매끄러움)하며 사숙제(강희맹)는 淸頸(맑고 힘참)하여 각기 그 아름다움을 專有하고 있지만 정밀하고 뜻이 깊으며 따스하고 넉넉하며 훈훈하고 문장의 법도가 한치의 어긋남이 없는 점에 이르러서는 모두가 삼탄(三灘)을 추앙하며 그에 미치지 못함을 자인하였다. 나는 나이 어려 그 어른의 모습을 직접 뵙고 음성을 들어보지는 못했으나 선비들 사이에서 그 어른의 풍모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니 훤칠한 키에 얼굴은 白玉같이 희고 수염은 신선 같았으며 善을 실천함에 부지런하고 즐겼으며 사람을 끌어올려 씀에 지칠 줄을 몰랐다 하니 참으로 儒林의 泰山北斗이셨다. 내 壯年이 되어 四方에 노닐 때 곳곳에서 題詠(제목을 정하여 詩歌를 지음)하는 사이에 선생의 작품을 얻어볼 수 있었는 바 읽어본즉 처음에는 어렵다고 느껴지지 않았으나 생각을 펼쳐 적절한 표현을 해보려고 온종일 사색에 잠겨 신음해도 선생의 措辭(적당한 문구사용과 배치)에는 도저히 근접할 수 없음을 알고 선생의 높은 재주를 더욱 절실하게 깨달았다. 선생께서는 文藝의 극치에 이미 도달하였음에도 마음이 흡족하지 못하시고 작품을 이룩하시고는 곧 원고를 버리곤 하셨는데 마침내 선생이 세상을 뜨시매 上(成宗大王)께서 문장의 모범을 보고자 사신을 집으로 보내어 선생의 遺文을 求하매, 선생의 아들 熙가 흩어져 있던 若干編을 수습하여 정리해 올리니 上께서 깊이 歎賞(감탄하고 칭찬함)하시고 간행하려 하던 차에 미처 그 말씀을 내리지 못하시고 승하하시니 안타깝기 그지없는 일이다. 더구나 문집의 소재마저 알 길이 없어 識者들 모두 몹시 애석하게 여기고 있었는데 甲戌年에 선생의 外孫으로 현재 함경도 都事로 있는 李君이 任地로 떠남을 알리려 나에게 와서 청하여 말하기를 나의 外祖父님 詩文이 아직 발간되지 못하였으니, 이름을 내세워 後世에 전함이 비록 外祖父의 뜻은 아니지만 그러나 子孫된 자로는 차마 그 시문이 아주 없어져 버려 전해지지 못하게 방치할 수는 없는 일이요. 나의 外叔(삼탄공의 장남 李熙)은 현재 杆城郡守로 있고 나 또한 함경도 수군절도사의 幕僚로 있어 相去가 불과 수백리라. 외숙과 생질이 힘을 합치면 成事할 수 있을 것 같으니 그대 한마디 베풀어주시면 編首의 머리말로 삼겠오(序文을 부탁한 말) 내 응하여 말하되 선생의 문장은 人口에 膾炙(사람들 입에 오르내린지)된지 오래요. 굳이 간행하지 않아도 될 일이니 序文은 또 무슨 필요가 있겠오? 그러나 刊出하지 않으면 永傳할 수 없고 서문은 간행하게된 사유를 기술하는 것이니 내 어찌 굳이 사양하겠오? 우리나라 문헌은 예로부터 전해내려온 바 있으니 저 文昌侯 催致遠같은 이는 아주 오래전 인물이요. 文烈公 金富軾이하 名文章家도 열분이나 되고 小說類까지도 간출되지 않음이 없고l 지금까지도 세상에 유포되어 일반인이 얻어볼 수 있게 되었으니 당시의 문학 崇尙熱을 알 수 있도다. 朝鮮朝의 文治의 盛함은 高麗朝에 비해서도 몇배나 높아 뛰어난 큰 재주들이 앞뒤 연이어 일어나 그 작품이 인쇄되어 널리 전해지는 책이 날로 뒤섞여 나오니 지금 三灘集이 李君의 勞苦를 기다려 출판되려는 것도 이 추세의 한 증거이다. 今世의 재주 후세에 전할만한 이 어찌 적다 할 수 있으랴 또한 지금 세상의 관습이 점점 옮겨가 옛날로 가는 것은 아닐까?
옛사람이 말하기를 文章은 世道(세상을 올바르게 다스리는 도리)와 함께 오르내린다 하였으니 때문에 세상의 治亂(다스려짐과 어지러움)을 占치려는 자 반드시 문장에서 그 실마리를 찾았던 것이다. 이 삼탄집이 전해짐으로써 조선조 文明의 다스림이 중국의 당(唐)나라 송(宋)나라 보다도 우뚝 솟아있고 久久한(오랜 역사의) 고려 보다도 뒤지지 않다는 것을 더욱 알게 되리니 李君의 출판의 공적 세상에 裨益됨이 어찌 많지 않으랴! 李君의 이름은 壽童이요. 나와는 두 번이나 같은 관직에 있었는 바 그릇이 크고 취향이 高遠하며 글 또한 잘하는 분이다. 外家의 법도를 지켜 선생의 외손된 직분을 멋지게 수행한 이 바로 이분이 아니겠는가?
甲戌年 十月上旬에 宜寧 南袞 삼가 序하노라

[註]: 삼탄집 서문은 申用漑의 서문과 南袞의 서문이 있는데 이는 남곤의 서문이다. 남곤은 佔畢齊 金宗直의 문인이며 대제학, 영의정을 지낸 문필이 뛰어난 인물인데 이 서문에서 삼탄공의 시문은 일견 쉬운 것 같으나 생각을 펼쳐 표현함에 있어 도저히 따를 수 없는 높은 경지에 있다고 격찬하고 있다. 더욱이 그는 삼탄집을 읽어봄으로써 조선조의 문학(文明) 수준이 중국의 문학 황금기였던 당, 송 보다도 오히려 높고 고려시대 문인들 보다 결코 뒤지지 않는 높은 수준임을 깨닫게 되리라고 자부하고 있음은 주목할 만한 대목이다.
이 서문을 쓴 甲戌년은 1514년 中宗9년이다.

 


 

世宗挽詞五首(세종만사5수)

三聖(太祖, 定宗, 太宗) 이어받아 王位에 오르니
그 어른들 서로 전해주심은 오직 한마음
(中庸의 大德으로 天下를 다스려야 한다는)
民心은 德있는 이를 사모하고 따르며
하늘 또한 진심으로 도우셨지요.
다만 千歲누리시기만 기원하였는데
八音 고요히 멎을 줄 어찌 알았으랴
백성들 靈前에 너도나도 눈물 흘리니
大王의 恩澤 마음속 깊이 사무침일세

周나라는 代代로 德을 쌓아 國運 오래 이어졌고
商나라도 德을 닦아 상서로움 나타났듯
公子들 모두 厚德하시고
子孫들 많이 멀리 퍼지셨네
대왕은 진심으로 九族과 敦睦하시고
三聖의 陵寢찾아 政事 물으셨는데
마침내 아드님께 왕도정치 물려주시니
그다지도 빨리 가심은 세상일 싫어지셨나이까

千고개 넘어 太平盛代 여시고
在位 30여년에
나라 경영의 아름다운 계책 확실히 세우셨네
事大의 정책 항상 독실하였고
交隣에는 信義 베풀어 믿음 얻으셨지
부지런하고 검소함은 禹임금 본받았고
周文王의 大謨 크게 드러냈지요.
五月喪期 임박하니
힌 상복에 지팡이 짚고
높은 山(대왕릉) 바라보며 달려가네

箕子의 洪範九疇 가슴에 안고
백성들 五福 누리도록 힘쓰셨으며
대왕의 光革은 堯 임금과 合致(합치)하셨네
태평에 기여하는 농사의 功(공) 익히 알으시고
꼴꾼 나무꾼에게도
물으셨다오.
禮樂은 주나라 雅樂같은
아름다운 음악 일으키시고
衣冠제도는 漢나라를 앞질렀다네
위대한 이름 아름다운 책에 실려
햇빛 별빛처럼 萬古에 빛나오리

대왕의 학문은 하늘이 내린 재주로 이룩하셨으며
神妙한 功德은 조화의 中樞를 잡으셨네
天文보아 天機에 맞는 政事 베푸셨고
사냥그물 칠 때에도 한쪽은 열어놓고
세 방위만 그물로 막으셨다네
德은 하늘과 땅만큼 넉넉하셨고
恩惠는 깊어 雨露처럼 백성들 적셔주셨네
小臣 생각할 수록 망극하여
피눈물 흘리면서
먼 하늘 바라보며 긴 한숨짓네

[註]: 八音은 金, 石, 絲, 竹, 匏(박), 土, 木, 革 등 재료로 만든 8종의 악기 즉, 모든 악기를 말함. 書經舜典에 “帝乃殂落커시늘 百姓은 如喪考妣하고 三載를 四海遏密八音하니라”하였다. 즉, 堯 임금이 승하하자 백성은 부모상을 당한 것처럼 슬퍼하였고 三年동안 온 세상에 음악소리가 끊어져 고요하였다.
箕範: 箕子가 周나라 武王에게 일러준 洪範九疇(홍범구주는 禹가 曉舜 이래의 사상을 집대성한 천지의 大法, 즉 정치 도덕의 기본적 九法
삼탄공은 세종대왕의 陵을 지금의 여주 영릉으로 옮길 때 遷陵誌石文을 썼고(왕의 묘지문은 당대의 최고문장이 쓰는 법) 또 이 만장 다섯수를 지었는 바 세종대왕의 정치는 중국의 聖君 堯, 舜, 禹王, 湯王, 文王, 武王의 善治에 비유하고 학문은 天縱之聖 孔子에 비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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立石釣魚(漢都十詠中一)/立石浦에서 고기 낚으며

우뚝 솟은 큰바위 강물을 굽어보고
바위아래 강물은
百頃(백경)의 澄潭(징담)되어 유리처럼 푸르렀네
물가 이끼 낀 돌 위에 앉아
한가로이 낚시대 드리우면
노니는 물고기들 미끼를 희롱하며
잠겼다 뛰었다 오르내리고
옥빛 쌀가루 나물죽 먹음직 해도
아무렴 맛있는 회무침을 어이 당하리
좋은 술 가득가득 銀병 기울여
강가에 흠뻑취해 누어 밝은 달 바라보니
酒德頌 이름높은 伯倫의 멋 닮았구료

[註]: 漢都十泳은 서울 十勝을 읊은 詩.
藏義尋僧(장의심승), 濟川翫月(제천완월), 楊花踏雪(양화답설), 盤松送客(반송송객)
木覓賞花(목멱상화), 箭串尋芳(전관심방), 麻浦泛舟(마포범주), 興德賞蓮(흥덕상련)
鍾街觀燈(종가관등), 立石釣魚(입석조어)를 일컬음인데 箭串(전관)은 ‘살곶이’
立石浦는 지금의 성수대교 북단 응봉 아래쪽의 깍아지른듯한 岩石이 있는 곳.
頃(경)은 전답의 면적단위 一頃은 百畝(백묘), 一畝는 百步, 步는 坪, 즉 一頃은 萬坪. 劉伶(유령) 字는 伯倫, 晋의 詩人 술을 즐겼으며 玩籍(완적), 嵆康(혜강)과 교유, 竹林七賢의 한사람, 酒德頌의 作者, 그는 주덕송에서 ‘幕天席地(하늘을 막으로 땅을 자리로 삼다’라 하였다.
[감상]: 낚시터에서 갓 잡아올린 농어회쯤 안주하여 좋은 술에 흠뻑 취해 강가에 누어 明月을 바라보니 劉伶이 酒德頌에서 幕天席地라 읊은 심정 가슴에 와 닿아 卽吟한 詩이다. 大自然과 하나되는 醉中仙趣 아니런가


無 題

老境에 詩狂되니
술과 어울리면 더욱 미쳐버리지
醉中에 神仙되는 우와한 멋
진정 가히 없어라
그대의 집 술 익거들랑
모름지기 날 부르게나
하루에 千잔을 기울이며
人生百年 보내리라.

[감상] : 三灘公의 詩는 씹으면 씹을수록 단 맛을 더한다더니 과연 그렇도다. 어려운 말 하나 쓰지 않고 平淡하게 쓴 글인데 어쩌면 훈훈한 뒷맛이 이렇게도 오래갈까? 특히 끝귀 ‘日飮千杯 送百年’은 李太白의 ‘會須一飮 三白杯’를 능가하는 멋과 여운을 남기는 絶唱이 아닐수 없다.
이 시는 사위 學正 李孟思의 詩에 次韻한 詩인데 翁壻간의 훈훈한 情까지 담겨있다. 學正은 성균관 8品職.

 

매미그림에 붙여(題 畵蟬)

비 개인 시냇가 수양버들엔
파란 내 가로 껴있고
매미들 높은 가지에서
늦게나마 날개임 즐기며 노래하네
일평생 바람과 이슬만 먹고
깨끗하게 살 줄 스스로 아니
伯夷의 淸白함에 비길만 하네
古書앞에 香피우고 쓸쓸이 앉아
黃庭經(황정경) 內外篇 다 읽고나니
오직 자연의 天眞속에 빠져들어
말 나눌 상대없이
다만 그림 속에서
바람만 마시고 사는 저 神仙(蟬)과 마주 대할 따름일세.

[註] : 黃庭은 黃庭經, 道敎의 경서.
[감상] : 바람과 이슬만 먹고사는 매미의 깨끗함을 伯夷의 청백함에 비기고 道敎的인 無慾이 無我境에서 그림속의 風露神仙 매미와 상대한다는 詩畵一如의 仙風넘치는 詩이다.


매 화(梅花)

羅浮山 神仙이런가
눈 서리같은 하얀 자태
해 저문 싸늘한 하늘아래
대나무 가지에 기대있네

마지막 물총새 梅花 香氣속에서
아름다운 노래 부르다 그치고
뜰 가득 매화가지 성긴 그림자
달 서쪽 하늘에 기우러가네

[註] : 羅浮山은 廣東省 增城山 동쪽에 있는 산으로 그 산록은 매화의 명소로 유명하다. 라부산 신선이란 바로 梅花나무를 뜻한다.
[감상]: 눈이나 서리같은 淸楚한 매화의 자태며 달 아래 성긴 가지 그림자 고요한 대지위에 아른거리는 광경. 마음 가라앉히고 명상에 잠기게 하는 꿈같은 詩境늘 불과 28字로 멋지게 그려내고 있다.


題 畵屛(그림병풍에 붙여)
1. 騰王閣(등왕각)
山顚傑閣俯江堧(산전걸각부강연) 更向高秋敞綺筵(경향고추창기연)
座上何人揮彩筆(좌상하인휘채필) 盡收佳景八詩聯(진수가경팔시련)
강가를 굽어보는
산마루 웅대한 殿閣에서
드높은 가을하늘 아래
큰 잔치 벌렸구려
좌상에 고운 붓 휘두르는 이 누구이런가
아름다운 경치
모조리 붓으로 쓸어담아
멋진 詩句로 펼쳐놓았네.
[註]: 등왕각은 唐高祖 李淵의 아들 元嬰이 江西省 南昌縣의 洪州刺史로 있을 때
지은 전각인데 그때 원영은 勝王에 봉작되었으므로 등왕각이라 이름하였던 것이다. 그 뒤 당고조 咸亨2年에 閻伯嶼(염백서)가 洪州守護가 되었을 때 등왕각을 중수하고 구월구일에 빈객을 초대하여 큰 연회를 베풀었다. 염백서는 미리 그의 사위 吳子章에게 序文을 짓게하여 놓고 당일 연석에서 사위자랑을 하려고 하였다. 좌중의 빈객들에게 紙筆을 내어주고 등왕각 서문을 짓도록 청하였으나 아무도 지어내는 이 없었다. 이 때 最年少靑年 王勃은 아버지 王福畤의 任所인 交趾로 가다가 이 잔치에 참석하였는데 紙筆이 자기 손에 들어오자 一筆揮之로 써내려 간 것이 그 유명한 만고의 명문 ‘등왕각 서문’이며 다음 詩로 끝맺음 하였다.

騰王高閣臨江渚(등왕고각임강저) 佩玉鳴鑾罷歌舞(패옥명란파가무)
畫棟朝飛南浦雲(화동조비남포운) 朱簾暮捲西山雨(주렴모권서산우)
閑雲潭影日悠悠(한운담영일유유) 物換星移度幾秋(물환성이도기추)
閣中帝子今何在(각중제자금하재) 檻外長江空自流(함외장강공자류)

勝王의 高閣 강가에 臨해 있으나
몸에 佩玉 차고 수레에 방울 단
貴人들의 歌舞는 그친지 오래다.
아침에는 丹靑의 기둥에 나드는 남포의 구름
저녁이면 주렴밖에 흩뿌리는 서산의 비
한가로운 구름 물에 비추는 그림자
날로 유유한데
세사는 바뀌고 성상은 흘러
몇 춘추가 지났느냐
각중의 帝子는 지금 어느곳에 있는가
난간 밖의 장강만
하염없이 흘러가누나
[감상]: 삼탄공은 이 畵題에서 天才文士 王勃(왕발)이 승왕고각에서 강물을 내려다보며 一筆揮之로 名文名詩를 쏟아내는 광경을 곁에서 지켜보듯 생동감 있게 묘사해냈다.

2. 廬山瀑布
煙起香爐接五峯(연기향로접오봉) 飛流直下掛長紅(비류직하괘장홍)
驚雷殷殷鳴幽壑(경뢰은은명유학) 冷雨蕭蕭새半空(냉우소소새반공)

향로봉에 雲煙 이니
五老峯에 이어지고
나는 듯 떨어지는
긴 냇물 붉게 걸려있네
폭포의 우람한 우뢰소리
그윽한 골자기에 울려퍼지고
싸늘한 비(폭포수의 泡沫)
쓸쓸히 반공간에 뿌리네
[註]: 려산은 강서성 성자현 서북에 있는 山. 최고봉인 오로봉은 절경으로 이름남. 향로봉은 려산 서북에 있는 봉우리.

[참조]: 李 太白의 望廬山瀑布
日照香爐生紫煙(일조향로생자연) 遙看瀑布掛前川(요간폭포괘전천)
飛流直下三千尺(비류직하삼천척) 疑是銀河落九天(의시은하낙구천)

햇살 향로봉을 비추니
붉은 煙霧 일고
멀리 폭포수 바라보니
앞에 냇물 걸려있는 듯
나는 듯 三千尺을 곧장 흘러내리니
혹시 은하수 구만리 장천에서
떨어짐이 아닐는지

[감상]: 이태백의 廬山瀑布詩는 시각적인 면만 거시적으로 묘사하였으나 삼탄공의 시는 시각적인 면 뿐만 아니라 청각적인 면도 또한 폭포수의 포말이 사늘한 빗방울처럼 半空에 뿌려지는 섬세한 부분까지도 묘사하였다.

 

畫 四景

一江春水碧於藍(일강춘수벽어람) 江上靑山削玉簪(강상청산삭옥잠)
隔岸桃花開處處(격안도화개처처) 武陵桃園正難尋(무릉도원정난심)

山色空濛翠欲流(산색공몽취욕류) 村家依約樹陰稠(촌가의약수음조)
風帆萬里隨潮落(풍범만리수조락) 興入江南白鷺州(흥입강남백로주)

秋容如洗碧天高(추용여세벽천고) 楓落吳江湧雪濤(풍락오강용설도)
一陣西風吹正急(일진서풍취정급) 似聞山木響颼颼(사문산목향수수)

千林萬壑白皚皚(천림만학백애애) 天地中間絶點埃(천지중간절점애)
想得剡溪明月夜(상득섬계명월야) 有人乘興棹船回(유인승흥도선회)

사계절 풍경을 그림

봄 강물 쪽빛보다 푸르고
강가에 있는 푸른 산은 옥비녀 깍아놓은 듯
저 건너 강기슭 곳곳마다 복사꽃 피니
어드매 무릉도원이런가 진정 찾기 어려웠네

비 갠 뒤 산색은 푸르름이 흘러내릴 듯
마을 속 집집마다 약속이나 한 듯 녹음 져 우거졌네
물때 맞추어 순풍에 돛달면 만리도 금방 갈 듯
흥이 난 김에 강남의 백로주나 찾아볼거나

가을하늘 모습 씻은 듯 푸르고 높아
단풍잎 오강에 지고 파도는 눈발처럼 용솟음 치네
한바탕 서녁바람(추풍) 급히 불어오니
산골 나무들 쉬쉬 흔들리는 소리 들려오는 듯

千숲 萬골짜기 하얗게 눈덮이니
하늘과 땅 사이 티끌 한점 없어라
剡溪의 달 밝은 밤 생각에 떠오르니
뉘 있어 달밤의 흥 못이겨 노저어 돌아올까

 

題壻李學正藏 八畫二篇(사위 이학정 집에 있는 여덞 그림중 두편)

1. 伯牙彈琴(백아탄금)
松陰滿地坐彈琴(송음만지좌탄금) 流水高山趣自深(류산고산취자심)
物我從來同一理(물아종래동일리) 當時六馬亦知音(당시육마역지음)

지면 가득한 솔그늘 아래 앉아 거문고 타니
흐르는 물 높은 산 곡조에 담긴 뜻 깊기도 하여라
사물이나 사람이나 본래 이치는 같은 것.
곡조의 깊은 뜻 어찌 鍾子期만 알았으랴
당시 임금의 수레 끌던 여섯 말도 알았다 하네
[註] : 六馬-임금의 수레를 끌던 여섯 마리의 말. “六馬不和하면 造父(周나라 穆王의 마부로 말을 잘 부리던 사람)도 不能以致”란 말이 있는데 마음이 맞지 않으면 일을 할 수 없다는 뜻이다.
“流水高山”은 다음 글을 참조
列子曰 伯牙善鼓琴(백아선고금) 鐘子期善聽(종자기선청) 伯牙鼓琴(백아고금) 志在高山(지재고산) 子期曰 善哉(선재) 峨峨乎若泰山(아아호약태산) 志在流水(지재류수) 子期曰 善哉 洋洋兮若江河(양양혜약강하) 伯牙所念(백아소념) 子期必得之(자기필득지) 呂氏春秋曰 鍾子期死(종자기사) 伯牙破琴絶絃(백아파금절현) 終身不復彈琴(종신불복탄금) 爲無足爲鼓琴者(위무족위고금자)
‘열자’에 이르기를 백아는 거문고를 잘 타고 종자기는 듣기를 잘했다. 백아가 거문고를 탈 때에 뜻이 ‘높은 山’에 있으면 종자기가 말하기를 ‘좋구나 높고 높은지고 태산과 같음이여’라 하고 뜻이 ‘흐르는 물’에 있으면 종자기가 말하기를 ‘좋구나 넓고 넓은지고 江河같구나’라고 하니 백아가 생각하는 바를 종자기가 반드시 해독했던 것이다. ‘여씨춘추’에 이르기를 종자기가 죽자 백아가 거문고를 부수어 줄을 끊고 종신토록 다시는 거문고를 타지 않았다고 하니 누군가를 위하여 거문고를 탈만한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 글이 ‘知音’의 출전. 즉 知音은 음악의 곡조를 잘 안다는 뜻으로 ‘자기의 속마음을 잘 알아주는 친한 벗’을 이르는 말.

2. 太白邀月(태백요월-이태백의 달맞이)
寀石江頭艤酒船(채석강두의주선) 更邀明月上靑天(갱요명월상청천)
雖然江月兩奇絶(수연강월량기절) 爭似金鑾殿上仙(쟁사금란전상선)
채석강에 배대어 술 싣고 푸른 하늘에 떠오르는 달맞이 하러가네
강과 달 모두 기막힌 절경이지만 허나 강과 달은
금방울 울리며 殿上에 오르는 酒仙의 멋진 모습 하도 맘에 들어
다투어 닮으려 시샘하였다 하네
이태백은 한말 술에 詩 百篇, 마시다 취하면 長安거리 술집에서 잠들어 天子께서 부르셔도 배에 오르지 않고 스스로 일컬어 臣은 酒中仙이라 하였다네.

李白이 술꾼들과 시중에서 취해 술집에서 잠들었는데 白蓮池에서 宴樂中인 唐玄宗이 이백으로 하여금 樂章을 짓게 하려고 불렀다. 그러나 이백은 만취상태라 좌우에서 물을 뿌렸다. 自稱 臣是酒中仙이라 하며 이끌려 천자앞에 나아가 단숨에 十四章의 시를 지었다 한다.
[감상] : 三灘公의 詩는 겉보기엔 쉬운 것 같으나 故事가 담기지 않은 것이 거의 없어 古今을 왕래하며 깊은 상념에 잠기게 한다. 특히 종자기만 知音했으랴!
六馬도 知音했다며 物我一致 사상을 일깨워 줌이라할지 강과 달, 自然美의 극치이지만 萬物의 靈長인 사람의 멋이 보다 더 우월하다는 기상천외의 발상을 그려내니 참으로 상상력 풍부한 大詩人이다.


領議政朴文憲公行壯(抄)-영의정 문헌공 박원형의 행장

公의 諱는 元亨 字는 之衢(지구) 號는 晩節堂(만절당)이니 신라의 宗姓이다. 遠祖 三重大匡 諱 奇悟가 계림에서 竹山으로 이거하여 자손들이 연이어 번연하여 드디어 죽산의 大姓이 되었다. 曾祖의 諱는 文瑤이니 고려에 벼슬하여 通直郞 起居郞 知制敎에 이르고 純誠佐理功臣 匡靖大夫 政堂文學 藝文館大提學 知春秋館事 上護軍 竹山君에 追贈되었으며 祖父의 諱는 永忠이니 우리 태조(이성계)를 섬겨 原從功臣 正憲大夫 判漢城府事를 지내고 물러나 崇祿大夫 議政府左贊成에 추증되었다.
아버님의 諱는 翶(고)이니 通政大夫 兵曹參議를 지내고 純忠補祚功臣 大匡輔國 崇祿大夫 議政府左議政 延興君에 추증되었다. 어머니는 陽城李氏 通政大夫 判司僕寺事 澣(한)의 따님으로 貞敬夫人에 봉해진 분이다. 永樂九年辛卯(1411 태종11년)八月初十日己亥에 公을 낳으시니 총명함이 월등하였다. 네 살 때에 유모가 이웃집 책읽는 소리를 듣고 공에게 말하기를 ‘남자는 장차 반드시 책을 읽어야 하는데 네 일이 걱정이구나’ 하였더니 공이 말하기를 ‘남들이 모두 읽으면 나도 읽을 것인데 무얼 걱정하오’ 라 하였으니 공의 기지와 총명이 이와 같았다.
성장하여 학문에 나아가매 한번 보면 곧 외우고 詩文 잘하기로 소문이 자자했으며 특히 科文에 뛰어나니 지금까지도 과거공부를 하는 이 모두 전해 외우며 모범으로 삼고 있다. 아버지 연흥군이 두 번 귀양가니 공이 모시고 따라가 아침 저녁 곁에서 떠나지 않고 요리를 스스로 담당하여 가장 맛있고 영양있는 음식을 마련해 드리도록 전력하니 고을 사람들 칭찬하지 않은 이 없었다.
[註] : 李澣 陽城李氏 八世孫으로 侍中公 諱 春富의 第四子, 孫子에 세종조 최고의 천문학자인 靖平公 諱 純之와 曾孫에 刑曹判書 弘文館提學을 지낸 文質公 諱 芮를 두셨으며 박원형은 본문에 기술된 바와 같이 이 어른의 外孫이다.
世宗十四年壬子春(1432)에 司馬試에 합격하여 성균관에서 공부할 때 權採가 名儒로 大司成이 되어 공을 보고는 공의 도량과 능력을 퍽 존중하여 通鑑 綱目 宋元播芳 杜詩 등 서책을 주니 관중제생이 영광으로 여겼으며 이로부터 명성이 크게 떨쳤다. 甲寅春(1434)에 上께서 성균관에 납시어 先聖들을 뵙고 諸生들에게 친히 시험을 보였는데 公이 三等으로 뽑혀 啓功郞 禮賓直長 벼슬을 받고 여러차례 옮겨 宣敎郞 都梁暑令에 이르렀다. 丙辰(1436)에 아버지 延興君의 상을 당하니 禮를 넘을만큼 심히 슬퍼하여 몸을 상할 지경이었다. 아우 元貞과 三年 시묘하니 무릇 장례와 제사 법도는 모두 朱子家禮에 다라 행하였다.
戊午六月(1438)에 탈상하여 의금부도사가 되고 己未(1439)에 사헌부감찰로 正朝使의 서장관이 되어 북경에 가니 사신이하 모두가 공의 淸直함을 거려했다. 庚寅(1440)에 先務郞 承文院副校理에 오르고 辛酉(1441)에 병조좌랑으로 옮기고 壬戌(1442)에 承訓郞이 가자되었는데 임기가 차 바뀔 무렵 나라에서 長城을 쌓고 백성들을 城邊으로 이주시킬 때 兵曹사무가 몹시 바빠졌다. 判書 鄭淵이 공이 아니면 능히 다스릴 수 없다고 여겨 공을 머무르게 해달라고 특별 상계를 올렸다.
공이 판서의 거처로 들어와 일을 의논할 때면 판서가 반드시 얼굴 모습을 가다듬어 큰 손님 대하듯 하였고 물러갈 때에도 目送의 禮를 갖추었으며 ‘이 사람은 우리들이 한발짝 비켜주어야 할 사람이다’라고 까지 말한 적이 있었다.
伊川에 호종하였을 때 임금의 수레가 막 귀로에 올랐는데 돌아보니 行宮이 불에 타 화염이 솟구쳤다. 상께서 크게 놀라 공을 보내어 조사케 하였다. 공이 돌아와 아뢰기를 ‘밭갈이 하던 농부가 밭에 불을 지른 것이 뜻밖에 번진 것이었습니다’ 하니 상께서 공을 침실 안까지 불러들여 이르시되 ‘나는 백성들이 임금의 행차가 너무 자주 있어 이를 싫어한 나머지 불을 지른 것으로 여겼는데 이제 네 말을 들으니 안심이 되는구나 너의 명석함이 아니였으면 어찌 실정을 파악할 수 있었겠느냐’ 라 하셨다. 癸亥(1443)에 議政府 司僕提調로 임명되니 馬政을 능히 맡을 만한 사람을 천거할 때 모두가 공을 적임자로 지목했기 때문이다. 특별히 承議郞에 가자되고 司僕判官이 제수되었다. 이 해에 북경간 사신이 장계를 급히 올려 ‘우리나라 羅州사람이 표류하여 蘇州 杭州에 이르렀는데 중국 황제가 본토로 환국할 것을 명하였다 합니다’ 라 하니 상께서 공에게 명하여 羅州官吏가 상계하지 않은 죄를 국문하라 하시었다. 공이 가서 조사해 보았으나 처음에는 실정을 파악할 수 없었다. 再審해 본 결과 표류한 사람의 이름이 濟州사람과 같았다. 즉시 상계하기를 ‘이는 틀림없이 濟州사람인데 처음에 사실대로 고하지 아니했던 것입니다. 지금 敬差官 鄭光元이 濟州로 돌아가니 그로 하여금 실상을 조사케 하소서’라 하니 상께서 윤허하셨다. 공은 또 전라도 사람들은 遠行할 때에 반드시 錦城堂에 訴願狀을 바친다는 점을 상기하여 사람을 시켜 이 訴願狀을 모두 거두어 살펴보게 하였더니 한 訴願狀에 漂流人 이름이 나오고 특히 이 사람이 제주사람임이 확인되니 사람들 모두 그 神明함을 칭찬하였다. 표류인이 도착하자 상께서 ‘너 무슨 까닭으로 처음에 나주사람이라 하였는가’ 물으시니 대답하기를 ‘제주는 본시 중국땅이라 들었습니다 만일 사실대로 말하면 또 달리 추궁당할까 걱정스러워 그리 하였던 것입니다’ 라 하였다. 上께서 公을 불러 기뻐하시며 ‘너의 조사가 잘 이뤄졌다’ 라고 하시었다. 李思儉이 下三道牧場(충청 전라 경상의 목장)을 순찰할 때에 공을 추천하여 從事官으로 삼았다. 乙丑(1445)에 吏曹正郞 으로 전직되었다. 상께서 馬政을 중요시하여 다시 司僕判官을 제수하고 奉訓郞에 特加되었다.
[주]: 李思儉, 양성이씨 九世孫으로 靖節公 諱沃의 第三子 知中樞院事를 지냈으며 崇祿大夫 議政府左贊成 양성부원군에 추증되고 諡號는 恭昭이다. 朴元亨은 이 어른의 숙부의 외손자.
景泰二年 辛未(1451)에 文宗이 즉위하여 朝敬大夫司僕寺尹으로 특가되었다. 상께서 공을 중히 여겨 공을 이름으로 부른 적이 없으셨다. 壬申(1452)에 威毅將軍大護軍 知司僕院事 知製敎가 되고 癸酉(1453)에 中直大夫 守判僕寺事에 올랐다. 이해 十月에 世祖가 내란을 평정하고 공을 副承旨로 명하면서 宰相에게 이르기를 ‘朴아무개는 公事가 아니면 私門에 이르는 일이 없고(사사로이 나를 찾는 일 없고) 正道로만 다니는 사람이다’라 하였다. 물망에 오른대로 여러 벼슬을 거쳐 左承旨가 되었는 바 모두 知刑曹事를 겸하니 당시 죄를 논하여 아룀이 분명하고 진실하다는 칭을 받았기 때문이다. 乙亥(1455)에 세조가 왕위를 물려받아 都承旨에 오르고 推忠左翼功臣에 책훈되었으며 田80結 노비8口 白銀20兩 채단1表裏(겉옷과 속옷) 내구마 한필을 하사 받았다. 丙子三月(1456)에 공이 상계하기를 ‘매년 宰相과 耆老(70세 이상 정2품 이상의 문신원로)들이 3월3일과 9월9일에 宴會를 갖는 바 이를 耆英會라 하며 여기에서 마음껏 마시고 즐김이 오래전부터 내려온 관례입니다. 老臣들 여생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위로의 예의를 폐할 수 없사옵니다’ 하니 상께서 그 말을 쫒아 司僕寺에 명하여 날짐승을 많이 사냥하여 하사하도록 하고 공에게 술과 안주를 내려 후하게 위로하라 명하시니 이 모임에 참석한 원로들 모두 感泣하였으며 耆英會에 內相(도승지)을 파견함이 이로부터 비롯되었다. 壬午(1462)에 吏曹判書로 癸未에 禮曹判書로 옮겼으며 새로 弘文館을 설치하여 공이 大提學을 겸하였다. 甲申(1464)에 명나라 給事中 金湜과 舍人 張城이 왔을 때 공이 또 接伴使가 되었는데 湜이 篆書로 晩節堂이라 써주고 城이 記를 지어 이로 인하여 호를 만절당이라 하게되었다. 崇政大夫議政府右贊成에 오르고 예조판서를 겸하였다. 成化元年乙酉(1465)에 知成均館事, 丙戌(1566)에 義禁府判事를 겸직하고 모두 贊成도 겸하였다. 하루는 상께서 묻기를 ‘요즘 학자들 취향이 어떻한가?’ 공이 대답하기를 ‘상께서 자주 諸生들을 끌어올려 經書를 講하게 하니 이는 近古에 드문 일입니다. 그러나 九流(아홉갈래의 학파)의 서적을 講하는 자도 있어 학자들이 자못 孔孟之道 외의 길로 가는 의혹이 있습니다’ 라 하니 상께서 한참 묵묵히 듣다가 이르기를 ‘이는 나의 죄이다’ 하시고 또 盧思愼을 불러 물으시니 대답하기를 박원형의 말이 맞습니다 선비들 심지어는 佛書를 읽는 자도 있습니다’ 하였다.
상께서 또한 어느땐가 술이 얼큰하게 오르자 공에게 ‘내가 부처를 좋아하는 임금인가?’ 하고 물으시니 ‘그렇습니다’ 라고 대답하였다. 상께서 ‘梁武帝와 비교하면 어떻한가’ 라고 또 물으시니 공이 감히 대답하지 못하였다. 상께서 또 다구쳐 물으시니 좌우가 모두 불안해 하던 차에 공이 서서히 대답하였다. ‘전하는 양무제 처럼 捨道奉佛 하고 神에 빠지는 제물을 식물성 일색으로 하지는 아니하실 것입니다’ 라 하니 상께서 웃으셨다. 四月初에 大匡輔國 崇?相梭? 議政府右議政 世子傅(세자의 스승)를 제수하였으며 공에게 전라 경상도 목장을 살펴보고 아울러 경상도 굼비상황도 고찰해보라고 명하였으며 延城君으로 君號를 바꾸고 예조판서를 겸하도록 하였다. 丁亥(1467)夏에 咸吉道 이시애가 군중을 모아 역모를 꾸며 절도사 관찰사 수령 등을 모조리 죽이고 험난한 지형을 이용하여 반역하니 상께서 장수를 파견하여 토평케 하였으나 유언비어가 그치지 않고 반란군 측에 붙는 자가 많아 특별히 공을 파견하여 순무하게 하면서 말씀하시되 ‘백성들이 전쟁에 휘말려 유리,방황하고 있으니 구휼대책을 크게 펼치지 않으면 군민간에 사망자가 한없이 나올 것 같으니 경은 감사이하를 상벌함에 상황에 알맞도록 조치하되 반드시 나의 뜻을 물어 할 필요는 없느니라’ 하셨다. 戊子三月(1468)에 좌의정을 배수하였다. 四月에 明皇帝가 姜沷, 金浦 등을 파견하니 상께서 太平館에서 연회를 베풀었다. 연회가 파하자 更衣室로 가셨는데 공이 그 때에도 접반사직을 맡고 있어 사무보고하러 들어가던 차에 상께서 冠帶를 하고 있지 않음을 보고 머뭇거리며 어전에 나아가지 못하고 있었다. 상께서 이를 바라보시고는 곧 좌우에게 관대를 가져오도록 명하면서 ‘이 사람은 나의 波黯(漢武帝의 諫臣, 직간으로 유명함)이다’ 라 하시며 공에게 말씀하시되 ‘내가 좌의정의 높은 자리에 있는 경을 굽히게 하여 접반사의 낮은 직책을 맡게 하였는데 경은 이를 어찌 생각하오’ 하시니 공이 대답하기를 ‘신이 비록 내세울 만한 것 없는 사람이오나 三公의 벼슬자리에 있는 몸입니다.(그러하니 적어도 다음과 같은 사리는 알고 있습니다) 중국 조정에서 만약 조선의 좌의정이 접반사를 맡았다는 들으면 전하의 事大之誠을 더욱 믿게될 것입니다’ 상께서 ‘사람들 이를 바꾸고자 하였으나 내 굳이 듣지 아니한 것도
또한 이 뜻이오‘ 하셨다.
乙丑(1469)정월초팔일 저녁에 아들 安性을 등잔아래 불러 이르기를 ‘오늘이 너의 생일이니 나에게 祝壽의 잔을 올릴만 하구나’ 하며 絶句 한수를 부르니
今夜燈前酒數巡(금야등전주수순) 汝年三十六靑春(여년삼십육청춘)
吾家寶物唯淸白(오가보물유청백) 好把相傳無限人(호파상전무근인)

‘오늘밤 등잔앞에서 술을 몇순배 들며 생각하니
너도 이젠 36세의 청춘나이 되었구나
우리집 보물은 오직 ‘淸白’ 뿐이니
내가 너에게 줄 것 이 밖에 또 무엇이 있으랴
고히 간직하여 자손만대 무궁토록 전할지어다

하였는데 公의 詩가 바로 公의 마음이로다. 그달 二十二日 丁丑에 正寢에서 卒하니 五十九世였다. 부고 전해지자 상께서 몹시 슬퍼하시고 三日동안 저자와 조정을 닫고 禮官과 弔祭官을 파견하여 葬事를 감싸고 도왔다. 公은 품성이 엄격하고 무게가 있었으며 도량이 넓고 너그러웠다. 평소에는 말을 빨리하지 않고 느긋하고 태연한 얼굴빛이였으며 따듯하고 훈훈하여 사람들 모두 친해질 수 있었으나 큰일 에 임하여 큰 결정 내릴 때에는 의젓하게 정의롭게 위협에 굴하지 않고 이익에 흔들림 없이 우람한 바위처럼 범할 수 없는 기상이 있었다. 매양 어전에서 군신들이 문제를 논의할 때 각기 소견을 고집하여 시비가 날카로울 무렵 공이 천천히 한마디로 실정과 이치에 맞는 결정을 내리니 아무도 반대하지 못하였다.
비록 세조와 같이 활달하고 常規에 구애받지 않은 호걸이라 할지라도 관대를 하지 않고서는 공을 보지 못하였으며 심지어 나의 汲黯이라 까지 찬양하였으니 公의 사람됨을 가히 짐작할 수 있도다.


題 三灘集後(삼탄집 뒤에 부치는 跋題)

文筆은 국가의 氣脈이다. 사람이 기맥이 없으면 그 몸을 보존할 수 없어 病이 날로 깊어갈 것이요. 나라에 기맥이 없으면 그 기강을 잡을 수 없어 다스림이 날로 저하될 것이다. 이 때문에 옛사람들은 文章의 순수함과 조잡함으로 世道의 興衰를 가늠하였던 것이니 治世의 音은 조화롭고 평온하며 衰世(쇠망해가는 세상)의 音은 衰傷에 차고 답답하며 亂世의 音은 원망이 턱까지 치밀면서도 표현하지 못하나니 이는 사람의 가슴속에 쌓여있는 것은 가릴 수가 없어서 呻吟(신음)하거나 글을 읽으면서도 읽기만 하고 듯을 몰라 답답해하는 心情들이 부지부식간에 言語와 文字 사이에 나타나기 때문이다. 公은 文治의 全盛期 에 詩文짓기를 배워 詩와 文의 어느쪽도 부족함이 없이 넉넉하며 同輩들보다 월등하게 뛰어나 四佳亭 서거정, 乖崖 김수온, 私淑齊 강희맹 등 三大家와 한 時代를 함께 달리며 名聲이 서로 오르내렸지만 문학의 여러 분야와 流派를 集大成한 면에 이르러서는 세 분 모두가 公을 으뜸이라 칭하였다. 나는 後進으로 공의 문하에서 공의 훌륭한 빛을 받들며 공의 餘香을 은혜 입음이 하루 이틀이 아니었는 바, 공의 몸가짐과 행동은 한가로우면서도 우아하시고 風貌는 白玉, 白雪처럼 하얀 光彩를 발하여 마치 神仙界에 사는 사람과 같았다. 사람들이 敬慕하여 精鍊된 金이나 美玉과도 같은 公의 一言半句라도 얻으면 모두 읊조리며 玩賞하여 손에서 놓아버릴 수기 없었다.
애석하도다! 사람이 떠나면 주변의 사물도 함께 가버리고 그 멋진 풍류와 담론도 다시는 접할 수 없음이여! 다만 없어지지 않고 남는 것은 오직 메아리 번지는 遺作 뿐인데 전술한 三代家의 詩文은 모두 선발의 혜택을 입어 이미 세상에 간출되었지만, 오직 공의 작품은 收錄하는 이 없었으니 어찌 識者의 큰 한탄이 아니랴! 이제 公의 詩稿 若干帙을 보니 온화하고 담백하며 넉넉하고 훈훈하며 語句 한 걸음마다 윤택하고 大篇은 태연 침착하고 短韻(짧은 시)도 정밀하고 아름다워 이를 읽으면 마치 사탕수수를 씹듯 씹을 수록 그 맛을 더하고 야들야들하여 싫증이 나질 않는다. 그 시를 보면 공의 높은 理想을 想起하게 되고 공의 마음을 느끼게 되는도다. 다행히 없어지지 않았던 것을 널리 들추어내어 간행하게 되면 그 아름다운 소리 笙簧(생황)이나 큰 종소리처럼 사람들 귀에 울려퍼질 것이고 사람들 입에 膾炙되어 儒道를 닦는 後生들로 하여금 그 위대한 본보기를 우러러 바라보며 詩經의 雅(아)와 頌(송)같은 正樂을 짓게되리니 국가의 氣脈을 북돋는데 기여하는 바 적지 않으리라
弘治 壬戌(1502년 연산8년)九月下旬에 昌寧 成俔 謹書하노라.
[註] : 成俔은 조선 성종때 예조판서 공조판서 대제학을 지내고 慵齊叢話(용제총화)를 지은 학자. 용제총화는 조선초기의 정치, 사회, 제도, 문화를 두루 살피는데 필수 불가결한 중요한 문헌.
西紀 二千三年癸未秋  李民成謹譯

출처 : 문화사랑 오솔길
글쓴이 : 맥결 이영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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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이 좀 많은 자료입니다.

고사나 어휘에 관한 좋은자료같아 올립니다.

출처는 잘 모르겠으나 좋은자료인것은 틀림없지요.

한문공부에 도움이 되시길 바랍니다.
출처 : 서예세상
글쓴이 : 中齋 申允九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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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건의 주체 추종자들과 ㅇㄴ터넷상에서 어지간히 다투었다.



                                               국새(國璽)



                                                                                  대의 사기꾼   민홍규 作


 

 ‘대한민국’ 4자의 마지막 ‘국’자의 받침 ‘ㄱ’을 두 획으로 나눠 쓴 것이 심사위원 10명

전원에게서 높은 점수를 받았다. 전통 동양사상에서

20획은 ‘파괴’ ‘파멸’을 뜻하고, 

21획은 ‘만물이 평안히 자라남’을 상징하기 때문”이란다.


1.  한글의 劃數로 오행상의 숫자로 길흉을 판단하는 동양사상의 출발은 언제 누구로부터

시작 된 전통사상인가?  이해할 수 없는 궤변이다.


2.  ‘대한민국’ 획수가 20획이라 파멸의 의미가 있다고? 억지로 국새에 21획을 만들어 놓으면

     국운이 평안해지겠는가?


3.  본질적으로 동양사상을 도입한다면 20획인 ‘대한민국’ 국호 자체를 “만물이

평안해지는”21획으로 바꿔야 할 것 아닌가?

 

 

                         (    21획  ----   태한민국. 대한만국? ㅎㅎ   )


4.   세종대왕 이후로 “ㄱ"자가 2획이 되는 꼴은 前代未聞이다.

                                                                  예술적 가치를 모른다 할 것인가? 


5.   이시대의 “전통 동양사상가들”은 모두 휴가 중인가?

                                                                        아니면 그들 또한 같은 생각일까?


 

6.   새로운 “한글 作名學”의 시대가 ? 열리려나보다.

 

 

7.조금이라도 솟은 부분이 보인다면

 

 

 

보도내용에 따르면 당선작의 “국”자의 “ㄱ”자는 발표당시 동양사상 운운하며 분명 2획으로 충 21획으로 했다고 발표했다.


 

전대미문의 "ㄱ"자를 2획 만든 제작의도에 대한 논란이 일어나자

행자부는 해명에 나섰는데

작가는 마지막 글자인 '국'자에 힘을 받쳐주기 위하여 한 것이나 2획이라는 논란의 소지가 있으므로, 작가의 창작성도 존중하고 2획으로 보이는 점도 보완하기 위하여, '국'자의 받침 'ㄱ'부분의 약간 솟아있는 부분을 보다 완화하여 일부 수정하기로 하였으며, 향후 국새의 글자 획수에 대한 문제는 논의하지 않기로 하였음


“'ㄱ'부분의 약간 솟아있는 부분을 보다 완화하여 일부 수정하기로 했다”지만

끊어짐이 없이 각지게 제작되지 않고 조금이라도 솟은 부분이 보인다면 

제작자가 의도한 2획 說의 미봉책에 불과하고  불난의 여지는 계속 될 것이다.

또한

“작가는 마지막 국자의 힘을 받쳐주기 위하여 한 것”이라고 말을 바꿨다.

구차한 변명에 불과하다.  

아무리 미술, 전각, 도형, 건축등의 문외한이라도 첫눈에 잘 못된 이론임을 확인할 수 있다.

도형상 힘을 받쳐주는 것은 안정감을 바탕으로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아래


왼쪽 그림을 자세히 보면 “국”자의 “ㄱ"모양은 대들보 역할을 하는 가로획이

기둥의 옆에 붙어있는 것처럼 보여서 힘을 느끼기는커녕 “국”자가 무너져 내릴 것 같은 불안한 그림으로 보인다.

 



 

그   후




21획은 ‘만물이 평안히 자라남’을 상징하는 전통 동양사상이라구?

으 ! ㅎㅎㅎ

                         21세기 박쥐 이빨 가는 소리

                                                            강은 썩고 

                                                                  뒤집히고

                                                                         백조는 날아갔다.



혁대 조이기는 배고플 때 하는 행동이다.  어떤 다짐의 의미이다.   

                          よし요시 =   よし 오냐 !.   よし니들 두고보자 !

혁대의 의미는 여기서도 보인다.


밥공기 혁대 그리고  J e s u s 예수 이니셜일까?


                                  장노님  쿼바디스 도미네요!



                                         https://youtu.be/I5s-Efu0unQ?t=17m30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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