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db.history.go.kr/item/level.do?levelId=ma_016_0270_0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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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숭산 수덕사 경내에 있는 푯말
 
수덕사 일주문에서 약 400~500m 정도 가면 길옆에 이런 푯말이 보이는데 곧 바로 가면 대웅전과 여
승방인 견성암이 나오고 왼쪽 샛길로 접어들면 일엽스님이 삭발하고 수도 했다는 환희대(歡喜臺)가
나온다
 
환희대(歡喜臺) 와 마주보고 있는 원통보전(圓通寶殿)
 
원통보전은 건축한지 얼마되지 않는 수덕사 부속건물인데 현세의 부처님인 관세음보살상을 모신 전
각이다. 앞에 검은 돌에는 '환희대'라고 새겨져 있고 바로 그 앞으로는 일엽스님이 삭발 수도 했다는
환희대가 자리잡고 있다
 
환희대와 마주보고 있는 원통보전
 
원통보전앞에서 바라 본 환희대
 
견성암에서 환희대로 내려왔을때는 잠시 소강상태를 보이던 비가 다시 갑작스레 퍼붓기 시작했다. 저
앞에 원두막처럼 생긴 정자는 이곳을 방문하는 사람들은 누구나 다 들어갈수 있는곳인데 마음을 비우

는 장소이다  

 
일엽스님이 출가당시 머리를 깍았다는 견성암 - 환희대(歡喜臺)
 
일엽스님은 1928년 33세 되던해에 불가에 들어 1933년 38세 되던 해에 만공스님을 만나 저곳에서 삭

발하고 수도 생활을 했었다고 전해진다

 

 1928년 33세에 출가를 했다고는 하나 수덕사 견성암에서 본격적인 수도생활을 하기 시작한것은

1933년인 38세때의 일이었던것으로 보인다
 
요즘의 38세라고 하면 새로운 출발을 해도 될 나이겠지만 70년전 당시의 38세라면 할머니란 소리를

들었을지도 모르는 나이다. 여튼 당시의 상황에선 일엽스님의 출가는 아주 늦은 시기 였었다

 

일엽스님이 처음 입산했을 당시가 33세라면 만공스님의 세수는 58세였고

삭발했던 해가 38세 였다면 당시 만공스님의 세수는 63세가 되었을 것이다  

 

일엽스님과 나혜석 이야기가 담겨 있는 에세이집 - 1980년 문학창조사 초판 발행본
 
김팔봉(김말봉?)이 본 일엽스님 이야기 - 1980년 문학창조사 초판 발행본
 
1980년 문학 창조사 초판 발행본에 소개된 김팔봉(김말봉?)씨 약력
 
한국 최초의 여성 장로(長老). 소설가. 1901년 음력 4월3일 부산 출생. 부산 일신여학교(현 동래여고
박순천 여사와 동창) 서울 정신여학교 졸업. 황해도 명신학교 교사로 재직후 일본에 유학하여 1927년
경도 동지사대학 영문과 졸. 이때 시인 정지용과 함께 수학. 1929년 중앙일보 기자. 1933년에 중앙일

보(구) 신춘문예 단편 망명녀(亡命女)가 당선 문단 데뷔....이하 생략   

 

 1962년 초판 발행본, 김일엽 스님의 '청춘을 불사르고'

 

 이 책은 당시 김일엽의 대표적 저서이자 그 당시 베스트 셀러였던 초판 발행 원본이다

책은 내가 아는 어느 집의 이삿일을 도와 주고서 창고에서 굴러 다니는것을 가져온것인데 

 사진에서 보듯이 이 책은 문선각에서 발행을 했고 이중 케이스로 되어 있다 

 

김일엽 스님 출가 당시 수덕사 대웅전에서 찍은 사진
 

이 사진도 1962년도에 발행된 '청춘은 불사르고'의 책자에서 디카로 찍은 사진이다

신여성 일엽은 당시 사회적 국민윤리에 도발하는 대담한 글과 처신으로
세간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숱한 화제에 오르기도 했다
 
그 당시 일엽은 구 시대의 낡은 관습에서 억압받고 주눅들었던 여성들을 대변하여
투철한 자기정신으로 자신의 목소리를 냈던 사람이다
 
그런 치열한 정신으로 구시대의 낡은 관습의 벽을 허물고자 안간힘을 다 하였으나
여자라는 인간적인 한계와 당시의 완고했던 현실의 벽을 넘어서지 못하고 고뇌할수 밖에 없었다
 
활화산처럼 활활 뜨겁게 타오르던 정열이 다 소진되어 허탈해 하고 있을때
수덕사의 만공선사라고 하는 선지식을 만나게 되었고 만공선사로부터
영원히 꺼지지 않고 사는 큰 가르침을 얻게 되어 불가에 입문하게 된다  
 

일엽스님이 출가당시 머리를 깍았다는 견성암 - 환희대(歡喜臺)

 

한국 최초의 비구니 선방인 견성암(見性庵)이 누가, 언제, 무엇때문에 환희대(歡喜臺)로 슬그머니 이
름을 바꾸었는지 그 내력은 알 수는 없지만 죽음조차 두려워하지 않는 연애끝에 훗날 자신이 쓴 인생
회고록처럼 청춘을 불사르다 간 곳이었으니 어쩌면 환희대란 이름이 더 어울렸었을른지도 모르
일이다  
 
환희대(歡嬉臺)에서 바라본 원통보전(圓通寶殿)과 마음 비우는 원두막
 
환희대 옆의 해우소
 

 수덕사 견성암 

 

견성암은 1900년대 초 만공스님 당시 덕숭산 중턱의 정혜사 오른편 작은 산채에서 시작했다고 하는
그 당시에는 아주 작은 규모의 초가집이었다고 한다. 그 초가집이 비구니 선방으로 자리를 잡으면서
주로 비구니들의 수행처가 되었다는데 김일엽스님도 그곳에서 수도를 했었다고 전해진다
 
그러니까 수덕사 산내의 견성암(見性庵)이 창건될 당시에는 초가집에서부터 시작해 함석집, 기와집
으로 증, 개축을 거듭해 오다 1960년대 후반에 이르러 사진에서 보시는 바와같이 지하 1층, 지상 2층

의 석조건물로 자리를 잡았던 것이다. 1900년대 초 만공스님 당시 창건한 이래 6십 몇년만의 일이다

 

한데 저기 오른쪽에 자리잡고 있는 부속건물은 최근에 지어진 건물이다  

 

출처 : 비단장수 왕서방 이야기
글쓴이 : 나먹통아님 원글보기
메모 : 수덕사 견성암(환희대) 일엽스님 그는 누구인가 ?
1별건곤 제65호1933-07-01다구진 處女市長잡저 원문제공
2삼천리 제6권 제7호1934-06-01내가 서울 女市長된다면?黃愛施德설문 원문제공
3삼천리 제6권 제7호1934-06-01내가 서울 女市長된다면?禹鳳雲설문 원문제공
4삼천리 제6권 제7호1934-06-01내가 서울 女市長된다면?張德祚설문 원문제공
5삼천리 제6권 제7호1934-06-01내가 서울 女市長된다면?李善熙설문 원문제공
6삼천리 제6권 제7호1934-06-01내가 서울 女市長된다면?羅蕙錫설문 원문제공       
7삼천리 제6권 제7호1934-06-01내가 서울 女市長된다면!金慈憙설문 원문제공
8삼천리 제6권 제7호1934-06-01내가 서울 女市長된다면?金仙草설문 원문제공
9삼천리 제6권 제9호1934-09-01女市長 選擧설문 원문제공
10삼천리 제8권 제1호1936-01-01十萬圓의 朝鮮舘經營하는 金珊瑚珠女士(女社長을 차저)대담·좌담 원문제공
삼천리 제7권 제6호  
발행일1935년 07월01일  
기사제목一問一答集  
기사형태설문  

一問一答集            

 

朝鮮에 女傑이 잇서요? 新聞社나 學校를 맛길 만한...
金東仁-女傑이라면 政治上으로 말하여야 할 것이나 그런건 말할 수 업슬지며 新聞社長이나 專門學校長을 맛길 만한 뛰어난 여성이 내 눈에는 아니 보여요.
李仁-金貞仁 王在德 等女流 敎育家가 결국 女傑이겟지.
李基世-女傑이라고. 업다고 봄이 올켓지. 男傑도 업는데 女傑이 무슨 女傑이여요.
金岸曙-업지요. 다 男子 以下지요.
朴昌薰-醫學上으로도 大腦가 낫지 못하대요.

 

연애결혼 못한 것을 後悔하지 안슴니까
朴昌薰-나는 연애결혼 못한 까닭인지 남들이 연애하다가 장가드는 것을 보면 몹시 부러워요.
李基世-저이끼리 조와서 결혼한 것을 연애결혼이라면 나도 연애결혼 터이니 더 부럽지 안어요.
金東仁-연애결혼이나 그저 결혼이나 별차이 업겟지요.
李仁-사람의 행, 불행은 연애결혼 여부에 잇는 것 안이니까 생각하면 별로 후회가 안나오.
金億-후회해 본 적 업서요. 나도 연애결혼 측에 드니까요.

 

조선 녀자의 지식수준을 外國에 比한다면
李仁-安南女性이나 一般이겟지요.
朴昌薰-未開人種은 아니지요. 文明民族의 수준에는 올*지요.
金東仁-교양이 대단이 놉지요. 더구나 여자를 佩物視하는 米國社會에 비하면 지위도 인격도 지식도 확실히 우이지요.
金億-얼골노 보아서도 安南 印度보다는 월신 進步햇지요.<109, 111, 113
삼천리 제8권 제1호  
발행일1936년 01월01일  
기사제목藝術家로서 世界에 나가면 무엇을 보고 도라올가  
기사형태설문  

 

 

 

藝術家로서 世界에 나가면 무엇을 보고 도라올가

음악 「波蘭樂聖 쇼팡을 맛나고저」
-延禧專門學校敎授 玄濟明
三千里誌에서 필자에게 向日 만약 필자가 세계일주를 한다면 어디 어디를 가보겠느냐? 대답인 즉 매우 어려운 대답이다. 地理式 대답이라면 그래도 낙제나 면할지 모르나 그래도 필자가 理想한 바가 있다면 그것을 내놓아야 할 것이니 그러한 空想이라도 하여보지 못한 나로서는 난처한 일이다. 그러나 이러한 기회에 꿈같은 이야기라도 해보는 것이 그리 손해될 것은 없으리라고 본다. 그러하다고 멍텅구리 세계일주 만화처럼 얼토당토 안는 虛榮說을 버려놓을 것도 아니다. 만약 내가 세계를 도라다닌다고 假說하면 내 전문이 음악이니만치 유명한 樂團音樂都市 音樂舘 音樂家들을 만나도 보고 또는 일즉이 세상을 떠난 유명한 樂聖들의 묘지를 찾어도 보겠고 또 그네들이 생존 時<172> 머물러 있던 집이라던지 로맨스가 얽힌 그곳을 내밟아보고 싶으며 따라 내가 연구하는 방면에 견문을 넓히고 깊은 경험과 배움을 더하려고 노력할 것은 물론이다. 그와 동시에 내가 보고싶고 만나고 싶은 處所와 인물을 여기 좀 記하여보려 한다. 그 광채나던 음악의 나라 露西亞는 그저 지내가고 말 것이다. 볼카호수가에서 배끄을던 그 노래는 아마도 지금은 그곳에서는 못드를 것이며 배끄으는 그네들을 보지도 못할 것이니 西伯利亞로 가던 그네들이 눈 우에서 잠을 잘 때 주린 창자를 쥐고서도 오히려 그 사슬을 흔드러 악기삼아 리즘을 맨들고 노래하던 그네들은 다 가버리고 그 音樂狂들은 가버리고 그 子孫들은 오늘날 무엇들을 하고 있는지! 내 무식하야 알 길이 없지마는 오늘에 露西亞는 음악의 露西亞는 아니다. 그리하야 過客으로서 지나갈 뿐이다.
내가 좋아하는 波蘭! 쇼팡이 난 波蘭! 파드럽스키가 난 波蘭을 가보고 싶다. 그리고 파드럽스키 前大統領을 만나고 싶다. 대통령보다도 波蘭에 救主인 피아니스트 파드럽스키를 여기서 만나보고 싶다는 것이다. 筆者在米時 數次 演奏會末席에서 본 일은 있으나 波蘭 땅에서 그를 보고 그 人格을 배우고 싶고 그 예술을 배우고 싶다는 것이다. 波蘭이 아니면 파드럽스키가 없었을 것이오, 파드럽스키가 없었든들 波蘭이 어찌되엿을고, 위대한 음악가 파드럽스키.
과거에 많은 樂聖들을 낳아준 獨逸, 匈牙利와 山水가 美麗하고 노래의 나라인 利太利를 나는 또한 사랑하며 가볼 만한 곳이니 序論에 말한 그 조건 만으로이다. 그 外로는 오히려 나치스 파시슴의 권력들의 폭행이 내 눈에는 보기 싫은 것이다. 다음으로는 자유의 나라 그보다도 세계음악가들의 活舞臺인 米國을 들어선다면, 뉴욕, 시카코, 兩大都市는 세계를 縮圖한 것으로서 他方面도 물론, 음악으로는 총 집합처, 過하게 말한다면 세계음단에 총 本營일 것이다. 세계적 樂家들이 이 米國에서 성공을 하고 못하는 데 따라서 세계적 地盤을 세우고 못세우는 대 있다고 생각이 된다. 여기서는 어떠한 유명한 대가들을 다 볼 수 있읍니다. 근본문제로 도라가 만약 내가 다시 간다면 내가 존경하고 숭배하는 두 선생을 만나보고 싶으니, 즉 그라부氏와 크라이슬러氏다. 發聲學者로 3옥타부 이상의 聲域을 가지고 뻬이스나 테너-를 무난히 노래를 하며 과학적 발성에 최고봉인 氏의 독특한 연구를 알아보고 싶은 것이다. 벌서 8,9년 전이다. 氏를 잠간 만난 일은 있으나 오랜 기회가 없었슴이 늘 遺憾이었던 것이다. 유감을 언제나 풀고저 누구나 다 아는 提琴大家 크라이슬러氏 나는 氏의 연기를<173> 숭배함보다 그 인격을 숭배하는 바이므로이다. 여기서 새삼스럽게 그의 사생활을 들어 인격을 증명할 것은 없지만은 예술가로서 가지기 어려운 順厚히고 겸손하고 검소하야 愛他主義 그 모든 도덕적 인격, 또는 예술가로서 있어야 할 예술에 대한 인격을 내 찬양하오며, 철학자인 그로서 예술가로서의 훌륭한 그 분을 내 다시 仰慕하는 바이므로서이다. 여기서 발길을 옴겨, 과거에 내가 정 깊든 시카코를 가서 모교와 은사들과 나를 援助해 주던 親友들을 만나고 내가 뛰놀던 곳들을 다시 가보고, 그네들에게 은혜에 한끝이라도 갚고 싶은 것이다. 이로서 다시 이 땅의 강산을 찾어든다면 새로운 내가 될까? 그리하야 北岳山 밑에서 울리우는 우리 고유에 음악을 내 다시 가지고 세계공*인 그 음악을 이 땅에 퍼치우려.
영화 「찝푸링」과 그 예술을 보고저
-羅雲奎
너무 막연한 이야기를 쓰라 하시니 대답하기도 아뜩합니다. 가고싶나, 보고싶다는 데가 한 두곳이겠읍니까, 그러나 그 마음도 時時로 변해 갑니다. 南政文學에 醉하였을 때는 地中海邊을 낱낱이 뒤지고 싶었고, 톨스토이를 좋아하던 때는 로시아도 퍽 그리워 했읍니다. 그러나 요새는 실현되지 못할 空想으로 밤을 새일 나히는 지났으므로 별로 그런 생각은 아니합니다만 지금 갈 수 있다면, 에디오피아에 가서 발 벗은 兵丁들이 싸움하는 구경이나 하고 싶습니다. 그 다음에 旅費나 넉넉하면 아메리카로 건너가 영화 村으로 드러가서 한 5, 6개월만 마음대로 구경이나 했으면 좋겠읍니다. 전에는 獨逸로 퍽 가고 싶었는데 히틀러氏의 「나치스」狂風이 떠도는 판에 재주있는 사람이면 거반 외국으로 가버렸다는 말을 드른 다음에는 독일영화계도 쓸쓸할 것 같습니다. 한 시절 제일 좋아하던 콘란트화이드도 지금은 英國에 가 있다니 독일 갈 마음이 더욱 없어졌읍니다. 그래도 하리우트는 그리운 사람이 꽤 많어요. 챠푸링같은 사람은 꼭 한번 만나보겠읍니다. 제일 먼저 묻고 싶은 이야기가 수십년 功을 드려 專賣특허권을 얻은 수염을 히틀러에게 빼끼고, 웨 가만있느냐고 그 일이 제일 궁금합니다. 다음은 그가 出演할 때에 차리는 모양이 (中山帽, 스데끼, 해진 예복, 뚜러진 구두 假紳士, 다시 말하면 속은 비고 형식만 차리는 어부류에 인간들을 비웃는 차림차리라는데 아무렇게 보아도 그것은 19세기말에나 볼 수 있는 紳士지요. 새 거리에서 볼 수 있는 紳士는 아니다. 처음 그가 출연할<174> 때에 신사들은 그랬을른지도 모르나, 요새 거리에 나타나 가진 害毒을 다 끼치는 假紳士들은 그런 모양으로 나타나지 안는다. 모자도 다르고, 양복도 다르다. 그러니 시대를 따 서 의상도 고쳐야 될 것을 아직까지도 그 옷으로 뼛틔려는 그 고집을 버리라고 손목을 꼭 붓잡고 타일르고 싶다. 그래서도 듣지 아니하거던 朝鮮사람이 모여준 돈 100만원을 도루내라고 해서 찾어오면 其中에 내가 찾을 돈도 2,30원은 있을 것이다. 다음에 만나야 될 사람은 죤 바리모어. 그곳서 백이는 寫眞은 많다는데 이리로 오는 寫眞은 하나도 없으니, 웬 일이냐고 무러야겠다. 물론 이렇게 대답하히라. 「내 사진은 권리금이 비싼데 그 돈을 주고 사가서는 收支가 안만는다고 안사가는 것이니 난들 어떻게 하우」하리다. 그러나 그것은 모르고 하는 말이다. 죤 바리모어를 朝鮮사람이 좋아하기는 씨-비스트(海의 野獸」 다. 線이 굵고 熱있는 演技가 朝鮮사람의 심장을 울렸다. 그후에 그는 작품마다 거이 다 低級興行價値를 구하려는 美男子役으로 출연했다. (마논레스코 론판, 내가 만일 왕자이었더면) 50된 남자가 힌 분을 바르고 나와서 20세 청년의 흉내를 낸다고 되는 법이 아니다. 그래서 여러 번 속은 朝鮮觀客들은 그를 버렸다. 아직도 무대에 나서 하물넷을 하면 1年滿員은 틀림없다는 인기니 權利金은 비싸리라만, 朝鮮에다가 사진을 또 팔아 먹으려거던 「海의 野獸」같은 것을 백여 보내면 틀림없이 나도 50전하나는 人場料로 쓰겠다고 단단히 일러야 겠읍니다. 돌아오는 길에 「하와이」에 들러서 朝鮮寫眞 중에 제일 잘못된 것을 그곳 있는 형제들에게 구경시키고, 조선서는 男俳優나 女俳優가 다 생활난으로 얼굴빛이 이렇게 나뿌니 그곳에 있는 대표적 미남미녀로 열사람씩만 同情해서 조선에 보내주면 외국으로 보낼 영화를 만들겠노라고. 事情하면 드를 듯도 한 일입니다. 東京 京都는 지나던 길에 들러서 그곳서 變名해 가지고 「中村」니 「田村」니 하고 조선사람이라는 것이 알려지면 10원짜리 撮影所 심부름군 자리가 떨어질가바 벌벌떨* 硏究(?)하시는 분들에게 「朝鮮映畵界가 貧弱하다」는 타령만 말고 와서 일 좀 가치 해보자고 부탁이나 해놓고 돌아올까 합니다. 정말 자미있는 이야기는 정말 여행을 하고온 때에 쓰겠읍니다. 언제 떠나는냐구요? 세계일주할 여비를 모으려고 「벙어리」한 개를 오늘 사 올 작정입다.
무용 「미라노」의 스카라座를 보고저
趙澤元
무용행각으로 세계일주를 떠나자면 먼저 조선 정서가 농크한<175> 조선의 고전무용을 현대 우리들의 감정에 맞게 고쳐 가지고 그것을 서양음악의 반주로 가장 자미있다고 생각하는(僧舞劍舞) 몇몇가지 무용을 질머지고 세계를 유람하는데 서양무용으로는 감히 그들과 억개를 겨눌 수가 없겠기에 돈 없는 우리들의 거름이니만큼 버러가면서 길을 떠나고져 한다.
먼저 압록강을 건너 넓고 넓은 만주들판에 좋은 공기를 담북 드러 마시고 머리로부터 발끝까지 깨끗하고 순진한 기세로서 먼저 신흥로서아에 발을 듸려놓아 그 옛날의 로시안바레(Rusian Balett)로 유명하던 제왕시대의 모스바를 찾어 한 조각 남은 그림자라도 찾어 옛 테크닉크로만 되여 있던 무용을 보기라도 하고 내가 가장 좋아하며 목적으로 삼는 독일로 발을 옴겨 그곳에서 적어도 2년간은 우리의 선구자인 메리웨크멘 무용연구소에서 신흥중앙파무용을 여사에게 지도받으며 연구하고 싶다. 화려하며 기술을 본위로 한 무용도 좋겠지만. 옛날처럼 자기 일생을 기술로만 보내던 시대와는 다르니 내용을 충실이하며 과학적이며 심장에 밑까지 찌를 수 있는 심각한 무용을 이곳에서 연구해가지고 불란서로 건너가서 힘주었던 독일생활을 위로하기 위하야 찬란무진한 「파리」에서 머리를 쉬여가는 일편 조그마한 극장에나마 출연하야 우리의 무용을 소개하는 동시에 도라올 노자와 이태리와 스페인에 가서 구경할 미천을 한주머니 만드러 가지고 이태리 미라노에 드러가 세계에 자랑꺼리인 쓰카라座한 귀퉁이에서 그들의 힘찬 노래에 귀를 씨처가지 스페인에 건너가 투우(鬪牛)와 캬스타녯도의 「칵텔」에서 스페인의 정령을 맛보아 가지고 (영국은 신사 외에는 볼 것 없다기에 슬적 빼고) 취한 김에 쟈쯔와 돈으로 세계를 정복하는 미국에 건너가 마음껏 보고 듣고 뛰고 한 연후에 태평양을 한숨에 건너 다시금 내 고향인 조선에 도라와 세계의 참된 무용을 가지고 남에게 뒤떨어진 조선의 대중과 무용아들을 위하여 새로운 힘이 되여나 보련다.
극장 寶塚劇場이나 볼가
東洋劇場主 洪淳彦
물으신 말슴에 대답하기 전에 먼저 말슴드릴 것은 나에게는 아직 세계일주할 만한 시간의 여유도 없읍니다. 따라서 米國의 누구 獨逸의 누구를 만나겠다는 계획도 없읍니다. 그래서 나 자신이 실행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푸랑을 말한다면 내년 봄쯤 東京을 가서 松竹의 白井會長을 만나서 日本興行界의 선구자, 또는 개척자로서의 辛苦談을 듣고, 그 다음으로는 寶塚의 小林社長을 만나서, 일본흥행계에 대한 明日의 포부를 듣고 싶은 것이 나의 솔직한 생각입니다.<176>
<172-176>
삼천리 제8권 제12호  
발행일1936년 12월01일  
기사제목다시 젊어지고 십흔가, 文士心境  
기사형태설문  

 

 

 

다시 젊어지고 십흔가, 文士心境
            

 http://db.history.go.kr/item/level.do?levelId=ma_016_0600_0390


(가) 조선사람 二千萬名中 先生은 大(체*)로 몃재번에나갈 행복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심니까
(나) 先生의 作品을 읽어 주는 讀者는 대(체*)로 몃사람이나 되리리고 推想하심니까 해마다 몃名程度로 느러가리라고 생각하심니까
(다) 先生은 다시 한번 젊어저서 다시 한번 熱熱한 戀愛를 하고십흔 생각이 업스심니까
春園
1, 朝鮮사람 전체를 「행복한 부류」와 「불행한 부류」의 두반으로 갈른다면 나는 행복한 측에 끼워있는줄 압니다. 몃 사람이 헐벗고 굶주리는 터에 나는 이때까지 의식에 缺함이 없이 지내 왔으며 지금도 거주할 곳 마저 평안하게 가지고 있으니 이 어찌 행복스럽다 하지 않으리까
2, 나는 내 작품을 읽어주시는이가 얼마나 되는지 생각해 본적이 없읍니다. 그러나 내가 뭇을 들고 나선 지 이미 20여년 그동안 다소라도 진정으로 내 작품을 읽어 주시는 이 있을 줄 믿습니다. 그리고 그 읽어주시는이는 십오육부터 육순 나는 노인 층에 있는 것까지 내가 얻은 경험으로 보아 잘 알고 있읍니다. 첫 번「무정」이 나올 때 읽어 주시든 이가 지금은 모다 사오십되는 년배에 이르럿슬 줄 압니다.
3, 내몸이 아직 50전이니 鳴呼老矣라하고 탄식해본적이 없읍니다.<209> 그러니 「젊음」을 그리워한 때도 없거니와 다시 또한번 연애하여 보겠다고 생각을 가저본일이 없읍니다. 그야 아직 내 몸에 열정이 있읍을 믿는지라 이 뒤에 올 일을 안다 못하겠거니와......
想沙
4, (가)행복이란 것을 생각해 본 일이 없으니 모르겠읍니다. 그러나 행복이란 주관적의 것이요 사람의 욕심이란 한이 있기 어려운 것이니 쌍에 자기가 제1 혹은 제2 혹은 몃재로 행복하다고 생각할 어림없는 사람도 없을 것 같습니다.
(나) 모릅니다. 貴社에서 통계표를 꾸미심이 어떨까요?
(다) 다시 젊어질 수 있다면 이라는 가정은 웃으운 말이외다. 70이 되어도 열렬한 연애를 하고 싶을지도 모르겠읍니다. 70이 되어 보고서 장담할 일이지만요.
岸曙
4,(1) 生을 끊지아니하고 존재하는것만치, 자기가 자기를 속여 가는 것은 있겠지요. 그러나 거지불치병자에게도 이것은 있으니까요.
(2) 별로 있을이라고 생각치 않습니다. 있다면 그것은 나와 같이 한 개의 好氣的無用으로의 존재물이외다.
(3) 이 우에 더구나 새파랗게 젊어서 사랑을 해보겠느냐고 말입니까. 제발 지내 온 쓸아린 경험을 두 번 다시 생각케도 말아 주소서, 고 나는 내 자신의 허황한 기억에게 애원을 하고 싶습니다. 한번 魂難곳에는 소도 발을 옴기지 않는다고 하지않었읍니까.
朴英熙
1, 末席이랃 좋으니 행복한사람만 되었으면 하오. 그러나 사람이 어찌 행복한 생활을 가즐수 있겠오.
2, 독자는 아즉 알 수 없으니 수가 많은 것보다도 작가의 지의를 이해할 수 있는 독자라면 소수라도 좋겠오.
3, 내가 다시 젊어진다면 열열한 연애보다도 과오 없는 생활과 사업을 하고 싶소. 연애는 젊어서만 열열한 것이 아니고 장년시대에도 할 수 있지만 나는 그러한 생각과 시대가 과거하였으니 말하는 것이 도로여 공상이겠오. <210>
崔貞熙
(가) 내 작품을 읽어줄이 하나도 없을 것 같기도 하고 또 2,000명이 죄다 읽어 줄 것 같기도 합니다.
(나) 역시 많이 느러나갈 것 같기도 하고 또 한사람도 늘지 않을 것 같은 불안도 있음니다.
5, 사람의 값이 젊음에만 있다면 영원히 늙지 말일이지요.
梁柱東
(가) 엇던날 첫재 엇던날 꼴치.
(나) 不知道.
(다) 다시 젊기는 왜요? 아즉도 젊은데. 꼭 한번 해보고 싶은 생각은 있으나 이른바(色)이 아니오. 참으로 그야말로 열렬한 「사랑」이라면 상대자가 문제입니다. 얼골은 나와 반대로 초근대형이여야 하겠고 교양과 취미에 이르러는 나와 準同等의 자격―무릇 歐文, 漢文, 「더구나」 우리 글을 저욱이 통하야 세스톱, 할트만, 周易, 圓覺經, 그러고 鄕歌(!)를 조곰씩 알아야 하겠고 게다가 書畵, 骨董(특히 내가 珍藏한 納入의 枯淡한 筆法을 나와 한끼 감상할 만한) 분재, 장기 쎄파―트(실은 없지만) 등등 취미를 모조리 이해하여야 하겠으니 이야말로 딱한 노릇이 아닙니까.
대관절 연애에 무슨 조건이 그리 많이 붙느냐고요? 若夫 대상이 傾國佳人이라면 전언은 戱耳라 부복하언이리오. 呵呵.
全成吉
(가)2,000만 명중 2,000만 번째의 불행자라할가요.
(나) 간혹 독자로부터 글을 받게 됨으로 미루어 보아 내 작품의 독자가 있는 것만은 확실하나 추산할 수 없고 내 자신이 제일 진정한 독자임니다.
(다) 연애를 해본 결과 시간과 물질과 정력을 *費하는 외에 당시는 모르나 다소냉정해진 후에 보면 소득이 없고 역시 환멸감을 주는 대서 인간의 諸行動의 일부분이라는 것 밖에 특별한 쾌감을 기억하지 못합니다. 다시 젊어지면 「열열한」연애는 못할 줄 암니다.
李軒求
(가) 첫재라고해도 거짓말 꼴지라고해도 욕먹을 바이니 2,000만중 X位라는 그X는 오히려 딴사람께 물어 보고 싶읍니다.
(나)나를 알어주고 나를 믿어 주고 또 나에게 격려를 보내는 독자 나와더브러 기뻐하고 나로더브러<211> 더 奮慨하는 그 한사람의 애독자가 있다면 고만일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아직도 나에게 대한 이러한 관계를 가진 독자를 발견못했읍니다. 이것을 유일의 遺憾이라고나 할까?
(다)다시 한번 젊어지는것보담도 가령 내가 이앞으로 30년을 산다고해서 나히를 먹으면서도 언제나 진격하고도 강렬한 연애감정을 가지고 싶다고 생각합니. 아마도 이런 점에서 궤―테는 그 일생을 청춘의 歡悅속에서 모냇다고도 할것임니다.
李孝石
4,(가) 2,000만명중에서 첫재번 갈때도 있겠고 제일 꼴재 갈때도 있겠죠.
(나) 알수있나요. 작품이 발표되는 간행물의 부수를 표준으로 할 수 밖엔요.
(다) 없지는않겠스나 이제 새삼스레 「렬렬한」 연애가 될상싶지 않음니다. 하기는 등장인물 나름이겠지만.
方仁根
4,(가)나는 행복된 사람이라고 생각해본적이 별로없음니다. 그러나 나보다 불행한 사람도 많을터이니까 2,000만명중에 1,900만째나될듯합니다.
(나) 내 작품으 독자는 계산하기가 도무지 어렵슴니다. 많을 것도 같고 적을 것도 같고 귀사에서 조사해주섰으면 고맙겠음니다. 그러니까 해마다 몇 명식 늘고 주는것도 모르겠음니다.
(다) 다시 젊어지면 렬렬한 연앨ㄹ 하고 싶지않으냐고요. 그야 뭇지않어도 다이를말슴입니까 젊어지는 방법만 가르처 주소서.
洪曉民
넷째 (가) 조선사람 二千萬名中 先生은 大體로 몃재번에나 갈 행복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심니까 하는 질문인데 이는 나는 내가 제일 먼저나 가지 아나하면 최후에나 갈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웨냐하면 첫째로 누구는 제일행복되고 누구는 제이 행복되고 하는 그런 것을 복잡스럽게 따질수도 없는 것이 한 이유도 되려니와 이것역시 제 맘에 있는 곧 극히 주관적인 그것인 까닭이다. 나는 남의 행복을 측정하고자 하는 맘은 전혀없다. 따라서 제가 첫재아니면 「꼴지」일 것이다.
(나) 先生의 作品을 읽어 주는 讀者는 대체로 몇사람이나 되리리고 推想하심니까 또해마다 몇名程度로 느러가리라고 생각하심니까 하는 질문인데 이것 역시 추상인만큼 내 욕심으로는 제일 많이 읽어나 그렇지않으면 아주 아니 읽으리라는 대답밖에 없다.
(다) 先生은 다시 한번 젊어저서 다시 한번 熱熱한 戀愛를 하고십흔 생각이 없스심니까 하는 질문인데 이는 나는 언제든지 렬렬한 연애는 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젊은 사람만이 렬렬한 연애를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연애는 노소가 없다. 하거들랑 렬렬히 하고 하지않으면 냉담할 그것뿐이다. 허나 이제 내 심경은 되나 못되나 나로서는 내 천분에 알맛는 한사람의 안해가있으니 그런맘은 전혀없다.
金恍燮
4,(가)남이 보긴 나는 비교적 행복한 듯도 할것임니다만 나로선 불행하다고도 봅니다. 제일 불행한자야 아니겠지요. 또 그럴지도 모르겠음니다.
(나)나의 독자요? 親友가 수십 명이 되니 그 이야 되겠지요.
(다)지금도 젊었는데 다시 더 젊을 수 있음니까? 혹시 어려진다면 모르겠음니다. 열열한 연애요? 순수화된 위대한 문예작품에는 다만 여주인 같은 것임니다. 사랑할 수 있겠지요.「테스」는 그런 의미에서 나의 애인이 영원히 되는 듯 함니다.
咸大勳
1,그렇게 생각해 본 일이 없음니다.
2,나는 내 작품을 읽어 주는 독자가 얼마라는 것을 생각한 일이 없음니다. 다만 나는 내 예술적 행동이 있을 때마다 작품을 쓰는 것 뿐 입니다.
3,아즉도 젊은 나이지만 연애는 그만 둘 가 함니다.
李無影
2,그것은 알 길이 없음니다.
徐光霽
4,가, 더울 때 피서 가고 목마를 때 麥酒를 마실 때 그리고 맛나 보고 싶었든 그 여자를 맛낫슬때에는 내가 이 세상에서 제일 행복된 사람 같고 그와 정반대일 때에는 亦 제일 불행한 사람같이 생각된다.
자, 그러한 것은 생각할 일이 없으나 어려슬 때 동리에서 같이 자라난 동모나 小學中學專門의 학교동창이나 나와 개인적으로 친한 벗들이 먼저 읽어 줄 것이다.
다, 아즉 청춘 그대로이니 었더한 기회에 얼마나한 열렬한 연애를 할는지도 모르겠다.
李石薰
4, (가) 나의 민족적 행복순위는 No. 17·500·000
(나) 한 五六十名가량만 된대도 행복이겠으나 실상은 그렇게도 못 될상 싶은 걸요. 전체로 해마다 늘어가겠지요. 한 一O%가량으로.
(다) 내 나이 30고개를 못 넘었으니 연애야말로 지금부터 할 때지요. 그러나 적극적으로 하고 싶은 생각은 없오. 늙어 죽는 날까지 할 수 있다고 믿소.
李一
4. 가, 나는 조선 사람 2,000만 명중에 2,000만명째 가는 행복자임으로 自處함니다.
나, 내 作品을 읽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음을 확실히 암니다.
다, 나는 다시 戀愛劇을 하고 싶지 아니하고 젊어지고 싶지 않고 마라손으로 꼴인을 企待리나이다.
蔡萬植
4, (가) 朝鮮사람 2,000만뿐이 아니라 나는 왼 세상에서 나같이 불행한 사람은 없다고 생각함니다.
(나) 가장 正確한 讀者의 數는 나 自身과 文選職工한 사람과 校正보는 이 한 사람과 檢閱官 한 사람 總合 네 사람임니다. 그 외에는 몇이나 되는지 또는 주는지 느는지 알 수 없음니다.
(다) 몸은 젊으면서 마음만 것늙어 가지고 愛 따우는 인제는 시시-함니다.
李北鳴
4, (가) 조선 사람을 李千萬鳴이라고 하면 나는 19,999,999번이나 될 가요. 웨 그런고 하며 우리 家族六鳴中에서만은 내가 第一 幸福者이니까.
(나) 자 그럼 나의 讀者數를 數學으로 풀어봅세다. 2000萬鳴―非讀者=北鳴讀者
伹非讀者數는 絶對秘密
一年에 讀者가 몇 명식이나 느러가는 가구요. 글세올시다. 每日 한 장식은 讀者들에게서 激勵의 편지를 받음니다만.
(다) 아즉 未知數임니다. 연애로부터 결혼한 지 몇 일이 <214> 안 되는데 이런 對答은 한 벌로 하다가는 加味 벼락탕을 먹을 것 같으여서 붓을 놓음니다. 呵
韓仁澤
4, 가, 第一不幸 나, 알 수 없음니다.
다, 아죽 늙지 않엇으니 그런 것을 생각해 본 일은 없음니다. 만은 늙었다 하더라도 연애를 하기 위하야 젊어지고 싶지는 않으리라고 생각합니다.
李甲基
4, (가) 내가 朝鮮만이 아니라 世界에서도 第一 幸福한 者이라고 陶醉하든 한 瞬間도 있었고 또 었던 때는 내가 第一이 世上에서 不幸한 놈이라고 니를 부둑부둑 가라 볼 때도 있으니......
(나) 모르지요.
(다) 혹 었더한 자리에서 나 어린 處女를 맛날 때에 극히 無邪한 氣分으로 自己에게 비처 보는 때가 종종 있지요. 그러나 벌서 내가 그 處女에게 비하기에는 너무 늙었다는 것을 생각할 때는 一誅의 悲哀를 늣기는 수가 있으며 同時에 그 反作用으로 또 한 번 젊어서...하는 생각도 아니 나는 것은 아님니다마는 퀘테는 70이 된 나희로도 능히 18세 되는 處女를 사랑하야 生男까지 하였다니 어데 그러한 權限이 詩聖에게만 限한 것 이겠음니까. 舜何人?......
宋影
4, (가) 남이 나를 어떻게 얼마만한 幸福의 人이다. 評定할 지는 몰나도 主觀的으로 내가 나를 생각하면 2,000만人 중에서보다도 全 世界人 중에서도 내가 第一 幸福의 人이라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나는 잘 지내 가고 있음니다.
(나) 절대로 推想이 안 됨니다. 그리고 또 몇 名式 느러가는지도 모름니다. 마음에는 日增月加해젓스면 하지만은 내 스스로 내 創作活動을 檢討해보면 오히려 그 같은 野望같은 것이 큰 誤詡라고 생각함니다.
(다) 다시 젊어서라는 게 내게는 소용이 없음니다. 늙은 들 관계있음니까. 여북 해야 꾀테翁(七旬 때)이 二八少女를 따라 같이 단겻슴니까? 나는 목소리만 듯고 얼골을 못 보는 것 같은 가장 *雅하고 超然한 意中之人이나 한 사람쯤 생겻스면 하는 哀切한 所望을 <215> 늘 가지고 있음니다. 다시 말하면 東洋的 戀훼를 한 번 해 보았으면 좋겠다는 말임니다.
柳完熙
4, (가) 以上 三에서 말한 바를 미루어 나의 慾求하는 바의 그 어느 것이고 滿足을 얻을 때가 있다면 그 때에 만은 나는 제일가는 행복자가 될 것이외다.
(나) 그것은 나로서는 推想을 不許하는 未知數에 屬하는 것이외다.
(다) 연애! 아즉도 나희 있으니 晩時之歎은 없으나 나의 지난 경험으로 본다던 지 모든 점으로 보아 나를 對象으로 골으는 彼方의 불행을 막기 위하야 이제는 단념하야 버리고 싶은 生覺밖에 없오이다.
安含光
4, (가) (나) 행복과는 먼- 距離의 존재이며 아즉 한 번도 내 讀者의 數를 推想해 본 일은 없아오나 編輯人諸氏와 植字班諸氏만은 틀님없이 讀者圈內에 들겟지요......
(다) 자칫 잘못 對答하다가는 家妻의 炊事 사보타-쥬로 餓死黨의 黨首가 되어야 할 모양이고 내 만약 다시 젊어저 실패된 첫사랑을 復活식히겠다고 하면 家妻, 離婚承諾書에 捺印을 强要할 모양이니 이 難處한 責任을낭 編輯局長께서 지소서.
閔丙徽
4, (가) 조선 사람 2,000만 중 先生은 대체로 몇제번에나 갈 행복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심니까?
심히 어려운 물음이다.
아마 2,000만 첫재라기는 내 자신이 너무도 불상하매 19,999,999번의 행복을 가젓다고 해서 自慰해 둘가 한다.
(나) 先生의 作品을 읽어 주는 讀者는 大體로 몇 사람이나 되리라고 想想하심니까? 또 해마다 몇 몇 정도로 느러 가리라고 새각하심니까?
-무어라 대답할고? 오즉 내 작품을 읽는 사람은 나뿐일 것이다. 그리고 나 하나가 해마다 느러 갈 것이다.
(다) 다시 한 번 젊어서 다시 한 번 熱熱한 연애을 하고 싶지 않으심니까?
괴악스런 嘲弄이다? 되지 않을 空想을 물었다. 내 三代獨子요, 無女獨男으로 태여 났읍니라. 뜻 맛는 친구를 그리며 뜻 맛는 女子동*나 하나 사귀였으면 하는 <216> 열없는 空想을 해 보기는 하나- 다시 젊어질 수도 없거니와 다시 젊어서 연애를 해 보고 싶은 새각은 없다! 만일 있다면 80세 되면 연애를 마주막 한 번 해 보고 죽어볼가! 할 뿐이다.
嚴興*
(가) 「행복」 하다고 까지야 할 게 없지만 구타여 全民族水準에 빛우어 불행한 部隊에 든다고 自暴自棄하기는 싫습니다.
(나) 글세요. 그것을 어떻게 數字的으로 단정해 말슴함니까.
다만 「萬名」만 되어도 좋겠다고 생각날 때가 더러 있음니다.
(다) 있음니다. -각-금.
그러나 부*없이 그 따위 粉紅色 空想을 하는 것보다는 親友와 더부러 郊外로 나아가 추湯에 日盃酒라도 마시고 얼근이 취해 雜談을 주고받으며 하로의 夕陽을 享樂하는 것이 實現性있는 享樂이며 또한 나의 행복이라고 믿음니다.
崔永秀
4, (가) - 彼此에 알고 싶은 일이오. 그러나 「몇 재번」의 幸福兒인 줄을 모르니까 다행이오.
(나) - 이것 역시 몰라 다행이지오.
(다) - 난 젊은 사람이니 속히 늙어서 듬직한 老人戀愛를 한 번 해 보고 싶으오. 요새 젊은 색시 어듸 믿음직한 게 있읍듸까? <217>
<209-217>
삼천리 제8권 제12호  
발행일1936년 12월01일  
기사제목戀愛냐돈이냐, 文士心境  

설문   

 

 

 

      

戀愛냐 돈이냐, 文士心境            

 http://db.history.go.kr/item/level.do?levelId=ma_016_0600_0380


人世의 造次顚沛속에서 오래 부댓겨 나섯스니 이제는 實感으로 말슴하야 「人生의 幸福」은 돈에서 온다고 생각각되지 안슴니까, 는 「戀愛」나 「藝術」에서 온다고 생각되지 안슴니까
春園
「인생의 행복」은 돈에서 오는 것도 아니요, 「연애」에서 오는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행복의 일부를 구성할 수는 있겠지만―나는 내 먹은 뜻이 돈이라거나 명예라거나 연애와 같은 모든 세속의 영화 때문에 움지기지 않는, 그 순간이 가장 행복된 때인 줄 압니다. 나는 오직 그하로 그하로 이러한 邪念 때문에 잡히지 않는 날로 지나는 것을 그날 그날의 가장 큰 행복으로 압니다.
朴英熙
인생의 행복은 마음의 평안에 있다고 생각하오. 心腦없은 생활이 행복이오.
想沙
인생의 행복은 「돈」에서도 「연애」에서도 「예술」에서도 얻을 것이나 각기 종류와 의미가 달을 것입니다.
岸曙
행복이 있는 줄 아는 것이 행복한 사람들이지요. 나는 행복의 존재를 인정치 안습니다. 그러니 돈, 사랑, 예술에서 생길 것이 아니외다. 술처럼 한때의 가장 짧은 순간의 위로는 될는지 몰으거니와, 그진정한 행복은 없는 것이외다. <204>
洪曉民
셋째 人世의 造次 顚沛속에서 오래 부댓겻어니 이제는 실감으로 말슴하야 「인생의 행복」을 돈에서 온다고 혹 생각되지 않슴니까 또는 「연애」나「예술」에서 온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하는 질문인데 이것 역시 나는 때로는 돈에서 온다고 생각한일도 있고 「연애」나「예술」에서 온다고 생각한 일 있었는데 지금은 다만 나는 맘(心)에서 온다고 생각하였다. 우선 맘이 안정되면 그야말로 一簞食, 一瓢飮하고 在陋巷이라도 樂亦在其中한 것을 알엇다.
方仁根
3, 인생의 행복이 돈에 있다고는 결코 생각지 않슴니다. 물론 연애나 예술에 이섯다고 절실히 느낌니다.
崔貞熙
인생이 행복이 어듸서 오는 건지 또 그것이 정말 내게 올수있는건지 아직 나는 모름니다. 연구를 해 봐와야겟읍니다.
金恍燮
3, 행복이라는 것은 업는 것을 깨달었슴니다.
李一
3, 나는 돈 안이주고사는 행복를 구한지 오래외다. 사람에게 그런 행복이 허락되지 안었슴니다. 연애라는 놈도 외상을 안이줌니다. 외상으로 연애하면 그 대가를 이 삼배나 물게 되고 때에는 생명으로 代償함니다. 無錢旅行은 할 수 있지만 無錢戀愛는 절대금물이외다. 無錢戀愛의 代償으로 罪惡 情死가 너우나 만습니다.
李石薰
3, 결국 「돈」이라고 믿소. 그러나 동뫃을 재주가 없으니 無可奈何지오.
咸大勳
3, 인생의 행복은 돈에서도 연애에서나 術藝에서도<205> 다않입니다. 참된 행복은 자유로운 활동 무대를 만드러 거긔 마음껏 활동해 *데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럴 환경이 못되니 인생의 행복(내 자신을 도라 보아)은 내 예술의 완성(그때가 있을 가 의문입니다만 은)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蔡萬植
3, 「인생의 행복」이란 무엇인지를 나는 모름니다. 30반생에 나는 그런 것을 맛보아보지 못했으니까요.
그러나 「인생의 불행」은 당해도 보고 알기도 함니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생각함니다. 「가난한 불행」은 돈이 생기면 행복으로 바뀌일수도 있도 남녀간의 애정의 파탄에서 오는 불행은 그 성취 혹은 새로운 연애로써 행복으로...예술적 고민에서 생긴 불행은 대작의 作成에서 행복으로...역시 바뀌일수있다고.
李北鳴
3, 각개인의 환경과 사상에 따라 행복 관도 달을것임니다. 그렇나 창작한 예술작품이 백만인 의 손에 둘녀서 찬사를 받는 동시에 인류사회에 生의 광명을 던저줄 때 모든 群小행복은 예술 앞에서 落淚할것임니다. 그렇나 연애만은 예술왕좌앞에서도 큰 역할을 할 것입니다.
韓仁澤
3, 인생의 행복이란 돈으로도 연애로도 척도할 수 없으리라고 생각합니다.
李軒求
3, 돈의 위대한 운명적인이요 暴小的지배력은 갈 사록 더 절실히 느끼여지는 듯 합니다. 그러나 생명을 바칠 바 예술이나 연애가 있다면 예술지상 연애지상론의 신념에 살고 싶습니다.
李甲基
3, 인생의 행복은 돈에서 오나 연애나 예술에서 오느냐고요. 나는 먼저 설문자에게 대체 인생의 행복이란 개념이 엇더한 내용과 엇더한 의의를 가진 것인지<206> 먼저 뭇고 싶읍니다.
徐光霽
지금 살고 있는 사람들의 「인생의 행복」은 두말할 것도 없이 돈에서 오고 죽은「인생의 행복」이 있다면 「연애」나 「예술」이겠지요.
李無影
돈은 행복의 破壞者입니다.
李孝石
3, 무엇을 속이슴겠니까. 인생의 행복은 「돈」과 「연애」와「예술」―이 세 가지를 합처더든 곧에서조.
宋影
3, 솔직하게 말하면 돈에서 온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나 내가 말한 「돈」이라는 것은 불철저한 경제기구에서 자연生한 돈의 본의를 니저버린 돈이 야기는 아님니다. 쉬웁게 말하자면 인생의 행복은 생활의 안정―즉 합리화된 경제조직에서 온다고 볼 수 있음다. 연애나 예술에서도 물론, 행복을 차질수가있으나 그것은 제2의적행복으로 밖게 볼 수 없음니다.
柳完熙
3, 나는 우리들인간의 세계에 절대한 행복이라고는 없다고 단정하는 자의 한사람이외다. 만일 인간이 慾求하는 부문의 만족을 얻는 것으로써 행복이라고 한다면 돈 예술 연애 이세가지가 모다 인간에 필요한 것일진대 이세가지의 만족을 동시에 얻게 되는 경우가 인간에 허락된 행복의 가장 큰 것이라 할 것이요. 어느 한가지의 욕구를 가저 그것의 만족을 얻을 때에도 또한 행복이라 할 것이외다.
安含光
3, 「돈」 때문에 인격적으로 멸시를 당하였슬 때 자기도 모르게 「돈이다!」하고 심령으로 부르지즌적은 한번이 아니나 그 결론에 「인생의 행복」은 돈에서 온다든가 또는 어떠케 하든지 돈을 좀 모아보고십다든가 하는 생각에로 이른(至)일은 한번도 업섯소. 그러타고 「연애」나 「예술」에서 오느냐(?)하면 이 또한 그러타고만도(首肯)해 버릴 수 업는곧에<207> 低迷한 심정의 고민이 있는 듯 함니다.
閔丙徽
3, 돈이 많어서 호의호식을 하고 술과 게집을 마음대로 얻을 수 있음을 행복이라고 할까? 그러타고―빈곤과 싸우며 예술을 한다고! 행복이라고 할가? 한때 연애를 하여보왔다고 늙은 추억을 살녀 보며 행복이라고 할가? 이곳에 苦海蒼生에 무삼행복이 올 것이 오릿가? 다음날 子孫에게나 행복이 올 것이다.
嚴興燮
엄밀히 말하자면 인생에게 행복이란 것이 없다고하겠음니다.
더구나 「돈」에서 「연애」에서 행복을 求하기란 하늘의 별따기와 같은 어리석은 짓입니다. 甲의 행복이 乙에 있어서는 불행이 될 수 있는 것처럼 乙의 행복이 甲에게는 또한 불행이 되는 것음임니다.
「행복」을 노리는 눈과 손은 그 사람의 개성 그 사람의 직업성격이 다른데 따라서 다 달음니다.
全武吉
3, 행복감이란 어데 까지든지 그 느끼는 자의 주관적인 감흥임으로 표면행복적된 생활이 내면으로 비참한 경우도 많슴니다. 인간은 만족을 모르는 동물인즉 돈에서나 「연애」에서나 「예술」에서나 제왕의 지위에서라도 진실한 의미에서의 행복이 없을 줄 암니다. 그러나 구지 행복된 경우를 말한다면 釋迦나 基督같이 인생을 달관하고 여하한 고난도 그 신념 앞에서 달게 받는류의 고급감정이겠지요. 凡人은 맹목적으로 살고 맹목적 행복을 느낄 뿐.
梁柱東
3, 인생의 행복이 돈에서 오느냐고 물으닛가 나의 肉氏는 섯불리 대번에 「오―케」라고 대답하는데 나의 靈님은 고개를 기우리고(No.sir)라고 대답합니다. 청교도인 나는 아모래도 靈님 說에 左祖하고 싶습니다.
연애나 예술이나 둘 다 재미는 있다죠. 행복은 몰나도.
崔永秀
3, 느끼게 따라 다르겠지요. 욕심을 부린다면 세 가지를 다 한꺼번에 갖고도 싶겠지요. 그러나 예술의 道에선者 예술이외에서 어찌 행복을 구하오리까! <208>
<204-208>
삼천리 제8권 제12호  
발행일1936년 12월01일  
기사제목僧이되고십지안흔가, 文士心境  
기사형태설문  

 

僧이되고십지안흔가, 文士心境
            

 

 


先生서는 그 貧困과「靈의 苦悶」문에 차라리 山속에 드러가 僧이되고 십흔가 업슴니까 자살이라도 해버릴생각을 가진 적이 엇스심니까
春園
입산 수도하려고 생각한 적이 여러 번 있었읍니다. 온갖 世屢를 깨끗히 떠러버리고 이 몸이 이 세상에 태나든 그때와 같은 청정한 육신과 사념 없는 영을 안고서 깊은 산 암자 속에, 맑은 하늘, 닷는 구름, 흐르는 물껼소리로 더부러 다만 몃해라도 사라 보고 싶었읍니다. 수년전 내가 朝鮮日報社를 나와서 금강산으로 내다른것도 오직 이뜻에서 웨다. 그때 생각에는 그저 백날만, 다만 석달열흘만이라도 峯아래 조고마한 절깐속에 있어진다면 내 생명은 정말 오른 길로 드러서, 마치 따뜻한 일광을 만난 봄날의 나무와 같이 싱싱커질것같았읍니다.
그러나 세속의 世屢가 이것조차 이루게 못합니다. 자살은 지금은 생각한 적이 없읍니다만은 칠팔년전에는 그러한 생각을 하여본 적이 있섯고, 그리고 그 자살의 방법까지 내 마음으로 작정한 일이 있었읍니다. 그러나 이제와 서는 제손으로 제생명을 끗는다는 것은 이以上 하늘에 큰죄 짓는일이없고, 인류와 동포에 송구한 일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말한다면 혹 세인들은 병고때문에 이런 생각을 가지는 줄 알것이외다만은 나는 병에 대하여는 아무런 두러움과 실증을 가지지 않고 있읍니다. 육체의 병은 초월한 셈이지요.
岸 曙
산 속에 들어간다고 고민이 없어질 것이 아니니까 바로 생명을 끊어서 모두 허무에다 파뭇는 것이 좋겠지요. 그러나 나는 이보다? 보살것없는 生이나마 그대로 끓어 가면서 돌모양으로 無言不語속에서 혼자 외로이 회색의 世相을 들어다 보고 싶습니다. 이것이 답지 아니한 나의 自嘲외다.<199>
朴英熙
그런 생각 한일은 없오.
想 沙
問或은 자살을 생각도 해보는 일이 없지 않지만, 정신에 이상이 생긴다든지 비상한 타격이나 밧기전에는 실행에까지는 客易치 않을 것입니다. 빈곤과 「靈의苦悶」에 상관적 연락도 없겠지마는, 빈곤 때문에 자살은 빈곤이 허영심을 상케하는 이상으로 수치라는 것을 생각하면 누구나 실행않될것같습니다. 靈의 고민이 자살의 원인 되는 경우는 별문제일 것이외다.
宋 影
결코 遁世니 혹은 壓世같은 소극적 敗北은 가지고 있는 일이없음니다.
한없는 靈의 고민보다는 貧의 희농을 바들 때에도 적극적 반발적 태도를 가젓섯슴니다. 태도보다도 자연한 생리적 현상이여슴니다.
竹林七賢이나 五柳居士같은 고대의 淸廉慷慨한 기풍이 일리가 없는 것도 아님니다마는 이것은 너무 敗頹적이였슴니다. 괴로울사록 더―살어서 스스로 괴로움을 물니치고싶은 것이 생활태도이며 철학임니다.
全武吉
빈곤은 면한 생활이나 영의 고민이라고 할 자는 항상 몸을 떠나지 않는 문제로서 일시산간의 은거생활이나 자살을 생각해 본 감상기도 있었으나 그것이 한 것 약자의 일임을 알면서 붙어서는 고민에서 얻는 인생의 맛을 초연히 苦笑하면서 대함이 한 快味를 줌니다. 주제넘은 말로 달관 비슷한 무엇이 나섬니다.
李軒求
사람인 이상 더군다나 그늘의 현실에 암담히 생활하는 자로서 이런 衝擊을 강열히 또 그리고 不絶히 느끼지 안는다면 그는 분명코 「超人」이거나 「非人」일까 합니다.
梁柱東
종종 無常感 때문에 佛說에 끄을려 圓覺經을 보기도하고 입산수도를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럿은 빈곤 때문이 아니오 배가 불럿기 때문이니 貴問에 이른바 靈의 고민인가 합니다. 이러한 정도의 善知識이기고<200> 보니 자살은 물론 생각한 적이 없고 입산은 이즈음 산중에 맛츰 절이 없기 때문에 단념하고 있습니다.
徐光霽
예술가는 樂天家래야 될 줄 생각한다. 어구나 朝鮮과 같은 환경에서는...그럼으로 나는 요사히 점점 체중이 느러가 14貫이나 되였다. 그렇다고 잠보다 음식을 더 먹는 것은 않이다. 식물의 영양보다 마음의 영양에서 오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李一
빈곤은 밧보지안을 特恩種이 있습데다만 靈의 고민은 누구나 면치못하듯 한 는대 그러나 靈이라는 놈도 그 육신에 물질적 편리를 잘 공급하면 그만 취해서 즐거워 하지만 이것 버리기 위하야 僧이 된다는 생각은 안이함니다. 僧도 非僧과 同色 同種이 있슴이외다. 자살! 그놈한번 해보고 십은 것인 대 해보고 십흔때와 하지못하는때가 동급수로 진행함니다. 자살도 용기 있는 사람의 작품인가 하나이다.
李孝石
산 속에서 적적해 엇더케 지냄니까. 이기든 지든 간에 세속에서 싸워야죠.
洪曉民
선생께서는 빈곤과 「靈의 고민」 때문에 차라리 산 속에 드러가 僧이 되고 싶은 때가 없읍니까? 자살이라도 해버릴생각을 가진 적이 없으심니까 하는 질문이다. 허나 이 질문은 심각하것만은 사실이나 그라지 僧되고 자살이라고까지 붓치도록 내가 빈곤과 「靈의 고민」을 느끼엇을까 생각해 보니 별로히 그런 것이 없다. 나는 오늘까지 이런 소극적인 고민은 해본 일이 없다. 이런 소극적인 고민을 하랴고 할진댄 차라리 예술 도에 아니 드러슬 것이다.
方仁根
그러한 때가 순간적으로 날 때도 있지마는 역시 참고 견듸려합니다.
崔貞熙
僧도 안되고 자살도 안 하기로 단단히 작정을 해놓았읍니다.
金恍燮
현실을 떠나지안을랴고 하면서도 혹시는 산 속이나 들어가고 십흔때가 있슴니다. 자살이라도 하여스면 하기도 해본 적이 있슴니다.
咸大勳
때때로 한가히 전원생할을 하면서 창작에 열중하고 싶옵니니다. 자살이나 僧侶생활은 넘우도 퇴영적이니 그만줄가 합니다.
李無影
한동안(이십사오세까지는) 빈곤이 염세관을 이르키게했읍니다마는 최근에 와서는 그렇지도 않습니다. 나는 항상 나는 정당한 죽엄은 못하리라고 생각합니다 마는 자살은 하게 된다면 작가로서의 자아의 무능을 깨닷는때 그때일 까지 합니다. 현재의 생활이란 자아의 무능을 깨달으면서도 이른 캄프라쥬하에 시일은 느리고보는것에 불과합니다.
李石薰
지금까지 그만치 심각한 고민을 경험하지않엇으나 세상에 무엇을 못해서 산중의 僧을 원하겠소?
蔡萬植
도를닥는 僧이 되자는 것이 아니라 생활이 어려우니까 어느 절이고 밥을 먹여 준다면 가서있어보고싶은 생각이 각끔남니다. 자살하고 싶은 때도 많습니다. 단 그것은 말하신 바 「靈의 고민」류는 아님니다. 대체 인생이란 것이 이따우로 살어도 사는 것이냐 하는 치사스럽나는(그런 까닭으로)너무도 동물적 본능만에 억매어 생명을 지지만 하려는 내자신이 입살 머리스러워서 그래 자살을 해바리고 싶은 생각이 시방 당장에도 무럭무럭 남니다.
韓仁澤
2, 그런 피난적압세적 생각을 갖인적이 없읍니다.
李北鳴
僧은 비현실적 존재이오 자살은 敗北者의 향락으로 생각되니 차라리 전사가 거륵한 행동이라고 봅니다. 靈의 고민이 극도에 달한다면 이마에 수건동이고 밀구구마를 미나 목도군이 되거나 그렇지 않으면 인력거를 끌지오.
李甲基
2, 자살하고 십든 시절을 지난 지는 벌서 한3년 되는가 보이다.
僧侶까지는 아직 되고 싶지는 아니하나 여하튼 냉혹한 世事現實에서 도피하고 싶습니다. 그것도 번민히 안 되는 줄 알고 보니 다만 사라 가는 대로 사라 가자 할 뿐이지요.
安含光
「靈의 고민」 때문에 때로 자살이라도 해 버릴 생각은 한두 번 가저섯고 그때마다 양심을 살니려는 자는 모름직이 자살의」길밖엔 업다 는 역리적인 생각에도 지배되여섰스니 세상이란 원체「자기를 기만할 수 있는 인간」만이 생존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이오 하나 산 속에 드러가 僧되고 싶은 생각은 한번도 없슨가함니다.
閔丙徽
가을의 細雨가 쏘할 때 그 계절의 終幕을 고하는 쌀쌀한 바람 불때면 곳없는 슬픔이 마음속에 기여드는때가 만타.
인간은 웨나면서 죽는 것인고? 끝없는 인간의 적막을 느끼면서! 죽엄을 생각한때 한두 번이 아니였고 마음대로 되지 않을 때 더욱히 내 자신이 타고난 운명 남의 집의 자식으로 이해 없는 사랑을 받을 때―되지 않은 무리들의 비인간적 橫行을 볼 때 아닌게 아니라 僧이 되고 싶흔때 많엇다.
親志들은 나를 말해 낙천적인 인간으로 본다. 그러나 비록 내스사로 사람들의 앞헤서 간교스럽게 감상적으로 보히고 싶허하지 않으며 염세적인 푸념을 내놓으려고 하지안는만큼 속깊은 애수―靈적 고민을 느끼는 때 그 누구에게 지지않을것이다.
嚴興燮
그런새각을 한때는 해보왔음니다. 그렇나 그것도 벌서 피가 용솟음치든 10년 전에 기분시대의 일임니다.
지금은 다만 沈*한 분위기 가운데서 야생초처럼 참고 버틔고 살감니어다.
―僧? 自殺? 이것은 결국 敗北者의 소아병적 자위수단에 지나지 안음니다.
柳完熙
그런 생각은 처음부터 가저본일도 없고 또한 가지려고도 하지안슴니다. 한번 현실 우에 등장한 이상 끝까지 싸어서 너머지는 깨끗한 전몰자는 될지언정 스사로 패퇴자의 치욕은 남기고 싶지 않은 때문임니다.
崔永秀
특별히 「빈곤」이라든가 「靈의고민」이라고 지적하긴 어려우나 때로 僧을 그리고 때로 죽엄을 새각한일이 많으오.<203>
<199-203>
삼천리 제8권 제12호  
발행일1936년 12월01일  
기사제목

「藝術」이냐

「死」냐, 文士心境         

기사형태설문  

 

 

 

 

 

「藝術」이냐「死」냐, 文士心境
            

 

 

父母妻子는 饑死할망정 先生서는 藝術(文學, 音樂, 繪畫)를 위하야 貧困(우리現象에 비추어 압흐로도 가난과病苦는 藝術家에게 不離할것이니)과 싸우면서라도 一生을 바치겟다는 情熱과 覺悟가 잇사오니까
春園
나는 이미 「藝術」을 위하야 이몸을 바치기로 盟誓하였읍니다. 내가 과거 30년 동안 거러온 길도 이「藝術」을 위한 길이요, 앞으로 거러갈 길도 오직 이 한길밖에 없읍니다. 이미 이렇게 엄숙하고도 굳센 盟誓를 하고는 이상 내몸에 닥처오는 빈곤쯤에야 내거름을 멈출 까닭이 있사 오리까
나는 내마음가운데 한가지의 믿음을 가지고 있읍니다. 그것은 천재 基督이 그경전가운데 「空中에 나는 새를 보라. 심으시고 거두지도 아니한데 하늘이 길러주시니 너이들은 입을가 먹을가 근심말고 오직 의를 구하라 하신 말슴이 있읍니다. 자긔만 오른 길로, 의의 길로 거러간다면 생물인 이상 하늘은 그 입을 옷과 먹을 양식쯤은 던저주시줄 압니다. 이 믿음 밑에서 오직 내 정성과 내 재조를 다가고저 할 뿐이외다. 이 의욕과 정열은 내 목숨이 다하는 날까지 조금도 물너가지 않을 것을 믿습니다.<192>
廉尙섭
그토록 한 정열도 각오도 없읍니다. 원체 빈곤과 싸우지 않는 것은 아니나 純一히 예술을 위하야 싸우는 것이 아니라, 처째 살기위하야 싸우는 것입니다.
朴英熙
饑死할 정도에 무슨 예술이 있겠오. 사람의 정열이라는 것이 초자연의 힘은 아니요. 생명이 없데 무슨 창작이 있겠오. 정열 없이 엇지 예술이 있겠오.
金岸曙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맘이외다. 이 변하는 맘을 못잡아놓고서 이렀읍니다, 하는 것은 결국 그림자를 잡는 것이요, 물우에 뜬 달을 움킨 것에 지나지 아니하는 것이외다. 그런지라, 혼자로서 打診하는 나의 심경에는 적지 아니한 誤謬이 있을 것이외다. 웨 그런고하니, 감정이라는 것이 언제든지 같은 것이 아니기 때문이외다. 어떤 때에는 세상을 뚜다려 보고싶기도하고 어떤 적에는 어린양모양으로 純實하게 아모 願望도 미움도 없이 지내고싶기도하고 또 가다가는 자기로서 자기의 가슴을 쾅쾅 치고싶기도하고 때로는 꿈이런 듯 모든 것을 다 잊어버리고 싶기도 하니, 어느 것을 내 감정의 진정이라 할 것입니까. 그렇다고 이것들이 나의 감정의 진정한 한 조각인 이상, 나는 그것을 거즛이라고도 할 수는 없슴니다. 요새 나의 심경의 打診이 오진인 동시에 또한 진정 심경은 아니외다. 일즉 이러한 일이 있었다는 것에 지내지 않는 것이외다.
아무것에든지 깊은 신념을 가젔으면 그것을 위하야 전심신을 다하는 것이 옳은 일이외다. 그러나 이도 저도 할 수 없는 경우라 하면 자기의 제움¼ 좋와하는 예술과같치 하는 것이 좋겠으나, 그러나 결국으로 보면 부모처자가 죽을 지경이면 예술도 죽을 것이니, 두 가지가 다같이 없어지는 동시에 내 자신도 죽어지지 아니할 수 없는 일이외다. 그렇거든 씨우기는 무엇과 싸우며, 정열은 무엇에다 바칠 수가 있겠읍니까. 가난이라도 정도문제요, 부모처자가 굶어 죽을 지경이면 이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외다.
梁柱東
풀, 베들레인詩集 첫머리(Francois CoPPee)의 서문중 그가 不朽의 저작을 하기위하야 팡없은 날과<193> 잘곳없는 밤을 달게 받앗다는 일절이 있든 것을 기억합니다. 여기에 비로소 숭고한 예술가의 경지가 있는 줄을 짐작하겠으나 나는 아즉도 그러한 정열과 각오를 가지지 못하였으니 무릇 나의 예술은 부모처자 이상이라기보다 실로 처자에게도 부끄러운 재분의 소산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黃梅泉의 白雲臺詩 일구를 조끔 고처서 다음과 같이 불러 봅니다.
牙涯竟是人間客. 縱愛名文亦愛身.
崔貞熙
열정도 각도도 없서졌읍니다. 그래도 어느 때고 글로 내마음을 모조리 이야기하리라는 생각은 가지고 있읍니다. 하나 나는 아직 무척 어립니다. 그래서 내마음을 숨김없이 터러노키를 무서워합니다.
金恍燮
나는 일즉이 饑死할망정 예술의 道만을 직히고저 생각해본적은 업습니다. 하나 나의 마음속에 예술의 생명이 살고 있는 한까지는 그 표현을 위하야 정진코저 함니다.
全武吉
부모처자를 救할 다른 길로 나가면서 餘業으로 할 일
嚴興燮
있음니다.
있기에 지금까지 빈곤과 병고와 싸워감니다.
-첫재 예술의 길로 나가지 않으면 나에게는 더넓고 더밝고 탄탄한 깃이 없을 것 같은음니다―
閔丙徽
추억의 아름운꿈이 조용한 가을 달 밝은 밤에 젊은 날개를 펼 때면 엇전지 옛날의 예술가적정열이 식어가는듯도 싶어진다. 나 어린 시인이 문학적정역에 날을 밝이며 글을 읽고 앞날을 꿈꾸든 시절이 나의게는 있섯다.
그러나 그는 지난날의 문학청년시대!
오날의 한 개 젊은 인테리인 내 쓸쓸한 그림자를 종로네거리에서 발견할 때면 나도 모를 쓸쓸한 애수에 길다란 한숨을 내여뿜는 날이 한두 번이 아니다.
이곳은 반도! 이곳의 예술가의 그림자여 그 얼마나 열벗든고? 그러나 그것도 예술가로서 자기를<194> 보는 까닭이다.
明日의 食代가 없다. 그것도 잘 알고 있다. 「티룸」의 한편 의자에 앉어 그는 외로히 누구를 기다리는고? 홍차의 香薰을 맡으면서 원고써줄 동무를 기다리는 잡지편집兼문인! 稿料(변변치도 못한)를 어드러 터벅이며 잡지사나 신문사의 문을 두다리는 예술가! 이곳의 한 개의 비극이 아니면 무었이랴?
그들의 얼골은 「메랑코리」하다! 그들은 묘지를 찾는 미망인과 같은 얼골을 가지고 종로 네거리를 그래도 예술을 위해서 무엇인지 머릿속에 담어가지고 정신없이 것다가 「꼬, 스톱」 의 경종에 비로소! 자기를 찾는 때 만타!
그들은 빈곤하나 그들은 부모도 있고 처자도 있다! 그러나 그들의 고료는 그들의 수입은 늙은 부모의게 식료를 버테들일 아모럴 사히도 업섯거니와 젊고 어린 안해와 자식의 몸동아리에 한님의 의복도 입혀 보지 못했다. 아니 자긔몸이나 가려보앗스며 자기의 口腹이나 채워 보앗든고? 이곳에서 환멸을 느낀 몇몇 사람은 결국! 돈을 찾으려 하기는 했으나 찻지 못하고 예술을 버리지않엇다.
굶주리면서도 인생을 위하야 마터가지고있는 자기소임을 다하기위하야 예술을 바리지 않엇다. 이것이 정열이다. 가난과 싸호며 위대한 예술을 남겨 놓으려는 각오다.
전차가 끈허진 밤 자동차도 타지 못하고 달빛이 유란히 밝은 서울의 밤거리를 거르때 병든 낙엽이 시름없이 떠러질때면 시와 같은 感傷의 인간인 나를 찾는다. 내 호주머니에는 오전 짜리 전차표가 두 장 남어있다. 明日의 전등료와 기한 지나는 質扎이 생각난다. 나무도 떠러젓스리라?
그러나 오날아침 부탁 바든 원고를 쓰기에 이 밤을 밝힌다. 한달 뒤에 드러올 돈 생각하면서 이것이 이곳에 사는 예술가들의 빈곤과 싸오며 행하는 예술적 정열이 아니랴. 그리고 일생을 이같이 싸 오려는 각오가 아니고 무었이겠는가?
安含光
존귀하든 한때의 그 정열과 각오도 일상적인 생활의 장벽 앞에서는 그 자신의 순수성을 보전할수업는 비애만이 계속되는 듯 하오며 앞으로도 그 정열의 순수성을 어느 정도까지나 달성할 수 있겠느냐(?) 하는 것은 한 개의 크다란 의문이 아닌가 함이다. <195>
柳完熙
생활과 예술의 兩全을 꾀할 수 있다면 다시 더 말할 것 없거니와 그렇지 못한 경우라 할지라도 생활 내지 가정을 무시하고 예술을 위하야 종생할 수는 사실상으로 불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함이다. 왜그러냐하면 생활과 인생 인생과 예술이 불가분의 계열에 서 있고 따아서 생활이나 가정에 대한 연계에서 오는 고통이 예술에 대한 애착이나 정열을 멸살시키고도 남음이 있을 것임으로써!
宋 影
물론 그 같은 정열과 각오가 있음이다. 이 같은 정열이란 것은 나의 생명임니다. 생명 없이 살아갈 수 없는 것과 같이 이 정열 없이는 차라리 안살녀고 함니다.
李甲基
아직 그렇한 심각한 일에까지 부닥처보지못하여서 엇지할는지 모르겠읍니다. 다만 史上에 날아 난 그렇한 고결한 정열을 가젓든 예술가를 누구보담도 존경할 줄은 압니다마는!
韓仁澤
1,문학도로 일생을 마출 결심을 가넛스니까 물질적으로 오는 위협이 제 의지에까지는 침입을 못하리라고 생각합니다.
李北鳴
오늘까지 饑死보다 못지 않은 가시의 길을 해염처 나온 몸이니 이 앞으로도 예술에 대한 정열과 각오에는 변함이 없으리라고 생각함니다. 萬雖을 물니치면서 예술의 길로 나아가랴는것도 불행 없는 건설을 위함이니 一意傳心 그 길로 나아가다가 饑死한들 누구를 원망하리오.
蔡萬植
그만한 각오와 (문학에 대한)열정을 가지고는 있습니다.
그러나 첫재 부모처자가 饑死한다면 낸들 발바닥을 할터먹고 사는 곰이라고 饑死를 免하겠습니까?
다음 내가 현재 가난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나 그것이 내가 문학하기를 고집한다고 부모 처자 밋 내가 饑死한대도 그것은 문학을 하는 罪가<196> 아님니다.
그 다음 지금 정세로 보면 가난이 문학인에게 敵이 아닌 것은 아니나 가난에 못지아니하게 여러 가지 난점이 있읍니다. 쩌나리슴이나 朱筆의......
李一
부모처자의 饑死와 대등 예술이 있으면 한번 모험해 보겠슴니다. 그러나 제이 삼차적 문자유희―惡戱에 불과하니 그런 열정은 암만해도 絞出치 못하나이다.
李石薰
나로서는 지금까지 문학을 한 餘技로하고 있다고 스스로 생각하고 있으므로 애당초에 그런 餘技를 갖이고 처자를 멕여가리란 비위좋은 생각은 꿈에도 하지 않소!
徐光霽
朝鮮청년의 대다수가 갖이고 있는 늙은 부모를 보양할 그러한 부채는 다행히 갖지 않게 되였다. 그것으로 자식된 도리와 의무라고도 할 수 있으나 나는 어려서 가정의 반역자가 되여 집에서 뛰여나왔고 그때나 지금이나 부모들이 饑死할지경은 않이며 두분이 다 노령이며 더구나 족하가 벌고 있으니 그러한 지경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妻라는 사람은 내가 없어도 혼자 활동하야 버러먹을 사람 求하였으니 걱정 없으나 나의 길을 닥거나가는데 나의 자식을 갖고 싶은 생각은 없다.
그럼으로 나는 10여년동안 내가 발버온 그 길을 일생것겠다고 생각한다.
李軒求
목전에 부모처자의 饑死를 빤히 내다보면서 예술경에 도취하는 심경! 불사조의 이상과 가트면서 그 이해가 곤란합니다. 살사 이해야한다기로니 그 신념에 살 수 있을는지 그 무서운 현실에 다닥처보아야겠지요. 樂貧, 鬪貧도 정도문제가 아닐까요?
李孝石
갸록한 정열과 각오이기는 하나 무릇 비현대적임니다. 생활을 벗어나 무엇이 있겠슴니까. 빈곤속에서 걸작이 난다로 생각하는 것은 일종의 중세적 낭만주의랄가요.<197>
李無影
그것은 이미 각오한 바이라. 이제 새삼스러이 생각하지도 않슴니다.
咸大勳
내가 만일 예술에 대한 불타는 욕망이 없었다면 지금쯤은 50,000만원부자는 되였스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리니 이제 그건긔회 다노치고 다시 돈벌러 떠나지는 못하겠읍니다. 빈곤과 싸우면서도 일생을 문학으로 마치렵니다.
方仁根
과거와 현재에 그러한 정열과 각오로 싸워 왔고 장래도 최후까지 싸워 보려고 합니다.
洪曉民
三千里에서 설문이란 흔히는 「쩌낼이슴」을 基調로 하고 물어 오는 것이 恒列이었는데 이번 설문은 나에게 진실로 뭉클한 무엇을 주엇다. 그것은
첫재 부모처자는 饑死할망정 선생게서는 예술을 위하야 빈곤과 싸우면서라도 일생을 바치겠다는 정열과 각오가 있는가 하는 질문이다. 이것이야말로 얼는 대답하기 힘든 그것인 동시에 또한 이러한 정열과 각오가 없어서는 아니 되겠다는 생각이 든다. 곧 심각한 질문임과 아울러 심각한 대답을 하자면 「나는 나의 예술을 위하야는 死而後己할 각오가있오」하고 말합니다.
崔永秀
두손을 가슴에 얹고 打診의 묵상을 해보았오. 「藝術」의 경지는 아득하고 「饑死境」은 아직 濛濃한지라 하기 어려우오. 빈곤까지는 몰라도 饑死之境까지는 장담 못하겠오.<198>
<192-1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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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천리 제9권 제1호  
발행일1937년 01월01일  
기사제목著名人物 一代記  
기사형태설문  
著名人物 一代記
丁丑新春
1, 先生의 春秋 얼마시며, 어듸서 무얼 하시면서 새해를 마젓사오며 또 新年에는 무얼 하시겠읍니까? 身老心不老의 嘆이나 其他 心境을 적어 주시압소서)
10年 前
1, 10年 前은 先生의 春秋 얼마섯는데 그 때 어듸서(京城 又는 東京) 무얼(職業) 하시면서 過歲하섰읍니까.
2, 그 해에는 朝鮮에 어떤 큰 일이 있었습니까.
20년 前
1, 그 때 선생의 춘추 얼마신데 어듸서 무얼하시며 지내섰읍니까.
2, 그 해에는 조선 사회에 어떤 큰 일이 있섰읍니까.
30年 前
1, 그 때 先生의 春秋 얼마신데 어듸서 무얼 하시며 지내섰읍니까.
2, 그 해에는 朝鮮社會에 어떤 큰 일이 있섰읍니까.
40年 前
1, 그 때 先生의 春秋 얼마신데 어듸서 무얼 하시며 지내섰읍니까.
2, 그 해에는 朝鮮社會에 어떤 큰 일이 있섰읍니까.
50年 前
1, 그 때 先生의 春秋 얼마신데 어듸서 무얼 하시며 지내섰읍니까.
2, 그 해에는 朝鮮社會에 어떤 큰 일이 있섰읍니까.
60年 前<28>
佐翁 尹致昊
丁丑新春= 新春에는 74歲가 됨니다. 이러케 나히가 만허지매 우리 社會의 高齡者 축에 한 해 두해 밀녀가는 寂寞을 늣겨지는 同時에 80平生 風浪 多하든 내 過去를 자조 回想하게 됨니다.
10년 전= 그 때 64歲 때인대 開城가서 松都高普校長으로 在職하고 있었으며 朝鮮 社會에는 東亞 朝鮮 各 新聞의 文盲打破運動이 이러나서 活氣를 띄고 있었음니다.
20년 전= 그 때 54歲엇는데 서울 있으면서 基督敎 總務로 일을 보고 있섯움니다. 月南 李商在氏도 함께 있었음니다. 世界에는 歐羅巴大戰이 方濃했고 東洋서도 靑島功衛戰이 시작되여 騷亂했음니다.
30년 전= 그 때 44歲엇는데 그 전 數年을 安島山과 더부터 平壤 大成學校長으로 있었고 松都 韓英書院일도 보았음니다. 그때의 半島政界에는 多事多端하야 人心에 衝激을 주는 여러 가지 政治的 事件이 疊出하엿고 西北學會 畿湖學會 등이 全盛했읍음니다.
40년 전= 그 때 34歲엇는데 海外 10年間의 亡命生活로써 귀국 后 議政府叅議 內閣祕書官歷, 다시 外部協辯으로 있섯고 또 元山서 元山 監理하든 때도 그 前後인가 합니다. 그러다가 高宗께서의 俄館播遷 日露의 風聞이 점점 告急했읍니다.
50년 전= 그 때 24歲 高宗께압서 親政하시든 때인데 나도 外部協辯으로 있었슴니다. 그 뒤 2年 만에 日本에 修信使를 韓國政府에서 보낼 때에 朴定陽氏를 따라 東京에 갔었오이다.
60년 전= 그 때 14歲 兪吉濬氏와 함께 修信使 魚允中의 從員이 되어 日本에 가다. 그래서 兪吉濬氏는 福澤諭吉의 慶應義塾에 나는 中村正直의 同人社에 入學修學.
70년 전= 4歲時, 忠淸道 白蓮庵에서 四書五經을 工夫, 10歲時, 漢文으로 三國誌, 水許誌를 通讀.
多山 朴榮喆
丁丑新春= 59歲가 되요. 新年에도 亦是 朝鮮商業銀行을 지키고 앉었쓸 뿐이요 다른 經營은 없소. 心境은 歲歲花相似, 年年人不同이요.
10년 전= 48歲 咸鏡北道 知事在任, 大正 15年 4月 李王殿下 薨去.
20년 전= 38歲 益山郡守在任, 朝鮮總督 寺內大將이 內閣總理大臣이 되고 長谷川大將이 總督任命되고 李王殿下가 東上參內하시다.<29>
30년 전= 28歲 陸軍參領在任, 統監府開廳 伊藤博文公 統監任命, 宮禁肅淸, 政治團體는 大韓協會 一進會, 共進會, 自强會가 있었고.
40년 전= 18歲 全州故鄕 私塾 讀書, 親露派 李範晉 등이 李太王 及 王世子를 俄國公使舘에 播遷하시게 하고 總理大臣 金弘集과 農大 鄭秉夏를 殺戮하고 度大 魚允中도 避亂途中 暴民에게 被殺되고 內大 兪吉濬 軍大 趙義淵 法大 張博은 日本에 亡命하였다.
島山 安昌浩
丁丑新春= 새해에 내 나이 於焉 60이외다. 平南 大寬山 산속에서 亞細亞의 하늘에 흐르는 구름 짱을 바라보면서 身病을 治療하고 있읍니다.
10년 전= 그 때 50이외다. 上海 佛租界에 있었읍니다. 54歲되는 해에, 故土의 땅을 20여년만에 처음 발버 보앗지요. 上海에서 지난 때의 心境과 그 當時 朝鮮事情은 더 말지 않기로 함니다.
20년 전= 그 때 40이외다. 米國 로샌젤스市에 根據를 두고 그 전해인가 墨西哥의 在留同胞을 차처 여러 달 遊說로 단녀왔고 그리고 42, 3세 되든 해에 上海에 있다가 比律賓과 濠洲 等地로 視察을 단녀 왔소이다.
30년 전= 그 때 30이외다. 28歲까지 平壤 大成學校 일을 보다가 李剛氏 등과 함께 北米로 건너가서 「協會」라는 團體도 만들고 新聞도 發行하는 한편 巴奈馬運河 파는 勞働에도 조곰 從事하였는대 아무튼 나의 30前後는 情熱에 타든 때외다.
40년 전= 그 때 20이외다. 18, 9歲때 상투 튼 이 몸이 獨立協會요 大X協會요 하는 政治團體를 조차다니며 서울과 平壤에서 演壇에 같금 올나섯고 더구나 그 때 平壤 浮碧樓에서 여러번 演說하다가 感이 極하야 울든 생각이 지금도 이저지지 않읍니다.
50년 전= 그 때 열살이외다. 舍伯으로 더부러 平壤 綾羅島까에 있는 조고마한 섬 속에서 農事짓고 있는 한편, 四書五經을 읽고 있었소이다.
權東鎭
丁丑新春= 77歲외다. 天道敎 大宗司長의 職任을 맛고 있읍니다. 世事에 대해선 차라리 沈黙을 지키기로 하지요.
計10년 전= 67歲때 외다. 서울 있으면서 新幹會 本部 副會長에 就任하였고 그 이듬해에는 또한 新幹會 本部 檢査委員長에 就任하여 前後 數年間 新幹運動에<30> 努力했읍니다. 그리고 그때에는 朝鮮 안에 新幹運動이 몹시 氣勢를 올리고 있었지요.
20년 전= 57歲때 외다. 그 해에는 天道敎에 있으면서 孫義庵를 모시고 敎勢擴張에 奔走했고 또 그때가 天道敎의 全盛時代었는데 그 이듬 이듬해에 入했읍니다.
30년 전= 47歲時. 舊韓國 中樞院 副贊議에 被任되였고 大韓協會 實業部長으로도 일하였지요.
40년 전= 37歲 저 有名한 閔妃事件으로 東京에 亡命하여 약 10年을 配所의 달을 처다보며 지냇소이다.
50년 전= 27歲時. 數年 前에 武科及第. 別軍職에 被任. 咸安郡守를 지나 咸鏡道 按撫中軍兼 討捕使로 있다가 다시 中樞府 內禁將으로 轉任했고 그리고 巨文島의 僉使兼守防將으로 있든 때외다.
60년 전= 17歲時, 舊韓國 陸軍士官學校에 다니든 때외다.
이러케 回顧함에 波爛만튼 내 一生이 여름날 구름조각같이 片片히 지나감을 깨달어짐니다.
春園 李光洙
丁丑新春= 나이는 새해되면 46, 浮生의 일이라 어디서 무었을 하며 過歲할는지 알 수 있읍니까. 센터럭이는 것같이 生覺되나 年令에 대해서는 아무 感想도 없읍니다.
10년 전= 10年 前에는 서울에 있었는데 아마 重病으로 알코 있었던 듯 합니다. 朝鮮에 어떤 일이 낳는지 記憶에 없으나 시인한 일이 없었던 것만 確實하겠지요. 記憶이 없으니까.
20년 전= 25歲, 東京早大에서 工夫. 無情을 쓰다. 學之光編輯, 基督靑年會 理事 등.
30년 전= 16歲. 東京서 中學에 다니다.
乙巳新條約 翌年.
40년 전= 5歲. 日淸戰爭 後 2年. 平北 定州에서 내<31> 劍과 초롱을 가지고 놀고 알암 줍고 千字文, 無題詩를 읽고 外祖母 이야기 책 보아 드리고 獨立協會가 한창이었을 것임니다.
50년 前= 나의 前生의 末端, 어디 가서 태어날 것을 準備하던 때다. 옛 朝鮮이 自滅의 一路를 걸고 있었다.
60년 前= 그 때에 나는 어디서 무었울 하고 있었는지 모른다. 大院君이 한창 들날릴 때일 것이다.
海岩 金麗植
丁丑新春= 「벌서 48歲로구나」하는 歎息을 하며 職責인 校務에 奔忙히 過歲準備를 하고 있읍니다. 新年에도 職務인 學校事業을 좀 擴張하려고 애쓰게 되겠지요. 그러나 歲不與我로 한해, 두해 지내는 동안 於公於私에 이렇다 할만한 成果가 없음을 愧歎하며 何如間 人生의 責任을 다하려고 스서로 猛省과 奮勉을 다함니다.
10년 전= 38歲이였는데 약 15年間 海外에 流浪하다가 還土 후 첫 번 작업으로 京城에서 協成學校長의 任에 在하었으나 약 半年間의 職員俸給未拂과 負債過多로 不得已 閉門케 된 學校에서 基金 鳩聚와 難局打開에 腐心盡力 중에 있었읍니다. 그 때 朝鮮 內에 어떤 큰 일은 없었으나 外來 新思潮에 基한 民衆運動이 依然 繼續되여 人心은 焦燥하었읍니다.
20년 전= 28歲 이었는데 米國 아이요와州 大學에 在籍 중으로 비록 苦學生活이었으나 希望에 싸이여 모든 苦勞를 잊고 오로지 學究에 熱中하고 있었음니다. 그 해에도 朝鮮 내에는 何等 特記할만한 큰 일은 없었으나 歐洲大戰亂의 影響을 받아 物價의 高貴와 人心의 興奮은 적지 않었읍니다.
30년 전= 18歲詩인데 時代의 變還에 따라 工夫하던 漢學書籍을 等閑視케 되고 同輩들과 朝夕追逐하며 密議가 紛紛하던 것은 捨舊取新으로 修學의 方向을 轉換하려고 當時 新學修業에 最重課目이던 數學을 演習하며 京城 留學을 꾀하고 있었읍니다.<32>
그때는 乙巳協約의 成立으로 韓國의 外交權을 日本에 讓渡한 後 初次의 重大事件으로 海牙密使事件이 發生되여 光武께서 禪位와 隆熙께서 登極이 있은 다움 丁未協約이 成立되여 韓國軍隊가 解散되고 等 韓末風雲이 緊張하였읍니다.
40년 전= 8歲이였는데 漢文書齋齊에서 童蒙先習등을 學習暗誦한 餘暇에는 동모들과 같이 紙鳶이나 날리고 石戰이나 하는 것 등으로 날뛰었을 뿐임니다. 그 때는 高宗께서 皇位에 올라 朝鮮을 王國으로부터 帝國으로 昇級하는 同時에 年號도 建陽을 光武로 改稱하고 內政 外交에 問題가 複雜하였으니 이에 따라 人心의 趨向도 얼마큼 달러가지만은 철모르는 兒孩 生活로 지내였읍니다.
呂運亨
丁丑新春= 52歲외다. 新聞社가 그러케 된 채로 過歲했슴니다. 世事에 대해서는 沈黙지키지요.
10년 전= 42歲 때인데 上海에 있었읍니다. 大正 8年에 東京 갔었고 내가 45歲 되든 해에 上海 遠東運動場에서 그리되어 朝鮮에 도라왔으며 朝鮮에는 아마 그 해에 第1次共産黨事件이 있었든 줄 記憶함니다.
20년 전= 32歲 때인데 南京大學에 在學中이었으며 歐洲大戰으로 靑島에선 日獨戰役이 있어 수선수선 하엿읍니다.
30년 전= 22歲 때인데 故鄕인 京畿道 楊平農村에서 農事짓고 있었읍니다. 그리다가 江原道를 도라 서울 올너왔지요.
碧初 洪命憙
丁丑新春= 나이 50입니다. 爲天下者도 못 되는 주제에 家人의 生産作業을 몰라서 逢變입니다. 避債臺 어듸 있는가. 過歲하러 가리라. 心境을 간단하게 쓸 재주 없으니 杜子美詩나 한 句 써서 대신 할까요.
「少壯幾時奈老何. 向來哀樂何其多」
10년 전= 2, 3年동안 골치알튼 紛雜한 新聞社生活을 淸算하고 이 해에 비로소 心身安靜하게 過歲하였읍니다.<33>
20년 전= 故鄕를 등지고 멀니 放浪길을 떠나서 6, 7年間 南船北馬로 돌아다닌 끄테 이러타 할 希望이 생긴 것은 아니로되 故土로 다시 들어오랴고 맘을 먹게 되엇섯슴니다. 馬來半島에 있다가 上海에 와서 睨觀과 같이 설을 쇠고 北京에 와서 丹齋와같이 달포 지내고 奉天으로 나왔었읍니다. 睨觀 丹齋 두 분과는 이 해 작별이 곧 千古死別이 되었읍니다.
30년 전= 東京서 所謂 四疊半生活을 하였읍니다, 우리 사람 心情의 憎惡이 必要한 것임은 이 때부터 잘 알게 되었읍니다.
40년 전= 曾祖母 귀염 속에 파무처 지냇슴니다. 이 세상을 내 세상으로만 알고 지냇슴니다. 넷 꿈입니다, 꿈은 벌서 연기같이 살아젓건만 살아진 자취가 지금도 내 맘을 아프게 할 때가 있읍니다.
凰山 李鐘麟
丁丑新春= 54歲외다. 점점 六旬이 갓가워지매 除夜詩 한 首에 이 心懷를 담어 보앗읍니다.
老妻惜夜盡 稚子待朝來
相看堪一笑 歲月爲難催
또 한 首 더 記錄하지요. 빠고다 公園에 갔다가 歲暮 雪景을 보고 心懷를 記하여 보앗지요.
手把雪中枝 春光翠上眉
移時終不捨 此意有誰知
10년 전= 44歲 時 그 때 서울 있었으며 朝鮮 物産獎勵會責任者되어 그 運動에 분주했고 또 그 해에 朝鮮에는 乙丑年 水災가 있어 飢饉救濟會를 組織하여 100,000圓 以上의 큰 돈을 거두어 能聚能散하였지요. 그리고 아마 全朝鮮記者大會도 그 當節에 京城에 열니어진 줄 암니다.
20년 전= 34歲 時 天道敎에 있으면서 孫義庵을 모시고 敎會 일에 분주하였지요. 그 때가 말하자면 天道敎의 全盛時代로서 敎徒도 300萬, 돈도 약 100萬圓을 가지고 있었지요. 지금 생각나는 것은 大正 7年 일인데 世上風雲을 바라보며
孫秉熙先生 게시든 鳳凰閣樓上에서 一首詩를 지어 心懷를 記하여 보앗지요.
黃葉西風吹更急
主人無語下書樓<34>
30년 전= 24歲. 그 때 서울 成均舘 博士가 되었고 그 當時 大韓協會 會報 編輯을 내가 하였고 그리하는 한 편 吳世昌氏 社長아래 大O民報主筆로 있으면서 政論을 일삼었읍니다.
40년 전= 14歲 李卨先生을 모시고 四書五經을 배웟슴니다.
梧村 薛泰熙
丁丑新春= 나는 只今 長沙町 224番에서 服藥療病 중임니다. 새해에도 아모 經營도 없읍니다. 그저 萬念如灰함니다.
惠間諸項의 所答은 客觀的 事狀뿐이라면 其時其時의 事件을 所知대로 對答할 수 있지마는 主觀을 말하라는데는 무었을 했느니 무었을 일으컷느니 하는 일이 모다 神通치 못할 뿐 外라 엇던 점으로는 남 부끄러운 일이어서 都是 開口하고 싶지 안슴니다. 잘 諒解해 주옵소서. 日後 무슨 機會있으면 回顧談 形式으로나 한다면 몰나도 今日의 이 形式으로는 開口할 廉恥가 없읍니다.
金活蘭
丁丑新春= 나는 己亥生이니 丁丑年에는 39歲가 될 것이외다. 여전히 京城에서 梨花專門과 保育의 將來를 꿈구면서 過歲할 豫定이외다.
身不老心不老이니 무슨 恨歎이 있으리이까.
10년 전= 10年 前에는 29歲었을 것이오. 亦 梨花專門과 保育에서 勤務하였나이다.
20년 전= 20年 前에는 19歲이였고 梨花大學 卒業班學生으로 지냇나이다.
30년 전= 30年 前에는 9歲의 小學生으로 仁川永化女子普通學校에 出入하며 지냇나이다.
40년 전= 40年 前 일은 알 길조차 없나이다.
兢人 許憲
丁丑新春= 올에 52歲, 벌서 이러케 되니 歲月이 如矢란 정말 實感으로 늣겨짐니다. 世上風雲을 바라보며<35> 이 한해에는 自體의 修養에나 努力코저 합니다.
10년 전= 42歲였소이다. 그 해에는 世界文化를 볼겸 歐米各國의 司法制度를 硏究코저 世界周遊의 길에 올라 米國 픽스킬에 滯在하면서 英語工夫를 하고 있었읍니다.
그 해에 朝鮮 社會는 活潑한 움지김을 보아서 新幹會가 이려나고 全鮮的으로 民衆運動의 氣勢가 크게 떨치었읍니다.
20년 전= 32歲 때외다. 그 때에는 서울에서 辯護士로 있었는데 그 當時의 社會現象으로 말하면 敎育熱이 크게 끌어서 各處에 中學校가 생기고 先導者들은 敎育을 시켜야 한다고 높이 부르짓든 때외다.
30년 전= 22歲 때외다. 그 전 해까지 宮內部의 奎章閣 主事로 있다가 그 해부터 法部主事로 轉職하여 있었읍니다. 法部大臣은 有名한 張博氏었지요. 밤에는 英語夜學을 단겻였읍니다. 그 當時는 合倂 전으로써 日韓兩國間에 여러 가지 政治的 交涉이 있어 人心이 몹시 緊張하고 있었읍니다.
40년 전= 12歲 때외다. 서울 齋洞 官立小學校 4年級에 다니든 小學生 時節이외다.
徐載弼, 李商在, 金玉均 尹致昊氏들 靑年政客들이 모여 獨立協會를 組織하고 文化更張運動을 이르키고 잇든 때외다.
悠堂 蘇完奎
丁丑新春= 36歲! 京城에서 별노 하는 일이 없이 新春을 마지 하였소이다. 그저 特別計劃없이 희미한 희망 속에서 牛步主義로 큰 樂觀도 큰 悲觀도 없이 나가보려는 중이외다.
20년 전= 26歲 때 東京에서 法學專攻 中 世事는 記憶 없소이다.
30년 전= 16歲 때 扶安 界火島에서 田良齋 선생을 모시고 있었읍니다. 世事는 記憶 없소이다.
金昶濟
丁丑新春= 年 57, 梨花女子高等普通學校 敎員으로 新年도 그저 일을 하겠지요. 별로 所感도 없고요.<36>
10년 전= 丙子부터 10년 前에는 47歲이며, 亦是 梨花高普와 梨門專門에서 교편을 잡고 있었고 日本內地에 學事視察團長으로 갔오. 東亞日報社 新築落成이 있어 民間敎育 15년 以上 功勞者 表彰式이 있었는데 本人도 그 中의 1人이였오.
20년 전= 37歲時 永生中學校(現高普) 敎師로 있었고 집은 亦是 京城에 있기 때문에 京城서 過歲하구요. 世界大戰亂이 한참이요. 日獨戰爭 中이었는데, 本人은 그 해 여름에 처음으로 東京에서 帝國大學講習會에 다니였소.
30년 전= 27歲 쩍인대 鏡城公立普通學校長으로 있으면서 一方으로 成一學校를 助力하였소.
日露戰爭이 막 끝나고 統監政治가 시작될 때인데 民間의 敎育熱은 非常히 昻騰하였지요.
40년 전= 17歲인데 忠南 保寧 態川에서 漢文을 읽으면 儒學者님도 相從하였지요.
甲午 乙未改革黨政府가 一敗倒地한 後 舊 완고당들이 발호하는 一種 恐怖時代 混亂狀態이엇지요. 民間에는 獨立協會가 있것슴니다.
50년 전= 7歲時에 亦是 故鄕인 保寧에서 漢學書堂에 入學하야 天地玄黃을 읽엇지요.
丙戌年 怪疾이 있었지요. 그리고 政界로는 甲申政變이 있는 後 매우 뒤숭숭 하엿지요.
60년 전= (出生) 前 4年인데 有名한 丙子年 凶年이엇지요.
春谷 元世勳
丁丑新春= 나는 至今 京城 東大門外 昌信町 140의 8에서 七旬老母를 모시고 지내는데 나는 금年에 滿 50세이며 나의 안해는 學生들에게 밥 지어주고 누릉지나 어더먹고 어린 딸년에게 날마다 菓子 갑에 졸이는 中이며 나는 最近에 中央時報社에 原稿 쓰는 것으로 日課를 삼ㅅ고 그날그날을 보내고 있소.
새해에 하고 싶은 일이 덜어 있겠지만 잘 될 것같지 아니한 일을 말한들 무었하겠소. 집안살님이 구차한 가운데라도 家族에게 疾病이나 없고 和平이나 하였으면 幸인가 하겠오. 「身老心不老」란 것은 거즛말이오. 늙은 놈에 젊은 마음이 도저히 있을 수가 없는<37> 것이오. 몸이 늙으면 靑年에게 辱 먹기 좋을 만한 마음만 생기는가 하오. 엇던 때는 모든 것이 貴치 않어서 深山幽谷이나 無人絶島를 차저가서 人間社會와 絶綠된 生活을 하다가 그만 둘 생각도 나니 이것이 最近 나의 心境의 一部分인가 하오.
10년 전= 의 나는 北京에서 한편으로는 學窓에 籍을 두고 露西亞 文學도 學究하는 한편으로는 또 무슨 運動에도 奔走하다가 結局은 新義州刑務所에 들어가서 몃해 설을 지내고 刑務所에서 나온 뒤로는 아시는 분들이 보시는 바와 갓치 이 생활을 6, 7年 繼續하는 중이지요.
20년 전= 의 나는 露領 沿海州에서 亦是 一種 放浪生活이라는 그 生活을 하다가 己未年 前後하야 中露兩國의 各地로 나딴은 그 무슨 運動에 쉬지 안코 분주하였지요.
30년 전= 나는 京城에서 大東法律專門學校에서 工夫하였고 校門을 나온 뒤로 곳 나는 나의 先輩와 同志들의 뒤를 따라서 海外로 나가게 되고 海外에 나간 뒤에 무엇무엇에 從事한 것은 낫낫치 말할 수 없오.
40년 전= 나는 書堂에서 小學 通鑑 論語 등의 漢學을 工夫하다가 18세 때에 머리 깍고서 올와서 工夫하게 된 것이 내가 鄕里를 떠난 첫거름이지요.
50년 전= 서 그 以後의 나의 經歷은 나의 어머니께서나 자세히 아시는 일이니 그만둡시다, 그때그때에 朝鮮에 무슨 큰 일 있었든 것은 朝鮮 近世史에 물어보시오.
李承晩
丁丑新春= 내 나히 올에 60이외다. 이미 海外에 나돈지 30餘年에 미첫스매 멀니 太平洋 건너의 靑山白雲 속으로 감금 꿈이 흘너감니다. 故土를 떠날 때에는 靑年이더니 이제 머리 우엔 白髮을 언게 되였소이다. 過歲는 北米 로샌절스市에서 하겠오이다.
10년 전= 그때 내 나이 50, 布哇 호놀루루에서 내 兄弟들과 함께 잇섯슴니다. 그리고 그 때는 布哇에 잇는 모든 勢力을 한데 묵느라고 微力을 다하느라 하였음니다. 布哇서는 新聞도 發行했슴니다.<38>
20년 전= 그 때 내 나이 40, 數年 동안 米國 各地로 遊說하고 도라다니다가 다시 布哇에 도라와서 그 때까지 西洋 사람 손에 있든 朝鮮人 敎會를 우리 사람 손으로 올마왓섯지요. 그래서 布哇에 朝鮮人 學校와 敎會를 세웟슴니다. 그리고 世上은 歐州大戰 中이 되야 여러 가지로 모다들 緊張되어 있었지요.
30년 전= 그 때 내 나이 30. 기억이 히미하야 잘 모르겟슴니다만은 아마 米國 푸린스톤大學을 마치고 다시 하-버드大學 政治經濟科에 다니든 때인 듯 함니다. 博士學位를 엇기가 1911年이엇스니까 그 때는 日露戰爭 후이고 尹致昊氏의 101人事件 卽後인 듯. 나는 故土를 떠나 太平洋을 건너 왓든 것이외다.
*年十년 전= 스무살 나든 해인데 서울서 漢城外國語學校를 다녓고 그리고 李商在, 金貞植氏 등과 함께 아마 무슨 事件으로 獄中生活을 하고 그런 뒤 基督敎靑年會에서 일 보든 때인 줄 아옵니다. 世上은 무슨 協約이 締結된다 云云하든 때지요.
心崗 李肯鍾
丁丑新春= 인체 42世가 되였슴니다. 朝鮮商工新聞社를 經營하게 된 後 日常 奔走히 지내므로 今年도 過歲는 京城서 그럭저럭 할까 합니다. 新年에는 言論界를 위하야 一層더 努力하야 볼까 합니다. 有志事不成에 歲不與我留의 歎이 日常 간절합니다.
10년 전= 에는 京城에 있어지오. 京城 鐘路圖書舘에서 일을 보면서 過歲하였읍니다.
20년 전= 2에는 내 나이 22歲! 참 조흘 때였슴니다. 法專學窓을 나와 다시 더 工夫할 作定으로 京都에 가서 이 해는 지내였슴니다. 그때는 가슴 속이 모다 希望과 雄圖로써 타고 있섰읍니다. 華麗한 꿈도 잇고 壯快한 空想도 하고 悲憤한 決心하고 있을 때였슴니다. 그리다가 그 다음해 北米로 근너가 뱌렸읍니다.
丁七星
생각건대 나는= 至今으로부터 30年 前 當時 李朝 末葉, 우연한 期會로 當時 大邱 관찰사의 진체를 구경하게 되여 그 마마의 地位를 부리워하야 그 길로 이웃 妓生집에 차저다니면서 工夫라고 시작한 것이 天才란 말까지 듯게 되자 부득이 부모님이 그 길에 내노케 되였는대 <39> 그 때 8歲였다, 남들이 日就月將한다는 내 技藝는 차츰 영문(도청) 본관 (군청) 삿도 잔체 때마다 들니게 되였다. 한번은 先生되는 妓生을 따라가서 그 신발을 직키고 구경하는 것이 그 弟子로써 늘 하는 일이라 그럴 때마다 저 애가 時調를 잘 부른단 말이 上坐에 돌게 되자 삿도는 곳 부른다. 부름을 밧고는 서슴지 않코 신을 쥔 채로 올나가 날너갈 뜻이 안즈면 모다들 대소하였다. 너 시조 한마대 불너라 하는 분부가 떠러지기 무섭게 어린 소견에도 자기가 第一 잘 한다고 생각키우는 漢高祖 모신 名將이란 역금을 붓그럼 없이 불너 만흔 층찬도 밧고 우슴도 밧었다. 그러다가 그 다음 그 다음해 순종께서 南巡時大邱라 達城에 坐하섰는데 그 때 여러 大官과 여러 妓生과 함께 나도 參拜한 일이 있었다.
10년 전= 至今으로부터 20年前 當時 一流라고 부름 밧는 京城의 妓生으로 2, 3處 名門大家의 소실노 일홈을 날였다. (異常스터운 것은 大邱에 최감사 退任時 보든 그 삿도집 며나리가 된 일도 있었다)
20년 전= 至今으로부터 10年前 卽 21歲 時 當時는 3.1運動 卽後 朝鮮 안은 수선수선하든 판이라 기푼 뜻은 모르나 鐘路 네거리에 서서 바라보는 절문 가삼은 興분에 넘치는 뜨거운 눈물을 흘니면서 그 뒤를 따라 단닌 일도 있었다. 여러 가지 活動寫眞에서 본 것과 이 때에 밧든 충동은 마츰내 玄海를 건느게 되여 거기서 語學도 배호고 西洋 갈 準備로 英語도 배호고 타이푸라이다도 배웠으나 그러는 中 차차 社會에 눈 뜨게 되에 다시 朝鮮에 건너와 大邱에 女靑을 組織하고 京城에 女性同友會를 組織하며 全鮮靑年大會代表의 한 사람으로 活動하다가 다시 東京으로 건너간 때는 25歲였는대 東京에서 女學生學興會幹事로 活動을 하는 한便 3月會의 參例하야 로자룩젠붉크女性과 社會란 팜푸렛을 發刊 全力하였고 當時는 劉英俊 朴順天 金善氏 등 女流 雄辯家들이 隱退 기분을 가질 때어서 그 뒤를 이어 그 當時 女性으로써의 演壇에 每日같이 오르며 東京地方에까지 단니면서 演說을 한 者는 女性으로써는 나 뿐이였다. 그러는 中 1週日에 몃 번 가지 못하든 技藝學校을 맛치자 서울 도라와서 여러 동모와 함께 槿友會를 創立하고 當時 組織部 責任者로 全鮮 各地 순廻 다음 出版部 責任을 兼하야 기억에 사라지지 않는 歷史的 意味를 띈 女性團體 槿友會는 그의 (나) 결정이다. 다음 槿友會 中央執行委員長으로 新幹會 幹部로 新幹會 全鮮代表大會代表委員의 한 사람 등이였다. <40>
呂運弘
丁丑新春= 은 마흔 일곱이외다. 아직 歲月이 30年은 남어 있을 터이기 焦燥한 생각을 가지지 않고 있읍니다. 새해 計劃이라야 별 것 있아오리까. 世上 形便을 좀 더 두고 보지요.
10년 전= 그 때 37歲. 上海에서 도라와서 별 일없이 그대로 서울 있었읍니다. 그 當時 蔣介石의 손으로 北伐이 完成되여 統一되었읍니다.
20년 전= 그 때 27歲. 米國 우스도大學 哲學科에 在學하였는데 歐洲大戰이 한참 들끌튼 때외다. 가치 學窓에 있든 米國大學生들이 歐羅巴戰場으로 나가는 것을 朝夕으로 보고 있었읍니다.
30년 전= 그 때 17歲. 故鄕인 京畿道 楊平農村에서 兩親 도라가신 뒤 奉祭祀하며 兄님으로 더부러 농사 짓고 있든 때이며 서울서 오는 소식에 여러 가지 政治的 變*이 생기는 줄 짐작을 했읍니다.
一星 辛泰嶽
丁丑新春= 今年 내 나이 36歲외다. 現在 京城에서 辯護士로서 法律事務를 보고 있는데 朝鮮日報社에 關係를 가진 以外에는 엇던 會社나 엇던 團體에 關係를 가진 곳이 없읍니다. 지난 해는 아모 意味 없이 보내었으니 새해인들 별 일이 있겠읍니까. 當分間 謹愼하야 自身의 修養이나 힘쓰랴고 합니다.
10년 전= 26歲 時에는 東京에 있었읍니다. 말이 留學이었으나 學窓生活보다도 다른 方面의 活動이 그 때 나의 全 生活이었읍니다. 只今 생각하야도 그 때 生活이 가장 高潔活達한 生活이던 것 갔읍니다. 現在의 生活을 죽은 生活이라고 하면 그 때 生活은 산 生活이었읍니다. 朝鮮에 三一運動이 있은 直後 全鮮 각지에 우후의 죽순같이 이러나는 청년단체 그 總合體인 朝鮮靑年聯合會가 創立되자 나는 鄭魯湜, 金喆壽 諸氏와 함께 그 中央執行委員으로 있다가 그 뒤 靑年總同盟이 생기고 思想團體로는 서울派, 火曜派, 北風派 등의 不純한 暗雲이 社會運動線上에 배회함을 보고 나는 혼자서 이를 근심하고 이에 反對하야 各 派 領袖을 만나면 小異를 버리고 大同團結하여야 한다고 語재가 없는 나로서 正言直射하다가 各派에 疑惑만 사게<41> 되어 나를 가라처 서울派는 火曜派로 火曜派는 北風派로 北風派는 다시 서울派로 誤認하던 일까지 있었읍니다. 나의 미약한 힘. 이들 派爭을 調停식힐 수 없음을 알었고 따라서 이 鮮內의 派爭에 超然함을 主旨로 하는 東京의 一月會가 나의 心情에 合致되기에 그에 加擔하였읍니다. 이것이 나의 思想團體에 加入한 첫 일이외다. 그 때 東京에는 一月會 以外에 女子團體로 三月會가 있었고 靑年團體로 在東京 朝鮮無産靑年同盟이 있었는데 나는 이 靑年同盟의 執行委員長의 責任도 가지게 되어 그 會의 機關紙로 「靑年朝鮮」을 刊行하였는데 其後 一月會 內部에서 그 一部分子가 派爭에 超然하기를 目標로 한 一月會를 몰아서 鮮內의 鬪爭團體와 抗爭하는 團體, 卽 無言의 투쟁단체로 전환식힐 음모가 있게 되어 이것이 三月會 靑年同盟의 一部에 浸潤됨을 看破하고는 이에 猛烈히 反對한데서 드듸여 東京의 所謂 「流血의 慘劇」 까지 이러나게 된 것입니다. 생각하면 그때의 나의 行動에는 遺憾된 일도 많었겠지마는 그 때의 나의 主觀으로는 그것이 가장 正當한 일이고 그러케 하여야 朝鮮의 社會運動이 正道에 바로 잡힐 것갔고 이것이 바로 잡혀야 朝鮮 사람의 眞正한 活路가 열닐 것갔했고 이 모든 생각에 一毫의 허위나 手段이 없었고 나의 內定한 생각을 그대로 確信하야 疑心함이 없었고 따라서 每事에 勇氣가 나고 熱誠이 생겻습니다. 生活全體가 양심에 비치어 참말 高潔하고 活達하였었습니다. 나는 只今도 그 때 生活을 回顧하야 「어느 때에나 다시?」 하고 고요히 次機를 計劃하고 있읍니다.
20년 전= 以前의 일은 어린 때 일이니 그만두지요.
李大偉
丁丑新春= 43歲가 되겠읍니다. 基督靑年勉勵會에서 일하면서 南滿地方을 돌아볼가 합니다.
오는 해에는 海外에나 나가서 좀 있어볼가 합니다.
10년 전= 32歲이었는대 米國 예일대학에서 工夫하고 있었읍니다. 社會主義運動이 한창 소리치던 때입니다.
20년 전= 22歲였는대 中國北平 留學하다가, 中國勞工兵 通譯官으로까지 가기로 했읍니다. 靑島問題로 하야 日獨交戰에 日本이 捷勝하야 四方에서<42> 提燈行列 하든 때입니다.
30년 전= 12歲이였는대 平北 龍川에서 小學校 工夫, 新興運動 잇서 各處에서 學校를 設立하고 洋鼓喇叭 마음대로 물고 斷髮令이 나려서 나도 父母 承諾없이 單發을 하였다가 1週間이나 남의 집에서 밥을 얻어먹다싶이 하였는걸요.
徐載弼
所丁丑新春= 지금은 米國 빌라델피아市에 있읍니다. 요지음 하는 일이라고는 여러 大學을 도라다니며 講演을 하고 있읍니다. 올에 나이는 68歲외다.
10년崙 전= 은 58歲. 米國 華盛頓에 있으면서 英文雜誌를 내고 있었읍니다. 그리고 아마 各地로 遊說하고 있든 때인가 합니다.
20년 전= 48歲. 米國서 돈을 모아 朝鮮 사람 事業에 쓰느라 하였고 또 醫學搏士의 學位를 어든 뒤인지라 醫業에도 從事한 듯 하오며 世上事情은 歐洲大戰 때이기 世上이 한참 떠들석 하였읍니다.
30년 전= 川 18歲時. 米國에 亡命하여 있을 때외다. 그때 듯기에는 梁起鐸氏 등이 만히 活躍하고 있다는 消息을 故土로 오는 風便에 듯고 있었읍니다.
40년 전= 28歲時. 朝鮮에 나가서 獨立協會를 創立하고 여러 同志로 더부러 半島의 政治 文化 各方面에 改革運動을 이르킨 때이니 가장 내 自身으로도 熱이 끌튼 때로소이다. 그때 우리들은 皇城新聞도 發行하여 民權을 鼓吹하였읍니다.
아무튼 먼 故土에 이제 내가 지내온 過去 一片을 草하는 이 글을 쓰게 되매 감개가 무량하외다, 더욱 貴誌가 11月號가 아니 왔읍니다. 곧 보내주소서.<43>
<28-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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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db.history.go.kr/item/level.do?levelId=ma_016

 

 

1929년 6월 18일

 

남 鎭南浦 漁業同務組合員 200여명, 互助會에 고용계약에서

동아일보 1929. 6. 25. 일제하사회운동사자료집 4 p. 274.
21929년 6월 19일평남 鎭南浦漁業者 互助會員과 船夫 240여명, 査定料면제중외일보 1929. 6. 24. 일제하사회운동사자료집 4 p. 274.
31929년 6월 25일평남 鎭南浦 어업자 互助會員 및 船夫 동맹파업사건,중외일보 1929. 6. 28. 일제하사회운동사자료집 4 p. 275.
41931년 4월 9일평남 鎭南浦 수산노동조합, 긴급집행위원회 개최하고동아일보 1931. 4. 13. 일제하사회운동사자료집 4 p. 279.
51931년 4월 10일평남 鎭南浦 수산노동조합·朝鮮人漁業者互助會, 船主측에동아일보 1931. 4. 13. 일제침략하36년사 9 p. 784.
61931년 4월 10일평남 鎭南浦 수산노동조합 조선인 어선부, 월급제동아일보 1931. 4. 13. 일제하사회운동사자료집 4 p. 279.
71931년 4월평남 鎭南浦 수산노동조합원 300여명, 일본인 어선주조직인동아일보 1931. 4. 11. 일제하사회운동사자료집 4 p. 279.
81936년 4월 28일反帝同盟 互助會. 農民協會 등에 가입 친일파 암살

동아일보 1936. 4. 25,29. 일제침략하36년사 11 p. 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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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926년 7월 21일滿鐵沿線 친일파 5명 살해후 피검된 朴尙萬. 金炳賢,동아일보 1926. 6. 27,7. 11,25. 일제침략하36년사 8 p. 207.
2021926년 7월 23일독립군 3명, 평북 龜城郡 天摩面에서 친일파 元智養고등경찰관계연표
2031926년 7월 26일滿鐵沿線 친일파 살해로 7. 21. 關東廳지방법원에서동아일보 1926. 8. 1. 일제침략하36년사 8 p. 212.
2041926년 9월 8일正義府 제6중대 제2소대장 金昌林. 대원 徐尙眞. 金龍活.한국독립운동사 4 p. 823. 일제침략하36년사 8 p. 250.
2051926년 9월 24일參議府員 3명, 通化縣 친일단체 상조계장 金業平家한국독립운동사 4 p. 826. 일제침략하36년사 8 p. 261.
2061927년 7월 8일경남 統營 친일단체 三九會 회원 29명, 동아일보 광고부장.동아일보 1927. 7. 12. 일제침략하36년사 8 p. 501.
2071927년 7월 8일統營 친일단체 三九會, 동아일보 광고부장 李魯泰와일제하민족언론사론
2081927년 7월 10일馬山記者團, 임시총회 개최하여 친일단체 三九會의일제하민족언론사론
2091927년 7월 11일馬山記者團, 친일단체 三九會를 폭력단체로 간주하고동아일보 1927. 7. 13. 일제침략하36년사 8 p. 502.
2101927년 7월 14일無名會, 긴급위원회 개최하여 친일단체 三九會의 폭행사건에일제하민족언론사론
2111927년 9월 26일新民府 무장단원 수명, 하얼빈 朝鮮人民會 습격하여한국공산주의운동사(김창순) 고등경찰관계연표 일제침략하36년사 8 p. 551. 동아일보 1927. 9. 29.
2121927년 9월 26일新民府 별동대 崔晉萬. 蔡世允 등, 하얼빈에서 친일기관원호처 독립운동사 5
2131927년 10월 24일徽文高普, 親日校主 동상건립반대. 日人 교원배척.원호처 독립운동사 8
2141928년 6월 14일일제, 조선농민의 민족·계급의식을 마비시키기 위해일제조선침략일지
2151928년 9월 26일大邱고보생 200여명, 조선사 교수·언론자유 요구동아일보 1928. 9. 28·29. 원호처 독립운동사 8,9 원호처 독립운동사자료집 13 일제침략하36년사 8 p. 914.
2161928년 9월 28일大邱고보 2·3년생, 교내의 학생자치·일인 및 친일원호처 독립운동사 8,9
2171928년 9월滿洲 開原·淸原縣 친일한인들, 자경단체로 開淸鮮人濟民會재만불량선인상황 일제침략하36년사 8 p. 917.
2181928년 10월 18일참의부 제4중대 소대장 玄昌周·卓應善·金利錫 등,한국독립운동사 5 p. 800. 일제침략하36년사 8 p. 925.
2191928년 10월 24일참의부원 金東一·李珍河 등 13명, 친일단체 鮮民府(뒤에한국독립운동사 5 p. 801. 일제침략하36년사 8 p. 926.
2201929년 2월 28일在滿 親日派 韓人들, 韓僑同鄕會 발기.한국독립운동사 5 pp. 807-810. 일제침략하36년사 9 pp. 40-44.
2211929년 7월국민부 중앙집행위원회, 선언을 발표하여 친일앞잡이한국공산주의운동사(김창순)
2221930년 4월 21일일제, 반봉건적 유교사상 전파 위해 친일유생들의일제조선침략일지
2231930년 12월 16일국민부 兪昌德·鄭一隅 등 4명, 石頭河子에서 친일동아일보 1930. 12. 24. 일제침략하36년사 9 p. 620.
2241932년 2월朴錫胤 등, 在滿韓人 親日團體 民生團 조직(7월에한국공산주의운동사(김창순)
2251932년 10월 20일일제, 중국 동북지방거주 조선인들의 반일투쟁 탄압목적으로일제조선침략일지
2261933년 6월 1일재경 일본인과 친일매국 역적들이 침략전쟁에 출동한일제조선침략일지
2271933년 8월 25일在滿僑胞, 新京에서 親日系 <滿鮮日報> 창간.대한민국임시정부사
2281934년 9월재만친일단체 民生團, 協助會로 개칭.한국공산주의운동사
2291934년 10월조선혁명군 제3중대장 李英杰·소대장 金利濟, 압록강연안에동아일보 1934. 10. 20. 일제침략하36년사 10 p. 735.
2301935년 3월 25일무정부주의자 鄭華岩. 嚴舜奉 등, 친일단체 상해 조선인거류민회일제하민족언론사론
2311935년 3월 25일嚴舜奉. 李圭虎 등, 상해 조선인거류민회 부회장인원호처 독립운동사 7
2321935년 3월 25일在中國南華韓人靑年聯盟 흑색공포단원 嚴舜奉. 李圭虎,동아일보 1935. 3. 26,5. 28. 독립운동사 7 p. 783 일제침략하36년사 11 pp. 45-46
2331936년 2월 4일駐中日本公使 有吉암살계획 및 친일파 上海 朝鮮人居留民會동아일보 1936. 2. 5. 일제침략하36년사 11 p. 272
2341936년 4월 28일反帝同盟 互助會. 農民協會 등에 가입 친일파 암살한동아일보 1936. 4. 25,29. 일제침략하36년사 11 p. 318
2351936년 12월 27일일제, 중국동북지방의 친일주구단체 협조회를 협화회에일제조선침략일지
2361937년 7월 29일新京朝鮮人民會. 協和會 등 6개 滿洲 新京在住 한국인동아일보 1937. 7. 30. 일제침략하36년사 11 p. 663
2371937년 8월 4일친일파 李元錫 등 4명이 한국에 支願兵制度 시행에최근의조선치안상황 일제침략하36년사 11 p. 671
2381937년 8월 20일상류여성 중심의 친일단체 愛國金釵會 결성(금비녀헌납운동일제하민족언론사론 원호처 독립운동사 9 일제조선침략일지 일본제국주의의조선지배
2391938년 1월조선민족혁명당원 金東宇, 친일파 조선인민회장 李甲寧일제침략하36년사 12 p. 11.
2401938년 3월 16일일제, 친일자 자식에게 항공훈련시켜 비행사로 충당키일제조선침략일지
2411938년 4월 23일전북 新泰仁 친일기독교도, 신사참배 결의.동아일보 1938. 4. 28. 일제침략하36년사 12 p. 59.
2421938년 5월 8일친일기독교인 鄭春洙·金禹鉉 등, 부민관에서 황국신민친일파군상 일제침략하36년사 12 p. 66.
2431938년 5월 8일친일목사·교도들, 경성부민관에서 조선기독교연합회동아일보 1938. 5. 9. 일제침략하36년사 12 p. 65.
2441938년 6월 4일종로기독교청년회, 이사회 개최하여 일본기독교청년연맹친일파의군상 일제침략하36년사 12 p. 76.
2451938년 6월 9일木浦 14派 친일기독교역원, 조선기독교 목포연합회동아일보 1938. 6. 14. 일제침략하36년사 12 p. 78.
2461938년 6월 18일修養同友會 曷弘基 등 16명, 친일단체인 대동민우회에최근의 조선치안사안상황 일제침략하36년사 12 p. 81.
2471938년 7월 6일尹致昊·曺秉相 등,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상무이사에친일파군상 일제침략하36년사 12 p. 89.
2481938년 7월 7일국민정신총동원 강원도연맹, 결성 (총재 金時權).친일파군상 일제침략하36년사 12 p. 89.
2491938년 7월 9일玄永燮, 한국어사용전폐를 총독에게 제의.친일파군상 일제침략하36년사 12 p. 90.
2501938년 7월 20일조선교화단체연구회, 시국대응강연회 개최 (강사 尹致昊친일파군상 일제침략하36년사 12 p. 93.
2511938년 10월 5일시국인식 위한 강연대, 경기도 각군에 파견 (연사친일파군상 일제침략하36년사 12 p. 135.
2521938년 10월 24일기독교인, 종로기독교청년회관에서 전쟁협력강도회친일파군상 일제침략하36년사 12 p. 140.
2531938년 11월 28일李碩圭(李容九의 子), 친일단체 大東一進會 조직.원호처 독립운동사 9
2541939년 1월 15일松都航空機주식회사 창립.친일파군상 일제침략하36년사 12 p. 179.
2551939년 2월 9일尹致昊·崔麟·張德秀, 東洋之光 창간기념회 시국문제강연에서친일파군상 일제침략하36년사 12 p. 197.
2561939년 3월 14일친일단체 황군위문작가단 발단.원호처 독립운동사 9
2571939년 4월 15일金東仁·林學洙·朴英熙 등, 조선문단 대표로 중국친일파군상 일제침략하36년사 12 p. 228.
2581939년 5월 15일국민정신총동원 天主敎聯盟 결성.친일파군상 일제침략하36년사 12 p. 252.
2591939년 7월 5일사상보국연맹 京城지부, 朝鮮神宮 광장에서 결성.친일파군상 일제침략하36년사 12 p. 279.
2601939년 8월 5일친일단체 全朝鮮排英동지회연맹 조직.원호처 독립운동사 9
2611939년 8월 5일韓圭復·張德秀·徐春 등, 국민정신선양 각도순회강연친일파군상 일제침략하36년사 12 p. 290.
2621939년 9월 21일汪兆銘, 親日 신중앙정권 수립 성명.일제하민족언론사론
2631939년 9월친일학생단체 조선학생애국연맹 조직.일제하광주학생민족운동사 원호처 독립운동사 9
2641939년 10월 20일李光洙·朴英熙·兪鎭午 등 10여명, 친일문학의 문예협회발기인회동아일보 1939. 10. 19, 21, 23. 일제침략하36년사 12 p. 327.
2651939년 10월 29일친일단체 조선문인협회, 부민관에서 결성.원호처 독립운동사자료집 별 3
2661939년 10월 29일친일문학단체 조선문제협회 결성.일제하민족언론사론
2671940년 1월 1일전조선일보 주필 徐春, 친일잡지 太陽 창간.일제하민족언론사론
2681940년 1월 28일조선문인협회, 평양에서 문예대강연회 개최 (兪鎭午·金東煥·李孝石친일파군상 일제침략하36년사 12 p. 388.
2691940년 1월전조선일보 주필 徐春, 친일잡지 太陽 창간.한민족독립운동사 8 p. 417.
2701940년 2월 20일李光洙, 創氏에 관한 논설을 每日新報에 발표.친일파군상 일제침략하36년사 12 p. 404.
2711940년 7월 1일李光洙, 황민화와 조선문학을 每日新報에 발표.친일파군상 일제침략하36년사 12 p. 484.
2721940년 11월 25일朝鮮文人協會, 문예보국강연회 개최 결정(金東煥·兪鎭午친일파군상 일제침략하36년사 12 p. 556.
2731940년 12월 25일친일단체 皇道學會, 부민관에서 결성.원호처 독립운동사 9
2741940년일제와 친일지주의 가혹한 약탈로 전체농가의 77%가일제조선침략일지
2751941년 6월친일문인단체 國民詩歌聯盟 결성.한민족독립운동사 8 p. 417.
2761941년 7월 30일兪鎭午, 국민문학의 工作鼎談會에 참가.친일파군상 일제침략하36년사 12 p. 758.
2771941년 8월 4일崔載瑞, 徵兵感謝와 우리의 각오라는 논문 발표.친일파군상 일제침략하36년사 12 p. 761.
2781941년 8월 20일친일단체 임전대책협의회, 부민관에서 개최.원호처 독립운동사 9
2791941년 8월 24일尹致昊·高元勳·朴興植 등 50여명, 황국정신 앙양친일파군상 일제침략하36년사 12 p. 7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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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11941년 10월친일문예지 國民文學 창간.한민족독립운동사 8 p. 417.
2821941년 11월 15일친일단체 言論報國會 창립(회장 崔麟).일제하민족언론사론
2831941년 11월 22일친일단체 조선임전보국단을 부민관에거 결성.원호처 독립운동사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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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51942년 5월잡지 <삼천리>가 친일지 <대동아>로 改題.일제하민족언론사론
2861942년 11월 4일親日文人들이 대동아문학자대회 개최.원호처 독립운동사 9
2871943년 1월 23일일제, 친일파들로 경찰예비원제 실시.일제조선침략일지
2881943년 4월 17일친일단체 조선문인보국회가 부민관에서 결성됨.원호처 독립운동사 9
2891943년 4월 17일親日文化團體를 통합한 半島文人報國會 결성.매일신보 1943. 4. 13. 일제침략하36년사 13 p. 475
2901943년 11월 4일<新韓民報>, 한민족의 독립운동이 정신적인 운동에서친일파군상 p. 47 일제침략하36년사 13 pp. 544-545
2911944년 11월 5일李光洙. 金基鎭이 南京文學者大會 조선대표로 선출됨.친일파군상 일제침략하36년사 13 p. 780
2921945년 2월 3일친일단체 대화동맹 발기.원호처 독립운동사 9 일본제국주의의조선지배
2931945년 2월 11일尹致昊. 秦學文 등이 內鮮一體를 목적한 大和同盟친일파군상 p. 152 일제침략하36년사 13 p. 812
2941945년 2월在日 親日朝鮮人들이 東京에서 조선동포처우개선 감사간담회한민족독립운동사 8 p. 494
2951945년 6월 8일친일단체 조선언론보국회 결성.원호처 독립운동사 9 일제하민족언론사론 일본제국주의의조선지배
2961945년 6월 23일朴春琴 등이 府民館에서 친일단체 大義黨을 결성함.원호처 독립운동사 9 일제하광주학생민족운동사
2971945년 6월 24일朴春琴 등이 친일단체 大義黨 창당.일제하민족언론사론 개항100년연표 친일파군상 p. 42 일제침략하36년사 13 p. 865
2981945년 7월 23일李鍾麟. 李鍾郁. 安貞植. 崔載瑞 등이 韓民同志會를친일파군상 p. 155 일제침략하36년사 13 p. 867
2991945년 7월 24일大韓愛國靑年黨 趙文紀 등이 친일단체 大義黨 주최원호처 독립운동사 9 개항100년연표 일제하민족언론사론 독립운동사 8 일제하광주학생민족운동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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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벽 제18호

1921-12-01藝術界의 回顧 一年間曉鍾논설 원문제공
2동광 제29호1931-12-27新聞戰線總動員, 「大合同日報」의 幹部公選, 萬一 朝鮮文 3新聞이 다 解消하고 一大理想 新聞이 出現한다면...설문원문제공
3동광 제35호1932-07-03混迷低調의 朝鮮美術展覽會를 批判함美術家諸氏문예평론 원문제공
4별건곤 제26호1930-02-01金雨英氏 夫人 羅蕙錫氏, 訪問 가서 感心한 婦人金起田소식 원문제공
5별건곤 제30호1930-07-01弟九回 朝鮮美展金周經문예평론 원문제공
6삼천리 제4호1930-01-11雜談室잡저 원문제공
7삼천리 제6호1930-05-01諸氏의 聲明설문 원문제공
8삼천리 제6호1930-05-01喫煙室잡저 원문제공
9삼천리 제6호1930-05-01新兩性道德의 提唱尹聖相, 黃信德, 羅惠錫, 鄭錫泰대담·좌담 원문제공
10삼천리 제8호1930-09-01名流婦人과 産兒制限설문 원문제공
11삼천리 제16호1931-06-01新女性總觀(2) 百花爛漫의 己未女人群회고·수기 원문제공
12삼천리 제3권 제11호1931-11-01나를 잇지 안는 幸福, 帝展入選後感想羅蕙錫문예기타 원문제공
13삼천리 제4권 제1호1932-01-01아아 自由의 巴里가 그리워, 歐米 漫遊하고 온 후의 나在東京 羅蕙錫회고·수기 원문제공
14삼천리 제4권 제3호1932-03-01巴里의 모델과 畵家生活東京 羅蕙錫기행문 원문제공
15삼천리 제4권 제4호1932-04-01巴里畵家生活, 巴里의 모델과 畵家生活在東京 羅蕙錫논설 원문제공
16삼천리 제4권 제7호1932-05-15佳人春秋소식 원문제공
17삼천리 제4권 제7호1932-07-01朝鮮美術展覽會 西洋畵總評羅蕙錫문예평론 원문제공
18삼천리 제4권 제12호1932-12-01쏘비엣露西亞行, 歐米遊記의 其一羅蕙錫기행문 원문제공
19삼천리 제5권 제1호1933-01-01半島에 幾多人材를 내인 英·美·露·日 留學史회고·수기 원문제공
20삼천리 제5권 제1호1933-01-01CCCP, 歐米遊記의 第二羅蕙錫기행문 원문제공
21삼천리 제5권 제3호1933-03-01伯林과 巴里羅蕙錫기행문 원문제공
22삼천리 제5권 제3호1933-03-01畵室의 開放, 巴里에서 도라온 羅蕙錫女史 女子美術學舍婦人記者소식 원문제공
23삼천리 제5권 제4호1933-04-01作家日記문예기타 원문제공
24삼천리 제5권 제9호1933-09-01그랫스면 集잡저 원문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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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삼천리 제7권 제1호1935-01-01女流名士의 男便調査狀잡저 원문제공
37삼천리 제7권 제1호1935-01-01新生活에 들면서羅蕙錫문예기타 원문제공
38삼천리 제7권 제2호1935-02-01新生活에 들면서羅蕙錫문예기타 원문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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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삼천리 제7권 제3호1935-03-01靑春을 앗기는 佳人哀詞문예기타 원문제공
41삼천리 제7권 제5호1935-06-01異性間의 友情論 아름다운 男妹의 記羅蕙錫문예기타 원문제공
42삼천리 제7권 제5호1935-06-01조선녀성의게, 歐米女性을 보고 半島女性에게羅蕙錫논설 원문제공
43삼천리 제7권 제5호1935-06-01李光洙, 許英肅兩氏間 戀愛書翰集문예기타 원문제공
44삼천리 제7권 제6호1935-07-01나의 女敎員時代羅蕙錫회고·수기 원문제공
45삼천리 제7권 제9호1935-10-01三千里機密室 The Korean Black Chamber소식 원문제공
46삼천리 제7권 제9호1935-10-01獨身女性의 貞操論羅蕙錫문예기타 원문제공
47삼천리 제7권 제10호1935-11-01(戱曲) 巴里의 그 女子羅蕙錫희곡·시나리오 원문제공
48삼천리 제8권 제1호1936-01-01英米婦人參政權運動者 會見記羅蕙錫대담·좌담 원문제공
49삼천리 제8권 제1호1936-01-01十萬圓의 朝鮮舘經營하는 金珊瑚珠女士(女社長을 차저)대담·좌담 원문제공
50삼천리 제8권 제4호1936-04-01倫敦救世軍托兒所를 尋訪하고羅蕙錫대담·좌담 원문제공
51삼천리 제8권 제11호1936-11-01三千里 機密室소식 원문제공
52삼천리 제8권 제12호1936-12-01玄淑羅蕙錫소설 원문제공
53삼천리 제10권 제5호1938-05-01나의 東京女子美術學校 時代羅蕙錫회고·수기 원문제공
54삼천리 제10권 제5호1938-05-01戀愛觀 批判, 毛允淑·羅蕙錫씨의安德根논설 원문제공
55삼천리 제10권 제5호1938-05-01女流 文士의 『戀愛 問題』會議대담·좌담 원문제공
56만국부인 제1호1932-10-01萬國婦人싸론회고·수기 원문제공
57동명 제18호1923-01-01母된 感想記羅蕙錫목차제공
58동명 제19호1923-01-07母된 感想記羅蕙錫목차제공
59동명 제20호1923-01-14母된 感想記羅蕙錫목차제공
60동명 제21호1923-01-21母된 感想記羅蕙錫목차제공
61동명 제23호1923-02-04觀念의 襤褸를 벗은 悲哀-羅蕙錫女史의 ‘母된 感想記’를 보고-百結生목차제공
62동명 제24호1923-02-11觀念의 襤褸를 벗은 悲哀-羅蕙錫女史의 ‘母된 感想記’를 읽고-百結生목차제공
63동명 제29호1923-03-18百結生에게 答함羅蕙錫목차제공
64서광 제6호1920-07-05婦人問題의 一端羅蕙錫女史목차제공
65여자계 목차제공
66학지광 제3호1914-12-03理想的 婦人羅蕙錫 孃목차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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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동아일보 1921-09-290305婦人衣服改良問題, 金元周兄의 意見에 對하여(제2회, 全4回)
7동아일보 1921-09-300303婦人衣服改良問題, 金元周兄의 意見에 對하여(제3회, 全4回)
8동아일보 1921-09-300303婦女衣服改良問題, 金元周兄의 意見에 對하여(제3회, 全4回)(羅蕙錫女史)
9동아일보 1921-10-010305婦女衣服改良問題, 金元周兄의 意見에 對하여(제4회, 全4回)(羅蕙錫女史)
10동아일보 1921-10-010305婦人衣服改良問題, 金元周兄의 意見에 對하여(제4회, 全4回)
11동아일보 1922-03-220404羅蕙錫女史, 安東縣에 女子夜學設立
12동아일보 1923-07-080601康明花의 自殺에 對하야
13동아일보 1925-06-010206美展入賞畵報其二, 羅惠錫女史의 「廟」 (三等)
14동아일보 1926-01-240303생활개량에 대한 녀자의 부르지짐[제1회, 全7回](羅蕙錫)
15동아일보 1926-01-250303생활개량에 대한 녀자의 부르지짐[제2회, 全7回](羅蕙錫)
16동아일보 1926-01-260305생활개량에 대한 녀자의 부르지짐[제3회, 全7回](羅蕙錫)
17동아일보 1926-01-270305생활개량에 대한 녀자의 부르지짐[제4회, 全7回](羅蕙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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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동아일보 1926-05-160303開會된 美術展覽會(一) 天后宮(特選) 羅蕙錫
22동아일보 1926-05-180301녀류예술가 라혜석씨 그림을 그리게 된 동긔와 경력과 구심, 십사년동안 긴세월에 끄님 업는 그의 정력
23동아일보 1927-05-270301羅蕙錫 京城은 感想一片
24동아일보 1927-05-270301京城온 感想一片
25동아일보 1929-09-220408羅蕙錫女史 歐米 寫生畫展覽會, 主催 東亞日報水原支局, 後援 中外日報水原支局
26동아일보 1929-09-230408羅蕙錫女史畵展 수원에서 개최
27동아일보 1929-09-230408羅蕙錫女史 歐米 寫生畫展覽會, 主催 東亞日報水原支局
28동아일보 1930-03-280501구미(歐米) 시찰긔; 불란서 가정은 얼마나 다를가[제1회, 全6回](羅蕙錫)
29동아일보 1930-03-280501구미(歐米)시찰긔, 불란서 가정은 얼마나 다를가[제1회, 全6回]
30동아일보 1930-03-290501구미(歐米) 시찰긔; 불란서 가정은 얼마나 다를가[제2회, 全6回](羅蕙錫)
31동아일보 1930-03-290501구미(歐米)시찰긔, 불란서 가정은 얼마나 다를가[제2회, 全6回]
32동아일보 1930-03-300501구미(歐米)시찰긔, 불란서 가정은 얼마나 다를가[제3회, 全6回]
33동아일보 1930-03-300501구미(歐米) 시찰긔; 불란서 가정은 얼마나 다를가[제3회, 全6回](羅蕙錫)
34동아일보 1930-03-310501구미(歐米)시찰긔, 불란서 가정은 얼마나 다를가[제4회, 全6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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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동아일보 1930-04-050502구미(歐米) 시찰긔[제3회, 全6回]
45동아일보 1930-04-050502구미(歐米) 시찰긔[제3회, 全6回](羅蕙錫)
46동아일보 1930-04-060502구미(歐米) 시찰긔[제4회, 全6回]
47동아일보 1930-04-060502구미(歐米) 시찰긔[제4회, 全6回](羅蕙錫)
48동아일보 1930-04-090502구미(歐米) 시찰긔[제5회, 全6回]
49동아일보 1930-04-090502구미(歐米) 시찰긔[제5회, 全6回](羅蕙錫)
50동아일보 1930-04-100502구미(歐米) 시찰긔[제6회, 全6回]
51동아일보 1930-04-100502구미(歐米) 시찰긔[제6회, 全6回](羅蕙錫)
52동아일보 1931-06-030402美展特選作「庭園」은 歐洲旅行의 선물, 羅蕙錫女史와 그의 作品[寫]
53동아일보 1931-10-130206彫刻에 文錫五氏, 洋畵에는 羅蕙錫女史 제전에 이채를 나타내 帝展에 各各入選[肖 : 라혜석녀사]
54동아일보 1933-02-04조간0406羅蕙錫女史 女子美術學舍創設 市內壽松洞에
55동아일보 1934-09-20조간0201女流畫家 羅蕙錫氏 崔麟氏相對提訴 妻權 侵害에 依한 慰藉料萬二千圓 請求, 十九日午後正式手續[肖]//訴狀에 나타난 請求理由의 全文//貞操蹂躝關係는 內容證明으로, 不應하기에 畢竟訴訟提起 辯護士蘇完奎氏談
56동아일보 1935-10-27석간0303羅蕙錫女史 洋畫小品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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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4년 8월 20일宋秉畯,尹始炳등 輔安會에 대항,친일단체 <維新會>를개항 100년 연표자료집
21904년 8월 20일宋秉畯,尹始炳 등이 친일단체 維新會 조직.일제하민족언론사론 (최민지) p. 619.
31904년 11월 30일일제 지시로 친일단체 일진회, 정치개혁을 정부에일제조선침략일지 p. 65.
41907년 5월 15일일제육군, 친일단체 일진회에 10만원의 정치 자금을일제조선침략일지
51910년 8월 25일일제통감부, 한국인의 일체 집회금지. 친일단체 <일진회>까지일제조선침략일지
61916년 12월 29일閔泳綺등 친일단체, 大正實業친목회 조직.일제하민족언론사론
71916년친일단체 <대정실업 친목회> 조직일본제국주의의 조선지배(박경식)
81919년 12월 4일閔元植 協成俱樂部, 국민협회로 개편 時事新聞 발간고등경찰관계연표 p.12
91920년 1월 18일국민협회(친일단체 회장 閔元植,협성구락부의 개칭)독립운동사 9
101920년 1월 18일국민협회(친일단체,회장 閔元植,協成俱樂部의 개칭)한국공산주의운동사(김창순)
111920년 1월 18일閔元植, 협성구락부를 국민협회로 개칭(한.일 양민족의고등경찰관계연표 p.16
121920년 4월 13일블라디보스톡에서 조선인 거류민회(친일단체) 조직한국공산주의운동사(김창순)
131920년 5월 1일니콜라예프스크에 친일단체인 朝鮮人民會 조직.고등경찰관계연표 p.25
141920년 10월 26일일제, 친일단체인 大東同志會 조직. 평양을 중심으로고등경찰관계연표 p.45
151920년 10월 26일金興健 등, 평양에 친일단체 大東同志會 조직.고등경찰보 제1호 p.182
161920년 10월 31일평양 大東同志會(회장 鮮于鎬) 결성. 韓·日人 공존공영高等警察要史 일제침략하 36년사-5 p.694
171921년 1월 13일친일단체 大正親睦會 한일 융화를 위한 主義,綱領每日申報 1921.1.14 일제침략하 36년사-6 p.7
181921년 3월 27일대한민국임시정부, 만주의 친일단체 保民會 간부 임살을대한민국임시정부사
191921년 8월 27일조선소작인상조회(친일단체) 조직-회장 宋秉畯한국공산주의운동사(김창순)
201921년 8월 27일宋秉畯, 친일단체인 소작인상조회를 결성(친일지주의원호처독립운동사 p.421
211921년재일친일단체 상애회 결성일본제국주의의 조선지배(박경식)
221923년 2월 3일시베리아에서 특별결사대로 파견된 獨立軍 10명이東亞日報 1923.1.21 일제침략하 36년사-7 p.1
231924년 3월 13일相愛會(친일단체) 부산본부 조직한국공산주의운동사(김창순)
241924년 3월 25일재경 친일단체 國民協會·維民會·少作人相助會·朝鮮經濟會독립운동사 9
251924년 3월 25일재경 친일단체 國民協會,維民會,소작인상조회,조선경제회한국공산주의운동사(김창순)
261924년 3월 25일親日團體 國民協會·朝鮮小作人相助會·維民會·勞動相愛會·東亞日報 1924.4.2 일제침략하 36년사-7 p.293
271924년 4월 2일친일단체인 각파유지연맹 朴春琴,李喜侃,金明濬,蔡基斗등한국공산주의운동사(김창순)
281924년 4월 2일친일단체인 각파 유지 연맹 박 춘금(朴春琴).이 희간(李喜侃).독립운동사 9
291924년 4월 2일朴春琴 등 親日團體代表,東亞日報社 宋鎭禹 金性洙를東亞日報 1924.4.2 일제침략하 36년사-7 p.304
301924년 4월 2일朴春琴 등 친일단체 대표, 동아일보사주 김성수와일제하민족언론사론
311924년 4월 9일親日團體 東亞日報 폭행사건에 대해 민간 유지 40명이東亞日報 1924.4.11 일제침략하 36년사-7 p.306
321924년 4월 15일申錫麟 등, 서울에서 친일단체 同民會를 조직.고등경찰보 제1호 p.182
331924년 4월 22일친일단체 각파 유지연맹 규탄 민중대회, 일경이 강압금지-조선한국공산주의운동사(김창순)
341924년 7월국민협회(친일단체)간부 金明濬 외 3명,회원 1만 7천여명이한국공산주의운동사(김창순)
351924년 7월친일단체 국민협회 간부 金明濬 외 3명, 회원 1만독립운동사 9
361924년 8월 13일金聖旭 등, 서울에 친일단체 甲子具樂部를 조직.고등경찰보 제1호 p.182
371925년 1월 8일시둑대동단(친일단체 : 각파유지연맹 및 普天교도한국공산주의운동사연구
381925년 6월 18일일선융화 표방한 친일단체 同民會, 同化事業 추진.한국독립운동사 p. 212 일제침략하36년사 p. 688
391926년 9월 24일參議府員 3명, 通化縣 친일단체 상조계장 金業平家한국독립운동사 4 p. 826. 일제침략하36년사 8 p. 261.
401927년 7월 8일경남 統營 친일단체 三九會 회원 29명, 동아일보 광고부장.동아일보 1927. 7. 12. 일제침략하36년사 8 p. 501.
411927년 7월 8일統營 친일단체 三九會, 동아일보 광고부장 李魯泰와일제하민족언론사론
421927년 7월 10일馬山記者團, 임시총회 개최하여 친일단체 三九會의일제하민족언론사론
431927년 7월 11일馬山記者團, 친일단체 三九會를 폭력단체로 간주하고동아일보 1927. 7. 13. 일제침략하36년사 8 p. 502.
441927년 7월 14일無名會, 긴급위원회 개최하여 친일단체 三九會의 폭행사건에일제하민족언론사론
451928년 10월 18일참의부 제4중대 소대장 玄昌周·卓應善·金利錫 등,한국독립운동사 5 p. 800. 일제침략하36년사 8 p. 925.
461928년 10월 24일참의부원 金東一·李珍河 등 13명, 친일단체 鮮民府(뒤에한국독립운동사 5 p. 801. 일제침략하36년사 8 p. 926.
471932년 2월朴錫胤 등, 在滿韓人 親日團體 民生團 조직(7월에한국공산주의운동사(김창순)
481934년 9월재만친일단체 民生團, 協助會로 개칭.한국공산주의운동사
491935년 3월 25일무정부주의자 鄭華岩. 嚴舜奉 등, 친일단체 상해 조선인거류민회일제하민족언론사론
501937년 7월 29일新京朝鮮人民會. 協和會 등 6개 滿洲 新京在住 한국인동아일보 1937. 7. 30. 일제침략하36년사 11 p. 663
511937년 8월 20일상류여성 중심의 친일단체 愛國金釵會 결성(금비녀헌납운동일제하민족언론사론 원호처 독립운동사 9 일제조선침략일지 일본제국주의의조선지배
521938년 6월 18일修養同友會 曷弘基 등 16명, 친일단체인 대동민우회에최근의 조선치안사안상황 일제침략하36년사 12 p. 81.
531938년 11월 28일李碩圭(李容九의 子), 친일단체 大東一進會 조직.원호처 독립운동사 9
541939년 3월 14일친일단체 황군위문작가단 발단.원호처 독립운동사 9
551939년 8월 5일친일단체 全朝鮮排英동지회연맹 조직.원호처 독립운동사 9
561939년 10월 29일친일단체 조선문인협회, 부민관에서 결성.원호처 독립운동사자료집 별 3
571940년 12월 25일친일단체 皇道學會, 부민관에서 결성.원호처 독립운동사 9
581941년 8월 20일친일단체 임전대책협의회, 부민관에서 개최.원호처 독립운동사 9
591941년 11월 15일친일단체 言論報國會 창립(회장 崔麟).일제하민족언론사론
601941년 11월 22일친일단체 조선임전보국단을 부민관에거 결성.원호처 독립운동사 9
611943년 4월 17일친일단체 조선문인보국회가 부민관에서 결성됨.원호처 독립운동사 9
621945년 2월 3일친일단체 대화동맹 발기.원호처 독립운동사 9 일본제국주의의조선지배
631945년 6월 8일친일단체 조선언론보국회 결성.원호처 독립운동사 9 일제하민족언론사론 일본제국주의의조선지배
641945년 6월 23일朴春琴 등이 府民館에서 친일단체 大義黨을 결성함.원호처 독립운동사 9 일제하광주학생민족운동사
651945년 6월 24일朴春琴 등이 친일단체 大義黨 창당.일제하민족언론사론 개항100년연표 친일파군상 p. 42 일제침략하36년사 13 p. 865
661945년 7월 24일大韓愛國靑年黨 趙文紀 등이 친일단체 大義黨 주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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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혜석(羅蕙錫, 1896~1949)이 아닐까 싶다.

20세기 초 화가이자 문필가였던 그녀는 여자이기 전에 한 인간이었고 인간이기 전에 예술가였다.

예술가로서 그녀의 삶은 예술 자체였다. 그러나 그녀의 해방론에 가까운 여성관은 전통적인 여성관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것이었다.

남성 중심 사회에 대한 그녀의 대범한 도전은 불행의 신호탄이었다.

근대 신여성들의 삶이 그랬듯이 그녀의 화려했던 삶은 한순간에 사라졌다.

 

 

 나혜석 VS 이상… `新인간`을 개척하다

  

 구본웅 이상 나혜석의 우정과 예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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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이 그린 시화 그림 속의 실제 주인공은 누구인가?



これはこれ札つきの要視察猿                     이거야말로 딱지 붙은 요시찰 원숭이

トキドキ人生ノ檻ヲ脫出スルノデ               가끔 인생의 우리를 탈출하기 때문에

園長さんが心配スルノテアル                     원장님이 걱정을 하는 것이다.            -이상-

 

 

누구는 구보 박태원 선생의 초상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림 원본의 얼굴 아래쪽 시루엣은 두 남녀가 대화를 나누고 있다.

                                                             원숭이 처럼 창문 밖에서 몰래 엳듣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요시찰  원숭이는 과연 누구일까?   간담이 서늘하다.

                                                                          

 

 

이 시화는 시인 강 민 선생이 원본을 보관하고 있을 때 가까운 이들에게

이 귀한 시화 몇 점을 나누어주기 위해 복사를 한 뒤 비닐로 코팅해 놓았던 것이다. 

이 시화 원본은 안타깝게도 강 민 선생이 이사를 할 때 잃어버렸다 한다.

                      전체사진 http://www.pressbyple.com/news/articleView.html?idxno=25293                                                  

 

 

 

 

 

 

 

나는 전연 실망 가운데 있다. 지금에 나의 이 무서운 생활이 노위에 선 도승사의 모양과 같이 나를 지지하고 있다.

모든 것이 다 하나도 무섭지 아니한 것이 없다. 그 가운데에도 이 <죽을 수도 없는 실망>은 가장 큰 좌표에 있을 것이다.


중편소설 十二月 十二日 서문 중에서......

                                                                                              

 

                                               

                                                                                          10. 동물에 대한 고결한 지식    바로가기













이상李箱 애사哀詞

                                                                                        박 태 원

 

여보, 상箱 -

 

당신이 가난과 병 속에서 끝끝내 죽고 말았다는 그 말이 정말이요 ?

부음을 받은 지 이미 사흘, 이제는 그것이 결코 무를 수 없는 사실인 줄만

알면서도 그래도 좀처럼 믿어지지 않는 이 마음이 섧구려.

 

재질과 교양이 남에게 뛰어나매, 우리는 모두 당신에게 바라고 기다리든 바

컸거늘, 이제 얻어 이른 곳이, 이 갑작한 죽음이었소 ? 사람이 어찌 욕되게

오래 살기를 구하겠다면 이십 팔년은 너무나 짧소.

 

여보, 상箱 -

 

당신이 아직 서울에 있을 때 하롯저녁 술을 나누며 일러주든 그 말 그 생각이

또한 장하고 커서 내 당신의 가는 팔을 잡고 마른 등을 치며 한 가지 감격에

잠겼든 것이 참말 어제 같거든 이제 당신은 이미 없고 내 가슴에 빈 터전은

부질없이 넓어 이 글을 초하면서도 붓을 놓고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기 여러 차례요.

 

여보, 상箱 -

 

이미 지하로 돌아간 당신은 이제 참 마음의 문을 열어, 내게 일러주지 않으려오 ?

당신은 참말 무엇을 위하야, 무엇을 구하야, 내 서울을 버리고 멀리 동경으로 달려

갔던 것이요 ? 모든 어려움을 다 물리치고 모든 벗들의 극진한 만류도 귀 밖에 흘리고

마땅히 하여야 할 많은 일을 이곳에 남겨둔 채 마치 도망꾼이처럼 서울을 떠났든 당신의

참뜻을 나는 이제 있어도 풀어 낼 수가 없구료.

 

여보, 상 -

 

그래도 나는 믿었소. 벗에게 마음을 아직 숨겨 두어도 당신의 뜻은 또 한 커서 이제 수히

서울로 돌아올 때 당신은 응당 집안을 돌보아 아들된 이의 도리를 지키고 또 한편 당신이

그렇게도 사랑하여 마지않든 우리 문학을 위하야 힘을 애끼지 않으리라고.

 

그러나 그것도 부질없이 만리나 떨어진 곳에 가난하고 외로운 몸이 하롯날 병들어 누우매

이곳에 남은 벗들은 오직 궁금하고 답답하여 할 뿐으로 놀란 가슴을 부등켜안고 달려간

안해의 사랑의 손길도 당신의 아픈 몸을 골고루 어루만지는 수는 없어 그래 드디어 할 일

많은 당신을 다시 돌아오게 못하였나, 하면, 우리가 굳이 당신을 붙들어 서울에 그대로

머물러 있게 못한 것이 이제 새삼스러이 뉘우쳐지는구료.

 

여보, 상 -

 

재주가 남보다 뛰어난 사람은 마땅히 또 총명하여야 할 것으로, 우리는 그것도 당신에게

진작부터 허락하여 왔거든, 어찌 당신은 돌아보아 그 귀한 몸을 애낄 줄 몰랐었소?

병을 남에게 자랑할 줄 모르는 당신, 허약한 몸이 감당해낼 턱없는 줄 알면서도 그 절제

없는 생활을 그대로 경영하여 온 당신 - 그러한 당신의 이번 죽음을 애끼고 서러워하기 전에

먼저 욕하고 나무라고 싶은 이 어리석은 벗의 심사를 상의 영혼은 어떻게 풀어주려 하오 ?

 

여보, 상 -

 

그러나 모든 말이 이제는 눈꼽만한 보람도 없는 것이구려. 돌아오면 하리라고 마음 먹었던

많은 사설도, 이제는 영영 찾아갈 곳을 잃은 채 이 결코 충실치 못하였든 벗은 이제 당신의

명복만을 빌려하오.

 

부디 상은 편안히 잠드시오.

                                                                                           <조선일보> 1938년 2월 8일

출처 : 행복한 꿈과 삶을 함께 나누고 싶은 마음
글쓴이 : 다니엘박 20번 원글보기
메모 :

 




 

 

.

 

 

[발굴] 文人, 옛 잡지를 거닐다 ③ 이상·김유정·박태원·김기림

 

“오입쟁이 李箱(이상)도 연정에는 서툰 소년”

 

⊙ ‘고독한 이방인’ 시인 李箱의 遺稿(유고) 속에 당대 문인들의 삶 담겨

⊙ 박태원의 소설 <애욕>의 주인공은 李箱이 실제 모델

⊙ “돌아오지 않는 ‘제비(이상의 다방 상호)’의 임자는 얼마나 야속한 사람이겠소?”(金起林)

 

 

이상·김유정·박태원·김기림(맨 위로부터 시계 반대 방향).

 

 

1930년대에 카프식(式) 경향문학에 맞선 걸출한 문우(文友)들이 여럿 있었다. 시인 이상(李箱·본명 金海卿·1910~1937)과 김기림(金起林), 정지용(鄭芝溶), 소설가 박태원(朴泰遠)과 김유정(金裕貞) 등이다.

순수예술을 지향했던 ‘구인회(九人會)’ 멤버이기도 한 이들 사이에 남은 교우록(交友錄)은, 일찍 타개한 이상의 유고(遺稿)와 문우들의 회고에서 확인할 수 있다.

 

1930년대 한국문단의 ‘고독한 이방인(異邦人)’이라 불린 이상은 당대 카프의 프롤레타리아 문학과 대조되는 관념적이고 난해한 모더니즘 문학으로 센세이션을 일으켰던 인물. 3년 과정의 경성고등공업학교(지금의 서울대 공대) 건축과를 나와 21세 때 조선총독부 내무국 건축기수로 취직한 그는, 조선건축회지 《조선과 건축》의 표지도안 현상모집에 1등과 3등에 당선되는가 하면 <이상(異常)한 반역반응(反逆反應)>이란 낯선 시로 당대 문단을 경악시켰다. 또 ‘선전(鮮展·조선미술전람회)’에 자신의 초상화를 출품, 입선될 정도로 문예(文藝)에 다재다능했다.

 

이상이 1934년 4월 17일 향년 28세를 일기로 동경제대부속병원에서 요절하고 2년 뒤인 1939년 5월호 《청색지(靑色紙)》에 이상의 유고 <소설체로 쓴 김유정론>이 실렸다.

글 도입부에 이상은 ‘앞으로 김기림, 박태원, 정지용에 대한 글도 쓸 계획’임을 밝혔을 정도로 교분이 두터웠다. 그러나 실제로 완성된 글은 한 편밖에 없다. <소설체로 쓴 김유정론>에는 문우들에 대한 흥미로운 묘사가 자주 등장한다.

 

비슷하지만 다른 起林· 泰遠· 芝溶· 裕貞

 

이상은 시인 김기림에 대해 ‘암만해도 성을 안 낼뿐더러 누구를 대하든 늘 좋은 낯으로 대하는 타입의 우수한 견본(見本)’이라고 했다. 소설가 박태원에 대해선 비슷하지만 다르게 묘사한다.

 

<…좋은 낯을 하기는 해도 적(敵)이 비례(非禮)를 했다거나 끔찍이 못난 소리를 했다거나 하면, 잠자코 속으로만 꿀꺽 없이 여기고 그만두는, 그러기 때문에 근시안경을 쓴 위험인물이 박태원이다.…>

(p89, <소설체로 쓴 김유정론>, 《청색지》, 1939년 5월)

 

이상이 보기에 정지용은 김기림, 박태원과 또 다르다.

 

<…없이 여겨야 할 경우에 “이놈! 네까짓 놈이 뭘 아느냐”라든가, 성을 내면서 “여! 어디 덤벼봐라”고 할 줄 아는, 그러나 그저 그럴 줄 알 뿐이지 그만큼 해두고 주저앉고 마는, 코밑에 수염을 저축(貯蓄)한 정지용이었다.…>(p89)

 

반면 김유정은 속으로 부글부글 삼키는 부류가 아닌 진정한 ‘투사’로 묘사된다.

 

<…모자를 홱 벗어 던지고, 두루마기도 마고자도 민첩하게 턱 벗어 던지고, 두 팔 훌떡 부르걷고 주먹으로는 적의 볼때기를, 발길로는 적의 사타구니를 격파하고도 오히려 행유여력(行有餘力)에 엉덩방아를 찧고야 그치는 희유(稀有)의 투사가 있으니 김유정이다.…>(p89)

 

이상은 ‘이들이 무슨 경우에 어떤 얼굴을 했댔자 기실, 그 교만(驕慢)에서 산출된 표정 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참 위험하기 짝이 없는 분들’이라 재미있게 표현한다.

 

<…다행히 이 네 분은 서로들 친하다. 서로 친한 이분들과 친한 나 불초(不肖) 이상이 보니까 여상(如上)의 성격이 순차적 차이가 있는 것은 재미있다. 이것은 혹 불행히 나 혼자의 재미에 그칠는지 우려되지만 그래도 좀 재미있어야 되겠다.…>(p90)

 

 

<소설체로 쓴 김유정론>을 좀 더 들여다보자.

 

어느 날 김유정이 B군, S군과 함께 초저녁부터 곤히 잠든 이상을 찾아왔다.

 

“김형!(김해경) 이 유정이가 오늘, 술 좀 먹었습니다. 김형, 우리 또 한잔 합시다.”

 

이상 왈(曰) “그럽시다 그려.”

 

강원도 출신인 김유정은 술이 들어가면 끈적끈적한 목소리로 강원도아리랑 ‘팔만구암자(八萬九庵子)’를 내뽑곤 했다. 이상이 듣기에 유정의 목소리는 ‘천하일품’. 하지만 취중 문학담은 곧잘 주먹다짐으로 이어졌다.

 

B군이 술에 취해 5합들이 술병을 거꾸로 쥐고 육모방망이 돌리듯 휘두르며 “너, 유정이 덤벼라”고 외쳤다. 유정과 S군이 함께 맞서 B군을 공격했지만 B군은 S군의 불두덩이를 걷어찼다. 노발대발한 S군은 B군을 향하여 맹렬한 일축(一蹴)을 결행한다.

 

<…이러면 B군은 또 선수(船首)를 돌려 유정을 겨누어 거룩한 일축을 발사한다. 김유정은 S군을, S군은 B군을, B군은 유정을, 유정은 S군을, S군은… 대체 누가 누구하고 싸우는 것인지 종잡을 수가 없는 것이다.…>

(p93)

 

 

仇甫의 소설 <애욕>에 등장한 李箱

 

 

이상이 절친한 친구였던 소설가 구보 박태원의 결혼식 방명록에 남긴 친필 축하 메시지.

“結婚(결혼)은 卽(즉) 慢畵(만화)에 틀님업고(틀림없고)”로 시작하는 글이 눈에 띈다.

 

 

1939년 5월 《여성》지에는 소설가 구보(仇甫) 박태원이 쓴 추모글인 <이상(李箱)의 비련(秘戀)>이 실렸다. 그는 이상을 이렇게 묘사했다.

 

<…가난하고 불결하기는 이전과 마찬가지지만, 코르덴 양복에 해진 셔츠, 세수는 사흘에 한번 할까 말까 하고, 잡지 일로 《조선일보》 출판부 같은 곳에 나타나서 불결한 손으로 눈을 비벼 눈곱을 떼고 하품을 하고 그러면서도 곧잘, 그의 독특한 화술을 농(弄)하여 사람을 웃겼던 것이나, 그러한 곳에는 또한 형언키 어려운 일종의 매력이라는 것이 있었다.…>(p76, <이상의 비련>, 《여성》, 1939년 5월호)

 

구보의 집은 서울 광교 천변에 있었는데 이상이 종로1가에서 운영했던 다방과 가까웠다고 한다. 다방 ‘제비’는 이상이 스물네 살 되던 해에 객혈로 건축과 기수직을 포기하고 황해도 백천(白川) 온천으로 휴양을 떠나 그곳에서 기생 금홍(錦紅)이란 여인과 동거를 시작한 뒤 상경(上京), 호구책으로 시작했었다. 영업이 신통치 않아 ‘제비’가 결국 문을 닫았고 뒤이어 카페 ‘쓰루’ ‘씩스 나인’, 다방 ‘무기’를 열었으나 한결같이 실패하고 말았다.

 

구보는 이상을 주인공으로 등장시킨 소설 <애욕(愛慾)>을 1934년 《조선일보》에 연재했다. 그러나 3~4회 연재하다 중단했다고 한다. 소설 내용은 이렇다.

 

 

"주인공은 젊은 화가 하웅(河雄). 하웅은 종로에서 다방을 경영하는데 아내를 다방 마담으로 내세웠다. 아내는 다른 사내와 바람이 나서 떠나버리고 하웅은 우연히 한 소녀와 사랑에 빠져 그녀를 위해 정지용의 시를 암송한다. 그러나 소녀 주위에는 여러 사내가 있어 하웅을 거짓사랑으로 농락할 뿐이다. 그런 하웅을 친구인 구보가 나무라지만 하웅은 ‘자기 힘으로 어쩔 수 없다’고 말한다."

 

 

박태원은 <이상의 비련>이란 글에서 자신의 소설 <애욕>을 소개하며 소설 속 하웅의 모델이 이상이었다고 밝혔다.

 

<…마르고 키 큰 몸에 어지러운 머리터럭과 면수(面手·면도와 세수)를 게을리한 얼굴에 잡초와 같이 무성한 머리카락이며, 심심하면 손을 들어 맹렬한 형세로 코털을 뽑는 버릇에 이르기까지 <애욕> 속의 하웅은 현실의 이상을 그대로 방불케 하는 것이다.…>(p74)

 

소설이 연재되고 친구들이 이상에게 이렇게 물었다고 한다.

 

“그 ‘모던 걸’하고 요새도 자주 만나시오?”

 

그러면 이상은 이렇게 답했다.

 

“무어? <애욕> 말씀이구려. 그건 내 얘기가 아니라, 구보 얘기지요. 하웅이라는 것이 실상은 구보요, 하웅을 나무라는 자가 실상은 나 이상이오.”

 

그러면 문우들이 다시 박태원에게 물었다.

 

“이상이 이처럼 말하는데 진상은 어찌된 것이오?”

 

그때마다 박태원은 이렇게 언명(言明)했다.

 

“그건 괜한 말이오. 하웅은 역시 이상임이 틀림없소.”

 

박태원은 요절한 벗을 그리며 이렇게 고백했다.

 

<…이제 자백(自白)을 하자면 <애욕> 속의 하웅은, 이상이며 동시에 나였고, 그의 친우 구보는 나면서 또한 이상이었던 것이다. (중략) 당시 나와 이상은 서로 각기 다른 조그만 로맨스를 가졌었다.

이상의 정인(情人)이 어느 카페의 여급이라는 것과, 나의 상대가 모(某) 지방 명사(?)의 딸이었다는 고만한 차이가 있었으나 두 사람 모두 작품 속의 소녀나 한 가지로 상당히 방종성(放縱性)을 띠고 있다는 점에 있어서 서로 일치되었다.…>(p74~75)

 

 

“매일같이 gloomy sunday”

 

 

다방 ‘제비’에 모인 이상, 박태원, 김소운(왼쪽부터).

 

 

이상의 실제 연애담은 훗날 여러 문인의 기억을 통해 회자됐다. 다방이 문을 닫고 아내 금홍이 바람이 난 뒤 카페의 일본 여급 ‘마유미’와 어지간히 사귀기도 했다.

어느 날 이상이 치정관계로 건달에게 칼침을 맞고 입원한 ‘마유미’를 보고 이렇게 되뇌었다고 한다

(문학평론가 尹柄魯의 <고독한 이방인> 참조).

 

“나는 떠나야겠어. 서울을, 이렇게 있다가는 썩어버릴 것만 같아, 매일같이 구루미 선데이야. 어두운 일요일이 날마다 계속이야. 아, 나는 죽을 것만 같아.”

 

<이상의 비련>에 박태원과 이상이 나누었던 생전의 대화가 실려 있다.

 

 

<…이상과 나(박태원)는, 당시에 있어 서로 겨 묻은 개였고, 동시에 똥 묻은 개였다. 내가 이상을 향하여 “여보, 그까짓 계집을 무어라고 그토록 소중히 안고 사랑을 하느니 어쩌니 그러오? 당신의 정열(情熱)이 너무 아깝소”라고 충고하면, 이상은 또한 박태원을 향해 이렇게 똑같이 받아쳤다.

 

“여보, 그까짓 계집을 무어라고 그토록 소중히 안고 사랑을 하느니 어쩌니 그러오? 당신의 열정이 너무 아깝소.”

 

두 사람은, 서로 마음속으로 ‘이상이 그리 미쳤단 말인가?’ ‘구보가 아무래도 성치는 않아…’ 그렇게 생각하며 벗을 위해 서로 슬퍼하고 못마땅해했다.…>(p75)

 

 

박태원은 “당당한 오입쟁이였던 이상도 몸과 마음을 그대로 내어놓는 연정(戀情)에는 스스로 소년과 같이 수줍고 애탔다”고 기억했다.

 

 

<…언젠가 다방 ‘금강산’에서 이상이 한 여성을 향해 구애한 일이 있었다. 구석진 탁자에 한잔의 가배차(커피-편집자)를 앞에 두고 여인과 마주앉은 이상은 다시 소년과 같이 가슴을 태우고 마음이 수줍은 나머지, 자신도 깨닫지 못하고 탁자 한가운데 놓은 각설탕 그릇에 담긴 모당을 손으로 만졌다.

사랑을 받아주기 원하는 여인 앞에 이상의 손이 불결한 것은 또한 어찌할 도리가 없는 슬픈 사실이다. 그가 만진 모당은 그대로 꺼멓게 때가 묻었다. 여인은, 이상의 열정보다도 한 개, 두 개, 손때가 까맣게 묻어가는 각설탕에 좀 더 관심을 가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이상은 물론 그런 것에 미처 생각이 들 턱이 없다. (중략) 평소 그처럼 능변(能辯)인 그가 말조차 더듬어 가며 자기의 진정을 애인에게 알리기 위해 열중했다. 그러나 마침내 시중드는 아이가 참다못해 그들 탁자로 다가와 이상의 손에서 그릇을 빼앗아 갔을 때 그는 새삼스럽게 놀라 고개를 들고 그곳에서 자기를 바라보는 여인의 모멸(侮蔑) 가득한 눈초리에 어처구니없이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p77)

 

 

1939년 6월호 《여성》에는 이상이 생전(生前) 시인 김기림에게 보냈던 편지 4편이 <이상서간(李箱書簡)>이란 제목으로 실렸다. 편지에는 사랑에, 정에 굶주렸던 고독한 시인의 마음이 잘 묻어 있다.

 

 

<…연애라도 할까? 싱거워서? 심심해서? 스스러워서? 이 편지를 보았을 때 형(김기림)은 아마 뒤이어 <기상도(氣象圖)>의 교정을 보아야 될 것 같소. 형이 여기 있고 마음맞은 친구끼리 모여 조용한 ‘기상도의 밤’을 가지고 싶은 것이 퍽 유감(遺憾)되게 되었구려. 우리 여름에 할까?

 

여보! 편지나 좀 하구려! 내 고독과 정적을 동정하고 싶지는 않소? 자, 운명에 순종하는 수밖에! 굿바이…>

(p83, <이상서간>, 《여성》, 1939년 6월호)

 

 

이상이 요절한 뒤 김기림은 박태원에게 쓴 편지(《여성》 1939년 5월호에 게재됐다)에 이상을 그리며 “봄이 오니 형(박태원)도 ‘제비(다방 상호)’가 그리우신가 보오. 돌아오지 않는 ‘제비’의 임자는 얼마나 야속한 사람이겠소? 동경(東京)을 지날 때는 머리를 숙이오”라고 썼다.⊙

 

 

 

 

 

 

 

/ 월간조선

 

 

 

 

 

 

 

 

 

출처 : 마음의 정원
글쓴이 : 마음의 정원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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