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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장소이다
발하고 수도 생활을 했었다고 전해진다
1928년 33세에 출가를 했다고는 하나 수덕사 견성암에서 본격적인 수도생활을 하기 시작한것은
들었을지도 모르는 나이다. 여튼 당시의 상황에선 일엽스님의 출가는 아주 늦은 시기 였었다
일엽스님이 처음 입산했을 당시가 33세라면 만공스님의 세수는 58세였고
삭발했던 해가 38세 였다면 당시 만공스님의 세수는 63세가 되었을 것이다
보(구) 신춘문예 단편 망명녀(亡命女)가 당선 문단 데뷔....이하 생략
1962년 초판 발행본, 김일엽 스님의 '청춘을 불사르고'
이 책은 당시 김일엽의 대표적 저서이자 그 당시 베스트 셀러였던 초판 발행 원본이다
이 책은 내가 아는 어느 집의 이삿일을 도와 주고서 창고에서 굴러 다니는것을 가져온것인데
사진에서 보듯이 이 책은 문선각에서 발행을 했고 이중 케이스로 되어 있다
이 사진도 1962년도에 발행된 '청춘은 불사르고'의 책자에서 디카로 찍은 사진이다
일엽스님이 출가당시 머리를 깍았다는 견성암 - 환희대(歡喜臺)
수덕사 견성암
의 석조건물로 자리를 잡았던 것이다. 1900년대 초 만공스님 당시 창건한 이래 6십 몇년만의 일이다
한데 저기 오른쪽에 자리잡고 있는 부속건물은 최근에 지어진 건물이다
1 | 별건곤 제65호 | 1933-07-01 | 다구진 處女市長 | 잡저 | 원문제공 | |
2 | 삼천리 제6권 제7호 | 1934-06-01 | 내가 서울 女市長된다면? | 黃愛施德 | 설문 | 원문제공 |
3 | 삼천리 제6권 제7호 | 1934-06-01 | 내가 서울 女市長된다면? | 禹鳳雲 | 설문 | 원문제공 |
4 | 삼천리 제6권 제7호 | 1934-06-01 | 내가 서울 女市長된다면? | 張德祚 | 설문 | 원문제공 |
5 | 삼천리 제6권 제7호 | 1934-06-01 | 내가 서울 女市長된다면? | 李善熙 | 설문 | 원문제공 |
6 | 삼천리 제6권 제7호 | 1934-06-01 | 내가 서울 女市長된다면? | 羅蕙錫 | 설문 | 원문제공 |
7 | 삼천리 제6권 제7호 | 1934-06-01 | 내가 서울 女市長된다면! | 金慈憙 | 설문 | 원문제공 |
8 | 삼천리 제6권 제7호 | 1934-06-01 | 내가 서울 女市長된다면? | 金仙草 | 설문 | 원문제공 |
9 | 삼천리 제6권 제9호 | 1934-09-01 | 女市長 選擧 | 설문 | 원문제공 | |
10 | 삼천리 제8권 제1호 | 1936-01-01 | 十萬圓의 朝鮮舘經營하는 金珊瑚珠女士(女社長을 차저) | 대담·좌담 | 원문제공 |
단두대 사연 (0) | 2015.01.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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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천리 제7권 제6호 | |
발행일 | 1935년 07월01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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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제목 | 一問一答集 |
기사형태 | 설문 |
一問一答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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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천리 제8권 제1호 | |
발행일 | 1936년 01월01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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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제목 | 藝術家로서 世界에 나가면 무엇을 보고 도라올가 |
기사형태 | 설문 |
藝術家로서 世界에 나가면 무엇을 보고 도라올가
女市長 選擧 (0) | 2014.12.2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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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천리 제8권 제12호 | |
발행일 | 1936년 12월01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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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제목 | 다시 젊어지고 십흔가, 文士心境 |
기사형태 | 설문 |
朝鮮에 女傑이 잇서요? 新聞社나 學校를 맛길 만한... (0) | 2014.12.2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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藝術家로서 世界에 나가면 무엇을 보고 도라올가 (0) | 2014.12.2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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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천리 제8권 제12호 | |
발행일 | 1936년 12월01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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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제목 | 戀愛냐돈이냐, 文士心境 |
설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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藝術家로서 世界에 나가면 무엇을 보고 도라올가 (0) | 2014.12.2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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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천리 제8권 제12호 | |
발행일 | 1936년 12월01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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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제목 | 僧이되고십지안흔가, 文士心境 |
기사형태 | 설문 |
僧이되고십지안흔가, 文士心境
다시 젊어지고 십흔가, 文士心境 (0) | 2014.12.2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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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천리 제8권 제12호 | |
발행일 | 1936년 12월01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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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제목 | 「藝術」이냐 「死」냐, 文士心境 |
기사형태 | 설문 |
「藝術」이냐「死」냐, 文士心境
戀愛냐돈이냐, 文士心境 (0) | 2014.12.2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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互助會. (0) | 2014.12.25 |
삼천리 제9권 제1호 | |
발행일 | 1937년 01월01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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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제목 | 著名人物 一代記 |
기사형태 | 설문 |
1936년 12월01일 「藝術」이냐「死」냐, 文士心境 (0) | 2014.12.2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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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9년 6월 18일 |
남 鎭南浦 漁業同務組合員 200여명, 互助會에 고용계약에서 | 동아일보 1929. 6. 25. 일제하사회운동사자료집 4 p. 274. | |
2 | 1929년 6월 19일 | 평남 鎭南浦漁業者 互助會員과 船夫 240여명, 査定料면제 | 중외일보 1929. 6. 24. 일제하사회운동사자료집 4 p. 274. |
3 | 1929년 6월 25일 | 평남 鎭南浦 어업자 互助會員 및 船夫 동맹파업사건, | 중외일보 1929. 6. 28. 일제하사회운동사자료집 4 p. 275. |
4 | 1931년 4월 9일 | 평남 鎭南浦 수산노동조합, 긴급집행위원회 개최하고 | 동아일보 1931. 4. 13. 일제하사회운동사자료집 4 p. 279. |
5 | 1931년 4월 10일 | 평남 鎭南浦 수산노동조합·朝鮮人漁業者互助會, 船主측에 | 동아일보 1931. 4. 13. 일제침략하36년사 9 p. 784. |
6 | 1931년 4월 10일 | 평남 鎭南浦 수산노동조합 조선인 어선부, 월급제 | 동아일보 1931. 4. 13. 일제하사회운동사자료집 4 p. 279. |
7 | 1931년 4월 | 평남 鎭南浦 수산노동조합원 300여명, 일본인 어선주조직인 | 동아일보 1931. 4. 11. 일제하사회운동사자료집 4 p. 279. |
8 | 1936년 4월 28일 | 反帝同盟 互助會. 農民協會 등에 가입 친일파 암살한 | 동아일보 1936. 4. 25,29. 일제침략하36년사 11 p. 318
|
1937년 01월01일 著名人物 一代記 (0) | 2014.12.2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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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천리 (0) | 2014.12.25 |
친일파 5명 (0) | 2014.12.25 |
民族正氣의 審判 民族正氣의 審判 (0) | 2014.12.25 |
羅蕙錫 신문조서 (0) | 2014.12.25 |
201 | 1926년 7월 21일 | 滿鐵沿線 친일파 5명 살해후 피검된 朴尙萬. 金炳賢, | 동아일보 1926. 6. 27,7. 11,25. 일제침략하36년사 8 p. 207. |
202 | 1926년 7월 23일 | 독립군 3명, 평북 龜城郡 天摩面에서 친일파 元智養 | 고등경찰관계연표 |
203 | 1926년 7월 26일 | 滿鐵沿線 친일파 살해로 7. 21. 關東廳지방법원에서 | 동아일보 1926. 8. 1. 일제침략하36년사 8 p. 212. |
204 | 1926년 9월 8일 | 正義府 제6중대 제2소대장 金昌林. 대원 徐尙眞. 金龍活. | 한국독립운동사 4 p. 823. 일제침략하36년사 8 p. 250. |
205 | 1926년 9월 24일 | 參議府員 3명, 通化縣 친일단체 상조계장 金業平家 | 한국독립운동사 4 p. 826. 일제침략하36년사 8 p. 261. |
206 | 1927년 7월 8일 | 경남 統營 친일단체 三九會 회원 29명, 동아일보 광고부장. | 동아일보 1927. 7. 12. 일제침략하36년사 8 p. 501. |
207 | 1927년 7월 8일 | 統營 친일단체 三九會, 동아일보 광고부장 李魯泰와 | 일제하민족언론사론 |
208 | 1927년 7월 10일 | 馬山記者團, 임시총회 개최하여 친일단체 三九會의 | 일제하민족언론사론 |
209 | 1927년 7월 11일 | 馬山記者團, 친일단체 三九會를 폭력단체로 간주하고 | 동아일보 1927. 7. 13. 일제침략하36년사 8 p. 502. |
210 | 1927년 7월 14일 | 無名會, 긴급위원회 개최하여 친일단체 三九會의 폭행사건에 | 일제하민족언론사론 |
211 | 1927년 9월 26일 | 新民府 무장단원 수명, 하얼빈 朝鮮人民會 습격하여 | 한국공산주의운동사(김창순) 고등경찰관계연표 일제침략하36년사 8 p. 551. 동아일보 1927. 9. 29. |
212 | 1927년 9월 26일 | 新民府 별동대 崔晉萬. 蔡世允 등, 하얼빈에서 친일기관 | 원호처 독립운동사 5 |
213 | 1927년 10월 24일 | 徽文高普, 親日校主 동상건립반대. 日人 교원배척. | 원호처 독립운동사 8 |
214 | 1928년 6월 14일 | 일제, 조선농민의 민족·계급의식을 마비시키기 위해 | 일제조선침략일지 |
215 | 1928년 9월 26일 | 大邱고보생 200여명, 조선사 교수·언론자유 요구 | 동아일보 1928. 9. 28·29. 원호처 독립운동사 8,9 원호처 독립운동사자료집 13 일제침략하36년사 8 p. 914. |
216 | 1928년 9월 28일 | 大邱고보 2·3년생, 교내의 학생자치·일인 및 친일 | 원호처 독립운동사 8,9 |
217 | 1928년 9월 | 滿洲 開原·淸原縣 친일한인들, 자경단체로 開淸鮮人濟民會 | 재만불량선인상황 일제침략하36년사 8 p. 917. |
218 | 1928년 10월 18일 | 참의부 제4중대 소대장 玄昌周·卓應善·金利錫 등, | 한국독립운동사 5 p. 800. 일제침략하36년사 8 p. 925. |
219 | 1928년 10월 24일 | 참의부원 金東一·李珍河 등 13명, 친일단체 鮮民府(뒤에 | 한국독립운동사 5 p. 801. 일제침략하36년사 8 p. 926. |
220 | 1929년 2월 28일 | 在滿 親日派 韓人들, 韓僑同鄕會 발기. | 한국독립운동사 5 pp. 807-810. 일제침략하36년사 9 pp. 40-44. |
221 | 1929년 7월 | 국민부 중앙집행위원회, 선언을 발표하여 친일앞잡이 | 한국공산주의운동사(김창순) |
222 | 1930년 4월 21일 | 일제, 반봉건적 유교사상 전파 위해 친일유생들의 | 일제조선침략일지 |
223 | 1930년 12월 16일 | 국민부 兪昌德·鄭一隅 등 4명, 石頭河子에서 친일파 | 동아일보 1930. 12. 24. 일제침략하36년사 9 p. 620. |
224 | 1932년 2월 | 朴錫胤 등, 在滿韓人 親日團體 民生團 조직(7월에 | 한국공산주의운동사(김창순) |
225 | 1932년 10월 20일 | 일제, 중국 동북지방거주 조선인들의 반일투쟁 탄압목적으로 | 일제조선침략일지 |
226 | 1933년 6월 1일 | 재경 일본인과 친일매국 역적들이 침략전쟁에 출동한 | 일제조선침략일지 |
227 | 1933년 8월 25일 | 在滿僑胞, 新京에서 親日系 <滿鮮日報> 창간. | 대한민국임시정부사 |
228 | 1934년 9월 | 재만친일단체 民生團, 協助會로 개칭. | 한국공산주의운동사 |
229 | 1934년 10월 | 조선혁명군 제3중대장 李英杰·소대장 金利濟, 압록강연안에 | 동아일보 1934. 10. 20. 일제침략하36년사 10 p. 735. |
230 | 1935년 3월 25일 | 무정부주의자 鄭華岩. 嚴舜奉 등, 친일단체 상해 조선인거류민회 | 일제하민족언론사론 |
231 | 1935년 3월 25일 | 嚴舜奉. 李圭虎 등, 상해 조선인거류민회 부회장인 | 원호처 독립운동사 7 |
232 | 1935년 3월 25일 | 在中國南華韓人靑年聯盟 흑색공포단원 嚴舜奉. 李圭虎, | 동아일보 1935. 3. 26,5. 28. 독립운동사 7 p. 783 일제침략하36년사 11 pp. 45-46 |
233 | 1936년 2월 4일 | 駐中日本公使 有吉암살계획 및 친일파 上海 朝鮮人居留民會 | 동아일보 1936. 2. 5. 일제침략하36년사 11 p. 272 |
234 | 1936년 4월 28일 | 反帝同盟 互助會. 農民協會 등에 가입 친일파 암살한 | 동아일보 1936. 4. 25,29. 일제침략하36년사 11 p. 318 |
235 | 1936년 12월 27일 | 일제, 중국동북지방의 친일주구단체 협조회를 협화회에 | 일제조선침략일지 |
236 | 1937년 7월 29일 | 新京朝鮮人民會. 協和會 등 6개 滿洲 新京在住 한국인 | 동아일보 1937. 7. 30. 일제침략하36년사 11 p. 663 |
237 | 1937년 8월 4일 | 친일파 李元錫 등 4명이 한국에 支願兵制度 시행에 | 최근의조선치안상황 일제침략하36년사 11 p. 671 |
238 | 1937년 8월 20일 | 상류여성 중심의 친일단체 愛國金釵會 결성(금비녀헌납운동 | 일제하민족언론사론 원호처 독립운동사 9 일제조선침략일지 일본제국주의의조선지배 |
239 | 1938년 1월 | 조선민족혁명당원 金東宇, 친일파 조선인민회장 李甲寧 | 일제침략하36년사 12 p. 11. |
240 | 1938년 3월 16일 | 일제, 친일자 자식에게 항공훈련시켜 비행사로 충당키 | 일제조선침략일지 |
241 | 1938년 4월 23일 | 전북 新泰仁 친일기독교도, 신사참배 결의. | 동아일보 1938. 4. 28. 일제침략하36년사 12 p. 59. |
242 | 1938년 5월 8일 | 친일기독교인 鄭春洙·金禹鉉 등, 부민관에서 황국신민 | 친일파군상 일제침략하36년사 12 p. 66. |
243 | 1938년 5월 8일 | 친일목사·교도들, 경성부민관에서 조선기독교연합회 | 동아일보 1938. 5. 9. 일제침략하36년사 12 p. 65. |
244 | 1938년 6월 4일 | 종로기독교청년회, 이사회 개최하여 일본기독교청년연맹 | 친일파의군상 일제침략하36년사 12 p. 76. |
245 | 1938년 6월 9일 | 木浦 14派 친일기독교역원, 조선기독교 목포연합회 | 동아일보 1938. 6. 14. 일제침략하36년사 12 p. 78. |
246 | 1938년 6월 18일 | 修養同友會 曷弘基 등 16명, 친일단체인 대동민우회에 | 최근의 조선치안사안상황 일제침략하36년사 12 p. 81. |
247 | 1938년 7월 6일 | 尹致昊·曺秉相 등,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상무이사에 | 친일파군상 일제침략하36년사 12 p. 89. |
248 | 1938년 7월 7일 | 국민정신총동원 강원도연맹, 결성 (총재 金時權). | 친일파군상 일제침략하36년사 12 p. 89. |
249 | 1938년 7월 9일 | 玄永燮, 한국어사용전폐를 총독에게 제의. | 친일파군상 일제침략하36년사 12 p. 90. |
250 | 1938년 7월 20일 | 조선교화단체연구회, 시국대응강연회 개최 (강사 尹致昊 | 친일파군상 일제침략하36년사 12 p. 93. |
251 | 1938년 10월 5일 | 시국인식 위한 강연대, 경기도 각군에 파견 (연사 | 친일파군상 일제침략하36년사 12 p. 135. |
252 | 1938년 10월 24일 | 기독교인, 종로기독교청년회관에서 전쟁협력강도회 | 친일파군상 일제침략하36년사 12 p. 140. |
253 | 1938년 11월 28일 | 李碩圭(李容九의 子), 친일단체 大東一進會 조직. | 원호처 독립운동사 9 |
254 | 1939년 1월 15일 | 松都航空機주식회사 창립. | 친일파군상 일제침략하36년사 12 p. 179. |
255 | 1939년 2월 9일 | 尹致昊·崔麟·張德秀, 東洋之光 창간기념회 시국문제강연에서 | 친일파군상 일제침략하36년사 12 p. 197. |
256 | 1939년 3월 14일 | 친일단체 황군위문작가단 발단. | 원호처 독립운동사 9 |
257 | 1939년 4월 15일 | 金東仁·林學洙·朴英熙 등, 조선문단 대표로 중국 | 친일파군상 일제침략하36년사 12 p. 228. |
258 | 1939년 5월 15일 | 국민정신총동원 天主敎聯盟 결성. | 친일파군상 일제침략하36년사 12 p. 252. |
259 | 1939년 7월 5일 | 사상보국연맹 京城지부, 朝鮮神宮 광장에서 결성. | 친일파군상 일제침략하36년사 12 p. 279. |
260 | 1939년 8월 5일 | 친일단체 全朝鮮排英동지회연맹 조직. | 원호처 독립운동사 9 |
261 | 1939년 8월 5일 | 韓圭復·張德秀·徐春 등, 국민정신선양 각도순회강연 | 친일파군상 일제침략하36년사 12 p. 290. |
262 | 1939년 9월 21일 | 汪兆銘, 親日 신중앙정권 수립 성명. | 일제하민족언론사론 |
263 | 1939년 9월 | 친일학생단체 조선학생애국연맹 조직. | 일제하광주학생민족운동사 원호처 독립운동사 9 |
264 | 1939년 10월 20일 | 李光洙·朴英熙·兪鎭午 등 10여명, 친일문학의 문예협회발기인회 | 동아일보 1939. 10. 19, 21, 23. 일제침략하36년사 12 p. 327. |
265 | 1939년 10월 29일 | 친일단체 조선문인협회, 부민관에서 결성. | 원호처 독립운동사자료집 별 3 |
266 | 1939년 10월 29일 | 친일문학단체 조선문제협회 결성. | 일제하민족언론사론 |
267 | 1940년 1월 1일 | 전조선일보 주필 徐春, 친일잡지 太陽 창간. | 일제하민족언론사론 |
268 | 1940년 1월 28일 | 조선문인협회, 평양에서 문예대강연회 개최 (兪鎭午·金東煥·李孝石 | 친일파군상 일제침략하36년사 12 p. 388. |
269 | 1940년 1월 | 전조선일보 주필 徐春, 친일잡지 太陽 창간. | 한민족독립운동사 8 p. 417. |
270 | 1940년 2월 20일 | 李光洙, 創氏에 관한 논설을 每日新報에 발표. | 친일파군상 일제침략하36년사 12 p. 404. |
271 | 1940년 7월 1일 | 李光洙, 황민화와 조선문학을 每日新報에 발표. | 친일파군상 일제침략하36년사 12 p. 484. |
272 | 1940년 11월 25일 | 朝鮮文人協會, 문예보국강연회 개최 결정(金東煥·兪鎭午 | 친일파군상 일제침략하36년사 12 p. 556. |
273 | 1940년 12월 25일 | 친일단체 皇道學會, 부민관에서 결성. | 원호처 독립운동사 9 |
274 | 1940년 | 일제와 친일지주의 가혹한 약탈로 전체농가의 77%가 | 일제조선침략일지 |
275 | 1941년 6월 | 친일문인단체 國民詩歌聯盟 결성. | 한민족독립운동사 8 p. 417. |
276 | 1941년 7월 30일 | 兪鎭午, 국민문학의 工作鼎談會에 참가. | 친일파군상 일제침략하36년사 12 p. 758. |
277 | 1941년 8월 4일 | 崔載瑞, 徵兵感謝와 우리의 각오라는 논문 발표. | 친일파군상 일제침략하36년사 12 p. 761. |
278 | 1941년 8월 20일 | 친일단체 임전대책협의회, 부민관에서 개최. | 원호처 독립운동사 9 |
279 | 1941년 8월 24일 | 尹致昊·高元勳·朴興植 등 50여명, 황국정신 앙양 | 친일파군상 일제침략하36년사 12 p. 769. |
280 | 1941년 9월 3일 | 총독부, 친일파·매판자본가 규합하여 어용단체인 | 일제조선침략일지 |
281 | 1941년 10월 | 친일문예지 國民文學 창간. | 한민족독립운동사 8 p. 417. |
282 | 1941년 11월 15일 | 친일단체 言論報國會 창립(회장 崔麟). | 일제하민족언론사론 |
283 | 1941년 11월 22일 | 친일단체 조선임전보국단을 부민관에거 결성. | 원호처 독립운동사 9 |
284 | 1942년 2월 12일 | 協和會 機構에 朝鮮人輔導委員會 특설됨. | 친일파군상 일제침략하36년사 13 p. 35 |
285 | 1942년 5월 | 잡지 <삼천리>가 친일지 <대동아>로 改題. | 일제하민족언론사론 |
286 | 1942년 11월 4일 | 親日文人들이 대동아문학자대회 개최. | 원호처 독립운동사 9 |
287 | 1943년 1월 23일 | 일제, 친일파들로 경찰예비원제 실시. | 일제조선침략일지 |
288 | 1943년 4월 17일 | 친일단체 조선문인보국회가 부민관에서 결성됨. | 원호처 독립운동사 9 |
289 | 1943년 4월 17일 | 親日文化團體를 통합한 半島文人報國會 결성. | 매일신보 1943. 4. 13. 일제침략하36년사 13 p. 475 |
290 | 1943년 11월 4일 | <新韓民報>, 한민족의 독립운동이 정신적인 운동에서 | 친일파군상 p. 47 일제침략하36년사 13 pp. 544-545 |
291 | 1944년 11월 5일 | 李光洙. 金基鎭이 南京文學者大會 조선대표로 선출됨. | 친일파군상 일제침략하36년사 13 p. 780 |
292 | 1945년 2월 3일 | 친일단체 대화동맹 발기. | 원호처 독립운동사 9 일본제국주의의조선지배 |
293 | 1945년 2월 11일 | 尹致昊. 秦學文 등이 內鮮一體를 목적한 大和同盟 | 친일파군상 p. 152 일제침략하36년사 13 p. 812 |
294 | 1945년 2월 | 在日 親日朝鮮人들이 東京에서 조선동포처우개선 감사간담회 | 한민족독립운동사 8 p. 494 |
295 | 1945년 6월 8일 | 친일단체 조선언론보국회 결성. | 원호처 독립운동사 9 일제하민족언론사론 일본제국주의의조선지배 |
296 | 1945년 6월 23일 | 朴春琴 등이 府民館에서 친일단체 大義黨을 결성함. | 원호처 독립운동사 9 일제하광주학생민족운동사 |
297 | 1945년 6월 24일 | 朴春琴 등이 친일단체 大義黨 창당. | 일제하민족언론사론 개항100년연표 친일파군상 p. 42 일제침략하36년사 13 p. 865 |
298 | 1945년 7월 23일 | 李鍾麟. 李鍾郁. 安貞植. 崔載瑞 등이 韓民同志會를 | 친일파군상 p. 155 일제침략하36년사 13 p. 867 |
299 | 1945년 7월 24일 | 大韓愛國靑年黨 趙文紀 등이 친일단체 大義黨 주최 | 원호처 독립운동사 9 개항100년연표 일제하민족언론사론 독립운동사 8 일제하광주학생민족운동사 |
1 | 民族正氣의 審判 | 民族正氣의 審判 |
2 | 民族正氣의 審判 | 民族正氣의 審判 서문 |
3 | 民族正氣의 審判 | 民族正氣의 審判 목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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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벽 제18호 | 1921-12-01 | 藝術界의 回顧 一年間 | 曉鍾 | 논설 | 원문제공 | |
2 | 동광 제29호 | 1931-12-27 | 新聞戰線總動員, 「大合同日報」의 幹部公選, 萬一 朝鮮文 3新聞이 다 解消하고 一大理想 新聞이 出現한다면... | 설문 | 원문제공 | |
3 | 동광 제35호 | 1932-07-03 | 混迷低調의 朝鮮美術展覽會를 批判함 | 美術家諸氏 | 문예평론 | 원문제공 |
4 | 별건곤 제26호 | 1930-02-01 | 金雨英氏 夫人 羅蕙錫氏, 訪問 가서 感心한 婦人 | 金起田 | 소식 | 원문제공 |
5 | 별건곤 제30호 | 1930-07-01 | 弟九回 朝鮮美展 | 金周經 | 문예평론 | 원문제공 |
6 | 삼천리 제4호 | 1930-01-11 | 雜談室 | 잡저 | 원문제공 | |
7 | 삼천리 제6호 | 1930-05-01 | 諸氏의 聲明 | 설문 | 원문제공 | |
8 | 삼천리 제6호 | 1930-05-01 | 喫煙室 | 잡저 | 원문제공 | |
9 | 삼천리 제6호 | 1930-05-01 | 新兩性道德의 提唱 | 尹聖相, 黃信德, 羅惠錫, 鄭錫泰 | 대담·좌담 | 원문제공 |
10 | 삼천리 제8호 | 1930-09-01 | 名流婦人과 産兒制限 | 설문 | 원문제공 | |
11 | 삼천리 제16호 | 1931-06-01 | 新女性總觀(2) 百花爛漫의 己未女人群 | 회고·수기 | 원문제공 | |
12 | 삼천리 제3권 제11호 | 1931-11-01 | 나를 잇지 안는 幸福, 帝展入選後感想 | 羅蕙錫 | 문예기타 | 원문제공 |
13 | 삼천리 제4권 제1호 | 1932-01-01 | 아아 自由의 巴里가 그리워, 歐米 漫遊하고 온 후의 나 | 在東京 羅蕙錫 | 회고·수기 | 원문제공 |
14 | 삼천리 제4권 제3호 | 1932-03-01 | 巴里의 모델과 畵家生活 | 東京 羅蕙錫 | 기행문 | 원문제공 |
15 | 삼천리 제4권 제4호 | 1932-04-01 | 巴里畵家生活, 巴里의 모델과 畵家生活 | 在東京 羅蕙錫 | 논설 | 원문제공 |
16 | 삼천리 제4권 제7호 | 1932-05-15 | 佳人春秋 | 소식 | 원문제공 | |
17 | 삼천리 제4권 제7호 | 1932-07-01 | 朝鮮美術展覽會 西洋畵總評 | 羅蕙錫 | 문예평론 | 원문제공 |
18 | 삼천리 제4권 제12호 | 1932-12-01 | 쏘비엣露西亞行, 歐米遊記의 其一 | 羅蕙錫 | 기행문 | 원문제공 |
19 | 삼천리 제5권 제1호 | 1933-01-01 | 半島에 幾多人材를 내인 英·美·露·日 留學史 | 회고·수기 | 원문제공 | |
20 | 삼천리 제5권 제1호 | 1933-01-01 | CCCP, 歐米遊記의 第二 | 羅蕙錫 | 기행문 | 원문제공 |
21 | 삼천리 제5권 제3호 | 1933-03-01 | 伯林과 巴里 | 羅蕙錫 | 기행문 | 원문제공 |
22 | 삼천리 제5권 제3호 | 1933-03-01 | 畵室의 開放, 巴里에서 도라온 羅蕙錫女史 女子美術學舍 | 婦人記者 | 소식 | 원문제공 |
23 | 삼천리 제5권 제4호 | 1933-04-01 | 作家日記 | 문예기타 | 원문제공 | |
24 | 삼천리 제5권 제9호 | 1933-09-01 | 그랫스면 集 | 잡저 | 원문제공 | |
25 | 삼천리 제5권 제9호 | 1933-09-01 | 伯林에서 倫敦까지, 歐美遊記의 續 | 羅蕙錫 | 기행문 | 원문제공 |
26 | 삼천리 제5권 제10호 | 1933-10-01 | 滿州國行의 廉想涉氏 | 소식 | 원문제공 | |
27 | 삼천리 제5권 제10호 | 1933-10-01 | 晩婚打開 座談會, 아아, 靑春이 아가워라! | 대담·좌담 | 원문제공 | |
28 | 삼천리 제6권 제5호 | 1934-05-01 | 朝鮮에 태여 난 것이 幸福한가 不幸한가 | 羅蕙錫 | 설문 | 원문제공 |
29 | 삼천리 제6권 제5호 | 1934-05-01 | 三千里人生案內 | 소식 | 원문제공 | |
30 | 삼천리 제6권 제5호 | 1934-05-01 | 熱情의 西班牙行(世界一周記 續) | 羅蕙錫 | 기행문 | 원문제공 |
31 | 삼천리 제6권 제7호 | 1934-06-01 | 人生揭示板 | 소식 | 원문제공 | |
32 | 삼천리 제6권 제7호 | 1934-06-01 | 내가 서울 女市長된다면? | 羅蕙錫 | 설문 | 원문제공 |
33 | 삼천리 제6권 제7호 | 1934-06-01 | 春園 出家放浪記, 朝鮮日報 副社長 辭任 內面과 山水放浪의 前後 事情記 | 소식 | 원문제공 | |
34 | 삼천리 제6권 제7호 | 1934-06-01 | 女人獨居記 | 羅蕙錫 | 문예기타 | 원문제공 |
35 | 삼천리 제6권 제8호 | 1934-08-01 | 離婚告白狀, 靑邱氏에게 | 羅蕙錫 | 문예기타 | 원문제공 |
36 | 삼천리 제7권 제1호 | 1935-01-01 | 女流名士의 男便調査狀 | 잡저 | 원문제공 | |
37 | 삼천리 제7권 제1호 | 1935-01-01 | 新生活에 들면서 | 羅蕙錫 | 문예기타 | 원문제공 |
38 | 삼천리 제7권 제2호 | 1935-02-01 | 新生活에 들면서 | 羅蕙錫 | 문예기타 | 원문제공 |
39 | 삼천리 제7권 제3호 | 1935-03-01 | 三千里機密室(The Korean Black Chamber) | 소식 | 원문제공 | |
40 | 삼천리 제7권 제3호 | 1935-03-01 | 靑春을 앗기는 佳人哀詞 | 문예기타 | 원문제공 | |
41 | 삼천리 제7권 제5호 | 1935-06-01 | 異性間의 友情論 아름다운 男妹의 記 | 羅蕙錫 | 문예기타 | 원문제공 |
42 | 삼천리 제7권 제5호 | 1935-06-01 | 조선녀성의게, 歐米女性을 보고 半島女性에게 | 羅蕙錫 | 논설 | 원문제공 |
43 | 삼천리 제7권 제5호 | 1935-06-01 | 李光洙, 許英肅兩氏間 戀愛書翰集 | 문예기타 | 원문제공 | |
44 | 삼천리 제7권 제6호 | 1935-07-01 | 나의 女敎員時代 | 羅蕙錫 | 회고·수기 | 원문제공 |
45 | 삼천리 제7권 제9호 | 1935-10-01 | 三千里機密室 The Korean Black Chamber | 소식 | 원문제공 | |
46 | 삼천리 제7권 제9호 | 1935-10-01 | 獨身女性의 貞操論 | 羅蕙錫 | 문예기타 | 원문제공 |
47 | 삼천리 제7권 제10호 | 1935-11-01 | (戱曲) 巴里의 그 女子 | 羅蕙錫 | 희곡·시나리오 | 원문제공 |
48 | 삼천리 제8권 제1호 | 1936-01-01 | 英米婦人參政權運動者 會見記 | 羅蕙錫 | 대담·좌담 | 원문제공 |
49 | 삼천리 제8권 제1호 | 1936-01-01 | 十萬圓의 朝鮮舘經營하는 金珊瑚珠女士(女社長을 차저) | 대담·좌담 | 원문제공 | |
50 | 삼천리 제8권 제4호 | 1936-04-01 | 倫敦救世軍托兒所를 尋訪하고 | 羅蕙錫 | 대담·좌담 | 원문제공 |
51 | 삼천리 제8권 제11호 | 1936-11-01 | 三千里 機密室 | 소식 | 원문제공 | |
52 | 삼천리 제8권 제12호 | 1936-12-01 | 玄淑 | 羅蕙錫 | 소설 | 원문제공 |
53 | 삼천리 제10권 제5호 | 1938-05-01 | 나의 東京女子美術學校 時代 | 羅蕙錫 | 회고·수기 | 원문제공 |
54 | 삼천리 제10권 제5호 | 1938-05-01 | 戀愛觀 批判, 毛允淑·羅蕙錫씨의 | 安德根 | 논설 | 원문제공 |
55 | 삼천리 제10권 제5호 | 1938-05-01 | 女流 文士의 『戀愛 問題』會議 | 대담·좌담 | 원문제공 | |
56 | 만국부인 제1호 | 1932-10-01 | 萬國婦人싸론 | 회고·수기 | 원문제공 | |
57 | 동명 제18호 | 1923-01-01 | 母된 感想記 | 羅蕙錫 | 목차제공 | |
58 | 동명 제19호 | 1923-01-07 | 母된 感想記 | 羅蕙錫 | 목차제공 | |
59 | 동명 제20호 | 1923-01-14 | 母된 感想記 | 羅蕙錫 | 목차제공 | |
60 | 동명 제21호 | 1923-01-21 | 母된 感想記 | 羅蕙錫 | 목차제공 | |
61 | 동명 제23호 | 1923-02-04 | 觀念의 襤褸를 벗은 悲哀-羅蕙錫女史의 ‘母된 感想記’를 보고- | 百結生 | 목차제공 | |
62 | 동명 제24호 | 1923-02-11 | 觀念의 襤褸를 벗은 悲哀-羅蕙錫女史의 ‘母된 感想記’를 읽고- | 百結生 | 목차제공 | |
63 | 동명 제29호 | 1923-03-18 | 百結生에게 答함 | 羅蕙錫 | 목차제공 | |
64 | 서광 제6호 | 1920-07-05 | 婦人問題의 一端 | 羅蕙錫女史 | 목차제공 | |
65 | 여자계 | 목차제공 | ||||
66 | 학지광 제3호 | 1914-12-03 | 理想的 婦人 | 羅蕙錫 孃 | 목차제공 |
1904년 8월 20일 | 宋秉畯,尹始炳등 輔安會에 대항,친일단체 <維新會>를 | 개항 100년 연표자료집 | |
2 | 1904년 8월 20일 | 宋秉畯,尹始炳 등이 친일단체 維新會 조직. | 일제하민족언론사론 (최민지) p. 619. |
3 | 1904년 11월 30일 | 일제 지시로 친일단체 일진회, 정치개혁을 정부에 | 일제조선침략일지 p. 65. |
4 | 1907년 5월 15일 | 일제육군, 친일단체 일진회에 10만원의 정치 자금을 | 일제조선침략일지 |
5 | 1910년 8월 25일 | 일제통감부, 한국인의 일체 집회금지. 친일단체 <일진회>까지 | 일제조선침략일지 |
6 | 1916년 12월 29일 | 閔泳綺등 친일단체, 大正實業친목회 조직. | 일제하민족언론사론 |
7 | 1916년 | 친일단체 <대정실업 친목회> 조직 | 일본제국주의의 조선지배(박경식) |
8 | 1919년 12월 4일 | 閔元植 協成俱樂部, 국민협회로 개편 時事新聞 발간 | 고등경찰관계연표 p.12 |
9 | 1920년 1월 18일 | 국민협회(친일단체 회장 閔元植,협성구락부의 개칭) | 독립운동사 9 |
10 | 1920년 1월 18일 | 국민협회(친일단체,회장 閔元植,協成俱樂部의 개칭) | 한국공산주의운동사(김창순) |
11 | 1920년 1월 18일 | 閔元植, 협성구락부를 국민협회로 개칭(한.일 양민족의 | 고등경찰관계연표 p.16 |
12 | 1920년 4월 13일 | 블라디보스톡에서 조선인 거류민회(친일단체) 조직 | 한국공산주의운동사(김창순) |
13 | 1920년 5월 1일 | 니콜라예프스크에 친일단체인 朝鮮人民會 조직. | 고등경찰관계연표 p.25 |
14 | 1920년 10월 26일 | 일제, 친일단체인 大東同志會 조직. 평양을 중심으로 | 고등경찰관계연표 p.45 |
15 | 1920년 10월 26일 | 金興健 등, 평양에 친일단체 大東同志會 조직. | 고등경찰보 제1호 p.182 |
16 | 1920년 10월 31일 | 평양 大東同志會(회장 鮮于鎬) 결성. 韓·日人 공존공영 | 高等警察要史 일제침략하 36년사-5 p.694 |
17 | 1921년 1월 13일 | 친일단체 大正親睦會 한일 융화를 위한 主義,綱領 | 每日申報 1921.1.14 일제침략하 36년사-6 p.7 |
18 | 1921년 3월 27일 | 대한민국임시정부, 만주의 친일단체 保民會 간부 임살을 | 대한민국임시정부사 |
19 | 1921년 8월 27일 | 조선소작인상조회(친일단체) 조직-회장 宋秉畯 | 한국공산주의운동사(김창순) |
20 | 1921년 8월 27일 | 宋秉畯, 친일단체인 소작인상조회를 결성(친일지주의 | 원호처독립운동사 p.421 |
21 | 1921년 | 재일친일단체 상애회 결성 | 일본제국주의의 조선지배(박경식) |
22 | 1923년 2월 3일 | 시베리아에서 특별결사대로 파견된 獨立軍 10명이 | 東亞日報 1923.1.21 일제침략하 36년사-7 p.1 |
23 | 1924년 3월 13일 | 相愛會(친일단체) 부산본부 조직 | 한국공산주의운동사(김창순) |
24 | 1924년 3월 25일 | 재경 친일단체 國民協會·維民會·少作人相助會·朝鮮經濟會 | 독립운동사 9 |
25 | 1924년 3월 25일 | 재경 친일단체 國民協會,維民會,소작인상조회,조선경제회 | 한국공산주의운동사(김창순) |
26 | 1924년 3월 25일 | 親日團體 國民協會·朝鮮小作人相助會·維民會·勞動相愛會· | 東亞日報 1924.4.2 일제침략하 36년사-7 p.293 |
27 | 1924년 4월 2일 | 친일단체인 각파유지연맹 朴春琴,李喜侃,金明濬,蔡基斗등 | 한국공산주의운동사(김창순) |
28 | 1924년 4월 2일 | 친일단체인 각파 유지 연맹 박 춘금(朴春琴).이 희간(李喜侃). | 독립운동사 9 |
29 | 1924년 4월 2일 | 朴春琴 등 親日團體代表,東亞日報社 宋鎭禹 金性洙를 | 東亞日報 1924.4.2 일제침략하 36년사-7 p.304 |
30 | 1924년 4월 2일 | 朴春琴 등 친일단체 대표, 동아일보사주 김성수와 | 일제하민족언론사론 |
31 | 1924년 4월 9일 | 親日團體 東亞日報 폭행사건에 대해 민간 유지 40명이 | 東亞日報 1924.4.11 일제침략하 36년사-7 p.306 |
32 | 1924년 4월 15일 | 申錫麟 등, 서울에서 친일단체 同民會를 조직. | 고등경찰보 제1호 p.182 |
33 | 1924년 4월 22일 | 친일단체 각파 유지연맹 규탄 민중대회, 일경이 강압금지-조선 | 한국공산주의운동사(김창순) |
34 | 1924년 7월 | 국민협회(친일단체)간부 金明濬 외 3명,회원 1만 7천여명이 | 한국공산주의운동사(김창순) |
35 | 1924년 7월 | 친일단체 국민협회 간부 金明濬 외 3명, 회원 1만 | 독립운동사 9 |
36 | 1924년 8월 13일 | 金聖旭 등, 서울에 친일단체 甲子具樂部를 조직. | 고등경찰보 제1호 p.182 |
37 | 1925년 1월 8일 | 시둑대동단(친일단체 : 각파유지연맹 및 普天교도 | 한국공산주의운동사연구 |
38 | 1925년 6월 18일 | 일선융화 표방한 친일단체 同民會, 同化事業 추진. | 한국독립운동사 p. 212 일제침략하36년사 p. 688 |
39 | 1926년 9월 24일 | 參議府員 3명, 通化縣 친일단체 상조계장 金業平家 | 한국독립운동사 4 p. 826. 일제침략하36년사 8 p. 261. |
40 | 1927년 7월 8일 | 경남 統營 친일단체 三九會 회원 29명, 동아일보 광고부장. | 동아일보 1927. 7. 12. 일제침략하36년사 8 p. 501. |
41 | 1927년 7월 8일 | 統營 친일단체 三九會, 동아일보 광고부장 李魯泰와 | 일제하민족언론사론 |
42 | 1927년 7월 10일 | 馬山記者團, 임시총회 개최하여 친일단체 三九會의 | 일제하민족언론사론 |
43 | 1927년 7월 11일 | 馬山記者團, 친일단체 三九會를 폭력단체로 간주하고 | 동아일보 1927. 7. 13. 일제침략하36년사 8 p. 502. |
44 | 1927년 7월 14일 | 無名會, 긴급위원회 개최하여 친일단체 三九會의 폭행사건에 | 일제하민족언론사론 |
45 | 1928년 10월 18일 | 참의부 제4중대 소대장 玄昌周·卓應善·金利錫 등, | 한국독립운동사 5 p. 800. 일제침략하36년사 8 p. 925. |
46 | 1928년 10월 24일 | 참의부원 金東一·李珍河 등 13명, 친일단체 鮮民府(뒤에 | 한국독립운동사 5 p. 801. 일제침략하36년사 8 p. 926. |
47 | 1932년 2월 | 朴錫胤 등, 在滿韓人 親日團體 民生團 조직(7월에 | 한국공산주의운동사(김창순) |
48 | 1934년 9월 | 재만친일단체 民生團, 協助會로 개칭. | 한국공산주의운동사 |
49 | 1935년 3월 25일 | 무정부주의자 鄭華岩. 嚴舜奉 등, 친일단체 상해 조선인거류민회 | 일제하민족언론사론 |
50 | 1937년 7월 29일 | 新京朝鮮人民會. 協和會 등 6개 滿洲 新京在住 한국인 | 동아일보 1937. 7. 30. 일제침략하36년사 11 p. 663 |
51 | 1937년 8월 20일 | 상류여성 중심의 친일단체 愛國金釵會 결성(금비녀헌납운동 | 일제하민족언론사론 원호처 독립운동사 9 일제조선침략일지 일본제국주의의조선지배 |
52 | 1938년 6월 18일 | 修養同友會 曷弘基 등 16명, 친일단체인 대동민우회에 | 최근의 조선치안사안상황 일제침략하36년사 12 p. 81. |
53 | 1938년 11월 28일 | 李碩圭(李容九의 子), 친일단체 大東一進會 조직. | 원호처 독립운동사 9 |
54 | 1939년 3월 14일 | 친일단체 황군위문작가단 발단. | 원호처 독립운동사 9 |
55 | 1939년 8월 5일 | 친일단체 全朝鮮排英동지회연맹 조직. | 원호처 독립운동사 9 |
56 | 1939년 10월 29일 | 친일단체 조선문인협회, 부민관에서 결성. | 원호처 독립운동사자료집 별 3 |
57 | 1940년 12월 25일 | 친일단체 皇道學會, 부민관에서 결성. | 원호처 독립운동사 9 |
58 | 1941년 8월 20일 | 친일단체 임전대책협의회, 부민관에서 개최. | 원호처 독립운동사 9 |
59 | 1941년 11월 15일 | 친일단체 言論報國會 창립(회장 崔麟). | 일제하민족언론사론 |
60 | 1941년 11월 22일 | 친일단체 조선임전보국단을 부민관에거 결성. | 원호처 독립운동사 9 |
61 | 1943년 4월 17일 | 친일단체 조선문인보국회가 부민관에서 결성됨. | 원호처 독립운동사 9 |
62 | 1945년 2월 3일 | 친일단체 대화동맹 발기. | 원호처 독립운동사 9 일본제국주의의조선지배 |
63 | 1945년 6월 8일 | 친일단체 조선언론보국회 결성. | 원호처 독립운동사 9 일제하민족언론사론 일본제국주의의조선지배 |
64 | 1945년 6월 23일 | 朴春琴 등이 府民館에서 친일단체 大義黨을 결성함. | 원호처 독립운동사 9 일제하광주학생민족운동사 |
65 | 1945년 6월 24일 | 朴春琴 등이 친일단체 大義黨 창당. | 일제하민족언론사론 개항100년연표 친일파군상 p. 42 일제침략하36년사 13 p. 865 |
66 | 1945년 7월 24일 | 大韓愛國靑年黨 趙文紀 등이 친일단체 大義黨 주최 |
20세기 초 화가이자 문필가였던 그녀는 여자이기 전에 한 인간이었고 인간이기 전에 예술가였다.
예술가로서 그녀의 삶은 예술 자체였다. 그러나 그녀의 해방론에 가까운 여성관은 전통적인 여성관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것이었다.
남성 중심 사회에 대한 그녀의 대범한 도전은 불행의 신호탄이었다.
근대 신여성들의 삶이 그랬듯이 그녀의 화려했던 삶은 한순간에 사라졌다.
동아일보 羅蕙錫 (0) | 2014.12.2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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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여성운동사 (0) | 2014.12.25 |
한서율력지 (0) | 2011.07.31 |
[스크랩] 삼탄 이승소의 문집(삼탄집)과 시, 문장 (0) | 2010.03.19 |
[스크랩] 재미있는 한자여행 (0) | 2007.04.14 |
이상이 그린 시화 그림 속의 실제 주인공은 누구인가?
これはこれ札つきの要視察猿 이거야말로 딱지 붙은 요시찰 원숭이
トキドキ人生ノ檻ヲ脫出スルノデ 가끔 인생의 우리를 탈출하기 때문에
園長さんが心配スルノテアル 원장님이 걱정을 하는 것이다. -이상-
누구는 구보 박태원 선생의 초상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림 원본의 얼굴 아래쪽 시루엣은 두 남녀가 대화를 나누고 있다.
원숭이 처럼 창문 밖에서 몰래 엳듣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요시찰 원숭이는 과연 누구일까? 간담이 서늘하다.
이 시화는 시인 강 민 선생이 원본을 보관하고 있을 때 가까운 이들에게
이 귀한 시화 몇 점을 나누어주기 위해 복사를 한 뒤 비닐로 코팅해 놓았던 것이다.
이 시화 원본은 안타깝게도 강 민 선생이 이사를 할 때 잃어버렸다 한다.
전체사진 http://www.pressbyple.com/news/articleView.html?idxno=25293
나는 전연 실망 가운데 있다. 지금에 나의 이 무서운 생활이 노위에 선 도승사의 모양과 같이 나를 지지하고 있다.
모든 것이 다 하나도 무섭지 아니한 것이 없다. 그 가운데에도 이 <죽을 수도 없는 실망>은 가장 큰 좌표에 있을 것이다.
중편소설 十二月 十二日 서문 중에서......
10. 동물에 대한 고결한 지식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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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李箱 애사哀詞
박 태 원
여보, 상箱 -
당신이 가난과 병 속에서 끝끝내 죽고 말았다는 그 말이 정말이요 ?
부음을 받은 지 이미 사흘, 이제는 그것이 결코 무를 수 없는 사실인 줄만
알면서도 그래도 좀처럼 믿어지지 않는 이 마음이 섧구려.
재질과 교양이 남에게 뛰어나매, 우리는 모두 당신에게 바라고 기다리든 바
컸거늘, 이제 얻어 이른 곳이, 이 갑작한 죽음이었소 ? 사람이 어찌 욕되게
오래 살기를 구하겠다면 이십 팔년은 너무나 짧소.
여보, 상箱 -
당신이 아직 서울에 있을 때 하롯저녁 술을 나누며 일러주든 그 말 그 생각이
또한 장하고 커서 내 당신의 가는 팔을 잡고 마른 등을 치며 한 가지 감격에
잠겼든 것이 참말 어제 같거든 이제 당신은 이미 없고 내 가슴에 빈 터전은
부질없이 넓어 이 글을 초하면서도 붓을 놓고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기 여러 차례요.
여보, 상箱 -
이미 지하로 돌아간 당신은 이제 참 마음의 문을 열어, 내게 일러주지 않으려오 ?
당신은 참말 무엇을 위하야, 무엇을 구하야, 내 서울을 버리고 멀리 동경으로 달려
갔던 것이요 ? 모든 어려움을 다 물리치고 모든 벗들의 극진한 만류도 귀 밖에 흘리고
마땅히 하여야 할 많은 일을 이곳에 남겨둔 채 마치 도망꾼이처럼 서울을 떠났든 당신의
참뜻을 나는 이제 있어도 풀어 낼 수가 없구료.
여보, 상 -
그래도 나는 믿었소. 벗에게 마음을 아직 숨겨 두어도 당신의 뜻은 또 한 커서 이제 수히
서울로 돌아올 때 당신은 응당 집안을 돌보아 아들된 이의 도리를 지키고 또 한편 당신이
그렇게도 사랑하여 마지않든 우리 문학을 위하야 힘을 애끼지 않으리라고.
그러나 그것도 부질없이 만리나 떨어진 곳에 가난하고 외로운 몸이 하롯날 병들어 누우매
이곳에 남은 벗들은 오직 궁금하고 답답하여 할 뿐으로 놀란 가슴을 부등켜안고 달려간
안해의 사랑의 손길도 당신의 아픈 몸을 골고루 어루만지는 수는 없어 그래 드디어 할 일
많은 당신을 다시 돌아오게 못하였나, 하면, 우리가 굳이 당신을 붙들어 서울에 그대로
머물러 있게 못한 것이 이제 새삼스러이 뉘우쳐지는구료.
여보, 상 -
재주가 남보다 뛰어난 사람은 마땅히 또 총명하여야 할 것으로, 우리는 그것도 당신에게
진작부터 허락하여 왔거든, 어찌 당신은 돌아보아 그 귀한 몸을 애낄 줄 몰랐었소?
병을 남에게 자랑할 줄 모르는 당신, 허약한 몸이 감당해낼 턱없는 줄 알면서도 그 절제
없는 생활을 그대로 경영하여 온 당신 - 그러한 당신의 이번 죽음을 애끼고 서러워하기 전에
먼저 욕하고 나무라고 싶은 이 어리석은 벗의 심사를 상의 영혼은 어떻게 풀어주려 하오 ?
여보, 상 -
그러나 모든 말이 이제는 눈꼽만한 보람도 없는 것이구려. 돌아오면 하리라고 마음 먹었던
많은 사설도, 이제는 영영 찾아갈 곳을 잃은 채 이 결코 충실치 못하였든 벗은 이제 당신의
명복만을 빌려하오.
부디 상은 편안히 잠드시오.
<조선일보> 1938년 2월 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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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③ 이상·김유정·박태원·김기림 / 文人, 옛 잡지를 거닐다 (0) | 2014.12.0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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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굴] 文人, 옛 잡지를 거닐다 ③ 이상·김유정·박태원·김기림
“오입쟁이 李箱(이상)도 연정에는 서툰 소년”
⊙ ‘고독한 이방인’ 시인 李箱의 遺稿(유고) 속에 당대 문인들의 삶 담겨
⊙ 박태원의 소설 <애욕>의 주인공은 李箱이 실제 모델
⊙ “돌아오지 않는 ‘제비(이상의 다방 상호)’의 임자는 얼마나 야속한 사람이겠소?”(金起林)
이상·김유정·박태원·김기림(맨 위로부터 시계 반대 방향).
1930년대에 카프식(式) 경향문학에 맞선 걸출한 문우(文友)들이 여럿 있었다. 시인 이상(李箱·본명 金海卿·1910~1937)과 김기림(金起林), 정지용(鄭芝溶), 소설가 박태원(朴泰遠)과 김유정(金裕貞) 등이다.
순수예술을 지향했던 ‘구인회(九人會)’ 멤버이기도 한 이들 사이에 남은 교우록(交友錄)은, 일찍 타개한 이상의 유고(遺稿)와 문우들의 회고에서 확인할 수 있다.
1930년대 한국문단의 ‘고독한 이방인(異邦人)’이라 불린 이상은 당대 카프의 프롤레타리아 문학과 대조되는 관념적이고 난해한 모더니즘 문학으로 센세이션을 일으켰던 인물. 3년 과정의 경성고등공업학교(지금의 서울대 공대) 건축과를 나와 21세 때 조선총독부 내무국 건축기수로 취직한 그는, 조선건축회지 《조선과 건축》의 표지도안 현상모집에 1등과 3등에 당선되는가 하면 <이상(異常)한 반역반응(反逆反應)>이란 낯선 시로 당대 문단을 경악시켰다. 또 ‘선전(鮮展·조선미술전람회)’에 자신의 초상화를 출품, 입선될 정도로 문예(文藝)에 다재다능했다.
이상이 1934년 4월 17일 향년 28세를 일기로 동경제대부속병원에서 요절하고 2년 뒤인 1939년 5월호 《청색지(靑色紙)》에 이상의 유고 <소설체로 쓴 김유정론>이 실렸다.
글 도입부에 이상은 ‘앞으로 김기림, 박태원, 정지용에 대한 글도 쓸 계획’임을 밝혔을 정도로 교분이 두터웠다. 그러나 실제로 완성된 글은 한 편밖에 없다. <소설체로 쓴 김유정론>에는 문우들에 대한 흥미로운 묘사가 자주 등장한다.
비슷하지만 다른 起林· 泰遠· 芝溶· 裕貞
이상은 시인 김기림에 대해 ‘암만해도 성을 안 낼뿐더러 누구를 대하든 늘 좋은 낯으로 대하는 타입의 우수한 견본(見本)’이라고 했다. 소설가 박태원에 대해선 비슷하지만 다르게 묘사한다.
<…좋은 낯을 하기는 해도 적(敵)이 비례(非禮)를 했다거나 끔찍이 못난 소리를 했다거나 하면, 잠자코 속으로만 꿀꺽 없이 여기고 그만두는, 그러기 때문에 근시안경을 쓴 위험인물이 박태원이다.…>
(p89, <소설체로 쓴 김유정론>, 《청색지》, 1939년 5월)
이상이 보기에 정지용은 김기림, 박태원과 또 다르다.
<…없이 여겨야 할 경우에 “이놈! 네까짓 놈이 뭘 아느냐”라든가, 성을 내면서 “여! 어디 덤벼봐라”고 할 줄 아는, 그러나 그저 그럴 줄 알 뿐이지 그만큼 해두고 주저앉고 마는, 코밑에 수염을 저축(貯蓄)한 정지용이었다.…>(p89)
반면 김유정은 속으로 부글부글 삼키는 부류가 아닌 진정한 ‘투사’로 묘사된다.
<…모자를 홱 벗어 던지고, 두루마기도 마고자도 민첩하게 턱 벗어 던지고, 두 팔 훌떡 부르걷고 주먹으로는 적의 볼때기를, 발길로는 적의 사타구니를 격파하고도 오히려 행유여력(行有餘力)에 엉덩방아를 찧고야 그치는 희유(稀有)의 투사가 있으니 김유정이다.…>(p89)
이상은 ‘이들이 무슨 경우에 어떤 얼굴을 했댔자 기실, 그 교만(驕慢)에서 산출된 표정 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참 위험하기 짝이 없는 분들’이라 재미있게 표현한다.
<…다행히 이 네 분은 서로들 친하다. 서로 친한 이분들과 친한 나 불초(不肖) 이상이 보니까 여상(如上)의 성격이 순차적 차이가 있는 것은 재미있다. 이것은 혹 불행히 나 혼자의 재미에 그칠는지 우려되지만 그래도 좀 재미있어야 되겠다.…>(p90)
<소설체로 쓴 김유정론>을 좀 더 들여다보자.
어느 날 김유정이 B군, S군과 함께 초저녁부터 곤히 잠든 이상을 찾아왔다.
“김형!(김해경) 이 유정이가 오늘, 술 좀 먹었습니다. 김형, 우리 또 한잔 합시다.”
이상 왈(曰) “그럽시다 그려.”
강원도 출신인 김유정은 술이 들어가면 끈적끈적한 목소리로 강원도아리랑 ‘팔만구암자(八萬九庵子)’를 내뽑곤 했다. 이상이 듣기에 유정의 목소리는 ‘천하일품’. 하지만 취중 문학담은 곧잘 주먹다짐으로 이어졌다.
B군이 술에 취해 5합들이 술병을 거꾸로 쥐고 육모방망이 돌리듯 휘두르며 “너, 유정이 덤벼라”고 외쳤다. 유정과 S군이 함께 맞서 B군을 공격했지만 B군은 S군의 불두덩이를 걷어찼다. 노발대발한 S군은 B군을 향하여 맹렬한 일축(一蹴)을 결행한다.
<…이러면 B군은 또 선수(船首)를 돌려 유정을 겨누어 거룩한 일축을 발사한다. 김유정은 S군을, S군은 B군을, B군은 유정을, 유정은 S군을, S군은… 대체 누가 누구하고 싸우는 것인지 종잡을 수가 없는 것이다.…>
(p93)
仇甫의 소설 <애욕>에 등장한 李箱
이상이 절친한 친구였던 소설가 구보 박태원의 결혼식 방명록에 남긴 친필 축하 메시지.
“結婚(결혼)은 卽(즉) 慢畵(만화)에 틀님업고(틀림없고)”로 시작하는 글이 눈에 띈다.
1939년 5월 《여성》지에는 소설가 구보(仇甫) 박태원이 쓴 추모글인 <이상(李箱)의 비련(秘戀)>이 실렸다. 그는 이상을 이렇게 묘사했다.
<…가난하고 불결하기는 이전과 마찬가지지만, 코르덴 양복에 해진 셔츠, 세수는 사흘에 한번 할까 말까 하고, 잡지 일로 《조선일보》 출판부 같은 곳에 나타나서 불결한 손으로 눈을 비벼 눈곱을 떼고 하품을 하고 그러면서도 곧잘, 그의 독특한 화술을 농(弄)하여 사람을 웃겼던 것이나, 그러한 곳에는 또한 형언키 어려운 일종의 매력이라는 것이 있었다.…>(p76, <이상의 비련>, 《여성》, 1939년 5월호)
구보의 집은 서울 광교 천변에 있었는데 이상이 종로1가에서 운영했던 다방과 가까웠다고 한다. 다방 ‘제비’는 이상이 스물네 살 되던 해에 객혈로 건축과 기수직을 포기하고 황해도 백천(白川) 온천으로 휴양을 떠나 그곳에서 기생 금홍(錦紅)이란 여인과 동거를 시작한 뒤 상경(上京), 호구책으로 시작했었다. 영업이 신통치 않아 ‘제비’가 결국 문을 닫았고 뒤이어 카페 ‘쓰루’ ‘씩스 나인’, 다방 ‘무기’를 열었으나 한결같이 실패하고 말았다.
구보는 이상을 주인공으로 등장시킨 소설 <애욕(愛慾)>을 1934년 《조선일보》에 연재했다. 그러나 3~4회 연재하다 중단했다고 한다. 소설 내용은 이렇다.
"주인공은 젊은 화가 하웅(河雄). 하웅은 종로에서 다방을 경영하는데 아내를 다방 마담으로 내세웠다. 아내는 다른 사내와 바람이 나서 떠나버리고 하웅은 우연히 한 소녀와 사랑에 빠져 그녀를 위해 정지용의 시를 암송한다. 그러나 소녀 주위에는 여러 사내가 있어 하웅을 거짓사랑으로 농락할 뿐이다. 그런 하웅을 친구인 구보가 나무라지만 하웅은 ‘자기 힘으로 어쩔 수 없다’고 말한다."
박태원은 <이상의 비련>이란 글에서 자신의 소설 <애욕>을 소개하며 소설 속 하웅의 모델이 이상이었다고 밝혔다.
<…마르고 키 큰 몸에 어지러운 머리터럭과 면수(面手·면도와 세수)를 게을리한 얼굴에 잡초와 같이 무성한 머리카락이며, 심심하면 손을 들어 맹렬한 형세로 코털을 뽑는 버릇에 이르기까지 <애욕> 속의 하웅은 현실의 이상을 그대로 방불케 하는 것이다.…>(p74)
소설이 연재되고 친구들이 이상에게 이렇게 물었다고 한다.
“그 ‘모던 걸’하고 요새도 자주 만나시오?”
그러면 이상은 이렇게 답했다.
“무어? <애욕> 말씀이구려. 그건 내 얘기가 아니라, 구보 얘기지요. 하웅이라는 것이 실상은 구보요, 하웅을 나무라는 자가 실상은 나 이상이오.”
그러면 문우들이 다시 박태원에게 물었다.
“이상이 이처럼 말하는데 진상은 어찌된 것이오?”
그때마다 박태원은 이렇게 언명(言明)했다.
“그건 괜한 말이오. 하웅은 역시 이상임이 틀림없소.”
박태원은 요절한 벗을 그리며 이렇게 고백했다.
<…이제 자백(自白)을 하자면 <애욕> 속의 하웅은, 이상이며 동시에 나였고, 그의 친우 구보는 나면서 또한 이상이었던 것이다. (중략) 당시 나와 이상은 서로 각기 다른 조그만 로맨스를 가졌었다.
이상의 정인(情人)이 어느 카페의 여급이라는 것과, 나의 상대가 모(某) 지방 명사(?)의 딸이었다는 고만한 차이가 있었으나 두 사람 모두 작품 속의 소녀나 한 가지로 상당히 방종성(放縱性)을 띠고 있다는 점에 있어서 서로 일치되었다.…>(p74~75)
“매일같이 gloomy sunday”
다방 ‘제비’에 모인 이상, 박태원, 김소운(왼쪽부터).
이상의 실제 연애담은 훗날 여러 문인의 기억을 통해 회자됐다. 다방이 문을 닫고 아내 금홍이 바람이 난 뒤 카페의 일본 여급 ‘마유미’와 어지간히 사귀기도 했다.
어느 날 이상이 치정관계로 건달에게 칼침을 맞고 입원한 ‘마유미’를 보고 이렇게 되뇌었다고 한다
(문학평론가 尹柄魯의 <고독한 이방인> 참조).
“나는 떠나야겠어. 서울을, 이렇게 있다가는 썩어버릴 것만 같아, 매일같이 구루미 선데이야. 어두운 일요일이 날마다 계속이야. 아, 나는 죽을 것만 같아.”
<이상의 비련>에 박태원과 이상이 나누었던 생전의 대화가 실려 있다.
<…이상과 나(박태원)는, 당시에 있어 서로 겨 묻은 개였고, 동시에 똥 묻은 개였다. 내가 이상을 향하여 “여보, 그까짓 계집을 무어라고 그토록 소중히 안고 사랑을 하느니 어쩌니 그러오? 당신의 정열(情熱)이 너무 아깝소”라고 충고하면, 이상은 또한 박태원을 향해 이렇게 똑같이 받아쳤다.
“여보, 그까짓 계집을 무어라고 그토록 소중히 안고 사랑을 하느니 어쩌니 그러오? 당신의 열정이 너무 아깝소.”
두 사람은, 서로 마음속으로 ‘이상이 그리 미쳤단 말인가?’ ‘구보가 아무래도 성치는 않아…’ 그렇게 생각하며 벗을 위해 서로 슬퍼하고 못마땅해했다.…>(p75)
박태원은 “당당한 오입쟁이였던 이상도 몸과 마음을 그대로 내어놓는 연정(戀情)에는 스스로 소년과 같이 수줍고 애탔다”고 기억했다.
<…언젠가 다방 ‘금강산’에서 이상이 한 여성을 향해 구애한 일이 있었다. 구석진 탁자에 한잔의 가배차(커피-편집자)를 앞에 두고 여인과 마주앉은 이상은 다시 소년과 같이 가슴을 태우고 마음이 수줍은 나머지, 자신도 깨닫지 못하고 탁자 한가운데 놓은 각설탕 그릇에 담긴 모당을 손으로 만졌다.
사랑을 받아주기 원하는 여인 앞에 이상의 손이 불결한 것은 또한 어찌할 도리가 없는 슬픈 사실이다. 그가 만진 모당은 그대로 꺼멓게 때가 묻었다. 여인은, 이상의 열정보다도 한 개, 두 개, 손때가 까맣게 묻어가는 각설탕에 좀 더 관심을 가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이상은 물론 그런 것에 미처 생각이 들 턱이 없다. (중략) 평소 그처럼 능변(能辯)인 그가 말조차 더듬어 가며 자기의 진정을 애인에게 알리기 위해 열중했다. 그러나 마침내 시중드는 아이가 참다못해 그들 탁자로 다가와 이상의 손에서 그릇을 빼앗아 갔을 때 그는 새삼스럽게 놀라 고개를 들고 그곳에서 자기를 바라보는 여인의 모멸(侮蔑) 가득한 눈초리에 어처구니없이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p77)
1939년 6월호 《여성》에는 이상이 생전(生前) 시인 김기림에게 보냈던 편지 4편이 <이상서간(李箱書簡)>이란 제목으로 실렸다. 편지에는 사랑에, 정에 굶주렸던 고독한 시인의 마음이 잘 묻어 있다.
<…연애라도 할까? 싱거워서? 심심해서? 스스러워서? 이 편지를 보았을 때 형(김기림)은 아마 뒤이어 <기상도(氣象圖)>의 교정을 보아야 될 것 같소. 형이 여기 있고 마음맞은 친구끼리 모여 조용한 ‘기상도의 밤’을 가지고 싶은 것이 퍽 유감(遺憾)되게 되었구려. 우리 여름에 할까?
여보! 편지나 좀 하구려! 내 고독과 정적을 동정하고 싶지는 않소? 자, 운명에 순종하는 수밖에! 굿바이…>
(p83, <이상서간>, 《여성》, 1939년 6월호)
이상이 요절한 뒤 김기림은 박태원에게 쓴 편지(《여성》 1939년 5월호에 게재됐다)에 이상을 그리며 “봄이 오니 형(박태원)도 ‘제비(다방 상호)’가 그리우신가 보오. 돌아오지 않는 ‘제비’의 임자는 얼마나 야속한 사람이겠소? 동경(東京)을 지날 때는 머리를 숙이오”라고 썼다.⊙
/ 월간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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