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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泰俊 小說에 나타난 鐵道體驗의 양상 - 단편소설을 中心으로.pdf
달밤 달밤은 1933년 11월 중앙에 발표된 단편소설이다.
까마귀
장마
복덕방
패강랭
농군
밤길
토끼 이야기
해방 전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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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 프란스
옴겨다 심은 綜櫚종려나무 밑에
빗두루 슨 장명등,
카페 프란스에 가쟈.
이놈은 루바쉬카
또 한사람은 보헤미안 넥타이
뻣적 마른 놈이 압장을 섰다.
밤비는 뱀눈처럼 가는데
페이브멘트에 흐늙이는 불빛
카페 프린스에 가쟈.
이놈의 머리는 빗두른 능금
또 한 놈의 心臟심장의 벌레먹은 薔薇장미
제비처럼 젖은 놈이 뛰여간다.
※
[오오 패릍(鸚鵡) 서방 ! 꾿 이브닝!]
[꾿 이브닝!](이 친구 어떠하시오?)
鬱金香울금향 아가씨는 이밤에도
更紗경사(오색무늬) 커-틴 밑에서 조시는구료!
나는 子爵자작의 아들로 아모것도 아니란다.
남달리 손이 히여서 슬프구나!
나는 나라도 집도 없단다.
大理石대리석 테이블에 닷는 내 뺨이 슬프구나!
오오, 異國種이국종 강아지야
내 발을 빨어다오.
내 발을 빨어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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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독립운동사 자료 1 임정편Ⅰ | 一一. 大韓民國臨時政府 政務報告書(大韓民國二十三年~二十七年·一九四一年~一九四五年) | 2. 大韓民國二十四年度 政務報告書 | |
2 | 한국독립운동사 자료 2 임정편Ⅱ | 1. 臨時政府 憲章 | 6. 臨時政府 成立祝賀文 |
3 | 한국독립운동사 자료 2 임정편Ⅱ | 1. 臨時政府宣言書·聲明書·警告文·布告文 | 2. 臨時政府의 宣言書 및 公約三章 |
4 | 한국독립운동사 자료 2 임정편Ⅱ | 2. 國務會議 및 各部署別活動 | 24. 男女學生에 대한 內務部의 布告文 |
5 | 한국독립운동사 자료 2 임정편Ⅱ | 6. 臨時政府主催 各種 記念式·辭類 | 8. 大統領의 三一節紀念 所感 |
6 | 한국독립운동사 자료 2 임정편Ⅱ | 5. 國民代表會議 參席代表의 談話 | 2. 救國團代表와 北間島地方代表의 談話 |
7 | 한국독립운동사 자료 2 임정편Ⅱ | 7. 國民代表會議 開催·經過 | 5. 國民代表會議參席代表의 宣誓·宣言式 擧行 |
8 | 한국독립운동사 자료 2 임정편Ⅱ | 10. 國民代表會議에 對한 國民輿論 및 新聞論評 | 2. 統一運動과 使命感 |
9 | 한국독립운동사 자료 2 임정편Ⅱ | 10. 國民代表會議에 對한 國民輿論 및 新聞論評 | 10. 會議 反對者의 再考要請 |
10 | 한국독립운동사 자료 3 임정편Ⅲ | 27. 韓國國民黨 | 5. 國恥日 紀念宣言 |
11 | 한국독립운동사 자료 3 임정편Ⅲ | 33. 朝鮮民族革命黨 | 2. 「八·二九」 三十二週年 紀念宣言 |
12 | 한국독립운동사 자료 4 임정편Ⅳ | 史料集 第二 | 3. 韓族의 日本族에게 對한 怨恨 |
13 | 한국독립운동사 자료 4 임정편Ⅳ | 四編 獨立運動의 事件 | 第五章 韓人의 日人의게 對 敵愾心 |
14 | 한국독립운동사 자료 4 임정편Ⅳ | 四編 獨立運動의 事件 | 第七章 獨立運動에 關한 書類 |
15 | 한국독립운동사 자료 4 임정편Ⅳ | 대한독립 혈전긔 | 대한독립 혈전긔 서문 |
16 | 한국독립운동사 자료 4 임정편Ⅳ | 내디독립군 활동소식 | 대한인국민회 쳠존끠 |
17 | 한국독립운동사 자료 5 3·1운동편Ⅰ | 1. 國內新聞 論說 記事 | 朝鮮獨立新聞 |
18 | 한국독립운동사 자료 5 3·1운동편Ⅰ | 1. 國內新聞 論說 記事 | 大韓獨立新聞 |
19 | 한국독립운동사 자료 5 3·1운동편Ⅰ | 1. 國內新聞 論說 記事 | 獨立新報 |
20 | 한국독립운동사 자료 5 3·1운동편Ⅰ | 2. 國外新聞 論說 記事 | 半島新聞 |
21 | 한국독립운동사 자료 7 안중근편Ⅱ | 八. 伊藤博文 被擊事件에 대한 國內外의 反響에 關한 件 | 機密送 第三號 |
22 | 한국독립운동사 자료 7 안중근편Ⅱ | 兇行者 及 嫌疑者 調査書 | 第五. 在外 韓字新聞統의 傾向 |
23 | 한국독립운동사 자료 7 안중근편Ⅱ | 一◯. 安重根 및 共諆嫌疑者에 대한 訊問에 關한 件 | 情報 第三 |
24 | 한국독립운동사 자료 7 안중근편Ⅱ | 一◯. 安重根 및 共諆嫌疑者에 대한 訊問에 關한 件 | 境 警視의 訊問에 대한 安應七의 供述(第十一回) |
25 | 한국독립운동사 자료 7 안중근편Ⅱ | 一一. 安重根 및 關聯被告에 대한 裁判及刑執行關係件 | 大韓每日申報 |
26 | 한국독립운동사 자료 9 의병편Ⅱ | (三) 三月, 全羅道 | 通報 |
27 | 한국독립운동사 자료 10 의병편Ⅲ | (二) 四月, 京畿道 | 通報 |
28 | 한국독립운동사 자료 12 의병편Ⅴ | (四) 十二月, 京畿道 | 被告人 訊問調書 |
29 | 한국독립운동사 자료 12 의병편Ⅴ | (四) 十二月, 忠淸道 | 忠州分遣所에서 白南奎의 陳述 |
30 | 한국독립운동사 자료 13 의병편Ⅵ | (三) 三月, 京畿道 | 左 |
31 | 한국독립운동사 자료 13 의병편Ⅵ | (三) 三月, 忠淸道 | 暴徒 首魁 逮捕의 件禮山郡 今坪面 下峴洞 |
32 | 한국독립운동사 자료 13 의병편Ⅵ | (三) 三月, 慶尙道 | 匪徒 逮捕의 件 本月 十六日付 安東警察署長 報告眞寶郡 北面 汶海洞居 農 |
33 | 한국독립운동사 자료 13 의병편Ⅵ | (三) 三月, 慶尙道 | 傳令 安東郡守 及 郡主事處(寫) |
34 | 한국독립운동사 자료 13 의병편Ⅵ | (三) 三月, 黃海道 | 令 金川馬山城居 鄭春弘處 |
35 | 한국독립운동사 자료 14 의병편Ⅶ | (二)五月, 慶尙道 | 生擒匪魁 兪宗煥 調査의 件 |
36 | 한국독립운동사 자료 14 의병편Ⅶ | (二)五月, 全羅道 | 匪徒에 關한 件 |
37 | 한국독립운동사 자료 14 의병편Ⅶ | (三) 六月, 京畿道 | 暴徒 檄文에 關하여 楊州警察署長 報告要領 |
38 | 한국독립운동사 자료 16 의병편Ⅸ | (二) 十二月, 忠淸道 | 李敎永 演說 大要 |
39 | 한국독립운동사 자료 17 의병편Ⅹ | (三) 三月, 忠淸道 | 暴徒에 關한 件 |
40 | 한국독립운동사 자료 17 의병편Ⅹ | (三) 三月, 咸鏡道 | 內報 暴徒檄文에 關한 件 |
41 | 한국독립운동사 자료 18 의병편XI | (一) 四月, 咸鏡道 | 賊首魁 姜斗弼 檄文 送附의 件 四月 十五日 元山管區長 報告 |
42 | 한국독립운동사 자료 18 의병편XI | (四) 七月, 黃海道 | 暴徒에 關한 報告 |
43 | 한국독립운동사 자료 37 해외언론운동편 | 제Ⅰ장 러시아지역 | 「大洋報」第三號譯報ノ件 |
44 | 한국독립운동사 자료 37 해외언론운동편 | 제Ⅰ장 러시아지역 | 「大洋報」第七號譯報 |
45 | 한국독립운동사 자료 37 해외언론운동편 | 제Ⅰ장 러시아지역 | 韓字新聞發刊ニ關スル件 |
46 | 한국독립운동사 자료 37 해외언론운동편 | 제Ⅰ장 러시아지역 | 한국 혈젼에 대한 감상(젼호를 니어) |
47 | 한국독립운동사 자료 37 해외언론운동편 | 제Ⅰ장 러시아지역 | 3월 1일 |
48 | 한국독립운동사 자료 37 해외언론운동편 | 제Ⅱ장 중국관내지역 | 新大韓創刊辭 |
49 | 한국독립운동사 자료 37 해외언론운동편 | 제Ⅱ장 중국관내지역 | 不穩新聞「革命」ノ記事ニ關スル件 |
50 | 한국독립운동사 자료 37 해외언론운동편 | 제Ⅱ장 중국관내지역 | 不穩新聞「導報」ノ記事ニ關スル件 |
51 | 한국독립운동사 자료 37 해외언론운동편 | 제Ⅲ장 중국동북지역 | 漢字新聞ニ關スル件 |
52 | 한국독립운동사 자료 37 해외언론운동편 | 제Ⅲ장 중국동북지역 | 不逞鮮人等發行雜誌「同友」記事ニ關スル件 |
53 | 한국독립운동사 자료 37 해외언론운동편 | 제Ⅲ장 중국동북지역 | 韓族勞働黨ノ狀況ニ關スル件 |
54 | 한국독립운동사 자료 37 해외언론운동편 | 제Ⅲ장 중국동북지역 | 不穩雜誌「同友」ノ記事其他ニ關スル件 |
55 | 한국독립운동사 자료 37 해외언론운동편 | 제Ⅲ장 중국동북지역 | 「農報」記事ニ關スル件 |
56 | 한국독립운동사 자료 38 종교운동편 | 國內‧中國東北地域 宗敎運動 | 耶蘇敎會堂設置ニ關スル件 |
57 | 한국독립운동사 자료 38 종교운동편 | 國內‧中國東北地域 宗敎運動 | 不逞鮮人ニ關スル件 |
58 | 한국독립운동사 자료 38 종교운동편 | 國內‧中國東北地域 宗敎運動 | 米國議員觀光團ノ來鮮ト不逞鮮人ノ行動 |
59 | 한국독립운동사 자료 38 종교운동편 | 國內‧中國東北地域 宗敎運動 | 檀君敎靑年會創立總會ノ件 |
60 | 한국독립운동사 자료 38 종교운동편 | 國內‧中國東北地域 宗敎運動 | 報告書 在間島英國宣敎師不法行爲證據書類(大正十年一月十一日軍務局下元少佐ヨリ送付) |
61 | 한국독립운동사 자료 39 中國東北地域篇 I | 中國東北地域民族運動 | 局子街ニ於ケル排日鮮人家宅搜索之結果具申 |
62 | 한국독립운동사 자료 39 中國東北地域篇 I | 中國東北地域民族運動 | 時局ト間島在住排日鮮人ノ言動並並之ニ對スル處置 |
63 | 한국독립운동사 자료 39 中國東北地域篇 I | 中國東北地域民族運動 | 秘號外 朝鮮人及危險思想抱持者視察ニ要スル費用送付ノ件 |
64 | 한국독립운동사 자료 40 中國東北地域篇 Ⅱ | 中國東北地域民族運動 Ⅱ | 安鍾奭暴動ノ顚末ニ關スル件 |
65 | 한국독립운동사 자료 40 中國東北地域篇 Ⅱ | 中國東北地域民族運動 Ⅱ | 排日鮮人ノ秘密會合ニ關スル件 |
66 | 한국독립운동사 자료 40 中國東北地域篇 Ⅱ | 中國東北地域民族運動 Ⅱ | 韓民仁想會組織ニ關スル件 |
67 | 한국독립운동사 자료 41 中國東北地域篇 Ⅲ | 中國東北地域民族運動 Ⅱ | 秘密出版物獨立新報ニ關スル件 |
68 | 한국독립운동사 자료 41 中國東北地域篇 Ⅲ | 中國東北地域民族運動 Ⅱ | 朝鮮獨立ニ關スル秘密出版譯文送付ノ件 |
69 | 한국독립운동사 자료 41 中國東北地域篇 Ⅲ | 中國東北地域民族運動 Ⅱ | 鮮人ノ配付文書ニ關スル件 |
70 | 한국독립운동사 자료 41 中國東北地域篇 Ⅲ | 中國東北地域民族運動 Ⅱ | 朝鮮獨立問題ニ關スル秘密印刷物並鮮人其後ノ狀況 |
71 | 한국독립운동사 자료 41 中國東北地域篇 Ⅲ | 中國東北地域民族運動 Ⅱ | 獨立運動ニ關スル情報送付ノ件 |
72 | 한국독립운동사 자료 41 中國東北地域篇 Ⅲ | 中國東北地域民族運動 Ⅱ | 新韓共和報ノ社說ニ關スル件 |
73 | 한국독립운동사 자료 41 中國東北地域篇 Ⅲ | 中國東北地域民族運動 Ⅱ | 排日鮮人等ノ行動急報ノ件 |
74 | 한국독립운동사 자료 42 中國東北地域篇 Ⅳ | 中國東北地域民族運動 Ⅳ | 國外情報 |
75 | 한국독립운동사 자료 42 中國東北地域篇 Ⅳ | 中國東北地域民族運動 Ⅳ | 國外情報 (浦潮派遣員報告要旨) |
76 | 한국독립운동사 자료 42 中國東北地域篇 Ⅳ | 中國東北地域民族運動 Ⅳ | 國外情報 |
77 | 한국독립운동사 자료 43 中國東北地域篇 Ⅴ | 中國東北地域民族運動 Ⅴ | 大韓獨立團支團設置陰謀發見檢擧ノ件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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님의 부르심을 받들고서-노천명
남아면 군복에 총을 메고
나라 위해 전장에 나감이 소원이리니
이 영광의 날
나도 사나이였드면 나도 사나이였으면
귀한 부르심 입는 것을
갑옷 떨쳐입고 머리에 투구 쓰고
창검을 휘두르며 싸움터로 나감이
남아의 장쾌한 기상이어든
이제
아세아의 큰 운명을 걸고
우리의 숙원을 뿜으며
저 영미를 치는 마당에랴
영문(營門)으로 들라는 우렁찬 나팔소리
오랫만에
이 강산 골짜구니와 마을 구석구석을
흥분 속에 흔드네
뒷일은 우리가/ 金活蘭 김활란 {조광}, 1943년. 12월)
학도병 출진의 북은 울렸다.
그대들은 여기에 발맞추어 용약(勇躍) 떠나련다!
가라,
마음 놓고!
뒷일은 후방의 국민은 우리 부녀가 지킬 것이다.
남아로 태어나서 오늘같이 생의 참뜻을 느꼈음도 없었으리라.
학병 제군 앞에는 양양한 전도가 열리었다.
몸으로 국가에 목숨 받치는 거룩한 사명이 부여되었다.
일본이름 아먀기 카쓰란天城活蘭
http://blog.daum.net/gapgol1/16154680
志願兵지원병에게 /毛允淑모윤숙 -삼천리 13권제1호, 1941년 1월1일
눈부신 山모통이
밝은 숲속
찬 기운 떠오는 하늘밑으로
가을 떨기를 헷치며 들어갔노라.
기슭을 후리고 지나가는
억센 발자욱
몸과 몸의 뜨거운 움직임들
칼빛은 太陽아래 번개를 아로삭여
힘과 열의 동산안에 내맘은 뛰놉니다.
눈은 하늘을 쏘고 그가슴은 탄환을 물리처
대 동양의 큰 이상 두 팔안에 꽉 품고
달리여 큰 숨 뿜는 정의의 용사
그대들은 이땅의 광명입니다.
대화혼 억센 앞날 영각으로 빛내일
그대들 이나라의 앞잽이 길손
피와 살 아낌없이 내여바칠
반도의 남아 희망의 화관입니다.
가난헌 이몸이 무엇을 바치리까?
황홀한 창검이나 금은의 장식도
그대 앞에 디림없이 그저 지냅니다
오로지 끓는 피 한 목음을 축여 보태옵니다.
지난날 이눈ㅅ가에 기뜨렸던 어둠을
내 오늘 그대들의 우렁찬 웨침 앞에
다- 맑게 씿고 새 계절 뵈옵니다
다- 맑게 씿고 새 노래 부릅니다.
일제 말기(日帝 末期) 여성작가들의 친일 http://blog.naver.com/bhjang3/2201996865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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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 말고 다른 남자와의 성교는
가장 진보된 사람에게 마땅히 있어야만 할 감정이라고....
충격적 고백수기인 나혜석의 離婚 告白狀-靑邱氏에게
C는 '최린'의 이니셜 (나혜석 33세, 최린 50세)
C의 명성은 일찍부터 들어 알고 있었으나 처음 만난 것은 프랑스 파리였습니다.
그를 대접하려고 요리를 하고 있는 나에게 “안녕합쇼“ 하는 처음 인사는 유심이도 힘이 잇는 말이었습니다.
이래 남편은 독일로 가있고 C와 나는 불어를 모르는 관계상 통역을 두고 언제든지 3인이 동반하여 식당, 극장, 뱃놀이 시외구경을 다니며 놀았습니다.
그리하여 과거지사, 현시사, 장래지사를 논하는 중에 공명되는 점이 많았고 서로를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이태리 구경을 하고 나보다 먼저 파리를 떠나 독일로 갔습니다.
그 왜에 콜논에서 다시 만났습니다.
내가 그때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나는 公을 사랑합니다.” 그러나 내 남편과 이혼은 아니 할랍니다.
그는 내 등을 뚝,, 두드리며
“과연 당신의 할 말이오.나는 그 말에 만족하오.” 라고 했습니다.
나는 제네바에서 어느 고국 친구에게 다른 남자나 여자와 좋아 지내면 반면으로 자기 남편이나 아내와 더 잘 지낼 수 있지요. 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공감했습니다.
이 같은 생각이 있는 것은 필경 자기가 자기를 속이고 마는 것인 줄은 모르겠으나
나는 결코 내 남편을 속이고 다른 남자 즉 C를 사랑하라고 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남편에게 정이 두터워지리라고 믿었습니다.
구미 일반 남녀 부부 사이에 이러한 공연한 비밀이 있는 것을 보고 또 이런 것이 당연한 일이오.
중심돼는 본남편이나 본부인을 어찌하지 않는 범위 내에 행동은 죄도 아니오,
실수도 아니라 가장 진보된 사람에게 마땅히 있어야만 할 감정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사실을 판명할 때는 웃어두는 것이 대수요.
일부러 (폐륜적 불륜관계라고 ?)이름을 지을 필요가 없는 것이외다.
-이혼 고백장- 청구씨에게- 나혜석 三千里 1934년 8월호
불타는 예술혼과 공명심이 세상물정 모르는 바보로 만들었다.
50 - 33 = 17
원문
C의 名聲은 일즉붓허 드럿스나 初對面하기는 巴里이엇사외다. 그를 待接하랴고 料理를 하고 잇는 나에게 「안녕합쇼 」하는 初 인사는 有心이도 힘이 잇는 말이엇사외다. 이래 夫君은 獨逸로 가서 잇고 C와 나는 佛語를 모르난 關係上 通辯을 두고 언제든지 三人이 同伴하야 食堂, 劇場, 船遊 市外 求景을 다니며 놀앗사외다. 그리하야 過去之事, 現時事, 將來之事를 論하는 중에 共鳴되는 點이 만핫고 서로 理解하게 되엿사외다. 그는 伊太利 求景을 하고 나보다 몬저 巴里를 떠나 獨逸노 갓사외다. 其 外 콜논에서 다시 만낫사외다. 내가 그때 이런 말을 하엿나이다. 「나는 公을 사랑합니다. 그러나 내 남편과 離婚은 아니 하랍니다」그는 내 등을 뚝,, 뚜뒤리며 「과연 당신의 할 말이오. 나는 그 말에 만족하오.」하엿사외다. 나는 제네바에서 어느 故國 親舊에게 「다른 男子나 女子와 조와 지내면 반면으로 자기 남편이나 안해와 더 잘 지낼 수 잇지요 」하엿슴니다. 그는 共鳴하엿슴니다. 이와갓흔 生覺이 잇는거슨 必竟 自己가 自己를 속이고 마는 거신 줄은 모르나 나는 決코 내 남편을 속이고 다른 男子 卽 C를 사랑하랴고 하는 거슨 아니엇나이다. 오히려 男便에게 情이 두터워지리라고 밋엇사외다. 歐米 一般 男女 夫婦 사이에 이러한 公然한 秘密이 잇는 거슬 보고 또 잇난 거시 當然한 일이오 中心되는 本夫나 本妻를 엇지 안는 範圍 內에 行動은 罪도 아니오 失守도 아니라 가장 進步된 사람에게 맛당히 잇서야만 할 感情이라고 生覺합니다. 그럼으로 이러한 事實을 判明할 때는 우서두는 거시 수요 일부러 일흠을 지을 必要가 업는 거시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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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여자 유학생: 나혜석 허영숙 김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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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 04월10일동아일보
변호사김우영, 라혜석양과 정동례배당에서 결혼식(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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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혜석 "천후궁" 특선화보 매일신보
特選畵報 每日申報 1926년 05월 14일
盧壽鉉, 羅惠錫, 金復鎭, 사진
朝鮮魂의 懊惱도 실고 南山에 展開된 美術의 殿堂
新綠에는 美의 旋律 젹막한 속에 새빗을 보는 뎐람회 쳣날의 늣긴 인상
朝鮮美展, 金權洙, 廬壽鉉, 李象範, 李漢福, 李昌鉉, 孫一峰, 羅蕙錫, 姜信鎬, 金復鎭, 金鎭珉, 金振宇
一九三四年의 提議
새해에는 생활부터 개량합시다. 나혜석 (上) 每日申報 1934년 01월 01일
나혜석 모친상 신문게재( 당시 25세)
每日申報 1919년 12월 26일 羅惠錫女史 丁憂
좌담 縱論橫議 돈이냐. 지식이냐.
每日申報 1920년 09월 26일
每日申報1925년 03월 21일
物論前과 物論後(6): 시대의 총애를 받던 洋畵家 羅蕙錫 女史
春葉, 李光洙, 金雨英(安東縣 副領事), 동경미술학교 洋畵科, 매일신보 來靑閣, 신여성
나혜석여사의 油畵
每日申報 1921년 03월 17일
양화전 소식
每日申報 1925년 05월 14일
美展 공개의 제2일, 오전 입장자가 일천삼백여명, 매매 예약된 것이 벌써 네 가지, 多數의 朝鮮婦人이 入場
小原武, 佐藤三代治, 羅蕙錫, 제2회 조선미술전람회
美展 공개의 제2일, 오전 입장자가 일천삼백여명, 매매 예약된 것이 벌써 네 가지, 多數의 朝鮮婦人이 入場
小原武, 佐藤三代治, 羅蕙錫, 제2회 조선미술전람회
고국의 겨을을 차져
每日申報 1933년 05월 16. 17일 美展의 印象 (1, 2)
每日申報 1922년 06월 03일
齋藤 총독의 감탄사, 오세창씨 전자에 매우 칭찬, 나혜석 여사의 그림에 감탄
齋藤實(총독), 伊藤(비서관), 加藤(촉탁), 吳世昌, 許百鍊, 沈仁燮, 山本梅溪, 加藤卓爾, 趙鳳珍(진명여학교 학생), 飯原, 三戶, 원전운웅, 羅惠錫, 제1회 조선미술전람회, 경성부
새해에는 生活부터 改良합시다 (五)
每日申報 1934년 01월 11일
30 | 삼천리 제6권 제5호 | 1934-05-01 | 熱情의 西班牙行(世界一周記 續) | 羅蕙錫 | 기행문 | 원문제공 |
31 | 삼천리 제6권 제7호 | 1934-06-01 | 人生揭示板 | 소식 | 원문제공 | |
32 | 삼천리 제6권 제7호 | 1934-06-01 | 내가 서울 女市長된다면? | 羅蕙錫 | 설문 | 원문제공 |
33 | 삼천리 제6권 제7호 | 1934-06-01 | 春園 出家放浪記, 朝鮮日報 副社長 辭任 內面과 山水放浪의 前後 事情記 | 소식 | 원문제공 | |
34 | 삼천리 제6권 제7호 | 1934-06-01 | 女人獨居記 | 羅蕙錫 | 문예기타 | 원문제공 |
35 | 삼천리 제6권 제8호 | 1934-08-01 | 離婚告白狀, 靑邱氏에게 | 羅蕙錫 | 문예기타 | 원문제공 |
36 | 삼천리 제7권 제1호 | 1935-01-01 | 女流名士의 男便調査狀 | 잡저 | 원문제공 | |
37 | 삼천리 제7권 제1호 | 1935-01-01 | 新生活에 들면서 | 羅蕙錫 | 문예기타 | 원문제공 |
38 | 삼천리 제7권 제2호 | 1935-02-01 | 新生活에 들면서 | 羅蕙錫 | 문예기타 | 원문제공 |
39 | 삼천리 제7권 제3호 | 1935-03-01 | 三千里機密室(The Korean Black Chamber) | 소식 | 원문제공 | |
40 | 삼천리 제7권 제3호 | 1935-03-01 | 靑春을 앗기는 佳人哀詞 | 문예기타 | 원문제공 |
每日申報1924년 06월 21일
今 1일로 폐막될 조선미술전람회, 20일 동안 대성황을 이루고 명일에 폐막
개벽 신간 제1호 1934년 11월01일
百人百話
만주국 육군 中佐 李亮씨는 歸京 중 조선호텔에서 체류하얏다. 전날 XXX勞働宿泊所에서 留宿하던 일을 생각하면 씨도 感慨無量할 듯.
金X仁씨는 저번에 母親喪을 당하니 兪鎭午씨는 요새 또 父親喪을 당하엿다. 今秋는 小說家 蒙喪之.
몸이 瘦瘠하기로 유명하야 瘦身大學교수니 말너스키니하는 別名을 듯고 收監 중에도 가느다런 손목이 명꽁이 時計(手錠의 별칭) 속으로 들낙달낙하야 看守들의 이약이거리가 되던 李箕永은 某사건으로 또 檢擧되엿다. 몸은 비록 不自由나마 손목만은 항시 自由일 듯
文藝評論家 白鐵은 이름이 不吉하야 鐵窓구경을 하게 되엿다. 어떤 친구가 戱言하는 것을 드럿다. 그러나 그 대신 姓이 白이닛가 白放될 수도 잇겟지.
金東煥씨는 羅惠錫 天使仙女로 아는지 뼉다구를 게먹드시 再湯三湯으로 三千里誌 號마다 울거먹는다. 그러다가는 羅씨 死後 白骨까지도 東煥씨가 차지하기 쉬울걸.
三千里誌에는 曙海 崔鶴松씨의 追悼會 비용을 상세 발표하얏다.
동광 제31호1932년 03월05일
辯護士 評判記(1) 필자東虛子
金雨英君
변호사로 副領事가 되어 가지고 安東縣 가서 수 년을 지내다가 미술가의 안해 羅惠錫女史와 같이 세계일주를 하고 돌아와서는 돌연히 羅氏와 이혼을 하고 다시 시내에서 변호사업을 시작하엿다.
어린 자식 3, 4명이 달린 안혜와 이혼을 한 金君 - 그 중심을 추측하기에 어렵지 아니하거니와 미친 물결같이 뛰노는 감정을 가진 예술가의 안해는 법으로 業을 삼는 이 남편과는 일생을 같이 할 수가 업섯는가.
안해 羅氏가 세계일주시 XX發明士 XXX氏와 巴里에서 달큼한 사랑을 속삭이엇다는 풍문이 사실인지 아닌지 그것은 모르거니와 金君은 자기의 쓰라린 경험으로 이혼소송을 대리할 때에는 타인이 상상도<67> 못할 名論을 토하야 法官의 머리를 끄덕거리게 하는 때도 잇다고 한다.
在野法曹界에 두번재 발을 들어놓는 金君은 무슨 의미로 보던지 甦生의 길을 거러나가는 첫 시련이니 금후의 金君의 辯護士로의 활약은 볼 만한 것인 줄 알앗더니.
잡지명 삼천리 제6호
발행일 1930년 05월01일
諸氏의 聲明 설문
諸氏의 聲明
1. 선생은 민족, 사회주의자임니가?
2. 선생은 실행가, 학자가 되겟슴니가?
3. 선생은 사상상 누구의 영향을 가장 만히 밧엇슴니가?
京城 崇三洞 127 李光洙
간단한 말은 오해를 사기 쉬웁니다. 그 중에도 민족주의란 말은 固定 共通한 내용이 적읍니다.
1. 민족주의자입니다.
2. 소설 쓰고 신문기자 되기를 목표로 함니다.
3. 톨스토이, 예수, 佛陀, 島山
市內 茶屋町 羅蕙錫
1. 답을 피함니다.
2. 장차 조흔 시기 잇스면 여성운동에 나서려 함니다.
삼천리 제6호 1930년 05월01일
喫煙室
羅蕙錫女史 曰=저는 경우만 허락하면 그림공부로 다시 한번 「파리」로 가려고 함니다. 요전 번에 그곳에 갓슬 때는 약 6개월 동안 잇섯는데 파리의 유명한 화가 「빗세이」씨의 화실을 다니며 무엇을 좀 알려고 애를 썻지만은 잘 알려지지 안튼 것이 정작 귀국하여 보니 이것 저것 谿然히 깨닷게 되는 바 잇서 이제야 정말 洋畵에 눈이 떠지는 듯 함니다. 그래서 녯날에는 헛 일을 한 듯 해요. 즉 헛 그림을 그린 듯 후회남니다.
요지음은 친구의 방을 빌어 가지고 전람회에 출품할 풍경화를 그리고 잇는데 아츰 열시부터
저녁 넉점까지 그 화실에 꼭 드러 박이고 잇슴니다. 아마 2주일이나 걸니어야 완성될 듯 한데 녜전 奉天의 풍물을 그린 「天后宮」 이후에 처음 애쓰는 作으로 나는 밋슴니다만은 엇덜는시요.
나의 여학생 시대는 벌서 10여년 전으로 지금은 열살 먹은 아들을 머리로 어린애들 녯을 가진 늙은이람니다. 세월은 참 빠르지요.
삼천리 제6호 1930년 05월01일
新兩性道德의 提唱
尹聖相, 黃信德, 羅惠錫, 鄭錫泰 대담·좌담
友愛結婚, 試驗結婚
羅蕙錫
日時 4월 2일 오후5시
場所 京城仁寺洞에서 會見
기자=우리들이 결혼하는 목뎍이 사나히면 자긔의 안해를 또 녀자이면 자긔의 지아비를 엇는데 잇슴니까 혹은 자긔의 혈통을 계승하여 줄 아돌 딸을 엇는데 잇슴니까?
羅女史=그야 한 개의 지아비 혹은 안해를 엇는뎨 잇겟지요. 자녀는 부산물에 불과한 것인 줄 압니다.
기자=그러면 「성욕」과 「생식」은 전연히 딴 물건이 되어야 하켓슴니다그러.
羅女史=전연 딴 것이라고 할 수는 업스나 그러케 혼동할 수도 업는 물건이겟지요.
기자 그러면 결혼의 주되는 목적이 이미 저안해를 엇는데 잇다면 만일 그 결혼이 잘못이 되엇든 것이 판명되는 날이면 물론 이혼하여야 할 것이 아니겟슴니까?
羅女史=그래야 하겟지요. 그러나 이혼이란 그러케 쉽사리 되는 것이 아닌 즉 그 결혼이 과연 행복될 것이냐 엇저느냐를 알기 위하야 최근에 구라파에서는 시험결혼이라 것이 제창되는 줄 압니다.
기자=3,4 년동안 살어보다가 실흐면 갈나지고 조흐면 偕老同穴하는?
羅女史=그러치요.
기자= 조선에 그러한 결혼방식이 적합하리까요?
羅女史=일부 처단을 거러가는 새 부부들은 벌서 그를 실행하고 잇지 안어요. 그러케 보이드구만요.
기자=시험결혼의 특색은 무엇임니까?
羅女史=이미 시험이니까 그 결과에 대하야 어느 편이나 절대적의 의무를 지지 안치요. 쉽게 말하면 리혼한다 섬치드래도 慰藉料니 貞操蹂躝이니 하는 문뎨가 붓지 안켓지요. 합의를 전제로 한 결혼은 이혼할 권리를 처음부터 보류하여 조흔 것이니까요.
기자=그러한 새 도덕을 현대의 만흔 여학생들에게 가르치엇스면 조켓슴니다. 성교육이라 하면 교육자들은 생리적 방면만 가르칠 줄 알엇지 사상상 도덕상의 새로운 길은 가르칠 줄 모르는 모양이니까 이것이 현대의 큰 通弊인 줄 압니다.
羅女史=동감임니다. 兩性문제에 잇서서 생리상 방면을 과학적으로 가르치는 것도 조켓스나 오히려 그보다도 더 근본적으로 가령 산아제한이 엇더타든지 시험결혼이란 엇던 것이라든지 하는 도덕상 사상상의 계몽을 식히는 것이 더욱 필요한 일로 교육자의 주력은 그곳에 몰녀와야 올흘 줄 암니다.
기자=그러니 산아제한가튼 방법을 필요로 하는 그 시험결혼은 빈빈한 이혼을 막는 길도 되고 男女性의 離合을 헐신 자유스럽게 하는 효과가 잇슬 것이겟슴니다.
羅女史=그러타 할 것이겟지요.(하략-원문)
미스코리아 심사위원
삼천리 제3권 제10호 1931년 10월01일
三千里一色」發表
화려강산 우리 반도가 나은 「삼쳔리일색」은 본사에서 일즉 모집을 개시한 이래 해내해외로부터 삼백이십륙 매의 다수한 응모 사진이 드러왓삽나이다. 그래서 심미계(審美界)의 권위인 李光洙, 廉想涉, 金岸曙, 安碩柱, 李承萬, 李靑田, 許英肅, 羅惠錫, 金一葉, 崔承喜, (本社側 金東煥, 崔貞熙) 등 문사, 화가, 의사, 무용가 여러분께서 여러 날을 두시고 엄숙하고도 공정한 심사를 하시어 이제 아래와 갓치 발표하나이다.
특선 崔貞嫄孃 芳紀 18 현재 충남 대전 여자고등보통학교 수업
삼천리 제4권 제1호 1932년 01월01일
아아 自由의 巴里가 그리워, 歐米 漫遊하고 온 후의 나
在東京 羅蕙錫
생활정도를 나츠이난 것처럼 고통스러운 것이 업난 것 갓다. 이상을 품고 그것을 실현 못하난 것처럼 비애스러운 것이 업난 것 갓다. 내 意思를 죽여 남의 意思를 쫏난 것처럼 무의미한 것이 업난 것 갓다. 그러면 나는 이러한 환경을 버서나지 못할 그야말로 무슨 운명에 처하엿는가? 그러치 아니면 일부러 당하고 인난가?
歐米 漫遊期 1년 8개월 간의 나의 생활은 이러하얏다. 단발을 하고 양복을 입고 빵이나 차를 먹고 침대에서 자고 스켓치빡스를 들고 연구소를 다니고(아가데미) 책상에서 佛蘭西 말 單字를 외우고 때로난 사랑의 꿈도 뀌여보고 장차 그림大家가 될 공상도 해보앗다. 흥 나면 춤도 추어보고 시간 잇스면 연극장에도 갓다. 왕전하와 각국 대신의 연회석상에도 참가해 보고 혁명가도 차자 보고 여자 참정권론자도 맛나 보앗다. 佛蘭西 가정의 가족도 되여보앗다. 그 기분은 여성이오 학생이오 처녀로써이엇다. 실상 조선여성으로서는 누리지 못할 경제상으로나 기분상 아모 장애되난 일이 하나도 업섯다. 태평양을 건느는 뱃속에서조차 매우 유쾌히 지냇다.
그러나 橫濱에 도착되난 때 붓터 가옥은 나무간 갓고 길은 시구렁 갓고 사람들의 얼골은 노라코 등은 새우등 갓치 꼬부러저 잇다. 朝鮮 오니 길에 몬지가 뒤집어 씨우난 거시 자못 불쾌하엿고 송이버섯 갓흔 납작한 집속에서 울녀 나오난 다듬이 소리는 처량하엿고 흰옷을 입고 시름 업시 거러가난 사람은 불상하엿다. 이와 갓치 훨적 피엿든 꼿이 바람에 떠러지듯 푸군하고 늘신하든 기분은 전후좌우로 밧삭밧삭 오그러들기를 시작하엇다.
歸國 後의 나의 生活
朝鮮 와서의 나의 생활은 엇더하엿나. 깍것든 머리를 부리낫케 기르고 강동한 양복을 벗고 긴 치마를 입엇다. 쌀밥을 먹으니 숨이 갓부고 우럭우럭 취하엇다. 잠자리는 백이고 느러슨 거슨 보기<43> 실혓다. 부억에 드러가 반찬을 맨들고 온돌방에 안저 바누질을 하게 되엇다. 시가친척들은 誼理를 말하고 시어머니는 효도를 말하며 시누이는 돈 모라고 야단일다. 아, 내 귀에난 아해들이 어머니라고 부르난 소리가 이상스섭게 들일만치 모든 지난 일은 긔억이 아니나고 지금 당한 일은 귀에 들니지 아니하며 아직 깨지 아니한 꿈속에 사난 것이엇고 그 꿈속에서 깨여보랴고 허덕이난 것은 나 외에 아모도 알 사람이 업섯다.
나는 로마시스지나궁전에서 미케란제로의 天井畵 압헤 섯슬 때 西班牙에서 鬼才 고야의 무덤과 밋 그 天井畵 압헤 섯슬 때 나의게 희망 이상이 용출하엿다. 이와 갓치 내가 만흔 그림을 본 후의 감상은 두가지다. 「1은 그림은 좃타」 「2는 그림은 어렵다」 내게 이 감상이 계속되난 동안에는 그림은 늘 수 업스리라고 밋난다. 그 외에 나는 여성인 것을 확실히 깨다랏다. (지금까지는 중성 갓햇든 것이) 그러고 여성은 위대한 것이오 행복된 자인 것을 깨다럿다. 모-든 물정이 이 여성의 지배하에 잇난 것을 보앗고 알앗다. 그리하야 나는 큰 것이 존귀한 동시에 적은 것이 갑잇난 것으로 보고 십고 나 뿐아니라 이것을 모든 조선사람이 알앗스면 십흐다.
또 나는 歐米를 漫遊하고 온 후로 곳 1년 동안이나 시집사리를 살게 되고 만흔 친척 가운대로 살게 되엇다. 생각은 따로 두고 행동은 그들에게 좃난 것도 역시 용이한 일이 아니엇다.
나는 이 고통, 비애, 무가치를 당하게 된 부득이한 사정이 잇섯나니 조선땅을 밟을 때 임의 腹 중의 8개월 된 임신중이엿다. 이것을 분만하야 왼만치 양육할 동안이 자연 1년이 지나고 만 것이다. 그외에 내 머리속이 뒤범벅이 된 것을 갈피를 차리자면 상당한 휴양과 시일이 걸녀야 햇섯다. 또 나는 사물에 대할 때 마다 이러케 생각한다. 巴里나 조선 지방이 그 인정이나 자연스러운 태도가 일치되난 점이 만타고. 다만 전자는 문명이 극도에 달한 사교술이요, 후자는 미개한 원시적인 差일 뿐이다. 그럼으로 전자보다 후자에게 뜨듯한 맛이 더 잇서 보인다. 識者憂患으로 조곰 아난 것을 잘 소화 못 식힌 나는 점점 偏性으로 다라난다. 이런 결점이 보일 때 마다 늘 반성하난 동시에 후자의게 더욱 친근한 맛을 늣기게 되난 것이다. 또 한가지난 엇지하면 나와 남 사이에 평화하게 살어볼가 하난 것이엇다. 파리인의 사교심이든지 조선농촌의 원시심이 그 요점은 극기다. 사람이 다 각각 개성이 잇난 이상 我만 세울수 업난 것이다. 더욱이 지방부인들의 극기심 즉 부덕이며 만흔 친척 사이에 융화해 가난 포옹성은 수양상 반드시 한번은 보아둘 필요가 잇난 것을 절실히 늣긴다. 이 여러 가지 점으로 보아 환경을 버서나지 못하엇다난 것 보다 환경을 이용할 수 잇섯든 것이다.
무서운 것 세 가지
그러타고 나는 이상과 갓흔 소극적 행동을 조와하지 아니한다. 경우가 흐리고 기운이 실미지근하며 개성이 똑똑지 못한 것이 실혀하고 미워한다. 과도기 사람들은 남의 변한 행동을 보기 조와하면서 자기의 인습적 행동에서 버서나지 못하난 것이다. 그리하야 누가 압서기를 기다리고 껑충 뛰난 자를 비록 입으로난 비난하더라도 몸으로난 존경을 표하난 것이다. 이러한 적극적 인물이 필요타고 생각한다.그러나 조선사람의 환경에서 껑충 뛸 사람이 용이히 생겨날난지?
이것저것 주서 모은 결론의 요점이 이것이다. 세상에난 무서운 것이 세가지가 잇다. 1은 사람이 무섭고 2는 돈이 무섭고 3은 세상이 무섭다. 사람이 사람답게 나든지 또 하고저 하면 못할 것이 업다. 돈만 잇스면 못 갈 곳이 업다. 능치 못할 것이 업다. 그러고 세상을 알고 보면 무섭다. 용기가 주러진다. 사람이면 다 사람이랴, 사람이라야 사람이지. 사람 하나 되기에 얼마나한 시일과 경험과 밋 번민 고통이 싸히난지 돈돈, 돈이 귀한 줄 뉘 몰느며 더구나 조선사람의 돈난리는 처처에서 들니난 바 아인가. 돈 잇난 자는 활기가 들고 돈 업난 자는 억개가 축 처진다. 돈 업스면 伊太利니 佛蘭西니 어대어대를 다 엇더케 다녀왓스랴.<44> 세상은 이런 세상도 잇고 저런 세상도 잇서 세계 중에는 형형색색의 세상이 만타. 이 세상에서는 저 세상을 동경하고 저 세상에서는 이 세상을 동경하니 어느 것이 조흐며 어느 것이 나으며 어느것이 올흔지 조곰 아는 지식으로는 판단하기 어렵다. 도로 제것에 도라가난 수 밧게 업난 것이다. 그럼으로 알고 도로목이나 모르고 도로목이 되기난 일반이다. 이와 갓치 세가지 무서운 것을 알앗다. 또 체험하엿다. 우리가 수양하난 것 활동하난 것이 다 이 세가지 중에 하나를 엇으랴고 하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평면과 입체를 통하야 用機畵에 나타나는 무수한 선이 보이난 것 갓치 눈을 감고 잇스랴면 서양에 잇슬 때는 서양의 입체만 보이고 朝鮮의 평면이 보엿든 것이 朝鮮 오니 조선의 입체가 보이고 서양의 평면이 보인다. 평면과 입체가 합하야 한 물체가된 것 갓치 평면 즉 외면과 입체 즉 내부가 합하야 1사회가 성립된 것이니 어느 것을 따로따로 떼여볼 수가 업다. 잠간잠간 들니난 객에게난 내부를 알 여가가 업고 또 얼는 보이지도 아니하고 한이 업난 것이엇다. 그럼으로 나는 그 외면에 나타난 몃 가지를 취해가지고 왓슬 뿐이다. 그러면 歐米人의 사난 것은 엇더하며 우리 사난 것은 엇더한가. 한말슴 말하면 그들은 꼭꼭 씹어서 단맛, 신맛, 짠맛을 다 알아가지고 생켜서 소화하난 것이오, 우리는 된대로 꿀덕꿀덕 생켜 아모 맛을 모르난 것이다. 결국 大便되기는 일반이나 大便될 동안에 경로가 얼마나 다른가. 그리하야 그들은 생의 맛을 안다. 즉 엇지하면 잘 놀까 하난 것이 걱정거리다. 일할 때는 한껏 일하고 놀때는 흥껏 논다. 감정이 솟을 때는 불이라도 붓흘 듯 하고 理智가 발할 때는 어름과 갓치 차다. 그러나 산뜻하고 다정하고 박애스러운 것이야 아모리 사교술이라 하더라도 유혹 아니될 수 업다. 그러면 우리 사난 것은 엇더한가. 날 가난 줄도 모르게 늘 지지하다. 그러고 감정과 理智를 折衷해서 산다. 또 그들 부녀들은 各自度生으로 의복을 입고 모자를 쓴다. 즉 창작성이 풍부하다. 그리하야 이상한 자태가 보이면 그것을 귀히 역이고 그 사람을 존경하고 그것을 장려한다. 그럼으로 그 사회에난 창작품이 만코 진보가 잇다. 우리난 엇더한가. 좀 이상스러운 것만 보면 욕설과 비방으로 눌느고 비웃난다. 이럼으로 창작물이 잇슬리 만무하다. 개인으로 창작성이 업는 자나 사회로 창작물이 업난 것은 진보가 업다고 볼 수 밧게 업다.
무식하나마 세계를 보고 온 머리로 그야말노 원시적이다 십흔 歐米보다 2,3세기 뒤진 조선농촌에서 생활을 하고 잇스랴니 모든 것이 어울니지 아니하고 그 결점이 확실히 눈에 뛰워 다시 외국에 드러슨 감이 생긴다. 그리하야 내 머리로는 딴 생각을 하면서 몸으로난 그들에게 싸이게 하너라고 애를 무한이 쓰게 되고 남보기에난 얼빠진 사람갓치 된다.
내가 歐米 갈 때의 目的
내가 歐米를 향하야 떠날 때에 나는 무슨 목적으로 가나 하고 생각하엇다. 내게는 안심을 주지 못하는 네가지 문제가 잇섯다. 1은 사람은 엇더케 살아야 조흘가. 2는 남녀간에 엇지하면 평화스럽게 살가. 3은 여자의 지위는 엇더한 것인가. 4는 그림의 요점이 무것인가. 이엇다. 그곳에 가서는 두가지 고려 중에 잇섯다. 즉 한곳에 머물너 巴里살논에 입선이라도 할가, 또 하나는 夫君을 따라 여러나라의 인정풍속을 구경할가 이엇다. 나는 후자를 취하엇다. 그리하야 단시일에 9개국을 주서보고 오니 모다 그것이 그거 갓하야 머리 속이 뒤범벅이 되고 두서를 차릴 수 업게 되엇다. 게다가 곳 해산을 하고 산후의 泄瀉病으로 쇄약해젓다. 마치 무엇을 잡으랴고 허덕허덕 애를 쓰나 잡혀지지 아니하난 것 갓햇다. 이것은 내게 튼튼한 예비지식이 업섯든 까닭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때가 가고 날이 갈사록 한가지 한가지식 정리가 되여 차차 뒤서를 차리게 된다. 그러는 동안에 세월은 速하야 2월 10일. 집에 도착하든 만 1개년이 되고 마렷다. 다만 애처럽고 앗가운 거슨 거대한 금전과 무수한 시간과 무한한 정력을 드려 엇은 歐米에 대한 인상은 점점 희미해지난 것이다. 오즉<45> 꿈속에서 왓다갓다 하다가 새벽잠이 깨여 과거를 回憶하기에 날 새우난 줄 모를 뿐이다. 아, 아 자유, 평등, 박애의 세상 巴里가 그리워...
내게 큰 병이 잇다. 그거슨 무어세든지 化해지지 안는 才操다. 나논 이 才操를 가진 사람을 부러워하나 내게는 잇서지지를 아니한다. 나는 이러한 나를 퍽 미워하고 실혀한다. 그러나 배내병신인데야 엇지하랴. 이는 보난 것, 듯난 것, 배호난 것을 내게 化하려는 고집이 잇는 까닭이다. 즉 내것을 맨든 후에 유쾌함을 늣기난 까닭이다. 다시 말하면 부득이하야 하고 십지 아니하다. 무어세든지 의미를 부처 즐겨서 하난 거시 되어야 속이 시원한 이상한 心思가 잇다. 그럼으로 내가 지금까지 조선대중의 생활을 떠나, 별천지에서 살앗든 거시 다시 조선인의 생활로 드러슬냐면 농촌생활의 정도로붓터 살어볼 필요가 절실히 잇섯다. 내게 농촌생활이 얼마나 필요하엿섯난지.
나는 때때로 이런 생각을 한다. 사람의 머리가 왜 서울 종로에 달닌 鍾만하지 아니한가. 더구나 조선 신여성의 머리가. 그들의 생활은 얼마나 복잡하며 몃 重 몃 중인지?
폭풍우가 지나갓다. 맑은 하날 빗이 들 때 그에 빗취이는 산천초목은 얼마나 명랑한가.
다시 엄동이 닥처왓다. 백설은 싸혀 은세계가 되고 마럿다. 저 수평선에 덥힌 백설은 얼마나 아름답고 결백하고 평화스러운가. 그러나 그것을 헷치고 빗을 보자 얼마나 만흔 凸凹굴곡이 잇는가?
나혜석 미술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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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필 편지 (0) | 2015.04.0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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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gend 1930 (0) | 2015.04.06 |
김우영 (0) | 2015.04.0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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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혜석은 조선 마리 앙투아네트 (0) | 2015.04.02 |
18살 때에 東萊郡 開揚學校(현 高等普通學校)를 졸업
1906년 東京으로 유학을 가서 正則豫備學校에서 2년간 공부
1914년 岡山第六高等學校 졸업
1915년 京都帝國大學 법학과
1919년 법학사 학위 취득
1919년 京都帝國大學 英法科 졸업
1915년 1월 24일 日本 京都帝國大學生 金雨英의 주동: 일제침략하 한국36년사 3권
출전朝鮮人槪況 第4章 內地鮮人の情況
日本 京都帝國大學生 金雨英 의 주동으로 京都朝鮮留學生親睦會가 조직되다.
동아일보 1920-04-01 國家存在의 理由(제1회, 全4回)金雨英
04월02일 國家存在의 理由(제2회, 全4回)金雨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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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 04월10일동아일보
변호사김우영, 라혜석양과 정동례배당에서 결혼식(肖)
1921년 09월25일 동아일보
1925년 12월01일 개벽 제64호 兩西 五十日 中에서
필자春坡 기행문中에서
新舊義州를 보고 回路에 .....
저녁 후는 安東縣에 가서 국경청년연합웅변대회를 보앗다.
演士들의 語材不足과 청중측의 「야지」 不的中은 外格보다 좀 섭섭하얏다.
그것보다 臂頭 金雨英 군의 「番判에 관한 주의」 云云은 (청중의 투표인고로) 죽인지 밥인지 실로 창피막심이엿다.
폐회가 되고보니 11시엿다. 還國을 재촉햇스나 還客이 못처럼 외국왓다가 그져 가느냐고 친구들은 결국 엇던 요리점으로 끌고간다.
盡蕩히 먹고 또 부족하야 엇던 妓房을 차저 기생구경까지하고 오게되얏다.
아구 망측해라.
열이고 백이고 잇는대로 다 드러와 선을 보인다.
누가 마음에 드느냐고 말을 모르면 손고락으로 꼭 집으라고 한다.
십여명 중에서 한아을 손고락질 하니 其餘落第娘들은 창피한듯이 달아나버린다.
5,6명 이국남성이 1개 이국랑과 酬酌이 열리니 엇지 우습지 안으랴.
或笑 或談 일분 후에 1圓金을 주고 나와 버렷다. 此亦經世라고 할가?
1930년 10월01일 별건곤 제33호 吸煙室
변호사 금우영 군은 丸山敬次郞君과 명치정에 공동사무소를 내엿다.
이를 터이면 일한소합병이지.
1932년 03월05일 동광 제31호 辯護士 評判記(1) 東虛子
金雨英 君
변호사로 副領事가 되어 가지고 安東縣 가서 수 년을 지내다가 미술가의 안해 羅惠錫女史와 같이 세계일주를 하고 돌아와서는 돌연히 羅氏와 이혼을 하고 다시 시내에서 변호사업을 시작하엿다.
어린 자식 3, 4명이 달린 안혜와 이혼을 한 金君 - 그 중심을 추측하기에 어렵지 아니하거니와 미친 물결같이 뛰노는 감정을 가진 예술가의 안해는 법으로 業을 삼는 이 남편과는 일생을 같이 할 수가 업섯는가.
안해 羅氏가 세계일주시 XX發明士 XXX氏와 巴里에서 달큼한 사랑을 속삭이엇다는 풍문이 사실인지 아닌지 그것은 모르거니와 金君은 자기의 쓰라린 경험으로 이혼소송을 대리할 때에는 타인이 상상도<67> 못할 名論을 토하야 法官의 머리를 끄덕거리게 하는 때도 잇다고 한다.
在野法曹界에 두번재 발을 들어놓는 金君은 무슨 의미로 보던지 甦生의 길을 거러나가는 첫 시련이니 금후의 金君의 辯護士로의 활약은 볼 만한 것인 줄 알앗더니.
1932.2.19 朝鮮總督府官報
李聖根이 咸鏡北道參與官에, 姜弼成이 咸鏡南道參與官에, 金雨英 이 道理事官에, 임명되다.
1939년 04월01일 동아일보
김우영(총독부도리사관) 승서고등관3등
1949년 01월 26일 한성일보
反民族行爲特別調査委員會, 부산에서 반민피의자 金雨英과 河判洛을 체포
민족을 좀먹는 친일분자에 대한 반민특위의 메스는 드디어 지방에 확대되었다. 즉 중앙반민위원회 김용희 조사관 일행은 지난 23일 부산에 도착, 행동을 개시하여 동일 하오 9시 반경 부내 芙容洞에서 전 중추원參議 金雨英(64)을 체포하는 한편 이어 24일 상오 9시경에는 부수동에서 전 경남도 고등과 형사 河判洛을 체포하여 모처에 구금하였다 하는 바, 전기 김우영은 京都帝大를 졸업한 후 안동 副領事, 전남산업과장, 충남 參與官, 중추원참의 등을 역임한 친일거두라 하며, 河는 고등과 형사로서 수많은 애국자를 고문학대하여 ‘고문왕’이라는 이름까지 받은 악질분자라 한다.
동아일보 | 1920-04-10 | 무 | 03 | 06 | 辯護士 金雨英, 羅蕙錫孃과 貞洞禮拜堂에서 結婚式(肖) | ||
10 | 동아일보 | 1920-05-20 | 무 | 02 | 07 | 朝鮮經濟會主催 講演會: 演士 朴泳孝 李商在 崔鎭 安國善 盧翼根 金雨英 | |
11 | 동아일보 | 1921-09-25 | 무 | 02 | 07 | 滿洲地方에 朝鮮人 副領事로 金雨英 楊在河 二名任命發表, 在滿朝鮮人의 內情을 詳細히 知得할 必要로 | |
12 | 동아일보 | 1922-05-19 | 무 | 03 | 04 | 報酬金八千圓 請求訴訟, 이전 변호사 金雨英의 송사 | |
13 | 동아일보 | 1922-10-04 | 무 | 04 | 05 | 安東縣朝鮮人靑年會主催 강연회: 在外靑年 同胞의 責任(金雨英), 家庭에서 育兒하는 方法(黃天佑) | |
14 | 동아일보 | 1930-03-28 | 무 | 02 | 03 | 辯護士 金雨英氏 開業 | |
15 | 동아일보 | 1939-04-01 | 조간 | 01 | 10 | 金雨英(總督府道理事官) 陞敍高等官三等 | |
16 | 동아일보 | 1949-01-26 | 석간 | 02 | 05 | 金雨英 河判洛은 釜山에서 逮捕拘禁 | |
17 | 동아일보 | 1949-01-27 | 석간 | 02 | 07 | 盧璣植(保安課長) 逮捕 金雨英等과 서울로 押送//李九範은 日本에 逃避(釜山) | |
18 | 동아일보 | 1949-02-02 | 석간 | 02 | 03 | 文明琦, 林昌洙逮捕 徐永出 南學鳳도 被檢//特委各道支部設置 朴興植과 李鍾榮은 問招終了//金雨英 金泰錫問招에 着手 | |
19 | 동아일보 | 1949-02-15 | 석간 | 02 | 06 | 金雨英保釋 | |
20 | 동아일보 | 1957-09-17 | 석간 | 04 | 06 | 民族共同生活과 道義(新生公論冊別) ; 新生公論社刊 | |
21 | 동아일보 | 1957-09-17 | 석간 | 04 | 06 | 金雨英著 民族共同生活과 道義(新生公論冊別) ; 新生公論社刊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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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 앙투아네트 유럽 최대의 몀문 합스브르그 家의 황녀로 태어나
프랑스의 왕비가 된 것은 운명의 우연이었을까?
단두대에서 처형을 당한 것은 역사의 필연이었을까?
프랑스 대혁명의 원인이 과연 그녀였을까?
참 많은 생각과 의문이 든다.
허영과 음모의 대명사 베르사유의 장미! 마리 앙투아네트! 기오틴 단두대에서는 날 아침 마리 앙투아네트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한없는 아이들 걱정에 눈물을 쏟으면서 페르센을 그리워했을까?
비극은 슬프다.
마리 앙투아네트! 한 번만 더 생각하고 인생의 방향을 달리 잡았더라면 이렇게 비참한 결말만은 피할 수 있었을 텐데..
그래서 인생에는 늘 조언이 필요하다.
곁에 있는 좋은 사람들을 통해서, 훌륭한 책들을 통해서 깊은 깨달음을 얻는다.
한 번 사는 인생 욕먹지 말고 사랑받으면서 잘 살아야지! 호호호호홍응! 개그우먼 권진영
베르사유의 장미 테판 츠바이크(1881~1942)가 1932년 발표한 평전
마리 앙투아네트Marie Antoinette d'Autriche
출생: 1755년 11월 2일
오스트리아 제국의 공주였다. 프랑스와의 동맹을 위해 루이 16세와 정략 결혼하게 된다.
어린 시절부터 자유분방하게 성장한 그녀는 11세부터 미래의 왕비교육을 받는다.
14살 : 1770년 5월 16일, 14살 때 루이 16세와 화려한 결혼식을 치른다.
미래의 왕비로써 갖추어야할 기본 법도를 교육받는다.
왕비는 신분이 낮은 자에게 먼저 말을 걸지 말라고 가르친다.
어려서부터 격이 낮은 자들은 모두 천한 것이니 혐오하도록 가르친 것이니 백성의 삶이 어떠한지 알 길이 없다.
19세 : 1774년 남편이 루이 16세로 즉위하자 마리는 프랑스의 왕비가 되었고,
남편으로부터 베르사유의 프티 트리아농 궁전을 선물 받았다.
유행의 선두주자가 되었고 귀족부인들이 이를 따라했다. 스타일 장식 로코코 여왕으로 불렸다.
루이 16세는 성불구(뒤에 회복) 18세의 멋쟁이 악셀 페르센 백작과 만나 로맨스 계속된다.
유행의 선두주자가 되었고 귀족부인들이 이를 따라했다. 스타일 장식 로코코 여왕으로 불렸다.
23세 : 1778년 12월 19일 첫 딸 마리 테레즈를 출산했다.
정치놀음에 관심없는 왕비는 무었을 입을까. 머리모양을 어떻게 할까. 액세서리는.., 뭐하고 놀지.....오페라 연극관람 온갖 사치로 빚을 지자 도박에 손을 댄다.
귀족부인들은 돈을 잃어주고 남편의 인사 청탁을 이뤄냈다.
가면무도회에서 푸른 눈빛의 폴리니아크 백작부인을 보자마자 반해서 궁정으로 불러들여 어디고 함께 팔짱을 끼고 다닐 만큼 사랑에 빠져있었다.
백작부인은 남들이 시샘 할 만큼 총애를 얻자 그의 일족들이 궁내에서 독단적인 전행을 일삼았다.
사치와 파타의 향락에 빠진 왕비는 보석 목걸이 사기 사건에 연루되어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진다.
주범인 라모트는 감옥을 탈출했는데 민심은 왕비가 주범이며 라모트의 탈옥 또한 왕비가 주도 했다고 믿게 되었다.
굶주리던 백성들은 결국 거리로 몰려 나와 혁명의 기쁜 함성을 질렀다.
왕은 단두대에 올랐고 왕비는 루이 까페의 부인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38세: 1793년 10월 16일 그리고 그녀 역시
1919년 1월 15일 베를린. 150cm가 넘을까 말까 한 신장에 다리가 불편한 한 40대 여인이 군인으로 보이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그들이 휘두른 총의 개머리판에 두개골이 으스러지도록 얻어맞고 쓰러졌다. 그리고 그녀의 시신은 그대로 다리 위에서 운하로 버려졌다. 독일의 11월 혁명 정국 속에서 우파 의용단에게 살해당한 이 왜소한 중년 여인은 로자 룩셈부르크였다. 그녀는 20세기 초, 러시아와 독일의 혁명을 주도하며 새로운 자유와 평등 사회를 꿈꾸던 정열의 혁명가이자 마르크스 이래 가장 뛰어난 두뇌의 소유자로 일컬어지던 탁월한 이론가였다.
로자 룩셈부르크가 살해된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한때 그녀가 몸담았던 사회민주당이 정권을 획득했던 시기였다. 그녀를 살해한 군인들도 11월 혁명을 이끌어 제정을 무너뜨린 세력이었다. 얼핏 그녀와 별반 다를 바 없는 노선을 걷는 것처럼 보이는 세력들이 로자 룩셈부르크를 서둘러 체포하고 재판도 없이 무참히 살해한 것은 로자 룩셈부르크라는 인물이 가진 타협을 모르는 순수 사회주의 사상과 그녀의 폭발적 행동력 때문이었다.
그녀는 고집스러울 만큼 자신이 이론적으로 알고 있고, 믿고 있는 혁명을 제대로 된 방법으로 100% 실현하기 위해 노력한 사람이었다. 이상적 혁명 달성은 공감하지만 과정의 난관을 타파하기 위해서 하는 수 없이 선택한 방법이라던가, 혹은 시대가 변했으니 그에 맞게 이론을 새롭게 수정해야 된다는 주장에 그녀는 단 한 번도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으며 그에 맞서 순정한 혁명정신을 부르짖었다.
그녀는 순수한 국제주의자였으며 평등주의자였고 민주주의자였다. 그러기에 그녀는 러시아로부터 독립을 원하던 그녀의 조국 폴란드의 사회주의자들과는 달리 계급해방의 노선을 택했고, 혁명달성을 위해 직업적 혁명가의 독재를 정당화하던 레닌과 맞섰으며, 변화하는 시대에 맞춰 사회주의 이론을 수정, 자본주의 사회에 적응할 것을 주장한 베른슈타인과 이론 투쟁을 벌였다. 그녀는 노동자 스스로가 만든 평등하고 자유로우며 민주적인 세계를 꿈꾸었으며 그것이 실현 가능하다고 굳게 믿었다. 그러나 대다수 그녀의 동료들은 상황과 자기논리에 맞추어 변해갔고 결국, 그녀에게 등을 돌리고 그녀의 존재를 부담스러워하게 된다.
결국 그녀가 독일 사회민주당과 결별해 독자적인 급진적 혁명당 스파르타쿠스단을 만들고 봉기를 일으키면서, 사회민주당과 로자 룩셈부르크와의 위태로웠던 공존은 불가능해지고 말았다. 그리고 로자 룩셈부르크는 그 꺾이지 않는 불굴의 의지를 증오하고 두려워한 세력에 의해 잔혹하게 살해당했다. 그러나, 정작 그녀의 적들과 동료들이 두려워했던 로자 룩셈부르크, 그녀가 꿈꾼 세상은 인간이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세상이었다. 그녀가 옥중에 있으면서 지인에게 보낸 편지 속에서 로자 룩셈부르크는 자신의 생각을 이렇게 써놓았다.
나혜석은 조선 마리 앙투아네트 (0) | 2015.04.0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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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자 룩셈부르크 (역사다큐) (0) | 2015.03.2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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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박타박 세계사 (0) | 2015.01.29 |
[백년전쟁 Part 1] 두 얼굴의 이승만- 권해효 나레이션(풀버전) (0) | 2015.01.15 |
http://swmuseum.blog.me/10146366420?Redirect=Log&from=postView
4男妹 아해들아 에미를 원망치 말고 社會制度와 道德과 法律과 因習을 원망하라.
네 에미는 過度期에 先覺者로 그 運命의 줄에 犧牲된 者이엿더니라.
발행일1935년 01월01일 삼천리 제7권 제1호
http://db.history.go.kr/item/level.do?levelId=ma_016_0440_0680
정조는 취미다.
http://ieave0047.tistory.com/144
진정한 선각자 나혜석
http://blog.naver.com/crazyboy/130177199405
나혜석의 시세계
http://jijiu00.blog.me/140014788730
인간으로써의 나혜석
http://ieave0047.tistory.com/146
이혼고백서
http://blog.naver.com/flowerisla70/120024103518
로자 룩셈부르크 (역사다큐) (0) | 2015.03.2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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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근현대잡지자료 (0) | 2015.03.18 |
타박타박 세계사 (0) | 2015.01.29 |
[백년전쟁 Part 1] 두 얼굴의 이승만- 권해효 나레이션(풀버전) (0) | 2015.01.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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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박타박 세계사 (0) | 2015.01.2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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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년전쟁 Part 1] 두 얼굴의 이승만- 권해효 나레이션(풀버전) (0) | 2015.01.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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